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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폐쇄적인 나라 북한. 그런 북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그동안 공영방송들이 여러 북한 관련 프로그램을 내보냈지만 ‘북한 프로는 재미없다’는 고정관념만 심어줬을 뿐 화제가 된 적은 없다. 그런 점에서 2011년 12월 시작한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이만갑)’의 성공은 이례적이다. 탈북민이 나오는 예능의 원조인 이만갑은 재미와 교양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덕에 다음 달 1일 방송 700회를 맞는다. 종합편성채널 최장수 예능이다. ▷탈북민들이 출연하는 버라이어티쇼 이만갑은 시작부터 국내외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목숨 건 탈북 과정을 들으며 울고, 노래와 춤 북한 요리 솜씨 자랑에 웃고, 좌충우돌 남한 정착기엔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일본 NHK와 영국 가디언 등 외신은 녹화 현장을 취재하며 “재기발랄한 젊은 여성들이 용기 내어 자기 이야기를 전하는 점이 인상적”이라고 보도했다. 지금까지 출연한 탈북민은 1000여 명. 방송이 뜨자 출연자들도 테드 강연과 국제 인권 운동을 하며 글로벌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만갑 출연자들은 체제 선전에 가려져 있던 북한의 실상을 생생히 전달한다. 약이 귀한 북한에선 감기에 걸리거나 작은 부스럼만 생겨도 ‘빙두’를 찾을 정도로 마약이 널리 퍼져 있다거나, 북한엔 머리 좋은 ‘자연 수재’와 부모 잘 만난 ‘인공 수재’가 있는데 인공 수재들은 입주 과외까지 받는다거나, ‘북한에서 검사 3년 하면 집이 생긴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법 일꾼’ 인기가 좋다거나, ‘성도파’ 같은 반정부 청년 단체가 있다는 증언은 다른 곳에선 듣기 힘든 얘기다. 공개 재판 장면 같은 희귀 영상을 입수해 공개할 때도 있다. ▷북한 사람들도 이만갑에서 정보를 얻는다고 한다. 통제 사회인 북한에선 다른 지역 소식은 모르는데 몰래 입수한 이만갑 영상을 보며 내부 실상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만갑을 보고 탈북을 결심하거나, 탈북 전 한국 정착 ‘예습’을 위해 이만갑을 챙겨 봤다는 이들도 있다. 북한에서 꽃제비로 살다 탈북해 연 매출 100억 원대 식품회사 사장이 되고, 치과 의사로 펀드매니저로 성공한 출연자들을 보며 탈북민으로서 자긍심을 갖게 됐다는 이들도 있다. ▷남북으로 떨어져 산 세월이 너무 길어 얘깃거리가 쌓여서일까. 제작진은 처음엔 소재 고갈로 100회까지 갈 줄 몰랐다고 했는데 700회 방송을 앞두고 있다. 요즘은 엘리트 탈북민과 북한 전문가들이 출연해 북한의 역사 정치 외교 이슈를 종합적으로 다루는 북한 정보 쇼로 발전했다. 이만갑의 출연자들과 제작진은 남과 북을 자유롭게 오가는 세상이 돼 프로 제목이 ‘이제 만나러 왔어요’로 바뀌는 게 꿈이다. 그런 날이 머지않아 오게 되길 바란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올해는 대표적인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넷플릭스가 한국에 진출한 지 10년이 되는 해다. 한국 드라마를 최대 30개 언어로 서비스하며 한류 확산의 일등 공신으로 평가받던 넷플릭스지만 요즘은 국내 방송 생태계를 초토화시킬 ‘황소개구리’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넷플릭스의 등장 이후 국내 방송과 광고 시장은 OTT를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국내 OTT 이용률이 해마다 증가하는 동안 방송 채널 시청 시간은 2020년 161분에서 2023년 121분으로 3년 새 25% 감소했다. 국내 방송 프로그램 제작도 위축되고 있다. 글로벌 OTT가 제작하는 한국 드라마 제작 편수는 2019년 3편에서 2023년 22편으로 7배 넘게 급증한 반면 국내 방송사 드라마 제작 편수는 109편에서 77편으로 줄어들었다. 전체 광고에서 방송광고가 차지하는 비중도 3년 연속 하락해 17.6%로 쪼그라들었다. ▷해외 OTT에 날개를 달아준 건 방송과 통신을 구분하는 시대착오적인 비대칭 규제다. 시청자 입장에선 OTT든 방송이든 차이가 없지만 법적으로 OTT는 전기통신사업법상 부가통신사업자로 분류돼 사실상 ‘규제 프리존’에 놓여 있는 반면 방송사는 방송법에 따라 소유와 겸영부터 편성, 심의까지 깨알 같은 규제의 감시를 받는다. 광고 규제를 예로 들면 모유 수유를 장려한다는 명분으로 조제분유 광고까지 금지하는 등 관련 조항이 140가지가 넘는다. OTT는 표현의 제약 없이 참신한 시도를 하는 동안 방송사들은 콘텐츠에 투자할 역량을 규제 리스크 관리에 쏟아붓고 있는 실정이다. ▷해외 OTT는 방송통신발전기금 납부 의무도 없다. 2023년 국내 방송 사업자들은 6092억 원의 발전기금을 냈지만 넷플릭스는 국내 매출 8233억 원을 기록하고도 발전기금 납부 대상에서 제외됐다. 국내 방송사에만 불리한 역차별일뿐더러 글로벌 OTT에 수익의 5∼20%를 기금으로 부과해 자국 콘텐츠 제작에 지원하는 해외 주요국들의 추세와도 맞지 않는다. ▷한국언론학회 주최로 최근 열린 세미나에서는 “글로벌 미디어 사업자에게 요구하지 못하는 규제를 국내 사업자에게만 요구하는 건 부당한 시합을 하는 것” “시장 현실에 부합하도록 규제를 재설계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왔다. 방송과 통신의 경계를 허무는 인터넷TV(IPTV)가 등장할 때부터 비대칭 규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됐지만 정부는 방송통신위원회까지 만들고도 방송 따로 통신 따로인 규제는 그대로 방치하면서 ‘넷플릭스 천하’로 가는 길을 열었다. 무역 수지 불균형 해소에 기여해온 국내 방송 산업이 고사되기 전에 OTT는 되고 방송은 안 되는 불합리한 규제부터 바로잡아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기어이 사법부를 손볼 모양이다. 더불어민주당은 대법원이 선거를 앞두고 이례적인 속도로 이재명 대선 후보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리자 조희대 대법원장에게 ‘희대의 난’을 일으킨 책임을 묻겠다며 자진 사퇴와 위법 소지가 다분한 청문회 출석을 요구했고, 자진 사퇴도 청문회 출석도 거부하자 명확한 범죄 혐의도 없이 ‘조희대 특검법’을 발의했다. 이 후보 사건에 유죄 의견을 낸 대법관 10명을 탄핵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대법원장 손보기는 민주주의의 토대인 삼권분립을 위태롭게 하는 초유의 시도로 독재 국가에서나 일어나는 만행이다. 필리핀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 집권 시절에 대법원장이 정부의 즉결 처형도 허용하는 범죄자 소탕전과 계엄 선포를 비판하다 탄핵당한 적이 있다. 두테르테는 그 대법원장이 지적했던 반인도적 살상 범죄 혐의로 얼마 전 체포돼 국제형사재판소 재판을 받는 신세가 됐다. 철권 통치자가 아니면 엄두도 못 낼 사법부 때리기를 집권 가능성이 높은 제1당이 하고 있으니 이런 나라 망신도 없다. 민주당은 일명 ‘이재명 재판 정지법’ ‘4심제 허용법’과 함께 대법관 수를 현행 14명에서 30명, 100명으로 늘리는 대법원 재구성 법안도 내놓았다. 민주당은 ‘사법개혁’이라 하지만 정치학 용어로 ‘심판 매수’라 부르는 ‘사법부에 제 사람 심기’ 꼼수다. 근대 사법 체계의 핵심이 통치 권력과 사법 권력의 분리다. 민주당 법안이 통과되면 통치 권력이 입맛대로 사법부를 구성해 두 권력 간 분리가 안 되는 ‘원님 재판’ 시절로 퇴행할 우려가 크다. 경제는 인공지능(AI)으로 가자면서 사법 체계는 왜 조선시대로 돌아가자 하나. 국내 공론장에서 수도 없이 인용된 미국 하버드대 교수 2명의 저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는 대법관 수 늘려 어용 판사로 채우다 민주주의를 무너뜨린 ‘심판 매수’ 사례가 줄줄이 나온다. 베네수엘라가 대표적이다. 차베스는 ‘사법개혁’이라며 모든 국가 기관 해산권을 요구했고 대법원은 다수결로 이를 받아줬다. 차베스는 대법원을 해산하고 대법관 수를 20명에서 32명으로 늘려 ‘혁명적’ 측근들을 앉히고, 대법원장은 “법원은 암살을 피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다”는 말을 남기고 사퇴했다. 암살이든 자살이든 사법부가 죽는 건 마찬가지다. 이후 대법원이 정부에 불리한 판결을 하나도 내놓지 않은 덕에 차베스는 14년간 장기 집권할 수 있었다. 앞으로 이 책의 개정판에는 한국의 사법부 손보기 사례가 포함돼 세계적인 반면교사로 회자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 후보의 사법 리스크가 삼권분립을 흔드는 국가 리스크로 커진 데는 이 후보 책임만 있는 게 아니다. 먼저 ‘정당의 문지기’ 역할을 못 한 민주당 책임이 무겁다. 왜 선거 앞두고 재판을 하느냐고 따질 자격이 없다. 8개 사건에 대해 5개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을 대선 후보로 선출한 건 민주당이다. 사법권 침해의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법률 전문가들은 또 어떤가. 대한민국 1호 헌법연구관으로 법제처장을 지낸 인사는 민주당 공동선대위원장으로서 문제의 대법원 판결에 대해 ‘헌재가 윤석열 대통령 파면 결정으로 세계적 각광을 받자 대법관들이 자존심을 찾기 위해 퇴행적 판결을 했다’고 주장했다. “정치도 선거도 법 위에 있지 않다”고 일갈했던 사람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그의 초대 법무부 장관을 지낸 인사는 총괄선대위원장인데 ‘민주당의 대법원장 사퇴 요구에 동의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당으로서는 충분히 할 말을 했다”고 두둔했다. 