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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월드컵과 함께 3대 글로벌 이벤트로 꼽히는 엑스포가 12일 오사카에서 개막했다. 1970년 오사카, 2005년 아이치에 이어 일본에서 열리는 세 번째 등록 엑스포다. 오사카가 개최지로 선정될 때만 해도 전후 일본의 부흥을 알렸던 55년 전 오사카 엑스포의 영광을 재현하리라 들떠 있던 현지인들은 이번엔 시작부터 저조한 흥행에 ‘동네 잔치’로 끝나는 것 아니냐며 불안해하고 있다. ▷오사카 엑스포 개최 지역은 매립지에 만든 인공섬 유메시마다. 엑스포 상징물인 세계 최대 목조 건축물 ‘그랜드 링’(둘레 2km) 안팎으로 한국을 비롯해 각국의 전시관 42개가 마련돼 첨단 기술을 선보인다. 일본 정부는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아 한국인들이 몰려들기를 기대하고 있다. 개최지 선정 당시만 해도 관람객 2820만 명을 유치해 33조 원의 경제 파급효과를 낼 것으로 예상했지만 지금까지 팔린 티켓은 1000만 장도 안 된다. 라멘 한 그릇에 3만8000원, 여행 가방 맡기는 데 하루 10만 원인 ‘바가지요금’도 논란이다. ▷한국은 오사카 다음으로 국내 최초 등록 엑스포가 될 2030 부산 엑스포를 유치하려다 실패했다. 지역 안배 원칙을 감안하면 오사카에서 가까운 부산이 될 가능성은 낮았음에도 대통령실에 전담 조직까지 두고 유치전에 올인한 결과 2023년 11월 1차 투표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 29 대 119로 대패했다. 부산만의 매력을 보여주기보다 강남스타일과 오징어 게임을 내세운 홍보 전략은 “뜬금없고 식상하다”는 혹평을 받았다. 1차 투표 3개월 전 ‘잼버리 사태’가 터지자 한국의 대형 행사 개최 역량이 의심받기도 했다. ▷결과 예측에 실패해 헛심 쓰게 한 정부의 무능은 더 큰 문제였다. 대통령이 프랑스 파리로 날아가 영어 프레젠테이션을 한 후론 ‘한국 지지로 선회’ ‘불과 10여 표 차이’라는 보고가 줄을 이었다. 1차 투표에서 70표 얻고 2차 투표에서 뒤집자는 전략이었다. 일선에서 ‘아직 그만한 표를 확보 못 했다’고 보고하면 ‘왜 사기를 꺾느냐’는 질책이 떨어졌다고 한다. 외교망 확충 효과를 거뒀다고 하나 2년간 5744억 원, 표당 198억 원이 들었다.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 담화를 발표했지만 그뿐이었다. 판세 예측 실패나 허위 보고 여부에 관한 진상 규명은 없었다. 외교부 장관과 대통령실 참모는 징계는커녕 총선 공천을 받았고, 외교부 차관은 경제 부처 장관으로 승진까지 했다. 여권에서도 “무능하고 아부에 찌든 참모들이 나라를 어지럽게 한다”는 질타가 나왔는데, 그때 대통령 보고 체계를 점검했더라면 엑스포 유치엔 실패해도 정권 실패엔 이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부산 엑스포의 꿈을 접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당시 유치전부터 복기해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한덕수 국무총리 탄핵이 기각되면서 거대 야당이 주도한 고위 공직자 탄핵 시도가 9전 9패를 기록했다. 현 정부에서 발의된 탄핵소추안 30건 중 헌법재판소가 선고한 9건 모두 기각 결정이 났다. 주요 선진국과 달리 한국은 탄핵 심판이 진행되는 동안 직무가 정지된다. 9명의 직무 정지 기간이 평균 5개월이니 무리한 탄핵 남발로 국정 공백을 초래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이제 한 총리를 복귀시킨 헌법재판관 8명이 윤석열 대통령은 어찌할지 주목된다. 윤 대통령 탄핵은 성공할까.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심판은 변론 종결 후 14일, 박근혜 전 대통령은 11일 만에 결론이 났는데 윤 대통령은 한 달이 지나도록 선고일도 못 잡고 있다. 탄핵 심판이 법적 절차이자 정치적 절차임을 감안하면 탄핵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은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노 전 대통령 땐 탄핵 반대 여론(71%)이 압도적이었고, 박 전 대통령은 탄핵 찬성(77%)이 압도했다. 윤 대통령은 탄핵 찬성 58%, 반대 36% 구도가 두 달간 이어지고 있다(한국갤럽). 탄핵 찬성 비율이 높지만 압도적이진 않다. 앞서 두 차례 대통령 탄핵 때와 달리 보수 성향의 헌법학자들을 중심으로 절차적 정당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은 점도 부담일 것이다. 권위 있는 헌법학자인 허영 경희대 석좌교수와 박 전 대통령 탄핵 심판 주심을 맡았던 강일원 변호사도 우려를 표하고 있어 흘려듣기 어렵다. 상식의 눈으로 보면 비상대권을 ‘경고용’으로 휘두른 무모한 사람에게 어떻게 대통령 자리를 계속 맡길까 싶다. 국회에 무장 군인이 들어가는 걸 생방송으로 봤고, 체포조 얘기도 여럿한테 들었으니 더 따져볼 것도 없다 싶은데 보수 헌법학자들 생각은 다르다. 대통령과 국회가 주고받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계엄선포권과 해제 요구권 행사)에 사법부의 개입은 신중해야 하고, 탄핵 사유에서 핵심인 내란죄 부분을 철회한 것은 심각한 하자이며, 국회 무력화와 정치인 체포 지시 같은 사실관계도 명확히 정리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윤 대통령은 이전 두 대통령과 달리 내란 혐의 수사도 받고 있다. 형사 법정에선 쓸 수 없는 증거들을 탄핵 심판에서는 채택했는데 단심제인 탄핵 결정이 난 후 형사 재판에서 다른 결론이 나오면 어떻게 될까. 헌재가 신문한 증인은 16명이지만 내란죄 형사 재판에선 검찰이 신청한 증인만 520명이다. 윤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기 한 달 전 이철희 정치평론가가 두 전직 대통령 탄핵의 성패를 가른 요인을 분석한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냈다. 노 전 대통령 때는 국회가 민심에 역행해 탄핵을 밀어붙이는 바람에 ‘의회 쿠데타’로 받아들여져 실패한 반면, 박 전 대통령 탄핵은 무르익은 민심의 요구를 국회가 수용하는 방식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박 전 대통령 탄핵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1기 때인 2017년 워싱턴포스트 칼럼에서 모범 사례로 소개됐다. 러시아 대선 개입 의혹에 트럼프 대통령 탄핵 요구가 거세던 시기로 이 칼럼은 탄핵 주도 세력의 절제와 신중함을 성공 요인으로 꼽았다.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여론이 거셌지만, 거국 중립내각 구성 등 다른 ‘위엄 있는 퇴로’를 먼저 제안하다 탄핵을 최후의 수단으로 활용함으로써, 혼란을 끝내고 질서를 회복할 정치 세력이라는 신뢰까지 얻을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거의 다 된 것 같던 윤 대통령 탄핵 절차가 막판에 느려진 이유도 더불어민주당이 이재명 대표의 선거법 확정 판결 전 조기 대선을 치르려고 서두른 탓이 크다. 헌법상 탄핵안 의결은 ‘대통령이 그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라야 가능하다. 하지만 탄핵안 가결 전 헌법과 법률 위반 여부를 따져보는 절차는 없었다. 1차 탄핵 때는 언론 기사 7건, 2차 땐 63건을 참고 자료로 첨부했을 뿐이다.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 탄핵 때는 상원에서 사실조사 하는 데 1년, 하원에서 소추 사유 확인하는 데 6개월 걸렸다고 한다. 국회가 제 역할을 했더라면 헌재에서 ‘요원’이냐 ‘인원’이냐 같은 사실관계 따지느라 귀한 시간 허비하는 일도, 광장에서 찬탄 반탄으로 갈라져 싸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탄핵은 국회의 탄핵 소추, 헌재의 심판, 여론의 승복으로 완성된다. 첫 번째 단계의 과오를 만회할 두 단계의 기회가 남아 있다. 헌재는 ‘신속하되 공정한’ 결정으로 설득하고, 윤 대통령과 야당은 무조건 승복해야 ‘58 대 36’의 갈등을 봉합할 수 있다. 탄핵 결정이 내전의 종식이 아닌 확전의 시작이 된다면 탄핵이 인용돼도 성공한 탄핵이 아니고, 탄핵이 기각돼도 성공한 기각이 아닌 게 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언론 통제 국가들에 외부 소식을 전해온 국영방송 ‘미국의 소리(VOA)’가 설립 83년 만에 신규 방송을 중단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VOA를 운영하는 글로벌미디어국(USAGM)을 구조조정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한 후 1300명 넘는 VOA 기자와 PD들이 휴직 처리됐다. USAGM 산하 조직으로 중국의 인권 유린 실태를 폭로해온 자유아시아방송(RFA)도 방송이 중단됐다. 트럼프는 비용 절감을 내세우지만 비판 언론 길들이기라는 지적이 나온다. ▷VOA는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선전전에 대항해 설립된 후 영국 BBC 해외방송과 함께 주요 심리전 수단으로 활약했다. 신규 방송 중단 전까지 북한 중국 이란 등의 수용자 3억6000만 명에게 48개 언어로 해외 뉴스를 전하고 독재 정권을 감시하는 역할을 해왔다. VOA 총국장은 “80년 넘게 공산주의와 파시즘에 맞서 싸우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온 미국의 귀중한 자산이 침묵당해 슬프다”고 했다. ▷한국어 방송은 같은 해 8월 시작됐는데 첫날 방송에서 이승만의 떨리는 육성 연설 ‘2000만 동포에게 고한다’를 내보냈다. 