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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오브 카드’가 인터넷으로 방영된 덕분에 시청률 걱정을 하는 대신 더 좋은 드라마를 만드는 데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18일 오전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 코엑스 ‘국제콘텐츠콘퍼런스(DICON) 2014’ 행사장에서 만난 조 힙스 미디어라이츠캐피털(MRC) 부사장(38)은 “미국에서는 인터넷으로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가 점점 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이 18, 19일 개최하는 이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MRC는 미국 정계의 음모와 배신을 다룬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의 제작사로 힙스 부사장은 MRC의 TV쇼 제작을 총괄하고 있다. ‘하우스…’는 일반 TV 채널 대신 미국의 온라인 DVD 대여 사이트인 넷플릭스에서 처음 공개됐다. 드라마가 히트하면서 시즌1을 방영한 지난해 넷플릭스는 순이익이 사상 최고인 37억5000만 달러(약 3조8175억 원)를 거둬들였다. “넷플릭스는 고객 정보 분석을 통해 어떤 시청자가 어떤 장르, 어떤 배우를 좋아하는지 등에 대한 방대한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습니다. 빅 데이터 분석으로 ‘하우스…’가 넷플릭스 고객에게 매력적일 거라고 판단을 한 거죠.” 넷플릭스는 고객 취향에 맞춘 다양한 예고편을 제작하는 등 마케팅에서도 빅 데이터를 활용했다. 매주 1, 2편을 방영하는 대신 시즌 전편을 한꺼번에 공개했다. 힙스 부사장은 “드라마 DVD가 출시되면 여러 편을 몰아보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파악했다”며 “드라마의 줄거리와 반전이 한꺼번에 공개된다는 위험은 있지만 오히려 시청자들이 스포일링을 당하기 전에 더 빨리, 몰아서 보도록 하는 효과도 있었다”고 했다. “‘하우스…’는 인간의 권력욕과 부패 등 보편적 주제를 담았기 때문에 미국을 넘어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끌 수 있었죠. 한국 드라마도 전 세계 시청자가 공감할 만한 보편적 정서를 담는다면 미국에서 성공할 수 있을 겁니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를 흥미롭게 봤다는 그는 “미국 방송사, 제작자들이 한국 드라마를 주목하고 있다. 미국 내 한국 드라마 팬들은 자막을 보는 수고까지 감수한다는 점에서 충성도와 지적 수준이 높은 시청자”라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드라마가 TV를 벗어나 다양한 플랫폼에서 소비되면서 새로운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온라인으로 드라마를 방영하면 3000만 명이 아닌 300만 명, 그보다 더 적은 수의 시청자만 있어도 성공할 수 있죠. 드라마 제작사에 새로운 기회가 열린 겁니다.”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 누구의 눈엔 무엇만 보입니다. 요리사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를 읽으며 연회 장면의 상차림에 주목합니다. 건축가는 영화 ‘명량’을 보면서 배의 설계와 구조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프로파일러는 영화 ‘나를 찾아줘’에서 부부가 사는 집에 그림이 걸려 있지 않음을 보고 소시오패스(반사회적 인격장애)일 가능성을 간파하기도 합니다. 작품을 이해하고 즐기는데 도움이 되는, 전문가들 눈에만 보이는 무엇을 소개합니다. 첫 회는 강력범죄 전문가가 본 드라마 ‘나쁜 녀석들’입니다. 》 OCN 드라마 ‘나쁜 녀석들’은 교도소에 복역 중인 죄수들로 특별수사팀을 꾸려 범죄자를 잡는 수사물이다. 오구탁 반장(김상중)이 지휘하는 수사팀은 조직폭력배 행동대장 출신인 박웅철(마동석)의 힘, 살인청부업자 정태수(조동혁)의 기술, 천재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 이정문(박해진)의 머리를 합쳐 나쁜 놈들을 사정없이 응징하고 복잡한 사건을 시원하게 해결한다. 서울 수서경찰서 강력팀장을 지낸 백기종 현대사회범죄연구원 전문위원(60)은 “디테일은 잘 살렸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틀린 점이 많다”고 했다. 죄수 3명은 수사 실적에 따라 감형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수사에 가담한다. 하지만 수사 권한이 없는 일반인이 현행범이 아닌 용의자를 제압해 체포하는 것은 한국에서는 위법이다. 교도소는 법무부 관할이어서 안전행정부 소속인 경찰이 죄수를 빼낼 수도 없다. 