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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넷! 다자녀 엄마 기자입니다. 환경, 보건, 복지 이슈를 취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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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5-11-05~2025-12-05
사회일반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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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법원판결3%
지방뉴스3%
  • ‘산림재난방지법’ 내년 2월부터 시행… “화재 위험시설 시정 강제 못해 보완 필요”

    역대 최악의 산불로 31명이 숨진 가운데 산불과 산사태, 병해충 등 산림 3대 재난을 아우르는 ‘산림재난방지법’이 내년 2월부터 시행된다. 하지만 산림 인근 화재 위험 시설에 대해 시정 조치를 강제할 수 없는 점 등은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산림재난방지법은 산불 등 재난에 대한 대응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올해 1월 제정됐다. 핵심 내용은 산림 관리와 재난 대응의 최고 책임자인 산림청장을 중심으로 5년마다 산림재난 방지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산림재난정보시스템을 구축해 산불의 위험도를 사전 예보하거나 확산 경로를 예측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기후변화로 인해 대형 산불과 병해충, 산사태 발생 위험이 갈수록 커지는 상황에서 산림재난 전반을 포괄하는 법이 마련된 건 의미 있는 성과로 평가된다. 그동안 3가지 재난은 서로 다른 기관에서 조사·대응해 통합적인 정책 수립과 현장 조율이 어려웠다. 그러나 새 법이 시행돼도 아쉬운 점은 남아 있다. 산림재난방지법에 따라 산림청장은 전국을 대상으로 ‘산림재난 위험도 평가’를 실시해야 한다. 불에 잘 타는 침엽수나 소나무 분포 현황, 지역별 기후 특성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반영한다. 하지만 문제가 확인된 시설이나 토지에 위험 요소 제거나 시정 조치를 강제할 법적 권한은 없어 실효성에 한계가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산림청에 따르면 건물 등 시설물에서 시작된 화재가 산불로 번진 사례는 2000년대 연평균 7.5건에서 2020년대에는 연평균 36건으로 크게 늘었다. 문현철 한국재난학회 부회장(호남대 교수)은 “단순히 위험도를 평가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가연성 물질을 다량 보유한 건축물 등 위험 요소에 대해 행정기관이 강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시행령 등을 통해 보완이 필요하다”고 했다. 실화자에 대한 형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산림재난안전법에 명시된 형량은 현행과 동일하다. 고의로 불을 질러 큰 피해를 내도 1∼15년 징역형이 내려지는 게 전부다. 실수로 냈다면 3년 이하의 징역, 3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이 부과된다. 새 법에 산림재난방지 교육 이수 대상자가 정확히 명시되지 않은 것도 문제다. 재난 현장을 총괄 지휘하는 지방자치단체장 등을 교육 대상으로 명시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제언했다.특별취재팀▽팀장 이미지 사회부 차장 image@donga.com▽황인찬 임우선 조은아 특파원(이상 국제부)김태영 이소정 임재혁 기자(이상 사회부)}

    • 2025-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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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 드론-열화상 카메라로 산불 감시… 위성으론 통신망 복구

    국내 기업들과 관계 당국은 산불 진화에 첨단 정보통신기술(ICT)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산불의 예방, 감시, 진화 등 전 영역에 걸쳐 인공지능(AI), 열화상 카메라, 드론 등을 접목해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2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SK텔레콤은 AI 산불 관리 솔루션인 ‘T 라이브 캐스터’ 서비스를 최근 서울 노원구와 구로구 등의 지자체에 추가 보급하기로 했다. 현재 130여 개 지자체에서 이를 활용하고 있다. T 라이브 캐스터 서비스는 산불 감시 드론에서 보내온 영상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AI가 이를 분석해 산불 발생을 감지하자마자 사전 지정된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기술이다. 올 2월 서울 구로구에서 발생한 산불을 초기에 탐지했고, 초기 진화가 마무리된 뒤 오후 11시쯤 다시 드론의 열화상 카메라를 통해 잔불을 발견하는 성과를 냈다. SK텔레콤은 또 산불로 인해 통신망이 소실된 산악지역에서 저궤도 위성통신을 활용해 통신할 수 있는 기술도 개발했다. 향후 국내에 저궤도 위성이 상용화되면 실제 활용이 가능하다. SK그룹의 계열사인 SK임업은 저전력 무선 산불감지 시스템을 친환경 정보기술(IT) 업체인 테크나인과 2023년 공동 개발했다. 현재는 일부 산불 위험 지역에 시범 설치하고 있다. 이는 연기 발생 여부를 센서를 통해 AI가 감지하는 기술이다. 해당 산불 감지 시스템에는 배터리를 두 개 장착해 한쪽이 태양광과 풍력으로 충전되는 동안 나머지 배터리의 에너지로 구동되도록 하고 있다. 배터리 교체 없이 오랜 기간 상시적으로 산불 상황을 감지하고 문제가 발견되면 이를 통신으로 전파할 수 있다. AI 업체인 스피어AX는 산불 감시 시스템인 ‘파이어워처’를 2022년에 개발해 현재 16개 시군구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파이어워처는 폐쇄회로(CC)TV 영상에서 AI가 연기를 감지해 산불이 발생했는지 여부를 조기에 알리는 시스템이다. AI가 학습을 통해 화재로 인한 연기를 구름, 안개 등과 구별할 수 있다. 회사에 따르면 감지 정확도가 93.4%에 이른다. 올해 1월 25일 대구 동구 야산에서 산불이 발생했을 때 해당 시스템을 적용한 대구시가 빠르게 발화 위치를 파악해 조기 진압했다. 산불 확산 예측에도 첨단 기술이 접목되어 있다. 국립산림과학원은 산불이 발생했을 경우 일몰 후 드론을 띄워 정찰 비행을 실시한다. 낮에는 진화가 우선이기 때문에 저녁 시간에 열화상 센서를 장착한 드론을 통해 산불이 어느 방향으로 확산할지 예측 정보를 취득하는 것이다. 수천 장의 사진을 커다란 사진으로 합친 뒤 이를 지도로 만들어서 재난 대응 유관 기관에 실시간으로 공유하기도 한다.특별취재팀▽팀장 이미지 사회부 차장 image@donga.com▽황인찬 임우선 조은아 특파원(이상 국제부)김태영 이소정 임재혁 기자(이상 사회부)한재희 기자(산업1부)}

    • 2025-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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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봇이 숲-나무 관리… 산불 막는 美오리건

    “로봇이 산불 발생 시 불쏘시개가 될 나무들의 부피를 측정하는 중이에요. 그냥 놔두면 대형 산불의 연료가 되거든요.”지난달 22일(현지 시간) 미국 오리건주 코밸리스시(市)에 위치한 맥도널드던 숲에서 오리건주립대 산림학과 소속 연구원 맷 슈만 씨가 연구실에서 개발한 산림 다목적 로봇을 가리키며 말했다. 약 1m 높이에 측정 장치와 컴퓨터, 트랙 바퀴가 달린 로봇이 움직이자 슈만 씨 손에 들린 스마트 패드에 주변 숲이 3차원으로 구현되기 시작했다. 슈만 씨는 “로봇이 숲을 돌아다니며 벌채 후 남아 있는 목재 등 산불 위험 요소를 찾고 임도 형태나 숲의 모양을 3차원으로 구현한다”며 “이 데이터로 산불을 조기 발견하고 나무의 쓰러짐 등으로 산사태 발생 여부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숲이 주의 절반인 1173만5883ha를 차지하는 오리건주는 여름철 극도로 고온 건조해져 매년 대형 산불에 시달렸다. 이에 산불 예방에 많은 자원을 투입해 왔지만 산림 관련 업종이 궂은일에 속하는 탓에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오리건주립대 등 지역 학교와 연구기관들이 산림 로봇 등 기술 개발에 몰두하게 된 이유다.美도 깊은숲 관리 기피, 인력 못구해… 로봇 투입 ‘산불지도’ 만들어〈2〉 美, 산림기술 개발 집중이동형 ‘계획적 불놓기’ 로봇 개발… “마른 풀-나무 미리 태워 산불 예방”번개 떨어진 지점 추적해 조기 대응… 드론 활용해 묘목 자동식재 기술도州-美정부, 수백억원 예산 적극 지원“산불 예방 로봇을 활용하면 사람이 들어가기 어려운 숲 구석구석까지 확인할 수 있어요. 숲의 구조나 위험 요소도 사람보다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죠.”슈먼 씨가 스마트패드로 로봇을 원격 조작하며 말했다. 슈먼 씨가 소속된 오리건주립대 포레스트리 연구실은 지난해 델루카 학장이 로봇 전문가인 우희성 교수를 영입하며 산림 관리 로봇들을 개발해오고 있다. 이 개발 중인 산림 기술은 이뿐만이 아니다. 드론을 이용해 원하는 목표 지점에 나무를 심는 기술도 개발하고 있다. 단일 수종으로 이뤄진 숲은 산불 발생 시 불이 빠르게 번진다. 혼합림을 조성하거나 불에 강한 나무들을 심어야 하지만, 넓은 산림에 사람이 직접 들어가 묘목을 일일이 심기란 쉽지 않다. 슈먼 씨는 “흙에서 썩는 상자에 묘목을 담아 드론으로 숲까지 운반한 뒤 목표 지점에 투하해 자동으로 나무를 심는 기술을 시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산불 커지는데 인력 감소… 기술 개발 불가피미국에서는 2012~2021년 10년간 연평균 6만1225건의 산불이 발생했다. 이 산불로 총 297만7776ha(헥타르) 산야가 잿더미가 됐다. 경기도의 약 3배에 이르는 면적이다.기후 변화로 산불은 더욱 커지고 잦아질 전망이지만, 미국에서도 산림 관련 업종은 힘든 일로 여겨져 인력 유입이 점차 줄고 있다. 21일 오리건주 임업회사 스타커에서 임도 개발 업무를 담당하는 제니퍼 비스는 “산림대학에서 꾸준히 젊은 산림 전문가들을 양성하고 있지만 숲에 자주 가거나 벌목을 하는 것이 어렵거나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 때문에 새 인력을 구하기 어려워졌다”며 “산불 관리, 나무 식재 업무의 경우 주로 멕시코 이민자들을 채용하고 있다”고 말했다.이에 미국은 대형 산불을 예방하고 부족한 인력을 대체하기 위해 산림 기술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미 항공우주국(NASA) 등과 협력해 위성 이미지, 기상 자료를 활용한 ‘산불 연료 지도’를 구축했다. 산불이 발생했을 때 연료가 될 만한 수종, 목재 잔재, 마른풀 등이 어디에 많은지 확인해 산불 위험 정도를 표시한 지도다. 지금은 측정 기술과 데이터가 보강돼 산불 발생 시 확산 속도와 화염 정도를 추정할 수 있는 모델로 고도화됐다.● 산불 위험 마른나무 소각하는 로봇도학교와 연구기관뿐 아니라 민간 기업들도 다양한 산림 기술을 시도하고 있다. 숲을 통한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산불 예방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오리건주와 함께 미 서부에서 가장 산불이 많이 나는 캘리포니아주에서 로봇을 개발 중인 스타트업 ‘번봇’은 계획적 불놓기를 위한 이동형 로봇을 2023년 개발했다. 계획적 불놓기란 산불을 일으키거나 산불 발생 시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나무 잔재, 마른풀을 미리 소각해 대형 산불을 예방하는 산림 관리법이다.트레일러가 달린 대형 트럭처럼 생긴 이 로봇은 숲을 돌다 산불의 연료가 될 만한 마른나무, 풀을 발견하면 트레일러 하단에서 불이 나와 이를 소각한다. 인력을 대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트레일러가 불의 확산을 막고 연기를 흡수하기 때문에 환경 피해도 최소화할 수 있다. 26일 번봇 직원인 로릴아이 노어비 씨는 “기존에 계획적 불놓기는 날씨, 장소 제약이 심했는데 이 기기를 활용하면 연중 불놓기로 산불 위험을 제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이 같은 기술은 단지 개별 기관의 노력으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정부가 기술 개발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번봇의 계획적 불놓기 기기도 미국 산림청이 약 2970만 달러(약 436억8276만 원)를 지원한 덕에 빠르게 개발될 수 있었다. 2025~2026년 캘리포니아 주정부 예산안에 따르면 캘리포니아는 화재 감지 카메라와 위성 기술 매핑 등 산불 예방 첨단 기술 개발에만 1040만 달러(약 152억9000만 원)를 투자할 계획이다.● 번개도 추적해 산불 선제 대응미국에서는 전체 산불의 약 46%가 번개 때문에 발생한다. 실제로 오리건주에서는 2022년 발생한 산불 889건 중 216건이 번개로 인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에 위성 및 고해상 카메라 등을 이용해 번개가 떨어진 지점을 추적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곳도 많다. 리스 도브마이어 스타커 산불예방 담당자는 21일 “번개가 내리친 지점을 빠르게 확인하면 산불에 조기 대응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인공지능(AI)을 활용한 병충해 관리 기술도 개발되고 있다. 기존에는 연구진이 일일이 나무를 확인해 병충해 진행 정도를 파악했다면, AI 기술은 기존 데이터를 학습해 나뭇잎의 병충해 정도를 자동으로 분석한다. 이 기술을 드론에 탑재하면 광범위한 산림의 병충해 상황을 빠르게 진단할 수 있다. 토머스 델루카 오리건주립대 산림대학장은 “병충해 피해로 죽은 나무는 불에 더 잘 탄다”며 “기술을 이용하면 더 안전하고 정확하게 숲을 관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특별취재팀▽팀장 이미지 사회부 차장 image@donga.com▽황인찬 임우선 조은아 특파원(이상 국제부)김태영 이소정 임재혁 기자(이상 사회부)한재희 기자(산업1부)}

    • 2025-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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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불 피해 컸던 美, 미리 나무 솎아내 확산 막아

