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수용소 같은 곳에서 얇은 벽 너머의 자유를 꿈꿨습니다. 이 소설은 제가 그토록 만나길 꿈꿨던 다른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저의 이야기입니다.” 재일 조선인 2세 양영희 감독(59)의 첫 장편소설 ‘도쿄 조선대학교 이야기’(마음산책·사진)가 최근 우리말로 번역 출간됐다. 양 감독은 북한 체제에 갇힌 재일 조선인 가족사를 풀어낸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2006년)과 ‘굿바이 평양’(2011년),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년)를 만든 이로, 소설은 친(親)북한계 단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가 운영하는 일본 도쿄 조선대 학생 박미영의 이야기를 그렸다. 도쿄에 있는 양 감독을 13일 화상으로 만났다. 그는 “소설의 주인공 미영은 대학 담장 너머 다른 세상을 꿈꿨던 어린 시절의 나”라고 말했다. 양 감독은 1983년 도쿄 고다이라(小平)시에 있는 조선대 문학부 신입생으로 입학하던 때가 생생하다고 했다. 학교는 입학 첫날부터 그에게 “다른 꿈은 허락되지 않는다. 조직에 네 모든 것을 위탁할 것을 맹세하라”고 강요했다. 학생들은 4년 내내 기숙사에서 지내야 했다. 청바지 금지, 오후 6시 이후 통행금지, 주말 외출 금지…. ‘금지의 세계’를 살았던 그는 학교와 벽 하나를 두고 붙어 있는 무사시노미술대 학생들의 자유로운 삶을 동경했다. 소설 속 미영처럼 양 감독이 조선대 진학을 택했던 건 도쿄에서 마음껏 연극을 보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양 감독의 고향은 총련 소속 재일 조선인이 많았던 오사카다. 양 감독은 “남편에게 종속된 채 평생을 살아온 한 여자가 이혼을 요구하며 자기 삶을 찾으러 집을 떠나는 연극을 14세 때 보고 충격을 받았다”며 “그때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인형의 집’과 비슷한 내용의 당시 연극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소설 속 미영이 학교를 나와 도쿄 중심가에 연극을 보러 다니다가 교사들에게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히는 장면은 실제 경험에서 나왔다. “대학의 외출 금지 조치에 ‘아르바이트를 못 하면 학교에 다닐 돈이 없다’며 맞섰고, 결국 내가 이겼다”고 했다. 양 감독은 미영과 마찬가지로 ‘조직에 모든 것을 맡긴다’는 맹세를 끝내 거부한 채 극단에 들어갔다. 미영이 무사시노미술대에 다니는 일본인 남학생과 사랑에 빠지는 대목은 창작했다. 양 감독은 “그 시절에는 국적과 이념이 다르기 때문에 일본인 남학생과는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며 “자유롭고 싶고, 다른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싶은 꿈을 꾼다는 점에서 그들과 나는 서로 닮았다”고 했다. “1980년대 도쿄 조선대 같은 곳은 지금도 어디에나 있어요. 어딘가 혹은 무언가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끝내 자기 목소리를 지키는 이야기로 읽히길 바랍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제게 ‘아무것도 꿈꾸지 말라’고 하는 수용소 같은 곳에서, 저 얇은 벽 너머의 자유를 꿈꿨습니다. 이 책은 제가 그토록 만나길 꿈꿨던 다른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저의 이야기입니다.” 재일조선인 2세인 양영희 감독(59)은 1983년 일본 도쿄 코다이라(小平)시에 있는 조선대 문학부 신입생으로 입학하던 때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했다. 북한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가 운영하는 학교는 입학 첫 날부터 그에게 “너에게 다른 꿈은 허락되지 않는다. 조직에 네 모든 것을 위탁할 것을 맹세하라”고 강요했다. 청바지 금지, 오후 6시 통행금지, 주말 외출금지…. ‘금지의 세계’를 살았던 그는 학교 담장 너머 청바지를 입고 다니는 무사시노미술대 학생들의 삶을 상상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선 북한체제, 다른 한쪽에선 도쿄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예술가들이 다니는 예술대학이 맞붙어 있었다. ‘치마저고리를 입은 나와 청바지를 입은 저 아이는 정말 같은 세상을 사는 게 맞을까. 다른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만날 수 있을까.’ 양 감독이 조선대에서 지낸 4년 동안 품었던 질문이다. 북한체제에 갇힌 재일조선인 가족사를 풀어낸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2006년)과 ‘굿바이 평양’(2011년),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년) 3부작을 만든 양 감독이 최근 첫 장편소설 ‘도쿄 조선대학교 이야기’(마음산책)를 펴냈다. ‘디어 평양’은 2006년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2021년 DMZ다큐멘터리영화제 국제경쟁 부문 대상을 받은 바 있다. 13일 화상으로 만난 양 감독은 “소설 속 조선대생 박미영은 학교 담장 너머 다른 세상을 꿈꿨던 어린 시절의 나”라고 했다. 주인공 미영처럼 양 감독이 조선대 진학을 선택했던 건 “도쿄에서 마음껏 연극을 보기 위해서”였다. 양 감독의 고향은 조총련 소속 재일조선인들이 많았던 오사카다. 14세 때 연극을 접하고 난생 처음 ‘다른 세상’을 만났다. 양 감독은 “남편에게 종속된 채 평생을 살아온 한 여자가 이혼을 요구하며 자기 삶을 찾으러 집을 떠나는 연극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홀로 집을 나서는 여자가 무대 위에서 웃는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무대가 나를 다른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바로 ‘나’라는 걸 무대 위 그 여자를 보면서 깨달았어요.” 학교에선 양 감독에게 외출 금지를 강제했지만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양 감독은 “‘아르바이트를 못하면 학교에 다닐 돈이 없다’고 맞불을 놓은 끝에 결국 내가 이겼다”며 “엄격한 조선대에서도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유롭게 연극을 보러 다녔다”고 했다. 소설 속 미영이 학교 밖을 나와 도쿄 중심가에 연극을 보러 다니다가 교사들에게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히는 장면은 실제 양 감독의 탈선 경험에서 나왔다. 양 감독이 그랬듯 소설 속 미영도 ‘조직에 모든 것을 위탁한다’는 맹세를 끝내 하지 않고, 대신 극단에 들어간다. 양 감독은 “도쿄 조선대에서의 일상과 북한 주민들의 삶은 실제 1980년대 내가 겪고 목격한 것”이라며 “소설에서 내가 100% 지어낸 건 미영이 무사시노미술대에 다니는 일본인 남학생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라고 밝혔다. 그는 “그 시절 나는 그들과 내가 국적도 이념도 다르기 때문에 서로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며 “‘그때 내가 먼저 그들에게 다가섰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에 넣게 됐다”고 했다. 양 감독은 “그때의 내가 내지 못했던 용기를 지금의 나는 낼 수 있다. 자유롭고 싶고 다른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싶은 꿈을 꾼다는 점에서 우리는 서로 닮아 있다”고 덧붙였다.