죄수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전자발찌를 채우는 설정도 말이 안 된다. 전자발찌는 검사가 청구해 법원의 명령으로 출소한 전과자에게 보호관찰관이 채운다. 범죄 발생 시 과거에 비슷한 수법으로 범죄를 저질렀던 전과자를 정보원으로 활용하는 일은 있다.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를 찾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거짓 정보에 속는 일이 많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는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장기 밀매에 대해 백 위원은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국내에 사채업자를 통한 장기 밀매가 있었지만 요즘은 거의 사라졌다. 그 대신 중국에서 밀매된 장기가 국내로 반입되는 경우는 있다”고 전했다. 이처럼 말이 안 되는 설정에도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이유는 디테일 덕분이다. 특별수사팀의 홍일점인 유미영 경감(강예원)은 자기보다 나이는 많지만 계급은 아래인 오구탁을 “오 반장님”이라고 부른다. 실제로도 그렇다. 경찰서장은 어깨에 무궁화 네 개, 서울지방경찰청장은 무궁화 다섯 개를 겹친 태극무궁화 세 개를 달고 나온다. 백 위원은 “경찰서장은 총경이고, 서울·부산·경기지방경찰청장은 치안정감이다. 드라마의 계급장이 정확하다”고 했다. 오 반장은 죄수들을 사건 현장에 투입하며 “(용의자를) 꼭꼭 씹어 먹어” “물어 뜯어버려”라고 말하는데 실제로는 “(확실한 증거를 잡아서) 꽁꽁 엮어 버려” 같은 말을 자주 쓴다. 드라마에는 수사팀이 용의자를 제압한 후에도 분을 이기지 못하고 구타하는 장면이 나온다. 백 위원은 “경찰도 인간이기 때문에 반인륜적인 범죄를 보면 분노한다. 그런 용의자를 체포할 때면 손이 더 매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체포에 저항하는 용의자를 제압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라는 규정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드라마는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해 잠복근무를 하던 형사가 범인과 몸싸움을 벌이다 살해당하는 사건에서 출발한다. 백 위원은 “형사들이 수사 도중 흉기에 찔려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치는 일은 자주 일어난다. 나도 조직폭력배와 맞닥뜨려 몇 개월 동안 입원한 적이 있다”고 했다. 위험한 현장에 출동할 때는 흉기에 대비해 방검복을 입어야 하지만 수량이 부족해 그냥 나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눈물 연기가 돋보이는 청초한 간호사(드라마 ‘수선화’·1975년), “너 나한테 홀딱 반했지?” 하는 공주병 여고생(오락 프로그램 ‘오늘은 좋은 날’·1996년), 사춘기 소녀처럼 일기장을 챙겨 떠나는 여행객(예능 프로 ‘꽃보다 누나’·2013년). ‘외로운 공주’와 ‘꽃누나’로 세대를 아우르는 사랑을 받은 배우 김자옥 씨가 16일 오전 폐암 합병증으로 별세했다. 향년 63세. 고인은 6년 전 대장암 수술을 받았고, 최근 암세포가 폐로 전이돼 항암 치료를 해왔다. 소속사 소울재커는 “14일 저녁 병세가 악화돼 입원 치료를 받았으나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끝내 눈을 감았다”고 밝혔다. 빈소에는 하얀 국화꽃 대신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색색의 장미꽃이 헌화용으로 놓였다. 배우 나문희, 박근형, 배종옥, 전도연, 방송작가 노희경, ‘꽃보다 누나’의 나영석 PD 등 동료와 선후배 방송인의 조문 발길이 이어졌다. 배우 김동현은 “나랑 부부 연기를 가장 많이 했다. 3주 전까지만 해도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았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노주현은 “내년 3월 아들 결혼 날짜를 잡았다고 기뻐하더니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고인의 마지막 드라마가 된 ‘세 번 결혼하는 여자’에서 고인과 부부로 나온 김용건은 “40년 넘게 봐온 가족 같은 사람이다. 짓궂게 놀려도 늘 웃던 모습이 기억난다”고 했다. 마지막 작품인 올 5월 악극 ‘봄날은 간다’에서 함께 공연한 윤문식은 “아픈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아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이 믿기지 않는다”고 애도했다. 1951년 시인 김상화의 2남 5녀 중 3녀로 부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1964년 배화여중 재학 시절 TBC 드라마 ‘우리집 5남매’의 아역으로 데뷔했다. 1970년 MBC 탤런트 공채 2기로 뽑힌 뒤 이듬해 KBS ‘심청전’으로 본격적인 연기 생활을 시작했다. 