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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을 앞두고 14일 한국조폐공사가 2025년 을사년 ‘뱀의 해’ 기념 메달을 선보였다. 금·은 메달 2종 세트는 399만 원, 색채 은메달 22만 원, 캘린더 동메달 33만 원으로 선착순 예약 접수는 25일까지 진행된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백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하나 골라 의미를 찾아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오늘은 우리나라 골동품 거래의 대표적인 거리 중 한 곳인 서울 인사동과 관련된 기사입니다. 자기가 모아 둔 조선의 보물들을 아무 조건 없이 사회에 내놓겠다고 하는 시민의 이야기입니다. 조선의 미술품이 사라지고 외세에 빼앗기는 것이 안타까워 10년 동안 많은 골동품을 모아왔는데 어느덧 마땅히 보관할 곳도 없고 더 이상 물건을 사 모을 여력도 안 되었던 모양입니다. 기자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해서 도움을 줄 사람을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서울 인사동에 살던 고미술품과 골동품 수집가의 이야기를 한번 살펴보시죠. 기사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924년 10월 6일 동아일보 기사입니다.◇적년수집 고미술품 무상 제공(積年收集古美術品 無償提供)을 언명(言明)10 여년 모아둔 조선의 보배를 보수없이 사회에 내놓겠다고글씨로 그림으로 건축으로 조각으로 옛날의 조선을 꽃밭같이 꾸미던 조선의 모든 미술품은 사라져 없어지고 재변(災變)으로 없어지고 알지 못하여 찾지 못하고 찾았으나 빼앗기고 하여◇옛날의 광명이나마 차차 사라지려 하는 때에 영남출생(嶺南出生)으로 방금 시내 인사동(仁寺洞)에 사는 림상종(林尙鍾)씨는 어려서부터 사라져가는 민족의 자랑거리를 남달리 아까워하여 자기의 일생을 고조선 미술품 수집 보존에 바치기로 하고 10여 년 이래로 자기의 거대한 전 재산을 이에 탕비하여 대표적 미술품이라 할만한 그림(畵) 이천 폭과 글 시(書)삼천폭과 신라(新羅) 고려(高麗) 리조(李朝)때의 그릇 도자기(陶磁器) 수백종과 기타 골동품 수십종을 모았는데 이 가운데는 삼한시대의 불상(佛像)도 있고 구하지 못할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호렵도(虎獵圖)도 있고 근세의 신화라하는 장승업(張承業)의 그림도 있고 김종서(金宗瑞)의 글씨도 있고◇고구려의 유물로 집안현(輯安縣)에 잇는 영락대왕(永樂大王)비의 탑본(搭本)도 있고 그밖에 신라 고려 때의 조각(彫刻) 도기(陶器) 동기(銅器) 등 우리나라의 고귀한 미술품은 거의 갖추어 있는데 이 같은 거대하고 어려운 사업에 일 개인의 힘은 한이 있어 지금의 림씨는 살림을 이어가는 여러장의 전당포와 이 같은 보배를 굶어 죽어도 영원히 보존하겠다는 정상만 남았을 뿐인데 만 가지 일에 돈의 힘이 드는 지금에 있어서 정성만 가지고 있다 무슨 변을 당하여 한 폭의 그림이나 한 개의 그릇이라도 잃거나 하면 어찌할까 하는 걱정으로 림씨는◇단연히 결심하고 어떤 개인이나 어떤 민간 단체에서 이것을 영구히 맡아 사회의 공유물로 완전히 보존하는 기관이 생기면 조금도 아끼지 않고 서화 그릇 등 전부를 내여놓기로 하였다더라.◇분로촌공(分勞寸功) - “땅 팔아 그림 한 폭”/임상종씨 담(林尙鍾氏談. 인터뷰)이 소식을 듣고 왕방한 기자에게 림씨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말하되『참말 인제는 내 힘만으로는 더 어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시는 이는 아실터이고 모르시는 이는 모르실터이지요마는 나는 실상 땅 한 마지기를 팔아서 그림 한 폭을 얻어오고 세간을 팔아서 글씨 한 쪽을 모은 것이 『분로촌공』으로 그래도 지금에는 저만콤 모으게 되엿습니다. 저것을 모은다고 밥이 생기거나 옷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도로혀 내 자신의 구복은 줄어드는 세움이지마는 그런 생각을 하고야 모아질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정성 뿐이고 힘이 없습니다.◇저렇게 모은 물건이 일조일석에 없어질지도 모를 일이고 없어질지도 모를 일이고 한폭 두쪽 잃어질지도 모를 일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칩니다. 어쨌든 이 물건을 한 곳에 모아 미술관을 지으시겠다는 개인이나 단체가 있으면 아무 보수도 없이 그대로 내여주겠습니다. 이것을 하나하나 떼여혔치자면 쉬운 일 이지요마는 나는 죽어도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한데 뭉치여 영구히 보존되기를 바랍니다』는 말끝에는 무한한 결심과 보배에 대한정성이 넘치었다.●이 기사를 쉽게 정리하면백년 전 신문에 실린 기사는 인사동에 거주하는 임상종 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사라져가는 조선의 문화유산을 아끼며, 10여 년 동안 고미술품을 수집해 왔습니다. 임 씨는 자신의 전 재산을 들여 그림 2000폭, 서예 3000폭, 도자기 수백 종, 기타 골동품 수십 종을 모았습니다. 표로 만들어보면 이렇습니다. 정말 귀중한 유물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복잡하니 임상종 씨가 수집한 유물들을 본문에서 언급된 종류와 수량을 바탕으로 표로 정리했습니다. 유물 종류수량설명그림(畵)약 2,000 폭조선 시대와 근세의 대표적인 그림 포함서예 작품(書)약 3,000 폭김종서 등의 유명한 서예가의 작품 포함도자기(陶磁器)수백 종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도자기불상(佛像)삼한 시대 불상삼한 시대의 귀중한 불상탑본(塔本)영락대왕비 탑본고구려 영락대왕비의 탑본조각(彫刻)수집된 다양한 조각신라와 고려 시대의 조각품들동기(銅器)수집된 동기류신라와 고려 시대의 동으로 만든 기물들호렵도(虎獵圖)1점고려 공민왕 시대의 호렵도장승업의 그림1점근세의 대표적인 화가 장승업의 작품● 임상종씨와 기자의 인터뷰 내용임상종 씨는 이러한 유물을 보존하는 것이 개인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현재 그는 여러 장의 전당포를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지만, 유물들이 훼손되거나 잃어버릴까봐 걱정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보물들을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기관이나 단체가 있다면, 보수를 받지 않고 모든 유물을 기증하겠다고 결심했고 신문사 기자와 인터뷰를 하게 됩니다.