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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현대의 어린이들은 무분별한 불량·불법 비디오를 시청해 비행 청소년이 되는 것을 가장 무서워한다.” 1990년대 초중반 애니메이션 비디오테이프에 담겨 있던 건전 영상 캠페인 내레이션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어찌나 오싹하던지. 비행 청소년은 우리 건전한 공동체를 수시로 위협하는 탓에 결국엔 눈 흘김을 받는 존재. 그렇게 된다는 건 가족과 친구들이 외면하고, 교사가 어느 날 나를 포기하게 된다는 의미다. 이렇듯 공포감은 관계가 무너지고 내가 더 이상 지금의 내가 아니게 되는 상황에서도 찾아 온다. 그건 호환, 마마만큼이나 무서운 일이라는 것. 넷플릭스로 공개된 범죄 스릴러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도 이와 같은 공포를 다룬다. 영화는 평범한 회사원 이나미(천우희)가 휴대전화를 분실했다가 일상이 송두리째 뒤흔들리는 모습을 비춘다. 이나미는 잃어버린 휴대전화를 돌려받았지만, 어느 날부터 자신이 스마트폰으로 하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면서 아연해한다. 자신을 아껴주던 회사 사장님을 험담하는 글이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라가고, 동료들은 그에게 등을 돌린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확인하는 과정에선 자신과 친한 사람들과의 관계도 틀어진다. 이로써 사람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공포의 3종 세트가 다 갖춰진다. 여기서 다시 캠페인 속 내레이션으로 되돌아가 보자. 옛날엔 공포의 대상은 주로 외부에 있는 ‘미지의 존재’였다. 즉, 집 안에 들어와서 아이를 물고 가는 호랑이이자 천연두를 옮긴다고 여겨지던 귀신 같은 것들. 그리고 전쟁처럼 한 개인이 컨트롤할 수 없는 사태도 그렇다. 내가 속한 울타리에 들어올 수 없는 존재들이 여기 울타리 안을 넘볼 때 두려움을 느낀다. 즉, 공포의 대상 중 첫 번째는 바로 울타리 밖의 낯선 존재다. 영화 속에선 주인공 이나미를 노리는 악의가 그렇다. 더 나아가면 울타리 안의 단단한 결속이 무너지는 것도 겁난다. 악령에 붙들린 가족에게 위협을 받거나, 좀비가 된 친구를 내가 죽여야 할지 말지 딜레마에 빠지는 공포 영화들이 그리는 세상처럼. 이 경우 나를 아득하게 품어주던 옛날의 울타리도 더 이상 믿을 수 없으며, 기존의 도덕도 더 이상 의지할 수 없다. 공포의 대상 두 번째. 한때 익숙했다가 낯설어지는 존재다. 영화 속 주인공과 틀어지는 관계들이 그렇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갈 수도 있다. 어떤 때는 자기 자신조차도 미지의 존재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더 이상 나 자신임을 증명할 수 없고 통제되지 않는 나. 자기 파멸적인 나. 공포의 대상 세 번째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저지르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는 사태가 그렇다. 영화는 공포의 대상을 한 상에 차려낸다. 영화가 초반부 흥미진진하게 느껴진다면 이는 한 인간에게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 속으로 빠뜨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나의 삶은 의지대로 통제되지 않고, 바라지 않던 방향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비치고, 누군가가 나를 감시한다. 이로써 나를 지탱해오던 조건들을 송두리째 빼앗기게 된다. 다만 흥미로운 설정에 비해 서사의 밀도는 떨어진다. 선과 악의 구도를 선명하게 그리고 스릴러의 스토리성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공포의 대상이 외부의 낯선 존재로 빠르게 정리된다. 결국 선의로 똘똘 뭉친 우리와 영문을 알 수 없는 적의로 가득 찬 저쪽의 구도가 짜이는데, 이는 결국 호환을 맞닥뜨린 상황처럼 돼 버린다. 공포의 선물세트를 한 아름 받아들 줄 알았는데, 여러 선택지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고, 포장을 까봤더니 나를 흉내 내는 ‘손톱 먹은 쥐새끼’가 나오는 모양새가 된다. 영화는 현대적 설정의 매력을 충분히 풀어내진 못하지만, 공감을 통해 생활 밀착 공포를 느끼게 하는 독특한 매력만큼은 남는다. 그것만으로도 오싹한 기분은 든다. 하긴 알람이 울리지 않아서 지각하는 게 공포가 아니면 뭐겠나. 일상이 지뢰밭이고 부디 악의를 만나지 않기만을 바라며 산다.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어떤 한 시절이 아름답게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뭘까. 그때 실제로 아름다웠던 풍경과 대상 자체의 속성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아니면 한 사람의 내면이 대상을 예민하게 포착한 감수성의 흔적일까. 만약 둘 다라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화학작용의 배합은 어떻게 될까. 숱한 세월 속에서 유독 몇몇 순간만이 훗날 추억의 질료로 절취되는 까닭은 뭘까. 비범한 예술가는 여기에 구구이 대답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한 풍경과 장면에 사로잡혀서 지난 일들을 오래 매만지는 운명만을 보여줄 뿐이다. 해석하지 않고 감정 속으로 전진한다. ‘바빌론’이 그런 영화다. 영화는 1920∼1950년대 할리우드 영화산업 태동기를 배경으로, 무성영화 스타가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격변기에 잊혀져 가는 이야기를 다룬다. 보통 이런 회고조 작품은 통속적인 공식을 따르는 법. 이전 시대의 찬란한 아름다움이 새 시대에 빛을 잃었다고 한탄하든지, 변화 속에서 소실된 훌륭한 덕성과 가치를 아쉬워한다든지. 극명한 대조 속에서 과거를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부각하기 십상이다. 그럴수록 삼류 회고록에 가까워진다. 반면 바빌론은 그런 인위적이고 의도적인 대조가 허위라는 점을 정확히 인식한다. 바빌론이 조명하는 할리우드의 초창기를 옹호하기란 어렵다. 밤에는 환락 파티를 벌이고 다음 날 촬영 현장에서 술에 취한 채로 영화를 찍고, 캐스팅은 주먹구구다. 영화 산업 종사자의 권리 같은 것도 없다. 그곳에서 사람 목숨은 소품보다 사소하고, 촬영장은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다. 시대가 지긋지긋함으로 온통 가득 차 있다. 본작을 연출한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자신의 대표작 ‘라라랜드’처럼 낭만적인 구석을 비출 듯하다가 결국 구역질 나는 이면으로 전환하며 어둠 속까지 깊숙하게 들어갔다가 빠져나오길 반복한다. 영화는 189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 동안 어둠과 낭만이 수시로 균형추를 맞춘다. 라라랜드엔 없던, 꿈 공장의 뒷단을 비추는 방식을 통해서다. 그러다 보면 결국 쇼 비즈니스에 대한 환멸이 부각된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 광기에 마음이 사로잡힌다는 점이 중요하다. 왜 우리는 어떤 순간과 대상에 매혹되는가? 모른다. 그러나 붙들린 마음은 결코 착시나 거짓이 아니다. 모든 종류의 사랑이 그렇듯 어딘가에 매혹되고 사로잡히는 마음은 본질적으로 불가해하다. 왜 사랑하는지 모르는 대상을 사랑할 수 있을까? 영화는 이것이 잘못된 질문임을 보여 준다. 대신 왜 사랑하는지 알 수 없음에도 빨려드는 감정이 본질적으로 사랑이라고 답한다. 영화는 하염없이 대상에 빠져드는 마음의 작용을 시작부터 줄곧 비춘다. 영화 도입부에서 환락과 욕망으로 가득 찬 파티에서 심부름꾼 매니(디에고 칼바)는 제멋대로인 배우 지망생 넬리(마고 로비)를 보고 단번에 사랑에 빠진다. 자신의 감정을 따르는 넬리의 생기와 광기는 유난하다. 넬리는 그저 되는 대로 살아갈 뿐이지만 이는 무성영화 속에선 타고난 천재성으로 발현된다. 매니는 넬리에게 속절없이 마음이 붙들린다. 영화 초반부 작품 속에서 스타로 가는 첫 단계에 접어든 넬리가 노래하고 춤추면서 빛날 때, 매니는 무성 영화배우 잭(브래드 피트)의 조수로 일하면서 그가 일하는 영화 촬영 현장에 카메라를 배달하기 위해 속도를 낸다. 넬리가 춤을 추다가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할 때, 매니는 꿈을 향해 정직하게 나아간다. 이 장면은 비범함과 범속함을 대조적으로 드러낸다. 매니가 결코 이해하지 못한 채로, 탁월함에 끌려가게 될 운명을 암시하면서. 바빌론을 통해 예술이 한 시대를 망각에서 건져 올리는 방식을 본다. 누군가는 K팝이 궁극의 예술로 진화하더라도, 여전히 싸이월드 시대의 소몰이 창법 음악 속 감정만 못하다고도 할 수 있다. 저마다의 진실은 다 다르니까. 그러나 한 시대의 매혹된 이가 이를 미화하지도 조롱하지 않고 누군가를 그 시대 감정으로 데려갈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다. 영화를 보면 개인의 내면에 남긴 저릿한 자국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마음만큼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많은 예술가들이 그 유혹에 빠져서 숱하게 실패하곤 한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그런 마음이 영화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누군가는 환락과 환멸의 도시 바빌론을 떠나고, 다시 돌아오고 이야기는 쌓인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어떤 세대에게 만화 ‘슬램덩크’는 인생의 한 시기를 떠올릴 때 경유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1990년대 중후반 농구 만화 연재가 끝난 뒤로도 한참 동안 중고교 각 반에 만화 속 명대사 “나는 천재니까”를 시도 때도 없이 입에 달고 사는 아이들이 하나씩 있었고, 그들은 농구공을 잡으면 자신을 만화 속 주조연인 강백호나 정대만으로 불러달라며 눈을 반짝였다. 어떤 아이들은 만화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장래 희망란에 ‘전국 제패’라고 적어 내기도 했다. 기자도 한때 전국 제패를 꿈꿨다. 농구 좀 하는 내 친구 ‘월곡동 윤대협’과 의기투합해서 동네 근린공원을 평정한 뒤 풋내기들 한 수 가르쳐 주러 서울 동북권 길거리 농구의 메카 고려대 야외 농구장으로 원정을 나가기도 했다. 전국 제패로 나아가는 첫 관문이었는데 생각보다 수준 높은 형들 농구를 보고 주눅 들어 코트 옆에서 드리블만 연습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주눅 들 땐 슬램덩크가 또 보약이라서 집에서 몇 번씩 읽으면서 ‘나도 할 수 있다’라고 되뇌었다. 대학생 땐 슬램덩크 만화에 나온 나이키 농구화를 사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여름 반바지와는 도무지 맞지 않는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농구화를 기어이 신고 다녔다. 이렇듯 어떤 이들에겐 원작 만화가 추억과 단단히 맞물린다. 만화를 삶의 일부처럼 여기는 광팬이 꽤 많다. 그들에게 원작은 단순한 만화 이상이다. 그러니 만화 슬램덩크의 클라이맥스인 일본 전국 고교생 종합체육대회(인터하이) 토너먼트 2차전을 다룬 극장판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개봉한다고 했을 때, 원작 팬들의 추억 공유회가 열리리라는 건 이미 예상했다. 