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임수

정임수 부장

동아일보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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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정임수 부장입니다.

imsoo@donga.com

취재분야

2026-05-08~2026-06-07
칼럼100%
  • [오늘과 내일/정임수]‘국민 재테크’에서 ‘국민 재앙’ 된 ELS

    안타깝게도, 혹시나 했던 수익률 반전은 없었다. 새해 들어 만기가 돌아온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에서 대규모 원금 손실이 현실화하고 있다. 2주 동안 5대 은행에서 발생한 손실액은 2300억 원에 육박한다. 평균 수익률 ―52.7%로 투자금 절반 이상을 날렸다는 얘기다. 올 상반기에만 10조2000억 원어치의 홍콩H지수 ELS 만기가 닥치는데, 지금 추세라면 원금 손실액은 6조 원을 넘어설 것으로 우려된다. 사정없이 터지는 손실 폭탄에 투자자들은 패닉에 빠졌다. ELS는 통상 3년인 만기 때까지 기초자산으로 삼는 주가지수나 특정 종목 주가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지 않으면 약정한 수익을 보장하는 일종의 파생상품이다. 2003년 처음 선을 보인 뒤 은행 예금 금리보다 2∼3배 높은 수익률을 내걸면서 저금리 시대 ‘국민 재테크’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기초자산 가격이 일정 수준 아래로 내려가면 100% 손실도 각오해야 한다. 손실 확률이 비교적 낮지만 한번 깨지면 크게 깨지는 초고위험 상품인데도, 한국에선 ‘중위험 중수익’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으로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지금 문제가 되는 홍콩H지수 ELS도 약정 수익률을 받으려면 지수가 3년 전 가입 때보다 65% 이상은 돼야 한다. 65% 밑으로 떨어지면 하락 폭만큼 원금 손실이 발생한다. 2021년 상반기 10,000∼12,000대를 오르내리던 홍콩H지수는 현재 반 토막도 안 되는 5,000 문턱까지 주저앉았다. 중국 부동산 경기 침체와 소비 부진 여파로 올 들어 하락세는 더 가파르다. ELS 손실률이 60%를 넘어서는 건 시간 문제다. 눈덩이 손실이 본격화되자 투자자들은 집단행동에 나섰다. ELS 가입자 모임은 19일 금융감독원 앞에서 집회를 열고 “원금 손실 가능성에 대해 설명 듣지 못했다”며 “불완전판매로 인한 피해를 보상하라”고 요구했다. 은행 직원들이 “중국이 망하지 않는 한 손실 날 일이 없다” “금리가 훨씬 높고 안전하다”며 가입을 권했다는 게 투자자들의 주장이다. 금융소비자보호법 시행으로 불완전판매 요소를 점검하는 이중삼중 장치가 생겼지만 65세 이상 고령층의 ELS 투자액이 전체 개인 투자액의 30%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금융사들이 이를 요식적으로 지켰을 가능성이 높다. ELS 가입에 필요한 투자성향서 작성이나 서명을 은행 직원이 대신했다는 증언도 나온다. 금감원이 앞서 벌인 사전 점검에선 일부 은행이 직원 인사 평가에서 ELS 판매 실적을 높은 비중으로 반영해 사실상 판매를 부추겼다는 정황이 확인됐다. ELS 판매 한도를 임의로 늘린 사실도 드러났다. ELS발 대형 손실 위기는 처음이 아니다. 2008년, 2015년, 2020년 등 수차례 원금 손실 공포를 안겼는데도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건 모럴해저드에 빠진 금융회사 못지않게 금융당국의 책임도 작지 않다. 문제가 불거지고 나서야 대응에 나서는 감독당국의 뒷북 행태는 그대로다. 2019년 해외금리연계 파생결합펀드(DLF) 손실 사태 이후 금융당국은 개별 종목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ELS 판매를 금지하면서도 H지수를 포함한 지수형 ELS 판매는 허용했다. 은행들이 홍콩H지수 ELS를 판매하도록 판을 깔아준 셈이다. 이번 기회에 은행의 고위험 투자 상품 판매가 적합한지 따져 봐야 한다. 감독당국이 ELS 판매 은행과 증권사에 대한 현장 검사에 착수한 만큼 철저하게 진상을 밝혀 금융사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일반적 투자 실패와 불완전판매로 인한 피해를 명확히 가려내는 작업도 필요하다. ELS 같은 고위험 상품에 여러 차례 투자해 수익을 챙겨놓고 손실이 날 때에만 판매사에 책임을 돌리는 이들까지 무작정 보호하는 건 곤란하다. 이번 사태 수습에서도 투자자 보호는 엄격하되, 총선을 앞두고 금융 포퓰리즘에 휘둘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4-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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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요논점/정임수]비트코인 ‘금융 상품화’ 시대 개막… 한국은 준비됐나

    《비트코인 가치가 산출된 최초의 기록은 2010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한 개발자가 비트코인 1만 개를 내고 피자 두 판을 사 먹으면서다. 당시 피자값이 30달러 정도였으니 비트코인 1개당 0.003달러꼴이었다.강산이 한 번 바뀌었을 뿐인데 비트코인은 현재 4만2000달러 선에서 거래되고 있다. 사상 최고가였던 재작년 11월의 6만9000달러 수준에서 30% 넘게 빠졌지만, 개발자는 한 판에 2800억 원짜리 피자를 먹은 셈이다. 비트코인이 세상을 바꿀 신기술이라는 블록체인에 기반했는데도 ‘제2의 튤립 버블’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던 이유다.》한때 ‘투기 광풍’의 중심에 섰던 비트코인이 세계 최대 금융시장인 미국에서 공식 투자 자산으로 인정받아 제도권에 진입했다. 비트코인 현물에 투자하는 상장지수펀드(ETF)가 미국 금융당국의 승인을 받아 11일(현지 시간)부터 뉴욕 증시에서 거래를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비트코인 ETF의 상장도, 투자도 여전히 막혀 있다. 세계 각국이 투자자를 보호하면서도 코인 산업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만큼 한국도 제도 정비를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비트코인 ‘주류 금융’ 진입 이미 뉴욕 증시에는 2021년 10월부터 비트코인 선물(先物) 기반의 ETF가 거래되고 있다. 선물 ETF는 비트코인을 담지 않고 미래 특정 시점에 미리 약정된 가격으로 비트코인을 사고팔 수 있는 선물 계약을 따르는 구조다. 이 때문에 실제 비트코인 가격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컸다. 이와 달리 미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이번에 승인한 현물 ETF는 비트코인을 직접 담고 있어 실질적으로 비트코인을 사는 것과 같다. 그동안 비트코인에 투자하려면 가상자산 거래소에 계좌를 만들고 별도의 코인 지갑에 보관해야 했지만, 이제는 증권거래소에서 비트코인이 포함된 ETF를 주식처럼 쉽게 사고팔 수 있게 된 것이다. 비트코인 현물 ETF는 캐나다, 독일, 호주 등이 먼저 선보였지만 글로벌 금융 중심지인 미국에서 처음 등장한 만큼 무게감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동안 가상자산에 회의적이던 투자자와 초고위험을 우려했던 기관투자가의 자금이 들어오면서 비트코인이 새로운 전환기에 접어들 것이라는 기대가 높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 피델리티 등이 내놓은 11개 비트코인 현물 ETF가 뉴욕 증시에 입성하자마자 이틀간 거래액은 77억 달러(약 10조2000억 원)에 달했다. 헤지펀드, 연기금 등 기관의 비트코인 투자가 일반화되면 올해에만 최대 1000억 달러, 중장기적으로 전 세계 ETF 자금의 3%가량인 3000억 달러가 유입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현물 ETF 상장 이후 비트코인 가격은 올해 상승분을 모두 반납하며 하락하고 있지만 중장기적으로 상승세로 돌아설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들이 쏟아지는 이유다. 여기에다 4월 비트코인 발행량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반감기가 예정된 것도 상승론에 힘을 보태고 있다. 비트코인이 개당 1억 원을 넘어 2억 원까지 오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비트코인은 ‘사토시 나카모토’로 알려진 개발자가 글로벌 금융위기를 불러온 중앙집권적 금융 체계에 맞서겠다며 2009년 내놓은 가상자산 원조이자 상징이다. 그런데 15년 만에 ‘탈중앙화’ 의미는 퇴색되고 제도권 금융이 코인을 흡수하는 역설적 상황이 된 셈이다. ● 실체 논쟁에도 세계 각국 제도권 포용 하지만 가격 널뛰기가 심해 투기적 성격이 강한 비트코인을 제도권 시장에 편입하는 것이 맞느냐는 논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SEC는 그동안 투자자 보호 장치가 미흡하다는 이유로 비트코인 현물 ETF의 상장을 거부해 오다가 미 연방법원이 재심사하라고 판결하면서 승인으로 돌아섰다. 게리 겐슬러 SEC 위원장은 성명에서 “이제 환경이 변했다”면서도 “SEC의 결정은 ETF에 국한된 것이지 비트코인을 승인하거나 보증하는 건 아니다. 투자자들은 가상자산 연계 상품들이 지닌 수많은 위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 2위 자산운용사 뱅가드를 비롯해 메릴린치, 씨티그룹 등이 비트코인 상품 출시에 거리를 두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반면 블랙록의 래리 핑크 최고경영자(CEO)는 “현물 ETF 등장은 비트코인의 합법성, 안정성을 보여준다”며 “비트코인은 ‘디지털 금(金)’으로서 훌륭한 가치저장 수단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범죄, 자금 세탁, 조세 회피에 쓰이니 가상자산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제이미 다이먼 회장의 발언과 상반되게 JP모건은 이번 비트코인 ETF 개발에 뛰어들었다. 이 같은 논쟁에도 가상자산의 제도권 편입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세계 각국도 이에 발맞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지난해 세계 최초로 가상자산에 대한 포괄적인 규제를 담은 가상자산시장법(MiCA)을 통과시켰다. 일본은 최근 은행의 스테이블코인(법정화폐에 연동하도록 설계된 코인) 발행, 가상자산을 통한 스타트업 자금 조달 등을 허용했다. 비트코인 채굴 금지령까지 내렸던 중국도 대체불가토큰(NFT) 거래가 가능한 국영 거래소를 출범시키고, 홍콩을 전면 개방해 글로벌 가상자산 허브로 구축할 계획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11일 기자간담회에서 “비트코인이 확실히 하나의 투자재로 자리 잡은 것 같다”며 “투자자산으로서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고 안정성이 있는지 시험해볼 시기가 됐다”고 말했다. ● 정부, 뒤늦게 “현물 ETF 거래 안 된다” 비트코인 현물 ETF에 대한 현지 반응은 뜨겁지만 한국 투자자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국내 증권사를 통해 해외에 상장된 비트코인 선물 ETF는 사고팔 수 있지만, 현물 ETF는 투자가 불가능하다는 방침을 금융당국이 내렸기 때문이다. 현행 자본시장법상 비트코인 같은 가상자산은 ETF가 담을 수 있는 기초자산에 포함되지 않아 위법 소지가 있다는 게 금융위원회의 판단이다. 정부는 2017년 1차 코인 광풍이 불었을 때 금융회사의 가상자산 보유나 매입, 담보 취득, 지분 투자 등을 전면 금지했는데, 여전히 이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내재 가치를 판단하기 쉽지 않은 가상자산의 태생적 한계나 2030세대가 불나방처럼 코인 투자에 뛰어들어 사회 문제가 됐던 점을 감안하면 금융당국의 신중한 입장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번 비트코인 ETF 대응 과정에서 보여준 혼선에 대해서는 비판이 많다. 미국의 비트코인 현물 ETF 상장은 지난해 중반부터 국내 금융투자 업계의 큰 관심사였는데 금융위는 이달 11일 오후가 돼서야 이와 관련된 유권해석을 내놨다. 또 2년 전부터 캐나다, 호주, 독일 등에서 비트코인 현물 ETF가 상장됐을 때는 손놓고 있다가 미국에서 출시되자 부랴부랴 거래를 막았다. 2년간 해외 비트코인 현물 ETF 상품을 중개해 오던 증권사들은 돌연 거래를 중단했고, 미국발 ETF 거래를 준비하던 증권사도 급하게 전산을 막아야 했다. 오락가락 ‘뒷북 규제’라는 비판이 쏟아지는 이유다. 이 같은 혼선을 두고 자산시장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금융 정책의 난맥상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견해가 적지 않다. 코인 광풍 때에는 못 미치지만 지난해 6월 말 기준 가상코인 시가총액은 28조 원을 넘어서고, 코인 투자자는 600만 명을 웃돈다. 이런데도 가상자산 불공정거래 처벌과 투자자 보호에 초점을 맞춘 초보적 단계의 ‘가산자산 이용자 보호법’은 올 7월에야 본격 시행된다. 가상자산 발행과 유통 규제, 사업자 진입 규제, 산업 육성 등을 포괄하는 2단계 가상자산법은 언제 도입될지 기약이 없다. 지금처럼 가상자산의 법적 지위가 애매모호하면 오히려 돈세탁이나 시세조종에 악용될 소지가 있다. 금융 산업의 새로운 흐름에 도태되지 않으면서 투자자 보호와 금융 건전성을 함께 고려한 인프라 마련에 속도를 내야 한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4-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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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혹시 나도 비행 공포증? [횡설수설/정임수]

