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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극장에서만큼은 어리다고, 장애가 있다고 배제돼선 안 돼요. 모두가 환영받는 세상이 더 행복한 세상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서울 종로구 아시테지 사무실에서 18일 만난 너태샤 길모어 영국 스코틀랜드 바로우랜드(배로랜드) 발레단 예술감독(50·사진)의 말이다. 국내 대표 어린이·청소년 공연예술 축제로, 올해 31주년을 맞은 ‘아시테지 국제여름축제’에서 바로우랜드 발레단은 무용극 ‘타이거’와 ‘OH! 타이거’를 국내 초연한다. 올해 축제는 소수자, 기후 위기 등 ‘공존’을 주제로 한 8개국의 총 13개 작품을 30일까지 선보인다. 바로우랜드 발레단은 종로구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21∼23일 공연한다. 20일 현재 전석 매진된 상태다. 바로우랜드 발레단의 두 무용극은 부모에게 관심받지 못하는 한 소녀의 집에 호랑이가 나타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감옥을 닮은 무대세트 속, 갈등으로 가득했던 가족의 세계는 호랑이로 인해 발칵 뒤집어지고 사랑이 다시 피어난다. 길모어 감독은 “어린이 작품은 더욱 까다롭게 만들어야 한다. 지루하면 바로 티 나는 아주 정직한 관객이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서사는 전부 덜어내고, 감정이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내리도록 구성했다”고 말했다. 22, 23일 공연되는 ‘타이거’는 시청각은 물론이고 후각과 촉각 등 감각적 요소를 극대화했다. 호랑이 배역 무용수의 의상엔 오렌지향 오일을 발라 극 초반의 분위기와 강렬히 대비되게 했다. 공연에는 실제 오렌지 180여 개가 사용된다. 공연 후반부에 관객과 무용수들은 오렌지를 손으로 가르고 가볍게 던지며 신나게 논다. ‘OH! 타이거’는 신경다양성을 가진 어린이 관객을 위해 ‘타이거’를 각색한 작품으로, 21일 공연된다. 자폐스펙트럼 등으로 가만히 앉아 공연을 관람하기 어려운 상황을 반영했다. 줄거리를 비롯한 작품 구성은 더욱 단순히 하되, 관객과 무용수가 교감하는 도입부는 강화했다. 무용수가 어린이 관객 옆에 앉아 바닥을 두드리면 되받아치도록 유도하는 식이다. 그는 “특수학교 학생들과 함께 작품을 만들었다. 아이들이 즉흥적으로 참여하기에 매번 새로운 작품이 나온다”며 웃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만들었지만 “부모도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우리 모두 내면에 어린이를 품고 있어요. 냉소적인 어른이 돼버렸지만 오렌지를 손에 쥔 순간 ‘나도 제법 잘 놀지’란 사실을 다시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아이들과 그 행복감을 나누길 바랍니다.” 전석 5만 원.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14년 만에 바뀌어 올해 1, 2월부터 서울 지하철 1∼8호선의 환승 안내 배경 음악으로 사용하는 퓨전 국악음악 ‘풍년’이 팝 스타일 곡으로 재탄생했다. 국립국악원은 싱어송라이터 조지 디.블루(본명 김용현·40)가 박경훈이 작곡한 원곡에 팝과 EDM을 가미한 스타일로 편곡한 ‘풍년(비트박스 리믹스·사진)’을 최근 발매했다. 조지 디.블루는 소녀시대 ‘백허그’(2014년), 에이핑크 ‘SUNDAY MONDAY’(2014년) 등 K팝 아이돌 그룹의 노래를 편곡, 작곡했다. ‘넓혀진 하루에 기대를 품고서 지화자 좋다’ 등 가사로 구성된 ‘풍년’은 일상 속 희망을 산뜻한 박자와 선율에 담았다. 조지 디.블루는 “새날이 밝아올 때의 고취된 마음을 구상하며 만든 곡”이라고 했다. 작사는 영국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에 세 차례 출연한 최고은이 맡았다. 주요 선율은 가야금과 소금 등 국악기로 연주했다. 25현 가야금을 강하게 뜯는 주법은 EDM 음악에서 통통 튀는 소리를 연상케 한다. 기본 박자는 자진모리와 비슷한 레게 음악처럼 구성했다. 그는 “국악기는 울리는 소리에 특화돼, 전자음악의 명확하게 끊어지는 소리를 표현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전자음으로 대체할 수 없는 고유의 색채가 분명하다”고 했다. 보컬로 참여한 소리꾼 김준수 장효선은 팝 선율에 부드럽게 녹아드는 소리를 낸다. 가수 라티노가 비트박스를 곁들였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초읽기 접전, 바둑판을 응시하던 입단 2년 차 막내의 표정은 시종일관 침착했다. 상대는 입단 25년 차 중견 선수. 9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 바둑TV 스튜디오에서 열린 한국여자바둑리그(여바리) 1라운드 4경기에서 여수세계섬박람회 4지명 이나경 초단(15)은 백돌을 쥐고 포항 포스코퓨처엠 주장 김혜민 9단(37)을 꺾었다. 패기에 찬 수읽기와 신예답지 않은 안정된 운영으로 백 반집 승을 거둔 것. 한국기원 소속 최연소 여자 기사인 이 초단에게 이번 경기는 주장 김은지 5단 대타로 뛴 데뷔전이었다. 그는 경기가 끝난 뒤 “막상 시작하니 떨리지 않았다”고 덤덤히 말했다. 최정상 여자 바둑 선수들이 맞붙는 여바리가 6일 개막했다. 올해로 9회째를 맞은 이 대회는 8개 팀이 3판 다승제, 14라운드 더블리그로 5개월간 정규리그를 이어간다. 2015년 대회 출범 이래 매년 새로운 팀이 챔피언에 올라 2번 이상 우승한 팀이 전무한 만큼 이번 시즌 우승 팀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바둑의 룰을 잘 알지 못해도 여바리를 즐길 수 있는 관전 포인트 5가지를 알아본다. 국내 최대 규모 여바리는 국내에서 열리는 여자 바둑대회 중 최대 규모로 꼽힌다. 바둑기전은 상금과 대국료 등 예산에 따라 대회 규모가 평가된다. 여바리는 우승 팀에 5500만 원, 준우승 팀에 3500만 원의 상금이 주어지며 대국마다 승자(130만 원)와 패자(40만 원)에게 대국료가 지급된다. 현존하는 국내 여자 기전 중 가장 오래된 ‘여자국수전’ 등이 개인 토너먼트 방식인 것과 달리 총 168대국에 걸친 팀 리그전인 만큼 예산이 최대 수준이다. 프로여자국수전은 우승자에게 2500만 원, 준우승자에게 1000만 원을 지급하며 별도 대국료는 없다. 2012년 국제바둑학회가 발간한 ‘현대 한국 여성 바둑의 발전 과정’(조선오·남치형 저)에 따르면 국내 최초 여자 기전은 1963년에 열린 여류왕위전이다. 그러나 단 1회 개최에 그쳤다. 이후 여자 기전은 1990년대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확대되기까지 오랜 부침을 겪었다. 미미했던 관심은 2000년 동아일보가 주최한 43기 국수전을 통해 증폭됐다. 당대 ‘철녀(鐵女)’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맹활약한 중국 여자 기사 루이나이웨이 9단이 세계적인 바둑 스타 조훈현 9단을 꺾고 우승하며 세간의 이목을 모은 것. 이후 박지은 조혜연 김채영 김혜민 등 스타급 선수들이 나타나면서 여성 바둑은 성장을 이뤘다. 이광순 한국여성바둑연맹 회장은 “과거 여자가 전문적으로 바둑을 두는 것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잡혀 있지 않았고, 2010년대가 돼서야 여성 프로 기사들이 국제무대에서 본격 활약하기 시작했다”며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영향으로 지난해 하반기부터 전국 31개 여성연맹 지부 중 21곳에 입문반이 신설됐다”고 말했다. 외국인 용병 제도 부활 올해 여바리에선 팬데믹 여파로 중단됐던 외국인 선수 제도가 4년 만에 부활했다. 팀마다 자율적으로 외국인 선수를 1명씩 영입하는 제도다. 김은지 한국기원 기전운영팀장은 “국가별 최정상급 기사들이 맞붙는 경기를 벌임으로써 국내외 팬들의 이목을 모을 수 있다”며 “대회를 국제 규모로 키워 안정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올 시즌 여바리 1라운드 평균 시청률은 0.15%로 외국인 용병이 불참한 지난해(0.12%) 대비 소폭 상승했다. 2004년 시작된 한국바둑리그는 출범 19년 만인 지난 시즌에야 대만, 일본 등 해외팀이 국가 명의로 참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번 여바리는 9월부터 열리는 항저우 아시아경기에 참가하는 국가대표 선수들이 출전하면서 ‘미리 보는 아시아경기’로도 불린다. 부안 새만금잼버리에는 일본 여자바둑의 최강자 후지사와 리나 6단이 합류했다. 입단 4년 차이던 2014년, 일본 여자바둑대회에서 사상 최연소(15세 9개월)로 우승을 거머쥔 선수다. 