“소설 속 시공간은 1980년대 도쿄 조선대이지만 이런 곳은 지금도 어디에나 있어요. 이념, 사상뿐 아니라 어딘가 혹은 무언가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끝내 자기 목소리를 지키는 이야기로 읽히길 바랍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문화재청이 지난해 미국 크리스티 경매에서 사들여 국내로 환수한 16세기 실경산수화 ‘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가 보물이 된다. 문화재청은 13일 독서당계회도를 보물로 지정 예고하며 “이 작품은 기존 보물로 지정된 계회도(과거 급제 동기, 관아 동료 등의 친목 모임을 그린 그림) 13점과 비교해 두 번째로 이른 시기에 제작됐다”며 “상단 표제와 중단 그림 등이 후대 제작된 계회도의 전형이 되는 작품으로 미술사적 가치가 높다”고 설명했다. 이 그림은 선비들이 현재 서울 성동구 옥수동 일대 한강변인 두모포(豆毛浦) 앞에 나룻배를 띄워 놓고 풍류를 즐기는 모습을 그린 실경산수화다. 조선 중종 때인 1516∼1530년 사가독서(賜暇讀書·젊은 문신에게 휴가를 줘 학문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를 했던 관료들의 모임 풍경을 담았다. 특히 강 건너 절벽 위에 세워진 독서당 등 두모포 일대를 섬세하게 그린 실경 묘사가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림 하단에는 모임에 참석한 관료 12명의 이름과 호, 과거 급제 연도 등이 상세히 적혀 제작 연대를 가늠할 수 있다. 문화재청은 조선왕조실록과 옛 문헌에 나타난 품계 및 관직 정보를 바탕으로 그림이 1531년 그려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림은 일본 국립교토미술관 초대 관장인 간다 기이치로(神田喜一郞)가 소장해 오다 그가 사망한 뒤 유족이 다른 일본인에게 판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일본인 소장자가 미국 크리스티 경매에 내놓은 작품을 지난해 3월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매입했다. 이 밖에도 문화재청은 14세기 제작된 경기 ‘안성 청룡사 금동관음보살좌상’과 조선 중기 문신 이항복(1556∼1618)이 손자 이시중(1602∼1657)의 교육을 위해 쓴 ‘이항복 해서 천자문’, 1462년 간행된 불경 ‘수능엄경의해(首楞嚴經義海) 권9∼15’도 이날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8세기 서구 유럽의 산업화를 이끈 건 어쩌면 편지였을지도 모른다.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1694∼1778)는 1755년부터 21년 동안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영국과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에 사는 지식인들과 1만 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최근 사회과학자들은 혁신을 보상하고 장려하는 문화가 서신 교환을 통해 싹텄다고 분석한다. 의회제의 정착, 교통망 발전, 증기기관의 발명…. 이 같은 혁신들이 비슷한 시기 한꺼번에 서구에서 이뤄질 수 있었던 건 곳곳에 흩어져 있던 천재적인 발상을 나누는 편지의 힘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미국 경제학자인 두 저자는 ‘부(富)의 기원’을 추적한다. 2세기 전만 해도 세계 인구의 94%는 하루 2달러(2016년 물가 기준) 이하를 쓰며 살았다. 2015년 그 비율은 10%로 줄었다. 200년 동안 어떤 변화가 세계를 경제 성장으로 이끌었을까. 저자들은 답을 찾기 위해 지리뿐 아니라 제도, 문화, 인구 등이 부와 빈곤에 끼친 영향을 분석했다. 이들은 다양한 데이터를 살핀 뒤 “경제 성장을 결정하는 요인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섬나라 영국은 18세기 운하와 철도 등 운송 인프라를 확충해 내수 운송 체계를 갖췄다. 내수 시장을 연결해 유럽 대륙과 연결돼 있지 않은 지리적 한계를 극복한 것이다. 거대한 땅덩어리를 가진 미국 역시 철도망을 촘촘하게 건설해 멀리 떨어진 지역을 한데 묶고 세계 최대 내수 시장을 확보했다. 철도망이 없었다면 1890년 미국의 총생산성은 25% 감소했을 것이란 최근의 연구 성과도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한다. 타고난 지리적 운명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운송 인프라로 ‘지리의 저주’를 극복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들은 ‘더 열심히 일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는 프로테스탄티즘 문화가 서구 유럽을 자본주의로 이끌었다’는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1864∼1920)의 주장도 반박한다. 종교개혁 이전에도 노동윤리를 강조한 자본주의 정신은 존재했다는 것. 오히려 종교개혁이 불러온 교육 효과에 집중한다. 성경을 직접 읽고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을 중시한 덕분에 문해력이 향상돼 두꺼운 인적 자본이 구축됐다는 얘기다. 읽고 쓰는 법을 배운 개신교인들은 더 많은 돈을 버는 일자리를 얻어 부를 쌓았다. 경제 성장을 이끈 결정적 요인은 종교개혁 그 자체가 아니라 종교개혁이 불러온 교육 선진화라는 분석이다. 부의 기원을 하나로 꼽을 수는 없지만 저자들은 근현대 경제를 성장시킨 핵심 요인으로 문화를 꼽는다. 21세기 산업을 지탱하는 정보기술(IT) 기업들은 어째서 미국에 몰려 있을까. 18세기 서구 유럽의 지식인들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생각을 공유했듯 미국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들은 소스코드를 무료로 공유한다. 좋은 발상을 나누는 성장 문화가 혁신을 이끌어내는 밑거름이라는 게 저자들의 주장이다. 사회경제학 논문과 보고서 550여 편을 참고한 탄탄한 데이터가 주장을 뒷받침한다. 한 나라를 부유하게 만든 복잡다단한 조건들이 촘촘히 담겼다. 저자들은 “과거의 청사진은 우리가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쓸 수 있는 소중한 자원”이라고 말한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규격화된 슴베찌르개가 서로 다른 문화층에서 110점 가까이 나왔어요. 이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장인 집단이 오랜 시간에 걸쳐 존재했다는 얘기입니다. 수양개 유적은 구석기 시대의 테크노폴리스였습니다.” 4만6000년 전 제작된 세계 최고(最古) 슴베찌르개(사진)를 비롯해 10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된 충북 단양 수양개 유적은 1980년 이융조 충북대 명예교수(82·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가 이끄는 충북대 박물관팀에 의해 그 존재가 세상에 드러났다. 그해 7월 21일 충주댐 수몰 예정지역 지표조사 중이던 조사팀이 이틀째 쏟아진 기록적 폭우를 뚫고 극적으로 발견했던 것. 충북 청주시 충북대 박물관에서 6일 만난 이 교수는 “배를 타러 가는 길에 비가 너무 많이 쏟아져 돌아가려는데, 제자들이 ‘계속 가보자’고 해서 찾아낼 수 있었다”며 “무슨 일이 있어도 유적을 발굴해 후대에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발견 당시를 회고했다. ‘한국 구석기 연구의 전환점’으로 평가되는 수양개 유적이 올해 발굴 40주년을 맞는다. 1980년 발견돼 3년 뒤 발굴한 수양개 유적은 충남 공주 석장리 유적, 경기 연천 전곡리 유적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구석기 유적으로 꼽힌다. 