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식

김갑식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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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갑식 부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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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6~2025-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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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세운동의 거점지 교회… 3·1운동과 기독교 관계 뜻깊어”

    한국 기독교 주요 연합기관과 교단들이 참여하는 ‘3·1운동 100년 한국교회 기념대회’가 다음 달 1일 오전 11시 서울광장을 중심으로 열린다. 대회 준비위원장을 맡은 윤보환 목사(60)를 최근 인천 남동구 영광교회에서 만났다. 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장과 감리교 중부연회 감독을 지낸 그는 교계의 대표적인 부흥사로 지난해 10월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회개하는 ‘한국 교회 일천만 기도대성회’를 주도했다.―3·1운동 100주년이 남다른 이유는…. “3·1운동은 기독교만의 운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기독교 신자가 전체 인구의 1.5%(20만 명)에 불과했지만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고 주도적 역할을 감내했다. 3·1운동 이후 100만 전도 운동을 펼치는 영적(靈的) 부흥이 일어났다.”―제암리 학살 사건으로 상징되는 피해가 적지 않은데 부흥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교회는 사찰과 달리 도시에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만세운동의 거점이 됐다. 피해가 컸지만 3·1운동을 계기로 기독교가 민족과 함께하는 종교로 자리 잡았다는 의미다.”―지난해 회개운동을 주도했는데…. “1938년 신사참배는 한국교회가 고개 숙인 영적 국치일(國恥日)이다. 개별 교단이나 목회자의 회개는 있었지만 우리 교회 전체가 회개한 적은 없었다.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우리 교회가 민족교회로 선한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반성이었다.”―3·1운동의 현재적 의미는…. “개인적으로 3·1운동의 핵심 키워드는 민족해방, 민중계몽, 청년의 세계화라고 본다. 이 땅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는 데 큰 지장이 없었기 때문에 왜 해방돼야 하고, 민족자결이 필요한지 잘 몰랐다. 그런데 지식인과 학생들이 부모와 가족은 물론 전 국토와 해외의 동포들에게 이를 알린 것이다. 2·8독립선언처럼 해외 유학생들이 독립을 외치면서 다시 국내의 젊은이와 공조했고, 임시정부와 해외에서 젊은 리더십이 창출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과 김구 주석 모두 40대였다.”―100주년 대회는 어떻게 치러지나. “우리 교회의 과거 현재 미래를 살펴볼 수 있는 대회가 될 것이다. 3·1운동 재연도 있고 한국교회의 결의문도 발표될 것이다. 학생과 젊은이들이 참여해 기독청년의 세계화를 다짐하는 시간도 있다. 이영훈 목사(여의도 순복음교회)가 설교를, 저와 예장 통합의 림형석 목사가 5분 메시지를 맡았다.”―집회 인원 예상은…. “규모가 중요하지는 않다. 대형 교회뿐 아니라 작은 교회의 자발적인 참여가 중요하다. 지난해 10월 행사에는 시골 작은 교회 목사님과 신자들이 승합차로 몇 명, 몇십 명씩 올라왔다. 그러면서 ‘저는 티끌이 되겠습니다. 태산을 만들어주세요’라는 문자를 보내더라. 태산까지는 몰라도 이런 정성을 잘 살리는 대회로 만들 생각이다.”―부흥이라고 하면 일방적 전도와 부정적 의미의 열광적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의사는 환자와 질병, 철학자는 사상, 윤리학자는 윤리적인 삶에 빠져 살아야 한다. 기독교 목회자나 신자가 최고의 가치인 하나님에 대해 몰입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웃음)”―교회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이 돼야 하나. “한국 교회는 일제강점기는 광복, 6·25전쟁 이후에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예수 믿으면 잘살 수 있다’는 목표를 우리 사회에 제시했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는 그런 목표를 주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요즘 사회는 정신과 영성의 혼돈세계다. 영성적인 부분을 통해 사람들이 작은 행복을 누릴 수 있고, 더 큰 행복을 향해 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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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재형 선생 추모비 건립 독립운동가 후손 돕기 앞장

    지난해 설립 30주년을 맞아 소외된 이웃을 위한 30가지 나눔 축제로 화제를 모은 새에덴교회(경기 용인시 죽전로)는 민족과 역사를 위한 소명에 충실한 교회다. 이 교회는 2007년부터 해외의 6·25전쟁 참전용사를 비롯해 국내외 참전용사 3500여 명을 초청한 보은행사를 통해 민간 외교에 기여해왔다. 최근 교회의 발걸음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돕기, 일본 교회의 사과와 한일 화해, 3·1운동과 독립운동 후손 돕기 등 다방면으로 향하고 있다. 그동안 교회는 경기도 광주 소재 나눔의집과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후원하면서 할머니들의 건강과 생활을 도왔다. 100주년을 맞는 3·1절을 앞두고 오야마 레이지 목사를 비롯한 일본 기독교 지도자 20명이 방한한다. 이들은 27일 새에덴교회 특별 예배에서 사죄문 발표에 이어 사죄의 절을 올린다. 제암리 교회와 순교자기념관, 서대문형무소와 안중근의사기념관 방문에 이어 3월 1일 3·1운동 100주년 한국교회 기념대회에 참석해 과거사에 대한 공개적 사죄도 예정돼 있다. 소강석 담임목사가 이사장으로 있는 한민족평화나눔재단은 최근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의 추모비 건립과 독일운동가 후손 돕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함경도 경원 출생의 선생은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연해주로 이주해 군납 사업으로 큰 부자가 된 뒤 그 돈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그는 항일 의병조직 동의회, 한인 신문 대동공보, 한인 실업인 모임으로 위장한 항일단체 권업회를 이끌었고, 30여 개 학교를 세워 동포들의 교육에 힘썼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계획하고 지원한 그는 1920년 4월 일본군이 연해주 일대의 한인촌을 습격해 살상을 자행한 4월 참변 때 순국했다. 재단은 8월 광복절 즈음에 선생이 순국한 러시아 우수리스크에 추모비를 세울 예정이다.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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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도-위안부 망언 일삼는 日… 3·1운동 아직 끝나지 않았다”

    충북 영동군 영동읍 중앙로에는 ‘3·1운동 기념비’가 서 있다. 1972년 동아일보가 영동 일대에서 펼쳐진 항일 독립만세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 기념비의 관리에는 대(代)를 이은 부자(父子)의 헌신적인 노력이 담겨 있다. 기념비 앞에서 2대째 자전거 판매·수리점을 운영하는 신달식 씨(61)와 그의 부친 신동우 씨(1994년 74세로 작고)가 주인공이다. 19일 만난 그의 기념비에 대한 애착은 남달랐다. ―어떻게 기념비와 인연을 맺게 됐나. “1986년 아버지가 소일 삼아 기념비를 돌보기 시작했는데 작고하면서 자연스럽게 제 일이 됐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기념비를 한 번이라도 읽어보고 3·1운동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곧 3·1운동이 100주년이다. “일본 지도자들의 독도 망언이나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일본의 태도를 보면 우리의 3·1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다. 일본이 과거의 만행에 대해 언제 제대로 사죄할지 의문이다. 그런데 젊은 세대가 먼저 우리 역사를 잊는 것 같아 안타깝다.” ―혼자서 기념비를 돌보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아무래도 혼자서는 역부족이다. 군에서 기념비의 보수, 관리에 신경을 더 써 주면 좋겠다. 비를 세운 지 거의 50년이 돼 글씨도 알아보기 어렵다. 요즘 기술이 좋다니 조금 투자하면 기념비에 새겨진 3·1운동의 뜻을 사람들에게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인가. “주변이 사람들 왕래가 잦은 곳이라 노점과 주차 문제로 어려움이 있다. 대부분 잘 이해하는 편이지만 ‘네가 무슨 상관이냐’는 식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3대째 관리는 어떤가. “제게는 영동의 교통수단을 책임진다는 자부심이 있는데 전자회사에 취업한 아들은 자전거가 얼마나 좋은지 아직 잘 모른다. 아들이 나이 들어 같이 일하면 3대째 기념비를 관리할 수도 있겠다.(웃음)”영동=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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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이 조선불교 망쳐”… 만공스님, 日총독 면전에서 호통

