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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경매사로 꼽히는 필립스옥션이 최근 작가와 구매자를 직접 연결하는 플랫폼 ‘드롭숍(Dropshop)’을 개설해 화제가 됐다. 통상 경매사는 작가와 직거래를 좀처럼 하지 않지만, 온라인 플랫폼 발달과 팬데믹의 영향으로 이러한 원칙이 깨지고 있다. 조너선 크로켓 필립스옥션 아시아 회장은 12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10년간 일어난 시장의 구조 변화와 세대교체 움직임을 주목했다”며 “작가와 경매사의 협력체계를 구축하는 데 필립스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드롭숍은 매달 필립스가 선정한 작가가 작품을 웹사이트로 판매하는 온라인 쇼핑몰이다. 한 달에 한 명의 작가만 선보이며, 이 사이트에서만 살 수 있는 한정판 작품을 별도로 제작한다. 작가가 직접 작품을 판매하는 ‘1차 시장’과 이미 누군가 소장했던 작품을 거래하는 ‘2차 시장’의 경계를 허물겠다는 의도다. 크로켓 회장은 최근 침체되는 미술 시장의 돌파구를 어떻게 찾고 있냐는 질문에 “항상 소장가와 연결될 새로운 방식을 모색한다”며 “작가와 소장가가 직접 교류하는 플랫폼을 통해 글로벌 미술 생태계를 확장하고 싶다”고 밝혔다. 필립스는 프리즈 서울(6∼9일) 개막을 맞아 서울 종로구 송원아트센터에서 팝업 전시도 열었다. 크로켓 회장은 “지난해에는 젊은 영국 갤러리와 협업 전시를 열었고, 올해는 기성 작가와 신진 작가를 골고루 보여주려 했다”며 “이유라, 세오, 김호재 등 한국 작가의 작품도 선보이게 돼 기뻤다”고 했다. 그는 아시아의 주요 미술 중심지로 서울에 대해 “한국의 소장가들이 현대미술에 열린 태도를 갖고 있다”고 했다. 이어 “한국이 큰 시장은 아니지만 미술품을 소장해 온 오랜 역사가 있다”며 “글로벌 갤러리가 분점을 열어 지역 미술 시장과 해외 기관의 연결고리가 돼 줄 것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필립스는 크리스티, 소더비처럼 홍콩에 상설 경매장을 열었다. 이에 대해 그는 “홍콩은 자유항이라는 유연성과 동서양이 혼합된 문화적 배경이 큰 이점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세계 미술 시장의 20%를 차지하는 중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 혹은 세 번째로 큰 시장이자 세계 최대 미술 경매 시장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올해 4월 14일부터 약 두 달간 ‘히스테리아: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전을 통해 국내 작가 13인의 구상 작품을 소개한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이 영국 작가 이시 우드(30)의 개인전을 연다. ‘히스테리아’전의 연장선에서 동시대 구상 회화의 경향을 새롭게 조망하겠다는 취지다. 7일 개막한 우드의 개인전 ‘I Like To Watch’는 신작 회화 47점과 설치·영상 작품, 출판물을 선보인다. 최근 수년간 해외 미술계에서 인기를 얻었던 우드의 국내 개인전은 처음이다. ● 좁은 캔버스 속 비밀 세계미술관 1전시실로 입장하면 캔버스의 사이즈가 관객을 당황하게 만든다. 작품 대부분이 가로세로 30cm를 넘지 않을 정도로 작기 때문이다. 또 모든 작품은 절대 전체 풍경을 보여주지 않는다. 작가는 작은 슬리퍼가 놓인 카펫, 자동차 보닛의 오른쪽 부분, 피자 한 조각 등 어딘가를 확대해서 본 듯한 장면을 묘사한다. 마치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으로 세상을 보는 듯 집착적이어서 답답함을 느끼게도 만든다. 전시장의 유일한 대형 작품은 바닥에 깔린 타일 설치작 ‘바닥2’이다. 검은 타일을 모자이크 형태로 붙인 작품 위에는 숫자만이 가득하다. 1전시실 작품들 대다수에선 작가가 일상에서 어느 부분은 보여주겠지만, 전체는 숨기겠다는 ‘보여주고 싶지만, 보여주기 싫다’는 이중적인 태도가 느껴진다. 2전시실에 가면 좀 더 큰 크기의 작품들이 나온다. 벨벳 위에 그린 ‘COP26’은 지구 위에 둥둥 떠 있는 가죽 재킷을 묘사해 기후 위기에 대한 대응이 공허한 외침으로 그치는 현실을 풍자한다. 회화 ‘오페라에서 껌을 씹는 캐리’와 ‘그렇다고 합니다’는 익살스러운 인물의 표정, 동물들 옆에 엉뚱하게 배치된 손목시계로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과거와 현대 스타일 자유롭게 혼합3전시실에서는 DIY(Do It Yourself·자기 주도적) 예술가로서 우드의 면면이 좀 더 다채롭게 펼쳐진다. 영국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빈티지 옷과 부츠에 그림을 그린 설치 작품이 등장하고, 프로젝트룸에서는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토대로 만든 뮤직비디오 8종이 상영된다. 우드는 미술가로서는 물론이고 신예 음악가로도 주목받았다. 글로벌 갤러리인 가고시안과 유명 음악 프로듀서 마크 론슨에게 각각 음악 계약을 제안받았지만 모두 거절한 일화가 유명하다. 지난해 뉴욕타임스(NYT) 보도에 따르면 우드는 자신의 작업이 상품화되고, 대상화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껴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그의 회화에선 중세부터 신고전주의까지 다양한 사조의 스타일을 조합하고, 아주 오래된 것 같은 풍경 위에 현대적인 대상을 올려놓는 등 혼합하는 경향이 보인다. 이는 시간적 흐름에 구애받지 않고, 개인에게 맞는 시각 언어를 자유롭게 활용하는 최근 미술의 흐름을 보여준다. 그의 회화와 음악만큼 유명한 것은 14세 때부터 블로그에 작성해온 일기다. 일민미술관은 우드가 쓴 블로그 글 일부를 골라 한국어로 번역한 책 ‘퀸 베이비’를 이번 전시에 맞춰 출간했다. 윤율리 책임큐레이터는 “우드의 실험은 회화를 내용이나 형식, 공간이나 평면 등 어느 하나로 환원하려는 전통적인 시도에 혼란을 가한다”고 했다. 이어 “일민미술관은 이런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주의 깊게 살피며 새로운 도전을 조망할 것”이라고 밝혔다. 11월 12일까지. 7000∼9000원.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캔버스 위 볼록한 배 모양의 살구색 물체가 붙어 있고, 그 옆으로 붉은 색채가 터져 나온다. 흰 바탕에 빨간색만 가득했다면 화면은 폭력과 죽음만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배경에 짙은 검은색이 드리우며, 어둠과 대비되는 빨강은 분출하는 에너지와 생동감을 표현한다.그 위 터진 장기 같은 물체는 마지막 에너지를 내뿜으며 죽어가는 중일까, 아니면 새로운 무언가를 탄생시키는 중일까. 작가는 ‘중간(In-Between)’이라는 모호한 제목을 붙여 해석을 관객의 몫으로 맡긴다.흔히 탄생을 축복이고 죽음을 종말이라고 하지만, 때로는 탄생이 폭력이고 죽음이 안식이 될 수 있다. 인간사의 모호한 경계를 탐구해 온 인도 출신의 영국인인 세계적 예술가 애니시 커푸어(69)의 작품이 한국을 찾았다. 커푸어는 미국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의 랜드마크인 반짝이는 거대한 콩 모양 조각 ‘구름 문’,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 야외에 자리한 금속 공을 쌓아올린 ‘큰 나무와 눈’, 원 모양의 ‘하늘거울’ 조각으로 잘 알려진 작가다.눈으로 읽는 역설의 시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에선 K1, K2, K3 전관에 걸쳐 커푸어의 개인전 ‘Anish Kapoor’가 열리고 있다. 국제갤러리에서는 7년 만에 열리는 커푸어의 전시로, 대규모 조각부터 회화, 드로잉까지 20여 점을 선보인다. 작품 대부분이 최근 10년 내 만들어졌다.커푸어는 ‘구름 문’처럼 거울같이 매끄러운 스테인리스 스틸 대형 조각으로 유명하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거친 표면과 육중한 무게감이 돋보이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시각적 효과로 눈길을 잡아끄는 커푸어 특유의 스타일은 여전하다.K3관의 대형 조각 4점은 괴물의 입, 동물의 장기처럼 기괴한 형태지만, 바닥에서 떠 있는 상태로 벽에 고정돼 무게를 가늠하기 어렵다. 거칠고 구멍 난 표면을 얇은 그물망으로 감싸 어딘가에 갇힌 듯 얌전하고 온순한 느낌도 자아낸다. 높이 3m가 넘는 붉은색 조각 ‘무제’(2017년)는 멀리서 보면 단단한 돌덩이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살펴보면 움푹 팬 흔적이 있고 살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겉만 봐서는 재료가 부드러운 실리콘임을 알기 어렵다는 것도 그의 작품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요소다.K2관에선 그가 최근 새로 공개한 회화들을 만날 수 있다. ‘In-Between’을 포함해 빨강과 검정으로 죽음과 탄생, 질서와 파괴 등 상반된 개념을 한데 모은 작품들을 볼 수 있다.보이지 않는 것을 보다그가 탐구하는 ‘역설의 미학’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 K1관 안쪽에 놓인 ‘반타블랙’을 이용한 작품들이다. 반타블랙은 2014년 한 영국 기업이 개발한 것으로, 빛을 99.6% 흡수해 완벽에 가까운 암흑을 나타낸다. 반타블랙을 이용한 조각 앞에 서면, 무언가를 보고 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마법 쇼를 보는 듯하다.커푸어는 관객들의 시각을 이리저리 교란시키며, 20세기 이후 예술이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과거 인터뷰에서 “마르셀 뒤샹(1887~1968)이 모든 물건이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면, 나는 그다음으로 모든 물건이 무언가를 상징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아무 물건이나 예술가가 선택하고 전시한다고 작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서 시적인 의미를 찾는 것이 이 시대 예술가의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이를 위해 그는 여러 종교와 신화의 맥락을 차용하며, 인간사에 대한 성찰을 제공하기 위해 애쓴다. 이러한 노력의 이면에는 인도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인도 상류층 학교를 다니고 이스라엘 집단 농업 공동체 키부츠에서 생활했으며 런던예술대를 다닌 커푸어의 다양한 문화적 배경이 영향을 끼쳤다. 전시는 10월 22일까지. 무료.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반짝이는 것. 화려한 것. 비싼 것.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미술에서 가장 쉽게 관심을 받는 이야기는 이런 것들입니다.덕분에 아트페어 기사를 쓰게 되면, 어떤 작품이 얼마나 비싼 가격에 팔렸고,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이 페어를 찾았으며, 그 안팎에서는 또 얼마나 화려한 파티들이 벌어졌는지를 다루게 됩니다.저 역시 그런 기사를 썼지만.. 오늘 뉴스레터에서는 좀 더 솔직한 이야기를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한남 나이트, 디너 파티, VIP 오픈, 삼청 나이트…. 영어 단어들로 장식된 시간을 지나고 난 뒤의 차분함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공유합니다.반짝이는 것을 쫓는 사람들“한국에서 1년 동안 소비할 샴페인의 절반은 이번 주에 쓰였을 것 같아요.”프리즈 서울의 6일 개막을 전후로 한 ‘아트위크’의 막바지인 오늘 어느 갤러리스트가 제게 한 말입니다.5일부터 7일까지 한남동, 청담동, 삼청동 갤러리들이 나눠준 술과 음식은 물론, 미술계 관계자들이 참가했을 수많은 저녁 식사와 파티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가느다란 샴페인 잔에서 수직으로 피어오르다 사라지는 거품처럼, 아트페어와 갤러리에는 반짝이는 무언가를 쫓는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이들은 멋진 옷을 입고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해 보이고,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며 분위기를 마음껏 즐겼습니다.