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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년과 역병으로 숨진 자의 수가 너무 많아 모두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만고에 드문 해였다.” 경상도 고성의 처사(處士·초야에 묻혀 살던 선비) 구상덕(1706∼1761)은 1733년의 봄을 이렇게 기록했다. 질병의 원인조차 제대로 모르던 시절, 향촌의 공동체는 역병에 어떻게 대응하고 살아남았을까. 김호 경인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53)는 계간지 역사비평 2020년 여름호에 ‘시골 양반 역병 분투기―18세기 구상덕의 승총명록을 중심으로’를 게재했다. ‘승총명록(勝聰明錄)’은 구상덕이 1725년부터 죽을 때까지 37년 동안 쓴 일기다. 이 발표문에 따르면 구상덕이 살았던 18세기 조선은 기근과 역병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1730년부터 이어진 역병과 재난으로 1733년 봄에는 들판에 나물을 뜯을 사람조차 없었다고 한다. 두창과 온역, 이질, 한질 같은 전염병이 1740년, 1748년, 1753년 등에 되풀이해 창궐했다. 구상덕도 아내와 딸, 친구와 친척을 연이어 역병으로 잃었다. 예나 지금이나 전염병 대응의 시작은 ‘사회적 거리 두기’였다. 구상덕은 자신의 마을에서 역병이 완전히 끝나지 않자 읍내 향교의 공사가 마무리되고 열린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집안에 역병이 돌자 향교에서 벌인 시회(詩會)에 불참했고, 집에서도 안채 등 정해진 곳을 떠나지 않고 스스로를 격리했다. 인적 드문 산중의 절이나 이웃집으로 몇 주씩 떠나 있기도 했다. 역병이 미치지 않은 동네의 누이 집으로 부모님을 모셨다. 구상덕은 친구가 역병에 걸려 죽게 되자 그의 아들을 거둔 뒤 데리고 암자로 피신했다. 김 교수는 “역병에 걸렸을지도 모를 사람에게 몸을 피할 공간을 제공하는 건 서로의 선의를 바탕으로 이뤄진 상호부조였다”고 설명했다. 구상덕은 역병을 막고자 점술가나 승려를 불러 독경을 요청했다. 1730년 아내가 괴질에 걸리자 소고기를 먹였다. 역병에 고기를 고아 먹는 치병(治病) 풍속이 있었던 것. 1757년 여름에는 역병이 돌자 닭 한 마리 값이 원래 5, 6전에서 몇 배나 올랐다고 일기에 썼다. 조정과 지방관은 처방전을 보급하고 피막(避幕)을 설치해 환자들을 격리했지만 대부분 인적 드문 들판에 세워져 환자들은 굶거나 얼어 죽는 일이 다반사였다. 피막은 병자들보다는 아직 병이 옮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장치였다. 구상덕이 가족의 안위만 살핀 것은 아니었다.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노파에게 죽을 먹였으며, 역병과 기근으로 버려진 아이를 노비 삼아 거두기도 했다. 또 백성의 고통을 사또에게 전하기 위해 각종 문서 작성을 도왔다. 김 교수는 “역병의 피해가 가혹한 상황에서 도덕적 삶을 유지하고 스스로 공동체를 지키려는 자발적인 ‘사(士·선비) 의식’이 역병의 시대를 헤쳐나간 열쇠였다”고 말했다. 오늘날 한국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대응에서 나타난 ‘시민들의 자발적 협조’ 역시 공동체의 안녕을 함께 도모하려는 선비의 의식과 닮아 있다고 김 교수는 분석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흉년과 역병으로 숨진 자의 수가 너무 많아 모두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만고에 드문 해였다.” 경상도 고성의 처사(處士·초야에 묻혀 살던 선비) 구상덕(1706~1761)은 1733년의 봄을 이렇게 기록했다. 질병의 원인조차 제대로 모르던 시절, 향촌의 공동체는 역병에 어떻게 대응하고 살아남았을까. 김호 경인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는 계간지 역사비평 2020년 여름호에 ‘시골 양반 역병 분투기-18세기 구상덕의 승총명록을 중심으로’를 게재했다. ‘승총명록(勝聰明錄)’은 구상덕이 1725년부터 죽을 때까지 37년 동안 쓴 일기다.이 발표문에 따르면 구상덕이 살았던 18세기 조선은 기근과 역병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1730년부터 이어진 역병과 재난으로 1733년 봄에는 들판에 나물을 뜯을 사람조차 없었다고 한다. 두창과 온역, 이질, 한질 같은 전염병이 1740년, 1748년, 1753년에 되풀이해 창궐했다. 구상덕도 아내와 딸, 친구와 친척을 연이어 역병으로 잃었다. 예나 지금이나 전염병 대응의 시작은 ‘사회적 거리두기’였다. 구상덕은 자신의 마을에서 역병이 완전히 끝나지 않자 읍내 향교의 공사가 마무리되고 열린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집안에 역병이 돌자 향교에서 벌인 시회(詩會)에 불참했고, 집에서도 안채 등 정해진 곳을 떠나지 않고 스스로를 격리했다. 인적 드문 산중의 절이나 이웃집으로 몇 주씩 떠나있기도 했다. 역병이 미치지 않은 동네의 누이 집으로 부모님을 모셨다. 구상덕은 친구가 역병에 걸려 죽자 그의 아들을 거뒀고, 다시 역병이 발발하자 암자에 머물렀다. 김 교수는 “역병에 걸렸을지도 모를 사람에게 몸을 피할 공간을 제공하는 건 서로의 선의를 바탕으로 이뤄진 상호부조였다”고 설명했다.구상덕은 역병을 막고자 점술가나 승려를 불러 독경을 요청했다. 1730년 아내가 괴질에 걸리자 소고기를 먹였다. 역병에 고기를 고아 먹는 치병(治病) 풍속이 있었던 것. 1757년 여름에는 역병이 돌자 닭 한 마리 값이 원래 5, 6전에서 몇 배나 올랐다고 일기에 썼다. 정부는 처방전을 보급하고 피막(避幕)을 설치해 환자들을 격리했지만 대부분 인적 드문 들판에 세워져 환자들은 굶거나 얼어 죽는 일이 다반사였다. 피막은 병자들보다는 아직 병이 옮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장치였다. 구상덕이 가족의 안위만 살핀 것은 아니었다.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노파에게 죽을 먹였으며, 역병과 기근으로 버려진 아이를 노비 삼아 거두기도 했다. 또 백성의 고통을 사또에게 전하기 위해 각종 문서 작성을 도왔다. 김 교수는 “역병의 피해가 가혹한 상황에서 도덕적 삶을 유지하고 스스로 공동체를 지키려는 자발적인 ‘사(士·선비) 의식’이 역병의 시대를 헤쳐나간 열쇠였다”고 말했다. 오늘날 한국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대응에서 나타난 ‘시민들의 자발적 협조’ 역시 공동체의 안녕을 함께 도모하려는 선비의 의식과 닮아 있다고 김 교수는 분석했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

“만약 조선이 발흥하고 일본이 쇠퇴해 일본이 조선에 합병되고, 궁성(에도성)이 폐허가 되며 그를 대신해 그 위치에 큰 서양풍의 일본총독부 건물을 짓게 되고, 저 푸른색 물이 흐르는 해자를 넘어 높고 흰색 벽으로 솟는 에도성이 파괴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일본인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사진)가 1922년 일제의 광화문 철거 방침에 반대하며 동아일보에 게재한 기고문 가운데 일제의 사전검열로 실리지 못한 내용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최응천)은 야나기가 광화문 철거에 반대하며 1922년 7월 작성한 육필 원고를 일본 도쿄 니혼민게이칸(日本民藝館·일본민예관)에서 최근 발견했다고 7일 본보에 밝혔다. ‘장차 잃게 된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이 원고는 1922년 8월 24∼28일 동아일보 1면에 5회에 걸쳐 실리면서 광화문 철거 반대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육필 원고에는 일제의 사전검열 탓에 신문에는 실리지 못하고 같은 해 일본 잡지 ‘가이조(改造)’ 9월호에만 실렸던 200자 원고지 2장 분량의 내용도 포함돼 있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장을 지낸 이상해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광화문의 아름다움을 추도사 하듯 애절하게 묘사하며 철거를 반대한 야나기의 글은 당시 한국인의 심금을 울렸다”며 “일제가 광화문을 헐어 조선의 상징을 말살하려는 데서 한발 물러섰고, 광화문은 비록 제자리는 아니지만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져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고 말했다. “너(광화문)를 자세히 아는 사람은 발언의 자유를 가지지 못했으며 또는 너를 산출한 민족 사이에서도 불행히 발언의 권리를 가지지 못하였다. … 그러나 침묵 가운데 너를 파묻어 버리는 것은 나로는 차마 견디기 어려운 비참한 일이다.” 야나기의 원고는 식민지 문화재의 운명과 나라를 빼앗긴 이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는 절창(絶唱)이다. 야나기는 일본이 조선에 합병되고 에도성(江戶城)이 헐린다면 “반드시 일본의 모든 사람들은 이 무모한 일에 대해 분노를 느낄 것”이라며 “그런데 이와 똑같은 일이 지금 경성에서, 강요받는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고발했다. 야나기에게 광화문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와도 같았다. 