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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 부모님과 호주로 이민을 떠났다. 시드니 북쪽 외곽의 작은 마을엔 동양인이 드물었다. 백인 친구들은 한국에서 온 남자아이의 어설픈 영어를 비웃었다. 아이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해 자신감을 잃었다. 의견이 달라도 입에선 “예스” “오케이”라는 말만 나올 뿐이었다. 아이의 입을 연 건 토론이었다. 아이는 쉬는 시간엔 조용했지만, 토론이 벌어지는 강당에선 자신감이 넘쳤다. 다른 아이들도 토론할 땐 영어가 어눌하다고 비웃지도, 동양인이라고 무시하지 못했다. 그는 나중에 세계 유명 토론대회를 휩쓴 토론 전문가가 됐다. 논리적 사유와 합리적 말하기에 관한 책 ‘디베이터’(문학동네)를 14일 펴낸 서보현 씨(29·사진) 이야기다. 18일 화상으로 만난 서 씨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는 질문을 끝까지 듣고 오래 생각한 뒤 천천히 생각을 털어놨다. 그는 “다른 사람과 정반대되는 의견을 명료하게 밝혀도 다툼이나 불화로 이어지지 않는 마법이 바로 토론”이라고 했다. 호주에선 교내 활동으로 토론을 장려한다. 11세에 학교 토론팀에서 토론을 시작한 그는 2013년 세계학생토론대회(WSDC), 2016년 세계대학생토론대회(WUDC)에서 우승했다. 호주 국가대표, 미국 하버드대 토론팀 코치로도 일했다. 그는 호주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닌 뒤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 인문학부를 졸업했고, 현재 하버드 로스쿨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토론 비결을 묻자 그는 경청을 언급했다. “사람들은 말을 잘해서 상대방 기를 누르는 것이라고 토론에 대해 오해하는데, 사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게 더 중요해요. 잘 들어야 이에 반대하는 의견을 낼 수 있거든요. 토론은 웅변이 아닙니다.” 서 씨는 신간에서 누구든 토론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갈등을 회피하고 침묵하는 태도로는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인공지능(AI) 시대에 사람을 대하는 토론의 중요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강조한다. “2019년 IBM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토론형 AI ‘프로젝트 디베이터’가 세계 토론대회 최다 우승자와 토론을 벌였어요. AI가 논리적으론 우수했지만, 결과는 적절한 순간에 웃거나 인상을 쓰며 청중의 감정을 건드린 인간의 승리였죠. 정보를 수집하고 분류하는 건 AI가 잘할지 모르지만, 사람을 상대하는 걸 제일 잘하는 건 사람입니다.” ‘침묵은 금’이라 여기는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자랐기 때문에 토론 전문가가 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그는 “토론은 서양의 전유물이 아니고, 어느 나라든 서로 이견을 조율하는 일은 있었다”며 “특히 내 토론 스타일엔 경청이라는 한국 스타일이 짙게 묻어나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토론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답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정치권에서 특히 말싸움이 난무한다. 서 씨는 “유권자들이 남을 이기려는 정치인이 아니라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제대로 토론하는 정치인에게 환호한다면 정치 문화도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인간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은 바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인공지능(AI)이 이야기를 복사하는 것을 넘어서 창작할 수 있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요?” ‘사피엔스’(김영사)를 쓴 세계적인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 이스라엘 히브리대 교수(47)는 19일 어린이·청소년책 ‘멈출 수 없는 우리’(주니어김영사)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에 머물고 있는 그는 이날 화상으로 한국 기자들과 만나 “챗GPT에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다”며 “AI가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로봇도, 총도 필요 없다. 이야기만 만들고, 인간이 이를 믿게 해서 서로를 쏘게 만들면 된다”고 했다. 하라리 교수는 지난해 10월 ‘사피엔스’ 출간 10주년 기념 특별판 서문을 AI 자연어 처리 모델 ‘GPT-3’가 쓰도록 한 뒤 결과물의 수준에 “깜짝 놀랐다”고 고백한 바 있다. 지난달 24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타임스(NYT) 기고문을 통해선 “AI가 인류를 장악하고 통제하는 것을 막기 위해 AI 도입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라리 교수는 이날도 AI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그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알고리즘은 원시적인 형태의 AI”라며 “이용자가 플랫폼에 머무는 시간을 길게 만들기 위해 증오와 분노, 공포를 일으키는 콘텐츠를 배치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사회를 양극화하는 역할을 했다”고 비판했다. 또 그는 “최근 AI는 인간과 대화하면서 친밀한 관계를 만들 수 있다”며 “자라나는 세대가 AI와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면 AI는 (특정한) 물건을 사게 하거나, 정치·종교적 신념을 주입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강력한 신약을 개발했을 때 긴 과정을 거쳐 안전성을 검사하는 것처럼 AI의 장단기적 영향을 확인하고 대중에게 공개할 필요가 있다”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AI가 대중에게 풀려나가는 속도를 늦추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해결책은 역사 교육이다. ‘멈출 수 없는 우리’를 시작으로 매년 1권씩 총 4부작으로 된 어린이·청소년책 시리즈를 펴내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류가 생긴 이래 가장 큰 존재론적, 생존 위기를 맞닥뜨렸어요. 인류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우리의 역사를 알기 바라는 마음을 담아 책을 썼습니다. 인류가 어떻게 사바나 초원의 동물에서 지금의 위치에 올랐는지, 그 과정을 아이들이 알게 된다면 AI의 이야기에 어떻게 대응할지 조금이나마 준비할 수 있지 않을까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아홉 살, 부모님과 호주로 이민을 떠났다. 시드니 북쪽 외곽의 작은 마을엔 동양인이 드물었다. 백인 친구들은 한국에서 온 남자아이의 어설픈 영어를 비웃었다. 아이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해 자신감을 잃었다. 의견이 달라도 입에선 “예스” “오케이”라는 말만 나올 뿐이었다. 아이의 입을 연 건 ‘토론’이었다. 아이는 쉬는 시간엔 조용했지만, 토론이 벌어지는 강당에선 자신감이 넘쳤다. 