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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뜩이는 눈으로 하우스(표적)를 바라보고 신중하게 스톤을 던지는 ‘팀 킴(Team Kim)’의 놀라운 경기력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렇게 팀 킴의 컬링은 평창 겨울올림픽 후반부 최대 화제로 떠올랐다. 경기장 안에서는 모든 선수가 냉철한 승부사이지만 경기장 밖에서는 정반대다. 가족과 친구 동료에게 이들은 그저 평범한 딸이자 누나 여동생 그리고 ‘절친’이다. 자매인 김영미(27·리드) 김경애(24·서드)는 활달하고 밝은 성격으로 중고교 때부터 따르는 후배들이 많았다고 한다. 자매의 한 친척은 “어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지만 밝은 성격 덕분인지 잘 극복했다. 기특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의성여고 출신인 오은진 선수(25·춘천시청)는 “영미 언니는 성격도 ‘국민 영미’다. 워낙 동생들을 잘 챙겼다”며 웃었다. 김영미의 담임교사였던 이장춘 씨(66)는 “영미는 책임감이 강하면서도 성격이 밝았다. ‘부잣집 맏며느리 같은 친구’였다”고 회상했다. 김경애는 어릴 때부터 운동신경이 좋았다. 볼링이나 배드민턴 등 생활체육 실력이 남달랐다. 학생 때 보충수업까지 챙기고 훈련장으로 떠나는 언니와 달리 수업이 끝나면 청소도 하지 않고 부리나케 컬링장으로 갔다가 혼이 나기도 했다. 친구 이유진 씨(25·여)는 “얼굴에서 항상 웃음이 떠나지 않는 친구였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 즐겁게 만든다”고 말했다. 대구의 한 대학에 입학한 뒤 지역 명물인 막창을 비롯해 삼겹살과 치맥(치킨과 맥주) 등을 먹기 위해 ‘맛집 투어’를 즐긴 여대생이었다. 특히 치킨을 좋아해 친구들은 김경애를 부를 때 ‘닭고기야’라고 애칭처럼 불렀다. 스킵(주장) 김은정(28)과 세컨드 김선영(25)의 할머니는 경북 의성에 살고 있다. 공교롭게도 두 선수 할머니의 성(姓)도 모두 김 씨다. 두 선수의 할머니 사랑도 남다르다. 김은정은 어릴 때부터 할머니의 도움을 받으며 자랐다. 투정 부리지 않는 순한 손녀딸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할머니를 살뜰히 챙긴다. 1월초 훈련을 위해 집을 떠날 때도 “당분간 올림픽 준비 때문에 바빠서 찾아뵙지 못할 것 같다”며 할머니를 꼭 안아줬다. 김선영도 대회에 나가 메달을 받으면 항상 할머니 목에 걸어주며 기쁨을 나눴다고 한다. 재롱이 많고 밝은 성격에 할머니를 웃게 하는 날이 많았다. 할머니가 “기특하다”며 손녀딸에게 용돈을 주면 명절이나 생일 때마다 손녀딸도 용돈을 챙겨드렸다. 김은정은 집안일도 곧잘 도왔다. 농사 일이 바쁘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무거운 모판을 날랐다. 아버지가 운영했던 식당 주방에 드나드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의성에 축제가 열려 손님이 붐빌 때면 서빙과 설거지를 뚝딱 해냈다. 당시 김은정의 모습을 기억하는 한 주민은 “얼마나 손이 빠른지 두 시간만 도와줘도 일이 수월해졌다”고 말했다. 후보로 시작해 예선 중반 맹활약을 펼친 김초희(22)는 5명 선수 중 유일한 비(非)의성 출신이다. 의성여고 못지않게 컬링으로 유명한 송현고(경기 의정부시)를 졸업했다. 제발로 찾아와 시작한 컬링이었지만 누구보다 실력이 좋아 ‘될성부른 나무’라는 소리를 들었다. 김초희의 중고교 시설 코치였던 이승준 씨(37)는 “초희는 ‘성실’과 ‘긍정’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는 학생이었다. 성실하고 열정적이었다”고 말했다. 강릉=권기범 kaki@donga.com·김정훈/의성=정현우 기자}

“나라 잔치라고 하니 화를 낼 수는 없고…본전도 못 건지니 답답하지, 뭘.” 강원 평창군의 한 민박집 사장 김모 씨(51)는 지난달까지만 해도 희망에 부풀었다. 평창 겨울올림픽이 시작되면 수많은 선수와 가족들, 관광객들이 몰릴 것이라는 전망을 믿었다. 2000만 원을 대출받아 페인트칠을 다시 하고 TV와 냉장고 이불도 싹 바꿨다. 그러나 지금까지 받은 손님은 ‘제로(0)’. 손님이 없어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매일 보일러를 켜놓아 유지비만 나가고 있다. 일손 부족에 대비해 임시로 고용했던 아주머니들은 8일 만에 그만뒀다. 김 씨는 답답한 목소리로 “지역경제에 파급효과가 그렇게 크다는데 현실적으로 와 닿는게 왜 없느냐”고 되물었다. 이곳에서 불과 500m정도 떨어진 한 펜션은 상황이 다르다. 1박에 25만~45만 원인 객실 21개가 폐막(25일)까지 만실이다. 예약자 10명 중 9명은 대회 구경과 관광을 겸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이다. 이곳 매니저 강모 씨(27)는 “올림픽 기간 동안 적어도 1억 원 이상은 매출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엇갈린 평창-강릉 숙박업소 ‘희비’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폭리 논란’이 일었던 경기장 인근 숙박업소들의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18~20일 강릉시와 평창군의 올림픽 경기장 인근 숙박업소를 살펴봤다. 글로벌 애플리케이션 제휴 등을 앞세운 고급 리조트나 호텔은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손님들로 가득했다. 반면 모텔 등 저가형 업소들은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손님에 한숨만 쉬고 있었다. 모텔이나 민박 중에는 관광객 눈높이에 맞추겠다며 올림픽을 앞두고 시설 개선 등에 비용을 투자한 곳이 많다. 적게는 수백만 원에서 많게는 1억 원이 넘는 돈을 들인 곳도 있다. 사실상 휴업 상태였던 건물에 수억 원의 보증금과 월세를 내고 영업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올림픽이 후반으로 접어들었지만 손님은 기대에 크게 못 미치고 있다. 투자금 회수에 애를 먹을 정도다. 그나마 상황이 나은 곳도 “손님 수가 평소 겨울철 성수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이라고 했다. 올림픽을 두 달 앞두고 강릉시의 한 모텔을 빌려 영업을 하고 있는 강모 씨(37·여)는 “특수는 커녕 평소 가격(5만 원)을 받고 있는데도 손님이 없다”고 얼굴을 찌푸렸다. 한 달 난방비와 전기세 임금 등을 고려하면 한 달 매출이 1300만 원은 나와야 하는데 매일 2, 3개 객실만 나갈 뿐이다. 업주들은 부랴부랴 가격을 기존 10만~15만 원에서 5만~7만 원대로 내렸지만 아무 효과가 없다. ‘숙박비가 비싸다’는 소문이 퍼져 아예 문의전화조차 오지 않는다. 도심인 강릉보다 평창 일대 업소들의 상황이 더하다. 평창의 한 민박집 사장은 “외국인들은 예약 앱을 이용하고, 내국인들은 경기장 주변 숙소는 비싸다는 편견 때문에 아예 평창으로 오질 않는다. 방 값을 알아보러 오는 사람도, 전화도 없다”고 말했다.● 숙박 앱이 변수…일부 ‘자승자박“ 지적도 반면 1박 가격이 30만~40만 원대인 고가형 숙박업소들은 실적을 내고 있다. 이들의 주요 수입원은 외국인 관광객들이다. 글로벌 숙박 중개 애플리케이션에 등록했던 것이 주효한 것이다. 강릉의 한 호텔에는 평일 80%가량, 주말에는 만실을 기록하고 있다. 숙박 앱에는 객실 가격을 현장(30만 원)보다 높은 최대 49만 원에 올려놨지만 문의가 계속되고 있다. 호텔 관계자는 ”기대했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손해 볼 걱정은 없다“고 말했다. S레지던스 지배인 박모 씨(57·여)는 ”올림픽 기간 중 객실 80% 정도가 차 있고, 이들 중 대부분이 외국인이다. 앱을 통해 미리 후기 등을 살펴본 뒤 예약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객실 상태가 좋은 업소에 몰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고속철도(KTX) 가격이 변수였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객실비 10만~15만 원을 주고 모텔에서 숙박하는 대신 KTX 값 2만~4만 원을 내고 서울이나 양평 등 관광이 용이한 곳에서 묵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강릉역에서 만난 권모 씨(30)는 ”숙박비 논란이 많아 아예 예약을 포기하고 KTX를 타고 왕복해가며 관람 중이다. KTX라 이동 시간도 별로 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업주들은 개막 전 폭리 논란이 제 발목을 잡은 격이라고 말했다. 강릉의 한 모텔 사장 이모 씨(64·여)는 ”인터넷을 할 줄 안다는 사장들이 고가에 방을 내놓은 게 편견만 심어주는 꼴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일부는 방문객 규모를 과도하게 예측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예측을 그대로 믿고 과잉 투자를 했다가 손해를 봤다는 것이다.강릉=권기범 기자 kaki@donga.com강릉=이지운 기자 easy@donga.com평창=김정훈 기자 hun@donga.com}

