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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반쪽짜리 광복절 기념식을 계기로 해묵은 ‘건국절 논란’이 다시 불붙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건국 시점을 임정 수립일인 1919년 4월 11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정부 수립일인 1948년 8월 15일로 볼 것인지를 놓고 이명박 정부 때 불거진 건국절 논란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체성을 어떻게 보느냐는 문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임시정부 혹은 망명정부는 근현대를 통틀어 전 세계에 약 80여 개가 있었습니다. 드골 망명정부 등 다른 역사적 사례와의 비교를 통해 임정의 의미를 짚어 보겠습니다.나라 뺏기고도 ‘전승국’ 인정받은 드골 망명정부국민, 영토, 주권이라는 국가 구성의 3대 요소를 들어 임정을 폄하하는 시각이 있습니다. 한반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권을 일본제국에 빼앗겨 허수아비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정부 형태가 바뀌어도 국가는 바뀌지 않는다(Forma regiminis mutata, non mutatur civitas ipsa)’라는 오랜 국제법 원칙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17세기 국제 법학자 그로티우스(H. Grotius)는 ‘전쟁과 평화의 법’에서 군주가 바뀌어도 국가는 동일성을 유지한다고 봤습니다. 예컨대 역성혁명으로 고려 왕조가 조선으로 대체됐어도 민족국가로서의 일체성은 유지된다고 보는 시각과 같습니다. 이런 논리를 확장하면 외세의 침입으로 당장 주권을 잃더라도 민족국가 자체가 소멸되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죠. 임시정부 혹은 망명정부의 정치적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그러나 현실적으로 모든 임시정부나 망명정부가 국제사회에서 그 존재를 인정받는 것은 아닙니다. 드골 망명정부와 티벳 망명정부의 차이가 대표적입니다. 독일 나치에 맞서 영국 런던에서 활동한 드골 망명정부(자유 프랑스)는 연합국과 공동으로 군사 작전에 나서는 과정을 거쳐 전후 전승국으로서 베를린 분할 점령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반면 티벳 망명 정부는 수장인 달라이 라마의 노벨평화상 수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지 못하고 있죠. 그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됐을까요.가장 큰 차이는 국제정치에서 역학 관계입니다. 드골 망명정부가 활동한 2차 대전 당시에는 독일 나치라는 공동의 적이 있어 연합국의 승인과 지지를 얻어내기에 용이했습니다. 반면 티벳 망명정부가 맞서고 있는 중국은 유엔 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이자, 미국과 더불어 G2로 분류되고 있는 강대국입니다. 이에 따라 자국의 정치, 경제적 이익이 우선인 각국이 중국의 눈치를 보며 티벳 망명정부를 승인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눈물 머금고 자국 함대 공격한 드골 이와 함께 시대 상황과 맞물려 드골 망명 정부가 연합국 군사작전에 기여하는 등 자신들의 유용성을 입증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2차대전 초까지는 미국이 나치의 괴뢰정부인 프랑스 비시 정부를 인정하는 등 드골 망명정부의 입지가 좁았습니다.그런데 1943년 7월 캐터펄트 작전(Operation Catapult) 당시 드골이 처칠의 요청에 따라 비시 프랑스 정권 휘하의 자국 해군 함대를 공격한 이후 상황은 달라집니다. 드골이 런던에 도착한지 3주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드골로서는 자국인들을 대상으로 총을 쏴야한다는 점에서 엄청난 고뇌를 안겨줄 수밖에 없는 작전이었죠.하지만 막강한 전력을 갖춘 프랑스 함대가 나치 수중에 들어가면 연합국으로선 큰 손실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드골은 영국군과 함께 알제리 오랑에 주둔해있던 프랑스 함대 공격에 동참합니다. 이후 1944년 드골 망명정부는 미국, 영국, 캐나다, 소련 등 연합국들로부터 승인을 받았습니다.이에 대해 영국 역사가 앤드루 로버츠는 자신의 책 ‘승자의 DNA’에서 “드골은 평생 이 작전을 자신의 가장 어두운 역사로 깊이 새겨두었다. 하지만 이 작전 이후 드골은 처칠에게서 진정한 동지 대우를 받게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임정도 드골 망명정부처럼 자신들의 실력을 보여줌으로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지를 이끌어냈습니다. 1932년 4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벌어진 윤봉길 의거가 대표적입니다. 당시 장제스는 “중국의 4000만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 청년이 해냈다”며 임정에 군사, 재정적 지원을 해줬죠. 1945년 4월 4일에는 임정과 국민당 정부가 ‘광복군 통수권은 임정에 있고, 재정 원조는 차관으로 한다’는 내용의 협정을 맺기에 이릅니다. 이는 카이로회담에서 장제스가 한국 독립을 언급하는 배경이 됩니다.국제사회 승인 위한 임정의 치열한 외교전임정이 중국 정부로부터 승인을 받기까지 윤봉길 의사의 의거뿐 아니라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1920, 30년대 이승만을 주축으로 한 임정의 외교전이 대표적입니다. 이 중 1921~22년 열린 워싱턴회의는 1차 대전 종전 이후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국제질서를 규정하는 중요한 국제회의였습니다. 일본의 막강한 해군력을 억제하고 동아시아에서 힘의 균형을 추구하고자 한 미국의 의도가 반영된 회의였던 만큼 임정은 이를 독립 외교의 기회로 활용하고자 했죠.이에 따라 당시 미국에서 활동한 이승만은 1921년 3월~1922년 1월까지 약 1년간 267개 미국 신문에 게재된 1009개의 한국 관련 기사들을 수집합니다. 미국 정부의 외교 방침을 명확히 이해하고 현지 언론을 외교전에 활용하기 위한 포석이었죠. 또 한국 독립문제를 미 의회에서 다룬 바 있는 토마스 찰스 전 상원의원 같은 정계 인사를 특별고문으로 영입합니다.그러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목표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미 정부가 1차대전 승전국인 일본을 의식한 탓에 이승만을 비롯한 한국 대표단이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고, 한국 문제가 공식 의제로 다뤄지지도 않은 겁니다.하지만 성과가 아주 없지는 않았습니다. ‘한일병합이 한국의 자발적 의지에 따라 이루어졌고, 일본의 식민 지배는 한국에 혜택을 주었다’는 일본 주장에 맞서 “한일병합은 강제로 이뤄졌고, 한국인들은 일본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다”는 임정의 입장이 미국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습니다. TV가 없던 시절 신문의 대중 영향력이 컸기에 독립 외교에서 의미 있는 첫발을 내디딘 것으로 평가됩니다.1931년 일본의 만주침략을 계기로 열린 1933년 국제연맹 특별회의에서 임정 외교전은 워싱턴회의 때보다 성공적이었습니다. 이때는 일본의 아시아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미국과의 대립 구도가 확연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미일 갈등이 심화되면서 일본 대륙 침략의 교두보인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가 재평가될 수 있었죠.이승만은 이런 미일 간 균열을 독립 외교에 활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승만은 국제연맹 회의가 열린 제네바로 출국하기 직전 언론 인터뷰에서 “일본의 아시아 대륙 침략 문제는 열강들의 보장 하에 완충국 한국이 정상적인 위치로 회귀 되지 않는 한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흥미로운 건 10여년 전 워싱턴회의 때만 해도 임정을 푸대접한 미국 정부의 태도가 이때는 180도 바뀐 사실입니다. 미국 체류 당시 무국적 신분이던 이승만에게 외교 여권을 발급해준 데 이어 제네바 주재 미국 영사(길버트 프렌티스)가 각국 대표들을 소개해주고 국제연맹 사무국의 정보도 알려줍니다.이뿐 아니라 이승만이 만든 외교 문건을 검토해주고, 그의 편지를 미 국무장관 및 소련 대표단에 전달해주기도 하죠. 