    만공(滿空·1871∼1946) 스님은 우리 선불교를 잇는 고승이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후원자로 알려져 있다. 특히 1937년 스님이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의 면전에서 일본의 불교정책을 비판한 일은 유명하다. 최근 만공 스님의 체취가 남아 있는 충남 예산군 수덕사를 찾아 경허·만공선양회장을 맡고 있는 옹산 스님(75)을 만났다. 옹산 스님은 만공 스님의 손자 상좌가 된다. ―스승인 원담 스님(1926∼2008)이 생전 만공 스님에 얽힌 일화를 얘기했나. “은사가 어렸을 때 얘기를 가끔 들려주셨다. 서울 삼청동의 한 공원에서 노장님(만공 스님)과 만해 한용운 스님이 만나는 것도 봤다고 한다. 한 달 전 92세로 입적한 수연 스님은 은사가 돈 자루를 들었다 놨다 하며 독립운동 자금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만공 스님이 선학원을 창건한 이유는 무엇인가. “총독부가 사찰령을 통해 조선 불교를 왜색화했다. 그 지시를 받기 싫어 사찰이 아닌 선학원을 세운 것이다. 선학원의 조선고승법회는 부처님의 말씀을 나누는 의미도 있었지만 항일운동을 모색하는 장이기도 했다.” 불교계에서 만공 스님의 ‘할(喝·깨달음 등을 전하기 위해 지르는 소리)’은 이렇게 전해진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전국 사찰 31개 본산(本山) 주지 등을 불러들여 불교정책을 전달하고 건의사항을 듣는 회의를 마련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만공 스님의 사자후가 터졌다. “청전이 본연하거늘 어찌하여 산하대지가 나왔는가! 전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우리 조선 불교를 망친 사람이다. 일본 불교를 본받아 대처, 음주, 식육을 마음대로 하게 하여 계율을 파계하고 불교에 큰 죄악을 입힌 사람이다. … 정부에서 간섭하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진흥책이다.” ―만공 스님의 할은 놀라운 일이다. “당시 회의에서 일본화된 사찰의 주지들이 총독에게 절을 하고 아첨을 일삼았다. 하지만 만공 스님은 꼿꼿한 자세로 일본의 불교정책을 비판했다. 셋방만 살아도 주인집 눈치를 본다고 하는데, 나라까지 잃었는데 총독 앞에서 이런 호통을 칠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문인이자 비구니로 잘 알려진 일엽 스님(1896∼1971)도 만공 스님과 인연이 있다. “일엽 스님은 머리는 경북 김천에서 깎았지만 만공 스님의 그릇과 법력을 흠모해 스님의 제자가 됐다. 출가 전 일엽 스님이 일본인과 결혼해 아들을 뒀는데, 그분이 10여 년 전 입적한 일당 스님이다. 일당 스님은 어릴 때 일본인 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만공 스님의 군자금 심부름을 했다는 말을 자주 했다.” ―만공 스님의 독립유공자 심사는 어떻게 됐나. “만공 스님의 할 사례는 긍정적이지만 종교적인 의식이지 독립운동으로 보기 어렵고, 독립자금 후원도 입증이 어렵다는 회신을 받았다. 하지만 독립자금을 주고 영수증을 받았겠나?” 이날 동행한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는 “불교계 독립운동에서 만해 스님의 역할이 아버지였다면 만공 스님은 어머니였다”며 “선학원 설립과 총독 앞에서의 ‘할’, 독립운동 지원으로 이어지는 만공 삶의 화두는 우리 불교와 나라를 되찾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예산=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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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갑식의 뫔길]대통령이 질 역사의 짐

    불교와 개신교, 가톨릭, 원불교, 천도교, 유교, 한국민족종교협의회 등 7대 종단이 참여하는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가 있다. 이 모임에서 가장 목소리가 크고 곧잘 웅변조로 얘기하는 이가 천도교 최고지도자인 이정희 교령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올해에는 종교계 행사가 잇달아 열려 그의 목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차례가 되면 어김없이 나오는 얘기가 있다. 천도교와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1861∼1922·사진)가 없었다면 3·1운동이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백범 김구 주석은 해방 뒤 환국하자마자 우이동 의암 묘소를 찾았고, 이승만 대통령도 두 차례나 방문했다. 정부에서 100주년을 맞는 3·1운동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문재인 대통령도 반드시 찾아야 한다.” 종단 지도자들이 함께한 자리에서의 대통령 방문 요청이라 미묘한 분위기가 감돌 때도 있다. 한국천주교주교회 의장으로 KCRP 대표회장을 맡고 있는 김희중 대주교는 미루어 짐작할 때 난처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요즘 KCRP는 3·1운동 100주년 행사는 물론이고 종교계의 남북 교류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소속된 가톨릭은 3·1운동에서 일부 신자의 참여를 빼면 뚜렷한 활동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 교령의 발언에 과장이 있고 결론이 대통령 방문 요청이라 어색할 수 있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종교계가 3·1운동에 힘을 모았다지만 천도교 없는 3·1운동은 상상할 수 없다. 1905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제3세 교주에 취임한 의암은 교세 확장과 함께 교육, 문화 활동을 후원하면서 국권 회복을 도모했다. 기록에 따르면 3·1운동 하루 전인 1919년 2월 28일 그는 비장했다. 종단을 이끌 후계자까지 정한 유시문(諭示文)을 발표하고 이른 새벽 청년들을 모아 마지막 훈시를 했다. “나는 지금 독립의 종자(種子)를 심으러 간다. 너희들은 3개 원칙(비폭력, 대중화, 일원화)을 끝까지 지켜라. 오늘의 동지가 내일 배신해 해를 끼칠 자도 있으니 매사를 성실히 참고 견뎌라. 우리 국권 회복에 대해서는 차후 세계 지도의 색채가 바뀔 때 각 열국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성취시킬 날이 올 것이다.” 의암은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하다 경찰에 체포돼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나 치료받던 중 세상을 떴다. 열강이 앞선 과학기술과 종교, 무력을 앞세워 밀려오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 이른바 서학(西學)에 맞서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는 기치를 내건 동학(東學)의 운명은 파란만장했다.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1824∼1864)가 ‘삿된 도로 세상을 어지럽힌 죄’로 처형된 데 이어 2세 교주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1827∼1898)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해월의 별명은 ‘최 보따리’였다. 농민군이 일제와 관군의 총칼에 밀려 패배하고 동학이 불법화된 가운데 그는 언제든지 도주할 수 있도록 괴나리봇짐을 메고 다니면서 무려 36년간 삼남(三南) 일대를 돌며 도피 생활 속에 교단을 정비했다. 서학과 동학, 가톨릭과 천도교의 운명은 3·1운동 이후 100년이 흐르면서 극명하게 갈렸다. 지난해 나온 한국천주교회 통계에 따르면 가톨릭 신자는 581만 명에 이른다. 천도교는 교단 측에서 교인 수를 밝히기를 꺼릴 정도로 위축됐다. 그 대신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교인 수가 남북 300만에 이를 정도로 최대 종교였다. ‘동학, 천도교 하면 대대손손 망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철저하게 탄압당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김 대주교가 20일 한국 가톨릭교회의 반성을 담은 담화를 발표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가톨릭이 우리 역사에 진 빚에 대한 반성일 수도 있다. 김 대주교는 이 담화에서 조선 후기 혹독한 박해 끝에 신앙의 자유를 얻은 한국 천주교회는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냈음을 전제하면서 “외국 선교사들로 이루어진 한국 천주교 지도부는 교회를 보존하고 신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며 정교분리 정책을 내세워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금지했다”며 “나중에는 신자들에게 일제의 침략 전쟁에 참여할 것과 신사 참배를 권고하기까지 했다. 민족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고 저버린 잘못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성찰하며 반성한다”고 밝혔다. 개신교는 지난해 여러 연합기관과 교단들이 모여 일제강점기의 신사 참배를 회개하는 대규모 집회를 가진 바 있다. 종교의 흥망성쇠는 여러 원인이 있는 만큼 함부로 얘기할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남북 분단 등으로 이어진 ‘역사의 충격’이 천도교 쇠락의 한 원인은 충분히 됐을 것이다. 지난해 10월 문 대통령의 바티칸 미사 참석과 TV 생중계가 논란이 됐다. 한반도 평화라는 취지가 있지만 대통령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에 다른 종교계에서는 불편한 기색도 내비쳤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동학, 천도교에 적지 않은 역사의 빚을 지고 있다. 문 대통령의 의암 묘소 참배는 어색한 일이 아니다. 대통령은 종교를 떠나 우리 역사의 짐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무겁게 져야 할 자리이기 때문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한 대표적 독립운동가를 찾는 것은 논란이 될 일이 아니다.김갑식 문화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dunanworld@donga.com}

    • 2019-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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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운동 주도한 기독교, 비로소 민족의 삶 속에 자리잡아”

