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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일과 방사포 시험 발사에 몰두하던 북한이 최근 청와대를 향해 “새벽잠까지 설쳐대며 허우적거리는 꼴” “겁먹은 개”라며 비아냥거릴 때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봤다. “새벽잠 설치지 말고 그냥 푹 자도 되지 않을까?” 찾아보니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북한 미사일 도발로 새벽에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주재한 적이 없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참석한 NSC 상임위 회의나 안보관계 장관 회의만 열렸을 뿐이다. 기자 생활 17년간 북한 문제로 NSC 새벽회의가 열리는 장면을 수없이 봤지만 그 자리에서 뾰족한 대책을 내놓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또 북한이 핵미사일 같은 파장이 큰 무기를 쏘는 것이 아니고 지금처럼 며칠마다 비슷한 계열의 미사일이나 방사포만 시험하는 상황이라면 국방부 차원의 대응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더 나아가 북한이 새벽에 뭔가를 쐈다고 무조건 대통령부터 장관까지 뛰쳐나와 긴급회의를 여는 방식도 바꾸는 것을 고려해볼 만하다. 북한이 새벽마다 미사일을 쏘는 데는 청와대를 조롱하려는 의도도 있어 보이는데, 만약 그렇다면 무시하는 것이 효과적인 대응일 수 있다. 게다가 북한군 전력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김정은이 집권 후 오로지 미사일과 조종 방사포 무력이 포함된 ‘전략군’에만 관심을 집중한 탓이다. 북한은 그동안 미사일과 방사포를 멀리, 정확히 쏘는 데만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국방력은 미사일과 방사포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전쟁은 결국 상대의 땅을 딛는 쪽이 이긴다. 이를 위해선 육해공군이 종합적으로 골고루 발전해야 한다. 북한은 오래전에 육해공군의 전력 증강 노력을 팽개쳤다. 그 대신 미사일을 쏘고 숨어버리는 팔레스타인 무장조직 하마스나 다름없는 전형적인 약자의 군사전략으로 가고 있다. 30∼40년 전만 해도 북한군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남침을 감행할 가능성도 컸다. 지금 북한은 그럴 군사적 능력을 잃었다. 북한 육군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1980년대까지 육군의 핵심 전력인 기갑은 북한이 더 강했다. 그때까지 한국군은 1952년 양산하기 시작한 미국제 M48 계열 전차로 무장했다. 반면 북한은 1960년대부터 탱크를 자체 생산했고, 수량도 압도적으로 많았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북한의 탱크는 1972년 생산된 소련의 T72 계열 전차에서 진화를 멈췄다. 이 탱크는 1990년대에 이미 ‘강철의 과부 제조기’란 오명을 뒤집어썼다. 걸프전 때 첨단 장비로 무장한 미군에 손쉬운 먹잇감이 되면서 붙여진 별명이다. 반면 현재 한국군의 주력 탱크인 K1A1은 북한군 탱크보다 사거리나 관통력이 2배 이상 차이 나고 다른 성능도 월등하다. 제공권을 잃는다면 기갑부대는 무용지물이다. 제공권을 결정짓는 북한의 공군력도 이미 한국에 뒤진다. 1980년대 북한은 한국과 동일한 세대의 전투기를 운용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북한은 4세대 전투기 초기 모델로 1980년대 초반 생산된 미그29를 불과 수십 대만 갖고 있다. 공군의 주력은 여전히 2, 3세대 전투기들이다. 반면 한국은 5세대 모델인 F35 스텔스기를 보유하고 있다. 공중전에서 전투기 한 세대의 차이는 일방적 학살로 이어진다. 해군의 격차는 육군이나 공군보다 훨씬 크다. 북한 잠수함이 남쪽 바다를 휘젓고 다니던 1980년대 한국엔 작전 능력을 가진 잠수함이 없었다. 지금은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이지스함 등 각종 최신 함정으로 무장한 한국 해군 앞에 북한의 해군은 하루도 버티기 힘들다. 북한이 미사일, 방사포 전력을 기형적으로 키워도 전세를 뒤집을 능력은 안 된다. 이런 무기들은 기습 발사는 가능하지만 제공권을 상실한 상태에선 오래 살아남기 어렵다. 모든 분야에서 열세인 북한은 핵무기 개발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핵무기를 쓰는 순간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김정은도 잘 안다. 따라서 핵무기 하나만 믿고 북한이 남침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10년쯤 더 지나 신형 무기를 살 돈이 떨어진 북한군과 계속 최신 무기로 업그레이드하는 한국군의 격차가 얼마나 더 벌어져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따라서 핵실험 정도가 아니고 재래식 무기 시험 수준이라면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잠을 푹 자도 좋다고 생각한다. 김정은에겐 요즘 할 일이 그것밖에 없지만, 우린 다른 할 일이 많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김정은은 최근 보름 동안 동·서해를 오가며 4차례나 미사일과 방사포 시험 발사를 주관했다. 그는 2010년 11월 연평도를 포격한 북한군의 방사포탄이 명중률도 한심하고 불발탄도 많자 충격을 받고 담당자들을 닦달했다. 그 결과물이 최근 시험한 신형 조종 방사포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북한의 유도 시스템은 미국의 민용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사시 미국이 GPS 코드를 바꾸면 포탄 조종은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돌이켜보면 김정은이 미사일과 방사포 사격에 매달릴 것이란 징후는 올해 초부터 예상됐다. 4월 시정연설에서 “티끌만 한 양보나 타협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김정은은 5월 4일과 9일 잇따라 미사일과 방사포 사격을 참관했다. 그리고 5월 말 강계뜨락또르(트랙터)종합공장 등 자강도 강계 일대 군수공장들을 방문했다. ‘26호 공장’으로 불리는 강계뜨락또르종합공장은 북한군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포탄과 폭탄, 미사일 탄두, 기뢰, 어뢰 등을 제조하는 군수공장이다. 이번에 시험한 조종 방사포탄도 이곳에서 생산됐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이곳은 미사일과 방사포탄 등을 이란 시리아 등 중동 국가들에 팔면서 외화벌이에도 크게 기여했다. 1949년 2월 강계 남천동에 공장이 생긴 이래 김일성은 30차례, 김정일은 23차례, 김정은은 2차례 방문했다. 북한에서 이 정도로 김씨 일가의 총애를 받은 공장은 찾기 어렵다. 남쪽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공장에는 끔찍한 비극의 역사가 있다. 북한이 포사격을 할 때마다 남쪽 사람들은 가깝게는 2010년의 연평도를, 멀리는 1994년의 ‘서울 불바다’ 발언을 떠올린다. 그런데 그 불바다가 현실화된 곳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기 위해 미사일과 포탄을 제작하던 26호 공장이었다. 며칠 전 취재를 위해 통화한 강계 출신 탈북민이 대뜸 “1991년 11월 30일 사고 말이죠”라고 되물었을 정도로 현지 사람들에겐 기억이 선명한 일이다. 증언들을 종합해보면 그날 밤 잠에 들었던 강계 사람들은 엄청난 폭발음과 유리창이 부서지는 소리에 일제히 눈을 떴다. 폭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밤새 이어졌다. 미사일과 포탄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땅으로 떨어졌다. 전쟁이 발발해 폭격을 받는 것으로 착각한 주민들은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채 집을 뛰쳐나와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 당시 100km 떨어진 곳에서도 벌겋게 물든 강계의 하늘이 보였다. 이날 사고는 수출용 미사일과 포탄, 폭탄 수천 발이 쌓여 있었던 26호 공장 야적장에 불이 나면서 시작됐다. 추위에 떨던 경비병들이 피운 불이 포탄 상자에 옮겨 붙은 게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공식적인 원인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26호 공장은 외부 공격을 피하기 위해 산 아래를 깊숙이 파고, 여러 층에 걸쳐 고가의 독일제 기계로 구성된 생산라인을 갖추고 있었다. 엄청난 양의 화약도 쌓여 있었다. 공장이 시가지와 붙어 있기 때문에 만약 지하 시설에까지 불이 붙으면 도시 전체가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화재 진압을 위해 먼저 뛰어들었던 사람들이 폭발로 죽자, 2차로 보안원(경찰)으로 구성된 결사대가 투입됐다. 불바다를 뚫고 들어간 이들은 몸으로 불길을 막아가며 공장 입구를 폐쇄했다. 그 결과 공장을 지켜 북한 군수산업의 핵심이 무너지는 것은 막았다. 하지만 잇따른 폭발로 갱도 내 산소가 타버리고 입구까지 밀폐되자 지하에서 일하던 야간작업조 300여 명 전원이 질식해 죽었다. 나중에 폐쇄했던 문을 열었을 때 여성들을 가운데 두고 남성들이 둘러싼 시신들이 한곳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군율이 적용되는 곳인지라 죽는 순간까지 질서를 흩뜨리지 않은 것이다. 이날 사고로 외부 사망자도 1000명 넘는다는 말도 나돌지만 북한이 정확한 실상을 밝히지 않고 있어 알 수는 없다. 북한의 역대급 폭발 참사가 아이러니하게도 최대 군수공장에서 일어났고, 군수공업의 도시 강계가 가장 생생한 불바다를 끔찍하게 경험한 도시가 됐다는 사실 앞에서 “불을 즐기는 자 불에 타죽는다”는 속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쏘고, 터지는 것만 보면 환하게 웃는 김정은에게 한 번쯤 상기시켜 주고 싶은 말이자 기억이기도 하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한반도 최고의 ‘자력갱생(自力更生) 전문가’는 북한에 있다. 김일성부터 시작해 김정은까지 3대째 자력갱생이라는 말을 60년 가까이 우려먹고 있다. 한 우물을 이만큼 오래 파면 저작권까지 생기는지 위키피디아는 자력갱생을 ‘북한어’라고 소개한다. 북한에서 자라 김일성대에서 사상 교육을 받은 나는 자력갱생이란 말을 귀가 헐도록 들었고, 절대 다수의 북한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단어에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가 됐다. 그 덕분에 북한식 자력갱생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자력갱생은 우선 “우리는 잘못한 게 없다”로 출발한다. 우리는 옳은 일만 하는 좋은 사람들인데 힘센 악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력갱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악당에 대해 적개심을 갖고 인류의 정의라는 대의를 위해 적의 압박에 절대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내부의 이적행위와 견결히 싸워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이기 때문에 정의를 지키려면 악당의 압박에 동조하거나 수령의 지도사상에 불평하는 불순분자를 걸러내고 준엄하게 심판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 편은 일심단결로 뭉치고 정치사상적 순결성을 갖게 된다. “각자 알아서 살아야 한다”는 어쩌면 북한식 자력갱생의 핵심 본질이다. 자력갱생하라는 지시가 떨어지면 절대로 수령과 국가에 손을 내밀어 ‘심려’를 끼쳐선 안 된다. 굶어죽는 것은 지도자나 국가의 잘못이 아니라 본인이 자력갱생을 제대로 못한 탓이다. 수령이 ‘자력갱생 간고분투(艱苦奮鬪)의 혁명정신’을 가지라고 했는데, 수령의 방침을 제대로 따르지 못했고 혁명정신이 부족해서 죽는 것이다. ‘고난의 행군’ 때 수많은 사람들은 굶어죽으면서도 국가를 원망할 수 없었다. 올해 북한은 자력갱생이란 단어를 어느 때보다 부쩍 강조한다. 내용은 내가 살던 20년 전 그대로다. 올해 4월 김정은은 노동당 전원회의 연설에서 자력갱생을 25번 외쳤다. “우리의 힘과 기술, 자원에 의거한 자립적 민족경제에 토대해 자력갱생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제재로 우리를 굴복시킬 수 있다고 혈안이 돼 오판하는 적대세력에게 심각한 타격을 줘야 한다”는 게 요지였다. 자력갱생을 해야 하는 원인을 100% 미국 탓으로 돌렸다. 북한 어용매체들의 선전전도 빠질 수 없다. 노동신문은 5월 1일자 사설을 통해 “자력갱생은 혁명가와 가짜 혁명가, 애국자와 매국자, 충신과 배신을 가르는 시금석”이라고 강조한 뒤 “남에 대한 의존심과 수입병, 패배주의 같은 사상적 병집을 불사르자”고 주장했다. 자력갱생에 토를 달면 가짜 혁명가, 매국자, 배신자가 되는 셈이다. 이 신문은 또 이달 14일자 논설에서 “자력갱생은 조선혁명의 영원한 생명선이며 국가의 자주적 존엄과 주민의 삶을 지키기 위한 유일무이한 혁명방식”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어 “현 시기는 정신 대 정신이 대결하는 시대로, 신념을 버리고 환상과 의존심, 패배주의에 사로잡히는 것은 투항이고 변절이며 오늘날 자력이냐 의존이냐 하는 문제는 사느냐 죽느냐를 판가름하는 운명적인 문제”라고 썼다. 생사가 자력갱생에 달렸다는 궤변도 어이가 없지만 논설은 ‘자력갱생의 시대’를 이끈다는 김정은을 이순신, 서희보다 백배는 더 용기 있고 지혜로운 지도자인 양 침이 마르게 찬양했다. 그러나 60년 가까이 자력갱생을 외쳐 왔지만 북한의 경제는 현재 외세(중국)에 철저히 종속된 처지라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자력갱생이라는 구호 뒤에는 ‘간고분투’나 ‘무조건 이긴다’ 같은 정신력 무장 강조가 나오고 그 다음에는 “우리 운명을 개척할 힘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주체사상으로 연결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북한 경제는 망가져갔다. 자력갱생을 피해 온 줄 알았는데, 요새 남쪽에서 자력갱생, 애국, 매국 등 북에서 배웠던 익숙한 표현들과 이분법적 선동 방식을 보게 되니 흠칫 놀란다. 우리가 일본의 수출 규제를 받는 상황이 된 것도 달갑지 않은데 이에 대한 남쪽 권력의 대응 선전마저 북한을 닮아가나 싶다. 나는 확실히 친일파는 아니다. 일본의 오만한 규제에는 온 국민이 함께 뭉쳐 맞서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절머리가 나는 북한 전제주의식 선동 방식은 정말 싫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지난 주말 1박 2일 일정으로 경남 함양을 다녀왔다. 그곳에서 안내원과 1951년에 일어난 거창 산청 함양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1951년 2월 8∼11일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는 지리산 인근 20여 개 산골마을에서 1400여 명을 학살했다. 군인들은 부락들을 돌며 총과 수류탄, 박격포 등을 이용해 닥치는 대로 주민들을 죽였다. 산청 함양의 사망자 705명 중 600여 명이 어린이와 노인, 부녀자였다. 거창에선 719명 중 15세 미만 어린이만 359명에 달했다. 6·25전쟁 당시 저지른 국군의 가장 끔찍한 범죄 가운데 하나였다. 만행을 주도한 11사단장이 바로 1986년 4월 월북한 최덕신이다. 1400여 명을 학살하고도 11사단 지휘관들은 잘나갔다. 사건의 진상이 알려지자 최덕신은 보직 해임됐지만 곧 복직돼 1군단장과 외무부 장관, 주서독 대사 등을 지냈다. 그는 나중엔 ‘사람 대하기를 하늘과 같이 하라’를 교리로 내세우는 천도교의 교령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정치적 갈등을 겪으면서 1976년 아내 류미영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월북했다. 무기징역을 받은 오익경 9연대장은 1년 뒤 복직해 대령으로 예편했고, 10년형을 선고받은 한동석 3대대장은 1년 뒤 특사로 풀려나 군에 복귀했다가 강릉, 원주시장까지 지냈다. 6·25전쟁 이후 월북한 남한 인사 중에서 최고위급으로 꼽히는 최덕신은 북한에서 김일성훈장 등 각종 훈장을 받으며 애국열사로 추앙받았다. 