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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꽃 구경의 계절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조금 특별하게 꽃 추억을 쌓는 방법이 있답니다.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이름의 수목원·정원 스탬프 투어입니다.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이 2022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아름다운 동행’ 스탬프 투어는 현재 44곳의 수목원과 정원에서 진행되고 있어요. 수목원에 비치된 ‘아름다운 동행’ 여권(스탬프북)에 도장을 찍는 활동입니다.그런데 이 도장이 예사롭지 않아요. 각 수목원을 대표하는 식물들의 그림이 새겨 있거든요. 국립세종수목원은 붓꽃, 경기 여주 황학산수목원은 단양쑥부쟁이, 전남 해남 포레스트수목원은 수국, 강원 평창 국립한국자생식물원은 깽깽이풀…. 도장만 찍어도 절로 우리 식물 공부가 된답니다. 나만의 식물도감을 만들어나가는 기분이 들어요.이 아날로그 도장 찍기의 매력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최초 세 개의 도장을 여권에 찍으면 씨앗과 화분 등으로 구성된 반려식물 키트를 받고요. 다음부터는 3개씩 도장을 찍을 때마다 동(銅)으로 제작된 주화를 받지요. 이 주화에는 미선나무처럼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자생식물들이 새겨져 있어요.스탬프 투어는 자전거 투어나 박물관·미술관 투어 등 여러 다른 분야에서도 활용되고 있는데요. 수목원·정원 스탬프 투어만의 특별함은 무엇일까요.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 측으로부터 이 투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들을 소개받아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우선 충남 논산에 사는 김지나 씨(39) 가족입니다. 부부와 9세, 12세 자녀가 2년 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39개의 도장을 받았다는데요. 집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인 국립세종수목원에 갔다가 이 투어를 알게 됐다고 합니다. 집에서 멀지 않은 세종시의 금강수목원과 전북 한국도로공사전주수목원을 시작으로 전국의 수목원들을 다녔다네요.김 씨가 말합니다. “난대 식물을 볼 수 있는 전남 완도수목원에 갔다가 구례수목원에 갔는데 두 곳에서 같은 종류의 은은한 향기가 나더라고요. 대체 이게 뭘까 했더니 목서(木犀)의 향이었어요. 이 투어를 통해 무엇보다 감사한 건 아이들이 나무를 알아보는 거예요. 수목원에서 자연을 만나고 나서 가족이 더욱 돈독해졌어요. 서른 개 도장을 받고 나니 더 많은 도장을 받아야겠다는 도전 의식도 생겨나던걸요(웃음).”김 씨는 올해 산불이 특히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한국의 다큐멘터리 영화 ‘수라’를 본 적이 있어요. 새의 군무를 본 남자분이 새들의 터를 지키려고 애쓰는 내용이에요. 그가 말했죠. ‘아름다운 것을 본 죄’라고.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스탬프 투어를 통해 우리 수목의 아름다운 모습을 봤기 때문에, 산불로 타버린 상황이 특히 마음에 와닿고 슬펐던 것 같아요.”인천에 사는 이화순 씨(63)는 꽃을 좋아해 빌라의 옥상에 여러 종류의 화초를 키우고 있다고 합니다. 이 스탬프 투어는 지난해 인천수목원에 갔다가 알게 됐는데, 집 근처 인천수목원은 입장료가 없어 언제든 부담 없이 들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는 사진으로 식물의 이름을 물어보면 집단지성이 알려주는 스마트폰 ‘모야모’ 앱에서 ‘똥식이사랑’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고 있는데요. 식물 이름을 궁금해하는 이들에게 답변을 잘 해주기 위해 식물원을 다니며 식물을 공부한다고 합니다.“꽃 좋아하는 저와 역마살 있는 남편에게 딱 맞는 여행이에요. 수목원마다 서로 다른 특징도 찾아보고 새로운 꽃도 발견하고 있어요. 꽃창포 가득한 경남 거창 창포원은 꼭 자전거를 빌려 한 바퀴 돌아보세요. 거창 금원산생태수목원은 골짜기 따라 숲길이 아주 좋은데 관람객이 적어 널리 알리고 싶네요. 인천수목원 온실에 오랜만에 핀 바우히니아는 또 얼마나 예쁜데요. 충남 홍성 그림같은수목원과 강원 강릉 솔향수목원도 추천하고 싶어요.”서울에 사는 차재연 씨(55)는 말합니다. “진달래 필 때 세종시 금강수목원을 맨발로 걸으면 참 행복해져요. 백두대간수목원에서 우리 호랑이와 자생식물 보는 것도 참 좋고요. 스탬프 투어의 매력이요? 경험이 온전히 내 것이 되는 기분이에요. 기억에 오래 남아요”.경기 성남에 사는 시내버스 기사 임명연 씨(63)는 쉬는 날 아내와 전국 100대 명산도 다니고, 등대 투어도 하다가 수목원·정원 스탬프 투어를 알게 돼 블로그에 수목원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이야말로 우리나라 수목원·정원의 진정한 홍보대사, 함께 지키고 돌보는 정원문화의 실천자 아닌가 싶습니다.이 스탬프 투어의 명칭은 왜 ‘아름다운 동행’일까요. “단순한 여행을 넘어 정원과 사람, 자연과 마음을 잇는 지속 가능한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지용훈 국립세종수목원 교육운영실 팀장). 지금까지 10만 개 스탬프북, 2만 개 주화가 국민에게 전달됐고, 참여 수목원에는 교육 전시 콘텐츠가 제공되고 있습니다.세상은 넓고 가볼 수목원은 많습니다. 전국 곳곳의 수목원은 단지 식물을 감상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누군가에게는 슬픔을 건너는 다리가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희망의 씨앗이 되는 장소입니다. 당장 이번 주말부터 도장 찍기 여행을 시작해보려 합니다. 가수 윤종신의 노래 ‘수목원에서’를 흥얼거려봅니다. ‘수다 떠는 아줌마들처럼 웃는 새들과 누굴 애타게 찾는 것처럼 울어대는 벌레들. 여전해요. 그대와 거닐었던 그날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추억의 숲속 길….’<스탬프 투어와 함께할 만한 교육·체험 프로그램>●국립세종수목원5, 6, 9, 11월에만 만날 수 있는 ‘물빛따라 꽃길따라’ 프로그램을 추천한다. 전기버스를 타고 수목원 해설사와 함께 정원과 사계절 온실을 돌아보며 기후대별 생물다양성을 체험할 수 있다.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공룡소나무 ‘울레미소나무’와 수천 년을 살아가는 식물 ‘웰위치아’ 등 특별한 식물들을 만날 수 있다.●국립한국자생식물원예술적 감성을 자극하는 체험 프로그램 ‘식물을 담은 도자기’를 진행한다. 초벌 도자기에 나만의 식물 이야기를 담고 유약을 발라 가마에 굽는 내내 식물과 예술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국립백두대간수목원야생 종자 영구저장시설인 ‘시드볼트’와 백두산 호랑이를 만날 수 있다. 숙박과 체험을 연계한 자연 체류형 프로그램 ‘가든스테이’가 인기다. 다양한 생태교육 프로그램과 함께 가족, 연인, 학생 단체들이 자연 속에서 휴식과 배움을 동시에 누릴 수 있다.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저들은 인생의 어떤 질문을 품었기에 고독하게 길을 걷는 것일까. 일본 시코쿠(四国) 남단 고치(高知)현에서 삿갓을 쓰고 걷는 순례자들을 보면서 궁금했다. 일본 근대화의 문을 연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6∼1867)의 고향이기도 한 고치. 그곳에는 햇살이 유리알처럼 반사되는 에메랄드빛 니요도강(仁淀川)이 흐른다. 일본에서 가장 맑고 푸르다는 이 강물 빛은 ‘니요도블루’로 불린다. 강물에 마음을 씻어 햇볕에 널고 싶다. 고치현은 일본 열도 중심에서 떨어져 있어 일본인에게도, 일본을 자주 찾는 한국인에게도 아직 낯선 땅이다. 국내 직항 노선이 없어 인천공항에서 오전 7시 비행기를 타고 고치현 북쪽 에히메(愛媛)현 마쓰야마(松山)공항까지 1시간 반, 다시 2시간 반 차로 달려서야 현청 소재지 고치시에 닿을 수 있었다. 그래도 이 소도시를 가봐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시간을 재촉하지 않고, 무엇보다 사람들 미소가 따뜻하다. 고치현 공식 관광 슬로건은 ‘내추럴(Natural), 고치’. 되돌아보니 온몸으로 느낀 환대와 치유의 슬로우 로컬 여행이었다.● 식물을 만나는 순례유키와리이치게(雪割一華). 눈(雪)을 가르며 피어나는 꽃이라는 뜻의 이 희고 여린 야생화는 한국의 바람꽃과 같은 속(屬)이었다. 3000여 종의 식물이 저마다 이름표를 달고 생명의 섬세한 언어를 들려주는 고치현립 마키노식물원은 고치현 출신 식물분류학자 마키노 토미타로(牧野富太郎·1862∼1957)를 기리기 위해 1958년 문을 열었다. 1500종이 넘는 식물에 학명을 붙인 그는 ‘일본 식물학의 아버지’로 통한다.그는 “사랑하는 식물을 만나러 가니 멋지게 입는 거예요”라며 식물을 채집하거나 연구할 때 늘 정장에 나비넥타이를 맸다고 한다. 식물원 ‘마키노 도미타로 기념관’에는 그가 평생 수집한 방대한 식물 표본과 장서, 직접 그린 그림이 전시돼 있었다. 기념품 상점에서 마키노의 식물 스케치가 프린트된 가방을 샀더니 평생 식물과 함께한 그의 행복을 소장한 기분이 들었다. 희귀 식물이 가득한 유리온실 입구에는 초록빛 식물이 내부를 감싼 9m 높이 탑이 있었다. 동그란 천창을 통해 하늘의 빛이 내려와 마음에 스며들었다.식물원 옆 고다이산(五台山) 정상에는 지쿠린지(竹林寺)라는 절이 있다. 일본 불교 진언종(眞言宗) 창시자 구카이(空海·774∼835)의 자취를 따라 시코쿠 4개 현, 88개 사찰을 걸어서 찾는 1400km 순례길을 시코쿠헨로(四国遍路), 이 길을 걷는 사람은 오헨로상(お遍路さん)이라고 한다. 고치현에는 제24∼39번 사찰이 있는데 지쿠린지는 제31번 사찰이다. 삶의 고단함을 잠시 내려놓으려는 이들이 찾아와 걷고, 명상하고, 정원을 바라본다.● 산골 마을을 살린 ‘모네의 정원’고치현에는 ‘니요도블루’만 있는 게 아니다. 프랑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1840∼1926)가 즐겨 그렸지만, 프랑스 기후에서는 볼 수 없던 ‘푸른 수련’이 따뜻한 고치현에서는 피어난다. 동부 산골 마을 기타가와무라(北川村)에는 ‘모네의 정원 마르모탕’이 있다. 프랑스 모네 재단이 다른 나라에 유일하게 ‘모네의 정원’ 명칭을 사용하도록 허가한 곳이다. 편의점에서 우메보시(매실 절임)주먹밥을 사서 정원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분홍빛으로 물든 밥알이 마치 손바닥 안 꽃밭처럼 고왔다. ‘모네의 정원’에 가 보니 프랑스 지베르니 모네의 정원을 정성껏 축소 재현해 놓았다. ‘물의 정원’에는 연못과 일본식 아치형 다리가 있고, 등나무와 장미가 아치를 감아 오르고 있었다. 안내를 맡은 정원사가 말했다. “모네는 생전에 빛의 인상으로 ‘푸른 수련’을 그렸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자랄 수 없던 푸른 수련이 이곳에서는 6월 하순부터 11월 초순까지 피어요.” 빛과 시간을 철학적으로 탐구한 모네의 푸른 수련이야말로 명상적 생명력이었다.물감 팔레트처럼 형형색색 튤립이 가득 채운 ‘꽃의 정원’을 지나니 ‘보르디게라’(Bordighera)라는 이름의 지중해식 정원이 나왔다. 모네가 이탈리아 해안 도시 보르디게라를 방문해 그렸던 이국적인 식물과 해안 풍경이 그대로 펼쳐졌다. 테라스에 앉아 풍광을 즐기는 사람들 모습이 평화로웠다. 일본 문화를 동경했고 자신이 남긴 작품 중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정원을 꼽았던 모네도 환생해 저 자리에 앉고 싶지 않을까. 이 정원이야말로 사라져 가던 기타가와무라를 기적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던 이곳은 정원을 통해 농촌 소멸을 막아냈다. 1990년대 후반 프랑스 모네의 정원을 찾아가 정원 설계 및 조성 협력을 받아 2000년 문을 연 이곳 모네의 정원은 지금까지 200만 명이 다녀갔다. 지방자치단체가 소유하고 운영하는 이 공공정원은 지역 주민들이 정원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 ‘카페 모네하우스’에서는 현지 제철 식재료로 요리한 음식을 선보인다. 정원을 찾는 방문객이 지역 농산물과 꽃을 사고 인근 숙소에 묵으니 마을이 살아났다.● 조용히 빛나는 느린 일상 이른 아침 고치 시내에 있는 전통 온천 료칸 산수이엔(三翠園) 앞 가가미강(鏡川) 주변을 천천히 산책했다. 료칸의 정원도 정갈했지만 버드나무 연두색 새잎과 동네 작은 공원 약수터, 자전거 타고 하루를 시작하러 가는 시민들의 아침 일상이 조용히 빛났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고치성(城)도, 시민들이 낮이든 밤이든 모여 가츠오타다키(가다랑어 짚불구이)를 하이볼과 함께 먹는 히로메(廣目)시장도 멀지 않다. 30여 년 전 도쿄(東京)에 처음 문을 연 유명 할인 잡화점 ‘돈키호테’는 일본 47개 도도부현(都道府県) 중 마지막으로 고치현에 올 2월에야 문을 열었다. 고치현의 느림을 보여주는 한 단면일 수 있겠다.작은 어촌 가쓰라하마(桂浜) 해변에는 사카모토 료마 동상이 13m 높이로 서 있다. 