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100세 시대를 맞아 은퇴한 뒤의 삶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특히 시대에 따라가지 못하는 정년퇴직 제도에 따라 일을 더 할 수 있음에도 일자리를 떠나야 하는 사람들은 30~40년이나 남은 노년을 어떻게 보내야할 지에 대한 관심이 높다. 이런 측면에서 일흔을 바라보는 마스터스마라토너 3인방이 펼치는 ‘노년 프로젝트’가 관심을 끈다. 지난해 말 경기도 분당검푸마라톤클럽(이하 검푸) 회원인 유병복(69) 강종수(68) 박동근 씨(68)씨는 망년회를 겸해 막걸리를 한잔 하다 서로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기로 뜻을 모았다. “우리 한반도 한바퀴 돌까요?” “자전거로 말이죠.” “무슨 소리입니까…. 걸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약간의 의견 충돌은 있었지만 너도나도 한반도를 한바퀴 도는 것에는 의견을 같이했다. 결국 ‘두 발로 한반도 둘레길 완보’란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의기투합했다. 건강과 우정을 다지며 동해안, 남해안, 서해안, 그리고 비무장지대(DMZ) 약 4000km를 4차례로 나눠 함께 걷겠다는 약속이다. 유 씨와 박 씨가 “어떻게 걷느냐 자전거를 타고 가자”고 했지만 강 씨가 “걸어야 대한민국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올 1월 9일 강원 고성으로 떠나 10일 7번 국도 종점을 출발해 16일간 걸어서 부산 해운대에 도착했다. 총 약 570km로 하루 많게는 45km, 적게는 21km를 걸었다. 하루 평균 36km를 걸었다. 강 씨는 “사실 남해안에서 섬을 다 돌면 총 길이가 4000km를 훌쩍 뛰어 넘는다. 중간 중간 잘라서 갈 것을 감안해 한반도 둘레길이 약 4000km 정도 된다”고 설명했다. 셋은 70세를 눈앞에 뒀지만 오랫동안 마라톤으로 단련된 체력이 바탕이 돼 거뜬히 첫 코스를 완보했다. 유 씨는 “어떻게 걸을까 고민했는데 막상 걸으니 자전거 타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자연을 제대로 느끼면서 걸었다”고 했다. 자전거 타고 돌자고 주장했던 유 씨는 “바다와 산, 들 등 대한민국 동해안을 그대로 보고 느꼈다. 자전거를 탔다면 못 느꼈을 것이다. 정말 아름다운 나라라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고 덧붙였다. 박 씨도 “안 해보면 모른다. 걸어서 건강도 챙겼지만 같은 뜻을 가진 동년배와 함께 했다는 데서 더 큰 의미를 찾았다. 누가 이렇게 함께 걸어주겠나?”고 했다. 강 씨는 “당초 하루 평균 30km 정도씩 여유 있게 걸었으면 더 즐길 수 있었는데 개인 일정 탓에 좀 무리하게 걸었는데 잘 따라줘 고마웠다”고 했다. 더운 여름을 피해 올해 안에 한반도 둘레길을 완보할 계획인 이들은 일찌감치 마라톤에 입문해 건강한 노년을 만들어가고 있다. 강 씨는 체중감량을 위해 1999년 달리기 시작했다. “그해 9월 한 하프마라톤대회가 열린다고 해서 그 대회 완주를 목표로 시작했어요. 체중이 84kg이나 나가서 살도 뺄 생각도 있었죠. 그런데 달리니까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달리는 사람들이 느끼는 ‘러너스 하이(고통스러운 순간을 참고 운동을 계속하면 어느 순간 찾아오는 행복감)’를 마라톤 시작 몇 개월 만에 느꼈어요. 그러니 달리기가 더 재밌어졌고 어느 순간 일상이 됐습니다. 달리기는 무엇보다 시간 날 때 아무 때나 할 수 있어 좋아요.” 2000년 검푸에 가입했고 그해 4월 풀코스를 처음 완주한 뒤 지금까지 풀코스만 100회 넘게 완주했다. 풀코스 최고기록은 2013년 기록한 3시간11분. 마라톤 시작 1년여 만에 14kg을 감량했고 지금까지 70kg을 유지하고 있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는 철인3종을 병행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킹코스(철인코스·수영 3.8km, 사이클 180km, 마라톤 42.195km)를 3회 완주했죠. 그 이후엔 올림픽코스를 완주하긴 했지만 킹코스는 참가하지 않았어요.” 킹코스 최고기록은 13시간 30분. 강 씨는 2003년 세계 최고로 불리는 보스턴마라톤에도 다녀왔다. 100km 울트라마라톤에도 여러 차례 참가한 철각이다. 요즘은 산악마라톤인 트레일러닝도 즐기고 있다. “서울 둘레길(157km), 북한산 둘레길(65km), 불수사도북(불암산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 5산 종주…. 경기도 주변 수도권엔 광교산과 청계산 등 달릴 수 있는 산이 많이 있어요. 시간만 나면 검푸 회원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달리고 있습니다.” 강 씨는 “80세까지는 풀코스를 내가 정한 기록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달리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강 씨는 지난해에도 3시간 20분에 풀코스를 완주했다. 유 씨는 친구 따라 2002년 마라톤에 입문했다. “평소 건강을 위해 조깅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운동을 잘 못할 것이라고 여긴 친구가 풀코스를 완주했다고 하는 겁니다. 명문고 명문대 출신으로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였죠. 속으로 ‘쟤도 달리는데 내가…’ 하는 심정으로 도전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좋았습니다.” 건강도 챙겼지만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충만 됐다. 검푸 회원들과 어울려 풀코스를 40회 이상 완주했다. 최고기록은 2006년 기록한 3시간19분. 유 씨는 2006년 6일간 250km를 달리는 사하라사막마라톤도 완주했다. “검푸 회원 2명과 함께 갔었죠. 한 명은 빨리 뛰어 나갔고 저하고 나머지 회원 한명은 걸었습니다. 그 회원 다리가 좋지 않아 뛸 수 없었습니다. 저도 굳이 무리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결과론적으로 보니 걸은 게 너무 좋았습니다. 사막을 제대로 볼 수 있었고 곳곳에서 사진도 찍었습니다. 그 때 찍은 사진이 400여장이었습니다. 빨리 달린 친구는 고생만 했고 사진도 별로 없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이면서도 기억에 남는 레이스였습니다.” 유 씨는 철인3종 올림픽코스(수영 1.5km, 사이클 40km 마라톤 10km)를 완주했다. 지리산 화대종주(화엄사~대원사 약 42km)도 했고 불수사도북 오산종주도 하는 등 트레일러닝도 즐기고 있다. 박 씨도 건강을 위해 마라톤에 입문했다. “술을 좋아해 체중이 많이 나가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2002년부터 혼자 연습하다 2003년 한 마라톤 대회 풀코스에 출전해 고생한 뒤 2004년 검푸에 가입해 회원들과 함께 달리고 있습니다.” 현재 체중은 10kg이 빠진 65kg. 2007년 동아마라톤에서 세운 3시간 47분이 개인 최고기록. 풀코스를 30회 넘게 달렸다. 그는 “330(3시간30분 이내기록)하려고 욕심 부리다 좀 무리했더니 고관절에 이상이 왔다. 그 다음부터는 건강마라톤으로 즐기면서 달리고 있다”고 했다. 박 씨는 환갑기념으로 풀코스를 달린 뒤에는 하프코스 등 짧은 코스를 즐겁게 달리고 있다. 지난해 1월 후두암 1기 판정을 받은 그는 수술 받고 치료를 받으면서도 꾸준하게 운동하고 있다. 박 씨도 강 씨, 유 씨와 함께 수도권 인근 산을 달리는 트레일러닝도 즐기고 있다. “전 그동안 운동을 열심히 해 건강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술 다음날에도 동네 뒷산을 올랐습니다. 전 육체가 정신을 지배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신력이 아무리 강해도 육체가 버텨주지 못하면 버틸 수 없습니다.” 셋은 두 발로 한반도 둘레길 완보를 마치면 제주 둘레길도 돌 예정이다. 그리고 백두대간도 종주할 계획이다. 이들은 이미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도 다녀왔다. 백두대간 종주를 제안한 유 씨는 “우리는 산을 타고 집사람들은 중간 중간 우리에게 음식 등을 지원하게 하면서 일부 구간을 함께 걷는 ‘부부동반’ 종주로 운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입을 모았다. “우린 행운아입니다. 체력 되죠, 시간 되죠, 나이도 비슷합니다. 은퇴한 뒤 이렇게 어울려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 있나요? 100세 시대 이렇게 맘에 맞는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어 즐겁습니다.” 이들 3인방은 100세 시대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매일 운동을 빼놓지 않고 하고 있다. 강 씨는 월 200~300km를 달린다. 산을 달리는 트레일러닝을 포함한 거리다. 친구들과 등산도 월 한두 차례 한다. 유 씨도 매일 아내와 함께 10km를 걷거나 달리고 있다. 등산도 자주 한다. 박 씨는 매일 아침 10km를 달린다. 달리는 것을 포함해 하루 2만 보 이상 걸으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몸을 쓰는 이유는 단 하나다. 몸이 건강해야 100세 시대를 즐겁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는 사람들에게 통용 되는 말이 있다. ‘구르는 돌엔 이끼가 끼지 않는다.’ ‘고인 물은 썩는다.’ ‘누죽달살(누우면 죽고 달리면 산다).’ …. ‘검푸 3인방’은 이렇게 말했다. “나이 들었다고 무엇을 할까 고민하지 말라. 일단 걷거나 달려 보라. 그럼 다른 세상이 보일 것이다.”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우리 한반도 한 바퀴 돌까?” “자전거로?” “뭔 소리…. 걸어야 제맛이지.” 지난해 말 경기 성남시 분당검푸마라톤클럽(검푸) 회원인 유병복(69) 강종수(68) 박동근(68) 씨 3인방은 망년회를 하다 의기투합했다. ‘두 발로 한반도 둘레길 완보’란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건강과 우정을 다지며 동해안, 남해안, 서해안, 그리고 비무장지대(DMZ) 약 4000km를 4차례로 나눠 함께 걷겠다는 약속이다. 유 씨와 박 씨가 “어떻게 걷느냐. 자전거를 타고 가자”고 했지만, 강 씨가 “걸어야 대한민국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올 1월 9일 강원 고성으로 떠나 10일 국도 7호선 종점을 출발해 16일간 걸어서 부산 해운대에 도착했다. 총 약 570km로 하루 많게는 45km, 적게는 21km를 걸었다. 하루 평균 36km를 걸었다. 셋은 70세를 눈앞에 뒀지만 오랫동안 마라톤으로 단련된 체력이 바탕이 돼 거뜬히 첫 코스를 완보했다. 유 씨는 “어떻게 걸을까 고민했는데 막상 걸으니 자전거 타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자연을 제대로 느끼면서 걸었다”고 했다. 박 씨도 “안 해보면 모른다. 걸어서 건강도 챙겼지만 같은 뜻을 가진 동년배와 함께했다는 데서 더 큰 의미를 찾았다. 누가 이렇게 함께 걸어주겠나?”라고 했다. 강 씨는 “하루 평균 30km 정도씩 여유 있게 걸었으면 더 즐길 수 있었는데 개인 일정 탓에 좀 무리하게 걸었음에도 잘 따라줘 고마웠다”고 했다. 더운 여름을 피해 올해 안에 한반도 둘레길을 완보할 계획인 이들은 일찌감치 마라톤에 입문해 건강한 노년을 만들어 가고 있다. 강 씨는 체중 감량을 위해 1999년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해 9월 열린 한 하프마라톤대회 출전을 목표로 훈련을 시작했다. 2000년 검푸에 가입했고 그해 4월 풀코스를 처음 완주한 뒤 지금까지 풀코스만 100회 넘게 완주했다. 풀코스 최고기록은 2013년 기록한 3시간11분. 강 씨는 “달리니까 너무 좋았다. 몇 개월 안 돼 ‘러너스 하이’(고통스러운 순간을 참고 운동을 계속하면 어느 순간 찾아오는 행복감)를 경험했다. 살도 14kg이나 빠지고 건강해졌다. 무엇보다 시간 날 때 아무 때나 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그는 철인3종 철인코스(수영 3.8km, 사이클 180km, 마라톤 42.195km)도 3회 완주했고, 100km 울트라마라톤도 수차례 완주한 ‘철각’이다. 산악마라톤인 트레일러닝도 즐기고 있다. 유 씨는 친구 따라 2002년 마라톤에 입문했다. 그는 “평소 건강을 위해 조깅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운동을 잘 못할 것이라고 여긴 명문대 출신의 대기업 다니는 친구가 풀코스를 완주했다고 하기에 ‘너도 하는데…’ 하는 욕심에 도전했다. 그런데 너무 좋았다”고 했다. 건강도 챙겼지만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충만해졌다. 검푸 회원들과 어울려 풀코스를 40회 이상 완주했다. 최고기록은 2006년 기록한 3시간19분. 유 씨는 2006년 6일간 250km를 달리는 사하라사막 마라톤도 완주했다. 박 씨도 건강을 위해 마라톤에 입문했다. 잦은 음주 탓에 체중이 많이 나갔다. 2002년부터 혼자 달리다 2003년 한 마라톤 대회 풀코스에 출전해 고생한 뒤 2004년 검푸에 가입해 회원들과 함께 달리고 있다. 현재 체중은 10kg이 빠진 65kg. 2007년 동아마라톤에서 세운 3시간 47분이 개인 최고기록. 그는 “330(3시간30분 이내 기록)하려고 욕심 부리다 좀 무리했더니 고관절에 이상이 왔다. 그 다음부터는 건강 마라톤으로 즐기면서 달리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1월 후두암 1기 판정을 받은 그는 수술 후 치료를 받으면서도 꾸준하게 운동하고 있다. 그는 “수술 다음 날에도 동네 뒷산을 올랐다. 요즘 매일 10km를 달린다. 달리기가 내 건강을 지켜주고 있다. 난 육체가 정신을 지배한다고 본다”고 했다. 셋은 한반도 둘레길 완보를 마치면 제주 둘레길도 돌 예정이다. 그리고 백두대간도 차근차근 종주할 계획이다. 이들은 입을 모았다. “우린 행운아다. 체력 되지, 시간 되지, 나이도 비슷하다. 은퇴한 뒤 이렇게 어울려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 있나? 100세 시대 이렇게 맘에 맞는 친구들과 함께할 수 있어 즐겁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1979년 충남대에 들어갔는데 탁구서클(현 동아리)이 없었어요. 중고교시절 대전 시내에서 탁구 좀 쳤는데…. 그래서 친구와 탁구서클 ‘한우리’를 만들었어요. 다른 친구들이 ‘동그라미’란 탁구서클을 만들었죠. 한우리는 2년 정도 운영하다 제가 군대하면서 없어졌고, 동그라미는 아직 남아 있다고 하더라고요.” 요즘 취미가 직업이 되는 시대가 됐다. 스포츠를 즐기다 ‘스포츠인’으로 전업한 사람들도 많이 나오고 있다. 탁구광 전인상 씨(62)도 평생 즐기던 탁구 덕에 은퇴 후의 삶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2020년 말 한국도핑방지위원회(KADA)에서 은퇴한 전 씨는 그해 말 삼다도 제주도에 터를 잡고 탁구 지도자의 길을 가고 있다. 정년을 앞두고 치밀하게 준비한 결과였다. “돌이켜보니 어려서 클 때까지 30년은 부모님 품에서 살았고, 또 30년은 직장을 잡고 가족들을 돌봤습니다. 이젠 나머지 30년 이상은 노년기로 이어집니다. 제가 이 시기를 잘 개척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00세 시대지만 현실은 60세쯤이면 정년퇴직을 해야 합니다. 정년 이후의 삶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됐죠. 그래서 전 평생 좋아했던 탁구로 은퇴 이후의 삶을 준비했습니다. 2014년 탁구 2급 생활체육지도자 자격증을 땄습니다. 지난해엔 노인체육지도자 자격증도 획득했어요. 올해부터 초등학교 방과후 지도자로 활동합니다.” 전 씨는 1973년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탁구의 이에리사 정현숙 등이 여자 단체전에서 우승하며 일어난 탁구 붐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중고교 시절부터 대전 시내에 들어선 탁구장을 돌아다니며 친 것이다. 사실 대학에서도 서클을 만들어 탁구를 치기는 했지만 실력이래야 친구들과 어울려 공을 넘기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책을 보고 거울 앞에서 자세를 익히는 등 열정만큼은 프로급이었다. 그렇게 2년을 활동하다 군에 입대하고 복학한 뒤 취업준비하면서 한동안 탁구를 잊고 지냈다.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를 앞두고 대한육상연맹에서 사람을 뽑아 지원했죠. 선수들과 지도자들을 행정적으로 뒷받침해야 해 1988년 서울올림픽까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탁구 칠 엄두도 내지 못했죠. 육상연맹 사무실이 서울 을지로에서 잠실로 옮겼고 1990년대 초반 청담동에 있는 대원탁구장을 우연히 발견하면서 다시 탁구와 연을 맺게 됐습니다.” 