임 씨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땅을 팔아 그림 한 폭을 사고, 세간을 팔아 글씨 한 쪽을 모았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는 밥이 생기거나 옷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하고서도 유물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정성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정성만으로는 부족하고, 힘이 없음을 토로합니다. 그는 유물들이 일조일석에 없어질 수도 있고, 한 폭 두 폭 잃어질 수도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고 하면서 그는 유물들을 한 곳에 모아 미술관을 지을 수 있는 개인이나 단체가 있다면, 보수를 받지 않고 기증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유물들이 하나하나 흩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영구히 보존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습니다.● 임상종 수집가는 파산의 위험에서 벗어났을까임상종씨의 이야기는 동아일보 데이터베이스에서 한번 더 검색이 됩니다. 1925년 7월 19일자 호외에 “水災 同情金” 기탁자 명단이 실리는데 여기에 ‘인사동 199번지 림상종 10원’이라는 한 줄까지 동정이 실립니다. 경성 시내를 강타한 수해 상황을 보도하면서 수재 의연금을 낸 수백 명의 독지가 중 한 명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제대로 추적이 되지 않습니다. 독지가나 기업 문화재단 등이 나타나 그의 수집품을 보관할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만들어주었다는 해피엔딩의 기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신문사 기자와의 인터뷰가 별로 도움이 안되었던 것 같습니다.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인터뷰 기사가 나간 후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고제희의 풍수칼럼 (21fengshui.com)이라는 곳에서 임상종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http://www.21fengshui.com/content5/view.html?id=4-1-1-1-3의 포스팅에 따르면 “여기저기서 빌린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임상종은 급기야는 고리대금업을 하는 최상규(崔尙奎)에게 군선도를 비롯한 고서화를 맡기고는 계속해서 돈을 빌려 썼다. 당시에 남에게 돈을 빌려쓰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이자가 월 2할에 가까워 5달만 지나면 원금의 곱이 되었던 시절이다. 마치 밑빠진 항아리에 물 붓기 식으로 늪에 빠진 임상종은 더 이상 빚을 갚을 길이 없자, 파산선고를 했다. 그러자 개인으로써는 유래가 드물게 수집했던 3백여 폭의 고서화가 이자와 원금 대신으로 고스란히 최상규에게로 넘어갔다. 욕심이 부른 파멸이었다. 죽음이 가까웠을 때에 임상종의 손아귀에는 손바닥만한 고서화 조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천추의 한을 품은 채 1940년 눈을 감았다. 고리대금업자 최상규는 그림을 볼 줄 모르는 사람으로 곧 임자를 찾아 나섰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오늘 백년 전 신문사진이 고른 사진은 1924년 10월 6일자 신문에 실린 인사동 큰손이었던 임상종의 인물사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진과 기사에서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언론이 세상에 사실을 알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 시대였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마찬가지일수도 있구요. 지금처럼 대기업이 문화재단을 운영하거나, 일반 시민들이 십시일반 투자하는 클라우드 펀딩이 대중화되었다면 좀 더 행복한 결말이 나올 수도 있었을까요?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다음 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재개발 예정인 건물에 담쟁이넝쿨이 입주했군요. 이제 막 가지를 뻗치고 있는 것 같은데 곧 허물어질 건물인 걸 알까요? ―인천 중구 유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서울 양천구 ‘찾아가는 이미용 봉사단’ 회원들이 지난달 25일 양천구 신월시영아파트 경로당에서 어르신들의 머리를 다듬고 있다. 봉사단은 주로 거동이 불편해 미용실이나 이발소를 방문하기 힘든 어르신들을 위해 11명의 자원봉사자들이 3월부터 매달 1회씩 봉사하고 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라면 먹고 갈래?’에 이은 신종 유혹법인가요. 고양이가 없을 때도 있다니, 나타날 순간을 더 기대하게 만드네요. ―경북 의성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 한 장을 골라 오늘의 시각에서 의미를 찾아보는 백년 사진입니다. 오늘은 흰 수염에 갓을 쓴 노인의 얼굴 사진을 골라봤습니다. 원래 계획은 아래 군밤 파는 소년의 사진(1924년 9월 30일자)과 그 이후 한국 사회에서 간식과 군것질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살피려 했는데 이 노인의 이야기가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주제를 바꾸었습니다. 1924년 10월 2일자에 실린 사진입니다. 입을 꼭 다문 채 정면을 응시하는 노인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흑백의 흐릿한 사진이지만 짙은 눈썹과 매서운 눈매가 보입니다. 고집이 세다고 할까요 아니면 결의에 찬 모습이라고 할까요?기사를 살펴보겠습니다. 교육계 독지(篤志) 전봉현 노인수만원 토지를 정주 오산학교에평북 선천읍내 사는 전봉현(田鳳顯)씨는 현재 85세의 노령으로 젊어서부터 근검저축으로 전전푼푼이 모아 지금은 유복한 생활을 하는 노인인데 다른 일에는 비상히 검소한 노인이나 오직 장래 청년 자제 교육에는 큰 뜻을 두고 정주 오산학교(定州 五山學校)에 1만7천여원 어치 토지와 선천군 남면 삼성동에 있는 밭을 전부 기부하였으므로 일반의 칭송이 많다더라 (사진은 전봉현씨)-1924년 10월 2일자 동아일보● 전봉현, 오산학교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다전봉현 선생에 대한 기록은 그 이전에도 신문에 등장합니다. 