20일 오전 강원 평창지역의 수은주는 영하 6도까지 떨어졌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던 수준의 한파는 아니다. 하지만 악명 높은 대관령 칼바람 탓에 피부로 느껴지는 추위는 매서웠다. 이날도 변함없이 남모 씨(61)는 빗자루를 들었다. 그의 일은 평창 올림픽스타디움 주변을 청소하는 것이다. 강릉에 사는 남 씨는 올림픽 개막 전인 지난달 2일부터 계약직으로 일하는 환경미화원이다. 경기장 주변에서 휴지와 담배꽁초 등 각종 쓰레기를 줍는 게 일이다. 이날 올림픽플라자에서 만난 남 씨는 추위 탓에 계속 몸을 떨고 있었다. 그러면서 “올림픽 내내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 같다. 쓰레기 줍는다고 줍는 사람까지 쓰레기 취급한다는 기분이 든다”며 허탈해했다. 남 씨는 이날 카키색 점퍼와 검은색 방한화를 신고 있었다. 집에 있던 자신의 옷과 직접 구입한 신발이다. 점퍼 위로 환경미화원이라는 걸 알리는 검은 조끼를 입었다. 기자를 만난 남 씨는 갑자기 바지와 내복을 함께 걷어 올렸다. 종아리와 발목에 붉은 두드러기 같은 증상이 뚜렷했다. 동상이었다. 남 씨와 함께 이곳에서 일하는 환경미화원은 약 50명. 서너 명을 제외하고 모두 60, 70대 고령자다. 대부분 강릉과 평창에 살고 있다. 대회 개막에 앞서 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조직위)가 용역업체를 통해 간접고용한 근로자다. 시간당 최저임금 7530원을 받고 하루 8시간씩 2교대로 주 6일 출근한다. 문제는 살을 에는 한파였다. 매서운 바람에 체감온도가 영하 20도 가까이 내려갈 때도 있지만 환경미화원에게는 별다른 방한용품이 제공되지 않았다. 지난달 한반도 전체에 최강 한파가 닥치자 걱정이 된 남 씨는 동료들과 함께 용역업체와 조직위 측에 방한복 지급 등 추위 대책 마련을 요청했다. 그때마다 “방안을 찾아보겠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참다못한 남 씨는 올림픽 개회 전후인 1일과 12일 청와대 국민신문고 홈페이지에 “미화원에게 방한복을 지급해 달라”는 글을 올렸다. 이에 대한 반응은 있었다.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직원이 전화를 걸어와 실태가 어떤지 물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환경미화원 김모 씨(65)는 “정부가 우리 얘기를 들은 척도 안 한다.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그저 시간만 끌려는 속셈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조직위는 용역업체를 통해 고용된 근로자에게까지 방한용품을 지급할 의무는 없다고 밝혔다. 한 관계자는 “국제올림픽위원회 규정에 간접고용 근로자에게 지급할 품목 내용은 없다. 현재 대회 운영 예산도 부족한 상황이라 1만여 명에 달하는 간접고용 인력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다”고 말했다. 지급 의무가 없다고 하는 건 용역업체도 마찬가지다. 업체는 환경미화원과 체결한 근로계약서를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근로계약서에 방한복 지급 관련 내용이 없고 계약 당시 환경미화원들이 이를 문제 삼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조직위가 이들에 대한 방한용품 지급을 요청하거나 협의한 적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환경미화원 이모 씨(60)는 “출근하자마자 계약서에 인적사항만 쓰고 일하러 갔다. 노인들이 계약서 사본조차 받지 못한 상태에서 세세한 내용까지 어떻게 알겠느냐”고 하소연했다. 환경미화원들은 조직위에 소속된 직원들이 이른바 롱패딩과 방한바지, 방한화까지 중무장을 하고 다니는 걸 볼 때마다 심한 박탈감을 느낀다고 호소했다. 소위 VIP 인사들이 고가의 방한용품을 선물받았다는 소식도 이들의 마음에 상처가 됐다. 환경미화원들은 패럴림픽이 끝나는 다음 달 말까지 일한다. 환경미화원 최모 씨(59)는 “우리 대부분이 동상에 걸려 고생하면서도 내 동네이고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다. 하지만 차별받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어 그만두고 싶을 때가 하루에도 수십 번이다”라고 말했다.김동혁 hack@donga.com / 평창=김정훈·권기범 기자}

18일 오후 강원 강릉시 관동하키센터. 빨간색과 회색이 어우러진 재킷과 바지를 입은 중년의 외국인 남성이 관람객 티켓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온 매슈 라르손 씨(57)다. 그는 평창 겨울올림픽에서 이벤트서비스(EVS) 자원봉사자로 활동 중이다. 또 유일한 ‘시장님 자원봉사자’이다. 지난달만 해도 라르손 씨의 일터는 미국 워싱턴주 스노퀄미시 집무실이었다. 인구 1만4000명의 도시를 이끄는 시장이다. 올해까지 무려 12년간 시장으로 일했다. 지난해 4선에 성공해 2021년까지 16년간 시장을 맡는다. 라르손 씨가 평창 올림픽 자원봉사를 결심한 건 문영훈 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 인력운영국장(51)과의 인연 덕분이다. 2007년 당시 행정안전부에서 근무하던 문 국장은 1년 6개월간 미국에 머물며 작고 강한 도시로 알려진 스노퀄미시를 배우고 체험했다. 문 국장은2009년 스노퀄미시와 전남 강진군의 자매결연 때도 다리 역할을 했다. 2016년 문 국장이 평창올림픽조직위로 자리를 옮기자 스노퀄미시 내부에서는 자연스럽게 자원봉사 참여가 화제에 올랐다고 한다. 참여를 희망한 사람은 13명. 라르손 씨도 손을 들었다. 대기업 부사장인 그의 아내도 휴가를 내고 함께했다. 라르손 씨는 “평창 올림픽 자원봉사를 위해 시장 재임 중 가장 긴 휴가를 냈다. 내 인생 최고로 흥분되는 휴가 계획이었다”고 말했다. 이달 초 한국에 온 라르손 씨는 이제 젊은 한국인 자원봉사자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린다. 근무를 마친 동료들에게 망설임 없이 먼저 “아리아리”를 외친다. 아리아리는 조직위가 채택한 자원봉사자들의 인사말이다. 급한 상황을 주고받을 때는 능숙하게 카카오톡을 이용한다. ‘핀 트레이딩’에도 열중하고 있다. 핀 트레이딩은 올림픽을 기념해 각국에서 제작한 핀을 서로 교환하는 것이다. 그의 가슴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기념용 핀 10여 개가 달려 있다. 라르손 씨는 “일주일간 10개가 넘는 핀을 교환했다. 미국 아이스하키팀으로부터 얻은 핀은 너무 소중해 방에 몰래 숨겨뒀다”며 웃었다. 미국에서는 시장이지만 한국에서는 별다른 특혜를 받지 않는다. 자원봉사자 선발부터 숙소 및 식사 제공까지 다른 이들과 똑같다. 그는 “자원봉사자에게 숙소까지 무료로 제공하는 대회는 별로 없다. 급식으로 나오는 수프(국)와 김치도 맛있다”고 평가했다. 라르손 씨는 지금까지 가장 인상 깊은 순간으로 여자 아이스하키팀 선수인 박윤정(미국명 마리사 브랜트·26) 가족과의 만남을 꼽았다. 박윤정은 태어난 지 4개월 만에 미국으로 입양됐다가 2016년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 라르손 씨는 20여 년 전 네 자녀를 해외에서 입양했다. 라르손 씨는 “박윤정 선수의 아버지가 한국과 미국 유니폼을 번갈아 입고 응원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인터뷰 말미에 라르손 씨는 한국 국민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을 남겼다. “한국은 전쟁을 겪고도 ‘한강의 기적’을 이뤘습니다. 고속철도도 만들고 겨울올림픽까지 열었습니다. 한국의 에너지는 마치 1960년대 미국의 황금기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인상적입니다.”강릉=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캐나다 선수단 소속의 여성 스태프 C 씨는 매일 오후 ‘귀촌 전쟁’을 벌인다. 주요 경기가 밤늦은 시간에 끝나다 보니 숙소로 돌아갈 때마다 택시 잡는 건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다. 밤마다 올림픽이 열리는 평창과 강릉의 택시 정류장에는 하염없이 택시를 기다리는 외국인이 길게 줄지어 서 있다. C 씨는 “기차시간이 다가오는데 택시가 보이지 않을 때면 식은땀이 난다”고 말했다. 평창 겨울올림픽이 개막한 지 18일로 열흘째를 맞았지만 여전히 교통이 불편하다는 외국인이 많다. 이런 상황은 설 연휴 기간에 귀성·귀경객이 더해지면서 특히 심했다. 연휴 마지막 날인 18일 오후 3시경 고속철도(KTX) 강릉역. 켄트 먼들 씨(25·캐나다)가 티켓 자동발매기 앞에서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는 10분 넘게 발매기의 터치스크린 화면을 누르다 한숨을 내쉬었다. 서울행 티켓이 막차까지 모두 매진된 탓이다.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는 먼들 씨는 출근 때문에 반드시 서울에 가야 했다. 그는 가까스로 양평행 티켓을 구했다. 시외버스로 갈아타고 서울로 가려는 것이다. 1시간 반 동안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먼들 씨는 “1년간 한국에서 직장을 다닌 덕에 그나마 설 휴가라는 것과 양평이 어디인지 알아서 이 정도 대처가 가능했다. 한국을 모르는 외국인들은 이런 걸 전혀 모르니 당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강릉역과 평창역에는 서울 등 다른 곳으로 가려는 외국인이 대거 몰려 마치 국제공항을 방불케 했다. 하지만 설 연휴가 겹쳐 대부분의 기차표는 일찌감치 동났다. 한국인들은 교통정보를 확인해 대안을 마련했지만 상당수 외국인은 정보조차 부족해 발만 동동 굴렀다. 서울에서 평창과 강릉으로 향하는 길 역시 아직도 ‘고난의 행군’이다. 스웨덴에서 온 데니스 얀센 씨(34)는 14일 한국에 왔지만 18일에야 경기를 관람했다. 설 연휴와 맞물려 평창행 KTX 좌석을 구하지 못해서다. 얀센 씨는 19만5000원짜리 평창 코레일패스(무제한이용권) 7일권을 구입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그는 “패스 소지자에게 할당된 좌석이 부족해 말만 ‘패스’지 탈 수 있는 열차가 별로 없었다”고 말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평창과 강릉으로 바로 갈 수 있는 경강선 KTX도 설 연휴를 앞두고 입석까지 모두 팔려 외국인들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코레일은 대안으로 청량리역과 상봉역에서 평창·강릉으로 출발하는 KTX를 편성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캐나다 국가대표로 출전한 아들을 응원하러 가족과 함께 온 스티븐스 스미스 씨(53)는 “코레일에 영문 웹사이트가 있긴 하지만 설 연휴에 열차표가 부족할 것이라는 공지가 없었고 예약 절차도 복잡해 이해하기 힘들었다. 개별 발권만 가능해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앉아야 했다”고 말했다. 불편이 계속되자 일부 외국인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자구책을 찾고 있다. 이달 초 한 외국인 방문객이 만든 ‘평창올림픽 2018 교통’이라는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2주 만에 1100여 명의 외국인이 가입했다. 이곳을 통해 외국인 질문에 답변을 해주는 신호진 씨(27·대학생)는 “경기 입장권을 예매하고도 기차표가 없어 한국 방문을 포기하는 사례도 있다”며 “우리나라가 외국인들에게 교통이 불편한 나라로 비칠까 봐 우려된다”고 말했다.강릉=권기범 kaki@donga.com·이지운 기자}