탁구의 신세계가 펼쳐졌다. 선수 출신 코치가 직접 레슨을 해주고 있었다. 과거엔 상상도 못하던 일이다. 선수출신에게 조련 받아 실력이 향상된 마니아들이 모여 있는 탁구장들도 여러 곳 소문이 났다. 전 씨는 대한항공 선수 출신 권영랑 관장에게 원포인트레슨을 받기도 하는 등 탁구 실력을 닦았다. 일을 마치면 어김없이 탁구장으로 달려가 1,2시간 땀을 흘렸다. 실력이 비슷하고 열정이 있는 사람들을 주축으로 대원탁구동호회를 만들어 대회에도 출전했다. 1997년 서울 강남구 생활체육 탁구대회에 출전해 복식 우승, 단식 3위를 하는 등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탁구는 직장생활의 해방구였어요. 일하며 얻는 모든 스트레스를 탁구공에 실어 날렸보냈습니다. 탁구를 치면 한두 시간은 잡생각 없이 탁구에 집중할 수 있었죠. 제 삶의 큰 활력소였습니다.” 실력이 늘자 탁구 치러 가면 어서든 대접도 받았다. 탁구 좀 치자 육상연맹에서 일한다고 하니 ‘육상선수 출신이라 역시 발이 빠르다’고 엉뚱한 칭찬을 하기도 했다. 어떨 땐 ‘체육과 출신이어서 잘 친다’고까지 했다. 그는 운동과 전혀 상관없는 영문과 출신이다. 각종 육상대회가 전국에서 열리기 때문에 출장이 잦았던 그는 항상 탁구 라켓을 가지고 다녔다. “난 술을 못 마시기 때문에 일 끝나면 바로 탁구장으로 달려갔다. 몸이 찌뿌드드해도 탁구 한두 시간 치면 바로 컨디션이 좋아졌다”고 했다. 탁구를 너무 많이 쳐 ‘엘보’가 오긴 했지만 아파서 병원 신세를 진 적은 없다. 전 씨는 탁구를 잘 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도 했다. 처음엔 펜홀더 라켓으로 시작했다. 속칭 ‘일펜(일본식 펜홀더)’다. 그는 “한 10년 일펜으로 쳤는데 백핸드 공격이 잘 안돼 중국식 펜홀더(중펜)로 바꿨다”고 했다. 2000년대 초 등장한 중국 탁구 스타 왕하오(39)가 기술을 완성한 것으로 펜홀더인데 뒷면에도 라바(고무판)를 붙인 라켓이다. 그는 “당시 중펜 사용법을 잘 몰라 왕하오가 치는 모습을 CD로 구워서 계속 보면서 탁구를 쳤다”고 회상했다. “당시는 PC통신이 유행할 때였죠. 천리안, 나우누리, 유니텔. 전 유니텔 탁구동호회에서 활동하고 있었죠. 온 오프라인 친교 모임이었습니다. 회원들과도 정보를 교류하며 탁구를 쳤습니다. 다음카페의 4050탁구동호회에서도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중펜이 손목에 무리를 줘 2010년 쯤 지금의 쉐이크핸드 라켓으로 바꿨습니다.” 서울 오금동 박현철탁구장에서 쉐이크핸드 라켓 기술을 배웠다. 박현철탁구장이 경기 성남 분당으로 옮겨 갔을 때도 원정까지 가서 탁구를 쳤다. 생활체육탁구에서 일펜으로 3부 리그 정상급까지 갔고, 중펜으로도 계속 정상급을 유지했다. 지금은 탁구인구가 많아져 4,5부에서 활동하고 있다. 2007년 KADA로 옮겨서도 탁구는 멈추지 않았고 각종 대회에서도 성과를 냈다. 2014년도 도닉배전국오픈탁구대회 혼합복식에서 우승했다. 2016년 강동구의회의회장배 탁구대회 복식에서도 1위를 했다. 2019년 제2회 에리사랑시니어탁구대회 단식에서도 우승했다. “서울 사는 사람들의 로망이라고 할까요? 꽉 막힌 빌딩 숲을 떠나 탁 트인 곳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강원도 원주, 강릉 등도 생각했지만 제주가 눈에 들어왔어요. 제주에 친구가 살고 있어 쉽게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은퇴하고 바로 제주로 내려왔습니다.” 제주에서의 삶은 자연스럽게 탁구가 주가 됐다. 제주탁구클럽에 가입해 활동했다. 외지인으로 제주에서 정붙이고 잘 살 수 있게 된 원동력에 매일 만나는 회원들과의 교류가 있었다. 전 씨는 지난해 말 열린 제주도탁구협회장기 탁구대회 백두부 복식에서 우승했고, 4부 단식에서 준우승하는 등 실력을 과시했다. 올해부터 초등학생을 지도로 나서지만 향후 시니어들에게도 지도할 계획이다. “탁구는 사계절 언제든 칠 수 있습니다. 자기 몸만 지탱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가능합니다. 제가 제주도 장애인복지관에서 레슨해준 적이 있습니다. 휠체어 타고, 목발 짚고도 칠 수 있습니다. 탁구는 관절에 무리를 주지 않아 최고의 실버스포츠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전 제가 좋아하는 탁구를 치면서 지도할 수 있어 너무 행복합니다. 어린이들에게는 탁구로 희망을 전하고, 어르신들께는 건강과 행복을 전하고 싶습니다.”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대학 때부터 즐기던 탁구가 정년퇴직을 앞두고 새로운 길을 제시해줬다. 2020년 말 한국도핑방지위원회(KADA)에서 은퇴한 전인상 씨(62)는 그해 말 삼다도 제주도에 터를 잡고 탁구 지도자의 길을 가고 있다. 정년을 앞두고 치밀하게 준비한 결과였다. “100세 시대지만 현실은 60세쯤이면 정년퇴직을 해야 한다. 그래서 평생 좋아했던 탁구로 은퇴 이후의 삶을 준비했다. 2014년 탁구 2급 생활체육지도자 자격증을 땄다. 지난해엔 노인체육지도자 자격증도 획득했다. 올해부터 초등학교 방과후 지도자로 활동한다.” 중고교 시절 대전시내 탁구장에서 좀 놀았던 전 씨는 대학 1학년 때 탁구서클(현 동아리)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탁구를 본격적으로 치기 시작했다. 실력이래야 친구들과 어울려 공을 넘기는 수준이었지만 책을 보고 거울 앞에서 자세를 익혔다. 그렇게 2년을 활동하다 군에 입대하고 복학한 뒤 취업 준비를 하면서 한동안 탁구를 잊고 지냈다.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를 앞두고 대한육상연맹에 입사했다. 선수들과 지도자들을 행정적으로 뒷받침해야 해 1988년 서울 올림픽까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육상연맹 사무실이 서울 을지로에서 잠실로 옮겨졌고 1990년대 초반 청담동에 있는 대원탁구장을 우연히 발견하면서 다시 탁구와 연을 맺게 됐다.” 탁구의 신세계가 펼쳐졌다. 선수 출신 코치가 직접 레슨을 해주고 있었다. 과거엔 상상도 못 하던 일. 선수 출신에게 조련받아 실력이 향상된 마니아들이 모여 있는 탁구장들도 소문이 났다. 전 씨는 대한항공 선수 출신 권영랑 관장에게 원포인트레슨도 받으면서 탁구 실력을 닦았다. 일을 마치면 어김없이 탁구장으로 달려가 한두 시간 땀을 흘렸다. 실력이 비슷하고 열정이 있는 사람들을 주축으로 대원탁구동호회를 만들어 대회에도 출전했다. 1997년 서울 강남구 생활체육 탁구대회에 출전해 복식 우승, 단식 3위를 하는 등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탁구는 직장생활의 해방구였다. 일하며 얻는 모든 스트레스를 탁구공에 실어 날렸다. 탁구를 치면 한두 시간은 잡생각 없이 탁구에 집중할 수 있다. 내 삶의 큰 활력소였다.” 실력이 늘자 어딜 가든 대접도 받았다. 탁구 좀 치자 육상연맹에서 일한다고 하니 ‘육상선수 출신이라 역시 발이 빠르다’고 엉뚱한 칭찬을 하기도 했다. 어떨 땐 ‘체육과 출신이어서 잘 친다’고까지 했다. 그는 운동과 전혀 상관없는 영문과 출신이다. 각종 육상대회가 전국에서 열리기 때문에 출장이 잦았던 그는 항상 탁구 라켓을 가지고 다녔다. “난 술을 못 마시기 때문에 일 끝나면 바로 탁구장으로 달려갔다. 몸이 찌뿌드드해도 탁구 한두 시간 치면 바로 컨디션이 좋아졌다”고 했다. 탁구를 너무 많이 쳐 ‘엘보’가 오긴 했지만 아파서 병원 신세를 진 적은 없다. 2007년 KADA로 옮겨서도 탁구는 멈추지 않았고 각종 대회에서도 성과를 냈다. 2014년도 도닉배전국오픈탁구대회 혼합복식에서 우승했다. 2016년 강동구의회의회장배 탁구대회 복식에서도 1위를 했다. 2019년 제2회 에리사랑시니어탁구대회 단식에서도 우승했다. “서울 사는 사람들의 로망이라고 할까? 꽉 막힌 빌딩 숲을 떠나 탁 트인 곳에서 살고 싶었다. 강원도 원주, 강릉 등도 생각했지만 제주가 눈에 들어왔다. 제주에 친구가 살고 있어 쉽게 결정했다. 은퇴하고 바로 제주로 내려왔다.” 제주에서의 삶도 자연스럽게 탁구가 주가 됐다. 제주탁구클럽에 가입해 활동했다. 외지인으로 제주에서 정붙이고 잘 살 수 있게 된 원동력에는 매일 만나는 회원들과의 교류가 있었다. 전 씨는 지난해 말 열린 제주도탁구협회장기 탁구대회 백두부 복식에서 우승했고, 4부 단식에서 준우승하는 등 실력을 과시했다. 올해부터 초등학생들 지도자로 나서지만 향후 시니어를 대상으로도 지도할 계획이다. “탁구는 사계절 언제든 칠 수 있다. 자기 몸만 지탱할 수 있다면 가능하다. 제주도 장애인복지관에서 레슨을 해준 적이 잇다. 휠체어 타고, 목발 짚고도 칠 수 있다. 탁구는 관절에 무리를 주지 않아 최고의 실버스포츠로도 알려져 있다. 어린이들에게는 탁구로 희망을 전하고, 어르신들께는 건강과 행복을 전하고 싶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다양한 운동을 하면서 좋아하는 것들을 경험해보고자 도전했는데…. 지금은 일도 다양하게 하고 있습니다. 운동은 저를 긍정적으로 살게 만들어 줬습니다. 너무 즐겁고 행복합니다.” 오세진 작가(41)는 3차례의 교통사고로 무너진 몸을 운동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려 엄청나게 노력했다. 운동을 통해 몸이 건강해지자 더욱 다양한 운동에 빠져들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속칭 ‘N잡러(여러 직업을 가진 사람)’가 됐다. 운동으로 교통사고 후유증을 극복하고 건강하게 사는 그를 2018년 11월 10일 dongA.com ‘양종구기자의 100세 시대 건강법’에 소개했었다. 2020년 초 전 세계를 강타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 19) 확산을 계기로 새롭게 변신한 오 작가를 다시 한번 조명한다. “저는 책을 통해 독자와 만나는 삶을 좋아했어요. 코로나 19가 터질 당시 4, 5번째 책을 냈는데 예정된 문화행사가 다 취소된 겁니다. 3,4개월 집에만 있다보니 저의 존재 가치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코로나19로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지 않게 된 세상이 원망스러웠어요.” 돌이켜보니 어느 순간부터 혼자서 주 3회 정도 산을 오르고 있었다. 코로나19 초반기 사회적 거리두기가 까다로워 피트니스센터 등 실내 운동을 못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산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오 작가는 “집에서 케틀 벨(Kettle Bell) 운동도 하고 혼자 달리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산을 타고 있는 나를 봤다”고 했다. “솔직히 유튜브는 제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문뜩 저의 이런 모습을 기록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했죠. 산에 대한 정보라기보다는 일종의 영상 에세이죠. 자연을 걷고 느낀 것을 글과 말로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에 빠지다’는 주제로 유트브 채널에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반응이 좋았다. ‘보고 힐링이 된다’ ‘마음에 와 닿았다’는 반응이 올라왔다. 오 작가는 댓글에 다시 답글을 달며 마음의 위안을 찾았다고 했다. 꼭 산에 국한된 게 아니라 바다와 마을 등 알려지지 않은 곳을 찾아다닌다. 아름답고 힐링될 수 있는 곳, 걸을 수 있고 자연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곳이면 다 간다. 그는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됐다. 그 명칭이 너무 무거웠는데…. 지금은 구독자가 5만6000명 가까이 된다. 서로 소통하는 장이다. 구독자는 내 영상을 보고 힐링하고, 난 구독자들의 반응을 보면서 힘을 얻는다”고 했다. “우리 채널에서는 구독자를 마루라고 합니다. 산마루 할 때 가장 높은 곳을 의미하기도 하고, 제 채널에 와서 쉬고 전 그들을 통해 위로 받는 대청마루라는 이중적인 의미로…. 구독자들이 지어준 것입니다. 마루들은 저를 ‘힐링진’으로 부릅니다.” 초반엔 주 2회, 지금은 주 1회 씩 올린다. 정기적이지 않고 부정기적으로 올린다. “숙제처럼 되면 내가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준비 됐을 때 올린다”고 했다. 마루들도 이해해준다고. “지난해 9월 코로나19 백신을 맞고 후유증이 와서 한 달 반 정도를 사실상 칩거해야 했어요. 심장 쪽에 영향을 줘 격한 운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마루들이 ‘천천히 해라. 무리하다 더 악화된다’는 등 응원 메시지를 줘서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강압이 아닌 자연스럽게 즐기면서 영상을 올리고 그것을 보고 즐깁니다.” 2020년 중반부터 KBS TV ‘영상앨범 산’에 출연하고 있다. 작가 겸 트레일러너로 산을 탐방하면서 느끼는 감정을 전달한다. 등산 마니아인 아버지와 함께 할 때도 있고 혼자서 출연할 때도 있다. 다른 등산 마니아와 산을 탐방하며 그 느낌을 전하기도 한다. 1월 22일에도 영상앨범 산 촬영차 충북 제천의 가은산 탐방을 다녀왔다. “코로나19가 터진 뒤 속칭 MZ세대가 산에 많이 갔잖아요? 그 때 저에게 그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는 분들이 많았어요.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들이 즐겨 놀던 ‘힙한’ 실내공간에 갈 수 없으니 자연스럽게 산으로 간 것입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랬을까요? 저하고 비슷한 경우입니다.” 오 작가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면 그 사람의 좋은 면만 보이듯 산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산도 자주 가다보면 아 이런 것도 있었네, 이렇게 아름다웠나? 아 이런 소리도 있었네. 이렇게 좋은 소리를 왜 나는 듣지 못했지? 이런 것을 영상에 담으며 표현하다보니 산을 더 찾게 됐죠. 아주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난 겁니다.” 오 작가는 2020년 100번 넘게, 지난해 60번 넘게 산을 찾았다. 명산을 찾는 다는 개념이 아니라 마음을 끌어당기는 산을 올랐다. 지리산은 5번 이상 올랐다. 그만큼 좋았다. 오 작가는 산을 오르며 달리기 좋은 곳에선 달린다. 등산과 트레일러닝을 함께 즐기는 것이다. “전 산행을 동적명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을 걸으면 우리 뇌가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지 않아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걷는 자기 모습을 보며 집중하다보면 마음이 가라앉고, 모났던 감정도 유해지죠. 산은 힐링 그 자체입니다. 많은 분들이 산에 갔으면 좋겠습니다.” 오 작가는 2014년 중반부터 2015년 중반까지 1년여 동안 교통사고를 무려 3번이나 당해 몸이 말이 아니었다. 20대부터 웨이트트레이닝 등 운동을 즐겼지만 사고로 몸이 무너진 몸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그는 “아프면 삶의 중심이 아픈 곳에 집중된다. 아프면 어떤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건강을 잃으면 돈이고 명예고 다 소용없다’는 말은 진리였다. 그래서 다시 운동으로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케틀 벨로 몸을 잡았다. 케틀 벨은 쇠로 만든 공에 손잡이를 붙인 중량 기구로 소의 목에 다는 벨과 모양이 유사해 붙여진 이름이다. 사고 나기 전부터 알고 있던 트레이너가 권유한 운동이었다. 허리 강화는 물론이고 몸의 올바른 기능을 회복시켜준다고 했다. 그는 “적응하기 어려웠지만 하면 할수록 몸이 달라졌다”고 했다. “누가 들으면 거짓말이라고 할 겁니다. 운동을 지속하면서 몸이 좋아졌어요. 운동효과가 긍정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목과 허리의 만성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습니다. 웨이트트레이닝은 팔과 다리, 몸통 등 분할운동입니다. 케틀 벨은 몸의 협응력, 전반적인 밸런스를 잡아주는 운동이었습니다. 속칭 코어를 발달시키는 운동이었는데 정말 내 몸에 좋은 효과를 줬습니다.” 케틀 벨 운동은 수련하는 느낌을 줬다. 케틀 벨로 스윙 동작을 하면서 작은 성취감도 느꼈다. 8kg, 12kg으로도 힘겨워 했는데 나중엔 24kg으로도 가뿐하게 운동을 할 수 있었다. 웨이트트레이닝처럼 팔 다리 따로 하지 않아도 온 몸이 균형이 잡혀갔다. 어느 순간 삶이 달라졌다. 짜증나고 골골한 삶은 사라졌고 건강하고 활력 넘치는 삶이 찾아왔다. 사는 게 행복했다. 일도 잘 됐다. 아플 땐 잘 해결되지 않던 일들이 술술 잘 풀렸다. 역시 아프지 않고 건강해야 인생을 즐길 수 있었다. 몸이 좋아지면서 달리기에도 도전했다. 한국CEO연구소 강경태 소장의 권유였다. 오 작가는 “솔직히 달리는 것을 싫어했다. 달리는 사람들을 보고 ‘왜 달려야하지?’