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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드 카펫 위로 등장하는 푸틴의 모습평양 김일성 광장에 임시로 설치된 구조물 앞에 레드 카펫이 깔려 있다. 광장과 건물 위아래에는 유치원생을 포함한 수만 명의 평양 인민들과 군인들이 행사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인민들은 김정은 위원장과 고위 참모들이 붉은 커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다. 쇼가 시작될 모양이다. 잠시 후 군인들이 붉은 커튼을 열자 김 위원장 일행이 밖으로 다시 나온다. 김정은의 정치 행사 진행을 총괄하는 조선로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 현송월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아마 푸틴이 행사장에 도착한다는 전화일 것이다. 광장 앞 건물에 걸린 대형 시계를 카메라가 비추자 12시 정각을 알리는 소리가 들린다. 방송 카메라의 마이크에는 드론이 공중으로 올라가며 내는 소리도 들린다. 마치 영화 촬영장의 ‘레디 액션’ 소리처럼 들린다. 화면 왼쪽에서 카메라를 멘 두 사람이 허겁지겁 뛰어온다. 김정은 위원장의 사진을 찍고 있던 북한 ‘1호 기자’들이 카메라를 멘 두 사람에게 자리를 잡으라고 도와준다. 북한 최고 지도자를 찍는 사진기자들이 러시아 푸틴을 수행하는 사진기자들을 돕고 있는 것이다. 원래 사진기자들은 최고지도자보다 먼저 현장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헐레벌떡 뛰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모습은 곧 최고지도자도 현장에 들어온다는 의미이다. 기마대가 도열해 있고 그 앞으로 군 의장대가 도열해 만든 통로로 푸틴이 탄 차가 들어와 멈춘다. 푸틴과 김정은이 악수를 하고 그 장면을 양국 사진기자들이 찍기 시작한다. ●전날 밤 촬영 현장24년 만에 평양을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의 만남은 전세계 이목이 집중되는 행사였다. 서울의 한낮 온도가 36도에 육박한 폭염의 날씨였지만 평양에는 큰 규모의 군중 행사가 열렸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에 대한 공식 환영식을 유튜브를 통해 몇 번 돌려 보았다. 정치 행사라고 하기에는 그 스케일이 너무나 커서 마치 블록버스터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 주인공 푸틴을 위해 평양에 세트장을 엄청나게 크게 만들고 시나리오를 짜고 인원을 동원해 놓았다. 그러나 전날 밤 남주(男主)는 촬영 현장에 늦게 도착했다. 감독 입장에서는 속상하고 기다리던 스태프와 엑스트라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몸값 비싼 주인공에게 뭐라 속시원하게 퍼부을 수도 없다. 남주 스케줄에 맞춰 나머지 사람들이 움직이며 촬영을 마칠 수밖에 없다. 당초 18일 저녁에 평양에 도착할 것이라는 예상보다 훨씬 늦은 19일 오전 2시가 넘어야 평양에 도착한 푸틴은 1박 2일이 아닌 당일치기 순방을 했다. 국제 외교 무대에서 지각 대장인 푸틴이 이번에도 늦을 것이라는 것을 북한이 예상했던 것일까? 북한은 푸틴의 짧은 체류 시간 동안 최대한의 촬영분량을 뽑아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탑 클래스의 배우를 섭외한 감독이라면 당연히 그럴 것 같다. 첫 번째, 19일 새벽 다른 스탭과 참모들은 다 귀가시켰지만 촬영팀은 공항에서 김위원장과 함께 푸틴을 기다렸다. 외신을 통해 들어온 사진을 보면 푸틴을 기다리고 있는 김 위원장과 현송월 부부장 이외에 촬영용 사다리에서 대기하고 있는 복수의 사진기자들이 보인다. 두 번째, 드론과 촬영 로봇을 준비했다. 드론이야 요즘 많이 활용하는 촬영 장비이지만 촬영 로봇을 정치 행사에서 활용하는 것은 이채로웠다. 군인들의 행진을 왔다갔다 하면서 촬영하는 모습이 생중계 화면에 잡혔는데 이 로봇이 푸틴의 사열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준비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평범한 앵글이 아닌 스펙터클한 화면을 위한 시도로 보인다. 셋째, 고프로를 준비했다. 고프로는 요즘 예능 방송에서 많이 쓰는, 방수와 충격 방지가 되는 소형 카메라이다. 고프로는 러시아산 리무진 아우르스의 보조석 위에 설치되어 푸틴과 김정은이 차례로 운전을 하며 화기애애한 표정을 짓는 순간을 기록했다. 고프로는 북한 ‘1호 사진기자’의 카메라에도 설치되었다. 보통의 경우 사진기자들은 스틸 사진만을 찍는다. 1초를 1/250초로 나눠 찰각찰각 찍는 방식이다. 연속 화면은 ENG방송용 카메라 기자들이 별도로 준비한다. 그런데 이번 환영식에서 북한 1호 사진기자들은 자신들의 렌즈 위에 고프로를 고정시켜서 스틸 사진과 동영상도 동시에 촬영했다. 역시 짧은 촬영 시간에 최대치의 분량을 뽑아내기 위한 총감독의 아이디어인 것으로 보인다. 넷째, 참모들의 스마트폰도 활용되었다. 지각 대장 푸틴이 공항에 내린 후 숙소인 금수산 영빈관에 도착하는 순간 현송월이 스마트폰을 꺼내 촬영을 시작했다. 푸틴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중요한 장면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촬영 현장의 숨은 공로자들전날 스케줄이 꼬여 노심초사했을 평양의 행사 담당과 선전선동 담당자들은 충분한 분량의 촬영을 했을까 궁금하다. 전세계에서 이런 화면 구성이 가능한 나라는 이제 없다. 폭염 속에 한복을 입고 꽃술을 들고 있는 어른들, 캐주얼한 복장의 대학생들, 반바지와 반 팔의 어린이들은 화면을 빛나게 하는 조연들이다. 그들의 대사는 ‘조러친선, 푸틴 환영’으로 제한된다. 북한과 러시아의 정상이 만나서 보여주는 일정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익숙한 풍경이다. 단독 정상회담, 확대 정상회담, 공동기자회견, 그리고 기자회견장 포디엄 뒤에 설치된 대형 국기는 이제 국제 표준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주인공을 위해 그리고 절대권력을 갖고 있는 감독에 의해 저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 스펙터클한 화면이 생산될 수 있는 사회라는 게 여전히 낯설다. 애국심으로 출연료를 대체할 수 있는 사회는 언제까지 이어질지 궁금하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전화 연결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교환수들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1924년 6월 13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좁은 사무실 벽에 빼곡하게 나열된 전화 교환기 앞에 소녀들이 앉아 있습니다. 