그는 “나는 마치 너(광화문)를 낳은 민족이 저 견고한 화강석 위에 끌을 깊이 파서 기념할 영원의 조각을 새긴 것과 같이 너의 이름과 자태와 영(靈)을 결코 스러지지 아니할 싶은 힘으로 잘 새기겠다”고 썼다. 총독부 건물의 신축은 “아무 창조의 미를 가지지 못한 양풍(洋風)의 건축이 돌연히 이 신성한 지경을 침범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 경복궁 흥례문 구역을 헐고 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앞을 가리는 광화문을 철거하고자 했고, 결국 1926년 경복궁 동쪽의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 이상해 교수는 “의궤(儀軌)도 없는 광화문이 사라졌다면 원형 복원은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2014, 2015년 니혼민게이칸 소장 한국 문화재를 조사했고 이후 도쿄예술대의 관련 연구를 지원했다. 이번 조사에 참여한 스기야마 다카시(杉山享司) 니혼민게이칸 학예부장은 “니혼민게이칸 학예사들도 (야나기 육필) 원고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검열된 부분을 파악하고 의미를 고찰해서 확인한 것은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재단은 최근 동아일보에 당시 자료(야나기의 원고)가 존재하는지 물어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제의 광화문 철거를 반대한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의 동아일보 기고 ‘장차 잃게 된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를 오늘날 맞춤법으로 고쳤다. ‘이조(李朝)’와 같은 당시 용어는 그대로 살렸다. 이 기고는 1922년 8월 24~28일 동아일보 1면에 (1)~(5)회로 연재됐다. (※) 표시된 문단은 당시 동아일보 기고에는 일제의 사전 검열 탓에 실리지 못했으나, 일본의 잡지 ‘가이조(改造)’ 1922년 9월호에는 실렸던 부분이다.장차 잃게 된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야나기 무네요시 (1) 이 한 편을 공개할 시기가 성숙한 것처럼 나는 생각한다. 장차 행하려는 동양 고건축의 무익한 파괴에 대하여 나는 가슴을 짜내는 듯한 아픈 생각을 느낀다. 조선의 수부(首府)인 경성에 경복궁을 찾아보지 못한 여러 사람들은 왕궁의 정문인 저 장대한 광화문이 장차 파괴될 일에 대하여 알지 못하겠기로 신경에 아무 느낌과 생각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독자가 동양을 사랑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의 소유자인 것을 믿고 싶다. 가령 조선이라는 것이 직접의 주의(注意)를 여러 많은 사람에게 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점차 인멸(湮滅·자취가 없어짐)하여 가는 동양의 고(古) 예술을 위하여 이 한 편을 정성껏 읽어주기를 바란다. 이 한 편은 잃어버려서는 안 될 한 예술이 잃어버리게 되는 운명에 대한 애석의 문자(文字)이다. 그리고 그 예술의 작자(作者)인 민족이 목전에 그 예술의 파괴를 당하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나의 동정하고자 하는 애달픈 감정의 피력이다.※그러나 아직도 이 제목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없다면 부디 다음과 같이 상상하길 바란다. 만약 조선이 발흥하고 일본이 쇠퇴해 일본이 조선에 합병되고, 궁성(에도성, 일본 황거·皇居를 이름)이 폐허가 되며 그를 대신해 그 위치에 큰 서양풍의 일본총독부 건물을 짓게 되고, 저 푸른색 물이 흐르는 해자를 넘어 높고 흰색 벽으로 솟는 에도성이 파괴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아니면, 정으로 치는 소리를 듣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강하게 상상해보라. 나는 그 에도(오늘날 도쿄)를 상징하는 일본 고유 건축의 죽음에 대해 애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쓸데없는 것이라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사실 미적으로 이보다 뛰어난 것을 오늘날 사람들은 만들 수 없지 않겠는가. (아, 나는 망해가는 나라의 고통에 대해 여기서 새롭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반드시 일본의 모든 사람들은 이 무모한 일에 대해 분노를 느낄 것이다. 그런데 이와 똑 같은 일이 지금 경성에서, 강요받는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번역: 일본 도쿄 예술대 연구진)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너의 생명이 조석(朝夕)에 절박(切迫)하였다. 네가 이 세상에 잇다는 기억이 냉랭한 망각 가운데 장사(葬事)되어 버리려 한다. 아! 어찌하면 좋을까? 나의 생각은 혼란해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하겠다. 혹독한 끌과 무정한 철퇴가 너의 몸을 조금씩 파괴하기 시작할 날이 멀지 않았다. 이것을 생각하고 가슴을 쓰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그러나 너를 구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불행히 너를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너를 불쌍히 여겨 주지 않는 사람뿐이다. 아직 이 세상은 모순의 시대이다. 문 앞에 서서 너를 쳐다볼 때 누가 그 위력(威力)의 미를 부인할 자 있으랴? 그러나 이제 너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려는 자는 반역의 죄를 받을 것이다. 너를 자세히 아는 사람은 발언의 자유를 가지지 못하였으며 또는 너를 산출한 민족 사이에서도 불행히 발언의 권리를 가지지 못하였다. 그러하여 그 곳에 있는 여러 사람은 어둡고 쓰린 무정한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너를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며 이후 세월이 지나갈수록 너를 애모하는 마음이 점점 깊어갈 것도 나의 확신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모의 애(愛)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없는 세상이다. 아니 이러한 애(愛)를 죽이라고 강제하는 세상이다. 아!! 생각할수록 괴로운 아픔이 가슴을 누른다. 그러나 어찌할 수도 없는 것은 사실이니 이야말로 답답하고 아프지 아니한가? 아무나 말하기를 주저하리라. 그러나 침묵 가운데 너를 파묻어 버리는 것은 나로는 차마 견디기 어려운 비참한 일이다. 이 까닭에 나는 말할 수 없는 여러 사람을 대신하여 네가 죽는 이 때에 한 번 너의 존재를 이 세상에 의식케 하려고 나는 이 한 편을 쓰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있는 장소에서 1000마일 이상이나 떠나 있는 내가 홀로 침묵을 깨치고 소리를 친다 할지라도 어둠의 힘과 강한 형세로부터 너를 구원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시비를 논단(論斷)하는 이 말을 결코 무의미한 말이라고 생각지 말아주기를 바란다. 이를 쓰는 것이 나에게 대하여는 한 가지 큰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너의 운명을 다시 회복하도록 보증하여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에 대한 존경과 정애(情愛)가 이 세상에 없다고는 생각하지 말아라! 너의 미(美)와 역(力)과 운명을 이해하는 사람은 실로 적지 아니할 것이다. 만약 그 수가 적다고 할지라도 너는 그 적은 사람의 정애라도 받아 주겠지? 어쨌든 너의 죽음을 생각하고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음을 생각하여다오? 나는 이 현세에서 장차 떨어지려는 너의 운명을 회복하여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영(靈)의 세계에서는 너를 불멸의 자(者)로 만들지 아니하고는 마지 아니하겠다. 실제 너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해낼 수 있는 자유는 나에게 없으나 이 문자 가운데서 너를 불멸케 하는 자유는 나에게 있다. 아? 나는 이에서 너의 이름과 자태와 영(靈)을 결코 스러지지 아니할 싶은 힘으로 잘 □각(刻)하겠다. 마치 너를 산출(産出)한 민족이 저 견고한 화강석 위에 끝을 깊이 파서 기념할 영원의 조각을 새긴 것과 같이. (2) 광화문이여 너의 존재는 얼마 아니 하여 없어지리라. 그러나 없어져서는 안 될 너의 존재를 위하여 나는 이 글을 쓴다. 그리하고 나는 농후하고 선명한 먹으로써 이 글쓰기를 게을리 아니한다. 지상에 있는 시선에서는 너의 자태가 없어진다고 할지라도 내가 쓰는 이 문자는 지상의 어느 곳을 물론하고 널리 전파되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너를 근저(根抵) 깊게 기념하기 위하여 이 적은 추도문을 공중(公衆) 앞에 보내는 것이다. 아!! 광화문이여 사랑하는 벗이여? 