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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은 어렵다. 머리로야 과학이나 금융의 근간이 되는 중요 학문이란 것을 알지만, 막상 수학문제 앞에 서면 까막눈이 되는 심정은 참 처참하다. 그런데 세계적인 수학 난제들이라…. 그냥 전문가들이 알아서 고민해주면 고맙겠다. 그런데 이 책은 당신도 이 수학 난제들과 무관치 않다고 소매를 잡아끈다. 영국 워릭대 수학과 교수인 저자는 난제 자체를 일반인이 이해할 필요야 없지만 이를 둘러싼 과정이나 정황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예를 들어 ‘푸리에 분석’이란 수학적 아이디어가 어떤 개념인지는 몰라도 괜찮다. 하지만 이 분석이 현대 전기통신의 근거이자 디지털카메라를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알아두면 좋지 않은가. 심지어 경찰이 지문을 보존하는 기술에도 푸리에 분석이 이용된단다. 위대한 수학 난제 중에는 중학교 교과서에서 이미 마주쳤지만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것도 있다. ‘골드바흐 추측’이라는 것인데 바로 소수와 관련된 문제다. 정의를 옮겨 쓰자면 “2보다 큰 모든 짝수는 두 개의 소수의 합으로 표시할 수 있다”이다. 책은 이런 난제를 통해 소수를 연구함으로써 정수론이나 인수분해 같은 분야가 확장됐으며, 이런 결과물이 바탕이 돼 알고리즘과 컴퓨터 운영체계, 인터넷통신의 프로토콜이 성장했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만하면 골드바흐 추측이 우리와 상관없다고 말하긴 힘들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이 책은 무지 어렵다. ‘일반인도 이해하기 쉽다’는 뻔한 소개는 도무지 못하겠다. 물론 난제를 둘러싼 뒷이야기들은 흥미롭다. 하지만 책의 비중이 그쪽보단 수학 개념 설명에 치중돼 머리가 팽팽 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요즘 경제가 어렵다. 언제는 좋았냐고 시큰둥한 이도 있겠지만 확실히 불안한 것은 맞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대공황’이라고? 설마 그 정도까지이겠나 싶긴 한데 일단 저자의 주장부터 들어보자. 일본 시가대 경제학부 교수인 저자가 볼 때 현 세계 경제의 흐름은 20세기 초 대공황과 너무나 닮았다. 미국의 거대한 버블 붕괴로 인해 세계적 경제위기가 찾아왔고, 그 여파가 유럽으로 확산됐다. 단기 자금의 이동에 따라 경제가 요동치는 것도 엇비슷하다. 당시에도 과도한 세계화로 국가 간 대립이 심각했는데, 요즘 아시아 중동에서 알력이 벌어지는 모습도 영 심상치 않다. 청년실업이 정치 변동으로 연결되는 양상도 마찬가지다. 다만, 현재가 대공황이라는 진단이 어색한 것은 ‘조용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1930년대처럼 국내총생산(GDP)이 곤두박질치고 시민들이 패닉에 빠지는 현상은 감지되지 않는다. 2008년 리먼 사태가 벌어지며 줄곧 상황이 나빠졌으나 대공황이라 부르긴 애매하다. 저자가 보기에 이는 각국 정부가 온갖 구제책을 적극 동원했기 때문이다. 전례 없이 엄청난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강력한 금융 및 재정 조치를 취한 덕에 가파른 추락은 면했다. 하지만 정부가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저자는 이미 그 붕괴의 단초가 여기저기서 발견되고 있다고 말한다. ‘조용한 대공황’은 간결해서 좋다. 어렵지 않은 문장을 사용하고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경제용어에 익숙하지 않아도 이해하기 편하다. 다만,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가 적어 설득력이 다소 떨어지는 대목도 있다. 게다가 대공황이라면서 공동체와 인관관계를 중시하자는 식의 결론은 너무 나이브한 것 아닐까.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직지의 대모’ 박병선 박사(1923∼2011)는 환수문화재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프랑스 유학 후 파리국립도서관에 근무하면서 ‘직지심체요절’을 찾아냈고, 외규장각 의궤가 고국 땅을 밟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해외에 산재한 우리 문화재 15만여 점 가운데 약 1만 점이라도 되찾은 데는 박 박사 같은 이들의 공이 컸다. 환수된 지정문화재에서도 반가운 이름을 만날 수 있다. 28건의 지정문화재 목록을 살펴보면 보물 제569호 ‘안중근 의사 유묵-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이나 정조가 직접 그린 쌍폭(雙幅·한 쌍의 글이나 그림)으로 알려진 ‘정조필 파초도’(제743호) ‘정조필 국화도’(제744호)처럼 동국대 박물관이 소장한 유물이 6건이나 된다. 이 가운데 5건이 1970년에 환수됐는데 바로 초우 황수영 전 동국대 총장(1918∼2011)이 이룬 업적이다. 초우는 서산마애삼존불상과 문무대왕 수중릉, 울산 반구대 암각화 발굴에 관여했고 국립중앙박물관장과 동국대 총장을 지냈다. 한일 국교정상화회담 당시 문화재 반환협상의 실무대표로 활동하며 우리 문화재를 되찾는 데 관심이 컸다. 가장 대표적인 성과가 파초도 국화도를 포함한 유물 10여 점의 환수였다. 초우는 이를 소장하던 재일교포 장석 씨를 오랫동안 설득해 기증받았다. 이를 가지고 귀국하던 도중 밀수품으로 오인받아 압수당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정우택 동국대 박물관장은 “미술품 기증이란 인식조차 부족했던 시절에 어렵게 해외를 넘나들며 문화재 환수를 성사시킨 열정과 혜안이 대단했다”고 말했다. 문화재 93점의 반환을 성사시킨 고 조창수 전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 학예관(1925∼2009)도 잊어서는 안 될 공로자다. 1994년 북한에서 43년 만에 생환했던 국군포로 조창호 중위(1930∼2006)의 친누나인 조 학예관은 44년 동안 아시아담당 큐레이터로 일하며 한국문화를 해외에 알린 민속학자였다. 스미스소니언에 아시아 최초로 나라 이름을 사용한 ‘한국실’을 설치한 주역이기도 했다. 그가 환수한 대표적 문화재는 고종과 순종, 명성황후 옥보. 옥을 깎아 손잡이를 용 모양으로 만든 고종옥보(高宗玉寶)는 ‘황제’라고 새겨져 고종이 황제에 오른 1897년 이후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1987년 미국 경매에 나온 옥보를 발견한 그는 오랜 기간 소장자를 설득하고 모금운동을 펼쳐 유물을 되찾은 뒤엔 국립중앙박물관에 조건 없이 기증했다. 떠나는 모습도 아름다웠다. 암 선고를 받은 뒤 4억 원 상당의 미국 자택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문화발전에 써 달라”며 스미스소니언에 기증했다. 그가 타계한 뒤인 2012년 유족은 평생 모은 연구자료 300여 점을 서강대에 기증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최근 그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자 동영상을 제작해 재단 홈페이지(www.overseaschf.or.kr)에 공개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제공한 환수문화재 목록을 보면 유독 자주 등장해 눈길을 끄는 이름이 하나 있다.