그 뒤로 감독자들이 듬성듬성 서 있습니다. 빨간 불빛이 들어오면 전화 연결을 원한다는 신호입니다. 원하는 번호로 재빨리 연결시키는 게 소녀들의 역할입니다. 기사를 한번 보겠습니다. 전화통을 떼어 귀를 대고 있으면 다같이 “하이 하이” 소리가 나온다. 그러면 “하이 하이”소리는 기계에서 나오는 것이냐? 아니다. 사람 중에도 가장 자랑이 많고 청춘의 피가 끓는 꽃같은 여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다. 조선 사람의 전화 가입자와 가장 인연이 깊은 광화문 전화분국에 가면, 눈빛같이 흰 적삼에 자줏빛 치마를 입은 묘령의 여자가 전부 수화기를 머리에 기우고 반짝반짝 일어나는 붉은 불빛을 쫓아 번개같이 날쌔게 부르는 번호에 줄을 꽂아주어 전화를 접속시킨다. 한 사람 앞에 수 많은 번호를 맡아 가지고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접속시켜도 뒤를 이어 불러 온다.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같이 어떤 가입자든지 전화를 걸면 그 전화에 불이 켜지고 교환수는 그 불을 보고 몇 번인가 물어 저 편에서 부른 번호에 꽂아 주어 말을 하게 하고 만일 부르는 번호가 말하는 중이면, “하나시주(통화 중)”하고 대답한다. 더욱 서울 안에서도 구역을 따라 전화번호 책에 쓰인 대로 용산이면 용산을 불러 대어 주며 시골로 전화를 걸려면 먼저 시외를 불러 가지고 그 시골의 번호를 부르게 되는 것이다.사진의 해상도가 너무 낮아 다른 사진을 찾아 보았습니다. 비슷한 모습의 교환실 모습 사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위의 사진에서 50년이 지난 사진입니다. 전화 교환원이라는 직업은 우리나라에 전화가 도입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전화가 들어온 것은 1902년 3월 20일 대한제국 통신원에서 지금의 서울인 한성과 인천 사이에 전화를 임시로 설치하면서부터라고 검색이 됩니다. 이 시절에는 전화 교환수를 통하지 않으면 전화를 걸거나 받을 수 없었습니다. 전화기를 들거나 핸들을 돌리면 교환수가 나와 원하는 번호를 알려 달라고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현재도 군대에서는 교환병을 통해 전화 통화를 합니다. 위 사진은 그 교환수들이 모여있는 공간을 촬영한 것입니다. 1971년이 되자 전화 교환원 없이 전화를 건 사람이 직접 다이얼을 돌려서 상대방과 통화할 수 있는 자동식 전화가 개통되었습니다. 이에 전화 교환원을 거치는 수동식 전화기는 ‘흑통’, 교환원 없이 가입자가 직접 전화를 걸 수 있는 자동식 전화기를 ‘백통’이라 불렀습니다. 백통은 당시 신청을 해도 한두 달 이상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귀했으며, 가격이 비싸 부의 상징이었다고 합니다. 1987년 전국 자동 교환망이 완성되면서 1가구 1전화 시대가 열렸고, 전화 교환원 없이 전화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15세 소녀들 생계 위해 전화 교환수로 취직초기 전화 교환원은 대부분 남성이었으나 1920년대 이후로 여성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1920년 4월 12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젊은 여성의 새로운 직업으로 전화 교환수를 소개되고 있습니다. “경성 우편국에서 전화 교환수로 조선 여자를 채용한다는 공고가 나왔고, 학력은 보통학교 졸업 정도면 충분했으며, 일본어 가능자가 우대되었다. 처음 입사 후 3개월간 견습 기간 동안 일당 51전을 받았고, 이후에는 60전 이상과 근면 수당을 지급받았다. 근무 시간은 45분 일하고 15분 휴식하는 방식으로, 하루 8시간을 넘지 않았다. 당시 3명의 교환수가 있었는데, 모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생으로 일을 잘해 앞으로는 여성만 채용하기로 했다. 나이는 15, 16세로 야근을 못하게 하는 부모들 때문에 야근은 하지 않았다”는 내용입니다. 1931년 7월 19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따르면 “서울의 전화 가입자는 3,140명이고 교환수가 352명.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의 두 시간이 가장 바쁜데 한 교환수가 한 시간에 약 210회씩 응하고 있다. 교환수가 늦게 대답한다고 해서 갖은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도 있어 직업으로서는 아주 힘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1958년 12월 11일자 기사도 함께 참고해 보겠습니다. “1분 동안 많을 때는 60통의 통화를 교환해야 하는데 좋은 청각과 고운 음성과 재빠른 솜씨가 필요하다. 이런 솜씨를 습득하는 길은 중앙전화국에 설치된 교환양성소에서 3개월간 무료로 수속을 받고 다시 시험을 치른 다음 증명서를 받으면 일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 국제화에 맞춰 외국어 전문 전화교환수 출현…이제는 사라진 직업1980년대에는 국제화시대에 맞춰 국제전화 교환수가 있었습니다. 1983년 6월 21일자 기사 “다이얼「102」「117」을 돌리세요”를 보면, 전 세계 157개국과 하루 평균 1만 7천건(해외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4만 건)의 국제전화통화를 4백 명 가량의 국제전화교환수들이 8시간씩 3교대로 접속시켜주었다고 합니다. 또 “국제전화교환수들은 선발시험에 통과된 후 3개월간의 영어 일어등 어학교육을 받고도 항상 개방돼있는 어학실습실이나 VTR교재등을 이용하여 외국어공부를 계속한다。 또 영어와 일어 중국어 불어 독어「아랍」어등 제2외국어에대한 리포트를 매주 2페이지씩 제출한다。 이처럼 어학훈련을 받아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상대방 이야기를 듣게되기까지는 1년남짓 걸린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4백 명의 교환수 중 남성은 3명에 불과했다고 하네요. 1983년 8월부터는 미국 등 일부지역에는 교환수를 거치지 않고 직접 외국으로 전화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사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화 교환원의 직업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점차 자동화되고 사라졌지만, 전화 교환원들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오늘은 100년 전 서울의 전화 가입자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던 소녀 전화교환수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전화교환수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신 적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의 경험을 나눠주세요.