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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소치 겨울올림픽 폐막식에서 러시아의 정신과 문화를 아름답고 장엄하게 표현해 깊은 인상을 남겼던 연출가 다니엘레 핀치 파스카(53)가 한국을 찾았다. 스위스 출신인 그가 만든 아트 서커스 ‘라 베리타’가 27일부터 나흘간 서울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되기 때문이다. LG아트센터에서 25일 열린 간담회에 참석한 그에게 평창 겨울올림픽 개·폐막식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예산 규모와 남은 시간을 정교하게 계산해 최대치를 뽑아내는 게 중요합니다. 러시아는 소치 올림픽에서 후대에 남길 만한 작품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어요. 기술의 힘에 중점을 둬 거대한 오브제를 많이 사용했죠.” 파스카는 2006 토리노 겨울올림픽에서도 카니발 형식의 화려한 폐막식을 연출해 갈채를 받았다. 그는 “토리노 올림픽 때는 이탈리아 정취를 뿜어내며 인간의 힘을 시적으로 표현해주길 원했다”며 “개·폐막식의 경우 사람은 순수함의 결정체로, 연대와 즐거움이라는 올림픽 정신을 실현하는 존재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아트 서커스로 불리는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질문이 집중됐다. “삶의 반짝이는 순간을 애크러배틱으로 표현한 것이 서커스죠. 어릴 때 높은 곳에 올라가면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는데 그것이 서커스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진실이라는 뜻의 ‘라 베리타’는 1944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한 발레 ‘광란의 트리스탄’의 배경막으로 살바도르 달리가 그린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 달리의 작품을 2009년 경매로 손에 넣은 수집가는 파스카에게 이 그림을 공연에 사용해 달라고 제안했다. “달리의 그림을 보고 전율했습니다. 달리는 사랑, 공포 등 여러 감정을 악몽과 결합해 몽환적으로 표현했죠. 공연에서는 이를 가볍게 풀기 위해 샤갈 그림의 느낌을 많이 반영했어요.” 달리의 삶을 철학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그는 달리의 집을 찾아가 봤고, 달리의 작품과 관련 책들도 살펴봤다. 그는 “이 과정에서 얻은 영감을 모자이크처럼 하나하나 짜 맞춰 나갔다”고 했다. ‘라 베리타’는 2013년 캐나다에서 초연된 후 20개국에서 30만여 명이 관람했다. 달리의 그림은 초연부터 3년간 공연에 사용했지만 훼손을 막기 위해 이후부터는 복사본을 사용하고 있다. 1인 광대극 ‘키아로’에서 직접 연기도 했던 그는 캐나다의 양대 서커스 단체로 꼽히는 ‘태양의 서커스’와 ‘서크 엘루아즈’에서 여러 작품을 연출했다. 이 중 ‘네비아’(2008년)와 ‘레인’(2011년)은 한국에서도 공연됐다. 러시아 마린스키극장과 영국 국립오페라단에서 오페라 ‘아이다’ ‘레퀴엠’을 연출하는 등 장르를 넘어 종횡무진 활동하고 있다. 그가 설립한 극단인 ‘컴퍼니 핀치 파스카’는 스위스, 러시아, 이탈리아, 우루과이 등 18개국에서 온 단원으로 구성됐다. “다국적 단원들과 유목민처럼 세계 곳곳을 다니며 쌓은 경험을 함께 작품에 녹입니다. 한국의 이미지도 앞으로 만들 작품에 반영되지 않을까요?” 등산과 버섯 따기를 즐긴다는 그는 “관객에게 삶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놀라움과 즐거움을 선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공연은 대전예술의전당(5월 5, 6일)과 대구 수성아트피아(5월 10, 11일)에서도 열린다. 4만∼10만 원. 02-2005-0114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어머니와 아들 같았다. 다음 달 6일 서울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막을 올리는 연극 ‘하늘로 가지 못한 선녀 씨 이야기’에서 어머니 이선녀 역의 선우용여(72)와 아들 종우 역을 맡은 최수종(55)은 그랬다. 선우용여는 “우리 아들”이라며 최수종의 어깨를 쓰다듬었고 최수종은 “어머니”라고 불렀다. 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한 연습실에서 22일 두 사람을 만났다. ‘하늘로…’는 폭력적인 아버지(한갑수)와 갈등을 빚던 종우가 스물다섯 살에 집을 나간 후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15년 만에 영정 앞에서 어머니의 삶을 돌아보는 내용을 담았다. 젊은 시절의 선녀 역은 윤해영이 연기한다. 지난해 뇌경색을 앓았던 선우용여는 “몸을 제대로 못 움직일까 봐 죽음보다 더 큰 두려움을 느꼈다. 투병을 하면서 올봄에는 무조건 연극을 하리라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연극은 자신을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도전하게 만들기 때문이란다. 최수종은 “어머니의 대사 분량이 저보다 훨씬 많은데 일찌감치 다 외우셨다”며 거들었다. 선우용여는 곳곳에 밑줄이 그어진 채 너덜너덜해진 대본을 손에 꼭 쥐고는 “처음 경상도 사투리 연기를 하는데 쉽지 않다”며 수줍게 웃었다. 반듯한 이미지의 최수종은 반항적인 탕아를 연기한다. 최수종은 “아버지에게 환멸을 느끼고 집을 뛰쳐나가 험한 생활을 하다 그렇게 됐다. 종우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된다”고 말했다. 최수종은 초등학교를 부산에서 다닌 데다 경상도 친구가 많아 사투리를 쓰는 게 어렵지 않단다. 그는 ‘서울 열목어’(1997년), ‘대한국인 안중근’(2009년) 후 8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선다. “연극은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고 많이 배우게 돼요. 다 함께 하나하나 다져가는 과정도 좋고요. 참 설레네요.”(최) 최수종은 모진 삶을 견디면서도 아이들을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긴 선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중간중간 큰 눈에 눈물이 맺혔다. 라디오를 진행하며 청취자 사연을 읽다가도 자주 운단다. “집에서도 아내(하희라)와 TV를 보며 같이 울 때가 많아요. 울다가 서로 휴지를 건네주는 게 자연스러운 일상이에요.”(최) 선우용여는 “마음이 약하고, 때가 안 묻어서 그래요”라며 거들었다. 선녀는 선우용여의 삶과도 상당 부분 겹친다. 그 역시 결혼 후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쉼 없이 연기하며 자식들을 키워냈다. 그래서일까. 선우용여는 선녀가 남편 때문에 힘들어도 아이들을 꿋꿋하게 키운 게 마음에 든단다. “돌아보니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정신없이 연기했어요. 이제는 한 작품 한 작품 꼼꼼히 분석하고 소화해서 연기하고 싶어요.”(선우) 최수종은 악역에 도전해보고 싶어 했다. “악역 제안을 많이 받았지만, 왜 악해졌는지 납득하기 어려운 캐릭터들이어서 거절했어요. 