청순가련형 이미지로 ‘눈물의 여왕’으로 불리며 김영애 한혜숙과 1970년대 안방극장 트로이카로 전성기를 누렸다. 인기 절정이던 1980년 가수 최백호와 결혼했다 3년 뒤 헤어졌다. 이듬해 동갑내기 가수 오승근과 결혼해 원앙부부로 30년간 결혼생활을 이어왔다. 마흔다섯의 나이에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TV코미디 프로그램 ‘오늘은 좋은 날’에 출연해 공주병 여고생 캐릭터로 인기를 끌었고, 같은 해 가수 태진아의 권유로 낸 음반 ‘공주는 외로워’는 60만 장 이상 팔리며 ‘공주병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후 CF를 10여 개나 찍었을 정도였다. 환갑이 넘어도 귀여운 이미지로 배우로서 존재감을 잃지 않았다.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의 김병욱 PD는 “‘감독님 오늘 셔츠 멋지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주시곤 했다. 간단한 안부인사도 세심하게 할 만큼 나이가 들어도 감수성이 무뎌지지 않은 분이었다”고 애도했다. 고인은 지난해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암은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병”이라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투병 중에도 최선을 다했다. 고인은 지난해 말부터 올 초까지 방영된 여행 리얼리티 프로그램 ‘꽃보다 누나’를 찍으면서 공황장애를 앓은 사실도 고백했다. “여행 간다고 예약했다가 매번 취소하고 그랬다. (이번 여행은) 내가 나를 바꿀 계기가 된 것 같다.” 별세 소식이 전해진 뒤 온라인에선 마지막 출연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3년)에 나온 고인의 대사를 인용한 추모의 글이 이어졌다. “산다는 건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이니 아끼지 말고 즐기며 살아야 해….” 빈소는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발인은 19일 오전 8시 반, 장지는 경기 분당 메모리얼 파크. 유족은 남편 오 씨와 아들 영환, 딸 지연 씨가 있다. SBS 김태욱 아나운서가 막냇동생이다. 02-2258-5940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펄프픽션’ ‘킬빌’을 연출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51·사진)이 10번째 연출작을 끝으로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영국 BBC는 11일(현지 시간) 타란티노 감독이 미국 샌타모니카에서 열린 아메리칸필름마켓(AFM)에서 “관객들이 떠나라고 애걸할 때까지 현역으로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며 “앞으로 2편을 더 만들면 떠날 계획”이라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타란티노 감독은 8번째 연출작인 ‘헤이트풀 에이트’ 홍보를 위해 AFM에 참석했다. 타란티노 감독은 “감독은 젊은 사람들의 일”이라며 “은퇴 후에는 희곡과 책을 쓰겠다”고 말했다. 그는 2003년 인터뷰에서도 “늙은 감독이 되고 싶지 않다”며 60대 전에 은퇴하겠다고 밝힌 적이 있다.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MC몽이 발표한 6집(사진) 수록곡이 KBS에서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KBS는 12일 “MC몽 6집 수록곡 14곡 중 ‘왓에버’ ‘죽을 만큼 아파서 part.2’ ‘뉴욕’ 3곡이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고 밝혔다. ‘왓에버’와 ‘죽을 만큼…’은 가사에 욕설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뉴욕’은 특정 브랜드인 ‘유튜브’를 언급한 데다 비속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MC몽의 새 음반 수록곡은 심의 결과와 상관없이 KBS에서 방송될 수 없다. MC몽은 2012년 해외 공연 등 거짓 이유로 입영을 연기한 혐의(위계공무집행방해)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후 KBS는 MC몽을 출연 정지시켰다. KBS 관계자는 “아직까지 MC몽에 대한 출연 정지 해제 신청은 없었다”고 전했다. 누리꾼들은 “방송 안 되는 것 알면서도 일부러 심의 신청한 듯” “대외 활동 안 한다더니 ‘어그로’(논란·관심을 뜻하는 인터넷 은어) 끌려는 것 아니냐”는 추측을 내놓았다.