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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전야.’ 한여름 더위를 피해 쉬어가는 휴가철이지만 미술계는 9월을 앞두고 조금씩 긴장감을 끌어올리고 있다. 프리즈 서울 아트페어 기간(9월 4∼7일)을 전후로 국내외 미술인들이 서울로 몰려들 예정이기 때문이다. 프리즈 서울은 올해로 3회차에 불과하지만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들이 한 해 가장 신경 써서 만든 전시를 9월에 개막하는 문화를 만들고 있다. 마크 로스코 같은 20세기 거장, 프랑수아앙리 피노 케링 창업자의 소장품부터 핫한 동시대 미술가 개인전까지. 놓치지 말아야 할 전시를 정리했다.● 국내에서 보기 힘든 걸작들 9월 4일 송은에서 개막하는 ‘소장품의 초상: 피노 컬렉션 선별작’ 전시는 국내에서 보기 힘들었던 해외 유명 미술가들의 작품이 한 번에 소개돼 기대된다. 마를렌 뒤마(남아공)처럼 유명 미술관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작가부터 피터 도이그(영국), 미리암 칸(스위스), 얀보(베트남) 등 흥미로운 예술 세계를 가진 작가들의 회화, 설치, 드로잉, 조각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 60여 점을 볼 수 있다. 이 전시는 프랑스 재벌인 피노 케링 창업자의 소장품을 한국에 13년 만에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피노 창업자의 소장품은 2021년 프랑스 파리 옛 상업거래소를 안도 다다오가 미술관으로 새롭게 단장한 ‘부르스 드 코메르스’에서도 전시되고 있다. 이 미술관의 개관전 ‘우베르튀르’에 소개됐던 작품 일부도 한국을 찾는다. 또한 20세기 미국 미술 거장인 마크 로스코는 한국 작가 이우환과 함께 페이스갤러리 서울에서 2인전을 연다. 4일 개막하는 ‘조응: 이우환과 마크 로스코’전은 갤러리 2, 3층 공간에서 열린다. 2018∼2023년 제작한 이우환의 회화와 1950∼1960년대 로스코의 대표적 색면 추상이 각 층에서 전시된다. 이우환이 로스코의 유족과 협업해 직접 전시를 큐레이팅해 눈길을 끈다.● 국제 미술계 뜨는 작가들 고미술을 주로 전시해 온 호암미술관에서는 처음으로 현대미술가의 개인전이 9월 3일부터 열린다. 스위스 출신 미술가로 미술 시장에서 사랑받는 니콜라스 파티가 회화, 조각 등을 고미술 소장품과 함께 전시할 예정이다. 파티는 특히 감각적인 색채가 돋보이는 정물, 풍경 등 파스텔화로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이 파스텔을 이용해 미술관 내부 벽면에 대형 벽화를 공개할 예정이다. 작가가 이미 한국에 와서 한창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또 글로벌 메가 갤러리인 가고시안(거고지언)도 한국에서 처음으로 전시를 연다. 3일 개막하는 데릭 애덤스 개인전 ‘더 스트립’은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캐비닛에서 개최된다. 애덤스는 강렬한 색채가 인상적인 ‘수영장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로, 전시장 규모는 작지만 새로운 연작을 이번 전시에서 발표한다. 신작은 전 세계 화장품 매장의 쇼윈도 디스플레이에서 영감을 얻었다. 영국의 대표적 현대미술관인 테이트모던 터빈 홀에서 선보인 해파리 모양 드론 작품처럼 생물학과 기술을 융합하는 실험적 작품으로 주목받는 한국계 미국 작가 아니카 이는 리움미술관 M2에서 5일부터 개인전을 연다. 작가의 아시아 첫 미술관 전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박수근 미술상 수상자인 홍이현숙, 인도네시아 작가 아라마이아니 등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활동하는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을 몸의 관점에서 조망하는 ‘접속하는 몸: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을 3일부터 연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정원을 가진 사람은 소나무를 심고 싶어 하지만 소나무는 너무 비싸다. 비싼 소나무 정원에 내 몸을 슬쩍 끼워 넣어 정원을 도둑질한다.’ ‘(작업실 동료들이) 해준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면 즐겁다. 영만이가 해준 것이니 맛없다고 말할 수 없을 수 있지만 젓가락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뭐….’ 만화가 허영만은 널리 알려진 작품 외에도 일상 속 느낀 단상을 ‘만화 일기’로 남기고 있다. 짧은 문장과 그림 한두 점으로 쓴 기록들은 캠핑, 요리 등 일상 속 감상부터 건강에 대한 염려까지 솔직히 담는다. 허영만의 50년 만화 인생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전시 ‘종이의 영웅, 칸ㅁ의 서사’(사진)가 6일 전남도립미술관에서 개막한다. 허영만은 1974년 한국일보 신인 만화 공모전에 ‘집을 찾아서’가 당선되며 만화의 길로 들어섰다. 5일 기자간담회에서 허영만은 “매일 놀러 다니는 사람 같지만 만화를 다 그리고 나갔기 때문에 펑크를 낸 적이 없다”며 “그동안 뒤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루 하루를 어떻게 살았는지를 저도 조명해 볼 기회”라고 말했다. 전시는 1부 ‘만화가 허영만’, 2부 ‘시대를 품은 만화’, 3부 ‘매스미디어 속 만화’, 4부 ‘일상이 된 만화’ 등 총 4부로 구성됐으며 연대기 순으로 대표 작품의 원화와 관련된 기록을 조명한다. 특히 ‘각시탈’ ‘날아라 슈퍼보드’ ‘비트’ ‘타짜’ 등 영상물로도 제작돼 대중에 익숙한 작품이 눈길을 끈다. 허영만은 “제 만화에는 슈퍼스타가 없고 동네에서 보는 어린아이나 어른이 주인공”이라며 “그렇기에 영화나 드라마로도 쉽게 다가온 것 같다”고 말했다. 1945년 광복부터 1968년 6·29 민주화선언까지 격동의 근현대사를 풀어낸 ‘오! 한강’의 원화에서는 탱크가 웅장하게 등장하는 모습이나, 주인공이 고문을 당하는 모습 등이 박진감 있게 펼쳐지는 그림체를 볼 수 있다. ‘비트’에서는 1990년대 청년들의 패션과 낭만이 감각적으로 드러난다. ‘비트’와 함께 작가가 잡지나 신문에서 수집한 당시 패션 스타일에 관한 자료도 방대하다. ‘타짜’를 위해 노름꾼을 만나 속임수를 기록한 노트, ‘식객’을 위해 음식을 직접 찾아다니며 남긴 메모 등은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 거친 치밀한 취재 과정을 엿볼 수 있다. 허영만은 “저는 1등 해본 적이 없다. 제가 처음 만화를 그렸을 땐 이상구가, 그다음엔 이현세가 1등이었다”며 “밥 먹다 냅킨에 고추장으로 메모하며 항상 소재에 대한 갈증이 있었기 때문에 오래도록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웹툰 시장의 성장에 대해 종이 만화가는 어떤 생각을 할까. 그는 “지금 웹툰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보고 싶은 욕심은 있다. 다른 필명으로 도전해 보면 어떨까 싶다”며 “서너 달 정도 연재할 수 있는 분량을 만들어 놓고 고민하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시는 10월 20일까지. 광양=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화가 김선두가 종이에 먹으로 그린 유튜버 침착맨(이말년)의 초상화를 개인전 ‘푸르른 날’에서 공개했다. 영화 ‘취화선’에 등장하는 장승업의 그림을 그린 것으로도 유명한 김선두는 화려한 색채와 다양한 구도를 활용해 한국화를 현대적으로 그리는 방법을 고민하는 작가다. 전시가 개막한 지난달 17일 서울 종로구 학고재에서 그는 “한국화의 중심이 되는 수묵과 붓을 제대로 탐구해야 한다”며 “낡은 방식으로 새롭게 이야기하기를 보여주고 싶다”고 밝혔다. 그가 그린 침착맨 초상화는 ‘아름다운 시절’ 연작 중 하나다. 시인 김수영, 야구 선수 선동열 등 유명 인물의 얼굴을 작가가 그리고 그 아래 달력처럼 칸을 마련했다. 이 칸에는 초상화 주인공이 그날마다 소화한 일정을 적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정이 차오르며 흰 여백은 검은 얼룩이 된다. 침착맨의 초상화에서는 굿즈 미팅, 가래떡 먹방, 여권 발급, 지인 집들이 등 바쁜 일상을 볼 수 있다. 시인 곽효환의 초상도 있는데, 일정을 적었다가 전시에 나온다고 하니 곽 시인이 부끄럽다고 지웠다고 한다. 김선두는 “너무 깨끗이 지워서 아쉽다”며 웃었다. 이 밖에 종이(장지)에 물감을 여러 번 칠해 한국화 특유의 투명하고 짙은 색을 담은 작품들도 볼 수 있다. 가로 8m 대작 ‘싱그러운 폭죽’ ‘낮별’ 연작 등이다. 전시는 17일까지.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개봉 전부터 대규모 유료 시사회를 열어 ‘변칙 개봉’ 논란이 된 영화 ‘슈퍼배드 4’(사진)에 대해 영화진흥위원회가 경고에 나섰다. 영진위 공정환경조성특별위원회는 2일 입장문을 내고 “영화 상영시장의 공정 질서를 해친 변칙 개봉에 대해 강력한 유감의 뜻을 전한다”고 밝혔다. 영진위에 따르면 ‘슈퍼배드 4’는 공식 개봉을 앞둔 주말인 지난달 20, 21일 이틀간 유료 시사회 명목으로 총 5090회를 영화관에서 상영해 76만8009석을 선점했다. 이 기간 ‘슈퍼배드 4’의 유료 시사회 상영 횟수는 국내 전체 극장의 12.1%를 차지했다. 단, 평균 좌석 판매율은 13.5%(관객 10만3528명)에 그쳤다. 