    한국 기독교(개신교) 주요 연합기관과 교단들이 참여하는 ‘3·1운동 100년 한국교회 기념대회’가 다음 달 1일 오전 11시 서울광장을 중심으로 열린다. 대회 준비위원장을 맡은 윤보환 목사(60)를 13일 인천 남동구 영광교회에서 만났다. 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장과 감리교 중부연회 감독을 지낸 그는 교계의 대표적인 부흥사로 지난해 10월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회개하는 ‘한국 교회 일천만 기도대성회’를 주도했다. ―3·1운동 100주년이 남다른 이유는…. “3·1운동은 기독교만의 운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기독교 신자가 전체 인구의 1.5%(20만 명)에 불과했지만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고 주도적 역할을 감내했다. 3·1운동 이후 100만 전도 운동을 펼치는 영적(靈的) 부흥이 일어났다.” ―제암리 학살 사건으로 상징되는 피해가 적지 않은데 부흥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교회는 사찰과 달리 도시에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만세운동의 거점이 됐다. 피해가 컸지만 3·1운동을 계기로 기독교가 민족과 함께하는 종교로 자리 잡았다는 의미다.” ―지난해 회개운동을 주도했는데…. “1938년 신사참배는 한국교회가 고개 숙인 영적 국치일(國恥日)이다. 개별 교단이나 목회자의 회개는 있었지만 우리 교회 전체가 회개한 적은 없었다.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우리 교회가 민족교회로 선한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반성이었다.” ―3·1운동의 현재적 의미는…. “개인적으로 3·1운동의 핵심 키워드는 민족해방, 민중계몽, 청년의 세계화라고 본다. 이 땅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는 데 큰 지장이 없었기 때문에 왜 해방돼야 하고, 민족자결이 필요한지 잘 몰랐다. 그런데 지식인과 학생들이 부모와 가족은 물론 전 국토와 해외의 동포들에게 이를 알린 것이다. 2·8독립선언처럼 해외 유학생들이 독립을 외치면서 다시 국내의 젊은이와 공조했고, 임시정부와 해외에서 젊은 리더십이 창출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과 김구 주석 모두 40대였다.” ―100주년 대회는 어떻게 치러지나. “우리 교회의 과거 현재 미래를 살펴볼 수 있는 대회가 될 것이다. 3·1운동 재연도 있고 한국교회의 결의문도 발표될 것이다. 학생과 젊은이들이 참여해 기독청년의 세계화를 다짐하는 시간도 있다. 이영훈 목사(여의도 순복음교회)가 설교를, 저와 예장 통합의 림형석 목사가 5분 메시지를 맡았다.” ―집회 인원 예상은…. “규모가 중요하지는 않다. 대형 교회뿐 아니라 작은 교회의 자발적인 참여가 중요하다. 지난해 10월 행사에는 시골 작은 교회 목사님과 신자들이 승합차로 몇 명, 몇십 명씩 올라왔다. 그러면서 ‘저는 티끌이 되겠습니다. 태산을 만들어주세요’라는 문자를 보내더라. 태산까지는 몰라도 이런 정성을 잘 살리는 대회로 만들 생각이다.” ―부흥이라고 하면 일방적 전도와 부정적 의미의 열광적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의사는 환자와 질병, 철학자는 사상, 윤리학자는 윤리적인 삶에 빠져 살아야 한다. 기독교 목회자나 신자가 최고의 가치인 하나님에 대해 몰입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웃음)” ―교회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이 돼야 하나. “한국 교회는 일제강점기는 광복, 6·25전쟁 이후에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예수 믿으면 잘살 수 있다’는 목표를 우리 사회에 제시했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는 그런 목표를 주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요즘 사회는 정신과 영성의 혼돈세계다. 영성적인 부분을 통해 사람들이 작은 행복을 누릴 수 있고, 더 큰 행복을 향해 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인천=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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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분처럼… 우리도 사랑하고 감사합시다”

    “오늘 이 자리는 그저 그분을 추억하는 자리가 아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겪는 어려움과 도전이 있겠지만,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하는 메시지를 통해 남기신 사랑과 감사의 삶을 지금 여기에서 우리도 살아 나가야 합니다.” 16일 김수환 추기경 선종(善終·별세를 의미하는 가톨릭 용어) 10주기를 맞아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된 추모미사에서 나온 염수정 추기경의 강론이다. 시대의 등불이자 평생 사랑과 나눔을 실천했던 김수환 추기경의 따뜻한 미소는 여전했다. 미사가 진행된 제대 앞에는 2007년 김 추기경이 직접 그리고, ‘바보야’라고 쓴 자화상 원본이 보였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염 추기경이 주례를 맡은 이날 미사는 한국 천주교 주교단과 사제단이 공동 집전했고 3000여 명이 참석했다. 성당 내부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명동대성당 뒤 성모동산에 마련된 스크린을 통해 미사를 지켜봤다. 미사 후 이어진 추모식에서는 김수환 추기경 추모 영상 ‘내 나이 85’를 상영했다. 주한교황대사 앨프리드 슈에레브 대주교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인 김희중 대주교가 추모사를 낭독했고, 문재인 대통령의 추모사를 문화체육관광부 김용삼 제1차관이 대독했다. 슈에레브 대주교는 “먼저 기쁜 마음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격려와 특별한 인사를 전한다. 특히 교황님께서는 김 추기경이 교회와 이 땅의 민주화 역사에 영혼의 참된 목자로서 기여하신 특별한 역할을 상기하셨다”라고 전했다. 문 대통령은 “김 추기경님은 자신을 ‘바보’라고 부르셨지만, 우리는 추기경님을 통해 낮은 자리에서 섬기며 사랑을 전한 예수님을 보았다”라며 “오늘 추기경님께 지혜를 물을 수 있다면, 변함없이 ‘만나고, 대화하고, 사랑하라’고 하실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만나고 대화하겠다”라고 했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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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김수환 추기경 선종 10주기 추모미사

    “오늘 이 자리는 그저 그분을 추억하는 자리가 아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겪는 어려움과 도전이 있겠지만,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하는 메시지를 통해 남기신 사랑과 감사의 삶을 지금 여기에서 우리도 살아 나가야 합니다.” 16일 김수환 추기경 선종(善終·별세를 의미하는 가톨릭 용어) 10주기를 맞아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된 추모미사에서 나온 염수정 추기경의 강론이다. 시대의 등불이자 평생 사랑과 나눔을 실천했던 김수환 추기경의 따뜻한 미소는 여전했다. 미사가 진행된 제대 앞에는 2007년 김 추기경이 직접 그리고, ‘바보야’라고 쓴 자화상 원본이 보였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염 추기경이 주례를 맡은 이날 미사는 한국 천주교 주교단과 사제단이 공동 집전했고 3000여 명이 참석했다. 성당 내부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명동대성당 뒤 성모동산에 마련된 스크린을 통해 미사를 지켜봤다. 미사 후 이어진 추모식에서는 김수환 추기경 추모 영상 ‘내 나이 85’를 상영했다. 주한교황대사 알프레드 슈에레브 대주교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인 김희중 대주교가 추모사를 낭독했고, 문재인 대통령의 추모사를 문화체육관광부 김용삼 제1차관이 대독했다. 슈에레브 대주교는 “먼저 기쁜 마음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격려와 특별한 인사를 전한다. 특히 교황님께서는 김 추기경이 교회와 이 땅의 민주화 역사에 영혼의 참된 목자로서 기여하신 특별한 역할을 상기하셨다”라고 전했다. 문 대통령은 “김 추기경님은 자신을 ‘바보’라고 부르셨지만, 우리는 추기경님을 통해 낮은 자리에서 섬기며 사랑을 전한 예수님을 보았다”라며 “오늘 추기경님께 지혜를 물을 수 있다면, 변함없이 ‘만나고, 대화하고, 사랑하라’고 하실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만나고 대화하겠다”라고 했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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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드러운 성품 닮은… ‘김수환 서체’ 나왔다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서로에게 밥이 되어 주십시오.’ 가톨릭출판사가 14일 ‘김수환 추기경(사진) 서체’를 공개했다. 이 서체는 16일 선종(善終·별세를 의미하는 가톨릭 용어) 10주기를 맞는 김 추기경의 생전 육필 원고를 바탕으로 1년여의 작업 끝에 완성됐다. 이날 공개한 글씨에는 동아일보 요청에 따라 김 추기경이 생전 사람들에게 강조해온 말들을 사용했다. 글씨 끝에는 김 추기경이 생전에 자주 그린 바보 자화상과 이름도 보인다. 가톨릭출판사는 서체 개발에 대해 “글씨란 그 사람의 삶과 정신이 녹아든 마음의 그릇”이라며 “김수환 추기경 서체는 이제는 직접 만날 수 없는 김 추기경님을 곁에 있는 듯 느끼고, 그분의 삶과 정신을 되새기도록 해 줄 매개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서체는 김 추기경 친필 가운데 자주 나오는 글자를 추려낸 뒤 데이터 작업을 거쳐 한글 1만 1000여 자를 뽑아내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펜의 종류에 따라 전반적인 느낌이 달라지는데 이 서체에서는 가는 수성 펜의 부드러운 느낌을 살렸다. 김 추기경은 생전 만년필보다는 일반 볼펜이나 수성 펜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출판사 측은 “필체가 디지털화했을 때 느낌이 딱딱해지거나 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부드러운 느낌을 줄 수 있도록 주의했다”고 했다. 출판사 측은 이 서체가 저작권자 허락 없이 사용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단, 공공적인 목적이라면 반드시 출판사와 협의를 거쳐 달라고 당부했다. 22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중림로 가톨릭출판사 마리아홀에서는 ‘김수환 추기경 서체 봉헌식’이 열릴 예정이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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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혈병으로 떠난 천사들 위해 첫 어린이 공원묘원 15일 열어