작품 구경만큼이나 사람 구경이 재밌는 일주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가장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나타났지만, 그 결과는 조금씩 다른 패션 스타일로 나타났죠. 다양한 모습을 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품의 취향도 옷처럼 모두 다를 것입니다.각자가 좋아하는 취향의 작품을 즐기고 만족할 수도 있겠지만, 아트페어에서는 그 작품들이 돈으로 가치가 매겨진다는 현실도 마주하게 됩니다. 어떤 작품은 몇백만원, 다른 작품은 몇십억을 하는 냉정한 숫자 앞에서 사람들은 주눅이 듭니다.내가 좋아하는 작품은 별로인가?비싼 작품이 더 좋은 거겠지?나는 왜 그런 작품을 가질 수 없을까.그 결과 페어에서 뉴스가 되는 것은 ‘최고가 작품’이죠.‘최고가’라는 수식어 앞에서 우리가 작품 앞에서 눈과 마음으로 마주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은 생각의 저편으로 멀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이 말들이 작품의 설명을 대신합니다.“##억 원에 팔린 작품이래.”“이게 그렇게 비싼 작품이래.”“이걸 산 사람은 얼마나 돈이 많을까?”오늘의 숫자와 내일의 감각 사이프리즈 서울 VIP 오픈과 기사 마감으로 정신없는 시간이 지난 뒤. 조금 한산해진 페어장 카페에서 컬렉터 A씨를 만났습니다. 자기만의 취향이 보이는 컬렉션에 제가 예전부터 호기심을 갖고 있었던 분이었죠.그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수년 전에 갤러리에서 두 작품을 보여주었어요. 둘 다 가격은 2000만 원 정도로 비슷했고, ㄱ보다 ㄴ작품이 제 취향이었죠. 그런데 왠지 제 눈에 ㄱ 작품이 시장에서 인기가 많을 것 같다는 느낌이 왔어요.고민하다 결국 취향대로 선택했는데, ㄱ 작품이 몇 년 사이에 수억까지 가격이 오르더군요. 지금도 제 선택에 후회는 없지만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내가 그때 조금만 양보해서 ㄱ 작품을 골랐다면 그 차익으로 ㄴ 작가의 작품 여러 점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웃음)”그의 이야기에서 컬렉터에게 주어지는 많은 조언들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투자는 생각하지 말고 좋아하는 작품을 사라? 아니면 투자를 위해 오를 작품을 골라라? 사실은 둘 다 모든 상황에 적용하기는 어려운 말입니다.예술 작품의 가격을 생각하면, 그저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사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작품 가치의 향방을 예측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고요.다만 나의 안목과 선택을 믿는다면 당장의 가격은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결론으로 대화는 마무리 지었습니다. 특히 그 안목의 기준이 순간의 감흥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관한 지식과 감각, 그리고 미술사 흐름에 대한 이해에 기초한 것이라면 말이죠.지금 시장의 반응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작품이 미술사에 남게 될 것이라면 오랜 시간이 증명해 줄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또 단순히 금전적인 가치뿐 아니라 좋은 작품을 집에 두고 가족들이 감상하며 얻는 감각과 경험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도요.공허한 시간들, 중심이 필요해아트페어를 계기로 작품의 가치는 돈으로 매길 수 없다거나, 글로벌 페어가 한국 미술계를 황폐하게 할 거라는 순진한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프리즈 위크를 지나면서 이는 되돌릴 수도 없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하는 흐름임이 더 피부에 와닿았습니다. 페어를 계기로 다양한 사람들이 만나고, 서로 생각을 나누며, 한국에 대해 알게 되는 장이 열린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그렇지만 서울보다 오래전부터 글로벌 페어를 열어왔던 홍콩을 떠올리면, ‘아트위크’가 공허한 시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중심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매년 ‘아트바젤 홍콩’이 열리면 미술인들이 이 도시를 찾고 떠들썩한 파티를 열지만, 정작 홍콩 미술 씬에 대해서는 알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오래전부터 운영되어 온 여러 비영리 기관은 있었지만, 제대로 된 미술관인 M+가 문을 연 건 최근의 일입니다.미술인들이 모여든다고 해도, 한국 미술이 어떤 맥락을 갖고 있는지, 그것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없다면 결국 이 도시는 하나의 거대한 마케팅 플랫폼, 파티장에 그치고 말 것이라는 이야기죠.가격은 중요하지만, 그 가격을 이야기하기 전에 작품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지. 그것이 과연 진실한 감각인지. 또 더 나아가 세계 보편적인 미술사 맥락에 비추어 합당한 논리를 갖추고 있는지를 고민해봐야 할 시간이 닥쳐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샴페인의 거품처럼 반짝이다 터져버릴 예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버텨낼 예술의 가치를 우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말입니다.이번 주 프리즈 서울과, 키아프, 서울아트위크를 겪은 독자분들은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기자 kimmin@donga.com}

한국 소설이 우리 시대의 노동을 제대로 그리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소설가 11명의 모임 ‘월급사실주의 동인’이 펴낸 첫 동인지다. 비정규직, 자영업,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에 더해 가사 구직 교습 등 우리 시대의 다양한 노동의 양태를 소재로 한 소설을 엮었다. 저자들은 모두 직장인으로 일한 경험이 있다. 김의경의 ‘순간접착제’는 삼각김밥 공장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청년 여성의 이야기를, 서유미의 ‘밤의 벤치’는 전업주부 경진이 사는 아파트 단지 안 벤치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염기원의 ‘혁명의 온도’는 노조 활동을 하면서 직장생활에 만족하는 군무원의 자조 어린 목소리를 담았다. 장강명의 ‘간장에 독’은 팬데믹의 직격탄을 맞은 여행사를 배경으로 신입사원이 겪는 어려움을 그렸다. 이들 작가는 겉으로는 소소하게 보일지라도 개인에게는 크게 다가오는 고난을 그리는 것을 통해 예술의 새로운 힘을 모색하고자 한다. 미국 작가 존 스타인벡이 ‘분노의 포도’에서 대공황의 대책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진 못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과 그 사이의 숭고함을 그려냈듯 현실을 묘사하는 것 자체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취지다. 장강명 작가는 기획의 말에서 “성실한 노동의 가치는 추락하고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다”며 “이러한 현상을 과거의 ‘자본가 대 노동계급’이라는 과거의 틀로 파악하고 대처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원인도 대책도 모르지만 최대한 고통스럽다는 사실만큼은 동시대 작가의 눈으로 쓰고자 했다”고 덧붙였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5일 서울 용산구의 한 식당. 평소라면 손님들이 각자 테이블에 앉아 식사했을 이곳에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서서 영어와 한국어로 이야기를 나눴다. 여기엔 일본 도쿄 모리미술관장 가타오카 마미, 영국 델피나재단 창립이사 에런 세자르 등 해외 미술기관 인사와 언론인, 예술가들이 섞여 있었다. 이들은 휘슬(서울), ROH(인도네시아 자카르타), STPI(싱가포르), 다케 니나가와(일본 도쿄) 등 4개 갤러리가 준비한 디너파티에 참석한 것이다. 글로벌 아트페어 ‘프리즈 서울’ 개막일인 6일 전후로 해외 주요 미술인들이 서울로 몰렸다.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9일까지 열리는 프리즈 서울은 갤러리들이 작품을 판매하는 ‘미술장터’를 넘어 거대한 마케팅 플랫폼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개막 전부터 여러 갤러리들이 합동 디너파티를 개최하는 것은 물론이고 샤넬, 프라다, 보테가 베네타 등 해외 유명 브랜드도 앞다퉈 팝업 전시와 파티를 열었다. 프리즈 서울과 함께 6일 코엑스에서 동시 개막한 국내 최대 아트페어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키아프)’도 10일까지 열린다.● 밀레부터 백남준까지거고지언(가고시안), 하우저앤드워스 등 글로벌 갤러리 120여 곳이 참가한 페어장의 6일 사전 프리뷰 풍경은 비교적 차분했다. 최근 미술시장 침체로 갤러리들은 고가의 작품보다는 아시아 컬렉터에게 꾸준히 인기를 모은 작품을 전시했다. 거고지언은 백남준의 ‘TV 붓다’와 조너스 우드의 정물화를 앞세웠고, 하우저앤드워스는 ‘화가들의 화가’로 불리는 필립 거스턴, 20세기 대표 여성 예술가 루이즈 부르주아를 내세웠다. ‘프리즈 마스터스’에서는 장프랑수아 밀레, 파블로 피카소, 폴 세잔 등 고전 대가들의 드로잉과 희귀 서적 등 고미술 작품들도 눈길을 끌었다. 갤러리들이 공개한 첫날 판매 실적도 무난했다. 지난해 조지 콘도의 40억 달러 상당 회화 작품을 판매한 하우저앤드워스는 이날 라시드 존슨의 회화 ‘Seascape “Ship of Fools”’(약 13억 원), 콘도의 회화 ‘Internal Combustion’(약 10억 원) 등 13점이 주인을 찾았다고 밝혔다. 페이스갤러리는 알렉산더 콜더의 1965년 조각을 판매했다. 작품 제목과 거래 가격은 밝히지 않았지만 호가는 200만 달러(약 26억 원)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인 컬렉터 A 씨는 “경기 불황으로 갤러리들이 판매액에 대한 기대를 접고 전속 작가를 소개한다는 느낌이었다”며 “올해는 프리즈 자체보다 팝업 전시나 국내 갤러리들이 신경 쓴 전시와 이벤트가 좋았다”고 말했다. 키아프는 첫날 방문객 수가 지난해보다 30% 늘었다. 갤러리현대는 라이언 갠더의 ‘In the Begging’을, 국제갤러리는 우고 론디노네의 ‘Light Green Clock’을 각각 선보였다. 학고재는 정영주 작가, 이화익갤러리는 최병진 작가의 작품을 출품했다.● 세계 미술 VIP들 서울로미술계에 따르면 프리즈 서울을 계기로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 후원회, 미국 뉴욕 디아미술재단 디렉터, 마이애미 배스미술관 후원회, 애스펀미술관 후원회, 중국 UCCA 현대미술센터 관장 등 주요 인사들이 한국을 찾았다. 해외 미술인들은 아트페어는 물론이고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김범 강서경 개인전이 열리는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 김환기 회고전이 열리는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 경기 파주 비무장지대(DMZ)에서 열리고 있는 현대미술 전시 ‘체크포인트’도 관람한 것으로 전해졌다. 권민주 프리즈 아시아 VIP 및 사업개발 총괄 이사는 “VIP들이 한국 전통문화를 소개하는 (서울 종로구) 아름지기와 예올을 방문한 뒤 한식당 ‘온지음’을 찾거나, ‘조선 양화’전이 열리는 호림박물관(서울 강남구)을 방문하는 것도 주요 동선”이라고 밝혔다. 