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구

이진구 기자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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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부터 ‘이진구 기자의 대화’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딱딱하고 가식적인 형식보다 친구와 카페에서 수다 떠는 듯한 편안한 인터뷰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sys1201@donga.com

취재분야

2026-02-25~202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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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논설위원의 對話]“세종대왕 동상 옮기면 흉물 돼… 차라리 없애 달라”

    《서울시가 지난달 21일 광화문광장 재조성안을 확정·발표했다. 이 안에 따르면 세종대왕 동상은 세종문화회관 옆으로, 이순신 장군 동상은 정부서울청사 옆으로 옮겨진다. 안이 공개되자 동상 이전을 반대하는 여론이 일었고, 서울시는 “확정된 게 아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이순신 동상은 존치하고, 세종대왕 동상은 이전하는 쪽으로 가는 분위기다. 동상을 옮기면 어떤 문제가 있는 걸까. 세종대왕 동상을 만든 김영원 전 홍익대 미대학장(72)은 “장소가 바뀌면 세종대왕 동상은 흉물이 된다. 차라리 없애는 게 낫다”고 말했다.》  ―지금의 세종대왕 동상 위치는 어떻게 정해진 건가. “공모에 선정된 후 2주 동안 광화문을 답사했다. 그리고 북악산 정기가 경복궁과 광화문을 거쳐 남대문까지 이어지는 역사의 축에 가장 위대한 인물을 모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순신 장군 동상과의 거리도 고려했다.” (이순신 동상과의 거리라니?) “두 동상이 너무 가까우면 시각적 공간 충돌이 생겨 보기가 부담스러워진다. 너무 떨어지면 무(武)를 상징하는 이순신 장군과 문(文)을 상징하는 세종대왕 간의 조화가 사라진다. 세종문화회관과 미국대사관이라는 거대한 건물이 동상에 미치는 시각적 요소도 고려했다. 주변의 모든 구조물이 시각적으로 서로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지점을 찾은 거다.” ―재조성안처럼 세종문화회관 옆으로 옮기면 이상해지나. “작품과 장소는 한 몸이다. 이전되면 지금처럼 광장의 주인, 역사의 축으로서의 상징성이 사라진다. 세종문화회관은 엄청나게 웅장한 건물이다. 그 옆에 동상이 놓이면 같은 크기라도 지금보다 훨씬 왜소하게 보인다. 세종문화회관에 딸린 장식물로 전락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동상이 지금처럼 남쪽(남대문 방향)을 바라보지 않고, 동쪽(미 대사관 방향)을 본다는 점이다.” ―얼굴이 동쪽을 보는 게 왜 문제가 되나. “조각은 빛의 예술이다. 어떻게 조명을 받느냐에 따라 작품이 살고 죽는다. 그래서 조각은, 특히 인체는 동향이나 서향으로 놓지 않는다. 지금은 햇빛이 얼굴 왼쪽에서 머리, 얼굴 오른쪽을 비추며 지난다. 이마, 코 등 때문에 얼굴에 적당한 음영이 지면서 양각이 살아나 어느 때, 어느 쪽에서 봐도 정상적인 사람 얼굴로 보인다. 그런데 이전 예정지에 놓이면 동상이 동쪽을 향한다. 해가 얼굴 정면을 비추며 뜬 뒤 뒤통수를 비추며 지는 것이다. 햇빛이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면 음영이 하나도 안 생겨 인형처럼 멍청해 보인다. 반대로 오후에는 해가 뒤에서 비추기 때문에 얼굴이 시커멓게 된다. 그래서 옮길 바에는 차라리 없애 달라고 한 거다. 알 만한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니…. “공모전 심사위원장인 승효상 국가건축정책위원장은 건축가다. 조경, 건축하는 사람들에게 공간에 대한 공부는 기본이다. 공간과 방향에 따라 동상이 어떻게 보인다는 걸 모를 수가 없다. 이전을 하면 세종대왕 동상은 흉물처럼 보이게 된다. 시민들 사이에서 보기 안 좋다는 말이 나올 테고 그때 가서 자연스럽게 없애려고 하는 게 아닌지….” ―서울시가 사전에 의견이나 양해를 구하지 않던가. “한마디도 말해 준 게 없다. 그래서 왜 옮기려고 하는지 모른다. 하도 답답해서 서울시 홈페이지에 질문을 올렸는데 답이 없다가 어제(11일) 오후 5시경에야 서울시 공무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울시는 이전을 말한 적이 없다면서 단지 당선작 설계자와의 만남은 주선해 줄 수 있다고 했다.” (설계자를 만난들 무슨 소용인가. 결정은 서울시가 하는 거 아닌가) “책임을 그쪽에 떠넘긴 거지.” (만났나?) “오늘 오후 2시경이라고 했는데 어디서 만나는지 아직도 연락이 없다.” (지금 오후 1시가 넘었는데?) “그러게 말이다.” ―이전이 불가피하다면 작가에게 양해를 구하는 게 예의 아닌가. “서울 강남 포스코센터 앞에 현대미술의 거장 프랭크 스텔라의 ‘아마벨’이란 작품이 있다. 비행기 잔해로 꽃을 형상화한 것인데 예술적 의미가 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좀 흉하게 보일 수 있는 형상이다. 보기 싫다는 민원이 많아지니까 포스코에서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겠다고 했다. 내가 그곳 작품심의위원이었는데 심의를 하면서 작가한테 허락을 받으라고 했다. 안 그러면 큰 망신이나 아니면 엄청난 페널티를 물 수 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작가가 노발대발해서 한 치라도 옮기면 소송을 하겠다고 펄펄 뛰더라. 결국 못 옮겼다. 작품과 장소는 한 몸이다.” ―세종대왕의 어떤 모습을 구현하고 싶었나.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초상화도 없고….” (어진이 없나?) “세종대왕은 어진이 없다. 지금 1만 원권 지폐에 있는 그림은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린 것이다. 동상심사위원회가 운보 그림을 주면서 참고하라고 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좀 유약해 보였다.” (유약하다니?) “세종대왕은 자애로운 분이지만 백성을 사랑하고 지키기 위해 늘 사대부들과 충돌했다. 훈민정음 창제는 그 절정이었고. 난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는 목숨을 건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기존 표준 영정에서는 그런 마음을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남아 있는 태조 영조 고종 순종 어진을 참고하고 후덕한 얼굴인 고종을 많이 반영했다. 다행히 다들 세종대왕으로 여기더라. 하하하.” ―만드는 동안 고생을 많이 했나. “점토 작업만 3개월 반이 걸렸는데 그 사이에 5kg이나 빠졌다. 한여름에도 오한이 들어 점퍼를 입고 작업했으니까…. 불면증도 걸리고…. 너무 힘들어서 나중에는 다 포기하고 외국으로 도망가려고 했다. 까짓것 위약금 물어주면 그만이지 하고….” (세종대왕 용안을 본 사람도 없는데…) “안 봤으니까 각자 느낌으로만 대할 것 아닌가. 더 힘들지. 더구나 광화문이라는 대한민국의 중심이 주는 중압감, 최고의 성군을 감히 나 같은 게 만든다는 부담이 너무 컸다. 나라 한복판에 자신의 작품이 있다는 건 대단한 영예지만 그만큼 큰 부담이다. 2009년 10월 9일 제막식만 가고 이후 1년 동안 광화문 근처는 얼씬도 안 했다. 너무 힘든 기억이 떠올라서.”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을 만들었다가 곤욕을 치렀다고 하던데…. “2017년 박 전 대통령 추모 단체에서 서울 마포구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에 세울 동상 제작을 요청했다. 박 전 대통령이 태어난 11월 14일을 기념해 전날 설치하는데 반대하는 사람들이 기념관 안에 텐트까지 치고 격렬하게 막았다. 충돌이 너무 커져서 결국 동상은 못 세우고 소유권을 기념관에 넘기는 서류 기증식만 했는데…, 기념관이 지역구인 더불어민주당 손혜원 의원도 와서 격렬하게 반대하더라. 그런데 나랑 눈이 마주치자 못 본 척 고개를 휙 돌렸다.” (손 의원은 홍대 미대를 나오고 산업미술대학원 교수를 하지 않았나) “그렇지….” (그 뒤에는 어떻게 됐나) “서울시가 허가를 안 해 아직도 설치를 못 하고 있다. 동상은 내가 보관하고 있고…. 인물에 대한 평가는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렇다고 박 전 대통령이 동상도 만들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반대한다고 힘으로 막는 게 진보라는 사람들이 할 일인가. 서울시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설치를 불허했다.” ―서울시가 왜 동상 설립을 불허하나. “기념관 부지가 시유지라 조형물을 세우려면 서울시 심의를 거쳐야 한다. 그런데 이게 심의할 만한 걸 해야지, 박정희 기념관에 박정희 동상 설치가 심의 대상이 되나. 견디다 못해 기념관에서 서울시에 정식으로 설치허가 요청서를 냈다. 그랬더니 마포구민 동의서를 받아 오라고 했다. 기가 막힌 일이다.” ※허가를 지연하던 서울시는 이듬해인 2018년 2월 당초 없던 ‘근·현대 역사 인물 동상 건립 기준’을 신설하고 기념관 측에 역사자문기관 3곳 이상에서 인물 평가를 받아 와야 허가할 수 있다고 통보했다. 기념관 측은 역사기관 평가 대신 박 전 대통령 관련 서적 12권을 제출했으나 서울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청남대에 세워진 역대 대통령 10명의 동상을 다 만들었다던데…. “충북도에서 청남대 길마다 역대 대통령 이름을 붙였는데 그 길에 하나씩 세워졌다. 이승만 대통령부터 이명박 대통령까지.” (대통령마다 표현하고 싶은 모습이 있었나) “YS는 결단성, DJ는 화합과 통합, 노무현 대통령은 권위주의 타파, MB는 부지런함을 표현하고 싶었다.” (누가 가장 만들기 어렵던가) “하하하. MB였다. 그분이 좀 얼굴이 왜소해서 양감이 잘 안 나온다. 또 눈 크기가 달라서…. 속된 말로 짝눈이라고 하는 건데…. 똑같이 만들면 얼굴이 엄청 이상하게 보인다. 약간 (눈을 키우는)가필을 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할 수 없이 눈도 그렇고 좀 가필을 했다. 하하하.”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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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논설위원의 對話]“김수현 정책실장은 꼭 중장기과제 고민할 짬을 냈으면…”

    《현 정부의 적폐청산이 거세다. 이미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구치소에 수감됐고 최근에는 전직 대법원장이 그 뒤를 따랐다. 누구든 죄가 있다면 처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 속에 서로에 대한 증오가 조금이라도 작용하고 있다면 정부가 바뀔 때마다 피바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정치에서 현 정부는 전임 정부를 존중하고, 전임 정부는 현 정부에 아낌없이 조언하는 모습을 볼 수는 없는 것일까. 백용호 전 대통령정책실장(63·이화여대 정책과학대학원 교수)은 “국가적 중장기 과제를 고민해야 한다고 늘 생각하면서도 못 한 게 무척 아쉽다”며 “현 김수현 정책실장은 어떻게 해서든 그런 고민을 할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청와대조차 중장기 정책을 고민할 여력이 없다면 어디서 하나. “매일 당면하는 현안이 너무 많다 보니 늘 후순위가 되더라. 현안도 중요하지만 긴 호흡을 가진 정책을 고민해야 하는데…. 우리나라가 그런 부분이 많이 약하다. 예를 들면 4차 산업혁명 시대나 저출산같이 긴 호흡이 필요한 문제를 어떻게 대비할 건지 같은…. 꼭 해보고 싶었던 게 다문화 가정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가 진정한 선진국이 되고 세계화 시대에 제대로 적응하기 위해서는 다문화 가정 문제를 전략적으로 잘 대응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 또 부모의 재력으로 인한 교육 격차 문제도 고민이 필요하고…. 큰 사건이 터지면 청와대 역량이 전부 거기로 쏠리니까 여력을 내기가 정말 쉽지 않았다. 아마 지금 청와대도 비슷할 거다.” ―정책실 일이 그렇게 많은가. “공정거래위원장부터 시작해서 국세청장, 정책실장까지 하다 보니 피로가 누적된 결과겠지만, 나중에는 걷는데 도로가 눈앞으로 튀어 올라오는 것처럼 보였다. 기가 다 빠진 것인지 잇몸도 다 내려앉고, 머리도 다 빠지고…. 한의원에 갔는데 풍(風) 초기인 것 같다며 닭고기는 먹지 말라고 하더라. 하하하. 그래서 지금도 닭고기는 안 먹는다.” ―전임 정책실장으로서 현 정부 정책에 대해 말한다면…. “정책실장을 하면서 절실히 느꼈는데 정책 성공을 담보하는 건 명분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명분과 정치적인 수사에 너무 매달리면 현실과 동떨어지게 되고, 반드시 부작용이 일어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애매한 이름을 사용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본다. 사안의 본질과 상관없이 검증된 이론이냐 아니냐는 소모적인 용어 논쟁에 빠졌으니까…. 그냥 분배를 개선한다고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이명박(MB) 정부가 끝난 뒤 ‘역사는 역시 반복되는 것 같다’고 했는데…. “음…, 선거 때 제시한 공약을 다 지킨 정부는 없을 거다. 다 해줄 수 있다, 또는 다 해줘야 한다고 너무 과신하는데 그게 모든 정부마다 반복된다. 그리고 못 지키고….” (정확하게 말하면 정부가 아니라 대통령 아닌가?) “허허허…, 뭐 그렇겠지. 이제는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는 정부가 나왔으면 한다.” (예를 들면 어떤 건가) “동남권 신공항 같은 것…. 특정 정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모든 정부가 바뀔 때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니까. 또 하나는 권력자의 모습인데, 권력을 갖기 전에는 스스로 원칙을 지키고, 거절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일단 권력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면 그걸 지키기가 아주 어렵다. 그런 절제가 없는 상태에서 평소 하던 행동을 하면 아주 불행한 결과가 오는 거지. 그런 경우가 지금 많지 않나.” ―MB 정부의 공과를 평가한다면…. “지금은 잊었겠지만 MB 정부 시절 대외 경제 여건이 무척 안 좋았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는 어쩌면 서방 국가들에는 대공황 이래 가장 큰 쇼크였는데 국민들이 피부로 위협을 못 느낄 정도로 성공적으로 대처했다. 한미 통화 스와프(swap)가 체결된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08년 9월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 보호를 신청하면서 전 세계 금융시장이 패닉에 빠졌다. 한국도 정부가 환율 방어 등 갖은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외환위기 문턱에서 이 상황을 진정시킨 것이 한미 통화 스와프였다. 사실상 미국 중앙은행이 보증을 서면서 원화에 대한 신뢰가 회복된 것이다. ―한미 통화 스와프 체결이 어려운 일이었나. “국제 규정상 통화 스와프를 하려면 여러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는데 우리는 그 기준에 모자랐다.” (어떻게 체결할 수 있었나) “일종의 외교적 노력으로 해결한 건데…. 대통령은 물론이고 많은 공직자들이 노력했고.” (과는?) “국민들이 실망한 부분이 많으니까…. 그 부분은 5년간 MB 정부에서 일한 사람으로서 마음이 참 착잡하고 무겁다.” ―MB 정부에서 국정홍보처를 폐지한 게 아쉬웠다고 했다. “정책 홍보를 전문 부처가 책임지고 하는 것과 부처 각자 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더 아쉬웠던 건 아주 부드럽게 정책을 성공시킬 수 있는 도구를 없앴다는 점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리처드 세일러의 ‘넛지효과(Nudge Effect)’인데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세금을 잘 낸다’는 사실만 알려도 탈세율이 현격하게 떨어진다. 정부가 강제적인 방법이 아니더라도 홍보만 잘해도 상당한 정책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홍보처를 없앤 건 너무 성급했다. 물론 당시에는 홍보처가 기자실 폐쇄 등으로 원성을 너무 사긴 했지만….” ―보수가 지금 무척 어려운 상황이다. 보수의 경제관도 바뀌어야 한다고 했는데…. “보수 정치집단은 그동안 쉬운 길을 걸어왔다. 과거 경제성장 실적, 안보와 지역주의에 안주해 수십 년을 버텼다. 그러다 지금 부패 문제로 위기를 겪고 있고…. 지금 위기는 시간만 지난다고 극복되는 게 아니다. 지키기 위해서라도 변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 사회가 겪는 갈등의 가장 큰 원인이 경제적 불평등과 격차 때문인데 이 담론을 진보의 영역에만 놔둬서는 안 된다.” (보수는 대개 보편적 복지에 각을 세우는데…) “도덕적 해이나 포퓰리즘, 재정 건전성 등을 걱정하는 건데, 그렇다고 해서 복지를 증진시키거나 경제적 불평등을 풀기 위한 과감한 조치들을 더 이상 진보의 영역으로 놔둬서는 (생존이) 어려울 거다.” ―하지만 우리 보수·진보 정당은 거의 이분법적으로 정책을 다룬다. “정책실장 때 친서민 정책을 제시했더니 내 편, 네 편 할 것 없이 ‘MB 정부가 무슨 친서민 정책이냐’며 비판하더라. 보수는 감세와 기업 규제 완화, 진보는 증세와 복지 증대 이런 식으로 아예 진영을 나누는 거지. 양극화가 심화되면 시장이 지속될 수 없다. 보수가 말하는 시장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친서민 정책을 펴야 한다고 설득했다. 마찬가지로 시장을 위험에 빠뜨릴 정도의 탐욕과 반칙에 대해서는 정부가 더 강력하게 개입해야 한다.” (MB 정부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사면해준 건 시장경제에 대한 반칙 아닌가. 이 회장은 배임과 조세포탈로 유죄를 선고받았고 당신은 당시 국세청장이었다) “음…, 그때 세 번째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에 도전할 때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에게 성공하기 쉽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국민의 열망도 컸지만 이미 두 번이나 유치 신청을 하다 보니 인프라 등 선행된 투자 금액이 굉장히 많았다. 없던 걸로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MB가 고민 끝에 ‘이왕 이렇게 된 바에는 모든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 성공하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던 이 회장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비난을 예측하지 못할 리가 없었을 텐데…. “모를 수가 있나. 재벌 특혜다, 법치주의가 훼손됐다 등 상당한 비난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정치적 부담과 세 번째 도전에서는 꼭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 이미 들어간 엄청난 투자 금액 등의 사이에서 결정한 건데…, 굉장히 고민스러운 결정이었지만 다른 국가적 이익을 위해 (법치 훼손을) 용인한 건 사실이다.” ―정부가 각종 제재로 지나치게 기업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이 있다. “보수 진보를 떠나 기업 경쟁력이 국가 경쟁력이란 걸 모르는 정부가 어디 있겠나. 그런데 대기업 집단들은 그런 제재가 왜 나오는지 근본 이유를 알아야 한다. 정치권은 국민의 마음을 읽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 국민들의 반기업 정서가 강하기 때문에 그런 제재들이 나오는 거다. 3세, 4세로 넘어가면서 국민들에게 실망을 주는 행위가 너무 많이 나오고 있지 않나. 반기업 정서가 왜 생겼는지 재벌들이 고민하지 않으면 정권을 가리지 않고 대기업에 대한 제재 문제가 계속 거론될 거다. 상속도 그렇다. 경영에 관심이 없고 다른 걸 더 잘하는 자녀에게까지 굳이 무리하게 물려줄 필요는 없지 않나. 회사로도, 사회적으로도 너무 위험한 행동이다.” ―공과를 떠나 한 정부의 경제 정책 전반을 이끈 사람으로서 해줄 말이 있나. “정책을 한 사람으로서 후임자들이나 그들의 정책을 비판하는 건 참 어렵다. 그 고충을 아니까…. 정책 결정 과정에 있는 사람은 굉장히 외롭다. 어떤 선택을 해도 반대가 있고,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정책이 성공을 해도 그 과정에서 피해를 본 사람들은 영원히 기억한다. 그래서 굉장히 외롭고 역사에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다. 그런 생각을 가졌으면 한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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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구]인플루엔자와 환각