일본이 전쟁에서 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이를 단파방송으로 몰래 듣고 외부에 전파한 이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6·25전쟁 발발과 미국의 참전을 가장 먼저 전한 것도 이 방송이었다. 전쟁 기간 내내 매일 1시간 15분씩 정규 방송을 편성하고, 학교 교육이 어려워지자 ‘방송학교’라는 교육 프로도 내보냈다. 주요 청취자는 귀한 라디오를 가진 엘리트 계층이었는데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땐 몰래 이불을 뒤집어쓰고 들었다고 한다. ▷1952년 임시 수도 부산에서 있었던 ‘부산 정치 파동’으로 방송이 중단된 적도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재집권을 노리고 직선제 개헌을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자 VOA는 이를 비판 보도했고, 공보처가 ‘내정 간섭’이라며 KBS를 통한 중계방송을 2주 넘게 중단했다. 전후 한국 언론이 제자리를 잡은 후엔 북한을 핵심 청취 및 취재 대상으로 바꿨다. 2018년 북한산 석탄의 국내 위장 반입 의혹을 처음 보도한 것이 VOA였다. ▷VOA는 연간 예산 10억 달러(약 1조4500억 원)를 정부에서 지원받지만 방송의 독립성을 내세우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보도를 해왔고, 백악관은 그런 VOA를 “좌파 편향적”이라며 불편해했다. 민영 방송사와도 소송전을 마다하지 않는 트럼프에게 국영방송 문을 닫게 하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VOA 신규 방송 중단 소식에 중국 관영 언론은 “거짓말 공장”이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논평했다. 미국 언론이 지적하듯 ‘독재자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침묵하게 하는 것은 ‘미국의 적에게 주는 선물’이 될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김대중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감옥은 작지만 큰 대학”이라고 했다. 내란 음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옥살이 6년간 하루 10시간씩 독서하고, 그리운 가족과 편지 주고받고, 화단을 가꾸며 “여기 오지 않았더라면 깨칠 수 없는 진리를 깨쳤다”고 썼다. 하지만 이는 예외적인 예찬일 뿐 감옥은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최고 권력을 쥐어본 이들에겐 더욱 그러할 것이다. ▷역대 대통령 중 수감 생활을 한 이는 전두환, 노태우, 박근혜, 이명박, 윤석열 대통령. 속칭 ‘범털’들은 입소 초기엔 음식 때문에 고생한다. 박 전 대통령은 구치소 음식이 짜서 맨밥만 먹다가 나중에는 컵라면을 사서 물을 많이 부어 먹었다고 한다. 전, 노 두 전직 대통령이 안양교도소와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다가 12·12와 5·18 사건 등으로 같은 법정에 출석해 처음 나눈 대화는 유명하다. “자네 구치소에선 계란프라이 주나?” “안 준다.” “우리도 안 줘.” ▷수감 생활 중 병원 신세를 지는 경우도 많다. 건강을 핑계로 쉽게 탈옥한다는 비난이 제기되지만 고령인 탓이 크다. 구치소에선 튼튼한 장정도 1년 지나면 몸이 망가지기 십상이라고 한다. 이 전 대통령은 구속된 지 4개월 만에 수면 무호흡과 당뇨로 입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건강이 나빠져 형 집행정지를 두 차례 신청했지만 검찰이 모두 불허했다. 공교롭게도 윤 대통령이 서울중앙지검장과 검찰총장이던 시절이다. 결국 법무부 결정으로 외부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았다. ▷법원의 구속 취소 결정으로 석방된 윤 대통령은 “잠을 많이 자니 더 건강해졌다” “구치소는 대통령이 가도 배울 게 많은 곳이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한밤중 계엄 선포로 밤잠 설쳐가며 나라 걱정하는 사람들이 듣기엔 불편한 말이다. 윤 대통령은 응원해준 국민들에게 감사하고, 내란 혐의로 구속된 계엄군의 석방을 기도한다고 했다. 좌우 할 것 없이 어려움과 분열을 겪는 모든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화합을 당부했어야 하지 않나. 배울 게 많은 곳에서 무엇을 배웠다는 걸까. ▷윤 대통령은 그동안 구속 기소했던 사람들 생각이 많이 났다며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을 언급했다고 한다. 서울중앙지검장 시절 사법농단 의혹 수사를 지휘하며 구속시킨 이들로 양 전 대법원장은 1심에서 무죄, 임 전 차장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두 사람만 콕 집어 지목하자 ‘보수층 외연 확장을 노린 발언’ ‘재판을 앞두고 법원에 선처를 호소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윤 대통령의 수감 생활은 52일, 이 중 8일은 헌법재판소, 하루는 내란죄 법정에 출석했다.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배움을 얻기엔 갇혀 지낸 시간이 길지 않았던 듯하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2·3 비상계엄 사태 후 논란이 끊이지 않는 정부 기관 중 하나가 국가인권위원회다. 지난달 10일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심판 방어권을 보장하라는 권고를 의결한 데 이어 18일엔 구속 기소된 박안수 육군참모총장 등 장군들에 대해 신속한 보석 허가와 접견 제한 해제를 권고해 “내란죄 피의자 변호인단”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최근에는 국제인권기구에 헌법재판소를 비판하는 서한을 보내 논란이다. ▷안창호 인권위원장은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에 보낸 답변서에서 ‘국민의 50% 가까이가 헌재를 믿지 못한다’ ‘헌재가 형사소송법 적용을 일부 배제하는 등 불공정한 재판을 하고 있다’ ‘헌법재판관이 정치 성향에 따라 재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앞서 국내 인권 단체들이 ‘계엄을 옹호하는 안건을 의결했다’며 세계국가인권기구연합에 인권위에 대한 특별 심사를 요청하자 안 위원장이 심사 관련 실무를 맡고 있는 사무소에 반박 답변서를 보낸 것이다. ▷한국갤럽의 최근 여론조사에서 헌재를 ‘신뢰한다’는 답변은 52%, ‘신뢰하지 않는다’는 40%였다. 윤 대통령 지지층을 중심으로 헌재에 대한 비판 여론이 커진 건 사실이지만, 비상계엄 이후 시행된 국가기관별 신뢰도 조사 4건 모두에서 헌재는 정부 국회 검경 등 다른 국가기관보다 높은 신뢰도 1위였다. 윤 대통령 탄핵 심리는 8인 재판관 전원이 합의한 절차에 따라 마무리돼 최종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재판관들이 정치적 성향에 따라 기계적으로 판결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안 위원장이 잘 알 것이다. 보수성향인 그는 헌재 재판관 시절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 인용 결정을 내렸다. ▷인권위는 대통령 방어권 보장을 권고하며 “신분을 이유로 인권 보호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하지만 인권위는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려 했던 계엄 선포에 대해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약자를 위한 기관이 대규모 변호인단의 도움을 받는 대통령 방어권만 챙기니 ‘윤권위’란 비아냥이 나오는 것이다. 대통령이 지명한 상임위원은 “대통령을 탄핵한다면 헌재를 흔적도 남김없이 없애버려야 한다”고 했다. 인권위는 위원 11명 중 6명을 대통령과 여당이 지명해 여권 편향적이라는 지적이 간혹 제기됐지만 이번엔 도를 한참 넘었다. ▷세계국가인권기구연합은 5년마다 118개 회원기구를 심사한다. 2001년 출범한 인권위는 2004년 최초 심사부터 가장 최근의 2021년 심사까지 줄곧 A등급을 받아왔다. 다음 심사에서 A등급을 유지할 수 있을까. 최근 해외 기관의 민주주의 성숙도 평가 결과 한국은 ‘완전한 민주주의’에서 ‘결함 있는 민주주의로 하락했다. 어려운 때일수록 인권위 같은 국가기관이 중심을 잡아야 할 텐데 오히려 내부 분열과 국격 추락을 부추기는 듯해 유감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국내 거주 외국인들이 건강보험료를 적게 내고 혜택은 많이 받는 줄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은 매년 보험료로 낸 돈보다 보험 혜택을 적게 받는다. 2023년 외국인 건보 재정은 7400억 원 흑자였다. ‘외국인 건보 무임승차’는 외국인 건보 가입자(146만 명)의 절반을 차지하는 중국인들의 적자 폭이 커서 생긴 오해인데 이마저도 통계 오류로 일부 과장된 것으로 확인됐다. 건보 무임승차론이 반중 정서를 키워 온 점을 감안하면 유감스러운 오류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국회에 제출한 외국인 가입자 건보 재정 수지 자료에 따르면 2020년 중국인 건보 재정은 239억 원 적자로 공표해왔으나 사실은 365억 원 흑자를 낸 것으로 나타났다. 2023년에는 640억 원 적자를 봤다고 했는데 다시 계산해보니 27억 원으로 적자 폭이 줄었다. 2년간 1200억 원의 오차가 발생한 것이다. 