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이렇게 좁은 땅에 어떻게 집을 짓지?” “한 두 사람 살기엔 이 정도면 충분해!” 1인 가구가 늘어나고, 부동산 가격이 치솟으면서 자투리 땅을 활용한 개성있는 작은 집 짓기가 트렌드로 떠올랐다. 넷플릭스에서도 리얼리티쇼 ‘Tiny House Nation’(도전! 협소주택)이 큰 인기를 끌면서 미니멀한 삶을 꿈꾸는 협소주택 열풍은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서울 종로구 낙산공원에서 동대문으로 넘어가는 첫 동네. 한양도성의 고즈넉한 풍경과 숲이 어우러진 동네에 ‘세로로(SERORO)’라는 이름의 흰색 건물이 올 봄에 들어섰다. 33㎡(10평)에 불과한 땅에 5개 층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협소주택이다. 이 집을 지은 사람은 신혼부부인 최민욱 씨(39·스몰러건축 소장)와 정아영 씨(34·와인강사) 부부. 이들은 올해 3월 결혼하면서 이 집을 짓고 입주했다. 남편의 사무실은 대학로. 서울성곽을 따라 낙산공원을 걸어서 넘어 출퇴근을 한다. 야경이 멋진 핫플레이스 데이트코스가 통근길인 셈이다. 대부분의 집은 여러 개의 방들이 수평으로 놓여 있게 마련. 그러나 이 집은 침실과 거실, 주방 등이 블록처럼 수직으로 쌓여 있는 형태다. 필로티 주차장인 1층에서 올라가면 2층은 서재 겸 작업실, 3층은 주방과 거실, 4층은 침실, 5층은 옷방과 욕실로 구성돼 있다. 2,3층은 주로 일하거나 식사하고, 손님을 맞는 공간이고, 4,5층은 사생활 공간이다. 2층 작업실에서는 남편이 설계업무를 하거나, 아내가 와인강의 준비를 하는 등 집이 일터가 되기도 한다. 각 층에 있는 방은 불과 16.5㎡(5평)에 불과하다. 사용하는 공간이 4개 층이니 총 20평짜리 집이다. 그러나 실제로 들어가서 보면 답답하지 않다. 가장 큰 이유는 숲과 마을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창문 때문이다. 2개면으로 나 있는 창문을 통해 비가 올 때 빗소리와 흙냄새, 나무향기가 퍼지고,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숲에 눈 내리는 모습이 창밖으로 펼쳐진다. 또한 딱따구리와 족제비와 같은 온갖 새들과 동물도 나타난다. 반면 도로와 접한 2개면은 프라이버시를 고려해 창문을 최대한 절제했다. “이사 후 창 밖을 보며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3층 주방에서 마주보고 커피를 마실 때면 경치 좋은 카페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듭니다. 저녁엔 집 근처 서울성곽과 낙산공원으로 산책을 가죠. 우리 부부는 ‘서울로 귀농한 느낌’이라고 말해요.” 협소주택의 가장 좁고 높은 집을 오르락내리락하려면 무릎이 아프지 않을까? 최 씨는 “낮과 밤 시간대의 동선을 철저히 고려해 설계했다. 아침에 일어나 씻고 내려오면 주로 밑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다”고 말한다. 최 씨는 이 땅을 3.3㎡당 1000만 원씩 1억 원을 주고 샀다. 공사비는 1억7000만원으로 총 2억7000만 원이 들었다. 그가 협소주택을 지으려고 마음먹은 것은 5년 전. 친구가 서울 강동구에서 오피스텔을 구하려고 하는데 4억 원에 전세도 구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결혼하기로 약속한 여자친구와 함께 “대출금에 치이느니 차라리 감당할 수 있는 작은 집을 짓자”며 의기투합했다. 경기도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던 최 씨는 통근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서울에서 집 지을만한 땅을 찾아다녔다. 가격이 저렴해보이는 곳은 강남의 자투리땅, 강북의 산동네까지 다 뒤졌다. 드디어 대학로 사무실과 가까운 창신동에서 땅을 찾았다. 1930년대에 지어진 폐가였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지붕은 무너지고, 들고양이들의 아지트였던 곳이었다. “집을 내놓은 지도 꽤 오래됐는데 아무도 사겠다는 사람이 없었답니다. 부동산에서도 ‘거기는 집을 못 짓는 땅’이라고 했어요. 과연 10평의 땅에 집을 지을 수 있을지 저도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 제가 설계했던 빌딩의 엘리베이터와 계단이 있는 공간보다도 작은 크기였지요.” 그는 1년 동안 설계를 다듬으며 고심했다. 그가 이 곳에 새 집을 짓기 시작하자 동네사람들은 환영했다. 보기 흉했던 폐가가 ‘귀여운’ 새 건물로 탄생하는 모습을 보고 따뜻한 응원과 격려를 보낸 것이다. ●“세상에 나쁜 땅은 없다”… 얇디얇은 집 서울 서초구 잠원동의 ‘얇디얇은 집’은 올해 서울시 건축상을 수상했다. “집이란 어떤 공간에 어떤 형태를 띠어야 한다는 상식을 깬 곳”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입구 쪽 폭이 1.4~2m에 불과한 땅에 지하1층, 지상4층짜리 건물을 지었다. 반면 높이는 20m에 이른다. 그야말로 책을 한 권 세워놓은 것처럼 얇고 길쭉한 집이다. 이 집은 영상촬영과 편집을 하는 두 부부가 산다. 1층과 지하는 작업실이고, 2층은 거실과 부엌, 3층은 침실과 자녀방, 4층에는 지붕 테라스와 옥탑방이 있다. 1개 층의 건평이 대략 33㎡(10평) 정도다. 원래 이 땅은 경부고속도로 소음을 막기 위한 완충녹지를 만들고 남은 자투리 땅이었다. 서울시 소유였지만 공공부지로는 활용하지 못해 일반에 매각했다. 여러 번 유찰된 끝에 5~6년 전에 주변 시세의 절반가격에 낙찰됐다. 이 땅을 구입한 매수자는 집을 짓기 위해 여러 설계사무소를 다녀봤지만 모두들 고개를 가로저었다고 한다. 그러다 지금의 주인이 다시 사들여 AnL스튜디오에게 맡겨 집을 지었다. “서울에서 집짓기 좋은 땅은 이미 집이 다 들어섰다고 보면 됩니다. 공공이든 민간이 갖고 있는 땅이든 좁고 길거나, 도로변 모퉁이 삼각형 모양의 비정형적인 필지만 남았죠. 요즘에는 이런 자투리땅을 매입해 지은 개성 있는 집들이 단조로운 도시풍경을 바꾸고 있습니다.”(신민재 AnL스튜디오 소장) 이 집은 각 층이 복도처럼 길쭉하게 생겼다. 집을 좁게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화장실이나 욕실을 빼고는 칸막이나 문을 거의 만들지 않았다. 또한 고속도로 완충녹지를 향해 커다란 창문을 만들어 자연을 감상하게 했다. 창신동 ‘세로로’ 집이나 잠원동 ‘얇디얇은 집’은 창문을 통해 숲과 공원의 풍경을 끌어들여 집이 넓게 보이는 효과를 낳았다. 협소주택의 평당 공사비는 보통주택에 비해 1.5배 이상 든다. 같은 면적이라도 층층이 쌓아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신 소장은 “세상에 나쁜 땅은 없다. 땅이 무슨 죄가 있겠느냐.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목적에 맞지 않는다고 나쁜 땅인가. 작지만 그 땅의 컨디션을 잘 이해하고 활용하면 건물이 가치를 지니게 된다”고 말했다. ●협소주택에 산다는 것 작은 집에 산다는 것은 미니멀 라이프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가구나 물건들을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협소주택에 살기 위해서는 그동안 갖고 있던 살림살이를 버리고, 비워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넷플릭스의 ‘Tiny House Nation’에서도 진행자인 존과 잭은 협소주택에 살고 싶어 하는 의뢰인에게 먼저 짐을 줄이는 교육을 시킨다. 이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협소주택으로 이사하려는 이유는 평생 모기지(주택담보대출)를 갚으며 살기 싫어서, 자녀 등록금을 내기 위해서, 청소 등 집안 관리에 시간을 뺏기지 않고 단순하게 살고 싶다 등 다양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큰 집에서 살다가 16.5~33㎡의 집으로 옮길 때는 준비가 필요하다. 작은 집에 더블사이즈 침대, 쇼파, 책상, 주방, 화장실까지 집어넣는 신기에 가까운 인테리어 아이디어를 대방출하는 프로그램이지만 사람들의 요구는 끝이 없다. “큰 오븐이 있어야 해요” “턴테이블은 꼭 갖고 가야해요” “그랜드 피아노가 들어가야 해요”…. 창신동 ‘세로로’ 주택을 지은 최 소장은 가구 크기까지 미리 염두에 두고 설계를 했다. 장롱과 냉장고와 세탁기 등의 가전제품의 크기를 미리 정해놓고 집 내부 벽체를 설계했다. 또한 가구가 들어올 수 있도록 창틀까지 한꺼번에 양쪽으로 열리는 대형 창문을 설치했다. 그는 “협소주택을 지을 때는 가구 크기는 물론 가구가 들어올 방식까지 계획하지 않으면 창문이나 유리를 뜯어내야 하는 불상사가 벌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최 소장은 또한 단열재를 콘크리트 외부에 붙여 공간을 조금이라도 넓게 만들었다. 그는 “협소주택에서는 1,2cm도 아쉬운데, 단열재를 외부에 시공하면 단열효과도 더 크고, 평균 10cm 정도의 공간이 더 커지는 효과를 갖게 된다”고 말했다. 잠원동 ‘얇디얇은 집’에도 좁고 길쭉한 땅의 모양 때문에 시중에 판매하는 가구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현장에서 공간에 맞춰 가구와 주방기구를 붙박이식으로 제작해 설치했다. 다행히 거주하는 부부는 원래 가구나 짐을 많이 갖고 있지 않았다. 이사 올 때 옷가지 정도만 싸들고 왔다고 한다.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작은 집의 혁명’ 홍콩에서는 대형 콘크리트 수도관으로 만들어진 협소주택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홍콩의 건축사무소 ‘제임스 로 사이버텍처’가 만든 ‘오포드 튜브 하우스(OPod Tube House)’다. 