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식

김갑식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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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갑식 부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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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6~2025-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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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장기 위에 태극기 덧그려… 서슬퍼런 종로서 ‘독립만세’ 주도

    “三角山(삼각산) 마루에 새벽빗 비쵤제/네 보앗냐 보아 그리던 太極旗(태극기)를/네가 보앗나냐 죽온 줄 알앗던/우리 太極旗(태극기)를 오늘 다시 보앗네/自由(자유)의 바람에 太極旗(태극기) 날니네/二千萬 同胞(이천만동포)야 萬歲(만세)를 불러라/다시 산 太極旗(태극기)를 爲(위)해 萬歲萬歲(만세만세)/다시 산 大韓國(대한국).” 17일 찾은 서울 은평구 진관사 입구에는 태극기 비(碑)가 우뚝 서 있다. 2011년 제막한 이 비에는 태극기와 독립신문(30호)에 실린 시 ‘태극기’의 일부가 새겨져 있다. 이곳에 태극기 비가 들어선 데는 사연이 있다. 2009년 5월 26일 오전 9시경 사찰 내 칠성각을 보수하던 현장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스님, 벽을 뜯었는데 한지에 쌓인 보퉁이가 나왔습니다.” 진관사 스님들이 모인 가운데 보퉁이는 조심스럽게 풀렸다. 보자기처럼 보인 것은 귀퉁이가 불에 타고, 군데군데 얼룩이 있어 몹시 낡았지만 분명 태극기였다. 크기는 가로 89cm, 세로 70cm였고, 태극의 지름은 32cm였다. 일장기 위에 덧그려져 독립 의지를 담았기에 의미가 더 컸다. 이른바 ‘진관사 태극기’다. 그 안에는 1919년 3·1운동 직후의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 32호 등 5점, ‘자유신종보(自由晨鍾報)’ 6점, 상하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 4점, 단재 신채호 선생이 상하이에서 발행한 ‘신대한(新大韓)’ 3점, 민족을 배반하고 부역하는 친일파를 준엄하게 꾸짖는 경고문 등이 들어 있었다. ○ 진관사와 백초월 스님 작은 암자 벽 속에 독립운동 자료를 숨긴 이는 일제강점기 만해 한용운과 백용성 스님을 계승해 독립운동을 펼친 백초월(白初月·1878∼1944) 스님이었다. 진관사 태극기의 발견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던 초월 스님을 조명하는 계기가 됐다. 진관사 주지 계호 스님은 이 태극기로 이어진 초월 스님과의 만남을 이렇게 전한다. “6·25전쟁 때 대웅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고 칠성각 등 일부 전각만 남았다. 만약 칠성각마저 전쟁으로 불탔다면 초월 스님의 염원은 알려지지 않았을 수 있다. 부처님의 오묘한 법(法)과 초월 스님의 원력(願力)이 만든 기적이다.” 진관사와 마포포교당(불교방송 뒤 극락암)은 일제강점기 불교계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진관사 독립운동 자료에 대해 “진관사는 마포에 포교당이 있어 중국 및 국내 각처와의 연결이 용이했다”며 “서울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 임시정부의 불교계 연락본부가 진관사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만해가 초월을 불교계를 대표할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으로 꼽았다는 증언도 있다. 초월의 일대기와 사상을 연구해 온 김광식 동국대 특임 교수가 만해의 제자였던 김관호에게서 전해 들었다는 얘기다. “만해는 백용성 스님, 수덕사 만공 스님, 범어사 오성월 스님, 당시 청주에 있던 백초월 스님 등 5, 6명을 불교계를 대표할 33인 후보로 생각했다. 하지만 독립선언이 짧은 시간에 일제의 눈을 피해 매우 은밀하게 진행됐기 때문에 지방에 있던 이들과는 연결이 쉽지 않아 백용성 스님만 포함됐다.” 일제의 문서는 지방 사찰에서 수행하던 초월이 서울로 올라와 독립운동에 투신한 시점을 1919년 4월로 전한다. 초월의 독립운동은 임시정부 및 독립군을 위해 전개한 군자금 모금과 ‘혁신공보(革新公報)’ 발간을 중심으로 한 민족의식 고취로 나눌 수 있다. 초월은 불교 중앙학림(동국대 전신)에 한국민단본부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는 한편 혁신공보를 발간해 사장을 맡았다. 초월의 행적은 불교계가 주도한 항일운동 곳곳에서 드러난다. 3·1운동 이후인 그해 11월 25일 단군 건국기념일(개천절)을 기해 만세운동을 전개한다. 종로 삼청동에 태극기와 단군기념이라는 깃발이 내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축하문, 선언서, 포고문이 배포됐다. 1920년 2월에는 제자 이중각을 통해 일본 유학생들이 주도한 3·1운동 1주년 기념시위에 관여하다 3월 도쿄(東京)에서 잡혀 경성지방법원으로 이송됐다. 이때 모진 고문으로 건강이 악화됐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정신이상자로 행세해 풀려났다.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의용승군 창설과 임시정부 국채 발행을 시도하기도 했다.○ “번갯불 번쩍할 때 바늘귀를 꿰어야 한다” 초월의 속명은 백인영으로 1878년 2월 17일 경남 고성군 영오면 성곡리에서 부친 백하진(白河鎭)과 모친 김해 김씨의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13세 때인 1891년 지리산 영원사(靈源寺·경남 함양군)로 입산 출가했다. 출가 당시 법명은 동조(東照), 초월은 법호다. 그는 구국당(龜國堂), 구당(龜堂)의 별호뿐 아니라 최승(最勝) 의수(義洙) 의호(義浩) 등 다양한 이명 및 가명으로 활동했다. 진관사 템플스테이를 담당하는 선우 스님은 “구국당의 별호에서 구할 구(救)자가 아니라 거북 구(龜)자를 쓰거나 이명, 가명이 많은 것은 일경의 눈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1991년 6월 초월의 고향에는 ‘구국당 인영 백초월대선사 순국비’가 건립됐다. 초월은 20대 중반에 이미 대강백, 큰스님의 반열에 오른 지성인이었다. 그가 1915년에 불교계가 힘을 모아 개교한 중앙학림 초대 강사로 내정됐을 정도다. 요즘으로 치면 학장이나 다름없는 역할이었다. 영원사 역대 조실(祖室·사찰의 큰스님)을 총정리한 ‘조실안록(祖室案錄)’에 따르면 초월은 1903년 겨울∼1904년 초 영원사 조실이었다. 그의 나이 25세 때였다. 초월은 1921년 마포포교당을 근거로 활동하면서 일심교(一心敎) 강령을 구상했다. 일심교는 화엄경에서 얻은 깨달음과 항일운동 전략이 어우러진 결정체로 ‘일심만능 군교통일 세계평화(一心萬能 群敎統一 世界平和)’를 내세웠다. 일심교는 비밀결사조직인 일심회(一心會)의 토대가 됐다. 진관사와 마포포교당은 그 중심이었고, 전국에서 초월의 뜻에 동조한 동지들이 결속돼 자금 모금이 이루어졌다. 통도사 주지 김구하, 천은사 주지 하용화, 화엄사 총무 이인월, 화엄사 승려 김영렬 등이 자금 모금에 협조했다. 특히 범어사 오성월 김경산은 많은 자금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치광이 행세로 일제의 집요한 감시를 피한 얘기는 유명하다. 동학사 강사 시절 초월은 방 안에 죽은 거북이를 보자기에 싸 두고 아침저녁으로 거북이를 바라보며 참선했다. 일경이 그의 방에 들이닥치면 거북이에게 알 수 없는 말을 하거나 거북이 노래를 불렀다. 초월은 그를 따르는 학인들에게 독립의식을 강렬하게 고취시켰다. “번갯불 번쩍할 때 바늘귀를 꿰어야 한다”라는 말은 독립운동에 나설 때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말고 즉시 가담하라는 의미였다. 1938년 봉천행 화물열차에 ‘대한독립만세’라고 낙서한 사건이 터진다.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초월은 2년 6개월 판결을 받았고, 다시 독립운동 자금 때문에 감옥에 갇혀 1944년 6월 29일 청주교도소에서 순국했다. 만해가 입적한 날과 같다. 초월에게는 1986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됐다. 김광식 교수는 “만해와 용성을 따라가다 보면 초월을 만날 수밖에 없다”라며 “초월은 20여 년간 체포와 투옥, 구금, 감시에도 항일운동 일선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독립기념관이 1989년 발행한 ‘항일 의열투쟁사’는 “불교계 승려들의 독립투쟁 가운데서도 백초월은 한용운 백용성의 활동에 뒤지지 않는 존재다. 항일 독립운동에 걸출한 활동을 하다 옥사 순국한 세 사람의 의열사를 들 때 신채호 김동삼과 함께 백초월을 넣는 이도 있다”며 높이 평가했다. 초월과 인연이 있는 경남 고성과 함양군, 서울 은평구 등 3개 지자체가 합동으로 스님을 기리는 선양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진관사 초입부터 사찰까지 약 1km의 백초월길이 이어진다. 일제강점기 진관사는 지금보다 훨씬 깊은 산중에 있었을 것이다. 초월은 그 숲길을 오르내리며 마음속에 꺼지지 않는 항일 독립의 불꽃을 피웠을 것이다. 일경에 연행돼 고문 받을 당시 남겼다는 그의 일갈이 떠오른다. “이놈아 밥을 치면 떡밖에 더 되겠느냐. 아무리 행패를 부리더라도, 계란 가지고 삼각산을 쳐도 삼각산이 없어질리 없다. … 너희 왜놈들이 미쳐서 남의 나라 땅을 강점하고 있는 것이지 내가 왜 미쳤단 말이냐, 너희가 미쳤지.”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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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랑이 눈썹에 기골 장대한 초월 스님, 파격의 원효에 가까워”