이숙경 영국 휘트워스미술관장은 “영국에서도 글로벌 아트페어가 열리면 이에 맞춰 주요 미술관이 중요한 전시를 연다”며 “아트페어를 계기로 현지 미술을 널리 알리려는 노력은 필요하다”고 말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5일 서울 용산구의 한 레스토랑. 평소라면 손님들이 각자 테이블에 앉아 조용히 식사했을 이곳에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서서 영어와 한국어로 이야기를 나눴다. 여기엔 마미 카타오카 일본 도쿄 모리미술관장, 아론 세자르 영국 델피나재단 창립이사 등 해외 미술 기관 인사와 언론인, 예술가들이 섞여 있었다. 이들은 휘슬(서울), ROH(자카르타), STPI(싱가포르), 다케 니나가와(도쿄) 등 4개 갤러리가 준비한 디너파티에 참가한 사람들이다.글로벌 아트페어인 프리즈 서울의 6일 개막을 전후로 해외 주요 미술인들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프리즈 서울은 갤러리들이 모여 작품을 판매하는 ‘미술장터’이지만, 거대한 마케팅 플랫폼이 열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프리즈 서울이 개막하기 전부터 여러 갤러리들이 합동 디너파티를 개최하는 것은 물론 샤넬, 프라다, 보테가 베네타 등 명품 브랜드도 앞다투어 팝업 전시와 파티를 열었다. 프리즈 서울 안팎의 풍경을 소개한다.● 세계 미술 VIP들이 서울에미술계에 따르면 프리즈 서울을 계기로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 후원회, 구겐하임 아부다비 미술관장, 미국 뉴욕 디아미술재단 디렉터, 마이애미 배스미술관 후원회, 아스펜미술관 후원회, 중국 UCCA 현대미술센터 관장, 일본 모리미술관장 등 주요 미술계 인사들이 한국을 찾았다. 홍콩의 ‘슈퍼 컬렉터’인 애드리언 챙을 비롯해 국내외 연예인들도 6일 페어장에서 볼 수 있었다.해외 미술인들은 아트페어 관람은 물론 국립현대미술관, 김범, 강서경 개인전이 열리는 리움미술관, 김환기 회고전이 열리는 호암미술관, 경기 파주 비무장지대(DMZ)에서 열리고 있는 현대미술 전시 ‘체크포인트’ 등도 관람한 것으로 전해졌다.권민주 프리즈 아시아 VIP 및 사업개발 총괄 이사는 “VIP들이 특히 근대 이전의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며 “한국 전통문화를 소개하는 아름지기와 예올을 방문한 뒤 미슐랭 한식 레스토랑인 ‘온지음’을 찾거나, ‘조선 양화’전이 열리는 호림박물관을 방문하는 것도 주요 투어 동선”이라고 밝혔다. 권 이사는 “해외 미술인에게도 한국은 케이팝과 뷰티, 정보기술(IT)로만 익숙하다는 점이 아쉬워 한국이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설명했다.한국인 최초로 유럽 미술관장이 된 이숙경 영국 휘트워스미술관장도 프리즈 아트페어를 찾았다. 그는 “영국에서도 글로벌 아트페어가 열리면 이에 맞춰 주요 미술관이 중요한 전시를 연다”며 “아트페어를 미술관처럼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지만, 이를 계기로 로컬 미술을 알리려는 노력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페어장은 차분한 분위기거고지언(가고시안), 하우저앤워스 등 글로벌 갤러리 120여 곳이 참가한 페어장의 6일 사전 프리뷰 풍경은 차분했다. 팬데믹 이후로 이어진 미술 시장 침체 분위기로 갤러리들은 과감한 고가의 작품보다는 아시아 컬렉터에게 꾸준히 인기를 모은 안전한 작품을 전시했다.한국인 컬렉터 A씨는 “경기 불황으로 갤러리들이 판매액에 대한 기대를 접고 전속 작가를 소개한다는 느낌이었다”며 “올해는 프리즈 자체보다 팝업 전시나 국내 갤러리들의 신경 쓴 전시와 이벤트가 좋았다”고 말했다.갤러리들이 공개한 1일차 판매 실적도 무난했다. 지난해 조지 콘도의 40억 달러 상당 회화 작품을 판매한 하우저앤워스는 이날 라시드 존슨의 회화(약 13억 원), 조지 콘도의 회화(약 10억 원) 등 13점이 주인을 찾았다고 밝혔다. 두 작품은 아시아 컬렉터가 구매했고, 폴 매카시의 조각 ‘미미’는 한국인이 약 7억 원에 샀다. 페이스갤러리는 알렉산더 칼더의 1965년 조각을 판매했다고 밝혔다. 거래 가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호가는 200만 달러(약 26억 원)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여성 직원을 강제 추행한 혐의로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민중미술가 임옥상 씨(73)의 작품에 대해 서울시가 철거 작업에 나섰다. 임 씨의 작품이 세워진 다른 기관과 단체에서도 작품 존치 여부를 두고 고심하고 있다.서울시를 비롯한 일부 단체는 임 씨의 범죄로 인해 작품의 의미가 훼손됐다고 보고 빠르게 철거 결정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여러 작가나 주체가 협업해서 만든 공동 작품의 경우 관련자들의 의견을 듣고 충분히 논의해야 한다는 반발도 있다. 이번 사안은 작품과 예술가를 별개로 볼 수 있느냐에 대한 오래된 논쟁과도 연결된다.‘임옥상미술연구소’ 웹사이트에 따르면 임 씨가 제작한 작품은 전국 100여 개에 달해 작품을 둘러싼 논란이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의미 변절시켜 철거해야” vs “성급히 지워선 안 돼”서울시는 서울 중구 남산 일본군 위안부 추모공원 ‘기억의 터’에 설치된 임 씨의 작품 ‘대지의 눈’과 ‘세상의 배꼽’을 5일 철거했다. 당초 서울시는 이들 작품을 4일 철거할 예정이었지만 ‘기억의 터 설립추진위원회’(설립추진위)와 정의기억연대(정의연) 등 시민단체가 이에 반대하는 집회에 나서며 작업이 한 차례 연기됐다. 서울시는 임 씨의 작품이 ‘기억의 터’에 있는 것은 위안부뿐 아니라 시민 정서에 반하는 행동이라는 입장이다. 서울시는 “시민 대상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65%가 작품을 철거해야 한다고 답했고, 설립추진위가 주장하듯 조형물에 표기된 작가 이름만 삭제하자는 의견은 23.8% 불과했다”고 밝혔다. 이어 “작가 이름만 가리는 것은 오히려 국민을 속이는 것”이라며 “공간의 의미를 변질시킨 임 씨의 조형물만 철거하고 대체 작품은 국민 의견을 최대한 반영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작품으로 재설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설립추진위와 정의연은 두 작품이 임 씨 개인의 창작물이 아니라, 설립추진위원과 여성 예술가들이 의견을 더 많이 반영한 공동 창작물이며 시민 1만9755명이 모금에 참여해 철거 이전에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세상의 배꼽’에는 임 씨의 이름은 없고 윤석남 작가의 드로잉이 있고, ‘대지의 눈’에는 위안부 증언록에서 발췌한 할머니들의 증언과 명단이 새겨져 있다. ‘대지의 눈’ 오른쪽 아래에는 ‘디자인 임옥상’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설립추진위원장을 맡았던 최영희 전 국회의원(민주당)은 “임 씨가 성추행 사건(2013년) 뒤인 2016년 작품 제작 의뢰를 받아들인 데 많이 분노하고 있지만 이 작품을 임 씨의 것으로 보는 것은 의미를 폄하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서울시가 대체 작품 설치에 관해 설립추진위 의견을 듣겠다고 했지만 이를 공문으로 달라고 하니 거부하고 있다”며 “임옥상 지우기가 아니라 위안부 지우기가 될까 두렵다”고 했다. 서울시는 ‘기억의 터’ 외에도 서울시청 서소문청사 앞 ‘서울을 그리다’, 마포구 하늘공원의 ‘하늘을 담는 그릇’,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광화문의 역사’ 등 임 씨 작품 6개를 모두 철거하는 작업을 조만간 마무리할 계획이다.● “작품 계속 두면 2차 가해”전태일재단은 임 씨가 제작한 노동운동가 전태일 열사의 반신상과 관련해 4일 ‘전태일동상 존치·교체 숙의위원회’를 열었다. 노동계와 문화·여성·청년 등 각계 인사 11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총 세 차례에 걸친 회의를 통해 동상 존치·교체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임 씨가 2005년 만든 전태일 열사 반신상은 서울 종로구 ‘전태일다리’ 위에 설치돼 있다. 조각상이 세워진 곳은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자리다. 2017년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 가이 라이더가 이 동상을 찾아 헌화했다. 제작비는 노동자와 시민 모금으로 마련했다. 한석호 전태일재단 사무총장은 “동상을 다른 것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게 내부 중론”이라고 밝혔다. 한 사무총장은 “동상을 계속 둘 경우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우려가 있고, 동상에 관한 논란이 계속돼 갈등이 심화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됐다”며 “더 좋은 동상을 만드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견이 다수였다”고 말했다. 서울시에 이어 적극적으로 임 씨의 철거를 검토하는 지방자치단체는 광주광역시다. 광주시 도시철도공사는 2003년 1호선 농성역에 설치된 임 씨의 작품 ‘솟아오르는 산’의 철거를 검토하고 있다. 경남 김해시도 논의를 시작했다. 김해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2주기를 맞아 노무현재단이 2011년 봉하마을에 세운 ‘대지의 아들 노무현’이 있다. 재단 관계자는 “현재 논의 중이며, 아직 공식적으로 결정된 입장은 없다”고 말했다. 다른 지자체들은 신중한 분위기다. 임 씨의 작품 4점을 보유하고 있는 경남 고성군은 “작품 4점 모두 제정구 선생을 기리는 작품이라 철거 후 대안도 마련해야 해 바로 결정할 수 없다”며 “충분히 논의한 뒤 철거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누가 이들에게, 대지의 어머니’를 보유한 경기 광주 나눔의집은 “당장 철거 계획이 없다”고 했다. 서울 영등포구 당사에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흉상이 있는 더불어민주당은 “철거 여부는 아직 검토 전이다”라고 밝혔다.● 철거 vs 존치하고 문제점 기록… “국민 논의 필요” 작가와 작품을 둘러싼 논란은 최근 수년간 ‘미투’ 운동이 문화예술계를 뒤흔들면서 세계적인 이슈가 된 바 있다. 2017년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프랑스 화가 발튀스(1908∼2001)의 작품을 철거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10대 소녀를 신비롭고 섹슈얼한 방식으로 표현한 그의 작품이 아동을 성적 대상화한다며, 온라인 철거 청원에 8500명이 서명을 하면서 논란이 됐다. 당시 미술관은 “시각예술은 현재뿐 아니라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라며 작품을 내리지 않았다. 이런 결정은 예술가와 작품을 별개로 본다는 의미도 있지만, 현재의 잣대로 미술사 속 예술가를 평가할 경우 수많은 작품이 내려져야 하기 때문인 점도 있다. 파블로 피카소, 디에고 리베라, 카라바조 등 많은 유명 예술가들이 성적 일탈, 인종 차별 등에서 현재의 잣대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문제 행적을 병기해 관객에게 판단을 맡기는 방법도 나왔다. 2019년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는 ‘고갱의 초상’전을 열며 고갱이 “타히티에서 10대 소녀들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으며 이는 명백히 백인 남성의 지위를 악용했다”는 설명을 함께 걸었다. 당시 테이트모던 관장이었던 비센테 토돌리는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예술가가 작품을 세상에 내놓으면, 그것은 더 이상 그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이므로 함부로 지워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생존 작가의 경우 선택이 나뉘는 경우도 있다. 미국 화가 척 클로스(1940∼2021)가 살아 있던 2018년 성폭력 가해자로 고발당했을 때, 워싱턴 국립미술관은 예정된 그의 개인전을 무기한 연기하고 시애틀대는 작품을 철거했다. 그러나 미국 국립초상화미술관은 그가 그린 빌 클린턴 초상화를 계속 전시했다. 작품 철거가 자칫하면 검열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단죄는 사법 기관의 역할이고, 미술관은 인간의 복잡한 문제에 관해 대화를 이끌어내는 장이어야 한다는 취지다. 철거할 것인가, 남기고 기록할 것인가. 선택은 각 기관과 국민의 몫이다. 임 씨의 경우 이런 선택을 내려야 하는 조형물이 100개가 넘는다는 게 문제다. 미술사가 황정수 씨는 “이번 일을 계기로 임 씨가 어떻게 그 많은 조형물과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는지 그 과정에 대한 조사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작가가 명예를 걸고 작품을 제작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품행을 지닐 의무가 있다”며 “작품을 철거하고 다시 제작한다면 그에 따른 비용까지도 작가에게 청구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

