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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호 북한군 총참모장은 김정은 집권 이후 숙청된 첫 인물로 알려져 있다. 2012년 7월 15일 북한은 당 정치국회의를 열고 “리영호를 신병 관계로 정치국 상무위원, 정치국 위원,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을 비롯한 모든 직무에서 해임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놀라운 소식이었다. 리영호는 김정은의 군사 과외선생이자 고문이었다. 그는 김정은이 군권을 장악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공로로 그는 북한군 차수로 승진했고, 실세 중의 실세가 됐다. 김정일 장례식 때 그는 김정은과 나란히 서서 운구차를 호위했다. 국가장의위원회 명단에서 김정은 김영남 최영림 다음으로 이름을 올렸다. 명목상 국가수반인 김영남과 허수아비 총리인 최영림을 빼면 사실상 리영호가 김정은 다음의 실세임을 보여준 셈이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몰락에 수많은 억측이 쏟아졌지만 당시에는 정확한 이유와 생사 여부가 알려지지 않았다. 나는 지난 7년 동안 여러 소식통을 통해 리영호의 숙청 이유를 취재했다. 그 결과 리영호가 북한에서 ‘얼음’이라 불리는 필로폰 복용 및 제조, 판매에 가담한 사실이 발각돼 몰락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의 2녀 1남 자식 중 둘째 딸이 화근이었다. 리영호는 강원도 근무 시절 눈여겨본 부하를 둘째 사위로 삼은 뒤 친아들 이상으로 챙겼다. 리영호 숙청 직전 친아들은 대대 정치지도원(대위)에 불과했지만 둘째 사위는 대좌(대령) 계급을 달고 많은 뇌물을 챙길 수 있는 핵심 보직을 꿰찼다. 또 평양 외곽을 방어하는 91훈련소(군단급) 부사령관으로 승진할 참이었다. 실세 장인을 등에 업은 사위는 상관인 군단장의 지시도 무시할 정도로 안하무인이었다. 리영호의 둘째 딸은 허리가 늘 아팠는데, 그의 집에 어느 날 ‘유명 한의사’가 나타났다. 의료시스템이 붕괴된 북한에는 지방을 떠돌며 환자를 치료하는 한의사가 많다. 이들 중에는 간부나 부유한 가정의 여인들을 노리는 사기꾼들도 있다. 둘째 딸에게 접근한 한의사는 만병통치약이라고 속이고 필로폰을 이용해 치료를 시작했다. 통증을 잊게 된 둘째 딸은 그를 평양의 친정에 소개한다. 이후 리영호와 가족들은 물론 책임운전사까지 그에게 빠진다. 이들은 그가 필로폰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지만, 마약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얼마 뒤 리영호는 총참모부 산하에 ‘화학무기연구소’를 만들었다. 필로폰을 제조해 팔겠다는 의도였다. 떠돌이 한의사는 총참모부 산하 화학무기연구소 소장이라는 고위 군관으로 신분이 수직 상승했다. 당시 북한에서는 벼락출세로 안하무인이 된 리영호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뿌리 굵은 가문 출신’들이 적지 않았다.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 최룡해 군 총정치국장, 노동당 조직지도부 등이 대표적이었다. 특히 리영호는 민간 출신인 최룡해가 자신을 견제하는 자리인 총정치국장이 된 데 불만이 컸다. 이에 최룡해는 보위사령부에 리영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도록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책임운전사가 연구소에서 만든 필로폰을 판매업자에게 넘기다 현장에서 체포됐다. 장성택과 최룡해 등은 리영호를 ‘현대판 김창봉’으로 몰았다. 김창봉은 항일 빨치산 출신으로 김일성의 큰 신임을 받고 민족보위상(국방장관)까지 오른 인물로, 1968년 1월 21일에 발생한 청와대 습격사건, 하루 뒤인 22일 벌어진 미국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등을 주도했다. 하지만 자신의 위세를 믿고 권력을 남용하다 1969년 숙청됐다. 리영호는 해임 전 고급당학교에 적을 두고 몇 달 동안 조사를 받은 뒤 지방으로 쫓겨났다. 그의 아내가 남편의 죄를 속죄한다며 조사 기간 평양 창전거리살림집 건설 현장에 자원해 일하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둘째 딸은 남편과 강제 이혼을 해야만 했다. 둘째 사위는 고위급 전용병원인 남산병원에서 마약치료를 받고 제대한 뒤 황해남도 용연군 인민군농장 관리부위원장으로 좌천됐다. 리영호는 일부 언론 보도처럼 처형되지는 않았다. 3, 4년간의 혁명화 과정을 거친 뒤 총참모부 작전처로 복귀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그의 파면을 주도한 최룡해가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 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라는, 형식적이지만 2인자 자리를 지키고 있어 복권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올해 77세인 리용호는 김정은의 신임을 다시 받아 지금 무대 뒤에서 군사고문으로 활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성공적인 연애를 하려면 크게 두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들었다. 우선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상대에게 줘 호감을 사야 한다. 교제에 성공하면 그 다음은 신뢰를 쌓아야 한다.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상대에게 줘야 한다는 뜻이다. 호감을 얻는 데 성공하고도 신뢰를 쌓지 못해 깨진 커플들을 자주 본다. 대개는 이 단계에서 다른 인연을 찾는다. 하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해 집착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이 경우 상대방을 쫓아다니는 스토킹 단계에 이르고, 이는 대개 결말이 좋지 않다. 최근의 남북관계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여 아쉽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판문점 회담과 평양 방문을 통해 김정은의 호감을 얻는 데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백두산에서 두 사람이 함께 손을 번쩍 쳐들며 지은 표정들에선 진심도 느껴졌다. 하지만 이후 단계에서 양쪽은 크게 틀어진 듯하다. 문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무엇을 약속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많은 약속들이 오갔을 것으로 확신한다. 판문점 도보다리에서, 그리고 평양에서 두 사람이 비공개로 보낸 많은 시간과 당시 김정은의 얼굴에 드러났던 밝은 표정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의 상황들을 보면 그 약속이 실행으로 이어지고, 신뢰 단계로 나아가지는 못한 것 같다. 김정은이 올해 신년사에서 “아무런 전제조건이나 대가 없이 개성공업지구와 금강산 관광을 재개할 용의가 있다”고 말할 때까지만 해도 믿는 구석이 있었을 것이다. 문 대통령 역시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 제안에 크게 환영하며 “이로써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의 재개를 위해 북한과의 사이에 풀어야 할 과제는 해결된 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말들만 오갔을 뿐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정부는 국제사회의 동의가 없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입장만 거듭했다. 김정은이 지난주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너절한 남측 시설들을 싹 들어내라”고 지시하자 화들짝 놀란 우리 정부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북한에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며 “북한의 관광산업 육성 정책 등도 충분히 고려하면서 금강산 관광 문제에 대한 창의적 해법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북한은 이마저 거절하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있다. 올해 초 김정은이 제안했을 때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움직였더라면 지금의 상황은 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신년사를 통해 북한 주민과 전 세계에 “금강산 관광을 재개할 용의가 있다”고 했지만 상대가 아무것도 하지 않자 김정은은 지금 무안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김정은의 눈에 1년 넘게 미국만 쳐다보며 남북관계 진전에 손을 놓고 있는 남쪽은 ‘미국의 마마보이’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올봄부터 문 대통령과 더는 교제하려 하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마음을 바꾸지 않고 있다. 연애를 잘하려면 눈치도 있어야 한다. 상대의 마음이 떠날 조짐이 보이면 대책을 세워야 한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북한이 떠나려 하자 ‘남북 평화경제’ ‘비무장지대(DMZ) 국제평화지대화’ ‘올림픽 공동 개최’ 같은 뜬금없는 메시지만 남발했다. 상대가 나를 마마보이로 생각하고 멀리하려 할 때 이를 불식시키기 위한 노력이 제일 시급하다. 그렇게 신뢰를 회복해야만 한다.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은 외면한 채 “결혼해주면 신혼집은 어디에 잡고, 애는 몇 명을 낳고, 결혼 10주년엔 하와이로 가족 여행 가자”는 식으로 희망사항만 쏟아낸다면 상대의 상처는 깊어질 뿐이다. 현실에선 이쯤 되면 스토커로 간주돼 상대의 마음이 완전히 닫힐 수도 있다. 이런 스토킹은 당장 멈춰야 한다. 희망사항만 남발하며 북한에 매달릴 시간에 미국을 찾아가 설득하는 시늉이라도 하는 게 더 현실적이고, 효과적일 수 있다. 대통령이 이제라도 북한의 심중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전문가를 찾아내고, 조언을 받는 일도 시급해 보인다. 문 대통령에게 누가 대북정책을 조언하는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작년 청와대가 대통령이 여름휴가 동안 평양 번화가를 찍은 사진집을 읽었다고 홍보할 때 크게 실망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읽은 사람이나, 추천한 사람이나 대북 인식이 사진집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큰일이다. 아직 임기가 반이나 남았다. 문제 해결을 위해 도전할 시간은 아직 충분하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남북관계를 오랫동안 지켜보며 별일을 다 봤지만, 한국 축구대표팀이 북한에 들어가 연락 두절된 이번 사건은 정말 황당했다. 21세기엔 달나라에 간다 해도 연락이 두절되는 일은 없을 텐데, 서울에서 불과 몇 시간 떨어진 평양에서 스타들로 구성된 국가대표팀 실종 사건이 벌어졌고, 우린 속수무책이었다. 언론들은 ‘북한 당국’이 냉대를 했다고 보도하고 있지만, 난 동의하지 않는다. 당국이 아니라 정확하게 김정은이 지시한 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김정은의 허락 없이 무관중 경기를 진행하고 한국 대표팀의 통신을 차단하며 생중계 불허, 기자단과 응원단 입국 금지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당연히 없다. 그랬다가는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살아남기 어려운 사회가 북한이라는 것쯤은 우린 당연한 상식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김정은은 왜 굳이 이런 속 좁은 행동을 한 것일까. 북한 축구의 객관적 전력이 열세인 상황에서 인민들에게 패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북한은 13일 전국적으로 체육절 70주년 행사를 열고 김 씨 일가의 영도로 북한 체육이 세계 강국으로 우뚝 섰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런데 불과 이틀 뒤 대표적인 스포츠 종목인 축구에서, 그것도 김일성의 이름이 붙은 경기장에서 남쪽에 패한다면 큰 망신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관중 경기는 북한 내부 사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해도, 한국의 생중계와 취재진 입국까지 봉쇄한 이유는 뭘까. 나는 김정은이 이번에 일부러 찬바람을 쌩쌩 일으켜 한국 사회, 더 구체적으론 문재인 대통령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했다고 생각한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꿈 깨”쯤 되겠다. 최근 몇 달간의 북한 언론을 분석해보면 김정은의 불만이 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자기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문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북한을 계속 활용하고 있는 데 화가 난 것이다. 떡 줄 생각도 없고, 그럴 상황도 아닌데 문 대통령은 북한과 함께해야 할 거창한 꿈을 매달 빠짐없이 발표하고 있다. 몇 가지 사례만 들어보자. 문 대통령은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한일 경제전쟁을 극복할 카드로 ‘남북 평화경제’를 꺼내들었다. 이튿날 북한은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이다”며 조롱했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유엔 연설에서 ‘비무장지대(DMZ) 국제평화지대화’ 구상을 제안했다. DMZ를 남북이 공동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고, 판문점과 개성을 잇는 지역을 평화협력지구로 지정해 DMZ 지뢰 제거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달 초엔 남북 올림픽 공동개최를 추진하겠다고도 했다. 이에 북한의 대외용 인터넷매체인 우리민족끼리는 8일 “세치 혓바닥 장난으로 세상을 기만하지 말라”고 맹비난했다. 김정은의 심정은 이해가 된다. 핵을 들고 비장한 각오로 흥정하러 나왔는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김정은과의 브로맨스만 강조하며 북한에 엄청난 기회가 있다는 식의 두루뭉술한 말밖에 하지 않았다. 북한이 하나하나씩 약속받고 싶은 것들은 따로 있는데, 재선을 의식한 트럼프 대통령은 도무지 진도를 나가려 하지 않고 있다. 대북 제재로 피 마르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김정은으로선 미국을 어떻게 다시 회담장으로 끌어올지 그것만 생각하기에도 골치가 아플 것이다. 이런 답답한 상황인데 김정은이 볼 땐 힘이 없어 운전석에서 밀어내려는 문 대통령까지 북한에 숟가락을 얹고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뜬금없는 제안을 계속 내놓으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 법하다. 지금 김정은은 문 대통령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을 것이다.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조차 미국 눈치 보느라 못 열면서 누구 맘대로 우리 땅에 국제평화지대를 만들겠다고 하나. 핵 폐기를 왜 남쪽이 공언하며 평화경제를 운운하나. 