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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복을 하루 앞둔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의 한 삼계탕 전문점 앞에 시민들과 외국 관광객들이 길게 줄 서 있다. 기상청에 따르면 15일 중부지방은 체감온도가 최고 33도를 넘어서는 등 찜통 더위가 예상된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올해 11월 치러지는 미국 대선을 4개월 앞둔 14일 일요일 오전(현지 시간 13일 오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겨냥한 총격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펜실베니아주 버틀러에서 유세를 위해 무대에 오른 지 10분도 안 돼 발생한 사건입니다. 다행히 트럼프는 SNS에 올린 영상을 통해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며 안전한 곳으로 복귀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세 현장 주변 건물 위에서 총을 쏜 범인은 현장에서 경찰과 특수기동대에 의해 사살되었습니다. 놀라운 점은 미국의 사진기자들이 총격 순간을 거의 완벽하게 포착했다는 점입니다. 현직 사진기자로 국내 정치 현장을 취재해 본 경험에 비춰볼 때 이런 상황은 아주 돌발적이라 동영상이 아닌 사진으로 포착하는 것이 아주 어렵습니다. 피격 직후 성조기를 배경으로 주먹을 불끈 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사진은 이번 대통령 선거 운동의 가장 핵심적인 장면으로 기록될 거라는 분석이 벌써부터 나옵니다. 공화당 지지자인 테슬라의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가 이미 자신의 엑스(X·트위터)에 이 사진을 공유했고, 지지자들도 퍼 나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국내로 들어온 사진의 촬영 정보 메타데이터와 현장에 있던 사진기자들의 바이라인을 유심히 살펴보니 이 상황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우선 사진을 찍는 사진기자들과 연단 사이에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사진기자들은 망원렌즈를 끼고 트럼프의 얼굴을 클로즈업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평소 험한 말을 하는 트럼프의 얼굴을 촬영하기에는 적당한 렌즈인거죠. 주먹을 불끈 쥔 트럼프 사진은 AP통신 Evan Vucci 기자가 촬영한 사진인데 1977년생인 그는 2003년부터 AP통신에서 일하고 있는 베테랑 사진기자입니다. AP통신 Evan Vucci 기자는 소니에서 나온 알파 1 미러리스 카메라에 400미리 망원렌즈를 장착했습니다. 거기에 렌즈를 1.4배 좀 더 길게 기능할 수 있게 하는 텔레컨버터를 장착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사진기자들이 프로야구를 찍을 때 사용하는 600미리 렌즈 정도의 효과를 주는 세팅입니다. 오른쪽 어깨에 망원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를 메었다면 반대편 왼쪽 어깨에는 소니 알파9 카메라에 24-70렌즈를 끼고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가까운 곳도 찍을 수 있는 세팅이라 연단에 쓰러진 트럼프 후보를 경호원들이 몸으로 감싸는 모습을 촬영할 수 있었고 곧바로 주먹을 쥔 채 연단을 내려오는 트럼프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AP통신은 Evan Vucci 기자 이외에 한 명의 기자를 더 현장에 배치했습니다. Gene J. Puskar 기자 역시 소니 알파 1 미러리스 카메라에 400미리 망원렌즈, 그리고 1.4배 텔레컨버터를 장착했습니다. Vucci 기자가 연단 가까이서 촬영하고 Puskar 기자는 떨어져서 촬영했습니다.현장의 사진기자는 또 AFP 통신의 Rebecca DROKE, 로이터통신의 Bredan McDemid, 게티이미지의 Anna Moneymaker가 있었습니다. 게티이미지의 Anna Moneymaker 기자는 총성 직후 연단으로 접근해 고개 숙인 채 피를 흘리는 트럼프의 얼굴을 경호원들 발 사이로 찍었습니다. 빅클로즈업이었습니다. 이밖에 통신사 기자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대체로 이들이 전 세계 주요 통신사 소속들입니다. 생각보다 많지 않은 인원이 현장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신문사 기자로는 뉴욕타임스의 더그 밀(Doug Mills) 기자가 현장에 있었습니다. 더그 밀 기자는 트럼프의 연단 바로 밑에서 촬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찍은 사진은 트럼프의 오른쪽 귀를 스친 탄환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망원렌즈로 찍은 사진의 배경으로는 트럼프 뒤의 임시 계단에 앉은 청중들의 모습입니다만 더그 밀 기자가 찍은 사진의 배경에는 파란 하늘이 보입니다. 연단 아래에서 트럼프를 밑에서 위로 찍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60년생인 더그 밀 기자는 미국 백악관을 1983년 로널드 레이건 시절부터 출입한데다 한미 정상회담 등도 커버했기 때문에 백악관 스탭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 사진기자들 사이에서도 꽤 유명합니다. 그의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에는 최근에도 바이든 대통령 국정 운영 모습과 트럼프 후보의 유세 모습 사진이 올라왔었습니다. 사전에 사진기자들이 현장을 잘 촬영할 수 있도록 연단과 동선을 계획해서 행사를 준비하는 미국 정치 현장의 관행과 현장을 오랫동안 지켜온 기자들이 찰나를 기록할 수 있게 만든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해서 테러가 유도되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해는 없으시겠지만요. . 지지자들의 감정을 흔들어버린 이 사진들이 올해 미국 선거에서 어떤 영향을 끼칠지 사진기자로서 무척 궁금해집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안녕하세요. 여러분 줄행랑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도망간다는 말을 할 때 ‘줄행랑을 치다’라고 하잖아요. 행랑은 옛날 양반집의 하인들이 먹고 자던 조그만 방을 말하는데요 여기에 ‘줄’을 붙여 길게 이어진 행랑, 그러니까 하인이 아주 많은 부잣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은 1924년 7월 9일자 동아일보 3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양반이 출타할 때 하인들이 끌었을 인력거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뒤로 커다란 한옥집이 보입니다. 