공단은 2020년의 경우 통계 산출을 수작업으로 하다가, 2023년엔 국가 코드를 분류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발생했으며, 전체 재정 수지에는 변동이 없다고 밝혔다. ▷중국은 외국인 가입자 수 상위 10개국 가운데 유일하게 거의 매년 적자가 나는 나라다. 하지만 무임승차 방지를 위해 2019년 국내 6개월 이상 거주 외국인은 직장가입자나 피부양자가 아니면 지역가입자로 건보에 가입해 보험료를 내도록 규정을 강화한 후로 적자 폭이 줄어드는 추세다. 2017년엔 1108억 원 적자였으나 2019년엔 세 자릿수로 줄었고, 코로나로 외국인 입국이 줄었던 2020년엔 흑자를 냈다가 2023년엔 27억 원 적자로 두 자릿수가 됐다. ▷외국인 건보 무임승차의 문턱은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4월부터는 국내 거주 기간이 6개월 이상 지나야 피부양자가 될 수 있다는 요건이 추가됐다. 외국인들이 입국하자마자 이곳에서 일하는 아들 딸 사위 며느리의 피부양자로 건보에 가입한 후 많게는 수천만 원어치의 치료를 공짜로 받고 돌아가는 사례를 막기 위해서다. 올 1월에는 한국인에게 건보 혜택을 제공하지 않는 나라의 국민은 한국의 건보 가입을 금지하는 ‘상호주의’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안도 발의됐다. ▷건보 재정은 정부의 의대 증원으로 고갈 속도가 빨라져 당장 올해부터 적자로 전환돼 2028년엔 바닥을 드러낼 것으로 전망된다. 건보 재정 누수 방지가 급선무지만 3500만 국내 가입자들의 의료 쇼핑, 과잉 진료부터 막을 일이다. 전체 가입자의 4%밖에 안 되는 외국인 무임 승차만, 그것도 잘못된 통계에 근거해 문제 삼다간 외국인 혐오 정서만 부추길 수 있다. 건보공단은 행정안전부의 ‘데이터 기반 행정 실태 점검’에서 3년 연속 최고 등급인 우수 기관에 선정됐다고 하니 이번 통계 오류 소동이 더욱 기막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비상계엄 선포 이후 주목받는 현상이 주말마다 열리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 열기다. 전광훈 목사의 서울 광화문 집회와 손현보 목사가 서울 여의도 부산 대구 광주 대전을 돌며 개최하는 순회 집회에는 탄핵 찬성 집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드론을 띄워 찍은 집회 현장의 인파를 보면 ‘진짜 민심은 여론조사 결과와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전 목사와 손 목사는 윤 대통령의 탄핵심판 최후진술 이후 처음 맞는 주말 광화문과 여의도에서 대대적인 3·1절 집회를 예고한 상태다. 민주화운동 시절 정치 참여에 적극적이었던 진보 교계와 달리 ‘정교분리’를 고수했던 보수 쪽 개신교 지도자들이 정치에 뛰어든 건 진보 정부가 출범한 이후다. 이들은 2000년대 초반부터 3·1절과 6·25가 되면 ‘반핵반김 자유통일’ ‘한미동맹 강화’ ‘북한 인권 보호’를 내세워 대규모 기도회를 열었다. 2004년에는 ‘기도의 표를 모아 세상을 확 바꾸자’는 구호와 함께 한국기독당도 창당했다. 오랫동안 지켜온 정교분리 원칙을 깨려면 명분이 필요했다. 정교분리는 제헌헌법부터 명문화돼 내려오는 조항이기도 하다. 이철 숭실대 교수(종교사회학)는 교계 지도자들이 내세운 논리와 명분을 분석해 몇 가지로 추렸는데 ‘지금 한국 사회는 강도당한 사마리아인과 같아 외면할 수 없다’는 상황론, ‘김정일 악한 권세를 예수 권세로 무너뜨리자’는 영적 전쟁론, ‘교회 1만 개보다 국회의원 한 명이 선교에 이익’이라는 실용론 등이다. 전 목사, 손 목사가 광장 집회 참여를 독려하며 내세우는 명분은 상황론에 영적 전쟁론이 가미돼 있는 듯하다. 전 목사는 “국민이여 일어나라. 국가가 위태롭다”고 한다. 손 목사가 집회를 위해 만든 단체 이름도 ‘세이브코리아’, ‘한국을 구하라’이다. 여기서 싸워 이겨야 할 상대는 북한과 공산주의, 이에 우호적인 남한 정치세력이다. “대한민국을 사악한 무리들(종북 세력)에 내어줄 수 없다”(손 목사) “주사파 척결하지 않으면 나라가 북한, 중국에 먹힌다”(전 목사)는 주장이다. 집회 무대에선 “종북 좌파가 바퀴벌레처럼 활약” “(진보 성향의)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을사오적” 같은 선동과 혐오 발언이 나온다. 전 목사는 “북한이 선거 개입한다”는 부정 선거론도 퍼뜨린다. 망국적 국론 분열을 치유해야 할 종교계가 갈등을 부추긴다는 비판에 손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 행위도 당시엔 정치 선동으로 비판받았다”고 반박했다. 손 목사가 속한 고신 교단을 만든 사람들이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자랑스러운 역사를 언급한 것이다. 지금이 옳은 일 하려면 목숨 걸어야 했던 시절과 같나. 이제는 말할 용기가 아니라 듣는 관용이 필요한 때 아닌가. 구국 집회의 결론이 ‘계엄은 합법’ ‘윤석열 즉각 석방’에 이를 즈음이면 야당의 줄탄핵과 대통령의 탄핵심판 절차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집회 열기는 뜨거운데 중도층 여당 지지율은 급락하는 추세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정권 연장’과 ‘정권 교체’ 여론의 변화를 추적해 온 리얼미터 조사에 따르면 정권 연장을 원하는 여론은 한덕수 총리 탄핵안 가결 후 커지기 시작해 1월 셋째 주 오차범위 내에서 정권 교체 여론을 앞서다 일타 강사 전한길 씨의 합류로 반탄 집회 열기가 달아오른 이후 정권 교체에 뒤지는 흐름을 보였다. 개신교계에선 정교분리란 정부의 교회 간섭을 막기 위함이지 교회의 정치 참여를 막기 위한 게 아니라고 본다. 루터 말대로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왕국’에 속하면서 ‘세상의 왕국’에도 속한다. 하지만 종교집단의 정치 참여는 국가의 세속적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범위에서 이뤄져야 한다. 정교분리는 근원적으로 종교가 정치세력화해 발생하는 폐해를 막기 위해 도입된 원칙이다(성정엽 인제대 법학과 교수). 종교는 절대적 믿음의 영역이고 정치는 상대적 타협의 영역이다. 전 목사 추종 세력이 주도한 서울서부지법 난입 사태는 믿음과 타협의 영역이 혼재돼 버린 종교의 정치화, 정치의 종교화의 치명적 결과를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해방신학의 본고장인 남미 출신이지만 종교의 과잉 정치는 경계했다. 그는 “공동선을 향한 뜨거운 마음으로 사회 문화 정치 생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달라”고 당부하면서도 “믿음이 대립을 조장하려는 집단들에 이용되거나 도구화될 위험”을 경고했다. 광화문파와 여의도파 집회에는 여당 정치인들까지 합류하고 있다. 종교와 정치가 건강한 관계로 공동선을 추구하는지, 아니면 서로가 서로의 도구로 이용하면서 나라에 어려움을 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기 바란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넣기 좋아하는 나라.” 김대중 대통령 시절 남한의 ‘타락상’을 묘사한 북한 소설 ‘아, 조국’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한다. 출간 연도가 노무현 대통령 집권 2년 차인 2004년. 이후로도 역대 대통령들의 끝은 좋지 않았다.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영국 대사 임기 끝무렵이다. 새로 선출된 노무현 대통령에게 발탁돼 귀국길에 오르는 그를 위해 마련된 송별회 자리에서 현지 지식인들은 축하보다 우려를 표했다. ‘한국 대통령들은 그 끝이 좋지 않고 거의 예외없이 비극적이기까지 하던데…’라면서. 라 교수는 이 문제를 잘 알고 있으면서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고 했다. ‘한국의 불행한 대통령들’은 라 교수가 오래 고민해 오던 문제에 대해 후배 정치학자들과 내놓은 답이다. 출간 연도가 2020년. 이후로도 우리는 감옥에 갇힌 또 한 명의 대통령을 보고 있다.》―21세기의 비상계엄 사태,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격세유전(atavism) 같은 현상이라고 본다. 일반인의 눈에 띄지 않게 잠재돼 있던 권위주의 시대의 인자가 갑자기 돌출한 것이다. 자크 데리다의 ‘유령론’을 인용해 유신시대 긴급조치라는 유령의 출현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해석하든 윤석열 대통령은 한국 정치 현실에 대해 황당할 정도의 오판을 했고 잘못된 조치로 나라 전체에 큰 혼란과 어려움을 초래했다. 나라가 국내외 경제 외교 안보 등 여러 가지로 어려운 문제에 당면하고 있는 상황에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한국의 불행한…’은 톨스토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윤 대통령의 불행의 이유는 무엇일까.“정치인으로서 경험과 경륜의 축적 없이 정부의 최고위직에 바로 올랐다. 그전의 경험이 검사로서 사람들을 정죄하는 일에 국한됐다는 점도 이미 높은 수준으로 발전한 나라를 이끄는 데 도움이 안 됐을 것이다. 널리 알려진 음주 습관. 이 기호도 전직과 관계가 있을 텐데, 냉철한 판단을 방해하는 요인이다. 국가수반으로서 영부인 문제 처리도 일반인들 기대 수준에 많이 미치지 못했다.” ―전직 대통령은 자식들도 감옥에 보냈다. 아내에게 모질기가 더 어려운가.