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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탄핵소추안의 국회 통과 이틀 전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야당으로서 촛불시위에 같이 참여해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했으니 자연적으로 (대권이) 나에게 올 것이라는 환상은 버려야 한다”는 거다. 다분히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를 겨냥한 언급이었다. 이 중요한 얘기를 아무도 전해주지 않았는지 문재인은 어제 현 시국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국민은 대통령 한 사람이 아니라 정권을 탄핵했다며 “촛불민심이 요구하는 청산과 개혁을 위한 입법과제를 선정하고 추진할 사회개혁기구 구성을 제안한다”는 점령군 대장 같은 발언을 한 것이다. 잘못된 적폐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데 반대할 사람은 단언컨대, 없다. 그러나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을 위한 6대 과제라며 비리와 부패에 관련된 공범자들을 ‘청산’하는 것부터 국정 농단을 앞장서서 비호한 권력기관의 공범들을 ‘색출’하고 책임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표현을 보면 선혈이 낭자한다. 국회는 불과 사흘 전에 헌법 절차에 따라 대통령을 탄핵했고,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누구 마음대로, 어떤 시민사회를 무슨 자격으로 입법에 참여시켜서 부역자를 색출, 청산, 몰수, 박탈, 개조하는 인민재판이라도 하겠단 말인가. 문재인이 헛물켜지 말라는 예로 김종인은 1969년 프랑스 사례를 들었다. ‘68혁명’의 광풍이 휩쓴 다음 해 드골 대통령은 자신의 신임을 연계한 국민투표가 부결되자 사임했다. 두 달 만에 치른 대선에서 당연히 야당에 정권이 넘어갈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드골 정부에서 총리를 6년이나 한 조르주 퐁피두 우파 대통령의 당선이었다. 이 나라엔 결선 투표가 있고, 1차 투표에서 좌파 후보가 셋이나 나오는 바람에 결선도 오르지 못했지만 국민은 지긋지긋한 혼란보다 안정을 택한다는 교훈은 지금도 유효하다. 오래된 과거까지 갈 것도 없다. 혁명이 민주화로 성공적 정착을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점은 ‘국가 대청소’ 같은 총체적 해결의 과욕을 접는 것이라고 작년 말 미국의 포린어페어스지(誌)가 강조했다. 스페인, 칠레, 남아프리카공화국, 폴란드 등 민주화에 성공한 국가의 전직 수장 12명에게 물어 얻어낸 결론이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우리는 민주화에 성공한 국민이라고 믿고 싶으면서도 굳이 다시 들춰본 이유는 박근혜의 탄핵과 함께 드러난 문재인 같은 야당 대선 주자의 시대적, 정신적 지체(遲滯) 때문이다. 점진적인 발전을 위해선 누구와도 타협해야 하는 것이 정치인의 용기다. 정권을 맡기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보여줘야 수권능력이 있는 것이지 “구제도와 구악을 청산하고 낡은 관행을 버려야 한다” 같은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재인의 문제는 법치(法治)에 대한 능멸이다. 탄핵 전에는 헌법에도 없는 거국내각, 대통령의 전권 포기를 주장하더니 탄핵 후엔 대통령 사퇴를 거듭 촉구하고 있다. 포린폴리시지(誌)는 색깔혁명의 실패 이유를 ‘법치 부재’ 때문이라고 간단히 정리했다. 정권을 접수한 새 정부들이 과거를 단죄하고 개혁한다며 법적 기준 같은 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집권층 마음대로 한 나라에서 어김없이 역풍이 덮쳐와 어렵게 성취한 민주화 혁명을 도루묵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김종인은 “문 전 대표가 좌파로 당을 구성해 대통령 후보 지명 자체는 별로 염려 안 할 것”이라고 했다. 문제는 이런 문재인으로 집권이 가능하겠느냐는 점이다. 혁명에 성공한 대중도 여망을 제도로 만들 순 없다. 그래서 리더십이 필요한 것이고, 리더의 비전이 뭔지는 더 중요하다. 그런데 문재인은 지난 2일 국회 앞 집회에서 탄핵 이후 가장 중요한 이슈가 뭔지를 묻는 19세 학생의 질문에 “국정 공백 최소화를 위해 빠른 대선이 필요하다. 어느 당 어느 후보가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 나갈 비전을 준비하고 있는지 제대로 판단해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은 과제 아니겠나”라고 알아듣기 힘든 답변을 하고 말았다. 나는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다도 아니고, 어떤 나라를 만들겠다도 아니고, 하다못해 노무현의 못다 한 꿈을 이루겠다는 것도 아니다. 시민혁명을 실패로 돌아가게 만드는 요소를 완비하고 있으면서, 그저 빨리 대선을 치러 대통령 자리에 앉고 싶다는 사람이 제1야당의 가장 유력한 대선 주자라는 사실이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최재경 민정수석은 4년 전에도 사표를 쓴 적이 있다. 대통령선거를 앞둔 2012년 말, 현직 고검장 뇌물수수 등 내부 비리로 곤경에 처한 한상대 검찰총장이 반전(反轉) 카드로 당시 대검 중앙수사부장이었던 자신의 감찰을 지시했을 때다. ‘제일 중요한 건 첫째가 조직, 둘째가 상관’이라고 믿는 그는 집단 항명을 주도했다. 한 총장이 대검 중수부 해체라는, 조직을 해치는 일을 검찰개혁안으로 발표하게 놔둘 수 없다며 거꾸로 총장 사퇴를 요구하는 연판장을 돌린 것이다. 최악의 검란(檢亂)이었다. 한 총장은 항복하고 11월 30일 개혁안 발표 없이 사퇴를 고했다. 최재경도 “공직자로서 책임을 지겠다”며 사의(辭意)를 표했다. 그런데 그는 남았다. 사표를 냈지만 반려됐다는 이유다. 그 무렵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저는 제 자신이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검찰을 이용하거나 검찰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임을 엄숙히 약속한다”며 중수부 폐지와 특별감찰관제 등 검찰 개혁 공약을 발표한 건 웃픈(웃기고도 슬픈) 코미디다. 그 최재경이 23일 다시 “사의를 표하는 게 공직자로서의 도리”라고 밝혔다. 중수부도 해체됐고 특별감찰관은 대통령 비선 실세의 미르·K스포츠재단을 들여다보다 쫓겨난 박근혜 정부에서 민정수석 임명장을 받은 지 닷새 만이다. 그러고는 사표가 반려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요일인 어제도 출근했다니 사표가 장난이었던 모양이다. 지난주 최재경이 지인에게 “내가 사표를 내는 이유는 단 하나, 내 동료·후배 검사의 수사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기에 나는 드디어 영화에서나 보던 검사가 나타났다고 만세를 불렀다. 대선 공약과 정반대로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검찰을 이용한 대통령이 현재의 대통령이다. 검사 출신 최재경을 불러들인 이유가 또 검찰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임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래도 평소 우병우 전 민정수석 때문에 검찰이 망가진다고 여겼다는 최재경은 다를 줄 알았다. 가장 똑똑한 검찰 내에서도 위아래로 신망이 두터웠다니 트로이의 목마처럼 청와대로 들어가선 혼군(昏君)에게 법치주의를 알려주고 사정 라인 곳곳의 ‘우병우 라인’을 걷어내는 진정한 검사의 모습을 보여주리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4년 전에도 그랬던 걸 보면 사표 내고도 다시 나오는 건 최재경의 버릇인 듯하다. 대면조사 받으라는 민정수석의 조언 대신 개인 변호인 말을 따르는 대통령이라면 최재경이 청와대에서 할 일은 없다. 그런데도 “상황이 상황”이라며 꾸역꾸역 출근하는 것을 보니 후임자가 올 때까지, 오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출근할 게 뻔하다. 4년 전 그가 사의를 밝힌 며칠 뒤 야당에서 “BBK (수사를 무혐의로 털어준) 정치검찰 행동대장, 검찰총장과 이전투구로 국민적 검찰개혁 요구에 정면으로 반발한 중수부장이 사표가 반려됐다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개탄했던 것과 똑같은 일이 반복된 셈이다. 최재경이 조직을 해치는 검찰총장은 안 된다며 검찰개혁에 반대했듯이, 말끝마다 조직을 되뇌는 집단은 조폭과 검찰밖에 없다. 국가와 검찰조직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면 조직을 우선하는 것이 검찰이라는 말까지 들린다. 2011년 이명박(MB) 당시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부지 매입 사건을 무혐의 처리했다가 특검에서 뒤집힐 만큼 정치검사로 유명했던 최재경이 그때 그렇게 검찰개혁에 반대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병우 가이드라인’에 절절 매는 검찰은 안 나왔을지 모른다. MB 때 잘나갔던 최재경도 2014년 세월호의 실소유주 유병언을 산 채로 체포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검찰을 떠났다. 두 달 전 “검찰은 추관(秋官), 즉 가을의 관청이다…검찰이 가을의 위엄을 되찾기 위해서는 검찰 스스로 서릿발 같은 자기 정화가 필요하다”고 쓴 글을 기억한다면, 지금이 정치검사라는 낙인을 지우고 진정한 공직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도 알았으면 한다. 사정기관을 주무르는 사정(司正)은 더는 안 된다. 국민의 뜻을 대통령에게 알리는 민정(民情)이 필요하다. 박 대통령이 독대를 피한다면 관저 앞에서 소리라도 쳐서 민심을 알리고, 검찰이 정한 마지막 조사날짜인 29일 대통령이 대면조사를 받도록 하기 바란다. 그래도 대통령이 듣지 않는다면, 청와대 출근은 끝내야 한다. 검사 출신이 그만한 기세도 없이 어떻게 ‘퇴폐한 기강’을 떨쳐 일으킨단 말인가.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가 어제 “박근혜 대통령이 조건 없는 퇴진을 선언할 때까지 국민과 함께 전국적 퇴진운동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모든 야당과 시민사회, 지역까지 함께하는 비상기구를 통해 퇴진운동의 전 국민적 확산을 추진하겠다”는 문 전 대표에 맞춰 추미애 민주당 대표도 야 3당과 시민사회 간의 ‘비상시국기구’ 구성을 제안했다. 제1 야당이 거국중립내각 제안을 철회하고 국정 운영의 한 축인 국회를 벗어나 이른바 진보좌파단체까지 포함한 ‘거리세력’과 연대해 정권 퇴진 투쟁에 나설 의도를 밝힌 것이다. 정의당과 국민의당에 이어 민주당까지 14일 ‘대통령 2선 후퇴’에서 ‘대통령 퇴진’으로 당론을 변경함으로써 야권은 한목소리로 박 대통령 퇴진을 주장하게 됐다. 