란 의문을 품었었다. 그런데 마라톤에 빠진 강 소장님의 악착같은 권유로 달려보니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고 했다. “결승선을 통과해보지 않은 사람은 말해줘도 몰라요. 솔직히 TV를 보다 매주 10km를 완주한 4살짜리 아이가 한 말인데 정말 그래요. 달릴 때 기분, 완주한 뒤 느끼는 성취감, 해보지 않으면 정말 몰라요.” 10km 단축마라톤부터 시작해 결국 2018년 마라톤 42.195km 풀코스까지 완주했다. 산도 달렸다. ‘산악마라톤’으로 불리는 트레일러닝에도 입문한 것이다. “솔직히 산을 다녔지만 마니아 수준은 아니었어요. 어렸을 때 아빠 따라 산을 가서 익숙하기는 했지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산은 소통의 공간이 됐어요. 10년 전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간적이 있어요. 하루 많게는 14시간 씩 걸었죠. 그 때 휴대폰 등 모든 문명의 이기와 단절돼 초반엔 불안했었어요… 그런데 3,4일 걷기를 반복하자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그 때부터 같이 간 동료들의 얘기가 들리고 자연도 보였죠. 자연과 하나 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산을 달릴 때 그 추억이 떠오릅니다.” 트레일러닝 대회에서 입상하기도 했던 오 작가는 2019년 8월엔 6박 7일간 250km를 달리는 고비사막마라톤도 완주하고 올 정도로 ‘강철 체력’을 과시했다. 이젠 달리지 않고 산에 오르지 않는 삶은 의미가 없다. 오 작가는 ‘커뮤데이아’ ‘몸이 답이다’, ‘달리기가 나에게 알려준 것들’ 등 5권의 책을 냈고 지금 6번째 책을 쓰고 있다. 작가였던 그는 이젠 작가에 더해 유튜브 크리에이터, 방송인까지 ‘1인다역’을 하고 있다. 모두 운동이 준 혜택이다. 무엇보다 가장 좋아하는 운동을 즐기며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2009년 1월 프로축구 성남 일화에서 방출당해 은퇴의 기로에 놓여 방황하고 있었던 이동국은 당시 최강희 전북 감독을 만나며 새로운 기회를 잡았다. 1998년 포항제철고를 졸업하고 프로에 데뷔한 이동국은 그해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해 ‘오빠부대’를 끌고 다니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방출 당시엔 대부분의 감독들이 “이동국의 시대는 갔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평소 이동국의 플레이를 눈여겨보던 최 감독은 달랐다. “넌 아직 은퇴할 때가 아니다”라며 용기를 주는 최 감독의 말에 자포자기하고 있었던 이동국은 강한 재기의 의지를 보여줬다. 최 감독은 이동국에게 “넌 골만 넣으면 된다”며 수비도 잘해야 한다고 강조한 여타 감독들과는 다른 주문을 했다. 최 감독은 골문 앞에서 흥분하지 않고 발과 머리로 골을 잡아내는 이동국의 특성을 잘 활용했다. 이동국은 2009년 당시까지 역대 개인 최다인 22골을 터뜨리며 전북의 K리그 우승을 주도했다. 2020년 말 은퇴할 때까지 이동국은 전북에만 10개의 우승컵을 안겼다. 2012년엔 한 시즌 국내 선수 최다인 26골을 기록했다. 이동국은 프로 인생 전반전인 1998년부터 2008년까지 64골 29도움을, 후반전인 2009년부터 2020년까지 무려 164골 48도움을 기록했다. 이동국은 선수론 ‘환갑’으로 불리는 41세까지 뛰었다. 최근 올해 37세인 박주영이 홍명보 울산 현대 감독의 부름을 받았다. 2005년 FC 서울로 데뷔한 박주영은 ‘축구 천재’로 불렸다. A매치(국가대표팀 간 경기) 68경기에서 24골을 넣고 3회 연속 월드컵(2006년 독일, 2010년 남아공, 2014년 브라질)에 출전했다. 6년 유럽 생활을 빼고 서울에서만 뛰어 ‘서울 맨’으로 불렸지만 지난 시즌을 마치고 최대 위기를 맞았다. 1년 동안 골과 도움인 공격포인트가 하나도 없었다. K리그에서 12시즌을 보내며 76골 23도움을 기록했던 박주영이 한 골도 넣지 못한 것은 지난해가 유일했다. 서울은 “이제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유소년 지도자를 하라”고 제안했지만 박주영은 “선수로 더 뛰겠다”고 버텼다. 결국 어느 팀에서도 관심을 갖지 않은 박주영에게 홍 감독이 손짓했다. 홍 감독은 2012년 런던 올림픽 때 고려대 선후배 사이로 ‘으리’라는 비난을 받고서도 박주영을 와일드카드로 뽑아 사상 첫 동메달을 획득했다. 홍 감독은 그때 지켜봤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며 후배들을 잘 다독이는 박주영의 리더십을. 지난해 K리그 사령탑을 처음 맡은 홍 감독으로선 어린 선수들에게 귀감이 될 박주영 같은 고참이 필요했다. 박주영은 자신을 믿어주는 지도자 밑에서 제대로 한번 보여주고 은퇴하고 싶었다. 박주영이 이동국처럼 성공 스토리를 쓴다면 그 파급 효과는 클 것이다. ‘제2, 제3의 박주영’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100세 시대, 이제 선수 생명도 그만큼 길어져야 한다. 축구 스타 리오넬 메시는 35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37세인데도 아직 세계 무대를 주름잡고 있다. 다른 스포츠에서도 노장들의 활약은 두드러진다. 우리나라에선 그 나이면 ‘뒷방 선수’로 낙인찍힌다. 박주영의 활약에 주목하는 이유다. 양종구 스포츠부 차장 yjongk@donga.com}

엄마와 딸이 한 축구팀에서 공을 찬다. 요즘 모 방송에서 유명 여성 연예인들이 축구를 하는 ‘골 때리는 그녀들(골때녀)’이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함께 축구를 하고 있다. 모녀는 ‘골때녀’ 영향으로 축구에 관심을 가지는 여성들이 늘고 있는 현상에 기뻐하지만 함께 건강하게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기에 더 행복하다. 서울 서대문구여성축구단에서 함께 공을 차며 모녀의 정을 쌓고 있는 김미순(58) 박단비 씨(32) 얘기다. 엄마는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열기가 식지 않은 2003년 축구를 시작했다. 엄마는 초등학교 때 잠시 축구를 한 아들(34) 때문에 축구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한일월드컵 때 열렬한 팬이 됐다. “아들을 데리고 축구장을 오갈 때 한일월드컵이 열렸어요. 그 때 호프집에 모여서, 혹은 길거리로 나가 응원했죠. 축구 하나로 온 국민이 열광하며 행복했어요. 그리고 1년여 뒤 서대문구청 소식지에 여성축구단을 모집한다는 기사를 보고 바로 달려갔습니다.” 어떤 힘에 끌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축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지배했다. 대부분 처음이라 개인차가 없었고 각종 패스와 트래핑, 드리블 등 기본기부터 차근차근 배우는 게 재밌었다. 넓은 축구장을 뛰어다니는 맛도 새로웠다. 공을 차며 한껏 땀을 흘리고 나면 온갖 스트레스도 날아갔다. 김 씨는 “감독님이 말하는 축구 용어가 생소해 축구 교본을 사서 공부했고, 초반에는 훈련 일지까지 쓰면서 배웠다”고 했다. 그렇게 10년을 하고서야 축구를 조금 알겠다고 했다. “솔직히 처음엔 축구를 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죠. 공을 아무 데나 차고 승부욕만 넘쳐 몸싸움만 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패스의 길이 보이더라고요. 패스를 잘 했을 때 즐거움도 알고, 골 어시스트하는 기쁨도 느끼기 시작했어요.” 축구 경기도 많이 봤다. 특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한 박지성 경기는 빼놓지 않고 봤다. 요즘은 토트넘 손흥민에 빠져 있다. 스타 선수들의 인상적인 플레이를 따라 해보기도 했다. 김 씨는 틈나는 대로 탁구도 친다. 2020년 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 19)이 확산돼 공공시설인 축구장과 실내 탁구장을 활용하지 못할 땐 야외에서 배드민턴을 치거나, 집 근처 안산을 돌며 체력을 관리했다. 딸은 직접 공을 차며 새벽에 박지성 경기까지 꼬박꼬박 지켜보는 엄마를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엄마가 축구를 시작한지 13년이 지나서 딸도 축구에 발을 들였다. 엄마를 지켜보면서도 축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딸은 2016년 어느 날 친구들을 축구단에 소개시켜주기 위해 나갔다가 축구의 매력에 빠져들었다.“엄마가 축구를 한다는 소문에 친구들도 하고 싶어 해 소개시켜주러 나갔죠. 감독님이 저도 한번 뛰어 보라고 했어요. 엄마와 2대1 패스를 했는데 잘 맞았어요. 게다가 연습경기에서 골도 넣었어요. 그 때 ‘축구가 이렇게 재밌나?’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까지 공을 차고 있습니다.” 박 씨는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다. 단거리 달리기와 수영, 속칭 심박수를 올려주는 운동이 좋았다. 커 가면서 피트니스센터에서 근육을 키우는 재미에도 빠졌다. 이렇다보니 자연스럽게 단국대 생활체육학과에 들어갔다. 축구를 접한 박 씨도 패스 등 기본기부터 차근차근 배우는 게 재미있었다. 축구는 누가 더 잘할까. 박 씨는 “수비형미드필더로 포지션이 겹치는데 엄마가 주전이다. 난 우리 팀이 몇 골을 넣어 앞설 때나 들어간다”며 웃었다. 그는 “축구는 경력을 무시할 수 없다. 엄마는 어떤 상황에서도 노련하게 플레이한다. 난 성급하게 플레이하다 실수를 자주 한다”고 했다. 그는 “주위에서 엄마 정도는 해야 하지 않느냐고 핀잔을 줘 부담이다. 그래서 엄마를 목표로 틈날 때 운동장도 달리고 있다”고 했다. 2018년 9월부터 서대문구체육회에서 일하는 박 씨는 엄마를 롤 모델 삼아 시간 날 때마다 근육운동으로 체력도 키우고 있다.“전 경로당 등을 돌아다니며 어르신들 운동을 지도하고 있어요. 제가 지도하는 분들 평균 연령이 80세인데 평소 운동을 많이 하셔서 그런지 아주 건강해요. 근력과 유연성도 뛰어나요. 플랭크와 스쿼트도 거뜬히 하십니다. 우리 엄마도 꾸준히 운동하시니까 80세 넘어서도 건강하고 젊게 사실 것으로 확신합니다.” 모녀는 매주 3회(월, 수, 금요일) 함께 공을 차고 있다. 서대문구청여성축구단은 전국 대회에서 자주 우승하는 등 강호로 통한다. 박 씨는 2019년 열린 제6회 만덕배 제주전국여성축구대회 우승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는 “제주월드컵경기장에서 뛴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는데 제주방송에서 중계까지 한 대회여서 기억에 오래 남는다. 그리고 우승까지 했다”며 웃었다. 김 씨는 “언제인지는 기억이 않지만 강원도 횡성에서 우리팀이 골을 많이 터뜨려 우승한 게 기억난다. 1골당 1만 원 씩 걷어 회식을 했다”고 회상했다. 서대문구청여성축구단은 매년 4~5개 대회에 출전하는데 코로나 19 이후엔 제대로 훈련도 못하고 대회도 나가지 못했다. 하지만 두 모녀는 축구훈련을 못할 땐 집 앞 공터에서 드리블과 패스를 함께하는 등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만큼 축구가 좋다. 김 씨는 서대문구청여성축구단에서 최고령이다. 그는 “이 나이에 지금도 축구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로 살아 있음을 느낀다. 스트레스도 날려주고 건강도 지켜주고…. 팀에 해가 되지 않는다면 힘닿을 때까지 뛰고 싶다”고 했다. 그는 “축구가 거칠기 때문에 100세 시대를 맞아 운동 플랜B도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탁구와 배드민턴, 등산도 병행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씨는 최근 ‘야구 메카’가 된 서울 고척돔야구장에서 분식코너를 운영하고 있어 야구도 자주 접하지만 축구만 한다. “축구가 더 좋기도 하지만 야구는 진입장벽이 너무 높다”고 했다. 박 씨는 직접 뛰는 축구 경기에 빠져 있다. “기술을 활용해 플레이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이랄까? 특기 골을 넣었을 때, 우승했을 때는 날아 갈 것 같다”고 말했다. ‘골때녀’는 보고 있을까. 엄마는 “잠깐씩 봤는데 정말 축구를 잘하는 것 같다. 특히 국악 하는 송소희는 ‘여자 메시’ 같았다”고 말했다. 딸은 “경기는 많이 못 봤지만 골때녀 보고 축구를 시작한 여자들이 많다는 얘기는 들었다. 많은 여자들이 축구하며 인생을 즐겁고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최근에 서대문구청여성축구단이 다시 서대문문화체육회관 축구장에서 훈련을 시작했다. 엄마는 “딸과 함께 경기하면서 합작골을 넣고 싶다”고 했다. 딸은 “축구를 평생하며 엄마와 우리 아이들까지 3대가 함께 축구하는 게 꿈”이라고 했다. 공을 차는 모녀의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엄마는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열기가 식지 않은 2003년 축구를 시작했다. 딸은 직접 공까지 차며 새벽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는 박지성 경기를 꼬박꼬박 지켜보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엄마가 축구를 시작한 지 13년이 지나서 딸도 축구에 빠져들었다. 서울 서대문구여성축구단의 김미순(58) 박단비 씨(32)는 매주 3회(월, 수, 금요일) 함께 공을 차며 모녀의 정을 쌓고 있다. 엄마는 초등학교 때 잠시 축구를 한 아들(34) 때문에 축구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한일 월드컵 때 열렬한 팬이 됐다. “아들을 데리고 축구장을 오갈 때 한일 월드컵이 열렸어요. 그때 호프집에 모이거나 길거리에서 응원했죠. 축구 하나로 온 국민이 열광하며 행복했어요. 그리고 1년여 뒤 서대문구청 소식지에 여성축구단을 모집한다는 기사를 보고 바로 달려갔습니다.” 대부분 처음이라 개인차가 없었고 각종 패스와 트래핑, 드리블 등 기본기부터 차근차근 배우는 게 재밌었다. 넓은 축구장을 뛰어다니는 맛도 새로웠다. 공을 차며 한껏 땀을 흘리고 나면 온갖 스트레스도 날아갔다. 김 씨는 “감독님이 말하는 축구 용어가 생소해 축구 교본을 사서 공부했고, 초반에는 훈련 일지까지 쓰면서 배웠다”고 했다. 그렇게 10년을 하고서야 축구를 조금 알겠다고 했다. “솔직히 처음엔 축구를 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죠. 공을 아무데나 차고 승부욕만 넘쳐 몸싸움만 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패스의 길이 보이더라고요. 패스를 잘했을 때의 즐거움도 알고, 골 어시스트하는 기쁨도 느끼기 시작했어요.” 축구 경기도 많이 봤다. 특히 박지성 경기는 빼놓지 않고 봤다. 요즘은 토트넘 손흥민에게 빠져 있다. 스타 선수들의 인상적인 플레이를 따라해 보기도 했다. 김 씨는 틈나는 대로 탁구도 친다. 2020년 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이 확산돼 공공시설인 축구장과 실내 탁구장을 활용하지 못할 땐 야외에서 배드민턴을 치거나, 집 근처 안산을 돌며 체력을 관리했다. 이런 엄마를 지켜보면서도 축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딸은 2016년 어느 날 친구들을 축구단에 소개해주기 위해 나갔다가 축구에 빠져들었다. “감독님이 저도 한번 뛰어 보라고 했어요. 엄마와 2 대 1 패스를 했는데 잘 맞았어요. 연습경기에서 골도 넣었어요. 그때 ‘축구가 이렇게 재밌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까지 공을 차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좋아한 박 씨는 단국대 생활체육학과를 졸업했다. 박 씨도 패스 등 기본기부터 차근차근 배우는 게 재미있었다. 축구는 누가 더 잘할까. 박 씨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포지션이 겹치는데 엄마가 주전이다. 난 우리 팀이 몇 골을 넣어 앞설 때나 들어간다”며 웃었다. 그는 “축구는 경력을 무시할 수 없다. 엄마는 어떤 상황에서도 노련하게 플레이한다. 난 성급하게 플레이하다 실수를 자주 한다”고 했다. 2018년 9월부터 서대문구체육회에서 일하는 박 씨는 엄마를 롤 모델 삼아 시간 날 때마다 근육운동으로 체력도 키우고 있다. “저는 경로당 등을 돌아다니며 어르신들 운동을 지도하고 있어요. 제가 지도하는 분들 평균 연령이 80세인데 평소 운동을 많이 하셔서 그런지 아주 건강해요. 근력과 유연성도 뛰어나요. 제 엄마도 꾸준히 운동하시니까 80세 넘어서도 건강하고 젊게 사실 것으로 확신합니다.” 서대문구청여성축구단은 전국에서 강호로 통한다. 매년 4, 5개 대회에 출전하는데 코로나19 이후엔 제대로 훈련도 못 하고 대회도 나가지 못했다. 하지만 모녀는 축구훈련을 못 할 땐 집 앞 공터에서 드리블과 패스를 함께하는 등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엄마는 “딸과 함께 경기하면서 합작골을 넣고 싶다”고 했다. 