“보세요, 통통 소리가 나죠?” 13일 오후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 서울 노원소방서 안병철 소방관이 605호 베란다 벽을 두드리며 말했다. 606호와 연결된 베란다를 막아주는 벽이다. 겉으로 보기엔 그냥 시멘트 벽이지만 실은 두께가 1cm도 되지 않는 석고보드로 돼 있다. 망치를 사용하거나 발로 세게 걷어차면 단숨에 깨진다. 그래서 일부 아파트 주민은 “돈 아끼려고 싸구려 소재 썼다”고 건설사에 항의하기도 한다. 이 벽은 비상 대피를 위해 만든 통로다. 현관으로 대피할 수 없을 때 옆집을 통해 대피하도록 만든 ‘경량 칸막이’다. 아파트에 설치된 대표적인 비상 대피 시설이다. 비상계단을 이용하기 어려운 고층 아파트의 안전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현관을 빠져나가기도 어려울 정도의 큰불이 났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다. 2005년 이후 지어진 아파트 4층 이상에는 이런 대피 수단이 의무적으로 설치돼 있다. 경량 칸막이 외에도 ‘대피 공간’과 ‘하향식 피난구’도 있다. 아예 옆집으로 드나들 수 있는 비상구가 마련된 곳도 있다. 그런데 자기 집에 이런 공간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노원소방서는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면 관리사무소에 문의하면 된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등에 붙어 있는 비상 대피로 도면에 적혀 있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만약 지금 살고 있는 곳이 1992년 이전에 지어진 아파트라면 대부분 집 안에 마땅한 대피 공간이 없다. 1992∼2005년 사이에 지어진 복도식 아파트라면 경량 칸막이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경량 칸막이는 베란다나 발코니 양쪽 끝 중 한 곳에 있다. ‘비상구’ ‘이곳을 깨고 탈출하세요’ 같은 스티커가 붙어 있다. 스티커가 보이지 않으면 손으로 두드리면 알 수 있다. 두께가 1cm 미만의 합판이나 석고보드 등의 재질로 돼 있어 ‘통통’ 소리가 난다. 하지만 이 기간에 지어진 아파트라도 경량 칸막이가 없을 수 있다. 의무 설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2005년 이후 지어진 아파트에는 대피 공간을 따로 마련해 놓은 곳이 많다. 면적이 2∼3m²로 크지 않지만 대피하기에는 충분한 구조다. 열기를 30분 이상 막아주고, 불이 밀고 들어오지 않도록 1시간가량 지켜주는 ‘갑종 방화문’이 설치돼 있다. 이곳으로 대피한 뒤 휴대전화 등으로 구조를 요청하면 된다. ‘하향식 피난구’는 가장 확실한 대피 수단으로 꼽힌다. 발코니 벽에 사각 모양의 맨홀 형태로 설치한다. 위급할 때 문을 열고 임시 사다리를 내려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위쪽을 향해 치솟는 화염과 연기를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절도나 주거 침입 우려로 설치를 꺼리는 곳이 많다. 많은 가정에서 대피 공간이나 경량 칸막이가 설치된 발코니를 창고처럼 쓴다. 비상 상황을 감안하면 가급적 이 공간을 비워놓는 것이 좋다. 특히 무게가 많이 나가는 가전제품이나 벽 전체를 가로막는 수납장은 대피 과정에 치명적 장애물이다. 소방 관계자는 “어둡고 밀폐된 공간으로 숨지 말고 발코니 등으로 대피한 뒤 연기가 들어오지 않게 문이나 창틈을 막고 구조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권기범 kaki@donga.com·사공성근 기자}

화재 현장에서 소방차가 한 번에 쏟아부을 물의 양은 제한돼 있다. 펌프차와 물탱크차를 모두 투입해도 길어야 5분이면 물이 떨어진다. 펌프차만 출동하면 3분도 벅차다. 소방차 운전대원이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소화전부터 찾아 뛰는 이유다. 소방차 물이 떨어지기 전에 소화전을 열고 수관을 연결해야 계속 불을 끌 수 있다. 이를 ‘소화전 점유 작업’이라고 한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8일 오후 2∼5시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일대 주택과 상가 건물 다섯 곳에서 소화전 점유 훈련을 했다. 소방차가 출동한 상황을 가정해 가장 가까운 소화전을 찾는 데 걸리는 시간을 측정했다. 대림역 12번 출구 앞 상가 골목. 도림로38길과 도림천로11길이 만나는 사거리 노래방에서 불이 났다는 가상 지령이 떨어졌다. 기자와 영등포소방서 소방대원 5명이 도착했다. 현장 도착까지는 순조로웠다. 하지만 소화전 앞에 가보니 7인승 승합차가 있었다. 화재 현장에서 불과 5m 떨어진 소화전인데 사용할 수가 없었다. 70m 거리에 있는 다른 소화전을 찾아 뛰었다. 동시에 승합차 운전자에게 전화도 걸었다. 운전자는 “금방 가겠다. 근처 슈퍼에 있다”고 답변했지만 훈련이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70m 떨어진 두 번째 소화전 앞에는 2t이 넘는 주류 운반 트럭이 서 있었다. 110m를 더 달렸다.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기자는 맨몸이었지만 실제 소방관들은 5kg이 넘는 장비를 들고 뛰어야 한다. 사용 가능한 소화전을 찾기까지 걸린 시간은 1분 56초. 실제였다면 펌프차에 담아온 물이 다 떨어져 진화가 중단될 위기였다. 정정의 영등포소방서 소방관은 “소화전에 도착한 뒤 소방차와 연결하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4분 가까이 걸린 셈이다. 불법 주차가 심한 오후라면 더 걸렸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대림역 6번 출구 인근 주택가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화재 지점에 도착해 50m 떨어진 소화전을 향해 뛰었다. 승용차가 서 있었다. 연락처도 없었다. 두 번째 소화전을 점유하는 데 1분 34초가 걸렸다. 장비를 이용해 지하식 소화전을 꺼내고 수관을 연결한 뒤 펌프차로 돌아오는 시간까지 합쳐 계산하면 3분 30초가 예상됐다. 지하식 소화전 등 소화 설비 인근 5m는 주차 금지 구역이다. 원래는 주차만 금지됐었지만 최근 개정된 도로교통법에 따라 8월 10일부터 ‘주정차 금지 구역’이 됐다. 주차뿐 아니라 5분 이내 정차도 금지된다. 또 8월 10일부터 아파트 등 공동주택 소방차 전용구역 설치가 의무화되면서 이곳에 주차하거나 길을 막으면 1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게 된다. 권기범 kaki@donga.com·조유라 기자}

쪽방 여관에서 생활하던 50대 일용직 근로자가 자신이 살던 객실에 불을 지르고 다른 투숙객을 칼로 찌른 뒤 자수했다. 이 남성은 경찰 조사에서 “너무 오래 굶어 화가 나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6일 서울 종암경찰서과 성북소방서에 따르면 이날 오전 3시 30분경 성북구 장위동의 한 여관에서 김모 씨(50)가 자신이 살던 약 6㎡ 크기의 방에서 이불에 불을 붙였다. 이어 여관 내 공동주방으로 향해 가스레인지에 연결된 가스 배관에도 불을 붙이려 했다. 건물 전체에 불을 내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여관은 전체 66㎡ 크기의 1층 건물이다. 전형적인 ‘쪽방 여관’이다. 방마다 금세 연기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다른 객실에 묶던 원모 씨(62)가 복도로 뛰쳐나왔다. 불이 났다고 생각해 가스 밸브를 잠그러 부엌으로 갔다. 누군가 연기 속에서 흉기를 휘둘렀다. 김 씨였다. 원 씨는 오른쪽 옆구리와 목 뒤를 다쳤다. 다행히 불은 크게 번지지 않았고 출동한 소방대원에 의해 4분 만에 꺼졌다. 김 씨는 곧바로 인근 지구대에 자수했다. 원 씨는 병원으로 옮겨졌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경찰은 김 씨를 현조건조물방화와 살인미수 혐의로 조사 중이다. 구속영장 신청을 검토 중이다. 경찰과 여관 투숙객 등에 따르면 김 씨는 이곳에서 ‘달방(월세)’를 얻어 생활하며 일용직 근로자로 일했다. 그러나 비수기인 겨울이 되면서 일을 거르는 날이 많아졌다. 김 씨는 경찰 조사에서 “요즘 같은 세상에 열흘이나 굶으면서 집에 있다보니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관 투숙객들은 김 씨에 대해 “평소 얼굴을 거의 볼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한 사람”이라고 했다. 원 씨도 이날 김 씨를 처음 봤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술 마시고 가끔 행패를 부릴 때도 있지만 김 씨는 그런 모습을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같은 여관에서 생활하던 A 씨(60)는 “빨래할 때 인사를 나누는 정도였다. 김 씨 때문에 큰소리가 난 게 오늘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피해자인 원 씨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입원 치료를 권유받았지만 그냥 퇴원했다. 상처 부위에 거즈만 붙인 채 쪽방 여관으로 돌아왔다. 치료비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다. 원 씨도 김 씨처럼 일용직 근로자다. 비수기인 탓에 김 씨와 마찬가지로 최근 거의 일을 하지 못했다. 1월에는 거의 대부분을 쉬어야 했다. 사흘 전 운 좋게 공사장 일을 하나 얻은 게 전부였다. 한 달 만에 일을 나간 것이다. 원 씨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던 김 씨를 안쓰럽게 생각했다. 원 씨는 “경찰서에서 조사 받으러 들어오는 김 씨를 봤는데 기력이 없는지 비틀거리더라. 얼굴이라도 알고 지냈으면 일감이 있을 때 같이 가서 밥이라도 먹었을 텐데…”라며 한숨을 쉬었다.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조유라 기자 jyr0101@donga.com}