뜻 아닌 죽음의 운명을 당하고 얼마나 무참히 생각하는가? 나는 네가 맛보지 않을 수 없는 괴로움과 쓰림을 생각하고 작지 아니한 동정을 보내고자 하노라. 아! 불쌍한 너의 영(靈)이여! 만약 네가 갈 곳이 없으면 나 있는 곳으로 와 주며 네가 죽은 후에는 이 문자 중에 길이 살아다오. 누구든지 이 문자를 읽고 너를 생각해 줄 이가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의 존재가 한 번 다시 여러 독자의 따듯한 의식 가운데에서 애모(愛慕)의 기억을 일으킬 날이 기어이 올 것이다. 그러나 여러 많은 사람은 너에게 대하여 침묵을 지키고 말하지 말라는 무서운 제재를 받고 있다. 그 까닭에 나는 그런 사람을 대신하여 발언의 자유를 지금 택하려고 한다. 아!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웅대하도다 너의 자태. 지금부터 50여 년 전 옛적에 너의 왕국 중에 가장 굳센 힘을 가진 섭정(攝政) 대원군이 그의 주저치 않는 강한 의지에 의하여 왕궁을 잘 지키라는 의미로 남면(南面)한 훌륭한 장소에 굳은 기초를 정한 것이다. 이곳으로부터 조선이 존재한다는 거룩한 사명을 다하고 있는 여러 많은 건축이 전면좌우에 연락(連絡)하여 있으며 광대한 도성의 대로를 직선으로 하야 한성을 지키는 숭례문과 서로 호응하야 있으며 그리하고 북에는 백악(白岳)의 장식(裝飾)이 잇고 남에는 남산의 요위(繞圍)가 있어서 이 황문은 과연 위엄 있는 위치를 태연히 점령했다. 이러하여 3개의 관문을 중앙에 두르고 거대하고 견고한 화강석으로 높이 축조했으며 그 위에 전통을 잘 지키는 중층(重層)의 건물을 용립(聳立·우뚝 솟음)케 했다. 여러 가지로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문은 좌우로 균등(均等)의 고탑(高塔)을 연(延)했으며 그 위에는 각루(角樓)가 아름다운 자세를 보전하고 있다. 앙현(仰見)하는 자로 누가 그 자약(自若)의 미에 대하야 놀라지 않을 자가 있으랴? 이것은 과연 일국의 최대한 왕궁을 지킴에 적당한 정문의 자세이다. 독자여! 이것은 이조 말기의 작품이라고 업신여기지 말라! 그리하고 완려하고 우아하고 정치한 미를 얻어 볼 수가 없다고 냉랭한 생각을 가지지 말라! 도리어 이조 말기에서라도 이러한 위대한 작품을 낸 것을 감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순하고 단엄(端嚴)한 그 자태에는 의지(意志)의 미가 표현돼 있지 않은가? 불교의 고려조는 먼 과거로 흘러가고 지금은 유교의 이조 말이 아닌가? 지(地)의 교훈에서 양육된 사람은 대지에 누울 견고하고 안전한 미를 가지지 아니하면 안 된다. 광화문에 대하여는 이조의 미의 권화(權化)를 목전(目前)에 느낄 것이다. 보아라! 광화문이 어떻게 단순하게 태연히 땅에 서 잇는 것을. 문을 지나는 자마다 모두 그 권위에 놀랄 것이다. 실로 한 왕조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건설한 적호(適好)의 기념비이다. 여러 많은 사람은 이미 저 문전 광장에 무수히 쌓아 놓은 거대한 재료가 화염에 싸여 경복궁 재건의 기도가 수포에 돌아가게 됐던 것을 기억하리라. 비상한 노고와 막대한 비용이 덧없는 일편(一片)의 회신(灰燼·재)으로 돌아가 일반 인민이 뜻하지 않았던 재화(災禍)에 그만 의지가 약해진 때에 그러한 변사(變事)를 일고(一顧)도 아니하고 곧 그 실행을 최촉(催促)한 대원군의 의지의 강한 것을 생각할 것이다. 실로 금일의 저 광화문은 그 불요부절(不撓不折)의 정신의 대담한 피력(披瀝)이다. 그는 그가 죽은 지 겨우 20여 년 후에 그의 의지로 지어 놓은 이 견고한 문이 이처럼 빨리 와괴(瓦壞·기와가 깨지듯 부서짐)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예술적 의식이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 대하여 이러한 무참한 파괴가 백주에 감행되리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다행히 이것이 오문(誤聞·잘못된 소문)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시간은 지체 없이 달려와서 파괴되려는 그 무서운 광경이 내 눈 앞에 떠오른다. 그러면 이 검은 형세를 제지할 힘은 어디를 가든지 어찌 못할 것인가? 아! 동포여 동양의 순수한 건축을 경애하라! 이에 필적할 만한 건물을 우리는 세우지 못한 것이 아니냐? 오늘날 생활에 소용이 없다고 할지라도 마음대로 버려서는 인되겠다. 예술은 공리의 관계를 초월한 자(者)이다. (3) 미(美)가 있는 자(者)는 길이 보존하여라. 더구나 순 동양식의 예술은 우리의 영예를 위하야 깊이 사랑하라! 여러 가지 사정에 있어서 그러한 예술을 수호하는 것은 조선에 대한 추모요 예술에 대한 이해인 것을 깊이 각오(覺悟)하라! 저 광화문은 비록 근대의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동양에서는 그렇게 많지 않은 훌륭한 건축이다. 조선에서 다섯 개의 우수한 문을 택한다고 하면 저 광화문은 반드시 그 가운데 하나인 작품이다. 작품의 양이 많지 못하고 역시 그 수가 매우 적은 조선에서는 더구나 중요한 건축의 하나가 아닌가? 저 광화문이 주도(主都)의 미(美)를 장식하고 있는 한 요소인 것은 누구나 모두 부인할 자가 없을 것이다. 그 주문(主門)이 없어진 때에 경복궁에 무슨 힘이 있으며 경복궁을 잃어버린 때에 한성(漢城)에 무슨 면목이 있으랴? 저 왕궁보다 더욱 정확한 형식과 더욱 위대한 규모를 가진 건축은 조선 안에서는 어디를 가든지 찾아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이조 건축의 대표이며 모범이며 정신이로다. 정치는 예술에 대하여 어디까지든지 염치없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예술을 침해하는 힘을 삼갈지어다. 도리어 예술을 옹호하는 것이 위대한 정치가의 할 일이 아니냐. 우방을 위하여 예술을 위하여 역사를 위하여 도시를 위하여 더구나 그 중에 민족을 위하여 저 경복궁을 구원하라! 그것이 우리의 우의(友誼) 상 정당한 행위가 아닌가? 특히 조선이라는 것을 생각게 하는 제(諸) 관아를 좌우에 이끌고 용립(聳立)한 북한산을 배경으로 하야 멀리서 대황로(大皇路)를 밟으며 광화문을 바라보는 광경은 참말 잊어버릴 수 없는 위대한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니냐? 자연과의 배치를 깊이 고찰하여 잘 계획한 그 건축에는 이중(二重)의 미가 있도다. 자연은 건축을 지키고 건축은 자연을 장식하지 않았는가? 사람은 함부로 그 사이에 있는 유기적 관계를 깨뜨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찌 하랴? 지금은 천연과 인공과의 좋은 조화가 이해(理解) 없는 자로 인하여 파괴되리라는 것을. 이것이 만약 꿈에 불과하다면 다행하겠다. 그러나 그것이 무서운 현실인 것을 어찌 하랴? 마음을 고요히 하여 10여년 옛적을 생각하여 보라! 위대한 광경에 마음이 끌리어 문 앞에 가까이 나갈 때 사람은 알지 못하게 그 장엄한 미에 마음을 빼앗길 것이다. 이리하여 중문으로 들어가 금천교를 건너가면 앞에는 장대한 근정전이 용립하고 뒤에는 강녕전과 경회루의 기와가 물결치는 모양으로 서로 중첩하여 있다. 다시 금원(禁苑)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혹은 녹색으로 혹은 적색으로 몸을 장식한 10여 개의 건물이 혹은 그 아래 연화(蓮花)를 피우고 혹은 그 위에 송지(松枝)를 뒤덮어 각각 보기 좋은 장소를 택하여 있다. 동에는 건춘문 서에는 영추문 북에는 신무문 그리하고 남면의 정문을 이름하여 사람들은 광화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연한 조직(組織) 있는 광경은 다시 두 번 이 세상에서 보지 못할 것이다. 이조의 대표적 건축인 강녕전과 교태전은 이미 다른 곳으로 이전이 되고 변형이 되어 지금은 다만 온돌에서 나오는 연기만이 작은 산 옆에서 고요히 떠오르고 있을 뿐이다. 중요한 최대의 건축인 근정전을 문 앞에서 우러러 볼 날은 두 번 우리에게 오지 아니할 것이다. 곧 얼마 아니하여 그러한 동양의 건축과 아무 관계 없는 방대한 양풍(洋風)의 건축이 곧 장차 완성될 총독부의 건축이 지금 그 준성(竣成)을 급히 하고 있지 아니한가? 아! 이미 전날에는 자연의 배경을 고찰하고 건축과 건축의 관계를 숙려하여 모든 점에 균등의 미를 포함케 하여 순 동양의 예술을 보류(保留)하려고 한 노력이 지금에 이르러는 전연(全然)히 파괴가 되고 방기가 되고 무시가 되었으며 이에 대신하여 아무 창조의 미를 가지지 못한 양풍의 건축이 돌연히 이 신성한 지경을 침범한 것이다. 이리하여 광화문에 연속된 흥례문은 이미 자취도 없어졌으며 저 금천교와 또 그 아래로 보이던 석조의 괴물(怪物)은 무참히 파괴를 당하여 지금은 다만 그 석편(石片) 등이 풀 속에 흩어져 있을 뿐이다. 저 위대한 경회루는 이후에도 잔존하겠지만 그것은 다만 유연(遊宴)의 용(用)으로만 공급될 것이다. 이리하여 남는 광화문은 그 위치에 서고 있을만한 의의를 참혹히 잃어버릴 것이다. 이전 날에는 그 문이 없어서는 안 될 위치에 존재했으나 지금은 도리어 있어서는 안 될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것은 그 건물을 사용하는 자가 변한 까닭이 아니고 무엇이랴? 누구든지 저 양풍의 건축이 광화문의 존재를 무시하고 설계된 것인 것은 부인할 자가 없을 것이다. (4) 현대의 동양, 주마등과 같이 모든 것이 격변하여 가는 현대 조선에서는 저 광화문이야말로 참말 귀중한 유작품(遺作品)이 아닌가? 이 까닭에 그 파괴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지를 숨길 수 없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실현되려는 파괴에 대하여 아!! 