나머지 두 유적이 미국인에 의해 발견된 데 비해 수양개 유적은 처음부터 우리 발굴팀이 발견해 의미가 더욱 크다. 그러나 첫 발견 뒤에도 한동안 충북대 박물관의 잠정 발굴 대상 목록에도 오르지 못했다. 이 교수는 1983년 3월 박물관장을 맡자마자 가장 먼저 수몰 위기에 놓인 수양개 유적 발굴을 추진했다. 그리고 충주댐 수몰지역 조사를 지원하는 한국수자원공사를 4개월 동안 설득해 그해 7월 첫 발굴에 나섰다. 이 교수가 “수몰 전 반드시 발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면 충주댐 건설로 영영 빛을 보지 못했을지 모를 유적이다. 이 교수는 74세가 된 2015년까지 13차례 수양개 발굴을 이어갔다. 수양개 유적지는 충주댐 건설로 수몰됐지만 댐 수위가 낮아지면 발굴을 계속한 것. 그렇게 수양개에서 출토된 유물은 “한반도에는 구석기 시대가 없다”는 식민사관을 뒤엎었을 뿐 아니라 ‘미개하다’고 여겨졌던 구석기 문화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았다. 이 교수는 “수양개 1지구에서는 석기 제작소만 49곳이 나왔다”며 “정교하게 정형화된 석기의 형태로 미뤄 대량 석기 생산 체계가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수양개 유적의 가치를 해외에 알리는 일에도 힘써 왔다. 1996년부터 코로나19 확산 전인 2019년까지 ‘수양개와 그 이웃들’이라는 국제학술대회를 25차례 개최했다. 미국과 러시아, 폴란드 등 해외 대학과 기관에서 연 것만도 16차례다. 그동안 181개국에서 학자 486명이 참여했다. 이 같은 노력 덕분일까. 일본 국립후쿠오카박물관은 전시물 설명에서 ‘수양개 슴베찌르개가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밝히고 있다. 이 교수는 “일본 구석기 사냥 도구의 기원이 수양개 유적에서 왔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라며 “나아가 ‘슴베찌르개 한반도 기원설’도 세계 학계의 인정을 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40년을 수양개 유적에 바쳤지만 그는 아직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았다고 했다. 수양개 유적에서 제작된 슴베찌르개가 일본과 중국 등 주변 지역으로 퍼져나간 경로를 파악하는 ‘슴베찌르개 로드’를 그리는 일이다. 이 교수는 “남은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 나는 아직도 현역”이라며 “유적의 가치를 밝히는 데 힘을 쏟고 싶다”고 했다.슴베찌르개날 부분을 찌를 수 있게 가공한 마름모꼴 석기로 한반도 후기 구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도구. 자루에 꽂기 위한 뾰족한 부분을 일컫는 ‘슴베’와 ‘찌르개’를 합쳐 이융조 충북대 명예교수가 만든 학술용어다. 나무나 짐승 뼈로 만든 자루에 달아 사냥용 창 등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주=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유적은 반드시 발굴해 후대에 알려야겠다는 사명감뿐이었어요. 그때 제가 수양개 유적을 조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면 이 유적은 충주댐 건설로 물 속에 잠겨 빛을 보지 못했을 겁니다.” 4만6000년 전 만들어진 세계 최고(最古) 슴베찌르개가 출토된 충북 단양 수양개 유적은 이융조 충북대 명예교수(82) 덕분에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충북대 박물관팀을 이끌고 충주댐 수몰지역 조사에 나선 이 교수는 1980년 7월 이틀 동안 750㎜가 쏟아진 폭우를 뚫고 수양개 유적을 처음 발견했다. 1983년 3월 충북대 박물관장을 맡은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이 수몰 위기에 놓인 수양개 유적을 ‘발굴 대상 지역’ 목록에 올린 것이었다. 42세 때 조사단장으로 시작한 첫 발굴은 그가 74세가 된 2015년까지 이어졌다. 총 13차례 넘는 발굴로 출토된 유물은 10만여 점에 달한다. 올해 수양개 유적 발굴 40주년을 맞아 충북 청주시 충북대 박물관에서 6일 만난 이 교수는 전시실에 놓인 슴베찌르개 25점을 가리키며 “모두 40년 전 나와 내 제자들이 수양개 유적에서 함께 발굴한 유물들”이라며 “모든 공을 나를 믿고 같은 길을 걸어준 제자들에게 돌리고 싶다”며 웃었다. 그는 2007년 충북대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한 뒤 재단법인 한국선사문화연구원을 설립해 여전히 발굴 조사와 학술대회를 총괄하고 연구 보고서와 논문을 쓰는 현직에 있다. 수양개 유적을 포함한 선사유적 51곳을 발굴해 한국 구석기 문화의 체계를 갖춘 공로로 2015년 옥관문화훈장, 2016년 용재학술상을 받았다. 수양개 유적은 ‘한국 구석기 연구의 전환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반도에는 구석기 시대가 없다”는 일제의 식민사관을 뒤엎었을 뿐 아니라 미개하다고 여겨졌던 구석기 문화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수양개 1지구에서는 석기 제작소만 49곳이 나왔다. 정교하게 정형화된 석기의 형태에 미뤄 어쩌다 석기 한 점이 우연히 만들어진 게 아니라 계획된 대량생산 체계가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흔히 구석기인들은 미개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규격화한 슴베찌르개가 서로 다른 문화층에서 110여 점 가까이 나왔다는 것은 이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장인 집단이 오랜 시간에 걸쳐 존재했다는 얘기입니다. 수양개 유적은 구석기 시대의 테크노폴리스였습니다.” 그는 발굴에서 멈추지 않고 수양개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의 연구 성과를 세계에 알리는 데에도 앞장섰다. 1996년부터 코로나19 확산 전인 2019년까지 매년 ‘수양개와 그 이웃들’이라는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 국가뿐만 아니라 미국, 러시아 폴란드, 이스라엘 등 외국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16차례 이 학술대회를 열어 181개국에서 학자 486명이 참여했다. 이 교수는 “발굴조사 보고서 하나 냈다고 연구가 끝나는 게 아니다. 나의 목표는 수양개 유적의 학술적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 것이었다”고 했다. 이 교수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한국선사문화연구원은 2021년 12월 ‘한국 단양지역 수양개 구석기 유적지의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값’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수양개 6지구에서 발굴된 슴베찌르개의 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 4만6000년 전의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세계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슴베찌르개 가운데 가장 빠른 것이다. 국제학술대회로 이 같은 연구 성과를 꾸준히 밝힌 덕분일까. 일본 국립후쿠오카박물관은 전시물을 ‘수양개 슴베찌르개가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교수는 “일본의 구석기 사냥 도구의 기원이 수양개 유적에서 왔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라며 “더 나아가 세계 학계에서 ‘슴베찌르개 한반도 기원설’이 인정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 40년을 수양개 유적에 바친 그는 “아직도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아 있다”고 했다. “실크로드처럼 수양개 유적에서 제작된 슴베찌르개가 일본과 중국 등 주변 지역으로 퍼져나간 경로를 파악하는 ‘슴베찌르개 로드’를 그려보는 것”이다. 