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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500대 기업 가운데 최고령 최고경영자(CEO)는 94세의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이다. 버핏은 30대 중반이던 1965년 버크셔를 인수했는데, 이를 두고 훗날 “인생 최악의 투자 결정”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사양산업이던 섬유회사를 싸 보인다는 이유로 헐값에 사들인 게 실패였다는 것이다. 버핏은 섬유 사업에서 손을 떼고 버크셔를 세계 최대의 투자회사로 일으킨 뒤에도 “끔찍한 실수를 상기시키는 상징”이라며 회사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포천 500대 기업 CEO들의 평균 나이가 57세, 평균 재임 기간이 7년인 걸 감안하면 버핏의 뒤를 이어 시가총액 1조 달러에 달하는 ‘가치투자의 본산’을 누가 이끌지가 늘 관심사였다. 버핏의 후계자는 2021년 우연찮게 공개됐는데, 버핏이 한 인터뷰에서 “오늘 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내일 아침 경영권을 인수할 사람은 그레그가 될 것”이라며 그레그 에이블 비(非)보험 부문 부회장을 지목했다. 그러면서도 은퇴 계획은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그런데 버핏이 3일 그의 고향 오마하에서 열린 버크셔해서웨이 연례 주주총회에서 60년간 지켜온 CEO 자리에서 올해 말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후임자인 에이블을 포함해 회사 이사진도 몰랐던 깜짝 은퇴 발표였다. 해마다 5월 초 열리는 버크셔 주총에는 버핏의 투자 철학과 지혜를 듣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투자자들이 몰려드는데, 올해는 4만여 명이 운집해 전설적인 투자자의 갑작스러운 퇴장에 1분여간 기립 박수를 보내며 경의를 표했다. ▷올해가 그가 이끄는 마지막 주총임을 알고 있었던 버핏은 은퇴 발표에 앞서 5시간에 걸쳐 경제 현안에 대한 견해를 가감 없이 쏟아냈다. 특히 세계 경제를 뒤흔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을 “큰 실수”라며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는 트럼프 이름을 직접 거론하진 않았지만 “무역이 무기가 돼서는 안 된다”며 “무역이 전쟁 행위(act of war)가 될 수 있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꼬집었다. 또 “다른 나라가 번영할수록 우리도 그들과 함께 더 번영할 것”이라며 “균형 잡힌 무역이 전 세계를 위해 이롭다”고 강조했다. ▷트럼프발 관세 폭탄으로 금융시장이 대혼란에 빠진 와중에도 버핏은 올 들어 세계 억만장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자산을 늘렸다. 다들 ‘트럼프 랠리’에 취해 있을 때 애플 같은 대형 기술주 주식을 내다팔고 채권과 현금 자산 비중을 크게 늘린 덕분이다. 이번에도 그의 선택이 옳았던 셈이다. 버핏의 자산은 현재 230조 원을 넘어섰는데, 이 돈의 95%가 60세 이후에 형성됐다고 한다. “투자 원칙의 첫 번째는 돈을 잃지 말라, 둘째는 첫째 원칙을 절대로 잊지 말라”는 버핏의 투자 철학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하는 혼돈의 시대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고물가가 길어질수록 인기를 끄는 게 유통업계 자체 브랜드(PB) 상품이다. 유통업체가 직접 기획하고 주문 생산하는 덕에 저렴하고 품질까지 좋아 허리띠를 졸라맨 소비자들이 먼저 찾는다. 대형마트, 편의점 같은 오프라인 업체뿐 아니라 이커머스 회사들까지 PB 상품 개발에 힘을 쏟는 이유다. 국내 1위 이커머스 업체 쿠팡은 2017년 ‘탐사’ 브랜드로 PB 시장에 뛰어들어 식품 ‘곰곰’, 생활용품 ‘코멧’, 가전 ‘홈플래닛’ 등 30개에 가까운 자체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쿠팡이 이 같은 PB 상품들을 경쟁 상품보다 우선 노출되도록 검색 순위 알고리즘을 조작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쿠팡과 쿠팡의 PB 상품을 전담하는 자회사를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같은 혐의로 유통업체로는 사상 최대인 1628억 원의 과징금을 물리고 검찰에 고발한 지 11개월 만에 기소가 이뤄진 것이다. ▷검찰에 따르면 쿠팡은 2019년 3월부터 지난해 11월까지 PB 상품과 직매입하는 로켓배송 상품 5만1300개의 검색 순위를 16만 번이나 조작해 상단에 고정적으로 노출시켰다. 특히 판매가 부진해 재고가 쌓인 PB 상품과 제조업체로부터 수백억 원의 인센티브를 받기로 한 직매입 상품을 집중적으로 띄웠다. 실제 판매량과 사용자 별점, 가격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산출되는 검색 순위를 무시하고 무려 5년 9개월 동안 자사 상품을 밀어준 것이다. ▷이 같은 조작으로 100위 밖이던 PB 생수 ‘탐사수’는 단번에 1위로 뛰어 단일 제품으로는 쿠팡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상품이 됐다. 정상적으로는 100위권 진입조차 어려웠던 다른 PB 상품들도 줄줄이 1위로 올랐다. 이 덕에 쿠팡 PB 상품의 소비자 노출 횟수는 43%, 매출액은 76%나 늘었다고 한다. 바꿔 말하면 쿠팡에 수수료를 내고 상품을 파는 21만 개 입점업체들은 자기 제품을 검색 상위에 올리기 어려웠다는 뜻이다. 오프라인 유통업계에서 판치던 입점업체 차별이 혁신을 앞세우는 온라인 플랫폼에서 더 노골화된 셈이다. ▷쿠팡은 지난해 공정위 처분이 나왔을 때 “상품 진열 방식은 업체의 고유 권한”, “시대착오적 조치”라고 반발했다. 하지만 공룡 플랫폼의 지위를 악용해 소비자와 입점업체를 기만하고 혁신과는 거리가 먼 배짱 영업을 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공정한 경쟁이 사라진 시장에서 쿠팡은 재작년 처음 흑자를 낸 데 이어 지난해 매출 40조 원을 돌파하며 국내 전체 백화점 판매액을 뛰어넘었다. 온·오프라인를 통틀어 유통 1위에 오른 쿠팡이 소비자 신뢰와 유통 질서를 회복하지 못하면 한국 시장을 무섭게 잠식하는 알리, 테무 등 중국 이커머스에 역전당하는 건 시간문제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문재인 정부가 자랑했던 경제 성과 중 하나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달성이다. 2006년 2만 달러를 처음 넘어선 1인당 국민소득이 문 정부 첫해인 2017년 3만 달러를 돌파했다는 거였다. 당시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은 “문 정부에서 국민 1인당 국내총생산(GDP) 증가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5년마다 이뤄지는 GDP 통계 기준연도 개편에 따라 국민소득 3만 달러 돌파 시기는 2017년에서 2014년으로 앞당겨졌다. ▷3만 달러를 돌파했든 아니든 이명박·박근혜·문재인·윤석열 정부 빠짐없이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를 핵심 공약이나 정책 목표로 내세웠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가르는 기준으로 꼽히는데, 선진국 문턱을 넘어 한 단계 더 도약하겠다는 청사진을 담은 셈이다. 윤 정부는 취임 2년 차에 “민간 주도 성장을 유지한다면 5만 달러도 꿈이 아니다”라며 목표치를 더 높였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의 싱크탱크도 최근 5만 달러 달성을 담은 성장 전략을 내놓았다. ▷그런데 국제통화기금(IMF)이 한국의 1인당 GDP 4만 달러 달성이 4년 뒤인 2029년에야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해 10월만 해도 2027년 달성을 예상했는데 반년 만에 두 해나 늦춰 잡았다. 또 올해 한국의 1인당 GDP는 3만4642달러로 지난해보다 4% 줄어든다고 분석했다. 코로나 위기가 한창이던 2022년보다 낮은 수준으로 후퇴하는 것이다.