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

이진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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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진영 논설위원입니다.

ecolee@donga.com

취재분야

2025-06-29~2025-07-29
칼럼100%
  • “다 잘될 거야”[횡설수설/이진영]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에 맞서다 숨진 19세 소녀가 민주화 시위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지난달 쿠데타 발생 후 최악의 유혈사태가 벌어진 3일 미얀마의 2대 도시 만달레이 시위 현장에서 군경의 총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에인절(또는 찰 신)이다. 그의 티셔츠에 적혀 있던 문구는 시위의 슬로건이 됐다. “다 잘될 거야(Everything will be OK).” ▷에인절은 댄서이자 태권도 사범이었다. 함께 시위 현장에 있었던 친구들은 그가 용감하게 시위를 주도했다고 기억한다. 경찰이 최루가스통을 던지면 그걸 주워 경찰을 향해 되던지고, 시위대가 매운 눈을 씻을 수 있도록 송수관을 찾아 열었다는 것이다. 에인절은 지난해 11월 총선 때 “내 생애 첫 투표”라는 글과 함께 투표 인증샷을 올리기도 했다. 11월 총선은 군부가 부정선거라며 쿠데타를 일으킨 계기다. ▷이번 시위의 주역은 에인절처럼 1995년 이후 출생한 Z세대다. 1988년 민주화운동 세대의 자녀들이다. 군사 정권하에서 나고 자란 부모 세대와 달리 이들은 민정 이양기에 유년기를 보냈고, 이후엔 민주화의 상징인 아웅산 수지의 집권하에 살아 자유를 억압하는 군부와는 상극이다. Z세대의 카니발 축제 같은 시위를 보면 민주화운동의 세대교체를 실감하게 된다. 만화 캐릭터 분장에 ‘전 남자친구도 나쁘지만 군대는 더 나빠’ 같은 구호를 외치며 청년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국제사회에 도움을 호소한다. SNS에는 국영 언론이 보도하지 않는 참혹한 시위 현장 사진을 올린다.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숨진 에인절의 모습도 페이스북을 통해 알려졌다. ▷이번 시위는 1962년 미얀마에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 세 번째 대규모 민주화 항쟁이다. 1988년 항쟁과 2007년 선황색(샤프란) 승복 차림의 승려들이 주도했던 ‘샤프란 혁명’은 군부의 잔인한 진압으로 끝났다. 이번에도 50명 넘게 숨지는 유혈사태로 번지면서 “미얀마에서 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국제사회가 미얀마 군정을 규탄하는 가운데 미국은 군정을 겨냥한 추가 제재를 예고했다. ▷에인절은 다 잘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페이스북에 혈액형과 비상연락처, 시신을 기증해 달라는 메시지와 함께 작별 인사를 남겼다. “이게 마지막 말일지 몰라. 많이 사랑해. 잊지 마.” 미얀마 유혈사태는 신생 민주주의 국가의 허약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수많은 ‘에인절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1987년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던 이한열의 죽음이 수많은 ‘이한열들’을 일으켜 세워 6월 항쟁을 이끌었듯 말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1-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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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산율 반등 없었던 유일한 文정부[오늘과 내일/이진영]

    저출산 현상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문재인 정부의 출산율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96년 산아제한정책 폐지 후 출산율이 단 한 번도 반등하지 못하고 내리막길만 달린 것은 문 정부가 유일하다. 김대중 정부는 1998년 합계출산율 1.46에서 시작해 1.48로 끌어올렸다가 1.19로 마무리했다. 노무현 정부는 2005년 저출산·고령화사회위원회를 신설한 후 1.26까지 갔다가 1.19로 끝났다. 이명박 정부는 저출산 대책이라며 낙태 단속을 강화해 여성계의 반발을 사면서도 3년 연속 상승으로 1.3까지 끌어올렸다가 1.19로 다음 정부에 넘겼다. 박근혜 정부는 1.24까지 갔다가 1.05로 끝났고, 문 정부 출범 후엔 0.98→0.92→0.84로 곤두박질쳤다. 저출산은 출산이 싫어서 안 하거나, 하고는 싶지만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탓이다. 안 하겠다는 사람은 몰라도 비용 문제로 엄두를 못 내는 사람은 정책적 지원으로 얼마든지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다. 국내외 학자들이 출산율을 끌어내리는 가장 중요한 경제 변수로 지목하는 것이 주거비용이다. 주거비용은 지출 항목 중 비중이 제일 커서 다양한 의사 결정에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선진국들의 경우 집값이 오르면 출산율은 떨어진다. 2000∼2014년 전국의 결혼가정 1114가구를 추적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집값이 배로 뛰면 결혼 연령이 남자는 0.94세, 여자는 0.85세 높아졌다. 한국은 혼외 출산율이 낮아서 여성이 결혼을 미루면 출산율도 떨어진다. 첫 아이 낳기 전 집을 산 부부는 집 사서 결혼한 부부에 비해 첫째 출산 시기가 많이 늦어졌고, 월세를 살면 전세보다 둘째 출산 확률이 74.5% 낮아졌다(2018년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 ‘지역 주택 가격이 결혼 연령 및 출산 시점에 미치는 영향’). 특히 서울 25개구의 경우 2006∼2018년 출산율 하락분의 15∼50%가 아파트 값 상승 탓인 것으로 분석됐다(한국생활과학회지 2020년). 문 정부만이 출산율 반등을 못 이뤄낸 이유도 역대급 집값 탓이 클 것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어제 발표에 따르면 문 정부 4년간 노동자 평균 연봉이 3096만 원에서 3360만 원으로 9% 오르는 동안 30평형 아파트 값은 6억4000만 원에서 11억4000만 원으로 78% 뛰었다. 4년 전 연봉을 21년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으면 살 수 있었던 아파트를 지금은 34년을 모아야 한다는 뜻이다. 지난해 말 신혼부부의 평균 결혼비용은 1억5332만 원인데 서울 아파트 중위 전셋값이 5억6700만 원이니 신랑신부가 예물 예단 신혼여행 다 포기하고 대출을 있는 대로 긁어모아도 부모의 도움 없이는 서울 전세 아파트에서 시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안정된 일자리를 얻지 못한 수많은 청년들에겐 이마저도 배부른 소리다. 경실련은 “남은 임기에 집값은 더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출산을 결정할 때 고려하는 변수가 최근 3년간 아파트 가격 추이라고 한다. 코로나19로 인한 결혼 감소분까지 더하면 향후 출산율 하락폭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문 정부의 저출산 문제를 보도하는 외신은 ‘한반도 최대의 적은 북핵이 아니라 인구 감소’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저출산 고령화로 인구학적 시한폭탄의 타이머가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집값이 주춤하다가도 정부가 부지런히 대책을 내놓으면 귀신같이 올랐다. 국가 소멸 타이머를 멈출 자신이 없다면 다음 정부에 부담을 떠넘기는 부동산정책이라도 거둬들여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1-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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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신에 대한 오해[횡설수설/이진영]

    “곧 마스크를 벗을 수 있겠죠.” “친구들과 마음 놓고 만나고 싶어요.” 국내 코로나19 환자 발생 400여 일 만에 백신을 맞은 사람들은 희망에 들떠 있다. 한 의사는 “짱돌 들고 싸우다 방탄복에 총까지 든 기분”이라고 한다. 하지만 마스크를 벗고 자유롭게 다니려면 아직 멀었다. ▷백신을 맞아 항체가 생기면 다른 사람을 감염시킬 염려가 없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런데 코로나 백신으로 생기는 면역은 감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살균 면역(sterilizing immunity)이 아니다. 백신 접종을 하면 증상이 발현되지 않을 뿐 체내에 바이러스가 들어오는 것까지 막지는 못한다. 내 몸속 바이러스는 언제든 다른 사람에게 옮겨갈 수 있다. 다른 백신들도 마찬가지다. 2009년 미국 일부 지역에서 갑자기 볼거리가 유행한 적이 있다. 역학조사 결과 11세 소년이 영국에서 볼거리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 귀국해 전파시킨 것으로 확인됐다. 이 소년은 홍역·볼거리·풍진(MMR) 예방접종을 모두 마친 상태였지만 감염과 전파를 피하진 못했다. ▷백신은 몸속에 들어오는 바이러스 양을 줄여 확산을 막는 효과는 있다. 현재 백신별 전파 억지 효과에 관한 연구가 진행 중인데, 영국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의 경우 1회 접종 후 감염자 수가 67% 줄었다는 연구가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미국 화이자 백신의 효과가 확인됐다. 백신을 맞지 않은 집단의 감염률은 4%인데 백신을 2회 모두 맞은 집단의 감염률은 0.02%로 뚝 떨어졌다. ▷그렇다고 전 세계 코로나 환자 증가세가 주춤한 것이 100% 백신 덕분만은 아니다. 마스크 쓰기와 거리 두기의 습관화, 부분적 봉쇄, 자연 면역이 종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절대적인 발생 규모는 여전히 위험한 수준이며 다시 증가세로 돌아설 조짐마저 보인다. 올여름 코로나 종식을 기대했던 미국에선 변이 바이러스의 출현이 백신 효과를 상쇄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한국은 하루 확진자가 좀처럼 300명대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있다. 방심했다가는 3차 유행 속에서 4차 유행을 맞을 수 있다. ▷정부는 올 9월까지 국민 70% 이상의 접종을 완료해 11월 집단 면역을 달성할 계획이다. 하지만 백신 접종 나흘째인 1일까지 접종률은 0.04%에 불과하다. 집단 면역에 필요한 접종률 60∼72%는 백신이 바이러스 전파를 완벽히 차단할 경우의 수치이며 실제로는 80∼90%가 맞아야 안심할 수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어제 “코로나가 올해 끝난다는 건 비현실적인 생각”이라며 거리 두기 강화를 권고했다. 백신 접종 개시는 코로나 끝의 시작일 뿐 끝이 아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1-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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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셜 버블[횡설수설/이진영]