1924년 5월 20일자 기사에는 그가 오산학교에 1만 5천여 원 상당의 토지와 재산을 기부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는 오산학교와 같은 민족 학교의 재정적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한 고귀한 행위로 당시 사회에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1만 5천원이면 어느 정도의 돈이 될까요? 당시 냉면 한 그릇에 20전이었다고 하니 냉면 7만5천 그릇의 가격으로 계산하면 약 8억원 정도의 돈입니다. 그에 대한 기록은 그 이후에도 신문에서 등장합니다. 전봉현 선생의 이름은 1929년 5월 2일 기사에 등장하는데 오산학교의 교사 신축 및 학교 확대를 위해 1천 5백 원을 추가로 기부한다는 기록입니다. 기부를 한 이사들의 명단 제일 앞에 그의 이름이 있습니다. 五山高普擴充崔昌學氏五萬圓寄附리사측에서도 근 만원 기부평븍정주(平北定州) 오산고등보통학교(五山高普)는 지금으로부터 23년 전 리승훈(李昇薰)씨의 노력으로 설립되어 조선사회에 많은 일꾼을 내보냈고 연 전에 30만원의 재단이 성립되며 고등보통학교로 승격되어 금년까지 제 2회 졸업생까지 내었는데 저간 교사 신축 등 학교 확대비로 결국 오만원의 부채를 보게 되어 그사이 만흔 곤난을 격거 오든바 이번 평븍 귀성에 잇는 삼성광업소(三成鑛業所) 주인 최창학(崔昌學)씨가 오만원을 기부하여 채무를 청장하는 동시에 동학교 이사들도 아래와 같이 기부금을 다시금 지출하여 경상비(經常費)에도 유감이 없게 되어 (校運)은 더욱 륭륭하게 되엇다더라.◇理事寄附▲田鳳現一千五百圓▲吳熙源一千五百圓▲李鏡麟一千五百圓▲吳致殷一千五百圓▲全起鴻一千五百圓▲趙始淵五百圓▲承啓漣三百圓-1929년 5월 2일자 동아일보● 민족을 위한 헌신의 발자취그러나 그 역시 어려움을 당한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26년 4월 30일에 전봉현 선생의 집에 강도가 침입하여 십여 원을 강탈해 도망친 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선천군 선천면 천남동(宣川郡 宣川面 川南洞)에 사는 부호 전봉현(田鳳賢)씨 집에 지난28일 새벽 한시경 에 돌연히 강도 2명이 담을 넘어 들어와서 돈을 내라고 강청하다가 아침 집에 있는 돈이 십여 원에 불과함으로 있는 데로 모두 빼앗어 가지고 어데로 도방하여 버리었다는데 이 사실을 안 선천 경찰서에서는 사방으로 비상을 늘리고 범인 체포 (선천)-1926년 4월 30일자 동아일보●사진에 담긴 노블레스 오블리주강도를 당한 전봉현 씨의 한자는 어질 현(賢)을 쓰고, 기탁을 했던 전봉현 씨의 한자는 나타날 현(顯)을 쓰고 있습니다. 혹시 다른 인물일 가능성도 있지만, 당시 식자공들이 일일이 한자를 넣던 시절이라 오타가 많았고, 사건 직후 신문에 실릴 만큼 유명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동일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또 하나 주목할 만한 기사가 하나 더 있습니다. 남편의 뜻을 아내가 이어 기부를 계속 하였다고 합니다. 고인이 되신 전봉현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아내인 이용상 여사가 안악고보 설립을 위해 1만원을 기부했다는 뉴스입니다. 1936년도 2월 12일자 동아일보에 실렸습니다.부군(夫君)의 유지(遺志) 이어만원 기부고 전봉현씨 부인 이용상 여사이번 안악고보 설립 기성에 있어서 특히 일반 인사를 감격시킨 것은 이용상(李龍祥) 여사의 1만원과 유형내 여사의 50원 히사라고 한다. 이용상 여사는 일직 그 남편되는 전봉현(全鳳賢)씨가 재세(在世)중에 황해도 각처에 신교육 운동을 일으키어 발분망식하든 유지(遺志)를 받드러 이번에 안악고보 설립 운동을 보고 돌아간 남편의 펴다 못 편 뜻을 이으려 힘자라는데까지 재산을 제공한 것이며 유형내 여사는 어린아들을 데리고 홀로 지내는 터로 가세도 넉넉지 못하여 50원의 부담도 그 형편으로는 적지 않은 짐이건만 ‘과부의 한 푼’을 보탠다는 그 성심에 일반 인사를 감격케 한 것이라 한다.-1936년 2월 12일자 동아일보1920년대 신문에는 전봉현 선생 이외에도 많은 기부자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인창의숙(현 인창고) 설립자 성암 손창원은 30만원을 기부했고(1924년 3월 5일자 매일신보),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 강택진은 자기가 갖고 있던 땅을 소작인에게 기부하고 아이스크림 장사를 시작(1923년 6월 26일자 동아일보)했습니다. 큰 돈을 내놓지 못하는 서민들도 민족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십시일반 돈을 내는 캠페인에 동참하기도 했습니다. 1924년 6월에서 8월까지만 예를 들면, 간도 용정촌 동흥중학교 설립을 위한 기부금 모집을 위해 모집원들이 충남 당진과 예산에서 황윤수 김창학 1원부터 유진영 안덕수 100원까지 돈을 모금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모집원들은 충남 뿐만 아니라 경북 영주 등에도 내려가 기부를 받았고 신문은 그들의 이름을 지면에 실었습니다. 어떤 날에는 150명의 기부자 이름을 일일이 한자와 함께 지면에 남겨 놓았습니다. 그 명단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우리가 큰 역사와 큰 인물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이분들에 대한 기록도 온전히 복원시켜 후손들이 자랑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가능하면 그들의 얼굴 사진도 한 장씩 다 넣어서 말입니다. 오늘은 100년 전 자신의 재산을 민족 학교 운영을 위해 기부한 전봉현 선생의 사진을 통해,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습니다. 비록 해상도 낮은 흑백 사진이지만, 사진이 남아있어 그의 고결한 뜻과 헌신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다음주에 뵙겠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3일 서울 용산구 이마트의 종가집 포기김치 매대가 텅 비어 있다. 