이들이야 캠프 사람들이라 치자. 헌법학회건 공법학회건 이번 사태에 대해 성명서 한 장 내지 않은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법대 교수들 몇 명이 국회에서 규탄 성명을 발표한다 해서 봤더니 ‘대법원장 사퇴, 대법관 수 대폭 증원’이라는 민주당과 똑같은 주장을 하다 끝났다. 무엇보다 중요한 곳이 사법부다. 이 후보는 “(사법부의) 총구가 우리를 향해 난사하면 고쳐야 한다”고 했다. 지금의 사법부에는 사법부로 향하는 권력의 총구를 막아낼 의지가 있는가. 이 후보의 출석 의무가 있는 재판들이 모조리 선거 이후로 미뤄졌는데 사법부가 ‘암살’을 피해 ‘자살’을 택한 것이 아니라 믿고 싶다. 이 후보는 대선 공약으로 대통령 계엄권 통제 강화와 사법개혁을 통한 ‘내란 극복’, ‘K민주주의 위상 회복’을 내세웠다. 대통령의 어리석은 비상계엄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다짐일 테지만 요즘 민주주의의 붕괴는 군을 앞세운 쿠데타가 아니라 선출된 지도자 손으로 이뤄진다. 폭력을 내세운 ‘경성 내란’은 가시적이어서 경각심을 갖고 막아낼 수 있어도 합법과 다수결을 통한 ‘연성 내란’은 난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당한다. 민주주의는 총칼로만 무너지지 않는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역대 교황들 중엔 유럽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다. 8일 선출된 레오 14세(70)를 포함해 지금까지 15개국에서 267명의 교황을 배출했는데 이 중 이스라엘 출신인 초대 교황 성 베드로를 비롯해 12명을 빼면 모두 유럽인이다. 최초의 신대륙 출신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하기 전 135년간 재위한 10명의 교황 전원이 유럽인이었다. 시카고 태생인 레오 14세 선출은 신대륙, 그것도 가톨릭교회 2000년 역사상 최초의 미국인이라는 점에서 파격적이다. 교황직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 초강대국 출신은 배제한다는 불문율을 깬 것이다. ▷새 교황 레오 14세는 아버지 쪽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혈통이고 어머니는 스페인계다. 27세부터 로마에서 유학했고,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은 뒤로는 페루로 건너가 20년간 사목하며 페루 시민권도 얻었다. 영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등 5개 국어와 라틴어가 유창한데 교황에 선출된 후 첫 강복은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로 하고 라틴어로 마무리했다. 미국과 유럽 언론은 “가톨릭 글로벌리스트” “가장 미국적이지 않은 미국인 교황”이라고 보도했다. ▷미국은 청교도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여서 반(反)가톨릭 정서가 있었다. 역대 대통령 중 가톨릭교도는 존 F 케네디와 조 바이든 2명뿐이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남부연합군 출신 가톨릭 교인들에게 암살당하자 1867년 건국 이후 유지해온 바티칸시국과의 영사 관계도 끊었다. 이후 117년 만인 1984년에야 공식 수교했는데 당시 교황이던 폴란드 출신 요한 바오로 2세는 반공주의자로서 미국의 든든한 우군으로 냉전 승리에 큰 역할을 했다. 1979년 백악관에 초청받은 첫 교황이었다. ▷미국 출신 교황 선출에 대해선 “도널드 트럼프 시대 대미 소통 강화 차원” “트럼프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다양한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은 백인 기독교인 집단인 복음주의자들이다. 레오 14세 교황은 신학적으로는 중도 성향이지만 전임자인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이민자 보호나 기후 위기 같은 진보적 의제에 관심이 많다. 트럼프 정부의 반이민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적도 있다. ▷전임자들과 달리 프란치스코 교황은 12년간 68개국을 돌면서도 고국인 아르헨티나는 한 번도 찾지 않았다. 교황의 방문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걸 원치 않았다고 한다. 특히 대선 전 “망할 공산주의자”라며 교황을 욕했던 극우 성향의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과는 껄끄러웠다. ‘교황 합성사진’ 논란을 일으켰던 트럼프 대통령은 “레오 14세를 만나길 고대한다. 매우 의미 있는 순간이 될 것”이라고 했다. ‘가장 미국적이지 않은’ 미국인 교황이 언제 고국을 찾을지,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미국 대통령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될지 주목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4세 이하 어린이 인구가 지난달 539만 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전체 인구 대비 10.5%다. 이는 인구 4000만 명 이상인 37개국 중 가장 낮은 비율로 세계 평균치(24.7%)의 절반도 안 되며, 한국보다 17년 앞서 초고령사회가 된 일본(11.4%)보다도 낮다. 17개 시도 가운데 어린이 인구 비율이 가장 낮은 지역은 서울(8.9%)이고 가장 높은 지역은 세종시(17.7%)다. ▷어린이날이 공휴일로 지정된 1970년대만 해도 어린이 인구 비중은 43%, 65세 이상은 3%로 세계 각국과 비교하면 젊은 나라에 속했다. 그런데 지금은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어린이 비중의 2배다. 지금 같은 저출산 고령화가 지속되면 25년 후엔 어린이 인구는 8%로 쪼그라들고 65세 이상은 40%로 불어날 전망이다. 연령대별 인구 분포가 아래는 좁디좁고 위로 갈수록 비대해지는 역삼각형 형태로 바뀌고 있다. 부양 부담만 커지는 암울한 인구 구조다. ▷어린이 행복도도 수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꼴찌를 기록하고 있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의 ‘2024 아동행복지수’에서는 어린이 행복도가 100점 만점에 45점으로 낙제점 수준이었다. 공부는 권장 학습 시간보다 더 오래 하고, 잠은 적정 수면 시간보다 훨씬 적게 자는 생활 습관 탓이 크다. 기저귀 떼기 전부터 사교육을 시작해 영어 유치원 입학을 위한 ‘4세 고시’, 유명 영어와 수학 학원 수강용 ‘7세 고시’를 거쳐 초등학생이 되면 수학 문제가 수능 만점자도 풀기 어렵다는 ‘초등 의대반’을 준비하는 세태다. ▷공부만 하고 놀지 않는 아이가 건강할 리 없다. 밤늦게까지 공부하거나 스마트폰 하느라 불면증을 겪는 어린이는 13%이고, 소아 우울증이나 불안장애를 겪는 초등학생도 10만5000명으로 4년 전보다 2.3배로 늘었다. 영유아 사교육 열풍이 뜨거운 서울 강남 3구 9세 이하 어린이의 우울증과 불안장애 진단은 4년새 3배로 늘었다. 유아기부터 시작되는 지나친 선행학습은 뇌 기초공사를 할 시기에 고층 빌딩을 짓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받는 스트레스로 학습 능력과 감정 조절 기능이 약해져 작은 충격에도 쉽게 마음의 병을 얻고 무너진다는 것이다. 돈 써서 아이 망치고 있는 셈이다. ▷행복지수가 높은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방과 후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하루 평균 53분 길고, 운동하는 시간은 17분 길었으며, 학원에서 공부하는 시간은 38분 짧았다. 일하는 어른들도 워라밸을 챙기면서 왜 한창 뛰어놀 아이들에겐 놀 권리를 주지 않나. 행복하게 자란 아이가 커서도 행복하다.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확신을 줘야 아이도 낳고 싶어진다. 적게 낳아 불행하게 키우는 바보짓은 이제 그만하자.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세계 정상급 인사 8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130여 개국 대표단과 함께 25만 명이 장례미사에 참석했고, 15만 명이 운구 행렬을 따랐다. 26일 엄수된 프란치스코 교황 장례식 참석자들의 면면과 추모 인파는 바티칸 시국의 수반이자 14억 가톨릭 신도들의 지도자로서 교황의 위상을 실감케 한다. 하지만 장례식은 검박했다. ‘가난한 이들의 겸손한 수호자’였던 교황의 유언대로 품위 있되 소박한 마무리였다. ▷21일 선종한 교황은 전임자들과 달리 방부 처리를 않고 세 겹이 아닌 홑겹 관에 안치돼 조문객을 맞았다. 선종 후에도 우상이 되기보다 인간적이었던 교황의 마지막 모습에 조문객들은 사진기를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았다. 장지인 성모 대성전에서 교황의 관을 처음 맞이한 이들은 로마의 가난한 사람들. 76세에 즉위한 후 12년간 68개국을 돌며 약자들을 위로했던 고단한 몸은 땅 아래 묻혔고, 고급 대리석 대신 증조부 고향에서 캐낸 ‘민중의 돌’로 만든 비석엔 ‘빈자의 성인’에서 따온 교황의 라틴어 이름만 새겨졌다. ‘프란치스쿠스’. ▷검소했던 장례 절차는 교황직을 수행하던 모습 그대로다. 교황청은 보유 자산이 최소 8조5000억 원에 연간 예산이 1조2000억 원이지만 교황은 ‘가난 서약’에 따라 월급(4600만 원)을 모두 교회에 기부했다. 2001년 추기경에 서임된 후로도 월급(670만∼840만 원)을 받지 않았다. 교황이 남긴 전 재산이 100달러뿐이라는 아르헨티나 언론 보도도 나왔다. 