    전에는 몰랐던 말들을 코로나19로 자주 쓰게 된다. 격리는 ‘쿼런틴(Quarantine)’, 격리 조치를 무시하는 10대는 ‘쿼런틴(Quaranteen)’이다. 재택근무는 WFH(Working From Home), 코로나 와중에 태어난 세대는 코로니얼(Coronnial)이라 한다. 정부가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를 개편하면서 도입을 검토 중인 방역 정책은 소셜 버블(Social Bubble)이다. ▷소셜 버블이란 가족이나 직장 동료처럼 일상을 공유하는 10명 내외의 사람들만 비눗방울로 싸듯 집단화해 버블 간 감염 확산을 막는 전략. 비눗방울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는 자유롭게 접촉하되 버블 밖에선 철저히 마스크 쓰기와 거리 두기를 해야 한다. 지난해 3월 방역 선진국인 뉴질랜드의 저신다 아던 총리가 봉쇄 조치를 발표하면서 “함께 사는 이들과 작은 버블 속에 있다고 생각하라. 바이러스가 버블 안에 없고, 우리가 버블 속에 있다면 우린 안전하다”라고 쉽게 설명한 것이 용어의 유래다. ▷소셜 버블은 감염의 위험을 통제하면서 거리 두기로 인한 고립감과 스트레스를 덜어 보자는 취지다. 뉴질랜드에 이어 캐나다 독일 영국에서도 시행 중인데 정부의 지침에 따라 감염이 확산되면 버블을 가족으로 제한했다가 상황이 좋아지면 간병인, 친척, 이웃 등으로 버블을 키운다. 어린 자녀의 사회성을 길러주기 위해 두세 가족이 하나의 버블을 만들 수도 있다.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팀은 지난해 6월 소셜 버블 정책을 시행했더니 일률적인 거리 두기를 적용했을 때보다 감염자 수가 3분의 1로 줄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소셜 버블은 터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작을수록 안전하고 1인당 하나의 버블에만 들어갈 수 있다. 두 가족 이상이 하나의 버블을 만들 경우 신체적 접촉의 수위나 가정 방문, 화장실 공유 문제, 버블 밖 행동반경 등에 대해 규칙을 만들어 두는 것이 좋다. 버블 밖에서 감염의 위험에 노출된 경우 즉시 버블 내 구성원에게 알려야 하며 조금이라도 찜찜하면 버블을 깨야 한다. 버블 형성 전 2주간의 자가 격리를 조언하는 전문가도 있다. ▷코로나의 장기화로 지속 가능한 방역 전략인 소셜 버블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지고 있다. 정부가 일률적인 ‘5인 이상 모임 금지’ 대신 소셜 버블을 도입한다면 코로나 확산세에 따라 크고 작은 버블 속에서나마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셜 버블이 나와 비슷한 취향의 정보만 편식하는 ‘생각의 감옥’이 될까 봐 걱정이다. 몸은 소셜 버블에 갇혀 있더라도 마음은 다양한 이웃들의 사정과 생각을 향해 열어 두어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1-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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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적 장르 ‘웹툰’[횡설수설/이진영]

    2092년 우주 청소부 얘기를 다룬 ‘승리호’. 한국 최초의 우주 SF물인 이 영화가 코로나19로 극장 개봉을 포기하고 5일 넷플릭스에 공개된 지 하루 만에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본 영화가 됐다. 영어 제목은 ‘Space sweepers(우주 청소부들)’인데 프랑스를 포함한 28개국에서 1위 자리를 쓸어 담았다. 원작인 홍작가의 웹툰 ‘승리호’의 힘이 성공요인으로 꼽힌다. ▷대중문화계의 비주류이던 웹툰이 드라마와 영화의 흥행을 보장하는 킬러 콘텐츠로 떠올랐다. 넷플릭스에 공개된 웹툰 원작의 드라마 ‘스위트홈’은 56개국에서 인기 순위 10위 안에 진입했다. ‘경이로운 소문’도 넷플릭스 아시아 시장에서 인기순위 1위다. 2010년 ‘매리는 외박중’을 시작으로 웹툰 기반의 드라마는 80편이 넘게 제작됐다. 영화도 2008년 ‘바보’부터 ‘이끼’ ‘강철비’ ‘신과함께’ 등 약 30편이 개봉하면서 웹툰 영화 시대를 열었다. ▷웹툰의 경쟁력은 세계적이다. 종이 만화 시장에선 미국과 일본이 대세지만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세로 스크롤 방식의 스마트폰에 최적화된 웹툰이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네이버와 카카오웹툰의 연간 글로벌 결제액은 1조3000억 원이 넘는다. 인터넷 만화는 영어로 ‘웹코믹’이라 하지만 한국 웹코믹은 ‘웹툰’이라는 고유 장르로 분류된다. 굳이 ‘K웹툰’이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주 1회 업데이트를 통한 속도감 있는 전개와 독자 댓글 반응의 적극적 수용이 웹툰의 강점.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원작인 웹툰을 찾아보는 사람들도 많다. 웹툰 ‘승리호’도 어제 북미 프랑스 일본 인도네시아 플랫폼을 통해 연재를 시작했다. ▷웹툰의 힘은 무한한 상상력에서 나온다. 유명 작가와 문하생 중심의 폐쇄적인 도제식 생산 방식을 버리고 누구나 인터넷에 작품을 올려 이용자들의 평가를 받는 개방형 시스템을 선택한 결과다. 웹툰 작가 10명 중 7명이 만화 교육을 받지 않은 아웃사이더들인데 이들은 기존 문법에서 벗어나 로맨스 판타지, 일상 개그툰, 학원 일진물 등 다양한 장르를 시도한다. 소재 빈곤에 허덕이던 드라마와 영화 시장이 웹툰의 검증된 이야기보따리에서 부활의 기회를 잡고 있다. ▷종이 만화 시장은 정체 상태이지만 디지털 만화는 두 자릿수 증가세로 올해는 시장 규모가 58억6200만 달러(약 6조5000억 원)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마블 코믹스는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엑스맨 시리즈로 미국 영화 시장을 먹여 살리고 있다. 민주적 생산 방식의 웹툰이 세계 이야기 시장에서 한류 콘텐츠의 영토를 얼마나 넓혀 나갈지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1-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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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이버 실검 폐지[횡설수설/이진영]

    ‘진용진레전드로가겠습니다.’ 외계어 같은 이 문장이 지난해 2월 뜬금없이 네이버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실검) 1위에 올랐다. 알고 보니 당시 구독자가 140만 명이던 유튜버 진용진 씨가 “몇 명이 검색해야 1위를 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며 “지금 당장 띄어쓰기 없이 ‘진용진…’을 검색해 달라”고 요청한 데 따른 현상이었다. 실검 순위가 소수의 동원력에 따라 좌우됨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네이버가 16년간 운영해온 실검 서비스를 25일 폐지하기로 했다. “실검이 대중의 관심사를 대변한다고 보기 어려워졌다”는 이유에서다. 그동안 여론 조작 논란이 끊이지 않자 지난해 4·15총선을 앞두고 중단한 적이 있는데 4월 7일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아예 없애기로 한 것이다. 카카오가 운영하는 다음은 지난해 총선 무렵 실검 서비스를 먼저 접었다. “실검이 사회 현상의 반영이 아닌, 현상의 시작점이 돼버렸다”는 반성과 함께였다. ▷포털 뉴스 이용자 10명 중 7명은 실검 순위를 확인한 후 뉴스를 본다. 그만큼 실검이 영향력을 발휘하자 순위에 오르고 싶은 욕구가 생겨났다. 먼저 아이돌 팬들이 ‘오후 3시 ○○그룹 부탁드립니다’라는 글을 올리며 지정된 시간에 지정된 키워드로 ‘실검 총공’에 나서면서 세를 과시했다. 정치 팬덤도 뒤따랐다. ‘조국구속’이 1위에 오르면 ‘조국수호’가 치고 올라오고, ‘문재인탄핵’이 1위를 하면 ‘문재인지지’가 역전하는 현상이 반복됐다. ▷기업들도 할인 이벤트를 미끼로 상품명을 실검에 띄우는 경쟁에 뛰어들었다. 1000만 원을 내면 실검 순위에 한 시간 떠 있게 해주는 업체가 있다는 뒷말도 있다. 2018년엔 네이버 실검 순위를 조작하다 포털 업무방해죄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사람도 나왔다. 기업은 실검 조작으로 홍보 효과를 보고, 네이버는 검색어를 클릭하면 뜨는 검색 광고 수수료로 떼돈을 버는 사이 소비자들만 왜곡된 정보로 피해를 봤다. ▷이제 실검이 순수한 여론의 반영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포털 이용자 76%가 실검 조작을 의심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다. 특히 네이버가 지난해 10월 검색 알고리즘 조작으로 자사 쇼핑 상품이나 동영상을 경쟁사보다 우선 노출해 과징금 267억 원을 부과받으면서 실검에 대한 불신도 깊어졌다. ‘실검 민주주의’라는 말이 있다. 이용자 개개인의 관심사가 모여 의제를 설정한다는, 실검의 순기능을 기대한 표현이다. 하지만 현실은 소수의 ‘실검 사유화’로 인한 여론 왜곡이다. 연 매출 6조 원인 인터넷 기업이 실검 장사로 배를 불리며 건전한 여론 형성을 방해하는 서비스를 너무 오랫동안 방치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1-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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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BS 수신료, 2500원도 비싸다[오늘과 내일/이진영]