또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과 천도교 청우당 위원장,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 등 요직을 두루 맡았다. 북한이 최고의 명작으로 꼽는 영화 ‘민족과 운명’ 1∼4부에서는 아예 그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최덕신 사후 3년 뒤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민간인 학살 장면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영화 속에서 최덕신은 학살 장소를 찾아가 “빨갱이를 죽이라고 했지 누가 양민을 죽이라고 했느냐”며 분노하거나, 평양에 가기 전 “단테의 기름 가마면 내 죄가 세척될 수 있을까”라며 번민하는 장면도 나온다. 한국의 거창 산청 함양 민간인 학살에 관한 조사 자료를 보면 최덕신이 민간인 학살에 대해 몰랐을 가능성은 낮다. 다만 만행을 저지른 최덕신마저 김일성이 용서해 준다는 설정을 하다 보니 북한은 잔인한 범죄자에 대한 성토 기회마저 포기한 것이다. 피해자 가족의 입장에서 학살 사건의 주범인 최덕신이 북한에 가서 미화되고 애국열사로 추앙받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최근 최덕신의 둘째 아들 최인국 씨가 몰래 월북한 사실이 밝혀졌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최인국 씨는 6일 평양에 도착했으며, 앞으로 북한에서 영주할 계획이다. 또 어머니 류미영에 이어 노동당의 관변 야당인 천도교 청우당의 위원장을 맡을 것으로 관측된다. 일부 한국 언론은 최인국 씨가 남한에서 아버지 때문에 제대로 된 일자리도 얻지 못한 채 힘겨운 삶을 살아왔다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1400여 명의 민간인과 후손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삶은 업보였을 수 있다. 이제 그는 평양에서 부친과 모친의 뒤를 이어 천도교 청우당 중앙위원장직을 이어받아 좋은 집에서 살게 될 가능성이 크다. 남쪽에서 72년을 살았던 최인국 씨가 북한이 어떤 곳인지를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부인과 자식들(1남 1녀)은 서울에 두고 갔을 것이다. 가족은 서울에서 자유를 맛보며 살게 하고, 자신은 자식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 평양에서 부모가 남긴 ‘적금’을 타먹으며 여생을 보내겠다는 계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계산이 들어맞을지는 지켜봐야 안다. 한편 남한으로 망명한 북한 최고위급 인물인 황장엽의 집안이 8촌까지 멸족된 것을 다 아는 북한 사람들에게 북으로 망명한 남쪽 최고위급 인물 최덕신의 아들이 아버지의 월북 이후에도 서울에서 풍채 좋은 모습으로 70년 넘게 살다가 평양으로 옮겨와 돌아다닌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 될 것 같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한스 모드로프 전 동독 총리(91·사진)는 동독 공산당 시절의 마지막 총리다. 1989년 11월 13일 빌리 슈토프 총리의 사임으로 총리가 된 뒤 그해 12월 7일 에곤 크렌츠 통일사회당 당수가 축출당하면서 사실상 동독의 통치자가 됐다. 그리고 1990년 3월 18일 자유선거 후 총리에서 물러났다. 모드로프 전 총리는 4개월 남짓한 재임 시절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와 동독의 미래를 놓고 4차례 담판을 벌였다. 지난달 22일 베를린 좌파당 당사(옛 공산당 청사)에서 만난 그는 통일을 지향하는 한반도에도 참고가 될 만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통일 직전 동서독 회담의 과정을 회상하며 “통일을 밀어붙이는 콜과 미국에 대항해 양국이 조약공동체 관계를 맺자는 제안을 했지만 거절당했다”고 말했다. 다음 대안으로 그가 준비한 방안은 3, 4년의 조약 공동체를 거쳐 국가연합으로 가고, 이후 연방제를 하는 3단계 통일 방안이었다. 그는 “모스크바를 두 번이나 찾아가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회담을 했지만 이미 체제 불안에 빠진 소련은 독일의 통일 과정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말했다. 힘이 없는 동독의 방안은 어디서도 통하지 않았다. ‘통일을 결정하는 주체는 힘’이라는 것을 보여준 교훈이었다. 모드로프 전 총리는 천천히 통일을 추진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통일 독일이 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콜 전 총리와의 회담 과정에서도 그는 150억 마르크를 지원해주면 동독을 재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그는 “150억 마르크는 사실 큰 금액이 아니었다”며 “동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1000억 마르크의 전쟁 보상금을 소련에 냈지만, 서독은 소련에 한 푼도 안 내고 오히려 서방의 마셜플랜(1947년부터 1951년까지 미국이 서유럽 16개 나라를 대상으로 한 대외원조계획)으로 지원을 받았다”고 했다. 이어 “전후 1000억 마르크는 1990년쯤엔 이자까지 계산해서 6000억 마르크나 되는 큰돈”이라고 덧붙였다. 2차 세계대전의 엄청난 보상을 동독이 다 감당했기 때문에 서독은 동독을 마땅히 지원했어야 했다는 의미로 읽혔다. 이는 한반도 통일 과정이 시작되면 북한도 다양한 논리로 남한의 경제 지원을 당연한 것으로 요구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그는 동독 지역에서 극우 세력이 세력을 키우는 것에 대해 동독 출신의 요아힘 가우크 전 대통령(2012∼2017년 재임)의 말을 빌려 우회적으로 의견을 밝혔다. 가우크 전 대통령은 “통일의 잘못된 결과로 나타나는 정치적 변화지만 ‘독일을 위한 대안(AfD)’을 적으로 간주하지 말고, 그들과 대화하고 협상해야 한다. 이미 의회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독일 주요 정당이 AfD와의 연정을 거부하는 것과 다른 태도다. 인터뷰를 마치며 1971년 동독이 서독 방송 시청을 허용한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금지 정책은 관철시킬 수 있을 때만 해야 한다.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관철시키지 못한다면 오히려 권력을 잃게 된다. 당시 기술적으로 금지해 봐야 막을 방법이 없었기에 방송 시청을 허가한 것이다.”베를린=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독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올해로 30년을 맞았다. 지난달 22일 찾은 베를린 장벽은 ‘이스트사이드갤러리’라는, 화가 100여 명이 그린 거대한 벽화로 채워져 있었다. 서베를린을 포위했던 총길이 약 160km의 장벽 중 약 1.3km 구간을 남겨 시내에 복원해 명소로 자리 잡았다. 베를린을 찾은 여행객들은 높이 3.6m의 장벽에 그려진 다양한 벽화를 사진에 담느라 분주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이들이 몰린 곳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에리히 호네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장이 키스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형제의 키스’였다. 옆 가게에선 무너진 장벽의 콘크리트 조각이 기념품으로 팔리고 있었다. 이제 베를린 장벽은 과거의 추억으로 남았다. 독일은 장벽이 무너진 뒤 통일을 맞았지만 통일의 후유증은 30년이 지나도록 남아 있었다. ○ 극우의 유령이 떠돌다 “하나의 유령,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에 떠돌고 있다.” 1848년 저술된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첫 구절이다. 그 유령은 20세기 나치즘의 득세와 더불어 세계사를 바꾸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년을 맞은 오늘날 독일인들은 반(反)난민, 반이슬람이라는 유령의 배회에 공포를 느끼고 있다. 2013년에 창당된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동독 지역에서 높은 지지를 받아 2017년 9월 총선에서 12.7%의 표를 얻어 제3정당으로 연방하원에 진입했다. 지난해에는 독일의 16개 주 의회에 모두 진출했고 정당 지지도 조사에서 2위에 올랐다. AfD는 여세를 몰아 프랑스 극우 포퓰리즘 성향 정당 ‘국민연합(RN)’ 등과 연대해 ‘정체성과 민주주의’라는 범유럽을 아우르는 극우 정치그룹을 만들었다. 이 그룹은 유럽의회에 73명의 의원을 둔 제5당으로 부상했다. 이들의 약진은 이제 시작이다. AfD의 지지 기반은 동독이다. 왜 동독인들은 극우 정당에 빠졌을까. 통일 전 동독 라이프치히대에서 저널리즘을 가르쳤던 불프 스카운 박사는 “20년 전만 해도 작센주(옛 동독)는 사회주의자들이 득세해 ‘붉은 작센’이라고 불렸는데, 지금은 이곳에서 AfD가 가장 강한 정당이 됐다”고 말했다. 과거의 사회주의자들이 이제는 극우로 변신했다는 것이다. 베를린자유대 앙케 피들러 교수는 “동독인은 2등 국민이라며 불만이 많다”며 “극우의 득세는 동독인들이 통일 이후에 갖는 불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했다. 통일의 후유증이 30년 뒤 극우 정당의 득세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독일의 난민 정책은 동독 지역의 불만을 키워왔다. 분단 시절 동독에선 외국인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적극적인 난민 수용 정책을 편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100만 명의 난민을 젊은 인력들이 빠져나가 공동화(空洞化) 현상이 심각한 동독 지역에 보냈다. 주민 500명이 살던 마을에 1000명의 난민이 배정되기도 했다. 통일 후 30년 동안 이러한 과정을 겪은 동독인들은 난민들이 똑같은 사회보장과 기초생활보장을 받으며 이웃으로 정착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 베를린자유대 김상국 교수는 “동독인들은 극우 정당 지지를 현실에 대한 실망감과 박탈감을 표시하는 가장 효과적인 저항이라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현재의 정치 기득권에 대한 불만이 극단주의자들에 대한 지지로 분출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극우가 득세하면서 독일 내에 인종차별과 혐오 발언이 확산되고 한국인들까지 피해를 입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과연 독일 통일에 후회는 없었을까 통일은 동독인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지난달 18∼26일 베를린과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등 동독 지역을 다니며 만난 20여 명의 정치인, 학자, 언론인,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모두 “독일 통일은 필연”이라고 입을 모았다. 정범구 주독일 한국대사는 “6월 초 베를린 훔볼트대와 ‘장벽은 과연 사라졌는가’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는데 ‘독일 통일은 전반적으로 성공적’이라는 게 현지의 보편적 평가”라고 전했다. 동독은 통일 후 경제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었다. 지난해 독일 경제·에너지부의 발표에 따르면 동독 사회의 가처분 소득은 서독의 85% 수준에 도달했다. 현실적인 수치로는 아직 차이가 있지만 분단 이전에도 독일의 주요 산업이 서독 지역에 몰려 있었고, 젊은 인력들이 서독으로 빠져나가 동독의 고령화가 심각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서독과 동독의 격차는 많이 좁혀진 셈이다. 한국의 도시와 농촌 간 격차를 감안하면 같은 국가 내에 이 정도의 소득 격차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동독 자체로만 따져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약 3만8000유로(약 5000만 원)로 이미 프랑스나 이탈리아와 비교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동독인들은 왜 불만을 갖는 것일까. ‘라이프치거 폴크스자이퉁’의 얀 에멘되르퍼 편집장은 “과거 사회주의권 국가 중 동독만큼 정치·사회적으로 발전한 곳이 없다. 그러나 동독인은 이웃 나라와 비교하지 않고 서독과 비교하기 때문에 불만이 크다”고 말했다. ○ 허물어지지 않은 심리적 장벽 동독 지역에서 만난 사람들은 불만과 갈등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 경제적 문제가 아닌 심리적 장벽 문제를 꼽았다. 통일은 동독인의 정체성을 지웠다. 일했던 직장과 경력이 사라졌다. 동독인들이 훌륭했다고 자부하는 의료제도, 교육제도는 물론 축구팀, 깃발, 노래 심지어 신호등까지 서독식으로 바뀌었다. 동독인들은 내가 어디서 일하던 누구인지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라이프치히 현대사포럼 위르겐 라이히 박물관장은 “독일 통일의 시초가 됐던 라이프치히 시위를 주도한 20대 청년들이 지금 50대가 되면서 현실에 절망했고 극우파를 지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독인들에게 당한 차별도 동독인들에게는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다. 당사자인 스카운 박사는 “통일이 되자 수준 낮은 서독 사람들이 식민지로 물밀듯 몰려와 동독 최고 엘리트들을 무시하면서 쓴맛을 느꼈다”고 거친 분노를 쏟아냈다. 독일 중부방송의 아나이스 로스 편집자는 역사적인 1989년 9월 10일 라이프치히 비폭력 시위 장면을 유일하게 촬영해 위험을 무릅쓰고 서독에 전송한 인물이다. 그는 서독과 동독 사람들에게 라이프치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려 했다. 통일이 되자 그가 일하던 중부방송의 경영진은 기술 담당 임원 단 한 명만 빼고 모두 서독 사람으로 바뀌었다. 동독 주민이 동독 임원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동독에서도 40대 이하 세대에겐 통일이 먼 과거 일로 기억된다. 하네스 모슬러 독일자유대 교수는 “일반적인 독일인이 갖고 있는 통일에 대한 생각은 기억하면서도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40대 이하 세대에게 통일은 기념일과 다큐멘터리, 자서전에서나 볼 수 있는 과거이며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앞으로 살아야 할 시대라는 것이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서독으로 옮겨가고, 동독에는 과거의 향수에 잠긴 노령 세대가 남아 늙어가고 있다. 통일 전 동독의 인구는 1600만 명, 서독은 6000만 명이었다. 현재 동독 인구는 1400만 명으로, 서독에서 약 200만 명이 이주해왔음을 감안하면 400만 명 이상의 동독인이 통일 후 서독에 간 것으로 추정된다. 장벽 붕괴 30년 뒤 독일의 모습은 통일을 지향하는 한국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통일 후 동독에서 가장 빠르게 변신한 이들은 정보기관인 슈타지 요원들이었다. 이들은 슈타지에서 쌓은 정보와 네트워크를 활용해 경비회사, 보험회사, 공해제거회사 등을 차려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반도가 통일되면 주민들을 탄압하고 감시하던 북한 보위부 요원들이 어떻게 변할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라 할 수 있다. 김상국 교수는 “독일과 한국의 통일은 상황이 너무 달라 비교하기는 어렵다. 다만 우리는 통일 과정에서 더욱 어려운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베를린·드레스덴·라이프치히=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KPF 디플로마-평화저널리즘 교육과정의 하나로 작성되었습니다.}