료마의 시선을 따라 시원하게 펼쳐지는 태평양 풍광을 바라보면 왜 그가 낭만적 혁신을 꿈꿨는지 짐작이 된다. 대개는 카약을 타러 오는 니요도강 아웃도어센터에서는 홀로 바이크에 텐트를 싣고 와서 강가에 펼친 중년 남성을 보았다. 우리는 눈인사를 했다. 그가 틀어둔 컨트리 음악이 푸른 물결을 따라 천천히 흘렀다. 어느새 내 마음의 연못에도 푸른 수련 하나가 소리 없이 피어나고 있었다.글·사진 고치=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저들은 인생의 어떤 질문을 품었기에 고독하게 길을 걷는 것일까. 일본 시코쿠(四国) 남단 고치(高知)현에서 삿갓을 쓰고 걷는 순례자들을 보면서 궁금했다. 일본 근대화의 문을 연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6~1867)의 고향이기도 한 고치. 그곳에는 햇살이 유리알처럼 반사되는 에메랄드빛 니요도강(仁淀川)이 흐른다. 일본에서 가장 맑고 푸르다는 이 강물 빛은 ‘니요도블루’로 불린다. 강물에 마음을 씻어 햇볕에 널고 싶다.고치현은 일본 열도 중심에서 떨어져 있어 일본인에게도, 일본을 자주 찾는 한국인에게도 아직 낯선 땅이다. 국내 직항 노선이 없어 인천공항에서 오전 7시 비행기를 타고 고치현 북쪽 에히메(愛媛)현 마쓰야마(松山)공항까지 1시간 반, 다시 2시간 반 차로 달려서야 현청 소재지 고치시에 닿을 수 있었다. 그래도 이 소도시를 가봐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시간을 재촉하지 않고, 무엇보다 사람들 미소가 따뜻하다. 고치현 공식 관광 슬로건은 ‘내추럴(Natural), 고치’. 되돌아보니 온몸으로 느낀 환대와 치유의 슬로우 로컬 여행이었다.● 식물을 만나는 순례유키와리이치게(雪割一華). 눈(雪)을 가르며 피어나는 꽃이라는 뜻의 이 희고 여린 야생화는 한국의 바람꽃과 같은 속(屬)이었다. 3000여 종의 식물이 저마다 이름표를 달고 생명의 섬세한 언어를 들려주는 고치현립 마키노식물원은 고치현 출신 식물분류학자 마키노 토미타로(牧野富太郎·1862~1957)를 기리기 위해 1958년 문을 열었다. 1500종이 넘는 식물에 학명을 붙인 그는 ‘일본 식물학의 아버지’로 통한다.그는 “사랑하는 식물을 만나러 가니 멋지게 입는 거예요”라며 식물을 채집하거나 연구할 때 늘 정장에 나비넥타이를 맸다고 한다. 식물원 ‘마키노 도미타로 기념관’에는 그가 평생 수집한 방대한 식물 표본과 장서, 직접 그린 그림이 전시돼 있었다. 기념품 상점에서 마키노의 식물 스케치가 프린트된 가방을 샀더니 평생 식물과 함께한 그의 행복을 소장한 기분이 들었다. 희귀 식물이 가득한 유리온실 입구에는 초록빛 식물이 내부를 감싼 9m 높이 탑이 있었다. 동그란 천창을 통해 하늘의 빛이 내려와 마음에 스며들었다.식물원 옆 고다이산(五台山) 정상에는 지쿠린지(竹林寺)라는 절이 있다. 일본 불교 진언종(眞言宗) 창시자 구카이(空海· 774~835)의 자취를 따라 시코쿠 4개 현, 88개 사찰을 걸어서 찾는 1400㎞ 순례길을 시코쿠헨로(四国遍路), 이 길을 걷는 사람은 오헨로상(お遍路さん)이라고 한다. 고치현에는 제24~39번 사찰이 있는데 지쿠린지는 제31번 사찰이다. 삶의 고단함을 잠시 내려놓으려는 이들이 찾아와 걷고, 명상하고, 정원을 바라본다.● 산골 마을을 살린 ‘모네의 정원’고치현에는 ‘니요도블루’만 있는 게 아니다. 프랑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1840~1926)가 즐겨 그렸지만, 프랑스 기후에서는 볼 수 없던 ‘푸른 수련’이 따뜻한 고치현에서는 피어난다. 동부 산골 마을 기타가와무라(北川村)에는 ‘모네의 정원 마르모탕’이 있다. 프랑스 모네 재단이 다른 나라에 유일하게 ‘모네의 정원’ 명칭을 사용하도록 허가한 곳이다. 편의점에서 우메보시(매실 절임)주먹밥을 사서 정원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분홍빛으로 물든 밥알이 마치 손바닥 안 꽃밭처럼 고왔다.‘모네의 정원’에 가 보니 프랑스 지베르니 모네의 정원을 정성껏 축소 재현해 놓았다. ‘물의 정원’에는 연못과 일본식 아치형 다리가 있고, 등나무와 장미가 아치를 감아 오르고 있었다. 안내를 맡은 정원사가 말했다. “모네는 생전에 빛의 인상으로 ‘푸른 수련’을 그렸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자랄 수 없던 푸른 수련이 이곳에서는 6월 하순부터 11월 초순까지 피어요.” 빛과 시간을 철학적으로 탐구한 모네의 푸른 수련이야말로 명상적 생명력이었다.물감 팔레트처럼 형형색색 튤립이 가득 채운 ‘꽃의 정원’을 지나니 ‘보르디게라’(Bordighera)라는 이름의 지중해식 정원이 나왔다. 모네가 이탈리아 해안 도시 보르디게라를 방문해 그렸던 이국적인 식물과 해안 풍경이 그대로 펼쳐졌다. 테라스에 앉아 풍광을 즐기는 사람들 모습이 평화로웠다. 일본 문화를 동경했고 자신이 남긴 작품 중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정원을 꼽았던 모네도 환생해 저 자리에 앉고 싶지 않을까.이 정원이야말로 사라져 가던 기타가와무라를 기적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던 이곳은 정원을 통해 농촌 소멸을 막아냈다. 1990년대 후반 프랑스 모네의 정원을 찾아가 정원 설계 및 조성 협력을 받아 2000년 문을 연 이곳 모네의 정원은 지금까지 200만 명이 다녀갔다. 지방자치단체가 소유하고 운영하는 이 공공정원은 지역 주민들이 정원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 ‘카페 모네하우스’에서는 현지 제철 식재료로 요리한 음식을 선보인다. 정원을 찾는 방문객이 지역 농산물과 꽃을 사고 인근 숙소에 묵으니 마을이 살아났다.● 조용히 빛나는 느린 일상이른 아침 고치 시내에 있는 전통 온천 료칸 산수이엔(三翠園) 앞 가가미강(鏡川) 주변을 천천히 산책했다. 료칸의 정원도 정갈했지만 버드나무 연두색 새잎과 동네 작은 공원 약수터, 자전거 타고 하루를 시작하러 가는 시민들의 아침 일상이 조용히 빛났다.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고치성(城)도, 시민들이 낮이든 밤이든 모여 가츠오타다키(가다랑어 짚불구이)를 하이볼과 함께 먹는 히로메(廣目)시장도 멀지 않다. 30여 년 전 도쿄(東京)에 처음 문을 연 유명 할인 잡화점 ‘돈키호테’는 일본 47개 도도부현(都道府県) 중 마지막으로 고치현에 올 2월에야 문을 열었다. 고치현의 느림을 보여주는 한 단면일 수 있겠다.작은 어촌 가쓰라하마(桂浜) 해변에는 사카모토 료마 동상이 13m 높이로 서 있다. 료마의 시선을 따라 시원하게 펼쳐지는 태평양 풍광을 바라보면 왜 그가 낭만적 혁신을 꿈꿨는지 짐작이 된다. 대개는 카약을 타러 오는 니요도강 아웃도어센터에서는 홀로 바이크에 텐트를 싣고 와서 강가에 펼친 중년 남성을 보았다. 우리는 눈인사를 했다. 그가 틀어둔 컨트리 음악이 푸른 물결을 따라 천천히 흘렀다. 어느새 내 마음의 연못에도 푸른 수련 하나가 소리 없이 피어나고 있었다.고치=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한국의 산림녹화기록물이 11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공식 등재됐다. 6·25전쟁 이후 국토를 복구하기 위해 민관이 함께 추진한 산림녹화 사업의 과정을 담은 공문서와 사진 등 9619건이다. 1992년부터 시작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은 세계적 영향력이 있는 인류의 주요 기록이 선정 대상이다. 한국이 반세기 만에 민둥산을 푸르게 바꾼 여정을 국제사회가 공식 인정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이번 등재의 배경에는 숨은 주역이 있다. 사단법인 한국산림정책연구회 소속 산림녹화유네스코기록유산등재추진위원회다. 서울대 산림과학부 명예교수인 이경준 위원장과 퇴직 산림공무원들이 2016년 6월 발족해 지금껏 등재를 추진해 왔다().최근 서울 동대문구 국립산림과학원 내 추진위 사무실에서 만난 이 위원장은 “추진위 회원 40명이 전국 산림조합과 지방자치단체 산림 부서를 7년 동안 다니며 수집한 1만여 건 중 9619건이 등재된 것”이라며 “산림녹화기록물은 단순한 기록이 아닌, 국토의 재건과 국민의 협력을 담은 감동의 서사”라고 강조했다.이 위원장에 따르면 한국의 새마을운동 기록물이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계기로 정부 차원에서 산림녹화기록물 등재 추진을 검토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영구보존되는 조림(造林) 대장 등을 제외하고는 기록물이 자동 폐기됐거나 전국에 흩어져 있어 자료 수집이 쉽지 않았다.이런 이유로 민간 추진위가 나서게 됐다. 이 위원장이 추진위를 이끌고 전진표 한국임우연합회장과 이철수 전 서부지방산림청장 등 퇴직 산림 공무원들이 자신들이 일했던 지역들을 다니면서 기록물을 모았다. 순전히 무보수 재능기부였다. 활동 비용은 산림청 연구용역비, 유한킴벌리와 한국양묘협회 등의 후원금을 받아 마련했다.추진위는 발족 이듬해인 2017년 정부 기록물 위주로 유네스코 등재를 신청했다가 탈락해 이번이 ‘재수’ 도전이었다. 한 번의 실패를 교훈 삼아 산림조합중앙회의 말단 조직으로 마을마다 있는 산림계를 찾아다녔다. 산림계는 산림녹화 초기에 연료림(땔감에 쓰일 목재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산림) 조성에 크게 기여했다. 그렇게 추가로 모은 1300여 개 산림녹화 기록물이 민간 기록물로 인정돼 온 국민이 합심한 숲가꾸기를 강조할 수 있었다. 유네스코는 한국의 대규모 사방사업과 화전 정리, 독특한 산림계의 기록이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희귀성을 지녔다고 평가했다.추진위는 대표적인 10대 산림녹화기록물을 다음과 같이 꼽는다. △1961년 제정 공포된 산림법 △제1, 2차 치산녹화계획 △전국산림실태조사 △산림계 민초조림(民草造林) △화전민 대책 △대관령 특수조림 △영일지구 사방사업(砂防事業·황폐지 복구 예방사업) 완료 보고서 △경북 봉화군 산림조합 연료림 조성 △한독 산림녹화사업 △강원도청 공무원 복지조림조합 조림계획이다.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산림녹화기록물은 올해 하반기 국립세종수목원에 문을 열 국토녹화기념관 수장고에 보관될 예정이다. 이 위원장은 “한국은 산업화와 산림녹화를 동시에 이뤄낸 자랑스러운 ‘K포레스트’를 개발도상국에 전하고, 지구온난화로 세계 산림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지구 살리기의 모범 케이스가 될 수 있다”며 “하루빨리 기록물 원본을 한데 모으고 디지털화해 세계인이 열람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한국의 산림녹화기록물이 11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공식 등재됐다. 6·25전쟁 이후 국토를 복구하기 위해 민관이 함께 추진한 산림녹화 사업의 과정을 담은 공문서와 사진 등 9619건이다. 1992년부터 시작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은 세계적 영향력이 있는 인류의 주요 기록이 선정 대상이다. 한국이 반세기 만에 민둥산을 푸르게 바꾼 여정을 국제사회가 공식 인정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이번 등재의 배경에는 숨은 주역이 있다. 사단법인 한국산림정책연구회 소속 산림녹화유네스코기록유산등재추진위원회다. 서울대 산림과학부 명예교수인 이경준 위원장(사진)과 퇴직 산림공무원들이 2016년 6월 발족해 지금껏 등재를 추진해 왔다. 최근 서울 동대문구 국립산림과학원 내 추진위 사무실에서 만난 이 위원장은 “추진위 회원 40명이 전국 산림조합과 지방자치단체 산림 부서를 7년 동안 다니며 수집한 1만여 건 중 9619건이 등재된 것”이라며 “산림녹화기록물은 단순한 기록이 아닌, 국토의 재건과 국민의 협력을 담은 감동의 서사”라고 강조했다. 이 위원장에 따르면 한국의 새마을운동 기록물이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계기로 정부 차원에서 산림녹화기록물 등재 추진을 검토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영구보존되는 조림(造林) 대장 등을 제외하고는 기록물이 자동 폐기됐거나 전국에 흩어져 있어 자료 수집이 쉽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민간 추진위가 나서게 됐다. 이 위원장이 추진위를 이끌고 전진표 한국임우연합회장과 이철수 전 서부지방산림청장 등 퇴직 산림 공무원들이 자신들이 일했던 지역들을 다니면서 기록물을 모았다. 순전히 무보수 재능기부였다. 활동 비용은 산림청 연구용역비, 유한킴벌리와 한국양묘협회 등의 후원금을 받아 마련했다. 추진위는 대표적인 10대 산림녹화기록물을 다음과 같이 꼽는다. △1961년 제정 공포된 산림법 △제1, 2차 치산녹화계획 △전국산림실태조사 △산림계 민초조림(民草造林) △화전민 대책 △대관령 특수조림 △영일지구 사방사업(砂防事業·황폐지 복구 예방사업) 완료 보고서 △경북 봉화군 산림조합 연료림 조성 △한독 산림녹화사업 △강원도청 공무원 복지조림조합 조림계획이다. 유네스코는 한국의 대규모 사방사업과 화전 정리, 독특한 산림계 등의 기록이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희귀성을 지녔다고 평가했다.추진위는 발족 이듬해인 2017년 정부 기록물 위주로 유네스코 등재를 신청했다가 탈락해 이번이 ‘재수’ 도전이었다. 