    KBS가 월 수신료를 2500원에서 3840원으로 올려 달라고 한다. 수신료가 41년째 동결돼 공적 책무를 해내기 힘들다는 것이다. 왜 3800원도, 4000원도 아닌 3840원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동안 1인당 국민소득이 1729% 올랐고, 일본은 연간 수신료가 16만 원이 넘는다는 참고 자료를 냈다. KBS 보는 데 얼마를 내면 적당할까. 시장 가격이 없는 공공재는 지불의사액(Willingness To Pay), 즉 지불할 의사가 있는 최대치를 따진다. 한국방송학회가 발간하는 저널에는 시청자들이 공영방송을 보기 위해 지불할 의사가 있는 최고 금액을 조사한 논문이 4편 있다. 김재철 박사의 2006년 조사에선 3775원이었다. 6년 후인 2012년 이준웅 서울대 교수팀의 연구에선 3577원, 2015년 우형진 한양대 교수의 조사에선 2645원, 우 교수팀이 2019년 다시 조사했을 땐 1667.45원으로 쪼그라들었다. 미디어오늘과 리서치뷰가 2일 발표한 설문조사에서도 수신료 인상 반대가 76%였다. 지난해 조사에선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46%나 됐다. 정치권에선 KBS가 편파 보도를 한다고 문제 삼지만 시청자들의 평가가 인색한 이유는 따로 있다. 2015년 조사까지만 해도 공정 보도 여부나 사회 통합에 기여한 정도를 따져 지불액을 결정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2019년 조사에선 소비자 후생을 기준으로 꼽았다. 설사 왜곡 보도를 해도 알아서 걸러 듣거나 다른 뉴스 채널을 볼 테니 내게 요긴한 정보, 날 즐겁게 해주는 콘텐츠를 달라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게 안전에 관한 정보다. 재난 주관 방송사가 2019년 강원 고성 산불 때처럼 늑장 특보를 하면 2500원도 다 못 내겠다는 것이다. 이미 10명 중 6명은 스마트폰으로 재해 재난 정보를 얻고 있다. 자본으로부터 독립을 강조하면서 소비자 고발 프로그램 하나 없는 방송, 수신료 중 고작 2.8%(70원)를 떼어가는 EBS가 펭수로 즐거움을 주는 동안 별 화젯거리도 못 만들어내는 재미없는 채널을 위해 왜 지갑을 열겠느냐는 것이다. KBS로선 KBS를 싫어하는 사람들보다 KBS가 없어도 불편함을 못 느끼는 이들을 두려워해야 한다. KBS 기자들이 파업을 해도 9시 뉴스 시청률이 20% 넘게 나오던 시절은 지났다. 종편과 홈쇼핑, 지상파계열 채널을 빼고도 유료채널이 130개가 넘는다. 젊은이들은 빠른 속도로 넷플릭스와 유튜브로 옮겨가고 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방송을 ‘시장’이 아닌 ‘문화’로 여기는 유럽에서도 공영방송들은 공영방송 무용론에 맞서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영국 문화의 자존심인 BBC는 2027년 면허 갱신 때 수신료 폐지 문제를 결정할 전망이라고 한다. 스위스는 공영방송 민영화 여부를 놓고 국민투표를 했는데 결국 공영방송은 유지하되 수신료와 광고를 대폭 줄이는 쪽으로 결론 내렸다. 일본 NHK는 수신료를 계속 내리고 구조조정 계획을 밝히며 여론의 눈치를 보고 있다. KBS 수신료 인상안은 2007년부터 세 차례 국회에 제출됐지만 번번이 승인받지 못했다. 이번에도 여야 모두 시큰둥하다. 국민 여론을 무시할 수 없어서인데, 그 여론이란 이런 것이다. 왜 다른 채널도 많은데 수신료 내가며 공영방송을 둬야 하나. 그것도 KBS1, KBS2, EBS 세 개씩이나. 공익을 위해 시장성 없는 프로도 만들어야 한다고? 1994년부터 수신료를 전기료에 합산해 강제 징수하면서 안정적인 재원을 마련해줬는데도 별 성과가 없지 않았나. 시청자에게 수신료 내지 않을 권리를 줘야 KBS도 긴장하고 더 잘하지 않을까. KBS는 41년째 2500원은 너무하다고 억울해하지만 그것도 비싸다는 것이 여론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1-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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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톨릭 대통령 바이든[횡설수설/이진영]

    여성, 비(非)백인, 오바마.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을 읽는 키워드들이다. 여성과 소수 인종,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 인맥을 중용한다.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키워드가 ‘진보적 가톨릭’이다. 아일랜드계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가톨릭 학교를 다닌 그는 개신교가 주류인 미국에서 존 F 케네디에 이은 두 번째 가톨릭 대통령이다. ▷그의 취임식은 가톨릭적인 이벤트였다. 취임식 기도는 예수회 신부가 맡았고 참석자들도 가톨릭 신자들이 주를 이뤘다. 축가를 부른 레이디 가가는 이탈리아계, 제니퍼 로페즈는 라틴계, 축시를 낭송한 어맨다 고먼은 아프리카계 가톨릭 신자다. 최초의 흑인 출신 국방장관 로이드 오스틴과 노동부 및 보훈부 장관 지명자를 비롯해 바이든의 초대 내각엔 가톨릭 신자가 다수 포함돼 있어 미 역사상 가장 가톨릭적인 정부로 불린다. ▷바이든 대통령은 가톨릭 중에서도 진보파에 속한다. 낙태와 동성결혼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반대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믿음을 강요할 권리는 없다’는 입장이다. 이 때문에 보수적인 미 주교회의는 취임식에 즈음해 “도덕적 해이를 조장하고 생명을 위협하는 정책을 추진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바이든의 최대 우군은 진보 성향인 프란치스코 교황. 교황이 공개적인 지지선언을 한 적은 없지만 미 주교회의 비판 성명이 나왔을 땐 미국 내 교황 쪽 추기경들이 반박 성명을 냈다. ▷2000년대 이후 미국 정치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종교는 복음주의 기독교다. 1960, 70년대 히피문화에 대한 반발로 보수적 복음주의가 세를 불리기 시작했는데 2000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들의 몰표로 당선됐다. 복음주의에 바탕을 둔 부시 행정부의 선악 이분법적인 접근이 이라크 전쟁에 영향을 준 요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신앙심이 두텁지도 도덕적이지도 않은 도널드 트럼프가 2016년 복음주의자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것은 뜻밖이다. 복음주의의 주류인 백인 노동자들의 경제적 박탈감에 주목하고, 복음주의의 기독교 국가주의를 미국 우선주의로 수용하면서 가능했다는 해석이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첫날 파리기후협약에 복귀하고 멕시코와 국경 장벽 건설을 중단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정의와 연대를 강조하는 진보적 가톨릭의 면모를 보여줬다. 그의 종교적 신념이 분열된 미국을 치유하고 평화로운 세계질서를 복원하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와 접점을 찾고 있는 ‘디모테오’ 문재인 대통령은 정상 간의 공통된 신앙에서 대화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1-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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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로나 등교 딜레마[횡설수설/이진영]

    지난해 초중고교 새 학기 등교는 코로나19로 수차례 연기된 끝에 5월 20일 고3부터 순차적으로 이뤄졌다. 6월 8일 가장 마지막에 등교한 중1 신입생들은 하복 차림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3월에 개학하고 등교일수도 지난해보다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적극적 등교로 분위기가 바뀐 데는 최근 발표된 논문의 영향이 크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최근 한림대 의대 연구팀과 공동으로 발표한 논문에서 “학교 봉쇄의 효과는 제한적인 데 비해 그로 인한 개인적 사회적 피해는 크다”고 했다. 지난해 5월 1일∼7월 12일 3∼18세 확진자 127명의 감염 경로를 조사한 결과 교내 감염은 3명(2.4%)에 불과했고 대부분 아이들이 가족이나 친척(59명)에게서 감염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연구팀은 “호주 뉴질랜드 아일랜드에서도 교내 전파 위험이 크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며 조심스럽게 등교에 힘을 실었다. ▷유럽 국가 대부분은 식당은 닫아도 학교는 열어둔다. 유럽 질병예방통제센터는 “어린이집이나 학교 봉쇄는 감염 차단에 별 효과가 없다”고 했다. 방역 수칙만 준수하면 학생 간 감염도, 학생들의 지역사회 전파도 적다는 것이다. 유럽과 반대로 학교는 닫아도 식당 문은 열어두던 미국도 최근 ‘학교를 봉쇄한 지역과 열어둔 지역의 환자 수가 별 차이 없었다’는 조사 결과가 나온 후 등교 쪽으로 기울고 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는 “학교는 가장 나중에 닫고, 안전해지면 가장 먼저 열어야 하는 곳”이라고 권고했다. ▷학교 봉쇄로 돌봄 공백과 교육 격차의 문제는 점차 심각해지고 있다. 어린이집과 학교는 물론 전국 4000개 지역아동센터와 170개 복지관이 문을 닫으면서 집 안에 갇힌 아이들이 소리 없이 학대를 당하고 있을 가능성도 높다. 더 큰 문제는 장기적인 피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학교 봉쇄로 인한 교육 부실로 80년간 전 세계 경제성장률이 1.5% 낮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학생 개인으로서는 교육 손실이 졸업 후 경제적 기회의 손실로 이어지게 된다는 뜻이다. ▷지금은 하루 400명 안팎의 환자가 나오고 있는 데다 영국발 변이 바이러스로 4차 대유행의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어 등교 확대는 섣부른 조치라는 우려도 나온다. 하지만 언제까지 미래 세대의 희생을 담보로 방역을 이어갈 수 있을까. 어린이나 청소년은 감염돼도 가볍게 앓고 지나간다. 사망자도 없다. 지금은 코로나 초기와 달리 방역 노하우가 많이 쌓인 상태다. 안심하고 학교 갈 수 있는 대책을 세우고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 달부터 들어오는 백신을 초중고교 교사들이 앞 순번에 맞게 하는 방법도 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1-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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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모는 아무나 하나[오늘과 내일/이진영]