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1954·사진)라는 일본인이다. 환수문화재 중 지정문화재로 등록된 28건 가운데 6건이 모로가에게서 환수됐다. 국보 제124호인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과 제125호 ‘녹유골호’를 비롯해 보물로 지정된 ‘도기 녹유 탁잔’(보물 제453호) ‘경주 노서동 금팔찌’(제454호)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제455호) ‘경주 노서동 금목걸이’(제456호)는 모두 그가 소장했던 유물이다. 얼핏 보면 한국에 문화재를 돌려준 고마운 은인처럼 여겨질 정도다. 》 하지만 모로가 히데오는 한국 문화재에 해를 끼치고 도굴을 일삼은 희대의 악당이다. 환수된 문화재도 그가 일본 검찰에 압수당한 것들로, 자칫 딴 곳에 팔거나 숨겼다면 고국 땅을 밟지 못할 뻔했다. 다행히 일본 제실박물관(일본 국립박물관의 전신)이 압수품들을 사들였고, 이를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돌려받았다. 국내에는 그간 모로가가 어떤 인물인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 초대 주임(관장·1926∼1930)을 지냈고 금관총 발굴에 관여했다는 정도만 전해졌다. 하지만 최근 정인성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44)가 학술지 ‘대구사학’에 게재한 논문 ‘일제강점기 경주고적보존회와 모로가 히데오’를 보면 모로가가 얼마나 많은 죄악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다. 모로가는 원래 문화재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이였다. 일본에서 서생으로 지내다 1908년 조선으로 넘어와 무역업, 대서업에 종사했다. 하지만 사교성이 좋았던 그는 정관계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고 1910년대 경주로 와서 고고학 전문가인양 행세하기 시작했다. 이때 경주의 조선인 유지들을 회유해 만든 것이 ‘경주고적보존회’였다. 보존회란 그럴듯한 이름을 달았지만, 실상 모로가의 막후 조종 아래 도굴과 문화재 강탈을 자행했다. 사천왕사지 서편 목탑을 비롯해 수많은 유적을 마구잡이로 파헤쳤다. 그가 착복한 유물은 엄청났고, 석기 토기 금속제 등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금관총 출토품은 경주에 별도로 보존했다고 하나, 일부는 모로가가 보존회 차원에서 관리하던 시절 도난당해 사라졌다. 하지만 죄는 조선인들이 뒤집어쓰고 고문까지 당했다. 심지어 모로가는 혹시나 있을 매장 유물을 차지할 욕심에 멀쩡한 첨성대를 해체 보수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너무 많이 착복한 탓일까. 1933년 모로가는 대구에서 파견된 일본 검찰에 전격 체포됐다. 신라 지역에 잇따른 도굴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것. 고위층과 인맥이 두터웠던 그였으나 일본 측이 봐도 그 정도가 너무 심했던 모양이다. 당시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이 연일 이 사건을 보도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소장품을 빼앗긴 뒤 그해 말 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경북 포항 수산시험장 주임으로 지내다 광복 직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압수된 모로가의 장물이 돌아왔다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는 남아 있다. 많은 유물을 환수하긴 했으나 당초 그가 빼돌렸던 유물이 제대로 다 돌아왔는지 확실치 않다. 정 교수는 “일본은 지금도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의 고고학 연구가 훌륭한 문화정책이었다고 주장한다”며 “하지만 모로가 같은 악질적인 문화 권력자와 유착해 벌인 활동이었음을 (그들은) 자각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최근 한국 최초의 근대 지폐인 호조태환권(戶曹兌換券) 원판이 국내로 돌아온 데 이어 문정왕후 어보(御寶·의례용 인장) 환수도 진전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지며 환수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는 대략 15만 점. 이 가운데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고국 땅을 밟은 환수문화재는 131건(9756점)에 이른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안휘준)의 도움을 얻어 환수된 뒤 국보나 보물처럼 지정문화재에 오른 유물 중심으로 환수문화재의 역사를 3회에 걸쳐 짚어본다. 》2010년 4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 ‘영친왕(1897∼1970) 일가 복식’은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몰려 화제였다. 고종의 일곱째 아들인 영친왕 이은 일가가 가례(嘉禮·혼례) 때 착용했던 의례복과 장신구다. 영친왕 일가 복식 및 장신구류가 유독 관심을 끈 데는 이 문화재가 어렵사리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상징성이 크게 작용했다. 이들 문화재는 광복 뒤 일본에 머물던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가 소장하다 1957년 도쿄국립박물관으로 넘겼다. 지속적인 협상 끝에 1991년 한일 정상회담 합의로 되찾았고, 2009년 중요민속문화재 제265호로 지정됐다. 환수된 지정문화재 가운데 수량으론 가장 많은 333점이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최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영친왕 유물처럼 환수문화재 131건 가운데 지정문화재가 된 경우는 모두 28건에 이른다. 건수로만 보면 전체 환수문화재의 약 21%다. 국보로 지정된 유물은 4건. 모두 일본에서 환수됐다. 1965년 한일협정이 맺어진 이듬해 들어온 국보 제124호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과 제125호 ‘녹유골호’, 1971년 환수된 제185호 ‘상지은니묘법연화경’, 2006년 큰 관심을 모았던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제151-3호)이다. 1912년 일본으로 갔다 돌아온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은 고려 초인 10세기경 제작됐다. 한국의 석불상은 재료가 대부분 화강암인데 흰 대리석으로 만든 점이 특이하다. 몸체와 뚜껑에 녹색유약을 입혀 통일신라시대 때 제작된 녹유골호는 현재 전해지는 골호(骨壺·불교에서 시신을 화장한 뒤 유골을 매장하는 데 사용하는 뼈항아리) 가운데 가장 빼어나다고 평가받는다. 