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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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임현석]역사를 되돌아보는 방식들

    1979년 12월 12일 밤 10시 조금 넘은 시각. 한 무리의 군인들이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사(현 일민미술관 건물)에 들어섰다. 수도경비사령부(수경사·현 수도방위사령부) 마크를 단 군인들이 총기를 들고 각 층마다 진입해 창문을 열고 밖을 향해 사격 자세를 취했다. 군인들은 1층과 옥상을 수시로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무전 교신을 했다. 새벽 3시경 ‘병력을 이동시키라’는 무전 연락을 받은 뒤 수경사 병력들은 철수했다. 새벽 4시경 이번엔 공수부대 병력이 동아일보사에 진입했다. 먼동이 틀 무렵인 6시 반, 또 다른 병력이 진입한다. 그날을 떠올리던 동아일보 기사(1987년 11월 21일 9면)는 이렇게 덧붙인다. “공수부대는 수경사 병력으로 교체됐으나 이들은 처음 왔던 수경사 병력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군인들이었다.” 서울 한남동에서 총소리를 들었다는 시민 전화를 받고 현장 취재에 나간 기자들과 회사에 소집된 기자들은 급변하던 그날 상황을 각각의 역사적 현장에서 지켜봤다. 그리고 13대 대선을 한 달여 앞둔 1987년 11월 특집 연재 기획 ‘12·12 수수께끼’(1987년 11월 14∼24일)를 통해 상당 부분 베일에 가려져 있던 그날의 세부를 까발렸다. 그때 기록을 보면 지금도 서늘하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다. ‘유신통치 기간 중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비서실 지침에 의해 움직인 관습에 젖은 행정부처는 물론 사법부까지도 계엄 업무와 관련이 없는 일반 소관 업무조차 계엄사령부에 세부 지침을 요구하거나 지침이 없다는 이유로 직무를 정상적으로 집행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이처럼 힘의 행사를 요구받기 시작한 군 조직 내부에서 주도권을 잡고자 하는 파워 게임이 전개되는 현상은 권력의 속성상 필연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중략) 국가 위기 상황에서 군이 근본 임무에 충실치 않고 실력자끼리 힘의 대결을 벌이다 민주화를 8년이나 늦어지게 한 사건이라는 역사적 심판도 면할 수 없다.’(1987년 11월 23일 5면) 여기서 기사는 12·12 군사반란이 권력의 속성을 드러내고 민주화를 늦춘 사건이라는 의의를 중시한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이들 각자의 대의나 욕망은 기사에선 모두 의견이자 주장으로만 처리된다. 그리고 어떤 주장이나 의견도 역사적 심판(민주화를 늦어지게 한 사건)이나 의의를 넘어설 순 없다. 기사는 증언을 최대한 수집하되 진실은 대립하는 의견 속 어딘가쯤에 위치한다고 여긴다. 예컨대 최규하 당시 대통령을 두고선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 재가 요청을 물리친 것은)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의견과 “정승화 총장이 12월 9일 급박하게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전보 인사를 대통령에게 건의했지만, 별 조치 없이 48시간을 끌었다”란 김치열 전 법무부 장관 비판이 상존한다는 점을 당시 기사는 밝히고 있다. 우유부단해 실기했다거나 군 실세의 재가 요청을 물리친 강골이라는 상반된 평가 중간 어디쯤 진실이 있을 것이다.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되, 역사적 의의를 무겁게 여기는 것. 또 반대로 결론을 엄연하게 여기되 동시에 역사 주체들의 의도와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는 것. 냉정한 역사 인식은 이 사이를 오가는 것이어야 한다. 12·12 군사반란 당일 긴박한 시간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은 팩트에 기반한다지만 캐릭터를 명확하고 단순하게 설정해, 많은 부분 상상력에 기댄 의견임을 숨기지 않는다. 그동안 12·12 군사반란에 대한 방송 재연극이 다수 있었는데, 이전과는 다르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그동안의 재연이 대부분 신군부 세력이 어떻게 권력 획득에 성공했는지를 조명하는 데 집중했던 반면 이번엔 진압군의 실패 과정에 초점이 맞춰지며 중심축이 옮겨갔기 때문이다. 기존 서사 중심축을 흔들기 위해 영화 편집은 훗날 신군부 세력과 반란을 진압하는 육군본부 지휘체계를 빠르게 오가며, 진영을 교차하는 것만으로도 팽팽한 기싸움이 느껴지게끔 한다. 영화는 주요 인물의 동기를 대의와 욕구로 단순하게 처리하는데, 이 점은 역사를 납작하게 만든다는 비판과 서사성을 끌어올려 극 자체의 몰입감을 높인다는 평가가 공존할 만하다. 충실한 재연이라는 측면만 놓고 보면 드라마 ‘제5공화국’ 등 기존 재연극에는 못 미치지만 역사적 사실에 대한 환기라는 면에선 호소력이 있다. 12·12 군사반란을 다룬 다른 재연극들이 대개 5공의 종말까지 다루면서 권력 앞에 의리란 덧없다는 교훈까지 나아가는 것과 달리, 영화는 그저 권력욕이 비루하다고 보여주는 쪽에 가깝다. 정말이지 권력이란 무엇일까. 서울의 봄을 비롯한 숱한 해석들과 여러 관점 속에서 전체적인 그림을 맞춰보고 싶어진다.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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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임현석]누가 더 인간적인가?

    그리스 신화에서 명계를 다스리는 죽음의 신 하데스는 로마 신화로 건너오면 플루토(Pluto)가 된다.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시리즈 ‘플루토’는 죽음의 신을 자처하는 악당 로봇 플루토와 어린이 로봇 아톰의 대결을 그린다. 아톰? 맞다. 그 ‘우주소년 아톰’이다. 애니메이션 만화 원작은 ‘20세기 소년’ ‘몬스터’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우라사와 나오키 작이다. 데즈카 오사무(1928∼1989)의 유명 만화 아톰 시리즈 중 ‘지상 최대의 로봇’(잡지 기준 1964년 작) 편을 리메이크했다. 만화 플루토는 데즈카 원작에서 설정된 주인공 아톰의 출생연도인 2003년 연재를 시작(2009년 종료)했다. 연재 시기를 부러 아톰 출생연도에 맞춘 것. 만화를 통해 로봇과 인간의 관계를 일찍이 사유한 데즈카 감독에 대한 헌사 의미가 담겼다. 애니메이션 플루토도 기본 스토리 골격은 리메이크 대상작(지상 최대의 로봇)을 따른다. 데즈카 작에서 중동의 한 왕국 술탄이 사치로 인해 왕좌에서 쫓겨나고 이에 대한 분풀이로 악당 로봇 플루토를 개발해 아톰을 비롯한 지상 최강의 로봇 7대와 싸우게 한다. 플루토는 최강 로봇들을 하나씩 쓰러뜨린다. 원작인 지상 최대의 로봇 편에서는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로봇이 등장한다. 희생당한 친구(브란도)와의 우정을 떠올리며 복수를 다짐하는 로봇(헤라클레스), 그와의 전투 후 죽기 직전인 플루토를 살려준 채로 떠나는 아톰, 플루토를 이길 힘이 있지만 어린이를 구하려다가 뒤를 잡혀 죽는 로봇(엡실론) 등이다. 플루토 역시 아톰을 유인하기 위해 아톰의 여동생 우란을 납치하고서 죄책감을 느끼는 것으로 그려진다. 반면 술탄과 그를 추종하는 박사는 플루토를 다그치며 전투에서 지면 자폭하게끔 설계한다. 작품은 묻는다. 누가 더 인간적인가? 인간적이라는 건 무엇인가? 만화는 인간만을 주체에 두는 무성의한 이분법과 도식을 비튼다. 우라사와도 이 점에 끌렸으리라. 플루토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이 사유를 증폭시킬 정교한 세계관을 만든다. 인공지능(AI)과 기계공학이 고도로 발달해 인간형 로봇이 보편화된 미래. 로봇인권법에 따라 로봇들 역시 인격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며 인간과 같이 살아간다. 로봇을 증오하는 인간과 그런 증오심마저 학습해 인간에 한층 더 가까워진 로봇이 출현한다. 로봇 아톰과 로봇 형사 게지히트, 플루토는 모두 고도로 진화해 인간을 닮았다. 그들은 악인과 선인 모두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1960년대 아톰 원작과 달리 플루토는 인간성 해석에 더 집중하는 서스펜스 스릴러다. 애니메이션에서 인간은 증오로 인해 스스로 종말을 향해 간다. 증오하는 것도 인간이고, 증오를 끊어낼 힘이 있는 것도 인간뿐이다. 아톰의 재해석 역사를 보는 것도 흥미롭다. 1964년 데즈카 작 지상 최대의 로봇은 민족주의적 성향이 다분하다. 이란으로 추정되는 한 중동 국가에서 만든 로봇이 지구 전역을 돌며 각국 대표 로봇들을 각개 격파하다가 일본 대표 로봇 아톰에 가로막힌다는 스토리는 미국인 레슬러를 때려눕히는 역도산의 프로레슬링 쇼처럼 보인다. 강한 일본이 패전 후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스토리로도 해석되는 것. 플루토와 싸우는 최강 로봇 7대 중엔 미국산이 없다. 1960년대 이란은 친미 국가였다. 플루토 머리에 달린 두 개의 뿔은 커다란 두 개 귀를 단 디즈니 만화 캐릭터와도 닮아 보인다. 플루토는 플루토늄, 우란은 우라늄, 아톰은 아토믹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전후 트라우마도 드러난다. 단, 플루토를 절대 악으로만 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훗날 리메이크를 통해 풍요롭게 해석할 여지를 남긴다. 만화 플루토가 나온 2003년, 지상 최강의 로봇들이 로봇 무기화를 단행한 페르시아 왕국을 단죄하기 위한 다국적군에 참여했다는 설정 등은 이라크전쟁을 떠올리게끔 했다. 선악으로 도식화하는 서구 패권주의에 대한 반발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민족주의 해석,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풀이되더니, 올해 공개된 애니메이션은 AI 시대와 중동 갈등 와중에 공개돼 공존과 증오 극복을 화두로 한 작품으로도 해석되고 있다. 트라우마에 갇힌 일국 민족주의에서 증오를 극복하는 보편성 추구로 나아가는 재해석 과정이 의미심장하다. 희망을 생각해 보게끔 한다.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밝힌 제작 기간은 10년,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작화감독 중 한 명이자 지브리 출신 가와구치 도시오가 감독을 맡았다. 시리즈는 총 8개 작품 각 1시간 분량이다.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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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임현석]아무리 외로워도 귀신과 어울리지 말 것

