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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진영 논설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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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22~2025-12-22
칼럼100%
  • [이진영 기자의 필담]이창위 “독도 이어도에 시설물 건축 자제해야”

    세계 해양사에 크게 남을 기념비적인 결정이다. 12일 유엔해양법협약 7부속서 중재재판소가 중국과 필리핀이 다툰 남중국해 분쟁 사건에 내린 중재판정 말이다. 중국 정부가 국제법정에 불려나온 것부터가 처음 있는 일이다. 중국은 ‘바다의 무법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약소국인 필리핀에 완패하는 망신을 당했다. 영유권 주장의 출발점이 되는 ‘섬’에 관한 해석은 독도와 이어도를 놓고 중국 일본과 신경전을 벌이는 한국에도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15일 오후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연구실을 찾았을 때 이창위 교수(57)는 479쪽짜리 결정문을 읽고 있었다. 그는 “무법자처럼 행동하던 중국에 작심하고 법의 철퇴를 가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국제해양법학회장을 맡고 있는 이 교수는 해양 분쟁 담당 부처인 외교부와 해양수산부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무법자처럼 굴다 철퇴맞은 중국" ―뉴욕타임스는 이 중재판정에 대해 ‘중국을 응징하다(chastise)’라고 표현했더군요. “중국이 지금까지 남중국해에서 주장하고 활동해온 것들의 국제법적인 근거를 일거에 무너뜨린 거죠. 한마디로 남중국해는 중국도, 누구의 것도 아닌 공해(公海)이니 더 이상 싸우지 말라고 선언한 겁니다. 이번 결정의 핵심은 중국이 주장한 9단선이 무효이고, 남중국해의 중심인 스프래틀리 제도(중국명 난사·南沙 군도)에는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인정할 만한 섬이 없으며, 중국의 인공섬 건설은 해양환경을 훼손하고 필리핀의 권리를 침해했다는 것입니다. 또 매립으로 암석이나 간조 노출지를 섬으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도 확인했습니다. 재판관들이 작심한 것 같습니다.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무력행사를 막자는 의지가 강했던 것 같아요.” ―남중국해가 공해라면 우리에게도 유리한 판정이네요. “그렇죠. 한국은 거의 모든 에너지 자원이 이곳을 통해 들어옵니다. 미국과 일본처럼 남중국해에서의 항행의 자유를 지지할 수밖에 없어요.” ―재판관 5명이 만장일치로 결정했습니다. 이런 결정이 나오리라 예상했나요. “이렇게까지 세게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9단선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중국이 9단선에 대해 EEZ를 갖는다고 명확하게 주장하지 않고 있거든요. 중재재판은 양쪽이 모두 동의해야 열 수 있습니다. 2013년 1월 필리핀이 제소하고, 2014년 12월 중국 외교부가 응소(應訴)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는데, 중재재판소가 이걸 응한 걸로 해석하고 재판이 성립된다고 결정했습니다. 중국으로선 억울한 부분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9단선을 인정하면 남중국해의 90%, 멕시코 크기만 한 바다가 중국의 해역이 되는 건데 중국의 억지가 심한 것 아닌가요. “중국이 가장 잘못한 게 그겁니다. 2009년 베트남과 말레이시아의 대륙붕 범위 신청에 반대해 처음으로 유엔대륙붕한계위원회에 9단선을 포함한 지도를 제출했어요. 아세안 국가들이 황당해하면서 그때부터 9단선이 유엔해양법협약에 맞는 것인지 따지기 시작했죠.” ―중재결정의 이행을 강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국제법의 실패’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반면 이번 결정이 향후 협상에는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긍정론도 있습니다. 골대를 필리핀 같은 약소 연안국들 쪽으로 움직여 놓은 효과가 있다는 거죠. 앞으로 남중국해 분쟁이 어떻게 전개될까요. “현실적으로 중국이 중재판정 내용을 이행하지 않으면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명분도 중요합니다. 판정을 이행하라, 인공섬을 철수하라고 압력을 넣을 수 있습니다. 필리핀과 베트남은 중국이 밉지만 경제적으로 종속돼 있어 중국과 공동개발 방향으로 갈 겁니다. 미중의 해양 패권을 둘러싼 경쟁은 증폭될 테죠.” ―중국은 중재재판소가 ‘필리핀의 돈을 받았다’며 중립성을 의심합니다. “원래 중재재판은 양쪽이 절반씩 부담하는 건데, 중국이 내지 않으니 필리핀이 다 부담한 겁니다.” “남중국해는 주인 없는 公海” ―남중국해는 자원이 풍부한 데다 세계 물동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해 분쟁의 역사도 길겠네요. “과거엔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이 제국주의 정책의 연장선에서 항해 문제로 대립하던 곳입니다. 그러다 인도차이나 반도를 지배하던 프랑스와 동남아를 침략한 일본 사이에서 1930년대 이후 영유권 분쟁이 시작됐죠. 1960년대 후반 엄청난 양의 석유가 매장된 사실이 확인되면서 해양 분쟁이 본격화했고요. 중국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등 남중국해 연안국들은 수많은 도서의 영유권을 다퉈 왔습니다. 중국은 베트남과의 무력충돌을 통해 1974년 파라셀 제도(중국명 시사·西沙 군도, 베트남명 호앙사 군도)를, 1988년엔 존슨사우스 암초(중국명 츠과자오·赤瓜礁)를 점령했습니다. 1994년부터는 필리핀 쪽 해역에 진출해 2012년 스카버러 숄에서 심각한 어업 분쟁을 일으킵니다. 중국이 암석과 간조 노출지를 집중 매립해 기지를 건설하고, 불법 조업하고…. 필리핀이 오죽했으면 제소했겠습니까.” ―왜 중국은 무리한 해양 정책을 펴는 걸까요. “해양법의 역사는 자유로운 해양의 이용을 주장하는 해양 강대국과 약소 연안국 그룹 간의 갈등사입니다. 중국은 대표적 연안국이었다가 해양 강대국으로 지위가 바뀌었어요. 대륙국인 중국은 근대화에 실패하고 해양을 통해 침략을 당했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 양국의 해양 패권에 반대했어요. 필리핀 베트남처럼 연안국의 해양 관할권 확대를 지지했죠. 그러다 강대국으로 입장이 바뀌면서 무리한 해양 정책을 힘으로 밀어붙이다가 그게 결정적 패착이 된 겁니다.” ―이번 판정의 핵심 내용 중 하나가 섬에 관한 해석인데요. 남중국해에 도서(島嶼)가 200개가 넘는데, 섬으로 인정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까. “남중국해엔 150∼200개의 도서가 있습니다. 700개라는 설도 있어요. 대부분 암석이나 암초여서 옛날부터 항해하기 위험한 지역으로 꼽혔습니다. 도서나 암초의 이름을 그곳에서 좌초한 배의 이름을 따 지을 정도였죠. 그런데 이번 결정에선 스프래틀리 제도에 EEZ를 가질 수 있는 섬이 없다고 해석한 겁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타이핑다오(太平島·영문명 이투아바)마저 섬이 아니라고 해석했습니다. 이 부분은 충격적입니다. 타이핑다오는 대만이 실효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번 결정으로 남중국해는 공해가 됐기 때문에 이제 각 연안국은 대륙붕의 범위를 국제적으로 공인받고, 상대국과 해양 경계 획정을 위한 협상을 벌여야 합니다.”“무조건적 해양개발 시대 끝났다” ―타이핑다오가 섬이 아니면 독도도 섬이 아닌 건가요. “유엔해양법협약에 따르면 섬은 사람이 거주하고 독자적 경제생활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중재재판소는 이번에 해양경찰과 같은 공무원은 거주민이 아닌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섬에 대해 까다롭게 규정한 판례를 남긴 거지요. 이 기준을 따른다면 독도는 섬이 아니라 (12해리 영해만 가질 수 있는) 암석입니다.” ―중국의 인공섬 건설이 해양환경 훼손이라는 대목에서 이어도의 해양과학기지가 떠올랐습니다. 이어도의 시설물도 문제가 될 수 있나요. “이어도 기지는 해양과학기지이기 때문에 중국이 환경 훼손을 이유로 시비를 걸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일부에서 독도에 호텔을 짓자고 주장한 적이 있는데 함부로 인공 시설물을 지을 경우 일본이 해양환경 훼손을 이유로 제소할 수 있습니다. 독도나 이어도 모두 분쟁으로 부각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서해의 불법 어업 문제나 한중 간 서해 해양 경계 협상에서 중국의 태도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바다에는 유엔해양법협약이라는 ‘바다의 헌법’이 있습니다. 중국은 이 법을 지키지 않는 나라라는 이미지가 한층 강해졌는데 이는 중국과의 협상에서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겁니다. 특히 서해에서 중국 측의 불법 어업 문제를 다룰 때 그런 부분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남중국해든 서해든 불법 어로 문제를 일으키는 건 중국이네요. “선진국은 인건비가 비싸 불법 조업을 못하죠. 국제회의장에 가보면 중국에 피해받은 나라들끼리 국제기구를 만들자, 중국의 불법 조업 영상을 유엔에 가서 보여주자 이런 얘기들도 나옵니다.” ―우리 시각에서 필리핀의 승소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국제해양법을 이용해 중국에 맞선 필리핀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한국은 전통적 해양 강대국인 일본과 신흥 해양 강대국인 중국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주변의 해양 경계는 일부를 제외하고 획정되지 않았어요. 우리는 관할 수역을 최대한 확보하고 독도나 이어도 해역을 굳건히 지켜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21세기는 무조건적인 해양 개발의 시대가 아닙니다. 해양에서 법의 지배를 존중하는 국가만이 해양 선진국이 될 수 있습니다.” :: 용어 :: 9단선(九段線)=중국이 남중국해의 관할권 경계를 표시한 9개의 점선. 중국은 9단선에 근거해 남중국해 전체의 90%가 자국의 해역이라고 주장해 왔다. 영해(領海)=연안국의 주권이 미치는 해역. 유엔해양법협약에 따라 12해리까지 인정. 배타적 경제수역(EEZ)=경제주권이 인정되는 수역으로 200해리까지 인정.대륙붕=육지에 인접한 해저와 하층토로 350해리나 2500m 등심선에서 100해리까지 인정.해양 지형=수중 암초, 간조 노출지(썰물 때 드러나고 밀물 때 잠기는 땅), 암석, 섬 등 4가지로 구분한다. 수중 암초는 관할 수역을 갖지 못하고, 간조 노출지는 육지나 섬의 12해리 영해 범위 이내에 있을 때에만 영해의 기점이 된다. 암석은 영해만 가질 수 있고, 섬만이 영해, EEZ, 대륙붕을 모두 가질 수 있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 201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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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영 기자의 필담]“법조계는 지금 칼잡이 기술자만 키우고 있다”