악인이 그렇게 된 이유가 충분히 이해되면 꼭 할 거예요.”(최) 선우용여가 “우리 아들, 새로운 연기 많이 해야지”라며 최수종의 등을 토닥였다. 최수종이 눈을 마주 보며 빙그레 웃었다. 5월 6∼21일. 7만7000∼8만8000원. 02-322-2061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봄이 성큼 다가왔다. 황금연휴에 화창한 날씨까지 더해져 나들이하기 더없이 좋은 때다.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다양한 공연도 풍성하게 열린다. 무료로 즐길 수 있는 야외 공연도 많다. ○ 거리에서, 극장에서 5월 5일부터 7일까지 2017안산국제거리극축제가 경기 안산문화광장과 안산 일대에서 열린다. 14개국 76개 공연팀이 참가해 116편의 작품을 선보인다. 개막 프로그램인 ‘안安寧녕2017’은 시민 참여형 길놀이로 저글링, 타악기 연주 등을 결합했다. 고공줄타기를 비롯해 불꽃을 따라 배우와 관객이 함께 이동하는 퍼레이드형 공연도 열린다. 무료. 031-481-0536, 0540 안데르센의 동화를 연극으로 만든 ‘엄마 이야기’가 29일부터 5월 21일까지 서울 종로구 아이들극장에서 막을 올린다. 아이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는 엄마의 애틋한 여정을 그렸다. 한태숙 씨가 연출하고 배우 박정자, 전현아, 김성우 등이 출연한다. 3만∼4만 원. 02-2088-4290 태권도를 홀로그램과 접목한 라이브 퍼포먼스 ‘킥스: 시즌2’도 서울 올림픽공원 K아트홀에서 열리고 있다. 대한태권도협회 국가대표 시범단이 배우로 나서 화려하고 절도 있는 연기를 선보인다. 8월 26일까지. 4만∼5만 원. 02-918-1982 ‘판타지: 꿈꾸는 세상’을 주제로 제16회 의정부음악극축제도 5월 12일부터 21일까지 열린다. 6개국 40여개 단체가 참가해 60여 회 공연과 전시, 체험 행사를 개최한다. 덴마크와 라트비아가 공동 제작한 ‘워 섬 업’(War Sum Up·5월 15일 의정부예술의전당 대극장, 2만∼5만 원)은 전쟁을 주제로 동서양의 스타일을 섞어 몽환적으로 그린 새로운 유형의 오페라다. 드뷔시가 영감을 받은 모험담을 그린 스페인 작품 ‘드뷔시의 음악여행’(5월 13, 14일·의정부예술의전당 소극장·2만 원)도 열린다. 031-828-5841, 2, ○ 눈높이 맞춘 클래식-동요 무대 어린이들이 클래식 음악에 흥미를 느끼게 하는 ‘어린이를 위한 음악회’도 열린다. 5월 5일 오후 2시 경기 성남시 티엘아이아트센터에서는 장난감 6개를 악기로 사용하는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장난감 교향곡’, ‘학교 다녀오겠습니다!’와 벤저민 브리튼의 ‘심플 심포니’가 열린다. 1만5000원. 031-779-1504 음악과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어린이 공연도 있다. 5월 5, 6일 오후 2시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는 최영선 지휘자와 디토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롯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과 브리튼의 ‘청소년을 위한 관현악 입문’, 프로코피예프의 ‘피터와 늑대’를 공연한다. 리코디스트 염은초가 ‘피터와 늑대’ 이야기를 해설한다. 공연장 주변에서 바비인형도 전시한다. 2만∼3만 원. 1544-7744 애니메이션과 클래식 음악을 함께 즐길 수도 있다. 5월 5, 6일 오후 1, 4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열리는 ‘와우! 클래식 앙상블’은 애니메이션과 음악의 결합을 통해 동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프로코피예프의 ‘피터와 늑대’,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가 연주된다. 2만 원. 02-399-1000 세계 각국의 동요를 듣는 무대도 있다. 5월 6, 7, 13일 오후 5시 서울 예술의전당 신세계스퀘어 야외무대에서 열리는 ‘동요콘서트’에서는 다채로운 동요 연주와 합창이 펼쳐진다. 무료. 02-580-1300손효림 aryssong@donga.com·김동욱 기자}

회사원 김민경 씨(33)는 연극 ‘유도소년’을 지난달 29일 집에서 봤다. 한 인터넷 포털에서 당일 전막 공연을 생중계했기 때문이다. 김 씨는 “배우의 표정이 생생하게 보이고 관객의 웃음소리도 들려 현장감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본 주여원 씨(42)도 “7시간짜리 대작을 수월하게 볼 수 있어 반가웠다”고 말했다. 연극, 뮤지컬 등 공연을 집에서 즐기는 이가 많아지고 있다. 하이라이트 장면이 아니라 공연 전체를 인터넷으로 생중계하거나 TV로 보여주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 확보 효과 쏠쏠 올해 연극 ‘유도소년’과 ‘왕위 주장자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신인류의 백분토론’을 비롯해 판소리와 무용을 결합한 ‘적벽’ 등도 인터넷을 통해 전막 생중계됐다. 뮤지컬 ‘오! 캐롤’은 이달 초 지상파 TV에서 1막, 2막이 두 차례에 걸쳐 방송됐다. 카메라를 4∼7대가량 사용해 여러 각도에서 무대와 배우를 보여줘 영상으로 봐도 지루하지 않다는 의견이 많다. 저작권 보호 때문에 다시보기 서비스는 제공하지 않는다. 실황 중계는 공연을 알리는 데 상당한 효과가 있다는 반응이다. ‘유도소년’은 9000명 넘게 중계를 봤는데, 다음 날 한 포털 사이트에서 공연 검색어 순위가 6위에서 2위로 뛰었다. 19만 뷰가 나온 ‘적벽’은 공연이 중계되는 70분 동안 예매된 표가, 평소 나흘에 걸쳐 판매된 분량과 같았다. 1만3500여 명이 접속한 ‘왕위…’ 역시 중계하는 동안 예매율이 상승했다. ‘오! 캐롤’ 관람객 가운데서도 방송을 보고 왔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세종문화회관은 페이스북 라이브로 서울시 유스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실황 중계했다. 뮤지컬 ‘밀사’도 다음 달 23일 중계한다. 손상원 정동극장장은 “전통 공연은 직접 봐야 매력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며 “경북 경주시에서 공연 중인 쇼퍼포먼스 ‘바실라’도 27일 생중계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 “영상물로 만들어야” 공연 실황 중계는 댓글을 통해 관객의 반응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관객을 늘리는데도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다. 오정화 세종문화회관 홍보마케팅팀장은 “연극을 처음 봤다며 관심을 보이는 댓글을 올린 이들이 적지 않았다”며 “공연은 한 번 경험하면 계속 보러 다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관객층이 확대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문가들은 공연이 여러 매체와 결합해 외연을 확장하려는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보관 가능한 기록물로 남겨야 한다고 조언한다. 