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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내린 목소리’와 ‘바이올린 여제’의 무대는 잔향이 길었다. 관객들은 기립해 마음을 전했고 일부는 공연장에 남아 여운을 달랬다.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지난달 31일 열린 ‘조수미와 로베르토 알라냐의 디바&디보 콘서트’는 맛과 품격을 잡은 파인 다이닝 같았다. 클래식 마니아와 일반 관객을 고려한 선곡, 유머러스한 연출, 반주자와 성악가의 호흡이 돋보인 2시간이었다. ‘데뷔 동기’인 조수미와 알라냐는 선의의 경쟁을 하듯 ‘달렸다’. 구노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의 ‘고귀한 천사들’, 오페라 ‘사랑의 묘약’의 ‘신비로운 이 묘약’에서 찰떡 호흡을 과시하다가도 각자의 무대에서는 날 선 기량을 뽐냈다. 조수미는 화려한 디바와 친근한 누이를 오가며 관객을 쥐락펴락했다. 한국 초연곡인 오베르의 오페라 ‘마농 레스코’ 중 ‘웃음의 아리아’는 소름이 돋았고, 앙코르곡 ‘호프만의 이야기’ 중 ‘인형의 노래’에서 인형 연기는 사랑스러웠다. 알라냐는 박수 유도, 술 취한 연기, 귀여운 퇴장으로 ‘무대 위의 동물’임을 입증했다. 3일 서울 롯데콘서트홀. 정경화의 무대는 삶의 아름다움과 비애가 녹아든 한 편의 로드무비였다. 복숭앗빛 한복 드레스 차림으로 바이올린과 밀고 당기며 포레 ‘바이올린 소나타 1번’,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3번’,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연주했다. 70세를 맞은 그의 브람스는 깊었고 프랑크는 슈크림처럼 부드러움을 더했다. 12년간 한 무대에 서온 피아니스트 케빈 케너의 기지도 돋보였다. 예민한 스타를 달래는 매니저와 우직한 동반자로 색채를 바꿔 가며 여제 곁을 지켰다. 앙코르 무대에서는 생전 그의 무대의상을 책임진 고 이영희 디자이너를 추모했다. ‘사랑의 기쁨’ 선율은 관객들을 추억에 잠기게 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실향민 1세대들은 거의 다 돌아가셨죠. 젊은 손님이 많아진 지는 꽤 됐고, 최근엔 여성 손님들이 급증한 느낌입니다.”(우래옥 김지억 전무·85) 지난달 31일 오후 2시 지하철 2·5호선 을지로4가역. 휴대전화 화면에 구글 지도를 띄웠다. 평양냉면 노포(老鋪) 우래옥은 지하철역에서 멀지 않았다. 지상으로 올라오자 지도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한곳을 향했다. 좁다란 골목엔 자가용 행렬이 멈춰 서 있었다. 사람과 자가용 사이를 헤치고 북적대는 주차장을 지나 우래옥 건물에 들어섰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홀에는 손님 100여 명이 대기 중이었다. “우리 집은 (대기실이 따로 있어서) 줄 안 서. 다른 집이 줄이 길지.” 이곳에서 55년간 일했다는 김지억 전무가 농을 건넸다. 매년 여름이면 평양냉면 신드롬이 일지만 올해엔 온도와 시기, 그리고 양상이 조금 다르다.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 때 북한이 진짜 평양냉면 맛을 보여주겠다며 제면기까지 이고 오는 퍼포먼스를 보인 데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아 멀다고 하면 안 되갔구나” 하는 유머 섞인 한마디까지 겹치며 평양냉면 열풍에 불을 지폈다. “이것 봐, 장부를 보면 대충 몇 명 왔는지 알 수 있지.” 30명씩 기입된 장부가 25장을 넘어가고 있었다. 한 팀을 2명 정도로 잡으면 이미 1500그릇 넘게 팔았다는 의미다. ○ 2030 사로잡은 평양냉면 정상회담이 열린 4월 27일부터 29일까지 신한카드의 평양냉면 가맹점 카드 사용량은 직전 4개 주간 평균보다 80%가 늘었다. 20대 사용률이 특히 도드라졌다. 롯데슈퍼가 같은 기간 냉면류 판매량을 분석한 결과 정상회담 사흘 전(4월 24∼26일)보다 73.5%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평양냉면은 실향민 1세대가 망향의 아픔을 달래던 음식이다. 1970년대 실향민 2세대와 식자층 베이비붐 세대가 제2의 부흥을 이끌었다. 전직 공무원 장현 씨(70)는 “광화문 을지로 인근에 평양냉면 노포들이 몰려 있었는데, 당시 회식 장소로 인기였다. 자연히 평양냉면이 미식의 관문으로 자리 잡았고 냉면으로 해장하는 ‘선주후면(先酒後麵)’ 문화가 전파됐다”고 전했다. 최근엔 평양냉면에 입문한 2030들이 적지 않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는 유명 가게를 하나씩 방문하는 ‘도장깨기’가 유행하며 ‘완냉샷(냉면을 다 먹은 그릇사진)’이 넘쳐난다. 특히 젊은 직장인들이 모여 있는 강남 분당 판교 등지의 신흥 냉면가게들이 성업을 이루고 있다. 딱 잡히는 맛 없이 슴슴하고 단순한 이 음식의 매력은 무엇일까. “처음 먹을 때는 걸레 빤 물을 마시는 것 같았어요. 한데 한 번 두 번 반복해서 먹으니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극이 없는 맛이 중독을 부른달까요. 맛을 찾으려 애쓰는 과정이 재미있어요.”―박지민 씨(26·학생) “차갑고 진한 고기국물이 일품이에요. 떡볶이 먹을 때 어묵 국물은 조미료 맛이 강해서 몇 번 들이켜고 마는데, 냉면 육수는 끝없이 들어가요. 감칠맛 때문인지 다른 요소 때문인지 모르겠네요.”―김동민 씨(33·유통업) 미디어와 SNS의 영향도 크다는 지적이다. 온라인에서 평양냉면 가게 족보를 외며 면발과 육수를 놓고 토론하고, 미디어로 인해 평양냉면이 유행으로 번지는 찰나, 정상회담으로 관심이 증폭됐다는 것이다. ○ 냉면의 현지화 올 4월 TV에서 북한에 간 남한 예술단의 일거수일투족이 흘러나왔다. 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끈 장면은 백지영의 냉면시식기. 면발은 거무튀튀했고 쭉 뽑아 올린 길이는 150cm는 족히 돼 보였다. 육수도 맑은 빛과 거리가 멀었다. 이 장면은 남한의 ‘평양냉면러’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툭툭 끊어지는 면발과 맑은 육수’를 경전처럼 받들며 메밀 함량과 육수 구성성분을 따지던 그들 아닌가. 정작 북한 냉면의 면은 질기고 육수는 검다니, ‘멘붕’에 빠질 만했다. 알고 보니 면은 전분 함량을 높이고 육수에는 간장을 섞어 검은색을 띤다고 했다. 면발이 거무튀튀한 건 소화가 안 될 때 쓰는 식소다 때문이라고 탈북자들은 전한다. 실향민 1세대가 북에서 경험한 평양냉면은 어떨까. 중학생 때 월남한 이인범 평안북도 중앙도민회 고문(83)은 “육수 재료는 정확히 모르지만 동치미가 들어간 건 확실하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밥으로도 간식으로도 먹었다”고 했다. 김금례 씨(87)는 “이북은 10월부터 겨울날씨라 동치미를 담그면 깊은 맛이 난다. 한데 남한에서는 그 맛을 내기 힘들다보니 냉면 육수를 고기로 내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들이 경험한 평양냉면은 동치미에 순면에 가까운 메밀면을 말아 넣은 국수 정도로 보인다. 집집마다 겨울이면 동치미 국물을 만들고 메밀반죽을 틀에 짜 국수를 뽑았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평양에서도 닭, 꿩, 쇠고기 등 육수를 동치미와 더러 섞어 썼다. 하지만 서민들은 대부분 동치미로 육수를 냈다. 남한에선 고기육수를 주로 쓴다. 북한과 달리 남한 초겨울은 그리 춥지 않다. 싱싱한 무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입에 착 붙는 동치미를 만들 여건이 아니었던 셈. 이 때문에 의정부 평양면옥은 탕 문화에서 힌트를 얻어 양지로 육수를 뽑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래옥은 1등급 한우 암소 사태를 푹 우려낸다. 장충동 평양면옥도 고기 국물을 쓴다. 반대로 북한에서는 면의 재료가 바뀌었다. 원래 평양냉면은 메밀 100%의 순면을 주로 썼다. 너무 툭툭 끊어진다 싶으면 메밀과 전분을 8 대 2 정도로 섞어 찰기를 더했다. 남한은 이 공식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다. 반면 북한에선 전분 함량이 껑충 뛰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는 예종석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를 ‘경제 사정에 따른 냉면의 현지화’라고 설명했다. 그는 “옥류관 청류관 고려호텔 민족식당 등 북한의 4대 냉면을 모두 맛봤는데 한국의 그것과 다르다. 동치미 함량이 높고 면발도 메밀을 많이 쓰지 않는다. 슬쩍 이유를 물어봤더니 고기와 메밀을 구하기 힘들어서 그렇다고 하더라”고 귀띔했다. ○ 남한 평양냉면의 계보 평양냉면은 계보를 알아가는 재미도 크다. 실향민의 아픔과 역사적 요소가 가미돼 매력적인 스토리로 다가온다. 남북분단이라는 상황으로 사실을 확인할 수 없어 신비감이 더해진다. 노포들은 을지로와 그 인근에 몰려 있다. 남한의 평양냉면 역사는 1940년대 을지로 4가에서 개업한 ‘서래관’(폐업)이 시작이다. 1946년 우래옥이 개업했고 1970∼1980년대 필동면옥·을지면옥·장충동 평양면옥 등이 뒤를 잇는다. 외식문화가 없던 당시 평양냉면은 특별한 먹거리로 시대를 풍미했다. 우래옥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평양냉면집이다. 평양 유명 냉면가게인 명월관 주인이 개업해 3대째 명맥을 잇고 있다. 을지로 본점은 창업주 고(故) 장원일 씨의 손녀 경선 씨(66)가, 대치동 분점은 손주 근한 씨(64)가 운영한다. 우래옥은 쇠고기만으로 육수를 우려낸다. 순면 또는 전분을 살짝 섞은 면 두 가지를 맛볼 수 있다. 우래옥 영업부장인 유병석 씨는 “업게 평균보다 연봉이 높은 편이다. 퇴직금도 준다”며 “직원 대부분 20∼30년씩 내 살림 돌보듯 일하는 것도 우래옥의 경쟁력”이라고 했다. 서울 냉면은 크게 의정부 계열과 장충동 계열로 나뉜다. 의정부 계열은 1·4후퇴 때 월남한 고(故) 홍영남, 김경필 씨 부부가 1969년 개업한 의정부 평양면옥이 거점이다. 곧 북한에 돌아갈 줄 알고 북과 가까운 경기 연천군에 자리를 잡았다가 12년 뒤 의정부로 가게를 옮겼다. 본점은 1남 3녀 중 아들 진권 씨(66)가 물려받아 부인이 운영한다. 필동면옥과 을지면옥은 첫째 딸과 둘째 딸이 운영한다. 셋째 딸은 잠원동에 ‘본가 평양면옥’을 차렸다. 의정부 계열 냉면은 고춧가루가 뿌려져 나온다. ‘장충동 계열’ 평양면옥은 논현동 평양면옥과 분당 평양면옥으로 나뉜다. 평양에서 대동면옥을 운영하던 고(故) 김면섭 씨의 며느리 변정숙 씨가 1985년 개업했다. 본점은 큰아들 김대성 씨가, 논현점은 둘째 아들 김호성 씨가 운영한다. 도곡점 신강점은 4대 손자·손녀들이 맡았다. 주방장 출신 임세권 씨가 독립해 개업한 진미평양냉면도 있다. 을밀대는 1971년 마포에서 개업해 서북권 강자로 떠올랐다. 봉피양은 만화 ‘식객’ 속 냉면 장인인 김태원 조리사가 만드는 곳으로 잘 알려졌다. 평양냉면의 대중화와 선구자들의 홍보 활동으로 신흥 강자들도 속속 등장했다. 강남 진미평양냉면, 합정 동무밥상, 강남과 마포까지 진출한 판교 능라도, 여의도 정인면옥 등이 대표적. 평양냉면 마니아로 동호회 활동을 해온 김수경 씨(44)는 “신흥 강자들의 트렌드는 ‘섹시함’이다. 감칠맛과 간이 세지고 있다”며 “평양냉면 대중화에 따라 여러 사람의 기호를 반영하기 위한 결과로 보인다”고 했다. ▼ 백령도-양평에 ‘황해도 냉면’… 부산은 밀면으로 변형 ▼“나도 있다” 각 지역 냉면문화평양냉면은 남한 곳곳에 뿌리내리며 개성을 더했다. 북한과 지척인 인천 백령도에는 황해도식 메밀냉면이 꽃을 피웠다. 백령도는 메밀밭이 지천이다. 이곳에 자리 잡은 황해도 출신 실향민들은 메밀 100% 순면에 사골처럼 진한 육수, 여기에 까나리액젓을 넣어 풍미를 더했다. 사곶냉면, 부평막국수, 변가네웅진냉면 등이 유명하다. 경기 양평군 옥천면에는 황해도식 냉면이 전해진다. 황해도 출신 이건협 씨가 1952년 개업한 ‘황해냉면’이 대표적. 굵은 면발에 간장이나 설탕으로 간을 한 육수가 특징이다. 옥천냉면과 옥천고읍냉면 등이 있다. 진주냉면은 권번문화와 맞물려 발달했다. ‘선주후면’에 따라 입가심으로 먹던 국수에 남은 안주를 올려먹던 게 진주냉면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1915년 ‘부인필지’에 소개된 명월관 요리법에 따르면 고기국물에 ‘디포리’ 홍합 새우 등 해물장국을 섞어 육수를 낸다. 해산물 잡내를 잡기 위해 무쇠몽둥이 집어넣고 15일간 숙성 절차를 거친다. 부산은 냉면이 밀면으로 변형됐다. 메밀 대신 미군에게 배급받은 밀가루로 냉면을 만들어 팔면서 밀면이 탄생했다. 유재우 내호냉면 사장은 “함경도 흥남에서 냉면집을 운영하던 증조할머니가 밀면을 처음 만드셨다. 손님들은 밀가루를 쓰니 면이 부드러워졌다며 좋아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한편 함흥냉면집은 서울 중구 오장동 일대에 몰려 있다. 오장동에 자리 잡은 함경도 피란민은 고향에서 먹던 농마국수를 변형해 함흥냉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감자 고구마 전분으로 만든 질긴 면을 매운 양념 가자미회 홍어회와 비벼 먹는다. 오장동 흥남집과 신창면옥이 대표적이다. 권이학 오장동 흥남집 이사는 “양념장과 회의 쫀쫀한 식감이 함흥냉면의 매력이다. 함흥냉면이야말로 중독성이 대단한 음식”이라고 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실향민 1세대들은 거의 다 돌아가셨죠. 젊은 손님이 많아진 지는 꽤 됐고, 최근엔 여성 손님들이 급증한 느낌입니다.”(우래옥 김지억 전무·85) 지난달 31일 오후 2시 지하철 2·5호선 을지로4가역. 핸드폰 화면에 구글 지도를 띄웠다. 평양냉면 노포(老鋪) 우래옥은 지하철역에서 멀지 않았다. 지상으로 올라오자 지도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한 곳을 향했다. 좁다란 골목엔 자가용 행렬이 멈춰 서 있었다. 사람과 자가용 사이를 헤치고 북적대는 주차장을 지나 우래옥 건물에 들어섰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홀에는 손님 100여 명이 대기 중이었다. “우리 집은 (대기실이 따로 있어서) 줄 안 서. 다른 집이 줄이 길지.” 이곳에서 55년간 일했다는 김지억 전무가 농을 건넸다. 매년 여름이면 평양냉면 신드롬이 일지만 올해엔 온도와 시기, 그리고 양상이 조금 다르다. 4월26일 남북 정상회담 때 북한이 진짜 평양냉면 맛을 보여주겠다며 제면기까지 이고 오는 퍼포먼스을 보인 데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아 멀다고 하면 안되갔구나”하는 유머 섞인 한마디까지 겹치며 평양냉면 열풍에 불을 지폈다. “이것 봐, 장부를 보면 대충 몇 명 왔는지 알 수 있지.” 30명씩 기입된 장부가 25장을 넘어가고 있었다. 