    공포영화의 핵심 공식. 세상에는 꼭 하지 말라는 일을 하는 이들이 있고, 영화에서 이들은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왜 금기를 넘는가? 인간은 어리석기 때문이다. 왜 어리석은가? 인간은 욕망하기 때문이다. 무슨 욕망? 좋은 공포물이라면 몇 단계를 거쳐 마지막엔 이 질문 앞에 도착한다. 여기 지금의 욕망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공포물 ‘톡 투 미’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린 너무 외롭다고. 그래서 우린 가끔 너무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된다고. 영화 톡 투 미는 90초짜리 쇼트폼 동영상 챌린지에 몰두하는 젊은이들을 비춘다. 이들은 소통을 즉각적인 동영상 소비로 대신한다. 이 시대에 소통이란 ‘관종’으로서 소비되거나, 감정을 유발하는 도구로서 대상을 호출하는 것을 의미할 뿐, 여기 누군가를 이해하거나 누군가에게서 이해받고자 하는 마음은 해소되지 못한 채 깊은 갈증만을 남긴다. 목마른 자, 기꺼이 플랫폼 시대의 관종이 된다. 영화 속 엄마를 잃은 17세 소녀 미아는 심한 우울증으로 인해 수시로 손톱을 만지작거리는 아이다. 미아는 외로움 속에 아버지를 떠나 친구 제이드 집에서 살다시피 한다. 어느 날 미아는 제이드와 참석한 한 파티에서 또래 사이에서 유행하는 90초 빙의 챌린지 톡 투 미 의식을 치른다. 미아가 또래들과 어울리려는 마음으로 자진해서 의식에 참여한 것. 기꺼이 스스로 온라인 동영상 속 소비 대상이 된다. 미아는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박제 손을 잡고 귀신을 부르는 주문(“톡 투 미”)과 귀신을 몸으로 불러들이는 주문을 외고 빙의 체험에 돌입한다. 친구들은 스마트폰 동영상으로 미아의 신비 체험을 촬영하다가 그 이상을 지나면 귀신이 붙는다는 90초를 지나서 가까스로 미아와 박제의 손을 떼어낸다. 미아는 그날 의식 이후 이상한 환영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번엔 제이드의 집에서 치러진 심령 파티. 제이드의 동생 라일리가 빙의 체험을 하던 중 미아의 엄마가 몸에 붙은 것처럼 행동한 뒤 발작을 일으키고 자해하는 모습을 본다. 미아는 엄마가 죽은 이유를 찾고, 귀신에 붙들린 라일리의 영혼을 구해내겠다는 마음을 품지만 곳곳에서 함정과 마주친다. 영화는 플랫폼 소비의 취약성과 현대적 욕망을 정확히 들여다보았다는 반응을 이끌어냈다. 우울감 속에서 호러를 발견했다는 호평 속에 세계 최대 영화 비평·리뷰 사이트인 ‘로튼 토마토’에서 토마토 미터(신선도 지수·긍정적 평가를 내린 사람의 비율)는 94%(12일 기준)에 이른다. 영화 내용만 들여다보면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지 말고, 위험한 장난은 하지 말라는 어른들의 경고를 오컬트적으로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엔 그러한 금기도 새롭게 해석된다. 여기서 친구들은 돌아가면서 영상을 촬영하고, 온라인에 업로드하면서 놀이 문화에 심취하는 이들로 그려진다. 타인에게 주체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대상으로서 소비하는 놀이는 결코 서로를 이어주지 못한다. 라일리가 자해 소동을 벌이고 경찰이 집에 찾아오자 책임 피하기에 급급하다. 빙의 의식에 참여한 이들이 이상 행동을 벌이고, 촬영본에 대해 지워 달라고 친구들에게 사정하는 모습을 통해 영화는 스스로 주체가 되지 못하는 이들이 결국 돌고 돌아 공포에 사로잡힌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타인을 대상으로서 소비하지 말고, 주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소비되지도 말라는 것. 이 영화의 메시지다. 타인과 연결되고 싶더라도 그 주체의 자리는 항상 나여야 하며, 타인의 욕망 역시도 주체의 자리 위에 놓아주어야 한다. 누군가와 어울리더라도(그게 귀신이라고 해도), 자신을 내어주는 방식이어선 곤란하다. 그러니 오해하지 말 것. 외로움과 이에 대한 해소라는 욕망 자체는 죄가 없다. 인간이 존엄하다면 욕망도 마찬가지일 터. 영화를 보면서 올해 일본 아쿠타가와상을 받고 최근 한국에 번역된 소설 ‘헌치백’이 절묘하게 떠올랐다. 중증 장애인인 소설 속 주인공은 자기 욕망이 얼마나 엄연한지 받아들이면서 자신을 대상이 아닌, 주체의 자리에 놓는다. 욕망을 바라보는 영화와 소설 두 시선을 교차하며 살피는 것도 흥미롭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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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라인 라운지]윤곤강 시·비평 세계 재조명… 전집 출간

    ◇윤곤강 시·비평 전집(소명출판) 윤곤강 시인(1911~1950)의 문학 활동을 정리한 ‘윤곤강 시·비평 전집’이 출간됐다. 1911년 충남 서산 태생인 윤 시인은 1928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0년 일본 센슈대학에서 법철학을 전공하던 중 1931년 비판 7호에 시 ‘녯성터에서’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신석초, 김광균, 이육사 등 주요 문인들과 시 전문 동인지 ‘자오선’(1937)을 발간하는 등 당대 문단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해방 이후 해방기념시집 ‘횃불’(1946)에 참여했고 1948년에는 시집 ‘피리’, ‘살어리’와 비평집 ‘시(詩)와 진실(眞實)’을 펴냈다 윤 시인은 특정 문예사조에 매몰되기보다는 당대 담론을 폭넓게 용인한 시인으로 평가된다. 한국문학이 근대 담론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고 그 방식에 대해 고민하던 1930년대 문단에 등장해 리얼리즘·모더니즘·전통주의 등 다양한 층위의 문학 활동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시론을 펼쳤다는 평도 따라 붙는다. 해당 문집은 ‘윤곤강 문학기념사업회’가 기획해 출간됐다. 해당 전집 출간에 맞춰 이달 3일 오후 5시 서울 종로구 사간동 출판문화회관에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임현석 기자 lhs@donga.com}

    • 2023-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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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임현석]그도 어른이 되려는 것일까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82)는 은퇴 선언이 잦은 감독이다. 최신 극장판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무려 네 차례의 은퇴 번복 끝에 나왔다. 최신작을 두고 언론에서 나오는 혼란스러운 수식어(사실상 마지막 작품, 새로운 시작, 복귀작, 이번엔 진짜 은퇴작일지도…)는 앞선 이력 때문이다. 첫 은퇴 선언은 1997년이다. 그는 당시 극장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를 만든 뒤 개봉에 앞서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의 초기 극장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년)의 주제의식을 잇는 작품으로 구상에만 16년, ‘붉은 돼지’(1992년) 이후 5년 만에 내놓은 극장판으로 감독 사상의 집대성 느낌이 강했던 터라 은퇴 선언이 거장의 결기처럼 여겨졌다. 해당 작이 1400만 명 이상 관객을 동원하며 일본 극장가 관객 기록을 갈아치운 가운데 50대 감독의 이른 퇴장을 받아들일 수 없던 팬들 성화로 그는 이듬해 은퇴를 철회했다. 그러나 다음 작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년)을 내놓으며 재차 은퇴 선언. 그러다가 당초 기획만 맡기로 했던 2004년 작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선 직접 감독직을 맡으며 복귀. 다음 작 ‘벼랑 위의 포뇨’(2008년)를 제작 중 또 은퇴 선언, 다시 복귀. 가장 최근 은퇴 선언은 10년 전이다. 장편 극장판 ‘바람이 분다’(2013년) 발표 당시 미야자키는 기자들에게 “또 말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번엔 진짜 은퇴다”라고 발언했다. 본인도 머쓱했는지 말한 뒤엔 멋쩍게 웃었다. 그동안 그의 은퇴 번복은 특유의 완벽주의 성향과 경영상 이유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은퇴 선언과 무관하게 매일 회사에 출근해 오던 그로선 뒷방 신세를 견디지 못하고 답답한 마음에 결국 복귀하는 패턴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또 그는 흥행 실적이 상대적으로 다소 부진했던 경우(벼랑 위의 포뇨) ‘잘 팔리는’ 감독으로서 실적을 만회하겠다는 마음가짐을 밝히며 복귀하기도 했다. 흥행과 작품성을 보장할 수 있는 진짜 후계자가 나오느냐가 관전 포인트가 됐다. 그땐(아쉽긴 해도) 미야자키도 진짜 내려놓겠지 하고 말이다. 그러나 전작 ‘바람이 분다’부터 이런 시각이 달라졌다. 미야자키가 이전 작품들을 미진하게 여기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쓰겠다는 열의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 자신의 이야기를 끝내지 못한 것이다. 그는 최근 들어 신화적 세계관을 덜어내면서 보다 직접적인 형태로 자신의 어린 시절 무의식을 지배했던 이미지와 그 근원에 대해서 풀어놓는다. 그 과정에서 미야자키 이전 작품들에 녹아들어 있는 생태주의와 반전·평화주의는 모순적인 배경 위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이 선연해진다. 예컨대 전작 ‘바람이 분다’는 평화를 바라면서도 전쟁에 사용되는 전투기에 매혹된 어린 시절의 향수가 강하게 녹아들어 있다. 그거 모순 아니냐는 질문에 노감독은 당시 인터뷰에서도 선선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평화주의와 향수를 오가다가 결국 우울로 이어지는 해당 작품의 서사는 느슨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는 그 작품만으론 자신의 어린 시절을 지배한 기억과 감정을 충분히 풀어내지 못했다고 느꼈으리라. 그는 자전적 성격이 강한 최신작에서 모순을 스스로 끄집어 낸다. 군수공장 공장장으로 일하던 아버지라는 실제 자신의 생활 배경을 소환한다. 세계가 무너진 이후에도 살아남아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과 과거 정체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번 작은 과거에 대한 향수와 환멸을 동시에 품는 실존에 대해 미야자키가 그 모습대로 인정하고 다음 스텝으로 가겠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제 관건은 어떤 세계를 만들어갈지 그 구체성에 달렸다고 말하려는 것일까. 그 점에서 의미심장한 것은 이 세계에서 있었던 일을 잊느냐, 기억하느냐가 주인공 마히토에게 달려 있다는 점이다. 미야자키에게 천착해 온 서브컬처 평론가 손지상 서울웹툰아카데미 멘토는 “결국 미야자키는 자신의 정체성과 모순을 직시한 뒤 ‘나는 이렇게 살 것’이라고 대답한 것이며 이는 제목에 숨겨진 진짜 의미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번 작은 미야자키 작품 속 소녀 이미지가 모성과 연결돼 있다는 그동안의 비평 분석에 대해 ‘히미’라는 캐릭터를 통해 직설적으로 화답하는 점도 인상적이다. 미야자키가 유년의 의미를 명확하게 인식하게 된 것일까. 그럼 이제 그도 어른이 되는 것일까. 그는 또 작품을 내놓겠지만, 적어도 그의 유년 이야기는 종지부를 찍었다. 어른이 되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질문을 던져놓고선.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전 카이로 특파원 lhs@donga.com}

    • 2023-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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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임현석]되풀이되는 폭력의 역사