    4·19혁명 땐 고려대에 진학해 데모를 하겠다고 생각했다. 소년이 중3 때다. 이듬해 5·16군사정변이 났을 땐 육군사관학교에 가서 쿠데타를 해야 하나 싶었다. 야심만만한 대전고 수재는 결국 서울대 법대를 나와 검사가 됐다. 슬롯머신 사건, 이용호 게이트, 대북송금 의혹 사건을 수사했고 대검찰청 초대 마약과장에 대검찰청 중수부장, 서울지검장을 지냈다. 검사로서의 운은 30년, 거기까지였다. 전관(前官) 예우부터 현관(現官) 로비까지 법조계 비리로 나라가 시끄러운 와중에 검사 유창종을 떠올린 건 변호사로 ‘떳떳하게’ 벌어 국내 유일의 기와박물관을 세우고 운영하며 ‘풍요로운’ 인생 2막을 살아가고 있어서다. 세속에서 상식으로 일군 삶은 은둔형 딸깍발이 선비의 죽비소리 못지않게 후배 법조인들, 법조 비리에 실망한 이들에게 울림을 줄 것이라 기대했다. “수사는 증거로, 미술은 유물로 입증” 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부암동 인왕산 중턱에 정남향으로 자리 잡은 유금와당박물관을 찾았다. “와당부터 감상하시지요.” 유 관장이 전시실로 안내했다. 마침 ‘돌아온 와전 이우치 컬렉션’이 열리고 있었다. 일본인 컬렉터 이우치 이사오(井內功)의 소장품으로 유 관장이 사재로 사들여 환수해 온 한국 와전 1296점 가운데 160여 점을 선보이는 전시다. 와당(瓦當)은 기와지붕 끝을 마감하는 기와로 다양한 무늬가 장식돼 있다. “고구려 와당은 웅건 활달하죠. 이쪽 백제 와당은 고아한 귀족적 기품이 느껴지죠? 통일신라에 와서 와당예술은 정점에 도달합니다.(기와 문화는 고구려를 통해 중국에서 건너온 거지만), 이런 건 중국엔 없는 겁니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민속적이고 해학적인 독특한 와당이 출현하지요.” 검사 출신인 유 관장의 꼼꼼한 설명을 들으며 그가 와당을 상대로 수사하는 엉뚱한 모습이 그려졌다. “피의자 와당은 언제 누구의 영향을 받아 제작됐는지 자백하라”고 다그치는. 그는 1978년 2월 청주지검 충주지청 검사로 발령받은 후부터 공부 모임을 만들어 주말마다 답사를 다니고 기와를 수집해 왔다. 당시 기와는 고미술품을 살 때 덤으로 주기도 하는, 검사 월급으로 수집 가능한 문화재였다. ―범죄인을 수사하고 문화재를 수집하는 일이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수사는 증거로 범죄 혐의를 입증하는 일이죠. 고고학과 미술사는 유물로 어렴풋한 문헌의 기록을 입증하는 겁니다. 검사로서 논리적 사고 훈련이 돼 있어 와당 연구에 도움이 됩니다.” ―거꾸로 와당 연구가 수사에도 도움이 되던가요. “와당을 연구하는 건 한중일 문화교류사를 연구하는 건데, 3개국 3000년을 넘나들다 보면 시야와 사고의 틀이 넓어지죠. 무엇보다 검사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예술이 많이 도움이 됩니다. 범죄와 전쟁을 치르려면 몸과 마음이 바쁘거든요.” ―검사 사주에 들어 있다는 칼의 부담을 흙의 기운으로 덜었다는 뜻인가요. “검사 일 정말 좋아했습니다. 비리와 거악을 척결하는 일, 얼마나 멋있습니까. 검사 된 지 한 달 만에 전국 8개 자해공갈단 조직을 일망타진했어요. 1994년엔 송종의 서울지검 검사장과 홍준표라는 독특한 검사와 함께 슬롯머신 사건을 수사했죠. 정계 안기부 법무 검찰 경찰 수뇌급 인사까지 기소 대상이 된 전무후무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검사들이 너무 힘들다고 하면 제가 그랬어요. 우리가 이런 것 하려고 검사 된 것 아니냐. 군인 되려고 육사 나온 사람이 전쟁터 가서 밤새 전쟁한다고, 그러다 다리에 총 맞을지 몰라 힘들다고 하면 되겠느냐고요.”“前官 대접, 절제해야” ―검사 일에 자부심이 컸던 만큼 요즘 검사 비리 사건을 보며 실망이 크겠습니다. “돈 벌겠다고 검사 하면 안 되지요.” ―전관예우와 관련 있는 형사 사건을 거의 맡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궁박한 상황에 몰린 사람에게 도를 넘는 돈을 받는 게 아니죠. (업계 톱이 아닌) 법무법인 세종을 선택한 이유도 윤리의식이 강한 곳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관예우가 나쁜 게 아닙니다. 전관예우를 악용하는 일부 사례가 나쁜 거지요. 전관이란 경험과 지혜가 있어 대접받고 돈을 더 버는 겁니다.” 얘기가 전관예우와 법조계 비리로 이어지자 유 관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전관이라고 다 돈 잘 버는 게 아닙니다. 검사장 출신들 중엔 사무장도 못 두고, 버스 타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어요. 실력 차이가 있는 겁니다. 나는 변호사 생활 3년간 홍만표(네이처리퍼블릭 정운호 대표 관련 법조비리 사건에 연루돼 구속기소된 검사장 출신 변호사)보다 사건 더 많이 맡았습니다. 스스로 절제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어 수임료를 3분의 1로 줄여달라고 했죠.” ―일반인들의 생각과 거리가 있네요. 고위 판검사로 퇴직한 경우 일정 기간 변호사 개업을 금지하는 ‘홍만표방지법’까지 도입하자는 얘기가 나옵니다. “이건 사고 치니까 애 낳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은 얘기네요. 저도 검사장실 가서 사건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부자(父子) 구속은 윤리에 반(反)한다, 부자 구속을 피해야 아버지를 엄하게 처벌할 수 있는 구실도 생기는 거다, 이런 식으로 의견을 말합니다. 전관의 경험은 활용돼야 합니다. 단, 의와 불의를 바꾸고, 선과 악을 바꾸면 안 되지요.” ―무리한 수사로 기업에 피해를 준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검사는 외과의사입니다. 수술은 최소한만 해야죠. 환부 도려내고, 재발하지 않도록 해놓고 끝내야지요. 혹시 전이됐을지 모른다고 장기를 이것저것 다 들쑤시면 안 됩니다. 진단을 정확하게 하고, 소환도 최소한으로 하고, 사법처리 범위도 넓지 않아야 하고요.” ―법조인의 윤리의식 제고가 절실합니다. “지금의 법조인 양성 교육은 수사 잘하는 기술자만 양산하고 있습니다. 수사하고 판결문 쓰는 건 6개월만 하면 다 잘하게 됩니다. 어려운 사람 법률 구조도 하고, 피의자들과 교도소에서 일주일씩 살아 보게도 하고. 칼잡이 외과 기술만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일’ 가린다” 그는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2년 수사 사령탑을 맡았던 이용호 게이트 부실 수사로 대검 중수부장에서 법무연수원으로 좌천됐다가 같은 해 서울지검장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2003년 노무현 정부 ‘검찰 인사 파동’ 때 대검 마약부장으로 후배를 상사로 모시게 되자 사표를 냈다. “주위에서 놀라더군요. 며칠간 여행하면서 마음 추스르고 하지도 않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퇴임식 하고, 오후에 세종에 가서 책상 확인하고, 다음 날 출근했거든요. 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고교 때 ‘한다발’이라는 대전지역 고교생 철학모임을 만들어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며 치열하게 토론했습니다. 그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검사 일을 그만두면 와당을 즐기고, 와당의 깨우침을 나누며 살겠다고 생각했죠.” 변호사 수임료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한양아파트를 팔아 2008년 3월 박물관을 개관했다. 허동화 한국자수박물관장이 “운영비가 월 수천만 원이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말렸지만, 부인인 금기숙 홍익대 섬유미술학과 교수(64)가 “그냥 하자”고 했다. 박물관 이름 앞 글자 ‘유금(柳琴)’은 유 관장 내외의 성을 따왔다. 부부는 박물관의 공동 관장이다. 박물관은 5000점이 넘는 동아시아 기와와 전돌, 그리고 금 교수가 복식문화 연구를 위해 수집해 온 중국 도용 2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학예사 3명을 포함해 직원이 5명이고, 매년 4000명이 다녀가는데, 그중 3000명이 초중고교생이다. 유 관장은 육십 넘어 배운 중국어와 일본어로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매년 700명을 대상으로 특강을 한다고 했다. 다음 달 13일엔 동북아역사재단 수요포럼에서 ‘와당으로 본 한국 고대사 쟁점들’을 주제로 강의한다. ―‘검사는 폭탄주 마실 때만 박수 받는 직업’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던데, 검찰을 떠나고 박수 받는 일이 많은 듯합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슬롯머신 사건, 마약수사로 이름이 알려지자 순천지청장 시절에 정치하라는 제의가 들어왔어요. 자민련에 고시 합격자가 없고, 대전고 나와 명성 가진 이가 없다고요. 제가 ‘국회의원 선거법에 유창종은 평생 국회의원 할 수 있다고 돼 있어도 안 한다’고 했어요.” 그는 어깨가 처져 있을 후배 검사들에게 이런 말도 전했다. “어려서 (충남 논산시) 강경읍에서 살았는데, 강경 장이 유명해요. 장날에 가면 시장 골목 입구에 잘 차려입은 할아버지들이 있어요. 뭐 하는 분들인가 궁금했는데, 장날이 되면 다들 장에 가니까 불안해서 집에 못 있고 나오신 분들이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무얼 하며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중요한지 생각하지 않고 남들이 좋다는 것만 좇아 사는 거죠. 검사는 역사와 철학을 이해하는 문화인이어야 합니다. 공부해야 합니다.”▼‘기와 검사’ 유창종▼△1945년 충남 당진 △1964년 대전고 졸업△1969년 서울대 법학과 졸업△1974년 사법연수원 4기 수료, 서울지방검찰청 검사△1978년 청주지검 충주지청 검사 시절 기와 수집 시작△1979년 2월 예성문화연구회 회원들과 충주고구려비 발견, 국보 205호로 지정△1987년 서울올림픽조직위 법무실장△1989년 대검찰청 초대 마약과장△1993년 서울지검 강력부 부장검사△2000년 대검 강력부 부장검사(검사장)△2001년 대검 중앙수사부 부장검사△2002년 서울지검 검사장한중일 와전(瓦전) 1873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 2층에 ‘유창종 기증와전실’ 개설, 국민훈장 모란장 수상△2003년 대검 마약부 부장검사△2003년∼현재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2005년 일본 이우치 와당 컬렉션 1301점 사들여 국내 환수△2006∼2011년 국립중앙박물관회장△2008년 유금와당박물관 설립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 2016-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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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이진영]트럼프의 반지성주의

    트럼프가 살아났다. ‘멕시코계 판사는 불공정하다’고 했다가 인종주의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기죽어 지내던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 12일 플로리다 주 올랜도 테러가 발생하자 “거봐, 내 말이 맞잖아” 하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트럼프의 발언 통로는 트위터다. 그는 900만 팔로어에게 “급진적 이슬람 테러에 대해 내가 옳았다고 축하해줘 고맙다”고 했다. 많이 죽고 많이 다쳤는데 ‘축하’라니. “올랜도에서 벌어진 일은 시작일 뿐”이라고 겁준 뒤 바로 해결책을 제시했다. “이민자를 막아야 한다니까.” 민주당 대선 후보 힐러리 클린턴을 겨냥해선 “우리 좀 안전해지자. 힐러리가 대통령 되면 큰일 난다”고, 눈엣가시였을 힐러리의 백기사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겐 “우리 리더십은 약하다”며 “사퇴하라”고 윽박질렀다. 미국판 ‘북풍(北風)’이라고 해야 할까. 9·11을 기억하는 미국 유권자들은 테러 공포에 흔들리고 있다. 그렇다고 보수당 후보에게 꼭 유리할 것 같진 않다. 트럼프가 입을 열수록 무지도 드러나고 있다. 그는 반(反)지성주의자다. 우치다 다쓰루의 신간 ‘반지성주의를 말하다’(이마)에는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나온다. 첫째, 근거 없는 얘기를 자신 있게 떠든다. 트럼프는 “올랜도 테러범이 ‘알라는 위대하다’고 외쳤다고 한다”고 했다. 경찰도 목격자들도 이렇게 얘기한 사람은 아직 없다. 폭스뉴스에 나와선 “올랜도 난사범보다 더 흉악한 수천 명이 미국에 나돌아 다닌다”고 했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미국 내에 ‘외로운 늑대(자생적 테러범)’가 900명가량 된다고 발표한 적이 있을 뿐이다. 둘째, 분풀이 대상을 콕 집어 단정적으로 얘기한다. 트럼프는 “미국이 위험한 건 불법 이민자들 때문”이고, “미국이 가난한 건 중국이 돼지저금통 털듯 미국을 털어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게 다 유대인 때문이야’ ‘이게 다 ○○도 놈들 때문이야’ 하는 식이다. 물론 테러나 경제난 같은 복잡다단한 문제의 원인이 하나일 리 없고 이렇게 쉽게 풀릴 수도 없다. 셋째, 같은 표정으로 똑같은 문구를 무한 반복하는 인내력이다. 트럼프 하면 똑같은 슈트에 똑같은 헤어스타일, 특유의 입 모양과 제스처가 떠오른다. “무슬림은 위험하다” “장벽을 세우면 된다”는 말을 하고 또 한다. 새로운 어휘를 구사하거나 새 논리를 펴지 않는다. 실패로부터 배우는 게 없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특징을 관통하는 본질이 반(反)시간성이다. 지성이란 앎의 쇄신이다. 여기엔 시간이 필수다. 반지성주의자들은 시간이 지나면 거짓임이 들통날 얘기를 되풀이하면서 지금 눈앞의 상대를 압도하는 일에 열중한다. 그래서 반지성주의의 적(敵)은 시간이다. 장사꾼들에게 불황은 한몫 챙길 기회다. 기업인 출신 트럼프에겐 국가적 비극이 표를 끌어모을 정치적 찬스로 보이는 모양이다. 저널리스트 리처드 로비어는 저서 ‘상원의원 조 매카시’에서 매카시를 ‘공산주의라는 유전을 파내 석유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본 탐사꾼’이라고 했다. ‘공산주의’를 ‘반이민주의’로 바꾸면 이 정치적 투기꾼은 딱 트럼프다. 시절이 수상하면 매카시, 트럼프 같은 반지성주의자들이 혹세무민(惑世誣民)해온 것이 되풀이돼온 역사다. 마르크스는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소극(笑劇)으로. 여기에 마르쿠제는 한마디를 보탰다. “희극으로 반복되는 게 원래 비극보다 훨씬 끔찍할 수 있다”고. 역사는 미국에서만 반복되는 게 아니다. 이진영 국제부 차장 ecolee@donga.com}

    • 2016-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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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이진영]敵의 아이를 가진 소녀