오랜 기간 지속된 무더위로 배추 수급이 어려워지면서 대상, CJ제일제당 등 주요사 김치 제품들이 온·오프라인 유통시장에서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마트 용산점에서 모델들이 ‘10월 가격 파격 선언’ 행사 상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마트는 3일부터 31일까지 국내산 돼지 앞다리 100g을 990원에 판매하는 등 필수 먹거리를 할인 판매한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북유럽에서 육아에 적극 동참하는 아빠를 ‘라테 파파’라 하죠. 커피 대신 책을 든 아빠, 여유를 보니 보통 고수가 아닙니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30일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서울 로비에서 직원들이 10만 개의 레고 블록으로 만든 110년 전 조선호텔 모형 ‘헤리티지 조선호텔로 시간여행’을 소개하고 있다. 10월 말까지 서울 전시 후 부산과 제주에서 무료로 전시된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00년 전 한반도를 찾은 외국 유명인들은 어느 곳에서 잠을 잤을까? 1920년 5월 28일자 동아일보 3면에 그 힌트가 있다. “이탈리아 비행기 오늘 오전 출발”이라는 기사는 다음과 같다. 이태리에서 삼만삼천리를 공중으로 날아온 진객 ‘푸에라린’ 마세로 두 중위는 오래동안 날아온 피곤한 몸을 조선호텔의 백설같은 침대 위에서 쉬면서 이 곳 저곳의 환영회에서 따뜻한 환영을 받은 후 오늘 28일 오전 7시에 경성을 떠나 대구로 향할텐데 경성부에서는 여의도 착륙장에서 간단한 다과의 접대가 있을 것이고 총독부의 중요 관원과 경성부의 중요 관리가 출석하여 여의도에서 전송한다더라.1914년 10월 10일 개관한 조선호텔이 올해로 110주년을 맞았다. 국내 최초 럭셔리 호텔의 시대를 알렸던 조선호텔은 ‘조선’의 이름을 지속적으로 이어오며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호텔로 성장해 왔다. 조선호텔앤리조트가 개관 110주년을 맞아 9월 30일 특별한 행사를 열었다. 1914년 개관 당시 조선호텔의 모습을 10만개의 레고 브릭으로 재현한 기획전시 ‘헤리티지 조선호텔로 시간 여행(Time Travel to Heritage Josun Hotel) 행사가 다음 달 말까지 열린다. 조선호텔앤리조트는110주년을 기념하여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도록 예전 건축 도면과 사진 자료를 바탕으로 전 세계 레고 공인작가(LEGO® Certified Certified Professional) 중 한 명인 반트 김승유 작가와 협업하여 이번 전시를 준비했다. 이번 전시에는 총10만개의 레고 브릭으로 당시 최대 규모의 럭셔리 호텔이었던 조선호텔의 전면과 후면, 그리고 주요 공간들을 입체적으로 표현했으며 국내외 고객들이 선진 문화를 향유했던 ‘콘서트룸’과 ‘연회장’, 국내 최초의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던 ‘팜 코트’와 스위트 객실 ‘201호’ 등 조선호텔 최초의 기록들이 담긴 공간들을 자세히 엿볼 수 있다. 해당 전시는 9월30일(월) 웨스틴 조선 서울을 시작으로 11월에는 부산시 해운대구에 위치한 그랜드 조선 부산에서, 12월에는 제주 서귀포시 중문관광단지에 위치한 그랜드 조선 제주의 호텔 로비에서 무료 전시로 만날 수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재난을 당한 피해자를 설득하고 그 피해자들을 카메라 앞에 서서 포즈를 취하도록 설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10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좋은 일은 남기고 싶지만 불행한 일은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니까요. 여기 한 가족의 사진이 있습니다. 카메라를 응시하면서 뭔가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신문은 이미 가해자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피해자가 있다는 것이고 그 사실만이라도 기록해, 세상에 알리고 역사에 남기고자 했던 현장 기자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사진입니다. 이 기사와 사진이 실리기 한 달 보름 전인 8월 11일 밤, 평안북도 위원군 화창면 신흥동에서 무장한 괴한들이 마을 전체를 불태워 여섯 집이 전멸하고, 스물 여덟 명의 가족이 한순간에 학살당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독립군의 소행이라는 일제의 발표에 대해 독립군은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밝혔지만 이후에도 일제는 정확한 사건 개요와 가해자를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신문사에서 무명회(일종의 공동 취재단) 소속 특파원을 현지로 보냈습니다. “전시 상황 이상의 긴장이 흐르는 국경 지역의 가련한 동포들을 생각하며 이 소식을 전한다”고 기사를 싣는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주민들 중 누구도 자신들이 보고 느낀 것을 기자에게 증언하지 못했다는 내용도 나옵니다. 그러면서도 기사는 ‘현장에서 일본인들이 주로 신는 버선이 다수 발견되었다’는 단서를 기사 끝부분에서 제시합니다. 판단은 하늘과 독자들이 해야할 것이라는 열린 결말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공포가 사회를 감싸고 있었던,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역사 중 한 단락입니다. 서설이 길었습니다. 1924년 9월 27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당시 조선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조선일보는 사진설명에 “참화를 피한 사람 = 오른편 앉은 이는 불 속에서 살아나온 최홍주. 그 곁에 누운 아이는 총창에 찔린 그의 아들 최인국, 그 밖의 사람은 간호에 진력하는 친족들”이라고 썼습니다. 우선 사건 개요를 보겠습니다. ◇ 천통지곡(天痛地哭)할 國境大慘禍 事件(국경 대참화 사건)이라는 기사인데 너무 방대한 기사라 최대한 짧고 쉽게, 그리고 지금의 언어로 요약했습니다. 하늘이 울고 땅이 통곡할 국경의 대참사 사건- 벽촌 한밤중에 갑자기 나타난 40여 명의 무장 부대가 지나가고, 마을 전체가 멸망하였다- 치솟는 불길에 무고한 주민들이 한순간에 처참하게 죽어가다- 6가구가 전소되었고, 28명이 불에 타 죽다- 잿더미 속에서 인간의 형체는 사라지고, 남은 것은 개와 닭의 잔해뿐. 마치 백골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잿더미 속에서 매미가 우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어렴풋이 총성까지 울리다. 