상지은니묘법연화경은 고려 공민왕 22년(1373년)에 제작된 법화경. 최영창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활용홍보실장은 “상지(橡紙·상수리 열매로 물들인 종이)에 은니(銀泥·은가루)로 옮겨 쓴 불경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해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보물은 모두 18점. 이 중 시기적으로 가장 오래된 문화재는 기원전 6세기에 만들어진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다. 외국 유물이 보물로 지정된 유일한 경우이기도 하다. 한국 스포츠의 영웅 손기정(1912∼2002)이 1936년 독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 기념으로 받았으나 전달되지 못하다가 1986년에야 한국 땅을 밟았다. 고대 그리스 코린트에서 제작된 것으로 1875년에 발굴됐다. 안중근 유묵(遺墨·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은 2점이 포함됐다.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과 ‘용공난용 연포기재(庸工難用 連抱奇材·서투른 솜씨는 쓰기 어려우나 아름되는 나무는 뛰어난 재목이다)’는 지금도 그 뜻이 인구에 회자되는 서예작품이다. 등록문화재 제383호로 지정된 ‘미국 해병대원 버스비어 기증 태극기’는 6·25전쟁 참전용사인 A W 버스비어가 2005년 한국에 돌려준 문화재. 버스비어는 서울 수복 당시 한 시민이 건네준 것을 전쟁 기간 내내 군용트럭에 꽂고 다니다 미국에 가져갔다. 문화재청은 “일장기를 개조해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한국 근현대사의 고난이 깃든 소중한 사료”라고 설명했다. 최소한 보물급은 되지만 임대·대여 방식으로 환수된 탓에 지정문화재에 오르지 못한 문화재도 여럿이다. 2011년 프랑스에서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는 당시 145년 만의 귀환으로 국민적 환대를 받았으나 5년마다 갱신되는 대여 방식으로 돌아왔다. 2005년 독일에서 환수한 ‘겸재 정선 화첩’은 영구 임대, 2007년 미국에서 온 ‘어재연 장군 수(帥)자기’도 10년 임대 신분이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제주도 한라산을 다양한 유물과 사료를 통해 조명하는 특별전 ‘한라산(漢拏山)’이 10일부터 국립제주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다. 국립제주박물관은 “한라산은 곧 제주 문화라고 할 정도로 제주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며 “한라산과 관련된 문화재를 중심으로 제주도의 역사를 되짚어 보려 한다”고 설명했다. 전시품 가운데 17∼18세기 한라산과 제주도의 모습이 오롯이 담긴 보물 제652-6호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와 제652-5호인 ‘남환박물지(南宦博物誌)’가 눈에 띈다. 두 문화재 모두 조선 숙종 때 국학자이자 실학자였던 병와 이형상(甁窩 李衡祥·1653∼1733)이 제주목사 시절 직접 그리거나 쓴 유물이다. ‘최익현 초상(崔益鉉 肖像·보물 제1510호)’과 ‘팔준도첩(八駿圖帖)’도 볼만하다. 구한말 우국지사였던 면암 최익현(1833∼1906)은 1875년 한라산을 등반하고 ‘한라산기’를 남긴 인연이 있다. 팔준도첩은 조선 태조의 여덟 마리 명마를 그린 그림을 모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화첩. 그 가운데 ‘응상백(凝霜白)’은 1388년 위화도 회군 당시 탔던 말로 한라산 자락에서 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월 3일까지. 무료. 064-720-80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예쁜 책의 기준은 뭘까. 표지부터 휘황찬란한 책을 일컫는 거라면 ‘불교의 미를 찾아서’는 거리가 멀다. 디자인에 들인 공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첫눈에 눈길을 사로잡았노라고 말하긴 솔직히 힘들다. 큼지막한 손 글씨체의 ‘미(美)’자가 나름 인상적이긴 해도. 내용도 마찬가지다. 책에서 보건대 인제대 인문학부 교수인 저자는 불교에 상당히 심취한 이다. 최대한 간결하게 불교문화를 설명하려고 애쓴 티가 역력한데, 아쉽지만 교과서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하지만 이 책의 ‘어여쁨’은 책을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마주하는 사진들에서 빛을 발한다. 10여 년 동안 사계절을 가리지 않고 사찰들을 찾았다는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은 놀라울 정도다. 전문 사진작가도 아닌 이가 어떻게 이런 작품을 찍었지 싶어 여러 번 출처를 확인했다. 경북 영주의 부석사 사진은 특히 인상적이다. 절 자체가 워낙 아름답기로 소문났지만 어찌 이리도 근사할까. 일찍이 미술사학자 최순우(1916∼1984)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에서 극찬했던 이유가 다시금 떠오를 정도다. 그 가운데서도 가을날 저녁 위쪽에서 부석사를 끼고 내려다본 산세를 담은 사진과 밤새 내린 눈에 덮인 부석사가 새벽 햇살에 황금빛으로 변모한 사진은 놓치지 마시길. 이 사진 두 장을 만난 것만으로도 ‘불교의 미를 찾아서’는 정말 예쁜 책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우고 싶다. 교과서 분위기가 난다고 했지만,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책은 초심자에게 입문서로 꽤 추천할 만하다. 전국의 사찰을 꼼꼼히 살펴 부처와 보살에 따라 매력적인 장소를 정리해놓은 것도 여행객에게는 도움이 될 듯하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우리도 안다. 넘치는 건 모자람만 못하다. 세상만사 안 그런 게 없다. 다만 알긴 아는데 뜻대로 안 된다. 살짝 부족할 때 숟가락을 놓을 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부지불식간에 감정을 터뜨리고 후회하는 일도 숱하게 많다. 자기 절제, 자신을 다스리는 일은 말처럼 녹록지가 않다. 저자가 볼 때 현대사회는 이런 자기 절제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하긴 주위를 둘러보라. 군침 도는 먹거리부터 근사한 옷과 가방, 날렵하고 매끈한 자동차…. 갖고 싶고 하고 싶은 것들이 하루 종일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술은 줄여야겠고, 담배는 끊어야겠고, 살은 빼야겠는데…. 물론 이런 절제에 성공하는 이들도 꽤 된다. 하지만 옛날, 아니 바로 인터넷이 흔하지 않던 십수 년 전만 떠올려보자. 지금의 인터넷 중독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아예 존재조차 하질 않았으니. 세상이 발전할수록 유혹은 점점 늘어나고 강력해진다. 미국 뉴욕타임스 저널리스트로 여러 소설과 논픽션을 쓴 저자는 이런 뜻에서 현 시대를 ‘과잉의 시대’로 명명한다. 