    정부가 ‘정인이 방지’ 대책을 내놓았다. 아동학대 전담 공무원을 늘리고 아동학대 신고가 두 번 접수되면 즉시 아이를 부모에게서 떼어놓겠다고 한다. 부모의 매질을 피해 건물 지붕으로 탈출하고, 소풍 보내 달라 조르다 맞아 숨지고, 여행용 가방에 갇혀 있다 죽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분노하며 대책을 내놓지만 아동학대는 멈추지 않는다. 정인이 대책이 발표되던 날엔 생후 3개월 된 딸의 온몸에 골절상을 입힌 20대 엄마가 구속됐다. 미국에선 1963년부터 아동학대 관련법을 제정하고 관심을 기울였는데도 학대 신고가 줄지 않자 1980년 부모면허제를 도입하자는 학계의 급진적 제안까지 나왔다. 운전면허나 의사면허처럼 자격을 갖춘 이들만 부모 노릇을 하도록 규제하자는 주장이었다. 무면허 운전이나 돌팔이 의사만큼 무자격 부모가 초래할 잠재적 피해가 크다는 논리였다. 결국 부모가 자녀를 갖는 건 신앙의 자유처럼 타고난 권리이고, 부모의 자격을 판단할 객관적 기준 마련이 어렵다는 반론에 부닥쳐 실현되진 않았지만 아동학대 예방책으로 부모에게 주목하는 계기가 됐다. 아이에게 부모는 절대적 존재다. 특히 핵가족 시대가 된 후로는 지켜보는 눈도 없이 아이는 오로지 부모에게 맡겨진다. 학대당한 아이를 부모와 분리해 시설에 보낸다고 하지만 국가의 품이 부모의 품만 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대개는 준비 없이 부모가 된다. 형편이 딱한 집만 그런 것이 아니다. 2017년 괌을 여행하던 판사와 변호사 부부가 돌배기 딸과 여섯 살 아들을 차 안에 두고 쇼핑 갔다가 체포돼 벌금형을 받은 적이 있다. 방치가 학대인 줄 몰랐다고 한다. 남매를 전교 1등으로 키운 초등학교 교장은 얌전히 자라주던 남매가 갑자기 고교 자퇴 선언을 하고서야 정서적 학대로 일관했던 무지한 부모였음을 깨닫고 ‘엄마 반성문’이란 책을 썼다. 따로 배우지 못한 부모 노릇은 부모를 보고 배운다. 지난해 9월 학술지 ‘한국사회복지질적연구’에 실린 논문에는 아동학대 전문기관의 부모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한 엄마 6명의 생생한 육성이 담겨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녀를 끔찍이 아낀다는 것, 그럼에도 정서적 신체적 학대를 일삼았다는 것, 알고 보니 어린 시절 학대를 받으며 자랐다는 점이다. 한 엄마는 아이에게 퍼붓는 폭언을 아이가 녹음해 들려주자 그제야 그토록 닮고 싶지 않았던 부모와 똑같이 제 아이에게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토로했다. 아동학대는 고리를 끊지 않으면 대물림되는 무서운 병이다. 미국의 부모면허제 논쟁이 학계 공방에서 그친 것은 아니다. 아동 보호를 위해 국가는 부모 노릇 제대로 하도록 교육적 지원을 할 의무가 있다는 인식이 자리 잡혀 부모교육 프로그램 개발과 실행이 활성화됐다. 우리도 부모교육을 하는 민간단체들이 있지만 입시 설명회는 가도 그런 곳은 잘 안 간다. 울주 아동학대 사망사건을 계기로 2014년 나온 ‘이서현 보고서’는 부모가 공권력에 접촉할 때 부모교육을 의무화하자는 제안을 했다. 혼인신고나 출생신고를 할 때, 자녀를 어린이집이나 초등학교에 보낼 때 국가가 지원하는 만큼 부모에게도 교육받을 의무를 지우자는 제안이다. 인구절벽 걱정에 속이 타는 지방자치단체들이 노름판 판돈 걸듯 출산장려금을 부르고 있다. 이쪽에서 “아이 셋 낳으면 3000만 원” 하면 저쪽에선 영화 ‘타짜’의 대사 “묻고 더블로 가”처럼 장려금 액수를 올린다. 정부는 내년부터 매월 30만∼50만 원의 영아수당을 생후 24개월까지 주고, 육아휴직 땐 최대 1500만 원을 휴직급여로 주기로 했다. ‘부모 되라’고 등 떠밀지만 말고 ‘부모답게’ 살도록 지원하고 의무도 지워야 한다. 아무나 부모 하도록 내버려둘 순 없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1-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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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로나 사투 1년[횡설수설/이진영]

    국내 코로나19 환자 1호는 중국 여성이다. 중국 우한에서 입국해 일본행 비행기로 환승하려던 이 여성은 인천공항에서 고열 증세를 보여 검사 끝에 양성 판정을 받았다. 그때가 지난해 1월 20일, 꼭 1년 전이다. 코로나19 감염증이 아니라 ‘우한 폐렴’으로 불리던 때다. ▷당시만 해도 코로나바이러스의 발견국은 중국 태국 일본 정도였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사람 간 지속적 전염 가능성은 낮다”고 봤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빠르게 전 세계로 확산돼 WHO가 3월 12일 세계적 대유행(팬데믹)을 선언했을 땐 110개국 12만 명이 감염된 후였다. 어제까지 전 세계 확진자는 9373만 명, 사망자는 200만 명이 넘는다. 국내 누적 확진자는 7만3115명, 사망자는 1283명이다. ▷코로나는 일상을 지배하는 키워드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생존법칙이 되면서 집 안에 갇힌 사람들은 촘촘한 배달망에 의지해 버티고 있다. 그 배달망을 유지하는 라이더들은 코로나로 벼랑 끝까지 몰린 자영업자들이다. 오랜 사회생활의 단절로 ‘코로나 블루’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온라인 수업에 의존하는 학생들은 ‘코로나 세대’로 불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악의 ‘코로나 리세션’이 닥치면서 ‘코로나 디바이드’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그래도 마스크 쓰기로 독감환자가 줄고 공기가 맑아졌다니 ‘코로나 패러독스’다. ▷14세기 흑사병이 유럽 중세시대를 마감했듯 코로나도 세계정세를 바꾸어놓을까. 집단주의 문화가 뿌리 깊은 아시아 국가들이 선방한 데 비해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구 선진국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중국은 무지막지한 디지털 감시망을 동원해 코로나 발원국이라는 오명을 씻고 넓은 내수시장을 밑천으로 경기 회복의 시동을 먼저 걸었다. 반면 미국은 코로나로 숨진 사람이 39만 명으로 제2차 세계대전 전사자 수(29만1500명)보다 많다. 거리 두기에 실패한 서구는 백신 개발과 접종에서 앞서나가며 만회를 노린다. ▷코로나가 발생한 지 1년이 지나도록 인류는 이 바이러스의 기원을 모른다. 누구나 코로나 종식을 기대하지만 풍토병으로 인류 곁에 남을 전망이라고 한다. 그래도 올해는 백신의 기원인 소의 해다. 사회적 거리 두기에도 우린 혼자가 아니다. 찬 바람을 맞으며 진단검사를 하고, 눈길에도 생필품을 집까지 배달해주며, 끼니를 거르는 노인들에게 도시락을 싸다 나르는 사람들이 있다. 1차 대유행 당시 대구에서 코로나와 사투를 벌였던 간호사가 말했듯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내가 곧 너이고, 네가 곧 나인 듯 서로를 지켜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1-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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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깅스 판결[횡설수설/이진영]

    레깅스만큼 논쟁적인 옷도 없다. 몸에 딱 달라붙는 레깅스 차림에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며 민망해하는 남자들이 많다. 하지만 여자들에겐 운동할 때는 물론이고 등산 가거나 출근할 때도 두루 입는 멀티웨어다. 레깅스 차림의 여성을 몰래 찍으면 유죄라는 판결이 나왔는데 레깅스만큼 ‘레깅스 판결’ 논쟁도 뜨겁다. ▷2018년 A 씨는 버스 안에서 레깅스를 입은 여성의 뒷모습을 휴대전화로 촬영하다 걸려 성폭력처벌법의 ‘카메라 이용 촬영죄’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에서 벌금 70만 원, 2심에선 무죄 판결이 나왔다. 레깅스를 입고 있어 신체 노출이 없었고, 통상적으로 눈에 보이는 시야를 촬영한 것이며, 피해자가 “기분 더러웠다”고 했는데 이는 성적 수치심이 아니라는 논리였다. 레깅스가 일상복이라는 점도 무죄의 근거가 됐다. 성적 수치심을 느낀다면 왜 여성들이 레깅스를 일상복처럼 입고 버스까지 타겠느냐는 뜻이었다. ▷6일 나온 대법원 판결은 달랐다. 엉덩이와 허벅지 굴곡도 신체 노출이고, 엉덩이나 가슴 등 특정 부위를 부각시키지 않고도 불법 촬영이 될 수 있으며, 일상복이든 뭐든 성적 대상화가 되면 성적 수치심을 느낄 수 있고, 수치심이란 ‘빡치심’도 포함하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여성학자들은 성적 수치심이 정조 개념에 뿌리를 둔 용어이니 대신 ‘성적 불쾌감’이라 표현하자는 주장을 해왔다. ▷남성 커뮤니티는 들끓고 있다. “몰래 촬영이니 불법이 맞다”는 소수 의견도 있지만 “‘거리 사진’이라는 예술 장르도 있는데 공공장소에서의 촬영을 금지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 “민사상 초상권 침해로 끝낼 일을 왜 성범죄로 처벌하느냐”는 반론이 거세다. 레깅스 몰카 처벌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9년 서울에서 레깅스 차림의 여성을 뒤따라가며 휴대전화로 촬영한 남성이 벌금 300만 원 형을 받았고, 같은 해 인천 지하철에서 레깅스를 입은 여성의 하반신을 찍다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남성도 있다. ▷그냥 보는 것은 괜찮을까. 여성의 몸을 훑어보며 불쾌감을 유발하는 경우를 ‘시선 폭력’, 좀 더 강하게는 ‘시선 강간’이라고 한다. 일본에선 ‘시간(視姦)’이라 줄여 말하는데 공공장소에서 타인을 수치스럽거나 불안하게 하는 언동을 금지하는 ‘민폐(迷惑·메이와쿠) 금지 조례’를 적용하면 처벌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국내법에는 시선 폭력을 처벌하는 조항은 없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입으면서도 ‘성적 대상이 되지 않을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이번 대법원 판결의 취지다. 무례한 시선을 보내면서 “보는 것도 죄냐”고 따져 물을 수는 없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1-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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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속 챙기고 여성 인권 외면한 여성계 거물들[오늘과 내일/이진영]