익선동 줄행랑 사진입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 지난 주 백년사진에 실렸던 “청군 백군 머리띠는 언제 사라졌을까” 에 대해 독자분이 보내 주신 메일이 있어 공유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과거 청백전이고, 일본은 홍백전입니다. 일본은 지금도 모든 게 홍백전입니다. 기원은 아시다시피 건페이 전쟁에서 왔습니다. 그럼 우리 청백전이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일제 강점기부터 있었을텐데, 언제부터, 왜 바뀌었는지 제가 알아봤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학교를 다닌 노인분들에게 물었더니 분명한 기억으로 그때는 홍백전이었다고 합니다.그런데 언제인지는 모르는데 해방되고 청백전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럼 유추할 수 있는 것이 왜색 문화 척결이란 의미에서 바뀌었거나, 반공(反共) 차원에서 적색을 사용 못하게 하려고 흰색으로 바뀌었을 겁니다.“라는 내용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이 독자분의 메일로 인해 새로운 맥락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번 주 ‘익선동 줄행랑’ 사진에 대한 기사를 소개하겠습니다. 1924년 6월 25일자부터 1924년 8월 15일자까지 50일간 동아일보에서 연재되었던 “사진기사 – 일백동정(一百洞町) 일백명물(一百名物)” 기사 중 하나입니다. 우리 동네 명물 소개라는 코너입니다. ◇익선동에는 별로 명물이랄 것이 없습니다. 내외주점이 많고 밀매 음녀가 어지간하니 이것으로나 명물을 삼을런지? 그러나 내외주점으로는 청진동만 못하고 매음녀로는 내놓코라도 병목정 갈보에야 머리도 못들터이니 이것도 저것도 다 명물감이 못됩니다. 그러니 할 수 없이 행랑 많은 루동궁(樓洞宮)이나 들추어 보려합니다.“익선동 줄행랑”이라하면 그 동리 사람은 어느 집 행랑인줄 다 안다고 합니다. 이 집은 지금부터 7,80년 전에 철종대왕의 백씨되는 곰배대군의 별명을 듣는 영평군(永平君이 홍판서의 집을 사고 든 때부터 루동궁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는데 지금 주인 조선귀족 후작 리해승 각하는 곰배대왕의 오대손이라고 합니다.곰배대군의 후손으로 리해승 양반도 한때는 세력이 빨래줄 같았겠지요. 그러나 요새는 조선총독이라는 대감에게 세력을 빼앗기고는 영락하기가 가이 없답니다. 닥쳐오는 운명에야 임금의 형님이든 곰배대군의 후손인들 어찌하겠습니까. 남종 여종이 드나들던 행랑방에는 인연도 없는 뭇사람의 차지한 바가 되었고 오직 빗물이 고여 있는 앞마당에 놓인 인력거 한 채가 그래도 후작댁의 체면을 보존하는 듯합니다. 정해자(正解者)라는 원래 문제나 퀴즈 따위를 제대로 푼 사람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기사를 쓴 시민이라는 의미입니다. 방관생 선생님이라는 분이 이날 신문에서 익선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근대뉴스()를 운영하는 송종훈 선생님의 해석으로는 방관생이라는 이름은 실제 이름이 아니고 익명일 수 있습니다. 세상 일에 관여하지 않고 방관(傍觀)하는 서생(書生)이라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익선동에는 술집과 사창가가 있었는데 청진동이나 병목정(지금의 쌍림동 부근이라고 합니다)에 비해 규모가 작아 내세울게 아니라 그나마 스토리를 갖고 있는 ‘익선동 줄행랑’을 소개한다고 운을 떼고 있습니다. 익선동에는 루동궁(樓洞宮)이라고 하는 큰 한옥이 있었는데 이 집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철종의 큰형인 영평군이 살던 집인데 지금은 영평군의 5대 손인 조선귀족 후작 ‘이해승’의 집입니다. 한때 권력을 누렸는데 일본의 조선총독에게 세력을 빼앗기고 보잘 것 없어졌다고 합니다. 행랑채에 있던 하인들도 이제는 다 떠나고 다른 사람들이 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빗물이 고여도 닦을 사람이 없는 인력거 한 대만이 이 한옥집이 옛날 권력자의 집이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라는 내용입니다. 전체적인 글의 분위기가 이해승이라고 하는 양반의 쇠락을 비꼬는 듯 합니다. 이해승과 그가 살던 루동궁이란 장소가 어떤 곳인지 좀 더 알아보기 위해 데이터베이스를 찾아보았습니다. 1974년 9월 20일자 동아일보에 “한양도읍 이후 살펴본 동네 명칭의 변화”라는 시리즈에 익선동에 대한 소개가 있습니다.사실(史実)속의 우리동네- 한양도읍(漢陽都邑)이후 살펴본 동명연혁(洞名沿革)] 익선洞 - 강화도령(江華道令) 철종(哲宗)때의 ‘익랑골’을 개명(改名)익선동(益善洞)은 현재 행정동인 종로구 권농동(勸農洞)관할에 속해있는 법정동 이름이다. 익선동은 1914년 일제총독부가 이른바 경성부제(京城府制)를 실시할 때 궁동(宮洞) 익동(益洞)돈 녕동(敦寧洞)의 일원과 니동(泥洞) 한동(漢洞)등의 일부를 합하여 만든 새 동네다.옛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동네이름은 대부분 그렇게 이름을 붙였을만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일부 동네이름은 후세에 와서 지나치게 미화(美化)가 된 나머지당초의 동명(洞名)의미를 상실해버린 경우도 있다. 익선洞이 바로 그와 같은 예다.익선(益善)이란 글자그대로「더욱 착하다」또는「더욱 잘한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또 옛날 중국의「楚」「漢」시대의 명장 韓信은 漢高祖가『그대는 군사를 얼마나 거느리면 잘싸울수 있겠는가』고 물었을때 자신있게「다다익선(多多益善)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즉『군사가 많을수록 좋다』는 뜻으로 한 명언으로 전해지고 있다.그러나 익선(益善)洞은 그러한 군사를 잘 쓴다든지 또한 모든 일을 더욱 잘하고 더욱 착하게한다는 등의 의미와는 전혀 관계없이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益善」이란 이름은 이 지역에「익랑골」이라는 동네가있었던데서 비롯됐다고한다.「익랑골」의 유래는 바로 이곳에 李씨조선의 제25대 哲宗의 장형(長兄)인 永平君이 거처하던 누동궁(樓洞宮)이란 궁궐이있어 그 궁궐주위에 익랑(翼廊)、즉 대문 좌우쪽으로 줄행랑이 늘어서 있었던 곳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려왔다 한다.李씨 조선 제24대 헌종(憲宗)이 승하(昇遐·임금이 세상을 떠남)한 다음 대를 이을 사자(嗣子)가 없어 全溪君(璜)의 제3대인 속칭「江華道令」으로 왕통을 계승케한 것이 철종왕(哲宗王)인데 그는 친아버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묘(廟)도 이「누동궁」안에 모시고 장형인 영평균(永平君)을 살게 해 그후 永平君의 5대손인 이해승(李海昇)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이 궁에 거주하였다고 한다。哲宗은 즉위와 함께 이곳에「누동궁」을 지었는데 그는「江華道令」으로 통칭될만큼 왕실의 분쟁이 심한중에 서울에도 있지 못하고 멀리 강화島로 들어가 농부생활을 하는등 고생을 했던터라 같이 고생하던 실형(實兄)을 위하고 또 친부모의 신위(神位)를 모셔 제사도 올릴수있게하기위해「누동궁」을 지었던 것으로 전해온다。哲宗은 그건문양식도 특별히 공을들여 궁궐대문앞에 동서로 익랑(翼廊)을 광대하게 짓게하고 시종들이 살도록 했는데 그후부터 이지역은「익랑골」이라는 동네이름을 얻게 됐다。