한 팀을 2명 정도로 잡으면 이미 1500그릇 넘게 팔았다는 의미다. ●2030 사로잡은 평양냉면 정상회담이 열린 4월 27일~29일 신한카드의 평양냉면 가맹점 카드 사용량은 직전 4개 주간 평균보다 80%가 늘었다. 20대 사용율이 특히 도드라졌다. 롯데슈퍼가 같은 기간 냉면류 판매량을 분석한 결과 정상회담 사흘 전(4월 24일~26일)보다 73.5%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평양냉면은 실향민 1세대가 망향의 아픔을 달래던 음식이다. 1970년대 실향민 2세대와 식자층 베이비붐세대가 제2의 부흥을 이끌었다. 전직 공무원 장현 씨(70)는 “광화문 을지로 인근에 평양냉면 노포들이 몰려 있었는데, 당시 회식 장소로 인기였다. 자연히 평양냉면이 미식의 관문으로 자리 잡았고 냉면으로 해장하는 ‘선주후면(先酒後麵)’ 문화가 전파됐다”고 전했다. 최근엔 평양냉면에 입문한 2030들이 적지 않다. 소셜네트워크(SNS) 상에는 유명 가게를 하나씩 방문하는 ‘도장깨기’가 유행하며 ‘완냉샷(냉면을 다 먹은 그릇사진)’이 넘쳐난다. 특히 젊은 직장인들이 모여 있는 강남 분당 판교 등지의 신흥 냉면가게들이 성업을 이루고 있다. 딱 잡히는 맛 없이 슴슴하고 단순한 이 음식의 매력은 무엇일까. “처음 먹을 때는 걸레 빤 물을 마시는 것 같았어요. 한데 한번 두 번 반복해서 먹으니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극이 없는 맛이 중독을 부른달까요. 맛을 찾으려 애쓰는 과정이 재미있어요.”-박지민 씨(26·학생) “차갑고 진한 고기국물이 일품이에요. 떡볶이 먹을 때 오뎅 국물은 조미료맛이 강해서 몇 번 들이켜고 마는데, 냉면 육수는 끝없이 들어가요. 감칠맛 때문인지 다른 요소 때문인지 몰르겠네요.”-김동민 씨(33·유통업) 미디어와 SNS의 영향도 크다는 지적이다. 온라인에서 평양냉면 가게 족보를 외며 면발과 육수를 놓고 토론하고. 미디어로 인해 평양냉면이 유행으로 번지는 찰나, 정상회담으로 관심이 증폭됐다는 것이다. ●냉면의 현지화 지난 4월 TV에서 북한에 간 남한 예술단의 일거수일투족이 흘러나왔다. 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끈 장면은 백지영의 냉면시식기. 면발은 거무튀튀했고 쭉 뽑아 올린 길이는 150cm는 족히 돼 보였다. 육수도 맑은빛과 거리가 멀었다. 이 장면은 남한의 ‘평양냉면러’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툭툭 끊어지는 면발과 맑은 육수’를 경전처럼 받들며 메밀 함량과 육수 구성성분을 따지던 그들 아닌가. 정작 북한 냉면의 면은 질기고 육수는 검다니, ‘멘붕’에 빠질 만했다. 알고 보니 면은 전분 함량을 높이고 육수에는 간장을 섞어 검은 색을 띤다고 했다. 면발이 거무튀튀한 건 소화가 안 될 때 쓰는 식소다 때문이라고 탈북자들은 전한다. 실향민 1세대가 북에서 경험한 평양냉면은 어떨까. 중학생 때 월남한 이인범 평안북도 중앙도민회 고문(83)은 “육수재료는 정확히 모르지만 동치미가 들어간 건 확실하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밥으로도 간식으로도 먹었다”고 했다. 김금례 씨(87)는 “이북은 10월부터 겨울날씨라 동치미를 담그면 깊은 맛이 난다. 한데 남한에서는 그 맛을 내기 힘들다보니 냉면 육수를 고기로 내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들이 경험한 평양냉면은 동치미에 순면에 가까운 메밀면을 말아 넣은 국수 정도로 보인다. 집집마다 겨울이면 동치미 국물을 만들고 메밀반죽을 틀에 짜 국수를 뽑았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평양에서도 닭, 꿩, 소고기 등 육수를 동치미와 더러 섞어 썼다. 하지만 서민들은 대부분 동치미로 육수를 냈다. 남한에선 고기육수를 주로 쓴다. 북한과 달리 남한 초겨울은 그리 춥지 않다. 싱싱한 무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입에 착 붙은 동치미를 만들 여건이 아니었던 셈. 이 때문에 의정부 평양면옥은 탕 문화에서 힌트를 얻어 양지로 육수를 뽑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래옥은 1등급 한우 암소 사태를 푹 우려낸다. 장충동 평양면옥도 고기 국물을 쓴다. 반대로 북한에서는 면의 재료가 바뀌었다. 원래 평양냉면은 메밀100%의 순면을 주로 썼다. 너무 툭툭 끊어진다 싶으면 메밀과 전분을 8대2 정도로 섞어 찰기를 더했다. 남한은 이 공식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다. 반면 북한에선 전분 함량이 껑충 뛰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는 예종석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를 ‘경제사정에 따른 냉면의 현지화’라고 설명했다. 그는 “옥류관 청류관 고려호텔 민족식당 등 북한의 4대 냉면을 모두 맛봤는데 한국의 그것과 다르다. 동치미 함량이 높고 면발도 메밀을 많이 쓰지 않는다. 슬쩍 이유를 물어봤더니 고기와 메밀을 구하기 힘들어서 그렇다고 하더라”고 귀띔했다. ●남한 평양냉면의 계보 평양냉면은 계보를 알아가는 재미도 크다. 실향민의 아픔과 역사적 요소가 가미되 매력적인 스토리로 다가온다. 남북분단이라는 상황으로 사실을 확인할 수 없어 신비감이 더해진다. 노포들은 을지로와 그 인근에 몰려 있다. 남한의 평양냉면 역사는 1940년대 을지로 4가에 개업한 ‘서래관(폐업)’이 시작이다. 1946년 우래옥이 개업했고 1970~1980년대 필동면옥·을지면옥·장충동 평양면옥 등이 뒤를 잇는다. 외식문화가 없던 당시 평양냉면은 특별한 먹거리로 시대를 풍미했다. 우래옥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평양냉면집이다. 평양 유명 냉면가게인 명월관 주인이 개업해 3대째 명맥을 잇고 있다. 을지로 본점은 창업주 고(故) 장원일 씨의 손녀 경선 씨(66)가, 대치동 분점은 손주 근한 씨(64)가 운영한다. 우래옥은 소구기만으로 육수를 우려낸다. 순면 또는 전분을 살짝 섞은 면 두 가지를 맛볼 수 있다. 우래옥 영업부장인 유병석 씨는 “업게 평균보다 연봉이 높은 편이다. 퇴직금도 준다”며 “직원 대부분 20~30년씩 내 살림 돌보듯 일하는 것도 우래옥의 경쟁력”이라고 했다. 서울 냉면은 크게 의정부계열과 장충동계열로 나뉜다. 의정부계열은 1.4 후퇴 때 월남한 고(故)홍영남, 김경필 부부가 1969년 개업한 의정부 평양면옥이 거점이다. 곧 북한에 돌아갈 줄 알고 북에 가까운 경기도 연천군에 자리를 잡았다가 12년 뒤 의정부로 가게를 옮겼다. 본점은 1남 3녀 중 아들 진권(66)씨가 물려받아 부인이 운영한다. 필동면옥과 을지면옥은 첫째 딸과 둘째 딸이 운영한다. 셋째딸은 잠원동에 ‘본가 평양면옥’을 차렸다. 의정부 계열 냉면은 고춧가루가 뿌려져 나온다. ‘장충동계열’ 평양면옥은 논현동 평양면옥과 분당 평양면옥으로 나뉜다. 평양에서 대동면옥을 운영하던 고(故) 김면섭 씨의 며느리 변정숙 씨가 1985년 개업했다. 본점은 큰아들 김대성 씨가, 논현점은 둘째 아들 김호성 씨가 운영한다. 도곡점 신강점은 4대 손주·손녀들이 맡았다. 주방장 출신 임세권 씨가 독립해 개업한 진미평양냉면도 있다. 을밀대는 1971년 마포에서 개업해 서북권 강자로 떠올랐다. 평랭의 대중화와 선구자들의 홍보활동으로 신흥 강자들도 속속 등장했다. 강남 진미평양냉면, 합정 동무밥상, 강남과 마포까지 진출한 판교 능라도, 여의도 정인면옥 등이 대표적. 평양냉면 마니아로 동호회활동을 해온 김수경 씨(44)는 신흥강자들의 트렌드는 ‘섹시함’이다. 감칠맛과 간이 세지고 있다“며 ”평양냉면 대중화에 따라 여러 사람의 기호를 반영하기 위한 결과로 보인다“고 했다. ●”나도 있다“ 각 지역 냉면문화 평양냉면은 남한 곳곳에 뿌리내리며 개성을 더했다. 북한과 지척인 인천 백령도에는 황해도식 메밀냉면이 꽃을 피웠다. 백령도는 메밀밭이 지천이다. 이곳에 자리 잡은 황해도 출신 실향민들은 메밀 100% 순면에 사골처럼 진한 육수, 여기에 까나리 액젓을 넣어 풍미를 더했다. 사곶냉면, 부평막국수, 변가네웅진냉면 등이 유명하다.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에도 황해도식 냉면이 전해진다. 황해도 출신 이건협 씨가 1952년 개업한 ‘황해냉면’이 대표적. 굵은 면발에 간장이나 설탕으로 간을 한 육수가 특징이다. 옥천냉면과 옥천고읍냉면 등이 있다. 진주냉면은 권번문화와 맞물려 발달했다. ‘선주후면’에 따라 입가심으로 먹던 국수에 남은 안주를 올려먹던 게 진주냉면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1915년 ‘부인필지’에 소개된 명월관 요리법에 따르면 고기국물에 디포리 홍합 새우 등 해물장국 섞어 육수를 낸다. 해산물 잡내를 잡기 위해 무쇠몽둥이 집어넣고 15일간 숙성절차를 거친다. 부산은 냉면이 밀면으로 변형됐다. 메밀 대신 미군에게 배급받은 밀가로루 냉면을 만들어 팔면서 밀면이 탄생했다. 유재우 내호냉면 사장은 ”함경도 흥남에서 냉면집을 운영하던 증조할머니가 밀면을 처음 만드셨다. 손님들은 밀가루를 쓰니 면이 부드러워졌다며 좋아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한편 함흠냉면집은 서울 중구 오장동 일대에 몰려 있다. 오장동에 자리잡은 함경도 피난민은 고향에서 먹던 농마국수를 변형해 함흥냉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감자 고구마 전분으로 만든 질긴 면을 매운 양념 가자미회 홍어회와 비벼 먹는다. 오장동 흥남집과 신창면옥이 대표적이다. 권이학 오장동 흥남집 이사는 ”양념장과 회의 쫀쫀한 식감이 함흥냉면의 매력이다. 함흥냉면이야말로 중독성이 대단한 음식“이라고 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20년 전 6월 3일이 생생해요. ‘괜히 외국 가서 바보가 되는 것 아닌가’ 걱정했죠.” ‘아시아의 종달새’ 소프라노 임선혜(42)는 노래만큼 말도 잘했다. 유럽 진출 20주년을 맞은 소감을 막힘없이 풀어냈다. 그는 서울대 음대에 다니던 21세에 독일 칼스루에 국립 음대로 유학을 떠났다. 자선 공연을 위해 잠시 귀국한 그와 23일 전화로 만났다. 그는 이달 경남 산청 성심원(3일), 부산 소년의 집(4일), 충남 서천 어메니티 복지마을(8일), 서울 명동대성당(11일)에서 ‘평화나눔음악회’를 열었다. 2009년부터는 문화 소외지역을 찾아 ‘희망나눔콘서트’도 매년 열고 있다. 그는 “클래식을 알고 나면 특별한 자긍심 같은 게 생긴다. 그래서 더 많은 분들과 음악을 나누고 싶다”고 했다. ‘사회에 어떻게 하면 보탬이 될까.’ 꽤 오랜 기간 그는 이 화두를 붙들고 살았다. 나의 노래가 다수에게 가닿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그래서 다른 길로 눈을 돌리기도 했다. 아나운서와 청소년 레크리에이션 강사를 고려했다. 고민은 어느 날 느닷없이 풀렸다. “10여 년 전쯤인가. ‘노래는 꼭 남을 위해 부르는 게 아니다. 스스로에게 기쁨과 위로가 되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어요. 이후 노래에 집중하게 됐죠.” 유학길에 오른 지 1년 반. 고음악 거장 필리프 헤레베허가 지휘하는 공연의 솔리스트 대타로 출연했다. 이후 수많은 거장의 ‘러브콜’을 받으며 고음악계 디바로 성장했다. 2005년부터 함께한 지휘자 레네 야콥스도 그중 하나. 야콥스는 “동양철학 때문인지 기독교인이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서양 클래식계가 잃어버린 영성을 임선혜에게 느낀다”고 했다고 한다. 7월엔 야콥스가 지휘·연출한 콘서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서 수잔나 역을 맡는다. 콘서트 오페라 3부작 다 폰테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지난해 ‘여자는 다 그래’에서는 데스피나 역을 맡았다. 내년에는 ‘돈 지오반니’의 무대에 오른다. 그는 “무대장치와 의상 없이 공연하는 콘서트 오페라는 출연자들이 갖가지 아이디어를 보태 함께 작품을 만들어가는 재미가 크다”고 말했다. 그의 침대맡엔 ‘한 글자 사전’, ‘조용히 다가온 나의 죽음’ 등 책 7권이 놓여 있다. 그는 읽고 쓰고 노래하길 즐기되 현실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수시로 점검한다. “하루에 몇 번씩 비행기를 타고, 음악으로 시대여행을 하고, 무대 위와 아래의 삶을 오가고. 자칫 현실과 동떨어지기 쉬운 삶이라 늘 밸런스를 신경 써요. 혼란스럽지만 지루할 틈 없는 성악가의 삶을 사랑합니다.” 7월 6일 오후 7시 반, 7일 오후 5시 서울 롯데콘서트홀. 4만∼15만 원. 1544-7744 이설 기자 snow@donga.com}

다음 달 개성으로 똘똘 뭉친 클래식 성찬이 펼쳐진다. 이른 더위와 미세먼지로 심신이 힘든 초여름, 공연장으로 작은 피서를 떠나보는 건 어떨까. 13년간 독일 베를린필하모닉 악장으로 활동한 바이올리니스트 가이 브라운슈타인이 피아니스트 김선욱과 한 무대에 오른다.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1번 G장조 OP 78 ‘비의 노래’ 등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을 연주한다. 2일 오후 7시 서울 LG아트센터. 4만∼9만 원. 02-2005-0114 세계적인 현악4중주단인 아르테미스 콰르넷과 파벨 하스 콰르텟의 공연도 기대를 모은다. 독일 현악4중주단인 아르테미스 콰르텟은 5일 오후 8시 LG아트센터에서 첫 내한무대를 꾸민다. 실내악 강국 체코의 현악4중주단 파벨 하스 콰르텟은 8일 오후 8시 LG아트센터에서 스메타나 현악4중주 제1번 E단조 ‘나의 생애로부터’ 등을 들려준다. 4만∼8만 원. 02-2005-0114 스위스에서 가장 오래된 악단인 루체른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2년 만에 내한 공연을 한다. 24일 오후 5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제임스 개피건이 지휘봉을 잡고 브람스 교향곡 1번을 선보인다. 5만∼18만 원. 02-599-5743 베를린 필하모닉 첼리스트 12명으로 구성된 ‘베를린필 12첼리스트’는 6년 만에 시대를 가로지르는 레퍼토리를 들고 한국을 찾는다. 27일 오후 8시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슈만의 ‘로망스’, 영화 ‘타이타닉’의 사운드트랙, 피아졸라의 ‘리베르탱고’ 등을 선보인다. 3만∼15만 원. 02-548-4480 이설 기자 snow@donga.com}