교황은 저서에서 “교회의 사제, 주교, 추기경들이 고급차를 몰며 청빈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마음 아프다”고 썼다. ▷청빈함은 12년 전 남미 출신으로는 최초로 교황에 선출된 비결이다. 교황청 안팎으로 비리와 추문이 끊이지 않던 시기에 교황이 된 그는 방만한 재정 개혁에 나섰다. 2021년엔 “교황청 재정은 투명한 유리집이 돼야 한다”며 교황청이 전 세계에 보유한 5000여 개 부동산 실태를 공개했다. 교황청 고위직이 신자들의 헌금으로 영국 런던의 고급 빌딩을 시세보다 비싸게 사들였다 큰 손해를 본 사건이 계기가 됐다. 연간 800억∼900억 원의 적자 해소를 위한 추기경 임금 삭감 등 구조조정도 마지막까지 힘을 기울였던 과제다. ▷한국에선 김수환 정진석 염수정 유흥식 4명의 추기경이 나왔고, 이 중 2명이 선종했다. 2009년 선종한 김 추기경 장례미사는 일반인과 별 차이 없이 소박했고, 2021년 선종한 정 추기경 때는 코로나로 더욱 간소했다. 김 추기경은 각막 기증으로 빛을, 정 추기경은 장기 기증으로 생명을 주고 떠났다. 모든 걸 내어주고 빈손으로 떠난 성직자들을 보며 혼탁한 뉴스로 어지러운 세상에 부끄러움을 느낀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21일 향년 88세로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점진적 개혁주의자로 평가받는다. 최초의 신대륙 출신 교황이자 예수회가 배출한 첫 교황이었다. ‘교황청의 아웃사이더’인 셈인데 동시에 아르헨티나 국적이긴 하나 이탈리아 혈통이고 가톨릭 교리에 충실한 보수주의자였다. 급진적이지 않으면서 성추문과 부패 문제로 신뢰를 잃어가던 가톨릭 교회를 재건할 적임자로 제266대 교황에 선출된 그는 12년간 12억 가톨릭 교인들과 함께 안정적인 변화를 이끌며 울림이 깊은 말을 남겼다. ▷가톨릭의 최고 이론가였던 전임 교황과 달리 그는 거리의 성직자였다. “천성이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고선 살 수 없다”던 그는 1969년 사제품을 받은 후 ‘가난한 자들의 아버지’로 불리며 평생을 낮은 곳에 사는 이들과 함께했다. 가난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제2의 출애굽’으로 여기는 해방신학의 고장 남미 출신인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좌파적 해방신학에 거리를 두면서도 “가난한 이들의 깃발은 기독교도의 것”이라고 했다. ▷76세 고령에 교황이 된 그는 우려와 달리 전 세계를 바삐 다니며 평화와 화해를 호소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발언도 피하지 않았다. 난민들의 떼죽음엔 “우리 모두 공범”이라고 질타했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이민 정책에 대해선 “다리가 아닌 벽만 세우려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무슬림 과격분자의 공격을 받은 후엔 이슬람과 폭력을 동일시하지 말라며 “이슬람 폭력을 말하려면 가톨릭 폭력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고 했다. 2014년 방한 당시 세월호 리본을 단 그에게 주변에서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으니 떼는 게 좋겠다’고 하자 이렇게 답했다. “인간적 고통 앞에 정치적 중립은 없다.” ▷성 소수자 문제에 대해선 전향적인 입장을 보였다. 동성애자 사제에 대한 질문을 받고는 반문했다. “내가 누구라고 그들을 판단하겠나.” 동성애, 이혼, 재혼에 대해서도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고 했다. 하지만 동성혼 허용과 여성 사제 서품엔 반대하며 가톨릭의 핵심 가치를 고수했다. 개혁론자들은 반발했지만 “더 크고 오래가는 합의를 만들려면 점진적으로 바꿔 나가야 한다”는 것이 교황의 지론이었다. ▷청빈했던 그는 교황에 오른 뒤엔 화려한 전용 숙소를 거부하고 소박한 사제들의 공동 숙소에서 살았다. 낡은 구두를 신고 순금 대신 철제 십자가를 목에 걸었다. 나머지는 다 헛것이라고 했다. “공작새를 보라. 앞에서 보면 아름답지만 뒤에서 보면 진면모를 알게 된다.” 마지막 부활절 강론에서 “전쟁을 끝내 달라”고 당부하고, 유언장에는 “장식 없는 무덤에 이름만 새겨 달라”고 했다. 13세기 ‘빈자의 성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딴 이름다운 마무리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6·3 조기 대선을 앞두고 국민의힘이 경선 시작도 전에 ‘빅텐트’ 운운하며 우왕좌왕하는 동안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는 대선을 향해 안정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브리풍 동화 같은 영상 메시지로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고, ‘결국 국민이 합니다’는 겸손한 제목의 책도 내고, 경제 성장을 강조하며 1호 공약으로 “인공지능(AI) 투자 100조 원 시대를 열겠다”고 발표했다. ‘이재명은 위험하다’며 망설이는 중도 표심을 안심시켜 이재명 대세론을 굳히려는 시도로 보이지만 기대한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1호 공약은 AI에 집중 투자해 ‘AI 기본사회’를 만들겠다는 내용이다. AI 교과서도 반대했던 민주당이다. AI 기본사회란 어떤 사회를 말하는가. 엄청난 전력을 소모하는 AI 산업을 육성하려면 싸고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필수적이다. 탈원전 정책을 폈던 유럽 국가들이 원전 건설을 늘리는 이유다. 민주당도 어제 “원자력 생태계를 구축하자”고 나섰는데 탈원전 정책을 포기한다는 얘긴지 헷갈린다. 당내 관련 조직에서 에너지 분과위원장을 맡은 이가 문재인 정부 탈원전 정책에 앞장섰던 인물이고, 이 전 대표도 책에서 재생에너지 비중 확대만 언급했을 뿐이다. 지지 세력인 탈원전 단체들이 들고일어나면 한다 했다가 철회한 ‘반도체 부문 주52시간 예외 특례’처럼 되는 것 아닌가.공약의 신뢰도 문제는 이 전 대표 성정에 대한 불안감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 같다. 그의 새 책에서 “다양성과 비판은 우리 민주당의 생명과도 같은 원칙” “(지난해 4월 총선에서) 혁신 공천으로 공천 혁명을 이뤄냈다”는 대목을 읽고 많이 놀랐다. 민주당 법률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변호사마저 ‘이재명 일극 체제’에 실망하고 당을 떠나며 “더불어도 없고 민주도 없다”고 했다. ‘혁신 공천’이 아니라 ‘비명횡사’ ‘공천 학살’이었음은 이 전 대표가 가장 잘 알 것이다. 그는 지난달 유튜브 방송에 나와 2023년 9월 자신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일을 거론하며 ‘총선에서 다 드러나서 책임을 물었다’고 했다. 동의안에 찬성표를 던졌을 것으로 의심되는 의원들을 ‘숙청’했다 인정해 놓고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양성이 민주당 생명이고 혁신 공천이었다 말하나.지난 대선에서 짙은 색 정장 차림에 “이재명은 합니다”를 외쳤던 그는 이번 대선 출마 영상에선 크림색 스웨터를 입고 나와 “대한 국민의 훌륭한 도구 이재명이 되고 싶다”고 했다. ‘못할 게 없는 사람’이라는 무서운 이미지를 벗고 ‘믿음직한 국민 머슴’ 이미지를 입고 싶었겠지만 ‘도구’라는 단어 선택은 실수였다. 당 대표 시절 ‘민주당이 이재명 로펌이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공당을 사조직처럼 도구화한 전력을 떠올리게 해서다.비명들이 횡사하는 동안 이 전 대표와 측근들의 사법 리스크를 변호하고 관리했던 율사 5명은 금배지를 달았다. “사실상 변호사비 대납 아니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민주당이 검토하고 추진했던 법안들 중엔 당 대표 사건을 맡은 검찰을 압박하는 ‘검사 법 왜곡죄’, 수천억 원대 배임 혐의로 재판받는 대표를 위한 배임죄 폐지, 대표가 재판받고 있는 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죄를 없애고 이를 소급 적용하는 법안도 들어 있다. 이 대표 수사하다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검사가 5명이다. 민주화 이후 이 정도로 민주주의와 법치를 유린한 당 대표가 또 있었나.민주당이 야당인 상황에선 말도 안 되는 법안이 통과되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최대 야당이 행정 권력까지 거머쥐면 국회가 정부를 감시하기는커녕 대통령 사법 리스크 제거를 위한 법을 만들어도, 대통령 친인척 비리 수사를 못 하게 법을 바꿔도 막을 도리가 없다. 혹여라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할 경우 야당 의원만으로는 계엄 해제안을 통과시킬 수도 없다.‘이재명 공포증’에 대해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라디오 방송에 나와 “김대중 대통령도 과격하다, 빨갱이다 많은 걱정들을 했지만 성공한 대통령이 됐다. 김대중을 보면 이재명이 보인다”고 두둔했다. 동의할 수 없다. 이재명이 두려운 건 이념 문제보다 아무렇지 않게 말을 바꾸고 권력을 잔인하게 쓰면서 삼권분립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사람 같기 때문이다.대통령 이재명은 김대중이 아니라 김대중이 3선 개헌 후 대선에 나선 박정희를 비판하며 언급했던 ‘총통’에 가까울 것이라는 우려까지 나온다. 그는 이재명 공포증을 해소해줄 ‘대선날 분권형 개헌안 국민투표 동시 실시’ 제안도 거부했다. 그래서 편안한 옷차림으로 웃고, 이재명이 아니라 국민이 한다 하고, 오늘까진 당을 도구로 썼지만 내일부턴 국민의 도구가 되겠다는 이재명이 여전히 미덥지가 않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올림픽, 월드컵과 함께 3대 글로벌 이벤트로 꼽히는 엑스포가 12일 오사카에서 개막했다. 1970년 오사카, 2005년 아이치에 이어 일본에서 열리는 세 번째 등록 엑스포다. 