항저우 아시아경기의 일본 국가대표 선수로도 활약할 예정이다. 아시아경기에 중국 대표로 참가하는 기대주 우이밍 5단은 서울 부광약품 선수로 발탁됐다. 우이밍 5단, 김은지 5단과 함께 한중일 신예로 꼽히는 일본 나카무라 스미레 3단은 순천만국가정원 선수로 지명됐다. 후지사와 6단은 “한국에서 대면 대국 할 날을 오랫동안 기다렸다”며 “아직 팀 단위 여자 기전이 없는 일본과 달리 동료들과 서로 격려하며 성장할 수 있어 좋은 경험”이라고 참가 소감을 밝혔다. 연고지 강조된 ‘내 고장 내팀’ 다른 기전에 비해 야구 등 대형 스포츠처럼 팀마다 연고지가 강조돼 응원의 재미도 크다. 팀 이름은 시(市), 군(郡)명을 기본 범위로 지어진다. 기업이 아닌 지방자치단체가 이끄는 팀은 서귀포 칠십리, H2 DREAM 삼척, 보령 머드, 순천만국가정원, 부안 새만금잼버리, 여수세계섬박람회 등 6개다. 보령 머드의 최정, 여수세계섬박람회의 이나경 선수는 실제 지역연고 선수로 출전한다. 지역투어 라운드에선 지역 팬들이 직접 참관하며 응원할 수 있다. 이는 팀 스토리텔링을 통해 대중 흥미를 자극하려는 전략이다. 한국바둑리그는 지역연고를 일찍이 앞세우지 않아 흥행 몰이에 실패했단 평가를 받는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국민 취미로 꼽혔던 바둑은 오늘날 인기가 급감하며 흥행이 관건인 처지가 됐다. 갤럽이 지난해 상반기 만 13세 이상 한국인 515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1년 이내 바둑을 경험한’ 한국인은 6%에 그쳤다. 국내 대학 단 2곳에 남아 있는 바둑학과 가운데 명지대는 최근 폐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바둑 여제’ 최정 9단 참전 ‘바둑 여제’ 최정 9단의 여바리 통산 100승 돌파 시점도 관전 포인트다. 현재 96승(13패)을 기록 중인 최 9단은 2018년 여자 기사 최연소로 9단에 입단해 여자 바둑 기사가 남자 기사보다 실력이 부족하다는 고정관념을 깨부순 주역이다. 이달 바둑 통계 사이트 고 레이팅(Go Ratings) 기준 세계 100위권에 든 국내 여자 선수는 최 9단이 68위로 유일무이하다. 2019년 세계 랭킹 2위인 커제 9단을 상대로 벌인 비공식 인터넷 대국에서 승리한 전적은 유명하다. 최 9단은 세계 바둑사상 처음 여성 프로 기사로서 메이저 세계대회 결승전에도 진출했다. 지난해 열린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8강전에서 중국 양딩신 9단, 4강전에서는 한국 변상일 9단을 꺾고 결승에서 세계 1위 신진서 9단과 맞붙었다. 루이나이웨이 9단이 1992년 제2회 응씨배에서 4강까지 올랐던 기록을 넘어선 것이다. 최 9단은 이달 6일 열린 GS칼텍스배 프로기전 4강에서는 박진솔 9단을 이기며 여자 기사로서 23년 만에 종합기전 결승 진출권을 따내기도 했다. 톱 랭커 박빙 승부 통상 스포츠 대회에서 이목이 쏠리는 톱랭커(상위 랭킹 및 우승자 출신 선수)끼리 맞붙는 경기 비중이 높은 것도 여바리의 매력이다. 리그마다 참전하는 지명 선수의 수가 적기 때문이다. 한국바둑리그가 1지명부터 5지명까지 5 대 5로 바둑을 두는 것과 달리 여바리는 3 대 3으로 대결한다. 인기 선수끼리 대국을 펼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최 9단과의 대국이 기대되는 국내 선수로는 김은지 5단 외에 동갑내기 김채영 8단(H2 DREAM 삼척)이 꼽힌다. 김채영 8단은 2018년 오청원배 세계여자바둑대회에서 최 9단을 이기고 초대 우승컵을 안은 바 있다. 순천만국가정원의 오유진 9단 역시 지난해 오청원배에서 최 9단을 꺾고 챔피언에 올랐다. 2015년 여바리에서 다승상과 MVP를 동시에 따내기도 했다. 기량이 빠르게 성장하는 어린 선수들이 패기 있는 접전을 벌이는 것도 묘미다. 태권도 1단이 9단을 이기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바둑에선 단위에 따른 실력 격차가 그리 크지 않아 결과를 점치기 어렵다. 8개 팀 참가 선수 32명 중 1990년대, 2000년대 출생한 선수 비율이 81%에 달한다. 바둑 선수의 기량은 통상 10대부터 20대 중반까지 빠르게 성장해 정점을 찍고 하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번 대회의 최연소 선수는 순천만국가정원의 나카무라 스미레 3단(14)이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살 판 아니면 죽을 판.’ 전통연희 무대에 선 광대가 고도의 기예를 선보이기 전 되뇐다는 말이다. ‘살판’(남사당놀이에서 몸을 날려 넘는 땅재주)을 활용한 언어유희지만 재기발랄한 악가무(樂歌舞)와 거침없는 풍자 뒤에서 광대들은 정말 그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실력을 갈고닦았다.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에서 10일 만난 줄광대 남창동 씨(22)와 발탈꾼 정준태 씨(42)는 “꿈의 무대인 전통연희축제에 서기까지 살 판, 죽을 판으로 노력했다”고 했다.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이 주최하는 ‘2023 대한민국 전통연희축제―뛸판, 놀판, 살판’이 12∼16일 국립국악원 일원에서 열린다. 남 씨와 정 씨는 14일 국악원 연희마당에서 합동 무대를 선보인다. 발탈은 포장막 속의 탈꾼이 발에 탈을 씌운 채 대나무로 만든 인형의 팔을 움직이는 공연이고, 줄타기는 외줄 위의 줄광대가 음악에 맞춰 기예와 재담을 펼치는 놀이다. 국가무형문화재인 두 종목 모두 맥이 끊길 소지가 있어 2016년 국가긴급보호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줄광대와 발탈꾼인 두 사람이 한 무대에 오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의외의 조합이지만 두 사람은 “줄과 탈이라는 도구 외에는 똑 닮은 장르”라고 입을 모았다. 발탈과 줄타기는 재담과 소리 등을 즉흥으로 섞어 서민의 희로애락을 표현한다. 정 씨는 “두 장르 모두 광대가 관객과 즉석에서 공연을 만들기에 함께 무대에 올랐을 때 시너지를 낸다”고 했다. 공연시간 약 40분간 남 씨는 2m80cm 높이의 줄 위에서, 정 씨는 포장막 안에서 재담을 주고받을 예정이다. 두 광대를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어릿광대 역할은 남 씨의 부친인 남해웅 국립창극단 창악부 부수석이 맡는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10여 년 전 창경궁에서 열린 공연이었다. 정 씨는 “키 120cm 남짓한 아이(남 씨)가 겁 하나 안 내고 줄을 타는 걸 보고 장차 대한민국 대표가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며 “우리 둘이 함께라면 관객이 눈을 떼지 못하는 무대가 만들어지겠다 싶었다”고 회고했다. 남 씨는 일곱 살 때부터 국가무형문화재 김대균 명인의 가르침을 받으며 줄타기 신동으로 관심을 모았다. 정 씨는 30년 전인 열두 살 때 사물놀이로 입문해 지금은 국내에 5명뿐인 무형문화재 발탈 전승자다. 그는 1998년부터 한 해 200회가량 공연하고 있다. “올봄, 제 인생 최고 난도의 기술을 개발했어요. 소위 ‘비인기’ 종목이지만 더 멋진 공연을 보여드리고 싶었거든요. 위험해서 아직 1년은 연마해야 해요. 외줄을 탈 때면 ‘도저히 못 하겠다’는 두려움이 생기기도 했지만 이젠 최대한 즐겨보려고 마음먹었습니다.”(남 씨) 관객에겐 일방적 감상보다는 ‘함께 놀기’를 권했다. 남 씨는 “요즘 전통예술에 대한 관심이 커진 만큼 더욱 열심히 준비했다. 공연을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보는 사람은 없게 될 것”이라며 웃었다. 무료.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검도 액션 더 크게! 동선 안 겹치게 조심해서 다시 해볼게요.”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뮤지컬 ‘그날들’의 신선호 안무감독(51)과 서정주 무술감독(49)이 5일 리허설에 열중하고 있었다. 2013년 초연된 ‘그날들’은 올해 10주년을 맞았다. 두 감독은 두 번째 시즌인 2014년부터 지금까지 호흡을 맞춰오고 있다. ‘그날들’은 청와대 신입 경호원인 정학과 무영, 한중 수교식의 비밀을 알고 있는 통역사 ‘그녀’를 둘러싼 실종 사건을 그린 뮤지컬이다. 김광석(1964∼1996)의 명곡을 넘버로 편곡했다. 배우 유준상 엄기준 오만석 이건명이 정학 역을, 지창욱 김건우 오종혁 영재가 무영 역을 각각 맡는다. 12일 개막하는 ‘그날들’은 앙상블 23명이 선보이는 화려한 액션 군무가 극의 긴장감을 끌어올린다는 평가를 받는다. 6번째 시즌인 올해 공연에선 군무가 작품에 녹아드는 ‘합’을 강화했다. 1막 넘버 ‘변해가네’의 경우 기존 호신술 시범처럼 분절된 동작을 하나로 속도감 있게 연결했다. 