    백혈병 소아암으로 세상을 떠난 어린이들을 위한 공원묘원이 국내에서 처음 문을 연다. 개신교 단체인 하이패밀리는 세계 소아암의 날인 15일을 맞아 경기 양평군 가족테마파크 ‘더블유 스토리(W-Story)’에 어린이 전문 화초장지인 ‘안데르센 공원묘원’을 연다고 12일 밝혔다. 묘원은 1155m²(약 350평)로 화장한 유골을 화초 주변에 묻는 화초장 방식으로 장례를 진행한다. 이 사업은 하이패밀리가 주도하고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 국제사랑의봉사단이 참여한다. 하이패밀리 대표인 송길원 목사는 “부모보다 먼저 간 자식이라는 이유로 장례도 치르지 않고 재를 뿌리는 경우가 많다”며 “사후에도 어린이 인권이 보장돼야 한다”고 말했다. 의대를 중퇴한 가수 윤형주 씨는 “의사가 됐다면 아이들의 투병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미안함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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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흘 연속 홍천 달군 항일함성… 8열사의 충혼 산천 흔들어

    강원 홍천군 내촌면 동창로(東倉路)에 위치한 기미만세공원은 100년 전 3·1운동의 뜨거운 현장이었다. 공원 입구에 들어서자 순국 8열사(八烈士) 기념비가 눈에 들어왔다. 비에는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일제의 총탄에 희생된 이순극 전영균 전기홍 이기선 이여선 연의진 김자희 양도준 등 8열사의 이름이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공원 한쪽에 서 있는 ‘동창마을의 기미 만세상’에 새겨진 기록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 주었다. ‘1919년 4월 3일 정오 이 고장이 배출한 천도교인 김덕원 의사가 선봉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여 천지를 진동시켰으니 이날 이 거사는 온 마을을 태극기의 물결로 뒤덮이게 했다. 아아 어찌 잊으랴! 이날 동창마을 김덕원 의사와 함께 외친 5개 면민 수천의 피 끓는 함성과 일제 헌병의 총탄에 희생이 된 팔열사의 충혼의 넋을…! 여기 옷깃 여미며 추모한다.’ 문학평론가 윤병노 교수의 글로, 당시 동창마을을 뜨겁게 달구었던 항일의 함성과 그 열기를 가늠케 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면 소재지도 아닌 이곳에서 수천 명이 만세운동에 동참했고 8명이나 희생됐다는 사실이다.○ 홍천의 8열사 동창로의 옛 주소는 물걸리(物傑里). 이 지역은 조선시대 중종 때 대동미 창고가 있었던 이유로 물걸리보다는 동창마을로 불렸다. 물걸리라는 이름도 예사롭지 않아 마을 사람들에게 의미를 물었지만 정확하게 아는 이가 없었다. 동쪽 창고라는 뜻의 동창이나 물걸리라는 지명은 물자가 풍부하고 뛰어난 인물이 많이 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 가능성이 높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물걸리는 강원도 내륙 교통의 중심지로 홍천군의 내촌면 화촌면 서석면, 그리고 인제군의 기린면과 내면 등 인근 일대를 연결해 주는 사통팔달의 요지였다. 그래서 마방(馬房)과 상설시장, 주막이 들어섰고 주변 지역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서 자연스럽게 3·1운동의 중심이 됐다. 이 지역의 독립운동사를 다룬 기록들에 따르면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말경 조금 늦게 시작됐다. 내륙 깊숙이 위치했기 때문에 당시 경성(京城·서울)의 3·1운동과 이틀 뒤 고종의 인산(因山·장례)에 대한 소식이 전달되기까지 시간이 다소 걸린 탓이다. 물걸리의 천도교도인 김덕원 전성렬은 같은 교도 전우균 이문순을 연락책으로 삼아 인근 5개 면에 연락하며 거사를 준비했다. 그러던 중 홍천읍에서 4월 1일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들은 4월 3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마침내 약속한 3일이 되자 아침부터 사방에서 시위 군중이 모여들었다. 지금의 팔열각과 그 옆 다리목을 중심으로 마을을 가득 채운 인원은 최소 1000여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약방과 글방이 있던 전영균의 집에는 큰 태극기가 높이 게양됐고, 군중은 모두 손에 수기를 쥐고 있었다. 이문순이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뒤를 이어 만세 소리가 마을을 뒤흔들었다. 이후 지금의 초등학교 뒷길을 따라 도관리 헌병주재소 헌병 7명이 헌병 보조원 홍재호 박연흥을 앞세우고 들이닥쳤다. 헌병이 시위대를 향해 일제히 발포하니 시위 군중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군중은 남의 집으로 혹은 뒷산과 개울가로 몸을 피했지만 무참한 총격에 여러 사람이 쓰러졌다. 그 와중에 현장에서 8열사가 사망했고, 20여 명이 다치는 등 사상자가 발생했다. 물걸리 만세운동의 피해 규모가 컸던 것은 시위 군중이 많았던 데다 4월 1, 2일 홍천읍과 동면 등에서 일어난 시위의 영향 때문으로 풀이된다. 동면 시위 현장에서는 일경에 의해 2명이 목숨을 잃는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 김시종 사무국장은 “동창마을은 의병 운동과 동학농민전쟁을 거치면서 항일 의식이 강했다”라고 말했다. 일련의 만세운동이 벌어진 뒤 홍천군 전체에서 일제는 대대적인 검거 활동에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도 11일 내촌면 소재지인 도관리에서는 밤중에 수십 명이 산 위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부르는 등 항일의 뜨거운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 천도교와 기독교(개신교)의 연합 물걸리에 앞서 홍천읍과 북방면, 동면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졌는데 특히 홍천읍 만세시위는 천도교와 기독교가 공동으로 계획하고 추진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2017년 작고한 사학자 조동걸 교수는 저서 ‘태백 항일사(太白 抗日史)’에서 “강원도에서 기독교와 천도교가 공동으로 계획을 추진한 것은 횡성과 홍천읍의 경우뿐이다”며 “고종 인산에 참례하러 갔다가 3·1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 사람들에 의해 주도됐다”고 소개했다. 고종 황제 인산에 참례하러 갔다가 3·1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 감리교인 차봉철 서상우와 천도교인 오창섭 등 11인이 차봉철의 집에 모여 독립만세 시위를 결행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2차례 모임을 더 갖고 역할을 분담했다. 감리교회는 홍천읍, 천도교회는 북방면을 각각 맡아 홍천읍 장날인 4월 1일에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기독교도들은 태극기 수기를 만들고 천도교인들은 큰 태극기를 만들었다. 4월 1일이 되자 홍천읍과 북방면에서 주민들이 홍천읍 신장대리 장터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때마침 인근 농민들이 도로공사 부역으로 홍천읍에서 인제로 가는 방향으로 10리 정도 되는 곳에 동원돼 있어 부역 인부를 가장했다. 오후 1시경 기독교인이 준비한 작은 태극기들이 장꾼들에게 나뉘어졌다. 마침내 천도교인이 만든 커다란 태극기가 높이 솟아오르자 주도 인물들은 독립만세를 선창했고, 뒤를 이어 터질 듯한 만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다. 시위대는 장터에서 군청으로 나아갔다. 군청 앞에는 500명이 넘는 시위대가 모여들었다. 군청에 들어가 군수 김동훈을 찾으니 군수는 행방을 감추고 없었다. 이때 북방면에서 도로 부역을 하고 있던 농민들이 신작로를 따라 읍내로 들어왔다. 이들은 만세시위에 대한 정보를 받고 있었는데, 읍내에서 독립만세 시위가 터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삽과 괭이를 든 채 읍내로 달려왔다. 4개 마을에서 부역 나온 약 200명의 시위대는 읍내에 들어선 뒤 도망 중이던 군수 김동훈을 찾아내고는 그가 차고 있던 칼을 부러뜨리고, 시위대에 저항하던 군수의 손을 꺾었다. ‘항일 태백사’는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당시 곳곳에서 만세를 불러 홍천읍내가 마치 독립축제의 한마당 같았다고 기록했다. 또 군청에 모인 군중, 면사무소에 모인 군중, 군수와 맞서 다투던 농민, 시장에서 독립만세의 흥겨움에 취해 여기저기 모였던 군중 등이 한마음으로 시국을 논했다고 전했다. 그날 오후 춘천에서 수비대가 도착하자 숨죽이고 있던 현지 일제 헌병들은 시위대 체포에 나서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홍천 헌병분견소로 밀고 나아갔지만 일제의 총칼 앞에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고, 시위대 일부(33명)가 체포되면서 해산했다. 동면의 만세운동은 민씨 문중이 계획했지만 면민이 대거 참가했다. 4월 2일 만세시위로 기세가 오른 만세군중은 3일 홍천읍으로 진행하려고 했으나 일제 헌병과 수비대가 나타나 대치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민병숙 민병태가 일제 헌병의 총을 빼앗으려다 총탄에 희생됐다. 이에 격분한 군중은 면사무소를 부수며 맞섰지만 일제의 총탄에 밀려 물러나고 말았다. 홍천읍 장전평로 무궁화공원에는 또 다른 ‘3·1운동 기념비’가 우뚝 서 있다. 동아일보가 일제 총칼의 위협에도 뜨겁게 맞섰던 홍천군의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1979년 세운 것이다. 조각가 김영중의 작품으로 곧고 꿋꿋한 대나무의 이미지를 살려 우리 민족의 기개를 표현했다. 홍천향토사료관 향토해설사 허병직 씨는 “홍천은 의병운동과 동학농민전쟁은 물론이고 6·25전쟁의 격전지로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護國) 의식이 치열했던 곳”이라며 “지리적 위치 때문에 3·1운동이 뒤늦게 시작됐지만 그 열기는 다른 어느 곳 못지않게 뜨거웠다”고 말했다. ▼ “조상들의 3·1운동정신 잘 기억해야 미래가 있다” ▼김창묵 동창만세기념사업회장 동창마을을 중심으로 한 3·1운동을 이끈 인물은 천도교도였던 김덕원 의사(1879∼1943?)였다. 김 의사는 1000섬 이상의 토지를 갖고 있었던 부호로 평생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민족을 위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동학(천도교)에 입교한 후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에 입각해 평등사상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의사와 ‘동창 만세운동’은 1970년대 이후에야 증언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 과정을 주도한 이가 김 의사 후손으로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를 이끌고 있는 김창묵 회장(97)이다. 백수(白壽·99세)를 앞둔 그는 항일 의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척야산문화수목원을 지키며 생생한 기억과 분명한 어조로 3·1운동의 의미를 되새겼다. ―김덕원 의사에 대한 기억은…. “김 의사 직계는 아니지만 손자뻘이 된다. 6세 때 뵌 기억이 있다. 산골 오두막에 살고 있었는데 고문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한 상태였다.” ―어떤 말씀을 들었나. “어릴 때라 많은 것을 기억할 수는 없다. ‘이 나라 동포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나라 잃은 민족이 죽어야지 살아야겠냐’라며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던 말씀은 생생하다.” ―100주년을 맞는 3·1운동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나라의 풍요가 저절로 이뤄진 게 아니다. 조상들이 흘린 피와 땀이 바탕이 됐다. 이 정신을 잘 기억해야 미래가 있다.” ―수목원에는 김 의사뿐 아니라 여성 의병장 윤희순 비 등 다른 기념물도 많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안중근 의사, 이순신 장군 등과 관련한 조형물들도 있다. 방문객들이 힐링은 물론이고 나라를 지킨 조상의 민족정기를 느꼈으면 하는 바람으로 공원을 조성했다.” ―3·1운동 기념사업뿐 아니라 많은 기부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시절이 어려워 나는 초등학교밖에 다니지 못했다. 대신 여러 대학의 최고위 과정 자격은 많다(웃음). 배움이 없어 먹고살기 위해 정신없이 일했다. 그러던 중 후손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하는 고민이 들더라. 우리 역사의 정신을 제대로 전하는 것만큼 좋은 일이 없겠다는 게 결론이었다. 밥만 먹고 똥만 싸다 갈 수는 없지 않나.”홍천=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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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김갑식]‘바보 김수환’ 추기경