올 화이트 바지 정장에 완벽하게 정리된 손톱, 흐트러짐 없는 화장과 헤어…. 23일 오후 경기 군포시 군포문화예술회관에서 만난 소프라노 조수미는 밀랍인형 같았다.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하고 막 귀국한 사람치곤 외모도 태도도 해사하고 말쑥했다. 뒤편 테이블에 어지럽게 널린 파우치, 샌드위치, 물병이 ‘자기관리 화신’의 노고를 조용히 다독이고 있었다. 조수미는 주 근거지인 이탈리아 로마에서 출발해 필리핀에서 유네스코 자선 공연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온 참이었다. 31일 출국 전까지 군포(26일), 제주(29일), 서울(31일)에서 공연을 이어간다. 31일 오후 7시 반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 테너 로베르토 알라냐와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펼치는 듀엣공연 ‘디바&디보’가 핵심이다. ‘난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참지 못하는 성미다.’ 1998년 소프라노 조수미는 음악잡지 ‘객석’에서 이렇게 썼다. 20년이 흐른 지금도 이 ‘성미’는 변함없는 듯했다. “하고 싶어서” “내가 원해서” “남 의식 안 하고” “감정에 충실하게”…. 1시간 동안 그가 쏟아낸 언어엔 이거다 싶으면 재지 않고 직진하는 돌격정신이 묻어났다. 조수미는 잘 노는 전교 1등 같다. 배꼽티 차림으로 기자회견에 등장하고(1992년) 앙코르 무대에서 말춤을 추는 등(2012년) 개구진 모습으로 음악계 안팎을 휘저었다. 최근 그의 관심사는 ‘사회공헌’. 장애인, 동물보호, 예술교육에 특히 마음이 뜨거워진다.○ 어릴 적 장애인 친구 생각에 ‘휠체어 그네’ 국내 도입 “어릴 때부터 약자들에게 마음이 쓰였고, 꽤 오래전부터 조금씩 동물 장애인 아동 등의 보호활동을 해왔어요. 한동안 그분들을 일부러 외면했어요. 감정 절제가 안 돼 펑펑 울다 보면 컨디션이 엉망이 됐거든요. 40대 이후에 그분들과 대면할 용기가 생겼고, 최근 더 많이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듭니다.” ―휠체어 그네를 국내에 처음 소개했지요. “2012년쯤이었나. 호주에서 처음 휠체어 그네를 접하곤 옛 친구를 떠올렸어요. 다리가 불편했던 그 친구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휠체어에 가만히 앉아 놀이터 한구석을 지켰죠. 수소문 끝에 휠체어 그네를 제작해 5년째 각 지역에 기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2018년 평창 겨울패럴림픽 개회식 무대에도 서게 됐지요.” ―애견인으로서 동물보호 활동에도 적극적입니다. 개고기 반대 발언도 했고요. “어려서부터 반려견과 함께했고 지금도 반려견 신디, 로이, 샤넬과 함께 지내요. 국내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의 명예이사로 후원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유기견에 특히 관심이 많은데 국내 보호소는 시설이 너무 열악해요. 사람이 지구의 유일한 주인은 아니잖아요. 동물복지를 위한 교육이 시급하다고 봅니다.” ―기부 금액도 꽤 될 것 같습니다만…. “금액은 알리고 싶지 않아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요.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지구를 떠나고 싶기에 원하는 걸 할 뿐이에요. 커리어든, 사회공헌 활동이든 사심은 없습니다. 언론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조금이나마 관심을 일깨울 수 있어서예요.” ―세간의 평가에 초월한 강철멘털 같습니다. “성악가는 심장에 거짓이 깃들면 관객에게 울림을 줄 수 없어요. 그래서 감정에 순응하는 겁니다. ‘조수미’는 ‘조수미’의 베스트 프렌드예요. 여장부 조수미가 한없이 여린 조수미와 부딪치고 화해하며 단단하게 성장해 왔어요. 그게 제 인생입니다.”○ 정치인도 아닌데…. 조수미는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예술교육 시스템, 후학 양성, 통일, 여성 등 거미줄처럼 관심이 뻗친다. 정치인도 아닌데 자꾸 ‘이건 저렇게, 저건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후학 양성이 최근 새로운 관심사라고 누군가가 귀띔하더군요. “후학 양성이라기엔 거창하고요. 가진 걸 후배들에게 나누는 일에 흥미를 느낍니다. 10여 년 전부터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간간이 마스터클래스를 열고 있어요. 음악적 테크닉뿐 아니라 음악을 대하는 자세나 실전 노하우 같은 것들을 알려주죠. 제게 선생님 자질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의 예술교육 시스템에 보탬이 되고 싶어요.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집대성해 정리하고 싶습니다.” ―음악의 힘은 무한한 것 같습니다. “음악적으로 사회적 이슈를 어떻게 그려낼지 늘 고민합니다. 예컨대 호주 공연에서 밝은 느낌의 ‘국가 찬가’를 들었는데, 우리도 엄숙한 애국가 외에 경쾌한 찬가가 있으면 좋겠다 싶었죠. 아이디어가 현실로 이어지진 못했지만 이런저런 사유를 즐깁니다. 통일 문제도 그중 하나이지요.” ―해외 곳곳을 다니다 보면 이런저런 사회 문제와 해결책이 동시에 보이나요.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요즘 제가 느끼는 문제는 속도예요. 한국은 사회가 너무 빠르고 바쁘게 굴러가다 보니 변화 자체에 무감각해졌다고나 할까요. 유럽에서 주로 살아온 저는 그들의 삶을 대체로 이해하는 편이에요. 그들이 생각하는 삶의 의미와 가치는 우리가 빠른 변화 속에 놓치고 지나치는 요소들과 관련이 깊다고 봅니다.” ―구체적으로요. “가족의 의미, 약자에 대한 배려, 교육의 방향, 삶의 의미…. 여러 면에서 우리와 다르죠. 고국을 찾을 때마다 빠른 템포에 발을 동동 굴리다가 뭔가 잊고 지나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듭니다.” ○ 탁월한 전략가? 조수미라는 브랜드는 후퇴가 없었다. 전천후 디바에서 친근한 이웃집 누나로, 한국 홍보대사에서 여성 리더로. 기존 미덕을 간직한 채 가치를 한 겹씩 더하며 30년 넘게 장수했다. 철 바뀌면 옷장 정리하듯 자연스러운 변신도 마음의 소리에 따른 것일까. ―브랜드 전략이랄까요. 큰 틀에서 향후 행보는 오롯이 혼자 결정하는지요. “해외에 거주하기 때문에 미디어에 비치는 한국의 모습이 전부인 경우가 많아요. 이 때문에 종종 매니저 일을 하는 남동생과 소통합니다. 전반적 사회 분위기가 제가 하고자 하는 일과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지를 주로 토론하지요. 예컨대 세월호 사건, 미투운동 등은 외신을 통해 접하기에 정확한 분위기를 이해하기 힘들거든요. 그런 다음 지인들과 전화 통화나 티타임을 하며 상황 파악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 다음은요. “적절한 문화 행보를 고민하지요. 노래를 하는 사람이 사회·정치적 이슈에 관심을 갖는 게 이상해 보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현대인 대부분이 삶의 질이 주 관심사이고 문화는 삶의 질과 가장 밀접한 영역이죠. 오랫동안 해외에서 활동하며 국가의 위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했어요. 국가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힘든 과정을 거쳐 여성 리더로 성장했습니다. 여성 문제에도 관심이 있나요. “여성들의 지위가 높아질수록 연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경쟁과 좌절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쿨’해야 합니다. 저도 질투를 합니다만 인정할 건 인정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야 내가 더 단단해지더군요.” ―‘쿨’요? “상대를 인정하고 나 자신을 되돌아볼 때 진정한 성장이 따라오는 것 같아요. 그리고 외면의 아름다움은 언젠가 사그라집니다. 감수성과 나의 생각, 느낌을 신실하게 돌봤으면 합니다.” ―유럽에서 부당한 일을 많이 겪었나요. “인종차별은 어디에나 있어요. 유럽 진출 초기에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오디션에서 탈락했고 독일어를 못해 마스터클래스에서 쫓겨났죠. 지금은 웃으며 얘기하지만 당시엔 충격이 컸어요. 하지만 유럽 사회는 실력이 있으면 언젠가는 인정을 합니다. 특별할 것 없는 제가 성공한 건 포기하지 않고 재능을 갈고닦았기 때문이에요.”○ 지독한 완벽주의자 그는 지독한 완벽주의자다. 컨디션 관리를 위해 공연 전엔 ‘호콕’(호텔에만 머무름)하고 킥복싱과 ‘홈트’(유튜브 보며 집에서 운동)로 체력을 다진다. 공연 전엔 완벽주의 기질이 극한으로 치닫는다. 무대, 의상, 객석 의자까지 제대로 각이 잡혀야 안심이 된다. 허름한 야외공연장 객석 의자가 거슬려 방석 수천 개를 산 적도 있다. ―평생 절제하는 삶, 힘들지 않나요.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8시간 동안 방에 가둬 두고 피아노 연습을 시켰어요. 누구도 대신 연습해주지 않고, 정상의 자리를 유지하려면 혼자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점을 받아들였습니다. 습관이 돼서 힘들지 않아요.” ―무대 밖에서는 어떤가요. “비슷해요. 뭐든 풀세팅을 선호하죠. 집에서 밥 한 끼를 먹어도 테이블 세팅을 갖춰요. 손님도 왕처럼 대접하죠. 살아온 모양처럼 몸이 굳었는지, 어떤 의사가 말하길 제 어깨가 돌처럼 딱딱하대요.(웃음)” ―어머니 꿈이 성악가셨다죠. 건강 상태는 어떠신가요. “7년째 치매로 고생하고 계신데, 거의 매일 저녁 식사 전에 전화로 이야기를 건넵니다. 오페라 아리아를 몇 곡이나 흥얼거리실 정도로 클래식을 사랑하셨죠. 로베르토 알라냐를 제일 좋아하셨는데, 이번 공연에 모실 수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알라냐는 어떤 동료인가요. “무대 위 동물이죠. 끼를 타고났어요. 무대 밖에선 소탈하고 천진하고 세상 물정 모르고. 저와 비슷한 면이 많아요. 사실 알라냐의 전 부인인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규와 더 친해서 한동안 어색하게 지내다가 다시 가까워졌어요.(웃음)” 깔깔 웃고 대책 없이 울다가 무대 위에선 카리스마를 내뿜는다. 조수미는 천생 예술가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반쪽 조수미였다. 그는 인터뷰 이슈를 소속사 직원에게 직접 카톡으로 주문할 만큼 빈틈없었다. 예술가의 감성과 최고경영자(CEO)의 냉철함을 동시에 품은 여전사 같았다. “러시아, 브라질, 현대음악 등 음악 욕심은 끝이 없어요. 언제 하고픈 걸 다 할지, 휴.” 그의 인생 ‘챕터2’가 닻을 올렸다. 조수미와 로베르토 알라냐의 디바&디보 콘서트. 8만∼20만 원. 02-399-1000 이설 기자 snow@donga.com}

올 화이트 바지 정장에 완벽하게 정리된 손톱, 흐트러짐 없는 화장과 헤어…. 23일 오후 경기 군포시 군포문화예술회관에서 만난 소프라노 조수미는 밀랍인형 같았다.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하고 막 귀국한 사람치곤 외모도 태도도 해사하고 말쑥했다. 뒤편 테이블에 어지럽게 널린 파우치, 샌드위치, 물병이 ‘자기관리 화신’의 노고를 조용히 다독이고 있었다. 조수미는 주 근거지인 로마에서 출발해 필리핀에서 유네스코 자선 공연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온 참이었다. 31일 귀국 전까지 군포(26일), 제주(29일), 서울(31일)에서 공연을 이어간다. 31일 오후 7시 반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 테너 로베르토 알라냐와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펼치는 듀엣공연 ‘디바&디보’가 핵심이다. ‘난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참지 못하는 성미이다.’ 1998년 소프라노 조수미는 음악잡지 ‘객석’에서 이렇게 썼다. 20년이 흐른 지금도 이 ‘성미’는 변함없는 듯했다. “하고 싶어서” “내가 원해서” “남 의식 안 하고” “감정에 충실하게”…. 1시간 동안 그가 쏟아낸 언어엔 이거다 싶으면 재지 않고 직진하는 돌격정신이 묻어났다. 조수미는 잘 노는 전교 1등 같다. 배꼽티 차림으로 기자회견에 등장하고(1992년) 앙코르 무대에서 말춤을 추는 등(2012년) 개구진 모습으로 음악계 안팎을 휘저었다. 최근 그의 관심사는 ‘사회공헌’. 장애인, 동물보호, 예술교육에 특히 마음이 뜨거워진다. ●어릴 적 장애인 친구 생각에 ‘휠체어 그네’ 국내 도입 “어릴 때부터 약자들에게 마음이 쓰였고, 꽤 오래전부터 조금씩 동물 장애인 아동 등의 보호활동을 해왔어요. 한동안 그분들을 일부러 외면했어요. 감정 절제가 안 돼 펑펑 울다 보면 컨디션이 엉망이 됐거든요. 40대 이후에 그분들과 대면할 용기가 생겼고, 최근 더 많이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듭니다.” ―휠체어 그네를 국내에 처음 소개했지요. “2012년쯤이었나. 호주에서 처음 휠체어 그네를 접하곤 옛 친구를 떠올렸어요. 다리가 불편했던 그 친구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휠체어에 가만히 앉아 놀이터 한구석을 지켰죠. 수소문 끝에 휠체어 그네를 제작해 5년째 각 지역에 기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2018년 평창 겨울패럴림픽 개회식 무대에도 서게 됐지요.” ―애견인으로서 동물보호 활동에도 적극적입니다. 개고기 반대 발언도 했고요. “어려서부터 반려견과 함께했고 지금도 반려견 신디, 로이, 샤넬과 함께 지내요. 국내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의 명예이사로 후원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유기견에 특히 관심이 많은데 국내 보호소는 시설이 너무 열악해요. 사람이 지구의 유일한 주인은 아니잖아요. 동물복지를 위한 교육이 시급하다고 봅니다.” ―기부 금액도 꽤 될 것 같습니다만. “금액은 알리고 싶지 않아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요.