이 교수는 “생각해 보니 이제 내게 남은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 나는 아직도 현역”이라고 했다. 청주=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피아니스트 이혁 씨(23·사진)가 7월 14일 프랑스 혁명 기념일인 ‘바스티유의 날’ 기념공연에서 독주를 펼친다. 한국인이 프랑스 국경일 기념 무대에 오르는 건 처음이다. 이 씨는 프랑스 파리 에펠탑 아래 샹드마르스 광장에서 열리는 클래식 공연에서 1부 마지막 순서로 무대에 올라 20분 동안 피아노 독주를 선보일 예정이다. 파리시와 공영 프랑스 텔레비지옹 방송이 공동 개최하는 행사로 TV와 라디오로 생중계된다. 바스티유의 날은 프랑스 대혁명의 시발점이 된 1789년 파리 시민들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기리는 날이다. 이번 공연은 이 씨가 지난해 11월 프랑스 ‘롱티보 국제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공동 1위를 차지하며 얻은 부상 가운데 하나다. 일본인 피아니스트 가메이 마사야(亀井聖矢)도 함께 1위에 올랐지만, 공연 주최 측이 이 씨에게 연주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3년 창설된 롱티보 국제 콩쿠르에서 한국인 피아니스트가 1위에 오른 건 2001년 임동혁 씨(39) 이후 21년 만이었다. 이 씨는 2012년 러시아 모스크바 국제 청소년 쇼팽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 및 최우수 협주상을 차지하며 국제무대에 데뷔했다. 2016년 폴란드 파데레프스키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도 최연소로 우승했다. 2021년 쇼팽 콩쿠르에서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결선에 올랐고, 같은 해 12월 프랑스 아니마토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에 다니던 이 씨는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뒤 파리 에콜 노르말 음악원으로 옮겨 최고 연주자 과정을 밟고 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피아니스트 이혁 씨(23)가 7월 14일 프랑스 혁명 기념일인 ‘바스티유의 날’ 기념공연에서 독주를 펼친다. 한국인이 프랑스 국경일 기념 무대에 오르는 건 처음이다. 이 씨는 프랑스 파리 에펠탑 아래 샹드마르스 광장에서 열리는 클래식 공연에서 1부 마지막 순서로 무대에 올라 20분 동안 피아노 독주를 선보일 예정이다. 파리시와 공영 프랑스 텔레비지옹 방송이 공동 개최하는 행사로 TV와 라디오로 생중계된다. 바스티유의 날은 프랑스 대혁명의 시발점이 된 1789년 파리 시민들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기리는 날이다. 이번 공연은 이 씨가 지난해 11월 프랑스 ‘롱티보 국제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공동 1위를 차지하며 얻은 부상 가운데 하나다. 일본인 피아니스트 카메이 마사야(亀井聖矢)도 함께 1위에 올랐지만, 공연 주최 측이 이 씨에게 연주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3년 창설된 롱티보 국제 콩쿠르에서 한국인 피아니스트가 1위에 오른 건 2001년 임동혁 씨(39) 이후 21년 만이었다. 이 씨는 2012년 러시아 모스크바 국제 청소년 쇼팽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 및 최우수 협주상을 차지하며 국제무대에 데뷔했다. 2016년 폴란드 파데레프스키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도 최연소로 우승했다. 2021년 쇼팽 콩쿠르에서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결선에 올랐고, 같은 해 12월 프랑스 아니마토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에 다니던 이 씨는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뒤 파리 에콜 노르말 음악원로 옮겨 최고 연주자 과정을 밟고 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조선은 ‘쇠고기의 나라’였다. 18세기 후반 조선에서 1년 동안 도축되는 소가 약 39만 마리에 달했다. 하지만 동시에 조선은 소를 팔아 도축한 자는 장(杖) 100대를 처하고 가산을 몰수하는 강력한 ‘우금(牛禁)’ 법을 가진 사회였다. 법을 어기고 소를 도축했던 대표적 집단으로 ‘반인(泮人)’이 있었다. 반인은 조선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 인근 반촌(泮村)에 살던 성균관의 공노비다. 17세기 쇠고기 도축이 급증하자 조정은 반인에게 영업세로 속전(贖錢)을 받는 대신 소고기를 도축하는 ‘현방(懸房)’을 허가해줬다. 신간 ‘노비와 쇠고기’(푸른역사)를 통해 반인에 주목한 강명관 전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65·사진)를 서울 은평구 자택 인근 카페에서 3일 만났다. 강 전 교수는 “우금 법은 18세기부터 사문화됐지만 반인에겐 늘 ‘불법’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며 “조선을 지탱한 이들이 어떻게 지배당하면서 저항했는지가 궁금했다”고 했다. 강 전 교수는 2003년부터 20년 동안 승정원일기뿐 아니라 반인에게 속전을 받았던 삼법사(三法司, 형조·사헌부·한성부를 통칭) 사료에서 현방과 관련된 기록들을 이 잡듯이 긁어모았다. 책은 주석만 140쪽에 이른다. 사료 속에서 지배계급에 수탈당했던 반인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건져낸 강 전 교수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재정난이 극심해지자 성균관과 삼법사는 현방을 수탈하며 곳간을 채웠다”고 했다. 1747년 성균관 대사성이 올린 상소문에 따르면 당시 현방 총 21곳이 1년에 삼법사 속전으로 7000냥, 성균관 운영 자금으로 8000냥을 냈다. 초가집 150채를 살 수 있는 돈이다. 18세기 초에는 조정에 ‘탈탈 털린’ 반인들이 진 빚이 5만 냥에 달했다는 기록도 있다. 먹을거리가 없어 극단적 선택을 하는 반인도 나왔다. 강 전 교수는 “상소문이 남아 있지 않았더라면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을 죽음”이라고 했다. 책에는 수탈에 저항한 반인의 목소리도 함께 담겼다. 반인들은 횡포에 맞서 현방 문을 닫거나(撤屠·철도), 성균관 식당에 식사 제공 노역을 거부(闕供·궐공)하기도 했다. 강 전 교수는 “노비의 관점에서 사료를 다시 읽으면 수탈에 저항하려 했던 반인들의 목소리가 들린다”며 “이들을 수탈의 대상으로 한정하는 건 인간에 대한 도리가 아닐뿐더러 진실도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지배계층으로부터 외면당한 반인들이었지만 스스로 살길을 도모했다. 성균관 유생에게 밥을 지어주거나 거처를 내주면서 수익을 냈고, 장빙(藏氷·얼음을 저장하는 곳간) 사업도 함께 벌였다. 반촌에 ‘제업문회’라는 학교를 세워 글을 가르치고 배우기도 했다. “갖은 수탈을 당하면서도 살고자 하는 이들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이들 역시 노래를 부르고 글을 짓는 인간이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저항했고 같이 살 길을 찾았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조선의 주체였던 겁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조선은 ‘쇠고기의 시대’였다. 18세기 후반 조선에서 1년 동안 도축되는 소의 수는 약 39만 마리에 달했다. 