    “가톨릭청년회 모임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어요. 청년들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수환이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수환이가 누구냐고 다시 물으니까 그제야 ‘나 김수환이야’라고 해서 청년들이 다들 놀랐지요.” 얼마 전 서울대교구 구요비 주교가 회고한 김수환 추기경의 겸손과 눈높이 소통법의 일화다. 최근 방송 중인 추모 라디오 드라마 ‘바보 김수환’에서 김 추기경 역을 맡은 탤런트 최재원은 책과 자료를 통해 연구하다 ‘내가 과연 하늘나라 천당에 갈 수 있을까’라는 그의 겸손한 고민에 놀랐다고 한다. ▷16일로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의 선종(善終·별세를 의미하는 가톨릭 용어) 10주기를 맞는다. 10년 전 서울 명동대성당 주변은 40만 명의 추모 인파가 몰린 ‘명동의 기적’으로 뜨거웠다. 서울대교구 중심으로 장례가 치러졌지만 국장(國葬) 아닌 국장이었다. 유신과 군사정권 치하 인권의 보루이자 민주화운동의 산파였으며, 민주화 이후에는 갈등과 대립으로 갈라진 사회에서 통합의 상징이자 누구든지 보듬어 줬던 큰 어른의 부재가 그만큼 아팠던 것이다. ▷우리 사회의 집단 기억에서 그는 여전히 바보 추기경 또는 이 시대의 마지막 어른이다. 모든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어른이 없다는 푸념 끝에 그는 어김없이 소환된다. 추기경을 곁에서 지켜본 이들은 김수환 정신을 한마디로 신앙에 입각한 교회와 사회에서의 인간 존중이라고 입을 모은다. 여기에는 보수와 진보가 따로 있을 수 없고, 하느님 모습대로 창조된 가장 존엄한 인간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1860년 프랑스 앙투안 슈브리에 신부가 설립한 프라도회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청빈한 생활과 함께 노동과 영성을 추구하는 사제들의 모임이다. 이 사제회는 국내에서는 김 추기경의 도움으로 1975년 출발했다. 프라도회의 정신 중 하나가 ‘사제는 먹히는 존재’라는 가르침, 프랑스어로 ‘옴 망제(homme mang´e)’다. 김수환 정신의 부활의 신비에는 이 가르침에 누구보다 충실했던 바보에 대한 그리움이 깔려 있다. 그런 어른을 찾아보기 점점 어려워지는 현실이어서인지 더더욱 그립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dunanworld@donga.com}

    • 2019-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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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운동 정신 계승해 민족 저력 보여줄 때”

    불교, 개신교, 가톨릭 등 국내 7대 종단 지도자들이 국민에게 3·1운동 100주년 행사에 동참하고 3·1운동 정신 계승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소속 종단 대표들은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11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며’라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KCRP 대표회장인 김희중 대주교(가톨릭)는 “3·1운동 정신은 우리 민족이 당한 많은 억압과 고통의 세월을 버텨낸 힘”이라며 “100년 전 국민 모두가 3·1운동 주역이었던 것처럼 다시 한번 저력을 보여 달라”고 당부했다. 이날 행사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 이홍정 목사, 원불교 오도철 교정원장, 천도교 이정희 교령, 유교 김영근 성균관장, 한국민족종교협의회 박우균 회장, 정강자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 이갑산 범시민사회단체연합 상임대표, 이용선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등이 참석했다. 원행 총무원장은 “종교인들이 앞장선 3·1운동은 전 국민의 만세 운동으로 이어졌다”며 “어둠을 뚫고 새벽을 알리는 범종 소리 같은 울림이었다”고 말했다. 이정희 교령은 “광복 뒤 환국하자마자 우이동 손병희 선생 묘소를 찾은 백범 김구 주석은 천도교가 없었다면 3·1운동이 없고, 3·1운동이 없었다면 임시정부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며 “이 시대의 보국안민(輔國安民)은 평화통일”이라고 했다. 종교계는 세계 종교인 33명을 초청한 세계종교인평화기도회를 20일 개최하고, 3월 1일 낮 12시에는 전국 사찰과 교회, 성당 등 종교시설에서 3분간 타종 행사도 거행한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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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일 김수환 추기경 선종 10주기… 여전히 그리운 ‘바보의 삶’

