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주성하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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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관련 사이트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http://nambukstory.com)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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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5-11-16~202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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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약 수출국 된 북한…탈북자 중엔 헤로인 ‘덴다’ 경험자 거의 없는 이유는?

    연일 연예인들의 마약 투약 사건으로 시끄럽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연예인 마약 사범 뉴스로 언론이 도배되고 있다. 그럴 때마다 커지는 궁금증은 ‘도대체 저 마약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이다. 전문가들은 국내 유통 마약 중 적잖은 물량이 북한산일 것으로 추정한다. 일반적으로 북한이 삼엄한 감시와 폐쇄성으로 인해 ‘마약 청정 국가’일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북한은 급속히 마약에 빠져들고 있다. 게다가 갈수록 북한산 마약이 한국에 더 많이 유입됨으로써 한반도 전체가 ‘마약 지대’가 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자유한국당 소속 윤상현 외교통일위원장은 2012년에 “2010년 국내에서 적발된 외국산 필로폰 8200g 중 57.3%가 중국에서 반입됐고 그중 상당량이 북한산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외 여러 마약 전문가들의 말을 종합하면 국내에서 유통되는 필로폰의 최소 30~40%는 북한산으로 추정될 정도다. 이 때문에 마약 전문가들은 정부가 나서서 북한의 마약 실태를 파악해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탈북자와 북한 소식에 정통한 전문가들이 털어놓은 북한의 마약 제조와 유통, 중독 현황 등을 정리해 본다. ● 북한은 마약 중독 사회 2013년 북한 당국은 형법을 개정해 ‘비법아편재배·마약제조죄’에 대해 사형할 수 있도록 했다. 그만큼 마약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다는 뜻이다. 실제로 마약 사법은 급증하고 있다. 단속해야 할 보위성 요원들부터 마약에 빠져 있거나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평양 출신의 한 탈북민은 “2010년에 검사로 일하는 친구가 술을 마시며 ‘전당 전군 전민이 약을 한다’며 개탄하더니 몇 달 후에는 그 친구가 마약을 하더라”라고 말했다. 마약이 얼마나 북한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가에 대한 증언은 넘쳐난다. 최근 입국한 탈북민들은 “어느 마을에 가나 얼음(마약의 은어)을 파는 집은 꼭 있으며 이런 집을 ‘소분집’이라 한다”고 말했다. 북한 내에서 현재 10회 정도 사용할 수 있는 얼음 1g의 가격은 15달러(약 1만8000원) 이하로 거래된다. 한국에서 밀거래되는 가격의 수십분의 1에 불과하다. 가격이 싼 만큼 찾는 사람들도 많을 수밖에 없다. 북한인권정보센터는 2016년 탈북민 1467명을 대상으로 북한 마약 실태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였다. 조사 결과 2010~2012년 탈북한 사람들의 13.6%가 마약을 접촉했다. 마약 접촉 비율은 2013년 26.8%, 2014년 25.0%, 2015년 36.7%로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실제로 얼마 정도의 북한 사람이 마약을 사용할까. 이 질문에 2010년 이전 탈북자의 35.7%가 “10%가 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하지만 2014년 탈북자의 경우 ‘10% 이하’라고 응답한 비율은 16.2%에 그쳤다. 이들의 27.8%가 “10~30%가 마약을 사용한다”고 대답했고, 나머지 56%는 “30% 이상의 북한 주민이 마약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똑같은 질문에 2016년 탈북한 2명의 대답은 충격적이다. 이들은 “북한 주민의 90% 이상이 마약을 사용한다”고 답했다. 이 대답이 과장됐을 가능성도 있지만, 북한의 조사 결과는 마약 사용이 해마다 빠르게 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쩌다 북한이 이렇게 된 것일까.● 국가 차원에서 마약을 양성하다 사실 북한은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마약 청정 지대였다. 그러다 1980년대 중반 북한 중앙당 간부들에게 건강 치료용으로 필로폰이 공급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평양 출신의 고위 소식통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의 경우 매달 1, 2알의 필로폰이 든 알약이 ‘뇌출혈, 뇌혈전 예방약’ ‘피로 회복제’ ‘건강치료제’ 등의 이름으로 지급됐다”며 “간부들도 이 약이 마약이란 걸 알았다”고 증언했다. 당시 70, 80대 고령의 간부들이 증가하며 건강 문제가 자주 발생하자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이런 조치가 내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1990년대 초반부터는 국가 차원에서 양귀비를 대대적으로 재배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1980년대부터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도별로 경작지를 10㏊ 혹은 20㏊ 규모로 할당하여 재배했다”고 말했다. 구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한 후로는 외화를 벌어들일 목적으로 마약 밀매를 시작했다. 김일성의 건강을 책임졌던 만청산연구원 출신의 한 탈북자는 “1990년 금수산의사당 경리부 당위원회가 ‘백도라지’(양귀비의 북한식 표현) 농장을 맡는 것에 대한 교시를 전달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김일성은 마약 생산을 “미 제국주의와 싸우는 새로운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등 적국을 마약에 중독시켜 자본주의 사회를 마비시키고, 북한은 돈도 벌어 사회주의를 지킬 수 있는 일석이조의 사업이란 논리였다. 이후 북한의 북부 지역 농장들마다 일정 규모로 양귀비를 재배했다. 양귀비 진액(아편)을 채취할 때엔 학생들까지 동원했다. 이렇게 전국에서 만든 아편은 평양에 집결돼 아편으로 제작됐다. 당시 상황에 정통한 한 탈북민은 “평양 외곽의 상원군에 생산기지가 있었는데, 국가과학원 상원분원이란 외피를 쓰고 있었다”며 “이곳에서 생산된 헤로인은 항불안제인 ‘디아제팜’과 외형이 똑같아 구별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는 “보위사령부 등 최정예 공작원들이 홍콩과 마카오 등의 동남아 마약조직과 접촉해 판로를 개척했는데 신분이 드러날 경우를 대비해 철저히 개인별로 움직였다”고 증언했다.● 평양 고위층에 퍼진 헤로인 ‘덴다’ 이후 북한산 헤로인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미국은 본격적인 제재 움직임을 보였다. 북한 당국은 1990년대 중반 상원분원을 폭파시켜 흔적을 없앴다. 하지만 이곳에서 이미 만들어 놓은 대량의 헤로인이 있었다. 바로 이 헤로인이 1990년대 중후반부터 북한 내부 부유층에 퍼지기 시작했다. 헤로인을 북한에선 ‘덴다’ ‘총탄’ 등으로 불렀다. 디아제팜과 똑같은 흰색의 알약 외에 특이하게 빨간색으로 된 덴다도 있었다. 상원분원에서 만든 덴다는 3, 4개 루트를 통해 평양에 흘러나왔다. 이 마약은 주로 젊은 아가씨들이 부유한 청년들을 상대로 팔았다. 덴다 구입자들은 이것을 부숴 가루로 만든 뒤 코로 흡입했다. 함유량에 따라 80캄마, 120캄마, 240캄마로 구분됐는데, 2000년 평양에서 거래된 덴다 120캄마 한 알의 가격은 2달러로, 부유층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이 때문에 평양의 극소수 부유층과 원산 신의주의 무역회사 사장 정도만 헤로인을 경험했다. 탈북자 중에 덴다를 경험한 사람이 거의 없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헤로인에 이어 필로폰 ‘얼음’ 퍼져 2003년경 상원분원이 만든 덴다의 재고가 바닥이 났다. 이때 새로 등장한 것이 ‘아이스’ ‘얼음’으로 불린 필로폰이었다. 헤로인과 필로폰은 완전히 상반되는 마약이다. 헤로인은 중추신경을 억제해 그 자체로만 쾌락을 느끼게 하는 반면 필로폰은 강력한 중추신경 흥분제다. 상반된 마약이 시점을 두고 북한에 등장한 이유는 식량난 악화와 연관된다. 상원분원이 폐쇄된 후 소속 과학자들은 국가과학원 함흥분원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둘 다 화학 계열의 연구소라는 게 이유였다. 실제로 애초에 상원분원에서 마약을 만들던 기술자들은 화학 공업의 중심지인 함흥의 화학공대 출신이 많았다. 바로 이들이 고향인 함흥으로 내려갔을 무렵 북한엔 일명 ‘고난의 행군’이라 부르는 대기근이 닥쳤다. 그러니 배급만으로는 먹고살기 어려워졌고, 마약 제조 전문가들인 이들은 헤로인보다 싸고 쉽게 원료를 구할 수 있는 필로폰을 제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필로폰 원료는 중국에서 의료용으로 수입하는 염산에페드린이었다. 이들이 개발한 필로폰은 2003년경부터 헤로인 판매망을 타고 평양에 공급되기 시작했다. g당 5~10달러 정도에 공급되는 필로폰은 순식간에 평양의 중산층까지 확산됐다. 2006년경부터는 지방에까지 필로폰 밀매가 본격화됐고, 2010년경에는 지방의 중산층들도 필로폰에 손을 댔다. 여전히 북한 내부의 마약 제조는 개인이 아닌 국가 차원에서 진행된다. 정찰총국, 보위성, 보위사령부 등 군부 조직도 마약 생산과 해외 밀매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소식통은 “김정은 집권 이후에도 북한군 총정치국 산하 53부에서 평양과 평성 사이 배산점이란 지역에 필로폰 생산 공장을 만들어 운영했다”며 “해마다 국가 차원에서 20t 이상의 필로폰이 생산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 한국의 ‘기술자’까지 북한 진출 북한산 ‘얼음’은 96~99% 정도의 순도를 보장하기 때문에 해외 밀매 조직엔 인기가 높다. 북한산 필로폰의 순도가 높아진 데엔 한국 ‘기술자’들의 공이 크다는 것이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한 탈북 소식통은 “필로폰 생산 초기에 한국인 기술자 3명이 국내 단속을 피해 동남아시아, 중국에 갔다가 북한까지 넘어왔다”며 “이들의 경험과 지식이 북한에 전수됐다”고 말했다. 한국인 기술자들도 99% 순도의 필로폰을 만들지는 못했다. 북한 당국이 정예 연구진을 투입하고 전문 생산기지를 제공하는 ‘투자’를 한 결과 순도가 크게 높아졌다는 것. 기술을 모두 넘겨받은 북한은 이후 한국 기술자 2명을 총살했으며 1명은 간신히 탈북해 숨어 사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기술자가 해외로 진출한 사례도 있다고 한다. 중국의 소식통은 “중국 단둥에서 북한과 큰 규모로 거래하는 사업가 송모 씨가 2004년 북한 기술자를 10만 달러에 계약해 데려온 뒤 기술을 전수받고 살해한 사건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 북한의 필로폰 기술이 다시 진화했다. 과거엔 중국의 염산에페드린이 원재료였는데 이를 수입하기 어려워지자 원재료를 바꾸면서 이른바 ‘기술혁신’을 이뤘다는 것. 탈북 소식통은 “새로운 방식의 필로폰 제조를 두고 내부에선 ‘마약 제조의 기본을 바꾼 혁명이 일어났다’고 비유한다”며 “새 재료를 쓴 필로폰의 질이 훨씬 더 좋다”고 말했다.● 해외 북한 식당이 마약 유통망 북한의 마약 해외 밀매는 점점 거침없어지고 있다. 대북 소식통은 “신의주와 마주한 중국 둥강(東港)시 공안국 부국장과 변방정찰 대대장이 2015년경 북한과 필로폰 밀거래를 하다 체포됐는데, 압수수색에서 50㎏ 이상의 필로폰이 나왔다”고 말했다. 또 다른 소식통도 “동남아시아는 북한 얼음이 이미 점령했다. 심지어 필리핀에는 유통 거점이 없는데도 팔려 나간다”고 증언했다. 동남아시아의 북한 필로폰은 현지 밀매조직을 통해 다시 미국과 유럽 등으로 넘어간다. 실제로 2015년 8월 미국 뉴욕 맨해튼연방지법에서는 북한산 마약을 미국에 밀반입하려던 홍콩 범죄조직 소속의 영국, 체코, 필리핀, 대만 등 다국적 조직원 5명이 검거돼 재판을 받기도 했다. 이들은 북한산 마약을 필리핀에 들여와 숨겨 놓은 뒤 100㎏을 태국을 경유해 반입하려다 미 마약단속국(DEA)에 적발됐다. 이 중 한 명은 자기 조직이 필리핀에 북한산 필로폰 1t을 숨겨놓고 있다고 고백했다. 2017년 말 중국 동북 3성 지역에서 밀거래되던 고순도 북한산 필로폰 가격이 갑자기 하락했다. ‘한 작대기’에 60만 원 정도에 밀거래되던 필로폰은 25만 원 선까지 하락했다. 작대기는 1회용 주사기 한 대 분량을 의미하는데, 4g 정도다. 북한산 마약 거래에 정통한 소식통은 “대북 제재로 중국 내 북한 식당이 한꺼번에 철수하면서 이들이 가지고 있던 마약을 일시에 방출했기 때문에 가격이 크게 하락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중국 내 북한 식당들이 북한산 마약의 유통거점 역할을 한다는 간접 증거인 셈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9-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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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 10년새 가장 심각?… 인구수-수요량 통계 왜곡 가능성