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흔해진 시대에, 우리 사진의 원형을 찾아가 봅니다. 사진기자가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매주 한 장씩 골라 소개하는데 여기에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이 더해지면 사진의 맥락이 더 분명해질 거 같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4일 오후 경기 평택시 해군2함대사령부에서 열린 제1연평해전 전승 25주년 행사에서 내빈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이날 행사에는 제1연평해전 당시 지휘관을 포함한 참전용사와 가족 90여 명, 2함대 장병과 군무원 등 250여 명이 참석했다. 제1연평해전은 1999년 6월 15일 한국전쟁 이후 남북 해군 간 발생한 최초의 정규전이다. 평택=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서울 낮 최고 기온이 33.7도를 넘긴 12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사거리 그늘막에서 시민들이 햇볕을 피하고 있다. 이날 강원 강릉시에서 낮 기온이 35.3도까지 올라간 가운데 기상청은 광주, 경남 양산시, 전남 순천시 등에 폭염주의보를 발령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킨텍스에서 14일까지 열리는 2024 서울국제식품산업대전에 참가한 업체가 냉동 김밥 제품을 바이어에게 소개하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는 전 세계 52개국 1605개 기업이 참여한 가운데 수출상담회, 라이브 커머스 대전, 어워즈, 세미나 등의 행사가 열린다. 고양=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익을수록 진해지는…옛날 통닭의 몸통이 시간을 머금으며 노르스름하게 변해 갑니다. 치맥 약속을 잡고 기다리는 시간도 익어 갑니다. ―서울 성동구 행당시장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땔감에 꽃이…땔감용 폐목이 새 생명을 품었네요. 스님께서 차마 불을 때진 못하실 거 같죠? ―경북 김천 직지사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단오를 즐겼던 시절의 사진 단오(端午). 민족의 명절이라고 얘기는 들었지만 어떤 날인지 사실 잘 모르고 지내왔습니다. 모내기를 끝내고 여름을 기다리며 청포물에 머리를 감는 날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습니다. 올해는 6월 10일이 단오입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1924년 6월 7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기사는 따로 없고 간결한 사진 설명만 있는데 단오를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이라고 합니다.고궁처럼 보이는 건물의 기와 처마가 사진 왼쪽으로 보이고 그 옆으로 많은 인파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요즘 과천 대공원을 가득 채우는 시민들의 행렬 모습 같습니다. 사진 속 인물들은 주로 성인 여성들이고 그 뒤로 머리를 치렁치렁하게 기른 여자 아이들도 보입니다. 여성들은 양산을 쓰거나 손에 들고 있기도 합니다. 아내와 자녀들을 따라 나선 중년의 남성들도 보입니다. 중절모를 쓰기도 하고 갓을 쓴 사람도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커다란 비석이 하나 보여 이곳이 어떤 장소의 입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사진이 찍힌 장소는 ‘남묘’입니다. 처음 듣는 곳인데다 요즘에는 사라진 지명 같아서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중국의 전설적 장군인 관우의 사당. 신격화된 관우를 관왕, 관성제군(關聖帝君)이라고 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으로 파병된 명(明)의 유격장(遊擊將) 진린(陳寅)은 1597년(선조 30) 전투에서 총상을 입었다가 회복하면서 관우가 자신을 보호했다고 여기고 관왕묘 건립을 시작하였다. 원래의 위치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도동1가 9번지였다. 6·25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57년에 재건하였고 1979년에 도동지구 재개발을 진행하면서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로23길 278[사당3동 180-1]로 이전하였다. 현재 위치에는 남아 있지 않다”는 내용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남산 자락 어딘가에 있었던, 관우 장군을 신으로 모시는 사당을 의미하는 것이었네요. 서울 동대문에 남아 있는 동묘와 쌍을 이룬 사당이었다고 합니다. ● 100년 전 단오 풍습에 대한 기사그러니까 이 사진은 100년 전 명절인 단오를 맞아, 시민들이 서울 용산에 있었다는 ‘남묘’로 나들이 나선 모습을 촬영한 것입니다. 남묘 안에서는 널뛰기 그네뛰기 씨름 등 각종 놀이와 공연이 펼쳐졌을 겁니다. 개별적인 놀이나 공연의 순간보다는 인파를 통해 단오의 규모를 표현하려고 이 사진을 썼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쉬운 마음에 관련 기사를 찾아보니 위 사진이 게재되기 하루 전인 1924년 6월 6일자 2면에 그네 타는 사진과 함께 단오에 대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좀 길지만 아래에 소개합니다. ◇오늘은 단오날이다. 단오란 이름이 어째서 생겼노하니 단오일(端午日)은 단오일(端五日)과 말이 같고 단오일(端五日)은 초오일(初五日)과 뜻이 다르지 않다. 옛글에는 8월 단오일이란 것도 있다. 1년 열두달에 다달이 있는 단오일을 5월이 혼자 차지 한 것은 9일을 9월이 혼자 차지한 것과 비슷하다. 오늘은 옛날 중국 사람 굴원(屈原)이 명나수(汨羅水)에 빠져 죽은 날이다. ◇그러므로 단오날 굴원의 일이 연상되는 것은 한식날 개자추(介子推)일과 흡사하다. 중국 남방에 성행하던 용(龍)배 놀이는 굴원의 혼을 위로하던 것이라는데 놀이가 끝판이 되면 의례 종(粽)이라고 하는 것을(찰밥을 세모지게 수수잎 같은 것에 싸서 찐 것) 오색 실로 얽어서 물에 던졌었다. ◇이것은 굴원의 혼령이 먹으라는 뜻인데 오색 실로 억는 건 교룡(蛟龍)같은 것이 뺏어 먹지 못하게 하는 뜻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중국에서 종(粽)과 비파(枇杷)라는 실과(實果) 혹 다른 물품을 서로 주고 받고 한다. 