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국가에서 1인당 소득이 이만큼 뒷걸음질 치는 건 이례적이다. ▷1인당 GDP는 한 나라의 경제 규모를 보여주는 경상 GDP를 미국 달러로 환산한 뒤 총인구로 나눠 계산하는데, IMF의 전망엔 저성장과 고환율 쇼크에 발목 잡힌 우리 경제의 현실이 고스란히 담겼다. 최근 IMF는 올해 한국의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2%에서 1%로 반 토막 냈다. 트럼프발 관세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더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봤다. 관세 폭탄에 국내 정치 불안, 내수 침체까지 맞물려 원화 가치는 주요국 통화보다 약세를 보이고 있다. ▷IMF 전망이 현실화된다면 한국은 15년이나 1인당 GDP 3만 달러의 덫에 갇히는 꼴이 된다. 우리보다 앞서 3만 달러를 통과한 선진국들이 평균 6년 만에 4만 달러 시대를 연 것과 비교하면 늦어도 한참 늦다. 게다가 내년부터 경쟁국인 대만에 1인당 소득이 추월당한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늙어 가는데도 경제 체질 개선과 사회 전반의 구조 개혁을 게을리한 대가다. 자칫 한눈팔다가는 4만 달러 벽을 깨기는커녕 2만 달러 추락을 걱정해야 할 수도 있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2005년 1월 정부과천청사가 대규모 시위대에 뚫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전년도 공인중개사 시험 불합격자 1500여 명이 경찰의 저지를 뚫고 청사에 난입해 한밤중까지 시위를 벌인 것이다. 이들은 건설교통부 건물을 에워싸고 “합격자를 추가 선발해 달라”고 요구했다. 통상 20% 안팎이던 공인중개사 시험 합격률이 그해 1%로 뚝 떨어지며 발생한 일이었다. ‘중년 고시’, ‘인생 2막 자격증’으로 불리는 공인중개사 시험의 인기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부동산 광풍에 취업 한파까지 겹쳤던 2021년에는 공인중개사 시험에 역대 최다인 28만 명이 응시했다. 집값이 워낙 올라 매물 한두 건만 중개해도 웬만한 직장인 월급을 능가하는 수입을 올릴 수 있어 젊은층이 대거 몰렸다. 중년 고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응시자 열 중 넷이 20, 30대 청년이었다. ‘미친 집값’을 잡겠다는 정부의 현장 단속을 피해 불을 꺼놓고 몰래 영업하는 중개업소가 등장하던 시절이었다. ▷첫 시험이 치러진 1985년 이후 현재까지 배출된 공인중개사 자격증 소지자는 55만여 명이다. 경제활동인구 55명당 1명꼴로 공인중개사이니, ‘국민 자격증’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하지만 이 중 80% 정도는 ‘장롱 면허’이고, 실제 영업하는 공인중개사는 11만1600명에 그친다. 부동산 시장이 식으면서 개업 공인중개사는 2023년 2월 이후 줄곧 감소세를 이어가고 있다. 2년 넘게 새로 문을 연 중개업소보다 폐업하거나 휴업한 곳이 더 많다는 얘기다. ▷특히 올해 들어선 3개월 연속 새로 개업한 공인중개사가 1000명을 밑돌고 있다. 봄 이사철을 앞두고 신규 개업이 몰리는 시기에 개업자가 1000명 아래로 떨어진 건 통계 집계 이후 처음이다. 부동산 시장 침체가 길어지면서 서울과 지방을 가릴 것 없이 새로 문 여는 중개사가 급감했다. 거래가 끊긴 데다 고금리, 대출 규제, 내수 침체가 겹쳐 공인중개사들도 사무실 관리비와 임차료를 감당하기 힘든 처지다. 부동산 시장 호황기에 연간 100만 건을 웃돌았던 전국 주택 매매 거래는 지난해 64만 건에 그쳤다. ▷여기에다 부동산 직거래가 활발해진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최근 3년간 이뤄진 부동산 거래 319만 건을 살펴보면 중개와 직거래 비중이 거의 반반일 정도다. 한 중고거래 플랫폼에서 성사된 부동산 직거래는 3년 새 220배 폭증했다. 집값이 뛰면서 덩달아 치솟은 중개수수료가 부담인 데다 ‘건축왕’ ‘빌라왕’ 같은 전세사기에 공인중개사가 빠짐없이 등장한 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새 아파트 단지가 생기면 부동산중개업소부터 들어선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지만, 이젠 공인중개사도 살아남는 것 자체를 걱정하는 시대가 됐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철강업계 1, 2위인 포스코와 현대제철의 관계는 가전의 삼성·LG전자, 유통의 롯데·신세계와 비슷하다. 외환위기로 쓰러진 한보철강 인수를 놓고 포스코와 현대차그룹이 맞붙은 것을 시작으로, 최대 라이벌이자 앙숙으로 사사건건 부딪혔다. 한보철강을 품에 안은 정몽구 현대차 명예회장이 용광로를 갖춘 일관제철소 건설을 추진하자, 30여 년 독점 체제가 깨지게 된 포스코가 자동차용 강판 공급을 중단한 건 유명한 일화다. 대통령을 비롯해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총출동한 현대제철 일관제철소 기공식에도 포스코는 참석하지 않았다. ▷이런 두 회사가 미국 시장 공략을 위해 이례적으로 손을 맞잡았다. 현대제철이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에 짓는 제철소에 포스코가 함께 투자하기로 한 것이다. 앞서 현대차그룹은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감사 인사를 받으며 미국에 210억 달러를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여기엔 현대제철이 58억 달러를 들여 루이지애나에 연산 270만 t 규모의 자동차 강판 제철소를 건립하는 게 포함됐는데, 포스코가 최소 1조 원 이상을 투입하고 일부 생산 물량을 직접 판매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어제의 적을 동지로 돌려세운 건 트럼프발 관세다. 미국은 금액 기준으로 한국 철강 기업들의 최대 수출 시장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12일부터 수입 철강과 파생상품에 25%의 관세를 때리면서 ‘메이드 인 코리아’ 철강은 가격 경쟁력을 잃었다. 가뜩이나 중국산 덤핑 공세에 밀리던 국내 철강 기업들은 트럼프발 관세가 현실화되자 지난달에만 미국 수출액이 16% 넘게 줄었다. 트럼프의 ‘관세 철벽’을 넘으려면 현지 생산을 늘리는 것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포스코와 현대제철의 동맹은 윈윈 전략으로 꼽힌다. 현대제철로서는 포스코와 힘을 합치면 현지 투자 리스크를 크게 줄일 수 있다. 현대제철은 당초 투자금 58억 달러 중 일부를 외부에서 조달할 계획이었는데, 미국 진출을 오랫동안 준비하고 자금 사정까지 넉넉한 포스코가 제격이다. 10년 넘게 미국 제철소 설립을 놓고 고심하던 포스코 역시 나 홀로 투자의 부담을 덜면서 미국 진출이라는 해묵은 숙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됐다. ▷한국의 철강 ‘빅2’가 해외에서 공동 투자와 생산에 나선다는 건 과거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포스코와 현대차그룹은 철강 외에도 글로벌 전기차 시장에 대응해 이차전지 소재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했다. 중국의 저가 물량 공세와 트럼프 관세의 틈바구니에 껴 휘청대는 다른 산업에서도 상상을 뛰어넘는 우리 기업들의 협력을 기대한다. 경쟁 상대와도 손잡을 수 있는 기업들의 과감하고 유연한 전략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트럼프 스톰’을 헤쳐 나가는 힘이 될 것이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한국 소비자들이 해외 온라인 쇼핑몰에서 직접 사들인 물건이 지난해 8조 원어치에 육박하는데, 이 중 60%가 중국발(發) 직구다. 초저가를 앞세운 ‘알테쉬’(알리익스프레스·테무·쉬인)의 등장 이후 중국 직구액은 해마다 조 단위 숫자를 바꿔가며 최대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국내에선 150달러 이하 소액 수입품은 관세와 부가세가 면제되는데 중국에서 직구하는 제품 대부분이 여기에 포함된다. 