    《16일은 김수환 추기경(1922∼2009) 선종(善終·별세를 의미하는 가톨릭 용어) 10주기다. 김 추기경은 1970, 80년대 민주화운동 산파이자 종교와 이념, 계층을 뛰어넘은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다. ‘고맙다, 서로 사랑하며 살라’던 바보의 삶은 40만 추모객이 몰리는 명동의 기적으로 이어졌다. 천주교서울대교구는 16일 오후 2시 명동대성당에서 염수정 추기경 주례로 추모 미사를 봉헌하는 것을 비롯해 사진전과 음악회, 심포지엄 등 다양한 행사를 연다. 김 추기경과 40년 가까운 인연을 맺은 문학평론가 구중서 씨(83)와 선종 당시 교구 문화홍보국장이자 장례위원회 홍보담당으로 활동했던 허영엽 신부(59)를 만났다.》  “눈높이 맞춰 낮게 소통하던 분” 장례위 홍보담당 허영엽 신부 40만 추모객 깜짝… 요즘 ‘어른의 부재’ 실감수녀원서 반찬투정 “그래야 저들도 잘 먹지”―선종 당시 장례위원회에서 홍보를 담당했다. 벌써 10주기다. “너무 빠르다. 사제들과 대화할 때 요즘도 김 추기경님 얘기가 자주 나온다. 선종하셨지만 사제들과 항상 같이하고 계시다.” ―명동의 기적이 생생하다. “당시 의료진 말도 있고 해서 봄은 지날 것으로 예측했다. 교회 가장 큰 어른의 마지막 길을 잘 배웅해야겠다는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추모객이 몰릴 줄 몰랐다. 명동성당에 처음 왔다는 분들도 있었다. 신앙에 관계없이 많은 분들이 빈소를 찾아 우리 사회의 어른을 잃은 슬픔을 표현한 것 같다.” ―추기경 선종 이후 어른의 부재(不在)를 말하는 이들이 많다. “종교와 계층에 관계없이 소통했던 추기경의 삶이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어른이 없다는 것은 우리 사회 전체의 불행이다.” ―10주기 행사는 어떻게 진행하나. “행사가 아니라 그분이 남긴 메시지를 기억하고 되새긴다는 의미로 준비하고 있다.” ―추기경의 유머와 겸손한 화법은 화제였다. “원래는 말씀이 많지 않고 좀 무거운 분위기였다. 이게 맞는지 모르지만, 1984년 카리스마와 유머로 잘 알려진 요한 바오로 2세 방한이 변화의 계기가 됐을 것 같다. 당시 추기경이 4박 5일 동안 밀착해 교황님과 시간을 보냈다. 동료 신부에게 들은 얘기도 있다. 추기경이 청빈한 생활로 유명한 ‘작은 자매수도회’만 가면 안 하던 반찬 투정을 해서 수녀님들이 많이 긴장했다고 한다. ‘내가 투정해야 저 사람들이 고기라도 한 점 먹을 게 아니야’라는 게 추기경님 말씀이었다고 한다.” ―말년에 보수화했다는 비난은 어떻게 생각하나. “추기경은 억압받던 시기에는 예언자적 역할이 중요하지만 민주화 이후에는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여겼던 게 아닌가 싶다. 일부의 비난에 대해 가타부타 반응은 하시지 않았다.”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닮은 점을 얘기하는 이들도 있다. “교황님 방한 때 잠깐 뵈었지만 주변을 편하게 해 주던 기억이 난다. 눈높이에 맞춰 낮게 소통하는 것은 두 분의 공통점이기도 했다. 우리 교회가 반성하고 배워야 할 점이다.” ―김 추기경 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핵심은 사람이다. 부딪치는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종교에 관계없이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이 어른은 먼저 다가오는 분이었다. 인사를 드려야 하나 마나 망설일 때 ‘자기 본당이 어디였지’라며 말을 먼저 꺼냈다. 말이 되지 않는 얘기도 무시하는 법 없이 끝까지 듣고 대꾸했다. 평신도 단체에서 주관한 ‘내 탓이오’ 운동도 그분 캐릭터와 연결돼 큰 반향을 얻었다.”  “인간존엄 정신 사회서도 추구” 문학평론가 구중서 씨‘창조’ 발행인-편집주간으로 만나 40년 인연… 말년에 변해? 그런말 하는 사람들이 정치적―최근 ‘김수환 추기경 행복한 고난’(사람이야기) 증보판을 냈다. “큰 틀은 바뀌지 않았지만 남북 정상이 만나는 화해와 평화의 시대에 맞춰 그 의미를 짚었다. 1971년 잡지 ‘창조’ 창간사에서 한 추기경의 말씀이 핵심이다. ‘이데올로기를 떠나 인간회복의 정신으로 이 땅의 진실한 역사 창조에 우리 모두가 이바지해야 한다.’” ―‘창조’ 발행인과 편집주간으로 만나 40년 인연을 맺었다. ‘김수환 추기경 정신’은 무엇인가. “추기경 삶의 일관된 방향은 성서의 복음정신에 따른 인간존엄이다. 이 가치가 교회뿐 아니라 사회에서 이뤄지게 하기 위해 헌신한 삶이었다.” ―책에는 인간 김수환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적지 않다. “저에 대한 추기경의 호칭은 항상 ‘구 선생님’이었다, 최고위 성직자이고 15년 가깝게 연상이었는데도. 안동성당 주임신부 시절에는 고해소에서 신자들에게 필요한 만큼 돈을 쥐여주기도 했다. 단, 얼마 받았다는 얘기는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일부에서 추기경이 말년에 변했다, 정치적이라고 비난한다.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닌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가 되라’는 게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년)의 정신이다. 독일 유학 시절 공의회를 접한 추기경은 누구보다 이 정신에 충실했다. 민주화 이후 특정한 정치적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렇게 비판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정치적이다.” ―그 비난에 대한 추기경 반응은…. “‘세상이 원래 그런 거야’ ‘인생은 고해(苦海)’라며 웃으시더라. 추기경은 자신을 비판하고 싫어하는 사람과도 대화했다. 인간이 오류를 범하더라도 존엄성은 남아 있다는 게 추기경 생각이었다.” ―추기경은 자신을 바보로 자처하기도 했다. “가톨릭 신자나 비신자, 가진 것이 많거나 적거나 상관없이 눈높이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겸손이 몸에 배어 있었다. 말년에는 더 경청하고 자주 웃고 유머도 많아졌다. 설악산 등산 때 일화다. 하산 길에 누군가 모자 쓴 점퍼 차림의 추기경에게 ‘많이 뵌 얼굴’이라고 하자 추기경은 ‘저도 추기경 닮았다는 얘기 종종 듣습니다’라고 대꾸했다. 서울 삼선교의 한 식당에 모시고 갔는데 초등학생이 사인을 받으러 왔다. ‘○○는 하느님도 예뻐하실 거야’라고 써 주시더라.” ―10주기를 맞는 소감은? “생전에 곤욕을 치르면서 주장하던 화해와 평화의 역사가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되고 있으니 추기경이 보여준 모범과 실천이 새삼 존경스럽고 그립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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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회 선학평화상 시상식’ 개최…아킨우미 아데시나-와리스 디리 공동 수상

    선학평화상위원회(위원장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는 9일 오전 10시 서울 송파구 잠실 롯데호텔월드 크리스탈 볼룸에서 ‘제3회 선학평화상 시상식’을 개최했다. 이 상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 문선명·한학자 총재의 평화비전을 토대로 인류의 평화로운 미래를 준비하자는 취지로 제정됐다. 수상 상금은 100만 달러(한화 약 11억원). 제3회 선학평화상은 아킨우미 아데시나 박사(아프리카개발은행 총재)와 할례 철폐 인권운동가인 와리스 디리 씨가 공동 수상했다. 아킨우미 아데시나 박사는 농업경제학자로 지난 30년간 아프리카 농업을 혁신해 경제발전을 촉진한 공적이 인정됐다. 와리스 디리 씨는 수천 년간 지속된 여성 할례(FGM·Female Genital Mutilation) 폭력성을 세계에 알리고, 이 악습을 근절하기 위한 국제법 제정에 앞장서 왔다. 이날 시상식에는 해외 전, 현직 대통령 및 총리 10여 명을 비롯해 1000여 명이 참석했다. 아킨우미 아데시나 박사는 수상 연설을 통해 “배고픈 곳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며 “특히 아프리카에서 가장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더 많은 것을 해야하며, 기아와 영양실조를 근절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라고 밝혔다. 와리스 디리 씨는 “우리 세대에서 할례는 철폐되어야 한다”며 “여성의 권리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김갑식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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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갑식의 뫔길]그리운 사랑의 바보, 김수환 추기경

