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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날 숲에 오른 기정은 나무십자가가 있는, 애인의 묘지를 찾는다. 동박새와 황조롱이와 바다사자를 함께 보러간 애인은 배 위에서 뛰어내렸다. 눈 덮인 숲은 깨끗하고, 간결하고, 단조롭다. 눈 벽에 갇힌 듯 안온함을 느끼며 청설모와 꿩을 본다. 청설모가 모형처럼 보이기도 한다. 때론 가짜라도 필요하잖아, 라는 게 모형을 만드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꿩이 앉았던 낙엽더미 위에는 돌멩이 두 개가 있다. 돌멩이를 새끼라고 여기는 듯했다. 무섭도록 조용한 숲속에서 기정은 신께 다가가는 세 가지를 떠올리며 정말 신께 다가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숲에서 내려오자 팀장은 점심시간이 너무 긴 거 아니냐고 타박하며 완이 때문에 학원에 가봐야 한다고 한다. 완이가 빨간 가방 때문에 친구를 패 묵사발로 만들어버렸다며 몹시 우울해한다. 숲으로 가기 전에 떠 놓았던 밀랍몰드의 원형은 다음 날 뽑을 수 있어서 지오라는 구체관절인형 심재를 만든다. 주문 제작이 아니라 기정의 작품이다. ‘성재범 제작소’는 팀장의 이름 때문에 끊이지 않고 주문이 들어오는 편이었으나 주문은 극히 제한적이라 팀장과 기정은 자신의 작품을 하면서 제작소를 꾸려나갔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15층에 사는 아주머니를 만난다. 아주머니는 몽롱하고 폐쇄적이고 쿠마리처럼 초경도 하지 않은 채 늙어버린 것 같다. 거실이 따뜻해질 때를 기다리며 소파에서 커피를 마시던 기정은 보석무늬가 일정하게 박혀 있는 벽지를 보며 어머니를 떠올린다. 어머니는 일 년 전 눈이 많이 내리는 날 관광차 전복 사고로 세상을 떴다. 텔레비전 위에는 구겐하임미술관 앞에서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그를 처음 만난 곳이 모마미술관과 구겐하임미술관이다. 15층 아주머니가 인터폰으로 기정에게 줄 게 있다며 올라오라고 한다. 똑 같은 31평이지만 아주머니의 집이 훨씬 넓게 보이는 것은 벽지나 소파나 커튼이 흰색이고, 별다른 장식장이 없기 때문이다. 기정은 흰색과 너무 넓다는 게 무섭다는 걸 처음으로 느낀다. 아주머니는 오늘이 미국지사로 떠나버린 아들 결혼식인데 가지 않았다고 하면서 공군장교였던 남편이 죽은 이야기와 북해도의 눈 이야기를 한다. 북해도의 눈 속에서 세상과 단절했고, 또 세상과 화해했다고 한다. 기정은 아주머니의 지적인 말투에 속으로 놀란다. 아주머니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이 그냥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무섭다고 했다. 베란다 밖의 움직이지 않는 강이 무섭듯이. 말차와 화과자를 먹던 중 아주머니는 안방으로 가서 선물을 가지고 나온다. 오타루의 공방에서 사온 오르골이다. 풍성한 치마를 입은 여자가 뱅글뱅글 돌자 여자 속에 남자가 숨어 있는 것처럼 여자남자 혼성 이중창이 흘러나왔다. 고맙다는 말에 아주머니는 자신이 이담에 무얼 부탁하면 들어주라고 한다. 기정은 두려움을 느낀다. 택시에서 내린 기정은 성당건물과 공무원연수원 건물 앞과 석유저장소 앞을 지나 샛길로 접어든다. 샛길에서 외국남자와 통역사를 보게 된다. 외국남자는 사제복이나 군복이 어울릴 것 같다. 숲으로 올라가면서 숲 앞면 역할을 하는 커다란 바위를 대리석 묘지 쓰다듬듯 쓰다듬는다. 믿음직스러운 기운과 성스러운 감정을 느낀다. 눈 내리는 숲속은 한 가지 색뿐이라서 더 넓어 보인다. 그래도 넓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혼자 서 있는 고독감 같은 걸 느낄 필요도 없었다. 눈 밑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깨끗하고 아름다운 눈만 보면 되었다. 묘지 주위에는 멧토끼나 멧돼지 발자국이라고 할 수 없는 투박한 발자국이 거칠게 찍혀 있다. 불안해하던 기정은 하늘에 떠 있는 새를 보며 패러글라이딩을 하던 그를 떠올린다. 아홉 살이나 많은 여자와는 절대 결혼시킬 수 없다고 하던 그의 어머니가 패러글라이딩을 하던 그가 땅으로 처박혀 왼쪽 어깨를 크게 다치자 다시 기정을 찾아와 네가 누굴 구원하겠다는 거야? 라고 했다. 왜 구원이라는 말을 할까 하고 기정은 의아해했다. 결혼을 반대하는 이유가 단순히 나이뿐인 줄 아냐고 하자 기정은 그동안 돌쩌귀가 어긋나 닫히지 않던 문이 닫히는 기분을 느꼈다. 닫힌 문 앞에서 버티고 서 있을 만큼 순수하지도, 어리지도 않은 기정은 그에게서 돌아섰다. 숲을 내려오기 전에 깨끗한 눈으로 발자국을 덮어버린다. 제작소로 온 기정은 밀랍인형인 대기업 창업주 손을 채색한다. 손이 얼굴보다 밀랍인형인 게 탄로 날 확률이 높아 푸른 힘줄과 주름을 강조한다. 퇴근 후에 팀장과 술을 한 잔 하러 간다. 술집에는 중년남자가 혼자서 보드카를 마시고 있다. 칵테일로 입술을 축인 뒤 기정은 완이는 어떻게 되었냐고 묻는다. 팀장은 친구와 싸워도 빨간색 가방(도망간 엄마의 숄더백)은 여전히 들고 다닌다고 하며 일요일에 완이가 얻어다 키우는 토끼를 보러 오라고 한다. 완이 엄마는 보험회사에 다니다가 바람이 나서 떠났다. 빨간색 가방만 들고 다니면 엄마가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는 완이와 달리 팀장은 완이 엄마와 남자가 탄 에쿠스가 유조차와 정면충돌해 둘 다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고 생각했다. 토끼를 보러간 날, 토끼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는 완이에게서 기정은 고집과 외로움을 엿본다. 팀장은 기정에게 꽃게탕을 끓여주고, 기정의 발이 예쁘다고 한다. 발을 바라보는 팀장의 눈이 불온하게 반짝였다. 밀랍인형인 박경준을 대기업 기념관 안에 설치해주고 나오자 비가 내린다. 팀장은 후배를 만나러 가고 혼자서 미술관으로 갔지만 당분간 휴관을 한다고 한다. 갈 데가 없는 기정은 집으로 간다. 유리탁자 위에 놓인 오르골을 보자 아주머니 생각이 나 1503호로 간다. 어머니가 보고 싶고, 따뜻한 것에 파묻히고 싶어서이다. 아주머니는 죽을상이고, 베란다의 유리문은 활짝 열려 있다. 와인을 마시던 아주머니가 말한다. 내가 전혀 의식하지 못할 때 그냥 손을 뻗어 나를 밀어버리라고. 놀란 기정이 아무한테나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하자 아주머니는 아무한테나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기정은 비밀이 들킨 것만 같다. 아주머니는 아무리 노력해도 내 생활은 바뀌지 않는다, 고 쓴 유서를 보여준다. 안방에는 장롱도 없다. 일을 간단하게 하고 싶어서 없애버렸다는 말에 기정은 얼어버린다. 기정은 쫓기듯 아래층으로 내려온다. 제작소에서는 당분간 일거리가 없어 본격적으로 지오를 만들어나간다. 점심시간에 함께 꽁지공원으로 간 미스 오는 조각가인 애인이 섹스는 하지 않고 상체만 애무해서 분하다고 한다. 