대구의 대표적 화랑인 리안갤러리가 신관을 열고 독일 작가 이미 크뇌벨(83)의 개인전을 연다. 1일 공개된 대구 중구 리안갤러리 신관은 기존 건물 뒤편에 지상 4층, 지하 1층 규모로 들어섰다. 전필준 대구가톨릭대 교수가 설계한 공간은 전시장 3곳과 교육실, VIP 라운지 등을 갖췄다. 주요 전시장 층고는 9m로 높다. 이에 따라 대형 조각과 설치 작품들도 소개할 예정이다. 1990년대 지어졌던 구관은 신축 후 수장고로 활용된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서울점도 1개 층 증축을 준비하고 있다. 안혜령 리안갤러리 대표(65)는 “앞으로 갤러리에서 교육 및 네트워킹 프로그램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갤러리 사업을 하기 전부터 ‘큰손’ 컬렉터였던 안 대표는 2007년 리안갤러리 개관 때 본인의 소장품으로 앤디 워홀 개인전을 열어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백남준, 앨릭스 카츠 등 주요 작가의 대작을 소장해 지난해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이사회 멤버로도 추대됐다. 안 대표는 1일 기자간담회에서 “해외 유명 작가를 소개하니 그 뒤에 전시되는 국내 작가에게도 자연스럽게 관심이 쏠렸다”며 “그런 이유로 이번 신관 개관전 역시 해외 작가를 선정했다”고 말했다. 전시장에서는 조립식 알루미늄을 기하학적 형태로 잘라낸 다음 여러 색채를 덧칠한 ‘Figura’ 연작 등 크뇌벨의 작품 12점을 볼 수 있다. 전시된 작품 중 ‘클라이너 원형 16c(Kleiner Archetyp 16c)’는 작가가 특별히 한국에서 소개하고 싶다고 요청한 것이다. 2008년 독일 홀레펠스 지역에서 발견된 구석기시대 비너스상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지하 1층에서는 남춘모 이진우 이건용 김택상 이광호 김춘수 윤희 신경철 등 리안갤러리 전속 작가를 포함한 국내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10월 14일까지. 무료.대구=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나/조그만 조약돌 되기/바라니!//바닷가에 조용히 무릎 꿇고 앉아/밀려오는 파도의 흐느낌을 배우고/몰아치는 폭풍의 노여움을/배우려니!’(최욱경의 시 ‘조약돌’ 중) 요절한 추상화가로 잘 알려진 최욱경(1940∼1985)은 그림만 남긴 것이 아니다. 첫 번째 미국 체류를 마치고 한국에 머물렀던 1972년, 그는 시집 ‘낯설은 얼굴들처럼’을 펴냈다. 유학 시절에 쓴 시 45편과 삽화 16점으로 구성된 이 시집엔 타지에서 겪은 외로움, 자아에 대한 고민, 그리고 절절한 사랑의 기쁨과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지난달 25일 개막한 최욱경 개인전 ‘낯설은 얼굴들처럼’은 이 시집에서 출발했다. 우선 시집에 삽화로 소개된 16점 중 6점인 ‘습작’ ‘실험’ ‘I loved you once’ ‘Study I’ ‘Study II’ ‘experiment A’가 소개된다. 종이에 그려진 드로잉들은 그의 추상이 단순히 유행하는 미술 사조를 따른 것이 아니라, 삶에서 겪은 감정과 고민에서 출발한 것임을 보여준다. 1969년 그린 작품 ‘무제’엔 “그때가 오면 해가 뜰까 /…/ 그런 시간이 정말로 내게 올까?”라는 내용이 영어로 적혀 있다. 낯선 곳에서 예술가로 살아남아야 하는 막막함과 암담함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고 풀어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1960년대 그린 크로키 9점도 전시된다. 최욱경이 1963년 미국으로 떠나 크랜브룩 미술학교 서양화과에서 공부할 무렵, 학교에서 누드 모델을 보고 그린 것들이다. 인물들이 움직이려고 하는 순간을 포착한 그림은 거침없고 대담하다. 이 크로키들은 대부분 유족이 보관하고 있던 것으로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전시에선 드로잉와 크로키에 더해 판화까지 작품 총 38점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모든 작품이 흑백으로만 구성돼, 그간 화려한 색채 추상으로 최욱경을 접했던 관객에서 새로운 재미를 준다. 색이 없어진 덕분에 그의 필치에 더욱 집중하게 되고, 또 그림 옆에 그가 써 내려간 글귀들도 더 선명히 드러난다. 전시장에서 놓치지 말고 봐야 할 것은 카운터에 놓인 그의 시집이다. 1972년 초판본은 전시팀이 헌책방을 수소문했으나 구하지 못했고, 사후에 나온 개정판을 전시하고 있다. 파란 모자를 쓴 최욱경의 자화상이 표지인 시집 안에는 그가 마주했던 뜨거운 인생의 순간들이 담겨 있다. 10월 22일까지. 무료.부산=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여러분 안녕하세요?오늘은 2주 전 ‘이중섭, 그 사람’을 쓴 오누키 도모코 인터뷰에 이어 이중섭의 편지화에 관한 책 ‘이중섭, 편지화’를 쓴 미술사학자 최열과의 인터뷰를 전해드립니다.최열은 이중섭에 관한 주요 문헌들을 토대로 쓴 ‘이중섭 평전’을 2014년 발간했고, 오누키 도모코가 이중섭에 관해 취재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하는데요.이번에는 왜 이중섭의 편지화에 주목했는지, 그 특징은 무엇이었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작품이 안 된다고 생각했던 편지화김민(민): 이중섭의 편지화에 집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최열(열):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편지화를 소장품에 넣기 전에는 편지화가 작품이 아니라고 소장가들이 생각했습니다. 그 후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회고전을 할 때 이중섭이 가족에게 보낸 편지가 화제가 되면서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했죠.이 전에는 편지화에서도 이를테면 아들에게 쓴 편지에 ‘태성군’이라고 적혀 있다면, 이 글을 지우고 마치 그림인 것처럼 표구를 하곤 했답니다. 그러다 편지화가 새로운 장르로 인정받는 것을 보면서, 이중섭의 세계가 이렇게 확장이 되는구나 저도 다시금 생각하게 됐죠.민: 이중섭 편지화만의 특징은 무엇인가요?열: 싸구려 재료를 사용한다는 것. 또 가족 외에는 누구도 볼 거라고 생각을 안했다는 점이에요. 또 이중섭의 그림이 그렇듯 현실에는 없는 ‘도원에서 노는 가족’, ‘사랑의 호소’ 같은 주제가 많이 드러나죠. 물감도 보면 1~3가지 색을 사용해 아주 단순해요.민: 전쟁이라는 맥락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것 때문에 가족이 헤어지고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으니까요.열: 그렇죠. 52년 6월 이중섭을 제외한 세 명이 일본으로 가죠. 그리고 1년 2개월 뒤 첫 편지화가 나와요. 그 그림이 바로 서귀포 게잡이 그림입니다. 가난하고 먹을 것이 없어 게를 잡아다 집에서 끓여 먹었거든요. 이때 보낸 그림은 작품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우리 그때 이렇게 살았지”하고 말을 거는 듯한 메시지를 위한 그림이죠.글은 힘들어도 그림은 밝게민: 그런데 굉장히 힘든 상황이었을텐데 그림은 무작정 어둡지만은 않아요.열: 표면은 다 행복하죠. 사실은 슬프고 어둡고 고통스러운 상황이었는데도 말이죠. 그런데 그림 편지가 아니라 문자로 쓴 편지에는 죽겠다고 호소를 했어요. 마치 그림에서는 자기의 상황을 반대로 묘사하는 것도 같아요. 겨울에 보낸 이 편지에는 자기가 있는 실내는 무척 따뜻한 것처럼 그렸어요. 그런데 실제로는 편지에 보면 방에 불이 안 들어왔다고 하거든요. 난방기구도 없었고요.민: 그간 연구한 자료를 오누키 기자님에게 공유하고 또 조언도 나누었다고 들었어요.열: 누구든 진지하게 연구하려는 분이 있다면 자료는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일본이 우리 문화에 대중 음악 외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는데, 일본인이 한일 관계 속에서 이중섭과 연관된 사람을 알아보겠다고 하니 감동을 받았어요.특히 이중섭의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 여사는 과거 부정적으로 서술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위작 시비와 묘하게 얽혀서 일본 쪽 가족을 범죄자 취급하는 분위기도 있었죠. 나중에는 한국인들이 벌인 짓임이 드러났지만, 이중섭의 아드님이 아직도 기소 중지가 되어 있어 한국에 오지 못하는 상황이에요. 그런 안 좋은 인연이 있는 가운데 오누키 씨가 야마모토 여사의 이야기를 듣겠다고 하니 고마운 일이었죠.민: 표지 그림은 어떻게 선정하게 되었나요?열: 두 부부를 이어주는 매개가 편지이니까,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복숭아 그림을 골랐어요. 사실 편지는 아들 태현에게 보낸 것인데, ‘도원’이 이상향, 유토피아이듯 두 사람의 사랑도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서 주제를 잘 보여준다고 보았습니다.민: 집필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열: 제가 2014년 쓴 것은 작가론인데, 저는 예술과 인간이 이어져 있다고 믿어요. 작가가 나쁜 사람인데 예술 작품이 좋을 수 있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그래서 작가 쪽에 무게를 두고 연구를 해 왔는데, 이중섭을 공부하며 작품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편지화를 분류하고 그 자체에 몰입하는 과정이 즐거웠습니다.민: 말씀 감사합니다.※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금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기자 kimmin@donga.com}