영진위는 “변칙 개봉으로 빈 좌석 수가 66만4481개나 발생하는 결과를 초래해 20일 147편, 21일 144편의 영화 상영 기회와 좌석을 빼앗아 공정한 시장질서를 저해했다”고 지적했다. 영진위는 이어 “지난해 정부와 영진위 및 상영 투자 배급 업계는 ‘한국 영화 재도약 정책실무협의체’, ‘한국 영화산업 위기극복 정책협의회’를 결성하며 팬데믹 이후 영화산업 위기 극복을 위해 노력했다”며 “유료 시사회 명목으로 진행된 변칙 개봉은 이 같은 정부와 영화계의 공동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결과”라고 비판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전쟁과 혼란으로 왕이 세 번이나 바뀌는 가운데 4명의 왕과 함께 일했던 궁정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프랑스 혁명이 있었던 18세기 말을 지나 19세기가 되고, 70대가 된 그는 세상과 연을 끊고 마드리드 인근 농가에서 칩거합니다.이 집에서 화가는 정체불명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궁정 화가였을 땐 초상화, 역사화, 풍속화를 주로 다뤘던 그가 홀로 그린 이 그림들이 누구를 무엇을 그린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낯선 사람의 눈에는 어둡고 공포스러운 이 집의 벽화에 사람들은 ‘검은 그림’(Black Painting)이라는 별명을 붙였죠. 나이 든 화가가 정신 이상을 겪고 그린 그림이라는 흉흉한 이야기도 나왔습니다.그러나 ‘검은 그림’은 지금 프라도 미술관의 대표 컬렉션이자, 인간 내면을 표현해 근대의 문을 연 걸작으로 평가를 받습니다.프라도 미술관에서 고야를 연구하는 큐레이터 마우러 구드룬과 ‘검은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아들과 손자를 위해 매입한 집,화가는 ‘검은 그림’을 남겼다- 고야는 평생 의뢰 받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검은 그림’은 말년에 오로지 자신을 위해 그린 것이죠. 고야가 미래를 비관적으로 봐서 이런 그림을 그린 걸까요?고야가 검은 그림을 자기만을 위해 그렸는지 먼저 따져봐야 합니다. 그림이 있는 집은 고야가 아들과 손자에게 물려주기 위해 매입한 것이에요. 그러니 그곳의 그림도 자식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겠죠.이 집 옆에는 밭이 있었고, 고야는 자식과 손주들이 농사를 지으며 살 수 있기를 바랐어요. 실제로 그들은 농부가 되었습니다.- 농가에 이런 그림을 그린 건가요? 왜요?그러게요 도대체 왜 그렸을까 라는 생각을 누구나 할 것 같습니다만, 그에 대한 해석이 여러 가지여서 하나로 답하기는 어렵습니다.분명한 건 고야가 이 집을 매입하는 과정에 아주 철저한 계획을 했다는 점이 문서로 뒷받침됩니다. 그러니까 고야가 이 그림을 그릴 때 정신 이상을 겪지 않았다는 건 확실합니다.- 마녀, 악마,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Saturn),… 그림들의 내용은 뭐라고 생각하세요?고야는 우리에게 옳고 그름을 가르치려고 하기보다, 인간의 내면을 깊이 관찰하고 드러내려 했습니다. 인간은 때로 거짓말하고, 장난을 치고, 이성적이지 않은 행동을 저지르기도 하죠. 이성의 반대편에 있는 열정, 불안, 공포를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 미술사에서 처음으로) 표현했어요.검은 그림에서 사투르누스가 자식을 잡아먹는 이유는, 그중 한 명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죠. 또 ‘Reading’에서는 무언가를 읽고 있지만 허공을 응시하는 사람은 공포에 사로잡힌 듯한 모습이에요.이 무렵 스페인에서는 종교 재판이 성행하고 마녀와 같은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계몽주의자들이 이런 세태를 비판하는 글을 싣기도 했어요. 그런데 고야는 이런 모습을 도덕적으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그 현상 속에서 드러나는 공포와 불안을 표현했어요. 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감정이죠.-검은 그림의 한 가지 키워드를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또 다른 유명한 그림인 ‘개’(The Drowning Dog)는 정말 복잡한 그림이에요. 그림 속 개는 허공을 보고 있으니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일까? 싶지만 앞에 아무것도 없어요. 헐떡이며 올라온 언덕과 그 위의 노란 하늘뿐이죠.-앞으로 무엇이 닥쳐올지 모른다는 것에 대한 공포와 불안인가요?그럴 수도 있죠. 그렇지만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에요. 사람들은 마녀나 악마를 두려워하고, 또 불안감으로 미신을 믿지만 사실 그 뒤에는 막막한 하늘처럼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에요.그러니까 무서워하는 무언가, 그 대상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고. 불안과 공포라는 감정 자체가 우리를 움직이는 힘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혹은 손자 마리아노에게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을 수도 있어요.-그렇지만 고야가 그림 외에는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아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는 거군요.네 아무것도 없어요. 작품 제목도 연구자가 임의로 붙인 겁니다.‘개’는 고독, 혹은 자아 성찰로 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삶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아 헤매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게다가 거대한 바위 앞에서 개가 한없이 작아 보이죠. 그러니까 대자연 앞에서 먼지처럼 작은 인간 존재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어요.또 고야는 사냥을 즐겨 했는데요. 이 시대 사람들이 사냥할 때 개를 데리고 다녔으니, 고야는 개의 습성에 대해서도 잘 알았죠. 여기서 개는 사람과 달리 자기 의견을 표시할 수 없는 존재로 그려진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인간이 아닌 순진한 동물이라는 차원에서 말인가요?그렇죠. 그런데 인간도 결국 삶의 막바지에 가서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잖아요. 이 그림에서 개는 주인을 잃고 혼자 헤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이것을 19세기 인간에게 대입해 생각해 볼 수도 있죠. (시민혁명, 전쟁 등으로 오랫동안 내려온 신념을 잃고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는 의미)혁명, 전쟁과 혼란의 시대.변하지 않는 건 무엇일까?-프라도미술관에 가면 3층에는 고야가 젊은 화가일 때 그린 태피스트리 밑그림이 있고, 1층에는 검은 그림이 있잖아요. 두 공간을 오가며 그림을 비교해 보았을 때 차이점이 극명해서 충격적이었어요.젊은 시절의 그림에서는 (고야 특유의 어두움이 있긴 하지만) 즐거움과 야망이 주된 분위기였다면, 말년의 그림에서는 그 어두움이 완전히 폭발해서 그림을 지배한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 야망으로 가득했던 그가 말년에 이르러 죽음을 앞둔 모습이 슬프기도 했고요.두 그림의 대조가 강렬한 것은 사실이에요. 그런데 ‘검은 그림’이 어두운 데에는 시대적 분위기도 작용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해요.그러니까 고야가 말년에 희망을 잃었다기보다는, 나폴레옹 전쟁, 종교 재판 같은 혼란스러운 시대를 겪었기에 예전처럼 밝은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던 것이죠. 또 요즘 영화나 게임 같은 콘텐츠가 점점 더 직접적이고 자극적으로 변하듯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의 그림도 더 과감해진 경향이 있어요.-그렇다면 젊은 시절보다 자기의 개인적인 의견을 더 대담하게 드러내는 걸 수도 있겠네요. 태피스트리 밑그림은 주문한 사람이 있었고, 검은 그림은 고야가 자발적으로 자신과 가족을 위해 그린 것이니까요. 그래서 더 마음을 열고 인생에 관해 솔직한 생각을 털어놓을 수 있었던 거고요.맞아요. 검은 그림은 고야가 아주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보기 위해서 그린 것이므로, 자신의 의견을 마음대로 펼칠 수가 있었죠. 또 시대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담겨 있고요.-고야의 판화 ‘카프리초스’의 가장 유명한 작품, ‘이성이 잠들 때 괴물이 깨어난다’도 검은 그림과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어요.그렇죠. 검은 그림은 그렇게 이성이 잠들 때 꿈에서 볼 법한 것들을 그리고 있어요. 그런데 그 꿈은 아주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의 삶에서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생겨나죠.