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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20대 남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노무현재단 이사장 유시민은 최근 특강에서 20대 남성의 대통령 지지율이 낮은 이유에 대해 정부의 여성 우대 정책과 양심적 병역 거부 합헌 결정, 미투 운동 등 일련의 사회 움직임을 들었다. 그러면서 20대 남자들이 화낼 만도 하다며 “여자들이 훨씬 유리하다. 남자들은 축구도 봐야 하고 게임도 해야 하고 모든 면에서 불리하다”고 우스갯소리를 한 것이 남성 비하 발언으로 해석돼 불을 질렀다. 유시민은 페미니즘 진영에서도 반기지 않는다. 진보논객 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저서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에 따르면 유시민은 ‘오빠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즘을 이론으로만 알면서 “오빠가 설명해줄게” 하며 여자를 가르치려 드는 사람, 오빠가 허락할 수 없는 수준의 페미니즘은 반대하는 사람을 뜻한다. 유시민은 ‘조개론’으로 일찌감치 여성계의 미움을 샀다. 2002년 대선 당시 개혁국민정당 내에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 공론화 움직임이 일자 대표집행위원이었던 그가 “해일 몰려오는데 조개 줍고 있다”고 말했다는 것. 2006년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여성 의원이 “저열한 성의식을 갖고 있다”며 조개론을 비판하자, 그는 “당내의 작은 일로 회의 시간이 소모되는 것에 대해 ‘해변에서 조개껍질 들고 놀고 있는 아이와 같다’고 했는데 왜곡됐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강준만 교수는 책에서 “그 후로도 유시민 계열의 진보주의자들이 페미니스트를 탄압한 사건이 있었지만 조개론의 원조 유시민은 침묵을 지킴으로써 조개론을 추인했다”고 반박했다. 또 자기 진영을 비판하기보다 감싸겠다는 유시민의 ‘어용 지식인론’이 조개론을 포함하고 있다며 “개혁과 진보를 원한다면서도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행위는 내부 총질이기에 집중 공격의 대상이 돼야 한다는 논리”라고 비판했다. 유시민의 ‘축구론’과 조개론은 묘하게 닮았다. 그는 문제의 강연에서 “20대 남녀 성별로 지지율 격차가 크게 나는 것은 대통령이 이성적인 관점에서 올바른 방향으로 정부의 권한을 행사해 나가는 과정에서 빚어진 일…정부가 감수해야 한다”고 했다. 진보 성향의 남성 커뮤니티에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너희가 희생 좀 해라’ 이런 식이네”라는 반응이 나왔다. 조개론에 대해 여성계가 “대의를 위해 일상의 차별에 눈감으라는 논리”라고 반발한 것과 비슷하다. 그의 강연에서 20대 남성들을 건드린 또 다른 대목은 “정치인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대중의 욕망을 이용하는 자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성직자의 자세로 일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는 “문 대통령은 정의를 추구하는데 이것이 20대 남성들의 욕망에 위배되면서 20대 남성들의 지지율이 떨어진다는 뜻”으로 해석됐고, “진보 세력의 고질적인 문제인 선민의식과 계몽주의를 드러낸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조개론도 ‘우리 편은 항상 옳으니 무조건 믿고 따르라’는 비민주적 진영 논리라고 비판받았다. 인터넷 독립저널을 운영하는 김아현 씨(23)는 올 4월 본보 기획기사 ‘이제는 386세대가 적폐…진영 논리 거부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반격’에서 “거악이 사라지고 정의가 실현되면 개인도 행복할 거라는 꼰대식 생각은 먹히지 않는다. 정책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가 중요하다”고 했다. 지금은 거대담론보다 나의 작은 권리가 소중하고, 진보 보수라는 이분법이 유효하지 않은 다양한 정체성 정치의 시대다. 조개론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비슷한 축구론을 다시 꺼내든 것, 이것이 여권의 정신적 지주 유시민이 양쪽에서 뺨맞는 이유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KBS1 TV 시사토크쇼 ‘오늘밤 김제동’이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 회복에 악영향을 줬다는 분석이 나왔다. 10일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에 따르면 이달 첫째 주 대통령 지지율 조사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연내 답방 뉴스로 주중 50%대를 회복한 지지율은 ‘오늘밤 김제동’의 ‘김정은 위인맞이 환영단’ 단장 인터뷰가 논란이 된 7일 48.7%로 떨어졌다. 청와대 특별감찰반 비위와 조국 민정수석 거취 공방이 거셌던 4, 5일에도 회복세가 꺾이지 않던 지지율이었다. ‘오늘밤 김제동’은 억울할 것이다. 9월 10일 첫 방송부터 지금까지 ‘오늘밤 청와대’라 착각할 만큼 대통령 홍보에 열을 올려왔기 때문이다. 첫 회부터 9회까지는 ‘D-7 3차 남북정상회담 평양행’ ‘D-5…평양행’ ‘3차 남북정상회담 DAY1’ ‘짐 로저스가 말하는 남북경협’ 등 하루도 거르지 않고 회담 분위기를 띄웠다. 그 절정은 문 대통령이 유엔총회에서 연설했던 9월 27일 9회 방송이다. 이날 아이템 3개가 모두 대통령 관련 뉴스였다. 먼저 이 프로 담당인 이윤정 PD가 나와 “3차 남북 정상회담에 동행한 대한민국 유일의 PD”라며 대통령의 능라도 경기장 연설 등 평양 취재기를 들려줬다. 이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을 지낸 강원국 씨를 초대해 “아이들 작문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며 문 대통령의 연설문을 해설했다. 마지막으로는 “문 대통령 연설에 대한 현지 반응을 안 들어볼 수 없다”며 뉴욕 PD특파원을 연결해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이라고 전했다. 찬반이 나뉘는 이슈를 다룰 땐 일방적으로 정권 편을 든다. 평양공동선언 비준 문제가 논란이 되자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동북아평화협력특별위원장이 나와 “문제없다”고 정리했다. ‘남북철도 도로 연결 사업은 퍼주기’라는 비판이 제기됐을 땐 김연철 통일연구원장(차관급)이 출연해 “가짜뉴스”라고 했고, 9·13 부동산대책 발표 후 ‘종부세 인상은 세금 폭탄’이라는 불만이 나오자 박영선 민주당 의원이 “실체 없는 가짜뉴스”라고 일축했다. 지난달 21일엔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이 출연해 탄력근로제 확대를 반대하는 이유를 길게 설명했는데, 공교롭게도 다음 날 문 대통령은 여야정 상설협의체에서 약속했던 합의(탄력근로제 확대 연내 처리)를 뒤집었다. 편파 논란, 품질 시비에도 ‘오늘밤 김제동’은 24년간 방송된 ‘뉴스라인’을 밀어내고 3일부터 밤 11시로 시작시간을 30분 앞당기고 방송시간도 40분으로 10분 늘렸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시사쇼 형식을 빌려 편파 방송하는 ‘생방송 시사투나잇’이 있었다. 그래도 그땐 상업적인 채널인 KBS2 TV였고 시간대도 자정 이후였다. 왜 KBS는 형평성 균형성 공정성이라는 기본적인 방송 원칙도 무시하는 시사쇼를 전진 배치하기 위해, 공정한 척이라도 해야 하는 정통 뉴스 프로를 폐지하는 무리수를 뒀을까. 김정숙 여사는 2012년 출간한 ‘정숙씨 세상과 바람나다’에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추모식 때 몇몇 방송인에게 사회를 부탁했는데 전부 거절했다. 그때 망설임 없이 나서준 제동 씨”라며 “이 일로 제동 씨가 방송 일을 하는 데 차질을 빚어 저나 남편이나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썼다. 대통령 부부의 이런 마음을 KBS가 헤아려 ‘오늘밤 김제동’을 편성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정권에 쓴소리 한마디 못 하는 방송은 대통령에게 독이고, 가짜뉴스로 어지러운 시대에 정통 뉴스를 줄인 국가 기간방송에는 부끄러움이며, 강제로 수신료 내고 편파방송을 보아야 하는 시청자들에겐 예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수보회의)를 3주째 열지 않았다. 참모진의 보고 참사와 기강 해이에 대통령의 불만이 폭발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수보회의는 문 대통령이 소통을 강조하며 취임 초부터 공들인 회의체다. 대통령의 수보회의 모두발언은 청와대 홈페이지에 공개돼 주요 현안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창구 역할도 해왔다. 그런데 참모들과 소통하는 수보회의 휴업보다 심각한 게 있다. 국민과의 소통 기회인 기자회견 휴업이다. 문 대통령의 공식 기자회견은 취임 후 모두 5회로 월평균 0.26회다. 미국, 프랑스 대통령과의 공동 기자회견을 포함한 숫자다. 간간이 ‘위안부 태스크포스(TF) 조사결과에 대한 대통령 입장문’ ‘김기식 금융감독원장 관련 대통령 입장문’ 등 일방적인 의견 표명은 했지만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도 없었다. 같은 대통령제 국가인 미국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것은 대통령의 중요한 의무다. 