과거엔 중국이 저가 제품을 쏟아내더라도 관세 장벽으로 1차 방어를 할 수 있었다면, 알테쉬 직구 시대엔 이마저 사라졌다는 뜻이다. ▷알테쉬의 초저가 공습에 골머리를 앓는 건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은 800달러 이하 소액 수입품에 면세를 해주는데, 이를 이용해 미국에 들어온 중국산 제품이 지난해 8억 개를 넘어섰다고 한다. 이를 발판으로 테무는 단숨에 미국 내 앱 다운로드 1위에 올랐고, 쉬인은 미국 패스트패션 시장의 절반을 장악했다. 미국 유통시장을 뒤흔들고 아마존, 월마트를 위협하는 중국 이머커스의 존재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그냥 두고 볼 리가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달 2일 전 세계를 향해 무차별 상호 관세를 발표하면서 중국산 제품에 대한 소액 면세 제도를 폐지했다. 소액 소포로 밀반입되는 마약류 펜타닐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했지만, 실상은 알테쉬를 정조준한 셈이다. 중국이 보복 관세로 맞대응하자 트럼프는 중국발 소액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30%에서 90%로 올린 데 이어 이틀 만에 120%까지 높였다. 그동안 무관세로 들어오던 알테쉬 제품에 다음 달 2일부터 120%의 관세 폭탄이 더해지는 것이다. ▷미국 진입이 사실상 막힌 중국 이커머스 업체들은 더 무섭게 한국 시장을 파고들 것으로 보인다. 벌써 올 1분기에 면세 혜택을 받고 국내에 들어온 중국발 직구 상품은 처음으로 6억 달러를 돌파했다. 알테쉬는 값싼 중국산 제품을 판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내 상품을 직접 유통하는 방식도 서두르고 있다. 테무는 올해를 한국 공략의 원년으로 삼고 국내 판매자를 모집 중이고, 알리익스프레스는 국내 유통 대기업과 손잡고 합작법인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알테쉬의 공세가 거세질수록 국내 경쟁 이커머스 업체는 물론이고 중국산 헐값 제품에 맞서 물건을 생산해야 하는 중소기업까지 고사 위기에 내몰릴 거라는 우려가 높다. 가뜩이나 내수 침체로 허덕이는 중소 제조업체들은 중국발 직구 여파로 적잖은 타격을 입고 있다. 지난해 설문조사에선 중국 직구로 피해를 본 중소기업의 절반이 ‘과도한 면세 혜택’을 문제로 꼽았다. 알테쉬에 대한 견제는 세계적 추세여서, 호주 싱가포르 베트남 등도 소액 면세 제도를 없앴다. 미중 관세 전쟁이 이커머스 봉쇄로 확전된 상황에서 우리도 알테쉬만 배불리는 제도를 손볼 때가 됐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 세계를 향해 마구잡이로 퍼부은 상호관세를 둘러싸고 ‘트럼프 2기 경제팀’의 균열이 감지되고 있다. 먼저 격돌한 건 관세 전쟁의 설계자인 피터 나바로 백악관 고문과 ‘퍼스트 버디’ 일론 머스크다. 상호관세 조치가 발표되고 사흘 후 머스크는 “미국과 유럽은 무관세로 가야 한다”며 트럼프 기조와 상반되는 주장을 펼쳤다. 나바로를 겨냥해선 “뭐 하나 이룬 게 없다”고 비꼬았다. 나바로는 트럼프 1기 4년을 꽉 채우고 2기에 발탁된 유일한 경제 관료다. ▷“미국 산업이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장담과 달리, 해외에 공장을 둔 미국 기업들이 관세 직격탄을 맞을 거라는 우려가 커지자 머스크가 총대를 메고 나선 셈이다. 그러자 나바로는 “머스크는 차를 파는 게 중요하다. 상호관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며 공개 비판했다. 그러면서 “머스크는 자동차 제조업자가 아니라 조립업자다. 테슬라의 많은 부품이 중국, 일본, 대만에서 온다”고 깎아내렸다. ▷머스크는 “테슬라는 가장 미국산 차(the most American-made cars)”라며 “나바로는 벽돌보다 멍청하다”고 맹비난했다. 트럼프의 최측근들이 원색적인 표현을 써가며 설전 수위를 높인 것이다. 나바로는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의 부상을 막는 게 최우선 과제지만 테슬라는 전체 매출의 20%가 중국에서 나온다. 오히려 자동차 부품 관세 때문에 미국 공장에서 만드는 테슬라 차의 가격을 올려야 할 처지다.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골수 마가(MAGA)파’가 중국을 때릴 때마다 머스크가 제동을 걸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를 두고 ‘골수 마가’와 트럼프 2기의 신진 세력으로 분류되는 ‘다크 마가’의 충돌이라는 해석까지 등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주류 관료나 정치인을 배제하는 인사를 하면서 경제팀엔 빅테크 엘리트와 정통 금융인·기업가 출신을 포진시켰다. 머스크를 비롯해 헤지펀드 매니저 출신인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 자수성가 기업인 출신의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이 대표적이다. 두 그룹의 경제 철학은 닮은 듯 서로 달라 트럼프의 경제 정책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지가 관심사였는데, 틈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을 제외한 나라의 상호관세를 느닷없이 유예하는 과정에서도 경제팀의 내분이 엿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 유예를 검토하면서 베선트, 러트닉 장관과 논의했다고만 했을 뿐 나바로는 언급하지 않았다. 베선트는 한국, 일본 등과의 무역 협상도 맡았다.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월가와 공화당 지지자들마저 분노를 표출하자, 고율 관세에 반대해 온 온건파 장관들에게 힘이 실리는 모양새다. 이번 유예 조치로 각국은 시간을 벌었지만, 트럼프 경제팀의 분열과 갈등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갖고 있는 ‘문제적 기록’은 화려하다. 미국 역사상 두 번이나 탄핵 소추된 유일한 대통령이며, 중범죄자 꼬리표를 달고 취임한 첫 대통령이다. 그런데 재취임 두 달 만에 또 하나의 기록을 추가하게 됐다. “억만장자는 권력에서 손을 떼라”는 뜻의 대규모 ‘핸즈오프(Hands Off)’ 시위를 촉발한 대통령이 된 것이다. 요즘 미 전역은 반(反)트럼프 시위로 들끓고 있다. 5일(현지 시간)에만 50개 주, 1300여 개 지역에서 핸즈오프 시위가 벌어졌고 60만 명이 참석했다고 외신은 전했다. ▷시위대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라’ ‘사회보장에 손대지 마라’ ‘관세가 무섭다’ ‘교육에서 손 떼라’ 등 각양각색의 팻말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 무역 정책, 공무원 대량 해고, 복지 축소 등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전국적인 시위로 분출된 것이다. 시위 현장에는 트럼프 못지않게 연방정부 구조조정을 이끄는 ‘퍼스트 버디’ 일론 머스크를 규탄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트럼프 2기에서 해고된 공무원이 벌써 12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특히 전 세계를 향해 융단폭격 식으로 퍼부은 ‘트럼프 관세’가 미국 증시부터 박살내면서 성난 민심에 기름을 끼얹었다. 상호관세 발표 직후인 3, 4일 이틀간 미국 증시의 3대 지수는 일제히 10% 안팎 급락하며 팬데믹 위기 이후 최악의 폭락장을 연출했다. 미 증시는 관세 폭탄을 맞은 나라들보다 더 많이 떨어져 이틀 새 1경 원에 가까운 시가총액이 허공으로 사라졌다. 이 같은 폭락 장세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비관론이 지배적이어서 더 무섭다. ▷최근 여론조사에선 미국 유권자의 절반 이상(54%)이 트럼프 관세 정책을 반대한다고 답했다. 올 초만 해도 관세 정책을 지지한다는 응답이 반대보다 많았던 것과 딴판이다. 