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지구를 떠나고 싶기에 원하는 걸 할 뿐이에요. 커리어든, 사회공헌 활동이든 사심은 없습니다. 언론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조금이나마 관심을 일깨울 수 있어서예요.” ―세간의 평가에 초월한 강철멘털 같습니다. “성악가는 심장에 거짓이 깃들면 관객에게 울림을 줄 수 없어요. 그래서 감정에 순응하는 겁니다. ‘조수미’는 ‘조수미’의 베스트 프렌드예요. 여장부 조수미가 한없이 여린 조수미와 부딪히고 화해하며 단단하게 성장해 왔어요. 그게 제 인생입니다.”●정치인도 아닌데…. 조수미는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예술교육 시스템, 후학 양성, 통일, 여성 등 거미줄처럼 관심이 뻗친다. 정치인도 아닌데 자꾸 ‘이건 저렇게, 저건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후학 양성이 최근 새로운 관심사라고 누군가가 귀띔하더군요. “후학 양성이라기엔 거창하고요. 가진 걸 후배들에게 나누는 일에 흥미를 느낍니다. 10여 년 전부터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간간이 마스터클래스를 열고 있어요. 음악적 테크닉뿐 아니라 음악을 대하는 자세나 실전 노하우 같은 것들을 알려주죠. 제게 선생님 자질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국 예술교육 시스템에 보탬이 되고 싶어요. 현장에서 겪은 노하우를 집대성해 정리하고 싶습니다.” ―음악의 힘은 무한한 것 같습니다. “음악적으로 사회적 이슈를 어떻게 그려낼지 늘 고민합니다. 예컨대 호주 공연에서 밝은 느낌의 ‘국가 찬가’를 들었는데, 우리도 엄숙한 애국가 외에 경쾌한 찬가가 있으면 좋겠다 싶었죠. 아이디어가 현실로 이어지진 못했지만 이런저런 사유를 즐깁니다. 통일 문제도 그 중 하나이지요.” ―해외 곳곳을 다니다 보면 이런저런 사회 문제와 해결책이 동시에 보이나요.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요즘 제가 느끼는 문제는 속도예요. 한국은 사회가 너무 빠르고 바쁘게 굴러가다 보니 변화 자체에 무감각해졌다고나 할까요. 유럽에서 주로 살아온 저는 그들의 삶을 대체로 이해하는 편이에요. 그들이 생각하는 삶의 의미와 가치는 우리가 빠른 변화 속에 놓치고 지나치는 요소들과 관련이 깊다고 봅니다.” ―구체적으로요. “가족의 의미, 약자에 대한 배려, 교육의 방향, 삶의 의미…. 여러 면에서 우리와 다르죠. 고국을 찾을 때마다 빠른 템포에 발을 동동 굴리다가 뭔가 잊고 지나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듭니다.” ●탁월한 전략가? 조수미라는 브랜드는 후퇴가 없었다. 전천후 디바에서 친근한 이웃집 누나로, 한국 홍보대사에서 여성 리더로. 기존 미덕을 간직한 채 가치를 한 겹씩 더하며 30년 넘게 장수했다. 철 바뀌면 옷장 정리하듯 자연스러운 변신도 마음의 소리에 따른 것일까. ―브랜드 전략이랄까요. 큰 틀에서 향후 행보는 오롯이 혼자 결정하는지요. “해외에 거주하기 때문에 미디어에 비치는 한국의 모습이 전부인 경우가 많아요. 이 때문에 종종 매니저 일을 하는 남동생과 소통합니다. 전반적 사회 분위기가 제가 하고자 하는 일과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지를 주로 토론하지요. 예컨대 세월호 사건, 미투운동 등은 외신을 통해 접하기에 정확한 분위기를 이해하기 힘들거든요. 그런 다음 지인들과 전화 통화나 티타임을 하며 상황 파악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 다음은요.“적절한 문화 행보를 고민하지요. 노래를 하는 사람이 사회·정치적 이슈에 관심을 갖는 게 이상해 보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현대인 대부분이 삶의 질이 주 관심사이고 문화는 삶의 질과 가장 밀접한 영역이죠. 오랫동안 해외에서 활동하며 국가의 위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했어요. 국가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힘든 과정을 거쳐 여성 리더로 성장했습니다. 여성 문제에도 관심이 있나요. “여성들의 지위가 높아질수록 연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경쟁과 좌절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쿨’해야 합니다. 저도 질투를 합니다만 인정할 건 인정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야 내가 더 단단해지더군요.” ―‘쿨’요? “상대를 인정하고 나 자신을 되돌아볼 때 진정한 성장이 따라오는 것 같아요. 그리고 외면의 아름다움은 언젠가 사그라집니다. 감수성과 나의 생각, 느낌을 신실하게 돌봤으면 합니다.” ―유럽에서 부당한 일을 많이 겪었나요. “인종차별은 어디에나 있어요. 유럽 진출 초기에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오디션에서 탈락했고 독일어를 못해 마스터클래스에서 쫓겨났죠. 지금은 웃으며 얘기하지만 당시엔 충격이 컸어요. 하지만 유럽 사회는 실력이 있으면 언젠가는 인정을 합니다. 특별할 것 없는 제가 성공한 건 포기하지 않고 재능을 갈고닦았기 때문이에요.”●지독한 완벽주의자 그는 지독한 완벽주의자다. 컨디션 관리를 위해 공연 전엔 ‘호콕’(호텔에만 머무름)하고 킥복싱과 ‘홈트’(유튜브 보며 집에서 운동)로 체력을 다진다. 공연 전엔 완벽주의 기질이 극한으로 치닫는다. 무대, 의상, 객석 의자까지 제대로 각이 잡혀야 안심이 된다. 허름한 야외공연장 객석 의자가 거슬려 방석 수천 개를 산 적도 있다. ―평생 절제하는 삶, 힘들지 않나요.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8시간 동안 방에 가둬 두고 피아노 연습을 시켰어요. 누구도 대신 연습해주지 않고, 정상 자리를 유지하려면 혼자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점을 받아들였습니다. 습관이 돼서 힘들지 않아요.” ―무대 밖에서는 어떤가요. “비슷해요. 뭐든 풀세팅을 선호하죠. 집에서 밥 한 끼를 먹어도 테이블 세팅을 갖춰요. 손님도 왕처럼 대접하죠. 살아온 모양처럼 몸이 굳었는지, 어떤 의사가 말하길 제 어깨가 돌처럼 딱딱하대요.(웃음)” ―어머니 꿈이 성악가셨다죠. 건강 상태는 어떠신가요. “7년째 치매로 고생하고 계신데, 거의 매일 저녁 식사 전에 전화로 이야기를 건넵니다. 오페라 아리아를 몇 곡이나 흥얼거리실 정도로 클래식을 사랑하셨죠. 로베르토 알라냐를 제일 좋아하셨는데, 이번 공연에 모실 수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알라냐는 어떤 동료인가요. “무대 위 동물이죠. 끼를 타고났어요. 무대 밖에선 소탈하고 천진하고 세상 물정 모르고. 저와 비슷한 면이 많아요. 사실 알라냐의 전 부인인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규와 더 친해서 한동안 어색하게 지내다가 다시 가까워졌어요.(웃음)” 깔깔 웃고 대책 없이 울다가 무대 위에선 카리스마를 내뿜는다. 조수미는 천생 예술가인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반쪽 조수미였다. 그는 인터뷰 이슈를 소속사 직원에게 직접 카톡으로 주문할 만큼 빈틈없었다. 예술가의 감성과 최고경영자(CEO)의 냉철함을 동시에 품은 여전사 같았다. “러시아, 브라질, 현대음악 등 음악 욕심은 끝이 없어요. 언제 하고픈 걸 다 할지, 휴.” 그의 인생 ‘챕터2’가 닻을 올렸다.이설 기자snow@donga.com}

제 손으로 방 한 번 닦아본 적 없는 A 씨 커플. ‘혼수가전 체크리스트’를 뽑아 들고 야심 차게 가전제품 매장을 방문했지만 두통만 얻고 돌아왔다. 전부 들이고 싶지만 집은 좁고 예산은 적고, 필수 품목을 고르려니 지인이고 포털이고 답변이 천차만별이다. ‘시간거지’인 워킹맘들이 가사노동에서 해방시켜 줄 만한 품목을 추려봤다.혼자 쓸고 닦고… 물걸레 로봇청소기 싱글이던 그 시절, 팔팔하던 20대에도 퇴근 후 집에 오면 늘 녹초였다. 세수할 힘도 없어서 소파에 한동안 누워 있었다. 낼모레 마흔인 지금은 체력이 더 달린다. 그런데 집에 오면 새로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단 1%라도 힘을 덜어준다면 뭐든 집에 들여놓게 된다. 지인 집에서 보고 곧바로 지난달 주문을 넣은 물걸레 로봇청소기가 대표적이다. 결혼 전 30여 년 동안 한 번도 물걸레로 바닥을 닦아보지 않았기에 물걸레질이 얼마나 힘든지 몰랐다. 걸레를 빨아 무릎을 꿇고 거실을 한 번만 닦아도 진이 빠진다. 대충 청소기만 밀고 모른 척하려 해도 미세먼지가 내려앉은 바닥에서 뒹굴고 노는 아이를 보면 그럴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물걸레 로봇청소기는 신세계였다. 먼저 무선 청소기로 한 번 쓱 민 다음 버튼 하나만 누르면 알아서 온 집을 돌아다니며 바닥을 닦는다. 주변 장애물을 잘 파악해서 알아서 요리조리 피해 다니기도 한다. 물론 아주 구석진 곳은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다. 하지만 로봇이 가지 못하는 곳이면 아이도 잘 가지 않는다. 그냥 무시하면 된다. 아이 매트 위에 올려보니 매트에서만 열심히 돌아다닌다. 스스로 낙하하지 않도록 공간을 가늠하며 청소하는 듯했다. 주말 아침에 청소기 한 번 돌리고 “물걸레 로봇아 청소하렴” 하고 나가면 그만이다. 요즘 인기 있는 제품은 에브리봇, 아이로봇, 브라바, 삼성, 에코백스, 유진로봇, 다이슨 등이다.(결혼 7년 차 워킹맘 기자 K 씨)진작 살걸 ‘기특한 너’… 스타일러 미세먼지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3월에 주문해 4월에 겨우 받은 아이템이다. 도저히 옷장 옆에는 자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거실 소파 옆자리를 내주었다. 스타일러에 꽂힌 첫 번째 이유는 옷을 세탁소에 맡길 시간이 없어서다. 워킹맘들은 주중이면 1분도 아껴서 움직여야 한다. 당연히 옷을 다릴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다. 약간 구겨지고 더러워진 옷은 비용이 들더라도 세탁소로 보낸다. 문제는 세탁소에 옷을 맡길 시간이 주말밖에 없다는 것이다. 주중에는 세탁소 아저씨를 만날 수가 없다. 매번 주말에 옷을 맡기고 평일 밤늦게 찾아오다 보니 입고 싶을 때 옷이 없는 일이 적잖다. 퇴근하고 몸이 천근처럼 느껴질 때 옷을 대충 의자 위에 걸쳐놓다 보니 구겨져 있을 때도 많다. 출근 준비에 시간을 쫓기며 옷을 잡았다가 주름진 모양에 소스라치게 놀랄 때도 있었다. 스타일러를 사용한 지 한 달. ‘더 일찍 샀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족스럽다. 일단 구겨진 재킷과 트렌치코트에 ‘짱’이다. 고급 의류 코스로 34분 정도 돌려주면 깔끔해진다. 면 셔츠도 다림질까진 아니어도 주름이 사라지고 새 옷 같아진다. 미세먼지 때문에 찜찜했던 이불 살균도 할 수 있다. 이용하기도 간단하다. 퇴근해서 구겨진 재킷과 셔츠를 스타일러에 넣고 돌린 뒤 다음 날 아침에 꺼내 입으면 된다. 4월에 겨울옷 정리할 때도 요긴했다. 드라이클리닝을 하고 한 번밖에 입지 않아 또 세탁소에 맡기기가 애매했던 옷들은 스타일러에 돌린 뒤 정리했다. 보송보송한 느낌이 좋았다. 특히 패딩, 모피에 효과가 컸다. 단점도 있다. 결정적으로 실크제품은 사용할 수 없다. 주름진 실크 스카프와 실크 블라우스, 실크 스커트에 적절한 조치가 절실했는데…. 스팀을 기본으로 하다 보니 고급 소재로 만든 제품들은 사용하기 어려운 것 같다. 요즘 주목받는 제품은 LG전자 트롬 스타일러, 10만 원대의 간소형 제품인 미국 해밀턴비치의 이지스팀백 등이 있다. 삼성전자와 웅진코웨이 등도 신제품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결혼 9년 차 워킹맘 J 씨)반찬부터 간식까지 ‘뚝딱’… 에어프라이어 둘째를 낳고 지난해 겨울부터 육아휴직 중이다. 그간 잘 보살펴주지 못한 첫째에게 맛난 걸 많이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손은 느리고 요리 감각은 없고…. 그때 에어프라이어를 추천받았다. “고기나 고구마, 감자, 어묵, 아무거나 그냥 넣기만 하면 돼.” 쉽고 간편하다는 말에 넘어가 샀다가 창고에 처박아 둔 가전제품이 많다는 사실에 잠깐 갈등했다. 그때 친구의 말은 쐐기가 됐다. “굽네치킨도 만들 수 있어.” 다음 날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에어프라이어를 골라 사들였다. 결과는 대만족이다. 밥과 간식을 전부 해결할 수 있었다. 고기를 좋아하는 다섯 살 아들은 에어프라이어를 거친 삼겹살과 스테이크로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운다. 고구마, 감자, 생선, 만두, 치킨 등도 자주 만들어 먹는다. 특히 치킨은 허브양념을 뿌리고 파, 양파를 썰어 넣은 뒤 에어프라이어에 튀기자 마법처럼 굽네치킨 같은 모양새가 나왔다. 돈가스는 지나치게 바삭바삭해 맛이 덜하지만 꼬마돈가스는 괜찮았다.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요령도 생겼다. 기름기가 쫙 빠져야 좋은 고기, 만두, 튀김 등은 기름종이를 깔아야 한다. 그 대신 기름기가 자작해야 맛이 나는 피자, 떡, 돈가스 등은 기름종이를 깔지 않는다. 요리 소요 시간은 180∼190도에서 20∼30분가량. 냉동식품과 튀긴 음식을 많이 먹게 돼 다이어트에는 도움이 안 된다. 새우나 큰 돈가스는 튀김 정도가 불만스럽다. 기름을 닦아내는 일이 다소 귀찮지만 베이킹소다와 뜨거운 물을 섞어 불리면 때를 말끔히 씻어낼 수 있다. 대우어플라이언스, 필립스와 트레이더스의 제품이 요즘 인기다.(결혼 7년 차 워킹맘 L 씨)빨래 널기 끝… 건조기 결혼 6년 차, 마침내 건조기를 집에 들였다. 미국 연수 중 ‘코인 세탁방’에서 쓰던 건조기의 편리함을 잊지 못해서다. 비가 쏟아지던 날에도 바삭바삭할 정도로 잘 말라 있는 옷들을 꺼낼 때 느껴지던 상쾌함도 잊기 어려웠다. 기자의 집은 96m² 정도. 실내가 좁아 건조기를 사기 전까지 고민이 컸지만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했다. 세탁기 위에 건조기를 놓았더니 공간 걱정이 사라졌다. 다만 키가 작다면 세탁물을 넣고 빼는 게 좀 불편할 수 있다. 건조기를 한 달간 사용해본 결과 두 가지 점이 특히 맘에 들었다. 우선 빨래가 끝난 옷을 꺼내 건조대에 거는, 가장 귀찮은 과정을 생략할 수 있었다. 특히 여름 장마철에 건조대 옆에서 제습기 두 대를 돌려도 꿉꿉한 냄새가 나 불쾌했다. 