홍콩은 세계의 주요 도시 중에서 내집 마련이 가장 어려운 도시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일자리를 찾아 홍콩으로 몰려든 청년들은 살인적인 집값 때문에 내집 마련의 꿈은 꿀 수 없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과잉생산으로 빈터에 방치된 대형 콘크리트 수도관을 주거공간으로 활용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지름 2.5m, 길이 2.6m짜리 2개의 수도관을 연결해 지은 이 집의 내부 면적은 9.29㎡(약 2.8평)로 1~2인이 충분히 생활할 수 있는 크기다. 2017년 말 모델이 공개된 후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오포드 튜브 하우스는 창문은 따로 없고 전면의 통유리 출입문이 창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스칸디나비아식 원목 바닥으로 꾸며진 내부는 안락하며 다양한 선반들을 설치해 물건들을 보관할 수 있도록 했다. 소파 겸용 침대는 접이식으로 벽면에 장착돼 있으며, 냉장고, 전자레인지, 옷걸이, 가방 등 대형 물건들도 모두 맨 하단의 대형 선반 위에 올려놓고 사용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여러 개를 쌓아올려 아파트형 타운을 만들 수도 있으며, 빌딩 사이 공터나 다리 밑과 같은 사각지대에도 설치가 가능하다. 한 채 건설비용은 약 1700만 원인데, 비슷한 부동산 시세의 20%인 월 47만 원에 임대한다. ‘큰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던 미국에서도 삶을 다운사이징하기 위한 타이니 하우스(협소주택) 열풍이 거세다. 협소주택은 소셜미디어에서 질투심을 유발하는 인기 아이템이다. 인스타그램에서는 협소주택을 찍은 사진이 그림처럼 예쁘면서도, 탄소발자국을 줄이는 친환경적이고, 미니멀한 라이프스타일로 각광받는다. 한편 협소주택은 경제적 불평등, 엄청난 학자금 대출금에 시달리는 밀레니얼 세대의 불행을 상징하기도 하다. 미국에서는 2017년에만 협소주택 판매량이 67%나 증가했다. 협소주택의 평균가격은 4만6300달러. 협소주택을 가진 이들의 68%는 주택담보대출(모기지)를 갖고 있지 않으며, 협소주택에 사는 사람의 89%가 평균적인 미국인들보다 더 적은 신용카드 빚을 갖고 있다고 한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raphy@donga.com}

올해 3월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신축된 새문안교회가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에서 14일 열리는 ‘2019 아키텍처 마스터 프라이즈(AMP)’의 건축설계 분야 문화건축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새문안교회는 최동규 건축사(서인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와 이은석 경희대 교수가 10년 가까이 공동으로 설계 프로젝트를 맡아왔다. 1985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국제디자인 프로젝트를 주관하는 전문 기업 파르마니그룹에 의해 제정된 AMP는 매년 전 세계의 혁신적인 건축 프로젝트를 선정해 수상작을 발표하고 있다. 올해는 건축설계, 인테리어 디자인, 조경 분야 등 42개 분야에 68개국 1000개 이상의 후보작이 출품됐다. 최동규 건축사와 함께 프로젝트를 공동진행해 온 이 교수와 1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13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한국 개신교회가 세계 속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게 됐다”며 “이제 교회 건축에서도 한국적 가치를 보여줘야 할 때”라고 말했다. ―교회 건물로 국제적 건축상을 받는 경우는 드문데…. “이번 수상작 중 교회 건축은 유일하다. 요즘엔 한국을 제외하면 전 세계적으로 교회를 많이 짓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국의 교회 건축은 뾰족탑이 있는 서양의 고딕 스타일만 흉내 내왔다. 형태보다는 공간, 채움보다는 비움을 통해 한국적인 교회 건축의 가치를 표현하려 했다.” ―‘무창(無窓)의 건축’으로 유명한데, 이번에도 절제된 창이 인상적이다. “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 목사가 1886년에 세운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다. 한국 개신교회의 어머니 교회로서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부드러운 곡선 벽면으로 형상화했다. 교회 앞마당에서 올려다보면 하늘로 열려있는 문을 상징하기도 한다. 정면의 작은 창문들은 밤이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은하수처럼 반짝이는데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광화문 쪽에 설치된 전면 유리창에는 자세히 보면 십자가 문양이 숨겨져 있다.” 새문안교회의 베이지색으로 보이는 돌은 화강암의 일종인 중국산 사비석이다. 돌 사이에 낀 철분에 녹이 슬면 전체적으로 발그스름한 베이지색을 띠게 된다고 한다. 이 교수는 “돌마다 색깔이 달라 저렴한 재료이지만, 잘 섞어서 쓰면 고상하고 역사성 있는 건물처럼 보이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예배당 본당을 지을 때 고려한 점은 무엇인가. “현대의 개신교회는 너무 극장식이다. 스크린에서 화면이 나오고, 대형 스피커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개신교회가 원래의 경건한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스피커를 안으로 감췄고 화면은 없앴다. 작곡가 홍난파, 김동진이 새문안교회 성가대 지휘자를 맡았을 정도로 음악적 전통이 강해 전자오르간 대신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했다.” 1층에 위치한 ‘새문안홀’은 1972년에 지어 50년 가까이 썼던 기존 예배당의 벽돌과 스테인드글라스, 한옥창문 무늬 장식 등을 그대로 복원해 옛 기억도 잊지 않았다. 이 홀과 1층 로비, 외부 광장은 시민들에게 휴식공간으로 개방되고 새문안로에서 세종문화회관으로 가는 지름길로 이용되기도 한다. 이 교수는 “예로부터 교회는 도시생활의 중심 공간이었는데 언젠가부터 그런 사회적 기능을 잃어버렸다”며 “새 교회를 지으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이 공공성 회복이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수많은 교회 건물을 설계해 온 교회 건축 전문가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 월드컵주경기장 인근에 세워질 예정이었던 초대형 원형 건축물인 ‘천년의 문’ 설계 공모(2000년)에서 1등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독일 바우하우스의 첫 카탈로그 표지에는 고딕성당이 그려져 있습니다. 건축을 통해 과학, 회화, 음악 등 모든 예술을 통합하자는 뜻이었죠. 현대건축은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데 집중하는데 교회 건축가는 정신적, 심리적, 상징적인 것을 포괄하는 복합 공간을 디자인한다는 점에서 행복합니다.”전승훈 문화전문기자raphy@donga.com}

“13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한국 개신교회가 세계 속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게 됐습니다. 이제 건축에서도 한국적 가치를 보여줘야 할 때입니다.”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올해 3월 신축된 새문안교회 설계프로젝트를 진행한 이은석 경희대 교수(57)가 말했다. 새문안교회는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14일 열리는 ‘2019 건축 마스터상(AMP)’의 건축설계분야 문화건축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1985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국제디자인 프로젝트를 주관하는 전문기업 파르마니 그룹에 의해 제정된 AMP는 매년 전 세계의 혁신적인 건축 프로젝트를 선정해 수상작을 발표하고 있다. 올해는 건축설계, 인테리어 디자인, 조경분야 등 42개 분야에 68개국 1000개 이상의 후보작이 출품됐다. 이 교수는 서인종합건축사사무소(대표 최동규)와 10년 가까이 새문안교회 설계프로젝트를 맡았다. 1일 이 교수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교회 건물로 국제적 건축상을 받는 경우는 드문데…. “이번 수상작 중 교회 건축은 유일하다. 요즘엔 한국을 제외하면 전 세계적으로 교회를 많이 짓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국의 교회건축은 뾰족탑이 있는 서양의 고딕스타일만 흉내내왔다. 형태보다는 공간, 채움보다는 비움을 통해 한국적인 교회건축의 가치를 표현하려 했다.”―‘무창(無窓)의 건축’으로 유명한데, 이번에도 절제된 창이 인상적이다. “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 목사가 1886년에 세운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다. 한국 개신교회의 어머니 교회로서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부드러운 곡선 벽면으로 형상화했다. 교회 앞마당에서 올려다보면 하늘로 열려있는 문을 상징하기도 한다. 정면의 작은 창문들은 밤이면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은하수처럼 반짝이는데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광화문 쪽에 설치된 전면 유리창에는 자세히 보면 십자가 문양이 숨겨져 있다.” 