워낙 큰 팬덤을 가진 작품이라서 기존 마니아들의 지지 속에 추억에 기대 기존 서사를 안전하게 옮겨오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고, 새로운 서사나 해석을 넣을 여지까진 없으리라고 봤다. 경기 결과가 중요한 스포츠물 특성상 캐릭터와 세계관이 구축돼 있다고 하더라도 결과가 바뀌지 않는 한 보여줄 수 있는 서사엔 한계도 있을 수밖에 없을 거라고 예상했다. 원작 팬들은 누구나 결과를 다 안다. 극장판에선 스포트라이트의 비중이 원작 주인공 강백호에서 조연 송태섭에게로 넘어갔다고 들었지만, 이 역시도 슬램덩크의 외전 격 작품들을 이미 섭렵한 광팬들에겐 익숙한 설정이기도 했다. 이번 작에서 구태여 새로움까진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를 본 뒤엔 완전히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 든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길 가지고 이런 재창조를 해내다니. 극장판은 주인공 팀 북산이 인터하이에서 고교 농구 최강자 산왕공고와 만나 치르는 대결을 다루는데 서사 줄기는 원작과 동일하다. 다만 원작이 저마다 마주하고 있는 난관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성장이 이뤄지는 모습을 그린다면, 극장판은 조금 더 그들의 관계에 포인트를 둔다. 미묘하지만 분명한 차이다. 극장판 주인공이 패스를 뿌리는 포인트가드라는 점이 극장판의 지향점을 드러낸다고도 볼 수 있다. 극장판은 송태섭의 개인사를 비추면서 어떻게 독단적인 성격이 됐는지를 조명한다. 송태섭의 어둡게 닫혀 있는 모습이 주변 이들에겐 비호감으로 비친다. 송태섭 눈에 다른 이들도 비호감이긴 마찬가지다. 송태섭은 세련된 패스를 받아내지 못하는 주장 채치수를 내심 못마땅해한다. 슈터 정대만과는 주먹다짐을 벌이기도 했고, 주전 선수인 서태웅과는 말 한마디 섞지 않은 걸로 묘사된다. 회상을 통해 불화가 드러난다. 회상이 끝나면 장면은 경기장으로 돌아온다. 서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그들은 경기장에선 각자 저마다 자신의 농구를 처절하게 해내고 있다. 그 점을 이해할 때, 서로를 의지해도 괜찮다는 마음이 차츰 스며든다. 단신 가드 송태섭을 약점으로 여긴 상대팀이 ‘존 프레스’ 전술로 압박할 때 동료들은 송태섭을 의지하는 결정을 내린다. 송태섭은 다른 팀원들을 믿고 의지하며 패스를 뿌린다. 송태섭의 패스가 다른 팀원들의 손으로 가서 감길 때 승부가 요동친다. 원작 만화에선 강백호가 마지막 집념을 발휘해 넘어지며 공을 잡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장면에서 감동을 자아내지만, 극장판은 같은 장면에서 강백호가 그렇게 잡은 공을 자신의 라이벌인 서태웅에게 던져주는 모습이 더 눈에 들어온다. 관계로 무게추가 옮겨져서 이야기성이 극대화된다. 극장판은 결국 송태섭을 시작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패스하는 법을 깨닫는 과정이다. 하긴 인생의 궁극적 목표가 ‘전국 제패’일 리 없다.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고, 행복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좋은 관계가 중요하다. 지향점을 향해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 폭이 넓어지고 좋은 관계가 만들어지는 법이다. 만화 완결 이후 27년이 지난 지금도 슬램덩크로 인생을 배운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영화 ‘영웅’은 동명 창작 뮤지컬이 원작이다. 원작은 2009년 초연해 9번째 시즌 공연에 들어간 뮤지컬로 작품성과 수익성은 이미 검증됐다. 영화 크랭크인 때부터 뮤지컬 플롯과 음악 등 흥행 요인을 스크린으로 옮겨 올 수 있느냐가 관심사였다. 그 점만 놓고 보면 영화는 성공이다. 영화는 공연을 스크린으로 가져오기 위해 각별한 공을 들였다. 14년간 뮤지컬에서 안중근 역을 맡은 배우 정성화가 영화 주연을 맡았고, 음악 역시 대부분 현장 라이브 녹음이다. 공연적 요소를 스크린 속에 담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기어이 관객을 울린다. 의도가 모두 맞아떨어진 ‘빌드업(build up)’ 축구 같다. 그럼에도 영화가 미진하다는 평도 적잖다. 원작의 플롯과 음악을 충실히 담아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일까. 역설적으로 공연의 감동을 그대로 옮기기 위한 원작 중심의 플롯 전개가 영화로 와선 다소 느슨하게 느껴진다. 영화 ‘영웅’은 서사적 개연성과 캐릭터성을 쌓아가는 대신 배우 연기를 부각하는 연출을 택한다. 공연에서 성공한 이 전략은 영화에선 원작 플롯의 서사적 빈틈을 더 크게 드러낸다. 원작 공연에선 서사 대신 배우들의 연기를 부각하는 방식에 고개가 쉽게 끄덕여진다. 공연은 이야기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상대적으로 영화에 비해 연기에 더 의존하기 마련이다. 직접성과 일회성이라는 특성이 현장의 긴장감과 연기에 대한 집중도를 더 높여준다. 그리고 연기를 통해 극대화된 감정이 극 개연성의 일부를 이룬다. 이는 공연 예술의 큰 강점이다. 연기를 통해 형성된 감정이 무대를 압도하며, 서사가 채워지지 않더라도 관객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캐릭터의 의도까지 넘겨보게끔 한다. 이를 통해 해석의 가능성을 다양하게 열어젖힌다. 원작 공연이 각광을 받은 것도 개인이면서 민족주의자이자 천주교인이라는 안중근 의사의 면모에 대해, 충분치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민족주의라는 단일 프레임을 넘어서 조명하는 자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공연의 서사적 빈틈이 보기에 따라선 장점이 되기도 한다. 반면 영화는 상대적으로 공연보다 시간적·공간적 제약에서 자유롭고 더 많은 장면을 보여주기에, 서사 전개에 대한 집중도가 상대적으로 더 높다. 보다 충분하게 서사적 갈등과 개연성이 쌓여야 관객의 마음이 움직인다. 영화 ‘영웅’은 원작 공연과 다른 해석으로 나아가진 않고, 공연을 재현하는 쪽을 택한다. 캐릭터의 내면과 감정, 서사를 표현하기 위해 공연처럼 노래와 연기에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노래에서 극에 필요한 서사를 추출하거나 분리하지 않고 남겨둔다. 이를 통해 공연을 스크린 속에서 재현하지만 아쉬움도 동시에 남긴다. 스토리라인은 캐릭터나 플롯을 쌓아 나가기보다는 원작 뮤지컬 속 유명 원작 넘버를 부르기 위해 구성한 듯한 인상도 준다. 플롯은 그야말로 꽉 짜인 빌드업 축구처럼, 다음 노래로 넘어가기 위한 전진 패스를 한다.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나 유머 코드는 적재적소에 배치되지만 플롯을 강하게 의식하는 탓에 마치 배우들이 숙제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원작의 구성을 옮겨 온다는 전략이 통하고 있지만, 서사가 충분히 쌓이지 않아 스크린에선 캐릭터의 내면이 다소 흐릿하다. 뮤지컬이자 역사물이어서 이와 같은 한계가 더 부각되는 측면이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다루면서 영화 전반부는 민족 감정의 관점에서, 후반부에선 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조명한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의 내면은 배우의 표정과 노래를 통해서만 비추고, 장면은 행적만을 숨 가쁘게 뒤따르다 보니 엄혹한 시대에 보편적 평화 사상에 도달하기까지의 사상적 여정은 적어도 작품 속에선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천주교와 유교 윤리를 바탕으로 시대의 대안적 가능성을 찾아보려던 사상가로서 안중근 의사의 면모를 비출 듯 말 듯하다가 끝난다. 원작도 이러한 부분에서 미진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앞서 말한 이유로 영화의 아쉬움이 더 짙어진다. 물론 이를 상업영화의 문제라고 말하는 건 지나치게 가혹하긴 하다. 예술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담론보다는 기존 담론의 소비와 팬덤만이 반복되는 시대에 말이다. 아름다운 패스와 슛만을 생각하자.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영화계에선 한동안 정통 추리극이 드물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최근엔 과학수사가 워낙 발달해서 멀쩡한 기술을 내버려 두고 왜 사람이 구태여 추리를 해야 하는지 납득하기가 전보다 어려워졌다. 이젠 일반 대중도 범죄가 벌어지면 일대 폐쇄회로(CC)TV와 차량 블랙박스부터 까봐야 한다는 걸 안다. 요즘 관객들은 추리극에 차량이 나오면 ‘차량사고 전문 변호사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한문철TV에 블랙박스 영상을 제보할 순 없는 걸까?’라고 생각한다. 현대 추리극은 관련 영상을 왜 구할 수 없는 상황인지 섬세하게 설정을 깔아야 한다. 즉 추리극은 이런 제약을 어떻게 돌파하는지 보는 게 재미다. 영화 ‘자백’은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스페인 영화 ‘인비저블 게스트’의 리메이크작으로 밀실 살인을 다룬다. 도입부에서 살인이 벌어지고 이후 줄곧 사건의 진실을 파고든다는 점에서 추리극 문법과 구성을 따른다. 영화에선 범행과 관련된 차량을 용의자가 반드시 폐기해야 할 이유가 있다는 설정을 넣었고, 밀실 살인이 벌어지는 호텔 객실 주변 CCTV 정보가 특별히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 영화 막바지쯤에 드러난다. 이제 추리극은 다음 난관을 넘어야 한다. 물적 증거가 없는 상황에선 쫓는 자가 진술의 허점을 파고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현대 추리극으로 올수록 캐릭터 설정이 중요하다. 사건을 좇는 자에겐 의심하며 모순을 파고들 수 있는 권위와 재능이 부여돼야 하고, 대답하는 자에겐 여기에 협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설득력 있게 제시돼야 한다. 묻는 자와 대답하는 자 간 욕망의 균형과 대립이 무너지고, 구태여 대답할 의무가 없거나 없다고 생각한다면? 긴장감은 뚝 떨어진다. 그런 걸 도어스테핑이라고 부른다. 자백은 밀실 살인 사건의 용의자 유민호(소지섭 분)와 승률 100% 변호사 양신애(김윤진 분)가 회상을 통해 사건의 진실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다룬다. 반전을 통해 묻는 자와 용의자의 욕망과 처지가 점차 명확해진다.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고 협조하는 관계 구성이 절묘하다. 영화가 두 번째 난관도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다. 또 하나의 난관. 추리극에서의 문답 과정은 겉으로 보기엔 심심하고 지루해서 영상화가 쉽지 않다. ‘범죄도시’나 ‘다크 나이트’ 취조 장면에서 결국 피의자를 쥐어박는데, 이는 “식사는 하셨나요?”로 시작하는 문답식 취조로는 영상이 너무 단조로워지는 탓도 있다. 거의 대부분의 영화에서 취조실은 현실과 달리 사람들이 화내고 격해지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대체로 연출자들은 문답 구성만으론 영화를 채울 만한 긴장이 충분히 조성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퍼즐 기반의 추리극 연출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도 된다. 