“어휴 냉동실이네, 냉동실.”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창신동. 누비옷을 위아래로 입은 한 여성이 검은색 비닐봉지를 들고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높이가 1m 남짓 되는 건물 1층 문을 열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나 철제 대문을 지나 쪽방에서도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날 오전 서울의 최저기온은 영하 12도까지 떨어졌다. 입춘(立春)이 하루 지났지만 한파의 기세는 더욱 강해졌다. 동아일보는 지난달 25, 26일 1박 2일 동안 서울 영등포역 인근 쪽방촌을 찾았다. 최저기온이 영하 17도까지 떨어진 날이었다.● 전기장판 온도 ‘최고’…잠 못 드는 쪽방촌 옆방에서 나는 기침 소리, 가래 끓는 소리, 화장실 가는 소리…. 26일 오전 2시경 기자가 6.6㎡ 크기의 방에 눕자마자 다양한 소리가 들려왔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찌든 담배냄새는 참을 만 했다. 공용 화장실 쪽에서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수도관 동파를 막기 위해 수도꼭지를 조금 열어 놓은 것이다. 화장실로 가봤다. 순간 온수기가 있어 따뜻한 물이 나왔다. 세수를 하자 찬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따뜻한 물이 금 세 식은 것이다. 겨우 잠이 들었다. 세 시간을 채 자지 못했다. 오전 4시 50분 찬 기운이 느껴져 잠을 깼다. 건조하고 찬 공기에 코가 아팠고 입술도 하얗게 말라붙어 있었다. 무릎과 허벅지가 차게 굳어 있었다. 무릎이 얼어붙은 것처럼 시려 1, 2분 동안은 잘 움직이지도 못했다. 패딩 점퍼를 입은 상체는 그나마 괜찮았다. 얇은 벽과 나무 문은 새벽 칼바람을 막지 못했다. 바닥은 얼음을 만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전기장판 레버를 가장 높은 온도에 맞춰놨지만 열기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따뜻하다’보다 ‘선선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쪽방촌은 겨울에 특히 열악하다. 그럼에도 빈방은 드물다. 싼 값에 ‘달방’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쪽방 월세 가격은 20만~35만 원 정도. 비싼 방은 보일러가 가동되는 방이다. 주인들은 “사람들이 보일러가 없는 싼 방부터 찾기 때문에 비싼 방이 마지막까지 남는다”고 했다. 돈을 더 쓰는 것보다 추위를 참는 게 낫다는 것이다. 어떤 방에는 전기 장판마저 없어 입주자가 구해서 가져가야 하는 곳도 있다.● 최강 한파 녹여주는 따뜻한 마음 쪽방촌 주민들의 하루는 새벽 일찍 시작됐다. 오전 5시 반쯤 밖으로 나가봤지만 옆방과 맞은편 방은 모두 비어 있었다. 주인은 “오전 4시 반쯤 나가야 건설 현장 같은 일용직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30분 쯤 지나자 일을 나가지 않는 주민들이 한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서 25년을 생활했다는 주민 이모 씨(73)는 찢어진 틈으로 솜이 비집고 나온 패딩 점퍼를 입고 서 있었다. 200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손난로 삼고 있었다. 그는 이 동네 고장난 보일러를 고쳐주는 기술자다. 그래서인지 이 씨의 집은 월세 21만 원인데도 따뜻했다. 그러나 싼 만큼 열악했다. 화장실이 없기 때문. 그는 “집 연탄을 갈아야 한다”며 서둘러 길을 떠났다. 인근 슈퍼를 찾았다. 슈퍼 옆 커피 자판기는 동네 사랑방 같은 곳이다. 슈퍼는 적은 양을 사가는 사람이 많아 쪼개서 먹을 것을 판다. 삶은 계란은 500원, 홍시는 1000원 하는 식이다. 아침부터 술을 사가는 사람도 보였다. 기자가 잤던 집에서 함께 생활하던 심모 씨가 슈퍼에 모습을 드러냈다. 심 씨는 “새벽같이 나와 고철을 주으러 인근 동네를 세 바퀴 정도 돌았다”고 했다. 심 씨는 몸을 녹이며 슈퍼 주인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 순간 아침에 방에서 나올 때 복도에 가지런히 놓인 기자의 신발이 떠올랐다. 어제 방으로 들어갈 때 아무렇게나 벗어두었었는데 누군가 정리해놓은 것이었다. 심 씨는 “다 사람 사는 곳 아니냐”며 웃었다.● SNS, 반려견…쪽방촌 주민들의 취미생활 한겨울 추위에 주민들은 그나마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방으로 꽁꽁 숨어든다. 25일 오후에도 오후 6, 7시부터 일찌감치 끼니 준비를 해서 방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방 안에서 나름대로 소소한 즐거움을 찾고 있었다. 한 건물 2층 쪽방에 8년간 살았다는 차모 씨(70)는 20년 전쯤 영등포 쪽방촌에 자리잡았다. 기초생활수급자인 차 씨는 국민연금 등을 합쳐 월 70만 원으로 방세와 생활비를 충당한다. 차 씨가 최근 빠져 있는 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페이스북 뿐만 아니라 젊은 층이 애용하는 트위터와 인스타그램 계정도 모두 갖고 있다. 트위터 팔로어는 5000명이나 된다. 모 정당 지지자인 차 씨는 주로 정치적인 이야기를 올리거나 공유한다. 주변 사람들과의 추억도 종종 남긴다. 몸이 불편해 주로 집에 있는 그에게 몇 안되는 재미다. 쪽방 관리인이자 주민인 서모 씨(72·여)는 ‘방울이’라는 작은 강아지를 한 마리 키운다. 방울이를 위해 반려견 전용 사료까지 구입해 정성으로 기르고 있다. 서 씨는 추위를 견디느라 패딩 조끼를 입고 매일 밤 잠들면서도 추위에 떠는 강아지 걱정뿐이었다. 그는 “방울이가 추워서 걱정이다. 가장 친한 친구인데…”라며 웃었다. 숙소 옆 집 쪽방에서 생활하던 한 70대 노인은 무표정으로 기자를 맞았다. 그의 방에는 전기장판, 옷걸이 2개, 겉옷 1개가 전부였다. 일회용 플라스틱 그릇에 담긴 벌건 수제비를 바닥에 놓고 먹고 있었다. 방을 둘러보는 취재진이 썩 달갑지 않은 말투로 “왜, 이런 거 보려고 온 거 아니었냐”고 되물었다. 길에서 만난 또 다른 60대 노인은 “요즘 구청이다, 시청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와서 귀찮아 죽겠다. 그래봐야 실제로 바뀌는 것도 별로 없다”고 말했다. 잇달은 화재로 주변의 관심이 쏠려 부담스럽다는 사람도 있었다. 현장에서는 당장의 화재 예방과 방한 대책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으로 쪽방촌 개선 사업을 벌여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국노숙인시설협회 산하의 한 쪽방상담소 관계자는 “시설 개선도 중요하지만 주민들이 스스로 생활을 개선해보겠다는 의욕을 가질 수 있게 교육 훈련이나 일자리 알선 등 정책이 강화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김정훈 기자 hun@donga.com조유라 기자 jyr0101@donga.com}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대기업에 다니는 직장인들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여직원에 대한 경영진의 노골적인 스킨십과 고질적인 기업 내 성차별 문제 등에 대한 폭로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블라인드’ 앱에 쏟아지고 있다. 이 앱엔 익명으로 글이나 사진을 올린다. 하지만 회사 e메일 확인을 거쳐야 가입이 가능하다. 1일 이곳에 ‘미투’ 채널이 개설됐다. 성폭력 성추행 성희롱 주제만 다루는 전용 게시판이다. 4일까지 “나도 당했다”는 고백이 600건가량 올라왔다. 대부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글을 올리지만 실명 고백 이상의 파장을 낳고 있다. 가장 파장이 큰 것은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의 ‘스킨십’ 폭로다. “박 회장이 매달 한 차례 김포에 있는 아시아나항공 건물에 찾아와 승무원 격려 행사를 한다. 여직원이 많은 부서를 돌면 직원들이 아양을 떨어야 한다”는 글이 게재됐다. “나도 신입사원 때 ‘기쁨조’ 역할을 했다”는 댓글도 달렸다. 금호아시아나 전현직 직원들은 폭로 내용이 대부분 사실이라고 밝혔다. 전직 승무원 A 씨(25·여)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박 회장은 갓 입사한 교육생도 악수하고 때때로 안았다”고 말했다. 