너무나 비참하고 처절한 현장, 폐허만 남아 있다- 독립단은 경찰의 소행이라 주장하고, 경찰은 독립단의 소행이라며 책임을 미루다. 이 사건의 진실은 하늘과 독자가 판단할 것- 끔찍한 고문과 극형. “무장 부대가 우리 집에도 찾아와서…”라고 말한 피난 중인 15세 소녀 송씨의 증언- 창자를 끌어안고 맹렬한 불길 속에서 도망친 최씨의 이야기와 그 전후의 참혹한 광경- 잔혹한 악마는 누구인가? 청산도 말없이 주민들이 이 끔찍한 재앙을 피해 달아나니, 하늘과 땅에 물어볼 자가 없다. 남은 마당에는 ‘지카타비’ 자국만 남았다◇ 사건 개요: 8월 7일 오전 6시경, 그 마을에서 약 25리 떨어진 곳에 있는 화창면 주재소를 독립단이 습격하려다 중지하고, 약 25명이 신흥동으로 올라가 마을 사람들의 집에서 밥을 해 먹은 일이 있었다. 그 이튿날 새벽, 일본 경찰이 마을로 들이닥쳤고, 피해를 당한 여섯 가구를 포위한 후 독립단이 밥을 해 먹고 간 일이 있느냐고 추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사실대로 말하면 멸망할 것이 두려워 자백하지 않았다. 경찰은 이를 빌미로 끔찍한 고문을 시작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독립단이 밥을 해 먹고 간 일을 자백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9일에는 경찰이 일시에 그들을 석방하여 주민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11일 밤, 주민들은 느닷없이 그와 같은 참사를 당하게 되었다.◇ 피해 상황:김응채(金應彩)의 집 - 8명이 불에 타 죽었다. 김응채와 그의 아내, 세 아들, 차남의 아내, 손자 2살 된 아이 등 8명의 가족이 불에 타 사망했다.전명길(全明吉)의 집 - 2명이 타 죽고, 전명길과 그의 아버지는 행방불명이 되었다.이창섭(李昌涉)의 집 - 이창섭과 그의 아내, 아들 등 4명이 사망했다.최응규(崔應奎)의 집 - 6명이 사망했다. 최응규와 그의 아내, 그의 부모, 아들과 장모가 사망하고, 고용인 최흥주와 그의 아들만이 가까스로 살아남았다.송지항(宋芝恒)의 집 - 4명이 사망했다. 송지항의 아내와 사위 등이 사망하고 송지항 본인과 딸만이 살아남았다.김창성(金昌盛)의 집 - 4명이 사망했다. 김창성과 그의 딸, 장남, 고용인 등이 사망했다. 집 여섯 채가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가축과 곡식 또한 전부 타버려 물질적 피해는 수천 원에 달한다.◇ 사건 이후: 화재가 발생한 후, 마을 주민들은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시시각각 자신들에게도 참화가 닥쳐올까 두려워했다. 주민들은 남부여대하고 피란을 떠나거나 산속으로 몸을 숨겼으며, 마을은 마치 유령 마을처럼 변해갔다. 남은 시신들은 부근의 공동묘지에 임시로 매장되었고, 며칠 후에야 경찰이 사건 조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생존자 이야기: 최흥주는 그날 밤 자신과 가족이 끔찍한 재앙을 당했던 일을 설명했다. 무장 부대가 찾아와 가족을 결박하고 방 안에 가둔 후 불을 질렀다고 한다.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그의 아들은 배에 총을 맞아 창자가 나오는 상태에서 살아남았다.● 현장에서 발견된 일본군의 버선신문은 사건의 개요를 설명하는 장황한 기사 뒤에 또 하나의 기사를 싣습니다. 제목은 “잔학한 악마는 누구인가?”입니다. 그러면서 범인에 대한 판단은 하늘과 독자에게 맡긴다고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사건 발생 광경과 누구의 소행인지를 백방으로 탐문하였으나 그곳 사람들은 워낙 놀란 가슴이라 사람을 보기만 하면 뿔뿔이 피하여 달아나기만 하고 아무리 신문사 직원이라고 하여도 시종 독립단인지 경관인지 알지 못하여 의심하는 모습으로 분명 어떠한 사람들로부터 “그날 밤에는 화광이 층천한 바람에 비로소 무슨 일이 났나보다 생각하였으나 원체 위험한 까닭으로 가보지 못하고 그 이튿날 아침에 가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불만 여전히 탈 뿐이었는데 간혹 피해자의 문전에서는 “지까다비”(일본 버선)자리가 어지럽게 박혀 있을 뿐이더라“는 사람도 있는데 자기네들끼리 수군수군하는 눈치를 보아 이와 같은 참혹한 일을 한 사람이 누구인 것은 분명한 일이나 사람 죽이기를 물 마시듯 하는 이곳에서는 더 이상 자세히 조사할 길이 없더라.● 오늘은 좀 복잡한 사건에 대한 사진을 소개해드렸습니다. 평범해 보이는 가족사진처럼 보이지만 역사의 한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사진이 세상의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비극을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것도 1920년대 이즈음부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지난 주 백년사진 No.79 “26세의 일본 청년은 왜 히로히토 황태자를 총으로 쏘았을까?” 포스팅에 대해 일부 독자들께서 왜 황태자라는 표현을 썼느냐고 힐난하셨습니다. 필자로서 고민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백년 전 신문의 표현을 그대로 쓰되 띄어쓰기와 두음법칙 정도만 고치는 것이 기록에 대한 충실한 고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해에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꽤 많은 분들이 읽고 공감을 표해주셨습니다. 100년 전 신문에서 그 기사를 다루었던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존경의 의미보다는 일본 내에서도 천황의 아들이 분노의 대상일 수도 있다는 점을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아무리 문화정치라곤 하지만 식민 시대의 엄혹함을 고려한다면 쉽지 않은 기사 배치였을 것입니다. 일제시대 동아일보 사진에서 제일 유명한 사진은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다시 신문을 찍었던 사건에 등장하는 사진일 겁니다. 사그런데 그 당시 기자들이 남긴 유산은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뿐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살펴본 사진처럼 평범해 보이지만 정치적 어려움 속에서 큰 용기와 고뇌의 끝에 ‘겨우’ 남긴 기록들도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주 100년 전 신문에는 좀 더 가벼운 사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한때 최신 첨단기기였던 휴대용 브라운관 TV가 골동품 가게에 쌓여 있네요. 