자백에선 무패의 변호사가 살인 용의자 의뢰인을 만나 범행 과정을 함께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버전의 회상을 끌어온다. 이를 통해 단조로울 수 있는 문답 구조의 한계도 넘어선다. 여기까진 모두 원작에 있는 내용이다. 자백은 여기에 극을 끌고 가는 메인 배우들의 탁월한 드라마 연기를 통해 단순한 문답 속에서도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주요 배역들은 선악이 공존하는 캐릭터인데, 이들의 욕망이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건 원작보다 자백 쪽이다. 원작과는 달리 반전이 드러나는 시점이 훨씬 앞당겨진 점은 호불호가 갈릴 만하다. 원작의 반전 구성만으론 충분치 않다고 여겼는지, 영화는 막바지에 원작엔 없는 추가적인 스릴러 장치를 배치한다. 왜 그랬는지 이해는 간다. 한문철TV에 익숙한 국내 관객들에게 누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무슨 혐의가 적용될지 증거가 나왔는지 다 알려줘야 하니까. 그래서 끝까지 보고 나면 한문철TV 레전드 사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운을 남기는 것보다 명확한 결론을 내는 걸 중시하는 유튜브 시대 논리에 영화도 맞춰간달까. 극 막바지 서스펜스를 통해 갈등과 선악이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반면 추리극 특유의 우아한 여운이 너무 짧게 소비되고 증발한다. 영화는 이대로도 볼만하지만 원작처럼 두뇌 싸움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가면 안 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럴 수 없는 한국만의 시장적 특성이 있는 걸까.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요즘 영화나 드라마에서 배우가 밋밋한 흰 벽지 앞에서 연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때깔’이 안 나오기 때문이다. ‘대부’로 대표되는 할리우드 마피아 영화가 옛날 한국 조폭 영화에 비해 분위기가 더 중후하게 느껴지는 건 보스 방에 붙은 벽지 품질 차이가 한몫한다. 벽지는 미감 때문에도 그렇지만, 감독의 미장센(화면 속 등장인물이나 사물의 주도면밀한 배치를 통한 연출) 속에서 스토리텔링과도 결합하기에 중요하다. 즉, 어떤 영화는 벽지로도 메시지를 던진다. 한국 영화를 볼 때 벽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2003년 ‘올드보이’부터인데, 이 영화 주인공이 15년간 갇혀 사는 방, 붉은 톤에 기하학적 무늬가 천장까지 이어지는 벽지는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다. 촘촘하게 반복되는 벽지 패턴은 주인공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누군가가 설계한 계획에 따라 움직이게 될 불가피한 운명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래로 20년간 적어도 대작으로 불리는 영화·드라마는 벽지를 포함한 세트 요소에 감정과 스토리를 담는 심오한 디테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에서 벽지가 중요해진 시점과 오늘날의 한국 영화 전성기가 맞물리는 만큼, 한국 영화·드라마가 인기 정점에 이른 건 상당 부분 K벽지 공이라고 봐도 된다. 최근 영화를 보고 난 뒤 주변에 “벽지 봤어?”라고 말하면 십중팔구 그 영화 좋다는 뜻이어서, 미술 요소가 부각된 요즘 시기를 K벽지 시대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다. K벽지 시대의 핵심 기수는 ‘올드보이’부터 박찬욱 감독과 합을 맞춘 류성희 미술감독이다. 영화계의 대표적인 벽지 장인으로, 한국 영화를 즐길 수 있는 또 하나의 미학적 관점을 제시했다. 류 감독은 2016년 ‘아가씨’로 칸영화제 벌컨상(최고기술상)을 받았을 때 K벽지 미학이 정점을 찍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영화에서 응접실과 침실의 영국풍 벽지 속 패턴 간격은 넉넉해 보이지만 조밀하게 배치된 소품들과 맞물리면서 잘 정돈돼 있는 와중에도 묘하게 신경질적인 기운을 풍긴다. 그렇게 주인공 이즈미 히데코(김민희 분)의 내면 풍경이 공간에서부터 엄습한다. 영화 팬들은 이제 류 감독의 최고 벽지 미학으로 아가씨보다 최근작인 ‘헤어질 결심’을 꼽는 분위기다. 주인공 송서래(탕웨이 분) 집의 푸른 색감 벽지는 산과 바다의 질감을 표현한 회화에 가까워 보인다. 벽지의 이미지는 산과 바다의 경계를 지워 나가는 영화의 내용과도 겹친다. 벽지가 감정을 전달하는 수준을 넘어 영화를 요약하고 압축한다. 류 감독 이래로 미술감독이 어떻게 영화를 해석하느냐, 영화와 대중적인 취향 사이에서 어떤 접점을 만들어 내느냐가 영화의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됐다. 또 다른 벽지 장인으로 미국 아카데미 미술상 후보로 노미네이트 된 ‘기생충’ 세트를 만든 이하준 미술감독도 있다. 연출 중에선 최동훈 감독도 알아주는 미려한 벽지 미장센의 달인인데,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올해 중반 개봉한 ‘외계+인’ 1부는 최 감독 연출에 미술감독으로 류 감독과 이 감독이 합류했다는 이유로 관심을 가졌던 이가 많다. 평가가 엇갈리는 가운데서도 벽지 자부심은 너끈히 지켜냈다. 그러고 보면 올해 영화계는 K벽지 대전이었던 셈. ‘버닝’으로 2018년 칸영화제 벌컨상을 받은 신점희 미술감독도 영화계에서 벽지 장인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영화뿐만 아니라 대작 드라마도 벽의 색감이 오래 뇌리에 남을수록 좋은 작품이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벽이 인상적인 작품으로 최근 에미상 6관왕 수상 영예를 안은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속 거대한 게임장도 꼽을 수 있다. 세상과 연결된 것처럼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단절돼 있는 거대한 벽체는 출구 없는 삶과 잔혹한 게임의 룰을 상기시킨다. 여기에 게임장 속 벽과 계단을 채운 분홍과 노랑, 민트 등의 밝은 색 조합을 통해 게임의 괴기성과 아이러니를 드러냈다. 이 작품의 세트장을 디자인한 채경선 미술감독도 미국 에미상 프로덕션 디자인상을 수상하면서 K벽지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최근 인기몰이 중인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은 배우들의 연기와 세트장이 오래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병한 미술감독이 전북 전주에 세트로 구축한 유럽풍 호화 저택과 차이나타운이 이야기를 끌고 간다. K벽지 장인들의 세트에선 기존 한국 영화·드라마에 없던 풍경을 만들어 내야 하는 고민이 엿보이는데, 결과적으로 다른 고전적인 이미지들을 끌고 와서 뒤섞는 방식을 통해 새로운 비주얼을 만들어 낸다. 기댈 수 있는 전통이 없는 가운데 탁월한 레퍼런스들로부터 영감을 얻어 독창성까지 나아간다는 점은 결과적으로 다른 K컬처의 성공 공식과도 닮아 있다. 가사로는 “그냥 하염없이 눈물이 나”라면서도 웃으며 칼군무를 추는 혼종 K팝을 흥얼거리다가 때론 어깨춤까지 추게 되는 것처럼, 무국적성의 비주얼은 K콘텐츠의 핵심 이미지로 세계인의 뇌리에 남아 맴돌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K콘텐츠가 또 늘었다는 의미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봉준호 감독이 붙였다는 ‘비누 냄새나는 변태’라는 별명 이상으로 배우 박해일을 잘 설명하는 말이 없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상, 부드러우면서도 동시에 거칠게 느껴지는 상반된 매력과 이미지를 절묘하게 잡아챈 별명이다. 그가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만을 내비치며 살인 용의자를 연기(‘살인의 추억’)할 때 우윳빛 미남의 한없이 여린 이미지와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의 무시무시한 기운이 위화감 없이 겹쳐졌다. 그렇게 이후 여러 영화에서 변주될 박해일 캐릭터, 비누 냄새나는 변태가 탄생한다. 별명에서 느껴지는 대비처럼, 그는 선악의 경계에 선 인물 또는 섬세한 내면 속에 갈등하고 의심하는 역을 자주 맡았다. 고집불통이든 변태든 곧 파괴될 인물이든, 이와 상반된 품위 있는 매력, 즉 비누 냄새를 풍기는 것으로 배역에 깊이를 만들어내는 유형이다. 예컨대 백수 날건달이지만 가족에게 누구보다 진심인 삼촌(‘괴물’), 품위를 지키고자 하지만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는 임금(‘남한산성’)처럼. 연기도 연기지만 그의 섬세한 외모로 인해 선악을 넘나드는 복잡한 캐릭터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그리고 이런 그의 캐릭터가 정점에 도달한 영화가 바로 ‘헤어질 결심’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살인사건 용의자 송서래(탕웨이 분)에게 의문과 관심을 동시에 품는 형사 장해준 역을 맡았다. 장해준은 적어도 겉으로는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형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도 자부심이 매우 큰 인물이다. 그런 그가 남편을 죽인 혐의를 쓴 살인 용의자에게 마음이 끌린다는 모순이 영화 초반부를 끌어간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도 장해준은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품위와 자부심을 지키고자 한다. 맞춤형 양복을 입고, 립밤을 잊지 않고 챙기면서. 범인을 잡는 숭고한 일에 헌신하면서. 송서래는 그런 장해준을 보고 ‘현대인치곤 품위 있는 남자’라고 부르고, 장해준 역시 몸이 꼿꼿한 송서래의 기품에 끌린다. 속절없는 사랑과 별개로 자신이 정한 원칙을 지켜나가는 것으로 품위는 무너지지 않고, 장해준은 모순 속에서도 마음의 평형을 맞춘다. 품위 있는 엉큼함. 역시나 박해일 배우가 이런 역할로는 독보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쯤, 영화는 그 품위의 근거인 자부심을 ‘붕괴’시키면서 내면과 모순의 구조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 박찬욱 감독 또한 일명 ‘배운 변태’라는 점을 상기하면, 영화는 중반부부터 근본적인 사랑의 의미를 파고드는, 변태들의 해석 경연처럼 느껴진다. 영화 중반부 자부심이 무너진 장해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내와 석류 껍질을 벗기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 장면부터 그는 모호하면서도 투명하다. 투명하기까지 한 변태라니. 주인공은 자신의 내면이 무너졌다고 느낄 때조차도 침묵으로 품위를 지키고, 그래서 영화 내내 비누 냄새를 풍긴다. 여기에 공범 둘만이 진실을 알고 있는 미결사건 같은 사랑은 또한 얼마간은 변태적이다. 영화의 나머지는 투명하면서도 동시에 모호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흘러간다. 영화 각본을 감독과 공동 집필한 정서경 작가는 지난달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사랑이라는 말 없이 가장 근본적이고도 원초적인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했는데, 과연 주인공들은 사랑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도 서로를 탐색하는 경지에 이른다. 