원종원 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영국 국립극장이 공연을 영상물로 만든 ‘NT 라이브’가 전 세계에서 상영되는 등 해외에서는 공연을 DVD로 제작하는 것이 활성화돼 있다”며 “국내 공연도 영상물로 만들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 공연을 즐기고, 제작자들도 못 본 작품을 보고 경험을 축적해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가슴이 뻥 뚫리는 노래와 찡한 이야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뮤지컬 ‘드림걸즈’가 제격이다. 해외 배우들이 첫 내한 공연 중인 이 작품은 2007년 동명 영화로도 개봉됐다. 흑인 소녀 에피, 디나, 로렐이 가수의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겪는 갈등과 상처, 화해를 그렸다. 1960년대 미국의 유명 흑인 R&B 여성그룹 ‘슈프림스’의 실화를 모티브로 만든 작품으로 1981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됐다. 최우수작품상과 안무상, 조명상 등 토니상 6개 부문을 수상했다. 이번 공연은 브로드웨이 제작진과 한국 제작진이 함께 작품을 다듬었다. 메인 보컬 자리와 사랑을 빼앗긴 후 그룹을 떠나는 에피 역의 브리 잭슨은 풍부한 성량과 압도적인 고음으로 가슴을 진동시킨다. 그가 뿜어내는 소리와 에너지는 단연 압권이다. 디나(캔디스 우즈), 로렐(앙투아넷 코머)을 연기한 두 배우 역시 뛰어난 가창력과 연기로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무브’ ‘드림걸즈’ ‘원 나이트 온리’ ‘리슨’ 등 익숙한 노래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 스타를 꿈꿨지만 높이 올라갈수록 공허해지고, 자신을 잃어가는 과정도 설득력 있게 담았다.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연예계의 추악한 이면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반목하고 갈라섰던 이들이 다시 함께하는 모습에서는 뭉클한 자매애를 느낄 수 있다. 다양한 빛깔로 수놓은 조명과 화려한 복고풍 의상은 풍부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뮤지컬에서 기대하는 여러 요소들을 만족시키는 작품이다. 6월 25일까지, 서울 샤롯데씨어터, 6만∼14만 원. 1588-5212 ★★★☆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검정개, 흰 구렁이, 새를 연기했던 동물 전문 배우가 ‘사람’으로 존재감을 빛내며 연극계의 ‘블루칩’이 됐다. 배우 이기돈(38)이다. 올해 1월 ‘리처드 3세’에서는 권력욕에 불타오르는 잔혹한 리처드 3세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악마적 본성을 지닌 스메르쟈코프 역을 맡아 소름끼치는 연기를 선보였다. 그는 21일 개막하는 연극 ‘가족’에서 주인공 종달 역을 맡아 아버지에게 억눌려 기를 펴지 못하고 분열되는 캐릭터를 실감나게 연기한다. 공연이 열리는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14일 그를 만났다. “동물 전문 배우라는 말이 싫지 않아요. 뭐든 ‘전문’이라는 건 좋잖아요. 하하.” 연습실에서 봤던 종달의 불안한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연극영화과에서 연출을 전공한 그는 후배인 하지혜 배우의 추천으로 오디션에 응모해 2006년 ‘이아고와 오셀로’(한태숙 연출)에서 검정개 역으로 데뷔했다. 이를 위해 손에 장갑을 끼고 석촌호수 산책로를 아침마다 네 발로 뛰어다녔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의 흰 구렁이, ‘오장군의 발톱’에서 살인자 겸 개, ‘오이디푸스’의 새 등을 맡으며 강렬한 눈빛과 날랜 몸놀림으로 주목받았다. 대사를 조금씩 하게 됐고, 2011년 ‘주인이 오셨다’에서 주인공에 발탁됐다. 꾸준히 무대에 올랐지만 연기를 제대로 못한다는 자괴감에 연극을 접으려 했다. “귀농해서 미니인삼을 키우려고 했어요. 4, 5주 만에 자라고 샐러드와 기내식에 많이 쓰인다더라고요.” 소식을 들은 이윤택 연출가는 “이 녀석,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대사를 주겠다”며 ‘길 떠나는 가족’(2014년)에서 열 개 이상의 역할을 하는 멀티맨을 시켰다. “연극의 재미를 다시 느꼈어요. 가슴이 뜨거워졌죠. ‘리어왕’(2015년)의 광대 역은 정말 즐거웠어요. 매일 다른 동선으로 움직이며 에너지를 쏟아냈는데, 내게 이런 면이 있었나 싶더라고요.” ‘가족’은 자산가 기철(김정호)이 광복 후 정치에 뛰어들며 몰락하고, 가족들이 상처를 입는 과정을 그렸다. 장남인 종달은 강압적인 아버지 때문에 회피성 성격장애까지 갖게 되지만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종달을 이해해요. 저도 장남인 데다 어릴 적 아버지는 못하는 게 없는 완벽한 존재로 보였거든요. 외환위기로 아버지의 사업이 망해 형편이 어려워진 것도 비슷하고요.” 먹고사느라 3년간 옷, 액세서리 등을 파는 노점상을 하며 지쳐갈 즈음 만난 게 연극이었다. 그는 실험적인 작품을 비롯해 코믹 연기까지, 비중에 관계없이 새로운 역할에 도전하고 싶단다. “단역을 할 때는 대사 욕심이 있었지만 지금은 안 그래요. 연극은 주연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요. 한태숙 선생님이 ‘검정개 한 번 더 할래?’ 하시면 망설이지 않고 ‘네!’라고 할 거예요.”(웃음) 21일∼5월 14일, 2만∼5만 원. 1644-2003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서울 LG아트센터 로비에 긴 줄이 생겼다. 연극 ‘파운틴헤드’가 끝난 직후인 지난달 31일 원작인 동명 소설(아인 랜드 지음·사진)을 사려는 이들 때문이었다. 두툼한 책 두 권은 투명한 봉투에 담겨 쉴 새 없이 건네졌다. 이 연극은 예술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타협을 거부한 건축가를 통해 개인주의와 이타주의의 팽팽한 대립을 다뤘다. 벨기에 출신의 유명 연출가 이보 반 호브의 파격적인 연출과 배우들의 빼어난 연기는 4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가게 만들었다. 보고 나니 원작이 궁금해졌다. 공연장 측은 준비한 40세트가 금방 판매돼 발길을 돌린 이가 적지 않았다고 전했다. 멋진 공연은 원작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2012년 개봉한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도 그랬다. 영화를 본 후 방대한 분량의 완역본 읽기에 도전한 한 지인은 “책장을 아무리 넘겨도 장발장이 나올 기미가 안 보인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여러 장르로 변주된 작품이 선사하는 다채로운 즐거움을 자주 맛보길 기대해 본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극적인 글을 쓰라고 제자를 몰아붙이는 교사 헤르만, 친구의 집을 관찰하고 그의 어머니에 대한 은밀한 욕망을 점점 대담하게 행동에 옮기며 글을 써 나가는 학생 클라우디오. 이를 지켜보는 헤르만은 혼란에 빠지지만 클라우디오는 침착하다. 매진을 이어가고 있는 연극 ‘맨 끝줄 소년’이다. 