예전 우리나라에서는 궁중에서 오늘 쑥으로 호랑이 모양 만든 것을 각신(閣臣)들에게 하사하는 전례가 있었다. ◇ 이것이 애호(艾虎)라고 하는 것인데 오늘날 애호(艾虎)는 문간에 매달면 벽사(闢邪)한다는 중국 풍속에서 온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약쑥을 뜯는 습관이 있다. 부채의 절선(節扇)이란 것은 전에 오날 외방관원들이 부채를 진상도 하고 친척(親戚) 지구(知舊)에게 주기도 하였었다. 그럼으로 절선(節扇)이란 말은 즉 단오선(端午扇)이란 말과 같다. 연중 행사에는 본래 미신에서 나온 것이 많지만◇ 오늘 창포물로 세수하고 창포를 깎아서 머리에 꽂는 것은 벽귀(闢鬼)한다는 미신이다. 또 계집아이들에게 물어보면 단오날 그네에 올라앉지 않으면 여름에 더위 먹는다고 참정 말만 한다. 미신이라니 말이지 그 전에 관상감(觀象監)에서 부작(부적)을 써서 궐문에 붙이는 것이 있었다. 그 부적에 쓰던 말은 이러하다. 오월 오일, 천중지절, 상득천복, 하득지복, 치우지신, 동두철액, 적구적설, 사백사병, 일시소멸, 급급여률령◇ 천중절(天中節)이란 이름은 단오의 별명이다. 오늘은 천기(天氣) 하강(下降)하고 지기상승(地氣上昇)한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오늘은 범방(犯房)하면 즉사한다니 젊은 남녀들 조심할 일이다. 이 이야기 끝막기로 우스운 듯 하고 긴요한 것 하나를 적는다.◇ 뛰는 낙거미를 승호(蠅虎)라고 하는데 오늘 이것을 잡어 터트려서 붉은 팥에 칠해서 음건(陰乾)해 두면 그 팥이 깡창깡창 뛰며 파리를 잡는다고 하니 파리채 대신 만들어 보면 어떠할까?● 신세대 사진기자들 그리고 사라지는 전통 – 단어는 남아 있지만 풍경은 사라지고 있는 단오 사진괜히 복잡한 기사를 소개해 드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중국 시인 굴원이 명라수에 빠져 죽은 날에서 단오가 유래했다는 것과, 용배 놀이, 찰밥을 오색실에 싸서 호수에 던지기, 쑥으로 만든 호랑이, 부채를 선물하는 이유, 창포물에 머리를 감는 이유, 그네를 꼭 타야 하는 이유, 이날 젊은 남녀들이 조심해야 하는 일, 파리를 쫓는 방법 등 많은 얘기들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독자들은 미신이라고 받아들일만한 내용들도 많아 단오가 민속 명절이라고는 하지만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합리성을 중시하는 시대와의 불화라고 할까요. 단오는 신문에서 어떻게 사진으로 표현되어 왔을지 궁금해 동아일보 데이터베이스(DB)에서 지난 사진들을 검색해보았습니다.1935년 널뛰는 소녀들1968년 창녕투계팀 시범1978년 동아방송 단오맞이 민요대잔치1977년 강릉단오제의 가면무극1992년 무주택의 날 선포 및 주거연합 창립 3주년 단오한마당1996년 서울 용산 가족공원에서 단오절 행사로 투계 시범 공연1998년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펼쳐진 단오축제에 참가한 여성이 그네뛰기2000년 강릉 단오제에서 그네 타는 여인2000년 전남 영광군 법성면 ‘숲쟁이 공원’에서 한 부녀자가 그네를 뛰고 있다.2001년 단오절 맞이 창포물에 머리감기. 국립민속박물관2002년 서울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그네뛰기(이후에도 창포 머리감기와 그네뛰기 사진이 유사하게 반복)2024년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단오제 홍보행사에서 참가자들이 창포머리감기 시연등이 검색되었습니다. 사진의 양이 많지 않았습니다. 지난 100년 간 신문사에서 관심이 별로 없었던 주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1970년대 유년 시절을 보내고 1990년대 말부터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저에게도 단오는 무척 낯선 명절입니다. 다만 청포로 머리를 감는다던지 그네를 타는 모습은 사진기자를 하면서 몇 번 보았습니다. 사진기자라는 일 중에는 신기하고 특별한 것을 기록하는 일이 있으니까요. 특히 2000년대를 지나면서 지방자치단체들이 축제를 많이 기획하고 전통을 살리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전국에서 단오 행사를 많이 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문에도 가끔 단오 관련 사진이 실립니다. 한국 전통을 체험하는 외국인들이 창포에 머리를 감는 모습도 신문과 방송에서 보도되곤 합니다. 하지만 단오의 의미를 상기시키기나 홍보하는 행사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의미는 희석되었지만 이미지는 반복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사진기자를 하면서 가끔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저와 제 세대들이 경험한 것과는 완전이 다른 뭔가의 사진을 찍을 때 드는 생각입니다. 신기하거나 사라지고 있는 것을 뉴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찍는 이벤트나 풍경 사진들이 지금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아이템일까 하는 궁금증입니다. 시골 5일장을 겪어 본 사진기자는 많지 않지만 사진기자 생활을 하면서 촬영은 해보게 됩니다. 회사에 들어왔을 때 제가 놀랐던 사진이 있었습니다. 조롱박 사진이었습니다. 선배가 전라북도 고창의 시골 돌담길을 배경으로 3개의 조롱박이 걸려있고 그 앞을 광주리를 인 아낙네가 걸어가는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이 1면에 멋지게 게재되었습니다. 살면서 처음 보는 광경인데 누군가에게는 일상일 수도 있구나 하는 충격이었을까요? 그 사진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강력한 이미지로 남아있습니다. 사진이라는 매체가 사라지는 것을 기록으로 남겨놓을 수 있는 매체이다 보니 사진기자들이 과거의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100년 전 서울에서 단오를 맞아 나들이 나섰던 인파 사진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단오절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단오 풍경이 신문에서 많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이미지도 독자들의 감수성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을 특별하게 보셨나요? 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흔해진 시대에, 우리 사진의 원형을 찾아가 봅니다. 사진기자가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매주 한 장씩 골라 소개하는데 여기에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이 더해지면 사진의 맥락이 더 분명해질 거 같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지게차 작업 필요하신 분∼지게차에 붙어 있는 ‘40분 작업에 8만 원’ 홍보 문구입니다. 