전 세계를 상대로 세운 높은 관세 장벽이 미국 내 물가를 높이고 해외에 공장을 둔 미국 기업의 이익을 감소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커진 탓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이 “그는 완전히 미쳐버렸다”는 직설적 표현으로 트럼프의 관세 정책을 비판했을 정도다. ▷이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 발표 바로 다음 날 플로리다의 마러라고 리조트로 날아가 골프를 즐기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지금이 부자 되기 좋을 때”라고 썼다. 시위 현장 곳곳에서 “주식시장은 폭락하고, 트럼프는 골프 친다”는 분노의 외침이 들린 배경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5일에도 “이것은 경제 혁명이며,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버텨내라”며 관세 전쟁을 강행할 뜻을 거듭 밝혔다. 미국 대통령이 막무가내로 힘을 휘두르는데 막을 사람이 없다. 분노한 시민들이 트럼프의 일방주의 폭주에 브레이크를 달아 줄 수 있을까.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국책은행인 IBK기업은행에서 전현직 임직원 수십 명이 가담한 880억 원대 부당 대출이 적발됐다. 퇴직한 직원이 은행에 다니는 배우자와 동기, 선후배 등과 결탁해 무려 7년 동안 부당 대출을 받거나 알선했다고 한다. 두 달 전에는 우리, KB국민, NH농협은행 등 3곳에서 고위 임원부터 일선 영업 현장까지 연루된 3800억 원대 부당 대출이 확인됐다. 소비자들에겐 가혹할 만큼 엄격한 대출 잣대를 들이대는 은행들이 국책은행, 시중은행 가릴 것 없이 짬짜미로 대규모 부정·편법 대출을 일삼아 온 것이다.▷금융감독원 검사 결과, 기업은행에서 14년간 근무하다 퇴직한 A 씨는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었다. 대출을 끼고 땅을 산 뒤 건물을 짓고 되파는 식으로 돈을 벌었다. 이 과정에서 기업은행 대출 심사역인 아내와 기업은행 사모임 5곳에서 만난 전현직 임직원이 대거 동원됐다. 대출 증빙 서류를 허위로 꾸며 제출했지만 아내와 동료들은 이를 묵인하고 돈을 내줬다. A 씨의 입행 동기인 대출심사센터장과 지점장들은 미분양 상가의 부당 대출을 줄줄이 승인해 줬고, 고위 임원은 미분양 난 건물에 아예 은행 점포를 입점시켰다.▷이런 식으로 A 씨가 2017년 6월부터 지난해 7월까지 직접 빌리거나 건설사에 알선해준 부당 대출은 51건, 785억 원에 달한다. 이쯤 되면 국책은행이 아니라 ‘사금고’라 불러야 할 판이다. A 씨의 부정을 공모하거나 눈감아준 임직원들은 두둑한 대가를 챙겼다. A 씨에게 해외 골프 접대를 받은 임직원이 스무 명이 넘고, 일부 임직원은 배우자들이 A 씨 회사에 취업하는 방식 등으로 16억 원 상당의 금품을 챙겼다. 은행원들의 기강 해이가 ‘도덕 불감증’ 수준이다.▷더군다나 기업은행은 지난해 9월 자체 조사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을 파악하고도 금감원에 보고하지 않았다. 오히려 금감원 검사가 시작되자 일부 직원들은 수백 개 문서와 사내 메신저 기록을 삭제하며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고 했다. 또 은행 조사 결과 부당 대출 규모가 240억 원이라고 공시했지만 금감원 검사에서 3배 넘게 늘었다. 은행권에 만연한 제 식구 감싸기가 도를 넘은 셈이다.▷지난해 손태승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이 얽힌 불법 대출이 드러난 데 이어 대규모 부당 대출이 끊이지 않으면서 은행권의 내부통제 강화와 윤리 경영이 말뿐이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국민은행과 농협은행에서는 직원들이 대출 브로커와 짜고 억대 금품을 받은 뒤 수백억 원을 대출해 주는 등 위법 행태도 갈수록 대담해지고 조직화되고 있다. 고객들이 이런 은행을 믿고 돈을 맡겨도 되나 싶다. 신뢰와 리스크 관리가 생명인 은행권의 탈선이 위험 수위를 넘고 있어 걱정스럽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진두지휘하는 ‘관세 전쟁’의 다음 무기는 4월 2일로 예고된 상호 관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개념의 관세인데, 각국이 미국산 제품에 적용하는 관세만큼 미국도 똑같이 상대국에 관세를 물리겠다는 것이다. 국가마다, 품목마다 관세율이 제각각이어서 상호 관세 부과는 AI 프로젝트급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어떤 나라가 대상인지, 어떻게 관세율을 매기겠다는 건지가 초미의 관심사인데 트럼프 행정부 고위 당국자가 ‘더러운 15(Dirty·더티 15)’ 국가들을 지목했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이 18일 현지 인터뷰에서 나라별로 상호 관세율이 다를 거라고 설명하면서 “대미 무역량이 많은 15%의 국가들, ‘더티 15’라고 부르는 국가들에 집중하고 있다”고 한 것이다. 과거 미 행정부가 중국을 겨냥해 ‘더러운 철강(dirty steel)’이라고 언급한 적은 있지만 무역 상대국을 싸잡아 지저분하다고 지칭한 건 이례적이다. 남의 나라 총리를 ‘주지사’라고 조롱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무례함이 행정부 전반으로 옮겨간 듯하다. ▷베선트 장관은 ‘더티 15’에 어느 나라가 포함됐는지 밝히진 않았지만 미국에 상당한 관세를 부과하고, 관세 못지않게 중요한 ‘비관세 장벽’을 치는 국가라고 지적했다. 미국에 불리한 세금이나 규제, 정부 보조금 같은 비관세 장벽까지 고려한 상호 관세를 거듭 확인한 것이다. 미국에 여덟 번째로 많은 무역 적자를 안긴 한국도 ‘더티 15’에 올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진위를 떠나 “한국의 평균 관세가 미국의 4배”라는 게 트럼프 대통령의 인식이다. ▷더군다나 한국의 까다로운 농산물 검역 규제와 30개월 이상 미국산 소고기 수입 금지, 구글의 정밀지도 반출 제한 등은 미국 측이 꾸준히 문제 삼아 온 한국의 비관세 장벽 이슈들이다. 최근 국무장관, 상무장관, 백악관 핵심 참모 등이 돌아가면서 한국을 콕 집어 압박 수위를 높이는 배경이다. 일본 대만 등이 미국에 더 큰 무역 적자를 떠안겼는데도 한국을 향한 칼날이 유독 매섭다. 국정 리더십에 구멍이 난 한국이 동네북이 된 신세다. ▷베선트 장관은 “사전에 협상하면 상호 관세를 피해갈 수 있다”며 “일부 국가는 이미 트럼프 대통령에게 대미 관세를 대폭 낮추겠다고 제안했다”고 강조했다. 교역국들을 상대로 4월 2일 전까지 선물 보따리를 가져오라고 압박한 셈이다. 일본, 인도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을 직접 만나 관세 면제를 요청하면서 각각 1조 달러 투자와 미국산 에너지·무기 수입을 약속했다. 대만은 정부 대신 반도체 기업 TSMC가 나서 1000억 달러를 추가 투자하기로 했다. 한국이 ‘더티 파트너’가 아니라 ‘대체 불가 파트너’임을 설득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한국에서 텔레그램 탈퇴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진 건 5년 전이다. 텔레그램 본사가 ‘n번방’ 수사에 협조하지 않자 국내 가입자들이 정해진 시각에 한꺼번에 탈퇴하며 압박에 나선 것이다. 누리꾼들은 텔레그램을 주무대로 벌어진 성착취물 유포 사건을 각종 외국어로 번역해 알렸고 해외 언론사에 제보하기도 했다. 하지만 탈퇴 러시도 잠시뿐, 한국 가입자는 갈수록 늘어 텔레그램은 국내 2위 모바일 메신저로 급성장했다. ▷범죄의 온상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보다 보안성과 익명성이 부각된 덕이다. 한국 경찰의 수차례 수사 협조 요청에도 텔레그램은 일절 응하지 않은 채 범죄자들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줬다. 불법 음란물 유통을 막기 위한 ‘n번방 방지법’이 시행되자 오히려 텔레그램 가입자가 수십만 명씩 늘어난 건 아이러니다. 해외에 서버를 둔 외국 기업은 규제에서 쏙 빠진 탓이다. 지난해 불법 계엄 사태 때도 카카오톡이 검열될 수 있다는 괴담이 퍼지자 시민들은 텔레그램부터 깔았다. ▷그런데 5년 만에 다시 텔레그램 탈출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이번에는 일반 가입자가 아니라 텔레그램을 방패 삼아 활개 치던 범죄자들이 중심이다. 