이를 이끌어가는 건 모호하면서도 투명한 내면을 가진 주인공이다. 이는 기존 배우 이미지에서도 한 단계 더 나아간 캐릭터다. 이로써 한국 영화계의 최고 명감독들이 비누 냄새 변태 유니버스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이 유니버스에 포함될 또 다른 작품이 최근 흥행몰이 중인 ‘한산: 용의 출현’이다. 그가 아무리 흔들리는 내면을 보여주고, 선악이 공존하는 매력으로 인해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가진 배우여도, 한없이 단호하기만 한 조선시대 명장과는 거리가 있다. 애국주의의 깃발을 들고 호소하기엔 고뇌하는 인상이 너무 짙다. 박해일의 얼굴에서 이순신을 찾아낼 수가 있을까.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가 판옥선에 올라서자 바다에서도 비누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이번 작품은 전작 ‘명량’의 과도한 애국주의 신파에 대한 비판을 의식하는 기색이 역력한데, 이를 한마디로 웅변(“나라와 나라의 싸움이 아니라 의와 불의의 싸움”)하는 이순신은 과연 박해일의 섬세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만 같다. 한산과 헤어질 결심의 대사를 겹쳐서 만드는 밈이 한때 유행이었다. 박해일로 겹쳐진 얼굴이 주는 뉘앙스와 이미지가 비슷해서다. 안개와 바다의 느낌도 묘하게 닮아 있다. 그의 표정은 두 영화 모두에서 헤어질 결심에 나오는 정훈희의 노래 ‘안개’ 가사(안개 속에 외로이 하염없이) 같기도 하다. 사람들이 그 표정을 보려고 영화관에 간다. 관객들이 확신에 찬 표정이 아니라 내면에서 고뇌하는 표정을 더 마주하고 싶어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지난해까지 주변 사람들로부터 숱하게 조언을 들었다. 가상화폐 코인 투자와 부동산 투자 막차에 얼른 올라타야 한다고 말이다. 올해부턴 분위기가 또 다르다.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술자리에서 막차를 타야 한다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난 막차 탔지∼.” 값이 오르기 전에 집을 샀다는 친구는 안도했다. 그 말인즉, 누군가는 어디에선가 낙심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젠 막차가 끊긴 걸까? 정말 그렇다면 막차에 간신히 탄 사람조차도 마냥 안도할 순 없다. 막차란 항상 순차적으로 끊기는 법. 취업이든 자가(自家) 마련이든 삶의 지금 목표에 간신히 도달했다고 한들 도착역에서 인생의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는 환승 열차나 버스가 남아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지금 어디에서인가 막차가 끊기고 있다면, 조금 더 갔든 이미 멈췄든 우린 모두 결국 막차가 사라진 세상에 하차하게 될 것이다. 그땐 우린 무엇을 위해 살아가게 될까. 지금까진 다음 차를 타러 가야 한다는 인식과 규범을 따라서 여기까지 왔는데 말이다. 이 질문을 먼저 마주했던 곳이 있다. 버블경제가 끝난 뒤에 끝을 알 수 없는 침체를 통과하고 있던 1990년대 후반 세기말 일본이다. 1997년 일본에서 개봉한 스릴러 영화 ‘큐어’가 비추는 공간이기도 하다. 일본 대중문화 전면 개방 이전에 나온 영화는 국내에선 이달 초 처음으로 정식 개봉했다. 줄거리는 이렇다. 일본 도쿄에서 살인 사건이 연달아 벌어진다. 우연의 일치로 보기엔 잔혹한 수법이 동일하고 범인들도 하나같이 자신이 저지른 범행이라고 자백하며 살해 상황도 또렷하게 기억하며 순순히 진술한다. 그러나 그들은 살인을 저지른 이유에 대해선 횡설수설하며, 추정되는 동기 또한 없다. 사건 담당 다카베 겐이치 형사(야쿠쇼 고지)는 살인을 저지른 이들이 공통적으로 한 사람을 만난 뒤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바로 기억상실에 빠진 최면술사 마미야 구니오(하기와라 마사토)다. 그는 자신이 만난 사람들에게 “당신은 누구지?”라고 물으면서 평온해 보이는 일상 뒤의 무의식을 뒤흔드는 인물이다. 이제 영화를 끌고 가는 것은 다카베 형사와 마미야의 심리 대결이다. 마미야는 다카베 형사의 내면에도 파문을 일으키려 한다. 당신은 누구냐고 끊임없이 되묻는 방식으로. 영화의 핵심은 마미야의 질문에 동요하다가 살인까지 저지르는 사람들이 극히 평범하다는 점이다. 그들은 모두 착실한 시스템의 수호자들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사회적 규범을 따르거나(회사원) 가르치며(교사), 지키지 않으면 처벌하며(경찰), 사람을 살리라는 사명(의사)에 충실해왔다. 마미야가 그들을 만나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지만 그 뒤엔 이런 맥락이 있다. 사회적 규범을 지키는 착한 사람이라는 외피를 뒤집어쓰고 살아가는 것은 시스템이 부여한 역할극에 불과하지 않으냐고. 진짜 당신은 어디에 있느냐고. 온갖 욕망을 부추기던 1980년대 버블경제 시기를 거쳐 그저 먹고살 만한 삶 외엔 별다른 선택지가 없고, 사회의 시스템이 더 이상 욕망을 단계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경로를 개인에게 제공할 수 없게 됐을 때 일본은 세기말을 맞았다. 이젠 ‘일탈하지 않는 착한 사람 되기’만이 유일 가치관이 된다. 세상이 우리에게 단계적인 성취 단계를 펼쳐놓든, 일탈 금지만을 유일 가치로 제시하든 모두 체제 안정성으로 욕망을 유도한다는 점에선 본질적으로 같다. 그러나 개개인의 입장에선 막차까지 사라진 세상 쪽에서 받는 질문이 더 무겁다. 삶의 경로를 따라 단계를 하나씩 성취해 나간다는 마취 효과마저 사라졌을 때, 선택지는 체제 안에 계속 남을지 이탈할지로 단순화되니까. 시스템은 정당한가? 그리고 남아 있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 그건 우리의 일상 속에 이미 잠복해 있는 질문이다. 불쑥 이런 질문이 삶의 어느 순간에 돌출될 때,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체제를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이란 죽거나, 미치거나,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그리는 잔혹한 세계관이다. 영화엔 시종 비관밖에 없고, 그건 냉소와 더불어서 막차가 떠나버린 세계의 중요한 표정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영화가 일깨워주는 건 시스템이란 고작해야 우리에게 복무할 것만을 요구하는 비합리성의 총체라는 점,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삶의 목표를 체제의 명령에 의존하지 않고 그 바깥에서 스스로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시스템의 명령에 착실히 복무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각자 자신의 내면에서 길어 올린 진짜 신념을 들여다보고 체제가 아닌 진짜 자기 삶의 원칙을 정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영화 막바지에 남는다. 그리고 영화는 25년 걸려 그 메시지가 필요한 곳에 정확히 도착한 것처럼 보인다. 막차가 떠나버린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목적지부터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원작이 있다는 건 도끼눈을 뜬 냉정한 비판자들을 깔고 간다는 의미다. 경전을 든 원리주의자들은 멍청한 감독이 원작을 어떻게 망쳐 버렸는지 비난을 퍼부을 준비를 하고 상영관에 들어간다. 그중에서도 특히 팔짱을 낀 채로 단호한 쪽이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 소설 팬들이다. 과거 또는 주변과 단절된 소설 속 주인공에게 묘한 연민을 느끼면서 자신과 동일시하는 팬이 많은데, 상당수는 자기 연민에 빠져 있다 보니 겉으로 보기엔 볼썽사납지만 스스로는 매우 진지하고 진심인 유형이다. 필자 역시 그중 하나다. 하루키 소설 중에서 ‘드라이브 마이 카’를 영화화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자연스럽게 “어디 한번 보자”면서 팔짱을 끼고 완고해졌다. 하루키 소설 각색 영화들은 이 고약하고 완고한 원작 팬들을 상대하느라 지쳐 버린 역사다. ‘토니 타키타니’는 하루키 소설 특유의 나른한 분위기를 살리느라고 정적인 연출로 일관하다가, ‘상실의 시대’는 소설 속 장면을 영상화하는 데 모든 역량을 기울이다가 스토리를 비롯한 나머지 영역에서 힘이 빠진다. 둘 다 동명의 소설 원작을 너무 의식한 탓이다. 이야기를 절정까지 끌고 가지 않고 어느 지점에서 돌연한 이미지 속으로 독자들을 풍덩 빠뜨리는 하루키 소설 속 기교를 보여주려다가, 정작 영화가 이미지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린다는 인상을 풍기고 만다. 원작에 의지하기보다는 새로운 이미지로 무장하는 영화도 있다. 하루키 초기 단편소설(‘헛간을 태우다’)을 각색한 ‘버닝’이 그렇다. 원작 소설을 상대적으로 덜 의식했다는 점에서는 앞선 작품과 달리 성공했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 시각적 이미지가 더 뇌리에 강하게 남는다는 점에서 하루키의 원작과도 돌고 돌아 같은 선상에서 대결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의 모호함과 허무를 드러내는 시각적 이미지를 중요시하되, 하루키 소설 속에서 묘사된 바로 그 장면이 아니라 새로운 스타일로 제시하는 영화도 이처럼 가능한 범주 안에 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어떤가? 이 영화는 원작의 단순한 영상적 반복에는 일단 관심이 없어 보인다. 주인공인 연극배우 가후쿠가 전속 드라이버를 두게 된다는 설정은 동일하다. 아내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되지만 추궁하지 못하는 가후쿠는 졸지에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지난날을 곰곰이 돌이키고, 그러다가 아내의 불륜 상대였던 남자 배우를 만난다는 점도 소설과 같다. 그러나 상대의 약점을 쥐기 위해 주인공이 먼저 접근했던 소설과는 달리 후배 배우 다카츠키가 먼저 주인공을 술자리에 초대하는 것으로 영화에선 뒤바뀌었다. 주인공의 심리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선 매우 중요한 소설 속 설정임에도 그렇다. 이 영화는 원작의 설정과 구조와 장면을 거스를 생각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동시에 초연하다. 영화만의 차별점이 있다면, 공간에 대해선 각별한 관심을 던진다는 점이다. 특히 영화의 주요 공간 중 하나가 연극 무대라는 점이 중요하다. 소설에선 연극배우라는 주인공의 직업이 제시되지만 연극 무대가 특별히 중요하게 다뤄지진 않는 것과 대조적이다. 영화에선 무대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연출에만 관여하던 주인공이 배우로서 무대 공간으로 옮겨가는 장면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적인 장면이 된다. 가후쿠는 아내의 불륜 상대 다카츠키가 해준 말(‘진실로 타인이 보고 싶으면 자기 자신을 깊이 똑바로 지켜볼 수밖에 없어요’)처럼 무대에 서서 자신의 삶을 스쳐간 일들의 의미를 대면하게 된다. 무대에 선 가후쿠는 영화 속에서 카세트테이프로 녹음된 아내의 목소리와 ‘바냐 아저씨’ 연극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형태로 두 번 반복된 대사(‘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 영화 속 무대 위의 모습은 원작에는 없다. 