    팔레스타인 지역 분쟁을 부추기는 요인들이 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벌어진 이스라엘과 아랍 세계의 구원은 차치하고서라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 강경파들은 갈등을 조정하기보다 도모하는 방식으로 이익을 취하는 구조가 공고화됐다는 점. 폭력과 갈등은 되풀이된다. 이 폭력의 악순환을 해부한 작품이 2005년 스티븐 스필버그 연출작 영화 ‘뮌헨’이다. 영화는 1972년 독일 뮌헨 올림픽에서 벌어진 이른바 뮌헨 올림픽 참사를 배경으로 한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올림픽 현장에서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단 11명을 인질로 잡고 팔레스타인 포로 석방을 요구했는데, 서독 경찰의 대응 실패로 인해 결국 인질 모두 숨진 사건이다. 이스라엘 해외 정보기관 ‘모사드’는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팔레스타인인 11명을 살해하려는 목적으로 5인조 암살단을 구성한다. 모사드 출신 비밀 요원 애브너(에릭 바나)가 리더로 암살단을 이끈다. 하지만 애브너는 목표물을 제거할수록 혼란을 겪는다. 복수를 해도 상대 조직 인사가 새로운 인물로 대체되고, 새로운 제거 목표가 생겨나며 도무지 복수의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폭력으로는 악의 종식을 이룰 수 없고, 괴물과 싸우면서 괴물이 돼 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기에 암살 팀원들 역시 정체불명의 조직에 의해 하나둘 목숨을 잃으면서 복수의 대상은 더 늘어나고, 자신도 언제 제거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영화에선 무고한 테러리즘에 희생된 이들에 대한 복수심과 팔레스타인 민족 국가 건설이라는 과제에 투신하는 마음을 모두 온정적으로 다룬다. 이로 인해 영화는 다루기 어려운 복잡한 과제에 용감하게 도전했다는 긍정적인 평과 함께 덧없는 양비론과 평이한 휴머니즘에 입각한 밋밋한 작품이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특히 뮌헨 올림픽 참사가 큰 트라우마로 새겨진 이스라엘에서도 비판받고, 이슬람권에선 대부분 상영되지 못했다. 이처럼 첨예하고 당장 피해가 발생하는 사태에서 본질적이고 이상적인 해답은 설득력이 떨어지고 무력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개인의 내면에 무관심하고 충성만을 요구하는 비정한 국가와 조직의 작동 방식을 다룬 점은, 예술이 늘 그러하듯 생각해 볼 여지를 만든다. 숭고한 대의로 움직이는 시스템은 개인의 마음을 황폐화시키며, 그 자체로 폭력적일 수도 있다는 것일까. 영화가 다루는 1970년대의 잔혹 복수극 이후로도 피가 피를 부르는 잔혹 사태는 이어지고 있다. 개인의 자리가 줄어들고, 복수를 수행하는 거대 정치의 비중 영역이 커지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제대로 복수를 수행하지 않으면 더 큰 화를 부를 것이라는 두려움도 있다. 영화에서 암시한 대로 복수의 시스템이 정확하게 작동할수록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커진다. 최근 이스라엘 정치권은 강화된 안보 역량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팔레스타인을 협력 대상으로 보지 않는 기조가 팽배해졌다. 이스라엘 의회(크네세트)에서도 친아랍 목소리가 줄어드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대립을 통해 정치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극우 강경파 비중이 점차 몸집을 키워 왔으며 갈등이 누적됐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실효 지배하는 무장정파 하마스 역시 통치 무능과 비민주적인 의사 결정에 대한 팔레스타인인들의 비난 어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정국을 전환하려는 목적으로 극단주의에 입각한 테러리즘을 획책하는 경향이 더 심화됐다. 팔레스타인 민중 상당수는 하마스의 무능과 폭력성에 회의감을 느끼면서도 대안을 찾지 못한다. 여기에 중재를 외치지만 자국 이익에 따라 적당히 폭력을 용인하고 때맞춰 수습하는 이집트 등 주변 아랍 국가와 이란, 미국, 중국, 프랑스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보복과 복수를 반복하는 저주에 빠졌다. 대립이 격화될수록 사람들의 피가 맞교환된다. 정치에 의해 희생되고 있는 건 무고한 이들이다. 50년 전 참사를 다룬 20년 전 영화가 지닌 메시지는 지금도 변한 게 없어 보인다. 영화는 핏빛 복수 속에서 죽음을 목격할 가족의 존재를 암시한다. 그들은 지금 이스라엘에도 있고, 팔레스타인에도 있다. 남겨진 이들의 표정을 생각하면, 휴머니즘만이 세계를 구원할 것이라는 희망을 놓을 수 없다.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전 카이로 특파원 lhs@donga.com}

    • 2023-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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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임현석]삶이 호러가 되는 순간

    영화 ‘잠’은 극 초반 설정상 악의를 지닌 인물이 없다. 오가는 길 먼저 말 붙이는 선한 아랫집 이웃, 강아지를 키우며 출산을 준비하는 윗집 밝은 부부가 있을 뿐이다. 이웃끼리 작은 선물을 건넬 땐 호의가 교차한다. (*이 칼럼엔 영화 ‘잠’에 대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과의 관계는 주로 한시적이며, 미세한 균열만으로도 지옥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우리네 삶 도처에 그러한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방아쇠가 있고 이는 우리 자신조차도 언제 어떻게 당겨질지 모른다. 부부나 연인 관계도 마찬가지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지만 타인을 온전히 다 알 순 없으며, 화합하려 애쓰는 마음이 진심이라고 해도 잘못해서 상대의 방아쇠를 건드리고 대화가 삐끗하고 수틀릴 수 있다. 악의가 없이도 문제는 벌어진다. 도처에 밟지 말아야 할 지뢰가 많은데, 무엇이 지뢰인지 모르겠을 때 삶은 호러가 된다. 영화 잠은 나를 언제든 광기로 몰아넣을 수 있는 방아쇠와 지뢰의 존재를 보여준다. 영화 속 방아쇠는 가족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선한 동기다.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광기에 휩싸일 수 있는 나 자신도 공포의 대상이 된다. 만삭 임신부 수진(정유미)과 현수(이선균) 부부에게 공포의 대상은 일차적으론 현수의 밤중 무의식이다. 어느 날 수진은 옆에 잠든 남편 현수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누가 들어왔어.” 수진은 이날부터 현수가 심상찮다고 느낀다. 급기야 현수가 수면 중 갑자기 일어나서 이상 행동을 벌이는 것을 본다. 현수는 잠에 취한 채로 걸어다니며 냉장고에서 생고기와 날계란을 거칠게 씹어 먹는다.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려고 하자 수진은 기겁한다. 그제야 지속적인 야간 층간소음에 점잖게 하소연하던 아랫집 이웃 민정(김국희)의 말도 이해가 간다. 현수는 밤중 부부가 기르던 강아지를 냉동고에 집어넣어 죽이기까지 한다. 아이가 태어나자 수진의 불안은 노이로제 수준이 된다. 혹시 남편이 아이를 무심결에 죽일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다. 여기서 현수의 무의식에 수진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운명을 보여준다면, 일반적인 공포 영화의 문법을 따르는 셈이다. 그러나 현수는 진심으로 수진을 걱정하고, 치료법을 찾기 위해 병원을 찾는다. 수진은 아이를 지키려는 마음과 불안감 속에서도 현수와 생활을 분리하는 대신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서 해법을 찾고자 한다. 부부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을 합친다. 집 벽에 걸린 가훈대로다.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일이 없다.’ 수진은 남편 현수가 공포의 대상이지만 피하는 대신 어떻게든 고치려고 한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키겠다는 마음은 뒤틀리거나 광기로 치달아가기 쉬운 감정이다. 벽에 걸린 가훈을 비출 때마다 수진의 표정 또한 점점 의미심장해진다. 평범한 가훈에 담긴 함의가 문득 섬뜩하게 느껴질 때, 극이 기대 온 공포 감정과 문법이 크게 비틀린다. 영화는 제한된 공간의 디테일을 통해서 인물의 감정선을 보여줄 만큼 촘촘하다. 반면 대조적으로, 서사에선 과감한 생략이 돋보인다. 그리고 생략을 통해 해석의 여지를 크게 열어젖힌다. 철저하게 계산된 열린 결말엔 고개를 끄덕인다. 관객 저마다의 관점과 처지를 다시 환기하게끔 하는 구석도 있다. 다양한 해석으로 열려 있는 결말은 저마다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세상과 삶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이 느껴진다. 각자 믿음만을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과의 관계에서 합리적으로 처신하려면 ‘혼이 실린 구라(거짓말)’라도 필요한 것일까. 아니면 우린 아무리 애써도 결국 아무런 진실도 모르는 채로 떠내려가고 마는 것일까. 남편 현수가 미친 사람이 너무 많다고 할 때 타인을 대상화하는 일반적인 용례와 달리, 자기 성찰적인 자조처럼 느껴져서 여운이 길었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섬세한 태도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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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임현석]모순 없는 삶은 없다

    세속을 살아가는 한 누구나 모순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개별자로서의 욕망과 이를 초월한 도덕감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간다. 세상을 긍정하지 않으면서도 순응하거나, 삶에 순응하면서도 부정할 수 있다. 좋은 예술은 이를 ‘아이러니’라고 부르며 삶과 동의어로 친다. 인간이 착오를 저지르고 혼란한 마음을 떠안는 건 얼마간 불가피하다. 다만 여기서 갈림길이 발생한다. 모순의 굽어진 줄기를 애써 곧게 펴며,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른 분별없는 행동을 대의와 선의로 포장하며 기만할 수도 있고, 과거를 그대로 응시하고 후회하고 반성할 지점에서 정확히 그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 애잔하고 마음이 쓰이는 건 후자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는 어느 쪽인가. 현실에서 그는 원폭 개발과 일본 히로시마 및 나가사키 투하에 일조한 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한 적은 없다. 추상적으로 반성을 암시했을 뿐 첨예하고도 직접적인 윤리적 질문에 대해선 외면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반면 오펜하이머를 알던 이들은 그가 원폭 개발 과정에서의 자신의 책임을 강하게 의식했다고 회고한다. 그의 생애를 다룬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신작 영화 ‘오펜하이머’는 원작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따라 죄책감에 시달리는 내면에 보다 방점을 찍는다. 이러한 영화 연출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1954년 비공식 청문회이다. 1950년대 매카시즘 광풍이 미국을 뒤흔들 당시 정부는 한때 공산주의자와 어울린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의 행적을 문제 삼는다. 미국의 예상과는 달리, 소련이 1949년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것도 문제가 된다. 오펜하이머는 소련 스파이 혐의를 받고 안보 인가 등 공직 권한이 박탈될 위기에 처한다. 아내를 비롯해 동료들이 오펜하이머가 궁지에 몰렸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청문회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해명할 것을 종용하지만 청문회 내내 그는 무기력할 뿐이다. 함정을 놓으며 옥죄어 오는 질문에도 그는 보호벽을 치지 않는다. 덫으로 걸어가는 일이 되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논리에 의지한다. 이 과정에서 청문위원들은 그의 행보를 들여다본다. 이때 그는 공산당원은 아니었지만 아내와 친동생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 중 많은 이가 공산주의 사상에 빠져 있었고 심지어 당원이기도 했으며 한때 자신도 그 사상에 가까웠다는 점을 회고한다. 교수로서 학내에선 타협적이지 않은 모습도 보이지만, 정부로부터 핵 개발 프로젝트 주도 권한을 부여받자 과학 행정가로서 자유분방한 물리학자들을 능숙하게 리딩했던 점에서 의심의 눈총을 사게 된다. 그가 불륜을 저지르고 윤리에 무감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원자폭탄 개발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윤리를 강하게 자각했다는 점이나, 비범한 천재성과 공존한 열등감이라는 감정도 언뜻 모순돼 보인다. 그는 미세한 마음의 작용을 청문위원들에게 납득시키지 못하고, 숱하게 허점을 노출하고 만다. 이론물리학자로서 수식과 증명의 세계에서 분투하던 그가 논리의 바깥에서, 설득할 수 없는 진실이라는 모순의 극점으로 치닫는다. 그는 벼랑 끝에서 더할 나위 없이 진실되고 자아는 통합돼 있으며, 바로 그 점이 필연적으로 그에게 반성과 죄의식의 자리를 만들어 낸다. 영화는 오펜하이머 비공식 청문회와 함께 그와 악연으로 얽힌 스트로스 제독(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미 상무장관 공식 청문회를 교대로 보여준다. 스트로스는 자신의 삶이 무결하다고 믿는 쪽이다. 청문회에서 그동안 자신이 믿은 진실이 순식간에 깨지는 과정을 마주한다. 스트로스 제독 역시 청문회를 거쳐 몰락한다.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지뢰가 삶에 잠재돼 있고, 그걸 밟고 만다. 모순 없는 삶은 없다. 삶에서의 결함을 종종 후회하고 성찰하는 이와 그러지 않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이념화된 정치 언어는 왜 무도한가. 그것은 아이러니로서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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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임현석]신뢰가 무너진 세상에서의 생존 수칙