기자를 싫어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지난해 1월 취임 후 공식 기자회견을 38회 가졌다. 대부분 공동 기자회견이지만 어쨌든 월평균 1.65회다. CNN 기자와 삿대질하며 말싸움을 벌였던 7일 기자회견이 가장 최근 행사였다. 중간선거 후 열린 이날 회견은 1시간 27분간 진행돼 66쪽 분량의 녹취록으로 남았다. CNN 기자와의 설전이 두드러지긴 했지만 비좁은 브리핑룸에서, 배석한 참모들도 없이, 혼자서 100개가 넘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아내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모든 현안을 꿰고 국정을 장악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비공식 기자간담회도 취임 후 20회 넘게 했다. 정상회담 시작 전이나 대통령 전용기 안에서 할 때도 있고, 외부 행사장에서 기자들이 질문하면 “망해가는 신문사가…” 하고 험한 말을 하면서도 피하지는 않는다. 기자들과의 질의응답 녹취록은 모두 백악관 홈페이지에 올라온다. 공식 기자회견조차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은 빼고 준비된 모두발언만 업로드하는 청와대와는 대조적이다. 미국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1913년 윌슨 대통령 시절에 시작돼 100년 넘게 이어온 전통이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함으로써 대통령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무엇에 화내고 웃는지, 리더십은 어떤지 국민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매월 6회 안팎의 기자회견을 했다. 1955년 아이젠하워 대통령부터 기자회견이 TV로 방송되면서 부담이 되자 월평균 2회 안팎으로 줄였다.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스캔들, 클린턴 대통령은 르윈스키 스캔들로 만신창이가 됐을 때도 생방송 기자회견을 거르지 않았다. 관훈저널은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 논란이 일었던 2015년 봄호 특집기사 ‘정부 수립 이후 대통령 기자회견 변천사’에서 문민정부 출범 이후에도 한국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나아지긴 했지만 달라지진 않았다’고 혹평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매달 정례 기자회견을 한 이는 김대중 대통령이 유일했는데 그마저도 1999년 옷 로비 사건이 터지면서 빈도를 줄였다. “대통령이 한 달에 한 번만이라도 기자회견을 했더라면 국민이 궁금해하거나 답답한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귀찮아했고 비서진은 기자회견을 두려워했다. 호가호위하는 비서진의 인의 장막에 의하여 대통령이 국민과 고절되어 있을 때 정치가 잘될 리가 만무하다.” 동아일보가 박정희 대통령 취임 이듬해인 1964년 2월 17일 게재한 사설이다. 사설 속 대통령은 ‘이승만’인데 ‘문재인’으로 바꿔 읽어도 무리가 없으니 답답하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이변이 없는 한 올해도 여학생이 더 잘 볼 것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 말이다. 지난해 수능에서 여학생은 국어와 수학 성적 모두 남학생을 앞질렀다. 절대평가로 바뀐 영어도 여학생의 1등급 비율이 남학생보다 높았다. 이과 수학에서 여학생이 남학생을 앞지른 것은 지난해가 처음이었다. “수능 수학이 쉬워져서”라는 분석이 나왔지만, 2015년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도 여학생은 읽기 수학 과학 전 과목에서 남학생을 추월했다. 한국만이 아니다. 여성의 문맹률이 높은 나라를 제외하면 똘똘한 ‘알파걸’에게 치이는 ‘베타보이’를 걱정한 지가 10년이 넘는다. 원인은 여럿이다. 우선 절대 공부량이 다르다. 15세 학생이 매주 숙제하는 데 쓰는 시간이 여학생은 5시간 30분, 남학생은 4시간 30분이다. 반면 온라인 게임 시간은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17% 길다(영국 이코노미스트 2015년). 듣고 쓰기 위주의 학교 교육이 가만히 앉아있질 못하는 남학생에게 불리하다는 분석도 있다. 캐나다 심리학자인 조던 피터슨은 베스트셀러 ‘12가지 인생의 법칙’에서 “경쟁을 좋아하고 반항적인 남자아이는 순종을 가르치려고 설립된 학교에 맞지 않는다. 여자아이와 경쟁해 이겨도 칭찬받지 못하고 지면 망신당하는 분위기 속에서 위축된다”고 했다. 미국 시사전문 애틀랜틱은 9월 남학생이 공부를 못하는 이유는 책을 덜 읽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독서엔 공부를 위한 것과 즐거움을 위한 것(reading for pleasure)이 있는데 순수한 즐거움을 위한 독서량에서 남학생이 뒤진다는 것이다. 한국도 남학생이 책을 덜 읽는다. 이과 수학마저 남학생이 뒤처졌던 지난해 고3들의 초중고교 시절 독서량을 추적해봤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남학생의 독서시간이 평일 56분, 주말엔 60분으로 여학생보다 매주 25분 덜 읽었다(2010년 국민독서실태조사 자료). 중3 땐 35.1분간 덜 읽었고(2013년), 고3 땐 여학생보다 1.5분 더 읽었다(2017년).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 남학생은 ‘지식을 습득하려고’, 여학생은 ‘좋아서’라고 답한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좋아서 하는 독서는 힘이 세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2016년 고교 2학년생 10만여 명을 조사한 결과 책을 많이 읽는 학생이 성적도 좋았다. 수학 성적도 그렇다. 영국 런던대 교육연구소는 2013년 영국의 16세 학생 6000명을 추적 조사했는데 10세 때부터 책과 신문을 즐겨 읽은 학생이 그렇지 않은 학생보다 어휘력은 14.4%, 수학 성적은 9.9% 높았다. 부모의 경제력이나 학력수준보다 성적에 더 큰 영향을 주는 게 독서량이었다. 미국 텍사스주 고교생(2016년)과 오하이오주 고교생(2015년)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즐거움을 위한 독서가 수학 성적을 올려주는 것으로 확인됐다. 호주 멜버른대 몰리 맥그리거 교수(교육학)는 “언어능력 자체가 수학 문제를 푸는 능력으로 치환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어능력이 떨어지면 수학도 못한다. 언어와 수학 모두 상징에서 의미를 끌어내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베타보이를 위해 남녀 간 신체 발달 차이를 감안한 교육 과정을 운영하고, 남자 교사를 늘리자는 제안이 나온다. 스포츠나 자동차에 관한 책을 학교 도서관에 비치하고, 책 읽는 남자를 ‘쿨’하게 여기도록 롤 모델을 보여주자는 아이디어도 있다. 어떤 대책이 효과적일지는 미지수다. 분명한 건 독서량에서 남녀 격차를 줄이지 못하면 성적 차이도 바뀌지 않으리라는 사실이다. 언어뿐만이 아니다. 책을 안 읽으면 수학도 과학도 잘하기 힘들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다시 이국종이다. 2011년 석해균 선장을 살려내고, 2017년 총상으로 벌집이 된 북한 귀순 병사를 소생시킨 ‘국민 의사’ 이국종 아주대병원 외상외과 과장(경기남부권역외상센터장)이 새롭게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그의 비망록 ‘골든아워’는 출간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1, 2권 판매 부수가 13만 부를 돌파했다. 올해 국회 국정감사장엔 잠깐 참고인으로 나와 ‘신 스틸러’로 주목받았다. 바다 위 응급환자를 위해 헬기를 타고 출동하는 장면을 담은 KT 광고 영상은 “역시 갓국종”이라는 찬사와 함께 조회수 2000만 회를 훌쩍 넘겼다. 그는 방송사 섭외 1순위다. 6일에는 채널A 건강정보 프로그램 ‘몸신’ 200회 특집에 출연한다. 그는 좀처럼 웃지 않는다. ‘이국종과 맥주의 공통점은 드라이하다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화제의 영상 속 그의 표정은 드라이보다는 앵그리에 가깝다. 응급헬기 탑승 2분 전 고장 난 무전기를 집어던질 때도 그랬다. “안 된다니까, 이 거지 같은 거. 무전기 지원해 달라고 한 지가 8년이 지났어요.” 지난달 24일 국회 국정감사장에서는 응급헬기 소음 민원 문제로 말소리가 떨렸다. “영국에선 경기장 근처에서 환자가 발생하면 경기 중단하고 경기장 잔디에 헬기가 내려앉습니다. 우린 관공서 잔디밭에 내려앉아도 안 좋은 소릴 합니다. … 누구도 안 된다는 사람 없는데 실제로는 전혀 안 되는, 오만 가지 핑계로 찍어 누릅니다.” 무전기가 고장 나 헬기 안에서 카톡을 하고, 응급환자를 향해 다급히 헬기를 몰고 가는 조종사가 “시끄럽다”는 민원 전화를 받는 초현실적인 열악함은 역설적이게도 ‘영웅 이국종’ 스토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그가 싸워야 하는 적은 환자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죽음의 사신만이 아니다. 중증 외상 환자는 대개 3D 업종에서 험한 일 하는 노동자들인데, 치료할수록 적자를 보는 이런 환자를 병원은 반가워하지 않는다. 석 선장 같은 ‘스타’ 환자가 발생해 여론이 들끓으면 ‘높은 분’들이 줄지어 다녀가고 장밋빛 지원을 약속하지만 달라지는 건 별로 없다. “별것 아닌 환자로 쇼 한다” “헬기가 이국종 개인택시냐”는 뒷말도 감수해야 한다. 3D 업종인 외상외과를 지원하는 의사가 있을 리 없다. 