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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5일(현지 시간) 캐나다 몬트리올의 한 미술 전시장인 ‘복스’. 영상 작품 속 인물은 록 음악을 연주했지만 가사는 프랑스어인듯 영어인듯 생소한 언어, ‘아카디아어’였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 레미 벨리보는 “프랑스와 영국이 캐나다에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일 때 강제 이주와 박해를 당한 (프랑스 출신 이주민) 아카디아인들의 1960년대 음악을 상상으로 복원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도 아카디아인의 후손이라고 밝혔다.● 잊힌 기억, 예술적 상상력으로 복원현대미술에서 정체성은 끊임없이 논의되지만 대부분 아프리카, 아시아 등 원주민의 정체성을 다룬다. 벨리보가 다룬 아카디아인은 백인 중에서도 제국주의에 희생된 여러 공동체가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달 5일 개막해 이달 28일까지 열리는 캐나다 몬트리올 ‘모멘타 비엔날레’는 15개국 예술가 23명을 초청해 정체성 문제를 다각도로 다뤘다. 몬트리올 시내 16곳에서 개인전 형태로 열린 현장을 지난달 25∼29일 다녀왔다. 베트남 작가 투안 앤드루 응우옌의 설치 영상 작품 ‘조상의 유령이 되다’(2019년) 역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시절 베트남에 관한 생소한 역사를 다뤘다. 당시의 동남아라고 하면 흔히 서구 제국주의 문제가 떠오르지만, 작가는 아프리카의 세네갈 다카르로 향했다. 프랑스 식민지 세네갈 출신으로 베트남에 주둔했던 병사들의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서였다. 작가가 주목한 건 세네갈 병사와 베트남 여성이 이룬 가정에서 태어난 후손들이 겪은 차별과 정체성 혼란이다. 총 4개 영상으로 구성된 작품은 이들의 사연을 낭독하는 장면, 이를 영상으로 재구성한 장면, 역사 속 실제 기록 영상과 사진으로 구성된다. 가운데 소파를 두고 커다란 스크린 4개가 관객을 둘러싸는 형태로 설치돼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생생한 이야기로 복원한다.● “고정관념 벗어나 어우러지길” 올해 18회를 맞는 이번 비엔날레는 한국계인 한지윤 씨(36·사진)가 예술감독을 맡았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캐나다 몬트리올대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그는 1920, 1930년대 초현실주의 사진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다. 프랑스 퐁피두센터 사진 부문 초청 연구원으로 파리와 몬트리올을 오가며 일한다. 그가 선정한 비엔날레 주제는 ‘가면극: 변신에 끌리다’. 예술가들이 고정된 정체성을 벗어나는 여러 방식을 탐구한다. 한 감독은 “가면극은 정해진 질서를 무너뜨리고 자신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한다”며 “관객들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장이 열리길 바란다”고 말했다. 여러 전시장에선 예술적 상상력을 통해 가면을 쓰듯 다른 존재가 되기를 시도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미국 작가 마라 이글은 유튜브에서 수집한 앵무새의 말소리를 대사로 활용한 애니메이션 ‘프리티 토크’(2023년)를, 캐나다 작가 마리옹 르사르는 인간의 끝없는 욕심과 그 폐해를 중세 이야기처럼 풍자한 영상 설치 작품 ‘후회의 소설’(2023년)을 선보였다. 국내 젊은 작가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친 독일 작가 히토 슈타이얼(슈타이에를)의 설치 작품 ‘소셜심’(2020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일부 선보였던 멕시코 작가 나오미 링콘 가야르도의 ‘예감, 종말의 가면극 3부작’(2022년)도 눈길을 끌었다. ‘소셜심’은 컴퓨터그래픽(CG)으로 만든 경찰들이 세계에서 수집한 공권력에 의한 폭력과 관련된 정보와 연계해 춤추는 모습을 영상에 담았다. 이를 통해 공권력에 의한 폭력과 억압을 비판한다. ‘예감…’은 환경 위기, 성 소수자 문제 등을 주제로 뮤직비디오 형식으로 만든 작품이다. ‘모멘타 비엔날레’는 1989년 시작돼 사진을 현대미술 장르로서 조명한 ‘무아 드 라 포토’(Le Mois de la Photo·사진의 달)가 전신이다. 현 디렉터인 오드레 제누아가 부임한 후 2017년 이름을 지금과 같이 바꿨다. 제누아 디렉터는 “영상을 포함한 여러 현대미술 영역으로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고 했다.몬트리올=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행복한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날, 독자 여러분께 인사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아름다운 결실을 거두어들이는 가을이 성큼 다가왔네요.결실은 한 시절의 마무리이자,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순간이기도 하죠.연휴 동안 한 해를 돌아볼 독자 여러분을 위해 안젤름 키퍼의 ‘가을’을 첫 사진으로 준비해보았습니다. 이 작품은 대전의 문화공간 헤레디움에서 볼 수 있는데, 이 전시에 관한 이야기는 추후에 천천히 다루기로 하겠습니다.오늘은 지난 시간 동안 독자 여러분께서 보내주신 감상을 ‘다시 보기’로 모아보았습니다.제가 영감한스푼을 하기 전 ‘김민의 그림이 있는 하루’ 시리즈를 연재했었는데요. 마지막 편을 독자 여러분의 댓글로 구성한 적이 있답니다. 그때 저도 하나하나 돌아보며, 우리가 그림을 통해 참 많은 것을 나눌 수 있다고 느껴서 지금까지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올해 ‘영감한스푼’ 구독자 여러분은 마음속에 어떤 예술을 품었는지, 한 번 같이 돌아보겠습니다.마음이 탁 풀어지는 델프트 풍경― 보통 화려한 것에 시선이 먼저 가게 되는데, <델프트 풍경>은 구름과 수면에 비친 그림자 등 무채색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해줍니다.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무채색이 오히려 주인공 같기도 하고, 화려한 색채와 무채색의 조합으로 균형과 조화가 보이기도 하고요. (익명의 독자)― 그림을 봤을 때 마음이 탁 풀어지는 느낌을 좋아하는데 델프트 풍경을 직접 보면 그렇게 될 것 같아요. 요하네스 베르메르라는 이름은 잘 몰랐었는데 글 마지막에 진주 귀걸이를 한 여자 보고 헉! 이 사람이구나! 했어요. (익명의 독자)영화 같은 ‘원계홍’전 스토리― 이미 잘 알려진 유명한 작가였다면 선입견이 작용했을 수도 있겠지만, 세상과 고립되었던 작가의 작품들인데도 순수하게 작품 그 자체에 끌리고 감동받은 분들이 있다는 게 놀랍고도 고무적입니다. 그분들이 작품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신 것도 특별한 인연인 것 같습니다. 온갖 사건, 사고들이 벌어지지만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고 따뜻하고, 예술이 서로 모르는 분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소통하게 했네요. 말을 걸어오는 그림들입니다. (익명의 독자)― 우리 삶은 인연으로 이어져 간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좋은 작품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익명의 독자).― 원계홍 작가는 어쩌면 대중이 다 알아주기보다는 진심으로 자신의 그림과 마음을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것만으로도 행복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작품에만 몰두하다 보면 세상과의 교류할 겨를이 없었을 듯 보입니다. 세상과 단절한 (?)한 작가라고 보기 힘들만큼 원계홍 작가 작품은 ‘세상을 이토록 아름답게 이해하고 그려낸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 말이죠. 그것도 우리 주변에 실재했던 동네와 사물을 저렇게 표현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왜 진즉 이 작가를 못 만났을까 자책하게 되는 심정도 드네요. 그런 의미에서 두 컬렉터분은 실로 복 받은 분이 아닐까 싶어요. 아울러 이를 대중에 소개해주는 마음도 너무 소중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익명의 독자)― 진주는 언젠가는 보석으로 빛을 발하네요. (익명의 독자)살아 움직이는 그 느낌!― 삶에서 가장 소중하게 기억나는 부분은 순간이죠. 그 순간의 햇빛, 표정, 말 한마디 등 이미지이고요. 덕분에 마네 전시 꼭 가보고 싶어졌습니다. (익명의 독자)― 모든 이들은 각자 자신의 일을 하며 살아간다. 커다란 공덕이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 다른 이들의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것뿐이다. (익명의 독자)― 살아 움직이는 느낌입니다. (익명의 독자)―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짧은 찰나의 순간에서도 느껴진다. 웨이트리스가 맥주 두 잔을 힘있게 들고있는 모습에서 삶의 희열을 느끼며 나의 하루의 삶도 숟가락 들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시작하게 된다. (마롱)찬란하고도 불안한 반 고흐― 어릴 땐 마냥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십수 년이 지나 새로이 찬찬히 뜯어보니 찬란하면서 불안하고 어딘가 붕 떠 있는듯한 감상도 함께 드네요. (익명의 독자)― 지금의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힘이 고요히 밀려옴을 느낀 순간 (익명의 독자)― 고흐라는 인간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저도 모르게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 그리고 예민하고 충동적인 성격 때문에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진 못했지만 자신을 아꼈던 소수의 사람 덕분에 멋진 작품을 남길 수 있었다는 걸 알게 되니 고흐가 이전과는 다르게 보여요!. 결국 스스로 죽음을 택한 고흐지만 옆에 있던 사람들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무수한 작품을 그려내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글 싸주셔서 감사합니다. 위로가 많이 되었어요! (익명의 독자)― 막 잘려 나간 풀의 냄새를 맡으며, 고개 숙이고 앉아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고흐의 시선이 느껴집니다. 고흐가 세상으로부터 느꼈을 고립감과 외로움이 전해집니다. (짱구맘)렘브란트 내면의 일기― 렘브란트는 자화상은 내면의 일기라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했다.“끊임없이 창작하겠다는 생각밖에 없던 사람,자신에게 닥친 가혹한 시련도 당연한 업보라는 듯 좌절하지 않고 이겨낸 사람….오직 예술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죽는 순간까지 지켜낸 사람,이런 진실한 성품과 천재성은 필연적으로 시대와 불화를 빚을 수밖에 없었고그런 갈등을 그림에 솔직하게 표현한 화가는 오직 렘브란트뿐이다….