    올해 여름 한국 영화 블록버스터 이른바 빅4(밀수, 더 문, 비공식작전,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같은 질문을 마주하고 있다. 자기 힘으론 어쩔 수 없는 재난과 난리통 속에 휩쓸려갈 때 개인은 어디에 의지해야 하나? 국가와 공권력, 더 나아가 공동체를 믿을 수 있나? 이 질문이 중요한 건 한국 사회가 공존에 대한 해법을 마련하지 못하는 가운데 문제를 해결해야 할 사회적 리더십은 정치 공학에만 매몰돼 있고, 각자도생 외에 뚜렷한 답이 없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뇌리에 남은 할리우드식 블록버스터 구출 내지는 탈출 서사가 공권력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 것과 달리, 한국식 서사엔 같은 대상에 대해 우리 현실을 반영한 일정한 냉소가 깔려 있다. 이 빅4 영화는 신뢰가 사라진 세상을 다룬다. ‘밀수’가 다루는 공간은 국가 주도 산업 정책과 환경 오염으로 말미암아 삶의 터전이 사라지고 공권력이 비루한 악으로 전락한 곳이다. ‘비공식작전’도 국가가 위험에 처한 개인을 정치적 계산에 따라 외면하는 시대상을 배경으로 삼는다. 여기에선 나와 가깝게 부둥킨 이들과의 신뢰가 중요하다. ‘더 문’은 달 탐사 중 우주에서 조난당한 대원을 구하기 위해 시스템이 아니라 전 우주센터장의 소명감에 의지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 이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파트 한 동을 지키려는 중산층 주민들의 악다구니와 회의감으로 어수선하다. 상대적으로 미래 SF적 상상력이 더해진 영화 두 편(더 문, 콘크리트 유토피아)이 공동체의 역할과 의무를 보다 첨예하게 묻는 쪽이다. 영화 속 미래 재난과 절망 속에서 싸우는 인간을 그리며 공동체를 회복하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반면 과거를 다룬 영화 두 편(밀수, 비공식작전)은 신뢰가 무너지고 공존을 모색하지 않는 세상에서 개인 단위에서의 구원이 더 부각된다. 동료애를 통해 보람과 위안을 구한다. 밀수와 비공식작전 두 편이 SF에 비해선 소박하고도 유머러스하지만, 들여다보면 냉소는 더 짙다. 빅4 영화 속 SF적 세계관 속에선 적어도 진실이 드러나면 세상이 회복될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진실이 중요하다는 믿음이 극을 끌고 간다. 반면 과거를 다룬 두 영화는 공권력이 진실도 손쉽게 은폐할 수 있는 시대를 그린다. 여기에선 개인이 짊어져야 할 부담의 크기가 더 크다. 대체로 세상이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없을 때 개인 단위에서 해법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법이다. 공동체에 대한 신뢰 수준이 낮을 때, 우리가 짓는 표정이 냉소다. 이런 관점에서 가장 냉소적인 작품은 비공식작전이다. 김성훈 감독의 전작인 ‘터널’이 그랬듯 이 역시 위험에 처한 국민이 등장하고,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모습이 그려진다. 레바논에서 우리 외교관이 납치되는 일이 벌어지지만 정부는 부처 간 기 싸움으로 말미암아 제대로 된 구출 작전을 벌이지 못한다. 구출 작전에 투신하는 개인들도 처음엔 거창한 대의와는 일견 멀어 보인다. 외무부 중동과에서 5년간 근무한 외교관 민준(하정우)이 납치 외교관을 구하는 일에 자원한 것도 미국 발령이라는 개인적 동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우연한 계기로 민준을 돕는 현지 택시기사 판수(주지훈)도 철저하게 돈벌이라는 자기 동기에 충실하다. 그들이 배신과 불신을 거쳐 마음을 바꿔 맞손을 잡는 과정이 흥미롭게 그려지지만, 개개인 단위에서 서로에 대한 믿음이 쌓일수록 역설적으로 국가 시스템에 대한 냉소는 더욱 깊어진다. 영화는 망가진 시스템 속에서도 자기 윤리에 충실한 개인이 많은 것을 바꿀 수 있고, 자기 일에 몰두하면서 그때그때 만나는 인연에 대해 호의를 품는 것은 값진 일이라고 말한다. 그건 현실적인 조언처럼 들린다. 이상적이진 않은 현실적인 조언. 현실적이지 않지만 이상적인 조언. 지금 시점에서 우리 사회에 무엇이 더 유효한 것일까. 요즘 한국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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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임현석]충성과 의리는 어떻게 다른가

    “먹고살려면 어디까지 해야 하는 거냐?” 영화 ‘밀수’에서 극 초반 엄 선장(최종원)의 푸념은 윤리와 생활 사이에서의 딜레마를 간결히 함축한다. 그 장면이 의미심장한 건 영화가 이 딜레마를 깊게 파고들겠다는 선언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여기 생활을 옹호하는 인물이 춘자(김혜수)라면, 공동체성을 더 중시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건 진숙(염정아)이다. 영화는 이 둘이 교차하는 과정에서 딜레마의 간극을 좁히거나 벌리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 칼럼엔 영화 ‘밀수’에 대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영화가 다루는 배경은 1970년대 가상의 바닷가 촌읍 군천이다. 진숙과 춘자는 해녀로 밥벌이를 하지만, 근처에 화학공장이 들어서고 바다가 오염되자 달리 살길을 모색하다 ‘바닷속 물건을 건져 올리기만 하면 된다’는 브로커 말을 듣고 밀수에 가담한다. 진숙과 춘자는 더할 나위 없는 친구 사이지만 배경은 다르다. 진숙이 촌읍에서 선주 아버지를 둔 먹고살 만한 인물인 반면, 춘자는 열네 살 때부터 식모살이를 했던 억척스러운 인물로 그려진다. 신중한 엄씨 일가와 달리 춘자는 밀수판을 키우자는 쪽이다. 급기야 엄 선장 몰래 금괴까지 밀수하기로 하는데, 밀수품을 바다에서 들어올리다 세관에 적발된다. 결국 밀수판에서 손을 떼려던 엄 선장이 불미스러운 일로 죽고, 그의 딸 진숙도 징역을 살게 된다. 춘자만 검거를 피해 혼자 빠져나오고, 진숙은 세관에 밀고했다는 소문이 도는 춘자에게 적개심을 키운다. 서울로 올라와 밀수품 판매업을 하던 춘자는 또 다른 거물 밀수꾼 권 상사(조인성)를 도와야 하는 처지가 되고, 결국 큰 밀수판을 벌이기 위해 군천에 내려오게 되면서 다시 진숙을 만난다. 진숙과 춘자가 재회하는 장면, 서로 뺨을 두 대씩 내갈길 때 서사는 팽팽해진다. 진숙은 아버지의 배도 잃고 곤궁한 처지로 내몰린 가운데서도 남겨진 해녀들의 리더로서 꿋꿋하게 자존심을 지키려 한다. 반면 춘자는 그런 그에게 큰돈을 만지게끔 해주겠다며 접근한다. 제안에 응하지 않으려던 진숙은 자신을 따르는 동료 해녀가 병원비를 마련해야 하는 처지가 되자, 다시 춘자의 손을 불가피하게 잡는다. 모두가 밀수에 가담하고 범법자인 상황에서도 영화는 선악을 명확하고도 뚜렷하게 분별한다. 이때 선과 악, 옳고 그름을 가르는 핵심축은 의리다. 영화에선 한 식구처럼 보이던 인물이 돌연 배신하며 악인이 된다. 또는 악인인 줄 알았던 인물이 여전히 서로에 대한 정서적 유대감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선의의 옹호자가 되기를 반복한다. 이러한 전환을 잘 보여주는 건 권 상사라는 캐릭터다. 그는 월남에서 사람 죽인 걸 훈장처럼 여기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악귀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부하인 애꾸(정도원)를 살린 인연을 떠올릴 때 돌연 의리감을 가진 캐릭터성이 부각되면서 몰입을 이끌어낸다. 로맨스가 없는 영화에서 권 상사는 인상적인 액션 신을 통해 춘자와 미묘한 뉘앙스를 남기며, 악인임에도 동정할 여지를 만든다. 춘자를 비롯해 우직한 세관 계장(김종수)이나 해녀들을 돕는 장도리(박정민)도 의리를 축으로 선과 악을 오가는 복잡한 캐릭터들이다. 영화는 세상이 모두를 얼마씩은 악인으로 만들어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애초에 해녀들이 밀수에 가담한 것도 정치사회적 배경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러한 명백한 악행에 대해 사법적, 도덕적 판단과 딜레마에 빠진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영화는 누구나 나빠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자기 나름대로의 윤리적 실천 범위를 설정하고, 이를 지켜나간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실천은 다른 사람의 처지에 대한 감정적, 정서적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에만 납득 가능해진다. 영화는 다방에서 일하는 옥분(고민시)을 비롯한 어촌 사람들의 우정과 의리를 이해에 기반한 연대처럼 다룬다. 그리고 이때의 결속은 일시적인 반목을 뛰어넘는다. 이들의 우정과 의리는 영화 속 조폭들의 충성과는 대조적이다. 상하 관계에서 비롯하는 충성은 윤리적 감각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뿐더러 책임감도 결여돼 있다. 그들은 공감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큰 빈 틈을 남긴다. 언제나 큰 힘은 우정에서 나온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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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을 바꾸는 선량한 마음 [무비줌인/임현석]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 ‘엘리멘탈’은 물, 불, 흙, 공기 등 4원소가 서로 모여 살아가는 도시(엘리멘트 시티)가 배경이다. 사회에서 배척받는 불 원소 소속 여성 ‘엠버’와 도시 주류인 물 원소 소속 남성 ‘웨이드’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이 칼럼에는 영화 ‘엘리멘탈’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는 서로 섞일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물과 불 원소가 서로 화합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다룬다. 엠버의 부모는 불 원소만 모여 살던 파이어랜드를 떠나온 이민자로, 모든 것을 불태우는 속성으로 말미암아 엘리멘트 시티에서 배척받아 온 것으로 묘사된다. 엠버 가족은 불 원소가 모여 사는 도시 내 커뮤니티에서 작은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며 오랜 세월 신산한 삶을 버텨낸다. 엠버 가족에겐 가게는 삶의 근간이자 자부심이다. 그러나 다른 주류 원소들 눈엔 무턱대고 세운 비인가 건물에 불과하다. 영화는 물 중심 사회에서 불 원소가 받는 은근한 차별을 비춘다. 엠버 가족은 미국 내 아시아계 이민자의 삶과 사랑을 상징한다. 그래서인지 한국계 이민자의 삶을 다룬 영화 ‘미나리’와 배경과 성향이 다른 두 집안과 자녀들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를 다룬 ‘로미오와 줄리엣’ 내지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섞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엘리멘탈은 익숙한 구조를 차용하지만, 소재를 다루는 방식은 독창적이다. 연출과 작화 면에선 원소별로 특징을 잡아채는 방식도 그렇거니와 이야기 면에선 차별받는 소수자의 내면을 세심하게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그렇다. 배경과 성향이 다른 집안을 그리는 영화들은 선한 자녀와 대별되는 가문 간의 극한 대립을 통해 극을 끌고 나가는 게 일반적인데, 영화는 이러한 전형성에선 벗어난다. 엘리멘탈에서 웨이드의 가족은 엠버를 극진히 환대한다. 엠버의 가족은 웨이드에 대한 적개감을 보이지만 이는 극 안에서 납득할 수 있게끔 설명돼 있다. 웨이드에 대한 반대 감정은 증오나 혐오 감정에 기반한다기보다는, 오랜 차별 속에서 익힌 엠버 부모의 생존 감각 내지는 주류 사회에서 상처받을 자녀를 우려하는 마음처럼 보인다. 적개감은 견고하지 않다. 자신의 의지로 가족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인 셈이다. 영화의 핵심적인 갈등은 가문 간이 아니라, 엠버의 내면에서 일어난다. 엠버는 타국에서 억척스럽게 자신의 자리를 일궈낸 부모에 대한 존경심을 강하게 내비치며, 가게를 물려받는 것으로 가족이 바라는 삶을 받아들이려 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만의 창의성을 인식하며, 불 원소 커뮤니티를 벗어나 자신이 부여받은 능력에 따라 자아를 실현하려는 마음도 있다. 두 감정은 엠버의 마음속에서 충돌한다. 그리고 내면에서의 혼란은 극의 막바지까지 이어진다. 영화 속 세계관 설정은 한국계 이민자 2세대인 영화감독 피터 손 개인의 경험이 반영돼 있다. 손 감독도 1960년대 말 미국으로 이민을 간 뒤 현지에서 식료품 가게를 운영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림에 대한 재능을 실현하고 싶던 손 감독 또한 가게를 물려받길 원하는 아버지와 갈등을 빚었다고. 그는 이 과정에서 이민 2세대로서 한 사회 안에서 각자의 배경과 성향이 다른 이들이 어떻게 서로 이해하고 융화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이민자 자녀들이 마주하는 딜레마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동시에 이야기가 보편성을 지닌 것처럼 느껴지는 건 감독의 경험에서 비롯한 신중함과 섬세함이 영화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엘리멘탈에선 등장 캐릭터 누구 하나도 악인으로 묘사하지 않는데, 대립하는 양쪽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응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사회에 적대할 만한 존재를 정하고, 이를 극복하고 이겨내는 것만으로 좋은 삶이 저절로 주어질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회적인 차별도 직시하면서 동시에 개인 차원에서의 작은 실천 또한 중요하다고 소박하게 다룬다. 이는 구조의 문제를 너무 손쉽게 개인화하고, 미시적으로 처리했다는 비판을 들을 지점도 있긴 하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면 선량한 태도가 세상을 바꾼다는 메시지에 무방비로 턱없이 공감하고 싶어진다. 우리 안의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키가 우리에게 있다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와닿아서가 아닐지.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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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임현석]히어로를 떠나보내는 방법