새문안교회의 베이지색으로 보이는 돌은 화강암의 일종인 중국산 사비석이다. 돌 사이에 낀 철분에 녹이 슬면 전체적으로 발그스름한 베이지색을 띠게 된다고 한다. 이 교수는 “돌마다 색깔이 달라 저렴한 재료이지만, 잘 섞어서 쓰면 고상하고 역사성 있는 건물처럼 보이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예배당 본당을 지을 때 고려한 점은 무엇인가. “현대의 개신교회는 너무 극장식이다. 스크린에서 화면이 나오고, 대형 스피커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개신교회가 원래의 경건한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스피커를 안으로 감췄고 화면은 없앴다. 작곡가 홍난파, 김동진이 새문안교회 성가대 지휘자를 맡았을 정도로 음악적 전통이 강해 전자오르간 대신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했다.” 1층에 위치한 ‘새문안홀’은 1972년에 지어 50년 가까이 썼던 기존 예배당의 벽돌과 스테인드글라스, 한옥창문 무늬장식 등을 그대로 복원해 옛 기억도 잊지 않았다. 이 홀과 1층 로비, 외부 광장은 시민들에게 휴식공간으로 개방되고 종로에서 세종문화회관으로 가는 지름길로 이용되기도 한다. 이 교수는 “예로부터 교회는 도시생활의 중심 공간이었는데 언젠가부터 그런 사회적 기능을 잃어버렸다”며 “새 교회를 지으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이 공공성 회복이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수많은 교회건물을 설계해 온 교회건축 전문가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 월드컵주경기장 인근에 세워질 예정이었던 초대형 원형 건축물인 ‘천년의 문’ 공모설계(2000년)에서 1등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독일 바우하우스의 첫 카탈로그 표지에는 고딕성당이 그려져 있습니다. 건축을 통해 과학, 회화, 음악 등 모든 예술을 통합하자는 뜻이었죠. 현대건축은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데 집중하는데 교회 건축가는 정신적, 심리적, 상징적인 것을 포괄하는 복합 공간을 디자인한다는 점에서 행복합니다.”}

“‘붉다’라는 글자 하나만 가지고/온갖 꽃 통틀어 말하지 마라/꽃술도 많고 적은 차이 있으니/세심하게 하나하나 보아야 하리.” 양반가의 서자로 태어나 신분차별을 겪었고, 봉건주의 인습에서 벗어나려 했던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1750∼1805). 그는 시와 그림으로 고독을 달래던 천생 예술가였다. 그가 남긴 ‘연평초령의모도’는 청나라에 저항한 명의 장수 정성공의 어릴 적을 그린 그림이다. 청의 선진 문물과 풍속을 소개한 ‘북학의’로 유명한 박제가가 청에 저항하던 인물을 그린 미스터리한 그림이다. 과연 이 그림의 진짜 작가는 누구일까. 저자는 ‘연평초령의모도’의 비밀 이야기를 좇아 20년 가까이 한국과 중국, 일본을 오간다. 갑갑한 조선에 몸담았으되 국경 없이 예술가들과 연대하며 더 넓은 세상을 꿈꿨던 자유인 박제가의 마음을 훑는 인문 기행서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조선왕조실록의 일부를 기계로 번역하고 평가한 결과가 28일 서울 중구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 열리는 한국번역학회(회장 김순영 동국대 교수) 창립 2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소개된다. 인공지능(AI)·데이터 전문 기업 솔트룩스 파트너스, 기계번역 전문기업 시스트란, 유명우 한국번역연구원 원장, 최병현 한국고전번역세계화 연구소 소장 등은 이날 조선왕조실록의 ‘태조실록’ 및 ‘정조실록’을 기계번역을 통해 영어로 옮긴 결과를 공개한다. 향후 AI를 활용한 다앙¤ 고전 번역 방향도 제시하기로 했다. 유명우 원장은 “AI를 통한 한국 고전 번역은 한국에서 서두르지 않으면 다른 국가에 주도권을 뺏길 가능성이 높다. 인문학과 IT의 결합이란 측면에서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분석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이영훈 고려대 교수가 ‘한국 번역학사, 새로운 20년을 준비하며’를 주제로 발표한다. 이 외 문학번역, 문화용어, 번역윤리 등 번역에 관한 다양한 세부 특강도 마련된다. 전승훈 문화전문 기자 raphy@donga.com}

영화제작자인 심재명 명필름 대표와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심 대표는 음식물을 감쌌던 종이와 비닐, 플라스틱 용기 등을 수돗가에서 수세미로 닦은 다음 재활용품 수집함에 넣었다. 그는 “음식물이 묻으면 재활용을 할 수 없다는 보도를 본 뒤 이런 실천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이 책에 따르면 이 같은 ‘가정폐기물 재활용’ 노력만으로도 연간 2.77기가톤의 이산화탄소 배출을 감소시킬 수 있다. 이 책을 쓰고 엮은 세계적 환경운동가이자 기업가인 호컨은 2001년부터 기후환경 분야 전문가들을 만날 때마다 “지구온난화를 막고 이를 되돌리기 위해 뭘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늘 같았다. “그런 목록은 존재하지 않는다”였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뒤. 기후변화를 야단스럽게 경고하는 기사들이 쏟아지고, ‘게임은 끝났다’는 패배적 인식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갈 무렵. 저자는 ‘드로다운(drawdown)’ 프로젝트를 기획하기로 결심한다. 드로다운은 기후 용어로 온실가스가 최고조에 이른 뒤 매년 감소하기 시작하는 시점을 말한다. 호컨은 각국의 과학자들, 공공 정책 전문가들에게 호소문을 보내 70명의 연구진으로 구성한 ‘프로젝트 드로다운’을 결성했다. 이들은 에너지, 식량, 여성 문제, 건축, 도시계획, 토지이용, 교통체계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포괄적인 기후변화에 대한 행동대책 100가지를 집대성했다. 이들은 2050년까지 달성 가능한 온실가스 배출 저감 효과, 잠재적 비용까지 산출했다. 일례로 음식물 쓰레기를 최소화함으로써 우리는 2050년까지 70.53기가톤의 이산화탄소 배출을 피할 수 있다. 채식 위주의 식단은 66.11기가톤의 배출을 줄인다. 여학생 교육과 가족계획은 기후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극적인 효과를 발휘해 각각 59.60기가톤을 절감한다. 1기가톤이란 40만 개에 이르는 올림픽 규격 수영장에 물을 채우는 양과 같은 규모. 2016년 한 해 동안 세계가 배출한 이산화탄소의 총량은 36기가톤으로, 1440만 개의 수영장을 가득 채울 양이다. 건물 옥상 녹화하기, 승차공유, 전기자전거, 미생물 농업 등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이들 솔루션이 제시하는 감축량은 이를 훨씬 뛰어넘는다. “세계 탄소배출량의 약 2.4∼4.6%가 해양 생물체에 의해 포집되고 격리된다. ‘푸른 탄소’ 습지 생태계가 퇴화되거나 파괴될 때 단순히 탄소 흡수 과정이 멈추는 것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연안습지는 오랫동안 격리된 대량의 탄소를 내뿜는 무시무시한 방출원이 되는 것이다. 연안습지를 보호함으로써 15기가톤의 탄소를 보유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공기 중에 방출된다면 약 53기가톤 이상의 이산화탄소에 상당하는 양이다.” 기후변화는 그동안 과학적 논쟁, 종교적 미신, 정치적 올바름 논란으로 치부돼 왔다. 아니면 재난영화나 호러물처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공포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 책은 무력감을 딛고 치밀한 계획과 행동, 실천만이 기후변화를 되돌릴 수 있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서울은 개발도상국뿐 아니라 유럽, 미국 등 선진국 도시들에도 배울 것을 던져주는 실험적인 도시입니다. 높은 밀도로, 전례 없이 초고속으로 발전해 온 서울의 경험은 선진국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죠.” 7일 개막한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의 해외총감독을 맡은 프란시스코 사닌 미국 시러큐스대 건축과 교수(64)의 평가다. 그는 8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왜 집합도시(Collective City)인가’를 주제로 강연했다. 그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서울에서 가장 인상적인 집합도시 공간으로 을지로와 광장시장을 꼽았다. 특히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으로 1960년대 말 지은 세운상가에 대해 “정말 어메이징하다. 서울이 세계의 다른 도시들에 영감과 교훈을 던져준 대표적 건축물”이라고 했다. “세운상가는 고층빌딩을 옆으로 눕혀서 시장과 식당, 가게 등을 배치하고, 위에는 주거용 고층빌딩을 세운 최초의 주상복합 프로젝트였습니다. 도심의 거대 복합공간(Mega Structure)은 미국, 유럽, 일본 등에서는 아이디어만 있었는데, 서울에서 가장 먼저 실현됐던 독특한 실험이었습니다.” 세운상가는 을지로와 주변 시장을 변화시켰고, 결국에는 시장이 세운상가 전체를 변화시켰다고 봤다. 그 결과 매우 집합적인 도시와 사회적인 네트워크를 지닌 복합공간이 탄생했다고 설명했다. 