오사카가 개최지로 선정될 때만 해도 전후 일본의 부흥을 알렸던 55년 전 오사카 엑스포의 영광을 재현하리라 들떠 있던 현지인들은 이번엔 시작부터 저조한 흥행에 ‘동네 잔치’로 끝나는 것 아니냐며 불안해하고 있다. ▷오사카 엑스포 개최 지역은 매립지에 만든 인공섬 유메시마다. 엑스포 상징물인 세계 최대 목조 건축물 ‘그랜드 링’(둘레 2km) 안팎으로 한국을 비롯해 각국의 전시관 42개가 마련돼 첨단 기술을 선보인다. 일본 정부는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아 한국인들이 몰려들기를 기대하고 있다. 개최지 선정 당시만 해도 관람객 2820만 명을 유치해 33조 원의 경제 파급효과를 낼 것으로 예상했지만 지금까지 팔린 티켓은 1000만 장도 안 된다. 라멘 한 그릇에 3만8000원, 여행 가방 맡기는 데 하루 10만 원인 ‘바가지요금’도 논란이다. ▷한국은 오사카 다음으로 국내 최초 등록 엑스포가 될 2030 부산 엑스포를 유치하려다 실패했다. 지역 안배 원칙을 감안하면 오사카에서 가까운 부산이 될 가능성은 낮았음에도 대통령실에 전담 조직까지 두고 유치전에 올인한 결과 2023년 11월 1차 투표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 29 대 119로 대패했다. 부산만의 매력을 보여주기보다 강남스타일과 오징어 게임을 내세운 홍보 전략은 “뜬금없고 식상하다”는 혹평을 받았다. 1차 투표 3개월 전 ‘잼버리 사태’가 터지자 한국의 대형 행사 개최 역량이 의심받기도 했다. ▷결과 예측에 실패해 헛심 쓰게 한 정부의 무능은 더 큰 문제였다. 대통령이 프랑스 파리로 날아가 영어 프레젠테이션을 한 후론 ‘한국 지지로 선회’ ‘불과 10여 표 차이’라는 보고가 줄을 이었다. 1차 투표에서 70표 얻고 2차 투표에서 뒤집자는 전략이었다. 일선에서 ‘아직 그만한 표를 확보 못 했다’고 보고하면 ‘왜 사기를 꺾느냐’는 질책이 떨어졌다고 한다. 외교망 확충 효과를 거뒀다고 하나 2년간 5744억 원, 표당 198억 원이 들었다.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 담화를 발표했지만 그뿐이었다. 판세 예측 실패나 허위 보고 여부에 관한 진상 규명은 없었다. 외교부 장관과 대통령실 참모는 징계는커녕 총선 공천을 받았고, 외교부 차관은 경제 부처 장관으로 승진까지 했다. 여권에서도 “무능하고 아부에 찌든 참모들이 나라를 어지럽게 한다”는 질타가 나왔는데, 그때 대통령 보고 체계를 점검했더라면 엑스포 유치엔 실패해도 정권 실패엔 이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부산 엑스포의 꿈을 접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당시 유치전부터 복기해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한덕수 국무총리 탄핵이 기각되면서 거대 야당이 주도한 고위 공직자 탄핵 시도가 9전 9패를 기록했다. 현 정부에서 발의된 탄핵소추안 30건 중 헌법재판소가 선고한 9건 모두 기각 결정이 났다. 주요 선진국과 달리 한국은 탄핵 심판이 진행되는 동안 직무가 정지된다. 9명의 직무 정지 기간이 평균 5개월이니 무리한 탄핵 남발로 국정 공백을 초래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이제 한 총리를 복귀시킨 헌법재판관 8명이 윤석열 대통령은 어찌할지 주목된다. 윤 대통령 탄핵은 성공할까.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심판은 변론 종결 후 14일, 박근혜 전 대통령은 11일 만에 결론이 났는데 윤 대통령은 한 달이 지나도록 선고일도 못 잡고 있다. 탄핵 심판이 법적 절차이자 정치적 절차임을 감안하면 탄핵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은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노 전 대통령 땐 탄핵 반대 여론(71%)이 압도적이었고, 박 전 대통령은 탄핵 찬성(77%)이 압도했다. 윤 대통령은 탄핵 찬성 58%, 반대 36% 구도가 두 달간 이어지고 있다(한국갤럽). 탄핵 찬성 비율이 높지만 압도적이진 않다. 앞서 두 차례 대통령 탄핵 때와 달리 보수 성향의 헌법학자들을 중심으로 절차적 정당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은 점도 부담일 것이다. 권위 있는 헌법학자인 허영 경희대 석좌교수와 박 전 대통령 탄핵 심판 주심을 맡았던 강일원 변호사도 우려를 표하고 있어 흘려듣기 어렵다. 상식의 눈으로 보면 비상대권을 ‘경고용’으로 휘두른 무모한 사람에게 어떻게 대통령 자리를 계속 맡길까 싶다. 국회에 무장 군인이 들어가는 걸 생방송으로 봤고, 체포조 얘기도 여럿한테 들었으니 더 따져볼 것도 없다 싶은데 보수 헌법학자들 생각은 다르다. 대통령과 국회가 주고받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계엄선포권과 해제 요구권 행사)에 사법부의 개입은 신중해야 하고, 탄핵 사유에서 핵심인 내란죄 부분을 철회한 것은 심각한 하자이며, 국회 무력화와 정치인 체포 지시 같은 사실관계도 명확히 정리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윤 대통령은 이전 두 대통령과 달리 내란 혐의 수사도 받고 있다. 형사 법정에선 쓸 수 없는 증거들을 탄핵 심판에서는 채택했는데 단심제인 탄핵 결정이 난 후 형사 재판에서 다른 결론이 나오면 어떻게 될까. 헌재가 신문한 증인은 16명이지만 내란죄 형사 재판에선 검찰이 신청한 증인만 520명이다. 윤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기 한 달 전 이철희 정치평론가가 두 전직 대통령 탄핵의 성패를 가른 요인을 분석한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냈다. 노 전 대통령 때는 국회가 민심에 역행해 탄핵을 밀어붙이는 바람에 ‘의회 쿠데타’로 받아들여져 실패한 반면, 박 전 대통령 탄핵은 무르익은 민심의 요구를 국회가 수용하는 방식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박 전 대통령 탄핵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1기 때인 2017년 워싱턴포스트 칼럼에서 모범 사례로 소개됐다. 러시아 대선 개입 의혹에 트럼프 대통령 탄핵 요구가 거세던 시기로 이 칼럼은 탄핵 주도 세력의 절제와 신중함을 성공 요인으로 꼽았다.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여론이 거셌지만, 거국 중립내각 구성 등 다른 ‘위엄 있는 퇴로’를 먼저 제안하다 탄핵을 최후의 수단으로 활용함으로써, 혼란을 끝내고 질서를 회복할 정치 세력이라는 신뢰까지 얻을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거의 다 된 것 같던 윤 대통령 탄핵 절차가 막판에 느려진 이유도 더불어민주당이 이재명 대표의 선거법 확정 판결 전 조기 대선을 치르려고 서두른 탓이 크다. 헌법상 탄핵안 의결은 ‘대통령이 그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라야 가능하다. 하지만 탄핵안 가결 전 헌법과 법률 위반 여부를 따져보는 절차는 없었다. 1차 탄핵 때는 언론 기사 7건, 2차 땐 63건을 참고 자료로 첨부했을 뿐이다.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 탄핵 때는 상원에서 사실조사 하는 데 1년, 하원에서 소추 사유 확인하는 데 6개월 걸렸다고 한다. 국회가 제 역할을 했더라면 헌재에서 ‘요원’이냐 ‘인원’이냐 같은 사실관계 따지느라 귀한 시간 허비하는 일도, 광장에서 찬탄 반탄으로 갈라져 싸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탄핵은 국회의 탄핵 소추, 헌재의 심판, 여론의 승복으로 완성된다. 첫 번째 단계의 과오를 만회할 두 단계의 기회가 남아 있다. 헌재는 ‘신속하되 공정한’ 결정으로 설득하고, 윤 대통령과 야당은 무조건 승복해야 ‘58 대 36’의 갈등을 봉합할 수 있다. 탄핵 결정이 내전의 종식이 아닌 확전의 시작이 된다면 탄핵이 인용돼도 성공한 탄핵이 아니고, 탄핵이 기각돼도 성공한 기각이 아닌 게 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언론 통제 국가들에 외부 소식을 전해온 국영방송 ‘미국의 소리(VOA)’가 설립 83년 만에 신규 방송을 중단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VOA를 운영하는 글로벌미디어국(USAGM)을 구조조정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한 후 1300명 넘는 VOA 기자와 PD들이 휴직 처리됐다. USAGM 산하 조직으로 중국의 인권 유린 실태를 폭로해온 자유아시아방송(RFA)도 방송이 중단됐다. 트럼프는 비용 절감을 내세우지만 비판 언론 길들이기라는 지적이 나온다. ▷VOA는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선전전에 대항해 설립된 후 영국 BBC 해외방송과 함께 주요 심리전 수단으로 활약했다. 신규 방송 중단 전까지 북한 중국 이란 등의 수용자 3억6000만 명에게 48개 언어로 해외 뉴스를 전하고 독재 정권을 감시하는 역할을 해왔다. VOA 총국장은 “80년 넘게 공산주의와 파시즘에 맞서 싸우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온 미국의 귀중한 자산이 침묵당해 슬프다”고 했다. ▷한국어 방송은 같은 해 8월 시작됐는데 첫날 방송에서 이승만의 떨리는 육성 연설 ‘2000만 동포에게 고한다’를 내보냈다. 일본이 전쟁에서 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이를 단파방송으로 몰래 듣고 외부에 전파한 이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6·25전쟁 발발과 미국의 참전을 가장 먼저 전한 것도 이 방송이었다. 전쟁 기간 내내 매일 1시간 15분씩 정규 방송을 편성하고, 학교 교육이 어려워지자 ‘방송학교’라는 교육 프로도 내보냈다. 