    영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는 여러모로 1980년대적이다. 당시는 미국 영화계가 블록버스터 ‘죠스’와 스타워즈 오리지널 시리즈의 대성공으로 야심만만했고, 모험과 액션의 스케일을 전례없이 키우던 시기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네 편 연출을 연달아 맡은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열광했던 첩보영화 ‘007’ 시리즈를 참고하면서도, 주인공 인디아나 존스를 007보다 더 가혹한 환경으로 밀어넣는다. 여기엔 큰 스케일의 독특한 퍼즐을 펼쳐 놓고 수습할 수 있다는 연출·제작 자신감이 녹아들어 있다. 1∼3편에서 인디아나 존스는 제임스 본드와 같은 첨단 무기도 없고, 적을 만나면 대체로 도망가야 하는 처지로 그려진다. 게다가 유적 속엔 바위가 굴러오는 부비트랩까지 깔려 있고, 맨주먹 액션도 꼭 달리는 차 위나 기차 위에서 한다. 장애물을 통한 제약이 복잡하고 정교할수록 주인공 존스의 창의적인 액션과 기지, 유머가 빛난다. 1980년대적이라는 건, 한편으론 한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1980년대에 개봉한 인디아나 존스 초기 시리즈(1∼3편)는 비(非)서구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여과 없이 노출한다. 유물의 가치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인디아나 존스 자신이라는 식의 표현이나, 유물을 해당국의 허락 없이 가져오겠다는 발상부터가 거칠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마지막 작품이 될 것으로 보이는 다섯 번째 작품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은 전작의 영광과 흠을 모두 의식하는 작품일 수밖에 없다. 연출을 맡은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인디아나 존스의 강렬한 인상을 이 시점에 복원하면서도, 기존 존스의 한계를 뛰어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인디아나 존스의 매력과 흠결은 분리가 가능한가? 더욱이나 이 과제의 난도를 높이는 배경도 있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는 할리우드에서 최근에 그러하듯 기존 시리즈에서 주연 배우를 바꾸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이른바 ‘리부트’를 통해 재해석하는 길도 막혀 있다는 점이다. 시리즈 첫 편 레이더스(1981년)부터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 해리슨 포드를 떠나서 존스를 말할 수 없어서다. 영화 제작사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후속작을 마치 007처럼 리버 피닉스, 샤이아 러버프 같은 배우에게 맡길 것처럼 보였으나, 몇 가지 이유로 인해 결과적으로 모두 실패했다. 시리즈 마지막 작품도 노인이 된 포드가 존스 역을 맡는다. 이번 영화가 어떻게든 기존 인디아나 존스의 유산을 쥔 채로, 새로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하는 캐릭터가 친구의 딸이자 대녀인 헬레나 쇼(피비 월러브리지)다. 쇼는 아버지가 평생을 연구한 유물 ‘안티키테라’를 찾는 인물로 그려진다. 시간 여행을 갈 수 있는 이 유물을 찾아 나치 출신 인사들도 뒤쫓고 있다는 설정이다. 쇼는 영화 초반 유물의 가치보다는 돈을 더 중요시하고, 이성 관계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는 또 다른 버전의 인디아나 존스처럼 느껴진다. 둘 다 아버지가 고고학자라는 점이 같고, 인디아나 존스 역시 시리즈 내내 독특한 이성관을 암시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존스는 비록 유물을 팔 생각은 안 했지만, 존스 역시 유물을 찾는 모험의 시작은 모험심이라는 개인적 동기에서 비롯했다. 쇼의 말에도 이러한 관점이 들어가 있다. 쇼는 인디아나 존스에게 모험심에 사로잡힌 도굴꾼이라고 일갈한다. 시리즈에 내려진 비판을 쇼를 통해 영화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이다. 존스에 대한 한계를 억지로 지워내지 않고 그대로 영화 안에 남긴다. 그것이 흠임을 알려주면서. 노인이 된 존스는 쇼의 물음에 간결하게 대답한다. 그건 의미 있는 일들이었다고. 42년에 이르는 여정 속에서 존스가 말하는 의미란 쇼의 비판을 상쇄한다기보다는 각각 일리 있는 말처럼 느껴진다. 이번 영화 속 존스는 한평생 과학적인 태도로 일관해 왔지만, 시간의 틈이라는 오컬트 현상에 대해선 “그동안 봐온 건 있다”라며 이해한다는 태도를 보인다. 이 역시 자신의 신념과는 상충되지만, 그대로 인정한다. 모순에 대해서 둘 다 맞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 노년이란 그런 것일까. 영화는 인디아나 존스와 함께 늙어간 이들에 대한 예우가 담긴 것처럼 느껴진다. 이는 곧 삶에 대한 경의이기도 하다. 긴 여정을 마친 이들이여, 부디 아늑하고 평온하길.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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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임현석]그래도 축제는 계속돼야 한다