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국민 첫사랑’에서 ‘희대의 악녀’로. 배우 사와지리 에리카(28)가 탄 롤러코스터는 낙차가 컸다. 2005년 드라마 ‘1리터의 눈물’에서 불치병에 걸린 청순한 소녀를 연기하며 전 일본인의 사랑을 받았던 그는 2007년 ‘베쓰니(별로) 파문’으로 추락했다. 한 영화 제작발표회에서 사회자의 질문에 “베쓰니(별로)”라고 답하는 등 무성의한 모습을 보이면서 비판 여론이 불거진 것이다. 이후로도 22세 연상과 결혼한 후 돌연 유학을 떠나고, 돌아와서는 이혼을 발표하는 등 스캔들을 잇달아 터뜨렸다. 거기에 의술의 도움을 받은 듯 예전과 달라진 얼굴까지, 재기는 물 건너간 얘기로 보였다. ‘퍼스트 클래스’는 그가 8년 만에 주연을 맡은 드라마다. 4∼6월 방영된 시즌1은 패션잡지사에 인턴으로 입사해 선배들을 하나씩 처치하며 편집장 자리까지 오르는 줄거리다. 앞에선 웃고 뒤에선 칼을 꽂는 악녀들의 싸움을 자극적으로 그려 토요일 심야 방송이라는 악조건에도 마지막 회는 시청률이 10%를 넘겼다. 주연 배우의 악녀 이미지도 흥행에 한몫했다. 방송사는 서둘러 넉 달 만에 시즌2를 수요일 오후 10시, 황금시간대에 편성했다. 그런데 그에게 찬물을 끼얹은 상대가 나타났다. 동시간대 방영하고 있는 ‘오늘은 회사 쉬겠습니다’의 주연 배우 아야세 하루카(29)다. 나이가 비슷한 여배우의 희비쌍곡선은 이전부터 묘하게 교차해왔다. 아야세는 사와지리의 전성기 때만 해도 ‘끗발’이 밀렸다. 하지만 사와지리가 추락한 바로 그해인 2007년 ‘호타루의 빛’에서 일만 하고 연애에는 관심 없는 ‘건어물녀’를 연기하며 일본 최고의 여배우로 발돋움했다. 그는 뒷소문까지 좋은 여배우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둘의 흥행 대결은 아야세의 압승으로 끝날 듯하다. 현재 ‘오늘은…’과 ‘퍼스트 클래스 2’의 시청률은 두 배 이상 차이가 난다. 아야세는 호타루의 빛에서처럼 연애에 서툰 노처녀 캐릭터를 맡아 자신이 가장 잘하는 연기를 하고 있다. 순수한 연하남과 능력 있는 연상남에게 동시에 사랑받는다는 줄거리도 달달하다. 퍼스트 클래스 시즌2 첫 회에서 사와지리는 이런 대사를 했다. “당신이 한 일이 (좋은) 평가를 받으면 과거에 당신이 뭘 했든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당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목숨을 걸고 일하는 것뿐이야.” 독기 품은 그의 연기가 일본의 대표 ‘순진녀’ 아야세를 처치하는 기적은 드라마 밖에선 일어나기 어려운 걸까.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고(故) 신해철이 결성한 밴드 넥스트에서 출발한 넥스트 유나이티드가 다음 달 27일 서울 고려대 화정체육관에서 콘서트를 연다. 고인이 직접 준비하던 콘서트인 만큼 추모 분위기로 꾸며진다. 신해철의 소속사는 “당초 콘서트는 파티 형식이었지만 바꾸려 한다. 추모 콘서트라고 이름을 붙이지는 않지만 자연스럽게 고인을 추모하는 분위기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9월 넥스트 유나이티드로 밴드 이름을 바꾸면서 합류한 보컬 이현섭이 넥스트 시절의 대표곡을 부를 예정이다. 고인이 올해 말 발매를 목표로 작업 중이던 밴드의 새 앨범 수록곡 중 일부도 다음 달 공개된다. 소속사는 “콘서트 전 고인이 남긴 신곡 1, 2곡을 공개할 예정”이라며 “신곡만 담은 싱글 앨범을 발매하는 안과 베스트 앨범에 신곡을 포함하는 안 등 다양한 방안을 고민 중”이라고 밝혔다. 소속사와 유족은 고인이 작업해둔 곡을 정리 중이며 이 중에는 보컬 녹음이 완료된 곡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저우룬파(周潤發), 린칭샤(林靑霞), 청룽(成龍)…. 이름만 들어도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배우들이다. 이들을 낳은 것은 바로 한때 세계 3위 규모의 영화시장을 형성했던 홍콩 영화계다. 19세기 말 서양의 단편영화가 중국에 처음 들어왔던 시기부터 최근까지 홍콩 영화계의 역사를 담았다. 방대한 시각 자료와 통계가 인상적이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 영화산업의 중심은 서양의 조계지였던 상하이였다.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을 모방한 제작사가 번성했고 스타 여배우가 등장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상하이 영화인들이 홍콩으로 대거 남하했고 영화 제작의 중심 역시 홍콩으로 옮겨왔다. 1950년대 동남아 자본의 유입과 함께 우리가 알고 있는 홍콩 무술영화의 서사 특성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황비홍’ 시리즈가 큰 성공을 거둬 60여 편이 제작됐다. 