이 위원장은 “실패를 교훈 삼아 민간 기록물을 샅샅이 찾아내 온 국민이 합심한 점을 강조한 게 주효했다”며 “한국은 산업화와 산림녹화를 동시에 이뤄낸 자랑스러운 ‘K포레스트’를 개발도상국에 전하고, 지구온난화로 세계 산림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지구 살리기의 모범 케이스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산림녹화기록물은 올해 하반기 국립세종수목원에 문을 열 국토녹화기념관 수장고에 보관될 예정이다. 이 위원장은 “하루빨리 기록물 원본을 한데 모으고 디지털화해 세계인이 열람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어제(4일) 서울에 벚꽃이 피었습니다. 기상청은 서울 종로구 서울기상관측소의 왕벚나무 한 가지에서 세 송이 이상 꽃이 활짝 피면 ‘공식 개화’를 선언합니다. 2025년 4월 4일, 벚꽃은 시작했고 세상엔 어떤 ‘끝’이 선고됐습니다. 오늘은 식목일. 한 그루 나무를 심듯 일상도 다시 심고 가꿔야 할 시간입니다. 사실 봄은 이미 와 있었습니다. 다만 올해는 봄을 봄이라 부르는 게 주저됐습니다. 3월의 폭설과 산불, 혼란한 정세 속에서 우리 일상은 흔들렸습니다. 노란 복수초와 할미꽃, 개나리와 진달래가 아름다우면서도 애처로웠던 건 마음의 시선이었을까요. 봄꽃과 새잎의 설렘을 누리는 것조차 한없이 조심스러웠던 그런 초봄을 보냈습니다. 어제 유독 많은 이들이 “이제야 봄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회사 선배는 불과 하루 만에 벚꽃이 활짝 핀 서울 안양천 뚝방길을 걷다가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돌아온 것은 꽃입니까, 나입니까, 세상입니까’라는 글귀와 함께…. 그 세상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일 겁니다. 갈등의 끝자락에서 이제는 서로 다른 마음들이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할 때입니다. 최근 경기 화성 소다미술관의 공공예술 프로젝트 ‘Hello, World!_당신의 목소리를 보여주세요’ 전시를 알게 됐습니다. 누구든 생각을 남길 수 있는 이 온라인 플랫폼에 남겨진 문장들에서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을 읽습니다.‘계절의 봄만큼 세상의 봄을 기다립니다.’‘봄은 결국 오고야 만다.’‘껍데기를 벗고 함께 나가자. 마침내 봄이 왔거든.’‘지구라는 정원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해요.’얼마나 간절하게 봄을 기다려온 마음들인가요. 곰곰이 되씹게 되는 말들이 이어집니다. ‘삶의 유한함과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모든 순간을 더 애틋하게 여기며 살아내자.’‘당신의 자리에 서 봅니다. 나를 사랑하듯이 당신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기를.’저는 ‘일상을 단단하게 지키는 것이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입니다’라고 남겼습니다. 요즘 진달래가 유독 곱게 보입니다. 한 줌 따서 입속에 넣으니 새콤한 봄맛이 납니다. 찹쌀가루 반죽 위에 올려, 기름 두른 팬에 꽃전을 부쳐봅니다. 이처럼 무탈하고 평온한 봄맞이가 얼마나 소중한 일상이던가요. 그래서 오늘은 일상의 회복을 돕는 봄의 ‘시크릿가든’ 네 곳을 소개합니다.◇길동생태공원서울이라는 도시에 이렇게도 고요한 생태숲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연두색 새잎과 새소리가 싱그런 봄을 알립니다. 누군가와 나란히 걸어도 좋지만 혼자 호젓하게 걸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흐트러졌던 마음이 조용히 정돈됩니다. ◇화담숲자작나무 2000여 그루 사이로 피어난 수선화 10만 송이가 땅에 시(詩)를 씁니다. 답답하고 억울했던 마음의 응어리가 조금씩 풀어집니다. 화담숲의 새 복합문화공간 화담채는 마루에 걸터앉아 바라보는 현대식 차경(借景)이 참 좋습니다. 서로 다른 식물들이 숲을 이루듯, 인간도 다름을 인정하고 어울릴 수 있기를. 화담채 분재 전시에서는 시간의 인내를 배웁니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걸어서 수목원 일주’는 숲해설가와 함께 호랑이숲, 능수벚꽃길, 거울연못, 미나리아재비 군락지 등을 세 시간 동안 돌아보는 교육 프로그램입니다. 하늘이 허락한다면 밤하늘을 수놓는 별들의 향연도 볼 수 있을 거예요.◇국립수목원올해는 유독 봄이 늦었습니다. 야생화들이 이제야 땅 위로 올라옵니다. 얼레지, 현호색, 할미꽃, 바람꽃, 깽깽이풀…. 작지만 강한 생명들은 몸을 낮추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시선을 땅 가까이에 둘수록 봄은 더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모진 날씨를 견뎌내고 피어난 봄꽃이 유독 애틋하고 고맙습니다.벚꽃은 피었고 어떤 끝은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다시 살아갈 시간입니다. 오늘 하루, 일상에 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살아보면 어떨까요. 꽃을 보며 설렐 수 있고, 오랜 친구에게 “잘 지내지?” 안부 문자를 보낼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회복을 시작한 것일 겁니다.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었지만 봄은 잿빛입니다. 화마(火魔)가 집어삼킨 우리 숲을 생각하면 버드나무 가지처럼 마음에 눈물이 흐릅니다. 도깨비불 앞에서 우리 인간은 얼마나 속수무책인지요. 겨울을 견딘 나무들이 꽃눈과 새잎을 터뜨리는 생명의 계절에 불길이 숲을 할퀴며 옮겨붙고 있습니다. 메마른 건 날씨와 토양만이 아닐 겁니다. 이 땅의 산과 숲, 그 속에 숨 쉬는 문화와 생명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도 그처럼 말라 있던 건 아닐까요. 무엇을 지키지 못했는지, 무엇을 외면했는지, 무엇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이 땅의 숲에 묵념을 올립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압축 성장하며 진통을 겪듯, 한국의 숲도 급속한 치산녹화를 지나 기후변화를 맞았습니다. 단 몇 도의 기온 상승이 재앙을 키운다는 사실에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국립산림과학원에 따르면 기후변화에 따른 산불위험지수는 기온이 1.5도 상승할 때 8.6%, 2.0도 상승할 때 13.5% 증가하는 것으로 예측됩니다. 1980년대 연평균 238건이던 산불은 2020년대 들어 580건. 숲은 이제 재난의 최전선이 되었습니다. 일단은 총력을 다해 산불을 끄는 게 급선무입니다. 다음엔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숲을 지켜낼 것인가. 숲은 단지 나무만의 공간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우리 삶의 가치와 함께 숨 쉬는 생명들이 존재합니다. 산림이 국토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우리나라에서 산불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사회재난입니다. 그에 맞는 재난관리 시스템을 보다 정교하게 정비해야 합니다. 예컨대 목재 모듈러 하우스를 평소에는 휴양림 숙소로 사용하다가 재난이 발생하면 이재민을 위한 쉼터로 옮겨 전환할 수 있습니다. 숲은 상처를 보듬고 회복을 이끄는 새로운 플랫폼이 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을 연결하는 전국 숲 네트워크를 본격적으로 고민할 때입니다. 이번 산불을 계기로 ‘소나무 탓’하는 목소리도 커졌습니다. 소나무 송진이 불을 옮기고 활엽수가 불길 확산을 막는다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중심 온도가 1500도가 넘는 산불에는 침엽수도 활엽수도 다 타버립니다. 기후변화로 건조해진 토양, 무분별한 입산과 관리 미흡 등 문제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인문, 사회, 경제적 요인을 종합적으로 감안한 건설적 논의를 통해 건강한 숲을 다시 일궈야 합니다.산림과학원은 바람의 방향 등 기후 인자를 통한 산불 확산을 예측하고 있습니다. 한 시간 단위로 산림청에 예측 결과를 보내 다른 부처들과 공유하고 있습니다. 현장에서는 이를 통해 진화 작전을 펼치고, 피해가 예상되는 민가와 국가유산을 대피시키고 있습니다. 현재 90%인 예측도를 높이는 게 과제입니다. 무엇보다 불을 내는 건 대체로 사람입니다. 올해부터는 인공지능이 사람의 행동을 분석해 위험 지역을 예측한다고 하니 기대와 경계를 함께 품어봅니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빨리빨리’가 깊숙이 박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무는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것입니다. 나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인간의 시간 감각은 조급하지만, 나무는 한자리에서 오랫동안 묵묵히 살아갑니다. 우리는 나무를 가꾼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나무가 우리를 견디게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산불 이후 숲을 어떤 방식으로 복원할 것인가. 그 해답은 나무의 소리를 듣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빠르지 않고 나지막하지만 놓쳐서는 안 될 숲의 언어입니다. 천년고찰이 불타고 불길이 삶터를 지나도 숲은 봄꽃을 피워내고 있습니다. 고요한 잿더미 속에서 새 생명이 움트고 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그 안에 얼마나 큰 슬픔을 삭이고 있을까요. 피해 이웃을 위로하며 그래도 단단하게 살아갈 이유, 숲이 그 답을 조용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코웨이가 공간의 크기에 따라 청정 면적을 다양화한 노블 공기청정기2 라인업으로 프리미엄 공기청정기 시장 공략을 강화한다.최근 주거 시설뿐만 아니라 식당이나 카페 등 상업시설에서도 공기청정기 수요가 늘어나면서 청정 성능은 물론이고 색상과 디자인, 제품의 크기 등을 다각적으로 고려하는 소비자의 요구도 커졌다.코웨이 노블 공기청정기2는 인테리어적 요소가 가미된 조형적 디자인과 자연의 소재를 모티브로 구성한 5가지 색상으로 2021년 처음 선보인 이후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코웨이 대표 제품이다.코웨이는 최근 노블 공기청정기의 프리미엄 디자인은 유지하면서 혁신적 청정 기술로 제품 크기는 줄이고 성능을 강화한 대형 청정면적의 100m², 133m² 제품을 새롭게 선보였다. 기존 53㎡, 67㎡에 이어 넓은 공간도 관리 가능한 신제품 출시로 공용·상업시설까지 프리미엄 공기청정기 시장을 적극 공략한다는 계획이다.넓은 청정면적의 노블 공기청정기2(100m², 133m²)는 코웨이만의 필터 기술력과 청정 솔루션으로 제품 크기는 최대 35% 줄이는 동시에 넓은 청정 성능을 구현했다. 공용 시설의 공간 활용성을 고려해 대용량 공기청정기임에도 불구하고 작아진 사이즈로 다양한 공간에서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노블 공기청정기2는 코웨이만의 혁신적 청정 솔루션 ‘상하 4D 입체 청정 시스템’을 탑재해 어느 공간에서도 빈틈없는 청정력을 자랑한다. 제품 내부에 상하로 적용된 2개의 필터 시스템을 통해 4개 면에서 오염된 공기를 중앙에서 집중 흡입하고 깨끗해진 공기를 상하로 내보내 공간을 빠르게 청정 관리한다는 설명이다.회사 측에 따르면 4단계 필터로 구성된 4D 입체 청정 시스템을 적용해 0.01μm(마이크로미터) 크기의 극초미세먼지를 99.999% 제거하고 공간 내 부유 세균 및 곰팡이, 바이러스까지 99.9% 감소시켜준다. 더 강력해진 탈취강화필터는 일상생활 속에서 발생하는 냄새뿐 아니라 반려동물 냄새까지 99% 이상 제거하는 동시에 깨끗한 공기가 나오는 상하부의 청정팬에 UV-C LED 살균 기능을 탑재해 위생적인 사용 환경을 제공한다.코웨이 노블 공기청정기2는 제품을 제어하고 스마트한 일상을 관리하는 코웨이 아이오케어(IoCare)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아이오케어 플러스(IoCare+)를 적용했다. 해당 앱을 통해 사용자의 필요 기능을 자동으로 추천하고 실내외 공기질 상태, 필터 교체 시기 등을 언제 어디서나 확인하고 관리할 수 있다.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롯데백화점이 다음달 6일까지 연중 최대 와인 행사인 ‘롯데 와인 위크(LOTTE Wine Week)’를 연다. 프리미엄부터 가성비까지 총 5000여 종 와인을 최대 80% 할인된 가격에 판매한다. 행사 물량을 지난해보다 30% 늘려 역대 최대 규모로 준비했으며, 2030세대를 위한 체험형 콘텐츠도 다채롭게 선보인다.우선 롯데백화점의 전문 소믈리에들이 엄선한 ‘프리미엄’ 와인을 합리적인 가격에 선보인다. 