“정치학에서 대통령 주변 인물들의 영향력을 측정하는 여러 기준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육체적인 근접성, 즉 대통령 곁에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를 따지는 것이다. 이 기준으로 보자면 영부인을 당할 사람이 없다. 어느 정부에서나 영부인의 영향력은 컸다. 문제는 그 영향력을 어떻게 행사하는지, 영부인 문제를 대통령이 어떻게 다루는지인데, 윤 대통령은 이를 소홀히 했다. 특검까진 안 가더라도 검찰 조사를 제대로 했어야 했다.” ―역대 대통령이 모두 불행한 구조적 원인으로 제왕적 대통령제가 지목된다.“스스로 제왕이라 여기는 멘털리티가 문제다. 대통령직을 흔히들 대권(大權)이라고 한다. 옛날에 유력한 어느 대선 후보는 측근들로부터 ‘주군’이라 불렸다. 3권분립 체제에서 5년 단임의 대통령직을 대권이라고 부르는 게 온당한가. 정권이 바뀌면 무슨 새로운 왕조를 세우듯 정부 조직을 개편하고 역사도 새로 쓴다. 김대중 대통령이 1992년 대선에서 실패하고 영국 케임브리지에 와 계실 때 자주 저를 찾으셨다. 한번은 ‘만약 차기 대통령이 되신다면 새로운 마음으로 정부를 운영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이때 ‘제2의 건국’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반공, 권위주의, 국가 기관을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일을 지양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신 다음 국가 기관을 동원해 제2건국위원회를 전국적 규모로 조직하는 것을 보고 놀라 여러 경로로 반대 의견을 전달했다. 현실적인 안목을 갖춘 분임에도 나라를 다시 세워 보겠다는 생각을 하신 것이다.” ―선거 때면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혁명적인 변화를 이뤄내겠다고 마음먹으면 반대 세력을 동반자나 경쟁자가 아닌 적이나 자기가 수행해야 하는 위대한 업적을 방해하는 방해꾼으로, 궤멸해야 하는 상대로 볼 수 있다.” ―전 정부 지우기도 되풀이되는 문제다.“다른 나라도 정권이 바뀌면 전 정권 지우기가 시도되지만 이는 정책의 영역에 머문다. 그런데 우리는 검찰을 동원한 사법적 처리가 주를 이룬다. 그러니 어떻게든 대권을 차지해 상대방을 문화계 스포츠계 망라해 다 쓸어버리려 하지 않겠나.” ―대통령 레임덕은 측근 비리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어느 정치인이 쓴 책에 ‘하루 일과가 100이라면 그중 일은 20∼30만 하고 나머지 70∼80은 자기 자리를 철벽 수비하는 데 썼다’고 나온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인사나 정책이 국익의 관점이 아닌 측근들 사이의 이해관계나 영향력을 위한 각축의 결과로 결정된다는 증언이다. 결국 책임은 다 대통령에게 돌아오게 된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막기 위해 개헌하자는 요구가 있다.“개헌이 현재 정치적 난국에서 가장 쉬운 탈출구로 논의되고 있지만 난 회의적이다. 역대 대통령들의 불행이 헌법 때문일까. ‘영국 헌법’의 저자인 월터 배젓은 헌법을 자주 고치는 나라를 환자에 비유했다. 환자는 침대에 누워 좀 더 편하려고 자세를 자주 바꾸지만 어떤 자세를 취해도 역시 불편하기 때문에 계속 자세를 바꾼다는 설명이다. 이해관계와 셈법이 다른 현 정치권에서 다수의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듣는 개헌을 할 능력이 있을지 의문이다. 개헌을 해도 헌법 조문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해 변칙적으로 활용하려 하지 않을까. 현행 헌법에 따르면 총리는 내각을 조직하고 이를 대통령에게 보고해 승인을 받도록 돼 있다. 하지만 조각은 청와대에서 이뤄지고 총리는 별 영향력이 없다. 좋은 헌법도 안 지키면 무슨 소용인가.” ―개헌이 아니라면….“우리는 민주주의를 독재와 싸우는 것으로만 이해한다. 경쟁자들과 페어 플레이 하려는 노력은 없다. 더 좋은 헌법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보다는 양보하고 타협도 할 수 있는 정치적 소양을 갖추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본다.” ―윤 대통령의 탄핵 사유는 박근혜 전 대통령 때보다 엄중해 보인다. 그럼에도 탄핵에 반대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야당의 독주가 지나쳤다는 여론이 있다. 또 하나는 박 전 대통령 때 탄핵되면 그 다음에 타협과 화합의 정치가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잖나. 적폐청산 한다면서 국가정보원 서버까지 들춰 보는 등 국기를 흔드는 일이 있었다.” ―국제 정세가 불안정한데 탄핵으로 국론까지 분열된 양상이다. 탄핵 심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물리적 충돌이 벌어질까 우려된다.“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정치인들이 ‘밥값’을 해야 한다. 최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는데, 이시바의 정적이었던 아베 전 총리 부인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게 참 부러웠다. 6·25전쟁 때 미군이 압록강에서 대패하자 트루먼이 ‘모든 무기 사용을 다 고려하고 있다’고 해 원자폭탄을 쓰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유럽이 발칵 뒤집혔고, 당시 클레멘트 애틀리 영국 총리가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노동당 출신 총리가 가는데 보수당의 윈스턴 처칠이 워싱턴에 있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서 ‘애틀리가 지금 굉장히 어려운 임무로 워싱턴에 가니 좀 도와 달라’고 했다. 우린 왜 이렇게 못하나.” ―탄핵 심리 결과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질 수 있다. 차기 대통령이 불행으로 끝나지 않으려면….“대통령이 되겠다며 조언을 구하는 분들에게 꼭 묻는다. ‘대통령이 되면 5년 동안 뭘 하겠느냐.’ 그럼 엄청난 얘기들을 한다. 통일도 추진하고 민주화도 더 추진하고 경제도 건설하고 세계에서 지도적인 역할도 하고. 그런데 구체적인 정책은 없고 일반적인 얘기만 한다.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 해놓고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 우왕좌왕하다 5년이 간다. 그럼 불만들이 쌓인다. 불행한 대통령 안 되기가 힘든 거다. 한시적으로 국정을 맡았을 뿐이라며 겸손하고 과학적이었으면 한다. 적폐청산이나 후임자 일까지 간섭하는 ‘대못 박기’ 이런 것 하지 말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으로 한반도 안보 지형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 불안하다.“큰 변화의 시기다. 그러나 국제 관계에 있어서는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상수로 남아 있는 것인가 판단하는 능력도 중요하다. 프랑스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변화할수록 그대로이다.’”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85)△서울대 정치학과△영국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 정치학 박사△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김대중 정부 국가정보원 해외·북한담당 차장△노무현 정부 대통령국가안보보좌관△주영 대사, 주일 대사△우석대 총장△저서: ‘장성택의 길’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 ‘물과 피: 정치의 이해’ 외 다수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김건희 여사가 지난해 4·10총선 때도 경남 창원 의창 공천에 개입하려 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명태균 씨 변호인이 17일 공개한 입장문 ‘김건희와 마지막 텔레그램 통화 48분’에 나오는 내용이다. 김 여사가 윤석열 대통령 검찰총장 시절 ‘조국 수사’에 참여한 김상민 검사(47)를 도와달라 했다는 것이다. 이곳은 검찰이 대통령 부부의 2022년 보궐선거 공천 개입 의혹을 수사 중인 지역구다. 명 씨 측은 녹취록을 따로 공개하지 않았고 국민의힘은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부인했다. ▷명 씨가 지난해 2월 16∼19일 5, 6회의 통화 내용을 복기한 기록에 따르면 김 여사는 “선생님, 김상민 검사 조국 수사 때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의창구 국회의원 되게 도와주세요”라고 했다. 김 검사는 현직 검사 신분으로 출마를 강행해 논란이 된 인물이다. 2023년 추석 무렵 “지역사회에 큰 희망을 드리겠다”는 ‘명절 문자’를 지역 주민들에게 보냈다가 ‘경고’ 처분을 받았다. 경선에서 떨어진 뒤엔 국가정보원 법률특보(차관보급)로 기용됐다. ▷김 여사는 김영선 당시 현역 의원에 대해서는 “어차피 컷오프라면서요”라고 배제했다. 또 다른 예비 후보에 대해서는 “문재인 정부 부역자”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명 씨는 “평생 검사만 하다 지역도 모르는 사람을 공천하면 총선에서 진다”며 반대했다. 명 씨는 당시 “5선 의원이 떨어지면 조롱거리가 된다”며 세비 절반을 떼주던 김 전 의원을 밀고 있었다. 