    ‘공포의 외인구단’ ‘남벌’ ‘천국의 신화’ 등으로 잘 알려진 이현세 화백(63·사진)은 지난해 3·1절 무렵 포털사이트에 웹툰 ‘초월’을 연재했다. 이 작품은 젊은 여성 파란이 진관사를 찾으면서 시작된다. 깊은 상처 속에 성장한 파란은 600년 전통의 영혼을 위로하는 진관사 수륙재(水陸齋)를 통해 초월 스님을 만나는 등 여러 영혼과 대화를 나누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된다. 18일 서울 강남의 화실에서 이 화백을 만났다. ―초월 스님을 알고 있었나. “‘천국의 신화’ 6부를 끝내고 쉬는 중이었는데 포털을 통해 진관사와 은평구에서 요청이 들어왔다. 솔직히 이전에는 스님을 몰랐다.” ―이 화백이 본 초월 스님 이미지는…. “수인(囚人)일 때 사진 한 장이 남아 있다. 호랑이 눈썹에 기골이 장대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독립운동을 하느라 세속에서도 활동해선지 자장 스님보다는 파격의 원효 스님에 가깝다고 느꼈다. 5회로 준비했는데 막상 작품을 하다 보니 탐이 나서 1, 2회 더 하고 싶었다.” ―유족들은 어떤 얘기를 했나. “만주로 가는 기차에서 쓴 대한독립만세 사건과 군자금 모금에 얽힌 항일운동 사례를 들려줬다. 작품에는 담지 못했지만 스님이 기생을 통해 군자금을 전달했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100주년을 맞는 3·1운동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1919년에는 이미 조선 전체가 상당히 일본화하지 않았을까 싶다. 3·1운동은 진정한 나라를 다시 찾는 출발점이 됐다. 대한제국은 사라졌지만 민중이 주인이 되는 새 국가의 시작이라는 의미다.” ―또 다른 독립운동가나 독립운동사를 다룰 생각은…. “생각은 있지만 여건이 어렵다. 모든 인물은 빛과 그림자가 있는데, 그림자 부분을 싫어하는 분이 많다. 그런데 밥을 먹으면 화장실도 가야 하는 것 아닌가.(웃음)” ―앞으로의 계획은…. “내년이면 교수 자리도 정년이다. ‘앞으로 뭐하고 살지’, 이런 생각 중이다. 70대부터는 할아버지와 손녀가 함께 볼 수 있는 동화도 그려보고 싶다. ‘남벌’ 같은 센 이야기를 원하는 분도 있지만 투자 면에서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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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현세 화백이 본 초월 스님은…“파격의 원효 스님 느낌이었다”

    ‘공포의 외인구단’ ‘남벌’ ‘천국의 신화’ 등으로 잘 알려진 이현세 화백(63)은 지난해 3·1절 무렵 포털사이트에 웹툰 ‘초월’을 연재했다. 이 작품은 젊은 여성 파란이 진관사를 찾으면서 시작된다. 깊은 상처 속에 성장한 파란은 600년 전통의 영혼을 위로하는 진관사 수륙재(水陸齋)를 통해 초월 스님을 만나는 등 여러 영혼과 대화를 나누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된다. 18일 서울 강남의 화실에서 이 화백을 만났다. ―초월 스님을 알고 있었나. “‘천국의 신화’ 6부를 끝내고 쉬는 중이었는데 포털을 통해 진관사와 은평구에서 요청이 들어왔다. 솔직히 이전에는 스님을 몰랐다.” ―이 화백이 본 초월 스님 이미지는…. “수인(囚人)일 때 사진 한 장이 남아 있다. 호랑이 눈썹에 기골이 장대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독립운동을 하느라 세속에서도 활동해선지 자장 스님보다는 파격의 원효 스님에 가깝다고 느꼈다. 5회로 준비했는데 막상 작품을 하다 보니 탐이 나서 1, 2회 더 하고 싶었다.” ―유족들은 어떤 얘기를 했나. “만주로 가는 기차에서 쓴 대한독립만세 사건과 군자금 모금에 얽힌 항일 운동 사례를 들려줬다. 작품에는 담지 못했지만 스님이 기생을 통해 군자금을 전달했다는 것도 흥미로웠다.”―100주년을 맞는 3·1운동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1919년에는 이미 조선 전체가 상당히 일본화하지 않았을까 싶다. 3·1운동은 진정한 나라를 다시 찾는 출발점이 됐다. 대한제국은 사라졌지만 민중이 주인이 되는 새 국가의 시작이라는 의미다.” ―또 다른 독립운동가나 독립운동사를 다룰 생각은…. “생각은 있지만 여건이 어렵다. 모든 인물은 빛과 그림자가 있는데, 그림자 부분을 싫어하는 분이 많다. 그런데 밥을 먹으면 화장실도 가야 하는 것 아닌가.(웃음)” ―앞으로의 계획은…. “내년이면 교수 자리도 정년이다. ‘앞으로 뭐하고 살지’, 이런 생각 중이다. 70대부터는 할아버지와 손녀가 함께 볼 수 있는 동화도 그려보고 싶다. ‘남벌’ 같은 센 이야기를 원하는 분도 있지만 투자 면에서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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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관사 보수하려 벽 뜯어내자 한지에 쌓인 보퉁이에는…

    “三角山(삼각산) 마루에 새벽빗 비쵤제/네 보앗냐 보아 그리던 太極旗(태극기)를/네가 보앗나냐 죽온 줄 알앗던/우리 太極旗(태극기)를 오늘 다시 보앗네/自由(자유)의 바람에 太極旗(태극기) 날니네/二千萬 同胞(이천만동포)야 萬歲(만세)를 불러라/다시 산 太極旗(태극기)를 爲(위)해 萬歲萬歲(만세만세)/다시 산 大韓國(대한국).” 17일 찾은 서울 은평구 진관사 입구에는 태극기 비(碑)가 우뚝 서 있다. 2011년 제막한 이 비에는 태극기와 독립신문(30호)에 실린 시 ‘태극기’의 일부가 새겨져 있다. 이곳에 태극기 비가 들어선 데는 사연이 있다. 2009년 5월 26일 오전 9시경 사찰 내 칠성각을 보수하던 현장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스님, 벽을 뜯었는데 한지에 쌓인 보퉁이가 나왔습니다.” 진관사 스님들이 모인 가운데 보퉁이는 조심스럽게 풀렸다. 보자기처럼 보인 것은 귀퉁이가 불에 타고, 군데군데 얼룩이 있어 몹시 낡았지만 분명 태극기였다. 크기는 가로 89cm, 세로 70cm였고, 태극의 지름은 32cm였다. 일장기 위에 덧그려져 독립 의지를 담았기에 의미가 더 컸다. 이른바 ‘진관사 태극기’다. 그 안에는 1919년 3·1운동 직후의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 32호 등 5점, ‘자유신종보(自由晨鍾報)’ 6점, 상하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 4점, 단재 신채호 선생이 상하이에서 발행한 ‘신대한(新大韓)’ 3점, 민족을 배반하고 부역하는 친일파를 준엄하게 꾸짖는 경고문 등이 들어 있었다. ● 진관사와 백초월 스님 작은 암자 벽 속에 독립운동 자료를 숨긴 이는 일제강점기 만해 한용운과 백용성 스님을 계승해 독립운동을 펼친 백초월(白初月·1878~1944) 스님이었다. 진관사 태극기의 발견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던 초월 스님을 조명하는 계기가 됐다. 진관사 주지 계호 스님은 이 태극기로 이어진 초월 스님과의 만남을 이렇게 전한다. “6·25전쟁 때 대웅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고 칠성각 등 일부 전각만 남았다. 만약 칠성각마저 전쟁으로 불탔다면 초월 스님의 염원은 알려지지 않았을 수 있다. 부처님의 오묘한 법(法)과 초월 스님의 원력(願力)이 만든 기적이다.” 진관사와 마포포교당(불교방송 뒤 극락암)은 일제강점기 불교계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진관사 독립운동 자료에 대해 “진관사는 마포에 포교당이 있어 중국 및 국내 각처와의 연결이 용이했다”며 “서울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 임시정부의 불교계 연락본부가 진관사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만해가 초월을 불교계를 대표할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으로 꼽았다는 증언도 있다. 초월의 일대기와 사상을 연구해 온 김광식 동국대 특임 교수가 만해의 제자였던 김관호에게서 전해 들었다는 얘기다. “만해는 백용성 스님, 수덕사 만공 스님, 범어사 오성월 스님, 당시 청주에 있던 백초월 스님 등 5, 6명을 불교계를 대표할 33인 후보로 생각했다. 하지만 독립선언이 짧은 시간에 일제의 눈을 피해 매우 은밀하게 진행됐기 때문에 지방에 있던 이들과는 연결이 쉽지 않아 백용성 스님만 포함됐다.” 일제의 문서는 지방 사찰에서 수행하던 초월이 서울로 올라와 독립운동에 투신한 시점을 1919년 4월로 전한다. 초월의 독립운동은 임시정부 및 독립군을 위해 전개한 군자금 모금과 ‘혁신공보(革新公報)’ 발간을 중심으로 한 민족의식 고취로 나눌 수 있다. 초월은 불교 중앙학림(동국대 전신)에 한국민단본부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는 한편 혁신공보를 발간해 사장을 맡았다. 초월의 행적은 불교계가 주도한 항일 운동 곳곳에서 드러난다. 3·1운동 이후인 그해 11월 25일 단군 건국기념일(개천절)을 기해 만세운동을 전개한다. 종로 삼청동에 태극기와 단군기념이라는 깃발이 내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축하문, 선언서, 포고문이 배포됐다. 1920년 2월에는 제자 이중각을 통해 일본 유학생들이 주도한 3·1운동 1주년 기념시위에 관여하다 3월 도쿄(東京)에서 잡혀 경성지방법원으로 이송됐다. 이때 모진 고문으로 건강이 악화됐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정신이상자로 행세해 풀려났다.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의용승군 창설과 임시정부 국채 발행을 시도하기도 했다. ●“번갯불 번쩍할 때 바늘귀를 꿰어야 한다” 초월의 속명은 백인영으로 1878년 2월 17일 경남 고성군 영오면 성곡리에서 부친 백하진(白河鎭)과 모친 김해 김씨의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13세 때인 1891년 지리산 영원사(靈源寺·경남 함양군)로 입산 출가했다. 출가 당시 법명은 동조(東照), 초월은 법호다. 그는 구국당(龜國堂), 구당(龜堂)의 별호뿐 아니라 최승(最勝) 의수(義洙) 의호(義浩) 등 다양한 이명 및 가명으로 활동했다. 진관사 템플스테이를 담당하는 선우 스님은 “구국당의 별호에서 구할 구(救)자가 아니라 거북 구(龜)자를 쓰거나 이명, 가명이 많은 것은 일경의 눈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1991년 6월 초월의 고향에는 ‘구국당 인영 백초월대선사 순국비’가 건립됐다. 초월은 20대 중반에 이미 대강백, 큰스님의 반열에 오른 지성인이었다. 그가 1915년에 불교계가 힘을 모아 개교한 중앙학림 초대 강사로 내정됐을 정도다. 요즘으로 치면 학장이나 다름없는 역할이었다. 영원사 역대 조실(祖室·사찰의 큰스님)을 총정리한 ‘조실안록(祖室案錄)’에 따르면 초월은 1903년 겨울~1904년 초 영원사 조실이었다. 그의 나이 25세 때였다. 초월은 1921년 마포포교당을 근거로 활동하면서 일심교(一心敎) 강령을 구상했다. 일심교는 화엄경에서 얻은 깨달음과 항일운동 전략이 어우러진 결정체로 ‘일심만능 군교통일 세계평화(一心萬能 群敎統一 世界平和)’를 내세웠다. 일심교는 비밀결사조직인 일심회(一心會)의 토대가 됐다. 진관사와 마포포교당은 그 중심이었고, 전국에서 초월의 뜻에 동조한 동지들이 결속돼 자금 모금이 이루어졌다. 통도사 주지 김구하, 천은사 주지 하용화, 화엄사 총무 이인월, 화엄사 승려 김영렬 등이 자금 모금에 협조했다. 특히 범어사 오성월 김경산은 많은 자금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치광이 행세로 일제의 집요한 감시를 피한 얘기는 유명하다. 동학사 강사 시절 초월은 방 안에 죽은 거북이를 보자기에 싸 두고 아침저녁으로 거북이를 바라보며 참선했다. 일경이 그의 방에 들이닥치면 거북이에게 알 수 없는 말을 하거나 거북이 노래를 불렀다. 초월은 그를 따르는 학인들에게 독립의식을 강렬하게 고취시켰다. “번갯불 번쩍할 때 바늘귀를 꿰어야 한다”라는 말은 독립운동에 나설 때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말고 즉시 가담하라는 의미였다. 1938년 봉천행 화물열차에 ‘대한독립만세’라고 낙서한 사건이 터진다.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초월은 2년 6개월 판결을 받았고, 다시 독립운동 자금 때문에 감옥에 갇혀 1944년 6월 29일 청주교도소에서 순국했다. 만해가 입적한 날과 같다. 초월에게는 1986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됐다. 김광식 교수는 “만해와 용성을 따라가다 보면 초월을 만날 수밖에 없다”라며 “초월은 20여 년간 체포와 투옥, 구금, 감시에도 항일운동 일선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독립기념관이 1989년 발행한 ‘항일 의열투쟁사’는 “불교계 승려들의 독립투쟁 가운데서도 백초월은 한용운 백용성의 활동에 뒤지지 않는 존재다. 항일독립운동에 걸출한 활동을 하다 옥사 순국한 세 사람의 의열사를 들 때 신채호 김동삼과 함께 백초월을 넣는 이도 있다”며 높이 평가했다. 초월과 인연이 있는 경남 고성과 함양군, 서울 은평구 등 3개 지자체가 합동으로 스님을 기리는 선양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진관사 초입부터 사찰까지 약 1㎞의 백초월길이 이어진다. 일제강점기 진관사는 지금보다 훨씬 깊은 산중에 있었을 것이다. 초월은 그 숲길을 오르내리며 마음속에 꺼지지 않는 항일 독립의 불꽃을 피웠을 것이다. 일경에 연행돼 고문 받을 당시 남겼다는 그의 일갈이 떠오른다. “이놈아 밥을 치면 떡밖에 더 되겠느냐. 아무리 행패를 부리더라도, 계란 가지고 삼각산을 쳐도 삼각산이 없어질리 없다. …너희 왜놈들이 미쳐서 남의 나라 땅을 강점하고 있는 것이지 내가 왜 미쳤단 말이냐, 너희가 미쳤지.”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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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성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한국회장 “신통일 한국시대로 나아가자”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 이기성 한국회장(사진)은 22일 열린 신년 간담회에서 3·1운동 100주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남북 평화 분위기 조성에 힘을 싣겠다고 밝혔다. 이기성 가정연합 한국회장은 이날 교단 차원에서 올해 ‘신통일 한국시대 개문 안착(開門 安着)’이라는 표어를 내세운다고 말했다. 가정연합 창시자인 문선명·한학자 총재가 주창한 참가정운동 등을 통해 신통일한국 시대로 나아가고자 한다는 의미다. 가정연합은 문선명(1920~2012) 총재가 북한에서 김일성 주석(1912~1994)과 만나고 현지에 평화자동차를 설립하는 등 북한과 각별한 관계를 구축해왔다. 이 회장은 “북미 관계의 영향을 받겠지만 북한과의 교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통일교 2인자로 불리던 박보희 전 세계일보 사장이 최근 작고했을 때 북한에서 조의문을 보내왔다고 전했다. 가정연합은 문 총재 탄생 100주년, 고인의 부인 한학자(76) 총재 탄생 77주년이 되는 2020년을 앞두고 다양한 기념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다음달 10일 경기 가평군 청심평화월드센터에서 열리는 ‘문선명 한학자 총재 탄생 기념식’을 비롯해 2월 7~10일 서울 송파구 잠실 롯데호텔월드에서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 월드 서밋 2019’이 이어진다. 월드 서밋에는 전, 현직 정상과 종교지도자 등 1000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2월 13일 가평 청심국제청소년수련원에서 열리는 효정세계평화재단 장학증서 수여식에서장학금 100억 원을 전달한다. 장학생에는 가정연합 신도는 물론 다문화가정과 탈북민 자녀도 포함돼 있다. 한반도 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한 5대 권역 국제지도자컨퍼런스(ILC), 3·1운동 100주년 기념 한·일 청년학생 교류 프로젝트, 한반도 통일과 세계평화를 염원하는 ‘피스로드 2019 세계대장정’ 등도 예정돼 있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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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지인에 정신적 에너지 공급하는 ‘영혼의 쉼터’ 자리매김”