이 같은 미국의 변화는 앞서 말한 미일 대립 구도가 본격화된 데 따른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결국 임정은 만주 거주 한인들의 피해를 호소하고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1933년 2월 22일 국제연맹 특별회의에서 공식 회람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1931년 만주사변이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 문제를 이슈화할 수 있는 기회가 된 셈입니다.지금까지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보면-정부 형태가 바뀌어도 국가는 동일성을 유지한다는 국제법 원칙과,-캐터펄트 작전 당시 눈물을 머금고 비시 정부 휘하의 프랑스 함대를 공격한 드골이 연합국의 승인을 얻어낸 것처럼-대한민국 임정도 윤봉길 의거와 치열한 외교전 등을 통해 중국 등의 지지와 승인을 쟁취했다는 점에서임정의 존재를 폄훼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단순히 민족주의적 감정이 아니라, 팩트들이 가르치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보고 소모적 논쟁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참고 문헌]-김태원 〈국제법상 망명정부의 승인에 관한 연구〉 (국제법학회논총 64권 2호, 2019년)-김정민 등 〈만주사변 발발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연맹 외교: 이승만의 외교활동을 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보, 2019년)“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중국 저장성 자싱의 백범 김구 피난처 2층에는 비밀스러운 공간이 하나 있다. 마룻바닥에 호수로 연결되는 비상 탈출구가 숨겨져 있는 것. 탈출구 아래엔 언제든 호수로 피신할 수 있도록 나무배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 일본 관헌을 피해 이곳까지 피신한 백범의 고단한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다. 백범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광복 직전까지 자싱을 거쳐 항저우, 난징, 충칭 등으로 옮겨다니면서 지난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중국 근현대 사학자인 저자는 난징 등에서 백범이 여러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항일운동에 나선 과정을 다루고 있다. 특히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와 손잡고 공동 항일투쟁을 벌일 당시를 구체적으로 그렸다. 1933년 백범은 난징에서 장제스를 만나 한인들의 군관학교 입학을 요청해 동의를 얻는다. 이후 뤄양군관학교에서 한인들을 훈련하는 반이 개설됐다. 백범은 국민당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하고 빈사 상태에 빠진 임정을 가까스로 끌고 갈 수 있었다. 1935년 11월 3일 임정 조직 개편 당시 국무위원 7명이 한국국민당 간부로 채워지는 등 이 시기 백범이 임정의 실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국민당 간부였던 추푸청(1873∼1948)과 여자 뱃사공 주아이바오 등 백범의 피신을 도우며 끈끈한 인연을 이어간 중국인들의 이야기도 흥미롭게 펼쳐진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최근 둘러본 국립중앙박물관의 ‘한중일 칠기(漆器) 특별전’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삼국삼색(三國三色)’이었다. 목기에 옻칠을 하는 칠기 공예품은 다른 문명권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동아시아의 독특한 문화유산이다. 한중일 3국에서 자생하는 옻나무 수액은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깊은 윤기를 띠어 신석기시대부터 목기를 장식하고 내구성을 높이는 천연 도료로 사용됐다. 중국 항저우 콰후차오(跨湖橋) 유적에서 발견된 칠궁(漆弓·옻칠을 한 나무 활)은 기원전 6000년경 제작된 세계 최고(最古)의 칠기로, 중국에서 유래된 칠기 제작 기술이 한반도와 일본 열도로 전해진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특별전에 전시된 14∼19세기의 3국 칠기는 같은 뿌리에서 유래됐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각기 독특한 멋을 자랑한다. 예를 들어 1부 전시의 백미로 꼽히는 중국 청나라 ‘조칠 산수·인물무늬 운반상자’는 그 자체로 한 폭의 정밀한 산수인물도를 방불케 한다. 중국 특유의 조칠(彫漆·여러 번 옻칠을 한 뒤 다양한 무늬를 새겨넣는 것) 기법에 따라 붉은색 옻칠 위에 산과 정자, 버드나무가 늘어진 정원, 산책하는 선비 등이 생동감 있게 표현돼 있다. 이에 비해 2부 전시의 꽃인 조선 시대 ‘나전 칠 쌍봉·매화무늬 옷상자’는 봉황을 둘러싼 자개들이 모자이크를 이루며 영롱한 무지갯빛을 뿜어내 중세 유럽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떠올리게 한다. 3부에선 일본 무로마치 시대에 제작된 ‘마키에 칠 연못무늬 경전상자’가 옻칠 위에 금가루를 뿌려 장식하는 화려한 마키에(蒔繪) 기법의 정수를 보여준다. 불경을 보관한 상자답게 극락정토에 핀다는 연꽃을 잎맥까지 정교하게 묘사했다. 한중일 3국 칠기의 이런 독특한 분화·발전은 문화에서 원형(原型)에 대한 모방 이상으로 자신의 시각으로 이를 해석, 변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후지와라 마코토(藤原誠)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장이 이번 특별전 도록에서 “공통된 소재를 대하는 3국의 관점 차이가 (칠기에서) 다채로운 기법과 디자인이라는 결실을 이뤄냈다”고 평한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이는 비단 전통문화에만 한정된 얘기는 아니다. ‘주말의 명화’와 VHS 비디오 등을 보며 자란 한국의 ‘할리우드 키드’들이 최근 세계 콘텐츠 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데에는 인류 보편의 소재에 한국적 현실을 가미해 성공적인 문화 변형을 이뤄낸 영향이 크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달동네와 반(半)지하방, 한우 짜파구리 등과 같은 지극히 한국적인 소재로 사회 양극화라는 보편적 주제를 흥미롭게 다룬 것이 대표적이다. 최근 영국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나 애플TV 드라마로 제작돼 주목받은 이민진의 ‘파친코’, 미국 하퍼콜린스가 2억 원에 판권을 사들인 이미리내의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은 그동안 세계인들이 주목하지 않은 한국 근현대사를 정면으로 다룬 소설들이다. 엔데믹 이후 한국 영화의 흥행 성적이 저조하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강세와 스크린 독과점 등이 원인으로 지목되지만, 올 5월 칸 영화제에서 경쟁부문에 초청된 한국 영화가 한 편도 없는 등 작품성이 예전만 못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삼국삼색의 한중일 칠기에 담긴 문화 변형의 힘이 다시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인간에게서 앗아갈 수 없는 것이 딱 하나 있다.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자유, 자신이 나아갈 길을 선택할 자유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 갇혔다가 극적으로 살아난 빅터 프랭클 박사가 회고록(‘죽음의 수용소에서’)에 쓴 말이다. 가족을 잃고 자신마저 살해당할 위기에 처한 불가항력의 대비극 앞에서 그는 원망과 저주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 대신 자기 존재의 이유를 찾고, 다른 수용자들을 도우며 삶을 이어갔다. 미국 하버드대 정책학 교수로 행복학 연구자인 저자는 프랭클 박사가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를 행동과 분리하는 ‘메타 인지’가 가능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예컨대 비가 내리면 공사를 할 수 없는 건축업자는 하늘을 원망할 순 있지만, 불가항력의 현실을 결코 바꿀 수 없다. 이때 그는 부정적 감정에만 빠져 있기보다는 악천후에 대비한 계획을 세우는 ‘행동’이 필요하다. 감정은 뇌가 보내는 신호일 뿐, 이후의 행동은 학습을 통해 바꿀 수 있다는 뇌과학 연구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생활 속에서 메타 인지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얼까. 