    모든 ‘미투’가 힘들지만 더 힘든 미투도 있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를 상대로 성폭력 소송을 제기해 승소한 김지은 씨는 “그가 가진 지위와 그가 관계 맺은 수많은 이에게 맞서는 일”이라고 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고소인을 막아선 상대는 성인지 감수성이 떨어지는 남성들이 아니라 그런 남성들을 닦달한 덕에 ‘여성계 대모’ 소리 들으며 한자리씩 차지한 거물들이다. 박 전 시장의 피해자는 지난해 7월 한국성폭력상담소에 고소 계획을 알리며 지원을 요청했다. 그런 지 하루 만에 여성계 인사들의 릴레이 전화 통화 끝에 서울시 젠더특보를 통해 그 사실이 박 전 시장 귀에 들어갔다. 검찰에 따르면 박 전 시장 피소 사실 유출의 중심인물은 김영순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 대표와 이 단체 대표를 지낸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최고위원이다. 3선의 남 위원은 여당 여성 의원들의 단톡방에서 피해자를 ‘피해 호소 여성’으로 부르자고 제안한 사람이고, 이에 동조한 4선 의원 김상희 국회부의장은 여연 회원 단체인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출신이다. ‘피해 호소인’이라 표현한 보도자료를 냈던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은 성폭력상담소 초대 소장인 최영애 씨다. 검찰 발표 직후 벌어진 김영순 대표의 ‘정부 위촉직 줄사퇴’ 소동을 보면 여성계 인사들이 왜 가해자 쪽과 한 몸처럼 움직였는지 짐작이 간다. 그는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 국무총리 소속 양성평등위원,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이사, 대법원 양형위 자문위원, 서울시 성평등위원을 동시에 맡고 있었다. ‘박원순계’ 남 위원의 보좌관은 3급 서울시장 젠더특보를, 최 위원장은 박 전 시장 덕에 서울시 인권위원장을 지냈다. 서울시 여성가족재단 대표이사 자리에도 여연 출신이 앉아 있다. “얽히고설킴이 만들어낸 이익 공동체가 신념의 공동체를 능가하는 무서운 결속력을 발휘했다”는 것이 유창선 시사평론가의 진단이다. 여연의 출발점은 성폭력 반대 운동이었다. 1986년 부천 성고문 사태 대책위를 모태로 20여 개 단체가 연합해 1987년 출범했다. 김영순 대표가 여성운동에 뛰어든 계기도 운동권 내부에서 발생한 성폭력이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피해자는 운동을 그만두고 가해자는 학생회 간부로 당선됐다. 용서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런 분노와 정의감, 박 전 시장 같은 깬 남성들의 조력 덕분에 성폭력특별법을 포함한 여성인권 3법이 제정됐고 여연도 민변 참여연대와 함께 진보 정권의 3대 실세 단체로 클 수 있었다. 한명숙 초대 여성부 장관을 포함해 여연이 배출한 장관과 국회의원이 11명, 자리 기준으로는 14명이다. 2006년엔 60억 원짜리 빌딩을 지으면서 정부 고위 인사를 대거 참여시켜 시민단체답지 않다는 비판도 받았다. 여연 대표를 지낸 인사는 “여성 관련법 제정을 위해 정계 진출이 필요했지만 권력과 적당한 거리 두기에 실패해 여성운동 단체의 고유 목적을 유지하지 못한 면이 있다”고 했다. 유력 정치인을 상대로 한 미투는 여성 운동의 성과물이다. 그런데 권력의 부당한 폭력에 참지 말고 상담소를 찾으라고 독려하던 이들이 미투가 자기네 편을 향하자 “유출한 게 아니라 질문한 것”이라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여성운동 경력으로 쥐게 된 한 줌 권력을 지키자고 평생 소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닌지 대모들은 운동의 출발점을 떠올려 보라. 여당의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로 거론되는 박영선 장관과 우상호 의원은 이 문제에 대한 입장 표명부터 해야 할 것이다. 미투가 누구를 향한 외침이었든 피해자가 일상을 찾는 것으로 결말이 나야 한다. 그것을 위해 박 전 시장도, 여성계 대모들도 젊은 시절 치열하게 살아온 것 아닌가.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1-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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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휴전선 전광판 없애라는 北요구에 DJ정부는…”[논설위원 파워 인터뷰]

    미국 의회 ‘톰 랜토스 인권위원회’가 이달 중 대북전단금지법 청문회 개최를 예고했다. 박정희 독재 정권의 치부를 드러낸 1976년 미 국제기구소위원회(위원장 도널드 프레이저) 청문회 이후 45년 만에 한국의 ‘내정’이 미 의회 청문 대상이 됐다. 북한에 전단뿐만 아니라 DVD나 USB메모리 등 외부 정보를 담은 물품을 보내면 처벌하는 이 법이 국회를 통과하자 국제 사회가 ‘국제 인권 표준을 어겼다’며 일제히 성토하고 나섰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외교안보 고위직을 지낸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80)는 “명분도 실리도 없는 나쁜 수를 뒀다”며 글로벌 역풍을 우려했다. 정초에 그를 만나 대북전단금지법 청문회를 비롯해 남북 관계 새해 전망을 물었다. 라 교수는 해외에서도 명망이 높다. 2013년 장성택의 숙청을 2년 전에 정확히 예견했던 그가 쓴 ‘장성택의 길’ 번역본이 2019년 뉴욕주립대 출판부에서 나왔고,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은 5월 일본에서 출간된다. ―올 3월 30일 발효되는 대북전단금지법에 대해 미국 영국 일본을 포함한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이 반대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이 나라 밖 정보를 얻고 한국 드라마와 음악도 즐겨야 하는데 이런 지적 정서적 박탈도 인권 유린이다. 탈북민들이 한국에 와서 크게 놀라는 순간이 6·25전쟁을 김일성이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때다. 8·15 광복도 김일성이 일본을 물리친 덕분인 줄 안다. 이런 사람들 입장은 생각 않고 전단금지법을 만드나.”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도 북한이 대북전단을 문제 삼았나. “그땐 휴전선 전광판을 없애달라고 했다. 김 정부에서 ‘남북이 화해하려면 북한 요구를 들어 줘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내가 인권 문제여서 안 된다고 했다. 노 정부 때도 같은 상황이 벌어졌고 내가 ‘북한을 비방하는 정치 선전은 금지하되 북한 주민들도 알고 즐겨야 하는 정보는 흘러 들어가야 한다’며 반대했다. 내가 주일 대사로 간 뒤 결국 전광판을 없앴다.”“휴전선 전광판 없애라는 北요구 DJ정부때 인권문제 앞세워 거부”―국제 사회의 비판에 여권이 ‘내정 간섭’이라고 반박했다. “1970년대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한국 민주화 문제를 다룰 땐 진보진영에서 환영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전단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더라면 국제적 위상이 상당히 높아졌을 것이다.” ―미 의회에서 청문회가 열리면 어떻게 되나. “미 정부의 직접적인 조치가 따르진 않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자유민주 국가들과 좋지 않은 분위기를 만든다는 점이다. 불똥이 일본군 위안부나 강제징용 문제로 튈 수 있다. ‘북한 인권 유린은 괜찮고 일본의 인권 유린 문제에 대해선 국제 사회에 지원을 바라나’라는 냉소가 나올까 걱정이다.”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삐라 문제를 해결해 줬으면 새해부터 북한이 보답해야 한다’고 했다. “입법했으니 교류하자고? 얼마나 구차한가. 북한 요구 들어준다고 관계가 잘 풀리나. 오히려 북한은 ‘이렇게 다루면 되는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정상회담 해주고 백두산 같이 올라가 주고, 아니면 남북연락사무소 폭파하고, 이렇게 하면 쉽게 움직이는구나 싶을 것이다. 친구든 부부든 모든 관계가 그러하듯 남북 관계도 상대방 말만 들어준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할 말은 해야 한다.”“경찰로 넘어간 대공수사, 약화 우려 南도 블레이크 같은 이중간첩 가능” ―국가정보원법 개정으로 유예 기간 3년이 지나면 대공수사권이 경찰로 이관된다. “북한이 국정원 폐지해 달라고 줄곧 요구해 왔는데 결국 국정원도 무력화돼 버렸다. 북한이 군사력 다음으로 중시하는 것이 간첩을 양성해 보내는 것이다. 간첩을 색출해야 남한 사회를 허물겠다는 북의 의도를 막을 수 있는데 걱정이다. 김대중 정부 때 신건 국정원장은 ‘국정원이 간첩을 열심히 잡아야 햇볕정책도 성공한다’고 했다.” ―요즘도 간첩이 많은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건수는 2013년 197건에서 2019년엔 15건으로 크게 줄었다. “요즘은 활동하기가 훨씬 편해져서 많이 보낼 것 같다. 비용도 남한에서 충당한다고 들었다. 옛날처럼 강압 수사하는 관행이 사라진 데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도 있어서 물증 없이 기소하기 어렵고 (교도소) 들어가 봤자 몇 년 안 살고 나온다. 간첩들도 다 알기 때문에 잡히는 것 무서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북한에 돌아가 어떤 대접을 받을지를 겁낸다.” ―최근 영국과 소련의 이중간첩이었던 조지 블레이크가 사망했다. 영국 MI6 요원이던 그가 ‘6·25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에 분노해 전향했다’는 자서전 내용이 새삼 화제가 됐다. “MI6에서 훈련받은 사람이 미군 폭격에 충격을 받았다고? 엉터리 얘기다. 미군의 농촌 폭격은 공산주의 국가가 흔하게 써먹는 선전용 일화다. 영국 정부 인사에게 들은 바로는 블레이크가 10대 후반에 식구들과 영국으로 이민했다고 한다. 집안이 반파시스트 운동을 해서 가능했다. 소련 KGB에서 MI6에 들어가는 훈련을 받고 이민 간 것이다.” ―라 교수가 “우리 국정원에도 ‘북한판 블레이크’가 있다”고 말했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다. “단정적으로 말한 것으로 잘못 보도돼 해당 신문사가 인터넷에서 내용을 바로잡았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있다. 동독 슈타지 간첩이었던 귄터 기욤이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비서까지 했다. 우리도 내부의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국정원의 권한 축소는 국정원이 자초한 측면이 있다. 정치에 개입하고 대공 수사와 관련해 증거를 조작한 일도 있었다. “국정원이 잘못한 일도 많지만 국정원을 나쁘게 만든 건 ‘정권정보원’으로 악용한 정치인들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하기 전에도 우리 쪽에 와서 정보를 주는 안기부 직원들이 있었다. 우리 쪽도 그걸 이용하고 집권한 후로는 그를 중용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국정원 직원 인사가 능력이 아니라 정권과 얼마나 가까우냐에 따라 이뤄지기 쉽다. 국정원 개혁이 아니라 정치권의 개혁이 필요하다.” ―북한의 제8차 당 대회를 맞아 군중집회가 예고돼 있다. 얼마 전엔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수만 명이 모여 새해맞이 행사를 했다.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할 텐데 주민 안전은 뒷전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코로나 통제를 어느 정도 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이 참석하는 군중집회는 주민들로선 큰 부담이다. 오전 10시에 행사를 시작하려면 집회 참가자들은 새벽 4시에 일어나 준비해야 한다. 행사장에 한번 들어가면 김정은 신변 안전 문제로 화장실도 못 가기 때문에 밥도 조금만 먹고 비닐봉지를 둘씩 들고 간다. 보안 체크는 3번 한다. 보안성 경찰, 보위부, 마지막으로 경호대가 샅샅이 뒤진다.” ―코로나와 대북제재 장기화로 경제 사정이 어려울 텐데 북한이 유화적으로 나올까. “경제가 어려워 외부에 손 벌려야 하는 형편인데 코로나 때문에 받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타협적으로 나올까. 북한은 어려워지면 오히려 큰소리치고 공격적으로 나서는 성향이 있다.”“도움 받아야 하는 쪽 자존심 생각해 쌀이나 백신 지원 땐 조용히 줘야”―정부가 식량과 백신 지원 의사를 밝혔는데 반기지 않는다. “북한이 동독 정도의 자신이 있으면 교류가 쉬울 텐데 그렇지 못하다. 우리가 쌀이나 백신을 주면 고마워할까. 미운 사람에게 도움 받아야 하는 그들의 자존심은 생각 안 하나. 떠들고 생색내지 말고 조용히 줘야 한다. 얻어먹으면서도 원한이 쌓일 수 있는 게 사람이다.” ―정부가 북한과의 화해 무드를 조성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남북한 갈등은 정체성에 관한 근본적인 갈등이다. 우리는 북한과 한민족이라고 생각하지만 북한은 자기네가 단군민족, 김일성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국제결혼을 큰 죄로 여기는 것도 순수한 혈통을 타락시킨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처녀지’라는 소설에 ‘처녀지를 개간하려면 호미가 아니라 쟁기로 깊이 갈아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남북 관계도 정상들이 악수한다고 쉽게 풀리는 게 아니다. 서독도 동독 인프라 개선 도와주고, 양심수를 돈 주고 데려오는 일 등을 소리 없이 하다 정상회담이 이뤄진 건 통일 되기 직전이었다. 정치인들이 자꾸 앞에 나설 게 아니라 작은 교류와 협력 관계부터 쌓아 나가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구상할 때부터 깊게 관여하지 않았나. 역사상 최초의 남북한 정상회담을 이뤄냈는데…. “첫 정상회담 이듬해인 2001년 북한에서 소설 ‘만남’이 나왔는데 그 내용을 보면 우리가 아는 성공적인 회담과는 딴판이다. 김대중이 불순한 동기로 북한에 왔으나 김정일의 당당한 대응에 기가 질려 굴복하고 돌아간 것으로 묘사돼 있다. 한국 운동권 출신 기자가 소련이 망하는 것 보고 전향했는데 김정일 만난 다음 다시 운동권이 됐다는 내용도 있다. 이희호 여사의 조카인 이영작 박사는 햇볕정책에 대해 ‘김정일에게 속은 것’이라고 했다. 외투 속에 칼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외투를 벗기냐면서. 남북 관계는 정치 9단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남북 화해를 정말 원한다면 정상회담 하고 기념품 주고받는 것보다 북한 주민들이 바깥소식을 알고 한국 드라마도 즐길 수 있게 하는 편이 훨씬 낫다.” 라종일 약력△서울대 정치학과△영국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 정치학 박사△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김대중 정부 국가정보원 해외·북한담당 차장△노무현 정부 대통령국가안보보좌관△주영국 대사, 주일본 대사△우석대 총장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1-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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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휴 가뭄’ 신축년[횡설수설/이진영]