    원불교 쾰른교당과 일원원불교선센터는 독일의 유서 깊은 도시 쾰른에서 동양의 선(禪)과 불교를 전하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대지 3305m²(약 1000평)에 주변에 1만3223m²(약 4000평)의 자연숲이 들어서 있다. 30분 이내의 거리에 쾰른대성당과 벤스베르크성, 시청사 건물이 있다. 2007년 부임한 이명희 교무(66)가 도량 재건축과 정비를 했고, 2008년에는 자매인 이원조 교무(60)가 합류했다. 지역 교당의 교무와 원불교신문 기자로 활동하다 나이 오십에 해외 포교에 나선 이원조 교무를 e메일을 통해 만났다.―현지 활동은 어떻게 진행되나. “2008년 선센터 개원식을 가진 뒤 현지인 교화(敎化)를 위해 다양한 그룹을 대상으로 한 명상프로그램을 연중무휴로 진행한다. 종교연합축제, 마을축제, 여성 및 장애인 단체와 결합된 행사도 개최한다.” ―서양에서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명상으로 여겨진다. “쾰른 교당은 독일 현지인을 교화 대상으로 삼고 있다. 현재 교당에 입교한 사람은 25명 정도다. 처음에는 명상프로그램에 대한 호기심으로 접근하다 나중에는 원불교 교도로 활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해외 포교의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인가. “언어 문제다. 글을 읽고 쓰고 말하는 데 불편함이 없는 것 같았는데, 독일 땅을 밟는 순간 문맹이 됐다. 교포들조차 ‘왜 그렇게 어려운 길을 택했느냐’라고 한다. 뒤집어 생각하면 ‘말이 다 통하는 한국 사람들은 다 교화가 됐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진실한 마음으로 신뢰감을 얻을 수 있다면 말이 좀 서툰 것은 도움을 받으며 풀어갈 수 있는 문제다.” ―뒤늦게 시작한 해외 포교의 어려움을 알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나. “아주 추운 날 연료로 쓰는 가스통이 비어 주문을 했더니 보름 만에 오전 6시에 배달이 됐다. 추위에 떨다 ‘이러다 얼어 죽으면 누가 와서 볼 사람은 있나’ ‘굶어죽으면 누가 올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해외 포교의 원칙은 무엇인가. “우선 교법정신을 충실하게 익히고 실천하는 것, 다양한 문화에 대한 수용과 이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잘 관리하는 것이 기본이다.” ―쾰른 교당의 향후 계획은…. “독일 현지인들은 이곳에서 문화 역현상이 일어난다고 평가한다. 한국인이 독일문화를 익히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이곳에 와서 한국과 원불교의 문화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이미 지역 내에서 정신의 새 에너지를 공급하는 주요 장소로 여겨지고 있다. 유럽 내에서 시대정신을 이끌어가는 원불교선센터로 발전시키고 싶다.” ―경전 중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면…. “원불교 교조 소태산(박중빈·1891∼1943)께서는 이미 100년 전에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고 하셨다. 10%의 사람이 세상 물질의 90%를 차지하고, 90%의 사람이 남은 10%의 재화를 나눠 쓴다. 그 까닭에 수많은 난민이 발생하고 기아와 질병, 전쟁의 고통이 도처에 있다. 저를 포함한 세상 사람들이 개벽정신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염원한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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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강산 신계사에 템플 스테이 추진” 원행 조계종 총무원장 신년회견

    금강산 신계사에서 열리는 템플 스테이가 추진된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사진)은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16일 열린 신년 회견에서 “청와대와 문화체육관광부 등 정부 측과 금강산 템플 스테이 개설을 위한 협의를 진행해 왔다”며 “신계사를 성공적으로 복원한 사례가 있기 때문에 템플 스테이도 가능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신계사는 유점사, 장안사, 표훈사와 더불어 금강산 4대 명찰로 불렸다. 2000년 6·15공동선언 이후 남북 불교계가 공동으로 복원을 추진해 2007년 완공을 기념하는 법회가 열렸다. 조계종에 따르면 템플 스테이 참가자는 연간 52만여 명이며 이 가운데 외국인이 7.4%를 차지한다. 신계사에 템플 스테이를 개설하면 국내외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평화의 상징이 되고 한반도 평화에도 도움이 된다는 설명이다. 조계종은 템플 스테이를 위해서는 별도 공간이 필요한 만큼 이를 건축하기 위한 협의도 함께 한다는 방침이다. 원행 스님은 “북측 조선불교도연맹 강수린 위원장이 지난해 총무원장 취임 축하 메시지를 보내왔다”며 “다음 달 중순 금강산에서 열리는 새해맞이 민족공동행사에서 북측과 상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계종은 불교종단협의회(종단협) 차원의 남북 교류도 적극적으로 진행할 방침이다. 원행 스님은 “북한은 묘향산 보현사 등 60여 개 사찰을 전통 사찰로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종단협 차원에서도 북한 사찰 복원과 교류를 위한 사업을 진행하겠다”고 했다. 부처님오신날 남북 공동법회와 전통등 전시회도 추진된다. 종단 안팎에서 제기돼온 총무원장 직선제 실시에 대해서는 다소 소극적인 입장이었다. 원행 스님은 “직선제가 시대적 요구인 것은 알고 있지만 율법 정신에 맞는 것인가는 전문가들의 검토와 내부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종단 내 백년대계본부에는 3개 위원회가 설치돼 변화와 혁신을 주도하게 된다. 승려 복지 강화, 교구 중심제 강화, 불교문화 창달 등 7대 중점 과제도 제시됐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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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홍정 NCCK 총무 “3·1절 100주년 맞아 남북과 세계 평화 일구는데 전념할 것”