그 결과 한국의 환자 이송 시간은 평균 4시간 5분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수준이다. 적절한 의료 인력과 장비를 갖춘 곳에서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한 응급환자가 10명 중 3명이 넘는다(예방 가능 외상 사망률 30.5%·보건복지부 2015년 기준). 중증 외상 의료 시스템의 공백은 외상외과 의료진이 “내 목숨을 갈아 넣어” 메운다. 그는 왼쪽 눈이 멀고 어깨뼈는 주저앉았다. 에이즈 환자의 피를 뒤집어쓰며 수술한 적도 있다. 주 90시간을 일하는 간호사들은 응급헬기를 타다 유산한 동료를 보고도 임신한 몸으로 다시 헬기에 오른다. 그는 책에서 2007년 영국 외상센터 연수 시절이 좋았다고 했다. “제대로 된 시스템 속에서 할 일을 하고 그 자체로 인정받았다. 원흉도 돌연변이도 아니었다. 주말엔 펍에서 동료들과 맥주 마시고 클럽에서 새벽까지 음악을 들었다. 내가 삶에서 바란 것은 그 정도다.” 우리에게도 온갖 가학적인 환경을 기적처럼 이겨내는 의사가 필요한 게 아니다. 산에 오르다, 도로 위에서 교통사고로, 군대에서 훈련을 하다 중증 외상을 입었을 때 이국종이 아니어도 살 수 있는 든든한 시스템을 원한다. 그래서 ‘영웅 이국종’이 싫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요양원에 사는 79세 할머니는 불만이다. 식사 시간엔 반조리 식품을 전자레인지에 대충 돌려주고 산책은 어쩌다 한 번이다. TV를 보니 교도소에서는 균형 잡힌 세 끼 식사에 매일 산책을 시켜주고 다양한 교양 수업도 들을 수 있단다. “차라리 감옥에 가는 게 낫겠어!” 할머니는 요양원 친구들과 5인조 노인 강도단을 만들어 범행을 모의한다…. 스웨덴 소설 ‘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의 줄거리다. 2권 ‘메르타 할머니 라스베이거스로 가다’, 3권 ‘메르타 할머니의 우아한 강도인생’까지 세계적으로 200만 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다. 노후 대책으로 재소자가 되는 할머니 이야기는 복지국가 스웨덴에서는 유쾌한 소설이지만 세계 최고령국 일본에서는 비참한 현실이다. 블룸버그는 올 3월 ‘일본 교도소는 여성 노인들의 천국’이라는 특집을 보도했다. 고령인구 증가로 노인 범죄율이 높아가고 있는데 특히 여성 노인들의 범죄율 증가세가 두드러진다는 내용이었다. 평생 착하게 살아온 여성들이 노년에 교도소 담장을 제 발로 넘게 된 사연에는 여러 가지 여성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남자보다 가난하고, 남자보다 수명이 길어 외롭게 혼자 사는 기간이 길며, 가부장적 문화에 따른 소외감에 힘들어한다. “여기서 나가면 혼자서 하루 1000엔으로 살아야 한다. 기댈 곳이 없다”(74세·3범·콜라와 주스 절도), “열심히 살았지만 늘 가난했고 아들 대학을 보내야 했다. 6년 전 쓰러진 남편 병 수발을 드느라 지쳤다. 여기가 편하고 여기선 내 삶을 살 수 있다”(80세·4범·프라이팬 훔쳐 2년 6개월 징역형), “늘 외로웠다. 13년 전 서점에서 소설책을 훔치다 걸렸는데 경찰이 얼마나 친절하던지, 내 푸념을 다 들어줬다.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80세·3범·크로켓과 부채 훔쳐 3년 2개월). 한국도 여성 노인들의 범죄율 증가세가 뚜렷하다. 2016년 65세 이상 여성 범죄자는 2만1637명으로 2년 전보다 26.8% 늘었다(남성은 9만6585명, 23.6% 증가). 특히 같은 기간 71세 이상 여성 범죄자 증가 폭은 33.8%(6935명→9282명)다. 강력범이나 폭력범보다는 절도범이 많이 늘었는데, 71세 이상 여성 절도범은 859명에서 1848명으로 2년 새 두 배 이상으로 폭증했다. 범행 이유를 알 순 없지만 가난하고 외로운 건 일본 할머니들과 같다. 65세 이상 여성의 연간 총소득은 632만 원. 남성(1417만 원)의 절반도 안 된다(통계청, 2014년 기준). 70세 이상 1인가구 비율은 여성이 29.3%, 남성이 7.9%(2018년 추계)다. 평균 기대수명이 남자보다 6년 길고 남녀 간 결혼 나이 차이를 감안하면 여성은 약 10년간을 혼자 살아야 한다. “난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비율과 결혼생활 만족도는 남성이 높고, 스트레스와 우울감을 호소하는 비율은 여성이 높다(‘2018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메르타 할머니’ 시리즈의 노인 강도단은 어렵게 들어간 교도소 생활에 실망하고 출소 후엔 꿈의 요양원을 짓기 위해 카지노와 은행을 턴다. 현실 속 한국과 일본 할머니들의 재범 비율도 높다. 하지만 그건 소설처럼 ‘건설적’인 목표 때문이 아니다. 그저 다시 갇히고 싶어서다. 메르타 할머니 말대로 “황혼기를 맞은 노인들이 강도가 되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면, 그 사회는 분명 뭔가 잘못된 사회임에 틀림없다”. 배고픈 자유와 배부른 구속 사이에서 고민하는 노인이 없도록 외롭고 가난한 노인, 특히 더 외롭고 더욱 가난한 여성 노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요즘 애들이 얌전해졌다. 선진국 청소년들 얘기다. 술 담배를 하거나 성경험이 있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청소년이 확 줄었다. 영국 언론에 따르면 지난해 24세 이하 영국 청소년 흡연율(17.8%)과 음주율(48%)은 예전의 3분의 2 수준으로 떨어졌다. 소년 범죄자 수(10∼17세 7만4800명)는 10년 전의 5분의 1이다. 스웨덴은 술 담배 마약을 입에 대지 않는 청소년(31%)이 12년 전보다 3배로 늘었다. 미국도 마약 하는 아이들이 줄어들고 성경험 있는 고교생 비율도 최근 10년 새 48%에서 40%로 감소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통계청의 ‘2018 청소년(9∼24세) 통계’를 보면 음주율은 2011년 20.6%에서 지난해 16.1%, 흡연율은 12.1%에서 6.4%로 뚝 떨어졌다. 18세 이하 소년 범죄자 수는 2016년 7만6000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던 2008년 13만5000명에 비하면 절반 수준이다. 같은 기간 전체 음주율과 범죄 발생 건수는 오히려 늘었고, 흡연율만 약간 줄었다. 왜 그럴까? 전문가들이 꼽는 주요 변수는 가정생활의 변화다. 부모가 자녀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고, 부모와의 대화가 편하다는 청소년도 많아졌다. 한국 청소년들도 가정생활에 만족한다고 답한 비율이 2011년 89.4%에서 지난해에는 95%로 늘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이용 시간의 증가도 빼놓을 수 없다. 그만큼 집 밖에서 나쁜 짓 할 시간이 줄어든 것이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술 담배 섹스의 쾌락을 접하는 나이가 늦춰졌을 뿐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른바 ‘×랄 총량의 법칙’이다. 영국의 경우 금욕적인 무슬림 인구의 유입도 주요 변수로 꼽힌다. 어쨌든 건실하게 자라주니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어른들 걱정은 끝이 없는 법. 성실한 자기 자식에겐 안심하면서도 집 밖의 ‘범생이’들에겐 패기 없는 애늙은이라고 혀를 찬다. 왜 금기에 도전할 생각을 못하나. 왜 사랑의 불구덩이에 뛰어들지 않고 미지근하게 ‘썸’만 타느냐. 왜 배낭 하나 메고 ‘탐험’의 길을 떠나지 않고 숙박 앱과 맛집 블로그에 기대어 ‘관광’만 하려 드나. 고교생이 선호하는 직장이 국가기관(27.2%)-대기업(18.7%)-공기업(15.3%)순이라고? 왜 일자리를 만들 생각은 하지 않고 남 밑에서 일할 생각만 하는가. 왜 바꾸려 하지 않고 적응하려고만 하나. 건실한 젊은이들은 답한다. 시대가 변했다고. “우리 세대는 지도의 모든 빈 공간이 채워지고, 야생지대에 포장도로가 깔리고, 마음껏 싸울 명예로운 전쟁이나 정착할 변경이 없는 이상한 시대에 태어났다. 내면의 야성을 펼칠 곳이 없다.”(미국 베스트셀러 ‘봉고차 월든’에서) 일탈도 제자리로 돌아올 자신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부모 세대가 이룬 풍요와 부모의 관리에 길들여진 세대는 계층 이동은커녕 이만큼 누리고 살기도 어려우리라는 미래에 일찍부터 주눅 든다. 경쟁은 치열하고 불안은 점증한다. 게다가 모든 실수가 기록되는 시대다. 미국의 심리학자 토리 히긴스에 따르면 사람을 움직이는 동기엔 좋은 것에 가까워지려는 ‘접근 동기’와 싫은 것에서 멀어지려는 ‘회피 동기’가 있다. 일을 칭찬받으려고 하는 건 접근 동기, 혼나지 않으려고 하는 건 회피 동기에서다. 접근 동기에 따라 재미있거나 즐거울 땐 기발한 아이디어가 쏟아진다. 하지만 최악을 모면하려는 회피 동기를 따를 땐 기존 틀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위험을 피하려는 동기로만 사는 젊은이들에게 젊은이다운 활력이나 창의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사고 칠 땐 밉더니, 얌전해지니 걱정이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세 친구는 ‘농부 어벤저스’로 불린다. 한국농수산대 10학번 동기들로 서로 품앗이 농사를 지으며 각자 1억 원 안팎의 연매출을 올리는 20대 청년들이다. 1년 전 채널A에 나왔던 이들을 기자는 ‘N포 세대와 달리 취업도 연애도 무엇도 포기하지 않은 모범 청춘’으로 칼럼에 소개한 적이 있다. 수확의 계절을 맞아 농부 어벤저스의 올해 작황이 궁금해 전화를 걸었다. 다들 변덕스러운 날씨와 최저임금 인상으로 휘청거리는 한 해였다고 했다. ▽박상봉(26·강원 정선·곤드레)=연간 순익이 6000만∼7000만 원이었지만 올해는 많이 줄었어요. 곤드레는 5월 초에 서둘러 내놔야 하는데 봄 가뭄에 냉해까지 겹쳐 늦어졌죠. ▽정우진(27·경북 상주·곶감)=감은 날씨를 덜 타는 작물이에요. 올해는 폭염 때문에 크기가 조금 작습니다. 