그러나 문 전 대표가 “구체적인 대통령의 퇴진 로드맵은 비상기구에 맡기자”며 과도내각 구성을 통한 최순실 사태 규명 및 차기 대선의 공정한 관리를 주장한 것은 중대한 변화다. 헌법에도 나와있지 않고 국민이 선출하지도 않은 ‘비상기구’에 국가운영의 로드맵을 맡기자니, 무슨 권한으로 이 정체불명의 기구가 과도내각을 구성하고 차기 대선까지 관리하도록 한다는 건가. 문 전 대표는 4월 총선에서 옛 통합진보당 출신 인사 두 명을 지지해 20대 국회 원내 입성을 도운 전력이 있다. 당시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일부 세력의 정체성 논쟁을 해결하지 않으면 수권 정당으로 가는 길은 요원하다”고까지 지적했음에도 문 전 대표는 “정체성 논쟁은 부질없다”고 했다. 이른바 진보좌파 원로로 구성된 ‘원탁회의’가 2012년 대선 과정에서 문 전 대표에게 유리한 야권 후보 단일화를 강권한 것을 안철수 전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는 기억할 것이다. 추 대표가 대통령과의 양자회담을 제안했다 취소한 것이 ‘시민사회와의 공조 계기’가 됐다지만 이 ‘비상기구’가 19일 촛불시위를 최대한 키워 대한민국을 어디로 끌고 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국가원수로서 권위와 정당성을 잃은 박 대통령이 그 자리에 있는 한, 국정 공백 사태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러나 야당이 강조하는 대통령의 ‘질서 있는 퇴진’을 위해서는 국회가 제 할 일을 해야 한다. 야당이 주장했던 거국내각이든, 현재 주장하는 과도내각이든 차기 대선까지 국정을 관리할 ‘대통령 대리인’은 필요하다. 민주당과 국민의당은 당장 야당 추천 총리를 누구로 할지부터 논의하는 것이 책임 있는 정당의 자세다. 국민은 야당이 과연 단일 총리 후보를 낼 의사와 능력이 있는지 의구심을 갖고 있다. 야당은 총리를 추천하는 순간부터 국정에 책임을 져야 한다. 야권 요구대로 대통령이 무조건 퇴진하거나 시한을 정해놓고 퇴진하면 단일 총리에 합의할 정치적 능력은 있는가. 단일 총리를 내든, 대통령 탄핵 절차를 밟든 민주당은 헌법 테두리 내에서 정당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하는 것이 국정 공백을 줄이는 길임을 알아야 한다. }

조국 서울대 로스쿨 교수가 11일 방송에서 근래 가장 웃기는 소리를 했다. 비선 실세 최순실과 ‘국가 사유화’를 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탄핵을 말하지 않는 이유가 첫째 국회에서 이뤄질 것인가, 둘째 황교안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는 게 옳은가, 셋째 이 복잡한 문제를 헌법재판관 9명에게 맡겨서 될 일인가 싶어서라는 거다. 법을 가르치는 교수가 헌법을 불신해 헌법 절차를 피하려 들다니 뚱뚱한 ‘다이어트 코치’를 만난 것 같다. 국회는 빼더라도 총리에게 문제가 있고 헌법재판소가 못 미더워 탄핵을 못 한다는 건 대한민국 헌법에 대한 모독이다. 2004년 5월 14일 헌재가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심판을 기각하자 “탄핵에 대한 법적 마무리가 이뤄졌다”고 평가했던 그가 현재의 헌재를 무시하는 것도 앞뒤가 안 맞는다. 그때 조국은 “탄핵안 가결 당시 반대했던 시민 중에는 절대적 의회권력에 반대한 이들도 있었다”고 강조했다. 가장 격하게 반발했던 이들이 ‘노무현 탄핵은 의회 쿠데타’라며 울부짖었던 친노(친노무현)다. 삼권분립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행정부의 탈법과 실정(失政)을 막기 위해 국민의 대표기관에 둔 합법적 제도를 쿠데타로 몰았으니 지금 와서 ‘박근혜 탄핵’을 거론하기도 민망할 것이다. 이제는 노무현 탄핵 과정도 차분히 복기할 필요가 있다. 2004년 3월 12일 탄핵안 통과 뒤 탄핵 반대 촛불시위가 번지고, 4월 15일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152석으로 압승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온 나라를 들끓게 만든 탄핵이 선거에서 재미 보려는 노무현의 정치공작이었다면, 배신감 느끼지 않는가. 당시 의사봉을 두드렸던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탄핵을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이 유인했다고 확신하고 있다. 대통령이 사과하고 여야가 협상할 기회를 수없이 주었음에도 당청이 거부한 게 그 증거다. 후폭풍도 오래가지 못했다. 386 의원들의 오만과 무능이 사정없이 드러나면서 탄핵 기각 1년도 안 돼 재·보궐선거에서 여당은 완패했고 국회는 도로 여소야대가 돼버렸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점은 헌재가 “국회의 탄핵소추안 의결 과정이나 절차 등에 하자가 없다”고 결정문에 명시했다는 사실이다. 탄핵은 의회 쿠데타나 불충(不忠)이 아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국회가 감히 끌어내려?’ 같은 국민감정이 끓어오른 데는 편파적 탄핵방송과 인터넷 영향이 컸다. 헌재가 “노 대통령이 일부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파면할 만큼 중대한 위반은 아니다”라고 기각 사유를 밝히면서 ‘탄핵이 필요한 중대한 법 위반’이 뭔지 별도로 해석해 놓은 대목에선 우주의 기운까지 감지된다. 바로 ‘국민의 신임을 배신하여 국정을 담당할 자격을 상실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때’다. 12년 뒤 박근혜 탄핵을 예견하는 문구처럼 섬뜩하지 않은가. 탄핵 심판 대통령 측 대리인 간사였던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2일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촛불시위에서 “대통령이 국민 요구에 답하지 않는다면 저와 우리 당은 부득이 퇴진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선언했다. 1987년 6월 항쟁을 기억한다는 유력 대선 주자가 민주화운동의 결과로 탄생한 현행 헌법을 무시한 채 대통령을 끌어내렸다간, 자신이 대통령이 될 경우 같은 운명에 처할 수 있음을 직시하기 바란다. 거국내각이라는 이름은 거룩하지만 야당 성향의 총리가 외교 안보까지 대통령의 전권을 접수해선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할까요, 말까요?” 북한에다 물어보는 거국내각이라면 난 반대다. 문재인이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헌정 질서에 따라 당당하게 대통령 탄핵 발의를 요청하란 말이다. 대통령의 탄핵 사유는 차고 넘친다. 박정희-육영수의 딸을 뽑았더니 최태민의 딸이 사실상 대통령이었다는 것만큼 국민의 신임을 배신한 일도 없다. 자신은 모든 것이 선의(善意)로되 배신만 당한다고 믿는 성정(性情)도 국정 담당할 자격으로는 부적절하다. 그럼에도 1986년 마르코스, 2001년 에스트라다 대통령을 쫓아낸 필리핀의 ‘피플 파워’ 역시 각각 선거와 탄핵 절차를 거쳤지 무작정 거리로 뛰쳐나오진 않았다. 피플 파워 30년에 얻은 건 도널드 트럼프 뺨치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뿐인 필리핀처럼 ‘피플 파워 피로’에 걸릴까 겁난다. 노무현 탄핵 유도로 재미 본 세력이 이번에도 나라와 역사 발전을 거꾸로 돌려선 안 될 일이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하늘이, 아니 온 우주가 도왔다 했다. 대통령이 왜 장관들 대면보고 한 번 안 받는지 드디어 알았다. 비선 실세 최순실의 국정 농단은 통탄할 일이지만 지금이라도 드러나서 되레 고맙다. 최순실이 곳곳에 꽂은 빨대만 뽑아내면 대한민국의 국운은 다시 융성할 수 있다, 고 생각했다. 그런데 반동(反動)의 기운이 느껴진다. 지난주 통일부가 “개성공단 중단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확정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전날 이성한 전 미르재단 사무총장이 “최순실과 차은택, 호스트바 출신 고영태 등이 비선 자문회의에서 논의했다”고 폭로한 걸 뒤집은 것이다. “최순실 취미가 대통령 연설문 고치는 것”이라고 터뜨려 대통령이 사과까지 하게 만든 고영태도 그런 말 안 했다고 부인하고 나섰다. 급기야 독일에서 신경쇠약에 걸려 비행기를 못 탄다던 최순실까지 어제 아침 급거 귀국해 검찰 조사를 자청했다. 2014년 말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이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으로 둔갑한 것과 비슷하게 돌아가는 분위기다. 최순실 국정 농단도 태블릿PC 유출 사건으로 낙착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나도 좋겠다. 하지만 있는 일을 없는 일로 만들 순 있어도 한 번 알아버린 것은 모르는 것으로 돌리진 못한다. 워싱턴포스트가 ‘기념비적 연설’이라고 언급한 2014년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연설마저 최순실이 손을 봤다니 표현만 다듬은 건지, 평화통일 구상까지 해준 건지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어제는 최순실과 잘 안다는 A 씨가 최순실이 대통령과 통화 직후 “VIP가 해외 나가서도 전화 걸어 일일이 묻는다”며 언짢아 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작년 3월 카타르 방문 때다. 입안의 혀 같은 외교장관 있고 보좌진 수두룩한데 최순실한테 뭘 물어볼 만큼 백지상태란 말인가. 국민이 가장 분노하고 또 허탈해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분명 박정희와 육영수의 딸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았는데 알고 보니 제정 러시아의 요승(妖僧) 라스푸틴에 비견되는 최태민의 딸이자 호스트바 마담 출신 남자와 반말하는 강남 여편네가 대통령 머리 꼭대기에 앉아 일일이 가르치며 국정을 주물렀다는 얘기다. 대통령을 대체 어떤 마력으로 사로잡았는지 최순실은 ‘내 딸이 행복해지는 나라’를 위해 대학입시와 130년 전통의 사학(私學)까지 뒤흔들었다. 대통령에게 최순실이 역린(逆鱗)이면 학부모와 학생들한테는 대입이 역린이다. “능력 없으면 너네 부모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라는 싸가지 없는 말로 열심히 살아온 국민을 모욕한 것만으로도 최순실 딸과 그 부모, 그리고 대통령은 석고대죄를 해야만 한다. 그런데도 검찰 수사마저 은폐 축소될 조짐이니 ‘헬조선’ 소리가 절로 나올 판이다. 내각책임제 같으면 벌써 내각 총사퇴했다. 그럼에도 대통령책임제에선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지 못한다. 대선 후보 측근들은 5년에 한 번씩 역성혁명 하듯 왕을 만들어 내고 집권하면 국가를 사유화하는 것이 대통령제의 폐해다. 민주화 이후 30년간 6번의 대통령이 측근비리와 부패 끝에 불행한 퇴임을 한 것이 그 증거다. 이번엔 대통령이 측근 부패의 재단을 차려주는 막장까지 왔다면 대통령제는 이제 끝내야 한다. 