    올해 100주년을 맞는 3·1절 행사는 가톨릭과 개신교, 불교, 원불교, 천도교, 유교, 한국민족종교협의회의 국내 7대 종단과 시민단체 등이 참여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다. 이홍정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는 15일 개최한 신년 간담회에서 “올해 3·1절을 계기로 남과 북은 물론 동북아시아, 세계에서 평화가 정착되어야 한다”며 “이 땅의 화해를 이루고 평화를 일궈내는 일에 전념하겠다”고 말했다. 이 총무에 따르면 이 행사는 범국민대회 형식으로 치러지며 정부는 오전 10~12시, 7대 종단과 시민단체는 낮 12시 이후 행사를 주관한다. 이를 위해 각 종단은 자체 기념행사를 가진 뒤 행진하며 광화문 행사에 합류한다. NCCK와 한국교회총연합은 오전 10시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연합 예배를 가질 예정이다. 이 총무는 북측 종교계 인사의 광화문 행사 참석에 대해 “남측 인사는 북측 행사에, 북측 인사는 남측 행사에 서로 참석하는 것을 협의하고 있지만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며 “행사 시기가 가까워지면 결론이 날 것”이라고 했다. 2월 중순 금강산에서 열릴 예정인 6·15공동선언 관련 모임에서 최종적으로 협의될 가능성이 높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NCCK 차원의 신년 계획과 과제에 대한 의견도 나왔다. 올해 제67회 NCCK 총회의 주제는 ‘평화를 이루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 이를 위해 한반도 평화와 통일, 차별·혐오가 없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지역 교회, 개신교 사회운동 단체 등과의 연대를 강화할 계획이다. 이 총무는 “NCCK가 진보적 색채 속에 통일 운동에 주력해 적지 않은 성과를 남겼지만 한국 교회 일반과 심리적 거리감이 커졌다는 반성도 있다”며 “지역교회협의회와의 연대를 강화해 교회 일치운동에서도 꽃을 피우겠다”고 말했다. 이 총무는 △한반도평화조약 체결을 위한 국제 캠페인 개최 △난민과 장애인, 성(性)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차별금지법 도입 △여성·청년 리더십 개발 등을 주요 과제로 꼽았다. 이 총무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기획국장, 아시아기독교협의회 국장, 필리핀 아태장신대 총장, 한일장신대 교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사무총장 등을 거쳐 2017년 11월 NCCK를 이끄는 총무로 취임했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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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전-질병의 땅에서 33년째 봉사… 죽어서도 돕겠습니다”

    선교사가 되겠다는 꿈은 품었지만 그곳이 아프리카 서부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라이베리아가 될 줄은 몰랐다. 1986년 조형섭 목사(67)는 사역 중이던 교회 담임 목사와 현지에서 의류 사업을 하다가 귀국한 이들을 만났다. 교회가 없어 신앙생활에 어려움이 많다는 얘기가 나왔다. 문득 담임 목사가 “아프리카에서 선교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엉겁결에 조 목사는 “저같이 부족한 사람이 선교할 수 있나요? 할 수만 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가족과 상의도 못 한 상태에서 한 답변이 라이베리아 선교의 씨앗이 됐다. 1987년 2월 라이베리아 땅을 밟은 그는 햇수로 33년째 현지에서 사역 중이다. 수도 몬로비아를 중심으로 5곳의 교회를 개척했고, ‘코리안 라이베리안 스쿨’을 시작으로 10개 지역에 학교를 세웠다. 강산이 세 번 바뀌는 사이 14년 동안 내전이 일어났고, 2014년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했다. 내전과 에볼라 사태로 외국인 선교사들이 떠나갈 때 그는 현지를 지켰다. 전기가 없는 곳에서 소형 발전기를 다루다가 세 손가락을 잃은 그는 이국의 땅에 묘비 없는 무덤을 마련해 놨다. 현지에서 ‘파더(아버지)’로 불리는 그를 최근 서울 은평구 안디옥 교회에서 만났다. ―30년 이상 라이베리아에서 사역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무모했다. 당시 김포공항에서 이 땅을 다시 못 밟을 수 있다는 각오 속에 떠났다. 온갖 풍토병과 내전, 에볼라를 겪으면서 30년 동안 안 죽고 살아 있을 줄 몰랐다.(웃음)” ―14년의 내전을 어떻게 겪었나. “파송 3년째 내전이 시작됐는데 처음 1개월이면 끝날 거라는 예측이 많았다. 하지만 1년이 지나고, 결국 14년이나 지속됐다. 현지인들이 내전 속에 숱하게 희생됐다. 이들이 스스로 내 곁을 떠나지 않는 한, 같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30여 년을 지탱한 힘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가라고 했지만 떠나라는 메시지를 주신 적이 없으니까. 현지인들에게 ‘당신이 어려울 때는 항상 곁에 있겠다’고 약속했다. 무슨 방도를 쓰더라도 지켜야 하는 약속이다.” ―에볼라 사태 때는 어땠나. “사실 에볼라 바이러스가 잠잠해져 한국으로 돌아와 안식년 휴가를 보내고 있었는데 바이러스가 더 확산됐다. 주변 만류를 뚫고 현지로 가려는데 인천공항 출입국사무소에서 ‘에볼라에 감염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더라. 그래서 ‘라이베리아에 무덤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에볼라에 걸린다면 절대 한국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고 출국했다. 현지인들이 돌아온 저를 ‘파파’라고 하더라.” 라이베리아는 내전 후유증으로 1990년대 이전으로 돌아갔다는 게 그의 전언이다. 주민의 80%가 물과 전기 없이 살아간다. 대부분은 하루 한 끼밖에 먹을 수 없고, 영·유아 사망률도 높다. 간호장교 출신으로 의료 사역을 돕고 있는 부인 오봉명 선교사(64)는 마디가 부족한 손을 펴 보이는 남편을 바라보며 “한국이라면 손가락을 구할 수 있었는데…”라고 했다. 이 부부는 2014년 몬로비아 인근 정커팜 지역에 장애아들도 함께 공부할 수 있는 그레이스 학교를 세웠다. 일반 교실은 물론이고 장애인 화장실이 설치된 특수교실, 도서관, 강당, 우물 등이 들어섰다. 적금과 환갑 기념으로 들어온 축의금으로 땅을 매입했고, 밀알복지재단이 건립을 지원했다. ―향후 계획은…. “소외된 자, 병자, 희망 없는 사람들을 도우라는 게 예수님의 참뜻 아니겠는가. 이곳에는 내전과 질병으로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많다. 바로 그곳에 저의 빈 무덤이 있다. 내가 죽어도 그 땅의 사역은 지속되리라고 생각한다.” ―건강 때문에 잠시 귀국했다고 들었다. “지난해 10월 몸의 왼쪽 감각이 사라져 뇌경색이나 뇌출혈로 보인다는 판정을 받았다. ‘하나님, 평생 아프리카 선교 사역을 했는데 이게 뭡니까’라는 말이 나오더라. 그런데 한국에서 정밀 진단을 받았더니 특별한 이상은 없고 몸이 너무 쇠약해졌다고 하더라. 전기 수도 배관 목공 등 그동안 ‘노가다 선교’를 너무 많이 했다. 몸에 이상이 없다니 하나님이 또 일하라고 하시나 보다 싶다. 몸을 추스르고 다음 달 말에 출국할 예정이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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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보희 前 세계일보 사장 별세

    ‘통일교 2인자’로 불렸던 박보희 전 세계일보 사장(사진)이 12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육사 2기 생도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 보좌관, 선화학원 이사장, 워싱턴타임스 회장을 지냈으며 1991년 세계일보 사장에 취임했다. 1970년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 문선명 총재의 연설을 영어로 통역하며 ‘문 총재의 오른팔’이 됐다. 문 총재의 차남이 교통사고로 숨지자 고인은 딸 박훈숙과 영혼결혼식을 하게 했다. 딸은 성씨를 바꿔 문훈숙(현 유니버설발레단장)으로 활동 중이다. 고인은 대북 관계에서 통일교의 얼굴이 됐다. 1991년 문 총재의 방북을 수행한 데 이어 1994년 김일성 북한 주석이 사망하자 북한을 방문해 조문했다. 1976년 미국 워싱턴포스트 보도로 불거진 ‘코리아게이트’(박동선 사건)에 연루돼 미국 하원에 출석해 증언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문훈숙 단장을 비롯해 2남 3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발인 성화(聖和)식은 15일 오전 8시 서울 용산구 천복궁교회에서 치러진다. 02-3010-2000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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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교 2인자’ 박보희 전 세계일보 사장 별세…향년 89세