요즘 지게차 학원이 호황이라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군요. ―서울 광화문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9일 구강보건의 날을 앞두고 4일 서울 강남구보건소가 1층 앞마당에서 올바른 구강 관리법 등을 상담하고 있다. 보건소는 5일까지 구강건강 상담, 세균막 검사, 헌 칫솔 교환 이벤트 등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비너스의 슬리퍼’란 별칭을 가진 희귀한 난초라는데요. 잘 보니 비너스가 아니라 강아지가 보이는 듯해요.―서울 강서구 서울식물원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100년 전 한강에서 Boat Race가 열리다마치 시간 여행을 떠난 것 같습니다. 여기, 흐릿한 흑백사진이지만 탄성이 절로 나오는 시원한 항공사진 한 장이 있습니다. 마치 시간 여행을 떠난 것 같습니다. 백년 전에 이런 앵글의 사진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1924년 5월 26일자 동아일보 3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어떻게 된 사연인지 설명을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강상(江上)의 단정경조(短艇競漕)조선에서 처음 보는 “보트레스”대회는 만철사우회(滿鐵社友會) 운동부 주최로 얄궂은 여름 비가 오락가락 뿌리다 마다하는 어제 25일 아침 7시 반부터 한강 인도교 아래에서 성대히 열리었다. 강물 위를 육지로 삼고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더 신선한 여러 가지 재조가 많았으며 만철각과(各課)의 경주로부터 27종의 흥미진진한 경기가 마친 후 결승 경주가 있어 강상의 풍미 있는 경기도 성황리에 마치었다 한다. 경기의 성적은 내일에... 사진은 강 위에 뜬 “보트”의 우승을 다투는 찰라. 한강에서 단정(Boat) 경주(Race)가 열렸습니다. 만주철도 사우회 주최로 한강 인도교 아래에서 1924년 5월 25일 열렸는데 우선 26일자 신문에는 위의 사진을 먼저 싣고 경기 결과는 27일자에 상세하게 알려주겠다는 기사입니다. 27일자 신문을 찾아보니 아래와 같은 기사가 또 실려 있습니다. 滿鐵社友會運動部主催의第一回全朝鮮短艇竸漕大會를再昨二十五日午前七時半부터漢江人道橋下에서盛大히開催하얏다함은既報한바어니와經過中第一先着者는如左하다고第一囘驛務二年(三分十九秒)▲二囘工塲旋盤(三分五十三秒)▲第三囘工塲製鑵A(三分一秒)▲第四囘工務事務所C(三分二十秒)▲第五囘十五俱樂部(三分)▲第六囘工塲體育協會B(二分五十秒)▲第七囘(日船)(一)金順三、金昊成(四分二十二秒)▲▲第八囘(各課代表豫選)(一)工務課(四分五十七秒五分之二)▲第九囘橫濱火災(二分五十五秒)▲第十囘(各課代表豫選)(一)機械課(四分五十六秒)▲第十一囘司計課타임不明▲第十二囘(各課代表豫選)▲第十三囘經理課B(三分十八秒五分之三)▲第十四囘(貸ボ│ト)(一)金仁植外二人▲第十五囘燃料硏究所(四分十四秒)▲第十六囘實業俱樂部(四分二十四秒)▲第十七囘庶務課B(三分十一秒)▲第十八囘鐵工土木科三年(四分十八秒)▲第十九囘記者團A(三分三十二秒)▲第二十囘殖產銀行(三分三十九秒)▲第二十一囘工塲體育協會B(四分五秒)▲第二十二囘工務建築係(三分九秒)▲第二十三囘工塲現塲組(三分七秒)▲第二十四囘京釜線(三分十七秒)▲第二十五囘(番外)(一)記者團B(三分十四秒)▲第二十六囘(番外)(一)遞信局(三分十七秒)▲第二十七囘(各課代表决勝)(一)機械課(四分五十二秒五分之四).● 누가 항공 촬영을 했을까?공중에서 사진을 찍는 행위는 지금도 규제의 대상입니다. 내 나라 내 땅이라고 하더라도 언론사가 함부로 비행기를 띄워서 촬영을 하지는 못합니다. 지금도 드론 촬영을 하려면 사전에 정부에 신고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물며 일제 시대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게다가 당시 동아일보는 자체적인 비행기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사진은 최소한 주최측인 만철 사우회 또는 비행기를 갖고 있는 기관의 도움을 받아 동아일보 사진기자가 함께 탑승해 찍었거나 아니면 주최측이 촬영해 신문사에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같은 날 매일신보에는 강변 선착장에서 한강 쪽을 지켜보고 있는 관중을 찍은 사진이 실렸습니다. 중절모를 쓴 신사들이 한강에서 펼쳐진 이색 볼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진기자의 눈으로 볼 때는 선착장에서 찍은 사진보다는 하늘에서 찍은 사진이 훨씬 좋습니다.● 신문에 실린 최초의 항공 촬영 사진요즘은 드론의 가격이 저렴해져서 200만원 정도면 신문에 쓸 사진을 충분히 찍을 수 있습니다. 사진기자로서는 아주 좋은 환경이 조성된 겁니다. 드론이 대중화되기 전까지는 언론사 중에서 공중파 방송국과 중앙일보만 항공촬영용 비행기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회사들은 경찰이나 산림청 등의 협조를 받거나 청와대 행사를 취재하기 위해 이동하면서 찍은 사진이나 영상을 보도에 사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사진을 찍는데 아주 제한적이었고 안전 문제로 서로 고민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기관의 헬기를 탈 경우 사진기자들은 사고에 대한 책임을 당사자가 직접 지겠다는 서약서를 쓰기도 했습니다. 동아일보가 비행기를 운용한 것은 1962년부터입니다. 이 해 2월 13일에 경비행기 (세스나 185형. 6인승)를 1대 구입하고 항공과를 신설해 조종사와 정비사를 고용합니다. 1963년 6월 18일에는 경비행기 (스틴슨 L5. 2인승) 1대 구입하고 1965년 12월 12일에는 3인승 헬리콥터 1대를 구입합니다. 이상은 1968년 4월 1일자 동아일보 9면에 실린, ‘격동 48년 동아 48년’ 특집 기사에 나온 내용입니다. 비행기의 이착륙은 서울 광화문 본사에서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는 수색 비행장에 격납고를 두고 기자들이 필요할 때마다 수색으로 출동해 그곳에서 타고 내렸습니다. 동아일보 사진기자들이 비행기를 마지막으로 탑승한 것은 1984년에 입사했던 수습 기자들의 경험이 마지막입니다. 1996년에 입사한 저는 회사 비행기는 타지 못하고 선배들의 무용담만 많이 들었습니다. 1963년부터 1985년까지 약 21년간 자체 비행기를 운영했지만 항공 사진은 그 전후로도 신문 지면에 게재되었습니다. 동아일보 지면에 나타나는 최초의 항공 촬영 관련 자료는 1933년 6월 ‘경성 부감기(俯瞰記)’입니다. 부감이라는 표현은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는 뜻인데 영어인 ‘Bird Eye’가 훨씬 이해하기 쉬운 표현입니다. 