“-렘브란트의 전기를 쓴 에밀 미셸빚더미와 가난과 고독에 시달리던 처절한 시기에 문득 거울 앞에 선 노화가의 자조어린 심정이 충격적일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들풀 이영일)― 빛의화가 라고 할 정도로 그의 작품은 너무 뛰어난 작품들이 많지만 사치스럽고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라는 인식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그가 활동했던 시기가 로코코가 유행하던 시기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을 수도 있지요~하지만 렘브란트가 없었다면 그 유명한 네덜란드 장르화의 시작도, 페이메르같은 화가도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사랑하고 의지했던 그의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 등 사랑했던 자녀들을 먼저보냈던 그의 절절한 외로움을 달래기에 지금의 셀카와도 같은 자화상이 유일한 위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지극히 화려한 영앤리치에서 마지막은 초라하기 그지없던 그의 죽음을 기억해봅니다. (psyj)― 이 세계적 화가의 말년 삶이 파산이라니 충격입니다. 혹시 톨스토이처럼 자발적 가난은 아니겠지요. 예술가의 삶이란 하고 싶다고 할 수도 없지만 과연 어떻게 삶을 살고 마무리해야 죽을 때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익명의 독자)―※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달이 환하게 가득 차 오르는 추석이다. 연휴 기간 나들이에 문화생활을 해 보는 건 어떨까. 온 가족이 함께 볼 공연과 영화, 전시, 책이 풍성하다. 본보 공연, 전시, 영화, 출판 담당 기자들이 추석 연휴에 즐길 만한 추천작을 각각 추려 봤다.》 英내셔널갤러리 명화전 마지막 기회… 장욱진 60년 활동 조명 회고전 열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품 52점을 선보이는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는 10월 9일 막을 내린다. 바로크 시대 이탈리아 최고의 거장 카라바조(1571∼1610)의 명작은 물론 라파엘로,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터너, 마네, 모네, 고갱 등 서양 미술사 거장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추석 당일에만 휴관하기 때문에, 이번 연휴가 명작을 만날 막바지 기회다. 통상 해외 전시는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인상주의나 현대미술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N차 관람하는 관객이라면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 풍속화나 18세기 영국 초상화 등 국내에서 접하기 쉽지 않은 미술 경향을 집중해서 보는 것도 새로운 재미를 줄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장욱진 회고전 ‘가장 진지한 고백’은 1920년대부터 1990년 작고하기까지 장욱진의 60년간 활동을 조명한다. 전시 준비 과정에서 일본에서 발견된 1955년 ‘가족’도 최초로 공개된다. 서울관에서는 김구림, 정연두 개인전을 연다. 과천관에서는 이신자 회고전을, 청주관에서는 피카소 도예전을 각각 볼 수 있다. 서울관은 추석 당일, 과천·덕수궁·청주관은 10월 4일 대체 휴관한다.항일운동 소재 ‘도적’ 가족 모두 즐길만… 강동원 주연 ‘천박사…’ 영화 예매율 1위 추석 연휴를 겨냥해 넷플릭스가 야심 차게 내놓은 작품은 ‘도적: 칼의 소리’다. 1920년대 중국 북간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조선식 서부극’으로, 배우 김남길 서현 이현욱 이호정 등이 출연했다. 조선, 중국, 일본 문화가 한데 모인 북간도의 이색적인 풍경에 말을 타고 윈체스터 장총을 쏘는 시원한 액션이 더해졌다. 항일운동을 소재로 삼아 가족들이 추석에 둘러앉아 함께 즐길 만하다. 총 9화가 22일 공개됐다. 27일 개봉한 배우 강동원 주연의 영화 ‘천박사 퇴마연구소: 설경의 비밀’은 예매율 1위를 달리며 추석 극장가 승리를 예고하고 있다. 퇴마사 행세를 하며 사람들에게 사기 행각을 벌이던 천 박사(강동원)가 악귀 범천을 만나게 되면서 진짜 퇴마사로 거듭나는 이야기다. 무시무시한 반인반신의 범천 역은 배우 허준호가 맡았다. 최근 개봉한 영화답지 않게 러닝타임이 98분으로 짧다. 12세 관람가로 연휴 저녁에 가족들이 가볍게 보기 좋은 오락영화다. 8월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오펜하이머’, 이달 초 개봉한 유재선 감독의 ‘잠’을 아직 보지 않은 관객이라면 이들 작품도 관람하길 권한다.하루키 6년만에 장편소설 ‘도시와…’ 출간, 그림책 ‘세상에서…’은 고향 풍경 담아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무라카미 하루키 지음·홍은주 옮김·768쪽·1만9500원·문학동네)을 읽어 보는 건 어떨까.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74)가 6년 만에 펴낸 장편소설이다. 30대 남자 주인공이 10대 시절에 글쓰기라는 취미를 공유했던 소녀를 떠올린 뒤 수수께끼의 도시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6일 출간된 뒤 예스24에선 3주 연속, 교보문고에선 2주 연속 종합 1위에 올랐다. 하루키가 1980년 문예지에 발표했지만 책으로 발간되지 않은 동명의 중편소설을 고쳐 썼다는 점에서 하루키의 팬들이라면 주목할 만하다. 두툼한 ‘벽돌책’인 만큼 연휴에 도전할 만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름’(델핀 페레 지음·백수린 옮김·128쪽·2만 원·창비)은 정겨운 고향의 풍경이 수채화처럼 펼쳐진 그림책이다. 엄마의 고향을 찾은 아이는 시골집 다락에 올라 엄마의 오래된 물건들을 꺼내어 본다. 엄마가 갖고 놀던 장난감, 엄마가 즐겨 불렀던 피리, 지금은 돌아가신 할아버지 사진들…. 엄마의 추억이 보물상자처럼 아이에게 닿는다. 온 가족이 모이는 추석 연휴, 이 책 속의 엄마와 아이처럼 가족들과 옛 추억을 나눠 보면 어떨까. 지난해 프랑스 아동문학상 ‘소시에르 상’ 수상작이다.국립창극단 ‘심청가’ 4년만에 무대에… 연극 ‘더 파더’ 전무송-현아 부녀 출연 이번 추석에는 ‘아빠와 딸’의 이야기를 다룬 공연으로 서로의 온기를 느껴 보는 건 어떨까. 다음 달 1일까지 서울 중구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선 국립창극단의 ‘심청가’가 4년 만에 무대에 오른다. 손진책이 극작과 연출을, 안숙선 명창이 작창을 맡았다.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기 직전 부르는 ‘범피중류’ 장면은 공연의 백미로 꼽힌다. 현대무용가 안은미가 안무를 짰다. 민은경, 이소연, 유태평양 등 창극단 소속 간판 소리꾼들이 출연한다. 연휴 기간에는 관람 전 창극단 단원들에게 ‘심청가’의 한 대목과 추임새를 배워 볼 수 있다. 2만∼5만 원. ‘진짜 부녀’가 함께 무대에 오르는 연극도 만날 수 있다.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는 다음 달 1일까지 배우 전무송(81)과 딸 전현아(52)가 아버지와 딸을 연기하는 연극 ‘더 파더’가 공연된다. 프랑스 극작가 플로리앙 젤레르의 희곡이 원작이다. 동명 영화로도 제작돼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과 각색상을 받았다. 공연은 치매에 걸린 가운데 위신을 지키려는 노인 앙드레와 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면서도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하는 딸 안느의 이야기를 다룬다. 4만5000∼5만5000원.김민 기자 kimmin@donga.com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1970년대에 처음 외국을 나가 프랑스의 큰 태피스트리(여러 가지 색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를 보고 생각했죠. 옛날처럼 하면 안 되겠다. 저는 자수를 전공하지 않아 제대로 된 방법은 몰랐지만, 되는 대로 비슷하게 만들어 보려 노력했고, 쉬운 걸 어렵게 한 적도 많습니다.” 한국 섬유예술 1세대 작가 이신자(93)가 21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말했다. 그의 대규모 회고전 ‘이신자, 실로 그리다’는 22일 개막했다. 이신자는 1970년대 섬유예술이라는 말도 없던 시절 ‘태피스트리’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작가로 덕성여대 교수를 지냈다. 이번 회고전에서는 그의 초기작부터 2000년대까지 작품 90여 점과 드로잉, 사진 등 기록물 30여 점을 선보인다. 이날 전시장 속 다채로운 작품만큼이나 작가의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무늬가 있는 검은색 스타킹에 하이힐을 신은 그는 “지금도 능력과 건강이 뒷받침된다면 좋은 작업을 하고 싶다”며 의욕을 보였다. 서울대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한 그는 “임직순 선생(1921∼1996)이 ‘회화에 재능이 있으니 미술을 하라’고 권했지만 당시 작업을 하는 여성이 별로 없었다”며 섬유예술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과감한 배포를 지니고 있었던 그는 1970년대 프랑스를 다녀온 뒤 앉아서 조그마한 작업을 할 게 아니라 ‘회화와 견줄 수 있는 크고 멋진’ 작품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어릴 적 할머니의 베틀을 보고 익힌 직조 과정을 토대로, 틀에 실을 묶어서 태피스트리를 짜 내려갔다. ‘숲’(1972년), ‘원의 대화 I’(1970년대), ‘어울림’(1981년)은 올 풀기로 독특한 표면 질감을 만들어 낸 작품이다. 이번 전시에선 초기 작업부터 전통적인 재료 대신 밀포대, 방충망, 벽지, 종이처럼 다양한 실험을 해 온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플라스틱이 들어간 실이나 납을 이용한 염색 방법을 직접 설명하면서 그는 “당시에는 ‘발가락으로 했느냐’거나, ‘대한민국 자수를 이신자가 다 망친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며 “그러나 내가 전공을 하지 않았기에 이렇게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장 가운데에는 1990년부터 3년간 제작한 ‘한강, 서울의 맥’이 펼쳐진다. 길이 19m에 달하는 대작으로, 우리 민족의 애환과 발전상을 보여주는 한강을 소재로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기겠다는 야심을 갖고 만든 것이다. 팔당 산골짜기에서 시작해 행주, 서해로 흐르는 한강의 모습을 태피스트리의 세밀한 명암 표현을 살려 수묵화처럼 담았다. 내년 2월 18일까지. 2000원.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오늘은 오랜만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 속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9월 20일을 기준으로 이 전시를 30만 명 넘는 분들이 관람했다고 합니다. 10월 9일까지 전시가 계속되니 이제 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그동안 영감한스푼에서는 총 4개의 작품을 소개했습니다.