가끔 저 작고 흐릿하던 화면이 그리운데 말이죠.―인천 중구 유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내내 집만 지킬 수 있나요? 가끔 바깥 구경하면서 쉬어야죠. 귀까지 쫑긋 세운 걸 보니 엄청 재밌는 일인가 봐요. ―인천 중구 유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3일 서울 지하철 7호선 이수역 인근 마을버스 전용 정류장에서 승객들이 내리고 있다. 지난달 동작구는 마을버스만 정차하는 정류소 15곳에 노선 및 도착 시간 등을 실시간으로 알리는 정보안내단말기를 설치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전국 대부분 지역에 비가 그치고 날씨가 가을로 접어든 22일 서울 중구 덕수궁 돌담길이 ‘차 없는 거리’로 변했다. 시민들이 산책을 즐기는 가운데 어린이들이 바닥에 그려진 사방치기 그림 위에서 놀이를 하고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이번 주 백년사진에서는 정치인을 노린 총격 사건 현장 사진을 한 장 소개하겠습니다. 우리나라가 아니라 일본 도쿄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일본 제국의 황태자인 히로히토를 노린 총격 사건이 벌어졌는데 현장 사진을 뒤늦게 신문에 게재하면서 사건의 개요를 상사하게 설명하는 기사입니다. 섭정궁(攝政宮)은 일본 제국에서 섭정이 거주하는 궁전을 의미합니다. 기사에서 언급된 “섭정궁 전하”는 일본 제국의 섭정인 히로히토 천황(일본 제국의 124대 천황)을 가리킵니다. 건강이 나쁜 부친 다이쇼 천황을 대신해 1921년에서 1926년까지 섭정(攝政)을 하였습니다. 1926년 12월 25일 지병 악화로 다이쇼 천황이 죽은 후 히로히토 황태자가 천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히로히토가 정식 천황이 되기 전 (육혈포) 총격으로 사망할 수도 있었던 큰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1924년 9월 16일 동아일보 기사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호문 대역사건(虎門大逆事件)오는 10월 1일에 공판 시작, 범인은 대의사 아들 탄파대조작년 12월 27일 오전 10시 45분에 섭정궁(攝政宮) 전하께서 제국의회 개원식에 행차하시는 중, 호지문(虎之門) 부근에서 전하의 자동차를 향해 육혈포를 발사한 자가 있었다. 범인은 곧 체포되었고, 그 사건은 황실(皇室)에 대한 위해죄(危害罪)로, 형사소송법 제 310조 2항에 따라 대심원의 특별 권한에 속하는 사건이 되었다. 검사총장이 그 수사의 임무를 맡아 사건을 조사한 결과, 범인은 산구현(山口縣) 웅모군(熊毛郡) 주방촌(周防村) 출신이며 전직 대의사였던 탄파작지진(灘波作之進)의 넷째 아들인 대조(大助, 26세)로 밝혀졌다. 사건은 10월 1일에 공판에 부쳐졌다. 재판장은 횡전국신(橫田國臣) 씨이며, 배석판사는 풍도직통(豊島直通), 극행차랑(磯谷幸次郎), 송강의신(松岡義信), 서천일남(西川一男) 씨 등이다. 검사는 소산송길(小山松吉) 씨이고, 변호인은 화정탁장(花井卓藏), 암전주조(岩田宙造), 금촌력삼랑(今村力三郎) 씨 등이다.또한, 황실에 대한 위해죄는 형법 제 73조에 규정되어 있으며, 이 법에 따르면 천황, 태황, 태후, 황태후, 황후, 황태자 또는 황태손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가하려 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번 사건은 대심원의 특별 권한에 속하는 만큼 1심에서 확정되며, 공소나 상고는 허용되지 않는다.▽사건 발생 전후의 상황범인은 현장에서 곧바로 체포되었다. 12월 27일 오전 10시 40분, 섭정궁 전하께서 의회 개원식에 행차하시던 중 호지문 부근에서 전하가 탄 자동차를 향해 권총을 발사한 자가 있었다. 범인은 즉시 포박되었으며, 전하께서는 다행히 무사하셨다. 사건 당시 전하의 자동차가 지구금평정(芝區琴平町) 1번지에 도달했을 때, 호지문 공원과 교구신조(橋口新助) 씨의 집 사이 거리에서 연령이 25~26세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나 권총을 발사했다. 발사와 동시에 큰 소동이 일어났으며, 경찰들이 현장에서 범인을 체포하고 경시청으로 호송했다.▽철야 수색사건이 발생하자 검사국에서는 검사총장과 각 판검사가 출동했고, 경시청 전 부서가 총출동하여 현장을 조사했다. 현장에서 총을 압수하고 범인을 엄중하게 취조한 결과, 범인은 산구현 웅모군 주방촌 출신이며, 전직 대의사 탄파작지진(灘波作之進)의 넷째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날 밤, 경찰들은 추가 용의자를 체포하기 위해 철야 수색을 진행했으나, 별다른 연루자는 발견되지 않았다.▽예언(豫言)의 서신이번 사건의 범인 탄파대조(灘波大助)는 사건 발생 전, 형 정태랑(正太郞)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사회를 전율하게 할 대사건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언했다. 내용은 자기는 세상에서 버림받을 일서생이나 이번에 사랑에 지나는 힘으로 사회가 전율할 만한 대사건을 단행할 터이니 주목하여 달라고 하였는데 그 편지는 12월 27일 오후 2시에 경찰에 의해 압수되었으며, 범인은 이번 사건을 계획적으로 저질렀다는 것이 드러났다.▽범인의 가족범인은 전직 대의사 탄파작지진(灘波作之進)의 다섯째 아들이며, 부모가 다 있고 고향에서는 다소 명망이 있는 집이었고 그의 형들은 모두 실업계에 종사하고 있다. 그의 부친은 과거에 정치계에 몸담았으나, 이번 사건으로 인해 대의사직을 내려놓고 근신 중이다. 그 고향에서는 촌장까지 나서서 전촌이 근신하는 분위기라고 전해진다.▽학력은 어떠한가범인 탄파대조는 산구현 웅모군 주방촌 출신으로, 덕산(德山)중학교에서 4년급까지 마치고 산구(山口)에 있는 흥성(鴻城)중학교에 입학하여 2학기까지 다녔다. 이후 여러 번 고등학교 입학 시험에 떨어진 뒤, 동경으로 올라와 조도(早稻田) 고등학원에 다니며, 중학교 시절부터 정치와 시사에 흥미를 가졌다. 그는 동경에서 노동자로 생활하며 사회운동에 참여했고, 메이데이 시위에도 선두에서 참가했다. 동경에는 작년 9월 1일 대지진이 일어나던 날 정오경 자기 고향으로부터 도착한 것이라는데 그는 애탕(愛宕)경찰서 령목(鈴木)경부보에게 체포되였다더라.▽내각 총사직범인이 잡힌 이후로 일본 상하는 모두 경동하여 당시 산본(山本) 내각은 책임을 지고 총사직을 하고 산리(山梨) 경비 사령관과 탕천(湯淺) 경시 총감은 즉시 후등(後藤) 내무 대신에게 사표를 제출하였으며 그때 백상(白上) 관방 주사(官房主事), 정력(正力) 경무부와 소활 경찰서까지 경시 총감에게 사표를 제출하였고 호등 내무 대신은 즉시 근신하는 뜻을 보였으나 적화 방지(赤化防止) 단원이 후등 내무 대신 집에 뛰어드는 등 대소동이 있었더라 (동경 전보).