    “오른쪽은 나무 위까지 탔는데, 왼쪽은 밑동만 그을렸죠. 나무 사이 빈 공간이 숲의 생사를 갈랐습니다.” 지난달 24일(현지 시간) 미국 서북부 오리건주 유진시 벅(Buck)산의 숲에서 존 베일리 오리건주립대 산림학과 교수가 말했다. 지난해 7월 이 지역에 산불이 났지만 간벌(間伐·나무 솎아내기) 작업으로 숲 사이 공간을 만든 덕에 불길은 더 나아가지 못했다.영남권을 할퀸 대형 산불로 30명이 숨지고, 4만8239ha의 산림이 잿더미가 된 가운데 대형 산불을 막기 위해 우리 숲의 체질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토 대비 산림 비율이 63%나 되지만, 숲을 계획적으로 관리하지 않아 산불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나무들이 지나치게 빽빽한 남부 산림은 강풍을 맞자 불을 빠르게 확산시켰다. 국내 산불 피해 면적은 최근 10년(2014~2023년) 연평균 4003.7ha로 2004~2013년(775.8ha)의 5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숲을 변화시켜 산불에 강한 숲을 만들고 경제적 가치를 높이는 ‘그린 시프트(green shift)’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본보 특별취재팀은 해법을 찾고자 지난달 21일부터 국내외 주요 숲을 심층 취재했다.집 500채 태운 벅산 산불, 나무 솎아낸 뒤엔 큰 피해없이 진화나무 솎아내기로 산속에 ‘완충지대’… “불길 확산 막고 건강한 숲에도 도움” 한국 면적 절반 태운 2020년 산불후 美, ‘간벌 효과’ 공감대 전역 확산 혼합식재로 불에 강한 숲 조성도“주황색 표시가 그려진 나무들 보이죠? 이곳은 이미 간벌 작업을 거쳤으니 ‘이 나무들은 자르지 않아도 된다’는 표시입니다.”지난달 24일(현지 시간) 미국 서북부 오리건주 유진시 벅(Buck)산 숲. 존 베일리 오리건주립대 산림학과 교수가 가리킨 나무 기둥에는 오리건주 산림부(Department for Forestry)가 간벌 작업 후 남겨놓은 주황색 일(一) 자 선이 그려져 있었다. 간벌은 숲의 나무를 솎아내 산불이 발생했을 때 빠르게 번지지 않도록 완충지대를 조성하는 것이다. 아무 나무나 자르는 것은 아니다. 산림당국이 위치와 나무 생육 상태 등을 조사해 간벌 장소와 정도를 정한다. 자연 훼손을 최소화하면서 산불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베일리 교수는 “불이 나면 나뭇잎에서 나뭇잎으로 불이 옮겨붙는다”며 “나무를 잘라 공간을 만들면 재해를 막을 뿐 아니라 다른 나무들도 더 건강하게 생장한다. 숲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빽빽한 숲… 오리건주 산불로 12조 원 이상 피해이날 베일리 교수와 함께 방문한 벅산(고도 약 1466m)은 오리건주 서부에 위치한 주 최대 숲 윌라멧 국유림(약 6880㎢ 넓이)의 일부다. 오리건주와 캘리포니아주는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철이 되면 극도로 고온건조해지고 강풍이 불어 산불 위험이 커진다.2020년 미 서부를 휩쓴 기록적 산불 당시 이곳도 피해를 당했다. 7월 시작된 산불은 수개월 지속되며 총 404만6856ha의 산야를 태웠다. 남한 국토 절반 크기다. 오리건주에서만 2020년 한 해 2027건 화재로 49만4252ha가 불타고 최소 11명 이상이 사망했다. 그해 9월 발생한 12건의 대형 화재만 따져도 피해액이 84억8800만 달러(약 12조4820억 원)에 이르렀다.벅산 숲도 인근에서도 큰 화재가 발생했다. 빽빽하게 붙어 있던 나무들이 불의 전달체가 되었다. 실제 기자가 방문한 지난달 24일 벅산 입구에서 당시 화재로 불에 탄 고사목들이 빽빽히 선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혼합식재로 불에 강한 숲 조성화재 후 오리건주는 직접 간벌하거나 사유림 소유자들에게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숲에 완충지대를 만들었다. 그 결과 지난해 7월 16일 인근에서 ‘오레(Ore) 산불’이 발생했는데, 간벌을 시행한 벅산 숲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불은 완충지대 경계선에 선 나무 일부를 태웠지만 더는 나아가지 못했다. 베일리 교수는 “나무를 벤다는 것에 거부감을 가질 수 있지만 통상 산불은 나뭇잎에서 나뭇잎으로 불이 번지며 걷잡을 수 없게 커지는 것”이라며 “관리하지 않으면 더 큰 재앙이 닥친다”고 설명했다. 간벌의 효과가 널리 알려지면서 최근에는 주민이 직접 인근 숲을 간벌하기 위한 기금을 모금하는 경우도 생겼다.간벌만으로 산불을 막을 수는 없다. 오리건주 산림당국은 혼합식재를 통한 내화수림(불에 내성이 강한 숲) 구성에도 힘쓰고 있다. 한 종류의 나무로 숲을 구성할 경우 화재는 물론 병충해에도 취약하다. 산불과 병충해로 나무들이 고사하면 산사태가 일어나기 쉽다. 세 가지 산림 재난은 모두 연결돼 있다.이런 문제를 알기에 오리건주에서는 일반 기업들도 혼합림과 내화수림 조성에 힘쓰고 있었다. 21일 코밸리스시의 한 숲에서 만난 임업기업 스타커사 조림 담당자 스티븐 코스키 씨는 “일반적으로 한 구역에 최대 4개의 다른 종을 심는데 건조한 지역인지, 특정한 병해충 등이 발생하는 지역인지를 고려해 조림한다”고 말했다. 스타커사는 회사가 소유하고 있는 약 3만8400ha 숲에 85%는 더글라스 전나무, 나머지 15%는 내화성이 뛰어난 자이언트 세쿼이아 등 13개 종을 심고 있다.● 산 정상까지 숲길로… “환경영향 최소화해 건설”이런 숲 관리는 차로 이동 가능한 숲길(임도)가 잘 마련된 덕에 가능했다. 지난달 24일 기자가 방문한 벅산도 산 정상까지 숲길이 나 있었다. 숲길이 있으면 산불 발생 시 신속한 진화가 가능하다. 이날 차를 타고 지난해 산불 피해를 입은 고도 400m 지점까지 6.9km를 이동하는 데 차로 6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프레스턴 그린 밀러 팀버 부사장은 “숲길은 숲을 가꾸기 위해서 필수적인 요건”이라며 “미국의 경우 산림 공학자들이 지향을 살피고 환경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도로를 설계해 임도 건설을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린 시프트(Green Shift) ::산불 등 재해에 강하고 임산물과 일자리를 창출해 지역에 기여하는 숲으로 전환함으로써 숲에 대한 인식과 관리 방식의 패러다임을 바꾸자는 의미.특별취재팀▽팀장 이미지 사회부 차장 image@donga.com▽황인찬 임우선 조은아 특파원(이상 국제부)김태영 이소정 임재혁 기자(이상 사회부)이미지 사회부 차장 image@donga.com도쿄=황인찬 특파원 hic@donga.com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김태영 기자 live@donga.com유진=이소정 기자 sojee@donga.com임재혁 기자 heok@donga.com}

    • 202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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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이미지]산불은 바뀌는데 우리는 그대로다

    21일 경남 산청을 시작으로 영남권 곳곳을 휩쓴 대형 산불은 4만 ha 넘는 산야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30명 가까운 인명이 희생됐다는 점이다. 1987년 산림청이 산불 피해를 공식 집계한 이래 최악의 피해다. 100세 할머니가 불붙은 집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유명을 달리했고, 80대 노인 3명은 대피 차량이 불티로 폭발하면서 함께 산화하고 말았다. “엄마 얼마나 뜨거웠을까” 오열하는 유족 인터뷰를 보며 가슴이 먹먹해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더욱 속상했던 건 이 참화(慘火)가 고작 라이터를 켠 성묘객, 예초기 불티를 방치한 작업자 등 기본 안전 수칙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의 실수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산불은 변하고 있다. 앞으로 더 자주, 더 크게 일어날 것이다. 기후변화로 한반도의 봄이 고온·건조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산불도 강한 바람, 건조한 공기, 높은 기온 등 3중 악조건 탓에 더 크게 번졌다.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경북 의성 산불의 경우 안동을 거쳐 영덕으로 확산하는 데 고작 한나절밖에 안 걸렸다. 빠르게 번지는 불은 당연히 끄기 어렵다. 앞으로 산불은 이전과 달리 많은 사상자를 낼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모습은 달라진 게 없다. 2024년 산불통계연보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산불의 원인은 입산자 실화(失火)가 31%, 논밭두렁이나 쓰레기 소각 24%, 담뱃불 실화 7%, 성묘객 실화 3%다. 10년간 최소 65%의 산불은 사람의 부주의로 난 셈이다. 여전히 몰지각한 불법행위도 쉽게 목격된다. 산 인근에서 농산부산물과 쓰레기를 소각하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엄연히 불법인데 농민들 사이에선 단속원들 퇴근 이후 소각하면 단속을 피할 수 있다는 팁까지 돈다고 한다. 담배꽁초를 아무렇게나 버리는 사람도 여전하다. 화기 사용이 금지된 산에서 야영하며 불 피운 영상을 자랑처럼 소셜미디어에 공유하는 유튜버도 있다. 어릴 때부터 어린이집과 학교에서 산불 예방 교육을 통해 잘못된 행동과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피해를 명확히 가르쳐야 한다. 어린이 불장난으로 인한 산불의 경우 꾸준한 계도 덕에 횟수가 1990년대 연평균 14건에서 2020년대 1건 미만으로 뚝 떨어졌다. 요행을 바라는 잘못된 인식을 없애기 위해 단속도 강화해야 한다. 인력이 부족하다면 폐쇄회로(CC)TV, 드론, 신고 포상제 등을 적극 고려해 볼 수 있다. 처벌 수위 역시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현재 산림 및 그 인접 지역에서 불을 피우다 적발되면 1차 위반 시 30만 원, 2차 40만 원을 내고, 3차 이상 적발돼도 50만 원만 내면 된다. 산불을 내도 3년 이하 징역, 3000만 원 이하 벌금이 끝이다. 방화면 7년에서 15년 이하 징역형을 받지만 지난해 산불로 징역형을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역대 세 번째 규모인 2022년 경북 울진·강원 삼척 산불은 차를 타고 가던 운전자가 버린 담배꽁초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됐다. 결국 범인을 잡지 못했지만 부디 당사자는 자신이 버린 작은 불씨가 수많은 삶의 터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길 바란다. 산불을 초래하는 모든 행위는 범죄다. 그저 작은 불씨란 없다. 부디 이번 산불로 얻은 교훈이 변화의 불씨가 되길 기원한다.이미지 사회부 차장 image@donga.com}

    • 2025-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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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공원 동물원으로 ‘공부하러’ 떠나요”

    “고릴라가 사는 열대우림은 휴대전화에 들어가는 탄탈륨이란 광물질이 생산되는 곳과 겹쳐서 고릴라의 서식지가 자꾸 줄어들고 있어요. 그럼 고릴라를 지키는 법은 뭘까요?” 15일 경기 과천시 서울대공원 동물원 고릴라 사육사 앞에 선 김경옥 동물해설사가 옆에 선 가족 관광객 10명을 향해 물었다. 한 초등학생이 “휴대전화를 오래 쓰는 것”이라고 답하자 김 씨가 “정답이다”라고 호응했다. 이날 서울대공원 동물원 ‘동물해설사와 함께 동물원 실내관 속으로’ 프로그램에는 네 가족이 참여했다. 서울대공원 동물원의 남미관, 동양관, 유인원관 중 한 곳을 선택해 해설사와 함께 관람하며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이 프로그램은 3월 한 달간 매주 토요일에 열리고 있다. ● 기린, 코끼리 등 인기 동물 공부할 기회봄을 맞아 ‘주말에 아이들과 어디 갈까’ 고민 중인 부모라면 서울대공원의 상설 교육 프로그램을 노려볼 만하다. 이달 매주 토요일 열리고 있는 실내관 교육 프로그램은 오전 1회, 오후 2회를 합쳐 하루 총 3회 열린다. 남미와 동남아시아에 주로 서식하는 동물들을 모은 남미관과 동양관, 그리고 유인원관에서 멸종위기 동물들의 생태와 보전 중요성을 배울 수 있다. 교육을 듣는 동안 해설사가 나눠준 교육 관련 유인물을 다 작성하면 마지막에 귀여운 동물 그림 열쇠고리를 선물로 준다. 참가비는 무료다. 서울시 공공서비스예약 홈페이지에서 신청할 수 있다. 참가 인원이 정해져 있고 선착순으로 마감된다. 이날 교육 참가자들은 유치원생부터 중학생 가족까지 다양했다. 아이들은 평소 들을 수 없는 동물에 대한 자세하고 흥미로운 설명에 해설사와 동물을 번갈아 보며 연방 “우와” “귀여워요”라며 감탄사를 내뿜었다. 경기 의왕시에서 온 최주혜 씨(32·여)는 “서울대공원이 가까워서 자주 오는데도 동물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배울 일이 없었다. 교육을 들으니 정말 유익했다”며 “아이가 좀 더 크면 다시 찾을 예정”이라고 했다. 서울대공원은 동물원을 주로 찾는 가족 관광객을 대상으로 연중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1월에는 뱀띠 해를 맞아 ‘푸른 뱀 겨울 탐구생활’이라는 주제로 구렁이, 그물무늬왕뱀 등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4월과 5월에는 각각 지구의 날(4월 22일)과 생명 다양성의 날(5월 22일)을 맞아 현장 행사와 함께 흰손기번, 오랑우탄 등 유인원에 대한 교육과 각종 체험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9∼11월에는 기린, 코끼리 등 어린이들의 관심이 많은 동물을 주제로 심층 교육을 한다. ● 산림 치유, 목공 체험 프로그램도 유아 교육기관과 초중고는 물론 특수학급과 특수학교 아이들을 위한 단체 생태교육도 있다. 4∼6월, 9∼10월 공공서비스예약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할 수 있다. 비대면 교육도 가능하다. 사육사, 수의사 등 동물 관련 직업에 관심이 있는 중고교생을 대상으로 진로박람회를 열고 설명과 체험 교육도 제공한다. 접수 방법은 프로그램마다 다르다. 자세한 내용은 서울대공원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울대공원은 공원 내 넓은 숲과 정원을 활용한 산림 치유, 숲 해설, 목공 체험 프로그램도 준비 중이다. 목공 프로그램의 경우 대공원의 폐목을 활용할 예정이다. 올해로 개장 40주년을 맞는 서울대공원 식물원에서는 식물과 나무를 주제로 한 다양한 행사와 심포지엄도 준비하고 있다. 박진순 서울대공원장은 “동물원 생태 프로그램과 숲, 식물을 활용한 프로그램을 통해 시민 참여 기회를 넓혀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 202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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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0세 어르신도 휠체어-유모차도 안전 산행… ‘무장애 숲길’로 봄나들이 떠나요