딸은 “축구를 평생 하며 엄마와 우리 아이들까지 3대가 함께 축구하는 게 꿈”이라고 했다. 공을 차는 모녀의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시작은 마라톤이었다. 마라톤 문화에 지쳐 있을 때 트레일러닝이 다가왔다. 2017년 산을 달리는 경험을 한 뒤 새로운 세상에 빠져 들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산만 달리고 있다. 제약회사에 다니는 ‘찰스’ 김찬수 씨(42)는 트레일러닝을 즐기며 전도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2010년 무렵부터 각 스포츠 브랜드가 개최하는 마라톤대회에 출전했어요. 평소 운동을 좋아해 처음엔 분위기에 휩쓸려 달렸죠. 기록을 잘 내려고 노력도 했어요. 사실 기록은 의미가 별로 없었는데 마스터스마라톤계에선 모든 것을 기록으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있었죠. 기록이 좋은 사람이 대우받고, 좀 으스대는 문화가 있었죠. 하지만 너무 잘난 척하는 게 싫었고, 동호회나 크루 내에서 불화도 많았어요. 그런 게 싫었습니다. 그렇게 마라톤에 지쳐 있을 때 트레일러닝을 만났습니다.” 평소 산을 좋아했던 김 씨는 2017년 7월 경남 거제에서 열린 거제지맥 트레일러닝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40km를 7시간 50분에 달렸습니다.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산을 넘는 게 엄청 힘들 것 같았는데…. 나무와 꽃, 바위 등 자연과 함께 하다보니 그렇게 힘든 줄 몰랐습니다. 도로는 평탄한 게 계속 이어져 지루하지만 산은 오르막 내리막에 바위, 나무 등을 피해서 가야하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또 계속 긴장하지 않으면 다칠 수 도 있어요. 그게 산을 달리는 매력입니다.” 김 씨의 마라톤 풀코스 최고기록이 3시간 35분. 마스터스로선 좋은 기록이었지만 과감히 마라톤계를 떠나 트레일러닝으로 갈아탔다. 트레일러닝 문화가 그를 사로잡았다. “마라톤은 경쟁의식이 너무 심합니다. 동호회나 크루도 잘 달리는 사람들만 받아주고…. 산을 달리는 사람들은 겸손합니다. 진중해진다고 해야 할까요. 산을 50km 이상 달린다는 것은 엄청 힘든 일입니다. 산 50km 완주는 자랑이라기보다는 해냈다는 성취감과 자부심이 더 강합니다. 존경심으로 대합니다.” 2017년 11월 영남알프스 하이트레일에서 ‘오지마라토너’ 유지성 아웃도어스포츠(OSK) 대표(51)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산에 빠져 들었다. 유 대표는 2000년대 초반부터 세계 4대 사막마라톤(사하라, 고비, 아카타마, 남극)을 완주했던 인물. 지금은 국내에 트레일러닝 보급에 힘쓰고 있다. 코리아 50k, 화이트트레일인제 등 유 대표는 국내 트레일러닝 대회를 거의 다 기획해서 만들었다. 김 씨도 시간이 날 때마다 유 대표와 함께 트레일러닝 발전에 힘을 보태고 있다. “이것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문화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죠. 끼리끼리 몰려 다니며 힘을 과시하는 게 아니라 서로 인정하면서 즐길 수 있는 문화. 2017년 겨울부터 서울 남산에 ‘찰스런’를 만들었습니다. 제 닉네임이 찰스입니다. 제 개인 브랜드로 트레일러닝을 보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찰스런은 매주 목요일 오후 7시30분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만나 남산 오솔길을 7~9km 달린다. “우린 그냥 함께 달립니다. 가르쳐준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달리고 싶은 사람 아무나 오면 됩니다. 그냥 놀 수 있는 놀이터를 제공하는 개념이죠. 서울 중심의 남산에 올라 자연을 달리는 경험, 누가 해보겠습니까? 밤에 달리는 기분은 또 달라요. 저는 처음 온 사람, 초보자 도 환영합니다. 운영은 모든 게 초보자 위주입니다.” 혼자 시작해 지금은 찰스런에 참여하는 사람이 약 100명.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찰스런은 계속 된다. 2020년 몰아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 19) 탓에 어쩔 수 없이 진행을 잠시 멈춘 경우도 있지만 찰스런은 계속 되고 있다. 찰스런은 남산의 터줏대감이 됐다. 달리는 사람은 다 안다. 김 씨는 ‘트레일러닝 큐레이터’를 자처한다. 김 씨는 국내에서 열리는 트레일러닝 대회는 영남알프스 나인피크 등 다소 힘든 레이스를 빼곤 거의 다 참가했다. “전 그냥 산 달리는 것을 즐깁니다. 사실 제가 체력이 좋아요. 좀 열심히 달리면 대회에서 좋은 성적도 낼 수 있죠. 그런데 산에선 굳이 성적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자연과 하나가 돼 달리는 게 중요하죠. 또 달리는 사람들하고 소통하는 것도 좋습니다. 힘들면 함께 천천히 걷기도 하고…. 산을 구경하면서 달리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트레일러닝의 장점은 다시 가는 길이지만 한발 한발 새롭습니다. 나무, 바위, 돌… 매일 매일이 다릅니다.” 국내에선 하이원 스카이러닝과 스테이지제주 100km가 즐기기에 좋은 트레일러닝이라고 했다. “스테이지제주 100km는 2박 3일간 30km, 30km, 40km를 달리는 팀레이스입니다. 제주의 모든 것을 구경하면 달릴 수 있죠. 2019년 후배하고 즐기려고 참가했는데 2등을 했습니다.” 산을 달리면 무릎 등 관절 부상 위험이 높지 않을까? 김 씨는 주법을 잘 익히면 안전하다고 했다. “등산 할 때 산에서 천천히 내려오면 체중의 100% 훨씬 넘는 부하가 무릎이나 발목에 영향을 줍니다. 몸을 띄운 상태에서 발을 빨리해 달려서 내려오면 부하를 훨씬 줄일 수 있습니다. 업다운 주법을 제대로 배우면 큰 문제없습니다. 나뭇가지나, 돌멩이 등을 조심하면서 넘어지지만 않는다면 관절에는 달리는 게 더 안전합니다.” 김 씨는 해외 트레일러닝도 많이 참가했다. 일본 우메노사토 33km, 스웨덴 발살로펫 45km, 홍콩 100km, 스페인 제가마 트레일러닝(43.195km), 울트라트레일 몽블랑(UTMB)…. “해외로는 트레일러닝 문화를 배우러 갑니다. 우리나라는 달리는 사람들을 다소 불편한 눈초리로 바라봅니다. 외국은 달리는 사람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함께 즐깁니다. 그런 문화를 배워 한국에도 퍼뜨리기 위해 갑니다.” 2019년 UTMB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 때 두 팀으로 나눠서 갔습니다. 팀코리아와 서포터팀, 3명이 170km 참가하고 저희는 그들이 완주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갔죠. 저희(2명)는 56km 짧은 거리에 참가한 뒤 코스 중후반으로 차를 몰고 가서 170km를 완주하는 사람들을 보좌했습니다. 결국 2명이 완주했습니다. 알프스의 아름다운 자연을 달리는 기분, 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코로나19가 종식되고 해외여행이 자유화된다면 다시 해외로 나갈 것이다. 올해 UTMB에 다시 갈 계획이다. UTMB에 가려면 각종 대회에 출전해 포인트를 쌓아야 한다. 이미 다 쌓았다. 예정대로 열린다면 그는 9월 알프스산맥을 달리게 된다. 김 씨는 회사를 다니면서도 거의 매일 산을 달린다. 서울 강남 회사에서 퇴근하면 남산으로 가서 달린 뒤 합정동 집으로 향한다. 달려야 사는 것 같다. 산을 달리기에 건강하고 즐겁다.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20대 중반에 고향 경북 군위를 떠나 대구와 경북 칠곡 등에서 생활했어요. 30대 초반에 결혼한 뒤 30대 중반부터 고향으로 돌아와 정착했습니다. 2009년 청천벽력 같은 일이 당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아내를 잃은 것입니다. 처음엔 술로 달랬지만 사춘기 아이들을 보면서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 때 저를 지켜준 게 바로 보디빌딩입니다.”지난해 12월 18일 경기도 수원메쎄에서 열린 2021 미스터&미즈코리아 마스터스 남자 60세 이상부에서 정상에 오른 신일동 경북 군위군보디빌딩협회 회장(61)은 근육을 키우며 아내 잃은 슬픔을 극복했다.평소 다양한 운동을 좋아했던 신 회장은 20대 후반부터 보디빌딩을 시작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몸을 만들어 보디빌딩 대회에도 출전했었다. 하지만 객지를 떠돌면서는 사는 데 바빠 체계적이기 보다는 건강 유지 정도로만 운동했다. 아내를 보낸 뒤엔 웨이트트레이닝을 운동이라기보다는 몸을 학대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술도 많이 마셨지만 가학적으로 운동해 몸이 피곤해야 그나마 잊을 수 있었다”고 했다.방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1남 2녀 아이들을 위해 아빠가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사고 당시 첫째 딸이 고등학교 2학년. 막내가 초등학교 6학년으로 민감한 시기였다. 그래서 운동을 체계적으로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2012년 군위군보디빌딩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또 다른 변화의 기회를 맞았다. “운동을 열심히 하는 트레이너들에게 대회 출전 경험을 주려고 하는데 협회가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해서 만들었다. 보디빌딩 관계자들이 당시 운동을 열심히 했던 내게 회장을 제안해 하게 됐다”고 했다. 선수들 뒷바라지 하면서 대회에 따라 다니다보니 젊었을 때 대회에 출전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다시 대회에 출전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2013년 6월 미스터&미즈코리아 경북선발대회에 출전해 중년부에서 3위를 했습니다. 이게 첫 대회였습니다. 목표를 설정하고 운동에 집중한 뒤 대회에 출전하는 과정을 반복하다보니 과거 아픔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직장에 다니면서도 하루 2~3시간 씩 훈련했다. 큰 대회는 아직 엄두를 못내 각종 생활체육 보디빌딩 대회 60세 이하부에 출전했다. 꾸준히 성적을 냈다. 2015~2016년 준우승만 4번을 했다. 2017년 8월 문화체육관광부 전국 생활체육보디빌딩대회 60세 이하부에서 처음 정상에 올랐다. 한 달 뒤 대한체육회장배 전국 생활체육보디빌딩대회 60세 이하부에서도 우승했다.“대회에 출전하니 아이들이 좋아했습니다. 특히 큰 딸과 막내딸은 대회 때마다 경기장을 찾아 ‘프로탄(피부색 바꿔주는 물질)’을 발라주며 응원했죠. 경북 지역에서는 저보다 우리 딸들이 더 유명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나도 덩달아 즐거웠죠. 각종 대회 우승으로 아빠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보디빌딩은 신 회장 삶도 크게 바꿨다. 평소 막걸리 마시는 것을 좋아했는데 근육을 키우려면 술을 줄여야 했다. 자연스럽게 절주가 됐다. 단백질 위주의 간편한 식단은 주로 혼자 살아가는 그에게 여러 가지 챙겨 먹어야하는 수고를 덜어줬다.2020년부터 목표를 상향 조정했다. 국내 메이저대회인 YMCA와 미스터코리아 대회에서 우승하겠다는 각오로 훈련에 임했다. 하루 2회로 나눠 5~6시간 씩 훈련했다. 2020년 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 19)이 터졌지만 훈련을 멈추진 않았다.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군위문화체육센터가 코로나19 정부지침에 따라 몇 개월씩 문을 닫았지만 대구와 칠곡 등 문을 연 헬스클럽을 찾아다니며 ‘원정 훈련’을 했다. 그리고 2020년 10월 2020년 미스터&미즈코리아 마스터스 남자 60세 이상부에서 3위를 했고, 한 달 뒤 열린 YMCA 대회에선 정상에 올랐다. 지난해 12월 5일 열린 YMCA 대회에서 60세 이상부 2연패를 달성했고 미스터&미즈코리아에서 대회 첫 정상에 오른 것이다.“뿌듯했습니다. 특히 지난해 12월 12일 결혼한 큰 딸이 너무 좋아했습니다. 메이저 두 대회에 참가하느라 17kg이나 뺀 몰골로 혼주석에 앉아 미안했는데…. 엄마를 일찍 보내면서 가정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어느 정도 털어낼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은 성적을 낼 땐 성취감도 느낍니다. 그런 나를 아이들이 자랑스러워합니다.”신 회장은 보디빌딩에서 운동도 중요하지만 음식조절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12월 18일 대회를 마친 뒤 10여일 가량 일반식을 먹은 그의 체중은 10kg이나 증가했다.“대회 때 65kg이었는데 지금은 75kg입니다. 대회를 준비하지 않는 비 시즌 때 최대 82kg 나가니 체중 변화가 얼마니 심한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왜 이런 모습을 보여주느냐면 식단조절이 체중조절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고 싶어서입니다.”신 회장은 “운동도 중요하지만 몸에 미치는 영향은 운동이 20~30%, 식단 조절이 70~80%”라고 강조했다. 아직까지 신 회장은 대회를 준비하며 언제든 몸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균형잡힌 몸매를 유지하려면 먹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는 얘기다.“이런 것입니다. 단백질 위주의 식단이라면 단백질을 하루 체중 1kg당 2g을 먹어야 합니다. 제 지금 체중으로 계산하면 150g이상을 먹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단백질은 소고기나 닭 가슴살 150g이 아니라 순수 단백질 150g입니다. 일반적으로 닭고기나 소고기 150g으로 생각하니 보디빌딩 식단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절대 어렵지 않습니다.”소고기의 경우 우둔살은 100g당 순수 단백질이 21g 들어있다. 체중 60kg인 사람은 하루 120g의 단백질이 필요하니 하루에 우둔살 600g 이상을 먹어야 한다. 여기에 탄수화물과 야채나 과일까지 먹어야 하니 하루 기준으로 따지면 적은 양이 아니다. 닭 가슴살은 100g당 28g의 순수 단백질을 함유하고 있다. 신 회장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순수 단백질이 아닌 고기 자체의 무게로 계산을 하다보니 보디빌딩은 식단 때문에 어렵다고 생각한다. 절대 아니다”고 말했다.“과거엔 탄수화물을 전혀 먹지 않는 무탄 다이어트를 했습니다. 요즘은 그게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는 연구결과가 나와서 무탄이 아니라 고탄, 저탄 조절하면서 식단을 만들고 있습니다. 저의 경우엔 평상시엔 일반식을 하다 대회를 앞두고는 단백질 위주로 바꾸면서 고구마를 하루에 6번 나눠서 먹는 식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야채와 과일도 많이 먹는 식단입니다. 이렇게 해도 근육을 키우고 선명도를 높이는데 큰 문제없습니다.”근육을 키우면서 건강은 자연스럽게 유지되고 있다. 그는 “내 또래 중 내가 가장 젊어 보이고 건강하다. 어떤 옷을 입어도 속칭 자세가 나온다. 모두 웨이트트레이닝 덕분이다”고 말했다.“솔직히 매일 근육운동을 하는 게 쉽지는 않아요. 다소 고통이 따르기는 합니다. 하지만 땀을 흘리는 자체가 어느 순간 즐겁습니다. 그리고 몸의 각이 잡히는 것이 보이면 희열을 느낍니다. 몸은 운동하면 할수록 아름답게 바뀝니다.”신 회장은 지금은 직장을 다니며 개인적으로 운동을 하고 있어 아직 다른 사람들을 지도하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조만간 지도자 자격증을 획득해 100세 시대를 맞는 어르신들에게 도움을 줄 계획이다.“과거엔 메이저 보디빌딩 대회에서 우승하면 지도자 자격증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젠 자격증 시험을 봐야 합니다. 은퇴를 앞두고 있으니 지도자 자격증을 따 건강하게 살고 싶은 분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신 회장은 또 다른 목표도 세웠다. 올 10월 국내에서 열릴 예정인 세계 보디빌딩&보디피트니스 대회 마스터스 부문에서 우승하는 것이다. 신 회장에게 이제 보디빌딩은 삶의 유일한 낙이자 희망이다. 그는 “아이들도 건강하게 보디빌딩에 집중하고 있는 아빠를 응원하며 걱정을 덜고 있다. 죽을 때까지 운동을 멈출 수 없는 이유”라며 웃었다.군위=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불의의 사고로 떠나보낸 아내의 빈자리를 지키기 위해 보디빌딩에 집중해 대한민국 마스터스 최고가 됐다. 18일 열린 2021 미스터&미즈코리아 마스터스 남자 60세 이상부에서 정상에 오른 신일동 경북 군위군보디빌딩협회 회장(61)은 근육을 키우며 아내 잃은 슬픔을 극복했다. “20대 중반에 고향을 떠나 대구와 경북 칠곡 등에서 생활했다. 