헤어지고 싶지만 자신이 그 유희감각을 버리지 못한다고 하자 기정은 아무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붙잡아두라고 한다. 일요일에 아주머니는 생일 케이크에 불을 붙여 달라며 기정을 부른다. 햇빛이 내리쬐는 강을 내려다보던 아주머니는 자신은 늘 강과 바다를 항해 중인 것 같으며 가도 가도 보이는 것은 흰 햇빛과 흰 물빛뿐이라고 말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건 자유뿐인 것 같고, 벽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게 너무 넓게 느껴진다고도 말한다. 그건 기정도 마찬가지였다. 넓은 강과 넓은 공터를 오랫동안 보고 있자 갑자기 무한대로 커지는 것 같고, 전혀 공간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면서 기정을 조롱하는 것 같다. 해봐, 해봐, 못할 것도 없지 않아. 너 역시 이대로 나가면 저 아주머니처럼 될 거야. 네게 누가 있어. 아무도 없잖아. 너의 이십 년 후의 모습이 바로 아주머니야. 너도 누군가에게 부탁할래?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할 때 죽여 달라고. 혼자서는 죽지도 못한다고. 그냥 이십 년 후의 너를 미리 없애버린다고 생각하고 밀어버려. 한순간이야, 한순간. 찰나만 지나면 아주머니는 곧 편안해질 거야. 그러면 고독에 떨 필요도 없는 거야. 고독에 떨고 있는 것만큼 추해보이는 것도 없잖아. 아주머니, 추하잖아. 그리고 말이야, 세상에 제일 무서운 게 혼자인 거야. 혼자인 것에서 벗어나게 해줘. 밀어, 밀어버리라니까. 기정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아주머니를 밀어버린다. 퍼뜩 정신을 차린 기정은 얼이 반쯤 빠진 아주머니를 소파에 앉혀놓은 뒤 아래층으로 도망쳐온다. 내내 아무 일도 하지 못하다가 팀장을 만나 위로를 받는다. 미스 오는 애인이 작업실에서 다른 여자와 엉켜 있는 것을 봤다며 괴로워한다. 뒤따라 나온 애인이 화난 여자가 뭐냐고 따지자 오필녀 씨, 저번의 그 작품 좋았어요, 라고 했다며 정말 오필리아처럼 웃어젖힌다. 오필리아로 불러주지 않아서 더 화가 났는지도 몰랐다. 스물다섯 살의 미남형 지오가 완성되자 기정은 저번의 일을 사죄도 하고 아주머니를 혼자 있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1503호로 가져간다. 아주머니에게 지오가 태어난 배경이라든지 성장과정이라든지 지오의 내면기록을 써보라고 한다. 박경준 뒤로는 일거리가 들어오지 않는다. 일감이 없으면 팀장보다 기정이 더 초조해졌다. 미스 오는 아무렇지도 않게 작업실에 다시 간다고 한다. 그날 본 것은 싹 까먹은 모양이다. 아니면 외로움이라는 물건이 1g이라도 더 얹힌 쪽이 관계에서 지는 거니까 미스 오의 시소가 땅 쪽으로 기울었는지도 몰랐다. 며칠 뒤 아주머니가 기정을 부른다. 지오의 내면기록을 쓴 노트를 보여준다. 지오가 되기 전까지, 아주머니의 아들이 되기 전까지의 내면기록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그것을 읽어본 기정이 끼어들어 윤색하고, 아주머니와 타협해서 이상훈이라는 한 인물을 창작해낸다. 이상훈의 내면에는 앵무조개의 나선형무늬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그 작업이 끝났을 때 팀장에게서 전화가 온다. 완이의 토끼가 죽어버렸다고 한다. 전화를 끊고 나자 아주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베란다의 블라인드가 딱딱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다. 어디 계세요? 하고 기정은 묻는다. 삼월인데도 눈이 내리자 기정은 숲으로 간다. 범죄스릴러물에 쓰일 전신더미 한 구는 팀장이 세밀화 작업 중이라 출근을 하지 않았다. 숲을 오르면서 기정은 이 길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느낀다. 싫고 나쁜 예감일수록 적중률 100%였다. 숲에서 기정은 멧토끼 한 마리를 본다. 그걸 잡아다 완이에게 주고 싶어진다. 완이는 야산에 토끼의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두 번쯤 토끼무덤에 갔으나 산에 가면 춥고 외롭다며 발길을 끊었다. 팀장이 미국너구리를 사다줄 거라고 했으나 생명 있는 것은 다 자기를 떠나버린다면서 다시 빨간색 가방을 들고 다녔다. 나무십자가가 있는 묘지로 간 기정은 대리석 묘지를 힘껏 끌어안으며 이제 눈은 안 와. 진달래꽃이 피면 다시 올게, 라고 말한다. 거칠고 둔탁한 발소리에 기정은 상체를 들고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본다. 언젠가 샛길에서 본 외국남자와 통역사인 청년과 석공이 올라온다. 위쪽이나 옆쪽으로 갈 줄 알았는데 나무십자가가 있는 묘지로 온다. 그래도 기정은 묘지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통역사가 왜 이 묘지에 있냐고 묻자 기정은 여기는 제 애인 묘지라고 한다. 외국남자가 지도를 들여다보며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한다. 묘지를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닌가 하고 묻자 기정은 아니라고 소리친다. 통역사가 이 묘지는 선교사인 안토니오 공베르 신부가 잠든 곳이고, 네덜란드에서 온 선교사의 유해도 이쪽으로 옮기고 다시 단장할 거라고 한다. 석공처럼 보이는 중년사내가 불쾌하게 바라보자 기정은 돌아선다. 숲을 내려오면서 기정은 돌멩이를 새끼라고 품고 있는 꿩이 자신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일 년 전을 떠올린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 남겨진 기정은 눈 쌓인 숲속을 올랐다. 발을 헛디뎌 추락사해도 괜찮을 것 같다며 발길 닿는 대로 걷는 기정의 눈에 나무십자가가 이정표처럼, 표식처럼 시선을 끌었다. 나무십자가 아래 아직 완성이 덜 된 묘지 옆에 앉은 기정은 편안함을 느끼며 즐거운 묘지라는 말을 이해했다. 그 뒤로 숲에 올랐고, 나무십자가를 찾았고, 묘지 옆에 앉았다. 숲을 오른 지 한 달 뒤쯤 너무 조용하고 편안한 것이 두려워진 기정은 그 묘지에 그를 묻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은 견딜 수 없으니까. 다음 날 아주머니는 15층에서 뛰어내렸다. 아주머니를 실은 앰뷸런스가 떠나고 나자 기정은 15층으로 올라간다. 지오를 안고 내려온다. 상류층 할머니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는 뉴스를 들은 기정은 벌떡 일어나 소리친다. 나는 아주머니와 말을 한 적도 없다고. 기정은 지오에게로 가 텐션 줄을 끌며 묻는다. 이제 묘지에 누워 있지 말고, 나랑 살래?김영옥}