그런데 이러한 연유에서 생긴「익랑골」이라는 동네이름은 어느사이엔가 익랑동(翼廊洞)에서 익동(益洞)으로까지 변천을 했으며 또 부근의 일부 지역은 역시「누동궁」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궁동(宮洞)으로 불려졌다。그후 일제 총독부가 동네를 폐합、새로운 행정구역을 정할 때 예전보다 더 좋은 이름을 붙인다는 뜻에서 익동(益洞)에 선(善)자 하나를 더 추가해 익선동(益善洞)이라는 새 동명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렇듯 역사적 배경을 지닌 동네이름이 후에 와서 전혀 의미가 다른 이름으로 바뀜에 따라 본래의 역사적 사실은 아득히 망각돼가고 있다는 것이 서운한 점이다。두 기사를 종합해 보면, 서울 종로구에 있는 익선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행랑이 많아 마치 새의 날개를 펼친 것처럼 보이는 대궐같은 집(누동궁)에서 유래한 익랑이라는 동네 이름에서 ‘랑’이 빠지고 좀 더 좋다는 의미의 선(善)을 넣으면서 익선동으로 변했다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행랑이 많다는 것은 권력과 돈이 많은 누군가의 집이라는 의미인데 100년 전 익선동에 살던 주민의 이야기로는 동네 사람들은 그 집의 주인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 다 알았다는 설명입니다. 홍판서 →영평군 →리해승(영평군의 5대 손)으로 변했는데 리해승과 관련한 검색을 해보니 “1910년 10월 16일 21세의 나이에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侯爵)작위를 받았고 일본의 통치에 적극 협력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일본 정부에 협조했던 왕족의 추락을 에둘러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줄행랑을 치다’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습니다. “원래 하인들이 묵는 행랑이 길게 이어진 모습을 표현하는 말로, 도망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이는 행랑이 길게 이어진 모습이 마치 꽁무니를 빼며 도망가는 모양과 비슷해서 생겨난 관용적 표현으로 해석됩니다. 또한, 권세가 있던 양반가가 몰락하면서 줄행랑을 버리고 도망가는 모습에서 유래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라는 설명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줄행랑이라는 표현이 100년 전 시작되었다는 것은 알 수 없지만 이해승의 집과 하인들의 도망과도 관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검색을 통해 줄행랑을 치다에 대한 다른 해석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조항범 교수(충북대 국문과) 교수는 줄행랑이 갖는 의미를 행랑을 죽 이어서 쌓는 것을 보통 줄행랑을 치다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치다는 벽 따위를 둘러서 세우거나 쌓는다는 의미로 담을 치다와 같은 표현입니다. 텐트를 치다는 표현도 같은 어원일 것 같습니다. 행랑을 길게 치는 것이 줄행랑을 친다는 건데 마치 꽁무니를 뺀 채 줄달음을 치는 것과 비슷한 모양이이서 도망치다 = 줄행랑을 치다 로 관용적 의미가 생겨났다고 추정합니다.” 오늘은 100년 전 서울 익선동에 있던 행랑 사진으로 ‘줄행랑’의 의미를 유추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셨나요? 주말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흔해진 시대에, 우리 사진의 원형을 찾아가 봅니다. 사진기자가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매주 한 장씩 골라 소개하는데 여기에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이 더해지면 사진의 맥락이 더 분명해질 거 같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정면 사진을 찍고 싶은데 모델이 영 비협조적이네요. 아이의 간절한 마음이 고양이에게 닿기를. ―서울 강북구 북서울꿈의숲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강성현 롯데마트·슈퍼 대표이사와 필립 베르투 주한 프랑스 대사가 11일 롯데마트 제타플렉스 서울역점에서 열린 ‘프랑스를 맛보다’ 사전 행사에 참석했다. 이번 행사는 26일 개막하는 파리 올림픽을 기념해 25일부터 다음 달 7일까지 열리며 치즈, 와인 등 프랑스 대표 먹거리를 판매한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운전 중 직진 신호를 기다리는데 앞에 서 있는 버스의 손잡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손잡이의 색깔이 초록 파랑 빨강 노랑이 섞여 있습니다. 초록색 일색이었던 옛날 버스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바뀌었지 하고 생각해봅니다. 하기야 화려한 칼라 시대에 승객의 감수성이 달라지면 버스 내부의 인테리어와 서비스가 달라지는 게 당연한 일이겠죠? 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1924년 6월 30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따로 경기에 대해 설명하는 기사는 보이지 않고 사진과 간단한 설명만 인쇄되어 있습니다. ●치마를 입고 배구 경기에 열중하는 여학생들 네트를 사이에 두고 여학생들이 배구 경기를 펼치고 있습니다. 예닐곱 명의 심판이 양복을 입은 채 높은 곳과 지표면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운동장 가장자리에는 커다란 텐트가 여러 동 설치되어 있습니다. 치러지는 경기의 숫자도 많고 참가자와 응원단도 많은 대회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진 속 배구에 출전한 선수들의 숫자가 좀 많아 보이시죠? 지금의 6인제 배구와 달리 양측 선수가 각각 10명이 넘어 보입니다. 원래 9인제 배구도 있었다곤 하는데 이 사진을 보면 9인제보다도 더 많은 선수들이 보입니다. 운동복이 아닌 치마를 입고 경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습니다. 치마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허리띠로 단단히 고정시킨 모습에서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의 긴장감이 느껴지지도 합니다. 양팀 뒤로 응원단인지 후보 선수인지 알 수 없는 여학생들이 머리띠를 두른 채 경기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청군 백군 머리띠는 언제 사라졌을까사진에서 가장 눈에 띈 건 머리띠였습니다. 흑백사진이라 색깔은 보이지 않지만 아마 청색과 백색으로 나누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에도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청백색 머리띠를 하고 팀을 구별하는지 궁금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초등학교 운동회에 가면 청팀과 백팀으로 나눠 머리띠를 하고 계주를 하거나 줄다리기를 하거나 공굴리기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청군 백군을 구별하는 머리띠는 사라지고 있습니다. 