소설 속 주인공에 대한 설명(어떤 경우에도 아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 사고이자 삶의 방식이었다)은 영화에선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소설과 영화 속 설정은 어느 지점에서 만난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까. 아내의 불륜 상대에게 격정을 터뜨리며 복수를 시도하는 것이 현실적, 그와 만나 술잔을 기울이면서 아내와 나와 상대의 마음을 교차하며 헤아려 보는 장면이 소설적이라면, 무대 위로 내던져진 주인공의 표정을 지켜보는 것이 영화의 방식이라고 말이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원작의 모호성을 걷어낸 뒤 확실한 메시지를 세우고, 세계관 속에 인물들을 빠뜨릴 뿐 구체적인 설정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원작과는 멀어진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점 때문에 원작에 대한 해석을 풍부하게 한다. 아무리 우리가 과거와 또는 타인과 단절된 듯한 느낌을 받더라도 실은 다른 이들과 같은 무대에 내던져져 있으며, 우리는 이 점을 직시해야만 한다는 것. 그건 하루키의 세계에서 한발 더 나아간 교훈이다. 그리고 그 무대는 언제나 여기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세계’에 있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배트맨은 괴상한 복장 취향을 지닌 재벌이 거친 세상 풍파에 뒤틀린 못난이(빌런)들을 쥐어 패는 이야기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최근 개봉한 새 시리즈 신작 ‘더 배트맨’도 마찬가지다. 이번에도 배트맨은 아무리 악인이라고 한들 가죽 장갑 끼고 직접 ‘빠따’를 쳐선 안 된다는 시민사회 합의를 무너뜨리는 존재다. 게다가 존재감을 온몸으로 뿜어내는 극한의 ‘관종’이라 서로 통하는 게 있다고 믿는 악당들을 자극한다. 마스크를 쓴 악당과 배트맨은 탄생 배경이 닮았다는 시리즈의 오랜 전통 역시 이어진다. 이번 신작의 메인 악당 리들러는 배트맨과 마찬가지로 행위 동기를 따지고 들어가면 뿌리 깊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있다. 그리고 둘의 트라우마는 복수라는 결론으로 귀착된다. 둘의 차이점이라면 배트맨은 부유층이라는 태생과 맞물려서 시스템을 옹호하는 포지션이라는 점, 공권력을 보완할 뿐 혁명을 꿈꾸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스템에 도전하고, 때론 정치적인 비전까지 내비치는 쪽은 이 시리즈에서 악인이다. 배트맨은 승인되지만, 악인은 배제된다. 이를 거꾸로 말할 수도 있다. 시스템이 승인하는 자 영웅, 배제되는 자 악인이다. 이 강력한 보수주의 서사는 배트맨 시리즈 내내 지속된 테마다. 이는 다른 히어로 영화들과 질적인 차이를 만들어내는 지점이다. 악인들은 지상에서 저마다의 사연과 오류 속에서 뒤틀려 있으며 세상에 메시지를 던지는 방편으로 범죄를 택한다. 배트맨은 가까스로 범행을 막아서지만, 공권력의 빈틈 속에서만 자신의 처지를 강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악인이 양산되는 구조가 그곳에 스산하게 남겨진다. 그래도 배트맨이 해결해준다면 괜찮은 걸까. 보수주의자 배트맨이 규정하는 정의는 어떤 방식으로 검증되는가? 이러한 구조는 본질적으로 옳은가? 이와 같은 시리즈의 필연적 모순과 의문을 어떻게 응시하느냐에 따라서 배트맨은 명작이 되기도, 또는 망작이 되기도 한다. 명작으로 꼽히는 팀 버턴 감독의 ‘배트맨’(1989년)에선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 수상 배우인 잭 니컬슨이 악당 조커로 분했는데 장르 사상 처음으로 선역과 악역의 스포트라이트 비중을 뒤흔들면서 질문을 돌출시킨다. 또 대안 없는 잔혹 도시의 풍경을 작곡가 대니 앨프먼의 비장한 음악과 어둠의 미장센을 통해 그려낸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다크 나이트’(2008년)는 선한 의도라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은 아무래도 좋으냐는 질문을 정면으로 던지고 감당하는 영화다. 좋은 질문이 배트맨 시리즈의 본질임을 아는 작품들이다. 이 지점에서 ‘더 배트맨’은 명작이 되려는 야심을 대놓고 드러낸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처럼 질문하는 시간으로 영화를 꽉꽉 채우고 있다. 그것도 거의 3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 동안! 이번 영화가 질문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 대표 악당 또한 수수께끼를 내는 인물 리들러라는 것도 이해가 간다. 리들러의 퀴즈는 시시하지만, 배트맨의 ‘내로남불’을 질타하는 존재라서 흥미롭다. 너무도 뚜렷한 정치적 어젠다와 신념을 가진 악역 리들러는 사적 제재로 정의를 실현하려 하는데, 마땅히 처벌받았어야 할 부패한 공직자 처단이 뭐가 문제냐고 묻는 존재다. 이는 공권력의 부재 속에서 배트맨이 정의를 수행해온 방식과 정확히 동전의 양면이다. 심지어 리들러는 배트맨의 ‘본캐’인 브루스 웨인 부모의 치부를 폭로하는 방식으로 배트맨이 믿어온 보수적 도덕 기반 또한 극히 취약하다는 점을 일깨운다. 부모의 죄악을 감당하라고 웨인을 몰아세우면서 그가 가진 정의감의 위선적 측면을 폭로한다. 그건 보수주의자 배트맨에게 그동안 묻지 못한 질문이다.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영화는 끊임없이 가죽 두건에 가려진 배트맨의 표정을 확대한다. 그가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배트맨이 악당과 다르게 가지고 있는 비범한 차이가 드러난다. 바로 회의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리들러도 질문하지만, 명확한 자기 확신 속에서 정답을 쥐고 있다고 믿는 반면에 배트맨은 해답을 쥐지 못해 불안해한다. 배트맨은 불확실성 속에서 정답을 단계적으로 찾아가고 그 과정을 신뢰하는 편을 택한다. 영화가 절차적 민주주의 현장인 선거 시즌을 배경으로 다룬다는 점이 여기서 의미심장하다. 배트맨은 자신의 정체성과 태생적 한계까지 회의하고, 때론 위선처럼 보일지언정 부여받은 정체성에 국한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로써 복수라는 사적 감정을 어느 시점에는 홀연히 뛰어넘는다. 명작 다크 나이트에서 고담시 검찰 수장 하비 덴트의 말 “영웅으로 죽거나, 오래 살아서 악당이 된 자신을 보거나” 또한 이 지점에서 반박된다. 회의할 수 있는 능력이 영웅이냐 악당이냐를 가른다. 영웅 덴트가 더 이상 고뇌하지 않고 동전 던지기 결과에 따라 행동하기로 마음먹자 악당(투 페이스)이 된다. 영웅과 악당 차이는 한 끗이다. 더 이상 회의하지 않는 자가 악인이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생산량이 들쭉날쭉한 풍력·태양광 에너지를 바닷속 대형 튜브에 모아뒀다가 필요할 때 댐처럼 전기를 만들어 꺼내 쓴다. 작물 재배시설을 실내에 아파트처럼 쌓아올려 탄소배출 문제를 해결한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기후변화 문제를 기술 혁신으로 해결하려는 기후기술 기업이 주목받고 있다. 첨단기술의 경연장인 세계 최대 전자·정보기술(IT) 전시회 ‘CES 2022’에서도 기후기술은 단연 화두였다. 디지털 기술의 본산인 미국 실리콘밸리에선 ‘기술로 기후 문제를 해결한다’는 야심 찬 프로젝트에 돈이 몰리고 있다. 기후기술 기업들은 생산 활동으로 만들어지는 탄소배출 문제 해결을 경영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기존 기업의 친환경 경영과 다른 평가와 관심을 받고 있다.○ 에너지를 수압으로 저장하고 설치 쉬운 지붕용 태양광 발전 개발네덜란드 기업 오션그레이저는 7일(이하 현지 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막을 내린 ‘CES 2022’에서 단 21개 기술에만 주어진 최고 혁신상을 받았다. 지속가능성 및 친환경디자인·스마트에너지 분야에선 유일한 수상 기업이다. 풍력·태양광은 친환경 대안 에너지로 꼽히지만 기후 등의 상황에 따라 발전량이 불안정하다. 대용량 에너지저장장치(ESS)에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지만 ESS가 발생시키는 폐기물, 오염 문제는 해결이 어렵다. 오션그레이저는 대용량 ESS 없이도 저렴하고 쉽게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는 혁신적인 기술을 찾아냈다. 해상 풍력·태양광 발전시설의 해저에 ‘오션배터리’로 불리는 장치를 설치했다. 에너지가 많이 생산될 때는 전기로 물을 끌어올려 튜브에 고압으로 저장한다. 바람이 불지 않거나 태양빛이 없을 때 물을 다시 아래로 내려보낸다. 수력발전처럼 위치에너지를 이용해 필요할 때마다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다. 5일 CES 현장에서 만난 막스 더스마 오션그레이저 최고운영책임자(COO)는 “기후 위기는 인류 보편의 문제이기 때문에 광범위한 지역에서 쉽게 적용 가능한 솔루션이 필요하다”며 “신재생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저장할 수 있는 기술에 투자자들의 관심이 높다”고 말했다. 태양광 발전을 대중화할 수 있는 기업도 주목받았다. ‘모든 지붕에서 에너지(Energy from every roof)’라는 목표를 내건 GAF에너지는 옥상 태양광 발전의 저변을 획기적으로 넓힐 수 있는 기술을 내놓았다. 세계 최초로 못을 박을 수 있는 지붕용 태양광 패널 ‘팀버라인 솔라’가 무기다. 설치를 위해 전문 인력과 장비가 필요했던 기존 시설과 달리 누구나 적은 비용으로 지붕에 손쉽게 설치할 수 있다. ○ 물 사용 95% 줄이는 농업 혁신적인 기후기술은 농업 같은 전통 산업에도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 기업 ‘그로브’의 ‘올림푸스 로보틱 타워’는 실내 수직농장의 생육판에서 동물사료 작물을 길러낸다. 센서를 통해 온도, 습도, 물 흐름, 생장률 등을 측정해 자동으로 조절한다. 훨씬 좁은 면적에서 기존 대비 5%의 물만 사용하면서도 같은 양의 사료를 생산할 수 있다. 스티브 린즐리 그로브 최고경영자(CEO)는 “동물을 먹이기 위해 너무 많은 땅과 물을 사용하고 있다”며 “농업기술 혁신을 통해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식량·사료 생산의 지속가능성도 확보할 수 있다”고 밝혔다. 프랑스 스타트업 ‘아그로브’는 도시주민을 위한 수직정원 ‘라 파르셀’을 공개했다. 이 회사의 프로젝트·사회적책임 담당인 셀린 피코트 씨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기술 업계가 환경제어식 농업에 주목하고 있다”며 “탄소배출을 줄이고 물 낭비를 막는 동시에 가축 사육방식은 간소화하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오충현 동국대 바이오환경과학과 교수는 “탄소저감의 필요성이 커지고 새로운 첨단 기술이 빠르게 등장하고 있어 기술 혁신으로 기후 문제를 풀어내려는 시도는 자연스레 더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기후기술’ 벤처에 유입 투자금, 8년새 1조 →19조원 기후기술 기업 우르살레오 CEO, “에너지 소비 30%가 빌딩… 줄여야” “넷제로(Net Zero·탄소중립)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무엇을 기여할 수 있을지 생각하면서 창업에 나섰다.” 