하지만 과열경쟁이 붙으면서 ‘칠일선(七日鮮·7일 만에 영화 제작을 완료)’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소자본 대량생산이 난무하기도 했다. 1970년대 제작사 ‘골든하베스트’를 통해 리샤오룽(李小龍), 청룽, 훙진바오(洪金寶)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스타들이 발굴됐다. TV 산업이 발전하며 한때 주춤했던 영화계는 쉬커(徐克) 등 방송국 출신 감독과 TV에서 인기를 끈 스타들이 데뷔하면서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해 198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다. 1980년대 말 중국 정부의 대만 정책이 변화하면서 ‘패왕별희’ ‘신용문객잔’ ‘동방불패’ 등 대만 자본으로 홍콩 제작진이 중국 현지에서 촬영한 합작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만 자금이 대량 유입되면서 배우 개런티가 부풀려지는 등 거품도 끼기 시작했다. 1997년 홍콩 주권 반환과 아시아 금융위기는 이 거품이 꺼지는 결정적 계기였다. 2003년 중국 대륙의 영화 시장이 홍콩에 완전히 개방되면서 점점 더 많은 홍콩 배우와 제작진이 중국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2014년 현재 홍콩은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다. 홍콩 영화계 역시 이 소용돌이에서 멀리 있지 않다. 홍콩 정치·사회의 변화와 함께 성쇠를 겪어온 홍콩 영화가 또 어떤 길을 걷게 될지, 이 책에 쓰인 과거로부터 미래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지금 우리 그래가요, 촬영을 하다 와서 아직 임시완으로 돌아오질 못했어요. 임시완은 훨씬 똑똑한데….” 5일 서울 중구 서울스퀘어의 tvN ‘미생’ 촬영 현장에서 만난 이성민은 주연인 장그래 역의 임시완을 ‘그래’, 영업 3팀 김동식 대리 역을 맡은 김대명을 ‘김 대리’라고 불렀다. “어제 그래랑 김 대리가 (촬영 현장에서) 먼저 퇴근했다. 굉장히 짜증났다”며 툭 뱉는 모습은 드라마 속 오상식 과장의 모습 그대로였다. “배우들이 진짜 회사원이 되어 가고 있어요. 아침에 도착하면 점심 메뉴 고민하고, 촬영 일찍 끝나면 맥주 한잔하고 싶고, 다음 날엔 촬영장에 오고 싶지가 않고 그렇습니다.” 윤태호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미생은 바둑 기사가 되는 것이 목표였던 장그래가 프로 입단에 실패한 뒤 한 상사에 입사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드라마다. 직장인의 비애를 현실적으로 그려낸 미생은 많은 회사원의 지지를 받으며 방송 6회 만에 시청률이 4%대로 올랐다. “촬영하면서 회사라는 곳이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는 일이 비일비재한 곳이라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지금까지는 직장인의 애환에 초점을 맞췄다면 앞으로는 쾌감을 느낄 만한 내용이 더 많이 나올 겁니다.” 이성민은 촬영 시작 약 1년 전 출연진 중에서 가장 먼저 캐스팅됐을 정도로 드라마에서 비중이 크다. 장그래에 초점을 맞췄던 웹툰과 달리 드라마는 오 과장이 겪는 희로애락에 따라 춤춘다. 이런 부담을 극복하기 위한 무기는 ‘디테일’이다. 사무실에선 ‘회사원의 전투화’인 슬리퍼를 신지만, 회의나 상사와의 면담이 있을 땐 꼭 구두로 갈아 신는다. 화면엔 상반신만 나오지만 꼭 그렇게 한다. 바이어 미팅을 가기 전 껌을 씹고 입을 닦는 장면도 대기업 임원으로 일하는 친척에게 물어보고 준비한 세심한 연기다. 또 다른 무기는 배우들 간 호흡이다. 이성민의 표현에 따르면 ‘심하게 착한’ 임시완을 비롯해 모든 배우와 함께 어떤 애드리브도 자유롭게 나올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둔다. “서로 허물이 없어요. 선후배 가릴 것 없이 자유롭게 의견을 내죠.” 이성민은 고교 졸업 후 곧바로 아무런 연고도 없던 대구에서 극단 생활을 시작했다. 이 시절은 “외로웠다”. 그의 과거가 드라마 속 장그래와 맞닿는 지점이다. “그래처럼 ‘버틴다’는 생각으로만 살던 시절 극단 선배가 제 연기를 보고선 제 이름을 물어보고 칭찬을 해줬던 적이 있어요. 그 기억이 뒤로도 큰 힘이 됐죠. 장그래가 오 과장의 애정으로 성장하는 것처럼요.” 그는 이제 자신이 배우로서 오 과장을 닮아가고 있다고 했다. “예전엔 한 배역, 한 작품에만 집중했다면 지금은 일 속에서 삶의 가치를 찾는 오 과장처럼 이번 연기가 내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함께 생각해요. ‘일은 놓아도 사람은 놓지 않는다’는 영업 3팀의 모토처럼 모두 함께 즐겁게 일하고 싶습니다.”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로 인기를 끈 배우 박해진(31)이 인터넷에서 자신에게 악성 댓글을 남긴 누리꾼과 함께 봉사활동에 나섰다. 박해진의 소속사는 5일 “지난달 31일 박해진이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악플러와 팬, 자원봉사자 30여 명과 함께 연탄을 나르는 봉사활동을 했다”고 밝혔다. 