    23일 일본 도쿄의 한 전철역에서 인플루엔자(독감)에 걸린 30대 여성이 선로에 떨어진 뒤 열차에 치여 숨졌다. 심하게 기침을 하던 중 갑자기 비틀거리면서 추락했다고 한다. 바로 전날 사이타마현에서도 독감에 걸려 집에서 쉬던 초등학생이 아파트 3층에서 떨어져 다치는 일이 벌어졌다.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독감으로 인한 신경이상 증상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전염병 전문가들에 따르면 독감에 걸리면 뇌의 질병이나 신경합병증으로 인해 환각이나 이상행동이 발생할 수 있다. 이상증상에는 갑자기 달리는 경우가 가장 많았고, 흥분해서 창을 열고 뛰어내리려 하거나 같은 자리를 맴도는 모습도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지난해 늦가을부터 지금까지 이런 증상이 100여 건 보고됐다. 환자수가 200만 명을 넘어설 만큼 독감이 확산되는 데다 신경이상 증상 공포까지 겹쳐 일본인들의 일상생활까지 바뀌고 있다. 한 커플은 남자가 독감 진단을 받자 노트북 영상통화로 결혼식을 치렀고, 독감에 걸린 환자들에게 위로금을 보내주는 크라우드펀딩 앱도 등장했다. ▷국내에서는 지난달 말 독감 치료제인 타미플루를 복용한 여중생이 아파트에서 떨어져 숨지면서 약의 부작용으로 인한 신경이상 증상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한 남성은 라디오 프로그램 건강상담에서 아들이 타미플루를 복용한 지 40∼50분이 지나면 어디론가 가곤 했는데 왜 그곳에 갔는지는 모르는 증상을 보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약과 이상증상의 관계는 연관 짓기 어렵다는 쪽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전염병은 철저히 대비해야 하지만 과민 반응은 경계해야 한다. 국내에서도 2015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발병 때 실제보다 사태를 더 키운 건 ‘공기로도 전염된다’는 식의 괴담, ‘낙타 고기와 낙타 우유는 먹지 말라’는 걸 예방법이라고 홍보한 정부의 안이한 대응, 무분별한 학교 폐쇄처럼 공포를 부추기는 과민·과잉대응이었다. 전염병 자체는 천재(天災)지만, 확산은 인재(人災)인 경우가 많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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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구]고종 훙서 100주기

    100년 전인 1919년 오늘,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 황제가 67세로 훙서(薨逝)했다.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평소 건강하던 고종이 이날 새벽 식혜 등 음료수를 마시고 갑자기 쓰러졌고, 시체가 심하게 부풀어 올랐다는 점 등 때문에 일제에 의한 독살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분노한 민심은 2·8독립선언의 동력이 됐고, 고종의 인산일(因山日·3월 3일)을 앞두고 전국에서 모인 백성들은 3·1만세운동에 대거 합류했다. 수많은 청년들이 시위 도중 영전이 있는 경운궁에 몰려가 울부짖으며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특히 일제는 장례행렬 선두에 일본 전통 제례 복장을 입은 사람들을 세웠는데 조선왕조 전통 의례가 아닌 일본식으로 왜곡된 장례식도 민심에 불을 지른 요인이었다. ▷고종의 훙서는 제국(帝國)을 마감하고 민국(民國)을 탄생시키는 기폭제가 됐다. 2·8독립선언, 3·1독립선언으로 이어진 정신을 잇기 위해 그해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더 이상 ‘왕족’을 인정하지 않았다. 망국의 군주라는 한계 속에서도 고종이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고 의병을 지원하는 등 독립을 위해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라를 지키는 데 실패한 군주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차가웠다. 고종은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홍릉에 묻혔다. 고종보다 24년 전에 일본인 자객에게 살해된 뒤 서울 청량리 근처의 천장산에 묻혔던 부인 명성황후(1851∼1895)도 그곳에 합장됐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서울 덕수궁 인근에 ‘고종의 길’을 조성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고종이 일제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도피한 길이다. 대구 중구에는 고종의 아들인 순종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순행을 하며 일본 건국신화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위패를 안치한 황대신궁을 참배한 길(순종황제남순행로)이 있다. 아픈 역사를 기억하자는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이라고 하지만 진정한 다크투어리즘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일제에 의해 무력한 지도자로 색칠돼온 고종에 관한 진실을 다시 세우고 아픈 시대의 교훈을 새기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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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이 터져라 땅이 꺼져라 ‘대한독립만세’… 천지가 진동하는 듯”

    《‘신명의 딸은 3·1운동의 첫 횃불을 올렸다. 영남의 하늘에, 순정의 기름에 불을 붙여, 적의 총칼 앞에서 높이 치켜든 그 휘황한 횃불. 큰 의로움을 위해서는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그 담대성 그 헌신성. 그 정신을 이어받아 참되게 살기를 다짐하는 소녀들이 작은 정성을 모아 여기 돌을 세운다.’(개교 65주년 기념 1972년 10월 23일 재학생 일동 세움) 대구 중구 신명고등학교·성명여자중학교에는 1919년 3·1운동에서 큰 역할을 했던 이 학교(당시 신명여학교) 교사들과 재학생 졸업생들을 기리는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3·1운동 기념탑을 교내에 세운 학교는 전국에서 신명고등학교가 처음이다.》○ 전교생이 만세운동에 참여 신명여학교는 1902년 5월 선교사 마사 스콧 브루언 여사가 대구에 신명여자소학교를 설립한 것이 모태가 됐다. 신명여자소학교는 대구지역 최초의 여학교였다. 1907년 신명여자중학교가 설립된 뒤 1912년 신명여자학교로 명칭이 바뀌었고, 1944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대구남산고등여학교로 개명됐다. 광복 후 1951년 신명여고와 신명여중으로 환원됐다. 이후 재단 분규와 여고의 남녀공학 전환 등으로 교명은 신명고등학교와 성명여중으로 다시 바뀌었다. 신명여학교는 전교생이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은 물론 이후에도 여성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는 등 항일독립운동에 큰 활약을 펼쳤다. 대구에서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시작됐다. 이때 신명여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이가 교사 임봉선(당시 22세·6회 졸업생)과 이재인(31세), 이선애(22세)다. 이들은 학생들에게 “공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일은 일제의 압제에 있는 우리나라를 자주독립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급선무요 우리의 살길이니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며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또 비밀리에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준비를 갖춘 뒤 이날 낮 전교생 50여 명과 함께 서문시장 밖에 모였다. 주도적 역할을 한 임봉선(1897∼1923)은 3·1운동 전해인 1918년 21세의 나이로 신명여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임봉선은 대구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내려온 평양숭실학교 학생 김무생(1898∼?)과 김천교회 전도사 박제원으로부터 서울과 평양의 만세운동 상황을 듣는다. 또 이 과정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사실을 알고 만세운동 참여를 결심한다. 경북 경산 출생인 김무생은 평양에서 3·1운동에 참가했고, 대구에서도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주모자로 체포돼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3월 8일 오후 만세시위대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행진을 시작했다. 이때 임봉선은 머리에 수건을 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50여 명의 신명여학교 학생들을 이끌었다. 당시 시위대는 만세운동이 시작된 큰 시장에서 동산교, 대구경찰서, 경정통, 남성정, 중앙파출소를 거쳐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 앞까지 진출했다. 이곳에선 일본군 80연대가 기관총을 설치해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또 기마경찰이 시위대로 뛰어들어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임봉선도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신명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체포됐다. 당시 여학생들은 나이가 어린 점이 참작돼 석방됐지만 임봉선 등 교사들과 졸업생들은 재판에 넘겨졌다. 임봉선과 이재인은 각각 징역 1년 형, 이선애는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임봉선은 이 과정에서 얻은 후유증으로 1923년 26세의 꽃다운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 “천지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신명여학교 10회 졸업생으로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한 고 김학진 할머니(당시 14세·2002년 97세로 작고)가 남긴 회고록에 따르면 학생들은 기숙사 이 방 저 방을 다니며 천을 구해 태극기와 만세운동에 입고 나갈 옷을 만들었다. 태극기는 크게 만들어 옷가슴에 매달았다. 또 치마는 끈이 어깨에 걸쳐지도록 제작했다. 달리면서 만세를 부르기에도 편하고, 일본 경찰에 체포당할 경우 당할 악형과 모욕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3월 8일 약속의 날이 오자 학생들은 기숙사를 빠져나갔다. 약속한 장소까지 가는 것이 큰일이었지만 대야에 세수수건을 담아 빨래하러가는 것처럼 꾸며 학교를 벗어났다. 학생들은 교문 밖 개천에 이르러서 대야를 바닥에 던져버리고 약속장소를 향해 뛰어갔다. 현장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학생들은 그 행렬 속으로 뛰어들어가 함께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인근 주민, 학생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장엄한 행렬이 됐고, 얼마 후 대구경찰서에 당도했다. 모인 사람들은 행렬을 멈추고 있는 힘을 다해서 경찰서가 떠나가라는 듯이, 땅이 꺼져라,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불러댔다. 김 할머니는 당시 상황을 “천지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고 술회했다. 이후 시위대가 동성로를 지날 때 일본 군경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이 시작됐다. 기마헌병들이 시위대 가운데로 뛰어들며 행렬을 분산시키기 시작했다. 진압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로 이뤄졌다. 어린 소녀들이 당한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했다. 기마헌병들은 여학생들의 머리채를 잡아채 내동댕이쳤고, 쓰러진 소녀들의 몸 위를 마구 짓밟았다. 특히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선애 임봉선 등은 전신이 피범벅이 될 정도로 가혹행위를 당했다. 이날 만세운동으로 일제에 체포된 신명여학교 학생들은 약 20여 명. 상당수 청년들은 일본 군경이 체포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손을 들고 자진해서 묶여갔다. 김 할머니는 “만세운동에 나왔을 때는 체포돼 감옥에 들어갈 것을 각오하고 나왔는데 너무 어려 보였는지 일본 군경들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며 “잡아가지도 않아 어떻게 할지 모르고 서 있는데 상급생 언니가 내 손을 잡고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 보호해줬다”고 기록했다. 김 할머니는 “만세운동 이후 검문검색이 심해서 외출도 못했는데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 많은 동포들이 체포돼 감옥에 들어갔다는 굉장한 소식을 들었다”며 “우리 학교 선생님과 학생들도 다수가 잡혀 들어가 학교는 휴교됐고 기숙사는 텅 비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또 “할머니와 어머니는 어린 것이 그 인파 속에서 밟혀죽지 않고 살아왔으니 감사하다고 반가워하셨으나, 아버님께서는 후에 말씀하시길 감옥에 안 들어가고 왜 피해왔느냐고 꾸지람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나 자신도 생각하면 더욱 용기를 내 손을 쳐들고 자원해서라도 잡혀가서 나라를 위해 옥고도 좀 겪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때때로 일었다”며 당시 심정을 기록했다. 이 같은 신명여학교의 3·1만세 운동은 국권 회복과 여권 신장을 목적으로 하는 대한애국부인회(회장 김마리아)와 조선여자기독청년회(회장 김활란)의 활동을 통해 계승·발전됐다. 대한애국부인회는 신명여학교 교사 출신인 유인경과 1회 졸업생인 이금례 등이 주축이 돼 독립운동 자금모집, 독립운동원의 보호, 독립운동 유가족의 생계보조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제에 발각돼 조직원 전원이 체포되는 아픔을 겪는다. 조선여자기독청년회는 1회 졸업생 임성례, 7회 졸업생 추애경, 9회 졸업생 이영현 등이 주축이 됐는데 여권신장운동, 농촌계몽운동, 절제 운동 등을 위주로 활동했다.○ 학생들이 주도한 3·1기념탑 이런 신명의 정신은 광복 이후에도 이어져 전국에서 처음으로 학교 안에 3·1운동 기념탑을 세우는 원동력이 됐다. 신명 3·1운동 기념탑 건립은 1972년 3월 민족 주체사상을 고취하고 애국정신을 함양하며 3·1운동 정신을 계승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학생들은 용돈을 절약해 1인당 60원씩 갹출해 건립비용에 보탰다. 탑 모양 설계는 미술교사이던 김익수 선생이 만든 2개 모델 가운데 하나를 전교생의 투표로 선정했다. 탑에 새겨질 명문(銘文)은 당대의 시인 박목월이, 글씨는 서예가 강선동 선생이 맡았다. 또 당시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이갑성 옹이 축전을 보내고 향나무 한 그루를 기증했다. 기공식도 건립 취지에 맞춰 그해 8월 15일 광복절에 거행됐다. 건립비 모금에는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의 부인인 박영옥 여사도 손을 거들었다. 박 여사는 이 학교 졸업생으로 학생들의 편지를 받고 직접 내려와 20만 원을 찬조했다. 십시일반으로 모두가 힘을 모은 신명 3·1운동 기념탑은 같은 해 10월 23일 제막식을 갖고 현재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신명여학교 출신 항일운동가 차보석-백신애 ▼차보석, 상하이서 미국으로 가 독립운동 지원 헌신백신애, 여성단체-문학 활동 통해 치열한 저항의 삶 신명여학교 출신의 독립운동가지만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동암 차리석(1881∼1945)의 여동생 차보석(1892∼1932)이다. 이화학당을 거쳐 일본 고베(神戶)가사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한 차보석은 1910년 신명여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차보석은 23세 때 신명여학교를 떠나 평양으로 가서 오빠 차리석과 교육사업을 펼치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에서는 흥사단에 참여하고, 1921년에는 재상해유일학생회에서 활약했다. 이후 30세인 1922년 미국으로 건너가 1925년 대한여자애국단 샌프란시스코 단장을 거쳐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1926∼1928년)을 역임했다. 그는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어학교 교사를 했는데 학생들에게 한국 혼을 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또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 모금에도 노력했다. 1931년에는 대한인국민회에 들어가 3·1절 기념식 준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하지만 1932년 3월 21일 불과 40세의 나이에 숨을 거뒀다. 정부는 2016년 고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항일 여성 운동가이자 여류 작가인 백신애 선생(1908∼1939·신명여학교 중퇴)도 신명여학교 출신이다. 그는 부친이 정미소를 운영하는 부잣집 외동딸로 태어났지만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고 민족의 아픔과 고통을 껴안는 저항의 삶을 살았다. 그는 영천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1926년 조선여성동우회, 경성여자청년동맹 등에 가입해 활동한 것이 드러나 교직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이후에도 두 단체 활동을 멈추지 않으며 상하이와 시베리아를 넘나들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다. 그는 작품에서 농촌의 궁핍한 삶과 여성에게 침묵과 순종만을 요구하는 가부장적인 가족제도 및 조혼의 폐단 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나의 어머니’ ‘꺼래이(일제강점기 러시아인들이 조선인을 비하해 부르던 말)’ ‘복선이’ ‘호도’ 등 소설 23편과 산문 38편을 남겼다. 그는 31세인 1939년 췌장암이 악화돼 경성제국대학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현재 백신애기념사업회가 ‘백신애문학상’을 매년 시상하고 있다.대구=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9-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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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논설위원의 對話]“나 사는 거 보고 애국할 사람 줄면 안 되는데…”