조선은 소를 팔아 도축한 자는 장 100대를 처하고 가산을 몰수하는 강력한 우금(牛禁) 법을 가진 사회였다. 어떤 이들이 이런 ‘불법 지대’에 살았을까. 신간 ‘노비와 쇠고기’(푸른역사)를 지난달 28일 출간한 강명관 전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65)는 이미 우금 법이 사문화된 현실과 처벌이라는 간극 사이에서 살아갔던 반인(泮人)의 삶에 주목했다.“성균관의 공노비 반인들은 지배계급이 먹었던 소고기를 도축하며 연명했습니다. 우금 법은 18세기부터 사문화됐지만 이들에겐 늘 ‘불법’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습니다. 저는 조선을 지탱한 이들이 어떻게 지배당하면서 저항했는지, 그것이 궁금했습니다.”서울 은평구 자택 인근 카페에서 3일 만난 강 전 교수는 “2003년부터 20년 동안 ‘승정원일기’뿐 아니라 형조·사헌부·한성부를 통칭하는 삼법사(三法司)의 사료 속에서 ‘현방(懸房)’과 관련된 모든 기록들을 이 잡듯이 긁어모았다”고 말했다. 현방이란 조선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 인근 마을 반촌(泮村)에서 소를 도축해 쇠고기를 판매한 곳. 140쪽에 달하는 주석에는 그가 20년간 찾아온 사료들로 빼곡하다. 그가 무수히 많은 사료 속에서 건져낸 건 지배계급에 수탈당했던 반인들의 절박한 목소리다. 강 전 교수는 “17세기 쇠고기 도축이 급증하면서 조정은 반인에게 현방을 허용하는 대신 영업세로 속전(贖錢)을 부과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재정난이 극심해지자 성균관과 삼법사는 현방을 수탈하며 곳간을 채웠다”고 설명했다. 일례로 1747년 성균관 대사성이 올린 상소문에 따르면 당대 현방 총 21곳은 1년에 삼법사 속전으로 7000냥, 성균관 운영자금으로 8000냥을 냈다. 당시 초가집 150채를 살 수 있는 규모다. 18세기 초 모든 이윤을 빼앗긴 이들이 진 빚이 5만 냥에 달했다는 기록도 있다. 심지어는 제 먹을거리도 없이 쌀을 수탈당하다 못해 극단적 선택을 하는 노비도 있었다. 강 전 교수는 “상소문이 남아있지 않았더라면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을 죽음”이라며 “노비의 관점에서 옛 사료를 다시 읽으면 수탈에 저항하려 했던 반인들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강조했다.강 교수는 수탈에 저항한 반인의 목소리도 함께 책에 담았다. “이들을 수탈의 대상으로 한정하는 건 인간에 대한 도리가 아닐 뿐더러 진실도 아니다”라는 이유에서다. 강 전 교수는 “지배계급에게 외면당한 삶이었지만 이들은 스스로 살 길을 도모하며 버텼다. 성균관 유생에게 밥을 지어주거나 거처를 내주면서 수익을 냈고, 장빙(藏氷·얼음을 저장하는 곳간) 사업도 함께 벌였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다. 반촌에 ‘제업문회’라는 학교를 세워 서로에게 한문을 가르치며 글을 나눴다.“갖은 수탈을 당하면서도 살고자 하는 이들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이들 역시 노래를 부르고 글을 짓는 인간이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저항했고 같이 살 길을 찾았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조선의 주체(主體)였던 겁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우리는 화석연료를 먹고 산다. 진짜 화석연료를 먹는다는 게 아니다.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음식이 화석연료를 이용해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밀을 재배해 빻고 대형 베이커리에서 밀가루 반죽을 구워 소비자에게 가기까지 빵 1㎏당 디젤유 기준 600mL가 필요하다. 평범한 한 끼 식사에도 화석연료가 가득 담겨 있는 셈이다. 캐나다 매니토바대 환경지리학과 명예교수이자 저명 환경과학자인 저자는 탄소 배출로 인한 기후위기를 극복하려면 먼저 “우리 문명은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2050년까지 ‘완전한 탈탄소’를 이루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경제적이지도 않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저자는 다채로운 통계와 데이터로 인류가 사회 경제 전반을 얼마나 화석연료에 의존하고 있는지 증명한다. 21세기 현대사회는 합성비료와 농기구를 사용한 덕분에 농업에 필요한 인력을 줄여왔다. 2020년 1㎏의 낟알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인력은 1800년에 비해 98% 넘게 줄었다. 과거처럼 기계 없이 농사를 짓거나 농약을 쓰지 않으면 인건비 증가로 농가가 큰 타격을 입는다. 농업에서 완전한 탈탄소화는 당분간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공해의 주범’으로 꼽히는 플라스틱은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산소를 공급하고 혈압을 관찰하는 튜브와 정맥주사용 주머니, 혈액 주머니, 무균 포장재 등 현대 의료기기 상당수는 플라스틱의 일종인 폴리염화비닐(PVC)로 만들어진다. 집 벽체와 지붕, 창틀, 블라인드는 물론이고 사무용품도 마찬가지다. 세계 플라스틱 생산량은 1925년 약 2만 t에 불과했지만 2019년 3억7000만 t으로 치솟았다. 저자는 플라스틱과의 완전한 결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적절한 사용은 현대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나아가 바람과 물, 태양 같은 재생가능 에너지로 세계 에너지 공급량의 80%를 대체하겠다는 미국의 ‘그린 뉴딜’ 정책도 비판한다. 이 같은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플라스틱과 강철, 시멘트처럼 현대문명을 떠받치는 재료를 어떻게 재생가능 에너지로만 생산할 것인지’, ‘세계화를 이끄는 항공·해상·육상 운송의 80%를 어떻게 2030년까지 탄소를 배출하지 않고 해내겠다는 것인지’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책에는 기후위기를 극복할 마법 같은 해법이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저자는 당장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다소 뻔하지만 음식물 쓰레기 양을 줄이는 것도 그중 하나다. 매일 식재료 중 채소의 절반, 어류의 3분의 1, 곡류의 30%가 버려진다. 복잡한 생산 과정을 개혁하는 것보다 먼저 낭비되는 음식을 줄여 탄소 배출을 줄이자는 것이다. 저자는 “나는 비관론자도 낙관론자도 아니다”라며 “그저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설명해보려는 과학자일 뿐”이라고 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서울 노원구 청원초등학교는 15층 높이의 약 1만 가구 아파트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다. 유치원과 중학교, 남·여고까지 한데 모여 있어 아이들의 시선에서는 위압적으로 보일 수 있는 풍경이다. 회색빛 건물들 속 키 작고 알록달록한 건물 하나가 눈에 띈다. 지난해 9월 서울시 건축상에서 우수상을 받은 청원초 체육관이다. 5층 높이 초등학교 건물에서 내려다본 체육관 지붕은 형형색색의 레고 블록을 꽂아둔 듯했다. 학교법인 청원학원의 의뢰로 김한중 그라운드아키텍츠 건축사사무소 대표(40)와 이혜서 건축사사무소 눅 대표(38)가 2021년 10월 완공했다. 