또 재밌는 건 고야가 막연한 꿈속의 공포나 불안을 표현해서 일종의 치유 효과를 준다는 점이에요. 지금은 심리학을 통해 그런 효과들이 익숙하지만, 고야는 당시 지식인들이 공포나 불안을 숨기라고 한 것과 달리 그것을 드러내고 보여줬다는 것도 너무나 흥미롭죠.-20세기 철학자인 미셸 푸코가 인간의 어둡고 억압된 면을 드러낸 사실이 생각나네요. 그런 점에서 고야는 예민한 감각으로 철학보다 빨리 근대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거고요.정확합니다. 고야가 모더니즘의 문을 열었죠. 인간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끄집어냈다는 점에서요. 히에로니무스 보쉬가 그랬던 것처럼요. 물론 검은 그림은 공개적으로 그린 것이 아니지만, ‘카프리초스’ 같은 판화는 시중에 보급했어요.-그런데 검은 그림에 관해 남겨진 글이 전혀 없다는 점이 아쉽네요. 물론 시각적으로 보았을 때 그 의미와 새로움이 강렬하게 다가오긴 하지만, 그걸 글로 옮기긴 어려워서요.그렇죠. 그런데 ‘카프리초스’에는 고야가 제목이나 짧은 코멘트를 남겼어요. 덕분에 판화들의 복잡한 의미를 알 수 있는 건 물론 고야가 어떤 식으로 생각했는지도 유추해 볼 수 있어요. 그걸 보면 고야가 ‘변하지 않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본질에 관심을 가졌던 거군요맞아요. 저는 1990년대에 ‘검은 그림’을 처음 봤는데, 그때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프라도 미술관에 검은 그림 전시실을 ‘충격의 방’이라고도 한답니다.그 이전에도 저는 고야에 관한 글을 읽곤 했지만, ‘검은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고 엄청난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리고 여러 자료를 연구하며 이것은 늙은 화가의 정신 이상이 아니라 아주 명석한 마음에서 그린 것임을 확인하게 됐어요. 또 그가 제시한 주제들은 지금에도 유효하다는 사실도요.-그렇죠. 한 가지 주제가 ‘두려움’이라고 하셨는데, 인터넷이 열리면서 종교 재판의 시대가 다시 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거든요. 사람들은 다르고 낯선 생각에 두려움을 느끼니까요. 또 금방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것처럼 세계가 지금도 불안한 상황이기도 하고요.가짜 뉴스도 마찬가지죠. 19세기에도 서로 다른 신념과 생각들이 부딪쳤고 그때는 더 폭력적이었지만 양상은 비슷해요. 그런 맥락에서 ‘검은 그림’은 불안과 공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가운데 자신만의 신념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는 생각도 듭니다.-그런 본질적 메시지를 담았기에 ‘검은 그림’이 고전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렇게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고전 문학이 인간 본성에 대해 다뤘기에 시간이 지나도 꾸준히 읽히고 그 의미를 잃지 않는 것처럼 말이에요.정확한 지적이에요. 검은 그림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를 갖고 있어요. 고야가 ‘카프리초스’ 판화를 위해 만든 드로잉 중에 ‘보편적 언어(Ydioma Universal, Universal Language)’라는 작품이 있다는 것 아시나요?-몰랐어요. 놀랍네요.드로잉에서도 고야는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다루죠. 전염병에 대한 공포, 그로 인한 불안, 여기에서 퍼져 나가는 미신과 같은 것들이요. 그러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마련이고, 여기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고야는 보여주려고 한 것이죠. 제 의견으로 고야는 글로벌한 사상가였습니다.-고야가 직접 ‘보편적 언어’라고 제목을 붙이고, 그런 주제로 작품을 남기려 했다는 것이 놀라워요. 그가 감각에만 의존한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인간의 본질적 요소를 찾아 표현하려 했다는 이야기니까요.그럼요. 고야가 궁정화가로 일할 때 왕실 컬렉션에서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작품을 보았을 거예요. 그런 작품들에서도 영향을 받았을 거고, 또 고야는 계몽주의자들과도 아주 가깝게 지내며 새로운 시대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었어요. 많은 책을 읽기도 했고요.그런 가운데 프랑스 혁명과 그 이후 스페인에서 펼쳐진 너무나 혼란한 상황. 군주제가 무너지는 듯하지만, 그다음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소용돌이와 같은 상황에서 나온 결과물입니다.수십 년 동안 고야의 작품을 연구했지만 이건 끝이 없는 작업이에요. 한 부분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또 다른 부분이 보이고,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되어요. 고야를 연구하게 된 것이 저의 커리어에서 잘한 결정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어요.-예술가가 손으로 펼쳐 놓은 세계가 얼마나 깊고 넓은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최근 발간된 도록들에 더 많은 새로운 연구 결과들이 있습니다. 또 카프리초스 전 작품과 그가 친구와 주고받은 편지도 읽어보세요. 고전 문학만큼 깊고 넓은 세계를 꼭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2년마다 열리는 현대 미술 전시인 ‘비엔날레’가 하반기 국내 여러지역에서 개막을 앞두고 있다. 작품 거래를 목적으로 여러 갤러리가 부스를 차리는 아트페어와 달리 비엔날레는 전시 감독이 주제를 정하고 그에 맞는 작품을 선별한다. 작품을 주어진 공간에 어떻게 배치하는지, 즉 ‘큐레이션’을 제대로 감상할 기회다. 국내외 큐레이터들이 선보이는 각 비엔날레의 관전 포인트를 꼽아봤다.》16일 개막하는 2024 부산비엔날레 ‘어둠에서 보기’는 뉴질랜드와 벨기에 출신으로 유럽에서 활동하는 두 큐레이터 베라 메이, 필리프 피로트가 감독을 맡았다. 두 감독은 미국의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1961∼2020)가 쓴 책 ‘해적 계몽주의’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 책은 18세기 유럽 계몽주의가 평화와 민주주의를 만들어냈다는 통념과 달리 해적 사회에서 그런 실천이 먼저 이뤄졌음을 밝혀 주목받았다. 두 감독은 해적 공동체가 태풍과 같은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선원이 그때마다 리더가 되었다는 유연성에 주목했다. 그 결과 참여 작가 중에는 통도사성보박물관장을 지냈고 ‘한국의 불화’ 40권을 집대성한 송천 스님,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인도와 파키스탄 등을 다니며 현지에서 구한 소재로 작업하는 이두원, 가정주부로 살다 40세에 미술가가 된 윤석남 등이 포함됐다. 이들은 미술가가 되는 정해진 과정을 따른 게 아니라 ‘해적처럼’ 작가가 된 이들이다. 박수지 협력 큐레이터는 “참여 작가 명단을 보고 일부러 유명 작가는 제외한 것이냐는 반응도 있었다”며 “작품으로 자기만의 해방 공간을 구축하는 작가를 일일이 발굴해 전시를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9월 7일 개막하는 제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은 비평서 ‘관계의 미학’으로 유명한 스타 큐레이터 니콜라 부리오가 감독을 맡았다. 관객이 불을 쬘 수 있는 난로, 앉을 수 있는 의자부터 각자의 집에 대해 설명하는 글을 쓸 수 있는 작품 등 관객 참여로 완성되는 작품으로 구성한 1999년 전시 ‘Traffic’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에서 부리오는 ‘판소리’를 주제로 했지만, 그 내용은 한국의 전통극인 판소리보다 ‘판’(공간)과 소리라는 단어의 의미에 더 집중했다. 언론 간담회를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부리오는 그간 미술에서 자주 다뤄지지 않았던 감각인 ‘소리’를 중심으로 전시를 구성할 예정이다. 거대한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을 소리를 테마로 어떻게 채울지, 또 광주와 한국의 지역성과 어떤 연관을 맺을지가 미술계의 관심사다. 9월 27일 개막하는 제7회 창원조각비엔날레 ‘큰 사과가 소리 없이’는 ‘시청각’을 비롯한 대안 공간들을 10여 년간 운영해 온 독립 기획자 현시원이 전시 감독을 맡았다. ‘시청각’은 한옥을 개조한 공간으로 2013∼2019년 운영되다 용산으로 이전했으며, 동시대 젊은 작가들의 실험적인 전시를 선보여 왔다. 조각 중심으로 진행됐던 지역 비엔날레가 서울 대안 공간의 문법과 어떻게 어우러질지가 관전 포인트다. 현 감독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수직으로 서 있는 조각을 수평으로 눕혀서 보고 싶다”고 은유적으로 전시 주제를 밝혔다. 