저자가 소개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순간적으로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른 채 10초만 현재의 내 모습을 바라보라는 것. 외부 스트레스를 위협으로 인식하고, 즉각 반응하려는 본능과 어긋나는 방식이기에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는 행복에 이르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자, 건강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고교 윤리수업 시간 니체의 ‘초인(超人)’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연상되는 건 슈퍼맨이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힘을 지녔으면서도 타인을 억압하지 않는 할리우드 영화 속 슈퍼맨 말이다. 하지만 니체가 말한 초인은 이와는 좀 다르다. ‘현재의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의지를 갖고 분투하는 이에 가깝다. 일본의 교육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저자는 이 책에서 ‘비포 앤드 애프터’로 초인의 개념을 쉽게 설명한다. 예를 들어 도스토옙스키의 고전 ‘죄와 벌’을 완독한다면 이를 읽지 않은 과거의 나를 뛰어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 여기에서 중요한 건 비교 대상이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점이다. 저자는 자신을 사랑하고 긍정해야 한다는 것이 니체 사상의 요체라고 말한다. 이를 실천하려면 타인과 나를 비교함으로써 타인의 욕망에 휘둘리는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대인의 삶은 이와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외모와 부, 인맥 등을 과시하는 자기 인정 욕구의 과잉이 타인의 자존감을 무너뜨린다. 이런 세상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단독자’로서 진정 나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에 감사하고, 지금 이 순간을 긍정하는 태도 등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니체의 조언을 풀어썼다. 저자의 전작이자 역사 분야 베스트셀러인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을 재밌게 본 독자라면 손길이 갈 만한 책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고즈넉한 폐사지(廢寺址)의 전형인 전북 익산 미륵사지에서 화려한 빛의 향연이 펼쳐진다. 현존하는 두 석탑 외에도 이 둘 사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목탑까지 백제시대의 3탑 가람 배치가 미디어아트로 화려하게 재현된다. 특히 9층 중 6층까지만 복원된 서쪽 석탑에 깃드는 형형색색의 빛은 돌이 하나씩 쌓이는 모습을 연출하며 보는 이들을 백제시대로 소환한다. 이 장면은 9월 6일부터 10월 6일까지 익산 미륵사지에서 펼쳐질 ‘미륵사, 천년의 빛: 미륵사지, 1400년의 비밀을 탐험하다’ 미디어아트의 일부. 국가유산청(청장 최응천)과 국가유산진흥원(원장 최영창)은 8∼10월 익산 미륵사지를 비롯한 전국 7곳에서 ‘2024 국가유산 미디어아트’를 개최한다. 2021년부터 시작돼 주요 문화유산에 담긴 스토리텔링을 정보통신기술(ICT)로 풀어낸 공연이다. 지난해 총 118만 명의 관람객을 동원한 ‘국가유산 미디어아트’는 올해 경남 진주시 진주성과 전남 고흥군 분청사기요지가 새로 추가돼 총 7곳에서 공연이 펼쳐진다. 다음 달 2∼25일 열리는 진주성 미디어아트는 ‘온새미로, 진주성도’를 주제로 촉석문 미디어 파사드를 비롯한 13개 프로그램이 관람객을 맞는다. 이 기간 진주 문화유산 야행도 함께 진행돼 여름밤에 운치를 더한다. 9월 6∼29일엔 부여 관북리유적 및 부소산성에서 ‘사비연희’를 주제로 백제 문화 부흥을 이룬 사비백제를 미디어아트로 재해석한다. 9월 13일∼10월 10일에는 공주 공산성 일대에서 ‘무령의 나라, 찬란한 희망의 빛’을 주제로 백제의 중흥을 꿈꾼 무령왕의 일대기를 미디어아트로 그려낸다. 금서루 외벽에 펼쳐질 미디어 파사드는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절경과 맞물려 신비로운 분위기를 선사한다. 9월 13일∼10월 6일 고흥 분청사기요지 일대에선 ‘화화(火花) 1250, 고흥에서 피어난 열정의 꽃 분청’을 주제로 분청사기의 아름다움을 미디어아트로 표현한다. 9월 28일∼10월 20일 수원 화성에선 ‘만천명월(萬川明月): 정조의 꿈, 빛이 되다’를 주제로 정조가 일군 화성의 화서문을 중심으로 미디어아트와 퍼포먼스가 융합된 공연이 펼쳐진다. 10월 5∼27일 강릉대도호부관아에서 열리는 ‘강릉을 그리다’ 미디어아트는 강릉을 대표하는 율곡 이이와 교산 허균을 조명한다. 전국 7곳의 미디어아트를 미리 보고 싶다면 26일 개막해 다음 달 4일까지 부산 해운대플랫폼(옛 해운대역사)에서 열리는 ‘Meta Heritage’ 기획전시를 둘러보면 된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냉전시대 내내 소련과 서방 진영 사이에서 중립을 고수하던 스웨덴이 2년 전 핀란드와 함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전격적으로 가입한 이유는 뭘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단편적인 답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스웨덴의 깊은 고심은 지도 한 장으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프랑스 언론인과 국제정치학자가 공저한 이 책은 다양한 지도를 통해 지정학적 갈등을 겪고 있는 28개국의 상황을 분석하고 있다. 우선 러시아의 부동항이 있는 ‘북유럽의 지중해’ 발트해 지도를 펴보자. 북유럽 9개국이 접한 발트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지점을 하나만 꼽는다면 단연 스웨덴령 ‘고틀란드’섬이다. 보트니아만을 제외한 발트해 가운데를 차지한 이 섬은 러시아의 역외 영토 칼리닌그라드와 마주 보고 있다. 여기에 에너지 자원 지도를 겹쳐 보면 더 흥미롭다. 서유럽 대러 에너지 의존의 핵심인 ‘노르트 스트림 가스관’이 이 섬 앞바다를 지나고 있어서다. 한눈에 봐도 러시아와 북유럽 사이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을 둘러싼 러시아와 스웨덴의 긴장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부터 본격화됐다. 나토의 동진에 지속적으로 반발해 온 러시아는 2016년 칼리닌그라드에 스웨덴까지 날아갈 수 있는 이스칸데르 미사일 포대를 배치했다. 이에 이듬해 스웨덴은 한동안 폐지했던 군 복무제를 부활한 뒤 고틀란드에 군대를 다시 투입했다. 이런 지정학적 긴장이 이어진 가운데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스웨덴의 선택지는 나토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최근 수미 테리 사건으로 외교가와 국내 정치권이 연일 시끄럽습니다. 이 사건은 ‘동맹국에 대한 첩보 활동’과 ‘정보기관의 정치화’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흥미롭습니다. 이 두 가지 요소를 둘러싼 역사적 의미를 짚어보면 이 사건을 새롭게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먼저 제1차 세계대전 당시로 시계를 돌려보겠습니다.‘침머만 전보 사건’과 영국의 대미 첩보전“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일 수 있는 물건이 하나 잡혔습니다.”1917년 1월 17일 영국 해군정보부 40호실의 신호정보(SIGINT) 분석관 나이절 드 그레이가 상관인 레지널드 홀에게 의미심장한 보고를 합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오가던 신호정보를 감시하던 그에게 독일 외무장관 아르투르 침머만이 워싱턴 주재 독일 대사관에 보낸 전문이 포착된 것. 최종 수신처는 멕시코 주재 독일 공사관이었습니다. 암호해독 후 파악된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1917년 1월 19일우리는 무제한의 잠수함 전쟁을 2월 1일 개시하려고 합니다. 이 전쟁을 벌이더라도 우리는 미국의 중립국 유지를 위해 노력할 겁니다. 이 노력이 성공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멕시코에 동맹을 제안합니다.전쟁을 함께 벌이자. 평화를 함께 이루자.우리 측에선 멕시코가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의 실지를 탈환하도록 관대한 재정지원을 약속합니다. 