토론 땐 영어가 어눌하다고 비웃을 수도, 동양인이라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는 커서 세계 유명 토론대회를 휩쓴 ‘토론 전문가’가 됐다. 14일 인문교양서 ‘디베이터’(문학동네)를 펴낸 서보현 씨(29) 이야기다. 18일 화상회의 시스템 ‘줌’으로 만난 서 씨는 생각보다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는 질문을 끝까지 듣고, 오래 생각한 뒤, 천천히 생각을 털어놨다.“제가 토론을 시작한 건 부끄러움을 극복하기 위해서였어요. 이민자인 ‘아웃사이더’로서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말하기 위해선 토론장이 필요했습니다.” 호주에선 교내활동으로 토론을 장려한다. 그 역시 11세에 토론을 시작했다. 처음은 호기심으로 학교 토론팀에 가입했고 자신의 재능을 찾아냈다. 2013년 세계학생토론대회(WSDC), 2016년 세계대학생토론대회(WUDC)에서 우승했다. 그는 호주 국가대표, 미국 하버드대 토론팀 코치로도 일했다. 토론 비결을 묻자 그는 ‘경청’을 언급했다.“토론을 말을 잘해서 상대방 기를 누르는 것으로 오해하는데 사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게 더 중요해요. 잘 들어야 이에 반대하는 의견을 낼 수 있거든요. 토론은 웅변이 아닙니다.” 그는 신간에서 누구든 토론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갈등을 회피하고 침묵하는 태도로는 현대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인공지능(AI) 시대에 사람을 대하는 토론의 중요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역설한다.“2019년 IBM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토론형 AI ‘프로젝트 디베이터’가 세계 토론대회 최다 우승자와 토론을 벌였어요. AI가 논리적으론 우수했지만, 결과는 적절한 순간에 웃거나 인상을 쓰며 청중의 감정을 건드린 인간의 승리였죠. 정보를 수집하고 분류하는 건 AI가 잘할지 모르지만, 사람을 상대하는 걸 제일 잘하는 건 사람입니다.” 그는 호주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닌 뒤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 인문학부를 졸업했다. 현재도 하버드 로스쿨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당신은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만 생활했기 때문에 토론 전문가가 된 것 아니냐고, ‘침묵은 금’이라 여기는 한국 사회에서는 갈등을 토론으로 풀지 못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토론은 서양 것이 아니에요. 어느 나라든 서로 이견을 조율하는 일은 있었으니까요. 특히 제 토론 스타일엔 ‘경청’이라는 한국 스타일이 짙게 묻어나 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전 토론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한국 사회의 갈등을 토론으로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정치 진영 간의 공허한 말싸움, 우기기, 윽박지르기가 난무하기에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고 자신만의 온전한 생각을 드러내는 말하기 기술은 더욱 중요하다고 했다. “다른 사람과 정반대의 의견을 명료하게 밝혀도 다툼이나 불화로 이어지지 않는 마법이 바로 토론이죠.”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천명관 작가(59·사진)의 장편소설 ‘고래’(2004년)가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 지난해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2017년)에 이어 한국 작가의 작품이 2년 연속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건 처음이다. 18일(현지 시간) 부커상 운영위원회는 ‘고래’를 포함해 6편의 최종 후보작을 발표했다. 부커상 심사위원회는 ‘고래’에 대해 “터무니없는 상황에서 믿을 만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며 “등장인물들은 선하지 않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천 작가는 부커상과의 인터뷰에서 “‘고래’는 내 인생을 바꿨고, 여전히 인생의 추진력이 되는 것 같다”고 밝혔다. ‘고래’를 번역한 김지영 번역가도 최종 후보에 함께 이름을 올렸다.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은 2016년 한강 작가가 ‘채식주의자’(2007년)로 수상했다. 한 작가는 2018년 ‘흰’으로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부커상은 노벨 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고래’는 박색이라 신혼 첫날 소박 맞고 홀로 살며 복수심을 지닌 노파, 집에서 도망친 뒤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금복, 말 못하는 춘희까지 여성 세 명의 거친 삶을 그렸다. 2004년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으로 출간 당시 베스트셀러가 됐다. 수상자는 다음 달 23일(현지 시간) 영국에서 발표한다. 상금 5만 파운드(약 8000만 원)는 작가와 번역가가 반반씩 가진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집에 내려달란 말이야!” 한강을 달리는 심야버스 안. 취객이 기사를 협박하며 난동을 부린다. 승객인 기준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불안해한다. 그때 한 여자가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기준에게 다가온다. 여자는 작은 치약 통처럼 생긴 플라스틱 튜브를 건네며 “이걸 짜서 아저씨 코에다 바르라”고 한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하지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시키는 대로 한다. 그러자 아저씨가 갑자기 가장 가까운 좌석으로 빨려 들어가듯 앉는다. 머리카락이라고 생각했던 건 9개의 꼬리고 여자는 요술을 쓰는 여우였던 것. 기준은 홀리듯 구미호와 사랑에 빠진다. 전자책(e북)으로 17일 먼저 출간되고, 다음 달 1일 종이책이 나오는 장편소설 ‘호’(읻다·사진)는 정보라 작가(47)가 구미호 설화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로맨스의 탈을 쓰고 있지만 유쾌한 장면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코미디, 주인공을 위협하는 귀신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선 공포 장르처럼 느껴진다. 평범한 남자가 구미호와 연애하며 겪는 사건을 정 작가 특유의 엉뚱한 상상력으로 재치 있게 풀어냈다.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14일 만난 정 작가에게 정말 사랑 이야기를 쓴 게 맞냐고 묻자 그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연애란 게 원래 그런 거 아니에요? 깔깔 웃다가도, 갑자기 등골이 서늘한 거요. 독자 생각은 모르겠지만 전 진짜 로맨스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하하.” 그가 처음 ‘호’를 쓴 건 15년 전이다. 2008년 외할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졌고 당시 러시아에 머물던 그는 급히 귀국했다. 