안녕하세요. 저는 광명초등학교 3학년 3반 정희성이에요. 갑자기 편지를 받아서 놀라셨죠? 왜냐면 아저씨는 저를 모르실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아저씨를 알아요. 아저씨의 시가 우리 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거든요. 읽기책 43쪽이에요. 담임선생님은 교과서에 나오는 시를 모두 외우라고 하세요. 그래서 저는 아저씨가 쓴 시도 다 외우고 있어요. 아저씨가 쓴 ‘봄의 계단’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예요. 아저씨도 어렸을 때 국어를 좋아했어요? 저는 국어가 제일 좋아요. 다른 과목은 딱딱한 공식이랑 외워야 할 것들밖엔 없는데 국어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고 제가 좋아하는 시도 있거든요. 하지만 시험 점수는 별로예요. 며칠 전에 쪽지시험을 봤는데 세 개나 틀렸어요. 이게 제가 틀린 문제인데요, 한번 보세요. 동시 ‘봄의 계단’의 분위기로 옳은 것을 고르세요.① 초라하다② 슬프다③ 애틋하다④ 불쾌하다⑤ 희망차다 저는 2번을 선택했는데요, 5번 희망차다가 답이래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왜 2번이 답이 아닌 건지 모르겠어요. 저는 이 시가 슬프다고 생각했거든요. 특히 이 부분이 무척 슬펐어요. 부지런한 새싹 땅 속에서 뽀얀 얼굴 내밀고 있네요 잠에서 갓 깨어난 아기 씨앗 기지개 켜다가 눈물이 찔끔 왜냐면 봄에 싹이 트는데 아기 씨앗은 혼자 늦게 잠에서 깨어났잖아요. 기지개를 켜는 척하면서 그러니까 몰래 울잖아요. 친구들은 다 싹이 트는데 자기만 느리니까요. 이 시의 분위기가 왜 희망차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이것뿐만이 아니에요. 다음 중 ‘봄의 계단’을 쓴 시인이 생각한 것으로 틀린 것을 고르세요.① 봄은 한 번에 오는 것이 아니라 계단을 밟고 올라가듯 천천히 오는구나!② 봄에는 많은 동물들과 식물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네.③ 추운 겨울이 지나면 곧 봄이 오니까 모두 힘내!④ 봄이 지나면 언젠가 다시 겨울이 오겠지.⑤ 개구리는 봄이 되면 신나서 폴짝 뛰나봐. 아저씨, 아저씨는 시를 쓸 때 정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썼어요? 그리고 아기씨앗은 정말로 기대에 부풀어 있는 거예요? 슬픈 게 아니고요? 선생님은 아마도 아저씨와 아주 친한 사람이거나 아저씨의 마음을 다 들여다보는 마법사인 게 분명해요. 그렇지 않고서야 아저씨가 생각한 것을 선생님이 알고 이런 문제를 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하지만 선생님이 아저씨와 친한 사이일 리는 없고 마법사일 리는 더더욱 없죠! 저는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께 가서 문제가 이상하다고 말을 했어요.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제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희성이가 시를 많이 읽어보지 않아서 시를 해석하는 게 어려운 모양이구나.” 하시는 게 아니겠어요? 저는 더 머리가 아파졌어요. 시를 읽는 건 나고 그걸 느끼는 것도 나잖아요. 그런데 내가 느껴야 할 것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건 어쩐지 이상하잖아요. 집에 와서도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내 생각이 남들과 다르다고 해서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아저씨도 다르다와 틀리다의 차이는 아시죠?) 저는 선생님에게 알려주고 싶었어요. 이 시가 누군가에게는 슬플 수도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저는 그날 밤 열두 시가 넘도록 잠을 자지 않고 책상에 앉아 아주 멋진 계획을 세웠지요. 다음 날 저는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교실에 남아 있었어요. 그리고 선생님께 가서 공책을 펼치며 물었어요. “선생님, 이 문제 알려주세요.”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하시더니 “이건 못 보던 시인데?”하셨어요. 못 본 게 당연했죠! 그건 교과서에 나오는 시가 아니었거든요. “문제집에 나와 있었어요.”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시를 읽었어요. 제목 : 가을 운동회 낙엽이 떨어지는 건 가을이 시작된다는 신호 준비! 땅! 단풍잎 손 주먹 쥐고 누가 누가 먼저 달려가나 누가 누가 먼저 고운 물이 드나 그리고 선생님은 턱을 괴고 문제도 가만히 읽었죠. 시인이 이 시를 쓴 이유로 옳은 것은?① 심심해서② 가을이 깊어가는 것을 알리려고③ 낙엽을 보고 갑자기 생각나서④ 가을 운동회가 시작되어서⑤ 여름이 지나간 것이 아쉬워서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빨간 펜으로 답을 고르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자, 이 시는 가을이 깊어가는 것을 아주 재미있게 표현했구나. 시인은 가을 낙엽을 운동장의 아이들에 빗대어 표현했어. 정확히는 가을 운동회 날 달리기 시합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거야. 아이들이 단풍잎 같은 손으로 주먹을 쥐고 달리면 마음에는 어느덧 푸른 물이 드는 거란다. 그렇게 가을은 무르익어 가고 아이들은 성장하는 거겠지? 그래서 답은 2번이 되는 거고. 이해가 되니?” 운동장? 학생? 저는 황당해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어요. 저는 선생님을 똑바로 보며 말했어요. “선생님, 틀렸어요!” 선생님이 무슨 뜻이냐는 듯이 나를 쳐다봤어요. “시인은 그런 생각은 안했어요. 그냥 낙엽이 빨리 땅에 닿는 게 달리기 경주하는 것 같다고 느낀 것뿐이에요. 그리고 시인은 가을이 오는 걸 알리려고 이런 시를 쓴 게 아니에요. 낙엽 보다가 생각이 나서 그냥 쓴 거죠!” 선생님은 한숨을 내쉬더니 웃으며 제게 말했어요. “희성아. 그게 아니야. 여기 ‘단풍잎 손 주먹 쥐고’라는 부분을 보렴. 아이들이 작은 손을 움켜쥐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니? 제목도 ‘가을 운동회’고 말이야. 시인이 아무런 의도도 없이 시를 썼겠니? 희성이는 아무래도 시를 해석하는 방법을 조금 더 공부해야겠구나.” 저는 허리에 손을 얹었어요. 그리고 선생님께 물었죠. “선생님, 이 시인이 누군지 아세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정희성이에요!” 선생님은 한참 저를 쳐다보시더니 곧 얼굴이 새빨개졌어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요. “이걸 네가 썼단 말이니?” 선생님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어요. 저는 고개를 끄덕였죠. 선생님은 잠시 당황한 듯 했지만 곧 무서운 표정으로 저를 노려보았어요. “너, 지금 선생님을 놀린 거니?” 저는 너무 놀라서 울 뻔했어요. 선생님이 그렇게 화가 난 모습은 정말 처음 봤거든요. 저는 주먹을 꽉 쥐고 이렇게 외쳤어요. “선생님이 낸 문제는 엉터리예요!” 그리고 나도 모르게 엉엉 울어버렸지요. 왜 울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냥 뭔가 서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그랬거든요. 저는 한참이나 서서 울었고 선생님은 그동안 아무런 말도 없었어요. 얼마나 울었을까요?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았어요. 나는 어쩐지 민망해서 억지로 울음소리를 내면서 콧물만 훌쩍거렸지요. 저는 선생님이 차라리 나를 때리거나 벌을 세워주었으면 했어요. 가만히 앞에 세워만 두지 말고요. 울음소리 흉내 내기도 지칠 즈음, 선생님은 제게 사탕을 하나 건네며 이제 그만 집에 가라고 했어요. 복도에 나가서 창문으로 살짝 들여다봤더니 선생님은 어두운 표정으로 계속 책상에 앉아 있었어요. 집으로 돌아와서도 저는 자꾸만 선생님이 생각났어요. 내가 너무 심한 장난을 쳐서 선생님이 단단히 화가 난 것이 분명했지요. 선생님이 이제 나를 싫어할 거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났어요. 나는 침대에 누워 월요일이 오지 않기를 빌었어요. 선생님을 다시 보는 게 두려웠거든요. 주말이 지나 학교에 갔을 때, 그러니까, 오늘 말이에요. 선생님은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책상에 앉아 일기장을 검사하고 있었어요. 저는 선생님 눈치를 보면서 우물쭈물했어요. 선생님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었지요. 마치 그날 일은 아주 없었던 것처럼요. 하지만 아저씨, 바뀐 것이 하나 있었어요. 오늘 본 쪽지시험 말인데요, 거기엔 글쎄 이런 문제가 있지 뭐예요! 이 시의 분위기로 옳은 것을 고르세요.① 초라하다② 슬프다③ 애틋하다④ 불쾌하다⑤ 희망차다⑥ 빈 칸에 자신의 생각을 쓰세요 ( ) 1번부터 5번까지만 있던 보기가 6번까지로 늘어났던 거예요. 제가 어떤 답을 선택했냐고요? 당연히 나만의 답을 선택했지요! 그리고 선생님은 그 문제에 파란 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려주었어요. 선생님은 이제 저를 용서한 걸까요? 그러니까 동그라미를 그려주었겠지요? 저는 기분이 좋아졌어요. 그래서 또 시를 쓰고 싶어졌어요. 그런데 아저씨, 제가 쓴 시는 어때요? 이만하면 저도 시인이 될 수 있을까요? 아참, 시인은 돈을 많이 버나요? 엄마가 시인은 가난하다고 했는데. 그리고 시인이 되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해요? 답장 기다릴게요!이진하}