사실 이 책의 원제는 ‘자기 절제 사회’가 아니라 ‘과잉 시대의 자기 절제(Self-control in an Age of Excess)’다. 자기 절제를 무너뜨리는 유혹은 넘쳐나고 그로 인해 인간의 욕망도 흥청거리는데, 어떻게 해야 이를 조절하고 관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보자는 취지다. 책은 전반부 상당량을 할애해 21세기가 얼마나 자기 절제가 힘든 시대인지 갈파한다. 하지만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인간의 본성 자체가 쉽게 통제력을 잃는다는 점도 놓치지 않았다. 그 가운데 하나로 작용하는 게 ‘시간적 비일관성’이라는 심리학적 요인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때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자기 합리화에 도가 텄다는 얘기다. 정신이 말짱한 낮에는 금주를 결심했다가도, 업무에 지친 저녁에는 열심히 일했으니 술 한 잔은 작은 보상이 아니겠느냐며 스스로를 다독거리는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물론 이런 비일관성이 삶을 적절히 버텨내는 윤활유로도 작용하지만, 절제라는 측면만 놓고 보면 고약한 악마인 셈이다. ‘자기 절제 사회’는 참 요상한 책이다. 일단 범주를 규정하기가 힘들다. 온갖 분야의 다양한 지식이 버무려져, 철학서적도 문예비평서도 과학책도 아닌 책이 등장했다. 그러다보니 작가의 현란한 드리블은 멋들어지지만 정작 어느 골대를 노리고 있는 건지는 아리송하다. 결론에 해당하는 마지막 장의 제목도 ‘카르페 디엠(carpe diem·현재에 충실하라)’이라니. 하지만 전제했듯 이 빼어난 드리블 솜씨를 보는 맛은 놓치기 아깝다. 다소 현학적이나 클래식 문학과 현대 대중예술, 진화생물학과 고대 그리스철학까지 넘나드는 재미가 꽤나 근사하다. 소설가여서 그런지 문장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래, 코트를 휘젓고 끝내주는 패스를 해줬으면 됐지 더이상 뭘 바랄까. 슛을 쏠지 말지, 결정은 독자가 스스로 해야지.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국립청주박물관(관장 윤성용)이 10일부터 청명관 기획전시실에서 특별전 ‘정병, 염원을 담다’를 개최한다. 박물관은 9월 11일∼10월 20일 열리는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를 맞아 고려시대의 수준 높은 공예 기술이 오롯한 정병(淨甁·사진)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정병은 원래 인도에서 여행자가 지니고 다니던 물병이었으나 한반도에 불교 공양구의 하나로 전해진 뒤 일반 민가에서 물병으로도 많이 썼다. 이번 전시에는 12세기에 제작된 ‘청자 물가 풍경 무늬 정병’(보물 제344호)을 비롯한 고려시대 정병과 관련 작품 40여 점을 선보인다. 특별전은 정병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물가 풍경 무늬를 소개하는 데 역점을 뒀다. 특히 청동으로 만든 정병은 한두 점을 제외하고 모두 이 무늬가 새겨져 있다. 무늬를 쫙 펼치면 물가에 어우러진 버드나무와 물풀, 물새가 한 폭의 그림처럼 구성된 것도 특징이다. 10월 27일까지. 무료. 043-229-6300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서울 경복궁 안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은 경복궁 복원정비사업에 따라 2025년까지 이전해야 한다. 전시자료 이전과 건물 공사를 고려하면 올해 안에 이전 장소를 선정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여러 지역이 거론되고 있으나 맞춤한 장소를 찾지 못하고 있다. 사실 민속박물관은 내심 서울 용산가족공원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직후에 사용하던 근대 건축물이 여럿 남아있어 이를 활용할 수 있다는 복안이다. 3일 민속박물관에서 열린 국제학술세미나 ‘박물관을 위한 근대건축물의 보존과 활용’이 열린 것도 민속박물관을 가족공원과 연계해 새로운 문화 명소로 키워보고 싶다는 바람이 담긴 자리였다. 이 때문에 이날 세미나에는 근대 건축물을 활용해 성공을 거둔 해외 박물관의 사례가 집중적으로 조명됐다. 특히 일본에서 1965년 개관해 가장 사랑받는 근대 건축물 박물관으로 잡은 메이지무라(明治村)는 스즈키 히로유키(鈴木博之) 관장이 직접 소개해 관심을 모았다. 일본 아이치(愛知) 현 이누야마(犬山) 시에 면적 100만 m² 규모로 자리 잡은 메이지무라는 67동의 메이지시대 건물을 옮겨와 복원하고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1923년 세계적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가 설계한 데이코쿠 호텔 중앙현관을 비롯해 국가지정 중요문화재가 12건에 이른다. 스즈키 관장은 “근대 건축물은 도시화 현대화에 휩쓸려 소멸되는 경우가 많아 이를 박물관으로 활용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며 “다만 근대건축물은 시간이 갈수록 보수비용이 늘어나기 때문에 면밀하게 유지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중국의 다산쯔(大山子) 798은 베이징에 폐허로 방치되던 군수공장 6개를 박물관 작품전시와 예술가의 전시공간으로 탈바꿈시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곳. 2003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문화 상징성을 가진 세계 22개 도시예술센터’로 꼽기도 했다. 황루이(黃銳) 다산쯔 798 예술감독은 근대건축물 활용에서 ‘개방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냉전시대 유물인 공장건물을 없애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역사성을 부여했으며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분야와 상관없이 최소 비용이 드는 작업공간을 제공하고 △중국 중심에서 벗어나 해외 예술단체의 입주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이 다산쯔 798의 성공 요인이었다는 것. 하지만 최근 다산쯔 798에도 대형 자본이 유입돼 상업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황 감독은 “개방성을 유지하되 근대 문화재 보존의 철학을 유지하는 일이 관건”이라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가수 이효리(34)와 기타리스트 이상순(39)이 1일 제주도에서 화촉을 밝혔다. 두 사람은 이날 오후 1시경 제주시 애월읍 소길리에 있는 별장에서 양가 가족과 몇몇 지인들만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이효리의 소속사 비투엠엔터테인먼트는 “가족과 지인들의 축하 속에 화기애애하게 식이 진행됐다”며 “주례 없이 조촐하게 치러졌으나 두 사람은 무척 행복해했다”고 전했다. 일부 언론에 공개된 사진에 따르면 신부는 흰색 드레스에 들꽃으로 엮어 만든 화관을 썼고, 신랑은 하늘색 정장 차림으로 식을 올렸다. 