지난해에는 에곤 실레의 작품이 화제였다면, 올해는 어떤 작품을 만날 수 있을까? 글로벌 아트페어인 ‘프리즈 서울’과 국내 최대 아트페어인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키아프)’가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6일 동시에 개막한다. 지난해 처음으로 개최된 프리즈 서울은 올해 전 세계 120여 개 갤러리가 참여한다. 이 중 70여 개는 아시아 갤러리다. 아트페어는 갤러리들이 모여 작품을 파는 ‘미술장터’이지만, 해외 작품을 볼 기회가 드문 한국에서는 작품을 관람하는 기회로도 여겨진다. 지난해에는 오스트리아 출신 화가 에곤 실레(1890∼1918)의 드로잉 40여 점을 선보인 영국 ‘리처드 내기 갤러리’와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작품 ‘술이 달린 붉은 베레모를 쓴 여자’를 출품한 아쿼벨라 갤러리가 화제였다. 올해 프리즈 서울의 화제작이 될 작품은 무엇이 있을지, 페어 참가 예정인 해외 갤러리들이 보내온 주요 작품을 소개한다.● 밀레, 세잔, 클레… 거장의 드로잉 아트페어에 그림을 관람하러 오는 관객들에겐 현대미술보단 20세기 이전 미술 작품이 더 익숙하다. 20세기 이전 예술 작품은 서양 고미술을 선보이는 ‘프리즈 마스터스’ 섹션에서 볼 수 있다. 프리즈 마스터스에는 고대부터 20세기까지 예술 작품을 취급하는 갤러리들이 참가한다. 에곤 실레 작품을 선보였던 리처드 내기 갤러리는 올해 참가하지 않는다. 지난해처럼 유명 서양 미술가 1명의 작품 여러 점을 한자리에서 보기는 힘들 전망이다. 다만 ‘만종’으로 국내에도 팬이 많은 바르비종 예술가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 인상파 거장 폴 세잔(1839∼1906), 독일 청기사파 화가인 파울 클레(1879∼1940) 등 주요 작가의 종이 드로잉 작품이 한국을 찾아 기대를 모은다. 이들 드로잉은 16∼20세기 서양 미술 거장들의 드로잉, 수채화, 오일 스케치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영국의 ‘스티븐 옹핀 갤러리’에서 볼 수 있다. 스티븐 옹핀 갤러리가 선보이는 밀레의 드로잉 ‘밭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은 밀레가 말년에 그린 동명 작품의 스케치다. 밀레는 스스로를 “자랑스러운 농부의 아들”이라고 밝히며, 이전까지 프랑스 사회에서 하찮게 여겨졌던 농민들을 캔버스의 주인공으로 앞세웠다. 이 드로잉에서도 농사일을 마친 뒤 가축을 몰고 집으로 향하는 가족이 묘사돼 있다. 파울 클레의 ‘알프스 풍경’(1937년)은 그가 피부가 굳는 전신경화증을 앓고서 몇 년간 그림을 그리지 못했을 무렵 나온 작품이다. 치료를 위해 스위스의 병원을 오갔던 클레는 1936년 그림을 단 25점 그렸지만, 이듬해 건강을 일부 회복하며 왕성하게 작업했다. 이 작품은 클레가 병을 고치려 찾은 병원 근처 알프스의 풍경을 담은 그림이다. 이 밖에 세잔의 ‘생트빅투아르산이 있는 풍경’, 파블로 피카소의 ‘예술가와 모델’ 등 거장의 손길을 확인할 수 있는 드로잉들이 출품작에 포함됐다. 미술사에 관심 많은 관객에게 흥미로울 작품은 영국 화가 루치안 프로이트(1922∼2011)가 남긴 편지다.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손자인 그는 주변 사람들의 적나라한 누드화를 자주 그렸다. 그런 그가 연인이자 훗날 아내가 된 캐럴라인 블랙우드에게 보낸 편지가 한국을 찾는다. 편지에는 연인에게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요. 어떤 말이든 해줘요”라며 사랑을 고백하는 내용과 함께, 두 사람이 키스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장면은 두 사람이 절친하게 지냈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1909∼1992)이 찍어준 사진을 토대로 한 것으로 전해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작업실에 놀러 온 두 연인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며 키스해 보라고 제안했다. 이 장면을 사진으로 남긴 다음 프로이트에게 보내줬고, 이를 받은 그가 드로잉한 것이다. 미술사가들은 이 일화를 통해 베이컨이 프로이트에게 더욱 과감한 주제에 도전하도록 영감을 준 것으로 분석한다. 갤러리 대표인 스티븐 옹핀은 “오래전부터 아시아에서의 전시를 원해 프리즈 서울에 참가하게 됐다”며 “르네상스부터 20세기까지 드로잉과 스케치를 전문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나의 취향에 따라 작품을 까다롭게 고른다”고 했다. 40년간 20세기 이전 미술 딜러로 활동해 온 그의 갤러리는 2007년 영국 런던에 설립돼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 중세 필사본과 희귀 서적까지 프리즈 마스터스는 2012년 영국 런던에서 시작됐다. 고대부터 20세기 예술 작품까지 광범위하게 선보이면서 컬렉터들에게 다양한 작품을 소개한다는 취지로 출발했다. 현대 미술 작품은 주로 젊은 컬렉터가, 고미술은 연령대가 높은 컬렉터가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소장가들이 고대부터 20세기까지 예술 작품을 두루 살펴보며 다른 분야에도 관심을 갖도록 한다는 점에서 호평받았다. 프리즈 마스터스의 ‘숨은 재미’로는 중세 필사본과 장신구, 고지도, 희귀 서적을 꼽을 수 있다. 프리즈 마스터스의 디렉터인 네이선 클레먼츠길레스피는 “지도와 필사본, 장신구는 아주 오래전부터 세계 무역의 중심에 있었고 예술 창작의 근원이었다”며 “런던 프리즈 마스터스에서도 하이라이트로 여겨졌던 아름다운 고대 예술품을 거래하는 딜러들이 서울에도 참가하게 돼 기쁘다”고 밝혔다. 이번 프리즈에서 볼 수 있는 중세 필사본 중 눈에 띄는 것은 프랑스 파리와 미국 뉴욕, 시카고에서 운영되고 있는 갤러리 ‘레장뤼미뉘르’가 출품하는 ‘기욤 몰레의 기도서’(Book of Hours·1480∼1490년)이다. 프랑스 리옹에서 15세기 만들어진 책으로, 소금과 무기 무역으로 성공한 상인이었던 기욤 2세 몰레가 사용한 것이다. 몰레는 프랑스 트루아의 시인이자, 샹파뉴 지역의 유서 깊은 서적상인 가문 출신이다. 13페이지에 걸쳐 펼쳐지는 그림과 34페이지에 화려하게 장식된 글자를 통해 호화로운 중세 기도서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레장뤼미뉘르는 바로크 양식으로 만들어진 에메랄드 반지(1680∼1720년)도 선보인다. 프랑스 루이 14세의 왕실 보석 디자이너였던 질 레가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과거 1억6000만 원 상당에 거래된 바 있다. 영국 런던의 ‘피터 해링턴 희귀 서적’ 갤러리는 8세기 일본의 ‘반야심경’과 14세기 ‘범망경고적기’를 출품한다. 일본에서 불교가 번성하던 가마쿠라 시대 나라 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범망경고적기는 신라시대 태현 스님이 썼다. 피터 해링턴 갤러리 대표인 폼 해링턴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불교가 전달되고 번성하는 데 한국 승려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보여주는 자료”라고 설명했다. 이 밖에도 서양에서 처음 이동식 활자로 찍은 ‘구텐베르크 성경’의 한 페이지, 생텍쥐페리의 사인이 있는 ‘어린 왕자’ 초판본, 찰스 다윈 ‘진화론’과 애덤 스미스 ‘국부론’ 초판본부터 조앤 K 롤링의 친필 사인이 있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초판본까지 만나볼 수 있다. 고미술과 현대미술품을 함께 전시하는 로빌란트보에나 갤러리는 15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그려진 고딕 양식의 회화 ‘성모자와 성 요한, 성 야고보’(1415년경), 베네치아 풍경화의 거장 카날레토의 ‘말게라의 탑’(1740년경)을 선보인다. ● 페어장 밖에서도 굵직한 전시 프리즈 서울을 계기로 글로벌 경매사와 갤러리, 미술관들이 평소 보기 드문 좋은 작품을 가져와 국내에서 전시를 연다. 지난해 프랜시스 베이컨과 아드리안 게니 2인전으로 눈길을 사로잡은 크리스티는 올해 장미셸 바스키아와 앤디 워홀 작품을 가져온다. 두 작가의 작품 10여 점을 5일부터 7일까지 서울 용산구 ‘현대카드 스토리지’의 ‘헤즈 온: 바스키아 & 워홀’ 전에서 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되는 1982년 바스키아가 그린 작품 ‘전사’는 2021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를 통해 4190만 달러(당시 약 472억 원)에 판매돼 현재까지 아시아 경매 거래 작품 중 서양 미술 최고가를 기록하고 있는 작품이다. 전시는 사전 예약제로 운영된다. 5, 6일은 미술 관계자를 대상으로 한다. 일반 관객은 7일 관람할 수 있다. 2018년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낙찰 직후 저절로 파쇄돼 엄청난 화제를 모은 뱅크시의 ‘사랑은 쓰레기통에’도 한국을 찾는다. 소더비가 파라다이스시티와 함께 준비한 전시 ‘러브 인 파라다이스: 뱅크시 앤 키스 해링’을 통해서다. 9월 5일부터 11월 5일까지 인천 파라다이스시티 전시장인 파라다이스 아트 스페이스에서 열리는 전시는 뱅크시와 해링의 작품 36점을 선보인다. 필립스 옥션도 알렉산더 칼더, 데이비드 호크니 등 30여 명의 작품을 소개하는 ‘잠시 매혹적인’전을 9일까지 서울 종로구 송원아트센터에서 연다. 인도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애니시 커푸어의 개인전도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 전관에서 10월 22일까지 열린다. 미국 뉴욕의 ‘구름문’이나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 앞 ‘큰 나무와 눈’ 등 대형 조각으로 익숙한 작가의 설치 작품과 회화를 다수 만날 수 있다. 국내에서 7년 만에 열리는 개인전으로, 기존에 만났던 작품과는 달리 파괴적이고 거친 면모가 돋보인다. 아트페어를 계기로 다양한 기회가 열리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페어의 본질은 작품 거래라는 한계를 염두에 두고 감상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김인혜 미술사학자는 “아트페어의 각종 부스에 걸린 작품은 판매가 목적이고, 미술관은 주제에 맞는 작품을 미술관에서 연구하고 선별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며 “페어에는 현재 거래가 가능한 작품이 나오기 때문에 총제적 맥락을 제시하는 미술관과 달리 단편적 정보가 늘어서 있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이어 “책이나 미술관급 전시를 통해선 작가나 작품에 대한 정보를 깊이 알 수 있지만 페어에서는 쉽지 않다”며 “이러한 한계를 인식한 가운데 작품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경험을 축적해 나간다는 의미를 두면 좋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기혜경 홍익대 예술기획과 교수는 “자본의 힘이 강해지면서 아트페어가 기획 부스를 설치하거나 토크 프로그램을 마련해 비엔날레와 같은 미술계 제도 기관과 비슷하게 보이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 교수는 “한국의 아트페어에서도 대가들의 대작을 만날 기회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라며 “평소 접할 수 없던 작품을 볼 기회로 삼을 수 있지만, 전체적인 맥락보다 개별적 특성에 초점을 맞춰 감상하기를 권한다”고 조언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미군이 남기고 떠난 군 시설인 경기 파주시 캠프그리브스 체육관에 군용 모포 36장이 걸렸다. 군대는 혹독한 훈련과 규율로 가득하지만, 병사들은 밤이 되면 각자 모포를 덮고 잠에 빠져든다. 땀과 먼지가 밴 모포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개인의 영역을 의미한다. 임민욱 작가는 이 모포의 한 면에 원초적 꿈과 환상 같은 그림을 그린 설치 작품 ‘커레히―홀로 서서’를 선보였다. 전시장에서 지난달 24일 만난 그는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비무장지대(DMZ) 또한 한반도의 담요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 DMZ 근처에서 국내외 현대미술가 27명의 작품 60점을 선보이는 전시 ‘체크포인트’가 31일 시작됐다. 북한 개성공단이 내려다보이는 파주 도라산전망대, 캠프그리브스, 평화누리에서 이달 23일까지 1부 전시가 열리고, 2부는 경기 연천에서 10월 6일∼11월 5일 열린다. 도라산전망대에서는 정소영의 ‘환상통’, 박보마의 ‘초록의 실제’ 등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캠프그리브스에는 서용선의 대형 회화, 함경아의 설치 작업과 이재석의 그림 작품 등이 전시된다. 전시 기획을 맡은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은 “올해는 젊은 작가를 다수 초청했는데,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와 젊은 세대가 DMZ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점이 흥미롭다”고 설명했다. 그는 2012년부터 DMZ에 현대 미술 작품을 설치하는 ‘리얼 DMZ 프로젝트’를 진행해오고 있다. 전시를 보려면 ‘DMZ 오픈 페스티벌’ 웹사이트를 통해 사전에 신청하고 매주 금·토요일 오전 9시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출발하는 투어 버스를 타야 한다. 