헤르만 역의 박윤희(50)와 클라우디오를 연기하는 전박찬(35)을 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만났다. 이들은 매진 소식에 “감사하면서도 두렵다”고 했다. 2015년 초연한 이 작품은 뇌종양으로 지난해 세상을 뜬 고 김동현 연출가(당시 51세·극단 코끼리만보 창단)의 유작이기 때문이다. 두 배우는 초연도 함께 했다. 고인은 올해도 연출가로 이름을 올렸고 당시 드라마투르그(희곡 연구 및 자료 조사, 작품 해석을 맡는 사람)였던 김 연출가의 아내 손원정 씨가 올해 ‘리메이크 연출가’로 데뷔했다. 이들은 이전보다 유연해지고 더 단단해진 것 같단다. “예전에는 강하게만 연기했는데, 이번에는 작가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일상에 지쳐가는 헤르만의 감정을 헤아리게 됐어요. 학생 라파(유승락)에게 모욕을 준 것을 사과할 때도 이를 받아들일 수 없어 가슴에 응어리진 모습을 표현하고요.”(박윤희) “초연 때는 책상 위나 바닥에 드러누워 수업을 듣는 등 반항적이었어요. 이번에는 그런 장면 없이 감정을 가두고 더 차갑게 연기해요. 클라우디오를 소름 끼치는 존재가 아니라 보듬어주고 싶은 아이라는 느낌을 주려 애쓰고 있어요.”(전박찬) 이들은 김 연출가가 다시 작품을 올려도 이렇게 요구했을 것 같단다. 손 연출가는 멈칫하는 배우들을 다독이며 한 걸음씩 나아가도록 독려했다. 작품은 악기의 줄이 하나하나 팽팽하게 조여지는 듯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권력 관계의 전복, 극적으로 터져 나오는 인간의 이중성 등을 그리며 짜릿한 흥미로움을 자아낸다. 이들은 김 연출가를 시인처럼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면서도 책임감 강한 이로 기억했다. “10년 전에 김 선생님을 만났는데 ‘배우로서 네 세계관은 무엇이니?”라고 물어보셨어요. 누구도 하지 않았던 질문이었죠.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깨치고 싶다고 말씀드리자 ‘그거 알 때까지 나랑 놀래?’라고 하셨어요.”(전박찬) “진짜 같은 환상을 보여주는 게 무대라고 강조하셨어요. 아픈 내색을 전혀 안 하시고 이 악물며 버티셨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가슴을 쳤습니다.”(박윤희) 박윤희는 젊은 시절 한 연출가로부터 배우에 맞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1년간 조연출을 하다 무대를 떠났다. 하지만 쉬지 않고 연극을 보며 감각을 유지했고, 다시 배우로 돌아왔다. 2007년에는 ‘심판’으로 동아연극상 유인촌신인연기상을 수상했다. 그는 “어딘가에 내 무대가 있을 거라 믿었다”며 “예전에는 이름 석자를 남겨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지금은 후배들이 마음껏 놀 수 있는 멍석을 깔아주는 선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해맑은 얼굴의 전박찬은 도발적이면서도 똑 부러지는 연기로 주목받고 있다. 그는 “즐거움과 위로를 건네는 배우가 되면 좋겠다”는 소망을 밝혔다. 30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1만∼5만 원. 02-580-1300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하늘은 한 알의 보리알,/지금 내 앞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보릿고개’ 중) ‘보릿고개’ ‘촛불’ ‘접동새’ 등으로 잘 알려진 후백(后白) 황금찬 시인이 8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9세. 현역 문인 가운데 최고령으로 활동해 온 시인은 강원 속초시 출신으로 자연을 소재로 한 시를 많이 써 ‘동해안 시인’으로 불렸다. ‘현장’ ‘오월나무’ ‘나비와 분수’ ‘오후의 한강’ ‘호수와 시인’ 등 시집 39권과 ‘행복과 불행 사이’ 등 수필집 25권을 펴내며 왕성하게 활동했다. 40번째 시집을 준비하던 고인은 지난해부터 거동이 불편해졌지만 시집 출간에 대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집을 끝내 마무리하지 못하고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다. 신달자 시인은 9일 “곁에 있는 이들을 늘 웃게 만드셨고, 맑은 영혼을 지닌 영원한 시인이셨다”고 애도했다. 고인은 기분이 좋을 때면 동요 ‘봄이 오면’을 즐겨 부를 정도로 아이 같은 고운 성정을 지녔다는 게 시단 후배들의 전언이다. 함경북도 성진에서 성장했고 1939년 문학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부두 노동을 하며 번 돈으로 일본 다이도(大東)학원을 다녔다. 4년 후 성진으로 돌아온 고인은 노동운동에 뛰어들었고, 6·25전쟁으로 월남한 뒤에는 강릉농업학교, 동성고교 등에서 국어교사를 지냈다. 1947년 월간 ‘새사람’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51년 강릉에서 ‘청포도’ 동인을 결성했고 이듬해 청록파 시인 박목월의 추천을 받아 ‘문예’로 등단했다. 박목월 박두진 피천득 등 시우(詩友)들을 모두 떠나보낸 뒤에도 홀로 시집을 향한 열정을 불태웠다. 오랜 기간 해변시인학교 교장으로 활동했고, 각종 TV 교양 프로그램에도 자주 출연해 문학을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섰다. 후배 문인들에게도 깊은 존경을 받았다. 지난해 열린 백수연(白壽宴·99세 생일잔치)에서 제자와 후배 문인들로부터 고인의 시 2018편이 담긴 필사집 ‘그리움의 노래’를 헌정받았다. 빈소에는 8일부터 이근배 성춘복 허영자 홍금자 등 시인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김문정 시인은 “선생님은 ‘시인은 하늘의 별이 되어야 하고, 하늘의 눈으로 사랑을 노래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어머니를 너무나 사랑했던 선생님이 생전에 애틋하게 여기셨던 시 ‘어머님의 아리랑’에서처럼, 어머니와 함께 진달래를 따기 위해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애도했다. 고인은 이 시에서 ‘어머님은/봄 산에 올라/참꽃(진달래)을 한 자루 따다 놓고/아침과 점심을 대신하여/왕기에 꽃을 담아 주었다’며 절절한 그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2015년 황금찬문학상이 만들어졌고, 고인의 이름을 딴 문학관 건립도 추진 중이다.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월탄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한국기독교문학상, 문화훈장보관장 등을 받았다. 장례식은 빈소가 마련된 서울성모병원에서 11일 오전 8시 반 대한민국 문인장으로 치러진다. 장례위원장은 성춘복 시인, 사회는 이애진 시인이 맡았다. 홍금자 시인이 고인의 연혁 보고를 하고, 최규창 시인이 조시를 낭독한다. 김문정 시인이 ‘어머님의 아리랑’을 낭송할 예정이다. 유족으로는 도정 누리목장 대표, 도원 윈드로즈 대표, 애경 씨 등 2남 1녀가 있다. 장지는 경기 안성시 초동교회묘지. 02-2258-5940 ▼ 봄꽃처럼 활짝 핀 한글사랑… 천국에서도 그 뜻 펼치소서 ▼이근배 시인 추모사 지금 이 나라 산천은 꽃 만발입니다. 