곶감은 90%가 설에 유통되는데 올 설에 완판을 해서 순익이 1000만 원 정도 늘었어요. ▽최동녘(27·강원 양구·유기농 사과)=우박에 냉해에 폭염까지 겹쳐 순익이 4000만 원으로 줄 것 같아요. 사과는 껍질이 얇고 빨간색을 내기가 어려워 유독 까탈스러운 과일이죠. ‘마움(마음에 움트다)’이라는 브랜드를 만들고 국내외 병충해와 사과농사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배우고 있습니다. 올해 일본에만 다섯 차례 갔다 왔어요. ―최저임금이 많이 올랐습니다. ▽박=최저시급에 맞춰 일당을 7만 원에서 8만 원으로 올렸어요. 그래도 농촌에선 사람 구하기가 어려워요. 외국인을 쓰려고 해도 다들 식당일을 하려고 하지 힘든 농사일은 싫어해요. ▽정=최저임금 인상엔 찬성하지만 감 값이 오르진 않으니 힘드네요. ▽최=날씨가 변덕을 부리고, 인건비는 오르는데 농산물 가격은 그대로예요. 셋 중 하나라도 내 편이 되면 좋겠어요. ―이상기후 현상은 계속되고, 농사는 더욱 힘들어지겠죠. ▽정=6년 차 농부인데 어렵지 않은 해가 없어요. 다행인 건 대처능력이 조금씩 나아진다는 거예요. 스트레스에도 무디어지고요. 버티는 거죠. ▽최=힘들어지는 만큼 점점 매력을 느껴요. 농사는 내가 주도하는 일이고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어요. 작물의 영양 생식을 알아야 하고, 하우스 고치고 집도 지을 줄 알게 되죠. 종합적인 배움이랄까. 매년 성장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35세까지는 돈 벌 생각 안 해요. 성공하면 좋고, 실패해도 경험치로 쌓이겠죠. ―쇼트트랙의 심석희 선수가 했던 말이 생각나네요. ‘후회하지 마라. 좋았다면 추억이고 나빴다면 경험이다.’ ▽박=늘 불안해요. 올해 1억 원 벌었다고 내년에도 그 돈을 번다는 보장이 없죠. 그래도 느리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올해는 땅 1000평 더 샀고, 저온 창고도 지었어요. 조금씩 늘려가는 재미로 농사짓습니다. ▽정=올해 초 청년농업인단체(4-H연합회)의 상주시연합회장을 맡았어요. 멋지게 꾸려나가며 청년 농부들의 어려움을 함께 해결해보려고 해요. ―요즘 젊은이들은 명절에 취업이나 결혼 계획을 묻는 어른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죠. 세 분은 직업도 여자친구도 있는데 그래도 추석이 부담되나요. ▽박=농촌에 젊은 사람이 없어서 저는 명절 때 음식 장만하느라 바쁩니다. ▽정=‘결혼 언제 할 거냐’는 말은 부담돼요. 하고 싶지만 자본금 없이 농사를 시작하다 보니 아직…. 그래도 제가 농사지은 감으로 차례상을 차린답니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옥탑방 다음엔 휠체어 체험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2일 서울청년의회에서 “하루 휠체어를 타고 서울시의 대중교통을 경험하겠다”고 약속했다. 한 청년 의원이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자 “이런 것은 체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며 이렇게 답했다. 휠체어와 지하철을 섭외하고 기자들에게 동선을 공개하는 이벤트로 장애인이 겪는 불편함을 절감할 수 있을까.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 장애인 콜택시, “리프트가 고장 났다”며 장애인을 지나치는 저상버스, “당신 하나 때문에 연착됐다”는 눈총을 주는 지하철을 체험할 수 있을까. 장애인의 나들이 체험담은 이미 차고 넘친다. 어느 1급 장애인 부부는 휠체어를 타고 유럽 여행을 다녀와 책을 냈다(‘낯선 여행, 떠날 자유’). 한강 유람선도, 남산타워도, 경복궁도 엄두를 못 냈던 부부는 파리에서 바토무슈를 타고, 에펠탑을 구경하고, 베르사유 궁전을 관광했다. 장애인용 대중교통이 훌륭해서가 아니다. 일반 택시나 버스를 휠체어로 이용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던 덕분이다. 서울도 이런 걸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다. 시장이 체감하지 못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어둔 것뿐이다. ‘체험 정치’에 맛들인 박 시장은 휠체어 다음엔 다시 금천구 옥탑방의 한파 체험을 예고했다. 강북구 옥탑방에 놀란 가슴, 금천구 옥탑방 보고 놀랄 일이다. 강북구 삼양동 옥탑방의 폭염 체험은 뜨거운 논란 끝에 지독한 화상을 남기고 마무리됐다. 전임 시장들의 개발 정책을 비판해온 박 시장은 옥탑방 입주 전후로는 돌연 ‘여의도·용산 통개발’로 요약되는 싱가포르 선언과 강북 발전 로드맵을 내놓았다. 정부의 서툰 부동산 정책으로 불난 집값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서민을 위한다던 옥탑방 체험이었지만 서민들은 “우린 그냥 옥탑방에서 계속 살라는 거냐”며 가슴을 쳤다. 박 시장이 여권의 차기 대선 후보 순위 1위라는 조사 결과에 “지금이라도 빨리 사놔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시장 본인도 “박 시장의 싱가포르 발언에서 삼양동 발언까지의 40일이 문재인 정부의 400일 부동산 정책을 뒤집었다”(한겨레)며 독박 쓰는 피해를 입었다. 박 시장은 최근 방송에 나와 “시장 반응을 몰랐다는 점은 쿨하게 인정하겠다”고 했다. 통개발 선언→옥탑방 체험→또 개발 발표라는 엉뚱한 조합의 시나리오도 황당하지만 대형 개발 계획을 공표하면서 시장 반응도 예상하지 못했다니, 그건 쿨하게 인정할 게 아니라 부끄럽게 사과하고 책임져야 할 일이다. 한 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정책 발표 탓에 정작 중요한 노후지역과 강북 개발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쑥 들어가 버렸다. 13일로 예정됐던 시정운영 4개년 계획 발표도 연기됐다. 집값 잡는다고 수요 억제에서 공급 확대로 선회한 정부와 여당이 서울의 그린벨트 해제를 압박해도 큰소리를 못 내는 처지다. 서울시장을 두 번 지낸 고건 전 총리는 행정을 하려면 최소한 세 수를 내다봐야 한다고 했다. 정책의 부작용이 뭐가 있을까, 그게 첫 수다. 부작용에 대한 해소책은 무엇일까, 그것이 두 번째 수. 마지막으로 해소책이 효과가 있을까, 바로 세 번째 수다. 박 시장은 ‘체험 위시리스트’를 버리고 옥탑방 정치의 실패를 복기한 후 인스타그램용 ‘그림’이 안 나오더라도 최소한 세 수를 내다보는 행정에 집중해주기 바란다. 시장은 체험하는 자리가 아니라 책임지는 자리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안희정 무죄 판결 역풍이 거세다.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못 살겠다 박살내자.’ 이런 구호를 내세운 대규모 집회가 주말에 열렸다. 21일 국회 여성가족위 전체회의는 안희정에서 시작해 안희정으로 끝났다. 리얼미터는 20일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최저치를 경신했다는 결과를 발표하며 ‘안희정 역풍’을 원인의 하나로 꼽았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수행비서 김지은 성폭행 사건의 실체는 셋 중 하나다. 14일 나온 1심 판결대로 불륜이거나, 아니면 김 씨 주장대로 성폭력일 수 있다. 김봉수 성신여대 법학과 교수는 ‘김지은이 진실해도 안희정은 무죄일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김 씨는 위력이라고 느꼈지만 안 전 지사는 위력을 사용하지도, 그에 대한 고의가 있지도 않았을 가능성이다. 김 교수는 “사건의 진실은 당사자도 정확하게 모를 수 있다”며 “각자 편견에 따라 당연히 성폭력이다, 불륜이다,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했다. 안 전 지사는 처음부터 유죄였다. 수행비서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인정했으니 도덕적으론 유죄 맞다. 하지만 판결이 확정되기도 전에 성범죄자로 단정하는 건 다른 문제다. 모든 형사 사건에는 ‘무죄 추정의 원칙’(헌법 27조 4항)이 적용되는데 유독 성폭력 사건은 여론재판에서 ‘유죄 추정의 원칙’을 따른다. “당했다”는 주장이 나오는 순간 끝난다. 재판을 받아볼 필요도 없다. ‘피해자’가 거짓말을 할 가능성은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에 쉽게 가려진다. 피해자를 우선해야 하고 성범죄자는 엄벌해야 맞지만 시작부터 가해자를 예단하고 몰아가면 뜻하지 않은 비극이 발생할 수 있다. 32년간 교편을 잡았던 전북의 중학교 교사는 지난해 8월 ‘여학생 성추행 교사’라는 누명을 쓰고 자살했다. 박진성 시인은 2016년 10월 익명의 허위 트위터 게시물 때문에 ‘미성년자 상습 성추행범’이 됐다. 그는 지난달 이를 보도한 언론사를 상대로 낸 정정보도 및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이겼으나 “사회적 생명은 이미 끊겼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엔 비슷한 피해자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성무고죄 처벌 강화를 요구하는 청원이 이어지고 있다. 유죄 추정의 원칙은 마녀 사냥의 다른 이름이다. 덴마크 영화 ‘더 헌트’는 2012년 개봉작이지만 미투 운동의 부작용을 경고하는 메시지로 새삼 주목받고 있다. 주인공 루카스는 유치원의 유일한 남자 교사다. 어느 날 여자아이가 루카스에게 기습 뽀뽀를 하고 루카스는 “뽀뽀는 엄마 아빠하고만 하는 거야”라고 주의를 준다. 무안함에 화난 아이는 유치원 원장에게 말한다. “루카스 선생님 싫어요. 고추도 달렸고요.” 원장은 “아이가 거짓말을 할 리 없다”며 루카스를 아동 성추행범으로 단정하고, 다른 아이들도 어른들의 유도 질문에 “미투” 한다. 루카스는 경찰에서 혐의를 벗지만 낙인은 지워지지 않고 ‘사냥감’이 된다. 