우리 국회 수준으로 내각책임제 할 수 있을지 우려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2013년 11월 19일 민주당 의원과 청와대 경호요원의 몸싸움으로 마침 파행 중인 국회를 찾았던 대통령이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한 내각책임제 국가인 키르기스스탄에서 온 귀빈이었다. 우리나라처럼 엉덩이에 몽고반점 있고, ‘씨족사회 전통’에 옛 소련으로부터 대통령제 국가로 독립한 뒤에도 부패와 독재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이 가난한 나라는 2005년 ‘튤립혁명’으로 14년 장기독재 대통령을 몰아냈다. 혁명을 이끈 야당 지도자마저 부패한 다음 대통령으로 돌변하자 2010년 대통령을 쫓아냈고 과도정부가 들어서 내각책임제 개헌 국민투표를 거쳐 2011년 평화적 정권교체를 했다. 그리고 2015년 두 번째 총선을 성공적으로 치름으로써 의회민주주의의 안정성과 정책의 연속성을 굳혀가고 있다. 이름도 입에 올리기 고약한 병신년(丙申年) 2016년, 박 대통령과 최순실의 비선·부패·섹스 스캔들은 대통령제를 시해(弑害)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으면 한다. 유력 대선 주자가 없는 지금, 거국내각이든 책임총리든 남은 1년 4개월 동안 내각책임제 개헌까지 해낸다면 박 대통령은 어쨌거나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어쩌면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청와대 비선(秘線) 실세 개입 의혹은 ‘난무하는 비방과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일지 모른다. 백 번 양보해서,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대기업들의 발목을 비틀어 두 재단에 800억 원을 바치게 할 수도 있다. 장사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고, 전경련이 일요일인 작년 10월 25일 ‘내일 도장 들고 나르샤’ 긴급 명령을 내렸을 적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쯤 재벌들이 모를 리 없다. 20대 국회 첫 국정감사에서 드러난 ‘이화여대 사태’는 다르다. 대통령 최측근으로 알려진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 씨의 힘이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있어 단순 비방이나 폭로로 넘기기 어렵다. 천 번을 양보해서, 이대가 2013년 5월 교수회의에서 승마를 체육특기 종목에 포함하기로 결정했고(4월 전국승마대회 판정 시비와 6월 대통령 지시에 따른 문화체육관광부 감사가 있었다), 2014년 10월 전형 때 진짜로 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을 들고 온 최 씨의 딸을 합격시킨 건(평가자 입실 전에 입학처장은 금메달을 가져온 학생을 뽑으라고 했다), 나라를 구한 소녀에게 하늘이 준 행운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최 씨가 작년 9월과 올해 4월 이대를 다녀간 뒤 특기생은 B학점 이상 주도록, 결석해도 봐주도록 학칙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안민석 의원이 “허위 사실이 있으면 책임지겠다”며 밝힌 7일 국감 회의록에는 최 씨 딸의 지도교수 얘기도 나온다. 올봄 ‘상당히 양식 있는’ 지도교수는 출석 한 번 안 한 학생에게 학점을 줄 수 없으니 학교에 나오게 하라고 연락을 했다. 그러자 다음 날 최 씨가 학교로 뛰어와서는 “왜 외국에서 열심히 훈련하는 애를 안 봐주고 귀찮게 하느냐? 고발할 수도 있다”며 한바탕 소란을 벌였다는 거다. 그 뒤 지도교수는 교체됐고 학칙은 ‘국제대회, 연수, 훈련 시 증빙서류를 제출하면 출석으로 인정’으로 바뀌었으며 최 씨 딸은 소급적용까지 받았다. “그리고 이대는 9개 교육부 예산지원 사업 중 8개에 선정되는 ‘재정 폭탄지원’을 받았다”며 안 의원은 ‘포괄적 뇌물죄’에 해당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합리적 의심’이 억울하다면 이대 총장이 직접 해명을 해야 마땅할 텐데도 증인 채택을 맹렬히 막은 게 새누리당이다. 그러니 최 씨 보호하려고 총장 못 부르게 했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이대는 ‘체육특기생 선발과 학칙 개정을 원칙과 절차에 따라 공정하고 적법하게 했다’고 해명하고 있다. 국제대회에서 모교와 대한민국의 명예를 드높일 특기생을 위해 대학이 어느 정도 특혜를 줄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단, 학교의 자율적 판단일 때 한해서다. 이 대학이 얼마나 학점 짜고, 학사관리 철저하고, 여교수들은 쌀쌀맞은지 ‘이대 나온 여자’(나도 그 중 하나다)는 다 안다. 130년 전통을 자랑하는 사학이 5년 임기의 대통령 측근, 심지어 공식 직함도 없는 학부모에게 휘둘려 학칙까지 바꾼 것보다 ‘비선 실세의 위력’을 확인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대 교수들은 ‘학사 문란’으로 규정했지만 국가로 치면 국기(國基) 문란 행위가 아니고 뭔가. ‘김영란법(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전화신고 1호가 대학생이 교수에게 준 캔커피 사건이다. 그런데 누구는 출석을 안 해도, 과제물을 개떡같이 내도 “참 잘했어요” 아부하는 대학이 정부 지원을 무더기로 받았다. 그렇다면 이 정권에선 어떤 대학입시나 대학정책도 공정할 수 없다. 평생교육단과대학(미래라이프대학) 반대와 최경희 총장 퇴진을 요구하며 7월 말부터 농성 중인 학생들은 ‘총장이 나갔으면 하고 땅을 팠는데 고구마에 무령왕릉까지 나왔다’며 역린(逆鱗)을 건드린 것을 당혹해하는 분위기다. 반면 학생들이 지나치다고 여겼던 교수들과 이사회는 대통령 최측근의 딸에게 온갖 특혜를 바쳐 이화의 명예를 추락시킨 총장에 대한 분노로 돌아서고 있다. 최 총장의 독선과 불통(不通), 비선 의존이 대통령과 똑 닮았다는 비아냥거림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다. 미르·K스포츠재단 의혹은 정권말이 되거나 정권이 바뀌어야 결국 규명될 것이다. 야당은 교육부에 이대 감사를 촉구했지만 ‘면죄부 감사’로 끝날 공산이 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미르·K스포츠재단과 달리 이대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이다. 대학이 과오를 규명하고 최경희 총장은 물러나야 한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미국 대통령선거 과정을 제일 즐기는 나라가 중국인 것 같다. 올 초 우리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결정했을 때 ‘한반도 전쟁 가능성’까지 언급하며 겁박했던 환추시보 영문판은 제목도 날아갈 듯 신나는 분위기다. 지난달 26일 미국서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 TV토론이 시작되기 전부터 중국인들은 미 대선을 오락으로 여긴다, 중국인 83%가 ‘사악한’ 힐러리보다 ‘불분명한’ 트럼프를 선호한다는 기사들이 분위기를 잡았다. 토론이 끝나자 ‘미국 민주주의의 쇠퇴를 드러냈다’ ‘리더십 부족을 보여준 대선 주자들’ 등등 근심스러운, 그러나 가만 들여다보면 깨소금 냄새가 나는 기사가 쏟아졌다. 물론 선거도 없는 중국이 미국 대선에 시비를 거는 건 내시가 남의 섹스를 질투하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중국판 트위터, 웨이보의 주장도 있다. 하지만 “대선 후보들의 질 낮은 수준을 보니 미국의 슈퍼파워가 흔들린다는 것이 명백해졌다”는 환추시보 주장은 반박하기 어렵다. 미국 경제가 살아나면서 중국의 패권 도전을 더는 용납지 않겠다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자세가 분명해졌으나 트럼프 대통령이 탄생할 경우, 과연 시진핑 국가주석과 맞설 수 있을지 불안하다. 그러고 보면 민주주의처럼 위험한 제도도 없다. 투표를 통해 유능한 리더를 뽑을 수 있으면 최고로 좋겠지만 “독일에 히틀러가 있었다면 필리핀엔 내가 있다”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도 선거로 뽑혔다.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타락하면서 민주 국가들이 ‘거대한 퇴보’에 직면했다는 것이 하버드대 니얼 퍼거슨 교수 지적이다. 미국까지 안 가도 지금 한강엔 뚝 잘린 손가락들이 둥둥 떠다닌다. 나라가 안보위기에 경제위기라면서 여당 대표가 무슨 대단한 투쟁이라고 국정감사까지 가로막고 일주일이나 밥을 굶었단 말인가. 야당 출신 국회의장이나 대선주자들이나 심지어 대통령이나, 사방을 둘러봐도 영웅은 아니더라도 리더다운 리더가 보이질 않는다. 실력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 지배하는 제도가 카코크라시(kakocracy)다. 대중이 투표로 리더를 뽑는 데모크라시가 카코크라시로 변질되면 유능하거나 열심히 하는 사람이 되레 왕따를 당한다. 요즘 중국은 데모크라시를 비웃으며 과거시험 전통에서 내려온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실력주의)를 자랑하고 있다. ‘중국 모델; 정치적 실력주의와 민주주의의 한계’를 쓴 칭화대 대니얼 벨 교수는 “1인 1표만이 리더를 뽑는 도덕적으로 합당한 방법이라는 데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지방 선거를 거쳐 능력과 자질과 성과가 확인된 정치 리더 중에서도 오랜 훈련과 검증을 통과한 사람만 최고지도부에 오르는 것이 왜 인기투표 같은 민주주의보다 못하냐는 것이다. 오히려 돈과 이익집단에 좌우되는 미국 정치보다 긴 안목으로 인민 전체의 복리를 대변하는 중국 정치가 더 민주적이라는 주장이다. 중국이 모델로 삼는 싱가포르에선 심지어 “우리의 성공비결은 실력주의, 실용주의, 청렴이고 가장 우려하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불과 30년 전,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쳤던 우리로선 당연히 동의하기 싫다. 시진핑도 아버지가 부총리까지 지낸 ‘금수저’여서 국가주석이 될 수 있었고 공산당 내에서도 갈수록 배경이 중요해진다. 중국 정부가 유능하기만 한 것도 아니어서 올 초 시장개입에 주식·환율시장이 흔들리는 곡절도 벌어졌다. 결국 역사는 자유민주주의로 귀결될 것이라던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50년 뒤에 본다면 그래도 승자는 중국 모델 아닌 자유민주주의”라고 강조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를 돌아보면 답이 안 보인다. 아무리 이상하고 무능한 사람이 뽑히더라도 민주주의는 신줏단지같이 모셔야 하는가. 유능하고 훌륭한 사람도 정부나 정치판에만 들어가면 이상하고 무능해지는 건 제도 탓인가. ‘그놈의 대통령제’ 때문이라면 내각제로 개헌할 경우 달라질 것인가.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100년 전 중국이 그랬듯이 도전받지 않고 견제받지 않는 실력주의로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사실뿐이다. 