네이버로 검색을 해보니 대신에 조끼나 모자 등으로 청군과 백군을 구분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어딘가 에서는 학생들이 머리띠를 하고 운동회에 참여하는 학교도 있겠지만 대체로 ‘갬성’을 강조하는 지금 세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아이템입니다. 머리띠가 사라지고 새로운 패션 아이템으로 팀을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생들이 부모가 되고 교사가 되기 시작한 2000년대 후반부터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머리띠는 진지하거나 절박함을 상징했던 아이콘 입니다. 공부만이 계층 이동을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아니 실제로 그랬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집의 머리 좋은 아들 딸들이 책상 앞에 앉아 ‘합격’을 써넣은 머리띠를 두르고 밤을 새우던 이미지가 신문과 방송에서 반복되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또 1980년대 후반 민주화의 시작 시점에 생존권을 요구하며 사회 각층에서 목소리를 높일 때도 머리띠는 꼭 등장하는 상징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면서 감수성도 변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오늘은 백년 전 머리띠를 두르고 배구 경기에 열중하고 있는 여학생의 사진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사라지고 있는 청백팀 머리띠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셨나요?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주세요.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흔해진 시대에, 우리 사진의 원형을 찾아가 봅니다. 사진기자가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매주 한 장씩 골라 소개하는데 여기에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이 더해지면 사진의 맥락이 더 분명해질 거 같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노트북 주인의 따님이 쓴 응원 메시지라네요. 그럼 에너지 충전하고 오늘 하루도 힘내 볼까요? ―서울 용산구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일 서울 성동구청을 찾은 시민들이 건강 관련 정보를 살펴보고 있다. 성동구는 이날 스마트 기술을 활용한 건강 및 돌봄 관련 정보를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스마트 포용 건강, 돌봄 일번지 성동’ 박람회를 열었다. 박람회에는 27개 업체가 참가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테라스에 홀로 남겨진 거위 인형이 실내를 간절히 바라보고 있네요. “더워요, 나도 안에서 살고 싶어요” 하는 듯해요.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북한 배지 문화의 변화일요일인 30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공개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10차 전원회의 2일 차 회의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얼굴이 단독으로 새겨진 배지가 처음 등장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회의에 참석한 참석 간부 전원이 배지를 왼쪽 가슴 위에 달고 나왔다는 것이다. 북한이 최고 지도자의 얼굴을 배지로 만들어 인민들이 ‘심장에 모시도록’ 하는 정책을 편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이다. 다만 2024년이라는 국제화 시대에 이게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젊은 지도자의 얼굴이 들어간 배지가 새로 만들어졌다니 이게 무슨 일일까 싶다. ‘Why?’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왜 저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북한 내부에서는 어떤 의사결정 과정이 있었을지 상상해 보았다. 일단 우리 민족의 문화에 배지라는 게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당연히 사진이라는 것도 없었고 쇠에 그림을 붙이는 기술도 없었으니 배지가 없었을 테고 그럼 일제 시대에 그런 문화가 있었나?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도 없는 것 같다. 그럼, 한국과 북한에서 지도자의 얼굴을 배지로 만들어 달고 다니는 것은 언제부터 이렇게 차이가 나기 시작했을까? 의심해 보는 것은 북한의 배지가 중국에서 넘어간 문화일 가능성이다. 중국에서 모택동(마오쩌둥)의 배지가 대중화된 것은 1966년 문화대혁명 시작 때부터이다. 봉건적이거나 부르주아적이라고 비난받을 만한 사람들의 목숨까지 위태로워지면서 일반인들은 최고 권력자인 주석을 숭배하는 경쟁에 몰두하게 된다. 마오쩌둥 사진과 어록, 포스터, 배지 등은 정치적으로 안전한 상품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특히 배지는 홍위병들 사이에서 획일적인 복장에 개성을 주는 포인트 아이템으로 인기를 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마오쩌둥 배지는 ‘진품’과 ‘짝퉁’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정부에서 허가한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진품은 모든 인민들에게 일괄적으로 지급되지 않았다. 어떤 순서와 서열에 따라 보급될 수밖에 없었다. 권력자에 대해 충성 경쟁에 나섰던 홍위병들은 배지를 사기 위해 상점 앞에서 몇 시간 동안 줄을 섰으며 불법적으로 만들어진 배지를 판매하는 암시장도 번창했다. 상하이의 경우 75개의 공장이 잔업까지 하면서 한 달에 1500만 개의 배지를 찍어냈고 우한은 600만 개. 난징은 100만 개 배지를 생산하였다. 1968년이 되자 전국의 배지 생산량은 한 달에 5000만 개를 상회하였다. 천안문 광장 주변에는 작은 마오저뚱 사진 열 장과 배지 한 개를 교환하는 장터도 형성되었었다. 랑크 디쾨터가 쓰고 고기탁이 옮김 “문화대혁명(2017)”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 김일성 김정일 쌍상 배지를 가장 먼저 가슴에서 떼버린 김정은 부부김정은과 부인 리설주는 젊은 지도자들이다. 그들은 이런 구시대적인 배지 문화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도 상상해 본다. 김정은은 2010년 9월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어 공식 후계자가 된 이후 할아버지 김일성 초상휘장을 왼쪽 가슴에 달기 시작했다. 2011년 12월 아버지 김정일 국방 위원장 사망 직후에도 김일성 배지를 달았다. 