● 사건의 요약1923년 12월 27일 발생한 일본의 사건으로, 의회 개원식에 참석하려던 히로히토 황세자를 겨냥해 권총이 발사되었는데 범인은 의사의 다섯째 아들인 26세의 탄파 대조라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사건 직후 체포되었고 철야 수사 결과 추가 용의자는 없는 단독 범행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대조는 사건 전 자신의 형에게 ‘내가 큰 사건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언한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총을 쏜 이유는 명확하게 취재되지는 않았지만 청년이 평소에 노동운동과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는 정황만 있을 뿐입니다. 사건으로 인해 당시 일본 내각이 총사퇴하였고 국민들이 크게 동요하였다고 합니다. 이 사건의 공판은 이 기사가 나간 후 보름 후인 1924년 10월 1일이 시작된다는 내용의 기사입니다. ● 그 청년은 어떻게 되었을까?10월 1일에 시작된 재판의 결과는 한 달 보름 만인 1924년 11월 13일 끝이 납니다. 사형이 집행되었으리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기사를 한번 보겠습니다. 일본대역범 사형(日本大逆犯死刑)긴 시일을 두고 심리 중에 있던 호지문(虎之門)사건의 범인 탄파대조(灘波大助)에 대한판결언도는 마참내 작 십삼일 횡전(橫田)대심원장 소산(小山) 검사총장의 담임으로 대심원내 특별 법정에서 열리었는데 방청석은 물론 입추의 여지없이 만원이었고 그 외에도 사십 여명의 판검사가 립회하여 장내의 공기는 말할 수 없이 긴장되었다. 정각 오전 10시 27분 횡전 재판장은 정엄한 어조로 판결 이유서를 낭독한 후 바로 언도에 들어가 “피고 탄파대조를 사형에 처한다”는 무거운 소리가 떨어지자 탄파대조는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높이 들고 법정이 떠나갈 듯이 무엇이라고 크게 부르짖은 후 청동(靑銅)같은 얼굴빛으로 법정을 나왔다는데 특별한 사정이 없기 전에는 일 주간 이내로 사형을 집행하리라고 하더라. (동경 전)게재지 동아일보게재일 1924-11-14● 트럼프 총격 사진과 차이가 나는 이유는 뭘까?우리는 최근에 미국 트럼프 후보가 괴한이 쏜 총탄에 스쳐 맞는 순간을 사진으로 보았습니다. 그 사진에 비해 100년 전 일본 황태자의 피격 사진은 총격 현장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단순히 흐릿한 흑백사진이기 때문이거나 순간 포착을 할 수 있는 카메라가 없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트럼프의 사진은 주인공이 주변의 인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상태였기 때문에 극적인 표현이 가능했습니다. 그건 미국의 정치 현장이 ‘무대’와 ‘관객’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촬영하기 좋게 세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공식적인 기자회견이나 연설, 정치적 의사 결정을 보여주는 장면은 일반적으로 무대 위에서 이뤄지며, 사진 기자들은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멀리서 망원렌즈를 준비하거나 가까이서 광각렌즈를 준비하고 기다립니다. 그리고 사진기자와 중요 인물 사이에는 카메라를 가릴 만한 요소가 없습니다. 그게 정치인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사전에 준비해 두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완벽한 촬영 조건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 순간이 희극이건 비극이건 제대로 카메라에 포착되어 역사 기록으로 남게 되는 것이구요. 오늘은 100년 전 일본 도쿄에서 벌어진 총격 사건 현장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눈에 띄시던가요? 댓글로 의견을 남겨주세요. 참, 지난주 백년 사진에서 제가 보름달 아래에 있는 식물을 수수라고 표현했는데 수수가 아니라 갈대 또는 억새라는 댓글 의견이 있었습니다. 독자분들의 해석이 맞는 것 같아 정정합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 다른 사진으로 뵙겠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저 액세서리를 걸고 다니면 서로 짝을 찾기도 좀 쉬워질까요?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명절마다 할머니 집 벽에는 몇 달 새 훌쩍 큰 손주들의 키가 새겨집니다. 마치 나무의 나이테처럼. ―경기 부천시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익어가는 수숫대 위로 걸린 둥근 보름달 사진보름달 아래 수수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저 수숫대 어딘가에서 메뚜기나 귀뚜라미가 휴식을 취하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저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기자는 풀 위에 배를 깔고 누웠을 것입니다. 1미터가 채 안되는 수수 너머 하늘에 떠 있는 둥근 달을 함께 찍기 위해서는 그 방법 밖에 없었을 테니까요. 풀밭에 누워 하늘을 향해 카메라를 이리저리 옮겨보며 앵글을 잡았을 겁니다. 지금의 카메라라면 카메라 뒤의 LDC 판을 꺽어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손만 바닥에 내리면 되지만 그때는 그랬을 겁니다. 1924년 9월 13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추석 스케치 사진입니다. 기사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추석은 금일◇더도 덜도 말고 팔월 한가위만 같으라지요. 오늘이 바로 팔월 한가위입니다. 우리는 이 날을 추석(秋夕)이라고 불으고 가배일(嘉俳日)이나 가배절(嘉排節)이라고도 씀니다 .추석은 한문 문자로 된 말이겠고 가배는 우리의 옛말을 한문으로 취음하여 쓴 것이겠습니다. 가배가 혹은 한가위란 가위의 와전이 아닌가 합니다. 지금 정월 보름날을 대보름이라고 하는 것 같이 예전 『신라』때는 팔월 보름날을 한가위라고 하얏든가 합니다.◇신라 때는 팔월 보름날이 대단히 중하게 알든 명절입니다, 수서(隨書)와 구당서(舊唐書)의 증거를 들지 않아도 이것은 사실이라고 단언할 수 있니다. 