    “내 나이에 이런 길 없었으면 산 못 올랐을 거예요.” 8일 서울 강서구 화곡동 봉제산 무장애숲길 입구에서 만난 박계단 씨(94·여)가 말했다. ‘젊은 시절 산을 좋아했다’는 박 씨는 고령이 돼 산행에 엄두를 못 내다가 2022년 동네에 있는 봉제산에 무장애숲길이 생긴 뒤로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날씨가 안 좋을 때를 빼고는 거의 매일 산을 오른다는 그는 지팡이를 짚긴 했어도 허리가 곧고 다리에 큰 불편이 없어 보였다. 박 씨는 “(무장애숲길이) 건강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했다. ● 경사 완만, 나무 덱과 난간 있어 안전 무장애숲길(자락길)은 장애인, 노약자 등 보행 약자들이 부담 없이 산을 즐길 수 있도록 경사 8.36%(각도 4도 전후) 이하로 만든 완만한 숲길이다. 나무 덱과 안전난간으로 이루어져 있어 유모차, 휠체어를 타고도 올라갈 수 있다. 2011년 양천구 신정산, 성북구 북한산을 시작으로 올해 3월까지 서울시 20개 자치구에 총 37개소, 69.32km의 무장애숲길이 만들어졌다. 무장애숲길은 보행 편의만 고려한 길은 아니다. 정비된 길을 만들면 사람들이 숲 안쪽으로 무분별하게 들어가지 않게 돼 훼손된 자연을 복원하고 추가 훼손을 방지할 수 있다. 실제 2024년 서울시립대가 제출한 용역 연구에 따르면 망우∼용마산 구간 훼손지가 무장애숲길 조성 후 일부 복원되었다. 무장애숲길 조성 후 보행 약자는 물론 가족, 연인 등 산행객 수가 늘어나면서 시와 각 자치구는 숲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시설도 마련하고 있다. 이날 방문한 봉제산 무장애숲길에도 책 쉼터, 유아숲체험원, 풋살장, 놀이터 등이 있었다. 날이 풀려서 친구들과 축구하러 나왔다는 유환희 군(12)은 “걸어올 수 있는 거리에 이런 시설이 있어서 정말 좋다”며 “가족들과 가볍게 산책하러도 자주 온다”고 했다. 어린이 동반 가족이 많이 찾는 것을 감안해 체험 교육을 운영하는 무장애숲길도 적지 않다. 이날 봉제산 책 쉼터 건물 앞에서도 4월부터 운영될 생태숲환경교실 맛보기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환경 교사가 무장애숲길 입구 한 연못에서 개구리알을 꺼내 보여주자 유치원생과 초등학생들이 탄성을 내지르고 “올챙이는 언제 나와요? “개구리알은 왜 여러 개가 붙어있어요?”라며 질문을 쏟아냈다. 무장애숲길 환경교실은 서울시 공공서비스 예약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할 수 있다. ● 전망대 포함 남산하늘숲길 10월 개소 무장애숲길마다 매력이나 장점이 달라 ‘도장 깨기(어떤 일에 차례로 도전하는 것)’도 해볼 만하다. 노원구 불암산 무장애숲길은 철쭉동산이 유명하다. 수락산 무장애숲길에선 자연휴양림과 연계해 더 많은 자연을 만끽할 수 있고, 성북구 개운산 무장애숲길에서는 명품 도심 전망을 관람할 수 있다. 오금근린공원 무장애숲길은 폐쇄된 배수지를 이용한 휴식 공간과 인공폭포, 정자가 있는것이 특징이다. 서대문구 안산 무장애숲길은 산을 한 바퀴 두르는 긴 순환 코스를 갖고 있다. 서울시는 올해 무장애숲길 23개소를 추가로 개소할 예정이다. 10월에는 외국인이 많이 찾는 남산에 선셋 전망대, 계곡전망다리, 모험놀이 덱을 포함한 무장애숲길 ‘남산 하늘숲길’이 문을 연다. 시 관계자는 “아직 무장애숲길을 통합 안내하는 사이트가 없는데 통합 안내체계를 검토 중에 있다”며 “시민들이 일상 속에서 언제든지 자연과 함께하는 힐링과 여유를 누릴 수 있도록, 무장애숲길 조성에 지속적으로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 2025-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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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이미지]제이미가 가득한 사회에 ‘영재적 모먼트’는 없다

    4세 제이미가 까까 세는 걸 본 엄마 이소담 씨는 “이건 영재적인 모먼트”라는 생각에 수학학원을 등록한다. 영어학원 원어민 강사로부터 제이미가 배변 훈련에 성공했단 전화를 받고, 소담 씨는 기쁜 마음으로 배변 훈련 과외를 취소한다. 이렇게 ‘과외 하나를 세이브’한 소담 씨는 제기차기 과외를 알아보러 나선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 2’에 나온 제기차기가 언제 학교 수행평가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난달 SNS에 공개돼 1, 2탄 합쳐 조회수 1000만 회를 넘긴 개그우먼 이수지의 일명 ‘(고슴)도치맘’ 영상 내용이다. 강남 엄마로 대표되는 부모들의 과한 조기교육을 풍자한 이 영상은 몇 주째 화제를 이끌며 다양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부모들을 지나치게 희화화한 측면도 있지만 주변에서 접하는 사례들을 보면 영상 내용을 결코 과하다고 치부할 수만은 없을 듯하다. 지인은 세종시 사는 공무원인데 아이만 서울인 친정집에서 키운다. 서울 유명 영어유치원(영유아 영어 사교육 기관)에 보내기 위해서다. 좋은 학원에 들어가려고 네댓 살 아이에게 ‘레테(레벨테스트)’ 준비를 시킨다는 지인도 여럿이다. 이른바 ‘4세 고시’다. 아이의 재능을 일찍 발견하고 키우기 위한 조기교육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문제는 현 한국의 조기교육이 아이의 재능과 무관하게 입시, 혹은 특정 직업군을 위한 ‘조기학습’에 치우쳤다는 데 있다. 아이를 영어 학자나 영어 소설가로 키우기 위해 영어유치원에 보내는 학부모는 없을 것이다. 대부분 일찍 배워둔 영어가 입시나 취업에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지난해 의대 증원 소식에 학원가에 수많은 선행학습반이 생긴 것도 같은 이치다. 특정 대학, 직업군에 쏠린 조기학습은 정작 인재가 필요한 미래 동력 산업의 인재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입시용 암기, 주입식 교육에 단련된 아이들이 도전 정신, 창의성 등을 요하는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길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젠슨 황 등 혁신을 이끈 세계적 기업가 중 조기교육으로 정해진 길을 걸어 성공한 사람은 없다. 최근 돌풍을 일으킨 중국 생성형 AI 딥시크의 젊은 직원들도 각자가 원하는 공부에 심취해 스스로 미지의 영역을 개척한 연구자들이었다. 그러나 부모들만 탓할 수 있을까. 내 아이가 마크 저커버그나 뤄푸리(딥시크 개발자)가 된다는 데 말릴 부모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한국에서 저커버그나 뤄푸리가 나오기 어렵다는 데 있다. 학교 평가 시스템은 이런 학생들을 제대로 평가해 내지 못하고 대학입시는 개혁을 외친 지 십수 년째 제자리걸음이다. 창업 실패는 개인 파산으로 이어져 재기가 어렵기 일쑤고, ‘타다’ 실패에서 보듯이 사회와 정치가 혁신을 저해한 사례도 적지 않다. 이런 상황을 겪거나 눈으로 봐온 부모들은 안전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제2의 이소담 씨가 돼 아이를 안정적인 전문직, 명문대로 가는 기차에 일찍 태우는 것이다. 과한 조기교육을 두고 부모들 탓만 하기 어려운 이유다. 확실한 건 4세 고시 제이미들이 가득한 사회에 ‘영재적 모먼트’는 오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패러디 영상을 보며 ‘강남 엄마들이 문제’라고 손가락질하기에 앞서 왜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지 고민하는 정부 당국자들이 있길 빌 뿐이다.이미지 사회부 차장 image@donga.com}

    • 2025-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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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이미지]계륵이 되어 버린 외국인 가사관리사 사업

    ‘저렴한 돌봄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2023년 외국인 가사관리사 도입을 두고 뜨거운 논쟁이 붙었을 때 한 전문가가 했던 말이다. 2024년 9월 고용노동부와 서울시가 함께 시행한 시범 사업이 종료일을 2주 남긴 가운데 역시나 예상했던 비용 상승이 예고되면서 사업 실효성에 대한 논란이 다시 불붙었다. 애초에 ‘높은 돌봄 비용이 저출산의 큰 원인’이라며 외국인 가사관리사 도입을 추진할 때부터 이 사업의 초점이 비용에 맞춰져선 안 된다고 봤다. 사실 돌봄 비용이 높다면 그건 근본적으로 부모들이 장시간 근로하면서 돌봄 인력에게 맡기는 시간이 길어졌기 때문이지 가사관리사의 절대적인 인건비가 높기 때문은 아니었다. 실상 국내 가사관리사들의 임금을 비롯한 처우는 열악하다. 돌봄 인력이 자꾸 줄어들고 고령화하는 이유다. ‘저렴한’ 외국인 가사관리사는 이런 국내 가사관리사들의 처우를 더 열악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었다. 근본적인 해법은 맞벌이 가정의 근로시간을 줄이고 시차출퇴근제 등 유연 근로를 확대하는 데 있었지만 정부는 임기 초 자신했던 노동 개혁에는 손을 못 대고 먼저 외국에서 저렴한 돌봄을 들여오겠다고 나섰다.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준다는, 국제적 노동 상식을 뛰어넘는 계획까지 내세웠다. 결국 정부의 야심(?) 찬 초안이 실현되지 못하면서 외국인 가사관리사의 시급은 최저임금에 주휴수당, 4대 보험을 더한 1만3700원(2월 현재 1만3940원)으로 책정됐다. 민간 가사관리사에 비해서는 저렴하지만, 다자녀 할인 등 각종 할인이 붙는 공공 아이돌보미에 비해서는 크게 저렴하다고 할 수 없는 애매한 금액이었다. 문제는 이제 이마저 어렵게 됐다는 점이다. 근로기준법상 입국일로부터 1년이 지나면 퇴직금을 받을 자격이 생겨 급여가 오를 수밖에 없다. 금액이 얼마나 오르냐에 따라 이용자가 줄어들 수 있는 상황이다. 더구나 고용부가 지난해 12월 실시한 수요 조사에 따르면 시범 사업 중인 서울시를 제외하고 가사관리사를 이용하겠다는 사람은 지자체별로 20명이 채 안 됐다. 서울시는 기존 가사관리사 지원 제도를 통해 지원에 나서는 등 긴급 수혈에 나섰다. 고용부는 시범 사업 연장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사업이 시범 상태일 순 없다. 정부는 비용 인상을 보전할 재원을 찾아 나설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재원을 찾더라도 ‘언제까지, 얼마나 지원할 것인가’ 하는 숙제가 남는다. 여러 반대를 뚫고 정책을 전격 도입한 정부 입장에서 비용을 올리거나 본 사업을 포기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는 계륵이 된 이 사업은 애초에 저렴한 돌봄을 들이겠다는 정부의 계획으로 시작됐다. 당장은 지원금으로 지금의 부담 수준을 이어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 계속 지원금을 쏟아붓긴 어렵다. 정부 계획대로 전국 단위 본사업으로 확장할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정부는 당장의 땜질이 아니라 외국인 가사관리사의 다른 장점을 발굴하는 등 장기적인 대책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저렴하기만 한 돌봄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이미지 사회부 차장 image@donga.com}

    • 2025-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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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인의 공로는 끝나지 않았다’… 90세 배우의 수상소감[이미지의 포에버 육아]

    ‘포(four)에버 육아’는 네 명의 자녀를 키우며 직장 생활을 병행하고 있는 기자가 일상을 통해 접하는 한국의 보육 현실, 인구 문제, 사회 이슈를 담습니다. 단순히 정보만 담는 것을 넘어 저출산 시대에 다자녀를 기르는 맞벌이 엄마로서 느끼는 생각도 공유하고자 합니다.“육십 먹어도 잘하면 상 주는 거예요. 공로상이 아니에요.”배우 이순재 씨는 지난 11일 KBS 연기대상을 수상하며 무대에 올라 이렇게 말했다. 올해 90세인 그는 연기 인생 70년 만에 첫 연기대상을 받았다. 이 씨는 “미국의 캐서린 햅번 같은할머니는 30대 때 한 번 타고 60(세) 이후에 세 번 탔다”며 “우리 같으면 전부 공로상(을 줬을 텐데)”이라고 했다. 한국의 경우 나이 든 배우들이 대체로 주연에서 밀려나 조연을 맡고 연말 시상식에서도 의례적으로 공로상 대상만 되어온 점을 꼬집은 것이다. 망백(望百)의 배우는 최근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맡아 분전했고 현역으로서 당당히 최고 연기상을 거머쥐었다. 그런 이 씨가 후배들의 진심 어린 축하 속에 품격 있는 일침을 날리는 모습은 여러 가지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 48년 뒤 노인 반, 非노인 반… 세계서 가장 늙은 국가2025년은 대한민국 초고령사회 원년이다. 초고령사회란 인구 20% 이상이 노인인 사회를 뜻한다. 65세 이상 인구가 1000만 명을 넘어선 것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노인 비율은 더 늘어날 것이다. 2024년 9월 통계청이 발표한 ‘2022년 장래인구추계를 반영한 세계와 한국의 인구현황 및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2072년 고령 인구 비율이 47.7%까지 올라 세계에서 세 번째로 늙은 국가가 될 전망이다. 1, 2위를 차지했다는 홍콩과 푸에르토리코는 하나의 나라라기보다 지역에 가까운 점을 감안하면 실질적인 국가 순위로 한국이 1위라 볼 수 있다. 인구의 47.7%면 사실상 절반이다. 48년 뒤면 노인이 반, 노인 아닌 사람이 반인 사회가 된다는 뜻이다. 2000년대 중반, 아주 인상적인 공익광고가 있었는데 저출산이 계속되면 지하철의 노약자석이 사실상 일반석과 자리를 바꾸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그 이미지가 신선하기도 하고 내용이 충격적이기도 해서 기억에 남는데, 그 광고가 현실이 되는 날이 머지않은 셈이다. 이미 지하철을 타면 노약자석이 만석임은 물론이고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한 어르신들이 일반 좌석까지 넘어가 앉아계신 모습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초초’고령사회도 먼일이 아니다. ● 아직도 노인빈곤률 부동의 1위 고령화로 인한 문제는 익히 알려져 있다. 상대적으로 생산가능인구가 줄고 부양해야 할 인구는 늘어날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현재 15~64세 생산가능인구 비율은 71.1%지만 2052년 51.4%까지 줄어든다. 생산가능인구 중심으로 짜인 현 산업 구조는 타격이 불가피하다. 생산연령인구 100명당 부양인구(유소년인구+고령인구) 비율인 한국의 총부양비도 올해 42.5명에서 2072년에는 118.5명으로 거의 3배나 껑충 뛰어오를 것으로 예측됐다.노년층도 힘들어지긴 마찬가지다. 한국은 이미 노인들이 가난한 나라다. 한국이 OECD 안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낯부끄러운 지표가 몇 개 있는데 노인빈곤률도 그중 하나다. 2020년 기준 40.4%로 무려 10년 넘게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 우리보다 훨씬 앞서 고령화한 일본의 노인빈곤률도 2020년 기준 20.0%로 한국의 절반이 안 된다. 하지만 글로벌 컨설팅 회사 맥킨지가 2023년 공개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이 노후에 받는 연금의 소득대체율은 지금도 47%에 불과해 OECD 권고치 대비 20%포인트 이상 낮다. OECD 국가 평균(58.0%)과 비교해도 11%포인트 적다. 지금과 같은 저출산고령화 속도라면 돈 낼 사람은 줄고 돈 받을 사람만 급격히 늘면서 기존 금액만큼 받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지금대로 노인 인구가 늘어난다면 어쩌면 한국은 그냥 노인이 많은 나라가 아니라 ‘가난한 노인이 가장 많은 나라’가 될지 모른다. ● “마땅한 일 없어 가방에 단추 붙이는 알바”대책은 노인들의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미 일자리를 찾는 노인들이 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4년 2분기 65세 이상 노인 취업자 수가 월평균 394만 명으로 1989년 집계 시작 이래 15~29세 청년(380만7000명)을 처음으로 뛰어넘었다. 처음 집계를 시작한 1989년만 해도 청년 취업자가 노인보다 13배 많았다고 한다. 일하는 노인이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노인들을 위한 일자리는 부족하고 상대적으로 열악하기까지 한 게 사실이다. 예전에 노인 일자리 관련 기사를 기획하며 어르신들을 여러분 만나 취재한 적이 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꽤 괜찮은 기업에서 오래 근무한 전력이 있음에도 정년퇴직 후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식당, 경비, 용역 등 열악한 일자리를 전전하는 어르신들이 많아 놀랐던 기억이 난다. 소위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 임원까지 역임한 분인데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핸드백에 단추 붙이는 알바를 하고 있다”는 퇴직자도 있었다. 정년을 늘리고 재고용 기회를 확대해 기존 직장이나 동종업계에서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하거나 각자의 특기를 살려 재취업, 창업할 수 있게 지원을 강화해야 하지만, 노사정 간에 겨우 물꼬를 텄던 정년 연장 논의는 물론이고 재고용, 재취업 지원 역시 정치에 막혀 공전 상태다. 연금 개혁은 여러 이해관계자가 다투면서 수십 년째 변죽만 울리고 있다. ● 서울시민 “노인, 70세는 넘어야” 사람들 생각은 바뀌었는데…배우 이순재 씨의 연기대상 수상은 그의 말처럼 노인이 ‘기여가 다 끝난 공로자’가 아님을 몸소 보여주었다. 얼마 전 서울시의회는 서울시민 1000여 명에게 ‘노인의 연령 기준’을 물은 설문 결과를 발표했다. 70세 이상, 75세 이상 등 최소 70세는 돼야 한다고 답한 사람이 응답자 10명 중 7명이나 됐다. 사람들의 생각은 진작에 바뀌었는데 제도와 시스템 변화는 언제쯤 그를 따라갈 수 있을까. 하필 초고령사회 원년에 벌어진 정치적 사태에 더욱 답답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 2025-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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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고령사회, 노인의 운전 제한을 논하기 전에[이미지의 포에버 육아]