그러다가 2012년 4월 7일 해군부대를 시찰하는 김정은이 북한 내부에서는 처음으로 김일성-김정일의 얼굴이 같이 들어가고 크기도 커진 ‘쌍상(雙象)’ 배지를 달았다. 흥미로운 점은 2018년 북미정상회담에 나서면서 김정은이 북한의 가장 중요한 상징인 김일성-김정일 배지를 떼고 나타났었다는 점이다. 김여정과 최선희 등 Team North Korea의 모든 수행원들은 쌍상 배지를 달고 나왔다. 트럼프와 폼페이오 장관 등 Team USA의 성조기 배지처럼. 하지만 김정은은 남북정상회담, 북·중 정상회담에 이어 북미 정상회담에도 배지를 달지 않았다. 사실 2015년 여름부터 김정은과 부인 리설주는 간헐적으로 쌍상 배지를 달지 않고 공식 석상에 나타나는 일이 잦아졌다. 리설주의 경우 처음 북한 인민들에게 얼굴을 보이던 몇 번을 제외하곤 배지 대신 여성들이 좋아하는 큰 브로치를 달고 등장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도 사진을 통해 두 사람을 보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쌍상 배지를 가장 먼저 달았던 최고지도자 부부가 가장 먼저 배지를 떼기 시작한 것이다. 선대로부터 독립적인 지도자의 위상을 강조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중국의 지도자들조차 마오쩌둥 배지를 거의 달지 않는 국제 정치의 표준을 따르기 위함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국제사회에서는 이미 최고지도자의 배지라는 상징을 배척해 왔다. 중국 외교관 리자오싱은 2014년 펴낸 자서전에서 중국이 마오쩌둥 우상화를 위해 노력하다 아프리카 케냐에서 외교적 마찰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1967년 10월 케냐 정부가 중국 대사관 측이 마오쩌둥 저작과 어록 그리고 상장(휘장)을 케냐 사람들에게 배포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처를 내렸고 1969년에는 마오쩌둥 저작을 케냐 영토 안에서 발행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선포했다는 설명이다. 2015년 중반 김정은 부부의 가슴에서 사라지기 시작한 김일성-김정일 배지. 이게 북한 변화의 상징이길 기대했었다. ● 배지 배급은 권력 순서대로 김정은의 착용 이후 쌍상 배지는 북한 사회에서 공식 배지가 되었으며 권력의 크기 순서에 따라 착용하기 시작했다. 쌍상 배지의 배급은 북한 내부의 서열과 계층 순서에 따르는 것으로 보였다. 2018년 6.12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 날 평양역에서 북한 주민들이 야외 스크린을 통해 전날 김 위원장의 싱가포르 야간 외출 보도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외신 사진기자가 찍은 이 사진 속에 등장하는 평양의 일반 주민들은 김일성 배지를 달고 있었지, 쌍상 배지는 받지 못한 것 같았다. 2018년 3월 평양에서 열린 한국 공연단을 보러 온 사람들은 쌍상 배지를 달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 했던 태권도 공연의 경우에는 관람하는 북한 사람들이 대부분 김일성 배지를 달고 있었다. 꼭 기득권이 아니더라도 뉴스에 등장해야 하는 경우 쌍상 배지를 우선 지급받는 것 같았다. 2013년 5월 라오스에서 북한으로 재북송되었던 꽃제비 청소년들이 쌍상 배지를 달고 북한 방송에 출현한 것은 이들이 특별한 대우를 받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한된 개수의 배지가 시장에 풀리면 그걸 먼저 착용하는 사람은 출신 성분을 증명할 수 있다. 권력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얼굴을 사람들의 생활 속에 밀착시키는 효과와 함께 충성심이 높은 순서대로 줄을 세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가슴 속에 아이콘을 하나씩 갖고 있다. 연예인일 수도 자기 아이일 수도 부모일 수도 꽃일 수도 여행지일 수도 있다. 충성하지 않으면 배제될 거라는 두려움에 북한 인민들은 충성의 상징인 배지를 얻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북한 권력자의 얼굴이 배지로 만들어졌다는 뉴스를 보며 든 생각이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100년 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기획 기사 중에 한 장 골랐습니다. 서울 재동에 있었던 백송(白松) 사진입니다. 1924년 6월 25일자부터 1924년 8월 15일자까지 동아일보 3면에는 2장의 사진이 매일 실립니다. 기획 기사가 50일간 연재된 것인데요 간판으로 “사진기사 – 일백동정(一百洞町) 일백명물(一百名物)”입니다. 우리 동네 명물 소개라는 코너입니다. 안국동 감고당, 종로 종각, 원동 모기, 공평동 재판소, 계동 위생소, 수송동 기마대, 화동 복주우물, 가회동 취운정, 소격동 종친보 등이 연속적으로 소개되었습니다. 그 중 7월 1일자에 실린 재동 백송 사진을 보겠습니다. 소개를 하는 사람은 동아일보 기자가 아니라 재동에 살고 있는 시민 김숙자씨입니다. 다른 날짜의 기사도 동네에 살고 있는 시민들의 이름으로 설명되어 있다는 점이 이채롭습니다. 재동(齋洞) 백송(白松)정해자(正解者) 재동 김숙자 우리 재동에는 장안에서도 유명한 백송이 있습니다. 백송이라는 것은 글자대로 흰 소나무라는 뜻입니다. 흰소나무라니까 솔잎까지 흰 줄로 알지 마십시오. 솔잎은 다른 소나무나 마찬가지로 사시장춘(四時長春) 푸르고 나무줄기가 보통 소나무와 달라서 허였답니다. 이 백송은 지금 경성 여자 고등보통학교 재동제2 기숙사안에 있는데 몇 백년 전부터 그곳에 그렇게 흰 몸을 버티고 섰삽니다. 그리고 이 백송의 고향은 중국입니다. 그 때가 아마 이조시대 이겠지오. 부끄러운 이야기지마는 그때에 우리나라 에서는 청국에 조공을 바치러 사신이 늘 들어다녔습니다. 이 백송이 그 때 청국에 들어갔던 어느 사신이 나무가 하도 기이함으로 조그마한 백송 하나를 가지고 나와서 심고 기른 것이 지금 재동 그 백송이지요. 세월은 가고 세상은 바뀌어서 사모풍잠(紗帽風簪)한 정승판서가 거들던 그 소나무 밑에는 지금은 검은 옷 입은 일본 사람 여학생들이 요새 같이 더운 날에 그늘을 찾아 그 백송 밑으로 와서 책을 읽는 답니다. 참 세상 변하는 것이란 모를 것입니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는 나중에 경기여자고등학교가 됩니다. 지금은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 있지만 당시에는 서울 종로에 있었던 것이죠. 그 자리에는 지금 헌법재판소가 위치해 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홈페이지에 재동 백송에 대한 소개가 있습니다. “재동청사의 부지는 구한말 개화파 공신으로 우의정을 지낸 환재(桓齋) 박규수(朴珪壽, 1807-1876) 선생의 저택이 있었고, 선교의사(宣敎醫師) 알렌(Allen)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병원인 광혜원(廣惠院, 1885-1887)이 자리 잡았던 곳이며, 그 후에는 경기여자고등학교, 창덕여자고등학교 등이 위치하여 많은 인재들을 길러낸 교육의 요람으로서 유서 깊은 곳이다. 또 부지 내에는 우리나라에 몇 그루밖에 없는 희귀수인 수령 600년이 넘는 천연기념물 제8호 재동백송이 자리 잡고 있다.”