주요 청취자는 귀한 라디오를 가진 엘리트 계층이었는데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땐 몰래 이불을 뒤집어쓰고 들었다고 한다. ▷1952년 임시 수도 부산에서 있었던 ‘부산 정치 파동’으로 방송이 중단된 적도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재집권을 노리고 직선제 개헌을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자 VOA는 이를 비판 보도했고, 공보처가 ‘내정 간섭’이라며 KBS를 통한 중계방송을 2주 넘게 중단했다. 전후 한국 언론이 제자리를 잡은 후엔 북한을 핵심 청취 및 취재 대상으로 바꿨다. 2018년 북한산 석탄의 국내 위장 반입 의혹을 처음 보도한 것이 VOA였다. ▷VOA는 연간 예산 10억 달러(약 1조4500억 원)를 정부에서 지원받지만 방송의 독립성을 내세우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보도를 해왔고, 백악관은 그런 VOA를 “좌파 편향적”이라며 불편해했다. 민영 방송사와도 소송전을 마다하지 않는 트럼프에게 국영방송 문을 닫게 하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VOA 신규 방송 중단 소식에 중국 관영 언론은 “거짓말 공장”이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논평했다. 미국 언론이 지적하듯 ‘독재자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침묵하게 하는 것은 ‘미국의 적에게 주는 선물’이 될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김대중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감옥은 작지만 큰 대학”이라고 했다. 내란 음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옥살이 6년간 하루 10시간씩 독서하고, 그리운 가족과 편지 주고받고, 화단을 가꾸며 “여기 오지 않았더라면 깨칠 수 없는 진리를 깨쳤다”고 썼다. 하지만 이는 예외적인 예찬일 뿐 감옥은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최고 권력을 쥐어본 이들에겐 더욱 그러할 것이다. ▷역대 대통령 중 수감 생활을 한 이는 전두환, 노태우, 박근혜, 이명박, 윤석열 대통령. 속칭 ‘범털’들은 입소 초기엔 음식 때문에 고생한다. 박 전 대통령은 구치소 음식이 짜서 맨밥만 먹다가 나중에는 컵라면을 사서 물을 많이 부어 먹었다고 한다. 전, 노 두 전직 대통령이 안양교도소와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다가 12·12와 5·18 사건 등으로 같은 법정에 출석해 처음 나눈 대화는 유명하다. “자네 구치소에선 계란프라이 주나?” “안 준다.” “우리도 안 줘.” ▷수감 생활 중 병원 신세를 지는 경우도 많다. 건강을 핑계로 쉽게 탈옥한다는 비난이 제기되지만 고령인 탓이 크다. 구치소에선 튼튼한 장정도 1년 지나면 몸이 망가지기 십상이라고 한다. 이 전 대통령은 구속된 지 4개월 만에 수면 무호흡과 당뇨로 입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건강이 나빠져 형 집행정지를 두 차례 신청했지만 검찰이 모두 불허했다. 공교롭게도 윤 대통령이 서울중앙지검장과 검찰총장이던 시절이다. 결국 법무부 결정으로 외부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았다. ▷법원의 구속 취소 결정으로 석방된 윤 대통령은 “잠을 많이 자니 더 건강해졌다” “구치소는 대통령이 가도 배울 게 많은 곳이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한밤중 계엄 선포로 밤잠 설쳐가며 나라 걱정하는 사람들이 듣기엔 불편한 말이다. 윤 대통령은 응원해준 국민들에게 감사하고, 내란 혐의로 구속된 계엄군의 석방을 기도한다고 했다. 좌우 할 것 없이 어려움과 분열을 겪는 모든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화합을 당부했어야 하지 않나. 배울 게 많은 곳에서 무엇을 배웠다는 걸까. ▷윤 대통령은 그동안 구속 기소했던 사람들 생각이 많이 났다며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을 언급했다고 한다. 서울중앙지검장 시절 사법농단 의혹 수사를 지휘하며 구속시킨 이들로 양 전 대법원장은 1심에서 무죄, 임 전 차장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두 사람만 콕 집어 지목하자 ‘보수층 외연 확장을 노린 발언’ ‘재판을 앞두고 법원에 선처를 호소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윤 대통령의 수감 생활은 52일, 이 중 8일은 헌법재판소, 하루는 내란죄 법정에 출석했다.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배움을 얻기엔 갇혀 지낸 시간이 길지 않았던 듯하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2·3 비상계엄 사태 후 논란이 끊이지 않는 정부 기관 중 하나가 국가인권위원회다. 지난달 10일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심판 방어권을 보장하라는 권고를 의결한 데 이어 18일엔 구속 기소된 박안수 육군참모총장 등 장군들에 대해 신속한 보석 허가와 접견 제한 해제를 권고해 “내란죄 피의자 변호인단”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최근에는 국제인권기구에 헌법재판소를 비판하는 서한을 보내 논란이다. ▷안창호 인권위원장은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에 보낸 답변서에서 ‘국민의 50% 가까이가 헌재를 믿지 못한다’ ‘헌재가 형사소송법 적용을 일부 배제하는 등 불공정한 재판을 하고 있다’ ‘헌법재판관이 정치 성향에 따라 재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앞서 국내 인권 단체들이 ‘계엄을 옹호하는 안건을 의결했다’며 세계국가인권기구연합에 인권위에 대한 특별 심사를 요청하자 안 위원장이 심사 관련 실무를 맡고 있는 사무소에 반박 답변서를 보낸 것이다. ▷한국갤럽의 최근 여론조사에서 헌재를 ‘신뢰한다’는 답변은 52%, ‘신뢰하지 않는다’는 40%였다. 윤 대통령 지지층을 중심으로 헌재에 대한 비판 여론이 커진 건 사실이지만, 비상계엄 이후 시행된 국가기관별 신뢰도 조사 4건 모두에서 헌재는 정부 국회 검경 등 다른 국가기관보다 높은 신뢰도 1위였다. 윤 대통령 탄핵 심리는 8인 재판관 전원이 합의한 절차에 따라 마무리돼 최종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재판관들이 정치적 성향에 따라 기계적으로 판결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안 위원장이 잘 알 것이다. 보수성향인 그는 헌재 재판관 시절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 인용 결정을 내렸다. ▷인권위는 대통령 방어권 보장을 권고하며 “신분을 이유로 인권 보호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하지만 인권위는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려 했던 계엄 선포에 대해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약자를 위한 기관이 대규모 변호인단의 도움을 받는 대통령 방어권만 챙기니 ‘윤권위’란 비아냥이 나오는 것이다. 대통령이 지명한 상임위원은 “대통령을 탄핵한다면 헌재를 흔적도 남김없이 없애버려야 한다”고 했다. 인권위는 위원 11명 중 6명을 대통령과 여당이 지명해 여권 편향적이라는 지적이 간혹 제기됐지만 이번엔 도를 한참 넘었다. ▷세계국가인권기구연합은 5년마다 118개 회원기구를 심사한다. 2001년 출범한 인권위는 2004년 최초 심사부터 가장 최근의 2021년 심사까지 줄곧 A등급을 받아왔다. 다음 심사에서 A등급을 유지할 수 있을까. 최근 해외 기관의 민주주의 성숙도 평가 결과 한국은 ‘완전한 민주주의’에서 ‘결함 있는 민주주의로 하락했다. 어려운 때일수록 인권위 같은 국가기관이 중심을 잡아야 할 텐데 오히려 내부 분열과 국격 추락을 부추기는 듯해 유감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국내 거주 외국인들이 건강보험료를 적게 내고 혜택은 많이 받는 줄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은 매년 보험료로 낸 돈보다 보험 혜택을 적게 받는다. 2023년 외국인 건보 재정은 7400억 원 흑자였다. ‘외국인 건보 무임승차’는 외국인 건보 가입자(146만 명)의 절반을 차지하는 중국인들의 적자 폭이 커서 생긴 오해인데 이마저도 통계 오류로 일부 과장된 것으로 확인됐다. 건보 무임승차론이 반중 정서를 키워 온 점을 감안하면 유감스러운 오류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국회에 제출한 외국인 가입자 건보 재정 수지 자료에 따르면 2020년 중국인 건보 재정은 239억 원 적자로 공표해왔으나 사실은 365억 원 흑자를 낸 것으로 나타났다. 2023년에는 640억 원 적자를 봤다고 했는데 다시 계산해보니 27억 원으로 적자 폭이 줄었다. 2년간 1200억 원의 오차가 발생한 것이다. 공단은 2020년의 경우 통계 산출을 수작업으로 하다가, 2023년엔 국가 코드를 분류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발생했으며, 전체 재정 수지에는 변동이 없다고 밝혔다. ▷중국은 외국인 가입자 수 상위 10개국 가운데 유일하게 거의 매년 적자가 나는 나라다. 