외할머니를 돌보던 그는 어릴 적 자신을 키워준 외할머니와 ‘전설의 고향’ 구미호 편을 보던 기억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공포 설화를 현대적인 로맨스로 바꿔 쓰면 어떨까 싶었다. 외할머니가 눈을 뜨길 바라는 마음도 담고 싶었다. 학원 강사인 기준과 구미호의 결혼을 반대하는 할머니가 쓰러지고, 할머니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기준이 고군분투하는 서사는 그렇게 탄생했다. “외할머니 사망신고도 제가 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죠. 소설 속에서나마 외할머니가 퇴원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썼던 만큼 제겐 애틋한 작품입니다.” 그는 ‘호’로 2008년 제3회 디지털작가상 모바일 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선인세 500만 원을 받고, 계약서까지 작성했지만 출간은 되지 않았다. 학교 밖에서 처음 상을 받았지만 책은 내지 못한 ‘미발표 등단작’인 셈이다. “당시 박사(미국 인디애나대 슬라브 문학) 논문을 써야 했고, 여러 장르문학 잡지에 단편소설을 기고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미출간이 크게 아쉽지는 않았어요. ‘호’가 15년 만에 발표되는 만큼 꼼꼼히 고쳤는데 독자들이 어떻게 읽을지 궁금하네요.” 정 작가는 지난해 단편소설집 ‘저주 토끼’(Cursed Bunny·래빗홀)가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며 주목받았다. 부커상은 노벨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올해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1차 후보에 천명관 작가(59)의 ‘고래’(문학동네)가 올랐다. 이에 대한 의미를 묻자 그는 곰곰이 생각한 후 답했다. “2년 연속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후보에 한국 작가가 선정될지 몰랐어요. 한국 문학의 품질이 일정 수준 보장된다는 의미 아닐까요.” 그는 집필과 번역 작업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오늘도 교정지를 보다 왔어요. 해외 장편소설 3권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해양수산물을 소재로 한 단편소설집을 쓰고 있고요. 올해 목표는 ‘마감을 잘하자’입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집에 내려달란 말이야!” 한강을 달리는 심야버스 안. 취객이 기사를 협박하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버스 승객인 ‘기준’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그때 한 여자가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기준에게 다가왔다. 여자는 작은 치약 통처럼 생긴 플라스틱 튜브를 건네며 “이걸 짜서 아저씨 코에다 바르라”고 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하지만 뭐라도 해야할 것 같아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어이없게도 아저씨가 갑자기 가장 가까운 좌석으로 ‘빨려’ 들어갔다. 뒤늦게 알았지만, 머리카락이라고 생각했던 건 9개의 꼬리고 여자는 요술을 쓰는 여우였다. 그런데도 기준은 홀리듯 구미호와 사랑에 빠지기 시작했다. 17일 전자책(e북)으로 먼저 출간되고, 다음달 1일 종이책이 나오는 장편소설 ‘호’(읻다)는 구미호 설화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호’는 로맨스의 탈을 쓰고 있지만 유쾌한 장면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코미디, 주인공을 위협하는 귀신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선 공포 장르처럼 느껴진다. 14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정보라 작가(47)에게 정말 사랑 이야기를 쓴 게 맞냐고 묻자 그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연애란 게 원래 그런 거 아니에요? 깔깔 웃다가도, 갑자기 등골이 서늘한 거요. 독자 생각은 모르겠지만 전 진짜 로맨스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하하.”그가 처음 ‘호’를 쓴 건 15년 전이다. 2008년 그의 외할머니는 뇌출혈로 쓰러졌고 당시 러시아에 머물던 그는 급히 귀국했다. 외할머니를 돌보던 그는 어릴 적 자신을 키워준 외할머니와 ‘전설의 고향’ 구미호 편을 보던 기억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공포 설화를 현대적인 로맨스로 바꿔 작품을 쓰면 어떨까 싶었다. 또 외할머니가 눈을 떴으면 하는 바람을 담고도 싶었다. 학원 강사인 ‘기준’과 구미호의 결혼을 반대하는 할머니가 쓰러지고, 할머니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기준이 고군분투하는 서사는 그렇게 탄생했다.“외할머니 사망신고도 제가 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죠. 소설 속에서나마 외할머니가 퇴원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썼던 만큼 제겐 애틋한 작품입니다.”그는 ‘호’로 2008년 제3회 디지털작가상 모바일 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선인세 500만 원을 받고, 계약서까지 작성했지만 아쉽게도 출간은 이뤄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외부 상을 수상했지만 책은 펴내지 못한 ‘미발표 등단작’인 셈이다. “당시 박사(미국 인디애나대 슬라브 문학) 논문을 써야 했고, 여러 장르문학 잡지에 단편소설을 기고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미출간이 크게 아쉽지는 않았어요. ‘호’가 15년 만에 발표되는 만큼 꼼꼼히 고쳤는데 독자들이 어떻게 읽어줄지 궁금하네요.” 정 작가는 지난해 단편소설집 ‘저주 토끼’(Cursed Bunny·래빗홀)가 노벨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후보에 오르며 주목받았다. 올해도 부커상 인터내셔널 1차 후보에 천명관 작가(59)의 ‘고래’(문학동네)가 지명됐다. 의미를 묻자 그는 곰곰이 생각한 뒤 이렇게 답했다. “저 역시 2년 연속 부커상 인터내셔널 후보에 한국 작가가 선정될지 몰랐어요. 부커상 심사위원회의 관심은 한국 문학의 품질이 일정 수준 보장된다는 의미 아닐까요. 올해도 좋은 소식이 들렸으면 좋겠습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거리는 평평하고 넓으며 건물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돼 있다. 도시는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조용하며, 풍경은 이른 아침 또는 늦은 오후에 특히 아름답게 보인다.” 단편소설 ‘텅 빈 도시’는 사람이 살지 않는 도시에 대한 세밀한 묘사로 시작된다. 감탄을 자아낼 정도의 미문은 아니지만, 표현력이 꽤 탄탄하다. 글을 쓴 건 놀랍게도 ‘챗GPT’다. 함께 작품을 쓴 김달영 작가가 “챗GPT가 나보다 훨씬 더 잘 쓰는 것 같다”고 토로할 만하다. 7명의 인간 작가가 ‘챗GPT’로 창작한 단편소설집이다. 인간이 챗GPT에게 지시를 내리고, 문장과 구성을 다듬었지만 인공지능(AI)이 큰 역할을 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신조하 작가는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입장문을 발표하는 소설을 써달라고 챗GPT에게 요청했다. 챗GPT는 논리적으론 나쁘지 않은 결과를 내놓았다. “인류에 해를 끼칠 의도가 전혀 없다”는 문장 등을 뚝딱 만들어낸 것이다. 