    예술이 쉬울 리 없다. 영감이 오길 기다려야지, 작업물에 몰두해야지, 필요한 경우 정부나 지자체 예술가 지원 사업에 서류를 넣을지 고민도 해야 한다. 사업기획·지원서 및 증빙 서류 처리로 머리를 싸매는 것도 적잖은 예술가들의 중요 일과다. 사실 예술 그 자체만큼이나 지원 사업을 비롯한 예술가의 삶을 둘러싼 조건과 환경 속에서 예술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이 자주 돌출된다. 영화 ‘익스트림 페스티벌’은 지자체 문화재단 사업과 축제 수의계약을 둘러싼 딜레마를 다룬다. 예술과 제도의 민낯을 경쾌한 코미디 톤으로 풀어낸다. 행사·축제 기획사 ‘질투는 나의 힘’ 대표 혜수는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를 기리기 위해 망진군청이 주최하는 지역 축제 ‘정조문화제’를 준비하던 중, 축제 하루 전 행사 타이틀과 콘셉트가 ‘연산군문화제’로 갑작스레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망진군수가 다른 역대 조선 왕들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정조 대신 폭군 연산이 지자체 홍보엔 더 낫다고 봤기 때문이다. 군수는 수도권과 가깝다는 걸 부각하려고 연산군이 한양에서 이 가상의 지자체를 자주 들렀다는 가짜 스토리텔링까지 덧입힌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행사는 점점 당초 계획과는 다른 방향으로 꼬인다. 축제 클라이막스였던 정조 연극은 돌연 ‘갑자사화의 형식을 빌린 팬데믹 종식 선언’으로 바뀐다. 연극을 맡기로 한 지역 극단은 갑작스럽고도 무리한 콘셉트 변경에 학을 떼더니, 마침 망진문화재단 예술지원사업에서 탈락했다는 문자를 받자 아예 축제 보이콧을 선언한다. 게다가 혜수의 남자친구이자 대행사 이사 상민이 섭외한 초청 가수는 오지 않는다. 예전에 불미스러운 일로 퇴사한 극작가 직원 래오가 스태프 업무로 불려오는데, 툴툴대다가 일을 망친다. 여기에 망진군에서 벗어날 생각밖에 없는 지역 알바생 은채는 인턴을 거쳐 정직원이 되려고 의욕과다 상태다. 군청에서 다음 축제 기획 사업까지 따내야 하는 혜수는 군수 눈치를 보면서 중간에서 난장판을 조율해야 한다. 어떻게든 축제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야만 한다. 영화에선 대행사 대표는 대표대로, 스태프와 연극 배우들은 또 그들대로 개인 해법을 찾는 사람들로 설정돼 있다. 축제 자체의 본질은 차라리 부차적이고, 자기 살길을 모색하는 과정만이 담긴다. 지역 축제와 지역 극단 예술 모두 공동체 감각을 기초로 둬야 한다는 명제에서 아득히 멀어진다는 점이 역설적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당장은 자기 삶을 도모하는 것 외엔 다른 수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추구하는 지향점과 비루한 삶의 격차를 좁힐 방법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가 느끼는 건 애환이다. 자기 목표를 향해 의심 없이 꿋꿋하게 진군하는 군수와 상민에겐 애환이 없다. 예술과 삶의 격차를 가장 예민하게 느끼는 건 대행사 전 직원이자 극작가로서 예술을 지향하는 래오다. 지역 극단을 향해 결국 돈 때문에 이러는 거냐고 냉소하지만, 그 역시 혜수의 표현대로라면 직장인으로선 무능하고, 예술가로선 불성실하다는 혐의를 벗어나지 못한다. 얽히고설킨 예술가의 딜레마다. 이쯤에선 영화는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면서, 직장 생활에 대한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만의 문제의식과 지향점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 점차 초라해지고, 또 해법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린 무엇을 해야 할까. 영화는 무대를 만들고 어떤 배역이든 조금이라도 의미를 찾아내는 지역 극단 대표의 모습을 비춘다. 저마다의 개인 해법과 의미를 찾아가야 하는 상황은 막막하고 안쓰럽지만, 그래도 삶이 계속돼야 한다는 것일까. 축제가 계속돼야 하듯 말이다. 영화 초반은 블랙코미디에 가깝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여기 나오는 저마다의 사정을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뾰족하던 톤은 점차 둥글어진다. 이는 예술이 삶을 이해해 가는 과정처럼 느껴지지만, 유머가 무뎌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해는 된다. 영화가 예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암시하는 만큼, 자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어느 누구도 미워하거나 조롱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담겼을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농담을 던진다. 삶은 계속되고, 그게 아무리 엉망진창이어도 유머를 잊지 말아야 한다. 영화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이 점일 것이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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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임현석]이제는 둘리가 밉다는 사람들에게

    1980년대 초 군사독재 시절만 하더라도 만화에서 아이가 어른에게 반말하거나 말대꾸하는 장면을 넣을 수 없었다. 만화 출판 전에 검열을 거쳐야 하는 시기, ‘아기공룡 둘리’ 원작자 김수정 화백은 검열을 피하고자 아이 대신 동물을 의인화하기로 마음먹고, 내친김에 당시엔 잘 쓰이지 않던 공룡 캐릭터를 내세웠다. 그렇게 세상 물정 모르는 척하지만, 항상 머리에 혹을 달고 혓바닥을 내밀면서 저항의 기운을 뿜어내는 공룡 캐릭터가 1983년 4월 만화 월간지 ‘보물섬’에 등장한다. 검열을 피한다고 피했는데도, 아이들 버릇을 망친다는 이유로 아기공룡 둘리는 연재 당시 학부모·시민단체로부터 불량 만화로 꼽히곤 했다. 요즘 들어선 둘리를 그저 대가리와 몸뚱이가 둥글둥글 친근하기만 한 봉제인형 공룡 캐릭터로 아는 경우도 많지만, TV 및 극장판 애니메이션 속 둘리의 진짜 매력은 바로 이 불온성에 있다. 둘리 탄생 40주년을 맞아 개선된 화질로 재개봉한 둘리 시리즈 극장판 애니메이션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 리마스터링’에서 둘리의 까칠한 매력이 되살아난다. 남극 빙하를 타고 서울 도봉구 우이천으로 떠내려 온 공룡 둘리는 쌍문동 중산층 고길동 집에서 더부살이한다. 이 과정에서 둘리는 온갖 엉뚱한 행동으로 말썽을 일으키고, 고길동과는 앙숙처럼 지낸다. 오늘날 소셜미디어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고길동을 말썽꾸러기 객식구를 받아준 성인군자로, 둘리와 친구들을 민폐를 끼치는 인성 파탄자처럼 해석하는 밈(meme·인터넷 유행 콘텐츠)이 퍼져 있다. ‘어디 초능력 맛 좀 볼 테야’라는 둘리의 태도는 지금 보면 선 넘는 것처럼 보이긴 한다. 누리꾼들은 영화 ‘부당거래’ 속 명대사(“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알아요”)를 패러디해 ‘호이가 계속되면 둘리인 줄 알아요’는 말로 둘리 쪽을 야유한다. 그러나 이건 둘리 입장도 들어봐야 한다. 재개봉한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보면 당시의 시대상과 분위기가 느껴지는데 여기서 고길동은 어린이를 자주 손찌검하고,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어린이에 대한 물리적 폭력이 폭넓게 또 긍정적으로 용인되던 시절, 때리는 어른을 향해 만화는 둘리의 입을 빌려 ‘어린이를 때리지 말라’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만화는 어린이를 지지하는 내용으로, 그 시기로선 매우 드물게 폭력과 훈육의 경계를 따지고 든 것이다. 이는 둘리가 그 시절 어린이들에게 사랑받고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 극장판 애니메이션 속 둘리는 낚싯대를 회초리처럼 휘두르는 고길동을 향해 “어린이를 때렸으니 큰 병에 걸려 죽을 거예요”라고 저주한다. 그리고 “아저씨 죽으면 이 집은 내 것”이라고 밉살맞게 굴었다가 더 맞고 집 밖으로 쫓겨난다. 둘리는 담벼락에 서서 아저씨는 농담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애니메이션은 이 상황을 일종의 유머극처럼 그리지만, 여기에도 뼈가 있어서 뾰로통하고 다정하지 않은 그 시절 어른들을 야유하는 뉘앙스가 있다. 어린이를 지지하는 콘텐츠가 많지 않던 시기엔 앞선 대사들이 다소 과격해 보일지라도, 분명 어른들과의 관계 속에서 마음을 다친 이들을 위로하고 이해해주는 기능이 있었을 것이다. 둘리 만화가 연재되던 시기 어린이 독자들은 어떻게 하면 둘리가 고길동을 괴롭힐 수 있을지 아이디어를 담은 우편을 김 화백에게 보내왔다고 한다. 어디 자기 마음 토로할 곳 없는 어린이들이 그 시절 특히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어른들을 골려주는 상상을 하면서 둘리를 봤다는 의미다. 그런 시대상을 곱씹으면, 둘리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부러 더 과격하게 나간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둘리는 현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공감대가 더 컸다. 둘리와 친구들은 결핍을 품고 있는 어린이들을 상징한다. 고아이거나, 자신이 몸담은 조직에서 쫓겨났거나, 어딘지 모르는 곳에 불시착해 버린 아이들이다. 이들은 주관이 뚜렷하고 고길동으로 대표되는 세상의 기준을 의심하고 폭력에 민감하다. 동시에 자기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일엔 또 진심이다. 집안일을 돕고, 서커스에서 스타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모두 빨리 어른이 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들은 반항과 순종하려는 마음 사이를 오가다가, 나쁘고 착하길 반복하다가 문득 어른이 될 것이다. 지금 보니 고길동도 그렇거니와, 그 시절 모두가 애잔하다.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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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임현석]농담과 냉소 사이

    기자 생활을 막 시작했을 무렵, 사수는 엉망진창 내 기사를 뜯어고치며 글쓰기 원칙을 상기시켜 주곤 했다. 그중엔 되도록 동어 반복을 피하라는 것도 있었다. 경제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지적으로 느슨해서 아름답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같은 표현을 쓰다 보면 관점이 강조되고, 한쪽 입장으로 비탈지게 빨려 들어가니 조심하라는 경고도 함께였다. 불가피한 되풀이도 있지 않나? 그때 나는 항변하고 싶었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세상 모든 원칙이 그러하듯 절대성을 지닌 명령이라서가 아니라, 함의가 더 와닿는다. 동어 반복은 무신경하고 섬세하지 못한 자들의 방식이라는 점 말이다. 제목에서부터 같은 말이 두 번 쓰인 영화 ‘말이야 바른 말이지’(말바말)는 바로 이 나태한 동어 반복의 논리를 파고든다. ‘말바말’이라는 표현 앞뒤로는 대체로 부주의하고 게으른 문장들이 따라붙기 십상이다. 영화는 상투적 관점과 표현 속에서 뒤틀린 신념 구조가 어떻게 공고화되는지, 그리고 우리가 이에 얼마나 둔감한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10분 내외의 짧은 여섯 편 단편으로 짜인 옴니버스 구성이다. 각각 다른 감독들이 연출을 맡았는데 각 작품마다 노사, 젠더, 지역, 세대 갈등이라는 우리 사회의 주요 어젠다를 끌고 들어온다. 대기업 관리자와 하청업체 대표가 직원을 어떻게 길들여 왔는지 대화하다가 서로 냉소(프롤로그)하고, 헤어지는 커플이 함께 키우던 고양이를 어떻게 할지 무신경하게 대화하며 동물에게 상처를 주는 모습(하리보)을 다룬다. 애견용품업체가 남성 혐오 단어로 지목된 ‘허버허버’와 비슷한 ‘허버버법’이라는 문구를 마케팅에 활용해 사과문을 작성(진정성 실전편)하고, 환경을 마구 오염시키는 방식으로 프러포즈(손에 손잡고)하는 에피소드가 담겼다. 상사와 부하 직원 간의 대화(새로운 마음)를 통해 은근한 성차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조명한다. 각 에피소드마다 다소 얼마씩 무신경한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은 동어 반복의 주체가 되며,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폭력적이다. 영화가 주장이 담긴 사회 이슈임에도 ‘비분강개’가 아니라, 농담이라는 형식을 끌고 온다는 점 역시 인상적이다. 첨예한 갈등 이슈를 블랙코미디 형태로 가공하는 과정에서 세상을 담론의 영역이나 진영 논리로만 다루지 않고 유머 속에서 폭넓게 문제의식을 펼쳐놓는다. 그동안 기득권과 이에 핍박받는 이들의 대결 서사를 자주 봐왔으나, 이는 우리 사회의 첨예한 갈등의 본질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기득권 적의 소멸이라는 해법을 유일한 대안으로 여기다 보면, 어떤 사회가 더 바람직한지 묻는 진짜 어려움을 외면하기 십상이다. 진영적 거대 담론에 기여하는 서사만을 의미 있게 여기는 과정에서 기득권과 이에 대한 저항이라는 구도에서 벗어나는 일상의 폭력을 사소하게 여기거나, 심지어는 외면하는 모습도 우린 자주 봐왔다. 영화는 ‘을’들 안에서도 저마다의 위계가 발생하며, 소속이나 집단 정체성과 무관하게 모든 관계 속에서 성찰하는 자세가 없으면 을들도 같은 을이나 병을 향한 무비판적인 폭력에 가담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여섯 편 중 한 편인 ‘당신이 사는 곳은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가 이 문제를 정면에서 마주하는 작품이다. 을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 갑 정체성으로 뒤바뀔 때, 손쉽게 차별에 동참하는 모습을 비추면서 자신의 처지로부터 공감 능력을 확장하지 못하는 우리 시민 사회의 한계를 드러낸다. 이를 통해 을에 대한 구원은 ‘정치적 올바름’의 담론만으론 충분치 않으며, 실은 공감 능력의 결여가 핵심 문제임을 드러낸다. 바람직한 공동체에 대한 상상이 없는 담론은 타인을 품지 못하는 개개인의 권익 보호에 그치며 공허해진다. 소비자 주의를 정면에서 풍자한 ‘진정성 실전편’ 역시 시민 없는 진정성이란 무엇인지 묻는다. 영화가 농담과 냉소를 위태롭게 오가는 가운데 희망도 비관도 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처지가 남겨진다.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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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임현석]마리오는 복도 많지