임기는 빠르게 가는데 작년 판문점과 평양에서 속삭였던 달콤한 약속들 가운데 뭘 지켰나. 내가 11월에 부산에 갈 가능성이 있다고?” 이런 와중에 하필 한국 축구대표팀이 평양에 가게 되면서 무관중 경기가 열리게 된 셈이다. ‘시어미 역정에 개 옆구리 찬다’는 속담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손흥민이 엉뚱하게 옆구리를 차여서 나도 괜스레 화가 난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남쪽에 와서 새로 익힌 공휴일 중 하나가 개천절이었다. 북에 있을 때 노동신문을 통해 가끔 남북이 단군릉에서 개천절 공동 기념행사를 열었다는 뉴스를 보기는 했지만 이날이 휴일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노동신문도 직책이 높은 간부들에게나 보급되기 때문에 한국에 온 탈북민 중에는 개천절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적잖다. 지금도 북한 달력에는 개천절이 따로 표시돼 있지 않다. 만약 김일성이 100일만 더 살았다면 개천절은 남북이 함께 쉬는 공휴일이 됐을 가능성도 있었다. 김일성이 생전 말년에 단군 복원에 엄청난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1993년 이전까지만 해도 북한 사람들은 단군을 환웅과 웅녀 사이에 태어난 신화 속 인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1993년 10월 노동신문에 평양 중심에서 약 40km 떨어진 평안남도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에서 단군과 그의 부인의 유골이 발견됐다는 내용이 대서특필됐다. 단군을 실존 인물로 재탄생시킨 것은 전적으로 김일성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북한 매체에 따르면 김일성은 1992년 9월 단군 전설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듬해 1월에는 강동에 있는 단군릉이란 묘비가 세워진 무덤을 파보라는, 보다 구체적인 과제를 주었다. 북한 매체들은 이런 상황들을 두고 김일성의 ‘천리혜안의 예지’였다고 주장한다. 또 파라는 곳을 팠더니 86점의 남녀 유골이 발견됐으며, 뼈를 측정한 결과 5011년(±267년) 전 사람이었는데 시기로 볼 때 단군이 분명하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이 같은 북한의 주장을 나는 전혀 믿지 않는다. 한국 학계에서도 북한의 유골 연도 측정 방법의 과학적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보고 있다. 여기에 나는 다른 여러 이유로 북한의 주장이 거짓말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수령님이 지시한 곳을 팠는데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직언할 간 큰 역사학자가 북에는 없다. 게다가 김정일까지 여기에 개입했다고 한다. 그는 당연히 “고령의 수령님 기대를 실망시키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을 가능성이 커 북측 발표의 신뢰성을 떨어뜨린다. 단군을 발굴하지 못했다고 하면 처벌을 면하기 어렵고, 발굴했다고 하면 인생이 바뀔 포상을 받을 판인데 어용학자들이 무슨 짓인들 못했을까. 단군 유골을 발견했다는 보고에 김일성은 무척 흥분한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 매체들에 따르면 김일성은 사망하기 전까지 1년 반 동안 단군릉 복원과 관련해 무려 40여 차례에 걸쳐 지시를 쏟아냈다. 1993년 9월에는 현장에 직접 나가 단군릉 복원 장소를 낙점해 주기도 했다. 사망 이틀 전인 1994년 7월 6일에도 김일성은 단군릉 설계 수정안에 직접 사인했다. 그 결과 복원 단군릉은 1994년 10월 11일에 1.8km² 크기의 방대한 면적에 가로 50m, 높이 22m로 준공된다. 북한은 이후 평양이 우리 민족의 발상지라며 민족사적 정통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대동강 유역은 인류 고대 문명의 발상지, 중심지로서 이 지역에서 발전한 ‘대동강 문화’는 세계 5대 문명의 하나로 당당히 꼽히고 있다”는 황당한 논리까지 만들어냈다. 이처럼 김일성이 말년에 단군신화에 보인 관심과 이후 북측이 ‘대동강 문화’까지 주창하고 나선 것을 봐선 김일성이 조금만 더 살아 있었다면 개천절을 북한의 공휴일로 지정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해석은 타당성을 갖는다. 하지만 아쉽게도 김정일은 단군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김정일은 단군릉 복원식이 열린 지 불과 닷새 뒤 “우리 민족의 건국 시조는 단군이지만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북한의 족보는 ‘김일성 민족’ ‘태양 민족’ ‘김정일 민족’으로 정리됐으며 1996년 ‘주체’ 연호까지 도입하게 된다. 김정일은 단군보다는 김일성을 활용하는 것이 권력을 유지하는 데 훨씬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단군릉 복원 뒤 북한엔 대기근이 닥쳐와 여러 해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다. 단군의 아버지라는 환웅 신의 진노 때문이라면 지나친 해석일까. 1994개의 무거운 대리석을 쌓아 만든 단군 묘는 일부러 허물지만 않으면 최소 수천 년은 그 자리에 ‘썰렁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먼 훗날 후손들이 김일성이 만든 그 웅장한 피라미드에 어떤 설명을 붙일지 궁금하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광주의 고속철도(KTX)역인 ‘광주송정역’이 현대적 느낌의 외관과는 달리 무려 106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13년 현재의 위치에 송정리역이 만들어진 뒤 역사 앞에는 일일시장이 생겨났다. 송정역시장이다. 한 세기 넘게 자리를 지켜온 역사를 강조하기 위해 시장 이름은 현재 ‘1913 송정역시장’으로 바뀌었다. 1980년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빈티지한 느낌의 각종 상가들을 구경하며 2분 정도 걷다 보면 ‘쑥’s 초코파이’라는 간판을 건 아기자기한 가게가 왼편에 눈에 띈다. 정화숙 대표(35)가 2016년 3월에 문을 연 초코파이 매장이다. 40m²(약 12평) 남짓한 가게에선 초코파이 6종과 다쿠아즈 4종, 머랭 쿠키 4종을 팔고 있다. 이 가운데 쑥으로 만든 개당 2000원짜리 초코파이가 매출의 30%를 차지한다. 달콤한 초코파이에 여수 거문도의 명품 특산물인 해풍쑥의 향긋한 풍미가 더해져 독특한 맛을 낸다. 정 대표가 처음부터 쑥으로 만든 초코파이를 메뉴로 내놓은 것은 아니다. 매장을 열 때 정 대표는 자기 이름의 마지막 글자 ‘숙’과 당시 공동 창업했던 임봉순 대표의 이름 마지막 글자의 영문 이니셜인 ‘S’를 넣어 ‘쑥’s’라는 간판을 달았다. 그러자 매장을 찾은 손님들 중에서 “쑥 초코파이는 왜 안 파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참에 진짜 쑥 초코파이를 만들면 어떨까 싶은 마음에 만들었는데, 쑥 특유의 향과 초코파이의 달콤함이 의외로 잘 어울렸어요. 쑥 초코파이는 시행착오 없이 거의 단번에 탄생시킨 메뉴죠. 제 이름이 준 선물이라는 운명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독특한 느낌의 쑥 초코파이는 입소문을 타고 매출이 올랐다. KTX를 타기 전 정 대표의 가게를 찾아 선물용으로 쑥 초코파이를 사가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배우 성병숙 씨도 이 가게의 단골이라고 한다. 가게는 3년 만에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봄가을엔 월 매출이 2000만 원을 넘고, 겨울과 여름에도 1500만 원어치 정도가 팔렸다. 함께 창업했던 임 대표는 지난해 여수 꿈뜨락몰에 쑥’s 2호점을 만들어 독립해 나갔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이란 TV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꿈뜨락몰이 뜨면서 2호점 매출도 단기간에 1호점과 비슷해졌다고 한다. 정 대표는 아침부터 퇴근할 때까지 초코파이 600여 개를 직접 손으로 만든다. 수줍은 미소를 담은 얼굴과 달리 그의 손은 거칠고 메말랐다. 밀가루를 반죽하고, 굽고, 초콜릿을 입히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이 분주히 움직였던 결과다. “저희 초코파이는 다른 파이보다 촉촉하고 덜 달다는 평을 많이 들어요. 초코파이를 만들 때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이 촉촉한 식감입니다. 더 촉촉해지도록 붓질하는 공정을 하나 더 넣었습니다. 그리고 건강한 빵, 순수한 초코파이를 만들겠다는 저의 철학대로 우리 밀과 우유, 버터를 사용하고 무항생제, 무바이러스를 담보하는 포프리 계란만 사용합니다.” 정 대표는 광주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다. 그는 스물세 살 때부터 7년 동안 건설회사 사무직으로 일했다. 비전이 보이지 않아 회사를 그만둔 뒤 제빵학원을 다니다가 초코파이를 만드는 매력에 푹 빠졌다. 1년 동안 전국의 플리마켓을 돌면서 초코파이를 팔다가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의 ‘청년창업, 전통시장을 살리다’라는 지원사업에 응모해 초기 매장 설립에 필요한 지원을 받았다. “초기에 사람들이 저의 초코파이를 전주 초코파이랑 비교할 때 속이 상했습니다. 광주는 비록 초코파이로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앞으로 제 가게를 광주를 대표하는 초코파이 가게로 키우고 싶습니다.” 앞으로 할 일도 많다. 정 대표는 초코파이를 만들고 포장하는 작은 공장을 만드는 것이 꿈이다. 또 지금은 판매 홍보를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에 의존하고 있지만 앞으로 홈페이지도 개설해 전국에 쑥 초코파이를 알리고 싶다고 했다. 정 대표는 감미로운 발라드 음악과 함께 초코파이를 만든다. 촉촉한 소녀의 감성이 그의 초코파이에 은은하게 녹아 있었다.▼ 나만의 메뉴’로 차별화 성공… 생산공정 시스템화 아쉬워 ▼지역상권육성사회적협동조합 최동규 이사장○ 칭찬해요①체계적인 창업 준비=창업 전 1년간 제과제빵 학원을 통한 자격증 취득,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의 창업교육, 컨설팅, 점포 체험 등과 같은 체계적인 준비 과정을 거쳤다. ②나만의 상품=기존의 수제 초코파이의 달고 딱딱한 맛 대신 여성의 섬세함과 특별한 비법을 더해 촉촉하고 덜 단 초코파이를 만들어냈다. ③건강한 친환경 재료=나와 가족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가장 건강한 재료를 사용하고 있다. 청정의 섬 거문도의 해풍과 해무를 맞고 자란 친환경 해풍쑥, 우유, 버터, 우리밀 등 최고의 재료만을 사용하고 있다. ④다양한 지원 방안 활용=정부(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의 청년상인 창업지원사업)와 대기업(현대카드의 전통시장 활성화 프로젝트) 지원을 적절히 활용한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 아쉬워요 ①보다 다양한 홍보 강화=SNS 등을 통해 차별화된 제품과 서비스 이외에도 지속적으로 알리는 활동이 필요하다. ②세밀한 상품패키지 전략=시그니처 메뉴인 쑥 초코파이를 연령별(어린이, 어른, 할아버지, 여성, 남성 등)로 만들어야 한다. 당도 조절을 통해 입맛에 맞게 세분된 패키지 상품으로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쑥’S 초코파이만의 디자인을 활용한 패키지 개발도 필요하다. ③제조 방법의 시스템화=제조 비용의 효율성 제고를 위해 제조 공장을 통한 생산의 시스템화를 검토해야 한다. 단계별 사업영역의 확대도 필요하다. 여수 꿈뜨락몰과 함께 제조 시스템을 구축하여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하는 방안도 추진해야 한다. ▼ 신사업 아이디어 있다면… 창업사관학교로 ▼20주간 창업이론-점포경영 교육… 우수 수료땐 최대 2000만원 지원인천-전주-창원서 내달까지 접수중소벤처기업부와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은 창업을 희망하는 예비창업자에게 창업 이론교육과 점포경영체험교육, 창업멘토링, 사업화보조금 등을 패키지 형식으로 지원하는 ‘신사업창업사관학교’ 사업을 진행 중이다. 지원 대상은 신청일 기준 사업자 등록이 되어 있지 않은 예비창업자로서 최근 3년간 공단에서 발굴한 신사업 아이디어나 해당 수준의 아이디어로 창업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한국표준산업분류상 음식점업(561)과 자동차판매업(451), 주점업(5621) 등 일부 업종은 제외된다. 신사업창업사관학교에 선발된 교육생은 4주간의 창업이론 교육과 16주의 점포경영체험 교육, 점포경영 체험기간 중 전문가 멘토링을 받을 수 있다. 교육을 수료한 뒤 사업화지원 대상자로 선발되면 초기 창업을 위한 창업비용(매장 모델링, 시제품 제작, 브랜드 개발, 홍보 마케팅 등)을 1인당 최대 2000만 원까지 지원해준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은 현재 인천, 전북(전주), 경남(창원)에 신사업창업사관학교 3곳을 신설하여 교육생을 모집 중이다.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지원 신청이 가능하며 신청 마감은 다음 달 16일까지다.광주=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이웃집이 아무리 가난하고 불쌍해 보여도 돕고자 할 때 방법은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자네 사정을 잘 아니 받아” 하며 무턱대고 돈 봉투를 내밀었다가 이웃의 자존심에 상처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최근까지 추진하던 대북 식량지원이 이런 예에 해당한다. 통일부는 16일 국회에서 “세계식량계획(WFP)을 통한 대북 식량지원 준비를 잠정 중단한다”고 밝혔다. 사실 ‘잠정 중단’이란 말도 어불성설이나 마찬가지다. 상대가 받을 생각이 없는데, 주겠다는 쪽에서 일방적으로 잠정 중단이니 영구 중단이니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나는 정부가 대북 식량지원 계획을 처음 공개했던 5월부터 이를 반대했다. 북한의 식량난이 과장됐고, 북한이 손도 내밀지 않았고, 억지로 줘봐야 남북관계 개선의 레버리지 효과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북한의 자존심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 결정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5월 데이비드 비즐리 WFP 사무총장을 만나는 등 대북 식량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자리에서 비즐리 사무총장은 “북한 주민의 배급량이 심각하게 적어 긴급 인도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문 대통령은 적극적인 공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나는 비즐리 사무총장의 말에 전혀 공감할 수가 없었다. 그 대신 이런 질문들을 던져보고 싶었다. “1인당 배급량 300g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배급받는 사람이 전체 북한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파악됩니까. 10년 넘게 극심한 식량위기라는 북한의 쌀값이 떨어지는 이유는…. 시장 조사도 못 한 이 보고서는 신뢰할 수 있나요.” 아마도 비즐리 사무총장은 이 질문들에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과만 본다면 북한의 식량난이 심각할수록 WFP는 더 많은 후원금을 모을 수 있다. 실제로 WFP는 우리 정부로부터 대북 식량지원사업 관리비용 명목으로 1177만 달러(약 140억 원)를 받아냈다. 