실리콘밸리의 기후기술 기업인 우르살레오의 존 버튼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12월 21일 동아일보와의 화상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우르살레오는 ‘디지털 트윈’(현실세계와 똑같은 가상세계) 기술로 창업한 스타트업이다. 현실세계와 똑같은 빌딩, 대학, 공장 등을 가상공간에 구축한다. 이를 통해 현실공간에서 에너지가 어떻게 소비, 활용되는지 측정한다. 디지털 기반으로 실시간 에너지 소비량을 시각화해 효율적인 에너지 관리를 돕는 것이다. 버튼 CEO는 소형 반도체 등 하드웨어 업계에서 30년 동안 일하다 기후기술의 미래 가능성을 보고 2017년 창업에 나섰다고 했다. 이 회사에 관심을 가진 투자자들로부터 최근 200만 달러의 투자금을 유치했다. 버튼 CEO는 “전 세계 에너지 소비의 30% 이상이 빌딩 부문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건물의 에너지 사용을 줄이는 것은 필수적이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넷제로’ 실현에 나서는 중”이라며 “기후변화는 우리 삶을 크게 변화시키고 있고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미래가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혁신의 상징인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기후기술 스타트업이 주목받고 있다. 기후예측, 탄소배출 관리, 정밀농업 등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을 통해 기후변화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며 벤처캐피털(VC) 자금을 끌어 모으고 있다. 벤처캐피털 관련 전문기관 피치북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기후기술과 관련된 벤처기업에 유입된 투자금은 2012년 10억 달러(약 1조2000억 원)에서 2020년 161억 달러(약 19조4000억 원)로 증가했다. 지난해엔 상반기(1∼6월) 투자액만 142억 달러(약 17조10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실리콘밸리에서는 다양한 기후기술 분야에서 수천억 달러의 투자를 유치해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 원 이상의 비상장기업)’ 수준의 평가를 받는 스타트업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내추럴캐피털거래소(NCX)는 ‘산림탄소 거래시장’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해 마이크로소프트(MS) 등으로부터 2200만 달러(약 264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기업이 나무를 심거나 보호하는 사업에 투자해 자신의 탄소배출량을 상쇄하는 시스템이다. NCX는 산림의 탄소흡수 능력을 측정하기 위해 인공지능(AI) 프로그램과 위성 이미지를 활용한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MS는 NCX를 통해 340만 달러 규모의 상쇄권을 구입했다. 스타트업 케레스 이미징은 항공사진과 AI 기반의 이미지 처리 기술을 적용해 농작물의 영양과 수분 상태를 살펴볼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다. 농작물을 키우는 데 투입되는 자원을 최적화해 탄소배출을 줄이는 정밀농업 기술이다. 지난해 말에만 2300만 달러(약 276억 원)의 신규 투자를 유치했다. 켈리 벨처 실리콘밸리뱅크 에너지·자원 혁신 담당은 “신재생에너지와 에너지 저장 기술이 성숙기에 도달해 규모의 경제를 달성한 상황”이라며 “이런 기술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흐름도 커지고 있기 때문에 기후기술의 지속적인 성장과 혁신을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라스베이거스=곽도영 기자 now@donga.com라스베이거스=홍석호 기자 will@donga.com김도형 기자 dodo@donga.com임현석 기자 lhs@donga.com}

지난해 12월 21일 오후 2시(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서쪽으로 36km 떨어진 플랭에 있는 르노의 자동차 공장. 크리스마스를 앞둔 연말 휴가 기간이었지만 대형 트럭들이 바쁘게 출입구를 오가며 공장은 활기를 띠고 있었다. 237만 m²(약 71만6900평) 부지의 이 공장은 르노그룹의 프랑스 본토 공장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1952년부터 현재까지 생산한 자동차만 1800만 대에 이른다. 전형적인 자동차 공장으로 보이는 이곳에선 지금까지 어느 자동차 회사도 하지 않은 거대한 실험을 진행 중이다. 지난해 9월 르노는 이 공장의 기존 생산라인 일부를 ‘중고차 공장(Factory VO)’으로 바꿨다. 단순히 일부 부품을 바꾸거나 새로 도색을 하는 수준이 아니다. 기존에 없던 기능이나 공간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방식의 대규모 개조가 이뤄진다. 범퍼 등은 떼어 재활용하고 수명을 다한 전기차 배터리를 재생해 사용한다. 앞으론 자동차 뼈대까지 개조하는 수준으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현재 하루 180대의 중고차를 개조할 수 있는데 내년까지 연 4만5000대 규모로 확대할 예정이다. 이방 스갈 르노 브랜드 세일즈 디렉터는 “최근 기술은 중고차를 심지어 네 번까지도 새롭게 재탄생시킬 수 있다”며 “내년까지는 운행 중이던 내연기관차를 전기차로 개조하기 위한 연구개발도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엔진과 변속기를 핵심으로 하는 내연기관차를 배터리와 모터 중심의 전기차로 전환하는 것은 사실상 새 차를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이다. 지속가능한 자동차 제조업에 도전하는 르노의 변신은 경영 환경의 큰 변화를 보여준다. 과거엔 매출, 이익만 따졌다면 이제는 ‘당신 회사 덕분에 세상이 더 나아졌는가’란 질문을 던진다. 사회 전반과 미래세대 등 모든 이해 관계자와 지구·환경에 이로운 성장을 추구하는 ‘넷 포지티브(Net Positive)’를 요구하는 것이다. 지난해 ‘넷 포지티브’라는 책을 펴낸 폴 폴먼 전 유니레버 최고경영자(CEO)는 “이 같은 지각변동에서 뒤처지는 기업은 어마어마한 실존적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며 “사회는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젊은 세대는 그들을 위해 일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탄소 규제에 내연기관 車 판매 줄어…주민들 경제 버팀목 사라질까 우려르노CEO “환경 가치로 활로 모색”윈스턴 에코스트래티지스 대표 “인류 번영없이 기업 번창할순 없어” “극단적 기후현상이 잦아지며 기후변화가 심각한 문제란 걸 다들 실감합니다. 정부가 탄소 배출이 많은 차에 과징금을 부과하니 다들 새 차 사기를 부담스러워 하죠.” 르노의 플랭 자동차 공장 일대에서 만난 40대 직장인 토마 씨는 “르노 같은 대형 자동차업체가 ‘중고차 공장’을 시도하는 게 신기하고 인상적”이라고 했다. 탄소배출 절감을 위한 각종 규제 때문에 내연기관 신차 판매가 줄어들고, 수십 년간 지역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했던 공장이 혹시 문을 닫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새로운 방식으로 해결책을 모색하는 점을 반긴 것이다.기후 재난에 거대 차 공장 지속가능성 우려지난해 7월 독일 벨기에 등 서유럽 폭우, 8, 9월 그리스 등 남유럽 폭염과 산불로 수백 명이 사망했다. 이상기후가 자주 발생하면서 유럽에선 탄소 감축 목표를 강제하는 조치가 강화되고 있다. 플랭 공장 인근 카페에서 만난 40대 지역 주민 로베르 씨는 “기후변화와 지속가능성이 프랑스 사회의 화두”라면서 “우리 지역 공장이 이를 선점해 나갈 수 있다면 자부심이 생길 것”이라고 했다. 플랭 공장이 있는 이블린주는 파리부터 흐르는 센강의 한 줄기가 지나가서 주민들은 수질 등 환경 이슈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30대 주부 마리 씨는 “아무래도 가깝게 센강이 있다 보니, 공장의 친환경적인 변화에 지역사회가 공감해주는 거 같다”고 전했다. 다만 신차보다 중고차, 전기차 개조에 집중하면서 당장은 지역 내 일자리가 감소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다. 플랭 공장에서 일한다는 한 주민은 “공장의 변화가 외부에서 보기보다 복잡한 문제가 있다”며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플랭 공장 관계자는 “프랑스에서 신차 판매보다 중고차 거래의 수요가 커지고 있고, 특히 미래 시장에서 중고 전기차의 중요성이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며 “중고차 생애주기의 모든 단계에서 시장의 가치를 발견하는 전략을 이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넷 포지티브’, 모두를 위해 성장하는 기업으로신차 생산·판매에 집중하는 자동차 업계에서 르노 같은 대형 제조업체가 중고차 개조 사업에 나서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꼽힌다. 르노의 시도는 지속가능한 사업 기회를 찾는 동시에 환경적 책임까지 강화하는 해법으로 풀이된다. 루카 데 메오 르노그룹 최고경영자(CEO)는 “기존의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새로운 경제적, 사회적, 환경적 가치 창출을 해 나갈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현하고 있다”고 밝혔다. 르노그룹의 시도와 지역사회에서의 평가들은 결국 모두를 위한 성장이라는 ‘넷 포지티브’가 기업 활동에서 필수적인 상황이 됐음을 보여준다. 김종대 인하대 녹색금융대학원 주임교수는 “기업의 환경적, 사회적 책임이라는 가치는 앞으로 시간이 갈수록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기업 투자의 물줄기도 바뀌고 있다. 글로벌지속가능투자연합(GSIA)은 2020년 6월 말 기준으로 전체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관련 투자 규모를 35조 달러(약 4경1650조 원)가량으로 추산했다. 2030년에는 130조 달러(약 15경4700조 원) 이상으로 확장될 것으로 예측된다. 앤드루 윈스턴 에코스트래티지스 대표는 “넷 포지티브는 ‘하면 좋고 안 해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며 “지구와 인류, 전 생물종의 번영 없이 기업만 번창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페라리 가죽 의자도 친환경 소재로 바꿔 보라뇨 伊 알칸타라 S.p.A 회장 “친환경 활동은 비용 아니라 투자”“친환경 활동은 기업에 비용이 아니라 투자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탈리아의 소재 기업 ‘알칸타라 S.p.A’(알칸타라)의 안드레아 보라뇨 회장(사진)을 지난해 12월 20일 화상으로 만났다. 알칸타라는 페라리, 람보르기니 같은 슈퍼 카의 시트와 실내 인테리어에 쓰이는 천연 가죽을 대체하는 부드러운 비단 느낌의 친환경 고급 소재로 유명해진 기업이다. 보라뇨 회장은 윤리적, 환경적 가치에 집중한 것이 회사의 지속적인 성장을 가져왔다고 강조했다. 