    비행기가 활주하는 순간 어떤 이는 설렘과 기대에 부풀지만 어떤 사람은 초조함과 두려움에 휩싸인다. 비행기가 이착륙하거나 난기류를 지날 때 단순한 불안감을 넘어 신체 이상을 초래하는 극심한 불안을 느끼는 게 ‘비행 공포증’이다.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리거나 현기증, 질식감 같은 이상을 느끼고 심하면 기절하거나 심장 발작을 일으키기도 한다. 성인 10명 중 1명이 겪는 흔한 질병이라는데 국내엔 집계된 수치가 없다. 미국에선 2500만 명이 비행 공포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해외 출장이 잦은 사람이 아니라면 1년에 비행기 탈 일이 몇 번 되지 않아 과소평가되지만 비행 공포증은 일상은 물론이고 직업을 위협할 만큼 문제가 되는 병이다.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한 시간 남짓 비행하는 제주도 여행도 망설이게 되고, 심하면 아예 비행기 탑승을 거부한다. 네덜란드 축구의 전설적 공격수 데니스 베르흐캄프는 비행 공포증 때문에 자동차, 배, 기차로 방문 경기를 다녔다. 비행기를 못 타 연봉 협상에서 손해를 보기도 했다. 북한의 김정일이 모스크바를 오갈 때 왕복 24일에 걸쳐 기차를 탄 것도 이 병 때문이라고 한다. ▷비행기 사고는 극히 드물어 걸어 다니는 것보다 안전하다는 말이 있다. 비행기 사고로 사망할 확률은 자동차의 65분의 1, 상업용 비행기 사고로 사망할 확률은 2억 명당 1명꼴이다. 하지만 비행 공포증을 앓는 사람들은 이를 몰라서가 아니라 사고가 나더라도 내가 대처할 수 없다는 통제의 상실에 더 큰 불안을 느낀다. 폐소 공포증이나 고소 공포증, 공황 장애 같은 불안 장애와 얽혀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연초부터 일본 하네다공항의 비행기 충돌 사고에 이어 미국에서도 대형 참사로 이어질 뻔한 사고가 나면서 비행기 타기가 두렵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5일 미국에서 비행 중이던 보잉737 맥스9 항공기 동체에 큰 구멍이 뚫린 사고가 벌어졌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미국 정부는 해당 기종의 운항을 전면 중단시켰다. 맥스 기종은 보잉의 대표적 중·장거리 여객기지만 앞선 맥스8 기종은 두 차례 추락으로 탑승자 전원이 숨지는 비극을 겪었다. 이쯤 되면 비행 공포증이 아닌 ‘보잉 공포증’이 올 판이다. ▷다른 불안 장애와 마찬가지로 비행 공포증도 피하지 않고 약물, 노출 치료 같은 전문 치료를 받는 게 필요하다. 미국, 유럽 항공사들은 오래전부터 공포증을 완화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승객들이 이륙 때 눈을 감고 음악에 맞춰 명상을 하거나 공항에서 개, 토끼 같은 동물을 직접 쓰다듬으며 긴장을 낮추는 식이다. 비행 정보를 입력하면 그동안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사고 가능성을 예측해주는 앱도 개발됐다. 국내엔 아직 이런 움직임이 없어 아쉬울 뿐이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4-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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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정임수]전세난 불씨 될 ‘실거주 의무’ 이대로 둘 건가

    주택시장에서 실수요, 투자, 투기만큼 구분이 모호한 게 없다. 무주택자나 1주택자가 전세를 안고 집을 사면 갭투자로 눈총 받다가도, 나중에라도 들어가 살면 실수요자라는 당당한 호칭을 얻게 된다.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에 나섰던 지난 정부는 실거주 의무를 강화하는 대책들을 쏟아냈다. 2017년 8월 1가구 1주택자의 양도소득세 면제 요건에 ‘2년 실거주’를 부활시켰고, 2020년 6월 재건축 조합원의 ‘2년 실거주’를 도입했다. 이어 2021년 2월엔 분양가상한제 아파트의 실거주 의무를 시행했다. 수도권에서 분양가상한제 아파트를 분양받은 청약 당첨자는 최초 입주일부터 최소 2년 이상 거주하도록 강제한 것이다. ‘로또 분양’을 노린 투기 수요를 막겠다는 취지였다. 목돈이 부족한 서민들이 전세를 놓아 분양 대금을 치르고, 몇 년 뒤 돈을 모아 입주하는 내 집 마련의 사다리를 차버렸다는 지적이 많았지만 당시 정부는 집값을 잡는 게 먼저였다. 팬데믹 이후 집값 하락으로 시장 상황이 달라지자 현 정부는 올 1월 청약 당첨자의 실거주 의무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건설사들은 정부 대책을 앞세운 홍보로 그동안 쌓였던 미분양을 털어냈다. 단군 이래 최대 재건축으로 불리는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의 ‘줍줍’(무순위 청약)엔 4만여 명이 몰렸다. 그만큼 실거주 의무 폐지 등 분양 규제 완화에 수요자들이 목말라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실거주 의무 폐지를 담은 주택법 개정안은 국회에서 폐기될 위기다. 여야 이견으로 정기국회 마지막 법안심사소위에서도 법안은 논의되지 않았다. 정부 발표를 철석같이 믿고 분양받은 사람들은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실거주 의무를 적용받는 수도권 아파트는 지난달 현재 72개 단지, 4만7500여 채다. 이 중 자녀 교육이나 직장 등의 문제로 당장 입주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멘붕’에 빠졌다. 새 집 전세보증금으로 잔금을 치르려던 이들은 자금 조달에 비상이 걸렸다. 이렇다 보니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선 법망을 피할 방법이 공유되고 있다. 실거주 의무를 지키지 않으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 원 이하 벌금형에 처해진다. 의무 기간 내에 이사 나가면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분양가 수준으로 집을 되팔아야 한다. 청약자들 사이에선 입주를 못 해 계약금을 날릴 바에는 세를 주고 벌금을 물겠다는 얘기가 나온다. 분양권을 판 뒤 본인이 세입자로 2년간 살면서 거주 의무를 채우겠다는 이면계약도 거론된다. 이 같은 혼란을 자초한 정부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여소야대 국면에서 야당의 협조가 없으면 법 개정이 힘든 걸 알면서도 섣부른 발표로 혼선을 가중시켰다. 야당은 실거주 의무가 사라지면 갭투자가 성행할 수 있다며 법 개정에 반대하고 있다. 그 대신 조건부로 예외를 허용하는 방안을 시행령에 담고, 애매한 사유에 대해선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를 꾸려 판단하자는 대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예외 규정을 열거하는 방식으로는 제도가 누더기가 돼 시장 혼란을 더 부추길 소지가 적지 않다. 실거주 의무 여부를 가리겠다고 위원회까지 두는 건 행정력 낭비가 아닐 수 없다. 통상 새 아파트 입주를 앞두고 전월세 물량이 쏟아지기 마련이지만 실거주 의무 적용 단지에서는 이런 움직임이 전혀 없다. 가뜩이나 내년 서울 입주 아파트가 올해의 3분의 1로 급감하는 상황에서 실거주 의무에 따른 전월세 공급 경색까지 겹치면 전세시장 불안은 심해질 수밖에 없다. 이미 서울 아파트 전셋값은 29주째 오름세다. 국회는 2020년 재건축 조합원의 실거주 의무로 세입자가 밀려나고 전셋값이 급등하자 1년 만에 백지화한 바 있다. 부작용이 되풀이되기 전에 이번 실거주 의무도 서둘러 손봐야 한다. 양도세 면제 요건처럼 입주 시점부터가 아니라 보유 기간 중 거주 의무를 채우도록 하는 보완책이라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3-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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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임수]한국 소비자 ‘호갱’으로 본 샤넬·에르메스·나이키

