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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봉화산 자락 경동제일교회 본당 복도에는 역대 교역자와 장로의 초상이 있다. 그중 눈길을 끄는 것은 엄귀현 영수(領袖) 사진이다. 영수는 정당 등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국내 개신교 초기에 있던 직분이다. 종치기 청소 행정은 물론이고 설교자가 없을 때는 설교도 하며 교회의 모든 일을 관리하는 봉사직이다. 왕손 이재형의 말을 끌던 마부 엄귀현은 “나리께서 예수 믿으시면 일평생 마부꾼으로 모시겠다”며 신앙을 권유했다고 한다. 이재형은 나중에 서울 승동교회 7대 목사가 됐다. 엄귀현은 1951년 1·4후퇴 때 경기 평택까지 내려간 뒤 교회를 지키겠다며 상경하다 폭격으로 숨졌다. 최근 출간된 ‘예수로 산 한국의 인물들’(전정희 지음·홍성사·사진)은 엄귀현을 비롯해 개신교 초기 인물 31명을 다뤘다. 가나안농군학교를 설립한 김용기 장로, 독립운동가 이상재, ‘바보 의사’ 장기려 박사 등의 삶을 이끌었던 신앙의 원천을 탐구했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보수적 성향의 개신교 연합기관인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과 CTS기독교TV는 부활절인 4월 12일 서울 도심에서 대규모 퍼레이드를 연다. 부활절 퍼레이드는 이날 오후 4시 서울 중구 정동길 이화여고를 출발해 세종대로 사거리와 서울시청 광장 등을 도는 4km 구간에서 진행된다. 행렬 참여자는 5000여 명이고 주변 인파까지 합하면 30만 명이 모인다는 게 주최 측 계산이다.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5일 열린 한교총 기자회견에서 퍼레이드 조직위원장인 소강석 목사(예장 합동 차기 총회장)는 “이번 행사는 아시아 최초의 이스터(Easter·부활절) 퍼레이드가 될 것”이라며 “우리 사회에 충돌과 갈등의 문화가 만연해 있는데 이 퍼레이드는 그리스도 부활을 축하하는 축제이자 우리 사회의 대화해를 위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교총은 이날 오후 3시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부활절 예배를 올린 뒤 퍼레이드에 참여할 계획이다. 오후 7시 광화문 특설무대에서 기념음악회가 이어진다. 한교총 공동대표회장인 김태영 목사(예장 통합 총회장)는 “4·15 총선 사흘 전 열리는 행사라 정치적인 우려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투표는 개인의 신성한 권리로 정치가 교회를, 교회가 정치를 끌어들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했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19세 때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그의 꿈은 나이 서른 전에 1억 원을 모으는 것이었다. 뉴욕에서 캐비아, 푸아그라, 캔디 등을 수입 판매했다. 28세 때 목표를 이뤘지만 기쁨보다는 공허감이 더 컸다. 얼마 뒤 같은 날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당신이 사관 가족의 일원으로 살기를 기도하겠다”는 구세군(The Salvation Army) 사관들의 전화가 이어졌다. 그때 “이게 콜링(Calling·소명)이구나. 피할 수 없으면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늦깎이로 구세군 사관학교에 입교한 그는 35세에 사관으로 임관했다.》 6일 한국구세군 책임자로 취임하는 장만희 사령관(62) 스토리다. 이민자 출신으로는 첫 구세군 사령관이다. 지난달 29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구세군회관에서 그를 만났다. 구세군은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군대’를 표방하며 군대식 조직을 따른다. 각 군국(軍國)의 최고지도자는 사령관이며 계급으로는 통상 부장(副將)이다. 성직자는 사관 호칭을 쓰고 계급은 부위, 정위, 참령, 부정령, 정령, 부장으로 올라간다. 장 사령관은 증조할아버지인 장춘경 사관부터 4대째 구세군 사관의 맥을 잇고 있다. ―사업가로도 유망했던 것 아닌가. “일찍 목표를 달성한 걸 보면 자질이 아주 없지는 않았던 것 같다(웃음). 태어난 곳이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 구세군 관사였다. 미국에서 사관이 됐지만 언젠가 한국에서 일할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태어나 60여 년, 이 자리에 있으니 운명 같다.” ―국내에서는 자선냄비로 잘 알려진 구세군이 개신교단인 줄 모르는 이들이 많다. 미국 분위기는 어떤가. “미국에서 구세군은 코카콜라, 맥도널드 햄버거만큼 유명한 이름이다. 하지만 구세군의 종교적인 배경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가장 잘 숨겨진 비밀’이라고 한다. 구세군은 교단으로 세력화를 추구하지 않아 대형 교회도 없다. 개신교 내에 교단 갈등이 있지만 구세군서 모이자고 하면 잘 모인다.” ―지난해 자선냄비 성과는…. “연말 집중 모금 기간 기준 약 57억 원으로 전년보다 2.35% 늘었다. 모금액보다는 기부금을 후원자 뜻에 맞춰 선하게 쓸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미국에서는 성인재활센터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재활이란 표현 때문에 오해가 있을 수 있다. 이 재활센터는 알코올과 마약중독자를 위한 것으로 육체적 재활을 포함해 정신적, 영적 재활을 담당한다. 50개 주에 100곳이 있는데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미 연방정부가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규모다. 내가 주로 활동하던 서부 지역은 13개 주에 25개 센터가 있다.” ―어떻게 재활을 돕나. “미국 대통령이 전쟁을 선언해도 해결할 수 없는 게 중독 문제다. 가족이나 직장에서 원인이 생긴 경우도 많다. 센터에서는 6개월간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며 생활 습관을 바꾸게 하고 작업 치료도 병행한다. 출근 시간에 맞춰 일어나 일터로 간다. 기부된 옷을 골라 옷걸이에 거는 작업을 반복해 육체적 능력을 깨운다. 90일 정도 지나면 육체적, 정신적 능력이 회복되는데 이후 개인의 능력과 취향에 맞춰 직업교육을 실시한다.” ―8월 아시아태평양지도자회의 참석을 위해 브라이언 패들 세계구세군 대장 등 지도부가 한국을 찾는다. “일본이 올림픽 때문에 개최가 어렵다고 해 한국에서 열린다. 구세군 대장의 비전을 공유하면서 지역 발전을 위한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기회다.”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요한복음 3장 16절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주셨다.’ 가장 중요한 단어는 ‘누구든지’다. 중독자나 노숙인 등 소외된 이들을 모두 포함한다.”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삼보(三寶)사찰인 해인사의 원당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을 지낸 혜암(慧菴) 스님(1920∼2001)의 체취가 여전한 곳이다. 지척에 스님이 수행하던 미소굴과 그의 말씀 중 큰 가르침으로 남은 ‘공부하다 죽어라’를 새긴 비(碑)가 우뚝 서 있다. 4월 14일은 혜암 스님 탄신 100주년 되는 날이다. 17일 원당암 염화실에서 혜암 스님의 제자이자 해인사 가장 큰어른인 방장(方丈) 원각(源覺) 스님(73·사진)을 만났다. ―‘공부하다 죽어라’, 젊은 시절 접했을 때와 지금의 새김은 어떻습니까. “수십 년 전이나 지금 모두 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죽을힘 다해 공부해라, 정성 쏟아 참선해라. 사중득활(死中得活), 참으로 죽으면 살길이 열립니다. 모든 걸 버리면 길이 보인다는 게 핵심이지요. 온갖 것에서 벗어나면 모든 것이 통합니다.” ―은사 스님 탄신 100주년이 다가옵니다. “지난해부터 은사의 수행처를 답사해 왔습니다. 이전 극락암 행사에는 800여 명이 왔습니다. 스님의 법어를 쉽게 풀어 쓴 책도 출간합니다. BTN불교TV에서 부처님오신날 무렵 은사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고 4월 14일에는 종정 스님을 모시고 탄신기념법회를 엽니다. 4월 한 달간 해인사 성보박물관에서 유품 전시회도 합니다.”―은사와의 일화를 들려주신다면…. “1966년 대학 입시를 준비하다 출가를 결심했는데 저를 받아주실 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중노릇 잘 못하면 상좌(제자)를 잘못 가르친 스승도 같이 지옥에 떨어진다. 그러니 중노릇 잘하라’고 하시더군요.”―법명을 스스로 지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인사 중봉암에서 행자 생활할 때 강원(講院)도 다니지 않아 유일하게 배운 게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이었는데 신심이 생기고 좋았습니다. 하루는 은사가 부르더니 뭐가 좋으냐고 물으셔요. 