다른 직원은 “박 회장이 ‘내가 안으면 문제가 될 수 있으니 너희들이 안겨라’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금호아시아나 측은 “현장과의 소통을 위한 스킨십 경영이었다”고 해명했다. 또 “정확한 사실관계 파악을 위해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폭로 이후 일부 간부가 입단속에 나섰다는 주장도 나왔다. 5년 차 미만 여승무원 B 씨는 동아일보 기자에게 “회사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휴대전화와 모바일 메신저를 검사하겠다’고 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미투를 가로막는 이른바 ‘미블로킹(#MeBlocking)’인 셈이다. 금호아시아나 측은 “그룹 차원에서 막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미래에셋금융그룹의 여성 임직원 골프대회도 ‘미투’ 도마에 올랐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이 참석하는 행사에 여직원들이 밤늦게까지 뒤풀이에 참석하고 장기자랑을 했다는 것이다. 남성 임원들을 위한 ‘황제 골프’라는 비판도 나온다. 미래에셋 측은 “여직원 사기 진작을 위해 마련한 교류의 장이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또 직원 회식 자리에서 고추를 들고 ‘우리는 하나다’라는 건배사를 외친 대기업 사장도 입방아에 올랐다. 회사 이름을 밝히지 않은 성추행, 성희롱 피해 사례도 많다. C 씨는 “4년 전 술에 취해 기억이 끊긴 뒤 추행을 당했다. 경찰과 검찰에서 기억하기 싫은 기억을 계속 꺼내 이야기해 수치스러웠다”고 적었다. 2년 가까이 일을 못 했다는 C 씨는 “내 인생을 망친 당신을 평생 저주하겠다”는 글을 남겼다. D 씨는 “너희는 살고 싶으면 신고하지 말라”는 제목의 글을 남겼다. D 씨는 “무서워서 참았더니 추행이 점점 심해져 경찰에 신고했다. 가해자가 벌 받으면 끝날 줄 알았는데 동료와 가해자 가족이 욕하는 편지를 계속 보냈다”고 썼다. 남자 상사가 농담이라고 던진 말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는 글도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여자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다’(25세 이후로는 가치가 떨어진다는 뜻) ‘○○ 씨 쌍꺼풀은 자연산이 아닌가 봐?’ 같은 말이다. 건강검진 때문에 휴가를 내겠다는 여직원에게 “여자는 대장 내시경 하면 안 된다”며 여성의 특정 신체 부위를 연상시키는 발언을 해 불쾌했다는 내용도 있었다.권기범 kaki@donga.com·김동혁 기자}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확산되는 가운데 피해자와 고통을 나누거나 성폭력 피해를 적극적으로 막자는 취지의 또 다른 해시태그(#) 운동 움직임이 일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팔로어가 2만3000여 명에 달하는 문유석 서울동부지법 부장판사(49·사법연수원 26기)는 지난달 30일 오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1000자 분량의 글을 올려 “‘#MeToo’ 운동에 지지를 보내는 것에 그치지 말고, 내 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방관하지 않고 먼저 나서서 막겠다는 ‘#MeFirst(미퍼스트)’ 운동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피해자의 고백에 그치지 말고 성폭력 조짐이 보이면 적극 만류하고 비판하자는 의미다. 가해자들이 ‘실질적 불이익을 입을 수 있다’는 위협을 느껴야 억지로라도 조심할 것이라는 게 문 판사의 주장이다. 문 판사는 “딸을 키우는 아빠로서 서지현 검사(창원지검 통영지청)가 겪은 일을 읽으며 분노와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고 썼다. 이 글은 올라온 지 이틀 만에 3800여 개의 ‘좋아요’를 얻었고 650번 이상 공유됐다. 성폭력 피해를 고백한 여성들에게 공감하며 함께하겠다는 뜻을 밝히는 ‘위드유(#Withyou·당신과 함께하겠습니다)’ 운동도 활발하다. 이들은 “지하철에서 성추행당한 경험이 없는 여자가 있느냐. 서 검사의 용기를 지지한다” “권력을 가진 가해자에게 대항하려면 연대밖에 답이 없다”며 SNS에 해시태그를 달고 있다. 일부에서는 “남성 주도의 미퍼스트 운동이 부적절하다”는 주장도 나와 논란이 일고 있다. 이에 대해 문 판사는 지난달 31일 “가해자나 방관자이기 쉬운 중년 기득권 남성으로서 반성하겠다는 다짐이었다. 나와 같은 입장인 분들에게 권유하는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2011년 서른 살 동갑내기 이모 씨(37)와 김모 씨(37)는 부부가 됐다. 부족한 준비에 남편 이 씨는 미안했다. 남편의 고향인 경남 밀양으로 내려온 두 사람은 출산 계획까지 미뤄가며 일했다.아이가 지낼 방을 따로 마련해줄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집을 갖고 싶어서였다. 그래도 마흔 살을 넘기지는 말자고 했다. 이 씨는 식품업체에서, 김 씨는 세종병원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했다. 2년 전부터 생활이 나아졌다. 일하기 바빠 여행도 가지 못하다 1년에 한 번 씩 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마흔 살 전 아이를 갖자는 약속도 했다. 한 지인은 “두 사람은 사이가 너무 좋아 부부라기보다 연인처럼 보였다. 아내 김 씨는 아기를 가지려 이름도 바꿨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26일 오전 세종병원에서 일어난 불이 아내 김 씨의 목숨을 앗아갔다. 30일 오전 8시경 김 씨의 발인이 열렸다. 남편 이 씨의 얼굴에는 수염이 거뭇하게 올라와 있었다. 이 씨는 “집안 곳곳에 남아 있는 아내의 흔적을 보니 견디기가 어렵더라. 이제 좀 살만해졌는데…. 아내가 좋은 곳으로 갔으면 좋겠다.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했다. 오전 10시경 화장장에 도착하자 울음바다가 됐다. 이 씨는 자신의 얼굴을 닦던 휴지로 영정 속 아내의 얼굴을 닦았다. 가슴을 두드리며 소리 내 울었다. 김 씨의 가족들도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오열했다. 한 유가족은 “누구보다 착했던 김 씨가 꼭 좋은 곳으로 갔으면 좋겠다”며 눈물을 닦았다. 세종병원 화재로 숨진 희생자 39명 중 이날까지 35명의 장례 절차가 마무리됐다. 이날 간호조무사 김 씨와 동료였던 간호사 김모 씨(49·여) 등 의료진 2명의 발인이 나란히 치러졌다. 이들은 당시 병원에서 환자들을 구하려 애쓰다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간호사 김 씨를 떠나보내던 어머니(72)는 마지막 술 한 잔을 건네다 다시 오열했다. 발인이 끝날 때까지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계속됐다. 맏딸이었던 김 씨는 평소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각별히 아꼈다고 한다. 김 씨는 “엄마랑 평생 같이 살겠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떠올리며 “다 못한 효도를 병원 어르신들에게 대신 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병원에서 약 2㎞ 떨어진 삼문동 밀양문화체육관에 마련된 합동분향소에는 두 사람을 추모하는 간호조무사 준비생들의 발길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밀성제일고 3학년 박모 양(18)은 두 사람의 영정을 차례로 살피며 한참을 서서 흐느꼈다. 간호조무사를 꿈꾸는 박 양은 지난해 여름 세종병원에서 한 달간 현장실습을 하며 이들과 함께 일했다. 박 양은 “(숨진 두 사람이) 실습 온 학생들을 잘 챙겨주면서 많은 걸 가르쳤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조무사 자격증 취득을 위해 공부 중인 이모(46·여) 신모(41·여) 조모 씨(39·여)도 이날 간호사 김 씨의 영정 앞에 섰다. 김 씨가 밀양 시내의 다른 병원 소아과에서 일할 때부터 알고 지냈던 인연이다. 이 씨는 “우리 아이들이 나고 자랄 때 병원에 오가며 항상 김 선생님을 만났다. 옛날 생각이 너무 많이 난다”며 가슴 아파했다. 나흘간 약 8000명의 시민이 합동분향소를 찾았다. 밀양=권기범기자 kaki@donga.com밀양=안보겸기자 abg@donga.com}
29일 오전 9시 20분경 경남 밀양시의 한 장례식장. 정모 씨(95·여)의 영정 사진을 든 손녀 강모 씨(45)가 2층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울음을 참는 듯 입술을 꾹 다문 모습이었다. 안경 너머 눈빛은 초점을 잃은 듯했다. 혼자 걷기가 힘든 듯 주변의 부축을 받으며 걸었다. 할머니 정 씨를 누구보다 잘 따른 손녀딸이었다. 사람들은 발인 내내 강 씨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정 씨는 생전 세종병원 2층에 입원 중이었다. 고령이었지만 얼굴이 맑고 정신도 또렷했다. 원래 병원 5층에서 요양 중이었지만 감기가 걸려 2층으로 옮겨 치료를 받고 있었다. 사고 3일 전에는 입맛이 없다고 해 며느리가 흰 죽과 동치미를 싸서 갔다. 정 씨는 “목넘김이 너무 좋다. 금방 감기가 나을 것 같다”고 했다. 25일 가족들이 두유를 사서 갔더니 아이처럼 좋아하며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세종병원에 화재가 일어나기 바로 전날이었다. 사고가 난 뒤 20분 정도가 지나 교회에서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병원에 불이 났다는 소식이었다. 가족들은 옷도 제대로 못 갈아입고 병원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현장은 이미 통제 중이었다. 발만 동동 굴렀다. 강 씨는 어머니 김 씨를 붙들고 “우리 할머니 어떻게 하냐”며 울기만 했다. 가족들이 정 씨의 시신을 찾은 건 그로부터 7시간이나 지난 오후 3시경. 가족들은 할머니의 시신이 어디 있는지 몰라 밀양 시내의 여러 병원을 전전하고 있었다. 그러다 세종병원 인근 자활센터 사무실에 임시로 안치된 정 씨의 시신을 발견했다. 담요를 덮고 있는 정 씨를 알아볼 수 있었던 건 정 씨가 쥐고 있던 가방 때문이다. 가방은 손녀 강 씨가 사준 것이었다. 한 가족은 “할머니가 가방을 들고 대피하려다 쓰러지신 것 같다”고 말했다. 정 씨의 시신은 운구차에 실려 인근 화장장으로 향했다. 가족들은 기도 후 할머니를 보냈다. 정 씨가 다니던 교회 관계자는 “손녀 강 씨가 ‘할머니가 대피하는 와중에도 가방을 챙기려 한 것 같다’며 힘들어한다고 들었다”며 “가족들이 슬픔을 잘 극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세종병원 화재 참사 4일째인 이날 시내 곳곳은 오전부터 눈물과 흐느낌으로 얼룩졌다. 정 씨를 비롯해 사고로 숨진 39명 중 15명의 발인이 이날 시내 주요 장례식장에서 진행됐다. 이날 빈소 4곳이 추가로 설치돼 화장한 1명을 포함해 39명 모두 장례 절차를 밟았다. 30일 13명, 31일 2명이 발인한다. 밀양=권기범 기자 kaki@donga.com밀양=안보겸 기자 abg@donga.com}