    요즘 MZ세대에게 운동화는 그냥 신발이 아니다.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하는 대중문화 아이템이자 투자 방법 중 하나다. 한정판 스니커즈를 산 뒤 웃돈을 붙여 되파는 리셀은 ‘슈테크’(슈즈+재테크)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나이키가 3년 전 명품 브랜드 디올과 협업해 내놓은 운동화는 전 세계 8000명에게만 판매됐는데, 리셀 가격이 판매가의 10배인 3000만 원까지 뛰기도 했다. ▷슈테크보다 앞서 등장한 ‘샤테크’(샤넬+재테크)는 코로나가 한창일 때 백화점 앞에서 밤을 새우는 ‘샤넬 노숙자’와 대신 줄을 서주는 ‘오픈런 아르바이트’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른바 ‘에루샤’(에르메스 루이비통 샤넬)로 불리는 럭셔리 브랜드들이 구매 이력이 있는 고객에게만 제품을 판매하다 보니 명품에 갓 입문한 2030세대는 리셀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정품 구입보다 중고 거래가 낫다는 거였다. 국내 리셀 시장은 지난해 1조 원대로 커졌고 2025년이면 2조8000억 원대로 성장할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자 샤넬, 에르메스를 비롯해 나이키, 아디다스, 뉴발란스 등 운동화 브랜드들이 지난해부터 줄줄이 ‘리셀과의 전쟁’에 나섰다. 재판매 목적으로 상품을 구매하면 판매 제한이나 계약 취소, 회원 자격 박탈 같은 불이익을 주는 조항을 약관에 명시하고 사실상 리셀을 금지한 것이다. 회사 가격 정책을 훼손하는 개인 간 거래를 막고 브랜드 가치를 지키겠다는 의도였지만 소비자들 사이에선 “내 돈 주고 산 물건 내 맘대로 처분도 못 하느냐”는 항의가 쏟아졌다. ▷그동안 한국 소비자를 ‘호갱’(호구+고객)으로 보는 명품 브랜드들의 배짱 장사가 끊이지 않았기에 고객 불만은 더 폭발했다. 명품업체들이 해마다 서너 차례씩 가격을 높이는 건 이제 놀랍지 않은 뉴스다. 애프터서비스를 받을 때도 아침 일찍부터 번호표를 뽑고 줄서야 하고, 수선된 제품을 받기까지 수개월을 기다리는 건 부지기수다. 제품 불량으로 고객이 교환을 요구할 때도 그 사이 가격 인상분을 받는다고 하니 소비자 기만이 도를 넘었다. ▷한국이 1인당 명품 소비 1위 국가에 올랐지만 이에 걸맞은 대접을 못 받고 있는 셈이다. 글로벌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작년에만 168억 달러(약 21조 원)에 달하는 명품을 구입했고, 1인당 구매액(325달러)은 미국 일본 유럽은 물론이고 명품 사랑으로 유명한 중국을 앞질렀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리셀은 구매자 권리”라며 샤넬, 에르메스, 나이키를 대상으로 리셀을 금지한 약관을 고치도록 했다. 하지만 기꺼이 호갱이 되려는 소비자가 사라지지 않는 한 명품·수입 브랜드의 ‘갑질’은 계속될 것 같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3-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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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임수]150년 기술기업 도시바의 쓸쓸한 퇴장

    도시바 하면 한국의 60, 70대는 1970년대 안방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던 미닫이문 흑백TV를 떠올릴 것이다. 영문 알파벳 로고가 선명한 노트북이 기억난다면 그 이후 세대라 할 수 있다. 도시바가 가진 최초 기록들만 열거해도 왜 ‘일본의 자존심’으로 불렸는지 알 만하다. 일본 최초의 냉장고, 세탁기, 컬러TV부터 세계 최초의 노트북PC, 낸드플래시 반도체까지 수많은 1호 제품을 양산했다. ▷150년 역사의 일본 대표 기업 도시바가 다음 달 20일이면 도쿄 증시를 떠난다. 도시바는 22일 임시주주총회를 열고 대주주 변경과 함께 자진 상장폐지를 확정했다. 1949년 상장해 시가총액 상위 자리를 지켜온 일본 테크산업의 상징이 74년 만에 증시에서 퇴장하는 것이다. 2조 엔(약 18조 원)을 들여 지분 전량을 확보한 현지 사모펀드 컨소시엄은 도시바의 새 주인이 됐다. 컨소시엄은 도시바의 기업 가치를 끌어올린 뒤 재상장하겠다지만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 ▷도시바는 ‘일본의 에디슨’으로 불리는 다나카 히사시게가 1875년 설립한 다나카제작소에서 출발했다. 재벌기업 미쓰이에 인수돼 시바우라제작소로 바뀌고 일본 최초로 백열전구를 만든 도쿄전기와 합병하면서 도쿄의 도(東), 시바우라의 시바(芝)를 따 도시바가 됐다. 전자회사로 출발했지만 방산·철도·의료기기·중공업까지 손을 뻗치며 80개가 넘는 계열사를 거느리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재계의 거인이자 150년 기술기업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한국과 중국 업체의 거센 추격에도 변화에 느렸다. 특히 반도체 사업에선 세계 1위 자리를 지키던 낸드플래시에 추가 투자를 할지 말지 망설이는 사이 기술을 전수해준 삼성전자에 완전히 밀렸다. 2001년 도시바의 합작사업 제안을 거절한 삼성전자는 과감한 투자로 1년 반 만에 도시바를 앞질렀다. 경쟁사들이 미래가 불투명하다며 인수를 포기한 미국 원전회사 웨스팅하우스를 무리하게 사들인 건 결정적 패착이었다. 동일본 대지진 여파로 천문학적 손실을 떠안으면서 인수 11년 만에 웨스팅하우스의 파산을 선언했다. ▷소니, 파나소닉 등이 적자에 허덕일 때도 도시바는 흑자를 이어갔지만 가짜였다. 5년간 2200억 엔의 이익을 부풀린 분식회계가 2015년 들통나 가파르게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 여파로 돈 되는 사업을 모조리 팔아야 했다. 상폐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행동주의 펀드들에서 자금 수혈을 받았지만 경영 정상화는 더 꼬였다. 2017년 발간된 일본 경영서 ‘도시바의 비극’은 경영진의 파벌주의, 연공서열의 경직된 조직 문화, 시장 변화를 읽지 못한 폐쇄적 경영 등을 실패 원인으로 짚었다. 혁신 않고 한눈 팔다가는 어느 기업이라도 도시바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3-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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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임수]11조 원 드는 ‘달빛고속철’… 與野의 포퓰리즘 짬짜미

    대구와 광주를 대중교통으로 오가는 사람들은 기차보다 버스를 주로 이용한다. 기차를 타면 ‘ㅅ’자 형태로 오송역까지 가서 환승해야 하고, 버스와 비교해 시간은 별 차이 없는데 요금은 두세 배 비싸다. 이 때문에 대구와 광주를 바로 잇는 철도를 건설하자는 얘기가 일찌감치 나왔지만 20년 넘게 공회전했다. 광주대구고속도로도 하루 교통량이 전국 고속도로 평균의 절반이 안 될 만큼 한산한데 굳이 철도를 깔아야 하느냐는 거였다. ▷대구∼광주 간 철도 건설은 재작년이 돼서야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 포함됐지만 이마저도 후순위 사업으로 밀렸다. 비용 대비 편익이 1보다 커야 경제성이 있다고 보는데, 이 수치가 절반에 못 미친 탓이다. 당시 198km 길이의 일반철도를 단선으로 놓는 데 4조5000억 원 이상의 사업비가 드는 것으로 분석됐다. 그런데 대구시와 광주시가 2038년 아시안게임을 공동 유치하겠다며 철도 조기 착공을 밀어붙이더니 올 8월 ‘달빛고속철도 건설을 위한 특별법’이 국회에 발의됐다. ▷대구 옛 지명 ‘달구벌’과 광주의 순우리말 ‘빛고을’의 앞 글자를 딴 고속철 건설을 사업이 타당한지 따져보는 예비타당성 조사 없이 추진하려는 법안이다. 대구가 지역구인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대표 발의하고 여야 의원 216명이 서명해 헌정 사상 최다 의원이 이름을 올렸다. 영호남 화합과 국토균형개발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거대 양당의 텃밭인 대구와 광주 지역의 표심을 사려는 선심성 법안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여야는 앞서도 ‘대구경북 통합신공항 건설’과 ‘광주 군공항 이전’을 특별법으로 주고받기 한 전력이 있다. ▷당초 계획과 달리 특별법은 205km 구간에 복선 고속철도를 건설하도록 했다. 최고 시속 300km를 보장하는 선로를 2개 이상 깔아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맞추면 사업비가 11조 원을 웃도는 것으로 국토교통부는 추산했다. 더군다나 설계 변경으로 사업비는 눈덩이처럼 불지만 시간 단축은 고작 2분에 그친다. 일반철도를 깔고 고속 운행하면 86분, 고속철도로 하면 84분이 걸린다고 한다. 이미 일반철도 사업비도 물가 상승으로 6조 원을 넘겼는데, 2분 당기려고 5조 원을 더 쓰겠다는 것이다.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최근 홍준표 대구시장, 강기정 광주시장을 만나 연내 특별법을 처리하겠다고 약속했다. 국민의힘 소속 홍 시장은 “국회가 결정하면 기획재정부는 따라오게 돼 있다”고 했다. 여야가 정부 동의도 거치지 않고 초대형 사업을 강행하겠다는 것이다. 2035년 달빛고속철의 수송 인원은 주중 하루 7800명 정도라고 한다. 정치 논리로 탄생해 텅 빈 지방공항들처럼 달빛고속철도 역시 텅 빈 열차가 달릴 수 있다는 얘기가 벌써부터 들린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3-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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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임수]나쁜 엔저, 슬픈 엔저