    ‘통일교 2인자’로 불렸던 박보희 전 세계일보 사장이 12일 오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0년 육사 2기 생도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 보좌관, 선화학원 이사장, 미국 뉴욕시티트리뷴 발행인, 워싱턴타임스 회장 등을 지냈으며 1991년 세계일보 사장에 취임해 3년간 회사를 이끌었다. 고인은 영어 실력이 뛰어나 육사에서 “박보희의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말이 돌았다는 일화도 있다. 1970년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이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교세를 넓혀가던 시기에 문선명 총재의 연설을 영어로 통역하며 ‘문 총재의 오른팔’이 됐다. 문 총재 차남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박 전 사장은 자신의 딸 박훈숙과 영혼결혼식을 하게 했다. 박 전 사장은 문 총재와 사돈이 됐으며, 딸은 성씨를 바꿔 문훈숙(현 유니버설발레단 단장)으로 활동 중이다. 빈소가 마련된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에서 13일 만난 통일교 관계자는 고인에 대해 “지혜와 덕을 갖춘 분으로 종교적 영역보다는 대북 관계를 비롯한 해외 교류와 문화 분야에서 큰 공적을 남겼다”고 평했다. 말년에는 6·25전쟁 참전국가들을 찾아 리틀엔젤스 순회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고인은 대북 관계에서 통일교의 얼굴이 됐다. 1991년 문 총재의 방북을 수행한 데 이어 1994년 김일성 북한 주석이 사망하자 북한을 방문해 조문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될 때도 통일교의 대북 네트워크가 적지 않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성 주석이 말년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남쪽과의 관계는 문 총재와 상의하라”는 유훈을 남겼다는 게 통일교 측 얘기다. 고인은 1976년 미국 워싱턴포스트의 보도로 불거진 ‘코리아게이트’(박동선 사건)에 연루돼 미국 하원에 출석해 증언하기도 했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재미사업가 박동선을 통해 미국 정치인에게 로비 활동을 하다가 터진 사건이 코리아게이트다. 고인은 코리아게이트를 조사하는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에 증인으로 소환됐다. 스파이 혐의를 받던 고인은 위원장을 맡고 있던 도널드 프레이저에게 애국심을 자극하며 공격적 발언을 퍼부었고 결국 어떠한 스파이 혐의도 밝혀지지 않았다. 고인은 저서 ‘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에 이 일화를 기록했다. 유족으로 문훈숙 단장을 비롯해 2남 3녀가 있다. 발인 성화(聖和)식은 15일 오전 8시 용산구 통일교 천복궁교회에서 원로와 신자 2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진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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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신의 무덤 마련해 놓고…내전-에볼라 견디며 33년째 사역 중인 선교사

    선교사가 되겠다는 꿈은 품었지만 그곳이 아프리카 서부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라이베리아가 될 줄은 몰랐다. 1986년 조형섭 목사(67)는 사역 중이던 교회 담임 목사와 현지에서 의류 사업을 하다 귀국한 이들을 만났다. 교회가 없어 신앙생활에 어려움이 많다는 얘기가 나왔다. 문득 담임 목사가 “아프리카에서 선교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엉겁결에 조 목사는 “저 같이 부족한 사람이 선교할 수 있나요? 할 수만 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가족과 상의도 못한 상태에서 한 답변이 라이베리아 선교의 씨앗이 됐다. 1987년 2월 라이베리아 땅을 밟은 그는 햇수로 33년째 현지에서 사역 중이다. 수도 먼로비아를 중심으로 5곳의 교회를 개척했고, ‘코리안 라이베리안 스쿨’을 시작으로 10개 지역에 학교를 세웠다. 강산이 세 번 바뀌는 사이 14년의 내전이 일어났고, 2014년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했다. 내전과 에볼라 사태로 외국인 선교사들이 떠나갈 때 그는 현지를 지켰다. 전기가 없는 곳에서 소형 발전기를 다루다 세 손가락을 잃은 그는 이국의 땅에 묘비 없는 무덤을 마련해 놨다. 현지에서 ‘파더(아버지)’로 불리는 그를 최근 서울 은평구 안디옥 교회에서 만났다. ―30년 이상 라이베리아에서 사역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무모했다. 당시 김포공항에서 이 땅을 다시 못 밟을 수 있다는 각오 속에 떠났다. 온갖 풍토병과 내전, 에볼라를 겪으면서 30년 동안 안 죽고 살아 있을 줄 몰랐다.(웃음)” ―14년의 내전을 어떻게 겪었나. “파송 3년째 내전이 시작됐는데 처음 1개월이면 끝날 거라는 예측이 많았다. 하지만 1년이 지나고, 결국 14년이나 지속됐다. 현지인들이 내전 속에 숱하게 희생됐다. 이들이 스스로 내 곁을 떠나지 않는 한, 같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30여년을 지탱한 힘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가라고 했지만 떠나라는 메시지를 주신 적이 없으니까. 현지인들에게 ‘당신이 어려울 때는 항상 곁에 있겠다’고 약속했다. 무슨 방도를 쓰더라도 지켜야 하는 약속이다.” ―에볼라 사태 때는 어땠나. “사실 에볼라 바이러스가 잠잠해져 한국으로 돌아와 안식년 휴가를 보내고 있었는데 바이러스가 더 확산됐다. 주변 만류를 뚫고 현지로 가려는데 인천공항 출입국사무소에서 ‘에볼라에 감염되면 어떻게 하겠냐’고 묻더라. 그래서 ‘라이베리아에 무덤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에볼라에 걸린다면 절대 한국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고 출국했다. 현지인들이 돌아온 저를 ‘파파’라고 하더라.” 라이베리아는 내전 후유증으로 1990년대 이전으로 돌아갔다는 게 그의 전언이다. 주민의 80%가 물과 전기 없이 살아간다. 대부분은 하루 한 끼밖에 먹을 수 없고, 영유아 사망률도 높다. 간호장교 출신으로 의료사역을 돕고 있는 부인 오봉명 선교사(64)는 마디가 부족한 손을 펴 보이는 남편을 바라보며 “한국이라면 손가락을 구할 수 있었는데…”라고 했다. 이들 부부는 2014년 먼로비아 인근 정커팜 지역에 장애아들도 함께 공부할 수 있는 그레이스 학교를 세웠다. 일반 교실은 물론 장애인 화장실이 설치된 특수교실, 도서관, 강당, 우물 등이 들어섰다. 적금과 환갑 기념으로 들어온 축의금으로 땅을 매입했고, 밀알복지재단이 건립을 지원했다. ―향후 계획은? “소외된 자, 병자, 희망 없는 사람들을 도우라는 게 예수님의 참 뜻 아니겠는가. 이곳에는 내전과 질병으로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많다. 바로 그곳에 저의 빈 무덤이 있다. 내가 죽어도 그 땅의 사역은 지속되리라고 생각한다.”―건강 때문에 잠시 귀국했다고 들었다. “지난해 10월 몸의 왼쪽 감각이 사라져 뇌경색이나 뇌출혈로 보인다는 판정을 받았다. ‘하나님, 평생 아프리카 선교사역을 했는데 이게 뭡니까’라는 말이 나오더라. 그런데 한국에서 정밀진단을 받았더니 특별한 이상은 없고 몸이 너무 쇠약해졌다고 하더라. 전기 수도 배관 목공 등 그동안 ‘노가다 선교’를 너무 많이 했다. 몸에 이상이 없다니 하나님이 또 일하라고 하시나 보다 싶다. 몸을 추스르고 다음 달 말에 출국할 예정이다.”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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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국안민 정신, 남북통일로 계승”… 천도교 이정희 교령 신년간담회

    “천도교는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정신으로 태어난 종교입니다. 오늘날의 보국안민은 다름 아닌 남북통일입니다.” 9일 간담회에 참석한 천도교 최고 지도자 이정희 교령(74·사진)의 말이다. 그는 천도교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1824∼1864)의 보국안민 사상이 2세 교조인 해월 최시형(1827∼1898)의 동학혁명, 3세 교조 의암 손병희(1861∼1922)의 3·1운동으로 계승됐음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 교령은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을 주도한 의암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큰 아쉬움을 표시하며 기념관 설립을 과제로 꼽았다. 천도교는 교도 300만 명의 최대 종교였지만 3·1운동 이후 일제의 혹독한 탄압으로 쇠락했다는 게 교단 측의 설명이다. 그는 “백범 김구 선생은 귀국하자마자 의암 묘소(서울 강북구 삼양로)를 찾았고 이승만 전 대통령도 두 차례나 방문했다”며 “3·1운동 기념식에 앞서 문재인 대통령이 꼭 이곳을 찾기 바란다”고 했다. 지난해 9월 평양에서 열린 제3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을 남북 공동으로 하자고 제안하면서 천도교가 방북단에서 빠진 것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방문단에는 가톨릭과 개신교, 불교, 원불교 측이 종교 대표로 참석했다. 이 교령은 “3·1운동을 말하면서 천도교를 배제한 정부에 대한 비판과 우리의 무능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임원 모두 사퇴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라며 “천도교, 유교, 민족종교협의회 등 3개 종단이 청와대에 공식 해명을 요구했다”고 밝혔다.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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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갑식의 뫔길]‘고소영 교회’ 목사의 조용한 은퇴

    서울 강남의 소망교회는 한때 특별한 곳으로 불렸다. 이곳은 압구정로에 위치한 부자교회이자 이명박 정부에서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인사’ 논란의 한 진원지였다. MB(이명박 전 대통령)가 장로로 있는 소망교회 인맥이 공적인 자리에 여럿 들어가자 교회를 인맥을 쌓는 장으로 생각한 총선 예비 후보, 관료들이 ‘줄’을 대고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지난해 12월 30일 주일(일요) 예배를 끝으로 이 교회에서 은퇴한 김지철 목사(70)가 최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소회를 담은 글을 올렸다. 말도 탈도 많았던 곳이라 새삼 눈길이 갔다. 그는 “16년간의 소망교회의 목회 여정이 끝났다”며 “지금 이 순간 무엇보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제 입가에 계속 맴돌고 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그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것은 그가 헤쳐온 우여곡절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 튀빙겐대 신학 박사 출신인 그는 50대 초반까지 장신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55세인 2003년 소망교회 담임목사로 초빙됐다. 교회 개척자이자 카리스마가 강한 것으로 알려진 곽선희 목사의 후임이었다. 김지철 목사의 설교는 차분하고 지성적인 것으로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교회의 바로 서기는 쉽지 않았다. 소망교회는 고소영 시비뿐 아니라 2011년 교회 내부의 갈등으로 김 목사가 폭행을 당해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교회 홈페이지에는 “정말 부끄럽고 화가 난다” “이젠 회개해야 한다”는 글이 쏟아졌다. 김 목사의 마지막 글에는 이런 과정에서 신자들을 마주해야 했던 뼈아픈 심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부족한 사람이 어렵고 낙심될 때에 힘내라고, 우리가 기도하고 있노라고 위로해 주셨던 분들… 애통해하는 이웃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찾아 나서신 분들… 세상에서는 소위 내로라하시던 분들이지만 교회에서는 마치 순한 어린 양처럼 순종하며 섬기셨던 분들이 하나하나 떠오릅니다.” 특히 마음에 와닿는 대목은 신자들에 대한 마음의 표시였다. 그는 “제 약한 성대 탓에 예배와 설교 때마다 하는 기침에도 늘 안타까운 마음으로 염려해주시고 기도해주시며 감싸주셨던 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고 했다. 이른바 ‘힘 있는 교회’ 또는 그의 조용한 성품 때문인지 몰라도 김 목사와의 만남은 쉽지 않았다. 2014년 12월 기회가 왔다. 그가 침묵을 깨고 언론과 접촉한 것은 한국기독교언론포럼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교계와 언론의 적극적인 소통에 나섰기 때문이다. 당시 그의 말이다. “고소영 논란이 일었을 때 억울하기도 했지만 가만히 있었지요. 마치 미국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흑인이니까 흑인들이 더 역차별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거죠.” 지난해 8월 그는 같은 예장 통합 교단의 원로 김삼환 목사(명성교회)에게 공개편지를 띄워 ‘교단을 떠나 달라’고 요청했다. 평소 그의 성품이나 교계 관행을 감안하면 보기 드문 ‘직격탄’이었다. 그는 이 편지에서 “세습은 아들이나 성도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며 “이제라도 목사님이 결단을 내려주시길 촉구한다. 이제 조용히 통합총회를 떠나 달라. 그래야 한국교회와 총회가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13일 소망교회에서는 후임으로 청빙된 장신대 출신의 김경진 목사를 위한 위임예식이 열린다. 김지철 목사는 교회가 제안한 특별 전별금을 거절했고 이후 청년 사역을 담당할 것으로 알려졌다. 교회 사유화를 막고 교회 재정에 대한 투명성을 확보했다는 게 교계 평가다. 소망교회 규모나 그동안의 논란을 감안하면 그의 퇴장은 조용한 은퇴다. 폭행 사건 뒤 김 목사에게서 들었다는 지인의 전언이다. “구둣발에 밟히면서 이게 내가 처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한없이 낮은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 소망교회가 제자리를 찾은 것은 이런 마음가짐이 바탕이 됐을지 모른다. 김 목사가 16년간 걸어온 길은 개인의 목회 인생뿐 아니라 한국 교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세습의 길을 택하지 않은 대형 교회의 경우 교회를 개척한 목사와 후임 목사의 갈등이 종종 불거졌다. 고소영 사례처럼 권력자와 인연이 있는 교회와 사찰 등을 둘러싼 논란도 어김없이 일어났다. 그의 조용한 은퇴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dunanworld@donga.com}