    “암 투병을 할 때 바로 옆방에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이 입원해 있었다. 추기경이 ‘수녀도 그럼 항암이라는 걸 하나?’라고 묻자 ‘항암만 합니까. 방사선도 하는데’라고 답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추기경이 한마디를 건넸다. ‘그래? 대단하다, 수녀.’” 몇 년 전 출간된 이해인 수녀의 ‘고운 마음 꽃이 되고 고운 말은 빛이 되고’에 실린 내용의 일부다. ‘주님을 위해서 고통을 참아라’라고 할 줄 알았는데 뜻밖의 인간적인 위로가 마음을 따뜻하게 달래줬다는 게 저자의 말이다. 다음 달 16일이 김 추기경의 선종(善終) 10주기다. 그에 대한 기억은 사람들마다 다를 것이다. 선종 직후 명동대성당 현장 취재는 내게도 특별한 경험이자 기억이었다. 그해 명동에서의 하루하루는 초유의 사건에 허둥대면서 돌아오는 ‘끼니’(기사) 챙기기에 바쁜 시기였다. “그게 다 복이다. 언제 이런 큰일을 치러 보겠느냐”는 얘기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편집국의 한 선배는 칼럼에서 “40만 명의 자발적 추모 인파가 모인 ‘명동의 기적’, 그리고 ‘추기경 신드롬’”이라고 썼다. 공식적으로는 서울대교구장이었지만 정신적으로는 국민장이나 다름없다고도 했다. 5년 뒤인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파파 신드롬’이 불었지만 당시는 축제에 가까웠다는 점에 분위기는 확연히 달랐다. 명동의 기적 이후, 햇수가 더해지면서 김 추기경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종종 뜻하지 않게 그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접했다. 어떤 사람들에게 김 추기경은 여전히 살아 있다. 최근 강원 원주시 소초성당에서 만난 김태원 신부와의 대화에서도 그랬다. 사제와 화가의 길을 동시에 살아온 그에게서 추기경과의 일화가 나왔다. “당시로서는 신부가 전액 장학생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걸 도와준 게 추기경님이다. 파리에 오면 유학생들과 만나 영화나 전시를 본 뒤 맥주도 한잔 사주셨다.” 그러면서 “서울에 있으면 이런 것도 할 수 없다”며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인과의 대화에서도 김 추기경은 빠지지 않았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두 차례 지낸 월주 스님의 회고록을 연재할 때였다. 김 추기경과 월주 스님은 1971년 청담 스님 열반 때 조문 온 추기경을 처음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만난 뒤 40년 가깝게 알고 지낸 사이였다. 앞서 세상을 뜬 강원용 목사(1917∼2006)와 추기경, 스님이 종교는 달랐지만 외환위기와 노사 갈등 등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민족 화해와 국민 통합을 위해 힘을 모은 삼각형 같은 존재였다는 언급도 있었다. 평소 종단을 대표한다는 격식 때문에 언제나 추기경님, 송월주 스님으로 불렀지만 선종 당시 조문하러 갈 때는 달랐다고 한다. 스님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단어는 ‘바보 형님!’이었다. 대북 관련 이야기를 나눌 때도 김 추기경은 등장했다. 지난해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장으로 방북했던 원택 스님은 추기경 강연 때 들었다는 말을 빌려 남북 교류 원칙의 하나를 언급했다. 김 추기경은 “제가 돈 내고 북한 간다면 이게 선례가 되지 않겠느냐. 향후 남북 교류가 계속될 것인데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없었다. 이후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겠나”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적인 모임에서 종교 문제나 이른바 ‘어른의 부재’라는 주제로 말머리가 향하면 김 추기경은 어김없이 소환됐다. 이념과 지역, 계층에 관계없이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다는 푸념 끝 결론이었다. 한 신부에게 김수환 추기경 정신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대로 바라봐 주는 인간애죠.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강력한 리더십이 아니라 품어주고 안아주고 말을 들어주는 ‘서번트 리더십(servant-leadership)’, 섬김의 리더십이죠. 그런 지도자, 그런 큰 어른이 없으니 추기경이 더 그리워진다”고 했다. 김 추기경 선종 뒤 10년이 됐지만 상황은 달라진 게 없다. 종교계뿐 아니라 우리 사회 원로와 지도자들이 일각에서는 열광적으로 지지받지만 다른 쪽에서는 비난받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스스로를 바보라고 불렀던 ‘바보, 김수환’이 더 그리운 나라가 됐다.김갑식 문화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dunanworld@donga.com}

    • 2019-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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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광훈 목사,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제25대 대표회장에 선출

    전광훈 청교도영성훈련원장(63·사랑제일교회 목사)이 보수적 성향의 개신교 연합단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제25대 대표회장으로 29일 선출됐다. 전 신임 대표회장은 이날 서울 종로구 여전도회관에서 열린 총회에서 218표 중 121표를 얻어 과반수로 당선됐다. 전 목사는 예장대신 교단 소속으로 개신교의 정치세력화에 나서 기독자유민주당을 이끌기도 했다. 태극기 집회에서 정권 퇴진을 주장하기도 한 그는 당선 후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간첩으로 의심된다”고 주장해 논란을 예고했다. 전 목사는 “문 대통령은 존경하는 사상가로 통혁당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신영복 선생을 꼽았다”면서 “그렇다면 간첩을 존경한다는 말인데, 문 대통령 어록과 (신영복 선생이) 사상전향을 하지 않았던 것을 살펴봤을 때 간첩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내 생각엔 문재인 대통령이 간첩으로 의심된다”며 “만약 이 같은 비판에 대해 억울하다면 TV나 유튜브에 나와 공개토론을 하고 전 국민 앞에서 ‘나는 절대 간첩이 아니다’라고 말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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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제와 화가 두 길… 너무 재미있어 어느 것도 포기 못해”

    25일 고속도로에서 빠져 나와 작은 길로 접어들자 정겨운 시골 초등학교가 나온다. 고개를 돌린 순간 ‘아’ 하는 감탄사가 나왔다. 하얀색 단층의 작고 예쁜 성당이 보였다. 강원 원주시 소초면에 위치한 이 성당은 입구에는 성모자상, 좌우에는 예수의 가시면류관과 끌려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 서 있다. 성당 내부는 신자 100명이 들어서면 꽉 찰 정도다. “성당이 작아서 아름답고 더 좋다”는 김태원 신부(67)와 소초성당은 사연이 있다. 이 성당은 그가 사제의 길로 이끈 ‘아들 신부’인 김찬진 신부가 2003년 초대 신부를 맡은 곳이다. 이제 아버지 신부가 이곳에서 은퇴를 앞두고 있으니 묘한 인연이다. ―성당이 그림처럼 예쁘다. “성당 건립 때 돈이 부족해 조립식으로 만들었다는데, 신자들이 좋아한다. 돈 들여 고칠 생각은 없다.” ―아들 신부와의 인연이 예사롭지 않다. “젊은 시절 용소막 성당에 있을 때 아버지와도 잘 아는 중학생이 있었다. ‘너, 나중에 신부가 돼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됐다. 가톨릭에서는 이런 관계를 ‘아들 신부’ ‘아버지 신부’라고 부른다. 이런 인연도 있고 작은 성당에서 건강도 챙겨야 해서 2년 전 이곳으로 왔다. 아들 신부도 멀지 않은 수도원에 있다.” ―입구 양쪽의 조형물이 독특하다. “성당 건립 당시 설치한 작품이다. 저녁에 성당 불빛이 가시면류관에 비치면 환상적이다. 입구로 옮겨 놨더니 분위기가 산다. 작품이 좋아 작가를 찾았는데 부인이 전화를 받았다. 남편 장동호 작가는 2007년 작고했다고 하더라. 재능 있는 작가라 안타까웠다.” 김 신부는 평생 사제와 화가의 길을 같이 걸어왔다. 1978년 프랑스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파리국립미술학교를 다녔다. 여러 차례 개인전 이후 옻칠 작업을 한 작품에 몰두해왔다. 그는 11월 서울 강남구 한 갤러리에서 가는 면실을 꼬아 그림판을 만든 뒤 옻칠 작업을 한 ‘만남’, 옻 작업 뒤 금가루를 입힌 ‘비상’ 등 120점을 전시할 예정이다. ―적지 않은 시간과 공이 들어간 작품이 많다. “옻칠 작업을 하면 작품이 1000년 이상 유지되고, 질감도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냄새가 심하고 시간이 많이 들지만 한번 빠지면 그 매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음 달 16일 선종(善終) 10주기를 맞는 김수환 추기경과도 인연이 있다고 들었다. “전액 장학생으로 프랑스 유학을 보내준 분이 김 추기경님이다. 가끔 파리에 오시면 유학생들과 영화나 전시를 보고, 맥주도 한잔 사주셨다. 그러면서 ‘내가 서울에 있으면 이것도 못 해’라며 웃으시던 모습이 엊그제처럼 생생하다. 유학생들에게 아버지 같은 분이셨다.” ―사제와 전업화가의 갈림길에서 고민한 적은 없나. “두 길이 모두 너무 재미있는데, 어떻게 하나만 선택할 수 있었겠나(웃음).” ―우문(愚問)이 됐다. “주변의 동기 신부들 보니까, 노는 것 같아도 다들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잘 준비하고 있더라. 그림 그리다 죽을 생각이다. 사제로서야 곧 은퇴하겠지만, 버리고 절제하는 신앙의 삶도 마지막까지 바뀔 게 없다.” 원주=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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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들 신부’가 초대신부였던 성당에서 ‘아버지 신부’가 은퇴 앞두고…