그래서 ‘평등성중 무피차 대원경상 절친소(平等性中 無彼此 大圓鏡上 絶親疎)’를 꼽았죠. 평등한 성품 가운데는 너와 내가 따로 없고, 둥글고 큰 지혜의 자리엔 가깝고 먼 게 끊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랬더니 법명을 한번 지어보라고 하세요. 생각 끝에 성각(性覺)이 어떠냐고 여쭈니 자신과 같은 돌림이라 안 된다고 해서 지금의 법명을 쓰게 됐습니다.” 혜암은 은사의 법호이고, 법명은 성관(性觀)이다. ―혜암 스님은 장좌불와(長坐不臥)로 유명했는데요. “사람이니 어쩔 수 없어 스님도 가끔 고개를 떨구셨죠. 조는 게 아니고 경책(警策)하러 앞에 서면 자세를 잡으시곤 했어요. 공부하려고 애쓰는 게 몸에 배어 있었죠.” ―스님도 함께 수행하셨나요. “중봉암 큰방에서 같이 기거했는데 둘이서도 철저하게 수행했어요. 저는 장좌불와는 못 하고 참선 공부 뒤 윗목에서 잤죠.(웃음)” ―미소굴 옆 달마선원은 재가자 수행처가 됐습니다. “원당암에는 용맹정진 가풍이 50년 넘게 이어집니다. 선원을 찾는 신도들 공부 열기가 스님들 못지않습니다. 안거 무렵에는 전국에서 200명가량 참여합니다.” ―스님은 어떤 화두를 받으셨나요. “성철 스님께 3000배 하고 ‘마삼근(麻三斤)’ 화두를 받았는데 제게 잘 안 맞았어요. 그래서 ‘시심마(是甚마)’로 바꾸었죠.” ―신도들에게 자주 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당나라 마조 스님 제자인 혜해(慧海) 스님의 ‘돈오입도요문론’에 ‘인욕제일도 선수제아인 사래무소수 즉진보리신(忍辱第一道 先須除我人 事來無所受 卽眞菩提身)’이라 했습니다. 인욕, 참는 것이 제일가는 도라, 사바세계는 참지 않고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먼저 ‘나다 너다’ 하는 상대에서 벗어난 본래의 마음 바탕에서 지혜롭게 생활하면 일이 와도 받는 바가 없어서 곧 부처입니다. 임제 선사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어디를 가든지 스스로 주인이 되고 서 있는 곳이 모두 진리의 세계라고 했습니다.” ―출가자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습니다. “스님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그것이 행(行)으로 모범이 되도록 노력해야죠.” ―우리 사회의 심각한 갈등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상생해야 하는데 너는 죽고 나는 살자고 합니다. 부처님의 중도(中道)는 이것저것의 중간이 아니라 이것저것 모두 내려놓고 받아들인다는 의미죠. 그럼 개인이나 나라, 세계 모두 살길이 나옵니다.” ―지금 필요한 리더십은 무엇입니까. “큰 정치를 해야죠. 진보와 보수는 내가 쓰는 도구인데, 그 도구에 휘둘려서는 소통할 수 없고 주인도 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리더들은 ‘동체대비(同體大悲·천지중생이 나와 한 몸이라는 것을 알고 자비심을 일으킴)’ 관점에서 소통하고 화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합천=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100세 철학자이자 우리 사회의 현자(賢者)로 불리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사진)의 책 ‘삶의 한가운데 영원의 길을 찾아서’(열림원)가 최근 출간됐다. 이 책은 종교에 대한 학문적 연구서가 아니라 인간과 종교, 사회 등에 대한 질문 등을 담담하게 풀어낸 신앙 에세이다. 책 앞부분에 있는 작가의 글에 따르면 이 글들은 김 교수가 주로 1980년대에 쓴 것이다. 노 교수의 시선이 머물렀던 여러 고민들은 3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도 진행형이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지나치게 큰 교회와 지나치게 작은 교회가 너무 많다.” “교회가 신앙공동체의 임무를 소홀히 하고 정치를 비롯한 사회공동체의 책임을 더 중하게 여기면 교회로서의 보편성을 상실할 수 있다.” 그는 누구보다 성실한 크리스천으로 살아왔음에도 무교회주의자라는 비난에 시달렸다고 고백한다. 그가 특히 비판적으로 언급한 ‘교회주의’는 다름 아닌 교회를 위한 교회다. 그는 “신앙생활은 가정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으며 직장에서도 전개되어야 한다”며 “말씀과 진리는 하늘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있는 것이지 교회를 키우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책은 개신교와 가톨릭, 불교, 유교 등 다양한 종교의 원리와 현상뿐 아니라 파스칼, 니체, 칸트 등 철학자들의 신(神)에 대한 명제를 담아냈다. ‘신의 존재에 대하여’ ‘신앙과 인간관계’ ‘진리에서 오는 자유’ ‘신앙인의 질문’ 등 크고 무거운 주제가 많지만 노교수 특유의 경험담이 어우러져 쉽게 읽힌다. 책 마지막 부분 ‘종교, 꼭 필요한 것일까’는 삶과 종교 문제로 고민해 온 현대인들에 대한 그의 답이 아닐까 한다. ‘파스칼은 신앙을 모험과 도박이라고 했다. 내 생명과 전 인격을 건 도박이다. 잃게 되면 자아라는 전체가 무(無)로 돌아간다. 그러나 얻게 되면 자아는 물론 영원과 삶의 실재를 차지한다.’ 신앙 에세이임에도 종교에 관계없이 100세 삶의 연륜에서 나오는 조언이 묵직하다. “사람이 정신적으로 늙게 되면 그건 정말 늙은 것이다. …내가 나를 키울 줄 알아야 하고, 모든 점에서 배우려고 노력해야 한다.”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7대 종단 대표들이 먼저 북한 개별관광을 신청한 뒤 각 종단에서 개별관광 신청 운동을 벌일 계획이다. 현재 7대 종단 대표들이 이를 협의하고 있다.” 진보적 성향의 개신교 교단 협의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이홍정 총무(64·사진)의 말이다. 그는 22일 열린 신년 간담회에서 정부가 추진 중인 북한 개별관광과 관련해 “2월 25일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정기총회 전에 합의를 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6·25전쟁 70주년인 올해 한반도 평화를 위한 행사들도 예정돼 있다. 이 총무는 “3월 1일부터 8월 15일까지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주최하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 캠페인이 진행된다”며 “6월에는 노근리 사건 70주년을 맞아 미국 워싱턴에서 참전군인과 피해자 간 화해 예배 등을 개최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행사 중 북한 개신교 관련 단체인 ‘조선그리스도교련맹(조그련)’ 관계자 초청도 추진 중이다. 각국 교회협의회와의 연대와 협력 사업도 이어진다. 2월 28일 일본 도쿄에서 ‘한일 종교·시민사회 평화회의’를 발족해 연대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NCCK 주도의 부활절(4월 12일) 행사는 당일 서울 용산에서 새벽 예배로 진행된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서울 서초구 사랑의교회(담임 오정현 목사)와 갱신위원회(마당기도회)가 7년여의 갈등을 끝내기로 최근 합의했다. 사랑의교회는 보도자료를 통해 “양측이 여러 갈등을 해소하기로 한 데 이어 합의 이행 절차를 마쳤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양측은 상대방에 대한 소송 등 모든 법적 조치를 취하하기로 했다. 사랑의교회는 갱신위 측 신자들에 대한 징계를 철회할 예정이다. 교계에 따르면 양측은 지난해 12월부터 이 교회의 소속 교단인 예장 합동 부총회장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의 중재를 통해 5차례 만남 끝에 향후 대립과 갈등 관계를 모두 내려놓기로 합의했다. 갱신위 측은 오 목사의 학위와 신축 예배당 문제 등을 거론하며 옛 사랑의교회에서 독자적으로 기도회를 진행해 왔다. 사랑의교회는 합의안을 교회 공동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승인받았다. 갱신위 측도 찬성 82%로 승인했다. 갱신위 내부에서 일부 반발이 있지만 사회문제로 비화됐던 사랑의교회 사태는 사실상 일단락됐다고 교계는 보고 있다. 갱신위 관계자는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고 인도하셔서 서로 화합하게 됐다”고 말했다. 오 목사는 이번 합의와 관련해 “저의 부족함과 사회적으로 덕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해 하나님 앞에 다시 한번 회개하며 사랑의교회 성도들과 뜻을 달리해온 성도들, 한국 교회 앞에 진심으로 사과한다”며 “사랑의교회는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은혜의 저수지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하나의 거짓말을 덮으려면 10개의 거짓말을 해야 한다. 다시 10개의 거짓말을 덮으려면 100개의 거짓말이 필요한데, 결국 독재나 전횡이 불가피하다.” 