    새해 달력을 받으면 습관적으로 ‘빨간 날’을 세어본다. 신축(辛丑)년 휴일은 주5일제 근무자 기준으로 113일. 2010년 112일 이후 가장 적다. 지난해보다 이틀 줄었다. 현충일 광복절 개천절이 일요일이고, 한글날과 성탄절이 토요일이다. 설과 추석 연휴, 어린이날이 빨간 날과 겹칠 때 주는 대체공휴일도 없다. 3·1절과 부처님오신날이 평일인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연휴도 가뭄이다. 4일씩 쉬는 설과 추석 연휴를 빼면 신정 연휴와 3·1절 연휴가 전부다. 5월 1일 근로자의 날도 토요일이다. 5월 어린이날과 부처님오신날이 수요일이니 앞뒤로 ‘연차의 마술’을 쓴다면 9일간의 연휴를 만들 수 있다. 서울과 부산 시민들에겐 4월 7일 재·보궐선거가 있지 않느냐고? 재·보궐선거일은 법정 휴일이 아니다. 선거일 오후 8시까지 투표하거나, 사전투표하거나, 고용주에게 투표 시간을 요구하면 된다. ▷임시 공휴일이 깜짝 지정되면 추가 연휴를 기대할 수 있다. 국가적인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혹은 내수 진작을 기대하며 정부가 지정하는 빨간 날이다. 새 정부가 출범한 2017년엔 추석 연휴를 앞두고 임시 휴일이 지정돼 최장 10일간의 황금연휴가 만들어졌다. 지난해는 월요일인 8월 17일이 임시 휴일이 돼 3일짜리 광복절 연휴가 생겼다. 문제는 연휴 끝에 코로나19가 확산된다는 사실. 정부는 ‘피로 해소와 내수 진작’을 기대했지만 광복절 하루 전날부터 확진자가 100명 넘게 나오면서 집단 감염만 부채질한 셈이 돼버렸다. ▷올해는 빨간 날에 영향을 받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 빨간 날은 관공서 휴일이지만 근로기준법이 바뀌어 지난해엔 300인 이상 대기업 근로자가 덕을 봤고, 올해는 30인 이상 중소기업 근로자에게도 유급 휴일이 된다. 하지만 올해는 휴일 수에 민감해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여행도 못 가는데 연휴가 무슨 소용이냐”고 한다. 형편이 어려운 이들은 “어차피 백수라 날마다 휴일이다” “365일 일해도 좋으니 회사가 망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며 한숨 쉰다. 코로나 뒷바라지로 ‘월화수목금금금’ 일하는 방역과 의료 인력은 연휴 끝에 환자가 쏟아질까 빨간 날이 두렵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매년 6월 이듬해 공휴일을 계산해 ‘월력요항’을 발표한다. 이에 따라 달력을 만들고, 사업 계획을 세우고, 휴가 일정을 짠다. 하지만 지난 한 해는 코로나 확진자 수와 거리 두기 단계에 맞춰 일상을 꾸려야 했다. 올해 코로나와 경제 전망도 불확실하다. 열심히 일하다 빨간 날 푹 쉬는 생활 리듬을 회복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1-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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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년가게[횡설수설/이진영]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은 1904년 개점한 서울 종로의 ‘이문설렁탕’이다. 초대 부통령 이시영, 남로당 당수 박헌영, 마라토너 손기정 선생이 단골이었고 김두한은 10대 시절 이곳에서 종업원으로 일했다. 1912년 궁중 상궁에게서 배운 떡으로 4대째 내려오는 낙원떡집, 1916년 문을 연 종로양복점도 100년 넘은 가게다. ▷해외로 나가면 1000년 넘은 가게도 있다. 모차르트 고향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장크트 슈티프츠켈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 803년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가 다녀간 기록이 남아있다. 신라시대 식당이 지금껏 남아있는 셈이다. 일본엔 100년 넘은 가게가 3만3000개인데 이 중 19개가 1000년 역사를 주장한다. 교토의 찹쌀떡(모찌) 가게 ‘이치와’는 1020년 전 역병에서 살아남기를 기원하며 긴카쿠지(金閣寺)를 찾는 이들에게 다과를 제공하면서 시작된 가게다. 지금은 25대 주인이 코로나19 대유행을 이겨내며 운영하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최근 서울 평양냉면집 ‘을밀대’와 전북 전주비빔밥 전문점 ‘가족회관’을 포함한 ‘백년가게’ 88개를 추가로 선정해 발표했다. 이로써 총 724개가 백년가게로 지정됐는데 엄밀히 말하면 백년가게들이 아니다. 창업한 지 30년 넘은 소상공인 가운데 장수할 만한 가게를 선정해 지원하는 사업이다. 진짜 백년가게인 이문설렁탕 낙원떡집 종로양복점은 리스트에 없다. ▷백년가게로 선정되면 인증 간판을 달아주고 대출 이자를 할인해 주는데 실질적인 지원책은 못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 노가리골목의 ‘을지OB베어’는 백년가게로 지정돼 유명해지자 대형 자본이 이 지역 부동산을 사들여 오히려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올해 국정감사에서는 사후 관리 부실 문제도 제기됐다. 백년가게 간판을 단 식당 636곳 중 64곳이 유통기한을 넘긴 식재료를 사용하는 등 식품위생법 위반으로 적발됐다는 것이다. ▷백년가게의 장수 비결은 무엇일까. 우선 몸집을 쉽게 불리지 않는다. 일본 백년가게의 25%가 2년 이상 운영 자금을 비축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이치와’의 25대 주인은 “우리에겐 이문을 남기는 것 이상의 목표가 있다. 그걸 이어달리기하듯 후대로 바통을 넘긴다”고 했다. 한국은 가게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오래가는 가게는 드물다. 식민통치와 전쟁, 정변과 쿠데타, 외환위기 등등 우리나라처럼 내우외환 잦은 환경 속에서는 100년이 아니라 10년을 이어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의 백년가게는 유럽이나 일본의 그것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 이문설렁탕의 묵직한 국물 맛처럼 불안한 시기 든든한 의지가 되는 백년가게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0-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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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부 사채 급전 빌려 직원 20명중 18명 내보냈다” [논설위원 현장 칼럼]