    정부가 대북 식량 지원 사업을 본격화할 방침을 밝히면서 찬반 논란이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는 북한이 현재 심각한 기아상태에 직면해 있는 만큼 인도적 측면에서 지원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반면 북한의 식량난이 과장됐고, 식량 지원이 “늘 선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다”며 반대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특히 북한 식량난의 근거가 되고 있는 인구수와 수요량 통계가 왜곡됐을 가능성마저 제기되고 있어 식량 지원을 둘러싼 찬반 양측의 갈등은 격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북한 식량난, “정말 심각” vs “과장 가능성” 북한 식량난은 이달 3일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식량계획(WFP)이 발표한 ‘북한의 식량안보 평가’ 보고서를 근거로 한다. 이 보고서는 지난해 북한의 식량 생산량이 최근 10년 사이 가장 심각한 수준이며, 올해 회계연도(2018년 11월∼2019년 10월) 식량 부족량은 136만 t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보고서는 따라서 북한 인구의 40%인 1010만 명이 식량 부족에 처해 있으며 긴급하게 식량 지원이 절실하다고 밝혔다. 문제는 FAO와 WFP 보고서가 곡물 생산량과 분배에 대한 기본적인 통계를 북한 당국에서 받아 발표하기 때문에 북한이 통계를 조작하면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수요 규모를 좌우하는 인구수가 정확하지 않다. FAO와 WFP는 보고서에서 북한 인구를 250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는 2017년 조선중앙연감에서 밝힌 수치(2015년·2503만 명)와 비슷하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결과에 의혹을 제기한다. 2008년 한국과 유엔인구기금(UNFPA)의 재정지원으로 북한이 실시한 인구센서스 결과도 불신 받았다. 당시 북한 인구는 2405만 명으로 발표됐다. 이석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2011년 발표한 논문 ‘2008년 북한 인구센서스의 분석과 문제점’에서 “군대 인구와 관련한 의도적 통계 왜곡의 가능성이 의심되며, 동시에 이들 통계는 기존의 인구통계와도 서로 조화될 수 없을 만큼 불일치한다”며 “현재 존재하는 북한의 모든 인구통계는 통계적 왜곡의 가능성과 불일치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본보가 단독 입수한 북한 중앙통계국 통계자료에 따르면 북한의 인구는 2005년 2100만 명을 넘어섰다가 2009년부터 2000만 명대로 후퇴했고, 이후 계속 줄었다. 추세대로라면 현재 북한 인구는 2050만 명 정도로 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북한의 인구가 FAO와 WFP 추산보다 450만 명이 적다는 뜻이며, 그만큼 북한에 필요한 식량 수요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국력을 부풀리기 위해 인구수를 조작하는 것은 과거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애용하던 방법이다. 북한도 예외는 아니다. 흥미로운 점은 북한이 과거 외부에 공개한 인구는 당시의 한국 인구 절반 수준으로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 식량 수요, “손실 커 수요 늘어” vs “근거 불명확” FAO, WFP 보고서는 북한이 앞으로 1년 동안 필요한 곡물 소요량을 575만 t으로 추정했다. 이 보고서는 지난해 북한의 곡물 소요량을 562만 t으로 잡았는데 1년 만에 13만 t을 늘려 잡은 이유로 “올해 식량 생산과 사료 소비량, 수확 후 손실 등이 더 많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됐다”고 설명했다. 반대 측은 이에 대해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고 반박한다. 또 실제 북한의 1년 식량 소비량을 추정한 것과도 다르다고 주장한다. 북한의 식량 소비량은 1인당 하루 평균 배급 목표 기준량으로 삼고 있는 500g을 기준으로 산출할 수 있다. 북한 인구가 2050만 명이면 전국적으로 매일 1만500t이 필요하다. 실제로 많은 탈북자도 “북한에선 전국의 하루 배급량이 1만 t이란 말이 정석처럼 통용되고 있다”고 증언한다. 1년 365일 기준으로 할 때 북한이 배급제를 유지하려면 1년 동안 383만 t이 필요하다. 북한 인구를 2500만 명으로 높여 잡아도 456만 t이 필요하다. 여기에 식품 생산, 사료 등에 사용되는 곡물을 포함해도 북한은 1년에 500만 t만 확보하면 굶어죽을 상황까지 내몰리진 않는다는 주장이 나온다.○ “현장 조사 했다” vs “조사 부실했다” FAO, WFP는 현장 조사를 위해 올해 3월 29일부터 4월 12일까지 전문가 8명을 북한에 파견했다. 이들은 북한 당국이 제공한 차량을 타고 6개의 도를 돌면서 155개 농가를 살펴보고 농민들과 농업 관계자들을 인터뷰했고, 그 결과를 보고서에 담았다. 하지만 정작 식량 가격과 거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장마당은 북한 당국의 비협조로 방문하지 못했다. 북한 농업전문가인 권태진 GS&J 북한동북아연구원장은 “이번 보고서에서 경사도가 15도 이상인 50만 ha의 농지가 빠졌는데, 이곳에서 생산되는 식량이 20만 t 정도로 추산된다”고 말했다. 보고서엔 북한 개인 경작지(소토지) 생산량도 반영되지 않았다. 북한에서 농민들이 협동농장 농사보단 개인 소토지 농사에 더 열심이란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개인 경작지 생산량은 농민들이 정확하게 신고하지 않기 때문에 당국이 파악할 수 없다. 북한이 최근 러시아에서 지원받은 밀가루 10만 t도 누락됐고, 외부 지원과 무역, 밀수 등으로 들어가는 식량도 전부 빠졌다. WFP의 발표에 따르면 북한은 늘 식량 위기에 몰려 있다. 하지만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갓 탈북한 북한 주민을 매년 약 100명씩 8년 동안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하루 세 끼를 다 먹었다”고 응답한 사람이 2012년 72.4%에서 2018년 87.4%로 증가했다. 적어도 북한이 굶주림에 시달릴 정도는 아니라는 뜻이다. 북한 경제전문가인 김병연 서울대 교수는 “북한 경제를 연구하는 다수의 학자는 FAO가 사업을 하려는 조직 특성 때문에 북한의 식량 필요를 과대평가하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쌀이 부족한데도 떨어지는 북한 쌀값의 미스터리 북한의 식량난을 판단하는 중요한 잣대는 장마당 쌀값이다. 하지만 최근 이 가격은 위기설과는 달리 하락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보름 주기로 북한의 쌀값과 환율 등 주요 지표들을 조사해 공개해 온 북한전문매체 데일리NK에 따르면 14일 현재 북한의 식량 가격은 평양 기준으로 1kg당 4180원이다. 평양의 쌀값은 지난해 12월 5000원이었고, 지난해 5월 15일엔 5100원이었다. 1년 동안 오히려 1000원이 하락한 것이다. 북한의 식량 가격은 2017년 9월에 6100원을 기록한 뒤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내림세를 보이고 있다. 통일부는 15일 이에 대해 “북한 체제 특성상 공식 가격이나 공식 기구가 아닌 (장마당) 지표를 가지고 식량 사정을 추정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많은 제한이 있다”며 “공식기구에 의한 가격이 아닌 장마당 가격에 대해 정부가 평가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라고 밝혔다. 주민의 구매력이 떨어지면 시장 식량 가격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할 때에도 쌀값은 자고 나면 올랐다.○ 식량 지원, “서둘러야” vs “신중해야” WFP는 5∼9월이 북한의 춘궁기라며 식량 지원이 가을 추수 이전에 이뤄져야 한다고 요청했다. 정부도 이에 화답해 9월 전까진 식량 지원을 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이는 전통적인 북한의 춘궁기 개념과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릿고개로 불리는 북한의 춘궁기는 3∼5월이고, 6월 초부터 이모작 봄 작물인 밀, 보리, 감자가 나오면 식량 사정은 점점 풀린다는 설명이다. 대북 식량 지원이 의도한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도 따져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우선 북한에 식량이 지원되면 내부 쌀값이 떨어지고, 굶어죽을 걱정이 없어진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또 농민에 대한 군량미 수탈도 줄어드는 작용도 있다. 북한이 식량 지원을 받을 때 대남도발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점도 기대 효과다. 햇볕정책이 본격 시행돼 매년 3억∼4억 달러어치의 식량 지원이 본격 시작된 2002년 하반기부터 2007년 말까지 북한은 인명 피해를 초래한 군사도발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효과도 있다. 우선 북한은 외부 지원으로 국가가 장악한 식량이 많아지면 배급제를 부활시킬 가능성이 크다. 시장에서 돈을 벌어 살던 주민이 배급 500g 때문에 직장에 강제로 출근해 통제에 묶이게 된다는 뜻이다. 북한의 시장화에 역행할 수 있다. 북한의 농업제도 개혁도 늦어질 수 있다. 북한은 부족한 식량난을 타개하기 위해 일부 지역에서 농가 책임 경영제 등을 시범 실시하고 있다. 하지만 외부 지원으로 연명할 수 있다면 굳이 협동농장 체제를 허물 동기가 없어진다. 모니터링이 철저히 되지 않으면 지원 식량이 군량미 창고에 쌓이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김병연 서울대 교수는 “WFP의 현장 모니터링도 북한이 동의하는 접근 정도만 가능하기 때문에 북한의 특성상 지원의 투명성을 완벽하게 보장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주성하 zsh75@donga.com·이지훈 기자}

    • 2019-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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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김정은의 주머니 사정을 판단하는 잣대

    “올해에 군민이 힘을 합쳐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 건설을 최단 기간 내에 완공하자.” “그 무엇에 쫓기듯 속도전으로 건설하지 말고 공사기간을 6개월간 더 연장하여 다음 해 태양절까지 완벽하게 내놓자.” 앞의 말은 김정은의 2018년 신년사이고, 나중은 그가 올해 4월 6일 원산을 방문했을 때 한 얘기다. 1년 4개월 만에 메시지가 완전히 달라졌다. 실제로 김정은은 2018년 신년사 직후 원산관광지구를 올해 태양절(4월 15일)까지 완공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지난해 8월 김정은은 완공 시점을 2019년 노동당 창건기념일(10월 10일)로 6개월 연장하라고 번복했다. 그리고 올해 4월에 다시 내년 4월로 6개월 더 연장했다. 두 차례의 연기 결정 모두 김정은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온 지 두 달쯤 지나 이뤄졌다. 김정은의 공사기간 연장 결정은 몇 가지 요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냉혹한 현실에 대한 김정은의 깨달음이다.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김정은은 자기가 직접 정세를 주도하면 2년 내로 대북제재가 풀리고 북한에 외국인 관광객이 몰려오는 상황이 만들어질 것이라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을 만날 때마다 이런 희망은 퇴색됐다.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김정은은 제재를 푸는 것이 매우 어렵고, 현실이 절대 녹록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으로 추정해 본다. 자금 부족도 빼놓을 수 없다. 김정은은 지난해 5월 26일부터 올해 4월 6일까지 10개월 남짓한 기간에 4차례나 공사현장을 방문했다. 그만큼 원산관광지구 건설에 공을 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원산관광지구에 들어설 건물들은 애초 완공 시점으로 잡았던 올 4월까지 골조공사도 마무리하지 못했다. 더 많은 품이 드는 내부 인테리어 공사는 엄두도 못 내고 있다. 북한은 2015년 평양에 2500가구의 미래과학자거리를 완공한 데 이어 2017년엔 4800가구 규모의 여명거리를 1년 만에 완공했다. 하지만 프로젝트 규모가 작은 원산관광지구는 2년 반이나 매달려도 완공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강력한 대북제재로 북한의 자금줄이 꽁꽁 묶인 탓도 있겠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건설 자금이 나오는 주머니가 다르기 때문이다. 평양 여명거리 공사는 김정은이 자기 주머니를 열지 않아도 가능하다. 하지만 원산관광지구는 오로지 김정은의 주머닛돈에 의존해서 건설해야만 한다. 평양의 거리 조성은 김정은이 구획만 지정하면 그 다음부터는 ‘돈주’들의 ‘돈 넣고 돈 먹기’판이 벌어진다. 북한에서 돈주는 권력을 가진 고위 간부들이다. 돈주처럼 보이는 사장이나 외화벌이 종사자들이 있지만 대다수가 돈과 권력을 틀어쥔 고위 간부들이 앞에 내세운 ‘바지사장’에 불과하다. 김정은이 벌여놓은 공사판은 권력자들이 돈을 불릴 좋은 기회가 된다. 최근 대북제재로 외화가 고갈돼 평양 집값이 하락했지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평양에선 아파트를 지어 팔면 투자금의 4∼5배를 벌 수 있었다. 부지와 건설 인력을 제공해 거리 조성의 최대 주역이 된 김정은도 완공된 주택의 절반 이상을 떼어 과학자, 교수, 예술인 등 정책적으로 챙겨줘야 할 사람들에게 공짜로 나눠주며 생색을 낼 수 있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반면 원산관광지구에 건설되는 호텔이나 상업시설은 팔 수 없다. 이런 이유로 김정은이 다양한 방법으로 회유해도 돈주들이 투자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원산관광지구는 김정은의 주머니가 비게 되면 진척되기 어려운 구조다. 게다가 아파트는 기본적인 내부 인테리어만 하면 되지만 호텔과 상업시설은 내부를 호화롭게 꾸며야 해 돈도 많이 든다. 김정은이 공사 기간을 연장한 것은 더 멋있게 짓겠다거나, 공사 담당자들을 배려하는 차원이 아니라 주머니가 비어 자금을 대줄 수 있는 여력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과 같은 강력한 대북제재가 유지된다면 원산관광지구가 북한의 계획대로 내년 4월에 완공될지도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원산관광지구가 대북제재로 말라가는 김정은의 주머니 사정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라는 사실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9-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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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일외고, 학생 부모 교사가 함께하는 비전 선포식으로 소통 기회 나눠