중요한 장소에 기념비처럼 홀로 서 있는 예술 작품이 아니라, 주변 지역과 공생하고 어우러지는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것. 이에 따라 창원의 역사나 산업사에 관한 연구를 토대로 한 김익현의 신작, 김정숙의 작품 등을 선보인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2년마다 열리는 현대 미술 전시인 ‘비엔날레’가 하반기 국내 여러 지역에서 개막을 앞두고 있다. 작품 거래를 목적으로 여러 갤러리가 부스를 차리는 아트페어와 달리 비엔날레는 전시 감독이 주제를 정하고 그에 맞는 작품을 선별한다. 작품을 주어진 공간에 어떻게 배치하는지, 즉 ‘큐레이션’을 제대로 감상할 기회다. 국내외 큐레이터들이 선보이는 각 비엔날레의 관전 포인트를 꼽아봤다.‘해적 같은 작가’ 모았다, 부산비엔날레16일 개막하는 2024 부산비엔날레 ‘어둠에서 보기’는 뉴질랜드와 벨기에 출신으로 유럽에서 활동하는 두 큐레이터 베라 메이, 필립 피로트가 감독을 맡았다. 두 감독은 미국의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1961~2020)가 쓴 책 ‘해적 계몽주의’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 책은 18세기 유럽 계몽주의가 평화와 민주주의를 만들어냈다는 통념과 달리 해적 사회에서 그런 실천이 먼저 이뤄졌음을 밝혀 주목받았다.두 감독은 해적 공동체가 태풍과 같은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선원이 그때마다 리더가 되었다는 유연성에 주목했다. 그 결과 참여 작가 중에는 통도사성보박물관장을 역임했고 ‘한국의 불화’ 40권을 집대성한 송천 스님,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인도와 파키스탄 등을 다니며 현지에서 구한 소재로 작업하는 이두원, 가정주부로 살다 40세에 미술가가 된 윤석남 등이 포함됐다. 이들은 미술가가 되는 정해진 과정을 따른 게 아니라 ‘해적처럼’ 작가가 된 이들이다.박수지 협력 큐레이터는 “참여 작가 명단을 보고 일부러 유명 작가는 제외한 것이냐는 반응도 있었다”며 “작품으로 자기 만의 해방공간을 구축하는 작가를 일일이 발굴해 전시를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스타 큐레이터’ 등판한 광주비엔날레9월 7일 개막하는 제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은 비평서 ‘관계의 미학’으로 유명한 스타 큐레이터 니콜라 부리오가 감독을 맡았다. 관객이 불을 쬘 수 있는 난로, 앉을 수 있는 의자부터 각자의 집에 대해 설명하는 글을 쓸 수 있는 작품 등 관객 참여로 완성되는 작품으로 구성한 1999년 전시 ‘Traffic’으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이번 전시에서 부리오는 ‘판소리’를 주제로 했지만, 그 내용은 한국의 전통극인 판소리보다 ‘판’(공간)과 소리라는 단어의 의미에 더 집중했다. 언론 간담회를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부리오는 그간 미술에서 자주 다뤄지지 않았던 감각인 ‘소리’를 중심으로 전시를 구성할 예정이다. 거대한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을 소리를 테마로 어떻게 채울지, 또 광주와 한국의 지역성과 어떤 연관을 맺을지가 미술계의 관심사다.대안공간 운영 기획자의 조각비엔날레9월 27일 개막하는 제7회 창원조각비엔날레 ‘큰 사과가 소리없이’는 ‘시청각’을 비롯한 대안 공간들을 10여년간 운영해 온 독립 기획자 현시원이 전시 감독을 맡았다. ‘시청각’은 한옥을 개조한 공간으로 2013~2019년 운영되다 용산으로 이전했으며, 동시대 젊은 작가들이 실험적인 전시를 선보여왔다. 조각 중심으로 진행됐던 지역 비엔날레가 서울 대안 공간의 문법과 어떻게 어우러질지가 관전 포인트다.현 감독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수직으로 서 있는 조각을 수평으로 눕혀서 보고 싶다”고 은유적으로 전시 주제를 밝혔다. 중요한 장소에 기념비처럼 홀로 서 있는 예술 작품이 아니라, 주변 지역과 공생하고 어우러지는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것. 이에 따라 창원의 역사나 산업사에 관한 연구를 토대로 한 김익현의 신작, 김정숙의 작품 등을 선보인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990년대 말 영국의 젊은 미술가(yBa·young British Artists)들이 죽은 상어, 침대, 피로 만든 두상 등을 작품이라고 주장하며 전시할 때 “그림을 그리지 않는 사람은 미술가가 아니다”라고 반박한 화가들이 있다. 이들 중 한 사람이었던 빌리 차일디시(본명 스티븐 햄퍼·65·사진)는 그림에 집착(stuck)한다는 연인 트레이시 에민의 핀잔을 그대로 가져와 ‘스터키즘’(회화를 고집하는 미술 운동)을 선언했다. 영국 미술사가 가장 뜨거웠던 시절 한가운데 있었던 화가 차일디시의 최근 작품이 리만머핀 서울에서 공개됐다. 4일 개막한 차일디시의 개인전 ‘now protected, I step forth(보호받았으니, 나는 이제 나아간다)’는 작가의 자화상으로 시작한다. 여러 색의 유화 물감으로 붓 터치를 하고, 목탄으로 윤곽을 잡은 그림은 배경의 리넨이 훤히 보인다. 여러 번 고민하고 고친 게 아니라 즉흥적으로 그려 나간 느낌이 역력하다. 차일디시는 이렇게 틀에 묶이지 않는 요동치는 감정을 표현하는 데 집중해 왔다. 그가 쓴 시나 음악에서는 마약 딜러로 감옥을 드나든 아버지 등 굴곡진 가정사나 트라우마에 대한 적나라한 고백이 등장한다. 16세에 중학교를 그만두고 미술학교 진학에 실패하자 지역 조선소의 견습 석공으로 일했고, 홀로 그린 그림 수백 점을 제출해 런던 세인트 마틴 예술학교에 입학했지만 2년 만에 퇴학을 당하고 오랜 기간 직업 없이 살기도 했다. 그런 중에도 소설과 시 40여 권, LP 170여 장을 발매하며 창작 활동을 한 그는 자신을 ‘아웃사이더 예술가’로 규정한다. 2012년 한국 첫 개인전에서는 이런 예술가들의 ‘기이한 용기’를 주제로 연작을 공개하며 한국의 문학가인 이광수와 이상의 초상을 그리기도 했다. 이번 전시는 그런 뜨거웠던 시간은 뒤로하고 고요하고 신비로운 자연 풍경을 주로 담았다. 보랏빛 구름이 일렁이는 하늘 가운데 떠 있는 달, 눈밭 위에 서 있는 나무, 숲을 헤치며 어슬렁거리는 늑대가 등장한다. 리만머핀 서울 관계자는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는 아름다움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 숭고함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8월 17일까지.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대형 미술관, 갤러리뿐만 아니라 젊은 기획자, 작가가 운영하는 을지로, 합정 일대 대안 공간까지. 서울에서 열리는 전시를 직접 찾아 사진으로 남기고 영어 글로 소개하는 플랫폼 ‘서울 아트 프렌드’를 운영하는 기자 겸 비평가 앤디 세인트루이스가 최근 한국의 밀레니얼 예술가를 영어로 소개하는 책 ‘Future Present: Contemporary Korea Art’를 펴냈다. 23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세인트루이스는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는 지금, 대중문화뿐만 아니라 한국의 현대 미술가도 국제적으로 발돋움할 시기가 됐다”고 말했다. 미국인인 그는 2010년부터 한국 미술 현장을 다니며 전시 리뷰, 비평을 영어 매체에 소개했다. 2013년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2018년 다시 한국에 온 후 인스타그램 계정 ‘서울 아트 프렌드’를 만들어 지금까지 서울의 전시 정보를 해외 구독자에게 전하고 있다. 책은 강서경, 김아영, 박가희, 백정기, 이은새 등 1970년대 후반 이후 출생한 작가 25명에게 집중한다. 젊은 작가에게 초점을 둔 이유를 그는 “나 역시 밀레니얼 세대이기에 친밀감을 느끼고, 그들이 이전 세대보다 국제적 문화 이슈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한다고 느낀다”며 “역사와 전통을 재해석하고, 사회 문화적 규범을 뒤집어 보거나 개인의 정체성을 적극 주장하는 태도 등이 해외 문화 담론과 접점이 있다고 봤다”고 했다. 이탈리아 미술 전문 출판사인 스키라에서 책을 펴내며 우여곡절도 많았다. 우선 많은 작가를 한번에 소개하는 만큼 수록된 작품 사진만 200장이 넘는다. 그는 “한국의 디자인 스튜디오인 워크룸과 논의한 끝에 책 페이지마다 전화번호부나 백과사전처럼 얇은 가로선을 넣어 찾아보기 쉽도록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출판사가 요구하는 인쇄 수준에 맞추려니 많은 비용이 필요했는데 마침 송은문화재단에서 신진, 중진 한국 작가에 관한 영어 출간물 후원을 시작해 책을 제작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한국 미술 현장을 10여 년간 지켜본 그는 “해외 갤러리가 서울에 진출하고, 프리즈 아트페어까지 열리면서 국내 미술 시장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며 “특히 새롭게 갤러리들이 생겨난 한남, 이태원, 경리단 지역이 미술 현장의 성장에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그러면서 “특히 밀레니얼 예술가들이 국제 미술 현장에 관심을 갖는 것과 동시에, 자신만의 표현 방식을 갈고닦고 있다”며 “새로운 세대의 예술가들이 한국 미술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현장에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무척 신난다”고 덧붙였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교통과 인터넷의 발달로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면서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개방적인 세상을 맞았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 다른 문화, 종교, 욕망이 충돌하며 국경을 걸어 잠그거나 교역을 제한하는 추세가 나타나고 있다. 