독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올해로 30년을 맞았다. 지난달 22일 찾은 베를린 장벽은 ‘이스트사이드갤러리’라는, 화가 100여 명이 그린 거대한 벽화로 채워져 있었다. 서베를린을 포위했던 총길이 약 160㎞의 장벽 중 약 1.3㎞ 구간을 남겨 시내에 복원해 명소로 자리 잡았다. 베를린을 찾은 여행객들은 높이 3.6m의 장벽에 그려진 다양한 벽화를 사진에 담느라 분주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이들이 몰린 곳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에리히 호네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장이 키스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형제의 키스’였다. 옆 가게에선 무너진 장벽의 콘크리트 조각이 기념품으로 팔리고 있었다. 이제 베를린 장벽은 과거의 추억으로 남았다. 독일은 장벽이 무너진 뒤 통일을 맞았지만 통일의 후유증은 30년이 지나도록 남아 있었다. ● 극우의 유령이 떠돌다 “하나의 유령,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에 떠돌고 있다.” 1848년 저술된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첫 구절이다. 그 유령은 20세기 나치즘의 득세와 더불어 세계사를 바꾸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년을 맞은 오늘날 독일인들은 반(反)난민, 반이슬람이라는 유령의 배회에 공포를 느끼고 있다. 2013년에 창당된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동독 지역에서 높은 지지를 받아 2017년 9월 총선에서 12.7%를 얻어 제3정당으로 연방하원에 진입했다. 지난해에는 독일의 16개 주 의회에 모두 진출했고 정당 지지도 조사에서 2위에 올랐다. AfD는 여세를 몰아 프랑스 극우 포퓰리즘 성향 정당 ‘국민연합(RN)’ 등과 연대해 ‘정체성과 민주주의’라는 범유럽을 아우르는 극우 정치그룹을 만들었다. 이 그룹은 유럽의회에 73명의 의원을 둔 제5당으로 부상했다. 이들의 약진은 이제 시작이다. AfD의 지지 기반은 동독이다. 왜 동독인들은 극우 정당에 빠졌을까. 통일 전 동독 라이프치히대에서 저널리즘을 가르쳤던 불프 스카운 박사는 “20년 전만 해도 작센주(옛 동독)는 사회주의자들이 득세해 ‘붉은 작센’이라고 불렸는데, 지금은 이곳에서 AfD가 가장 강한 정당이 됐다”고 말했다. 과거의 사회주의자들이 이제는 극우로 변신했다는 것이다. 베를린자유대 앙케 피들러 교수는 “동독인은 2등 국민이라며 불만이 많다”며 “극우의 득세는 동독인들이 통일 이후에 갖는 불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했다. 통일의 후유증이 30년 뒤 극우 정당의 득세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독일의 난민 정책은 동독 지역의 불만을 키워왔다. 분단 시절 동독에선 외국인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적극적인 난민 수용 정책을 편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100만 명의 난민을 젊은 인력들이 빠져나가 공동화(空洞化) 현상이 심각한 동독 지역에 대량으로 보냈다. 주민 500명이 살던 마을에 1000명의 난민이 배정되기도 했다. 통일 후 30년 동안 이러한 과정을 겪은 동독인들은 난민들이 똑같은 사회보장과 기초생활보장을 받으며 이웃으로 정착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 베를린자유대 김상국 교수는 “동독인들은 극우 정당 지지를 현실에 대한 실망감과 박탈감을 표시하는 가장 효과적인 저항이라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현재의 정치 기득권에 대한 불만이 극단주의자들에 대한 지지로 분출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극우가 득세하면서 독일 내에 인종차별과 혐오 발언이 확산되고 한국인들까지 피해를 입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과연 독일 통일에 후회는 없었을까 통일은 동독인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지난달 18~26일 베를린과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등 동독 지역을 다니며 만난 20여 명의 정치인, 학자, 언론인,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모두 “독일 통일은 필연”이라고 입을 모았다. 정범구 주독일 한국대사는 “6월 초 베를린 훔볼트대와 ‘장벽은 과연 사라졌는가’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는데 ‘독일 통일은 전반적으로 성공적’이라는 게 현지의 보편적 평가”라고 전했다. 동독은 통일 후 경제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었다. 지난해 독일 경제·에너지부의 발표에 따르면 동독 사회의 가처분 소득은 서독의 85% 수준에 도달했다. 현실적인 수치로는 아직 차이가 있지만 분단 이전에도 독일의 주요 산업이 서독 지역에 몰려 있었고, 젊은 인력들이 서독으로 빠져 나가 동독의 고령화가 심각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서독과 동독의 격차는 많이 좁혀진 셈이다. 한국의 도시와 농촌 간 격차를 감안하면 같은 국가 내에 이 정도의 소득 격차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동독 자체로만 따져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약 3만8000유로(약 5000만 원)로 이미 프랑스나 이탈리아와 비교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동독인들은 왜 불만을 갖는 것일까. ‘라이프치거 폴크스자이퉁’의 얀 에멘되르퍼 편집장은 “과거 사회주의권 국가 중 동독만큼 정치 사회적으로 발전한 곳이 없다. 그러나 동독인은 이웃 나라와 비교하지 않고 서독과 비교하기 때문에 불만이 크다”고 말했다. ● 허물어지지 않은 심리적 장벽 동독 지역에서 만난 사람들은 불만과 갈등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 경제적 문제가 아닌 심리적 장벽 문제를 꼽았다. 통일은 동독인의 정체성을 지웠다. 일했던 직장과 경력이 사라졌다. 동독인들이 훌륭했다고 자부하는 의료제도, 교육제도는 물론 축구팀, 깃발, 노래 심지어 신호등까지 서독식으로 바뀌었다. 동독인들은 내가 어디서 일하던 누구인지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라이프치히 현대사포럼 위르겐 라이히 박물관장은 “독일 통일의 시초가 됐던 라이프치히 시위를 주도한 20대 청년들이 지금 50대가 되면서 현실에 절망했고 극우파를 지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독인들에게 당한 차별도 동독인들에게는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다. 당사자인 스카운 박사는 “통일이 되자 수준 낮은 서독 사람들이 식민지로 물밀듯 몰려와 동독 최고 엘리트들을 무시하면서 쓴맛을 느꼈다”고 거친 분노를 쏟아냈다. 독일 중부방송의 아나이스 로스 편집자는 역사적인 1989년 9월 10일 라이프치히 비폭력 시위 장면을 유일하게 촬영해 위험을 무릅쓰고 서독에 전송한 인물이다. 그는 서독과 동독 사람들에게 라이프치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려 했다. 통일이 되자 그가 일하던 중부방송의 경영진은 기술 담당 임원 단 한 명만 빼고 모두 서독 사람으로 바뀌었다. 동독 주민이 동독 임원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동독에서도 40대 이하 세대에겐 통일이 먼 과거 일로 기억된다. 하네스 모슬러 독일자유대 교수는 “일반적인 독일인이 갖고 있는 통일에 대한 생각은 기억하면서도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40대 이하 세대에게 통일은 기념일과 다큐멘터리, 자서전에서나 볼 수 있는 과거이며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앞으로 살아야 할 시대라는 것이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서독으로 옮겨가고, 동독에는 과거의 향수에 잠긴 노령 세대가 남아 늙어가고 있다. 통일 전 동독의 인구는 1600만 명, 서독은 6000만 명이었다. 현재 동독 인구는 1400만 명으로, 서독에서 약 200만 명이 이주해왔음을 감안하면 400만 명 이상의 동독인이 통일 후 서독에 간 것으로 추정된다. 장벽 붕괴 30년 뒤 독일의 모습은 통일을 지향하는 한국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통일 후 동독에서 가장 빠르게 변신한 이들은 정보기관인 슈타지 요원들이었다. 이들은 슈타지에서 쌓은 정보와 네트워크를 활용해 경비회사, 보험회사, 공해제거회사 등을 차려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반도가 통일되면 주민들을 탄압하고 감시하던 북한 보위부 요원들이 어떻게 변할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라 할 수 있다. 김상국 교수는 “독일과 한국의 통일은 상황이 너무 달라 비교하기는 어렵다. 다만 우리는 통일 과정에서 더욱 어려운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동독 마지막 총리 “천천히 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통일 독일 됐을 것” ▼한스 모드로프 전 동독 총리(91)는 동독 공산당 시절의 마지막 총리다. 1989년 11월 13일 빌리 슈토프 총리의 사임으로 총리가 된 뒤 그해 12월 7일 에곤 크렌츠 통일사회당 당수가 축출당하면서 사실상 동독의 통치자가 됐다. 그리고 1990년 3월 18일 자유선거 후 총리에서 물러났다. 모드로프 전 총리는 4개월 남짓한 재임 시절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와 동독의 미래를 놓고 4차례 담판을 벌였다. 지난달 22일 베를린 좌파당 당사(옛 공산당 청사)에서 만난 그는 통일을 지향하는 한반도에도 참고가 될 만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통일 직전 동서독 회담의 과정을 회상하며 “통일을 밀어붙이는 콜과 미국에 대항해 양국이 조약공동체 관계를 맺자는 제안을 했지만 거절당했다”고 말했다. 다음 대안으로 그가 준비한 방안은 3, 4년의 조약 공동체를 거쳐 국가연합으로 가고, 이후 연방제를 하는 3단계 통일 방안이었다. 그는 “모스크바를 두 번이나 찾아가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회담을 했지만 이미 체제 불안에 빠진 소련은 독일의 통일 과정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말했다. 힘이 없는 동독의 방안은 어디서도 통하지 않았다. ‘통일을 결정하는 주체는 힘’이라는 것을 보여준 교훈이었다. 모드로프 전 총리는 천천히 통일을 추진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통일 독일이 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콜 전 총리와의 회담 과정에서도 그는 150억 마르크를 지원해주면 동독을 재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그는 “150억 마르크는 사실 큰 금액이 아니었다”며 “동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1000억 마르크의 전쟁 보상금을 소련에 냈지만, 서독은 소련에 한 푼도 안 내고 오히려 서방의 마셜플랜(1947년부터 1951년까지 미국이 서유럽 16개 나라를 대상으로 한 대외원조계획)으로 지원을 받았다”고 했다. 이어 “전후 1000억 마르크는 1990년쯤엔 이자까지 계산해서 6000억 마르크나 되는 큰돈”이라고 덧붙였다. 2차 세계대전의 엄청난 보상을 동독이 다 감당했기 때문에 서독은 동독을 마땅히 지원했어야 했다는 의미로 읽혔다. 이는 한반도 통일 과정이 시작되면 북한도 다양한 논리로 남한의 경제 지원을 당연한 것으로 요구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그는 동독 지역에서 극우 세력이 세력을 키우는 것에 대해 동독 출신의 요아힘 가우크 전 대통령(2012~2017년 재임)의 말을 빌려 우회적으로 의견을 밝혔다. 가우크 전 대통령은 “통일의 잘못된 결과로 나타나는 정치적 변화지만 ‘독일을 위한 대안(AfD)’을 적으로 간주하지 말고, 그들과 대화하고 협상해야 한다. 이미 의회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독일 주요 정당이 AfD와의 연정을 거부하는 것과 다른 태도다. 인터뷰를 마치며 1971년 동독이 서독 방송 시청을 허용한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금지 정책은 관철시킬 수 있을 때만 해야 한다.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관철시키지 못한다면 오히려 권력을 잃게 된다. 당시 기술적으로 금지해 봐야 막을 방법이 없었기에 방송 시청을 허가한 것이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KPF 디플로마-평화저널리즘 교육과정의 하나로 작성되었습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24일 독일 라이프치히 성니콜라이교회를 찾았다. 현재 이곳은 동서독 통일의 시발점으로 꼽히는 라이프치히 시위 30주년을 맞아 새 단장이 한창이었다. 교회 앞 번들거리는 돌바닥을 보며 1989년 10월 9일 이곳에서 촛불을 들었던 수십만 명의 시위대를 떠올렸다. ‘우리가 인민이다’는 구호를 외치던 시위대의 요구는 당시까지만 해도 통일이 아니었다. 이들은 1985년 소련에서 시작된 ‘페레스트로이카(정치·경제적 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에 동독 정부가 발맞출 것을 촉구했다. 언론의 자유, 슈타지(비밀경찰)의 해체, 해외여행의 자유가 핵심이었다. 시위는 베를린 등 동독 전역으로 확산됐다. 다급해진 동독 지도부는 해외여행 절차 간소화 조치를 발표해 사람들을 달래려 했지만 공산당 대변인의 실수로 국경 개방이라는 오보가 전파를 탔다. 뉴스를 들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베를린 장벽은 어이없이 무너졌다. 동독을 사실상 지배하던 소련도 통일을 막지 않았다. 독일 통일은 우연과 행운의 연속이었다. 장벽이 무너진 다음 해 동독에선 통일을 염두에 둔 ‘우리는 하나의 인민’이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서독 마르크가 오지 않으면 우리가 서독으로 가겠다’는 구호도 나왔다. 통일은 더 나은 삶을 바라는 동독 사람들의 선택이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아 이달 중순부터 열흘간 동독과 서독의 주요 도시를 누비며 여러 기관을 방문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것을 느꼈다. 우선 동독의 도시와 도로가 서독의 도시나 도로보다 깨끗해 보였다. 30년 동안 막대한 서독 자금이 동독으로 흘러간 결과였다. 동독의 소득이 여전히 서독보다 못하다는 뉴스도 볼 수 있었다. 젊은 인력들이 서독으로 빠져나가고, 주요 공업시설 대부분이 서독에 있는 탓이었다. 동독 주민들이 느끼는 소외감은 매우 커 보였다. 여기에는 근거가 있었다. 라이프치히대의 2016년 조사에 따르면 동독인은 독일 전체 인구 중 17%를 차지했지만 사회지도층에는 단 1.7%만 진입했다. 차관급 관료 60명 중 3명, 군 장성 202명 중 2명, 연방법원 판사 336명 중 13명, 대사 154명 중 4명만이 동독 출신이었다. ‘우리가 인민이다’를 외쳤던 동독 사람들이 지금은 ‘우리는 같은 인민이 아니라 2등 국민이다’라고 자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한국에선 통일을 이야기할 때 대개 경제적 부분에 초점이 맞춰지지만 독일에 와서 마음의 통일이 먼저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돈이 많고 적음을 떠나 마음이 맞지 않으면 한집에서 살 수 없다. 서독은 돈을 주었지만 마음은 그렇게 하질 않았다. 우리가 통일이 됐을 때 과연 남쪽 사람들은 서독 사람들보다 나은 관용을 보일 수 있을까. 요즘 남쪽에는 독일 통일 과정을 연구하는 사람도, 관련 저서도 많다. 하지만 직접 독일에 와서 북한 출신으로서 지켜본 결과 독일 통일 과정에서 배울 것은 거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독과 북한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동독 사람들은 과거 사회주의 시절을 회상할 때 빠뜨리지 않고 슈타지를 떠올린다. 