    부산 부일외고는 학생들이 진로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을 세울 수 있도록 특별한 이벤트를 진행한다. 1학년 학생들이 자신의 장래 희망과 3년간의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자기 나름의 계획을 부모와 교사, 학급 친구들 앞에서 선포하는 ‘비전 선포식’이다. 올해로 벌써 6회째다. 학교는 학부모를 초청해 매년 4월 한 달간 1학년 학생 개개인의 비전을 듣고 학생들이 준비한 합창과 다양한 퍼포먼스도 펼치는 등 소통과 공감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첫 학기를 보내고 있는 1학년 학생 중에는 아직 진로를 정하지 못한 이들이 많다. 진로를 정한 학생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 없는 경우도 있다. 이를 감안해 학교는 비전 선포식 준비를 통해 학생들에게 자신의 진로와 그 실천계획을 짜게 하고 다양한 진로 적성을 탐구하게 만든다. 학생들은 3월 한 달간 진로 수업과 연계해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노력해야 할지 모색한다. 입학 후 실시한 진로진학예측검사와 자신의 진로와 연관된 대학의 입시 요강 등을 분석해 구체적인 학업 계획을 제시하거나 ‘꿈의 변천사’를 통해 중학교 시절부터 현재까지 자신의 발자취를 정리하기도 한다. 선포식은 학부모들에게도 자녀들이 생각하는 진로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1학년 1반 비전선포식에 참석한 이혜영 씨(최원진 학생 어머니)는 “아이들의 진지하고 열정적인 발표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모두의 꿈이 꼭 이뤄지기를 응원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비전 선포식 행사를 기획하고 주관한 이무진 교사(진로부장 겸 교감 직무대리)는 “기성세대가 젊은이에게 꿈을 가지라고 말하면서, 정작 부모님도 선생님도 학생들이 꿈에 대해 말할 기회를 주기보다 성적 얘기만 한다”며 “교사와 부모가 학생들의 마음속 이야기를 듣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에 진로 수업과 연계한 비전 선포식은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9-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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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옥류관 냉면은 권력 순으로 배분된다

    평양에는 냉면집이 제법 많다. 그중 남쪽 사람들도 다 아는 옥류관부터 청류관 평양면옥 평남면옥 선교각 평천각 천지관 고려호텔 평양호텔 룡흥식당 등은 10대 냉면집으로 불리며 맛집으로 통한다. 이 외 인민무력성 본부에 있는 장령식당도 냉면 맛이 상당히 좋지만, 장성에게 할당된 식권이 있어야만 이용할 수 있어 일반인이 맛보긴 어렵다. 평양 사람들은 이 중에서도 옥류관과 청류관, 고려호텔 지하 1층 냉면(1층에도 냉면집이 있다)을 3대 냉면 맛집으로 손꼽는다. 평양냉면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옥류관은 지명도에 비해 운영 방식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옥류관은 휴일인 월요일을 빼고 여름이나 겨울이나 항상 낮 12시부터 오후 7시까지 하루 1만 그릇만 판다. 그런데 표는 5000개만 발매된다. 표 1개당 무조건 곱빼기 냉면까지 두 그릇이 나오기 때문이다. 옥류관 냉면은 양이 많다. 기자가 평양에 있을 땐 “오늘은 무조건 세 그릇을 먹어야지”라고 맘먹고 쫄쫄 굶고 가도 두 그릇 반 이상을 먹지 못했다. 선주후면(先酒後麵)을 중시하는 북한에선 1인당 25도짜리 평양술을 한 잔씩 준다. 주문한 냉면 수와 상관없이 무조건 사람 수만큼 술잔을 준다. 식사 후엔 자체 생산한, 맛이 참 괜찮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후식으로 주는데 이것도 1인당 한 컵이다. 5000개 표 중 대략 절반은 옥류관이 자체로 소비한다. 권력기관에서 요구할 때 내줄 몫으로 당비서표, 지배인표, 기사장표, 조리사표 등 권력 순서에 맞춰 적당량이 배분된다. 월급과 배급으로만 살 수 없는 옥류관 종업원 수백 명도 이 표로 먹고산다. 표를 다른 기관에 주고 과일이나 라면 등을 바꿔 종업원들이 나눠 갖는 식이다. 나머지 2500개는 지도기관인 인민봉사총국에 넘겨진다. 총국은 이 표를 오늘은 평양화력발전소에 100개, 영예군인공장에 50개, 어느 인민반에 30개 하는 식으로 배분한다. 외화를 받는 식당을 제외하면 평양시내 주요 식당 표는 모두 이런 방식으로 유통된다. 냉면표를 받은 기업의 간부는 다시 적당히 알아서 나눠주거나 팔아먹는다. 다른 냉면집은 오전 6시부터 한정수량을 현장 판매한다. 그럼 할 일 없는 노인들이 일찍 나와 줄을 서서 산 뒤 암표로 팔아 차액을 챙긴다. 하지만 옥류관은 공급용 표만 있다. 공급용 표는 1인 표가 없이 최소 10명 표부터 시작해 20명 표, 50명 표 등으로 나뉜다. 지방 사람이 옥류관 냉면을 먹으려면 일단 옥류관 앞에 가서 암표상을 찾아야 한다. 암표 1장은 북한 돈 2만 원, 달러로는 2.5달러 정도 가격에 거래된다. 10명 표를 샀다면 모르는 사람 9명과 함께 팀을 이뤄야만 한다. 만약 먹다 남으면 육수, 면, 고기를 따로따로 담아 집에 가져갈 수 있다. 집에 보관했다 먹으면 대개 면이 풀어져 있어 맛은 크게 떨어진다. 고려호텔이나 평양호텔, 천지관처럼 외화로 운영되는 곳에는 일반 공급표가 없다. 이런 곳은 돈을 내면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다. 가격은 양에 따라 다르다. 냉면 100g은 4달러, 150g은 5달러, 200g은 6달러를 받는 식이다. 평양 사람들에게 냉면 맛집을 물으면 옥류관이라는 대답이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북에서 달러를 좀 만져본 사람들은 부유층만 가는 고려호텔 지하 1층 냉면을 더 많이 꼽는다. 이들은 그 이유에 대해 “일반인 상대 식당보다 달러를 받는 냉면집에서 최고의 냉면장인들이 일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냐”고 말한다. 10년 전 기자는 한국의 유명 평양냉면집 순위를 매긴 적이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매우 오만한 행동이었다. 지금은 어느 냉면이 제일 맛있냐고 질문을 받으면 “냉면 맛을 처음 배운 냉면집이 제일 맛있는 냉면집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런 이유로 기자는 늘 서울의 냉면집보다 맛을 배웠던 평양냉면이 제일 그리웠다. 그동안은 그 아쉬움을 달랠 방법도 없었다. 유명 냉면집에서 진짜로 일했던 탈북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전 고려호텔 지하 1층 냉면집 조리사 출신이 서울에 냉면집을 냈다고 한다. 양강도 분질감자 전분을 구할 수 없어 100% 똑같지는 않겠지만 고려호텔 지하 식당의 냉면 레시피가 서울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기자에겐 축복처럼 여겨진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9-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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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방사람이 옥류관 냉면 먹는 방법은 암표뿐…5000개 표는 어디로?

    평양에는 냉면집이 제법 많다. 그 중 남쪽 사람들도 다 아는 옥류관부터 청류관 평양면옥 평남면옥 선교각 평천각 천지관 고려호텔 평양호텔 룡흥식당 등은 10대 냉면집으로 불리며 맛집으로 통한다. 이외 인민무력성 본부에 있는 장령식당도 냉면 맛이 상당히 좋지만, 장성에게 할당된 식권이 있어야만 이용할 수 있어 일반인이 맛보긴 어렵다. 평양 사람들은 이중에서도 옥류관과 청류관, 고려호텔 지하 1층 냉면(1층에도 냉면집이 있다)을 3대 냉면 맛집으로 손꼽는다. 평양냉면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옥류관은 지명도에 비해 운영방식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옥류관은 휴일인 월요일을 빼고 여름이나 겨울이나 항상 낮 12시부터 오후 7시까지 하루 1만 그릇만 판다. 그런데 표는 5000개만 발매된다. 표 1개당 무조건 곱빼기 냉면까지 두 그릇이 나오기 때문이다. 옥류관 냉면은 양이 많다. 기자가 평양에 있을 땐 “오늘엔 무조건 세 그릇을 먹어야지”라고 맘먹고 쫄쫄 굶고 가도 두 그릇 반 이상을 먹지 못했다. 선주후면을 중시하는 북한에선 1인당 25도짜리 평양술을 한 잔씩 준다. 주문한 냉면 숫자와 상관없이 무조건 사람 수만큼 술잔을 준다. 식사 후엔 자체 생산한, 맛이 참 괜찮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후식으로 주는데 이것도 1인당 한 컵이다. 5000개 표 중 대략 절반은 옥류관이 자체로 소비한다. 권력기관에서 요구할 때 내줄 몫으로, 당비서표, 지배인표, 기사장표, 조리사표 등 권력 순서에 맞춰 적당량이 배분된다. 월급과 배급으로만 살 수 없는 옥류관 종업원 수백 명도 이 표로 먹고 산다. 표를 다른 기관에 주고 과일이나 라면 등을 바꿔 종업원들이 나눠 갖는 식이다. 나머지 2500개는 지도기관인 인민봉사총국에 넘겨진다. 총국은 이 표를 오늘은 평양화력발전소에 100개, 영예군인공장에 50개, 어느 인민반에 30개 하는 식으로 배분한다. 외화를 쓰는 식당을 제외하면 평양시내 주요 식당 표는 모두 이런 방식으로 유통된다. 냉면표를 받은 기업의 간부는 다시 적당히 알아서 나눠주거나 팔아먹는다. 다른 냉면집은 오전 6시부터 한정수량을 현장 판매한다. 그럼 할 일없는 노인들이 일찍 나와 줄을 서서 산 뒤 암표로 팔아 차액을 챙긴다. 하지만 옥류관은 공급용 표만 있다. 공급용 표는 1인표가 없이 최소 10명 표부터 시작해 20명 표, 50명 표 등으로 나뉜다. 지방 사람이 옥류관 냉면을 먹으려면 일단 옥류관 앞에 가서 암표상을 찾아야 한다. 암표 1장은 북한돈 2만 원, 달러로는 약 2.5불 정도 가격에 거래된다. 10명 표를 샀다면 모르는 사람 열 명과 함께 팀을 이뤄야만 한다. 만약 먹다 남으면 육수, 면, 고기를 따로따로 담아 집에 가져갈 수 있다. 집에 보관했다 먹으면 대개 면이 풀어져 있어 맛은 크게 떨어진다. 고려호텔이나 평양호텔, 천지관처럼 외화로 운영되는 곳에는 일반 공급표가 없다. 이런 곳은 돈을 내면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다. 가격은 양에 따라 다르다. 냉면 100그램은 4달러, 150그램은 5달러, 200그램은 6달러를 받는 식이다. 평양 사람들에게 냉면 맛집을 물으면 옥류관이라는 대답이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북에서 달러를 좀 만져본 사람들은 부유층만 가는 고려호텔 지하 1층 냉면을 더 많이 꼽는다. 이들은 그 이유에 대해 “일반인 상대 식당보다 달러를 받는 냉면집에 최고의 냉면장인들이 일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냐”고 말한다. 10년 전 기자는 한국의 유명 평양냉면집 순위를 매긴 적이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매우 오만한 행동이었다. 지금은 어느 냉면이 제일 맛있냐고 질문을 받으면 “냉면 맛을 처음 배운 냉면집이 제일 맛있는 냉면집입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런 이유로 기자는 늘 서울의 냉면집보다 맛을 배웠던 평양냉면이 제일 그리웠다. 그동안은 그 아쉬움을 달랠 방법도 없었다. 유명 냉면집에서 진짜로 일했던 탈북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전 고려호텔 지하 1층 냉면집 조리사 출신이 서울에 냉면집을 냈다고 한다. 양감도 분질감자 전분을 구할 수 없어 100% 똑같지는 않겠지만 고려호텔 지하식당의 냉면 레시피가 서울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기자에겐 축복처럼 여겨진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9-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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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od&Dining]배스킨라빈스, 아보카도와 딸기의 만남… “한 번에 두 가지 맛 즐겨요”