    일본에서 엔저 앞에 ‘와루이’(나쁜)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은 건 지난해 봄이다. 엔화 가치가 이른바 ‘구로다 방어선’이라는 달러당 125엔을 뚫고 내려가면서다. 통상 엔화가 약세일 때 수출 기업의 실적 호조를 앞세워 경기를 회복시켰는데, 이런 경로가 먹히지 않는다는 거였다. 엔저의 긍정적 효과보다 수입가격 상승이 쏘아올린 물가 급등, 무역수지 악화 등 악영향이 크다는 평가가 쏟아졌다. 일본 재무상도 “그만큼 임금이 오르지 않으니 나쁜 엔저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최근 국제 외환시장에서 엔화는 달러당 150엔을 넘어 152엔 수준까지 근접했다. 152엔마저 뚫는다면 엔화 가치는 버블 경제 붕괴 초반이던 1990년 이후 33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 된다. 엔화는 1985년 플라자 합의 때 ‘엔고’를 조건으로 세계 3대 통화가 됐지만, 버블 붕괴와 함께 엔고가 디플레이션을 몰고 오면서 일본 경제는 ‘잃어버린 30년’에 진입했다. ▷30년여 만에 맞은 초(超)엔저는 팬데믹 이후 전 세계가 금리를 끌어올리는 동안에도 일본은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한 영향이 크다. 특히 10년간 아베노믹스 집행관으로 있던 ‘엔저론자’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가 올 4월 떠나고 신임 총재가 들어선 뒤에도 무제한 돈 풀기가 계속되면서 엔저의 질주는 멈추지 않고 있다. 그사이 미국은 금리를 더 올려 금리가 낮은 엔화를 팔고 금리가 높은 달러를 사는 ‘엔캐리’ 자금이 엔저를 부추기고 있다. ▷엔저 특수에 힘입어 일본 수출 기업과 관광 산업은 역대급 호황을 맞았다. 엔화를 헐값에 사서 일본 주식을 사려는 외국인 자금이 몰리면서 증시도 훨훨 날고 있다. 하지만 많은 일본 기업이 해외로 생산기지를 옮긴 탓에 수출 기업의 실적 개선이 임금 인상과 가계소득 증가로 이어지는 선순환 고리는 끊겼다. 오히려 엔저로 엔화 구매력이 바닥으로 추락해 일본 국민은 더 가난해졌다.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물가 상승에 100엔숍이 사라졌고, 관광객이 넘치는 대로변 쇼핑가와 달리 뒷골목 상점은 눈물의 폐업을 하고 있다. ▷이를 두고 나쁜 엔저를 넘어선 ‘가나시이’(슬픈) 엔저라는 얘기가 나온다. 이런데도 일본 정부는 디플레이션에서 확실히 탈출하기 전까지 엔저에 브레이크를 밟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세계 시장에서 일본과 경합하는 한국 주력 제품의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과거 원-엔 환율이 ‘1 대 10’ 비율보다 하락하면 한국 경제가 감기에 걸렸는데, 지금 100엔당 860원대까지 낮아졌다. 슈퍼 엔저 장기화의 영향이 최소화될 수 있도록 우리 경제 구조를 고도화하고 수출 경쟁력을 더 높여야 할 때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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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임수]술고래 남성 줄고 술꾼 여성 늘었다

    나라마다 기준이 대동소이하지만, 국내 보건당국은 한 번 술을 마실 때 남성은 소주 7잔(맥주 5캔), 여성은 5잔(맥주 3캔) 이상 마시는 걸 폭음이라고 규정한다. 남녀 간에 2잔이 차이 나는 건 여성의 알코올 분해 능력이 남성보다 떨어져서다. 남성보다 왜소한 여성은 간의 크기도 작아서 간에서 분비되는 알코올 분해 효소가 남성의 30∼50%에 불과하다. 여성호르몬 에스트라디올은 알코올 분해 효소의 활동도 방해한다. 술이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 치명적인 이유다. ▷그런데 잔뜩 취할 정도로 술을 몰아서 마시는 한국 여성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일주일에 2번 이상 폭음하는 사람이 최근 10년 동안 남성은 25.1%에서 23.6%로 줄어든 반면 여성은 7.9%에서 8.9%로 늘었다. ‘고위험 음주’에 해당하는 술꾼들이다. 한 달에 한 번 이상 폭음하는 사람으로 좁혀 봐도 남성은 62%에서 56%로 감소했지만 여성은 31%로 변화가 없었다. 질병관리청은 2012년부터 2021년까지 성인의 음주 행태를 분석해 최근 이런 내용의 심층 보고서를 내놨다. ▷보고서에 따르면 자주 폭음하는 술꾼들이 남성의 경우 40, 50대 중장년층에서 많았지만 여성은 20, 30대 젊은층에서 두드러졌다. 특히 30대 여성의 고위험 음주율은 10년간 11.6%에서 13.2%로 뛰었다. 이는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고 여성 음주에 대한 사회·문화적 수용성이 높아진 영향이 크다. 서른 살 여자 동창 3명이 주구장창 술 마시는 드라마 ‘술꾼도시여자들’이 큰 인기를 끈 것도 이 같은 현실이 투영된 결과다. ▷도수는 낮추고 맛은 살린 ‘순한 술’ 경쟁이 불붙은 것도 한몫했다. ‘국민의 술’ 소주는 2004년 21도, 2006년 20도, 2014년 18도, 2018년 17도 등으로 도수를 계속 낮추며 남성 중심이던 소비층을 여성으로 넓혔다. 2015년 14도짜리 유자 맛 과일소주가 처음 나왔을 땐 “일반소주는 입에도 못 댔는데 두세 병은 거뜬히 마셨다”는 여성들의 무용담이 쏟아졌다. 최근엔 위스키에 토닉워터나 탄산수를 섞어 마시는 하이볼, 당을 뺀 제로슈거 소주가 여성 애주가를 사로잡고 있다. ▷임신과 출산으로 술을 끊었다가 육아로 인한 스트레스를 ‘육퇴’(육아+퇴근) 후 술 한잔으로 푸는 여성들도 여럿이다. 미국에선 이를 뜻하는 ‘마미주스’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하지만 습관적인 음주가 알코올 의존증으로 이어지기까지 남성은 평균 7∼8년, 여성은 5년 걸린다고 한다. 남성은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지만 여성은 스트레스와 외로움, 우울감 등을 달래기 위해 술을 찾았다가 문제가 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건강한 음주는 없다’는 말은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3-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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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임수]中에 삼성반도체 복제공장이?

    애플의 위탁생산업체인 대만 폭스콘이 2018년 10조 원 이상을 투자해 중국 주하이에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는 청사진을 발표했다. 국내외 반도체 관련 기업 60여 곳을 현지로 초청해 사업 설명회까지 열었다. 이 과정에서 공장 설립을 돕는 컨설팅업체가 ‘진세미’라는 게 알려졌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서만 28년간 일하며 ‘반도체 공정(工程)의 달인’으로 불리던 최모 씨가 2015년 싱가포르에 설립한 회사였다. ▷최 씨는 18년 몸담은 삼성전자에서 한 번 타기도 힘들다는 삼성그룹 기술대상을 세 번이나 탔다. 2001년 옮겨간 하이닉스에선 빚더미 애물단지 회사를 세계 D램 2위 업체로 끌어올리며 사장 후보까지 올랐다. 국내 반도체 산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은탑산업훈장도 받았다. 그런 그가 중국, 대만 등 해외에서 컨설팅을 해주며 현지 반도체 공장 가동에 기여한다는 소식에 퇴직한 고급 인력을 우리가 활용해야 한다는 말들이 나왔다. ▷돌연 최 씨의 구속 소식이 들려온 건 올 6월이다. 2018년 중국 시안의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불과 1.5km 떨어진 곳에 이 공장을 본뜬 ‘복제 공장’을 지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삼성전자에서 반도체 공장 BED(반도체 클린룸 최적화 기술), 공정 배치도, 설계 도면 등을 대거 빼돌렸다고 한다. 최소 3000억 원, 최대 수조 원대 가치가 있는 핵심 기술들이다. K반도체의 산증인이 산업 스파이가 됐다는 소식에 산업계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복제 공장을 짓기 위해 최 씨는 삼성, 하이닉스 출신 등 반도체 엔지니어 200여 명을 영입했다. 기존보다 2배 많은 연봉은 물론이고 체류비, 자녀 교육비 등 파격 조건을 제시하며 ‘친정 식구’들을 데려온 것이다. 검찰은 최 씨가 이들에게 삼성전자 자료를 입수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봤다. BED는 삼성전자를 퇴사한 직원이 근무 당시 훔쳤고, 설계 도면은 삼성 시안 공장의 감리회사 직원이 빼돌렸다. ▷시안 공장에 8조 원을 투자하기로 했던 폭스콘이 발을 빼면서 공장 설립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최 씨는 청두로 눈을 돌렸다. 2020년 청두시에서 4600억 원을 투자받아 반도체 합작회사를 만들고 공장까지 세운 것이다. 그런데 이 공장에서 개발한 20나노급 D램 반도체에 삼성의 핵심 기술이 활용된 정황을 최근 경찰이 포착했다고 한다. 다행히 최 씨가 구속되면서 양산은 못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삼성의 ‘준(準)복제 공장’쯤은 생긴 셈이다. 넋 놓고 있다가는 중국에 첨단 기술과 인력들을 다 빼앗길 판이다. 산업 스파이를 간첩죄에 준해 엄벌해야 하는 이유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3-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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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요논점/정임수]국회 파행에 ‘워크아웃법’ 또 아웃… 한계기업 줄도산 덮치나