하지만 무임승차 방지를 위해 2019년 국내 6개월 이상 거주 외국인은 직장가입자나 피부양자가 아니면 지역가입자로 건보에 가입해 보험료를 내도록 규정을 강화한 후로 적자 폭이 줄어드는 추세다. 2017년엔 1108억 원 적자였으나 2019년엔 세 자릿수로 줄었고, 코로나로 외국인 입국이 줄었던 2020년엔 흑자를 냈다가 2023년엔 27억 원 적자로 두 자릿수가 됐다. ▷외국인 건보 무임승차의 문턱은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4월부터는 국내 거주 기간이 6개월 이상 지나야 피부양자가 될 수 있다는 요건이 추가됐다. 외국인들이 입국하자마자 이곳에서 일하는 아들 딸 사위 며느리의 피부양자로 건보에 가입한 후 많게는 수천만 원어치의 치료를 공짜로 받고 돌아가는 사례를 막기 위해서다. 올 1월에는 한국인에게 건보 혜택을 제공하지 않는 나라의 국민은 한국의 건보 가입을 금지하는 ‘상호주의’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안도 발의됐다. ▷건보 재정은 정부의 의대 증원으로 고갈 속도가 빨라져 당장 올해부터 적자로 전환돼 2028년엔 바닥을 드러낼 것으로 전망된다. 건보 재정 누수 방지가 급선무지만 3500만 국내 가입자들의 의료 쇼핑, 과잉 진료부터 막을 일이다. 전체 가입자의 4%밖에 안 되는 외국인 무임 승차만, 그것도 잘못된 통계에 근거해 문제 삼다간 외국인 혐오 정서만 부추길 수 있다. 건보공단은 행정안전부의 ‘데이터 기반 행정 실태 점검’에서 3년 연속 최고 등급인 우수 기관에 선정됐다고 하니 이번 통계 오류 소동이 더욱 기막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비상계엄 선포 이후 주목받는 현상이 주말마다 열리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 열기다. 전광훈 목사의 서울 광화문 집회와 손현보 목사가 서울 여의도 부산 대구 광주 대전을 돌며 개최하는 순회 집회에는 탄핵 찬성 집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드론을 띄워 찍은 집회 현장의 인파를 보면 ‘진짜 민심은 여론조사 결과와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전 목사와 손 목사는 윤 대통령의 탄핵심판 최후진술 이후 처음 맞는 주말 광화문과 여의도에서 대대적인 3·1절 집회를 예고한 상태다. 민주화운동 시절 정치 참여에 적극적이었던 진보 교계와 달리 ‘정교분리’를 고수했던 보수 쪽 개신교 지도자들이 정치에 뛰어든 건 진보 정부가 출범한 이후다. 이들은 2000년대 초반부터 3·1절과 6·25가 되면 ‘반핵반김 자유통일’ ‘한미동맹 강화’ ‘북한 인권 보호’를 내세워 대규모 기도회를 열었다. 2004년에는 ‘기도의 표를 모아 세상을 확 바꾸자’는 구호와 함께 한국기독당도 창당했다. 오랫동안 지켜온 정교분리 원칙을 깨려면 명분이 필요했다. 정교분리는 제헌헌법부터 명문화돼 내려오는 조항이기도 하다. 이철 숭실대 교수(종교사회학)는 교계 지도자들이 내세운 논리와 명분을 분석해 몇 가지로 추렸는데 ‘지금 한국 사회는 강도당한 사마리아인과 같아 외면할 수 없다’는 상황론, ‘김정일 악한 권세를 예수 권세로 무너뜨리자’는 영적 전쟁론, ‘교회 1만 개보다 국회의원 한 명이 선교에 이익’이라는 실용론 등이다. 전 목사, 손 목사가 광장 집회 참여를 독려하며 내세우는 명분은 상황론에 영적 전쟁론이 가미돼 있는 듯하다. 전 목사는 “국민이여 일어나라. 국가가 위태롭다”고 한다. 손 목사가 집회를 위해 만든 단체 이름도 ‘세이브코리아’, ‘한국을 구하라’이다. 여기서 싸워 이겨야 할 상대는 북한과 공산주의, 이에 우호적인 남한 정치세력이다. “대한민국을 사악한 무리들(종북 세력)에 내어줄 수 없다”(손 목사) “주사파 척결하지 않으면 나라가 북한, 중국에 먹힌다”(전 목사)는 주장이다. 집회 무대에선 “종북 좌파가 바퀴벌레처럼 활약” “(진보 성향의)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을사오적” 같은 선동과 혐오 발언이 나온다. 전 목사는 “북한이 선거 개입한다”는 부정 선거론도 퍼뜨린다. 망국적 국론 분열을 치유해야 할 종교계가 갈등을 부추긴다는 비판에 손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 행위도 당시엔 정치 선동으로 비판받았다”고 반박했다. 손 목사가 속한 고신 교단을 만든 사람들이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자랑스러운 역사를 언급한 것이다. 지금이 옳은 일 하려면 목숨 걸어야 했던 시절과 같나. 이제는 말할 용기가 아니라 듣는 관용이 필요한 때 아닌가. 구국 집회의 결론이 ‘계엄은 합법’ ‘윤석열 즉각 석방’에 이를 즈음이면 야당의 줄탄핵과 대통령의 탄핵심판 절차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집회 열기는 뜨거운데 중도층 여당 지지율은 급락하는 추세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정권 연장’과 ‘정권 교체’ 여론의 변화를 추적해 온 리얼미터 조사에 따르면 정권 연장을 원하는 여론은 한덕수 총리 탄핵안 가결 후 커지기 시작해 1월 셋째 주 오차범위 내에서 정권 교체 여론을 앞서다 일타 강사 전한길 씨의 합류로 반탄 집회 열기가 달아오른 이후 정권 교체에 뒤지는 흐름을 보였다. 개신교계에선 정교분리란 정부의 교회 간섭을 막기 위함이지 교회의 정치 참여를 막기 위한 게 아니라고 본다. 루터 말대로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왕국’에 속하면서 ‘세상의 왕국’에도 속한다. 하지만 종교집단의 정치 참여는 국가의 세속적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범위에서 이뤄져야 한다. 정교분리는 근원적으로 종교가 정치세력화해 발생하는 폐해를 막기 위해 도입된 원칙이다(성정엽 인제대 법학과 교수). 종교는 절대적 믿음의 영역이고 정치는 상대적 타협의 영역이다. 전 목사 추종 세력이 주도한 서울서부지법 난입 사태는 믿음과 타협의 영역이 혼재돼 버린 종교의 정치화, 정치의 종교화의 치명적 결과를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해방신학의 본고장인 남미 출신이지만 종교의 과잉 정치는 경계했다. 그는 “공동선을 향한 뜨거운 마음으로 사회 문화 정치 생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달라”고 당부하면서도 “믿음이 대립을 조장하려는 집단들에 이용되거나 도구화될 위험”을 경고했다. 광화문파와 여의도파 집회에는 여당 정치인들까지 합류하고 있다. 종교와 정치가 건강한 관계로 공동선을 추구하는지, 아니면 서로가 서로의 도구로 이용하면서 나라에 어려움을 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기 바란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넣기 좋아하는 나라.” 김대중 대통령 시절 남한의 ‘타락상’을 묘사한 북한 소설 ‘아, 조국’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한다. 출간 연도가 노무현 대통령 집권 2년 차인 2004년. 이후로도 역대 대통령들의 끝은 좋지 않았다.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영국 대사 임기 끝무렵이다. 새로 선출된 노무현 대통령에게 발탁돼 귀국길에 오르는 그를 위해 마련된 송별회 자리에서 현지 지식인들은 축하보다 우려를 표했다. ‘한국 대통령들은 그 끝이 좋지 않고 거의 예외없이 비극적이기까지 하던데…’라면서. 라 교수는 이 문제를 잘 알고 있으면서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고 했다. ‘한국의 불행한 대통령들’은 라 교수가 오래 고민해 오던 문제에 대해 후배 정치학자들과 내놓은 답이다. 출간 연도가 2020년. 이후로도 우리는 감옥에 갇힌 또 한 명의 대통령을 보고 있다.》―21세기의 비상계엄 사태,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격세유전(atavism) 같은 현상이라고 본다. 일반인의 눈에 띄지 않게 잠재돼 있던 권위주의 시대의 인자가 갑자기 돌출한 것이다. 자크 데리다의 ‘유령론’을 인용해 유신시대 긴급조치라는 유령의 출현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해석하든 윤석열 대통령은 한국 정치 현실에 대해 황당할 정도의 오판을 했고 잘못된 조치로 나라 전체에 큰 혼란과 어려움을 초래했다. 나라가 국내외 경제 외교 안보 등 여러 가지로 어려운 문제에 당면하고 있는 상황에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한국의 불행한…’은 톨스토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윤 대통령의 불행의 이유는 무엇일까.“정치인으로서 경험과 경륜의 축적 없이 정부의 최고위직에 바로 올랐다. 그전의 경험이 검사로서 사람들을 정죄하는 일에 국한됐다는 점도 이미 높은 수준으로 발전한 나라를 이끄는 데 도움이 안 됐을 것이다. 널리 알려진 음주 습관. 이 기호도 전직과 관계가 있을 텐데, 냉철한 판단을 방해하는 요인이다. 국가수반으로서 영부인 문제 처리도 일반인들 기대 수준에 많이 미치지 못했다.” ―전직 대통령은 자식들도 감옥에 보냈다. 아내에게 모질기가 더 어려운가.“정치학에서 대통령 주변 인물들의 영향력을 측정하는 여러 기준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육체적인 근접성, 즉 대통령 곁에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를 따지는 것이다. 이 기준으로 보자면 영부인을 당할 사람이 없다. 어느 정부에서나 영부인의 영향력은 컸다. 문제는 그 영향력을 어떻게 행사하는지, 영부인 문제를 대통령이 어떻게 다루는지인데, 윤 대통령은 이를 소홀히 했다. 특검까진 안 가더라도 검찰 조사를 제대로 했어야 했다.” ―역대 대통령이 모두 불행한 구조적 원인으로 제왕적 대통령제가 지목된다.“스스로 제왕이라 여기는 멘털리티가 문제다. 대통령직을 흔히들 대권(大權)이라고 한다. 옛날에 유력한 어느 대선 후보는 측근들로부터 ‘주군’이라 불렸다. 3권분립 체제에서 5년 단임의 대통령직을 대권이라고 부르는 게 온당한가. 정권이 바뀌면 무슨 새로운 왕조를 세우듯 정부 조직을 개편하고 역사도 새로 쓴다. 김대중 대통령이 1992년 대선에서 실패하고 영국 케임브리지에 와 계실 때 자주 저를 찾으셨다. 