그렇다면 헌법재판소 뒤뜰에 있는 백송은 100년 전 신문에 소개된 그 소나무일 가능성이 아주 높네요. 다만 사진 속 백송이 한 그루처럼 보이는데 현재 헌법 재판소 백송은 한 그루지만 밑둥부터 두 개의 큰 가지로 나뉘어 자라 두 그루처럼 보입니다.헌법 재판소 경내에 들어가려면 입구 경비실에서 이름과 휴대폰 번호를 기입하고 방문증을 받으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근처에 가실 일이 있으시면 우리나라 최고의 헌법기관인 헌법재판소와 지금도 명물인 헌법재판소 백송을 한번 구경하시면 어떨까요? 오늘은 백년 전 신문에 실렸던 서울 재동의 백송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셨나요?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흔해진 시대에, 우리 사진의 원형을 찾아가 봅니다. 사진기자가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매주 한 장씩 골라 소개하는데 여기에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이 더해지면 사진의 맥락이 더 분명해질 거 같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누가 오래된 담벼락에 이렇게 예쁜 그림을 그렸을까요? 기차에 탄 아이들의 환호성이 들리는 듯해요.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6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 인촌기념관 강당에서 외국인 유학생들이 응원단을 따라 응원을 하고 있다. 이날 고려대에선 ‘2024 국제하계대학(ISC) 입학식 및 오리엔테이션’이 열렸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5일 서울 성동구청 옥외주차장에서 구청 직원 및 지역 주민들이 생명나눔 사랑의 헌혈 행사에 동참하고 있다. 이번 헌혈 행사는 불안정한 혈액 수급의 안정과 생명나눔 문화 활성화를 위해 마련됐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IBM이 개발한 ‘IBM 퀀텀 시스템 원’의 실물 모형. 25일 경기 고양시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퀀텀코리아 2024’에 참석한 IBM 관계자가 참관객에게 IBM 퀀텀 시스템 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고양=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전날 저녁 이야기꽃을 피웠던 흔적일까요? 술은 사라졌지만 꽃은 남았군요.―서울 성동구 행당시장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커다란 대포 사진입니다. 1924년 6월 20일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서울 사람들에게 낮 12시라는 것을 알려주었던 오포(午砲)라는 것이었다는데요. 사연을 한번 보겠습니다. ◇午砲의殞命日(오포의 운명일)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십여 년 동안 한결같이 30만 부민에게 정오(正午)를 보(報)하던 용산 효창원(孝昌園)안에 있는 오포(午砲)는 경비절약관계로 오늘로써 마지막 날을 짓게 되고 내일 21일부터는 그 대신으로 시보기(時報機)라는 것을 남대문통 소방대안 철골망루(鐵骨望樓)에 만들어 놓고 신호소리를 내게 되었는데, 신호방법은 정오보다 구십초(九十秒)가 이르게 신호소리를 시작하여 정오에 그칠 터이므로 말고동 소리가 끝나는 순간이 즉 정오라더라. (사진은오포)● 매일 낮 12시에 서울에서 울렸던 대포 소리시민들이 공용으로 사용하던 시계를 비용 문제로 철거하고 내일부터 뭔가 기계적인 시계를 설치한다는 소식입니다. 1910년대부터 십 년 넘게 매일 낮 12시면 서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포(砲)를 쏘았었다고 합니다. 용산 효창원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운영에 돈이 꽤 들어갔는지 이제 철거하고 내일부터 ‘시보기’라는 것을 설치한다고 합니다. 서울 남대문 근처 소방서에 높은 철골 망루를 세우고 거기에 시보기를 올려 놓는다는 얘기인데 대형 스피커 같은 장치를 시계와 연결해서 12시를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12시보다 90초 즉 1분 30초 전부터 말고동 소리를 길게 울리는 방식입니다. ● 새로운 알람 시계의 등장새로운 제도가 생기면 아무래도 여론의 행방이 중요한데 당시 시민들의 반응은 어땠을지 후속 기사를 좀 찾아 보았습니다. 새로운 시보기가 설치된 후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1924년 6월 26일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시보기가 설치된 남대문 부근에만 들리고 멀리 있는 곳에서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에러가 발생해서 시민들의 비난이 있다는 내용입니다. 납품 업체에 AS를 요청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時報機의非難 - 소리가 들리지 않아경성부청에서는 오포(午砲)를 폐지하고 그 대신으로 이달 21일부터 시보기(時報機)를 울려서 시민(市民)에게 오정을 알려 준다고 하엿으나 어찌된 일이지 시보기가 있는 남대문통 일대를 제외하고는 그 소리를 들었다는 사람이 없다 하여 비난이 자못 많다 하는데 경성부 당국에서는 졸지에 낭패한 빛을 가지고 시보기를 사는 곳에 방금 그 이유를 조회하였으므로 그 회담을 기다려 다시 개량방법을 강구할 터이다.그 이후 10월 19일자 동아일보에 재밌는 기사가 있어 인용해 봅니다. 時報機(시보기)는七時에 - 날이짤너진고로정오와 오전 6시에 울던 시보기는 요사이 날이 짧아졌음으로 오전 6시를 오전 7시로 고쳐 7시에 울게 되였다더라.지금으로 하면 서머타임제라고 해야 할까요? 새벽 6시에 시민들을 일터로 나가라고 깨우던 시계가 겨울이 가까워지면서 한 시간 늦워 7시에 울리도록 정책이 바뀌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새로 설치된 시보기는 점심 시간을 알리는 낮 12시 뿐만 아니라 조금 이른 기상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오전 6시에도 울렸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100년 전 서울 시민들의 기상 시간과 점심 시간을 알려주던 대포와 그 뒤를 이은 시보기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특별한 점이 보이셨나요? 댓글을 통해 알려주세요. 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흔해진 시대에, 우리 사진의 원형을 찾아가 봅니다. 사진기자가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매주 한 장씩 골라 소개하는데 여기에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이 더해지면 사진의 맥락이 더 분명해질 거 같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레드 카펫 위로 등장하는 푸틴의 모습평양 김일성 광장에 임시로 설치된 구조물 앞에 레드 카펫이 깔려 있다. 