    《부산 지역의 중견 조선업체 대선조선이 이달 12일 주채권은행에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을 신청했다. 수주 물량이 쌓였는데도 선박 인도가 지연되면서 일시적인 자금난에 처했기 때문이다. 조선업계가 긴 불황의 터널을 지나 수주 호황을 맞았지만, 중소업체 중엔 극심한 인력난과 원자재 가격 급등을 견디지 못하고 유동성 위기에 빠진 곳이 적지 않다.하지만 이들 업체는 대선조선처럼 워크아웃을 활용해 신속하게 경영 정상화를 시도할 기회가 사라졌다. 워크아웃 제도의 법적 근거가 되는 ‘기업구조조정촉진법’(기촉법)이 국회의 태만으로 16일부터 효력을 상실해서다. 이제 위기에 몰린 기업이 기댈 수 있는 구조조정 수단은 훨씬 더 까다롭고 강도 높은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만 사실상 남았다.고금리·고물가·고환율 등 3고(高) 위기가 한국 경제를 다시 덮친 가운데 구조조정 제도의 공백을 불러온 정치권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기촉법의 재입법을 서두르는 동시에 20여 년간 반복돼 온 법률 일몰과 재연장의 논란을 끝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국회 파행에 또 없어진 ‘워크아웃법’잭 웰치 전 제너럴일렉트릭(GE) 회장이 기업 구조조정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면서 대중화된 워크아웃이 한국으로 건너온 건 외환위기 때다. 외환위기 여파로 기업들이 줄도산하자 2001년 한시법(유효기한이 정해진 법)으로 기촉법이 만들어졌다. 이 법을 근거로 워크아웃은 채권단 75% 이상이 동의하면 채무 조정과 신규 자금 지원 등을 통해 부실기업의 경영 정상화를 유도하는 구조조정 프로그램으로 운영돼 왔다. 한시법이 5차례 연장을 거듭하면서 채권단 주도의 워크아웃은 법원이 주도하는 법정관리와 더불어 기업 재도약을 위한 핵심 수단으로 활용됐다. 중소기업뿐만 아니라 하이닉스, 현대건설, 금호아시아나 등이 워크아웃을 거쳐 되살아났다. 금융위원회가 2012∼2021년 기업은행에서 선정한 부실징후기업 1348곳을 분석한 결과, 워크아웃으로 기업을 정상화시킨 성공률은 34.1%인 반면 법정관리 성공률은 12.1%에 그쳤다. 정상화에 걸리는 기간도 워크아웃이 3.5년으로 통상 10년 정도 걸리는 법정관리보다 짧았다. 워크아웃이 보다 신속하고 유연하게 구조조정을 지원하는 게 입증된 셈이다.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수주 계약 해지 사유에 해당되고, 수출입 기업의 경우 신용장 거래가 중단돼 정상적인 영업 활동을 할 수 없다. 금융채권뿐만 아니라 일반 상거래채권도 동결돼 협력업체 등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만만치 않다. 반면 워크아웃은 이런 부작용 없이 상거래를 지속할 수 있다. 기업들이 법정관리를 ‘최후의 수단’으로 여기는 이유다. 워크아웃의 이런 장점 때문에 올해도 기촉법 시한 만료를 앞두고 여야 의원들이 각각 일몰을 연장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가 6, 7월 두 차례 법안을 논의하고는 개점휴업에 들어가면서 이 법은 일몰을 피하지 못하고 또 없어지고 말았다. 여야의 극한 대립 속에 기촉법 관련 논의가 내년 4월 총선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기촉법 공백기에 중견기업·건설사 줄줄이 무너져금융당국은 기촉법 재입법을 추진하는 동시에 전 금융권이 참여하는 ‘구조조정 자율협약’을 가동해 법의 공백을 메우기로 했다. 과거 기촉법이 일몰 폐지됐을 때도 자율협약으로 워크아웃을 진행한 전례가 있다. 하지만 자율협약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데다 채권자 범위도 모든 금융채권자가 아니라 채권금융회사로 한정돼 한계가 분명하다. 올해를 제외하고 기촉법이 일몰 기한을 넘겨 효력을 잃은 경우는 4차례 있었다. 가장 긴 공백은 2006년 1월부터 2007년 11월까지 약 2년이다. 이때 6개 기업이 자율협약 방식으로 구조조정을 추진했지만 4곳이 채권단 간 이견으로 실패했다. 특히 중견 디스플레이 회사였던 현대LCD는 법정관리를 거쳐 중소업체에 일부 자산이 매각됐다가 결국 청산됐다. 휴대전화 제조업체 VK모바일도 채권단 합의에 난항을 겪다가 최종 부도를 맞고 청산됐다. 2011년 5개월 동안 기촉법이 실효됐을 때는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과 맞물려 삼부토건·동양건설·월드건설·LIG건설 등 중견 건설사들이 줄줄이 법정관리로 직행했다. 이 중 일부 건설사는 법정관리 신청 직전에 대규모 기업어음을 발행해 투자자들에게 부실을 떠넘겼다는 비판을 받았다. 올해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경기 침체와 금리·물가 상승 여파로 경영난에 처한 기업이 늘고 있어 워크아웃 중단의 파장이 작지 않을 것으로 우려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3년 연속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내는 한계기업이 지난해 말 기준 3900개를 웃돈다. 전체 기업(외부감사 대상 비금융 기업)의 15%를 차지하는 것으로 5년 만에 가장 높은 비중이다. 금융감독원의 신용위험평가 결과, 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가 필요한 부실징후기업은 185개로 1년 새 25개 늘었다. 자금난이 영세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확산되면서 1∼8월 어음부도액은 3조6200억 원을 넘어섰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1년(1조9000억 원)이나 레고랜드 사태가 있었던 지난해(2조2500억 원)보다 심각한 수준이다. 금융권과 산업계에서 “구조조정 골든타임을 놓쳐 도산하는 기업이 없도록 재입법을 서둘러야 한다”는 요구가 쏟아지는 이유다.● “기업에 다양한 구조조정 선택지 줘야”기촉법 일몰 기한이 돌아올 때마다 법 존속 여부를 두고 사회적 논란은 반복되고 있다. 금융위는 한시법인 기촉법을 연장하는 것에서 나아가 상시화 검토도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법정관리를 주도하는 법원은 기촉법을 폐지하고 사법부 영역에서 구조조정이 일원화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조조정 주도권을 둘러싸고 밥그릇 싸움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법원행정처는 이번에도 국회 정무위에 기촉법 연장 반대 의견을 냈다. 워크아웃에 동의하지 않는 채권자에 대해 재산권 침해 등 위헌 소지가 있고, 금융채권자 권한이 우선시되면서 채무기업이 사실상 배제된다는 것이다. 기촉법이 관치금융 수단으로 활용된다는 비판도 오래된 논쟁거리다. 이에 대해 금융위는 그동안 수차례 법 개정을 통해 관련 문제를 대부분 해소했다는 입장이다. 원치 않는 채권자는 반대매수청구를 통해 이탈할 수 있고, 기업이 신청해야만 워크아웃을 개시할 수 있으며, 금융감독원장의 채권행사 유예 요청 권한 등도 없앴다는 것이다. 임채운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법정관리와 워크아웃의 장단점이 뚜렷한 만큼 기업들에 다양한 선택지를 주고 상황에 맞게 구조조정 수단을 정하도록 하는 게 맞다”며 “선택지를 오히려 없애는 방향으로 가면 안 된다”고 말했다. 세계적으로도 법원 밖 구조조정을 다양화하는 추세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해 ‘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정책 옵션’ 보고서에서 법정 외 구조조정 활용을 높일 것을 권고했다. 그러면서 워크아웃 제도를 근거로 한국의 위기대응 능력을 60개 대상국 중 가장 높게 평가했다. 일본, 미국, 영국 등 선진국처럼 제3의 구조조정 기관이 채권단과 채무자 입장을 공정하게 조율하면서 기업 회생을 신속하게 돕는 새로운 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많다. 한은은 ‘기업 채무조정제도 개선에 관한 글로벌 논의와 시사점’ 보고서에서 “법원 외에 공정하고 중립적인 제3자 역할을 하는 도산 실무가를 육성해야 한다. 중소기업 맞춤형 채무조정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새로운 제도가 마련되기도 전에 기존 워크아웃 제도를 없애는 건 위기에 처한 기업들의 재기 발판을 없애는 것이나 다름없다. 국회와 정부는 서둘러 재입법을 통해 워크아웃 제도를 부활시켜야 한다. 민생을 챙기는 일이 바로 이런 것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3-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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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임수]1년 새 134조 원 빚 낸 2030 세대

    무섭게 치솟던 가계빚 증가세에 브레이크가 걸린 건 작년 4분기 들어서다. 가계대출은 지난해 통틀어 7조8000억 원이 줄었는데 통계 편제 이래 첫 감소다. 한국은행 기준금리가 10년 만에 연 3%대로 올라선 데다 부동산과 주식 시장이 얼어붙은 영향이 컸다. 대출금리 인상을 알리는 은행 문자메시지에 벌벌 떨고, 상투에 집을 사서 물렸다며 땅을 치는 ‘영끌족’이 한둘 아니었다. 전세를 끼고 갭투자에 나섰던 사람들이 ‘갭거지’가 됐다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이 같은 분위기도 반짝이었다. 올 들어 한은이 줄곧 금리를 동결하고 금융당국의 은행권 ‘이자 장사’ 질타에 대출금리가 하락세로 돌아서자 빚을 갚으려던 사람들이 생각을 바꿨다. 특히 봄 이사철 이후 집값이 바닥을 쳤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영끌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주식시장에선 배터리 투자 광풍이 빚을 내서 돈을 벌려는 ‘빚투족’의 귀환을 부추겼다. ▷영끌·빚투에 앞장선 이들은 이번에도 2030 청년층이다. 팬데믹 시기에 아파트 ‘공포 매수’를 주도하고, 주식 투자에 뛰어든 ‘동학개미운동’ 세대다. 국감 자료를 보면 올 7월까지 1년 동안 5대 시중은행과 6대 증권사에서 이들이 새로 받은 대출은 134조 원에 육박한다. 1년간 해당 은행들에서 162조 원의 주택담보대출이 나갔는데 절반가량이 20, 30대 몫이었다. 상반기 전국 아파트 매매의 3분의 1을 30대 이하가 사들였다고 하니 곧장 주택담보대출로 이어진 셈이다. ▷한국부동산원 집계로 전국 아파트 매매가는 12주 연속 상승세다. 서울에선 ‘미친 집값’으로 불리던 급등기의 80∼90% 수준을 회복한 아파트가 속출하고 있다. 집값이 다시 꿈틀대자 이번에도 때를 놓치면 나만 소외될지 모른다는 포모(FOMO) 심리가 2030세대를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어렵게 취업한 일자리마저 저소득 비정규직이 많다 보니 착실히 돈을 모으기보다 주식이나 코인 투자로 한방을 노리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 ▷문제는 고금리와 저성장이 굳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은행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다시 최고 7%를 돌파했고, 미국발 고금리 시대는 더 길어질 것으로 보인다. 소득과 자산이 적은 청년들이 감당하기 힘든 나락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얘기다. 벌써부터 이자를 제때 갚지 못하는 20, 30대가 늘고 있다고 한다. 부동산·주식 거품이 빠지면 대박을 노린 섣부른 투자가 쪽박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한은 총재가 “다시 낮은 금리로 갈 거라고 생각하고 집을 산다면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젠 ‘아파트 때문에 나라 망하겠다’는 아파트 망국론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됐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3-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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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임수]“삼겹살로 깻잎 싸먹을 판”