슈타지가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설명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미안하게도 다른 생각을 했다. 슈타지는 감시만 열심히 했을 뿐 처형은 하지 않았다. 북한 사람의 눈으로 보면 동독은 천국이었다. 그 외에도 다른 점은 너무나 많다. 세습왕조인 북한이 수령에 대한 신격화를 포기하고 동독처럼 신앙의 자유를 허용할 수 있을까. 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도회가 반정부 시위로 이어져도 무력 진압하지 않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한국 TV 시청을 당국이 공식 허가하는 것 역시 꿈꾸기 어려운 일이다. 대외적 환경이 다른 것은 거론할 필요도 없다. 독일 통일 30주년을 맞아 한국에선 각종 연구발표회가 열릴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독일 통일 연구는 대개 서독 중심의 시각이었다. 나는 독일을 둘러보고 앞으로 예멘을 깊이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통일 후 사회 통합을 이루지 못해 4년 뒤 내전으로 이어진 예멘이 지금은 오히려 한반도에 더 많은 시사점을 줄 것 같다. 예멘도 내년이면 통일 30주년을 맞는다. ― 라이프치히에서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탈북민 정착 교육 시설인 ‘하나원’이 다음 달 8일로 창립 20주년을 맞는다. 1999년 경기 안성시에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라는 명칭으로 문을 연 하나원은 지금까지 3만 명 이상의 탈북민을 교육해 사회에 배출했다. 대다수 탈북민에게 하나원은 한국에서 첫발걸음을 뗀 ‘마음의 고향’으로 기억된다.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은 국정원 경찰청 등 관계기관의 합동신문을 거친 뒤 하나원으로 가서 12주간 문화적 이질감 해소, 심리 안정, 진로지도 상담 등 ‘사회적응교육’을 받는다. 이 기간에 정부는 탈북민의 가족관계를 등록하고, 집을 마련해 주는 등 이들의 사회 정착을 준비해 준다. 탈북민과 만들어가는 ‘작은 통일’의 입구에 선 하나원의 20년 역사는 순탄치만은 않았다. 수많은 갈등과 화해가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하나원의 시작과 현재를 조명해 본다.○ 귀순자에서 북한이탈주민까지 하나원 설립은 김대중 정부 출범 초기 “한 해 수십 명 들어오는 탈북자도 돌보지 못하면서 무슨 통일을 운운하느냐”는 여론 속에 결정됐다. 하나원의 출범을 이해하려면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에 대한 정책이 어떻게 변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반공을 국시로 삼고 있던 1960년대부터 1993년까지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은 국가유공자 지위를 부여받고 엄청난 금전적 보상을 받았다. 1980년대엔 “의사, 변호사 위에 귀순자가 있다”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다. 1990년대 접어들면서 이런 상황에 변화가 생긴다. 러시아 벌목공의 대규모 귀순이 시작되자 1993년 6월 ‘귀순북한동포보호법’이 제정되면서 탈북민은 생활능력이 결여된 생활보호대상자로 간주됐다. 주관 부처도 국가보훈처에서 보건복지부로 이관됐다. 경제적 지원이 급격하게 줄어들자 탈북민은 가난에 허덕였다. 김대중 정부는 1997년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을 만들고 탈북민에 대한 정착비와 주거지원비를 확대했다. 담당 부처도 보건복지부에서 통일부로 바뀌었다. 북한의 경제난으로 탈북민 수가 늘어남에 따라 이들에 대한 사회적응 교육 시설의 필요성이 제기돼 결국 하나원이 만들어졌다.○ “영감, 고기 잘 잡힙니까?” 하나원 초기 매달 입소하는 탈북자는 많지 않았다. 1기 20명, 2기 9명, 3기 32명, 4기 41명, 5기 27명…. 2002년 23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 기수가 100명이 넘었다. 하나원을 만든 뒤에도 주관 부서인 통일부는 초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당장 1기부터 사망 사고가 발생했다. 사회에 나가지 못하고 3개월 동안 하나원에 더 갇혀 있게 되자 탈북민들은 거칠어졌다. 이들을 다독이려고 공무원들은 수시로 함께 외박을 나갔다. 그런 가운데 밤에 저수지에 수영하러 나갔던 1기생 남성이 심장마비로 숨졌다. 총명하고 촉망받던 청년이었다. 게다가 탈북민 사이의 싸움과 연애 사건까지 끝없이 터졌다. 통일부는 이들을 졸업시킨 뒤인 2000년 1월에야 3기생을 받았다. 예정대로라면 3기는 1999년 9월에 입소했어야 했다. 고작 29명뿐인 1, 2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 다른 탈북민을 합동신문 기관에서 4개월을 더 기다리게 했던 것이다. 무엇부터 교육할지도 몰랐다. 이런 가운데 사회에 배출된 1, 2기 졸업생들의 사고 소식이 잇따랐다. 지방에 간 청년이 낚시하는 노인에게 북한에서 하던 버릇대로 생각 없이 “영감, 고기 잘 잡힙니까”라고 했다가 큰 봉변을 당한 일도 있었다. 새파란 청년에게서 영감이란 말을 들은 노인은 펄펄 뛰었다. 어느 곳에선 한국 여성과 결혼한 청년이 너무 버릇이 없다는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장모가 한 달 내내 김치와 반찬을 냉장고에 넣어주다가 “더 부족한 것이 없느냐”고 물었는데 탈북민 사위가 “일없습니다”라고 대답한 게 화근이 됐다. ‘괜찮습니다’라는 뜻이었지만 이를 오해한 장모는 다니던 교회 목사를 찾아가 “내가 어떻게 해주었는데 탈북한 사위가 나를 무시한다”고 하소연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초기 하나원은 탈북민에게 언어와 정착 교육에 초점을 맞췄다. 1999년 9월부터 2002년 10월까지 하나원 원장을 지낸 김중태 전 통일부 기조실장은 “우리 역시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탈북민에 대해 알아갔다”며 “환자가 그렇게 많을 줄도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초기 교육생들의 옷차림이 이상해서 살펴보니 운동복 위에 또 옷을 껴입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내복을 입는 북한의 습관을 몰라 속옷과 겉옷만 지급했던 것이다. 김 전 원장은 “내복을 살 예산이 책정되지 않아 천주교 단체의 후원으로 내복을 급히 구했다”며 “초기 영락교회, 정동제일교회 같은 교계에서 많이 후원했다”고 기억했다.○ “넌 하나원 몇 기니?” 대다수 탈북민은 서로 만나면 상대에게 “하나원 몇 기냐”고 인사처럼 묻는다. 하나원 기수는 탈북민에겐 대학교 학번과 마찬가지다. 매달 한 번씩 조사를 마친 탈북민이 하나원에 오면 순서대로 기수가 부여된다. 19일에 256기 교육생이 사회에 배출된다. 탈북민들이 기억하는 하나원에 대한 추억은 경기 안성 성남 시흥 양주시와 강원 화천군으로 각자 다르다. 2002년 8월까진 모든 탈북민이 안성시의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입국자가 늘어나자 통일부는 같은 해 9월부터 성남시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 시설을 임차해 여성들을 따로 교육했다. 이때는 여성보다 남성 수가 많을 때였다. 이후 시설 포화와 임차 기간 만료 등의 이유로 하나원 분원은 시흥과 양주로 옮겨 다녔다. 2013년 화천군에 하나원 제2분원이 세워지고 남성 탈북민을 따로 교육하면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2009년 2914명에 이르던 탈북민은 2012년 1502명이 입국하며 절반으로 줄었다. 이후부터 계속 줄어 1년 평균 1200명 안팎 수준에 머물고 있다. 김정은이 권력을 잡은 뒤 탈북에 대한 단속이 매우 엄격해진 것과 무관치 않다. 탈북민 수가 줄어도 통일부의 탈북민 지원 업무와 예산은 크게 줄지 않았다. 통일부 공무원 500여 명 중 20%에 육박하는 100여 명이 하나원 업무에 종사한다. 제2분원만 해도 고작 수십 명의 남성 탈북민 교육을 위해 30여 명의 통일부 직원이 일한다. 반면 안성 하나원엔 빈방이 많다.○ “졸리고, 지루해요.” 2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하나원이 갈 길은 여전히 멀다. 12주의 하나원 교육 기간과 교육의 질 등은 과거나 지금이나 늘 논쟁거리다. 하나원이 탈북민의 정착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역시 의견이 엇갈린다. 20년이 지나도록 바뀌지 않는 일부 하나원 직원들의 불친절하고 고압적인 태도도 시급히 개선해야 할 문제다. 탈북민이 한국 사회에서 처음 만나는 공무원이기 때문이다. 전문성 부족도 풀어야 할 숙제다. 하나원은 20년 동안 원장만 16명이 바뀌었다. 이 중 3년 정도 근무한 3명을 제외하면 나머지 13명 원장의 재직 기간은 1년도 안 된다. 직원도 전문성을 따져 뽑지 않고 통일부 직원들이 돌아가며 순환근무를 한다. 탈북민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 훈련을 고민하기보다는 본부로 복직할 때까지 무난하게 시간이나 때우려는 경향이 적지 않다. 김 전 원장은 “하나원은 가장 공무원 같지 않은 공무원들이 있어야 하는 곳이며 직원들은 자신의 행동이 탈북민에게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 늘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려면 하나원의 20년 역사 속에서 얻은 교훈이 전해져야 하는데 이런 과정이 누락된 채 매년 담당 공무원이 바뀌면서 똑같은 실수가 반복되는 일도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하나원을 졸업한 탈북민이 가장 문제점으로 꼽는 것은 교육이다. 다양한 연령과 성별, 경력을 가진 탈북민이 모이다 보니 각자의 수준에 맞는 교육과정은 애초에 엄두를 내지 못한다. 무엇보다 지루하다는 불만이 제일 많다. 강사의 수준과 강의 내용도 늘 논란거리다. 19일 하나원을 졸업하는 한 탈북여성이 최근 지인에게 털어놓은 하소연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언니, 나 무서워서 사회에 못 나가겠어. 나가면 사기꾼들이 득실거린다고 귀가 아프도록 들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지 막막해.” ▼“식단-의료 훌륭… 개인 맞춤형 진로 지도 등 현실적 교육을”▼거쳐간 탈북민들이 되돌아본 하나원 생활탈북민들은 하나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무작위로 남녀 각각 5명을 선택해 좋았던 점과 싫었던 점을 두 가지씩 물었다. 한국 사회를 많이 알수록 더 객관적 평가를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해 오래전 졸업한 탈북민 위주로 선정했다. 괄호 안에 성별과 하나원을 졸업한 시기를 밝혔다.○ “나는 이래서 하나원이 좋았다” “있을 땐 몰랐는데 정작 사회에 나오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낸 그 시절이 그립고 즐거운 추억으로 기억된다.”(여·2012년) “식단도 좋았고, 의료 서비스도 좋았다. 무엇보다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운동도 마음껏 했다.”(남·2006년) “심성수련 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약육강식의 사회인 줄만 알았는데, 따뜻한 마음도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여·2002년) “돌아보니 근심걱정 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었다.”(남·2006년) “전반적인 기억이 좋다. 의료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고, 음식도 맛있었다.”(여·2012년) “탈북 과정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아무 생각 없이 편히 다스릴 수 있어서 기뻤다. 먼저 사회에 나간 탈북민이 와서 자기 이야기를 들려준 시간이 좋았다.”(남·2004년) “드디어 안전하게 보호받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안온했다.”(여·2002년) “마음이 편했고, 현장학습을 나갈 때마다 너무 기뻤던 것이 기억난다.”(남·2016년) “지금 생각해 보면 한국 생활 중에서 하나원이 제일 좋았다. 의식주를 다 책임져 주고 골치 아픈 일도 없고, 쉬는 기분이었다. 다시 거기서 생활하다 오고 싶다.”(여·2008년) “시설이 깨끗했고, 무엇보다 체육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서 좋았다. 배고프지 않았던 것도 좋았다.”(남·2016년) ○ “나는 이래서 하나원이 싫었다” “배운 것이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특히 탈북민을 멀리하고 아무 사람이나 믿지 말라고 계속 교육받아서 한동안 주변을 불신하게 했다.”(여·2012년) “직업교육을 일률적으로 하지 말고 개인별 맞춤형 진로 지도 시스템이 있으면 좋겠다. 외부활동이 너무 적은데, 자주 한국 사회를 경험했으면 좋겠다.”(남·2006년) “특별히 지적할 점은 생각나지 않지만 교육이 약간 아쉬웠다.”(여·2002년) “교육 내용과 수준이 맞지 않아 지루했다. 전문성을 갖춘 직원들이 부족하다.”(남·2006년) “수업이 너무 많은데 무슨 소리인지 몰라 졸렸고 기억에 남는 것도 없다.”(여·2012년) “하나원 직원들이 너무 거들먹거려 기분이 나빴다.”(남·2004년) “가족 해체를 겪으며 한국에 온 탈북민 가족을 하나원에서도 몇 달 동안 갈라놓아 이산가족을 만든다. 탈북민 대다수가 도시에서 사는데 산골에 가둬놓고 비현실적 교육을 한다. 하나원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여·2002년) “절실히 필요하지 않은 교육을 정리하고 심리상담을 강화해야 한다.”(남·2016년) “나오니 좋은 것을 알겠지만, 안에 있을 때는 지루하고 하루라도 빨리 사회에 나가고 싶었다. 나와 보니 정착은 책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치며 배우는 과정이었다.”(여·2008년) “교육이 형식에 그치는 것 같다. 음식이 단조로워 질렸다. 교육생 중에 난폭한 사람이 석 달 내내 분위기를 망쳐도 감싸기만 하고 대책이 없다. 큰 사건 없이 달래서 졸업만 시키면 그 후엔 자기 일이 아니라서 그러는 것 같다.”(남·2016년)주성하 zsh75@donga.com·이지훈 기자}