참사가 난 세종병원 5층(4층이 없어 병원에서는 6층으로 표기)에는 노인 환자 16명이 있었다. 이들은 세종요양병원 환자다. 병원 측은 요양환자 병실이 부족해 2015년부터 일반병원 5층의 용도를 바꿔 사용해 왔다. 환자는 대부분 치매 등을 앓는 70∼90대 할머니다. 몸에 중증질환이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혼자서 움직일 수도 없다. 그만큼 돌봄의 손길이 더 많이 필요하다. 그 일을 요양보호사 이모 씨(58·여)가 맡았다. 경력 10년째인 이 씨는 불이 난 26일도 평소처럼 환자들의 아침식사를 챙기고 있었다. 오전 7시 30분경 갑자기 비상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 씨가 ‘오작동인가’라고 생각했지만 벨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 창밖으로 시커먼 연기가 올라오는 게 이 씨의 눈에 보였다. 마음이 급했다. 한 명씩 부축해 대피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는 환자들에게 수건을 하나씩 주면서 “입을 막으라”고 외쳤다. 그런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전기가 끊긴 탓이다. 5층 병실은 안에서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열리는 자동문이다. 평소 대피훈련을 받았던 이 씨도 당황했다. 그때 소방대원들이 5층 진입에 성공해 문을 열었다. 이 씨는 소방대원과 함께 할머니들을 5층 야외공간으로 대피시켰다. 그러자 영하 10도 안팎의 강추위에 환자들이 떨기 시작했다. 이 씨는 시커먼 연기로 잘 보이지도 않는 병실로 다시 향했다. 휴대전화 빛에 의존해 몇 번이나 오가며 이불을 날랐다. 잠시 후 남성 직원 한 명이 올라와 이 씨를 도왔다. 소방대원들이 비상계단을 통해 16명을 업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때 이 씨의 눈에 이불더미가 눈에 띄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들춰보자 한 할머니가 나타났다. 추위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던 것. 이 씨는 할머니를 소방대원에게 넘긴 다음 가장 마지막으로 내려왔다. 당시 5층에 입원했던 박모 씨(85·여)는 이 씨의 시커먼 얼굴이 기억난다며 “그 할마이 아니었으면 다 죽었어. 덕분에 다 안 죽고 살아나왔다 아이가. 안 그래도 고생 많은데 욕봤다”고 말했다. 세종병원 2층에 입원해 있던 이 씨의 시어머니도 다행히 목숨을 구했다. 현재 이 씨는 부산의 한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다. 겁이 나고 떨려서 뉴스는 보지 못한다. 이 씨는 “장성 요양병원 화재(2014년)를 보고 불이 나면 환자를 꼭 지키겠다고 평소 생각했다. 대단한 것도 아니다. 내 도움을 고맙게 생각해주는 분이 있다면 그걸로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사망한 의료진 3명 중에는 당직의사 민모 씨(59)가 있다. 민 씨는 불이 난 1층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마지막까지 불을 끄려고 애쓰다 쓰러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서울의 한 종합병원 교수 출신이다. 아버지도 의사였다. 밀양의 다른 병원에서 정형외과 전문의로 일하던 민 씨는 매주 목요일 밤 세종병원에서 야간 당직의사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불이 나기 전날인 25일 밤도 마찬가지였다. 민 씨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고 한다. 환자 치료에는 적극적이고 수술도 꼼꼼하게 진행하는 걸로 유명했다. 어떤 환자라도 한결같은 태도로 맞았다. 직원들은 그를 “진짜 의사”라고 했다. 장례식장이 모자라 민 씨의 빈소는 아직 차려지지 않았다. 그가 일하던 병원 관계자는 “소아과 의사를 해도 좋을 정도로 자상하고 꼼꼼한 사람이었다. 하필이면 그날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며 안타까워했다.밀양=권기범 kaki@donga.com·이지운 / 부산=권솔 기자}

참사가 난 세종병원 5층(4층이 없어 병원에서는 6층으로 표기)에는 노인 환자 16명이 있었다. 이들은 세종요양병원 환자다. 병원 측은 요양환자 병실이 부족하자 2015년부터 일반병원 5층의 용도를 바꿔 사용 중이다. 환자는 대부분 치매 등을 앓는 70~90대 할머니다. 몸에 중증 질환이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혼자서 움직일 수도 없다. 그만큼 돌봄의 손길이 더 많이 필요하다. 그 일을 맡은 게 바로 요양보호사 이모 씨(58·여)다. 경력 10년째인 이 씨는 불이 난 26일도 평소처럼 환자들의 아침식사를 챙기고 있었다. 오전 7시 30분경 이 씨는 환자들의 아침식사를 살피고 있었다. 갑자기 비상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 씨가 ‘오작동인가’라고 생각했지만 벨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 창 밖으로 시커먼 연기가 올라오는 게 이 씨의 눈에 보였다. 마음이 급했다. 한 명씩 부축해 대피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는 환자들에게 수건을 하나씩 주면서 “입을 막으라”고 외쳤다. 그런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전기가 끊긴 탓이다. 5층 병실은 안에서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열리는 자동문이다. 평소 대피훈련을 받았던 이 씨도 당황했다. 그때 소방대원들이 5층 진입에 성공해 문을 열었다. 이 씨는 소방대원과 함께 할머니들을 5층 야외공간으로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영하 10도 안팎의 강추위에 환자들이 떨기 시작했다. 이 씨는 시커먼 연기로 잘 보이지도 않는 병실로 다시 향했다. 휴대전화 빛에 의존해 몇 번이나 오가며 이불을 날랐다. 그때 병실 안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할머니 한 명에 눈에 띄었다. 이 씨는 할머니를 이끌고 옥상으로 갔다. 잠시 후 남성 직원 한 명이 올라와 이 씨를 도왔다. 소방대원들이 옥상에서 연결된 비상계단을 통해 16명을 업고 내려왔다. 이 씨는 가장 마지막으로 내려왔다. 당시 16층에 입원 중이던 박모 씨(85·여)는 이 씨의 시커먼 얼굴이 기억난다며 “그 할마이 아니었으면 다 죽었어. 덕분에 다 안 죽고 살아나왔다 아이가. 안 그래도 고생 많은데 욕봤다”고 말했다. 세종병원 2층에는 이 씨의 시어머니도 입원 중인데 다행히 목숨을 구했다. 현재 이 씨는 부산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겁이 나고 떨려서 뉴스는 보질 못하고 있다. 이 씨는 “장성 요양병원 화재(2014년)를 보고 불이 나면 환자를 꼭 지키겠다고 평소 생각했다. 대단한 것도 아니다. 내 도움을 고맙게 생각해주는 분이 있다면 그걸로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사망한 의료진 3명 중에는 당직의사 민모 씨(59)가 있다. 민 씨는 처음 불이 난 1층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마지막까지 불을 끄려고 애쓰다 쓰러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서울의 한 종합병원 교수 출신이다. 아버지도 같은 의사였다. 민 씨는 밀양의 다른 병원에서 정형외과 전문의로 일한다. 매주 목요일 밤 세종병원에서 야간 당직의사로 일한다. 불이 나기 전날인 25일 밤도 마찬가지였다. 민 씨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환자 치료에 적극적이고 수술도 꼼꼼하게 진행하는 걸로 유명했다. 어떤 환자라도 늘 같은 태도로 맞았다. 그래서 직원들은 그를 “진짜 의사”라고 말했다. 장례식장이 가득 차 있어 민 씨의 빈소는 아직 차려지지 않았다. 민 씨가 일하던 병원 관계자는 “소아과 의사를 해도 좋을 정도로 정말 자상하고 꼼꼼한 사람이었다. 하필이면 그날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며 안타까워했다. 밀양=권기범 기자 kaki@donga.com밀양=권솔 기자 kwonsol@donga.com}