    《“…희생과 공헌의 정도에 상응하여 국가유공자와 유족의 영예로운 생활이 유지·보장되도록 실질적인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2조 ‘예우의 기본이념’) 한 노인이 있다. 증조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수반)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 선생. 조부(이준형)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 자결했고, 역시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이대용)는 6·25전쟁 중 46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했다. 불령선인의 자식으로 낙인찍힌 그의 형들은 중학교도 진학하지 못한 채 울분 속에 살다가 젊은 나이로 사망했고, 그렇게 기울어진 가세 때문에 노인과 그의 여동생은 한때 보육원에서 살아야 했다. 야간 고등학교를 나온 그는 80세인 지금 자기 집 없이 전세를 살고 있다.》  ―올해가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입니다. 석주 선생 등 독립운동가 39인이 만주에서 발표하신 무오독립선언이 3·1만세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고 하던데요. “증조부는 종택(宗宅·종갓집)인 임청각(보물 제182호) 등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한 뒤 온 가족을 이끌고 만주에 망명했고, 서로군정서와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했습니다. 또 독립운동가 39인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인 무오독립선언(1919년 2월 1일)을 발표했고, 이 무오독립선언이 도쿄 2·8독립선언, 3·1독립만세운동으로 이어졌지요.” ―조부와 부친의 독립운동 활동상은 어떠셨는지요. “조부와 부친은 증조부와 함께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증조부가 돌아가신 1932년에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왔습니다. 조부는 독립운동을 하며 얻은 병이 깊어지고, 일제의 회유와 압박이 심해지자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살면 하루의 부끄러움만 더할 뿐’이라며 자결하셨지요. 부친도 평안북도 청성진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무장투쟁을 하셨고 이 때문에 징역 7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1990년 조부는 애국장, 부친은 독립장에 추서됐고, 제 어머니(허은 여사)도 지난해 애족장에 추서됐지요.” ―자결까지 할 정도로 압박이 심했습니까. “증조부의 반혼제(返魂祭·죽은 사람의 혼을 집으로 불러들일 때 지내는 제사)에서 손님은 물론이고, 제문까지 검열했답니다. 산속으로 숨었더니 거기까지 순사들이 들이닥치고, 아들인 제 부친을 잡아넣기도 했고요. 그런 상태에서 당시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싱가포르를 점령하니까 독립이 희박해졌다는 절망에 그러신 것 같아요. 결국 생신날인 1942년 9월 2일 자결하셨지요. 부친께는 ‘내가 자결하는 것은 참된 도리를 알게 하려는 뜻이니 나의 마음을 헤아려 과도하게 슬퍼하지 말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시고요.” ―국가보훈처에 석주 선생의 서훈 등급 조정을 요청하셨다고요. “건국훈장에는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등 5등급이 있는데 증조부가 받은 독립장은 3등급입니다. 1962년 서훈 당시 친일파들이 심사하다 보니 제대로 심사가 안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별로 조정할 생각이 없는 것 같더군요.” ―명백한 이유가 있으면 당연히 조정되는 것 아닙니까. “현행 상훈법은 서훈의 추천, 확정, 취소에 대한 규정만 있지 훈격을 조정할 수 있는 규정이 없어요. 저평가나 과대평가가 확인돼도 등급을 조정할 수가 없는 거죠. 옛날에는 자료 조사가 부실해서 엉성하게 평가한 경우가 많았어요. 가짜 국가유공자도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민원을 우려해 안 하는 거죠.” (민원 우려라니요?) “건국훈장 수훈자가 1만5000명(건국포장, 대통령 표창 포함) 정도 됩니다. 등급 조정 신청을 받으면 상당수가 우리 할아버지 등급을 더 올려달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러다 보면 내려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우리 할아버지가 쟤네 할아버지보다 못한 게 뭐냐는 시비가 날 수도 있고…. 그래도 해야지요. 그런데 법 개정안을 심사도 하지 않고 있으니….” ―유관순 열사조차 여전히 3등급 독립장으로 남아있는 이유가 그 때문인가요? “그렇지요. 훈격 조정 규정을 신설하자는 건데 2017년 9월에 발의됐지만 뭐 쟁점 법안이라며 심사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어요. 아까 말한 이유로….” ―한때 보육원에서 살았다고 들었습니다만…. “월사금을 못 내서 중학교에서 맨날 쫓겨났지요.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형들이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고등학교도 가기 어려웠고…. 1956년인가? 당시에는 보육원에 있으면 정부에서 야간 고등학교라도 보내줬어요. 여동생이 보육원에 간 것도 중학교에 가기 위해서였지요. 전 그나마 졸업 때까지 있지 못했어요. 만 18세가 넘으면 나와야 하니까. 낮에는 학교에서 소사 일도 하고, 페인트칠도 해서 돈을 벌고 밤에는 학교를 다녔지요.” ―조부와 부친께서 일제 치하에서 끝까지 호적 등록을 거부하셨다고요. “증조부, 조부, 부모님이 다 독립운동을 하셨는데…. 증조부는 99칸 대저택인 안동 임청각에 살 정도로 대부호였죠. 노비만 수백 명이었으니…. 증조부가 상당수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지만 그래도 남은 재산이 좀 있었는데 조부와 부친이 독립운동을 하느라 잘 관리를 못 하니까 그 사이에 문중의 다른 집에서 야금야금 빼갔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어떤 사람이 부친이 자기에게 판 거라며 매매계약서를 내미는데 1974년에 판 걸로 돼 있더라고요. 아버지는 1952년에 돌아가셨는데…. 조부와 부친은 고성 이씨 종손인데 일제 치하에서 호적 등록을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중에서는 재산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집안의 여러 구성원 명의로 등기를 했고, 수십 년이 지나면서 소유권이 불분명해졌지요. 형님들은 불령선인 자식이라고 학교도 못 다니고…. 그렇게 어려워진 거죠.” ―불령선인 자식이라 학교를 못 다녔다고요? “증조부, 조부, 부친 모두 조선총독부의 불령선인 명부에 올랐지요. 여기 오른 사람 자식들은 초등학교는 몰라도 중학교는 입학이 안 됐어요. 큰형님, 둘째형님이 그래서 중학교를 못 갔고…. 큰형님은 광복 후 친일파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잡혀갔다가 풀려난 지 며칠 후에 돌아가시고, 둘째형님은 6·25 때 행방불명되고…, 셋째 넷째형님들도 돈이 없어 진학을 못 하다가 한 분은 열차 사고로, 한 분은 그런 스트레스로 술을 너무 드시다가 일찍 돌아가셨지요.” ―생활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제대하고 안동에 내려왔는데 옆집에 촌수는 멀지만 300여 년간 이웃하며 살던 문중 집안이 있었어요. 그 집 어르신이 탤런트 이서진 씨의 할아버지인데 그분이 조흥은행에 취직시켜 줘서 30년을 일했지요.” (당시에 은행원이면 괜찮은 직업 아닌가요?) “물려받은 재산은 없었고…. 아버지 없는 조카가 9명이나 되다 보니 큰 도움은 아니어도 아이들이 정착하는 데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어요. 집에서 인터뷰를 못 한 것도 (집이) 좀 그래서….” ―안동 임청각 사당에 신주(神主·죽은 사람의 위패)가 없다고 들었습니다만…. “증조부가 종손인데 만주로 떠나기 직전에 마지막 제사를 지내면서 ‘나라가 망했는데 가문이 무슨 소용이냐’며 땅에 묻으셨다고 해요. 원래 돌아가신 날에 각각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어서 지금은 매년 8월 15일 오전 11시에 합동으로 지내고 있지요.” ―선조께서 그 많은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썼는데 혹시 ‘안 그랬으면…’ 하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내가 어렸을 때 ‘밥 한번 실컷 먹어봤으면 좋겠다’고 한 적이 있나 봐요. 난 기억이 없는데 어머니께서 그게 한이 됐는지 회고록에 적어두셨더라고요. 그 많은 전답을 팔아 독립운동을 했는데 정작 먹을 게 없어 굶고 있는 현실이 답답하셨나 봅니다. 어릴 적에는 이런저런 생각도 했지요. 학교도 못 다니고 했으니까…. 그러다가 증조부에 대해 알게 되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아버지가 독립운동 간부로 추대됐는데 2대 독자이다 보니 증조부와 조부를 모셔야 한다고 고사했대요. 그러자 증조부가 제 부친을 부르더니 ‘나라 찾겠다는 사람이 집 걱정을 해서야 되겠느냐’며 혼내셨답니다.” ―인터뷰를 잘 안 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나 사는 모습 보면 누가 애국하려고 할까 싶어서…. 잘사는 애국지사 후손들이 (언론에) 나와야 사람들이 ‘나라 위하니까 국가가 보호해주는구나’ 하고 애국하지 않겠어요. 올해는 3·1만세운동 100주년인데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어요. 무오독립선언, 2·8독립선언에서 3·1만세운동으로 이어진 그 정신을 우리 모두가 잊지 말아야 해요.”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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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구]샌드라 오

    “몰라∼, 그리고 난 한국 사람이거든!” 2005년 시작돼 현재 시즌 15가 방영되고 있을 정도로 인기를 끈 미국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 이 작품에서 주연인 외과 인턴 크리스티나 양(샌드라 오 분)은 동기 인턴인 이지가 중국인 환자를 데려오며 “중국에서는 그러지 않니?”라고 인종 차별적인 말을 하자 이렇게 당당하게 말한다. 당시만 해도 아직 국내에는 낯설었던 샌드라 오(한국명 오미주·48·시즌 1∼10 출연)가 미드 마니아들을 중심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이 ‘사이다’ 대사가 계기가 됐다. ▷6일(현지 시간) 제76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TV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은 샌드라 오는 아시아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이날 시상식 사회도 봤다. 그는 사회를 시작하며 “두렵고 떨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선 건 여기 모인 청중과 함께 변화의 순간을 목격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날 골든글로브 시상식에는 그가 출연한 ‘킬링 이브’는 물론이고 ‘블랙팬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등 비(非)백인 연출자와 배우들의 작품이 대거 후보에 올랐다. 그의 말은 모든 배우가 인종차별의 벽을 넘어 실력으로 인정받는 순간이 왔다는 뜻이다. ▷1960년대 캐나다로 이민을 간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그가 캐나다도 아닌 미국, 그것도 인종차별이 공공연한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 배우, 드라마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IMDb)에 따르면 샌드라 오는 “미국은 배우로서 캐나다보다 더 크게 성공할 수 있는 곳이지만 훨씬 더 많은 스트레스와 희생이 뒤따른다. 주류 사회에서 배역을 얻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술회했다. ▷그는 그레이 아나토미 출연 당시 중국계 입양아인 여자아이에게서 ‘저도 찢어진 작은 눈인데 TV에 나온 언니도 저랑 같네요. 참 예뻐요’라고 적힌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그는 답장에 “너희 같은 아시안 친구들이 오랫동안 연기를 꿈꿀 수 있도록 꼭 롤 모델이 되겠다. 그것이 내가 더 열심히 연기하는 이유”라고 썼다. 변화를 꿈꾸고 이루려 노력하는 그가 참 아름답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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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째서 무고한 동포를 검거했느냐” 日警 향한 혜성단의 일갈

    “피고 (김)수길을 징역 2년 6개월에, 피고 (이)종식을 징역 2년에, 피고 (이)영옥, 동 (이)명건, 동 (허)성도, 동 (이)기명, 동 (이)종헌, 동 (최)재화, 동 (이)수건 및 동 (이)덕생을 각 징역 1년 6개월에 처한다.”(1919년 7월 19일 혜성단원 김수길 등 11명에 대한 당시 대구지방법원 판결) 경북 지역에서 3·1만세운동이 처음 시작된 곳은 대구였다. 1919년 3월 8일 시작된 대구 만세운동은 3월 말까지 이어졌다. 대구고등보통학교,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등의 학생들이 주축이 됐다. 하지만 일제의 강경 진압과 친일 단체의 준동으로 만세운동은 쉽지 않았다. 이때 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비밀결사단체가 ‘혜성단(慧星團)’이다. 당시 재판부는 혜성단원인 김수길(당시 19세·계성학교 4학년) 등에 대해 ‘비밀결사를 조직해 대구에 본부를 두고 경성, 상주 기타 각지에 지부를 설치해 동지를 규합하고, 경고인쇄물을 각 관공서장 앞으로 보낸 죄’로 이같이 판결했다. ○ 일제의 자제단 결성 1919년 조선총독부는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이를 억누르기 위해 ‘자제단(自制團)’이란 친일단체를 조직했다. 당시 전북도 장관을 지냈던 친일파 이진호(후에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총독부 학무국장을 지냄)는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조선 총독에게 ‘민간 유지자(維持者)들이 자발적으로 독립운동을 진정할 방법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만세운동을) 유혹하는 자를 검거할 것을 서약하게 만들자’는 내용을 담은 서한을 보냈다. 친일파들이 ‘독립운동을 자제하자’며 스스로 자제단을 만든 것이다. 자제단은 지역에 따라 ‘자성회(自省會)’라고도 불렸다. 주로 남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조직됐다. 설립 목적은 3·1만세운동 참가자 검거, 관련 정보 수집 및 대민(對民) 설득을 통해 민중들을 만세운동에서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당연한 이유로 자제단 단원들은 모두 밀고 의무가 있었다. 1919년 4월 6일 결성된 대구 자제단 규약(제3조)은 ‘만세(운동)에 부화뇌동하지 말도록 부민(府民)을 굳게 타이르고, 만일 불온한 행위를 감행하는 자를 발견하였을 때에는 당장 경무 관헌에 보고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당시 대구 자제단 발기인 67명 가운데 신원이 파악된 27명 대부분이 지주, 관리, 자본가 등 친일인사들이었다. 지주와 자본가들은 다시 자신의 노비와 소작농, 노동자들을 강제로 가입시켰다. 또 이들을 이용해 만세운동 참가자와 조직을 색출했다. 자제단 조직은 1919년 7월까지 울산, 전북, 수원 등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이들은 만세운동을 자제할 것을 촉구하고, 일본 경찰 대신 만세운동을 진압하거나 시위 참여자를 귀가시키는 일을 했다. 초기 전국에서 들불처럼 번진 만세운동에 당황했던 일제가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던 데는 이들 자제단의 역할이 있었다. 자제단 지도부는 기회주의적인 친일파가 아니라 친일을 종교처럼 신봉한 골수 친일파들이었다. 특히 자제단을 조직했던 박중양(후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을 지냄)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한말의 암흑시대가 일제시대 들어 현대 조선으로 개신되었고, 정치의 목표가 인생의 복리를 더하는 것에 있었고, 관공리의 업무도 위민정치를 집행하는 것 외의 것이 아니었다. 일정시대에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다’라고 적을 정도로 골수 친일파였다. 그는 자제단 설립으로 훈장을 받고 중추원 부의장까지 지냈다. ○ “어째서 무고한 동포를 검거했느냐” 자제단에 맞서기 위해 1919년 4월 17일 김수길, 이기명 등 대구 계성학교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이 만든 비밀결사 단체가 혜성단이다.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대구에서는 학생들이 주축이 돼 3월 8일과 10일 2차례의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이에 따라 일제는 대구고보 신명여학교 계성학교 등에는 휴교령을 내렸다. 시내에는 일본군 보병 80연대를 출동시켰다. 이런 삼엄한 분위기 때문에 독립운동은 지하에서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 중심에는 혜성단이 있었다. 혜성단은 당시 대구경찰서장인 시라이 요시사부로(白井義三郞) 앞으로 “어째서 너는 3월 8일 한국독립만세를 부른 무고한 동포를 검거했느냐. 너는 생사 어느 쪽을 원하느냐. 너희들 같은 사람은 경무부장과 함께 암살할 기회가 있을 것이니 각오해야 한다”는 내용의 협박 편지를 보냈다. 또 자제회 설립에 앞장서던 박중양에게 “시세에 적응하기 위한 자제회를 설립하고, 다수의 사람을 강제 권유하여 입회하게 함은 조선민족으로서 유서(宥恕·너그럽게 용서함)해서는 안 되는 놈들이기 때문에 암살해야 한다”는 내용의 경고장을 보냈다. 혜성단은 대구에 본부를 두고 경성과 만주에도 지부를 설치했다. 인쇄책으로는 최재화 김수길, 인쇄물 배달책으로는 허성도 이덕생 이종식 이종헌 이기명이 각각 활약했다. 자금 출납책은 이수건, 만주 출장책은 이영옥 등이었다. 혜성단의 목표는 유인물 배포를 통해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 자산가들에게 독립운동 자금 헌금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일반 민중에게는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했다. 공장 노동자들에게는 파업을 요구했다. 상인들에게는 철시 및 일본인과의 거래 중지를 호소했다. 또 궁극적으로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내외가 함께해야 하기 때문에 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 운동가들과의 연결도 모색했다. 혜성단원을 만주에 파견해 항일투쟁을 이어가려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혜성단의 활동은 당연히 일본 군경의 눈엣가시였다. 결국 결성 한 달여 만인 5월 중순까지 주축 인물들이 차례로 검거되는 아픔을 맞는다. 동아일보 조사부장을 지낸 이여성(1901∼월북)도 혜성단원 출신이었다. 그는 대구에서 혜성단을 조직하고 만세운동을 계획하다 체포돼 3년형을 받고 복역했다. 후에 일본 릿쿄(立敎)대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32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조사부장을 맡았다. 조사부장 재직 시절 식민지 조선 민중들의 열악한 실상을 숫자로 표현한 ‘숫자 조선연구’(전 5권)를 출간해 식민치하의 아픔을 고발하기도 했다. 신문사 퇴직 후에는 조선역사화 제작과 복식사 연구에 매진했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장을 맡다가 1948년 월북했다.○ 파리회의에 알리고자 철시투쟁도 이끌어 혜성단은 기존 만세운동과 함께 시장 상인들을 설득해 철시투쟁도 이끌어냈다. 1919년 1월부터 6월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기대감에서였다. 당시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 윌슨 대통령은 어떤 민족도 다른 민족을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민족 자결주의’를 주창해 국내 3·1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당시 유럽에서는 독일이 알자스로렌 지역을 프랑스에 돌려주고,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독립시켰다. 또 불가리아는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에 영토의 일부를 돌려줬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은 이 회의에 대한 기대가 컸다. 혜성단 또한 당시 대구에 와 있던 서양 신문기자들을 통해 파리강화회의에 대구는 물론 조선의 독립운동을 전 세계에 알리려고 했다. 혜성단원이던 이종식은 그해 4월 7일경 자신의 집에서 ‘서양 신문기자가 시내를 순찰하는데 우리들이 독립자유를 원하고 있다는 의지를 보이기 위해 내일 8일은 아침 일찍부터 철시(撤市)하고 폐점하라’는 내용의 유인물 300통을 작성해 배포했다. 이종식은 유인물에서 ‘(철시 및 폐점 상황이) 신문기자들 손에서 프랑스 파리 열국강화회의(파리강화회의)에 전달되고, 다시 구미 각국 신문에 게재되면 우리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상인들은 일본 상인과 금전 및 물품 거래를 해서는 안 된다. 이번 신문지상에 전해진 총독부의 유고(諭告·타일러 훈계함), 기타 경찰관의 전달 등은 어느 쪽이나 모두 허구의 사실로 이를 믿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사실 혜성단과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전승국들의 축제 잔치인 파리평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전쟁에서 이긴 연합국 쪽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독립운동가들은 조국에서의 자발적 만세운동이 세계 여론을 움직이는 데 보탬이 된다는 신념으로 죽음을 각오한 항쟁을 전개한 것이다. ▼ 3·1운동 대구 확산 주도… 숱한 항일투사 배출 ‘독립운동 요람’ ▼혜성단의 주축 ‘계성학교’기소된 단원 13명 중 9명이 동문, 대부분 학생-교사 만세운동 참여휴교 조치 당했다가 이듬해야 풀려혜성단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계성학교’다. 혜성단원으로 활동하거나 협조하다가 일제에 체포돼 재판에서 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모두 13명. 이 중 김수길 허성도 이기명 이영식 등 9명이 계성학교 재학생 및 졸업생이다. 지금 대구에 있는 계성중고등학교의 전신이 바로 이 계성학교다. 계성학교 출신들의 항일운동은 혜성단이나 대구 지역에 그치지 않았다. 서울의 3·1운동이 대구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계성학교 출신들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19년 3월 8일, 대구 큰장(서문시장) 장날이던 이날 학생들은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한복을 입거나 장사꾼 차림으로 변복하고 시장 안으로 숨어들어가 만세운동을 벌였다. 만세운동으로 계성학교는 휴교 처분을 받았고, 대부분의 교사와 학생이 체포, 투옥됐다. 당시 조선헌병대사령부가 기록한 ‘조선소요사건 상황―경상북도 편’에는 이 같은 상황이 잘 기술돼 있다. 조선헌병대사령부는 ‘사립학교 중 소요로 인하여 아직까지 휴학하고 있는 곳은 안동군 사립협동학교 및 대구 기독교부속 계성학교 2개교이며, 그 밖에 청도군 사립문명학교, 문경군 금룡사 지방학림, 달성군 동화사 지방학림은 20일 내지 1개월간 휴교하기에 이르렀으나 현재는 모두 개교하였다’고 밝혔다. 계성학교는 이듬해인 1920년 4월에야 개교할 수 있었다. 또 ‘독립운동사 자료집 3·1운동 재판기록―경상남북도 편’에 따르면 1919년 만세운동으로 일제에 의해 형을 받은 76명 가운데 44명이 계성학교 출신이었다. 계성학교 100년사에 따르면 대구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지기 하루 전인 1919년 3월 7일 계성학교 전교생이 46명이란 것을 고려할 때 이들의 참여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잘 알 수 있다. 계성학교 출신들의 항일운동은 3·1운동에만 그치지 않고 그 뒤로도 이어졌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학생 항일운동이 일어났을 때 계성학교 출신인 이원우 조활용 등은 농림학교 김을용, 경북여자고보 곽진숙 권유진 등과 함께 회합을 가지고 항일운동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이들은 소속 학교 학생들을 달성공원까지 동원할 것과 만세시위운동의 행진 순서 등을 포함한 세부 계획까지 세웠으나 일제에 발각돼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다. 개인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친 이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3·1운동 당시 계성학교 5학년이던 권성우는 경북 의성군의 의성 장날 궐기하려다 발각돼 대구형무소로 압송됐다. 그는 6개월 형에 3년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는데 이후에도 요인 암살을 기도하다 동료들은 죽고 자신은 만주로 망명한 뒤 광복단원으로 활동했다. 졸업생인 박재현도 1919년 3월 8일과 10일 두 차례 만세운동에 참여해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그는 출옥 후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했는데 재학 중 평안남도 도청 폭파 혐의자로 체포됐으며, 이후 밀양 집성 사랑학교에 재직하면서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에 협조하다 다시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대구=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9-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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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구]한국식 나이