사닌 교수는 2008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공동감독을 맡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국의 도시건축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는 세계적인 학자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의 주제는 ‘방의 도시(City of Bang)’였다. “한국의 도시는 노래방, 찜질방, PC방처럼 집 안의 방이 사회적으로 터져 나와 도시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한국 아파트는 부(富)의 상징이지만 소외감, 공동체 생활의 실종 같은 부작용을 드러냈습니다. 고밀도화된 아파트가 지배하는 도시에서 타인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사적인 네트워크 공간을 갖고 싶은 심리 때문에 수많은 방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는 세운상가 주변 을지로 등 도심 재개발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집합도시는 돈으로 연결돼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인 섬유질로 관계를 맺기 때문에 주변 시장과 골목길을 없애고 건물만 살아남을 수는 없습니다. 영국 런던, 중국 베이징 등 수많은 도시들이 도심의 역사, 뿌리, 기억을 다 지우고 무너뜨린 후 뒤늦게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해질 녘 국회의사당의 둥근 초록색 돔에 조명이 켜진다. 국회 정문 왼쪽에 새롭게 들어선 수소충전소 건물의 반투명 유리 틈새로 은은한 불빛이 새어나온다. 주유소 하면 떠오르는 빨강, 노랑, 초록의 형형색색 로고와 가격을 홍보하는 숫자들…. 그러나 국회 수소충전소에는 새하얀 캐노피(지붕 덮개) 말고는 어떤 외부 장식도 찾아볼 수 없다. 10일 개소식을 하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수소충전소는 세계 최초로 국회에 들어서는 수소충전소다. ‘규제 샌드박스’ 1호 사업으로 승인된 뒤 5월 말 착공해 3개월 만에 공사를 마친 서울 내 첫 번째 상업용 수소충전소이기도 하다. 국회 수소충전소는 단순하고 깔끔한 미니멀리즘 디자인으로 지어졌다. 수소탱크를 저장하는 메인 건물에는 두꺼운 철근콘크리트를 썼고, 건물 외벽은 저탄소 친환경 소재인 유글라스(U-glass)로 감쌌다. 반투명한 재질의 유글라스는 밤에 조명이 켜지면 부드러운 흰색을 뿜어낸다. 디자인을 맡은 건축가 임재용 OCA 대표는 “안전을 고려한 육중한 콘크리트 건물이지만, 가볍고 경쾌한 디자인을 통해 맑고 깨끗한 청정 수소에너지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기충전소, 수소충전소…. 장기적으로 화석 에너지를 친환경 에너지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함에 따라 국내 주유소 풍경도 달라지고 있다. 주유소 업계가 정점을 이뤘던 2010년 12월 말 전국의 영업 주유소는 총 1만2691곳. 이후 해마다 주유소가 줄어들어 2010년과 비교하면 1100곳 이상 문을 닫았다. 도심 주유소는 대로변의 좋은 위치에다 부지도 300∼400평(약 990∼1300m²)으로 넓어 오피스텔이나 상가 건물로 신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대를 이어 주유소를 운영해온 경우에는 주유소를 포기하지 않고, 1층 주유소 지붕 위에 건물을 짓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다양한 변신을 꾀하고 있다. 서울 중구 장충단로의 서울석유 사옥은 한국 1세대 건축가 고 김수근의 작품인 경동교회 건물 바로 옆에 있다. 1, 2층 주유소 위에 새로 올린 정방형 건물은 얇은 회색 철망이 씌워져 있다. 이 건물 내부 계단에서는 경동교회를 다양한 위치와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다. 붉은 벽돌과 담쟁이 넝쿨로 둘러싸인 경동교회가 무거운 침묵이라면, 건물 6, 7층에 사선형으로 유리관을 박아 외부와 내부를 개방한 이 건물은 공중에 떠 있는 듯 가벼운 느낌의 건축물로 어우러진다. 서울 관악구 봉천동 낙성대입구 교차로에 있는 한유그룹 사옥은 1, 2층에 자리 잡은 셀프 주유소 위로 주변을 압도하는 스케일의 건물이 올라가 있다. 시시각각 음영을 달리하는 유리창이 돋보이는 데다, 심장부에 사각형의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어 사진을 찍으러 오는 사람도 많다. 건물 앞뒤의 풍경을 소통하게 하는 구멍에는 서로 다른 각도로 구름다리가 엇갈린다. 건물 내부 구름다리는 관악산의 경치를 볼 수 있는 최고의 조망대이기도 하다. 주유소는 이제 자동차에 기름을 넣고 세차도 하며, 식사를 해결하는 도시 속 새로운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 교육개발원입구 사거리의 SK주유소 건물은 회오리치듯 사선 띠가 3층부터 둘러싸고 있어 행인들의 눈길을 끌어당긴다. 1층에 주유소와 드라이브 스루 패스트푸드점이 들어섰고, 상부 층은 사무실 식당 갤러리 등으로 사용하는 복합 문화공간이 됐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해질녘. 국회의사당의 둥근 초록색 돔에 조명이 켜진다. 국회 정문 왼쪽에 새롭게 들어선 수소충전소 건물의 반투명 유리 틈새로 은은한 하얀 불빛이 새어나온다. 주유소하면 떠오르는 붉은색, 노란색, 초록색의 형형색색 로고와 가격을 홍보하는 숫자들…. 그러나 국회 수소충전소에는 새하얀 캐노피(지붕 덮개) 말고는 어떤 외부장식도 찾아볼 수 없다. 10일 개소식을 갖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수소충전소는 세계 최초로 국회에 들어서는 수소충전소다. ‘규제 샌드박스’ 1호 사업으로 승인된 뒤 5월말 착공해 3개월 만에 공사를 마친 서울 내 첫 번째 상업용 수소충전소다. 국회 수소충전소는 단순하고 깔끔한 미니멀리즘 디자인으로 지어졌다. 수소탱크를 저장하는 메인 빌딩은 두꺼운 철근콘크리트로 지어졌고, 건물 외피는 저탄소 친환경 소재인 유글래스(U-glass)로 감쌌다. 반투명한 재질의 유글래스는 밤에 조명이 켜지면 부드러운 흰색을 뿜어낸다. 디자인을 맡은 건축가 임재용 OCA대표는 “안전을 고려한 육중한 콘크리트 건물이지만, 가볍고 경쾌한 디자인을 통해 맑고 깨끗한 청정 수소에너지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전기충전소, 수소충전소…. 장기적으로 화석에너지를 친환경에너지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함에 따라 국내 주유소 풍경도 달라지고 있다. 주유소 업계가 정점을 이뤘던 2010년 12월 말 전국 영업 주유소는 총 1만2691곳. 이후 해마다 주유소는 줄어들어 2010년과 비교하면 1100곳 이상 문을 닫았다. 도심 주유소는 대로변의 좋은 위치에 자리 잡았는데도 300~400평가량의 넓은 부지를 갖고 있어 오피스텔이나 상가 건물로 신축하는 경우가 대부분. 그러나 대를 이어 주유소를 운영해온 경우에는 주유소를 포기하지 않고, 1층 주유소 지붕 위에 건물을 짓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다양한 변신을 꾀하고 있다. 서울 중구 장충단로의 서울석유사옥은 한국 1세대 건축가 고(故) 김수근의 작품인 경동교회 건물 바로 옆에 있다. 1, 2층에 주유소 위에 새로 올린 정방형 건물은 얇은 회색 철망이 씌워져 있다. 이 건물 내부 계단에서는 경동교회를 다양한 위치와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다. 붉은 벽돌과 담쟁이 넝쿨로 둘러싸인 경동교회가 무거운 침묵이라면, 건물 6~7층에 사선 형으로 유리관을 박아 외부와 내부를 개방한 이 건물은 공중에 떠 있는 듯 가벼운 느낌의 건축물로 어우러진다. 서울 관악구 봉천동 낙성대입구 교차로에 있는 한유그룹 사옥은 1~2층에 자리 잡은 셀프 주유소 위로 주변을 압도하는 스케일의 건물이 올라가 있다. 시시각각 음영을 달리하는 유리창이 돋보이는데다, 심장부에 사각형의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어 사진 찍으러 오는 사람들도 많다. 건물 앞뒤의 풍경을 소통하게 하는 구멍에는 서로 다른 각도로 구름다리가 엇갈린다. 건물 내부 구름다리는 관악산의 경치를 볼 수 있는 최고의 조망대이기도 하다. 주유소는 이제 자동차에 기름을 넣고 세차도 하며, 식사를 해결하는 도시 속 새로운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 교육개발원 입구사거리에 있는 SK주유소 건물은 회오리치듯 사선 띠가 3층 위부터 올려져 행인들의 눈길을 끌어당긴다. 1층에 주유소와 패스트푸드 드라이브 스루가 들어섰고, 상부 층은 사무실 식당 갤러리 등으로 사용하는 복합문화공간이 됐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raphy@donga.com}