귀하는 미국과의 전쟁 발발이 확실해지자마자 가장 은밀하게 위의 사항을 멕시코 대통령에게 알리고, 그가 자발적으로 일본에 즉각적인 동조를 요청하는 동시에 우리와 일본 사이를 중재하는 방안을 그에게 제시하기 바랍니다.한 마디로 이 전문은 유럽에 이어 미국이 1차대전에 참전할 경우 미국과 영토를 맞대고 있는 멕시코와 전시 동맹을 맺으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 등 과거 멕시코의 영토를 회복하도록 지원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한 겁니다.영국에 의해 침머만 전문을 전달받은 미국은 큰 충격에 빠집니다. 당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중립을 지키며 독일과 영국 사이에서 평화조약을 모색하고 있었죠. 하지만 그 사이 독일은 미국의 뒷통수를 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겁니다.1917년 3월 1일 뉴욕타임스 등 주요 신문의 1면 헤드라인을 침머만 전문이 장식하자, 미국 내 참전 여론이 들끓게 됩니다. 결국 윌슨 대통령은 한 달 뒤인 4월 2일 미 의회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요청하며 이런 연설을 남기게 됩니다.“멕시코 주재 독일 공사에게 보낸 절취된 전문은 바로 우리 집 앞의 이웃을 적으로 만들려는 독일의 의도를 웅변하는 증거입니다.”이로부터 나흘 뒤 미국은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합니다. 독일의 맞서 싸울 영국의 강력한 우군이 생긴 겁니다. 그날 밤 침머만 전문을 입수한 드 그레이와 책임자 레지널드 홀은 축배의 샴페인을 떠트렸다고 합니다.‘동맹국 도청’ 출처 위장한 英 기만작전그런데 이 침머만 전보 사건 안에는 영미 간에 심각한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중대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영국이 그동안 미국의 대서양 횡단케이블을 지속적으로 도청해 적국인 독일뿐 아니라 우방인 미국의 외교 통신도 가로챘다는 사실이죠. 지금 수미 테리 사건처럼 최대 우방국에 대한 첩보 행위가 들통이 난 셈입니다. 침머만 전문을 처음 보고받은 해군정보부 40호실 책임자 레지널드 홀도 이를 매우 우려했습니다.그래서 그는 절취한 전문을 활용하기에 앞서 그 출처를 위장하는 작전을 벌이게 됩니다. 멕시코시티 주재 영국 총영사였던 에드워드 더스턴에게 요청해 현지 전신국으로부터 침머만 외교 전문 사본을 입수토록 한 겁니다. 즉, 워싱턴 주재 독일 대사관이 멕시코시티 공사관에게 보낸 전문을 입수한 것처럼 꾸며서 미국 정부에 알려준 거죠. 이미 워싱턴에서 전문을 절취한 사실을 가리기 위한 공작이었습니다.이와 함께 런던 주재 미국 특파원을 속이는 기만 작전도 벌입니다. 미국 비밀요원들이 전문을 입수한 것처럼 기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슬쩍 흘린 거죠. ‘국뽕’에 취한 미국 기자들이 이를 대서특필 할 거라는 점을 노린 겁니다. 레지널드 홀은 뉴욕 주재 해군무관 가이 곤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미국 기자들은 자국 비밀기관이 침머만 전문을 확보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미국 내 도청 라인은 계속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동맹 첩보활동은 유럽 ‘세력균형 외교’의 산물1차대전 당시 영국의 대미 첩보활동은 사실 새로운 건 아니었습니다. 국가간 힘의 배분에 따라 적과 동지를 수시로 바꾼 유럽의 세력균형(balance of power) 외교에선 늘상 있는 일이었죠. 17세기 베스트팔렌 체제 수립으로 유럽 각국에 본격적으로 들어선 외교 공관은 첩보활동의 온상이 됐습니다.예컨대 러시아의 ‘검은 방’이나 프랑스의 ‘흑실(cabinet noir)’은 전신이 도입되기 전부터 자국 수도에 주재하는 각국 외교공관 내 협조자를 포섭하고, 이곳을 오가는 각종 편지와 보고서를 가로채 첩보를 수집했습니다. 여기에는 동맹국이나 우방국도 예외가 아니었죠.나폴레옹에 공동으로 맞서 전쟁을 벌인 영국과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이 1814~1815년 빈에서 연 국제회의에서도 이런 현상은 두드러졌습니다. 나폴레옹 시대 이후의 유럽 지도를 그리기 위해 개최된 빈 회의는 각국 군주와 외교관 등이 모여 당시로선 유럽 역사상 최대 규모로 열렸습니다. 이때 각국은 상대국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다수의 스파이들을 대동합니다.예를 들어 각국 대표단의 수발을 드는 하인으로 위장한 스파이들이 대화를 엿듣고, 편지와 외교 문서를 몰래 복사하는 한편 휴지통이나 벽난로에서 타다 남은 문서까지 샅샅이 뒤졌습니다. 오스트리아 황제 궁전(호프부르크)에 머문 외빈들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었죠. 이처럼 유럽의 장기 평화를 상징하는 유럽 협조체제(concert of europe)에서조차 우방간 스파이 활동이 치열하게 이뤄진 겁니다.반복되는 국정원의 ‘정보 실패’이번 수미 테리 사건에서는 국정원 요원들이 고급 가방을 사주고 비싼 식당에서 접대하는 장면이 FBI 카메라에 포착돼 국정원의 해외공작이 허술하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최근 대통령실 관계자가 “문재인 정권때 일어난 일”이라며 감찰을 시사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이 관계자는 “문재인 정부가 국정원 차원에서 전문적으로 외교활동을 할 수 있는 요원들을 다 쳐내고 아마추어 같은 사람들로 채워넣어 문제가 발생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정권 교체 때마다 반복되는 국정원의 정보 실패가 수미 테리 사건의 본질이라고 밝힌 셈입니다.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사망 직후 국정원이 이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도 정권 교체와 맞물린 대표적인 정보 실패 사례입니다. 당시 이명박 정부에서 원세훈 원장이 이끌던 국정원은 김정일이 사망하고 이틀이 넘도록 이를 알지 못하다 북측의 보도 이후에야 파악했죠. 이를 두고 이명박 정부 직후 국정원 개편 과정에서 대북전략국을 해체하면서 대북 정보망에 구멍이 뚫렸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왔습니다.이는 역대 정부에서 계속 반복돼 온 현상입니다. 예를 들어 전두환 정권에선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을 겸임하면서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단행해 약 300명의 요원들을 내보냈습니다. 이후 김대중 정부는 안기부 명칭을 국정원으로 바꾸고 전체 직원의 약 11%를 구조조정했고, 김영삼 정부에선 안기부 직원 약 300명을 대기 발령했습니다.문재인 정부에선 국정원에 ‘적폐청산 TF’를 설치하고 대공수사권을 경찰로 넘기는 등 대대적인 조직개편에 나섰습니다. 윤석열 정부는 2022년 6월 국정원 내 1급 보직국장 27명 전원을 대기 발령했죠.전문가들은 정권 교체기마다 국정원의 인적 청산이 대규모로 이뤄져 전문성이 떨어지는 폐해가 반복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한 분야를 오랫동안 담당하며 쌓아놓은 정보망(인적 네트워크)이 대규모 조직개편 과정에서 사라진다는 얘기입니다. 이번 수미 테리 사건도 이런 현상과 무관치 않습니다.역대 정부들에서 이런 현상이 반복되는 건 국정원을 정권의 친위기관으로 여겨 ‘내 사람’을 심어야한다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정보기관의 정치화’입니다. 정책 결정자가 정보기관을 길들이려는 행태는 정보 실패로 이어집니다. 정보기관이 인사, 예산권을 틀어쥔 권력자의 입맛에 맞게 정보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정세를 왜곡하기 때문이죠.지금까지 다룬 내용을 잠시 요약하면,①동맹국에 대한 첩보활동은 유럽 세력균형 외교에서 비롯된 것으로②1차대전 당시 미국의 참전을 유도한 ‘침머만 전문 사건’도 영국의 대미 첩보활동의 결과였습니다.③하지만 당시 영국은 이번 수미 테리 사건과 달리 출처를 위장하는 작전을 벌여 동맹국과의 관계 악화를 사전에 차단했습니다.④국정원의 정보 실패는 역대 정권에서 반복되는 ‘정보기관의 정치화’에서 비롯됐습니다.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국정원의 대미 첩보활동이 이상하다고 볼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영국의 사례에서 보듯 동맹국과의 갈등 소지를 없애기 위한 조치가 미흡했으며, 이는 국정원의 정보 실패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결국 정권 교체기마다 반복되는 국정원의 정보 실패를 근절하려면 정보기관을 최고 권력자의 친위기관으로 여기는 행태를 차단하는 노력이 필요할 겁니다. 