선생님의 모국어 사랑, 한글 사랑이 꽃과 더불어 활짝 피어나던 이 봄날 아침에 선생님은 홀연히 붓을 놓고 먼 길을 떠나셨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색동옷 입은 제자들이 부르던 선생님의 시 ‘어머님의 아리랑’이 이 산 저 산 소쩍새들의 울음으로 들려옵니다. 나라 뺏긴 지 여덟 해 만에 태어나시어 여섯 살 때 할아버지가 가솔을 데리고 북간도 망명길에 가다가 함경북도 마천령 용소골에서 머물러 사셨지요. ‘10분의 4는 집을 닮고 그 남은 6은 토굴’이었던 집에서 어머님의 아리랑은 함께 살아온 온 겨레의 아리랑이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우리 시대의 노래입니다. ‘한글/그 글자 속엔/어머님의 음성과 아버님의 음성이 숨 쉬고 있다’(시 ‘한글’)고 하셨듯이 일찍이 한글의 얼이 곧 나라의 얼임을 깨달으셨습니다. 1947년 월간지 ‘새사람’에 등단하셨으니 올해로 회방년(回榜年·등단 60년)을 넘어 시력으로 고희를 맞으시는 해이기도 합니다. 후백 선생님! 선생님은 책 읽는 법, 글 쓰는 법뿐만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말씀으로 또는 품성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남달리 몸에 배기도 했지만 저의 눈에는 선생님의 풍모에서 예수만이 아닌 공자도 석가도 함께하심을 뵈올 수 있었습니다. 대학에서 문예창작과 학생들에게 저의 졸시 ‘겨울자연’을 칠판에 써놓고 모두 외우라고 하셨죠. 그러고는 저를 만나면 “이 선생, 이제 시 그만 쓰세요. 그 시 하나면 됩니다” 하며 등을 두드려 주셨습니다. 어찌 저에게뿐이겠습니까. 선후배 시인 모두에게 선생님은 늘 덕담을 해주셨고 따르는 후학들에게는 큰 스승이자 친구이자 연인이셨습니다. 해마다 섣달이면 시낭송 모임 뒤풀이에서 소주 한 잔을 올리곤 했습니다. 재작년 뵈올 때 제가 이백수(二白壽) 상수하시라고 제자들에게 박수 치게 한 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가실 줄 알았으면 한 번 더 손이라도 잡아보는 것인데…. 후백 선생님! 가시는 하늘나라에도 꽃들은 피겠지요. 입술이 파랗게 먹던 참꽃(진달래)도 있겠지요. 부디 그 나라 산천에 일백 년 모국어 사랑! 더 높고 더 긴 강 이루소서. ― 후학 이근배 곡만(哭輓)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한태숙 씨가 연출하고 배우 손진환, 예수정 씨 등이 출연하는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이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12일 막을 올린다. 베테랑 연출가와 배우가 손잡고 지난해 무대에 올린 이 작품은 높은 완성도로 주목받으며 객석 점유율 95%를 기록했다. 평생 외로운 세일즈맨으로 살아온 윌리 로먼 역을 맡은 손 씨는 처절하게 분열돼 가는 연기를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윌리의 아내 린다 로먼을 연기한 예 씨는 원작에서 확인하기 쉽지 않았던 존재감을 뚜렷이 부각시켰다. 아버지와의 갈등을 섬세하고 날카롭게 연기한 장남 비프 역의 이승주와 밝아 보이지만 이면에 외로움을 지닌 차남 해피 역을 맡은 박용우가 올해도 합류했다. 지난해는 윌리의 분열에 초점을 맞췄다면 올해는 현실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는 청춘의 좌절도 강조했다. 비프와 해피를 통해 이 시대 젊은이들의 모습을 밀도 있게 투사한 것이다. 공연 기간 중에는 ‘88만 원 세대’의 저자인 우석훈 씨와 강태경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가 진행하는 강의와 대담 프로그램도 예술의전당 CJ라운지에서 진행한다. 12∼30일, 3만5000∼5만5000원. 02-580-1300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재기발랄한 또 한 편의 창극이 탄생했다. 국립창극단이 처음 선보인 창극 ‘흥보씨’는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하기 어렵다. 흥보는 착하고 놀보는 심술궂다는 점 외에는 사실상 새로 썼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극본과 연출을 맡은 고선웅 연출가가 오랜 시간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고 씨는 2014년 ‘변강쇠 점찍고 옹녀’ 극본과 연출로 창극에 처음 도전해 대히트를 쳤다. 소리꾼 이자람은 ‘흥보씨’의 소리를 짜는 작창(作唱)과 작곡, 음악감독을 맡아 판소리의 맛을 살리면서도 젊음과 경쾌함을 더했다. 흥보(김준수)는 자식이 없던 연생원(김학용)이 양자로 들인 장남이고, 동생 놀보(최호성)는 연생원의 아내가 외간 남자와 통정해 낳은 차남이다. 흥보가 도와준 제비(유태평양)는 외로운 아녀자들을 위로(?)해주는 춤꾼이다. 외계인도 등장한다. 기존 요소를 살짝살짝 비틀거나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 잘 알려진 이야기에 신선한 숨결을 불어넣었다. 극을 관통하는 철학은 ‘비움’이다. 가난을 텅 빈 충만으로 받아들이는 흥보는 구도자를 연상시킨다. 그리스도, 석가모니의 이미지도 덧입혔다. 다만 후반부에 흥보가 놀보를 위해 가혹한 희생을 자처한 설정은 선함을 지나치게 증폭시켜 극의 힘을 떨어뜨리는 느낌을 준다. 기둥 줄거리 자체가 ‘권선징악’을 충분히 웅변하기 때문이다. 캐릭터에 맞게 절묘하게 캐스팅된 단원들은 배역을 120% 소화하며 웃음과 흥을 끌어낸다. 창극의 변신은 현재 진행 중임을 다시 한 번 입증한 무대다. 16일까지.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2만∼5만 원. 02-2280-4114 ★★★(★5개 만점)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봄과 함께 어김없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돌아왔다. 1969년 초연된 후 올해 48주년을 맞는 이 작품은 대부분 봄에 공연됐다. 올해는 서울 마포구 소극장 산울림에서 7일 시작한다. 극장 건물 2층에 있는 갤러리 ‘산울림 아트 앤 크래프트’에서 작품의 역대 포스터와 임영웅 연출가(81)의 연출 노트를 비롯해 의상, 소품 등을 전시하는 행사(12∼23일)도 열린다. 전시회 관람은 무료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사뮈엘 베케트(1906∼1989)가 쓴 ‘고도…’는 앙상한 나무 아래에서 하염없이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내를 통해 기다림과 삶의 의미 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작품에 숱하게 참여한 관록 있는 배우들이 이번에도 무대에 선다. 지금까지 830여 회 출연하며 ‘가장 오랫동안 고도를 기다려온 배우’ 한명구가 블라디미르 역을 맡았다. 그는 1994년 블라디미르 역으로 처음 출연한 뒤 꾸준히 무대에 섰다. 럭키 역을 맡은 1996년과 박사학위 논문을 쓰던 2006, 2007년을 제외하고는 계속 블라디미르로 열연했다. 한 씨는 “인간과 존재의 본질을 다룬 작품이라 ‘고도…’를 할 때마다 경전을 읽는 느낌이다. 잊고 있던 이상을 떠올리고, 지금 내가 잘 살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그는 첫 출연 때 입었던 옷과 신발을 그대로 쓴다. 한 씨는 “마와 비슷한 소재로 된 얇은 옷이었는데, 계속 천을 덧대어 꿰매 입다 보니 두툼해졌다”며 웃었다. 한 씨와 함께 고도를 기다리는 에스트라공 역은 박상종이 맡았다. 