국가주의, 고립주의로 돌아가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 책은 수백 년 전 세계의 상품이 모여들던 포르투갈 리스본에 살던 두 남자를 조명해 지금을 되돌아보게 한다. 첫 번째 인물은 16세기 후반 포르투갈 왕립 기록물 소장이던 다미앙 드 고이스(1502∼1574)다. 책은 그가 벽난로 옆에서 반쯤 타다 만 문서 조각을 쥔 채 사망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의 죽음에 관한 기록은 엇갈린다. 시신에 폭력의 흔적은 남았지만 불에 타 죽은 것인지, 교살당했는지, 그 범인은 누구인지 밝혀진 바가 없다. 이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두 번째 인물 루이스 드 카몽이스( ?∼1580)가 나타난다. 카몽이스는 세계를 방랑하며 겪은 경험을 서사시로 담아냈다. 이 서사시는 라틴어, 스페인어, 영어, 프랑스어로 번역돼 그는 포르투갈 국민 시인의 반열에 오른다. 그리고 그가 남긴 편지를 비롯해 다미앙 사망의 진범을 파헤칠 단서들이 드러나게 된다. 다미앙은 기록 보관소에서 종이 더미에 파묻혀 살았지만, 세계에서 모여든 기록을 탐독하며 넓은 시야로 변화하는 세상을 봤다. 반면 세계를 떠돌아다닌 카몽이스는 서사시를 통해 유럽인을 세계의 중심으로 내세우며 오히려 편협한 시각을 고집했다. 이 두 이야기를 교차하며 책은 어쩌면 인간은 낯선 사람과 문화를 접할수록 불안해하고 공격적으로 되며, 그러한 편협함이 본능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물리적 연결보다도 열린 태도로 세상을 볼 줄 알았던 다미앙의 시각과 상상력이 지금 더 필요한 자세임을 강조한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책, 도서관, 여행을 연구하고 중세와 르네상스 문학을 가르치는 저자의 꼼꼼한 연구와 이를 토대로 추리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서술이 인상적이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폭격기, 탱크 등 전쟁에 관한 이미지를 흑백의 거친 드로잉으로 보여 온 작가 최대진이 ‘꽃 그림’을 그렸다. 10일부터 서울 종로구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열고 있는 개인전 ‘내가 (살아)본 모든 살인들(Tous les meurtes que j’ai v(ec)us)’에서 작가는 처음 그려 본 꽃 그림을 공개했다. 전시장에는 흑백 드로잉 10여 점이 걸려 있다. 여기엔 서울의 풍경을 넓게 펼친 ‘두 개의 달’부터 작가가 대학생 시절 집회에 나섰다가 경찰에게 둘러싸여 얻어맞는 모습을 담은 작품, 걸그룹 에스파까지 다양한 장면을 그린 작품이 소개된다. 그리고 이 그림들 사이사이로 마치 칸막이를 치듯 장미꽃을 그린 작품 ‘오웰의 장미’ 연작이 배치되어 있다. 작가는 “꽃 그림은 미술 시장에서 팔기 위해 그린 쉬운 작품이라는 독특한 의미가 있다”며 “그럼에도 리베카 솔닛이 쓴 ‘오웰의 장미’를 읽으며 꽃이 주는 다른 감정에 공감하게 돼 그려도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오웰의 장미’는 문학가 조지 오웰이 일반인의 인식과 달리 정원 가꾸기를 즐겼음을 밝히며,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 사사로운 욕망도 사회 변화의 중요한 요인임을 드러낸 책이다. 최 작가는 “‘오웰의 장미’처럼 사소하지만, 개인의 일상에선 커다란 기쁨이 되는 감성에 집중한 결과물이 꽃 그림 연작”이라고 설명했다. 8월 4일까지.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버려진 비닐봉지를 오리고 붙인 뒤 그 위에 환경에 관한 관심을 드로잉과 메시지로 담아 공중에 띄우는 ‘무세오 에어로솔라’가 서울 하늘에도 등장한다. 리움미술관은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 중인 작가 토마스 사라세노와 함께 공공 참여 프로그램 ‘에어로센 서울’을 개최한다고 24일 밝혔다. ‘에어로센’은 사라세노가 2007년부터 시작해 예술가, 활동가, 과학자 등과 협업해 ‘생태 사회 정의’를 위한 여러 활동을 하는 공동체로, 전 세계 126개 도시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하나로 열리는 ‘무세오 에어로솔라’는 서울 용산구 내 단체들과 협업해 비닐봉지 약 5000개를 수집하고 이를 태양열을 이용해 다음 달에 띄운다. 또 에어로솔라 조형물을 오직 태양열만 이용해 띄우는 비행 키트인 ‘에어로센 백팩’을 제작하는 워크숍도 광주, 경기, 대구, 대전, 부산 등의 지역 미술관과 함께 개최한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이순신의 얼굴을 어떠한 어른으로 꾸밀지 한참 생각하였다. 용감한 무장으로 그리면 족할까, 아니 아니 춘원(이광수)의 말씀을 들으면 지, 덕, 용을 갖춘 어른의 얼굴로 그려야 할 것이다.” 한국적 산수의 전형을 만든 청전 이상범(1897∼1972)은 삽화를 그리는 신문사 미술기자로도 오랫동안 활동했다. 그는 1931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이광수 소설 ‘이순신’의 삽화를 그릴 때 고민을 글로 남겼다. 청전은 “무장, 도덕 군자, 선비의 얼굴을 혼합했다”며 “순전히 내 머리에서 빚어낸 얼굴을 후세가 어떻게 비평할지 모르겠다”고 썼다. 그 후 청전은 현충사 중건 과정에서 필요하게 된 이순신 영정도 제작한다. 청전처럼 20세기 신문사에서 기자 또는 사원 직함을 달고 전속 화가로 활동한 ‘미술기자’를 조명하는 전시 ‘아담한 필촉: 기자가 그려낸 신문 삽화 미장센’이 12일 서울 종로구 신문박물관에서 개막했다.● 삽화 미술의 시작 전시는 1910년대 신문 삽화 미술의 태동부터 1920년대 전성기를 미술기자의 행적을 중심으로 선보인다. 한국에서 최초의 만화가로 알려진 이는 이도영(1884∼1933)이다. ‘대한민보’의 1909년 창간호 1면에 목판 인쇄로 시사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이도영은 당대 최고 도화서 화원 출신 조석진과 안중식에게 전통 회화를 배웠다. 이도영이 그린 최초의 만화를 전시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문사에 소속돼 활동한 최초의 미술기자는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로도 불리는 고희동이다. 동아일보 창간 동인으로 참여한 고희동은 안석주, 이마동, 이승만 등 자신이 가르친 제자들도 대거 신문사로 영입해 미술기자 시대를 열었다.● 미술기자 전성시대 전시의 중심은 전성기 활약한 미술기자들이 남긴 자료다. 1920년대 여러 일간지가 창간되면서 각 신문은 화가를 미술기자로 채용했다. 이들은 일반 기자보다 더 많은 보수를 받으면서 신문에 필요한 도안, 삽화, 만화 등을 제작했다. 전시장에 비치된 대형 리플릿을 통해 청전을 비롯한 당대 미술기자들이 고민했던 흔적을 글로 볼 수 있다. 청전은 이순신은 물론 이광수의 ‘단종애사’ 삽화 제작도 가장 어려웠던 일로 꼽았다. 등장인물인 단종, 수양대군, 평안대군의 얼굴에 관해 남겨진 기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또 당시 건축부터 의복, 의관, 악기까지 어떠했는지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야 했기에 이광수와 부지런히 대화해야 했다. 당시 신문 소설은 지금의 영상 콘텐츠처럼 많은 사람들이 즐겨 보는 오락의 수단이기도 했다. 신문사들은 소설을 비롯한 문예 지면이 상업성과 경쟁력이 있다고 보고 전문 미술인을 채용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체계적인 미술 교육을 받거나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해 능력을 인정받은 화가들이 삽화 제작에 활발히 참여했다. 당시 동아일보의 이상범, 조선일보 노수현, 매일신보 이승만은 ‘삽화계 삼대 천왕’으로 불리며 당대 신문 삽화 미술의 부흥을 이끌었다. 전시 후반부는 1930년대 이후 신문사를 떠난 미술기자들이 영화감독, 미술가 등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에 종사하는 과정을 그린다. 안석주(1901∼1950)는 삽화가로 기른 재능을 영화 연출에 활용했는데, 그가 남긴 흑백 유성영화 ‘심청’이 상영된다. 한국화가 천경자와 ‘고바우 영감’의 작가 김성환의 1960, 70년대 소설 삽화와 만평도 전시된다. 9월 8일까지.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미국, 멕시코에서 전시를 열었지만 한국에서는 이번이 처음인 아침 김조은의 개인전 ‘최소침습’에는 두 겹으로 된 비단 그림이 있다. ‘Unshoved(빼내다, 내 목에서 뼈를 꺼내는 엄마 위 생선요리)’라는 제목의 그림 위 겹에는 생선 요리가, 아래 겹에는 딸의 목에 걸린 생선 가시를 빼주는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11일 전시가 열리는 서울 강남구 글래드스톤에서 만난 작가는 이렇게 설명했다. “밥을 먹는데 목에 피가 날 정도로 생선 가시가 박혔어요. 