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목록을 참고해주세요.이번엔 인상주의 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작품, 폴 고갱의 정물화를 감상해보겠습니다.수수께끼 가득한 그림고갱이 프랑스 파리를 떠나 브리타니에 머물던 시절 그렸던 이 정물은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가장 먼저 거슬리는 건 오른쪽 아래 그려진 맥주잔과 칼입니다. 이들 옆 동글동글한 과일들은 입체감을 뽐내며 금방이라도 그림 밖으로 쏟아질 듯 묘사되어 있는데, 맥주잔 혼자서 어두운 방 안에 놓인 듯 짙은 색을 하고 있습니다.게다가 빛은 하나도 비추지 않아서 마치 종이를 오려서 세워 놓은 듯 납작하게 그려져 있죠. 그 옆 칼 역시 기울어진 각도가 아니었다면, 입체감을 전혀 느낄 수 없도록 색이 칠해져 있습니다.덕분에 이 그림은 과일이 있는 부분은 앞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보이지만, 칼과 잔이 놓인 부분은 갑자기 푹 꺼져서 이상하고 낯선 느낌을 자아냅니다.게다가 이 모든 것들이 놓여 있는 테이블 바닥을 인식하게 되면 이 그림은 더욱 이상해집니다. 맥주잔은 납작해서 같은 눈높이에서 본 모양인데, 테이블은 옆면이 전혀 보이지 않고 상판만 가득해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입니다.만약 이 그림이 사진이라면 낭떠러지처럼 그려진 상판에 놓인 모든 것들은 아래로 흘러내려야만 할 것입니다.이상한 점은 또 있습니다. 바로 테이블 뒤에 있는 창밖 풍경과 빛의 각도입니다.우선 이렇게 테이블 뒤편에 바로 창이 있다면, 테이블 위에 놓인 사물들은 역광을 받고 있겠죠. 맥주잔처럼 시커멓게 칠해져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사과는 오른쪽 위에서 빛을 받아 동글동글한 양감을 마음껏 뽐내고 있습니다.마치 ‘빛이 어디에서 오든 난 이 각도가 제일 예뻐’하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죠.또 고갱이 이 정물을 그린 지역은 시골 마을인데, 창밖 풍경은 집이 아주 빽빽하게 들어찬 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고갱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있었던 걸까요?이 질문에 답을 찾으려면 아래의 작품을 꼭 봐야 합니다.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세잔이 정물은 고갱보다 10년 앞서 세잔이 그린 것입니다. 역시 재밌는 포인트가 여러 가지 있습니다. 우선 쏟아질 것 같은 테이블의 각도, 그 위에 각자 제멋대로 눈높이에서 그려진 사물들, 그리고 그림 아래 중앙에 짙고 굵게 그려진 검은 선까지. 균형 맞추기 게임을 하듯 치밀한 계산 위에 놓여 있습니다.고갱 정물과 공통점을 찾자면 비스듬히 놓여 시선을 앞으로 잡아당기는 나이프, 납작해 벽지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유리잔이 가장 먼저 눈에 띕니다. 여기에 뒤편의 벽지를 마치 그림의 액자처럼 활용한 것도 재치 있죠.고갱은 주식 중개인으로 일할 무렵인 1880년대 세잔의 작품 6점을 구입합니다. 그중 하나가 위 정물이었는데, 이 작품에 대해 ‘최고의 보석,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작품’이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고갱은 1883년 이혼을 하면서 갖고 있던 많은 작품을 팔았는데, 이 작품만큼은 계속해서 가지고 있었습니다.그리고 주식 중개인으로서의 삶을 버리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브리타니로 떠난 뒤 우리가 지금 만나는 정물을 그리게 된 것이죠. 고갱의 또 다른 초상화에서도 이 정물의 모습은 발견됩니다.칼과 유리잔의 정반합은 이 그림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죠. 고갱은 세잔의 균형 게임에 커다란 인물을 더해 자신만의 버전으로 더욱 확장해 재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고갱과 세잔이 왜 인상주의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후기 인상주의를 열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모네를 비롯한 인상주의 작가들은 우리의 눈을 ‘빛을 받아들이는 기관’으로 보고, 빛의 변화에 따라 바뀌는 시각적 색채와 이미지를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죠.여기서 더 나아가 세잔은 우리의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 보았습니다. 빛이 역광으로 비치더라도 내 마음속 사과는 오른쪽 위가 반짝이는 예쁜 사과일 수 있다는 것. 유리잔을 테이블 위에 놓고 보면 동그란 윗부분만 보일지라도, 내 마음속에서는 옆선이 선명하게 보이는 납작한 도형일 수도 있다는 것이죠.이런 세잔의 과감하게 내디딘 걸음을 고갱은 마음으로 느끼고 있었기에, 작품을 진심으로 즐기고 또 더 나아가 단조롭게 되풀이되는 일상을 뒤로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열어젖힐 수 있었습니다.예전 어느 영화에서 첼로 거장 파블로 카살스가 이런 말을 했다는 일화가 나옵니다. 자신이 무능력하다고 생각하는 젊은 연주자가 “내가 학생일 때 당신 앞에서 연주를 했고, 칭찬까지 해주었다”고 말하고는, 카살스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그때 왜 그런 무책임한 말을 했느냐”고 항의합니다.그러자 카살스는 곧바로 오래전 젊은이의 연주를 재현하며 “당신의 이 부분이 좋았다는 걸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며 “나는 작은 것에서도 감동과 기쁨을 느낄 수 있다.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이상하게 놓인 나이프, 테이블 아래 시커먼 선, 납작한 맥주잔… 그림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는 것은 이런 사소한 것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사소하고 이상해 보여도 마음의 문을 열고 보면 그곳에서 무한한 감동과 기쁨이 쏟아져나올 수 있으니까요.고갱의 납작한 맥주잔에서 오늘은 그런 즐거움을 느껴보는 것 어떨까요?※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를 관람한 인원이 20일 30만 명을 넘어섰다. 최근 열리고 있는 전시 가운데 단연 ‘가장 핫한 전시’로 꼽히면서 올해 6월 2일 개막한 지 111일 만에 누적 관객 수 30만 명을 돌파한 것이다.● 한 점 한 점이 명작 내셔널갤러리 명화전은 전시 개최 이후 하루 평균 2700명이 방문하고 있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국립중앙박물관이 개최한 특별 전시 중 2016년 ‘이집트 보물전―이집트 미라 한국에 오다’(37만 명) 이후 가장 많은 관객이 찾은 전시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이번 전시는 2016년과 달리 팬데믹 후 회차별 관람 인원을 제한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엄청난 관심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20일 선유이 학예연구사에 따르면 관객들은 카라바조의 ‘도마뱀에 물린 소년’, 토머스 로런스의 ‘찰스 윌리엄 램턴(레드보이)’에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렘브란트의 ‘63세의 자화상’과 클로드 모네의 ‘붓꽃’, 빈센트 반 고흐의 ‘풀이 우거진 들판의 나비’도 인기 작품이다. 선 학예연구사는 “전체 작품 수는 50여 점으로, 한 점 한 점이 거장의 작품이기에 모두 골고루 사랑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중 ‘레드보이’는 한국 관람객에게 특히 사랑받는 작품이다. 18세기 말 영국에서 초상화가로 권위 있었던 로런스가 당시 더럼 백작의 아들이 6, 7세 무렵일 때 의뢰를 받아 그렸다. 이 시기 아카데미 화풍의 절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1967년에는 영국에서 우표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림 속 소년이 13세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도 작품에 아련함을 더한다.● 내셔널갤러리 역사 영상도 눈길 작품만큼 좋은 반응을 얻는 또 다른 주인공은 전시장에서 상영되는 영상 ‘영국 내셔널갤러리의 시작과 한 점 전시회’다. 이 영상은 영국에서 내셔널갤러리가 설립된 사연과 공공 미술관으로서의 역할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내셔널갤러리는 프랑스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나면서 1793년 루브르궁이 박물관이 된 것에 영향을 받아 설립됐다. 영국에서도 왕실이나 귀족이 아닌 모두를 위한 공공 미술관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1824년 의회가 설립을 추진했다. 다만, 왕정이 무너진 프랑스와 달리 왕과 귀족이 여전히 권력을 갖고 있었던 영국에서는 왕실 소장품을 강제로 공공 자산으로 만들 수 없었다. 이에 은행가였던 존 앵거스테인(1735∼1823)의 소장품 38점을 구입하고, 그의 집을 빌려 미술관을 만들었다. 이후 1838년에야 오늘날 런던 트래펄가광장의 건물로 이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는 ‘한 점 전시회’를 열어 국민을 위로한 일화도 유명하다. 독일군의 영국 침공이 가까워졌을 때 내셔널갤러리는 소장품 전부를 시골 광산에 마련한 수장고로 옮겼다. 그 후 텅 빈 미술관에서 음악회를 열었지만 그림 없는 미술관에서 허전함을 느낀 사람들이 작품 전시를 요청한다. 이에 미술관은 시골 광산에서 매달 작품 한 점씩을 가져와 전시했고, 이를 보기 위해 매일 수천 명이 미술관을 찾았다. 이 ‘한 점 전시회’에 걸렸던 작품이 3점이나 국내 전시에도 출품됐다. 클로드 로랭의 ‘성 우르술라의 출항’, 폴라이우올로의 ‘아폴로와 다프네’, 렘브란트의 ‘63세의 자화상’이다. 전시는 10월 9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진공 상태 같은 풍경이었어요. 밀폐된 곳에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막막함…. 색이 없어지면 꽃은 스러진다고 생각했는데, 맨드라미가 다르게 보인 순간이었습니다.” 눈이 펑펑 내린 어느 겨울 밤 화가 김지원(62)은 작업실 앞 맨드라미 밭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붉게 타오르는 맨드라미를 그렸던 김지원 작가는 수년 전부터 가을이 되어 갈색으로 바래고, 겨울밤 시든 맨드라미에 눈길을 돌렸다. 그 결과물을 27일까지 서울 종로구 누크갤러리에서 열리는 ‘회화의 이름…그림의 시작’전에서 볼 수 있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식물인데 동물 같았던’ 맨드라미는 계절을 지나면서 스산한 바람에 울부짖는 가시나무처럼 묘사되어 있다. 이 전시는 지난해 노충현 작가의 제안으로 시작된 ‘회화의 이름’ 두 번째 시리즈로, 한국 중견 회화 작가들의 작업을 소개하고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아름다운 장미가 너무 흔해지면서 ‘장미는 이제 덧없는 이름으로만 남았다’고 표현한 것에서 착안해 당연하고 때로는 식상한 것으로 여겨지는 회화를 다시 보자는 취지를 담았다. 