우리는 무슨 말을 하랴? 저 광화문이 파괴를 당하고 그 대신에 무엇이 건설되겠는가? 우리는 위대한 자를 무익한 노력으로써 파괴하고 그 대신에 왜소한 문을 세우게 되는 날을 어쩔 수 없이 기다리게 되었다. 아!! 그러면 여러 사람은 눈물을 흘릴까? 그만 미쳐 버릴까? 어떠한 기예로라도 저 광화문보다 더 장엄하고 더 거대하고 더 아름다운 문을 세우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광화문과 장차 세울 문을 마음에 그리고 어느 문이 우월할까를 선택하여 보라! 그 선택함에는 일순간의 시간이라도 요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파괴가 기탄(忌憚) 없이 감행됨에야 무슨 말을 하면 좋을 것인가? 여러 사람은 결코 스러지지 아니 할 하나의 기억이 스러지라고 강제하는 날이 시시각각으로 가까워 옴을 알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스러지지 아니할 기억이 이 문자(文字)로써 여러 사람의 가슴에 인(印) 박힐 수가 있을는지? 어찌하여 저 광화문이 파괴를 당한다는 생각을 우리에게 줬는가? 아! 어찌하여 그 파괴되는 문을 구원할 수 없으리만치 그처럼 비참한 경우에 빠진 자기가 되었는가? 우리에게 그것을 변해(辯解·변명)할만한 변해다운 변해가 있을까? 우리가 이러한 파괴를 마음대로 하는 것은 우리의 우의(友誼) 상 정당한 일일까? 또는 이 건축에 대한 정당한 이해일까? 우리는 그 파괴를 시인할 만한 적극적 이유를 어디를 가든지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아! 우리는 공연히 대답할 수 없는 대답을 바라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파괴하는 그 사람은 대답하려고도 아니하고 파괴를 마음대로 행하고 있다. 아! 시간은 주저 없이 광화문의 사형(死刑)을 우리에게 고하고 있도다. 문은 재흥(再興)된 후로부터 겨우 50여 년의 성상(星霜)을 지났을 뿐이다. 그것이 어떻게 조성되었으며 누가 지었으며 또는 어떻게 완성되었는가는 지금도 오히려 새로운 추억이 아니냐? 그리하고 오히려 그러한 사실을 목격한 사람이 지금도 남아 있는 이 때에 이러한 파괴를 감행하여 그러한 기억을 추가케 하는 것은 그들에게 대하야 너무도 무정하고 무참한 행위가 아닌가? 나는 이러한 사정을 생각하고 파괴를 피하여 이전을 계획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면 이 자비스러운 처치로써 어떠한 운명을 광화문이 받을까? 다행히 죽음은 이로 인하여 면한다 할지라도 문이 가지고 있던 의의는 그만 반(半) 넘게 죽어 버리는 것이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문이요, 딴 곳의 문이 아니다. 저 위치와 저 배경과 저 좌우의 벽을 제하고는 광화문에 얼만한 가치와 생명이 있을까를 생각하여 보라! 형체는 남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만 추상적의 생명 없는 형체가 아니냐. 특히 자연과 건축과의 관계와 조화를 생각한 고인(古人)의 주의를 무시하고 그것이 얼만한 의의를 가지게 될 것인가? 아!! 그러면 다시 저를 ‘사(死)’에서 구원할 수는 없을까? 저의 존재와 가치를 시인하고 보호하려는 사람은 없는가? 저는 아직 젊도다. 육체는 완연히 건강하고 정신은 의연히 견고하지 아니한가! 때 아닌 죽음을 저에게 최촉(催促)하는 죄는 그 책임을 누가 지려는가! 아?! 광화문이여 너는 얼마나 적막히 생각하는가? 너의 많은 여러 벗들은 이미 너보다 먼저 죽어 바렷다. 도성의 서방(西方)을 장식하고 있던 돈의문(서대·西大)과 소의문(서소·西小)의 양 문은 벌써 시민의 눈에서 자취를 잃어버린 지가 오래다. 선년(先年)에 내가 혜화문(동소·東小)을 방문하였을 때 그 문은 보호자가 없는 까닭에 그 가련한 모양은 풍우(風雨)에 쓰러져 버릴 듯이 보였다. 너의 존귀한 형제인 숭례문(남대·南大)은 성벽에서 고립이 되었으며 또는 보잘 것 없는 철책으로 겨우 몸을 보전하고 있다. 사랑하여 주는 주인이 없는 너는 얼마나 그 짧은 운명을 애달피 생각하는가? 죽지 아니할 네가 죽지 않으면 안 될 이 세상을 얼마나 부자연하게 저주하고 원망하는가?(5) 아!! 문 앞에 안치된 2개의 큰 석사(石獅)여. 너는 오랫동안 잘 왕궁의 정문을 수호하였다. 추운 때나 더운 때나 어느 때를 물론하고 그 자태를 변치 않코 너에게 가까이 오는 자의 마음에 마다 위대한 권위로써 임하였다. 그리하고 문에 상당한 위엄과 확실로써 궁전에 더할 수 없는 미를 첨부하였다. 너는 지금도 묵묵히 전면을 바라보고 있으나 장차 네 주인의 신상에 내릴 운명을 위하여 너는 걱정하지 아니하는가? 아! 너는 자세히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너의 주인은 이미 임종의 상(床) 위에 누워 있는 것이다. 그리하고 너도 영원히 동(動)하지 않겠다는 그 장소로부터 장차 동하게 될 날이 가까워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아!! 그러면 너는 장차 어디로 가게 되려는가?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아니 너를 가져가는 그 사람까지도 그 날이 오지 않으면 그 곳을 알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용서해 다오? 나는 죄 있는 여러 사람을 대신하여 사죄하려고 한다. 나는 그 까닭에 지금 사죄의 붓을 든 것이다. 혹은 더운 여름철이나 또는 하늘 위에 눈송이 날릴 때나 그러하고 석모(夕暮)의 반월(半月)이 청백(靑白)의 빗을 누상(樓上)에 던질 때나 그 어느 때를 물론하고 나는 몇 번이나 여러 가지 생각을 마음에 그리고 그 문을 쳐다봤는지 알지 못한다. 지금도 그 거대한 모양이 아른아른 내 눈 앞에 떠오른다. 그런데 저 광화문이 이 세상에서 없어진다고 어떻게 생각할 수가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괴로운 현실임에야 어찌 하랴? 누구든지 그 문을 파괴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할 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떠한 사정으로 인하여 너를 이러한 비참한 파탄의 도정까지 인도하게 되었는가? 나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에 말한 그 말을 생각한다. ‘여러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지 알지 못 한다’ 하는 이 말을. 만약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안다고 하면 안 될 일을 하고 있는 그 우열(愚劣·어리석고 못남)한 죄를 지지 아니할 것이다. 광화문이여 장수할 너의 운명이 단명에 마치고 마는 것을 너는 얼마나 괴로이 생각하고 얼마나 적막히 생각하는가? 나는 네가 아직 건전(健全)하여 있는 그 동안에 다시 바다를 건너 너를 찾아가려 한다. 너는 나를 고대하여 다오! 그러나 나는 그 전에 시간을 이용하여 이 한 편을 쓰는 것이다. 너를 산출(産出)한 너의 친한 민족들은 지금 말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 까닭에 그러한 사람을 대신하여 너를 애석히 생각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너의 생전에 말하여 두고 싶다. 그 까닭에 나는 이 말을 기록하여 공중(公衆) 앞에 보내는 것이다. 이로써 너의 존재가 다시 한 번 의식 깊게 여러 사람에게 반성을 준다고 하면 나는 얼마나 기뻐하랴? 그리하고 내가 기록하는 이 문자로써 그 의식을 영원히 계속케 한다 하면 너도 얼마나 기뻐할 것이냐? 그러면 이것이 나의 기쁨이 아니고 무엇이랴?(1922. 7. 4. 도쿄에서)조종엽기자 jjj@donga.com}

1890년 중국 남부에서 페스트가 발생했다. 이 페스트는 윈난성에서 홍콩으로, 인도 뭄바이로 퍼져나갔으며, 1907년경까지 모든 대륙으로 확산했다. 이전의 유행이 주로 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에 국한됐던 것과는 달랐다. 그 배경에는 긴밀하게 연결된 세계 경제, 항해기술의 발전과 상품 수송시간의 단축 등이 있었다. 이후 오늘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유행으로 생긴 일들과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각국 정부는 페스트 발병지에서 출항한 선박을 항구에서 격리했고, 사람들의 입국을 막았다. 포르투갈 정부는 아예 해상무역을 중단시켰다. 1897년 베네치아 국제위생회의에서는 어느 선에서 상품 수입을 금지하고 출항을 규제할지를 둘러싼 국제적 합의가 이뤄지기도 했다. 의학사를 연구하는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가 풍부한 사례를 통해 전염병과 세계 무역, 방역의 관계를 조명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걸그룹 트와이스의 신곡 ‘모어 앤드 모어(MORE & MORE)’ 뮤직비디오 장면에 등장하는 세트가 해외 설치미술가의 작품과 매우 흡사해 원작자가 표절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트와이스는 1일 미니 9집 ‘모어 앤드 모어’를 발표했고 동명 타이틀곡의 뮤직비디오에는 호수 위에 설치된 알록달록한 아치 모양 구조물 앞에서 멤버들이 군무를 추면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구조물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설치미술가인 데이비스 매카티의 작품 ‘펄스 포털’(Pulse Portal)과 매우 닮았다. 