미중 갈등으로 야기된 신(新) 냉전이 펼쳐지는 가운데 북핵 고도화, 북러 밀착 등 안보 위협이 커진 상황에서 국정원의 정보 실패를 막기 위한 대책이 시급하지 않을까요.[참고 문헌]-크리스토퍼 앤드루·박동철 역, 〈스파이 세계사〉 1, 2, 3 (한울·2021년)“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아테네에서 자신의 학문을 활짝 꽃피웠지만, 민주정에 대해선 부정적이었다. 어리석은 민중들에 의해 공동체의 이익이 훼손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정치학’에서 “1인이나 소수 혹은 다수의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정치체제는 왜곡된 형태의 체제”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비록 1인 지배라도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추구한다면 정상적인 정치체제라고 주장한다. 정치학자인 저자는 민주주의를 다룬 서양의 주요 고전들을 엄선해 핵심 원문(영문 및 한글번역)을 이 책에 담았다. 고대 헤로도토스부터 현대의 슘페터까지 약 2000년에 걸친 주옥 같은 저작을 아우르고 있다. 신간에서 다룬 아리스토텔레스의 민주정 비판은 얼핏 전체주의를 옹호하는 궤변으로 비칠 수 있지만, 사실 현대 민주주의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민중을 선동하며 사적 이익을 도모하는 ‘포퓰리즘’에 대한 경계로 읽힐 수 있어서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그리스에서 포퓰리스트를 뜻하는 ‘데마고고스(demagogos)’를 민주정치의 적으로 규정했다. 그는 ‘정치학’에서 “민중이 법 위에 군림하는 민주정에서는 데마고고스가 부자들과 전쟁을 벌여 나라를 둘로 나눈다. 이들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민중들에게 생산잉여를 분배하는 ‘무절제(aselgeia)’에 빠진다”고 지적했다. 이미 2000여 년 전 ‘복지 포퓰리즘’의 폐해를 예견한 셈이다.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의 통찰력을 맛보고 싶다면 일독을 권한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점점이 ‘돌들’뿐이라 황량하기만 하고, 무슨 의미인지도 잘 모르겠네요.” 1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앞 ‘의정부지 역사유적 광장’에서 만난 이모 씨(48)는 “여름휴가를 맞아 아이들과 경복궁 구경을 마치고 찾아왔는데 기대 이하”라며 이렇게 말했다. 주위 외국인 관광객들도 영문으로 쓰인 입간판과 ‘돌들’을 쓱 훑어보고는 건너편 경복궁으로 발걸음을 옮기기에 바빴다. 이들이 본 ‘돌들’은 조선시대 의정부(議政府) 건물터의 위치를 알려주는 주춧돌 재현품이다. 조선시대 진짜 주춧돌은 복토된 잔디 아래 매립돼 있다. 서울시는 의정부 터에서 약 8년간 발굴조사 및 정비를 마치고 지난달 역사유적 광장을 공개했다. 그런데 1만1300㎡ 규모의 광장에는 주춧돌 재현품과 화장실, 벤치 몇 개가 전부다. 입구의 입간판에는 의정부의 역사적 연원 등만 기록돼 있을 뿐, 정작 이곳에서 살아 숨쉰 정도전이나 황희 정승 등 주요 인물들의 이야기는 단 한 줄도 찾아볼 수 없다. 고건축이나 조선사에 정통하지 않고서는 돌들만 보면서 역사적 의미를 음미하기는 쉽지 않다. 조선시대 의정부는 단순한 국가기관이 아니었다. 조선왕조 으뜸 궁궐(법궁)인 경복궁 정문(광화문)의 동쪽 첫 번째 자리에 둘 정도로 최고 행정기관의 위상을 지녔다. 무엇보다 의정부는 조선을 설계한 개혁가 정도전의 비전과 통치 철학을 응축하고 있다. 그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 “임금은 어리석을 수도 현명할 수도 있고, 강할 수도 약할 수도 있어서 한결같지 않다. 그러므로 재상은 임금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살려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고 썼다. 왕조 국가임에도 1인이 아닌, 시스템으로 국가를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 그의 혁명적 사상이 묻어난다. 그가 구상한 조선은 국왕의 만기친람을 막고, 재상들이 실질적 통치를 주도하는 나라였다.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통해 백성을 편케 하겠다는 고심의 산물이다. 이에 따라 행정 각부에 해당하는 육조(六曹)가 삼정승으로 구성된 의정부를 거쳐 왕에게 보고하거나, 지시를 받는 구조가 정착됐다. 의정부는 왕명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육조로 하달되기 전 이의를 제기해 왕권을 적극적으로 견제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태종과 세조가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왕이 육조에 직접 지시하거나 보고를 받는 제도)를 시행해 의정부를 무력화시킨 이유다. 최근 과도하게 집중된 대통령실의 힘을 빼고 부처의 정책 리더십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주장의 뿌리에는 이런 역사적 전통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의정부의 다양한 역사적 의미를 시민들에게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선 주춧돌 몇 개만으로는 부족하다. 문화유산계 일각에서는 대안으로 공연이나 음악회, 토론회 등을 통해 의정부와 이곳을 거쳐간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집단지성으로 국정을 주도한 의정부의 의미를 살려 정책 토론회장을 두는 것도 방법이다. 방문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건물 일부를 몸체까지 복원하거나, 경주 황룡사지처럼 유적 외곽에 전시관을 세우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문화유산의 원형을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 유적 복토 후 주춧돌 재현품만 놓은 시 당국의 결정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화유산 보존에만 치우쳐 활용을 등한시하던 시대는 지났다. 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우리나라의 음반 수출액이 올해 상반기(1∼6월) 기준 9년 만에 처음 감소세로 돌아선 것으로 나타났다. 15일 관세청 수출입 무역통계에 따르면 올 1∼6월 음반 수출액은 1억3032만1000달러(약 1794억 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0% 줄었다. 상반기 기준 음반 수출액이 마이너스로 돌아선 것은 2015년 이후 9년 만이다. 상반기 음반 수출액은 2015년(1277만4000달러) 이후 지난해(1억3296만5000달러)까지 매년 증가했으나 올해는 상황이 달라진 것. K팝 시장 규모를 보여주는 총 음반 판매량도 올 상반기 1∼400위 앨범만 약 4760만 장으로 지난해보다 800만 장 줄었다. 가요계에서는 최근 몇 년간 이어진 음반 판매량을 높이는 마케팅에 대한 해외 팬들의 피로감이 커졌다고 진단한다. 그동안 일부 국내 기획사 등은 음반 판매 수익을 높이기 위해 포토카드나 포스터 등 각종 굿즈를 동원해 앨범 종류를 10종 이상으로 늘리기도 했다. ‘팬심’을 이용한 이런 마케팅에 일부 팬들은 ‘지나치다’고 비판하며 비용 부담을 호소하기도 했다. 다만 이렇게 여러 종류의 앨범을 내는 것은 K팝뿐만 아니라 미국 시장 등에서도 벌어지는 현상이다. 올 상반기 국가별 음반 수출액은 일본이 4693만1000달러(약 648억 원)로 가장 많았고, 미국(3045만4000달러·약 421억 원), 중국(1840만 달러·약 254억 원)이 2, 3위를 차지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고백하건대, 저도 왕년에 ‘이혼 가방’ 싸본 여자입니다.” 20년 차 가정법원 판사로 소위 ‘이혼 주례’를 서는 게 일인 저자는 신간에서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일을 하면서 생후 18개월의 첫째와 갓 태어난 둘째 육아를 감당해야 했던 시절, 그만 산후우울증이 와버렸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한계에 부닥친 상황에서 남편과의 사이도 멀어졌다. 그는 “나를 함부로 대하는 남편을 보면서 ‘내가 아파트에서 아기를 안고 뛰어내려 죽으면 나의 소중함을 알까?’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고 썼다. 가정의 위기는 주변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극복될 수 있었다. 다른 지방법원으로 발령이 난 직후 친정 어머니가 가사와 육아를 분담해주고, 남편 소개로 만난 여성 목사님과의 만남을 통해 정신적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었다는 것. 