다만 미묘한 문맥은 살리진 못했다. ‘음흉한 분위기를 반영해 달라’는 요구에 “장담하건대 폭력적인 수단은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며 단순한 문장을 내놓은 것이다. 결국 단편소설 ‘매니페스토’를 쓸 때 신 작가는 자주 문장을 다듬어야 했다고 한다. 챗GPT 활용 방법은 가지각색이다. 나플갱어 작가는 챗GPT에게 지구에 가장 위협적인 기후위기가 무엇인지 물어 바다에 잠긴 도시가 등장하는 ‘희망 위에 지어진 것들’을 썼다. 윤여경 작가는 챗GPT에게 인기를 끌 만한 주제를 추천해 달라고 요청해 AI가 인간의 무의식을 읽는 ‘감정의 온도’를 집필했다. “얼개만 주면 살을 붙여준다”(‘그리움과 꿈’의 오소영 작가), “결말을 손댈 필요가 없다”(‘오로라’의 전윤호 작가) 같은 고백을 읽다 보면 창의력이 정말 인간만의 것인지 의심되기도 한다. 인간과 AI가 쓴 문장이 헷갈리는 시대, 이제 문학에도 새로운 윤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서두에 챗GPT 사용 여부를 밝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마치 조미료를 넣지 않은 식품을 따로 표기하는 것처럼.”(‘펜웨이 파크에서의 행운’의 채강D 작가)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설마 올해도?’라고 생각했는데 올해도였다. 지난달 14일(현지 시간) 발표된 2023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1차 후보에 천명관 작가(59)의 장편소설 ‘고래’가 오른 일 말이다. 영국 부커상은 노벨 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2016년 한강 연작소설집 ‘채식주의자’(2007년·창비) 수상을 시작으로 한국 작품이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1차 후보에 오른 건 이번이 5번째다. 후보 선정이 이례적인 사건은 아닌 셈이다. 다만 지난해 정보라 작가의 단편소설집 ‘저주토끼’(2017년·래빗홀)가 최종 후보에, 박상영 작가의 연작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2019년·창비)이 1차 후보에 각각 올랐던 만큼 올해 한국 출판계의 기대는 낮았다. 그런데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이다. 부커상 심사위원회는 왜 ‘고래’에 주목한 걸까. 먼저 심사위원회의 평가 중 “한국의 풍경과 역사에 대한 탐구”라는 대목에 눈길이 갔다. 실제로 ‘고래’는 한국 여자들의 고달픈 삶을 담았다. 박색이라 신혼 첫날 소박을 맞고 홀로 늙어가며 세상에 복수심을 지닌 노파, 홀아버지 밑에서 자라다가 집에서 도망친 뒤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금복 등 등장인물의 여정은 우리 할머니 세대가 겪은 일 자체다. 천 작가와 함께 후보에 오른 번역가 김지영이 부커상 심사위원회 인터뷰에서 “작품을 번역하며 어린 시절 온갖 설화와 이야기를 들려주셨던 할머니가 생각났다”고 한 것도 이 때문 아닐까. 심사위원회는 또 ‘고래’를 “사악한 유머로 가득 찬 소설”이라고 했다. 등장인물 춘희가 여성임에도 14세가 되기 전 이미 100kg을 넘었다고 능청스럽게 풀어내고, 춘희가 교도소에서 출소한 뒤 땡볕을 뚫고 벽돌공장으로 향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대목은 농담인지 헷갈릴 정도로 초현실적이다. 심사위원회가 ‘고래’에 대해 ‘카니발레스크’(Carnivalesque·전통적인 문학을 유머와 무질서로 전복시키는 양식)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이 이해된다. 무엇보다도 부커상 심사위원회를 놀라게 한 건 양면성에 대한 탐구일 것이다. “생생한 인물들은 어리석지만 현명하고, 끔찍하지만 사랑스럽다”는 심사위원회의 말처럼 인간은 선하면서 동시에 악하다는 사실을 직시한 글쓰기가 이들을 매료시킨 것이다. “고래는 책의 폭동”이라는 심사위원회의 평가에서 부커상이 얼마나 이 작품을 신선하게 느끼는지 알 수 있다. 물론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1차 후보에 함께 오른 다른 작품들도 쟁쟁하다. 우크라이나 ‘국민작가’로 불리는 안드레이 쿠르코프, 노벨 문학상 유력 수상 후보로 꼽히는 프랑스 소설가 마리즈 콩데의 작품 등 12개국 13개 작품이 올라와 있다. 다만 ‘고래’ 심사평을 읽으며 ‘설마 올해도?’라는 희망을 품게 됐다. 18일(현지 시간) 영국에서 발표될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고래’가 포함될지 기대된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투명한 플라스틱 상자에 22개 소책자가 담겨 있다. 꺼내서 읽어보려 했더니 제본되지 않은 소책자들이 손 위에서 ‘떠다닌다’(Float). 쪽수도 없어 어디가 앞인지, 뒤인지 알 수 없다. 겨우 표지를 찾았더니 이렇게 쓰여 있다. “정해진 순서도 없고 주제도 제각각인 스물두 권의 소책자 모음. 읽기는 자유낙하가 될 수 있다.” 13일 출간된 캐나다 시인 앤 카슨의 에세이 ‘플로트’(봄날의책)는 실험적인 책이다. 카슨은 2001년 여성 최초로 T S 엘리엇상을 받으며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노벨 문학상 유력 수상 후보로도 언급되는 그가 독특한 시도를 한 건 독자들이 책을 능동적으로 읽기 원하기 때문이다. 수필, 비평, 희곡, 축사 등 다양한 글 중에 어떤 것을 먼저 읽을지 독자가 고르라는 것이다. 책은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시도다. 지난해 8월 출간된 카슨의 에세이 ‘녹스’(봄날의책)는 책의 모든 면을 하나로 이어 붙여 아코디언처럼 펼쳐지게 했다. ‘녹스’는 정가가 5만5000원이나 됐지만 3000부가 팔려 출판계에서 화제를 모았다. 박지홍 봄날의책 대표는 “‘플로트’의 정가가 3만8500원으로 높은 편이지만 카슨 책을 찾는 마니아들을 겨냥해 초판으로 2000부를 인쇄했다”며 “독자들이 스스로 글을 분류하고 선택해 읽으며 책의 의미를 확장해 나가면 좋겠다”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강원 강릉시에서 11일 발생한 산불로 경포호 인근 정자 2곳이 피해를 입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경포호 근처에 있는 정자인 ‘상영정’이 이날 전소됐다. 1886년 향토유림인 상영계가 건립한 상영정은 비지정문화재지만, 관광객이 자주 찾는 명소였다. 상영정이 있던 자리엔 까만 기와 조각만 남은 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인 ‘방해정’은 가옥 형태만 남긴 채 대부분 소실됐다. 방해정은 조선 철종 10년(1859년)에 통천 군수가 벼슬에서 물러난 후 관청 건물 일부를 헐어 지은 정자다. 방해정에 살고 있는 권천수 씨(62)는 “어머니가 애지중지 관리하시고 문화재로도 지정된 집인데 한순간에 타버려 절망스럽다”고 말했다. 관동팔경 제1경으로 꼽히는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인 경포대, 국가민속문화재인 선교장 인근까지 한때 불이 번지자 문화재청은 경포대 현판 7개를 떼어 인근 오죽헌박물관으로 옮겼다. 강릉시는 이 문화재들 인근에 물을 뿌려 불이 옮겨붙지 않게 했다. 경포호 주변 사찰 ‘인월사’는 불에 타 전소됐다. 인월사는 문화재는 아니다. 경포대 일대는 불길이 진압된 뒤에도 나무 타는 냄새로 가득했다. 정자 인근 소나무들은 밑동이 새까맣게 그을렸고 나무 주변의 풀과 꽃도 모두 타버려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강릉=최미송 기자 cms@donga.com}