박상종은 2005년부터 이 작품에 출연했다. 포조 역의 이호성은 1994년부터, 럭키 역의 박윤석은 2008년부터 각각 출연했다. 임 연출가는 반 백년 가까이 해 온 작품인데도 대사 하나 하나를 꼼꼼하게 점검하고 있다. 한 씨는 “웬만해서는 대사에 손대시지 않는데 올해는 블라디미르의 대사 ‘그럴걸’을 ‘아마도 그럴걸’이라고 해 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셨다. 마모된 부분을 날카롭게 벼리시는 듯하다”고 말했다. 임 연출가는 “작품을 올릴 때마다 늘 새롭고, 해를 거듭할수록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어 즐겁다”고 말했다. 7일∼5월 7일. 4만 원. 02-334-5915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선배님이 씻겨주고 밥도 떠먹여주세요. 저는 해주시는 대로 다 받고요.” 배우 정영숙 씨(70)가 옆자리에 앉은 이순재 씨(82)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아내가 치매에 걸린 70대 부부의 이야기를 그린 창작 연극 ‘사랑해요, 당신’에서 부부 역을 맡은 이들 사이에는 편안한 공기가 흘렀다. 이 씨는 “평소에 잘 못해줘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직접 돌보는 거지”라고 답했다. 이 씨가 원장을 맡아 운영하는 서울 강남구 SG연기아카데미에서 지난달 31일 이들을 만났다. 4일 막을 올리는 이 연극에서 이 씨는 무뚝뚝한 전직 교사 한상우 역을 맡았다. 정 씨는 모든 걸 참고 살아오다 치매로 서서히 자신을 잃어가는 아내 주윤애를 연기한다. 그때껏 윤애가 남편에게 유일하게 바란 건 함께 여행을 가는 것이었지만, 무심한 남편은 귀 기울이지 않았다. 치매를 앓으니 아내는 뭘 원하는지도 모르게 됐고, 그런 아내에게 남편은 더 미안해진다. 장용(72), 오미연 씨(64)도 부부로 나와 이들과 번갈아가며 출연한다. 가천대 길병원이 제작 지원을 하고 의료 자문도 했다. 이 씨는 아내에게 잔소리하고 자녀들을 엄하게 대한 한상우가 가슴으로 이해된다고 말했다. “교육자니까 자녀들이 엇나가지 않도록 야단치며 키울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잔소리를 해도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고요.”(이 씨) 실제 이 씨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일절 잔소리를 하지 않는단다. 정 씨가 “애정 표현은 하시죠?”라고 물었다. “안 해. 그걸 꼭 말로 해야 하나. ‘꽃보다 할배’에서도 나랑 신구는 집에 전화 안 하잖아. 박근형도 아내가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다정하게 바뀐 거지 옛날에는 안 그랬어.”(이 씨) 정 씨는 치매 환자를 실감나게 연기하려 애쓰고 있다. “치매 환자들을 관찰하고 상상도 해 봤어요. 초점이 나간 눈빛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고요.”(정 씨) 노인이 나온다고 해서 연극이 고리타분할 것이라 여기면 오산이라고 이들은 강조했다. “늙은이들이 주책 떠는 게 더 재미있어. 웃기는 장면이 많아요.”(이 씨) “아휴, 연습할 때마다 얼마나 웃는지 몰라요.”(정 씨) 이 씨는 미국 대통령 이름을 재임 순서대로 모두 외우는 등 뛰어난 기억력으로 유명하다. 이날도 이 씨는 정 씨가 출연한 드라마와 역할, 연도는 물론 상대 배우 이름까지 줄줄 읊었다. 정 씨는 “어머, 맞아요!”라며 연신 감탄했다. 정 씨는 성경 구절을 암송하며 기억력을 유지한다고 했다. 올해 연기 인생 61주년을 맞은 이 씨는 다시 태어나도 배우가 되겠단다. “한 작품 한 작품 하다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어. 연극은 관객과 호흡하고 교감할 수 있어서 특히 매력적이지.”(이 씨) 정 씨는 배우이기에 억척스러운 여인, 주책 맞은 고모 등 다양한 삶을 살 수 있어서 참 좋단다. 이 씨는 아내와 여유 있게 여행을 다녀오고 싶어 했다. 연극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었다. “아내와 길게 여행 간 건 태국 푸껫을 일주일 다녀온 게 전부예요. 자연도 좋고 문화적으로도 볼 게 많은 유럽을 열흘 정도 같이 가 보고 싶어.”(이 씨) 정 씨가 “남편과 다녀 보니 별로 편치 않던데요”라고 말하자 이 씨가 “그런가?”라며 고개를 갸웃했다.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4일∼5월 28일 서울 대학로 예그린씨어터. 6만 원. 1566-5588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남의 돈은 물론이고 아이디어도 빼앗고,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뒤처질까봐 멈추지 못하는 곳. 한국이다. 연극 ‘목란언니’는 탈북 여성의 시각에서 본 ‘요지경’ 남한의 모습을 신선하고 경쾌하게 풀어냈다. 그러면서도 묵직한 주제 의식을 놓치지 않는다. 2012년 동아연극상 희곡상(김은성 작)을 받는 등 주요 상을 휩쓸었다. 평양예술학교에서 아코디언을 전공한 조목란(김정민)은 뜻하지 않은 일에 휘말려 한국에 왔지만 브로커에게 속아 정착금과 임대아파트 보증금을 잃는다. 부모가 있는 북한으로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돈은 5000만 원. 룸살롱을 운영하며 세 남매를 키운 조대자(강지은)는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한 아들 태산(안병식)의 간병인으로 목란을 받아들인다. 경계인 목란의 눈으로 본 남한은 균열로 가득 차 있다. 철학과 교수 태강(김주완)은 학과가 폐지돼 갈 곳을 잃고, 태양(이지혜)은 무명작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반갑습니다’ ‘려성은 꽃이라네’ 등 북한 노래가 율동과 함께 나오는가 하면 탈북 남성의 과장된 간증 등 짧은 에피소드들이 휘몰아치듯 튀어나오는 가운데 목란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냉혹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악스럽게 몸부림치는 사람들은 남과 북 그 어디에도 파라다이스가 없음을 서글프게 증명한다. 객석을 네 군데로 나눠 중앙과 객석 사이를 무대로 활용함으로써 극의 역동성을 높였다. 상처와 폭력으로 얼룩진 우리 근현대사와 오늘날의 현실을, 마냥 우울하지 않으면서도 예리하고 촘촘하게 빚어낸 솜씨가 일품이다. 4월 22일까지, 서울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3만 원. 02-708-5001 ★★★★(별 다섯 개 만점)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나만의 예술 세계를 추구해야 할지, 관객이 원하는 걸 따라야 할지 늘 고민합니다. 예술가의 이런 대립을 부각시킨 연극 ‘파운틴헤드’는 관객에게도 개인주의적인 삶과 사회와 어울리며 지내는 삶 가운데 어떤 걸 선택할지 생각하게 만들 겁니다.” 세계에서 가장 ‘핫한’ 연출가의 한 명으로 꼽히는 이보 반 호브(59)는 30일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파운틴헤드’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4시간짜리 이 연극은 LG아트센터에서 31일부터 사흘간 공연된다. 