    ‘포(four)에버 육아’는 네 명의 자녀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병행하고 있는 기자가 일상을 통해 접하는 한국의 보육 현실, 문제, 사회 이슈를 담습니다. 단순히 정보만 담는 것을 넘어 저출산 시대에 다자녀를 기르는 맞벌이 엄마로서 겪는 일화와 느끼는 생각도 공유하고자 합니다.얼마 전 버스에서 겪은 일이다. 앞좌석에 앉은 노인 한 분이 뭔가 불편하신 듯 계속 자리에서 안절부절못했다. 곧 내리셔야 하는데 출구까지 빨리 걷지 못해 내릴 곳을 놓칠까 봐 불안하신 모양이었다. 결국 정차하기 전 일어나 출구로 향하시던 노인은 때마침 속도를 줄인 버스에 휘청이다가 그만 갖고 있던 지팡이로 앞에 있던 중년 여성의 머리를 세게 치고 말았다. 노인이 곧장 사과했지만 여성은 정말 많이 아팠는지 “어떻게 그렇게 때리실 수 있어요? 일부러 그러신 거 아니에요?”하고 톡 쏘아붙였다. 멀리서 기사가 “어르신, 그러니까 그냥 앉아 계시라니까요. 제가 세워 드린다니까” 했다. 노인은 연방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더니 다음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렸다. 창밖으로 힐끔 더욱 굽어진 듯한 노인의 등을 지켜보는데 괜히 먹먹해졌다. 우리 아빠보다 5살쯤 많으실까. 노인의 버스 이용은 버거웠고, 곧 우리 아빠의 이용도 그렇게 될 거라 생각하니 남일 같지 않았다.● 고령운전 사고 늘자 쉽게 “운전 제한” 주장요즘 심심찮게 나오는 뉴스가 고령 운전자의 사고 소식이다. 무안 제주항공 참사로 모두가 침통하던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목동깨비시장에서 한 운전자가 골목의 행인들을 치고 질주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속보를 보자마자 ‘혹시 운전자가 고령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지난해 7월 9명을 죽음으로 내몬 서울 시청역 참사를 비롯해 최근 이런 차량 질주 사고의 운전자가 대체로 노인이었던 탓이다. 아니나 다를까, 깨비시장 사고 운전자도 70대 중반의 노인으로 드러났다. 정말 고령일수록 사고를 많이 낼까? 고령 운전자의 사고는 전반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2019년 전체 교통사고의 14.5%였던 고령 운전자 사고 비율은 2023년 20.0%까지 올랐다. 그 수도 3만 3293건에서 3만 9641건으로 늘었다. 고령 인구가 늘어나니 당연한 일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연령별 사고 증가율을 따져도 고령 운전자의 증가율이 높았다. 삼성화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65세 이상 운전자의 추돌사고 증가율은 4년간 연평균 14.4%로 4%대에 불과한 20~50대를 크게 상회했다.이쯤 되면 가장 쉽게 나오는 이야기가 고령 운전자의 운전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현재 만 75세 이상 운전자는 3년에 한 번 운전면허 적성검사를 받고 면허를 갱신해야 하는데, 검사를 강화해서 통과하기 어렵게 하거나 자진해서 면허를 반납할 수 있게 독려하자는 것이다. 누군가의 운전이 남에게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다면 제한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앞서 본 노인을 떠올려 보면 그리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운전을 못하게 하는 대신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은 충분할까?● 보행약자 배려 부족, ‘교통 사막’ 지역도 곳곳에네 번의 임신, 출산을 거치며 느낀 게 있다. 배가 부르고 몸이 무거워져 보니 대중교통 이용이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부른 배에 가려 발밑이 잘 보이지 않는데 지하철역마다 계단과 턱은 많아 늘 거북이걸음이었다. 버스들은 잘 기다려주지 않았고 만석일 때가 잦았다. 아이 손을 잡고 걸을 때면 횡단보도 신호는 왜 그리 짧은지. 초록색 불이 깜빡이기 시작하면 벌써 차들이 정지선을 넘어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고, 마지막엔 아이 손을 잡고 달리기 일쑤였다. 노인들은 내가 겪은 것과 같은 불편함과 위협을 매일 느낄 것이다. 많이 개선됐지만 우리 대중교통과 도로엔 여전히 보행 약자들을 위한 배려가 부족하다. 실제 편의를 고려하지 않고 요식행위로 만들어놓은 듯한 시설도 적지 않다. 몇 달 전 여러 노선이 교차하는 환승역에서 길 잃은 어르신을 도와드린 적이 있는데,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해야 하다 보니 그것만 따라 위로 올라오다 전혀 엉뚱한 곳으로 오게 됐다고 했다. 편의시설이 있긴 하지만 실제 보행 약자들이 이용하려면 한없이 걷거나 돌아야 했던 것이다. “역 안에서만 한 시간을 헤맸다”는 노인이 그뿐만은 아닐 것이다. 지방 소도시나 시골은 더욱 심각하다. 서울 등 대도시는 불편해도 탈 대중교통이라도 있다. 하지만 지방엔 ‘교통 사막’인 지역이 적지 않다. 11년 전 육아휴직 중 지방 근무한 남편을 따라 3개월간 이런 교통 사막 지역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다. 버스는 30분~1시간 대기가 기본이었고 그나마 언제 올지 기약할 수도 없었다. 버스를 탄다고 원하는 목적지에 딱 떨어지는 것도 아니어서 슈퍼라도 가려면 한참 걸어야 했다. 휴직 때라 여유가 있었다지만 소금 하나 사러 왕복 3시간씩 시간을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부분 농사일 등 생업에 종사하는 노인들도 마찬가지일 터다. 이런 곳에선 별도 교통수단이 보완되지 않는 이상 차가 필요했다. ● 운전보조장치 등 노인 이동권 보장안 찾아야무작정 막고 제한할 일은 아니다. 노인들의 이동권은 건강과도 직결된다. 자주 활동하는 노인이 신체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건강할 수밖에 없다. 관련 연구는 무수히 많다. 2023년 보건사회연구원이 노인 992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노인’ 그룹의 건강이 가장 좋게 나타났다. 굳이 연구를 찾지 않더라도 활력에 차서 열심히 활동하는 노인들이 그렇지 않은 노인보다 훨씬 건강하고 오래 사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인구 5명 중 1명이 노인인 초고령사회로 들어서면서 노인들의 건강 관리는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국민 5명 중 1명이 불행하거나 아프고 분노하는 사회는 여러 문제를 잉태할 수밖에 없다.노인들의 권리를 지키면서 안전도 지키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노인의 운동, 인지기능을 보완하는 운전보조장치 도입이 한 방법이이다. 일본의 경우 비상자동제동장치, 페달조작오류·급발진 억제 장치, 차선이탈 경보 장치 등 보조장치를 단 ‘서포트카’를 구매할 때 보조금을 주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도 특정 연령 이상이 이런 장치를 단다고 하면 비용을 보전하는 식으로 보조장치 장착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 대중교통도 보행 약자들을 위한 시설을 보강해야 한다. 노인들을 위한 이동 수단과 안내를 늘리고 편의시설, 좌석도 늘어나는 노인 수에 걸맞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고령 인구가 늘면 휠체어 등 보행보조기기를 이용하는 인구가 많아질 텐데 이들 이동방안도 감안해야 한다. 교통문화 개선 노력도 필요하다. 해외 대학에서 근무하는 한 교수님이 한국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병원에 갔던 경험을 공유한 적이 있다. 정차할 곳이 마땅찮아 잠시 도로변에 차를 붙이고 부모님을 내리는데, 뒤차들이 내내 클랙슨을 울리며 빨리 가라고 재촉했다고 한다. 것이다.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는 도로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버스는 빨리 떠나고, 조금만 느리거나 정차해도 사람들의 불만이 쏟아진다. 이런 문화에서 노인들이 설 자리는 없다. ● 누구나 노인이 된다누구나 노인이 된다. 나의 아빠도 곧 그 버스의 노인처럼 거동이 불편해지실 테고, 나 역시 20년 남짓 남았을 뿐이다.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내 부모님뿐 아니라 나의 하루도 발이 묶일 것이다. 건강수명이 길어지는 만큼 이동권의 수명도 길어져야 한다. 그 다음 운전 제한을 논해야 제한도 실효성을 찾을 수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전체 운전자 중 면허를 반납한 비율은 권고를 시작한 2019년 이래 내내 2% 초반대에 머물고 있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 2025-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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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엄 덕에 아이가 정치를 묻기 시작했다 [이미지의 포에버 육아]

    ‘포(four)에버 육아’는 네 명의 자녀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병행하고 있는 기자가 일상을 통해 접하는 한국의 보육 현실, 문제, 사회 이슈를 담습니다. 단순히 정보만 담는 것을 넘어 저출산 시대에 다자녀를 기르는 맞벌이 엄마로서 겪는 일화와 느끼는 생각도 공유하고자 합니다.아이들의 질문에 답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런데 요즘만큼 대답하기 어려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엄마, 계엄이 정확히 뭐야?” “대통령은 왜 그걸 선포한 거야?” “탄핵은 또 뭐야?” 아이가 정치를 묻기 시작했다.답하는 게 고생스럽긴 해도 아이가 시사 이슈에 관심을 가지는 모습이 한편 기특하기도 하다. 놀라운 건 이런 게 비단 우리 아이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초등학교 6학년인 큰아이 말에 따르면 요즘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많은 아이들이 대통령, 계엄, 탄핵 등 요즘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단순히 소식만 나누는 게 아니라 누가 잘했느니, 잘못했느니 판단하기도 하고 서로 간에 토론도 한다는 것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기자가 되기 전까지 정치 현안이나 시사 이슈에 대해 잘 모르는 소위 ‘정치 잘알못(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 중엔 애초 기자를 꿈꾸며 관련 학과와 모임을 거치고 학생회, 시민단체, 심지어 정당 활동을 하다가 들어온 이도 있지만 난 그렇지 못했다. 아마 1990년대 후반 이후 학교에 다닌 학생 대다수는 비슷할 것이다. 교실에서 정치 문제를 접하거나 관련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학교에서 선생님 혹은 친구들과 정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던가…. 되짚어 봐도 떠오르는 기억이 없다. 왕조시대에도 나라님 흉은 봤다는데, 온오프라인 할 것 없이 정치 이야기가 활발한 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유독 교정만 청정지대다. 왜? 잘못 꺼냈다간 번거로운 일에 휘말리기 십상이었던 탓이다. 잊을 만하면 나오는 게 소위 ‘정치 편향적 발언’을 한 교사가 학부모나 아이의 신고로 시도교육청의 감사와 징계를 받았다는 뉴스다. 교사들은 교육자이자 공직자의 한 명으로서 엄격한 정치적 중립성을 요구받는다. 헌법에서 정치적 중립성은 ‘보장’되어야 할 권리에 가까운 데 반해 교육기본법에서 정치적 중립성은 ‘지켜야’ 하는 의무다. 잘못해 이를 어겼다가는 누군가로부터 신고를 당하고 괜한 고생을 자초하게 된다. 물론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은 중요하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한쪽의 일방적 주장만 옳다고 가르치거나 더 나아가 진실을 왜곡하면 자질미달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저 정치적 소재를 화두 삼았다거나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특정한 입장이 피력된 것까지 정치 편향이라고 봐야 할까. 편향 사례라고 해서 보면 수업 중 특정 정치적 사건이나 인물을 예시로 삼았다거나 특정 언론의 자료를 보여준 것에 불과할 때가 적지 않다. 잣대가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학교에선 갈등과 충돌 없을 것만 가르치고, 교실에선 정치적, 시사적으로 예민한 소재들이 사라졌다.사실 굳이 학교가 아니더라도 아이들이 요즘 정치 이슈를 접할 수 있는 창구는 무궁무진하다. 우리 아이와 그 친구들도 TV, 휴대전화, 컴퓨터, 엄마와 아빠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고 들었을 것이다. 요즘은 정치 이슈를 상세히 설명하는 SNS 영상과 채널도 많다. 그런데 이런 루트로 정치 이슈를 접하는 것엔 문제가 있다. 편견이 생기기 쉽다는 점이다. 뉴스의 출처마다 성격이 다양한데 어떤 출처를 볼지 선택하는 데도 의사가 반영되고 더욱이 요즘 아이들이 많이 이용하는 SNS의 경우 알고리즘을 통해 비슷한 것만 골라 보여주기 때문이다. 당장 우리 곁엔 비슷한 콘텐츠만 보다가 계엄을 선포한 대통령도 있지 않나.어차피 어디나 편견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면 그나마 정제된 공간인 학교에서 배우는 게 낫지 않을까. 대면 교육장에선 쌍방 소통이 가능하기에 궁금하거나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을 묻고 조율할 수도 있다.그리고 우리에겐 무엇보다 이런 훈련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능력인 탓이다. 이슈가 터질 때마다 일반 시민은 물론 정치인까지 와르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광장정치는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측면에서 선진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매우 후진적인 정치의 단면이다. 문제가 생기면 이해 당사자 간에 원만한 토론과 숙의, 사회 공감대 형성, 그리고 합의로 풀어야 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첨예한 문제가 생기면 사람들은 너도나도 그 문제를 거리로 들고 나온다. 그리곤 각자 정부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서로 대화하는 대신. 어릴 때부터 민감한 정치·사회적 이슈를 두고 토론하고 숙의해서 문제를 푸는 연습을 했다면 좀 다르지 않았을까. 매년 열리는 국정감사나 국회 현안질의를 지켜보면, 이런 일에 통달해 있어야 할 정치인들부터 얼마나 부족한지 여실히 볼 수 있다. 맥락에 닿지 않는 진행, 내 할 말만 하겠단 식의 질의, 답답하면 다짜고짜 내지르는 고성 등은 몇 년째 보기 민망할 정도다. 미국에서 잠시 학교에 다닌 적이 있다. 유창하지 않은 영어 때문에 곤혹스러운 순간이 많았는데 그중 가장 곤혹스러웠던 시간을 꼽으라면 단연 발표나 토론 수업을 할 때였다. 그런 수업이 정말 잦았는데 이를테면 역사 시간에 자유무역주의자와 보호무역주의자로 나뉘어 토론을 해보는 식이었다. 당장 돌아가는 정치, 사회 현안과 관련한 토론들도 많았다. 어릴 땐 그 시간이 너무 무섭고 부담스러워서 도망치고 싶단 생각밖에 안 들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니 무척 부러운 수업 문화다. 우리 학생들은 그만큼 토론하고 고민하고 조율할 기회를 갖고 있을까. 한국에서 정치 논의는 자주 금기 취급된다. 비단 학교뿐 아니다. 기사 거리 탐색을 위해 종종 들르는 온라인 카페 중에 자칭 ‘클린 카페’라는 곳들이 있다. 정치적 이슈를 이야기할 수 없는 곳이기에 정치 청정지역, 클린 카페라는 것이다. 정치가 더러운 것인가. 찬반이 첨예한 소재를 잘 다루지 못하는 탓에 서로 싸우고 비방해서 그렇지 정치 자체는 지저분한 것이 아니다. 세상만사가 정치다. 조율하고 합의해 가는 것. 아리스토텔레스도 정치의 핵심을 ‘중용’이라 하지 않았나. 불행한 사건으로나마 어린아이들이 현 시국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니 반가운 일이다. 교원 단체에 따르면 요즘 학교에서 정치 현안에 대해 묻고 궁금해 하는 학생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더 많은 아이들이 관심 갖고 토론할 수 있었으면 한다. 나처럼 내내 정치라곤 모르고 살다가 스무 살 넘어서 갑자기 대선부터 맞닥뜨리는 그런 일은 겪지 않도록 말이다. 그게 민주주의의 기초 체력을 키우는 일이고 또 한 번의 12월 사태를 막는 길이 될 것이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 2024-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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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非)비혼 출산이 불러일으킨 비혼 출산 논란[이미지의 포에버 육아]