아빠는 ‘밥을 꿀떡 삼켜’라고만 하는데, 엄마가 망설임 없이 제 입에 손을 넣고 가시를 뺐고 그 기억이 강렬하게 남았어요. 딸에게 엄마는 경계 없는 사랑을 베풀지만 그게 때로 괴로운, 미묘한 관계잖아요.” 이 작품의 아래 겹 그림은 202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개인전에서 선보인 ‘사자굴’ 연작의 일부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 가족의 고통을 솔직하게 담아냈다.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하고, 빚쟁이가 아버지를 찾겠다고 우유 구멍으로 손을 집어넣는 극한의 상황까지 벌어졌다. 그는 “가족이 터부시하던 시절이었는데 응어리를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 집 문고리가 어떻게 생겼더라?’ 하고 작은 이야기로 가족과 대화를 시작했다”고 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관객들은 작가는 물론 부모님까지 붙잡고 저마다의 어려웠던 시절을 털어놓았고, 신진 작가임에도 LA카운티뮤지엄(LACMA)의 큐레이터와 아티스트 토크를 열었다. 그는 “비디오 가게, 우유 구멍, 피아노 같은 한국인만 알 수 있는 상징이 많은 작품이어서 한국 미술관에서도 꼭 전시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작업실에서 보내며 파티나 개막식에도 잘 가지 않는 ‘내향인’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삶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과 섬세함이 묻은 전시에 대한 입소문으로 여러 차례 개인전을 치렀다. 한국에서의 첫 전시 소감을 묻자 그는 “지금도 한국에 오면 꼭 고속터미널역에 있는 한가람문고를 가는데, 어릴 때는 주저하며 샀던 비싼 전문가용 붓을 한 꾸러미 사는 순간에야 실감이 났다”며 웃었다. 이번 전시 제목은 ‘최소한으로 자신을 드러내길 바라며 누군가의 기억엔 강렬하게 남고 싶어 하는’ 아이러니한 사람들의 인생 철학을 담았다. 최근 만든 작품들을 전시하는데, ‘사자굴’ 연작처럼 개인사를 직접 이야기하기보다 느낌과 감정을 담은 것이 많다. 전시장에서는 액자를 벽에서 살짝 띄우거나, 다른 느낌의 천을 겹치고, 왼쪽 오른쪽을 함께 그리는 등 어느 쪽으로도 결정 짓지 않으려는 연출이 돋보인다. 이에 대해 그는 “작품과 전시를 ‘초고’ 상태로 두기를 좋아한다”며 “오늘의 나보다 미래의 내가 더 나은 사람일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다”고 말했다. 전시는 다음 달 3일까지.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2주 전 발송한 프라도 미술관 큐레이터 하비에르 포르투스 페레스 인터뷰의 이어지는 내용입니다.지난 뉴스레터 보기 ☞ 서양 미술사의 가장 미스터리한 그림, ‘시녀들’ 이탈리아 고전 미술의 영향- 벨라스케스가 초상, 역사화 등 전통적인 구분을 깼지만 그 바탕에는 고전 미술에 대한 충실한 이해가 있었다고요.맞습니다. 벨라스케스는 이탈리아를 두 번 여행했는데, 30세에 떠난 첫 번째 여행에서 시스틴 채플, 바티칸 벽화, 고대 로마 조각 등을 그렸습니다. 그러한 고전 예술에서 벨라스케스가 많은 배움을 얻었음을 알 수 있는데요.예를 들어 이 그림은 이탈리아로 여행하기 직전에 그린 것입니다. 훌륭하지만 공간의 관점에서 약간의 문제가 있죠. 인물이 모두 전경에 나열되어 있어서 공간이 없어 보인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그리고 몇 달 뒤 고대 조각,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를 연구한 뒤 공간 문제를 해결했음이 다음 작품에서 드러나죠.여기서 공간은 매우 작지만 나름의 규칙이 있죠. 또 인물을 보면 고대 조각을 연구했음을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동시에 모든 인물들이 일상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벨라스케스만의 특징도 살아 있습니다.- 벨라스케스 그림 속 사람들은 늘 움직이는 듯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중간을 포착한 것 같아요. 네. 인물의 얼굴은 고대 그리스 로마 조각을 연상케 하지만, 벨라스케스는 늘 다르게 보이는 것을 추구했어요.처음부터 남들과 달라야 함을 생각했다는 것이 벨라스케스의 주요한 특징이죠.이탈리아 로마에 가서도 고대 예술에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늘 ‘다름’을 고민했어요.- 고대 예술을 해석해서 자신만의 버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네요. 벨라스케스를 이해하려면 그가 유럽 전역에서 가장 중요한 회화 컬렉션과 가까이에 있었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스페인 펠리페 4세 왕은 그 시절 가장 중요한 컬렉터였어요. 또 궁에는 티치아노, 루벤스의 최상급 작품들이 있었죠. 벨라스케스는 루벤스, 티치아노, 틴토레토, 반 다이크 그림에 둘러싸여 있었어요.‘스페인 미술’ 아닌 ‘유럽 미술 네트워크’를 조명하는 미술관의 전략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19세기까지 스페인 미술을 연구하던 역사가들은 우리 미술이 다른 나라와 어떻게 다른지, 스페인에 고유한 특징을 강조하는 데 몰두했어요.그런데 그 후 이어진 연구에서 스페인이 그렇게 고립되어 있지 않았고, 오히려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좋은 작품들을 갖고 있음을 주목했죠.지난 50년간 스페인 미술사는 벨라스케스, 무리요, 주르바란을 고립된 화가가 아니라 유럽과 교류하고 이해하는 화가라는 관점에서 조명하려 노력했습니다.벨라스케스의 경우 티치아노, 루벤스, 반 다이크의 작품을 매우 잘 알고 있었죠. 또 이탈리아 화가도요. 이들을 아주 잘 알면서 자신만의 개성을 갖고 싶어 했어요.- 맞아요. 어제 프라도의 컬렉션 전시를 보면서 그런 맥락에 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예전에는 벨라스케스와 고야가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재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상설전을 순서대로 따라가 보니 티치아노, 루벤스의 영향을 느낄 수가 있었어요.현재 미술관 상설전의 배열이 정확히 그 점을 강조하려 했습니다.예를 들어, 메인 갤러리에서는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색채 화가인 베네치아 화가들을 볼 수 있어요.그다음으로 루벤스가 있어요. 루벤스는 비록 플랑드르 사람이었지만, 베네치아 화가들의 진정한 후계자였죠. 당시에는 국가별 작가 개념이 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죠.18세기부터 미술사는 주로 국가의 관점에서 쓰여 졌지만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멉니다.피카소가 해석한 ‘시녀들’‘시녀들’을 미술 내 장르, 국제적 미술의 관점뿐 아니라 다른 것과도 연결 지어 볼 수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연결 고리는 연극입니다.당시 스페인에선 연극은 왕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즐겼어요. 작가들은 한 작품 속에 다양한 의미를 넣어 누구나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했죠.‘시녀들’에도 비슷한 속성이 있어요. 연극처럼 여러 가지 의미를 복합적으로 넣은 것이 그렇죠. 그리고 이를 정확히 이해한 예술가 중 한 명이 바로 파블로 피카소예요.- 피카소가 ‘시녀들’을 리메이크 한 연작 58점을 만들었죠?네. 그런데 마지막 작품이 무엇인지 기억하시나요? 이 작품이에요. 마치 연극 무대에서 관객에게 배우가 작별 인사를 하는 것 같죠. 피카소는 ‘시녀들’ 연작을 막이 내린 연극처럼 표현했어요.- 피카소는 벨라스케스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 거네요. 피카소는 벨라스케스와 경쟁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재밌는 건 이 연작에서 피카소가 처음엔 벨라스케스를 거인 같은 존재로 그렸는데, 뒤로 갈수록 벨라스케스가 점점 사라진다는 점이에요. - 피카소의 작품에선 늘 야망이 느껴져요. 가끔은 너무 강해서 부담스러울 정도로…그렇죠. 뜨거운 사람이었어요. 피카소는 벨라스케스보다 고야와 더 닮았어요. 두 예술가는 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어요.벨라스케스의 작품에서 개인적인 감정을 찾기는 쉽지 않죠. 고야의 시대부터 예술들이 주관적인 생각, 정치에 대한 관점, 시대에 관한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예술을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개인적으로 벨라스케스보다 고야에 더 공감할 때가 많아요. 벨라스케스는 그림과 보는 사람 사이에 거리를 두는 경향이 있는데, 이 시대 예술가들에겐 일반적인 일이에요.- 그렇지만 벨라스케스와 고야 모두 19세기 미술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요. 