    요즘 고깃집이나 횟집 메뉴판에서 바뀐 건 가격만이 아니다. 메뉴판 구석에 ‘쌈채소 리필은 한 번만 가능’ ‘상추·깻잎 리필에 3000원’ 등을 써 붙인 식당이 갈수록 늘고 있다. 여름 성수기와 추석 연휴를 지나고도 고공 행진하는 채소값 때문이다. 청상추 100g이 1821원으로 작년 이맘때보다 50% 넘게 뛰었고, 같은 양의 깻잎은 3165원으로 15% 올랐다(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6일 소매가 기준). 국산 삼겹살 100g이 2700원대에 판매되고 있으니 깻잎이 삼겹살보다 비싸진 것이다. “삼겹살로 깻잎 싸먹겠다”는 얘기가 나올 판이다. ▷과일값도 다르지 않다. 추석을 앞두고 사과와 배 1개씩 사면 만 원을 넘겼는데 지금은 더 올랐다. 곧 마트에 풀릴 가을 대표 과일 단감은 가락시장 도매가격이 지난해보다 최고 40% 넘게 급등했다. 올해 유독 심했던 폭염·폭우 등 극한 기후의 여파가 여전히 농산물 수급에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6, 7월 두 달간 내린 집중호우로 서울 여의도 면적의 236배에 달하는 농지가 침수, 낙과 등의 피해를 입었으니 쉽게 진정될 가격 상승세가 아닌 듯하다. ▷이상 기후가 불러온 농산물 가격 급등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에선 오렌지 가격이 연일 뛰고 있다. 최근 뉴욕상품거래소에서 농축·냉동 오렌지주스 선물(先物) 가격은 역대 최고가를 기록했다. 허리케인이 강타한 플로리다의 오렌지 생산량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탓이다. 사탕수수 최대 산지인 인도와 브라질의 가뭄으로 설탕 선물 가격도 12년 만에 최고가를 찍었다. 남유럽의 전례 없는 폭염과 가뭄으로 올리브 수확이 급감하면서 국제 올리브유 가격은 1년 새 2배 넘게 치솟았다. ▷국제 농산물 가격 급등은 시차를 두고 국내 식품가격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올리브유를 고집하던 국내 치킨 프랜차이즈는 18년 된 레시피를 바꿔 해바라기씨유를 절반 섞어 쓰기로 했다. 원유(原乳) 가격 인상 여파로 우유에 이어 아이스크림 가격도 뛰면서 ‘밀크플레이션’에 시동을 걸었다. 거의 모든 음식에 들어가는 설탕의 가격 상승이 이끌 ‘슈거플레이션’이 현실화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올 7월 영국 BBC의 시사 프로그램에서 ‘기후플레이션’이라는 신조어를 처음 소개했는데, 불과 몇 달 새 우리 밥상을 위협하는 최대 요인이 됐다. 이상 기후가 농산물 작황 부진으로 이어져 식품물가를 끌어올리고 전체 물가에도 악영향을 준다는 뜻이다. 2035년이면 기후 변화가 세계 식품물가 상승률을 최대 3.23%포인트 높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무분별한 탄소 배출이 지구 온도뿐만 아니라 물가까지 끌어올리는 기후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3-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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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정임수]한전에 또 등장한 ‘워룸’

    2009년 5월 한국전력 본사 지하에 비상상황실 ‘워룸(war room)’이 만들어진 적이 있다. 미국발 금융위기와 고유가 여파로 창사 이래 처음 적자가 나면서 위기감이 높아진 때였다. 이 워룸에서 한전 컨소시엄 직원 80여 명이 야전침대를 두고 7개월 내내 휴일도 없이 살다시피 했다.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을 따내기 위한 사령부 역할을 한 것이다. 전시처럼 일한 결실은 국내 1호 원전 수출이자 사상 최대 인프라 수출로 이어졌다. 며칠 전 한전 본사에 다시 워룸이 등장했다. 이번엔 사장 집무실이 간판을 바꿔 달았다. 20일 취임한 김동철 신임 사장이 간이침대를 들여놓고 이곳에서 숙박하고 있다고 한다. 김 사장은 “위기 극복의 실마리가 보일 때까지 휴일을 반납하고 24시간 본사를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 직원들에게는 ‘제2의 창사’라는 각오로 경영 체질을 개선할 것을 주문했다. 한전 설립 62년 만에 최초로 정치인 출신 최고경영자가 된 김 사장의 첫 행보다. 한전이 처한 위기 상황은 14년 전 워룸이 들어섰을 때와 비할 바가 못 된다. 2008년 3조 원에 육박하는 첫 적자에 충격을 받았지만, 올 상반기 영업적자는 8조4500억 원에 이른다. 2021년 2분기 이후 아홉 분기 연속 영업손실을 내면서 누적 적자는 47조 원을 넘어섰다. 민간 기업이라면 벌써 파산하거나 매각됐을 수준이지만 한전은 천문학적 빚을 내며 버티고 있다. 2020년 말 132조 원이던 한전 부채는 2년 반 새 200조 원대로 급증했다. 앞으로 5년간 한전이 부담해야 할 이자만 24조 원, 하루 131억 원꼴이다. 우량 공기업이던 한전이 빚더미 ‘적자 공룡’으로 전락한 건 제때 전기요금을 올리지 않은 게 결정적이다. 국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는데도 문재인 정부는 정권 말이자 대선 직후인 작년 4월을 제외하고 전기요금을 한 번도 올리지 않았다. 오히려 탈원전 정책에 매달려 발전 비용이 저렴한 원전 가동을 줄이고, 고가의 신재생에너지와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을 늘려 비싼 전기를 생산했다. 전기료가 원가에도 못 미쳐 전기를 팔수록 손해인 구조가 굳어진 것이다. 출범 1년 4개월을 맞은 현 정부도 이젠 자유로울 수 없다. 당초 정부는 한전의 경영 정상화를 위해 올해 kWh당 51.6원의 전기료 인상이 필요하다고 봤지만 1, 2분기에 21.1원 올리는 데 그쳤다. 전기요금 정상화 숙제를 미루는 게 국정 지지율이나 내년 총선 때문이라면 지난 정부가 보여줬던 포퓰리즘 행태와 다를 바 없다. 전기료 방치는 한전의 부실로 끝나지 않는다. 전력망 투자가 위축되면 전력산업 생태계가 훼손되고 대규모 정전 같은 국가 재난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 적자 보전을 위해 한전이 찍어내는 한전채가 시중 자금을 빨아들여 금융시장 혼란을 부추기는 문제도 반복되고 있다. 최근 국제유가가 다시 배럴당 100달러 돌파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한전이 더 깊은 수렁에 빠질 위험이 다분하다. 공기업 부실이 커지면 국민 세금으로 메울 수밖에 없다. 더 늦기 전에 원가와 수요를 기반으로 전기요금을 정상화하는 게 정공법이다. 한전의 2023년형 워룸은 정부와 정치권을 설득해 정치 논리에 좌우되는 기형적 전기요금을 바꾸는 사령부 역할을 해야 한다. 노조에 휘둘리지 않고 방만한 조직과 경영을 대수술하는 리더십도 보여야 한다. 앞서 5월 한전이 부동산 매각, 임금 인상분 반납 등 26조 원 규모의 재무구조 개선책을 내놨지만 진전이 없다. 국민이 공감할 만한 추가 자구안을 내놔야 한다는 지적이 쏟아지는 이유다. 워룸이 정치인 출신 사장의 보여주기식 쇼에 그친다면 한전의 정상화는 물론이고 에너지 정책의 정상화도 요원할 것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3-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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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임수]레지던스 10만 채, 수천만 원씩 벌금 폭탄 맞나

    고강도 부동산 대책이 쉴 새 없이 쏟아지던 2018년 무렵부터 틈새형 주거상품의 인기가 치솟았다. 주택시장에 집중된 규제 장애물을 피해 오피스텔, 도시형생활주택 등으로 돈이 몰린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뜨거웠던 건 생활숙박시설(생숙)이다. 강릉, 속초, 제주 등에서 세컨드하우스로 각광받던 생숙이 수도권에 상륙하며 청약 열풍을 몰고 왔다. 2021년 서울 마곡지구에서 분양한 생숙은 고분양가 논란에도 최고 6049 대 1, 평균 657 대 1의 경쟁률로 시장을 놀라게 했다. ▷흔히 레지던스라고 불리는 생숙은 원래 취사와 세탁 등이 가능한 숙박시설이다. 주택법이 아니라 건축법과 공중위생관리법의 적용을 받는다. 하지만 전입신고가 가능하고 거주에 불편함이 없는 데다 건축법상 특별한 규제도 없어 주거용으로 쓰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특히 청약통장이 필요 없고 전매 제한, 대출, 거주 의무 등 각종 규제에서 자유로워 실수요자는 물론이고 시세 차익을 노린 투자자까지 몰려들었다. 이에 힘입어 2018년부터 매년 아파트를 빼닮은 1만 채 이상의 생숙이 들어섰다.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을 벌이던 지난 정부는 생숙마저 과열 조짐을 보이자 칼을 빼들었다. 2021년 5월 건축법 시행령을 고쳐 생숙의 숙박업 신고를 의무화하고 용도 변경 없이는 주거용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오피스텔로 변경하도록 2년의 유예기간을 줬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매년 건물 시가표준액의 10%를 이행강제금으로 물리기로 했다. 유예기간이 끝나는 다음 달 15일부터 오피스텔로 용도 변경을 하지 않고 지금처럼 거주하면 수천만 원의 벌금을 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건축법 개정 이전에 이미 분양했거나 준공된 생숙까지 이를 소급 적용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전국 592개 단지, 10만여 채의 생숙 집주인들은 그야말로 날벼락이다. 오피스텔로 용도 변경을 하려면 복도 폭을 넓히고 주차 대수를 늘리고 통신·소방시설 등을 강화해야 하는데, 다 지어놓은 건물은 이 요건을 충족하기가 쉽지 않다. 이렇다 보니 지금까지 오피스텔로 바뀐 생숙은 1%뿐이다. ▷생숙 집주인들은 정부가 지키기 어려운 잣대를 들이대며 입주자를 거리로 내몰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특히 분양부터 입주까지 정부와 지자체 누구도 문제 삼지 않다가 투기를 막겠다며 급하게 법 개정을 밀어붙여 혼란을 키웠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10만여 채의 불법 건축물을 양산하는 규제 시한이 코앞인데 정부가 손놓고 있어선 안 된다. 주거 패러다임 변화에 맞춰 주거와 숙박 기능을 담은 ‘하이브리드형 시설’로 생숙을 양성화하자는 전문가 의견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3-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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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임수]툭하면 수백억 횡령… 은행 믿고 돈 맡길 수 있겠나