이 작가는 2018년경부터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미국 볼티모어와 라스베이거스, 시애틀 등 도시에서 열린 전시회와 축제 현장에 이 작품을 설치한 사진을 올렸다. 작가는 최근 SNS에 “트와이스가 내 조형물을 표절해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 이는 예술에 대한 노골적인 저작권 침해”라고 글을 올린 것으로 전해졌다. 트와이스 소속사 JYP엔터테인먼트는 3일 공식 입장을 통해 “‘모어 앤드 모어’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세트가 기존 특정 작품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오늘 오전에 알았다”고 밝혔다. 이어 “뮤직비디오 제작사에 원작자와 대화를 통해 문제가 원만히 해결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며 “앞으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검증 시스템을 보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봉오동전투 100주년을 맞아 관련 전시가 잇달아 열린다. 이북5도위원회(위원장 이명우)는 봉오동전투 승전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사진기획전 ‘대한독립! 그날을 위한 봉오동전투’를 4∼16일 서울 종로구 이북5도청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당시 전장(戰場)의 오늘날 사진과 작전상황도 등을 통해 전투의 의미와 홍범도 장군의 생애를 조명한다. 전투의 시발점인 두만강 변 강양동 초소 원경, 전투가 벌어진 삼둔자 봉오동 전경 등이 전시된다. 봉오동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이 북간도 한인 3700여 명을 학살한 간도참변 역시 관련 사진을 통해 고발한다. 간도참변을 저지른 나남19사단과 예하 보병 제75연대의 병영 및 훈련 모습, 독립군 학살 장면 사진 등이 공개될 예정이다. 전시에서는 항일운동 기지였던 북간도 명동촌의 건설과 민족교육 장면 사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1920년 ‘대한민력’ 복제본 등도 볼 수 있다. 전시 자료는 명동촌을 개척한 규암 김약연 선생(1868∼1942)의 증손자 김재홍 함북도지사가 수집했다. 독립기념관도 ‘홍범도 일지 필사본’을 비롯해 독립군이 남긴 수기와 회고를 선보이는 특별전시를 4일부터 10월 25일까지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 특별기획전시실에서 연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물품의 가격 액수는 결코 소액이 아닙니다. 가령 소액이라 하더라도 해당 물품은 아군의 정신이고 또한 우리 민족의 심혈입니다.” 독립운동 단체 대한국민회 회장 대리 서상용(1873∼1961)이 1920년 중국군이 압수한 독립군의 군수품을 돌려받기 위해 작성한 문서 중 일부다. 압수품은 재봉기계와 총기용 기름, 군복, 약품 등이었다. 서상용은 이 글에서 “절대 타국 군인이나 민족에 위탁할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4일로 봉오동 전투가 시작된 지 100주년을 맞는다. 독립군이 대승을 거둔 건 1920년 6월 7일이지만 전투의 시작은 사흘 전인 6월 4일 홍범도(1868∼1943) 최진동(1882∼1945) 부대의 함북 종성군 일본군 헌병 초소 습격이다.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전개에 관해서는 연구가 적지 않지만 막상 승리의 바탕이 된 독립군의 무기와 보급 연구는 아직 부족한 편이다. 박환 수원대 교수는 최근 발간한 ‘독립군과 무기’(선인)에서 독립군 무장 현황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봤다. 책에 따르면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무장투쟁 노선으로 전환한 뒤 1920년 말까지 무장에 심혈을 기울였다.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북로독군부만 해도 당시 소총 900여 정과 폭탄 100여 개, 권총 약 200정, 기관총 2문 등을 갖추고 있었다. 탄환도 총 1정에 150발씩 있었다. 이 같은 무장은 간도 동포들의 피와 땀에서 비롯됐다. 1920년 7월 서상용의 보고를 보면 당시 장총 한 정은 탄환 100발 등을 포함해 35원이었다. 이는 그 시절 간도 노동자 한 명의 한 해 노임(30∼45원)과 맞먹는다. 한인들은 금비녀부터 요강까지 독립군을 위해 군자금으로 내놨다. 청산리 전투 당시 사용한 무기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철수하던 체코군단으로부터 구입한 것이라는 건 널리 알려져 있다. 책에 따르면 당시 체코의 골동품 시장에는 무기대금으로 받은 한국인의 금반지, 비단 보자기 등이 흘러나왔고, 놋요강도 끼어 있었다고 한다. 북간도의 철혈광복단은 용정에서 일경을 습격해 15만 원을 빼앗아 군자금으로 쓰기도 했다. 한인들은 전투요원은 아니더라도 무기 운반대원으로 나섰다. 독립군의 무기는 중국과 러시아 국경지대 한인들이 육로와 해로로 반입했다. 어깨에 직접 메고 나르거나, 밀송선 수레 말 우마차를 동원했다. 대한군정서에 관한 일본 측 보고는 1920년 무기 운반대원이 “노령 방면에서 약 1500명의 운반대를 모집함으로써 불일간 병기와 함께 도착하게 됐다”고 적었다. 북로군정서 분대장이었던 이우석 역시 200여 명의 운반대원이 장총과 탄환 ‘200짐’을 운반했다고 생전 구술했다. 전투요원의 생활도 열악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대한국민회의 군사 훈련에 대한 일본 측 보고는 “식사는 가장 조악한 조밥에 부식물로는 한인이 먹는 야생초, 파를 넣은 된장국뿐”이라고 했다. 어렵게 확보한 독립군의 무기는 러시아를 중심으로 독일 벨기에 미국 프랑스 영국 제품이었고,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노획한 것도 있었다. 박 교수는 “독립군은 동포들의 자발적 희생으로 만든 상당한 수준의 무장을 갖고 있어 승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경북 경주시 남산 약수곡 석조여래좌상절터에서 통일신라시대 석불좌상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보이는 불상의 머리(불두·佛頭)가 발굴됐다. 문화재청은 “경주시가 일제강점기 석조여래좌상의 원위치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좌상의 머리로 추정되는 불두를 발견했다”고 3일 밝혔다. 조사 당시 석조여래좌상은 원래 자리에서 옮겨져 있었고, 그 옆에 불상 대좌(불상을 놓는 대)의 중대석과 상대석이 불안정한 상태로 노출돼 있었다고 한다. 하대석도 원래 위치에서 움직여 큰 바위 아래에 놓여 있었다. 이 바위 옆(서쪽)에서 머리는 땅속을 향하고 얼굴은 서쪽을 바라보는 상태로 발견됐으며 얼굴 오른쪽과 귀 일부에서 금박이 관찰됐다고 문화재청은 밝혔다. 머리가 유실됐던 석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 후기 작품으로, 경주 석굴암 본존불상처럼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왼 손바닥은 펴서 위로 향하게 단전에 올리고 오른손은 펴서 무릎 아래 땅을 가리키는 모습의 인상)을 하고 있다. 통일신라 석불좌상의 대좌는 상당수가 팔각형인 데 비해 이 불상의 대좌는 네모다. 경주 이거사지 출토품으로 알려진 청와대 대통령 관저 뒤편 녹지원의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보물)과 형식이 같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걸그룹 트와이스의 신곡 ‘모어 앤드 모어’(MORE & MORE) 뮤직비디오 장면에 등장하는 세트가 해외 설치 미술가의 작품과 매우 흡사해 원작자가 표절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트와이스는 1일 미니 9집 ‘모어 앤드 모어’를 발표했고, 동명 타이틀곡의 뮤직비디오에는 호수 위에 설치된 알록달록한 아치 모양 구조물 앞에서 멤버들이 군무를 추면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구조물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설치미술가인 데이비스 맥카티(Davis McCarty)의 작품 ‘펄스 포털’(Pulse Portal)과 매우 닮아 있다. 이 작가는 2018년경부터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미국 볼티모어와 라스베이거스, 시애틀 등 도시에서 열린 전시회와 축제 현장에 이 작품을 설치한 사진을 올렸다. 작가는 최근 SNS에 “트와이스가 내 조형물을 표절해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 이는 예술에 대한 노골적인 저작권 침해”라고 글을 올린 것으로 전해졌다. 트와이스 소속사 JYP엔터테인먼트는 3일 공식 입장을 통해 “‘모어 앤드 모어’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세트가 기존 특정 작품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오늘 오전 알았다”고 밝혔다. 이어 “뮤직비디오 제작사에 원작자와 대화를 통해 문제가 원만히 해결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며 “앞으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검증 시스템을 보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