마지막 통화는 “김상민이 내려 꽂으면 전 가만히 안 있을 겁니다”로 끝난다. 둘 사이가 틀어진 계기가 공천 문제였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김 여사는 당시 총선 결과를 낙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명 씨가 “이 추세로 가면 110석을 넘지 못합니다”라고 하자 “아니에요. 보수 정권 역사 이래 최다석을 얻을 거라 했어요” “이철규, 윤한홍 의원이 그랬어요” 했다는 것이다. 보수 정권 역대 최대 의석은 2008년 총선 당시 153석이었다. 결과는 역대 두 번째로 적은 108석이었다. 통화가 이뤄진 시기는 명품백 논란으로 2월 18∼24일로 잡혔던 독일 국빈 방문과 덴마크 공식 방문 일정까지 연기할 정도로 총선 여론이 좋지 않을 때였다. ▷지난 총선은 ‘김 여사 리스크’로 시작해 ‘대파 논란’으로 끝난 선거였다. 일반 여론도 ‘대통령실 책임론’이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대승 전망과 대패 결과 사이에서 윤 대통령은 부정선거론의 길로 빠져들었고 이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게 된 주요 원인”이 됐다. 김 여사는 계엄 전후 조태용 국정원장과도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서울중앙지검이 넘겨받은 명 씨와 대통령 부부 사건을 수사하다 보면 계엄의 전말을 보여줄 퍼즐 조각을 찾게 될지 모른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오는 4월 2일 하윤수 전 교육감이 당선무효형을 받아 치러지는 부산시교육감 재선거를 앞두고 뜻밖에 조국 입시 비리 사태가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예비후보로 등록한 진보 성향의 차정인 전 부산대 총장이 최근 기자회견을 열어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 딸 조민 씨에게 공개 사과하면서다. 차 후보가 총장이던 2021년 부산대는 위조된 표창장과 허위 인턴십 확인서를 의학전문대학원 입시에 활용한 조 씨의 입학을 취소했다. ▷차 후보는 이날 회견에서 “당시 수사가 정치 검찰의 표적 수사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며 “총장이 학생을 지키지 못한 엄연한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그는 “(정경심 교수) 1심 판결 후 국민의힘에서 거세게 공격하고 교육부가 공문을 보내 입학 취소를 요구했지만 응하지 않았다”면서 “사실심의 최종심인 항소심 판결이 난 이후에야 입학 취소 예정 처분을,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후에야 입학 취소를 결정했다”고 강조했다. ▷차 후보의 난데없는 사과 회견은 같은 진보 진영의 경쟁 후보와 단일화가 무산된 후 진보층의 지지를 결집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차 후보가 출마하자 진보 진영에서는 ‘당시 총장이 직권으로 조민 씨 입학 취소를 막을 수 있지 않았나’라는 말이 나왔다. 차 후보는 이에 대해 “부산대 입학 요강에는 허위 서류를 제출하면 불합격 처리한다고 명시돼 있었고, 허위 여부는 법원 판결로 결정되기 때문에 총장에게 재량권은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조민 씨의 허위 서류가 합격에 영향이 없었음을 공개한 사실을 언급하며 “학생의 억울한 점을 밝히는 데도 최선을 다했다”고 덧붙였다. ▷조민 씨 입시 비리 사건은 입시제도의 신뢰 기반을 흔들어놓은 사건이다. 조 씨가 입시에 활용한 ‘7대 스펙’은 대법원에서 모두 허위로 판명됐다. 이 일로 조 씨의 부모가 모두 실형을 살았거나 살고 있다. 차 후보는 검사 출신으로 민변 변호사와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지냈다. 법조인이자 교육자 출신이 부산 초중고교 교육을 책임지겠다며 나선 자리에서 부정입학생을 억울한 정치적 피해자인 양 감싸다니 자격 미달 아닌가. ▷교육감 선거는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 정당 개입을 금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치열한 진영 대결로 치러진다. 특히 이번 선거는 지금까지 등록한 예비후보만 6명이다. 후보가 난립할수록 진영 내 후보 단일화가 승리에 결정적이다 보니 공약 경쟁은커녕 엉뚱한 사람에게 사과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2022년 당선된 시도교육감 17명 중 서울(조희연)과 부산 교육감 2명이 대법원 판결로 불명예 퇴진했고 3명이 재판을 받고 있다. 여러모로 교육적이지 않은 교육감 선거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노상원 수첩’은 내란 혐의로 구속 기소된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점집에서 경찰이 확보한 약 70쪽짜리 메모장이다. 그는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불러준 내용을 받아 적은 것”이라고 진술했는데 국립과학수사연구원 필적 감정에서는 ‘감정 불능’ 판정이 나왔다. 누가 썼는지는 수사 중이지만 일부 언론이 입수해 보도한 수첩 속 비상계엄 계획은 충격적이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체포자 명단. 수첩에는 계엄 선포 10일 차까지 체포 대상자를 ‘수거’해 ‘수집소’로 보낸다는 내용이 나온다. 체포 대상은 “여의도 30∼50명 수거” “언론 쪽 100∼200(명)” 등 “500여 명 수집”으로 적혀 있다. 이 중 A급은 문재인, 이재명, 유시민, 권순일, 김명수, 조국, 민노총 등이다. 검찰 조사 결과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김 전 장관에게서 넘겨받았다는 ‘체포자 명단 16명’과 비교하면 ‘한동훈’이 빠지고 ‘이준석’이 들어가 있다. 이재명 대표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판사, 조국 전 장관을 위해 탄원서를 쓴 축구대표팀 감독 차범근 씨도 ‘수거’ 대상이다. ▷“A급 수거 대상 처리 방안”은 살벌하다. ‘수집소’는 “강원도 화천, 양구, 울릉도, 마라도, 전방 민통선 쪽”이고, “확인 사살 필요” “막사 내 잠자리 폭발물 사용” 등의 메모로 보아 ‘처리’는 ‘살해’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내국인 사용 시 수사를 피하기 어렵다”는 문장과 함께 “외국 중국 용역업체” “북한과의 접촉 방법” “무엇을 내어줄 것이고 접촉 시 보안 대책은”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다. 수거 대상자들을 제거하려 ‘북풍’ 공작을 검토한 흔적들이다. ▷메모 작성 시기는 지난해 4월 총선 이전으로 짐작된다. 수첩 첫 장에 “총선 후 입법으로 집행하는 건 쉽지 않다. 실행 후 싹을 제거해 근원을 없앤다”는 문장이 있다. “여의도 봉쇄” “역행사에 대비해야 한다” “민주당 쪽” “9사단과 30사단” 등의 문구로 보아 국회의 계엄 해제 결의를 무력으로 진압하려는 계획도 세웠던 듯하다. “행사 후속 조치 사항”으로 “헌법, 법 개정” “3선 집권 구상 방안” “후계자는?”이 나온다. 메모 작성자 머릿속엔 ‘경고성 계엄’이 아니라 윤석열 대통령의 장기 집권용 비상계엄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수첩 속 메모는 휘갈겨 쓴 필체라 동일인이 썼는지 확인하기 어렵다는 게 필적 감정 결과다. 검찰은 메모 내용이 파편적이어서 해석의 여지가 있고, 수첩 주인이 작성 경위에 대해 입을 닫고 있다며 그의 공소장에 수첩 내용은 담지 않았다. 하지만 허튼 망상이라고 덮고 넘기기엔 체포 명단 작성과 국회 표결 무력화 등 실제 시도한 대목이 적지 않다. 누구 지시로 작성한 것일까. 유혈 친위 쿠데타 모의의 흔적이 ‘계엄의 설계도’였는지 규명할 필요가 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2·3 비상계엄 사태의 결정적 장면 중 하나가 계엄 전 소집된 국무회의다. 계엄 선포와 해제는 헌법과 계엄법에 따라 최고 정책심의기관인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공소장에 따르면 당시 국무회의는 법적 절차를 무시한 채 5분 만에 끝난 하자투성이 회의였다. 국무위원들도 최근 경찰 조사에서 “정상적인 국무회의가 아니었다”고 진술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계획을 가장 먼저 접한 국무위원은 김 전 장관을 제외하면 한덕수 국무총리다. 한 총리는 그날 오후 8시 40분경 호출을 받고 대통령 집무실에 도착해 계엄 얘기를 처음 들었다. 반대해도 소용없자 “다른 국무위원들 말도 들어보시라”고 했고 윤 대통령은 “그럼 한번 모아 보라”고 지시했다. “윤 대통령은 처음부터 국무회의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는 게 한 총리 진술이다. “항상 법전 먼저 찾는 게 평소 업무 스타일”이라는 법조인 출신 대통령이 왜 국무회의 심의 절차를 가볍게 여겼는지 의문이다.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도 “국무위원 전원이 반대한다”며 대통령을 말렸다고 한다. “계엄에 동의한 국무위원이 있었다”는 김 전 장관 증언과 배치되는 진술이다. 이는 장관들의 반대 의견이 국무회의 전 비공식적으로 제기된 상황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장관들은 의결정족수 11명이 채워지길 기다리는 동안 “국가 신인도에 치명적 영향을 준다” “70년간 대한민국이 쌓은 성취를 무너뜨린다”며 말렸다. 