매일 오후 2시 40분 임진각 DMZ 매표소를 출발하는 순환형 ‘DMZ 평화관광 버스투어’를 현장에서 신청(선착순)할 수도 있다. 신분증 지참은 필수다.파주=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오랫동안 한자리를 지킨 듯 거대한 나무와 풀잎이 가득한 들판 한가운데 남자가 초록색 물체를 들고 서 있다. 임동식 작가(78·사진)가 1991년 선보인 퍼포먼스 ‘이끼’를 재구성한 이 회화는 27년에 걸쳐 작업한 ‘이끼를 들어 올리는 사람’(1993∼2020년)이다. 퍼포먼스 당시 작가는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림 속에서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다. 또 뒤의 배경엔 카메라를 든 인물과 노란 하늘이 보였지만, 그림에서는 그 자리를 숲이 대신한다. 임 작가는 뒤편의 나무가 “충남 공주 원골마을에 살 때 보았던 느티나무”라며 “자연 속에 푹 들어온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변주했다”고 설명했다. 제5회 박수근 미술상 수상자인 임동식의 개인전 ‘이끼를 들어 올리는 사람, 임동식’이 1일부터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센터 전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선 그의 회화 작품 40여 점과 드로잉 100여 점을 선보인다.● 그림이 된 야투 퍼포먼스 전시장에서는 가장 먼저 표제작인 ‘이끼를 들어 올리는 사람’을 비롯해 그가 자연 현장에서 선보인 퍼포먼스를 회화로 변주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임동식은 1975년 충남 태안군 안면도 꽃지해변에서 처음으로 야외 작업을 한 다음, 1980년 ‘금강현대미술제’를 개최한다. 이후 1981년 여과되지 않은 순수한 자연을 표현하고 자연 현장에 서자는 의미를 담아 ‘들로 던진다’는 뜻의 ‘야투(野投): 야외현장미술연구회’를 설립했다. 국내 최초 자연미술운동그룹인 야투 예술가들은 풀잎을 온몸에 동여매고 금강에 들어가 벗어 던지거나, 물속에 몸을 반쯤 담그고 앉아 수면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는 등의 행위를 했다. 임동식은 1983년 독일 국립 함부르크미술대에 진학한 뒤 이런 야투의 활동을 현지에서 소개했다. 1989년 함부르크시의 지원을 받아 ‘야투 함부르크전―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를 개최하며 현지 미술계에서 관심을 끌었다. 이후 그가 ‘이끼’ 퍼포먼스를 선보인 1991년 충남 공주에서 ‘금강에서의 국제자연미술전’을 열었고, 여기에 100여 명의 독일어권 작가가 참여했다. 작가는 1992년부터 퍼포먼스 작업을 그림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온몸에 풀 꽂고 걷기’, ‘물보기 나보기’ 작품이 대표적이다. 전시에선 퍼포먼스 모습을 담은 사진과 이를 회화로 옮겨 기록한 작품들을 함께 볼 수 있다. 임동식은 “어릴 적 친구들과 앞산 뒷산에 산딸기를 따러 갔던 기억, 주변에 늘 있었던 자연을 회상하며 그 느낌을 그림에 담으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원골마을 속 자연 미술 또 다른 자연 미술 시리즈 작품인 ‘자연 예술가와 화가’, ‘친구가 권유한 풍경’도 눈길을 끈다.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90년 귀국해 원골마을에 정착한 임동식은 자주 가는 식당 주인 우평남을 만난다. 평생 농사꾼으로 살아온 우평남과 함께 버섯 따기, 칡 캐기를 하면서 임동식은 자신이 그간 했던 작업이 자연을 흉내낸 것에 불과했음을 깨닫고, 우평남과 함께 산과 들로 풍경을 그리러 다니며 진정한 자연 미술을 실천하고자 했다. ‘친구가 권유한 풍경’은 친구 우평남이 함께 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장면을 지목하면 그것을 그린 풍경화 시리즈다. 전시장에서는 임동식과 우평남이 함께 그림을 그린 작업실을 재현한 공간도 만날 수 있다. 우평남의 그림과 작업실에 놓여 있는 잡동사니까지 가져와 배치했다. 잠시 갤러리를 떠나 공주로 떠난 것 같은 기분을 자아낸다. 10월 1일까지. 무료.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그레타 거위그 감독의 영화 ‘바비’가 인기를 끌면서 분홍색이 유행이라고 하죠. 오늘 만날 이 그림에도 분홍빛이 가득하지만, 그 분위기는 ‘바비’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림 속 분홍은 거칠고 새빨간 선을 만나 피가 흐르는 살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죠. 누군가 쓰러져 더미처럼 쌓인 듯 이 그림의 뒤편에는 구두가 한가득 장벽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앞에는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운 얼굴이 눈만 껌뻑이며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죠. 팔도 다리도 없는 이 형상의 배 위에는 케이크가 잔뜩 놓여 있습니다. 이 작품은 미국의 화가 필립 거스턴(1913∼1980)이 1973년 그린 ‘그리기, 담배 피우기, 먹기’입니다. 얼핏 보면 귀여운 것도 같지만 자세히 보면 섬뜩한 이 그림에는 무슨 사연이 있을까요?“미국 추상은 사기다”거스턴은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1913년 캐나다에서 태어나 1919년부터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았습니다. 이때 미국에서는 흑인과 유대인을 상대로 잔혹한 테러를 자행했던 KKK단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죠. 러시아에서 캐나다, 미국으로 이주하며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거스턴의 아버지는 1923년 목숨을 끊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처음 발견한 것은 바로 열 살 아들, 필립 거스턴이었습니다. 이런 차별의 비극은 추후 거스턴의 작업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림을 곧잘 그렸던 거스턴은 예술고등학교를 다니게 되고 여기서 잭슨 폴록과 친구가 됩니다. 1950년대 미국은 추상 회화가 대세를 이루었고, 거스턴도 잠시나마 이런 흐름을 따르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속에서 추상 회화는 러시아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항하는 예술로, 평론가들에 의해 정치적 메시지를 담지 않은 ‘순수 회화’로 여겨졌습니다. 거스턴은 이런 흐름에 반감을 느끼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깁니다. “미국 추상 예술은 거짓이고, 사기이며, 가난한 정신의 위장에 불과하다. 그것은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가 느끼는 ‘날것’의 감정, 세계에 대한 원초적이며 진실한 감정에서 도피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 다음 그는 1960년대 베트남 전쟁과 미국 내 만연한 인종 차별, 박해를 고스란히 담은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선홍빛 캔버스에는 먹고 버린 생선 가시처럼 쌓인 다리들, 꼼짝 못 한 채 눈만 껌뻑이며 담배를 피워대는 얼굴들, 멍든 곳을 더 때리는 듯한 주먹들이 나타납니다. 겉으로는 유쾌하고 발랄하지만, 이면에는 차별과 폭력이 가득한 세상 속 무기력한 개인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스턴은 추상을 버리게 된 계기를 나중에 설명하며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1960년대가 닥치면서 나는 정신분열증에 걸린 것 같았다. (베트남) 전쟁,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들, 세상의 잔혹함…. 집에 앉아서 잡지를 읽으며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분노하고 절망하다, 작업실에 가서 (추상화의) 빨간색을 파란색으로 바꾸는 게 도대체 무슨 짓이란 말인가.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과 (내 작업이) 일치하기를 바랐다.”탈진실의 시대를 예고하다그런 그의 작업은 최근 미국과 영국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통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미국 보스턴미술관, 휴스턴미술관을 거쳐 워싱턴 내셔널갤러리에서 전시가 열렸습니다. ‘필립 거스턴 나우’라는 제목의 전시는 3월 2일부터 8월 27일까지 그의 회화 110점, 드로잉 115점을 선보였습니다. 이 전시는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으로 이동해 막을 내릴 예정입니다. 이런 작업들이 주목받게 된 것은 추상·구상의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 개별 국가와 사회는 물론이고 개인의 다양한 맥락에서 일어나는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는 ‘신표현주의’의 부상과 맞물립니다. ‘신표현주의’는 독일의 게오르크 바젤리츠와 안젤름 키퍼, 미국의 장미셸 바스키아가 대표적입니다. 거스턴의 회고전은 원래 2020년 예정되어 있었는데, 2년이 미뤄지게 된 사연도 서구 언론을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2020년 미국에서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전 세계에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M)’ 운동이 확산하였는데요. 이때 거스턴 회고전을 준비했던 미술관들이 그림 속 KKK단 묘사가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며, ‘그림이 올바른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때까지’ 전시를 연기한다고 발표해 예술계의 거센 반발을 모았습니다. 세상에 만연한 차별과 인간의 잔혹함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 것이 거스턴의 예술인데, 미술관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관객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말이죠. 결국 거스턴 회고전은 2년 만에 열리게 되었고, 워싱턴 내셔널갤러리는 전시 소식을 발표하며 “우리의 결정에 문제를 제기하고, 가이드를 제시하며, 영감을 준 수많은 목소리에 감사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런 해프닝은 역설적으로 너무나 다양한 가치관들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우리 시대의 민낯을 보여주는 것 같아 더 흥미롭습니다. 모두가 함께 믿었던 진실이 사라지고, 각자의 진실이 난립하는 갈등과 폭력의 탈진실(post-truth) 시대. 예민한 예술가였던 거스턴이 반세기 전부터 예고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뉴스레터 ‘영감 한 스푼’은 매주 금요일 오전 7시 발송됩니다. QR코드를 통해 구독 신청하시면 이메일로 먼저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