대북 휴민트가 세계 최고인 우리가 북한의 식량 사정을 파악하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정부는 우리의 정보력 대신, 신뢰하기 어려운 WFP의 말을 선택했다. 결과는 창피할 정도로 참담했다. 우리의 식량지원 제안에 돌아온 것은 북한의 조롱과 욕설이었다. 우리는 이번 사례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지원하려면 받을 사람의 의사와 감정부터 파악해야 한다. 북한도 공짜 쌀을 받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북측은 굶어 죽어도 자존심이 먼저다. 북한과 친해지려면 그 자존심부터 헤아려야 한다. 나는 이번 대북 식량지원 실패가 20여 년 동안 한국을 지배해왔던 ‘인도적 대북지원’의 패러다임에 종말을 찍는 사건이 될 것이라고 본다. 지금까지 남쪽 사람들은 “우리는 잘사니 도와줘야 하고, 가난한 북한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북한이 못살긴 해도, 당연히 지원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상대가 달라졌다. 젊고 자신감에 찬 김정은은 집권 후 남쪽에 손을 내밀지 않았다.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완성한 자신감으로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과 중국을 움직이며 장기적 생존을 위한 새판 짜기에 몰두하는 중이다. 쌀 5만 t으론 김정은을 움직이기엔 어림도 없는 상황인 데다 그가 “거지 취급하느냐”며 화를 낼 가능성이 오히려 더 크다.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좋은 봄이 다시 올 것이란 희망을 안고 있는 수백 개의 대북지원 단체들도 이제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 쌀과 의약품, 생필품 등을 모금해 가면 북한이 환대하던 시절은 이제 옛날이야기로 남을 가능성이 커졌다. 지금 북한 사람들은 북-미 수교를 맺고 세계적 기업들을 유치해 농기계와 비료, 의약품, 생필품을 북에서 직접 생산하는 시대를 꿈꾸고 있다. 그 꿈이 무너지고 다시 ‘고난의 행군’ 시대로 돌아가 온 나라가 굶주림으로 쓰러지지 않는 한 남쪽의 지원 물자를 애타게 기대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우리의 대북 정책도 북한의 부푼 기대에 편승해야 한다. 제공자와 수혜자로 나뉘는 일방적인 지원의 시대를 벗어나 이제부터는 상생과 공동 번영을 말해야 한다. 핵을 폐기하면 어떻게 남북이 함께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을지를 같이 말하고, 응원하고, 한발 더 나아가 체감할 수 있게 보여줘야 한다. 지금은 안갯속에 가려진 미래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지금 북한이 남쪽에서 가장 받고 싶어 하는 지원이라고 생각한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사단법인 남북문화교류협회(이사장 김구회)가 4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동문회관에서 탈북민 대학생 장학금 수여식을 가졌다. 이날 각 대학의 추천을 받은 20명의 탈북 대학생들은 2000만 원 상당의 장학금과 추석선물세트, 의류 등을 전달 받았다. 2일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태국 방콕에서 열린 ‘동포 만찬 간담회’에서 ‘거위의 꿈’과 ‘친구여’를 열창해 큰 울림을 주었던 가수 인순이 씨가 이날 행사에 참석해 탈북 대학생들을 격려하는 강연을 진행했다. 남북문화교류협회는 지난 20년 동안 한 해도 빠짐없이 추석을 맞아 탈북민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국내에 입국한 탈북민 숫자가 1000명 남짓했던 2000년부터 탈북민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이들의 안정적인 대학생활을 지원한 것이다. 그동안 지원받은 탈북민 대학생들은 650여 명에 달하며 장학금도 2억 원을 넘는다. 김구회 이사장은 이날 “장학금을 수상한 탈북민 대학생들이 우리 사회의 훌륭한 구성원으로 성장하는 것을 볼 때마다 뿌듯함과 자부심을 느낀다”며 “통일의 중요한 자산이 될 탈북 인재 양성을 위해 앞으로도 계속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대종상영화제 조직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김 이사장은 탈북민 대학생 지원 이외에도 군 장병 위문 방문, 연세대 한국청소년연맹 한국영화인총연합회 등 각종 단체에 대한 기부 및 나눔행사 등을 통해 사회 발전에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지난해 ‘제15회 연세를 빛낸 행정인상’을 받았다. 남북문화교류협회는 1991년에 평화적 통일 기반 조성을 위해 설립된 단체다. 남북 분단 장기화로 인한 이질성 해소와 화해와 협력을 통한 동질성 회복을 목적으로 사회 저명인사들을 초청해 지금까지 약 150회 이상 통일 관련 정책 강연을 진행했다. 올해 3월에는 태영호 전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가 강사로 나와 북한 비핵화에 대한 해법을 제시해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지난달 말 강원 철원군 비무장지대(DMZ) 내 화살머리고지를 찾았다. 지난해 9·19 남북군사합의에 따라 올해 4월부터 6·25전쟁 전사자 남북공동유해발굴 작업이 한창이었다. DMZ 통문 앞에서 국군의 방탄모와 방탄조끼를 받아 입었다. 플라스틱 재질의 방탄모가 북한군 철갑모보다 훨씬 무거워 놀랐다. 땡볕과 혹한 속에 무거운 방탄모와 방탄조끼, 총과 탄약 등을 장착하고 전방을 지키는 군인들의 노고가 묵직하게 몸으로 전해졌다. 덩굴식물로 무성하게 덮여 있는 발굴 현장에 도착했을 때 6·25전쟁 당시 국군이 매우 불리한 지형 조건에서 전투를 치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지의 남쪽 면은 가파른 데 반해 북쪽 면은 높은 산과 연결된 완만한 경사지였다. 중공군은 미끄럼틀을 타듯 내려왔겠지만 한국군은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미끄럼틀을 거꾸로 올라가며 싸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전쟁 당시 이 고지를 놓고 뺏고 빼앗기는 격전이 네 차례 펼쳐졌다. 그 과정에서 국군 약 250명, 미군과 프랑스군 100여 명, 중공군 3000여 명이 전사했다. 이곳에서 3km 남짓 떨어진 백마고지에서도 국군 3396명, 중공군 1만4000여 명이 전투 중 사망했다. 현재 상주인구가 4만5000명에 불과한 철원 평야를 두고 수많은 생명이 죽고 다친 셈이다. 산중턱을 깎아 만든 폭 12m의 비포장도로를 따라 군사분계선(MDL)이 눈앞에 보이는 지점까지 다가갔다. 지난해 11월 도로 연결 작업 중 남북 군인이 악수를 하는 감격적인 사진이 찍혔던 그 장소였다. 한국은 가파르게 경사진 언덕배기에도 중장비를 동원해 불과 몇 달 만에 넓은 도로를 만들었다. 반면 북한은 지형 여건이 좋은데도 중장비를 거의 동원하지 못하고 삽과 곡괭이로 협소한 도로만 닦았다. 남북의 현격한 경제력 차이가 고스란히 드러난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7월 “화살머리고지의 유해 발굴을 마치면 남북 협의를 통해 DMZ 전역으로 유해 발굴을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장을 둘러보면서 대통령의 바람이 임기 중에는 이뤄지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남북공동유해발굴이란 말이 무색하게 악수 장면을 연출한 뒤 북한군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쪽 도로엔 풀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을 뿐 발굴 작업의 징후는 볼 수 없었다. 게다가 북한이 유해 발굴 지역 확대에 응할 뚜렷한 동기도 없다. 1990년대 함경남도 장진호반에서 미군이 유해 발굴 작업을 했을 때 북한 사람들은 왜 미국이 엄청난 비용을 들여가며 뼈를 찾으려 애쓰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도 그럴 것이다. 발굴 작업의 이해 당사자이자 북한을 움직일 수 있는 중국도 관심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전사자 수를 고려할 때 화살머리고지에서 발견될 유해는 국군이나 유엔군보다 중공군의 것일 가능성이 10배 이상 많다. 하지만 중국은 전쟁이 끝나자 북한에 전사자 합장묘를 만든 뒤 유해 발굴에 노력을 기울인 적이 한 번도 없다. 유해 발굴 사업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산가족 상봉과 비슷하다. 우리는 인도주의 측면을 고려해 사업을 추진하지만 북한의 계산은 다르다. 남쪽에 연고를 둔 이산가족은 출신 성분이 나쁜 계층으로 분류돼 있다. 남쪽 가족과 만나게 해주고, 달러와 값진 물건을 받는 특혜를 굳이 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다만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에 응하는 것은 식량 지원 등과 같은 대가를 얻을 수 있어서였다. 결국 북한군이 참전하지도 않은 화살머리고지 전투의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에 북한이 응한 것은 대가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해 발굴에 응했는데도 북한은 개성공단 재가동이나 금강산관광 재개와 같은 기대했던 대가를 받지 못한 상태다. 지금 북한은 남쪽의 단독 유해 발굴을 묵인하는 것만으로도 남쪽에 큰 배려를 베푼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실상을 무시하고 문 대통령이 DMZ 전역으로 유해 발굴을 확대해 나가겠다고 일방적으로 말하면 북한은 매우 화가 날 수밖에 없다. 북한은 이렇게 묻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럼 남쪽에선 뭘 줄 겁니까?”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미사일과 방사포 시험 발사에 몰두하던 북한이 최근 청와대를 향해 “새벽잠까지 설쳐대며 허우적거리는 꼴” “겁먹은 개”라며 비아냥거릴 때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봤다. “새벽잠 설치지 말고 그냥 푹 자도 되지 않을까?” 찾아보니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북한 미사일 도발로 새벽에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주재한 적이 없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참석한 NSC 상임위 회의나 안보관계 장관 회의만 열렸을 뿐이다. 기자 생활 17년간 북한 문제로 NSC 새벽회의가 열리는 장면을 수없이 봤지만 그 자리에서 뾰족한 대책을 내놓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또 북한이 핵미사일 같은 파장이 큰 무기를 쏘는 것이 아니고 지금처럼 며칠마다 비슷한 계열의 미사일이나 방사포만 시험하는 상황이라면 국방부 차원의 대응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더 나아가 북한이 새벽에 뭔가를 쐈다고 무조건 대통령부터 장관까지 뛰쳐나와 긴급회의를 여는 방식도 바꾸는 것을 고려해볼 만하다. 북한이 새벽마다 미사일을 쏘는 데는 청와대를 조롱하려는 의도도 있어 보이는데, 만약 그렇다면 무시하는 것이 효과적인 대응일 수 있다. 게다가 북한군 전력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김정은이 집권 후 오로지 미사일과 조종 방사포 무력이 포함된 ‘전략군’에만 관심을 집중한 탓이다. 북한은 그동안 미사일과 방사포를 멀리, 정확히 쏘는 데만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국방력은 미사일과 방사포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전쟁은 결국 상대의 땅을 딛는 쪽이 이긴다. 이를 위해선 육해공군이 종합적으로 골고루 발전해야 한다. 북한은 오래전에 육해공군의 전력 증강 노력을 팽개쳤다. 그 대신 미사일을 쏘고 숨어버리는 팔레스타인 무장조직 하마스나 다름없는 전형적인 약자의 군사전략으로 가고 있다. 30∼40년 전만 해도 북한군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남침을 감행할 가능성도 컸다. 지금 북한은 그럴 군사적 능력을 잃었다. 북한 육군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1980년대까지 육군의 핵심 전력인 기갑은 북한이 더 강했다. 그때까지 한국군은 1952년 양산하기 시작한 미국제 M48 계열 전차로 무장했다. 반면 북한은 1960년대부터 탱크를 자체 생산했고, 수량도 압도적으로 많았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북한의 탱크는 1972년 생산된 소련의 T72 계열 전차에서 진화를 멈췄다. 이 탱크는 1990년대에 이미 ‘강철의 과부 제조기’란 오명을 뒤집어썼다. 걸프전 때 첨단 장비로 무장한 미군에 손쉬운 먹잇감이 되면서 붙여진 별명이다. 반면 현재 한국군의 주력 탱크인 K1A1은 북한군 탱크보다 사거리나 관통력이 2배 이상 차이 나고 다른 성능도 월등하다. 제공권을 잃는다면 기갑부대는 무용지물이다. 제공권을 결정짓는 북한의 공군력도 이미 한국에 뒤진다. 1980년대 북한은 한국과 동일한 세대의 전투기를 운용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북한은 4세대 전투기 초기 모델로 1980년대 초반 생산된 미그29를 불과 수십 대만 갖고 있다. 공군의 주력은 여전히 2, 3세대 전투기들이다. 반면 한국은 5세대 모델인 F35 스텔스기를 보유하고 있다. 공중전에서 전투기 한 세대의 차이는 일방적 학살로 이어진다. 해군의 격차는 육군이나 공군보다 훨씬 크다. 북한 잠수함이 남쪽 바다를 휘젓고 다니던 1980년대 한국엔 작전 능력을 가진 잠수함이 없었다. 지금은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이지스함 등 각종 최신 함정으로 무장한 한국 해군 앞에 북한의 해군은 하루도 버티기 힘들다. 북한이 미사일, 방사포 전력을 기형적으로 키워도 전세를 뒤집을 능력은 안 된다. 이런 무기들은 기습 발사는 가능하지만 제공권을 상실한 상태에선 오래 살아남기 어렵다. 모든 분야에서 열세인 북한은 핵무기 개발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핵무기를 쓰는 순간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김정은도 잘 안다. 따라서 핵무기 하나만 믿고 북한이 남침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10년쯤 더 지나 신형 무기를 살 돈이 떨어진 북한군과 계속 최신 무기로 업그레이드하는 한국군의 격차가 얼마나 더 벌어져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따라서 핵실험 정도가 아니고 재래식 무기 시험 수준이라면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잠을 푹 자도 좋다고 생각한다. 김정은에겐 요즘 할 일이 그것밖에 없지만, 우린 다른 할 일이 많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김정은은 최근 보름 동안 동·서해를 오가며 4차례나 미사일과 방사포 시험 발사를 주관했다. 그는 2010년 11월 연평도를 포격한 북한군의 방사포탄이 명중률도 한심하고 불발탄도 많자 충격을 받고 담당자들을 닦달했다. 그 결과물이 최근 시험한 신형 조종 방사포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북한의 유도 시스템은 미국의 민용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사시 미국이 GPS 코드를 바꾸면 포탄 조종은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돌이켜보면 김정은이 미사일과 방사포 사격에 매달릴 것이란 징후는 올해 초부터 예상됐다. 4월 시정연설에서 “티끌만 한 양보나 타협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김정은은 5월 4일과 9일 잇따라 미사일과 방사포 사격을 참관했다. 