한국 복음주의의 맏형으로 불려온 개신교 원로 홍정길 남서울은혜교회 원로목사(78)는 “여야 가릴 것 없이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일부 인사의 궤변을 앞세운 ‘말의 정치’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지구촌교회 원로 이동원 목사, 작고한 옥한흠 하용조 목사와 함께 복음주의의 네 수레바퀴로 꼽혔다. 장애인학교인 밀알학교 설립자이자 1993년 북한을 돕기 위한 최초의 민간단체 ‘남북나눔’ 이사장으로 30년 가깝게 활동을 펼쳤다. 이 단체는 약 1500억 원 상당의 분유와 의약품 등을 북한에 지원했다. 홍 목사도 60회 넘게 방북했다. 최근 서울 강남구 밀알학교 이사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2020년 희망의 메시지를 달라. “2020, 숫자로 보면 희귀한 해다. 두 자리씩 좌우가 대칭되는 해는 2000년간 몇 차례 없다. 1919년에는 왕조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의 씨앗을 뿌렸다. 이후 100년 동안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정부가 100주년 관련 위원회도 만들고 예산도 많이 썼지만 단발성 이벤트에 그쳤다.” ―어떻게 진행했어야 했나. “본래 동양에서는 자유란 표현 자체가 낯설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때 서양 고전을 번역하면서 만든 단어로 알고 있다. 스스로 자(自), 말미암을 유(由). 스스로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중국과 북한 등 사회주의권에서 ‘자유, 자유주의자는 버릇없다’고 생각할 때 쓰는 말이다. 비폭력 평화운동의 관점에서 우리가 세계에 기여한 것이 3·1운동이다. 하지만 정부는 1948년 정권 수립을 부정하는 차원에서 3·1운동을 꺼냈을 뿐 제대로 조명을 못 했다.” ―여러 차례 만났지만 올해 말씀이 가장 비판적이다. “이 정부는 너무 말에 의지한다. 말은 실재(實在)가 있어야 한다. 말 재주꾼 몇 사람이 궤변으로 정부를 끌고 가서는 안 된다.” ―보수 쪽은 어떤가. “진보, 보수가 중요한 게 아니다. 깊은 사유 없이 온라인에서 배설하듯 얘기하고, 그걸 정치라고 하면 안 된다. 좋은 생각 한다고 좋은 사람이 아니다. 그 사람이 뭘 했는가, 뭘 하는가를 봐야 한다. 발달심리학자인 장 피아제는 자신의 아이가 어떤가를 알려면 유리창 밖에서 무얼 하는지 지켜보라고 했다. 입만 보수, 입만 진보는 의미 없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에 대한 논란이 적지 않다. “대표회장인 전광훈 목사 쪽에서 찾아와 도와달라고 하더라. 그런데 그분이 쓰는 언어 품격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 당연히 같이할 수 있는 일도 없다고 했다.” ―남북나눔 차원의 교류는 어떤가. “북에서 안 하겠다는데 방법이 없다.” ―오랫동안 민간 차원의 대북 지원을 했다. 뾰족한 방법은 없을까. “남북 관계의 현주소는 북이 남쪽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대남 활동에 관계한 북측 인사들은 숙청당하거나 사라졌다. 문제가 생길 때 책임을 물은 것이다. 하지만 최근 남북, 북-미 대화는 남측이 설득해 ‘최고 존엄’ 김정은이 전면에 나섰고 북한 주민에게 엄청난 희망의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하노이에서 빈손으로 그 먼 길을 돌아갈 때 김정은이 느꼈을 배반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격의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북의 기조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을 포함한 지도자에게 어떤 리더십이 필요한가. “떠도는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북 관계가 막혔다고 하지만 할 일이 많다. 탈북민들이 세계 도처에서 고생하고 있다. 지금이 도울 때다. 북의 눈치만 볼 게 아니라 기분 나쁘지 않게 할 소리는 해야 한다.” ―요즘 어떤 기도를 하나. “새벽 4시 일어나면 하나님께 두 가지만은 후손에게 유산으로 물려달라고 기도한다. 하나는 신앙, 또 하나는 자유다. 이것은 목숨을 걸고라도 물려줘야 한다.”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역사는 (전부는 아니지만) 어떤 점에서는 자전적(自傳的)인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UCSD) 역사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48)가 책 머리말에 꺼낸 말이다. 그 개인적 경험은 국제관계학 전공자인 그가 일본 문학을 부전공으로 택하고, 다시 한국으로 지적 탐구영역을 넓히는 데 동력이 됐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을 두루 잘 아는 외국인의 시선에 비친 일제강점기는 어떨까. 이 책을 꿰뚫고 있는 키워드는 동화(同化)다. 조선 왕실을 상징하는 경복궁과 일제가 세운 남산의 조선 신궁(神宮) 등 공간을 중심으로 동화정책을 분석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저자의 시선은 무단정치-문화정치-병참기지화라는 도식 대신 일제 정책에 따라 주요 공간이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따라간다. 일본어 ‘게이조’로 불린 경성(京城)은 일제의 관점에서 볼 때 ‘병든 도시’였다. 이 도시는 미개한 상태에서 벗어나 근대화를 이뤄내 일제 통치의 정당성을 보여줘야 할 일종의 ‘전시장’이었다. 동화는 정신적 동화, 물질적 동화, 공중적 동화의 세 측면에서 고찰됐다. 정신적 동화 프로젝트의 대립항은 경복궁과 1925년 들어서는 남산의 신궁이었다. 경복궁은 정궁(正宮) 기능을 상당 부분 잃었지만 여전히 조선의 심장부였다. 조선 왕조는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에 종묘, 서쪽에 사직단을 배치했다. 남북 방향으로는 육조 거리와 주작대로, 동서로 상업공간인 운종가가 들어섰다. 일제는 왕실과 국권의 상징인 경복궁을 조직적으로 훼손하면서 신비함을 벗겨내는 전략을 택했다. 1914년 박람회인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한다는 명목으로 대부분의 전각을 헐어버렸다. 근대화를 표방한 경성의 거리 개편은 1926년 총독부 신청사가 완공돼 경복궁 앞을 가로막으면서 마침표를 찍는 것이다. 1925년 세워진 조선 신궁은 황국신민화 등으로 강도를 높여간 정신적 동화의 상징이었다. 일제는 이 신궁을 일본 내 이세신궁, 메이지신궁과 함께 사격(社格)이 가장 높은 곳으로 대우했다. 현재 안중근 의사 기념관 등이 들어서 있는 남산에서 조선 신궁의 자취를 찾기는 어렵다. 물질적 동화는 ‘진보’를 앞세웠지만 조선 민부(民富)를 수탈하는 경제적 고리였다. 그 경제적 이익마저 일본인과 거류 일본인, 조선인의 순으로 불균등하게 주어졌다. 옛 경복궁 터를 중심으로 벌어진 박람회가 대표적이다. 한때 신성했던 조선 왕궁 주변은 각종 상품이 전시되고 볼거리가 등장하는 시장터가 됐다. 심지어 게이샤와 기생의 공연이 열렸다는 기록도 나온다. 박람회 참석이 강요되면서 농민들이 적지 않은 경제적 부담을 지게 되자 주요 매체는 이런 실정을 비판했다. “십인의 부자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백의 걸군이 생기지 않도록 더 노력하는 것이 정치의 이상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1929년 11월 1일자 동아일보 사설) 공중적 동화는 주민 생활의 청결과 위생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주택과 거리 등 일상 공간을 통해 집요하게 이뤄졌다. 하지만 조선인이 개선된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치적 주체가 아니라 일본인 주민의 안녕을 위협하는 병인(病因)으로 간주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영어 원제(‘Assimilating Seoul’·서울 동화하기)가 책의 실체에 어울린다. ‘서울, 권력도시’라는 제목은 요즘 서울의 글로벌한 이미지와 겹쳐 불필요한 상상과 오해를 초래한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세상이 온통 가시밭길이라도 가죽신 하나 잘 챙겨 신으면 쉽게 건너갈 수 있다.” 최근 출간된 청전 스님(67)의 ‘안녕, 다람살라’(운주사·사진) 중에 언급되는 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의 한 구절이다. 30여 년간 인도 다람살라에서 스승 달라이 라마를 모시고 수행과 봉사의 삶을 살아온 스님의 심경을 이처럼 잘 묘사하는 말이 있을까. 출가자라면 저마다 사연이 많다지만 스님도 만만치 않다. 교육대에 다니다가 1972년 10월 유신으로 학교를 그만둔 그는 가톨릭대에 들어갔다가 다시 자퇴한 뒤 1977년 출가했다. 전국 선방을 돌며 수행하던 그는 1987년 달라이 라마를 만난 뒤 티베트 불교를 공부했다. 달라이 라마의 첫 한국인 제자다. 이 책은 달라이 라마를 포함한 티베트 불교 고승에게 얽힌 사연, 아프가니스탄 순례기, 다른 종교와의 만남 등을 담았다. “첫째 위선이 없고, 둘째 항상 공부를 하고, 셋째 그 위치에서 언제나 겸손하다.” 책에 언급한 달라이 라마에 대한 묘사다. 달라이 라마의 침상 머리맡에는 나무로 조각된 작은 부처의 고행상이 있다고 한다. 왜 이런 불상을 두냐는 제자의 질문에 대한 스승의 답변은 이랬다. “흔히 우리가 부처님이라고 하면 휘황찬란한 황금 불상을 생각하지요. 