한국 경찰과 텔레그램이 핫라인까지 구축해 수사 공조에 나서자 범죄자들이 텔레그램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한결같이 수사에 비협조적이던 텔레그램은 지난해 8월 파벨 두로프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가 프랑스 검찰에 체포되자 태도를 바꿨다. 이용자 간 대화가 서버에 전혀 남지 않는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었다. ▷텔레그램은 234명의 피해자를 성착취한 이른바 ‘자경단’ 사건을 시작으로 수사 협력에 물꼬를 튼 뒤 한국 경찰의 자료 요청에 90% 넘게 협조하면서 하루 3번꼴로 소통하고 있다. 텔레그램에서 벌어지던 성범죄, 마약 등 강력 범죄뿐만 아니라 투자 리딩방 같은 신종 사기 수사에도 속도가 붙었다고 한다. 문제는 범죄자들이 추적을 피해 해외의 다른 보안 메신저로 갈아타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국가안보국(NSA) 감청 프로그램을 세상에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이 쓴다고 해서 유명해진 ‘시그널’이 대표적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다 같이 시그널로 갈아타면 끝 아님?”, “보안 쪽에선 시그널이 좋음” 등의 글들이 퍼지고 있다. 과거 ‘드루킹 댓글 조작’ 사건에 이 메신저가 쓰였고 윤석열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도 계엄 관련자들과 시그널로 소통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용자 아이디가 없는 메신저 ‘심플엑스 챗’, 동유럽에서 많이 쓰는 ‘바이버’ 등도 범죄자들이 숨어드는 곳이라고 한다. 이들 메신저가 초창기 텔레그램과 닮아 있어 새로운 범죄 소굴이 될까 걱정스럽다. 하지만 텔레그램이 결국 꼬리를 내린 것처럼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새해 들어서도 “장보기가 겁난다”, “월급 빼고 다 오른다”는 말이 괜한 엄살이 아니다. 연초부터 과자, 빵, 아이스크림, 커피, 햄버거, 컵밥까지 뭐 하나 안 오른 게 없어서다. 올 들어 불과 한 달 남짓 동안 가격을 이미 올렸거나 인상을 예고한 식품기업이 열 손가락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롯데웰푸드·빙그레 같은 제과·빙과업체부터 오뚜기·대상 등 식품 제조업체, 파리바게뜨·버거킹 등 프랜차이즈, 스타벅스·폴바셋 등 커피 브랜드까지 품목을 가리지 않는다. ▷기업들이 내세우는 가격 인상의 배경은 원재료 비용 급등이다. 세계적인 이상 기후에 트럼프발 ‘관세 폭탄’ 화염까지 옮겨붙으면서 국제 농산물 가격이 치솟고 있는 건 사실이다. 커피 원두 가격은 브라질과 베트남이 극심한 폭염과 가뭄에 시달린 탓에 자고 일어나면 최고가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초콜릿 원재료인 코코아는 지난해에만 170% 넘게 급등해 “비트코인보다 더 올랐다”는 평가를 받는다. 수입 대두, 밀 가격도 들썩이고 있다. 여기에 원-달러 환율마저 1400원대가 뉴노멀이 되면서 기업의 비용 부담은 더 커졌다. ▷하지만 계엄·탄핵 정국의 혼란한 틈을 타 식품업계가 무더기로 가격 인상에 나섰다는 곱지 않은 시선이 쏟아지고 있다. 그동안 정부 눈치를 보느라 인상을 망설였던 기업들이 국정 공백이 두 달 넘게 이어지는 상황을 틈타 기습적으로 가격을 올렸다는 것이다. 지난해만 해도 농림축산식품부는 식품기업들을 수시로 소집해 가격 동결을 압박했고, 공정거래위원회는 제품 용량을 줄여 꼼수로 가격을 올리는 ‘슈링크플레이션’에 대해 과태료를 물리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그런데 올 들어서는 먹거리 가격 인상을 통제하려는 정부의 움직임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지난해 12월 일부 식품기업이 가격을 인상했지만 어려운 국내 여건과 소비자 물가 부담 등을 고려해 식품업계의 가격 인상은 당분간 없을 것으로 파악된다”는 게 1월 초 내놓은 농식품부의 보도자료다. 이러니 정부의 ‘물가 컨트롤타워’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의구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도 식품업체들의 가격 인상 릴레이가 이어진 바 있다. 당시에도 맥주, 커피, 라면, 치킨, 햄버거 등 품목을 가리지 않았다. 이 여파로 박 전 대통령 탄핵 시기인 2016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농축수산물 소비자물가는 예년의 두 배 수준인 7.5% 뛰었다. 민간 기업에 밑지면서 장사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만, 요즘 같은 내우외환의 경제 위기 상황에서 기업들도 고물가를 부추기는 가격 인상을 가급적 자제하는 게 옳다. 먼저 뼈를 깎는 원가 절감 노력을 기울이고, 하다 하다 안 될 때 가격을 올리는 것이 소비자들에 대한 예의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경기 광명시 소하동에 있는 ‘기아 오토랜드’는 광명 시민들에게 ‘소하리 공장’으로 더 익숙한 곳이다. 이 공장에서 처음 생산된 세단 브리사는 현대차 포니와 함께 1970년대 국내 자동차 시장을 휩쓸었다. 이후 ‘봉고 신화’를 쓴 승합차 봉고, 국민 소형차로 불린 프라이드, 기아 대표 스테디셀러 카니발 등이 줄줄이 이 공장에서 탄생했다. 지난해부터 이곳 2공장에서 전기차 EV3도 생산하고 있다. ▷그런데 기아가 연매출 100조 원 돌파를 앞둔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동안 모태가 되는 이 공장은 54년째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으로 묶여 있다. 공장은 1970년 설립 허가를 받아 착공했지만 이듬해 도시계획법이 개정되면서 느닷없이 그린벨트로 지정됐다고 한다. 그동안 주변 녹지는 그린벨트에서 풀려 아파트 단지들이 우후죽순 들어섰지만 공장 부지만큼은 한번 박힌 대못 규제가 뽑히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기아는 광명 공장을 증설하거나 개축할 때마다 까다로운 인허가 절차를 거치는 건 물론이고 그린벨트 보전부담금을 물어야 했다. 지난해 노후화된 2공장을 재건축해 전기차 전용 공장으로 전환할 때도 예외가 없었다. 광명시 등 지자체까지 나서서 그린벨트 부담금을 낮춰 달라고 건의했지만 정부는 다른 지역과의 형평성 등을 이유로 퇴짜를 놨다. 4000억 원을 투입해 현대차그룹의 첫 전기차 전용 공장으로 탈바꿈하는 것이었지만, 세제 혜택은커녕 부담금 폭탄을 떠안은 것이다. ▷기아는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전기차 생산라인 증설 계획을 20만 대에서 15만 대로 축소하고 기존 공장의 지붕과 뼈대를 그대로 유지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를 두고 경제계에서 “해묵은 규제가 미래차 투자를 가로막는다”는 반발이 쏟아졌고 국무조정실, 대한상공회의소, 지자체 등이 머리를 맞대고 개선 방안을 모색했다. 그렇게 절충점을 찾은 게 광명 공장의 지목을 ‘대지’에서 ‘공장 용지’로 변경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린벨트 보전부담금이 6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다고 한다. ▷향후 증설 규모에 따라 최대 수천억 원의 비용 절감 효과를 거둘 수 있겠지만 그린벨트에서 완전히 해제된 건 아니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일본이 대만 TSMC 반도체 공장 유치를 위해 50년 이상 묶였던 그린벨트를 풀고 수조 원대 보조금을 쏟아붓는 것과 대비된다. 더군다나 오토랜드 공장처럼 설립 허가를 받은 뒤 그린벨트로 묶인 공장이 수도권에 수두룩하다고 한다. 급변하는 산업 흐름에 맞춰 공장 시설을 교체하거나 업그레이드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첨단산업 패권을 쥐기 위한 글로벌 전쟁이 숨 가쁜데,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규제가 우리 기업의 발목을 잡는 일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나.