한국의 루카스, 제2의 시인 박진성이 계속 나온다면 용기 있는 여성들이 어렵게 불을 지핀 미투 운동이 지속될 수 있을까. 미투가 성폭력이 만연한 일상을 바꾸려면 성폭력 혐의자에게도 무죄 추정의 원칙을 인정해야 한다. 평소 몸가짐이 단정한 남자든 손버릇 나쁘기로 소문난 난봉꾼이든 마찬가지다. 잠시 숨을 고르고 ‘성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단체 ‘휴먼연대’의 문제 제기를 들어보자. “언론을 통해 일거에 상대방을 매장시키는 미투 방식은 유효한가? 관련 언론의 책임은? 강력한 변호인단을 구성한 안 전 지사와 달리 다수의 가난한 이들은 성범죄자라는 혐의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우리는 지금 구명보트를 타고 바다에 표류 중이다. 보트엔 50명이 있는데 10명을 더 태울 수 있다. 보트 밖에서 100명이 허우적거리며 구조를 애원한다. 보트에 있는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세 가지 선택이 가능하다. ①가급적 모두 구조한다. ②10명만 구조한다. ③모두 외면한다. 대개는 ①과 ②를 택할 것이다. 하지만 1985년 이 ‘구명보트 윤리’를 제시한 미국의 생태학자 개릿 하딘은 ③이 정답이라고 했다. 60명 정원인 보트에 150명이 타면 다 죽는다. 10명을 골라 태우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만약을 대비해 여유분이 필요한 데다, 100명 중 10명을 어떻게 추리나. 훌륭한 사람? 절박한 사람? 아니면 선착순? 하딘은 구명보트 비유를 통해 “완벽한 정의는 완벽한 파국을 낳는다”며 인구 과잉에 따른 환경 파괴를 막으려면 후진국을 도와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가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구명보트 윤리를 이용해 제주 예멘 난민 사태로 달아오른 난민 논쟁을 풀어보자. 먼저 위기에 처한 난민을 최대한 수용하는 게 인간의 도리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한국은 1992년 난민협약에 가입했고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2012년 난민법을 제정한 난민 보호 선진국이다. 하지만 올해 6월까지 난민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849명, 난민 인정률이 4%다. 미국 독일 영국 캐나다 등은 25∼45%다. 한국에만 가짜 난민들이 몰려오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인정률이 최소한 두 자릿수는 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대로 난민 심사 절차를 강화하거나 난민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가뜩이나 취직이 안 되고 ‘송파 세 모녀’들도 많은데 난민들에게 일자리 뺏기고 복지 혜택 주고 범죄와 테러의 위협에까지 시달리다간 우리까지 죽는다는 논리다. 특히 20대와 여성들의 난민 반대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데 그만큼 일자리와 안전 문제에 대한 공포감이 크기 때문이다. 사람이 먼저인가, 국민이 먼저인가. 대부분의 딜레마가 그러하듯 난민 딜레마도 양극단 사이에 답이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용(golden mean)’이다. 예를 들어 ‘만용’과 ‘비겁’의 양극단 사이에 ‘용기’가 자리한다. 그런데 중용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건 용기, 그냥 지나치는 건 비겁이다. 하지만 수영은 못하고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이 물에 뛰어드는 건 만용이다. 그렇다고 외면하는 건 비겁이며 구조를 요청하러 달려가는 것이 용기다. ‘한국호’를 타고 항해하는 우리를 향해 가난과 전쟁과 정치적 박해를 피해 도망 왔다며 손을 흔드는 이방인들이 있다.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 그들을 외면하는 건 비겁한 거다. 이제 와서 난민법을 폐지하고 난민협약에서 탈퇴하며 뒷걸음질을 칠 수는 없다. 난민협약에 가입한 140여 개국 가운데 탈퇴한 나라는 없다. 그렇다고 능력 밖으로 수용하는 건 만용이다. 일손이 부족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둔 일본도 난민 인정률은 0.2%밖에 안 된다. 그 대신 지원금을 많이 낸다(2017년 유엔난민기구 국가별 기부금 순위 4위). 한국갤럽이 최근 성인 남녀 1002명을 대상으로 제주도 예멘 난민 신청자에 대해 물었는데 ‘가능한 한 수용’(11%)하거나 ‘최소한으로 수용’(62%)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난민법 폐지 국민청원에 대한 정부의 답변 시한이 8월 13일이다. ‘비겁’도 ‘만용’도 아닌 ‘용기’ 있는 답을 내놓길 기대한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올 상반기 채널A 예능으로 뜬 일반인 남자가 둘 있다. 남녀 짝짓기 프로그램인 ‘하트시그널 시즌2’의 셰프 김현우(33), 육아예능 ‘아빠본색’에 출연한 도성수(46)다. ‘나쁜 남자’ 김현우가 긴가민가하는 헷갈림으로 애를 태우는 연애의 신이라면, 도성수는 안정감을 주는 외조의 왕이다. 뮤지컬 배우인 아내 홍지민에게 도시락을 싸주고, 젖먹이 딸의 애착인형을 바느질하고, 장인의 제사상을 차린다. ‘결혼 안 했으면 같이 살고 싶은 남자’를 꼽는 설문에 유명인도 아닌 그의 이름이 오르는 이유다. 공연과 앨범 준비로 바쁜 아내를 대신해 세 살, 돌쟁이 두 딸(도로시, 도로라)과 씨름 중인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독박 육아’로 입술이 부르텄다죠. “독박 육아는 아니에요. 로시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가게(짬뽕집 경영)에 나가 일하다 오후 5시 반에 로시를 데려와 저녁 먹이고 씻기고 놀아주다 재워요. 어머니가 많이 도와주세요. 매일 아침 식사와 로시 등원 준비는 아내가 합니다. 제가 여유롭게 출근 준비를 하면서 오롯이 저만을 위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죠. 아내는 어쩌다 하루 쉬는 날에도 최선을 다해 아이들과 놀아주고 저에게 집중해줘요.” ―집중을 해준다고요? “음, 머리 염색을 해주거나 손잡고 입 맞추고 데이트하며 둘만의 시간을 갖는 그런 것…. 저희도 이혼 위기를 겪었고, 다행히 극복한 후엔 서로 맞춰주고 노력하며 삽니다.” ―최근 방송에서 아내의 앨범 녹음 현장에 나타나 스태프에게 일일이 간식을 만들어 돌리는 장면은 감동적이었어요. ‘우리 지민이 하고 싶은 거 다해’란 응원 문구를 보고 지민 씨가 울컥하며 “힘들 때마다 잡아줘서 고맙다”고 했죠. “아내가 아이 낳고 키우느라 9년을 기다려온 앨범이에요. 얼마나 하고 싶어 했는지 아니까 응원해주고 싶었죠. 아내도 제 기를 살려주려고 애씁니다. 제가 한 달에 한두 번 야구를 하는데, 함께 나눠 먹으라고 도시락을 싸줘요. 새벽에 술 마시다 ‘우리 집으로 2차 가자’ 하며 호기롭게 친구들을 데려와도 웃으며 술상을 차려내죠.”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군요. 지민 씨가 보채는 아이를 보며 “바쁜 엄마여서 미안해” “일 다 접고 (집에) 들어앉을까” 하던데, 힘들어하는 아내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정말 존경스러워요. 아내는 무대에 섰을 때 가장 멋진 사람입니다. 힘들어하다가도 관객들의 박수를 받으면 엄청 행복해해요. 훗날 딸들도 그런 엄마를 더 좋아할 거라고 믿어요.” ―집안의 대소사를 양가 어머니들과 함께 결정하고, 장인의 제사상을 차리는 장면을 보며 양성 평등을 실천하는 모범 가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표현은 부담스럽습니다. 처가도 가족인데 처가 본가 따지지 않아요. 장인어른 제사는, 아내가 제 아버지 제사를 모시는 것처럼 당연한 거죠.” ―‘82년생 김지영’이란 소설에 많은 사람이 공감해요. 불평등한 결혼 생활을 거부하는 젊은 여성도 많죠. 로시와 로라가 커서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면요? “엄마 아빠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자라면 자연스럽게 결혼하지 않을까요? 저는 유복자로 태어나 아버지나 남편 역할을 못 보고 자랐어요. 그래서 결혼할 생각이 없었어요. 좋은 남편이나 아버지가 될 자신이 없었죠. 그런 제가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아빠도 된 겁니다. 그래서 아내가 고마워요. 아내와 딸들 곁에 오래 있어주고 싶습니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골게터 손흥민도 아니다. 골키퍼 조현우도 아니다.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탈락의 위기에 놓인 한국 축구대표팀에서 가장 ‘뜨거운’ 선수는 중앙 수비수인 장현수다. 한국은 24일 멕시코와의 2차전에서 1-2로 졌는데 2점 모두 장현수의 태클로 실점했다. 장현수는 전반 24분 페널티 지역에서 멕시코 선수의 크로스를 막으려고 태클하다 공이 오른팔에 맞아 핸드볼 반칙으로 페널티킥을 내줬다. 후반 21분 멕시코의 역습 상황에서는 상대 선수가 슈팅할 때 성급한 태클로 추가골을 허용했다. 온라인은 장현수를 비난하는 글로 들끓고 있다. 보다 못한 동료 선수는 “현수가 많이 노력했는데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돼 안타깝다”고 편들다가 “그럼 선수를 보이는 걸로 평가하지 내면을 보느냐”는 뭇매를 맞고 있다. 2패를 기록한 한국 축구대표팀의 수비수 기용을 둘러싼 논란은 실적 부진에 주전 선수들(장하성 대통령정책실장과 김동연 경제부총리) 간 불화설까지 도는 한국 경제팀의 상황과 닮은꼴이다. “경제 브레인들의 기초실력도 축구대표팀 수비수들처럼 부실하다”거나 “한국 축구는 장현수가, 한국 경제는 장하성이 말아먹고 있다”는 성토도 나온다. 