    소녀는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웃 마을 언니 집에 가는 길에 납치된 이후의 생활은 입에 담기도 싫었다. 그저 무사히 집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기도했다. 하지만 납치범들 손에서 풀려나 집에 왔을 때 소녀는 싸늘한 시선들과 마주쳤다. 그제야 달거리가 멈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최근 보도한 나이지리아 루카이야 양(13)의 이야기다. 이 나라에선 극단주의 무장반군 보코하람(Boko Haram)과 정부군의 대립이 8년째 계속되면서 여성들의 인권 유린이 끊이지 않고 있다. 보코하람은 ‘서구식 교육은 죄악’이라는 뜻이다. 인구의 절반은 기독교도, 절반은 이슬람교도인 이 나라에 이슬람 신정(神政)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2009년부터 마구잡이 테러를 자행해왔다. 특히 어린 여자아이들을 끌고 가 자살폭탄 테러에 이용하거나 ‘결혼’이라는 이름 아래 성폭행했다. 유엔아동기금에 따르면 2012년 이래 보코하람에 납치된 여성은 약 2000명. 최근엔 정부군의 소탕 작전이 성공해 납치됐던 소녀들의 기적 같은 생환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기쁨의 귀향은 절망의 시작이다. 전쟁 피해자들은 아군과 또 다른 무언의 전쟁을 치러야 한다. 적군과 함께 살다 온 여성은 적군만큼 위험한 존재로 간주된다. 부모들은 “딸을 포기하라”는 협박을, 정부는 “평생 여자애들을 가둬놓으라”는 압력을, 성폭행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개들 속의 하이에나’라는 손가락질을 받는다. ‘보코하람의 여자’라는 낙인은 조선시대 전쟁 피해자들인 환향녀(還鄕女)를 떠올리게 한다. 역사학자들은 속환녀(贖還女)라고 부른다. 병자호란을 기록한 인조실록엔 “오랑캐에게 정조를 잃은 며느리에게 조상 제사를 받들게 할 수는 없다”며 이혼을 요구하는 시아버지 얘기가 나온다. 반대로 딸이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왔는데도 사위가 새 장가를 들려고 한다며 이를 막아달라는 친정아버지의 사연도 있다. 당시 좌의정 최명길은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왔다는 이유로 이혼을 허락해선 안 된다고 했다가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린 자”로 역사에 기록됐다(인조실록 36권). 인조는 마을마다 ‘회절강(回節江)’을 지정해 몸을 씻는 여인들은 받아주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적잖은 속환녀들은 그 이후로도 이혼당하고 버림받았다. 이제는 환향녀도, 속환녀도 입에 올릴 일이 없다. 그렇다고 부당한 낙인찍기가 사라진 건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이 서울 서대문구 독립공원에서 착공식을 마치고도 마포구 성미산 자락으로 쫓겨나 건립된 이유는 일본이 반대해서가 아니다. 일부 단체에서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 훼손”이라며 들고일어났기 때문이다. 보코하람에 납치된 소녀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며 ‘우리 딸을 돌려 달라’(#BringBackOur Girls)는 해시태그 캠페인에 동참했던 이들은 이제 소녀들의 ‘슬픈 귀향’에 분노하고 있다. 2012년 5월 문을 연 후 4주년을 맞는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 문제를 넘어 이름 그대로 전시 성폭력이라는 보편적 여성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공간으로 진화하면 어떨까. 전쟁의 만행뿐 아니라 전쟁에서 소녀를, 국민을 지켜내지 못한 이들이 오히려 적군과 함께 그 희생자를 혐오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그 뒤에 숨어버리는 비겁함을 일깨우는 곳 말이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숨겨놓듯 지은 건물은 세계 곳곳의 분쟁 지역에서 여전히 횡행하는 피해 여성에 대한 낙인찍기 관행을 역설적으로 선명히 드러내줄 것이다.이진영 국제부 차장 ecolee@donga.com}

    • 2016-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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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5병’ 아이 행복열쇠… “가정화목과 자유시간”

    똑똑하지만 행복하지 않은 아이들. 한국의 초등학생들은 학업 성취도 면에서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행복도 순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중 최하위다(보건복지부 2013년 조사 결과). 동아일보는 이 간극을 좁히기 위해 창간 100주년인 2020년까지 이어지는 ‘2020 행복원정대’의 올해 주제를 ‘초행길’로 정했다. ‘초등 고학년생의 행복 찾는 길’을 줄인 말이다. 초등학생, 그중에서도 4∼6학년은 아동기에서 청소년기로 옮겨가는 과도기로 스트레스가 절정에 이르는 시기다. 초등학생으로 묶이기엔 몸도 마음도 커버렸다. 초등학생이지만 고교생처럼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이런 어정쩡함 속에 스트레스의 싹이 자란다. 이들의 삶의 만족도를 알아보기 위해 서울의 평범한 4∼6년생 64명과 그 어머니 64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아이들은 행복의 제1조건으로 ‘화목한 가정’을 꼽았다. 아이 64명 중 46명(72%)이, 엄마는 64명 중 37명(58%)이 ‘화목한 가정’이라고 답했다. 아이들은 “친구랑 있으면 즐거운데 가족과 있으면 따뜻하다” “성적은 나중에 올리면 되지만 가족은 한번 금이 가면 안 된다”고 했다. 두 번째 행복 조건은 ‘자유시간’이었다. 아이는 7명, 엄마는 10명이 행복하려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아이들은 이 학원 저 학원 바쁘게 다니느라 늘 시간 부족에 시달리는 ‘타임 푸어(Time-poor)’였다. 아이들은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의지하면서도 부모의 기대에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녀로서 나의 점수’를 매겨 달라는 질문에 3.98점을 주었다. 엄마들이 준 자녀 점수(4.36점)보다 낮았다. “성적이 2학년 때보다 떨어져서 죄송하다” “공부를 못해서 내가 집안의 걱정거리”라는 아이가 많았다. 사춘기가 시작돼서일까. 초등 5학년은 질풍노도의 시기임도 확인됐다. 주관적인 행복도는 물론이고 학교생활과 부모에 대한 만족도, 미래의 행복도 평가에서 이 또래의 점수가 두드러지게 낮았다. 아이들은 행복을 말하면서 엄마 얘기는 많이 했지만 아버지에 관한 언급은 별로 하지 않았다. 엄마에 대한 만족도(4.81점)가 아버지에 대한 만족도(4.66점)보다 높았다. 특히 딸이 아버지를 인색하게 평가(4.63점)했다. 이진영 ecolee@donga.com·김아연 기자}

    • 201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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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류 덕에 호주 한국학 전공 학생 80% 늘어”

    “한류 덕분에 한국학을 전공하는 학생이 2010년 100여 명에서 지금은 180명으로 늘었어요. 이 대학 학생들은 체육관에서 ‘강남 스타일’을 틀어 놓고 파티를 해요. 동아시아 팝음악을 소개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90% 이상이 한국 대중가요랍니다.” 호주 캔버라에서 만난 최혜월 호주국립대 한국학연구소장(54·사진)은 한국학의 인기를 이같이 전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를 연구하는 학생들로 한정하면 그동안 학생 수가 중국학-일본학-인도네시아학 순으로 많았는데 지금은 인도네시아 대신 한국학이 3위로 올라섰다고 한다. 한국학은 한국어→한국사와 문학→사회과학 순으로 확산되는 경향이었지만 이곳 학생들은 한국어 다음으로 사회과학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6·25전쟁이나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죠. 탈북자와 동남아 결혼 이주 여성, 한국의 대중문화와 민주화 역사도 인기 있는 연구 주제입니다.” 최 소장은 제자들이 쓴 졸업논문 가운데 기억에 남는 것으로 △캐나다 선교사의 일기를 중심으로 한국 근대사와 종교의 관계를 분석한 연구 △한일 지식인 네트워크가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기여한 정도 △미국 문화가 유입되던 시기인 1950년대 한국 영화계 이야기 △중국 조선족 결혼 이주 여성을 다룬 논문을 소개했다. 그러나 이 대학의 아시아 전문 연구진 250명 가운데 한국학 교수는 5명밖에 안 된다. 전공은 주로 역사와 문학 분야로 사회과학에 대한 학생들의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형편이다. 최 소장은 “사회과학 분야 연구진이 보강돼 한국학을 주변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캔버라=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 2016-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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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女, 폭력없는 세상을 외치다

    세계 여성의 날인 8일 오전 7시. 옛 기차역을 문화 시설로 개조한 호주 시드니 로코모티브 가(街)에 자리한 기술 공원은 일찍부터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군의 여성 2000여 명으로 북적였다. ‘안전한 가정과 안전한 지역사회’를 주제로 유엔여성기구 호주전국위원회가 기금 모금을 겸해 연 조찬 행사였다. 기업과 정부 기관, 여성단체에서 95달러(약 8만5000원)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온 성인들 사이사이에 교복 차림의 앳된 여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여학생들은 여성에 대한 폭력 반대 운동을 지지하는 뜻의 보라색 리본을 단 채 아침을 먹으며 “세계 여성 3명 중 1명 이상이 다양한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며 “태평양 연안 국가들에선 3명 중에 2명꼴로 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발표를 경청했다. 여성과 소녀를 상대로 한 폭력 방지를 포함해 성평등 문제는 호주 외교부의 주요 의제 가운데 하나다. 줄리 비숍 외교장관은 “폭력 없는 삶과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삶은 기본적인 인권”이라며 “연방정부는 호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앞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학교 규정상 성과 학교 이름을 밝히지 않은 여중생 이사벨 양(15)은 “지리 시간에 개발도상국 여성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사는지 알게 됐다. 다른 나라 여성들의 현실에 관심이 많아 친구들과 함께 왔다”고 말했다. 여고생 엘리자 양(17)은 친구들과 ‘사회 속에서의 균형(Balance in Society)’이라는 학내 동아리를 만들어 여성 문제를 공부한다. 친구들을 독려해 제3세계의 여성 상대 폭력 근절을 촉구하는 편지를 20∼30통씩 써서 해당국 대사관에 전달했다. 그는 “낙태를 지지하는 활동도 하고 싶지만 학교가 가톨릭계여서 안 된다”며 아쉬워했다. 앞서 6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토크 페스티벌 ‘올 어바웃 우먼(All About Woman·여성에 관한 모든 것)’도 페미니즘이 일부 여성단체의 전유물이 아니라 평범한 여성들의 일상적인 고민을 담아내는 이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줬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30명의 연사가 △성에 관한 미신 △나 자신이 되는 법 △무의식적 편견 △남성성 등 모두 24개 주제별로 발표와 토론을 진행했다. 24개 주제 모두 입장권이 일찌감치 동날 정도였다. 기자는 이 중 ‘변해야 할 것들’이라는 세션에 예약 취소된 표를 36달러에 구하여 막판에 겨우 입장할 수 있었다. 보수적인 캐나다 원주민 환경운동가부터 동성 파트너, 남성 유모와 함께 아이 셋을 키우며 사는 레즈비언까지 다양한 패널이 나와 “매직 맘(만능 엄마)이 되려고 해선 안 된다” “아니다, 돌봄은 여성의 몫이다”라며 설전을 벌였다. 청중에게 질문 차례가 돌아오자 10대 소녀들이 우르르 마이크 앞으로 몰려 나갔다. “(어른들이)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면서 부자 남편, 의사 남편을 만나라고 하는 건 이중적이지 않으냐”는 질문에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13세 딸과 함께 페스티벌에 참여한 미셸 로빈슨 씨(43·여)는 “젠더 이슈를 배우는 건 아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잡는 데 중요하다”며 “이건 정치적인 이슈가 아니라 생활의 문제”라고 힘주어 말했다. 호주에는 여성에게 여전히 차별적인 요소가 많다. 100인 이상 사업장 가운데 풀타임 정규직 여성 근로자 임금이 남성보다 19.1% 적고, 최고경영자(CEO)를 포함해 고위직 임원 중 여성 비율은 15.4%밖에 안 된다. 직장 내 양성평등법이 제정되고 양성평등청이 신설된 것도 2012년의 일이다. 시드니 기금 모금 행사장에서 만난 프루던스 고워드 뉴사우스웨일스 주 여성부 장관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했다. 자원봉사에 나선 여고생 앨리 양(16)은 “미래에 내가 살아갈 사회를 위해서는 지금 행동하는 것이 좋다. 남자와 똑같이 일하고 적게 받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들이 바꿔 놓을 호주의 미래가 궁금해졌다.시드니=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 2016-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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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英 왕위서열 3위’ 조지 왕자 유치원 가는 날 “귀여워”

    영국 왕위 서열 3위인 조지 왕자가 6일(현지시간) 처음 유치원에 가는 모습이 공개됐다. 왕세손의 업무를 담당하는 켄싱턴궁은 이날 공식 트위터 계정에 왕세손빈 조지 왕자의 첫 유치원 등원길 사진 2장을 올렸다. 조지 왕자는 윌리엄 왕세손과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빈의 장남으로 올해 2살(생후 30개월)이 됐다. 조지왕자가 선택한 유치원은 노퍽 주의 웨스트에이커 몬테소리 유치원. 이 곳은 윌리엄 왕세손 부부가 사는 아메르 홀과 가까운 일반 유치원으로, 수업료가 시간당 5.5파운드(약 9700원)이다. 이는 켄싱턴궁 근처의 사립 유치원 수업료(연간 약 3200만 원)보다 싸다. 현지 언론은 지난해 말 “왕세손 부부가 자녀를 일반적인 양육환경에서 키우겠다는 생각”이라고 전한 바 있다. 누리꾼들은 통통한 볼과 금발머리의 꼬마 왕자 사진에 “벌써 이렇게 컸다니 믿을 수 없다” “정말 귀엽다”며 환호했다. 특히 그가 입은 파란색 누비 재킷과 하늘색 배낭이 큰 인기를 끌었다.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은 조지 왕자가 입은 재킷은 영국의 고급백화점인 ‘존 루이스’의 아동복으로 현재 매진 상태라고 전했다. 사진 속 조지 왕자의 포즈에도 관심이 쏠렸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유치원 담벼락에 그려진 그림을 오른손으로 가리키면서 왼손은 재킷 안에 찔러 넣은 것. 이처럼 재킷 주머니에 한 손을 집어넣는 포즈는 이 집안 내력이다. 조지 왕자의 증조부인 필립 공과 할아버지 찰스 왕세자도 같은 포즈를 하고 있는 모습이 자주 목격됐다. 이날 윌리엄 왕세손 부부는 아들을 직접 유치원에 데려다준 것으로 알려졌다. 조지 왕자는 당분간 수업의 일부만 들으며 적응기간을 가질 예정이다.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 2016-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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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OW TO] 입소문 ‘눈알 가방’…토종 브랜드 인기 비결은?