    후진국에서나 일어날 법한 은행 횡령 사건이 또 터졌다. 이번엔 BNK경남은행에서 50대 부장급 간부가 7년간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자금 562억 원을 빼돌렸다고 한다. 지난해 우리은행의 700억 원대 역대급 횡령 사건이 드러난 지 1년여 만이다. 10년 넘게 한 부서에서 장기 근무한 직원이 서류를 위조해 대출을 받고 가족 계좌로 이체한 수법부터, 은행과 금융당국이 수년간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점까지 판박이다. ▷경남은행에서 2007년부터 부동산 PF 업무를 맡아온 이모 부장은 7년 전 PF 대출 상환금을 가족 명의 계좌로 몰래 보내도 적발되지 않자 본격적으로 범죄 행각을 벌였다. 수시로 들어온 대출금 78억 원을 가족 계좌 등으로 옮긴 것이다. 수법은 갈수록 대담해졌다. 아예 PF 시행사인 것처럼 서류를 꾸며 대출금 326억 원을 가족 법인 계좌로 이체했다. 또 다른 PF 사업에서 상환된 돈을 본인이 담당하던 PF 대출을 갚는 데 쓰기도 했다. 은행 내부통제에 구멍이 뚫린 게 아니라 아예 시스템이 마비된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들 정도다. ▷횡령 사실이 드러난 과정은 더 어이없다. 다른 저축은행 PF 사건을 수사하던 검찰이 올 4월 이 부장의 금융거래에서 수상한 점을 포착하고 정보 조회를 요청할 때까지 은행은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했다. 더군다나 은행은 자체 감사를 거쳐 횡령액이 78억 원이라고 지난달 금융감독원에 보고했다. 하지만 불과 10여 일 만에 금감원은 484억 원의 횡령을 추가로 적발했다. 제 식구를 감싸기 위해 은폐한 게 아니라면 은행 감사 시스템도 고장 난 셈이다. ▷금융당국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당국은 은행 횡령 사고를 막겠다며 지난해 11월 ‘내부통제 혁신 방안’을 내놨다. 오랫동안 같은 업무를 맡을 경우 사고 위험이 높아지기 때문에 순환 근무와 명령 휴가 등을 통해 장기 근무자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이 부장은 15년 넘게 PF 업무를 담당했고, 은행은 지난해 문제가 없다고 보고했다. 당국의 지시를 무시한 은행도 황당하지만 이를 제대로 점검하지 못한 금감원도 할 말이 없다. ▷최근 6년여 동안 금융사 임직원들의 횡령액은 2200억 원을 넘어섰다고 한다. 허술한 내부통제와 뒷북 감독이 문제지만 바늘도둑을 소도둑으로 키우는 솜방망이 처벌도 한몫한다. 회삿돈 2215억 원을 횡령한 오스템임플란트 전 직원이 얼마 전 1심 재판에서 이례적으로 징역 35년형을 선고받았는데, 은행원의 횡령에는 좀 더 무거운 잣대를 들이대야 할 듯하다. 수백억 원대 횡령 사고가 연례행사처럼 터져나오니 어디 은행 믿고 돈을 맡길 수 있겠나.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3-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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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극한기후에 전쟁 겹치니 ‘침묵의 쓰나미’ 몰려온다[수요논점]

    《미국 월가의 투자 보고서에 농업과 인플레이션을 합친 ‘애그플레이션’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건 2007년이다. 옥수수 값 폭등으로 멕시코에서 ‘토르티야 폭동’이 일어난 것을 시작으로 세계 30여 개 국가에서 식량 가격 급등으로 인한 폭동이 발생하던 때였다. 식량 위기가 안보 위기로 확산되자 반기문 당시 유엔 사무총장은 2008년 4월 비상사태를 선포했다.식량 위기 공포에 다시 방아쇠를 당긴 것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다. 세계 최대 곡물 생산·수출국으로 꼽히는 두 나라의 전쟁이 길어지면서 세계인의 식탁이 위협받고 있다. 여기에다 올해 극단적인 폭염·폭우 등 이상기후로 물가가 치솟는 ‘기후플레이션’까지 맞물려 식량 위기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고착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한국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극한 기후는 이미 우리 밥상을 덮쳤고 쌀을 제외한 곡물 자급률은 바닥 수준이다. ‘소리 없는 쓰나미’라 불리는 식량 안보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노골화되는 러시아의 ‘식량 무기화’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발표하는 세계 식량가격지수는 전쟁 발발 직후인 지난해 3월 역대 최고치(159.7)로 치솟았다. 러시아의 흑해 봉쇄로 세계 3대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이 막히면서 2007∼2008년의 식량 폭동이나 2011년 ‘아랍의 봄’ 때보다 상황이 더 나빠진 것이다. 이를 가까스로 잠재운 것은 유엔과 튀르키예의 중재로 체결된 ‘흑해곡물협정’이다. 이 협정에 따라 전쟁 와중에도 지난해 7월 이후 우크라이나산 밀·옥수수·보리 등 3280만 t이 흑해를 통해 45개국으로 수출됐다. 하지만 앞서 3차례 협정을 연장했던 러시아가 지난달 17일 협정 파기를 선언하더니 흑해에 접한 우크라이나 최대 항구도시 오데사의 곡물창고와 항만 시설을 연일 공습했다. 이어 24일에는 전쟁 이후 처음으로 다뉴브강 항구도시 레니를 공격했다. 흑해 항로를 대체할 수출길은 다뉴브강을 이용한 수로와 인접 국가를 거치는 육로뿐인데 노골적으로 내륙 수로 곡물 항구를 타격한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을 인질로 삼아 전 세계를 대상으로 ‘식량 테러’를 가하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세계 곡물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지난달 25일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에서 밀 선물 가격은 부셸(약 27kg)당 7.7달러에 거래되며 5개월 만에 최고치로 뛰었다. 곡물협정 중단 이후 나흘 새 18% 급등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현재 북반구가 곡물 수확기인 데다 세계 최대 밀 생산국인 러시아에 수출 가능한 물량이 쌓여 있어 국제 곡물 가격이 지난해처럼 계속 급등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국제 곡물 가격이 요동칠 것이라는 관측이 높다. 러시아의 ‘곡물 만행’이 서방의 제재 완화를 노린 것이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전쟁 이후 퇴출당한 국제금융결제망(SWIFT·스위프트) 재가입 등을 요구하고 있는데 서방으로선 수용하기 쉽지 않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이번 사태로 곡물 가격이 최대 15% 상승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기후플레이션’ 몰고 온 엘니뇨지난해 말 현재 식량 수출의 빗장을 걸어 잠근 국가는 27개국에 이른다. 밀, 옥수수 같은 곡물뿐만 아니라 육류, 유제품, 팜유, 비료 등 57개 품목에 대해 수출 금지나 수출 물량 제한 등의 조치가 시행됐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식량 위기 우려가 높아지자 각국이 식량보호주의를 강화하고 나선 것이다. 이 같은 움직임이 자국의 식량 수급 안정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중장기적으로 국제 식량 가격을 더 높이는 역효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행이 밀 가격 변화를 실증 분석했더니, 수출 제한 비중이 1%포인트 늘 때마다 밀 가격은 2.2%포인트 올랐다. 더군다나 올해는 4년 만에 발생한 엘니뇨로 극한 폭염과 폭우, 가뭄 등 이상기후가 지구촌을 덮치면서 식량 가격 급등세와 식량 보호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 설탕(원당) 선물 가격은 사탕수수 최대 산지인 인도와 브라질의 가뭄으로 5월 파운드당 26센트를 넘어서며 12년 만에 최고치를 찍더니 현재 24센트를 오르내리고 있다. 초콜릿 원료인 카카오 원두 가격은 1·2위 생산국인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와 가나의 폭우로 지난달 46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중남미 파나마가 100년 만에 최악의 가뭄을 겪으면서 칠레산 와인, 브라질산 소고기, 에콰도르산 바나나 등의 수출도 차질을 빚고 있다. 글로벌 물류 요충지인 파나마운하의 수위가 낮아져 선박 통행을 제한한 탓이다. 인도는 올 들어 설탕 수출을 제한한 데 이어 지난달 20일부터 바스마티 품종을 제외한 모든 품종의 쌀 수출을 금지했다. 인도 쌀 수출 물량의 45%를 차지하는 규모다. 최근 인도 북부 지역이 45년 만에 최악의 홍수 피해를 입으면서 쌀값이 들썩이자 특단의 조치에 나선 것이다. 세계 최대 쌀 수출국인 인도의 금수 조치로 국제 쌀 가격도 뛰고 있다. 점점 뜨거워지고 있는 지구가 식품 물가를 끌어올리는 ‘히트플레이션’(열+인플레이션)이 본격화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유럽중앙은행(ECB)이 5월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 요인을 제외하고 폭염 영향만으로 지난해 유럽 식품물가 상승률은 0.67%포인트 더 높아졌다. 독일 포츠담기후변화연구소는 이 보고서에서 “2035년에는 기후 변화가 세계 식품물가 상승률을 최대 3.23%포인트 끌어올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자급 능력+해외 조달+비축’ 3박자 갖춰야더 섬뜩한 건 우크라이나 전쟁은 여전히 교착 상태이고 극한 기후는 올해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미국항공우주국(NASA·나사) 등은 엘니뇨 영향이 본격화하는 내년이 올해보다 더 더울 것이라는 관측을 잇달아 내놨다. 식량 위기가 상시적이고 구조적인 위험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국내에서도 최근 극한 호우에 불볕더위가 이어지며 채소 값이 한 달 새 2∼4배 급등했는데 일시적 현상으로 볼 게 아니다. 게다가 한국은 국제 곡물 가격 급등과 식량보호주의 움직임에 매우 취약하다. 연간 수요량의 80%(1800만 t)를 해외에 의존하는 세계 7위 곡물 수입국인 탓이다. 1980년대 50%를 넘던 한국의 곡물 자급률(사료용 포함)은 2021년 20.9%까지 떨어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다. 자급률이 85%에 육박하는 쌀을 제외하고 밀(1.1%), 옥수수(4.2%), 콩(23.7%) 등 나머지 주요 곡물은 대부분 수입한다. 세계 곡물 값이 뛰면 국내 가공식품과 외식 물가는 물론이고 생활 물가 전반이 줄줄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글로벌 경제 패권 경쟁과 공급망 재편이 심화되는 가운데 식량과 자원을 무기화하는 국제적 흐름은 더욱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도 이에 대비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식량 안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곡물은 하루아침에 생산 기반을 늘리고 자급화를 실현하는 게 힘든 만큼 쌀 중심으로 돼 있는 식량비축 제도를 확대하고 안정적인 해외 공급망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일본은 밀과 사료곡물 등의 상시 비축을 법제화하고, 종합상사들이 일찌감치 해외 농업 개발과 계약재배 등에 뛰어들어 곡물 수입의 70%를 안정적으로 책임지고 있는데 이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국내 자급 능력을 높이는 데 힘써야 한다. 임정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자급률을 높이려면 우량 농지를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아울러 밀, 콩, 옥수수 등 자급률이 낮은 곡물에 대해선 쌀 농가 수준의 보조금을 지원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신냉전 구도가 갈수록 뚜렷해지는 상황에서 지금의 ‘반도체 전쟁’이 언제 ‘식량 전쟁’으로 확대될지 모른다. 총성 없는 식량 전쟁에 대비해 정부와 민간이 머리를 맞대고 서둘러 대응책을 마련해야 할 때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3-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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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정임수]땔감 된 거북선, 전국 곳곳에 지자체 ‘세금 낭비’