그레타 거윅 감독의 영화 ‘바비’가 인기를 끌면서 분홍색이 유행이라고 하죠. 오늘 만날 이 그림에도 분홍빛이 가득하지만, 그 분위기는 ‘바비’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림 속 분홍은 거칠고 새빨간 선을 만나 피가 흐르는 살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죠.누군가 쓰러져 더미처럼 쌓인 듯 이 그림의 뒤편에는 구두가 한가득 장벽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앞에는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운 얼굴이 눈만 껌뻑이며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죠. 팔도 다리도 없는 이 형상의 배 위에는 케이크가 잔뜩 놓여 있습니다.이 작품은 미국의 화가 필립 거스턴(1913~1980)이 1973년 그린 ‘그리기, 담배피기, 먹기’입니다. 대충 보면 귀여운 것도 같지만 자세히 보면 섬뜩한 이 그림에는 무슨 사연이 있을까요?“미국 추상은 사기다”거스턴은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1913년 캐나다에서 태어나 1919년부터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았습니다. 이때 미국에서는 흑인과 유대인을 상대로 잔혹한 테러를 자행했던 KKK단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죠.러시아에서 캐나다, 미국으로 이주하며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거스턴의 아버지는 1923년 목숨을 끊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처음 발견한 것은 바로 10살 아들, 필립 거스턴이었습니다. 이런 차별의 비극은 추후 거스턴의 작업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그림을 곧잘 그렸던 거스턴은 예술고등학교를 다니게 되고 여기서 잭슨 폴록과 친구가 됩니다. 1950년대 무렵 미국은 추상 회화가 대세를 이루었고, 거스턴도 잠시나마 이런 흐름을 따르게 됩니다.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분위기 속에서 추상 회화는 러시아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항하는 예술로, 평론가들에 의해 정치적 메시지를 담지 않은 ‘순수 회화’로 여겨졌습니다. 거스턴은 이런 흐름에 반감을 느끼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깁니다.“미국 추상 예술은 거짓이고, 사기이며, 가난한 정신의 위장에 불과하다. 그것은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느끼는 ‘날 것’의 감정. 세계에 대한 원초적이며 진실한 감정에서 도피하는 것일 뿐이다.”그런 다음 그는 1960년대 베트남 전쟁과 미국 내 만연한 인종 차별, 박해를 고스란히 담은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선홍빛 캔버스에는 먹고 버린 생선 가시처럼 쌓인 다리들, 꼼짝 못 한 채 눈만 껌뻑이며 담배를 피워대는 얼굴들, 멍든 곳을 더 때리는 듯한 주먹들이 나타납니다. 겉으로는 유쾌하고 발랄하지만, 이면에는 차별과 폭력이 가득한 세상 속 무기력한 개인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탈진실의 시대를 예고하다거스턴은 추상을 버리게 된 계기를 나중에 설명하며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1960년대가 닥치면서 나는 정신분열증에 걸린 것 같았다. (베트남) 전쟁,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들, 세상의 잔혹함…. 집에 앉아서 잡지를 읽으며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분노하고 절망하다, 작업실에 가서 (추상화의) 빨간색을 파란색으로 바꾸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과 (내 작업이) 일치하기를 바랐다.”그런 그의 작업은 최근 미국과 영국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통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미국 보스턴미술관, 휴스턴미술관을 거쳐 지금은 워싱턴 내셔널갤러리에서 전시가 열리고 있습니다. ‘필립 거스턴 나우’라는 제목의 전시는 3월 2일부터 8월 27일까지 그의 회화 110점, 드로잉 115점을 선보였습니다. 이 전시는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으로 이동해 막을 내릴 예정입니다.이런 작업들이 주목받게 된 것은 추상·구상의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 개별 국가와 사회는 물론 개인의 다양한 맥락에서 일어나는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는 ‘신표현주의’의 부상과 맞물립니다. ‘신표현주의’는 독일의 게오르그 바젤리츠, 안젤름 키퍼 또 미국의 장 미셸 바스키아가 대표적입니다.거스턴의 회고전은 원래 2020년 예정되어 있었는데, 2년이 미뤄지게 된 사연도 서구 언론을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2020년 미국에서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전 세계에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M) 운동이 확산되었는데요.이 때 거스턴 회고전을 준비했던 미술관들이 그림 속 KKK단 묘사가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며, ‘그림이 올바른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때까지’ 전시를 연기한다고 발표해 예술계의 거센 반발을 모았습니다. 세상에 만연한 차별과 인간의 잔혹함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 것이 거스턴의 예술인데, 미술관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관객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말이죠.결국 거스턴 회고전은 2년 만에 열리게 되었고, 워싱턴 내셔널갤러리는 전시 소식을 발표하며 “우리의 결정에 문제를 제기하고, 가이드를 제시하며, 영감을 준 수많은 목소리에 감사한다”고 언급했습니다.이런 해프닝은 역설적으로 너무나 다양한 가치관들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우리 시대의 민낯을 보여주는 것 같아 더 흥미롭습니다. 모두가 함께 믿었던 진실이 사라지고, 각자의 진실이 난립하는 갈등과 폭력의 탈진실(post-truth) 시대. 예민한 예술가였던 거스턴이 반세기 전부터 예고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금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기자 kimmin@donga.com}

“이번 전시가 제 생애 상업화랑 세 번째 전시입니다. 퍼포먼스는 내일 하는 줄 알았는데…. 임기응변으로 해보겠습니다.” 서울 종로구 갤러리현대 본관에서 22일 만난 한국의 1세대 실험미술가 성능경 작가(79)의 말이다. 이곳에서 23일부터 개인전 ‘성능경의 망친 예술 행각’이 열렸다. 기자들이 많이 와 쑥스럽다던 작가는 “고등학생 때 선생님이 가르쳐준 스트레칭”이라며 갤러리 한복판에서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더니 퍼포먼스를 이어갔다. 24일에는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김구림 작가(87)의 개인전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6월에도 이곳 미술관 로비에서 ‘생성에서 소멸로’ 퍼포먼스를 선보였던 작가는 1950년대 후반 평면 추상부터 신작까지의 작품 세계를 총망라하는 대규모 회고전을 25일부터 개최한다. 두 작가는 다음 달 1일 미국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개막하는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전에 작품을 출품한다. 전시는 구겐하임미술관이 12년 만에 여는 한국 미술 특별전이다. ● 사진과 신문으로 풀어낸 개념미술 갤러리현대 전시는 성능경 작가의 시대별 대표작 140여 점을 선정해 미니 회고전 형식으로 작품 세계를 조망한다. 권영숙 갤러리현대 디렉터는 “국립현대미술관과 구겐하임미술관이 실험미술 기획전을 위해 자료 수집에 나서는 과정에서 성 작가를 제대로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해 지난해 9월부터 준비한 전시”라고 설명했다. 성 작가의 작업을 ‘사진 매체로 풀어낸 개념 미술’이라고 해석한 것이 특징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1970년대 작가가 직접 주인공이 돼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이를 기록한 ‘수축과 팽창’(1976년), ‘검지’(1976년)가 관객을 맞이한다. 그 다음으로 1980년대 신문 보도 사진을 재편집하고 이를 전시 공간에 맞춰 이어 붙여 설치한 ‘현장’ 연작이 두 개 벽면을 차지한다. 1979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린 ‘제5회 서울 현대 미술제’에서 처음 선보인 이 작품은 신문 보도 사진을 접사로 촬영한 다음 먹과 세필로 드로잉을 그려 넣었다. 작가는 “신문 편집자가 제시하는 사진 해석을 무효화하고 재해석하는 행위”라고 설명했다. 신문은 성 작가의 작업에서 꾸준히 중요한 매체로 사용돼 왔다. 1976년 전시장에서 매일 신문을 읽은 다음, 읽은 부분을 오려냈던 퍼포먼스 ‘신문 읽기’를 9월 6일 외국인 100명과 함께 재현할 예정이다. 10월 8일까지. 무료.● 정해진 모든 것 거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김구림’전에서는 초기 추상 작품부터 신작 ‘음과 양: 자동차’, 비디오 조각 작품인 ‘음과 양’까지 작품 230여 점과 기록 60여 점을 선보인다. 얼음이 녹는 과정을 작품으로 활용한 ‘현상에서 흔적으로’(1970년)와 실험영화 ‘1/24초의 의미’, 1990년대부터 이어진 ‘음과 양’ 시리즈로 정해진 모든 개념을 거부하는 것이 그의 작업 세계임을 엿볼 수 있다. 다만 김구림 작가는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1970년대 미술관 건물 일부를 광목천으로 묶었던 ‘현상에서 흔적으로’ 작품을 재현하려 했는데, 미술관과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돌발 발언을 했다. 이에 대해 류지연 국립현대미술관 현대미술1과장은 “미술관이 등록문화재 제375호로 지정돼 있어 관련 부처와 협의해야 하는데 처음 작품이 언급된 것이 6월 20일이라 시간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고 밝혔다. 전시는 내년 2월 12일까지. 2000∼5000원.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개관 35주년을 맞은 서울시립미술관이 서울 중구 서소문본관(사진)을 전면적으로 리모델링한다. 서울시립미술관은 23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전시동 건물이 준공 22년이 지나며 낡았고, 편의시설과 수장 및 전시 공간이 부족해 리모델링과 증축을 한다”고 밝혔다. 미술관에 따르면 리모델링 뒤에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전시동 전면부 파사드는 보존되며, 전시동을 증축하지는 않는다. 전시동 건물 파사드는 일제강점기인 1928년 한성재판소 터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 전면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건물은 1948년부터 대법원 청사로 사용됐으며,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이전한 뒤 파사드만 남기고 새로 지어져 2002년부터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이용됐다. 대신 미술관은 전시동 앞 마당에 지하 2개 층을 증축해 전시장과 수장고, 편의시설 등을 설치할 예정이다. 지하 공간 증축과 전시동 리모델링을 순차적으로 진행해 전시는 계속 개최한다. 미술관은 이날 전시 성과와 향후 운영 방향도 발표했다. 20일 끝난 전시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는 4개월간 33만1100명이 찾았다. 최은주 서울시립미술관장은 “미술관이 성장기를 벗어나 청년기에 접어들었다”며 “미술 생태계의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전시와 프로그램을 기획하겠다”고 말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모든 사람이 미래에 대해 고민하지만, 현실성이 없는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미래를 열심히 생각해봐도, 생각처럼 되지 않으니까요.” 