6월 4일은 북한의 ‘보천보전투 승리기념일’이다. 북한은 보천보전투를 ‘김일성이 현장에서 진두지휘한 첫 조국진공작전이며, 조선의 정신을 깨운 사건’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김일성이 보천보전투 현장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자료가 잇따라 공개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일부는 70년 넘게 역사 속에 묻혀 있던 보천보전투 실제 지휘관의 이름까지 거론하고 있다. 특히 조선족 출신 유순호 작가가 최근 완성한 ‘김일성평전(상·중·하)’은 보천보전투와 관련해 그동안 중국이 북한을 의식해 공개하지 않았던 동북 항일 운동 관련 비밀 자료들을 담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평전에 실린 자료는 1958년경 중국이 당시 생존해 있던 동북 항일열사들의 증언 등을 모아 만든 것이다. 이때 중국은 김일성과 관련이 있는 내용은 모두 비공개로 숨겼다. 김일성 신격화에 공을 들이던 북한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질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조치였을 것이다. 유 작가는 이런 자료들을 30년 이상의 시간을 들여 수집했고, 책을 완성했다. 평전에는 북한의 주장과 상반된 얘기들이 적잖은데 보천보전투 관련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유 작가는 1937년 6월 4일 발생한 보천보전투의 실제 지휘관은 김일성이 아니라 왕작주(王作舟) 동북항일연군 2군 6사 참모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군 6사는 1930년대 후반 김일성이 지휘한 부대였다. 중국인인 왕작주는 김일성 부대 참모장으로서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 같은 존재였다. 길림군관학교 졸업생인 왕작주는 열정만 앞세울 뿐 병법은 전혀 몰랐던 김일성을 대신해 주요 전투 대부분을 지휘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동안 중국과 북한은 왕작주라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도록 적잖은 공을 들였다. 가장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가장 깊숙이 묻힌 셈이다. 북한이 기록한 항일투쟁사 어디에도 김일성 부대 참모장에 대한 기록은 없다. 유 작가에 따르면 1937년 5월 백두산 인근 베개봉 지역에 진출한 최현 부대가 일본군에 포위되자 왕작주는 베개봉과 적의 거점인 혜산의 중간 지점인 보천보를 공격해 포위망을 푼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자신이 지휘하고 있던 6사 소속 7퇀(연대) 4중대(중대장 오중흡) 70여 명, 8퇀 1중대(중대장 무량본·武良本) 30여 명, 기관총소대(소대장 이동학) 10여 명, 여성중대(중대장 박녹금) 10여 명 등 총 130여 명을 거느리고 보천보를 공격했다. 당시 항일연군은 지휘관과 참모장이 각각의 친솔부대를 거느리고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들도 있다. 보천보전투 때 경찰서 습격을 맡았던 중국인 항일열사 무량본과 6사 9퇀장 마덕전의 회고담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에 따르면 보천보전투의 현장 지휘는 왕작주가 했고, 김일성은 다른 곳에서 작전을 벌이다가 보천보전투 발생 다음 날인 1937년 6월 5일 압록강 건너편 23도구에서 왕작주 부대와 합세했다. 김일성이 소련에 들어가 1942년에 직접 쓴 ‘항련 제1로군 약사’에는 보천보전투가 언급돼 있지 않다. 자신이 한 일도 아닌 데다 별로 대단한 전투라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이 보천보전투에 의미를 두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다. 왕작주는 1940년 전사했다. 유 작가와 면담한 왕작주의 외손녀는 “생전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인 이가 김일성이었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전투 중 중상을 입은 왕작주가 의식을 잃고 체포돼 이송될 때 김일성이 나타나 그가 변절한 것으로 오해하고 총을 쐈다고 한다. 보천보전투는 1937년 6월 5일 동아일보의 특종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일제의 정보 통제가 엄혹했던 시기였지만 습격 상황과 피해 대상 등을 매우 자세하고 정확하게 소개했다. 다만 보천보전투가 김일성 부대의 작전이었다는 점만 밝히고, 누가 전투를 현장 지휘했는지는 다루지 않았다. 당시로선 그런 내용까지 파악하기란 쉽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북한은 보천보전투를 김일성의 최대 업적 가운데 하나로 내세우며 북한 주민들에게 김일성 신격화를 세뇌시켜 왔다. 유 작가의 저서가 공개되고, 보천보전투가 김일성 부대의 참모장 왕작주가 지휘한 작전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북한 사람들에겐 적잖은 충격이 될 것 같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최근 만난 대북지원단체 관계자는 “상당액의 물자가 북으로 가는 중인데 연락이 안 돼 답답하다”고 말했다. 물자가 가면 누가 받으러 나간다는 정도는 알려줘야 하는데 대답이 없다는 것이다. 북한이 남측 민간단체들을 만나자고 중국에 불러놓고는 23일 당일에 “상황이 생겨 실무협의를 취소한다”고 팩스를 보낸 일도 있다. 원인은 하나다. 북한의 대남창구인 통일전선부가 하노이 회담 결렬에 화가 난 김정은의 지시로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숙청된 인사 중에는 남쪽에도 잘 알려진 김성혜 통전부 통일전선책략실장(54)이 포함돼 있다. 김 실장은 베트남 하노이 북-미 회담에 참가했다가 귀국한 직후 억류돼 취조를 받았고, 얼마 전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것으로 전해졌다. 하노이 회담 실무자들이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예측이 나올 때 “설마 미국과 마주 앉았던 사람들을 숙청하겠느냐”는 반론이 있었지만 예측은 현실이 됐다. 김성혜는 지난해에 부각된 인물이다. 평창 겨울올림픽에 참가하러 내려온 김여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존재감을 드러냈고, 북-미 협상에 깊숙이 개입했다. 김영철 통전부장과 함께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만났고 1, 2차 북-미 회담 준비 작업도 주도했다. 김성혜는 북한의 유일한 여성 대남협상가로 과거 남북회담 수석대표도 지냈고,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해 9월 방북 때는 김정숙 여사를 수행하기도 했다. 올해 통일부가 발행하는 ‘북한 주요 인물정보 2019’에 처음 이름을 올렸는데 그게 마지막이 됐다. 반면 함께 북-미 협상에 참가했던 한 살 위의 여성 실세 최선희 외무성 북미국장은 하노이 회담 이후 승승장구하고 있어 비교가 된다. 최선희는 부상(차관급)으로 승진했고 장관들도 하기 어려운 국무위원회 위원에 올랐다. 후보위원을 거치지 않고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위원도 됐다. 하노이 회담 전날 김정은이 멜리아 호텔에서 가진 실무회의의 원탁에는 김성혜와 최선희를 포함해 단 4명만 앉았다. 결과를 보면 최선희의 분석은 높은 평가를 받았고, 김성혜의 분석은 격노를 산 셈이 됐다. 김성혜와 함께 트럼프 대통령을 만났던 박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은 최근 가족과 함께 지방으로 추방된 것으로 전해진다.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냐” 발언으로 화제가 됐던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과 김혁철 국무위원회 대미특별대표도 공식 석상에서 사라졌는데, 지금 취조를 받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대미·대남 외교를 총괄해온 김영철도 통전부장에서 해임돼 허울뿐인 노동당 부위원장으로 밀려나 미래를 알 수 없게 됐다. 북-미 협상에 뛰어든 통전부 라인의 ‘김영철 사단’이 모두 전멸한 셈이다. “대남 업무를 맡은 통전부가 분수에 맞지 않게 외무성의 일인 북-미 회담은 왜 가로챘을까”라는 의문이 있었는데 결국 그 업보를 받았다. 숙청 바람은 통전부에만 불지 않았다. 1993년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공사로 시작해 유엔 차석대사를 두 번씩이나 지낸 20여 년 경력의 최고 미국 전문가 한성렬 외무성 부상(65)은 총살됐다고 한다. 그를 포함해 소문이 무성했던 외무성 간부 4명의 처형설은 사실인 듯하다. 다만 4명 모두 해외에서 활동한 인물들이지만 외무성 소속이 아닌 사람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 부상은 북핵 문제의 주요 고비마다 미국에서 북한의 입으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한창 나이에 미국에 매수된 간첩으로 낙인찍혀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됐다. 북한 내 유일한 미국 아이비리그 졸업생일지 모를 그의 딸도 수용소에 끌려갔을 가능성이 크다. 한 부상은 유엔에 근무하던 1990년대 말 한국 교민들의 후원을 받아 딸을 컬럼비아대에서 공부시켰다. 최근의 숙청 상황을 전해준 북한 내부 소식통은 과거에도 고위층의 숙청 소식들을 정부 발표보다 훨씬 이전에 정확히 알려주었다. 감옥 간 사람도 하루 만에 꺼내놓을 수 있는 북한인지라 숙청 보도는 부담스럽지만 이 소식통은 신뢰할 만하다. 통전부에 몰아친 피바람은 북한과의 접촉을 학수고대하는 한국 민간단체들에는 악재다. 에이스들이 숙청된 통전부는 최대한 몸을 사릴 것이다. 수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대남협상의 전면에 나섰던 통전부 고위급 중 무사히 은퇴한 사람은 거의 없다. 거긴 죽음의 자리다. 이 칼럼을 북에서 읽게 될 통전부 간부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 “나는 아닐 것이라고 제발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연일 연예인들의 마약 투약 사건으로 시끄럽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연예인 마약 사범 뉴스로 언론이 도배되고 있다. 그럴 때마다 커지는 궁금증은 ‘도대체 저 마약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이다. 전문가들은 국내 유통 마약 중 적잖은 물량이 북한산일 것으로 추정한다. 일반적으로 삼엄한 감시와 폐쇄성으로 인해 북한은 ‘마약 청정 국가’일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북한은 급속히 마약에 빠져들고 있다. 게다가 갈수록 북한산 마약이 한국에 더 많이 유입됨으로써 한반도 전체가 ‘마약 지대’가 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자유한국당 소속 윤상현 외교통일위원장은 2012년에 “2010년 국내에서 적발된 외국산 필로폰 8200g 중 57.3%가 중국에서 반입됐고 그중 상당량이 북한산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외 여러 마약 전문가들의 말을 종합하면 국내에서 유통되는 필로폰의 최소 30∼40%는 북한산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때문에 마약 전문가들은 정부가 나서서 북한의 마약 실태를 파악해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탈북자와 북한 소식에 정통한 전문가들이 털어놓은 북한의 마약 제조와 유통, 중독 현황 등을 정리해 본다.○ 북한은 마약 중독 사회 2013년 북한 당국은 형법을 개정해 ‘비법아편재배·마약제조죄’에 대해 사형할 수 있도록 했다. 그만큼 마약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다는 뜻이다. 실제로 마약 사법은 급증하고 있다. 단속해야 할 보위성 요원들부터 마약에 빠져 있거나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평양 출신의 한 탈북민은 “2010년에 검사로 일하는 친구가 술을 마시며 ‘전당 전군 전민이 약을 한다’며 개탄하더니 몇 달 후에는 그 친구가 마약을 하더라”라고 말했다. 마약이 얼마나 북한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가에 대한 증언은 넘쳐난다. 최근 입국한 탈북민들은 “어느 마을에 가나 얼음(마약의 은어)을 파는 집은 꼭 있으며 이런 집을 ‘소분집’이라 한다”고 말했다. 북한 내에서 현재 10회 정도 사용할 수 있는 얼음 1g의 가격은 15달러(약 1만8000원) 이하로 거래된다. 한국에서 밀거래되는 가격의 수십분의 1에 불과하다. 가격이 싼 만큼 찾는 사람들도 많을 수밖에 없다. 북한인권정보센터는 2016년 탈북민 1467명을 대상으로 북한 마약 실태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였다. 조사 결과 2010∼2012년 탈북한 사람들의 13.6%가 마약을 접촉했다. 마약 접촉 비율은 2013년 26.8%, 2014년 25.0%, 2015년 36.7%로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실제로 얼마 정도의 북한 사람이 마약을 사용할까. 이 질문에 2010년 이전 탈북자의 35.7%가 “10%가 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하지만 2014년 탈북자의 경우 ‘10% 이하’라고 응답한 비율은 16.2%에 그쳤다. 이들의 27.8%가 “10∼30%가 마약을 사용한다”고 대답했고, 나머지 56%는 “30% 이상의 북한 주민이 마약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똑같은 질문에 2016년 탈북한 2명의 대답은 충격적이다. 이들은 “북한 주민의 90% 이상이 마약을 사용한다”고 답했다. 이 대답이 과장됐을 가능성도 있지만, 북한의 조사 결과는 마약 사용이 해마다 빠르게 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쩌다 북한이 이렇게 된 것일까.○ 국가 차원에서 마약을 양성하다 사실 북한은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마약 청정 지대였다. 그러다 1980년대 중반 북한 중앙당 간부들에게 건강 치료용으로 필로폰이 공급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평양 출신의 고위 소식통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의 경우 매달 1, 2알의 필로폰이 든 알약이 ‘뇌출혈, 뇌혈전 예방약’ ‘피로 회복제’ ‘건강치료제’ 등의 이름으로 지급됐다”며 “간부들도 이 약이 마약이란 걸 알았다”고 증언했다. 당시 70, 80대 고령의 간부들이 증가하며 건강 문제가 자주 발생하자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이런 조치가 내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1990년대 초반부터는 국가 차원에서 양귀비를 대대적으로 재배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1980년대부터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도별로 경작지를 10ha 혹은 20ha 규모로 할당하여 재배했다”고 말했다. 구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한 후로는 외화를 벌어들일 목적으로 마약 밀매를 시작했다. 김일성의 건강을 책임졌던 만청산연구원 출신의 한 탈북자는 “1990년 금수산의사당 경리부 당위원회가 ‘백도라지’(양귀비의 북한식 표현) 농장을 맡는 것에 대한 교시를 전달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김일성은 마약 생산을 “미 제국주의와 싸우는 새로운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등 적국을 마약에 중독시켜 자본주의 사회를 마비시키고, 북한은 돈도 벌어 사회주의를 지킬 수 있는 일석이조의 사업이란 논리였다. 이후 북한의 북부 지역 농장들마다 일정 규모로 양귀비를 재배했다. 양귀비 진액(아편)을 채취할 때엔 학생들까지 동원했다. 이렇게 전국에서 만든 아편은 평양에 집결돼 아편으로 제작됐다. 당시 상황에 정통한 한 탈북민은 “평양 외곽의 상원군에 생산기지가 있었는데, 국가과학원 상원분원이란 외피를 쓰고 있었다”며 “이곳에서 생산된 헤로인은 항불안제인 ‘디아제팜’과 외형이 똑같아 구별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는 “보위사령부 등 최정예 공작원들이 홍콩과 마카오 등의 동남아 마약조직과 접촉해 판로를 개척했는데 신분이 드러날 경우를 대비해 철저히 개인별로 움직였다”고 증언했다.○ 평양 고위층에 퍼진 헤로인 ‘덴다’ 이후 북한산 헤로인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미국은 본격적인 제재 움직임을 보였다. 북한 당국은 1990년대 중반 상원분원을 폭파시켜 흔적을 없앴다. 하지만 이곳에서 이미 만들어 놓은 대량의 헤로인이 있었다. 바로 이 헤로인이 1990년대 중후반부터 북한 내부 부유층에 퍼지기 시작했다. 헤로인을 북한에선 ‘덴다’ ‘총탄’ 등으로 불렀다. 디아제팜과 똑같은 흰색의 알약 외에 특이하게 빨간색으로 된 덴다도 있었다. 상원분원에서 만든 덴다는 3, 4개 루트를 통해 평양에 흘러나왔다. 이 마약은 주로 젊은 아가씨들이 부유한 청년들을 상대로 팔았다. 덴다 구입자들은 이것을 부숴 가루로 만든 뒤 코로 흡입했다. 함유량에 따라 80캄마, 120캄마, 240캄마로 구분됐는데, 2000년 평양에서 거래된 덴다 120캄마 한 알의 가격은 2달러로, 부유층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이 때문에 평양의 극소수 부유층과 원산 신의주의 무역회사 사장 정도만 헤로인을 경험했다. 탈북자 중에 덴다를 경험한 사람이 거의 없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헤로인에 이어 필로폰 ‘얼음’ 퍼져 2003년경 상원분원이 만든 덴다의 재고가 바닥이 났다. 이때 새로 등장한 것이 ‘아이스’ ‘얼음’으로 불린 필로폰이었다. 헤로인과 필로폰은 완전히 상반되는 마약이다. 헤로인은 중추신경을 억제해 그 자체로만 쾌락을 느끼게 하는 반면 필로폰은 강력한 중추신경 흥분제다. 상반된 마약이 시점을 두고 북한에 등장한 이유는 식량난 악화와 연관된다. 