신 감독은 “앙상블 오디션 때부터 개인의 역량보다는 전체적인 합을 중시했다”고 말했다. 군무는 복싱, 태권도, 합기도, 검도 등의 동작을 조합해 완성했다. 이를 소화하기 위해 배우들은 전문 무술 교육을 주 2회씩, 2개월간 받았다. 서 감독은 “연습 때마다 배우들은 물론이고 모든 동작을 시연하는 감독들의 티셔츠도 흠뻑 젖는다. 특히 15m 높이에서 줄을 타고 내려오는 레펠(현수하강)은 단 5회 차 연습만으로 습득해 낼 ‘강심장’을 찾느라 마음이 힘들었다”며 웃었다. 뮤지컬 ‘광주’ ‘마리 퀴리’ 등에 참여한 15년 차 안무가인 신 감독에게 ‘그날들’은 가장 많은 고민 끝에 안무를 만든 작품이다. 그는 “항상 주위를 경계하는 눈빛, 꼿꼿하게 서 있는 자세 등 실제 국내외 경호관의 영상을 수없이 돌려봤다. 넘버를 수천 번 듣고 두 달간 쪽잠만 자면서 만들었다. 제작진에게 ‘버튼 누르면 안무 나오냐’고 농담할 정도였다”고 했다. 서 감독은 두 번째 시즌 공연에 먼저 참여한 신 감독에게서 “무술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제안을 받고 합류했다. 뤽 베송 감독의 영화 ‘루시’(2014년)에서 배우 최민식의 행동대장 역을 맡는 등 액션 배우로 경력을 쌓아온 그는 “정장 입으면 보디가드, 추리닝 입으면 건달… 액션만큼은 자신 있었기에 단번에 수락했다”고 했다. 이어 “공연은 모든 회차가 현장에서 안전하게 끝나야 하기에 수위를 잘 조절하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두 감독은 이날도 차에서 잠깐 눈을 붙인 게 전부라면서도 환하게 웃었다. “하나도 피곤하지 않아요. 멋진 작품과 배우들이 주는 희열이 훨씬 크거든요.” 9월 3일까지, 5만∼16만 원.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난독증이 있어서 희곡을 정독하기가 힘들어요. 그 대신 이미지를 수집하듯 읽으며 홀로 무궁무진한 상상을 하죠. ‘메디아 온 미디어’의 원작인 ‘메디아’(메데이아) 역시 제목을 보자마자 사로잡혔어요. 메디아의 입을 빌려 미디어 얘기를 해야겠다고요.” 연극 ‘메디아 온 미디어’를 무대에 올리는 김현탁 연출가(55·극단 성북동비둘기 대표)는 2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울 성동구 성수아트홀에서 9일부터 16일까지 공연되는 이 연극은 에우리피데스가 쓴 고대 그리스 비극 ‘메디아’를 패러디해 오늘날 미디어 현실을 풍자한 작품이다. 원작 속 메디아의 복수극은 리얼 토크쇼, 성인 콘텐츠 등 각종 TV 프로그램 형식으로 재연되면서 콘텐츠의 자극과 폭력에 무감각해진 세태를 꼬집는다. 격정과 질투 끝에 메디아가 추방되는 장면은 고전 멜로 영화 속 과장된 연기와 슬픈 음악을 빌려 우스꽝스럽게 표현됐다. 작품은 11월엔 미국 뉴욕과 버지니아주 블랙스버그에서 초청 공연될 예정이다. 2009년 초연된 후 여러 차례 무대에 오른 작품인 만큼 이번 공연에는 급변한 미디어 환경을 반영했다. 김 연출가는 “작품의 큰 틀은 유지하되 지상파 방송에서 차용했던 일부 형식과 대사를 1인 유튜브 방송으로 바꿨다”고 말했다. 연극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실험적 무대가 특징이다. 배우들은 손수 분무기로 물을 뿌려 비 오는 장면을 연출하고, 막간을 이용해 무대를 대걸레로 닦는 모습을 관객에게 내보인다. 의상은 무대에서 대놓고 갈아입는다. 자유분방하게 바뀐 고전 원작은관객들의 실소를 유발한다. 그는 “그때그때 떠오르는 소품을 주위에서 끌어다 제 방식대로 쓴다”며 “극단이 가난해서, 성미가 급해서일 수도 있지만 ‘무엇이든 연극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확신을 보여주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2009년 초연 때부터 같은 배역을 맡아온 배우 김미옥과 이진성이 이번 공연에서도 각각 메디아 역과 크레온 왕 역을 연기한다. 배우들은 고난도 요가 동작을 하는 등 신체적 에너지를 뿜어낸다. 김 연출가는 “관객이 살면서 쉬이 볼 수 없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것 역시 배우가 할 일”이라며 “매일 밤 내가 직접 동작을 연습해보며 신체의 한계점을 찾는다”고 했다. 그는 올해 1월 제59회 동아연극상에서 연극 ‘걸리버스’로 작품상을 받는 등 2005년 극단 창단 후 동아연극상을 4차례나 수상했다. 그는 “극장에서 먹고 자며 온종일 연극만 생각하다 얻게 된 결과가 아닐까”라며 웃었다. 전석 3만 원.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공연예술로 영역 넓히는 AI ‘로봇’은 100여 년 전 체코 희곡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에서 처음 사용됐다. 허무맹랑하다고 여겼던 상상은 오늘날 로봇이 지휘하고, 인공지능(AI)이 희곡을 쓰며 현실이 됐다. 인간의 창조적 영역인 예술을 기술이 대체할 수 있을까.》가장 ‘아날로그적’인 예술로 꼽히는 공연계에도 로봇과 인공지능(AI) 바람이 불고 있다. 소설, 만화, 음악 등에 이어 사람과 현장이 핵심이라 여겨지던 공연 장르에서 신기술을 적극 시도하기 시작한 것. 지난해 생성형 AI인 챗GPT가 공개된 이후 인간의 가장 창조적 활동으로 여겨진 종합예술의 영역을 AI가 대체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담론이 급속히 확산 중이다.● AI가 제작에 참여한 무용과 연극 지난달 27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N스튜디오 국립발레단 연습실에서 한 무용수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반대편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이를 지켜보던 이영철 국립발레단 지도위원은 안무 AI ‘리빙 아카이브’를 켜고 카메라로 무용수의 몸짓을 찍었다. 무용수의 골격을 인식한 AI가 해당 동작과 연결하기 좋은 동작들을 순식간에 추천해줬다. 안무가마다 1명씩 붙는 어시스턴트 역할을 일부 대신해준 것이다. 이 위원은 그중 가장 매끄럽게 이어질 움직임끼리 조합해 무용수에게 제시했다. 거울 앞에 선 무용수는 춤을 따라 춰보며 자신만의 스타일로 소화해낼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국립발레단이 1, 2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선보이는 ‘KNB 무브먼트 시리즈8’의 ‘피지컬 싱킹+AI’는 이런 방식을 거쳐 창작됐다. 전반적인 콘셉트는 챗GPT가 구상했다. 챗GPT에 ‘탄생, 연결, 여행자’ 등의 키워드를 주고 ‘한 사람의 인생과 AI의 탄생을 엮은’ 짧은 이야기를 써달라고 한 것. 이를 토대로 이 위원이 구글 리빙 아카이브와 아이바(AIVA·작곡 프로그램) 등 AI를 활용해 안무와 음악을 구성했다. 이 위원은 “안무가들도 자기 스타일을 벗어난 동작을 상상하는 데 한계가 있다. AI가 나열한 수만 개의 동작을 보면서 안무의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이어 “AI가 전문 안무가의 수준까진 따라잡지 못했지만, 비전공자를 비롯해 누구나 춤을 출 수 있도록 장벽을 낮추는 데 역할을 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지난달 26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의 연습실에선 푸른 불빛이 깜박이는 로봇 지휘자가 양손을 부드럽게 들어 올리자 국립국악관현악단 단원 60여 명의 시선이 동시에 그의 손끝을 향했다. 로봇 지휘자는 국내 최초로 공연의 연주를 지휘하는 안드로이드 ‘에버6’다. 에버6는 단원들의 연주를 이해한다는 양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관현악단 대표 레퍼토리인 ‘말발굽 소리’를 차분하게 이끌었다. 북이 울리고, 국악기 선율이 휘몰아치는 절정에 치닫자 에버6의 지휘봉은 더 높은 곳을 찌르며 빠르게 움직였다. 깔끔한 비팅(beating·박자 젓기)과 정확한 템포는 마치 인간 지휘자를 보는 것 같았다. 다만 에버6는 실제로 소리를 듣지 못하는 데다 프로그래밍된 대로만 움직일 수 있어 연주자들과 실시간 호흡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에버6의 지휘로 화제가 된 국립국악관현악단의 ‘관현악시리즈Ⅳ―부재(不在)’가 30일 1200여 석 규모의 해오름극장에서 공연됐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에서 개발한 에버6는 먼저 대표 레퍼토리 2곡(말밥굽 소리, 깨어난 초원)을 단독으로 지휘한 뒤 지휘자 최수열이 이끄는 즉흥곡 ‘감’의 패턴 지휘를 도왔다. 