윤 대통령은 “22시에 KBS 생방송으로 발표해야 하는데”라며 기다리다 딱 11명이 되자 바로 회의를 시작해 일방적 통보만 하고 끝냈다. ▷결국 당시 국무회의는 안건 제안도, 실질적인 심의도, 국무위원 서명이 담긴 회의록도 없는 ‘3무(無)’ 회의였다. 이 전 장관은 계엄 선포 직후 대통령실 부속실 직원에게 “장관 몇 명이 언제 왔다 정도라도 적어 놓으라”고 지시했다. 회의록이 없으면 국무회의 심의를 거친 것으로 볼 수 없어 위헌 위법적 계엄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은 계엄 선포 후 누군가 와서 “서명해 달라”고 했지만 거부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회의가 국무회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한 총리 등에게 “(비상계엄 계획은)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와이프도 모른다. 와이프가 화낼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일명 ‘명태균 녹취록’을 통해 김건희 여사의 전방위적 국정 개입 의혹이 제기된 터다. 김 전 장관 공소장에는 지난해 8월과 10월 윤 대통령이 관저에서 주요 군 지휘관들과 식사하며 계엄을 모의한 정황도 나온다. 김 여사를 보호하고 싶었을까. 왜 “계엄은 정당하다”면서 김 여사가 알면 화낼 것 같다고 했을까.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은 티켓 구하기 경쟁이 치열했다. 원래 미국 대통령 취임식은 국내 행사인데 트럼프가 개인적 친분을 중시하는 데다 전혀 다른 미국을 예고하면서 ‘눈도장 찍기’ 수요가 폭증했다. VIP석과 대통령과의 만찬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기부금이 쇄도해 역대 최고치인 2억5000만 달러(약 3627억 원)가 걷혔다. 한국 정·재계 참석자들도 현지에서 인증샷을 올리고 있는데 취임식을 ‘직관’한 이는 많지 않다. ▷이번 취임식 전 배포된 초청장은 VIP석 1600장을 포함해 22만 장. 그런데 북극 한파로 국회의사당 실내 행사로 바뀌면서 참석 인원이 2만1800여 명으로 크게 줄었다. 취임식 좌석은 3등급으로 나뉘는데 1등급은 취임식이 열린 의사당 중앙홀(로툰다)로 약 600명에게 돌아갔다. 상·하원 의원들과 대법관, 전직 대통령 부부, 빅테크 기업 수장들이 상석을 차지했다. 한국인 중엔 조현동 주미 대사가 유일하게 로툰다 홀에 초대됐다. ▷2등급은 의사당 내 노예해방홀(1200명), 3등급은 의사당 밖 체육관인 캐피털원아레나(2만 명)로 모두 취임식을 생중계 화면으로만 볼 수 있는 곳이다. 한국계 미국인 김범석 쿠팡Inc 의장이 노예해방홀,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 부부와 최준호 패션그룹형지 부회장 등이 캐피털원에 초대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식후 노예해방홀에서 즉석 연설을, 캐피털원에선 행정명령 서명쇼를 벌였으나 상당수는 트럼프의 얼굴도 못 봤다고 한다. 정 회장 부부는 트럼프 장남의 초대로 VIP만 입장 가능한 3개 무도회 중 한 곳에도 참석했다. ▷정계에서는 국민의힘 방미단과 일부 의원들이 캐피털원에서 취임식을 스크린으로 지켜봤다. 수용 규모가 2만 명이어서 미 정계 인사들과 의미 있는 교류를 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소셜미디어에 “차기 대선 후보 자격으로 미 대통령 취임준비위원회 초청”을 받았다면서도 추위에 줄 설 엄두가 나지 않아 호텔에서 스크린으로 취임식을 봤다고 썼다. 취임식 일주일 전 급하게 초청받아 상원의원들과의 만남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럴 거면 세금 써서 왜 간 것이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초대했는데 대신 부주석이 참석했다. 그동안 주미 대사가 참석했던 관례를 깨고 부주석으로 급을 높인 것이다. 일본도 처음으로 외상이 취임식에 초대받았고, 식후에는 백악관 안보보좌관과 회담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행정명령 폭탄을 쏟아내는 터라 탄핵 사태로 인한 리더십 공백이 뼈아플 수밖에 없다. 의원 외교로 공백을 메워주면 좋으련만 다들 ‘찬밥’ 신세에다 일부는 대통령을 먼발치서 보려는 수고도 않았다니 한심한 노릇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건강은 개인 하기 나름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회적 요인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미국은 인종에 따라 기대수명 차이가 크다. 아시아인이 84.5세, 백인 77.5세, 흑인 72.8세, 원주민 67.9세 순이다. 영국에선 부촌에서 태어난 아이가 가난한 동네 아이보다 12년 더 오래 산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부자가 더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윤석준 고려대 예방의학교실 연구팀이 2008∼2020년 건강보험 데이터를 이용해 소득 수준(5개 등급)에 따른 기대수명을 분석한 결과 2020년 최상위 소득계층이 87.4년으로 최저 소득층보다 7.9년 더 오래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별 이상 없이 생활하는 기간을 뜻하는 ‘건강수명’ 격차는 더 컸다. 최상위 계층이 74.9년으로 최저소득 계층보다 8.7년 더 길었다. 기대수명과 건강수명 모두 소득 수준에 따른 격차가 해마다 더 벌어지는 추세를 보였다. ▷건강과 수명을 결정하는 요인으로는 경제력, 주거 환경, 식습관, 사회관계 등이 꼽히는데 특히 의료 서비스 접근성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부자들이 사는 동네에는 큰 병원과 실력 있는 의사들이 많다. ‘종합병원에 1시간 30분 이내 접근이 불가능한 인구 비율’은 의료 여건이 좋은 곳은 0%이지만 나쁜 곳은 42%나 된다. ‘지역응급의료센터에 30분 이내 접근이 불가능한 인구 비율’은 지역별로 0∼57%로 격차가 더 크다. 이 때문에 소득 수준별로 응급 상황이나 급성 심뇌혈관질환으로 인한 사망률 차이가 크게 난다. 제때 치료를 받았더라면 피할 수 있는 사망률(회피가능사망률)의 경우 최저소득 계층이 최고층보다 1.4배 더 높다. ▷부자들은 급성 질환뿐만 아니라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같은 만성 질환을 앓는 비율도 낮다. 많이 벌수록 술과 담배를 덜하고, 적당한 유산소 운동과 균형 잡힌 식단으로 건강과 비만을 관리하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질병관리청 2023 국민건강영향조사). 건강은 대물림된다. 유전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생활 환경과 습관을 그대로 물려받아 부모 세대 건강 격차가 자녀 세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금융자산이 10억 원 이상인 부자들은 일반인보다 아침 식사를 하는 비율이 높고, 종이신문과 연간 10권의 책을 읽으며, 가족과 함께 식사하는 횟수도 많았다(‘2024 대한민국 웰스 리포트’). 아침을 먹으면 폭식을 예방하고, 하루 30분 이상 읽으면 사망할 확률이 줄어들며, 가족 간 유대는 심리적 안정에 필수 요소다. 평범해 보이는 이런 장수 생활 습관도 먹고살기 힘든 이들에겐 사치일 수 있다. 의료 불평등 못지않게 경제 양극화 완화에 힘써야 건강 불평등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조기를 게양한 채 을사년 새해를 맞이할 줄은 몰랐다. 정부는 무안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하고 전국에 합동분향소를 설치했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은 “정부 수반의 대행으로서 비통하고 송구한 마음”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비상계엄 사태를 일으켜 놓고 수습은커녕 재난 대응 컨트롤타워 곳곳을 구멍 낸 정치권은 더욱 송구한 마음이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실패한 계엄 후 여야 간 예측 불허의 정쟁에 대해 외신은 ‘오징어 게임’ 같다고 보도했다. 탄핵이든 수사든 피해가며 어떻게든 자리를 보전하려는 윤 대통령, 그런 대통령을 빨리 끌어내리고 조기 대선에서 승리해 자신의 사법 리스크를 털어내려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벌이는 혈투다. 얼마 전 공개된 ‘오징어 게임 2’가 반짝 흥행으로 끝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는 리얼리티쇼 ‘오징어 게임 계엄편’이 훨씬 극적이고 잔혹한 탓도 있을 것이다. 비석치기, 제기차기, 공기놀이로 승부를 가리는 드라마 ‘오겜2’와 달리 ‘오겜 계엄편’을 이해하려면 헌법 지식이 필요하다. 첫 번째 게임 ‘대통령 탄핵소추’가 이 대표 승리로 끝나고 한덕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됐다. 두 번째 게임은 대통령 탄핵 여부를 결정할 헌법재판소 9인 체제 복원을 위한 ‘헌법재판관 3명 임명하기’. 뜻밖에 한 대행이 ‘여야 합의가 우선’이라며 임명을 보류하면서 결과적으로 대통령을 도운 ‘깐부’가 됐고, 대본에 없던 ‘한 대행 탄핵소추’와 ‘의결정족수’ 게임이 추가됐다. 이제 주인공은 최 대행. 