나의 고아원 시 당선작 안 미 옥신발을 놓고 가는 곳. 맡겨진 날로부터 나는 계속 멀어진다. 쭈뼛거리는 게 병이라는 걸 알았다. 해가 바뀌어도 겨울은 지나가지 않고. 집마다 형제가 늘어났다. 손잡이를 돌릴 때 창문은 무섭게도 밖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벽을 밀면 골목이 좁아진다. 그렇게 모든 집을 합쳐서 길을 막으면. 푹푹, 빠지는 도랑을 가지고 싶었다. 빠지지 않는 발이 되고 싶었다. 마른 나무로 동굴을 만들고 손뼉으로 만든 붉은 얼굴들 여러 개의 발을 가진 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 이상했다. 집을 나간 개가 너무 많고 그 할머니 집 벽에서는 축축한 냄새가 나. 상자가 많아서 상자 속에서 자고 있으면, 더 많은 상자를 쌓아 올렸다. 쏟아져 내릴 듯이 거울 앞에서 새파란 싹이 나는 감자를 도려냈다. 어깨가 아팠다.}

왜요? 대체 왜요? 저 어떡해요? 당선 소식을 전해주신 기자님에게 다짜고짜 던진 제 첫 대사였습니다. 보이스피싱인 줄 알았거든요. 과분할 정도로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초조합니다.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데, 이걸 어찌하나 싶습니다. 잠깐 반짝였다가 소리 소문 없이 지는 별똥별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캄캄한 암전이 눈앞에 펼쳐진다 하여도, 왠지 굳건히 이겨낼 자신이 있습니다. 생각 없이 살던 제게, 길을 열어주신 조광화 교수님과 이강백 교수님, 그리고 심사위원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며칠 전 원수의 죽음보다 너의 소식이 더 충격적이다’라고 단 한 줄로 놀라움의 크기를 표현해 준 백통령. ‘넌 이제 노이로제 걸릴 일만 남았어’라고 악담해준 연모 군.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라고 말이 씨가 되게 해준 오모 군. 컴퓨터 잃어버리게 해준 하모 군. 손 잡아준 과순, 안아주던 런던게이, 그래도 난 네 글 재미없다고 말해준 흑인3, 잡스, 유스마일, 정화랑, 빡재, 근이, 허텅, 미취학 아동, 서레기 등 격앙된 목소리로 축하 전화해준 사랑하는 동기 선배님들. 일방적으로 연락 끊어버린 내게 근근이 생존 소식을 전해주는, 대단한 인격을 소유한 옛 친구들. 그리고 온몸이 만신창이임에도 불구하고 얼싸안고 기뻐해준 친구까지도. ‘감사합니다’라는 단 한마디로 허세 섞인 짤막한 당선소감을 쓰고 싶었지만, 태생적으로 그런 인간은 못 되나 봅니다. 가족들. 이제 어디 가서, 나랑 피 섞였다는 거 쪽팔리지 않게 해줄게요. 사랑해요. △1991년 경북 김천 출생 △서울예대 극작과 1학년}

어릴 때 저는 시골 할머니 집으로 가는 걸 좋아했습니다. 그곳에 가면 산과 저수지와 들판과 꽃과 나무가 있었으니까요. 성인이 되어 생이 힘들어질 때, 그때 본 자연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거짓말처럼 제가 극단으로 치닫지 못하게 붙잡는 것도 자연이었습니다. 소설을 쓰고 싶지만 잘 되지 않아 포기하려고 할 때마다 마지막에 꼭 떠오른 것도 자연이었습니다. 그걸 소설로 써보고 싶은 욕구를 끝내 버릴 수 없었습니다. 원하는 대로 소설을 쓰게 되었지만 문학의 길은 너무 멀리 있었습니다. 이 길이 정말 내 길일까, 돌아설 용기가 없어 버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제 삶을 믿고, 제 자신을 믿고 그냥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제게 누군가 등불을 밝혀주는 것 같습니다. 가던 길을 계속 가겠습니다. 새 글을 썼다고 하면 좋아하고 최선을 다해 읽어주는 동생 숙이, 늘 제 작품을 읽어주고 문학이야기를 하는 홍영숙 씨,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준 정아 씨, 제게 행운을 가져다준 14라는 숫자에 고마움을 전합니다. 소설을 쓰겠다는 저를 유일하게 이해해주셨던 엄마가 계셔서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부족한 작품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주시고 저의 어깨를 두드려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동아일보사 관계자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1965 경남 사천 출생 △경상대 농화학과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 수료 △신라문학대상 소설 부문 수상}