애버6를 개발한 이동욱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수석연구원은 “정예지 지휘자를 학습모델로 삼은 에버6는 모션 캡처, 모션 최적화 등 기술을 통해 지휘봉의 궤적을 학습했다”며 “로봇 특유의 딱딱한 관절 움직임이 ‘불쾌한 골짜기(The uncanny valley·어딘가 부자연스럽고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를 불러일으키는 것과 달리 에버6는 인간의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따라 할 수 있어 정서적 교감이 비교적 쉬운 편”이라고 설명했다. 극작가와 연출가의 상상력을 토대로 살아 있는 배우, 스태프들이 무대를 완성하는 연극 역시 AI의 밀물을 막을 수 없다. AI가 쓴 시를 연극으로 만든 ‘인공지능 시극 파포스 2.0’이 다음 달 10일부터 13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코트’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시 창작 AI ‘시아’가 주어진 시제에 맞춰 시를 쓰고, 챗GPT가 이를 대본화하면 연출가와 소설가가 다듬어 극을 완성한다. 배우 3명이 연기하고, 무용수 2명과 연주자 5명이 퍼포먼스를 곁들인다. 작품의 연출가인 김제민 서울예대 공연학부 교수는 “AI의 논리적인 사고방식과 시극 창작이 대척점에 놓여 있을 것 같지만, 사람이 시를 쓸 때 언어적 규칙이 깨지는 양상은 AI에 오류가 발생하는 과정과 닮아 있다”고 말했다.● AI 창작, 인간 감수성 대체하기엔 한계하지만 공연계 현장에서는 ‘AI가 예술가를 대체하기엔 아직 기술력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글쓰기, 작곡 등 혼자서도 가능한 창작 영역과 비교해 다수가 출연하는 연극 무용 등의 장르는 언어 너머 교감을 통한 협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국내 최초로 로봇 에버6와 함께 관현악단 연주를 이끈 최수열 지휘자는 “정확한 박자 계산은 로봇이 유리하더라도 순간적으로 박자를 밀고 당기는 루바토, 시선 교환을 통한 단원들과의 소통은 인간을 능가하지 못함을 체감했다”고 했다. 이어 “리허설 초반 에버6의 지휘가 자꾸만 빨라진다고 느꼈는데 오류가 아니었다. ‘인간’ 단원들의 자연스러운 호흡 속도에 맞출 줄을 몰랐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립발레단의 ‘피지컬 싱킹+AI’ 역시 작곡AI인 아이바가 만든 음악의 완성도가 떨어져 결국 기본 선율은 쓰되 별도의 작곡가가 곡을 완성시켰다. 2017년 지휘 로봇 ‘유미’가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와 호흡을 맞춰 오페라 ‘리골레토’의 아리아를 공연했을 때 유미의 학습 모델이었던 지휘자 안드레아 콜롬비니는 “팔만 갖고 있을 뿐 영혼이 없어 인간 지휘자의 감수성을 대체할 수 없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함에 따라 ‘판도가 언제 뒤집힐지 모른다’는 전망과 함께 발 빠른 대응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김제민 교수는 “불과 2, 3년 전만 해도 공연 제작에 AI를 들인다는 건 엉뚱한 시도로 여겨졌지만 최근 AI의 학습 속도, 데이터 수집 방식 등이 급격히 발전하며 공연계에 빠른 속도로 유입되고 있다”며 “AI를 인간과 대립하는 존재로 치부하기보단 창작 영역을 확장하는 도구로 보고 어떻게 활용할지를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뮤지컬 평론가인 원종원 순천향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AI를 관객 수요나 유행을 분석하는 보조자로서 활용한다면 공연 한 편을 올리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을 효율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이를테면 ‘그동안 가장 호응이 높았던 조명 작동 방식’을 쉽고 빠르게 찾아내는 것”이라며 “작곡과 노래는 사람이 하되 반주는 AI가 하는 식으로 인간이 기술과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간 공연계가 강조해왔던 ‘인간성’의 정의를 재정립하는 작업이 선행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공연은 무대 위 신체의 등장, 관객과 동시에 호흡하는 현장성이 중요한 장르인 만큼 작품 주제 선정과 제작 방식 모두 인간 중심적 사고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이은경 연극평론가협회장은 “향후 AI가 인간과 유사한 수준의 사고를 하게 된다면 단지 인간의 수단으로만 볼 수 없다. 기술 발전이 어차피 당면해야 할 과제라면 AI가 우리 삶과 어떻게 상생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게 맞다”며 “지금까지의 예술이 로봇과 동식물 등 인간 외의 존재들을 배제한 채 인간성을 논한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때”라고 말했다.문학-웹툰-음악… 예술 분야 급속히 퍼지는 ‘AI 창작’ 바람 인공지능 활용 창작, 어디까지 왔나“효율성에 창의성 북돋워” 평가 속가짜 음원-작가 파업 등 논란도 커신기술 창작 활용 규정 속속 마련 최근 인공지능(AI)은 공연계뿐 아니라 예술 창작 전반에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대표적인 분야가 문학이다. 질문을 던지면 답을 내놓는 대화형 AI ‘챗GPT’를 활용해 글을 짓는 방식은 이미 널리 쓰이고 있다. 2012년 중국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 모옌은 지난달 19일(현지 시간) 챗GPT를 활용해 시상식에서 발표할 글을 작성했다고 고백해 충격을 줬다. 7명의 인간 작가가 챗GPT로 창작한 단편소설집 ‘매니페스토’(네오북스)가 올 4월 출간되는 등 국내 작가도 활발히 AI를 활용하고 있다. 웹툰 업계에서도 AI는 화두다. 네이버웹툰이 2021년 10월 출시한 ‘AI페인터’는 웹툰 30만 장의 데이터를 학습한 AI가 인물의 얼굴이나 신체, 배경 등에 자연스럽게 색상을 입혀주는 기능을 갖췄다. 명령어를 쓰면 10초 만에 이미지 여러 장을 만드는 ‘노블AI’도 웹툰 작가를 돕는다. ‘공포의 외인구단’(1983년) 등으로 한국 만화계를 이끈 이현세 화백은 지난해 10월부터 44년 동안 창작한 만화책 4174권을 컴퓨터에 학습시켜 자신의 그림체를 구사할 수 있도록 하는 ‘AI 이현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화백은 “AI에 내 그림을 학습시키면 (내 작품 창작이) ‘불멸’, ‘영생’할 수 있는 셈”이라고 했다. 음원 창작 분야에서도 AI 기술이 활용되고 있다. 음원 서비스 기업인 지니뮤직은 28일 AI 기술을 활용한 악보 기반 편곡 서비스 ‘지니리라’를 선보였다. 노래 음원을 입력하면 AI가 즉석에서 악보를 따 주고 편곡까지 가능하게 해 준다. 김형석 작곡가의 대표곡을 AI로 편곡하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김 작곡가는 “AI는 효율적인 제작 방식을 제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창의성을 북돋는 영감까지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AI 활용에 따른 논란도 일고 있다. 네이버웹툰에 지난달 22일 처음 공개된 ‘신과 함께 돌아온 기사왕님’은 AI를 활용해 보정 작업을 거친 사실이 알려져 독자 사이에서 논란이 됐다. 올 4월 유명 가수 드레이크와 위켄드가 함께 부른 것처럼 보이는 신곡이 음원 플랫폼에 올라왔다가 AI로 만든 음원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삭제되기도 했다. 미국작가조합(WGA) 소속 작가들이 지난달 17일(현지 시간) “AI는 문학(대본 창작)에 사용될 수 없고, 작가들의 작업물은 AI 학습 훈련에 쓰이면 안 된다”며 파업을 벌일 정도로 반발도 적지 않다. AI 활용을 일부 제한하는 규정도 속속 만들어지고 있다. 미국의 대중음악 시상식인 그래미 어워드는 17일(현지 시간) 인간의 기여가 크지 않은 AI 곡이라면 상을 받을 수 없다고 밝혔다. 네이버웹툰은 정식 연재 작가들에게 생성형 AI를 활용하지 말아 달라고 권고하고, 공모전 도중 ‘생성형 AI 활용이 불가하다’는 방침을 새로 세웠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올해 9월까지 ‘저작권 관점에서의 AI 산출물 활용 가이드’(가칭)를 마련해 AI 기술 발전에 따른 저작권 제도 개선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신작을 자평하자면 ‘성의 있는 연극’. 