표현은 거칠고 과장됐지만 스웨덴과의 1차전에서 장현수가 일으킨 ‘나비효과’는 선한 의도가 뜻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 점에서 소득주도성장론의 ‘나비효과’와 닮았다. 장현수는 요령부득의 공중볼을 찼고→이 부정확한 패스를 박주호가 무리하게 받으려다 허벅지 근육을 다쳤으며→대타로 들어간 김민우가 태클로 페널티킥 결승골을 내주었다. 김민우의 이 태클도 장현수의 패스 실수가 발단이었다. 경제정책의 나비효과는 이렇다. 소득주도성장을 목표로 최저임금을 무리하게 인상하자→인건비 부담이 늘어난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직원을 해고해→실업률이 18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으며→소득 양극화는 심해졌다. 심판의 석연찮은 판정과 “봄비가 많이 와서”라는 해석이 나왔지만 오심은 경기의 일부이고, 날씨도 경제환경의 일부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장현수 선수와 경제팀 교체를 요구하는 청원이 나란히 올라와 있다. 신태용 감독은 “수비 조직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며 선수 교체 없이 남은 경기를 치를 것임을 시사했다. 경제정책의 실책을 인정하지 않는 정부도 청와대 조직개편과 정부부처 개각을 앞두고 “경제는 긴 호흡으로 봐야 한다”며 경제팀 교체 얘기는 하지 않는다. 1, 2차전의 태클 참사로 한국 축구대표팀은 16강에 진출하기 위해 ‘마지막 독일전에서 2점 차 이상 이기고 멕시코가 스웨덴을 이기거나 아니면…’ 등등 난수표 같은 시나리오를 기대하는 처지가 됐다. 설사 16강 진출에 실패하더라도 축구는 ‘기분’의 문제다. 선수와 감독을 원망하고 4년을 기다리면 또 다른 월드컵이 온다. 하지만 경제는 ‘생존’이 달린 문제다. 가계소득 증가→소비 증가→내수 활성화라는 소득주도성장론의 시나리오가 현실화하지 않으면 선수와 감독을 비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경제대표팀 선수들이 시야를 넓혀 상대 수비수를 확인하고 동료 선수들과 눈빛을 교환해가며 이기는 경기를 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하는 이유다. 발밑의 공만 보고 엉뚱한 방향으로 드리블하거나 어설픈 태클로 실점을 부른다면 교체를 검토해야 한다. 경제는 실패해도 4년 후를 도모할 수 있는 월드컵이 아니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둘 중 한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배우 김부선 씨(57)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경기도지사 후보(54)와의 불륜 의혹에 대해 10일 KBS 메인뉴스에서 “제가 살아있는 증인”이라며 거듭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이재명 후보 측은 블로그에 “저들의 주장은 대부분 허구이니 100% 안심하셔도 된다”며 거듭 부인했다. 이 스캔들을 키운 바른미래당은 이 후보를 허위사실 공표죄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상태다. 이 후보의 압승을 기대했던 지지자들은 ‘한물간’ 여배우와의 10년 전 밀회 의혹이 북-미 정상회담 이슈에 묻히기는커녕 갈수록 커지는 것이 불만이다. 우선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 김 씨는 “이 후보랑 찍은 사진이 있다”고 했지만 김 씨의 딸은 11일 “이 후보님과 어머니의 사진을 많은 고민 끝에 다 폐기해버렸다”며 어머니의 한 가닥 희망을 날려버렸다. 일 잘하는 도지사 뽑는데 개인사는 왜 들추나. 적폐세력에 최대 지자체를 내주란 말인가.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쓸데없는 것 갖고 말들이 많은데 도지사는 일하는 능력을 보면 된다”고 말해 불을 끄려다 기름을 부었다. 이번 스캔들의 진위를 가리는 건 쓸데없는 일이 아니다. 불륜 의혹이라는 사적인 문제로 출발했지만 이젠 덮어두고 가기 힘든 공적 이슈가 돼버렸다. 김 씨는 KBS 인터뷰에서 “(교제 당시 이 후보가) 서울중앙지검의 부장검사들이 친구인데, 대마초 전과 많은 너 하나 엮어서 집어넣는 건 일도 아니다”라고 협박했다고 주장했다. MBC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인 주진우 씨는 시사IN 기자 시절인 2016년 두 사람의 스캔들이 불거지자 ‘이재명 변호사와 남녀 관계가 아니다’라는 취지의 글을 대신 써서 김 씨에게 공식 해명하라고 문자로 보냈다고 한다. 이 말을 따른 김 씨는 허언증 환자로 전락했다. 유력 정치인이 권력을 동원해 약한 상대를 입막음한 뒤 바보로 만들었다면 그게 작은 일인가. 추 대표의 ‘쓸데없는 것’이라는 표현은 최고 정치권력을 쥔 여성이 난방비도 버거운 여성을 겨냥해 내뱉은 말이어서 더욱 충격적이다. 사소한 일로 큰일 해낼 스타 정치인의 발목을 잡지 말라는 건가. 김 씨도 2010년과 2016년 불륜 의혹을 부인했던 이유에 대해 “같은 진보를 지지하는 분들이 ‘아무리 나빠도 김부선이 좀 참아라. 박근혜 이명박 전 대통령을 물리칠 사람이 이재명밖에 더 있느냐’고 해 그때마다 주저앉았다”고 했다. 해일 밀려오는데 조개 줍지 말라는 논리다. ‘전과자 에로배우’의 호소를 들어주는 일은 인구 1300만의 경기도정을 적임자에게 맡기는 일만큼 중요하다. 그도 딸에겐 ‘세상의 조롱거리로 파괴되면 안 되는 고귀한 엄마’다. 더구나 ‘사람이 먼저다’라는 촛불정부 아닌가. 하지만 김 씨에게 유리한 증언을 했다가 “3류 소설 쓴다”며 인신공격을 받고 있는 공지영 작가는 트위터에서 “내가 고발한 것은 약자를 희생시키지 말자는 것”인데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 테러들에 신고하는 사람 하나 없이… 버스 안에서 윤간당하는 기분”이라고 했다. 진보 역사학자 전우용 씨는 페이스북에 “상식과 양심을 가진 민주 시민들을 납득시키지 못하는 한 그(이 후보)는 다음 여정을 시작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선거는 선거고 진실은 진실이다. 김 씨는 “이게 거짓이면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이 후보는 자기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데 무엇을 걸 텐가.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은 경이롭다. 한국갤럽의 5월 말 여론조사에서 ‘대통령이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고 답한 비율이 76%다. 노태우 대통령 이래 집권 2년 차에 접어든 역대 대통령 가운데 누구도 70%를 넘은 이가 없다. 나라 밖을 봐도 지지율이 80%라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제외하면 주요국 정상들의 지지율은 대부분 40% 언저리다. 세계 정상들의 낮은 지지율은 2008년 금융위기 극복 이후 호황인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대개 경기가 좋을 때 대통령의 지지율은 높게 나온다. 하지만 2000년 닷컴 붐 이후 최대 호경기를 맞은 미국 대통령의 지지율은 40%로 역대 대통령들의 같은 재임 시기 평균인 57%를 한참 밑돈다. 미국보다 경기가 좋은 독일 총리 지지율도 50%대로 한창 때보다 20% 떨어졌다. 경제 개혁 중인 프랑스 대통령과 일자리가 남아도는 일본 총리도 낮은 지지율이 고민이다. 외신은 실용적인 경제 성과보다 기성 체제를 부정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포퓰리즘의 부상이 주요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그렇다고 경제와 대통령 지지율이 따로 노는 건 아니다. 경기가 좋아도 지지율이 낮을 순 있지만, 경기가 나쁜데 지지율이 높은 경우는 드물다. 예외적으로 푸틴 대통령이 저유가로 러시아 경제가 엉망이어도 지지율은 세계 1위인데 거긴 언로(言路)가 막힌 나라다. 장기적으로 대통령의 지지율은 경기가 결정한다. 1993년 김영삼 정부부터 2013년 이명박 정부까지 20년간 경제 지표와 대통령의 지지율을 시계열 분석한 결과 경제상황이 대통령 지지율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경제상황에 대한 평가(수출증감률)와 미래 경기에 대한 기대(경기종합선행지수)에 따라 대통령의 지지율이 달라졌다(김덕파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등의 논문 ‘한국에서의 대통령 지지율과 거시경제: 김영삼에서 이명박까지’). 박근혜 정부 때도 최순실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대통령의 지지율과 소비자심리지수는 나란히 움직였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추락했지만 레이건과 클린턴 대통령은 이란-콘트라와 르윈스키 스캔들이 터졌을 때 타격을 입지 않거나 오히려 지지율이 올라갔다. 닉슨 시절엔 경기가 나빴고, 레이건과 클린턴 정부 땐 좋았다(최준영 인하대 정외과 교수 논문 ‘스캔들, 경제적 성과, 그리고 대통령 지지율: 미국의 경우’). 5월 말 여론조사에서 문 대통령이 잘하고 있다고 평가한 사람들은 대북정책(19%), 북한과의 대화 재개(15%), 남북 정상회담(10%)을 주요 이유로 제시했다. 반대로 잘못하고 있다고 답한 이들은 경제·민생문제 해결 부족(24%)을 1순위로 꼽았다. 대통령이 취임 후 1년간 가장 잘못한 분야도 경제였다(이상 한국갤럽). 통계청은 지난달 29일 10대 경제지표 가운데 수출액과 소비자기대지수를 포함한 9개 지표가 꺾였다고 발표했다. 문 대통령에겐 정치적 경고음이다. 경제지표를 외면하는 인기 있는 대통령은 국가적으로도 위험하다. 