박해진은 올해 3월 악플러 30여 명을 명예훼손으로 부산지방검찰청에 고소했다. 하지만 8월 반성문을 쓰고 선처를 호소한 일부 악플러에 대해서는 봉사활동을 조건으로 고소를 취하했다. 이날 봉사활동에는 악플러 3명이 참여했다. 소속사는 “박해진과 봉사자들이 약 5시간에 걸쳐 생활이 어려운 주민들에게 연탄 1600여 장, 각종 생필품, 상품권 등을 전달했다”며 “악플러들이 이런 소통과 나눔 활동으로 조금 다른 표현 방식을 배우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전했다. 이색 봉사활동 소식에 누리꾼들은 “진정한 용서란 이런 것” “추운 날씨에 전해진 따뜻한 미담”이라며 박수를 보냈다. “나도 (박해진과 함께 시간을 보내도록) 악플을 달걸”이라는 우스개 댓글을 올린 이들도 있었다.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그런 일 있고도 드라마 주연을 하네요.” “그런데 예쁘긴 진짜 예쁘네요.” 한예슬(사진)이 SBS 주말드라마 ‘미녀의 탄생’으로 3년 만에 복귀했다. 일단 복귀 성적표는 좋다. 1일 방영된 첫 회가 8.4%, 2회가 10.0%로 방송 2회 만에 시청률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 전작인 ‘끝없는 사랑’의 마지막 회 시청률인 9.3%보다 높은 수치다.(닐슨코리아 자료) 한예슬은 2011년 KBS 드라마 ‘스파이 명월’ 출연 당시 “촬영 환경이 열악하다”며 촬영장을 무단이탈한 후 미국으로 가버려 물의를 일으켰다. 나흘 만에 촬영장에 복귀했지만 드라마는 결국 결방됐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미녀의 탄생’ 연출자인 이창민 PD는 지난달 30일 제작발표회에서 “(무단 출국을 못하도록) 한예슬 여권을 미리 받아뒀다”는 농담을 했다. 한예슬도 2일 SBS 예능 프로그램 ‘런닝맨’에 출연해 “다시는 안 도망갈 거야”라며 애교 섞인 발언을 했다. 온라인에선 “한예슬이 바르고 나온 립스틱 브랜드를 알려 달라”며 한예슬을 반기는 여론과 “얼굴도 예전만 못하고 연기도 나아진 게 없다”며 그의 복귀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엇갈렸다.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 ‘대세’ 소리를 듣는다. 데뷔 10년 만이다. 그런데 이 남자, 나오는 프로마다 다른 모습이다. 순박한 시골 청년 같았다가 어떨 때는 무지막지 호통을 치고, 다음 순간에는 모두가 혀를 내두르는 천재가 돼 있다. 여러 캐릭터의 ‘다중인격 매력’으로 토크쇼(KBS ‘나는 남자다’)부터 리얼리티(SBS ‘에코빌리지-즐거운 가’)까지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는 개그맨 장동민(35) 얘기다. 》 ○ ‘그까이꺼’에서 ‘갓동민’까지 장동민이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프로는 tvN ‘더 지니어스-블랙가넷’이다. 출연자들이 모여 매회 다른 게임을 하며 두뇌싸움을 벌이는 프로그램이다. 방송 전만 해도 KAIST, 미국 하버드대 등 명문대 출신, 프로 포커 플레이어, 멘사 회원 등 쟁쟁한 출연자 중에서 그는 가장 약체로 꼽혔다. 하지만 방송 5회 만에 시청자들이 신을 뜻하는 영어 ‘갓(God)’에 이름을 합해 ‘갓동민’이라고 부를 정도로 게임의 귀재로 떠올랐다. 게임의 법칙을 이해하고 주변 사람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이 뛰어나 출연진 모두가 그가 빨리 탈락하길 바랄 정도의 요주의 인물이다. 데뷔 초 그는 지금과 정반대 캐릭터였다. 2004년 KBS 개그맨 공채에 합격한 그는 2004∼2006년 ‘개그콘서트’의 ‘봉숭아학당’에서 경비원으로 처음 주목을 받았다. 특유의 느릿한 충청도 사투리로 소화해낸 유행어 ‘그까이꺼 대충∼’에서 알 수 있듯 순박하고 어눌한 이미지였다. 개콘 ‘대화가 필요해’에서도 공부 못하는 아들 역을 맡았다. 이후 그는 특유의 호통과 막말을 선보이며 조금씩 대세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2008년 개콘 ‘할매가 뿔났다’에서 이유 없이 광기 어린 분노를 선보이는 ‘할매’ 캐릭터가 시작이었다. 2011, 2012년 엠넷 ‘비틀즈 코드 시즌2’에서 걸그룹 멤버나 가요계 대선배 등 상대를 가리지 않고 뜬금없이 괴성을 지르거나 “꺼져” “닥쳐”라고 막말 하는 모습으로 인기를 끌었다. 누리꾼 사이에서 그가 호통을 치는 영상이 ‘장동민 레전드’로 회자되기 시작했고 이런 이미지로 2013년 초 단독으로 음료 CF를 찍기도 했다.○ 인간관계의 판 읽을 줄 아는 개그맨 연예인들이 직접 집 짓는 과정을 보여주는 리얼리티 프로 SBS ‘에코빌리지-즐거운 가’는 장동민의 다양한 캐릭터가 한꺼번에 녹아 있다. 그는 다짜고짜 배우 이재룡을 “노인네”라고 부르고 제작진에게 “고생만 시킨다”며 버럭 소리를 지른다. 한편으로는 일에 서툰 출연자들에게 요령을 알려주고 공사가 난관에 부딪혔을 때 잔머리를 써 이를 돌파하기도 한다. 장동민은 실제로도 머리가 명석하고 주변을 잘 살핀다는 평가를 받는다. “데뷔 뒤 방송 출연을 쉬지 않았고 개인사업도 2개나 한다. 