이제는 그럴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평소 입던 옷에 얼마나 많은 먼지들이 붙어 있었는지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도 있다. 건조기를 다 돌리고 난 뒤 먼지거름망을 꺼내 보면 먼지가 수북하다. 특히 미세먼지 경보라도 울린 날 먼지거름망을 꺼내 보면 묘한 쾌감까지 느낄 수 있다. 아쉬운 점도 있다. 무엇보다 건조 시간이 생각보다 너무 오래 걸린다. 한 시간 동안 세탁한 옷들을 표준 코스로 건조하면 평균 두 시간 넘게 걸린다. 삼성전자, LG전자, 독일 블롬베르크, 터키 아첼릭 등이 내놓은 건조기들이 최근 주목받고 있다.(결혼 6년 차 워킹맘 기자 L 씨)‘청소 바보’를 천재로 바꿔주는 무선청소기 자랑은 아니지만 우리 부부의 ‘지저분 견딤 지수’는 매우 높다. 신혼 때에는 먼지와 사이좋게 뒹굴며 살았다. 아이가 생기면서 견딤 지수는 급격히 떨어졌다. 먼지가 방 구석구석에 쌓이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청소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유선청소기의 실타래처럼 꼬인 줄을 풀고, 거리가 멀어져 콘센트에서 플러그가 빠질 때마다 전원을 다시 꽂다 보면 심신이 바닥났다. 결국 무선청소기를 찾았다. 처음 사용할 때는 괜히 샀다 싶었다. 끈이 얽히고설켜 분노를 유발하던 유선청소기에 비하면 양반이었지만 손목과 손아귀가 너무 아팠다. 버튼을 계속 꾹 누른 채 청소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청소가 끝나고 나선 다신 못 하겠다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이용 횟수가 늘어나면서 통증은 사라졌다. 그때부터 무선청소기의 진가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돌릴 때마다 ‘샤샤삭’ 하는 소리와 함께 먼지가 사라지는 시각적 쾌감이 상당했다. “게으른 인간도 청소하게 만든다”는 지인들의 얘기가 과장이 아니었다. 친정과 시댁에도 무선청소기를 선물했다. 한데 반응이 달랐다. 60대로 비교적 체력이 좋은 편인 친정어머니는 주변에 “딸에게서 좋은 선물을 받았다”고 자랑하신다. 70대인 데다 건강이 그리 좋지 않은 시어머니는 “너무 무겁기도 하고 청소 결과도 맘에 들지 않는다”며 물걸레 로봇청소기를 찾으셨다. ‘무선청소기+스탠드형 물걸레청소기’ 또는 ‘무선청소기+로봇청소기’ 조합으로 돌리니 집이 말끔하다. 아쉬운 점도 있다. 특히 얼굴 쪽으로 바람이 불고, 필터를 비울 때 묵은 먼지가 날리는 점은 개선이 필요하다. 요즘 무선청소기 제품은 다양해지는 추세. 다이슨, LG전자, 일렉트로룩스, 디베아 등의 제품이 인기다.(결혼 5년 차 워킹맘 S 씨)친정엄마 건강 지킴이… 전기레인지 어려서부터 불을 무서워했다. 그래서 요리할 때마다 불안하다. 활활 타오르는 불이 냄비 옆구리를 스쳐 솟구치거나 바람에 일렁일 때면 화들짝 놀라는 일도 잦았다. 두 아이를 낳곤 가스레인지가 더 못마땅해졌다. 천방지축 아들들의 키가 자라면서 부엌에 대한 공포는 더더욱 커졌다. 행여 손잡이를 돌려 가스레인지를 켤 수도 있다는 조바심이 생겼다. 여기에 미세먼지도 전기레인지를 구매하도록 만든 큰 요인이 됐다. 일주일 내내 미세먼지가 극성을 부려 실내 환기를 못 하게 된 데다 가스레인지에서도 심각한 미세먼지가 나온다는 언론 보도를 봤다. 일하는 딸 대신 부엌에 살다시피 하시는 친정엄마의 건강이 염려됐다. 전기레인지는 가열 방식에 따라 인덕션과 하이라이트로 나뉜다. 인덕션은 빨리 가열되고 빨리 식고, 하이라이트는 천천히 가열되고 천천히 식는다. 보통 인덕션 1개, 하이라이트 2개를 섞은 하이브리드 제품을 많이 산다고 한다. 전기레인지를 들여놓은 뒤 요리를 할 때 이산화탄소를 맡을 일이 줄어 만족스럽다. 요리 과정에서 느껴지는 열기도 덜해 쾌적한 기분마저 들었다. 전기레인지 전용 냄비를 써야 한다고 했지만 요즘은 다 호환이 된다. 뚝배기가 거의 유일한 금지 품목이다. 청소도 간편하다. 사용한 직후에 물티슈나 건티슈로 닦아주고, 일주일에 한 번 전용세제로 세척해주면 끝이다. 쿠쿠전자, LG전자, 삼성전자, 쿠첸 등 대부분 가전회사가 전기레인지를 내놓고 있다.(결혼 8년 차 전직 워킹맘 K 씨)정리=이설 기자 snow@donga.com}

“50년 가까이 외국 생활을 했지만 와인은 늘 자신이 없었어요. 언젠가 와인을 극복하고 싶었습니다.” 4월과 이달 9일 두 차례에 걸쳐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양태규 전 몬트리올 총영사(81)를 만났다. 첫 만남에선 와인 강의를 들었고 두 번째엔 그가 만든 와인을 마셨다. “내가 만든 와인이 자랑스럽다. 와인 맛이 어떠냐”고 묻는 노신사의 얼굴에 해사한 미소가 번졌다. 마치 와인과 사랑에 빠진 20대 청년 같았다. 그는 첨가물을 일절 넣지 않은 내추럴와인으로 제3의 인생을 열었다. 외교관으로 32년, 해외 대학 교수로 13년간 일한 뒤 2009년 이제 좀 쉬자 싶어 한국에 들어왔다. 그런데 펄펄 끓는 피를 잠재울 수 없었다. 일흔둘, 하고 싶은 것도 수두룩했고 묵히기 아까운 능력도 많았다. “그림을 그릴까, 책을 쓸까, 행복한 고민에 빠졌죠. 그러다 문득 와인이 떠올랐어요. 외교관으로 일하면서 적잖은 와인을 접했지만 제대로 파고들면 어떨까 싶었죠. 온라인에서 관련 정보를 찾으며 와인을 공부하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독한’ 와인공부가 시작됐다. 한국어 일본어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러시아어…. 그는 7개 언어를 한다. 이런 외국어 능력을 바탕으로 온라인에서 크고 작은 와인정보를 뒤지기 시작했다. 학구파 기질을 살려 각국의 와인자료를 보다 보니 ‘조지아(옛 그루지야)’라는 이름이 나왔다. “조지아는 와인의 발상지예요. 황토 항아리인 크베브리(Qvevri)에서 포도를 숙성시켜 만들죠. 천년에 걸쳐 내려온 기술로 러시아 대문호 푸시킨은 프랑스의 부르고뉴 기술보다 조지아의 양조방식이 더 뛰어나다고 칭송했어요.” 조지아의 내추럴와인에 강한 호기심이 일어 2010년 3개월간 와이너리 현지답사를 다녔다. 농가를 빌려 크베브리 5개를 묻고 포도 종을 골라 같은 해 말 첫 와인을 만났다. ‘초심자의 행운’이 따라와 기가 막힌 와인이 나왔다. 그는 포도는 직접 재배하지 않는다. 그 대신 발품을 팔아 좋은 테루아에서 유기농으로 키운 최고의 포도를 매입한다. 처음엔 700병 정도 만들다가 최근엔 자신감이 붙어서 1500병 정도로 양을 늘렸다. 한국에 올 때마다 조금씩 들여와 지인들과 나눠 마신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파노라마처럼 쭉 뻗는 소리를 원합니까, 제 방에서 듣는 아늑한 소리를 원합니까?” 올해 4월 경기 부천시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사무실. 박영민 상임지휘자와 세계적 음향설계자인 나카지마 다테오 씨(47)가 머리를 맞댔다. 부천필하모닉 전용홀의 설계를 맡은 나카지마 씨가 부천필 측의 요구사항을 듣는 자리였다. 음악가의 추상적인 요구에 설계자가 기술적 답변을 하는 게 보통이지만 이날은 달랐다. 박 지휘자는 “오케스트라의 색깔을 파악하기 위해 집요하게 음악 관련 질문을 던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나카지마 씨는 최근 가장 주목받는 음향설계자다. 이 분야의 대부인 러셀 존슨(2007년 사망)의 후계자로, 세계적인 공연장을 다수 설계한 영국 애럽사의 음향 및 무대디자인 팀을 이끌고 있다. 폴란드 브로츠와프의 ‘국립뮤직포럼’, 덴마크 올보르의 ‘북유틀란트 하우스 오브 뮤직’ 등이 그의 작품. 2021년 완공 예정인 부천필 전용홀 음향설계를 맡은 그를 8일 오전 서울 강남구 애럽 한국지사 사무실에서 화상으로 만났다. “미적 기준이 다른 것처럼 공연장도 각각 그 나름대로의 소리(tone)와 특성(identity)이 있어요. 공연장이 추구하는 소리를 이해하기 위해 설계 전 고객과 충분히 이야기를 나눕니다.” 공간의 규모, 습도, 온도, 벽면과 바닥의 재질…. 음향설계는 수십 가지 변수를 조율해 원하는 음색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객석과 형태를 정하고, 흡음과 반사를 고려해 마감 재료를 선택하고, 잔향과 초기음 등을 고려해 정교하게 설계를 가다듬는다. 그는 “방대한 데이터베이스와 최신 기술을 토대로 설계해도 결과는 늘 예상을 비켜간다”며 “이것이 음향설계의 마법”이라고 말했다. 그는 원래 음악도였다. 캐나다 토론토왕립음악원을 졸업한 뒤 독일 일본 네덜란드 등에서 바이올리니스트와 지휘자로 활동했다. 연주자나 무대 관련 일을 하다가 음향설계로 진로를 바꾸는 이들이 적잖지만 지휘자 출신은 드물다. 그는 “무대에서 음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경험한 점이 큰 도움이 된다. 지금도 가끔 설계한 무대에서 지휘를 하며 설계가 어떻게 구현됐는지 확인한다”고 했다.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건 1999년 세계적 음향회사인 아르텍(2013년 애럽에 합병)의 창립자인 러셀 존슨과 만나면서부터. 지휘자인 그에게 러셀은 “공연장의 소리는 연주자, 악기, 관객, 공간이 어우러져서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를 건넸고, 그는 공간과 교감하며 음악을 만들어 나가는 점에 매료돼 아르텍에 입사했다. 음반, 디지털, 영상 등 클래식과 만나는 길이 다채로워지는 시대, 공연장은 어떤 경쟁력을 갖춰야 할까. “공연장은 웅장함, 생동감, 따뜻함 등 단순한 소리 이상을 경험하는 공간입니다. 제 손끝에서 탄생한 공연장이 그 지역의 정체성(identity)을 잘 담아내길 바랍니다. 공연장을 방문한 이들이 자연스레 그 지역의 정서에 녹아들고, 그곳만의 소리를 느낄 수 있도록요.” 이설 기자 snow@donga.com}

목소리만으로 합창하는 ‘아카펠라’는 이탈리아어로 ‘성당 안의 기도실’을 뜻한다. 16세기 작은 기도실에서는 파이프오르간을 사용할 수 없어 무반주 합창곡을 작곡하던 것이 아카펠라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세계적 아카펠라 그룹인 영국의 ‘킹스싱어즈(King‘s Singers)’와 스페인의 ‘비보컬(B vocal)’이 잇따라 한국을 찾는다. ‘아카펠라계 비틀스’인 킹스싱어즈는 16일 오후 8시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50주년 기념 내한 공연을 갖는다. 대중적인 팝송부터 현대음악가 다케미쓰 도루의 곡까지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선보인다. 그간 내한 무대에서 ‘아리랑’ ‘마법의 성’ 등 한국 노래를 선보인 이들은 이번에도 깜짝 선물을 준비했다는 귀띔이다. 킹스싱어즈는 1968년 영국 케임브리지대 킹스칼리지의 합창 장학생 6명이 창단했다. 이후 50년간 카운터테너 2명과 테너 1명, 바리톤 2명, 베이스 1명 등 같은 파트 구성으로 26명이 거쳐 갔다. 이들의 가장 큰 매력은 투명한 사운드와 장르를 넘나드는 선곡, 그리고 유머 넘치는 퍼포먼스. 현재 가장 오래 활동한 멤버인 크리스토퍼 게비타스(2004년 합류)는 “킹스싱어즈의 ‘롱런’ 비결은 팀을 떠나는 선배가 자신을 대신하는 신입에게 모든 걸 전해주고 떠나는 전통이다. 클래식, 로맨틱, 팝, 포크 등을 소화하는 다채로움도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5만∼11만 원. 02-541-3173 스페인 출신 5인조 아카펠라 그룹 비보컬은 다음 달 9일 오후 5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과 인천 남동소래아트홀, 경북 경산 등에서 순회공연을 펼친다. 비보컬은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전 세계를 누비며 아카펠라로 스페인을 알려 달라”고 요청할 만큼 스페인이 아끼는 그룹이다. 이들의 공연은 눈과 귀와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다. 정장을 입고 자리를 지키는 공연이 아니라 박력 있는 연출로 관객들의 흥을 돋운다. 변호사, 소믈리에, 물리학자, 플라멩코 강사 등 다채로운 직업을 지닌 멤버들이 머리를 맞대 늘 뭔가 다른 무대를 고민한다고 한다. 이번 공연에는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등 오페라 대표곡뿐 아니라 레너드 코언의 팝송, 케이팝 등을 들려준다. 3만3000∼11만 원. 02-597-9870이설 기자 snow@donga.com}

#1 “불은 냉면이라도 먹겠다.” 남북 정상회담 준비가 한창이던 지난달 초 청와대 내부 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이같이 쐐기를 박았다. 당초 청와대 내에서는 “냉면 사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자칫 불을 수가 있어 적절치 않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평양냉면’이라는 상징성에 문 대통령이 힘을 주면서 메뉴 논의는 사실상 끝이 났다. #2 “북한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겠다.” 2002년 9월 북-일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북한 평양을 방문했던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와 아베 신조(安倍晋三) 관방부장관은 일본에서 직접 도시락을 공수해갔다. 당시 두 나라는 일본인 납북 피해자 진상 규명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납북 일본인 13명 중 8명이 이미 사망했다는 소식이 정상회담 직전 전해져 일본 측은 경악했다. 일본이 준비해간 도시락은 북한에 대한 불쾌감과 강경함을 보여주는 아이템이었다. 4·27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푸드 디플로머시(Food Diplomacy·음식외교란 뜻)’가 화제다. ‘세기의 만남’이 될 북-미 정상회담은 회담 일자, 장소, 배석자 등이 모두 베일에 싸여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마주앉아 식사를 할지, 한다면 무슨 메뉴를 올릴지 자체가 회담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상징적 메시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과연 두 사람이 함께 햄버거를 먹는 장면이 연출될 것인가. ○ 음식은 메시지다 4·27 남북 정상회담 이후 평양냉면이 갑작스레 남북 화해의 상징으로 부상하자 유사한 사례로 미국과 프랑스 간 ‘감자튀김’ 사건을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2005년 2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미-프랑스 정상회담이 끝난 뒤 양국 정부는 “정상들(미국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프랑스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이 만찬 때 감자튀김을 즐겼다”고 강조했다. 