“끔찍한 폭력의 실재를 견디기 위해 여성들은 눈을 돌려버린다. 스탠드 불빛만 노려보거나 벽에 걸린 그림만 보고 있기도 한다. 아니면 눈을 감아버린다. 이는 곧 여성들이 강간범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할 수 있고, 범인이 입은 옷 방 시간 주변 환경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성폭력 범죄는 피해자가 거짓말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받는 범죄다. 성폭력을 당했다고 말하는 순간, 수사기관부터 주변 지인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모든 사람이 한 번쯤 피해자의 말을 의심한다. 그래서 성폭력은 강력범죄 가운데 신고율이 가장 낮은 범죄다. 설령 재판까지 가더라도 피해자는 낯선 사람들이 가득한 법정에서 자신이 당한 성폭력의 세부사항을 공개해야 하며 자신과 멀지 않은 곳에 앉아있는 범인을 보며 증언해야 한다. 이 책은 2008년 8월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임대아파트에 홀로 사는 18세 여성 마리가 침입자에게 강간당한 사건을 추적한 탐사보도 르포르타주다. 당시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피해자의 반복 진술 사이에서 사소한 모순을 의심했다. 결국 마리는 협박에 가까운 경찰들의 취조에 겁에 질려 진술을 철회했고, 허위 신고죄로 기소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약 3년 뒤. 타 지역에서 연쇄강간 행각을 벌이던 진범이 잡히고 나서야 마리의 강간 신고가 사실이었음이 밝혀진다. 저널리스트인 저자들은 방대한 서면 자료와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사건을 재구성했다. 수사의 중심에는 갤브레이스와 헨더샷이라는 두 여성 형사가 있었다. 그들은 성범죄 피해자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며, 보통 경찰들이 걸리기 쉬운 ‘피해자다움’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갤브레이스는 피해자의 말을 무조건 믿지도 의심하지도 않고, 우선 경청한다는 원칙을 지켰다. 객관적이고 냉철한 탐사보도는 마치 추리소설처럼 흡인력 있게 독자들을 끌어당긴다. ‘성인지 감수성’ ‘2차 가해’ 등이 이슈가 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건축가들은 의자를 디자인하길 좋아한다. 하중을 받치는 구조물이면서도, 미적인 디자인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 건축물과 닮았기 때문이다. 20세기 전에는 의자를 만드는 가장 보편적인 재료로 나무와 천이 전부였다. 그러나 20세기 독일의 바우하우스에서는 혁신적인 재료를 쓴 의자가 등장했다. 바로 속이 빈 강철관이었다. 강도가 뛰어날 뿐 아니라 유연함까지 갖춘 의자는 디자인 혁신을 불러왔다. 철근 콘크리트 건물에 쓰이던 캔틸레버(Cantilever·외팔보) 건축공법을 적용한 의자도 등장했다. 한글로 ‘ㄷ’ 자를 연상시키는 캔틸레버 의자는 ‘뒷다리 없는 의자’로도 안정적으로 떠받칠 수 있어서 공중에 뜬 것처럼 가볍고 세련된 모습이었다. 더 이상 의자에는 다리가 4개 또는 3개가 필요하지 않았다. 올해는 디자인 혁명의 아이콘, 인류 첫 창조학교로 불리는 바우하우스 설립 100주년을 맞는 해. 29일 다큐멘터리 영화 ‘바우하우스’가 개봉하고, 서울 종로구 삼청동 금호미술관과 2019 광주디자인비엔날레, 경기 양주시 조명박물관에서 바우하우스 100주년 기념 특별전시회가 잇따라 열리고 있다. 금호미술관 30주년 기념 특별전인 ‘바우하우스와 현대생활’은 1920년대 바우하우스의 오리지널 디자인 60여 점을 볼 수 있는 쉽지 않은 기회다. 우선 마르셀 브로이어의 초기 ‘캔틸레버 의자’와 루트비히 미스 반데어로에의 우아한 곡선이 가미된 ‘캔틸레버 의자’, ‘바르셀로나 체어’를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다. 페터 켈러의 ‘칸딘스키 콘셉트의 요람’은 바우하우스 교수였던 추상미술 선구자 바실리 칸딘스키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기하학적 도형과 색채감이 돋보인다. 바우하우스의 금속 공방장으로 활동했던 마리아네 브란트의 반구형 금속 ‘재떨이’와 탁상시계는 지금 봐도 세련된 디자인이다. 빌헬름 바겐펠터의 오리지널 빈티지 ‘주전자’(1929년)는 현대에도 널리 쓰이는 디자인의 원형이라는 점에서 놀랍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부터 1933년까지 약 14년 동안 독일에서 지속됐던 예술학교. 제1차 세계대전의 폐허를 딛고 보다 많은 사람들의 더 나은 생활을 꿈꿨으며 ‘예술과 기술의 결합’을 시도해 산업시대를 내다본 대량생산을 모색했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철학으로 단순하지만 기능에 충실한 명품 디자인은 1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사랑받는다. 영화 ‘바우하우스’는 바우하우스에서 벌어졌던 학생들의 공연을 통해 자유로운 상상력과 배움의 즐거움, 천재들의 협업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바우하우스에 영향을 받은 현대의 대표적인 브랜드로 애플, 이케아, 무인양품을 꼽는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덴마크의 공간 디자이너 로잔 보슈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교실 없는 학교’, 베를린 건축가 판보 레멘첼의 ‘미니하우스 프로젝트’, 남미 슬럼가를 바꾸는 공공기반시설 건축 프로젝트 등 삶을 둘러싼 다양한 요소들에 담긴 바우하우스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다음 달 7일 개막하는 ‘2019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서는 주한 독일문화원과 독일의 후원을 받은 ‘Imaginista’ 전시가 열린다. 바우하우스 창시자인 발터 그로피우스가 디자인한 바우하우스 데사우의 축소모형인 ‘타이니 바우하우스’ 구조물이 설치되고, 지난 100년 동안 바우하우스 철학이 세계 각국으로 어떻게 퍼져나갔는지 살펴본다. 또한 크리에이터 14명이 바우하우스의 의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도 선보인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건축가들은 의자를 디자인하길 좋아한다. 하중을 받치는 구조물이면서도, 미적인 디자인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 건축물과 닮았기 때문이다. 20세기 이전, 의자를 만드는 가장 보편적인 재료는 나무와 천이 전부였다. 그러나 20세기 독일의 바우하우스에서는 혁신적인 재료를 쓴 의자가 등장했다. 바로 속이 빈 강철관이었다. 강도가 뛰어날 뿐 아니라 유연함까지 갖춘 의자는 디자인 혁신을 불러왔다. 철근 콘크리트 건물에 쓰이던 캔틸레버(Cantilever·외팔보) 건축공법을 적용한 의자도 등장했다. 한글로 ‘ㄷ’자를 연상시키는 캔틸레버 의자는 ‘뒷다리 없는 의자’로도 안정적으로 떠받혀서 공중에 뜬 것처럼 가볍고 세련된 모습이었다. 더 이상 의자에는 다리가 4개 또는 3개가 필요하지 않았다. 올해는 디자인 혁명의 아이콘, 인류 첫 창조학교로 불리는 바우하우스 설립 100주년을 맞는 해. 29일 다큐멘터리 영화 ‘바우하우스’가 개봉하고, 서울 종로구 삼청동 금호미술관과 2019광주디자인비엔날레, 경기 양주시 조명박물관에서 바우하우스 100주년 기념 특별전시회가 잇따라 열리고 있다. 금호미술관 30주년 기념 특별전인 ‘바우하우스와 현대생활’에서는 1920년대 바우하우스의 오리지널 디자인 60여 점을 볼 수 있는 쉽지 않은 기회다. 우선 마르셀 브로이어의 초기 ‘캔틸레버 의자’와 루드비히 미스 반데어로에의 우아한 곡선이 가미된 ‘캔틸레버 의자’와 ‘바르셀로나 체어’를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다. 페터 켈러의 ‘칸딘스키 컨셉트의 요람’은 바우하우스 교수였던 추상미술 선구자 칸딘스키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기하학적 도형과 색채감이 돋보인다. 바우하우스의 금속 공방장으로 활동했던 마리안느 브란트의 반구형 금속 ‘재떨이’와 탁상시계는 지금 봐도 세련된 디자인이다. 빌헬름 바겐펠터의 오리지널 빈티지 ‘주전자’(1929년)는 현대에도 널리 쓰이는 디자인의 원형이라는 점에서 놀랍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부터 1933년까지 약 14년 동안 독일에서 지속됐던 예술학교. 제1차 세계대전의 폐허를 딛고 보다 많은 사람들의 더 나은 생활을 꿈꿨으며 ‘예술과 기술의 결합’을 시도해 산업시대를 내다본 대량생산을 모색했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철학으로 단순하지만 기능에 충실한 명품 디자인은 1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사랑받는다. 영화 ‘바우하우스’는 바우하우스에서 벌여졌던 학생들의 공연을 통해 자유로운 상상력과 배움의 즐거움, 천재들의 협업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바우하우스에게 영향을 받은 현대의 대표적인 브랜드로 애플, 이케아, 무인양품을 꼽는다. 여기에 더 나아가 덴마크의 공간 디자이너 로잔 보쉬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교실 없는 학교’, 베를린 건축가 반 보 레-멘첼의 ‘미니하우스 프로젝트’, 남미 슬럼가를 바꾸는 공공기반시설 건축 프로젝트 등 삶을 둘러싼 다양한 요소들에 담긴 바우하우스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다음달 7일 개막하는 ‘2019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서는 주한독일문화원과 독일의 후원을 받은 ‘Imaginista’ 전시가 열린다. 바우하우스 창시자인 발터 그로피우스가 디자인한 바우하우스 데사우의 축소모형인 ‘타이니 바우하우스’ 구조물이 설치되고, 지난 100년 동안 바우하우스 철학이 세계 각국으로 어떻게 퍼져나갔는지 살펴본다. 또한 14명의 크리에이터들이 바우하우스의 현대적 의미를 재해석한 작품도 선보인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고대 이집트인들은 파피루스 종이에 원하는 일들을 적고 그것을 실천했다고 하지요. 우리 부부도 버킷리스트가 있었습니다. 저는 ‘죽기 전에 낡은 집을 사서 내 맘대로 고쳐보기’였고, 남편은 ‘농사를 지으며 시골에서 살아보기’였지요.” 프랑스 고성(古城)을 사들여 수리해 나만의 살림집으로 꾸미고, 8260m²(약 2500평)의 농토와 정원을 가꾸며 사는 부부가 있다. ‘나는 프랑스 샤토에 산다’(청출판) 저자인 허은정 씨(줄리 허·54) 부부가 그 주인공. 허 씨는 26세에 호주로 유학을 가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기업 컨설팅 일을 해온 한국인 여성. 