러시아 출신의 미국 소설가 아인 랜드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그는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저작권을 확보하려 6년간 매달렸단다. “책을 선물 받았는데 책장을 펼치자마자 750페이지를 단숨에 읽어버렸어요. 너무나 매혹적이었어요. 연극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절실해졌죠.” 벨기에 출신인 그는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으로 영국 올리비에상(2015년), 미국 토니상(2016년)에서 최고연출상과 작품상을 각각 수상했다. 2015년 배우 쥘리에트 비노슈와 함께 ‘안티고네’를 올렸고, 다음 달에는 런던 바비칸센터에서 주드 로가 출연하는 ‘강박관념’을 초연한다. 그의 작품은 런던, 뉴욕, 파리, 암스테르담 등 세계 곳곳에서 공연되고 있다. 오페라와 뮤지컬, 영화로도 보폭을 넓히는 중이다. 건축가의 세계를 그린 ‘파운틴헤드’는 다수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하워드 로크와 사회적 평판과 성공을 위해 질주하는 피터 키팅의 이야기가 주축을 이룬다. 로크의 불꽃같은 사랑도 녹였다. 그는 “로크는 극단적인 면이 있지만 예술가로서 닮고 싶은 사람이다”고 말했다. 작품에서 사랑을 부각시키는 데 대해서는 “사랑은 삶의 엔진이자 풀리지 않는 고대의 수수께끼와 같아 언제나 흥미롭다”고 덧붙였다. 자기중심주의와 자유방임주의를 주장한 아인 랜드의 사상과 작품을 일부 극우주의자들이 신봉한다는 점에서 ‘파운틴헤드’를 연극화한 것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이에 대해 그는 “나치가 바그너의 오페라를 정치 선동에 사용했다고 해서 바그너의 작품성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이어 “아인 랜드의 주장은 독단적이어서 충격을 주지만, 그런 전복성 때문에 사람들이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고 강조했다. 그는 2001년부터 네덜란드 최대의 레퍼토리 극단인 토닐그룹 암스테르담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극단 배우는 22명이다. 한국 무대에서 ‘파운틴헤드’를 선보이는 이들은 빼어난 연기로 관객들을 사로잡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역 축제가 아니라 연극계 올림픽에 도전한다는 생각으로 작품을 만들자고 말합니다. 몸의 언어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첫 장면부터 끝 장면까지 움직이며 연습해요. 배우들에게 다음 장면이 뭔지 예측하지 말고 매 순간 도전하라고 강조하고요.” 그는 세계적인 연출가의 반열에 오른 것에 대해 성공 그 자체보다는 국제적인 작업을 할 수 있게 돼 행복하다고 말했다. “내 생각이 여러 문화권에서 존중받는다는 점이 즐거워요. 연극을 통해 나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고, 마음의 소리를 따라 왔죠. 연극은 내게 좋은 결혼생활 같은 대상이에요.” 4만∼8만 원. 02-2005-0114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그게, 말이 되나요?” 배우 박은태(36)가 다음 달 15일 막을 올리는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남자 주인공 로버트 킨케이드 역을 더블 캐스팅 없이 단독으로 제안받자마자 튀어나온 말이었다. 너무나 뜻밖이었다. 그러나 대본을 보고 음악을 들은 후 곧바로 작품에 빠져 들었다. 여주인공 프란체스카 역은 옥주현(37)이 역시 단독으로 맡았다.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에서 23일 박은태를 만났다. 만나자마자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하며 악수를 청했다. 반듯한 이미지 그대로였다. 그는 소설, 영화로 유명한 작품을 맡은 데 대한 부담을 숨기지 않았다. “영화의 이미지를 극복하는 게 숙제이긴 해요. 다만 손짓 하나, 눈빛 하나로 절절함을 표현한 클린트 이스트우드 선생님과 메릴 스트립 선생님 같은 명연기를 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오만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먼 나라 배우들에게도 ‘선생님’이라는 존칭을 깍듯하게 붙였다. 주인공들이 어린 것 같다고 하자 그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도 좀 더 젊게 설정했다”고 말했다. 착실하고 모범적인 그가 바람 같은 킨케이드 역을 어떻게 소화할까. “킨케이드는 자유를 갈구하지만 따뜻하고 진심을 담고 있는 사람이에요. 허튼 말은 하지 않죠.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프란체스카에게 함께 떠나자고 했는데, 그런 말은 살면서 단 한 번 하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지도록 하려 애쓰고 있어요.” 영화감독 김지운이 만든 ‘매디슨…’ 뮤직비디오를 보면 박은태가 부르는 넘버는 그의 미성과 어우러져 긴 여운을 남긴다. 멜로디도 귓가에 오래 맴돈다. “힘겹게 절제하는 미세한 감정의 흐름을 객석에 전달하고 싶어요. 폭발하기보다는 밀도로 승부해야죠. 옥주현 씨와는 ‘황태자 루돌프’에서 연인으로 만났는데 편하고 말도 잘 통해요.” 한양대 경영학과를 나온 그는 2007년 뮤지컬 ‘라이온 킹’의 앙상블로 데뷔해 ‘노트르담 드 파리’ ‘프랑켄슈타인’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지킬 앤 하이드’ ‘모차르트!’ 등 차근차근 작품을 하며 정상에 올랐다. “돌아보니 10년 동안 가장 길게 쉰 게 ‘도리안 그레이’를 하기 전 석 달이었어요. 보통 한 달을 채 쉰 적이 없었죠. ‘매디슨…’도 ‘팬텀’이 끝난 후 곧바로 한 거고요. 계속 오를 무대가 있다는 게 고맙죠.” 걸그룹 파파야 출신 배우 고은채와 2012년 결혼한 그는 딸, 아들을 둔 아빠다. 요즘 아이들의 잠자는 얼굴만 보고 나올 때가 많아 마음이 짠하단다. “아빠가 되니 내 안의 우주가 더 커진 느낌이에요.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하루하루 무사히 일상을 이어가는 것 자체가 감사하다는 걸 깨닫고 있답니다.” 그는 앞으로 10년 동안 다시 달릴 수 있는 체력과 실력을 유지하길 소망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선생님이 ‘저런 연기를 해야지’라고 생각하게 만들듯이 사람들이 제 연기를 보고 ‘명연기’라고 말할 날이 오리라 믿어요.” 4월 15일∼6월 18일.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5만∼14만 원. 1588-5212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시는 힘이 세다. 최근 막을 올린 창작 뮤지컬 ‘윤동주, 달을 쏘다’ ‘스모크’를 통해 태어난 윤동주, 이상의 시와 삶은 그 자체로 강한 자력을 뿜어내며 관객을 끌어당긴다. 윤동주 탄생 100주년, 이상 서거 80주기가 되는 올해. 20대에 세상을 떠난 두 청년은 무대에서 다른 색깔로 그렇게 피어났다. ‘윤동주…’는 2012년 초연돼 올해 네 번째 공연되는 작품이다. 해를 거듭하며 작품의 밀도를 높이고 세련미를 강화했다. 