한번은 ‘만약 차기 대통령이 되신다면 새로운 마음으로 정부를 운영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이때 ‘제2의 건국’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반공, 권위주의, 국가 기관을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일을 지양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신 다음 국가 기관을 동원해 제2건국위원회를 전국적 규모로 조직하는 것을 보고 놀라 여러 경로로 반대 의견을 전달했다. 현실적인 안목을 갖춘 분임에도 나라를 다시 세워 보겠다는 생각을 하신 것이다.” ―선거 때면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혁명적인 변화를 이뤄내겠다고 마음먹으면 반대 세력을 동반자나 경쟁자가 아닌 적이나 자기가 수행해야 하는 위대한 업적을 방해하는 방해꾼으로, 궤멸해야 하는 상대로 볼 수 있다.” ―전 정부 지우기도 되풀이되는 문제다.“다른 나라도 정권이 바뀌면 전 정권 지우기가 시도되지만 이는 정책의 영역에 머문다. 그런데 우리는 검찰을 동원한 사법적 처리가 주를 이룬다. 그러니 어떻게든 대권을 차지해 상대방을 문화계 스포츠계 망라해 다 쓸어버리려 하지 않겠나.” ―대통령 레임덕은 측근 비리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어느 정치인이 쓴 책에 ‘하루 일과가 100이라면 그중 일은 20∼30만 하고 나머지 70∼80은 자기 자리를 철벽 수비하는 데 썼다’고 나온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인사나 정책이 국익의 관점이 아닌 측근들 사이의 이해관계나 영향력을 위한 각축의 결과로 결정된다는 증언이다. 결국 책임은 다 대통령에게 돌아오게 된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막기 위해 개헌하자는 요구가 있다.“개헌이 현재 정치적 난국에서 가장 쉬운 탈출구로 논의되고 있지만 난 회의적이다. 역대 대통령들의 불행이 헌법 때문일까. ‘영국 헌법’의 저자인 월터 배젓은 헌법을 자주 고치는 나라를 환자에 비유했다. 환자는 침대에 누워 좀 더 편하려고 자세를 자주 바꾸지만 어떤 자세를 취해도 역시 불편하기 때문에 계속 자세를 바꾼다는 설명이다. 이해관계와 셈법이 다른 현 정치권에서 다수의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듣는 개헌을 할 능력이 있을지 의문이다. 개헌을 해도 헌법 조문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해 변칙적으로 활용하려 하지 않을까. 현행 헌법에 따르면 총리는 내각을 조직하고 이를 대통령에게 보고해 승인을 받도록 돼 있다. 하지만 조각은 청와대에서 이뤄지고 총리는 별 영향력이 없다. 좋은 헌법도 안 지키면 무슨 소용인가.” ―개헌이 아니라면….“우리는 민주주의를 독재와 싸우는 것으로만 이해한다. 경쟁자들과 페어 플레이 하려는 노력은 없다. 더 좋은 헌법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보다는 양보하고 타협도 할 수 있는 정치적 소양을 갖추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본다.” ―윤 대통령의 탄핵 사유는 박근혜 전 대통령 때보다 엄중해 보인다. 그럼에도 탄핵에 반대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야당의 독주가 지나쳤다는 여론이 있다. 또 하나는 박 전 대통령 때 탄핵되면 그 다음에 타협과 화합의 정치가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잖나. 적폐청산 한다면서 국가정보원 서버까지 들춰 보는 등 국기를 흔드는 일이 있었다.” ―국제 정세가 불안정한데 탄핵으로 국론까지 분열된 양상이다. 탄핵 심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물리적 충돌이 벌어질까 우려된다.“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정치인들이 ‘밥값’을 해야 한다. 최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는데, 이시바의 정적이었던 아베 전 총리 부인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게 참 부러웠다. 6·25전쟁 때 미군이 압록강에서 대패하자 트루먼이 ‘모든 무기 사용을 다 고려하고 있다’고 해 원자폭탄을 쓰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유럽이 발칵 뒤집혔고, 당시 클레멘트 애틀리 영국 총리가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노동당 출신 총리가 가는데 보수당의 윈스턴 처칠이 워싱턴에 있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서 ‘애틀리가 지금 굉장히 어려운 임무로 워싱턴에 가니 좀 도와 달라’고 했다. 우린 왜 이렇게 못하나.” ―탄핵 심리 결과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질 수 있다. 차기 대통령이 불행으로 끝나지 않으려면….“대통령이 되겠다며 조언을 구하는 분들에게 꼭 묻는다. ‘대통령이 되면 5년 동안 뭘 하겠느냐.’ 그럼 엄청난 얘기들을 한다. 통일도 추진하고 민주화도 더 추진하고 경제도 건설하고 세계에서 지도적인 역할도 하고. 그런데 구체적인 정책은 없고 일반적인 얘기만 한다.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 해놓고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 우왕좌왕하다 5년이 간다. 그럼 불만들이 쌓인다. 불행한 대통령 안 되기가 힘든 거다. 한시적으로 국정을 맡았을 뿐이라며 겸손하고 과학적이었으면 한다. 적폐청산이나 후임자 일까지 간섭하는 ‘대못 박기’ 이런 것 하지 말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으로 한반도 안보 지형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 불안하다.“큰 변화의 시기다. 그러나 국제 관계에 있어서는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상수로 남아 있는 것인가 판단하는 능력도 중요하다. 프랑스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변화할수록 그대로이다.’”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85)△서울대 정치학과△영국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 정치학 박사△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김대중 정부 국가정보원 해외·북한담당 차장△노무현 정부 대통령국가안보보좌관△주영 대사, 주일 대사△우석대 총장△저서: ‘장성택의 길’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 ‘물과 피: 정치의 이해’ 외 다수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김건희 여사가 지난해 4·10총선 때도 경남 창원 의창 공천에 개입하려 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명태균 씨 변호인이 17일 공개한 입장문 ‘김건희와 마지막 텔레그램 통화 48분’에 나오는 내용이다. 김 여사가 윤석열 대통령 검찰총장 시절 ‘조국 수사’에 참여한 김상민 검사(47)를 도와달라 했다는 것이다. 이곳은 검찰이 대통령 부부의 2022년 보궐선거 공천 개입 의혹을 수사 중인 지역구다. 명 씨 측은 녹취록을 따로 공개하지 않았고 국민의힘은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부인했다. ▷명 씨가 지난해 2월 16∼19일 5, 6회의 통화 내용을 복기한 기록에 따르면 김 여사는 “선생님, 김상민 검사 조국 수사 때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의창구 국회의원 되게 도와주세요”라고 했다. 김 검사는 현직 검사 신분으로 출마를 강행해 논란이 된 인물이다. 2023년 추석 무렵 “지역사회에 큰 희망을 드리겠다”는 ‘명절 문자’를 지역 주민들에게 보냈다가 ‘경고’ 처분을 받았다. 경선에서 떨어진 뒤엔 국가정보원 법률특보(차관보급)로 기용됐다. ▷김 여사는 김영선 당시 현역 의원에 대해서는 “어차피 컷오프라면서요”라고 배제했다. 또 다른 예비 후보에 대해서는 “문재인 정부 부역자”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명 씨는 “평생 검사만 하다 지역도 모르는 사람을 공천하면 총선에서 진다”며 반대했다. 명 씨는 당시 “5선 의원이 떨어지면 조롱거리가 된다”며 세비 절반을 떼주던 김 전 의원을 밀고 있었다. 마지막 통화는 “김상민이 내려 꽂으면 전 가만히 안 있을 겁니다”로 끝난다. 둘 사이가 틀어진 계기가 공천 문제였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김 여사는 당시 총선 결과를 낙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명 씨가 “이 추세로 가면 110석을 넘지 못합니다”라고 하자 “아니에요. 보수 정권 역사 이래 최다석을 얻을 거라 했어요” “이철규, 윤한홍 의원이 그랬어요” 했다는 것이다. 보수 정권 역대 최대 의석은 2008년 총선 당시 153석이었다. 결과는 역대 두 번째로 적은 108석이었다. 통화가 이뤄진 시기는 명품백 논란으로 2월 18∼24일로 잡혔던 독일 국빈 방문과 덴마크 공식 방문 일정까지 연기할 정도로 총선 여론이 좋지 않을 때였다. ▷지난 총선은 ‘김 여사 리스크’로 시작해 ‘대파 논란’으로 끝난 선거였다. 일반 여론도 ‘대통령실 책임론’이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대승 전망과 대패 결과 사이에서 윤 대통령은 부정선거론의 길로 빠져들었고 이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게 된 주요 원인”이 됐다. 