대표 와인으로는 ‘르루아 꼬르통 그랑크뤼’, ‘프리에르 로크’, ‘솔라이아’, ‘마세토’, ‘오퍼스원’ 등이 있으며 최대 80% 할인된 가격에 판매한다. ‘르루아 꼬르통 그랑크뤼’ 는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에서 전설적인 양조자로 불리는 ‘랄로 비즈 르루아’가 최고 전성기인 2000년대 중반에 생산한 빈티지 와인으로 세계에서 가장 희소한 프리미엄 와인 중 하나다. 이 외에도 180년 역사를 자랑하는 호주의 ‘펜폴즈 그렌지’와 이탈리아 최고의 와인 명가로 꼽히는 ‘가야 바르바레스코 삼총사’ 등 국내에서 구하기 어려운 와인들을 한정 수량으로 선보인다.저렴한 가격에 높은 품질을 자랑하는 ‘가성비’ 와인도 다양하게 준비했다. 1만원부터 3만원까지 가격대별 균일가 와인 물량을 전년보다 30% 확대하고, 최근 가성비를 중시하는 2030세대를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뉴질랜드산 화이트 와인 물량도 20% 늘렸다. 세계 최대 와인 플랫폼인 비비노(VIVINO)에서 4.0점 이상 득점한 우수 와인들도 엄선해 준비했다. 대표 상품으로는 ‘신퀀타 꼴레지오네, ‘에라주리즈 돈 막시미아노’, ‘빈디 딕슨 피노누아 2020’, ‘리덴토레 레포스코’ 등이 있다.롯데백화점에 따르면 최근 경제 침체와 고물가 현상이 지속되면서 와인 시장의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 지난해 롯데백화점의 전체 와인 매출 중 10만원 이상의 ‘프리미엄’ 와인과 3만원 이하의 ‘가성비’ 와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년보다 각 5%P와 10%P 증가해 50%와 30%를 기록했다. 특히, 코로나19 기간 중 와인 수요가 급증했던 2030세대는 3만 원대 이하 와인 매출 구성비가 65%에 달했을 정도로 가성비 와인에 대한 선호가 두드러진 것으로 나타났다.경험을 중시하는 2030세대를 위한 체험형 행사도 다채롭게 선보인다. 점포별로 와인을 포함해 다양한 주류 시음과 경품 이벤트 등을 마련했다. 4월 4일부터 6일까지 김포공항점에서는 국내 3개 유명 소믈리에 대회에서 처음으로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조현철 소믈리에와 협업해 총 300여종의 와인을 직접 마셔볼 수 있는 테이스팅 행사를 진행한다. 본점에서는 인기 푸드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상품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우리술 랩소디’ 팝업 스토어를 27일까지, 광복점에서는 유명 수제 맥주 플랫폼 ‘무빙 브루어리(3/28∼4/10)’와 함께하는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최준선 와인앤리커(Wine&Liquor)팀 치프바이어(소믈리에)는 “와인 시장이 양극화 됨에 따라 이번 행사는 ‘프리미엄’과 ‘가성비’ 와인에 초점을 맞춰 상품 구성부터 물량까지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다”며, “앞으로도 변화하는 주류 시장에 주시하며, 고객들의 니즈에 맞는 프로모션과 콘텐츠를 발빠르게 선보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아원고택과 아가페정원. 여러모로 성격이 다른 두 곳을 다녀왔는데,이상하게도 같은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어떻게 살 것인가.’#1. 똑딱똑딱. 전북 완주 아원(我園)고택 로비 겸 갤러리에 들어서자 물줄기가 명상 음악과 어우러지며 수조 위로 떨어졌다. 목탁 소리 같은 그 소리는 마음에 동그란 물수제비를 그렸다. 부드러운 빛이 수면에 내려앉기에 위를 올려다보니 지붕이 뚫려 있었다. 움직이는 지붕이라 이따금 눈과 비도 실내로 들어온다고 한다. 구도(求道)의 공간이 이런 걸까.● 아원고택, “한옥은 움직이는 정원” “오후 4∼5시 체크인 시간을 준수해 주시길 바랍니다. 손님들 안전과 어둠이 내리기 전 아원 풍광을 보여드리기 위함입니다.” 시간에 맞춰 도착하니 아원고택 측이 미리 보내준 문자 메시지 내용이 이해되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종남산(終南山)은 그 자체로도 가슴을 뻥 뚫리게 했지만, 해가 산 위로부터 서서히 하강하면서 정원의 네모난 수경(水鏡) 위를 비추는 풍광은 마음속에도 빛을 가득 채웠다.송광사 절터를 구하던 도의선사가 이 산에서 깨끗한 영천수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남쪽으로 더 이상 내려가지 않았다고 해서 산의 이름이 종남산이라고 했던가. 지금으로부터 44년 전,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지만 좋아하는 음악을 마음껏 듣고 싶어 나만의 공간을 절실하게 찾던 어느 20대 청년도 종남산 산세에 반해 황무지 6600㎡(2000평)을 사들였다. 오랫동안 정원을 만들고 전국에서 한옥 네 채를 옮겨와 15년간 조립해 지은 곳이 아원고택이다. 땅을 산 그 청년, 전해갑 아원 대표는 이제 일흔 살이다. 아원고택은 2019년 그룹 BTS가 머물며 제작한 ‘2019 썸머 패키지’에 소개되며 글로벌 ‘BTS 힐링 성지’가 됐다. 오랜 세월이 그려낸 기와 꽃, 그날그날 수반에 띄워 두는 들꽃, 호수 같은 수조에 데칼코마니처럼 찍히는 나무 그림자, 대나무 산책길의 새 소리…. 이곳의 디테일은 고요하고 느리게 걸을수록 하나둘 눈, 귀, 마음에 들어선다. 아원은 ‘우리들의 정원’이란 뜻이다. 전 대표는 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 전북 정읍시, 전남 함평군 등에서 오래된 한옥 네 채를 옮겨왔다. 집들 나이를 합치면 650세다. 정읍의 100년 된 한옥을 옮겨 온 천지인(만휴당) 다도실에서 전 대표와 마주 앉았다. 한옥의 네모난 창문이 액자처럼 종남산을 담고 있었다. 꽃 피고 단풍 드는 계절의 색(色)도 좋지만,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지금 시기의 실존적 풍경도 좋았다. 겨우내 잎을 떨쳐 냈던 나무들은 선명한 형태를 드러내는 동시에 새 생명이 움트는 설렘을 품고 있었다. 전 대표는 젊을 때 음악에 미쳐 DJ 일도 했다. 편안한 공간에서 음악을 듣고 싶어 공간 기획 일을 시작했는데, 음악으로 일깨운 감각 덕분인지 손대는 상업공간마다 성공했다. 하지만 남의 공간을 빌려 반짝이게 하면 임대료가 오르고 결국 내몰렸다. 지친 그의 관심을 끈 게 조경이었다. 어느 순간 건축보다 한 그루 나무가 더 소중하게 여겨졌다고 한다. 그가 말했다. “아원은 정원이 먼저였고, 한옥은 나중에 얹은 거예요. 한옥은 가구처럼 해체해 옮길 수 있는, 움직이는 ‘랜드스케이프(landscape·조경) 정원’이에요.” 그러고 보니 돌담 옆 녹차 밭, 좁아지고 넓어지는 동선 등 조경 요소들이 세심하게 배치돼 있었다. “파블로 피카소가 그랬죠. ‘좋은 예술가는 모방하고 뛰어난 예술가는 훔친다’고요. 전 한옥의 차경(借景·빌려오는 풍경)을 통해 자연을 훔쳤어요. 바깥 풍경을 불러들이려면 안에는 적을수록 좋아요. 그래야 나도 모르게 멈춰 탁 ‘멍 때릴’ 수 있거든요. 그게 몰입이고 명상이에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자연이에요. 가능하면 자연에 손대지 말고, 내 걸로 만들려고 하지 말아야 해요. 자연은 그걸 바라보는 사람이 주인이에요. 훼손되고 상처받은 마을들에 이런 공간들이 들어서 지역 소멸을 막았으면 해요.”#2. 허리가 굽은 어르신들이 향나무 산책길을 걷고 있었다. 1970년대 고 서정수(알렉시오) 신부가 오갈 곳 없는 어르신들을 보살피기 위해 세운 전북 익산 ‘아가페정양원’ 정원이다. 이곳은 2021년 전북 제4호 민간정원으로 지정돼 정비한 뒤 ‘아가페정원’이라는 이름으로 50여 년 만에 일반에 개방됐다. 지금까지 70만 명 이상 다녀갔다.● 아가페정원, 무조건적 사랑이 이룬 숲 정원 3층 갈색 벽돌 건물에 ‘사회복지법인 아가페정양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2년 전까지 아가페정양원장이었다가 정년퇴직하고 이제는 이 노인복지시설의 정원인 아가페정원만 집중해 맡는 최명옥 원장이 말했다. “서정수 신부님이 1970년 이곳을 세우면서 아가페정양원(靜養院)이라는 말을 붙였어요. 고요하게(靜) 쉬면서 무조건적 사랑(아가페)을 나누자고요. 아가페정양원 원훈(院訓)도 ‘가족으로 살자’에요. 처음엔 몰랐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살려면 가족처럼 살아야 하더라고요. 서 신부님이 1985년 선종(善終·성직자의 경건한 임종)한 후로는 박영옥 이사장님(92)이 지금껏 정양원을 가꿨어요.” 현재 50명의 기초생활수급자 노인이 사는 아가페정양원은 11만5700㎡(3만5000평) 부지가 온통 숲이다. 오갈 곳 없는 어르신들을 보살피기 위해 나무를 키워 팔아 왔다. 내장산에는 단풍나무, 부잣집들에는 향나무를 팔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1만 그루 넘는 나무가 남아 있고, 그중 향나무는 3000여 그루다. 50여 년 동안 ‘비밀의 숲’이던 이곳이 2021년 아가페정원으로 문을 열게 된 건 정헌율 익산시장의 공이 컸다. 정 시장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때 아가페정양원을 찾아가 “시민들이 자연 속에서 치유 받도록 오래된 숲을 정원으로 조성해 개방하자”고 제안했다. 아가페정양원 박 이사장은 장고(長考) 끝에 무료 개방을 결정했다. 팬데믹으로 갈 곳 없어진 시민들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나누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아가페정원은 세련되게 설계된 정원이 아니라서 오히려 정답다. 익산산림조합, 푸른익산가꾸기운동본부 등과 손잡고 숲에 길을 내고 여기저기로부터 꽃을 나눔 받아 꾸몄다. 정원을 걷다가 ‘어서 와요, 소중한 당신’ ‘최고보단 최선을’ 같은 문구들을 마주치니 상처받은 누군가를 살리는 위로가 되겠구나 싶었다. 정원 측이 최근 2년 간 향나무 아래 심었다는 각종 계절 꽃이 곧 너울댈 것이다. 봄에는 수선화와 끈끈이대나물, 여름에는 맥문동과 샤스타데이지, 가을에는 상사화…. 일부 식물 조합은 낯설었지만 구수한 느낌이 있었다. 겨울에 일손이 부족해 미처 뽑아내지 못했다는 시든 토종 맨드라미, 마른 채 가지에 달린 튤립 모양 백합나무 꽃은 각각 땅과 하늘에 쓴 시(詩)였다. 최 원장이 말했다. “정원을 다녀간 분이 고맙다고 연락하셨어요. 요즘 봉선화를 보기 어려운데 우리 정원에서 실컷 보니 어릴 적이 생각나 행복했다고요.” 정원에서 키우는 고양이마저 살갑게 구는 게 인상적이었다.1970년대 울타리 삼으려고 심은 사람 키 높이 메타세쿼이아 500여 그루는 이제 높이 50m로 자라 울창한 산책로를 이룬다. 그곳을 가족과 친구들이 걸으며 추억을 쌓는다. 아가페정원 방문객의 절반 이상은 익산 시민이 아니다. 전국에서 몰려들어 주차장 확충이 시급해진 정원 측은 나무를 팔아 재원을 마련하고 싶단다. 새들이 찾아와 먹으라고 열매를 따지 않고, 잡초로 여겨지는 야생화도 소중하게 대하는 이 정원의 실천적 사랑이 꽃향기처럼 퍼진다. 아원고택과 아가페정원은 오랜 세월의 사랑이 깃든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치유’라는 말이 너무 흔하게 사용되는 요즘 이 두 곳이야말로 우리 마음을 바라보고 챙기게 하는 치유 정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 챙김 과정은 고요하지만은 않았다. 가슴속에서 어떤 열정이 깨어나 꿈틀댔다.주변 추천 여행지◇미륵사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중심축이다. 미륵사는 백제 30대 무왕 대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륵사지 석탑은 동아시아 최대 규모 석탑이다. 일제 강점기 때 콘크리트로 덧씌워졌다가 긴 복원 과정을 거쳐 2019년 지금의 모습을 찾았다. 출토 석조물들이 야외에 전시된 모습이 마치 ‘돌의 정원’ 같다.◇왕궁리 유적 백제 궁궐터로 왕궁리 오층석탑 등이 있다. 유적을 걷다 보면 뜻밖에 백제의 정원을 만난다. 당시 정원 중심시설과 역 ‘U’ 자형 대형 수로를 볼 수 있다. 백제왕궁박물관 옥상 하늘정원은 유적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비밀의 정원’이다.글·사진 완주·익산=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경북 칠곡군의 복합문화공간 ‘시호재’가 최근 세계적 권위의 디자인상을 잇달아 받으면서 주목받고 있다.시호재는 지난달 27일 ‘iF 디자인 어워드 2025’로 선정됐다고 14일 밝혔다. 1954년부터 매년 혁신적 디자인을 선정하는 iF 디자인 어워드 측은 시호재에 대해 “마치 두 팔을 벌려 환영하듯 양쪽에 배치된 두 건물 사이의 길은 자연의 넉넉한 품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편안하게 환대한다”고 평했다. 이에 앞서 시호재는 지난달 7일 ‘2025 독일 디자인 어워드’도 수상했다. 시호재는 재일교포 출신의 세계적 건축가 고(故) 이타미 준의 장녀인 유이화 건축가(ITM 유이화 건축사사무소 소장)가 설계하고 조경은 김봉찬 ‘더가든’ 대표가 맡았다. 지난해 11월에는 한국건축가협회 건축상도 받았다().건축주 박용해 탑런토탈솔루션 회장은 “시호재가 권위있는 상들을 통해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기쁘다”며 “더 많은 이들이 찾아와 문화적으로 교류했으면 한다”고 말했다.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1. 똑딱똑딱. 