호주인 남편과 결혼해서 살아온 그는 10년 전부터 은퇴 뒤 유럽 시골로 귀농이라는 ‘버킷리스트’를 꿈꾸며 준비해 왔다. 허 씨는 프랑스 인터넷 사이트를 뒤지면서 귀족이 살았음 직한 웅장한 샤토(고성)를 일반인도 구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게다가 가격도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다. 실제로 호주 신문에는 ‘시드니의 작은 아파트 값이면 프랑스의 고성을 살 수 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고 한다. 3년쯤 유럽 시골을 돌아다녔을까. 2013년 4월 프랑스 파리에서 서쪽으로 230km가량 떨어진 마옌주의 한적한 마을에서 지은 지 160년이 넘은 샤토를 발견했다. 1857년에 완공한 이 성은 당시 파리에 유행했던 오스만 양식으로 지어진 지하 1층, 지상 3층짜리 건물. 5년 동안 집이 비어 있던 탓에, 정원의 나무들은 밀림처럼 자라 있었고 집안에선 곰팡이 냄새가 났지만 허 씨의 가슴은 설렘에 쿵쾅거렸다. 이후 5년 반 동안 허 씨는 해마다 3, 4개월씩 고성에 머물며 수리해 왔다. 호주 시드니에서 23시간에 걸쳐 비행기를 타고, 3시간 동안 운전해서 찾아가야 하는 길이었다. 집수리 도중에 물이 새고, 지붕이 무너지는 등 고생한 이야기가 책에 가득하다. 그러나 프랑스 시골마을의 벼룩시장과 앤티크 숍을 돌아다니면서 오래된 가구와 거울, 접시를 사서 집을 꾸미는 과정은 흥미진진하다. 허 씨가 고성을 매입한 가격은 약 10억 원, 수리비는 3억∼4억 원. 강남 아파트 한 채 가격으로 2500여 평 대지의 프랑스 고성에서 텃밭농사를 짓고, 인테리어와 요리강습을 하며 사는 인생을 시작했다. 허 씨는 편의시설은 현대적으로 바꿔도 타일과 마룻바닥, 문고리, 욕조까지 최대한 원래 모습으로 되살린다는 원칙을 지켜왔다. 그는 “우리나라에서도 고택을 보수해서 쓰는 것이 유행인데, 껍데기만 한옥이지 내부에는 정체를 알 수 없도록 해놓은 것을 보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그의 되살려낸 고성에서의 삶은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등의 인테리어 잡지와 인스타그램으로 소개되며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그를 다룬 미국 잡지의 제목은 ‘Courage to Fly Home’이었다. 시드니에서 23시간에 걸쳐 비행기를 타고 와서 집수리를 하는 그의 삶을 담은 기사였다. 허 씨는 수리 도중에는 벽지를 벗겨내고 뼈대만 남은 폐허 같은 고성에서 홀로 잠을 잤다고 한다. 그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집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집이 우리를 선택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고대 이집트인들은 파피루스 종이에 원하는 일들을 적고 그것을 실천했다고 하지요. 우리 부부에게도 버킷리스트는 있었죠. 저는 ‘죽기 전에 낡은 집을 사서 내 맘대로 고쳐보기’였고, 남편은 ‘농사를 지으며 시골에서 살아보기’였지요.” 서울 강남의 아파트 한 채 가격에 프랑스의 아름다운 고성(古城)을 사들여 수리해 나만의 살림집으로 꾸미고, 8200여㎡(2500평)의 농토와 정원을 가꾸며 사는 부부가 있다. ‘나는 프랑스 샤토에 산다’의 저자인 허은정 씨(54·줄리 허) 부부가 그 주인공이다. 허 씨는 26세 호주로 유학을 가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기업 컨설팅과 통역 일을 해온 한국인 여성. 그는 바이오 생명공학 분야 연구자이자 사업가인 호주인 남편과 결혼해서 멜버른에서 살아왔다. 10년 전부터 은퇴 후 유럽 시골로 귀농이라는 ‘버킷리스트’를 꿈꾸며 준비해 온 부부는 인터넷 부동산 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엔 자그마한 시골집을 찾던 허 씨는 프랑스 인터넷 사이트를 뒤지면서 귀족이 살았음직한 웅장한 샤토(고성)을 일반인도 구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게다가 낡은 고성의 가격은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다. 실제로 호주 신문에는 ‘시드니의 작은 아파트 값이면 프랑스의 고성을 살 수 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고 한다. 3년 쯤 유럽의 시골을 돌아다녔을까. 2013년 4월 프랑스 파리에서 서쪽으로 230km 가량 떨어진 마욘주의 한적한 마을에서 지은 지 160년이 넘은 샤토(고성)를 발견했다. 북쪽으로는 노르망디 해변에 차로 한 시간 거리에 닿을 수 있고, 남쪽으로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루아르 강가의 고성 밀집지역과도 가까웠다. 1857년 완공된 이 샤토는 당시 파리에 유행했던 오스만 양식으로 지어진 지하 1층, 지상 3층짜리 건물이었다. 주인 할머니가 5년 전 양로원에 들어간 후 집이 비어 있던 탓에 정원의 나무들은 밀림처럼 자라 있었고, 집 안에는 곰팡이 냄새가 났지만 허 씨는 두 번에 걸쳐 총 45분간 보고 계약을 해버렸다. 이후 5년 반 동안 허 씨는 프랑스에서 매년 3~4개월씩 머물면서 고성을 수리해왔다. 호주 시드니에서 23시간에 걸쳐 비행기를 타고, 3시간에 걸쳐 자동차를 운전해서 찾아가야하는 먼 길이었다. 집수리 도중에 욕실에서 물이 새고, 지붕이 무너져 내리는 등 끊임없이 고생한 이야기가 책에 가득하다. 그러나 프랑스 시골마을의 벼룩시장과 앤티크 숍을 돌아다니면서 남들이 쓰던 오래된 가구와 거울, 접시를 사서 나만의 집을 꾸미는 이야기는 흥미를 자아낸다. 허 씨가 고성을 매입한 가격은 약 10억 원, 수리비는 3억~4억 원이 들어갔다고 한다. 허 씨는 “한국에서도 아파트에 살았고, 호주에서는 현대식 건물에 살았지만 오래된 집에서 풍기는 ‘올드 소울’(Old Soul)을 늘 그리워했다”며 “이 공간엔 누가 어떻게 살았을까, 이 가구를 쓰던 사람은 누구일까 생각하며 대화를 나눈다”고 말했다. 편의시설은 현대적으로 바꿨지만 타일과 마룻바닥, 문고리, 욕조까지 원래 있던 것을 최대한 고쳐서 원래 모습으로 되살렸다. 또한 인테리어를 할 때는 클래식한 스타일의 앤티크라도 맘 편하게 사용하고 앉을 수 있는 것을 추구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도 고택이나 한옥을 보수해서 다시 쓰는 것이 유행인데, 껍데기만 한옥이지 내부에는 정체를 알 수 없도록 해놓은 것을 보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그의 되살려낸 고성에서의 삶은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등의 인테리어 잡지와 인스타그램으로 소개되며 관심을 끌었다. 그를 인터뷰한 미국 잡지의 제목은 ‘Courage to Fly Home’이었다. 시드니에서 23시간에 걸쳐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에서 수리를 하는 그의 삶을 담은 기사였다. 허 씨는 벽지를 벗겨내고, 철골만 남아 폐허가 된 집을 수리하던 도중에도 고성에서 홀로 잠을 잤다고 한다. 그는 “전혀 무섭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가 집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집이 우리를 선택한 것 같아요. 무언가 보이지 않는 끈이 우리를 잡아당기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고 말했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재프랑스 서양화가 한홍수 화백(61)이 24일부터 경기 광주시 영은미술관에서 개인전 ‘산 깊은 모양_령(Haut-fond)’을 개최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깊은 산속의 골짜기 풍경이 펼쳐진다. 그러나 영묘한 골짜기처럼 보이는 하나하나의 형상은 사실 사람 몸의 한 부분이 수없이 겹쳐진 모습임을 깨닫게 된다. ‘인체를 풍경처럼, 풍경을 인체처럼’ 투명하고도 몽환적으로 표현해내는 작가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볼 수 있다. 그는 2015년 중국 출신 세계적인 조각가 왕두(王度·63)와 함께 프랑스 파리에서 유네스코 창립 70주년 기념전 ‘제3의 현실’을 개최했다. 2015년 유네스코에 전시됐던 한 작가의 작품 ‘기원의 뒷면’은 에로틱하면서도, 신성한 인간의 몸에 대한 구도와 성찰을 보여줘 프랑스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한 작가는 인체를 그릴 때나, 자연의 풍경을 그릴 때나 부드러운 붓으로 유화 물감을 얇게 서른 겹 이상 덧칠하는 동일한 방식으로 작업을 한다. 겹쳐 칠하기를 반복하면서 흐릿해진 경계선 탓에 관람객들은 첫 이미지를 넘어서는 또 다른 이중적 의미를 상상하게 된다. 그는 “그려진 그 자체보다 그것을 봄으로써 다른 세계로 감성이 이동하는 것을 추구한다”며 “동양과 서양, 영원과 현재, 이상과 현실, 초월과 세속이라는 양의성이 내 예술세계”라고 설명했다. 그는 영은미술관 창작 스튜디오에 입주해 일기를 쓰듯이 매일 한 점씩 자화상을 그렸다. 그가 목탄과 색연필, 먹물 등으로 그린 100개의 자화상 작품을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다. 그는 1992년 프랑스로 건너가 거리의 초상화가로 일하기 시작한 이래 30년 가까이 인체 크로키, 자화상 드로잉 작업을 계속해왔다. 올해 작가의 고향인 해남에서 열린 ‘어머니, 바다, 땅(母海地)’ 전시회, 서울 인사동 올미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 ‘경치그림’전에서도 자연과 인체를 그린 다양한 드로잉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듯이 자화상을 일기처럼 관찰하고, 기록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연처럼 나 자신도 변해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31일 오후 2시 오프닝 파티에서는 인체 그림을 몸짓으로 표현하는 마리오네트, 뮤지컬 배우 박혜미, 크로스오버 테너 류하나가 참여하는 퍼포먼스 공연이 펼쳐친다. 9월 22일까지.