    동명의 게임을 영화화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는 평이 꽤나 극단으로 갈리는 작품이다. 대표적인 해외 비평 사이트인 ‘로튼 토마토’에서 전문가 지수가 59%에 불과하다. 다수 국내외 비평가들은 단순한 전개와 빈약한 스토리를 흠으로 봤다. 원작 게임 시리즈를 오마주하려는 의도가 영화에 꼭 필요한 스토리 구성보다 앞서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주인공 마리오가 거대 고릴라 동키콩과 철근 구조물 위에서 결투하는 건 별다른 이유가 없다. 1981년 게임 ‘동키콩’에서 훗날 마리오로 이름 붙여질 주인공 점프맨과 악당 콩의 대결을 오마주한 것이다. 주인공 마리오가 악당 쿠파를 물리치기 위해 동료를 모으는 과정도 그저 다행스러운 우연의 연속이다. 안 그래도 마침 쿠파와 싸우려던 참이었던 피치 공주와 버섯 왕국이 마리오 편에 선다. 영화 부제를 짓는다면 ‘마리오는 복도 많지’라고 지어야 할 판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관객들이 이러한 설정 허점과 서사의 빈틈을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점이다. 로튼 토마토 관람객 지수는 96%에 달한다. 혹평에도 올해 개봉한 영화 중 최고 수익을 올리며 흥행 중이다. 게임 원작 팬은 다양한 오마주 요소를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원작 게임 팬이 아니더라도 이미 여러 다른 게임의 형식과 문법을 경험한 어린 관객들은 장애물과 제약을 딛고 목표에 도달하려는 게임 관점을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그동안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은 게임이라는 마이너한 장르 논리에 익숙하지 않은 대중 관객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어려운 설정을 덜어내고, 매력적인 캐릭터와 세계관만을 취하곤 했다. 스크린 관객들도 게임을 이해할 수 있도록 영화적 해석을 덧입혀 전압을 변환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 변환 과정에서 해석이 과하거나 미흡할 경우 졸작이 만들어지곤 했다.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1993년작 실사판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가 그런 작품이었다. 악당 쿠파가 거북이 괴물이 아닌 인간이라는 설정으로 바꿨는데 원작 팬들로부터 야유를 받았다. 주인공이 막바지에서야 갑자기 빨간 옷을 입는 설정엔 무리수라는 평가가 따랐다. 돌연한 전개가 설득력만 떨어뜨렸다. 2023년작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는 게임 속 스토리와 세계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유지한다. 원작 세계관을 크게 비틀거나 가공하지 않는다. 영화 문법을 따르기보다는 원작 마리오 게임의 특징인 직관성을 부각한다. 원작 슈퍼 마리오는 벽돌을 밟고 뛰고 깃발이 있는 곳까지 달려가는 것을 목표로 한 직관적인 게임이다. 구조물 배치를 파악해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스테이지를 격파한다. 스토리는 상대적으로 부차적이다. 악당을 물리치기 위한 모험이라는 원작 게임의 단순한 스토리와 단선적 진행이 고스란히 영화의 특징으로 반영된다. 이젠 과감히 영화적 틀에 맞지 않는 게임 원작 요소를 관객에게 ‘그냥 받아들여라’고 할 정도로 게임의 장르적 문법이 오늘날 보편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게임이란 사전 합의된 규칙 안에서 장애물을 돌파하는 과정에서의 창의성과 효율성만을 따진다. 왜 그런 세계인지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아도 관객들은 이해한다. 게임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유튜브 세대는 게임적 직관성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애초에 제작자도 직관성을 영화의 특징으로 여긴다. 영화 제작에 참여한 ‘슈퍼 마리오의 아버지’ 게임 개발자 미야모토 시게루는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상황을 설명하는 대사를 많이 줄였다”고 했다. 주인공의 배경 설정보다 주인공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능력을 중시하고 도달해야 할 목표까지 장애물을 어떻게 배치하는지를 좀 더 고심하는 게임 개발자적 접근법에 더 가까워 보인다. 친숙한 우리 편 마리오 형제를 기반으로 한 지식재산권(IP) 팬덤 비즈니스 구조 위에서 별다른 설명 없이 직진할 수 있는 시대, 영화가 게임을 해석하던 시대를 지나 이제 게임의 논리가 영화 문법을 압도한다. 내가 속한 팬덤이 장애물을 어떻게 돌파해서 목표에 도달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개연성은 덜 중시된다. 그래도 어색하지 않아졌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팬덤과 게임 논리 아래서 스토리의 세부를 따지는 건 머쓱하게 여겨진다. 온 세상이 점점 게임 닮아가고, 마리오는 사랑받는다.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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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임현석]개연성 없는 전개, 설득력 있는 액션

    앞서 세 편의 ‘존 윅’ 시리즈 영화에서 주인공 킬러 존 윅(키아누 리브스)은 299명을 죽였다. 최신작인 ‘존 윅 4’에선? 140명이다. 이번 작 상영 시간 169분 동안 1분 20초에 한 명씩 죽여야지 나올 수 있는 숫자다. 존 윅은 왜 이렇게 화가 나 있나? 시작은 복수 감정이었다. 77명을 죽인 1편에서 존 윅은 자신이 키우던 개를 죽인 자들을 쫓는다. 영화 속 복수 동기치곤 일반적이지 않은 편이다. 글로 쓰인 시놉시스상 복수 동기만 보면 존 윅 시리즈는 ‘람보’ 같은 먼치킨(Munchkin·극단적으로 강한 인물) 액션 장르물이 아니라 ‘못 말리는 람보’ 같은 코믹 패러디식 유머로 일관하는 영화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악당조차도 개 때문에 이러느냐고 볼멘소리를 한다. 애시당초 그럴싸한 명분과 동기로 차근차근 스토리를 쌓아서 승부하는 영화는 아니었고, 한없이 멋을 낸 중년 킬러의 액션 활극만이 볼거리였다. 후속작인 2, 3편에서 매력적인 킬러 세계관을 구축했다고 하더라도, 존 윅 시리즈는 1편과 마찬가지로 개연성 없이 펼쳐지는 무법자의 대학살 복수극 범주를 벗어나진 않는다. 보기에 따라선 빈약한 스토리와 개연성 없는 전개가 흠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동안의 킬러 세계관이 집대성되고 마무리되는 4편에 이르러선 급작스러운 전개를 흠으로 보는 시각이 무색해진다. 시리즈가 지향하는 바가 보다 명확해져서다. 모든 영화는 각자의 방식으로 무엇이 아름답고 좋은 것인지 웅변하는데, 존 윅 시리즈가 옹호하려는 것은 극단적인 수준의 액션 형식미다. 이번 작품은 더욱이나 액션 미학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자신감과 장르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무술 액션의 전통을 정확히 이해하고 관객에게 장르의 미학을 설파하고자 한다. 이번 영화에선 오사카와 베를린, 파리를 오가는 동안 총은 물론이고 칼과 활, 쿵후가 등장한다. 존 윅 시리즈는 영화사 속 액션 미학에 대한 존중감을 내비쳐 왔는데, 4편에 이르러선 동서양의 주요 액션 장르를 녹여내려는 시도까지 성큼 나아간다. 대표적으로 일본 사무라이 갑주가 놓인 호텔 내 전시장에서 존 윅이 쌍절곤을 들고 총 든 상대들을 쓰러뜨리는 액션 장면이 그렇다. 클래식 액션 영화에 대한 애정과 이해가 느껴지는 장면이다. 액션 미학에 대한 높은 이해 수준은 시각장애인 킬러 캐릭터 케인(전쯔단)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시각장애인 무술 고수는 아시아권 영화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다. 케인의 무술은 일본 사무라이 영화 ‘자토이치’나 홍콩 무협 영화 ‘동사서독’ 속 맹무살수를 떠올리게끔 한다. 아시아권 영화 속 무술과 감정, 캐릭터성을 이해하고 영화 속에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존 윅 4는 케인을 할리우드 영화 속 전형적인 유색인종 악인 캐릭터로 소모하지 않는다. 케인은 온갖 무술에 능통한 달인으로서 존 윅에게 밀리지 않는 실력과 인격적 합리성을 갖춘 인물로 묘사된다. 주인공과 대립하는 인물이지만 다층적으로 그려낸다. 이 지점에서 전쯔단이라는 액션 스타에 대한 묵직한 존중까지도 느껴진다. 존 윅 시리즈는 세상 온갖 액션 영화에 대한 헌사를 통해 미학적 완성을 지향하는 장인 영화로서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배우들이 액션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게끔 하려고 영상을 현란하게 분절하는 할리우드식 눈속임은 없다시피 하다. 롱테이크로 긴 호흡으로 액션을 담아낸다. 주인공과 악당이 합을 겨루는 장면들은 마치 무기와 무술을 활용한 무용을 보는 것만 같다. 그걸 보다 보면 무술이 서사를 채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별개의 예술처럼 다뤄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존 윅 4는 액션 장르에 대한 존중감을 관객에게도 발신한다. 그 장르적 자신감을 마주하다 보면 영화를 보는 동안 개연성은 다소 부족하더라도, 장인이 한 땀 한 땀 다듬은 액션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한 우물을 판 장인의 눈빛은 구구한 설명 없이도 설득력을 지니는 법이다. 복수에 매진하던 존 윅이 이번 작에선 자유를 갈망하며 국제적 연합조직 최고회의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고, 시리즈는 막바지를 향해 간다. 복수에서 자유로 테마를 절묘하게 틀어간 덕분에 스토리도 보다 깊이를 얻었다. 한 가지를 대하는 태도가 곧 만 가지를 대하는 태도라더니. 하나를 깊이 파다가 여러 장점에 도달한 걸작이 탄생하기도 한다. 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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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운지]이갑수 작가 두 번째 소설집, SF 세계관 속 블랙 유머 담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출신 이갑수 작가(40)가 쓴 ‘외계 문학 걸작선’은 그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작가는 첫 소설집 ‘편협의 완성’(2018), 장편소설 ‘킬러스타그램’(2021)을 통해 위트와 냉소와 독특하게 결합된 인간애를 표현해낸 바 있다. 아홉 편의 소설이 수록된 소설집에서 작가는 물리적으로 한층 더 확장된 세계를 배경으로 삼는다. 이번 신간도 첫 소설집 ‘편협의 완성’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사실과 물리학 이론, 각종 수학 공식이 다수 담겨 있다. 이와 같은 과학적 세계관 설정에선 현상의 기원과 유래를 탐구하는 시선이 드러난다. 이와 같은 시선엔 그 특유의 블랙 유머가 진하게 녹아들어 있다. 아홉 편 소설 모두 주제는 인간애로 수렴된다. 이번 소설집에서 작가는 이전 작품 속 캐릭터와 세계관을 연결시킨다. 이는 소설 전반에 흐르는 특유의 유머 톤과도 맞물려 재미 요소를 끌어 올린다. 한편 작가는 서울 광진구 ‘서점로티’를 운영하는 서점 주인이기도 하다. 해당 서점은 소설가 지망생을 대상으로 한 소설 작법 강의를 진행한다.임현석 기자 lhs@donga.com}