모건스탠리자산운용의 루치르 샤르마 글로벌 전략 대표는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이렇게 경고했다. “민주주의는 정치인이 경제 결과에 책임을 지도록 유권자가 감시할 때 작동한다. 호황기의 지도자가 경제를 무시하고 정치적 고려에 따라 정책을 밀어붙인다면 불황기에 접어들 경우 어떻게 되겠는가.” 대통령의 경이로운 지지율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북풍(北風) 덕일까.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의 ‘3층 서기실의 암호’가 출간 3일 만에 초판 1만 부가 매진되며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최고 존엄’에 대해 ‘갑자기 튀어나온 이상한 백두혈통’이라고 쓴 대목이 거슬렸는지 북한은 출간 다음 날 저자를 “천하의 인간쓰레기”라고 욕했는데 이것이 홍보 효과를 냈다. 탈북 외교관 중 최고위급 인사인 저자는 북한의 외교 비화와 최고 엘리트의 생활 실상을 542쪽 분량으로 증언한다. 외교를 못해도 만회할 길이 있는 정상 국가와 달리 외교를 못했다간 나라가 망하는 북한은 벼랑 끝 외교, 고슴도치 외교 등 다양한 전략을 구사해 왔다. 저자는 이를 ‘저팔계식 실용 외교’라고 요약했다. 중국 소설 ‘서유기’의 저팔계처럼 “솔직한 척 어리석은 척 억울한 척하면서 어딜 가나 얻어먹을 것은 다 챙기는 외교”다. 북한 외교관 출신인 현성일 박사도 김정일이 이렇게 요구했다고 증언했다. “저팔계처럼 잇속만 챙길 수 있다면 적에게도 추파를 던질 줄 알아야 한다.” 저자가 저팔계 외교의 성공 사례로 소개한 것이 ‘영국으로 미국 견제하기’다. 2003년 미국이 이란 이라크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이라크를 첫 상대로 지목하자 김정일은 “다음은 조선 차례”라며 떨다가 영국에 ‘추파’를 던지라고 지시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칠 것 같다. 영국의 지원이 없었으면 안 되는 일이다. 빨리 런던에 대사관을 개설하고 공화국기를 띄워라.” 가장 가까운 동맹국 영국이 반대하면 미국이 북한을 치지 않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그해 8월 북한의 최고 핵 전문가인 리용호가 주영국 대사로 부임해 “‘큰일’(2006년 1차 핵실험) 전까지 2, 3년간 시간을 벌라”는 임무를 수행했고, 그 결과 “조선이 핵실험을 해도 미국이 때리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얻게 됐다. 저자는 “북한 외교의 승리”라고 자평했다. 태 전 공사는 북한 외교가 강한 비결로 ‘숙청으로 단련되는 외교력’을 꼽았다. 북한 외교관들은 친선 축구를 할 때도 목숨 걸고 찬다. 유럽 대사관과의 축구 시합에서 전반전에 패하자 북한 외무성 팀은 국가대표팀 선수 3명을 몰래 후반전에 투입했다. 최고 존엄에 결과를 보고해야 하니 져서는 안 되는 경기였다. 북한 외교관의 최대 고민은 자녀 교육 문제다. 해외 발령을 받아도 아이를 한 명만 데려갈 수 있다. 쌍둥이도 예외가 아니다. 태 전 공사는 운이 좋았다. 김정은은 측근들이 70, 80대 고령인 점이 못마땅해 학생들을 많이 유학 보내 고급 인재로 키우라고 했다. 그런데 북한엔 인터넷이 없어 해외 대학에 원서를 낼 수 없다. 건강검진서도 북한 병원의 문서는 인정을 못 받으니 중국 베이징까지 가야 한다. 하지만 해외여행의 자유가 없다! 결국 “둘이든 셋이든 상관 말고 외교관 자녀를 유학 보내라”고 지시했고, 태 전 공사는 평양에 혼자 떨어져 있던 큰아들을 런던으로 데려와 망명할 수 있었다. 이 드라마틱한 자서전은 끝나지 않았다. 그의 출간 소식에 여당 국회의원들은 “대북 적대 행위”라고 비난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남북 화해 방해하는 태영호를 북송하라”는 청원이 쇄도한다. “북한은 봉건사회”라고 비판하던 그가 모든 문제를 여전히 ‘나라님이 해결해 달라’고 매달리는 21세기 민주사회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이 모든 소동 덕분에 인세 수입은 늘어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기증을 느끼지는 않을까.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낮말은 새가 듣는다는데, 그날 ‘도보다리 밀담’을 들은 이는 정말 새 말고는 없다. 언론은 대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입 모양’ 판독에 바쁘다. 대화시간 30분 중 그의 얼굴이 정면으로 카메라에 잡힌 건 4분. 채널A의 의뢰를 받은 독순술(讀脣術) 전문가들은 입 모양에서 “핵 같은 것을 이참에” “트럼프께서” “관광사업별로 뭔가를 짓고 싶어서” “아버지가 저 여자와 결혼하라고”를 읽어냈다. 이를 뼈대로 삼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관한 책 ‘화염과 분노’, 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의 신동아 4월호 기고문으로 살을 붙여 4·27 남북 정상 간의 밀담을 상상했다. ▽김 위원장=트럼프께서 나를 ‘개방적이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로켓맨’이라 할 때는 언제고…. 북-미 정상회담도 하자 없게 하고 싶다. 데니스 로드먼이 트럼프가 쓴 ‘거래의 기술’을 줘서 읽어봤는데 잘 모르겠다. ▽문재인 대통령=독특한 인물이다. 맥도널드 햄버거를 즐겨 먹는 이유가 독살당할 걱정이 없어서란다. 그래도 그 파격적인 스타일 덕에 한반도 상황이 극적으로 바뀐 것이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그는 ‘2분남(two-minute man)’이다. 미 정보기관이 올리는 대통령 보고서는 60쪽 분량인데 그에겐 5쪽을 넘기지 않는다. 숫자나 글자보다 큰 그림을 활용하라. 지난해 4월 시리아 공습 때도 꿈쩍 않다가 큰딸 이방카가 화학무기 공격을 받은 아이들의 처참한 사진을 보여주자 놀라며 토마호크 미사일 발사를 명령했다고 한다. ▽김=길고 복잡하게 얘기하면 안 되갔구나. ▽문=북-미 정상회담에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 아니면 진짜 회담장을 박차고 나올 사람이다. ▽김=미국이 종전과 불가침을 약속하면 왜 우리가 핵을 가지고 어렵게 살겠나. 5월에 한미 전문가와 언론인을 초청해 북부 실험장 폐쇄과정을 공개하겠다. ▽문=위원장은 최근 노동당 중앙위에서 경제-핵 병진노선의 승리를 선언하며 경제 건설에 집중하겠다고 공표했다.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을 담은 책자와 USB메모리를 준비했으니 가져가시라. ▽김=아버지의 핵전략은 파키스탄 모델이었지만 난 베트남을 보고 있다. 베트남은 1980년대 ‘도이머이’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했고, 1995년 미국과 국교를 정상화했으며, 2007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다. 동남아에서 미국과 가장 가까운 나라다. 우리 조선에 중국은…. 92년 한중수교 때 중국에 배신감을 느꼈다. 90년대 말 100만 명이 굶어죽을 때 중국이 도와준 게 있나. 게다가 장성택이를 내세워 친중 정권을 도모하고. ▽문=중국에선 리설주 여사가 송혜교만큼 인기가 많다고 한다. ▽김=아버지가 별세하기 3년 전인 2009년 나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나이 어린데 가정까지 없으면 내세우기 뭣하다고 빨리 찾아내라 하더니, 저 여자와 결혼하라 하셨다. 세습을 생각하셨다면 스위스로 유학 보내지 않고 당이나 군대에서 후계자 훈련시키고 결혼도 일찌감치 시켰을 텐데, 할아버지와 찍은 사진 한 장만 있었다면 피 볼 일도 없었을 텐데…. ▽문=난 친화력이 있는 아내 덕을 많이 본다. 위원장도 그럴 것 같다. ▽김=서양에선 영국의 케이트 미들턴 세손빈 흉내 내는 거냐 하던데, 명품 핸드백과 옷을 너무 많이 산다. (정상국가처럼) 잘 연출됐다니 그만 사라 하면 안 되갔구나.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노무현 정부의 주요 브레인은 삼성이었다. 노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삼성경제연구소에 의뢰해 400쪽짜리 보고서 ‘국정과제와 국가운영에 관한 어젠다’를 받았다. 참여정부의 성장전략인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부터 동북아 중심 국가론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까지 주요 국정과제가 삼성의 어젠다였다. 노 대통령의 국민경제비서관을 지낸 정태인 씨는 “386들이 정의감은 있지만 아는 게 없어서”라고 했다. 진보 정권이 하필 재벌의 머리를 빌리는 현실이 딱했던 걸까.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엔 참여연대가 90개 정책과제를 담은 보고서를 정부에 전달했다. 최저임금법 개정, 종합부동산세법 개정,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설치 같은 굵직한 의제들이 한 달여 후 정부가 발표한 100대 국정과제에 반영됐다. 여기서 그쳤으면 좋았을 것이다. 참여연대는 정부 요직마저 접수했다. ‘노무현 정부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인지 노 정부 당시 시민단체의 국정 참여를 놓고 ‘홍위병 논쟁’ 재연을 염려하던 조심성이 사라졌다. 청와대의 정책실장, 민정수석, 사회혁신비서관, 재정개혁특위 위원장이 참여연대 출신이다. 정부엔 공정거래위원장, 여성가족부 장관, 국민권익위원장이 있다. 취임 보름 만에 그만둔 금융감독원장과 취임도 못 하고 낙마했던 법무부 장관과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도 참여연대 인사다. 정책도 사람도 참여연대의 것이니 ‘민주당 정부가 아니라 참여연대 정부’라는 말이 나온다. 