결혼한 뒤 30대 중반에 고향 경북 군위로 돌아와 정착했다. 2009년 청천벽력 같은 일을 당했다. 예상치 못한 사고로 아내를 잃은 것이다. 처음엔 술로 달랬지만 사춘기 아이들을 보면서 정신을 차렸다.” 평소 다양한 운동을 좋아했던 신 회장은 20대 후반부터 보디빌딩을 시작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몸을 만들어 보디빌딩 대회에도 출전했었다. 하지만 객지를 떠돌면서는 사는 데 바빠 체계적이기보다는 건강 유지 정도로만 운동했다. 아내를 보낸 뒤엔 웨이트트레이닝을 운동이라기보다는 몸을 학대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가학적으로 운동해야 그나마 잊을 수 있었다”고 했다. 방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1남 2녀 아이들을 위해 아빠가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운동을 체계적으로 다시 시작했다. 2012년 군위군보디빌딩협회 회장을 맡았다. “운동을 열심히 하는 트레이너들에게 대회 출전 경험을 주려고 하는데 협회가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해서 만들었다. 보디빌딩 관계자들이 당시 운동을 열심히 했던 내게 회장직을 제안해 하게 됐다”고 했다. 선수들 뒷바라지하면서 대회에 따라다니다 보니 젊었을 때 대회에 출전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다시 대회에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2013년 6월 미스터&미즈코리아 경북선발대회에 출전해 중년부에서 3위를 했다. 목표를 설정하고 운동에 집중한 뒤 대회에 출전하다 보니 과거 아픔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직장에 다니면서도 하루 2, 3시간씩 훈련했다. 큰 대회는 아직 엄두를 못 내 각종 생활체육 보디빌딩 대회 60세 이하부에 출전했다. 꾸준히 성적을 냈다. 2015, 2016년 준우승만 4번을 했다. 2017년 8월 문화체육관광부 전국 생활체육보디빌딩대회 60세 이하부에서 처음 정상에 올랐다. 한 달 뒤 대한체육회장배 전국 생활체육보디빌딩대회 60세 이하부에서도 우승했다. “대회에 출전하니 아이들이 좋아했다. 큰딸과 막내딸은 대회 때마다 경기장을 찾아 ‘프로탄’(피부색을 바꿔주는 물질)을 발라주며 응원했다. 경북 지역에서는 나보다 우리 딸들이 더 유명할 정도였다. 그러니 나도 덩달아 즐거웠다. 각종 대회 우승으로 아빠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난해부터 목표를 상향 조정했다. 국내 메이저 대회인 YMCA와 미스터코리아 대회에서 우승하겠다는 각오로 훈련에 임했다. 하루 2회로 나눠 5, 6시간씩 훈련했다. 지난해 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터졌지만 훈련을 멈추진 않았다.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군위문화체육센터가 코로나19 정부 지침에 따라 몇 개월씩 문을 닫았지만 대구와 칠곡 등 문을 연 헬스클럽을 찾아다니며 ‘원정 훈련’을 했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2020년 미스터&미즈코리아 마스터스 남자 60세 이상부에서 3위를 했고, 한 달 뒤 열린 YMCA 대회에선 정상에 올랐다. 올 12월 5일 열린 YMCA 대회에서 60세 이상부 2연패를 달성했고 미스터&미즈코리아에서 대회 첫 정상에 오른 것이다. “뿌듯했다. 이달 12일 결혼한 큰딸이 너무 좋아했다. 메이저 두 대회에 참가하느라 17kg이나 뺀 몰골로 혼주석에 앉아 미안했는데…. 엄마를 일찍 보내면서 가정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어느 정도 털어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좋은 성적을 낼 땐 성취감도 느낀다. 그런 나를 아이들이 자랑스러워한다.” 신 회장은 또 다른 목표도 세웠다. 내년 10월 국내에서 열릴 예정인 세계 보디빌딩&보디피트니스 대회 마스터스 부문에서 우승하는 것이다. 신 회장에게 이제 보디빌딩은 삶의 유일한 낙이자 희망이다. 그는 “아이들도 건강하게 보디빌딩에 집중하고 있는 아빠를 응원하며 걱정을 덜고 있다. 죽을 때까지 운동을 멈출 수 없는 이유”라며 웃었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초등학교 4학년부터 엘리트 육상선수를 시작했다. 부산체고를 졸업하고 바로 실업팀 포항시청에 입단했다. 100m 허들과 세단뛰기를 병행했다. 173cm의 늘씬한 몸매를 과시하며 트랙과 필드를 누비다 은퇴를 했다. 주위에서 보디빌딩을 해보라는 말에 근육운동을 시작해 마흔을 넘어서도 국내 최고를 넘어 아시아 최고가 됐다. 위암까지 이겨낸 그는 이제 세계 최고를 꿈꾼다. 12월 17, 18일 경기도 수원 메쎄에서 열린 제73회 미스터& 제16회 미즈코리아 선발대회(미스터코리아)에서 미즈 코리아에 등극한 최서영 씨(41·경남 S-휘트니스) 얘기다. “25세 쯤 은퇴를 하고 선수시절 입학한 동국대 사회체육과에서 공부를 하면서 헬스클럽을 다녔습니다. 주위에서 보디빌딩을 하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죠. 제 몸이 예쁘다고 했어요. 그런데 운동도 운동이지만 식단 조절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말에 안한다고 했어요. 육상선수 할 때도 체중 조절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었는데 또 그렇게 힘들게 살고 싶지 않았어요.” 육상선수 시절에도 웨이트트레이닝은 많이 했다. 단거리의 파워를 키우기 위해서 무게를 최대한 높이고 순간적으로 힘을 내는 훈련을 해 와서 웨이트트레이닝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계속 헬스클럽을 다니며 운동을 한 이유다. 다만 본격 대회 출전을 하진 않았다. “사이클도 많이 탔어요. 사이클을 타다보니 지방이 빠지고 몸매 라인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프로필 사진이나 찍어 볼까 하면서 운동을 좀 열심히 하다 얼떨결에 부산의 작은 피트니스대회에 출전했습니다.” 2014년 5월 이었다. 첫 출전에 2등을 했다. 최 씨는 “무대에 서니까. 너무 좋았다. 육상과는 다른 희열감을 느꼈다. 조명이 환하게 비추는 가운데 나를 바라봐 주는 관객을 향해서 연기를 펼치는 느낌…. 다른 세계에 온 듯했다. 그때부터 근육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말했다. 부산에서 경남 양산으로 이사를 하면서 당시 양산시보디빌딩협회 회장이 운영하는 피트니스센터에 등록하면서 그해 11월부터 체계적으로 운동하게 됐다. “육상과 보디빌딩이 비슷했어요. 모두 혼자서 해야 하는 운동이죠. 보디빌딩도 혼자서 훈련한 뒤 심사위원과 관객들에게 평가를 받아요. 다만 보디빌딩은 식단이 힘들었어요. 탄수화물을 배제해야 하고 대회에 임박해서는 수분까지 조절해야 합니다.” 2015년 7월 미스터코리아 대회 보디피트니스 여자부 +168cm에서 우승하고 청천벽력 같은 일을 당했다. “우승해 취해 있다 한 달 뒤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어요. 음식을 절제하다 막 먹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위암 3기라고. 바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죠. 중간에 한번 쓰러졌었는데 작은 병원에서 물을 잘못 먹었다며 소염진통제 처방으로 돌려보냈었죠. 참 나.” 혈변를 누고 피를 토했던 최 씨는 의사를 4번 찾아갔다. 절개가 아닌 복강경으로 수술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는 “전 꼭 보디빌딩 국가대표가 되고 싶었다. 당시 35세라 한창 나이인데 배를 다 갈라놓으면 보기 흉하지 않나. 결국 의사 선생님이 ‘그럼 수술 중 절개할 상황이면 절개해도 좋다’는 각서를 쓰고 수술 했다”고 했다. 위 70%를 잘라냈다. “1년간 8차례 항암 치료를 받는 게 지옥이었어요. TV 등을 보면 암에 걸리면 산에 들어가서 살았다는 사람들을 봐서 산으로 들어갈까도 고민했죠. 그랬더니 관장님이 ‘뭔 소리냐, 잘 먹으면서 헬스클럽에서 운동하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해서 항암 2차 치료를 받은 뒤 운동을 시작했습니다.”항암 치료에 몸무게가 57kg까지 빠졌다. 비 시즌 때 운동 안하면 72kg까지 나갔었다. 키가 커 뚱뚱해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57kg이 되자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다른 사람들은 살 빠진 저 보러 그냥 날씬해졌다고 했는데 제가 볼 땐 근육이 다 빠져 너무 앙상해 보였죠. 제 모습이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운동을 해서 다시 자신감을 찾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운동하면 볼륨감이 살아날 것이라 생각했죠. 몸은 기억하니까. 그런데 항암치료 할 땐 몸이 기억 못하더라고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수술 전 10kg 아령을 들었다면 1kg부터 다시 시작했다. 암컬을 10kg으로 15개씩 3~5세트 하던 것을 1kg으로 100개씩 하는 식이다. 근육이 없어 많은 무게를 못 들었다. 스쾃도 맨몸으로 했다. 그런데 운동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 “하루 2시간 운동하고 오면 22시간을 잤어요. 피곤해서 다른 것은 전혀 할 수 없었죠. 그런데 그 2시간 운동이 너무 즐거웠습니다.” 그렇게 8개월을 운동했다. 항암 치료 끝나고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의사가 깜짝 놀랐단다. 보통 항암치료를 받으면 골다공증이 오는데 모든 골밀도 수치에서 20대로 나온 것이다. 항암치료하면서 저항운동(웨이트트레이닝)을 계속해서 그렇다는 평가를 받았다. “먹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계란 반쪽부터 시작해 늘려갔는데…. 단백질은 섭취해야 하는데 그만큼 소화를 시키지 못했죠. 그래서 보충제 등도 많이 먹었어요.” 2016년 말 수술한 부위 장중첩으로 수술을 받았다. 의사는 운동하지 말라고 했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2017년 초 아시아선수권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갔지만 떨어졌다. 회복이 덜된 상태였다. 그해 8월 제주도에서 얼린 미스터코리아 대회에선 미즈 코리아(여자부) 대상을 차지했다. “전 매 대회에서 복근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수술을 받다보니 그 부분 감각이 떨어져 운동을 해도 잘 근육이 잡히질 않았어요.” 2017년 맹활약한 결과 국가대표가 돼 2018년 몽골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에 출전해 4등을 했다. 그리고 2019년 우여곡절 끝에 아시아선수권에서 정상에 올랐다. “부족한 부분을 보강해 1년 체계적으로 운동했어요. 그래서 그해 4월 1, 2차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했는데 2차 다음날 다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어요. 또 장중첩으로 수술 받았죠.” 중국에서 열리는 아시아선수권이 한 달 남은 시점. 수술부위 실밥이 터졌다고 했다. 다시 수술했지만 아시아선수권을 포기할 순 없었다. “그런 게 있죠. 1년 죽어라 연습하며 모든 것을 쏟아 부었는데…. 포기가 쉽지 않았어요.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대한보디빌딩협회에 얘기 안하고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163cm급에서 우승한 뒤 관계자들에게 얘기했더니 엄청 놀랐죠. 그 대회에서 그랑프리까지 3관왕을 차지했습니다. 너무 기뻐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2019년 9월 다시 장중첩으로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2개월 뒤 세계피트니스선수권대회에 출전해 5위를 했다. “안타까웠지만 세계무대가 어떤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바비인형에 근육만 입혀놓은 듯한 멋진 선수들이 즐비했습니다. 내년 10월에 한국에서 세계피트니스대회가 열리는데 꼭 상위권에 오르고 싶습니다.” 지난해와 올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 19) 탓에 세계피트니스선수권에 가지 못했다. “올해 미즈코리아는 2017년 이후 4년 만에 우승입니다. 제가 세계무대에서도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평가가 좋았습니다. 70%는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내년엔 꼭 세계대회에서 좋은 성과를 내겠습니다.”암수술 이후 보디빌딩은 그의 삶이자 목표가 됐다. “위암을 겪고 나서 많이 바뀌었습니다. 과거 운동은 직업적으로 먹고살기 위해 했습니다. 이젠 살기 위해 운동합니다. 건강하려면 근육에 힘이 있어야 합니다. 운동을 해야 하죠. 하루 이틀 안하면 금방 몸이 반응을 합니다. 또 목표를 정하고 그것에 투자하고 결과를 내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도 제가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대전지방법원 판사시절이던 1969년 어느 날 당시 법원장이었던 고 이일규 전 대법원장께서 지리산에 가자고 했어요. 뭐 가끔 뒷산 정도 오르는 수준이라 힘들 것 같았지만 상사가 가자고 하니 따라 나섰죠. 천왕봉까지 올랐습니다. 힘들 줄 알았는데 그다지 힘들지 않았어요. 해냈다는 성취감도 느꼈죠. 그 때 산의 매력을 처음 알게 됐습니다.” 그 이후 산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이재후 엄홍길휴먼재단 이사장(81)은 “산에서 많이 배웠고 행복했다”고 말한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등산으로 건강하고 즐거운 노년을 만들어가고 있다. 첫 지리산 산행 때의 에피소드가 재밌다. “당시 경남 진주로 해서 지리산에 올랐어요. 그 때 허우천이란 분이 안내를 했죠. 그는 가족을 버리고 지리산 중턱에 막을 치고 혼자 살고 있었죠. 나중에 알고 보니 사람들이 허우천 씨를 산신령이라고 부르더군요. 1960년대에 수백 번 지리산을 오르내리며 등산로를 정비하고 안내판을 설치해서 사람들이 그리 부른다더군요. 몇 년 뒤 가보니 그 분이 사라졌는데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대요.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진짜 산신령이 됐다는 얘기가 떠돌았죠.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엘리트였는데 산을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면서 놀랐지요.” 이 이사장이 바로 등산 마니아가 된 것은 아니다. 1970년 서울로 올라온 이 이사장은 가끔 산행을 하긴 했지만 마니아 수준은 아니었다. 주로 테니스를 치며 건강을 다졌다. 그는 “당시 법조계에선 테니스가 유행이었다. 재미도 있고 건강관리에도 좋았다”고 회상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산을 타게 된 것은 서울고 동문 산악회에 가입한 1970년대 후반부터. 판사 생활을 접고 김앤장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를 맡으면서 서울고 산악회, 서울법대 동기들과 전국의 명산들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네팔 히말라야 등 해외 트레킹도 다녀왔다. “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줍니다. 산에 가면 좋은 공기를 마실 수 있죠. 또 경관이 얼마나 좋습니다. 나무, 꽃, 바위, 개울, 그리고 정상에서 보는 황홀함…. 산을 타면 건강에도 좋죠. 힘들게 정상에 오른 뒤 느끼는 성취감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함께 하는 친구들과 이런저런 사는 얘기하고, 막걸리도 한잔하고…. 이렇게 좋은 운동이 어디 있나요. 대한민국은 산이 70%라 맘만 먹으면 언제든 오를 수 있습니다.” 이 변호사는 20세 무렵부터 60년 넘게 북한산 자락인 서울 정릉에 살고 있어 산과는 친하게 지냈다. 본격 등산은 아니지만 틈나는 대로 산책을 했고 나중에 등산 마니아가 된 것이다. 지금은 법조계의 ‘등산 고수’로 통한다. 서울대 법대를 수석 입학한 그는 해병대 법무관으로 군 생활을 했고 1965년 대전지법에서 판사생활을 시작했다. 