전북 완주 아원(我園)고택 로비 겸 갤러리에 들어서자 물줄기가 명상 음악과 어우러지며 수조 위로 떨어졌다. 목탁 소리 같은 그 소리는 마음에 동그란 물수제비를 그렸다. 부드러운 빛이 수면에 내려앉기에 위를 올려다보니 지붕이 뚫려 있었다. 움직이는 지붕이라 이따금 눈과 비도 실내로 들어온다고 한다. 구도(求道)의 공간이 이런 걸까.#2. 허리가 굽은 어르신들이 향나무 산책길을 걷고 있었다. 1970년대 고 서정수(알렉시오) 신부가 오갈 곳 없는 어르신들을 보살피기 위해 세운 전북 익산 ‘아가페정양원’ 정원이다. 이곳은 2021년 전북 제4호 민간정원으로 지정돼 정비한 뒤 ‘아가페정원’이라는 이름으로 50여 년 만에 일반에 개방됐다. 지금까지 70만 명 이상 다녀갔다.아원고택과 아가페정원. 여러모로 성격이 다른 두 곳을 다녀왔는데, 이상하게도 같은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아원고택, “한옥은 움직이는 정원”“오후 4~5시 체크인 시간을 준수해 주시길 바랍니다. 손님들 안전과 어둠이 내리기 전 아원 풍광을 보여드리기 위함입니다.” 시간에 맞춰 도착하니 아원고택 측이 미리 보내준 문자 메시지 내용이 이해되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종남산(終南山)은 그 자체로도 가슴을 뻥 뚫리게 했지만, 해가 산 위로부터 서서히 하강하면서 정원의 네모난 수경(水鏡) 위를 비추는 풍광은 마음속에도 빛을 가득 채웠다.송광사 절터를 구하던 도의선사가 이 산에서 깨끗한 영천수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남쪽으로 더 이상 내려가지 않았다고 해서 산의 이름이 종남산이라고 했던가. 지금으로부터 44년 전,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지만 좋아하는 음악을 마음껏 듣고 싶어 나만의 공간을 절실하게 찾던 어느 20대 청년도 종남산 산세에 반해 황무지 6600㎡(2000평)을 사들였다. 오랫동안 정원을 만들고 전국에서 한옥 네 채를 옮겨와 15년간 조립해 지은 곳이 아원고택이다. 땅을 산 그 청년, 전해갑 아원 대표는 이제 일흔 살이다.아원고택은 2019년 그룹 BTS가 머물며 제작한 ‘2019 썸머 패키지’에 소개되며 글로벌 ‘BTS 힐링 성지’가 됐다. 오랜 세월이 그려낸 기와 꽃, 그날그날 수반에 띄워 두는 들꽃, 호수 같은 수조에 데칼코마니처럼 찍히는 나무 그림자, 대나무 산책길의 새 소리…. 이곳의 디테일은 고요하고 느리게 걸을수록 하나둘 눈, 귀, 마음에 들어선다. 아원은 ‘우리들의 정원’이란 뜻이다.전 대표는 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 전북 정읍시, 전남 함평군 등에서 오래된 한옥 네 채를 옮겨왔다. 집들 나이를 합치면 650세다. 정읍의 100년 된 한옥을 옮겨 온 천지인(만휴당) 다도실에서 전 대표와 마주 앉았다. 한옥의 네모난 창문이 액자처럼 종남산을 담고 있었다. 꽃 피고 단풍 드는 계절의 색(色)도 좋지만,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지금 시기의 실존적 풍경도 좋았다. 겨우내 잎을 떨쳐 냈던 나무들은 선명한 형태를 드러내는 동시에 새 생명이 움트는 설렘을 품고 있었다.전 대표는 젊을 때 음악에 미쳐 DJ 일도 했다. 편안한 공간에서 음악을 듣고 싶어 공간 기획 일을 시작했는데, 음악으로 일깨운 감각 덕분인지 손대는 상업공간마다 성공했다. 하지만 남의 공간을 빌려 반짝이게 하면 임대료가 오르고 결국 내몰렸다. 지친 그의 관심을 끈 게 조경이었다. 어느 순간 건축보다 한 그루 나무가 더 소중하게 여겨졌다고 한다. 그가 말했다. “아원은 정원이 먼저였고, 한옥은 나중에 얹은 거예요. 한옥은 가구처럼 해체해 옮길 수 있는, 움직이는 ‘랜드스케이프(landscape·조경) 정원’이에요.” 그러고 보니 돌담 옆 녹차 밭, 좁아지고 넓어지는 동선 등 조경 요소들이 세심하게 배치돼 있었다.“파블로 피카소가 그랬죠. ‘좋은 예술가는 모방하고 뛰어난 예술가는 훔친다’고요. 전 한옥의 차경(借景·빌려오는 풍경)을 통해 자연을 훔쳤어요. 바깥 풍경을 불러들이려면 안에는 적을수록 좋아요. 그래야 나도 모르게 멈춰 탁 ‘멍 때릴’ 수 있거든요. 그게 몰입이고 명상이에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자연이에요. 가능하면 자연에 손대지 말고, 내 걸로 만들려고 하지 말아야 해요. 자연은 그걸 바라보는 사람이 주인이에요. 훼손되고 상처받은 마을들에 이런 공간들이 들어서 지역 소멸을 막았으면 해요.”● 아가페정원, 무조건적 사랑이 이룬 숲 정원3층 갈색 벽돌 건물에 ‘사회복지법인 아가페정양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2년 전까지 아가페정양원장이었다가 정년퇴직하고 이제는 이 노인복지시설의 정원인 아가페정원만 집중해 맡는 최명옥 원장이 말했다.“서정수 신부님이 1970년 이곳을 세우면서 아가페정양원(靜養院)이라는 말을 붙였어요. 고요하게(靜) 쉬면서 무조건적 사랑(아가페)을 나누자고요. 아가페정양원 원훈(院訓)도 ‘가족으로 살자’에요. 처음엔 몰랐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살려면 가족처럼 살아야 하더라고요. 서 신부님이 1985년 선종(善終·성직자의 경건한 임종)한 후로는 박영옥 이사장님(92)이 지금껏 정양원을 가꿨어요.”현재 50명의 기초생활수급자 노인이 사는 아가페정양원은 11만5700㎡(3만5000평) 부지가 온통 숲이다. 오갈 곳 없는 어르신들을 보살피기 위해 나무를 키워 팔아 왔다. 내장산에는 단풍나무, 부잣집들에는 향나무를 팔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1만 그루 넘는 나무가 남아 있고, 그중 향나무는 3000여 그루다.50여 년 동안 ‘비밀의 숲’이던 이곳이 2021년 아가페정원으로 문을 열게 된 건 정헌율 익산시장의 공이 컸다. 정 시장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때 아가페정양원을 찾아가 “시민들이 자연 속에서 치유 받도록 오래된 숲을 정원으로 조성해 개방하자”고 제안했다. 아가페정양원 이사장은 장고(長考) 끝에 무료 개방을 결정했다. 팬데믹으로 갈 곳 없어진 시민들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나누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아가페정원은 세련되게 설계된 정원이 아니라서 오히려 정답다. 익산산림조합, 푸른익산가꾸기운동본부 등과 손잡고 숲에 길을 내고 여기저기로부터 꽃을 나눔 받아 꾸몄다. 정원을 걷다가 ‘어서 와요, 소중한 당신’ ‘최고보단 최선을’ ‘조금 느리게 걸어도 괜찮아’ 같은 문구들을 마주치니 상처받은 누군가를 살리는 위로가 되겠구나 싶었다.정원 측이 최근 2년 간 향나무 아래 심었다는 각종 계절 꽃이 곧 너울댈 것이다. 봄에는 수선화와 끈끈이대나물, 여름에는 맥문동과 샤스타데이지, 가을에는 상사화…. 일부 식물 조합은 낯설었지만 구수한 느낌이 있었다. 겨울에 일손이 부족해 미처 뽑아내지 못했다는 시든 토종 맨드라미, 마른 채 가지에 달린 튤립 모양 백합나무 꽃은 각각 땅과 하늘에 쓴 시(詩)였다. 최 원장이 말했다. “정원을 다녀간 분이 고맙다고 연락하셨어요. 요즘 봉선화를 보기 어려운데 우리 정원에서 실컷 보니 어릴 적이 생각나 행복했다고요.” 정원에서 키우는 고양이마저 살갑게 구는 게 인상적이었다.1970년대 울타리 삼으려고 심은 사람 키 높이 메타세쿼이아 500여 그루는 이제 높이 50m로 자라 울창한 산책로를 이룬다. 그곳을 가족과 친구들이 걸으며 추억을 쌓는다. 아가페정원 방문객의 절반 이상은 익산 시민이 아니다. 전국에서 몰려들어 주차장 확충이 시급해진 정원 측은 나무를 팔아 재원을 마련하고 싶단다. 새들이 찾아와 먹으라고 열매를 따지 않고, 잡초로 여겨지는 야생화도 소중하게 대하는 이 정원의 실천적 사랑이 꽃향기처럼 퍼진다.아원고택과 아가페정원은 오랜 세월의 사랑이 깃든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치유’라는 말이 너무 흔하게 사용되는 요즘 이 두 곳이야말로 우리 마음을 바라보고 챙기게 하는 치유 정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 챙김 과정은 고요하지만은 않았다. 가슴속에서 어떤 열정이 깨어나 꿈틀댔다.<주변 추천 여행지>◇미륵사지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중심축이다. 미륵사는 백제 30대 무왕 대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륵사지 석탑은 동아시아 최대 규모 석탑이다. 일제 강점기 때 콘크리트로 덧씌워졌다가 긴 복원 과정을 거쳐 2019년 지금의 모습을 찾았다. 출토 석조물들이 야외에 전시된 모습이 마치 ‘돌의 정원’ 같다.◇왕궁리 유적백제 궁궐터로 왕궁리 오층석탑 등이 있다. 유적을 걷다 보면 뜻밖에 백제의 정원을 만난다. 당시 정원 중심시설과 역 ‘U’ 자형 대형 수로를 볼 수 있다. 백제왕궁박물관 옥상 하늘정원은 유적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비밀의 정원’이다.완주·익산=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눈앞에 배롱나무꽃이 흐드러졌다. 진달래의 분홍도 철쭉의 분홍도 아닌 배롱나무꽃 고유의 분홍이 화면을 가득 메우며 흔들렸다. 노래 가사처럼 ‘그대를 처음 만난 날 남모르게 그려본’ 분홍 립스틱은 ‘떨리던 마음같이 사랑스럽던’ 배롱나무꽃의 분홍빛 아니었을까. 이곳은 실감형 디지털 전시 ‘미음완보(微吟緩步), 전통정원을 거닐다’가 열리고 있는 서울 세종문화회관. 하지만 나의 정신은 어느 가을날 갔던 전남 담양군 명옥헌(鳴玉軒) 원림을 걷고 있었다. 명옥헌 가던 돌담길 풍경이 지금도 생생하다. 감나무들은 주렁주렁 매달고 있던 열매를 이따금 땅에 내려뜨렸다. 나무에서 곧바로 떨어진 감을 맛본 건 처음이었다. 톡 터져 흐르던 주황색 감의 달콤한 육즙!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었을까.배롱나무는 일순간 피었다가 지는 꽃이 아니다. 비단 같은 꽃이 여름 내내 핀다. 명옥헌 원림이 특별한 건 감각과 철학의 정원이기 때문이다. 계곡물을 받아 네모난 연못, 즉 방지(方池)를 조성한 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라는 동아시아 전통 우주론을 구현해 원형의 섬을 만들고 주변에는 배롱나무를 심었다. 물이 바위를 따라 옥이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흐르고 연못은 배롱나무꽃을 거울처럼 비춘다.우리는 그 가을날 약속했다. 배롱나무꽃이 피는 여름에 꼭 다시 오자고. 언젠가 그 약속대로 될까. 한여름 반짝이는 햇살과 매미 소리와 분홍빛 배롱나무꽃이 어우러지는 명옥헌 원림은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추억과 상상의 정원, 비밀의 정원이 된다. 다만 궁금해진다. 지금의 우리는, 미래의 우리는 그때의 우리와 같을까. ‘미음완보’는 조선 시대 문인 정극인의 가사 ‘상춘곡’(賞春曲)에 나오는 글귀로, ‘나직이 읊조리며 천천히 걷다’라는 뜻이다. 국가유산청이 한국 전통정원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마련한 ‘미음완보’ 전시는 이렇듯 우리 각자의 주관적 경험과 추억을 소환한다. 전남 담양 명옥헌 원림·소쇄원·보길도 윤선도 원림, 전북 남원 광한루원, 경북 안동 만휴정·영양 서식지·봉화 청암정, 서울 창덕궁 후원…. 자연유산 중 역사적·경관적·학술적 가치가 높아 보존의 필요성을 인정받은 우리 명승(名勝)들이 디지털로 펼쳐진다.전시장 바닥에 깔린 방석에 앉아 커다란 화면을 바라본다. 분명히 몸의 긴장을 내려놓았는데 정신은 기억의 세계를 날아다니듯 여행한다. 소쇄원에서 맡았던 야생화 길마가지의 은은한 향기, 연두색 새잎이 살랑이던 광한루원 수양버들의 생명력, 우리가 정원들에서 나누었던 ‘까르르’ 웃음소리…. 정원은 결코 누구에게나 똑같을 수 없다. 저마다의 경험과 지식, 관점에 따라 보고 느끼는 게 다르다. 같은 사람이라도 언제 누구와 어떤 기분으로 갔느냐에 따라 또 달라진다. “소쇄원에 가 본 적이 있다”와 “소쇄원에서 가을 탱자를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는 경험의 층위가 다르다.전시 마지막 순서는 한국의 대표적 궁궐정원인 창덕궁 후원을 3차원 디지털 정밀 실측 데이터로 구현한 미디어아트였다. 선왕의 넋을 표현했다는 화면 속 하얀 나비가 후원의 사계절을 날아다녔다. 꽃잎이 흩날리는 봄의 주합루, 초록으로 물든 여름의 애련지, 단풍 든 가을 옥류천, 눈 내리는 겨울의 연경당…. 창덕궁 후원을 좋아해 계절마다 찾아가는데도 미디어아트로 감상하는 건 색다른 경험이었다. 디지털 기술은 평소에 관람객이 오르기 힘든 주합루에서 왕의 시선으로 부용지를 내려다보게 했다. 화면이 휙휙 바뀌는 후원의 사계절은 관람객의 몰입감을 한껏 끌어올렸다. 특히 후원에 눈발이 몰아치는 장면은 마음속을 직시하는 계기가 됐다. 어디선가 저 눈처럼 바람이 불어와 모래나 자갈 같은 감정의 부유물을 일으키고 있는 건 아닌지. 왜 그때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의 책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가 떠올랐을까. 주인공은 세상을 뜬 아내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덴마크 화가 빌헬름 함메르쇠이의 화폭 같은 감정의 어둠을 느꼈지만,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는 마침내 고요가 들어섰다고 했다. 그에게 정원은 그리움이 사무치는 장소이자 아내의 영혼을 만나는 장소였다.