우리 출가자들은 적어도 부처님을 기릴 때 난행고행(難行苦行)의 부처님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런 난행고행의 과정이 우리 비구들의 삶이어야 합니다.”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대한불교조계종이 종단 내부 갈등으로 멸빈(滅빈·승적의 영구 박탈)된 승려에 대한 사면 조치에 나선다. 원행 조계종 총무원장(사진)은 15일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신년 종정 하례 법회에서 종단 혼란기에 종단과 다른 견해와 의견을 제기했던 스님들에 대한 대화합 조치를 당부했다”며 “올해는 소통과 화합을 최우선 과제로 실천하겠다”고 밝혔다. 조계종에 따르면 1994년 당시 의현 총무원장의 3선을 지지했던 이들과 2018년 설정 총무원장 퇴진을 요구하며 40여 일간 단식하면서 종단 개혁을 촉구했던 설조 스님 등이 포함됐다. 2018년 사태 관련자 50여 명에 대한 중징계는 진행 중인 상태다. 종단의 한 관계자는 “의현 스님이 이미 구제된 상태라 형평성에 문제가 있고, 2018년 징계자들에 대한 조치는 대화합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들에 대한 사면 및 복권은 종단의 국회 격인 중앙종회에 이어 최종적으로 원로회의 의결을 거쳐야 한다. 조계종은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민간 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설 방침이다. 원행 총무원장은 “장안사와 유점사 등 북한 사찰의 발굴과 복원을 위한 사업을 제안할 계획”이라며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북한 사찰 문화재를 북한 사찰에 모실 수 있도록 북측과 협의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6·25전쟁 70년을 맞는 올해 판문점에서 남북 종교인이 함께하는 ‘한반도 종전선언과 평화 정착을 위한 기원대회’도 열 계획이다. 조계종은 국내외에 포교 활성화를 위한 사찰 건립에도 나선다. 3월 말 인도 부다가야에서 첫 한국 사찰인 ‘분황사’ 건립을 위한 착공식이 열릴 예정이다. 세종시 한국불교체험관과 위례신도시 도심 포교당 건립도 추진한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가정연합)은 창시자 문선명(1920∼2012) 총재 탄신 100주년과 한학자 총재 탄신 77주년이 되는 2020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행사를 연다. 다음달 2일부터 7일까지 ‘월드 서밋(World Summit) 2020’이란 이름으로 개최되는 기념행사는 △공생 공영 공의를 위한 세계평화콘퍼런스 △월드 서밋 2020 총회 △제4회 선학평화상 시상식 △2020 효정 천주축복식 △세계평화정상연합(ISCP) 총회 △세계평화국회의원연합(IAPP) 총회 △세계평화종교인연합(IAPD) 총회 △세계평화언론인대회 △세계평화경제인대회 △세계평화학술대회 등 30여 개의 세부 행사로 나눠 치러진다. 개최 장소는 경기 고양시 일산 킨텍스와 가평군 청심평화월드센터 등이다. 월드 서밋 2020 총회에는 전·현직 정상 등 정계 인사와 종교지도자, 학자, 언론인, 경제인 등 120여개 국가에서 60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효정(孝情) 천주축복식에는 64개국에서 3만 여명이 참가해 합동결혼식을 진행한다. 제4회 선학평화상에는 마키 살 세네갈 대통령과 무닙 유난 전 루터교세계연맹 의장이 공동수상자로 선정됐다. 살 대통령은 독재와 빈곤이 만연한 아프리카 대륙에서 모범적으로 대통령 임기를 단축하고 경제 부흥을 일궈냈고, 유난 전 의장은 팔레스타인 난민 출신으로 40년 이상 중동 지역에서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의 화합에 기여한 공로를 평가받았다. 올해는 설립자 특별상이 마련돼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수상자로 선정됐다. 반 전 총장은 기후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아동과 여성 인권 신장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기성 가정연합 한국회장(사진)은 14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문 총재의 애천(愛天) 애국(愛國)의 삶을 세계에 드러내는 축제를 정성껏 준비하고 있다”며 “내적, 종교적으로는 참가정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외적으로는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언론 등 각 분야에서 새로운 세계평화운동을 벌이겠다”고 말했다. 김갑식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그날은 보름달이 떴나 보다. 이해인 수녀(75)를 만난 다음 날인 10일 오전 눈을 뜨니 휴대전화 문자가 눈에 들어왔다. “간밤엔 둥근 보름달을 보며 태석 신부님의 환히 웃는 얼굴도 떠올려봤어요. 고통 속에서도 웃을 수 있던 (그분)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나 많은 이의 가슴속에 이웃사랑의 본보기. 보름달로 떠 있는 분!” 수도자이자 시인의 길을 걷고 있는 그는 간밤 보름달에서 2010년 선종(善終)한 이태석 신부를 떠올린 듯하다. 전날 부산의 한 극장에서 영화 ‘울지마 톤즈 2―슈크란 바바’를 함께 관람했다. 다시 광안리 해변에서 차를 마시고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원 내의 해인글방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슈크란 바바는 수단의 한 부족 언어로 ‘하느님 감사합니다’란 뜻이다. ―14일, 벌써 이태석 신부 선종 10주기네요. “행사에서 시를 낭송하기도 했는데 11일 열린 음악회에는 여건이 안 돼 영상 메시지를 보냈어요.” ―영화 보는 중 기도하고 눈물도 여러 차례 흘렸습니다. “48세, 너무 젊죠. 10년은 더 사셨어야 하는데….” ―왜 하느님은 그를 그리 빨리 데려가셨을까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영화 보면서 신부님이 하느님께서 주신 여러 재능을 아낌없이 불꽃처럼 태우고 가셨다고 생각했어요. 무엇보다 그 많은 일을 하면서도 그토록 겸손할 수 있다는 게 다시 봐도 놀라워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누군가를 대신해 목숨을 바친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도 떠올랐습니다. 모르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게 정말 용기 있는 삶입니다.” ―이태석 신부와 인연은 어떻습니까. “태석 신부님이 생전 병 치료를 위해 한국에 왔을 때 만난 적이 있어요. 한 번 만났지만 닮고 싶었습니다. 영화를 보면 ‘Everything Is Good’이 유언이라고 합니다. 고통을 이겨내고 삶의 품격을 회복시킨 분입니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죽음의 문제에 직면합니다. “스티브 잡스의 ‘Stay Hungry, Stay Foolish’(늘 갈망하라, 늘 우직하라), 그 말이 떠오르네요. 잡스는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도 자신과 주변을 위한 준비를 하나씩 해 나갔다고 합니다. 인생의 끝에는 이별이 있기 마련인데 무엇보다 자신이 추구해온 삶의 본질에 충실해야 합니다.” 해인글방은 서가의 책뿐 아니라 사진과 편지, 기념품 등으로 ‘해인(海仁·바다 같은 어진 마음이란 뜻의 필명)의 향기’가 가득하다. 젊은 시절 그의 사진을 보며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올리비아 허시를 닮았다고 하자 “그런 소리 좀 들었죠”라는 대꾸와 웃음이 돌아왔다. 그는 “영화 ‘두 교황’도 봤는데 베네딕토 16세 역의 앤서니 홉킨스가 어찌나 연기를 잘하는지 몰라요. 팬레터라도 보내야겠어요”라고 했다. ―그 영화는 어떤 점이 좋았나요. “무엇보다 두 분 교황의 삶 자체가 주는 무게와 감동 때문입니다. 거의 매 순간 필요했던 그분들의 인내와 절제를 느끼게 됩니다. 두 배우의 연기도 너무 훌륭합니다.” ―수도자이자 시인의 삶도 쉽지 않습니다. “수도원에 오기 전에는 넓게, 모든 사람의 애인이 되고 싶었어요. 수도 생활을 하고 글을 쓰고 나서는 하느님과 세상을 잇는 ‘러브레터’로 살려고 했습니다. 나비, 민들레의 솜털은 어떨까…(웃음), 어느 정도 이뤘으면 다행이죠.” ―시와 좋은 말씀으로 이미 큰 위안을 주고 있습니다. “숭산 스님의 말이 있습니다. ‘감자가 물에서 이리저리 서로 부딪치며 때가 벗겨지는 것처럼 도(道)도 그렇다’고. 나이가 들수록 영적인 고민이 많아 문제입니다. 교만한 의인보다 세상 속에서 겸손한 죄인이 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해요.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거룩한 것과 통한다고 합니다.” ―요즘 어떤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차별 없는 사랑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요. 사람이라 살다 보면 구분 또는 선택이란 걸 하게 됩니다. 