세상이 어둡다. 올해 희곡 분야 지원작은 대부분 전망 없는 세상에 대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소시민적 일상의 삶을 그린 작품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런 세상살이에 대한 알레고리나 탈현실의 판타지도 제법 많았다. 작품들의 전체적인 수준은 나쁘지 않았지만 120여 편의 후보작이 비슷한 주제의식이나 패턴화한 스타일을 공유해 모범답안에서 벗어난 문제작을 찾기 힘들었다. 그런 점에서 당선작인 ‘자전소설’은 여타의 작품과 구별되는 반짝이는 감각과 신선함이 돋보였다. 작가의 창작 행위를 극화한 이 작품은 현실과 허구의 삼투과정을 감각적으로 구축했고, 관념적인 내용임에도 계속해서 다음 장면을 기대하게끔 만드는 밀도와 매력이 있었다. 작품이 가진 문학적 섬세함이 대중과 소통해야 하는 연극적 언어로 전환될 수 있을지 심사 과정에서 다소의 논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조율 과정은 본질적 결함이라기보다는 희곡작가라면 누구나 배우고 치러야 할 통과의례 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어, ‘자전소설’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 외 후보작으로 1990년대 운동권과 현재 취업난에 직면한 20대 청춘의 우울한 자화상을 재치 있는 일상 속에 표현한 ‘프로작, 언니’가 주목받았고, ‘아이돌’과 ‘열어주세요’도 아직은 거칠지만 눈여겨볼 연극성을 가진 작품으로 함께 거론됐다.박근형 극작가 연출가, 김명화 극작가 연극평론가}

기대를 접으려던 즈음 날아든 소식은 입고 싶어 하면서 보기만 했던 옷과도 같았습니다. 새로 입은 옷 하얀 깃에 얼룩이라도 묻을까 조심스럽지만 그마저도 기분 좋은 설렘입니다. 뜻밖의 선물에 가당찮게 우쭐하려는 어깨를 눌러 내립니다. 당일특급으로 원고 보내던 날, 우편 접수하던 여직원에겐 살짝 굳은 표정이 읽혔을지 모릅니다. 어디 두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우편 영수증을 찾아야겠습니다. 어설픈 첫 습작을 쓸 때 들고 다녔던, 이제는 수명을 다한 노트북 사이에 끼워 놓고 가끔씩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시나리오는 설계도와도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설계도의 그림대로 건축물이 올라가듯, 지면에 고정되어 있는 4만7000여 개의 글자들이 빛을 타고 움직이고 공기를 통해 울려나오는 날을 상상해 봅니다. 막연한 기대에는 초조함이 따르지 않아 좋습니다. 새로 쓰는 글이 그 이전 것보다는 늘 조금이라도 깊어지고 나아진 결과물이기를 바랍니다. 자식이 어떤 결정을 하든 그 뜻을 존중해주신 부모님께, 나이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좋은 인연을 맺은 친구들에게, 분수 모르고 건방 떠는 제자를 포용해주신 선생님들께 다할 수 없는 감사를 짧은 글에 실어 전합니다. △1969년 서울 출생 △캐나다 에밀리카 예술디자인대 졸업(커뮤니케이션 디자인 전공) △동국대 대학원 국문학과 석사과정}

아쉽게도 이번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서는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 응모작 수가 적었던 탓이 컸지만, 솔직히 말하면 응모작들의 수준이 우려할 정도로 기대 이하였다는 사실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이다. 좋은 문학평론은 다루고 있는 작가나 작품의 문학적 자리를 잡아주고 그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하나의 좋은 문학작품은 그 자체로만 유의미한 게 아니라, 동시대 다른 작품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앞 세대 작품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가치를 발한다. 비록 그것이 단절과 분리의 제스처를 취해도 말이다. 그러나 올해 대다수 응모작은 작품의 문학적 맥락들을 짚어내지 못한 채 그저 자신들이 알고 있는 몇 가지 이론을 성급하게 덮어씌우거나 상식적이고 평이한 수준의 작품이해에만 그치고 있어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또한 이론적 개념어들을 정확한 이해 없이 마구 남발할 뿐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에 대해 새롭게 발견한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문학평론이란 겉보기에 그럴듯하고 화려한 말들을 나열하는 현학적 자기과시의 장르가 아니다. 소박하더라도 자기만의 시선과 통찰력으로 그 작품의 가치와 의미를 짚어주고, 나아가 그 작품이 던지는 문학적 질문을 현실사회의 맥락 속에서 재구성해야 한다. 당선권에 올려놓고 논의한 작품이 없었기에 개별 논의는 생략하도록 한다. 좋은 문학평론은 결국 한국문학에 대한 애정(어린 채찍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쉽지만 응모자 모두 더 열심히 읽고 더 열심히 쓰는, 말 그대로의 문학적 실천을 통해 내년에는 더 좋은 글로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권성우 문학평론가, 심진경 문학평론가}

본선 진출작 여섯 편 중 세 편을 눈여겨보았다. 떠난 애인의 아이를 키우며 미혼모로 살아가는 ‘거미집’의 화자는, 내연의 연인과 동반자살한 아버지를 기억한다. 남편의 외도로 애정 없이 사는, 어머니의 운명을 닮은 위층 여자를 알게 된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삶은 불행과 갈등으로 미만해 있을 뿐이지만 그 자체가 자신의 존재를 일깨우는 성찰의 씨앗이라는 점을 환기한다. 하지만 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소설 스스로 마련한 저 확연한 도식은 어떤가. 화자를 조명디자이너로 하여 존재 간의 관계를 거미집에 비유해 가는 멋진 환치가 끝내 무색해지고 만다. 내심 ‘이거다!’ 하며 읽을 만큼 ‘커버걸’의 흡입력은 대단하다. 문장이며 진행 솜씨가 단단한 데다 매력적으로 차갑기까지 하다.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다만 시작 후 3분의 1까지만 그러하다. 아내의 죽음 뒤로는 모든 게 혼미하다. ‘숲의 정적’에서는 이웃의 외로운 여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내 생활은 바뀌지 않는다’는 유서를 남기고 아파트에서 투신한다. 그녀가 얻으려 했던 건 외롭지 않은 생활, 즉 진짜 삶이다. 구체관절인형을 만드는 내력, 눈 내리는 날 숲에 올라 무덤을 찾는 사정, 엄마에게 버림 받은 완이가 눈에 밟히는 까닭들이, 결코 쉽지 않으나 명쾌한 대답에 이르는 절묘한 서사를 이룬다. 당선되었으니 많이 쓰기 바란다. 기본기를 다지고 지키느라 머뭇거려 왔다면 이제 훌훌 벗어던지고 앞으로 나아가길. 조남현 문학평론가, 구효서 소설가}