    SPC그룹이 운영하는 배스킨라빈스가 인기 만화 캐릭터 ‘스폰지밥’과 손잡고 봄에 어울리는 ‘스트로베리 아보카도’를 출시했다. 스트로베리 아보카도는 스폰지밥의 인기 캐릭터 ‘뚱이’를 모티브로 한 제품이다. 아보카도 아이스크림과 달콤한 딸기 아이스크림을 결합해 부드럽고 고소한 아보카도의 맛과 상큼하게 씹히는 딸기 과육이 어우러진다. 더블주니어 사이즈가 3800원이다. 배스킨라빈스는 스폰지밥 캐릭터 디자인을 패키지에 입힌 디저트 ‘아이스크림 스틱바’도 새롭게 선보였다. 동그란 스쿱(아이스크림 뜨는 전용 도구) 모양의 아이스크림 디저트로, ‘민트쿠앤크’와 ‘초코그린티’ 등 두 가지 맛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다. 스푼 없이 포장지를 개봉해 간편하게 즐길 수 있다. 판매가는 2900원. 이달의 케이크로 최근 출시된 ‘뚱이와 스폰지밥’(2만8000원)은 만화 스폰지밥에 등장하는 파인애플 집 모양을 재현한 2단 케이크다. 스폰지밥 모양의 초콜릿과 뚱이 피규어가 올라간 모양으로 옐로 치즈케이크, 엄마는 외계인, 블루베리 치즈케이크 등 총 7가지 맛을 담았다. 4월의 음료 ‘스트로베리 아보카도 와츄원 쉐이크’(4800원)는 ‘스트로베리 아보카도’에 아이스크림과 우유를 넣고 갈아 만든 것으로 부드럽게 즐길 수 있는 메뉴다. ‘그린티 라테’는 그린티 크림과 우유에 에스프레소 샷이 들어가 진하고 고소한 풍미를 맛볼 수 있다. 배스킨라빈스가 신제품 출시를 기념해 실시한 프로모션도 인기다. 이달 30일까지 해피포인트 애플리케이션에서는 ‘스폰지밥을 찾아라!’ 이벤트가 진행된다. 미니게임에 참여해 스폰지밥을 찾는 미션에 성공하면 ‘스트로베리 아보카도 싱글레귤러 1+1 쿠폰’을 증정한다. 선착순으로 50만 명을 선정하며, 자세한 사항은 해피포인트앱을 참고하면 된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9-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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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08학번 평양 여대생의 청춘시절

    2008년 4월. 평양의 유명 4년제 대학에 입학한 여대생 영희(가명·17)는 부푼 희망을 안고 등굣길에 올랐다. 하지만 꿈은 몇 달 안돼 깨지기 시작했다. 6월 말부터 평양 대학생들은 9월 9일 공화국 창건 60주년 행사에 동원됐다. 2008년 여름은 악몽이었다. 그늘 한 점 없이 뜨겁게 달아오른 김일성광장에서 4m 길이의 무거운 나무 깃대를 들고 두 달 반 동안 하루 종일 행진 연습만 한 것이다. 일사병으로 쓰러지는 학생들이 속출했고, 영희도 두 번이나 쓰러져 실려 갔다. 행사를 마치고 열흘간의 방학 뒤 개강을 했지만 진도를 따라가기가 벅찼다. 교수는 시험 때 창문을 내다봤다. 공부를 못했으니 마음껏 커닝하라는 뜻이었다. 2009년 초 조류독감이 돌았다. 모든 학교가 두 달 넘게 휴강을 했다. 4월 2학년이 된 영희와 동급생들은 교도대에 나갔다. 교도대는 대학생들이 2학년 때 6개월간 의무적으로 대공포 부대에서 복무하는 것으로, 필수 이수 코스다. 11월에 복무를 마치고 돌아와 한 달 남짓 강의를 듣다 보니 다시 방학이었다. 2010년 1월 방학이었지만 영희는 쉬는 날 없이 대학에 나와 문답식 학습 경연 준비를 했다. 신년사와 당의 정책을 외우는 연례행사다. 2월 개강한 뒤 두 달이 지났을 때쯤 영희는 다시 아리랑공연에 차출됐다.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공연의 3분 분량을 위해 그해 여름 내내 뜨거운 광장을 뛰어다녀야 했다. 10월부턴 매일 미니스커트를 입고 공연에 투입됐다. 11월 잠깐의 방학 뒤 한 달 남짓의 공부가 시작됐다. 90분짜리 강의가 오전 3개, 오후 3개, 저녁 1개씩 이어졌다. 한 학기 분량이 열흘 만에 끝났다. 커닝을 해도 시험 점수가 나쁘면 교수에게 불려갔다. “보고서 써야 하는데 A4 용지가 부족하다”는 말이 나오면 30∼50달러의 돈을 내밀어야 했다. 그래야만 낙제를 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2011년 2월 개강하고 두 달 뒤인 4월 말 농촌지원을 한 달 나갔다. 5월 말에 돌아오니 이번에는 ‘수도 10만 주택 건설 총동원령’이 떨어졌다. 평양의 22개 대학 전체가 문을 닫았다. 대학생들은 능라도유원지, 창전거리, 역포구역의 10만 주택 건설장에 동원됐다. 당초 1년 예정이었지만 동원령은 2013년 2월까지 지속됐다. 무려 1년 9개월을 건설 노동자로 일한 셈이다. 살림집 건설에 국가 지원은 일절 없었다. 한 개 학부에 대략 10층짜리 아파트 한 동을 짓도록 과제를 주고 알아서 완공하라는 식이었다. 인력은 대학생들로 충원됐지만 자재를 살 돈이 없었다. 그렇다고 학생들에게 돈을 걷는 일은 ‘세외부담’이라며 금지했다. 대학은 꼼수를 썼다. 100달러를 내면 열흘 휴식을 줬다. 지친 학생들이 앞다퉈 돈을 냈다. 심지어 10만 달러를 내면 노동당에 입당까지 시켜주었다. 북한에서 대학생의 노동당 입당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자재 확보를 위해 당원증을 판 것이다. 권력과 돈을 가진 집의 자제들은 노동당원이 됐고, 졸업할 땐 당원이란 명목으로 군에도 안 가고 제일 좋은 부서에 배치됐다. 부족한 건설 인력은 돈을 주고 군인을 수십 명씩 고용했다. 이런 와중에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하자 영희는 겨울 애도행사에 동원됐다. 2013년 3월 영희는 비로소 대학에 돌아왔다. 이미 1년 전에 졸업했어야 했지만 학제에도 없는 5학년이 돼 2학년 교재로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에도 이런저런 명목으로 동원되며 1년을 더 공부하고 6개월 논문기간을 끝낸 뒤에야 영희는 2014년 12월 졸업할 수 있었다. 6년 반이나 학교를 다녔지만 뭘 배웠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동기들은 스스로를 “우린 저주받은 세대”라고 불렀다. 졸업은 끝이 아니었다. 북한에서 대학 졸업생들은 의무는 아니지만, 90%가 입당을 위해 군대를 간다. 남학생은 일반 병사로 가고, 여학생은 기무, 재정 참모 등 군관이 된다. 군 복무 기간은 4∼5년이다. 요즘 평양 대졸 여성들의 평균 결혼연령은 32∼33세다. 그럴 수밖에 없다. 영희는 2015년 3월 입대해 4년 만에 입당하고 제대했다. 08학번 영희는 만 28세가 된 2019년 4월에야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제부터 그는 결혼할 남자를 찾아야 한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9-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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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미협상 중심축 국무위로 옮겨… 최룡해-최선희 라인 뜬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1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차 회의를 통해 ‘포스트 하노이’ 구상을 어느 정도 완성했다. 대미·대남 협상 조직에 변화를 두면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의 협상 돌파구를 찾는 동시에 자력갱생을 통해 미국 주도의 제재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것을 성과로 보여주겠다는 것. 특히 김 위원장이 핵심 대미 라인들을 국무위원회에 결집시키고, 대남 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까지 국무위원회 산하로 옮긴 것으로 분석됐다.○ 대미 협상, 통전부에서 국무위로 최룡해는 우리의 국회 격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차지한 데 이어 새로 신설된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오르며 명실상부한 2인자가 됐다. 다만 권력 집중을 우려해 맡아왔던 당 조직지도부장 직책은 리만건 당 부위원장에게 넘겼을 가능성이 나온다. 최룡해는 11일 김 위원장의 국무위원장 재추대 연설에 나서 “최고영도자 동지를 따르는 길에 우리 조국의 존엄과 영예, 무궁한 발전과 찬란한 미래가 있다”며 충성 맹세를 했다. 관심을 끄는 것은 그동안 두 차례 북-미 정상회담에서 평양을 지켰던 최룡해가 대미 협상 전면에 나서느냐다. 그가 2인자가 된 국무위원회엔 김영철 통일전선부장, 리용호 외무상,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이상 위원)에 ‘김정은 집사’ 김창선 부장, 김혁철 대미특별대표까지 있다. 하노이 결렬 이후 경질설까지 돌았던 김영철을 견제하거나 역할에 따라선 협상 바통을 이어받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여기에 당 중앙위 위원-국무위원-외무성 제1부상까지 휩쓴 최선희의 역할은 대폭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은 “김영철의 거친 화법을 불편해했던 미국으로서는 최룡해를 더 선호할 수 있다. 과거 중국, 러시아 특사 경험이 있는 최룡해가 대미 특사로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여기에 내각 아래 있던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국무위원회 산하 조직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고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이 ‘최고인민회의 분석 보고서’를 통해 밝혔다. 대미 실무는 외무성, 대남 실무는 조평통에 맡기지만 이를 국무위원회 아래 넣으면서 김 위원장이 직접 세세히 챙기겠다는 것이다. ○ 시 주석 “北 사회주의 사업 새로운 역사 단계” 김 위원장은 10일 당 전원회의에서 ‘자력갱생’을 투쟁 노선으로 강조하면서 경제의 새 사령탑인 내각총리에 김재룡 자강도 당 위원장을 내세웠다. 김재룡은 중앙 정치에선 낯선 ‘지방 토박이 관리’로 산간 오지인 자강도를 관리하다가 자력갱생 실무 지휘봉을 잡게 됐다. 자강도는 1990년대 고난의 행군 때 자체적으로 경제난을 타개한 ‘강계 정신’으로 유명한 곳이어서 제재 장기전에 대비해 당시 노하우 전파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평가가 나온다. 한편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12일 김 위원장에게 축전을 보내 국무위원장에 재추대된 것을 축하하며 “북한의 경제사회 발전이 끊임없이 새로운 성과를 얻었으며 사회주의 사업은 새로운 역사 단계에 진입했다. 중국과 북한은 끈끈한 이웃 나라”라고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축전을 보내 “양자 및 지역 현안들과 관련 (김 위원장과) 공조할 준비가 돼 있음을 확인하고 싶다”고 밝혔다고 타스통신이 전했다. 황인찬 hic@donga.com·주성하 기자}