그는 누구라도(심지어 가정법원 판사도) 이혼의 위기에 봉착할 수 있으며, 갈등의 불씨를 식힐 수 있는 기회나 시간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밖에 저자는 지난 20년 동안 수많은 이혼 판결을 통해 만난 다양한 부부와 자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혼 재판 중 자살한 남편, 첫사랑과 주고받은 휴대전화 메시지가 들통이 나 이혼당한 남편, 잠적한 베트남 아내를 찾아다니다 숨진 아들의 결혼을 무효로 만들어달라고 청원한 어머니 등. 각 사건을 맡으면서 판사이자 아내, 엄마로서 가졌던 심정을 솔직 담백하게 담았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뽀로로 캐릭터 등 국내 콘텐츠 지식재산권(IP)을 광범위하게 소개하는 ‘캐릭터 라이선싱 페어 2024’가 서울 코엑스에서 18∼21일 열린다. 올해로 23회를 맞은 이번 행사는 문화체육관광부 주최로 한국콘텐츠진흥원과 코엑스가 공동 주관한다. 캐릭터와 애니메이션, 게임 등 여러 콘텐츠의 IP를 전시하고, 새로운 사업 기회를 제공한다. 올해는 통상 70만∼200만 원이던 참가업체 부스비를 없앴고, 관람료도 받지 않는다. 행사 규모는 지난해 576개 부스에서 724개 부스로 확대한다. 주제는 ‘잇-다: 콘텐츠 IP’로, 장르와 산업을 넘나들며 확장하는 캐릭터 IP의 잠재력에 주목한다. 전시장에서는 뽀로로, 콩순이 등 애니메이션을 비롯해 K팝, 웹툰, 드라마, 게임 등 다양한 캐릭터를 선보인다. 버추얼 캐릭터, 발달장애 창작자 굿즈 등을 소개하는 특별기획관도 마련했다. 알버트 김 넷플릭스 총괄 프로듀서, 웹툰 ‘머니게임’의 배진수 작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에이트 쇼’의 한재림 감독 등이 참여하는 토론회도 열린다. 조현래 콘텐츠진흥원장은 “20년 넘게 국민에게 사랑받아 온 캐릭터 페어를 무료화한 만큼, 보다 많은 관람객들이 국내 콘텐츠 IP의 파워를 직접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 국가에 기증한 청동유물이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전시된다. 대구박물관은 9일 ‘2000년 전의 대구 비산동과 1500년 전의 고령 지산동’ 전시를 개막했다. 이 선대회장의 기증품 중 대구·경북과 관련이 있는 국보 ‘대구 비산동 청동기 일괄’과 보물 ‘전(傳) 고령 일괄 유물’ 등 총 73점을 선보인다. 1956년 대구 비산동 와룡산에서 주민에 의해 발견된 창, 칼, 꺾창 등 청동기 일괄 유물은 1971년 국보로 지정됐다. 이 중 창과 꺾창은 당시 의례를 위해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꺾창은 나무 자루 끝에 창날을 가로 방향으로 결박해 찍거나 베는 용도로 쓴 청동무기다. 대가야 왕릉인 경북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됐다고 전하는 보물 ‘전 고령 일괄 유물’은 유리구슬 목걸이, 큰 칼, 말갖춤 등으로 구성돼 있다. 전시는 내년 6월 29일까지.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김칠순(62) 경희대 의류디자인학과 교수가 서양화가로 이탈리아 밀라노대에서 12~13일 개인전을 연다. 김 작가는 다양한 재료와 표현 기법의 작품으로 80회 이상 국내외 단체전에 참여했으며 개인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유화 4점과 아크릴화 2점, 수채화 4점을 선보인다.김 작가는 미국 뉴욕 파슨즈 디자인 스쿨에서 프로덕트 디자인(텍스타일 디자인)을 공부하고 귀국한 후 1999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주로 실크, 면, 마 등의 섬유에 안료를 이용해 추상적인 형태를 그려왔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귀하는 소련이나 중국으로 탈출을 준비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된 지 한 달이 채 안된 1950년 10월 13일,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보낸 편지는 북한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렸습니다. 성공적인 상륙 이후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미군에 맞서 김일성은 지원 병력을 다급히 요청했지만, 소련은 끝내 파병을 거부하죠.반면 마오쩌둥은 스탈린이 절망적인 편지를 보낸 지 엿새 만인 10월 19일 중공군의 참전을 결정합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란 말이 있듯, 이는 북한 외교의 중심 축이 소련에서 중국으로 옮겨간 결정적 계기가 됐죠.지난 달 김정은과 푸틴이 정상회담을 통해 동맹조약 부활을 선언했지만, 역사는 북한과 러시아의 관계가 늘 아름답지 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노이 노딜’로 쇼크에 빠졌던 김정은이 중국을 제끼고 일단 러시아에 풀베팅을 한 형국이지만, 그동안 북러관계는 배신과 애증의 연속에 가까웠습니다.북러 밀착 이후 한국의 자체 핵무장 주장까지 나오고 있지만, 과도한 불안을 갖기 보다 차분히 대응해야하는 이유입니다. 그럼, 현 북러 밀착을 평가하기에 앞서 시계를 다시 한국전쟁 당시로 돌려보겠습니다.‘유럽 세력확대’ 위해 한반도 이용한 스탈린“한반도 전쟁에 중국을 끌어들여 미국과 싸우게 하면 미국이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못하게 될 겁니다. 이는 유럽 사회주의를 강화하는 시간을 벌게 된다는 사실을 뜻합니다.”스탈린이 1950년 8월 27일 클레멘트 고트발트 체코 공산당 서기장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그해 6월 28일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 유엔군 파견을 결정할 당시 소련 측 유엔 대사가 불참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면서 중국을 전쟁에 끌어들인 이유가 미국의 발을 아시아에 묶어 유럽에서 사회주의 세력 확대를 노리기 위해서였다고 말한 겁니다.1951년 7월 시작된 정전협상이 2년이나 시간을 끈 것도 이런 스탈린의 의도가 반영됐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최대한 전쟁을 오래 지속해 미국이 유럽에 개입할 여유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는 거죠. 소련의 안보 위협에 불안을 느낀 영국이 한반도에서 미국의 확전을 경계하고, 조속한 종전을 요구한 이유입니다.냉혹한 현실주의자였던 스탈린은 손 안대고 코풀려는 격으로, 소련군의 전면적인 참전은 거부한 채(소수의 소련 공군도 중공군으로 위장해 투입) 중공군만 끌어들이는 지극히 이기적인 전략을 관철시켰습니다. 이처럼 소련의 대 한반도 전략은 철저히 유럽 중심 사고에서 한반도를 부차적인 방편으로 이용하는 행태를 보였죠.이는 탈냉전을 촉발한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정책 시기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북한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1988년 서울올림픽 참가를 전격적으로 결정한 게 대표적입니다. 한국으로부터 경제 지원이 시급했던 소련은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맞물려 1990년 9월 한국과 수교를 맺습니다. 조소동맹이란 봉인이 사실상 와해된 상황에서 소련은 이듬해인 1991년 9월 18일 안보리 이사국으로서 남북한의 UN 동시 가입을 지지하죠.이렇게 남한 일변도로 편향돼 있던 러시아의 한반도 외교안보 정책은 소련 와해 후 옐친 때까지 이어지다 푸틴 집권 이후 서서히 바뀌기 시작합니다. KGB 출신으로 구소련 시절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푸틴의 야망이 한반도에서 남북한 등거리 외교를 추진하는 계기가 됐죠.1999년 12월 집권한 푸틴은 이듬해 2월 이바노프 외무장관을 평양에 보내 ‘조러 우호선린협력조약’을 체결하고, 그해 7월 평양을 방문합니다. 당시 한국을 먼저 방문하리라는 세간의 예상을 깬 것으로, 소련과 러시아 역사를 통틀어 국가원수가 최초로 방북한 사례였습니다.부활한 ‘북러 밀월’ 얼마나 갈까일각에선 김정은과 푸틴이 지난달 맺은 조약의 실효성을 의심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북한과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는 점(러시아의 부족한 재래식 무기를 북한이 공급해주고, 대북제재로 곤란한 북한경제를 러시아가 지원)에서 종전 후 러시아가 태도를 바꿀 수 있다는 거죠.사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동맹에 시효가 있었다는 점, 특히 상대적 강대국과 약소국 간의 ‘비대칭 동맹’은 ‘방기(abandonment)와 연루(entrapment)의 딜레마’에 빠지기 쉽다는 점에서 더 그렇습니다. 