‘미음완보’ 얘기로 돌아오면 이 전시는 경남 하동군 지리산 쌍계사 불일폭포에서 착안한 실감형 미디어 폭포를 제작해 가까이 다가서면 물줄기가 머리 위에서 갈라지는 체험을 할 수 있게 했다. 지리산국립공원에 있는 자연폭포로 높이가 60m에 이른다는데, 아직 가보지 못한 장소에 대한 호기심이 솟구쳤다. 우리 판소리에 현대적 팝스타일을 조화시키는 그룹 이날치 출신 장영규 감독이 전시음악을 만들고 전문 조향사들이 공간에 맞춰 향기도 제작해 비치해두었다. 세련된 향이었지만 감탄할만큼 각 공간의 콘셉트와 딱 맞는 것 같지는 않아 조금 아쉬웠다. 후각이야말로 강렬한 기억이라 더욱 전문적이고 정교한 접근이 필요하겠다. 우리 전통정원이 다양한 시도로 교훈과 당위성의 공간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선망의 공간으로 미래 세대에게 다가가기를 바란다.무료인 이 전시는 지난해 서울 일민미술관과 영국 런던 사치갤러리에서 열렸던 전시의 앙코르 전이다. 지난해 연말 일민미술관 전시 기간이 열흘이었던 데 비해 이번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4월 27일까지 열리니 더 많은 이들이 전통정원을 접하며 각자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의 기억 속을 천천히 걸었으면 한다. 이번 디지털 콘텐츠는 앞으로 디지털 사이니지 등 다양한 전시공간에 접목될 수 있어 국내외에 우리 자연유산을 널리 알릴 수 있겠다는 기대를 품게 한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롯데백화점이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돌체앤가바나(DOLCE&GABBANA)’ 매장을 21일 인천점 1층에 열었다. 인천 지역에 최초로 연 돌체앤가바나 매장으로, 플래그십 스토어를 제외하고 남녀 패션 컬렉션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유통사 유일의 ‘남녀 복합 매장’이다. 의류 컬렉션은 물론 주얼리 등 다양한 잡화 상품군까지 선보인다.젬스톤 원석으로 자연의 다양성을 표현한 ‘스프링’, 무지개 빛의 반사와 굴절로 펜던트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레인보우’, 이탈리아 장신의 세공 기술로 제작한 ‘스페셜’ 컬렉션 등 총 세 종류의 컬렉션에서 선보이는 12가지 파인 주얼리 상품을 오직 롯데백화점 인천점 돌체앤가바나 매장에서만 만나볼 수 있다. 파이톤 스킨을 입힌 특별한 ‘시실리백’도 오직 인천점 매장에서만 만나볼 수 있다. 돌체앤가바나의 상징적인 시실리백 디자인에 고급스러운 파이톤(Python, 비단뱀) 소재를 접목한 이 토트백은 녹색 등 총 4가지 색상이다.롯데백화점 인천점은 지속적인 리뉴얼을 통해 각종 프리미엄 콘텐츠를 선보이며 점포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해 8월에는 지하 1층에 약 1200평 규모의 ‘프리미엄 뷰티관’을 조성해 전국을 대표하는 ‘뷰티 메카’로 거듭났다. 재작년 12월에는 3500평 규모의 프리미엄 식품관인 ‘푸드 에비뉴’를 새단장해 현재까지 900만 명이 넘는 방문 고객수를 기록하는 등 미래형 식품관의 기준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조형주 롯데백화점 럭셔리부문장은 “돌체앤가바나는 장인 정신을 담은 매혹적인 스타일로 럭셔리 패션을 대표하는 브랜드”라며 “인천 지역 최초의 매장이자, 유통사 최초로 남녀 복합 매장을 선보이는 만큼 지역 고객들의 많은 관심을 기대하며, 향후에도 새로운 럭셔리 콘텐츠를 지속 선보일 계획”이라고 밝혔다.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요리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히데코 선생님’은 유명하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집에서 2008년부터 이어지고 있는 나카가와 히데코(中川秀子) 씨의 요리 수업은 지금까지 4500명 이상이 수강했다. 일본 도쿄 제국호텔의 프랑스 음식 주방장을 지낸 나카가와 다모츠(中川保) 씨를 아버지로 둔 ‘셰프의 딸’로, 국내에 일본 가정식 요리를 전파한 대표적 인물이다.그가 올해 초 자신의 18번째 책 ‘히데코의 일본요리’를 펴냈다. 남편 박병진 씨가 차린 ‘북스레브쿠헨’이라는 1인 출판사를 통해서다. 박 씨도 같은 시기 ‘위스키, 스틸 영’이라는 위스키 인문학책을 냈다. 부부는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일로 삼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귀화 일본인인 아내 히데코 씨는 일본 대학에서 독일어를 전공했지만 어려서부터 맛보고 자란 일본요리를 가르친다. IBM과 SAP 등 국내외 기업에서 30여 년간 일했던 남편 박 씨는 20여 년 전 좋아하는 위스키를 인생 후반기 아이템으로 준비해 지금은 위스키 전문가로 활약 중이다.17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부부는 “둘 다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것을 인생의 최우선 가치로 생각한다”며 “사람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배우고 동시에 우리의 선한 영향력도 건네고 싶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아내의 말―둘은 어떻게 만나 결혼했나.“1994년 한국에 어학을 배우러 왔다가 아르바이트로 남편이 다녔던 IBM의 거래처인 새한그룹에서 일본어 강사를 하던 중 새한 과장님의 소개로 만났다. 1년쯤 사귀다가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남편이 일본으로 와 청혼을 해서 1998년 결혼했다.”―‘히데코의 일본요리’를 펴낸 이유는.“독자들이 일본 식문화를 더 자세히 알고 집에서 쉽게 요리 할 수 있으면 한다. 그래서 특이한 일본요리보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음식들을 많이 소개했다.”―히데코의 일본요리의 특징은.“일본요리 전문학교를 나오지는 않았지만 일본에서 태어나 이유식부터 엄마와 할머니의 일본요리 맛을 체험해 혀와 기억 속에서 일본요리의 맛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한국에 오래 살면서 여기서 구하는 재료로 그 맛을 재현한 게 히데코의 일본요리다.”―식자재를 구하는 곳은 어디인가.“서울 연희동 ‘사러가’, 노량진시장, 마장동 시장, 가락시장의 단골 판매자들로부터 구한다. 어부와 농부 등 생산자들로부터 직접 사기도 한다. 수업 때 쓰는 빵과 후식 재료도 전문가들로부터 산다. 모두 만들고 가르치기보다 저보다 잘하는 사람의 식자재를 사용해 더 맛있는 요리를 만들려고 한다.”―이제 곧 3월인데 추천하고 싶은 레시피는.“봄의 향기와 공기를 느끼게 되면 바다에서 나오는 것들이 맛있어진다. 조개 주꾸미 스미소무침을 추천한다.”>> 남편의 말―30여 년간 직장생활을 하다가 어떻게 위스키 전문가가 됐나.“첫 직장인 IBM에 다닐 때부터 와인과 위스키를 좋아했는데 무의미하게 사업목적으로만 술을 마시는데 회의가 들었다. 100세 시대 두 번째 인생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20년 전부터 위스키 공부를 했다. 매년 열흘 이상씩 전 세계 위스키 증류소도 다녔다. 위스키 칼럼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동아일보 최고위과정 광화문살롱에서 강의도 한다.”―‘위스키, 스틸 영’에 나온 곳들은 아내와 함께 여행했나.“대부분 같이 여행했지만, 스코틀랜드의 오지라서 두 번은 가고 싶지 않던 곳들은 혼자 가기도 했다.”―위스키의 매력은.“와인처럼 까다롭지 않게 구입하고, 보관하고, 마시는 술이다. 상하지 않으니 한 번에 다 마실 필요도 없다. 집에 따 둔100여 병 중 그날그날 어떤 위스키 조합으로 마실지 즐거운 고민을 하게 된다.”―일본요리와 위스키의 궁합은.“위스키는 요리 없이도 마실 수 있지만 그래도 일본요리는 비교적 위스키에 잘 어울리는 편이다. 일반적으로 피트향이 나는 위스키가 해산물에 어울린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플로럴한 스페이사이드 위스키가 어울린다. 피트가 없는 위스키가 오히려 사시미나 산뜻한 식초가 들어가는 해산물의 맛을 더 풍부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튀김 음식은 하이볼이나 온더락스에 매우 잘 어울린다.”―아내와 시간을 많이 보내나.“바쁜 가운데서도 대부분의 저녁 혹은 위스키 한잔의 시간은 아내와 가지는 편이다. 즐거운 인생을 함께 헤쳐나가는 동반자로서 서로 조언해주기도 한다. 물론 둘 다 조언을 잘 듣는 편은 아니다. 그저 서로 말하는 데 의의가 있는 편이고 자주 싸우기도 한다(웃음).”조개 주꾸미 스미소 무침 - 4인용 재료: 모시조개 800g, 해감용 소금물(물1L+소금 2큰술), 청주 100mL, 주꾸미 4마리(100g), 풋콩 1컵, 두릅 또는 아스파라거스 6개, 방울토마토 8개, 소금 적당량- 초피 스미소 양념: 초피 열매 1큰술, 미소 4큰술, 쌀 식초 3큰술, 머스코바도 설탕 2큰술, 다시마다시 1큰술1. 모시조개는 씻어 해감용 소금물에 담가 은박지 덮어 30분 이상 둔다. 해감 후 다시 씻는다.2. 냄비에 해감한 모시조개와 청주, 소금을 약간 넣고 입이 열릴 때까지 찐다. 다 익으면 식혀 조갯살만 분리한다.3. 주꾸미는 내장과 입 등을 제거하고 끓는 물에 넣었다가 색이 하얗게 변하면 건져낸다. 바로 얼음물에 식혀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4. 끓는 물에 소금 1작은술을 넣고 풋콩을 2분간 데친 후 차가운 물에 담가둔다. 같은 냄비에 손질한 두릅을 넣어 1분간 데치고 건져내 그대로 식힌다.5. 방울토마토는 꼭지를 떼고 세로로 반 자른다.6. 초피 열매는 잘게 다져서 볼에 넣고 나머지 초피 스미소 재료와 섞는다.7. 6의 초피 스미소에 조갯살, 주꾸미, 풋콩, 두릅, 방울토마토를 넣어 버무린 후 그릇에 담는다.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해외여행에 나설 때 면세점에서 여행의 설렘을 느낄 ‘가심비’ 쇼핑 아이템은 뭘까. 화장품 아닐까. 신세계면세점이 다양한 뷰티 브랜드와 제품을 갖춰 ‘코덕’(코스메틱 덕후)들을 유혹한다. 신세계면세점은 샤넬, 디올, 에스티로더, 시슬리, 설화수 등 글로벌 명품 브랜드부터 탬버린즈, 논픽션, 메디큐브 등 감각적인 K-인디 브랜드까지 거의 모든 카테고리에 걸쳐 800여 개의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던 브랜드를 다양하게 갖췄으며 단순한 쇼핑을 넘어 시향 서비스와 뷰티 클래스 등 오감으로 즐길 수 있는 체험형 콘텐츠를 강화하고 있다. 특히 500개 이상 브랜드가 입점한 신세계면세점 명동점은 국내외 코스메틱 덕후들의 필수 방문지로 자리 잡았다. 샤넬, 에스티로더, SKⅡ, 설화수를 비롯해 향기에 민감한 ‘코덕’들을 위해 딥디크, 조말론, 르라보, 크리드, 아쿠아디파르마, 킬리안, 메종프란시스 커정 등 다양한 럭셔리 향수 브랜드를 구비했다.주력 제품인 수분크림을 필두로 중국 왕홍들의 입소문을 타고 있는 헤스킨, 아마존에서 선크림 신드롬을 일으킨 조선미녀 등 K-뷰티를 대표하는 인기 브랜드들이 업계 단독으로 오프라인 매장을 운영하며 브랜드 경험을 극대화한다.친환경·비건 뷰티 브랜드들도 눈에 띈다. 비건 립 틴트와 생기 넘치는 치크 컬러로 트렌디한 메이크업을 제안하는 어뮤즈, 촉촉한 히알루론산 라인으로 수분과 진정을 내세우는 토리든, 웰더마, 쥬스투클렌즈, 하우스오브비, 원씽 등의 브랜드가 관심을 끈다. 한편 인천공항 2터미널 신세계존의 뷰티 매장은 기초 화장품부터 메이크업·향수 제품까지 구역을 나눠 개인의 취향에 맞는 제품을 찾을 수 있다. 프라다 뷰티는 국내 면세점 최초로 입점해 향수와 립스틱 등 인기 제품 등을 선보이고 있다. 또 푸에기아 1833(Fueguia 1833)은 아시아태평양(APAC) 최초 면세점 입점 브랜드로, 400병 한정 생산되는 점과 고유번호를 부여한 프리미엄 향수로 소장 가치가 높다는 설명이다.아트 브랜딩 전략도 돋보인다. 명동점에서는 유명 아티스트와 협업한 전시를 지속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자체 캐릭터 ‘폴앤바니(Paul & Bani)’를 활용한 향수를 선보여 고객들에게 시각적 즐거움을 동시에 선사해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강화하고 있다. 또 해외여행객을 위한 ‘스페셜 오더 서비스’는 출국 3시간 전까지 주문이 가능하다. 바쁜 출국 일정 속에서도 본인에게 맞는 제품을 직접 테스트해 보고, 제품을 비교해볼 수 있다.신세계면세점은 신진 브랜드를 발굴하고 육성하며 K-뷰티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다. 감각적인 패키지와 독창적인 향으로 주목받는 ‘탬버린즈’, 프리미엄 스킨케어로 해외 유명 셀럽들도 사용하는 ‘듀이셀’, 미국 유명 여성래퍼 카디비가 자신의 소셜 미디어인 틱톡을 통해 머드팩 효과를 극찬한 ‘비알머드’ 등의 브랜드들이 신세계면세점에서 첫 매장을 오픈하며 글로벌 소비자들에게 브랜드 가치를 널리 알리고 있다.