지난해에는 노충현, 샌정의 작품을, 올해는 김지원, 최진욱(67)의 작품 20여 점을 소개한다. 최진욱의 신작에 담긴 건 그가 오래전부터 이어온 작업실 풍경들이다. 이번에는 형광을 연상할 만큼 밝고 강렬해진 색채가 눈에 띈다. 김지원은 색을 빼고, 최진욱은 색을 더한 것도 비교 감상할 수 있는 지점이다. 별채 갤러리에서는 김지원의 ‘무거운 그림의 시작’(1997년)을 비롯한 1990년대 작품 4점과 최진욱의 ‘그림의 시작’(1990년), 1995년 자화상 두 점 등 오래전 작품도 볼 수 있어 작업 스타일 변화를 가늠해보는 재미도 있다. 무료.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반짝이는 것. 화려한 것. 비싼 것.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 미술에서 가장 쉽게 관심을 받는 이야기는 이런 것들입니다. 덕분에 아트페어 기사를 쓰게 되면 어떤 작품이 얼마나 비싼 가격에 팔렸고,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이 페어를 찾았으며, 그 안팎에서는 또 얼마나 화려한 파티들이 벌어졌는지를 다루게 됩니다. 이번에는 좀 더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한남 나이트, 디너파티, VIP 오픈…. 영어 단어들로 장식된 시간을 지나고 난 뒤의 차분함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공유합니다.반짝이는 것을 좇는 사람들 “한국에서 1년 동안 마실 샴페인의 절반은 이번 주에 소비된 것 같아요.” 프리즈 서울(6∼9일)이 막을 내릴 무렵인 8일 어느 갤러리스트가 제게 한 말입니다. 5일부터 7일까지 갤러리들이 나눠준 술과 음식은 물론이고 미술계 관계자들이 참석했을 수많은 식사와 파티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느다란 샴페인 잔에서 수직으로 피어오르다 사라지는 거품처럼, 아트페어와 갤러리에는 반짝이는 무언가를 좇는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이들은 멋진 옷을 입고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인스타그램에 이를 올리며 마음껏 즐겼습니다. 사람 구경이 재밌는 일주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입은 다양한 옷처럼 그들의 예술적 취향도 각자 다를 것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작품을 즐기고 만족할 수도 있겠지만 아트페어에서는 그것들이 돈으로 가치가 매겨진다는 현실도 마주합니다. 어떤 작품은 몇백만 원, 다른 작품은 몇십억 원 하는 냉정한 숫자 앞에서 사람들은 주눅이 듭니다. 그 결과 페어에서 뉴스가 되는 것은 ‘최고가 작품’이죠. 여기서 우리가 작품 앞에서 눈과 마음으로 마주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은 멀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이 말이 작품의 설명을 대신합니다. ‘이게 몇십억 원짜리 작품이래, 이걸 산 사람은 얼마나 돈이 많을까?’오늘의 숫자와 내일의 감각페어장에서 만난 컬렉터 A 씨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수년 전 갤러리에서 두 작품을 보여주었어요. 둘 다 가격은 비슷했고, ㄱ보다 ㄴ 작품이 제 취향이었죠. 그런데 왠지 ㄱ 작품이 시장에서 인기일 거라는 느낌이 왔어요. 고민하다 취향대로 선택했는데, ㄱ 작품이 몇 년 사이 엄청나게 가격이 오르더군요. 지금도 후회는 없지만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내가 그때 조금만 양보해서 ㄱ 작품을 골랐다면 그 차익으로 ㄴ 작가의 작품 여러 점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웃음)” 그의 이야기에서 컬렉터에게 하는 많은 조언들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투자는 생각하지 말고 좋아하는 작품을 사라? 아니면 투자를 위해 가격이 오를 작품을 골라라? 사실은 둘 다 모든 상황에 적용하기는 어렵습니다. 고가의 예술 작품은 그저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사기는 쉽지 않습니다. 작품 가치의 향방을 예측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고요. 다만 나의 안목을 믿는다면 당장의 가격은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결론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 안목의 기준이 순간의 감흥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관한 지식과 감각, 미술사 흐름의 이해에 기초한 것이라면 말이죠. 작품의 가치는 당장 시장 반응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증명해 줄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금전적 가치뿐 아니라 좋은 작품을 곁에 두고 얻는 감각과 경험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도요.공허한 시간들, 중심이 필요해 아트페어를 계기로 작품의 가치는 돈으로 매길 수 없다거나 글로벌 페어가 한국 미술계를 황폐하게 할 거라는 순진한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프리즈 주간을 지나며 이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흐름이라는 게 더 와닿았습니다. 페어를 계기로 다양한 사람들이 만나고 생각을 나누는 장이 열린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오래전부터 글로벌 페어를 열어왔던 홍콩을 떠올리면, ‘아트위크’가 공허한 시간이 되지 않기 위해 중심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년 ‘아트바젤 홍콩’이 열리면 미술인들이 이 도시를 찾고 떠들썩한 파티를 열지만 정작 홍콩 미술계에 대해서는 알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오래전부터 운영된 비영리 기관은 있지만 제대로 된 미술관인 M+가 문을 연 건 최근의 일입니다. 미술인들이 모여든다 해도 한국 미술의 맥락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없다면 결국 이 도시는 하나의 거대한 마케팅 플랫폼, 파티장에 그치고 말 것이라는 이야기죠. 가격은 중요하지만, 그 전에 작품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지, 그것이 과연 진실한 감각인지, 그것이 세계 보편적 미술사 맥락에 비추어 합당한 논리를 갖추고 있는지를 고민해 봐야 할 시간이 닥쳐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샴페인의 거품처럼 반짝이다 터져 버릴 예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버텨낼 예술의 가치를 우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말입니다. 프리즈 서울과,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키아프)’, 서울아트위크를 겪은 독자분들은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뉴스레터 ‘영감 한 스푼’은 매주 금요일 오전 7시 발송됩니다. QR코드를 통해 구독 신청하시면 이메일로 먼저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1916∼1984)가 살던 한옥에서 조각가 한용진(1934∼2019)의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은 서울 성북구 혜곡최순우기념관(최순우 옛집)에서 ‘혜곡의 영감’ 세 번째 전시로 ‘한용진 조각전’을 연다고 밝혔다. 한용진의 석조 작품 14점과 드로잉·판화 11점, 기록 자료를 만날 수 있다. 최순우 옛집은 1930년대 초 지어진 근대 한옥으로 최순우가 1976년부터 별세하기까지 살았던 곳이다. 사랑방, 안방, 대청마루, 건넌방으로 구성된 ‘ㄱ’자형 안채 바닥에 한용진의 돌 조각이 놓여 있고, 바깥채에서는 기록 자료를 볼 수 있다. 마당에는 소나무, 산사나무, 모란, 수련 등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와 꽃으로 가꾸어져 있다. 안채 내부로 들어가지 않고 마당에서 작품을 감상하면 한옥 나무 문틀이 액자 역할을 해 인상적이다. 리움미술관 소장품이 놓인 대청마루 뒤편은 부엌으로 사용돼 다양한 모양의 소반이 걸려 있었다고 전한다. 최순우의 집을 찾은 많은 문화인이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용진은 1세대 조각가로 충청도, 강원도, 제주도를 다니며 한국인의 심성을 닮았다고 생각하는 돌을 찾고 거기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만들었다. 최순우가 기획한 국립박물관 ‘판화 5인전’(1963년)에 김종학, 윤명로, 김봉태 등 동료 작가들과 참여했다. 1963년에는 김환기와 함께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참여했으며, 1967년부터 미국에 정착한 뒤 김환기·김향안 부부와 가깝게 지냈다. 22일에는 미술사학자 조은정이 전시 연계 강연 ‘조각가 한용진의 삶과 작품 세계’를 연다. 사전 신청을 통해 참가할 수 있다. 전시는 10월 28일까지. 무료.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가지런한 도로 위를 나란히 달리는 버스. 그 안에는 좌석들이 줄지어 놓여 있고, 승객들이 차곡차곡 앉아 어디론가 떠나고 있습니다. 버스의 위로는 동그라미가 질서정연한 전광판, 코카콜라 광고판이 보이지만 검은 무늬가 시선을 왼쪽으로 흐르게 만들고 있죠. 우리의 눈은 이 그림에서 가장 큰 형체, 벌거벗은 붉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이 사람은 마치 도시의 그 모든 풍경 밖에 서서 ‘아웃사이더’인 것처럼 굳은 채 오른쪽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가지런한 도시의 질서 속에 도저히 자신을 담을 수 없다는 것처럼 말이죠. 그의 오른쪽 아래 또 다른 화려한 색깔의 인물도 버스 사이를 가로지르며 야성적인 에너지를 뿜어냅니다. 서용선 작가(72)가 1989년, 1991년에 걸쳐 그린 ‘도시-차 안에서’입니다.벼락처럼 떨어진 도시 속 군상들서용선의 1980년대 초반부터 최근 작품까지 70여 점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서용선: 내 이름은 빨강’이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습니다.그간 서용선은 ‘단종 애사’의 작가, ‘역사화’를 그린 작가 등 장르와 소재를 중심으로 읽히곤 했는데, 이 전시는 그런 도식적인 구분을 벗어나 조형 언어 자체를 돌아보자는 취지를 갖고 있습니다.그 때문인지 전시장 1층에 가면 그가 1980년대부터 그린 도시 풍경을 먼저 마주하게 되는데요. ‘도시-차 안에서’를 비롯해 ‘숙대 입구 07:00-09:00’(1991년), ‘도심’(1997-2000년), ‘버스 속 사람들’(1992년)처럼 큰 캔버스에 과감하게 풀어낸 인간 군상을 즐길 수 있습니다.이 그림들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격자무늬 속 불편하게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공간을 사각형, 마름모로 균일하게 구획 지어 버리는 격자 속에서 다양한 형태를 지닌 개인들은 비좁은 골목에서 터져 나올 듯하거나(도심), 좀비처럼 격자 사이를 조심조심 밟고 지나갑니다(숙대 입구).그는 왜 이런 도시 풍경에 주목했을까요? 