그가 전임자와 달리 여당과 민주당이 추천한 헌법재판관 1명씩 2명을 임명하면서 탄핵심판 무력화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피해가게 됐다. ‘오겜 계엄편’의 출연진도 드라마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12개 혐의로 5개의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는 자신을 수사한 검사들은 ‘이재명 괴롭힌 죄’를 물어 탄핵하고 방탄용 입법을 남발하는 독한 빌런임에도 당내에선 ‘민주당 아버지’ ‘신의 사제’로 추앙받는다. 그런 이 대표도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으로서 헌법과 법률을 무시하고 계엄을 하려다 체포영장을 받아 든 경쟁자에 비하면 평범해 보일 지경이다. 통계학자인 아버지와 화학을 전공한 어머니 슬하에서 법학을 공부했건만 대통령 주변에선 법사와 도사와 보살들이 측근 자리를 놓고 신통력 경쟁을 벌였다. 부인도 “웬만한 무당보다 낫다”고 자부하는 인물이다. 동양철학자 임건순 씨에 따르면 무속은 철저한 현세주의이고, 모든 잘못은 남 탓, 악귀 탓이다. 무속에 빠진 사람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고 “나 감옥 가느냐”를 묻는다. 여사 의혹은 야당의 악마화 탓, 총선 대패는 선거 부정 탓, 비상계엄 선포는 야당의 입법 독주 탓이다. 대선 후보 시절 손바닥에 ‘왕(王)’자를 써 넣고 다닐 때 망국적 주술 정치를 예고하는 복선임을 눈치챘어야 했다. 참담한 사고로 잠시 멈춘 정쟁은 4일 애도 기간이 끝나면 재개될 것이다. 개인 목숨을 건 드라마와 달리 현실 속 오징어 게임엔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다. 계엄 사태로 주가가 내려앉고 원화 가치가 추락해 국제 투기 자본들이 알짜배기 기업을 헐값에 쓸어 담으려 어슬렁거리고 있으니 게임을 지속하는 건 경제적 자해 행위다. 제주항공의 아찔한 동체 착륙을 TV로 지켜본 사람들은 대내외적 난기류에 휩싸인 대한민국호가 비상 착륙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살아남을 수나 있을지 공포감을 느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은 조종석에서 제 발로 걸어 나올 용기도, 책임감도 없어 보인다. 그가 계엄 날 지시했다는 “총을 쏴서라도” “도끼로 문 부수고”를 검찰 공소장에서 확인한 정신과 전문의들은 수사보다 치료가 급하다고 한다. 헌재의 탄핵 심리 절차를 밟는 방법밖엔 없다. 아무리 못났어도 대통령을 파면한다는 건 주권자의 민주적 의사 결정을 파기하는 일이다. 9인 완전체라야 그 결정이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 4월이면 대통령이 지명한 2명의 재판관 임기 만료가 돌아오는데 그때까지 탄핵 심리가 끝나지 않으면 다시 6인 체제가 되는 상황도 감안해야 한다. 결국 윤 대통령을 배출한 죄 있는 여당이 수습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길 기대한다. 헌재 9인 체제 복원을 위한 여야 협의에 적극 나서고, 최 대행이 거부권을 행사한 ‘내란죄 특검법’과 ‘김건희 특검법’도 위헌 조항을 뺀 수정안으로 야당 동의를 얻어 ‘부부의 난’을 단죄하라. 제주항공 희생자 179명을 위해 울리는 조종(弔鐘)은 더 이상 한눈팔지 말고 앞을 똑바로 보라는 경종(警鐘)으로 들어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비상계엄 사태와 관련해 풀리지 않은 의문은 대체 왜 그 무모한 일을 벌였느냐다. 윤석열 대통령은 ‘거대 야당의 의회 독재’를 이유로 들었다. ‘김건희 여사 수호 계엄설’ ‘명태균 황금폰 유출 제지용’이라는 해석도 제기된다. 계엄의 동기를 이해하려면 질문을 바꿔볼 필요가 있다. 언제부터 계엄을 모의한 것인가. ▷가장 눈여겨볼 시점이 계엄을 총지휘한 김용현 국방부 장관 인사다. 대통령은 8월 12일 김 당시 대통령경호처장을 국방부 장관에 지명하기 위해 임명된 지 1년도 되지 않은 외교안보 라인을 돌연 교체했다. 미 대선을 85일 앞둔 시점의 깜짝 인사에 ‘말 못 할 사연이라도 있는 게 아니냐’는 뒷말이 나왔다. 당시 대통령실은 ‘여름휴가 중 숙고를 마친 결과’라고 했는데 공교롭게도 대통령이 휴가 때 함께 골프 친 부사관들이 이번 계엄 과정에서 국회에 투입된 707특임단 소속이라는 야당 측 주장이 나왔다. 또 당시 부하 여단장과의 하극상 사태로 경질설이 돌던 문상호 정보사령관이 김 전 장관의 인사로 살아남아 함께 계엄을 준비했다고 한다. ▷민주당이 계엄 의혹을 제기한 때도 이즈음이다. 김민석 최고위원은 8월 17일 “국방부 장관의 갑작스러운 교체와 대통령의 뜬금없는 반국가 세력 발언으로 이어지는 최근 정권 흐름의 핵심은 북풍 조성을 염두에 둔 계엄령 준비 작전”이라고 주장했다. 윤 대통령은 ‘뉴라이트 역사관’ 논란으로 광복회와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열린 광복절 경축식에서 “검은 선동 세력에 맞서 싸워야 한다”, 이후 국무회의에선 “반국가 세력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며 비판 세력에 대한 노골적 적대감을 드러냈다. ▷국방부 장관 교체가 계엄 준비 작전이라면 계엄 구상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올 3월 윤 대통령과 저녁 자리에서 ‘조만간 계엄을 하겠다’는 말을 들은 신원식 당시 국방부 장관(현 국가안보실장)이 경호처장이던 김 전 장관 등을 불러 이를 막기 위한 대책 회의를 했다고 한다. 여인형 방첩사령관은 “지난해 말 대통령이 비상조치가 필요하다고 얘기했다”고 진술했다.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이 전북 군산의 무속인을 찾아 지난해 초부터 ‘앞으로 일을 벌일 것’이라고 하고, 군인 10여 명의 이름을 건네며 “나를 배신할 놈이 있는지” 물었다는 언론 보도도 나왔다. ▷야당의 계엄 의혹 제기에 대통령실은 “나치 스탈린 전체주의의 선동정치”라며 펄쩍 뛰었다. 또 “민주당 의원들의 머릿속엔 계엄이 있을지 몰라도, 저희의 머릿속에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허황된 음모론이라 무시하고 넘어갔던 계엄이 대통령 머릿속엔 오래전부터 자리하고 있었던 듯하다. 자기만의 성채에 갇혀 널리 듣지도, 질문받지도 않는 지도자란 얼마나 위험한가. 비상식적인 국정 운영과 황당한 발언을 더 의심하고 따져 물었어야 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으로 직무 정지를 당한 후 대통령의 입 역할을 하는 이가 ‘40년 지기’ 석동현 변호사다. 윤 대통령의 법률 대리인도 아니고 ‘윤 대통령의 변호인단 구성을 돕고 있는’ 석 변호사가 대변인 역할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가 전하는 대통령의 입장은 기함할 지경이다. “내란이 아닌 소란” “체포의 ‘체’자도 꺼내지 않았다”더니 23일엔 “비상계엄 하나로 수사하고 탄핵한다”며 “굉장히 답답하다는 토로를 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수사보다 탄핵 심판이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25일 공수처의 2차 출석요구에도 불응할 계획이다. 석 변호사는 “폐쇄된 공간에서 수사관과의 문답을 통해 대통령의 입장과 행위의 의미를 설명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했다. 대통령은 권한이 일시 정지됐을 뿐 “엄연히 대통령 신분”이어서 “대통령이 오란다고 가고 그런 것은 아니지 않나”라는 주장이다. 법조계에선 곧 재판에 넘겨지는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수사 기록을 보고 변론 전략을 세우려고 시간을 끌고 있다고 본다. ▷탄핵 심판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것도 아니다. 대통령이 서류 수령을 거부하자 헌법재판소는 23일 송달 효력이 발생한 것으로 보고 27일 첫 변론 준비 기일을 진행하기로 했지만 석 변호사는 “탄핵소추 된 지 10일도 안 됐다”며 불참을 시사했다. 윤 대통령은 최근 입장문을 통해 계엄 선포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한 바 있다. 송달된 서류는 거부하면서 장외에선 여론전을 펼치니 구차한 지연작전이란 말이 나오는 것이다. ▷“계엄 하나로…” 발언은 그깟 ‘경고성 계엄’으로 무거운 사법적 심판을 받는 건 억울하다는 뜻으로 들린다. 하지만 계엄 당일 오찬에서 김 전 장관이 “탱크로 국회를 밀어버리겠다”고 했다는데 실제로 그날 밤 탱크부대장이 판교 정보사에 대기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겸임하는 현직 대법관에 대한 구두 체포 지시, 야당 대표에게 1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부장판사에 대한 위치 확보 시도도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설마 했던 ‘북풍 공작’ 의혹을 뒷받침하는 물증까지 나왔다. 윤 대통령이 야당을 두고 언급한 ‘광란의 칼춤’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무능해서 실패했기 망정이지 어쩔 뻔했나. ▷‘6시간 계엄’에 놀란 가슴이 가라앉기도 전에 이처럼 경악할 만한 속보들이 쏟아지고 있다. 5100만 국민이 두고두고 할부로 치러야 할 안보와 경제적 대가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조차 안 된다. 탄핵 심판이든 내란 우두머리 수사든 부르는 대로 나가도 모자랄 판에 “엄연한 대통령”이라며 탄핵과 수사 순서를 정하고 있다. 그러고도 “굉장히 답답하다”고 한다. 사태 파악을 못 할 정도로 아둔한 건가, 비겁하게 모르는 척하는 건가. ‘대통령 복 없는 죄’밖에 없는 국민 속은 뭐라 해야 하나.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어느 정권이든 임기 후반 무렵이면 ‘게이트’가 열리곤 했다. 