    “앗, 이게 뭐야?”“꺅! 너무 귀엽다.”이 가방을 보고 놀라지 않거나 웃음을 참기는 어렵다. 자물쇠까지 달린 어엿한 에르메스 버킨백 모양인데 앞쪽에 커다란 눈알 두 개가 달렸다.부끄럼을 타는 걸까? 아니면 호기심의 표현? 혹은 살짝 놀란? 표정이 살아있는 눈알 두개를 달아놓으니 밋밋한 가방이 말을 걸어올 듯 생기가 돈다. 신생 패션브랜드 플레이노모어(PLAYNOMORE)의 토트백 ‘샤이걸(Shy Girl)’은 본명보단 ‘눈알 가방’ 혹은 ‘눈깔 가방’이라 불린다.지난해 6월 19일 밤 11시 55분 온라인에서 런칭한 플레이노모어는 셀럽들이 들고다니면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토트백(21.5×17.5×9㎝) 샤이걸에서 진화해 빨간 입술과 별이 그려진 같은 크기의 ‘샤이스타’, 눈알이 다섯 쌍 그려진 빅백(35×18×27.5㎝) ‘샤이패밀리’도 나왔다. 눈알과 입술 디자인을 인용한 티셔츠와 모자, 화장품(라네즈와 콜라보레이션), 네일스티커 까지 토털 패션 브랜드로 커나갈 잠재력도 보인다.태어난 지 한 돌도 되기 전부터 ‘짝퉁’ 제품이 나올 정도로 주목받아온 플레이노모어. 이 토종 브랜드의 인기몰이법을 김채연 플레이노모어 대표(35)에게 물었다. ① 가방은 여자들의 장난감디자이너인 김 대표는 “롤 모델이 누구냐”는 질문에 “디즈니 만화”라고 했다. 헐, 샤이걸처럼 키치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한 안야 힌드마치나 카스텔바작, 모스키노가 아니고? “디즈니만화는 보면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어린아이부터 나이든 사람까지 누구나 좋아하죠. 샤이걸도 송종국 씨 딸 지아부터 탤런트 전인화 김수미씨까지 들고 다니죠.” 김 대표는 지금도 해외에서 쇼핑할때면 옷이나 액세서리보다는 레고 블록이나 플레이모빌을 산다고. “플레이노모어는 바비인형을 가지고 놀던 여자들이 성인이 돼서 갖는 장난감 같은 거예요. 자동차는 성인 남자들의 장난감이잖아요. 로봇을 갖고 놀다 자동차로 옮겨가는 거죠. 가방이 여자들의 신분을 대신하는 게 싫어요. 가방도 좋아서 사는 패션 아이템이 됐으면 해요.”샤이걸은 눈만 가지고도 놀 거리가 많다. 한쪽 눈을 감게 한 뒤 아이섀도우를 바르거나, 아이라인을 그리거나, 속눈썹을 길게 빼 마스카라를 칠하거나. 여자들만 아는 재미다.② 가방은 ‘상전’이 아니다여기서 퀴즈 하나. 저기 저 여성이 들고 있는 명품 디자인 가방이 짝퉁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건 갑자기 비가 오면 답이 나온다. 가방을 우산 대신 머리 위로 받쳐 들고 뛰면 짝퉁, 빗방울이 튈 새라 품에 꼬옥 안고 뛰면 진품이다.“명품 가방은 ‘장만’한다고 표현하잖아요. 전 쉽게 사서 편하게 들고 다니는 가방이 좋아요. 가방이 상전이 되면 안 되죠.”그래서 김 대표는 가죽 대신 합성 피혁을 쓴다. 눈은 스팽글을 달아 표현한다. 기계로 달고, 손으로 마무리한다. 플레이노모어 가방은 가볍고, 만만하며, 명품에 비하면 가격도 착하다. 토트백 크기의 샤이걸과 샤이스타가 17만8000~24만5000원, 빅백 샤이패밀리는 29만8000~42만8000원.③ 블로거, PPL 마케팅은 사절패션브랜드는 셀럽 마케팅이 중요하다. 그래서 드라마에 PPL을 하거나, 인기 가수와 배우들에게 “우리 가방 들어 달라”며 거저 주는 경우가 많다.플레이노모어도 SBS 월화드라마 ‘상류사회’에서 배우 임지연이 매고 나올 때가 있다. 김 대표는 “PPL이 아니라 협찬”이라고 했다. “협찬은 드라마 찍을 때 쓰고 난 뒤 돌려받아요. 이렇게 스타일리스트가 픽업하면 자연스러운데, PPL처럼 만들어진 내용은 한계가 있어요. PPL을 하기엔 마케팅 예산이 빠듯하기도 하고요.”샤이걸은 만화 같은 디자인 때문에 아이돌 쪽에서 러브콜이 많았지만 김 대표는 모델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모델은 또 아이돌과 달리 어리다는 느낌을 주지 않아 이들에게 ‘잇백’이 된다면 중장년층에까지 시장을 넓힐 수 있다고 봤다. “나이 드신 분들은 샤이걸을 보고 ‘이걸 어떻게 들지?’ 하잖아요. 그런데 변정수 씨가 들고 드라마(‘전설의 마녀’)에 나오니까, ‘아, 나도 들 수 있겠네’ 하는 거죠. 색상도 겨울에 일부러 밝은색 가방을 밀었어요. 그래야 계절도 타지 않죠.”‘리뷰를 써줄 테니 증정해달라’는 블로거들의 요구도 사양했다고. “천편일률적인 평가가 싫어서요. 솔직한 포스팅이 좋아요.” ④ 사랑받고 싶으면 기다리게 하라? 품절 마케팅플레이노모어의 가방을 사기는 쉽지 않다. 올 6월 초 서울 명동에 첫 단독매장을 열었고, 서울과 부산의 롯데백화점 일부에 입점해있다. 제일모직의 편집샵인 ‘비이커(Beaker)’ 매장에서도 살 수 있다. 하지만 인기 상품의 경우 재고가 없어 주문을 해놓고 1주일 이상 기다려야 한다.공식 온라인 사이트에서도 상품 주문 후 배송까지 3, 4주는 기다려야 한다. 일부 인기 모델은 품절이다. 그래서인지 리뷰란에는 “생각보다 별로” 보다는 “정말 어렵게 받았다” “드뎌…”라는 감격스러워하는 상품 후기가 많이 올라와 있다.구매하기가 어렵고, 명품 가방에 비해 가격 부담도 덜해서인지 한 번 살 때 색상별로 서너 개를 주문하는 이들도 있다. 일종의 ‘품절 마케팅’이랄까.“주문량을 따라잡지 못해서 그렇지, 의도한 건 아니에요. 오히려 오래 기다리게 하면 클레임이 들어올 위험이 크죠. 큰 회사는 자본금이 있어 모든 과정을 다 만들어놓고 시작할 수 있지만, 저희는 하면서 만들어가거든요. 그래서 소비자들이 원하는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어요.”⑤ “오래 가려면 새 장르가 돼야”홍대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를 졸업한 김 대표는 2007년 구두 브랜드 ‘스탈렛애쉬(Starlet Ash)’를 런칭해 7년간 운영했다. 10년이 지나도 신을 수 있는, 유행을 타지 않는 무난한 콘셉트의 브랜드였다.그런데 쉽지 않았다. 신발은 계절도 타고, 사이즈가 세분화돼있으며, 취향도 제각각이고, 킬힐부터 플랫 슈즈까지 높이도 다양했다. 재고 부담이 컸다.게다가 셀럽 마케팅도 쉽지 않았다.“드라마 ‘상속자들’과 ‘예쁜남자’의 신발 스타일링을 담당했어요. 하지만 배우들의 구두까지 잡는 풀샷이 드물어 홍보 효과가 없었죠. 뭘 하더라도 상반신에 들어가야겠다, 계절과 사이즈를 타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죠.”플레이노모어는 스탈렛애쉬와는 여러모로 대비된다. 가죽 대신 합성 피혁을 쓰고, 오래 가는 무난한 디자인이 아니라 어딜 가나 눈에 확 들어오는 튀는 스타일이다.문제는 튀는 패션 트렌드의 경우 반짝하다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 명품 브랜드들이 클래식한 디자인을 고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유행이 아니라 새로운 장르가 되면 오래 가지 않을까요?”플레이노모어는 1주년이던 올 6월 19일 홍콩의 영국계 백화점 하비니콜스에 입점했다. 이밖에 이탈리아, 일본, 대만, 중국, 인도네시아의 패션 매장에 진출했다.“처음부터 해외 시장을 생각했어요. 국내에선 신규 브랜드이지만 해외에선 똑같이 모르는 브랜드잖아요.”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 2015-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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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OW TO]대출없이 대학 졸업하는 7가지 방법