신세계면세점 관계자는 “신세계면세점은 프리미엄 뷰티 브랜드 유치와 차별화된 고객 경험으로 면세점 뷰티 시장의 새로운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글로벌 소비자들의 다양한 니즈에 부합하는 혁신적인 쇼핑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뷰티 카테고리의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요리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히데코 선생님’은 유명하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집에서 2008년부터 이어지고 있는 나카가와 히데코(中川秀子) 씨의 요리 수업은 지금까지 4500명 이상이 수강했다. 일본 도쿄 제국호텔의 프랑스 음식 주방장을 지낸 나카가와 다모츠(中川保) 씨를 아버지로 둔 ‘셰프의 딸’로, 국내에 일본 가정식 요리를 전파한 대표적 인물이다.그가 올해 초 자신의 18번째 책 ‘히데코의 일본요리’를 펴냈다. 남편 박병진 씨가 차린 ‘북스레브쿠헨’이라는 1인 출판사를 통해서다. 박 씨도 같은 시기 ‘위스키, 스틸 영’이라는 위스키 인문학책을 냈다. 부부는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일로 삼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귀화 일본인인 아내 히데코 씨는 일본 대학에서 독일어를 전공했지만 어려서부터 맛보고 자란 일본요리를 가르친다. IBM과 SAP 등 국내외 기업에서 30여 년간 일했던 남편 박 씨는 20여 년 전 좋아하는 위스키를 인생 후반기 아이템으로 준비해 지금은 위스키 전문가로 활약 중이다.17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부부는 “둘 다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것을 인생의 최우선 가치로 생각한다”며 “사람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배우고 동시에 우리의 선한 영향력도 건네고 싶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아내의 말―둘은 어떻게 만나 결혼했나.“1994년 한국에 어학을 배우러 왔다가 아르바이트로 남편이 다녔던 IBM의 거래처인 새한그룹에서 일본어 강사를 하던 중 새한 과장님의 소개로 만났다. 1년쯤 사귀다가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남편이 일본으로 와 청혼을 해서 1998년 결혼했다.”―‘히데코의 일본요리’를 펴낸 이유는.“독자들이 일본 식문화를 더 자세히 알고 집에서 쉽게 요리할 수 있으면 한다. 그래서 특이한 일본요리보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음식들을 많이 소개했다.”―히데코의 일본요리의 특징은.“일본요리 전문학교를 나오지는 않았지만 일본에서 태어나 이유식부터 엄마와 할머니의 일본요리 맛을 체험해 혀와 기억 속에서 일본요리의 맛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한국에 오래 살면서 여기서 구하는 재료로 그 맛을 재현한 게 히데코의 일본요리다.”―식자재를 구하는 곳은 어디인가.“서울 연희동 ‘사러가’, 노량진시장, 마장동 시장, 가락시장의 단골 판매자들로부터 구한다. 어부와 농부 등 생산자들로부터 직접 사기도 한다. 수업 때 쓰는 빵과 후식 재료도 전문가들로부터 산다. 모두 만들고 가르치기보다 저보다 잘하는 사람의 식자재를 사용해 더 맛있는 요리를 만들려고 한다.”―이제 곧 3월인데 추천하고 싶은 레시피는.“봄의 향기와 공기를 느끼게 되면 바다에서 나오는 것들이 맛있어진다. 조개 주꾸미 스미소무침을 추천한다.”●남편의 말―30여 년간 직장생활을 하다가 어떻게 위스키 전문가가 됐나.“첫 직장인 IBM에 다닐 때부터 와인과 위스키를 좋아했는데 무의미하게 사업목적으로만 술을 마시는데 회의가 들었다. 100세 시대 두 번째 인생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20년 전부터 위스키 공부를 했다. 매년 열흘 이상씩 전 세계 위스키 증류소도 다녔다. 위스키 칼럼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동아일보 최고위과정 광화문살롱에서 강의도 한다.”―‘n잡러’의 일상은 어떤가.“오전 6시 기상해 7시부터는 칼럼이나 책의 원고를 쓴다. 9시부터는 출판사 대표로서 각 서점의 주문을 처리하고 출고지시를 한다. 오후에는 외부미팅을 하면서 히데코 요리교실의 허드렛일 담당 집사로서 각종 수강등록과 정산 등 행정 업무처리를 한다. 거의 연예인 수준인 히데코의 일정관리 및 외부활동의 매니지먼트 역할도 병행한다. 장보기와 물건나르기 등 요리교실 보조로서도 활동한다.”―‘위스키, 스틸 영’에 나온 곳들은 아내와 함께 여행했나.“대부분 같이 여행했지만, 스코틀랜드의 오지라서 두 번은 가고 싶지 않던 곳들은 혼자 가기도 했다.”―위스키의 매력은.“와인처럼 까다롭지 않게 구입하고, 보관하고, 마시는 술이다. 상하지 않으니 한 번에 다 마실 필요도 없다. 집에 따 둔100여 병 중 그날그날 어떤 위스키 조합으로 마실지 즐거운 고민을 하게 된다.”―일본요리와 위스키의 궁합은.“위스키는 요리 없이도 마실 수 있지만 그래도 일본요리는 비교적 위스키에 잘 어울리는 편이다. 일반적으로 피트향이 나는 위스키가 해산물에 어울린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플로럴한 스페이사이드 위스키가 어울린다. 피트가 없는 위스키가 오히려 사시미나 산뜻한 식초가 들어가는 해산물의 맛을 더 풍부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튀김 음식은 하이볼이나 온더락스에 매우 잘 어울린다.”―추천하고 싶은 단골 위스키 바는.“연희동의 터줏대감으로 자리잡아가는 ‘코블러’를 추천한다. 오너 바텐더와 시니어, 주니어 바텐더들이 모두 칵테일과 위스키에 관한 전문 지식을 갖추고 고객과의 소통에도 열심이다. 무엇보다 가정집을 개조한 바여서 연희동 특유의 감성을 느낄수 있다.” ―아내와 시간을 많이 보내나.“바쁜 가운데서도 대부분의 저녁 혹은 위스키 한잔의 시간은 아내와 가지는 편이다. 즐거운 인생을 함께 헤쳐나가는 동반자로서 서로 조언해주기도 한다. 물론 둘 다 조언을 잘 듣는 편은 아니다. 그저 서로 말하는 데 의의가 있는 편이고 자주 싸우기도 한다(웃음).”〈조개 주꾸미 스미소 무침 〉- 4인용 재료: 모시조개 800g, 해감용 소금물(물1L+소금 2큰술), 청주 100mL, 주꾸미 4마리(100g), 풋콩 1컵, 두릅 또는 아스파라거스 6개, 방울토마토 8개, 소금 적당량- 초피 스미소 양념: 초피 열매 1큰술, 미소 4큰술, 쌀 식초 3큰술, 머스코바도 설탕 2큰술, 다시마다시 1큰술1. 모시조개는 씻어 해감용 소금물에 담가 은박지 덮어 30분 이상 둔다. 해감 후 다시 씻는다.2. 냄비에 해감한 모시조개와 청주, 소금을 약간 넣고 입이 열릴 때까지 찐다. 다 익으면 식혀 조갯살만 분리한다.3. 주꾸미는 내장과 입 등을 제거하고 끓는 물에 넣었다가 색이 하얗게 변하면 건져낸다. 바로 얼음물에 식혀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4. 끓는 물에 소금 1작은술을 넣고 풋콩을 2분간 데친 후 차가운 물에 담가둔다. 같은 냄비에 손질한 두릅을 넣어 1분간 데치고 건져내 그대로 식힌다.5. 방울토마토는 꼭지를 떼고 세로로 반 자른다.6. 초피 열매는 잘게 다져서 볼에 넣고 나머지 초피 스미소 재료와 섞는다.7. 6의 초피 스미소에 조갯살, 주꾸미, 풋콩, 두릅, 방울토마토를 넣어 버무린 후 그릇에 담는다.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논개의 위패를 모신 진주성 의기사(義妓祠) 마당에 대숲이 일렁였다. 평양 부벽루, 경남 밀양 영남루와 함께 국내 3대 누각으로 꼽히는 경남 진주 촉석루 바로 뒤 사당이 의기사다. 임진왜란 중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질 때 논개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성 맞은편 남강 변 대숲은 낮에는 겨울 햇살, 밤에는 희고 둥근 달 모양의 조명을 받아 일렁였다. 그 길의 이름은 남가람별빛길이라고 했다. 진주에 다녀온 후 마음속에 내내 대숲이 일렁인다.》● 문화가 있어 빛나는 밤 풍경 혹자는 진주의 야경이 체코 프라하보다 예쁘다고 했다. 확실한 것은 진주 사람들에게 심장 같은 존재인 진주성 성곽이 낮보다 밤에 또렷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진주의 밤을 비추는 조명은 노랑도 주황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의 빛이어서 오묘하게 깊은 맛이었다. ‘이래서 진주 사람들이 진주성 야경을 꼭 보라고 했구나.’ 세계적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를 사사(師事)한 고 김중업 건축가(1922∼1988)가 남긴 경남문화예술회관의 기둥은 전통 건축의 공포(工包)를 형상화해 유독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풍겼다.진주성 안에는 고 김수근 건축가(1931∼1986)가 지은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이 있다. 지난해 7월에는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한 진주대첩역사공원 내 진주성 호국마루도 문을 열었다.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된 계단식 지붕 건물에 대해 지역에서 흉물 논란이 일었고, 승 건축가는 “세월이 지나면 많은 사람의 선의가 덧대어져 건축이 아닌 장소로 변할 것”이라고 맞섰다. 일전에 다른 상황에서 세계적 예술가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논란이 없다면 예술이 아니다.” 아픈 역사만큼 자긍심을 품은 이 문화 도시에 필요했던 건축은 무엇이었을까. 밤의 광장을 걸으며 생각해 본다. 밤의 진주를 느낄 수 있는 명소가 또 있다. 소망진산 유등(流燈)공원이다. 진주성에 오르면 정작 진주성을 바라볼 수 없지만, 이 공원에서는 남강과 진주성, 저 멀리 지리산 천왕봉도 조망할 수 있다. 유등은 진주를 상징하는 빛이다. 매년 10월 열리는 진주남강유등축제는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 당시 왜군이 강을 건너는 것을 막고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기 위해 남강에 유등을 띄운 데서 유래했다. 공원 아래 진주남강유등전시관은 그 애틋한 마음을 담은 유등을 연중 볼 수 있는 복합 문화 공간이다. 박선기 작가의 ‘물 위를 걷다’ 작품은 700여 개 아크릴 조각이 바닥에 빛의 그림자를 일렁일렁 드리운다.● 불탔던 산에 돌을 쌓은 정원 달의 어금니. 월아산(月牙山)은 이름부터 참 곱다. 국사봉과 장군대봉, 어금니 모양을 이루는 두 산봉우리 사이로 달이 떠오른다고 지어진 이름인데 정말로 그 위치로 달이 뜬다. 월아산은 1995년 대형 산불로 산림 30만㏊가 잿더미가 됐던 아픔이 있다. 진주시와 주민들이 힘을 모아 정비해 푸른 숲의 제모습을 찾았다. 월아산의 반전은 계속됐다. 2018년 목재문화체험장을 시작으로 2021년 ‘숲속 어린이 도서관’, 2022년에는 자연휴양림과 산림 레포츠 시설을 확충해 ‘월아산 숲속의 진주’라는 복합 산림 휴양 시설을 갖췄다. 공사 중 나온 월아산 돌들을 시민들과 쌓아 산석(山石) 정원을 만든 사연이 감동이다. 월아산은 애추(崖錐) 지형으로 불리는 암석 퇴적 지형으로 돌들이 곳곳에 있어 이용객 이동에 제약이 많고 산림 휴양 시설 조성에도 애를 먹었다. 진주시는 이 돌들을 애써 들어내지 않고 정원 조성에 활용하는 역발상을 했다. 코로나19 기간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시민들이 공공 일자리를 얻어 돌을 쌓았다. 온기와 정성이 스며든 돌들을 쓰다듬다가 돌 사이에 핀 진주바위솔을 만나니 반가웠다. 진주바위솔은 지리산과 진주 일대 암석에서 볼 수 있는 우리 자생식물이다.월아산 숲속의 진주에는 작가정원들이 있다. 지방자치단체가 정원을 조성하면서 너도나도 작가정원을 만드는 게 굳이 필요한가 의문을 가져 왔다. 그런데 이곳 작가정원들은 지역의 역사와 지형을 성실하게 읽어내고 욕심을 덜어낸 게 빛난다. 오픈니스스튜디오가 작업한 정원 ‘청림월연(靑林月淵)’은 바람이 이는 대숲을 거닐며 정원에 앉아 달을 바라보는 선비의 맑은 마음을 담았다. 단정한 정자에 앉으면 월아산에 원래부터 있던 대숲이 시야에 펼쳐진다. 그 숲이 일렁이며 마음의 때를 씻는다.● 과거를 기억하며 나아가는 도시 진주는 공원의 도시였다. 정원 향기를 품는 공원들의 도시…. 17년간 생활 쓰레기를 야적하던 곳이 도시 재생을 통해 거듭난 초전공원은 생태연못과 메타세쿼이아 숲길이 있는 생태공원이다. 6월 대한민국 정원 산업박람회가 이곳에서 열린다.진주역이 이전한 후 남아 있던 철도 시설과 터를 활용해 조성한 철도문화공원에서는 반려견을 데리고 나와 느긋하게 산책하는 사람들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공원에 있는 옛날 열차 안에 들어가 보고, 옛 진주역 차량정비고에서 진주 인물들을 소개하는 문화 전시를 보고, 후피향나무와 맹꽁이 생태공원을 본 뒤 햇볕 잘 드는 ‘메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모든 게 좋았다. 카페에 걸려 있는 기다란 금발의 메텔 캐릭터 그림을 보니 어린 시절 TV에서 방영되던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가 절로 떠올랐다. 진주 ‘노을 맛집’은 진주 서쪽 진양호 공원이다. 아천북카페에서 양마산 둘레길까지 이어진 1.8km의 ‘노을전망 데크로드’가 사랑받는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진주 동쪽에서 노을을 봤다. 