    • 2019-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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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 최고인민회의’ 분석해 보니…김정은의 진짜 속마음이 보였다

    “김영철은 이제 빠져, 최룡해가 외무성 데리고 해봐”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4기 1차 1일 회의가 11일 마무리되면서 숨 가쁘게 이어져 온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4월 행보도 일단락을 맺게 됐다. 4월 초에 보여준 김 위원장의 행보를 자세히 분석해 보면, 북한이 발표하는 공식 성명과는 달리 김정은의 진짜 속마음이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다.● 통전부 중심 대미협상, 국무위 중심으로 11일 제14기 1차 1일 회의에선 북한의 지도부 개편이 다뤄졌다. 가장 눈길을 끈 부분은 대미협상 라인을 새롭게 정비하고 크게 힘을 실어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북미 협상은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이 주도해 왔다.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나 김혁철 국무위원회 대미특별대표 등도 회담에 등장하긴 했지만, 김 부장의 영향력이 가장 컸다. 즉 김정은을 둘러싼 대미협상 라인 중 김영철의 입김이 가장 셌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번 최고인민회의를 계기로 김정은은 통전부가 주도해 온 북미 협상을 국무위원회 차원에서 다루겠다는 의지와 함께 정통 외교 라인인 외무성에 힘을 실어줬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는 최룡해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임명과 최선희의 국무위원 선임이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북한을 대외적으로 대표하며, 대외 외교를 책임지는 자리다. 지금까지 이 자리를 91세인 김영남이 차지하고 있었다. 고령의 김영남은 대미협상에서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젊은 최룡해가 상임위원장이 되면서 앞으로 그의 외교활동이 대단히 활발해지는 것은 물론, 김영철이 맡았던 대미 특사도 최룡해가 직접 넘겨받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대미 강경파인 김영철보다 상대적 온건파인 최룡해가 북미협상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것은 교착상태인 북미회담에 새로운 변수가 된다. 최룡해는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 직에도 임명되어 국무위원들인 리수용 당중앙위원회 국제부장, 김영철 통일전선부장, 리용호 외무상, 최선희 외무성 부상 등을 지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최선희는 부상급에 불과하지만 이번 회의에서 상도 임명되지 못하는 국무위원이 됐다. 이는 김정은이 외무성 라인 중심의 대미협상파에 엄청난 힘을 실어준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한편으론 하노이 회담 이후 최선희에 대한 신뢰가 더욱 커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시에 향후 북미협상의 주역은 통전부 중심에서 외무성 중심으로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인선 결과는 김정은이 여전히 북미회담의 성공과 대북제재 해제에 올인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말로는 “자력갱생”, 마음은 “제재해제” 김정은은 최고인민회의 전날인 10일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4차 전원회의에서 ‘자력갱생’을 25번이나 직접 언급했다. 그는 “제재로 굴복시킬 수 있다고 오판한 적대세력에게 타격을 줘야 한다”며 “자력갱생을 번영의 보검으로 틀어쥐고, 총돌격전, 총결사전을 과감히 벌이는 것이 4차 전원회의의 기본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은 대북제재가 언제 해제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김정은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다. 즉 원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택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카드가 자력갱생인 것이다. 하지만 자력갱생은 북한 주민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수없이 들었던 말이기 때문에 내부를 단속하게 해 결집시키는 효력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4월 초에 집중적으로 이뤄진 김정은의 집중 경제 시찰은 ‘비둘기 마음은 콩밭에 가 있다’는 속담을 떠올리게 한다. 김정은은 4일 양강도 삼지연군 건설현장을 방문으로 올해 첫 경제시찰을 시작한데 이어, 6일 강원도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와 평안남도 양덕온천관광지구를 방문했다. 8일에는 개업을 앞둔 평양 대성백화점을 찾았다. 대북 제재가 해제돼야 성공할 수 있다는 곳만 찾아다닌 것이다. 삼지연과 원산, 양덕은 모두 대북 제재가 해제돼야 외부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관광단지다. 수입산 판매가 위주인 대성백화점도 대북제재가 유지되는 한 절대로 잘 나갈 수 없는 곳이다. 이런 곳들만 찾아다녔다는 것은 김정은이 겉으로는 자력갱생을 외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져 있음을 인식하고 있지만, 마음속에는 “대북제재를 풀면 내부의 관광 및 상업 인프라가 바로 받쳐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볼 때 4월의 김정은의 행보는, 그가 여전히 대북제재 해제를 위한 추가 협상에 목말라 하고 있다고 분석할 수 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9-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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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北이 가장 숨기고 싶은 것은 생화학무기”

    2017년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김정남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베트남 여성 도안티흐엉(31)이 다음 달 초 석방된다. 말레이시아 법원은 1일 흐엉에게 3년 4개월 형을 선고했는데 그가 이미 2년 넘게 수감 생활을 한 데다 통상적인 감형 절차까지 고려해 다음 달 풀려나게 됐다. 흐엉과 함께 김정남 살해에 동참한 인도네시아인 시티 아이샤(27)는 지난달 석방돼 본국으로 돌아갔다.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던 김정남 살해 사건은 주범을 밝히지 못한 채 결국 흐지부지 끝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 사건이 북한의 소행임은 누구나 안다. 북한 공작원들은 흐엉과 아이샤의 손에 각기 다른 화학물질을 묻혀 김정남의 얼굴에 바르게 했다. 따로 있으면 독성이 없는 이 물질들은 섞이는 순간 맹독성 독극물 VX로 변한다. 그래서 먼저 화학물질을 바른 아이샤는 멀쩡했지만, 두 번째 화학물질을 바른 흐엉은 독극물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흐엉이 곧바로 화장실에서 손을 씻었지만 구토 증세를 보인 이유다. 재빠르게 대처하지 않았다면 흐엉도 현장에서 죽었을 것이다. 북한은 VX처럼 두세 가지 물질이 섞이기 전까지는 독성을 띠지 않는 이원화, 삼원화 형태의 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이 독극물들은 북한에서 정치범 등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통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아직도 그 실체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북한의 핵실험이 한창이던 몇 년 전 나는 북한 현직 과학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는 “생화학무기는 북이 가장 숨기고 싶은 것이자 세계가 가장 모르는 분야”라며 “핵을 내놓아도 생화학무기를 내놓지는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또 “핵무기는 사찰이 가능할지 몰라도 화학무기는 사찰이 불가능하다”고도 했다. 그 이후에도 여러 북한 출신 관련 전문가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북한 생화학무기의 실체에 접근하지 못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화학무기의 특수한 제조 과정이 걸림돌이다. 화학무기는 각각 무해한 화학물질을 만든 뒤 특수 제작한 폭탄이나 포탄에 넣어 보관한다. 이것이 폭발해 물질이 섞이는 순간 살상무기가 된다. 따라서 화학무기는 화학 공식을 만드는 개발자만 진실을 파악할 뿐 생산자들은 자신이 화학무기용 물질을 만든다는 사실조차 알기 어렵다. 반면 핵무기는 개발자나 현장 생산자 등이 모두 핵무기를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한 화학무기 생산의 중추는 화학산업 연구의 핵심인 과학원 산하 함흥분원으로 추정된다. 함흥분원에는 화학공학연구소, 화학실험기구연구소, 화학재료연구소, 유기화학연구소, 무기화학연구소, 분석화학연구소 등 10개의 직속 연구소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함흥분원 옆에는 국방과학원 소속인 화학재료연구소가 있으며, 자강도 강계에도 화학 관련 연구시설이 있다. 이 중 어디에서 화학무기가 설계되고 만들어지는지를 특정하기는 쉽지 않다. 화학무기 연구소와 생산 라인이 같이 있다는 점도 북한 화학무기의 실체를 알기 어렵게 만든다. 특정 물질이 개발되면 필요한 양만 생산하고 해당 생산라인은 멈춰진다. 만들어진 물질은 화학무기를 운용하는 부대에서 직접 수령해 무기화한다. 미사일 운영 특수부대인 ‘전략군’처럼 화학무기 운영 전담 부대도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생물무기 개발의 목표는 한국군의 전투력 상실에 있다고 한다. 특히 장염을 일으키는 생물무기가 이미 여러 종이 생산됐다는 증언도 있다. 탄저균처럼 치명적 균도 연구를 끝낸 상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은 화학무기를 수출까지 한다. 대표적으로 시리아 정부군이 사용한 화학무기엔 북한의 기술이 사용됐다. 지난해 2월 발행된 유엔의 비공개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은 1990년대부터 시리아의 화학무기 생산을 지원했고 기술자들도 파견했다. 미국 국방정보국 한국 담당 연구원이었던 브루스 벡톨은 2007년에 사린가스와 VX로 채워진 탄두가 실수로 폭발하면서 북한 및 이란 지원단과 시리아 기술자들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북한의 생화학무기는 김정남 암살을 계기로 반짝 조명됐지만 다시 수면 아래로 묻히게 됐다. 어쩌면 김정은 정권이 존재하는 한 영영 베일에 감춰질지도 모른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9-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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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젤리명가 오리온, 탱글한 식감 ‘닥터유 젤리’ 출시

    최근 간식 시장에서 젤리 판매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젤리명가 오리온이 파우치형 곤약젤리 신제품 ‘닥터유 젤리’를 출시했다. 5년 전 690억 원대 규모였던 젤리 시장이 지난해 2000억 원대로 급성장하는 것에 발맞춘 행보다. 닥터유 젤리는 오리온이 곤약젤리 영역에 새롭게 도전하는 만큼 ‘마이구미’, ‘젤리데이’, ‘젤리밥’ 등으로 30년 가까이 축적한 젤리 노하우를 모두 아낌없이 담아낸 제품이다. 특히 1년 6개월의 개발 기간에 1500번이 넘는 배합과 실험을 거쳐 기존 곤약젤리 제품들과는 다른 ‘살아있는 탱글한 식감’을 극대화했다. 또 생물 기준 30%에 달하는 포도, 복숭아 과즙을 넣어 잘 익은 과일의 진한 맛을 그대로 살렸다. 특히 닥터유 브랜드 고유의 영양설계를 바탕으로 비타민C의 1일 영양성분 기준치를 100% 충족시킬 수 있게 했다. 오리온은 젤리 시장에 대한 관심이 높지 않았던 1990년대 초부터 차별화된 제품을 출시해 젤리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마이구미 포도’, ‘마이구미 복숭아’, ‘마이구미 딸기’ 등 마이구미 브랜드를 비롯해 아이들 타깃 펀 콘셉트의 ‘왕꿈틀이’, 고래밥 해양 생물 캐릭터를 활용한 ‘젤리밥’, 성인 여성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젤리데이’, 신맛을 강조한 ‘아이셔 젤리’ 등으로 30년 가까이 ‘젤리명가’의 위상을 이어가고 있다. 오리온 관계자는 “닥터유 젤리는 기존 곤약젤리와의 차별화를 위해 식감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기능성까지 더한 것이 특징”이라며 “맛, 영양 등 제품 하나도 꼼꼼하게 따지며 나를 위해 소비하는 ‘미코노미족’(Me와 Economy의 합성어)에게 좋은 반응을 얻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식이섬유와 수분으로 구성된 곤약은 포만감이 높고 변비 예방 효과가 탁월하다고 알려져 최근 들어 다이어트 간식으로 각광받고 있다. 이 때문에 곤약을 활용해 국수에서 장조림까지 다양한 식품이 등장하고 있다. 이 중 젤리처럼 부드럽게 먹을 수 있는 간식과 결합한 제품들이 제일 인기가 있다. 곤약젤리는 설탕을 넣지 않았지만 충분히 단맛을 낼 뿐만 아니라 비타민과 같은 영양소도 풍부해 어린이들에게도 인기 만점이다. 또 칼로리가 낮으면서 쉽게 포만감을 느끼게 하고, 포만감 효과를 오랫동안 지속하게 해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된다. GS25에 따르면 사탕 매출이 일년 중 가장 높은 화이트데이 행사 기간(3월 1∼15일)에도 젤리 매출 비율은 60%로 사탕 매출 비율(40%)을 넘어섰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9-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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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향 감도는 홍대 골목… 경포호 벚꽃길 찬란한 유혹