그리고 5월 말 강계뜨락또르(트랙터)종합공장 등 자강도 강계 일대 군수공장들을 방문했다. ‘26호 공장’으로 불리는 강계뜨락또르종합공장은 북한군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포탄과 폭탄, 미사일 탄두, 기뢰, 어뢰 등을 제조하는 군수공장이다. 이번에 시험한 조종 방사포탄도 이곳에서 생산됐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이곳은 미사일과 방사포탄 등을 이란 시리아 등 중동 국가들에 팔면서 외화벌이에도 크게 기여했다. 1949년 2월 강계 남천동에 공장이 생긴 이래 김일성은 30차례, 김정일은 23차례, 김정은은 2차례 방문했다. 북한에서 이 정도로 김씨 일가의 총애를 받은 공장은 찾기 어렵다. 남쪽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공장에는 끔찍한 비극의 역사가 있다. 북한이 포사격을 할 때마다 남쪽 사람들은 가깝게는 2010년의 연평도를, 멀리는 1994년의 ‘서울 불바다’ 발언을 떠올린다. 그런데 그 불바다가 현실화된 곳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기 위해 미사일과 포탄을 제작하던 26호 공장이었다. 며칠 전 취재를 위해 통화한 강계 출신 탈북민이 대뜸 “1991년 11월 30일 사고 말이죠”라고 되물었을 정도로 현지 사람들에겐 기억이 선명한 일이다. 증언들을 종합해보면 그날 밤 잠에 들었던 강계 사람들은 엄청난 폭발음과 유리창이 부서지는 소리에 일제히 눈을 떴다. 폭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밤새 이어졌다. 미사일과 포탄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땅으로 떨어졌다. 전쟁이 발발해 폭격을 받는 것으로 착각한 주민들은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채 집을 뛰쳐나와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 당시 100km 떨어진 곳에서도 벌겋게 물든 강계의 하늘이 보였다. 이날 사고는 수출용 미사일과 포탄, 폭탄 수천 발이 쌓여 있었던 26호 공장 야적장에 불이 나면서 시작됐다. 추위에 떨던 경비병들이 피운 불이 포탄 상자에 옮겨 붙은 게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공식적인 원인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26호 공장은 외부 공격을 피하기 위해 산 아래를 깊숙이 파고, 여러 층에 걸쳐 고가의 독일제 기계로 구성된 생산라인을 갖추고 있었다. 엄청난 양의 화약도 쌓여 있었다. 공장이 시가지와 붙어 있기 때문에 만약 지하 시설에까지 불이 붙으면 도시 전체가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화재 진압을 위해 먼저 뛰어들었던 사람들이 폭발로 죽자, 2차로 보안원(경찰)으로 구성된 결사대가 투입됐다. 불바다를 뚫고 들어간 이들은 몸으로 불길을 막아가며 공장 입구를 폐쇄했다. 그 결과 공장을 지켜 북한 군수산업의 핵심이 무너지는 것은 막았다. 하지만 잇따른 폭발로 갱도 내 산소가 타버리고 입구까지 밀폐되자 지하에서 일하던 야간작업조 300여 명 전원이 질식해 죽었다. 나중에 폐쇄했던 문을 열었을 때 여성들을 가운데 두고 남성들이 둘러싼 시신들이 한곳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군율이 적용되는 곳인지라 죽는 순간까지 질서를 흩뜨리지 않은 것이다. 이날 사고로 외부 사망자도 1000명 넘는다는 말도 나돌지만 북한이 정확한 실상을 밝히지 않고 있어 알 수는 없다. 북한의 역대급 폭발 참사가 아이러니하게도 최대 군수공장에서 일어났고, 군수공업의 도시 강계가 가장 생생한 불바다를 끔찍하게 경험한 도시가 됐다는 사실 앞에서 “불을 즐기는 자 불에 타죽는다”는 속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쏘고, 터지는 것만 보면 환하게 웃는 김정은에게 한 번쯤 상기시켜 주고 싶은 말이자 기억이기도 하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한반도 최고의 ‘자력갱생(自力更生) 전문가’는 북한에 있다. 김일성부터 시작해 김정은까지 3대째 자력갱생이라는 말을 60년 가까이 우려먹고 있다. 한 우물을 이만큼 오래 파면 저작권까지 생기는지 위키피디아는 자력갱생을 ‘북한어’라고 소개한다. 북한에서 자라 김일성대에서 사상 교육을 받은 나는 자력갱생이란 말을 귀가 헐도록 들었고, 절대 다수의 북한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단어에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가 됐다. 그 덕분에 북한식 자력갱생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자력갱생은 우선 “우리는 잘못한 게 없다”로 출발한다. 우리는 옳은 일만 하는 좋은 사람들인데 힘센 악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력갱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악당에 대해 적개심을 갖고 인류의 정의라는 대의를 위해 적의 압박에 절대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내부의 이적행위와 견결히 싸워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이기 때문에 정의를 지키려면 악당의 압박에 동조하거나 수령의 지도사상에 불평하는 불순분자를 걸러내고 준엄하게 심판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 편은 일심단결로 뭉치고 정치사상적 순결성을 갖게 된다. “각자 알아서 살아야 한다”는 어쩌면 북한식 자력갱생의 핵심 본질이다. 자력갱생하라는 지시가 떨어지면 절대로 수령과 국가에 손을 내밀어 ‘심려’를 끼쳐선 안 된다. 굶어죽는 것은 지도자나 국가의 잘못이 아니라 본인이 자력갱생을 제대로 못한 탓이다. 수령이 ‘자력갱생 간고분투(艱苦奮鬪)의 혁명정신’을 가지라고 했는데, 수령의 방침을 제대로 따르지 못했고 혁명정신이 부족해서 죽는 것이다. ‘고난의 행군’ 때 수많은 사람들은 굶어죽으면서도 국가를 원망할 수 없었다. 올해 북한은 자력갱생이란 단어를 어느 때보다 부쩍 강조한다. 내용은 내가 살던 20년 전 그대로다. 올해 4월 김정은은 노동당 전원회의 연설에서 자력갱생을 25번 외쳤다. “우리의 힘과 기술, 자원에 의거한 자립적 민족경제에 토대해 자력갱생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제재로 우리를 굴복시킬 수 있다고 혈안이 돼 오판하는 적대세력에게 심각한 타격을 줘야 한다”는 게 요지였다. 자력갱생을 해야 하는 원인을 100% 미국 탓으로 돌렸다. 북한 어용매체들의 선전전도 빠질 수 없다. 노동신문은 5월 1일자 사설을 통해 “자력갱생은 혁명가와 가짜 혁명가, 애국자와 매국자, 충신과 배신을 가르는 시금석”이라고 강조한 뒤 “남에 대한 의존심과 수입병, 패배주의 같은 사상적 병집을 불사르자”고 주장했다. 자력갱생에 토를 달면 가짜 혁명가, 매국자, 배신자가 되는 셈이다. 이 신문은 또 이달 14일자 논설에서 “자력갱생은 조선혁명의 영원한 생명선이며 국가의 자주적 존엄과 주민의 삶을 지키기 위한 유일무이한 혁명방식”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어 “현 시기는 정신 대 정신이 대결하는 시대로, 신념을 버리고 환상과 의존심, 패배주의에 사로잡히는 것은 투항이고 변절이며 오늘날 자력이냐 의존이냐 하는 문제는 사느냐 죽느냐를 판가름하는 운명적인 문제”라고 썼다. 생사가 자력갱생에 달렸다는 궤변도 어이가 없지만 논설은 ‘자력갱생의 시대’를 이끈다는 김정은을 이순신, 서희보다 백배는 더 용기 있고 지혜로운 지도자인 양 침이 마르게 찬양했다. 그러나 60년 가까이 자력갱생을 외쳐 왔지만 북한의 경제는 현재 외세(중국)에 철저히 종속된 처지라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자력갱생이라는 구호 뒤에는 ‘간고분투’나 ‘무조건 이긴다’ 같은 정신력 무장 강조가 나오고 그 다음에는 “우리 운명을 개척할 힘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주체사상으로 연결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북한 경제는 망가져갔다. 자력갱생을 피해 온 줄 알았는데, 요새 남쪽에서 자력갱생, 애국, 매국 등 북에서 배웠던 익숙한 표현들과 이분법적 선동 방식을 보게 되니 흠칫 놀란다. 우리가 일본의 수출 규제를 받는 상황이 된 것도 달갑지 않은데 이에 대한 남쪽 권력의 대응 선전마저 북한을 닮아가나 싶다. 나는 확실히 친일파는 아니다. 일본의 오만한 규제에는 온 국민이 함께 뭉쳐 맞서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절머리가 나는 북한 전제주의식 선동 방식은 정말 싫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지난 주말 1박 2일 일정으로 경남 함양을 다녀왔다. 그곳에서 안내원과 1951년에 일어난 거창 산청 함양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1951년 2월 8∼11일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는 지리산 인근 20여 개 산골마을에서 1400여 명을 학살했다. 군인들은 부락들을 돌며 총과 수류탄, 박격포 등을 이용해 닥치는 대로 주민들을 죽였다. 산청 함양의 사망자 705명 중 600여 명이 어린이와 노인, 부녀자였다. 거창에선 719명 중 15세 미만 어린이만 359명에 달했다. 6·25전쟁 당시 저지른 국군의 가장 끔찍한 범죄 가운데 하나였다. 만행을 주도한 11사단장이 바로 1986년 4월 월북한 최덕신이다. 1400여 명을 학살하고도 11사단 지휘관들은 잘나갔다. 사건의 진상이 알려지자 최덕신은 보직 해임됐지만 곧 복직돼 1군단장과 외무부 장관, 주서독 대사 등을 지냈다. 그는 나중엔 ‘사람 대하기를 하늘과 같이 하라’를 교리로 내세우는 천도교의 교령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정치적 갈등을 겪으면서 1976년 아내 류미영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월북했다. 무기징역을 받은 오익경 9연대장은 1년 뒤 복직해 대령으로 예편했고, 10년형을 선고받은 한동석 3대대장은 1년 뒤 특사로 풀려나 군에 복귀했다가 강릉, 원주시장까지 지냈다. 6·25전쟁 이후 월북한 남한 인사 중에서 최고위급으로 꼽히는 최덕신은 북한에서 김일성훈장 등 각종 훈장을 받으며 애국열사로 추앙받았다. 또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과 천도교 청우당 위원장,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 등 요직을 두루 맡았다. 북한이 최고의 명작으로 꼽는 영화 ‘민족과 운명’ 1∼4부에서는 아예 그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최덕신 사후 3년 뒤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민간인 학살 장면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영화 속에서 최덕신은 학살 장소를 찾아가 “빨갱이를 죽이라고 했지 누가 양민을 죽이라고 했느냐”며 분노하거나, 평양에 가기 전 “단테의 기름 가마면 내 죄가 세척될 수 있을까”라며 번민하는 장면도 나온다. 한국의 거창 산청 함양 민간인 학살에 관한 조사 자료를 보면 최덕신이 민간인 학살에 대해 몰랐을 가능성은 낮다. 다만 만행을 저지른 최덕신마저 김일성이 용서해 준다는 설정을 하다 보니 북한은 잔인한 범죄자에 대한 성토 기회마저 포기한 것이다. 피해자 가족의 입장에서 학살 사건의 주범인 최덕신이 북한에 가서 미화되고 애국열사로 추앙받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최근 최덕신의 둘째 아들 최인국 씨가 몰래 월북한 사실이 밝혀졌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최인국 씨는 6일 평양에 도착했으며, 앞으로 북한에서 영주할 계획이다. 또 어머니 류미영에 이어 노동당의 관변 야당인 천도교 청우당의 위원장을 맡을 것으로 관측된다. 일부 한국 언론은 최인국 씨가 남한에서 아버지 때문에 제대로 된 일자리도 얻지 못한 채 힘겨운 삶을 살아왔다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1400여 명의 민간인과 후손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삶은 업보였을 수 있다. 이제 그는 평양에서 부친과 모친의 뒤를 이어 천도교 청우당 중앙위원장직을 이어받아 좋은 집에서 살게 될 가능성이 크다. 남쪽에서 72년을 살았던 최인국 씨가 북한이 어떤 곳인지를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부인과 자식들(1남 1녀)은 서울에 두고 갔을 것이다. 가족은 서울에서 자유를 맛보며 살게 하고, 자신은 자식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 평양에서 부모가 남긴 ‘적금’을 타먹으며 여생을 보내겠다는 계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계산이 들어맞을지는 지켜봐야 안다. 한편 남한으로 망명한 북한 최고위급 인물인 황장엽의 집안이 8촌까지 멸족된 것을 다 아는 북한 사람들에게 북으로 망명한 남쪽 최고위급 인물 최덕신의 아들이 아버지의 월북 이후에도 서울에서 풍채 좋은 모습으로 70년 넘게 살다가 평양으로 옮겨와 돌아다닌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 될 것 같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한스 모드로프 전 동독 총리(91·사진)는 동독 공산당 시절의 마지막 총리다. 1989년 11월 13일 빌리 슈토프 총리의 사임으로 총리가 된 뒤 그해 12월 7일 에곤 크렌츠 통일사회당 당수가 축출당하면서 사실상 동독의 통치자가 됐다. 그리고 1990년 3월 18일 자유선거 후 총리에서 물러났다. 모드로프 전 총리는 4개월 남짓한 재임 시절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와 동독의 미래를 놓고 4차례 담판을 벌였다. 지난달 22일 베를린 좌파당 당사(옛 공산당 청사)에서 만난 그는 통일을 지향하는 한반도에도 참고가 될 만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통일 직전 동서독 회담의 과정을 회상하며 “통일을 밀어붙이는 콜과 미국에 대항해 양국이 조약공동체 관계를 맺자는 제안을 했지만 거절당했다”고 말했다. 다음 대안으로 그가 준비한 방안은 3, 4년의 조약 공동체를 거쳐 국가연합으로 가고, 이후 연방제를 하는 3단계 통일 방안이었다. 그는 “모스크바를 두 번이나 찾아가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회담을 했지만 이미 체제 불안에 빠진 소련은 독일의 통일 과정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말했다. 힘이 없는 동독의 방안은 어디서도 통하지 않았다. ‘통일을 결정하는 주체는 힘’이라는 것을 보여준 교훈이었다. 모드로프 전 총리는 천천히 통일을 추진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통일 독일이 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콜 전 총리와의 회담 과정에서도 그는 150억 마르크를 지원해주면 동독을 재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그는 “150억 마르크는 사실 큰 금액이 아니었다”며 “동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1000억 마르크의 전쟁 보상금을 소련에 냈지만, 서독은 소련에 한 푼도 안 내고 오히려 서방의 마셜플랜(1947년부터 1951년까지 미국이 서유럽 16개 나라를 대상으로 한 대외원조계획)으로 지원을 받았다”고 했다. 이어 “전후 1000억 마르크는 1990년쯤엔 이자까지 계산해서 6000억 마르크나 되는 큰돈”이라고 덧붙였다. 2차 세계대전의 엄청난 보상을 동독이 다 감당했기 때문에 서독은 동독을 마땅히 지원했어야 했다는 의미로 읽혔다. 이는 한반도 통일 과정이 시작되면 북한도 다양한 논리로 남한의 경제 지원을 당연한 것으로 요구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그는 동독 지역에서 극우 세력이 세력을 키우는 것에 대해 동독 출신의 요아힘 가우크 전 대통령(2012∼2017년 재임)의 말을 빌려 우회적으로 의견을 밝혔다. 