스페인의 어떤 속성이 이런 예술을 가능하게 했는지도 궁금합니다.스페인적 요소가 전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지만, 일반인들이 좋아하는 것과 예술가가 하고 싶은 것 사이 교차점을 찾으려고 했던 점이 있는 것 같아요. 스페인 예술가들은 ‘현실적인 것’을 좋아했고 이는 스페인 사회의 중요한 특성이기도 합니다.※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오래된 한옥 건물 지하를 와인 저장고로 개조하고, 일본인 셰프를 모셔 와 한국에 정착하게 만드는가 하면, 이탈리아 시칠리아 출신 셰프가 운영하던 레스토랑도 인수한다. 보고 느끼는 예술 작품뿐 아니라 맛과 감각으로 무장한 ‘미식’에도 신경 쓰는 갤러리스트들 이야기다. 이들은 갤러리 내외부에서 레스토랑과 카페를 직접 운영한다.● 1·2대의 다른 취향, 두가헌과 에밀리오 갤러리현대는 서울 종로구 삼청동 갤러리 옆 두가헌과 강남구 청담동 에밀리오 두 곳을 운영하고 있다. 이 중 두가헌은 1910년대 만들어진 한옥을 개조해 2004년 문을 연 곳으로 지하 공간에는 300여 종의 와인 3000여 병이 보관돼 있다. 도형태 부회장은 “처음 아버지와 이 한옥을 발견했을 때 지하는 와인 셀러로 완벽하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청전 이상범의 수묵화와 김창열의 물방울 작품이 걸려 있는 두가헌은 파스타, 스테이크 등 코스 메뉴를 판매하지만, 한국인의 입맛에 맞춘 것이 특징이다. 오래전부터 갤러리현대를 찾은 전통적 컬렉터, 원로 작가 취향에 맞춰 대부분 요리를 저염으로 부드럽게 조리한다. 대표 메뉴는 한우 스테이크와 전복구이다. 이에 반해 도 부회장이 올해 초 인수한 에밀리오는 이탈리아식으로 더 과감히 밀고 나간다. 시칠리아 셰프가 운영하던 메뉴를 살려 버섯 크림에 비벼 먹는 파케리 파스타, 카포나타, 아란치니, 포카치아, 올리브를 곁들여 먹는 시칠리아 스타일 애피타이저, 양갈비구이가 대표 메뉴다. 레스토랑 내에는 이반 나바로의 발광다이오드(LED) 작품, 라이언 갠더의 풍선 설치 작품 등 국내외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으로 활기찬 분위기를 연출했다.● “한식 양식 일식 중에 골라”, 국제갤러리 카페 국제갤러리는 삼청동 K1 건물 1, 2층에 각각 ‘카페@더 레스토랑’과 ‘더 레스토랑’을 운영한다. ‘애플 포타주’를 비롯한 정통 프렌치 코스 요리를 맛볼 수 있는 더 레스토랑에는 양혜규의 벽지 작업이 설치돼 있다. 카페 벽면에는 김영나, 냅킨에는 홍승혜의 디자인 문양이 그려져 있는 등 갤러리 전속 작가들의 손길이 곳곳에 묻어 있다. 메뉴는 일본 도쿄 럭셔리 호텔과 현지 대형 외식 그룹 총괄 셰프를 지낸 아베 고이치가 1999년부터 총괄 담당하고 있다. 독특한 것은 카페 메뉴다.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 다 준비했다’는 듯 연어 스테이크, 해장 짬뽕, 매운 해산물 떡볶이와 사누키 우동 등 한식 일식 양식이 공존한다. 초기에는 파스타, 샌드위치, 샐러드 위주의 종이 1장짜리였던 메뉴판이 지금은 얇은 책 한 권이 됐다. 여기에는 2세 경영자인 김찰스창한 사장의 의견이 적극 반영됐다. 국제갤러리 관계자는 “갤러리 레스토랑은 전시 관람의 경험이 미식으로도 이어지는 곳”이라며 “이런 점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대중적인 메뉴도 함께 준비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해장 짬뽕은 아베 셰프가 가끔 갤러리 직원들과 나눠 먹던 음식이 김 사장의 추천으로 정식 메뉴가 됐다. 이 관계자는 “김 사장이 지금은 갤러리 운영 전반에 참여하지만 처음에는 레스토랑, 카페를 경영했다”며 “지금도 새로운 메뉴 개발은 물론이고 테이스팅까지 관여한다”고 했다. 지난해 프리즈 서울과 연계해 갤러리들이 야간에 문을 연 ‘삼청 나잇’ 행사 때도 VIP뿐 아니라 일반인에게 개방한 데는 김 사장의 의지가 반영됐다는 후문이다.● 미술인들, 미식에도 진심 국제갤러리의 더 레스토랑이 처음 문을 연 1999년에는 ‘갤러리에서 무슨 식당이냐’며 비판을 받았다. 당시 이현숙 회장은 갤러리 비즈니스에 식사와 미팅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후임에도 과감하게 레스토랑 오픈을 결정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전시 관람 문화가 확산되면서 미술관에서도 식음료 서비스를 중요하게 여기고, 소셜미디어에서도 주목받는다. 전시를 관람하는 큐레이터, 작가 등 미술인들 사이에서는 전시와 함께 인근 맛집을 소개하는 인스타그램 계정 우뚜기(@oottoogi)가 인기다. 6만7000명이 팔로하는 이 계정을 운영하는 A 씨는 “비엔날레와 대형 전시처럼 실제로 많이 움직이며 보는 전시도 있고, 작은 전시라도 보는 데 마음과 머리를 많이 써야 한다”며 “그러면 허기가 지기에 자연스레 먹을 만한 곳을 찾게 된다”고 했다. 호암미술관은 불교 미술 기획전이 열리는 3월부터 6월까지 태극당과 협업해 팝업 카페를 열었다. 팝업 카페를 기획한 이정진 삼성문화재단 대외협력실장은 “고미술 전시에 맞춰 나름의 역사와 창의적인 정체성을 갖춘 곳을 중심으로 물색했고 ‘극락 라떼’ ‘연꽃 에이드’ 등 한정 메뉴 반응이 좋았다”며 “전시 관람객의 30%가 카페를 함께 이용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산지 갤러리가 8월 17일까지 ‘그 다양한 시선’이라는 주제로 현대미술의 다채로운 세계를 탐험할 수 있는 전시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는 몇 개의 선과 모양만으로 현대인의 익명성을 나타냄과 동시에 경쾌하고 친숙하게 인물 형상을 완성시킨 팝아티스트 줄리안 오피(Julian Opie)를 선두로 자연, 동식물, 인간의 공존과 상호 의존적인 관계를 비유와 상징이 가득한 화풍으로 표현하는 일본 작가 유이치 히라코, 1993년 ‘아톰’과 ‘미키마우스’의 결합으로 탄생한 캐릭터 ‘아토마우스’로 유명한 한국의 현대미술 작가 이동기를 비롯한 총 8명의 작가가 참여한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오래된 한옥 건물 지하를 와인 저장고로 개조하고, 일본인 셰프를 모셔 와 한국에 정착하게 만드는가 하면, 이탈리아 시칠리아 출신 셰프가 운영하던 레스토랑도 인수한다. 보고 느끼는 예술 작품뿐 아니라 맛과 감각으로 무장한 ‘미식’에도 신경 쓰는 갤러리스트들 이야기다. 이들은 갤러리 내외부에서 레스토랑과 카페를 직접 운영한다.1∙2대의 다른 취향, 두가헌과 에밀리오갤러리현대는 서울 종로구 삼청동 갤러리 옆 두가헌과 강남구 청담동 에밀리오 두 곳을 운영하고 있다. 이 중 두가헌은 1910년대 만들어진 한옥을 개조해 2004년 문을 연 곳으로 지하 공간에는 300여 종의 와인 3000여 병이 보관되어 있다. 도형태 부회장은 “처음 아버지와 이 한옥을 발견했을 때 지하는 와인 셀러로 완벽하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청전 이상범의 수묵화와 김창열의 물방울 작품이 걸려 있는 두가헌은 파스타, 스테이크 등 코스 메뉴를 판매하지만, 한국인의 입맛에 맞춘 것이 특징이다. 오래전부터 갤러리현대를 찾은 전통적 컬렉터, 원로 작가 취향에 맞춰 대부분 요리를 저염으로 부드럽게 조리한다. 대표 메뉴는 한우 스테이크와 전복구이다.이에 반해 도 부회장이 올해 초 인수한 에밀리오는 이탈리아식으로 더 과감히 밀고 나간다. 시칠리아 셰프가 운영하던 메뉴를 살려 버섯 크림에 비벼 먹는 파케리 파스타, 카포나타, 아란치니, 포카치아, 올리브를 곁들여 먹는 시칠리아 스타일 애피타이저, 양갈비구이가 대표 메뉴다. 레스토랑 내에는 이반 나바로의 LED 작품, 라이언 갠더의 풍선 설치 작품 등 국내외 현대 미술가 작품으로 활기찬 분위기를 연출했다.“한식 양식 일식 중에 골라”, 국제갤러리 카페국제갤러리는 삼청동 K1 건물 1, 2층에 각각 ‘카페@더 레스토랑(카페)’와 ‘더 레스토랑’을 운영한다. ‘애플 포타주’를 비롯한 정통 프렌치 코스 요리를 맛볼 수 있는 더 레스토랑에는 양혜규의 벽지 작업이 설치되어 있다. 카페 벽면에는 김영나, 냅킨에는 홍승혜의 디자인 문양이 그려지는 등 갤러리 전속 작가들의 손길이 곳곳에 묻어있다. 메뉴는 일본 도쿄 럭셔리 호텔과 현지 대형 외식 그룹 총괄 셰프를 지낸 아베 고이치가 1999년부터 지금까지 총괄하고 있다.독특한 것은 카페 메뉴다.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 다 준비 했다’는 듯 연어 스테이크, 해장 짬뽕, 매운 해산물 떡볶이와 사누끼 우동 등 한식 일식 양식이 공존한다. 초기에는 파스타, 샌드위치, 샐러드 위주의 종이 1장짜리였던 메뉴판이 지금은 책 한 권이 됐다.여기에는 2세 경영자인 김찰스창한 사장의 의견이 적극 반영됐다. 국제 갤러리 관계자는 “갤러리 레스토랑은 전시 관람의 경험이 미식으로도 이어지는 곳”이라며 “이런 점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대중적인 메뉴도 함께 준비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해장 짬뽕은 아베 셰프가 가끔 갤러리 직원들과 나눠 먹던 음식이 김 사장의 추천으로 정식 메뉴가 됐다.이 관계자는 “김 사장이 지금은 갤러리 운영 전반에 관여하지만, 처음에는 레스토랑, 카페 경영부터 참여했다”며 “지금도 새로운 메뉴 개발은 물론 테이스팅까지 관여한다”고 했다. 지난해 프리즈 서울과 연계해 갤러리들이 야간에 문을 연 ‘삼청 나잇’ 행사 때도 VIP뿐 아니라 일반인에 개방한 데 김 사장의 의지가 반영됐다는 후문이다.미술인들, 미식에도 진심국제갤러리의 더 레스토랑이 처음 문을 연 1999년에는 ‘갤러리에서 무슨 식당이냐’며 비판을 받았다. 