    새해를 맞으면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만 나이로 바꿔주세요’ ‘한국 나이 폐지해주세요’란 청원이 상당수 올라오고 있다. 갓 태어난 아이를 0세가 아닌 1세로 치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 12월 31일 태어난 아이가 다음 날인 이듬해 1월 1일이면 우리 나이로는 벌써 두 살이 된다. 나이 먹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많지 않은 데다 우리식 나이와 만 나이에 연 나이까지 혼용되다 보니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연 나이는 금년에서 태어난 해를 뺀 것으로 관공서에서 징병검사 나이 등을 따지는 데 사용한다. ▷나이 세는 방식의 차이는 외국인 친구를 만나면 실감한다. 2000년생의 경우 올해 생일이 지나지 않았다면 만으로는 18세, 연 나이로는 19세, 우리 나이로는 20세가 된다. 늘 스무 살이라고 하다가 외국 사람을 만나면 18세라고 말하려니 어색하다.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한국식 나이를 ‘코리안 에이지(Korean Age)’라고 부르고, 유튜브 등에는 그 계산법을 설명하는 동영상도 있다. ▷중국 일본 베트남 등도 과거에는 우리와 같은 나이 계산법을 썼지만 중국은 문화대혁명 이후,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만 나이로 통일했다. 일본은 1902년 만 나이를 공식적으로 채택했으나 이후에도 전통식 나이 계산법이 계속 통용되자 다시 1950년 법률을 제정하면서까지 만 나이로 통일시켰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난 곧 17세가 될 16세(I‘m sixteen going on seventeen)’라는 노래가사는 나이를 따질 때 개월 수까지 계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몇 살이냐’고 묻지만 서양인들은 ‘얼마나 오래됐냐(How old)’고 묻는다. ‘몇 살이냐’는 질문과 달리 ‘얼마나 오래됐냐’는 질문은 개월 수에 열려 있다. 같은 해에 속하면 하루가 지나도 1년, 365일이 지나도 1년으로 치는 것은 현대적 시간 감각에 어울리지 않는다. 뻐기듯 손윗사람 행세하고 싶어 한 살이라도 부풀리고 싶어 하는 젊은 한때를 제외하곤 나이가 어려지는 걸 싫어할 사람은 없을 테니 만 나이로 통일하자는 목소리가 점점 커질 것 같다.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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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기자의 對話]“내 정성이 하늘에 닿으면…, 종이 답을 하겠지”

    《해마다 섣달 그믐날 밤 12시이면 서울 종로 보신각(普信閣)에서는 보신각종을 33번 치는 ‘제야(除夜)의 종’ 행사가 열린다. 원래 1468년 제작된 보신각종(보물 제2호)을 쳤으나 균열이 생기는 등 타종이 어려워지자 새 보신각종을 제작해 1985년 8·15광복절 40주년 기념 타종 행사 때부터 사용해 오고 있다. 이 새 보신각종을 만든 이가 2016년 에밀레종(성덕대왕 신종·국보 제29호) 복원에 성공한 국가무형문화재 제112호 원광식 주종장(76·鑄鐘匠)이다. 하지만 정작 경내에 있는 내력비에 그의 이름은 없다.》 ―새 보신각종을 만든 이유와 사람을 기록한 비에 이름이 없더군요. “아, 그게 사람들하고 엄청 싸우고 옥신각신하다가 내 이름은 빼라고 했지요.” (싸우다니요?) “새 보신각종을 설계는 서울대 공대 생산기술연구소, 디자인은 서울대 미대에서 했는데 종에 넣을 무궁화 문양이 이상했어요. 뿌리에 꽃이 바로 달렸더라고? 디자인도 시원찮고…. 이상하지 않으냐고 물으니 추상이라고 하더라고. 종이란 게 한번 만들면 천년을 가는 건데 문양 그렇게 만드는 거 아니라고 대판 싸우고 보름간 일을 안 했지요. 그때가 1984년 이맘때인데 기흥 작업장으로 이종찬 씨가 갑자기 찾아오더군요.” ―국가정보원장을 했던 그 이종찬 씨를 말합니까? “네. 그땐 민정당에 있었고, 보신각종 중주위원회 운영위원인가를 했는데…, 윤보선 전 대통령이 위원장이었지요. 아, 글쎄 ‘각하가 광복 40주년에 맞춰 쳐야 하는데 왜 안 만드느냐’고 하더라고. 그때 내가 일을 안 하니까 용인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 작업장에 쫙 깔려서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했어요. 그래서 ‘각하고 나발이고 대통령이 무서워서 작품 만드느냐. 돈 도로 줄 테니 딴 데서 만들어라’라고 들이받았지요.” (무사하셨나요? 멀쩡한 사람도 잡아가던 시절인데….) “전두환이 참석해서인지 광복 40주년 타종 행사를 엄청나게 큰 행사로 준비한 것 같더군요. KBS가 10달 동안 작업 과정을 모두 촬영했으니까. 근데 내가 일을 안 해 종 제작도, 촬영도 멈추게 되니까 급했나 봐요. 당시 서울신문사 사장이 서울 반포에 있는 팔래스호텔 14층 양주 코너로 부르더라고.” ―서울신문 사장이 관련이 있습니까? “그때 새 보신각종 제작비를 국민성금으로 모았는데 서울신문사가 모금 집행기관이었어요. 그 사장이 나랑 대판 싸운 교수랑 함께 왔더라고. 내가 정치인도 아니고 어떻게 하기 힘드니까 이종찬 씨가 모금 집행기관 사장을 찔러서 어떻게든 해결하라고 한거지요. 술 엄청 먹고 서로 풀고 다시 일은 했는데… 생각해 보니 여기에 내 이름을 넣을 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듭디다. 그래서 ‘성종사 주종장 원광식’이라고 들어가야 하는데 이름은 빼고 성종사만 넣으라고 했지요.” ―그렇더라도 첫 타종식에는 가셨겠지요. “안 갈 수야 없죠. 내가 만들었으니. 거기서 전두환을 봤는데…, ‘자네가 그렇게 고집이 세다면서?’ 하더라고. ‘웃기고 있네’라고 했지.” (대놓고 그랬단 말입니까?) “아니, 속으로. 하하하.” ―새 보신각종은 기존 보신각종을 모델로 하지 않았다고 하던데요. “에밀레종을 모델로 했지요. 서울대 공대팀이 그렇게 설계를 했고, 복원 사업도 아니고 지금 시대의 종을 만드는데 굳이 과거의 것을 본뜰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2006년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새 보신각종의 울림이 길지 못해 새 종을 만들어 주겠다”고 해 종소리 논쟁이 있었습니다만…. “지금 보신각은 (소리)환경이 너무 안 좋아요. 도심 한복판에 있으니까. 수많은 인파 속에서 차가 그렇게 많이 다니는데 그런 소리가 종소리를 깎아먹어요. 제대로 들릴 수도 없고…. 또 어디는 땡, 어디는 쿵 하는 식으로 부위와 각도에 따라 소리가 다 다르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그냥 녹음하면 안 돼요. 조용할 때 산사에 있는 종은 정말 멀리 가지요. 아침 목탁 소리나 풍경 소리 같은 것도…. 공간이 소리에 주는 영향이 얼마나 큰데…. 종소리가 뭔지 알긴 하는지….” ―우리 종은 ‘한국종’이라는 학명이 있을 정도인데 왜 함께 불교가 번성한 중국, 일본에서는 종이 발달하지 않았을까요. “잘 모르겠는데…, 별로 소리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고려 때는 불화가 더 발달했고, 종 크기도 작아졌지요. 조선 때는 다시 대형 종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신라 종과 달리 중국 영향을 받아서 당좌가 없는 것이 많아요. 그러다 보니 소리가 제멋대로 나기도 하고…. 일본은 100년 전 종을 지금도 그대로 만들고 있는데 소리가 안 좋아도 고칠 생각을 안 하더라고. 매일 그 소리만 들어서 뭐가 좋은지 몰라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허허허.” ※당좌(撞座)란 종을 치는 나무(당목·撞木)가 종에 닿는 곳을 말한다. ―오른쪽 눈이 안 보이신다고 들었습니다만…. “17세 때 8촌 형님(고 원국진 선생)이 운영하는 종 만드는 회사(성종사)에 들어가 2년 정도 일했지요. 그때는 종에 대해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고 일자리로…. 그리고 제대 후 다시 들어갔는데…, 그때 8촌 형님이 몸이 안 좋았는데 자식도 없었어요. 하루는 형수님이 부르더니 대를 이어 보지 않겠냐고 하더군요. 그땐 정말 정신이 번쩍 들어서 본격적으로 배우며 일했는데… 27세 땐가? 쇳물을 연결하는 파이프가 터지면서 쇳물이 눈에 튀어서 실명을 했지요. 그리고 쫓겨났고….” (친척이고 완전히 안 보이는 것도 아닌데 쫓겨나셨다고요?) “옛날에는 그런 거 없었어요. 하하하. 뭐, 한쪽 눈으로는 수평을 잘 못 보니까…. 근데 다 핑계지. 지금 같지 않아요. 그러고는 전등 갓(반사등) 만드는 일을 한 1년 했지요. 아주 잘됐어요.” ―잘됐는데 왜 다시 종을 만드시게 된 겁니까. “주문은 많이 들어왔는데, 전부 외상이라…. 나중에 돈 받을 때가 되니까 전부 사라지더라고요. 그때 지인이 종 만드는 회사를 동업으로 차리자고 했지요. 양심상 내게 기술을 가르쳐준 곳이 성종사인데 말도 없이 할 수는 없어서 승낙을 받으러 갔더니 8촌 형님이 괜찮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시작한 게 충남 예산 수덕사 종이었는데…. 대웅전 구석에 작업장 차려 놓고 혼신의 힘을 쏟았지요. 이 종을 만들어야 내가 산다는 심정으로….” ―수덕사 종으로 재기하셨는데 그렇게 대단한 종이었습니까. “종을 한 번 치면 소리가 2분 30초를 가고, 30리에 퍼진다는 평을 받았지요. 되느라고 그런 건지 당시에 불국사에서도 범종을 만들었는데 수덕사와 경쟁이 붙었어요. 광복 이후 가장 큰 종을 누가 먼저 만드는가를 놓고. 수덕사 종이 약 4t인데 지금 보면 작은 거지만 당시에는 엄청나게 큰 것이었죠. 내가 먼저 만드니까 그때 신문 방송에 며칠 동안 뉴스가 났는데 그러고는 전국에서 제작 의뢰가 쏟아졌어요.”※원 주종장은 이후 8촌 형님이 운영하던 성종사를 1973년 인수했다. ―에밀레종을 복원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무엇이었습니까. “워낙 유명한 소리니까…. 복원한 종이 그 소리를 따라잡지 못하면 난 죽는 거라고 생각했지요. 내 인생이 물거품이 되는 거니까…. 2년여간 고생했는데, 그래도 우연의 일치인지 99.9%는 맞았다고 생각해요. 마누라는 ‘당신하고 살면 쪽박 찬다’고 하지만…. 하하하.” (왜요?) “15억 원 받았는데 실제는 20억 원이 들었거든. 더 준다고 했지만 됐다고 했지요. 종만 제대로 만들면 나는 기쁘지요.” ―에밀레종을 치면 ‘에밀레∼’ 소리가 난다던데…. “듣는 사람에 따라 그렇게 들을 수도 있죠. 우리나라 종소리에서는 몇 초 주기로 소리가 작아졌다 다시 커지는 ‘맥놀이’가 일어나는데 그 울림을 듣다 보면 ‘에밀레’로 들리기도 해요.” (녹음된 걸 아무리 들어도 그렇게 안 들리던데, 혹시 들리십니까?) “허허허, 난 뭐…, 음…. 그렇게 생각하고 들으면 들린다니까. 하하하.” ※진동수가 거의 같은 두 소리가 중첩돼 규칙적으로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가 반복되는 현상을 맥박이 뛰는 것 같다고 해 ‘맥놀이’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종은 ‘우∼웅∼우∼웅’ 하며 소리가 크고 작아지기를 반복해 긴 여운을 남긴다. 중국 일본 등 다른 나라 종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스스로를 주철장(鑄鐵匠)이 아닌 주종장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나는 종을 만드는 사람이니까요. 주철장은 틀에 쇳물을 부어 여러 물건을 만드는 장인(匠人)을 말하는 거고요. 나라에서도 주철장이라고 부르고 지금까지 모든 언론에서 주철장이라고 써 왔지만 난 주종장으로 불렸으면 해요.” ―좀 무식한 질문입니다만, 종 만드는 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50여 년을 물고 늘어지며 만들었는데 아직도 모르겠는데…. 안 풀리는 수수께끼도 너무 많고…. 예를 들어 종의 모든 부위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만들면 소리가 좋을 것 같지만 아니에요. 더 이상해. 공기 중의 수분에 의해서도, 마르는 과정에서도, 또 주물을 붓는 과정, 문양의 모양 등등에서 알게 모르게 종이 ‘짱구’가 지는데 그 비대칭 속에서 희한하게 좋은 소리가 나오니까. 아직도 모르겠어요. 과학 가지고 안 되는 분야가 이 분야지요. 그저 내 정성이 하늘에 닿으면, 종이 답한다고 여길 뿐….”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8-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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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기자의 對話]“혁신 없는 당 지지율 상승은 오히려 독”