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먹는 음식이 곧 당신이다’는 말이 있다. 먹거리에 따라 달라지는 사람의 건강과 체질을 설명할 때 쓰곤 한다. 이 책은 “당신이 사는 장소가 바로 당신이다!”라고 외친다. 영국의 총리 처칠이 1943년 독일군 공습으로 무너진 국회의사당을 다시 짓겠다고 약속하면서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다시 그 건축이 우리의 모습을 만들어간다”고 한 명언과 맞닿아 있다. 실제로 어린 시절이나 성인이 돼 첫 출근 날을 추억할 때 꼭 장소에 대한 기억을 동반한다. 이것은 뇌에서 장기 기억을 형성할 때 가동하는 세포와 공간을 찾는 세포가 같은 부위에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삶의 90%를 인공 건축물에서 보낸다. 아파트, 사무실, 학교, 도로, 지하철…. 그래서 건축물 환경이 삶에 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화두는 그 연장선에서 ‘건축에서 디자인이 왜 중요한가?’다. 이 질문에 전문가들도 답을 하라면 쩔쩔맨다. 미국 하버드대 교수를 지낸 건축평론가인 저자는 뇌과학과 인지신경심리학계에서 새롭게 발견된 지식을 통해 건축 환경이 인간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사람들은 왜 천장 높이가 2.4m인 방보다 3.6m인 방에서 더 창의적인 생각을 하게 될까? 학생들은 왜 자신이 학습한 교실에서 시험을 볼 때 더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을까? 그는 인지과학과 신경과학계에서 밝혀낸 새로운 사실들을 건축과 연결하는 작업을 했다. 그중에서도 그가 집중한 것은 삶을 무의식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체화된 인지’의 작용이다. 건축가 알바르 알토는 자신의 고향 핀란드 북부에 건물을 만들면서 층계바닥을 밝은 노란색으로 칠하고 금속 난간은 목재로 감쌌다. 사람들이 샛노란 계단에 나무 난간이 있는 것을 ‘보기’만 해도 따스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햅틱’ 인상은 우리가 마음속으로 촉각 시뮬레이션을 하게 만드는 시각 자극으로, 단지 대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각 운동을 일으킨다. 서구 문화에서는 17세기 데카르트가 발전시킨 인지 이론이 자리 잡았다. 인간의 감각으로 받아들인 데이터를 해석하는 인지가 신체와 독립적으로 작용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최근 과학적인 연구 결과 ‘인지’는 마음과 신체, 환경의 세 요소가 동시에 결합해서 이뤄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즉, 마음과 육체는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것. 이런 의미에서 저자는 노모를 노인 요양시설이나, 친척 집으로 옮길 것을 고민할 때 가능하면 옮기지 않는 편이 낫다고 조언한다. 오랜 세월 함께한 집을 떠난다는 ‘인지적’ 경험이 ‘신체’ 건강에 해롭게 작용하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인간의 신체와 뇌는 특히 자연에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자연 풍광을 20초만 접해도 빨라진 심장 박동이 진정된다. 담낭 수술을 받은 뒤 낙엽수가 보이는 병실에 머문 환자는 벽돌이 보이는 병실에서 머문 환자보다 회복 속도가 빠르다고 한다. 저자는 아테네의 파르테논, 맨해튼의 월드트레이드센터, 프랑스의 아미앵 대성당,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기념관 등 세계 최고와 최악의 건물, 도시경관을 분석한다. 서울의 청계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인사동 쌈지길, 북촌 한옥에 대한 단상도 흥미롭다. 그는 “11km가 넘는 청계천을 따라 눈높이로 쌓아올린 돌담은 인간에게 풍부한 물질적 경험과 자극을 주는 휴먼스케일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며 “삶의 질을 높이려면 정서를 건강하게 해주는 적절한 인지자극이 필요하다는 연구 결과를 강력하게 뒷받침해주는 증거”라고 평했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먹는 음식이 곧 당신이다’는 말이 있다. 먹거리에 따라 달라지는 사람의 건강과 체질을 설명할 때 쓰곤 한다. 이 책은 “당신이 사는 장소가 바로 당신이다!”라고 외친다. 영국의 총리 처칠이 1943년 독일군 공습으로 무너진 국회의사당 건물을 복원하면서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다시 그 건축이 우리의 모습을 만들어간다”고 한 명언과 맞닿아 있다. 실제로 어린 시절이나 성인이 돼 첫 출근 날을 추억할 때 꼭 장소에 대한 기억을 동반한다. 이것은 뇌에서 장기 기억을 형성할 때 가동하는 세포와 공간을 찾는 세포가 같은 부위에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삶의 90%를 인공 건축물에서 보낸다. 아파트, 사무실, 학교, 도로, 지하철…. 그래서 건축 환경이 삶에 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화두는 그 연장선에서 ‘건축에서 디자인이 왜 중요한가?’다. 이 질문에 전문가들도 답을 하라면 쩔쩔맨다. 미국 하버드대 교수를 지낸 건축평론가인 저자는 뇌과학과 인지신경심리학계에서 새롭게 발견된 지식을 통해 건축 환경이 인간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사람들은 왜 천장 높이가 2.4m인 방보다 3.6m인 방에서 더 창의적인 생각을 하게 될까? 학생들은 왜 자신이 학습한 교실에서 시험을 볼 때 더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을까? 그는 인지과학과 신경과학계에서 밝혀낸 새로운 사실들을 건축과 연결하는 작업을 했다. 그중에서도 그가 집중한 것은 삶을 무의식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체화된 인지’의 작용이다. 건축가 알바르 알토는 자신의 고향 핀란드 북부에 건물을 만들면서 층계바닥을 밝은 노란색으로 칠하고 금속 난간은 목재로 감쌌다. 사람들이 샛노란 계단에 나무 난간이 있는 것을 ‘보기’만 해도 따스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햅틱’ 인상은 우리가 마음속으로 촉각 시뮬레이션을 하게 만드는 시각 자극으로, 단지 대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서 감각 운동을 일으킨다. 서구 문화에서는 17세기 데카르트가 발전시킨 인지 이론이 자리 잡았다. 인간의 감각으로 받아들인 데이터를 해석하는 인지가 신체와 독립적으로 작용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최근 과학적인 연구 결과 ‘인지’는 마음과 신체, 환경의 세 요소가 동시에 결합해서 이뤄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즉, 마음과 육체는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것. 이런 의미에서 저자는 노모를 노인 요양시설이나, 친척 집으로 옮길 것을 고민할 때 가능하면 옮기지 않는 편이 낫다고 조언한다. 오랜 세월 함께한 집을 떠난다는 ‘인지적’ 경험이 ‘신체’ 건강에 해롭게 작용하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인간의 신체와 뇌는 특히 자연에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자연 풍광을 20초만 접해도 빨라진 심장 박동이 진정된다. 담낭 수술을 받은 뒤 낙엽수가 보이는 병실에 머문 환자는 벽돌이 보이는 병실에서 머문 환자보다 회복 속도가 빠르다고 한다. 저자는 아테네의 파르테논, 맨해튼의 월드트레이드센터, 프랑스의 아미앵 대성당,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기념관 등 세계 최고와 최악의 건물, 도시경관을 분석한다. 서울의 청계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인사동 쌈지길, 북촌 한옥에 대한 단상도 흥미롭다. 그는 “11㎞가 넘는 청계천을 따라 눈높이로 쌓아올린 돌담은 인간에게 풍부한 물질적 경험과 자극을 주는 휴먼스케일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평했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무목적(無目的).’ 서울 경복궁 옆 동네인 서촌의 오래된 한옥 건물 사이 4층짜리 노출 콘크리트 건물에 조그맣게 쓰인 이름이다. 길을 걷다 보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건물로 모여들고, 내부로 들어온 사람들도 미로 같은 공간에서 물 흐르듯이 배회하게 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1층에는 수공예품 판매장과 디자인제품 숍이 있고 2층에는 사진스튜디오, 3층에는 갤러리, 4층에 들어선 ‘대충 유원지’ 바에는 시원스러운 통창을 통해 서촌과 인왕산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인스타그램 명소로 꼽힌다. ‘대충(大蟲)’이란 조선시대에 호랑이를 일컫는 말. 인왕산에 딱 들어맞는 이름이다. 올해 서울시 건축상 최우수상을 받은 이 건물은 상업빌딩인데도 ‘공공성’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건물의 밑으로 뚫린 샛길을 이용하면 건물 앞 필운대로와 뒷골목에 있는 중국집 영화루와 대오서점 등 핫플레이스들을 쉽게 오갈 수 있다. 