하루도 4시간 이상 잔 적이 없다”고 말하는 성실함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즐거운 가’의 김용관 PD는 “장동민은 막말 캐릭터는 갑자기 구축된 것이 아니라 10년 동안 ‘옹달샘’(장동민 유세윤 유상무가 결성한 개그 그룹)에서 연습해 왔기에 가능한 것”이라며 “호통을 치더라도 아무데서나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볼 줄 안다”고 말했다. 개콘 시절부터 장동민을 지켜봐온 김석현 tvN 기획제작1국장은 “같은 바보 연기를 해도 정교하게 하는 개그맨이다. 특히 인간관계의 판을 읽는 데 뛰어나다”며 “최근 들어 호통이 먹히는 시대가 된 것도 장동민이 새롭게 주목받는 이유”라고 분석했다.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유영철 강호순 오원춘…. 온갖 강력범들이 잊혀질 만하면 나온다. 신고 전화 제대로 못 받아 억울한 희생자가 생기고 연쇄살인 희생자 수가 두 자릿수를 넘길 때까지 범인이 안 잡히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나쁜 놈들을 더 나쁜 놈들로 잡는다는 극단적인 드라마가 등장했다. 4일 시작한 OCN ‘나쁜 녀석들’은 교도소에 갇혀 있던 천재 사이코패스(박해진), 조직폭력배(마동석), 살인청부업자(조동혁)가 주인공이다. 나쁜 놈들은 강력계 형사 오구탁(김상중)의 지휘 아래 수사가 지지부진한 사건에 투입된다. 전자발찌를 찬 채 범죄 현장을 누비며 수사 도중 상대를 흠씬 두들겨 패는 것은 물론이고 살해 협박도 서슴지 않는 행동력으로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미드 팬이라면 2011년 방영된 ‘브레이크아웃 킹스’를 떠올릴 거다. 탈옥 드라마로 유명한 ‘프리즌 브레이크’의 제작진이 만들었는데 탈옥범이 탈옥범을 잡는다는 줄거리다. 각자의 ‘경력’을 살려 범죄자를 잡는 ‘나쁜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이 드라마의 탈옥범들도 행동심리학자, 갱단 두목 등 스펙이 화려하다. 일본에서는 무시무시한 처단자가 있었다. 2010년 방영된 일드 ‘조커-용서받지 못할 수사관’의 다테 형사(사카이 마사토)다. 다테는 낮에는 건성으로 일하지만 밤이 되면 “네 놈에게 내일은 오지 않아!”라는 대사와 함께 범죄자를 총으로 날려버리는 이중적 인물이다. 처단의 대상은 경찰이 잡았는데도 교묘히 법망을 빠져나가 처벌이 요원해진 범죄자들이다. 비슷한 설정이지만 세 나라 드라마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사적 처벌을 동원하는 시점은 다르다. 한국은 경찰이 범인을 잡지도 못해 죄수까지 동원한다면, 일본은 경찰이 범인을 잡긴 잡는데 돈과 권력에 굴복한 사법기관이 놓아준다. 미국은 범인을 잡아 재판한 뒤 감옥에까진 넣는데 놓쳐버린다. 드라마를 보면 각 나라에서 어떤 정부기관이 불신을 받는지 알 수 있다. 극단적인 설정 때문인지 앞서 소개한 미드와 일드는 끝이 좋지 않았다. ‘브레이크아웃 킹스’는 대형 탈옥 사건이 매일같이 발생해야 한다는 점 등 기본적인 개연성에 문제가 있어 두 시즌 만에 종영했다. ‘조커…’ 역시 막판에는 범죄자를 처단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애매한 결말로 마무리됐다. ‘나쁜 녀석들’도 범죄자를 미화한다는 논란 등 여러 위험 요소를 안고 출발했다. 그럼에도 방송 4회 만에 시청률이 3%대 후반까지 올랐다. 19금 케이블 드라마치고는 꽤 높은 수치다.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일단 제대로 잡기나 하라는 시청자들의 답답한 심정을 반영한 결과일까.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자영업을 하는 박모 씨(32)는 tvN 드라마 ‘미생’의 열렬한 팬이다. 프로 바둑기사 입단에 실패한 젊은이가 대기업 무역상사에 계약직으로 입사한 후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를 그는 매주 ‘본방 사수’한다. 박 씨는 “취업난, 비정규직의 설움을 겪어봐서 남의 일 같지 않다. 대기업 경험이 없어서인지 세밀하게 그리는 조직 이야기도 흥미롭다”고 했다. 1% 남짓한 시청률에서 시작한 ‘미생’은 방영 3회 만에 3%대(닐슨코리아)를 돌파했다. 지난해 히트작 ‘응답하라 1994’보다 가파른 상승세다. 직장생활은 요즘 대중문화가 가장 주목하는 소재다. KBS2 ‘개그콘서트’의 ‘렛잇비’나 tvN ‘코미디 빅 리그’의 ‘리액션 스쿨’은 직장생활을 풍자한 내용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가상 결혼과 가상 육아에 이어 가상 취업을 다룬 프로도 나왔다. tvN ‘오늘부터 출근’은 로이킴 봉태규 은지원 등 연예인의 가상 입사기를 보여주는 관찰 예능이다. 다음 달 13일 개봉하는 영화 ‘카트’는 대형마트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조명한다. 봇물처럼 쏟아지는 직장 소재 대중문화 콘텐츠는 일자리에 관한 관심이 그만큼 높고 절실함을 입증한다. 