근년에도 설、한식、추석、동지를 사(四)명절이라하야 집집이 산소차례까지 지냈었습니다. 지금 설과 동지에는 지내지 않는것이 보통이고 한식과 추석 중에는 추석이 더 성황입니다. 시골 농가에서는 추석을 설보담도 낫게 여깁니다. 지금은 쌀나무 찾으실 서울 양반이 없겠지요마는 혹 그런 양반이 있다하면 이 말을 곧이 듣지 않으실터이지요. 잡담 그만두고 신라 때 이야기나 적겠습니다.◇신라 유리왕(儒理王)때 륙부(六部)를 나누어 두 편을 만들고 두 왕녀가 각기 수두(首頭)가 되어 부내 여자들을 데리고 길삼내기를 하였답니다. 이 길삼내기는 칠월칠석날 (혹은 칠월 보름날이라고 합니다)부터 시작하야 팔월 추석날에 와서 서로 비교하는데 진 편이 음식을 장만하야 이긴 편을 대접하고 두 편이 춤추고 노래하고 한바탕 잘들 놀았답니다.● 여러분의 추석 풍경은 어떤 모습인가요?요즘 신문에 수숫대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 사진을 쓰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단순한 자연 풍경보다는 추석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 흥미를 끄는 요소이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지금은 서울역, 용산역, 고속버스터미널에서 포착되는 귀성객이나 역귀성객 사진이 실립니다. 아니면 긴 연휴를 이용해 해외로 휴가를 떠나는 시민들의 행렬이 신문에 실리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올해 추석 풍경은 어떤 모습이신가요?궁금증이 하나 생겼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추석이나 설을 맞아 고향을 찾아가는 풍경을 만들었던 걸까요? 농촌에서 가족 친척들이 모여 살던 시절에는 명절이라고 하더라고 동네에서 어른의 댁에 모이는 정도였을 테니 혹시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사온 사람들이 명절을 맞아 대규모로 서울에서 고향으로 가는 풍경을 만들게 된 걸까요? “귀성객”이라는 키워드로 과거 기사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1939년 12월 27일 동아일보 기사에서 ‘새해 귀성객’이라는 표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금년 분은 전부 매진금년도 앞으로 닷새를 남기고 턱앞에 박두하엿는데 년말의 려행객은 예년에보 지못하는 폭주를 뵈여 전조선 각역은 안비막개의 분주상(奔走相)을 보이고 있다.경부、경의 양국제간선은 기차마다 만원이여서 서서가는 승객이 태반이며 부정기 급행(不定期急行)과 임시급행(臨時急行)도 모다 초만원을 일우어 새해귀성객(歸省客)들로 역원들은 눈코를 못 뜨고 잇다.일제 강점기였던 1939년에 연말을 맞아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가려는 귀성객들로 전국의 기차역에서 일하는 역무원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기사내용입니다. 귀성객이라는 표현은 그 후에는 잘 안 쓴 모양입니다. 동아일보 DB에서는 그로부터 20여 년 남짓 지난 1957년 9월 8일에 다시 등장합니다. ◇ 오늘 추석 – 들끓는 귀성객(歸省客)해마다 찾아오는 명절이건만 이날을 맞아 즐기는 어린이들에게는 언제나 새롭고 즐거운「중추가절」이기도 하다. 이날 어른은 어른대로 선형을 찾아 성묘에 바쁘겠고 어린이는 또 그들대로 때때옷에 몸과 맘이 들뜬 채 하루를 즐기겠는데▼이날을 하루 앞둔 어제(음一四일)서울역은 추석맞이 귀향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매표구 개찰구에 들어선 장사진. 십여개씩 연결된 각선 여객차 내에 박혀있는 승객들은흡사 콩나물|▼서울역 집계에 의하면 지난 六일의 매표수만 해도 평일보다 약 三배나 됐다고▼들에는 어느새 五곡이 여물어가고 하늘도 드높고 푸른 이날 서민층의 명절「八월가위」를 맞는 전야 서울 장안은 살아난 듯 활기를 띠웠다.● 본격적인 귀성 행렬 사진은 1960년대부터기사에는 등장했던 ‘귀성객’ 사진이 실제로 등장하는 것은 1960년대 말 부터입니다. 지금은 잊혀진 풍경이지만, 기를 쓰고 고향을 가던 우리의 50년 전 풍경을 여러분께 공유합니다.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명절 귀성객들의 사진은 당시의 사회적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시기는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대규모의 이농 현상이 벌어진 때였고, 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도시로 이동했습니다. 도시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명절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재회하려 했고, 그로 인해 매년 명절마다 대규모 귀성 행렬이 펼쳐졌습니다. 사진을 보시면 알겠지만 단순히 행렬 수준이 아니라 ‘귀성 전쟁’이라는 표현이 결코 과하지 않았습니다. 설날과 추석 같은 큰 명절이 다가오면 교통편은 턱없이 부족했고, 고향을 가려는 사람들은 긴 시간 동안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귀성 전쟁을 치렀습니다. 기차표를 구하지 못했던 걸까요? 열차의 출입문이나 지붕에 매달려 귀성길에 오르던 모습도 있습니다. 이처럼 산업화와 도시화는 사람들의 생활 패턴을 변화시켰고, 고향으로 가는 길은 그저 이동의 과정이 아닌 고된 여정이었습니다.지금은 교통 인프라가 개선되고 자동차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예전처럼 극적인 귀성 전쟁은 사라졌지만, 당시 고향을 향한 귀성 행렬은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흔적을 담고 있는 중요한 기록입니다. 기차역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고향으로 향하는 열차에 오르기 위해 필사적으로 줄을 서고, 차표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모습은 이제는 희미해진 기억이지만, 그 시절 고향을 향한 간절한 마음은 여전히 우리의 가슴 속에 남아 있습니다.오늘은 100년 전 한가위 보름달 사진에서부터 1960, 70년대 귀성 풍경을 되짚어 보았습니다. 당시의 고단했던 여정과 지금은 잊힌 귀성 전쟁의 모습을 떠올리며, 풍성한 한가위 보내시길 바랍니다.여러분께서는 그 시절 명절의 풍경을 기억하고 계신가요? 고향으로 향하던 긴 여정이나, 교통 수단이 부족했던 그 때의 이야기를 공유해 주실 분이 계신지 궁금합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