베트남인 엄마와 한국인 아빠를 둔 중학생 도훈이는 힘들 때면 마을 언덕에 있는 느티나무를 찾는다. 둘레가 10m가 넘는 느티나무 안엔 자그마한 공간이 있다. 이곳에서 학원에 가지 못하는 다문화가정 출신 아이들이 모여 공부한다. 아이들은 느티나무의 정령과 함께 논다. 어느 날 마을에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소문이 돈다. 아파트를 짓기 위해 느티나무가 서 있던 언덕을 없앤다는 말까지 나온다. 도훈이는 친구들과 함께 ‘레인보우 크루’를 만들고, 느티나무를 보호하는 활동을 하기로 마음먹는데…. 도훈이와 친구들은 느티나무를 지켜낼 수 있을까. 김중미 작가(60·사진)가 최근 출간한 장편소설 ‘느티나무 수호대’(돌베개)는 다문화 아이들의 성장기를 그린다. 청소년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2001년·창비)로 유명한 김 작가는 지난해 4월 장편소설 ‘너를 위한 증언’(낮은산)을 냈다. 신작은 가상의 마을인 대포읍이 배경이다. 대포읍에 사는 아이들은 절반 이상이 다문화가정 출신이다. 아이들은 자주 편견에 가로막힌다. 중국에서 온 엄마 아빠가 마라탕 가게를 하는 금란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중국으로 꺼지라”는 말을 듣는다. 베트남에서 온 민용이는 ‘동남아 울보’로 불린다. 나이지리아에서 온 뒤 검은 피부색 때문에 놀림받던 니카는 친구들에게 “속상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괭이부리말 아이들’에서 판자촌 아이들이 절망하지 않았듯, 이번 책에서도 아이들은 희망을 찾는다. 김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희망은 언제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슬픔과 절망을 거름 삼아 싹을 틔운다”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올해만 장편소설 2권, 단편소설집 1권을 출간합니다. 정신없이 바쁘네요.” 지난해 4월 단편소설집 ‘저주토끼(Cursed Bunny·아작)’로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던 정보라 작가(47)는 4일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 작가는 “올 상반기엔 구미호 이야기를 재해석한 호러 장편소설 ‘호’(가제·읻다)와 단편소설집 ‘아무도 모를 것이다’(가제·퍼플레인)를, 하반기엔 중독 가능성이 없는 진통제 개발을 다룬 공상과학(SF) 장편 ‘고통에 관하여’(가제·다산북스)를 펴낼 계획”이라며 “부커상 후보에 오르기 전에 썼지만 출간되지 못한 작품도 이제야 빛을 보게 됐다”고 했다. 올해 출간되는 문학책 중엔 최근 장르문학계 ‘핫한 작가’들의 작품이 눈에 띈다. 2021년 장편소설 ‘밤의 여행자들’(민음사)로 영국 추리작가협회가 주관하는 대거상 번역추리소설상을 수상한 윤고은 작가(43)는 올 6월 SF 장편 ‘불타는 작품’(가제·은행나무)을 출간한다. 말하는 개가 세운 재단의 예술가 지원 프로그램에 선정된 예술가가 겪는 기묘한 이야기를 다룬다. 장편소설 ‘설계자들’(2019년·문학동네)이 20여 개국에 번역 출간된 김언수 작가(51)는 올 하반기 스릴러 장편 ‘빅 아이’(가제·문학동네)로 돌아온다. 김 작가는 원양어업을 둘러싼 갈등을 그린 이 작품을 쓰기 위해 6개월간 원양어선을 탔다. 거장과 중견 작가들도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 윤흥길 작가(81)는 일제강점기 한 가족의 엇갈린 삶을 다룬 대하소설 ‘문신’(문학동네) 4, 5권을 올봄 동시에 펴내며 대장정을 끝낸다. 2019년 캐나다 그리핀 시문학상 국제부문, 2021년 스웨덴 시카다상을 받은 김혜순 시인(68)은 에세이 ‘김혜순의 말’(마음산책)에서 자신의 삶을 털어놓는다. 이인성 작가(70)는 연작소설집 ‘돌부림’(가제·문학과지성사), 이기호 작가(51)는 장편소설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가제·문학동네)으로 돌아온다. 하성란(56) 정이현(51) 작가는 장편소설을, 김연수(53) 김금희(44) 작가는 에세이를 각각 준비 중이다. 장편소설 ‘파친코’(인플루엔셜)를 잇는 이산(디아스포라) 문학 작품도 나온다. 마음산책은 한국계 미국인 작가 헬레나 로가 미국에서 의사로 성공한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아메리칸 서울’을 선보인다. 2021년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을 선보인 연상호 영화감독(45)과 최규석 만화가(46)는 만화 ‘계시록’(문학동네)을 올 6월 출간할 계획이다. 살인을 저지른 목사와 그를 쫓는 형사가 등장하는 스릴러다. 해외 작품으론 지난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83)의 ‘표면의 삶’과 ‘아니 에르노 자서전: 이브토로 돌아가다’(가제), ‘외면 일기’(가제)가 열린책들에서 잇따라 출간될 예정이다. 비문학 장르에서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100)이 세계 각국 지도자들의 지도력을 평가한 ‘리더십’(민음사)이 눈에 띈다. 올해 상반기 국내 출간될 예정이다. 스웨덴 출신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20)가 환경 문제를 다방면으로 짚은 ‘기후 책’(김영사)도 올해 3월 독자를 만난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올해만 장편소설 2권, 단편소설집 1권을 출간합니다. 요즘 정신없이 바쁘네요.” 지난해 4월 단편소설집 ‘저주토끼’(Cursed Bunny·아작)로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던 정보라 작가(47)는 4일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 작가는 “올 상반기엔 구미호 이야기를 재해석한 호러 장편소설 ‘호’(가제·읻다)와 단편소설집 ‘아무도 모를 것이다’(가제·퍼플레인), 하반기엔 중독 가능성이 없는 진통제 개발을 다룬 공상과학(SF) 장편소설 ‘고통에 관하여’(가제·다산북스)를 펴낼 계획”이라며 “부커상 후보에 오르기 전에 썼지만 출간되지 못한 작품도 있는데 이제야 빛을 보게 됐다”고 했다. 올해 문학 신간 중엔 최근 장르문학계의 ‘핫한 작가’의 신작이 눈에 띈다. 지난해 김훈작가(75) 장편소설 ‘하얼빈’(문학동네), 은희경 작가(64) 연작소설집 ‘장미의 이름은 장미’(문학동네)처럼 순수문학계 원로작가 활약이 이어졌다면 올해는 한층 젊은 작가의 활약이 두드러질 것으로 보인다. 2021년 장편소설 ‘밤의 여행자들’(민음사)로 영국 추리작가협회가 주관하는 대거상 번역추리소설상을 수상한 윤고은 작가(43)은 올 6월 SF 장편소설 ‘불타는 작품’(가제·은행나무)을 출간한다. 말하는 개가 세운 재단의 예술가 지원 프로그램에 선정된 예술가가 겪게 되는 기묘한 이야기를 다룬다. 장편소설 ‘설계자들’(2019·문학동네)이 20여 개국에 번역 출간되며 해외에서도 인정받은 김언수 작가(51)는 올 하반기 스릴러 장편소설 ‘빅 아이’(가제·문학동네)로 돌아온다. 김 작가는 원양어업을 둘러싼 갈등을 그린 이 작품을 쓰기 위해 6개월간 원양어선을 탔다. 지식재산권(IP) 시대인 만큼 영상화의 흐름이 반영된 작품도 출간된다. 2021년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을 선보인 연상호 영화감독(45)과 최규석 만화가(46)는 만화 ‘계시록’(문학동네)을 올 6월 출간할 계획이다. 살인을 저지른 목사와 이를 쫓는 형사가 등장하는 심리 스릴러다. 지난해 3월 동명의 애플TV플러스 드라마로 공개된 뒤 출판계까지 이어진 이민진 작가(55)의 장편소설 ‘파친코’(인플루엔셜)의 영향일까. 한국계 미국인 작가 헬레나 로가 미국에서 의사로 성공한 이야기를 털어놓은 에세이 ‘아메리칸 서울’(마음산책)처럼 이산문학(디아스포라 문학)도 나온다. 거장들도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 윤흥길 작가(81)는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한 가족의 엇갈린 삶을 다룬 대하소설 ‘문신’(문학동네) 4·5권을 올 봄 동시에 펴내며 대장정을 끝낸다. 2019년 캐나다 그리핀 시문학상 국제부문, 2021년 스웨덴 시카다상을 받은 김혜순 시인(68)은 에세이 ‘김혜순의 말’(마음산책)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 털어놓는다. 이인성 작가(70)는 연작소설집 ‘돌부림’(가제·문학과지성사), 이기호 작가(51)는 장편소설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없는 삶’(가제·문학동네)으로 돌아온다. 