    “5년이나 대학을 다니고, 두 차례 무급 인턴으로 일하고, 3600만원이나 되는 빚을 지고도 나는 10대 때와 변함없이 취업시장에서 환영받을 요소는 전혀 갖추지 못한 채, 딱히 기술이 필요 없고 책임도 별로지지 않는 저임금 노동만 벌써 몇 년째 하고 있었다.…”국내의 4년제 대학 졸업생이라면 누구라도 “내 얘기”라 생각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건 미국의 ‘삼포세대’ 켄 일구나스(32)가 한 말이다.미국 뉴욕 주의 중산층 집안 아들인 켄은 뉴욕주립대 버펄로 캠퍼스를 졸업한 뒤 미국의 여느 대졸자들처럼 빚더미를 안고 대학문을 나섰다. 그가 대학에 다니며 편하게 공부만 한 것도 아니다. 대형 마트 카트 정리, 신문 배달, 패스트푸드점 조리사, 정원사, 공공 스케이트장 경비까지 고단한 알바를 끊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본인 표현을 빌리자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문교양 학위(역사학과 영문학!)를 따느라 빚을 진 거다. 미국도 청년 실업이 장난이 아니다.켄에게 빚은 ‘격파해야 하는 악당, 죽여야만 하는 용, 쓰러뜨려야만 하는 풍차’였다. 악착같이 벌되 한 푼도 안 쓰는 전략으로 졸업 2년 만에 다 갚았다. 빚의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자 그는 새로운 도전을 한다. 빚지지 않고 듀크대 대학원 인문교양프로그램을 마치는 것.그는 이 도전에 성공했고, 성공담을 새 책 ‘봉고차 월든(원제 Walden on wheels, 문학동네)’에 담았다. 2009년 미국 대학원 얘기임을 감안해 읽으며 국내 대학 생활에 적용해보자. ① 하숙집 말고 봉고차우선 방값을 아껴야 한다. 켄은 기숙사나 자취방 대신 봉고차에서 먹고 자기로 결정하고 1700달러(약 191만원)를 들여 주거용으로 개조된 1994년형 포드 봉고차를 샀다.켄이 계산한 봉고차 거주 시 연간 최저 생활비는 4824달러(약 543만원). 그는 책에서 거주 형태를 주택, 기숙사, 아파트, 봉고차, 텐트 5가지로 나눈 뒤 월 최저생활비를 꼼꼼히 계산했다. 이중 ‘기숙사’를 보면 월세 582달러와 식비 382달러를 포함 총 1129달러(약 127만원)가 든다. ‘봉고차’는 월세가 나가지 않는 대신 학내 주차비, 기름값, 보험료 등 차에 월 200달러가 든다. 여기에 식비와 기타 비용을 합하면 월 최저생활비는 402달러로 기숙사보다 생활비를 약 3분의 1 규모로 줄일 수 있다. 이보다 싼 주거 형태는 월 최저생활비가 202달러인 ‘텐트’밖에 없다.미국엔 ‘봉고차 거주족’이 있나 보다. 봉고차 거주계의 ‘구루’인 밥 웰스의 웹사이트(www.cheaprvliving.com)를 이용해도 좋다. 봉고차 선택법부터 인기척을 없애는 법, 태양전지판 설치법, 화장실 가는 법까지 봉고차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조언을 올려두었다.② 구내식당도 사치다 하룻밤쯤은 없이 사는 것도 재밌을 것이다. 하지만 봉고차 거주가 일상이 되려면 독하게 마음먹어야 한다. 켄은 논문학기를 제외한 2년을 봉고차에서 살았다. 10센트 단위까지 따져가며, 쓰레기통 뒤지기 직전까지 갈 정도로 가난하게 지내야 빚 없이 대학원에 다닐 수 있다.등록금과 봉고차 다음으로 지출이 많은 부분이 식비. 켄은 하루 세 끼를 모두 해먹었다. 아침 메뉴는 시리얼에 가루우유(냉장고가 없다), 아니면 따뜻한 오트밀 한 그릇에 땅콩버터를 넣어 먹었다. 점심은 바나나와 땅콩버터 샌드위치, 저녁엔 가벼운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다. 하루 식비는 평균 4.34달러. 샤워는 체육관에서(한 학기 회원권 34달러), 노트북, 휴대전화, 카메라 충전은 도서관, 공부는 따뜻한 강의실에서 한다. 가끔 휴식이 필요할 땐 도서관에서 무료로 책과 영화 DVD를 빌려본다. 한겨울 봉고차 안은 얼음장 같다. 최대한 늦게까지 도서관에서 버티다 돌아온다. 빨래는 월 1회 동전 빨래방, 쓰레기는 캠퍼스 공중 쓰레기통에. 봉고차에서 지내려면 건강 잘 챙겨야 한다. 의료보험도 없는데 목돈 들 일이 생기면 안 되니까.③ 들키지 않기마지막 남은 대형 지출은 캠퍼스 주차증으로 연간 182달러다. 듀크대 주차 규정엔 자동차 거주 금지 조항이 없다. 물론 다양한 거주 방식을 실험하라고 배려해서가 아니다. 듀크대엔 워낙 사는 애들이 많아 굳이 그런 규정을 만들 필요가 없었을 거다.켄은 늘 들킬까봐 걱정이었다. 그는 검은 천과 선팅된 창문, 블라인드로 인기척을 없앴다. 불행히도 번잡한 쪽 주차장 자리에 배정받았다. 오후5시 이후부터는 대학 주차장 어디든 원하는 곳에 주차 가능했지만 켄은 기름값이 아깝고, 봉고차가 잔고장이라도 날 까 두려워 주차장을 옮겨 다니지 않았다. 그는 봉고차 거주 7원칙을 만들었다. 첫째, 그리고 둘째도 봉고차 거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셋째, 조명이나 난방을 켜두거나 시동을 건 채 차를 떠나지 않는다. 넷째, 불필요한 소음을 내지 않는다. 다섯째, 요리할 땐 모든 창문을 닫아 냄비가 달그락거리거나 수저 부딪치는 소리가 새나가지 않도록 한다. 여섯째, 절대 봉고차에 들어가는 모습을 아무도 못 보게 한다. 일곱째, 절대로, 절대로, 봉고차에서 나가는 모습을 아무도 못 보게 한다.④ 등록금 깎고, 알바꺼리 찾고듀크대 대학원 인문교양프로그램의 등록금은 과목당 3313달러. 켄은 ‘재정적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증명한 끝에(그건 넘 쉬웠다!) 1089달러로 깎았다. 학기당 2개 강의를 수강했고, 석사 학위를 받는데 총 1만1000달러가 들었다.장학금을 받지 않는다면 알바꺼리를 찾아야 한다. 그는 대학이기에 가능한 알바를 구했다. 온라인으로 참여 가능한 모든 실험에 참가자로 신청한 거다. 신경과학과 인지실험은 시간당 10달러인데 전극으로 자극을 받거나, 바늘에 찔리거나, 약에 취하는 실험이었다. 4가지 주요 체액 중 3가지를 기증하기도 했다.가장 짭짤하되 다소 찜찜한 알바는 MRI 기계에 들어가 두뇌를 스캔 당하는 것. 시급 20달러는 탐나지만 실험 참여 동의서의 문구는 영 맘에 들지 않았다. “자성이나 전파에 노출되어 부작용이 발생했다는 보고는 없습니다. 그러나 향후 해로운 영향이 발견될 가능성은 있습니다.”글쓰기를 좋아하는 켄은 ‘독서 교육’ 체험학습 프로그램 알바도 했다. 도심지역 초등학교에서 시급 16달러를 받고 주당 20시간씩 일했다. ⑤ 방학 땐 극한 알바로 목돈 마련방학 땐 실한 알바를 뛰어 한 몫 벌어두는 게 좋다.미국엔 국립공원 산간지역 관리원이란 알바 자리가 있다. 켄은 방학이 되자 알래스카까지 날아가 게이츠오브더아크틱 국립공원 및 보호구역에서 일했다. 시급 20달러. 극한 알바이니만큼 일당이 많기도 하지만, 이런 곳에선 워낙 돈 쓸데가 없어 목돈을 모을 수 있다. 돈 모으려면 많이 버는 것보다 안 쓰는 게 중요!공원 내엔 도로도 산길도 인공 시설도 전혀 없어 수상용 경비행기를 타고 출근하고 이동했다. 관리원인 켄은 걷거나 카누를 타고 야생 지대를 순찰하고, 곰이 열 수 없는 식료품 함에 음식을 보관하고, 쓰레기를 줍고, 밀렵꾼이나 불법 어업자를 발견하면 위성전화로 공원 순찰대에 신고했다.바쁜 일거리도 없고, 대자연을 감상하며 맑은 공기를 마시니 호사 아니냐고? 27㎏짜리 짐을 어깨에 메고, 수많은 모기에 온몸을 물어뜯기며, 곰에게 공격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해야 하는데도?켄도 그리즐리곰과 맞닥뜨렸다. 무사히 살아 돌아와 하는 말이겠지만, 어려움을 겪게 돼 행복했다고.“바로 그 순간이 스스로의 한계이자 나의 진정한 본질을 잠깐이나마 엿볼 수 있었던 순간이었으니까.” ⑥ 비밀 털어놓을 친구 만들기 켄은 외로웠다. 맥주 사마실 돈이 없고, “어디 사느냐?”는 질문을 피해 다녀야 하니 친구가 없을 수밖에. 하지만 그에겐 메일로 속마음을 주고받는 고교시절 베프 조시 프륀이 있었다. 이 책에서 주인공 켄과 함께 비중 있는 조연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조시는 5만8000달러의 빚을 안고 대학을 졸업했다. 성적이 뛰어났지만 취업 시장에선 줄줄이 불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친구 켄처럼 극한 알바를 하지 않은 조의 대출금은 이자만 불어갔다. 조는 켄에게 보낸 메일에서 대출금을 이렇게 묘사했다.“마치 내가 운동화 끈을 묶느라 멈춰서 있는 동안 내 뒤를 맹렬하게 쫓아오는 퓨마 같아.”인류에 봉사하는 일을 하고 싶었던 정의로운 조시. 하지만 대출금을 갚기 위해 웨스트우드 대학(미국서는 듣보잡 학교) 입학사정관이 됐다. 한국의 입학사정관과는 달리 텔레마케터에 가까운 직업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이 조시 자신처럼 학자금 대출 인생을 살도록 꼬시는 일이었다. 졸업율, 졸업생 취업 현황, 학위를 받기 위해 드는 엄청난 비용, 이곳서 받은 학점이 다른 일반 대학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숨겨야 했다. ‘집이 봉고차’라는 사실을 들킬까봐 학우들과 교류가 없었던 켄은 조시와 메일을 주고받으며 외로움을 이겨냈다. 조시 역시 성실한 친구 켄과 교류하며 통쾌한 반전을 기획한다. ⑦ 멘탈 갑이 되는 스펙 관리켄이 학창시절 쌓아온 스펙을 보자. 토익점수? 필요 없고, 다른 경력? 없다. 지방 신문사 인턴 자리에 지원했지만 줄줄이 떨어졌다. ‘루저’ 켄은 빚을 갚을 요량으로 3D 업종에 뛰어들었다. 알래스카의 오지에서 모텔 청소하고, 햄버거용 패티를 굽고, 쓰레기를 소각하고, 여행 가이드를 하는 일이었다. 마약사범, 알코올 중독자, 정신분열증 환자, 살인 전과자들이 가득한 일터였다.하지만 모험거리라고는 비디오 게임밖에 몰랐던 도시촌놈 켄은 이곳에서 미국 사회의 민낯을 확인했다. 북극의 추위 속에서 신체를 단련했고, 알래스카에서 뉴욕 고향집까지 8000㎞를 히치하이크로 횡단하는 용기를 얻었다. 봉고차 주거 방식도 1980년식 쉐보레 서버번을 집으로 삼아 사는 알래스카 노인네에게서 배운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낮고 험한 곳에서 생활하며 그는 남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 문화를 가꾸고, 성찰의 힘과 인문학의 효용을 깨달았다. 충만한 생활에서 건져 올린 귀한 글감은 그를 봉고차 속에 숨어 사는 ‘찌질이’에서 듀크대의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바꿔놓았다.책은 듀크대 대학원 졸업식에서 켄이 축사를 하는 것으로 끝난다. “비록 교육을 받기 위해 거의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그 대신 부유함을 얻었습니다. 여기서의 부유함은 환율이 없는 통화, 녹슬지 않는 주화, 소비해버릴 수 없는 자본인 아이디어와 진실의 부유함을 의미합니다. 비록 이곳을 떠나는 제 지갑은 비어 있을지언정, 나이가 적든 많든, 국내든 해외든, 집이 있든 없든, 돈이 많든 적든, 살아있는 마지막 그날까지 이 부유함을 간직할 것입니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 2015-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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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OW TO] 짧아도 다 있다? ‘72초 드라마’ 찍는 7가지 방법

    《“질질 끄는 거 이제 그만해.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은 72초뿐이야.”형식은 내용을 결정한다.손안의 TV 모바일은 드라마 문법을 고쳐 쓰고 있다.콘텐츠 제작 회사 ㈜칠십이초의 ‘72초 드라마’는 모바일 시청자를 겨냥한 콘텐츠다.올 5월10일 네이버 TV캐스트에 ‘72초TV’를 개설하고 72초짜리(실제로는 102~164초) 에피소드 8편을 내보냈다. 7월2일 현재 재생 수는 약 300만회.7월 중순에는 시즌1의 주인공이 그대로 나오는 시즌2가 방송된다. 다른 주인공을 내세운 시즌3은 대본 작업이 진행 중이다. ‘질질 끌지 않고’ 72초 만에 기승전결을 마무리 짓는 방법은 뭘까.㈜칠십이초의 성지환 대표(38)에게 초압축 드라마 찍는 법을 물었다.》① 드라마 작가가 쓰지 않는다72초든 60분이든 드라마는 스토리가 중요하다. 하지만 1분 남짓한 시간에 복잡한 캐릭터와 플롯을 소화하기는 무리. 그래서 72초 드라마는 일상을 다룬다.시즌1의 주인공은 ‘흔남(흔한 남자)’. 평범한 30대 미혼남이 중국집 가고, 미장원 가고, 한밤중에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뜬금없이 “자니?” 라는 문자를 날린 뒤 답장을 기다리며 오만가지 생각을 하는 이야기다. 에피소드 7, 8회에서 주인공이 예쁜 여자를 만나 썸 타는 얘기가 나오자 즉각 “초심을 잃었다” “웬 판타지냐”는 성토 글이 올라왔다.일상을 다루는 드라마 대본은 누가 쓸까. 시즌1은 라디오작가 3명, 시즌2는 ㈜칠십이초 내부 연출자 2명이 썼다. 시즌3은 시즌1의 영어 번역을 맡은 ‘초짜’ 작가가 대본을 맡았다.“일반적인 드라마는 캐릭터와 상황을 설정한 후 이야기를 전개하죠. 72초 드라마는 누구나 겪을법한 평범한 사연을 다루기 때문에 (드라마 작법을 아는 전문 작가보다) 실제 경험담 위주로 생생하게 풀어내는 작가가 필요합니다.” ② 랩 같은 내레이션의 리듬감은 영업비밀72초 드라마의 묘미는 속도감. 편당 컷이 120개가 넘을 정도로 장면 전환이 빠르다. 대사는 없거나 있더라도 짧다. 내용은 내레이터가 전달하는데 랩처럼 들린다. 에피소드 3에서 나오는 아래의 내레이션은 10초 만에 끝난다.“내가 소개팅에서 번번이 실패했던 이유는 입고 있던 옷이 별로였고, 차를 소리 내면서 마셨고, 재밌게 말을 못했고, 결정적으로 차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유행하는 옷을 샀고, 차를 우아하게 마셨고, 개인기를 준비했고,….” “음향 감독인 임태형 씨가 내레이션을 맡았습니다. 바람 새는 소리가 없이 전달력이 좋고 연기도 되는 사람이죠. 문장의 처음과 다음 문장 끝이 물리는 듯한 리듬감은 어떻게 편집한거냐고요? 그건 영업 비밀입니다.” ③ 짧아도 돈 들건 다 든다짧아도 드라마는 드라마다. 마지막 에피소드가 끝난 뒤엔 엔딩 크레딧이 줄줄이 올라간다. 출연진이 26명, 스태프는 책임 프로듀서부터 예술감독 연출 촬영 조명 미술 음악 음향까지 35명이다(겹치기 포함).회사 직원이나 신인 배우를 캐스팅해 출연료 부담이 적은데도 성 대표가 밝힌 제작비는 회당 1000만원 미만. 60분짜리 미니시리즈 드라마 회당 제작비가 3억~4억 원(분당 500만~670만 원)인데, 이보다 많이 든다고 한다.“짧아도 스태프는 똑같이 필요하거든요. 제작비를 줄이려고 에피소드 8편을 몰아서 찍습니다. 회당 이틀씩 15~20일 만에 완성하죠.” ④ PPL 못 하는 이유? 100% 사전 제작시즌1이 인기를 끌자 PPL 제의가 몰려들었다고. 드라마를 보면 커피메이커, 술, 오디오, 의상, 커피숍, 스마트폰 등등 PPL 할만한 거리가 눈에 들어온다.하지만 시즌2에도 PPL은 없다. TV 드라마의 경우 방송이 시작된 후 시청률이 높으면 PPL 요청이 쇄도한다. 72초 드라마는 100% 사전 제작이어서 PPL이 어렵다.“시즌2의 대본이 이미 나와 있는 상태여서 드라마의 완성도를 헤치지 않는 자연스러운 PPL이 어려웠어요. 시즌3에선 고려해 보려고요.” ⑤ 편성과 배급 전략이 있어야시즌1은 매주 수, 목 오전 11시27분 네이버에 공개했다. 시즌2의 편성과 채널은 미정이다. 넷플릭스처럼 에피소드 8편을 한꺼번에 공개할지, 하루 1편씩 할지, 주3회가 좋을지, 어떤 편성이 시청자를 끌어 모을지 고민 중이다. 약은 약사에게. 배급은 배급사에게.시즌1의 배급은 대표적인 MCN 회사인 트레져 헌터가 맡았다. 시즌2는 네오 터치포인트가 배급한다. “저희는 콘텐츠 제작 업체예요. 서로의 역량에 집중!” ⑥ 국내 시장만으론 어렵다시즌1의 경우 영어와 중국어 버전으로 제작 중이다. 일본어와 인도네시아어 버전 제작도 구상 중이다. 왜 인도네시아냐고? 인구 2억5000만 명이 넘는, 세계 4위의 인구 대국이니까.72초 드라마의 주요 수입은 콘텐츠 사용료와 광고수익에서 나온다. 하지만 여기에만 의존해서는 돈을 벌기가 어렵다고 한다.“BJ 같은 1인 제작자의 영상 콘텐츠와 달리 72초 드라마는 제작비가 높습니다. 국내 시장만 바라봐서는 한계가 있어요. 해외로 시장을 넓혀야지요.” ⑦ 독자 반응보다 중요한 기준, “72초답게”쪽 대본에 의존하는 한국 드라마의 제작 관행은 단점인 동시에 장점이다. 그만큼 시청자들의 요구사항을 드라마 흐름에 반영할 수 있어서다.인터넷에서 BJ들이 인기를 끄는 이유도 실시간 댓글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 그러나 72초 드라마는 100% 사전 제작이다. 댓글? 보긴 하지만 크게 영향 받진 않는다고. “시청자 반응보다 중요한 건 만드는 사람들이 스스로 ‘재밌다’고 동의할 수 있느냐 입니다. 늘 자문해요. ‘72초스러운가’ 라고요. 브랜드 이미지가 있듯 ‘72초다움’은 우리 드라마의 시그너처 입니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 2015-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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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OW TO] ‘SNS 인기 스타’ 여경, 최고의 경찰 홍보거리는 바로…