이 무렵 작가는 서울대 강사로서 생활을 병행하며 미아리에서 정릉, 숙대입구, 총신대역, 낙성대 등으로 이동하는 버스와 지하철에서 도시 풍경을 관찰했다고 합니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는 서울이 고속 성장을 하며 강남이 개발되고 도시가 빠르게 형성됐던 시기이기도 합니다.불과 30~40년 전만 해도 전쟁으로 잿더미가 됐던 서울은 거짓말처럼 화려하고 깔끔한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릴 적 미아리 공동묘지 위에 세워진 학교에 다니며 전쟁으로 사체와 뼈 더미를 보았던 기억이 채 지워지지 않았는데도 말이죠.당시 포화상태가 된 미아리 공동묘지가 망우리로 이전하면서 포크레인으로 시신을 파내고, 학교 운동장 한쪽에는 뼈가 쌓여 있는 모습을 작가는 목격했다고 합니다. 그런 땅 위에 깔끔한 보도블록과 반듯한 빌딩들, 질서 정연한 도로가 놓이며 서용선의 도시 풍경은 묻습니다. 가지런한 격자무늬가 과연 그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겠느냐고요.가슴 속 끓어오르는 응어리, 빨강2층 전시장으로 발길을 옮기면 역사적 사건을 다룬 회화와 자화상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대형 인물화 ‘빨간 눈의 자화상’(2009년)입니다. 서용선 작가가 서울대 교수직을 그만둔 다음 해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었을 때 발표돼 주목을 받았고, 지금은 스크린골프 회사가 소장해 사옥에 걸려있다는 것도 흥미로운 얘깃거리가 되는 작품입니다.이 그림 앞에 서면 어디에도 갇히지 않겠다는 듯 거침없이 그어나간 붓 터치가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이렇게 굵은 선을 그릴 때면 잘못하면 어떡하나 망설이게 될 것 같은데, 그 망설임을 이겨내려는 것처럼 더 과감하게 그었다는 느낌도 전해집니다.어느 선도 잘못 그은 것은 없다. 오히려 그것이 기준이 된다.그 선들은 언젠가 반드시 만나게 된다.서용선 작가는 “어느 선도 잘못 그은 것은 없으며 오히려 그것이 기준이 된다”며 “그 선들은 언젠가 반드시 만나게 된다”고 했는데요. 결국 잘못 그었다고 생각하는 선이 자신을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는,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빨간색을 칠할 때 쾌감을 느낀다.어떨 땐 더 빨갛게, 더 빨갛게 칠하자는 생각도 한다.그렇다면 여기서 왜 눈을 붉게 그렸는지에 관한 이야기도 할 수 있겠죠. 그는 “빨간색을 칠할 때 쾌감을 느낀다”며 “어떨 땐 더 빨갛게, 빨갛게 칠하자는 생각도 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정치적인 의미, 혹은 길들여져야만 하는 사회적 맥락 속에 갇힌 빨간색의 부당한 상징성을 깨버리고, ‘빨강은 그저 빨강’이라고 외치는 눈입니다.전시장 속 인터뷰 영상에서 그가 “(탄광촌 사람들의) 가슴 속에 끓어오르는 불만, 가슴 속의 응어리”를 담고 싶다고 언급한 것도 인상적입니다.격자무늬와 정치, 사회가 개개인을 길들이려고 할 때 생겨나는 불만과 응어리. 그것이 우리의 인간성과 개별성을 잃지 않게 해주는 것임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그런 맥락에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비몽사몽인, 의식과 무의식이 섞인 상태로’ 그리기도 했다는 자화상 역시, 그러한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을 포착하려는 노력으로 읽힙니다.15일부터는 자연 풍경과 인물화, 나무 조각으로 구성된 이 전시의 3부가 새롭게 공개됩니다. 삶과 예술의 일치를 위한 작가의 탐구와 성찰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현장에서 한 번 만나보세요.※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기자 kimmin@donga.com}

세계 3대 경매사로 꼽히는 필립스옥션이 최근 작가와 구매자를 직접 연결하는 플랫폼 ‘드롭숍(Dropshop)’을 개설해 화제가 됐다. 통상 경매사는 작가와 직거래를 좀처럼 하지 않지만, 온라인 플랫폼 발달과 팬데믹의 영향으로 이러한 원칙이 깨지고 있다. 조너선 크로켓 필립스옥션 아시아 회장은 12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10년간 일어난 시장의 구조 변화와 세대교체 움직임을 주목했다”며 “작가와 경매사의 협력체계를 구축하는 데 필립스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드롭숍은 매달 필립스가 선정한 작가가 작품을 웹사이트로 판매하는 온라인 쇼핑몰이다. 한 달에 한 명의 작가만 선보이며, 이 사이트에서만 살 수 있는 한정판 작품을 별도로 제작한다. 작가가 직접 작품을 판매하는 ‘1차 시장’과 이미 누군가 소장했던 작품을 거래하는 ‘2차 시장’의 경계를 허물겠다는 의도다. 크로켓 회장은 최근 침체되는 미술 시장의 돌파구를 어떻게 찾고 있냐는 질문에 “항상 소장가와 연결될 새로운 방식을 모색한다”며 “작가와 소장가가 직접 교류하는 플랫폼을 통해 글로벌 미술 생태계를 확장하고 싶다”고 밝혔다. 필립스는 프리즈 서울(6∼9일) 개막을 맞아 서울 종로구 송원아트센터에서 팝업 전시도 열었다. 크로켓 회장은 “지난해에는 젊은 영국 갤러리와 협업 전시를 열었고, 올해는 기성 작가와 신진 작가를 골고루 보여주려 했다”며 “이유라, 세오, 김호재 등 한국 작가의 작품도 선보이게 돼 기뻤다”고 했다. 그는 아시아의 주요 미술 중심지로 서울에 대해 “한국의 소장가들이 현대미술에 열린 태도를 갖고 있다”고 했다. 이어 “한국이 큰 시장은 아니지만 미술품을 소장해 온 오랜 역사가 있다”며 “글로벌 갤러리가 분점을 열어 지역 미술 시장과 해외 기관의 연결고리가 돼 줄 것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필립스는 크리스티, 소더비처럼 홍콩에 상설 경매장을 열었다. 이에 대해 그는 “홍콩은 자유항이라는 유연성과 동서양이 혼합된 문화적 배경이 큰 이점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세계 미술 시장의 20%를 차지하는 중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 혹은 세 번째로 큰 시장이자 세계 최대 미술 경매 시장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올해 4월 14일부터 약 두 달간 ‘히스테리아: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전을 통해 국내 작가 13인의 구상 작품을 소개한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이 영국 작가 이시 우드(30)의 개인전을 연다. ‘히스테리아’전의 연장선에서 동시대 구상 회화의 경향을 새롭게 조망하겠다는 취지다. 7일 개막한 우드의 개인전 ‘I Like To Watch’는 신작 회화 47점과 설치·영상 작품, 출판물을 선보인다. 최근 수년간 해외 미술계에서 인기를 얻었던 우드의 국내 개인전은 처음이다. ● 좁은 캔버스 속 비밀 세계미술관 1전시실로 입장하면 캔버스의 사이즈가 관객을 당황하게 만든다. 작품 대부분이 가로세로 30cm를 넘지 않을 정도로 작기 때문이다. 또 모든 작품은 절대 전체 풍경을 보여주지 않는다. 작가는 작은 슬리퍼가 놓인 카펫, 자동차 보닛의 오른쪽 부분, 피자 한 조각 등 어딘가를 확대해서 본 듯한 장면을 묘사한다. 마치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으로 세상을 보는 듯 집착적이어서 답답함을 느끼게도 만든다. 전시장의 유일한 대형 작품은 바닥에 깔린 타일 설치작 ‘바닥2’이다. 검은 타일을 모자이크 형태로 붙인 작품 위에는 숫자만이 가득하다. 1전시실 작품들 대다수에선 작가가 일상에서 어느 부분은 보여주겠지만, 전체는 숨기겠다는 ‘보여주고 싶지만, 보여주기 싫다’는 이중적인 태도가 느껴진다. 2전시실에 가면 좀 더 큰 크기의 작품들이 나온다. 벨벳 위에 그린 ‘COP26’은 지구 위에 둥둥 떠 있는 가죽 재킷을 묘사해 기후 위기에 대한 대응이 공허한 외침으로 그치는 현실을 풍자한다. 회화 ‘오페라에서 껌을 씹는 캐리’와 ‘그렇다고 합니다’는 익살스러운 인물의 표정, 동물들 옆에 엉뚱하게 배치된 손목시계로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과거와 현대 스타일 자유롭게 혼합3전시실에서는 DIY(Do It Yourself·자기 주도적) 예술가로서 우드의 면면이 좀 더 다채롭게 펼쳐진다. 영국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빈티지 옷과 부츠에 그림을 그린 설치 작품이 등장하고, 프로젝트룸에서는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토대로 만든 뮤직비디오 8종이 상영된다. 우드는 미술가로서는 물론이고 신예 음악가로도 주목받았다. 글로벌 갤러리인 가고시안과 유명 음악 프로듀서 마크 론슨에게 각각 음악 계약을 제안받았지만 모두 거절한 일화가 유명하다. 지난해 뉴욕타임스(NYT) 보도에 따르면 우드는 자신의 작업이 상품화되고, 대상화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껴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그의 회화에선 중세부터 신고전주의까지 다양한 사조의 스타일을 조합하고, 아주 오래된 것 같은 풍경 위에 현대적인 대상을 올려놓는 등 혼합하는 경향이 보인다. 이는 시간적 흐름에 구애받지 않고, 개인에게 맞는 시각 언어를 자유롭게 활용하는 최근 미술의 흐름을 보여준다. 그의 회화와 음악만큼 유명한 것은 14세 때부터 블로그에 작성해온 일기다. 일민미술관은 우드가 쓴 블로그 글 일부를 골라 한국어로 번역한 책 ‘퀸 베이비’를 이번 전시에 맞춰 출간했다. 윤율리 책임큐레이터는 “우드의 실험은 회화를 내용이나 형식, 공간이나 평면 등 어느 하나로 환원하려는 전통적인 시도에 혼란을 가한다”고 했다. 이어 “일민미술관은 이런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주의 깊게 살피며 새로운 도전을 조망할 것”이라고 밝혔다. 11월 12일까지. 7000∼9000원.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캔버스 위 볼록한 배 모양의 살구색 물체가 붙어 있고, 그 옆으로 붉은 색채가 터져 나온다. 흰 바탕에 빨간색만 가득했다면 화면은 폭력과 죽음만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배경에 짙은 검은색이 드리우며, 어둠과 대비되는 빨강은 분출하는 에너지와 생동감을 표현한다.그 위 터진 장기 같은 물체는 마지막 에너지를 내뿜으며 죽어가는 중일까, 아니면 새로운 무언가를 탄생시키는 중일까. 작가는 ‘중간(In-Between)’이라는 모호한 제목을 붙여 해석을 관객의 몫으로 맡긴다.흔히 탄생을 축복이고 죽음을 종말이라고 하지만, 때로는 탄생이 폭력이고 죽음이 안식이 될 수 있다. 인간사의 모호한 경계를 탐구해 온 인도 출신의 영국인인 세계적 예술가 애니시 커푸어(69)의 작품이 한국을 찾았다. 커푸어는 미국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의 랜드마크인 반짝이는 거대한 콩 모양 조각 ‘구름 문’,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 야외에 자리한 금속 공을 쌓아올린 ‘큰 나무와 눈’, 원 모양의 ‘하늘거울’ 조각으로 잘 알려진 작가다.눈으로 읽는 역설의 시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에선 K1, K2, K3 전관에 걸쳐 커푸어의 개인전 ‘Anish Kapoor’가 열리고 있다. 국제갤러리에서는 7년 만에 열리는 커푸어의 전시로, 대규모 조각부터 회화, 드로잉까지 20여 점을 선보인다. 작품 대부분이 최근 10년 내 만들어졌다.