광장과 건물 위아래에는 유치원생을 포함한 수만 명의 평양 인민들과 군인들이 행사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인민들은 김정은 위원장과 고위 참모들이 붉은 커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다. 쇼가 시작될 모양이다. 잠시 후 군인들이 붉은 커튼을 열자 김 위원장 일행이 밖으로 다시 나온다. 김정은의 정치 행사 진행을 총괄하는 조선로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 현송월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아마 푸틴이 행사장에 도착한다는 전화일 것이다. 광장 앞 건물에 걸린 대형 시계를 카메라가 비추자 12시 정각을 알리는 소리가 들린다. 방송 카메라의 마이크에는 드론이 공중으로 올라가며 내는 소리도 들린다. 마치 영화 촬영장의 ‘레디 액션’ 소리처럼 들린다. 화면 왼쪽에서 카메라를 멘 두 사람이 허겁지겁 뛰어온다. 김정은 위원장의 사진을 찍고 있던 북한 ‘1호 기자’들이 카메라를 멘 두 사람에게 자리를 잡으라고 도와준다. 북한 최고 지도자를 찍는 사진기자들이 러시아 푸틴을 수행하는 사진기자들을 돕고 있는 것이다. 원래 사진기자들은 최고지도자보다 먼저 현장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헐레벌떡 뛰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모습은 곧 최고지도자도 현장에 들어온다는 의미이다. 기마대가 도열해 있고 그 앞으로 군 의장대가 도열해 만든 통로로 푸틴이 탄 차가 들어와 멈춘다. 푸틴과 김정은이 악수를 하고 그 장면을 양국 사진기자들이 찍기 시작한다. ●전날 밤 촬영 현장24년 만에 평양을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의 만남은 전세계 이목이 집중되는 행사였다. 서울의 한낮 온도가 36도에 육박한 폭염의 날씨였지만 평양에는 큰 규모의 군중 행사가 열렸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에 대한 공식 환영식을 유튜브를 통해 몇 번 돌려 보았다. 정치 행사라고 하기에는 그 스케일이 너무나 커서 마치 블록버스터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 주인공 푸틴을 위해 평양에 세트장을 엄청나게 크게 만들고 시나리오를 짜고 인원을 동원해 놓았다. 그러나 전날 밤 남주(男主)는 촬영 현장에 늦게 도착했다. 감독 입장에서는 속상하고 기다리던 스태프와 엑스트라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몸값 비싼 주인공에게 뭐라 속시원하게 퍼부을 수도 없다. 남주 스케줄에 맞춰 나머지 사람들이 움직이며 촬영을 마칠 수밖에 없다. 당초 18일 저녁에 평양에 도착할 것이라는 예상보다 훨씬 늦은 19일 오전 2시가 넘어야 평양에 도착한 푸틴은 1박 2일이 아닌 당일치기 순방을 했다. 국제 외교 무대에서 지각 대장인 푸틴이 이번에도 늦을 것이라는 것을 북한이 예상했던 것일까? 북한은 푸틴의 짧은 체류 시간 동안 최대한의 촬영분량을 뽑아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탑 클래스의 배우를 섭외한 감독이라면 당연히 그럴 것 같다. 첫 번째, 19일 새벽 다른 스탭과 참모들은 다 귀가시켰지만 촬영팀은 공항에서 김위원장과 함께 푸틴을 기다렸다. 외신을 통해 들어온 사진을 보면 푸틴을 기다리고 있는 김 위원장과 현송월 부부장 이외에 촬영용 사다리에서 대기하고 있는 복수의 사진기자들이 보인다. 두 번째, 드론과 촬영 로봇을 준비했다. 드론이야 요즘 많이 활용하는 촬영 장비이지만 촬영 로봇을 정치 행사에서 활용하는 것은 이채로웠다. 군인들의 행진을 왔다갔다 하면서 촬영하는 모습이 생중계 화면에 잡혔는데 이 로봇이 푸틴의 사열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준비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평범한 앵글이 아닌 스펙터클한 화면을 위한 시도로 보인다. 셋째, 고프로를 준비했다. 고프로는 요즘 예능 방송에서 많이 쓰는, 방수와 충격 방지가 되는 소형 카메라이다. 고프로는 러시아산 리무진 아우르스의 보조석 위에 설치되어 푸틴과 김정은이 차례로 운전을 하며 화기애애한 표정을 짓는 순간을 기록했다. 고프로는 북한 ‘1호 사진기자’의 카메라에도 설치되었다. 보통의 경우 사진기자들은 스틸 사진만을 찍는다. 1초를 1/250초로 나눠 찰각찰각 찍는 방식이다. 연속 화면은 ENG방송용 카메라 기자들이 별도로 준비한다. 그런데 이번 환영식에서 북한 1호 사진기자들은 자신들의 렌즈 위에 고프로를 고정시켜서 스틸 사진과 동영상도 동시에 촬영했다. 역시 짧은 촬영 시간에 최대치의 분량을 뽑아내기 위한 총감독의 아이디어인 것으로 보인다. 넷째, 참모들의 스마트폰도 활용되었다. 지각 대장 푸틴이 공항에 내린 후 숙소인 금수산 영빈관에 도착하는 순간 현송월이 스마트폰을 꺼내 촬영을 시작했다. 푸틴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중요한 장면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촬영 현장의 숨은 공로자들전날 스케줄이 꼬여 노심초사했을 평양의 행사 담당과 선전선동 담당자들은 충분한 분량의 촬영을 했을까 궁금하다. 전세계에서 이런 화면 구성이 가능한 나라는 이제 없다. 폭염 속에 한복을 입고 꽃술을 들고 있는 어른들, 캐주얼한 복장의 대학생들, 반바지와 반 팔의 어린이들은 화면을 빛나게 하는 조연들이다. 그들의 대사는 ‘조러친선, 푸틴 환영’으로 제한된다. 북한과 러시아의 정상이 만나서 보여주는 일정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익숙한 풍경이다. 단독 정상회담, 확대 정상회담, 공동기자회견, 그리고 기자회견장 포디엄 뒤에 설치된 대형 국기는 이제 국제 표준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주인공을 위해 그리고 절대권력을 갖고 있는 감독에 의해 저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 스펙터클한 화면이 생산될 수 있는 사회라는 게 여전히 낯설다. 애국심으로 출연료를 대체할 수 있는 사회는 언제까지 이어질지 궁금하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전화 연결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교환수들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1924년 6월 13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좁은 사무실 벽에 빼곡하게 나열된 전화 교환기 앞에 소녀들이 앉아 있습니다. 그 뒤로 감독자들이 듬성듬성 서 있습니다. 빨간 불빛이 들어오면 전화 연결을 원한다는 신호입니다. 원하는 번호로 재빨리 연결시키는 게 소녀들의 역할입니다. 기사를 한번 보겠습니다. 전화통을 떼어 귀를 대고 있으면 다같이 “하이 하이” 소리가 나온다. 그러면 “하이 하이”소리는 기계에서 나오는 것이냐? 아니다. 사람 중에도 가장 자랑이 많고 청춘의 피가 끓는 꽃같은 여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다. 조선 사람의 전화 가입자와 가장 인연이 깊은 광화문 전화분국에 가면, 눈빛같이 흰 적삼에 자줏빛 치마를 입은 묘령의 여자가 전부 수화기를 머리에 기우고 반짝반짝 일어나는 붉은 불빛을 쫓아 번개같이 날쌔게 부르는 번호에 줄을 꽂아주어 전화를 접속시킨다. 