김현철 게이트, 최규선 게이트, 박연차 게이트, 최순실 게이트 등 게이트의 주인공은 달라도 대통령과의 친분을 악용해 부당한 잇속을 챙기다 정권에 치명타를 안기는 구조는 같았다. 윤석열 정부에선 법사와 도사들이 비리 의혹의 주역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도사와 얘기하기 좋아하는 영적인” 김건희 여사의 비선으로 지목된 이들이다. ▷대통령 부부와 친분을 과시했던 ‘건진법사’ 전성배 씨(64)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2018년 경북 영천시장 선거 출마자에게 당내 경선 승리를 위한 기도비 명목으로 1억 원을 받은 혐의다. 김 여사 전시기획사의 고문 명함을 들고 다녔고, 대통령의 입당 전 외곽 단체를 관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선 캠프 산하 조직에서 고문으로 활동하다 무속인 논란이 불거지자 조직이 해산됐으나 막후에선 역할을 했다고 한다. 법사가 이권을 챙긴다는 의혹이 정권 초기부터 나왔으나 경찰은 “풍문만으론 수사할 수 없다”고 했었다. ▷대통령 부부의 공천 개입 의혹 핵심 인물인 명태균 씨(54)도 ‘지리산 도사’로 불린다. 김 여사와는 ‘영적 대화’를 나누며 가까워졌다고 한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에 대해 김 여사에게 ‘청와대 가면 죽는다’고 조언한 사람이다. 유튜브 방송에 나와선 “김 여사가 처음 만났을 때 ‘우리 오빠 당선되느냐’고 물어봤고, ‘대선이 3월 9일이라 당선된다’고 답했다”고 했다. 이재명 후보는 꽃이 피어야 당선되는데 3월 9일이면 꽃이 피기 전이라는 것이다. ▷건진법사와 명도사는 천공과 함께 대통령 부부의 ‘3대 비선’으로 꼽히는데 이들 간 비선 경쟁도 치열했다. 명도사는 “(김영선 전 의원이) 건진법사가 공천 줬다더라. … 나를 쫓아내려고”라고 말했다. 김 전 의원이 공천받은 게 건진법사 덕분이라고 말하고 다닌다며 화낸 것이다. 또 “천공 같은 사람은 우리가 볼 때는 어린애”라고도 했다. 도사와 법사가 구속되고 체포되자 천공은 18일 윤 대통령에 대해 “지금은 실패한 게 아니다” “희생이 되더라도 국민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라고 두둔했다. ▷검찰은 명 씨의 ‘황금폰’에 이어 전 씨의 ‘법사폰’까지 확보해 분석 중이다. 황금폰은 명 씨가 관여한 것으로 의심되는 각종 선거가 있었던 시기에 사용한 폰이고, 법사폰엔 세무조사 무마 청탁과 이권 개입 의혹을 규명할 단서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통령 부부와의 통화 녹음도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아 게이트가 열리면 계엄 못지않은 ‘험한 것’들이 튀어나올 수 있다. 전문가의 조언과 민심엔 귀 닫은 채 자신의 미래도 내다보지 못한 삿된 도인들에게 휘둘렸으니 전근대적 리더의 행로가 편할 리 없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45년 만의 비상계엄 사태는 오래된 문화를 소환했다. 대학 캠퍼스에는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서툰 손글씨의 종이 대자보가 나붙었다. 디지털 세계에 갇혀 지내던 학생들은 광장에 나와 난생처음 대자보를 쓰고 읽으며 해방감과 유대감을 느꼈다고 한다. 또 하나가 호외(號外) 신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14일 토요일은 신문사들이 쉬는 휴일이었으나 일제히 호외를 발행해 헌정 사상 3번째 대통령 탄핵안 가결 소식을 전했다. ▷호외는 정규 발행일을 기다리기엔 긴급한 뉴스를 전하기 위해 호수 없이 발행하는 신문이다. 동아일보는 3만2120호와 3만2121호 사이 ‘尹대통령 탄핵, 직무정지’라는 큰 제목의 4개면 호외를 발행했다. 호외를 받아 든 중장년층은 “오랜만에 보는 호외”라며 반가워했고, 청년들은 드라마에서 봤던 신문 배달 소년처럼 “호외요 호외”를 외치며 신기해했다. 집회 현장의 시민들은 ‘역사 굿즈(기념품)’ 호외를 들고 인증샷을 찍었고, 소셜미디어에는 “탄핵 호외 구하고 싶다”거나 “호외 2부 있어서 1부 나눔한다”는 게시글도 여럿 올라왔다. ▷한국인이 발행한 최초의 호외는 독립신문 1898년 2월 19일자다. 4일 전 미 해군 함정이 쿠바 아바나만에서 폭침당했다며 미국-스페인 전쟁의 도화선이 될 사건을 전하는 내용이었다. 외신을 호외로 보도할 정도로 안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20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되면서 호외 발행이 잦아졌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엔 두 신문이 한 달 동안 약 50회의 호외를 내며 전황 속보를 전했다. TV가 보급되기 전에는 대형 물난리가 나면 ‘화보 호외’를 찍기도 했다. ▷호외는 환희와 성취, 충격과 슬픔이 가득한 현대사의 기록이다. 4·19 혁명, 5·16 쿠데타, 박정희 대통령 피살, 6·29 선언, 월드컵 4강 진출, 남북 판문점 선언 등 제목만 일별해도 격동의 현대사임을 실감할 수 있다. 드물지만 오보를 낼 때도 있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호외를 내고 이준 열사의 할복 자결 소식을 전했는데 오보였다. 1986년엔 한 신문사가 ‘김일성 총맞아 피살’이라는 제목의 호외를 발행했으나 바로 다음 날 김일성이 평양 공항에 나타나면서 오보로 판명 났다. ▷호외 전성시대도 저물었다. 이제 속보는 방송과 인터넷, 신문은 심층 보도와 의제 설정을 담당한다. 그래도 호외 문화가 남아 있는 이유는 중대한 사건일수록 공신력 있는 매체에서 정돈된 정보를 확인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온갖 설이 난무하는 디지털 시대에 삼삼오오 모여 호외를 펼쳐 든 건 ‘역사의 초고’를 공유하며 역사의 방관자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일종의 의례였을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8년 전 탄핵 정국에선 박근혜 대통령의 정신건강과 심리 상태를 놓고 전문가들이 여러 분석을 제기한 적이 있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대통령의 언행을 설명해 보려는 시도였다. 이번에도 음모론에 빠져 실패할 게 뻔한 비상계엄 선포로 탄핵 위기를 자초한 윤석열 대통령의 ‘범행 동기’에 대해 전문가들이 갖가지 분석을 내놓고 있다. “엄정 수사와 함께 정신 감정이 필요하다”는 제안도 나왔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대면 없이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순 없다”는 전제하에 “현실이 아닌 걸 현실로 믿는 망상적 사고를 갖고 있는 것으로 우려된다”고 했다. “권력자 중엔 자기애가 지나쳐 공감력이 떨어지는 이들이 있는데 윤 대통령이 그런 상태일 수 있다” “충동 제어가 안 되는 것 같다”는 진단이 나왔다.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병리적 문제일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자기와 다른 의견이나 질문에 노출되는 데 대해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 공포를 느끼는 것 같다”는 것이다. ▷직접 진료하지 않은 공인의 정신건강에 대해 전문적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의료 윤리 위반이 될 수 있다. 한 의대 교수는 “전문가 권위를 남용하고 의료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릴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의사들에겐 개인의 병이 타인에게 심각한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 ‘경고의 의무’가 있다는 반론도 있다. 대통령의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면 국가적 재앙이 되므로 비밀 준수 규정을 지키는 게 오히려 의사 윤리 위반이라는 논리다. ▷경고의 의무는 2017년 미국 정신의학 전문가 27명이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에 대해 “극단적 쾌락주의자이자 병적 나르시시스트, 소시오패스”라고 진단하면서 주목받았다. 트럼프가 나오는 수백 시간 분량의 동영상, 수천 건의 인터뷰, 수만 건의 트윗을 분석한 결과였다. 이들은 백악관 의료진이 대통령의 정신건강도 관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핵무기 담당자는 정신건강을 별도로 관리하면서 핵단추 누르는 최고 결정권자는 왜 관리 않느냐는 지적이었다. 국내에서도 대통령 정신건강을 관리할 주치의를 두고, 최고위급 공직자와 장성급은 매년 정신 검진을 의무화하자는 제안이 나온다. ▷윤 대통령은 “조증과 울증 상태를 왔다 갔다 하는 양극성 정동장애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빈손으로 임기를 마치게 될 거라는 비관과 초고속 승진해 용산까지 왔으니 앞으로도 잘될 거라는 낙관 사이에서 ‘정신적인 붕괴 상태’에 이르렀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윤 대통령은 국민 정신건강을 위해 역대 정부 최초로 대통령 직속 정신건강 정책 혁신위원회를 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국민을 위한다면 자신의 정신건강부터 챙겨야 했다. 대통령 마음의 병은 나라의 큰 ‘유고’에 해당함을 절감하는 시국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