커푸어는 ‘구름 문’처럼 거울같이 매끄러운 스테인리스 스틸 대형 조각으로 유명하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거친 표면과 육중한 무게감이 돋보이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시각적 효과로 눈길을 잡아끄는 커푸어 특유의 스타일은 여전하다.K3관의 대형 조각 4점은 괴물의 입, 동물의 장기처럼 기괴한 형태지만, 바닥에서 떠 있는 상태로 벽에 고정돼 무게를 가늠하기 어렵다. 거칠고 구멍 난 표면을 얇은 그물망으로 감싸 어딘가에 갇힌 듯 얌전하고 온순한 느낌도 자아낸다. 높이 3m가 넘는 붉은색 조각 ‘무제’(2017년)는 멀리서 보면 단단한 돌덩이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살펴보면 움푹 팬 흔적이 있고 살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겉만 봐서는 재료가 부드러운 실리콘임을 알기 어렵다는 것도 그의 작품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요소다.K2관에선 그가 최근 새로 공개한 회화들을 만날 수 있다. ‘In-Between’을 포함해 빨강과 검정으로 죽음과 탄생, 질서와 파괴 등 상반된 개념을 한데 모은 작품들을 볼 수 있다.보이지 않는 것을 보다그가 탐구하는 ‘역설의 미학’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 K1관 안쪽에 놓인 ‘반타블랙’을 이용한 작품들이다. 반타블랙은 2014년 한 영국 기업이 개발한 것으로, 빛을 99.6% 흡수해 완벽에 가까운 암흑을 나타낸다. 반타블랙을 이용한 조각 앞에 서면, 무언가를 보고 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마법 쇼를 보는 듯하다.커푸어는 관객들의 시각을 이리저리 교란시키며, 20세기 이후 예술이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과거 인터뷰에서 “마르셀 뒤샹(1887~1968)이 모든 물건이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면, 나는 그다음으로 모든 물건이 무언가를 상징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아무 물건이나 예술가가 선택하고 전시한다고 작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서 시적인 의미를 찾는 것이 이 시대 예술가의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이를 위해 그는 여러 종교와 신화의 맥락을 차용하며, 인간사에 대한 성찰을 제공하기 위해 애쓴다. 이러한 노력의 이면에는 인도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인도 상류층 학교를 다니고 이스라엘 집단 농업 공동체 키부츠에서 생활했으며 런던예술대를 다닌 커푸어의 다양한 문화적 배경이 영향을 끼쳤다. 전시는 10월 22일까지. 무료.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반짝이는 것. 화려한 것. 비싼 것.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미술에서 가장 쉽게 관심을 받는 이야기는 이런 것들입니다.덕분에 아트페어 기사를 쓰게 되면, 어떤 작품이 얼마나 비싼 가격에 팔렸고,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이 페어를 찾았으며, 그 안팎에서는 또 얼마나 화려한 파티들이 벌어졌는지를 다루게 됩니다.저 역시 그런 기사를 썼지만.. 오늘 뉴스레터에서는 좀 더 솔직한 이야기를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한남 나이트, 디너 파티, VIP 오픈, 삼청 나이트…. 영어 단어들로 장식된 시간을 지나고 난 뒤의 차분함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공유합니다.반짝이는 것을 쫓는 사람들“한국에서 1년 동안 소비할 샴페인의 절반은 이번 주에 쓰였을 것 같아요.”프리즈 서울의 6일 개막을 전후로 한 ‘아트위크’의 막바지인 오늘 어느 갤러리스트가 제게 한 말입니다.5일부터 7일까지 한남동, 청담동, 삼청동 갤러리들이 나눠준 술과 음식은 물론, 미술계 관계자들이 참가했을 수많은 저녁 식사와 파티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가느다란 샴페인 잔에서 수직으로 피어오르다 사라지는 거품처럼, 아트페어와 갤러리에는 반짝이는 무언가를 쫓는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이들은 멋진 옷을 입고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해 보이고,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며 분위기를 마음껏 즐겼습니다.작품 구경만큼이나 사람 구경이 재밌는 일주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가장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나타났지만, 그 결과는 조금씩 다른 패션 스타일로 나타났죠. 다양한 모습을 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품의 취향도 옷처럼 모두 다를 것입니다.각자가 좋아하는 취향의 작품을 즐기고 만족할 수도 있겠지만, 아트페어에서는 그 작품들이 돈으로 가치가 매겨진다는 현실도 마주하게 됩니다. 어떤 작품은 몇백만원, 다른 작품은 몇십억을 하는 냉정한 숫자 앞에서 사람들은 주눅이 듭니다.내가 좋아하는 작품은 별로인가?비싼 작품이 더 좋은 거겠지?나는 왜 그런 작품을 가질 수 없을까.그 결과 페어에서 뉴스가 되는 것은 ‘최고가 작품’이죠.‘최고가’라는 수식어 앞에서 우리가 작품 앞에서 눈과 마음으로 마주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은 생각의 저편으로 멀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이 말들이 작품의 설명을 대신합니다.“##억 원에 팔린 작품이래.”“이게 그렇게 비싼 작품이래.”“이걸 산 사람은 얼마나 돈이 많을까?”오늘의 숫자와 내일의 감각 사이프리즈 서울 VIP 오픈과 기사 마감으로 정신없는 시간이 지난 뒤. 조금 한산해진 페어장 카페에서 컬렉터 A씨를 만났습니다. 자기만의 취향이 보이는 컬렉션에 제가 예전부터 호기심을 갖고 있었던 분이었죠.그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수년 전에 갤러리에서 두 작품을 보여주었어요. 둘 다 가격은 2000만 원 정도로 비슷했고, ㄱ보다 ㄴ작품이 제 취향이었죠. 그런데 왠지 제 눈에 ㄱ 작품이 시장에서 인기가 많을 것 같다는 느낌이 왔어요.고민하다 결국 취향대로 선택했는데, ㄱ 작품이 몇 년 사이에 수억까지 가격이 오르더군요. 지금도 제 선택에 후회는 없지만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내가 그때 조금만 양보해서 ㄱ 작품을 골랐다면 그 차익으로 ㄴ 작가의 작품 여러 점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웃음)”그의 이야기에서 컬렉터에게 주어지는 많은 조언들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투자는 생각하지 말고 좋아하는 작품을 사라? 아니면 투자를 위해 오를 작품을 골라라? 사실은 둘 다 모든 상황에 적용하기는 어려운 말입니다.예술 작품의 가격을 생각하면, 그저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사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작품 가치의 향방을 예측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고요.다만 나의 안목과 선택을 믿는다면 당장의 가격은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결론으로 대화는 마무리 지었습니다. 특히 그 안목의 기준이 순간의 감흥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관한 지식과 감각, 그리고 미술사 흐름에 대한 이해에 기초한 것이라면 말이죠.지금 시장의 반응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작품이 미술사에 남게 될 것이라면 오랜 시간이 증명해 줄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또 단순히 금전적인 가치뿐 아니라 좋은 작품을 집에 두고 가족들이 감상하며 얻는 감각과 경험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도요.공허한 시간들, 중심이 필요해아트페어를 계기로 작품의 가치는 돈으로 매길 수 없다거나, 글로벌 페어가 한국 미술계를 황폐하게 할 거라는 순진한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프리즈 위크를 지나면서 이는 되돌릴 수도 없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하는 흐름임이 더 피부에 와닿았습니다. 페어를 계기로 다양한 사람들이 만나고, 서로 생각을 나누며, 한국에 대해 알게 되는 장이 열린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그렇지만 서울보다 오래전부터 글로벌 페어를 열어왔던 홍콩을 떠올리면, ‘아트위크’가 공허한 시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중심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매년 ‘아트바젤 홍콩’이 열리면 미술인들이 이 도시를 찾고 떠들썩한 파티를 열지만, 정작 홍콩 미술 씬에 대해서는 알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오래전부터 운영되어 온 여러 비영리 기관은 있었지만, 제대로 된 미술관인 M+가 문을 연 건 최근의 일입니다.미술인들이 모여든다고 해도, 한국 미술이 어떤 맥락을 갖고 있는지, 그것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없다면 결국 이 도시는 하나의 거대한 마케팅 플랫폼, 파티장에 그치고 말 것이라는 이야기죠.가격은 중요하지만, 그 가격을 이야기하기 전에 작품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지. 그것이 과연 진실한 감각인지. 또 더 나아가 세계 보편적인 미술사 맥락에 비추어 합당한 논리를 갖추고 있는지를 고민해봐야 할 시간이 닥쳐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샴페인의 거품처럼 반짝이다 터져버릴 예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버텨낼 예술의 가치를 우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말입니다.이번 주 프리즈 서울과, 키아프, 서울아트위크를 겪은 독자분들은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기자 kimmin@donga.com}