    《 자유한국당이 과연 혁신될 수 있을까? 최근 당 지지율이 조금 오르고, 15일에는 조직강화특별위원회(조강특위)가 현역 의원 21명의 당협위원장 자격을 박탈하는 인적 쇄신을 발표했지만 아직은 미지수. 당내 혁신파인 김세연 의원(3선·부산 금정)은 “혁신 없는 지지율 상승은 독”이라며 “차기 당 대표 등 지도부가 어떤 성격이냐에 따라 삶과 죽음이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016년 12월 당시 새누리당을 탈당한 의원 29명이 만든 개혁보수신당(바른정당)의 창당 멤버였으나 올 1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국당에 복당했다. 올 7월에는 한국당 혁신비대위원장의 유력한 후보로 검토되기도 했다. 》  ―당협위원장 자격은 박탈했지만 이들의 경선 참여를 막을 수는 없지 않나. 1년 남짓 된 새 당협위원장들이 이들 다선 중진의원을 이길 수 있을까? “그래서 다음 당 대표 등 지도부가 어떤 성격이냐에 따라 살든지 망하든지 결정될 것이다. 그 지도부가 퇴행적인 성격을 갖고 지금의 노력을 무위로 돌리면 정말 끝이다. 성숙한 의식을 가진 지도부라서 지금의 노력을 이어간다면 어느 정도 빛을 발할 것이고…. 총선과 먼 시점에 활동하는 비대위가 행사할 수 있는 권한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지금은 어떤 개혁을 해도 미완일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한국당에 대해 쓴소리를 많이 했는데 요즘은 좀 조용한 것 같다. “전에는 가혹할 정도로 비판적이었는데…. 비판만 한다고 나아질 게 없더라. 그래서 요즘은 비판할 시간에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뭘 하고 있나?) “당에서 기득권을 가진 분들이 잘해주기를 바라지만, 솔직히 지금의 모습으로는 밝은 미래를 담보하기 어려운 것 같다. 문재인 정부가 폭주를 할 수 있는 데는 한쪽 날개인 우리가 부러져서 회복이 안 되고 있는 탓도 있다. 그래서 새로운 날개를 만들 수 있는 생각과 역량을 가진 분들이 모이고 연대할 틀을 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그런 좋은 사람들이 지금 한국당에 들어올까. “다음 선거에서 한국당이 압승할 길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나를 포함해서 현역 의원 전부가 불출마 선언을 하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을 공천하면 많이 달라질 것이다.” (그게 가능할까?) “채택되지는 않겠지만…. 이 정도의 강도 높은 개혁을 해야 다시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과거처럼 유명인을 낙하산으로 내려보내 의석 하나 건지는 방식이 아니라, 지금의 한국당 유전자(DNA)와는 완전히 다른 DNA를 가진 세대가 들어와야 한다. 한국당은 죽어야 할 때 죽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좀비 상태가 됐다. 필사즉생(必死則生)의 길을 택했어야 하는데 생즉필사(生則必死)의 길을 택해 현재의 지경에 이르렀다.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개혁보수 하겠다던 바른정당에서는 왜 그런 신선한 결의를 안 했나. “당시는 총선이 아닌 대선 국면이라 그런 말이 화두로 나올 때가 아니었다. 복기해 보면 개혁보수정당을 만들고 싶었던 사람들과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을 내세워 대선을 치르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 섞여 있다 보니 지향점이 달라 연대가 공고하지 못했다. 정말 의외인 분도 왔다 가고…. 차라리 (생각이 같은) 10여 명만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교섭단체를 구성해서 국회 운영의 키를 쥐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혁신은 잘못을 인정해야 하는 것인데, 한국당이 잘못을 인정한 적이 있나. “짧은 사과성명과 논평이 나간 적은 있다. 하지만 국민들은 아직도 한국당이 제대로 된 반성과 사과를 했다고 여기지는 않는 것 같다.” (일각에서는 탄핵백서를 만들겠다는데….) “요즘 반사이익으로 지지율이 좀 오르다 보니 엉뚱한 방향의 말이 이렇게 나오는 것 같다. 혁신을 하면 보수가 갈라질 이유도 없다. 정답이 있는데….” (알면서 왜 그런 정치공학적 정치는 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나?) “참 안타까운데…. 그런 말을 하면 그게 계기가 돼 또 다른 내전이 일어난다. 지금은 내전을 일으킬 상황은 아닌 것 같고….” ―혁신 없는 지지율 상승은 독이라고 했다. “현실을 무시한 경제정책과 무리한 적폐몰이 수사, 자신들의 과오에는 내로남불, 여당 대표의 20년 집권론 등 정부 여당의 실정과 오만 때문에 반사이익을 조금 얻었는데 우리로서는 좋아할 일이 아니라 되레 더 큰 문제다. 더 망가져야 살기 위해서라도 혁신을 할 텐데 그럴 필요가 줄어드니까…. 폭주하는 정부, 오만한 여당, 혁신 없이 탄핵 이전으로 돌아간 제1야당이 나라를 운영하면 어떻게 되겠나.” ―당신이 비대위원장이나 당 대표라면 뭘 하고 싶은가. “당 해산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2012년 총선 때 새누리당 공약이 처음에는 경제민주화, 복지, 일자리 순이었다. 그해 대선에서는 순서가 바뀌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중도보수적인 말이라도 했다. 그런데 홍준표 전 경남지사가 망가진 당의 대선 후보와 당 대표가 된 후에는 급속도로 극우 정당화가 돼갔다. 그런 기이한 지도부를 선출하는 당원 구성으로는 제대로 된 국민통합정당, 수권정당이 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중도 보수에 있는 사람들조차 적으로 몰았으니…. 지금도 당내에서 가장 오른쪽 끝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언동이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 그래서 정당이 과반 국민의 지지를 통해 안정적으로 집권하기 위해서는 보다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인식과 행태를 보여야 한다. 이를 위해 한 번의 당 재편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당내에서 탄핵 찬성을 사과하라는 말이 나오는데 결국 탄핵을 부정하라는 말인가? 헌법재판소가 이미 파면했는데…. “그러니 보수 중 일부가 반(反)헌법 세력화가 돼 가고 있다는 거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 총선 공천 개입으로 2년형이 확정됐다. 그런데 그걸 당에서 수행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당내에서도 별 조치가 없다. “그래서 20대 총선 공천 당시 상황을 담은 백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임 소재를 사후에라도 명명백백하게 가려야 하는데…. 그런데 공천이 끝나면 관련 자료를 모두 폐기하기 때문에 진상 규명도 쉽지 않을 거다. 이렇게 잘못된 게 한둘이 아니다. 비정상을 합리화해 주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다. 후보들에 대한 여론조사 때 당연히 유무선 전화번호를 섞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올해 지방선거에서 우리 후보들이 대부분 지는 걸로 나오니까 당시 당 대표가 당 자체 여론조사에서 무선 전화 조사는 빼라는 지시를 했다고 들었다. 후보들 사기 떨어진다고…. 이런 걸 뭐라고 해야 하는지 묘사할 말도 없다.” ―올 초 복당하면서 지방선거를 이유로 댔다. “나와 함께 바른정당으로 간 사람들이 있다. 바른정당에 남으면 기호 4번에 정당 지지율 5%로 선거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만 남고 다들 복당하면 한국당 당협위원장이 전부 공천에서 배제시킬 테고…. 그 사람들을 위해 내가 같이 가서 출전할 수 있도록 도와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그걸 대의가 아니라 작은 의리라고 하겠지만…. 내가 아니었다면 한국당에 남아서 선거를 치를 수도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나 때문에 정치적으로 죽도록 버려둘 수는 없었다.” ―지방선거가 있는 걸 모른 것도 아니고, 그 정도 어려움도 없을 것 같았나. “당시 새누리당을 탈당할 때는 이 길이 옳기 때문에 바른정당이 보수의 주류 정당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런데 녹록지 않은 현실에 부닥쳤고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봤던 것 같다.” ―개혁보수의 실체가 구체적으로 뭔가? 말은 많았지만 본 적이 없는데…. “돌이켜보면 바른정당에 있을 때 비판만 했지 대안이 없다는 지적을 받았다. 앞서 이제는 비판만 하기보다 열심히 실천하고 있는 게 있다고 했는데 대안을 찾는 것도 그중 하나다.” (예를 든다면?) “기계적으로 다른 정당들이 논평한 걸 보고 가운데 위치를 잡는 식으로 해서는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을 받았다. 우리가 지향하는 정당을 만들기 위해서는 깊은 철학적 토대가 있어야 했는데 그게 약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하나씩 만들어 갔어야 했는데…. 만 18세 선거권만 해도 젊은이들이 많이 투표하면 우리한테 불리하다고 반대하면 어떻게 하나. 젊은이들이 지지하는 정당으로 변해서 그 표를 가져와야지. 19대 국회 때 만 18세 선거권 관련 법안을 발의했더니 본회의장에서 한 걸음 갈 때마다 붙잡혀 ‘왜 그러느냐’는 말을 들었다. 그냥 늘 그러했듯이 다음번 선거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거듭나기 위해 무얼 할 것인가를 봐야 한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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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숯검정 얼굴로 情 나누고… 올해도 300만장 사랑을 쏩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겨울철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연탄’. 새벽에 연탄을 갈기 위해 일어나신 아버지, 눈이 오면 미끄러지지 않게 깨서 뿌리던 다 탄 연탄들, 연탄불에 구워 먹던 쥐포와 오징어…. 하지만 이제는 전체 에너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에 그칠 정도로 사용자가 줄고 있다. 그나마 산업용은 없고, 대부분 서민들이 난방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동네 연탄가게도 거의 사라진 요즘 누가 어떻게 연탄을 쓰고 있을까.○ 대부분 난방용으로 현재 연탄의 주 사용처는 서민 가구의 난방용과 가게 등의 난로 정도다. 그나마 주거 개선 사업 등으로 도시가스가 보급되면서 소비량도 2014년 162만8000여 t, 2016년 125만5000여 t 등으로 줄고 있다. 전국적으로 13만여 가구가 사용하고 있고, 이 중 4만∼6만 가구는 ‘따뜻한 한반도 사랑의 연탄 나눔 운동’(사랑의 연탄), ‘밥상공동체 연탄은행’ 같은 사회단체와 지자체의 지원을 받고 있다. 대구에서 연탄 판매업을 하는 한성연탄 최학석 사장은 “예전에 동네에서 흔히 보던 연탄가게는 거의 사라졌고, 주문 배달로 연탄을 받아 사용한다”고 말했다. 최 사장처럼 연탄 제조공장과 연결된 판매업자에게 전화를 해 필요한 수량을 말하면 직접 트럭으로 가져다주는 방식이다. 최 사장은 “집 난방이나 가게 등의 난로에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많이 줄기는 했지만 겨울철에는 하루에 5∼8번 정도 배달을 한다”고 말했다. 수량은 주문자마다 다르지만 보통 한 번에 300∼500장이고, 많게는 1000장도 있다고 한다. 연탄은 대표적인 서민 난방 연료지만 지난달 23일 공장도 가격이 534원에서 639원으로 19.6% 올라 부담이 늘어났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소매가격은 대략 760∼1100원. 이 때문에 ‘사랑의 연탄’도 연탄 1장 후원금을 740원에서 840원으로 올렸다. 최 사장은 “1000장씩 많이 사면 할인해 주고, 반대로 배달 장소가 2층이라거나 차가 들어가기 힘든 곳은 더 받고 있다”며 “차가 들어가기 힘든 곳은 리어카로 나른다”고 말했다. ‘사랑의 연탄’ 원기준 사무총장은 “우리 단체의 경우 재작년 서울 본부와 전국 지부를 다 합쳐 약 330만 장, 작년 300만 장, 올해도 300만 장 정도를 지원할 것 같다”며 “지원량이 준 것은 기부가 줄기 때문이 아니라 도시를 중심으로 연탄을 때는 집이 줄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천사들의 합창 12일 오후 서울 중랑구 신내동 용마산 기슭의 주택가에서는 얼굴 여기저기에 탄가루를 묻힌 남녀 어린이 20여 명이 열심히 연탄을 나르고 있었다. 이들은 인근 신내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 추운 겨울을 나야 하는 어르신들을 위해 직접 집까지 연탄을 나르는 봉사를 하는 중이다. 시작하기 전 주의사항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다소 어색해하던 아이들은 금방 익숙해져 서로 얼굴에 탄가루를 묻히며 즐거워했다. “수염이 생겼어, 하하 호호∼.” “야! 이빨에 바르면 어떻게 해∼ 크크.” 산기슭은 시내와 달리 매섭게 추웠다. 옮겨야 할 연탄은 800장. 한 집당 200장씩 네 집이다. 집마다 차이는 있지만 겨울을 나는 데 방 하나 기준으로 보통 1000∼1500장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날 봉사활동을 연결한 ‘사랑의 연탄’의 경우 가구당 300∼400장을 지원하고 있다. 필요량의 3분의 1 정도다. ‘사랑의 연탄’ 측은 “보통 나라에서 ‘연탄 쿠폰’으로 3분의 1 정도, 우리 같은 단체에서 3분의 1 정도를 지원한다”고 말했다. 이날 봉사는 담임선생님이 나눔 실천 차원에서 연탄 배달 봉사를 제안하자 학생들이 공감해 이뤄졌다. 연탄 한 장은 약 3.6kg. 보통 두 장씩 들고 나르면 7kg 정도다. 몇 번 정도는 몰라도 아이들이 수십 번을 나르기에는 결코 가벼운 무게가 아니다. 1시간 정도가 지나자 몇몇은 팔을 주무르고, 몇몇은 뻐근한지 기지개를 켰다. 원 사무총장은 “돈만 기부할 수도 있지만 가능하면 기부와 함께 직접 연탄을 배달하는 봉사활동까지 패키지로 이뤄지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탄 봉사’ 어디까지 아니? 연말을 맞아 기업과 단체, 개인들이 연탄 배달 봉사를 많이 하지만 ‘사랑의 연탄’의 경우 자신들이 직접 봉사활동을 언론에 알리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대부분은 해당 기업이나 단체에서 알리는 것이다. 원 사무총장은 “우리로서는 효도하는 마음으로 정을 나누는 것이고, 우리가 조금 더 가진 것을 나누자는 것”이라며 “하지만 봉사활동이 뉴스가 되면서 받는 분들이 ‘달동네’ ‘쪽방촌’ ‘독거노인’ 등 굉장히 불쌍한 사람들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그분들은 경제적으로는 조금 어렵지만 결코 불쌍하고 불행한 분들이 아니다”라며 “그래서 연탄 배달 봉사를 하러 온 분들께 절대로 그분들을 아주 불쌍한 사람으로 여기거나 자신이 마치 엄청난 자선활동을 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교육하고 있다”고 말했다. 배달 봉사에 회사나 단체 이름이 큼지막하게 들어간 일회용 비닐 옷을 입는 것도 가급적 피해야 할 일이다. 이런 비닐 옷은 땀이 배출되지 않아 30분만 지나면 그야말로 땀복이 되고, 정전기 현상으로 탄가루가 더 많이 묻는다고 한다. 그래서 사랑의 연탄에서는 두툼한 천에 겉이 코팅된 큰 앞치마(고깃집 앞치마 모양이다)와 팔에 끼는 토시를 제작해 제공하고, 봉사활동 후 다시 거둬 세탁해 재사용한다. 하지만 홍보가 더 큰 목적인 단체일수록 회사 로고가 없는 이 옷보다는 자신들이 만들어온 비닐 옷을 선호한다고 한다. 봉사를 한 뒤 비닐 옷을 길에 버려서 쓰레기 더미가 되는 것도 문제다. 홍보용 사진 촬영에 더 신경을 쓰는 단체일수록 뒷정리는 소홀히 해 봉사활동이 끝나고 나면 주민들이 쓰레기와 연탄재로 지저분해진 동네를 청소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연탄 기부를 받는 주민은 동네에서 소수이기 때문에 다른 주민들이 “그 사람들 때문에 동네가 지저분해진다”며 눈치를 주기도 한다고 한다. 연탄을 나르는 방법은 각자 들고 가는 법과 릴레이식으로 서서 전달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릴레이식은 모두가 한 방향을 바라보고 서서 전달하는 것보다 한 사람씩 엇갈려 마주 보고 전달하는 것이 좋다. 이럴 경우 옆으로 전달이 아니라 비스듬히 앞으로 전달하기 때문에 떨어뜨릴 위험이 작기 때문이다(하지만 정치인 등 사진 촬영이 우선인 단체일수록 이렇게 하지 않고 모두가 앞을 보고 서서 전달한다. 자기 얼굴이 잘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연탄 배달 봉사는 연탄을 사서 기증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집까지 날라주는 것은 물론이고 골목 청소 등 뒷정리까지 깔끔하게 마치는 것이다. 특히 정치인들은 바쁜 데다 진짜 봉사가 목적이 아니다 보니 사진만 찍고 나면 하나둘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사라진다고 한다. 어떤 의원들은 직접 돈을 모아 연탄을 기부하지 않고, 특정 기업이 한 연탄 기부 현장에 와서 사진만 찍고 돌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원 사무총장은 “연탄 배달 봉사의 핵심은 연탄이 아니라 이웃과의 만남”이라며 “받는 분들은 만나지도 않고, 그분들이 고마워서 타주는 커피 한잔 먹어보지 않고 연탄만 쌓아놓고 혼자 뿌듯해하는 것은 일종의 천사 코스프레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8-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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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수염 생겼어, 하하” 연탄 봉사하는 아이들…주의점은?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겨울철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연탄’. 새벽에 연탄을 갈기 위해 일어나신 아버지, 눈이 오면 미끄러지지 않게 깨서 뿌리던 다 탄 연탄들, 연탄 불 위에 구워먹던 쥐포와 오징어…. 하지만 이제는 전체 에너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에 그칠 정도로 사용자가 줄고 있다. 그나마 산업용은 없고, 대부분 서민들이 난방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동네 연탄가게도 거의 사라진 요즘 누가 어떻게 연탄을 쓰고 있을까.● 거의 대부분 난방용으로 현재 연탄의 주 사용처는 서민 가구의 난방용과 가게 등의 난로 정도다. 그나마 주거 개선 사업 등으로 도시가스가 보급되면서 소비량도 2014년 162만8000여 t, 2016년 125만5000여 t 등으로 줄고 있다. 전국적으로 약 13만여 가구 정도가 사용하고 있고, 이 중 4만~6만 가구 정도는 ‘따뜻한 한반도 사랑의 연탄 나눔 운동’(사랑의 연탄), ‘밥상공동체 연탄은행’ 같은 사회단체와 지자체의 지원을 받고 있다. 대구에서 연탄판매업을 하는 한성연탄 최학석 사장은 “예전에 동네에서 흔히 보던 연탄가게는 거의 사라졌고, 주문 배달로 연탄을 받아 사용 한다”고 말했다. 최 사장처럼 연탄제조공장과 연결된 판매업자에게 전화를 해 필요 수량을 말하면 직접 자신의 트럭으로 가져다주는 방식이다. 최 사장은 “집 난방이나 가게 등의 난로에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많이 줄기는 했지만 겨울철에는 하루에 5~8번 정도 배달을 한다”고 말했다. 수량은 주문자마다 다르지만 보통 한번에 300~500장 정도고, 많게는 1000장도 있다고 한다. 연탄은 대표적인 서민 난방 연료지만 지난달 23일 공장도 가격이 534원에서 639원으로 19.6% 올라 부담이 늘어났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소매가격은 대략 760~1100원. 이 때문에 ‘사랑의 연탄’도 연탄 1장 후원금을 740원에서 840원으로 올렸다.최 사장은 “1000장 씩 많이 사면 할인해주고, 반대로 배달 장소가 2층이라거나 차가 들어가기 힘든 곳은 더 받고 있다”며 “차가 들어가기 힘든 곳부터는 리어카로 나른다”고 말했다. ‘사랑의 연탄’ 원기준 사무총장은 “우리 단체의 경우 재작년 서울 본부와 전국 지부를 다 합쳐 약 330만 장, 작년 300만 장, 올해도 300만 장 정도를 지원할 것 같다”며 “지원량이 준 것은 기부가 줄기 때문이 아니라 도시를 중심으로 연탄을 때는 집이 줄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천사들의 합창 12일 오후 서울 중랑구 신내동 용마산 기슭의 주택가에서는 얼굴 여기저기에 탄가루를 묻힌 남녀 어린이 20여 명이 열심히 연탄을 나르고 있었다. 이들은 인근 신내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 추운 겨울을 나야 하는 어르신들을 위해 직접 집까지 연탄을 나르는 봉사를 하는 중이다. 시작하기 전 주의사항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다소 어색해하던 아이들은 금방 익숙해져 서로 얼굴에 탄가루를 묻히며 즐거워했다. “수염이 생겼어, 하하 호호~.” “야! 이빨에 바르면 어떻게 해~ 크크.” 산기슭은 시내와 달리 매섭게 추웠다. 옮겨야 할 연탄은 800장. 한 집 당 200장씩 네 집이다. 집마다 차이는 있지만 겨울을 나는 데 방 하나 기준으로 보통 1000~1500장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날 봉사활동을 연결한 ‘사랑의 연탄’의 경우 가구당 300~400장을 지원하고 있다. 필요량의 3분의 1 정도다. ‘사랑의 연탄’ 측은 “보통 나라에서 ‘연탄 쿠폰’으로 3분의 1 정도, 우리 같은 단체에서 3분의 1 정도를 지원한다”고 말했다. 이날 봉사는 담임선생님이 나눔 실천 차원에서 연탄 배달 봉사를 제안하자 학생들이 공감해 이뤄졌다. 연탄 한 장은 약 3.6kg. 보통 두 장씩 들고 나르면 7kg 정도다. 몇 번 정도는 몰라도 아이들이 수십 번을 나르기에는 결코 가벼운 무게가 아니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몇몇은 팔을 주무르고, 몇몇은 뻐근한지 기지개를 켰다. 원 사무총장은 “돈만 기부할 수 도 있지만 가능하면 연탄 기부와 함께 직접 연탄을 배달하는 봉사활동까지 패키지로 이뤄지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탄 봉사’ 어디까지 아니? 연말을 맞아 기업과 단체, 개인들이 연탄 배달 봉사를 많이 하지만 ‘사랑의 연탄’의 경우 자신들이 직접 봉사활동을 언론에 알리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대부분은 해당 기업이나 단체에서 알리는 것이다. 원 사무총장은 “우리로서는 효도하는 마음으로 정을 나누는 것이고, 우리가 조금 더 가진 것을 나누자는 것”이라며 “하지만 봉사활동이 뉴스가 되면서 받는 분들이 ‘달동네’ ‘쪽방촌’ ‘독거노인’ 등 굉장히 불쌍한 사람들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그분들은 경제적으로는 조금 어렵지만 결코 불쌍하고 불행한 분들이 아니다”며 “그래서 연탄 배달 봉사를 하러 온 분들께 절대로 그분들을 아주 불쌍한 사람으로 여기거나 자신이 마치 엄청난 자선활동을 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교육하고 있다”고 말했다. 배달 봉사에 회사나 단체 이름이 큼지막하게 들어간 일회용 비닐 옷을 입는 것도 가급적 피해야할 일이다. 이런 비닐 옷은 땀이 배출되지 않아 30분만 지나면 그야말로 땀복이 되고, 정전기 현상으로 탄가루가 더 많이 묻는다고 한다. 그래서 사랑의 연탄에서는 두툼한 천에 겉이 코팅된 큰 앞치마(고깃집 앞치마 모양이다)와 팔에 끼는 토시를 제작해 제공하고, 봉사활동 후 다시 거둬 세탁해 재사용한다. 하지만 홍보가 더 목적인 단체일수록 회사 로고가 없는 이 옷보다는 자신들이 만들어온 비닐 옷을 선호한다고 한다. 봉사를 한 뒤 비닐 옷을 길에 버려서 쓰레기 더미가 되는 것도 문제다. 홍보용 사진 촬영에 더 신경을 쓰는 단체일수록 뒷정리는 소홀히 해 봉사활동이 끝나고 나면 주민들이 쓰레기와 연탄재로 지저분해진 동네를 청소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연탄 기부를 받는 주민은 동네에서 소수이기 때문에 다른 주민들이 “그 사람들 때문에 동네가 지저분해진다”며 눈치를 주기도 한다고 한다. 연탄을 나르는 방법은 각자 들고 가는 법과 릴레이식으로 서서 전달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릴레이식은 모두가 한 방향을 바라보고 서서 전달하는 것보다 한 사람씩 엇갈려 마주보고 전달하는 것이 좋다. 이럴 경우 옆으로 전달이 아니라 비스듬히 앞으로 전달하기 때문에 떨어뜨릴 위험이 적기 때문이다(하지만 정치인 등 사진촬영이 우선인 단체일수록 이렇게 하지 않고 모두가 앞을 보고서서 나른다. 자기 얼굴이 잘 나와야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연탄 배달 봉사는 연탄을 사서 기증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집까지 날라주는 것은 물론이고 골목 청소 등 뒷정리까지 깔끔하게 마치는 것이다. 특히 정치인들은 바쁜데다 진짜 봉사가 목적이 아니다보니 사진만 찍고 나면 하나둘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사라진다고 한다. 어떤 의원들은 직접 돈을 모아 연탄을 기부하지 않고, 연탄 기부는 특정 기업이 하고 와서 사진만 찍고 돌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원 사무총장은 “연탄 배달 봉사의 핵심은 연탄이 아니라 이웃과의 만남”이라며 “받는 분들은 만나지도 않고, 그분들이 고마워서 타주는 커피 한잔 먹어보지 않고 연탄만 쌓아놓고 혼자 뿌듯해하는 것은 일종의 천사 코스프레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진구 기자sys1201@donga.com}

    • 2018-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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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기자의 對話]“수능으로 사교육을 조절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