“돈 보고 하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이렇게 보람 있는 일이 없다면서 악착같이 일하더니….” 간호를 천직으로 알던 아내였다. 간호조무사 김모 씨(37)의 남편은 26일 아내의 시신을 확인하고는 망연자실했다. 이날 오전 7시 반경 경남 밀양시 세종병원을 덮친 화마(火魔)가 아내를 앗아갔다. 남편 김모 씨는 “아침에 아내가 전화를 했다. ‘살려줘. 병원인데 불이 크게 났어’라고만 말하고 끊겼다. 1분 뒤에 다시 전화가 왔는데 ‘살려줘’라고 하더니 또 끊겼다”고 말했다. 김 씨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엄마, 어떡해” 전화만 남기고… 2010년 결혼한 간호조무사 김 씨는 이듬해 남편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와 세종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간호사가 되겠다며 대학 간호학과에 입학하려고 원서도 제출했다. 임신과 출산도 간호사가 된 뒤로 미룰 정도로 일하면서 공부했다. 딸집에 요양차 잠시 내려와 있던 김 씨 아버지도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떨궜다. 아버지는 딸이 사준 목폴라 니트를 입고 있었다. 그는 “남 보살피는 걸 천직이라고 생각한, 쾌활하고 착한 외동딸이었다”며 울먹였다. 맏딸로서 집안의 기둥이었던 간호사 김모 씨(49)는 몸이 불편한 어머니(72)를 모시고 살다가 변을 당했다. 간호조무사로 일하다 2015년 면허증을 따고 간호사가 됐다. 김 씨는 간호사가 된 이후 세종병원에서 일했다. 이날도 어머니가 건넨 주스를 마시고는 “너무 맛있다”며 너스레를 떨고 출근했다. 김 씨 어머니는 “7시 35분쯤 딸이 전화를 했는데 ‘엄마, 엄마, 어떡해, 어떡해’만 하더니 끊겼다. 연기를 얼마나 마셨는지 얼굴이며 콧구멍이 새까맣고 손에는 피가 묻어 있더라”라며 가슴을 쳤다.○ “춥다고 퇴원을 미뤘는데…” 망연자실 어머니 현모 씨(89)의 사고 소식을 듣고 부산에서 달려온 김모 씨(63)는 전날까지만 해도 설 연휴를 함께 보낼 생각에 들떠 있었다. 지난해 퇴직한 코레일에서 근무할 때 연휴는 언감생심이었다. 이제야 가족과 첫 연휴를 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3층 병실에 있던 어머니는 미처 대피하지 못했다. 평생 시골에서 고추와 깻잎 농사를 지으며 자신을 뒷바라지한 어머니였다. “며칠 전 어머니를 퇴원시키려고 했는데 날이 너무 추워 노인에게 안 좋을까봐 미뤘다. 그게 천추의 한”이라며 비통해했다. 2층 병실에 입원해 있다 숨진 김모 씨(60)는 이날 더 큰 병원으로 옮길 예정이었다. 지난해 11월 교통사고로 왼쪽 다리와 오른팔 등을 다친 김 씨는 일주일 전까지 남편과 함께 세종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남편은 상대적으로 빨리 회복해 퇴원했다. 그러나 부러진 뼈를 고정하기 위해 핀을 박은 부위의 부기가 빠지지 않아 김 씨는 퇴원을 미뤘다. 남편 박모 씨는 “어제 의사 설명을 듣고 오늘 큰 병원으로 옮기기로 마음을 굳혔는데…”라며 한숨만 쉬었다. “아들한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심폐소생술을 받으며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진 이모 씨(35)의 남편 문모 씨는 영정에 있는, 대학 시절 찍은 부인의 사진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이 씨는 교통사고로 왼쪽 정강이가 부러져 수술을 받은 뒤 재활치료를 받고 있었다. 부부는 12세 아들만 바라보며 각각 식당일과 화물차 운전을 했다. 문 씨는 “형편은 변변치 않아도 항상 웃던 아내였다. 한쪽 발로 다녀야 해 제대로 피하지도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손으로 긁어 문 열고 피신한 환자들도 겨우 목숨을 구한 환자도 있었다. 5층에서 가장 먼저 탈출한 김모 씨(89)는 병실 미닫이문을 손으로 박박 긁어서 열고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마침 그를 발견한 소방대원이 업어서 구출했다. 김 씨는 “틀니고 시계고 지팡이고 다 두고 나왔다. 살아 있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며 얼굴을 찡그렸다. 203호 병실에 있던 양모 씨(66·여)는 “방에 남아 고래고래 살려달라고 소리 질렀다. 숨진 사람이 이렇게 많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고 떨면서 말했다. 치매 환자들은 불이 났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면서도 겁에 질렸다. 한 달 전 입원한 정모 씨(86·여)는 “나는 그냥 들고 다니던 수건으로 입을 막고 나왔다. 옥상에서 보니 연기가 말도 못 할 정도던데…”라고만 했다. 정 씨의 딸은 “병원에 불이 났다는 것도 잘 모르신다”고 말했다. 밀양=권기범 kaki@donga.com·정현우·유주은 기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산하 전국금속노동조합(금속노조)가 24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세종로공원 앞에서 ‘2018년 신년 투쟁 선포식’을 열었다. 이날 집회에는 금속노조 조합원 약 5000명이 참가했다. 이들은 세종로공원 앞에서 집회를 마친 뒤 오후 3시 10분경 청와대 앞을 향해 행진했다. 오후 3시 반경 청와대 앞에 도착한 참가자들은 “(복수노조 교섭) 창구 단일화 정책 폐기” “산별교섭 제도화”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어 오후 4시경 자진 해산했다. 평일 낮에 열린 집회로 도로가 통제되면서 일부 구간에서 정체가 빚어졌다. 또 세종대로 3개 차로와 경복궁 서쪽 4개 차로에서 행진이 열리고 참가자들이 타고 온 전세버스가 바깥 차로에 주차하면서 버스 이용객들이 불편을 겪었다. 그러나 올 겨울 가장 추운 날씨 탓에 집회 참가자는 주최 측 예고보다 1000명가량 적었다. 경영 정상화를 두고 회사와 갈등을 겪고 있는 금호타이어 노조원이 2500여 명으로 가장 많았다.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22일 서울 종로구 A여관. 낡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지만 ‘비상구’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곳저곳을 헤맨 끝에야 겨우 비상구를 찾았다. 앞에는 폐정수기와 여행용 가방, 의자, 상자 등이 어른 키만큼 쌓여 있었다. 유명무실한 비상구였다. 이틀 전 방화로 6명이 숨진 종로구 서울장여관 상황과 비슷했다. 불이 난 여관 비상구도 자물쇠로 잠겨 있어 안에서는 물론 밖에서도 열기 어려웠다. A여관도 1970년대 지어진 2층짜리 낡은 건물이었다. 서울장여관처럼 만약 새벽에 불이 나면 큰 인명피해가 우려됐다. 서울장여관 소식을 들었다는 A여관 주인은 “우리는 그런 이상한 손님 안 온다”고 말했다. ○ 곳곳에 자리한 ‘서울장여관’ 판박이 동아일보 취재팀은 21, 22일 서울 종로와 영등포, 용산 일대의 이른바 ‘쪽방 여관’ 15곳을 살펴봤다. 대부분 1960, 70년에 지어져 40∼50년 된 건물이었다. 모두 서울의 낙후된 도심에 자리 잡은 이들 여관은 사고가 난 서울장여관처럼 화재 대비에 심각할 정도로 취약한 상태였다. 객실 12개가 있는 대학로의 여관은 객실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은 정문밖에 없었다. 비상구가 아예 없었다. 여관 주인은 “3층 옥상으로 대피하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성인 남성 1명이 지나가기에도 비좁았다. 비상구가 갖춰지지 않은 쪽방 여관에서 스프링클러 등 소화 시설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여관 15곳 중 스프링클러가 설치된 곳은 2곳에 불과했다. 서울 중구의 한 여인숙은 소화전이 없어 소화기를 10여 개 구입해 비치해 뒀다. 객실 수(18개)에 비해 부족했다. 이 여인숙 1층 객실 창문에는 쇠창살이 설치돼 있어 창으로도 대피할 수 없는 구조였다. 인근의 또 다른 여관 사장(76)은 “최근 불이 자주 나 나무를 다 들어내고 콘크리트로 바꿨는데도 여전히 겁이 난다”고 말했다. 서울 용산의 한 여관 정문 앞은 전깃줄이 제멋대로 엉켜 있고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여관 안으로 들어가자 현관 앞에 빛이 바랜 소화기가 있었다. 제작연도 1994년. 소화기는 제조 뒤 10년이 지나면 성능점검을 받거나 교체해야 하지만 그런 기록은 보이지 않았다. 2층 소화기의 제작연도는 2005년이었다. 이들 여관은 불이 나도 소방차가 진입하기도 어려웠다. 여관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폭이 2∼3m에 불과했다. 골목 중간 중간 전봇대가 설치돼 있어 소방 차량이 지나가기는 더 어려워보였다. 쪽방촌과 여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20일 발생한 화재 참사에도 달라진 게 없었다. 22일 찾은 서울 영등포역 일대 쪽방촌 골목에서는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6∼7m² 정도 크기의 방마다 담배꽁초가 가득한 재떨이와 먼지가 쌓인 전기장판 등이 눈에 띄었다. 한 여성 세입자(41)는 “재료들이 다 나무라 불이 나면 소화기는 ‘물뿌리개’에 불과할 것”이라고 말했다. 22일 창신동의 한 쪽방촌에서는 집 한 곳에서 불이 나 주민과 인근 모텔 투숙객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사고 현장 바로 옆 건물에 부탄가스와 휴대용 가스버너가 다수 발견됐다. 주민 김모 씨(67)는 “방마다 가스버너가 하나씩은 있었을 텐데 불이 번져 부탄가스가 터졌다면 큰일이 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방법 사각지대에 놓인 쪽방촌 쪽방촌 건물 대부분은 수십 년 전 지어진 것이 많아 건축법이나 소방시설법(화재예방, 소방시설 설치ㆍ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을 적용받지 않는다. 특히 쪽방 여관은 숙박시설이라 소방시설법 적용 대상이지만 2003년 이전에 지어진 건물은 비상구를 갖춰야 할 의무가 없다. 불이 났을 경우 사상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곳이라 맹목적으로 규제만 강화하기도 쉽지 않다. 박청웅 세종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단기적으로는 기존 시설을 잘 관리하면서 관리자 교육을 철저히 하고, 중장기적으로 소방 관련법 적용 대상을 확대하는 ‘투 트랙’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울장여관 방화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 혜화경찰서는 숨진 6명의 시신을 22일 오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보내 1차 부검을 진행했다. 여행 중 참변을 당한 세 모녀는 유전자 검사를 추가로 진행하기로 했다. 피의자 유모 씨(53·구속)는 이날 경찰에 2차 조사를 받았다. 유 씨는 “펑 소리에 놀라 도망가다 112 신고를 했다. 멍하다”고 진술했다. 정신병력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권기범 kaki@donga.com·정다은·전채은 기자}