한국 소설이 우리 시대의 노동을 제대로 그리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소설가 11명의 모임 ‘월급사실주의 동인’이 펴낸 첫 동인지다. 비정규직, 자영업,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에 더해 가사 구직 교습 등 우리 시대의 다양한 노동의 양태를 소재로 한 소설을 엮었다. 저자들은 모두 직장인으로 일한 경험이 있다. 김의경의 ‘순간접착제’는 삼각김밥 공장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청년 여성의 이야기를, 서유미의 ‘밤의 벤치’는 전업주부 경진이 사는 아파트 단지 안 벤치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염기원의 ‘혁명의 온도’는 노조 활동을 하면서 직장생활에 만족하는 군무원의 자조 어린 목소리를 담았다. 장강명의 ‘간장에 독’은 팬데믹의 직격탄을 맞은 여행사를 배경으로 신입사원이 겪는 어려움을 그렸다. 이들 작가는 겉으로는 소소하게 보일지라도 개인에게는 크게 다가오는 고난을 그리는 것을 통해 예술의 새로운 힘을 모색하고자 한다. 미국 작가 존 스타인벡이 ‘분노의 포도’에서 대공황의 대책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진 못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과 그 사이의 숭고함을 그려냈듯 현실을 묘사하는 것 자체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취지다. 장강명 작가는 기획의 말에서 “성실한 노동의 가치는 추락하고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다”며 “이러한 현상을 과거의 ‘자본가 대 노동계급’이라는 과거의 틀로 파악하고 대처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원인도 대책도 모르지만 최대한 고통스럽다는 사실만큼은 동시대 작가의 눈으로 쓰고자 했다”고 덧붙였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5일 서울 용산구의 한 식당. 평소라면 손님들이 각자 테이블에 앉아 식사했을 이곳에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서서 영어와 한국어로 이야기를 나눴다. 여기엔 일본 도쿄 모리미술관장 가타오카 마미, 영국 델피나재단 창립이사 에런 세자르 등 해외 미술기관 인사와 언론인, 예술가들이 섞여 있었다. 이들은 휘슬(서울), ROH(인도네시아 자카르타), STPI(싱가포르), 다케 니나가와(일본 도쿄) 등 4개 갤러리가 준비한 디너파티에 참석한 것이다. 글로벌 아트페어 ‘프리즈 서울’ 개막일인 6일 전후로 해외 주요 미술인들이 서울로 몰렸다.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9일까지 열리는 프리즈 서울은 갤러리들이 작품을 판매하는 ‘미술장터’를 넘어 거대한 마케팅 플랫폼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개막 전부터 여러 갤러리들이 합동 디너파티를 개최하는 것은 물론이고 샤넬, 프라다, 보테가 베네타 등 해외 유명 브랜드도 앞다퉈 팝업 전시와 파티를 열었다. 프리즈 서울과 함께 6일 코엑스에서 동시 개막한 국내 최대 아트페어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키아프)’도 10일까지 열린다.● 밀레부터 백남준까지거고지언(가고시안), 하우저앤드워스 등 글로벌 갤러리 120여 곳이 참가한 페어장의 6일 사전 프리뷰 풍경은 비교적 차분했다. 최근 미술시장 침체로 갤러리들은 고가의 작품보다는 아시아 컬렉터에게 꾸준히 인기를 모은 작품을 전시했다. 거고지언은 백남준의 ‘TV 붓다’와 조너스 우드의 정물화를 앞세웠고, 하우저앤드워스는 ‘화가들의 화가’로 불리는 필립 거스턴, 20세기 대표 여성 예술가 루이즈 부르주아를 내세웠다. ‘프리즈 마스터스’에서는 장프랑수아 밀레, 파블로 피카소, 폴 세잔 등 고전 대가들의 드로잉과 희귀 서적 등 고미술 작품들도 눈길을 끌었다. 갤러리들이 공개한 첫날 판매 실적도 무난했다. 지난해 조지 콘도의 40억 달러 상당 회화 작품을 판매한 하우저앤드워스는 이날 라시드 존슨의 회화 ‘Seascape “Ship of Fools”’(약 13억 원), 콘도의 회화 ‘Internal Combustion’(약 10억 원) 등 13점이 주인을 찾았다고 밝혔다. 페이스갤러리는 알렉산더 콜더의 1965년 조각을 판매했다. 작품 제목과 거래 가격은 밝히지 않았지만 호가는 200만 달러(약 26억 원)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인 컬렉터 A 씨는 “경기 불황으로 갤러리들이 판매액에 대한 기대를 접고 전속 작가를 소개한다는 느낌이었다”며 “올해는 프리즈 자체보다 팝업 전시나 국내 갤러리들이 신경 쓴 전시와 이벤트가 좋았다”고 말했다. 키아프는 첫날 방문객 수가 지난해보다 30% 늘었다. 갤러리현대는 라이언 갠더의 ‘In the Begging’을, 국제갤러리는 우고 론디노네의 ‘Light Green Clock’을 각각 선보였다. 학고재는 정영주 작가, 이화익갤러리는 최병진 작가의 작품을 출품했다.● 세계 미술 VIP들 서울로미술계에 따르면 프리즈 서울을 계기로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 후원회, 미국 뉴욕 디아미술재단 디렉터, 마이애미 배스미술관 후원회, 애스펀미술관 후원회, 중국 UCCA 현대미술센터 관장 등 주요 인사들이 한국을 찾았다. 해외 미술인들은 아트페어는 물론이고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김범 강서경 개인전이 열리는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 김환기 회고전이 열리는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 경기 파주 비무장지대(DMZ)에서 열리고 있는 현대미술 전시 ‘체크포인트’도 관람한 것으로 전해졌다. 권민주 프리즈 아시아 VIP 및 사업개발 총괄 이사는 “VIP들이 한국 전통문화를 소개하는 (서울 종로구) 아름지기와 예올을 방문한 뒤 한식당 ‘온지음’을 찾거나, ‘조선 양화’전이 열리는 호림박물관(서울 강남구)을 방문하는 것도 주요 동선”이라고 밝혔다. 이숙경 영국 휘트워스미술관장은 “영국에서도 글로벌 아트페어가 열리면 이에 맞춰 주요 미술관이 중요한 전시를 연다”며 “아트페어를 계기로 현지 미술을 널리 알리려는 노력은 필요하다”고 말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5일 서울 용산구의 한 레스토랑. 평소라면 손님들이 각자 테이블에 앉아 조용히 식사했을 이곳에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서서 영어와 한국어로 이야기를 나눴다. 여기엔 마미 카타오카 일본 도쿄 모리미술관장, 아론 세자르 영국 델피나재단 창립이사 등 해외 미술 기관 인사와 언론인, 예술가들이 섞여 있었다. 이들은 휘슬(서울), ROH(자카르타), STPI(싱가포르), 다케 니나가와(도쿄) 등 4개 갤러리가 준비한 디너파티에 참가한 사람들이다.글로벌 아트페어인 프리즈 서울의 6일 개막을 전후로 해외 주요 미술인들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프리즈 서울은 갤러리들이 모여 작품을 판매하는 ‘미술장터’이지만, 거대한 마케팅 플랫폼이 열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프리즈 서울이 개막하기 전부터 여러 갤러리들이 합동 디너파티를 개최하는 것은 물론 샤넬, 프라다, 보테가 베네타 등 명품 브랜드도 앞다투어 팝업 전시와 파티를 열었다. 프리즈 서울 안팎의 풍경을 소개한다.● 세계 미술 VIP들이 서울에미술계에 따르면 프리즈 서울을 계기로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 후원회, 구겐하임 아부다비 미술관장, 미국 뉴욕 디아미술재단 디렉터, 마이애미 배스미술관 후원회, 아스펜미술관 후원회, 중국 UCCA 현대미술센터 관장, 일본 모리미술관장 등 주요 미술계 인사들이 한국을 찾았다. 홍콩의 ‘슈퍼 컬렉터’인 애드리언 챙을 비롯해 국내외 연예인들도 6일 페어장에서 볼 수 있었다.해외 미술인들은 아트페어 관람은 물론 국립현대미술관, 김범, 강서경 개인전이 열리는 리움미술관, 김환기 회고전이 열리는 호암미술관, 경기 파주 비무장지대(DMZ)에서 열리고 있는 현대미술 전시 ‘체크포인트’ 등도 관람한 것으로 전해졌다.권민주 프리즈 아시아 VIP 및 사업개발 총괄 이사는 “VIP들이 특히 근대 이전의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며 “한국 전통문화를 소개하는 아름지기와 예올을 방문한 뒤 미슐랭 한식 레스토랑인 ‘온지음’을 찾거나, ‘조선 양화’전이 열리는 호림박물관을 방문하는 것도 주요 투어 동선”이라고 밝혔다. 권 이사는 “해외 미술인에게도 한국은 케이팝과 뷰티, 정보기술(IT)로만 익숙하다는 점이 아쉬워 한국이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설명했다.한국인 최초로 유럽 미술관장이 된 이숙경 영국 휘트워스미술관장도 프리즈 아트페어를 찾았다. 그는 “영국에서도 글로벌 아트페어가 열리면 이에 맞춰 주요 미술관이 중요한 전시를 연다”며 “아트페어를 미술관처럼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지만, 이를 계기로 로컬 미술을 알리려는 노력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페어장은 차분한 분위기거고지언(가고시안), 하우저앤워스 등 글로벌 갤러리 120여 곳이 참가한 페어장의 6일 사전 프리뷰 풍경은 차분했다. 팬데믹 이후로 이어진 미술 시장 침체 분위기로 갤러리들은 과감한 고가의 작품보다는 아시아 컬렉터에게 꾸준히 인기를 모은 안전한 작품을 전시했다.한국인 컬렉터 A씨는 “경기 불황으로 갤러리들이 판매액에 대한 기대를 접고 전속 작가를 소개한다는 느낌이었다”며 “올해는 프리즈 자체보다 팝업 전시나 국내 갤러리들의 신경 쓴 전시와 이벤트가 좋았다”고 말했다.갤러리들이 공개한 1일차 판매 실적도 무난했다. 지난해 조지 콘도의 40억 달러 상당 회화 작품을 판매한 하우저앤워스는 이날 라시드 존슨의 회화(약 13억 원), 조지 콘도의 회화(약 10억 원) 등 13점이 주인을 찾았다고 밝혔다. 두 작품은 아시아 컬렉터가 구매했고, 폴 매카시의 조각 ‘미미’는 한국인이 약 7억 원에 샀다. 페이스갤러리는 알렉산더 칼더의 1965년 조각을 판매했다고 밝혔다. 거래 가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호가는 200만 달러(약 26억 원)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여성 직원을 강제 추행한 혐의로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민중미술가 임옥상 씨(73)의 작품에 대해 서울시가 철거 작업에 나섰다. 임 씨의 작품이 세워진 다른 기관과 단체에서도 작품 존치 여부를 두고 고심하고 있다.서울시를 비롯한 일부 단체는 임 씨의 범죄로 인해 작품의 의미가 훼손됐다고 보고 빠르게 철거 결정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여러 작가나 주체가 협업해서 만든 공동 작품의 경우 관련자들의 의견을 듣고 충분히 논의해야 한다는 반발도 있다. 이번 사안은 작품과 예술가를 별개로 볼 수 있느냐에 대한 오래된 논쟁과도 연결된다.‘임옥상미술연구소’ 웹사이트에 따르면 임 씨가 제작한 작품은 전국 100여 개에 달해 작품을 둘러싼 논란이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의미 변절시켜 철거해야” vs “성급히 지워선 안 돼”서울시는 서울 중구 남산 일본군 위안부 추모공원 ‘기억의 터’에 설치된 임 씨의 작품 ‘대지의 눈’과 ‘세상의 배꼽’을 5일 철거했다. 당초 서울시는 이들 작품을 4일 철거할 예정이었지만 ‘기억의 터 설립추진위원회’(설립추진위)와 정의기억연대(정의연) 등 시민단체가 이에 반대하는 집회에 나서며 작업이 한 차례 연기됐다. 서울시는 임 씨의 작품이 ‘기억의 터’에 있는 것은 위안부뿐 아니라 시민 정서에 반하는 행동이라는 입장이다. 서울시는 “시민 대상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65%가 작품을 철거해야 한다고 답했고, 설립추진위가 주장하듯 조형물에 표기된 작가 이름만 삭제하자는 의견은 23.8% 불과했다”고 밝혔다. 