    《 5일 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표가 발부된다. 물수능, 불수능으로 불린 해가 평온했을 때보다 더 많았던 우리 수능. 오죽하면 2002학년도 수능에서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쉽게 출제하겠다는 정부의 약속을 믿었다가 충격을 받은 학부모와 학생들을 생각할 때 매우 유감스럽다”고 사과까지 했을까. 2007, 2009, 2011학년도 출제위원장을 지낸 안태인 서울대 명예교수(71·생명과학부)는 “수능 하나로 대학수학능력도 측정하고, 고교 교육과정 이수도 평가하고, 또 사교육까지 줄이려는 등 너무 많은 목표를 두다 보니 점점 더 쉽지 않은 일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출제위원과 출제부위원장, 그리고 세 번의 출제위원장을 역임했다. 》  ―워낙 부담이 커 남들은 한 번도 안 하려 한다는데 위원장을 세 번이나 했다. “사범대 출신이라 교수가 되기 전에 중고교에서 교사를 잠시 했다. 유학 후 서울대 생물교육과 교수로 부임했는데 사범대에 있다 보니 교원임용시험 출제도 하고, 교과서도 썼다. 그러다 보니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수능 문제 한 번 출제해 달라고 요청이 들어와 참여했는데 다행히 문제가 출제 모델로 사용될 정도로 잘됐다고 하더라. 그러더니 그 다음 해에는 출제부위원장으로 와 달라고 했고, 별 무리 없이 했다고 판단했는지 몇 년 후 2007학년도 수능 출제위원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문제에 오류가 나면 평가원장이 사임할 정도로 출제는 어려운 일이다. 그해 무사고 운전을 하니까 평가원에서 더 해도 좋다고 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세 번이나 하게 됐고…. 문제 오류로 혼이 난 위원장도 있지만 그래도 출제위원장은 보람 있는 자리다.” ―출제위원장이던 2009, 2011학년도 수능이 역대 최고의 불수능이라던데…. “기사를 보면 그런 것 같은데 정확한 것은 평가원 자료를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2011학년도는 어려웠다고 하더라.” 2013년 10월 초 한 수험생 카페에 ‘안태인 교수님이 사라졌다는 소문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2009, 2011학년도 수능을 ‘헬’로 만든 분인데 학교에서 안 보이는 이유가 출제위원장으로 합숙에 들어갔기 때문 아니냐는 내용이었다. 그 아래에는 ‘만약 사실이라면 전 과목 핵폭탄 각오해야…’ ‘이번 수능 포기해야 하나’라는 댓글이 수십 개가 달렸다. 다행히(?) 이 해에는 출제위원장을 맡지 않았다. ―거의 해마다 홍역을 치르는데 난이도 조절은 어떻게 하나. “합숙에 들어가면 먼저 평가원에서 매년 수능 문제를 아주 정밀하게 분석한 자료를 보여준다. 연도별 수능의 전체적인 난이도, 개별 문제마다 얼마만큼 어려워했는지, 모의 수능에서 어떤 문제를 가장 많이 틀렸는지, 수리가 평이했으니 한두 문제 정도는 어렵게 내는 게 좋겠다든지, 그런 가이드라인을 다 제시해준다. ‘출제요람’이라고 일정은 물론이고 출제 방법까지 모든 게 매뉴얼로 돼 있다. 질문은 어떤 식으로 제시하고, 어떤 방식으로 답을 고르게 하면 난도가 높아지고 낮아지는지 등이 예시돼 있다. 그걸 보고 올해 출제는 어느 영역의 난도를 높이고 낮출지, 문제 수준을 어느 정도로 할지 등을 정한다.” ―그런데 왜 난이도 조절에 실패하는 일이 벌어지나. “난이도 조절은 정말 어렵다. 교육과정이 개편돼 책이 바뀌면 더 어렵고…. 이런 심리도 작용한다. 어떤 과목의 전년도 수능 문제가 쉬우면 아이들이 아무래도 덜 공부한다. 쉬우니까. 어려우면 더 파고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고…. 사람 심리가 그렇다. 이런 분위기가 은연중에 출제위원들에게도 반영된다. 난도를 좀 올려서 우리 과목을 더 공부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그렇더라도 검토과정에서 걸러질 수 있는 것 아닌가. “출제위원이 문제를 낼 때 자신이 예측한 난도를 함께 적어낸다. 이걸 보지 않은 상태에서 검토위원들도 문제를 풀고 난도를 매긴다. 양자가 차이가 나면 회의를 하는데 각자가 낸 문제를 모두 올려놓고 출제 의도부터 어떤 지식을 묻기 위해 냈는지, 어떻게 응용하는 걸 알아보기 위한 건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같이 이의 제기를 한다. 속된 말로 ‘씹는’거지. 잘 내는 사람도 있지만 경험이 적은 사람은 아주 쩔쩔맨다. 문제를 냈는데 끌어내려지고, 다시 올렸는데 끌어내려지고 하면…. 출제자 입장에서는 기분 나쁜 정도가 아니다. 더군다나 다 같은 동료 교수이고 같은 분야인데…. 후배가 선배가 낸 문제를 지적하다 보면 다툼도 일고, 또 그 반대로 선배가 낸 문제라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기하지 못하는 일도 있다. 불화가 심해지면 이런 과정이 잘 작동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출제위원장 역할 중 가장 중요한 일이 화합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거다.” ―‘EBS 교재 70% 연계’란 말을 수험생과 출제자가 다르게 생각하는 탓도 있다던데…. “상당히 많은 수험생들이 EBS 기출 문제에서 70%가 나오는 것으로 생각한다. 정확한 뜻은 수능 문제의 소재를 EBS 교재에서 따온다는 것이다, 문제를 그대로 낸다는 게 아니라. 그러다 보니 조금만 응용해도 어렵게 출제됐다고 느낀다.” (수능에 EBS 교재를 연계한 이유가 사교육 경감을 위해서인데 그렇다고 사교육이 준 것 같지는 않다.) “통계는 모르지만 아마 어떤 방식으로 해도 사교육은 줄이기 힘들 것 같다. EBS 교재를 연계시키자 EBS 교재를 철저히 분석해 가르치는 학원이 나왔고 지금은 다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수능을 쉽게 내는 이유가 어려우면 사교육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2001학년도 수능은 만점을 받고도 서울대에 떨어질 정도로 물수능이었는데 그렇다고 사교육이 준 것 같지도 않다. “어려우면 더 공부해야 한다고 학원 가고, 쉬우면 하나라도 실수하지 않으려고 학원 가고…. 거참…. 우리 애도 2001학년도 수능을 봤는데 실수를 해서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우리 학부모들이 워낙 교육열이 높다 보니 아예 제도적으로 사교육을 막지 않는 한 방법이 없는 것 같다. 학원은 허용한 상태에서 수능 문제로 사교육을 컨트롤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수능에 너무 많은 교육 목표를 넣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닌 게 된 것 아닌가. “대학수학능력시험이란 말처럼 원래 취지는 대학에서 공부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는지를 측정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고교 교육과정을 제대로 이수했는지도 평가하고, 대입 전형자료로도 쓴다. 입시 자료로 쓰려면 등수를 매겨야 하니 변별력이 있어야 하고, 당연히 어려운 문제도 있어야 하는데 그러면 또 교육과정을 벗어난 문제라는 지적을 받는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앞으로는 두 가지 시험으로 나누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두 가지라니?) “고교 교육을 제대로 이수했는지를 평가하는 것과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한 분석력 이해력 독해력 등을 갖췄는지를 보는 시험 두 가지다. 전자는 정상적으로 이수했다면 만점자가 얼마든지 나와도 상관없다. 사실 그게 더 바람직하다. 모든 학생이 제대로 배웠다는 방증이니까. 후자는 실제 수학능력을 평가하는 것으로 응용 쪽이니까 교과서 밖에서 어렵게 내도 괜찮을 것 같다. 지금은 둘 다 섞여 있으니까….” ―단기간 합숙 출제 시스템 때문에 출제 시간이 부족해 문제가 생긴다고 하는데…. “내 경험으로는 시간이 많다고 더 좋은 문제가 나오지는 않는 것 같다. 사람 머리에 한계가 있어서…. 오래 공부한다고 합격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오류는 다소 줄일 수 있을 것 같지만.” (문제은행식으로 출제하면 안 되나.) “평가원에서 검토한 것으로 아는데, 문제은행식으로 내면 보안을 장담할 수가 없다. 그 많은 문제를 내려면 그만큼 많은 출제자가 필요하다. 수능은 1년에 한 번인데 그 많은 사람들을 문제가 사용될 때까지 합숙시킬 수도 없고…. 또 자기 자녀나 친인척 자녀가 시험을 보면 그해에 사용될지는 알 수 없겠지만 ‘이런 문제를 냈다’고 알려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동안 숱하게 입시제도가 바뀌었는데 솔직히 과거 본고사, 학력고사 시절에 비해 지금이 더 나은 학생들을, 더 정확하게 뽑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음…, 허허허…. 그건 자신 없는데…. 지금 제도에도 문제는 있다. 또 학생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수시모집을 늘렸지만 최근 ‘숙명여고 쌍둥이 사건’처럼 문제가 발생하면 제도 자체에 대한 불신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 극복해서 발전시켜야지 오점만 보고 과거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그건 학생을 종합적으로 보지 않고 단순 암기력 하나만 보고 뽑자는 거니까….”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8-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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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on’t stop me now” 떼창은 그칠 줄 몰랐다

    ‘형님들, 정말 오랜만에 뵙겠네요.’ 내일은 세간의 화제인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를 보러 가는 날. 그 옛날의 향수를 더 진하게 느끼고 싶어 ‘싱얼롱(singalong)’ 상영관으로 예매를 했다. 설레는 마음에 그 옛날, 30여 년 전에 샀던 낡은 LP(long-playing record)앨범을 꺼냈다. ‘THE WORKS.’ 2년간의 휴지기를 가진 퀸(Queen)이 전작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1984년 내놓은 앨범. ‘작품’이란 앨범 이름처럼 여기에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도 나오는 ‘I want to break free’ ‘Radio Ga Ga’ 등 걸작들이 수록돼 있다. 앨범 사진 속 형님들이 싱긋 웃으며 말한다. ‘빨랑 와.’○ 두근두근 울렁울렁 지난달 27일 오후 5시 반. 상영 25분 전. 서울 메가박스 강남의 싱얼롱 상영관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길게 줄 선 모습을 기대했지만 그런 광경은 볼 수 없었다. 좌석도 90여 석 중 3분의 1 정도만 찼고, 40∼60대는 서너 명뿐이고 대부분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었다. 평일인 데다 아직 퇴근시간 전이기 때문일까? 이 상영관이 초대형 화면으로 몰입감을 주는 아이맥스관도, 양 벽면까지 활용해 공연장의 현장감을 살려주는 스크린 X관도 아닌 일반관인 탓도 있는 것 같다. ‘형님들, 죄송합니다. 좀 더 좋은 곳에서 뵈었어야 하는데….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전 세계에서 싱얼롱 상영을 하는 곳은 우리를 포함해 16개국. 아이러니하게도 퀸의 고향인 영국에서는 싱얼롱 상영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리에 앉았는데 옆에 있던 한 중년 여성이 양해를 구했다. “저 죄송한데요…, 영화가 너무 좋아서 다섯 번째 보는데 괜찮으시다면 제가 중간중간 사진도 좀 찍고 그럴게요. 불편하거나 방해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관객이 적어 ‘떼창’이 없을까봐 은근히 걱정하던 차에 불편이라니? 목청껏 따라 불러주시면 제가 더 고맙지요….(기대와 달리 그녀는 영화 막판에 약간 흥얼거리는 정도를 제외하면 상영 내내 영화를 동영상으로 찍는 데만 집중했다. 정말 영화를 좋아한 것 같다. 음악은 아니고.) 영화가 시작됐다. 조금씩 나오는 주옥같은 명곡들. ‘Love of my life’ ‘We will rock you’ ‘under pressure’….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 따라 불러야 하는 거야? 모든 노래가 영화 스토리에 맞춰 조금씩만 나오다 보니 감정에 발동이 걸리기가 힘들었다. 막 흥이 나 따라 부를 만하면 끝나는 노래들…. 시작 초 몇몇 곡은 따라 부를 수 있게 자막 아래 영어 가사가 함께 깔렸지만 영화 화면을 보느라 시선이 분산돼 몰입하기가 어려웠다. 가장 많이 알려진 ‘Love of my life’는 프레디 형님이 피아노를 치며 이 곡을 작곡하는 장면에서 나왔는데…, 가사 자막이 없었다! 그나마 1분도 채 안 돼 끝났고…. 여기에 그다지 남 앞에 나서는 것을 쑥스러워하는 보통 한국인들의 성향이 겹치면서 대부분 조용히 영화 감상만 하고 있었다. 러닝타임 120분 중 90여 분이 지날 때까지…. 다 같이 일어서서 박수를 치고 어깨동무를 한다는 곳은 도대체 어디인지. 물론 몇몇은 큰 소리는 아니지만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자 앞자리에 앉은 한 아저씨가 뭐라고 했다. “조용히 합시다. 영화를 볼 수가 없네….” “여기 싱얼롱인데요?” “싱얼롱이 뭔데? 공공장소에서 피해 주면 안 되지. 상식 아닌가?” “헐∼.” 영화가 끝난 뒤 그 아저씨한테 물었더니 “그런 게 있었냐?”며 자기는 몰랐고 하도 영화가 유명하다고 해서 일하다가 비는 시간에 보러 왔다고 했다. 상영관 입구에 싱얼롱 상영 관람 안내문이 붙어 있지만 주의하지 않으면 그냥 일반 관람 안내문으로 생각하기 쉽다. ○ 드디어 웸블리! 드디어 20여 분을 남기고 영국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1985년 7월 13일, 에티오피아 기아 문제를 돕기 위한 자선공연 라이브 에이드(Live Aid)가 열린 곳. 스타디움에 모인 관중만 7만2000여 명. 전 세계 19억 명이 시청했다는 저 전설적인 공연. 피아노에 앉은 프레디 형님이 ‘보헤미안 랩소디’(1975년 발매된 앨범 A Night at the Opera의 타이틀곡이자, 이 영화의 제목)의 전주를 치며 “Mama∼, just killed a man∼” 하고 부르자 객석에서도 닫힌 입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이 곡은 국내에서 1989년까지 금지곡이었는데 ‘사람을 죽였다’는 가사 때문이란 설과 제목인 보헤미안이 체코의 지명 중 하나인데 당시 체코가 공산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어느 쪽이든 유치한 건 마찬가지다. 이때문에 1985년 MBC가 이 공연을 녹화 중계하면서 이 곡은 뺐다.) ‘Bohemian Rhapsody’ ‘Radio Ga Ga’ ‘We Will Rock You’ ‘We Are The Champions’로 이어지면서 영화는 클라이맥스로 치달았고, 관객들의 호응과 노래도 점차 고조됐다. 특히 ‘We Are The Champions’에서는 비록 앉은 채였지만 대부분의 관객이 두 손을 높이 들고 좌우로 흔들면서 좀 더 목청을 높이며 따라 불렀다. 웸블리 스타디움에 모인 관중과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가장 큰 목소리로, 가장 많은 관객들이 떼창을 한 노래는 ‘Don‘t stop me now’였다. 이 곡이 나오면서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갔는데, 대학생 10여 명은 불이 켜진 상태에서도 신이 나서 손을 흔들며 따라 불렀다. 이 곡은 마지막에서 두 번째 곡이었는데, 마지막 곡인 ‘show must go on’이 나오자 따라 부르던 것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곡은 신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진지한 곡이다. 영화가 끝난 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앞. 분명히 옛날 향수 때문에 찾은 것으로 보이는 50대 중년 아저씨에게 물었다. “싱얼롱에 왔는데 노래를 안 따라 하시던데요….” 그는 “돌았수? 나 혼자 부르게?”라며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열심히 따라 부르던 한 여학생은 “영화 보며 함께 노래 부르는 일이 흔한 것도 아니고 재미있을 것 같아 왔는데 오늘은 날이 아니었던 것 같다”며 “싱얼롱은 ‘케바케’라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케바케’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를 줄인 말. 보헤미안 랩소디 싱얼롱은 관객 성향이나 그날 분위기에 따라 조용한 곳도, 열광적인 곳도 있는 등 다 다르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뭔가 큰 것을 얻은 듯 아주 좋아라 했다. “아저씨 근데 드럼 완전 잘생기지 않았어요?” 프레디 머큐리 사망 27주기를 추모해 메가박스가 지난달 24일 전국 8개 MX관에서 연 싱얼롱 행사는 마치 콘서트장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프레디 형님은 1991년 11월 24일 에이즈로 사망했다.) 주최 측은 행사를 위해 떼창을 유도할 ‘프로 떼창러’를 모집했는데 500명 넘게 지원해 64명이 선발됐다.(배급사인 이십세기폭스코리아에 따르면 11월 28일 기준으로 보헤미안 랩소디는 500만 관객을 돌파했고, 이 중 10만 명 정도가 싱얼롱 관람이라고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기대했던 것만큼 열광적인 떼창이 없어 아쉬웠지만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신나기는 했겠지만 뭔가 아련한 여운은 갖지 못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불꽃처럼 한 시대를 살다간 사람들을 기억하는 데는 그것이 더 좋았다. 안녕, 프레디. 안녕 퀸….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8-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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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기자의 對話]“조두순 출소? 막을 방법이 없진 않지요”