서울 용산구 휘슬 갤러리에서 3년 만에 개인전을 여는 에이메이 카네야마(김영명·42)가 18일 말했다. ‘Future Days’라는 제목으로 신작 9점을 선보이는 그는 현실에 집중하자는 생각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현재를 긍정하자는 메시지가 아니라, 긍정도 부정도 없이 내가 갖고 있는 시간을 최대한 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덧붙였다. 재일교포 3세로 일본에서 태어나 미국 시카고예술대에서 회화를 전공한 작가는 현재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 본명은 김영명으로 일본 이름은 없지만 작가명으로 본명의 한자를 일본식으로 읽은 표기를 사용한다. 올해로 서울 생활 10년째를 맞는 그의 작업에서는 미래에 대한 막막함, 이로 인해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현재의 감각에 집중하고 싶은 마음이 느껴진다. 전시 작품 대부분은 캔버스를 나무틀에 끼우지 않고 사방으로 펼쳐 놓았다. 이전 작업에 비해 색은 더 차분해지고, 형태는 더 복잡해졌다. 전시장 입구에 걸린 표제작 ‘Future Days’가 이번 전시의 시작이 되는 작품이다. 그는 표제작에 대해 “그림 속에 빛과 공간이 생긴 것이 이전 작품들과 다른 점”이라고 설명했다. 추상 회화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칸딘스키처럼 심상에 집중하거나, 몬드리안처럼 구체적인 형태를 단순화할 수도, 또 미니멀리즘 예술처럼 철학과 미학을 토대로 추상을 그리기도 한다. 카네야마는 이런 방식보다는 개인적인 일상의 광경이나 기사에서 마주한 형상을 기록한 뒤, 그것을 한순간에 즉흥적으로 풀어낸다고 했다. ‘Gemini’나 ‘Ketos’ 같은 작품에서는 서로 다른 보랏빛과 파란빛이 전면에 펼쳐지며 깊이감을 만들어낸다. 색채의 사용에 대해 작가는 “자연 속 대상들이 원래부터 갖고 있는 색처럼 자연스러운 색을 표현하려 하고, 색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고 밝혔다. 갤러리에 들어서면 눈에 보이는 작품은 8점이 전부다. 숨겨진 작품은 작가가 마치 부적처럼 사람들의 눈에는 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요청한 것이다. 세워진 가벽을 앞뒤로 잘 살펴보면 커다란 나머지 1점을 발견할 수 있다. 9월 23일까지. 무료.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여러분 안녕하세요?화가 이중섭과 그의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의 사랑 이야기는, 이중섭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두 사람은 7년을 부부로 지냈고, 이중섭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야마모토 여사는 두 아들과 함께 70년을 살다 지난해 작고했습니다. 8월 13일이 야마모토 여사의 별세 1주기였답니다.그런 야마모토 여사의 이야기를 취재하고 일본에서 책으로 출간한 신문 기자가 있습니다. 마이니치 신문의 정치부 기자 오누키 도모코입니다. 일본어로는 ‘사랑을 그린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펴낸 그녀의 책은 2020년 한국에 관한 책으로는 처음으로 일본 쇼가쿠칸 논픽션 대상을 받았습니다.이 책이 최근 ‘이중섭, 그 사람’(혜화1117)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번역 출간됐습니다. 그녀를 만나 이중섭에 관한 책을 쓰게 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그녀를 만나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은, ‘왜 이중섭에게 매료되어 책을 쓰셨나요?’였습니다.그런데 그 질문을 하기 전에 또 다른 이중섭의 책을 펴낸 최열 미술사학자와도 함께 인터뷰를 했기 때문에, 두 분이 처음 만난 순간에 대해 질문을 해야 했습니다.오누키 씨는 이 질문에 답하면서 저에게 2016년 11월 마이니치 신문 1면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마이니치신문의 서울 특파원이었던 그녀는 한국에 관련된 소식 두 가지로 1면을 장식했습니다. 하나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소식, 또 하나는 야마모토 여사의 인터뷰 기사였습니다.이 기사를 통해 일본에 이중섭과 야마모토의 이야기가 알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오누키 씨는 한 출판사 편집자로부터 두 사람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한국에서 탄핵 정국과 대통령 선거까지 취재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던 그녀는 수년이 지나서야 책 집필 작업에 돌입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습니다.절절한 러브 스토리에 매료되다김민(민):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중섭 전시를 보고 처음 이야기를 알게 됐다고 하셨어요.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오누키 도모코(오): 솔직히 저는 그림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다만 전시장에서 두 분이 주고받았던 편지를 보게 되었어요. 한국에서는 이중섭이 보낸 편지만 유명한데 이번 취재 과정에서 야마모토 여사가 보낸 편지도 꽤 많다는 걸 알게 됐죠.그것을 순차적으로 정리해서 읽어보니, 만나기를 원하는 간절함과 서로에 대한 믿음이 느껴졌어요. 아, 나는 과연 이렇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70년 가까이 홀로 지낸 야마모토 여사의 원동력이 무엇이었을지도 궁금했어요.내가 오래 산다면 야마모토상처럼 이렇게 예쁘게 나이 들고 싶다. 그런 생각도 들면서 궁금증이 계속해서 생겨났죠.민: 그러니까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에 빠져든 거군요.오: 딱 맞아떨어지는 러브 스토리죠. 그렇지만 제가 책까지 낼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당시 매주 토요일에는 탄핵 정국 속 집회를 취재하러 다니는 등 정말 바빴거든요. 2016년 12월 출판사로부터 메일을 받았는데 당장은 어렵다고 기다려줄 수 있겠냐고 답을 드렸어요. 그리고 5년이 지나서야 책을 낼 수 있게 됐죠.‘특종병’ 있던 기자, 미공개 편지 발굴하다민: 원래 정치부 기자로 일을 하셨잖아요.오: 네. 일본에서 종합지 기자들은 입사하면 무조건 지방으로 파견이 되어서 5년 동안 온갖 취재를 한 다음 본사로 올 수 있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경제 정치 사회 등 분야에서 일을 하는데 저는 정치부를 지원했죠.그중에서도 외교 분야를 오래 취재했고, 한일 관계와 한반도, 북일 관계에 관심이 많았어요. ‘특종병’도 있었기 때문에 서울 특파원을 오면서 ‘한일 관계에 대해 무슨 특종을 할까‘ 고민을 했죠.민: 그럼 미술에는 원래 관심이 있었나요?오: 미술관에 자발적으로 간 적이 없어요(웃음). 고등학교 친구들이 여행을 가면 함께 미술관에 가자고 하는데 정말 저만 관심이 없었답니다. 이중섭 전시를 보러 가게 된 것도 어느 주간지에서 야마모토 여사의 인터뷰를 본 것이 계기였어요. “식민지부터 6.25 전쟁까지 어려운 시대를 겪은 분이 살아계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민: 야마모토 여사의 스토리가 기사가 될 거라고 생각하신 거군요.오: 마침 그분이 사시는 곳이 도쿄 저의 집과 가까웠어요. 야마모토 여사에 대한 관심을 갖고 전시를 가보니 이중섭이 한국에서 ‘국민화가’라는 걸 알게 됐죠. 서울에서 일하고 있는 일본 외교관을 통해 수소문을 했는데, 마침 야마모토 여사의 친척이 일본 외무성에 계셨어요. 그분이 저도 가까운 분이라 금방 연결이 됐고 인터뷰 날짜도 빠르게 잡을 수 있었죠.민: 수월하게 만남이 이뤄졌었네요.오: 네 야마모토 여사와 거의 바로 옆집에 사셨던 분이 일본 도쿄에 계셨고, 그분도 이중섭 부부의 사연에 매료되어 한국어를 공부하게 되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민: 직접 만난 야마모토 여사를 만났을 땐 어땠나요? 책에서는 말수가 많지 않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오: 걱정을 많이 했어요. 연세도 있으시고, 사전에 말씀이 많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질문을 하는 게 좋다는 이야기도 들었거든요. 첫 번째 인터뷰에서는 큰 기사를 써야 한다는 초조함도 있었고요. 다만 여기자에게는 조금 편하게 말씀을 하실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여성 기자로 일하며 불리함을 느낀 적이 많았는데 이럴 땐 도움이 되는구나 싶었죠.그렇게 첫 번째 만났을 때 인상은 세련된 모습이라는 느낌이었어요. 브로치와 목걸이 등 액세서리도 잘 어울리게 하시고, 전혀 90대로 보이지 않았어요. 피부도 반짝이는 느낌이었는데,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굉장히 고생을 많이 하셨잖아요. 그럼에도 ‘곱고 우아하다‘는 분위기였어요.처음엔 아주 조심스럽게 질문을 골라서 했는데, 이중섭과 만났을 때 이야기, 행복했던 신혼 생활을 이야기할 때는 꽤 오래 말씀을 하셨어요. 정확하게, 아주 밝은 표정으로. 마치 엊그제 일처럼.아 정말, 내가 만약 같은 나이가 되어도 이렇게 옛날얘기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동경심이 들었어요.민: 세 차례 인터뷰를 하셨고, 그 과정에서 미공개 편지도 발굴하셨어요. 그 과정은 어떻게 되나요?오: 제가 책을 쓰게 됐다고 둘째 아들인 야스나리상에게 말씀을 드렸더니, ‘이런 편지가 남아있다’며 보여주셨어요. 야마모토 여사가 부산에 있을 때 친정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부터 일본으로 간 뒤 주변 친구들이 야마모토 여사에게 보낸 편지. 또 이중섭을 일본으로 올 수 있게 하기 위해 야마모토의 어머님이 백방으로 노력한 편지와 기록을 보내주셨죠.그다음 2019년 말에 야스나리 씨가 집에 보관된 이중섭이 쓴 편지를 추가로 발견하게 됐어요. 그중 일부를 저에게 공개해서 책에 싣게 되었습니다.민: 책을 보면 이중섭의 흔적을 찾아 제주, 부산 등을 직접 다니셨어요. 인상 깊었던 점이 있나요?오: 이중섭을 취재하기 전에 제가 북한 원산도 취재차 가본 적이 있거든요. 이중섭이 살았던 원산, 부산, 통영, 제주 모두 바다가 있다는 게 인상 깊었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바다가 있는 곳에서 두 분이 사셨구나” 싶었고, 제주도와 부산에서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이 부부와 떼어낼 수 없는 곳이 바다였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어요.이중섭이 서울에 가서 개인전을 하다 수금에 실패해 도쿄로 오지 못하게 되었잖아요. 역사에서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혹시 바다가 있는 부산이나 통영에 머물면 좀 더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이중섭의 삶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함께 인터뷰에 응했던 미술사학자 최열은 “과거 한국의 이중섭 연구자들은 그의 일본 가족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짙었다”며 “그런 야마모토 여사의 이야기를 오누키 씨가 듣고 풀어준다고 하니 고마운 일이었다”고 말했습니다.오누키 씨의 책 ‘이중섭, 그 사람’은 그녀가 야마모토 여사를 인터뷰한 기록을 포함해 여러 가지 자료를 토대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서술하고 있습니다.이중섭의 편지화를 분석한 책을 발간한 최열의 인터뷰는 추후 뉴스레터에 소개하겠습니다.-※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금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