이효리는 1998년 걸그룹 핑클로 데뷔한 뒤 2003년부터 솔로로 전향해 큰 인기를 끌었다. 이상순은 1999년 밴드 롤러코스터 출신으로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로 활동해 왔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인도 뭄바이 빈민촌 하면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떠올리는 사람이 꽤 있다. 인도 작가 비카스 스와루프의 소설 ‘Q&A’를 원작으로 한 영화는 가난해도 꿈을 잃지 않는 하층민 젊은이의 삶을 맛깔 나게 풀어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안나와디의 아이들’은 그런 흥취를 향해 두 눈을 부릅뜬 관운장이 청룡언월도를 내려치는 듯한 책이다. 웃기지 마라. 낭만? 희망? 노숙이나 다름없는 움막에 살면서 밤이면 쥐한테 물어뜯기고, 또 그 쥐를 잡아먹으며 쓰레기를 줍는 인생에 과연 그런 여유가 끼어들 틈이 있을까. 11세 어린애가 당장 내일의 끼니는 고사하고 오늘의 생존도 장담하지 못하는 땅. 그곳이 인도 빈민촌이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를 거쳐 현재 뉴요커 기자로 재직하는 저자가 4년 동안 밀착 취재했다는 뭄바이 빈민촌 안나와디의 실상은 충격적이다 못해 두렵다. 안나와디는 뭄바이의 수많은 빈민촌 가운데 사하르 공항(공식 명칭은 차트라파티시바지 국제공항) 인근에 형성된 곳. 1991년 공항도로 건설에 동원됐던 지방 노동자들이 터를 닦아 현재 3000명 정도가 산다. 그 가운데 정규 직장을 가진 이는 겨우 6명. 대다수는 공항에서 배출하는 폐품을 수거하거나 오염된 폐수에서 건진 물고기를 잡아 삶을 연명한다.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소년 압둘과 수닐에게 인생의 즐거움이란 ‘오늘 하루 얼마나 근사한 쓰레기를 건졌는가’이다. 동네 아이들이 가져온 쓰레기를 매입해 넘기는 중개상쯤에 해당하는 압둘은 새벽부터 밤까지 허리 한 번 펼 새 없이 일한다. 자신의 노동이 철모르는 동생들은 물론이고 무능력한 부모의 밥줄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압둘은 푼돈이나마 저축할 수 있으니 그나마 사정이 낫다. 경찰과 공항 관리요원에게 매를 맞는 건 다반사이고, 쓰레기를 차지하려 칼부림까지 벌이는 경쟁을 매일 겪어야 하는 수닐에게 삶은 지옥과 같은 말이다. 다행히 둘은 예외라지만, 또래들이 그 참혹과 허기를 잊으려고 버려진 수정액으로 만든 화학찌꺼기를 마약처럼 흡입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 보면 이게 진실일까 자꾸만 의심하게 만든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참혹할 수 있나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엔 꿈과 희망이 존재한다는 식의 긍정적인 요소는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다. 저자가 오랫동안 공들인 취재기를 르포 형식이 아닌 소설처럼 썼기 때문에 더 감정이입이 큰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꾸며진 얘기였으면 좋겠다는 바람마저 생긴다. 저자는 흔히 ‘달동네’ 하면 가난해도 서로 돕고 의지하는 인정 넘치는 풍경을 떠올리는 고정관념마저 깨부순다. 가난의 극에 다다른 이들에게 그건 사치고 낭비다. 오늘 좁쌀만 한 여유가 생겼다고 내일도 그럴 거란 보장이 없으니까. 끊임없는 악다구니를 건네며 서로를 물어뜯고 생채기내는 건 벽을 맞댄 이웃들이다. 빈민촌 주민들은 보잘것없는 이권이라도 생기면 그걸 절대 허투루 쓰지 않는다. 수십 년을 보아온 이웃사촌이라도 할 수만 있다면 뭐든지 악착같이 뜯어낸다. 그래야 이 지옥에서 상대를 밟고 짓이긴 뒤 자기라도 벗어날 수 있으리라 착각하면서. 더 암울한 건 딱히 빈민촌과는 상관없어 보이던 ‘세계화’나 ‘서구 경기침체’가 이들에게 직격탄을 먹였다는 점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불황은 인도의 성장둔화로 이어졌고, 고철이나 폐품 가격의 폭락을 불러왔다. 또 돈벌이가 시급해진 대기업마저 재활용사업에 뛰어들며 그들의 먹고살 양식을 앗아갔다. 게다가 인도 경제를 책임져야 할 뭄바이는 해외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도시정비사업에 나서 빈민촌을 밀어버리려 한다. 세상은 그들에게 그 거지같은 잠자리마저 허락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자꾸만 한숨이 흘러나온다. 초반엔 이런 안타까운 상황을 돕지는 못할망정 그저 지켜만 보는 저자가 야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느낄 수 있다. 아, 이게 한두 사람 챙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구나. 이걸 도대체 어떡해야 할까. 왠지 이 무력감, 오래갈 것 같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흔히 서화를 족자나 병풍으로 꾸미는 일을 ‘표구(表具)’라고 한다. 하지만 이 용어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풍이 들어오며 생긴 말로 원래 조선에서는 ‘장황(粧O)’이라고 불렀다. 장황이 표구로 바뀐 것처럼 이 땅의 서화 보존처리는 전통 기법이 상당 부분 유실됐다. 21세기 한국의 문화재 보존처리는 현대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이런 전통을 되찾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29일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 주최로 열린 국제학술심포지엄 ‘유기질문화재 보존처리의 현황과 전망’은 큰 의의를 갖는다. 유기질문화재란 서화에 쓰이는 종이나 가죽, 목재로 이뤄진 문화재를 말한다. 이날 심포지엄은 이런 섬세한 유기질 유물의 국내 보존처리 성과를 공유하고 해외 연구사례를 배워 개선점을 찾는 자리였다. 심포지엄에서는 박지선 용인대 문화재학과 교수(53)가 보물 제1564호 ‘이순신 선무공신교서’를 보존처리했던 과정을 전해 눈길을 끌었다. 2008년까지 교서는 제작 당시의 두루마리가 아닌 서첩으로 보관돼 있었다. 명확하지는 않으나 20세기 초 일본의 영향을 받으며 유행을 좇아 변질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존처리팀은 배접지(褙接紙·전통 장황 방식으로 여러 겹 겹쳐 붙이는 종이)를 일일이 떼어내고 재처리해 지금 일반인들이 마주하는 두루마리 형태로 되살렸다. 박 교수는 “단순히 원형 복원이 능사가 아니라 유물의 보존에 무엇이 최선의 방식인가를 고민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근대문화재도 보존처리는 중요하다. 배순화 서울여대 강사(47)는 성철 스님(1912∼1993)의 두루마기를 보존처리한 경험을 사례로 들었다. 성철 스님은 평생 옷을 손수 기워가며 입어 의복은 누더기처럼 낡았으며 잦은 푸새(옷에 풀을 먹이는 일)로 뻣뻣했다. 일견 낡은 게 문제처럼 보이지만 시급한 것은 푸새였다. 입을 때는 풀을 먹인 게 옷의 형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장기간 보관할 경우 푸새는 곰팡이나 해충의 피해를 유발할 가능성이 높았다. 