태석 신부님은 한센병 환자를 찾아가고 발가락이 제대로 없는 이들을 위한 맞춤 신발을 만들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천대받거나 멸시받는 이들과 함께하셨고요. 예수님의 그 마음을 닮고, 또 닮아야 합니다.”부산=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익숙한 역사 상식에 대한 도전으로 가득한 책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발상지로 언급되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산측 지대를 포함해 ‘환메소포타미아’로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황허(黃河) 문명의 논벼도 황토 지대가 아닌 골짜기 지역에서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중국에서 태어난 저자는 홍콩에서 자랐고 대만과 미국에서 공부한 뒤 미국과 캐나다 대학에서 강의해온 역사학자다. 1권에선 인류 기원부터 로마제국 시대까지 다룬다. 농경과 목축을 통한 문명의 탄생, 전쟁과 교류를 통한 문화의 전파, 종교와 철학의 탄생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한 ‘빅 히스토리(Big History)’ 계열의 노작이다. 도발적인 주장의 근거로 최근 연구 결과가 충실하게 실려 있다. 하지만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있는 무언가는 아쉽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1년 정도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고 갈림길에 섰다. 그때 알코올 중독자를 돕는 사목을 택했는데 지나고 보니 다시 본당 신부로 살았으면 중독이 재발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하느님과 신자들 모두에게서 멀어졌을 것이다.” 최근 서울 중구 중림로 가톨릭출판사 내에 있는 가톨릭알코올사목센터에서 만난 허근 신부(66·소장 겸 단중독 사목위원회 위원장)의 말이다. 1999년 그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김옥균 주교(2010년 선종·善終)에게 알코올 중독자(알코올 의존증 환자)를 도울 수 있는 사목 활동을 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해 9월 센터가 문을 열었다. “주교님이 센터 창립과 활동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 2009년 12월 몸이 불편하던 주교님이 센터 행사에 참석했는데 그분의 마지막 공식 행사였다”는 게 허 신부의 회고다. 이 센터 입구에는 ‘고 김옥균(바오로) 주교를 기리며’라는 글씨가 보이는 기념공간이 있다. 알코올 의존증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크지 않은 사회 분위기에서 재활의 씨앗을 뿌리도록 도운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다. 허 신부는 “올해 3월 1일은 주교님이 선종한 지 10년이 되는 날이라 작은 기억의 선물을 준비했다”며 “주교님과 인연을 맺었던 지인들이 편지를 준비해 낭독할 생각”이라고 했다. 지난해 11월 말 창립 20주년 행사를 개최한 센터는 어려움 속에서도 적지 않은 성과를 거뒀다. 의존증 환자 2만1000여 명 치료, 9300여 명의 가족 치료, 상담 인원은 5만8000여 명에 이른다. 알코올뿐 아니라 도박 마약 게임(인터넷)으로 범위를 넓힌 프로그램도 진행 중이다. 1년 이상 금주(禁酒)에 성공하면 회복자로 분류하는데 성공률은 30% 정도라고 허 신부는 귀띔했다. 가톨릭 신자와 그렇지 않은 상담자의 비율은 반반 정도다. 허영엽(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 허영민 신부(의정부교구 야당맑은성당 주임)와 3형제 신부로 잘 알려진 허 신부는 중독의 심각성을 이렇게 말했다. “술 마시면서 신자들과 교류하면 사목 잘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나는 언제든지 끊을 수 있다’며 오만하기까지 했으니…. 동생들이 아무리 얘기해도 와 닿지 않고 반감만 더 강했습니다. 중독은 개인뿐 아니라 가족 모두를 파괴시킵니다.” 허 신부는 “센터는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으로 운영되고 있다”며 “등산으로 치면 센터 역할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산 입구까지 모셔다 드리는 거다. 산에 올라가는 것은 본인이고, 그때 함께해 주실 수 있는 분이 하느님”이라고 덧붙였다. 허 신부가 건넨 가톨릭 선교단체 회보에 실린 그의 시 ‘나의 회복을 위한 어머니의 기도’의 구절이 간절하다. ‘시간의 흐름마저 잊은 고요한 밤/술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아들 위해/간절한 기도로 밤을 지새웁니다//…하늘보다 높은 어머니 사랑을 고이고이/가슴에 묻고 회복의 길을 걸어가렵니다.’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지난해 12월 24일 입적한 봉암사 적명 스님은 평생 수좌(首座·참선을 위주로 수행하는 승려)로 살며 그 삶을 지키고 사랑해온 선승(禪僧)이었다. 동아일보와의 인터뷰는 2018년 5월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경북 문경시 봉암사 내의 거처에서 이뤄졌다. 교계를 포함해 마지막 인터뷰다. 당시는 설정 조계종 총무원장의 거취를 둘러싼 갈등이 첨예하고, 바깥세상에서는 보름여 전 남북 정상회담이 열려 해빙 무드가 가득하던 시기였다. 스님은 종단 형편을 감안해 자신의 발언이 봉암사, 나아가 수좌 전체의 입장으로 해석될 수 있다며 기사화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스님이 산행 중 입적해 임종게(臨終偈)조차 남기지 못한 터라 생전 목소리를 공개한다. 첫 이야기는 커피였다. “적명 스님이 타주는 다방커피가 맛있는데 얻어먹은 이가 몇 안 된다고 하더라”고 하자 스님은 싫은 내색 없이 커피 한 잔을 내주었다.》 ―그 소문난 커피다. “30년쯤 됐는데 내원사 부근 토굴에 있을 때 아침을 간단하게 먹는 법을 연구했다. 참선 시간도 축내지 않고 속도 편하게 할 것을 찾았다. 죽, 누룽지, 미숫가루 등 여러 가지 했는데 안 됐다. 그러다 커피에 달걀을 타 먹으니 부담스럽지도 않고 든든하더라. 중이 무슨 달걀을 먹느냐는 생각도 했지만 입이 좋다고 하니…. (웃음) 낮에는 커피 하나, 설탕 둘, 크림 둘 이렇게 탁탁 풀어 먹는다. 이놈의 중이 블랙을 먹을 줄 알아야지.” ―계율을 지키는 계행(戒行)의 파괴에 대한 종단 안팎의 비판이 거세다. “우선 세상이 점점 바뀌니 재능 있는 인재들이 출가하는 경향이 줄었다. 선의 중흥조가 된 경허 스님(1846∼1912)의 계율을 뛰어넘는, 무애행(無碍行)도 잘못 받아들여졌다. 깨달음 없이 무애만 따라 하니 세상의 욕을 먹는 거다. 지행합(知行合)은 유가와 불교에서도 두루 갖춰져야 한다. 지혜가 행으로 나타나는 것이 보살행이고 불교사상이다.” ―성철 청담 향곡 스님 등이 중심이 된 봉암사 결사는 청정승가의 정신을 회복시킨 운동으로 남아 있다. “결사에 참여했던 성수 스님으로부터 그때 얘기를 전해 들었다. 노장 말씀에 따르면 낮에는 일하고, 저녁 먹으면 참선하고, 부처님 법대로 살던 꿈같은 시절이었다고 하더라. 6·25전쟁으로 결사가 흐트러졌다. 전쟁 뒤 대처승들이 차지한 사찰을 정비하는, 정화불사(淨化佛事) 과정에서 수좌들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수행에 전념해야 할 수좌들이 불가피하게 사찰 주지와 총무원 행정을 맡게 됐다. 수행승들이 자의 반 타의 반 세속화한 게 요즘 종단 위기의 한 씨앗이다.” ―수좌 목소리가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수좌들이 종회에 가서 발언하면 영향력이 있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종단이 수좌들 말에 신경도 쓰지 않더라. 종단의 중심이 사판승(事判僧·사찰과 종단의 행정을 담당하는 승려)으로 옮겨간 탓이다. 그런데 사판이 제대로 된 원력이 없으면 돈과 권력, 성(性)에 거리를 두기가 쉽지 않다.” ―종단의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종단 운영에 참여했던 도법 스님은 ‘총체적 부패라 졸지에 바뀌기는 어렵다’고 하더라. 봐서 알겠지만 밖에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도 효과가 없다. 당연한 얘기 같지만, 뼈를 깎는 수행과 철저하게 계를 지키는 지계(持戒)가 출발점이다. ‘저 사람은 진짜 중 같아, 부처님 제자 같아’, 이런 말들이 나와야 승가 전체와 일반 신도까지 바뀌는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성철 스님과도 인연이 적지 않다. “노장님 계실 때 내가 해인사에서 입승(立繩·사찰의 규율 담당) 소임을 맡고 선원장도 했다. 하지만 악역을 맡아 마음고생하다 떠난다고 했더니 노장께서 섭섭해 그런지 얘기를 들으려고도 안 해. 그래, 지금 떠나지만 스님 입적할 때는 임종 지키겠다고 하니, 노장 얼굴에 화색이 돌며 ‘그 말이 정말이가’ 이러시더라.” ―남북 정상회담으로 해빙 무드다. “내가 우리 나이로 80이다. 이쯤 되면 이생을 잘산 것이니, 이제는 개울가 산책하고 수행이나 하면서 살려고 했다. 그런데 요즘 분위기를 보니 마음이 들뜬다. 