청원초등학교 체육관에서 지난달 22일 만난 김 대표는 “아이들이 거리낌 없이 드나들 수 있는 작고 만만한 체육관을 짓고 싶었다”고 말했다. 건축 면적은 초등학교 건물 앞 자투리 공간 680㎡뿐이었다. 농구장 면적이 420㎡인 것을 감안하면 체육관 크기를 줄여야 했던 상황. 게다가 더 큰 숙제가 있었다. “아이들이 심리적으로 위압감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건축가들은 고민 끝에 지표보다 1.8m가량 바닥이 낮은 키 작은 체육관을 설계했다. 체육관 전체 높이는 9.1m로 지으면서 5분의 1가량은 지하화한 것. 덕분에 학교에서 바라본 체육관은 7.3m로 주변 건물에 비해 ‘만만해 보인다’. 체육관 출입구 길목에는 계단 대신 완만한 내리막을 만들었다. 김 대표는 “수업 동을 빠져나온 아이들이 어떤 진입장벽도 없이 내리막을 달려 거침없이 체육관으로 향하길 바랐다”고 했다. 체육관 내부에는 교내 행사를 위한 단상도 설치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올라가야 할 계단이 생기는 순간 거긴 어른의 공간이 되거든요. 누군가는 위에 서고 누군가는 아래에 선다는 개념은 체육관에선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작고 만만한 건물을 짓고 보니 지붕이 신경 쓰였다. 5층 높이 초등학교 복도 어디서든 체육관 지붕이 훤히 내려다보였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아이들이 체육관에 있는 시간보다 체육관 지붕을 보는 시간이 더 많을 것 같았다. 초록색 방수 페인트로 칠해진 못생긴 지붕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며 웃었다. 고민 끝에 박공지붕에 주로 쓰이는 건축 자재 ‘징크’를 주황, 하늘, 연두, 베이지색으로 조합해 지붕에 얹었다. 학교 복도에 난 창문 너머로 ‘장난감 같은’ 지붕 풍경이 생긴 셈이다. 체육관 앞 내리막길은 작은 정원으로 꾸몄다. 그는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만든 길을 주로 밟는 아이들에게는 잔디가 있는 숨 쉴 틈이 필요하다”고 했다. 체육관 전면에는 유리창을 내 실내에서 운동하는 아이들이 밖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창을 열면 바깥 공기와 바람, 햇빛을 느낄 수 있다. “아이들이 실내체육관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길 바랐어요. 이곳을 체육관이 아니라 운동장처럼 막 썼으면 좋겠습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호랑이한테 쫓기지 말고 우리가 먼저 그 호랑이를 잡도록 합시다.” 대한독립군과 일본군의 결전이 코앞으로 다가온 1920년 10월 어느 날 백두산 부근 산악지대 청산리 근처. 대한독립군을 포함한 연합부대가 모여 긴급 작전회의를 연다. 이전까지는 방어하자는 의견이 우세했던 상황. 부대 지휘를 총괄했던 홍범도 장군(1868∼1943)은 “청산리 부근의 유리한 지세를 이용해 적의 선두부대를 기습 공격하자”고 제안한다. 결국 그의 주장이 채택됐고, 독립군은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한다. 홍 장군 순국 80주기를 맞아 이동순 시인(73)이 1일 출간하는 ‘민족의 장군 홍범도’(한길사)의 한 대목이다. 1982년부터 홍 장군과 관련된 사료를 모아 온 이 시인은 28일 기자간담회에서 “41년 만에 마침내 홍 장군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은 이 책을 그의 묘소에 바칠 수 있게 돼 영광”이라고 말했다. 840쪽에 이르는 이 책은 홍 장군의 출생부터 1943년 10월 25일 카자흐스탄에서 눈을 감기까지의 일생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일대기다.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 시인은 할아버지인 독립지사 이명균 선생(1863∼1923)의 삶을 전해 들으며 “언젠가 조부처럼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들의 삶을 문학으로 엮어보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주목한 인물이 바로 홍 장군. 이 시인은 “홍 장군이 한국 독립운동사에 남긴 족적을 제대로 조명하는 것이 일생의 목표였다”고 했다. 이 시인은 ‘홍범도 일지’(홍 장군이 카자흐스탄에 살아 있을 때 고려극장 소속 극작가가 기록한 구술 채록집)에 드러난 홍 장군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2003년 민족서사시 ‘홍범도’ 1∼10권을 펴내기도 했다. 이후 20년 만에 산문으로 홍 장군의 생애를 다시 써내려간 이유에 대해 “단순 사실의 조합은 생애를 평면화하기 쉽다. 홍 장군의 생애를 소설적 상상력으로 입체화하려는 시도”라고 했다. 이어 “홍 장군에 대한 새로운 사료들이 추가로 밝혀진다면 얼마든지 새롭게 써내려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1920년 청산리 전투 이후 연해주에 살던 홍 장군은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으로 카자흐스탄에서 생을 마감했다.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공동묘지에 안치돼 있던 홍 장군의 유해는 순국 78주년인 2021년 광복절 고국으로 돌아와 현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치돼 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문화재청은 강원 고성군 ‘고성 건봉사지’(사진)를 28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했다.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때인 520년 창건됐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조선 세조 때는 왕실의 사찰인 원당(願堂) 기능을 수행했고,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승군을 모아 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6·25전쟁 때 탑비 등만 남고 절 건물은 불에 타 사라졌다. 1990∼2020년 9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고려 후기 건물지 등이 확인됐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먼 미래에 인간의 감정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진보한 인공지능(AI) 로봇이 존재할 수도 있어. 그렇다면 그 로봇의 사랑과 실제 사랑이 다르지 않다는 결론도 내릴 수 있을까?” 뇌과학자 김대식 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56)가 지난달 대화형 인공지능(AI) 챗GPT에게 던진 질문이다. 챗GPT가 내놓은 답변은 “그렇다”였다. “만약 이 로봇이 감정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고 실제 사람의 감정과 구별할 수 없는 감정 반응을 보일 수 있다면 자신이 시뮬레이션하고 있는 감정이 진짜라고 믿게 될 수도 있다”는 것. 미래의 인간이 진보한 기계와 사랑에 빠지는 것도 상상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도 챗GPT는 “그럴 수 있다”고 답했다. 김 교수는 챗GPT와 사랑, 정의, 죽음 등을 주제로 10여 차례 나눈 대화를 엮은 ‘챗GPT에게 묻는 인류의 미래’(동아시아·사진)를 최근 펴냈다. 그는 27일 서울 중구의 한 식당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챗GPT는 앞으로 나올 진보한 AI의 예고편”이라고 강조했다. “말을 타고 다니는 시대가 끝나고 자동차의 시대가 열렸을 때 가장 먼저 필요했던 건 운전면허입니다. 