나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더욱 완강하게 나를 붙잡고 있었다. 사실은 나와 멀어지고 싶지 않다는 것을, 도망치면서 알게 되었다. 그 힘으로 시를 쓰게 되었다. 내 언어의 시작이 되어주신 아버지, 어머니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부모님의 사랑을 시를 쓰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나의 오해들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내가 좀 더 따뜻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부모님을 따뜻하게 안아드리고 싶다. 나 자신을 좀 더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은, 남편 정현 덕분이다. 내가 의지하는 단 한 명의 사람. 말로 다 할 수 없게 고맙고 미안하다. 힘껏 미워하고, 힘껏 사랑하고, 함께 울고, 웃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나의 벗, 사랑과 버들에게, 나를 믿어주는 은정에게, 항상 지지해주고 격려해주는 정숙 언니에게, 곁을 지켜주는 슬기에게, 나보다 나의 잘됨을 더욱 기뻐하는 진희 언니에게, 부케처럼, 바통을 넘긴다. 나은아. 내 옆에 있어 준 이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이원 선생님. 선생님의 문학에 대한 마음이 나를 더욱 간절하게 했다. 깊고 단단하게, 오래도록 좋은 시를 쓰는 것으로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다. 많은 가르침을 주셨던 명지대 교수님들과 부족한 나에게 시인이라는 이름을 달아 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린다.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지는 않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시 앞에서 좀 더 용기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두려움을 뚫고 나가는, 무서운 손으로. △1984년 경기 안성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명지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태어나 처음 쓴 희곡 작품으로 당선의 영광을 안은 대학교 1학년생, 20년 동안 미용실을 운영하며 손님이 없는 틈을 타 습작을 해온 미용사, 7년 동안 단편소설로 신춘문예에 지원하다 중편으로 바꿔 지원한 첫해에 당선된 작가…. 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자들의 당선 뒷이야기를 들으면 그 자체가 한 편의 소설 같다. 이번 신춘문예 지원자 2426명 가운데 당선의 영광을 차지한 사람은 단 8명. 시, 단편소설 등 총 9개 부문에서 경합을 벌였지만 아쉽게도 문학평론 부문은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 기념촬영을 위해 12월 23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를 찾은 당선자들은 아직도 당선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모습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번 당선자들의 나이는 20대 4명, 40대 4명으로 양분됐다. ○ 느닷없는 당선 통보, “장난 전화인 줄 알았다” 희곡 당선자인 신비원 씨(23)의 당선작은 기말고사 과제였다. 서울예대 극작과 1학년인 신 씨는 ‘희곡 작품 하나를 신춘문예에 투고하고 택배 영수증을 제출하라’는 조광화 교수의 엄명에 부랴부랴 3주 만에 초고를 탈고했다. 하지만 일이 생겼다. 원고가 들어 있던 노트북을 분실한 것. PC방에 틀어박혀 일주일여 만에 다시 원고를 완성해 간신히 신춘문예에 지원할 수 있었다. 물론 난생처음 쓴 희곡작품이다. 학교 앞 PC방에서 대학 동기들과 카트라이더를 하다 당선 통보를 받은 신 씨의 첫마디는 “나 어떡해∼. 진짜 동아일보 맞아요?”였다. 같이 게임하던 친구들의 반응은 “이럴 수가!!” 신 씨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해 드라마 대본, 단편 소설, 시나리오 등을 습작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발표한 것이 없었다. 아직도 꿈결 속에 있는 것 같다”며 웃었다. 중앙대 문예창작과 4학년인 동화 당선자 이진하 씨(24)는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졸업 선물을 받게 됐다. 지난해 12월 대산대학문학상 동화 부문에 당선된 그는 걸출한 수상 경력을 안고 사회에 나서게 됐다. “엄마와 칼국수를 먹다가 당선 전화를 받았어요. 깜짝 놀라 젓가락을 내려놓았는데 손이 덜덜 떨리더군요. 졸업 전에 등단이 돼서 기쁘지만 부담도 돼요. 만족하지 않고 계속 발전해 나가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시 당선자인 안미옥 씨(28)는 올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지원하기 전 서류봉투 10개를 샀다. ‘봉투를 다 사용하기 전에 꼭 등단해야 한다’고 다짐했던 것. 한꺼번에 산 봉투가 무색할 정도로 ‘작심하고 지원한’ 첫해에 당선됐다. 고등학교 때부터 시를 써온 그는 명지대 문예창작과를 거쳐 명지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며칠째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을 하다 잠결에 전화를 받았어요. 꿈속인 것 같아 처음엔 덤덤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심장이 막 뛰었죠. 제대로 준비해 신춘문예에 응모한 것은 처음인데 매우 기뻤습니다.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깊게, 꾸준하게 시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영남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소설을 쓰고 싶어서’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 다시 입학해 졸업한 김혜진 씨(29)는 단편소설에 당선됐다. 소설 쓰는 게 생각보다 너무 괴로워서 고민도 많이 했다는 김 씨는 통보를 받고 ‘아, 이제는 어쩌지’ 하는 막연한 걱정부터 들었다고 했다. “박기동 선생님(서울예대 교수)께서 소설 안에서 인물들이 놀게 하라고 하셨는데 그게 가장 어려웠습니다. 소설과 소설 속 인물, 소설을 쓰는 저를 아주 많이 좋아하고 싶고, 성실하게 쓰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시조 당선자인 황외순 씨(44)는 지난해 말에 운이 없었다. 10여 년간 경북 경주시 외동읍에서 운영하던 미용실인 ‘내가 잘 가는 미용실’이 도시 재정비 사업으로 도로가 나면서 지난해 11월 철거됐다. 당선 통보를 받기 몇 시간 전에는 집안에 작은 화재가 났다. “안 좋은 일들이 연달아 생긴 가운데 당선 통보를 받아 더 기뻤어요.” 미용 경력 20년인 황 씨는 손님이 없는 틈틈이 미용실 한편에서 습작을 했다. 경주문예대에서 1년간 문학 기초를 닦은 것이 전부. “미용실 일을 하면서 자리를 비우기 힘들어 취미 삼아 시를 쓰기 시작한 게 등단까지 이어졌다. 즐기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일상과 동떨어지지 않은 주변 이야기, 그 속에 산재해 있는 따뜻함을 시로 풀어내고 싶다”며 환하게 웃었다. 황 씨는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도 당선돼 2관왕에 올랐다. 김영옥 씨(47)는 중편소설 당선으로 재등단하게 됐다. 4년 전 한 지역 문예지를 통해 등단했지만 청탁은 1년에 한 번 받기도 힘들었다. 다시 중앙일간지 신춘문예를 노크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단편만 쓰던 김 씨는 첫 중편에 도전했고 이번에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슬픔을 가진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단 한 줄이라도 용기를 얻는 작품을 쓰고 싶습니다.” 장르를 넘나들다 작가의 길을 걷게 된 당선자들도 있다. 영화평론 당선자인 김정(본명 김혜란·46) 씨는 서울대 동양화과, 서강대 대학원 영상학 석사를 거쳐 연세대 대학원 영상예술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미술과 영상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겸손하게’ 풀어내는 솜씨에 심사위원으로부터 “당장 평론계로 나와도 손색없다”는 극찬을 받았다. 김 씨는 “창작과 비평을 겸해온 일련의 군단(누벨바그 등)으로부터 깊은 감흥을 받아 많은 습작을 하게 됐습니다. 앞으로 치열하고, 사려 깊고,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습니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캐나다 유학 때 디자인을 전공하고 현지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했던 전호성 씨(43)는 시나리오에 당선됐다. 영화를 만들었던 그는 자연스레 시나리오에 관심을 갖게 됐고, 혼자 간직하던 글을 세상에 내보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생겼던 것. 귀국해 동국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간 그는 시나리오와 소설 창작을 병행하고 있다. “남의 일로만 여겨졌던 게 내게도 일어나는구나 싶었어요. 사람과 사람의 관계, 그 이면에 있는 것들에 관한, 울림 있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한밤에 창을 열면, 멀리 옥탑방이 환하다. 반듯한 사각을 배경으로 밤은 어둡고, 나는 자주 그곳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은 없는 이들과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이들이 무시로 드나들던 환한 창 너머. 오래된 계절이나 기억나지 않는 시간들을 밀어 넣으며 나는 헐거운 이야기를 떠밀었다. 다시 먼 옥탑방을 올려다보는 한밤. 설익은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박기동 선생님, 김혜순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전할 수 있어 기쁘다. 그분들은 글 이전에 쓰여져야 하는 어떤 것들을 가르쳐주셨다. 우둔한 제자에게도 그 가르침의 무게는 시간이 지날수록 버겁다. 손정희 선생님, 박상우 선생님께도 감사 인사를 전한다. 아버지, 어머니께는 언제나 부끄럽고 죄송하다. 두 분의 걱정과 염려를 담보로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잊은 적 없다. 두 분이 내 아버지, 어머니인 것은 고맙고 다행한 일이다. 무시로 그 환한 방을 드나들던 이들에게도, 나날이 살찌는 내 작은 식구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러니까 내가 쓴 글들은 내가 쓴 것이지만, 내가 쓴 것이 아닌 셈이다. 한없이 보잘것없다는 자각으로 힘껏, 사유하고 즐겁게, 쓰겠다. △1983년 대구 출생 △영남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총 12편의 신춘문예 본심 진출작을 통독하면서 느낀 것은 젊음이다. 힘이 넘치고 실험적인 작품이 많았고 우리 소설문학의 밝은 미래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중에서도 아래와 같은 네 작품이 집중 검토되었다. ‘크레이지 러브 트럭’은 잘 짜여진 작품이다. 많이 읽고 많이 써본 솜씨임을 짐작하게 한다. 문제는 소설이 무엇을 말하는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독자의 공감에 이르게 하는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만 느낌이다. ‘언제까지 어릴래?’는 골격이 단단하다. 컴퓨터 게임에 빠진 오빠의 갱생을 바라보는 중학생 여동생의 시선은 적당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웃음기가 느껴지게 한다. 결말은 훈훈하다. 이처럼 모든 것이 갖춰진 것이 틀에 박힌, 모범적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어서 마지막 관문을 넘지 못했다. ‘티셔츠’는 잘 만들어진 작품임에 틀림없다. 발상 또한 참신하다. 세상이 두려워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는 동생과 직장 상사의 성추행을 견뎌내며 생활을 지탱해오던 언니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인데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럽게 흘러간다. 하지만 소품에 그치고 만 느낌이어서 당선권에서 제외되었다. ‘치킨 런’은 문제작이다. 상황은 암울하고 비극적인데 세부는 웃음을 짓게 만드는 희극이다. 현재적이고 현세적인 동시에 파격적이다. 우리 문학이 기다려온 것이 바로 이런 작품이 아닐까 싶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모든 응모자들의 정진을 진심으로 바란다. 오정희 소설가, 성석제 소설가}