    ‘포(four)에버 육아’는 네 명의 자녀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병행하고 있는 기자가 일상을 통해 접하는 한국의 보육 현실, 문제, 사회 이슈를 담습니다. 단순히 정보만 담는 것을 넘어 저출산 시대에 다자녀를 기르는 맞벌이 엄마로서 겪는 일화와 느끼는 생각도 공유하고자 합니다.정치 이슈가 모든 걸 집어삼키기 전인 이번 주 초까지만 해도 한 유명 배우의 사생활 소식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간판 톱스타가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를 가진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더욱 화제가 된 건 그가 ‘아빠로서 아이는 책임지지만 아이 엄마와 결혼하진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다. ‘비혼 출산’이라며 새로운 가족 트렌드에 대한 분석 기사들이 쏟아졌고, 급기야 국회의원들과 대통령까지 나서 사안을 언급하고 관련법을 내겠다고 공언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며칠 뒤 그 배우가 한 영화제 단상에 나서 전 국민에 사과하고 아이를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공식 발표하는 모습은 일련의 사태에서 가장 하이라이트 같은 장면이었다. 그런데 이게 국민들 앞에서 머리를 숙여야 할 일이었을까? 그의 개인사는 이토록 화제를 일으킬 만한 일이었나.● 사실 새로운 일도 아닌데…엄밀히 말하면 이 유명 배우의 사례는 흔히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이야기할 때 말하는 비혼 출산과는 거리가 있다. 보통 비혼 출산이라 하면 자녀를 갖고 싶지만 결혼을 원치 않거나, 결혼제도 하에서는 도저히 뜻을 이룰 수 없는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결혼 외 방법으로 자녀를 갖고 키우는 걸 뜻한다. 해외에서 정자 기증을 받고 혼인 배우자 없이 아이를 낳은 방송인 사유리 씨의 출산이 대표적인 예다. 즉 적극적으로 가족을 이루고 자녀를 갖고 싶은 이들이 비혼 출산을 하고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이룬다. 유럽과 미국 등 많은 선진국에선 이런 식의 가족 구성이 흔하다. 이들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지원하는 다양한 제도가 마련돼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시민연대계약 ‘팍스(PACS)’는 1999년 동성 커플을 법적 동반자로 인정하기 위해 도입되었지만, 지금은 이용자의 90% 이상이 이성애자일 정도로 누구 할 것 없이 보편적으로 이용하는 결합 제도다. 결혼보다는 제한적이지만 팍스 구성원들은 가족으로서 법적 권리를 누린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데 불편이 없는 것은 물론이다.이성애자이고 가족으로 살 거라면 왜 굳이 결혼 대신 연대를 선택할까. 기존에 결혼이라는 제도가 가졌던 법적 의무와 사회문화적인 속박, 억압이 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서구보다 가부장제 부담이 크고 혼외출산은 기대하기 힘든 한국에서 비혼 가족 제도 도입은 초저출산을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의 하나로 꼽혀 왔다. 이를 볼 때 유명 배우의 사례는 비혼 가족을 염두에 둔 적극적 출산과는 거리가 멀다. 출산이 먼저 있었고 부모가 가족으로 살길 원치 않아서 둘 중 한 명이 아이를 맡아 키우게 된 경우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그냥 한부모 가족이 된 것이다. ● 한부모 등 법적 인정받은 가족조차 차별적 시선그렇다면 이 새롭지 않은 가족이 왜 전례 없는 일처럼 화제가 되었을까. 이런 가족조차 낯설 정도로 한국의 가족 문화가 여전히 획일적이고 폐쇄적이기 때문이다.지난 반세기 눈부신 변화와 성장을 이룬 한국이지만 가족 문화만큼은 기존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일명 ‘정상 가족’이라고 하는 이데올로기가 강한 사회다. 정상 가족이란 보통 비슷한 연배의 한국인 아빠와 주부 엄마, 그들의 생물학적 자녀 둘 혹은 하나로 구성된 핵가족으로, 많은 사람이 정상적이고 옳은 형태라 생각하는 가족이다. 이를 벗어난 가족은 법적으로 인정 받은 가족이라 해도 불완전하고 비정상적인 가족으로 여겨진다. 한부모, 다문화, 입양 가족, 엄마가 일하고 아빠가 주부인 가족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이들 수는 결코 적지 않다. 한부모 가족을 예로 들면 국내 이혼, 사별, 미혼 부모 등을 포함한 한부모 가구 수가 2022년 기준 149만 4000가구로 전체 가구의 약 7%, 15가구 중 1가구에 이른다. 다문화 가구의 경우 2021년 대한민국 전체 가구의 1.7%(38만 5000가구), 가구원은 전체 가구원의 2.2%를 차지했다. 특히 출생아 중에선 100명 중 6명에 이르렀다. 광주, 대전에서 한 해 태어나는 전체 출생아에 맞먹는 수다. 결코 소수자라 보긴 어렵지만, 여전히 소수자로 인식되고 사회에선 잘 드러나지도 않는다. 외국에선 비혼 상태에서 연애하다 출산하고 아이를 부모 중 한 명이 키우는 경우도 흔하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로 간주돼 온 게 사실이다. 이번 유명 배우 사례도 상대 여성이 당당히 아이를 낳고 키운다고 한 점에서 더 새롭게 인식됐을 것이다. ● 고령사회, 어르신 비혼 수요도 늘 것비혼 출산의 비율이 전체 출산의 5%도 안되는 나라는 한국, 일본 등 전 세계에서 극소수에 불과하다. 유럽 등에선 절반 이상이 비혼 출산으로 태어난다. 결혼을 해야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사회에서 결혼과 출산은 모두 더욱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비록 새로운 가족 형태는 아니었지만 유명 배우 사례는 한국 사회가 여전히 가족에 대해 얼마나 닫혀있고 편협한가 일깨운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 배우가 국민 앞에서 사과하는 장면은 외국인들 눈에 매우 희한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상대 여성이나 아이에게 사과할 일이 있다면 모를까, 우리가 그 사과를 받을 일은 없다. 비혼 가족 제도는 흔히 생각하듯 자유분방한 요즘 젊은이들만을 위해 필요한 제도가 아니다. 고령사회로 갈수록 어르신 수요도 늘어날 것이다. 독신인 어르신은 물론 이혼, 사별로 혼자가 되는 어르신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번 결혼했거나 자녀가 있는 경우 다시 결혼하는 건 여러모로 부담스럽다. 비혼 가족 제도가 도입된다면 많은 어르신이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여생의 동반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한국처럼 노인 빈곤률이 높고 노후에 연금 등 사회보장이 약한 사회에선 황혼 비혼 가족이 새로운 돌봄 대안도 될 수 있다.정치권에서 오래간만에 생활동반자법이나 비혼 출산, 동거 지원 이야기가 나와 반가웠는데, 정치 이슈 탓에 다시 묻히는 것 같아 걱정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건 종북세력 척결이나 계엄 단죄가 아닌 10년, 20년 뒤 미래에 대한 준비다. 2025년이면 초고령사회로 들어선다. 출산율은 조금 오른대도 0.7명 대에 불과하다. 결혼과 출산에 대한 획기적인 변화 없이 5년, 10년 내 큰 변화를 기대하긴 힘들다. 지금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 2024-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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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소멸’ 주장했던 英석학 “저출산 해소하려면 ‘자녀=토큰’ 인식 사라져야” [이미지의 포에버 육아]

    ‘포(four)에버 육아’는 네 명의 자녀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병행하고 있는 기자가 일상을 통해 접하는 한국의 보육 현실, 문제, 사회 이슈를 담습니다. 단순히 정보만 담는 것을 넘어 저출산 시대에 다자녀를 기르는 맞벌이 엄마로서 겪는 일화와 느끼는 생각도 공유하고자 합니다.데이비드 콜먼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78)는 몰라도 “한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소멸하는 국가가 될 것”이라 한 그의 말을 들어본 사람은 많을 것이다. 약 20년 전 한 이 발언으로 이역만리 타국에서 유명 인사가 된 콜먼 교수는 아마도 근래 한국을 가장 자주 찾는 해외학자 중 한 명일 것이다. 합계출산율이 떨어지다 못해 0명대에 이르면서 그의 발언이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난해에 이어 다시 한국을 찾은 콜먼 교수를 12일 서울 동대문구 DDP 아트홀에서 만났다. 콜먼 교수는 옥스퍼드대 명예교수이자 영국 내무부, 주택부, 환경부 특별 고문을 역임하고 인구 관련 8권의 책과 150편 이상의 논문을 저술한 인구학 분야 세계적 석학이다. 가장 먼저 그가 지난 세월 수없이 들어왔을 질문부터 던졌다. “한국이 정말 가장 먼저 소멸할까요?”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팔순을 앞둔 노학자가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내가 오래전 했던 말은 ‘조건부’였어요. 한국이 낮은 출산율 경향을 이어가고 이민자도 별로 늘지 않는다면 수학적으로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죠.” 그러나 콜먼 교수는 한국의 상황이 결코 긍정적인 것은 아님을 분명히 했다. ―최근 몇 달간 한국에서 전년 동월 대비 출생아 수가 오르고 ‘아이 낳는다’는 청년이 늘었다긴 합니다. 좋은 신호일까요?“출산율이 상승할 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한국의 출생아 수는 전반적으로 감소하는 추세고 지난해에는 합계출산율이 0.72명을 기록했습니다. 이건 분명 좋은 상황이 아닙니다.”―당신은 한국 저출산 원인으로 ‘압축적 근대화’를 지목해 왔습니다. 특히 전통적 가족 문화가 급격한 경제사회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 남녀 격차가 벌어지고 육아가 여성에 집중된 점을 꾸준히 지적했는데요. “여성들의 고용 안정성을 높이는 건 매우 중요합니다. 고용 안정성이 출산과 가정생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건 이미 많은 사회과학 연구가 입증한 사실입니다. 자녀를 갖는다는 것은 장기 투자입니다. 15~20년간 지출과 시간을 묶이게 되는데 이는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죠. 당연히 안정적인 고용 상태가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고용이 안정적일 뿐 아니라 정책도 안정적이고 일관돼야 합니다. 프랑스가 높은 출산율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프랑스 사람들 누구나, 대통령이 누가 되든 관계없이 가족을 지원하는 정책은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실제 프랑스의 지원 정책은 갈수록 나아지고 있고요.”―그런데 프랑스와 달리 한국에선 가족과 자녀를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도 많이 옅어진 것 같습니다.“그건 사실일 수도 있지만 서유럽이라고 그런 변화가 없는 건 아닙니다. 가족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는 비단 한국에서만 일어난 일은 아니거든요. 한국과 프랑스의 가족관에 있어 큰 차이점을 꼽으라면 저는 프랑스에서는 태어나는 아이의 절반이 혼외출산일 정도로 결혼 밖 가족이 많다는 점을 꼽을 겁니다. 내가 어렸을 때인 1950년대 그러니까 60, 70년 전 영국의 혼외출산율이 4~5% 정도였는데 지금 한국의 혼외출산율과 비슷합니다(※영국의 혼외출산율은 2022년 영국 통계청 기준 51.4%다).”―결혼해야만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생각이 한국에서 출산을 더욱 부담스럽게 만드는 건 사실입니다. 결혼은 단순한 형식을 넘어 많은 문화적 구속과 억압을 내포하니까요. “지금 서구에서 여성의 가족 내 지위와 인식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여성이 남성에게 복종해야 한다거나 여성이 육아를 전담해야 한다는 식의 인식은 이제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여성만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남성도 가장으로서 가정을 부양해야 한다는 부담을 집니다. 특히 경쟁이 치열한 요즘 한국에선 부모조차도 하나의 ‘자원’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잘 지원해야 한다는 부담이 전보다 더 커진 거죠.“그건 굉장히 흥미로운 지적이네요.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세계 모든 부모가 자녀로부터 보상을 얻고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보통 그 보상이란 자녀를 키우며 느끼는 사랑, 즐거움 같은 것입니다. 물론 자녀가 부유하고 유명해지면 좋겠지만, 그게 육아에서 가장 중요한 보상은 아닐 겁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그것이 최우선적인 문제가 된 것 같군요. 그런 생각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부모와 자녀를 동일시하는 전통적 가족관 영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부모가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 사회경제적으로 성공시키고 싶어 하고, 이를 자신의 성공으로 여깁니다.“자녀의 성공이 가족과 부모의 성공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는 건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부모는 자녀를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자녀가 문제를 일으키거나 실패했을 때 그것이 부모의 평판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제가 인지하지 못했던 것은 (한국에선) 자녀가 (가족의 성공을 보장하는) 일종의 ‘토큰(token)’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인식을 벗어나는 게 저출산을 극복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일이 될 겁니다. 모두가 상위 5% 대학에 가고 최고 직업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이죠. 대부분은 승리하지 못할 싸움에 에너지와 시간과 돈을 낭비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만난 한국 청년들은 “잘 키우지 못할 바에야 낳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일명 ‘완벽한 부모 증후군’입니다. 이런 부담이 저출산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상위 5%를 향해 모두가 달리는 경쟁은 자멸적이고 무의미합니다. 교육과 성공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줄이고 조금 덜 경쟁한다면 지금처럼 많은 에너지와 시간, 돈을 쓰지 않아도 될 텐데요.”―가능할까요?“매우 어려운 일일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효과적인 방법을 고민해 봐야겠죠. 명문대학 입학 인원에 할당량을 부여하는 방법이 있을 겁니다. 이미 한국에서 일부 시행 중이지요? 오늘 아침 포럼에서도 누군가 언급했는데, 중앙 정부의 기능을 지방으로 이전하여 지역에 고급 일자리를 만들고 인구를 분산하면 주택 문제와 각종 비용 압박이 줄어들 겁니다. 다양한 취향과 선호를 가진 사람들이 늘어날 수도 있겠죠. 나는 자녀가 세 명입니다. 당신보다는 한 명이 적군요. 당신은 어떻게 네 명을 키우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다음에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좋겠군요.”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 2024-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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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육아 페널티’를 없애는 법[이미지의 포에버 육아]