윤동주 역에는 박영수 온주완이 더블 캐스팅됐다. 박 씨는 초연 때부터 계속 윤동주를 맡았다. 새로 합류한 온 씨는 절망의 시대에 시를 쓰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면서도 우리말을 통해 영혼을 지키려 한 청년을 애틋하게 표현했다. ‘서시’ ‘참회록’ ‘십자가’ 등 시 8편은 서정적인 영상이나 여백이 있는 장면들과 함께 독백 혹은 낭송으로 흘러나온다. 곡을 붙이지 않고 시를 있는 그대로 음미하게 만든 점이 돋보인다. 그래서 더 담백하고 더 절절하다. 장난치고, 이성에게 끌리며 여느 젊은이들처럼 해맑았던 윤동주와 송몽규(김도빈) 등이 절망의 시대에 짓눌리며 저항하다 질식하는 과정은 웅장한 합창, 화려한 군무와 어우러져 애달프게 다가온다. 무대에는 열차가 등장하는가 하면 경성 거리, 연희전문학교, 감옥 등으로 빠르게 바뀌며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윤동주’란 콘텐츠를 영리하게 녹여낸, 한 편의 서정시 같은 작품이다. 아름답고 눈물겹다. 모든 관람객에게 무료로 증정하는 윤동주 육필 원고 사본은 그의 자취를 한층 생생히 느끼게 만든다. 4월 2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4만∼8만 원. 1544-1555 ★★★ ‘윤동주…’가 시인의 삶을 사실대로 그린 작품이라면 ‘스모크’는 이상의 작품과 삶을 미스터리 스릴러 형식으로 풀어냈다. 시를 쓰는 남자 ‘초’(김재범 김경수 박은석)와 그림 그리는 소년 ‘해’(정원영 고은성 윤소호)는 바다를 보러 갈 돈을 마련하기 위해 미스코시백화점 딸 ‘홍’(정연 김여진 유주혜)을 납치한다. 홍은 몸과 마음 모두에 고통을 지닌 여인이다. 작품은 한마디로 이상의 시 같다. 이야기가 한 단계씩 전개되고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는 과정은 분열된 자아를 표현한 이상의 작품 속으로 한 걸음씩 들어가는 듯하다. 잘 짜여진 퍼즐을 보는 듯 흥미롭고 신선하다. 실력 있는 배우들의 연기는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높인다. 이상의 삶과 작품에 대해 자세히 알수록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 이상이 신문에 ‘오감도’를 연재하다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로 중단해야 했고, 반일 지식인 혐의로 34일간 옥살이를 했으며 죽음의 문턱에서 멜론을 먹고 싶다고 말했던 일화 등을 녹였다. 시 ‘오감도’ ‘거울’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비롯해 소설 ‘날개’ 등의 구절이 등장한다. 극의 막바지에 이상의 시가 영상으로 벽면을 가득 채우는 장면은 찡한 여운을 남긴다. 5월 28일까지 서울 대학로 유니플렉스2관. 3만∼6만 원. 02-2638-2872 ★★☆(별 다섯 개 만점)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드라마 ‘피고인’이 자체 최고 시청률 28.3%(닐슨코리아 기준)를 올리고 21일 종영했다. 아내와 딸을 죽였다는 누명을 쓴 채 온갖 난관을 절묘하게 뚫고 나가는 검사 박정우 역을 맡은 지성과 그를 파멸로 몰아넣은 재벌 2세 차민호 역의 엄기준(사진)은 압도적인 연기력을 통해 드라마를 성공으로 이끈 쌍두마차다. 엄 씨는 냉혹한 살인마지만 사랑하는 여인에겐 눈빛이 흔들리고, 폭압적인 아버지 앞에서 벌벌 떠는 모습을 실감나게 연기했다. 엄 씨는 무대에서도 탁월한 연기를 선사하는 배우다. 뮤지컬 ‘레베카’ ‘베르테르’ ‘잭 더 리퍼’, 연극 ‘클로저’ 등에서 차가우면서도 부드럽고 애절한 감정을 세밀하게 표현했다. 공연계에서는 ‘피고인’에서 맹활약한 그에게 박수를 보내면서도 “무대에서 보기 어려워지는 것 아니냐”며 애정 어린 걱정을 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다행히 그가 주연을 맡은 뮤지컬 ‘몬테크리스토’가 전국 투어 공연을 하고 있다. 무대에서 발산하는 그의 매력을 맛보길 권한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600여 년간 서울을 둘러싸고 자리를 지켜 온 건축물인 한양도성(사진)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지 못하게 됐다. 문화재청은 “유네스코 자문 심사 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로부터 최근 한양도성의 등재 불가 판정을 통보받았다”고 21일 밝혔다. 이코모스는 14명으로 구성한 전문가 패널 심사를 통해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은 이에 따라 한양도성의 세계유산 등재 신청도 철회하기로 했다. 이코모스는 각국이 등재하려는 유산을 심사해 ‘등재 권고’ ‘보류’ ‘반려’ ‘등재 불가’ 등 네 가지 권고안 중 하나를 선택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와 해당 국가에 전달한다. 등재 불가 결정을 받으면 사실상 등재가 불가능하게 된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지난해 이코모스로부터 ‘반려’ 판정을 받은 ‘한국의 서원’에 이어 2년 연속으로 등재를 추진하던 유산을 세계유산위원회 회의 본선에 올리지 못하게 됐다. 영주 소수서원, 경주 옥산서원, 정읍 무성서원 등 9개 서원을 묶은 ‘한국의 서원’은 서원들 사이의 공통점이 명확하지 않다는 지적을 받았다. 1995년 주민들의 등재 반대 움직임에 부닥쳤던 ‘설악산 자연보호구역’, 2009년 ‘등재 불가’ 판정을 받은 ‘한국의 백악기 공룡 해안’을 포함하면 이번이 네 번째 자진 철회다. 문화재청 측은 “한국 고유의 사상인 성리학과 풍수를 근간으로 자연 지세를 살려 축성된 한양도성은 진정성, 완전성, 보존 관리 계획 등에서 충분한 요건을 갖췄지만 다른 나라의 세계유산 도시 성벽과 비교해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충족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밝혔다. 문화재청 측은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각국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심사가 엄격해졌다. 앞으로 더 면밀하고 충분한 연구와 검토를 거치겠다”고 밝혔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이윤택 연출가가 이끄는 극단 연희단거리패가 운영하던 게릴라극장(서울 종로구 혜화로)이 다음 달 문을 닫는다. 2004년 서울 동숭동에서 문을 연 이 공연장은 2006년 5월 현재 위치로 옮긴 뒤 ‘하녀들’ ‘갈매기’ 등 고전을 비롯해 실험적인 작품 160여 편을 무대에 올렸다. 게릴라극장은 ‘오프 대학로의 중심’ ‘소극장 연극의 메카’로 불렸지만 경영난에 시달려 극장을 매각하게 됐다. 게릴라극장은 폐관 공연으로 연극 ‘황혼’을 30일부터 다음 달 16일까지 올린다. 알프스의 관광객에게 산짐승의 울음소리를 흉내내주며 살아가는 70대 시각장애인에게 50대 매춘부가 찾아오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오스트리아 작가 페터 투리니의 작품으로 시각장애인 노인 역에 명계남, 매춘부 역에 김소희가 출연한다. 게릴라극장 예술감독인 채윤일 씨가 연출을 맡았다. 연희단거리패는 지난해 종로구 창경궁로에 개관한 소극장 ‘30스튜디오’에서 공연을 올리며 작업을 이어갈 예정이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