물론 만찬에선 바닷가재가 들어간 리조토와 안심 스테이크 등이 메인 요리였고, 감자튀김은 사이드 요리에 불과했다. 미국과 프랑스가 유독 감자튀김을 강조한 데는 배경이 있다. 당시 프랑스는 사담 후세인이 이끌던 이라크 공격을 결정한 미국에 사사건건 반대했고, 약이 오른 미 정계에서는 노골적인 프랑스 거부 움직임을 보였다. 특히 미 의회 식당에선 감자튀김의 통상적 명칭인 ‘프렌치 프라이즈’ 대신 ‘프리덤 프라이즈’로 바꿔 불러 국제적인 화제가 됐다. 프랑스 측은 ‘엉뚱한 화풀이를 하지 말라’며 미국을 비꼬기도 했다. 미-프랑스 정상회담 만찬에서 제공된 감자튀김은 두 나라 정상 간의 화해 의지를 담은 메시지였던 것이다. 유대교, 이슬람교 등 종교와 상대국 정상의 건강상태 등을 고려한 ‘배려음식’은 실타래처럼 꼬인 의제를 푸는 마스터키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신경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2014년 미국은 ‘캐비아 좌파’라는 비난에 시달리던 프랑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에게 캐비아 요리를 대접해 분위기가 싸늘해지기도 했다.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는 ‘햄버거’가 북핵 해법의 아이콘으로 떠오를 수 있을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에서 정상회담을 할지, 식사를 함께할지, 한다면 누가 호스트가 돼 어떤 형식으로 진행할지 등 전혀 알려진 게 없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 6월 미 조지아주 애틀랜타 유세 때 “내가 김정은을 만나러 북한에 갈 생각은 없지만 (그가) 온다면 만나겠다. 국빈만찬이 아니라 회의 탁자에 앉아 햄버거를 먹으며 더 나은 핵협상을 하겠다”고 밝힌 게 두고두고 회자되면서 ‘햄버거 회동’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 햄버거 외교, 평양에 맥도널드 매장 오픈으로? 햄버거가 북-미 정상회담 음식으로 결정될 경우 전문가들은 ‘햄버거의 포지션’을 눈여겨봐야 한다고 말한다. 두 정상이 간단히 식사를 한다면 트럼프 대통령의 말처럼 국빈만찬 대신 회의 탁자에서 햄버거를 먹는 모습이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일반적인 정상회담처럼 식사가 진행된다면 코스 요리 중 한 부분에서 햄버거가 특별 출연하는 모습이 연출될 수도 있다. 2008년 3월부터 2016년 12월까지 청와대에서 양식 요리를 담당했던 ENA호텔 한상훈 총주방장은 “정상회담 식사는 격식과 대화가 중요하기 때문에 아주 파격적인 형식 파괴는 이뤄지기 어렵다”며 “만약 북-미 정상회담에서 햄버거가 식사 때 제공된다면 코스 요리 중 하나로 햄버거가 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햄버거가 북-미 정상회담에 등장한다면 △쇠고기 패티의 크기와 익힘 정도 △야채 종류 △치즈의 양과 종류 △빵 등이 어떤 스타일일지도 관심사다. 트럼프 대통령이 즐기는 것으로 알려진 맥도널드의 ‘빅맥’이나 ‘쿼터파운더’와 비슷한 햄버거일지 아니면 이와는 다른 스타일의 햄버거일지에 시선이 집중된다는 뜻이다. 이를 두고는 햄버거광인 트럼프 대통령의 취향이 최대한 반영된 햄버거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많다. 북-미 정상회담이 파격적이고 특별한 만남인 만큼 기념의 의미를 담은 햄버거를 선보일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박기홍 우석대 외식산업조리학과 교수(2002년 4월∼2008년 8월 청와대 양식담당 요리사)는 “회담 결과가 좋아 정상회담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면 특별한 재료나 소스 등을 첨가하고, ‘판문점 버거’ ‘평양 버거’ ‘코리아 버거’ 같은 이름이 붙는 햄버거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두 정상이 먹는 햄버거를 누가 만들지도 궁금한 대목이다. 일반적으로 정상회담 시에는 초청국이 모든 음식을 담당한다. 제3국에서 열리는 정상회담은 양측이 협의해 어느 나라가 담당할지를 결정한다. 최근 북-미 정상회담 장소로 부각되는 판문점의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사실상 방문하는 모습이니 북한이 음식을 준비하는 게 적절하다’는 의견도 있다. 북한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식 햄버거’를 내놓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햄버거는 난도가 낮은 음식이고, 정상회담 전에는 양측 의전 관계자들이 실제 제공될 음식의 맛과 모양을 세밀하게 체크하는 과정이 있다”며 “북한 측에서 큰 어려움 없이 준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은이 햄버거를 먹어본 적이 있는지는 전혀 알려진 게 없다. 스위스 유학 시절 햄버거의 존재를 경험했을 가능성은 있다. 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북-미 정상회담이 잘 풀릴 경우 조만간 평양에 맥도널드 매장이 들어서는 모습을 상상해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세형 turtle@donga.com·이설 기자}

“바쁜 스케줄에서도 틈틈이 축구 경기를 챙겨 봤죠. 마치 저글링을 하듯요.” 대한민국이 온통 붉은색으로 물든 2002년 여름.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 테너 로베르토 알라냐(55)도 관중석에서 응원전을 펼쳤다. 당시 아내였던 안젤라 게오르기우와 함께한 공연은 전원 기립박수를 받으며 화려한 후일담을 남겼다. 2002년 이후 그가 처음으로 한국을 찾는다. 오랜 지기인 소프라노 조수미(56)와 함께 31일 오후 7시 반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의 ‘디바&디보 콘서트’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다. e메일로 미리 만난 그는 16년 전 한국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 관객들이 보내준 뜨거운 지지가 눈에 선하다”며 “이번 한국 공연도 무척 기대된다”고 말했다. 그는 수컷미를 물씬 풍긴다.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외모, 눈빛, 연기가 어우러진 마성으로 관객을 휘어잡는다. 인생도 드라마틱하다. 파리의 피자 가게에서 팁을 받고 노래하다 음악 관계자의 눈에 띄었다. 1988년 루치아노 파바로티 국제성악콩쿠르 우승을 거쳐 데뷔하자마자 세계 3대 테너의 뒤를 잇는 ‘제4의 테너’로 떠올랐다. 여기에 무대 거부 논란, 디바 안젤라 게오르기우와의 ‘세기의 결혼-이혼-재결합-이혼’, 소프라노 알렉산드라 쿠자크와의 재혼으로 할리우드 악동 같은 이미지를 얻었다. 그는 지난 26년을 어떻게 추억할까. “행복, 실망, 후회, 절망 스릴…. 정말 많은 일을 겪었어요. 실제 인생과 배역이 뒤섞여 서로를 이끌었죠. 죽은 아내를 돌려 달라고 부르짖는 오르페우스는 곧 저 자신이었고(첫 아내가 뇌종양으로 사망), ‘사랑의 묘약’에서 공연한 쿠자크와 실제 사랑에 빠졌죠. 제 인생이 한 편의 오페라 같아요.” 알라냐와 조수미는 인연이 깊다. 한 살 차이인 데다 1992년 영국 코번트가든 무대에서 동시에 데뷔했다. 1998년 오펜바흐 오페라 ‘호프만 이야기’로 호흡을 맞춘 뒤에는 음반도 발매했다. 얼마 전 오스트리아 빈 국립오페라극장에서 ‘투란도트’를 공연한 뒤에도 분장실에서 조수미를 만났다. 그는 “수미는 눈부신 음악적 감성적 재능을 타고난 성악가이자 좋은 친구”라며 “수미와 함께 선물 같은 무대를 준비 중인데, 김이 샐까 봐 자세히 알려줄 순 없다”고 했다. 그는 오랜 기간 정상의 테너로 주요 무대에 올랐다. 오페라 주역도 대부분 경험했다. 그럼에도 무대에 오르기 전에는 처음처럼 설렌다고 한다. 무대는 노래라는 기도가 울려 퍼지는 성전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무대에서 노래에 몰입할 때면 성스러운 기분에 빠진다”며 “여전히 모든 무대가 꿈의 무대이고, 커튼이 올라갈 때면 마법에 걸린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워라밸’이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했다. “새 음반 발매와 생상스의 ‘삼손과 델릴라’, 베르디의 ‘루이자 밀러’ 등이 예정돼 있어요. 이미 2022년 스케줄을 준비하고 있죠. 여전히 노래와 일을 사랑하지만 지금 소원은 휴가입니다!” 8만∼20만 원. 02-399-1000 이설 기자 snow@donga.com}

어린이날(5일), 어버이날(8일), 부부의날(21일)….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이벤트를 어떻게 꾸릴지 고민이 깊어진다. 각 관계지수를 높이기 좋은 맞춤형 클래식 공연을 소개한다. △키즈 클래식=5일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는 ‘어린이날 스페셜 롯데콘서트홀 키즈 콘서트’가 열린다. 각 악기의 특성을 소개하는 ‘오케스트라 게임’, 동화 신데렐라를 소재로 한 ‘신데렐라’ 등을 애니메이션과 함께 들려준다. 오전 11시 반, 오후 4시. 2만∼5만 원. 1544-7744. 2015년생 이상만 입장 가능하다. 19, 20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는 ‘2018 디즈니 인 콘서트: 리브 유어 드림’이 열린다.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라이언 킹’ 등 애니메이션의 고전의 수록 곡을 영화 장면과 함께 연주한다. 2부는 아이들이 특히 좋아하는 ‘겨울왕국’ 특집으로 꾸몄다. 디즈니 콘서트 전문 가수들과 디토 오케스트라가 협연한다. 3만∼10만 원. 1577-5266. 48개월 이상 입장 가능. △효도 클래식=4일 오후 8시 서울 예술의전당 IBK홀에서는 영화 속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 실내악 공연이 열린다. ‘2018 KBS교향악단 실내악 시리즈Ⅱ-더 프리미어’다.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말러 피아노 4중주 a단조,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 등을 해설과 함께 들려준다. 4만∼6만 원. 02-580-1300 지난달 27일 막을 올린 ‘제9회 대한민국 오페라 페스티벌’도 27일까지 이어진다. 누오바오페라단의 ‘여우뎐’(11∼13일), 코리아아르츠그룹의 ‘흥부와 놀부’(25∼27일), 국립오페라단의 ‘오페라 갈라’(25∼27일) 등을 효도 티켓으로 추천한다. △부부 클래식=남편과 아내가 오붓하게 즐기기 좋은 공연도 풍성하다. 15∼27일에는 ‘제13회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SSF)’가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 등에서 열린다. 특히 19일 서울 북촌 안동교회와 윤보선 고택에서 열리는 고택브런치콘서트(전석 15만 원)는 로맨틱한 기분을 돋우기에 좋다. 12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그랜드 오페라 갈라’는 개관 연도인 1978년생 400명을 무료 초청한다. 고택브런치콘서트는 오전 11시. 전석 15만 원. 02-712-4879 이설 기자 snow@donga.com}

정해진 사무실 없이 노트북컴퓨터만 들고 다니며 일하는 ‘노마드(Nomad·유목민)족’ A 씨. 그는 와이파이, 콘센트, 널찍한 테이블을 갖춘 카페에서 주로 서식한다. 출퇴근이 자유롭지만 이따금 업무 환경이 불만족스럽다. 괜스레 직원 눈치가 보여 음료를 자꾸 주문하게 되고, 동네 노마드족이 한꺼번에 몰리는 날엔 숨이 막힌다. 그가 돈 걱정 없이 ‘놀멍쉬멍’ 일할 쾌적한 공간은 없을까.‘생각의자’ 앉으면 창의력이 쑥∼서울 지하철 5, 6호선과 공항철도, 경의중앙선 등 4개 노선이 지나는 공덕역 2번 출구에서 나와 5분 정도 언덕을 오르면 우뚝 솟은 흰색 건물이 나온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서울창업허브’다. 과거 산업인력공단 건물을 리모델링해 지난해 6월 문을 열었다. 올해 1월엔 별관도 만들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환하고 널찍한 공간이 펼쳐진다. 채광도 좋지만 빨강 주황 노랑 초록 등 원색을 써서 실내를 밝게 꾸몄다. 창업가와 예비 창업가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다. 본관 1∼3층 전체와 10층 테라스, 별관 옥상, 외부 운동 공간 등 일부는 일반인도 이용할 수 있다. 예비 창업가와 직장인이 주로 이용하지만 주말이면 아이와 함께 이곳을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 1∼3층은 모두 ‘계단형 극장’으로 연결돼 있다. 2층과 3층은 어른 미끄럼틀로도 이동할 수 있다. 1층의 ‘코워킹 공간’에는 좌석 104석이 마련돼 있다. 25일 오전 10시, 20여 명이 노트북, 스케치북, 메모장, 책 등을 펼쳐 놓고 제각각 자기 일에 빠져 있었다. 코워킹 지역 옆에는 화이트보드와 좌석이 일체형으로 붙은 ‘생각의자’가 자리 잡고 있다. 건물 한가운데 자리한 계단형 극장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 봤다. 2층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은 ‘독립형 사무공간’. 비행기 1등석 좌석처럼 칸막이가 쳐져 있어 일에 몰입하기 좋다. 바로 옆에는 달걀 의자와 털썩 누울 수 있는 놀이공간이 있다. “이곳에서 낮잠을 자거나 미끄럼을 타도 어느 누구도 눈치를 주거나 간섭하지 않는다”고 서울창업허브 관계자는 귀띔했다. 3층에 위치한 ‘키친 인큐베이팅’에서는 외식업 예비 창업자들이 정성껏 만든 음식들을 맛볼 수 있다. 3개월 단위로 업체가 바뀐다. 가격은 7000∼8000원 선. 