    ‘포(four)에버 육아’는 네 명의 자녀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병행하고 있는 기자가 일상을 통해 접하는 한국의 보육 현실, 문제, 사회 이슈를 담습니다. 단순히 정보만 담는 것을 넘어 저출산 시대에 다자녀를 기르는 맞벌이 엄마로서 겪는 일화와 느끼는 생각도 공유하고자 합니다.최근 모 언론사 기자가 회사 측을 상대로 노동청에 진정을 냈다. 이 기자는 언론인 대상 연수 프로그램에 지원했다가 면접 과정에서 회사 임원으로부터 ‘육아휴직으로 인한 공백’이 길다는 지적을 받았고, 결국 최종적으로 휴직 공백 등을 이유로 탈락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소식을 들은 노동조합과 사내 구성원들은 ‘육아휴직자 차별’이라며 즉각 회사에 항의했다. 하지만 사측은 ‘차별은 아니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엔 남녀고용평등법 위반으로 노동청까지 가게 된 것이다. 처음 뉴스를 접했을 때는 회사 측의 문제 발언이 명확했기 때문에 금방 해결이 되겠거니 했다. 누구도 아이 키우는 사람을 차별하는 게 ‘옳다’고 할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한 달여 지난한 싸움을 거쳐 결국 노동청 진정까지 가게 되는 걸 보면서 또 한 번 이런 문제의 해결이 어려움을 실감했다. 출산과 육아에 따른 고용상의 불이익, 일명 ‘육아 페널티(차일드 페널티)’는 우리 사회에 적잖이 만연해 있지만, 이처럼 그 해결이 쉽지 않다. 왜일까?● “일 못해서 그런 거야” 증명 어려운 육아 페널티첫째, 육아 페널티는 증명부터 어렵다. 사측이 ‘육아휴직’을 정확히 언급하며 차별의 티(!)를 내주면 좋겠지만 그런 경우는 잘 없다. 두 번 육아휴직 한 회사원 A 씨(39)는 동료들보다 수년 늦은 승진에 대해 상사에게 문의했을 때 이런 답을 들었다. “고과를 종합적으로 고려했다.” 한 마디로 동료들보다 일을 못 했기에 승진도 늦다는 이야기였다. 평소 느끼기에 남들보다 좋은 성과를 내왔던 그라 납득할 수 없었지만, 회사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거나 소송을 걸지 않고선 증빙할 방법이 없었다. “내 탓이라고 딱 그래 버리니까 그때부터 말문이 턱 막히더라고요. 육아휴직 얘기를 했으면 어떻게든 들이받았을 텐데….” A 씨 말이다.설사 차별을 당한 게 맞다고 해도 그게 A 씨의 육아휴직 탓인지, 성별 탓인지, 심지어는 성격이나 외모 탓인지도 알기 어렵다. 인사에는 정말이지 무수히 많은 요소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능력을 평가하는 지표도 다양하다. ‘오래 쉰 탓인지 업무 성과가 좋지 않아서’ 또는 ‘너는 10년 일했고, 네 동기는 13년 일해서’ 승진을 못한 거라고 설명하면 대부분 대거리할 말이 없어진다. “네가 월등히 잘했다고 해 봐. 승진 못 했겠니? 휴직 탓하지 말고 그럴 시간에 좀 더 정진해.” 결국 이런 소리를 듣고 끝나기 십상이다.● 유자녀 vs 무자녀…서로 다른 입장두 번째 이유는 좀 더 골치 아프다. 노노(勞勞) 간에도 입장 차가 있어 회사가 마냥 유자녀 직원을 두둔할 수 없다. 그러기엔 요즘 회사에 무자녀 직원도 많고 또 갈수록 늘고 있다. 이들은 업무만 두고 객관적으로 평가받길 바라는 게 사실이다. 내가 ‘쎄빠지게’ 일하는 동안 집에서 예쁜 아기를 키우다 돌아온 동료가 나와 같은 평가를 받는 건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아이를 둔 B 씨(40)도 인사 담당 직원에게 육아휴직 기간 경력 인정 관련 문의를 했다가 “육아휴직자와 비육아휴직자를 동일한 잣대에서 평가하는 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취지의 말을 들었다. “어쨌거나 (B 씨가) 쉰 건 맞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실제 요즘 무자녀 직원들의 상대적 박탈감도 커지고 있다. 유자녀 동료들이 누릴 수 있는 복지혜택이 점차 늘어나면서다. 요새 기업 HR 담당자들이 가장 골치 아파하는 것 중 하나가 ‘왜 자녀 장학금은 있고 본인 장학금은 없느냐’ 같은 ‘유자녀 vs 무자녀’ 불만 충돌이다. 최근 육아휴직 급여와 기간이 늘고, 단축근로 범위가 확대되고, 각종 가족 지원도 커지면서 무자녀 직원들 가운데 이제는 되레 자신들이 차별받는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적지 않아졌다. 이런 가운데 육아 페널티를 해소하자며 육아휴직자의 경력 인정 같은 이야기를 해봐야 흔쾌히 수용될 리 없다. 내 지인 중 한 명은 “안 그래도 혼자라 서러운데 (유자녀 동료들은) 휴직도 누려, 일찍 들어가, 지원금 받아, 그러면서 일도 나만큼 한 걸로 인정받겠다니 그건 도둑놈 심보 아니냐”고 반 농담, 반 진담처럼 말하기도 했다.● 육아로 인한 불이익부터 명확히 해야앞선 두 가지 이유는 육아 페널티가 더 이상 못된 업주나 상사, 동료들 같은 개인과 개인 간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사람과 (인사)제도, 집단과 집단 간의 문제가 된 것이다. 과거 모성보호제도가 얼마 확산되지 않았을 때, 소수의 이용자와 소수의 억압자만 있었을 때는 각 개인에게 유자녀 직원에 대한 배려와 공동체 정신 같은 것을 요구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두루뭉술하고 이상적인 말로 다수의 사람을 설득해서 육아 페널티를 없앨 순 없다. 제도를 정비하고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일단 차별은 없어야겠다. 누구든 업무능력과 무관하게, 자신이 바꿀 수 없는 처지로 인해 부당하게 차별받아선 안 된다. 그게 여성이든, 아빠든, 육아휴직자든 말이다. 그러나 지금까진 무엇이 육아휴직으로 인한 차별이고 어디까지가 공정한 차등인지 잣대가 모호했다. 사업장별로 상황도 천차만별이라 ‘2년까지 휴직은 동일평가, 2년 넘어가면 차등’ 이렇게 무 자르듯 하기도 어려웠다. 이러다 보니 근로감독하기도 쉽지 않았다. 부당해고, 육아휴직 미허용 같이 차별행위가 선명한 위반 행위와 달리 ‘부당 처우’는 적발해서 처벌하기가 어려웠던 이유다. 정부가 꾸준한 사례 수집과 단속으로 전범을 만들어 가야 한다. 무엇이 불이익하고 부당 처우인지 좀 더 명확한 그림을 그려주는 것이다. 지금보다 정확한 기준과 가이드라인이 생기면 근로자들도 보다 안심할 수 있고 기업도 불이익을 범하지 않도록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육아가정뿐 아니라 모두가 누려야 할 워라밸그럼 무자녀 직원이 상대적으로 불리한 게 아니냐고 걱정할 수 있다. 육아휴직과 단축근로에 따른 인사상 불이익을 없앤다고 무자녀 직원이 피해를 입진 않는다. 둘은 제로섬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를 키우든 말든, 개인 사정이 있든 없든 똑같은 잣대를 적용해 평가하는 건 ‘공정’한 게 아니라 그냥 ‘기계적 평등’일 뿐이다. 진짜 공정한 건 오히려 유자녀 직원들이 같은 출발선에 설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하지만 ‘육아 페널티’를 없앤다고 유자녀 직원에게만 ‘육아 인센티브’를 주는 건 조심해야겠다. 그런 건 직원 간에 위화감을 부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자녀가 있든 없든 ‘워라밸’의 혜택을 누리게 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모두가 누릴 수 있다면 딱히 서로를 질시할 필요가 없다. 육아휴직이 아니더라도 누구든 부모나 친척 돌봄으로 불가피하게 휴직하거나 일찍 퇴근해야 한다면, 피치 못할 개인 사정으로 휴가를 내야 한다면 쉬이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육아휴직’을 ‘돌봄휴직’으로 바꿔보는 건 어떨까? 미래엔 부모나 형제, 혼외반려자, 반려생물까지, 돌봐야 하는 대상이 확대될 수 있으니 말이다.육아 페널티는 역설적으로 유자녀와 무자녀까지 아우르는 범복지 시스템이 꾸려져야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먼 길이다. 하지만 차근차근 가보면 된다. 지금부터.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 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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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출산 반환점 돌려면 ‘육아의 공포’를 걷어내야 한다[이미지의 포에버 육아]