이어 “작가 이름만 가리는 것은 오히려 국민을 속이는 것”이라며 “공간의 의미를 변질시킨 임 씨의 조형물만 철거하고 대체 작품은 국민 의견을 최대한 반영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작품으로 재설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설립추진위와 정의연은 두 작품이 임 씨 개인의 창작물이 아니라, 설립추진위원과 여성 예술가들이 의견을 더 많이 반영한 공동 창작물이며 시민 1만9755명이 모금에 참여해 철거 이전에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세상의 배꼽’에는 임 씨의 이름은 없고 윤석남 작가의 드로잉이 있고, ‘대지의 눈’에는 위안부 증언록에서 발췌한 할머니들의 증언과 명단이 새겨져 있다. ‘대지의 눈’ 오른쪽 아래에는 ‘디자인 임옥상’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설립추진위원장을 맡았던 최영희 전 국회의원(민주당)은 “임 씨가 성추행 사건(2013년) 뒤인 2016년 작품 제작 의뢰를 받아들인 데 많이 분노하고 있지만 이 작품을 임 씨의 것으로 보는 것은 의미를 폄하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서울시가 대체 작품 설치에 관해 설립추진위 의견을 듣겠다고 했지만 이를 공문으로 달라고 하니 거부하고 있다”며 “임옥상 지우기가 아니라 위안부 지우기가 될까 두렵다”고 했다. 서울시는 ‘기억의 터’ 외에도 서울시청 서소문청사 앞 ‘서울을 그리다’, 마포구 하늘공원의 ‘하늘을 담는 그릇’,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광화문의 역사’ 등 임 씨 작품 6개를 모두 철거하는 작업을 조만간 마무리할 계획이다.● “작품 계속 두면 2차 가해”전태일재단은 임 씨가 제작한 노동운동가 전태일 열사의 반신상과 관련해 4일 ‘전태일동상 존치·교체 숙의위원회’를 열었다. 노동계와 문화·여성·청년 등 각계 인사 11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총 세 차례에 걸친 회의를 통해 동상 존치·교체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임 씨가 2005년 만든 전태일 열사 반신상은 서울 종로구 ‘전태일다리’ 위에 설치돼 있다. 조각상이 세워진 곳은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자리다. 2017년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 가이 라이더가 이 동상을 찾아 헌화했다. 제작비는 노동자와 시민 모금으로 마련했다. 한석호 전태일재단 사무총장은 “동상을 다른 것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게 내부 중론”이라고 밝혔다. 한 사무총장은 “동상을 계속 둘 경우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우려가 있고, 동상에 관한 논란이 계속돼 갈등이 심화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됐다”며 “더 좋은 동상을 만드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견이 다수였다”고 말했다. 서울시에 이어 적극적으로 임 씨의 철거를 검토하는 지방자치단체는 광주광역시다. 광주시 도시철도공사는 2003년 1호선 농성역에 설치된 임 씨의 작품 ‘솟아오르는 산’의 철거를 검토하고 있다. 경남 김해시도 논의를 시작했다. 김해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2주기를 맞아 노무현재단이 2011년 봉하마을에 세운 ‘대지의 아들 노무현’이 있다. 재단 관계자는 “현재 논의 중이며, 아직 공식적으로 결정된 입장은 없다”고 말했다. 다른 지자체들은 신중한 분위기다. 임 씨의 작품 4점을 보유하고 있는 경남 고성군은 “작품 4점 모두 제정구 선생을 기리는 작품이라 철거 후 대안도 마련해야 해 바로 결정할 수 없다”며 “충분히 논의한 뒤 철거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누가 이들에게, 대지의 어머니’를 보유한 경기 광주 나눔의집은 “당장 철거 계획이 없다”고 했다. 서울 영등포구 당사에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흉상이 있는 더불어민주당은 “철거 여부는 아직 검토 전이다”라고 밝혔다.● 철거 vs 존치하고 문제점 기록… “국민 논의 필요” 작가와 작품을 둘러싼 논란은 최근 수년간 ‘미투’ 운동이 문화예술계를 뒤흔들면서 세계적인 이슈가 된 바 있다. 2017년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프랑스 화가 발튀스(1908∼2001)의 작품을 철거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10대 소녀를 신비롭고 섹슈얼한 방식으로 표현한 그의 작품이 아동을 성적 대상화한다며, 온라인 철거 청원에 8500명이 서명을 하면서 논란이 됐다. 당시 미술관은 “시각예술은 현재뿐 아니라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라며 작품을 내리지 않았다. 이런 결정은 예술가와 작품을 별개로 본다는 의미도 있지만, 현재의 잣대로 미술사 속 예술가를 평가할 경우 수많은 작품이 내려져야 하기 때문인 점도 있다. 파블로 피카소, 디에고 리베라, 카라바조 등 많은 유명 예술가들이 성적 일탈, 인종 차별 등에서 현재의 잣대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문제 행적을 병기해 관객에게 판단을 맡기는 방법도 나왔다. 2019년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는 ‘고갱의 초상’전을 열며 고갱이 “타히티에서 10대 소녀들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으며 이는 명백히 백인 남성의 지위를 악용했다”는 설명을 함께 걸었다. 당시 테이트모던 관장이었던 비센테 토돌리는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예술가가 작품을 세상에 내놓으면, 그것은 더 이상 그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이므로 함부로 지워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생존 작가의 경우 선택이 나뉘는 경우도 있다. 미국 화가 척 클로스(1940∼2021)가 살아 있던 2018년 성폭력 가해자로 고발당했을 때, 워싱턴 국립미술관은 예정된 그의 개인전을 무기한 연기하고 시애틀대는 작품을 철거했다. 그러나 미국 국립초상화미술관은 그가 그린 빌 클린턴 초상화를 계속 전시했다. 작품 철거가 자칫하면 검열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단죄는 사법 기관의 역할이고, 미술관은 인간의 복잡한 문제에 관해 대화를 이끌어내는 장이어야 한다는 취지다. 철거할 것인가, 남기고 기록할 것인가. 선택은 각 기관과 국민의 몫이다. 임 씨의 경우 이런 선택을 내려야 하는 조형물이 100개가 넘는다는 게 문제다. 미술사가 황정수 씨는 “이번 일을 계기로 임 씨가 어떻게 그 많은 조형물과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는지 그 과정에 대한 조사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작가가 명예를 걸고 작품을 제작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품행을 지닐 의무가 있다”며 “작품을 철거하고 다시 제작한다면 그에 따른 비용까지도 작가에게 청구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

대구의 대표적 화랑인 리안갤러리가 신관을 열고 독일 작가 이미 크뇌벨(83)의 개인전을 연다. 1일 공개된 대구 중구 리안갤러리 신관은 기존 건물 뒤편에 지상 4층, 지하 1층 규모로 들어섰다. 전필준 대구가톨릭대 교수가 설계한 공간은 전시장 3곳과 교육실, VIP 라운지 등을 갖췄다. 주요 전시장 층고는 9m로 높다. 이에 따라 대형 조각과 설치 작품들도 소개할 예정이다. 1990년대 지어졌던 구관은 신축 후 수장고로 활용된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서울점도 1개 층 증축을 준비하고 있다. 안혜령 리안갤러리 대표(65)는 “앞으로 갤러리에서 교육 및 네트워킹 프로그램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갤러리 사업을 하기 전부터 ‘큰손’ 컬렉터였던 안 대표는 2007년 리안갤러리 개관 때 본인의 소장품으로 앤디 워홀 개인전을 열어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백남준, 앨릭스 카츠 등 주요 작가의 대작을 소장해 지난해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이사회 멤버로도 추대됐다. 안 대표는 1일 기자간담회에서 “해외 유명 작가를 소개하니 그 뒤에 전시되는 국내 작가에게도 자연스럽게 관심이 쏠렸다”며 “그런 이유로 이번 신관 개관전 역시 해외 작가를 선정했다”고 말했다. 전시장에서는 조립식 알루미늄을 기하학적 형태로 잘라낸 다음 여러 색채를 덧칠한 ‘Figura’ 연작 등 크뇌벨의 작품 12점을 볼 수 있다. 전시된 작품 중 ‘클라이너 원형 16c(Kleiner Archetyp 16c)’는 작가가 특별히 한국에서 소개하고 싶다고 요청한 것이다. 2008년 독일 홀레펠스 지역에서 발견된 구석기시대 비너스상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지하 1층에서는 남춘모 이진우 이건용 김택상 이광호 김춘수 윤희 신경철 등 리안갤러리 전속 작가를 포함한 국내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10월 14일까지. 무료.대구=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나/조그만 조약돌 되기/바라니!//바닷가에 조용히 무릎 꿇고 앉아/밀려오는 파도의 흐느낌을 배우고/몰아치는 폭풍의 노여움을/배우려니!’(최욱경의 시 ‘조약돌’ 중) 요절한 추상화가로 잘 알려진 최욱경(1940∼1985)은 그림만 남긴 것이 아니다. 첫 번째 미국 체류를 마치고 한국에 머물렀던 1972년, 그는 시집 ‘낯설은 얼굴들처럼’을 펴냈다. 유학 시절에 쓴 시 45편과 삽화 16점으로 구성된 이 시집엔 타지에서 겪은 외로움, 자아에 대한 고민, 그리고 절절한 사랑의 기쁨과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지난달 25일 개막한 최욱경 개인전 ‘낯설은 얼굴들처럼’은 이 시집에서 출발했다. 우선 시집에 삽화로 소개된 16점 중 6점인 ‘습작’ ‘실험’ ‘I loved you once’ ‘Study I’ ‘Study II’ ‘experiment A’가 소개된다. 종이에 그려진 드로잉들은 그의 추상이 단순히 유행하는 미술 사조를 따른 것이 아니라, 삶에서 겪은 감정과 고민에서 출발한 것임을 보여준다. 1969년 그린 작품 ‘무제’엔 “그때가 오면 해가 뜰까 /…/ 그런 시간이 정말로 내게 올까?”라는 내용이 영어로 적혀 있다. 낯선 곳에서 예술가로 살아남아야 하는 막막함과 암담함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고 풀어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1960년대 그린 크로키 9점도 전시된다. 최욱경이 1963년 미국으로 떠나 크랜브룩 미술학교 서양화과에서 공부할 무렵, 학교에서 누드 모델을 보고 그린 것들이다. 인물들이 움직이려고 하는 순간을 포착한 그림은 거침없고 대담하다. 이 크로키들은 대부분 유족이 보관하고 있던 것으로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전시에선 드로잉와 크로키에 더해 판화까지 작품 총 38점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모든 작품이 흑백으로만 구성돼, 그간 화려한 색채 추상으로 최욱경을 접했던 관객에서 새로운 재미를 준다. 색이 없어진 덕분에 그의 필치에 더욱 집중하게 되고, 또 그림 옆에 그가 써 내려간 글귀들도 더 선명히 드러난다. 전시장에서 놓치지 말고 봐야 할 것은 카운터에 놓인 그의 시집이다. 1972년 초판본은 전시팀이 헌책방을 수소문했으나 구하지 못했고, 사후에 나온 개정판을 전시하고 있다. 파란 모자를 쓴 최욱경의 자화상이 표지인 시집 안에는 그가 마주했던 뜨거운 인생의 순간들이 담겨 있다. 10월 22일까지. 무료.부산=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