서울지법 판사, 서울고법 판사, 대법원 재판연구관도 지냈다. 판사 생활 중에 미국소송법을 연구하기 위해 미국 조지타운 법대에서 1년 공부하기도 했다. 2008년 히말라야 16좌를 오른 엄홍길 대장(61)을 만나면서 새로운 길도 함께 개척하고 있다. 엄 대장이 “이제 산에서 내려와 인생의 16좌를 오르겠다”며 휴먼재단을 만들겠다고 이 이사장을 찾은 것이다. 엄 대장은 평소 산을 좋아하고 히말라야도 여러 차례 다녀온 그에게 이사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엄 대장은 어려운 이웃에게 희망과 사랑을 나눠주자는 취지로 휴먼재단을 설립했다. 재단의 중점 사업이 네팔의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지어주는 사업이다. 이사장도 취지가 너무 좋아 흔쾌히 동의했다. 그는 “엄 대장이 주도적으로 활동하고 난 옆에서 보좌하는 역할”이라고 했다. 엄 대장은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땐 늘 이사장님이 잘 판단해주신다”고 했다. 지난해와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 19) 탓에 못 갔지만 이 이사장도 매년 네팔에서 열리는 학교 착공식과 준공식에 참여했다. 히말라야 4000m 고지까지 4박5일 올라야 하는 힘겨운 일정이지만 이 이사장은 매번 엄 대장과 함께 했다. 엄 대장은 “한국 나이 80세인 2019년에도 히말라야를 거뜬히 오르셨다”고 했다. 당시 네팔 랑탕에서 엄 대장 등 대원들이 이 이사장에게 ‘팔순 생일잔치’를 벌여주기도 했다. 이 이사장은 “네팔 4000m 고지에 학교를 세워줬을 때 아이들이 너무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했다. 엄 대장이 참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이 이사장과 엄 대장은 14년 째 찰떡궁합을 과시하며 재단을 이끌고 있다. 당초 재단은 16개의 학교를 지을 계획이었지만 벌써 19번째 학교 후원까지 약속 받아 놓은 상태다. 이 이사장은 지금도 매달 진행하는 휴먼재단 정기산행 때 북한산 백운대까지 다녀오는 4~5시간 일정의 산행도 무리 없이 소화하고 있다. 이런 강철 체력의 원동력이 걷기다. 그는 특별한 일 아니면 걸어서 다닌다. 아직도 매일 법률사무소로 출근하는 그는 헬스클럽까지 왕복 2km도 걸어 다닌다. 헬스클럽에서도 걷고 웨이트트레이닝으로 근육도 키우고 있다. 정기 산행은 재단 혹은 지인들과 한 달에 1,2 차례 한다. 집 근처 북한산을 가장 많이 가고, 수락산 청계산 천마산 등 수도권 산을 자주 오른다. “세계적으로 대도시 주변에 이렇게 아름다운 산이 많은 나라가 없다. 북한산은 수천 번 올랐다. 북한산은 오를 수 있는 루트가 수없이 많아 언제 가도 새로움을 느낀다. 정말 명산이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산에서 정직을 배웠다. 그는 “산은 보이는 곳에 항상 있다. 아무리 꾀를 써도 자신의 힘으로만 올라야 한다. 산은 정직하다. 법조인 최고의 덕목도 정직이다. 있는 그대로 보고 따라야 한다. 산은 정복하는 게 아니라 순응하는 것이다. 산에 오르면서 겸손을 배운다”고 말했다. “요즘 일부에서 법을 자기들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 못된 겁니다. 법 취지가 제대로 반영돼야 합니다. 법을 자의적으로 운영하면 절대 안 됩니다. 법치주의가 잘 돼야 국가와 국민이 편안합니다.” 이 이사장은 대한민국 산의 색다른 아름다움을 얘기했다. “한국의 산은 계절 따라 다른 아름다움을 줍니다. 따뜻한 나라의 산은 늘 녹색이지만 우리 산은 그렇지 않아요. 봄에 녹색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해 여름까지 웅장한 녹색의 맛을 보여줍니다. 가을엔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들지요. 금수강산이란 말이 딱 어울립니다. 겨울엔 또 다른 맛을 느끼죠. 봄 여름 가을엔 정상을 오르기 전엔 바로 앞의 아름다움만 볼 수 있지만 낙엽이 진 뒤에는 나뭇가지 사이로 속이 다 보입니다. 멀리 봉우리까지 볼 수 있습니다. 산세가 투명하고 정직하게 다 보입니다. 그리고 눈으로 덮인 산이 주는 아름다움은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이 이사장은 겨울산은 제주도 한라산을 최고로 꼽는다. “겨울에 한라산을 올라가면서 보는 눈꽃은 눈이 부십니다. 또 다른 산과 달리 봉긋 솟아 있어 어느 순간부터는 완전히 눈에 덮인 산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신선이 된 기분이요. 지리산 설악산도 좋은 산이지만 너무 방대해 겨울에 이런 맛은 한라산에서만 느낄 수 있어요.” 이 이사장은 100세 시대 노인들의 건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고통은 죽음 이상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나이 들어 아프고 걷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요. 전 다행이 아직 걸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관리한다기보다는 걸어 다니고 산에도 가니 건강이 유지됩니다.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산에 갈 것입니다.”양종구기자 yjongk@donga.com}

이렇다 할 운동을 하지 않던 1969년 상사의 권유로 본격적으로 산을 올랐다. 그 이후 산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등산으로 건강하고 즐거운 노년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재후 엄홍길휴먼재단 이사장(81)은 “산에서 많이 배웠고 행복했다”고 말한다. “대전지방법원 판사 시절에 당시 법원장이었던 고 이일규 전 대법원장께서 지리산에 가자고 했다. 뭐 가끔 뒷산 정도 오르는 수준이었는데 상사가 가자고 하니 따라 나섰다. 천왕봉까지 올랐다. 힘들 줄 알았는데 전혀 힘들지 않았다. 해냈다는 성취감도 느꼈다. 그때 산의 매력을 처음 알았다.” 이듬해 서울로 올라온 이 이사장은 가끔 산행을 하긴 했지만 마니아 수준은 아니었다. 주로 테니스를 치며 건강을 다졌다. 그가 본격적으로 산을 타게 된 것은 서울고 동문 산악회에 가입한 1970년대 후반부터. 판사 생활을 접고 김앤장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를 맡으면서 서울고 산악회, 서울법대 동기들과 전국의 명산들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네팔 히말라야 등 해외 트레킹도 다녀왔다. “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준다. 우선 공기와 경관이 좋다. 산을 타면 건강에도 좋고 힘들게 정상에 오른 뒤 느끼는 성취감도 있다. 무엇보다 함께하는 친구들과 이런저런 사는 얘기 하고, 막걸리도 한잔하고…. 이렇게 좋은 운동이 어디 있나. 대한민국은 산이 70%라 맘만 먹으면 언제든 오를 수 있다.” 이 이사장은 20세 무렵부터 60년 넘게 북한산 자락인 서울 정릉에 살고 있어 틈만 나면 산을 올랐다. 법조계에선 ‘등산 고수’로 통한다. 2008년 히말라야 16좌를 오른 엄홍길 대장(61)을 만나면서 새로운 길도 함께 개척하고 있다. 엄 대장이 “이제 산에서 내려와 인생의 16좌를 오르겠다”며 휴먼재단을 만들겠다고 이 이사장을 찾은 것이다. 엄 대장은 평소 산을 좋아하고 히말라야도 여러 차례 다녀온 그에게 이사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엄 대장은 어려운 이웃에게 희망과 사랑을 나눠주자는 취지로 휴먼재단을 설립했다. 재단의 중점 사업이 네팔의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지어주는 사업이다. 이사장도 취지가 너무 좋아 흔쾌히 동의했다. 그는 “엄 대장이 주도적으로 활동하고 난 옆에서 보좌하는 역할”이라고 했다. 지난해와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탓으로 못 갔지만 이 이사장도 매년 네팔에서 열리는 학교 착공식과 준공식에 참여했다. 히말라야 4000m 고지까지 4박 5일 올라야 하는 힘겨운 일정이지만 이 이사장은 매번 엄 대장과 함께했다. 엄 대장은 “한국 나이 80세인 2019년에도 히말라야를 거뜬히 오르셨다”고 했다. 이 이사장은 “네팔 4000m 고지에 학교를 세워줬을 때 아이들이 너무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했다. 엄 대장이 참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이 이사장과 엄 대장은 14년째 찰떡궁합을 과시하며 재단을 이끌고 있다. 이 이사장은 지금도 매달 진행하는 휴먼재단 정기산행 때 북한산 백운대까지 다녀오는 4∼5시간 일정의 산행도 무리 없이 소화하고 있다. 이런 강철 체력의 원동력이 걷기다. 그는 특별한 일 아니면 걸어서 다닌다. 아직도 매일 법률사무소로 출근하는 그는 헬스클럽까지 왕복 2km도 걸어 다닌다. 헬스클럽에서도 걷고 웨이트트레이닝으로 근육도 키우고 있다. 정기 산행은 재단 혹은 지인들과 한 달에 1, 2차례 한다. 집 근처 북한산을 가장 많이 가고, 수락산 청계산 천마산 등 수도권 산을 자주 오른다. 이 이사장은 산에서 정직을 배웠다. 그는 “산은 보이는 곳에 항상 있다. 아무리 꾀를 써도 자신의 힘으로만 올라야 한다. 산은 정직하다. 법조인 최고의 덕목도 정직이다. 있는 그대로 보고 따라야 한다. 산은 정복하는 게 아니라 순응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100세 시대 노인들의 건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고통은 죽음 이상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나이 들어 아프고 걷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난 다행히 아직 걸을 수 있다. 특별히 관리한다기보다는 걸어 다니고 산에도 가니 건강이 유지된다.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산에 갈 것이다.” 양종구 논설위원 yjongk@donga.com}

어려서부터 태권도를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태권도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결혼해 아이를 낳은 뒤에는 달리기에 심취해 있다. 평생 운동을 생활화하고 있는 신기해 씨(33)는 스스로를 ‘애주가(愛走家)’라고 부른다. 가장 쉽게 할 수 있으며 운동효과도 좋은 달리기가 너무 좋다. “어릴 때부터 달리는 게 좋았습니다. 태권도를 하긴 했지만 친구들과 뛰어 노는 것도 즐겼죠. 각종 릴레이 대회에도 나갔고, 단축마라톤대회에 출전해서 입상하기도 했어요. 고등학교 1학년부터 태권도 선수생활을 하면서 달리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제 몸 속엔 그 유전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는 기본으로 하는 것이라 했지만 선수생활을 할 생각은 없었다. 중학교 졸업할 무렵 ‘어차피 할 것이라면 선수하는 게 좋겠다’는 주위의 권유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유도 태권도 명문 용인대에 들어가서 선수생활을 접었다. “대학에 가서도 전국대회에서 메달도 획득해 국가대표까지 되려는 생각을 했죠. 하지만 뭐 그런 것 있잖아요. 엘리트선수가 되니 다른 것은 모두 포기해야 하고 운동만 해야 하는…. 태권도에만 매몰돼 살아가는 게 싫었어요. 대학 1학년 때 인턴으로 미국에 가서 태권도를 지도할 기회가 있었죠. 그 때부터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2007년 미국 캘리포니아로 갔다. 태권도장 3군데를 돌아다니며 지도했다. 돌아와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서 2009년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펜실베이니아 쪽 대학에서 어학연수를 하며 태권도를 지도했다. 시카고까지 가서 태권도 마스터로 활약한 뒤 2010년 귀국했다. 그는 태권도 5단, 유도 1단, 공인 6단이다. “이렇게 미국에 오고 가다보니 대학교 생활에 집중하지 못했어요. 방황한 것은 아니고 계속 새로운 것을 찾았지요. 그래서 아직도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는 육아에 집중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 19)이 터지기 전까진 요가를 했다. “근질거리는 몸을 바로잡기 위해 다소 거칠다는 아쉬탕가요가를 시작했어요. 재미가 붙으려고 하는데 코로나19가 터진 겁니다. 실내 활동에 제약을 받기 시작하면서 학원을 못 가게 돼 아쉬웠어요. 그 때 시작한 게 달리기입니다.” 지난해 11월이었다. 대부분 실내 스포츠를 할 수 없게 되면서 혼자 즐길 수 있는 스포츠를 찾았다. 그 때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달리기를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집이 서울 도림천 근처에요. 시간만 있으면 바로 나가서 달릴 수 있었죠. 그래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달리니까 너무 좋았습니다. 스트레스를 날리는 것은 물론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죠.” 거친 숨을 몰아쉬며 10km를 달리고 나면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계속 운동을 해 와서인지 제법 잘 달렸다. 주위에서 ‘엄지 척’을 하며 응원해줬다. “달리기, 마라톤은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하잖아요. 전 태권도를 했는데, 태권도에서는 상대를 눌러야 합니다. 마라톤은 순위도 있지만 제 자신만의 목표를 정할 수 있어요. 예를 들면 개인 최고기록 경신이 있죠. 굳이 남을 이기지 않아도 저 자신과 경쟁할 수 있어 좋아요. 일종의 원윈(Win-Win) 스포츠조. 전 혼자 달리는 것도 좋고, 남들과 같이 달리는 것도 좋아합니다. 달리기는 뭐든 가능합니다.” 신 씨는 속칭 ‘혼뛰족(혼자 뛰는 사람)’이다. 육아하느라 동호회에 가입해 특정 시간에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즐겁다. “전 한번 달릴 때 12km를 달립니다. 체조를 한 뒤 첫 1km는 워밍업으로 달리고, 10km를 제대로 달리고, 다시 마지막 1km는 웜다운으로 달립니다. 많이 달릴 땐 1주에 4~5회, 한 달에 총 280km까지 달린 적도 있어요. 주로 아침에 아이 유치원에 보낸 뒤 달렸는데 요즘엔 코로나19로 유치원에 보내지 않아 제가 돌봐야 해 남편이 퇴근하고 오면 바통터치하고 달립니다.” 달리면서 뭔가 의미 있는 일이 없을까 인터넷 서핑을 했다. “시각장애마라토너와 함께 달리는 마라톤 동반주자(가이드러너)가 눈에 들어왔어요. 오래전부터 시각장애인들을 도와주고 있는 김영아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클럽 감독님을 알게 됐죠. 그래서 저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이드러너가 되기로 했습니다. 김 감독님께 배운 것은 아니지만 여기저기 찾다 빛나눔동반주자단이란 곳을 알게 됐습니다. 김 감독님을 롤 모델 삼아 저도 가치 있는 일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나은행 직원인 김영아 씨(48)는 2000년대 초반부터 달린 마스터스마라톤계의 유명 스타다. 2007년부터 시각장애마라토너와 함께 뛰는 마라톤 동반주자 활동을 시작했고, 2016년부터는 훈련 코치로 활약했다. 매년 시각장애마라톤체험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빛나눔동반주자단도 시각장애인들에게 다양한 운동 기회를 주고 있다. “코로나19로 활동을 못하다 지난달부터 다시 시작했어요. 매월 셋째 주 토요일 서울 잠실올림픽주경기장 보조경기장에서 시각장애인들을 돕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어요.” 신 씨는 남편도 달리기에 입문시켰다. “제 남편은 결혼 전 사이클 마니아였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뒤 10kg이 넘게 체중이 불었어요. 남편 운동을 시킨다는 것보다는 그냥 한마디 했죠. 제가 좀 더 잘 달리려고 연구하다보니 여자들의 경우 남자 페이스메이커가 있으면 기록 단축이 빠르더라고요. 올 봄쯤 그런 얘기를 남편에게 했더니 ‘조금만 기다려’라며 혼자 달리더라고요.” 남편이 3개월 새 9kg이나 뺐다. 5km를 1km당 3분40초 페이스로 달릴 수 있게 됐다. 남편이 생일 선물로 뭐가 필요하냐고 했을 때 ‘나랑 달려주면 된다’고 했고 9월 생일날 남편과 함께 21.0975km 하프코스를 달렸다. “1km를 4분50초대 페이스로 달렸습니다. 하프를 1시간 43분 정도에 완주했습니다. 그 정도면 제 페이스메이커로 합격점이었죠. 역시 운동을 좋아해서인자 잘 달리더라고요. 좀 더 빨리 달리면 제 기록 단축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남편에게 다른 선물은 필요 없다고 했어요. 