배 강사는 효소와 활성제를 이용해 여러 번에 걸쳐 풀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이를 해결했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해외 보존처리 사례도 다양하게 소개됐다. 덴마크국립박물관은 중세 바이킹 시대 목재선박을 진공 상태에서 동결 건조시키는 방식을 소개해 주목을 받았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6·25전쟁 때 해외에 무단으로 유출됐던 한국 최초의 근대 지폐 호조태환권(戶曹兌換券) 인쇄 동판(원판)이 60여 년 만에 국내로 환수된다. 문화재청은 27일 “미국에서 불법 거래되다가 미 정부가 압수한 호조태환권 10냥의 앞면 원판이 한미 당국 간 협상이 마무리돼 30일경 국내로 들어온다”고 밝혔다. 그간 미국 측과 공조를 취해온 문화재청과 대검찰청은 다음 달 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검청사에서 미국 국토안보부와 주한 미국대사관으로부터 원판을 공식적으로 전달받을 예정이다. 호조태환권은 구한말인 1892년 고종이 신식화폐조례를 공포하고 호조 산하에 태환서(兌換署)를 설치해 기존에 쓰이던 옛 화폐를 회수하려고 만든 일종의 교환화폐다. 조국의 경제근대화를 실현하기 위해 화폐개혁을 실시하는 데 쓸 목적이었다. 그러나 지폐를 찍어낼 원판을 제작했던 조폐기관인 전환국(典(원,환)局)이 일본의 방해로 운영에 차질을 빚으며 호조태환권은 발행되지 못했다. 이후 일본 제일은행권과 옛 한국은행권이 유통 화폐로 쓰이며 과거에 묻혔으나, 학계에서는 호조태환권을 한국 근대기에 나온 최초의 지폐로 평가한다. 이번에 미국에서 환수되는 호조태환권은 크기 15.875×9.525cm에 무게 0.56kg인 청동 재질 10냥 원판. 가운데 ‘십냥(拾兩)’이라고 크게 보이고, 아래에 대한제국 이전에 채택하려 했던 ‘대조선국(大朝鮮國)’의 국호를 써서 ‘대조선국전환국제조’라고 적혀 있다. 양옆으로는 호조와 태환서가, 가운데 10냥 표기 아래에는 ‘이 환표ㅱ 통용ㅱㅱ 돈으로 교환ㅱㅱ 것시라’고 새겨져 있다. 당시 전환국은 모두 4종(50냥, 20냥, 10냥, 5냥)의 원판을 제작했으며, 현재 국내에서는 국립고궁박물관이 50냥, 10냥, 5냥 동판을 소장하고 있다. 원판으로 찍은 호조태환권 지폐는 당시 대부분 소각되고 거의 남아있지 않다. 2010년 희귀화폐를 취급하는 풍산 화동양행에서 10냥 지폐 1장이 9250만 원에 거래된 바 있다. 화동양행 관계자는 “원판은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국보급에 해당하는 보물”이라고 말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미국으로 유출됐던 이 원판은 6·25전쟁 직전까지 서울 덕수궁에 보관돼 있었다. 그러나 1951년 한 미군이 혼란을 틈타 불법 유출하며 종적을 감췄다가 2010년 그의 유족이 미국 미시간 주에 있는 경매회사 ‘미드웨스트 옥션 갤러리’에 처분을 의뢰하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미국 국무부가 이를 감지하고 주미 한국대사관에 통보해 한국 대검찰청 검찰국제협력단과 미국 국토안보부 이민관세집행청이 수사 공조를 진행했다. 하지만 경매회사 측은 협조 요구를 거절하고 경매를 강행해 원판은 한국계 고미술수집가 S 씨(54)에게 3만5000달러(약 3900만 원)에 넘어갔다. 다시 사라질 뻔했던 동판은 같은 해 양국 수사기관들이 상호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하며 환수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인 끝에 올해 초 미국 사법당국이 연방장물거래금지법을 적용해 S 씨와 경매회사 대표를 체포하면서 원판을 되찾았다. 문화재청은 “국외로 반출된 문화재를 해외 수사기관과 공조해 형사절차를 밟아 되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향후 미국으로 유출된 또 다른 문화재들의 국내 환수 작업에도 좋은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한국편집기자협회(회장 박문홍)는 제143회 이달의 편집상 수상작으로 동아일보 조승업 차장(사진)의 ‘이 티켓 동났다’(문화·스포츠부문) 등 5편을 선정해 27일 발표했다. 종합부문은 충청투데이 하정호 기자(촛불잔치·촛불눈치), 경제·사회부문은 서울신문 신혜원 기자(삼척까지 ‘빨간물’…일주일째 ‘빨간눈’), 피처부문은 아시아경제 권수연 차장(초록 에어컨), 특별상부문은 한국일보 이직 차장(언론의 바른 길,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이 수상했다.}

올해 파독 광원·간호사 50주년이 주목받고 있지만 또 다른 반세기를 맞은 해외동포 역사가 있다. 바로 ‘남미 이민 50주년’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과 섞여 남미로 떠난 한인도 일부 있었지만, 1963년 2월 12일 한국 정부가 농업이민자 103명을 브라질로 보낸 것을 공식적인 첫 남미 이민으로 본다. 고향 떠난 이들의 삶이 누군들 쉬울 리 없겠지만 남미에 정착한 한인들의 고생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층민으로 설움도 많이 겪었고, 다른 나라로 재이민을 간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브라질을 중심으로 한인 의류사업이 번성하고 뜨거운 교육열로 2, 3세대를 잘 키워 내며 이제 한국계 이민자의 현지 위상도 높아졌다. 남미 이민 50주년을 맞아 최근 의미 있는 연구 성과가 나왔다. 김환기 동국대 일어일문학과 교수(49)가 4년간 현지조사를 벌인 노작 ‘브라질·아르헨티나 코리안 문학 선집’(보고사)을 출간했다. 김 교수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이민사회에서 지난 반세기 동안 양산된 문학작품을 모으고, 그 디아스포라 문학에 담긴 사회적 역사적 함의를 짚었다. 김 교수는 일본계 이민사회를 연구하는 일본 호세이대와 공동프로젝트로 이 연구를 진행해 왔다. 한국어로 쓰인 362편의 문학작품을 분석한 김 교수는 남미 이민문학의 특징으로 ‘초국가적 열린 세계관’에 주목했다. 다양한 인종이 어우러진 남미 혼종문화의 영향을 받아 생긴 경향이다. 남미 문화에서 한국과 비슷한 점을 찾으며 동질감을 보이거나 현지에서 겪는 문화적 갈등도 융합을 통해 해소하려는 주제를 다룬 작품이 다수를 차지했다. 이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드러낼 때도 엇비슷했다. 박종하의 시 ‘남미로 오는 기상에서’를 보면 “비행기에 몸을 실어 하늘을 나니/구름이 가로 막혀 지구마저 이별인가”라는 대목이 나온다. 고향을 떠난 안타까움을 직접적으로 표출하기보다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관조자의 시각으로 풀어냈다. 김 교수는 “이민 초기 소수민족으로 냉대를 받았으나 결국 폐쇄적 민족성보다는 다원주의적 태도로 공존공생을 이뤄낸 역사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남미 대자연에 대한 찬양을 담거나 종교적 휴머니즘을 다룬 작품이 많은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일본계 이민사회에 우호적 태도를 보인 작품이 많다는 점이다. 