도시락이나 1층 편의점에서 구입한 간편식을 3층에서 먹는 이들도 많다. 운영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1층 카페의 아메리카노는 2500원, 주차는 1시간에 3000원이다. 구글 뺨치는 플레이그라운드신분당선 판교역 인근에 위치한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 9층에 위치한 ‘판교 경기문화창조허브’. 문을 열고 들어서자 놀이터와 사무실을 합친 듯한 공간이 나타났다. 1200m² 규모의 1층 전체가 뻥 뚫려 있고, 입구엔 간단히 전자게임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거실처럼 자리 잡고 있다. 그 뒤로 기다란 도서관 책상이 놓인 ‘코워킹 공간’과 소파와 화이트보드가 놓여 있는 ‘미팅 공간’이 펼쳐졌다. 사무실 한 구석에선 3, 4명이 대형 모니터와 노트북을 펼쳐 놓고 열심히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곳에선 모니터 등 일부 기기는 대여도 가능하다. 미팅룸은 홈페이지에서 당일 예약해 4시간까지 이용 가능하다. 교육 공간인 세미나실도 예약하면 사용할 수 있다. 거실 옆에는 키친이 마련돼 있다. 건물에 편의점이 없는 대신 냉장고를 마련해 필요한 것들을 보관할 수 있도록 했다. 냉장고 속엔 이름이 적힌 포스트잇이 붙은 오렌지주스와 커피, 케이크 등 먹을거리가 가득했다. 커피머신과 정수기가 있어 텀블러를 갖고 다니면 편할 것 같았다. 점심은 자장면 등 배달 음식을 시키거나 도시락을 가져와 키친에서 해결하면 된다. 10층 식당도 4000원짜리 식권을 구입하면 이용할 수 있다. 주차는 3시간까지 무료. 이후엔 10분당 500원, 하루 최대 2만 원에 사용할 수 있다. 사무실 왼편 창가에는 ‘리프레시룸’이 자리하고 있다. 신발을 벗고 올라가 잠시 몸을 뉠 수 있는 작은 공간이지만 전망은 좋다. 통유리창을 통해 올려다본 하늘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졌다. 장기 대여가 가능한 사물함과 조용하게 통화를 할 수 있는 전화 부스도 마련돼 있다. 운영 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주말에도 운영한다. 경기도는 문화창조허브공간을 수원 광교와 의정부, 시흥 등지에서도 운영 중이고, 조만간 고양시 일산신도시에도 마련할 예정이다. 7층의 ‘경기콘텐츠코리아랩’도 누구나 이용이 가능하다. 9층과 비슷하지만 분위기는 도서관에 가까웠다. 명사들이 기부한 책이 꽤 많이 비치돼 있었다. 이곳에는 회의실은 물론이고 녹음실, 맥 컴퓨터가 구비된 디자인실, 전문 촬영이 가능한 스튜디오 등 다양한 공간이 들어서 있다.럭셔리 분위기에 업무효율 Up! 서울 용산구 청파로에 위치한 서울글로벌창업센터 4층도 노마드족이 찾아볼 만한 곳이다. 서울시가 지원하며 ㈜르호봇 비즈니스 인큐베이팅이 위탁 운영한다. 470m² 규모로 최대 70명 이상이 동시에 사용할 수 있다. 여러 명이 같이 앉아 얘기할 수 있는 테이블과 10인실, 4인실, 세미나실 등이 있다. 세미나실은 이메일이나 전화로 예약하면 월 10시간까지 사용할 수 있다. 물, 커피머신, 차 등 음료가 비치돼 있다. 식사 반입은 허용되지 않는다. 비즈니스호텔처럼 차분한 분위기가 특징이다. 프린터 복합기와 빔 프로젝터 등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언어 수업과 스타트업 관련 세미나가 종종 열려 아이디어를 구하기 좋은 환경이다. 이 밖에 서울 은평구 통일로의 서울혁신파크 혁신동 1, 2층에는 올 6월쯤 시민 개방 공간이 마련될 예정이다. 또 서울 강남구 개포로 개포디지털혁신파크 운동장에는 올해 안에 컨테이너박스를 이용한 시민 코워킹스페이스가 꾸며질 것으로 알려졌다. 찾아보면 쏠쏠한 뜻밖의 공간 많아 코워킹 스페이스는 아니지만 서점과 도서관 중에서도 놀멍쉬멍 일하기 좋은 곳이 적잖다. 이태원의 복합문화시설 블루스퀘어의 북파크가 대표적으로 책이 우거진 숲 같은 공간이다. 서점에 들어서면 1층부터 3층까지 수천 권의 책이 꽂힌 높이 24m 서가에 압도된다. 미로같이 구분된 공간 구석구석에 의자가 놓여 있어 책을 읽으며 일하기에 좋다. 테이블 50여 개와 의자 200여 개, 앉아서 책을 볼 수 있는 계단 등이 마련돼 있다. 일반 서적과 중고 서적-팬시 용품 등을 구경하며 머리를 식힐 수 있다. 화창한 날엔 3층 테라스에 나가 볕을 쬐며 일할 수도 있다.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 인근에 위치한 ‘이진아기념도서관’의 3, 4층 공간은 탁 트인 창이 업무 욕구를 자극한다. 국내 공공도서관 중 개인의 이름을 딴 첫 도서관으로, 미국 유학 중 사고로 사망한 고(故) 이진아 씨의 아버지 이상철 씨가 책을 좋아하던 딸을 기리기 위해 50억 원을 기부해 세웠다. 인왕산을 품은 듯한 디자인으로 2006년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을 받았다. 뒤편으로 안산자락길이 이어져 있다. 지난해 10월 개관한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일대 세운전자박물관도 빼놓을 수 없는 코워킹 스페이스를 갖고 있다. 청계동 304호의 ‘세운테크북라운지’에선 최신 과학기술 서적과 DIY(Do It Yourself) 관련 책 5500여 권이 구비돼 있다. 세운상가 2층의 ‘세운인라운지’는 제품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슈팅스튜디오’, 휴식 공간인 ‘주민사랑방’, 사무 공간인 ‘세운워크룸’ 등이 있다. 운영 시간은 매주 월∼토요일 오전 10시∼오후 7시. 일하기 좋은 마트도 있다. 서울 영등포구의 롯데마트 양평점 1층의 ‘어반포레스트(urban4rest)’. 주말과 평일 오후엔 아이들로 붐비지만 평일 오전엔 노트북을 켜고 업무 삼매경에 빠진 이들을 적잖게 볼 수 있다. 도서관에서나 볼 만한 테이블 의자, 소파, 계단 등이 놓여 있다. 다만 음식점, 디저트 카페와 같은 층에 있어 간식을 자꾸 찾게 된다는 게 단점. 방문객이 많은 주말에는 다소 시끄럽다. 서울 은평구 롯데마트 은평점 4층에도 북한산을 바라보며 일하기 좋은 공간이 마련돼 있다.이설 기자 snow@donga.com}

누군가가 무대 위로 걸어 나오자 단원들이 기립한다. 지휘자인가 했더니 바이올린을 들고선 지휘자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는다. 알쏭달쏭한 그의 정체는 제1바이올린 파트 리더인 ‘악장’. 오케스트라의 반장이자 심장이라 불리는 자리다. 최근 한국인 연주자들이 해외 오케스트라 악장 자리를 휩쓸고 있다. 박지윤(33)은 올해 초 프랑스 명문 라디오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악장으로 선임돼 9월 취임한다. 김수연(31)은 올 1월부터 독일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서, 이지윤(26)은 지난해 9월부터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에서 악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스위스 바젤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독일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에서 악장으로 뛰는 윤소영(34)과 이지혜(32)도 있다. 오스트리아 빈 국립 폴크스오퍼 심포니의 유희승, 미국 뉴욕필의 권수현 등은 부악장으로 일한다.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인 악장은 오케스트라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리더다. 지휘자의 곡 해석에 따라 단원들을 통솔해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내야 한다. 간단해 보이지만 그 과정은 쉽지 않다. 김유나 서울시향 홍보마케팅 팀장은 “악장은 지휘자와 100명 가까이 되는 단원 모두를 상대해야 한다. 음악성은 물론 탁월한 리더십이 필요한 자리”라고 말했다. 세계 곳곳에서 한국인 악장 열풍이 부는 이유는 뭘까. 2011년부터 프랑스 페이드라루아르 국립오케스트라에서 악장으로 일해 온 박지윤은 ‘순발력’과 ‘소통능력’을 악장의 자질로 꼽았다. 그는 “맨 앞에서 지휘자의 의도를 빠르게 파악해 연주자들에게 전달해야 한다. 멀리 떨어진 팀파니나 목관 파트 수석들과도 눈짓으로 교감하려 노력한다”고 했다. 뭣보다 중요한 건 음악적 자질이다. 이정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악장(53)은 “지휘자와 단원에게서 신뢰를 얻으려면 음악을 잘 이해해야 한다. 해외 오케스트라에서 악장은 특히 솔로 연주를 할 일이 많아 음악성이 정말 중요하다”고 했다. 한 음악계 관계자는 “악장이 솔로 파트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면 단원들이 못 미더워 한다. 지휘자는 지휘를, 악장은 솔로 파트를 잘해야 뒷말을 듣지 않는다”고 귀띔했다. 전문가들은 한국인 악장이 대거 탄생한 배경은 클래식계의 성장과 관련이 깊다고 분석했다. 김 팀장은 “세계적 기량을 갖춘 국내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솔리스트뿐 아니라 오케스트라 수석과 악장 등의 장점에 눈을 뜬 것 같다”고 했다. 솔리스트로서 한계를 느낀 이들이 단독 활동을 병행하기 좋은 오케스트라 악장 자리를 선호한다는 의견도 있다. 박지윤은 “해외 오케스트라는 보통 악장을 2, 3명 두고 있어 개인 활동을 하기 좋다. ‘트리오 제이드’ 멤버로 활동할 수 있어서 만족한다”고 했다. 악장도 오디션으로 선발하지만 보통 지휘자와 합을 맞추는 과정이 중요하다. 아무리 뛰어나도 해당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궁합이 맞지 않으면 합격하기 힘들다. 해외 오케스트라 악장의 연봉은 단원들의 3∼5배 수준. 미국에선 악장이 후원자 관리까지 도맡기도 한다. 악장의 스타일은 제각각이지만 시대적 흐름은 있다. 한 해외 오케스트라 악장은 “예전엔 ‘왜 동양 여성을 굳이 악장으로 뽑느냐’는 문의 전화가 오곤 했다. 지금은 그런 일이 드물다”며 “악장은 나이와 관계없이 음악성이 최우선”이라고 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부천에서 아시아 오케스트라 축제를 여는 게 꿈입니다.” 1988년 4월 창단된 부천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서울 광화문에서 23일 만난 박영민 상임지휘자(53)는 “경기 부천은 문화도시로서 저력이 상당하다”며 “일본 홍콩 대만 등 아시아 오케스트라가 모여 실력을 겨루는 축제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부천필은 국내 최초로 말러와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며 한국 클래식계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2015년 부임한 박 지휘자는 말러 시리즈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시리즈 등을 시도해 주목받아 왔다. 그는 “해외 오케스트라와의 교류가 주는 자극이 있다. 국내 오케스트라는 실력에 비해 아직 국제적 명성이 부족한데, 아시아 주요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축제가 명성 확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부천필은 2021년까지 부천시청 내 6500m²(약 1970평) 부지에 전용홀을 짓는다. 최근 세계적인 음향공학자 나카지마 다테오 씨 등과 부천필 단원들이 부천필만의 공간을 위해 머리를 맞댔다. “나카지마 씨가 어떤 소리를 원하냐고 묻더군요. 부천필의 캐릭터에 맞는 홀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였어요. 집에서 듣는 음악과 차별화되는 사운드를 내는 공간을 만들려고 해요. 가장 최근에 만든 공연장이 최고의 공연장이라는 업계 이야기가 있는데,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그는 추계예대 교수와 지휘자 일을 겸하고 있다. 지휘자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에 대해 “음악으로 소통하는 것”이라고 했다. “오케스트라도 사기 진작이 중요해요. 그러려면 음악적 목표 외에 다른 요소가 개입되면 안 되죠. 저희 단원들은 음악적 욕심이 커서 제가 쉬자고 해도 더 연습하자고 합니다. 고마운 일이지요.”이설 기자 snow@donga.com}