서울시극단이 공립극단인 만큼 누가 봐도 쉽고 재밌도록 정성껏 만들었어요. ‘겟팅아웃’이 관객을 대하는 마음은 선량합니다.” 23일부터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무대에 오른 연극 ‘겟팅아웃’의 연출을 맡은 고선웅 서울시극단 단장(55·사진)의 말이다. 이번 작품은 제52회 동아연극상 대상작인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등을 통해 스타 연출가란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그가 지난해 9월 서울시극단 단장에 취임한 뒤 내놓은 첫 연출작이란 점에서 기대를 모은다. ‘겟팅아웃’은 희곡 ‘잘자요, 엄마’로 1983년 퓰리처상 드라마 부문을 수상한 미국 유명 극작가 마샤 노먼(76)이 1977년 발표한 희곡이다. 부모에게도 보호받지 못한 10대를 거쳐 8년의 복역을 마친 주인공 알린이 출소 후 24시간 동안 겪는 이야기를 다룬다. 알린은 과오로부터 벗어나려 고군분투하지만 쏟아지는 건 비난뿐이다. 어른이 된 알린 역은 배우 이경미가, 어린 알린은 유유진이 캐스팅됐다. 이 외에도 배우 강신구 정원조 등 서울시극단 단원 5명이 모두 출연한다. 28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고 단장은 “인간은 모두 작고 외로운 존재인데 누군가에게 기대기보단 서로 따지려 든다. 그렇다 보니 과오가 남긴 상흔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쉽지 않다”며 “변화를 시도하는 이들에게 사회가 갈수록 너그러움을 잃어가는 게 아닌지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번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이 무대를 움직이는 중심축이란 점이다. 알린의 심경의 변화에 따라 주 무대 조명인 차가운 백색 조명이 주황색으로 바뀌었다가 창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빛으로 표현되는 식이다. 고 단장은 “흐르는 감정에 극을 의지하는 것이 만만찮았다”며 “보석 같은 단원들이 약속한 선을 잘 지켜준 덕에 안정감 있는 무대가 됐다”고 했다. 고 단장은 9월엔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을 데이트 폭력이라는 사회적 문제로 치환한 연극을 연출할 예정이다. “이번 공연을 본 관객들이 다음 작품인 ‘카르멘도 궁금한데?’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게 목표예요. 서울시극단을 연극의 ‘스탠더드(standard )’로 만들고 싶습니다.” 7월 9일까지, 3만∼5만 원.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매년 전 세계 40만 명이 찾는 세계적인 공연 축제 영국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에 창극, 무용 등 다양한 장르의 한국 작품이 무대에 오른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9일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한영 수교 140주년을 맞아 영국에서 ‘2023 코리아 시즌’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과 주영 한국문화원이 공동 주관한다. ‘코리아 시즌’은 문체부가 K컬처의 파급력이 큰 국가를 대상으로 1년간 한국 문화를 집중적으로 알리고 문화교류 기반을 다지는 행사다. 지난해 멕시코에서 처음 열렸다. 문체부 주최로 열리는 이번 행사는 ‘시대의 초월, 세기의 확장’을 주제로 창극부터 미디어아트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예술을 소개한다. 올해 말까지 런던을 비롯한 영국 각지 12개 도시에서 총 11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앞서 2월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런던 바비칸센터에서 리사이틀 공연을 펼치며 포문을 열었다.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4월 열린 영국 최대 힙합댄스 축제 ‘브레이킹 컨벤션’에 참가한 댄스그룹 ‘무버’의 김설진 예술감독은 “10년 전 영국에서 공연했을 때에 비해 무용수 개개인에 대한 외국 관객들의 호응이 열렬했다”며 “한국의 문화예술이 크게 성장했음을 체감했다”고 했다. 특히 오는 8월 열리는 제76회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에선 한국 특별주간이 운영된다. 이탈리아, 스웨덴 등 국제 협력국으로 참가하는 5개국 가운데 특별주간이 열리는 건 한국이 유일하다. 노부스 콰르텟과 KBS교향악단, 피아니스트 손열음,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 등의 클래식 공연 4편이 무대에 오른다. 국립극장 산하 국립창극단은 에우리피데스 원작의 동명 그리스 고전을 바탕으로 한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을 3차례 공연한다. 영화 ‘기생충’ OST 등을 만든 정재일이 작곡과 음악 감독을 맡은 작품이다. 극본을 쓴 배삼식 작가는 “우리 소리의 아름다움을 더한 고전이 해외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줄 것”이라고 했다. 다음 달에는 영국 내 한식당으로서 유일하게 미슐랭에 등재된 레스토랑 ‘솔잎’의 박웅철, 기보미 셰프가 런던에서 한식 팝업 행사를 연다. 이어 9월에는 안은미 댄스 컴퍼니가 런던 바비칸센터와 맨체스터 라우리 극장에서 아시아 각국의 밀레니얼 세대 용띠 무용수들(2000년생)과 ‘드래곤즈’를 선보인다. 안은미는 프랑스 파리 시립극장이 선정한 한국인 최초 상주 안무가다. 이 외에도 올해 에르메스재단 미술상을 받은 김희천 작가의 개인전이 11월 헤이워드 갤러리 및 주영 한국문화원에서 열린다. 박보균 문체부 장관은 “코리아 시즌이 한국과 영국 양국 간 협력의 지평을 확장하는 ‘솔루션 플랫폼’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5, 6년 전부터 연극 무대로 돌아오고 싶었어요. 다만 기회가 닿지 않았죠. 공연 첫날, 사랑하는 연기를 관객 앞에서 원 없이 해볼 수 있어 기뻤습니다.”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 서울에서 20일 시작된 연극 ‘나무 위의 군대’로 9년 만에 무대에 복귀한 ‘대세 배우’ 손석구(40)가 말했다. LG아트센터 서울에서 27일 열린 간담회에서 그는 “대본을 보자마자 너무 출연하고 싶었다”며 “오늘날 한국 관객들이 볼 때도 가장 와닿는 작품일 거라 생각했다”고 밝혔다. 드라마 ‘D.P.’(2021년), ‘나의 해방일지’(2022년), 영화 ‘범죄도시2’(2022년)에서 강렬한 연기를 선보인 손 씨가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된 연극 ‘나무 위의 군대’는 티켓 판매를 시작하자 전석 매진됐다. ‘나무 위의 군대’는 1945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2년 동안 나무 위에 숨어 살아남은 두 병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일본 대표 극작가 이노우에 히사시(1934∼2010)의 유작을 극작가 겸 연출가 호라이 류타(47)가 대본으로 만들어 2013년 도쿄에서 초연했다. 살아남는 것에 부끄럼 없는 신병 역은 손 씨가, “살아남은 것은 수치”라며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상관 역은 배우 이도엽과 김용준이 번갈아 가며 연기한다. 두 병사는 낮에는 적군의 야영지를 살피고 밤에는 몰래 나무에서 내려와 식량을 구하며 목숨을 부지한다. 손 씨는 “신병은 상관이 옳다고 믿지만 진심으로 이해할 수는 없기에 마음속 부조리가 움튼다. 하지만 계급이 달라 싸우지도 못한다. 이건 가족과 직장, 학교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다. 지금껏 출연한 작품에서 보지 못한 주제라 강한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지만 캐나다에서 연극 ‘피라무스와 티스베’로 배우의 첫발을 뗀 연극인 출신이다. 그는 중학교 때 미국으로 가 공부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연극 ‘오이디푸스의 왕’(2011년), ‘사랑이 불탄다’(2014년)에 출연하며 연기 생활을 이어갔다. 