아직도 우리에게 민주주의가 고마운 유일한 이유가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도 정권교체를 할 수 있다는 것 정도라면, 정말 정치인들 국민에게 죄 많이 짓고 있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추석 연휴 KBS가 연거푸 내보낸 다큐드라마 ‘임진왜란 1592’를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탄탄한 고증과 영화 뺨치는 해전, 이순신 장군의 감동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편한 건 2년 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서울대에서 “임진왜란 때 양국 백성들과 군인들이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어깨를 나란히 하며 싸웠다”고 연설한 결과가 바로 이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중국중앙(CC)TV의 제안으로 공동 제작했으니 당연히 “명나라를 먹겠다” “전쟁은 기회다” 외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나쁜 인간으로 묘사됐다. 이번 주 등장하는 명나라 군과의 연합작전은 분명 감동의 도가니일 것이다. 시진핑의 음수사원(飮水思源·근원을 생각하고 그에 감사하라) 언급대로 이런 역사를 잊고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를 배치하거나 한미동맹도 모자라 한미일 3각 공조를 해선 안 된다는 시청 소감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우연찮게도 ‘임진왜란 1592’가 처음 방영된 9월 3일은 중국의 전승절이었다. “결혼을 원한다면 시(진핑) 아저씨 같은 사람하고 하세요. 시 아저씨는 불굴의 의지를 지닌 영웅, 세상이 어떻게 변한다 해도 전진하네”라는 시진핑 찬양가요의 영상 배경도 작년 전승절 행사에서 시진핑이 열병식 하는 장면이다. 다행히 톈안먼 성루에서 지켜보는 49개국 지도자들의 얼굴은 나오지 않았지만 가슴이 덜컥했다. 혹시 우리 대통령이 보일까 싶어서. 명색이 사회주의 국가에서 시진핑 찬양가요에 시진핑의 말씀학습 같은 개인숭배가 나오는 것이 정상은 아니다. 지난달 공산당 전·현직 지도부의 베이다이허 회의에서 시진핑이 ‘10년 집권’의 불문율을 깨고 장기집권을 논의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AFP통신 보도가 의미심장하다. 올 3월 중국 양회(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전국인민대표대회) 중 ‘충성스러운 공산당원들’이 ‘시진핑 동지’에게 퇴진을 요구해 파문을 일으킨 공개서한도 이 점을 지적했다. 시진핑이 집단지도 체제를 무력화하고 모든 권력을 틀어쥐면서 정치 경제 사상 등 온갖 방면에 위기가 닥쳤다는 것이다. 특히 “외교적 측면에서 시진핑이 덩샤오핑의 도광양회(韜光養晦·재능을 감추고 때를 기다림) 정책을 폐기함으로써 중국에 호의적인 국제환경을 해쳤을 뿐 아니라 북한이 핵실험에 성공하도록 허용해 중국 안보에 위협을 끼치고, 미국이 아시아로 돌아오고, 한국과 일본 동남아시아가 중국을 견제하게 만들었다”는 대목은 눈이 번쩍 뜨인다. 중국에도 양식 있고, 정치적 경제적 자유를 요구하는 공산당원들이 살아있다는 얘기다. 공개서한은 신장위구르자치구 정부가 운영하는 인터넷매체 우제(無界)신문에 실렸다가 바로 삭제됐지만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유명 언론인의 실종설이 나오고 ‘부패 고위직’ 체포와 반란설이 끊이지 않는 등 파장이 계속되는 것도 시진핑과 중국이 밖에 비치는 것만큼 탄탄하지 않다는 의미로 봐야 한다. 2008년 9월 15일 미국 리먼브러더스의 파산 신청이 촉발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국이 구가했던 대국굴기(大國崛起)는 일단 멈췄다는 진단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중국은 영광이 계속될 줄 알고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고, 국수주의적 외교로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을 위협했지만 지금 같은 ‘뻥튀기 성장률’과 부패로는 집권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는 분석이다. 말로는 시장중심 개혁을 외치면서 시진핑 중심으로 돌아가는 독재가 성공한다면 세상 이치에 대한 배신이다. 이제는 종주국이 눈을 부라리면 당장 조공무역이 끊겨 굶어죽는 줄 아는 우리 일각의 친중(親中)경사부터 바로잡을 때가 됐다. ‘임진왜란 1592’의 극본을 쓰고 연출한 김한솔 PD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임란 때 김성일(1538∼1593)이 의병 모집의 목표로 중화문화 수호를 강조한 건 왜 안다뤘는지 모르겠다. 16세기에 일본이 침략했고 중국이 도와줬으니 21세기도 그럴 것으로 믿는 것이야말로 바보짓이다. 그때 한국과 중국이 중화(中華)의 가치를 공유했다면 지금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공유하는 쪽은 중국 아닌 일본이다. 인구 8000만 명의 통일된 자유민주 대한민국을 환영할 나라도 중국 아닌 일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역사의 실패를 극복하는 한,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국민정서법’에 사로잡혀 세상 돌아가는 줄 모르는 수구꼴통이나 입만 살아있는 ‘입 진보’가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며 조공국처럼 살게 놔둘 순 없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어제 중국 항저우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의 한반도 배치에 반대 입장을 밝혔다. 시 주석은 “이 문제가 제대로 처리되지 못하면 지역의 전략적 안정에 불리하고 각 측의 갈등을 격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북핵 및 미사일 문제가 해결되면 사드는 더 이상 필요가 없을 것”이라며 한중 간 소통과 함께 ‘한미중 간 소통’을 제안했다. 한국과 미국이 7월 사드의 한반도 배치를 결정한 이후 첫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각차를 좁히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박 대통령은 북핵 문제 해결에 중국이 사활을 걸고 나섰다면 우리나라에 사드를 배치할 필요가 없으며, 사드는 한국 방위를 위한 자위적 조치임을 당당하게 설명했어야 했다. 북한은 어제도 탄도미사일 3발을 동해로 발사했다. 북한 김정은이 베이징에 핵 선제공격을 하겠다고 위협한다면 중국이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중국은 최근 필리핀 인근 남중국해 스카버러 암초 주변에 선박 약 10척을 집결시켜 기지 건설을 위한 매립에 나섰다. 남중국해 영유권을 인정하지 않은 상설중재재판소의 결정을 무시하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행태다. 국제법과 규범을 무시하고 중국과 주변국들을 주종(主從)관계로 인식하는 중화제국의 패권의식은 21세기에 맞지 않는다. 시 주석은 모두발언에서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30년대 항저우에서 3년간 활동했던 과거를 거론했다. 당시 중국의 지원을 받은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 장군이 1996년 중국을 방문해 ‘음수사원(飮水思源·근원을 생각하고 그에 감사하라) 한중우의’라는 글을 남겼다는 것이다. 실제로 임시정부를 도운 것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였고, 시 주석이 이를 언급한 것은 외교 결례이기도 하지만 한중 선린우호를 위한 의도로 받아들이고 싶다. 그러나 지금 한중 관계는 그때와는 거리가 멀다. 박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중국에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말을 들을 만큼 대중(對中) 외교에 공을 들였지만 결국 실패했다. 중국과 구존동이(求存同異)의 외교 관계를 추구하되 생존 차원의 사드 배치까지 양해를 구할 이유는 없다. 중국이 한국의 존망에는 관심 없이 미국 패권에 도전한 상황에서 우리가 믿을 것은 한미동맹뿐이다. 박 대통령은 7, 8일 라오스 아세안 정상회의 기간에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는다. 북의 핵 도박에 한국과 미국이 중국과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깊은 전략적 대화가 필요하다.}

“잘났어, 정말”이라는 TV 유행어가 있었다. 의부증에 시달리는 고두심은 주로 남편한테 히스테리를 부리다 말이 막히면 “잘났어, 정말” 하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1989년 KBS ‘사랑의 굴레’가 방영되던 그때는 저금리·저환율·저유가로 단군 이래 최대 경제 호황이었다. 드라마 속 남편도 정말 잘나가서 “잘났어” 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해 4월 1일 종합주가지수는 1,000을 돌파했고 대학 졸업생들은 어디든 취업이 가능했다. 그때 정말 공부 잘해서 사시, 행시 패스하고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 판검사나 관료가 된 사람들의 민낯이 요즘 드러나고 있다. 그들이 새파랗게 젊었을 때 “물러나라”고 외쳤던 구악(舊惡) 뺨치는 모습이다. 공직에서 태연하게 사익(私益)을 챙기는 부정부패를 해먹고도 국민은 개돼지로 아는지 그게 무슨 문제냐는 식이어서 더 놀랍다. 2일 밤 구속된 인천지법 김수천 부장판사는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전 대표한테 억대의 뇌물을 받고는 그가 원하는 대로 판결을 해주는 희대의 사법비리를 자행했다. 10년 전에도 부장판사가 구속된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브로커 돈을 받고 동료 법관의 재판에 잘 봐달라고 청탁을 한 것이어서 차원이 다르다. 세상이 암만 썩었대도 판사는 법대로 판결해 줄 것이라는 국민의 소박한 믿음, 최후의 기대, 사법정의의 근간을 뒤흔든 것이다. 더 기함할 일은 보름 전 그의 수뢰 의혹이 나왔을 때 인천지법이 “살펴봤더니 양형 참작 사유를 충분히 고려한 판결이었다”고 감싸고, 대법원에선 “불공정한 재판 결과가 나타났다고 보지 않는다”고 뭉갰다는 사실이다. ‘주식 대박’ 진경준 당시 검사장의 수상한 투자설이 불거졌을 때 “제 돈 가지고 투자한 게 뭐가 문제냐”는 청와대 반응과 거의 비슷한 잘난 사람들의 제 식구 감싸기요, 도덕적 마비다. 4·13총선 전후만 해도 이런 특권 의식은 국회에나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행정부, 사법부, 심지어 청와대에도 잘난 사람들의 구린내가 진동한다는 것이 줄줄이 드러났다. 