그는 고급 천연 가죽을 사용하는 ‘메이드 인 이탈리아’ 이미지를 바꾼 과정에 대해 “처음엔 알칸타라 소재가 단순히 가죽을 대신하는 소재로 시장에서 통했지만 ‘동물을 죽이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밀고 나가면서 동물친화의 가치를 더한 제품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천연가죽 대신 알칸타라 소재를 사용한다는 행위 자체가 경제적인 측면이나 가치 측면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합니다. 메이드 인 이탈리아의 정신에는 가죽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디자인, 열정, 창의력, 장인정신 등에 알칸타라의 기술을 접목했죠.” 알칸타라는 동물복지에 더해 탄소배출 감축을 추진해 왔다. 2009년 이후 계속 탄소중립 기업으로 인증받고 있다. 그는 “2009년에 탄소중립을 시행하는 것은 다른 기업과 비교해 상당히 급진적이었지만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친환경 활동은 거짓이나 과장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보라뇨 회장은 친환경 경영에 따른 비용 부담을 묻는 질문에 “친환경은 비용이 아니라 투자다. 추가 비용이 들지만 결국 기업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와 평판이라는 보상으로 되돌아온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2010년 7820만 유로(약 1050억 원)였던 알칸타라 매출은 2014년 1억2390만 유로(1670억 원), 2018년 2억420만 유로(2750억 원)로 꾸준히 성장했다. 페라리와 맥라렌, 애스턴마틴, 마세라티의 자동차 모델 외에도 삼성전자, 애플, 스와로브스키 등과 함께 제품을 만들었다. 알칸타라는 1000곳이 넘는 원재료 공급업체들까지 모두 환경, 인권, 노동 기준을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보라뇨 회장은 “2026년까지 완전히 식물에서 추출한 식물유래 폴리머를 개발하겠다는 목표와 출처를 증명할 수 있는 폴리에스테르 재활용이 우리의 중요한 미래 계획”이라고 밝혔다.넷 포지티브(Net Positive)모두에게 이로운 공존과 공정을 추구하는 기업 활동을 뜻한다. 제품과 경영이 고객과 주주는 물론이고 사회 전체, 미래세대와 지구 환경을 포함하는 모두의 복지를 개선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플랭=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김도형 기자 dodo@donga.com신동진 기자 shine@donga.com임현석 기자 lhs@donga.com}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사진)이 내년 차기 정부 건의 사항으로 “기업, 정부, 국회가 원팀으로 같은 목표를 지향할 수 있도록 민관합동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국가 방향을 세워야 한다”고 밝혔다. 글로벌 공급망 위기 등 한국 경제를 둘러싼 도전 과제들이 정부와 기업이 각자 할 일만 한다고 해결될 수 없다는 인식에서다. 26일 대한상의에 따르면 최 회장은 22일 서울 중구 대한상의 회관에서 출입기자단과 진행한 송년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최 회장은 이날 “반도체, 배터리와 관련된 것들은 이제 대한민국만의 문제로만 보기는 어렵다”며 정부의 외교적 역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 회장은 원팀을 이루기 위해 소통을 강조했다. 최 회장은 “소통을 통해 반기업 정서가 어느 정도 해소돼야 기업의 역할이 자리 잡을 수 있고 사회가 원하는 형태의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내년에 시행되는 중대재해처벌법과 관련해선 “중요한 건 이 법이 생긴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는 것”이라며 “경제 문제는 형사적 접근보다 경제적 접근으로 해결하는 게 좋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한편 최 회장은 ‘SK실트론 사익편취 의혹’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가 최근 최 회장과 SK㈜에 각각 8억 원 과징금 제재 결정을 내린 것을 두고선 “아쉽지만 반성할 부분은 반성하고 대응할 부분은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임현석 기자 lhs@donga.com}

“내년 투자와 채용 계획을 아직도 못 세웠습니다. 원자재 가격 부담이 커지는데 가격엔 반영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내 월급이라도 반납해야 할 판입니다.” 산업용 패킹 고무를 제조해 납품하는 회사 대표 A 씨는 새해 회사 경영 계획을 아직도 마무리짓지 못했다. 패킹 고무의 원자재인 합성고무 가격이 연초 t당 170만 원 선에서 최근 220만 원 수준까지 30% 가까이 올랐지만 대부분의 납품 업체들과 고정가격으로 장기 계약을 맺고 있다 보니 원가 부담이 커졌을 때 판매 가격에 바로 반영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줄곧 마른 수건 쥐어짜듯 비용 절감을 계속해 뭘 더 줄여야 할지 난감하다. A 씨는 “지금 같아선 내년엔 올해 수준의 현상 유지만 하더라도 큰 성공”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 내년도 경영 계획을 수립한 기업 중 절반 이상은 경영 기조를 ‘현상 유지’로 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글로벌 공급망 위기에 따른 원자재 가격 상승,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임금 인상 부담 등이 복합적으로 맞물려 불확실성이 큰 탓에 사업을 키우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26일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전국 30인 이상 기업 243개사를 대상으로 내년도 기업 경영전망 조사를 실시한 결과, 내년도 경영 계획의 최종안을 확정했다고 답한 기업은 11.1%에 불과했다. ‘초안을 수립했다’고 답한 기업은 53.5%였다. 64.6%(157곳) 기업만 경영 계획을 수립한 것이다. 경영 계획을 수립한 기업들은 내년도 경영 계획 기조를 두고 현상 유지(53.5%)라고 대답한 경우가 많았다. 긴축 경영이라는 대답도 22.9%에 달했다. 확대 경영으로 응답한 기업은 23.6%에 불과했다. 긴축 경영이라고 응답한 기업들의 구체적인 추진 계획은 ‘원가 절감’(80.6%)이 많았다. 경총 측은 “최근 불거진 공급망 쇼크, 원자재 가격 급등, 임금 인상과 같은 이슈로 대다수 기업이 원가 절감을 긴축 경영의 최우선 순위로 꼽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부산지역에서 고압가스 용기 생산업체를 운영하는 B 씨는 “원자재인 철강 가격이 오른 데다 수급도 원활하지 않다. 모든 게 불확실해 긴축 경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경영 계획을 세운 기업을 대상으로 2022년 투자 및 채용 계획을 조사한 결과 ‘올해(2021년) 수준’이라는 응답이 각각 53.5%(투자)와 63.7%(채용)로 높게 나타났다. 경총은 “기업들이 올해 4% 수준의 경제성장률을 경기회복 신호로 받아들이기보다 지난해 역성장(―0.9%)에 따른 기저효과로 보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내수 경기에 민감한 중소기업들이 경기 악화 충격파를 더 크게 받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가 13∼20일 중소기업 3150곳을 대상으로 내년 1월 중소기업경기전망조사를 실시한 결과 다음 달 업황전망경기전망지수(SBHI)는 전달 대비 4.5포인트 하락한 79.0으로 나타났다. 80포인트 선 아래로 하락한 것은 올 9월(78.0) 이후 4개월 만이다. 중기중앙회 관계자는 “오미크론 변이 확산으로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고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화되면서 숙박 및 음식점업을 중심으로 산업 전체 체감경기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밝혔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83.3, 비제조업은 76.8로 각각 전달 대비 3.1포인트, 5.2포인트 떨어졌다. 특히 비제조업 가운데 서비스업은 ‘숙박 및 음식점업’이 78.2에서 47.2로, ‘예술·스포츠 및 여가 관련 서비스업’이 70.1에서 55.1로 떨어지는 등 10개 업종이 모두 하락했다. 중소기업들은 주요 애로 요인으로 ‘내수 부진’(58.3%)을 가장 많이 꼽았다. △원자재 가격 상승(46.4%) △인건비 상승(44.9%) △업체 간 과당경쟁(40.1%) 등이 뒤를 이었다. 임현석 기자 lhs@donga.com김하경 기자 whatsup@donga.com}

‘용기내 캠페인’이 최근 SNS를 통해 크게 확산되고 있다. 음식 포장에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일회용품을 줄이기 위해 다회용 ‘용기’에 담아 포장하고 이를 인증하는 챌린지 형태의 친환경 캠페인이다. 그릇을 뜻하는 용기(容器)와 씩씩한 기운을 나타내는 용기(勇氣)를 모두 연상시키는 언어유희를 활용한 이름이다. SK지오센트릭은 ‘용기내 캠페인’의 일환으로 구성원 가족을 중심으로 다회용품 사용 문화를 조성하기 위한 ‘Take Green’ 캠페인을 이달 1일부터 진행하고 있다. 구성원과 그 가족들이 일회용품과 비닐백 대신 다회용 용기에 음식을 포장한 인증사진을 SK지오센트릭 공식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면 인증 횟수, 인증사진 아이디어 심사 및 추첨을 통해 친환경 신발과 폴딩박스, 수건 등을 상품으로 지급하는 이벤트다. SK지오센트릭 나경수 사장도 ‘Take Green’ 캠페인에 동참했다. 8일 평소 즐겨 먹는 치킨과 분식들을 다회용 용기에 직접 포장해 인증사진을 찍어 SK지오센트릭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했다. 이번 캠페인에 앞서 SK지오센트릭은 다회용 기능성 보관 용기 및 친환경 수세미, 사회적기업 몽세누가 폐사일리지를 활용해 만든 비닐 대신 사용 가능한 업사이클링 가방 등이 포함된 ‘Take Green’ 세트를 전 구성원들에게 전달하며 친환경 캠페인 참여를 독려하기도 했다. SK지오센트릭 관계자는 “SK지오센트릭은 리사이클 기반 친환경 도시유전 기업으로의 체질 개선 작업과 함께 플라스틱 사용량 저감에 대한 인식 제고를 위해 다회용품 사용을 장려하는 ‘Take Green’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며 “특히 환경문제에 관심도 많고 그 해결에 직접 나서는 MZ세대와 공감대를 위해 참여형 친환경 캠페인을 사내외로 지속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SK지오센트릭은 11월 말부터 ‘자연을 새로고침하는 지구 중심적’이라는 회사 모토를 디지털 캠페인으로 제작해 선보이면서 친환경 인식 제고를 위한 디지털 OX 퀴즈 이벤트를 진행 중이다. 환경 상식 및 올바른 분리배출과 관련한 퀴즈를 풀고 상품도 받을 수 있는 이번 이벤트에는 3만 명 이상이 참여했으며, 만점을 받기 위한 반복 참여자가 많아 친환경 지식 공유와 확산에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다.임현석 기자 lhs@donga.com}