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장여관. 이날 새벽 50대 취객이 저지른 방화로 투숙객 6명이 숨진 곳이다. 여관 내부는 가재도구가 모두 타 버린 채 시커먼 그을음이 묻은 벽체만 흉물스럽게 남아있었다. 불이 꺼진 지 여러 시간 지났지만 여전히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침 경찰은 1층 105호를 조사 중이었다. 가로세로 각각 3m 남짓한 작은 방이다. A 씨(35·여)와 두 딸 등 세 모녀가 숨진 채 발견된 곳이다. 서울로 여행 온 세 모녀는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이 여관에 투숙했다가 변을 당했다. 이날 세 모녀가 낸 숙박비는 2만5000원이다. 세 모녀가 투숙한 105호 창문에는 쇠창살 4개가 있었다. 도둑 침입을 막는 용도이지만 불이 났을 때 창문으로 탈출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맞은편 101호는 창문을 열면 바로 벽이었다. 옆 건물과 불과 10cm 간격으로 붙어있었다. 여관 뒤편으로 10m쯤 가면 비상구로 쓰이는 문이 있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문 밖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 열쇠 없이는 안에서도 밖에서도 열 수 없었다. 화재 당시에는 여관 전체가 퇴로 없는 ‘지옥’이었던 셈이다. 소방 관계자는 “우리가 강제로 열었던 문은 도저히 탈출 용도로 쓸 수 없는 문이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여관 1, 2층에 각각 4개씩, 방 8곳 중 7곳에 투숙객 10명이 머물고 있었다. 이 중 A 씨 모녀 등 6명이 숨졌다. 3명은 중태에 빠졌다. 2층에 있던 최모 씨(53)만 가벼운 부상을 입어 화를 면했다. 대부분 일용직이나 퀵서비스 배달, 의류업체 비정규직 직원 등으로 어렵게 생활하던 서민이었다. 지어진 지 50년이 넘은 건물인 데다 3층 지붕은 불이 잘 붙는 샌드위치패널로 돼있어 건물은 순식간에 불가마가 됐다. 불을 지른 건 중국음식점 배달원 유모 씨(53)였다. 유 씨는 19일 오후 9시부터 20일 오전 1시까지 동료들과 술을 마셨다. 동료 배달원 B 씨는 “유 씨가 소주 1병 정도 마신 것 같다”고 말했다. 경찰에 따르면 술에 취한 유 씨는 20일 오전 2시경 서울장여관을 찾았다. 그는 여관 주인 김모 씨(71·여)에게 “여자를 불러 달라”고 말했다. 성매매를 요구한 것이다. 김 씨가 거부하자 유 씨는 오전 2시 6분 “여관이 투숙을 거부한다”며 112에 신고했다. 김 씨 역시 “취객이 성매매를 요구하며 난동을 부린다”고 신고했다. 유 씨가 계속 생떼를 쓰자 김 씨는 오전 2시 8분경 2차 신고를 했다. 경찰은 오전 2시 9분 여관에 도착했다. 경찰이 “성매매로 처벌되면 벌금 300만 원을 내야 한다”고 경고하자 유 씨는 욕설을 퍼부었다. 경찰은 오전 2시 26분 현장에서 유 씨를 훈방 조치했다. 김 씨가 “이대로 돌려보내면 어떻게 하느냐”며 항의하자 경찰은 “유 씨가 (집에 가기 위해) 15m쯤 걸어가는 모습을 봤다”고 설명한 뒤 돌아갔다. 하지만 유 씨는 귀가하지 않았다. 대신 택시를 잡아타고 여관에서 1.9km 떨어진 ‘24시간 주유소’를 찾아갔다. 이곳에서 유 씨는 휘발유 10L를 구입했다. 누가 봐도 취한 상태로 보였지만 휘발유 구입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유 씨는 다시 여관으로 갔다. 1층 복도에 휘발유를 뿌렸다. 그리고 가져온 비닐에 불을 붙여 던졌다. 김 씨는 “물을 뿌리는 줄 알았는데 ‘펑’ 소리와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고 말했다. 유 씨의 동료는 “유 씨가 평소 욱하면 잘 가라앉히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말했다. 김 씨는 곧바로 119에 신고했다. 같은 시각 유 씨도 112에 “내가 불을 질렀다”고 자수했다. 경찰은 오전 3시 12분 여관 주변을 서성이던 유 씨를 체포했다. 소방관들은 화재 신고 4분 만인 오전 3시 11분 현장에 도착했다. 불길은 이미 여관 전체를 집어삼키는 중이었다. 오전 3시 25분 큰 불이 잡히자 소방관들은 정문으로 진입했다. 1, 2층에 있는 방 8개를 일일이 확인한 뒤 쓰러진 투숙객을 한 명씩 옮겼다. 불은 1시간 만인 오전 4시 4분경 완전히 진압됐다. 경찰은 21일 유 씨를 현존건조물 방화치사 혐의로 구속했다.배준우 jjoonn@donga.com·권기범·김자현 기자}

17일 오전 4시 30분 서울 구로구 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 근처 한 사무실의 불이 켜졌다. 인도에 서 있던 사람들 얼굴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건설 현장 일자리를 찾기 위해 새벽부터 인력사무소를 찾은 일용직 근로자들이다. 두꺼운 점퍼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작업복과 도구가 든 배낭도 빠지지 않았다. 어림잡아 170여 명. 사무실 앞 인도가 비좁아 일부는 도로 옆 횡단보도에까지 내려가 있었다. 이들은 거의 다 조선족 등 중국인과 동남아 출신 외국인이다. 이곳은 서울의 대표적인 인력시장. 외국인 근로자가 대세가 된 지 이미 오래다. 기자가 다가서자 누군가 어눌한 한국말로 물었다. “일거리 있어요?” 횡단보도 건너편에도 일용직 근로자가 모여 있었다. 30명 남짓이었다. 대부분 한국인 근로자다. 정모 씨(64)는 외국인 근로자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보름 동안 딱 하루 일했어. 중국 애들 들어오면서 일당도 2만, 3만 원이나 떨어졌다고.” 같은 날 오전 5시 경기 안산시 단원구 지하철 4호선 안산역 앞 인력시장에 승합차와 버스가 줄지어 서 있었다. 일용직 근로자들이 5, 6명씩 무리 지어 올라탔다. 일감을 찾아 건설 현장으로 가는 길이다. 차량 안에서는 중국말만 들렸다. 근처 인력사무소로 들어서자 아직 ‘선택’받지 못한 근로자 수십 명이 있었다. 사무소 직원이 “○○○ 씨 혈압 높아요?”라고 큰 소리로 물었다. 한 근로자가 어색한 한국말로 “혈압 안 높아. 몸 좋아”라고 외쳤다. 직원은 건설 현장에 보낼 명단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름 옆에 일당을 적었다. 13만 원부터 19만 원까지 금액이 적혔다. 19만 원은 한국인 근로자가 받는 일당이다. 외국인은 13만∼18만 원이다. 명단이 ‘팀장’에게 건네졌다. 이름이 불리자 근로자들이 줄지어 팀장을 따라 나섰다. 한국인은 10명 중 2, 3명꼴이다. 오전 5시 20분경 안산역 앞에 서 있던 승합차와 버스가 일제히 시동을 걸었다. 한국인 근로자 한 명이 마지막 차량에 올라타며 말했다. “우리는 작은 데야. 큰 데는 다 중국 애들이 가거든.” 같은 시간 경기 성남시 수정구 태평고개에서도 차량들이 하나둘 현장으로 출발했다. “이제 끝났어요. 하루 쉬세요”라고 인력사무소 직원이 외쳤다. 10분 후 사무실은 문을 닫았다. 불을 켠 지 1시간 만이다. 이곳은 비수기에도 200명 이상이 몰리는 수도권 최대 인력시장 중 하나였다. 서울 지역 건설 현장에서도 늘 사람을 찾아 이곳에 들렀다. 그러나 요즘은 30∼40명밖에 모이지 않을 정도로 침체됐다. 41년간 철근작업을 한 손모 씨(66)는 “‘오야지’들이 불법 외국인 근로자를 미리 현장에 꽂는 바람에 우리가 갈 수 있는 자리가 확 줄었다. 걔들 때문에 일을 못해 먹는다”고 말했다. 이날 모인 사람들 중 건설 현장으로 ‘출근’한 사람은 8명뿐이었다. 50, 60대 한국인 근로자를 찾는 곳은 거의 없었다. 일을 나가지 못한 사람들은 아쉬운 듯 주변을 서성거렸다. 30년 차 목수 이모 씨(63)는 “혹시 알아? 술 먹고 못 나온 사람 있어서 자리 빵꾸(펑크)난 팀 있으면 불러줄지. 지금 다른 데 가봐야 소용도 없고…”라고 말했다. 몇몇 근로자는 “밥이나 먹으러 가자”며 인근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주인은 “요즘 나이 든 한국인들은 인력시장에 왔다가 아침 먹고 소주 사서 귀가하는 게 대부분”이라고 전했다. 스물두 살 때부터 현장에서 일했다는 박모 씨(73)는 “외국인 근로자를 실컷 두들겨 패고 싶다”며 언성을 높였다. 외국인 근로자 사이에서도 일자리를 놓고 갈등이 빚어진다. 건설 현장에 합법적 취업이 가능한 외국인들은 불법 체류 외국인에게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냈다. 한국에 온 지 8년 됐다는 조선족 박모 씨(33)는 중국말로 대화하던 사람들을 가리키며 “쟤네 좀 신고해 달라”고 기자에게 부탁했다. 박 씨는 “불법 체류자들이 일당 5만 원 받고도 일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우리까지 일자리를 빼앗기고 있다”고 하소연했다.권기범 kaki@donga.com / 성남=김은지 / 안산=윤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