김 여사는 계엄 전후 조태용 국정원장과도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서울중앙지검이 넘겨받은 명 씨와 대통령 부부 사건을 수사하다 보면 계엄의 전말을 보여줄 퍼즐 조각을 찾게 될지 모른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오는 4월 2일 하윤수 전 교육감이 당선무효형을 받아 치러지는 부산시교육감 재선거를 앞두고 뜻밖에 조국 입시 비리 사태가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예비후보로 등록한 진보 성향의 차정인 전 부산대 총장이 최근 기자회견을 열어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 딸 조민 씨에게 공개 사과하면서다. 차 후보가 총장이던 2021년 부산대는 위조된 표창장과 허위 인턴십 확인서를 의학전문대학원 입시에 활용한 조 씨의 입학을 취소했다. ▷차 후보는 이날 회견에서 “당시 수사가 정치 검찰의 표적 수사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며 “총장이 학생을 지키지 못한 엄연한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그는 “(정경심 교수) 1심 판결 후 국민의힘에서 거세게 공격하고 교육부가 공문을 보내 입학 취소를 요구했지만 응하지 않았다”면서 “사실심의 최종심인 항소심 판결이 난 이후에야 입학 취소 예정 처분을,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후에야 입학 취소를 결정했다”고 강조했다. ▷차 후보의 난데없는 사과 회견은 같은 진보 진영의 경쟁 후보와 단일화가 무산된 후 진보층의 지지를 결집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차 후보가 출마하자 진보 진영에서는 ‘당시 총장이 직권으로 조민 씨 입학 취소를 막을 수 있지 않았나’라는 말이 나왔다. 차 후보는 이에 대해 “부산대 입학 요강에는 허위 서류를 제출하면 불합격 처리한다고 명시돼 있었고, 허위 여부는 법원 판결로 결정되기 때문에 총장에게 재량권은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조민 씨의 허위 서류가 합격에 영향이 없었음을 공개한 사실을 언급하며 “학생의 억울한 점을 밝히는 데도 최선을 다했다”고 덧붙였다. ▷조민 씨 입시 비리 사건은 입시제도의 신뢰 기반을 흔들어놓은 사건이다. 조 씨가 입시에 활용한 ‘7대 스펙’은 대법원에서 모두 허위로 판명됐다. 이 일로 조 씨의 부모가 모두 실형을 살았거나 살고 있다. 차 후보는 검사 출신으로 민변 변호사와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지냈다. 법조인이자 교육자 출신이 부산 초중고교 교육을 책임지겠다며 나선 자리에서 부정입학생을 억울한 정치적 피해자인 양 감싸다니 자격 미달 아닌가. ▷교육감 선거는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 정당 개입을 금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치열한 진영 대결로 치러진다. 특히 이번 선거는 지금까지 등록한 예비후보만 6명이다. 후보가 난립할수록 진영 내 후보 단일화가 승리에 결정적이다 보니 공약 경쟁은커녕 엉뚱한 사람에게 사과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2022년 당선된 시도교육감 17명 중 서울(조희연)과 부산 교육감 2명이 대법원 판결로 불명예 퇴진했고 3명이 재판을 받고 있다. 여러모로 교육적이지 않은 교육감 선거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노상원 수첩’은 내란 혐의로 구속 기소된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점집에서 경찰이 확보한 약 70쪽짜리 메모장이다. 그는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불러준 내용을 받아 적은 것”이라고 진술했는데 국립과학수사연구원 필적 감정에서는 ‘감정 불능’ 판정이 나왔다. 누가 썼는지는 수사 중이지만 일부 언론이 입수해 보도한 수첩 속 비상계엄 계획은 충격적이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체포자 명단. 수첩에는 계엄 선포 10일 차까지 체포 대상자를 ‘수거’해 ‘수집소’로 보낸다는 내용이 나온다. 체포 대상은 “여의도 30∼50명 수거” “언론 쪽 100∼200(명)” 등 “500여 명 수집”으로 적혀 있다. 이 중 A급은 문재인, 이재명, 유시민, 권순일, 김명수, 조국, 민노총 등이다. 검찰 조사 결과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김 전 장관에게서 넘겨받았다는 ‘체포자 명단 16명’과 비교하면 ‘한동훈’이 빠지고 ‘이준석’이 들어가 있다. 이재명 대표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판사, 조국 전 장관을 위해 탄원서를 쓴 축구대표팀 감독 차범근 씨도 ‘수거’ 대상이다. ▷“A급 수거 대상 처리 방안”은 살벌하다. ‘수집소’는 “강원도 화천, 양구, 울릉도, 마라도, 전방 민통선 쪽”이고, “확인 사살 필요” “막사 내 잠자리 폭발물 사용” 등의 메모로 보아 ‘처리’는 ‘살해’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내국인 사용 시 수사를 피하기 어렵다”는 문장과 함께 “외국 중국 용역업체” “북한과의 접촉 방법” “무엇을 내어줄 것이고 접촉 시 보안 대책은”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다. 수거 대상자들을 제거하려 ‘북풍’ 공작을 검토한 흔적들이다. ▷메모 작성 시기는 지난해 4월 총선 이전으로 짐작된다. 수첩 첫 장에 “총선 후 입법으로 집행하는 건 쉽지 않다. 실행 후 싹을 제거해 근원을 없앤다”는 문장이 있다. “여의도 봉쇄” “역행사에 대비해야 한다” “민주당 쪽” “9사단과 30사단” 등의 문구로 보아 국회의 계엄 해제 결의를 무력으로 진압하려는 계획도 세웠던 듯하다. “행사 후속 조치 사항”으로 “헌법, 법 개정” “3선 집권 구상 방안” “후계자는?”이 나온다. 메모 작성자 머릿속엔 ‘경고성 계엄’이 아니라 윤석열 대통령의 장기 집권용 비상계엄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수첩 속 메모는 휘갈겨 쓴 필체라 동일인이 썼는지 확인하기 어렵다는 게 필적 감정 결과다. 검찰은 메모 내용이 파편적이어서 해석의 여지가 있고, 수첩 주인이 작성 경위에 대해 입을 닫고 있다며 그의 공소장에 수첩 내용은 담지 않았다. 하지만 허튼 망상이라고 덮고 넘기기엔 체포 명단 작성과 국회 표결 무력화 등 실제 시도한 대목이 적지 않다. 누구 지시로 작성한 것일까. 유혈 친위 쿠데타 모의의 흔적이 ‘계엄의 설계도’였는지 규명할 필요가 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2·3 비상계엄 사태의 결정적 장면 중 하나가 계엄 전 소집된 국무회의다. 계엄 선포와 해제는 헌법과 계엄법에 따라 최고 정책심의기관인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공소장에 따르면 당시 국무회의는 법적 절차를 무시한 채 5분 만에 끝난 하자투성이 회의였다. 국무위원들도 최근 경찰 조사에서 “정상적인 국무회의가 아니었다”고 진술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계획을 가장 먼저 접한 국무위원은 김 전 장관을 제외하면 한덕수 국무총리다. 한 총리는 그날 오후 8시 40분경 호출을 받고 대통령 집무실에 도착해 계엄 얘기를 처음 들었다. 반대해도 소용없자 “다른 국무위원들 말도 들어보시라”고 했고 윤 대통령은 “그럼 한번 모아 보라”고 지시했다. “윤 대통령은 처음부터 국무회의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는 게 한 총리 진술이다. “항상 법전 먼저 찾는 게 평소 업무 스타일”이라는 법조인 출신 대통령이 왜 국무회의 심의 절차를 가볍게 여겼는지 의문이다.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도 “국무위원 전원이 반대한다”며 대통령을 말렸다고 한다. “계엄에 동의한 국무위원이 있었다”는 김 전 장관 증언과 배치되는 진술이다. 이는 장관들의 반대 의견이 국무회의 전 비공식적으로 제기된 상황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장관들은 의결정족수 11명이 채워지길 기다리는 동안 “국가 신인도에 치명적 영향을 준다” “70년간 대한민국이 쌓은 성취를 무너뜨린다”며 말렸다. 윤 대통령은 “22시에 KBS 생방송으로 발표해야 하는데”라며 기다리다 딱 11명이 되자 바로 회의를 시작해 일방적 통보만 하고 끝냈다. ▷결국 당시 국무회의는 안건 제안도, 실질적인 심의도, 국무위원 서명이 담긴 회의록도 없는 ‘3무(無)’ 회의였다. 이 전 장관은 계엄 선포 직후 대통령실 부속실 직원에게 “장관 몇 명이 언제 왔다 정도라도 적어 놓으라”고 지시했다. 회의록이 없으면 국무회의 심의를 거친 것으로 볼 수 없어 위헌 위법적 계엄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은 계엄 선포 후 누군가 와서 “서명해 달라”고 했지만 거부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회의가 국무회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한 총리 등에게 “(비상계엄 계획은)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와이프도 모른다. 와이프가 화낼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일명 ‘명태균 녹취록’을 통해 김건희 여사의 전방위적 국정 개입 의혹이 제기된 터다. 김 전 장관 공소장에는 지난해 8월과 10월 윤 대통령이 관저에서 주요 군 지휘관들과 식사하며 계엄을 모의한 정황도 나온다. 김 여사를 보호하고 싶었을까. 왜 “계엄은 정당하다”면서 김 여사가 알면 화낼 것 같다고 했을까.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