손 씨는 “상관 역을 맡은 도엽이 형이 연습 초반 ‘무대라고 해서 손을 다르게 쓰려 하지 말고 카메라 앞에서처럼 해라’라고 조언해줬다”며 “오랜만에 연극 무대에 섰지만, 연습 과정에서 알맞은 연기를 찾아 갔다”고 했다. 한때 코미디언을 꿈꿨다는 그는 이번 공연에서 느긋하고 순진한 신병 역을 매끄럽게 소화해낸다. 자연스러운 표정 연기와 능청스러운 유머로 엄중한 서사에 여유를 더한다. 적군이 내다버린 쓰레기 더미에서 식량을 찾아 먹는 그에게 상관이 “맛있냐”고 호통치자 그는 한껏 쭈그러든 어깨로 “네, 맛있어요”라고 답하며 관객의 웃음을 유도한다. 손 씨는 “신병 캐릭터가 그간 해왔던 배역과 많이 달랐다”며 “나처럼 때 묻은 사람이 이렇게 맑고 순수한 사람을 연기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컸다”고 말했다. 나무의 혼령으로서 무대 위에 있지만 두 병사에겐 들리지 않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여자’ 역은 배우 최희서(37)가 맡았다. 나무 둥치 사이사이를 그림자처럼 돌아다니며 두 병사를 관조하고, 짧지만 굵은 대사로 전쟁의 의미를 묻는다. 신병에게 살의를 느끼는 상관을 향해 “전쟁터에선 부끄러움을 모르는 괴물이 태어난다”고 읊조리는 등 사유의 깊이를 더한다. 최 씨와 손 씨는 9년 전 연극 ‘사랑이 불탄다’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다. 최 씨는 “당시 연극을 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각자 통장에서 100만 원씩 꺼내 50석 규모의 소극장에서 5일 정도 공연했다. 이번 공연은 손석구 씨가 ‘다시 같이 해보자’고 제안해 함께 서게 됐다. 어마어마한 무대를 보며 매일 감사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8월 12일까지, 6만6000∼7만7000원.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솔(soul) 푸드.’ 원래 미국 노예제 시대 흑인들의 애환이 깃든 음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간 이들은 싸구려 식재료를 고향의 방식대로 요리해 먹으며 폭력에서 살아남았다. 그들에게 음식은 그리움의 종착점이기도 했다. 책은 한국판 솔 푸드에 관한 이야기다. 1972년 미군 기지촌에서 일하던 31세 여성 군자는 백인 미국 남성을 만나 태평양을 건넜다. 한국인이 단 한 명도 없던 워싱턴주의 시골 마을에서 미국인이 되고자 영어와 미국 요리를 배우며 고군분투했다. 딸이 한국 땅에서 ‘양공주 자식’이라고 놀림받는 대신 비교적 평범한 삶을 살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딸이 열다섯 살이 되던 해, 군자는 마음의 문을 닫고 스스로를 완전히 고립시켰다. 갑자기 조현병이 온 탓이다. 발병 후 군자는 음식을 거부했고, 혼잣말을 반복했다. 일본으로 강제 징용된 한국인 가정에서 태어난 군자가 미국에 오게 된 건 사실상 ‘미국인과 동침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군자는 이역만리에 닻을 내리려고 노력했지만 돌아온 것은 허망하게도 ‘전쟁 신부’, ‘차이나 돌’ 같은 혐오와 낙인이었다. 고국에서도, ‘자유의 땅’에서도 보호받지 못한 군자를 두고 저자는 말한다. “결코 살아남을 운명이 아니었다”고, 그리고 그건 ‘사회적 죽음’이라고. 굳게 닫힌 군자의 세상을 비집고 들어간 건 다름 아닌 딸이 만든 한식이었다. 딸은 미국에서 들어본 적조차 없던 생태찌개를 끓이고, 생일 밥상에 갈비와 콩나물무침을 올렸다. “한국 음식은 엄마의 과거를 보드랍게 놓아줬고 단조로운 삶을 조직하는 봉홧불이 됐다.” 군자는 2008년 건강이 악화돼 67세에 세상을 떠났다. 짐작하겠지만 저자는 군자의 딸이다. 미국 브라운대와 하버드대를 거쳐 현재 뉴욕 시립 스태튼아일랜드대에서 사회학·인류학을 가르치는 저자는 낙인으로 얼룩진 어머니의 삶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며 전후 한인 이주여성의 삶의 궤적을 탐구했다. 저자는 군자가 겪어야 했던 고난이 “미국 군사주의와 한국의 독재 정권, 외국인 혐오가 평범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자행한 조직적 폭력”이라고 말한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K팝 아이돌이 주도하는 ‘코어패션’(발레복, 축구복 등 비일상적 옷을 활용한 패션) 열기가 뜨겁다. 지난해 뉴진스가 데뷔곡 ‘어텐션’ 뮤직비디오에 축구 유니폼을 입고 등장하면서 스포츠 유니폼을 일상복과 같이 입는 패션 열풍이 분 데 이어 최근 아이브의 멤버 장원영이 선보인 바비 인형 스타일 패션까지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 급부상한 건 바비 인형처럼 선명하고 화려한 분홍색을 앞세운 패션인 ‘바비코어’다. 22일 온라인 패션플랫폼 W컨셉에 따르면 지난달 19일부터 한 달간 핑크 등 바비코어와 관련된 단어의 검색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50% 증가했다. 분홍색 가방과 신발 매출도 같은 기간 각각 35%, 50% 늘었다. 바비코어의 유행을 이끈 건 걸그룹 멤버들이다. (여자) 아이들은 ‘퀸카’ 뮤직비디오에서 핫핑크 드레스를 입고 등장해 주목을 받았다. 현아, 소녀시대 출신 제시카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일상생활에서 핑크색 패션을 소화하는 모습을 선보였다. 발레 토슈즈 앞코를 빼닮은 메리제인 슈즈, 나풀거리는 짧은 치마 등 지난해 가을부터 유행한 ‘발레코어’는 올해 여름 시원한 소재로 만든 제품으로 변주되고 있다. 발레코어 열풍을 이끈 이는 블랙핑크 멤버 제니다. 그는 인스타그램에서 유명 브랜드의 발레코어 제품을 입은 모습을 자주 선보이고 있다. 트와이스 멤버 나연, 스테이씨 시은과 윤 역시 무대 의상으로 발레 의상인 튀튀 같은 풍성한 치마를 애용했다. 레드벨벳 슬기, 르세라핌 채원이 입어 화제가 된 등산화나 캠핑용 외투를 활용한 ‘고프코어’도 인기다. 고프코어는 야외 활동을 할 때 주로 챙기는 음식인 견과류를 뜻하는 ‘고프(Gorp)’에서 따온 말이다. 인스타그램에 ‘고프코어’ 해시태그로 올라온 게시물은 22일 현재 6만2000개다. 관련 제품의 매출도 늘었다. 미국 아웃도어 신발 브랜드 ‘킨(KEEN)’은 올해 1분기(1∼3월) 매출이 전년 동기보다 190% 증가했다. 스포츠 유니폼도 핫한 일상복으로 활용되고 있다. ‘블록코어’는 영국에서 사내를 뜻하는 속어 ‘블록(Bloke)’과 ‘놈코어(norm-core·평범하지만 포인트가 있는 패션)’를 합성한 단어로, 스포츠 유니폼에서 영감을 얻은 패션을 말한다. 지난해 7월 뉴진스 민지가 데뷔곡 ‘어텐션’ 뮤직비디오에서 하늘색 축구 유니폼을 입어 인기를 선도했다. 지난해 9월 블랙핑크 제니가 ‘핑크 베놈’ 뮤직비디오에서 입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니폼은 품절 사태가 벌어졌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치료학과 교수는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MZ세대의 특성과 아이돌에 대한 선망이 맞물리며 아이돌이 입는 옷을 일상에서도 즐겨 입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튀는 걸 곱게 보지 않는 우리 문화의 특성상 아이돌 콘셉트를 따라 하되 평소에 입을 수 있게 무난하게 변형하는 팬들이 많다”고 했다. 코어패션이 인기를 끄는 데는 분홍색 투피스,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스포츠 양말 등 몇 가지 아이템만 있으면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는 “패션 아이템이 구체적일수록 스타일을 따라 하기 수월하고, 기업은 비슷한 제품을 만들기 쉬워 유행이 빠르게 확산된다”며 “팬들이 SNS로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스타 패션을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아이에게 춤추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꿈이었어요. 시상식에 같이 오진 못했지만 러시아 볼쇼이 극장에서 춤추는 걸 남편과 아이가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봤으니 꿈을 이뤘죠. ‘이걸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큰 상을 받았습니다.”