상원분원이 폐쇄된 후 소속 과학자들은 국가과학원 함흥분원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둘 다 화학 계열의 연구소라는 게 이유였다. 실제로 애초에 상원분원에서 마약을 만들던 기술자들은 화학 공업의 중심지인 함흥의 화학공대 출신이 많았다. 바로 이들이 고향인 함흥으로 내려갔을 무렵 북한엔 일명 ‘고난의 행군’이라 부르는 대기근이 닥쳤다. 그러니 배급만으로는 먹고살기 어려워졌고, 마약 제조 전문가들인 이들은 헤로인보다 싸고 쉽게 원료를 구할 수 있는 필로폰을 제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필로폰 원료는 중국에서 의료용으로 수입하는 염산에페드린이었다. 이들이 개발한 필로폰은 2003년경부터 헤로인 판매망을 타고 평양에 공급되기 시작했다. g당 5∼10달러 정도에 공급되는 필로폰은 순식간에 평양의 중산층까지 확산됐다. 2006년경부터는 지방에까지 필로폰 밀매가 본격화됐고, 2010년경에는 지방의 중산층들도 필로폰에 손을 댔다. 여전히 북한 내부의 마약 제조는 개인이 아닌 국가 차원에서 진행된다. 정찰총국, 보위성, 보위사령부 등 군부 조직도 마약 생산과 해외 밀매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소식통은 “김정은 집권 이후에도 북한군 총정치국 산하 53부에서 평양과 평성 사이 배산점이란 지역에 필로폰 생산 공장을 만들어 운영했다”며 “해마다 국가 차원에서 20t 이상의 필로폰이 생산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한국의 ‘기술자’까지 북한 진출 북한산 ‘얼음’은 96∼99% 정도의 순도를 보장하기 때문에 해외 밀매 조직엔 인기가 높다. 북한산 필로폰의 순도가 높아진 데엔 한국 ‘기술자’들의 공이 크다는 것이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한 탈북 소식통은 “필로폰 생산 초기에 한국인 기술자 3명이 국내 단속을 피해 동남아시아, 중국에 갔다가 북한까지 넘어왔다”며 “이들의 경험과 지식이 북한에 전수됐다”고 말했다. 한국인 기술자들도 99% 순도의 필로폰을 만들지는 못했다. 북한 당국이 정예 연구진을 투입하고 전문 생산기지를 제공하는 ‘투자’를 한 결과 순도가 크게 높아졌다는 것. 기술을 모두 넘겨받은 북한은 이후 한국 기술자 2명을 총살했으며 1명은 간신히 탈북해 숨어 사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기술자가 해외로 진출한 사례도 있다고 한다. 중국의 소식통은 “중국 단둥에서 북한과 큰 규모로 거래하는 사업가 송모 씨가 2004년 북한 기술자를 10만 달러에 계약해 데려온 뒤 기술을 전수받고 살해한 사건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 북한의 필로폰 기술이 다시 진화했다. 과거엔 중국의 염산에페드린이 원재료였는데 이를 수입하기 어려워지자 원재료를 바꾸면서 이른바 ‘기술혁신’을 이뤘다는 것. 탈북 소식통은 “새로운 방식의 필로폰 제조를 두고 내부에선 ‘마약 제조의 기본을 바꾼 혁명이 일어났다’고 비유한다”며 “새 재료를 쓴 필로폰의 질이 훨씬 더 좋다”고 말했다.○ 해외 북한 식당이 마약 유통망 북한의 마약 해외 밀매는 점점 거침없어지고 있다. 대북 소식통은 “신의주와 마주한 중국 둥강(東港)시 공안국 부국장과 변방정찰 대대장이 2015년경 북한과 필로폰 밀거래를 하다 체포됐는데, 압수수색에서 50kg 이상의 필로폰이 나왔다”고 말했다. 또 다른 소식통도 “동남아시아는 북한 얼음이 이미 점령했다. 심지어 필리핀에는 유통 거점이 없는데도 팔려 나간다”고 증언했다. 동남아시아의 북한 필로폰은 현지 밀매조직을 통해 다시 미국과 유럽 등으로 넘어간다. 실제로 2015년 8월 미국 뉴욕 맨해튼연방지법에서는 북한산 마약을 미국에 밀반입하려던 홍콩 범죄조직 소속의 영국, 체코, 필리핀, 대만 등 다국적 조직원 5명이 검거돼 재판을 받기도 했다. 이들은 북한산 마약을 필리핀에 들여와 숨겨 놓은 뒤 100kg을 태국을 경유해 반입하려다 미 마약단속국(DEA)에 적발됐다. 이 중 한 명은 자기 조직이 필리핀에 북한산 필로폰 1t을 숨겨놓고 있다고 고백했다. 2017년 말 중국 동북 3성 지역에서 밀거래되던 고순도 북한산 필로폰 가격이 갑자기 하락했다. ‘한 작대기’에 60만 원 정도에 밀거래되던 필로폰은 25만 원 선까지 하락했다. 작대기는 1회용 주사기 한 대 분량을 의미하는데, 4g 정도다. 북한산 마약 거래에 정통한 소식통은 “대북 제재로 중국 내 북한 식당이 한꺼번에 철수하면서 이들이 가지고 있던 마약을 일시에 방출했기 때문에 가격이 크게 하락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중국 내 북한 식당들이 북한산 마약의 유통거점 역할을 한다는 간접 증거인 셈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연일 연예인들의 마약 투약 사건으로 시끄럽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연예인 마약 사범 뉴스로 언론이 도배되고 있다. 그럴 때마다 커지는 궁금증은 ‘도대체 저 마약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이다. 전문가들은 국내 유통 마약 중 적잖은 물량이 북한산일 것으로 추정한다. 일반적으로 북한이 삼엄한 감시와 폐쇄성으로 인해 ‘마약 청정 국가’일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북한은 급속히 마약에 빠져들고 있다. 게다가 갈수록 북한산 마약이 한국에 더 많이 유입됨으로써 한반도 전체가 ‘마약 지대’가 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자유한국당 소속 윤상현 외교통일위원장은 2012년에 “2010년 국내에서 적발된 외국산 필로폰 8200g 중 57.3%가 중국에서 반입됐고 그중 상당량이 북한산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외 여러 마약 전문가들의 말을 종합하면 국내에서 유통되는 필로폰의 최소 30~40%는 북한산으로 추정될 정도다. 이 때문에 마약 전문가들은 정부가 나서서 북한의 마약 실태를 파악해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탈북자와 북한 소식에 정통한 전문가들이 털어놓은 북한의 마약 제조와 유통, 중독 현황 등을 정리해 본다. ● 북한은 마약 중독 사회 2013년 북한 당국은 형법을 개정해 ‘비법아편재배·마약제조죄’에 대해 사형할 수 있도록 했다. 그만큼 마약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다는 뜻이다. 실제로 마약 사법은 급증하고 있다. 단속해야 할 보위성 요원들부터 마약에 빠져 있거나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평양 출신의 한 탈북민은 “2010년에 검사로 일하는 친구가 술을 마시며 ‘전당 전군 전민이 약을 한다’며 개탄하더니 몇 달 후에는 그 친구가 마약을 하더라”라고 말했다. 마약이 얼마나 북한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가에 대한 증언은 넘쳐난다. 최근 입국한 탈북민들은 “어느 마을에 가나 얼음(마약의 은어)을 파는 집은 꼭 있으며 이런 집을 ‘소분집’이라 한다”고 말했다. 북한 내에서 현재 10회 정도 사용할 수 있는 얼음 1g의 가격은 15달러(약 1만8000원) 이하로 거래된다. 한국에서 밀거래되는 가격의 수십분의 1에 불과하다. 가격이 싼 만큼 찾는 사람들도 많을 수밖에 없다. 북한인권정보센터는 2016년 탈북민 1467명을 대상으로 북한 마약 실태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였다. 조사 결과 2010~2012년 탈북한 사람들의 13.6%가 마약을 접촉했다. 마약 접촉 비율은 2013년 26.8%, 2014년 25.0%, 2015년 36.7%로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실제로 얼마 정도의 북한 사람이 마약을 사용할까. 이 질문에 2010년 이전 탈북자의 35.7%가 “10%가 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하지만 2014년 탈북자의 경우 ‘10% 이하’라고 응답한 비율은 16.2%에 그쳤다. 이들의 27.8%가 “10~30%가 마약을 사용한다”고 대답했고, 나머지 56%는 “30% 이상의 북한 주민이 마약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똑같은 질문에 2016년 탈북한 2명의 대답은 충격적이다. 이들은 “북한 주민의 90% 이상이 마약을 사용한다”고 답했다. 이 대답이 과장됐을 가능성도 있지만, 북한의 조사 결과는 마약 사용이 해마다 빠르게 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쩌다 북한이 이렇게 된 것일까.● 국가 차원에서 마약을 양성하다 사실 북한은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마약 청정 지대였다. 그러다 1980년대 중반 북한 중앙당 간부들에게 건강 치료용으로 필로폰이 공급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평양 출신의 고위 소식통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의 경우 매달 1, 2알의 필로폰이 든 알약이 ‘뇌출혈, 뇌혈전 예방약’ ‘피로 회복제’ ‘건강치료제’ 등의 이름으로 지급됐다”며 “간부들도 이 약이 마약이란 걸 알았다”고 증언했다. 당시 70, 80대 고령의 간부들이 증가하며 건강 문제가 자주 발생하자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이런 조치가 내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1990년대 초반부터는 국가 차원에서 양귀비를 대대적으로 재배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1980년대부터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도별로 경작지를 10㏊ 혹은 20㏊ 규모로 할당하여 재배했다”고 말했다. 구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한 후로는 외화를 벌어들일 목적으로 마약 밀매를 시작했다. 김일성의 건강을 책임졌던 만청산연구원 출신의 한 탈북자는 “1990년 금수산의사당 경리부 당위원회가 ‘백도라지’(양귀비의 북한식 표현) 농장을 맡는 것에 대한 교시를 전달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김일성은 마약 생산을 “미 제국주의와 싸우는 새로운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등 적국을 마약에 중독시켜 자본주의 사회를 마비시키고, 북한은 돈도 벌어 사회주의를 지킬 수 있는 일석이조의 사업이란 논리였다. 이후 북한의 북부 지역 농장들마다 일정 규모로 양귀비를 재배했다. 양귀비 진액(아편)을 채취할 때엔 학생들까지 동원했다. 이렇게 전국에서 만든 아편은 평양에 집결돼 아편으로 제작됐다. 당시 상황에 정통한 한 탈북민은 “평양 외곽의 상원군에 생산기지가 있었는데, 국가과학원 상원분원이란 외피를 쓰고 있었다”며 “이곳에서 생산된 헤로인은 항불안제인 ‘디아제팜’과 외형이 똑같아 구별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는 “보위사령부 등 최정예 공작원들이 홍콩과 마카오 등의 동남아 마약조직과 접촉해 판로를 개척했는데 신분이 드러날 경우를 대비해 철저히 개인별로 움직였다”고 증언했다.● 평양 고위층에 퍼진 헤로인 ‘덴다’ 이후 북한산 헤로인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미국은 본격적인 제재 움직임을 보였다. 북한 당국은 1990년대 중반 상원분원을 폭파시켜 흔적을 없앴다. 하지만 이곳에서 이미 만들어 놓은 대량의 헤로인이 있었다. 바로 이 헤로인이 1990년대 중후반부터 북한 내부 부유층에 퍼지기 시작했다. 헤로인을 북한에선 ‘덴다’ ‘총탄’ 등으로 불렀다. 디아제팜과 똑같은 흰색의 알약 외에 특이하게 빨간색으로 된 덴다도 있었다. 상원분원에서 만든 덴다는 3, 4개 루트를 통해 평양에 흘러나왔다. 이 마약은 주로 젊은 아가씨들이 부유한 청년들을 상대로 팔았다. 덴다 구입자들은 이것을 부숴 가루로 만든 뒤 코로 흡입했다. 함유량에 따라 80캄마, 120캄마, 240캄마로 구분됐는데, 2000년 평양에서 거래된 덴다 120캄마 한 알의 가격은 2달러로, 부유층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이 때문에 평양의 극소수 부유층과 원산 신의주의 무역회사 사장 정도만 헤로인을 경험했다. 탈북자 중에 덴다를 경험한 사람이 거의 없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헤로인에 이어 필로폰 ‘얼음’ 퍼져 2003년경 상원분원이 만든 덴다의 재고가 바닥이 났다. 이때 새로 등장한 것이 ‘아이스’ ‘얼음’으로 불린 필로폰이었다. 헤로인과 필로폰은 완전히 상반되는 마약이다. 헤로인은 중추신경을 억제해 그 자체로만 쾌락을 느끼게 하는 반면 필로폰은 강력한 중추신경 흥분제다. 상반된 마약이 시점을 두고 북한에 등장한 이유는 식량난 악화와 연관된다. 상원분원이 폐쇄된 후 소속 과학자들은 국가과학원 함흥분원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둘 다 화학 계열의 연구소라는 게 이유였다. 실제로 애초에 상원분원에서 마약을 만들던 기술자들은 화학 공업의 중심지인 함흥의 화학공대 출신이 많았다. 바로 이들이 고향인 함흥으로 내려갔을 무렵 북한엔 일명 ‘고난의 행군’이라 부르는 대기근이 닥쳤다. 그러니 배급만으로는 먹고살기 어려워졌고, 마약 제조 전문가들인 이들은 헤로인보다 싸고 쉽게 원료를 구할 수 있는 필로폰을 제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필로폰 원료는 중국에서 의료용으로 수입하는 염산에페드린이었다. 이들이 개발한 필로폰은 2003년경부터 헤로인 판매망을 타고 평양에 공급되기 시작했다. g당 5~10달러 정도에 공급되는 필로폰은 순식간에 평양의 중산층까지 확산됐다. 2006년경부터는 지방에까지 필로폰 밀매가 본격화됐고, 2010년경에는 지방의 중산층들도 필로폰에 손을 댔다. 여전히 북한 내부의 마약 제조는 개인이 아닌 국가 차원에서 진행된다. 정찰총국, 보위성, 보위사령부 등 군부 조직도 마약 생산과 해외 밀매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소식통은 “김정은 집권 이후에도 북한군 총정치국 산하 53부에서 평양과 평성 사이 배산점이란 지역에 필로폰 생산 공장을 만들어 운영했다”며 “해마다 국가 차원에서 20t 이상의 필로폰이 생산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 한국의 ‘기술자’까지 북한 진출 북한산 ‘얼음’은 96~99% 정도의 순도를 보장하기 때문에 해외 밀매 조직엔 인기가 높다. 북한산 필로폰의 순도가 높아진 데엔 한국 ‘기술자’들의 공이 크다는 것이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한 탈북 소식통은 “필로폰 생산 초기에 한국인 기술자 3명이 국내 단속을 피해 동남아시아, 중국에 갔다가 북한까지 넘어왔다”며 “이들의 경험과 지식이 북한에 전수됐다”고 말했다. 한국인 기술자들도 99% 순도의 필로폰을 만들지는 못했다. 북한 당국이 정예 연구진을 투입하고 전문 생산기지를 제공하는 ‘투자’를 한 결과 순도가 크게 높아졌다는 것. 기술을 모두 넘겨받은 북한은 이후 한국 기술자 2명을 총살했으며 1명은 간신히 탈북해 숨어 사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기술자가 해외로 진출한 사례도 있다고 한다. 중국의 소식통은 “중국 단둥에서 북한과 큰 규모로 거래하는 사업가 송모 씨가 2004년 북한 기술자를 10만 달러에 계약해 데려온 뒤 기술을 전수받고 살해한 사건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 북한의 필로폰 기술이 다시 진화했다. 과거엔 중국의 염산에페드린이 원재료였는데 이를 수입하기 어려워지자 원재료를 바꾸면서 이른바 ‘기술혁신’을 이뤘다는 것. 탈북 소식통은 “새로운 방식의 필로폰 제조를 두고 내부에선 ‘마약 제조의 기본을 바꾼 혁명이 일어났다’고 비유한다”며 “새 재료를 쓴 필로폰의 질이 훨씬 더 좋다”고 말했다.● 해외 북한 식당이 마약 유통망 북한의 마약 해외 밀매는 점점 거침없어지고 있다. 대북 소식통은 “신의주와 마주한 중국 둥강(東港)시 공안국 부국장과 변방정찰 대대장이 2015년경 북한과 필로폰 밀거래를 하다 체포됐는데, 압수수색에서 50㎏ 이상의 필로폰이 나왔다”고 말했다. 또 다른 소식통도 “동남아시아는 북한 얼음이 이미 점령했다. 심지어 필리핀에는 유통 거점이 없는데도 팔려 나간다”고 증언했다. 동남아시아의 북한 필로폰은 현지 밀매조직을 통해 다시 미국과 유럽 등으로 넘어간다. 실제로 2015년 8월 미국 뉴욕 맨해튼연방지법에서는 북한산 마약을 미국에 밀반입하려던 홍콩 범죄조직 소속의 영국, 체코, 필리핀, 대만 등 다국적 조직원 5명이 검거돼 재판을 받기도 했다. 이들은 북한산 마약을 필리핀에 들여와 숨겨 놓은 뒤 100㎏을 태국을 경유해 반입하려다 미 마약단속국(DEA)에 적발됐다. 이 중 한 명은 자기 조직이 필리핀에 북한산 필로폰 1t을 숨겨놓고 있다고 고백했다. 2017년 말 중국 동북 3성 지역에서 밀거래되던 고순도 북한산 필로폰 가격이 갑자기 하락했다. ‘한 작대기’에 60만 원 정도에 밀거래되던 필로폰은 25만 원 선까지 하락했다. 