내년 가을쯤 혹 자유왕래가 이뤄지면 금강산이며 평양, 대동강을 한번 돌아보고 싶다.” ―조언을 한다면…. “김정은이 진정한 자유, 민주화를 위해 문을 여는 사람으로, 북한을 자유로운 사회로 이끄는 리더 역할을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북한 내부는 곪아터지고, 남북, 북-미 관계 모두 어려워질 것 같다.” ―공존과 상생을 위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가. “불교의 불이(不二) 사상은 평화의 진리다. 나와 네가 대립하는 두 개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싸울 필요가 없다. 어머니가 아이를 무한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이를 자기 자신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가 오려면 너와 나, 온 우주가 하나의 세계라는 자각이 절실하다.” ―사람들에게 자주 권하는 경전 구절을 들려 달라. “화엄경이 좋다. 그중 심여공화사(心如工畵師) 능화제세간(能畵諸世間) 오온실종생(五蘊實從生) 무법이불조(無法而不造)라는 구절이 있다.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아 능히 세상사를 다 그려내고, 오온은 모두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어서 그 무엇도 만들어 내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결국 모든 것은 마음 하기에 달려 있다.”문경=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지난해 12월 24일 입적한 봉암사 적명 스님은 평생 수좌(首座·참선을 위주로 수행하는 승려)로 살며 그 삶을 지키고 사랑해온 선승(禪僧)이었다. 동아일보와의 인터뷰는 2018년 5월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경북 문경시 봉암사 내의 거처에서 이뤄졌다. 교계를 포함해 마지막 인터뷰다. 당시는 설정 조계종 총무원장의 거취를 둘러싼 갈등이 첨예하고, 바깥세상에서는 보름 여 전 남북정상회담이 열려 해빙 무드가 가득하던 시기였다. 스님은 종단 형편을 감안해 자신의 발언이 봉암사, 나아가 수좌 전체의 입장으로 해석될 수 있다며 기사화하지 말아야 할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스님이 산행 중 입적해 임종게(臨終偈)조차 남기지 못한 터라 생전 목소리를 공개한다. 첫 이야기는 커피였다. “적명 스님이 타주는 다방커피가 맛있는데 얻어먹은 이가 몇 안 된다고 하더라”고 하자 스님은 싫은 내색 없이 커피 한 잔을 내주었다. ―그 소문난 커피다. “30년 쯤 됐는데 내원사 부근 토굴에 있을 때 아침을 간단하게 먹는 법을 연구했다. 참선 시간도 축내지 않고 속도 편하게 할 것을 찾았다. 죽, 누룽지, 미숫가루 등 여러 가지 했는데 안 됐다. 그러다 커피에 달걀을 타 먹으니 부담스럽지도 않고 든든하더라. 중이 무슨 달걀을 먹느냐는 생각도 했지만 입이 좋다고 하니…. (웃음) 낮에는 커피 하나, 설탕 둘, 크림 둘 이렇게 탁탁 풀어먹는다. 이놈의 중이 블랙을 먹을 줄 알아야지.”―계율을 지키는 계행(戒行) 파괴에 대한 종단 안팎의 비판이 거세다. “우선 세상이 점점 바뀌니 재능 있는 인재들이 출가하는 경향이 줄었다. 선의 중흥조가 된 경허 스님(1846∼1912)의 계율을 뛰어넘는, 무애행(無碍行)도 잘못 받아들여졌다. 깨달음 없이 무애만 따라 하니 세상의 욕을 먹는 거다. 지행합(知行合)은 유가와 불교에서도 두루 갖춰져야 한다. 지혜가 행으로 나타나는 것이 보살행이고 불교사상이다.”―성철 청담 향곡 스님 등이 중심이 된 봉암사 결사는 청정승가의 정신을 회복시킨 운동으로 남아 있다. “결사에 참여했던 성수 스님으로부터 그때 얘기를 전해 들었다. 노장 말씀에 따르면 낮에는 일하고, 저녁 먹은 뒤 참선하고, 부처님 법대로 살던 꿈같은 시절이었다고 하더라. 6·25 전쟁으로 결사가 흐트러졌다. 전쟁 뒤 대처승들이 차지한 사찰을 정비하는, 정화불사(淨化佛事) 과정에서 수좌들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수행에 전념해야 할 수좌들이 불가피하게 주지, 종회의원 등으로 총무원 행정을 맡게 됐다. 수행승들이 자의반타의반 세속화한 게 요즘 종단 위기의 한 씨앗이다.”―수좌 목소리가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수좌들이 종회에 가서 발언하면 영향력이 있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종단이 수좌들 말에 신경도 쓰지 않더라. 종단의 중심이 사판승(事判僧·사찰과 종단의 행정을 담당하는 승려)으로 옮겨간 탓이다. 그런데 사판이 제대로 된 원력이 없으면 돈과 권력, 성(性)에 거리를 두기가 쉽지 않다.”―종단의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종단 운영에 참여했던 도법 스님은 ‘총체적 부패라 졸지에 바뀌기는 어렵다’고 하더라. 봐서 알겠지만 밖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도 효과가 없다. 당연한 얘기 같지만, 뼈를 깎는 수행과 철저하게 계를 지키는 지계(持戒)가 출발점이다. ‘저 사람은 진짜 중 같아, 부처님 제자 같아’, 이런 말들이 나와야 승가 전체와 일반 신도까지 바뀌는 영향을 미칠 수 있다.”―육사 입학하려다 출가하신 걸로 들었다. “필기는 붙었는데 면접에서 떨어졌다. 그러던 중 부처님을 알게 되면서 출가를 결심했다. 21세 때 출가해 30세에 선방에 앉았는데 선배가 없더라. 36세 때 극락암에 있었는데 70명 대중이 모였고 그때 유나(維那·선원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직책) 소임을 맡았다.”―지금은 조실(祖室·사찰의 최고 어른)이 되실 만 하지 않나. “내가 확철대오(廓徹大悟·철저하고 크게 깨달음)한 사람도 아닌데…. 향곡 스님 모시고 살아보니까 노장님도 조실이라고 안 하시더라. 지금 송담 스님(용화선원)도 선원장이라고만 하시고…. 총림이나 큰 절은 급하고 큰 일이 많아 방장이나 조실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봉암사는 그리 급한 절이 아니라 그런 자리는 필요 없다.”―성철스님과도 인연이 적지 않다. “노장님 계실 때 내가 해인사에서 입승(立繩·사찰의 규율 담당) 소임을 맡고 선원장도 했다. 하지만 악역을 맡아 마음 고생하다 떠난다고 했더니 노장께서 섭섭해 그런지 얘기를 들으려고도 안 해. 그래, 지금 떠나지만 스님 입적할 때는 임종 지키겠다고 하니, 노장 얼굴에 화색이 돌며 ‘그 말이 정말이가’ 이러시더라.”―돈오돈수(頓悟頓修·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면 수행이 더 필요하지 않음), 돈오점수(頓悟漸修·깨달은 뒤에도 점진적 수행단계가 필요) 논쟁도 치열했나. “그때 큰 방서 결명차, 보리차 한잔 먹으면 ‘돈점 논쟁’이 일어나곤 했다. 성철 스님은 돈오돈수하면서도 돈오점수를 부정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최상승 선에서는 돈오돈수이지만 근기가 약한 이들에게는 점수가 필요한 것 아닐까.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와 보조스님의 돈오점수는 서로 부정하는 게 아니라 방점, 강조점만 다른 거라고 본다.”―남북정상 회담으로 해빙 무드다. “내가 우리 나이로 80이다. 이쯤 되면 이생을 잘 산 것이니, 이제는 개울가 산책하고 수행이나 하면서 살려고 했다. 그런데 요즘 분위기를 보니 마음이 들뜬다. 내년 가을 쯤 혹 자유왕래가 이뤄지면 금강산이며 평양, 대동강을 한번 돌아보고 싶다.”―조언을 한다면…. “김정은이 진정한 자유, 민주화를 위해 문을 여는 사람으로, 북한을 자유로운 사회로 이끄는 리더 역할을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북한 내부는 곪아터지고, 남북, 북미 관계 모두 어려워질 것 같다.”―공존과 상생 위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가. “불교의 불이(不二) 사상은 평화의 진리다. 나와 네가 대립하는 두개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싸울 필요가 없다. 어머니가 아이를 무한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이를 자기 자신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가 오려면 너와 나, 온 우주가 하나의 세계라는 자각이 절실하다.”―사람들에게 자주 권하는 경전 구절을 들려 달라.“화엄경이 좋다. 그중 심여공화사(心如工畵師) 능화제세간(能畵諸世間) 오온실종생(五蘊實從生) 무법이불조(無法而不造)라는 구절이 있다.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아 능히 세상사를 다 그려내고, 오온은 모두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어서 그 무엇도 만들어 내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결국 모든 것은 마음 하기에 달려 있다.” 문경=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정부가 선택한 것은 5년으로 끝날 수 있으나 국민이 선택하는 것은 반세기 동안은 지속하게 된다.” 우리 시대의 현자(賢者)로 불리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사진)의 고언이다. ‘동아일보 창간 100주년 릴레이 기고―다음 100년을 생각한다’의 첫 필자인 김 교수는 무엇보다 정부가 아닌 국민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 교수는 기고에서 “나는 20세기를 살았다. 