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 최고 여성무용수상을 수상한 발레리나 강미선(40·사진)이 21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소감을 밝혔다. 그의 수상은 발레리나 강수진(1999년), 김주원(2006년), 발레리노 김기민(2016년), 발레리나 박세은(2018년)에 이어 한국 무용수로는 다섯 번째다. 강미선은 이들 가운데 ‘워킹맘 발레리나’로서 처음 수상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국내 양대 발레단 중 하나인 유니버설발레단(UBC)의 수석무용수다. 강미선은 20일(현지 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중국 국립발레단의 추윈팅과 공동으로 상을 받았다. 함께 후보에 올랐던 파리오페라발레단(BOP)의 수석무용수 도로테 질베르,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의 메이 나가히사 등 세계적인 발레 스타들을 제친 것이다. 강미선은 올해 3월 선보였던 창작발레 ‘미리내길’에서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는 과부 연기로 브누아 드 라 당스를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그는 시상식 당일 열린 갈라 콘서트에서도 ‘미리내길’을 선보였다. 그는 “올해 발목 부상과 폐렴으로 입원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상으로 위로받는 기분”이라고 했다. 이어 “공연이 마음에 안 들면 절대 박수를 안 친다는 볼쇼이 극장장님이 어제 박수를 치셨다고 들었다. 한국적 정서가 잘 전달돼 감격스럽다”며 웃었다. 그는 선화예중·고등학교와 미국 워싱턴 키로프 아카데미를 거쳐 2002년 UBC 연수단원으로 입단했다. 2012년 수석무용수로 승급한 이듬해 UBC 동료인 수석무용수 콘스탄틴 노보셀로프와 결혼했다. 2021년 10월 아들을 출산한 뒤 5개월 만인 지난해 3월 발레 ‘춘향’을 통해 성공적으로 복귀했다. 강미선은 “결혼과 출산 후 춤추는 시간의 소중함을 더 크게 느낀다”며 “발레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은 이전보다 줄어들었지만 그만큼 모든 걸 쏟아붓는다”고 말했다. 문훈숙 UBC 단장은 “올해 후보들이 워낙 쟁쟁해 심사위원들이 두 번에 걸쳐 투표했다고 들었다”며 “강미선 발레리나는 어떤 작품이든 믿고 맡기는 무용수다. 풍부한 감정 연기와 표현력을 지녔고 작품을 연구하는 자세와 기술이 뛰어난 노력파”라고 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채널A 다큐멘터리 ‘지구는 엄마다2―밤하늘 구하기’(연출 김해영)가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선정한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방심위는 21일 서울 양천구 한국방송회관에서 시상식을 열고 “별, 은하수 등 다양한 볼거리를 과학적이면서도 예술적으로 재해석해 환경 문제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내는 참신한 구성이 돋보였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4월 19일 방송된 이 프로그램은 별이 가득한 세계 각지의 밤하늘을 담는 한편 오늘날 심각한 빛 공해 문제를 드러낸 다큐멘터리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흰색 튀튀를 입은 맨발의 발레리나들이 원형으로 모여 선다. 오른팔을 동시에 들어올려 천천히 손목을 굴린 뒤 손가락을 오므리는 모습은 호숫가에서 주위를 경계하는 야생 백조와 꼭 닮았다. 16마리의 백조로 분한 무용수들은 차이콥스키 ‘백조의 호수’ 중 ‘정경’ 선율에 맞춰 등을 둥글게 말았다가 펴기를 반복하며 강렬한 군무를 펼친다.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 서울에서 22∼25일 국내 초연되는 프랑스 프렐조카주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2막 원형 군무 장면이다. 발레단을 이끄는 안무가 앙줄랭 프렐조카주(66·사진)는 19일 서면 인터뷰에서 “작품의 백미로 꼽히는 2막 원형 군무는 고전 발레의 클리셰를 해체한 자유의 송가”라며 “발레 역사상 기념비적인 작품에 도전하는 일은 두렵지만 동시에 나를 깨어 있게 한다”고 밝혔다. 1995년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 안무가상, 1998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받은 그는 ‘현대 발레의 거장’으로 불린다. 파리오페라발레단(BOP), 볼쇼이발레단 등 세계적인 발레단과 손잡고 여러 작품의 안무를 짰다. 2020년 프랑스에서 초연된 ‘백조의 호수’는 그가 ‘로미오와 줄리엣’(1996년), ‘스노 화이트’(2008년) 이후 12년 만에 내놓은 스토리 발레다. ‘백조의 호수’는 26명의 무용수가 출연한다. 이번 공연은 2019년 ‘프레스코화’ 이후 4년 만의 내한 공연이다. 주인공 오데트와 지크프리트의 사랑을 다룬 원작은 오늘날 환경 파괴에 대한 비판적인 이야기로 재탄생했다. 악마 로트바르트는 부패한 사업가로 탈바꿈해 호수 속 화석연료를 캐내려 한다. 오데트와 지크프리트는 각각 환경운동가, 시추기 판매회사의 상속자로서 함께 로트바르트에 맞서 싸운다. 프렐조카주는 “사랑 이야기를 유지하되 산업과 금융의 세계로 치환하고 싶었다”고 했다. 춤은 19세기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 버전을 토대로 현대적으로 재구성했다. 3막 무도회가 열리는 궁정은 칵테일 파티장으로 옮겨갔다. 검은 옷을 입은 25명의 무용수는 ‘ㄷ’자 대형으로 의자에 앉아 양팔을 벌려 크게 날갯짓한다. 프티파 버전에서 권력을 상징하던 지크프리트의 어머니는 아들과 2인무를 추며 지크프리트에게 자연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안무에는 실제 동물의 행동이 녹아 들었다. 그는 “내면의 충동에 귀 기울이는 모습을 강조하려 했다”며 “새가 날아오르기 전 땅에서 쉬고 있는 자태를 팔의 움직임과 뛰어오르는 동작 등에 담아냈다”고 했다. 음악 역시 일부 곡을 현대적으로 각색했다. 그는 “공연의 90%는 차이콥스키 음악으로, 나머지는 뮤지션 ‘75D’가 작곡한 빠른 비트의 현대음악으로 채웠다”며 “발레곡 이외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서곡도 사용했다”고 밝혔다. 5만∼11만 원.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무대 한가운데 작은 느티나무 분재가 자리를 굳건히 지킨다. 실제 나무인 이 분재는 소품이 아니라 주인공이 될 것이다. 반은 로봇, 반은 인간인 주인공 릴리는 인간을 “섬기지도, 섬멸하지도” 않으며 극을 이끈다.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27일 초연되는 연극 ‘너의 왼손이 나의 왼손과 그의 왼손을 잡을 때’에서 ‘비(非)인간’들은 병풍 같은 존재에 그치지 않는다. 인류가 멸망한대도 저들만은 살아남아 다시 지구를 밝힐 것처럼 무대 깊숙이 뿌리를 내린다. ‘너의 왼손이…’의 연출과 극작을 맡은 정진새 연출가(43·사진)를 14일 만났다. 그는 “팬데믹 이후 생태에 관한 책을 읽으며 그간 연극이 인간성을 과도하게 찬미해왔다고 느꼈다”며 “다양한 생물종을 통해 인류세를 돌아보는 연극을 만들고 싶었다”고 밝혔다. 극은 생태주의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새로 쓴 노아의 방주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전 세계가 불타오르자 인간과 로봇, 동식물이 뒤섞여 탄 배 8척이 대피에 나선다. 하지만 배 한 척당 하나의 종(種)만 스발바르 종자저장고에 남을 수 있다. 장애인 과학자, 동물원의 비버 등은 후대의 생존을 위한 확률 게임을 한다. 정 연출가는 “이들은 비주류를 의미하는 왼손으로 악수를 하며 낯선 교감을 하게 된다”고 했다. “연극은 세상의 거울이에요. 그러나 인간만 출연한 왜곡된 거울이었죠. 그 거울을 넓혀 자연 속 존재를 비추고 싶어요. 공상과학(SF) 연극은 SF 소설이나 영화에 비해 제약은 많지만 관객이 눈앞의 배우를 통해 인간 이외 존재를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칫 근엄해질 수 있는 디스토피아적 서사는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쓴웃음으로 균형을 맞췄다.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을 두고는 “열매를 맺으려면 두 그루를 심어야지. 