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전 세계의 시선이 닷새 뒤면 개막하는 ‘트럼프 2.0 시대’에 쏠려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취임 첫날만큼은 독재자가 되겠다”고 공언한 만큼 세계 질서를 뒤흔들 ‘미국 우선주의’ 정책들을 몰아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출범도 전에 25%의 관세 폭탄을 물리겠다며 캐나다 총리를 무너뜨렸고, 북극권 전략 요충지인 덴마크령 그린란드와 중국의 주요 무역 통로인 파나마 운하를 손에 넣기 위해 무력 사용도 배제하지 않겠다고 위협하고 있다.‘트럼프 2기’의 노골적 영토·관세 압박 모든 수입품에 10∼20% 관세를 매기는 보편관세 추진을 위해 ‘국가경제 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Make America Great Again)’로 상징되는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자국 우선주의를 넘어 동맹국의 주권도, 세계 질서도 신경 쓰지 않는 패권주의로 가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전방위로 몰아칠 ‘트럼프 스톰’에서 한국도 안전하지 않다. 보편관세 부과부터 인플레이션감축법(IRA) 폐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개정, 대중 수출 통제 동참 압박 등 트럼프가 꺼내들 카드에 따라 우리 경제가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문제는 이에 대비해 외교 총력전을 펼쳐도 모자랄 판에 계엄·탄핵의 후폭풍으로 국가 리더십 공백이 길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2기 대응이 출범 후 100일도 아닌 100시간이 골든타임이라는 말까지 나오지만, 정쟁의 늪에 빠진 정치권에 리더십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이 같은 비상 시기에 글로벌 최전선에 있는 한국 기업과 기업인들이 대(對)트럼프 외교의 길을 트고, 미국 제조업 부활의 파트너로 뛰며 고군분투하고 있다. 삼성·SK·LG·현대차 등 국내 간판 기업들은 미국의 제조업 부흥 기조에 발맞춰 일찌감치 미국 내 생산기지를 확대하며 현지화 전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현대차는 트럼프 취임식에 100만 달러를 기부하며 ‘트럼프 보험’ 들기에도 나섰다. 현대제철이 수조 원을 들여 미국에 자동차용 강판을 생산하는 제철소를 짓기로 결정한 건 트럼프에게 깜짝 선물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군분투 기업들이 ‘위기 버팀목’ 최근 KOTRA 설문조사에서도 미국에 진출한 국내 기업 10곳 중 6곳이 트럼프 2기에서 대미 투자를 늘리거나 현 수준을 유지할 것이라고 했다. 미정이라는 답변도 30%가 넘어 향후 현지 투자를 확대할 기업은 더 많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제조업 기술력이 뛰어난 한국 기업들이 ‘MAGA 태풍’에 무작정 휩쓸리기보다 미국 현지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고 제조업 전반의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데 일조하는 ‘MAGA 파트너’가 되겠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콕 찍어 언급한 한국 조선업을 비롯해 방산, 원전 분야도 트럼프 파고를 넘을 기회로 꼽힌다. 중국의 해양 굴기에 맞서 군함을 대폭 확대하려는 트럼프 2기 정부는 세계 최고 기술력에 가격 경쟁력까지 갖춘 한국 조선업체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한화오션이 발 빠르게 움직여 미 해군 군수지원함의 유지·보수 사업을 잇달아 따냈고 필라델피아 조선소 인수도 마무리했다. 러시아·중국에 밀리는 원전 건설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한미 간 ‘원전 동맹’이 체결된 가운데 첨단 산업의 전력 수요를 충당할 소형모듈원자로(SMR)에서 기업들의 협력이 가속화되고 있다. 트럼프의 중국 때리기가 본격화되면 반도체·배터리·항공정비 등에 이르기까지 한국에 SOS를 치는 분야가 더 늘어날 수 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트럼프 2기를 상대로 윈윈 할 수 있는 협상 전략을 마련해야 하지만 ‘못난 정치’는 기업을 밀어주지 못할망정 발목을 잡고 있다. 최소한 상반기 내내 정치 혼란이 불가피한 만큼 ‘한강의 기적’을 만든 도전과 혁신의 기업가 정신으로 트럼프 스톰을 헤쳐갈 수밖에 없다. 기업의 버팀목 역할이 더 절실해졌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2025년 새해가 밝았지만 제주항공 참사의 상처가 깊은 전남 무안공항의 시간은 멈춰 있다. 참사 사흘 만에 희생자 179명의 신원이 모두 확인됐지만, 아직도 희생자들을 품에 안지 못한 유가족에게 새해를 맞이하는 건 무의미한 일일 뿐이다.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유족들에게 그나마 힘이 되는 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온정의 손길이다. “내 자식, 내 형제 같아서”,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어서” 한걸음에 달려온 자원봉사자들이 지금까지 2000명이 넘는다. ▷무안군의 여성 농업인들은 사고 당일 맨 먼저 떡국 3000인분을 챙겨 공항으로 달려왔다고 한다. 여기에 새마을부녀회 등 지역 봉사단체들이 힘을 보태 매일 아침 유가족과 사고 수습에 나선 소방대원, 경찰, 공항 직원들을 위한 식사를 책임지고 있다. 공항 주차장엔 전국 곳곳에서 보내온 밥차·간식차들이 빼곡히 들어섰고 공항 1층의 식당도 24시간 문을 열고 하루 700인분의 식사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그 어떤 헤아림도 유족의 비통함을 대신할 수 없겠지만, 따뜻한 밥 한 끼라도 해주고 싶은 작은 정성들이다. ▷생업을 제쳐 두고 현장으로 달려온 자원봉사자들은 크고 작은 안내부터 쓰레기 정리, 화장실 청소, 교통 지원까지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손발을 보태고 있다. 유가족들 사연 하나하나에 귀 기울이며 같이 울어주고 슬픔을 어루만지는 것도 현장 봉사자들이다. 커피 한 잔을 건네다 함께 눈물을 글썽이고, 손난로와 담요를 전달하며 이별의 아픔을 다독인다. 공항 계단에는 “너무 무서웠을 그 시간이 비통하고 미안하다”, “좋은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 만나자”고 쓴 손편지가 가득하다. ▷현장을 직접 찾지 못한 시민들은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 때도 등장했던 ‘선결제 나눔’으로 작은 위로를 보내고 있다. 공항 내 커피숍과 편의점, 식당에는 ‘커피 200잔 선결제’, ‘도시락 선결제’ 같은 안내문이 갈수록 늘고 있다. 유가족을 돕기 위한 생필품과 구호품도 속속 답지하고 있다. 지자체 등에는 “필요한 게 있으면 어떻게든 구해서 보내주겠다”는 전화가 쉴 틈 없이 쏟아진다고 한다. ▷새해 벽두부터 전국 각지에 마련된 합동분향소에는 희생자를 애도하는 추모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무안공항 분향소에는 조문 인파가 너무 몰려 통신 장애가 빚어지고 지자체가 ‘다른 분향소를 방문해 달라’는 안내 문자를 보낼 정도다. 슬픔을 함께할 수 있다면 한두 시간씩 기다리는 일쯤은 조금도 힘들지 않다는 마음들이다. 느닷없는 국가적 대참사로 어느 해보다 참담한 심정으로 새해를 맞았지만, 작은 힘이라도 모으려는 봉사 행렬과 이웃의 고통을 나누려는 조문 행렬에서 우리 사회의 희망을 본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유럽 최대 자동차 기업 폭스바겐이 창사 이래 처음으로 독일 공장 3곳을 폐쇄한다는 비상 경영을 선언해 충격을 주더니,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의 구조조정이 줄을 잇고 있다. 