여러 작품에 일본인들이 등장하는데, 긍정적이고 친근한 캐릭터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김 교수의 연구를 도운 최금좌 한국외국어대 포르투갈어과 교수에 따르면, 이는 한인들의 현지 정착에 일본 이민자의 공이 컸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일본인들은 한인보다 60년 정도 앞선 1900년대부터 남미에 터전을 마련했다.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일본말에 능숙한 이가 많았는데, 일본인 이민자들이 말이 통하는 한인들을 적극 도와줬다. 김 교수는 “굴곡진 역사를 공유한 양국이지만 머나먼 지구 반대쪽에서는 서로가 동질감을 느끼는 존재였다”고 말했다. 작품 소재로 의류사업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눈길을 끈다. 남미 이민사회는 브라질 상파울루의 코리아타운 봉헤치루를 중심으로 의류를 만들어 팔며 경제적 번영을 이뤘다. 초기에는 저가제품을 대량 생산하며 기반을 마련했지만 현재는 대형 백화점 명품매장에 입점할 정도로 고급화됐다. 최승재의 ‘얼씨구 절씨구’나 안경자의 ‘쌍파울로의 겨울’ 같은 소설은 벤데(외판원) 생활을 하던 초기 이민자의 모습을 담아 현지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김 교수는 남미 이민문학이 번성한 이유로 현지 한글문학회의 활발한 활동을 꼽았다. 브라질은 1970년 브라질한인회의 전신인 한국문화협회가 창간한 ‘백조’를 시작으로 ‘무궁화’ ‘열대문화’ 같은 종합문예지가 이어졌다. 아르헨티나도 1994년 재아(재아르헨티나)문인협회가 조직된 뒤 동인지 ‘로스안데스문학’을 발간하고 있다. 김 교수는 “한국 이민사회의 정체성을 문학을 통해 지키려는 노력이 남미 이민문학이란 독특한 역사적 산물을 낳았다”고 평가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조선왕조 당대의 화가들이 오백 년 도읍지 한양의 풍경을 담은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은 고미술 특별전 ‘한양유흔(漢陽留痕)’이 서울 종로구 관훈동 공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리고 있다. 1983년 문을 연 공화랑이 공아트스페이스로 재개관한 지 3주년을 맞아 여는 이번 전시는 고려대박물관과 협력해 조선 회화의 진수라 부를 만한 고미술 작품 100여 점을 소개했다. 1부 ‘한양, 꿈을 펼친 화가들’에서는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호생관 최북, 현재 심사정과 같은 시대를 호령했던 화가들이 그린 한양의 흔적을 모았다. 2부 ‘왕실, 그 속을 거닐다’는 도화서(圖畵署) 화원들이 그린 궁중기록화와 궁중 의물(儀物), 사대부 초상화를 전시한다. 1부에 소개된 겸재의 ‘장동팔경도(壯洞八景圖)’는 개인 소장품으로 일반인에게는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다. 서울 인왕산과 백악산(북악산)의 명소 8곳을 담은 이 작품은 백악산 자락에서 나고 자라 인왕산 계곡에서 말년을 보낸 겸재의 작품이라 더욱 애정이 묻어난다. 겸재의 작품 중에서 표암 강세황의 발문이 적힌 8폭 병풍 ‘백납병풍(百納屛風)’과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사직노송도(社稷老松圖)’도 놓치면 아까운 작품이다. 2부에서는 1743년(영조 19년)에 거행된 대사례(大射禮)의 광경을 그린 ‘대사례도’가 인상적이다. 대사례는 임금이 성균관에서 석전례(공자에게 올리는 제사)를 지낸 뒤 신하들과 행하는 활쏘기 의식을 말한다. 고려대박물관이 소장한 이 작품은 보존을 위해 앞으로 더이상 전시하지 않을 예정이어서 실물로 보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라고 한다. 9월 15일까지. 3000∼5000원. 02-735-9938정양환 기자 ray@donga.com}

2011년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는 당시 ‘145년 만의 귀환’이란 헤드라인으로 큰 관심을 모았다. 반환이냐 대여냐를 놓고 지금도 말이 많지만, 1991년 한국 정부가 프랑스에 반환을 공식 요청한 지 20년 만에 어렵사리 거둔 성과였다. 외교통상부 프랑스 담당관과 주프랑스 한국대사관 정무참사관을 지낸 저자는 거의 모든 양국 간 의궤 협상에 참여하며 겪은 일들을 에세이 형식으로 엮었다. 외부에서야 돌아온 보물의 가치에 더 주목했겠지만, 저자에게 의궤는 ‘긴장과 불안의 외줄타기 외교’와 동의어였다. 1999년 4월 처음 열렸던 민간전문가 협상 이래 한번도 쉬웠던 적이 없었다. 양국 협상단은 처음부터 자기 주장만 내세우며 공세적 태도를 취했다. 2000년 7월 협상 때는 자크 살루아 프랑스 감사원 최고위원이 주먹으로 탁자를 쾅 내리치고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기도 했다. 이후에도 프랑스는 의궤 대신 그에 상응하는 문화재를 제공하길 요구했고, 한국은 한국대로 여론에 휘청거리며 협상을 진전시킬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과도한 업무로 유산까지 겪었다. 오죽했으면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도 “의궤 문제라면 지긋지긋해 신물이 난다”고까지 말했을까. ‘터널 속에 갇혀버렸던’ 협상은 2009년 박흥신 주프랑스 대사가 부임하며 전환점을 맞았다. 박 대사는 여전히 자국 입장만 견지하는 프랑스 관계자들에게 “한국 국민은 맞교환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의궤를 돌려주고 한국인의 영원한 사의를 선물로 받으라”고 폭탄 선언을 했다. 하지만 이것이 결국 프랑스의 높은 벽을 무너뜨리는 돌파구로 작용했다. 이후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고 결국 대여라는 형식을 취하긴 했지만, 저자는 한번도 외국에 문화재를 돌려준 적 없던 프랑스 문화재법을 뛰어넘었다는 데 큰 의의를 뒀다. 현재 미국 애틀랜타 부총영사로 재직 중인 저자는 여전히 외교무대에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이제 이 책을 통해 의궤를 둘러싼 너무나 길고 혼신을 다했던 줄다리기의 줄을 그만 놓고 싶다는 심정을 조심스레 피력한다. 맡은 바에 최선을 다했기에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본 샹스(Bonne chance·행운을 빕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서해안에서 어선 한 척이 실종됐다고 치자. 사람 목숨이 걸렸으니 쓸 수 있는 방법은 총동원해야 할 터.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연안 앞바다를 모조리 훑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선박, 인력이 투입돼야 할까. 그때까지 배에 탄 선원들이 살아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확실하진 않더라도 ‘가능성 높은’ 지역부터 찾는 게 현실적이다. 일종의 도박이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이 ‘가능성 높은’에는 복잡한 함의가 숨어 있다. 짐작건대 배를 구출하기 위해 정부와 과학자들은 그간의 경험과 실종 어선을 둘러싼 다양한 변수를 고려할 것이다. 