    “드립하다 특진?”“트위터 하다 보니 승진?”부산지방경찰청 장재이 경장(29)은 요즘 악플에 시달리고 있다. SNS에서 부산 경찰 홍보를 잘한 공로로 지난해 정기승진에 이어 올 6월말 또 한 차례 승진한 다음부터다.다행히도 악플엔 대개 이런 반론들이 따라 붙는다. “일선에서 고생하는 경찰들을 제대로 홍보해 신뢰를 얻은 점은 생각 안하나.”맞는 말이다. 부산 경찰은 SNS에서 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페이스북 ‘좋아요’가 20만 명, 카카오스토리 구독자 수 15만명, 트위터 팔로워가 3만4000명이다.지난 연말엔 한국인터넷소통협회가 주관하는 ‘2014 대한민국 소셜미디어대상’ 공공기관부문대상, 한국소셜콘텐츠진흥협회가 주최하는 ‘제4회 대한민국 SNS대상’ 공공기관부문 대상, 한국광고PR실학회가 주는 ‘올해의 광고상’ 스마트광고상을 받았다.1일 ‘여경의 날’을 맞아 ‘우수 여경’ 장 경장에게 ‘약 빨고 하는 듯한’ 홍보 비법을 물었다.① 자기자랑은 금물…웃기거나 울리거나공공 기관 홍보 담당의 주요 업무는 기관장의 동정이나 ‘치적’을 알리는 일.그러나 부산경찰청 SNS의 경우 청장 사진이 올라오는 경우는 1년에 1, 2회. 그것도 ‘망가진’ 모습일 때다.시간 때우려고, 아무 생각 없이 웃으려고 들어오는 SNS에서 ‘자랑 질’은 금물.웃기거나, 감동적인 얘기가 좋다.온갖 사연들이 몰려드는 경찰서는 콘텐츠의 보고다. “아침에 출근하면 간밤에 들어온 사건사고 보고서와, 간부회의 결과 자료와, 일선 파출소나 경찰서에서 메일이나 카톡으로 보내온 사건 뒷얘기를 쭉 훑어요. 이중 얘기 되는 홍보거리를 재미있게 소개하는 거죠.”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덕분인지 장 경장의 예사롭지 않은 소개 글은 신선한 이야기 재료에 감칠맛을 더한다.“감자 캐다 산삼 건짐”. 신호 위반 차량을 쫓았는데 알고 보니 운전자가 마약 사범이었다는 이야기다. 만취한 형제가 경찰차를 얻어 타고 집에 가려고 메르스에 걸린 것 같다며 허위 신고해 검거된 소식을 전할 땐 이런 소개 글을 달았다. “아재들요, 쫌!”지난달 전국의 주요 언론에 소개된 한 장의 사진도 부산경찰청의 SNS 홍보에서 시작됐다.생후 2개월인 아이를 안고 민원 하러 남포지구대를 찾은 남자. 아기가 울자 초짜 아빠는 어쩔 줄 모르고, 육아 경험이 있는 경장이 아이를 대신 안아 젖병을 물린 모습을 놓치지 않고 찍어둔 사진이었다.장 경장은 사진을 업로드하며 이런 카피를 날렸다.“젖병을 든 남자의 팔뚝이 이렇게나 멋질 수가!”② 과장했다간 스팸 광고 짝 나요만날 한가하게 재밌는 드립만 칠순 없다. 가끔은 “부산 경찰, 살아 있네!” 소리가 나오게 일도 잘하고 있다는 걸 알려야 한다. 단, 가끔씩 그리고 은근히.“범인 검거하느라 일선에선 억수로 고생하거든요. 그런데 조금이라도 과장하거나, 많이 꾸미거나 하면 스팸 광고 같아서 역효과 나요. ‘칭찬해주세요’ 하고 강요해도 안 되고요. 사진과 영상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해요.”늦은 밤 차들이 쌩쌩 달리는 위험천만한 자동차 전용도로의 중앙분리대에서 가출한 치매 환자 할머니를 업고 도로를 무사히 건너려는 교통경찰, 학교 폭력의 피해자 여학생이 자신을 친동생처럼 돌봐주던 여경에게 보내온 100점짜리 수학 시험지 사진. 사실관계를 설명하는 문장 이상의 꾸밈이 없어도 이 장면들만으로 충분히 감동적이다.③ ‘부산 사투리’ ‘경찰’은 먹히는 코드서울 경찰도 이렇게 인기를 끌 수 있었을까.형사와 부산 사투리는 드라마와 영화에서도 먹히는 인기 코드다.이 코드를 십분 활용한 콘텐츠가 학교 폭력 예방 캠페인 ‘부산 사나이’와 가정폭력 예방 캠페인 영상 ‘사랑한데이’다.‘부산 사나이’는 ‘신세계’ ‘범죄와의 전쟁’ 같은 조폭 영화를 패러디한 영상물. 조폭 혹은 꽃남 계열 형사 7명이 중학교 강당에서 학생들과 닭싸움하고, 호신술을 지도하며 어울리는 행사를 4분27초짜리 경쾌한 영상물로 만들었다.조폭 같이 생긴 형사는 “힘을 우째 쓰야하는지 알리주께” 하며 겁주고, 꽃남 형사는 여학생들을 겨냥해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믄 오빠야가 데이트해주께” 하고 달콤하게 속삭인다.‘사랑한데이’는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부산 경찰들이 아내, 어머니, 애인에게 전화로 사랑을 고백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물. 무뚝뚝한 부산 사내들이 홍보팀의 요청에 못 이겨 어렵게 입을 뗀다. “여보 사랑해.” “엄마 사랑해요.” 수화기 너머 반응도 부산 싸나이들 못지않다. “뭐라노.” “끊어라 바쁘다,” “미칫나, 약 잘못 묵었나.”④ 내 안에 끼 있다SNS에서 홍보를 하려면 영상물은 필수다. 웹툰까지 곁들인다면 금상첨화.부산경찰청은 제작 인력을 모두 내부에서 충당한다.SNS 홍보는 경찰청의 홍보담당관실에서 한다. 장 경장이 SNS를 관리하고, 영상은 강대민 경사, 웹툰은 박은정 경장이 주로 그린다. 사진 담당은 김록수 경사다.홍보 영상에 필요한 배우도 내부에서 캐스팅한다. 장 경장이 오글거리는 분장을 하고 직접 출연할 때도 있다.‘부산 사나이’도 내부 캐스팅으로 찍었다.“영상을 찍어서 보내 달라 했어요. 그중에 7명을 캐스팅했죠. 조폭 분위기 나는 경찰은 많은데, 꽃남 경찰이 없어서 찾다찾다 결국 의경 중에서 캐스팅했어요.”이 꽃남 의경이 올 봄 케이블 채널 엠넷 ‘너의 목소리가 보여’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던 꽃남 가수 ‘남포동 꽃경찰’이다. 그는 학교폭력 예방 홍보를 위해 이 프로그램에 출연, 미모에 가수 뺨치는 노래실력으로 인기를 끌었다.⑤ 팀장님이 이해 몬해도 패쓰!기발한 아이디어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나오는 법. 홍보담당관 직원들은 커피를 마시며 “이거 어떻노” “저거 어떻노” 하며 수다를 떨다 아이디어를 건진다.“팀장님(정태운 경감)이 팀원들을 믿고 일을 맡기세요. 내부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디어가 죽지 않죠. SNS에서 쓰는 은어는 팀장님이 모르실 수도 있는데 한번도 ‘이거 이해 안 된다. 알기 쉽게 고쳐라’ 하시지 않아요. ‘이거 요즘 재밌는 거야? 그럼 해봐’ 하시죠. 그래서 SNS스러운, 공공기관 냄새가 나지 않는 홍보물을 만들 수 있는 거죠.”⑥ 최고의 홍보거리는 바로…‘SNS 대모’로 불리는 장 경장은 검도 3단의 유단자다.장 경장은 지구대 파출소 경찰관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평생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싶다”며 2011년 경찰이 됐다.조폭 일당을 일망타진하는 박력 있는 형사도 좋지만, 소소한 동네 민원을 해결해주며 의지가 되는 경찰의 삶은 더욱 감동적이라고 생각한다.혼자 사는 할머니가 있었는데, 휴대전화의 단축번호가 1번 첫째아들부터 둘째 셋째로 이어지다 6번 파출소로 끝났다. 경찰은 누군가에겐 자식처럼 의지하고 기억해야 할 존재인 것이다.“홍보거리를 찾느라 사건 보고서를 보면서 많이 배웁니다. 페북 좋아요 숫자가 늘어나는 것도 좋지만, 학교폭력 전담 경찰로 일할 때 상담해줬던 학생들이 가끔 연락해올 때 진짜 기분이 좋아요. 언젠가는 복귀해야죠. 일선 현장으로.”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 201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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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OW TO] 아내는 의사, 남편은 배 목수…‘시소 부부’로 사는 법

    “이젠 당신 차례야.” “그래, 이번엔 내가 올라가야지.” 김창혁(54) 이영이(51) 씨 부부는 최근 ‘임무’ 교대를 했다. 아내 영이 씨가 생계를 책임지고, 남편 창혁 씨는 회사를 관두고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한 것이다. 신문사 기자로 맞벌이를 하던 둘은 2005년 영이 씨가 의학전문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면서 외벌이 커플이 됐다. 영이 씨는 10년간 의전 준비생-이화여대 의전 졸업-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고 올 3월 전문의가 됐다. 이번엔 창혁 씨가 배를 만드는 목수가 되기 위해 올 4월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 부부처럼 한쪽이 ‘딴 짓’하는 동안 다른 쪽이 먹여 살리고, 일정 기간이 지나 밥벌이와 딴 짓하기를 교대하며 사는 커플을 ‘시소 부부’라고 한다. 둘은 따로 살았더라면 이루지 못했을 꿈을 시소 타듯 지혜롭게 균형을 이뤄가며 실현했다. 시소 부부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시소부부로 살 수 있나요?”① 너무 늦지 않게 시작하라 2005년 2월 부부가 의료 봉사팀을 따라 네팔로 여행을 갔을 때였다. 몸을 낮추어 가난한 이들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는 의사들을 보며 영이 씨는 가슴이 뛰었다. “아,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정의 실현 같은 거대담론을 고민하기보다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치료하고 그들이 나아지는 과정에서 소소한 기쁨을 느끼고 싶었다. “나, 의사 되고 싶어. 회사 그만두고.” “해봐. 당신 공부 끝나면 나도 배 만드는 목수로 살 테니.” 영이 씨는 귀국하자마자 18년간의 기자 생활을 접고 나이 마흔 하나에 의전 공부를 시작했다. 창혁 씨는 말했다. “‘썸데이’ 윌 네버 컴‘Someday’ will never come), ‘언젠가’는 결코 오지 않습니다.” ② 지금보다 가난해지는 걸 각오하라 벌이는 반으로 줄고 씀씀이는 커졌다. 의전의 연간 학비만 2천만 원이었다. 의전 입시 준비에도 상당한 돈이 들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영이 씨는 의전 첫 해 입시에서 떨어졌다. 사표를 냈으니 돌아갈 곳도 없었다. 창혁 씨는 “사수까진 봐주겠다”고 했는데, 다행히 이듬해 합격했다. 창혁 씨도 배를 만드는 목수가 되기 위해 5년간 선박학교에 다녔는데, 그곳 학기당 학비는 500만원이었다. 부부는 집을 줄였다. “로망이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게 아니잖아요. 나이 들어 하는 공부이니 성취의 속도도 젊을 때와는 다르죠. 가난해지는 것 각오해야 해요. 무직에 대한 두려움도 떨쳐야 하고요.” ③ 둘 다 뜬구름을 잡으면 안 된다 의사 공부는 길어도 끝이 있다. 면허증이 있으면 굶을 일은 없다. 반면 배를 만드는 목수는 그 일로 먹고 살 수 있을지 막연하다. 창혁 씨가 회사를 그만 둔다고 했을 때도 시댁 식구들은 영이 씨에게 “네가 말려야 한다”고 했다. “만약 둘이서 화가와 배우가 되기 위해 시소 타기를 했다면 불안했을 거예요. 화가로 배우로 성공하기는 어렵잖아요. 둘 중 하나는 결과가 확실한 꿈을 꾸어야지요. 그리고 부부가 같은 쪽을 바라보면 힘들어요. 그럼 저희처럼 시차 공격이 불가능할 겁니다.” ④ 자아실현이 노는 핑계가 돼선 안된다 의사 공부를 하는 영이 씨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창혁 씨는 노후 걱정 없겠네. 셔터맨 하면 되니”였다. 영이 씨는 “하고싶은 일을 한답시고 놀고먹어선 안된다”고 못을 박았고, 창혁 씨는 회사를 그만두기 한참 전부터 배 목수로 살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했다. 2008년 강원도 원주에 있는 올리버 선박학교에 등록해 5년간 주말 보트 빌더로 살았다. 매주 토요일 아침에 가서 일요일 오후까지 공부한 시간이 모두 1만 시간은 된다. 2013년 5월엔 선주로서 발주해 학교 사람 3명과 배를 만들기 시작했다. 꼬박 2년 매달린 끝에 9명이 탈 수 있는 22ft(6.7m) 길이의 레저용 케빈 크루저 ‘올리버 노바’를 완성했고, 최근 서울 광화문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동력수상레저면허와 배를 싣고 다닐 트레일러 면허도 땄다. “남편이 배 목수가 되겠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땐 황당했어요. 배에 관한 책을 쓰고, 배를 만들어 전시회를 하고, 그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겠다니, 정말 황당하잖아요. 이번 전시회를 보고 좀더 믿어줄 걸 하고 후회했죠.”⑤ 기브 앤 테이크, 받았으면 갚아라 시소는 함께 타는 것. 내가 올라가면 다음엔 상대를 띄워줘야 한다. 아내가 오랜 수련 기간이 끝나고 전문의가 됐을 때 남편은 말했다. “나도 인턴, 레지던트 기간이 필요해. 5년을 줘. 그 후엔 내가 먹고사는 건 내가 해결하리다.” 아내도 동의했다. “내가 10년간 공부했으니, 이 사람에게도 4, 5년은 줘야죠. 10년 전 남편이 불안해했으면 저도 사고 못 쳤을 거예요. 회사 그만두고 의사 공부 하면서 힘들 때마다 징징거리면 남편이 다 받아줬는데, 이젠 내가 서포트 해야죠.” 창혁 씨는 당분간 헤밍웨이처럼 살 계획이다. 배타고, 배 짓고, 낚시하고, 글 쓰면서, 5년 후의 수익 모델을 찾을 생각이다. 먼저 올 가을 ‘심각한 취미’(나남)라는 책이 나온다. 배 만들기란 취미로 하기엔 돈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심각한’ 취미란다.⑥ 서로의 꿈을 반복적으로 얘기하라 꿈꾼다는 건 때론 피곤한 일이다.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가난도 감수해야 한다. 그럴 때 힘이 되는 건 그 꿈에 대해 자꾸 얘기하며 마음을 다잡는 것이다. 꿈의 대화는 따로따로인 계획을 부부생활에 맞게 조율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아내는 봉사하는 삶을 꿈꾸죠. 국경없는 의사회 활동을 하고 싶어했어요. 어느 날은 에티오피아로 함께 가자고 하더군요. 난 ‘아프리카는 싫다’고 했죠. 너무 착하게 살려고 애쓰지 말라고 했어요.” 의사 일도 하고, 배도 탈 수 있는 곳은 어딜까. 둘은 곳곳을 답사한 끝에 강원도 강릉에 정착했다. 강릉엔 아산병원이 있고, 올리버 선박학교 교육장이 들어선다. 개인병원이 아닌 아산병원이라면 공공 의료 성격을 갖추고 있어 병원이 아닌 환자를 위해 일하고 싶어 하는 영이 씨의 요구도 어느 정도 충족할 수 있다.⑦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라 둘의 시소타기는 ‘인생 후반부를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남녀 모두 갱년기가 오면 이런 질문을 하게 되죠. 인생 2막을 버벅대며 시작하지 않으려면 준비 기간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기자로서 입품, 글품으로 살았는데 앞으로는 일품으로 살아야지 했어요. 몸을 써서 사는 일. 마침 아내의 공부가 끝나고, 아들의 군 복무도 끝나 있었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돈은 최저 생계비 정도만 벌면 되죠. 의사는 그러기에 좋은 직업이에요. 의사인 나를 정말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며 살고 싶어요.” 부부는 멀지 않은 미래를 그려본다. 에메랄드 빛 바다의 항구엔 창혁 씨가 만든 배로 가득하다. 항구의 클럽하우스 옆엔 항해자들을 위한 클리닉이 있고, 그곳에 흰색 가운을 입은 영이 씨가 일한다. 언젠가는 부부가 병원선을 탈 것이다. 남편이 건조한 배에 아내의 진료용 도구를 싣고 외딴 섬을 돌며 배도 아픈 몸도 고쳐주면서 사는 그런 인생….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 2015-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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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편이 전업주부 된다면? 男 48% “찬성” 女 67% “반대”