    ‘포(four)에버 육아’는 네 명의 자녀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병행하고 있는 기자가 일상을 통해 접하는 한국의 보육 현실, 문제, 사회 이슈를 담습니다. 단순히 정보만 담는 것을 넘어 저출산 시대에 다자녀를 기르는 맞벌이 엄마로서 겪는 일화와 느끼는 생각도 공유하고자 합니다.“○○이 보고 싶다, 그치?”벌써 몇 번째 아이들에게 되묻고 있었다. 둘째가 친구 생일 기념 ‘파자마 파티’를 한다며 생애 처음 외박한 날, 어쩐지 휑뎅그렁한 저녁 식탁을 보며 남은 아이들에게 계속 둘째 없으니 허전하다, 둘째 벌써 보고 싶다 되뇌었다. 고작 하룻밤 외박이고 아이가 넷에서 셋이 됐을 뿐인데 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허전함’이라니. 넷인 삶에 적이 익숙해졌던가 보다. 많은 사람이 “넷을 키우다니 힘들지 않냐”고 묻는다.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지내다 보면 ‘뉴노멀’에 익숙해지게 된다. 무엇보다 아이 키우는 기쁨이 힘듦을 상쇄하고도 남아 힘들단 생각보단 행복하단 생각이 크다. 아마 부모들 대부분 비슷하지 않을까. 각자의 사정과 생각이 다르기에 남에게 출산을 권하진 않지만, 육아란 그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는 소중하고 행복한 경험이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 아이를 낳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소식은 여러 의미로 반가운 소식이었다. ● “올해 출산율 반등할 것 같다”통계청에 따르면 8월 출생아가 지난해 같은 달 대비 1000명 이상 늘었다고 한다. 이런 증가세는 두 달째다. 2024년 8월 출생아 수는 2023년 8월에 비해 1124명(5.9%) 증가했다. 7월에도 1516명 늘어 12년 만에 최대 증가 폭을 기록했다. 최근 방문한 한 저출산 토론회에서 정부 측 자문역을 맡고 있는 한 전문가는 “올해 출산율이 반등할 것 같다”고 귀띔했다. 출생아 수뿐 아니라 미래 출산을 가늠할 수 있는 몇몇 지표들이 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공개한 결혼·출산·양육 및 정부 저출생 대책 인식 조사에서도 결혼과 출산 의향을 묻는 질문에 긍정적인 답이 3월보다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2000여 명 조사가 전 국민을 완벽히 대표했다고 하긴 어렵고 ‘의향이 있다’가 반드시 ‘한다’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지만 기존에 늘 언론지상을 장식했던 ‘의향이 줄었다’는 설문조사 결과보다는 분명 고무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저출산이 바닥을 찍은 걸까? 누구도 장담할 순 없다. 하지만 최근의 전환적인 분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동안 한국의 압도적(!)인 저출산 기록 행진엔 사회경제적 어려움뿐 아니라 육아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사회 전반의 비관적 분위기 영향도 컸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 육아 부정적 인식 걷어내기 급선무 결혼하지 않았거나 아이가 없는 청년들과 육아 이야기를 해보면 예외없이 ‘무섭다’, ‘감히 엄두가 안 난다’ 같은 말을 들을 수 있다. 육아는 물론 힘들고 어렵다. 그런데 무섭고 감히 엄두가 안 날 정도의 일일까. 이런 말은 (내 기준에선) 번지점프를 하거나 귀신의 집에 들어갈 때나 쓰는 말이다. 육아가 그런 일일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많은 청년이 육아에 대해 이런 표현을 썼다.그만큼 육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만연하다는 뜻일 터다. 한양인구문제연구원 인구사회문화 연구센터가 올 6월부터 10월까지 10대 이상을 대상으로 결혼·출산·육아를 들었을 때 연상되는 단어를 설문조사했다. 결과는 행복, 감동이라는 단어를 꼽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의무, 스트레스, 고통이라는 단어를 꼽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육아에 대해선 행복, 감동보다 의무, 스트레스를 떠올린 사람이 더 많았다. 상위 4개 단어가 ‘아기’라는 중립적인 단어를 제외하면 모두 부정적이었다. 설문엔 두려움이나 공포 같은 말은 없었지만, 위험, 후회 같은 단어가 적잖이 꼽힌 걸 볼 때 두려움, 공포가 있었으면 그를 뽑는 이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 청년뿐 아니라 기혼자들과 이야기를 나눠 봐도 육아에 대해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이 만연했음을 느낄 수 있다. 아이를 키우며 행복한 순간들이 분명 많았을 텐데, 육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라 하면 ‘힘들다’, ‘후배들에겐 낳지 말라 한다’, ‘아이는 최대한 늦게 가지는 게 좋다’ 같은 이야기들이 자주 나온다.아이를 좋아하고 키우고 싶었던 사람도 이런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들으면 겁에 질릴 수밖에 없다. 앞서 7, 8월 출생아 수 증가는 그 선행지표인 혼인이 늘어난 영향도 큰데, 육아에 대한 공포가 만연할 시 향후 결혼이 늘더라도 출산은 그만큼 따라 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 두려움 부추기는 “심각, 위기” 경고육아에 대한 인식이 왜 이렇게 부정 편향되었을까. 원인을 한두 가지로 단정할 수는 없다. 사회경제적인 어려움도 당연히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아이 키울 때 들어가는 품과 비용, 부모들의 ‘바이탈부터 멘탈까지 탈탈’ 털어가는 현실 고충 사례들은 아이 키우기 좋은 집 마련은커녕 취업조차 요원한 청년들에게 두려움을 심기 충분하다. 미디어 콘텐츠의 영향도 큰 것으로 보인다. 청년들에게 ‘육아와 관련해 부정적인 모습을 주로 어디서 접하냐’고 물으면 TV, 뉴스, SNS 등 주로 미디어라 답하는 경우가 많았다. 젊은 세대가 많이 이용하는 SNS에도 독박육아의 고충이나 아이 키우는 부모의 바쁜 일상을 다룬 콘텐츠가 많다. 반복된 저출산 위기 경고가 외려 역효과를 냈다는 지적도 있다. 언론과 각종 콘텐츠에서 심각하다, 위기다 강조하는 것이 오히려 저출산 인식을 고착화하고 젊은 세대로 하여금 육아를 더 두렵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앞서 한양인구문제연구원 조사에서 ‘저출산 극복 관련 미디어’를 유형별로 나눠 선호도를 조사했는데 저출산 심각성을 강조하는 다큐멘터리를 본 이들은 감성적 광고, 정보를 담은 공익광고를 본 사람들과 비교해 결혼·출산 의향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청년들을 인터뷰했을 때도 “저출산 위기 경고가 지긋지긋하다”, “더 애를 낳지 말란 말로 들린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안 낳아도 되지만 ‘못’ 낳는 사람 없게아이를 낳고, 안 낳고는 개인의 선택이고 거기에 옳고 그른 것은 없다. 하지만 무서워서, 엄두가 안 나서,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서 아이를 ‘못’ 가지는 사람이 많다는 건 문제가 있다. 지금 청년 중엔 그런 사람이 적지 않아 보인다. 이런 가운데 나온 결혼·출산 의향과 출생아 수 증가 소식은 작은 희망을 품게 한다. 여러 제도적 보완과 함께 분위기가 반전되고 있는 것이라면 거대한 초저출산의 추세에도 변화를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유혜미 대통령실 저출생대응수석도 23일 한 방송에 나와 “저출생 반전의 신호가 시작됐다”고 평가했다. 진정 반전의 시작이 되려면 청년들에게 지속해서 희망을 보여줘야 한다. ‘넷 키우니 힘들겠다’가 아니라 ‘넷 키우니 행복하겠다’는 말을 듣는 날이 올까. 정부의 세심한 정책 운용을 기대한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 2024-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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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벨 문학상 쾌거에 기뻐한 당신, 국어는 얼마나 쓰고 있나요?[이미지의 포에버 육아]

    ‘포(four)에버 육아’는 네 명의 자녀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병행하고 있는 기자가 일상을 통해 접하는 한국의 보육 현실, 문제, 사회 이슈를 담습니다. 단순히 정보만 담는 것을 넘어 저출산 시대에 다자녀를 기르는 맞벌이 엄마로서 겪는 일화와 느끼는 생각도 공유하고자 합니다.한국 시각 10일 오후 8시, 스웨덴 한림원의 노벨 문학상 발표를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한국 작가가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않았기에 그저 누가 되는가, 호기심으로 지켜보다가 “South Korean author, Han Kang(한국인 작가, 한강)”이 호명되는 순간 너무 놀라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다른 상도 아니고 노벨 문학상을, 버나드 쇼와 펄 벅, 헤세, 헤밍웨이, 카뮈가 탄 그 상을 한국인 작가가, 한국 작품으로 수상하다니.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감개무량했다. 수상 직후 공개된 노벨위원회와 인터뷰에서 한강 작가는 ‘한국 최초 노벨 문학상 수상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냐’는 질문에 ‘어릴 때부터 한국어로 된 책들을 읽으며 자랐다…한국 문학과 함께 자랐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소식이 한국 문학 독자들과 내 친구 작가들에게도 좋은 일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그의 수상은 한국어와 한글로 작품활동을 하는 많은 작가, 그 독자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긍지와 자부심을 안겼을 것이다. 마침 수상일은 한글날 바로 다음날이었다.● 노벨 문학상 탔지만…“학생 10명 중 2명 교과서도 이해 못 해”‘나랏말ᄊᆞ미 듕귁에 달아 문ᄍᆞ와로 서르 ᄉᆞᄆᆞᆺ디 아니ᄒᆞᆯᄊᆞㅣ(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훈민정음 서문은 너무도 인상적이라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한글 창제 목적이 이 한 문장에 담겨 있다. 한글은 나라말을 오롯이 담기 위해 창제됐다. 세종과 당대 최고 엘리트들이 머리를 맞댄 덕에 우리는 우리의 말은 물론 생각과 문화, 그 미세한 차이까지 담아낼 수 있는 최고의 그릇을 갖게 됐다.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같은 성찬도 이런 훌륭한 그릇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어 맞춤 제작이긴 하나 한글은 그 자체로도 매우 우수한 문자다. 음운을 체계적으로 분석해 만들었기에 전 세계 문자 중 가장 많은 소리를 담을 수 있다고 한다. 한글의 독창적이고도 과학적인 창제 원리를 담은 훈민정음 해례본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한글날만 되면 언론을 도배하는 건 외국어 잠식, 한글 뜻 모르는 아이들, 독서 인구 최저치 같은 우울한 소식이다. 올해도 여지없이 그런 기사들을 볼 수 있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전국 초·중·고 교원 5848명을 대상으로 ‘학생 문해력 실태 교원 인식’을 조사했는데, 교원들 91.8%는 아이들의 문해력이 과거보다 떨어졌다고 답했다. 도움 없이는 교과서의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등 문해력이 부족한 학생이 전체 학생 중 21% 이상이라고 답한 교원은 절반(48.2%)에 달했다. 조사를 통해 수집된 문해력 부족 사례를 보면, 학생들은 시발(始發)점을 욕으로 알아듣고 금일(今日)을 금요일로, 이부자리를 별자리로 이해했다고 한다. 두발 자유화 두발을 두 다리, 족보를 족발보쌈세트 줄임말로 안 아이도 있었다.  ● 어른도 할 말 없어…절반 이상 1년에 책 한 권 안 봐인터넷에 떠도는 요즘 아이들 맞춤법 오류 사례를 보면 ‘이것 웃기려고 만든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황당한 것들도 많다. 안 핵갈려요(안 헷갈려요). 권투를 빈다(건투를 빈다), 문안한 스타일(무난한 스타일), 골이따분한 성격(고리타분한 성격), 유종애미(유종의 미), 눈을 부랄이다(눈을 부라리다), 일해라 절해라 한다(이래라저래라 한다) 등. 놀라운 건 현직 교원에게 보여주었더니 요새 일기나 과제를 받아 보면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사례들이라고 했다는 점이다. 문해력 저하는 그만큼 한글로 읽고 쓰지 않는 데 따른 것이다. 아이들만 뭐라 할 건 아니다. 지난해 우리나라 19세 이상 성인의 독서율도 43%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57%, 즉 절반 이상은 1년에 책 한 권 읽지 않았다는 뜻이다.온라인커뮤니티를 둘러보면 어른들의 국어 수준도 만만찮음을 볼 수 있다. 금새(금세), 않된다(안 된다), 어떻해(어떡해) 같은 맞춤법, 띄어쓰기 오류는 물론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래어로 점철된 문장(시크한 인상과 큐티한 복장), 비문, 비속어까지, 게시물 하나 걸러 하나씩 이런 글을 발견할 수 있다. ● ‘국어보다 영어’ 입사·채용 시험서도 홀대받는 국어‘나랏말ᄊᆞ미’ 이런 상황인데 우리 아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남의 나라말, 영어 교육에 내몰린다. 내 주변에도 자녀를 영유아 때부터 영어 사설 기관(영어 유치원)에 보내는 부모가 적지 않다. 한창 국어 단어와 표현을 왕성히 흡수해야 할 나이의 아이들이 영어 단어와 노랫말부터 배운다. 언젠가 지인들 모임에서 유치원생쯤 되는 아이에게 노래를 시켰더니 영어 동요를 불러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영어유치원에 다니며 매일 영어 노래를 부른다는데, 다들 대단하다며 감탄했지만 솔직히 씁쓸했다. 저맘때쯤 한창 불러야 할 우리 동요에 담긴 한국말이 얼마나 예쁘고 아기자기한데…. 저 아이는 모르고 크는 게 아닐까.물론 국어를 등한시하고 영어 교육에 열 올리는 게 부모와 아이들 탓만은 아니다. 각종 입학, 채용 시험에서 영어가 변별력이 되다 보니 영어 사교육에 아니 몰릴 수 없다. 얼마 전 만난 한 외국인 취재원은 한국에서 학교와 직장을 다니며 “에세이(글쓰기) 시험이 거의 없는 것에 깜짝 놀랐다”고 했다. 여러 나라에서 거주해 본 그는 각국에서 입학, 채용 시험을 경험했는데 대부분 나라에서 에세이 시험이 있는 반면 한국에선 글쓰기 시험이 거의 없고 대체로 단편적인 지식이나 영어 실력을 평가하는 시험이 많았다는 것이다.이렇게 국어가 중히 쓰이지 않는데 사람들이 국어를 공부할 이유가 없다. 안 그래도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꼭 필요한 스펙과 정보만 습득하기도 바쁘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자기기를 통한 짧고 빠른 콘텐츠 소비까지 확산하면서 긴 호흡의 국어를 읽고 쓸 기회는 더욱 줄어들고 있다. ● 한강의 수상에서 그치지 않기를노벨상 수상 소식 직후 각종 온라인 서점에서 한강의 소설이 동나고 오프라인 서점에서도 품귀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문학상 수상 소식을 계기로 한 명이라도 더 책을 읽고 한강 작가의 글 세계도 접할 수 있게 됐다니 기쁘다. 부디 이런 열기가 금세 사그라지지 않고 다른 K문학 작품으로, 또 다른 책으로 번져 나가길 빈다. 그게 한강 작가도 수상소감에서 바란 긍정적 선순환 아닐까. 우리가 이토록 기쁘고 뿌듯하게 맞이한 노벨 문학상 수상은 국어가 좀 더 소중하고 중요하게, 그리고 많이 쓰여야 또 나올 수 있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 2024-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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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렴한 돌봄은 지속가능하지 않다[이미지의 포에버 육아]