문화재청은 정면 9칸으로, 국내 사찰 누각으로는 가장 큰 전북 고창 선운사 만세루(萬歲樓)를 보물로 지정했다고 1일 밝혔다. 1620년 지은 만세루는 화재로 소실돼 1752년 다시 지었다. 정면 9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현존하는 사찰 누각은 대체로 정면 3칸이고, 5칸이나 7칸 규모도 있지만 9칸 규모는 흔치 않다. 처음에는 중층이었지만 재건하며 단층으로 지었다고 한다. 특히 가운데 칸 높은 기둥에 있는 마룻보(대들보 위에 설치되는 마지막 보)는 한쪽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나무를 그대로 사용해 활기 넘치는 인상을 준다. 문화재청은 “만세루는 조선 후기 불교 사원의 누각 건물이 시대 흐름과 기능에 맞춰 구조를 적절하게 변용한 사례이며, 자재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만들어낸 독창적인 건축물”이라고 설명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이제 ‘86세대’가 민주화의 ‘성직’을 내려놓게 하자.” 진보 성향의 계간지 ‘문화/과학’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임명 사태 등을 계기로 ‘86세대’를 비판적으로 다룬 특집을 올 여름호(102호)에 냈다. 김현준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은 특집에 기고한 ‘86세대 지식인의 계급투쟁: 대리 정치와 표상의 독점’에서 최근 ‘조국 수호’에 나선 이 세대 일부 지식인을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김 연구원은 “‘조국 사태’로 드러난 건 민주 진영을 공격하기 위한 반민주 진영의 음모 따위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이었다”며 “그럼에도 일부 86세대 지식인은 불평등과 공정성의 문제가 촉발한 조국 비판을 ‘반민주’로 매도했다”고 지적했다. ‘86세대’의 엘리트들은 사실상 지배계급 내 편입을 시도하는 ‘상승 지향’ 세대라는 것이 김 연구원의 견해다. 그는 글에서 “이 세대가 스스로를 ‘민주화의 상징’ ‘도덕의 대변자’로 여기면서 민중을 대리한다는 자기 기만에 빠진 것은 아닌가”라고 물었다. 강정석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 사무국장은 ‘계급 유지 전략으로서의 교육의 문제: 불평등의 구조화와 86세대’에서 “조 전 장관과 가족을 둘러싼 입시 비리 의혹은 한국 교육이 불평등을 고착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며 “소위 ‘86세대’는 자신들이 얻은 경제적 사회적 자원을 자녀 세대에 안정적으로 세습하는 방법으로 공정치 않은 교육제도를 활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성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86세대를 동질적 집단으로 규정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보고 권력과 부, 정보를 배타적으로 소유한 ‘파워 엘리트 86세대’에 비판의 초점을 맞췄다. 김 교수는 기고문 ‘파워 엘리트 86세대의 시민 되기와 촛불민심의 유예’에서 “파워 엘리트 86세대는 IMF 외환위기로 인한 정리해고를 비켜갔고 노동유연화 정책의 집행자로 참여했을 뿐 아니라 부동산으로 부를 축적하는 등 시류에 부합해 한국 사회의 상층으로 진입했다”며 “그럼에도 삶의 궤적을 ‘민주주의’로 정당화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또 “청년 세대의 좌절은 촛불 민심을 근거로 헤게모니를 잡은 86세대가 스스로 청산 대상이 됐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이 밖에도 이번 특집에서는 ‘86세대의 문화 권력과 그 양가성에 대하여’(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대학 고용구조의 양극화와 86세대’(박치현 성균관대 강사), ‘86세대와 여성’(박혜경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초빙교수)의 글이 실렸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6세기 북미의 화산 폭발이 고구려에 기근을 일으키고 국제정세를 바꿨을까? 기후가 우리 역사에 미친 영향을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한국역사연구회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은 학술회의 ‘인류세와 생태환경사: 한국 기후사의 모색’을 5월 30일 서울 중구 대우재단빌딩에서 개최했다. 한국사에서 환경의 영향에 관한 연구는 고대로 올라갈수록 자료 부족 등으로 인해 별 진척이 없었다. 학술회의 발표문 “한국사에서 ‘536년 화산’의 이해와 적용”(서민수 건국대 사학과 박사 수료)은 6세기 이상기후가 만든 재앙을 다룬 영국의 저자 데이비드 키스 등 해외 연구를 소개한 뒤 한국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추적했다. 발표문에 따르면 536년경 유럽과 중동 일대에서 햇빛이 약해졌다는 기록이 있고, 북반구 각지의 나무 나이테는 이 시기 기온 하강을 보여준다. 계절풍의 약화로 건조한 날씨가 지속됐다. 중국에는 이 시기 여름철에 눈과 서리가 내렸다는 기록이 있고, 541년 신라에는 3월(음력)에 눈이 한 척(尺)이나 왔다. 중국 북조와 고구려에서 서리와 가뭄, 기근, 혹한, 병충해가 일었다. 한랭 건조한 기후는 550년경까지 이어졌고, 농업생산량은 감소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536년 기근으로 인한 진휼(賑恤·곤궁한 백성을 구제함)과 왕의 순무(巡撫·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백성을 위로함)가 기록돼 있다. 536, 549, 550년에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참상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상기후는 535, 536년경 북반구에서 화산이 대규모로 분화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범인’은 북미나 아이슬란드, 일본 등지의 화산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발표문은 “‘536년 화산 분화’는 중국과 한반도 일대에 갑작스러운 기후의 한랭건조화를 초래했고 만성적 기근이 광범위한 인구 이동을 유발했을 뿐 아니라 북방 유목민의 이합집산을 가속화했다”며 한반도 주변 국제정세 재편을 촉발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날 학술회의에서 김미성 KAIST 인문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은 조선 현종, 숙종 시기 이상기후로 발생한 대규모 유민(流民)이 서울에 몰려 조선 후기 상업 발전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이 밖에도 ‘1939년 조선 대가뭄의 양상과 그 여파’(고태우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동해 명태 회유로의 이동과 남북한 냉전’(조수룡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이 발표됐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경북 경주 신라 고분에서 43년 만에 금동(金銅) 신발이 새로 출토됐다. 문화재청은 경주 황남동 120-2호분에서 금동 신발과 허리띠 장식용 은판(銀板), 각종 말갖춤(마구·馬具) 장식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고 27일 밝혔다. 신라 금동 신발은 실생활에서 쓰던 것이 아니라 장사를 치르기 위해 의례용으로 만든 것이다. 경주 신라 고분에서 이 같은 신발이 출토된 것은 1977년 경주 인왕동 고분군에서 나온 이후 처음이다. 한 쌍인 금동 신발은 매장된 시신의 발치에서 발견됐다. 표면에는 ‘T’자 모양의 무늬가 뚫려 있고, 둥근 금동 달개(영락·瓔珞)가 달려 있다. 신발은 27일 현재 완전히 파낸 것은 아니어서 계속 발굴 중이다. 경주 황남대총 남분에서도 비슷한 모양의 금동 신발이 출토된 적이 있다. 조사기관인 신라문화유산연구원 김권일 선임연구원은 “금동 신발이 나왔다는 건 무덤에 묻힌 사람이 왕족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또 시신의 다리 부분에선 허리띠 장식에 쓰인 은판이 드러났고, 머리 부분에서는 여러 점의 금동 달개가 확인됐다. 이 달개는 머리에 쓰는 관(冠)이나 관 꾸미개(관식·冠飾)일 가능성이 있다고 문화재청은 밝혔다. 부장품으로는 금동 말안장(안교·鞍橋)과 금동 말띠꾸미개(운주·雲珠) 등이 출토됐다. 황남동 120호분은 경주 대릉원 일원에 있다. 일제강점기 때 고분 번호가 부여됐지만 민가가 들어서면서 훼손돼 고분의 존재를 명확히 확인할 수 없는 상태였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길이 하나 막혔다고 끝은 아니다.” 간송미술관 측이 재정 압박을 해소하기 위해 27일 케이옥션 경매에 내놓은 보물 불상 2점이 유찰되면서 간송 측의 향후 행보에 문화재계의 관심이 모이고 있다. 