과거 정권에선 이들이 공직자 아니었을 때 관행처럼 퍼졌던 부동산 투기, 세금 탈루, 위장 전입, 병역 기피, 논문 표절 등 ‘청문회 5종 세트’로 지적됐고 상당수가 낙마했지만 박근혜 정부에선 3종 세트 정도는 기본이다. 공부 잘해 그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들이 세금 좀 덜 내겠다고 가족회사에 통신비를 떠넘기고, CJ 햇반 행사에 출몰하면서 CJ가 건설한 빌라에서 파격적 싼값 전세를 살고, 부부가 한 사람은 공정거래위원회를 감사하고 한 사람은 공정거래위원회에 소송하고도 그게 부패인 줄도 몰랐다면 공직사회 타락이 도를 넘었다는 얘기다. 이대로 가면 새누리당 집권은 10년으로 끝이라는 얘기가 자칭 보수라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나온다. 패권주의 친박(친박근혜)을 제외한 대선 주자들은 이미 ‘보수 개혁’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제 월급으로는 굴비 한 마리 안 사 먹는 공직자들의 관존민비(官尊民卑) 근성이 28일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으로 달라질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법치에 대한 신뢰는 이미 땅에 떨어진 뒤다. 검찰이 자의적으로 기소독점권을 휘두르고, 사법부가 멋대로 판결한다면 김영란법은 끔찍한 흉기가 될지 모른다. 지배계급부터 법과 규칙을 유린해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국민에게는 애국심과 자긍심을 강조하다니 ‘헬조선’ 소리가 절로 나올 판이다. 청렴한 복지국가 스웨덴도 1700년대까지는 부패한 나라였다. 이 나라의 개벽은 1793년 왕이 살해되고 1809년 정보공개법을 헌법에 넣는 등 기득권 세력의 특권을 없애고 부패를 척결함으로써 가능했다고 최연혁 스웨덴 스칸디나비아정책연구소장이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적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병역 기피가 만연했던 1960년대 초,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병역미필자들을 제주도 5·16도로 건설에 투입하는 것으로 병역의 의무를 바로 세웠지만 따님 대통령은 그럴 것 같지가 않다. 지금 기득권 계층의 특권을 제거하고, 법치를 바로잡고, 그리하여 나라에 새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김수남 검찰총장이다. 김 총장은 김밥 한 줄 사 들고 홀로 산에 올라 고민할 것이 아니라 제 식구는 물론 살아 있는 권력까지 법대로 수사하도록 독려해야 한다. 그것이 김 총장에게 시대가 요구하는 소명이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어제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는 김앤장 변호사인 조 후보자 남편의 사건 수임이 논란이 됐다. 더불어민주당 김병욱 의원은 조 후보자가 18대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이던 2008∼2010년 그의 남편이 수임한 사건 34건 가운데 26건이 정무위 소관 기관인 공정위를 상대로 한 소송이라고 밝혔다. ‘국회의원은 심의대상 안건이나 국정감사, 국정조사 사안과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는 경우 사전에 소명하고 관련 활동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 국회 윤리실천규범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조 후보자는 “남편의 사건 관련 자료를 받았다거나 한 적은 추호도 없다”고 답했다. 그러나 의원은 공정위를 감사하고, 배우자는 그 공정위에 소송을 내는 변호사인 것을 공정하다고 인정할 국민은 많지 않다. 소송을 낸 기업들은 조 후보자를 의식해 그의 남편에게 일감을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공직자윤리법의 이해충돌방지규정 위반 소지도 있다. 오늘 청문회를 갖는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후보자는 농림부 농산물유통국장 시절인 2001년 식품 대기업인 CJ그룹 계열사 CJ건설이 지은 223m²(약 67평) 빌라를 분양가보다 2억1000만 원 적은 4억6000만 원에 매입해 5년 뒤 8억3000만 원에 팔았다. 3억7000만 원의 시세차익을 거둔 것이다. 2007년부터 2014년까지 경기 용인의 93평 아파트에 전세로 살면서 농협에서 파격적인 저리 대출을 받은 일도 있다. 더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가 “농식품 회사와 관련된 부동산 일만 했으니 부동산부 장관을 해야 한다”고 비판할 정도다. 과거 정권에서 ‘청문회 5종 세트’로 거론된 부동산 투기, 세금 탈루, 병역 기피, 논문 표절, 위장 전입은 장관 후보자들의 ‘민간인 시절’ 또는 산업화 시절에 관행처럼 저질러진 비리였다. 조, 김 후보자는 공직에 있으면서 바로 그 자리를 이용해 사익(私益)을 챙겼다는 점에서 국민을 분노시킨다. 두 사람은 불법은 없었고 일부는 과장됐다고 항변하지만 그게 바로 국민 눈높이와는 한참 동떨어진 ‘그들만의 인식’이다. “한국 고위층이 성취는 했지만 그 성취에 부합하는 도덕성과 희생정신이 없다”는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의 지적대로다. 공직자의 직무 관련 사익 추구행위가 한마디로 하면 ‘부패’이고 ‘도둑정치(Kleptocracy)’다. 우리나라만 존재하는 전관예우 역시 도둑정치에 속한다. 국민이 납득하기 어려운 두 후보자의 이력을 청와대 인사검증은 걸러내지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낙점한 후보자들을 검증하는 한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철성 경찰청장처럼 박 대통령은 그대로 임명할 것이 분명하다. 청문회는 이제 요식행위가 됐다.}

네이마르의 황금발이 독일을 꺾지 못했다면 브라질에선 폭동이 날 뻔했다. 우리 시간으로 21일 오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남자 축구 결승전에서 브라질의 스타 네이마르가 조국에 첫 축구 금메달을 안기기까지, 이 나라에선 “7 대 1 먹었다”가 “망했다”와 동의어였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4강전 때 독일에 7-1로 참패를 당하고 나자 3월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 탄핵 절차가 시작됐을 때도 “대통령이 7 대 1 먹었다”, 올림픽 준비 부실로 국제 망신을 당할 때도 “7 대 1 먹었다”고들 했다. 우리가 ‘대∼한민국’을 외치며 하나가 됐듯이 축구처럼 정치적인 스포츠도 없다. 2년 전 월드컵 때 홍명보 감독은 ‘으리’(의리)에 죽고 살 것처럼 ‘엔트으리’에 영국 2부 리그 후보인 박주영을 집어넣더니 원칙 없는 ‘불통 리더십’을 휘둘러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그 뒤론 경제나 정치나 계속 내리막길로 내달리면서 올 초 대통령은 경제·안보 복합 위기를 선언한 상태다(그러다 광복절 때 돌연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 번영의 주역’으로 격상됐다). 브라질은 우리보다 더하다. 허리가 휙휙 돌아가고 몸이 파도처럼 출렁대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축구가 삼바축구다. 축구 선수나 정치인이나 황금률은 건달처럼 잘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청소년팀 코치까지 뇌물을 밝히게 되면서 월드컵 7-1이라는 굴욕적 결과를 낳았다. 여기에 브라질 경제 붐을 일으켰던 원자재 거품 붕괴에 호세프의 지나친 경제개입 정책으로 1930년대 대공황 이래 최악의 경기 침체가 닥쳤고, 입때껏 잘 빠져나가던 정치건달들의 부패가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급기야 대통령을 갈아 치우는 ‘의회 쿠데타’로 이어진 상황이다. 이때 폭죽처럼 터진 네이마르의 황금 슛은 브라질의 명운을 되살리는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다. 보통 때 같으면 국민 지지를 받기 어려운 재정개혁안이지만 축제 분위기 속에서라면 의회 통과도 가능하다. 어쩌면 우리 대통령도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강조하면서 노동개혁법안의 국회 처리를 요구할지 모를 일이다. 물론 세계 8대 경제규모지만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도 안 되는 브라질과 3만 달러에 육박하는 한국을 비교하는 건 유쾌하지 않다. 그러나 재정회계 조작 혐의로 대통령 탄핵까지 불러온 최악의 부패 스캔들은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 거의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행정부와 입법부의 충돌에서 비롯됐다는 최근 포린어페어스지(誌) 분석을 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대통령이 원하는 입법이 의회 ‘발목 잡기’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의회의 협조를 얻어야 하는 것이 필수다. 이 나라에선 정당 설립의 최소 인원이 따로 없어 현재 의회에 진출한 정당 수가 28개나 된다. 브라질 행정부는 의원들과 끝장 토론이라도 해서 설득과 타협을 하는 것이 아니라 특권과 뇌물, 국영기업 자리 등을 나눠주는 쉽고도 비싼 길을 택했다. ‘정피아’가 제도화된 셈이다. 우리나라와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대통령 사람들’이 혜택을 보는 반면에 브라질은 의원마다 낙하산을 보내는 것이랄까. 브라질에서 요즘 논의되는 것이 의원내각제로의 개헌이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 대표도 어제 퇴임 회견에서 “제왕적 대통령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여당은 거수기로 전락해 국회가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며 대선 주자들은 개헌에 대한 견해를 밝히라고 촉구했다. 헌법학자 칼 뢰벤스타인이 1965년 “미국의 대통령제는 모방하기 어려운 제도”라고 설파하고, 한태연이 1960년 “정치적 숙련성과 관용성이 적은 후진국가에서 대통령제는 중남미 제국의 경우처럼 지독한 부패를 동반한 독재정치로 타락하게 된다”고 한 지적이 지금도 틀리지 않는다면 끔찍한 일이다. 브라질의 대대적 부패 수사 ‘라바 자투(Lava Jato·세차 작전)’는 이번에야말로 수십 년 적폐를 척결하겠다는 신세대 판검사들이 있어 가능했다. 작년 9월에 나온 2015∼2016 세계경제포럼 경쟁력지수에서 브라질의 사법 독립성 순위(92위)가 우리(69위)보다 낮다는 게 안 믿길 정도다. 