가우크 전 대통령은 “통일의 잘못된 결과로 나타나는 정치적 변화지만 ‘독일을 위한 대안(AfD)’을 적으로 간주하지 말고, 그들과 대화하고 협상해야 한다. 이미 의회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독일 주요 정당이 AfD와의 연정을 거부하는 것과 다른 태도다. 인터뷰를 마치며 1971년 동독이 서독 방송 시청을 허용한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금지 정책은 관철시킬 수 있을 때만 해야 한다.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관철시키지 못한다면 오히려 권력을 잃게 된다. 당시 기술적으로 금지해 봐야 막을 방법이 없었기에 방송 시청을 허가한 것이다.”베를린=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독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올해로 30년을 맞았다. 지난달 22일 찾은 베를린 장벽은 ‘이스트사이드갤러리’라는, 화가 100여 명이 그린 거대한 벽화로 채워져 있었다. 서베를린을 포위했던 총길이 약 160km의 장벽 중 약 1.3km 구간을 남겨 시내에 복원해 명소로 자리 잡았다. 베를린을 찾은 여행객들은 높이 3.6m의 장벽에 그려진 다양한 벽화를 사진에 담느라 분주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이들이 몰린 곳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에리히 호네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장이 키스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형제의 키스’였다. 옆 가게에선 무너진 장벽의 콘크리트 조각이 기념품으로 팔리고 있었다. 이제 베를린 장벽은 과거의 추억으로 남았다. 독일은 장벽이 무너진 뒤 통일을 맞았지만 통일의 후유증은 30년이 지나도록 남아 있었다. ○ 극우의 유령이 떠돌다 “하나의 유령,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에 떠돌고 있다.” 1848년 저술된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첫 구절이다. 그 유령은 20세기 나치즘의 득세와 더불어 세계사를 바꾸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년을 맞은 오늘날 독일인들은 반(反)난민, 반이슬람이라는 유령의 배회에 공포를 느끼고 있다. 2013년에 창당된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동독 지역에서 높은 지지를 받아 2017년 9월 총선에서 12.7%의 표를 얻어 제3정당으로 연방하원에 진입했다. 지난해에는 독일의 16개 주 의회에 모두 진출했고 정당 지지도 조사에서 2위에 올랐다. AfD는 여세를 몰아 프랑스 극우 포퓰리즘 성향 정당 ‘국민연합(RN)’ 등과 연대해 ‘정체성과 민주주의’라는 범유럽을 아우르는 극우 정치그룹을 만들었다. 이 그룹은 유럽의회에 73명의 의원을 둔 제5당으로 부상했다. 이들의 약진은 이제 시작이다. AfD의 지지 기반은 동독이다. 왜 동독인들은 극우 정당에 빠졌을까. 통일 전 동독 라이프치히대에서 저널리즘을 가르쳤던 불프 스카운 박사는 “20년 전만 해도 작센주(옛 동독)는 사회주의자들이 득세해 ‘붉은 작센’이라고 불렸는데, 지금은 이곳에서 AfD가 가장 강한 정당이 됐다”고 말했다. 과거의 사회주의자들이 이제는 극우로 변신했다는 것이다. 베를린자유대 앙케 피들러 교수는 “동독인은 2등 국민이라며 불만이 많다”며 “극우의 득세는 동독인들이 통일 이후에 갖는 불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했다. 통일의 후유증이 30년 뒤 극우 정당의 득세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독일의 난민 정책은 동독 지역의 불만을 키워왔다. 분단 시절 동독에선 외국인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적극적인 난민 수용 정책을 편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100만 명의 난민을 젊은 인력들이 빠져나가 공동화(空洞化) 현상이 심각한 동독 지역에 보냈다. 주민 500명이 살던 마을에 1000명의 난민이 배정되기도 했다. 통일 후 30년 동안 이러한 과정을 겪은 동독인들은 난민들이 똑같은 사회보장과 기초생활보장을 받으며 이웃으로 정착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 베를린자유대 김상국 교수는 “동독인들은 극우 정당 지지를 현실에 대한 실망감과 박탈감을 표시하는 가장 효과적인 저항이라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현재의 정치 기득권에 대한 불만이 극단주의자들에 대한 지지로 분출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극우가 득세하면서 독일 내에 인종차별과 혐오 발언이 확산되고 한국인들까지 피해를 입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과연 독일 통일에 후회는 없었을까 통일은 동독인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지난달 18∼26일 베를린과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등 동독 지역을 다니며 만난 20여 명의 정치인, 학자, 언론인,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모두 “독일 통일은 필연”이라고 입을 모았다. 정범구 주독일 한국대사는 “6월 초 베를린 훔볼트대와 ‘장벽은 과연 사라졌는가’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는데 ‘독일 통일은 전반적으로 성공적’이라는 게 현지의 보편적 평가”라고 전했다. 동독은 통일 후 경제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었다. 지난해 독일 경제·에너지부의 발표에 따르면 동독 사회의 가처분 소득은 서독의 85% 수준에 도달했다. 현실적인 수치로는 아직 차이가 있지만 분단 이전에도 독일의 주요 산업이 서독 지역에 몰려 있었고, 젊은 인력들이 서독으로 빠져나가 동독의 고령화가 심각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서독과 동독의 격차는 많이 좁혀진 셈이다. 한국의 도시와 농촌 간 격차를 감안하면 같은 국가 내에 이 정도의 소득 격차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동독 자체로만 따져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약 3만8000유로(약 5000만 원)로 이미 프랑스나 이탈리아와 비교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동독인들은 왜 불만을 갖는 것일까. ‘라이프치거 폴크스자이퉁’의 얀 에멘되르퍼 편집장은 “과거 사회주의권 국가 중 동독만큼 정치·사회적으로 발전한 곳이 없다. 그러나 동독인은 이웃 나라와 비교하지 않고 서독과 비교하기 때문에 불만이 크다”고 말했다. ○ 허물어지지 않은 심리적 장벽 동독 지역에서 만난 사람들은 불만과 갈등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 경제적 문제가 아닌 심리적 장벽 문제를 꼽았다. 통일은 동독인의 정체성을 지웠다. 일했던 직장과 경력이 사라졌다. 동독인들이 훌륭했다고 자부하는 의료제도, 교육제도는 물론 축구팀, 깃발, 노래 심지어 신호등까지 서독식으로 바뀌었다. 동독인들은 내가 어디서 일하던 누구인지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라이프치히 현대사포럼 위르겐 라이히 박물관장은 “독일 통일의 시초가 됐던 라이프치히 시위를 주도한 20대 청년들이 지금 50대가 되면서 현실에 절망했고 극우파를 지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독인들에게 당한 차별도 동독인들에게는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다. 당사자인 스카운 박사는 “통일이 되자 수준 낮은 서독 사람들이 식민지로 물밀듯 몰려와 동독 최고 엘리트들을 무시하면서 쓴맛을 느꼈다”고 거친 분노를 쏟아냈다. 독일 중부방송의 아나이스 로스 편집자는 역사적인 1989년 9월 10일 라이프치히 비폭력 시위 장면을 유일하게 촬영해 위험을 무릅쓰고 서독에 전송한 인물이다. 그는 서독과 동독 사람들에게 라이프치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려 했다. 통일이 되자 그가 일하던 중부방송의 경영진은 기술 담당 임원 단 한 명만 빼고 모두 서독 사람으로 바뀌었다. 동독 주민이 동독 임원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동독에서도 40대 이하 세대에겐 통일이 먼 과거 일로 기억된다. 하네스 모슬러 독일자유대 교수는 “일반적인 독일인이 갖고 있는 통일에 대한 생각은 기억하면서도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40대 이하 세대에게 통일은 기념일과 다큐멘터리, 자서전에서나 볼 수 있는 과거이며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앞으로 살아야 할 시대라는 것이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서독으로 옮겨가고, 동독에는 과거의 향수에 잠긴 노령 세대가 남아 늙어가고 있다. 통일 전 동독의 인구는 1600만 명, 서독은 6000만 명이었다. 현재 동독 인구는 1400만 명으로, 서독에서 약 200만 명이 이주해왔음을 감안하면 400만 명 이상의 동독인이 통일 후 서독에 간 것으로 추정된다. 장벽 붕괴 30년 뒤 독일의 모습은 통일을 지향하는 한국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통일 후 동독에서 가장 빠르게 변신한 이들은 정보기관인 슈타지 요원들이었다. 이들은 슈타지에서 쌓은 정보와 네트워크를 활용해 경비회사, 보험회사, 공해제거회사 등을 차려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반도가 통일되면 주민들을 탄압하고 감시하던 북한 보위부 요원들이 어떻게 변할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라 할 수 있다. 김상국 교수는 “독일과 한국의 통일은 상황이 너무 달라 비교하기는 어렵다. 다만 우리는 통일 과정에서 더욱 어려운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베를린·드레스덴·라이프치히=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KPF 디플로마-평화저널리즘 교육과정의 하나로 작성되었습니다.}

독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올해로 30년을 맞았다. 지난달 22일 찾은 베를린 장벽은 ‘이스트사이드갤러리’라는, 화가 100여 명이 그린 거대한 벽화로 채워져 있었다. 서베를린을 포위했던 총길이 약 160㎞의 장벽 중 약 1.3㎞ 구간을 남겨 시내에 복원해 명소로 자리 잡았다. 베를린을 찾은 여행객들은 높이 3.6m의 장벽에 그려진 다양한 벽화를 사진에 담느라 분주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이들이 몰린 곳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에리히 호네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장이 키스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형제의 키스’였다. 옆 가게에선 무너진 장벽의 콘크리트 조각이 기념품으로 팔리고 있었다. 이제 베를린 장벽은 과거의 추억으로 남았다. 독일은 장벽이 무너진 뒤 통일을 맞았지만 통일의 후유증은 30년이 지나도록 남아 있었다. ● 극우의 유령이 떠돌다 “하나의 유령,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에 떠돌고 있다.” 1848년 저술된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첫 구절이다. 그 유령은 20세기 나치즘의 득세와 더불어 세계사를 바꾸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년을 맞은 오늘날 독일인들은 반(反)난민, 반이슬람이라는 유령의 배회에 공포를 느끼고 있다. 2013년에 창당된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동독 지역에서 높은 지지를 받아 2017년 9월 총선에서 12.7%를 얻어 제3정당으로 연방하원에 진입했다. 지난해에는 독일의 16개 주 의회에 모두 진출했고 정당 지지도 조사에서 2위에 올랐다. AfD는 여세를 몰아 프랑스 극우 포퓰리즘 성향 정당 ‘국민연합(RN)’ 등과 연대해 ‘정체성과 민주주의’라는 범유럽을 아우르는 극우 정치그룹을 만들었다. 이 그룹은 유럽의회에 73명의 의원을 둔 제5당으로 부상했다. 이들의 약진은 이제 시작이다. AfD의 지지 기반은 동독이다. 왜 동독인들은 극우 정당에 빠졌을까. 통일 전 동독 라이프치히대에서 저널리즘을 가르쳤던 불프 스카운 박사는 “20년 전만 해도 작센주(옛 동독)는 사회주의자들이 득세해 ‘붉은 작센’이라고 불렸는데, 지금은 이곳에서 AfD가 가장 강한 정당이 됐다”고 말했다. 과거의 사회주의자들이 이제는 극우로 변신했다는 것이다. 베를린자유대 앙케 피들러 교수는 “동독인은 2등 국민이라며 불만이 많다”며 “극우의 득세는 동독인들이 통일 이후에 갖는 불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했다. 통일의 후유증이 30년 뒤 극우 정당의 득세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독일의 난민 정책은 동독 지역의 불만을 키워왔다. 분단 시절 동독에선 외국인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적극적인 난민 수용 정책을 편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100만 명의 난민을 젊은 인력들이 빠져나가 공동화(空洞化) 현상이 심각한 동독 지역에 대량으로 보냈다. 주민 500명이 살던 마을에 1000명의 난민이 배정되기도 했다. 통일 후 30년 동안 이러한 과정을 겪은 동독인들은 난민들이 똑같은 사회보장과 기초생활보장을 받으며 이웃으로 정착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 베를린자유대 김상국 교수는 “동독인들은 극우 정당 지지를 현실에 대한 실망감과 박탈감을 표시하는 가장 효과적인 저항이라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현재의 정치 기득권에 대한 불만이 극단주의자들에 대한 지지로 분출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극우가 득세하면서 독일 내에 인종차별과 혐오 발언이 확산되고 한국인들까지 피해를 입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과연 독일 통일에 후회는 없었을까 통일은 동독인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지난달 18~26일 베를린과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등 동독 지역을 다니며 만난 20여 명의 정치인, 학자, 언론인,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모두 “독일 통일은 필연”이라고 입을 모았다. 정범구 주독일 한국대사는 “6월 초 베를린 훔볼트대와 ‘장벽은 과연 사라졌는가’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는데 ‘독일 통일은 전반적으로 성공적’이라는 게 현지의 보편적 평가”라고 전했다. 동독은 통일 후 경제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었다. 지난해 독일 경제·에너지부의 발표에 따르면 동독 사회의 가처분 소득은 서독의 85% 수준에 도달했다. 현실적인 수치로는 아직 차이가 있지만 분단 이전에도 독일의 주요 산업이 서독 지역에 몰려 있었고, 젊은 인력들이 서독으로 빠져 나가 동독의 고령화가 심각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서독과 동독의 격차는 많이 좁혀진 셈이다. 