이전까지 주민과 방문객들이 한 블록을 빙 돌아가야 하는 수고를 덜어주는 ‘쇼트컷(shortcut)’이 생긴 셈이다. 실제로 지난해 이 건물을 완공한 뒤 이 샛길을 처음 사용한 사람들은 소방관들이었다. 영화루가 내부 수리 도중 화재가 났을 때 119대원들이 넓은 필운대로에 소방차를 세우고, 이 건물을 통과하는 길을 통해 불을 껐다. 2개 동으로 이뤄진 무목적 건물의 내부도 미로 공간처럼 생겼다. 계단과 테라스로 이어지다가도, 벽으로 막히고, 옆의 작은 샛문으로 이어지는 식이다. 또한 루프톱 정원부터 4층, 3층까지 뚫린 중앙정원은 건물 내부에서도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눈을 직접 맞을 수 있는 독특한 야외 공간이다. 지난달 무목적 갤러리(3층)에서 열린 미디어작가 송호준의 ‘On/off Everything’ 전시회 개막식에서는 다양한 전자기기와 조명 쇼, 음악이 어우러진 ‘힙’한 감성의 파티가 열리기도 했다. 이 건물을 설계한 몰드프로젝트의 정영섭 소장은 “끊어질 듯 이어지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 같지만 또 다른 출구로 이어지는, 배회하며 즐기는 공간을 연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곳에는 원래 가정용 액화석유가스(LPG) 저장소로 쓰이던 콘크리트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무목적 빌딩도 원래 풍경과 비슷하게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했다. 그러나 신축 건물의 콘크리트 벽면이 매끄럽지 않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가 하면, 진흙으로 빚어놓은 듯 울퉁불퉁하고 거칠다. 일부러 두껍게 만든 콘크리트 외벽에 고압 살수장치로 물을 쏘아대 상처를 내는 ‘치핑(Chipping)’ 공법을 사용한 것이다. 수압의 크기에 따라 벽면에는 크고 작은 무늬의 상처가 났고, 심한 곳은 철근이 보일 정도다. 이로써 세련된 새 건물이지만 원래 있었던 것처럼, 오래된 서촌에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풍경이 됐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1909년 10월 중국 하얼빈역에서 7발의 총성이 울렸다. 안중근 의사가 쏜 총탄은 이토 히로부미를 맞혔다. 법정에 끌려간 안 의사의 옆에는 세 명의 청년이 있었다. 유동하, 우덕순, 조도선 열사. 그들의 뒤에는 가장 큰 조력자 최재형 선생(1860∼1920·사진)이 있었다. 거사를 위한 사격 연습 장소부터 안 의사가 붙잡힌 후 러시아인 변호사를 구한 것, 그의 가족을 보살핀 것도 최 선생이다. 일제강점기 러시아 연해주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한 최재형 선생의 기념비와 흉상이 광복 74주년을 앞두고 12일 현지에 세워졌다. 이 기념비는 안 의사가 사격연습을 하던 그의 고택에 세워졌다. 2.5m 높이의 비석은 한반도 모양으로 만들어졌고, 태극기 문양도 새겨졌다. ‘애국의 혼 민족의 별 최재형’이란 문구가 들어갔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최재형 선생은 1920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한 일본군에 의한 신한촌 참변 때 연해주에서 체포돼 총살을 당해 순국했다. 아직도 그의 시신과 묘지는 찾지 못했다. 이날 비가 내리는 가운데 열린 제막식에는 최재형순국100주년추모위원회 공동대표인 소강석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 안민석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 문영숙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최재형 선생의 손자인 러시아독립유공자협회 최발렌틴 회장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은 축사에서 “일제강점기 추운 조국의 현실에 따뜻함을 전해주신 최재형 선생을 우리는 ‘페치카’라는 애칭으로 기억하고 있다”며 “오늘 제막하는 기념비 비문처럼 최재형 선생은 ‘애국의 혼, 민족의 별’로 오래도록 우리 곁에 머물 것”이라고 말했다. 소강석 이사장은 “오늘 추모비를 세움으로써 최재형 선생의 애국애족의 정신이 민족의 광야에 순백의 꽃으로 피어나고, 별처럼 빛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제막식에는 최재형 선생 추모곡 ‘자유의 아리아’를 테너 박주옥 교수가 불렀고, 창원국악관현악단과 바이올리니스트 닐루파르 무히디노바 양의 연주와 헌화가 이어졌다. 1860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연해주로 이주해 군납사업을 하며 부를 쌓았다. 전 재산을 항일 독립운동과 한인 동포 지원에서 쏟아부어 그에게는 러시아어로 난로를 뜻하는 ‘페치카’라는 애칭이 따라다녔다. 연해주에서 한인사회 대표 지도자로서 학교를 세워 인재 양성에 나섰고, 대동공보사와 대양보, 권업신문을 만들어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의병부대인 ‘동의회’를 조직해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지원했으며 대한국민의회 외교부장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됐다. 정부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3급)을 추서했다.우수리스크=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2019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가 다음 달 7일부터 11월 10일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돈의문박물관마을, 서울도시건축전시관, 세운상가 등지에서 열린다. 2017년 ‘공유도시’라는 주제로 열린 제1회 비엔날레에 이어 두 번째다. 이번 주제는 ‘집합도시(Collective City)’. “함께 만들고 함께 누리는 도시”라는 슬로건도 내걸었다. 올해 비엔날레에는 베를린, 파리, 암스테르담, 울란바토르 등 전 세계 80여 개 도시 180여 개 기관이 참여한다. 총감독은 건축가 임재용(국내), 미국 시러큐스대 교수 프란시스코 사닌(해외)이 공동으로 맡았다. 지난달 31일 임 감독(58)을 광화문에서 만났다. ―세계 각국에는 ‘건축’ 비엔날레가 많다. 왜 서울은 ‘도시건축’ 비엔날레인가. “베니스를 비롯해 전 세계에서 건축비엔날레는 100개쯤 된다. 대부분 건축가를 작가로 초청하고, 건물 프로젝트 위주의 작품을 전시한다. 서울비엔날레는 도시 문제를 논의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됐기 때문에 도시 전문가들이 참가한다. 서울은 오래된 도시이지만, 후발 주자이기도 하다. 도시 문제 논의를 위한 글로벌 플랫폼으로 적합한 도시다.” ―‘집합도시’란 주제는 무슨 뜻인가. “원래 도시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다. 그런데 규모가 커지니까 도로, 지하철 같은 인프라가 더 중요해지고, 사람은 거기에 끼여 사는 느낌이 돼 버렸다. 시스템 중심으로 된 도시를 사람 사는 곳으로 되살리자는 것이다. 도시는 일반 시민이 누구나 공평하게 누려야 할 공간인데, 그렇지 못한 곳이 많다.” ―‘함께 만들고, 함께 누리는 도시’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도시를 만드는 방식은 정부나 지자체가 나서는 톱다운 방식이었다. 이제는 주민들이 먼저 마을을 만들고, 전문가가 지원하는 상향식 프로세스가 주목받고 있다. 시민과 전문가, 정부가 집합적인 노력으로 도시를 만들어 나간다면, 결과적으로 도시를 공평하게 누릴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사람 중심 도시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걷기 편해야 한다. 런던 도심에서는 모든 길이 2차선으로 좁다. 길 건너편에 있는 보행자의 표정을 읽을 수 있고, 부를 수 있어야 도로를 오가며 걷게 된다. 반면 국내 신도시는 도로가 왕복 8∼10차선 대로다. 공원이나 상가로 가려면 수백 m 간격의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서울 광화문 도심이 회복된 계기는 세종대로 사거리 등에 횡단보도를 설치하면서부터다. 사람들이 지하도로 건너지 않고 지상에서 신호를 기다리면서 도시 풍경이 확 바뀌었다.” ―요즘엔 ‘숨은 골목 찾기’가 트렌드인데…. “수많은 골목들이 반짝 떴다가 진다. 바람이 불고 외부인 유입, 젠트리피케이션의 패턴이 반복된다. 요즘에는 3, 4년을 못 버티는 것 같다. 도시재생이 삶과 연결되려면 건물주와 임대인, 지자체가 스마트한 협약을 맺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도 ‘집합도시’의 이슈다.” ―국내 아파트 단지의 문제점은…. “단지가 섬처럼 고립돼 있어 도시 전체의 길의 풍경이 끊긴다. ‘집합도시’는 도시 내 소통을 고민한다. 주거지, 상업지, 공원을 구역별로 크게 나누지 말고, 잘게 쪼개서 촘촘히 연결해줘야 한다. 10년 전에는 50∼60평대 아파트가 유행이었다. 그러나 1인 가구가 30%에 이르면서 협소주택, 공유주택 등 주거 형태가 급속히 변하고 있다. 정책이 도시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형국이다.” ―세운상가 주변 재개발과 도심 제조업 보존도 논란인데…. “도시는 생물체 같은 것이다. 무 자르듯이 옮기거나 녹지로 만들 수 없다. 경제적인 합의점도 찾아야 한다. 세운상가 주변은 어마어마한 삶의 역사가 있는 곳이다. 아무리 신축 건물이 좋아도 시간이 주는 위대함을 무시 못 한다. 비엔날레 기간에 세운상가에서는 ‘시장(市場)’을 주제로 한 현장 프로젝트가 열릴 예정이다.”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