    경남 거제시 조선해양문화관 광장에 있던 120t짜리 거북선이 결국 지난주에 철거됐다. 2011년 경남도의 ‘이순신 장군 기념사업’ 일환으로 제작됐지만 아무런 활용도 못 하다가 땔감과 고철만 남기고 폐기된 것이다. 국비와 지방자치단체 예산 16억 원이 투입된 프로젝트의 한심한 결말이다. 철거된 거북선은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남해안 일대 지자체들이 앞다퉈 ‘이순신 마케팅’에 뛰어들고,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거북선보다 더 많은 거북선을 만들어 낼 때 편승한 사업이었다. 게다가 제작업체가 국내산 목재를 쓰겠다는 계약을 어기고 외국산을 사용한 게 드러나 ‘짝퉁’ 꼬리표가 붙었다. 승선 체험 등 관광용으로 쓰려고 바다에 띄웠지만 물이 새고 기울어져 뭍으로 끌어올려야 했다. 지상에서도 배가 뒤틀리고 부서지는 사고가 잇따랐다. 엉성한 계획으로 출발해 부실한 시공과 관리감독으로 이어진 지자체 전시행정의 전형적인 사례다. 문제는 이처럼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수십억, 수백억 원의 세금을 낭비한 사업이 널려 있다는 사실이다. 서울시가 1100억 원을 들여 만든 세운상가 공중보행로는 개통 1년 만에 철거 논란에 휩싸였다. 전임 시장이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했지만 통행량이 당초 예측의 5∼17%에 불과한 탓이다. 충북도가 ‘내륙판 자갈치시장’을 표방하며 바다도 없는 괴산군에 조성한 수산단지는 파리만 날릴 지경이다. 사업성을 도외시한 이 역발상 행정에 230억 원이 투입됐다. 110억 원 넘게 들어간 부산 수영구의 복합생활문화시설 ‘비콘그라운드’, 1220억 원이 투입된 대구 군위군의 ‘삼국유사테마파크’, 강원 원주시가 폐철로를 매입하기도 전에 54억 원을 들여 사들인 관광열차 등 애물단지로 전락한 시설이 곳곳에 수두룩하다. 사업성이나 활용 방안을 치밀하게 검토하지 않고 일단 짓고 보자는 식의 안이한 행정에 국민 세금이 줄줄 새고 있는 것이다. 전국 243개 광역·기초지자체의 재정 자립도는 평균 45%에 그친다. 전체 예산 중 지방세 같은 자체 수입이 절반도 안 된다는 뜻이다. 재정 자립도가 30%를 밑도는 지자체는 190곳이 넘는다. 이런데도 지자체마다 보여주기식 행정에 돈을 펑펑 쓸 수 있는 건 국세에서 자동 이전되는 지방교부금이 있기 때문이다. 선출직 지자체장들이 중앙정부가 내려보내는 지방교부금을 쌈짓돈 삼아 치적 쌓기나 선거용 사업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인사권과 예산 편성권, 인허가권을 쥔 지자체장이 결정하면 공무원들은 따라갈 수밖에 없다. 상당수 지자체가 재정 혁신 노력은 게을리한 채 인기 영합식 정책을 남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올해도 지자체 186곳이 19조 원이 넘는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했는데, 이 중엔 공짜로 해외여행을 보내주거나 탈모 치료비를 지원하는 식의 선심성 사업이 적지 않다. 지자체의 흥청망청 예산 낭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올해 역대급 세수 펑크가 예상될 정도로 나라 살림이 비상이라는 점에서 우려를 더한다. 국가채무가 1000조 원을 넘어선 상황에서 중앙정부에서 매년 수십조 원을 받아 쓰는 지자체의 세금 낭비는 나랏빚 부담을 가중시킬 뿐만 아니라 지방자치 시스템 자체를 뒤흔들 수 있다. 각 지자체의 예산 낭비를 막을 제도적 장치가 필요한 이유다. 중앙정부의 지자체 사업 타당성 검증을 강화하고, 전문가와 지역주민들이 불필요한 사업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사업 선정 과정과 예산 집행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시스템도 필요하다. 지방재정의 건전한 자립을 위해 60년 넘은 지방교부금 제도를 대수술하는 작업도 서둘러야 한다. 지자체의 방만 재정으로 혈세가 줄줄 새는 일이 더는 없어야 할 것이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3-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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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임수]할리우드가 멈췄다… 美 배우-작가 63년 만의 동반 파업

    올여름 할리우드 기대작으로 꼽히는 영화 ‘오펜하이머’의 영국 런던 시사회는 지난주 배우들 없이 진행됐다. 맷 데이먼, 에밀리 블런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등 스타 배우들이 레드카펫에서 사진만 찍고 사라진 것이다. 홀로 무대에 오른 감독은 “그들은 피켓을 들기 위해 떠났다”고 했다. 14일 자정을 기해 시작된 미국 배우·방송인노동조합의 총파업에 배우들이 동참한다는 설명이었다. 배우조합은 지난달부터 디즈니, 유니버설, 넷플릭스 등을 대표하는 영화·TV제작자연맹과 고용계약 협상을 벌였지만 결국 결렬됐다. ▷앞서 5월부터 미국 작가조합이 파업에 들어간 데 이어 배우, 스태프 등 16만여 명이 몸담은 배우조합까지 파업을 결의하면서 세계 최대 영화산업 메카인 할리우드가 멈춰섰다. 두 노조의 동반 파업은 매릴린 먼로가 참여하고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배우조합장으로 있던 1960년 이후 처음이다. TV 산업 초창기였던 당시 작가와 배우들이 방송국에 판매된 영화 재상영 분배금 문제를 놓고 함께 싸웠다면, 이번엔 할리우드 판도를 뒤흔들고 있는 스트리밍과 인공지능(AI)을 두고 뭉쳤다. ▷동영상 스트리밍 시대가 열리면서 넷플릭스, 애플, 디즈니 같은 콘텐츠 플랫폼 기업은 배를 불리고 있지만 정작 콘텐츠 생산자인 작가와 배우들은 합당한 로열티를 받지 못한다는 게 양대 조합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들이 더 우려하는 건 AI가 잠식할 할리우드의 미래다. 앞으로 생성형 AI가 대본을 쓰고, AI 딥페이크 기술이 배우의 신체와 연기를 대체하면서 이들의 직업이 폐기 처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려는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지난해 실어증으로 은퇴한 ‘다이하드’ 배우 브루스 윌리스는 자기도 모르는 새 전성기 모습을 이용한 딥페이크 광고가 만들어져 논란이 됐다. 마블의 신작 ‘시크릿 인베이젼’ 오프닝 영상은 아예 AI가 만들었다. 작가조합이 제작자들에게 AI를 활용한 대본 작성과 수정을 금지해 달라고 요구하고, 배우조합이 배우의 얼굴과 목소리가 AI에 무단 도용되는 걸 막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AI의 진화로 일자리를 위협받게 된 콘텐츠 생산자들이 반격에 나서는 건 할리우드뿐만이 아니다. 작가, 예술가 등 14만여 명이 속한 독일 협회와 노동조합은 AI가 저작권을 침해하고 있다며 유럽연합에 AI 규정 강화를 촉구했다. 영국 배우조합도 AI 때문에 배우들 일자리가 없어진다며 파업을 예고했다. 국내 최대 웹툰 플랫폼에선 AI 보이콧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생성형 AI가 상용화된 지 1년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들이다. AI가 ‘예술가의 종말’을 부를지에 대한 논쟁은 63년 만의 ‘할리우드 셧다운’으로 더 뜨거워지게 됐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3-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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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임수]남녀평등지수, 한국이 세계 146개국 중 105위?

    ‘우간다보다 못하다.’ 한때 한국 금융의 후진성을 질타할 때 쓰였던 말이다. 다보스포럼으로 알려진 세계경제포럼(WEF)이 2015년 발표한 국가경쟁력 금융 부문에서 한국이 87위, 우간다가 81위에 오르면서다. 당시 WEF의 평가가 기업인 설문조사 위주로 진행돼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결과를 뼈아프게 받아들이는 금융인들이 적지 않았다. 이후 WEF가 통계지표 반영 비중을 높이면서 한국의 금융 경쟁력은 껑충 뛰었다. ▷국가경쟁력 외에도 WEF가 매년 국가별로 순위를 매기는 것 중 ‘성 격차(Gender Gap) 지수’라는 게 있다. 경제 참여·기회, 교육 수준, 건강, 정치 권한 등 4가지 항목에서 남녀평등 정도를 평가해 지수화한 것이다. 그런데 WEF가 그제 발표한 성 격차 지수에서 한국은 146개국 중 105위에 그쳤다. 지난해보다 여섯 계단 하락한 것이자 아프리카 세네갈(104위)보다 낮은 수준이다. 심지어 르완다가 12위였다. ▷여성의 지위와 권한 자체가 아니라 ‘성별 격차’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남녀 모두 수치가 낮은 아프리카 국가들보다 남녀 차이가 큰 한국이 뒤로 밀린 것이다. 한국뿐 아니라 중국(107위), 일본(125위) 등 가부장적 문화가 남아 있는 아시아 국가들이 대체로 하위권에 몰렸다. 반면 ‘육아 천국’, ‘복지 천국’으로 꼽히는 북유럽의 아이슬란드·노르웨이·핀란드·스웨덴과 뉴질랜드는 1∼5위를 휩쓸었다. 이들 국가가 90% 안팎 수준으로 남녀평등을 실현했다면 한국은 68% 수준으로 평가됐다. ▷여성 인권의 절대 수준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WEF 평가를 깎아내릴 게 아니라 자성할 대목들도 적지 않다. 항목별로 보면 경제 참여·기회가 114위로 종합 순위보다 낮았고, 더 세부적으로는 근로소득(119위), 고위직 비율(128위)이 최하위권을 맴돌았다. 남녀 임금 격차가 크고, 여성의 승진이 힘들다는 뜻이다. 한국 남성이 100만 원의 임금을 받을 때 여성은 69만 원을 받고, 여성 10명 중 4명은 출산과 육아, 자녀 교육으로 경력 단절을 경험하고 있다. 민간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은 11.5%에 불과하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매년 발표하는 ‘유리천장지수’에서 한국이 ‘만년 꼴찌’인 것도 이 때문이다. 경제 규모 세계 10위권을 자랑하고, K컬처로 문화 강국 반열에 오른 한국의 부끄러운 현주소다. 최악의 저출산은 물론이고 고용, 복지, 교육 문제까지 어느 것 하나 성평등 정책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해결 방안을 찾기보다 극단적 혐오의 충돌로 젠더 갈등의 골만 깊어져 우려스럽다. 성평등을 통해 여성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것은 여성뿐 아니라 남성, 정부를 포함한 한국 사회 전체의 과제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3-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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