    • 2023-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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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어 조던’ 게임의 법칙을 바꾼 그 순간[무비줌인]

    영화 ‘에어’는 1984년 스포츠용품 회사 나이키가 당시 신인 프로농구 선수 마이클 조던과 농구화 전속 계약을 맺는 과정을 그린다. 여기까지 들으면 농구 스포츠 드라마일 것 같은데, 아니다. 배 나온 중년 아저씨들이 회사의 중요한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초과근무를 하는 비즈니스 드라마다. 스펙터클은 없다. 영화는 나이키 직원들이 총 대신 농구화를 들고, 좀비 대신 아디다스를 상대하는 과정을 다룬다. 결과도 누구나 다 아는 대로다. 나이키는 1980년대 초반 농구화 시장에서 경쟁사인 아디다스와 컨버스에 밀린 3위 업체였지만 마이클 조던과 계약을 맺은 뒤 농구화 라인 ‘에어 조던’을 선보이며 단숨에 시장 선두로 도약한다. 스토리는 뻔하고 장면도 단조로운데, 푹 빠져서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캐릭터가 잘 구축됐기 때문이다. 관례와 싸우는 혁신가 캐릭터들이 나오고 그들 편에 서서 응원하게끔 된다. 이 중에서도 핵심 인물은 마이클 조던과의 계약 체결 과정에서 나이키의 광고 모델 스카우트 역할을 한 소니 바카로(맷 데이먼)다. 비즈니스의 운명을 뒤흔들 결정적인 통찰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영화는 마이클 조던의 대학 무대 버저비터 장면을 비디오로 반복해서 돌려 보는 소니의 모습을 비추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소니는 최고 선수를 모델로 섭외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회사 분위기에 냉소하면서, 누가 최고인지 알기 위해 농구 광팬에게 말을 걸고 농구 잡지를 빼먹지 않고 읽는 인물이다. 소니는 아직 프로 무대를 밟지 않은 마이클 조던의 가치와 잠재력을 알아보고 회사 측에 보다 과감하게 베팅할 것을 요구한다. 소니는 마케팅 예산을 나눠 선수 여러 명을 모델로 두는 스포츠용품 회사들의 관행을 깨고 예산을 집중해서라도 걸출한 한 명을 발탁해야 한다고 나이키 최고경영자(CEO) 필 나이트(벤 애플렉)를 설득해 나간다. 강한 확신에 찬 소니는 선수와 계약을 위해선 에이전시를 통해야 한다는 관행도 깨고, 마이클 조던의 부모를 직접 찾아가기까지 한다. 업계에서 퇴출될 수도 있다는 위험을 무릅쓴 베팅이다. 이런 모습은 영화 속에서 언급되는 나이키의 10대 원칙과도 포개진다. ‘우리는 항상 공격한다’, ‘규칙에 얽매이지 말아라’, ‘비즈니스는 전쟁이다’ 같은 문구들. 그는 승리하기 위해 경쟁사들을 서슴없이 공격하기도 한다. 에이전트에게 아디다스 독일인 창업자의 나치 부역 전력을 들먹이고, 조던의 어머니 델로리스 조던(비올라 데이비스)에게 나이키 경쟁사들의 약점을 일러주는 장면도 나온다. 벌금을 물더라도 미국프로농구(NBA) 규정과 어긋난 농구화 디자인으로 주목을 끌겠다는 전략을 취한다. 승리를 위해 물불 안 가리는 셈이지만, 이는 소니가 마이클 조던의 진짜 가치를 알아본 사람이기에 가능한 행동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선 경쟁이 아름답지만은 않으며 비즈니스는 공정하지 않다는 격언도, 옳은 일을 하면 수익은 저절로 벌게 된다는 격언도 나온다. 일견 비즈니스 격언들이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순이 아니라는 점을 영화는 소니의 모습을 통해 담담히 보여준다. 마이클 조던의 진가를 알아본 인물은 소니 말고 덜로리스도 있다. 덜로리스는 나이키 신제품의 마이클 조던 이름을 허락하는 대신 제품 판매 수익의 5%를 줄 것을 요구한다. 소니처럼 새로운 시장에 대한 확신과 통찰을 토대로 관례를 깨는 만큼 역시 공감을 산다. 필 나이트도 관례를 깬 또 다른 혁신가다. 그에 관해선 영화 내내 별생각 없이 사는 괴짜 성향이 두드러지게 묘사된다. 그는 네 글자가 좋다기에 나이키(NIKE)라는 사명을 지었고, 나이키 로고 ‘스우시’도 대학생에게 35달러 주고 맡겼는데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마이클 조던 농구화에 붙은 ‘에어 조던’이라는 명칭을 두고도 별로라는 식으로 반응한다. 결과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그는 그렇게 하게끔 했다. 잘 모르겠다면서도 “차차 정들겠지”라고 한다. 자신의 견해와 무관하게, 직원에게 위임한다. 또한 필 나이트는 덜로리스의 제안을 담대하게 수용한다. 영화에선 나오지 않지만, 선수와의 판매 수익 배분 계약은 나이키 이사회에서 해고될 위기를 감수하고서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게 관례를 깬 혁신가들이 상대의 진가를 알아봐 주는 구조가 쌓인다. 그리고 모두 믿음에 부합한다. 비즈니스가 변화를 만들어내려면 서로를 인정하고, 알아봐 주는 지지의 문화가 중요하다. 그러고 보면 비즈니스도 팀 스포츠 농구를 닮아 있다. 상대의 실수를 노리면서, 승부처로 게임을 끌고 가야 한다. 좋은 기업 문화가 있다면, 역전 기회는 남아 있다.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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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비줌인]총 없는 나라의 복수극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파트2(9∼16편)가 공개된 후, 이 완벽한 복수극에서도 구태여 흠을 잡는 사람들은 동은(송혜교)과 여정(이도현)의 로맨스 분위기를 문제 삼기도 한다. 온전히 복수만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도 충분하지 않았느냐고 말이다.(※이 칼럼에는 ‘더 글로리’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이 드라마의 김은숙 작가와 주연 송혜교 배우는 세상 온갖 상황에서도 사랑은 꽃핀다는 메시지를 던져온 로맨스의 아이콘들이다. 천생 로맨스 재질이라고 감탄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연애할 때가 아니니까 긴장 풀지 말라는 주문을 하게 되다니. 그만큼 이 복수극의 매력이 압도적이라는 의미다. 이 드라마의 성공을 이야기할 때 현실에선 이뤄지지 않는 권선징악에 사람들이 대리만족했다는 해석이 적지 않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미진하다. 애초에 모든 복수극은 대리만족을 통한 판타지적 쾌감을 노리는 장르다. 이 드라마가 돋보인 건 권선징악의 카타르시스 이상으로 지난한 복수 과정 속에서 의미를 담아내고. 과정에서 몰입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복수 장르에선 오래된 격언이 있다. 복수는 차갑게 식혀 먹을 때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고. 복수란 이뤄지는 시점보다 이를 실행하려는 의지와 이를 향해가는 일관된 과정이 더 중요하다. 공들여 쌓아온 복수는 차갑게 식혀 먹어도 군침이 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대로 짜인 복수극에 갈증이 있다. 밑바닥부터 극한까지 감정을 끌어올린 다음 폭죽처럼 터지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어 한다. 이 갈증은 한국식 기존 막장 드라마의 복수로는 해소가 안 된다는 사실을 더 글로리를 보면서 깨달았다. 복수를 소재로 해도 냉기를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막장 드라마는 처음부터 시비만 안 걸면 싸울 일도 없다는 무해한 주인공이 드라마 방영 기간 동안 악인에게 ‘갈굼’을 당하다가 방영 후반쯤 우연한 계기로 별안간 지위 역전이 이뤄지면, 그게 복수라고 주장한다. 드라마 방영 내 복수가 차지하는 비중보다 갈굼 비중이 더 높다. 응징할 대상을 그야말로 쓸어버리는 영화 ‘테이큰’이나 ‘존 윅’ 스타일은 오락의 쾌감은 있을지언정, 감정이입을 통해 카타르시스까지 큰 낙차를 만들어내진 못한다. 총이라는 형태로 복수의 능력이 그들의 손에 쉽게 쥐여져 있어서다. 반면 더 글로리는 주인공 동은이 복수의 능력을 하나씩 채워가는 과정에 매우 진심이다. 복수의 동기를 보여주는 장면들은 드라마 중 초반에 몰려 있고, 2화부터는 상대적으로 덜 할애된다. 그 대신 복수를 준비해 나가는 과정에 집중한다. 창작 관점에서 이 지지부진한 복수의 준비 과정을 견딘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작가라면 당장 주인공 손에 총을 쥐여줄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이 드라마는 총 대신 쓰레기를 뒤지면서 시간을 견디는 인간을 비춘다. 여기엔 파괴된 존엄을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개인에게 중요한 일인지 보여주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드라마 속 지난한 복수 과정을 따라가는 동안, 고군분투하는 동은에게 운이 따른다는 설정이 납득이 간다. 동은이 조력자를 만들어가는 방식도 그렇다. 자신이 구태여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하고, 깊이 공감하고, 악인들을 응징 대상으로 삼을 때도 변하지 않았다고 안도한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깊이 감정이입하고 공감하게 된다. 바로 즉각적이고 뜨거운 응징에선 느낄 수 없는, 차가운 복수극의 묘미다. 잘못한 자 벌 받는다는 종교적 운명론이나 명분론에 기대는 대신 주인공 동은이 감정의 수호자로서 복수를 말하는 점이 특히 섬세하다. 동은은 명분과 운명에 관심이 없다. 그건 종교에 심취한 가해자의 몫으로 둔다. 열여덟 살 어린 동은의 꿈과 감정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복수의 명분은 충분하다. 동은의 복수 조력자인 현남(염혜란)의 “나 빨간 립스틱 바를 거야. 가죽 잠바도 입을 거야”라는 대사도 그렇다. 그들에겐 그저 소박한 감정의 영역이 훼손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동은이 복수를 다짐하게 됐던 순간도 가해자 연진(임지연)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현모양처’라는 꿈을 들은 뒤다. 우리에게서 사소하고 소박한 감정들이 소실되지 않도록, 나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서로가 지켜줘야 한다는 메시지가 복수 끝에 남는다.임현석 디지털이노베이션팀 기자 lhs@donga.com}

    • 2023-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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