앞으로 틈날 때 저랑 달려주면 된다고 했죠. 이젠 평생 함께 달려야죠.” 신 씨는 11월 13일 울산에서 열린 제18회 태화강국제마라톤대회에 출전해 10km 여자부에서 40분 43초로 2위를 했다. 코로나19 탓에 대회가 열리지 않아 처음 참가한 공식대회였다. “달리기 동호회에서 만든 이벤트 대회에 경험삼아 출전하기는 했지만 공식대회 출전은 처음이었어요. 첫 대회에서 좋은 기록과 성적을 내서 기쁩니다.” 신 씨는 마라톤 42.195km 풀코스 첫 대회에서 마스터스마라토너 꿈의 기록인 ‘서브스리(3시간 미만 기록)’를 하는 게 목표다. “지금은 5km와 10km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엘리트 선수들도 이 기록이 좋아야 결국 풀코스 기록도 좋다고 합니다. 이 기록을 바짝 당겨놓고 거리를 늘려 3년 안에, 늦어도 마흔이 되기 전에 서브스리 달성하는 게 목표입니다.” 집에 트레드밀도 있어 틈나는 대로 걷고 달린다. 생활 속에서 맨몸 스¤, 팔굽혀펴기 등 근육운동도 한다. 기록이 절대 기준은 아니지만 목표를 세우고 조금씩 달성해가는 재미도 있다. 달리면서 체력도 탄탄해졌다. “건강해야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체력이 있어야 어떤 힘든 일도 버틸 수 있죠. 또 진부하지만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도 있잖아요. 달리면 머리가 맑아져요.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 평생 달릴 겁니다.”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최근 미국프로골프(PGA)투어 히어로 월드챌린지에서 1위를 달리다 공동 5위를 하는 바람에 남자 골프 세계랭킹 1위 등극을 놓친 콜린 모리카와(24·미국)는 공부 잘하는 운동선수로 명성이 자자하다. 미국의 명문 비즈니스스쿨인 UC버클리의 하스경영대학을 졸업한 수재다. 일본계 아버지와 중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모리카와는 어릴 때 9홀 대중골프장을 자주 찾는 부모 밑에서 자연스럽게 골프를 접했다. 여덟 살 때 골프에 눈을 떠 선수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모든 학생이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학업과 운동을 병행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돼 있어 모리카와는 골프와 공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었다. 모리카와는 ‘골프 천재’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46)같이 장타자는 아니지만 정교한 아이언샷과 치밀한 코스 공략으로 올해 메이저대회인 디 오픈에서 우승하는 등 벌써 6승을 거뒀다. UC버클리에 입학한 모리카와는 미국 대학의 우수 선수들을 이르는 ‘올 아메리칸’에 4년 내내 선발됐다. 미국 아마추어 1위, 세계 아마추어 1위도 차지했다. 이렇게 선수로 활약하면서도 2학년 가을 하스경영대학에 진학했다. 골프 선수로도 잘나가는데 왜 굳이 공부까지 열심히 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그는 “나는 골퍼로서 나만의 브랜드가 있다. PGA투어에서 벌어지는 비즈니스에 대해서도 알고 싶고 직접 개입하고 싶다”고 했다. 선수로서 골프 비즈니스에도 관심이 많아 공부하고 있다는 얘기다. 모리카와 얘기를 꺼낸 이유는 최근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운동선수 학습권 논란 때문이다. 얼마 전 교육부는 학생선수의 대회 및 훈련 참가 허용일수 축소를 예고했고 이에 현장에서는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교육부는 현재 초등학교(10일), 중학교(15일), 고등학교(30일) 선수들의 결석일수를 내년에는 각각 0일, 10일, 20일로 축소할 계획이라고 공지했다. 2023학년도에는 초등(0일), 중등(0일), 고등(10일) 선수들의 결석일수가 또다시 축소될 예정이다. 교육부가 내세운 명분은 운동선수의 학습권 보장이다. 대한체육회를 포함한 일부 체육계는 공부할 권리로서 학습권만 강조하는 경직된 교육관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운동선수들의 ‘운동권’도 포괄적 학습권에 포함돼야 한다며 결석일수 축소를 폐지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교육부의 취지는 모리카와 같은 공부하는 운동선수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운동선수를 공부시킨다고 모리카와같이 명문대에 갈 수 있을까. 미국은 운동선수라도 고등학교까지 학업 성적만으로 상급 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 대학 입시 땐 미국대학체육협회(NCAA)에서 학업 성적 하한선을 마련하면 각 대학이 그 기준에 맞춰 운동 능력을 보고 선수를 선발한다. 물론 공부를 잘하는 선수는 대학을 선택해서 간다. 한국 운동선수는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아도 대학에 갈 수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시스템을 고치지 않고 학습권 보장을 이유로 공부하라고 한들 선수들이 제대로 따를 리 없다. 학생과 운동선수를 따로 구분하는 현 교육 시스템으론 답을 찾을 수 없다. 운동선수도 학생일 뿐이다. 특기를 살리는 교육도 가치 있으니 미국처럼 공부를 병행하며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초중고교 학생 534만여 명 중 1.5%인 8만2000여 명의 운동선수를 특별 대우할 이유가 전혀 없다. 입시 탓에 사실상 운동 기회를 박탈당한 대다수 학생에게도 운동할 시간을 보장해야 한다. 교육 시스템이 바뀌어야 가능한 일이다.양종구 논설위원 yjongk@donga.com}

평생 즐길 수 있는 스포츠가 하나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건강도 챙기면서 좋은 친구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나이 80세인 김두환 장호테니스재단 이사장은 평생 테니스를 치며 즐겁고 행복한 노년을 만들어가고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 테니스를 시작해 국가대표로까지 활약했고 이후에도 라켓을 놓지 않고 체력을 다지며 테니스 발전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서울 양재 스포타임 테니스코트. 김 이사장은 회원들끼리 치른 혼합복식 경기에서 자로 잰 듯한 발리와 스매싱, 구석을 찌르는 좌우 스트로크에 강력한 서비스까지 선보였다. 선수 출신이라지만 평생 관리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플레이였다. 그는 “이렇게 테니스 치고 나면 날아갈 것 같다. 재밌고 건강도 챙기고,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최고의 스포츠”라며 웃었다. “축구선수를 한 아버지와 형의 피를 받아서인지 어릴 때부터 운동에 소질이 있었어요. 축구와 농구 등 하는 것마다 잘했죠. 부산 동래중학교에서 연식정구를 시작했습니다. 축구선수도 같이 했습니다. 축구 명문 동래고에 가서도 축구와 연식정구 선수로 활약했습니다. 대학에 가면서는 축구를 그만 두고 테니스에 집중했죠. 주변에서 단체 종목보다는 개인종목을 하는 게 더 유망하다고 조언해줬어요.” 김 이사장의 형은 고 김두식 전 청구고(대구) 감독이다. 변병주(전 대구 FC 감독) 박경훈(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 등을 키우며 청구고를 축구 명문으로 만든 인물이다. 김 이사장이 테니스와 인연을 맺은 이유가 재밌다. 동래고 2학년 때 ‘서울 구경’을 이유로 연식정구에서 테니스로 바꾼 것이다. “중학교 2학년부터 연식정구를 시작했습니다. 고교 2학년 때인 1958년 전국체전 부산 예선에서 3학년 형들에게 져서 탈락했습니다. 당시 서울은 외국만큼 가고 싶은 곳이었죠. 그해 서울에서 전국체전이 열렸어요. 한 지도자 선배가 ‘그럼 테니스로 바꿔라. 팀이 별로 없기 때문에 등록만하면 나갈 수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전국체전을 한 달 남기고 테니스로 바꿨습니다.” 전국체전에서 메달을 획득하지 못했지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는 “8강 이상을 살펴보니 다 3학년 형들이고 2학년은 없었다. 다음해엔 우승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해 겨울부터 테니스에 집중했고 다음해 종별선수권과 전국체전 등 거의 모든 대회에서 우승했다. 1962년 테니스 시작 3년 만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한국테니스선수권(1962년, 1969년 우승)을 제패하는 등 강호로 군림하며 데이비스컵(남가 국가대항전) 대표로 활약했다. 당시 여자 최강 양정순 장호테니스재단 이사(74)와 파트너로 1969년 전일본선수권대회 혼합복식에 출전해 대한민국 사상 첫 테니스 국제대회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기도 했다. 양 이사는 1974년 테헤란, 1978년 방콕 아시아경기 금메달리스트다. 1971년 한일은행에서 선수생활을 마친 김 이사장은 은행직원, 사업가, 스포츠 행정가 등을 거치면서도 테니스 라켓을 놓지 않았다. 그는 “테니스는 할수록 매력적인 스포츠다. 건강을 지켜주는 데다 테니스로 만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이어갈 수도 있었다”고 했다. “은행 다니고 있는데 부산에서 사업하는 고교 4년 선배가 테니스공을 만든다고 도와달라고 했어요. 주말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려가 만든 공을 직접 쳐보면서 무게, 탄성 등을 평가해줬어요. 레오파드란 테니스공을 만들었죠. 선배가 테니스공 판매할 사람이 없다고 저에게 총판을 맡겼죠. 그래서 은행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김두환’ 이름 석자로 사업을 했죠. 당시 테니스는 사회적으로 저명한 사람들이 많이 쳤습니다. 저를 아는 분들이 참 많이 도와줬습니다.” 신발 및 스포츠웨어로 사업을 확장하다 다양한 업체가 나타나 경쟁이 심해지면서 접었다. 사업을 그만 둔 뒤에는 대한테니스협회 전무와 부회장, 그리고 회장(1993~2001년)까지 역임하며 테니스 발전을 위해 뛰었다. 당초 기업 출신이 협회 수장을 맡아야하는데 여의치 않자 김 이사장이 회장직을 일부기간 대신하다 결국 8년간 이끌게 된 것이다. 당시 협회 운영비가 없어 테니스인들을 주축으로 자립기금 모금 운동을 펼쳤고, 이런 노력에 정부 지원금도 받게 됐다. “협회 예산이 3200만 원밖에 없었어요. 전국대회 한번 치르면 2500만 원이나 들었죠. 어쩔 수 없이 자립기금을 모아야 했죠. 이런 우리의 노력이 언론을 타면서 정부에서 관심을 가지게 됐고 두둑한 지원금을 받게 됐습니다.” 8년간 22억 원의 테니스 발전 기금을 적립하고 물러났다. 그는 한국시니어테니스연맹 회장(2004~2009년, 2012~2015년)으로 노인테니스 발전에도 힘을 보탰다. 김 이사장은 현재 고 장호 홍종문 선생이 만든 장호테니스재단을 4년째 이끌며 유소년테니스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장호테니스재단은 ‘장호홍종문배주니어테니스대회’를 매년 개최하고 유망주에게 장학금을 주는 등 유소년테니스 발전을 주도하고 있다. 여든에도 이렇게 왕성하게 활약하고 있는 원동력에 테니스가 있다. 김 이사장은 2006년 2월 간암으로 수술을 받았지만 그해 가을 시니어국제테니스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빨리 극복했다. 그는 “테니스로 다져진 체력 덕분에 수술도 잘 견뎠고 회복도 빨랐다. 테니스는 내 생명의 버팀목”이라며 웃었다. “테니스나 탁구, 배드민턴 등 개인 종목은 선수생활을 한 뒤에도 계속 운동하면서 건강관리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야구나 축구 등 단체 종목은 선수생활을 그만두고 그 종목을 계속 하는 경우가 드물어요. 사람들이 모여야 하니까요. 테니스가 가지고 있는 장점입니다.” 김 이사장은 주 1~2회 지인들과 테니스를 친다. 한번에 2시간에서 3시간. 요즘도 50대 60대와 ‘맞짱’을 뜬다. 20세 이상 차이가 나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 아마추어테니스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즐기기 위해 대부분 복식이나 혼합복식 게임을 한다. 이렇다보니 자연스럽게 ‘테니스 친구들’과 좋은 인연으로 이어진다. “테니스가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누구나 칠 수 있어요. 6개월만 투자하면 됩니다. 다만 나이 들어선 과유불급입니다. 적당히 쳐야 좋아요. 건강 지키려다 오히려 망칠 수 있죠. 제가 아는 분은 101살까지 테니스 치다 돌아가셨습니다. 테니스는 최고의 실버스포츠입니다”고 조언했다. 김 이사장은 골프도 주 1회 친다. 겨울엔 스키도 탔지만 이젠 위험해 그만뒀다. 이렇게 테니스와 골프를 즐기기 위해 매일 집 근처 서울 올림픽공원 몽촌토성 언덕길을 걸으며 체력도 키운다. 그는 “그래도 테니스가 가장 좋다. 힘닿는 데까지 치다 테니스코트에서 죽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양종구기자 yjongk@donga.com 양종구기자 yjongk@donga.com}

축구선수를 한 아버지와 형의 피를 받아서인지 어릴 때부터 운동에 소질이 있었다. 중학교 때 연식정구를 시작해 고등학교 때 테니스로 바꿔 국가대표로도 활약했다. 은퇴한 뒤에도 평생 테니스를 쳤다. 테니스는 삶의 활력소이자 건강 지킴이였다. 테니스 덕에 간암도 거뜬하게 이겨냈다. 한국 나이 80세인 김두환 장호테니스재단 이사장은 요즘도 50, 60대와 ‘맞짱’을 뜬다. 20세 이상 차이가 나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 지난달 29일 서울 양재 스포타임 테니스코트. 김 이사장은 회원들끼리 치른 혼합복식 경기에서 자로 잰 듯한 발리와 스매싱, 구석을 찌르는 좌우 스트로크에 강력한 서비스까지 선보였다. 선수 출신이라지만 평생 관리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플레이였다. 그는 “이렇게 테니스 치고 나면 날아갈 것 같다. 재밌고 건강도 챙기고,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최고의 스포츠”라며 웃었다. 김 이사장은 부산 동래고 시절 ‘서울 구경’을 이유로 테니스와 인연을 맺었다. “중학교 2학년부터 연식정구를 했다. 고교 2학년 때인 1958년 전국체전 부산 예선에서 3학년 형들에게 졌다. 당시 서울은 외국만큼 가고 싶은 곳이었다. 그해 서울에서 전국체전이 열렸다. 한 지도자 선배가 ‘그럼 테니스로 바꿔라. 팀이 별로 없기 때문에 등록만 하면 나갈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전국체전을 한 달 남기고 테니스로 바꿨다.” 전국체전에서 메달은 획득하지 못했지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는 “8강 이상을 살펴보니 다 3학년 형들이고 2학년은 없었다. 다음 해엔 우승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해 겨울부터 테니스에 집중했고 다음 해 종별선수권과 전국체전 등 거의 모든 대회에서 우승했다. 1962년 테니스 시작 3년 만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전국을 휘어잡으며 데이비스컵(남자 국가대항전) 대표로 활약했다. 1969년 전일본선수권대회 혼합복식에서 대한민국 사상 첫 테니스 국제대회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기도 했다. 1971년 한일은행에서 선수생활을 마친 김 이사장은 은행 직원, 사업가, 스포츠 행정가 등을 거치면서도 테니스 라켓을 놓지 않았다. 그는 “테니스는 할수록 매력적인 스포츠다. 건강을 지켜주는 데다 테니스로 만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이어갈 수도 있었다”고 했다. 사업을 그만둔 뒤에는 대한테니스협회 전무와 부회장, 그리고 회장(1993∼2001년)까지 역임하며 테니스 발전을 위해 뛰었다. 당초 기업 출신이 협회 수장을 맡아야 하는데 여의치 않자 김 이사장이 회장직을 일부 기간 대신하다 결국 8년간 이끌게 된 것이다. 당시 협회 운영비가 없어 테니스인들을 주축으로 자립기금 모금 운동을 펼쳤고, 이런 노력에 정부 지원금도 받게 됐다. 8년간 22억 원의 테니스 발전 기금을 적립하고 물러났다. 그는 한국시니어테니스연맹 회장(2004∼2009년, 2012∼2015년)으로 노인테니스 발전에도 힘을 보탰다. 김 이사장은 현재 고 장호 홍종문 선생이 만든 장호테니스재단을 4년째 이끌며 유소년테니스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그가 왕성하게 활약하고 있는 원동력에 테니스가 있다. 김 이사장은 2006년 2월 간암으로 수술을 받았지만 그해 가을 시니어국제테니스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빨리 극복했다. 그는 “테니스로 다져진 체력 덕분에 수술도 잘 견뎠고 회복도 빨랐다. 테니스는 내 생명의 버팀목”이라며 웃었다. 김 이사장은 주 1, 2회 지인들과 테니스를 친다. 한 번에 2시간에서 3시간. 아마추어테니스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즐기기 위해 대부분 복식이나 혼합복식 게임을 한다.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테니스 친구들’과 좋은 인연이 이어진다. 그는 “테니스가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누구나 칠 수 있다. 6개월만 투자하면 된다. 다만 나이 들어선 과유불급이다. 적당히 쳐야 좋다. 건강 지키려다 오히려 망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골프도 주 1회 친다. 겨울엔 스키도 탔지만 이젠 위험해 그만뒀다. 이렇게 테니스와 골프를 즐기기 위해 매일 집 근처 서울 올림픽공원 몽촌토성 언덕길을 걸으며 체력도 키운다. 그는 “그래도 테니스가 가장 좋다. 힘닿는 데까지 치다 테니스코트에서 죽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양종구 논설위원 yjongk@donga.com}