당시 이현숙 회장은 갤러리 비즈니스에 식사와 미팅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IMF 직후임에도 과감하게 레스토랑 오픈을 결정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전시 관람 문화가 확산하면서 미술관에서도 식음료 서비스를 중요하게 여기고, 소셜 미디어에서도 주목받는다.전시를 관람하는 큐레이터, 작가 등 미술인들 사이에서는 전시와 함께 인근 맛집을 소개하는 인스타그램 계정 우뚜기(@oottoogi)가 인기다. 6만7000명이 팔로우하는 이 계정을 운영하는 A씨는 “비엔날레와 대형 전시처럼 실제로 많이 움직이며 보는 전시도 있고, 작은 전시라도 보는 데 마음과 머리를 많이 써야 한다”며 “그러면 허기가 지기에 자연스레 먹을 만한 곳을 찾게 된다”고 했다.호암미술관은 불교 미술 기획전이 열리는 3월부터 6월까지 태극당과 협업해 팝업 카페를 열었다. 팝업 카페를 기획한 이정진 삼성문화재단 대외협력실장은 “고미술 전시에 맞춰 나름의 역사와 창의적인 정체성을 갖춘 곳을 중심으로 물색했고 ‘극락 라떼’, ‘연꽃 에이드’ 등 한정 메뉴 반응이 좋았다”며 “전시 관람객의 30%가 카페를 함께 이용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글로벌 아트페어와 여러 파티가 열리는 한국 미술 현장이 일본보다 더 활기차다고 느꼈어요. 또 일본에서 K팝 등 한국에 관심이 많아 한국 작가와 디자이너도 소개할 생각입니다.” 13일 서울 용산구 갤러리 상히읗에서 만난 야노 앤 캄&펑크 갤러리 프로듀서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 도쿄에 있는 캄&펑크 갤러리는 이날 상히읗에서 일본 작가 나리타 히카루, 오카다 슌의 2인전 ‘대안적 존재: 내 이웃이 보는 풍경’을 열었다. 19일에는 캄&펑크 갤러리에서 한국 작가 이승희, 추수의 2인전 ‘대안적 존재: 모자만 아는 일’이 개막한다. 두 갤러리는 각 나라의 작가를 상대 갤러리에 소개하는 교환 프로그램을 열기로 했다. 지혜진 상히읗 대표는 “지난해 야노 씨가 프리즈 서울을 찾아 만나게 됐고 젊은 작가를 서로 소개하자는 공감대가 있어 교류 전시를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야노 프로듀서는 “한국의 여러 갤러리에서 일본 작가 개인전이 열리고, 오카자키 겐지로 같은 원로 작가도 소개돼 놀랐다”고 했다. 상히읗에서 전시되는 두 일본 작가는 애니메이션이나 장난감의 캐릭터, 컴퓨터의 오류 화면에서 이미지를 가져와 작품을 만든다. 나리타는 인공 대리석 위에 조각으로, 오카다는 캔버스에 두껍게 올린 물감으로 표현한다. 이미지는 온라인에서 가져왔지만 결과물은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 손맛이 느껴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승희는 동물을 신비로운 존재로 표현한 회화와 ‘개도사’ 조각 연작을 선보인다. 추수는 2021년 인공지능 음악 회사의 제안으로 만든 버추얼 인플루언서 ‘에이미’를 소재로 한 연작을 소개한다. 20일에는 일본의 유명 가상 인플루언서인 ‘이마’를 만든 제작사 Aww의 프로듀서 사라 주스토와 추수 작가의 아티스트 토크도 연다. 두 전시는 다음 달 4일까지.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미술관을 자주 찾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곳에 걸린 작품은 어딘가 움츠러들고 대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작품의 작가를 직접 만나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조심스럽고, 실수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죠. 그런 예술가들의 솔직한 일상은 어떨까요?취재 현장에서 작가 본인은 물론 큐레이터, 혹은 과거 작가와 일했던 스튜디오 관계자나 지인을 만나면 일상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곤 합니다.다른 모든 사람처럼 고군분투하며 때론 초라하기까지 한 일상을 알면 예술이 탄생하는 과정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꿋꿋하게 버틴다사실 대부분의 예술 작품은 동시대에는 소수의 사람만 가치를 알아봅니다. 이에 예술가는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직감을 믿으며 앞으로 나아가야할 때가 있는데요.한국에서 전시를 열고 있는 팝아트 화가 제임스 로젠퀴스트(1933~2017)의 친구이자 재단 이사인 존 코벳을 만났습니다.로젠퀴스트는 앤디 워홀과 달리 빌보드 화가 출신으로 그림에 집중하고 상징과 은유를 활용해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표현이 없어 덜 주목받았습니다.이런 가운데 최근 ‘팝아트’라는 타이틀보다 회화 자체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재조명을 받고 있는데요. 코벳은 그런 시대 변화에 관한 로젠퀴스트의이야기를 전했습니다.“어느 날 제임스가 1950, 1960년대 미술 잡지 한 더미를 가져와 책상에 턱 놓았어요. 그 잡지들을 한 장씩 넘기며 보이는 예술가마다 손가락으로 가리켰죠.그러면서 “처음 보는 작가”, “이 사람도 몰라”, “피카소는 알지”, “이 작가도 처음”, “모르는 작가”라며 몇 권을 계속 넘기더군요.미디어에는 수많은 작가가 언급되지만 그중 살아남는 건 일부라는 이야기죠.”로젠퀴스트는 끊임없이 변하는 동시대의 반응에 흔들리지 말고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충실하면 언젠가는 때를 만나 빛을 볼 날이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그의 말대로 최근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대형 작품이 새롭게 소장되며 미국의 중요한 작가로 재평가를 받습니다.● 생각만큼 화려하지 않다‘노마디즘 예술가’로 불리는 김주영 작가는 최근 서울 종로구 토탈미술관에서 열린 ‘월요살롱’에서 1980년대에 교수직을 버리고 프랑스로 떠났을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운동화와 가방만 들고 떠난 김 작가는 파리 대학에 등록하고, 그곳에서 그림 그리기 방법론을 떠나 자유로운 사고에 대해 이야기하는 강의에 감명받습니다.포스트모더니즘을 공부하고 싶어 무작정 찾아가 수업을 듣게 해달라 졸랐던 조그마한 철학 교수는 질 들뢰즈.동양에서 온 학생이 간절해 보였는지 들뢰즈는 그를 받아주었고, 프랑스어도 제대로 못 했던 작가는 들리는 단어를 받아 적고 나중에 책에서 관련내용을 찾아보며 적응해 나갔습니다.작업실은 재건축으로 철거가 예정된 빈 건물에서 다른 작가들과 함께 나누어 썼죠. 그래도 한국에선 검은색을 즐겨 쓰는 그녀의 작품을 ‘어둡고 부정적’이라고만 했는데, 프랑스 미술계의 사뭇 다른 반응과 수상, 레지던시 입주 등 성과에 공부와 작업을 이어갔습니다.그러다 귀국하니 너무나 캐주얼한 자신의 복장과 달리 프랑스 유학 간 친구를 만난다고 귀부인처럼 꾸미고 온 친구들 앞에서 ‘예술가의 현실과 일반적 삶의 괴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라는 고민이 들었다고 합니다.● 초라할만큼 파고든다우리의 상상보다 예술가의 삶은 덜 우아하고 때로는 초라하기까지 합니다.한국을 찾은 프랜시스 모리스 테이트 모던 명예관장은 루이스 부르주아가 “함께 일하기에는 무서운 사람”이었다고 기억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들지 않는 말을 하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가 잠시 뒤엔 한없이 다정한,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었다고요.그런 부르주아는 언제나 자신이 어릴 적 겪었던 트라우마와 아픈 기억을 되새기며 작업의 원천으로 삼았습니다.모리스는 “부르주아가 예술 작업으로 트라우마를 치유하려 했지만, (좋은 작품을 위해서) 그 문제가 영원히 해결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다”고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집중하며 보통 사람이라면 너무 초라하고 부끄러워서 외면할 문제들을 훌륭한 작가들은 깊이 파고들고 있는 것이죠.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 ‘앤디 워홀 다이어리’에도 워홀의 초라한 모습이 등장합니다. 동유럽 이민자 가정 출신이었던 워홀은 늘 앵글로색슨백인(WASP)처럼 될 수 없다는 데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습니다.“나는 너무 이상하게 생겨서 어디에 낄 수 없고 이를 바꿀 수도 없다”는 내용이 일기에도 자주 나옵니다.자본주의 사회가 주는 콤플렉스와 판타지를 깊이 파고든 결과물이 워홀의 예술인 것이죠. 그런 워홀도 자신이 좋아하고 아꼈던 젊은 작가 장미셸바스키아가 흑인으로서 받는 차별의 시선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습니다.이렇게 예술가들은 저마다 가진 현실의 문제와 그것이 주는 불안을 끌어안고 거기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초라함, 불안, 허무를 정면으로 파고들어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 좋은 예술 작품이 관객을 위로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여기에 있습니다.※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