    25일 고속도로에서 빠져 나와 작은 길로 접어들자 정겨운 시골 초등학교가 나온다. 고개를 돌린 순간 ‘아’ 하는 감탄사가 나왔다. 어여쁜 별장을 연상시키는 천주교 원주교구 소초성당이 보였다. 강원 원주시 소초면에 위치한 이 성당은 입구에는 성모자상, 좌우에는 예수의 가시면류관과 끌려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 서 있다. 성당 내부는 신자 100명이 들어서면 꽉 찰 정도다. “성당이 작아서 아름답고 더 좋다”는 김태원 신부(67)와 소초성당은 사연이 있다. 이 성당은 그가 사제의 길로 이끈 ‘아들 신부’인 김찬진 신부가 2003년 초대 신부를 맡은 곳이다. 이제 아버지 신부가 이곳에서 은퇴를 앞두고 있으니 묘한 인연이다. -성당이 그림처럼 예쁘다. “성당 건립 때 돈이 부족해 조립식으로 만들었다는데, 신자들이 좋아한다. 돈 들여 고칠 생각은 없다.” -아들 신부와 인연이 예사롭지 않다. “젊은 시절 용소막 성당에 있을 때 아버지와도 잘 아는 중학생이 있었다. ‘너, 나중 신부가 돼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됐다. 가톨릭에서는 이런 관계를 ‘아들 신부’ ‘아버지 신부’라고 부른다. 이런 인연도 있고 작은 성당에서 건강도 챙겨야 해서 2년 전 이곳으로 왔다. 아들 신부도 멀지 않은 수도원에 있다.” -입구 양쪽의 조형물이 독특하다. “성당 건립 당시 설치한 작품이다. 저녁에 성당 불빛이 가시면류관에 비치면 환상적이다. 입구로 옮겨 놨더니 분위기가 산다. 작품이 좋아 작가를 찾았는데 부인이 전화를 받았다. 남편 장동호 작가는 2007년 작고했다고 하더라. 재능 있는 작가라 안타까웠다.” 김 신부는 평생 사제와 화가의 길을 같이 걸어왔다. 1978년 프랑스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파리국립미술학교를 다녔다. 여러 차례 개인전 이후 옻칠 작업을 한 작품에 몰두해왔다. 그는 11월 서울 강남구 한 갤러리에서 가는 면실을 꼬아 그림판을 만든 뒤 옻칠 작업한 ‘만남’, 옻 작업 뒤 금가루를 입힌 ‘비상’ 등 120점을 전시할 예정이다. -적지 않은 시간과 공이 들어간 작품이 많다. “옻칠 작업을 하면 작품이 1000년 이상 유지되고, 질감도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냄새가 심하고 시간이 많이 들지만 한 번 빠지면 그 매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음달 16일 선종(善終) 10주기를 맞는 김수환 추기경과도 인연이 있다고 들었다. “전액 장학생으로 프랑스 유학을 보내준 분이 김 추기경님이다. 가끔 파리에 오시면 유학생들과 영화나 전시를 보고, 맥주도 한 잔 사주셨다. 그러면서 ‘내가 서울에 있으면 이것도 못해’라며 웃으시던 모습이 엊그제처럼 생생하다. 유학생들에게 아버지 같은 분이셨다.” -사제와 전업화가의 갈림길에서 고민한 적은 없나? “두 길이 모두 너무 재미있는데, 어떻게 하나만 선택할 수 있었겠나(웃음).” -우문(愚問)이 됐다. “주변의 동기 신부들 보니까, 노는 것 같아도 다들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잘 준비하고 있더라. 그림 그리다 죽을 생각이다. 사제로서야 곧 은퇴하겠지만, 버리고 절제하는 신앙의 삶도 마지막까지 바뀔 게 없다.” 원주=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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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욕망 비움이 행복 채움의 시작”… ‘업의 그릇을 비워라’ 18쇄 행진

    무명 스님의 ‘그대는 알겠는가’는 몇 년간 불교계 방송에서 화제가 됐던 프로그램이다. 일상에서 겪는 삶의 문제를 불교 교리로 풀어낸 생활 법문이었다. 이 법문들은 지난해 11월 ‘업의 그릇을 비워라’(1만5000원·쌤앤파커스·사진)라는 책으로 출간됐다. 독자들의 반응이 좋아 벌써 18쇄를 찍었다. 최근 부산 금정구 무명사에서 스님을 만났다. ―방송과 책은 어떤 차이가 있나. “방송용 법문이야 늘 하는 일이니 비교적 편하게 했다. 책은 실제 법문보다 최소한으로 줄여서 냈다. 글이라 더욱 조심스러웠다.” ―왜 업(業)의 그릇을 비워야 하나. “현대인들은 재욕, 식욕, 색욕, 명예욕, 수명욕 등 다섯 가지 욕락(慾樂)에 깊이 빠져 있다. 그런데 이 욕망들은 채우면 채울수록 더 허기지는 업의 그릇이다. 마음의 행복은 먼저 이 그릇을 비우는 데서 시작된다.” ‘업의 그릇…’은 귀에 솔깃한 사례를 통해 불교의 핵심을 쉽게 전달한다. 해외 포교로 잘 알려진 숭산 스님(1927∼2004)과 기적을 보여주면 불교 신자가 되겠다는 이의 대화다. “오늘 밥을 먹고 왔느냐.” “네, 스님.” “그럼,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습니다.” “그래 그것이 기적이다. 하루 밥을 먹고 힘을 쓰며 법문을 듣고 있는 게 어찌 기적이 아니란 말인가!” 술술 넘어가는 책과 달리 이날 만난 무명 스님은 “기도 열심히 하며 살 뿐”이라며 말을 아꼈다. ―최근 지구촌행복나눔이라는 국제구호단체를 설립했다. “20세 때 부모님을 떠나보냈다. 13세 때부터 혼자서 먹고사는 걸 해결해 춥고 배고픈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안다. 쌀이 필요하면 쌀로, 공부가 필요하면 공부로, 제가 능력이 닿는 한 주변을 돕고 싶다.”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 스님은 뒤늦게 출가를 결심해 전남 순천 선암사에서 용하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책의 후반부에는 스님 삶의 단편과 인연이 닿지 않아 쉽지 않았던 출가 사연이 나온다. ―불교 종단 하면 조계종을 많이 떠올리는데 어려움은 없나. “어려움은 없다. 조계종 아니면 스님이 아닌 것도 아니고. 혹 누군가 물으면 저는 그냥 부처님 종단, 나 홀로 종단이라고 한다.(웃음)” ―사는 게 쉽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럼 우선 웃음 보시부터 시작해 봐라. 돈 들지도 않고 웃음 속에는 모든 것이 다 담겨 있으니까. 부처님 말씀이 화안애어(和顔愛語) 아닌가. 아름다운 꽃처럼 평화스러운 미소를 짓고 사랑스러운 말만 할 수 있다면 날마다 좋은 날이 될 수 있다.”부산=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 2019-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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