    코로나19 사태로 552만 자영업자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코로나는 외환위기나 금융위기와 달리 민간 소비에 특히 치명적이다. 한국신용데이터에 따르면 이달 둘째 주 전국 소상공인 매출은 전년도의 71%라는데 이는 체감도가 떨어지는 평균치일 뿐 주변엔 폐업 위기에 내몰린 자영업자들이 많다. 채널A 장수 프로그램 ‘서민갑부’에 출연했던 성공한 자영업자들에게도 코로나는 매서웠다. 불면증에 속이 타들어가고, 사채로 버틴다고 했다. 올해는 그럭저럭 넘겼는데 내년이 더 걱정이라고 했다. 그래도 밑바닥에서 시작해 외환위기에 사스 메르스까지 견뎌낸 이들이라 맷집이 달랐다. 급한 불을 끄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모두 코로나 이후를 내다보고 있었다. “돈 있어도 사람이 못 버티면 끝장”고세곤 씨(40)는 ‘솜사탕 갑부’다. 천연색소가 들어간 설탕으로 토끼 오리 곰 모양의 알록달록 솜사탕을 만들었는데 이게 전국의 축제나 행사장에서 어린이와 연인들을 끌어모아 지난해엔 일본 시장에까지 진출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올린 매출은 약 8억 원. 베트남 진출을 준비하던 중에 코로나 사태가 터졌고 억대 매출은 솜사탕처럼 녹아내려 0원이 됐다. “처음 3개월간은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사스와 메르스 때는 혼자 솜사탕 기구와 설탕만 가지고 장사하던 때라 돈은 못 벌어도 나가는 돈이 없었어요. 지금은 가만히 있어도 서울과 오사카 사무실 임대료로 월 210만 원이 나갑니다. 서울 사무실 직원 6명 중 한 명만 남기고 다 내보내고 일본은 4명 다 내보냈어요.” 그는 소상공인 지원금으로 정부에서 100만 원, 일본에선 2000만 원을 받았다. 소상공인 긴급자금대출을 신청했지만 이벤트업자여서 자격이 안 된다고 했다. 신용대출 카드론대출 보험사약관대출까지 다 끌어모아 1억 원 넘게 만들고, 요리사 경력을 살려 메뉴와 레시피 컨설팅을 해주고 받는 부수입으로 버티고 있다. “제가 잘못해서 생긴 일도 아니고, 제게만 닥친 불행도 아니죠. 안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마음을 내려놓았어요. 코로나로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닙니다. 6세, 9세 두 아들을 제가 돌보는데 아빠가 같이 놀아주고 밥도 해주니 너무 행복해합니다.” 그는 그동안 구상만 하고 바빠서 실행하지 못했던 사업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있다. 새로운 솜사탕 캐릭터를 만들고, 다양한 천연 색소를 개발하고, 솜사탕을 접목시킨 새로운 음료도 준비 중이다. “코로나가 내년 하반기까지 갈 거라고 각오하고 있어요. 지금껏 쌓아온 것이 무너지지 않도록 어떻게든 버텨야죠. 돈이 버티는 것 아닙니다. 돈이 있어도 사람이 못 버티면 끝입니다.”“메르스 때처럼 도약 준비 시간”최낙근 씨(53)는 출장요리 사업을 한다. 대학 축제, 회사와 동문회 체육대회 같은 행사가 취소되면 직격탄을 맞는 업종이다. 연간 10억 원이 넘던 매출이 올해는 1억 원 남짓으로 쪼그라들었다. “2014년 세월호 사태와 이듬해 터진 메르스 때 행사가 줄줄이 취소되면서 2년 연속 부도 위기를 맞았어요. 코로나가 터지자마자 심상치 않다는 감을 잡고 재빨리 가정용 온라인 판매에 집중했죠. 통돼지 바비큐를 6분의 1로 잘라 당일 배송합니다. 공장 지으려고 사둔 땅엔 캠핑장을 만들어 한 달 전 영업을 시작했어요.” 메르스 사태 땐 3부 사채를 썼는데 지금은 5부 사채를 쓴다고 했다. 직원 20명 중 18명을 내보냈는데 퇴직금에 3개월 치 월급을 얹어 주느라 급전이 필요했다. “소상공인 긴급자금대출 1억 원을 받았는데 그걸로 모자랐어요. 매출이 없는데 누가 대출을 해주나요. 내년 2, 3월이면 긴급자금대출 상환이 시작되는데 아마 곳곳에서 곡소리 날 겁니다.” 그가 사업을 시작한 후 가장 어려웠던 시절은 ‘주머니에 500원도 없었던’ 외환위기 때였다. 그때만큼만 하면 이번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다. “이럴 땐 더 일찍 일어나 움직이고 작은 돈도 아껴야 합니다. 난로도 누군가 버린 걸 주워 고쳐서 쓰고 있어요. 배달은 두 아들이 하고, 캠핑장은 용접 전기배선 모두 애들 데리고 셋이서 했어요. 주방 정화조도 뚫으려면 30만∼40만 원 달라고 하기에 제가 들어가 처리했죠. 쓸 돈도 없지만 바빠서 돈 쓸 시간도 없습니다.” 그가 코로나 전까지 10억 원대 매출을 올릴 수 있었던 건 메르스 위기를 잘 넘긴 덕분이다. 메르스 유행으로 일감이 끊기자 1년간 기계 개발에 집중했다. 실패를 거듭한 끝에 통돼지를 12마리까지 구울 수 있는 대용량 기계와 야외에서도 음식을 따뜻하게 먹을 수 있는 스팀기, 10m짜리 대량 꼬치구이 기계를 개발해냈고 그걸로 재기에 성공했다. “메르스가 아니었다면 바빠서, 혹은 할 필요가 없어서 기계 개발은 생각도 못했을 겁니다. 지금도 부지런히 제품 개발하고 캠핑장을 업그레이드하고 있어요. 코로나가 끝나면 빠르게 앞서나갈 수 있도록.”“남탓 말고 못 따라올 실력 쌓아야”하나금 씨(59)는 30여 년 전 남편과 사별한 후 꽃집을 운영하기 시작해 연매출 11억 원의 사업으로 키워냈다. 지금은 두 딸과 함께 꽃집 매장 7곳과 플라워 카페 3곳을 운영하고 있다. “꽃집은 봄에 벌어 1년 먹고사는 사업이에요. 올봄은 그럭저럭 넘겼는데 내년 봄이 걱정입니다. 카페는 꽃집 비수기에 돈 벌려고 시작했는데 코로나로 장사가 안 돼 20명 남짓 되는 직원들 월급 주기가 벅차네요.” 그가 안정적인 사업 기반을 마련한 계기는 백화점 입점이다. 상가 매장을 임대해 장사할 땐 매출이 없어도 임대료가 꼬박꼬박 나갔다. 꽃은 24시간 냉난방을 해야 해 관리비 부담도 컸다. 백화점 수수료 매장을 알아봤지만 유명 브랜드가 아니면 안 된다고 했다. “브랜드를 만들어도 돈이 없으면 알릴 방법이 없어요. 궁리 끝에 45인승 버스를 꽃집으로 개조해 전국 꽃박람회장을 다니며 홍보했죠. 그 덕분에 백화점과 대형 마트에 입점할 수 있었고 매출이 떨어져도 그만큼 수수료가 낮아져 부담을 덜게 됐어요.” 올해 매출은 예년보다 20∼30% 늘 것 같다. 꽃은 덜 팔렸지만 ‘흙’을 많이 팔았다. 20년 전 그가 흙에 광물질을 섞어 발명 특허를 받은 특수 흙은 물을 정화시키는 기능이 있어 물이 고여 있어도 썩지 않는다. 화분 밑에 배수구가 없어 깔끔하니 인테리어용으로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특수 흙을 출시한 후 목돈을 만지나 싶었는데 비슷하게 흉내 낸 흙을 싼값에 판매하는 업자들이 고객을 빼앗아 갔다. 빈털터리가 돼 속을 끓이다 ‘이 사람들과 싸우는 데 에너지를 쓰기보다 생산적인 일에 힘을 쏟자’며 털고 일어났다. 6년을 다시 매달려 개발한 특수 흙이 ‘리치 쏘일(rich soil)’이라는 브랜드로 매출의 40%를 담당하고 있다. “짝퉁 흙들이 따라오지 못하게 제 흙을 업그레이드시켜 버린 거죠. 남들과 똑같아선 남들 이상이 될 수 없어요.” 그는 요즘 리치 쏘일을 활용해 무배수 농업으로 식용 꽃을 대량으로 키우고 있다. 성공하면 플라워 카페에도 공급하고 꽃차 등을 만들어 사업을 키울 생각이다. “개구리가 뛰기 전에 잔뜩 움츠리잖아요. 저도 멀리 뛰기 위해 조용히 준비하고 있습니다.”“이러다가 언젠가 되는 날도 올것”최영준 씨(38)는 경북 영덕에서 홀어머니와 횟집을 운영한다. 영덕의 대게는 2, 3월이 최고 성수기인데 하필 그때 코로나가 터졌다. “사람들 발길이 뚝 끊어졌어요. 억수(엄청)로 힘들었지만 그동안 너무 달려와서 쉬라고 그러는 갑다(모양이다), 마음을 편히 가지려고 했죠. 방송에서 드라이브스루 서비스를 하는 횟집 뉴스를 접하고 저거다 싶어 얼른 따라 했어요.” 최 씨가 해산물 드라이브스루 영업을 하는 동안 어머니는 오전 4시에 일어나 건설 현장 인부들 새벽밥을 지었다. 직원 9명 중 6명을 내보내고 식당 옆 골방에서 쪽잠을 자면서 모자는 고비를 넘겼다. 지금은 관광객만 바라볼 수 없어 택배 비중을 늘려나가고 있다. 경쟁이 치열해 남들과 비슷한 해산물로는 주문을 받기 어렵다. 스킨스쿠버를 즐기던 그는 ‘머구리(어업잠수부)’가 됐다. 취미가 밥벌이가 된 것이다. 30kg의 장비를 몸에 걸치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어 수압을 견디며 해산물을 채취한다. 바다와 민물이 만나는 곳에선 벚굴을, 수심 50m 아래 모래와 바위 경계 지점에선 해삼을, 모랫바닥에선 백합을 따와 횟집에서 곁들임 상을 차리고 택배로 판매도 한다. “산소 공급 장치와 연결된 호흡선이 배 스크루 날개에 걸려 빨려 들어가기 직전 줄을 끊어 겨우 탈출한 적이 있어요. 아차 하는 순간 가는구나 싶었죠. 하지만 제가 차별화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으니 달리 방도가 없죠.” 머구리 활동으로 벌어들인 수입 1억 원을 합쳐 올해도 예년 수준인 연매출 6억 원은 달성할 수 있을 것 같다. 7년 전 오랜 암투병 끝에 아버지가 빚을 남기고 떠난 후 어머니 혼자 유지하던 연매출 5000만 원 식당을 그가 머구리 일을 해가며 이만큼 키워 놓았다. “올해는 태풍까지 세 번이나 불어 닥쳐 피해가 컸어요. 내년 대게 대목도 놓치나 싶어 걱정이네요. 그래도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잠잠해지잖아요. 이렇게 안되다가도 언젠가는 되는 날도 오겠죠.”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0-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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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로나 V-day[횡설수설/이진영]