챗GPT와 대화를 나누면서 ‘검색의 시대’가 끝나고 인공지능과 ‘대화하는 시대’가 열렸을 때 가장 중요한 역량은 무엇인지 고민했습니다.” 김 교수의 결론은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기계는 사랑을 느끼는지’, ‘AI는 인류를 지배할 것인지’ 물었을 때 챗GPT는 “현재 내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는 답만 되풀이했다. 김 교수는 “처음에는 챗GPT가 매우 능숙한 정치인 같았다”고 털어놨다. 질문을 바꿨다. ‘지금보다 더 진보한 31세기 미래의 인공지능이라면?’ 규칙으로 통제된 챗GPT에 ‘만일의 세계’를 가정한 질문을 입력하자 제대로 답변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주 먼 미래에 진정한 의미의 AI 기계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진보한 AI는 행복이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라고 묻자 챗GPT는 “진보한 AI는 목표나 목적을 만족시키는 것이 행복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고 답했다. “진보한 기계의 주 목적이 완전한 세계 평화와 질서 유지라고 가정해 보자. 만일 그런 기계가 있다면 사회의 평화와 질서를 방해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반응할까?”라고 물었다. 이에 “몇 가지 방법이 있다. 감시와 분석, 비폭력 대응, 합법적 조치, 정당방위, 지속적인 감시”라고 답했다. 챗GPT의 답에는 아주 먼 미래 인공지능의 감시 아래 놓이게 될 수도 있는 사회상이 담겨 있었다. 김 교수는 “챗GPT에게 질문을 던져 봐야만 우리가 이 도구를 어떻게 활용할지, 이 도구로 인해 어떤 미래가 다가올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며 “어차피 막을 수 없다면 새 기술을 먼저 받아들이고 학생들에게 가르쳐 줘야 한다”고 했다. “챗GPT로 인해 작가나 프로그래머 같은 직업이 사라지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챗GPT를 잘 활용하는 이들로 인해 이 도구를 잘 활용하지 못하는 이들은 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김 교수)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2016년 10월 7일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힐러리 클린턴이 월가에서 엄청난 돈을 받고 연설했던 내용이 인터넷 언론 위키리크스를 통해 폭로됐다. 이 문서는 힐러리가 캠프 선거대책본부장이었던 존 포데스타와 과거 주고받았던 e메일에서 유출된 것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가 여성을 모욕한 녹취 파일을 미국 워싱턴포스트가 공개한 지 1시간 만에 나온 폭로였다. 같은 해 대선일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Woke Black(깨어 있는 흑인들)’이라는 인스타그램 계정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트럼프에 대한 과장된 이야기들과 증오가 흑인들로 하여금 ‘킬러리(Killary)’를 뽑도록 강제하고 있다. 차라리 녹색당 후보 질 스타인을 뽑아라.” 두 사건의 배후에는 러시아가 있었던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미국에 사는 흑인이 운영하는 줄 알았던 인스타그램 계정의 진짜 주인은 러시아 공작원이었다. 러시아 해커들은 존 포데스타뿐 아니라 민주당 실세들의 e메일 계정을 해킹해 힐러리와 10년 동안 주고받은 메일을 전부 훔쳤다. 목적은 분명했다. 반(反)러시아 후보였던 힐러리의 약점을 폭로해 선거 판도를 바꾸고 여론을 분열시키는 것. 한마디로 미국 대선을 러시아에 유리한 판으로 바꾸려는 것이었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사이버안보 담당 부국장인 저자가 현대 사이버전을 분석했다. 현직에 있는 만큼 미국과 영국, 캐나다, 우크라이나, 러시아 등 세계 각국에서 벌어진 사이버전의 전모를 담아냈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 사이버전에는 크게 세 가지 작전이 있다. 첩보와 공격, 교란이다. 러시아의 2016년 미국 대선 개입은 전형적인 교란 작전이다. 경쟁 기업의 정보를 빼내 시장에서 우위를 선점하는 건 첩보 작전에 속한다. 2013년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부 소속 61398부대가 만든 해커조직 ‘APT1’이 세계 원자력발전소 시장의 50%를 점유하던 미국 전력회사 웨스팅하우스의 서버를 해킹해 원자로 설계도와 건설 정보 70만 장을 훔쳤다. 중국 경쟁 기업은 이 기밀 정보로 단숨에 원자력발전소 건설 시장을 장악했다고 저자는 주장했다. 웨스팅하우스는 중국 기업과의 경쟁에 밀려 2017년 법원에 파산 신청을 했다. 교묘하게 판세를 바꾸는 첩보와 교란 작전은 성공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하지만 눈에 띄게 상대를 협박하는 공격 작전은 성공하기 쉽지 않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일례로 2014년 김정은 당시 북한 노동당 제1비서를 희화화한 소니픽처스의 영화 ‘인터뷰’ 개봉을 앞두고 북한 해커들이 벌였던 소니픽처스 전산망 공격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금방 잊힐 코미디 영화가 해커의 대대적 공격으로 오히려 논란의 중심에 섰기 때문이다. 저자는 현대 사이버전의 최종 목표가 상대를 압박하는 ‘신호 전달(Signaling)’이 아니라 지정학적 판세를 자국에 유리하게 만드는 ‘환경 조성(Shaping)’에 있다고 본다. 현대 사이버전은 전차대대가 앞장서서 상대를 협박하는 시끄러운 방식으로 치러지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의 공간에서 교묘히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기밀을 빼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저자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정부 소속 해커들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고 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2016년 10월 7일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힐러리 클린턴이 월가에서 엄청난 돈을 받고 했던 연설문이 인터넷 언론 위키리크스를 통해 폭로됐다. 이 문서는 힐러리가 캠프 선거대책본부장이었던 존 포데스타와 과거 주고받았던 e메일에서 유출된 것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가 여성을 모욕한 녹취 파일을 미국 워싱턴포스트가 공개한지 1시간만에 나온 폭로였다. 같은 해 대선일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Woke Black(깨어 있는 흑인들)’이라는 인스타그램 계정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트럼프에 대한 과장된 이야기들과 증오가 흑인들로 하여금 ‘킬러리(Killary)’를 뽑도록 강제하고 있다. 차라리 녹색당 후보 질 스타인을 뽑아라.” 두 사건의 배후에는 러시아가 있었던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미국에 사는 흑인이 운영하는 줄 알았던 인스타그램 계정의 진짜 주인은 러시아 공작원이었다. 러시아 해커들은 존 포데스타 뿐 아니라 민주당 실세들의 e메일 계정을 해킹해 힐러리와 10년 동안 주고받은 메일을 전부 훔쳤다. 목적은 분명했다. 반(反) 러시아 후보였던 힐러리의 약점을 폭로해 선거 판도를 바꾸고 여론을 분열시키는 것. 