축구는 룰이 있고 결과가 공정해 네이마르 같은 아이들의 우상이 탄생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능한 검사 우병우는 우리 청소년들, 아니 검사들의 롤 모델이 될 수 있을까. 2016∼2017년 사법 독립성 순위는 어떻게 나올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참이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냉장고 문을 불쑥 열고는, 내가 뭘 꺼내러 왔더라 할 때가 있다. 나야 갱년기 증상이라고 해도 요즘 새누리당을 보면 자기네들이 왜 비상대책위 체제에서 전당대회를 열게 됐는지를 잊은 것 같다. 새누리당은 4·13총선에서 참담하게 패해 새 당 대표를 뽑는 거다. 친박(친박근혜) 세력은 한사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들지만 여당 총선백서는 ‘새누리 왜 망했나 우리가 알려 주마’ 부분에서 계파 갈등을 패배 이유로 맨 앞에 놨다. 그것도 빨간 글씨로 ‘진박, 친박, 비박, 원박, 뭔 박이 이렇게나 많아… 흥부전도 아니고’라고 명시해 친박 패권주의가 가장 큰 문제임을 밝혔다. 비박(비박근혜)계 주호영 ‘혁신 단일 후보’도 어제 “친박 패권주의 청산 없이는 그 어떤 혁신도 공염불에 불과하며 정권 재창출의 희망도 살려낼 수 없다”고 부르짖었다. 그럼 그가 당 대표 되면 흥부전 결말처럼 사필귀정(事必歸正)이 되는 건가? 비박계로선 그럴지 모른다. 친박의 패권질을 끝장내면서 내년 대선 후보 경선까지 제대로만 관리해주는 비박당 대표가 제일 고마울 거다. 경선 룰이 마구 조정돼 친박에서 원하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경선 없이 대선 후보로 안착하고, 그리하여 친반(친반기문)이 된 친박이 천년만년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데 비박은 계속 찬밥신세가 되는 게 그들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새누리당이 나의 냉장고는 아니지만 여기서 잠깐 냉장고 문을 놓고, 내가 뭘 꺼내러 왔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내가 원하는 건 시원한 음료수이지 ‘웬 떡’이 아니었다. 갈증만 달랜다면 꼭 콜라가 아니라 물이어도 상관없다. 요컨대 친박 패권주의가 문제면 비박 패권주의도 문제라는 얘기다. 더 중요한 건 친박 패권 청산 정도가 아니라 시대정신에 맞는 보수 정당이 되도록 살가죽을 벗기는 일이다. 그 개혁 방향에 따라 국정기조도 달라지면서 ‘내시’와 여왕 같은 당청관계도 바꿔나가야 한다. 주호영이 합리적이어서 친박-비박 두루 거부감이 적은 인물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걸 해낼 것 같지가 않다. 왜 지금 당 대표가 돼야 하느냐는 질문에 “공천 희생자인 제가 되는 게 가장 극명하게 새누리당이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수준이 답답해서다. 한마디로 ‘복수’하려고 나왔다는 것 아닌가. 더구나 그는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의 성주 배치에 반대한 TK(대구경북)다. 반대가 아니라 정부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라고 나중에 말을 바꿨지만 “내 지역구에 불만 많다”고 대통령한테 민원이나 하는 얌체는 당당한 여당 대표가 될 수 없다. 야당이, 중국이 사드 반대할 때 뭐라고 맞설 텐가 말이다. 국가보다 제 표밭이 더 중하다는 치사한 속내를 드러낸 사람이 여당 대표가 된다면 국제 망신이다. 그럼에도 비박 단일 후보가 주호영이어서 당 대표로 뽑힌다면 이번엔 웰빙끼리 돌아가며 해먹자는 의미밖에 안 된다. 차라리 “나를 대통령의 내시라고 불러도 부인하지 않겠다”며 “새누리당을 혁명해서 뒤바꿔 보겠다”는 친박 이정현이 당 대표 되는 게 새누리당에는 나을 것 같다. 그가 “미국에서 흑인이 인종 차별을 넘어 대통령이 된 것처럼 호남 출신 당 대표가 나오는 것이 지역주의의 벽을 넘는 일”이라고 말했듯이, 친박-비박 계파 깨는 일이 지역주의 깨는 것만큼 어렵진 않을 것이다. 당선되는 순간 기득권에 빠져드는 새누리당, 국민이 없는 정치를 바꾸는 ‘제2의 민주주의 혁명’을 하겠다는 발언이 설령 레토릭이라 해도 이 정도 비전은 내놔야 예의다. 물론 이정현이 당 대표가 된다면 ‘도로 친박당’을 청와대의 혀처럼 끌고 갈 수도 있다. 하지만 2008년 “한나라당이 대통령당(黨) 되지 않고 친박이라는 자정(自淨) 장치가 있는 것이 천만다행”이라던 인터뷰를 기억한다면, 그리하여 지금 같은 내시 정당을 확 바꾸는 ‘반역’을 감행한다면 그게 되레 충성이고 애국일 터다. 아니면 친박이기는 해도 “계파 패권주의를 추구하는 정치인은 아니다”라는 이주영, “강성 친박 10명은 2선으로 물러나게 하겠다”는 한선교도 낫겠다 싶다. 적어도 이들은 대놓고 “내 지역구엔 사드 반대”를 외치진 않았다. 암만 생각해도 친박 패권 비판하며 저희들 멋대로 단일화해버린 비박 패권주의를 용서할 수 없다.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더불어민주당 최운열 의원이 어제 “근로소득자 중 48%가 근로소득세를 납부하지 않는 것은 굉장히 비정상적인 상황”이라며 “헌법에 납세의무가 있고, 소득이 있는 곳은 1원이라도 세금을 내는 것이 정상”이라고 말했다. 경제학 교수 출신인 최 의원은 김종인 비상대책위 대표의 ‘경제 브레인’으로 지난 총선 때 더민주당 경제공약을 진두지휘했다. 당 정책위 부의장인 그가 당내 세법 개정안 논의 과정에서 면세자 축소를 주장했는데도 실제 개정안에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은 더민주당 안이 지극히 ‘정치적’임을 의미한다. 더민주당 개정안의 핵심은 부자 증세다. 현재는 과세표준 1억5000만 원 소득에 최고세율 38%를 적용하는데 더민주당은 연봉 5억 원 이상 과세표준을 신설해 세율 41%를 적용한다는 것이다. 상위 0.1%를 공격해 표를 얻겠다는 의도로 ‘징벌적 효과’는 있지만 증가 세수는 연 6000억 원에 불과하다. 조세 전문가들이 공평과세의 원칙으로 한결같이 강조하는 ‘과세 기반 확대’와도 거꾸로 가는 방향이다. 내년 대선을 의식해 면세자 축소 원칙을 포기한 더민주당이 앞으로도 표를 겨냥한 포퓰리즘 경제정책을 쏟아낼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더민주당의 전신인 민주당은 2013년 8월 정부가 근로자 연말정산 방식을 소득공제에서 세액공제로 바꿔 연봉 3450만 원 이상의 소득세 부담이 늘게 되자 “중산층 세금 폭탄”이라며 공격했다. ‘증세 논란’에 박근혜 대통령이 수정을 지시했고, 10월 재·보궐선거를 의식한 정부는 닷새 만에 ‘증세 기준선 연봉 5500만 원’을 발표했다. 2013년 32.5%이던 근로자 면세 비중이 이 바람에 2014년 48.1%로 치솟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보다 10%포인트 높은 왜곡된 구조다. 앞서 기획재정부가 내놓은 2016년 세법 개정안에도 면세자 감축 방안은 없다. 저소득층에 대한 세금 경감은 필요하지만 이는 최 의원 말대로 ‘1만 원 세금을 내면 여기에 얼마를 더해 돌려주는’ 근로소득장려세제 등으로 보완하는 것이 조세정의에 맞다. 과세 형평을 외면하고 고소득자만 공격하는 ‘갈라치기 세법 전쟁’으로는 사회 분열만 조장할 공산이 크다.}

서슬 퍼렇던 5공화국 때 ‘땡전 뉴스’를 없앤 사람은 김용갑 당시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이었다. TV 9시 뉴스가 “9시를 알려드립니다. 땡” 하자마자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 하고 시작된다고 대통령에게 알려주면서 “각하, 국민들이 땡전만 나오면 TV 꺼버립니다” 직언을 했다. 대통령이 불쾌해하기는커녕 그럼 민정수석이 조치하라고 했다는 건, 참 대단한 일이다. 원로 친박인 7인회 멤버였던 그는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들어가기 전 만날 때마다 “민정수석만 잘 고르면 성공한다”며 “절대 검찰 출신은 민정수석에 쓰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고위직 인사검증부터 공직기강, 민심 동향까지 가감 없이, 대통령이 싫어해도 전해야 하는데 상명하복 문화에 길들여진 검찰 출신은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청개구리 대통령’은 현재 우병우 민정수석까지 4명을 모두 검사 출신으로 앉혔다. 그것도 특수통(곽상도, 우병우) 아니면 공안통(홍경식, 김영한)이고 3명의 전직 모두 1년도 못 채우는 기록을 남겼다. 우병우 역시 사정은 잘할지 몰라도 “요즘 대통령이 TV에 나오면 시청률 떨어진답니다”는 식으로 민정을 가감 없이 전할 것 같진 않다. 김용갑이 이유로 꼽은 상명하복의 검사 문화도 있겠지만 우병우쯤 되면 대한민국 0.01%의 최최상류계급에다 검찰 출신 ‘신성가족(神聖家族)’의 최고 실세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동저작 ‘신성가족’에서 제목을 따온 ‘불멸의 신성가족; 대한민국 사법패밀리가 사는 법’을 쓴 김두식 경북대 로스쿨 교수는 신성가족이란 불경스러운 대중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해 어마어마한 투쟁 끝에 마침내 고독하고, 신을 닮았으며, 자기만족적이고 절대적인 존재가 된 사람들을 뜻한다고 했다. 한마디로 하면 판검사 집단이다. ‘인간성에 대한 조직적 파괴 과정’인 사법시험을 통과해 최소한 강남의 30평 아파트를 지참한 외모, 집안 빵빵한 여성과 결혼한 그들은 설령 개천에서 났대도 절대 개천을 돌아보지 않는다. 젊은 나이에도 뒷짐 지고 걷는 검사들이, 더구나 별명이 ‘깁스’였다는 우병우가 바닥 삶과 민심을 알 리 없다. 신성가족끼리의 청탁은 너무나 순수하기에 장모님이 땅을 팔 때 가서 위로해 드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한번 신성가족이면 퇴직해도 신성가족이므로 안대희 총리 후보자가 변호사 5개월 동안 16억 원 번 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납득을 못 한다. 박근혜 정부의 고위공직자 인사검증이 하는 족족 ‘국민 눈높이’와 안 맞고 앞으로도 맞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다. ‘엘리트 카르텔’의 특권의식 서열의식 연고주의가 DNA에 박힌 민정수석이 청와대를 지키는 한, 전관예우는 안 없어진다. 검사들의 막강 권력을 분산시켜 부패와 검찰의 정치화를 막을 고위공직자 비리 수사처, 검경 수사권 조정도 거의 불가능하다. 오죽하면 2012년 대선 직전 “일단 박근혜가 될 것이고 공수처 공약은 없다”는 윤대해 검사의 문자메시지가 파문을 일으켰겠는가. 온갖 의혹이 쏟아지는데도 청와대가 우병우를 내치지 못하는 것은 사정기관 곳곳에 심은 ‘직통라인’ 때문이라고 나는 본다. 박 대통령은 검찰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위해 검사의 외부기관 파견 금지를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검사 사표를 내게 한 뒤 청와대에서 일하다가 복귀시키는 적폐를 계속하는 것도 비정상인데 잠시 한직으로 돌리는 염치도 없이 최고 요직으로 영전시키는 건 “청와대에 충성하라”고 꽹과리 치는 것과 같다. ‘김영란법’의 주인공 김영란 전 권익위원장은 검찰 권력의 비대화를 막으려면 중수부보다 직통라인을 폐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우병우는 직통 쇠심줄을 만들어낸 거다. 세계에서도 유례없는 권력이어서 있는 혐의를 없는 것으로, 없는 혐의를 있는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검찰이 나는 두렵다. 