    일하는 엄마, 집안일 하는 아빠. 이런 역할 분담이 일반적인 가모장(家母長)제 사회로 가는 걸까. 여성 가장을 뜻하는 여성 가구주가 늘고 있다. 여성 가구주란 남편 대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여성, 남편과 사별 또는 이혼했거나 미혼으로 가장 역할을 하는 경우를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여성 가구주는 해마다 증가해 올해는 약 531만3000가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 중 실직한 남편 대신 식구를 먹여 살리는 가구주(배우자가 있는 여성 가구주)도 132만3000가구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초식남’과 ‘알파걸’이라는 유행어가 말해주듯 선진국에선 가모장제로의 이행이 한국보다 빠른 편이다. 알파걸들이 커서 ‘알파주부’가 되는 것이다. 미국은 2009년, 영국은 2010년부터 전체 일자리의 절반을 여성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미국 저널리스트 해나 로진은 저서 ‘남자의 종말’에서 체력이 아닌 사회 지능과 의사소통 능력 등이 요구되는 후기 산업사회에서는 여성이 노동시장에서 남자를 제치고 있으며 집에서 살림하는 ‘전업남편’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에선 전업남편에 대해 여성들의 거부감이 강하다는 사실. 결혼정보업체인 선우 부설 한국결혼문화연구소에 의뢰해 선우의 남녀 회원 46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남편이 전업주부 역할을 하는 데 대해 남성은 ‘찬성한다’가 48.3%로 ‘반대한다’(29.2%)보다 훨씬 많았다. 이에 비해 여성의 경우 반대 의견(67.0%)이 월등히 많았다. 이는 남편이 일을 그만둬도 집안일은 여자가 다 하게 되는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남옥 서울부부가족치료연구소장은 “여성의 교육 수준과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있다. 아내가 가장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했다. 황현호 한국부부코칭센터소장도 “바깥일은 남자, 집안일은 여자라는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잠재적인 전업남편들에게 “직업이 있을 때의 직함을 나와 동일시하면 실직 후의 생활에 적응하기가 더욱 힘들다”고 조언했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 2015-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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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직한 남편이 집안일은 해주겠지… 그 기대, 딱 두달”

    ※남편의 실직 후 3년째 가장 역할을 하는 김모 씨(40)의 이야기를 일인칭 시점으로 정리했습니다.“여보, 아무래도 나 그만둬야겠어, 회사….” 나는 말릴 수가 없었다. 남편이 다니는 회사는 꽤 오랫동안 어려웠다. 회사 형편이 다시 좋아질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어차피 오래 못 다닐 거라면 퇴직금 한 푼이라도 더 챙겨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나와 다른 직장을 찾아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맞벌이니 끼니 걱정할 일은 없었다. “그래, 고생했어. 한두 달 쉬면서 다른 직장을 알아보자.” 그렇게 나는 우리 집 가장이 됐다. 길어야 1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외벌이 가장 노릇을 한 지가 2년이 넘었다. 처음 한 달 동안은 가족 모두가 즐거웠다. 회사일로 스트레스를 받던 남편의 얼굴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남편은 매일 아침 남매를 초등학교에 데려다 주고, 학교가 끝난 뒤 아이들이 돌아오면 간식 및 학원 스케줄과 숙제를 챙겼다. 아이들은 아빠가 챙겨주는 간식을 신기해하며 잘 먹었고, 신경질적인 엄마보다는 자상하게 설명해주는 아빠와 공부하는 걸 더 좋아했다. 직장에 다닐 땐 집안일엔 손도 대지 않던 남편은 청소도 하고 세탁기도 돌렸다. 하지만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지나자 집 안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남편은 구직용 웹사이트를 뒤적이고 대학 동창이나 선배들을 만나고 다녔지만 괜찮은 일자리의 면접 기회를 갖기는 어려웠다. 이것저것 자격증 수험서를 사들고 들어와도 끝을 보는 경우는 없었다. 내가 “자영업 쪽으로 알아보라”고 하면 “치킨집 열었다 열에 아홉은 망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보다 실직 기간이 길어지자 남편은 의욕을 잃어갔다. 요즘은 바깥 약속도 없고, 내가 출근해 일하는 동안 집 밖에 나가지 않는 눈치다. 나는 남편이 놀아 고민이라는 얘기를 털어놓을 친구가 몇 있는데, 남편은 실직 후 인간관계도 끊긴 듯하다. 이제는 집안일도, 아이들 돌보는 일도 안 한다. 얼마 전부턴 컴퓨터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새벽 늦게까지 게임을 하는 날이면 늦잠을 자느라 아이들 학교에 데려다 주는 일도 빼먹는다. 남편은 무료해 죽을 지경인데 나는 바빠 죽겠다. 맞벌이 시절 가사도우미가 하던 일은 고스란히 내 몫이 됐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새로운 일터에 출근한 것 같다. 저녁상 차리고, 먹고, 치우고, 청소기를 돌린다. 아이들 숙제 봐주는 것도 다시 내 일이 됐다. 지친 몸으로 빨래를 개고 있는데 남편이 옆에서 TV를 보고 있을 때면 속에서 열이 확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참는다. 폭발하면 걷잡을 수 없을까 봐 겁이 난다.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쓴다. 가족 모두 건강하고, 내가 정년까지 일할 수 있는 정규직인 게 어디냐고. 내 단골 마트에도 비슷한 처지의 여성이 있다. 남편이 직장을 그만둬 아내가 마트에서 하루 9시간씩 일해 먹고산다. 오후 10시까지 서서 일하니 발바닥이 아프고, 가족과 저녁상에 마주앉아 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했다. 그 집에는 대학 졸업 후 취업을 못한 아들도 있다. 내가 가장 무서운 건 남편이 무너지는 거다. 가족 외식 후 번번이 내가 계산할 때, 명절에 거래처에서 내 앞으로 선물이 들어올 때 남편이 기죽지 않나 눈치를 살피게 된다. 아이들도 아빠 눈치를 본다. 어릴 적엔 “아빠랑 결혼할거야”라고 하던 딸이 요즘은 “난 결혼 안 해”라고 한다. 아빠는 집에서 노는데 엄마 혼자 회사일하랴 집안일하랴 힘든 모습을 보니 결혼할 마음이 없다는 거다. 애 아빠가 노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딸의 친구들이 우리 집에 발걸음을 하지 않는 이유를 건너 건너 듣고는 억장이 무너졌다. 성인 남자가 반바지 입고 하루 종일 집에 있는데 무서워서 딸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얘기였다. 며칠 전 신문을 보니 미국에선 남편보다 수입이 많은 전문직 아내가 돈을 벌고 남편은 집안 살림을 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여자는 직장이 없으면 전업주부지만 남자는 그냥 백수다. 내가 그 여자들만큼 똑똑하지도, 많이 벌지도 못해서일까. 일 없이 놀면서 집안일도 하지 않는 남편이 밉지만, 남편이 나 대신 진짜 전업주부가 되는 건 더 싫다. 둘 중 하나가 직장을 관둬야 한다면 차라리 내가 잘리는 게 낫겠다 싶다. 나이 마흔 둘에 일없이 집에서 노는 남편, 정말 봐주기 힘들다.■엄마 家長으로 살아보니“남편은 학습지로 아이들 가르치고 집안일도 아이들과 함께해요. 직업은 없지만 성실하게 사니 큰 문제는 없어요. 제가 벌면 되죠 뭐.” (계약직 회사원 전모 씨·40) “취업 면접 때 꼭 물어보더라고요. 남편이 뭐 하느냐고요. 제가 일하는 건데 왜 남편 직업을 묻나요?” (백화점 식품부 직원 이모 씨·60)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 2015-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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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맞춤 취업 프로그램으로 인생 2막 열어보세요