동맹을 맺고도 안보위기 시 약소국이 도움을 받지 못할 수 있는 위험이 방기라면, 연루는 동맹으로 인해 강대국이 원치 않는 갈등(전쟁 등)에 휘말릴 수 있는 위험을 말합니다. 이를 북러동맹에 대입한다면 한반도에서 안보위기가 발생할 때 북한은 방기 위험에, 러시아는 연루의 위험에 빠질 수 있기에 상호 간 입장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얘깁니다.특히 위에서 살펴봤듯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거대한 영토를 갖고 있는 러시아의 경우 역사적으로 동아시아보다 유럽에 대한 정책 우선순위가 더 높기에 스탈린이 한국전쟁 참전을 외면한 것처럼 연루의 위험을 감당하지 않을 가능성이 꽤 있습니다. 즉, 현재 러시아 외교안보 정책에서 최우선 순위인 우크라이나 전쟁이 마무리 되면, 북한에 대한 지원을 줄일 수 있다는 겁니다.이와 관련해 지난 달 양국 정상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김정은이 ‘동맹’이라는 표현을 세 차례 쓰면서 이를 부각한 반면, 푸틴은 이 단어를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도 러시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군사 상호원조 조항을 설명하면서 방어적 성격만 강조했죠. 이번 조약을 둘러싼 양국 간 온도 차이가 느껴지는 대목입니다.북중러 3각 관계에 미묘한 파장이번 조약은 북중러 3국 관계에 미묘한 파장을 던져주고 있다는 점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입니다. 역사적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가 경쟁관계에 있는데다 1950, 60년대 중소 갈등기에는 북한을 서로 끌어들이기 위해 경쟁한 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중국으로서는 북러 밀착이 달갑지 않을 수 있다는 얘깁니다. 시계를 1960년대로 돌려보죠.1969년 3월 소련-중국 국경지대인 시베리아 우수리강의 젠바오섬에서 양국 간 교전이 벌어져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1956년 스탈린 사후 마오쩌둥이 소련 공산당과 사상투쟁을 벌이며 사회주의 종주국을 둘러싼 갈등을 벌인 게 원인이었죠.1964~1969년 중소 양국이 4189회에 걸쳐 국경분쟁을 벌이는 등 갈등이 첨예해지자, 소련은 중국 핵시설에 대한 공격까지 검토합니다. 1969년 8월 아나톨리 도브리닌 주미 소련대사가 미국에 중국에 대한 공격을 암시하며 지원을 요청할 정도였죠. 이에 양국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미국이 7000km에 이르는 중소 접경지대를 정찰한 결과, 소련군 약 40개 사단이 무더기로 배치된 정황을 파악해 중국에 알려줬습니다. 한마디로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간 거였죠.중소갈등 국면에서 북한은 중국과 소련을 오가며 실리를 취합니다. 예컨대 북한은 1960년까지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무상원조의 43.17%와 30.75%를 각각 받아내죠. 또, 김일성은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일으켜 친소파, 친중파(연안파)를 모두 제거하며 유일 지배체제의 기반을 구축합니다. 미중 데탕트 국면에선 북한이 소련으로 밀착 가능성을 암시하며 중국을 압박하기도 했죠.북중러의 이런 미묘한 3각 관계는 이번 북러 밀착 국면에서도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중국은 지난달 푸틴 방북 기간에 한중 외교 안보대화를 진행하면서 일종의 견제구를 날렸죠. 또 중국 언론사 차이신(財新)은 북러 간 군사관계가 과열되고 있다면서 유사시 자동 군사개입 조항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습니다.한국 핵무장의 기회 비용북러동맹은 한국의 자체 핵무장론을 촉발시키고 있습니다.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한미 확장억제를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한편, 전술핵 재배치 및 NATO식 핵공유, 자체 핵무장 또는 잠재적 핵능력 구비 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대안에 대한 정부 차원의 검토 및 전략적 공론화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적시했죠.그러나 한국의 핵무장은 많은 기회비용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점을 꼭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NPT 체제에 근거해 핵확산 방지에 주력하는 미국과의 동맹이 와해될 수 있습니다. 핵보유를 포기하는 대신 한국에 핵우산을 제공한다는 것이 한미동맹의 핵심 조건이기 때문이죠. 한국의 핵심 안보자산인 한미동맹을 포기하면서까지 핵무장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봉착할 수밖에 없습니다.두번째는 국제사회로부터 전방위 제재입니다. 해외무역에 의존해 사는 한국이 미국, 유럽, 중국 등으로부터 금융, 경제제재를 받는다면 폐쇄국가인 북한 이상으로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죠. 해외 의존도가 높을수록 경제제재의 파괴력은 더욱 커지기 마련입니다.세번째는 핵 군비경쟁이라는 ‘안보 딜레마’에 빠질 우려입니다. 한국이 핵무장에 나서면 이웃국가인 일본도 동참할 가능성이 높고 그렇게 되면 동아시아 전역이 핵군비 경쟁의 악순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는 안보위협을 완화하기 위해 택한 핵개발이 도리어 위기를 확대하는 딜레마를 초래할 수 있죠.한미동맹 기반 위에 한중관계 지렛대로지금까지 다룬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① 러시아는 소련 시절부터 한국전쟁 참전을 거부하고 종전을 늦추는 등 유럽 중심 사고에서 한반도를 이용하는 행태를 보였고,② 북러 간 비대칭 동맹의 구조상 러시아가 연루 위험을 회피할 가능성이 상존하기 때문에③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후 북러 밀착이 와해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④ 여기에 1950년대 중소갈등의 역사가 보여주듯, 러시아와 중국의 미묘한 경쟁관계가 북중러 3각 구도에 균열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습니다.이런 사항들을 고려할 때 북중 밀착에 과도한 불안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겁니다. 결국 굳건한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한중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북중러 3각 구도의 불안정성을 파고들 수 있는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한미동맹에 균열을 일으키고, 동아시아에서 안보 딜레마를 초래할 수 있는 핵무장론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한 접근이 필요합니다.[참고 문헌]-국가안보전략연구원 <러북정상회담 결과 평가 및 對 한반도 파급 영향> (INSS 전략보고, 2024년 6월)-하상식 <러시아의대한반도 정책: 러시아, 북한관계를 중심으로>(국제정치논총 40집 4호, 2000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로씨야련방 사이의 포괄적인 전략적동반자관계에 관한 조약> (조선중앙통신 2024년 6월 20일)“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비좁은 지하철 운전실, 기관사의 얼굴이 갑자기 사색이 된다. 평상시 상비하고 다니는 지사제를 먹어도 소용없는 배탈이 난 것. 한번 운전대를 잡으면 2시간 30분 동안 절대 내릴 수 없다. ‘똥 대기’로 불리는 대기 기관사를 태우기 위해서는 아직도 몇 개 정거장을 더 가야 한다. 고독한 운전실에서 맞은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기관사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 책은 부산 지하철 2호선 현직 기관사인 저자가 쓴 에세이다. 대도시에 사는 평범한 이라면 누구나 이용하는 지하철의 세계를 새로운 각도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저자는 일터이자 삶의 공간인 지하철과 그 역사에서 만나는 동료와 승객들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그려낸다. 무리하게 지하철 문으로 돌진한 경험, 승객이라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그중에서도 비가 오는 날이면 출몰하는 일명 ‘쟈철 에페’가 공포의 대상이라고. 