한국의 도시와 농촌 간 격차를 감안하면 같은 국가 내에 이 정도의 소득 격차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동독 자체로만 따져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약 3만8000유로(약 5000만 원)로 이미 프랑스나 이탈리아와 비교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동독인들은 왜 불만을 갖는 것일까. ‘라이프치거 폴크스자이퉁’의 얀 에멘되르퍼 편집장은 “과거 사회주의권 국가 중 동독만큼 정치 사회적으로 발전한 곳이 없다. 그러나 동독인은 이웃 나라와 비교하지 않고 서독과 비교하기 때문에 불만이 크다”고 말했다. ● 허물어지지 않은 심리적 장벽 동독 지역에서 만난 사람들은 불만과 갈등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 경제적 문제가 아닌 심리적 장벽 문제를 꼽았다. 통일은 동독인의 정체성을 지웠다. 일했던 직장과 경력이 사라졌다. 동독인들이 훌륭했다고 자부하는 의료제도, 교육제도는 물론 축구팀, 깃발, 노래 심지어 신호등까지 서독식으로 바뀌었다. 동독인들은 내가 어디서 일하던 누구인지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라이프치히 현대사포럼 위르겐 라이히 박물관장은 “독일 통일의 시초가 됐던 라이프치히 시위를 주도한 20대 청년들이 지금 50대가 되면서 현실에 절망했고 극우파를 지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독인들에게 당한 차별도 동독인들에게는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다. 당사자인 스카운 박사는 “통일이 되자 수준 낮은 서독 사람들이 식민지로 물밀듯 몰려와 동독 최고 엘리트들을 무시하면서 쓴맛을 느꼈다”고 거친 분노를 쏟아냈다. 독일 중부방송의 아나이스 로스 편집자는 역사적인 1989년 9월 10일 라이프치히 비폭력 시위 장면을 유일하게 촬영해 위험을 무릅쓰고 서독에 전송한 인물이다. 그는 서독과 동독 사람들에게 라이프치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려 했다. 통일이 되자 그가 일하던 중부방송의 경영진은 기술 담당 임원 단 한 명만 빼고 모두 서독 사람으로 바뀌었다. 동독 주민이 동독 임원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동독에서도 40대 이하 세대에겐 통일이 먼 과거 일로 기억된다. 하네스 모슬러 독일자유대 교수는 “일반적인 독일인이 갖고 있는 통일에 대한 생각은 기억하면서도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40대 이하 세대에게 통일은 기념일과 다큐멘터리, 자서전에서나 볼 수 있는 과거이며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앞으로 살아야 할 시대라는 것이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서독으로 옮겨가고, 동독에는 과거의 향수에 잠긴 노령 세대가 남아 늙어가고 있다. 통일 전 동독의 인구는 1600만 명, 서독은 6000만 명이었다. 현재 동독 인구는 1400만 명으로, 서독에서 약 200만 명이 이주해왔음을 감안하면 400만 명 이상의 동독인이 통일 후 서독에 간 것으로 추정된다. 장벽 붕괴 30년 뒤 독일의 모습은 통일을 지향하는 한국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통일 후 동독에서 가장 빠르게 변신한 이들은 정보기관인 슈타지 요원들이었다. 이들은 슈타지에서 쌓은 정보와 네트워크를 활용해 경비회사, 보험회사, 공해제거회사 등을 차려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반도가 통일되면 주민들을 탄압하고 감시하던 북한 보위부 요원들이 어떻게 변할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라 할 수 있다. 김상국 교수는 “독일과 한국의 통일은 상황이 너무 달라 비교하기는 어렵다. 다만 우리는 통일 과정에서 더욱 어려운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동독 마지막 총리 “천천히 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통일 독일 됐을 것” ▼한스 모드로프 전 동독 총리(91)는 동독 공산당 시절의 마지막 총리다. 1989년 11월 13일 빌리 슈토프 총리의 사임으로 총리가 된 뒤 그해 12월 7일 에곤 크렌츠 통일사회당 당수가 축출당하면서 사실상 동독의 통치자가 됐다. 그리고 1990년 3월 18일 자유선거 후 총리에서 물러났다. 모드로프 전 총리는 4개월 남짓한 재임 시절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와 동독의 미래를 놓고 4차례 담판을 벌였다. 지난달 22일 베를린 좌파당 당사(옛 공산당 청사)에서 만난 그는 통일을 지향하는 한반도에도 참고가 될 만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통일 직전 동서독 회담의 과정을 회상하며 “통일을 밀어붙이는 콜과 미국에 대항해 양국이 조약공동체 관계를 맺자는 제안을 했지만 거절당했다”고 말했다. 다음 대안으로 그가 준비한 방안은 3, 4년의 조약 공동체를 거쳐 국가연합으로 가고, 이후 연방제를 하는 3단계 통일 방안이었다. 그는 “모스크바를 두 번이나 찾아가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회담을 했지만 이미 체제 불안에 빠진 소련은 독일의 통일 과정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말했다. 힘이 없는 동독의 방안은 어디서도 통하지 않았다. ‘통일을 결정하는 주체는 힘’이라는 것을 보여준 교훈이었다. 모드로프 전 총리는 천천히 통일을 추진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통일 독일이 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콜 전 총리와의 회담 과정에서도 그는 150억 마르크를 지원해주면 동독을 재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그는 “150억 마르크는 사실 큰 금액이 아니었다”며 “동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1000억 마르크의 전쟁 보상금을 소련에 냈지만, 서독은 소련에 한 푼도 안 내고 오히려 서방의 마셜플랜(1947년부터 1951년까지 미국이 서유럽 16개 나라를 대상으로 한 대외원조계획)으로 지원을 받았다”고 했다. 이어 “전후 1000억 마르크는 1990년쯤엔 이자까지 계산해서 6000억 마르크나 되는 큰돈”이라고 덧붙였다. 2차 세계대전의 엄청난 보상을 동독이 다 감당했기 때문에 서독은 동독을 마땅히 지원했어야 했다는 의미로 읽혔다. 이는 한반도 통일 과정이 시작되면 북한도 다양한 논리로 남한의 경제 지원을 당연한 것으로 요구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그는 동독 지역에서 극우 세력이 세력을 키우는 것에 대해 동독 출신의 요아힘 가우크 전 대통령(2012~2017년 재임)의 말을 빌려 우회적으로 의견을 밝혔다. 가우크 전 대통령은 “통일의 잘못된 결과로 나타나는 정치적 변화지만 ‘독일을 위한 대안(AfD)’을 적으로 간주하지 말고, 그들과 대화하고 협상해야 한다. 이미 의회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독일 주요 정당이 AfD와의 연정을 거부하는 것과 다른 태도다. 인터뷰를 마치며 1971년 동독이 서독 방송 시청을 허용한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금지 정책은 관철시킬 수 있을 때만 해야 한다.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관철시키지 못한다면 오히려 권력을 잃게 된다. 당시 기술적으로 금지해 봐야 막을 방법이 없었기에 방송 시청을 허가한 것이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KPF 디플로마-평화저널리즘 교육과정의 하나로 작성되었습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24일 독일 라이프치히 성니콜라이교회를 찾았다. 현재 이곳은 동서독 통일의 시발점으로 꼽히는 라이프치히 시위 30주년을 맞아 새 단장이 한창이었다. 교회 앞 번들거리는 돌바닥을 보며 1989년 10월 9일 이곳에서 촛불을 들었던 수십만 명의 시위대를 떠올렸다. ‘우리가 인민이다’는 구호를 외치던 시위대의 요구는 당시까지만 해도 통일이 아니었다. 이들은 1985년 소련에서 시작된 ‘페레스트로이카(정치·경제적 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에 동독 정부가 발맞출 것을 촉구했다. 언론의 자유, 슈타지(비밀경찰)의 해체, 해외여행의 자유가 핵심이었다. 시위는 베를린 등 동독 전역으로 확산됐다. 다급해진 동독 지도부는 해외여행 절차 간소화 조치를 발표해 사람들을 달래려 했지만 공산당 대변인의 실수로 국경 개방이라는 오보가 전파를 탔다. 뉴스를 들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베를린 장벽은 어이없이 무너졌다. 동독을 사실상 지배하던 소련도 통일을 막지 않았다. 독일 통일은 우연과 행운의 연속이었다. 장벽이 무너진 다음 해 동독에선 통일을 염두에 둔 ‘우리는 하나의 인민’이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서독 마르크가 오지 않으면 우리가 서독으로 가겠다’는 구호도 나왔다. 통일은 더 나은 삶을 바라는 동독 사람들의 선택이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아 이달 중순부터 열흘간 동독과 서독의 주요 도시를 누비며 여러 기관을 방문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것을 느꼈다. 우선 동독의 도시와 도로가 서독의 도시나 도로보다 깨끗해 보였다. 30년 동안 막대한 서독 자금이 동독으로 흘러간 결과였다. 동독의 소득이 여전히 서독보다 못하다는 뉴스도 볼 수 있었다. 젊은 인력들이 서독으로 빠져나가고, 주요 공업시설 대부분이 서독에 있는 탓이었다. 동독 주민들이 느끼는 소외감은 매우 커 보였다. 여기에는 근거가 있었다. 라이프치히대의 2016년 조사에 따르면 동독인은 독일 전체 인구 중 17%를 차지했지만 사회지도층에는 단 1.7%만 진입했다. 차관급 관료 60명 중 3명, 군 장성 202명 중 2명, 연방법원 판사 336명 중 13명, 대사 154명 중 4명만이 동독 출신이었다. ‘우리가 인민이다’를 외쳤던 동독 사람들이 지금은 ‘우리는 같은 인민이 아니라 2등 국민이다’라고 자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한국에선 통일을 이야기할 때 대개 경제적 부분에 초점이 맞춰지지만 독일에 와서 마음의 통일이 먼저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돈이 많고 적음을 떠나 마음이 맞지 않으면 한집에서 살 수 없다. 서독은 돈을 주었지만 마음은 그렇게 하질 않았다. 우리가 통일이 됐을 때 과연 남쪽 사람들은 서독 사람들보다 나은 관용을 보일 수 있을까. 요즘 남쪽에는 독일 통일 과정을 연구하는 사람도, 관련 저서도 많다. 하지만 직접 독일에 와서 북한 출신으로서 지켜본 결과 독일 통일 과정에서 배울 것은 거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독과 북한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동독 사람들은 과거 사회주의 시절을 회상할 때 빠뜨리지 않고 슈타지를 떠올린다. 슈타지가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설명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미안하게도 다른 생각을 했다. 슈타지는 감시만 열심히 했을 뿐 처형은 하지 않았다. 북한 사람의 눈으로 보면 동독은 천국이었다. 그 외에도 다른 점은 너무나 많다. 세습왕조인 북한이 수령에 대한 신격화를 포기하고 동독처럼 신앙의 자유를 허용할 수 있을까. 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도회가 반정부 시위로 이어져도 무력 진압하지 않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한국 TV 시청을 당국이 공식 허가하는 것 역시 꿈꾸기 어려운 일이다. 대외적 환경이 다른 것은 거론할 필요도 없다. 독일 통일 30주년을 맞아 한국에선 각종 연구발표회가 열릴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독일 통일 연구는 대개 서독 중심의 시각이었다. 나는 독일을 둘러보고 앞으로 예멘을 깊이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통일 후 사회 통합을 이루지 못해 4년 뒤 내전으로 이어진 예멘이 지금은 오히려 한반도에 더 많은 시사점을 줄 것 같다. 예멘도 내년이면 통일 30주년을 맞는다. ― 라이프치히에서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탈북민 정착 교육 시설인 ‘하나원’이 다음 달 8일로 창립 20주년을 맞는다. 1999년 경기 안성시에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라는 명칭으로 문을 연 하나원은 지금까지 3만 명 이상의 탈북민을 교육해 사회에 배출했다. 대다수 탈북민에게 하나원은 한국에서 첫발걸음을 뗀 ‘마음의 고향’으로 기억된다.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은 국정원 경찰청 등 관계기관의 합동신문을 거친 뒤 하나원으로 가서 12주간 문화적 이질감 해소, 심리 안정, 진로지도 상담 등 ‘사회적응교육’을 받는다. 이 기간에 정부는 탈북민의 가족관계를 등록하고, 집을 마련해 주는 등 이들의 사회 정착을 준비해 준다. 탈북민과 만들어가는 ‘작은 통일’의 입구에 선 하나원의 20년 역사는 순탄치만은 않았다. 수많은 갈등과 화해가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하나원의 시작과 현재를 조명해 본다.○ 귀순자에서 북한이탈주민까지 하나원 설립은 김대중 정부 출범 초기 “한 해 수십 명 들어오는 탈북자도 돌보지 못하면서 무슨 통일을 운운하느냐”는 여론 속에 결정됐다. 하나원의 출범을 이해하려면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에 대한 정책이 어떻게 변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반공을 국시로 삼고 있던 1960년대부터 1993년까지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은 국가유공자 지위를 부여받고 엄청난 금전적 보상을 받았다. 1980년대엔 “의사, 변호사 위에 귀순자가 있다”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다. 1990년대 접어들면서 이런 상황에 변화가 생긴다. 러시아 벌목공의 대규모 귀순이 시작되자 1993년 6월 ‘귀순북한동포보호법’이 제정되면서 탈북민은 생활능력이 결여된 생활보호대상자로 간주됐다. 주관 부처도 국가보훈처에서 보건복지부로 이관됐다. 경제적 지원이 급격하게 줄어들자 탈북민은 가난에 허덕였다. 김대중 정부는 1997년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을 만들고 탈북민에 대한 정착비와 주거지원비를 확대했다. 담당 부처도 보건복지부에서 통일부로 바뀌었다. 북한의 경제난으로 탈북민 수가 늘어남에 따라 이들에 대한 사회적응 교육 시설의 필요성이 제기돼 결국 하나원이 만들어졌다.○ “영감, 고기 잘 잡힙니까?” 하나원 초기 매달 입소하는 탈북자는 많지 않았다. 1기 20명, 2기 9명, 3기 32명, 4기 41명, 5기 27명…. 2002년 23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 기수가 100명이 넘었다. 하나원을 만든 뒤에도 주관 부서인 통일부는 초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당장 1기부터 사망 사고가 발생했다. 사회에 나가지 못하고 3개월 동안 하나원에 더 갇혀 있게 되자 탈북민들은 거칠어졌다. 이들을 다독이려고 공무원들은 수시로 함께 외박을 나갔다. 그런 가운데 밤에 저수지에 수영하러 나갔던 1기생 남성이 심장마비로 숨졌다. 총명하고 촉망받던 청년이었다. 게다가 탈북민 사이의 싸움과 연애 사건까지 끝없이 터졌다. 통일부는 이들을 졸업시킨 뒤인 2000년 1월에야 3기생을 받았다. 예정대로라면 3기는 1999년 9월에 입소했어야 했다. 고작 29명뿐인 1, 2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 다른 탈북민을 합동신문 기관에서 4개월을 더 기다리게 했던 것이다. 무엇부터 교육할지도 몰랐다. 이런 가운데 사회에 배출된 1, 2기 졸업생들의 사고 소식이 잇따랐다. 지방에 간 청년이 낚시하는 노인에게 북한에서 하던 버릇대로 생각 없이 “영감, 고기 잘 잡힙니까”라고 했다가 큰 봉변을 당한 일도 있었다. 