어렸을 때 엄마가 구두를 신은 모습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엄마 구두를 훔쳐 신으며 두근거리던 때도 있었지요. 내 발에 한참이나 큰 구두를 신고 뒤뚱뒤뚱 걸으며 기뻐했던 기억이 납니다.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듣고 저는 동경하던 구두를 선물 받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가만히 작은 발을 넣어봅니다.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아 어색하고 걸음걸이는 우스꽝스럽습니다. 하지만 가슴이 벅차오르고 자꾸만 웃음이 납니다. 하루 빨리 성장하여 이 멋진 구두에 걸맞은 작가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당선 소식을 듣자마자 불러내 꽃등심을 사주신 아빠, 언제나 내 편인 엄마,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내 동생 미나, 죄 없는 샌드백 - 이재훈 씨, 모드파 멤버들, 자랑스러운 동기들, 언제나 내게 질투와 동경의 대상인 ‘수작’ 문우들, ‘넌 될 거야!’라고 말해준 고마운 사람들. 이들 덕분에 한 문장씩 써내려 갈 수 있었습니다. 부족한 제게서 가능성을 보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는 발전하는 모습으로 보답하고자 합니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걷겠습니다. 문학의 기틀을 닦아주신 중앙대 교수님들과 동화의 즐거움을 알려주신 김서정 교수님께 이 자리를 빌려 무한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합니다. △1988년 경기 광명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4년 △대산대학문학상 동화부문 당선}

270여 편의 응모작을 두 심사위원이 나누어 검토하였으며 썩 만족스러운 편은 아니나 본심 작품들은 나름의 가능성이 크다. ‘D-day’는 이혼에 이른 부모의 상황에서 아이 입장을 단순히 비극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시선, 주체가 뚜렷한 아이를 그려낸 점이 신선하였으나 앞뒤가 뚝 잘린 부분적인 작품이라 아쉬웠다. ‘구멍이 있는 사과’는 응모작 가운데서 상상력이 가장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이미지가 자연스럽고 사랑스러운 느낌마저 주는데 이를 받쳐 줄 기본적인 문장력이 서툴러 공부가 더 필요해 보였다. ‘두근두근 15분’은 낯선 사람을 의심하고 불신할 수밖에 없는 세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때로는 우리 교육이 되레 불신감과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건 아닌지 반성케 하는 지점이 있으나 이야기가 그저 해프닝이었을 뿐이라는 결론은 허탈감을 준다. ‘시인 아저씨께 보내는 편지’는 다소 설명적일 수 있는 내용을 시각적으로 풀어낸 점도 신선하고, 전형적인 시 교육에 의문을 제기하는 아이의 목소리도 흥미로웠다. 다만 작가의 단조로운 인식은 아쉽다. 작품 내용 중 ‘작가 의도’라는 표현은 ‘작품 의도’라야 적절하고, 논거만 충분하다면 작품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타당하다는 열린 시각이 필요하다. 문학교육, 나아가 경직된 사유 방식에 대해 당돌하면서도 창의적인 아이의 눈을 통해 다양한 관점의 포용이라는 문제를 제기한 재치가 돋보여 당선작으로 올린다.김경연 아동문학평론가, 황선미 동화작가}