미국 ‘빅3’ 중에선 GM을 제외한 두 곳이 이달 들어 대규모 감원 계획을 알렸다. 포드는 유럽 전체 직원의 14%에 해당하는 4000명을 내보내기로 했고, 지프·크라이슬러가 속한 스텔란티스는 미국 공장 직원 1100명을 줄인다고 한다. 내연기관 중심의 자동차 시장을 이끌어 가던 ‘레거시 기업’들이 전기차 전환의 격변기를 맞아 생존 경쟁에 내몰린 것이다. ▷굴지의 일본 자동차 기업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일본 기업들의 구조조정은 동남아 최대 자동차 생산기지로 ‘아시아의 디트로이트’라 불리는 태국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3대 자동차 업체 닛산은 전 세계 직원의 7%를 해고하고 차량 생산의 20%를 축소한다는 계획을 내놨는데, 태국 현지 직원 1000명을 줄이고 태국 공장 한 곳의 생산을 중단하는 방안이 포함됐다. 혼다와 스즈키도 내년에 태국 현지 공장의 가동을 멈춘다고 한다. ▷전통 자동차 강호들이 대대적인 정리해고와 생산 감축에 나선 건 중국 전기차의 파상 공세 때문이다. 세계 최대 시장인 중국을 중국 차에 뺏긴 데 이어 수십 년간 ‘안방’으로 호령하던 동남아, 유럽에서도 턱밑까지 추격당했다. 몇 년 전만 해도 동남아는 일본 차 브랜드 점유율이 90%를 웃돌았지만 전기차 시장에선 판이 뒤집혔다. 말레이시아, 태국, 싱가포르 등에서 중국 전기차가 1위를 휩쓸고 있다. 유럽에서도 중국산 전기차 점유율이 벌써 20%를 넘어섰다. ▷중국 차가 더 위협적인 건 싸기만 한 ‘짝퉁 차’ 꼬리표를 떼고 기술력까지 인정받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중국 최대 전기차 기업 비야디(BYD)가 60년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 올해의 차’ 최종 후보에 오른 사실은 상징적이다. 전기차 성능을 좌우하는 배터리는 물론이고 차량용 반도체, 모터, 전장부품 같은 핵심 부품과 소재를 자체 조달하는 게 경쟁력이다. 이를 발판으로 BYD는 판매 대수에 이어 분기 매출까지 테슬라를 추월했고, 샤오미는 전기차 출시 1년도 안 돼 10만 대 생산을 돌파했다. ▷중국 전기차 공습에 전통 강자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으면서 한국 기업에 새로운 기회가 열릴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도 적잖다. 국내 한 증권사는 “현재 온전한 자동차 기업은 현대차, 도요타, GM뿐이며 테슬라와 BYD를 더해 5곳이 최상위 경쟁을 벌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압도적인 가격 경쟁력에 품질까지 갖춘 BYD의 국내 판매가 내년부터 본격화되면 한국 시장도 언제 잠식당할지 모른다. 중국의 전기차 굴기에 맞서 국내 기업들이 초격차 기술 개발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이유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정부의 출범이 두 달 남았는데, 벌써 그 충격이 한국 경제를 뒤흔들고 있다. 경제 기초체력을 반영하는 원-달러 환율은 1400원대를 넘나들고 한국 기업 실력을 보여주는 증시는 코스피 2,400 선을 위협받다가 소폭 반등했다. 트럼프발 무역 전쟁의 최대 피해국으로 꼽히는 중국보다 하락 폭이 큰 상황이다. 한국 대표 기업 삼성전자는 주가가 4만 원대로 폭락하자 자사주 10조 원 매입을 전격 발표했다. ‘트럼프 포비아’가 과도하다기보다 미중 양대 시장과 특정 산업에 의존하는 우리 경제의 취약성을 여지없이 드러낸 셈이다.美中 수출 비중 40% 한국에 고관세 직격타 스스로를 ‘관세맨(Tarriff man)’이라 칭하는 트럼프의 집권 2기가 시작되면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은 타격을 피할 수 없다. 당장 모든 수입품에 물리겠다는 10∼20%의 보편관세와 중국산에 대한 60% 관세 폭탄 공약이 기다리고 있다. 트럼프는 대중국 강경파이자 관세 정책의 열렬한 지지자인 하워드 러트닉 정권인수팀 공동위원장에게 상무장관뿐 아니라 무역대표부(USTR) 사령탑까지 맡기며 더 독해진 보호무역 조치들을 밀어붙일 태세다. 미중 갈등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 여파로 대미 수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미국은 21년 만에 한국의 최대 무역 흑자국이 됐다. 트럼프 1기 마지막 해 166억 달러였던 대미 무역 흑자는 지난해 455억 달러로 늘었다. 미국 입장에선 한국이 8위 무역 적자국인데, 이를 빌미로 노골적인 통상 압박을 가하거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틀을 흔들 수 있다.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지원법이 폐지되거나 축소되면 미국 정부의 보조금 약속을 믿고 현지 투자를 감행한 국내 기업들의 피해가 커질 것이다. 모두 반도체·자동차·배터리 등 우리 주력 산업이 대상이다. 무엇보다 트럼프의 ‘중국 때리기’가 본격화되면 한국 경제에 연쇄 쇼크가 불가피하다. 예전만 못하더라도 국내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올 들어 19.2%로 미국(18.6%)을 앞선 1위다. 중국산 제품에 관세 폭탄을 때리면 중국에 중간재를 수출하는 한국도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 한국의 대중 수출에서 중간재 비중은 78%에 달한다. 이미 중국의 저가 제품 ‘밀어내기 수출’로 국내 기업들이 몸살을 앓는 상황에서 중국이 미국으로 수출하지 못하는 물량을 더 밀어내면 전 세계적인 출혈 경쟁이 우려된다.내년 경제성장률 1%대 추락 위기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내외 기관들이 줄줄이 내년 한국 성장률 전망치를 2%로 낮추면서, 더 나쁘면 1%대로 추락할 수 있다고 경고한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수출 증가율이 올해 7%에서 내년에 2.1%로 꺾일 걸로 봤는데, 이마저도 미국의 관세 인상이 2026년 시작되는 것을 전제로 했다. 미국이 관세 조치에 속도를 내면 수출은 더 위축돼 잠재성장률 수준의 성장도 위태롭다는 뜻이다. 이 와중에 한국이 미국의 환율 관찰 대상국으로 지정돼 환율 방어도 힘들어졌다. 고환율이 물가를 자극하고 금리 인하의 발목을 잡아 내수 침체를 더 심화시킬 수 있다. 이런데도 정부에선 절박한 위기의식이 느껴지지 않는다. 미 대선 직후 한미 정상 간 통화에서 트럼프가 조선업 협력을 요청했는데, 우리가 먼저 이런 제안을 못 했다는 것 자체가 정부의 준비 부족을 보여준다. 앞으로 온갖 ‘트럼프 청구서’가 날아올 텐데 한국이 미국에 가장 많이 투자하고 일자리 창출에 기여한다는 점을 내세우며 서로 ‘윈윈’할 거래를 제시해야 한다. 거센 보호무역 파도를 넘으려면 특정 지역과 업종에 편중된 수출 시장과 해외 생산기지를 다변화하는 전략도 필요하다. 규제 혁파와 구조 개혁으로 성장 잠재력을 높이는 정공법에도 속도를 내야 할 것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요즘 증권가에 나돈 우스갯소리가 있다. 최고의 자산이 뭐냐고 물었더니 코인 투자하는 사람은 ‘비트코인’, 미국 주식 하는 사람은 ‘엔비디아, 테슬라’라고 하는데 한국 주식 가진 사람은 ‘건강’이라고 답하더란다. 희망 없는 국내 증시를 두고 ‘국장(國場) 탈출은 지능순’이란 말이 회자되더니 이런 자조적 유머까지 나온 것이다. 지난주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집권이 확정된 뒤 이는 더 현실이 되고 있다. 세계 금융시장이 트럼프 수혜 자산에 베팅하는 ‘트럼프 트레이드’로 들썩이는데 한국 증시만 소외돼 있어서다. ▷뉴욕 증시의 3대 지수는 미 대선 다음 날부터 나흘 연속 최고 기록을 새로 썼다. 엔비디아를 새로 품은 다우존스지수는 11일 44,000 고지도 밟았다.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미국 우선주의’를 경험했던 글로벌 자금이 더 독해진 트럼피즘을 앞두고 미 증시와 달러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법인세 감면, 규제 완화 등 트럼프가 내세운 친기업 정책도 투자 심리에 불을 지피고 있다. 