새파란 청년에게서 영감이란 말을 들은 노인은 펄펄 뛰었다. 어느 곳에선 한국 여성과 결혼한 청년이 너무 버릇이 없다는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장모가 한 달 내내 김치와 반찬을 냉장고에 넣어주다가 “더 부족한 것이 없느냐”고 물었는데 탈북민 사위가 “일없습니다”라고 대답한 게 화근이 됐다. ‘괜찮습니다’라는 뜻이었지만 이를 오해한 장모는 다니던 교회 목사를 찾아가 “내가 어떻게 해주었는데 탈북한 사위가 나를 무시한다”고 하소연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초기 하나원은 탈북민에게 언어와 정착 교육에 초점을 맞췄다. 1999년 9월부터 2002년 10월까지 하나원 원장을 지낸 김중태 전 통일부 기조실장은 “우리 역시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탈북민에 대해 알아갔다”며 “환자가 그렇게 많을 줄도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초기 교육생들의 옷차림이 이상해서 살펴보니 운동복 위에 또 옷을 껴입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내복을 입는 북한의 습관을 몰라 속옷과 겉옷만 지급했던 것이다. 김 전 원장은 “내복을 살 예산이 책정되지 않아 천주교 단체의 후원으로 내복을 급히 구했다”며 “초기 영락교회, 정동제일교회 같은 교계에서 많이 후원했다”고 기억했다.○ “넌 하나원 몇 기니?” 대다수 탈북민은 서로 만나면 상대에게 “하나원 몇 기냐”고 인사처럼 묻는다. 하나원 기수는 탈북민에겐 대학교 학번과 마찬가지다. 매달 한 번씩 조사를 마친 탈북민이 하나원에 오면 순서대로 기수가 부여된다. 19일에 256기 교육생이 사회에 배출된다. 탈북민들이 기억하는 하나원에 대한 추억은 경기 안성 성남 시흥 양주시와 강원 화천군으로 각자 다르다. 2002년 8월까진 모든 탈북민이 안성시의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입국자가 늘어나자 통일부는 같은 해 9월부터 성남시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 시설을 임차해 여성들을 따로 교육했다. 이때는 여성보다 남성 수가 많을 때였다. 이후 시설 포화와 임차 기간 만료 등의 이유로 하나원 분원은 시흥과 양주로 옮겨 다녔다. 2013년 화천군에 하나원 제2분원이 세워지고 남성 탈북민을 따로 교육하면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2009년 2914명에 이르던 탈북민은 2012년 1502명이 입국하며 절반으로 줄었다. 이후부터 계속 줄어 1년 평균 1200명 안팎 수준에 머물고 있다. 김정은이 권력을 잡은 뒤 탈북에 대한 단속이 매우 엄격해진 것과 무관치 않다. 탈북민 수가 줄어도 통일부의 탈북민 지원 업무와 예산은 크게 줄지 않았다. 통일부 공무원 500여 명 중 20%에 육박하는 100여 명이 하나원 업무에 종사한다. 제2분원만 해도 고작 수십 명의 남성 탈북민 교육을 위해 30여 명의 통일부 직원이 일한다. 반면 안성 하나원엔 빈방이 많다.○ “졸리고, 지루해요.” 2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하나원이 갈 길은 여전히 멀다. 12주의 하나원 교육 기간과 교육의 질 등은 과거나 지금이나 늘 논쟁거리다. 하나원이 탈북민의 정착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역시 의견이 엇갈린다. 20년이 지나도록 바뀌지 않는 일부 하나원 직원들의 불친절하고 고압적인 태도도 시급히 개선해야 할 문제다. 탈북민이 한국 사회에서 처음 만나는 공무원이기 때문이다. 전문성 부족도 풀어야 할 숙제다. 하나원은 20년 동안 원장만 16명이 바뀌었다. 이 중 3년 정도 근무한 3명을 제외하면 나머지 13명 원장의 재직 기간은 1년도 안 된다. 직원도 전문성을 따져 뽑지 않고 통일부 직원들이 돌아가며 순환근무를 한다. 탈북민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 훈련을 고민하기보다는 본부로 복직할 때까지 무난하게 시간이나 때우려는 경향이 적지 않다. 김 전 원장은 “하나원은 가장 공무원 같지 않은 공무원들이 있어야 하는 곳이며 직원들은 자신의 행동이 탈북민에게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 늘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려면 하나원의 20년 역사 속에서 얻은 교훈이 전해져야 하는데 이런 과정이 누락된 채 매년 담당 공무원이 바뀌면서 똑같은 실수가 반복되는 일도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하나원을 졸업한 탈북민이 가장 문제점으로 꼽는 것은 교육이다. 다양한 연령과 성별, 경력을 가진 탈북민이 모이다 보니 각자의 수준에 맞는 교육과정은 애초에 엄두를 내지 못한다. 무엇보다 지루하다는 불만이 제일 많다. 강사의 수준과 강의 내용도 늘 논란거리다. 19일 하나원을 졸업하는 한 탈북여성이 최근 지인에게 털어놓은 하소연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언니, 나 무서워서 사회에 못 나가겠어. 나가면 사기꾼들이 득실거린다고 귀가 아프도록 들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지 막막해.” ▼“식단-의료 훌륭… 개인 맞춤형 진로 지도 등 현실적 교육을”▼거쳐간 탈북민들이 되돌아본 하나원 생활탈북민들은 하나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무작위로 남녀 각각 5명을 선택해 좋았던 점과 싫었던 점을 두 가지씩 물었다. 한국 사회를 많이 알수록 더 객관적 평가를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해 오래전 졸업한 탈북민 위주로 선정했다. 괄호 안에 성별과 하나원을 졸업한 시기를 밝혔다.○ “나는 이래서 하나원이 좋았다” “있을 땐 몰랐는데 정작 사회에 나오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낸 그 시절이 그립고 즐거운 추억으로 기억된다.”(여·2012년) “식단도 좋았고, 의료 서비스도 좋았다. 무엇보다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운동도 마음껏 했다.”(남·2006년) “심성수련 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약육강식의 사회인 줄만 알았는데, 따뜻한 마음도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여·2002년) “돌아보니 근심걱정 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었다.”(남·2006년) “전반적인 기억이 좋다. 의료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고, 음식도 맛있었다.”(여·2012년) “탈북 과정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아무 생각 없이 편히 다스릴 수 있어서 기뻤다. 먼저 사회에 나간 탈북민이 와서 자기 이야기를 들려준 시간이 좋았다.”(남·2004년) “드디어 안전하게 보호받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안온했다.”(여·2002년) “마음이 편했고, 현장학습을 나갈 때마다 너무 기뻤던 것이 기억난다.”(남·2016년) “지금 생각해 보면 한국 생활 중에서 하나원이 제일 좋았다. 의식주를 다 책임져 주고 골치 아픈 일도 없고, 쉬는 기분이었다. 다시 거기서 생활하다 오고 싶다.”(여·2008년) “시설이 깨끗했고, 무엇보다 체육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서 좋았다. 배고프지 않았던 것도 좋았다.”(남·2016년) ○ “나는 이래서 하나원이 싫었다” “배운 것이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특히 탈북민을 멀리하고 아무 사람이나 믿지 말라고 계속 교육받아서 한동안 주변을 불신하게 했다.”(여·2012년) “직업교육을 일률적으로 하지 말고 개인별 맞춤형 진로 지도 시스템이 있으면 좋겠다. 외부활동이 너무 적은데, 자주 한국 사회를 경험했으면 좋겠다.”(남·2006년) “특별히 지적할 점은 생각나지 않지만 교육이 약간 아쉬웠다.”(여·2002년) “교육 내용과 수준이 맞지 않아 지루했다. 전문성을 갖춘 직원들이 부족하다.”(남·2006년) “수업이 너무 많은데 무슨 소리인지 몰라 졸렸고 기억에 남는 것도 없다.”(여·2012년) “하나원 직원들이 너무 거들먹거려 기분이 나빴다.”(남·2004년) “가족 해체를 겪으며 한국에 온 탈북민 가족을 하나원에서도 몇 달 동안 갈라놓아 이산가족을 만든다. 탈북민 대다수가 도시에서 사는데 산골에 가둬놓고 비현실적 교육을 한다. 하나원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여·2002년) “절실히 필요하지 않은 교육을 정리하고 심리상담을 강화해야 한다.”(남·2016년) “나오니 좋은 것을 알겠지만, 안에 있을 때는 지루하고 하루라도 빨리 사회에 나가고 싶었다. 나와 보니 정착은 책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치며 배우는 과정이었다.”(여·2008년) “교육이 형식에 그치는 것 같다. 음식이 단조로워 질렸다. 교육생 중에 난폭한 사람이 석 달 내내 분위기를 망쳐도 감싸기만 하고 대책이 없다. 큰 사건 없이 달래서 졸업만 시키면 그 후엔 자기 일이 아니라서 그러는 것 같다.”(남·2016년)주성하 zsh75@donga.com·이지훈 기자}

6월 4일은 북한의 ‘보천보전투 승리기념일’이다. 북한은 보천보전투를 ‘김일성이 현장에서 진두지휘한 첫 조국진공작전이며, 조선의 정신을 깨운 사건’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김일성이 보천보전투 현장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자료가 잇따라 공개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일부는 70년 넘게 역사 속에 묻혀 있던 보천보전투 실제 지휘관의 이름까지 거론하고 있다. 특히 조선족 출신 유순호 작가가 최근 완성한 ‘김일성평전(상·중·하)’은 보천보전투와 관련해 그동안 중국이 북한을 의식해 공개하지 않았던 동북 항일 운동 관련 비밀 자료들을 담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평전에 실린 자료는 1958년경 중국이 당시 생존해 있던 동북 항일열사들의 증언 등을 모아 만든 것이다. 이때 중국은 김일성과 관련이 있는 내용은 모두 비공개로 숨겼다. 김일성 신격화에 공을 들이던 북한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질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조치였을 것이다. 유 작가는 이런 자료들을 30년 이상의 시간을 들여 수집했고, 책을 완성했다. 평전에는 북한의 주장과 상반된 얘기들이 적잖은데 보천보전투 관련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유 작가는 1937년 6월 4일 발생한 보천보전투의 실제 지휘관은 김일성이 아니라 왕작주(王作舟) 동북항일연군 2군 6사 참모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군 6사는 1930년대 후반 김일성이 지휘한 부대였다. 중국인인 왕작주는 김일성 부대 참모장으로서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 같은 존재였다. 길림군관학교 졸업생인 왕작주는 열정만 앞세울 뿐 병법은 전혀 몰랐던 김일성을 대신해 주요 전투 대부분을 지휘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동안 중국과 북한은 왕작주라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도록 적잖은 공을 들였다. 가장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가장 깊숙이 묻힌 셈이다. 북한이 기록한 항일투쟁사 어디에도 김일성 부대 참모장에 대한 기록은 없다. 유 작가에 따르면 1937년 5월 백두산 인근 베개봉 지역에 진출한 최현 부대가 일본군에 포위되자 왕작주는 베개봉과 적의 거점인 혜산의 중간 지점인 보천보를 공격해 포위망을 푼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자신이 지휘하고 있던 6사 소속 7퇀(연대) 4중대(중대장 오중흡) 70여 명, 8퇀 1중대(중대장 무량본·武良本) 30여 명, 기관총소대(소대장 이동학) 10여 명, 여성중대(중대장 박녹금) 10여 명 등 총 130여 명을 거느리고 보천보를 공격했다. 당시 항일연군은 지휘관과 참모장이 각각의 친솔부대를 거느리고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들도 있다. 보천보전투 때 경찰서 습격을 맡았던 중국인 항일열사 무량본과 6사 9퇀장 마덕전의 회고담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에 따르면 보천보전투의 현장 지휘는 왕작주가 했고, 김일성은 다른 곳에서 작전을 벌이다가 보천보전투 발생 다음 날인 1937년 6월 5일 압록강 건너편 23도구에서 왕작주 부대와 합세했다. 김일성이 소련에 들어가 1942년에 직접 쓴 ‘항련 제1로군 약사’에는 보천보전투가 언급돼 있지 않다. 자신이 한 일도 아닌 데다 별로 대단한 전투라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이 보천보전투에 의미를 두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다. 왕작주는 1940년 전사했다. 유 작가와 면담한 왕작주의 외손녀는 “생전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인 이가 김일성이었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전투 중 중상을 입은 왕작주가 의식을 잃고 체포돼 이송될 때 김일성이 나타나 그가 변절한 것으로 오해하고 총을 쐈다고 한다. 보천보전투는 1937년 6월 5일 동아일보의 특종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일제의 정보 통제가 엄혹했던 시기였지만 습격 상황과 피해 대상 등을 매우 자세하고 정확하게 소개했다. 다만 보천보전투가 김일성 부대의 작전이었다는 점만 밝히고, 누가 전투를 현장 지휘했는지는 다루지 않았다. 당시로선 그런 내용까지 파악하기란 쉽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북한은 보천보전투를 김일성의 최대 업적 가운데 하나로 내세우며 북한 주민들에게 김일성 신격화를 세뇌시켜 왔다. 유 작가의 저서가 공개되고, 보천보전투가 김일성 부대의 참모장 왕작주가 지휘한 작전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북한 사람들에겐 적잖은 충격이 될 것 같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최근 만난 대북지원단체 관계자는 “상당액의 물자가 북으로 가는 중인데 연락이 안 돼 답답하다”고 말했다. 물자가 가면 누가 받으러 나간다는 정도는 알려줘야 하는데 대답이 없다는 것이다. 북한이 남측 민간단체들을 만나자고 중국에 불러놓고는 23일 당일에 “상황이 생겨 실무협의를 취소한다”고 팩스를 보낸 일도 있다. 원인은 하나다. 북한의 대남창구인 통일전선부가 하노이 회담 결렬에 화가 난 김정은의 지시로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숙청된 인사 중에는 남쪽에도 잘 알려진 김성혜 통전부 통일전선책략실장(54)이 포함돼 있다. 김 실장은 베트남 하노이 북-미 회담에 참가했다가 귀국한 직후 억류돼 취조를 받았고, 얼마 전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것으로 전해졌다. 하노이 회담 실무자들이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예측이 나올 때 “설마 미국과 마주 앉았던 사람들을 숙청하겠느냐”는 반론이 있었지만 예측은 현실이 됐다. 김성혜는 지난해에 부각된 인물이다. 평창 겨울올림픽에 참가하러 내려온 김여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존재감을 드러냈고, 북-미 협상에 깊숙이 개입했다. 김영철 통전부장과 함께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만났고 1, 2차 북-미 회담 준비 작업도 주도했다. 김성혜는 북한의 유일한 여성 대남협상가로 과거 남북회담 수석대표도 지냈고,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해 9월 방북 때는 김정숙 여사를 수행하기도 했다. 