    ‘저 넓은 들판에 파랗게 새봄이 왔어요/가로등 그늘 밑에도 새봄이 왔어요/모두들 좋아서 이렇게 신바람 났는데/아이야 우리 손잡고 꽃구경 가자꾸나….(하략)’ 한국 포크음악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가수 이정선(68)이 1979년 발매한 4집 앨범(‘이정선 4’)에 수록된 곡 ‘봄’의 일부다. 산과 들에는 초록 새싹이 움틀 준비를 하고 있다.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심에도 붉고 노란 꽃들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꺼칠하던 가로수들도 푸른빛을 내며 생기를 되찾고 있다. 이제 따스한 봄볕을 맞으며 거리로 나설 때가 됐다. ‘한국관광공사’의 관광안내 사이트 ‘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소개한 도보여행 추천코스를 중심으로 봄에 걷기 좋은 길들을 소개한다.○ 도심 한복판에 찾아든 봄 절기상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춘분(春分)인 17일 서울 도심은 선선한 봄 날씨였다. ‘사라진 성곽길’로 소개된 광화문 일대를 걸어봤다. 서울의 옛 성곽들은 상당수 사라졌지만 길은 남았고 봄의 정취를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광화문광장을 출발해 서대문 방향으로 5분쯤 걷다 보면 서울역사박물관이 다가선다. 다양한 석상과 옛 전차 등 전시물을 지나자 박물관 본관에서 진행 중인 다양한 전시행사가 눈길을 끈다. 그 옆 아담한 고궁에 ‘흥화문(興化門)’ 현판이 보인다. 조선시대 광해군이 1618년 세운 경덕궁(현재 경희궁) 정문이다. 궁 안으로는 넓은 잔디밭과 울창한 나무숲이 펼쳐져 있다. 경희궁 인근 강북삼성병원 뒤편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1949년 피살된 ‘경교장’이 자리를 잡고 있다. 1938년 지어진 이 건물은 김구 선생이 1945년 중국에서 돌아와 서거할 때까지 집무실 겸 숙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강북삼성병원 건너편에는 연인들의 명소로 꼽히는 정동길이 있다. 편도 1차로에 이화여고, 예원학교, 작은 카페, 식당 등이 있어 구경하며 걷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덕수궁 돌담길을 끼고 걷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을 들러도 좋다. 전시회를 보지 않더라도 미술관 주변의 멋진 조형물과 숲만으로도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옛 추억을 되새겨도 좋다. 이처럼 도심 속에서 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는 인천 중구 산책길, 대전 유성구 공부길, 부산 시간여행길 등을 꼽을 수 있다. 한국관광공사 김명주 홍보팀장은 “도보여행 추천코스 17곳은 누리꾼들의 조회수가 가장 많은 곳들로 선정됐다”며 “앞으로는 많은 국내 관광객이 여가시간을 보다 쾌적하게 지낼 수 있도록 잘 알려지지 않은 유망 관광지를 발굴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 호수와 들녘을 뒤덮은 봄 최근 기온이 올라가면서 불청객 미세먼지에 고통받는 이들이 많이 찾는 곳이 있다. 강원 강릉시 경포호다. 특히 4월이 되면 경포호 주변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상춘객들을 유혹한다. 1960년 경포해수욕장이 개장하면서 조성된 벚꽃길은 수령 100년을 헤아리는 10여 그루의 벚나무도 있어 볼거리를 제공한다. 여기에 조선 후기 양반집인 선교장과 관동팔경(關東八景) 가운데 하나인 경포대, 참소리축음기&에디슨박물관 등도 모두 경포호를 둘러본 뒤 찾아볼 만한 곳들이다. 소설 ‘토지’의 주인공이 돼 봄을 맞는 일도 색다른 경험이 될 수 있다. 경남 하동군 악양면 일대를 둘러보면 된다. 평사리공원부터 드라마 토지를 촬영한 세트장, 평사리문학관에 이르는 4.5km를 걷다보면 서희, 길상, 최치수 등 소설 속 등장인물이 걷고 먹고 마시며 잠자던 공간을 마주할 수 있다. 전남 영암군 군서면에는 2200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전통마을이 있다. 월출산(月出山)의 서쪽 자락에 위치한 구림전통한옥마을(왕인박사마을)이다. 많은 역사적 설화와 인물을 배출한 곳으로 12개의 누각과 정자, 전통가옥, 돌담, 고목나무 등이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이곳에서 시작해 죽정서원∼왕인박사유적지∼성기동국민관광지를 걷다 보면 먼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경험하는 시간여행도 가능하다. 이 밖에 경기 남양주시 팔당역 주변길이나 강원 고성군의 문화산책길, 경북 상주시의 느림보산책길, 경남 밀양시의 바람길, 전남 장흥군의 유치자연휴양림, 제주의 올레길 등을 걷다 보면 물아일체의 상태에서 봄에 안길 수 있다. ○ 골목길로 파고든 봄 서울 마포구 상수동에 위치한 홍익대라는 이름에서 시끌벅적한 이미지만 떠올린다면 아직 이 거리를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홍익대 번화가에서 5분만 더 걸어가면 문화와 예술이 공존하고, 개성 넘치는 카페와 펍, 레스토랑이 구석구석 숨어 있는 골목길들을 만날 수 있다. 발 가는 대로 걷다 보면 이 골목이 저 골목 같고, 저 골목이 이 골목 같은 풍경을 만날 수 있다. 골목 곳곳에 숨어 있는 조용한 명당을 찾는 재미에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이 거리의 대표적 이색공간인 윤스칼라에서는 한류 드라마의 대표작인 윤수호 감독의 사계절 시리즈 ‘가을동화’ ‘겨울연가’ ‘여름향기’ ‘봄의 왈츠’에서 사용한 소품과 현장 사진, 드라마 세트 등을 볼 수 있다. 숲속 같은 분위기에서 맛있는 커피 한잔도 가능하다. 비영리 갤러리인 대안공간 루프에선 유망한 젊은 작가들의 전시를 만날 수 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색다른 볼거리를 찾고 싶다면 불쑥 들러도 된다. 루프 앞에는 비보이 전용극장도 있다. 상수동 이색거리에서 여유를 만끽했다면 다시 홍대입구역 쪽으로 몇 골목 걸어보자. 홍대 걷고 싶은 거리, 홍대 예술의 거리, 홍대 클럽거리 등이 즐비하다. 세상은 다시 분주해진다. 골목길이지만 전혀 다른 느낌을 찾는다면 경북 군위군 부계면 한밤마을 돌담길이 추천 1순위이다. 번잡한 도시의 골목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다. 이 밖에 경북 경주시와 경남 통영시에서도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골목길 경험이 가능하다.황태훈 beetlez@donga.com·주성하 기자}

    • 2019-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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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김정은국방종합대학

    북한에 김정은의 이름이 붙은 대학이 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 대학은 김정은국방종합대학(김정은국방대)으로 국방 과학 인재들을 양성하는 곳이다. 2016년 6월 13일 이 대학을 방문한 김정은은 “국방종합대학의 기본 임무는 동방의 핵대국을 빛내어 나가는 기둥감을 훌륭히 키워내는 것”이라며 “우리나라에서 제일 실력 있는 대학, 대학 위의 대학, 세계 일류급의 대학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돌아갈 때 김정은은 대학 명칭 앞에 자기 이름을 붙이도록 허락했다. 북한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이름을 쓰는 대학이 각각 3개, 2개가 있다.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일성군사종합대학, 김일성정치군사대학은 당·정·군의 중추적 간부들을 양성하는 최고 대학이다. 김정일 시대에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이 생겼지만, 이는 대학이라기보다는 대남 공작원 비밀 훈련소에 가깝다. 김정일 사망 1년 뒤 김정은은 보안(경찰)간부 양성 대학을 김정일인민보안대학이라고 명명했다. 김정은의 이름을 딴 대학은 국방대가 처음이다. 겸손을 내세우며 자기 생일도 공휴일로 지정하지 않는 김정은이 자기 이름을 쓰게 허락했다는 것은 국방 과학을 매우 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웅변처럼 보여준다. 20여 년 전 사망한 김일성보다 살아있는 권력인 김정은의 끗발이 더 센 것은 당연한 일이다. 평양시 용성구역 중이동에 있는 김정은국방대의 대외명은 852군부대이다. 학생들도 군복을 입고 다니며 증명서엔 852군부대 학생으로 돼 있다. 이곳엔 각 지역 수재 학교인 1고등 최우수 졸업생을 중심으로 최고의 이공계 인재들을 최우선으로 뽑을 권리가 있다. 다른 특혜도 많다. 김정은이 수백 채의 최신식 아파트를 지어 교직원들에게 선물로 주고, 학생들을 졸업 전 노동당에 입당시킨 게 대표적이다. 학생들은 “김일성대는 저리 가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5년제 과정을 마친 졸업생들은 상위(중위와 대위 사이) 계급을 받고 군에 가거나 국방과학원이나 각 군수공장에 배치된다. 김정은국방대의 제1학부는 로켓공학부이다. 북한 로켓의 아버지로 불리는 김국태를 위시해 최고의 미사일 개발자들이 교수진이다. 국방대는 1963년 6월 13일 문을 열었다. 주요 임무는 미사일 개발이었다. 1960년대 후반 국방대는 강계공업대학으로 이름을 바꾸고, 자강도 강계로 이전했다가 1990년대 다시 평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2016년 김정은국방대가 됐다. 북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에는 김정은국방대 인재들이 핵심 역할을 했다. 액체연료 엔진부터 고체연료 엔진 제작 실험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이들이 주도했고, 실험 도중 난관에 부닥칠 때마다 이들은 자체로 해결하거나 러시아 기술을 베껴서 극복해 나갔다. 김정은국방대 바로 옆엔 요즘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산음동 ICBM 조립공장이 있다. 미사일 설계와 조립이 한 세트처럼 맞물려 있다. 김일성대조차도 늘 정전 속에서 살고 있지만, 김정은국방대는 단 10분만 전기가 꺼져도 큰 사고로 여겨지고 비상이 걸린다. 북한이 2012년 12월 인공위성 발사라고 주장하는 ‘은하 3호’ 로켓 발사를 성공한 뒤 강일웅 국방대학장이 주석단 아래 1-1번 좌석에 앉기도 했다. 중장(한국군 소장) 편제인 학장에겐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특혜였다. 김정은국방대에는 8개 이상의 학부가 있다. 각 학부에는 전자공학부, 금속공학부, 화학재료공학부 등의 이름이 붙어 있지만, 외부에는 숫자만 공개된다. 가령 323조는 3학부 2학년 3반이란 뜻이다. 국방대는 김정은의 이름이 붙기 전까지 3000∼4000명의 학생이 공부했다. 하지만 이후 학과가 10개 이상으로 늘었고 학생 수 역시 증가했다는 증언이 있다. 최근 김정은국방대에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춰 드론이나 로봇과 같은 인공지능(AI) 관련 무기를 연구하는 학부가 새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다. 윤리가 안중에 없는 북한이기에 몇 년 뒤 어떤 괴물 무기가 나올지 알 수 없다. 집권 초기 5년 내내 쏘고 터뜨리는 데에만 집착한 김정은의 행보를 보면 국방대에 자기 이름을 붙인 것은 너무 잘 이해가 된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김정은은 “경제 발전보다 더 절박한 일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말이 신뢰를 얻자면 머잖아 김정은경제종합대학 정도는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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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김정은의 무너진 꿈, 받아온 숙제