    ‘포(four)에버 육아’는 네 명의 자녀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병행하고 있는 기자가 일상을 통해 접하는 한국의 보육 현실, 문제, 사회 이슈를 담습니다. 단순히 정보만 담는 것을 넘어 저출산 시대에 다자녀를 기르는 맞벌이 엄마로서 겪는 일화와 느끼는 생각도 공유하고자 합니다. 서울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에 참여했던 필리핀 가사관리사 두 명이 무단이탈한 일로 외국인 가사관리사에 대한 논란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생각보다 빠르긴 하지만 사실 무단이탈 사고는 예고된 일이었다. 가사관리사들의 임금이 제조업 고용허가제 외국인 근로자 임금보다 낮게 책정되면서 “이럴 거면 다른 일하지 뭐 한다고 가사관리사 하겠느냐”거나 “차라리 불법체류자로 식당 일을 하는 게 더 낫겠다” 같은 회의적인 반응이 제도 도입 초기부터 꾸준히 제기됐다. 이번 이탈자들이 정말 임금 불만으로 작정하고 무단이탈한 건지는 수사를 지켜봐야겠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소되지 않는 한 이탈과 불만은 분명 또 불거질 것이다. ● 돌봄 부담 줄여? 12년째 부족한 아이돌봄 지원부터 외국인 가사관리사 사업은 육아 가정의 돌봄 부담을 줄여준다는 취지로 도입되었다.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저렴한 동남아 등 외국에서 돌봄 인력을 들여와 활용함으로써 육아 가정의 양육 비용 부담을 경감한다는 것이다. 맞벌이, 한부모 육아 가정 입장에서 돌봄 비용이 부담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부모들이 없는 시간 쪼개 이모님 면접을 보고, 고심 끝에 모신 이모님이 그만두신다면 절망하고,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멘탈이 탈탈 털려 ‘요샌 이모복(福)이 오복(五福)’이라며 탄식하는 이유는 돌봄이 그저 가격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이들은 줄어 두 명도 잘 낳지 않는 시대에 갈수록 더 금지옥엽이 되어갈 자녀를 위해 저렴한 돌봄을 들이고픈 부모가 앞으로 몇이나 될지 의문이다. 물론 돌봄 수요는 다양할 수 있다. 사정이 어려워서 저렴한 돌봄을 이용할 수밖에 없거나, 영어 등 목적으로 외국인 가사관리사를 원하는 집도 분명 있는 게 사실이다. 후자라면 굳이 외국인 돌봄 인력을 저렴하게 만들어서 들여올 일은 아니다. 가사관리사의 다양성을 키우는 차원에서 현 가사관리사 시장에 외국인이 진출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면 될 일이다. 그럼 언어와 교육에 특화된 더 우수한 인력이 들어올 수 있다. 돌봄 비용이 부담인 가정을 위하는 것이라면 제발, 딴 거 하지 말고 이미 있는 제도부터 개선하시길 바란다. 어느덧 15년이 된 아이돌보미 지원사업은 여전히 인력, 지원 모두 충분치 않다. 아직도 돌보미가 부족해 줄을 서야 하는 지역, 시간대가 있고, 지원금도 예산 한정 탓에 특정 소득 이하 가정만 받을 수 있다.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긴 부끄럽지만) ‘애국자’ 소리 듣는 아이 넷 엄마 기자도 지원 대상에 들지 못해 매달 월급의 60~70%를 아이돌보미 비용으로 지출하고 있는 상황이다. 담당 부처에서 예산을 확대해달라고 계속 개선안을 올리고 있지만 잘리고 거부되길 수 차례다. 이래 놓고 갑자기 비싼 돌봄 탓을 하며 저렴한 외국인 돌보미를 들여오자니 당황스러울 뿐이다. 아이돌보미 예산 자를 때는 비싼 돌봄이 문제가 아니었던가.● 최저임금 차등, 장기적으로 국내외 인력 질 악화시킬 것 값싼 돌봄이 최저임금이란 벽에 가로막히자 정부와 서울시는 최저임금 차등화까지 들고 나왔다. 이건 정말이지 벼룩 잡자고 초가삼간을 뒤집어엎는 일이다. 최저임금 차등화는 매년 최저임금위원회의 가장 큰 쟁점이자 노사 간 해묵은 갈등 사안이다. 갑자기 이런 식으로 특정 직군, 특정 국적부터 트고 볼 일이 아니다. 지난 수년간 애써 증진한 가사관리인력의 권리와 위상은 또 어떤가. 외국인 가사관리사를 도입하자고 주장하는 측이 이유로 내세웠던 것 중 하나가 국내 가사관리 인력의 지속적 감소, 고령화인데 가사관리 인력이 계속 줄고 고령화한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처우가 열악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가사관리사 하면 과거 ‘식모’나 ‘파출부’를 떠올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중년의 지인들이 일자리를 찾을 때 아이돌보미 등 가사관리 일자리가 어떠냐고 추천하는데, ‘나이 들어서 왜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하느냐’는 식의 부정적인 답을 받을 때가 많았다. 이런 인식은 그동안 가사관리 인력의 일도 일이지만 급여가 너무 낮았던 데서 기인한다. 이미 국내 민간업체 가사관리 인력의 상당수가 중국 동포로 채워지며 상대적으로 적은 급여를 받는 상황을 감안할 때 외국인 가사관리사의 낮은 급여는 국내 가사관리 인력의 임금과 지위를 더 열악하게 끌어내릴 가능성이 높다. 장기적으로 보면 이건 가사관리 인력 지원자를 더 줄어들게 할 것이고 인력 감소는 인력의 질 저하로 이어질 것이다. ● 여성이 하던 무급 노동, 外여성이 싼값에…‘여성=육아’ 인식 강화 우려최근 가사관리사의 최저임금 차등화에 동의한다는 한 정치인이 쓴 칼럼을 읽었다. 우리나라 필리핀 가사도우미 임금은 홍콩의 3배다, 싱가포르에서도 필리핀 도우미가 가사와 육아를 도맡아 함으로써 여성이 커리어를 계속할 수 있었다, 젊은 세대의 새로운 시작을 도울 수 있는 변화다…. 가사관리사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철저히 우리 출생아 수를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서 역할만 풀어놓은 걸 보고 이것이 국민을 대표해 입법을 책임진 사람의 생각이라는 데 실망과 뜨악함을 금할 수 없었다. 돌봄 인력이 누구고 어떤 처우를 당하든 아이만 잘 낳아 기를 수 있으면 된다는 생각이 지난 세월 많은 능력 있는 여성들을 가정으로 내몰았다. 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지상목표를 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지위에 있던 여성들이 개인의 꿈을 포기했고, 그들이 무급으로 봉사한 가사와 육아의 가치는 평가절하되었다. 작금의 여성들이 그 전철을 밟지 않겠다며 출산을 거부하고 있는데, 나라와 지자체는 ‘그럼 그 고된 일을 다른 여성에게 시킬게’라며 아이를 낳으라고 하고 있다. 이게 모순적이라는 걸 정녕 그들은 모르는 걸까. 육아휴직자가 늘고 육아기 단축근로 이용자도 서서히 늘고 있다고 하지만 육아휴직 이용자 70%, 단축근로 이용자 90% 이상이 여성이다. 여전히 여성이 육아의 상당 부분을 짊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또 다른 값싼 여성 인력에 육아를 전가한다는 발상은 언제든 힘든 상황이 오면 다시 엄마가 그 짐을 져야 한다는 인식을 강화할 수 있다. ● 다양한 선택지 좋지만 저렴하겐 안된다돌봄의 선택지를 다양하게 만들어주겠다는 것뿐인데 뭘 그리 예민하게 생각하냐고, 너무 앞선 걱정이니 일단 좀 지켜보자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 다양한 선택지를 만들어 주는 건 좋다. 대신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주겠다는 생각은 접어주길 바란다. 그런 시스템은 지속가능성이 떨어진다는 걸 최근의 이탈 사태가 보여주었다. 장기적으로 국내 돌봄 시장과 문화에 악영향이 될 가능성도 높다. 다행인 건 지금이 본사업이 아닌 시범사업 기간이라는 점이다. 부디 정부와 서울시가 빨리 문제를 깨달아주길 바랄 뿐이다. 저렴한 돌봄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 2024-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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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젊은 여성들은 아직도 시집살이가 두렵다고 할까[이미지의 포에버 육아]

    ‘포(four)에버 육아’는 네 명의 자녀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병행하고 있는 기자가 일상을 통해 접하는 한국의 보육 현실, 문제, 사회 이슈를 담습니다. 단순히 정보만 담는 것을 넘어 저출산 시대에 다자녀를 기르는 맞벌이 엄마로서 겪는 일화와 느끼는 생각도 공유하고자 합니다.‘재벌가와 결혼했다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주인공. 하지만 사실 주인공의 삶은 지옥 같다. 배우자와 그 가족들이 제멋대로 굴어도 대거리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고, 가족들을 위해 밤낮없이 일하고 제사까지 준비해도 돌아오는 건 당연한 일을 한다는 반응, 그리고 눈칫밥뿐이다. 결국 숨 막히는 결혼에서 벗어나고자 주인공은 이혼을 결심한다.’ 2024년 상반기 방영된 ‘눈물의 여왕’이라는 드라마 줄거리 일부다. 제목과 줄거리를 보니 며느리 눈물 쏙 빼는 ‘시월드(시댁 혹은 시집살이)’ 드라마인가 싶지만, 아니다. 재벌가 자제가 여자, 평범한 배경의 신데렐라 주인공이 남자다. 즉 주인공을 괴롭힌 건 시집살이가 아니라 ‘처가살이’였다. 재벌가 결혼, 시한부 인생 등 뻔한 소재를 얽으면서도 이런 변주 덕에 드라마는 호평을 받았고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사위의 처가살이라는 소재가 ‘변주’라는 건 현실에선 여전히 반대 상황이 일반적이라는 이야기다. 드라마에서 명문대 사위들이 전을 부치고 제사 준비하는 모습이 화제였는데, 현실에서 며느리들은 명문대를 나오건 안 나오건 오랜 세월 전을 부쳐 왔다.2030, 여전히 “시집살이 두렵다”최근 젊은 2030 세대 여성들을 만나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흥미로웠던 건 결혼을 꺼리는 이유 중 하나로 ‘시월드’를 꼽는 여성들이 여전히 많았다는 점이다. 30, 40대는 물론 20대 젊은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남성들은 대부분 고개를 갸우뚱한다. 유부남인 30대 아는 동생에게 인터뷰 이야기를 했더니 그도 의아하다는 얼굴로 이렇게 되받았다. “시집살이요? 언젯적 이야기예요? 우리 와이프는 엄마 집에 가면 우리 엄마가 차린 밥 먹고 설거지도 안 해요. 내가 다 하는데요?!” 이 지인의 말처럼 과거 같은 시집살이는 보기 어려워진 게 사실이다. 나 어릴 때만 해도 며느리를 새벽부터 밤까지 노예처럼 부리면서 따뜻한 말은커녕 하대와 폭언을 서슴지 않는다거나 심지어 폭력까지 행사하는 뜨악한 시집살이 사례를 어렵잖게 찾을 수 있었다. 며느리는 전통 가족 안에서 그야말로 을(乙) 중에 ‘슈퍼 을’이었다. 오죽하면 ‘시집살이는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벙어리 3년’이라는 말까지 있었을까.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요즘 이런 시집살이를 겪는, 혹은 겪을 여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도 시댁에 가면 시어머니께서 차려주시는 밥을 잘 얻어먹기만 하고 오는 며느리 중 한 명이다. 엄마 통해 간접경험…“세상 빨리 안 바뀌어”그런데 젊은 여성들은 왜 아직도 시집살이를 두려워하는 걸까? 현재 20, 30대 여성 중엔 엄마나 주변 사람을 통해 간접적으로 시집살이를 경험한 사람이 많다. 직접 겪진 않았어도 그 고충을 옆에서 지켜봤다. 24세 여성 A 씨는 명절, 제사 때마다 엄마와 함께 제사를 준비했다고 한다. “엄마가 음식을 엄청 많이 해야 했는데, 그거를 제가 다 옆에서 같이 했어요. 그러다 보니 매년 명절만 오면 제가 다 두려울 정도였거든요.” A 씨는 본인이 결혼했을 때 그런 걸 요구하는 시댁을 만날까 무섭다고 했다.세상이 많이 바뀌었대도 여전히 바뀌지 않은 게 많다는 점도 이들이 든 이유다. 역시 24세인 또 다른 여성 B 씨는 친구 사례를 꺼냈다. “제 친구 남자 친구가 신발 같은 것도 자기가 안 빨고 그냥 베란다 놔두면 어머니가 알아서 빨아주시고, 밥도 차려놓으면 먹고 설거지도 안 한다고 했거든요. 어느날은 남자 친구가 ‘혹시 된장찌개 끓일 수 있냐’ 묻더라는 거예요. ‘밀키트 사 먹으면 된다’ 그러니까 자기는 그런 거 싫다고, 못 먹는다고, 직접 끓여달라 그러더래요. 그런 애들 아직 있는 거 보면 세상은 그렇게 빨리 안 바뀌는구나, 그런 생각 들죠.”결국 결혼하면 과거만큼은 아니어도 과거 아내, 며느리, 엄마로서 기대되던 전통적 역할에 어느 정도 종속될 거라는 게 젊은 여성들이 가진 두려움이었다. 명문대로 꼽히는 대학을 졸업한 29세 직장 여성 C 씨는 유년 시절 설거지를 해본 기억이 거의 없다. 한데 그 이유가 서글프다. “우리 엄마, 아빠가 귀에 못이 박히게 한 얘기가 ‘어차피 시집 가면 만날 설거지할 텐데 지금부터 하지 말라’는 거였어요. 시부모님도 이런 생각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은데 아무리 나 혼자 거부한다고 되겠어요?”(C 씨)사소한 듯 사소하지 않은 차별과거와 비교할 때 사소하고, 어쩌면 시부모님이나 남편은 깨닫지도 못할, 무의식중에 나온 별 뜻 없는 행동을 차별이라 하고 시집살이로 부르는 건 과한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소한 듯 사소하지 않다’는 게 여성들의 말이었다. “친구 중에 시댁 일로 싸우다가 결국엔 이혼한 친구가 하나 있어요. 결혼할 때 남편이랑 명절 공평하게 챙기기로 약속했는데, 결혼하고 나니 명절 당일에는 무조건 남자 집에 가더라는 거예요. 친구가 그걸로 계속 뭐라고 하니까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남편은 이해를 못 하더라는 거죠.” 37세 여성 D 씨 말이다. “사실 차별이란 게 진짜 치사해 보여서 말하기도 어려운 것들이었거든요. 예를 들면 시댁에서 닭을 삶았는데 다리를 자기만 안 준다든가. 근데 그런 거 하나하나가 쌓이면 사소하지 않잖아요. 집안에서 며느리 위치를 보여주는 건데요. 막말로 여자들은 시댁에서 누워있는 것조차 불편한데. 사위는 ‘백년손님’이잖아요?”차별이 크냐, 작으냐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담고 있는 며느리의 지위에 대한 인식, 가부장제 문화, 남편이 우선시되는 분위기가 불편하다는 게 여성들 말이었다. 그 때문에 닭다리를 안 주거나, 명절 당일은 늘 시댁이 우선순위인 게 결코 작고 사소한 차별로 치부될 수 없었다.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여성이 여전히 낮은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기 때문이었다.美 ‘캣 레이디’ 논란…여성 전통 역할에 반발, 韓뿐만 아냐여성들의 이런 생각을 피해의식이나 과대망상으로 치부할 순 없다. 여권이 크게 신장했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 많은 성차별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한국의 남녀 임금 격차는 OECD 부동의 1위다. 대기업 여성 임원 비율 역시 11년째 꼴찌다. 부부 중 누군가 일을 포기해야 할 때 일을 포기하는 건 대체로 여성이기 때문이다. 생애 경력 단절을 경험하는 여성이 전체 10명 중 4명에 이른다. 입사할 땐 분명 여자가 많았는데 시간이 흘러 중간 관리자쯤 가면 남자만 남는 직장이 허다하다. ‘여성은 이럴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기반해 알게 모르게 성별분업을 하고 있는 직장도 많다. 만화나 예능프로그램에서도 여성은 대체로 서브 캐릭터다. 많은 여성이 결혼과 출산을 거치며 이런 차별이 강화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관련 설문 조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결혼과 출산에 부담을 느끼거나 이들을 기피하는 비율은 늘 남성보다 여성이 높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2024년 청년 인식 조사에 따르면 결혼하지 않은 남녀 중 결혼 의향이 없고 나중에도 하고 싶지 않다는 답변은 22.8%였는데, 남녀로 나눠 보면 남자 13.3%, 여자 33.7%로 여성이 2배 이상 많았다. 자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비율 역시 남녀 차이가 큰데 61.1%, 남자는 69.7%, 여자는 51.9%였다. 특히 25~29세 젊은 여성은 34.4%에 불과​했다. 미국에서도 ‘캣 레이디(Cat Lady·아이 없는 독신 여성을 비하하는 말)’ 논란이 한창이다. 공화당 밴스 부통령 후보가 과거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대통령 후보 등 일부 여성들을 두고 “고양이나 키우는 독신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고 나라의 미래까지 망친다”고 비판한 발언이 소환되면서다. 이로 인해 공화당에서 등을 돌린 여성이 적지 않다. 가족의 일원으로서 출산, 가사, 내조를 강요받으며 차별당했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비단 한국에만 있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올 추석엔 함께 전을 부치자여성들이 일방적으로 희생해 왔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남성들이 잘못했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전통사회에서 남녀의 성 역할이 그러했고, 그로 인해 남성들도 피해를 봤다. 남성은 가장으로서 책무와 부담을 크게 지어 왔다. 다만 분명한 건 지금 이 순간, 남성보다는 여성이 결혼과 출산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더욱 꺼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출산의 주체는 누가 뭐래도 여성이다. 추석이다. 오래간만에 모인 가족들이 서로 사는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눌 터다. 혹 저출산이 문제라며 혀를 차고 있다면 지금 당장 부엌으로 달려가 설거지나 전 부치기를 돕는 건 어떨까.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 2024-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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