허리 부상으로 군 생활을 접었다. 훈련을 안 하다보니 체중이 불었다. 이러다 안 되겠다 싶어 달렸다. 달리는 게 좋았다. 건강도 챙기지만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줬다. 어느 순간 ‘철인’이 됐다. 트라이애슬론(철인3종)에 빠져 사는 박세흠 씨(43)는 고민이 생기거나 일이 안 풀리면 운동을 한다.“ROTC 소위로 임관해 3군단 703특공연대에 있었습니다. 적지종심 작전부대(유사시 북한에 침투하는 부대)라 30kg 완전군장으로 행군하는 훈련이 많았는데 어느 날 디스크가 터졌습니다. 훈련을 못하게 됐습니다. 헬기도 못타고 훈련에 계속 빠지다보니 군 생활을 접어야 했죠. 계속 군에 있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2002년 중위로 전역했습니다.” 특수부대라 군에서는 오후 3시에 일과를 끝내고 체력단련을 했었다. 전역하면서 사실상 운동을 접은 데다 담배까지 끊었더니 20kg 가까이 체중이 불었다. 다이어트에 가장 좋다는 달리기를 시작한 이유다. “살도 쪘지만 몸도 여기저기가 아팠습니다. 의사는 디스크 수술을 권했는데 당시 수술하면 더 악화시킬 수 있다고 해서 안 하고 운동에 집중했습니다. 처음엔 아팠죠. 하지만 운동하면서 허리 주변 근육이 강화되자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달리면 세상만사 모든 고민이 사라졌다. 해결되지 않던 문제에 대한 답도 나왔다. 그래서 일이 안 풀리거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으면 달렸다. 그는 “몸이 건강해야 정신도 건강해진다는 것을 달리면서 알았다.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도 달리면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힘들 땐 달린다”고 했다. 전역 후 제약회사 다닐 때는 밤에 헬스클럽에서 달리고 주말에 탄천을 뛰었다. 각종 마라톤대회 10km와 하프코스에도 출전했다. “달리면서 건강을 되찾다보니 철인3종에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수영은 어렸을 때 배웠고 자전거도 탈 수 있었으니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 것입니다.” 2008년부터 철인3종에 빠져 들었다. 그해 여름 올림픽코스(수영 1.5km, 사이클 40km, 마라톤 10km)를 2시간 20분대에 완주했다. 달리면 기분이 좋아지는 ‘러너스 하이’가 있듯이 수영을 하거나 사이클을 타도 머리가 맑아지고 좋았다. 새벽에 수영을 하고 낮이나 저녁 땐 달리거나 사이클을 탔다. “회사를 그만 두고 서울 동대문에서 신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결혼 후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회사생활만으론 생활이 어려웠어요. 중국을 오가며 브랜드 여러 개를 확장하며 사업이 잘 됐습니다. 오후 8시에 문을 열어 새벽 5시에 닫는 생활로 밤낮이 바뀌어 힘들었지만 운동이 있어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온라인쇼핑으로 트렌드가 바뀌면서 사업이 힘들어진 데다 2014년 세월호 사건이 터져 매출이 거의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사업을 접어야 했죠.” 정신적 신체적으로 힘들었지만 철인3종을 하면서 쌓은 체력으로 버틸 수 있었다. 그는 “철인3종은 극한 상황에서도 참고 이겨내야 한다. 올림픽코스도 힘들지만 철인코스(수영 3.9km, 사이클 180km, 마라톤 42.195km)는 정말 체력과 정신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완주하기 힘들다. 어느 순간 철인3종은 내 삶의 버팀목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2011년 처음 철인코스(킹코스, 아이언맨코스)를 15시간 15분에 완주했다. 그리고 2018년 13시간 45분에 완주했다. 지금까지 철인코스 2회, 올림픽코스 14회, 하프코스 6회를 완주했다. 마라톤 풀코스는 9회 완주했다. 마라톤 풀코스 최고기록은 3시간 59분대. 박 씨의 하루는 운동으로 시작한다. 매일 새벽 수영을 1시간 한다. 2015년 경기 성남 분당 집 근처에 피자집을 열면서 오전엔 시간이 여유가 있어 운동을 즐길 수 있게 됐다. 주 1,2회 사이클 50km에 달리기 5~10km를 한다. 철인3종은 근전환 훈련이라고 해서 자전거를 타다가 바로 달리기를 해준다. 그렇지 않으면 실전에 근육 경련이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주말엔 사이클 80~100km, 마라톤 20km를 한다. 보강훈련으로 주 3회 요가 및 근육운동도 한다. 철인코스 완주를 앞두고는 운동량을 거의 두 배로 올린다. “2017년 분당철인클럽과 성남시철인3종협회에 가입해서 운동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혼자 운동했습니다. 혼자 시간 날 때 운동을 하는 게 편했어요. 그런데 운동을 자유롭게 즐길 수는 있지만 기록 향상은 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분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 동호회에 가입했습니다.” 여럿이 함께 하니 서로 끌어주고 밀어줘 도움이 됐다. 피곤해 운동을 하기 싫을 때가 있어도 회원들과의 약속이 있어 꾸준히 훈련할 수 있어 좋았다. “솔직히 제 기록이 뛰어나지는 않아요. 미국 하와이 코나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 출전권을 따고 싶은데 철인코스를 9시간 30분에는 완주해야 합니다. 전 이제 13시간 45분이라…. 하지만 나이 들어 언젠가는 하와이에 나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운동하고 있습니다. 10~20년 뒤에는 그 나이에 맞는 기준 기록을 맞출 수 있지 않을까요?” 철인3종을 하면서 겸손을 배웠다고 했다. “대회에 나가보면 저보도 못할 것 같은 분들이 저보다 앞서 나가는 것을 많이 봅니다. 자존심이 상해 제가 더 빨리 가려다보면 오버페이스를 하죠. 그분들은 저보다 훨씬 많은 훈련을 했다고 봐야 합니다. 처음엔 따라 잡히면 기분이 나빴는데 이젠 존경을 하게 됩니다. 철인3종은 시간투자와 노력이 뒷받침 돼야 즐겁게 완주할 수 있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 19) 탓에 2년간 대회 출전을 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대회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 씨는 내년 9월 전남 구례에서 열리는 대회 철인코스 완주를 위해 준비에 들어갔다. “철인3종 철인코스는 준비를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1년 전에 대회 출전 신청을 받습니다. 아직 코로나19로 여럿이 참여하는 대회를 열지는 못하지만 내년부터는 대회가 열릴 것으로 예상하고 훈련에 들어갔습니다. 완주와 기록단축이란 목표도 있지만 완주를 위해 노력하는 과정도 즐겁습니다. 이렇게 땀을 흘리며 운동하면서 사는 삶이 정말 좋습니다.”성남=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돌고 돌아 결국 몸 쓰는 일로 돌아왔다. 황혜민 다부짐휘트니스 매니저(40·경기도 용인 수지)는 유망한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였다. 부모의 반대에도 스케이팅을 포기하고 미술대학에 들어갔다. 스케이팅은 타지 않았지만 운동을 멈추진 않았다. 대학 때부터 웨이트트레이닝 트레이너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대회에 출전해 우승하면서 미술을 접고 전문 선수로 나섰다. 지금은 ‘보디 디자이너’로 건강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몸을 만들어주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각종 대회 기록을 갈아 치우던 제가 중학교 때 스피드스케이팅을 그만 둔다고 하자 어머니 반대가 심했어요. 운동을 계속 하는 게 더 유망한데 갑자기 비전도 보이지 않는 미술을 한다고 했으니. 돌이켜보면 왜 그랬는지…. 결국 몸 쓰는 일로 돌아왔죠.” 스피드스케이팅이 싫었던 게 아니었다. 새벽에 일어나 추운 곳에서 운동하는 게 싫었다. 평소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 서양화를 전공했다. 하지만 운동 본능을 완전히 억누를 수는 없었다. 운동은 언제나 그의 옆에 있었다. 미술을 했지만 시간 날 때 공원을 달리고, 헬스클럽을 찾아 운동은 계속했다. “몸을 쓰지 않으면 더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루라도 운동을 안 하면 몸이 근질근질 했다”고 했다. 혹시 몰라 미술대학 입시를 준비하며 체육대학 입시도 병행했다. 결국 미대에 진학했지만 1학년부터 웨이트트레이닝 생활체육지도자 자격증을 따 시간제 트레이너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업을 마쳤다. 대학원 때 미술학원을 차린 뒤에도 시간을 내 헬스 트레이너로 ‘투잡’을 뛰었다. “2013년 헬스클럽 관장이 ‘살을 빼서 보디빌딩 대회에 출전해보라’고 권유했어요. 보디빌딩을 10년 넘게 했지만 많이 먹으면서 운동해 체중이 74kg까지 나갔었죠. 살만 빼면 근육이 돋보일 것이라고 했어요.” 그해 7월 1일부터 3개월 운동과 다이어트를 병행해 20kg 넘게 감량했다. 다소 극단적인 다이어트였다. 그는 “2개월 간 하루 닭가슴살 400g, 현미 300g 먹다가 마지막 한 달은 탄수화물을 끊었다”고 했다. 하지만 황 매니저는 “다이어트를 할 때 절대 탄수화물을 끊으면 안 된다. 적당히 먹고 많이 운동해서 빼야 요요현상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살을 뺀 뒤 10월 2일 경기도 성남시 보디빌딩대회 여자부 52kg 이하급에서 1위를 하고 그랑프리까지 차지했다. 이 때부터 미술을 접고 본격적으로 보디빌딩에 매달렸다. 무대에서 잘 만든 몸을 과시하며 좋은 평가를 받는 게 멋졌다. 오전 오후 4시간씩 하루 8시간 근육을 만들었다. 2013머슬마니아 코리아 대회에 출전해서도 머슬 1위, 피규어 3위를 차지하는 등 각종 대회에서 우승했다. 어렸을 때 스피드스케이팅으로 다져진 하체와 10년 넘게 만들어진 상체 근육이 돋보였다. 2015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머슬마니아 세계대회에 출전해 2관왕을 차지했고 2018년까지 4회 연속 출전해 2016년(2위)을 제외하고 모두 우승했다. “솔직히 보기에 예쁜 몸을 만들고 싶었는데 전 근육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두드러졌어요. 몸매도 좀 서구적으로 생겼고…. 보디빌딩대회가 분화하면서 국내 각종 대회에서는 근육보다는 전체적인 아름다움을 보는 경우가 많았죠. 그 때 사진기자 한 분이 ‘혜민 씨는 외국에 가야 먹힌다’고 했는데 실제로 국제대회에서 더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미술을 공부했던 게 피트니스 트레이너인 그에게 큰 도움이 됐다. “인물을 그릴 때 밸런스와 대칭 등 알맞은 비율에 맞게 그려야 한다. 운동하면서 인체해부학을 공부하다보니 미술과의 연관성이 깊었다. 요즘은 내 몸은 물론 지도하는 회원들의 몸도 멋지게 디자인하는 즐거움에 빠졌다”고 했다. 그는 최근 근육운동을 하는 여성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에 기대와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열심히 운동해 보디프로필을 찍어 과시하는 문화는 동기부여가 돼 좋다. 하지만 몸 건강을 위하기보다는 반짝 스포트라이트만 받으려는 의도는 좋지 않다”고했다. 황 매니저는 “한두 달 운동하고 대회에 출전해 마치 꾸준히 운동한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운동을 진짜 좋아하는 사람들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운동한다. 속성 운동은 트레이너에게 부탁해 사실상 강압에 의해 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많다. 부상도 잦다”고 말했다. “웨이트트레이닝을 주목 받는 도구로 사용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요. 뭐 ‘나 이런 것도 해’라고 과시하는 것이죠. 연예인이나 파워 유튜버, 또 속칭 인플루언서들…. 하지만 근육운동의 기본은 건강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전 운동을 즐기다 자연스럽게 무대에 섰고 인정 받다보니 더 열심히 운동하게 됐습니다. 모든 운동이 마찬가지지만 특히 근육운동은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누구나 도전할 수 있지만 아무나는 못합니다. 한계를 뛰어 넘는 힘겨운 과정을 이겨내야 합니다.” 황 매니저는 웨이트트레이닝 기구를 사용하기 전에 맨몸 운동을 많이 시킨다. “근육을 잘 쓰게 하려면 쓸 줄 알아야 합니다. 무턱대고 기구 운동을 하면 부상당할 수도 있고요. 전 스쿼트, 런지, 팔굽혀펴기, 사이드스텝, 버피테스트 등 맨몸으로 하는 운동으로 기초 체력을 잡아준 뒤 기구 운동에 들어갑니다. 전 20회 PT를 하면 10회 이상 기초를 잡기 위해 투자합니다. 맨몸을 잘 쓰면 두려움도 없어져요. 운동효과도 기구운동과 차이가 없습니다. 또 준비운동을 20분 이상해야 PT를 해줍니다. PT가 1시간이라면 미리 와서 준비운동 안하면 20분 손해 보는 겁니다. 제 PT 회원들은 수업 전에 와서 충분히 준비운동을 합니다.” 그는 회원들에게 줌바, 스피닝 등 GX(그룹 운동)도 참여를 권유한다. 음악을 들으며 춤추듯 하는 운동을 하면 재밌기 때문이다. 그는 “재미없으면 피트니스센터에 안 나올 가능성이 높다. 흥미를 유발시키는 게 중요하다. 정 안 되면 센터에 나와서 샤워만이라도 하고 가라고 한다. 자주 나와야 꾸준히 운동할 가능성이 높다. 오는 연습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황 매니저에게는 ‘보디빌딩 선수’를 하고 싶은 회원들이 많이 찾는다. 그만큼 몸을 잘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가 디자인해준 선수들이 각종 대회에서 상위권에 올랐다. 2018년엔 육군 부사관학교에서 예비군인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황 매니저는 국내에선 선수보다는 머슬마니아 대회 심사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코로나19로 라스베이거스에 못가 안타깝습니다. 올해도 조만간 라스베이거스가 머슬마니아 세계대회로 달아오를 겁니다. 내년부턴 다시 출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개인 PT를 하면서도 매일 3시간 이상 운동할 시간은 확보한다. 그는 “돈보다 중요한 게 나에 대한 투자”라고 강조했다. 근육운동과 함께 유산소운동을 꼭 한다. “지방을 빼는 데는 유산소운동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라고. 스피닝강사 자격증도 가지고 있다. 주말에는 10km를 달린다. 코로나19가 없을 땐 회원들과 함께 주요 마라톤대회 10km와 하프코스를 완주했다. 심폐지구력을 향상시키는 유산소운동이 주는 즐거움도 크다. 취미로 주 1회 락킹 댄스도 배우고 있다. 새로운 것으로 삶의 활력소를 찾는다. 황 매니저는 외관상 다소 강한 이미지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몸에 문신도 했다. 왼팔엔 Blossom, 오른팔엔 운동하기 전 자기모습, 등엔 양귀비꽃을 그렸다.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