그리고 최대한 정답을 구하려 애쓸 게 분명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누구도 배의 위치를 장담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판단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베이즈의 정리’는 바로 이 대목에서 탄생한 이론이다. 1740년대 영국의 토머스 베이즈 목사(1701∼1761)는 자신도 얼마나 대단한지 가늠할 수 없었던 엄청난 정리를 발견했다. 그는 ‘세상의 증거에 기초해 신의 존재에 대한 합리적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결론을 도출할 방법 하나를 착안해 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한 대상에 대해 가진 초기의 믿음을 객관적이고 새로운 정보로 업데이트할 때 보다 개선된 새로운 믿음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게 골자다. 무슨 소리인가 갸우뚱거려진다면 베이즈 목사가 직접 했던 실험을 사례로 들어보자. 당구대에 공을 굴리고 멈춰 선 위치를 찾는 게임을 한다고 상상해보라. 게임 도구는 다른 공들이다. 첫 공은 치운 뒤 두 번째 공을 굴려 보여주고 이 공이 ‘첫 공과 비교하면 오른쪽 아래에 섰다’ 정도의 정보를 알려준다. 그러면 정답은 몰라도 첫 공이 섰을 것이라 추측할 범위가 다소 줄어든다. 세 번째, 네 번째 공을 굴리고 나면 그 범위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베이즈의 정리란 이것이다. 새로운 정보가 추가로 투입될수록 정답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더 커진다. 바로 ‘확률’이 높아진다는 얘기다. 지금 시대라면 이런 확률 이론이 익숙하지만 베이즈의 정리는 그 후 오랫동안 멸시를 당했다. 당대 지식인들은 전혀 과학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고 봤다. 왜냐하면 이 논리엔 주관적 요소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출발부터가 그렇다. 처음 굴린 공이 당구대 밖으로 튀어나가지 않았다는 것은 누가 보장하나. 당구대에 있다는 전제를 인간이 자의적으로 만든 셈이다. 그리고 아무리 많은 공을 굴려도 결코 정답은 구할 수 없다. 99% 확실해도 1%의 오차는 존재한다. 그런데 이를 따른다면 이 역시 주관이 개입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듯이 베이즈의 정리, 즉 확률은 현재 지구상에서 너무나 폭넓게, 그리고 유용하게 쓰인다. 저자에 따르면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은 군대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암호를 풀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아군이 쏜 대포가 어디를 맞힐지 예측하거나 전투에 내보낸 비행기가 추락할 위험도를 찾는 데도 도움이 됐다. 객관적 수치만으로 이를 찾기란 불가능하다. 당장 전쟁에서 이길지 질지 모르는데 100% 확실한 것을 언제 기다리겠나. 이처럼 확률은 효율성을 무기로 기존 과학의 입장을 무너뜨렸다. 솔직히 이 책은 상당히 어렵다. 이 분야에 관심이 없는 이라면 용어도 낯설고 등장인물도 생소하겠다. 분량 역시 만만찮다. 하지만 다행히 저자도 저널리스트이지 과학자는 아니라서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쓰려고 노력했다. 일종의 역사서적을 읽는 느낌이랄까. 최소한 수학책 들여다볼 때처럼 머리가 핑핑 돌지는 않으니 너무 걱정 마시길.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진 속 태극기는 건물에 비해 너무나 컸다. 휘날리는 모습도 어색하다. 그려 넣은 티가 역력했다. 20세기 초 별다른 보정기술도 없으면서 사진에 투박하게 태극기를 넣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 속에는 민족의 독립을 소망하는 재외동포의 애달픈 염원이 담겨 있었다. 지난해 102년 만에 되찾은 옛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이 미국 내 한인들 사이에서 자주독립의 상징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주는 1910년대 우편엽서가 처음으로 발견됐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안휘준)은 14일 “독립운동가 김호(1884∼1968)의 외손자인 안형주 선생(76)이 보관하던 기록물에서 ‘미국 와싱톤 대한뎨국 공사관’ 엽서를 찾았다”고 밝혔다. 그간 태극기가 그려진 주미공사관 사진은 당시 공사관의 모습을 담은 대표적 유물로 꼽히면서도 그 출처와 의도가 명확하지 않았다. 왜 이런 합성사진을 만들었는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후대에 누가 장난삼아 태극기를 그려 넣은 게 아니냐는 추측도 나돌았다. 하지만 이번에 사진이 실린 엽서 원본이 발견되며 미스터리는 단박에 풀렸다. 발견된 엽서에는 마영준이란 사람이 허승원에게 보내는 새해인사가 적혀 있다. 수신 주소는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 본부였다. 이 단체는 1909년 조직된 해외 한인 독립운동단체로 독립자금을 모으고 기관지 ‘신한민보’를 발간해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조사한 결과 허승원은 도산 안창호와 교류하며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국민회 간부였다. 마영준도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한글을 가르치며 민족의식 고양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이 엽서가 일회성으로 만든 게 아니라는 사실도 추가로 확인됐다. 독립기념관이 소장한 안창호와 서재필 유물에서도 같은 엽서가 나온 것. 그런데 똑같이 태극기가 합성된 앞면 사진과 달리 뒷면 디자인은 엽서마다 조금씩 달랐다. 여러 차례에 걸쳐 지속적으로 제작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김도형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독립운동가들이 공사관 사진이 담긴 우편엽서를 주고받았다는 것은 처음 알려진 사실”이라며 “당시 재미 독립운동 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라고 평가했다. 어색해 보이는 합성 태극기는 당시로서는 뜨거운 결의를 담은 강력한 메시지였다. 엽서를 만든 시점은 이미 일제가 나라를 빼앗고 공사관도 강제로 단돈 5달러에 팔아넘긴 뒤였다. 태극기를 게양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재미동포에게 공사관은 조국이 자주독립 외교를 떨치던 상징이었다. 강임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활용홍보팀장은 “서투른 솜씨지만 큼지막한 태극기를 새겨 다시 공사관과 조국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재단은 홈페이지(www.overseaschf.or.kr)를 통해 신청하는 일반인 1000명에게 엽서 복제품을 무료로 배포한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