간송미술문화재단 관계자는 이날 유찰 소식을 접한 뒤 본보와의 통화에서 “기왕 하기로 한 이상 (경매에서)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했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그리고 “경매 결과와 관계없이 간송미술관은 새로운 길을 걷겠다는 기조를 살려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간송가(家)가 내놓은 금동여래입상과 금동보살입상의 경매 시작가는 각각 15억 원으로 경매사가 호가를 불렀음에도 응찰에 나선 이가 없었다. ‘민족문화유산의 수호자’ 전형필 선생의 후손으로서 문화재를 매각한다는 부담을 감수하고 매각에 나선 간송 측으로서는 상처가 작지 않은 게 사실이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배기동) 역시 전날 본보에 밝힌 대로 이날 경매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27일 “국립중앙박물관이 민간 후원회와 함께 구입하는 쪽으로 케이옥션과 상의하고 있다”고 밝힌 배 관장의 인터뷰가 한 언론에 나가면서 경매 유찰에 영향을 준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원래도 ‘간송 컬렉션은 국공립기관이 소장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던 차에 관장의 발언이 사립미술관이나 개인 수집가의 응찰을 더욱 주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 문화재계 인사는 “의도야 어쨌건 국립중앙박물관의 처신이 적절하지 않았다”라고 꼬집었다. 실제로 국립중앙박물관은 구입을 위한 물밑 협상을 거의 벌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일단 ‘시간을 벌었다’는 분위기다.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는 “경매를 이틀가량 앞두고 케이옥션에 ‘경매 중지’가 가능한지 문의했지만 ‘그대로 진행하는 게 자연스럽다’는 취지의 답을 들었다”고 했다. 이날 불상의 경매 시작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한 문화재 관계자는 “당대 문화재 가운데 유일한 작품이었으면 경매 결과는 달랐을 것”이라고 했지만 다른 전문가는 “경매 시작가 이상의 가치가 있는 문화재”라고 했다. 이번 경매한 주관한 케이옥션 역시 매각을 성사시키지는 못했다는 측면에서 타격이 없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간송 측이 앞으로는 ‘조용히’ 매각에 나설 것이라는 추정도 나온다. 최근 고미술 시장에서 거액의 거래가 침체됐기에 간송 측이 경매 방식을 택했지만 ‘리트머스시험지’ 성격의 이번 시도가 무위로 돌아간 이상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번 일을 계기로 ‘간송 컬렉션’에 관해 근본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최응천 동국대 교수(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는 “아무리 사유물이라 해도 간송 컬렉션 가운데 중요 문화재의 구입은 국공립기관이 예산 탓을 하며 너무 잴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광표 서원대 교수는 “간송미술관이 사립이지만 공공성의 역사를 가진 이상 간송 측도 어려움을 솔직히 털어놓고 사회도 지원하는 것에 대해 공개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길이 하나 막혔다고 끝은 아니다.” 간송미술관 측이 재정압박을 해소하기 위해 27일 케이옥션 경매에 내놓은 보물 불상 2점이 유찰되면서 간송 측의 향후 행보에 문화재계의 관심이 모이고 있다. 간송미술문화재단 관계자는 이날 유찰 소식을 접한 뒤 본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기왕 (경매에 내놓는) 방향으로 가기로 한 이상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했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그리고 “경매 결과와 관계없이 간송미술관은 새로운 길을 걷겠다는 기조대로 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간송가(家)가 내놓은 금동여래입상과 금동보살입상의 경매 시작가는 각각 15억 원으로 경매사가 호가를 불렀음에도 응찰에 나선 이가 없었다. ‘민족문화유산의 수호자’ 전형필 선생의 후손으로서 문화재를 매각한다는 부담을 감수하고 매각에 나선 간송 측으로서는 상처가 작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번 유찰은 ‘간송 콜렉션은 국공립기관이 소장해야 한다’는 여론에 사립미술관이나 개인 수집가들이 응찰을 주저했던 탓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 문화재 전문가는 “간송 측으로서는 경매를 통해 깔끔하게 작품을 매각하고자 했을 텐데, 국립중앙박물관이 협의를 통해 구매하고 싶다는 의향을 경매에 임박해 공개적으로 밝혔기에 사립미술관이나 개인들로서는 응찰 부담이 컸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립중앙박물관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는 “간송 측이 경매 출품 전 박물관과 협의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않았다”며 “경매를 이틀 가량 앞두고 케이옥션에 ‘경매 중지’가 가능한지 문의했지만 ‘그냥 진행하겠다’는 취지의 말을 들었다”고 했다. 박물관으로서도 구입 의향이나 방식을 정하기에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는 반면, 간송 측과 적극 협의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지적도 있다. 경매 시작가(15억 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한 문화재 전문가는 “당대 문화재 가운데 유일한 작품이었으면 경매 결과는 달랐을 것”이라고 했지만 다른 관계자는 “경매 시작가 이상의 가치가 있는 문화재”라고 했다. 케이옥션 역시 이번 경매에 국민의 이목이 집중되는 상황이 됐음에도 매각을 성사시키지는 못했다는 측면에서 이미지에 타격이 없지 않다는 평가다. 경매 사실이 공개됐음에도 매각에는 성공하지 못한 간송 측이 이제는 ‘조용히’ 매각에 나설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광표 서원대 교수는 “최근 고미술 시장에서 거액의 거래가 침체된 상황에서 간송 측이 경매 방식을 택했을 것으로 본다”면서 “‘리트머스 시험지’ 성격의 이번 경매 시도가 무위로 돌아간 이상 다른 방법을 찾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간송 콜렉션’에 관해 근본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최응천 동국대 교수(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는 “이번 불상 매각 시도를 통해 앞으로의 해법을 만들어야 한다”며 “아무리 사유물이라 해도 간송 컬렉션 가운데 중요 문화재의 구입은 국공립기관이 예산 탓을 하며 너무 잴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참 만남, 참 문화유산(Feel the REAL KOREAN HERITAGE).’ 문화재청이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과 방문을 촉진하기 위해 26일 문화유산 방문 캠페인을 시작했다. 문화재청은 이날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선포식을 열고 “문화유산과 사람 간 거리를 좁히고, 문화유산을 국민을 위한 공간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캠페인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캠페인은 국내 유네스코 세계유산과 인류무형유산을 2, 3일 자유 여정으로 즐길 수 있는 문화유산 방문 코스 7선(選)을 제안했다. ‘한국 문화유산의 길’로 명명한 방문 코스는 △경주와 안동을 중심으로 한 ‘천년 정신의 길’ △공주와 부여, 익산을 둘러보는 ‘백제 고도의 길’ △우리 옛소리를 주제로 전북과 전남 지역을 둘러보는 ‘소릿길’ △제주도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설화와 자연의 길’ △서울과 인천, 경기의 궁과 산성을 둘러보는 ‘왕가의 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서원과 산사를 각각 묶은 서원의 길, 수행의 길 등이다. 문화재청은 교통편과 주변 명소 및 숙박 등 관광정보를 담은 ‘문화유산 방문 지도·가이드북’을 제작해 전국 관광안내소 및 온라인에서 제공한다. 세계유산축전을 비롯한 여러 특별 행사도 벌인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알리는 축제 ‘세계유산축전’은 ‘한국의 서원’ 등을 주제로 경북과 제주 등에서 올 7∼9월 펼쳐진다. 7월에는 수원 화성을 무대로 케이팝 공연과 한복 패션쇼 등이 펼쳐지는 축제 ‘코리아 온 스테이지(KOREA on Stage)’가 열릴 예정이다. 5대 궁(경복 창덕 창경 덕수 경희)을 주제로 한 ‘궁중문화축전’은 10월 10∼18일 열린다. 