    북-미 정상회담을 열흘쯤 앞둔 때, 북한이 이번 회담을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내부 움직임 두 가지가 포착됐다. 첫 번째는 2월 중순 대외 무역 기관과 회사들에 대한 전면적 조사였다. 처벌하기 위한 조사는 아니었다. 각 회사들의 매출액과 거래 품목, 해외 바이어 등을 파악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북한 내부 관계자는 “제재 와중에 난립했던 작은 회사들은 정리하고 주요 무역 자원을 국가가 틀어쥐겠다는 의미였다”며 “북-미 회담이 성공적으로 진행돼 주요 제재가 해제될 상황을 대비하려는 움직임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같은 시기에 내려진 두 번째 조치는 해외 체류 4년 이상 외교관과 무역일꾼들에게 떨어진 귀국명령이었다. 지난해 11월 망명 후 잠적한 조성길 이탈리아 주재 북한대사관 대사 대리 부부가 빌미가 됐다. 북한은 떠들썩한 탈북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해외 체류자 철수나 임시 귀국 조치를 취했다. 따라서 이번 일이 새로운 일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결코 단순한 조치는 아니었다. 그동안 지속된 대북 제재로 북한 해외 인력의 상당수가 귀국하면서 해외에 남은 무역일꾼들에 대한 의존도가 크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베테랑들에 대한 철수 조치는 그만큼 믿는 구석이 있다는 의미였다. 김정은이 열차 여행을 선택한 것도 나쁘지 않은 징후였다. 그가 비행기와 열차 중 불편한 열차 여행을 고른 것은 개인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북한에선 김정은에게 열차에서 왕복 130시간 넘게 불편을 감수하고, 평양을 닷새 넘게 추가로 비워야 하는 무리한 일정을 요구할 만한 간부가 없다. 김정은은 열차를 타고 베트남을 가면서 중국의 발전상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을 것이다. 중국 대륙을 3박 4일간 둘러보며 김정은은 북한의 미래를 이모저모 꿈꿨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기대는 허망하게 무너졌다. 김정일이 준비해 간 보따리를 유일한 구매자였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최선희 외무성 부상은 “미국식 거래 계산법에 대해서 굉장히 의아함을 느끼고 계시고 생각이 좀 달라지신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김정은의 심기를 전달했다. 언론에 공식적으로 밝힌 내용이 이 정도라면 실제로는 김정은이 크게 대노했다는 뜻이다. 이제 김정은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미국식 거래 계산법을 공부하거나 신년사에서 밝힌 대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어떤 결심을 해도 말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 그의 심정으로는 새로운 길을 찾아 미국에 본때를 보여주고 싶을 것이다. 굴레 벗은 망아지처럼 온갖 실험과 도발로 국제정치 상황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핵 기술을 외국에 팔겠다고 선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선택은 목숨까지 내걸어야 하는 위험한 도박이 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북한의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중단을 자신의 최대 치적으로 선전하고, 김정은에게 온갖 찬사를 보내왔다. 따라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신의 최대 치적이 최대 수모로 바뀌는 상황을 방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재선을 위해서라면 이라크처럼 북한을 공격할 수도 있다. 새로운 길을 위해 북한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를 계산하기란 쉽지 않은 문제다. 다만 지금 같은 강력한 제재가 지속된다면 북한은 머지않아 ‘제2의 고난의 행군’에 들어가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경우 체제 붕괴로 이어지진 않겠지만, 김정은의 권위는 북한 인민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다. 고난의 행군 시절을 스위스에서 보낸 김정은은 곳곳에서 시체가 나뒹굴던 참혹함을 다 알지 못한다. 김정은은 17세 무렵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에게 “우리는 매일 이렇게 제트스키, 승마를 즐기는데 일반 인민은 뭘 하는가. 유럽과 일본에 가면 식량과 상품이 쌓여 있는데 북한에 돌아와 보면 아무것도 없다”며 고민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김정은의 마음 한구석에 아직도 당시의 고뇌가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핵을 움켜쥐고 있는 한, 북한 인민이 제트스키와 승마를 즐기며 살 수 있는 날은 절대 오지 않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9-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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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평양 아파트 베란다 수난사

    김정은이 “외국인들이 보면 비웃겠다”고 한마디 했나 보다. 이달 들어 평양시내 아파트들이 1층 방범용 쇠살창을 떼어내느라 어수선하다. 방범창 철거가 간단해 보이지만 속내를 보면 복잡하다. 무엇보다 치안이 문제다. 이걸 떼면 베란다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베란다에 김치도 놔두고, 물품도 둘 수 있지만 쇠살창이 없으면 누가 몰래 가져가도 어쩔 수가 없다. 1층 베란다가 뚫리면 2, 3층도 도난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평양의 아파트 거주민 모두가 이번 조치에 불만을 감추지 않는 이유다. 평양에는 수만 명으로 추정되는 도둑 후보들이 득실거린다. 각종 공사가 진행되면서 지방에서 공사인력으로 차출된 군인들과 돌격대다. 이들은 평양에 들어와 천막을 치고 사는데 밤만 되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거리를 배회한다. 아파트에 폐쇄회로(CC)TV가 있는 것도 아니고, 늘 정전이라 암흑 속에서 살다 보니 도둑질하기에 십상이다. 게다가 평양에선 일반적으로 도둑질에 대해 처벌이 경미하다. 지방에서 강제로 끌려온 군인들이 배가 고파 훔쳐 먹었다고 하면 처벌하기도 애매하다. 이런 것까지 감옥에 보내면 감옥이 넘쳐날 수밖에 없다. 군대에서 쫓아내면 너도나도 도둑질에 나설 것이다. 그냥 부대에 통보해 정치적 처벌을 요구하는 수밖에 없는데, 부대에 돌아가면 다 같은 처지라 “바보처럼 들켰느냐”는 비웃음을 받는 정도에 그친다. 결국 자기 집을 지키는 책임은 평양 사람들의 몫이다. 서울처럼 치안이 발달한 도시에서도 방범창이 없으면 불안한데 평양은 오죽하겠는가. 남쪽에선 방범창이 없어도 베란다 창문만 잘 잠그면 된다. 하지만 평양은 베란다에 창문을 설치하는 게 금지돼 있다. 김정일의 ‘유훈’ 때문이다. 평양 사진을 보면 대다수 베란다가 휑한 것도 이런 이유다. 창문을 막으면 난방 효과도 있고, 베란다를 창고로 쓸 수 있지만 평양에선 안 된다. 평양 베란다의 수난사는 제법 길다. 15년 전쯤 갑자기 모든 베란다를 다 막으라는 지시가 떨어진 적도 있다. 당시 사람들은 “갑자기 웬 인민을 위한 지시냐”며 감지덕지한 마음에 급히 창문을 막았다. 누구는 유리로, 누구는 비닐로 막았다. 그런데 제각각 창문이 보기 싫었는지 2011년 남포의 대안친선유리공장에서 생산된 유리를 팔 테니 그것으로 막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능력이 안 되면 당장 단층집으로 이사 가라는 협박까지 나왔다. 주어진 며칠 안에 평양시민들은 유리를 사야 했고, 대안공장 유리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당시 집안의 가보인 TV를 팔아 유리를 산 집도 많다. 지시대로 유리를 설치한 지 며칠도 지나지 않아 이번엔 무조건 당일로 베란다 창문을 모두 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때 평양의 민심은 부글부글 끓었다. 당의 방침이니 대놓고 항의할 수도 없어 베란다 유리를 망치로 사정없이 깨뜨린 사람도 여럿이었다. 베란다 유리를 뗐다 붙였다 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사람들이 추락사하기도 했다. 지시가 오락가락한 이유는 단순했다. 베란다 창문 설치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던 시점에 공장 시찰을 나갔던 김정일이 “토끼장처럼 보이니 다 떼라. 외국인들이 평양에 와보고 얼마나 비웃겠느냐”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단층집으로 내쫓는다는 협박에 급히 창문을 설치하다 보니 누구는 통유리로, 누구는 값싼 작은 유리로 조각조각 막아야 했다. 창틀에 대한 규정도 없어 누구는 알루미늄 틀을 쓰고, 누구는 나무로 급히 만들어야 했다. 그 결과 토끼장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베란다 창틀 철거 지시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다만 김정은 시대엔 통일된 창을 설치할 수 있는 대로변 아파트에만 베란다 창문이 허용됐다. 이건 돈 많은 사람들만 베란다에 창문을 달 수 있다는 뜻이다. 평양은 또 한 번 춥고 어두운 긴 겨울을 이겨냈다. 반짝 좋아진 듯했던 평양의 전기 사정은 지난해 초겨울에 접어들며 또다시 악화돼 몇 시간밖에 불이 들어오지 않을 정도다. 재작년 보안성이 몰래 중국에서 밀수해 온 10만 kW 발전기 2대가 다시 고장 났을 가능성이 크다. 외국인을 의식해 방범창까지 떼어낸 평양을 뒤로 하고 김정은은 이달 말 베트남에 날아가 역사적 북-미 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김정은이 이번 기회에 전 세계의 시선을 제대로 의식하길 바란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9-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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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학자들의 사고방식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비즈니스의 해답이 보인다

    고리타분하고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평가받던 철학이 비즈니스와 결합해 다시 돌아왔다. 불확실한 시대에 불분명한 문제들과 싸워야 하는 것이 현대인의 숙명이라면, 철학은 이들에게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깊이 있게 통찰하고 해석하는 데 필요한 열쇠를 준다. 특히 경영의 가장 큰 화두가 혁신인 기업의 입장에서 철학은 눈앞에 닥친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하는 생각의 기술을 알려준다. 저자 야마구치 슈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대학원에선 미학미술사를 공부해 경영에 관한 정식 교육은 전혀 받지 못했지만, 철학을 무기로 세계 1위 경영·인사 컨설팅 기업 콘페리헤이그룹의 시니어 파트너가 됐다. 그는 본질을 꿰뚫고 최적의 솔루션을 찾아내는 철학적 사고법이야말로 현대인의 가장 큰 무기라고 주장한다. 그는 비즈니스 현장에서 유용하게 사용하는 50가지 사상과 철학을 담아 신간을 출간했다. 이 책은 일본 아마존 인문·교양 베스트셀러에 올랐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9-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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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 베트남전에 공군 파병… ‘하노이 공중전’으로 혈맹 맺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이달 27, 28일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개최된다. 회담지로 낙점된 베트남은 미국과 북한에 있어 서로 다른 시각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국가다. 북한의 시각에서 베트남은 ‘혈맹의 국가’에서 ‘배신의 국가’로, 다시 ‘따라 배워야 할 국가’로 자리 잡았다. 미국에 베트남은 ‘패전당한 국가’에서 ‘친구의 국가’로 바뀌었고, 이제는 ‘북한의 표본이 될 국가’로 다가섰다.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50여 년 전 베트남 상공에서 미군과 북한군은 생명을 내건 전투를 벌였다. 당시 북한이 베트남 전쟁을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수백 명의 지원군을 파견하면서 펼쳐진 상황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혈맹이었던 북한과 베트남이 ‘애증의 역사’를 갖게 된 이유는 뭘까.○ “하노이 상공을 평양 하늘처럼 사수하라” 지난해 9월 9일 북한 정권 수립 7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뜻밖의 장면이 눈길을 끌었다. 베트남전 참전 공군 종대가 사상 처음으로 등장해 김일성광장을 행진한 것이다. 북한 조선중앙TV는 “비엣남(베트남)전쟁에 참가하여 수적·기술적 우세를 자랑하던 적의 공중 비적들을 무자비하게 박살내어 조선인민군의 본때를 남김없이 보여준 공군 종대가 나가고 있다”고 소개했다. 베트남 참전 사실을 숨기던 북한이 외부에 이를 당당히 공개한 것이다. 북한은 베트남전 초기 무기 10만 정, 군복 100만 벌 등 물자를 지원했다. 이후 전쟁이 본격화되자 1966년 말부터 공군과 공병부대를 ‘지원군’이란 이름으로 파병해 북베트남군을 지원했다. 공군력에서 열세에 몰린 북베트남은 소련과 중국에 먼저 조종사 파견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북한만 1개 비행연대 규모에 해당하는 조종사 60명, 정비사 50명 이상을 보냈다. 조종사들이 수시로 순환근무를 했던 것을 감안하면 베트남전 기간 연인원 1000명가량의 북한 공군 병력이 참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베트남에 파병된 북한 조종사들은 황해도 황주 주둔 203비행연대 소속이었다. 베트남 공군복장으로 참전한 북한 조종사들은 하노이 주변 비행장에 주둔했다. 당시 김일성 수상은 “하노이 상공을 평양 하늘처럼 사수하라”고 지시했다. 북한은 또 공병부대를 파견해 북베트남 당 중앙위원회와 국방부가 들어갈 갱도를 건설했고, 약 100명의 심리전 부대도 파견해 한국군 전투지역에서 활약했다.○ ‘혈맹에서 배반자로, 다시 동반자로?’ 피로 맺어진 북한과 베트남 관계는 1975년 베트남 통일 후 식어갔다. 1978년 12월 베트남이 인근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북한은 “무력침공은 국제법 위반임과 동시에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이라고 비난했다. 이후 양국은 평양과 하노이에서 각각 대사관을 철수했다. 김일성은 베트남군에 의해 쫓겨난 노로돔 시아누크 캄보디아 국왕을 평양으로 데려와 1991년 귀국할 때까지 돌봤다. 1979년 2월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했을 때에도 북한은 중국 편에 섰다. 북한과 베트남은 1984년 외교관계를 복원했지만, 이후에도 가까워질 기회를 좀처럼 찾지 못했다. 1986년 베트남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도이머이’ 개혁 정책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1992년 베트남이 한국과 수교하고 이어 1995년 미국과 수교한 것도 북한의 시각에선 배신이었다. 2004년 베트남이 자국에 입국한 탈북자 468명을 한국으로 한꺼번에 보냈을 때도 북한은 강력히 반발했다. 양국 관계는 2007년을 기점으로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이해 베트남에서 호찌민 주석 이후 처음으로 농득마인 총비서가 북한을 찾았고, 양국 우호관계를 발전시키자는 데 합의했다. 베트남을 통한 탈북자들의 한국행 루트도 막혔다. 현재 베트남은 공산당 체제를 유지하면서 개혁개방을 이루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도 성공함으로써 북한이 배우고 싶은 ‘롤모델’로 떠오르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베트남 국빈방문 일정을 소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김정은 시대 북한과 베트남이 과거 ‘혈맹과 배반’의 역사를 넘어 ‘동반자’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을지 주목된다.호찌민=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9-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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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찌민 거리 곳곳엔 北빼닮은 선전화