    • 2019-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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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운동 8개월뒤 中 상하이서 ‘대한승려 독립선언서’ 발표

    “한토(韓土)의 수천 승려는 이천만 동포 급(及) 세계에 대하야 절대로 한토에 재(在)한 일본의 통치를 배척하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주장함을 자(玆)에 선언하노라.” 1919년 11월 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자리한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승려연합회’ 명의로 발표된 독립선언서의 일부다. 선언서 대표자로 스님 12명의 법명(또는 속명)이 끝부분에 있다.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른바 ‘승려독립선언서’다. 발표 일자는 ‘대한민국 원년 11월 15일’로 돼 있다. 이 선언서는 200자 원고지 9장 분량으로 국한문 혼용, 영문, 한문의 3가지로 정리돼 있다. 특히 이 선언서에 서명한 12인에는 두 명의 범어사 출신 스님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발표 시점은 3·1운동이 들불처럼 번진 뒤 일제의 탄압이 본격화된 시기였다. 선언서는 “대한의 국민으로서 대한국가의 자유와 독립을 완성하기 위하야 이천년 영광스러운 역사를 가진 대한불교를 일본화와 멸절에서 구하기 위하야 아(我) 칠천의 대한승니(大韓僧尼)는 결속하고 기(起)하였노니…”라며 불교계의 결연한 항일 의지를 보여준다. 선언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다른 탄원서들과 함께 프랑스 파리법과대 도서관에 보관돼 있었는데, 1969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이 자료의 존재를 확인했다. 동아일보는 1970년 2월 28일자에 ‘3·1운동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우리말 원본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선언서의 존재를 가장 먼저 세상에 알렸다. 선언서의 12인은 오만광(吳卍光) 이법인(李法印) 김취산(金鷲山) 강풍담(姜楓潭) 최경파(崔鯨波) 박법림(朴法林) 안호산(安湖山) 오동일(吳東一) 지경산(池擎山) 정운몽(鄭雲夢) 배상우(裵相祐) 김동호(金東昊). 하지만 이들이 누구인지는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상황에서 탄압을 우려해 가명을 쓴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불교신문의 전신인 대한불교는 1970년 3월 8일자를 통해 “지금 살아계신 스님들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오만광(오성월·범어사 주지), 이법인(이회광·해인사 주지), 김취산(김구하·통도사 주지), 지경산(김경산·범어사 고승) 스님”이라고 보도했다.부산=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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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라 없는 곳에 佛法도 없다”… 범어사 암자서 태극기 만들어 배포

    “삼엄한 총검도 정의(正義)의 전진을 막지 못하였고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과 옥고에도 끝내 굴하지 않았으니 그 정기(正氣) 길이 이 땅에 빛나리라.” 부산 금정산 범어사 순환도로인 범어사로를 내려오다 보면 마주치는 ‘3·1운동 유공비’의 일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불교계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만해, 용성 스님이 이름을 올렸고, 불교계 교육시설인 중앙학림과 지방학림에서 수학하던 학인스님들이 본말사(本末寺)의 전국 조직망을 활용해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범어사, 봉선사, 해인사, 통도사, 표충사, 동화사, 도리사, 김용사, 대흥사, 송광사 등 전국 16곳의 사찰이 대규모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 천년고찰에 불어온 3·1운동 신라 문무왕 시절(678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범어사는 해동화엄십찰(海東華嚴十刹)로 꼽히는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당시 범어사는 일제 사찰령에 따른 불교의 왜색화에 맞서 우리 전통 불교를 되찾자는 운동의 중심지였다. 주지를 지낸 오성월 스님(1865∼1943)은 당대 선승(禪僧)으로 유명한 경허 스님을 모셔오고, 선원과 강원도 열었다. 각지에 근대식 포교당을 설립하고 명정(明正)학교를 세워 교육 활동에도 힘썼다. 범어사의 3·1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그는 이후 상하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제공해 임시정부의 고문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오성월의 노력에 힘입어 젊은 승려와 학생들이 다수 재학하고 있던 범어사는 만세운동을 펼치기에 적격이었던 도량인 셈이다. 1919년 2월 하순 만해가 범어사에 왔다. 만해는 오성월 이담해 오이산 스님과 만나 거족적으로 봉기할 예정인 만세운동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만해를 만난 범어사 스님들은 중앙학림과 지방학림에 다니던 김법린 김봉환 김상기 등 7명을 불러 모았다. 그 자리에서 만해의 이야기를 전하고 만세운동에 동참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김법린 등 7명의 범어사 청년 승려들은 곧바로 서울로 상경했다. 3·1운동 전날 만해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눠 받은 불교중앙학림 학생들이 인사동에 있는 범어사 포교당에서 모임을 갖고 역할을 나눈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3·1운동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후 김법린과 김상호는 만해의 지시에 따라 범어사로 내려왔다. 이들은 삼엄한 경계를 피하기 위해 농민과 노동자로 변복해 독립선언서를 봇짐 속에 감추고 내려왔다. 7일 찾은 범어사에서 인근 유공비를 빼면 3·1운동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만 당시 일화는 구전으로 전해진다. 지금의 ‘범어사율학승가대학원’이 들어서 있는 자리가 명정학교의 옛터다. 범어사에서 50여 년간 지낸 석공 스님이 3·1운동에 참여한 일능, 준산 스님으로부터 직접 들었다는 얘기다. “범어사 말사인 내원암, 정련암에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작은 밀실이 있었다. 거사에 참여한 스님들은 이곳에서 태극기를 만든 뒤 손수레에 실어 동래 온천시장까지 몰래 운반했다. 스님들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이후에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해 전달하고 연락책도 마다하지 않았다.”○ 검거와 밀고에도 꺾이지 않은 만세운동 서울에서의 3·1운동 소식을 전해 들은 범어사 스님과 지방학림 학생들의 3·1운동 시위는 3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이들은 결사대를 조직해 독립선언서 5000장을 등사한 후 3월 6일 오후 범어사에서 선언식을 거행했다. 7일에는 차상명 김봉환의 주도로 30여 명이 동래시장 중앙에서 선언문을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제창한 뒤 경찰서로 돌진했지만 경찰에 의해 연행됐다. 다음 거사는 동래읍 장날인 3월 18일로 준비됐다. 스님과 청년들이 앞장서고 주민들이 동참하기에 장날이 적당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거사 전날인 17일 명정학교 졸업생들의 송별회가 열렸다. 회합 장소인 범어사에는 40여 명이 모였다. 나라 잃은 설움을 누구보다 깊이 인식하고 있던 젊은 스님과 학생들은 만세운동에 적극 동참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송별회를 마친 후 밤을 이용해 동래읍으로 향했다. 눈에 띄지 않게 길은 피하고 선리(仙里·현재 금정중 인근) 뒷산과 동래 향교 뒷산을 넘어 읍내에 잠입했다. 18일 오전 1시경 범어사 동래포교당(부산 법륜사)에 도착했다. 장터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거사를 준비하고 단행하기에 가장 적합했다. 시장기를 달래려고 시장에서 곶감을 사와 먹고 있을 때였다. 일본 경찰과 헌병 20여 명이 들이닥쳤다. 밀고가 있었던 것이다. 일경은 김영규 차상명 김상기 김한기 등을 검거해 동래경찰서로 연행하고 나머지 대중은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때만 해도 일경은 범어사의 만세운동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주동자를 검거하고 해산시키면 더 이상 아무 일이 없을 것으로 예상한 듯하다. 하지만 포교당이 아닌 곳에서 또 다른 이들이 준비하고 있었다. 지방학림에 다니는 허영호 집이 장터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1000여 장의 독립선언서와 함께 대형 태극기 한 개, 소형 태극기 1000여 개를 준비한 상태였다. 강제 해산당한 그날 저녁 동래읍 서문 인근에서 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근우 김해관 김재호 박재삼 신종기 윤상은 박영환 등 40여 명이 만세를 부르며 동래시장까지 이르렀다. 범어사 3·1운동 유공비에는 당시 상황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우리 고장 범어사에서도 젊은 학도들이 제세의 사명을 자각하고 구국의 비원(悲願)을 불전에 맹세하며 나라와 자유 없는 곳에 진정한 불법(佛法)도 있을 수 없다는 대승정신으로 3월 18일 동래시장 등에서 독립선언문을 산포(散布·흩어져 퍼짐)하고 만세 소리를 높게 외치니 운집한 군중도 동조하였다.” 이날 밤에 전개된 기습 시위는 일경이 미처 대처하지 못했다. 이 시위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자신감을 얻은 이들은 19일 더 큰 규모의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했다.○ “한 번 죽음은 자유를 얻는 것만 같지 못하다(一死莫如得自由)” 19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미리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한 허영호는 윤상은 이영우 황학동 등을 통해 “한 번 죽음은 자유를 얻는 것만 같지 못하다(一死莫如得自由)”는 내용을 담은 격문 수백 장을 동래시장 입구에서 뿌렸다. 오후 5시, 동래시장 남문에 집결한 범어사 지방학림과 명정학교 학생 수십 명은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었다. 한 시간 뒤 또 다른 학생 수십 명이 시장에 모여 같은 시위를 전개했다. 깜짝 놀란 일경은 무자비한 방법으로 참가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3월 19일 동래시장 만세운동으로 연행된 인물은 100여 명에 이르며 34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김영식 박재삼은 집행유예 6년, 다른 참가자들은 징역 6개월에서 2년을 언도받고 부산과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핵심 주동자의 한 사람인 김법린은 만세운동 뒤 검거망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탈출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 일을 빌미로 일제는 범어사 지방학림과 명정학교를 강제 해산시켰다. 지방학림은 범어사 승가대학(강원)으로, 명정학교는 부산 금정중학교와 청룡초등학교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지방학림과 명정학교 학생들이 어둠을 이용해 동래읍으로 향했던 선리 뒷산 인근에 자리한 금정중학교에는 1970년에 세운 또 하나의 ‘3·1운동 유공비’가 있다. 이 비는 그날의 역사를 이렇게 전한다. “금정산 기슭 호국의 전통이 스며 있는 수월도량에서도 제세의 사명을 통절히 자각하고 구국의 비원을 불전에 맹세하며 분연히 일어서니 이는 곧 나라와 자유 없는 곳에 진정한 불법도 있을 수 없다는 대승정신의 발로라 할 것이요… 모진 고문과 가혹한 옥고에 시달리면서도 끝내 굴하지 않음은 나라와 자유를 찾으려는 우리의 결심을 저들이 꺾지 못함이라. 아아 그 뜻 장할시고 세월이 흘러 님들은 가고 또 가고 거룩한 위국정신과 훌륭한 그 업적은 해방된 조국에서 자유를 누리는 후생들의 가슴에 불명의 빛이 되고 엄숙한 교훈이 될 것인 바….” 7일 이곳에서 만난 근대불교사 연구자인 김화선 교사(금정중 교무부장)는 “범어사에는 강원과 선원 등에서 150여 명이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규모”라며 “3·1운동과 관련해 많은 이들이 혹독한 조사를 받았지만 대중의 신뢰와 존경이 대단했기 때문에 오성월이 핵심 배후라는 걸 아무도 발설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창씨개명을 이유로 오성월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한 것은 아쉽다는 의견이 이어졌다. 김 교사는 “사찰령하의 일제에서 주지를 맡으려면 창씨개명은 불가피했다”라며 “공적과 당시 상황을 감안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부산=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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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 뒷받침 안된 도움은 의타심만 키워… 사람부터 바꿔야”