    《 지난달 14일 발생한 서울 ‘강서구 PC방 살인사건’의 피의자 김성수(29)는 현재 충남 공주에 있는 국립법무병원 치료감호소에서 정신감정을 받고 있다. 우리 형법(10조)은 심신장애로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자의 행위는 벌하지 않거나 감경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왜 나라가 세금으로 흉악범을 정신병자로 만들어 형량을 감해 주려 하느냐”는 비난도 많았다. 허찬희 전 국립법무병원 의료부장(65·마음편한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은 “흉악범의 정신감정이 필요한 것은 형을 감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다수 시민의 안전을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는 이곳 의료부장이던 2010년, 부산에서 여중생을 납치, 성폭행하고 살해한 김길태 등 다수의 흉악범죄자들에 대한 정신감정을 맡은 바 있다. 》  ―김성수 자신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경찰이 먼저 정신감정을 의뢰했다. “실제 김성수에게 정신질환이 있는데 정신감정을 안 해 모른 채 다른 일반 범죄자처럼 복역하고 출소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상 증상이 나타날 때마다 끔찍한 범죄가 또 벌어지지 않겠나. 정신감정은 본인이 요청하면 하고, 안 하면 안 하는 게 아니다. 수사기관의 판단에 따라 한다. 그리고 국가가 흉악범의 정신이상 여부를 감정하고, 치료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다수 시민의 안전을 위해서다. 형량이 감경되는 것만 생각해선 안 된다. 또 형기가 끝났다고 다 나오는 것도 아니다.” ―형기가 끝났다고 다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공주치료감호소는 정신질환을 가진 범죄자들이 복역하며 치료를 받는 곳이다. 하지만 형기가 끝나도 치료가 덜되면 치료 기간을 연장해 안 내보낸다. 병이란 게 형기에 딱 맞춰 낫는 게 아니니까…. 치료감호소 내에 의료부장이 위원장인 퇴소심사위원회가 있는데 형기가 끝난 수감자 중 퇴소시킬 사람을 선정해 법무부 치료감호심의위원회에 올린다. 그러면 여기서 다시 심사해 대상자를 최종 결정한다. 못 나간 사람도 많다.” ―조두순이 불과 2년 후인 2020년 12월이면 출소한다고 걱정이 많다. “지금은 공주치료감호소에만 적용되는 연장 치료를 일반 교도소까지 확장하는 제도를 만들면 어떨까. 일반 교도소에서도 복역 중에 정신이상이 생기는 수감자들이 있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별도의 교도소에 모아서 치료한다. 단지 이곳에 있는 정신질환 수감자들은 공주치료감호소와 달리 정신병이 다 낫지 않아도 형기가 끝나면 내보낼 수밖에 없다. 어느 교도소에 있든지 심각한 정신질환이나 사이코패스 증상이 다 낫지 않은 수감자는 내보내지 않고 치료하는 제도를 사회적 합의로 만들면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충분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시설과 인력을 갖춰야 한다. 일부러 가둬놓기 위해 하는 게 아니니까…. 인권 침해 논란이 있겠지만 치료가 안 된 채 나와서 저지를 재범 우려를 생각하면 충분히 논의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조두순은 경찰의 사이코패스 검사에서 진단 기준인 25점을 넘는 29점을 받았다. 부녀자 10여 명을 연쇄 살해한 강호순은 27점, ‘어금니 아빠’ 이영학은 25점이었다. 조두순과 김길태는 현재 흉악범들을 수감하는 경북북부제1교도소(옛 청송교도소)에 있다. ―김성수가 정신감정을 받는 데 한 달 걸린다는데…. 정신감정이 그렇게 복잡한가. “그 한 사람만 하는 데 한 달 내내 걸린다는 뜻이 아니라 그 안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수감자도 많고, 또 수사기관에서 정신감정 의뢰를 보내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면서 정신감정을 하려면 일이 몰려 그 정도 걸린다.” ―정신이상 판정을 받으면 감형된다는 걸 알고 속이는 경우는 없나. “하하하, 한 달 정도 이것저것 물어보고 대화하다 보면 그런 경우는 다 알 수 있다. 그런 일은 없다.” ―김성수 가족이 우울증 진단서를 제출했는데, 우울증은 자기가 죽고 싶은 거지 남을 죽이고 싶은 건 아니라고 하는데…. “극단적인 흉악범죄가 발생하는 이유는 마음속에 분노와 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분노는 대부분 아주 어릴 적 엄마의 보살핌이 결핍되면 불만이 쌓이면서 생긴다. 예를 들어 한 살 때 엄마가 집을 나갔다면 아이는 항상 불안에 떨면서 살게 된다. 자기를 지켜주지 않는 엄마에 대해 좌절한 갓난아이의 분노는 극심한 거다.” (한 살 때도 그런 걸 느끼나?) “느낀다. 6세 이전에 그 정도의 결핍을 느껴 장애가 오면 정신분열이 생긴다. 극단적 흉악범은 대개 아주 어린 시절에 겪은 깊은 상처를 갖고 있다. 그 분노가 밖을 향하면 흉악범이 되고, 밖으로 못 나가고 자기를 향하면 우울증을 앓고 자살을 한다. 이 둘이 혼재돼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자살도 엄마와의 관계에서 발생한다고? “유명인의 자살 사건이 발생하면 ‘치열한 경쟁을 견디지 못해서’, ‘인기를 유지하기 힘들어서’라는 말을 하는데 핵심은 아주 어릴 적 엄마와의 관계다. 자살이 사회적 문제지만 우리가 근본적인 접근을 못하고 피상적인 대응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른이 된 후에 받는 상처로는 사람이 그렇게 극단적으로 안 간다.” ―요즘은 맞벌이가 많아 하루 종일 어린이집에 있는 아이가 많은데…. “그래서 저녁에 아이와 서로 대화도 많이 하고 마음을 풀어줘야 한다. 낮에도 전화해서 목소리도 듣고…. 그러면 해소가 된다. 그런데 그런 필요성을 모르고 ‘아이는 혼자 크는 거야’ 하면서 간과하면 장애가 생기기 쉽다. 이건 할머니가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모든 정신병의 근본은 아주 어릴 적 엄마와의 정서적 관계다.” ―심신미약, 정신질환을 이유로 한 형 감경에 분노하는 여론이 많다. “우리 형법에 그런 조항이 있긴 하다. 하지만 잘못 아는 게 심신미약이라고 무조건 형을 감경해 주는 게 아니라, 그 증상이 범죄와 얼마나 관계가 있는지를 따져서 판결한다. 정신질환자라고 모두 범죄를 저지르는 게 아니지 않나. 마찬가지로 정신질환이 있더라도 해당 범죄 발생과는 무관한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중형을 받는다. 재판부마다 다르게 판단하는 게 문제라고 하지만 질병의 유무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해당 정신질환이 범죄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판사가 판단하기 때문에 사건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2차 정신감정을 맡았던 김길태 사건도 정신감정 때마다 판단이 달랐다. “1차 감정은 다른 사람이 하루 했는데 ‘정신이상이 없고 연기일 가능성도 있다’고 소견을 냈다.” (하루 했다고?) “정신감정에 정해진 시간은 없다. 며칠 만에 해달라고 하면 그렇게 해주고, 한 번 보고 해달라고 하면 본 대로 보고한다. 그런데 판사가 보니까 아무리 봐도 이상한 거야. 사람이 이상하다는 건 정신과 전문의가 아니라도 알 수 있으니까. 그래서 당시 공주치료감호소 의료부장이던 나한테 2차 감정을 의뢰했다. 입원시킨 뒤 한 달을 지켜보는데 과거 병력기록을 보니 그 사건 전에도 다른 범죄로 4년간 복역하면서 3명의 정신과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더라. 아주 심한 정신병 환자에게 주는 고농도 약물도 4년간 먹었고.” (기록도 있는데 왜 1차에서는 이상 없다고 했을까?) “놓친 것 같다. 그래서 2심 재판정에서 1심 정신감정인에게 과거 기록을 봤냐고 물으니까 못 봤다고 하더라.” ―그렇게 결론이 난 건가. “1, 2차 감정 결과가 다르니까 검찰이 서울대병원에 3차 감정을 다시 맡겼다. 여기서 일주일 정도 했는데 또 이상이 없다는 소견이 나왔다.” (엉?) “정신감정은 면담을 충분히, 잘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일주일이라도 자기공명영상(MRI) 촬영하고, 뇌파 찍고 하는 데 며칠 걸리니까 면담 시간이 적을 수 있다. 또 정신치료 경험이 많은 사람이 해야 하는데, 약물치료를 중심으로 하는 사람이 형식적으로 하면 환자들이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의사의 정신감정은 참고일 뿐이다. 판사가 판단하는데 결국 정신장애가 있다고 판단해 무기징역을 받았다.” ―왜 치료감호소에서 일한 건가. 근무환경이 아주 열악했을 텐데…. “정신의학은 정신치료와 약물치료가 병행돼야 가장 효과가 좋다. 그런데 요즘은 대체로 약물 위주고 정신치료 수련은 미흡하다. 그전에는 개업의를 했는데 사회에서 노이로제 환자 정도만 보는 걸로는 성이 안 찼다. 정말 중증 정신병 환자들을 치료하고 싶었다. 마침 국립정신병원인 국립부곡병원에 있는 후배가 부탁을 해 2008년 과장으로 갔는데 그해 말에 공주치료감호소 의료부장 자리가 비었다고 요청이 왔다. 생각해 보니 나한테 딱 맞는 자리인 거다. 속된 말로 완전히 미친 데다 나쁜 범죄까지 저지른 사람들이니…. 그때는 의사 한 명당 100명씩 담당할 정도로 환경이 열악해서 사실 치료보다는 수용소 비슷한 상태였다. 위험한 수감자가 많으니까 어떤 의사들은 병실에 잘 안 들어가고 간호사실에서 보고를 받기도 했고…. 그런 곳을 수용이 아니라 치료하는 곳으로 바꾸고 싶었다.” ―사이코패스 같은 극악무도한 정신이상 흉악범도 치료될 수 있을까. “제대로 된 의사에게 충분한 치료를 받는다면, 또 환자 자신도 나으려는 의지가 있다면 모든 사람은 치료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너무 어릴 때 상처를 받아서 병이 오래되고 깊으면 치료가 더딜 수는 있겠지만…. 치료가 안 되는 병은 없다고 믿는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8-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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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기자의 對話]“건강하십시다… 고맙습니다…”

    《 “아침 일찍 수간호사가 신문을 가져와서 단숨에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건강하십시다. 신성일.” 그의 인터뷰 기사가 게재된 지난달 20일 오전, 그로부터 잘 읽었다는 내용의 문자가 왔다. 전화를 했지만 쉬는 날이라 자고 있던 탓에 전화를 안 받자 대신 문자를 보낸 것이다. 답신을 하자 멀리서 그의 음성이 들렸다. “아, 이 기자, 기사 잘 봤어요. 사진도 좋고…. 영화 장면처럼 만들었더군요. 하하하. 우리 다시 또 봅시다.” 》  그것이 사실상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인터뷰가 될 것이라고는 당시에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20여 일 전인 지난달 17일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만났을 때만 해도 그는 내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할 작품에 대해 기자와 함께 이야기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전남 화순의 한 요양병원에서 요양하던 그는 기자가 도착했을 때 마침 병원 뒤뜰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었고, “어이∼ 여기요, 여기∼ 잘 왔어요”라며 넉넉한 미소로 반겨줬다. 전날까지 서울에는 비가 내리고 시월 중순답지 않게 전국이 몹시 추웠지만 이날은 닫힌 마음마저 푸근하게 열릴 정도로 부드러운 가을날이었다. 볕이 무척이나 좋았던 그날, 붉게 물든 뒷산의 단풍을 배경으로 한 그의 은발을 보며 왜 그 옛날 보았던 홍콩 영화 ‘가을날의 동화’(1987년)가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그만큼 멋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여기 볕이 참 좋아요. 볕이 좋으면 늘 걷지요.” 인터뷰를 요청했던 것은 그가 내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할 인생의 마지막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폐암 투병 중이라 인터뷰가 쉽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인터뷰 취지를 말하자 그는 “얼마든지 좋다”며 흔쾌히 승낙했다. 그의 건강에 대해서는 실례인 것 같아 굳이 묻지 않으려 했다. 단지 인사를 나눌 때 가볍게 “건강은 어떠신가요”라고 물었는데, 그는 뜻밖에도 “조금 전이가 돼서…”라고 말했다. 요양병원에는 3월경 왔다는데 지인이 운영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리고 건네준 명함에는 이 병원의 명예원장 직함이 적혀 있었다. 그가 천생 영화배우라는 것은 만나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의 방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는 이 병원 시청각실에서 매주 금요일 오후 7시에 상영하는 영화 제목을 적은 A4용지가 붙어 있었다. 9월부터 11월까지였는데 모두 그가 주연을 맡은 작품들이었다. 이 영화들을 광주 등지에서 찾아오는 지인들과 함께 매주 보고 있다고 했다. “옛날에는 서울에도 극장이 단성사 국제극장 등 6개 정도밖에 없는 데다 너무 바빠서 내가 주연인데도 정작 나는 못 본 작품이 많았지요. ‘맨발의 청춘’도 찍어 놓고는 못 보고 있었는데, 광화문에서 다른 촬영을 하다가 마침 쉬는 시간이 있어서 잠깐 들어가서 봤으니까요.” 이야기가 내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할 작품으로 넘어가자 그의 눈에는 생기가 돌았다. 중심 촬영 장소에 대해서만 20여 분을 설명했으니…. 대구에 살고 있는 동생뻘 되는 지인의 집 응접실인데 그가 구상하는 작품의 중심 공간이라고 했다. “그 집 응접실이 동서로 긴 모양인데 기막히게 잘 만들었어요. 10여 명이 앉을 수 있는데…, 촬영하기도 무척 좋죠. 그랜드피아노도 있고, LP판도 많고, 진공관으로 된 오디오도 있고….” 영화는 유명 사진작가와 그의 사위들, 외손녀 등 3대의 가족 이야기라고 했다. 시나리오는 최종 수정 중이고 배역도 대부분은 어느 정도 정해진 상태라는 것. “내가 사진작가 역이고 부인 역으로는 처음에는 윤정희 씨를 생각했는데 요즘 몸이 안 좋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고은아 씨에게 물었더니 너무 오래 출연을 안 해서 자신이 없다고 해요. 문희 씨도 생각했는데 거기도 자신이 없다고 하고…. 그래서 이장호 감독과 자녀들에게 물었더니 문숙 씨를 추천하더라고요. 나는 그 여인의 자연주의적인 이미지가 참 좋아요. 이만희 감독의 ‘태양을 닮은 소녀’라고 1975년 데뷔작도 나랑 같이 했고….” 영화를 설명하는 그의 눈은 암 환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예리하게 빛났다. 목소리도 처음에는 다소 지친 듯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 활기를 띠었다. 특히 그의 사위 역으로 나올 두 배우를 설명할 때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후배들”이라며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 듯했다. “나는 그 집의 주인이자 유명 사진작가, 스마트폰도 안 쓰고 가능하면 유선전화를 쓰는 아날로그 세대를 대표하죠. 맏사위는 안성기인데 직장생활에 찌든 증권회사 이사, 둘째 사위는 박중훈으로 사업하다 내려와서 세계 최고의 포도주를 만들겠다고 하는 역할이죠. 이 둘은 디지털 세대를 대표하고…. AI 연구원인 외손녀까지 3대의 사랑과 갈등이 주 촬영 장소인 응접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인터뷰는 그의 방에서 유부초밥과 김밥을 함께 먹으며 진행됐다. 인터뷰에 집중해서인지, 병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유부초밥을 두세 개밖에 먹지 않았다. 인터뷰가 중반을 넘어갈 때쯤이었다. 신군부가 들어선 뒤의 영화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그때 한 여인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고 했다. 당시 서울 충무로의 한 영화사에서 경리로 일하는 아가씨가 있었는데 한창 5·18민주화운동이 벌어지던 그때 전화가 왔다는 것. 광주가 고향인 그녀는 마침 그때 그곳에 있었다고 한다. “그때는 보도 통제로 서울에 있는 우리는 간첩들이 내려와 폭동을 일으킨다는 식으로 듣고 있을 때였어요. 근데 그 사람한테 전화가 와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 군인들이 사람을 난도질하고 죽이고 있다며 통곡을 하더라고. 나중에 시간이 지난 뒤 내려갔는데 아무리 찾아도 그 사람을 찾을 수가 없더군요. 그때는 내가 지방에 가면 소문이 날 때였거든요. 서울에 올라와서도 백방으로 찾았는데 못 찾다가 한참 후 소식을 들었는데 수녀가 됐다고 하더군요. 그때 충격으로….” 다소 무거워진 분위기를 돌리려고 젊은 시절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어떻게 하다가 세금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는 “당시에는 탈세가 많았는데 나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1960, 70년대에는 영수증 처리가 잘 안 될 때니까…, 개념도 없고…. 그래서 탈세가 무척 많았지요. 그런데 우리 집에는 1년에 두 번, 상반기 하반기로 용산세무서 공무원이 찾아왔어요. 근데 올 때 내가 출연한 영화 신문광고를 들고 오는 거야. 광고에 주연 신성일이라고 쓰여 있으니까. 그러고는 이 영화, 저 영화 짚으면서 걷어간 거지요. 하하하. 언젠가는 납세 1등인 적도 있었는데, 아마 박정희 대통령이 그런 모습을 보고 굉장히 좋아했던 것 같습디다. 그 덕분에 당시 청와대 사람들하고도 많이 친해졌으니까….” 그는 3김(金) 중에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를 가장 좋아했고 친분도 많았다고 말했다. 그의 방 앞 복도에는 그가 출연했던 작품의 장면을 담은 동판(‘만추’·1966년)과 영화 장면, 소장했던 그림 등이 전시돼 있었다. 그중 하나가 JP가 직접 써서 줬다는 ‘사유무애(思惟無涯·작은 사진)’란 한자 액자다. “무슨 뜻인가요?” “하하하, 정확하게는 몰라요. ‘생각에는 끝이 없다’는 뭐 그런 뜻 같은데 원래 있던 고사성어는 아니고 JP가 만든 것 같아. 3김 중에서도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나눈 사람이 JP지요.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을지로 입구에 개성상회라는 이북식으로 개고기 백숙을 하는 집이 있었는데 그 집 주인하고 나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 개고기를 먹었지요.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많이 만나진 못했고요.” 처음 인터뷰 요청 때 그는 건강 때문인 듯 “길게는 못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1시간 정도면 끝날 거라 생각했는데 실제론 거의 3시간가량이나 이어졌다.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 촬영을 위해 병원 뒤뜰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생각보다 한참 만에 그가 와인 빛이 감도는 빨간 스웨터에 스카프, 곱게 빚은 은발 머리 차림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짚고 있는 지팡이가 아주 좋은 것이라며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함께 벤치에 앉은 김에 또 몇 마디 물었다. “선생님, 최근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에서 청바지를 입으셨던데 청바지를 좋아하십니까?” “아∼, 내가 청바지를 좋아라 하지요. 그게 ‘돌체앤가바나’요. 150만 원짜리.” (150만 원요?) “응, 근데 윗옷이 길어서 상표가 안 보였어. 하하하.” 유머로 인터뷰를 마무리한 그는 “잘 가라”며 우리를 보고 오랫동안 손을 흔들어 주었다. 선생님, 편히 쉬십시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8-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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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 은밀하게 더 집요하게… 온라인 ‘집단따돌림’ 광풍