새의 시선과 같은 앵글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유일한 조선인 비행사였던 신용욱이 살무손 2A2기를 전세 내서 서울 시내를 촬영했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이 해 8월에는 태풍참상을 항공 촬영한 사진으로 화보 지면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막상 이렇게 쓰고 나니 이 사진이 최초가 아니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혹시 다른 자료가 발견되면 다시 소개드리도록 하겠습니다.)●우리 땅 독도를 1964년 처음으로 항공촬영하다비행기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함부로 비행기를 띄우지는 못했습니다. 기술적인 문제와 함께 정부의 허락이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독도를 처음 항공촬영한 것이 1964년인데 그 사진을 찍은 동아일보 기자는 군 전투기를 타고 촬영을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1964년까지 우리나라 국민들 대부분이 독도가 어떻게 생긴 섬인지 몰랐습니다. 하늘에서 찍은 사진이 없었으니까요. 우리가 지켜야 할 대한민국의 영토 독도를 처음 항공 촬영하겠다고 나선 것은 고 최경덕 기자입니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것을 개탄했던 최경덕 기자는 3년간 공군본부에 공문을 보냈고 회사를 설득해 1964년 12월 30일 전투기를 타고 독도 상공을 비행해 사진을 찍었고, 이 사진은 이틀 후인 1965년 1월 1일자 신문 1면에 실렸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동아일보와 정권의 관계가 좋지 않았고 당연히 공군도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협조 요청을 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협조 요청 공문을 3년간 보냈다는 것은 그런 상황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을 겁입니다. 독도를 꼭 찍어보겠다는 사진기자의 제안에 동아일보 경영진이 화답했습니다. 최경덕 기자는 당시 동아일보 부사장이었던 일민 김상만 선생에게 면담을 신청해서 “군사정부가 동아일보를 싫어해서 항공촬영에 대한 결정을 못 내리는 것 같다”는 공군 장교의 얘기를 전했습니다. 김상만 부사장은 최기자에게 촬영 섭외비를 줬습니다. 공군과 최기자 사이에 어떤 설득 과정이 있었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지만 결국 공군은 최기자가 F86D 전투기를 타도록 허락했습니다. 당시 조종사는 박용태 소령이었고 비행단장은 ‘2천 피트 이하로는 절대 내려가지 마라’고 명령했습니다. 막상 하늘에 올라가니 최기자가 준비한 카메라와 렌즈로는 독도가 너무 멀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들이 갖고 있던 라이카 카메라 M3와 50미리 렌즈는 최고급 카메라였지만 전투기 위에서 바라 본 독도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죠. 비행단장과의 약속을 어기고 최기자는 조종간을 잡은 박 소령에게 “딱 한번만 내려가 줘”라고 부탁했습니다. 드디어 구름을 뚫고 독도를 볼 수 있었습니다. 두 번을 선회하는 동아 셔터 속도 250분의 1초로 딱 10장을 찍었습니다. 당시 천관우 편집국장과 김상만 부사장이 크게 기뻐했고 동도와 서도가 공중에서 함께 보이는 최초의 독도 사진이 독자들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오늘은 백년 전 한강철교 위에 떠서 행사를 촬영했던 비행기를 상상하며, 신문 속 항공촬영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을 특별하게 보이셨나요? 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흔해진 시대에, 우리 사진의 원형을 찾아가 봅니다. 사진기자가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매주 한 장씩 골라 소개하는데 여기에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이 더해지면 사진의 맥락이 더 분명해질 거 같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30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재개발 현장의 한 웅덩이에서 119구조대원들이 풍수해 대비 종합훈련을 하고 있다. 서울시는 이날 6월 장마철을 앞두고 폭우로 반지하 주택이 침수되거나 차량이 지반 침하로 추락하는 상황을 가정해 훈련을 벌였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6일 오전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KB굿잡 우수기업 취업박람회’에서 시민들이 구직 정보를 살피고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평화로운 한국에서 아이언맨은 악당을 물리치는 대신 마시멜로를 굽습니다. 말 시키지 마세요. 잘못하면 타니까. ―서울 마포구 홍익대 앞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1924년 5월 19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100년 전 서울에서 고교 야구대회가 열렸습니다. 야구 대회에서 우승한 대구(DAIKU)야구단과 배재야구단에게 우승기를 수여한 후 기념촬영한 사진이 실렸습니다. ● 사람은 밥으로만 살지 않는다. 건강한 조선 청년의 정신을 위해 야구 대회를 열다 양복에 구두를 신은 VIP가 우승기를 건네고 있습니다. 검정색 선글래스가 이채롭습니다. 그런데 고교 야구이긴 하지만 우승 사진치곤 너무 점잖은 모습입니다. VIP가 우승기를 건네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데 기념사진은 요즘의 재기발랄한 표정과 비교할 때 정적인 느낌까지 줍니다. 우선 이 당시 고교 야구가 어떤 행사였는지, 왜 이런 대회를 열었는지 초심(初心)을 살펴보겠습니다. 지면 하단에 관련 기사가 있어 원문을 읽기 쉽게 옮겨봅니다. [야구대회(野球大會)를 보고 – 조선의 장래를 다스릴 용자는]조선 체육회 주최와 동아일보사 후원의 전(全)조선야구대회는 지난 16, 17 이틀 동안 배재운동장에서 성황리에 원만히 마치었다 한다.◇‘사람이 밥으로만 살지는 않는다’는 옛 성인의 말은 어디로 보든지 옳은 말이지만 건전한 정신을 가져야겠다는 점에서 더욱이 조선의 꽃봉오리인 소학단으로부터 청년단까지 온 조선을 망라한 대회라는 점에서 두 손을 들어 그 원만히 경과함을 축하하여 마지 않는 동시에 장래를 위하여 더욱 간절히 비는 바이다. 과연 우리 조선에 어느 것이 자유로우며 그 무엇이 행복스러우랴! 사면을 보아도 모든 것이 자유롭지 못하고 바야흐로 살펴도 온갖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조선의 오늘이다.