작대기는 1회용 주사기 한 대 분량을 의미하는데, 4g 정도다. 북한산 마약 거래에 정통한 소식통은 “대북 제재로 중국 내 북한 식당이 한꺼번에 철수하면서 이들이 가지고 있던 마약을 일시에 방출했기 때문에 가격이 크게 하락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중국 내 북한 식당들이 북한산 마약의 유통거점 역할을 한다는 간접 증거인 셈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정부가 대북 식량 지원 사업을 본격화할 방침을 밝히면서 찬반 논란이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는 북한이 현재 심각한 기아상태에 직면해 있는 만큼 인도적 측면에서 지원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반면 북한의 식량난이 과장됐고, 식량 지원이 “늘 선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다”며 반대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특히 북한 식량난의 근거가 되고 있는 인구수와 수요량 통계가 왜곡됐을 가능성마저 제기되고 있어 식량 지원을 둘러싼 찬반 양측의 갈등은 격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북한 식량난, “정말 심각” vs “과장 가능성” 북한 식량난은 이달 3일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식량계획(WFP)이 발표한 ‘북한의 식량안보 평가’ 보고서를 근거로 한다. 이 보고서는 지난해 북한의 식량 생산량이 최근 10년 사이 가장 심각한 수준이며, 올해 회계연도(2018년 11월∼2019년 10월) 식량 부족량은 136만 t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보고서는 따라서 북한 인구의 40%인 1010만 명이 식량 부족에 처해 있으며 긴급하게 식량 지원이 절실하다고 밝혔다. 문제는 FAO와 WFP 보고서가 곡물 생산량과 분배에 대한 기본적인 통계를 북한 당국에서 받아 발표하기 때문에 북한이 통계를 조작하면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수요 규모를 좌우하는 인구수가 정확하지 않다. FAO와 WFP는 보고서에서 북한 인구를 250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는 2017년 조선중앙연감에서 밝힌 수치(2015년·2503만 명)와 비슷하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결과에 의혹을 제기한다. 2008년 한국과 유엔인구기금(UNFPA)의 재정지원으로 북한이 실시한 인구센서스 결과도 불신 받았다. 당시 북한 인구는 2405만 명으로 발표됐다. 이석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2011년 발표한 논문 ‘2008년 북한 인구센서스의 분석과 문제점’에서 “군대 인구와 관련한 의도적 통계 왜곡의 가능성이 의심되며, 동시에 이들 통계는 기존의 인구통계와도 서로 조화될 수 없을 만큼 불일치한다”며 “현재 존재하는 북한의 모든 인구통계는 통계적 왜곡의 가능성과 불일치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본보가 단독 입수한 북한 중앙통계국 통계자료에 따르면 북한의 인구는 2005년 2100만 명을 넘어섰다가 2009년부터 2000만 명대로 후퇴했고, 이후 계속 줄었다. 추세대로라면 현재 북한 인구는 2050만 명 정도로 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북한의 인구가 FAO와 WFP 추산보다 450만 명이 적다는 뜻이며, 그만큼 북한에 필요한 식량 수요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국력을 부풀리기 위해 인구수를 조작하는 것은 과거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애용하던 방법이다. 북한도 예외는 아니다. 흥미로운 점은 북한이 과거 외부에 공개한 인구는 당시의 한국 인구 절반 수준으로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 식량 수요, “손실 커 수요 늘어” vs “근거 불명확” FAO, WFP 보고서는 북한이 앞으로 1년 동안 필요한 곡물 소요량을 575만 t으로 추정했다. 이 보고서는 지난해 북한의 곡물 소요량을 562만 t으로 잡았는데 1년 만에 13만 t을 늘려 잡은 이유로 “올해 식량 생산과 사료 소비량, 수확 후 손실 등이 더 많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됐다”고 설명했다. 반대 측은 이에 대해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고 반박한다. 또 실제 북한의 1년 식량 소비량을 추정한 것과도 다르다고 주장한다. 북한의 식량 소비량은 1인당 하루 평균 배급 목표 기준량으로 삼고 있는 500g을 기준으로 산출할 수 있다. 북한 인구가 2050만 명이면 전국적으로 매일 1만500t이 필요하다. 실제로 많은 탈북자도 “북한에선 전국의 하루 배급량이 1만 t이란 말이 정석처럼 통용되고 있다”고 증언한다. 1년 365일 기준으로 할 때 북한이 배급제를 유지하려면 1년 동안 383만 t이 필요하다. 북한 인구를 2500만 명으로 높여 잡아도 456만 t이 필요하다. 여기에 식품 생산, 사료 등에 사용되는 곡물을 포함해도 북한은 1년에 500만 t만 확보하면 굶어죽을 상황까지 내몰리진 않는다는 주장이 나온다.○ “현장 조사 했다” vs “조사 부실했다” FAO, WFP는 현장 조사를 위해 올해 3월 29일부터 4월 12일까지 전문가 8명을 북한에 파견했다. 이들은 북한 당국이 제공한 차량을 타고 6개의 도를 돌면서 155개 농가를 살펴보고 농민들과 농업 관계자들을 인터뷰했고, 그 결과를 보고서에 담았다. 하지만 정작 식량 가격과 거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장마당은 북한 당국의 비협조로 방문하지 못했다. 북한 농업전문가인 권태진 GS&J 북한동북아연구원장은 “이번 보고서에서 경사도가 15도 이상인 50만 ha의 농지가 빠졌는데, 이곳에서 생산되는 식량이 20만 t 정도로 추산된다”고 말했다. 보고서엔 북한 개인 경작지(소토지) 생산량도 반영되지 않았다. 북한에서 농민들이 협동농장 농사보단 개인 소토지 농사에 더 열심이란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개인 경작지 생산량은 농민들이 정확하게 신고하지 않기 때문에 당국이 파악할 수 없다. 북한이 최근 러시아에서 지원받은 밀가루 10만 t도 누락됐고, 외부 지원과 무역, 밀수 등으로 들어가는 식량도 전부 빠졌다. WFP의 발표에 따르면 북한은 늘 식량 위기에 몰려 있다. 하지만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갓 탈북한 북한 주민을 매년 약 100명씩 8년 동안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하루 세 끼를 다 먹었다”고 응답한 사람이 2012년 72.4%에서 2018년 87.4%로 증가했다. 적어도 북한이 굶주림에 시달릴 정도는 아니라는 뜻이다. 북한 경제전문가인 김병연 서울대 교수는 “북한 경제를 연구하는 다수의 학자는 FAO가 사업을 하려는 조직 특성 때문에 북한의 식량 필요를 과대평가하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쌀이 부족한데도 떨어지는 북한 쌀값의 미스터리 북한의 식량난을 판단하는 중요한 잣대는 장마당 쌀값이다. 하지만 최근 이 가격은 위기설과는 달리 하락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보름 주기로 북한의 쌀값과 환율 등 주요 지표들을 조사해 공개해 온 북한전문매체 데일리NK에 따르면 14일 현재 북한의 식량 가격은 평양 기준으로 1kg당 4180원이다. 평양의 쌀값은 지난해 12월 5000원이었고, 지난해 5월 15일엔 5100원이었다. 1년 동안 오히려 1000원이 하락한 것이다. 북한의 식량 가격은 2017년 9월에 6100원을 기록한 뒤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내림세를 보이고 있다. 통일부는 15일 이에 대해 “북한 체제 특성상 공식 가격이나 공식 기구가 아닌 (장마당) 지표를 가지고 식량 사정을 추정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많은 제한이 있다”며 “공식기구에 의한 가격이 아닌 장마당 가격에 대해 정부가 평가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라고 밝혔다. 주민의 구매력이 떨어지면 시장 식량 가격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할 때에도 쌀값은 자고 나면 올랐다.○ 식량 지원, “서둘러야” vs “신중해야” WFP는 5∼9월이 북한의 춘궁기라며 식량 지원이 가을 추수 이전에 이뤄져야 한다고 요청했다. 정부도 이에 화답해 9월 전까진 식량 지원을 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이는 전통적인 북한의 춘궁기 개념과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릿고개로 불리는 북한의 춘궁기는 3∼5월이고, 6월 초부터 이모작 봄 작물인 밀, 보리, 감자가 나오면 식량 사정은 점점 풀린다는 설명이다. 대북 식량 지원이 의도한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도 따져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우선 북한에 식량이 지원되면 내부 쌀값이 떨어지고, 굶어죽을 걱정이 없어진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또 농민에 대한 군량미 수탈도 줄어드는 작용도 있다. 북한이 식량 지원을 받을 때 대남도발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점도 기대 효과다. 햇볕정책이 본격 시행돼 매년 3억∼4억 달러어치의 식량 지원이 본격 시작된 2002년 하반기부터 2007년 말까지 북한은 인명 피해를 초래한 군사도발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효과도 있다. 우선 북한은 외부 지원으로 국가가 장악한 식량이 많아지면 배급제를 부활시킬 가능성이 크다. 시장에서 돈을 벌어 살던 주민이 배급 500g 때문에 직장에 강제로 출근해 통제에 묶이게 된다는 뜻이다. 북한의 시장화에 역행할 수 있다. 북한의 농업제도 개혁도 늦어질 수 있다. 북한은 부족한 식량난을 타개하기 위해 일부 지역에서 농가 책임 경영제 등을 시범 실시하고 있다. 하지만 외부 지원으로 연명할 수 있다면 굳이 협동농장 체제를 허물 동기가 없어진다. 모니터링이 철저히 되지 않으면 지원 식량이 군량미 창고에 쌓이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김병연 서울대 교수는 “WFP의 현장 모니터링도 북한이 동의하는 접근 정도만 가능하기 때문에 북한의 특성상 지원의 투명성을 완벽하게 보장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주성하 zsh75@donga.com·이지훈 기자}

“올해에 군민이 힘을 합쳐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 건설을 최단 기간 내에 완공하자.” “그 무엇에 쫓기듯 속도전으로 건설하지 말고 공사기간을 6개월간 더 연장하여 다음 해 태양절까지 완벽하게 내놓자.” 앞의 말은 김정은의 2018년 신년사이고, 나중은 그가 올해 4월 6일 원산을 방문했을 때 한 얘기다. 1년 4개월 만에 메시지가 완전히 달라졌다. 실제로 김정은은 2018년 신년사 직후 원산관광지구를 올해 태양절(4월 15일)까지 완공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지난해 8월 김정은은 완공 시점을 2019년 노동당 창건기념일(10월 10일)로 6개월 연장하라고 번복했다. 그리고 올해 4월에 다시 내년 4월로 6개월 더 연장했다. 두 차례의 연기 결정 모두 김정은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온 지 두 달쯤 지나 이뤄졌다. 김정은의 공사기간 연장 결정은 몇 가지 요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냉혹한 현실에 대한 김정은의 깨달음이다.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김정은은 자기가 직접 정세를 주도하면 2년 내로 대북제재가 풀리고 북한에 외국인 관광객이 몰려오는 상황이 만들어질 것이라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을 만날 때마다 이런 희망은 퇴색됐다.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김정은은 제재를 푸는 것이 매우 어렵고, 현실이 절대 녹록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으로 추정해 본다. 자금 부족도 빼놓을 수 없다. 김정은은 지난해 5월 26일부터 올해 4월 6일까지 10개월 남짓한 기간에 4차례나 공사현장을 방문했다. 그만큼 원산관광지구 건설에 공을 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원산관광지구에 들어설 건물들은 애초 완공 시점으로 잡았던 올 4월까지 골조공사도 마무리하지 못했다. 더 많은 품이 드는 내부 인테리어 공사는 엄두도 못 내고 있다. 북한은 2015년 평양에 2500가구의 미래과학자거리를 완공한 데 이어 2017년엔 4800가구 규모의 여명거리를 1년 만에 완공했다. 하지만 프로젝트 규모가 작은 원산관광지구는 2년 반이나 매달려도 완공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강력한 대북제재로 북한의 자금줄이 꽁꽁 묶인 탓도 있겠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건설 자금이 나오는 주머니가 다르기 때문이다. 평양 여명거리 공사는 김정은이 자기 주머니를 열지 않아도 가능하다. 하지만 원산관광지구는 오로지 김정은의 주머닛돈에 의존해서 건설해야만 한다. 평양의 거리 조성은 김정은이 구획만 지정하면 그 다음부터는 ‘돈주’들의 ‘돈 넣고 돈 먹기’판이 벌어진다. 북한에서 돈주는 권력을 가진 고위 간부들이다. 돈주처럼 보이는 사장이나 외화벌이 종사자들이 있지만 대다수가 돈과 권력을 틀어쥔 고위 간부들이 앞에 내세운 ‘바지사장’에 불과하다. 김정은이 벌여놓은 공사판은 권력자들이 돈을 불릴 좋은 기회가 된다. 최근 대북제재로 외화가 고갈돼 평양 집값이 하락했지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평양에선 아파트를 지어 팔면 투자금의 4∼5배를 벌 수 있었다. 부지와 건설 인력을 제공해 거리 조성의 최대 주역이 된 김정은도 완공된 주택의 절반 이상을 떼어 과학자, 교수, 예술인 등 정책적으로 챙겨줘야 할 사람들에게 공짜로 나눠주며 생색을 낼 수 있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반면 원산관광지구에 건설되는 호텔이나 상업시설은 팔 수 없다. 이런 이유로 김정은이 다양한 방법으로 회유해도 돈주들이 투자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원산관광지구는 김정은의 주머니가 비게 되면 진척되기 어려운 구조다. 게다가 아파트는 기본적인 내부 인테리어만 하면 되지만 호텔과 상업시설은 내부를 호화롭게 꾸며야 해 돈도 많이 든다. 김정은이 공사 기간을 연장한 것은 더 멋있게 짓겠다거나, 공사 담당자들을 배려하는 차원이 아니라 주머니가 비어 자금을 대줄 수 있는 여력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과 같은 강력한 대북제재가 유지된다면 원산관광지구가 북한의 계획대로 내년 4월에 완공될지도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원산관광지구가 대북제재로 말라가는 김정은의 주머니 사정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라는 사실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부산 부일외고는 학생들이 진로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을 세울 수 있도록 특별한 이벤트를 진행한다. 1학년 학생들이 자신의 장래 희망과 3년간의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자기 나름의 계획을 부모와 교사, 학급 친구들 앞에서 선포하는 ‘비전 선포식’이다. 올해로 벌써 6회째다. 학교는 학부모를 초청해 매년 4월 한 달간 1학년 학생 개개인의 비전을 듣고 학생들이 준비한 합창과 다양한 퍼포먼스도 펼치는 등 소통과 공감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첫 학기를 보내고 있는 1학년 학생 중에는 아직 진로를 정하지 못한 이들이 많다. 진로를 정한 학생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 없는 경우도 있다. 