    #장면1. 2월의 뜨거운 햇볕에 달아오른 베트남 호찌민 시내 도로 옆에 낯익은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베트남 국기를 바탕으로 노동계급을 상징하는 노동자가 있고, 그 뒤로 농민, 군인, 체육인, 지식인을 상징하는 사람들이 서 있는 그림이었다. 북한 노동당이 가장 많이 쓰는 선전화와 구도가 판박이였다. 밑에 적힌 베트남어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북한이라면 저 밑에 “당의 기치 따라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향하여 앞으로”라는 구호가 적혀 있을 것이다. 선전화를 보는 순간 ‘베트남이 공산당 국가구나’라는 생각을 새삼 떠올렸다. 강력한 붉은색을 바탕으로 그려진 선전화는 시내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베트남의 국부 호찌민 전 주석이 선전화 속에서 인자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고, 선전화의 대다수가 계급적 화합과 충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밑에 적힌 베트남어만 아니라면 북한 선전화라고 해도 전혀 차이점이 없어 보였다. #장면2. 베트남에서 규모가 제일 큰 ‘호찌민 전쟁기념관’에서 북한 황해남도 신천군에 있는 ‘신천박물관’을 떠올렸다. 기념관 입구에 전시된 미군 전투기와 탱크를 볼 때만 해도 승전국 전쟁 기념관이기에 북베트남군이 승리한 기록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념관에는 전쟁으로 인한 끔찍한 참상들만이 전시돼 있었다. 학살의 기록을 담은 사진과 전시물들을 보면서 ‘신천박물관’을 떠올렸다. 기념관 측은 전시 의도에 대해 “미군을 고발하기 위해 전시한 것이 아니라 전쟁이 인간을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세상 사람들이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철저히 미군의 잔혹성에 치를 떨도록 기획한 신천박물관과 다른 점이었다. 북한도 북-미 관계를 정상화한 뒤 신천박물관에 “증오가 아닌 기억을 위한 것”이라는 설명문을 새로 붙이게 될지 모른다. #장면3. 관광지 해변에서 택시 운전사는 노선이 표시된 구글맵을 꺼내 보여주는데도 태연히 방향과 반대로 차를 몰고 갔다. 영어로 설명해도 못 알아듣는 척이다. “스톱”이라고 외치자 ‘그럼 차를 돌릴까’라는 제스처를 취한다. 머리를 끄덕이자 왔던 길로 돌아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갔다. 이 택시 운전사를 보면서 외국 기업들이 들어가는 족족 사기를 당해 결국 짐을 싸고 나오는 북한을 떠올렸다. 외국 기업에 대한 북한의 호의는 차에 오를 때까지다. 전 세계가 신뢰할 수 있는 사회주의라는, 중국과 베트남도 이루지 못한 일을 북한은 과연 이뤄낼 수 있을까.호찌민=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9-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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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혈맹이 배반자로, 다시 동반자로?’ 호치민에서 떠올린 北-베트남 굴곡사

    #장면1 설 연휴를 맞아 찾은 호치민시. 2월의 뜨거운 햇볕에 달아오른 시내 도로 옆에 낮 익은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베트남 공산당기를 바탕으로 노동계급을 상징하는 노동자가 있고, 그 뒤로 농민, 군인, 체육인, 지식인을 상징하는 사람들이 서 있는 그림이었다. 북한 노동당이 가장 많이 쓰는 선전화와 구도가 판박이었다. 밑에 적힌 베트남어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북한이라면 저 밑에 “당의 기치 따라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향하여 앞으로”라는 구호가 적혀 있을 것이다. 선전화를 보는 순간 “베트남이 공산당 국가구나”라는 생각을 새삼 떠올렸다. 강력한 붉은색을 바탕으로 그려진 선전화는 시내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 전 주석이 선전화 속에서 인자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고, 선전화의 대다수가 계급적 화합과 충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밑에 적힌 베트남어만 아니라면 북한 선전화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어 보였다.#장면2 베트남에서 규모가 제일 큰 ‘호치민전쟁기념관’에서 북한 황해남도 신천군에 있는 ‘신천박물관’을 떠올렸다. 기념관 입구에 전시된 미군 전투기와 탱크를 볼 때만 해도 승전국 전쟁 기념관이기에 북베트남군이 승리한 기록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념관에는 전쟁으로 인한 끔찍한 참상들만이 전시돼 있었다. 학살의 기록을 담은 사진과 전시물들을 보면서 ‘신천박물관’을 떠올렸다. 기념관 측은 전시 의도에 대해 “미군을 고발하기 위해 전시한 것이 아니라 전쟁이 인간을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세상 사람들이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철저히 미군의 잔혹성에 치를 떨도록 기획한 신천박물관과 다른 점이었다. 북한도 북미 관계를 정상화한 뒤 신천박물관에 “증오가 아닌 기억을 위한 것”라는 설명문을 새로 붙이게 될지 모른다.#장면3 관광지 해변에서 택시 기사는 노선이 표시된 구글맵을 꺼내 보여주는데도 태연히 방향과 반대로 차를 몰고 갔다. 영어로 설명해도 못 알아듣는 척이다. “스톱”이라고 외치자 ‘그럼 차를 돌릴까’라는 제스처를 취한다. 머리를 끄덕이자 왔던 길로 돌아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갔다. 이 택시운전사를 보면서 외국 기업들이 들어가는 족족 사기를 당해 결국 짐을 싸고 나오는 북한을 떠올렸다. 외국기업에 대한 북한의 호의는 차에 오를 때까지다. 전 세계가 신뢰할 수 있는 사회주의라는, 중국과 베트남도 이루지 못한 일을 북한은 과연 이뤄낼 수 있을까. ▼ 北에게 베트남은 ‘혈맹의 국가→배신의 국가→배워야 할 국가’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이달 27, 28일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개최된다. 회담지로 낙점된 베트남은 미국과 북한에 있어 서로 다른 시각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국가다. 북한의 시각에서 베트남은 ‘혈맹의 국가’에서 ‘배신의 국가’로, 다시 ‘따라 배워야 할 국가’로 자리 잡았다. 미국에게 베트남은 ‘패전당한 국가’에서 ‘친구의 국가’로 바뀌었고, 이제는 ‘북한의 표본이 될 국가’로 다가섰다.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50여 년 전 베트남 상공에서 미군과 북한군은 생명을 내건 전투를 벌였다. 당시 북한이 베트남 전쟁을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수백 명의 지원군을 파견하면서 펼쳐진 상황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혈맹이었던 북한과 베트남의 ‘애증의 역사’를 갖게 된 이유는 뭘까.●“하노이 상공을 평양 하늘처럼 사수하라” 지난해 9월 9일 북한 정권수립 7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뜻밖의 장면이 눈길을 끌었다. 베트남전 참전 공군 종대가 사상 처음으로 등장해 김일성광장을 행진한 것이다. 북한 조선중앙TV는 “비엣남(베트남) 전쟁에 참가하여 수적·기술적 우세를 자랑하던 적의 공중 비적들을 무자비하게 박살내어 조선인민군의 본때를 남김없이 보여준 공군 종대가 나가고 있다”고 소개했다. 베트남 참전 사실을 숨기던 북한이 외부에 이를 당당히 공개한 것이다. 북한은 베트남전 초기 무기 10만정, 군복 100만 벌 등 물자를 지원했다. 이후 전쟁이 본격화하자 1966년 말부터 공군과 공병부대를 ‘지원군’이란 이름으로 파병해 북베트남군을 지원했다. 공군력에서 열세에 몰린 북베트남은 소련과 중국에 먼저 조종사 파견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북한만 1개 비행연대 규모에 해당하는 조종사 60명, 정비사 50명 이상을 보냈다. 조종사들이 수시로 순환근무를 했던 것을 감안하면 베트남전 기간 연인원 약 1000명가량의 북한 공군 병력이 참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베트남에 파병된 북한 조종사들은 황해도 황주 주둔 203비행연대 소속이었다. 베트남 공군복장으로 참전한 북한 조종사들은 하노이 주변 비행장에 주둔했다. 당시 김일성 수상은 “하노이 상공을 평양 하늘처럼 사수하라”고 지시했다. 공중전은 주로 하노이 상공과 인근 항구도시 하이퐁 해상에서 벌어졌다. 북한 공군은 시속 1000㎞ 미그 17기로 시속 2000㎞가 넘는 미국 최신예 전폭기 F-105를 상대했다. 1967년 5월 28일 북한 미그 17기 8대가 하노이 상공에서 미군 전투기 32대와 싸워 12대를 격추했는데 북한군 피해는 전무했다. ‘하노이 공중전’으로 알려진 그 전투였다. 1983년 귀순한 북한군 조종사 이웅평 상위는 “베트남전에서 북한군 조종사 67명이 전사했다”고 말했다. 공중전이 주로 해상에서 진행된 까닭에 대다수 전사자들은 베트남 해상에 떨어져 산화했다. 림장안 부연대장을 포함해 시신이 있는 전사자 14명은 하노이 북부 박장성에 묻혔다. 북한은 또 공병부대를 파견해 북베트남 당 중앙위원회와 국방부가 들어갈 갱도를 건설했고, 약 100명의 심리전 부대도 파견해 한국군 전투지역에서 활약했다.●‘혈맹에서 배반자로, 다시 동반자로?’ 피로 맺어진 북한과 베트남 관계는 1975년 베트남 통일 후 식어갔다. 1978년 12월 베트남이 인근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북한은 “무력침공은 국제법 위반임과 동시에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이라고 비난했다. 이후 양국은 평양과 하노이에서 각각 대사관을 철수했다. 김일성은 베트남군에 의해 쫓겨난 노로돔 시하누크 캄보디아 국왕을 평양으로 데려와 1991년 귀국할 때까지 돌봤다. 1979년 2월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했을 때에도 북한은 중국 편에 섰다. 북한과 베트남은 1984년 외교관계를 복원했지만, 이후에도 가까워질 기회를 좀처럼 찾지 못했다. 1986년 베트남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도이모이’ 개혁 정책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1992년 베트남이 한국과 수교하고 이어 1995년 미국과 수교한 것도 북한의 시각에선 배신이었다. 1999년 탈북한 홍순경 전 태국 주재 북한대사관 참사는 “북한과 베트남 사이엔 별로 왕래도 없었다”며 “북한으로선 베트남에 섭섭한 것이 꽤 있었다”고 말했다. 2004년 베트남이 자국에 입국한 탈북자 468명을 한국으로 한꺼번에 보냈을 때도 북한은 강력히 반발했다. 양국 관계는 2007년을 기점으로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이해 베트남에서 호치민 주석 이후 처음으로 농 득 마잉 총비서가 북한을 찾았고, 양국 우호관계를 발전시키자는데 합의했다. 베트남을 통한 탈북자들의 한국행 루트도 막혔다. 현재 베트남은 공산당 체제를 유지하면서 개혁개방을 이루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도 성공함으로써 북한이 배우고 싶은 ‘롤모델’로 떠오르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2차 북미정상회담을 계기로 베트남 국빈방문 일정을 소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김정은 시대 북한과 베트남이 과거의 ‘혈맹과 배반’의 역사를 넘어 ‘동반자’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을지 주목된다. 호치민=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9-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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