그 연장선에서 21세기 전반기를 맞이하고 있다”며 “지난 한 세기를 돌이켜 보면서 앞으로 100년 동안 어떤 시련과 희망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라고 밝혔다. 1920년생인 김 교수는 내년 7월 100세를 맞는다. 윤동주 시인과 평양 숭실중 동기인 그는 작고한 김태길 안병욱 교수와 3대 철학자로 꼽혔으며 대학에서 후학을 지도하고 은퇴한 뒤에도 강연과 칼럼을 통해 우리 사회와 국민 행복을 위한 조언을 전하고 있다. 김 교수는 미래 100년을 위해 시급한 현안으로 경제 문제를 꼽았다. “전문가들은 제4차 산업사회를 말하기도 하고, 인공지능의 개발은 노동시장과 생산 수단을 근본부터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본다. 지금의 경제 문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위기가 찾아올지 모른다.” 김 교수는 사회 지도층의 철저한 반성도 촉구했다. 그는 “정치인들이 고정관념이나 이기집단적 가치관을 극복하지 못하면 선진국가로 가는 길은 열리지 않는다”며 “50년 후 자신들의 모습을 예상해 보기 바란다. ‘우리에게는 잘못이 없다. 법망에서 벗어날 수는 있으니까’라는 정권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정계를 떠나야 한다. 이들을 밀어내지 못하는 국민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릴레이 기고] 내년 100세 맞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산길을 개척해 가는 노력은 힘들고 긴 세월이 걸린다. 그러나 그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짧은 시일 안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일본이 바로 그런 혜택을 입은 나라다. 유럽과 미국의 문물(文物)을 가장 빨리 모방했다. 모방의 천재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다. 그 혜택으로 아시아에서는 가장 앞선 국민이 되었다. 역사가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과거에 붙잡히지 말고 미래를 위해 전진하라는 가르침이다. 미래를 개척하지 못하는 민족은 과거까지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넓은 밖으로 나와 선의의 경쟁을 할 수 있는 사회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나는 20세기를 살았다. 그 연장선에서 21세기 전반기를 맞이하고 있다. 지난 한 세기를 돌이켜 보면서 앞으로 100년 동안에는 어떤 시련과 희망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책임이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경제다. 정치보다 더 절박한 과제다. 전문가들은 제4차 산업사회를 말하기도 하고 인공지능의 개발은 노동시장과 생산 수단을 근본부터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 변혁에 뒤따르는 문제는 산업사회의 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게 된다는 경고다. 지금 우리가 치르고 있는 일자리 문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위기가 찾아올지 모른다. 우리 정부의 능력과 경제정책으로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모든 경제 문제를 국제간의 경쟁과 협력에서 해결지어야 한다. 국내의 사소한 문제나 노사 간의 투쟁을 갖고 해결되지는 않는다. 지난 몇 해 동안의 경제는 정체와 후퇴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일자리 문제도 그렇다. 우리는 교육을 받은 우수한 젊은 인재들을 많이 갖고 있다. 이들을 아시아와 세계 여러 지역으로 보내는 길을 정부가 열어 주어야 한다. 어학과 기술이 전제가 된다. 젊은 세대들은 10개의 일자리를 위해 100인이 줄서서 기다리거나 취업시험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개척해 가는 용기와 신념을 가져야 할 때다. 이를 위해 정부 주도형 경제가 아닌 기업 주도의 시장경제 체제로 돌아가야 한다. 일본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까지도 이미 경제는 시장경제로 방향을 바꾸고 있다. 21세기 후반기쯤에 중산층이 확립되는 국가로 탈바꿈하지 못하면 우리가 경제역사에 무능과 오점을 남기게 된다. 한국 사회를 평가하는 사람들은 정계가 경제계보다 뒤져 있다고 지적한다. 현재의 정치 무대는 법조계 출신과 운동권 계통의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좋은 점도 있는지 모르나 그들은 국제 감각에 뒤지고 있는 편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기업인들이 앞서고 있다. 선진국 어디에 가든지 현 정부만큼 정부가 교육과 경제를 규제하는 곳은 없다. 정부는 기업인들을 뒷받침해 주어야 한다. 정치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경제와 문화를 육성하는 후원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 문제 해결의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방향을 찾는다면 어려운 과제도 아니다. 성공한 선진국가의 선례를 찾아 따르면 된다. 유럽이나 미국, 캐나다는 물론이고 호주, 일본도 같은 길을 택하고 있다. 민주주의 신봉 국가들이다. 민주주의는 휴머니즘과 공존하기 때문이다. 민주정치를 실현하는 데는 확실한 방향이 있다. 교육과 문화를 위해서는 자유가 보장되는 선의의 경쟁이 필수적이다. 정신적 성장과 창조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사립교육의 가능성을 막아서는 안 된다. 교육의 다양성이 다원사회를 가능케 하며 인류의 복지를 증진시킬 수 있다. 경제 정책은 법적인 평등보다 양극화를 억제하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지향해야 한다. 평등을 위한 평등은 창의적 성장을 제약할 뿐이다. 정치는 정의 가치의 구현이다. 인권 존중을 위한 최고의 가치가 인정받아야 한다. 더 많은 국민의 행복과 인간다운 삶을 위한 윤리적 질서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법은 선한 가치와 질서를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문제는 정치인들의 자질이다. 정치를 통해 이득을 노리는 사람들은 민주정치의 적이다. 정권이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은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다. 공산국가와 신생 국가의 생태가 그러했다. 정부와 정권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나는 미국 워싱턴 부근의 마운트버넌에 있는 조지 워싱턴의 농장을 가보았다. 그의 무덤도 있는 곳이다. 워싱턴은 퇴임 후 농장에 돌아와서는 손님을 대할 때마다 “나를 대통령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대통령은 백악관에 계십니다. 나는 농민으로 있다가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다시 농민으로 돌아왔습니다. 농민이라고 부르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아메리카의 주인은 대통령이 아니고 농민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그런 애국자가 정치 지도자이기를 바란다. 정치인들이 고정관념이나 이기집단적 가치관을 포기하지도, 극복하지도 못하면 선진국가로 가는 길은 열리지 않는다. 50년 후의 지금 자신들의 모습을 예상해 보기 바란다. ‘우리에게는 잘못이 없다. 법망에서 벗어날 수는 있으니까’라는 정권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정치계를 떠나야 한다. 이들을 밀어내지 못하는 국민도 책임을 져야 한다. 한 가지만 더 추가하기로 하자. 만일 세종대왕 때 창제한 한글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문화권을 따르고 있을까. 편지나 글도 어떤 문자로 썼을지 모르겠다. 학생들에게 가르칠 국어교과서는 어떻게 되었을까. 일제강점기에 총독부는 우리글과 말을 말살시키려고 했다. 일본문화권에 흡수해 버리면 우리 민족은 영구히 일본화가 되기 때문이다. 100년 후의 우리 역사를 위해 가장 막중한 과제는 무엇인가. 한글 문화권을 아시아 중심문화의 하나로 육성하며 세계 문화권의 일익을 담당할 수 있도록 키워야 한다. 그 핵심이 되는 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정신적 가치관과 통하는 것이며 인간적 삶의 도리를 찾는 학문이기 때문에 휴머니즘과 공존하도록 되어 있다. 공산국가나 히틀러의 독재국가에서는 사상의 자유를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사상의 원천인 인문학을 억제하거나 폐기했다. 한때 중국에서는 마르크스 사상과 마오쩌둥 어록이 인문학을 대신했을 정도였다. 