청와대는 대체 무엇이 그리 두렵기에 검찰을 장악해 ‘사정 정국’을 성장동력 삼아 통치를 하려는지는 더 궁금하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국민보다 검찰을 더 믿는 듯한 모습도 보기 딱하다. 청와대에 들어오자마자 검찰과의 핫라인을 끊은 것이 노무현 정부였다. 대선자금 수사 보복이라는 인상을 줄까 봐 중수부 폐지는 못 했다지만, 그리고 이념 문제 때문에 당시 송광수 검찰총장이 양보 못할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노 정부는 검찰의 탈(脫)정치화, 법무부의 탈검찰화를 초기에는 진심으로 추진했다. 나도 내가 노 정부를 평가하는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취중 실언이란다. 교육부 나향욱 정책기획관(고위공무원단 2∼3급)이 “민중은 개돼지로 취급하면 된다” “신분제를 공고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는 경향신문 9일자 보도에 대해 본인과 교육부가 내놓은 해명이다. 영화 ‘내부자들’에 그런 대사가 있다고 했을 뿐이고, 양극화가 심해지는 현실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복지정책을 펴야 한다는 취지였다는 그의 방송 인터뷰를 믿고 싶다. 교육부 내부에선 억울하게 됐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왜곡 보도라는 게 자신 있다면 부디 제소해서 진실을 밝혀주기 바란다. 그럼에도 취중에 진담 나오는 법이다. 보도에 따르면 나향욱은 “신분제를 공고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다음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민중은 개돼지다, 이런 멘트가 나온 영화가 있었는데”라고 말했다. 기자들이 ‘내부자들’이라고 알려주자 나향욱은 “어, 내부자들” 하면서 “(민중을) 개돼지로 보고 먹고살게만 해주면 된다고”라고 설명을 붙였다. 고위공직자로서 취중 아니라 몽중(夢中)에서도 해선 안 될 발언을 한 것이다. 정부는 나향욱 개인의 징계 정도로 넘어갈 눈치다. 국민적 공분은 교육부를 폭파할 기세로 번지고 있다. 다른 부처도 아니고 교육부에서, 그것도 넉 달 전 승진한 행정고시 출신 고위공무원단이 언론에 대놓고 말한 것은 박근혜 정부 자체에 대한 ‘자폭 테러’나 마찬가지다. 집권 4년 차에 으레 터지는 친인척·측근 비리도 아니고, 장차관도 아닌 일개 국장의 취중 발언에 왜 분노하는지 모른다면 이 정권은 레임덕이 분명하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타이밍이다. 흙수저, 금수저론이 들끓고, 여야 대표들이 양극화 해소를 시대정신으로 제기하고, 심지어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까지 벌어진 시점에 나향욱은 “격차가 존재하는 사회가 합리적인 사회”라고 했다. 국민 염장을 질러버린 것이다. 정치철학자 윤평중은 ‘철학과 현실’ 여름호에서 “한국은 거대한 르상티망(ressentiment) 사회”라고 했다. 르상티망은 승자와 강자에 대한 패자와 약자의 원한, 질투, 시기심 등 대단히 부정적인 감정의 결합체다. 격차로 인한 불만이 극에 달해 ‘원한 사회’로 가고 있다는 진단도 나왔다. 양극화가 심해져도 공정한 기회와 과정을 통한 결과라면 패자가 원한까지 품지 않는다. 공정한 기회와 과정의 틀을 짜고 집행하는 것이 정부 역할이고 공직자들이 봉급 받는 이유다. 그런데 뭐? 신분제를 공고히 해야 하고, 나향욱 자신은 1%에 속하려 노력하고, 자사고에 다니는 둘째는 99%의 민중이 될 리 없고, 구의역에서 컵라면도 못 먹고 죽은 아이(스크린도어 수선공)에 대해 내 자식처럼 가슴 아파하면 위선이라고? 첫 조각에서 17개 부처 장관 후보자 10명이 관료 출신일 만큼 관료들을 떠받들었던 박근혜 정부다. 그 관치(官治) 마인드가 국민을 개돼지로 안다는 것이기에 소름 끼치는 거다. 결국 대입 자기소개서 쓰는 데 컨설팅 비용으로 100만 원씩 들어가는 ‘학종’(학생부종합전형)이 늘어난 건 신분제를 굳히기 위해서란 생각이 안 들 수 없다. 국민이 개돼지 수준이니 정부가 인증한 역사만 가르치라는 국정 역사교과서를 밀어붙였을 것이다. 누리예산을 한사코 안 내주는 것도 내 새끼까지 개돼지 만들기 위해서가 틀림없다. 대통령 측근 비리는 그래도 측근과 비리를 도려내면 됐다. 하지만 나향욱의 발언은 이 정부의 정책 신뢰도를 사정없이 추락시키고, 전복(顚覆)의 칼을 갈게 만든다는 점에서 측근 비리보다 불온하다. 국민에 대한 걱정 외에는 모두 번뇌라는 대통령이 관료들의 보고서에 더는 속지 말았으면 한다. 정대영 송현경제연구소장은 경제가 안 되고 국가경쟁력이 떨어진 것도 관료 문제로 귀결된다고 지적했다. 재벌이 가장 두려워하는 말은 경제민주화가 아니라 “법대로”이고, 행시로 연결된 이익집단이 관료라고 했다. 2년 전 세월호 참사 때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며 공직사회 개조를 다짐했는데도 여전히 국민을 개돼지로 안다면, 그들이 대통령보다 막강하다는 얘기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지만 프랑스혁명을 불러왔다. 나향욱이 “민중은 개돼지로 취급하면 된다”고 말하지 않았대도 어쩔 수 없다. 나, 개돼지는 내 혈세로 당신들 죽을 때까지 공무원연금 바치기 싫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클린턴이 궁금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같은 전문가들이 일제히 경제적 재앙을 경고했는데도 영국이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선택한 23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는 11월 대선 승리가 확정된 듯한 표정이었다. 영국의 옵서버지는 “발행인의 장인이 트럼프임을 공개한다”며 브렉시트를 이끌어낸 반(反)세계화와 내셔널리즘, 정재계 엘리트에 대한 분노의 포퓰리즘이 트럼프 돌풍의 원동력과 일치한다고 했다. 이성적 보수적 국민성으로 이름난 영국이 세계인의 예상을 뒤엎고 브렉시트를 택했을 정도면, 미 대선 이변(異變)도 각오해야 한다. 정작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 후보의 반응은 역시 학창 시절 별명처럼 ‘냉장고 언니’였다. 영국인들의 분노를 이해하기 때문에 투표 결과에 놀라지 않았다는 거다. 심지어 보좌진도 영국의 국민투표와 미국의 대선은 절대 같지 않으리라는 걸 확신한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클린턴이 내놓은 성명만 봐도 얼마나 똑똑한지 알겠다. “불확실성의 시기엔 미국인의 삶을 보호하고 우방을 지지하며 적(敵)에 맞서 국익을 지킬 수 있는 침착하고 견고하며 경험 있는 백악관 리더십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내가 미국인이면, 글로벌 위기가 닥칠 수도 있는 순간 스코틀랜드 정계가 아닌 자기 골프장을 찾아가 “파운드 가치가 떨어지면 사람들이 내 골프장에 더 많이 올 것”이라고 말한 트럼프 말고 클린턴을 찍겠다. 안타깝게도 클린턴은 너무나 ‘비호감’이어서 대통령이 되기 어렵다는 분석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클린턴의 이성이 트럼프의 분노를 꺾을 수 있을까’라는 독일 슈피겔지 기사 제목처럼 클린턴이 똑똑하고 ‘일을 되게 하는’ 정치인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일중독에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바람피운 남편과 정치적 야심 때문에 이혼도 안 했고, ‘노오력’만 강조하고, 그래서 진정성도 안 보이고 신뢰할 수 없어 비호감이라는 거다. 하지만 이게 바로 능력 있는 남성 정치인들의 특징 아닌가? 클린턴도 이 점이 제일 아픈 모양이다. 올 초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여성 정치인에게는 이중잣대가 적용된다”며 “남성 정치인은 유능하기만 하면 되는데 여성 정치인은 유능하면 비호감이 돼버린다”고 한탄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정치적 기술을 존경한다면서 “여성 대통령은 잘 듣고 포용적이며 윈윈의 결과를 내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많이 듣던 얘기 같지 않은가. 4년 전 ‘준비된 여성 대통령’을 내걸었던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와 관련해 숱하게 나왔던 것과 거의 같은 내용이다. 박근혜는 위기관리능력 같은 국정역량에선 문재인 안철수보다 높게 평가됐지만 국민이 박근혜 정부에 가장 원하는 것은 화합형 리더십이라는 동아시아연구원 조사도 있었다. 대통령은 유능한 남성 정치인 같은 특성을 보이는데 국민이 원했고 지금도 부족하다고 아우성치는 것은 온화하게 화합을 이끄는 여성적 리더십이라는 얘기다. 작년 9월 유럽연합(EU)에 몰려드는 난민의 무제한 수용을 전격 결정한 메르켈 총리는 그해 말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선정돼 EU 통합을 성공적으로 이끈 리더라는 극찬을 받았다. 사람을 믿지 않고, 자신에게 도전하는 정치인은 인정사정없이 제거하는 킬러 본능조차 사랑보다는 존경을 받는 리더십이라는 평가도 나왔다(이것도 우리 대통령과 비슷하다). 그 아름다운 난민정책이 난민사태로 번지면서 메르켈의 국정 지지율은 30%대로 추락했다. “측근에 둘러싸여 대중과 동떨어졌다”는 비판까지 듣더니 급기야 영국이 EU에서 탈퇴하는 상황을 맞았다. 브렉시트 후폭풍도 11월이면 어떻게 번질지 알 수 없다. 글로벌 위기의 진원지가 된 영국에서 교훈을 얻어 침착하고 경험 있는 클린턴이 당선될지, 포퓰리즘이든 아니든 양극화에 대한 분노를 제대로 자극한 트럼프가 당선될지 두고 볼 일이다. 다만, 지금은 경청과 포용과 상생의 여성적 리더십을 발휘하겠다는 클린턴도 백악관에 재입성하는 순간 카리스마 얼음공주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궁금해진다. 우리가 여성 대통령에게 정말 원하는 것이 소통인가, 국정운영 능력인가. 박 대통령에게 부족한 것은 소통인가, 아니면 능력인가.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김장수 주중(駐中)대사 교체설이 파다하다. 두 달 전 유흥수 주일대사가 고령(79)을 이유로 사의를 밝혔을 때부터 김장수 교체설이 언급되긴 했다. 나이(68)나 재임 기간(당시 14개월)으로 보아 ‘업무 피로도’가 이유로 지적된 것이 이례적이었다. 대단히 실례지만 뭐가 그리 피로했을까 싶어 지난 기사를 찾아보고 나는 눈을 의심했다. 4월 5일 부임 1주년에 맞춰 베이징 한국 특파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그가 1년간 가장 힘들었던 일로 꼽은 것이 “중국에서 한국 성형관광과 저가 패키지여행 부정적 보도가 나올 때”였다. 북한이 4차 핵실험을 한 게 1월 6일이고,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한 것이 2월 7일이다. 당일 한미 양국에서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논의 발표가 나오자 김장수는 중국 외교부 차관으로부터 ‘초치’당하는 굴욕까지 겪었다. 