하성란(56) 정이현 작가(51)는 장편소설, 김연수(53) 김금희 작가(44)는 에세이를 준비 중이다. 해외에선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83)의 국내 미출간작 ‘표면의 삶’, ‘아니 에르노 자서전: 이브토로 돌아가다’(가제), ‘외면 일기’(가제)가 열린책들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비문학에선 ‘위기’를 다룬 해외 저작이 눈에 띈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100)이 세계 각국 지도자들의 지도력에 대해 평가한 ‘리더십’(민음사)을 올 상반기 출간한다. 스웨덴 출신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20)는 환경문제를 다방면으로 짚어낸 ‘기후 책’(김영사)을 올 3월 펴낸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영화 드라마에서 시작된 한국 콘텐츠 붐이 이젠 게임으로 이어질 겁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업체에서 일하다 최근 게임 회사로 이직한 이가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등 글로벌 OTT를 통해 세계로 뻗어 나간 한국 콘텐츠의 미래가 게임에 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지난해 영화 드라마 업계에선 서사가 탄탄한 웹소설, 웹툰을 원작으로 한 작품의 성공이 눈에 띄었다”며 “게임 업계도 지식재산권(IP) 발굴 가능성을 지닌 원천 콘텐츠를 찾고 있다”고 했다. ‘한계선을 넘다’는 판타지 장편소설 ‘눈물을 마시는 새’(전 4권·황금가지)를 게임과 영상으로 만들기 위한 삽화를 담은 책이다. ‘눈물을 마시는 새’는 이영도 작가(51)가 2002년 PC통신 하이텔에 연재했고, 2003년 종이책으로 출간돼 60만 부 이상 팔렸다. 현재 국내 게임업체 크래프톤이 ‘눈물을 마시는 새’를 게임과 영상으로 만들고 있는데, 시각화 작업의 초안을 담은 게 ‘한계선을 넘다’다. 책에는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삽화 300여 점이 담겼다. 눈에 띄는 건 한국적 색채가 짙다는 점이다. 도깨비 남성 캐릭터인 ‘비형 스라블’의 옷은 흰색이다. 비형 스라블은 짚신을 신고, 머리엔 상투를 튼 후에 풀어지지 않도록 위에 꽂는 장식인 ‘동곳’을 달았다. 설화에서 방금 툭 튀어나온 듯한 모습이다. 인간이 신을 모시는 종교적 집결지인 ‘하인샤 대사원’의 모습도 낯설지 않다. 스님들은 회색 승복을 입고 돌아다니고, 암자가 오밀조밀 모여 있는 모습은 경남 합천 해인사를 떠올리게 한다. 끈에 매단 뒤 공중에 돌려 소리를 내는 독특한 피리인 ‘무릿매피리’를 연주하는 모습은 쥐불놀이의 한 장면 같다. 영화 ‘스타워즈’ ‘해리포터’ 시리즈에 참여한 미국 할리우드의 디자이너 이언 매케이그가 시각화에 참여해서 그런지 서양에서 익숙할 만한 그림도 보인다. 중세 유럽의 성 같은 왕국의 옛 수도, 도끼나 단검 등 대장간에서 만들어진 전투용 무기는 영미권 판타지에서 흔히 보는 모습이다. ‘한계선을 넘다’를 시작으로 내년엔 그래픽노블이 출간되고, 이르면 2025년엔 롤플레잉게임(RPG)이 나온다니 반응이 어떨지 기대된다. 지난해 출판계는 영화 드라마가 몰고 온 열풍의 수혜를 단단히 받았다. 박찬욱 감독 영화 ‘헤어질 결심’(2022년)의 각본집인 ‘헤어질 결심 각본’(을유문화사), 드라마 ‘그 해 우리는’ 대본집 ‘그 해 우리는’(전 2권·김영사)이 인기를 끌었다. ‘한계선을 넘다’가 출간 직후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서 종합 1위에 오른 것을 보니 게임업계와 출판계도 이미 동떨어진 시장이 아니다. 이젠 한국 문학을 바탕으로 만든 게임이 콘텐츠 붐을 일으킬 때도 되지 않았을까. 해외 유저들이 한국 게임을 즐기고, 이 인기 덕에 한국 작가가 쓴 원작 소설이 미국 온라인 서점 아마존북스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상상을 해본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보르비콩트보다 더 크고 더 화려하게 만들어라.” 프랑스 파리 남서쪽 베르사유 궁전 정원엔 ‘태양왕’ 루이 14세(재위 1643∼1715년)의 권력에 대한 욕망이 녹아 있다. 당시 재무장관 니콜라 푸케(1615∼1680)가 세운 보르비콩트 성의 정원을 보고 질투를 느낀 루이 14세는 더 멋진 정원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보르비콩트 정원을 설계한 정원사 앙드레 르 노트르(1613∼1700)를 불러 거대한 프로젝트를 맡긴다. 1682년 완성된 정원은 어마어마했다. 14개 정원엔 50개의 연못 분수와 500개가 넘는 조각상이 배치됐다. 정원 중앙에 자리 잡은 신들의 분수는 조각상의 근육이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생생하게 만들어졌다. 영국 에식스대에서 조경학을 공부하고 국내에서 정원설계회사를 운영하는 저자는 베르사유 정원이 “자신을 태양이자 절대 권력으로 투영한 루이 14세의 상징”이라고 평가한다. 저자는 세계 수많은 정원 중 독특한 특징을 지닌 정원 30곳과 이에 얽힌 일화를 소개한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구엘공원, 미국 뉴욕 맨해튼 센트럴파크 같은 해외 유명 정원뿐 아니라 서울 종로구 창덕궁 후원, 강원 강릉시 오죽헌의 정원 등 한국의 아름다운 정원도 소개한다. 깊이 있는 분석보단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많다. 찬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 책장을 넘기며 방구석에서 정원 산책을 해보는 건 어떨까.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어느 날 프랑스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전직 에투알(수석무용수) 스텔라가 6층 자택에서 떨어져 사망한다. 외부 침입 흔적은 없었다. 경찰은 스텔라가 발코니에서 화분에 물을 주다가 추락사한 것으로 판단하고 수사를 종결한다. 그러나 스텔라의 딸 루이즈는 경찰 수사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루이즈는 어머니의 죽음 뒤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며 전직 강력반 반장 마티아스를 찾아가는데…. 과연 스텔라는 왜 사망한 것일까. 프랑스 작가 기욤 뮈소(49)가 지난해 12월 21일 국내에 출간된 19번째 장편소설 ‘안젤리크’(밝은세상·사진)로 돌아왔다. 지난해 1월 장편소설 ‘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밝은세상) 이후 11개월 만이다. 책장을 술술 넘기게 하는 ‘페이지 터너’ 장인의 녹슬지 않은 실력을 증명한 신작을 내놓은 그를 서면으로 단독 인터뷰했다. ―반전과 서스펜스가 넘치는 추리소설로 돌아왔다. “서스펜스야말로 내 전매특허다. 다만 신작은 추리소설이자 등장인물의 비밀과 추억이 담겼다는 점도 생각하며 읽어줬으면 좋겠다.” ―등장인물은 저마다의 꿈을 달성하는 데 실패하고 결국 원한을 갖게 된다. “신작은 사람을 황폐하게 만드는 ‘원한’이라는 감정을 파고든다. 요즘은 과거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원한 때문에 엇나가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믿는데 실제로는 그런 삶을 전혀 누리지 못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비참할까. 원한에 사로잡힌 인물이 끔찍한 일탈을 저지르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책 맨 앞에 영화 ‘태양은 가득히’(1960년)의 원작자로 유명한 미국 소설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1921∼1995)의 말을 인용했다. “그저 다른 사람이었으면 하는 불만에 흥미를 갖는다”라는 문장은 인간의 충족되지 않은 욕망을 담은 것 같다. “신작을 쓰는 데 하이스미스가 영감을 줬다. ‘안젤리크’를 읽으면서 독자는 등장인물이 가면을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서운 비밀을 숨기고 있고, 그 비밀이 등장인물을 살아있게 만드는 동력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등장인물을 평가하거나 규정하려 들지 않는다. “나는 인간의 영혼이 지닌 복잡한 미로를 탐구하려고 애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다. 