    《지난달 15일 청와대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 ‘아동학대로 오해받던 교사가 자살했습니다’란 청원이 올라왔다. 경기 김포시의 한 어린이집 여교사가 지역 맘(MOM) 카페의 신상 털기와 마녀사냥을 견디지 못해 자살했으니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내용이다. 이 글은 2일 현재 14만8000여 명이 동의했다. 도를 넘은 무차별적인 ‘사이버불링(Cyberbulling)’이 한 젊은 여교사를 죽음으로 몰 만큼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자살까지 부르는 사이버불링 2000년 미국 뉴햄프셔대 아동범죄예방센터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사이버불링’은 인터넷, 스마트폰, e메일 등에서 특정인을 집요하게 괴롭히는 행위를 말한다. 가상공간을 뜻하는 Cyber와 집단따돌림을 지칭하는 bulling의 합성어다. 오프라인에서 벌어지던 왕따 등 집단따돌림 현상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발달과 더불어 사이버 공간으로 확산된 것이다. 김포 어린이집 여교사 자살사건은 사이버불링으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큰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 여교사는 지난달 11일 아이들을 데리고 가을나들이 행사에 참여했다. 나들이는 별 이상 없이 마무리됐지만 같은 날 밤 늦게 인천·김포 지역 맘 카페에 글 하나가 올라왔다. 한 아이가 이 교사에게 안기려는데 교사는 돗자리 터는 데만 신경 쓰고 아이를 밀쳤다는 내용이었다. 글쓴이는 (밀치는 장면을) 직접 본 것은 아니고 주변 사람들에게 들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 글이 올라오자 이 카페에는 해당 여교사를 비난하는 글이 빗발쳤고, 여교사의 실명과 사진도 게시됐다. 다음 날 해당 어린이집에는 항의 전화가 쇄도했다.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관이 찾아오기도 했다고 한다. 해당 여교사는 글이 올라온 지 이틀 만인 13일 새벽 김포의 한 아파트 아래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내가 다 짊어지고 갈 테니 여기서 마무리됐으면 좋겠다. 어린이집과 교사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 달라. 미안하다’는 내용의 유서도 발견됐다. 사건 발생 후 사망한 여교사의 어머니는 맘 카페에 글을 올린 사람과 신상 털기에 가담한 불특정 다수를 명예훼손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신상 털기에 가담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정보통신망법 제70조에 따라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허위 사실일 경우엔 7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으로 더 엄하게 처벌받는다. 해당 맘 카페에는 여교사의 죽음을 추모하는 글이 속속 올라왔지만 이미 뒤늦은 후회일 뿐이었다. 외국에서도 사이버불링의 피해는 심각하다. 올 1월 호주에서는 무분별한 악플로 인해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던 소녀 모델 에이미 에버렛(14)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달리(dolly)’라는 애칭으로 잘 알려진 에이미는 호주의 명품 모자 브랜드인 ‘아쿠브라(Akubra)’의 모델로, 호주 농촌의 상징인 카우보이식 모자를 쓴 깜찍한 모습으로 광고에 나와 유명해졌다. 유명세를 탄 에이미는 평소 악성 댓글에 시달려왔다. 부모의 요청으로 악성 댓글 내용이 모두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이 중에는 ‘죽어라’는 말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카톡 감옥, 떼카, 데이터셔틀 인터넷과 SNS가 발달하는 만큼 사이버불링의 방법도 다양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카톡 감옥’. 카카오톡 감옥의 줄임말로 그룹 채팅방에 참여시킨 후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카톡 지옥’, ‘카톡 감금’이라고도 불린다. 카카오톡 채팅방은 참여자가 방을 나가도 다른 사람이 ‘초대’하면 다시 불러들일 수 있다. 학교나 학급 같은 단체 채팅방에서 누군가를 집단으로 괴롭히려고 작정할 경우 해당자가 방을 나가도 다른 사람이 계속해서 초대를 하는 것이다. 당사자가 초대를 거부하는 기능이 없기 때문에 당하는 사람은 속절없이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카톡 감옥은 프로필 설정의 아이디 검색을 ‘허용’에서 ‘끔’으로 바꾸고 자동 친구 추천, 메시지 도착 알림 등의 설정을 바꾸면 피해를 어느 정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다른 사람들과 정상적인 관계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떼카’는 단체 채팅방 등에 피해 대상을 초대한 후 단체로 욕설을 퍼붓거나 굴욕적인 사진을 공개하는 것. 가장 전형적인 사이버불링 방식이다. 반대로 피해 학생을 카톡 채팅방에 초대한 뒤 여러 사람이 무조건 무시하는 방법도 있다.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이 건네는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다가 다른 학생이 말을 걸면 일시에 다 같이 열광적으로 대답해주는 것이다. ‘카톡 멤놀’은 ‘카카오톡 멤버 놀이’의 준말로 좋아하는 연예인의 말투와 행동을 모방하는 10대들의 신종 인터넷 사교 문화를 말한다. 모든 일을 주관하는 총괄과 부총괄, 신입 멤버들을 관리하는 출석 관리자, 신입 관리자 등 간부들과 새로 온 신입을 뜻하는 ‘임관’ 등으로 구성되는데 간부들은 신입들의 행동에 모두 관여한다고 한다. 신입들은 간부의 허가 없이는 채팅방을 나가서도 안 되고, 욕설과 음담패설도 허락을 받아야 할 수 있다. 이런 멤버 놀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을 ‘종합병원’이라 부르며 비하한다. 일정 기간마다 싫어하는 멤버를 투표로 뽑아 일명 ‘물갈이’라고 불리는 강제 퇴장도 시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리벤지 포르노(revenge porno)도 넓게 보면 사이버불링의 한 형태다.○ 별것 아니라는 인식도 문제 한국방송통신위원회와 한국정보화진흥원의 지난해 사이버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 6000명(학생 4500명, 성인 1500명) 중 사이버 폭력을 경험한 사람은 4명 중 1명꼴인 26%에 달했다. 피해 수단으로는 ‘채팅, 메신저’가 45.6%로 가장 많았고, 온라인게임이 38.8%, 페이스북 등 SNS가 35.3%, 커뮤니티가 6.8%, e메일 또는 문자 6.6%, 개인 홈페이지 2.1% 순이었다. 사이버폭력을 행사한 적이 있다고 답한 사람들은 가해 이유로 ‘상대방이 싫거나 화가 나서’(42.2%)를 가장 많이 들었다. ‘상대가 먼저 그런 행동을 해서 또는 보복하기 위해서’가 40%로 뒤를 이었으며, ‘그저 장난이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라는 대답도 23.8%에 달했다. 특기할 만한 점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상당수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같은 조사에서 피해자들에게 ‘사이버폭력에 왜 직접적인 대응을 하지 않느냐’고 묻자 무려 76%가 ‘별일 아니라고 생각해서’라고 답했다. 23.6%는 ‘신고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서’라고 답했다. 27.1%는 ‘나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해서’라고 답했다. 이 밖에 ‘상대가 누구인지 몰라서’(7.9%), ‘더 심한 따돌림을 받을까봐’(4.8%), ‘어디에 도움을 요청해야할지 몰라서’(4.4%), ‘고자질하는 것 같아서’(4.4%), ‘상대가 보복할까봐’(3.5%) 등을 이유로 들었다. 전문가들은 “사이버폭력은 오프라인에서 벌어지는 물리적 폭력보다 주변에서 알아차리기가 더 힘든 만큼 문제가 드러났을 때는 심각한 상태인 경우가 많다”며 “가정과 학교에서 교육을 통해 사이버폭력의 문제점을 끊임없이 교육하고, 다양한 소통을 통해 이상 징후를 파악해 대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8-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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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성일 “내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제 인생작을 올릴 겁니다”

    《 영화배우 신성일(81). 입가에 묻은 밥풀마저 영화 소품처럼 보이게 만드는 남자. 은발의 노신사가 됐지만 그는 여전히 멋있었다. 암 투병 중인 그는 지금 지인이 운영하는 전남 화순의 한 요양병원에 머무르면서 내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할 인생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볕이 좋았던 17일 오후 그는 세 시간에 걸쳐 새 작품과 그의 인생, 그리고 우리 영화계 모습에 대해 애정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이만희 감독과 함께 만든 ‘만추’(晩秋·1966년)란 영화가 있는데 아쉽게도 국내에는 필름이 없고 북한에 남아 있다”며 “남북한 교류가 활발해져서 평양에 갈 수 있다면 그걸 꼭 복사해서 갖고 오고 싶다”고 말했다. 》 ―건강은 어떠신가요. “아, 잘 지내요. 몇 달 전부터 지인이 운영하는 여기 전남 화순의 요양병원에서 지내고 있는데 이곳 공기가 참 좋아요. 제가 주연했지만 못 봤던 영화도 보고 있고… 지난주에는 ‘여·여·여’를 봤지요.” (방에서 혼자 보시나요?) “아니요. 병원에서 여럿이 볼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줘서 거기서 보지요. 광주에 사는 아는 동생들이 지인들과 찾아오면 함께 봅니다. 매주 금요일 오후 7시에 상영하고 있는데 이번 주는 강대진 감독의 ‘가로수의 합창’, 다음 주는 김기 감독의 ‘가버린 사랑’을 틉니다.” (주연 작품인데 못 보신 게 있으십니까?) “그땐 너무 바빠서…. ‘맨발의 청춘’도 못 보다가 다른 영화 촬영 중에 시간이 나 극장에 들어갔지요. 2층에 앉았는데 신성일하고 엄앵란이 왔다니까 관객들이 영화는 안 보고 우리만 봐서 바로 나오기는 했지만요. 하하하.” 김기영 유현목 정진우 감독이 옴니버스식으로 제작한 ‘여·여·여(女·女·女)’는 그가 최은희 김지미 문희 등 세 여인과 겪는 기묘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연소자 관람 불가. 이곳 엘리베이터에는 그가 주연한 작품의 상영 일을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그는 이 요양병원의 명예원장도 맡고 있다. ―영화를 준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만…. “3년 전부터 기획을 하고 있었는데 병 때문에 잠시 미뤘었죠. 시나리오는 나왔는데 작품에 맞게 약간 수정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사진작가와 그의 두 사위, 외손녀 등 가족 이야기죠. 이야기를 풀어나갈 중심 장소도 이미 봐 둔 곳이 있고요.” (어떤 역이신가요?) “저는 아날로그 세대인 할아버지 사진작가 역이죠. 스마트폰도 거의 안 쓰고 가능하면 유선전화를 쓰는…. 디지털 세대인 첫째, 둘째 사위 역에는 안성기와 박중훈. 제가 제일 좋아하는 우리 후배들이지요. 외손녀 역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오디션을 볼 겁니다.” (안성기 박중훈 씨가 승낙을 하셨나요?) “전화로 반승낙은 받았지요. 시나리오 완성본은 이달 말쯤 나오니까.” ―제목이 정해졌나요? 가제라도…. “처음에는 ‘행복(happiness)’을 생각했는데 이장호 감독이 누군가 쓴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가제를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으로 했어요. 난 그게 마음에 듭니다.” ―상대 여주인공이 누군지 정말 궁금합니다. “이 감독과 아들딸들과 이야기하는데 문숙 씨를 추천하더라고요. ‘태양을 닮은 소녀’라고 이만희 감독의 1975년 작품인데 데뷔작을 저하고 같이 했지요. 전 그 여인의 자연주의적인 이미지가 참 마음에 듭니다.” (선생님의 아내 역인가요?) “네. 그런데 제가 이 감독에게 ‘우리 둘이 너무 엇박자 아니냐’고 했더니 ‘형님, 엇박자 가지고 하모니 한번 만들어 봅시다. 둘째 부인으로 하죠’ 그러더라고요.” (왜 하필 둘째 부인으로…?) “화면으로 보면 저하고 문숙 씨가 차이가 많이 나요. 정상적인 노부부로 잘 보이지 않는 거죠. 그래서 첫째 부인은 죽은 걸로 하고…. 작품에 대한 감독의 이미지가 팍팍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선생님, 매우 부럽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애정이 깊으신 것 같습니다. “매년 참석했어요. 감옥에 있는 2년만 빼고…. 아, 감옥에서 나온 해도 미안해서 못 갔고…. 그 세 번만 빼고는 다 갔죠. 작년에는 제 회고전도 열렸고…. 사실 이번 작품도 내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할 계획입니다.” (촬영은 언제쯤 시작됩니까?) “내 건강이 회복되는 때를 내년 5, 6월 정도로 보고 있는데…. 아마도 그때쯤 크랭크인을 할 겁니다. 출품작이 되려면 7월까지는 어떤 작품이라는 걸 알려줘야 하니까요.”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습니까?) “3, 4개월이면 충분해요. 제가 제작을 해봤지만 대작이 아니면 오래해 봐야 돈만 많이 드니까…. 10월에 개막이니 그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서 빨간색 포드 머스탱을 몰고 박정희 대통령 차를 추월했다는데 사실입니까. “하하하, 누가 재미있게 쓴 거지 어떻게 대통령 차를 추월하겠소. 그땐 시간만 있으면 머스탱 몰고 대전, 추풍령까지 돌고 왔지요. 서울에서 추풍령까지는 개통돼 있었고, 그날 추풍령에서 부산까지 뚫린 거니까. 박 대통령 행렬은 부산에서 올라오고 나는 서울에서 내려갔으니 추월이 아니고 지나친거죠. 추풍령휴게소 근처인데 저쪽에서 대통령 행렬이 껌뻑껌뻑 불 켜고 올라오고 있더라고? 어떤 행렬이란 건 알았지요. 라디오로 생중계 중이었으니까. 그 옆을 시속 백 몇십 km로 휙 지나친 거죠.” ―서슬 퍼렇던 시절인데 별일 없었습니까. “며칠 후 시내에서 박종규 경호실장하고 점심을 먹는데 ‘동생, 나 그날 동생 차 지나가는 거 봤어’ 하더라고. 내 차를 본 적은 없지만 외제차 샀다는 소문은 들었으니까 차 보고 안 거죠. 제가 엄청난 속도로 ‘씽∼’ 지나가니까 박 대통령이 ‘저거 누구야?’ 하고 물어서 ‘영화배우 신성일입니다’라고 했답디다. 그랬더니 박 대통령이 ‘그 친구 오래 살라고 해’ 했다더군요. 사고 내지 말고 조심하란 뜻인데… 참 어른스러움이 묻어 있는 말이지요. 별일은 없었어요.” (얼마나 빨리 달렸길래…) “부산까지 두 시간 반 걸렸으니까…. 지금도 좀 달립니다.” (지금도요?) “제 버릇 어디 가겠소?” ―원래 겁이 없으신가요. 1980년 신군부의 국회의원 제안도 면전에서 거절했다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 전 청와대에 갔을 때 먼발치에서 이미가 훌렁 벗겨지고 머리가 되게 큰 친구가 가끔 눈에 띄었어요. 나중에 보니 전두환 전 대통령 동생 전경환이더라고. 1979년 12·12쿠데타가 벌어지고 이듬해인데 하루는 청와대에서 전화가 와서 받으니 저쪽에서 ‘선배님, 저 전경환입니다’ 하더군요. 청와대 한 번 다녀가라고…. 갔더니 ‘국회의원 한번 하시면 안 좋겠냐’고 합디다. 첫마디에 ‘안 한다’ 하고 나와 버렸지요. 형님으로 부르던 당시 주영복 국방부 장관과도 절연했고….” (왜요?) “1980년 어느 날 장관 공관으로 우리 부부를 초대했는데 얘기 중에 전두환이 대통령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전두환이 되면 나라 망한다’고 했더니 안색이 확 바뀌면서 ‘그런 말하면 너 혼난다’고 하더군요. ‘혼내라’고 하고 뛰쳐나왔지요.” (그러면 찍혔을 텐데요?) “찍혔으니까 그 뒤에 내가 할 일이 하나도 없어진 거 아니오. 일 년에 한 편? 두 편? 찍었으니까. 영화도 다 죽어버리고….” ―그때도 한자리 차지하려는 사람이 수두룩했는데 왜 거절했습니까. “그땐 전두환의 민정당이 집권할 게 확실했으니까 승낙했으면 국회의원을 몇 번은 할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그게 끝난 뒤에는 내가 뭐가 될까 하는 생각이 듭디다. 그때가 40대 초반이었는데….” (역사의 심판대에 섰을까요?) “하하하,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겠지. 그래서 안 한다고 했지요. 그들이 광주에서 한 짓을 생각하면….” ―요즘 영화계에 아쉬움이 있는지요. “아쉬움이 많으니 ‘소확행’을 만드는 거지요. 말이 났으니까 그렇지만 모 감독은 연기 지도한다고 여배우 뺨을 때렸다는데 그게 무슨 감독이오? 후배들 다 못 쓰게 만들고…. 나는 액션 영화는 많이 안 했어도 맞고 넘어지는 장면은 숱하게 했는데, 진짜 맞았다면 내 턱이 남아났겠소? 카메라 앵글로 (맞는 것처럼) 잡아주고 어색하게 보이지 않게 그걸 연습하는 거지…. 진짜 맞는 게 무슨 훈련이야? 나쁜…. 그러면 안되는 거요.” ―개인적으로 바라는 게 있다면…. “이만희 감독과 함께 만든 ‘만추(晩秋·신성일 문정숙 주연·1966년)’란 영화가 있는데 참 좋은 영화지요. 근데 필름이 이제는 우리나라에는 없고 북한에만 있어요. 김정일 애장품으로…. 나는 한 장면이 새겨진 동판만 갖고 있지요.” (왜 국내에는 없습니까?) “당시에는 영화 필름 보관에 대한 개념이 약해서 전부 잘라서 밀짚모자 테두리로 썼으니까…. 일부가 당시 홍콩에 수출됐는데 김정일이 영화광이다 보니 그걸 사갔다고 하더군요. 북한에 납치됐던 신상옥 감독이 김정일 소장 영화 목록에서 그걸 봤대요. 남북한 교류가 활발해져서 평양에 갈 수 있다면 그걸 꼭 복사해서 갖고 오고 싶소.”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8-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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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격한 학사관리, 올해까지 91번째 노벨상 배출한 원동력… 1974년 하이에크 이후 경제학상만 30명 ‘시카고학파’ 명성

    미국 시카고대 휘장에는 불사조 머리 위에 ‘Crescat scientia: vita excolatur’란 라틴어 문장이 적혀 있다. ‘지식을 기를수록 인간의 삶은 풍요로워진다’는 뜻. 그래서일까. 시카고대는 미국 명문대 중에서도 공부를 혹독하게 시키기로 유명하다. 시카고대가 유독 노벨상 수상자를 많이 배출하는 것은 이런 학업 풍토 때문인지도 모른다. 2017, 2018년 기준 미국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대학교 랭킹인 ‘US News and World Report’에서 미국 대학(학부)부문 3위를 차지했다. 이 외에도 대부분의 세계 대학교 순위에서 10위 안에 들 정도다. 시카고대는 올해 노벨상 경제학상 공동 수상자로 폴 로머 뉴욕대 교수(62)와 윌리엄 노드하우스 예일대 교수(77)가 선정되자 8일(현지 시간) 홈페이지를 통해 “시카고대가 91번째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고 자랑했다. 로머 교수는 이 대학에서 수학 학사(1977년), 경제학 박사 학위(1983년)를 받았고, 1988∼1990년 교수로 재직했다. 이 대학은 특히 다수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시카고학파(Chicago School)’로도 유명하다. 1950∼1962년 이 대학 교수를 지낸 자유주의 경제학의 거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1974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2013년에는 유진 파마와 라스 피터 핸슨 교수가 공동수상을 했고, 지난해에는 리처드 세일러 교수가 수상했다. 대학 측은 “시카고대 소속 또는 출신으로 노벨상을 받은 91명 중 30명이 경제학 전공자”라고 밝혔다. 엄격한 의미에서 시카고학파란 20세기의 시카고대 경제학부의 멤버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요즘은 경제학의 지나친 수리적 접근 및 정형화에 반대를 하고, 자유주의, 자유시장의 가격이론을 고수하는 부류까지 포함하기도 한다. 원래 시카고대는 1857년 S. A. 더글러스가 기증한 토지를 기초로 세워졌으나 재정난으로 1886년 폐쇄됐다. 지금의 시카고대는 실업가 J. D. 록펠러가 새 대학으로 세워 1892년 개교한 것이다. 개교 이후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의 근거지로서 사회학 교육학 자연과학 분야에서 급속한 발전을 이뤘는데, 1942년 E. 페르미 교수에 의한 최초의 원자로 운전을 비롯해 원자과학 의학 인구학 인류학 등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보였다. 경제학 분야 외에도 졸업생이나 교수 중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으로는 허버트 브라운(1972년 화학), 솔 벨로(1976년 문학) 등이 있다. 고고학자 로버트 애덤스, 수학자 조지 버코프, 인권운동가 제시 잭슨 등 다양한 부문에서 저명인사들을 배출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도 시카고대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오바마는 이 대학 로스쿨 교수 출신이고 대학 내에는 그가 데이트했던 장소와 살던 집 등이 있다. 시카고는 오바마의 정치적 고향이고, 대통령 임기가 끝난 후 첫 연설을 시카고대에서 했다. 또 미국 대통령의 특권인 대통령 도서관(Presidential Library)을 시카고대에 만들 계획이다.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8-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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