그런데 북핵 실험을 막지 못해서도 아니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전화를 청와대와 연결 못해서도 아니고, 중국인 관광객이 줄어서 힘들었다니 군인 출신 대사의 섬세함에 되레 분노가 치민다. 물론 기자간담회에서 김장수는 미국을 방문한 시진핑이 ‘전면적 대북(對北) 제재 이행’을 강조한 것을 큰 성과로 들긴 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시진핑은 우리 대통령에게 사드 반대도 분명히 밝혔다. 그렇다면 국방장관과 대통령국가안보실장까지 역임해 사드 문제를 잘 풀어낼 것으로 여겼던 주중대사가 대체 뭔 일을 했다고 업무 피로도를 호소한단 말인가. 일본은 지난달 중국통으로 이름난 요코이 유타카를 신임 주중대사로 임명해 중일 정상회담의 조기 실현 등 관계 개선을 예고했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일본의 중요성을 절감했는지 일본통과는 좀 거리가 있지만 장충초등학교 동창인 이준규 전 주(駐)인도대사를 내정한 상태다. 주중대사까지 한일 비교가 되기 전에 별로 한 일이 없는 김장수는 서둘러 돌아오는 것이 낫겠다. 현장에서 체험한 중국은 청와대가 알고 있는 중국이 아니라고 대통령에게 고하는 것이 차라리 국익을 위하는 길이다. 작년 8월까지만 해도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에서 ‘중국의 부상(浮上)과 동북아 국제질서 변화’ ‘팍스 시니카의 시대가 오고 있는가’ 같은 연구보고서를 내놓은 게 사실이다. 2013년 소설 ‘정글만리’를 출간한 조정래는 “중국이 곧 G1이 될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단언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올 초 미국의 포린어페어스 인터넷판은 ‘중국 부상의 종언’이라는 논문을 소개할 만큼 세상은 급변했다. 중국 국내총생산(GDP)의 249%로 치솟은 부채에다 세계교역 폭락, 노동인구 감소, 주식시장까지 개입하는 독재정치로 인해 더 깊은 침체, 아니면 금융위기가 닥칠 수 있다는 모건스탠리의 최근 분석도 나왔다. 반면 셰일가스 혁명에 제조업 르네상스까지 맞아 성장을 구가하게 된 미국은 중국의 패권 도전을 더는 봐주지 않을 태세다. 지난주 미중 전략경제대화에서 두 강대국이 북핵 문제 말고도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위안화 평가절하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날카롭게 부딪친 것도 2014년을 기점으로 중국경제가 급격히 가라앉았다는 지경학(地經學)적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작금의 중국은 작년 9월 박 대통령이 중국 톈안먼 성루에서 보던 그 중국이 아니다. 2020년 또는 2030년 미국의 경제력을 앞설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지면서(그러려면 연평균 8∼10%로 성장해야 가능한데 벌써 틀렸다) 인민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국수주의(國粹主義)를 뿜어내며 북핵으로 칼춤을 추는 맹수처럼 돼 버렸다. 통일이 대박이든 아니든, 한국의 대전략은 우리가 주도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통일이어야 한다. 그러나 시진핑이 박 대통령과 친하다 해도 중국은 그런 한반도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명백해졌다. 다행히도 최근 동아시아의 구조 변화로 인해 미국의 ‘전략적 고려’가 한반도를 빠른 시기에 통일시키는 것으로 변하고 있다고 이춘근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지적했다. 김장수가 지금까진 별 볼 일 없었지만 더는 중국 눈치만 봐선 안 된다고, 한국의 좀비기업이 중국의 2배나 될 만큼 경제구조까지 닮아가선 안 된다고 피를 토하듯 말해줬으면 좋겠다. 대통령이 또 초등학교 동창 대사를 찾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중국통 아닌 사람을 중국에 보낼까 봐 그게 걱정이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지난해 게임업체 넥슨의 주식 80만여 주를 팔아 126억 원을 챙긴 진경준 검사장(법무연수원 연구위원)의 주식 매입 자금이 넥슨에서 나온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그는 3월 재산 공개 때 자기 돈으로 주식을 샀다고 해명했다. 4월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 조사에서는 개인 자금과 장모에게 빌린 돈이라고 말을 바꿨다. 이후 공직자윤리위가 그의 금융 거래명세를 확인하니 넥슨으로부터 4억2500만 원을 송금받아 주식을 산 뒤 갚은 사실이 밝혀졌다. 결국 거짓말이 들통 난 것이다. 진 검사장의 주식 대박으로 2005년 넥슨의 비(非)상장주식 1만 주 취득 배경과 자금 조달 등에 대한 해명 요구가 빗발쳤지만 그는 4월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며 사표를 내려 했다. 당시 대통령민정수석실 관계자는 ‘자기 돈으로 주식에 투자한 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며 진 검사장 역성을 들었다고 한다. 법무부는 사표를 수리하려다 여론이 들끓자 물러섰지만 징계는 마냥 늦추고 있다. 그 사이 진 검사장과 넥슨 창업주인 김정주 회장이 서울대 86학번으로 친밀한 관계임이 알려지고 주식 매입과 처분 과정에서 미공개정보 이용과 스폰서 관계 의혹까지 거론됐다. ‘개인 간 거래’라며 선을 긋던 넥슨은 공직자윤리위 감찰 결과가 나온 4일에야 회삿돈을 무이자로 빌려준 사실을 인정해 기업윤리에 먹칠을 하게 됐다. 처음부터 진 검사장 거짓말을 믿었던 법무부와 민정수석실은 아무런 견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제 식구 감싸기’라는 비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공직자윤리위의 징계 요청을 받은 법무부가 경징계를 내리고 사표를 수리한다면 특검으로 갈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홍만표 변호사의 ‘전관예우 몰래 변론’과 진 검사장의 ‘거짓말 시리즈’로 검찰 신뢰도는 추락할 대로 추락했다. 진 검사장이 챙긴 시세차익은 넥슨이 바친 뇌물과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검찰은 배임이나 뇌물 혐의는 공소시효가 끝났다며 방패막이에 급급하다. 넥슨 주식을 보유한 상태에서 금융 수사를 전담했던 진 검사장의 스폰서 특혜 등을 한 점 의혹 없이 밝혀내지 못하면 검찰도 한통속이라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은 분명 미담 기사다. 작년 9월 충북 제천시 금성면 작목반협의회 농산물직거래장터에서 SK텔레콤 자회사인 네트웍오앤에스 임직원들이 200여만 원 상당의 농산물을 구입해 주민들의 칭송을 받았다는 거다. 제천인터넷뉴스는 ‘네트웍오앤에스는 김기용 전 경찰청장이 고문으로 재직하는 회사로 이날 구매는 김 전 청장의 소개로 이뤄졌다’는 친절한 소개도 잊지 않았다. 김기용의 고향이 제천이고, 4·13총선 때 그곳 새누리당 예비후보였던 걸 알고 나면 미담의 향기는 훅 날아간다. 그가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로부터 SK텔레콤 기지국 설치 관련 자회사에 취업 승인을 받은 날이 꼭 2년 전 5월 30일이었다. 세월호 참사가 터진 뒤 박근혜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며 “관피아라는 부끄러운 용어를 완전히 추방하겠다”고 다짐한 지 한 달 만에 새 관피아를 탄생시킨 공직자윤리위원장이 김희옥 새누리당 혁신비상대책위원장 내정자다(이하 경칭 생략). 퇴직 공무원 취업 관련 법규에 어긋났다는 건 아니다. 지연(地緣) 학연(學緣) 의리 있는 사람끼리 회삿돈으로 고향 농산물 200만 원어치 사주는 게 별일 아닐지 모른다. 김희옥이 동국대 총장 시절 KCC의 동문 명예회장에게 학교 건물 신축을 맡기고(동국대 홈페이지에는 공개입찰 기록이 없다), 윤리위원장 재임 중인 작년 10월 KCC 자회사인 코리아오토글라스 사외이사를 맡은 것도 대수롭지 않은 게 분명하다. 다만 김기용 같은 관피아 때문에 나의 SK텔레콤 요금이 더 비싸졌다는 건 억울하기 짝이 없다. 줄줄이 무너지는 경제에 대한 책임에서도 김희옥은 자유롭지 않다. 작년엔 수출입은행장 시절 경남기업과 대우조선해양 부실대출에 앞장섰던 김용환 NH농협금융지주 회장의 영전까지 승인해줬다. 새누리당은 김희옥 내정 이유로 청렴과 원칙, 포용력을 꼽지만 본인은 청렴해도 법 규정만 따지는 원칙주의, 공직자에게 너그러운 포용력이 국민한테는 피해로 돌아온 형국이다. 그래서 ‘관피아 방지법’이 발효된 2014년 7월 이후 잠깐 줄었던 4급 이상 관피아가 2015년 426명, 전년보다 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원칙과 인품이 훌륭해 세상 변화와 민심에 어두운 건 더 위험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관피아에 대한 분노와 공직 혁신에 대한 요구가 들끓던 그 무렵 어떻게 공직자윤리위원장이 청와대 행정관으로 뇌물 먹고 직위해제된 공정거래위원회 과장의 로펌 취업을 승인해준단 말인가. 인사 자료에 없어 몰랐다는 건 신문도 안 본다는 얘기다. 명색이 장관급이면 사전에 조사할 건 조사해 보고 사표 반려 뒤 징계하도록 조치해야 옳지, 공무원연금 다 챙기고 억대 연봉까지 받게 해주는 게 말이 되는가. 개각설이 나올 때마다 김희옥이 총리 물망에 오른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새누리당을 환골탈태시키는 건 국민에게 잘 뵈지도 않는 총리 역할보다 중요하다. 관피아 척결이 어느 때보다 중요했던 세월호 직후에도 관피아를 그냥 내려보냈던 인품으로 새누리당을 개혁한다는 건 관피아가 웃을 소리다. 정진석 원내대표의 비대위원장 겸임과 김용태 혁신위원장 추인을 위한 상임전국위원회가 친박(친박근혜)의 힘에 무산된 ‘5·17쿠데타’로 새누리당의 운명은 바뀌었다. 1979년 12·12쿠데타로 서울의 봄이 사라진 것처럼 새누리당은 앞으로 대통령만 바라보며 수구보수의 길로 갈 것이다. 김희옥이 남들 다 아는 새누리당의 총선 패인에 대해 “말씀드리기 어렵다”면서도 비박(비박근혜) 중심의 비대위를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밝힌 것이 그 증거다. 그는 청와대 출신 관피아의 취업 승인을 거의 100% 통과시켜 주듯 혁신안을 처리할 것이고, 어쩌면 그 공로로 황교안 총리의 뒤를 이어받을지 모르겠다. “전통적인 보수 세력은 지금도 민주주의에 미숙하다.” 4년 전 ‘뉴라이트’ 이재교 공정언론시민연대 공동대표는 “노무현 정권이 스스로 무너지면서 보수가 정권을 손쉽게 되찾는 바람에 변하지 못했다”고 했다. 2012년에도 좌파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지금은 친박이 그 꼴이다. 김희옥이 신문을 본다면 더불어민주당 싱크탱크에서 작년 2월 만든 보고서를 알려주고 싶다. “(유럽에서) 승리하고 있는 최근의 보수 정당들은 ‘진보적 보수주의’ 천명…새누리당 비박 유승민 원내대표의 당선으로 ‘보수의 혁신’이 예상되는 바 (우리 당은) 반사이익에 안주하지 말고 오직 민생의 ‘혁신 경쟁’에 뛰어들어야.”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