한 사람 앞에 수 많은 번호를 맡아 가지고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접속시켜도 뒤를 이어 불러 온다.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같이 어떤 가입자든지 전화를 걸면 그 전화에 불이 켜지고 교환수는 그 불을 보고 몇 번인가 물어 저 편에서 부른 번호에 꽂아 주어 말을 하게 하고 만일 부르는 번호가 말하는 중이면, “하나시주(통화 중)”하고 대답한다. 더욱 서울 안에서도 구역을 따라 전화번호 책에 쓰인 대로 용산이면 용산을 불러 대어 주며 시골로 전화를 걸려면 먼저 시외를 불러 가지고 그 시골의 번호를 부르게 되는 것이다.사진의 해상도가 너무 낮아 다른 사진을 찾아 보았습니다. 비슷한 모습의 교환실 모습 사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위의 사진에서 50년이 지난 사진입니다. 전화 교환원이라는 직업은 우리나라에 전화가 도입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전화가 들어온 것은 1902년 3월 20일 대한제국 통신원에서 지금의 서울인 한성과 인천 사이에 전화를 임시로 설치하면서부터라고 검색이 됩니다. 이 시절에는 전화 교환수를 통하지 않으면 전화를 걸거나 받을 수 없었습니다. 전화기를 들거나 핸들을 돌리면 교환수가 나와 원하는 번호를 알려 달라고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현재도 군대에서는 교환병을 통해 전화 통화를 합니다. 위 사진은 그 교환수들이 모여있는 공간을 촬영한 것입니다. 1971년이 되자 전화 교환원 없이 전화를 건 사람이 직접 다이얼을 돌려서 상대방과 통화할 수 있는 자동식 전화가 개통되었습니다. 이에 전화 교환원을 거치는 수동식 전화기는 ‘흑통’, 교환원 없이 가입자가 직접 전화를 걸 수 있는 자동식 전화기를 ‘백통’이라 불렀습니다. 백통은 당시 신청을 해도 한두 달 이상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귀했으며, 가격이 비싸 부의 상징이었다고 합니다. 1987년 전국 자동 교환망이 완성되면서 1가구 1전화 시대가 열렸고, 전화 교환원 없이 전화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15세 소녀들 생계 위해 전화 교환수로 취직초기 전화 교환원은 대부분 남성이었으나 1920년대 이후로 여성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1920년 4월 12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젊은 여성의 새로운 직업으로 전화 교환수를 소개되고 있습니다. “경성 우편국에서 전화 교환수로 조선 여자를 채용한다는 공고가 나왔고, 학력은 보통학교 졸업 정도면 충분했으며, 일본어 가능자가 우대되었다. 처음 입사 후 3개월간 견습 기간 동안 일당 51전을 받았고, 이후에는 60전 이상과 근면 수당을 지급받았다. 근무 시간은 45분 일하고 15분 휴식하는 방식으로, 하루 8시간을 넘지 않았다. 당시 3명의 교환수가 있었는데, 모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생으로 일을 잘해 앞으로는 여성만 채용하기로 했다. 나이는 15, 16세로 야근을 못하게 하는 부모들 때문에 야근은 하지 않았다”는 내용입니다. 1931년 7월 19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따르면 “서울의 전화 가입자는 3,140명이고 교환수가 352명.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의 두 시간이 가장 바쁜데 한 교환수가 한 시간에 약 210회씩 응하고 있다. 교환수가 늦게 대답한다고 해서 갖은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도 있어 직업으로서는 아주 힘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1958년 12월 11일자 기사도 함께 참고해 보겠습니다. “1분 동안 많을 때는 60통의 통화를 교환해야 하는데 좋은 청각과 고운 음성과 재빠른 솜씨가 필요하다. 이런 솜씨를 습득하는 길은 중앙전화국에 설치된 교환양성소에서 3개월간 무료로 수속을 받고 다시 시험을 치른 다음 증명서를 받으면 일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 국제화에 맞춰 외국어 전문 전화교환수 출현…이제는 사라진 직업1980년대에는 국제화시대에 맞춰 국제전화 교환수가 있었습니다. 1983년 6월 21일자 기사 “다이얼「102」「117」을 돌리세요”를 보면, 전 세계 157개국과 하루 평균 1만 7천건(해외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4만 건)의 국제전화통화를 4백 명 가량의 국제전화교환수들이 8시간씩 3교대로 접속시켜주었다고 합니다. 또 “국제전화교환수들은 선발시험에 통과된 후 3개월간의 영어 일어등 어학교육을 받고도 항상 개방돼있는 어학실습실이나 VTR교재등을 이용하여 외국어공부를 계속한다。 또 영어와 일어 중국어 불어 독어「아랍」어등 제2외국어에대한 리포트를 매주 2페이지씩 제출한다。 이처럼 어학훈련을 받아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상대방 이야기를 듣게되기까지는 1년남짓 걸린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4백 명의 교환수 중 남성은 3명에 불과했다고 하네요. 1983년 8월부터는 미국 등 일부지역에는 교환수를 거치지 않고 직접 외국으로 전화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사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화 교환원의 직업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점차 자동화되고 사라졌지만, 전화 교환원들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오늘은 100년 전 서울의 전화 가입자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던 소녀 전화교환수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전화교환수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신 적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의 경험을 나눠주세요.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흔해진 시대에, 우리 사진의 원형을 찾아가 봅니다. 사진기자가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매주 한 장씩 골라 소개하는데 여기에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이 더해지면 사진의 맥락이 더 분명해질 거 같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4일 오후 경기 평택시 해군2함대사령부에서 열린 제1연평해전 전승 25주년 행사에서 내빈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이날 행사에는 제1연평해전 당시 지휘관을 포함한 참전용사와 가족 90여 명, 2함대 장병과 군무원 등 250여 명이 참석했다. 제1연평해전은 1999년 6월 15일 한국전쟁 이후 남북 해군 간 발생한 최초의 정규전이다. 평택=변영욱 기자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