    드디어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된다. 영국은 세계 최초로 화이자와 바이오엔테크가 공동 개발한 백신의 긴급사용을 허가하고 8일부터 접종을 개시한다. 화이자 백신은 10년 걸리는 백신 개발을 10개월 만에 마무리한, 역사상 가장 빨리 개발된 백신으로 안전성 우려가 따른다. 하지만 유럽에서 최다 코로나 사망자(6만1000명)가 발생한 영국은 사상 최대 규모의 백신 접종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이날을 전승 기념일을 뜻하는 ‘V-Day’로 이름 지었다. ▷화이자 백신은 3주 간격으로 2회 접종한다. 영국 정부는 올해 안에 80만 명을 대상으로 1차 접종을 끝낼 계획. 1순위는 의료인과 80세 이상 노인들이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94)과 남편 필립 공(99)도 순번에 따라 맞는다. 하지만 요양원 노인들은 좀 더 기다려야 한다. 화이자 백신은 온도 조절이 까다로운 데다 1000개 단위로 포장돼 있어 수십 명이 지내는 요양원으로 백신 묶음을 보내면 900개 넘는 백신은 쓰지도 못하고 버려야 한다. 영국 정부는 안전하게 소분(小分)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백신을 확보한 나라들은 접종 순서를 정하느라 고민이다. 코로나 치료에 필수적인 의료 인력이 우선이라는 데는 동의하지만 나머지는 백신 접종의 목표와 나라 사정에 따라 우선순위가 다양하다. 접종의 목표가 사망자 줄이기일 경우 대개는 노인과 기저질환자들을 우선시한다. 하지만 활동량이 많아 전파 가능성이 높고 백신 부작용은 적은 젊은이들이 먼저라는 반론도 있다. 인도네시아는 18∼59세가 우선이다. ▷앤서니 파우치 미국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장은 ‘사회 기여도’도 감안해야 한다고 했다. 사회가 잘 작동하고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중요한 사람들이 우선이라는 뜻이다. 미국 뉴욕주는 교사, 운전기사, 식료품 점원들이 노인보다 먼저 백신을 맞기로 했다. 백신 임상시험 참가자들을 챙겨야 한다는 제안도 있다. 효율 못지않게 중요한 기준이 공정이다. 캘리포니아주는 코로나 피해가 컸던 유색인종들, 호주와 뉴질랜드는 토착 원주민들을 먼저 배려하기로 했다. ▷미국은 10일과 17일 화이자와 모더나 백신의 사용 허가를 앞두고 “내년 봄이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본은 백신 3종의 구매를 확정해 노인들부터 맞기로 하고 우선순위가 적힌 쿠폰 발행 계획까지 세워두었다. 한국 정부가 구매 계약을 맺은 백신은 효과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아스트라제네카 한 종류뿐이다. 백신 확보도 서둘러야 하지만 어렵게 구한 백신이 공동체 복원의 계기가 되도록 공정하고 효율적인 배분 순서를 정해두어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0-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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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20번 문항[횡설수설/이진영]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나면 문제의 난이도나 오류에 관한 논란이 시작된다. 2019학년도엔 ‘국어 31번’이 문제였다. ‘구는 무한히 작은 부피 요소들로…’로 시작되는 난삽한 지문 탓에 물리시험 같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일부 수험생들은 ‘불수능 때문에 피해 봤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했다. ▷수능 역사상 최악의 문항은 2014학년도 ‘세계지리 8번’이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유럽연합(EU)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보다 총생산액 규모가 크다’는 보기를 정답으로 출제했다. 문제는 교과서의 기술과 반대로 NAFTA가 더 크다는 데 있었다. 평가원은 교과서에 맞는 답만 정답으로 채점했다가 법원이 오류를 인정하자 ‘오답’을 적어낸 1만8800여 명도 정답 처리하고 추가 합격 등 구제 조치를 했다. 이후 수험생 94명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2심에선 1인당 위자료 200만∼1000만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왔고 대법원 재판이 진행 중이다. ▷올해는 ‘한국사 20번’으로 시끄럽다.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려는 노력도 북의 호응으로 큰 진전…’이라는 연설문을 제시한 후 이 연설이 행해진 정부의 정책을 고르는 5지선다형이다. 그런데 1∼4번은 ‘당백전 발행’ ‘도병마사 설치’ ‘노비안검법’ ‘대마도 정벌’로 고려나 조선시대 정책이고 정답인 5번만 현대사인 ‘남북 기본 합의서 채택’이어서 “초등학생도 풀겠다” “수능이 장난이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정부의 대북정책을 홍보하는 문제라는 비판도 있는데 해당 내용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연설이다. ▷한국사는 2017학년도부터 절대평가로 바뀐 뒤 ‘물수능’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모의고사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왜군을 물리친 전쟁’을 묻는 문제가 나온 적도 있다. ‘외국인 대상 귀화시험보다는 어려워야 한다’는 갑론과 ‘고교생이 알아야 할 기본 역사 상식을 검증하는 시험임을 감안해야 한다’는 을박이 맞붙곤 한다. ▷영국의 BBC방송은 최근 ‘한국: 인생을 바꾸는 시험은 팬데믹에도 멈추지 않는다’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수능을, 신기하다는 시선을 담아 보도했다. 올해는 코로나19 사태로 대규모 시험을 치른다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었다. 미국과 프랑스는 수능에 해당하는 SAT와 바칼로레아를 취소했고, 영국은 A레벨 시험 대신 모의고사와 내신성적을 바탕으로 알고리즘을 이용해 성적을 매겼다가 공정성 논란에 휩싸였다. 올해도 수능 출제가 제대로 됐는지 냉정하게 따져봐야겠지만 코로나 대유행 속에서 별 탈 없이 큰 시험을 치러낸 것만큼은 평가해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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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민정음’ 빌보드 정복[횡설수설/이진영]

    올 초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받은 작품상은 1992년 아카데미 역사상 비(非)영어 영화로는 처음이었다. 그만큼 미국인들은 ‘자막 달린 영화’를 싫어한다. 어제는 방탄소년단(BTS)이 ‘Life Goes On’으로 빌보드 ‘핫100’ 1위를 차지했다. 제목은 영어지만 가사는 한국어다. 올 9월 영어 가사 곡 ‘Dynamite’가 싱글차트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이번엔 한국어 가사로 정상에 오른 것이다. 영어 가사가 아닌 노래가 발매 첫 주에 정상에 오른 것은 빌보드 62년 역사상 처음이다. ▷BTS의 충성스러운 ‘아미(ARMY)’들에게 언어는 장벽도 아니다. 유튜브에는 BTS 한국어 가사 발음을 로마자로 표기하고 영어 자막을 달아놓은 동영상이 차고 넘친다. 아미들 중 ‘통역병’들이 무료로 제작한 콘텐츠들이다. ‘oppa’(오빠) ‘unnie’(언니) ‘aegyo’(애교)와 같은 ‘돌민정음’(아이돌과 훈민정음을 합한 신조어)을 일찌감치 뗀 아미들은 이 영상으로 노랫말을 ‘선행학습’한 후 콘서트장에서 ‘얼쑤’와 같은 추임새까지 ‘떼창’ 한다. ▷BTS의 일상을 담은 영상이나 인터뷰도 공개된 지 몇 시간 만에 영어로 번역되고, 다시 수십 개의 언어로 옮겨진다. BTS가 곤룡포를 입고 나오면 ‘곤룡포란 왕의 의상으로 다섯 마리 용이…’라는 설명이 따른다. ‘우린 다 개돼지 화나서 개 되지’(‘AM I Wrong’)를 번역할 땐 ‘한국 고위 관료가 민중은 개돼지라고 말해 논란이 된 적이 있다’는 해석을 곁들여준다. ▷한류 드라마도 2000년대 초중반까지는 영어 자막이 먼저 제작되고 그것이 각국의 언어로 번역됐는데 그 후로는 바로 각국의 언어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자막 봉사자들은 대부분 대학생들이어서 북반구 대학의 시험 기간엔 자막 달기 속도가 늦어지기도 한다(홍석경 서울대 교수 저서 ‘BTS 길 위에서’). 열성 팬들의 번역에 의지해 ‘어둠의 경로’로 한국 드라마를 찾아보던 팬들은 이제 넷플릭스에서 한류 콘텐츠를 마음껏 포식한다. 대만과 말레이시아의 넷플릭스 최고 인기 TV 프로그램 10편 중 9편, 베트남은 8편, 일본은 5편이 한국 드라마다. ▷지난해 한국어능력시험(TOPIK) 응시자 수는 37만5871명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프랑스 파리8대학 한국어과는 138명 정원에 1000명 넘게 지원했다(2018학년도). 태국과 아르메니아 시위 현장엔 케이팝 노랫말과 한글 구호가 등장한다. 574년 전 ‘말과 글이 달라 제 뜻을 능히 펼치지 못하는 백성’들이 안타까워 만든 한글이 디지털 시대 세계인을 위로하는 문화언어가 되고 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0-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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