    “1차 서류전형 합격 문자를 받고 눈물이 나네요. (아이 키워 놓고 다시 일하려고) 40군데쯤 이력서 넣었는데 학습지 회사 말고 처음 받은 합격 통보예요. 하루 2∼3시간 단순 알바조차도 아무 연락이 없어 제 무능에 많이 좌절했어요. 아줌마는 노동시장에서조차 기회가 없네요.” 대표적인 여성 커뮤니티 사이트인 ‘82쿡’에는 이처럼 재취업과 관련한 글이 많이 올라온다. 통계청에 따르면 ‘경력 단절 여성(경단녀)’은 지난해 4월 현재 197만7000명. 이 중 30대가 109만5000명으로 가장 많다. 30대 기혼 여성의 36.7%가 경단녀다. 경력 단절의 이유는 결혼(41.6%) 육아(31.7%) 임신과 출산(22.0%) 자녀교육(4.7%) 순. 경단녀 문제를 연구 중인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자녀 양육과 일 사이에서 균형 잡기가 어려운 워킹맘들은 조직이 기회를 주지 않거나 따를 만한 롤 모델이 없을 경우 그만두기 쉽다”며 “경력 단절 후엔 이전 수준으로 재취업하는 것은 어렵고, 그보다 낮은 수준으로 취업했다가 다시 경단녀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실제로 82쿡에는 눈높이를 낮춰 재취업에 성공했다 보수가 적고 비전이 없거나 원만하지 못한 인간관계 때문에 힘들다고 호소하는 글이 많다. “집안 호령하다가 재취업해 젊은 상사에게 지적받으니 못 참겠어요.” “월급이 초라해요. 고용주는 적은 월급 때문에 아줌마 채용한 거니 올려 줄 생각이 없는 듯해요. 신입사원들은 월급도 많고 직급도 높게 들어오네요.” 김종숙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여성고용연구센터장은 “여성의 취업에는 대다수가 찬성하면서도 여성이 결혼이나 출산과 무관하게 일하는 것이 좋다는 견해는 소수에 그친다”며 “경단녀 문제는 사회가 함께 노력해야 극복할 수 있는 구조적인 문제”라고 진단했다. 특히 20대 청년 실업이 심각한 요즘에는 “왜 살림하던 아줌마들까지 끼어드느냐”는 적대적인 시선도 넘어야 할 산이다. 윤수경 고용노동부 고용문화개선정책과장은 “경력이 오래 단절된 여성들은 이력서 쓰기와 면접 기술부터 조직 생활 방식이나 소통 기술 등 익혀야 할 것이 많다”며 고용노동부의 경단녀 취업 프로그램을 활용할 것을 권했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 2015-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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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득 거울 보니 내 모습이 낯설어”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니 내 모습이 낯설게 보이더군요. 어디서도 배우지 못한 엄마 아내 며느리 역할을 하면서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렸어요. 그런데 40대가 되고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면서 나를 돌아보게 됐죠. 아이가 학원 가고 없는 시간에 생각해요. 내가 뭘 하고 싶었더라? 앞으로 난 뭘 하고 살아야 하지? 질풍노도의 40대죠.”(정미경 씨·48·서울 양천구 목동) 여성에게 40대는 신체적 심리적으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다. 신체적으로는 폐경에 가까워지고, 결혼생활은 권태기에 접어들 때.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48)는 “30대의 젊음도, 50대의 홀가분함도 없는 40대는 힘든 시기”라며 “50대가 되면 몸이 가벼워지고 자녀 대학입시도 끝나 마음을 비우게 되며 남편과는 친구 같은 관계로 정리된다”고 설명했다. 중년의 위기는 전 세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통과의례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40대만의 특수한 어려움이 있다. 40대는 ‘X세대(1968∼1974년 출생)’에 해당한다. 어린 시절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대학에선 정치적 민주화를 경험했으며, 취업 걱정 없이 다양한 문화적 혜택을 누린 세대다. 이나미 이나미심리분석연구원장(54)은 “한국의 40대는 열심히만 하면 내가 꿈꾸는 대로 된다고 믿고 살았지만 외환위기를 겪으며 이것이 착각임을 깨닫게 됐다”며 “정서적으로 저항력이 없는 취약한 세대”라고 했다.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자신감이 줄어든 중년 여성들은 피부 미용실을 찾고, 헬스클럽 이용권을 끊고, 문화 강좌를 듣는다.(‘중년기 여성 소비자의 자신을 위한 소비에 대한 탐색적 연구’, 소비자정책교육연구 2013년) 이 같은 엄마들의 노력은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김종윤 씨는 고려대 석사학위 논문 ‘40대 중년여성의 생활 스트레스와 스트레스 대처방식이 가족의 건강성에 미치는 영향’(2014년)에서 “수도권 지역 40대 여성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이들은 가사, 건강, 직장, 자녀 교육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이는 가족의 행복도에도 나쁜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 2015-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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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은 자녀 성적순?… “내 삶은 뭐지”

    《 한국의 엄마들에겐 40대도 질풍노도의 시기다. 신체적으로 한풀 꺾이는 나이인 데다 자녀 교육 문제, 남편이 조기 퇴직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노부모 부양까지 온갖 짐을 짊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특히 맞벌이를 하는 40대 여성들의 경우 더욱 큰 성과를 요구하는 직장 스트레스까지 겹쳐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40대 엄마들이 털어놓았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은….” 》“20대 땐 모든 게 서툴고 두려웠어요. 30대에 결혼, 임신, 출산을 겪으며 힘들기도 했지만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40대는 두렵네요. 더이상 젊지도 않고 신경 써서 꾸며 봐도 아줌마일 뿐…. 40대의 삶은 어떨까요?” 맞벌이를 하며 8세 딸을 키우는 주부 A 씨(40)는 최근 여성 커뮤니티 사이트 ‘82쿡’에 이런 질문을 올렸다. 동아일보 창간 95주년 기획 ‘2020 행복원정대-엄마에게 날개를’의 인터뷰에 응한 40대 엄마들이라면 이런 댓글을 달았을 것이다. “각오하세요. 40대가 고비예요.” 중산층 30∼50대 엄마 50명을 인터뷰한 결과 40대 엄마들의 행복도는 평균 6.5점(10점 만점)으로 30, 50대 엄마들보다 낮았다. ‘나는 몇 점짜리 엄마인가’라는 질문에도 가장 낮은 점수(6.0점)를 주었다. 이들은 대학입시와 경단녀(경력단절여성) 문제, 조기 퇴직으로 인한 경제적 불안감에 노부모 부양까지 엄마들의 모든 고민거리를 짊어지고 있었다.○ 일과 아이 사이의 외줄타기 육아 단계를 지난 40대 엄마들의 관심사는 자녀 교육과 일이다. ‘나의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을 꼽아 달라는 질문에 ‘자녀의 성공’과 ‘몰두할 수 있는 일’을 1, 2순위로 꼽았다. 30대, 50대 엄마들과 달리 ‘부부관계’를 선택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애들이 고1, 고3이어서 온통 애들 성적 생각뿐이죠. 열심히 한 만큼, 실력만큼 대학 간다면 불만이 없을 텐데 요즘 대학입시는 로또 같아요. 대학 나와도 취업이 어렵다지만 그래도 대학마저 못 가면 더이상 패자부활전은 없는 사회잖아요.”(한모 씨·44·전업주부) “육아와의 사투 끝에 경단녀가 됐어요. 아이를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돌봄교실’에 보낸다고 하면 (아직 어리니 엄마가 돌봐야 한다며) 짐짓 걱정스럽게 충고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럴 때면 폭발하려는 걸 꾹 참아야 하죠.”(유모 씨·43) 특히 40대 엄마 중에서도 맞벌이를 하는 경우 행복도(6.1점)와 자기 평가 점수(5.7점)는 매우 낮았다. “내가 늙어가는 것, 아들 성적, 직장 스트레스까지 삼중고예요. 아이가 ‘밋밋한 대학’에 갔어요. 뒷바라지를 못했다는 자책감이 커요. 직장에서도 후배들에게 처지는 느낌이에요. 요즘 애들 스펙이 장난이 아니잖아요.”(강모 씨·45·공기업 직원) “대학입시 전형이 수백 가지여서 엄마가 전략을 잘 짜야 애가 대학에 갈 수 있어요. 이건 양극화의 고착이고 직장맘들에겐 좌절감을 안기는 제도죠. 엄마 월수입이 700만 원 이하이면 직장 다니는 것보다 아이 키우는 게 낫다는 얘기도 해요. 이래서야 고학력 경단녀들이 국가 경제에 기여할 수 있을까요?”(김모 씨·41·회사원)○ 노부모 부양에 늦둥이까지 40대 엄마들이 ‘나의 행복 조건’ 3순위로 꼽은 것은 가족의 건강이었다. 양가 부모가 병들어 걱정이고, 명예퇴직한 남편 대신 가장이 된 내 건강이 걱정이었다. “시아버지는 요양원에 모셨어요. 친정어머니는 저를 포함해 세 딸이 돌아가면서 모시고요. 월 50만 원 요양원 비용과 양가 어머니 생활비까지 부담이 꽤 커요. 그거야 자식 된 도리라지만 속상한 건 시부모님과 갈등이 생기면 무조건 며느리 탓을 하는 문화예요. 웃어른이 잘못하는 경우도 많은데….”(강모 씨·49·교사) “남편이 실직했어요. 퇴근 후 집에 오면 다른 일터에 출근한 듯 집안일과 애들 교육에 시달리죠. 나 혼자 살아보고 싶어요.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의 주인공 김혜자처럼 안식년을 가든가.”(장모 씨·41·회사원) 특히 만혼 풍조로 출산이 늦어지면서 육아 부담에 힘들어하는 40대도 있었다. “나이 마흔에 아이를 얻은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다만 우리가 너무 빨리 건강을 잃게 되면 어쩌나 걱정됩니다.”(이모 씨·42·회사원) 82쿡에도 늦은 육아를 하는 엄마들의 고생담이 많이 올라온다. “요즘 교육정책도 빠르게 바뀌고 엄마들도 극성인데 늙은 엄마는 힘들어요.” “출산이 늦으니 친정 엄마에게 산후조리나 육아도움을 바랄 수 없어 서러워요.” “둘째가 첫아이랑 열두 살 차이인데 첫째가 자꾸 물어요. 아빠가 병들어 일 못하면 자기가 동생 공부시키고 장가보내야 하느냐고요.” “어느 나라나 자녀가 사춘기일 때 엄마들은 가장 불행하다. 한국에선 자녀보다 엄마 쪽에서 분리불안을 느낀다. 아이를 떠나보내라. 나를 기쁘게 하는 일,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일에 침잠해야 한다.”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56) “직장 여성들에게 40대는 자녀 양육의 부담이 크고 직장에서도 뭔가 보여줘야 하는 힘든 시기다. 아침이나 잠들기 전 잠깐이라도 오직 자기만을 위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나은영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53·사회심리학 박사)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 2015-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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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행복원정대]엄마에게 날개를

    지킴이, 안식처, 기둥, 밑거름…. 엄마의 또 다른 이름들이다. 더 노력해도 덜 얻는 저성장이 새로운 일상이 된 ‘뉴 노멀(New Normal)’ 시대. 사람들은 엄마를 나침반 삼아, 오아시스 삼아 사막 같은 뉴 노멀 시대를 살아간다. 하지만 엄마들은 안다. ‘모든 게 엄마 덕분’이라는 고마움은 언제든 ‘모든 게 엄마 탓’이라는 원성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2020년 동아일보 창간 100주년까지 이어질 특별기획 ‘행복 원정대 2020프로젝트’의 올해 주제는 엄마의 행복이다. 동아일보는 엄마들의 고민과 부담감을 가늠하기 위해 30∼50대 중산층 ‘엄마’들 50명과 남편(20명), 10∼20대 자녀(20명), 시부모와 친정부모(10명) 등 가족 구성원 50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이 100명과의 심층 인터뷰로 잡아내기 힘든 엄마와 가족들의 속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국내 대표적인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82쿡’과 ‘DC인사이드’에 올라온 엄마와 관련된 게시글의 1억여 개 단어를 분석했다. 인터뷰에 응한 엄마들은 스스로를 ‘종신형 집사’ ‘멀티플레이어’ ‘조력자’로, 가족들은 ‘정신적 기둥’ ‘내비게이션’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규정했다. ‘집사’든 ‘기둥’이든 역할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그 때문인지 엄마들은 가족이 짐작하는 것보다 행복감을 덜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엄마들은 행복도를 10점 만점 중 7.2점, 가족들은 엄마가 느끼고 있을 행복도를 7.4점이라고 답했다. 가족 구성원별로는 남편들이 아내의 행복도(7.9점)를 높게 추정했고, 미래에 엄마가 될 딸들은 엄마의 행복 점수(6.6)를 짜게 주었다. 전업주부(7.8점)가 직장 생활을 하는 엄마(6.8점)보다 행복도가 높았고, 자녀의 대학 입시와 양가 노부모의 건강 문제, 남편의 조기 퇴직 문제 등으로 고민이 많은 40대 엄마들의 행복도(6.5점)가 두드러지게 낮았다. ‘엄마’의 역할(아내와 며느리 역할 포함)을 잘 해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엄마 본인들은 자신 없어했다. 가족들은 엄마의 수행 점수를 8.8점(10점 만점)으로 높게 평가했지만 엄마들은 스스로에게 6.5점을 줬다. 전업주부(6.7점)보다 직장맘(6.5점)이, 나이대별로는 40대 엄마(6.0)들이 스스로에게 인색한 평가를 했다.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게시글에 대한 빅데이터 분석 결과 엄마들의 최대 고민거리는 남편의 경제력과 외도 문제였다. 자녀에 대해서는 성적과 대학 입시에 관심이 많았으나 지난해 세월호 참사 이후에는 자녀의 자존감과 행복에 대해서도 고민하기 시작한 것으로 나타났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 201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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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佛은 왜 루이지애나를 美에 팔았나

    인간의 역사에는 숱한 전쟁이 있었지만 무기를 내려놓고 지낸 시간이 훨씬 길다. 싸움보다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극한 갈등이 빚어내는 스펙터클이 없어 전쟁사보다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는 평화로운 시기 조약의 역사에 조명을 비춘다. 세계 최초의 평화조약인 히타이트-이집트 조약(기원전 1274년으로 추정)에서 시작해 지구적 환경 재앙을 막기 위한 리우환경협약(1992년)까지 역사의 흐름을 바꾼 조약 64개를 추렸다. 이 중에는 국가 간 부동산 거래가 많다. 가장 주목할 만한 거래는 1803년 미국과 프랑스의 루이지애나 매입 협정이다. 당시 기준으론 미국 영토의 50%, 지금으로 치면 23%에 해당하는 너른 땅이다.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뉴올리언스를 차지하고 있던 프랑스에 “팔지 않으면 영국과 손잡고 프랑스를 치겠다”고 했고, 나폴레옹은 “아예 루이지애나를 통째 사라”고 했다. 나폴레옹으로선 미국의 위협도 겁났지만 “루이지애나는 사막 같은 쓸모없는 땅”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루이지애나는 미국이 20세기 초강대국으로 일어서는 토대가 됐다. 저자는 “역사상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은 국가는 많았지만, 이처럼 협상 테이블에서 대국이 된 나라는 거의 없다”고 평했다. ‘전쟁을 최대한 덜 비참하게 하려는’ 제네바 협약은 인류의 위대함과 한계를 동시에 드러낸다. “부상병은 국적을 불문하고 구호를 받는다”는 합의는 인도주의의 승리처럼 보이지만 ‘제네바 협약을 위반한 자는 엄중 조사’ 방침에 나토 회원국의 활동은 열외다. 국사와 세계사 시간에 빨간 줄 치면서 조약의 주요 내용과 역사적 의미를 달달 외워야 하는 고교생들이 보충 교재로 이용하기 좋은 책이다.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 2014-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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