이를 감안해 학교는 비전 선포식 준비를 통해 학생들에게 자신의 진로와 그 실천계획을 짜게 하고 다양한 진로 적성을 탐구하게 만든다. 학생들은 3월 한 달간 진로 수업과 연계해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노력해야 할지 모색한다. 입학 후 실시한 진로진학예측검사와 자신의 진로와 연관된 대학의 입시 요강 등을 분석해 구체적인 학업 계획을 제시하거나 ‘꿈의 변천사’를 통해 중학교 시절부터 현재까지 자신의 발자취를 정리하기도 한다. 선포식은 학부모들에게도 자녀들이 생각하는 진로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1학년 1반 비전선포식에 참석한 이혜영 씨(최원진 학생 어머니)는 “아이들의 진지하고 열정적인 발표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모두의 꿈이 꼭 이뤄지기를 응원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비전 선포식 행사를 기획하고 주관한 이무진 교사(진로부장 겸 교감 직무대리)는 “기성세대가 젊은이에게 꿈을 가지라고 말하면서, 정작 부모님도 선생님도 학생들이 꿈에 대해 말할 기회를 주기보다 성적 얘기만 한다”며 “교사와 부모가 학생들의 마음속 이야기를 듣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에 진로 수업과 연계한 비전 선포식은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평양에는 냉면집이 제법 많다. 그중 남쪽 사람들도 다 아는 옥류관부터 청류관 평양면옥 평남면옥 선교각 평천각 천지관 고려호텔 평양호텔 룡흥식당 등은 10대 냉면집으로 불리며 맛집으로 통한다. 이 외 인민무력성 본부에 있는 장령식당도 냉면 맛이 상당히 좋지만, 장성에게 할당된 식권이 있어야만 이용할 수 있어 일반인이 맛보긴 어렵다. 평양 사람들은 이 중에서도 옥류관과 청류관, 고려호텔 지하 1층 냉면(1층에도 냉면집이 있다)을 3대 냉면 맛집으로 손꼽는다. 평양냉면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옥류관은 지명도에 비해 운영 방식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옥류관은 휴일인 월요일을 빼고 여름이나 겨울이나 항상 낮 12시부터 오후 7시까지 하루 1만 그릇만 판다. 그런데 표는 5000개만 발매된다. 표 1개당 무조건 곱빼기 냉면까지 두 그릇이 나오기 때문이다. 옥류관 냉면은 양이 많다. 기자가 평양에 있을 땐 “오늘은 무조건 세 그릇을 먹어야지”라고 맘먹고 쫄쫄 굶고 가도 두 그릇 반 이상을 먹지 못했다. 선주후면(先酒後麵)을 중시하는 북한에선 1인당 25도짜리 평양술을 한 잔씩 준다. 주문한 냉면 수와 상관없이 무조건 사람 수만큼 술잔을 준다. 식사 후엔 자체 생산한, 맛이 참 괜찮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후식으로 주는데 이것도 1인당 한 컵이다. 5000개 표 중 대략 절반은 옥류관이 자체로 소비한다. 권력기관에서 요구할 때 내줄 몫으로 당비서표, 지배인표, 기사장표, 조리사표 등 권력 순서에 맞춰 적당량이 배분된다. 월급과 배급으로만 살 수 없는 옥류관 종업원 수백 명도 이 표로 먹고산다. 표를 다른 기관에 주고 과일이나 라면 등을 바꿔 종업원들이 나눠 갖는 식이다. 나머지 2500개는 지도기관인 인민봉사총국에 넘겨진다. 총국은 이 표를 오늘은 평양화력발전소에 100개, 영예군인공장에 50개, 어느 인민반에 30개 하는 식으로 배분한다. 외화를 받는 식당을 제외하면 평양시내 주요 식당 표는 모두 이런 방식으로 유통된다. 냉면표를 받은 기업의 간부는 다시 적당히 알아서 나눠주거나 팔아먹는다. 다른 냉면집은 오전 6시부터 한정수량을 현장 판매한다. 그럼 할 일 없는 노인들이 일찍 나와 줄을 서서 산 뒤 암표로 팔아 차액을 챙긴다. 하지만 옥류관은 공급용 표만 있다. 공급용 표는 1인 표가 없이 최소 10명 표부터 시작해 20명 표, 50명 표 등으로 나뉜다. 지방 사람이 옥류관 냉면을 먹으려면 일단 옥류관 앞에 가서 암표상을 찾아야 한다. 암표 1장은 북한 돈 2만 원, 달러로는 2.5달러 정도 가격에 거래된다. 10명 표를 샀다면 모르는 사람 9명과 함께 팀을 이뤄야만 한다. 만약 먹다 남으면 육수, 면, 고기를 따로따로 담아 집에 가져갈 수 있다. 집에 보관했다 먹으면 대개 면이 풀어져 있어 맛은 크게 떨어진다. 고려호텔이나 평양호텔, 천지관처럼 외화로 운영되는 곳에는 일반 공급표가 없다. 이런 곳은 돈을 내면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다. 가격은 양에 따라 다르다. 냉면 100g은 4달러, 150g은 5달러, 200g은 6달러를 받는 식이다. 평양 사람들에게 냉면 맛집을 물으면 옥류관이라는 대답이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북에서 달러를 좀 만져본 사람들은 부유층만 가는 고려호텔 지하 1층 냉면을 더 많이 꼽는다. 이들은 그 이유에 대해 “일반인 상대 식당보다 달러를 받는 냉면집에서 최고의 냉면장인들이 일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냐”고 말한다. 10년 전 기자는 한국의 유명 평양냉면집 순위를 매긴 적이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매우 오만한 행동이었다. 지금은 어느 냉면이 제일 맛있냐고 질문을 받으면 “냉면 맛을 처음 배운 냉면집이 제일 맛있는 냉면집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런 이유로 기자는 늘 서울의 냉면집보다 맛을 배웠던 평양냉면이 제일 그리웠다. 그동안은 그 아쉬움을 달랠 방법도 없었다. 유명 냉면집에서 진짜로 일했던 탈북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전 고려호텔 지하 1층 냉면집 조리사 출신이 서울에 냉면집을 냈다고 한다. 양강도 분질감자 전분을 구할 수 없어 100% 똑같지는 않겠지만 고려호텔 지하 식당의 냉면 레시피가 서울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기자에겐 축복처럼 여겨진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평양에는 냉면집이 제법 많다. 그 중 남쪽 사람들도 다 아는 옥류관부터 청류관 평양면옥 평남면옥 선교각 평천각 천지관 고려호텔 평양호텔 룡흥식당 등은 10대 냉면집으로 불리며 맛집으로 통한다. 이외 인민무력성 본부에 있는 장령식당도 냉면 맛이 상당히 좋지만, 장성에게 할당된 식권이 있어야만 이용할 수 있어 일반인이 맛보긴 어렵다. 평양 사람들은 이중에서도 옥류관과 청류관, 고려호텔 지하 1층 냉면(1층에도 냉면집이 있다)을 3대 냉면 맛집으로 손꼽는다. 평양냉면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옥류관은 지명도에 비해 운영방식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옥류관은 휴일인 월요일을 빼고 여름이나 겨울이나 항상 낮 12시부터 오후 7시까지 하루 1만 그릇만 판다. 그런데 표는 5000개만 발매된다. 표 1개당 무조건 곱빼기 냉면까지 두 그릇이 나오기 때문이다. 옥류관 냉면은 양이 많다. 기자가 평양에 있을 땐 “오늘엔 무조건 세 그릇을 먹어야지”라고 맘먹고 쫄쫄 굶고 가도 두 그릇 반 이상을 먹지 못했다. 선주후면을 중시하는 북한에선 1인당 25도짜리 평양술을 한 잔씩 준다. 주문한 냉면 숫자와 상관없이 무조건 사람 수만큼 술잔을 준다. 식사 후엔 자체 생산한, 맛이 참 괜찮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후식으로 주는데 이것도 1인당 한 컵이다. 5000개 표 중 대략 절반은 옥류관이 자체로 소비한다. 권력기관에서 요구할 때 내줄 몫으로, 당비서표, 지배인표, 기사장표, 조리사표 등 권력 순서에 맞춰 적당량이 배분된다. 월급과 배급으로만 살 수 없는 옥류관 종업원 수백 명도 이 표로 먹고 산다. 표를 다른 기관에 주고 과일이나 라면 등을 바꿔 종업원들이 나눠 갖는 식이다. 나머지 2500개는 지도기관인 인민봉사총국에 넘겨진다. 총국은 이 표를 오늘은 평양화력발전소에 100개, 영예군인공장에 50개, 어느 인민반에 30개 하는 식으로 배분한다. 외화를 쓰는 식당을 제외하면 평양시내 주요 식당 표는 모두 이런 방식으로 유통된다. 냉면표를 받은 기업의 간부는 다시 적당히 알아서 나눠주거나 팔아먹는다. 다른 냉면집은 오전 6시부터 한정수량을 현장 판매한다. 그럼 할 일없는 노인들이 일찍 나와 줄을 서서 산 뒤 암표로 팔아 차액을 챙긴다. 하지만 옥류관은 공급용 표만 있다. 공급용 표는 1인표가 없이 최소 10명 표부터 시작해 20명 표, 50명 표 등으로 나뉜다. 지방 사람이 옥류관 냉면을 먹으려면 일단 옥류관 앞에 가서 암표상을 찾아야 한다. 암표 1장은 북한돈 2만 원, 달러로는 약 2.5불 정도 가격에 거래된다. 10명 표를 샀다면 모르는 사람 열 명과 함께 팀을 이뤄야만 한다. 만약 먹다 남으면 육수, 면, 고기를 따로따로 담아 집에 가져갈 수 있다. 집에 보관했다 먹으면 대개 면이 풀어져 있어 맛은 크게 떨어진다. 고려호텔이나 평양호텔, 천지관처럼 외화로 운영되는 곳에는 일반 공급표가 없다. 이런 곳은 돈을 내면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다. 가격은 양에 따라 다르다. 냉면 100그램은 4달러, 150그램은 5달러, 200그램은 6달러를 받는 식이다. 평양 사람들에게 냉면 맛집을 물으면 옥류관이라는 대답이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북에서 달러를 좀 만져본 사람들은 부유층만 가는 고려호텔 지하 1층 냉면을 더 많이 꼽는다. 이들은 그 이유에 대해 “일반인 상대 식당보다 달러를 받는 냉면집에 최고의 냉면장인들이 일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냐”고 말한다. 10년 전 기자는 한국의 유명 평양냉면집 순위를 매긴 적이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매우 오만한 행동이었다. 지금은 어느 냉면이 제일 맛있냐고 질문을 받으면 “냉면 맛을 처음 배운 냉면집이 제일 맛있는 냉면집입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런 이유로 기자는 늘 서울의 냉면집보다 맛을 배웠던 평양냉면이 제일 그리웠다. 그동안은 그 아쉬움을 달랠 방법도 없었다. 유명 냉면집에서 진짜로 일했던 탈북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전 고려호텔 지하 1층 냉면집 조리사 출신이 서울에 냉면집을 냈다고 한다. 양감도 분질감자 전분을 구할 수 없어 100% 똑같지는 않겠지만 고려호텔 지하식당의 냉면 레시피가 서울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기자에겐 축복처럼 여겨진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SPC그룹이 운영하는 배스킨라빈스가 인기 만화 캐릭터 ‘스폰지밥’과 손잡고 봄에 어울리는 ‘스트로베리 아보카도’를 출시했다. 스트로베리 아보카도는 스폰지밥의 인기 캐릭터 ‘뚱이’를 모티브로 한 제품이다. 아보카도 아이스크림과 달콤한 딸기 아이스크림을 결합해 부드럽고 고소한 아보카도의 맛과 상큼하게 씹히는 딸기 과육이 어우러진다. 더블주니어 사이즈가 3800원이다. 배스킨라빈스는 스폰지밥 캐릭터 디자인을 패키지에 입힌 디저트 ‘아이스크림 스틱바’도 새롭게 선보였다. 동그란 스쿱(아이스크림 뜨는 전용 도구) 모양의 아이스크림 디저트로, ‘민트쿠앤크’와 ‘초코그린티’ 등 두 가지 맛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다. 스푼 없이 포장지를 개봉해 간편하게 즐길 수 있다. 판매가는 2900원. 이달의 케이크로 최근 출시된 ‘뚱이와 스폰지밥’(2만8000원)은 만화 스폰지밥에 등장하는 파인애플 집 모양을 재현한 2단 케이크다. 스폰지밥 모양의 초콜릿과 뚱이 피규어가 올라간 모양으로 옐로 치즈케이크, 엄마는 외계인, 블루베리 치즈케이크 등 총 7가지 맛을 담았다. 4월의 음료 ‘스트로베리 아보카도 와츄원 쉐이크’(4800원)는 ‘스트로베리 아보카도’에 아이스크림과 우유를 넣고 갈아 만든 것으로 부드럽게 즐길 수 있는 메뉴다. ‘그린티 라테’는 그린티 크림과 우유에 에스프레소 샷이 들어가 진하고 고소한 풍미를 맛볼 수 있다. 배스킨라빈스가 신제품 출시를 기념해 실시한 프로모션도 인기다. 이달 30일까지 해피포인트 애플리케이션에서는 ‘스폰지밥을 찾아라!’ 이벤트가 진행된다. 미니게임에 참여해 스폰지밥을 찾는 미션에 성공하면 ‘스트로베리 아보카도 싱글레귤러 1+1 쿠폰’을 증정한다. 선착순으로 50만 명을 선정하며, 자세한 사항은 해피포인트앱을 참고하면 된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2008년 4월. 평양의 유명 4년제 대학에 입학한 여대생 영희(가명·17)는 부푼 희망을 안고 등굣길에 올랐다. 하지만 꿈은 몇 달 안돼 깨지기 시작했다. 6월 말부터 평양 대학생들은 9월 9일 공화국 창건 60주년 행사에 동원됐다. 2008년 여름은 악몽이었다. 그늘 한 점 없이 뜨겁게 달아오른 김일성광장에서 4m 길이의 무거운 나무 깃대를 들고 두 달 반 동안 하루 종일 행진 연습만 한 것이다. 일사병으로 쓰러지는 학생들이 속출했고, 영희도 두 번이나 쓰러져 실려 갔다. 행사를 마치고 열흘간의 방학 뒤 개강을 했지만 진도를 따라가기가 벅찼다. 교수는 시험 때 창문을 내다봤다. 공부를 못했으니 마음껏 커닝하라는 뜻이었다. 2009년 초 조류독감이 돌았다. 모든 학교가 두 달 넘게 휴강을 했다. 4월 2학년이 된 영희와 동급생들은 교도대에 나갔다. 교도대는 대학생들이 2학년 때 6개월간 의무적으로 대공포 부대에서 복무하는 것으로, 필수 이수 코스다. 11월에 복무를 마치고 돌아와 한 달 남짓 강의를 듣다 보니 다시 방학이었다. 2010년 1월 방학이었지만 영희는 쉬는 날 없이 대학에 나와 문답식 학습 경연 준비를 했다. 신년사와 당의 정책을 외우는 연례행사다. 2월 개강한 뒤 두 달이 지났을 때쯤 영희는 다시 아리랑공연에 차출됐다.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공연의 3분 분량을 위해 그해 여름 내내 뜨거운 광장을 뛰어다녀야 했다. 10월부턴 매일 미니스커트를 입고 공연에 투입됐다. 11월 잠깐의 방학 뒤 한 달 남짓의 공부가 시작됐다. 90분짜리 강의가 오전 3개, 오후 3개, 저녁 1개씩 이어졌다. 한 학기 분량이 열흘 만에 끝났다. 커닝을 해도 시험 점수가 나쁘면 교수에게 불려갔다. “보고서 써야 하는데 A4 용지가 부족하다”는 말이 나오면 30∼50달러의 돈을 내밀어야 했다. 그래야만 낙제를 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2011년 2월 개강하고 두 달 뒤인 4월 말 농촌지원을 한 달 나갔다. 5월 말에 돌아오니 이번에는 ‘수도 10만 주택 건설 총동원령’이 떨어졌다. 평양의 22개 대학 전체가 문을 닫았다. 대학생들은 능라도유원지, 창전거리, 역포구역의 10만 주택 건설장에 동원됐다. 당초 1년 예정이었지만 동원령은 2013년 2월까지 지속됐다. 무려 1년 9개월을 건설 노동자로 일한 셈이다. 살림집 건설에 국가 지원은 일절 없었다. 한 개 학부에 대략 10층짜리 아파트 한 동을 짓도록 과제를 주고 알아서 완공하라는 식이었다. 인력은 대학생들로 충원됐지만 자재를 살 돈이 없었다. 그렇다고 학생들에게 돈을 걷는 일은 ‘세외부담’이라며 금지했다. 대학은 꼼수를 썼다. 100달러를 내면 열흘 휴식을 줬다. 지친 학생들이 앞다퉈 돈을 냈다. 심지어 10만 달러를 내면 노동당에 입당까지 시켜주었다. 북한에서 대학생의 노동당 입당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자재 확보를 위해 당원증을 판 것이다. 권력과 돈을 가진 집의 자제들은 노동당원이 됐고, 졸업할 땐 당원이란 명목으로 군에도 안 가고 제일 좋은 부서에 배치됐다. 부족한 건설 인력은 돈을 주고 군인을 수십 명씩 고용했다. 이런 와중에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하자 영희는 겨울 애도행사에 동원됐다. 2013년 3월 영희는 비로소 대학에 돌아왔다. 이미 1년 전에 졸업했어야 했지만 학제에도 없는 5학년이 돼 2학년 교재로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에도 이런저런 명목으로 동원되며 1년을 더 공부하고 6개월 논문기간을 끝낸 뒤에야 영희는 2014년 12월 졸업할 수 있었다. 6년 반이나 학교를 다녔지만 뭘 배웠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동기들은 스스로를 “우린 저주받은 세대”라고 불렀다. 졸업은 끝이 아니었다. 북한에서 대학 졸업생들은 의무는 아니지만, 90%가 입당을 위해 군대를 간다. 남학생은 일반 병사로 가고, 여학생은 기무, 재정 참모 등 군관이 된다. 군 복무 기간은 4∼5년이다. 요즘 평양 대졸 여성들의 평균 결혼연령은 32∼33세다. 그럴 수밖에 없다. 영희는 2015년 3월 입대해 4년 만에 입당하고 제대했다. 08학번 영희는 만 28세가 된 2019년 4월에야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제부터 그는 결혼할 남자를 찾아야 한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