자기 손으로 (나무를) 키워본 적 없는 멍청한 인간”이라 비꼰다. 정 연출가는 “연극은 재미있어야 한다. 조심스럽다고 유머를 포기하기보단 잘 웃기려 고민한다”고 했다. 정 연출가는 지난해 국립극단과 선보인 SF 연극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로 올해 1월 제59회 동아연극상 희곡상을 수상했다. ‘너의 왼손이…’는 물리학과 진화론, 생태학 등이 맞물려 세계관이 더 세밀해지고 방대해졌다. 그는 “마블 영화와 그래픽 노블, SF 문법을 잘 아는 양근애 평론가에게 많은 빚을 졌다”고 했다. “과학자와 달리 예술가는 감각적 논리만 있고 근거가 없죠. 사회를 설득하려면 작품에도 근거가 필요해요. 언젠간 영화 ‘어벤저스’처럼 제 작품 간 세계관도 연결해보고 싶습니다.(웃음)” 다음 달 15일까지, 전석 3만5000원.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김교식 작가(71)의 첫 개인전 ‘2023 시간과 공간의 재현’이 14~19일 서울 종로구 갤러리인사1010에서 열린다. 국내외 풍경화,극사실주의 인물화 등을 다채롭게 선보인다. ‘미메시스-비상’ 등 실크스크린 기법을 활용한 작품도 전시한다. 기획재정부 기획조정실장, 여성가족부 차관을 지낸 김 작가는 10여 년 전 은퇴한 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난해 대한민국 미술대전 구상부문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김용주 국립현대미술관 전시기획관은 “추상과 재현의 경계를 넘나들며 신선한 변화를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작가”라고 평했다. 무료.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공연장으로 들어서면 무대 왼편의 불투명한 격자무늬 창문이 천장을 반 정도 덮습니다. 해가 지면 창문을 통해 석양이 비집고 들어오고, 그 아래 따뜻한 갈색 톤의 카펫이 깔려 있습니다. 카펫 위 가죽 소파의 재질은 모형 옆 샘플을 만져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앞에서 연극 ‘20세기 블루스’가 시작되기 전 시각장애인 관객들을 대상으로 한 설명이 진행됐다. 공연장 입구에서 실제 무대를 약 50분의 1 크기로 축소한 모형을 직접 만져 보며 음성 해설을 들을 수 있는 ‘무대 모형 터치 투어’다. 모형을 만지며 해설을 듣다 보면 등장인물의 동선과 작품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다. 이청 접근성 매니저는 “무대 위 소품의 배치와 각 소품이 갖는 의미에 중점을 두고 해설한다”며 “전문 음성해설사, 무대디자이너와 2∼3개월간 함께 작업했다”고 말했다. 17일까지. 장애인도 감상할 수 있게 한 ‘배리어프리’ 공연이 다양해지면서 휠체어석이나 자막을 제공하던 것을 넘어 장애인 관객이 다양한 감각을 활용해 무대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작업이 활발해지고 있다. 서울 중구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22∼25일 공연되는 연극 ‘우리 읍내’는 모든 회차에서 수어통역사 5명이 배우들의 대사를 통역한다. 농인 배우 2명과 청인 배우 14명이 출연해 1980년대 경북 울진군에 사는 사람들을 그린 작품이다. 수어통역사 5명은 매일 최소 4시간씩 모여 연기를 연습한다. 새마을 회장 황혁찬 역을 통역하는 조유나 수어통역사는 “연기 톤을 맞추는 데 중점을 둔다”며 “대사에서 ‘뭐라카노’ 같은 경상도 말맛을 살리기 위해 수어 동작은 날리듯이, 표정 연기는 강하게 한다”고 했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도 대사를 그대로 전하는 것을 넘어 인물의 감정에 따라 글자 크기를 조절하거나 말풍선 등 장치를 더해 배우의 연기를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국립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틴에이지 딕’에서는 주인공이 속마음을 말하는 독백 장면에서 기존 고딕체 자막을 손글씨로 바꿔 말풍선 안에 집어넣었다. 국립극단 연극 ‘몬순’을 비롯해 2018년부터 배리어프리 공연 57편을 제작해 온 강내영 사운드플렉스스튜디오 대표는 “배리어프리를 구현하는 방식이 하나의 창작물로 여겨지는 분위기로 확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강 대표는 “연극, 무용 등 창작자들이 음성해설의 경우 이어폰을 통해 원하는 사람만 들을 수 있게 한 기존 방식에서 더 나아가 해설이 필요한 부분을 작품에 녹여 누구든 들을 수 있게 하는 방식까지 시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김광석(1964∼1996)의 명곡들로 구성된 뮤지컬 두 편이 무대에 오른다. 뮤지컬 ‘그날들’과 ‘다시, 동물원’이다. 두 작품 모두 ‘서른 즈음에’, ‘변해가네’, ‘사랑했지만’ 등 김광석의 대표곡으로 구성됐다.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다음 달 12일 개막하는 뮤지컬 ‘그날들’은 2013년 초연 후 누적 관객 수 55만 명을 넘었다. 1992년 청와대 신입 경호원인 정학과 무영, 그리고 한중 수교식의 비밀을 알고 있는 통역사 ‘그녀’를 둘러싼 실종 사건을 다룬다. 배우 유준상 엄기준 오만석 이건명이 정학 역을, 지창욱 김건우 오종혁 영재가 무영 역을 맡는다. 9월 3일까지. 서울 종로구 동덕여대 공연예술센터에서 24일 개막하는 ‘다시, 동물원’은 밴드 동물원의 멤버들이 ‘그 친구(김광석)’의 기일을 맞아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1988년 다섯 명의 친구가 밴드를 결성하고 데모테이프를 녹음하는 등의 실화를 토대로 만들었다. 2015년 초연된 뮤지컬 ‘그 여름, 동물원’의 전반적인 내용을 유지한 채 일부 대사와 음악 연주 장면에 변화를 줬다. 그룹 빅스의 멤버 혁을 비롯해 최승열 송유택이 ‘그 친구’ 역에 발탁됐다. 9월 17일까지. ‘그날들’은 김광석 원곡을 오케스트라 선율로 웅장하게 편곡해 극적인 서사와 어우러지게 했다. 뮤지컬 ‘피맛골연가’에서 음악을 총괄했던 장소영 음악감독이 편곡했다. ‘다시, 동물원’은 동물원의 원년 멤버인 박기영 씨가 음악감독을 맡아 ‘혜화동’ ‘널 사랑하겠어’ 등 밴드 노래와 1집 멤버였던 김광석의 음악을 들려준다. 박 감독은 동물원에서 싱어송라이터로 보컬과 건반을 담당해 왔다. 기타, 건반, 드럼 등 밴드 악기 구성을 유지해 원곡의 색채를 살렸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태엽을 스무 번 남짓 감자 둥근 음반이 돌기 시작했다. 1925년 제작된 유성기(留聲機·사진)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으로 연주한 아리랑 선율이 선명하게 흘러나왔다. 84년 전 녹음됐지만 최근까지도 존재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음반이다. 한옥 풍류방을 닮은 전시관에 삼삼오오 모인 관람객들은 가슴팍 높이의 유성기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국립국악원과 재단법인 아름지기가 서울 종로구 아름지기 사옥에서 열고 있는 전시 ‘유성기집, 소리를 보다’를 1일 찾았다. 유성기음반(SP)은 최근 젊은층을 중심으로 수집 열풍이 분 LP의 원조 격이다. 1900년대 SP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우리 전통음악이 소리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당시 지금의 광화문 일대에서 유성기로 음악을 틀어주던 곳을 ‘유성기집’이라 불렀다. 이번 전시에서는 당시 유행가였지만 오늘날 쉽게 접하기 어려운 고음반 30여 점을 아날로그와 디지털로 들어볼 수 있다. 전시는 SP가 많은 인기를 누렸던 1920∼1950년대를 집중 조명했다. 1층에는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궁중음악 녹음본인 ‘조선아악’(1928년) 음반이 전시됐다. 우리 궁중음악의 가치를 깨달은 미국 빅터사가 이왕직아악부의 연주를 녹음한 것이다. 2층 음악감상실은 전시의 백미다. 아리랑 등 민요 3곡을 틀어주는 유성기 건너편에선 국립국악원이 디지털로 복원한 고음반 음원을 태블릿PC로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다. 3층에서는 이희문, 우원재 등 동시대 예술가들이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우리 음악을 영상과 함께 들려준다. 30일까지. 무료.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