지수면 승산리에 있는 지수승산부자마을에 갔다가 관란정(觀瀾亭)에 오른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 700명을 모아 진주성 1차 전투에서 공을 세운 관란 허국주 선생이 은거했던 정자다. 남강으로 저물기 직전 겨울 해가 비추는 관란정 풍경은 마치 황금색 필터를 끼운 듯 따뜻한 색감이었다. 지수승산부자마을은 국내 대표 기업 창업주들이 나고 자라면서 교류한 동네다. LG그룹 공동 창업주이자 GS그룹 창업주인 효주 허만정 본가, LG그룹 공동 창업주인 연암 구인회 생가, 삼성그룹 이병철 창업주의 둘째 누나 이분시 여사가 살던 집 등이 모여 있다. 고즈넉한 한옥마을을 걸으니 어린 시절 창업주들이 돌담길 너머에서 뛰어나올 것 같았다. 이 창업주들이 다녔던 지수초등학교는 리모델링을 마치고 2022년부터 진주 K-기업가정신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운동장에는 이들이 함께 심고 가꿨다는 ‘부자 소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이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 부자가 된다는데, 창업가들의 도전 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것만으로 ‘마음 부자’가 된 듯했다. 허만정 창업주의 호를 따서 조성한 공원인 효주원에 향기 좋은 은목서 꽃이 필 때 꼭 다시 와서 걷고 싶다. 진주가 이토록 우아한 곳인지 이제야 알았다.진주의 맛◇하연옥 해물 육수를 쓰는 진주냉면의 성지. 마른 명태 머리와 건새우 등으로 맛을 낸 육수에 메밀면을 담고, 채 썬 육전과 지단 실고추 오이 등을 고명으로 얹는다. 바다와 육지 맛이 입안에서 어우러진다.◇월산닭무국 진주 로컬 맛집. 소고기가 귀하던 시절 소고기 대신 늙은 닭과 무를 넣고 푹 끓여낸 것이 시작이었다고 한다. 시원하고 구수한 국물 맛이 하이라이트. 몸속뿐 아니라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진주식 영혼의 수프’라고 할 수 있겠다.글·사진 진주=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논개의 위패를 모신 진주성 의기사(義妓祠) 마당에 대숲이 일렁였다. 평양 부벽루, 경남 밀양 영남루와 함께 국내 3대 누각으로 꼽히는 경남 진주 촉석루 바로 뒤 사당이 의기사다. 임진왜란 중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질 때 논개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성 맞은편 남강 변 대숲은 낮에는 겨울 햇살, 밤에는 희고 둥근 달 모양의 조명을 받아 일렁였다. 그 길의 이름은 남가람별빛길이라고 했다. 진주에 다녀온 후 마음속에 내내 대숲이 일렁인다.● 문화가 있어 빛나는 밤 풍경혹자는 진주의 야경이 체코 프라하보다 예쁘다고 했다. 확실한 것은 진주 사람들에게 심장 같은 존재인 진주성 성곽이 낮보다 밤에 또렷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진주의 밤을 비추는 조명은 노랑도 주황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의 빛이어서 오묘하게 깊은 맛이었다. ‘이래서 진주 사람들이 진주성 야경을 꼭 보라고 했구나.’ 세계적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를 사사(師事)한 고 김중업 건축가(1922~1988)가 남긴 경남문화예술회관의 기둥은 전통 건축의 공포(工包)를 형상화해 유독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풍겼다.진주성 안에는 고 김수근 건축가(1931~1986)가 지은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이 있다. 지난해 7월에는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한 진주대첩역사공원 내 진주성 호국마루도 문을 열었다.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된 계단식 지붕 건물에 대해 지역에서 흉물 논란이 일었고, 승 건축가는 “세월이 지나면 많은 사람의 선의가 덧대어져 건축이 아닌 장소로 변할 것”이라고 맞섰다. 일전에 다른 상황에서 세계적 예술가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논란이 없다면 예술이 아니다.” 아픈 역사만큼 자긍심을 품은 이 문화 도시에 필요했던 건축은 무엇이었을까. 밤의 광장을 걸으며 생각해 본다.밤의 진주를 느낄 수 있는 명소가 또 있다. 소망진산 유등(流燈)공원이다. 진주성에 오르면 정작 진주성을 바라볼 수 없지만, 이 공원에서는 남강과 진주성, 저 멀리 지리산 천왕봉도 조망할 수 있다. 유등은 진주를 상징하는 빛이다. 매년 10월 열리는 진주남강유등축제는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 당시 왜군이 강을 건너는 것을 막고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기 위해 남강에 유등을 띄운 데서 유래했다. 공원 아래 진주남강유등전시관은 그 애틋한 마음을 담은 유등을 연중 볼 수 있는 복합 문화 공간이다. 박선기 작가의 ‘물 위를 걷다’ 작품은 700여 개 아크릴 조각이 바닥에 빛의 그림자를 일렁일렁 드리운다.● 불탔던 산에 돌을 쌓은 정원달의 어금니. 월아산(月牙山)은 이름부터 참 곱다. 국사봉과 장군대봉, 어금니 모양을 이루는 두 산봉우리 사이로 달이 떠오른다고 지어진 이름인데 정말로 그 위치로 달이 뜬다. 월아산은 1995년 대형 산불로 산림 30만㏊가 잿더미가 됐던 아픔이 있다. 진주시와 주민들이 힘을 모아 정비해 푸른 숲의 제모습을 찾았다.월아산의 반전은 계속됐다. 2018년 목재문화체험장을 시작으로 2021년 ‘숲속 어린이 도서관’, 2022년에는 자연휴양림과 산림 레포츠 시설을 확충해 ‘월아산 숲속의 진주’라는 복합 산림 휴양 시설을 갖췄다. 공사 중 나온 월아산 돌들을 시민들과 쌓아 산석(山石) 정원을 만든 사연이 감동이다. 월아산은 애추(崖錐) 지형으로 불리는 암석 퇴적 지형으로 돌들이 곳곳에 있어 이용객 이동에 제약이 많고 산림 휴양 시설 조성에도 애를 먹었다. 진주시는 이 돌들을 애써 들어내지 않고 정원 조성에 활용하는 역발상을 했다. 코로나19 기간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시민들이 공공 일자리를 얻어 돌을 쌓았다. 온기와 정성이 스며든 돌들을 쓰다듬다가 돌 사이에 핀 진주바위솔을 만나니 반가웠다. 진주바위솔은 지리산과 진주 일대 암석에서 볼 수 있는 우리 자생식물이다.월아산 숲속의 진주에는 작가정원들이 있다. 지방자치단체가 정원을 조성하면서 너도나도 작가정원을 만드는 게 굳이 필요한가 의문을 가져 왔다. 그런데 이곳 작가정원들은 지역의 역사와 지형을 성실하게 읽어내고 욕심을 덜어낸 게 빛난다. 오픈니스스튜디오가 작업한 정원 ‘청림월연(靑林月淵)’은 바람이 이는 대숲을 거닐며 정원에 앉아 달을 바라보는 선비의 맑은 마음을 담았다. 단정한 정자에 앉으면 월아산에 원래부터 있던 대숲이 시야에 펼쳐진다. 그 숲이 일렁이며 마음의 때를 씻는다.● 과거를 기억하며 나아가는 도시진주는 공원의 도시였다. 정원 향기를 품는 공원들의 도시…. 17년간 생활 쓰레기를 야적하던 곳이 도시 재생을 통해 거듭난 초전공원은 생태연못과 메타세쿼이아 숲길이 있는 생태공원이다. 6월 대한민국정원산업박람회가 이곳에서 열린다.진주역이 이전한 후 남아 있던 철도 시설과 터를 활용해 조성한 철도문화공원에서는 반려견을 데리고 나와 느긋하게 산책하는 사람들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공원에 있는 옛날 열차 안에 들어가 보고, 옛 진주역 차량정비고에서 진주 인물들을 소개하는 문화 전시를 보고, 후피향나무와 맹꽁이 생태공원을 본 뒤 햇볕 잘 드는 ‘메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모든 게 좋았다. 카페에 걸려 있는 기다란 금발의 메텔 캐릭터 그림을 보니 어린 시절 TV에서 방영되던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가 절로 떠올랐다.진주 ‘노을 맛집’은 진주 서쪽 진양호 공원이다. 아천북카페에서 양마산 둘레길까지 이어진 1.8km의 ‘노을전망 데크로드’가 사랑받는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진주 동쪽에서 노을을 봤다. 지수면 승산리에 있는 지수승산부자마을에 갔다가 관란정(觀瀾亭)에 오른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 700명을 모아 진주성 1차 전투에서 공을 세운 관란 허국주 선생이 은거했던 정자다. 남강으로 저물기 직전 겨울 해가 비추는 관란정 풍경은 마치 황금색 필터를 끼운 듯 따뜻한 색감이었다.지수승산부자마을은 국내 대표 기업 창업주들이 나고 자라면서 교류한 동네다. LG그룹 공동 창업주이자 GS그룹 창업주인 효주 허만정 본가, LG그룹 공동 창업주인 연암 구인회 생가, 삼성그룹 이병철 창업주의 둘째 누나 이분시 여사가 살던 집 등이 모여 있다. 고즈넉한 한옥마을을 걸으니 어린 시절 창업주들이 돌담길 너머에서 뛰어나올 것 같았다.이 창업주들이 다녔던 지수초등학교는 리모델링을 마치고 2022년부터 ‘진주 K-기업가정신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운동장에는 이들이 함께 심고 가꿨다는 ‘부자 소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이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 부자가 된다는데, 창업가들의 도전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것만으로 ‘마음 부자’가 된 듯했다. 허만정 창업주의 호를 따서 조성한 공원인 효주원에 향기 좋은 은목서 꽃이 필 때 꼭 다시 와서 걷고 싶다. 진주가 이토록 우아한 곳인지 이제야 알았다.<진주의 맛>◇하연옥해물 육수를 쓰는 진주냉면의 성지. 마른 명태 머리와 건새우 등으로 맛을 낸 육수에 메밀면을 담고, 채 썬 육전과 지단 실고추 오이 등을 고명으로 얹는다. 바다와 육지 맛이 입안에서 어우러진다.◇월산닭무국진주 로컬 맛집. 소고기가 귀하던 시절 소고기 대신 늙은 닭과 무를 넣고 푹 끓여낸 것이 시작이었다고 한다. 시원하고 구수한 국물 맛이 하이라이트. 몸속뿐 아니라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진주식 영혼의 수프’라고 할 수 있겠다.진주=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산림청이 정원문화와 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2020년부터 매년 지방자치단체를 선정해 진행하는 대한민국 정원산업박람회가 올해는 경남 진주시에서 열린다. 6월 13일부터 22일까지 진주시 초전공원에서 열리는 ‘2025 대한민국 정원산업박람회’다. 박람회의 주제는 ‘정원과 함께하는 삶: 생활 속 실용정원’이다. 4일 진주시청에서 만난 조규일 진주시장(사진)은 이번 대한민국 정원산업박람회 개최의 의미에 대해 “2010년 전국체전 개최 이후 15년 만에 진주시에서 국가 주관 행사를 열게 됐다”며 “누구나 옥상과 주말농장 등 생활 속에서 쉽게 정원을 가꿀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지역 내 잠재된 정원산업의 역량을 끌어내겠다”고 말했다. 왜 ‘정원과 함께하는 삶: 생활 속 실용정원’일까. 조 시장은 “정원 만들기는 대개 생활 주변의 텃밭 가꾸기로부터 비롯되는데 요즘은 옛날과 달리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실정”이라며 “아파트 거실과 베란다와 같은 실내정원을 가꾸고 주민들이 공동체 일원으로 마을 정원을 함께 만드는 것이 현실적인 ‘정원 속의 삶’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번 박람회는 진주시 초전공원에서 열린다. 과거 17년 동안 쓰레기 야적장으로 사용되다가 2010년 전국체전이 열린 후 생태공원으로 탈바꿈한 장소다. 조 시장은 “교통 접근성과 주차 여건이 우수하고 진주시 농산물도매시장에 인접해 정원과 농업의 만남이 가능하다”며 “박람회 이후에는 행정복합 신도시의 정원문화 타운이 되는 계기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진주시는 2023년과 2024년 복합산림복지시설인 ‘월아산 숲속의 진주’에서 월아산 정원박람회를 열었다. 1995년 대형 산불로 황폐해졌던 진주 월아산은 진주시와 지역민의 노력으로 푸른 숲을 되찾았다. 늘어나는 산림복지 수요에 발맞춰 2018년 월아산에 ‘목재문화체험장’을 운영한 것을 시작으로 2021년 ‘숲속 어린이 도서관’, 2022년에는 자연휴양림과 산림레포츠 시설을 확충했다. 특히 시설 확충 과정에서 나온 월아산 돌들을 시민들과 쌓아 만든 산석정원이 독자적 풍광을 이뤘다. 시설 개장 6년 만에 누적 방문객 100만 명을 돌파했으며 지난해에는 35만 명이 다녀갔다. 조 시장은 “사람도 살다 보면 쓰러질 때도 일어설 때도 있듯 월아산이 화재의 잿더미에서 다시 태어나 생명의 소중함을 전한다”며 “이번 박람회가 열리는 6월에 월아산의 수국이 특히 아름다울 것”이라고 했다. 조 시장은 “진주는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도시여서 그 가치를 재조명하고 활용해 미래 세대에 자긍심을 심어주는 게 우리 모두의 몫”이라며 “이번 박람회가 삶 속에서 정원의 의미를 고찰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진주=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