참여연대의 ‘집권’으로 정부는 유능한 쓴소리꾼을 잃었다. 보수 정권의 댓글 조작 사건 때는 수사를 방해했다며 경찰 15명을 고발했던 참여연대는 여당 당원의 댓글 조작 사건인 드루킹 게이트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다. 인사 검증에 줄줄이 실패한 조국 민정수석에 대해 정의당마저 책임론을 제기하지만 참여연대는 논평 한 줄 내지 않았다. 김기식 전 금감원장의 외유성 출장 의혹이 불거지자 “매우 실망스럽다”는 입장을 냈는데 공식 성명이 아니라 ‘회원께 드리는 글’이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정치학)는 “사회 각 분야가 권력으로부터 독립해 자율성을 가져야 사회가 발전한다. 군인과 재벌이 권력을 가지면 안 되듯 시민단체도 권력 감시라는 고유의 기능을 잃고 권력화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시민단체 대표 브랜드인 참여연대의 신뢰도 추락도 사회 전체의 손실이다. 2013년부터 사회 각 분야의 신뢰도를 조사해온 한국행정연구원에 따르면 시민단체를 “믿지 않는다”고 답한 비율이 2013년 49.5%에서 2017년엔 53.7%로 증가했다. 시민단체가 “청렴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52.8%에서 57.5%로 많아졌다. 누리꾼들은 요즘 “SKY보다 좋은 대학이 참여연대” “스펙 쌓으러 참여연대 가즈아”라며 비아냥댄다. 참여연대는 출세욕에 몸이 달아오른 이들이 기웃거릴 정도로 시시한 곳이 아니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1999년), 부패방지법 제정(2001년), 증권집단소송법 제정(2003년) 등 1994년 창립된 참여연대가 쌓아올린 성과는 일일이 열거하기 숨찰 정도다. 3선을 노리는 박원순 서울시장은 2003년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시절 이런 말을 했다. “시민단체가 정부와 연대하면 정치적 견해가 다른 이들에겐 영향력을 끼칠 수 없고 시민운동의 공신력도 크게 떨어진다. 노무현 정부가 실패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정권은 유한하지만 시민운동은 영원하다. 정권과 운명을 같이할 수 없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자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바로 뉴욕으로 날아갔다. 아사히신문과 껄끄러웠던 아베 총리는 두 사람 모두 신문에 얻어맞았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농담을 건넸다. 둘은 “하지만 내가 이겼다” “나도 이겼다”고 맞장구치며 금방 친해졌다. 그로부터 1년 4개월이 지난 요즘 아베 총리는 아사히의 사학 스캔들 특종 보도 후 촛불 시위대의 퇴진 압력을 받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도 대선 때 러시아와 내통했다는 언론 보도로 특검 수사를 받는 처지다. 아마존을 공격하는 트럼프를 보며 사람들은 워싱턴포스트(WP)에 뺨 맞고 아마존에 눈 흘기기라고 한다. 아마존의 최고경영자 제프 베이조스가 WP의 소유자다. 트럼프와 베이조스는 이민자 가정(독일, 쿠바) 출신으로 아이비리그(펜실베이니아대, 프린스턴대)를 나와 자수성가한 부자라는 공통점을 빼면 상극이다. 트럼프는 벽돌과 시멘트로 돈을 벌고 쇠락해가는 제조업계에서 표밭을 일군 정치인이다. 인터넷 쇼핑은 할 줄 모른다. 베이조스는 미국 최대 인터넷 상거래업체로 돈을 벌어 우주 개발에 쏟아붓는 실리콘밸리 엘리트다. 트럼프의 아마존 때리기는 실리콘밸리의 기술 혁신으로 일자리를 잃은 핵심 지지층 다독이기다. 올드보이 트럼프 대통령의 무기는 뉴미디어인 트위터다. 그는 ‘가짜 뉴스 쏟아내는’ 주류 언론을 패스해 트위터로 유권자와 직통한다. WP가 입맛에 맞지 않는 기사를 내면 “아마존이 미국 우체국을 배달 소년처럼 부린다” “아마존의 횡포로 소매점들이 문을 닫고 있다”는 보복성 말폭탄을 던진다. 트럼프의 트위터 속도전에 맞서는 베이조스의 무기는 올드미디어인 신문이다. 권력 감시란 인터넷의 속도감과 조급증으론 해낼 수 없는 일. WP는 대선 당시 기자 20명을 투입해 트럼프 검증팀을 꾸렸는데 팀장이 1972년 워터게이트 스캔들 보도로 닉슨 대통령을 끌어내린 탐사보도의 전설 밥 우드워드였다. 검증팀은 트럼프 후보의 후원금 기부 약속 미이행, 음담패설 녹음파일을 특종 보도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후 ‘대통령의 실세 사위가 러시아 커넥션의 몸통’이라는 의혹을 제기한 것도 WP다. 트럼프가 “WP는 베이조스의 장난감”이라는 트윗을 날리자 WP는 “베이조스는 격주 수요일마다 간부 회의를 주재하지만 신문 편집엔 관여하지 않는다”며 아마존 독주의 폐해 등 그동안 WP가 보도했던 아마존 비판 기사의 목록을 편집권 독립의 증거로 제시했다. 트럼프와 WP의 불화는 1972년 재선을 앞두고 워터게이트빌딩 민주당사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던 닉슨 정부와 이를 폭로한 WP의 전쟁과 닮은꼴이다. 두 스캔들 모두 선거 방해가 핵심이다. 트럼프가 아마존을 협박하듯 닉슨도 WP 소유의 방송사 면허 취소 카드를 꺼내 들었다. WP는 느리지만 정확한 보도로 맞섰다. 취재 내용을 2명 이상의 다른 취재원에게 복수로 확인하기(삼각확인·triangulation)와 같은 보도 원칙은 이때 다듬어진 것이다. 트럼프는 세계 최고의 권력자이고, 베이조스는 세상에서 가장 돈 많은 사람이다. 트럼프의 아마존 때리기를 포브스 집계 세계 부호 1위에 대한 질투심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트럼프는 766위다. 잃을 게 많은 베이조스가 트럼프의 칼 앞에서 정치권력을 견제하는 펜을 지켜낼 수 있을까. 뉴스위크는 트럼프 대통령이 탄핵된다면 그건 특검도 의회도 아닌 탐사보도의 힘이라고 논평했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영화 ‘더 포스트’의 주인공은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캐서린 그레이엄 여사(1917∼2001)다. 그가 발행인으로 있던 1971년 워싱턴포스트는 국방부 기밀문서를 보도해 정부가 질 줄 알면서도 베트남전을 끌어왔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이듬해엔 워터게이트 스캔들 특종으로 대통령을 사임시켰는데, 이는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1976년)이라는 영화로 제작됐다. 1971년 시기를 다룬 ‘더 포스트’가 이 영화의 프리퀄인 셈이다. ‘모두가…’에는 단역으로도 나오지 않던 여성 발행인이 ‘더 포스트’에선 주인공을 맡게 된 건 여권 신장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그레이엄의 젖꼭지를 탈수기에 넣어 돌려 버리겠다”는 정부의 협박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낸 여걸이다. 워터게이트 보도 후 대통령은 쫓겨났고, 워싱턴의 지방지는 세계적 권위지로 우뚝 섰으며, 그는 작은 탈수기와 젖꼭지 모형을 선물로 받아 목걸이에 걸고 다녔다. 하지만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그는 대찬 여장부가 아니라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중년 여성이었다. 아버지와 남편이 차례로 경영하던 신문사를 남편의 자살 후 떠안은 때가 1963년. 사람들은 살림만 하던 여자가 회사를 말아먹겠거니 했다. 스스로도 공격적인 인수합병으로 회사를 키웠던 남편의 카리스마를 흉내 낼 자신이 없었다. “아빠 의식하지 말고 엄마 방식대로 하라”는 딸의 격려를 따를 수밖에 없었는데 놀랍게도 이것이 성공으로 이어졌다.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남자들의 말을 듣기만 했다”는 그레이엄 여사는 발행인이 된 후로도 명령하기보다는 듣고 협조를 구했다. 월터 리프먼에게 자문해 벤 브래들리(톰 행크스 분)라는 걸출한 편집국장을 발탁하고, 워런 버핏을 멘토 삼아 재무를 배웠다. 사내에서도 직급을 가리지 않고 묻고 다니는 그를 보며 참모들은 “사장이 결정하면 그만”이라고 답답해했다. 그는 워터게이트 보도 후 발행인의 역할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가능한 한 모든 사람의 의견을 들었다. 난 믿고 도왔을 뿐이다.” 베트남전의 실상을 담은 극비문서 보도라는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땐 베트남에 파병된 큰아들의 편지가 힘이 됐다. 발행인이 된 후로도 사교 모임에 가면 남자들 자리엔 끼지 못하고 부인들과 어울려 아줌마 수다를 나누는 처지였다. 남자들이 공유하는 정치공학이나 국제정세엔 어두웠지만 “우리 아들(혹은 오빠)이 아직 베트남에 있다”는 여성들의 외침만큼 확신을 주는 건 없었다. 회사 경영에 익숙해진 후로도 독자 편지에 꼭 답장하고, 회사의 13개 노조가 파업할 땐 밤새워 배달용 신문을 포장하고 광고 의뢰 전화를 받았다. 경영진과 편집국이 기사냐 수익이냐를 놓고 따질 땐 ‘좋은 저널리즘이 좋은 비즈니스’라며 중재했다. 결국 수평적으로 소통하고 배려하는 통합의 리더십으로 그레이엄 여사는 부패한 권력을 무릎 꿇리고 언론 자유를 지켜냈다. 취임할 때 8400만 달러였던 회사 수익은 1991년 퇴임할 땐 14억 달러로 불어났다. 한때 ‘남자처럼 일하고 여자처럼 승리하라’는 책이 유행했는데, 그는 여자처럼 일하고 남자처럼 승리했다. 김광웅 서울대 행정대학원 명예교수는 21세기 리더의 덕목으로 권한의 80%만 사용하는 리더, 공부하는 리더, 자신을 의심하는 리더를 꼽았다. 자만을 경계하며 묻고 배우고 권한을 위임한 그레이엄 여사는 21세기 남녀 모두에게 필요한 리더십을 한 세기 먼저 실천했다. 영화 ‘더 포스트’와 퓰리처상을 받은 ‘캐서린 그레이엄 자서전’은 언론학뿐만 아니라 리더십 교재로도 훌륭하다.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