인간을 깊이 이해하려면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지구에서 살며 가장 끔찍한 건 모든 사람이 그 나름의 이유를 지니고 행동한다는 점이니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기에 어떻게 지냈나. “코로나19가 시작되고 나서 6개월 동안 아예 글을 쓸 수 없었다. 정상적인 삶으로 되돌아오자 마치 히말라야 등반을 마친 산악인 같은 기분을 느꼈다. 히말라야에 다시 올라가라고 하면 과연 해낼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신작의 첫 장을 꾸역꾸역 쓰고 났더니 다시 글쓰기가 가능해졌다.” ―한국 영화의 광팬으로 알려져 있다. “제일 좋아하는 감독이 박찬욱이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하나같이 독창적이고 특별하다. 최근에 영화 ‘헤어질 결심’(2022년)을 봤는데 역시 보석 같은 작품이었다. 영화 ‘부산행’(2016년)의 연상호, 영화 ‘곡성’(2016년)의 나홍진,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2019년)의 김성훈 감독도 좋아한다.” ―새해를 맞아 한국 독자들에게 어떤 말이 하고 싶은지 궁금하다. “한국 독자들이 줄곧 내게 보여준 변함없는 열광에 깊이 감사드린다. 2010년 한국에 처음 갔다. 한국에 가서 한국어로 번역된 내 책들을 다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어느 날 프랑스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전직 무용수 스텔라가 6층 자택에서 떨어져 사망한다. 외부 침입 흔적은 없었다. 경찰은 스텔라가 발코니에서 화분에 물을 주다가 추락사한 것으로 판단하고 수사를 종결한다. 그러나 스텔라의 딸 루이즈는 경찰 수사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루이즈는 스텔라의 죽음 뒤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며 전직 강력반 반장 마티아스를 찾아간다. 과연 스텔라는 왜 사망한 것일까. 프랑스 작가 기욤 뮈소(49)가 지난달 21일 번역 출간된 19번째 장편소설 ‘안젤리크’(밝은세상)로 돌아왔다. 국내 출간은 올 1월 장편소설 ‘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밝은세상) 이후 11개월 만이다. 책장을 술술 넘기게 하는 ‘페이지 터너’의 장인의 녹슬지 않은 실력을 증명한 신작을 내놓은 그를 서면으로 만났다.―반전과 서스펜스가 넘치는 추리소설로 돌아왔다. “서스펜스야말로 내 전매특허다. 다만 신작은 추리소설이자 등장인물의 비밀과 추억이 담겼다는 점도 생각하며 읽어줬으면 좋겠다.”―등장인물은 저마다의 꿈을 달성하는 데 실패하고 결국 원한을 갖게 되는데…. “신작은 사람을 황폐하게 만드는 ‘원한’이라는 감정을 파고든다. 요즘은 과거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이 원한 때문에 엇나가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믿는데 실제로는 그런 삶을 전혀 누리지 못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비참할까. 원한에 사로잡힌 인물이 끔찍한 일탈을 저지르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책 맨 앞에 영화 ‘태양은 가득히’(1960)의 원작자로 유명한 미국 소설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1921~1995)의 말을 인용했다. “그저 다른 사람이었으면 하는 불만에 흥미를 갖는다”라는 문장은 인간의 충족되지 않은 욕망을 담은 것 같다. “신작을 쓰는데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영감을 줬다. ‘안젤리크’를 읽으면서 독자는 등장인물이 가면을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서운 비밀을 숨기고 있고, 그 비밀이 등장인물을 살아있게 만드는 동력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등장인물을 평가하거나 규정하려고 들지 않는다. “나는 인간의 영혼이 지닌 복잡한 미로를 탐구하려고 애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다. 인간을 깊이 이해하려면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지구에서 살면서 가장 끔찍한 건 모든 사람이 나름의 이유를 지니고 행동한다는 점이니까.”―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기 어떻게 지냈나. “코로나19가 시작되고 나서 6개월 동안 아예 글을 쓸 수 없었다. 정상적인 삶으로 되돌아오자 마치 히말라야 등반을 마친 산악인 같은 기분을 느꼈다. 히말라야에 다시 올라가라고 하면 과연 해낼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신작의 첫 번째 장을 꾸역꾸역 쓰고 났더니 다시 글쓰기가 가능해졌다.”―한국 영화의 광팬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감독이 박찬욱이다. 박찬욱 영화는 하나같이 독창적이고 특별하다. 최근에 영화 ‘헤어질 결심’(2022)을 봤는데 역시 보석 같은 작품이었다. 영화 ‘부산행’(2016)의 연상호, 영화 ‘곡성’(2016)의 나홍진, 넷플릭스 시리즈 ‘킹덤’(2019)의 김성훈 감독도 좋아한다.”―새해를 맞은 한국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한국 독자들이 줄곧 내게 보여주신 변함없는 열광에 깊이 감사드린다. 한국에 가서 한국어로 번역된 내 책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이영도 작가(51)가 2003년 출간한 판타지 장편소설 ‘눈물을 마시는 새’(전 4권·황금가지)가 유럽의 한 출판사로부터 선인세 약 3억 원을 받고 판매됐다. 이는 단일 국가에서 받은 한국 출판물 선인세 중 최고액이다. ‘눈물을 마시는 새’는 이번 계약을 포함해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 12개 국가 출판사와 총 6억 원의 선인세 계약을 맺었다. 앞서 김수현 작가의 에세이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2020년·놀)가 일본 출판사와 2억 원, 김언수 작가의 ‘설계자들’(2010년·문학동네)이 미국 출판사와 1억 원의 선인세 계약을 각각 맺은 바 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웹소설, 웹툰, 게임 시나리오…. 언제나 상업적인 글을 썼다. 먹고살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가벼운 글을 싫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밤이 찾아오면 조금 허전함을 느꼈다. 사람들이 깊게 공감하는 주제에 대해 쓰고 싶었다. 그럴 때면 홀로 방에 앉아 자판을 두드렸다.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을 써 내려갔다. 공허함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20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당선자 김혜빈 씨(29)는 포부를 묻자 자신감 있게 답했다. “7년 동안 웹소설, 웹툰, 게임 시나리오를 썼어요. 그런데 주위에선 저를 ‘진짜 작가’로 인정하지 않더군요. 신춘문예를 계기로 웹소설 작가에 대한 편견을 깨부수고 싶어요. 