마치 펜싱의 에페 종목 선수처럼 닫히는 문을 향해 우산을 꽂아 넣는 이들을 말한다. 정시 운행을 사수해야 하는 기관사들에게는 기피 1순위다. 진상 승객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다. 지하철에서 갑자기 쓰러진 이를 돕기 위해 승객들이 나선 감동의 순간도 포착한다. 저자가 종착역에서 늘 한다는 안내 방송은 마음에 위로를 준다. “우리 열차의 마지막 역인 양산역입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모두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안 좋은 일, 슬픈 일들은 열차에 두고 내리시면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980년 청와대 경제과학비서관에 부임한 오명은 미래 먹거리 산업을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는 한국의 기술, 경제 여건, 산업별 특성 등을 표로 빼곡히 정리한 뒤 점수를 매겨봤다. 선입견에서 벗어나 냉철하게 숫자로 파악한 결과는 ‘전자산업’이었다. 노동집약적이면서 첨단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산업 특성이 한국에 적합하다는 판단이었다. 기술 개발 속도가 빠르고 기술 수명이 짧은 전자산업은 한국과 같은 후진국이 도전하기에 역부족이라는 당시 경제 관료들의 견해와 다른 접근이었다. 오명은 관련 부처와 산업계, 연구소의 인재들을 모아 전자공업 육성을 위한 팀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반도체, 컴퓨터, TDX(전화전자교환기)를 3대 전략 목표로 정하고 5년 내 전자산업 수출 규모를 2.5배 늘리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내놓았다. 지금의 1등 수출 품목인 반도체 산업의 비약적인 발전 토대가 이때 마련된 것이다. 국내 과학기술 분야 석학들의 단체인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기획한 이 책은 오명 전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의 리더십 비결을 분석했다. 한국 정보화 사업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받는 그는 체신부 장관 및 차관, 교통부 장관, 건설교통부 장관, 건국대 총장, 동아일보 회장 및 사장 등을 거치며 그만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1980년대 체신부 차관 시절 2000년 정보화 시대를 대비한 세미나를 열고 장기 계획을 수립하는 등 다양한 일화들도 눈길을 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사랑하는 아들 롤랑에게. 아빠는 너처럼 어린 한국의 아이들이 길에서, 흙에서, 눈 속에서 헤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곳에 왔단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프랑스의 랄프 몽클라르 장군(1892∼1964)이 1950년 12월 23일 당시 생후 11개월의 어린 아들에게 보낸 편지다. “혹독한 겨울 날씨로 손가락이 얼어붙어 총을 쏘기조차 어려웠다”던 그해 겨울 몽클라르는 중공군의 거센 공세를 버텨내고 있었다. 이윽고 이듬해 2월 그가 이끈 프랑스군과 미군 1개 연대가 경기 양평군 지평리에서 38선 아래로 밀고 내려온 중공군 3개 사단과 맞닥뜨렸다. 5 대 1의 압도적인 병력 차이 탓에 전술상 유리한 고지를 버리고 평지에 원형 진지를 구축한 결사항전이었다. 1, 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은 백전노장 몽클라르의 지휘 아래 총검을 단 백병전까지 불사한 끝에 연합군은 중공군 참전 이래 첫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6·25 전사에 전설로 남아있는 ‘지평리 전투’다. 몽클라르는 6·25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스스로 프랑스 육군 중장에서 중령으로 네 단계나 계급을 낮췄다. 대대 단위만 파병하기로 한 프랑스 정부의 방침 때문이었다. 장성에서 영관급 장교로 낮아지면서까지 전쟁에 나선 이유에 대해 그는 “곧 태어날 자식에게 내가 프랑스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최근 KT 자회사인 스토리위즈와 ㈜지평리문화콘텐츠가 지평리 전투에서 몽클라르 장군의 이야기를 웹툰과 웹소설로 제작하기로 했다. 앞서 지난해 국가보훈부는 지평리 일대의 남한강 자전거길 3421m(참전 프랑스군 3421명을 의미)를 ‘몽클라르의 길’로 조성했다. 남한강의 멋진 경치를 감상하며 라이딩을 즐기는 여행자들은 이 구간을 통과할 때마다 자유를 위해 헌신한 연합군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지방자치단체별로 지역 문화유산을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는 추세와 맞물려 지평리 사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길만 조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기 얽힌 사연을 웹툰 등으로 풀어내는 ‘스토리텔링’을 결합해서다. 유명 인사나 장소를 기념하는 입간판만 세우는 방식으로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데 한계가 있다. 예컨대 공주 공산성(公山城)의 경우 몇 해 전 이곳에서 옻칠갑옷이 발견된 것과 맞물려 신라군에 맞서 최후 항전을 벌인 의자왕이 비장한 의식을 치르는 장면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유구와 유물의 의미는 장소가 갖는 스토리텔링에 크게 좌우될 수 있다. 고대 로마의 휴양 도시였던 터키 히에라폴리스의 ‘고대 수영장’이 대표적이다. 이곳 온천장 바닥에 깔아놓은 2500년 전 로마시대 조각상과 기둥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관광객들은 이를 직접 밟으면서 692년의 대지진으로 무너진 고대 문명의 흔적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따지고 보면 경주가 한국을 대표하는 역사 도시가 된 것도 신라 고분 발굴의 스토리텔링 덕이 컸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주도로 추진된 황남대총 등 대형 적석목곽분 발굴은 신라 황금문화의 화려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1971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을 손수 입안하며 발굴 유적을 아우른 것처럼, 문화유산에 스토리텔링을 덧입히는 정책을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 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
제2차 세계대전만큼 학계에서 깊이 있게 연구된 분야는 별로 없다. 20세기 냉전을 거쳐 21세기 미중 패권시대에 이르기까지 세계 질서를 형성한 핵심 동인이 2차대전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관련 학술서들이 나왔지만 이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서사는 ‘선한 연합국 vs 탐욕의 추축국’이란 대립 구도다. 이들 진영 간의 패권 경쟁과 이데올로기 갈등 등이 대전으로 치달았다는 것이다. 영국의 원로 현대사학자인 저자는 이 책에 전통적 견해와 결이 다른 수정주의 시각을 담았다. 2차대전을 이미 식민지를 거느린 기존 ‘영토 제국’과, 이 대열에 끼기 위해 도전한 신흥국들 사이의 ‘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한 것. 이 구도로 보면 식민지에서 고혈을 짜내 막대한 부를 축적한 당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도 전쟁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관점에 따라 저자는 2차대전의 시작점을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한 1939년이 아닌, 일본이 만주를 침략한 1931년으로 본다. 이후 1935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 1937년 중일전쟁 등 식민지 침탈을 둘러싼 전 지구적 분쟁 과정이 2차대전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 것. 군인뿐 아니라 2차대전을 맞은 당시 민간인들의 경험이나 감정, 심리 등을 깊이 있게 분석한 내용도 눈길을 끈다.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민간인을 일종의 군인으로 간주하는 전쟁의 ‘민간화’가 이례적으로 벌어졌다는 것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