한화그룹 사회활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미래세대에 대한 아낌없는 지원은 물론, 문화예술 분야와 비인기 스포츠 분야에 대해서도 꾸준히 지원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프로야구, 골프, 사격, 승마, 복싱 등 다양한 종목의 스포츠 발전을 위해 끊임없는 지원과 선수육성에 힘쓰고 있다. 특히, 국내 비인기 종목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통해 균형 있는 스포츠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국내 스포츠 발전의 공로를 인정 받아 체육훈장(백마장, 맹호장, 청룡장)을 비롯해 대한민국 체육상과 한국기자연맹이 선정한 체육상(공로상)을 수상하는 등 스포츠를 통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한 기업인으로 평가 받고 있다. 매년 개최되는 ‘한화회장배 사격대회’는 국내 대표적인 5대 메이저 사격대회 중 하나로 김승연 회장이 비인기 종목인 사격 활성화와 저변 확대를 위해 2008년 창설한 이래 국내 최고의 전국 사격대회로 도약했으며 기업이 주최한 최초이자 유일한 사격대회이기도 하다. 한화그룹은 국내사격 육성을 위하여 2002년 6월부터 대한사격연맹의 회장사를 맡아 지금까지 100억 원이 넘는 사격발전 기금을 지원하는 등 국내사격 발전을 위해 전폭적으로 지원해왔다. 환경 관련 활동도 펼치고 있다. ‘한화 태양의 숲’은 한화그룹이 2011년 사회적 기업인 트리플래닛과 파트너십을 맺고 국내외에 친환경 숲을 조성해온 프로젝트 활동이다. 2012년 몽골 토진나르스 사막화 방지숲을 시작으로 중국, 한국 등에 지금까지 총 7개의 숲을 조성했으며, 이를 모두 더하면 약 133만 m²의 면적(축구장 180여 개 넓이)에 약 50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이렇게 조성된 숲은 해당 지역의 사막화 방지, 수질 정화, 대기 정화, 토사유출 방지와 같은 효과를 거두고 있다. ‘한화 해피선샤인 캠페인’은 태양광 발전설비를 국내외 사회복지지설, 학교 등에 무상 기증하는 친환경 사회공헌활동이다. 올해 허리케인 피해로 전력망이 파괴된 콜롬비아 라과히라 지역에 태양광 모듈을 기부하는 활동도 펼쳤다. 김 회장은 천안함 사고 희생자 유가족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며 실질적 도움을 준 적이 있다. 희생자 46명 중 채용을 희망한 38명의 가족 중 유가족의 연령, 경력 등을 종합해 계열사에 24명이 취업했다. 천안함 유가족 채용은 물질적 지원보다는 실제 유가족들에게 장기적으로 필요로 하는 도움을 주었다는 점에서 좋은 선례를 남겼다는 평가다. 임현석 기자 lhs@donga.com}
중국 정부가 SK하이닉스의 미국 인텔 낸드플래시 사업 인수를 최종 승인했다. 이로써 SK하이닉스는 인텔 낸드 인수에 필요한 경쟁당국 심사를 사실상 모두 마쳤다. 국내 반도체 업계가 D램에 이어 낸드플래시에서도 절반 이상 점유율을 확보하게 됐다. SK하이닉스는 중국 경쟁당국으로부터 인텔의 낸드플래시 및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사업에 대한 기업결합 승인을 받았다고 22일 밝혔다. 지난해 10월 SK하이닉스와 인텔의 합의로 시작된 90억 달러(약 10조 원) 규모의 인수 절차가 마무리됐다. SK하이닉스는 이후 한국과 미국 유럽연합(EU) 영국 싱가포르 대만 브라질 등에서 기업결합과 관련한 심사를 받고 중국의 승인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인텔 낸드플래시 사업 인수로 SK하이닉스는 세계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2위 자리를 확고히 다지게 됐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 집계에 따르면 낸드플래시 시장은 올해 3분기(7∼9월) 기준 삼성전자가 34.5%로 1위, 일본 키옥시아(옛 도시바 낸드플래시 사업부문)가 19.3%로 2위다. SK하이닉스가 13.5%로 3위, 미국 웨스턴디지털이 13.2%로 4위다. 6위인 인텔(5.9%)의 몫을 가져오게 되면서 SK하이닉스 점유율은 19.4%로 올라 키옥시아를 앞서게 됐다. 삼성전자와 점유율을 합치면 53.9%에 달하게 된다. 이번 인수로 SK하이닉스는 D램에 이어 낸드플래시를 메모리반도체 사업의 양대 축으로 삼을 수 있게 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D램 점유율이 70%를 넘는 걸 감안하면 한국이 세계 메모리반도체 주도권을 확실하게 가져왔다는 평가도 나온다. 서형석 기자 skytree08@donga.com임현석 기자 lhs@donga.com}

최태원 SK그룹 회장에게 SK실트론(옛 LG실트론) 지분 일부 인수와 관련해 8억 원의 과징금이 부과됐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기업 지분 인수와 관련해 지배주주의 회사 사업 기회 유용으로 제재한 첫 사례다. 다만, 공정위는 위반 행위가 중대하지 않다며 검찰 고발은 하지 않았다. 공정위는 22일 SK㈜가 SK실트론의 주식을 인수한 뒤 잔여 주식을 최 회장이 인수하게 해 공정거래법을 위반했다며 시정명령과 함께 SK와 최 회장에게 8억 원씩 모두 16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공정위는 다만 “위반행위의 정도가 중대하지 않고 최태원이 SK에 사업 기회 제공을 직접 지시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증거가 없다”며 검찰 고발은 하지 않았다. 최 회장은 15일 직접 공정위 전원회의에 참석해 당시 상황을 소명했다. 공정위에 따르면 SK는 2017년 LG실트론 주식 70.6%를 인수한 뒤 나머지 29.4% 지분의 인수를 포기해 최 회장이 이를 취득하도록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최 회장이 잔여 주식 인수 의사를 밝히자 SK 측이 인수를 포기하고 이사회도 열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 회장 개인의 거래인데도 임직원이 입찰과 계약 과정을 지원한 점도 문제 삼았다. 이번 사건은 경쟁당국이 기업 지배주주의 계열사 사업 기회 이용에 대해 제재한 첫 사례다. SK가 2016년 실트론의 경영권을 인수할 당시 1조1000억 원이던 기업 가치가 2020년 3조3000억 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한 만큼 잔여 주식을 인수하는 게 회사에 이익이 되는데도 이를 포기했고, 최 회장의 주식 가치는 취득 당시와 비교해 1967억 원(2020년 말 기준)이 올랐다는 게 공정위의 판단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회사가 지배주주에게 직접 사업 기회를 주는 게 아니라 사업 기회를 포기하는 ‘소극적 방식’의 사업 기회 제공을 제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SK 측은 “이사회 개최가 필요하지 않다는 법률 검토 등을 거쳤고, SK㈜는 이미 실트론 경영권을 확보해 추가 지분 인수가 별다른 실익이 없었다”고 항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SK 측은 이날 공식 입장을 내고 “SK실트론 사건에 대해 충실하게 소명했는데도 납득하기 어려운 제재 결정이 내려진 데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면서 “의결서를 받는 대로 필요한 조치를 강구해 대응에 나서겠다”며 차후 판결에 불복하고 법적 대응할 여지를 열어 놓았다. 공정위 전원회의 결정은 법원의 1심 판결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 SK가 과징금 결정에 대해 불복하고 항소를 진행한다면 고등법원에서 법리 다툼이 이어지게 된다. 재계에선 이번 과징금 부과와 관련해 “경영권 취득과 관계없는 단순한 소수지분 취득까지 사업 기회로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라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한 재계 관계자는 “SK가 최 회장에게 제공했다는 사업 기회가 구체적으로 얼마의 가치가 있었는지, 지분 인수 후에 사업이 어려워졌다면 그것도 사업 기회로 볼 수 있는지가 핵심인데 공정위 결론에선 그 부분이 빠졌다”라고 지적했다.세종=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임현석 기자 lhs@donga.com}
현대오일뱅크가 4000억 원을 들여 액화천연가스(LNG)와 블루수소를 연료로 쓰는 친환경 발전소 건설을 추진한다고 22일 밝혔다. 현대오일뱅크에 따르면 해당 발전소 발전 용량은 290MW(메가와트)로 2025년 상업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현대오일뱅크는 생산한 스팀과 전기를 충남 서산시 대산공장 내 현대케미칼, 현대쉘베이스오일 등 자회사에 공급할 예정이다. 현대오일뱅크는 고도화설비 증설, 현대케미칼 HPC(중질유 기반 석유화학 설비) 신규 상업가동 등으로 대산공장의 스팀, 전기 사용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보고 원활한 전력 공급을 위해 발전사업을 확대하기로 했다. 친환경 발전소가 건립되면 대산공장 전체 전력 대비 70% 이상을 직접 충당할 수 있게 된다. 현대오일뱅크는 친환경 발전소 건설을 위해 6월 발전 자회사 현대E&F를 설립하고 집단에너지사업 인허가를 취득했다. 집단에너지사업이란 전기, 열 등의 에너지를 산업시설 등에 공급하는 사업이다. 강달호 현대오일뱅크 대표는 “LNG-블루수소 혼소 발전은 다양한 탄소중립 노력 가운데 하나”라면서 “온실가스를 최대 56% 저감할 수 있는 LNG 발전소에 수소를 30% 투입하면 온실가스 약 11%를 추가 저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임현석 기자 lhs@donga.com}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비롯해 SK그룹 최고경영진이 내년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정보기술(IT)·가전전시회 ‘CES 2022’ 현장에 모일 전망이다. SK그룹 공통 관심사인 넷제로(Net Zero·탄소중립) 경영 로드맵을 보여주는 한편 북미를 비롯한 글로벌 사업 확장 의지도 함께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21일 재계에 따르면 SK그룹은 이번 CES 전시 주제를 넷제로로 정하고 SK㈜, SK에코플랜트, SK이노베이션, SK텔레콤·SK스퀘어, SK하이닉스, SK E&S 등 6개 계열사가 합동 전시관을 꾸린다. SK에서 주요 계열사별로 CES 전시관을 꾸린 적은 있으나 이번처럼 그룹 합동 전시관을 꾸리는 것은 처음이다. 최 회장이 현장에서 탄소중립 이슈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SK그룹의 사업 및 경영 전략을 강조할 계획이다. CES 2022에는 최 회장을 비롯해 박정호 SK스퀘어·SK하이닉스 부회장, 노종원 SK하이닉스 사장, 유영상 SK텔레콤 사장, 윤풍영 SK스퀘어 최고투자책임자(CIO) 등 최고경영진도 합류할 예정이다. 최근 SK온 대표로 경영에 복귀한 최재원 SK그룹 수석부회장도 참석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인사 및 조직개편을 마친 SK그룹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에도 불구하고 이번 CES 2022를 계기로 각 사업부문 수장들의 글로벌 현장 경영을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SK 관계자는 “2년 만에 오프라인으로 열리는 CES인 만큼 각 사업 총괄들이 현지에서 대외 행사와 비즈니스 미팅에 직접 나서기로 했다”면서 “오미크론 확산 상황에 따른 일정 변경 가능성을 계속 예의 주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곽도영 기자 now@donga.com임현석 기자 l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