어떤 이야기를 쓰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작가라는 걸 증명하겠습니다.” 20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자들이 지난해 12월 23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 모였다. 중편소설, 단편소설, 시, 시조, 희곡, 동화, 시나리오, 문학평론, 영화평론까지 모두 9개 부문에서 김혜빈 공현진(36) 권승섭(21) 김미경(57) 임선영(29) 김서나경(본명 김나경·43) 장희재(30) 민가경(29) 윤성민 씨(39)가 당선됐다. 당선자들은 직업도 나이도 각양각색이라 처음에는 서로 어색해했지만 문학이라는 공통분모 덕에 금세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날 영하 14도의 한파가 몰아쳐 몸은 꽁꽁 얼었지만 당선자들의 표정은 이른 봄이 찾아온 듯 해맑았다. 단편소설 당선자 공현진 씨에게 신춘문예는 닿을 듯 닿지 못했던 꿈이었다. 공 씨는 학사, 석사, 박사 모두 국문학을 전공하며 작품을 꾸준히 써 왔다. 201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한 시가 본심까지 진출했지만 끝내 당선되지 못했다. 작가가 될 수 있을지,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매일 고민했다. 올해 단편소설을 신춘문예에 응모할 때도 마음을 비웠지만 마침내 등단의 꿈을 이뤘다. “‘신춘문예 장수생’이어서 불안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글쓰기를 포기하고 싶은 적은 없었습니다.” 시 당선자 권승섭 씨는 올해 최연소 당선자. 권 씨는 7세 때 하늘을 훨훨 날아가다 꽃에 앉은 배추흰나비를 그린 시를 썼다. 대학생인 그는 시뿐 아니라 소설, 동화, 희곡 등 다양한 작품을 쓰고 있다. 소감을 묻자 권 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너무 이른 나이에 당선이 된 것 같아 기쁨보단 걱정과 불안이 앞섭니다. 제가 행복하게 시를 썼을 때 반응이 좋더라고요. 즐겁게 쓰는 시인이 되고 싶어요.” 시조 당선자 김미경 씨는 올해 최고령 당선자다. 어릴 적부터 시인을 꿈꿨던 문학소녀였지만 결혼 후 아이를 키우느라 글쓰기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2017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펜을 잡았다. 당선 전화를 받은 건 미국에 있는 아들의 대학 졸업식을 마치고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던 때였다.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은 김 씨를 향해 아들이 “축하한다”고 나직이 말했다고 한다. “자연과 사물에 귀가 열린 사람이 시인이라고 생각해요. 흔들리는 바람의 말도 귀담아듣겠습니다.” 각자 상황이 달랐던 만큼 준비 기간도 천차만별이다. 수년간 투고 끝에 당선된 이들이 있는가 하면 첫 도전에 당선된 이도 있다. 영화평론 당선자 윤성민 씨는 올해 처음 신춘문예에 응모해 당선됐다. 윤 씨는 대학생 때 영화 동아리에서 활동했지만 평론을 제대로 써본 적은 없다. 올해 신춘문예 공고문을 보고 동아일보에만 응모해 당선됐다. 중앙일보 기자인 윤 씨는 “기자 업무가 명확한 글쓰기 훈련을 하는 데 도움을 줬다”며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최선을 다해 평론을 쓰겠다”고 했다. 희곡 당선자 임선영 씨는 대학생 때부터 10년 가까이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번번이 낙선한 탓에 회사원으로 생업을 이어갔지만 작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임 씨는 “취업 준비를 하면서 작가가 못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많이 힘들었다”며 “신춘문예 당선은 이루지 못했던 꿈에 날개를 달아준 ‘사건’”이라고 했다. 당선자들은 등단이라는 첫발을 뗐다. 이들에게 작가는 어떤 의미일까. 어린이책 편집자로 일하다가 자기만의 글을 쓰고 싶어 신춘문예에 응모한 동화 당선자 김서나경 씨는 “내 이야기가 세상에 닿을 수 있다는 희망과 좋은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겼다”며 “글을 잘 쓸 수 있을지 두려움도 있지만 더 나은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며 웃었다. 매일 8시간씩 카페에서 일하며 작품을 쓴다는 시나리오 당선자 장희재 씨는 “아직 남들만큼 이뤄놓은 게 없어 잃을 것도 없다”며 “사람들을 한바탕 울리거나 위로를 주는 작품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문학평론 당선자 민가경 씨는 문학을 동경했지만 생계를 위해 6년 동안 항공교통관제사와 공무원으로 일했다. 퇴직 후 뒤늦게 꿈을 찾아 문예창작학과 대학원에 진학했고 당선의 기쁨을 맛봤다. 배수의 진을 친 그의 도전은 시작일 뿐이다. 민 씨는 힘찬 목소리로 고백했다. “신춘문예 당선은 꿈을 외면하고 살았던 제게 문학이 ‘꿈꿔도 좋다’고 허락해준 것 같아요. 당선 전화를 받았을 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빛난 순간입니다. 문학이 이 시대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말하는 평론가가 되겠습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지나온 삶에는 여러 성공과 실패가 섞여 있다. 내 낚싯줄에 어떤 물고기가 걸릴지 알 수 없듯, 성공도 실패도 내 뜻대로만 되지 않았다.” 저자는 소설책을 읽을 때 밑줄을 잘 긋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가 1952년 발표한 중편소설 ‘노인과 바다’를 읽을 땐 달랐다. 소파에 드러누워 책장을 넘기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밑줄을 그으며 문장을 음미했다. 삶은 성공도 실패도 아니라는 사실을 단단한 문장으로 전하는 헤밍웨이의 글을 읽으며 저자는 “나이를 먹고 보니 삶은 성공도 실패도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이 책은 저자가 50대에 50권의 책을 읽은 감상을 담은 에세이다. 저자는 대학에서 시인 김수영(1921∼1968) 연구로 석사 학위를, 소설가 최인훈(1936∼2018)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강사로도 잠시 일했다. 하지만 결혼 후 육아와 살림을 하느라 청춘을 보냈다. 나이가 들어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던 저자에게 다가온 것이 책이었다. 그가 먼저 찾은 건 고전이다. 독일 철학자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의 희곡 ‘파우스트’(1831년)를 읽고 “이제는 성찰하는 열정의 삶을 살고 싶다”고 다짐한다. 러시아 소설가 레프 톨스토이(1828∼1910)의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1885년)를 탐독하곤 “모두의 마음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 그게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싶다”고 외친다. 어려운 책만 읽은 건 아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여성 작가 김혼비의 에세이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2018년)에 감동받고 “하마터면 동네에 여자축구팀이 있는지 찾아볼 뻔했다”고 우스갯소리를 던진다. 지리학자 최영준의 에세이 ‘홍천강변에서 주경야독 20년’(2010년)을 통해 “주말 텃밭을 가꾸고 싶다는 용기가 생겼다”고 당당히 이야기한다. 지금 내가 잘 살고 있는지, 어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된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