올해 통일부가 발행하는 ‘북한 주요 인물정보 2019’에 처음 이름을 올렸는데 그게 마지막이 됐다. 반면 함께 북-미 협상에 참가했던 한 살 위의 여성 실세 최선희 외무성 북미국장은 하노이 회담 이후 승승장구하고 있어 비교가 된다. 최선희는 부상(차관급)으로 승진했고 장관들도 하기 어려운 국무위원회 위원에 올랐다. 후보위원을 거치지 않고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위원도 됐다. 하노이 회담 전날 김정은이 멜리아 호텔에서 가진 실무회의의 원탁에는 김성혜와 최선희를 포함해 단 4명만 앉았다. 결과를 보면 최선희의 분석은 높은 평가를 받았고, 김성혜의 분석은 격노를 산 셈이 됐다. 김성혜와 함께 트럼프 대통령을 만났던 박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은 최근 가족과 함께 지방으로 추방된 것으로 전해진다.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냐” 발언으로 화제가 됐던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과 김혁철 국무위원회 대미특별대표도 공식 석상에서 사라졌는데, 지금 취조를 받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대미·대남 외교를 총괄해온 김영철도 통전부장에서 해임돼 허울뿐인 노동당 부위원장으로 밀려나 미래를 알 수 없게 됐다. 북-미 협상에 뛰어든 통전부 라인의 ‘김영철 사단’이 모두 전멸한 셈이다. “대남 업무를 맡은 통전부가 분수에 맞지 않게 외무성의 일인 북-미 회담은 왜 가로챘을까”라는 의문이 있었는데 결국 그 업보를 받았다. 숙청 바람은 통전부에만 불지 않았다. 1993년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공사로 시작해 유엔 차석대사를 두 번씩이나 지낸 20여 년 경력의 최고 미국 전문가 한성렬 외무성 부상(65)은 총살됐다고 한다. 그를 포함해 소문이 무성했던 외무성 간부 4명의 처형설은 사실인 듯하다. 다만 4명 모두 해외에서 활동한 인물들이지만 외무성 소속이 아닌 사람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 부상은 북핵 문제의 주요 고비마다 미국에서 북한의 입으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한창 나이에 미국에 매수된 간첩으로 낙인찍혀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됐다. 북한 내 유일한 미국 아이비리그 졸업생일지 모를 그의 딸도 수용소에 끌려갔을 가능성이 크다. 한 부상은 유엔에 근무하던 1990년대 말 한국 교민들의 후원을 받아 딸을 컬럼비아대에서 공부시켰다. 최근의 숙청 상황을 전해준 북한 내부 소식통은 과거에도 고위층의 숙청 소식들을 정부 발표보다 훨씬 이전에 정확히 알려주었다. 감옥 간 사람도 하루 만에 꺼내놓을 수 있는 북한인지라 숙청 보도는 부담스럽지만 이 소식통은 신뢰할 만하다. 통전부에 몰아친 피바람은 북한과의 접촉을 학수고대하는 한국 민간단체들에는 악재다. 에이스들이 숙청된 통전부는 최대한 몸을 사릴 것이다. 수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대남협상의 전면에 나섰던 통전부 고위급 중 무사히 은퇴한 사람은 거의 없다. 거긴 죽음의 자리다. 이 칼럼을 북에서 읽게 될 통전부 간부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 “나는 아닐 것이라고 제발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연일 연예인들의 마약 투약 사건으로 시끄럽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연예인 마약 사범 뉴스로 언론이 도배되고 있다. 그럴 때마다 커지는 궁금증은 ‘도대체 저 마약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이다. 전문가들은 국내 유통 마약 중 적잖은 물량이 북한산일 것으로 추정한다. 일반적으로 삼엄한 감시와 폐쇄성으로 인해 북한은 ‘마약 청정 국가’일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북한은 급속히 마약에 빠져들고 있다. 게다가 갈수록 북한산 마약이 한국에 더 많이 유입됨으로써 한반도 전체가 ‘마약 지대’가 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자유한국당 소속 윤상현 외교통일위원장은 2012년에 “2010년 국내에서 적발된 외국산 필로폰 8200g 중 57.3%가 중국에서 반입됐고 그중 상당량이 북한산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외 여러 마약 전문가들의 말을 종합하면 국내에서 유통되는 필로폰의 최소 30∼40%는 북한산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때문에 마약 전문가들은 정부가 나서서 북한의 마약 실태를 파악해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탈북자와 북한 소식에 정통한 전문가들이 털어놓은 북한의 마약 제조와 유통, 중독 현황 등을 정리해 본다.○ 북한은 마약 중독 사회 2013년 북한 당국은 형법을 개정해 ‘비법아편재배·마약제조죄’에 대해 사형할 수 있도록 했다. 그만큼 마약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다는 뜻이다. 실제로 마약 사법은 급증하고 있다. 단속해야 할 보위성 요원들부터 마약에 빠져 있거나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평양 출신의 한 탈북민은 “2010년에 검사로 일하는 친구가 술을 마시며 ‘전당 전군 전민이 약을 한다’며 개탄하더니 몇 달 후에는 그 친구가 마약을 하더라”라고 말했다. 마약이 얼마나 북한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가에 대한 증언은 넘쳐난다. 최근 입국한 탈북민들은 “어느 마을에 가나 얼음(마약의 은어)을 파는 집은 꼭 있으며 이런 집을 ‘소분집’이라 한다”고 말했다. 북한 내에서 현재 10회 정도 사용할 수 있는 얼음 1g의 가격은 15달러(약 1만8000원) 이하로 거래된다. 한국에서 밀거래되는 가격의 수십분의 1에 불과하다. 가격이 싼 만큼 찾는 사람들도 많을 수밖에 없다. 북한인권정보센터는 2016년 탈북민 1467명을 대상으로 북한 마약 실태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였다. 조사 결과 2010∼2012년 탈북한 사람들의 13.6%가 마약을 접촉했다. 마약 접촉 비율은 2013년 26.8%, 2014년 25.0%, 2015년 36.7%로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실제로 얼마 정도의 북한 사람이 마약을 사용할까. 이 질문에 2010년 이전 탈북자의 35.7%가 “10%가 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하지만 2014년 탈북자의 경우 ‘10% 이하’라고 응답한 비율은 16.2%에 그쳤다. 이들의 27.8%가 “10∼30%가 마약을 사용한다”고 대답했고, 나머지 56%는 “30% 이상의 북한 주민이 마약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똑같은 질문에 2016년 탈북한 2명의 대답은 충격적이다. 이들은 “북한 주민의 90% 이상이 마약을 사용한다”고 답했다. 이 대답이 과장됐을 가능성도 있지만, 북한의 조사 결과는 마약 사용이 해마다 빠르게 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쩌다 북한이 이렇게 된 것일까.○ 국가 차원에서 마약을 양성하다 사실 북한은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마약 청정 지대였다. 그러다 1980년대 중반 북한 중앙당 간부들에게 건강 치료용으로 필로폰이 공급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평양 출신의 고위 소식통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의 경우 매달 1, 2알의 필로폰이 든 알약이 ‘뇌출혈, 뇌혈전 예방약’ ‘피로 회복제’ ‘건강치료제’ 등의 이름으로 지급됐다”며 “간부들도 이 약이 마약이란 걸 알았다”고 증언했다. 당시 70, 80대 고령의 간부들이 증가하며 건강 문제가 자주 발생하자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이런 조치가 내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1990년대 초반부터는 국가 차원에서 양귀비를 대대적으로 재배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1980년대부터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도별로 경작지를 10ha 혹은 20ha 규모로 할당하여 재배했다”고 말했다. 구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한 후로는 외화를 벌어들일 목적으로 마약 밀매를 시작했다. 김일성의 건강을 책임졌던 만청산연구원 출신의 한 탈북자는 “1990년 금수산의사당 경리부 당위원회가 ‘백도라지’(양귀비의 북한식 표현) 농장을 맡는 것에 대한 교시를 전달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김일성은 마약 생산을 “미 제국주의와 싸우는 새로운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등 적국을 마약에 중독시켜 자본주의 사회를 마비시키고, 북한은 돈도 벌어 사회주의를 지킬 수 있는 일석이조의 사업이란 논리였다. 이후 북한의 북부 지역 농장들마다 일정 규모로 양귀비를 재배했다. 양귀비 진액(아편)을 채취할 때엔 학생들까지 동원했다. 이렇게 전국에서 만든 아편은 평양에 집결돼 아편으로 제작됐다. 당시 상황에 정통한 한 탈북민은 “평양 외곽의 상원군에 생산기지가 있었는데, 국가과학원 상원분원이란 외피를 쓰고 있었다”며 “이곳에서 생산된 헤로인은 항불안제인 ‘디아제팜’과 외형이 똑같아 구별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는 “보위사령부 등 최정예 공작원들이 홍콩과 마카오 등의 동남아 마약조직과 접촉해 판로를 개척했는데 신분이 드러날 경우를 대비해 철저히 개인별로 움직였다”고 증언했다.○ 평양 고위층에 퍼진 헤로인 ‘덴다’ 이후 북한산 헤로인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미국은 본격적인 제재 움직임을 보였다. 북한 당국은 1990년대 중반 상원분원을 폭파시켜 흔적을 없앴다. 하지만 이곳에서 이미 만들어 놓은 대량의 헤로인이 있었다. 바로 이 헤로인이 1990년대 중후반부터 북한 내부 부유층에 퍼지기 시작했다. 헤로인을 북한에선 ‘덴다’ ‘총탄’ 등으로 불렀다. 디아제팜과 똑같은 흰색의 알약 외에 특이하게 빨간색으로 된 덴다도 있었다. 상원분원에서 만든 덴다는 3, 4개 루트를 통해 평양에 흘러나왔다. 이 마약은 주로 젊은 아가씨들이 부유한 청년들을 상대로 팔았다. 덴다 구입자들은 이것을 부숴 가루로 만든 뒤 코로 흡입했다. 함유량에 따라 80캄마, 120캄마, 240캄마로 구분됐는데, 2000년 평양에서 거래된 덴다 120캄마 한 알의 가격은 2달러로, 부유층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이 때문에 평양의 극소수 부유층과 원산 신의주의 무역회사 사장 정도만 헤로인을 경험했다. 탈북자 중에 덴다를 경험한 사람이 거의 없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헤로인에 이어 필로폰 ‘얼음’ 퍼져 2003년경 상원분원이 만든 덴다의 재고가 바닥이 났다. 이때 새로 등장한 것이 ‘아이스’ ‘얼음’으로 불린 필로폰이었다. 헤로인과 필로폰은 완전히 상반되는 마약이다. 헤로인은 중추신경을 억제해 그 자체로만 쾌락을 느끼게 하는 반면 필로폰은 강력한 중추신경 흥분제다. 상반된 마약이 시점을 두고 북한에 등장한 이유는 식량난 악화와 연관된다. 상원분원이 폐쇄된 후 소속 과학자들은 국가과학원 함흥분원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둘 다 화학 계열의 연구소라는 게 이유였다. 실제로 애초에 상원분원에서 마약을 만들던 기술자들은 화학 공업의 중심지인 함흥의 화학공대 출신이 많았다. 바로 이들이 고향인 함흥으로 내려갔을 무렵 북한엔 일명 ‘고난의 행군’이라 부르는 대기근이 닥쳤다. 그러니 배급만으로는 먹고살기 어려워졌고, 마약 제조 전문가들인 이들은 헤로인보다 싸고 쉽게 원료를 구할 수 있는 필로폰을 제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필로폰 원료는 중국에서 의료용으로 수입하는 염산에페드린이었다. 이들이 개발한 필로폰은 2003년경부터 헤로인 판매망을 타고 평양에 공급되기 시작했다. g당 5∼10달러 정도에 공급되는 필로폰은 순식간에 평양의 중산층까지 확산됐다. 2006년경부터는 지방에까지 필로폰 밀매가 본격화됐고, 2010년경에는 지방의 중산층들도 필로폰에 손을 댔다. 여전히 북한 내부의 마약 제조는 개인이 아닌 국가 차원에서 진행된다. 정찰총국, 보위성, 보위사령부 등 군부 조직도 마약 생산과 해외 밀매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소식통은 “김정은 집권 이후에도 북한군 총정치국 산하 53부에서 평양과 평성 사이 배산점이란 지역에 필로폰 생산 공장을 만들어 운영했다”며 “해마다 국가 차원에서 20t 이상의 필로폰이 생산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한국의 ‘기술자’까지 북한 진출 북한산 ‘얼음’은 96∼99% 정도의 순도를 보장하기 때문에 해외 밀매 조직엔 인기가 높다. 북한산 필로폰의 순도가 높아진 데엔 한국 ‘기술자’들의 공이 크다는 것이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한 탈북 소식통은 “필로폰 생산 초기에 한국인 기술자 3명이 국내 단속을 피해 동남아시아, 중국에 갔다가 북한까지 넘어왔다”며 “이들의 경험과 지식이 북한에 전수됐다”고 말했다. 한국인 기술자들도 99% 순도의 필로폰을 만들지는 못했다. 북한 당국이 정예 연구진을 투입하고 전문 생산기지를 제공하는 ‘투자’를 한 결과 순도가 크게 높아졌다는 것. 기술을 모두 넘겨받은 북한은 이후 한국 기술자 2명을 총살했으며 1명은 간신히 탈북해 숨어 사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기술자가 해외로 진출한 사례도 있다고 한다. 중국의 소식통은 “중국 단둥에서 북한과 큰 규모로 거래하는 사업가 송모 씨가 2004년 북한 기술자를 10만 달러에 계약해 데려온 뒤 기술을 전수받고 살해한 사건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 북한의 필로폰 기술이 다시 진화했다. 과거엔 중국의 염산에페드린이 원재료였는데 이를 수입하기 어려워지자 원재료를 바꾸면서 이른바 ‘기술혁신’을 이뤘다는 것. 탈북 소식통은 “새로운 방식의 필로폰 제조를 두고 내부에선 ‘마약 제조의 기본을 바꾼 혁명이 일어났다’고 비유한다”며 “새 재료를 쓴 필로폰의 질이 훨씬 더 좋다”고 말했다.○ 해외 북한 식당이 마약 유통망 북한의 마약 해외 밀매는 점점 거침없어지고 있다. 대북 소식통은 “신의주와 마주한 중국 둥강(東港)시 공안국 부국장과 변방정찰 대대장이 2015년경 북한과 필로폰 밀거래를 하다 체포됐는데, 압수수색에서 50kg 이상의 필로폰이 나왔다”고 말했다. 또 다른 소식통도 “동남아시아는 북한 얼음이 이미 점령했다. 심지어 필리핀에는 유통 거점이 없는데도 팔려 나간다”고 증언했다. 동남아시아의 북한 필로폰은 현지 밀매조직을 통해 다시 미국과 유럽 등으로 넘어간다. 실제로 2015년 8월 미국 뉴욕 맨해튼연방지법에서는 북한산 마약을 미국에 밀반입하려던 홍콩 범죄조직 소속의 영국, 체코, 필리핀, 대만 등 다국적 조직원 5명이 검거돼 재판을 받기도 했다. 이들은 북한산 마약을 필리핀에 들여와 숨겨 놓은 뒤 100kg을 태국을 경유해 반입하려다 미 마약단속국(DEA)에 적발됐다. 이 중 한 명은 자기 조직이 필리핀에 북한산 필로폰 1t을 숨겨놓고 있다고 고백했다. 2017년 말 중국 동북 3성 지역에서 밀거래되던 고순도 북한산 필로폰 가격이 갑자기 하락했다. ‘한 작대기’에 60만 원 정도에 밀거래되던 필로폰은 25만 원 선까지 하락했다. 작대기는 1회용 주사기 한 대 분량을 의미하는데, 4g 정도다. 북한산 마약 거래에 정통한 소식통은 “대북 제재로 중국 내 북한 식당이 한꺼번에 철수하면서 이들이 가지고 있던 마약을 일시에 방출했기 때문에 가격이 크게 하락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중국 내 북한 식당들이 북한산 마약의 유통거점 역할을 한다는 간접 증거인 셈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