트럼프가 “슈퍼 천재”라고 추켜세운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는 나흘 새 40% 가까이 폭등했다. ▷가상자산 대장주 비트코인도 연일 최고가 행진 중이다. 10일 사상 처음 8만 달러를 넘더니 12일 오전 8만9000달러까지 돌파했다. 비트코인 시가총액은 한국 코스피 시총 규모도 뛰어넘었다. 3년 전만 해도 비트코인을 사기(scam)라고 했던 트럼프는 이번 대선 과정에서 “가상화폐 대통령(crypto president)”이 되겠다고 선언했고, 중앙은행이 금을 비축하는 것처럼 미 정부가 비트코인을 보유하겠다는 구상을 내놨다. ▷이와 달리 한국 증시는 ‘남들 오를 때 못 오르고, 떨어질 땐 폭삭 주저앉는’ 게 뉴노멀이 됐다. 비실대던 코스피는 12일 2% 가까이 급락하며 3개월 만에 2,500 선이 붕괴됐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증시 저평가) 이슈가 해소되지 않은 가운데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더 강력해진 보호무역주의가 한국 경제를 짓누를 것이라는 불안감이 확산된 탓이다. 트럼프 1기 때 한국 증시를 빠져나간 글로벌 자금이 23조 원인데, 이미 외국인은 석 달째 국내 주식을 내다 팔고 있다. 미국 증시로 ‘주식 이민’을 떠나는 개미도 갈수록 늘고 있다. ▷투자자들이 한국을 등진다는 건 국내 기업이 주식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해 성장하고 일자리를 만들 기회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증시 이탈을 막으려면 경제 기초체력이 뒷받침돼야 하지만 몸집이 훨씬 큰 미국에 잠재성장률을 역전당할 만큼 성장 엔진은 식었고, 주력 산업은 혁신 기업의 등장 없이 수십 년째 제자리다. 세계 꼴찌 수준의 주주 환원과 후진적 기업 지배구조도 달라진 게 없다. 이를 그대로 두고 한국 증시가 활력을 갖기를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이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노○○존’의 원조는 10년 전쯤 등장한 노키즈존이다. 식당과 카페에서 벌어진 어린이 안전사고를 두고 주인에게 배상 책임을 묻는 판결이 이어지고, 똥기저귀를 버젓이 두고 가는 ‘맘충’ 논란이 들끓을 때였다. 해외에도 ‘차일드 프리존(child free zone)’이라며 어린이 출입을 막는 곳이 있지만, 한국처럼 당당히 아이들을 거부하는 나라는 드물다. 프랑스 르몽드는 올 초 “한국이 저출산으로 몸살을 앓는 건 우연이 아니다. 아이가 있다는 것만으로 피곤해지기 때문”이라며 500곳이 훌쩍 넘는 우리나라 노키즈존을 조명했다. ▷한국식 노키즈존은 연령과 계층, 성별로 세분화하며 진화하고 있다. 올여름엔 인천의 한 헬스장이 ‘아줌마 출입 금지’ 안내문을 내걸면서 노줌마존 논란이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다. 안내문 아래엔 ‘교양 있고 우아한 여성만 출입 가능’하다는 설명과 함께 아줌마를 정의하는 8가지를 제시했다. “나이 떠나 공짜 좋아하면, 대중교통 임산부 배려석에 앉으면, 둘이 커피 한 잔 시키고 컵 달라고 하면, 음식물쓰레기 공중화장실에 몰래 버리면….” ▷노키즈존 못지않게 빠르게 퍼지고 있는 건 노인 출입을 금하는 이른바 노실버존, 노시니어존이다. 식당이나 카페에서 직원에게 반말을 일삼고, 여자 사장을 마담이라 부르며 희롱하고, 때로는 담배를 피워대는 ‘무매너 어르신’들 때문이라고 한다. 충북 제천의 한 수영장에서는 67세 이용자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게 발단이 됐다. 안 그래도 일부 노인들이 물속에서 볼일을 보기도 하고 천천히 수영해 방해가 됐는데 이참에 노실버존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쏟아졌다. ▷‘젊은 분들에게 인사, 대화, 선물, 부탁, 칭찬 등 하지 마세요’라는 공지문을 써 붙인 헬스장도 있다. 어르신들이 말 걸고 참견해서 불편하다는 젊은 회원들의 민원이 쇄도한 탓이다. 이어폰을 끼지 않은 채 큰 소리로 음악이나 유튜브를 켜놓는 노인들이 방해가 된다는 불평도 적잖다. 운동하다가 쓰러지고 다치는 노인이 늘기도 했지만, 젊은층의 불만이 커지자 안전사고 위험을 구실로 노실버존이 된 스포츠시설이 한둘이 아니다. ▷7년 전 노키즈존을 차별이라고 규정했던 국가인권위원회가 이번에도 고령자를 차별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고령이라는 이유로 스포츠시설의 회원 가입을 막는 건 평등권을 침해하는 차별이라는 것이다. 사실 노키즈존에서 문제인 건 아이들이 아니라 자녀를 통제하거나 훈육하지 않는 ‘무개념 부모’이고, 노줌마존과 노시니어존에서 문제인 건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일부 ‘진상 고객’이다. 문제의 행동을 제재하는 것과 특정 집단을 싸잡아 배제하는 건 엄연히 다르다. 늘어만 가는 노○○존은 배려와 존중보다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는 우리 사회의 씁쓸한 단면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경단녀’(경력단절여성)라는 단어가 등장한 건 15년 남짓밖에 안 된다.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를 늘리겠다며 정부가 ‘경력단절여성 등의 경제활동촉진법’을 제정하면서다. 이때부터 경단녀는 임신, 출산, 육아 때문에 퇴직해 경제 활동을 중단한 여성을 뜻하는 말로 널리 쓰였다. 20대에는 남성보다 높았던 여성의 고용률이 애 낳고 키우는 30대에 푹 꺼졌다가 40, 50대에 다시 높아지는 ‘M커브’ 역시 경단녀의 상징이 됐다. ▷그런데 요즘 민간 기업은 물론이고 지방자치단체들까지 나서서 경단녀를 ‘경보녀’(경력보유여성)로 바꿔 부르고 있다. 경기도를 시작으로 ‘여성 경력단절 예방’ 조례를 ‘여성 경력유지’ 조례로 개정한 지자체가 한둘이 아니다. 여성들을 위축시키는 ‘단절’이라는 부정적 용어 대신 경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의미를 살려 노동시장에 복귀하려는 이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자는 취지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여성 임금근로자는 올 들어 처음 1000만 명을 넘어섰다. 60년 전과 비교하면 18배 가까이 급증한 숫자다. 여성 자영업자 비중도 30%를 웃돌며 최고치를 찍었다. 눈치 보지 않고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기업 문화가 확산되면서 여성의 경력단절이 줄어든 데다 창업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이들이 늘어난 영향이다. 특히 이커머스 플랫폼이 발달하면서 사업 아이템만 좋으면 큰돈 들이지 않고 인생 이모작에 도전할 길이 열렸다. 라이브방송의 ‘패션 셀러’ ‘뷰티 셀러’로 성공한 경보녀들이다. ▷‘인생 다모작’에 나서는 신중년층도 많다. 교육 수준이 높고 건강한 요즘 5060세대는 은퇴 후에도 계속 일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60대 후반의 경제 활동 참가율이 최근 55%를 웃도는데, 이 연령대에서 일하거나 일자리를 찾는 사람이 절반이 넘는다는 뜻이다. 지게차·굴착기 운전 기능사, 전기 기능사 등 미리 따둔 자격증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찾거나 그동안 쌓아온 경력으로 인력난에 시달리는 중소기업에 재취업해 구원투수 역할을 하는 은퇴자가 늘고 있다. ▷하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남성과 여성의 임금 수준과 근로 조건 격차는 여전히 심각하다. 특히 올해 역대 최대 규모로 불어난 비정규직 근로자의 3명 중 2명은 자발적으로 지금의 일자리를 택했다고 하는데 여기에 은퇴자와 경보녀, 청년 알바족이 몰려 있다. 본인이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시간만큼 일하려는 사람도 있겠지만 생계를 위해 불안정한 일자리와 타협한 이들이 적잖다. 경직된 노동시장을 개혁해 차별 없는 다양한 형태의 일자리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이게 리스타트에 나선 경보녀와 신중년, 청년들을 뒷받침하는 길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