전체적으로 지난해보다 응모작의 질이 좋았다는 느낌이 들지만 본심에 오른 13편의 수준 차는 심했다. 당선 후보로 집중적으로 검토한 작품은 ‘피어싱’ ‘달봉이 장례식’ ‘푸른 노을’ ‘금루곡’이었다. ‘피어싱’은 ‘팜 파탈 여고생’이 등장하는 흥미로운 소재지만 전체적으로 구성력과 필력이 현격히 떨어졌다. 좀 더 글 쓰는 연습이 필요해 보인다. ‘달봉이 장례식’은 한 장수마을에 들어간 젊은 장례업자의 얘기를 유쾌한 필치로 그렸고 ‘모든 부모는 자식 때문에 산다’는 메시지도 좋았다. 구성도 뜻도 좋지만 너무 전형적인 느낌이다. ‘푸른 노을’은 한 절 앞에서 사진관을 하는 노인이 수취인 불명의 사진 5장을 전하러 길을 떠나는 얘기로, 상업영화에서 잘 볼 수 없는 주제라 눈길이 갔다. 글쓰기가 안정감이 있고 의미도 좋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구성의 탄탄함이 사라져 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당선작으로 꼽은 ‘금루곡’은 흥미진진해 한 호흡으로 읽었다. 전체적으로 고르게 수준이 와 있는 듯한 느낌이다. 글쓰기나 구성력, 인물에 대한 표현의 깊이 등이 안정적이어서 영양분이 고루고루 들어 있는 음식을 먹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사건을 좀 더 드라마틱하게 키우는 전개가 있어야 하는데 안에서 타는 듯했다. 스케일감이 있었으면 좋겠다. 차승재 한국영화제작가협회장, 이정향 영화감독}

단평이 요구하는 기본적 덕목들을 충분히 갖춘 글은 전체 응모작들 가운데 단 한 편도 없었다. 두세 편의 후보작은 물론이고 최종 당선작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가작 아닌 당선작을 낸 건, 그 가능성과 잠재력 때문이다. 단평과 장평 두 범주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자웅을 겨룬 건 두 명이다. 단평 ‘비트냐, 펑크냐-(2011)에 관하여’와 장평 ‘개들의 예감-(2010), (2010), (2011)에 관하여’의 엄준석, 단평 ‘살아남은 자의 슬픔, 죽은 자의 비문(秘文)-의 자기반영성’과 장평 ‘욕망의 모호한 대상, 혹은 욕망의 모호한 시간-의 이시성(異時性)과 이소성(異所性)’의 김정(본명 김혜란)이었다. 이들의 단평들도 만족스럽진 않지만 장평에서 빛을 발한다. 엄준석이 ‘확산적’ ‘거시적’이라면, 김정은 ‘집중적’ ‘미시적’이다. 엄준석은 ‘개와 카메라의 여정’을 통해 국민국가가 직면해 있는 다양한 위기를 배회하는, 일종의 ‘유기견’의 생태학적 보고로 분석한다. 다만 논리 전개의 정교함에 비해 문장의 완결성이 떨어진다. 김정의 글은 기표인 비주얼과 사운드 등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으면서 ‘북촌방향’의 시공간 안으로만 파고 들어가는 건 아쉬움을 넘어 유감이다. 하지만 ‘북촌방향’과 홍상수 영화 세계 전반에 대한 분석과 종합이 그 어느 글보다 심층적이며 풍요롭다. 상호 텍스트적으로 이처럼 풍성한 글을 언제 만났나 싶을 정도다. 미술과 사진, 영화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펼치는 논지는 융합적 글쓰기의 한 전범으로서 손색없다.전찬일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눈뜨는 화석 천마총에서 황외순소나무에 등 기댄 채 몸 풀 날 기다리는천마총 저린 발목에 수지침을 꽂는 봄비맥 짚어 가던 바람이 불현듯 멈춰선다벗어 둔 금빛 욕망 순하게 엎드리고허기 쪼던 저 청설모 숨을 죽인 한 순간에낡삭은 풍경을 열고 돋아나는 연둣빛 혀고여 있는 시간이라도 물꼬 틀면 다시 흐르나몇 겁 생을 건너와 말을 거는 화석 앞에누긋한 갈기 일으켜 귀잠 걷는 말간 햇살}

집 안에 작은 화재가 있던 날이었습니다. 달리 재산상의 손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가재도구에 달라붙은 그을음을 닦아내야 하는 막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우리 집 큰아들인 현준이가 위로의 말이랍시고 제게 건넨 말이 있습니다. “엄마, 우리 교수님이 그러시는데 불난 적이 있는 집은 무조건 사고 봐야 된대. 복이 넘쳐서 불이 나는 거래.” 웬 복? 싶은 맘 없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루가 다 지나가기도 전에 당선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큰 복이 제게로 왔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만 두리번거리는 저를 보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시선들이 함께 따라왔나 봅니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제게 품이 넉넉한 올가미가 씌워진 것 같습니다. 이것마저도 시조를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젠 당선이 주는 이 구속마저도 즐겨야 할 것 같습니다. 돛도 없이, 표적도 없이 갈팡질팡 노 저어온 시조의 길. 아직은 갈 길이 더 멀다는 것을 압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응원의 손길 보내주신 두 분 심사위원님과 동아일보사에 감사드립니다. 믿음직스러운 시인이 되겠습니다. 아울러 힘든 고비마다 제 눈물 닦아주시고, 지친 등 쓸어주신 우리 쪽방 식구들과 여러 친구들, 따뜻한 내 남편과 두 아이들에게도 고맙다는 말 전합니다. △1968년 경북 영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청소년교육과 졸업 △경주문예대학 수료 △문열공 매운당 이조년 추모 백일장 장원 △청풍명월 전국 시조백일장 장원 △전국 가사·시조 창작공모전 우수}

글을 쓸 때면, 복기하는 두 가지 잠언. 피로 써라. 자라투스트라는 그렇게 말했다. 언젠가 글을 쓴 대가로 은화 몇 닢을 받은 이후, 심장에 새겨둔 말이다. 정말이지 피로 쓰지 않으면 단 한 줄도 제대로 쓸 수 없다. 내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한 줌의 지식으로는 온전히 양피지를 채울 수도, 당신과 깊은 공명을 이룰 수도 없다. 잉크로 삼아야 할 것은 오직 나의 피. 그러나 아직 나의 피는 묽다. 시네크리튀르(Cin´ecriture). 영화(Cin´e)와 글쓰기(´Ecriture)의 합성어. 이 용어는 창작과 비평이 수레의 앞뒤 바퀴처럼 공생하는 것임을 각인시켜 주었다. 내 서툰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창작, 이제 숨 고르며 첫발을 내디디는 비평. 나는 비평이 창작의 등가물(等價物)이어야 함을 익히 알고 있다. 치열하고 사려 깊은 글, 영화에 대한 연서이자 노동과 성찰일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그리고 감사드린다. 존경해 왔던 전찬일 선생님께 내 미욱한 글이 읽혀질 수 있었음을. 동아일보의 전언 덕분에 겨울의 심장을 통과할 수 있었음을. 꿈의 음화(陰(화,획))인 현실, 현실의 음화인 꿈. 그 두 세계를 봉합하는 영화를 통해 스쳐간 모든 이들에게도. △1966년 서울 출생 △서울대 동양화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졸업(영상학) △연세대 대학원 영상예술학 박사과정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