나도 중국에 가면 유명한 대학들 주변의 서점에 들러 중국 학생들이 어떤 책을 읽는가, 살펴보곤 했다. 읽을 책이 없었다. 인문학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은 세계적 공통성을 갖는다. 그리고 인류가 수용할 수 있는 사회과학은 전통을 이어온 인문학 국가들의 업적으로 태어났다.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이 그 대표적 예가 된다. 그리스는 그 전통을 계승하지 못했기 때문에 인문학으로 그쳤고, 중국은 인문학의 근대화를 상실했기 때문에 일본이 중국학 연구에 앞서는 후진성을 자초했다. 인문학의 단절이 정신문화의 종식을 초래한 것이다. 인문학이 모든 정신사의 주역을 담당했다. 인문학이 사회과학을 탄생시켰고 사회과학 뒤에 자연과학이 열매를 맺은 것이 세계 정신사의 순서였다. 그러나 인문학과 예술 분야는 여러 중견 국가에 의해 육성되었기 때문에 문화의 다양성을 갖추고 있다. 우리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기다리는 염원은 우리 문화의 세계적인 진출을 위해서다. 지금까지 경제보다 정치의 후진성을 지적했으나 우리 정부의 교육과 문화정책은 더 뒤지고 있다. 문화 전반의 결실은 정상적이고 창조적인 교육의 유산으로 주어진다. 지금과 같은 교육정책으로는 인문학까지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든지 이념 교육은 교육의 정도(正道)가 아니다. 특히 정치적 이념 교육은 역사적 성과보다는 범악(犯惡·악을 저지르다)의 결과를 초래한다. 교육은 인간됨의 본성과 가능성을 통해 새로운 가치 창조를 위한 자유로운 선택에서 이루어진다. 그렇게 유구한 역사의 성장을 짧은 기간에 속하는 이념으로 묶어 놓아서는 안 된다. 한 세기쯤 후에는 한글과 우리의 예술이 세계무대의 위상까지 진입할 수 있는 교육의 선진화가 우선이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의무를 위한 전환점에 처해 있다. 지도층 사람들의 겸허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세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선택과 노력의 책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는 법이다. 우리의 잘못으로 정체나 단절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 정부가 선택한 것은 5년으로 끝날 수 있으나 국민이 선택하는 것은 반세기 동안은 지속하게 된다.}
실력이 엇비슷한 상대에게 패할 땐 이유가 둘 중 하나다. 승리를 과신하거나, 패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31년 만의 우승에 도전했다가 가을 무대 첫 관문(디비전 시리즈)에서 탈락한 LA 다저스는 두 악재가 겹쳤다. 데이브 로버츠 감독은 상대를 쉽게 생각했고, 에이스 클레이튼 커쇼는 승부를 너무 두려워했다. 그래서 졌다. 정규시즌과 달리 포스트시즌은 내일이 없는 벼랑 끝 승부다. 로버츠 감독은 내일을 봤다. 주무기인 류현진을 워싱턴전 1, 2차전이 아닌 3차전 선발로 내세웠다. 다음 단계인 챔피언십시리즈(NLCS) 1차전 선발로 내세우기 위해서였다. 정규시즌 106승(구단 최다승)을 거둔 자신감 때문인지, 막차 타고 가을 무대에 입성한 워싱턴을 쉽게 봤던 것이다. 워싱턴은 다윗처럼 내일이 없었다. 에이스인 맥스 셔저를 2차전 구원투수로 투입하는 강수를 마다하지 않았다. 골리앗 다저스는 기선 제압에 실패하고 무너졌다. 로버츠는 방심으로 큰 그림을 잘 못 그렸다. 패배의 마침표는 커쇼가 찍었다. 5차전에 구원 등판한 커쇼는 홈런 2개를 내리 허용하며, 워싱턴에게 승리를 헌납했다. 커쇼는 사이영상을 세 번이나 받은 최고의 투수지만, 진검승부가 펼쳐지는 가을 무대에선 거듭 실패했다. 가을 무대가 그의 아킬레스건이었다. 그래서인지 5차전 구원 등판을 앞둔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불펜 피칭을 하면서도 표정이 무척 어두웠다. 패배가 미리 두려웠던 것이다. 투수가 두려움을 느끼면,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그러면 그 공은 날카로움을 잃고, 의도한 궤도도 벗어난다. 커쇼의 공이 그랬다. ‘국보급 투수’ 선동열 감독이 이런 말을 했다. “패전 처리 투수라도 온전히 자기 공을 던지면 홈런왕도 삼진으로 돌려 세운다”고. 투수는 타자가 아닌 자기 마음과 싸움을 하는 존재다. 커쇼는 경기가 끝난 뒤 덕아웃에 홀로 앉아 있었다. 실패에 따른 엄청난 비난과 조롱,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 그는 또 다른 두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앞선 마운드의 모습처럼, 그가 그 두려움에도 붙들려 주저앉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커쇼는 야구장을 떠나지 않았고, 기자들 앞에 섰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던 것(포스트시즌 징크스)이 이제 진실이 됐다. 정말 참담한 심정이고, 지금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고통을 애써 억누르며 그는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숙이지는 않겠다. 도망가지 않겠다. 계속 싸우고, 경쟁할 것이다.” 인생의 마운드에서 던진 그의 메시지는 날카로웠고, 정확한 지점을 찔렀다. 커쇼의 그 한마디는, 5차전 승전보보다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 사실 커쇼가 월드시리즈 MVP를 한 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야구가 단순한 공놀이가 아닌 것은, 그 것이 우리의 인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메이저리그 가을잔치에는 8개 팀이 나섰다. 우승팀을 뺀 7개 팀은 패자가 된다. 메이저리그 전체로 보면 패배하는 팀은 29개다. 우리 삶도 성공을 지향하지만, 그것은 무수한 실패 속에서 이뤄진다. 실패에 고개 숙이지 않겠다는 그 말,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불같은 강속구를 던졌던 커쇼는 구위가 확연히 떨어지고 있다. 나이도 들고, 부상도 있다. 상대타자도 더 악착같이 물고 늘어질 것이다. 과거처럼 포효하는 모습을 쉽게 보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커쇼는 나아간다고 한다. 류현진을 보지 않았는가. 어깨 수술로 강속구를 잃었지만, 제구력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찾아내 메이저리그를 평정했다. 실패를 극복하려는 의지와 상황에 대한 새로운 해석, 그 것이 있기에 희망은 유효하다. 내년 가을 무대에는 커쇼가 어떤 모습으로 설까. 멋지게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 내년 우리의 모습은 어떠할까.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사전은 평화를 ‘전쟁이나 갈등이 없이 평온함’이라고 정의한다. 그 평화를 사유의 핵심에 놓은 철학자가 묵자였다. 그는 비공(非攻)을 주장했다. 비공이란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 문제는 약육강식의 시대에 그것을 어떻게 관철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약자와 약소국의 편을 드는 것, 이것이 그가 제시한 해결책 중 하나였다.그는 초(楚)나라가 송(宋)나라를 침략하려 한다는 소리를 듣고 밤낮으로 열흘을 달려 초나라로 갔다. 송나라는 크기가 초나라의 10분의 1이 안 되는 작은 나라였다. 경제력도, 군사력도 작고 약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약소국이라는 것이었다.초나라는 자국에서 새로 발명한 무기인 운제(雲梯), 즉 구름에 닿을 만큼 높은 사다리를 이용하여 송나라의 성을 함락시킬 심산이었다. 묵자는 침략전쟁이 천륜에도, 인륜에도 어긋난다는 자신의 말에 초나라 왕이 설득당하지 않자 다른 카드를 꺼냈다. 사다리 무기를 무력화할 비책이 있다고 밝힌 것이다. 그는 300명의 제자들을 이미 송나라로 보내 대비하고 있으니 아무리 침략해도 소용없다고 단언했다. ‘저를 죽인다 해도 그들을 다 없앨 수는 없을 겁니다.’ 초나라 임금은 결국 묵자의 말에 송나라를 침략하지 않기로 했다. 묵자는 다른 경우에도 그런 식으로 전쟁을 막았다.묵자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덕목 때문이었다. 하나는 나와 우리만이 아니라 타자까지 사랑하라는 겸애(兼愛) 사상이 그에게 부여한 도덕적 권위였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것을 실천하려 한 용기였다. ‘남의 나라를 내 나라처럼 사랑하라.’ 공자도, 맹자도 펼치지 못한 절대적인 평화와 환대의 사상이었다. 2400여 년 전의 묵자는 바로 이것을 갖고 강대국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다면 사다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막강한 무기를 가진 강대국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는 묵자들이 아직도 이 세상에 있을까.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