기존 문화유산 전시와 공연도 캠페인에 연계해 운영한다. 전북 전주 국립무형유산원의 무형문화재 전시·공연, 충남 공주를 비롯해 전국 36개 문화유산에서 한밤에 즐길 수 있는 ‘문화재 야행’, 전국 주요 박물관 특별 전시, 문화재 발굴·수리 현장 공개, 조선왕릉문화제 등이 준비돼 있다. 문화재청은 문화유산을 즐기는 새로운 방식이 생기고, 한류 확산으로 문화의 사회경제적 가치가 새롭게 부각되는 시대 흐름에 따라 방문 캠페인을 진행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우리 유산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휴식과 관광, 치유의 공간으로서 문화유산의 매력을 알리게 될 것”이라며 “문화유산은 대다수가 실외에 있어 ‘생활 속 거리 두기’를 하며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고 말했다. 이번 캠페인은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이 주재한 확대국가관광전략회의에서 관광혁신을 이끌 사업으로 선정됐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이날 선포식에서 “우리나라는 전국이 ‘지붕 없는 박물관’과 다름없을 정도로 문화유산 강국”이라며 “캠페인이 내수경기 회복의 마중물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간송미술관이 27일 케이옥션 경매에 출품하는 금동여래입상(보물 284호)과 금동보살입상(보물 285호)의 새 주인이 누가 될지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공식적으론 응찰 여부를 아직 결정 안 했다고 하지만 사실상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졌다.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는 26일 통화에서 “(예상 가격) 범위가 만만치가 않아 박물관이 경매에서 (낙찰 경쟁에) 따라갈 예산상 능력이 안 된다”며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경매에 참여할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두 불상은 경매 시작가가 각각 15억 원(변동 가능)이 될 것으로 알려졌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 구입 비용은 연간 약 40억 원 수준에 불과하다. 문화재청이 필요 시 구매 예산 지원이 가능한지 검토할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지만 그래도 낙찰을 받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 더구나 성격상 중복되는 유물이 이미 박물관에 없지 않고, 향후 간송가(家)에서 소장 문화재 가운데 국보인 불상과 불감 역시 매물로 내놓을 가능성이 있어 박물관 측의 고민은 더욱 깊다. 이 관계자는 “국립박물관의 임무를 다하고 싶지만 능력이 모자라 너무나 안타깝다”며 “힘을 다해 유물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 중이지만 파는 쪽(간송미술관)에서도 유물이 공공적 성격을 띤 기관에 안착할 수 있도록 전향적으로 검토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간송 컬렉션’이 일부라도 흩어지는 것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지정문화재가 시장에 나올 때마다 국가가 구입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한 문화재계 관계자는 “물론 국가기관에 들어가는 게 전시나 보존 면에서 가장 좋기는 하겠지만, 사유물의 거래에 나라가 일일이 뛰어들 수는 없는 일이고, 간송 컬렉션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불상의 낙찰가도 주목된다. 지금까지 경매에서 최고가를 기록한 보물은 청량산괘불탱으로 2015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35억2000만 원에 개인에게 낙찰됐다. 2012년에는 서화첩인 ‘퇴우이선생진적첩’이 34억 원에 낙찰됐다. 이번 경매에 나오는 두 불상은 모두 청동에 도금해 제작됐다. 금동여래입상은 높이 37.6cm의 7세기 중반 불상이다. 눈은 감고 입을 오므리면서 꾸밈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해 보는 이에게 감동을 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옷 주름은 가지런하면서도 오른쪽 어깨의 옷이 흘러내릴 듯 자연스럽게 표현됐다. 금동보살입상은 6세기 말∼7세기 초 불상으로 경남 거창에서 출토됐다고 전해진다.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긴 편이다. 얼굴은 가늘게 찢어진 눈과 앞으로 내민 입술, 툭 튀어나온 광대뼈가 어울려 토속적 인상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두 불상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됐다. 금동보살입상의 출토지가 신라의 영역인 경남 거창인데 백제 양식이 섞인 점을 두고 진위를 검토하는 게 먼저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간송미술관 관계자는 최근 본보와의 통화에서 “학계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고 말을 아꼈다. 불교미술사 전문가인 최응천 동국대 교수(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는 “필요하다면 조사할 수 있겠지만 간송의 소장품들은 당대 쟁쟁한 분들의 검증을 거친 것이고, 출토지가 명확한 게 아닌 이상 백제 양식이 보인다 해도 어색하지 않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지금만큼 시대별, 나라별 불상 양식이 파악되기 전인 1960년대에는 이 정도의 위작을 만들 수준이 아니었다”고 덧붙였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937년 소련이 연해주 한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킬 당시 한인들을 ‘잠재적 위험분자’로 보고 신분증명서와 소지한 무기를 열차 탑승 전 회수한 것으로 드러났다. 홍웅호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연구교수는 23일 경기문화재단과 인천문화재단, 한국역사연구회가 연 심포지엄 ‘역사 속의 디아스포라와 경계인’에서 이같이 밝혔다. 홍 교수는 발표문 ‘1937년 연해주 한인 강제이주 결정과 그 진행’에서 러시아문서보관소 자료를 통해 이주 과정을 살폈다. 당시 불과 4개월 동안 한인 17만 명 이상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강제 이주됐다. 발표문에 따르면 당시 소련 극동변강위원회는 “공산당원과 콤소몰(공산주의 청년 정치조직) 맹원들을 등록명부에서 삭제하고, 탈퇴서를 교부한다”고 지시했다. 홍 교수는 “이는 그동안 유지되던 신분이 무효라는 뜻”이라며 “한인 사회에 일본 정보원이 침투했다는 걸 전제로 한인을 배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결과 한인들은 이동의 자유를 박탈당했고,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1956년 신분증이 다시 발급된 뒤에야 이동의 자유를 얻었다. 강제이주 결정에 한인은 물론 러시아인도 저항했다. 김평하라는 인물은 무기 회수에 거부했고, 리진화라는 인물은 “소비에트 정권이 한인들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추방하고 있다”고 말했다가 구속됐다. 한 러시아인 관료는 회의 중 당원증을 책상에 던지면서 “(이주 결정은) 헌법을 완전히 위반하는 것이다. 나중에는 나머지 모든 사람을 추방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 체포됐다. 엄청난 혼란의 와중에도 한인들은 이주를 앞두고 조상의 유골을 챙기기도 했다. 당시 조사보고서는 1937년 9월 한인들이 묘지 7곳을 파헤치고 망자 일부의 유해를 꺼내갔다며 한인들이 새로운 지역으로 이주할 경우 망자의 뼈까지도 가져가는 관습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겨레신문은 지난해 10월 ‘윤석열 검찰총장이 건설업자 윤중천의 별장에서 접대를 받았다’는 의혹을 보도한 데 대해 “부정확한 보도였다”며 22일자 1, 2면에 걸쳐 사과문을 냈다. 한겨레신문은 사과문에서 “당시 (법무부 과거사위원회 조사보고서에) 윤 총장이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스폰서였던 건설업자 윤중천의 별장에 들러 접대를 받았다는 윤 씨의 진술이 나왔으나 추가 조사 없이 마무리됐다고 보도했다”며 “하지만 ‘수차례’ ‘접대’ 등 보고서에 없는 단어를 기사에 사용하고, 1면 머리기사 등에 비중 있게 보도함으로써 윤 총장이 별장에서 여러 차례 접대를 받았는지에 관심이 집중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밝혔다. 이어 “보도된 지 여러 달이 지났지만 윤 총장의 별장 접대 의혹에 대해 증거나 증언에 토대를 둔 후속 보도를 하지 못했다”면서 “정확하지 않은 보도를 한 점에 대해 독자와 윤 총장께 사과드린다”고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