그리하여 푸르러야할 청년도, 붉어야 할 소년도 모두 잿빛이 아니면 흰빛 밖에 구하여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아! 이 얼마나 가슴이 아픈 소리인가.◇청년은 청년으로의 원대한 포부가 있어야겠고 소년은 소년으로의 아리따운 새 희망을 가꾸어야 하겠거늘! 하물며 할 일이 많은 조선의 청년과 소년임에는 더 말할 여지도 없거니와 용기조차 없는 것이 아닌가.◇이와 같은 여러 가지 점에서 한 둘 씩 차례로 온 조선을 망라하여 씩씩한 용기와 튼튼한 기틀을 가꾸움이 결코 긴하고 중요한 일인 동시에 오히려 이와 같은 모임이 늦은 느낌을 일게 한다.◇다섯 살된 동 대회가 무슨 사정으로 인하여든지 참가단체가 다수에 이르지 못한 불만이 있다하나 (그것)보담도 경기의 본정신에 있어서 충분히 또 원만하게 ‘스포츠맨십’을 발휘한 것은 더욱 칭찬하여 마지 않는다.요즘 열리는 고교야구는 보통 보름 정도 걸리는데 당시에는 출전 팀 숫자가 많지 않다보니 이틀만에 최강자를 가릴 수 있었었네요. 요즘 목동야구장과 신월야구장에서 열리고 있는 ‘제 78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의 경우 5월 14일부터 5월 29일까지의 일정입니다.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는 1947년부터 시작된 대회이니 사진 속 조선야구대회와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신문사가 주최하거나 후원을 하는 행사라는 공통점은 있습니다. 신문사가 왜 야구대회에 관심이 있었는지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기사에는 100년 전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에게 꿈과 희망 그리고 건강함을 주기 위해 만들었다는 대회의 취지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스포츠를 통해 조선의 청년이 호연지기를 길러주고자 만든 대회가 벌써 5년째라는 설명입니다. ● ‘헹가래’ 사진은 1960년대부터 나오기 시작사진 얘기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점잖게 포즈를 취하고 있는 선수들을 보면서 요즘 고교 야구의 우승 사진을 상상해 봅니다. 우승을 보여주는 전광판을 배경으로 선수들이 감독을 헹가래 치는 사진이 신문에 실립니다. 카메라를 의식해서 감독의 얼굴이 잘 보이도록 선수들이 그림을 잘 만들어 줍니다. 일부 학생 선수들은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기도 합니다. 감독도 잘 보이고 선수도 잘 보이는, 어쩌면 자연스럽지 않지만 주인공의 얼굴과 기쁨이 동시에 표현되는 사진이 만들어집니다. 사진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사진을 잘 이해하는 시대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기술적으로도 빠른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는 카메라가 나온 시대이기 때문에 가능한 앵글입니다. 고교 야구 우승팀의 헹가래 사진이 언제부터 찍히기 시작했는지 궁금해 동아일보 DB를 찾아보았습니다. 점잖은 기념사진과 역동적인 우승 사진이 갈라지는 분기점이 있을 거 같습니다. 보관된 사진 중에는 1968년도 사진이 가장 오래된 커트입니다. 우리나라 헹가래 사진의 역사는 55년쯤 되는 셈입니다. 물론, 동아일보 데이터베이스 기록 이전에 헹가래 사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진 말고 기사에서 헹가래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35년 12월 23일자 동아일보 4면에 실린 이무영(李無影)의 연재소설 “먼동이 틀 때” 제 127편 이었습니다. ‘장정 몇은 내게로 달려들어 팔 다리를 하나씩 잡고 헹가래를 치기도 했다’는 표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스포츠 대회 말고 헹가래 사진이 많이 등장했던 상황은 아마 대학 입시 현장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풍경이지만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대학입학의 당락은 해당학교 운동장에 설치된 대형 벽보판에 이름이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되었습니다. 지금처럼 온라인으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넣고 바로 확인하던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현장에 친구들과 가족들이 함께 가서 확인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을 기록하는 사진기자들의 카메라에 헹가래를 치는 장면이 포착되었습니다.헹가래 사진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하던 중 몰랐던 사실을 하나 알았습니다. 헹가래가 영어나 외래어가 아닌 순우리말이었습니다. 어감 때문에 여태 외래어로 생각해 왔었는데 아니었습니다. 헹가래의 어원 중 하나로 농사지을 때 하는 ‘가래질’에서 왔다는 주장도 흥미롭습니다. 헹가래를 칠 때 사람의 네 활개를 번쩍 들어 내밀었다 들였다를 반복하는 일이 가래질을 할 때 흙을 떠서 앞으로 던지고 다시 뒤로 돌아와 흙을 떠서 앞으로 던지는 것과 비슷하여 헹가래가 가래질에서 왔다고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외국에서도 헹가래 치는 장면이 나오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 사진과의 선후 관계는 정확하게 파악이 되지는 않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 참가한 독일 선수들의 헹가래 사진이 있어 함께 소개합니다. 오늘은 100년 전 고교 야구 대회 우승팀 모습의 사진을 통해 우승의 기쁨을 표현하는 사진이 어떻게 변해오고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특이점을 보셨나요? 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흔해진 시대에, 우리 사진의 원형을 찾아가 봅니다. 사진기자가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매주 한 장씩 골라 소개하는데 여기에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이 더해지면 사진의 맥락이 더 분명해질 거 같습니다.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알려주세요.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시멘트 덮인 주차장에 뿌리내릴 곳은 유도등 틈뿐이었나 봅니다. 그러나 살아내라고, 굳건히 버티라고 응원을 건네 봅니다.