    《1996년 40대 초반의 성관 스님(64)은 도반들과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유적을 찾았다. 그 장엄함에 큰 감동을 받았지만 ‘1달러’를 외치며 따라다니던 아이들의 목소리를 마음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스님이 “말년엔 이곳에서 아이들을 도우며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하자, 도반들은 “되지도 않을 소리”라며 웃어넘겼다. 그로부터 7년 뒤. 캄보디아 정부와 앙코르와트 유적 인근 땅 4만 m²(1만2000여 평)의 30년 무상 사용 계약을 맺으면서 스님의 희망은 구체화됐다. 2004년 국제개발협력 NGO 로터스월드(Lotus World)를 법인으로 등록했고 2006년 캄보디아아동센터가 개원했다. 현재 로터스월드는 캄보디아는 물론 미얀마와 라오스에서 교육과 의료, 환경 개선, 사회적 기업 설립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난 연말 경기 수원시 보현선원에서 로터스월드 이사장인 스님을 만났다.》 ―무상 사용 계약은 기적처럼 들린다. “2003년 기업인들과 캄보디아를 방문했는데 컴퓨터를 지원해 달라는 게 현지 요청이었다. 그런데 사업 전망이 없는지 모두 발을 빼더라. 약속해 놓고 안 지키면 그게 건달 아닌가 싶어 사비로 지원했다. 그 신뢰가 바탕이 됐고 캄보디아 현지 대사관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 땅이 유적 인근에서 캄보디아 정부가 소유한 마지막 땅이라니 기적이 맞다.” ―로터스월드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연꽃처럼 나쁜 것에 물들지 말자, 불교적으로는 정토(淨土)를 만들자는 바람이 담겨 있다.” 현재 캄보디아아동센터는 100명 이상 수용할 수 있는 남녀기숙사를 비롯해 교실 6칸과 도서관, 식당, 게스트 하우스가 있다. 시설 내에 ‘김안과 병원’을 개원해 2000여 명에게 무료 안과 수술을 해주기도 했다. 또 센터 외곽 프놈크롬에는 수원시와 함께하는 ‘수원마을’ 프로젝트를 통해 학교와 공동 화장실, 우물, 마을회관 건립을 지원해왔다. ―교육 관련 활동이 많다. “수백 개의 화장실을 짓고 맑은 물을 위해 우물을 팠지만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소용없더라. 아이들에게 신발 신기는 데 3년, 젓가락으로 밥을 먹도록 하는 데 3년 걸렸다. 교육이 뒷받침되지 않은 구호활동은 의타심만 키운다. 교육이 지속가능성이다.” ―의료 부문 성과는 어떤가. “캄보디아는 자외선이 강해 실명 위기에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나중에는 우리 센터에 오면 눈을 뜬다는 소문이 전국에 났다. 한마디로 심 봉사 눈 뜨는 거지.” ―로터스월드를 비롯해 지구촌공생회, 프라미스 등은 불교계의 대표적인 NGO다. 하지만 개신교나 가톨릭에 비해 부족한 점이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웃 종교에 비하면 아직 부끄러운 수준이다. 재정과 시스템에서 개선할 점이 많다. 조계종 차원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종단의 주요 사찰이 한 분야, 한 지역을 맡아주는 것도 방법이다.” ―지난해 조계종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았는데…. “총무원 호법부장과 총무부장 등 종단의 요직을 거친 입장에서 남 탓만 할 수는 없다. 나도 허물이 크다. 옛날처럼 투쟁하고 싸우는 게 아니라 좋은 일로 갚고 싶다.” ―평소 좋아하는 경전의 구절은…. “출가 결심 뒤 찾아간 해인사에서 성철 스님(1912∼1993)을 뵐 기회가 있었는데 ‘너의 존재가치가 뭐냐’고 묻더라. 멍하니 있는데, 노장 왈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고 이익 되게 하느냐가 네 가치’라고 하더라. 이게 불교의 전부 아닌가 생각한다.” ―불교계를 포함한 지도자들에게는 어떤 모습이 필요한가. “2600여 년 전 부처님은 이미 ‘세상은 변한다. 쉼 없이 정진하라’고 했다. 범부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부처님 혜안에는 그때 이미 보인 거다. 미셸 오바마의 ‘비커밍’을 보니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늘 신문과 책, 비전 속에서 살았다고 평했더라. 그게 지도자의 중요한 덕목이다. 지도자들은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을 읽고, 미래세대를 위한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서가에 문명과 역사를 다룬 책들이 적지 않다. “유발 하라리, 하도 유명해서 책을 갖다 놨는데 이제 ‘하라리 신도’가 됐다.(웃음) 문명과 역사에 대한 식견이 있다면 누구의 것이든 배워야 한다.” 수원=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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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관 스님 “캄보디아 정부와 1만2000평 30년 무상 사용계약은 기적”

    1996년 40대 초반의 성관 스님(64)은 도반들과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유적을 찾았다. 그 장엄함에 큰 감동을 받았지만 ‘1달러’를 외치며 따라다니던 아이들의 목소리를 마음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스님이 “말년엔 이곳에서 아이들을 도우며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하자, 도반들은 “되지도 않을 소리”라며 웃어넘겼다. 그로부터 7년 뒤. 캄보디아 정부와 앙코르와트 유적 인근 땅 4만㎡(1만 2000여 평)의 30년 무상 사용계약을 맺으면서 스님의 희망은 구체화됐다. 2004년 국제개발협력 NGO 로터스월드(Lotus World)를 법인으로 등록했고 2006년 캄보디아아동센터가 개원했다. 현재 로터스월드는 캄보디아는 물론 미얀마와 라오스에서 교육과 의료, 환경개선, 사회적 기업 설립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난 연말 경기 수원시 보현선원에서 로터스월드 이사장인 스님을 만났다. ―무상 사용계약은 기적처럼 들린다. “2003년 기업인들과 캄보디아를 방문했는데 컴퓨터를 지원해 달라는 게 현지 요청이었다. 그런데 사업 전망이 없는지 모두 발을 빼더라. 약속해 놓고 안 지키면 그게 건달 아닌가 싶어 사비로 지원했다. 그 신뢰가 바탕이 됐고 캄보디아 현지 대사관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 땅이 유적 인근에서 캄보디아 정부가 소유한 마지막 땅이라니 기적이 맞다.” ―로터스월드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연꽃처럼 나쁜 것에 물들지 말자, 불교적으로는 정토(淨土)를 만들자는 바람이 담겨 있다.” 현재 캄보디아아동센터는 100명 이상 수용할 수 있는 남녀기숙사를 비롯해 교실 6칸과 도서관, 식당, 게스트 하우스가 있다. 시설 내에 ‘김안과 병원’을 개원해 2000여명에게 무료 안과 수술을 해주기도 했다. 또 센터 외곽 프놈끄라움에는 수원시와 함께 하는 ‘수원마을’ 프로젝트를 통해 학교와 공동화장실, 우물, 마을회관 건립을 지원해왔다. ―교육 관련 활동이 많다. “수 백 개의 화장실을 짓고 맑은 물을 위해 우물을 팠지만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소용없더라. 아이들에게 신발 신기는데 3년, 젓가락으로 밥을 먹도록 하는데 3년 걸렸다. 교육이 뒷받침되지 않은 구호활동은 의타심만 키운다. 교육이 지속가능성이다.” ―의료 부문 성과는 어떤가. “캄보디아는 자외선이 강해 실명 위기에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나중에는 우리 센터에 오면 눈을 뜬다는 소문이 전국에 났다. 한마디로 심 봉사 눈 뜨는 거지.” ―로터스월드를 비롯해 지구촌공생회, 프라미스 등은 불교계의 대표적인 NGO다. 하지만 개신교나 가톨릭에 비해 부족한 점이 많다는 지적이다. “이웃종교에 비하면 아직 부끄러운 수준이다. 재정과 시스템에서 개선할 점이 많다. 조계종 차원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종단의 주요 사찰이 한 분야, 한 지역을 맡아주는 것도 방법이다.” ―지난해 조계종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았는데. “총무원 호법부장과 총무부장 등 종단의 주요 요직을 거친 입장에서 남 탓만 할 수는 없다. 나도 허물이 크다. 옛날처럼 투쟁하고 싸우는 게 아니라 좋은 일로 갚고 싶다.” ―평소 좋아하는 경전의 구절은? “출가결심 뒤 찾아간 해인사에서 성철 스님(1912~1993)을 뵐 기회가 있었는데 ‘너의 존재가치가 뭐냐’고 묻더라. 멍 하니 있는데, 노장 왈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이익 되게 하느냐가 네 가치’라고 하더라. 이게 불교의 전부 아닌가 생각한다.” ―불교계를 포함한 지도자들에게는 어떤 모습이 필요한가. “2600여 년 전 부처님은 이미 ‘세상은 변한다. 쉼 없이 정진하라’고 했다. 범부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부처님 혜안에는 그때 이미 보인 거다. 미셀 오바마의 ‘비커밍’을 보니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늘 신문과 책, 비전속에서 살았다고 평했더라. 그게 지도자의 중요한 덕목이다. 지도자들은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을 읽고, 미래세대를 위한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서가에 문명과 역사를 다룬 책들이 적지 않다. “유발 하라리, 하도 유명해서 책을 갔다 놨는데 이제 ‘하라리 신도’가 됐다.(웃음) 문명과 역사에 대한 식견이 있다면 누구의 것이든 배워야 한다.” 수원=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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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례는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을 발견하는 여정입니다”