온라인에선 누구나 겸양을 벗고 제 목소리를 낸다. 특히 기사의 댓글난에선 목소리들의 정면 승부가 펼쳐진다. 잘만 돌아가면 숙의(熟議)가 가능한 공간이다. 댓글 기능도 이런 기대에서 도입됐다. 하지만 댓글난은 문제아로 자랐다. 성숙한 토론보다 흑색선전이 난무했다. 정직하게 의견을 개진하기보다 ‘좌표’를 찍고 ‘화력’을 집중하며 여론 몰이를 해댔다. 댓글의 대표성이 짙어지면서 이를 이용하려는 세력도 등장했다. 십알단, 국가정보원 댓글 개입, 더불어민주당원 댓글 조작은 모두 이 연장선에서 탄생한 괴물들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디지털 뉴스 리포트 2017 한국 보고서’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8명이 검색이나 뉴스 수집 플랫폼을 통해 뉴스를 접한다. 전 세계 평균을 2배 이상 웃도는 수치다. 여기에 포털 댓글에 영향을 받는 동조 효과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론이 사실상 특정 포털의 손아귀에 놓인 것이다. ‘포털 댓글=여론’이라는 착시(錯視) 현상 속에 댓글 전쟁도 과격해졌다. 여야를 지지하는 정치 팬덤들이 민감한 사안마다 몰려다니며 여론전을 벌였다. 온라인 정치 브로커도 등장했다. 선거철이면 정치권에는 댓글 블로그 카페 등으로 불리한 여론을 뒤집어 주겠다는 어둠의 제안이 판친다고 한다. 드루킹 사건은 숱한 댓글 조작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정치권뿐 아니다. 전문가들은 “거의 모든 온라인 세계는 연출됐다. 청정 구역은 없다”고 입을 모은다. 언더마케팅은 10여 년 전 본격화됐다. 시작은 온라인에서 입소문을 퍼뜨리는 ‘바이럴(viral) 마케팅’. 후기를 가장해 제품을 홍보하는 바이럴 마케팅이 콘텐츠를 조작하는 언더마케팅으로 변질됐다.단순한 홍보를 넘어 여론 조작의 장이 돼버린 포털을 이대로 둬도 되는 걸까. 언더마케팅은 누가 어떻게 하며 어디까지 가능할까. 현장에서 활동하는 언더마케터의 도움을 받아 블로그와 기사 댓글을 직접 조작해 봤다.○ “순위를 다 만들어 드립니다” 두 사람이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글을 블로그에 쓴다. 그런 다음 동일한 키워드로 검색을 한다. 결과가 어떨까? 상식적으로 검색 순위가 비슷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며느리도 모르는’ 네이버의 알고리즘에 따라 검색 순서가 뒤죽박죽 섞이기 때문이다. 네이버는 극구 부인하지만 언더마케터들 사이에서 ‘아이디(ID) 등급설’은 정설로 통한다. 일정 기간 활발히 글을 올린 이들은 검색 시 상단에 노출되도록 설계됐다는 거다. 검색에 쉽게 노출되는 아이디는 ‘최적화 아이디’, 이 아이디에 딸린 블로그는 ‘최적화 블로그’다. 4, 5년 전만 해도 언더마케팅 시장에서 최적화 아이디는 개당 150만∼200만 원에 거래됐다. 최근엔 가격이 1000만 원 선으로 껑충 뛰었다. 2년 전 최적화 알고리즘을 네이버가 무력화하면서 최적화 아이디의 씨가 말랐기 때문이다. 기존의 아이디는 살아 있다. 누군가가 ‘최적화 아이디’로 검색하면 언더마케팅 광고가 쭉 뜰 거라는 ‘팁’을 줬다. 직접 댓글 조작을 해보기 전에 시장 분위기를 파악하고 싶었다. ‘네이버 지식인’에서 최적화 아이디를 치자 관련 글이 떴다. 한데 검색된 질문에 달린 답변은 1, 2명의 네임카드로 도배가 돼 있었다. 언더마케팅을 하는 업자들이었다. 그중 한 곳에 전화해 “병원 광고를 하고 싶다”고 했다. A 씨는 자신의 전문 분야를 ‘블로그 카페 지식인 상위 노출’이라고 소개했다. 원하는 키워드로 검색할 시 상단에 글이 노출되도록 도와준다고 했다. 부산의 피부과를 홍보하고 싶다고 하자 그가 청산유수로 말했다. “병원 키워드는 제일 ‘잡기’ 힘들어요. 경쟁이 ‘어마무시’하거든요. 네이버 단속도 특히 심하고요. 한데 저는 다 잡아 드립니다. 그냥 ‘피부과’보다 ‘부산 여드름’ ‘부산 피부과’ ‘부산 대상포진’ 등으로 세분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가격은 노출 보장 기간과 건수에 따라 다르다. 한 달간 1∼5위 노출 조건에 건당 40만∼120만 원. 5건이면 매달 200만∼600만 원이 드는 셈이다. “가짜 콘텐츠라 좀 께름칙하다. 불법적 요소는 없느냐”고 하자 그는 “법률적으로 문제 될 게 0.000001%도 없다”고 단언했다. 중국에서 파는 해킹 아이디가 아니라 진짜 존재하는 아이디로 작업하기 때문에 위법이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댓글 조작이 제일 쉬웠어요” “컴맹도 문제없습니다.” 댓글 조작법을 알려주기로 한 언더마케터 B 씨가 자신했다. 컴퓨터 실력이 형편없어도 걱정 말라고 했다. 그는 “프로그램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 대중적인 프로그램을 쓰면 누구나 댓글 조작을 할 수 있다”며 “만나는 건 부담스럽고 원격으로 도와주겠다”고 했다. 19일 오전 10시, B 씨가 기자의 노트북에 들어왔다. 도전 과제는 ‘블로그 댓글 조작’과 ‘기사 댓글 조작’. 먼저 ‘난도 하’인 블로그 댓글부터 달아보기로 했다. B 씨는 Z프로그램(가칭)을 추천했다. 유치원생도 작업할 만큼 간편한 데다 걸릴 염려도 적다고 했다. Z프로그램을 클릭하자 견적이 떴다. 1만 원에 300명의 아이디로 댓글 300개와 공감 100개, 스크랩 100번을 제공한다고 했다. 50만 원으론 검색 2만1750번, 댓글 2만1750번, 공감 7250개가 가능했다. 한데 프로그램이 실행되지 않았다. B 씨는 “(드루킹 사건으로) 시기가 흉흉해 내려받지 못하도록 막아둔 것 같다”며 본인의 Z프로그램을 불러왔다. Z프로그램 원리는 악성코드를 심은 ‘좀비PC’를 활용하는 것과 같다. 악성코드 대신 프로그램을 사용 중인 이들의 아이디를 사용해 댓글을 달고 공감 수를 올린다. B 씨는 “사용자가 많을수록 작동이 잘된다. 기자의 아이디도 모르는 사이 어딘가에서 댓글을 달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B 씨가 기자의 블로그에 ‘나는 나다’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Z프로그램에선 글의 인터넷접속주소(URL)를 입력한 뒤 검색 키워드난에 ‘나는’이라고 적었다. 검색은 20회, 댓글은 10개, 스크랩은 2회로 잡았다. 그런 다음 원하는 댓글 10개를 적었다. “다 됐습니다. 이제 기다리면 됩니다.” 10분쯤 지나자 블로그 글에 댓글 8개가 달려 있었다. 빈칸 채우기 몇 번으로 댓글 조작을 마친 것이다. 이렇게 하루 수십 개의 댓글과 공감을 받으면 며칠 후 해당 글은 포털사이트 상단에 노출된다. Z프로그램 외에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좋아요’ 달기, 인스타그램 조회 수 높이기 등 다양한 용도의 프로그램이 있다. 전문 업자들은 보통 자체 개발한 프로그램을 쓴다. 네이버 방어막 최대치에 접근한 프로그램으로 ‘업무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다. B 씨는 “네이버가 Z프로그램의 원리를 파악해 페널티를 가하면 연루 계정이 모두 저품질 계정이 된다. 그러면 관련 블로그가 모두 검색창에서 사라지는 ‘블로그 학살’이 일어난다”며 “그런 위험을 피하려 자체 프로그램을 쓴다”고 설명했다. 개발자에게 프로그램을 주문하기도 한다. 아이디와 인터넷주소(IP주소) 변경, 스크랩, 스팸 문자, 매크로 속도 등 기능이 추가될 때마다 단가가 높아진다. 전직 언더마케터 C 씨는 “장판이냐, 대리석이냐에 따라 인테리어 비용이 달라지듯 프로그램 견적도 제각각이다. 속도와 성능이 뛰어난 프로그램은 억대를 호가한다”고 귀띔했다.○ 매크로 잘못은 아니지만… 한 공공기관에 근무 중인 장모 씨(34). 지난달 한 포털에서 기관 관련 기사를 읽던 그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듯한 내용의 댓글 100여 개가 순식간에 달린 것. 기사를 지지한다는 뜻의 ‘공감’ 수도 갑자기 늘어났다. 그는 “당시 댓글을 훑으면서 기관과 소송 중인 누군가가 떠올랐다. 지금 생각하니 댓글 조작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민주당원들의 댓글 조작 파문으로 매크로 프로그램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매크로는 반복되는 작업을 자동으로 하게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단순 노동의 수고를 덜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각종 언더마케팅과 여론 조작에 악용되면서 체면을 구기고 있다. B 씨는 “매크로는 초등학생들이 게임할 때 흔히 쓰는 쉬운 프로그램이다. 공개된 스크립트에 따라 쉽게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온라인 거래 가격은 10만∼100만 원이다. 기사 댓글 조작을 위해 매크로 프로그램 X(가칭)를 깔았다. 컴퓨터가 사람의 행동을 반복하게 만드는 녹화 매크로 프로그램이다. 네이버 기사를 골라 ‘테스트’라는 댓글을 단 뒤 내용을 복사해 같은 댓글을 또 달았다. 공감도 눌렀다. 이 동작을 마친 뒤 X를 실행하고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잠시 후 커서가 저절로 댓글을 달고 공감을 눌렀다. 댓글 조작은 아이디와 IP주소만 충분히 확보하면 식은 죽 먹기다. 매크로 없이 10명이서 수작업으로도 댓글 1000개쯤은 후딱 만든다고 했다. B 씨는 “댓글 하나를 복사하는 데 10초 남짓이다. 컴퓨터 수십 대를 연결해 계속 클릭만 하면 5∼10분 만에 ‘베스트 공감 댓글’이 만들어진다”고 했다. 아이디는 개당 300∼1000원에 얼마든지 구한다. 전문 업자들은 컴퓨터나 대포폰 수십 대를 연결한 작업방에서 일한다. IP주소를 우회하면 되는데 굳이 작업방을 두는 이유는 뭘까. C 씨는 “포털에서 불법으로 개인 PC 정보를 읽어간다는 의혹이 있다. 한 컴퓨터에서 여러 아이디와 IP주소를 사용하면 꼬리를 밟힐 우려가 있어 작업방에서 일하는 것”이라고 했다.이설 기자 snow@donga.com}
“회사에 대한 부정적인 글을 다른 미담글로 도배해서 후순위로 미뤄요. 부정적 연관검색어를 긍정적으로 바꾸기도 하죠. 경쟁사 제품의 이미지를 망가뜨리는 일도 비일비재해요. 대기업도 비공식적으로 언더마케팅 업체를 이용합니다.” B 씨는 언더마케팅은 일종의 ‘온라인 흥신소’라고 했다. 시장은 은밀히 굴러간다. 서울 구로구 구로디지털단지에 관련 사무실이 몰려 있다고 알려졌지만 정확한 규모는 파악되지 않았다. 보안 유지를 위해 메일, 카페, 지식인, 블로그 등 분야별로 팀을 짜 활동한다. 보통 마케팅업체가 점조직으로 활동하는 실행업체에 하청을 준다. 의뢰인은 다양하다. 병원 법률사무소 쇼핑몰 뷰티업계 학원 렌털업체 뷰티숍 등이 ‘티 나지 않는 홍보’를 의뢰한다. 이 중 큰손은 강남에 위치한 병원. 한 병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신모 씨는 “언더마케팅을 한 뒤 병원 매출이 2억 원에서 4억 원으로 뛰었다. 병원 의료인이 30명인데 광고 인력이 40명이었다”고 했다. 연예기획사나 기업은 종종 소속 연예인과 재벌가의 평판관리를 의뢰한다. C 씨는 “방송 중 갑자기 실시간 검색 순위 1위에 오르는 건 100% 작업 결과다. 불리한 소문이 연관검색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것도 업체의 작품이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정치 관련 여론조작은 특히 보안이 생명이다. 정치공작은 언더마케터들 사이에서도 넘어선 안 될 선으로 통한다. 10년 차 언더마케터 김모 씨(41)는 “정치 관련 공작은 위험 부담이 커서 응하지 않는다. 가늘고 길게 가는 게 좋다”며 “선거철에 정치권에서 뛰는 이들은 대목을 노리거나 친분이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라고 귀띔했다. 언더마케팅은 불법과 합법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다. 대부분 기업이 마케팅을 이유로 여론을 관리한다. 공공연하게 댓글당 100원을 지급하는 아르바이트도 성행하고 있다. 특정 카페에 침투 작업을 의뢰하는 글도 마케팅 사이트에 하루 수십 건씩 올라온다. 하지만 지난해 자동 댓글 조작 프로그램을 만들어 대가를 챙긴 이들이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올해 초 수년간 검색어 순위를 조작해 30억 원이 넘는 이익을 챙긴 일당에게 법원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언더마케팅 기술은 네이버와 ‘창과 방패’처럼 발전했다. 네이버가 검색 알고리즘을 바꾸면 테스트를 통해 알고리즘을 찾아낸다. 다시 광고글이 물을 흐리면 네이버는 알고리즘을 바꾸고 마케터들은 새로운 공격법을 고민하는 식이다. 속이기 위한 전쟁을 멈출 방법은 없을까. 정보보안전문가인 김태봉 KTB솔루션 대표는 “포털의 독과점 시장을 흔들어야 한다. 또 포털이 이상징후 시스템에 더 투자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 전직 언더마케터는 “여론조작 없는 투명한 사회를 만들 뾰족한 방법은 없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국민들이 원하는 정보를 온라인에서 얻으려면 네이버 독과점 시장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네이버가 알고리즘을 공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네요. 네이트와 다음은 검색 결과가 비슷한데 네이버는 달라요. 누구나 원리를 안다면 굳이 기를 쓰고 작업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이설 기자 snow@donga.com}

“예상보다 더 만족스럽습니다. 오케스트라 시스템은 독일과 놀랍도록 닮았고 클래식 시장도 성숙했어요. 가까워서 딸을 보러 자주 한국에 올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죠. 하하.” 클라리네티스트 조성호(33·사진)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지난해 초 일본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입단한 뒤 12월 투표를 거쳐 종신수석으로 확정됐다. 서울 예술의전당 IBK홀에서 22일 독주회를 여는 그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그룹 사옥에서 16일 만났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고 독일 유학을 마친 뒤 그가 선택한 곳은 일본이었다. “왜 일본이냐”는 질문에 그는 “운명처럼 자리가 났고 운명처럼 선택받았다”고 했다. “서울시립교향악단에서 트라이얼(수습) 기간을 마친 뒤 도쿄필에 자리가 났어요. 국내외를 통틀어 목관악기는 자리가 거의 나지 않거든요. 뽑히면 거의 ‘로또’인 셈인데 시기도 딱 맞고 아시아 해외 오케스트라에서 일하고 싶다는 계획에도 들어맞았죠.” 경쟁률은 200 대 1. 바늘구멍을 뚫은 비결에 대해 그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한국과 독일”이라고 답했다. 한국에서는 여느 전공생과 마찬가지로 ‘콩쿠르 기계’처럼 살았다. 학교 가는 날보다 콩쿠르를 준비하는 날이 많았고, 연주를 즐기기보다 틀리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 그에게 유학 시절 스승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클라리넷 수석 벤첼 푹스는 “마음을 느껴라. 틀려도 된다. 감정을 마음껏 드러내라”고 독려했다. 조 씨는 “수석은 잘 어우러지면서도 솔리스트적인 기질도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정확한 테크닉을 익혔고 독일에서 나만의 색을 찾아서 오디션에서 합격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피아노를 전공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 피아노 바이올린 등 여러 악기를 배웠지만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처럼 목관악기를 만났다. “13세에 리코더를 부는데 숨결을 불어넣어 손가락을 움직여 소리를 내는 게 마치 노래하는 듯했어요. 그 길로 목관악기 가운데 리코더처럼 세워서 부는 클라리넷을 시작했죠.” 이번 독주회에서는 브람스 전곡에 도전한다. 20대에는 격정적인 프랑스 음악에 이끌렸지만 최근 브람스에 대한 열망이 생겼다. 그는 “브람스 소나타는 연습만으로 연주할 수 있는 곡이 아니라 깊은 사유가 바탕이 돼야 한다”며 “쉬운 곡은 아니지만 깊은 울림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