―서울 용산구 이촌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0일 서울 성동구청 대강당에서 진행된 ‘반려동물 건강 시그널 및 응급처리 교육 특강’ 참가자들이 수의사의 지도에 따라 반려견 심폐소생술을 배우고 있다. KB금융그룹이 발간한 ‘2023 한국 반려동물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에서 반려동물을 기르는 가구는 2022년 말 기준 약 552만 가구다. 이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반려동물 건강관리’(55%)인 것으로 나타났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누가 떨어뜨린 졸업사진인가 봐요. ‘국민학교’ 친구들과의 추억이 담긴 세상에 한 장뿐인 사진일 텐데, 주인님 돌아와요!―경기 광명사거리역 개찰구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흔해진 시대에, 우리 사진의 원형을 찾아가 봅니다. 카메라가 흔하지 않던 시절, 사진은 전문가들만이 만들 수 있는 매체였고 하루치 신문 전체에 한 장이나 많아야 두 장 밖에 실리지 않던 희소한 기록이었습니다. 사진기자가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매주 한 장씩 골라 소개하는데 여기에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이 더해지면 사진의 맥락이 더 분명해질 거 같습니다.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1924년 5월 15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100년 전 5월 서울 마포의 강변 풍경입니다. ● 마포나루는 물류와 상업의 중심지 서울 마포 나루터의 위치는 현재 주소로는 서울 마포구 도화동과 용강동 일대입니다. 마포대교 북단쪽입니다. 조선시대 마포나루는 삼남(三南·충청 경상 전라도를 통틀어 이르는 말)에서 서해와 한강을 이용해 올라온 쌀, 소금, 새우젓, 옷감 등 물자가 한양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습니다. 일제 시대 역시 마포나루는 물류의 핵심 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진설명을 보면 마포 나루터에는 물자를 운반하는 배들 뿐만 아니라 직접 어업에 나섰던 어선들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명맥이 끊어졌지만 서울에도 어부가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물류와 시장의 중심이다 보니 먹거리도 발전했는데 포구의 상인과 물건을 사러 나온 시민들이 즐겨 먹던 음식 중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메뉴가 ‘서울식 설렁탕’과 ‘주물럭’입니다. 마포 설렁탕은 국물이 말갛고 담백하며 기름에 갠 다진 양념 대신 청양고추를 볶아서 빻은 다진 양념이 특징입니다. ‘마포 주물럭’은 고기에 간장, 마늘 등 양념을 입혀낸 음식입니다. 이렇게 한강의 나루터였던 마포가 지금은 마용성(마포 용산 성동 지역)이라고 하는 신흥 부동산의 대명사로 젊은층들에게 인기 높은 주거지역으로 변해 있습니다. 하지만, 사진 속 100년 전 모습과 현재의 깔끔한 모습 사이에는 난개발의 역사도 있었다고 합니다. 20세기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도시화는 처음에는 제대로 된 계획없이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강종합개발계획에 따라 강변 도로 건설, 다리 건설, 그리고 주변 지역의 상업 시설 및 주거 개발이 가속화되고 2010년대부터 주거지역에 대한 재개발이 다시 한번 이뤄지면서 현대적인 도시 공간으로 탈바꿈하였습니다. 마포 나루터는 한강의 역사와 서울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곳입니다. ●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풍경의 의미비가 내리는 봄날, 당시 사진기자는 왜 마포 나루터로 카메라를 메고 나갔을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루터는 아름다운 풍경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곳입니다. 도심에서는 흔하게 볼 수 없지만 시대의 구성원들의 일상 모습이 포구에서는 다양하게 펼쳐집니다. 변화무쌍한 풍경은 사진을 찍는 사람 입장에게 다양한 셔터 찬스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배가 들어오고 나가고, 물건을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그리고 물건을 어디론가 나르는 사람들 모습을 기대하고 나갔을 수 있습니다. 어부들이 배를 정박하거나 내일의 일을 준비하는 모습도 운좋게 포착할 수도 있을 겁니다.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만을 기대하지 않고 다양한 삶의 모습을 기록하려는 의도에서 카메라를 메고 나갔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최종 지면에 실린 한 장의 사진은 그야말로 목가적인 사진입니다. 아름드리나무의 늘어진 가지 사이로 보이는 두 척의 어선의 모습이 비오는 봄날의 고즈넉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이런 앵글의 사진을 ‘자연적 프레이밍’이라고 하기도 하고 ‘프레임 속 프레임’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자연적 프레임은 주변 요소를 활용하여 촬영 대상을 감싸는 방법입니다. 나무나 문 등의 구조물, 창문 액자 등 자연적으로 제공되는 요소들을 활용하는 겁니다. 프레임 속 프레임이라는 표현은 사진이라는 게 카메라의 필름이라는 4각 프레임 속에 풍경을 집어 넣는 과정인데 화면 속에 또 하나의 프레임을 넣는다는 뜻일 겁니다. 이런 앵글은 여러분이 스마트폰으로 일상을 촬영할 때도 활용해 볼 만합니다. 풍경 사진을 찍을 때 그냥 저 멀리 산을 찍는 것보다는 내 앞에 있는 나무 가지나 동굴 입구 등을 프레임으로 사용하여 그 안에 풍경을 넣는 겁니다. 도시의 건물이나 구조물 사이로 특정한 장면을 촬영하거나 다리의 구조를 이용해 강이나 도로를 프레임 안에 포함시키는 방법도 좋습니다. 실내에서 인물을 찍으면서 식탁 위에 아이템을 배열하여 배경에 있는 인물을 강조할 수 있고 책꽂이 사이로 방안을 바라볼 수도 있을 겁니다. 이런 앵글을 주제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시선을 집중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피사체가 자연 또는 전체 속의 일부라는 느낌을 주는 효과도 있습니다. # 오늘은 100년 전 서울 마포의 나루터 풍경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특이점을 보셨나요?변영욱 기자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