    《사랑과 자비는 종교인의 으뜸 덕목이다. 종교인을 둘러싼 여러 논란에도 헌신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신년기획으로 해외를 중심으로 사랑과 자비의 길을 걸어가는 종교인들을 4회에 걸쳐 만난다.》스페인 레온주 ‘라바날 델 카미노’ 베네딕도 수도원의 인영균 신부(53). 천년 세월 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신앙과 삶의 구원을 위해 걸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지키고 있는 유일한 한국인 신부다. 이 순례길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야고보(스페인 식 이름은 산티아고)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북서쪽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한다. 특히 프랑스 남부 생장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목적지에 이르는 800여 km는 프랑스 길로 불린다. 인 신부가 활동하는 수도원은 목적지의 3분의 2 지점에 있다. 한국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그를 최근 서울 중구 왜관수도원 서울분원에서 만났다.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본원장과 서울 장충동 분원장 등을 지낸 그는 2016년 이곳으로 파견됐다. ―프랑스 길은 다른 코스와 달리 영적인 길로 불린다. “9세기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기적적으로 발견된 뒤 유럽 전역에서 순례자들이 영적 힘에 끌려 걸어오기 시작했다. 가장 오래된 이 길에서는 과거 순례자들의 신앙은 물론 고통과 땀, 역사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든 안 믿든, 많은 순례자들이 놀라운 것들을 체험한다.” ―수도원은 어떤 역할을 하나. “현재 스페인과 독일 신부, 베네수엘라 출신 수사가 함께 일하고 있다. 5∼10월에 순례자의 집을 운영하며 숙식을 제공하는데, 이용자는 여건에 따라 비용을 기부하면 된다. 기도와 함께 원하면 상담을 해주고 있다. 단, 숙박 조건은 이틀 이상 묵는 것이다.”―왜 이틀 이상인가. “우리 수도원은 전체 여정에서 3분의 2 지점에 있다. 순례를 처음 시작할 때는 걷는 게 힘들지만 나중에는 관성화해 몸이 계속 앞으로 가자고 한다. 그럴 때 휴식을 취하며 자신의 경험과 고민을 대화로 나누면서 ‘큰 쉼표’를 찍어야 한다.” ―순례의 놀라운 체험을 말하는 이들이 많다. 어떤 이유인가. “순례자는 자신의 집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신분이 순례자로 바뀐다. 국적과 종교, 나이와 성별, 직업과 빈부는 관계없다. 순례길에서는 신앙적 체험뿐 아니라 여러 놀라움을 만날 수 있다. 언어가 달라도 대화가 이뤄진다. 절뚝거리면 누군가 치료를 도와주고, 길을 잘못 들어서면 제대로 된 곳까지 차를 태워준다. 길에서 만나는 이유 없는 친절은 순례자이기 때문에 이뤄지는 것이다.” ―한국인 순례자는 자주 만나나. “거의 매일 만났다. 절반은 가톨릭 신자이지만, 나머지는 개신교와 불교 신자, 신앙이 없는 분들로 다양했다.” ―순례자를 위해 조언을 해 준다면…. “대부분 너무 바쁘다. 순례는 무작정 걷거나 목표 달성을 위한 게 아니다. 아직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선물’로 발견하기 위한 것이다. 길에 맡기면 된다.” ―특히 한국인 순례자들이 계획적일 것 같다. “(웃음) 오랜 습관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룹으로 오지 말라, 목표 세우지 말라, 만남과 헤어짐에 두려워하지 말라, 멈춰라, 이런 조언들을 자주 한다. 그룹으로 오거나 목표를 세우면 얽매이고 무리하기 쉽다.” ―모든 사람을 위한 조언을 해 달라.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순례, 카미노(길)는 가짜다. 순례를 마친 뒤 당신이 출발했던 삶의 자리로 돌아갔을 때 당신의 진정한 카미노가 시작될 것이다. 비신앙인이라면 삶의 근본적 이유, 인간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 아닐까? 내가 내 힘으로만 사는 게 아니었다는 걸 느끼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신앙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에 한 발 한 발 더 다가서는 길을 찾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다 지치면 다시 카미노를 찾으면 된다.”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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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티아고 순례길’ 지키는 유일한 한국인 신부…“목표 세우지 말고 길에 맡겨라”

    《사랑과 자비는 종교인의 으뜸 덕목이다. 종교인을 둘러싼 여러 논란에도 헌신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신년기획으로 해외를 중심으로 사랑과 자비의 길을 걸어가는 종교인들을 4회에 걸쳐 만난다.》 스페인 레온 주 ‘라바날 델 카미노’ 베네딕도 수도원의 인영균 신부(53). 1000년 세월 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신앙과 삶의 구원을 위해 걸었던 산티아고 순례 길을 지키고 있는 유일한 한국인 신부다. 이 순례 길은 예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였던 야고보(스페인 식 이름은 산티아고)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북서쪽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한다. 특히 프랑스 남부 생장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목적지에 이르는 800여㎞는 프랑스 길로 불린다. 인 신부가 활동하는 수도원은 목적지의 3분의2 지점에 있다. 한국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그를 최근 서울 중구 분도회관에서 만났다.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본원장과 서울 장충동 분원장 등을 지낸 그는 2016년 이곳으로 파견됐다. ―프랑스 길은 다른 코스와 달리 영적인 길로 불린다. “9세기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기적적으로 발견된 뒤 유럽 전역에서 순례자들이 영적 힘에 끌려 걸어오기 시작했다. 가장 오래된 이 길에서는 과거 순례자들의 신앙은 물론 고통과 땀, 역사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든 안 믿든, 많은 순례자들이 놀라운 것들을 체험한다.” ―수도원은 어떤 역할을 하나. “현재 스페인과 독일 신부, 베네수엘라 출신 수사가 함께 일하고 있다. 5~10월까지 순례자의 집을 운영하며 숙식을 제공하는데, 이용자는 여건에 따라 비용을 기부하면 된다. 기도와 함께 원하면 상담을 해주고 있다. 단, 숙박 조건은 이틀 이상 묶는 것이다.” ―왜 이틀 이상인가. “우리 수도원은 전체 여정에서 3분의2 지점에 있다. 순례를 처음 시작할 때는 걷는 게 힘들지만 나중에는 관성화해 몸이 계속 앞으로 가자고 한다. 그럴 때 휴식을 취하며 자신의 경험과 고민을 대화로 나누면서 ‘큰 쉼표’를 찍어야 한다.” ―순례의 놀라운 체험을 말하는 이들이 많다. 어떤 이유인가. “순례자는 자신의 집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신분이 순례자로 바뀐다. 국적과 종교, 나이와 성별, 직업과 빈부는 관계없다. 순례 길에서는 신앙적 체험 뿐 아니라 여러 놀라움을 만날 수 있다. 언어가 달라도 대화가 이뤄진다. 절뚝거리면 누군가 치료를 도와주고, 길을 잘못 들어서면 제대로 된 곳까지 차에 태워준다. 길에서 만나는 이유 없는 친절은 순례자이기 때문에 이뤄지는 것이다.” ―한국인 순례자는 자주 만나나. “거의 매일 만났다. 절반은 가톨릭 신자이지만, 나머지는 개신교와 불교 신자, 신앙이 없는 분들로 다양했다.” ―순례자를 위해 조언을 해 준다면. “대부분 너무 바쁘다. 순례는 무작정 걷거나 목표 달성을 위한 게 아니다. 아직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선물’로 발견하기 위한 것이다. 길에 맡기면 된다.” ―특히 한국인 순례자들이 계획적일 것 같다. “(웃음) 오랜 습관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룹으로 오지 말라, 목표 세우지 말라, 만남과 헤어짐에 두려워하지 말라, 멈춰라, 이런 조언들을 자주 한다. 그룹으로 오거나 목표를 세우면 얽매이고 무리하기 쉽다.” ―모든 사람을 위한 조언을 해 달라.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순례, 카미노(길)는 가짜다. 순례를 마친 뒤 당신이 출발했던 삶의 자리로 돌아갔을 때 당신의 진정한 카미노가 시작될 것이다. 비 신앙인이라면 삶의 근본적 이유, 인간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 아닐까? 내가 내 힘으로만 사는 게 아니었다는 걸 느끼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신앙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에 한발 한발 더 다가서는 길을 찾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다 지치면 다시 카미노를 찾으면 된다.”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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