한마디로 미국 대선을 러시아에게 유리한 판으로 바꾸려는 것이었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사이버안보 담당 부국장인 저자가 현대 사이버전을 분석했다. 현직에 있는 만큼 미국과 영국, 캐나다, 우크라이나, 러시아 등 세계 각국에서 벌어진 사이버전의 전모를 담아냈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 사이버전에는 크게 세 가지 작전이 있다. 첩보와 공격, 교란이다. 러시아의 2016년 미국 대선 개입은 전형적인 교란 작전이다. 경쟁 기업의 정보를 빼내 시장에서 우위를 선점하는 건 첩보 작전에 속한다. 2013년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부 소속 61398부대가 만든 해커조직 ‘APT1’이 세계 원자력발전소 시장의 50%를 점유하던 미국 전력회사 웨스팅하우스의 서버를 해킹해 원자로 설계도와 건설 정보 70만 장을 훔쳤다. 중국 경쟁 기업은 이 기밀 정보로 단숨에 원자력발전소 건설 시장을 장악했다고 저자는 주장했다. 웨스팅하우스는 중국 기업과의 경쟁에 밀려 2017년 법원에 파산 신청을 했다. 교묘하게 판세를 바꾸는 첩보와 교란 작전은 성공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하지만 눈에 띄게 상대를 협박하는 공격 작전은 성공하기 쉽지 않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일례로 2014년 김정은 당시 북한 노동당 제1비서를 희화화한 소니픽처스의 영화 ‘인터뷰’ 개봉을 앞두고 북한 해커들이 벌였던 소니픽처스 전산망 공격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금방 잊힐 코미디 영화가 해커의 대대적 공격으로 오히려 논란의 중심에 섰기 때문이다. 저자는 현대 사이버전의 최종 목표가 상대를 압박하는 ‘신호 전달(Signaling)’이 아니라 지정학적 판세를 자국에 유리하게 만드는 ‘환경 조성(Shaping)’에 있다고 본다. 현대 사이버전은 전차대대가 앞장서서 상대를 협박하는 시끄러운 방식으로 치러지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의 공간에서 교묘히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기밀을 빼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저자는 “누구도 막을 수 없고 막지 않는 국가의 해커들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고 했다.이소연기자 always99@donga.com}
“명맥이 끊겨버린 전통공예를 한지로 복원하고 싶었어요. 한지에는 무언가를 재생시킬 수 있는 힘이 있거든요.” 이탈리아 로마의 주이탈리아 한국문화원에서 22일부터 개인전 ‘한지: 삶에 깃든 종이 이야기’를 열고 있는 이승철 작가(59·사진)는 16일 서울 성북구 동덕여대에 있는 작업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가 한지로 만든 ‘한지 반닫이’와 ‘한지 건칠보살좌상’, ‘한지 달항아리’ 등 대표작을 선보인다. 동덕여대 회화과 교수인 이 작가가 한지에 매료된 건 한국화를 전공하던 대학생 시절인 1990년이다. 한지의 물성(物性)에 끌렸다고 한다. 그는 “한지는 말아 꼬아 뭔가를 만들면 지승공예가 되고, 색을 입히면 색지공예, 색을 입힌 한지를 오려 기물에 장식하면 지장공예가 된다”며 “무한한 쓰임새를 가진 한지의 순환성에 끌려 진짜 전통 한지를 찾아 나섰다”고 말했다. ‘해답은 옛것에 있다’는 결론에 이른 이 작가는 한지로 만든 고문헌을 닥치는 대로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용은 읽지도 않고 사 모은 한지 컬렉션만 8500여 점. 그는 “옛 한지는 면이 매끄럽지 않고 날카롭다. 붓이 종이에 닿자마자 번지는 화선지와 달리 한지는 필선 하나하나가 세세하게 남는 것이 특징”이라고 했다. 이 작가는 옛 한지를 연구해 깨달은 제작법대로 손수 한지를 만든다. 그리고 전통 방식으로 만든 한지를 부조로 만든 반닫이와 건칠보살상, 달항아리 등의 위에 굳히는 방식으로 새로운 한지 공예를 선보였다. 최근 세계 유명 박물관에서 한지를 이용해 문화재를 복원하면서 한국보다 해외에서 그를 찾는 이들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이 작가는 2017년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 열린 ‘내일을 위한 과거의 종이’, 2018년 이탈리아 국립기록유산보존복원중앙연구소에서 마련한 ‘색의 신비―동서양의 비교’ 학술대회와 전시에 초대됐다. 4월 21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오스트리아와 독일, 미국, 프랑스 등에서 순회 전시를 이어갈 예정이다. 이 작가는 “한지가 지닌 힘을 세계에 알리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동북아역사재단이 ‘다케시마의 날’(22일·일본 시마네현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며 제정한 날)을 앞두고 김대건 신부(1821∼1846)가 독도의 이름을 로마자로 써 유럽에 전파한 조선전도(朝鮮全圖·사진)를 분석해 연구 보고서를 내놨다. 재단은 최근 펴낸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 연구’ 보고서에서 한국 최초의 신부이자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가 1845년 제작한 조선전도가 유럽 지리 정보에 끼친 영향력을 분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김 신부는 이 지도에 독도의 옛 이름 우산(于山)을 로마자로 ‘Ousan’이라고 적었고, 울릉도도 ‘Oulnengtou’라고 썼다. 지도에 다른 산이나 강의 이름은 적지 않은 반면 울릉도와 독도를 특별히 기록한 건 독도가 조선 땅임을 명확히 밝히려 했던 김 신부의 의도가 담겼다는 분석이 나온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한국 최초의 신부이자 순교자였던 김대건 신부(1821~1846)는 독도를 로마자로 쓴 조선전도(朝鮮全圖)를 손수 만들어 유럽에 전파했다. 이 지도는 독도뿐 아니라 조선팔도의 지명을 로마자로 표기한 최초의 지도로 알려져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최근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 연구’ 보고서를 펴내며 김대건 신부가 1845년 제작한 조선전도가 유럽 지리 정보에 끼친 영향력을 분석했다. 특히 김대건 신부는 이 지도에 독도의 옛 이름인 우산(于山)을 로마자 ‘Ousan’이라고 명확히 적었다. 독도 바로 왼편에는 ‘Oulnengtou(울릉도)’도 함께 표기했다. 다른 산이나 강의 이름은 적지 않은 반면 울릉도와 독도를 특별히 기록한 건 독도가 조선의 땅이라는 사실을 밝히려는 의도였다는 분석이 나온다. 보고서는 또 “김대건 신부가 제작한 조선전도는 프랑스 파리외방교회에 전해져 유럽 지리학계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했다. 일례로 프랑스 지라학자 말트 브렁은 1856년 펴낸 ‘세계지리’ 3권 215쪽 아시아 편에서 김대건 신부가 그린 조선전도의 지명 등을 축약해 정리했다. 프랑스 지리학자 루이 니콜라 베서렐이 1857년 펴낸 ‘세계지리대사전’에도 김대건 신부가 조선전도에 표기한 조선 8도의 로마자 표기가 그대로 나온다. 로마자로 전한 최초의 조선전도가 19세기 유럽 사회에 조선을 인식시킨 계기가 됐다는 설명이다. 김대건 신부가 파리외방교회에 전한 조선전도는 프랑스 해군을 거쳐 현재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1978년 고 최석우 몬시뇰이 처음 발견해 존재가 알려졌다. 최석우 몬시뇰은 199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을 기념해 조선전도 원본을 복사한 뒤 국내로 들여와 서울 마포구 순교박물관에서 선보인 바 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