예전엔 직장생활이 누구나 하는 평범한 일상이었지만 취업이 어려워지면서 결혼과 육아가 그렇듯 판타지와 호기심의 대상이 됐다. ‘오늘부터 출근’을 기획한 김석현 CJ E&M 부국장은 “기업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의외로 많다. 시청자들이 직장에 대한 궁금증과 관심이 높다는 생각에서 기획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고졸 출신이 대기업 비정규직으로 입사해 멋지게 성장하는 이야기(‘미생’)가 어느 영웅담 못지않은 카타르시스를 주는 이유도 그만큼 현실에서 실현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취업은 젊은층만의 관심사가 아니다. 12일부터 4부작 파일럿으로 방송 중인 KBS ‘나 출근합니다’는 중장년층이 재취업을 하는 과정을 담았다. 이남기 KBS PD는 “일반인들의 재취업 과정이 관심을 모을 수 있을지 우려했지만 예상보다 반응이 좋아서 정규 편성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밝혔다. 직장을 배경으로 한 콘텐츠는 예전에도 많았다. 그러나 과거 대중문화 속 직장이, 여직원이 그룹 오너의 아들과 연애하는 공간이거나 소소한 갈등이 존재하는 곳이었다면 요즘의 직장은 훨씬 드라마틱하고 살벌해졌다. 대표적인 ‘오피스물’인 KBS ‘TV 손자병법’(1987∼1993년 방영)과 요즘의 ‘미생’을 비교해보자. 경제성장률이 두 자릿수에 가깝던 시절 제작된 ‘TV 손자병법’은 직장인인 등장인물끼리 소소한 오해와 갈등을 겪지만 금세 화해하는 가족극에 가까웠다. 반면 ‘미생’ 속 직장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인턴 등 계급이 다른 사람들 간 차별과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영업 경쟁, 사내 정치가 살벌하게 오고가는 전쟁터에 가깝다. 비정규직 처우와 같은 노동 문제가 진지하게 부각되기도 한다. ‘미생’의 주인공은 인턴 면접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도 신분증 색깔이 다른 2년 계약직으로 입사한다. ‘카트’는 비정규직 해고 문제를 모른 척하는 정규직의 이기심을 꼬집는다. 이명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같은 공간에서 하는 일이 같더라도 신분이나 소속이 다른 사례가 늘다 보니 직장에서 개인과 개인, 집단과 개인의 갈등이 더 정교해지고 늘어났다. 대중문화 콘텐츠 역시 이 같은 변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해석했다.구가인 comedy9@donga.com·이새샘 기자 }
jtbc 예능 프로그램 ‘비정상회담’이 일본 국가(國歌)인 기미가요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해 시청자들의 비난을 받고 있다. jtbc는 27일 방송분에서 일본 배우 다케다 히로미쓰 씨가 등장하는 순간 기미가요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했다. 일본 제국주의 시기에 국가로 불렸던 기미가요는 일본 내에서도 “과거사에 대한 반성 없이 일본 침략전쟁의 상징인 기미가요를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방송 직후 시청자들이 문제를 지적하자 jtbc 제작진은 28일 “국민 정서와 역사적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잘못을 인정한다”며 사과했다. 하지만 비정상회담 제작진이 7월 7일 첫 회 방송에서도 일본인 출연자가 등장할 때 기미가요를 튼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비판 여론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 프로의 시청자 게시판에는 “징계에 그칠 것이 아니라 프로를 폐지해야 한다”는 비난글이 폭주하고 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가수 신해철에 대한 생전 대중의 호불호는 흑백으로 갈렸다. 그러나 27일 숨져 더이상 세상에 없는 그에 대한 애도의 목소리는 한결같다. 1990년대 문화 아이콘에 대해 주변인들은 “천재적 재능과 추진력을 갖춘 그는 음악에선 양보가 없었지만 일상에선 누구보다 따뜻하고 예의가 바른 사람, 농담과 독설을 즐기지만 가족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선배와 웃어른에 대한 깍듯한 예의가 돋보인 인물”로 기억했다. 28일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는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오후 1시부터 팬클럽 회원들을 비롯해 다양한 조문객이 줄을 이었다. 가수 거미 김광진 김수철 김현철 백지영 신대철 싸이 에픽하이 유열 이승기 조용필 조하문 한대수, 사진가 김중만, 배우 엄정화 김아중, 개그우먼 박경림도 있었다. 이승철은 “고인이 고교생일 때 1980년대 그룹 ‘부활’ 팬클럽 부회장이었다. 우리 연습실에 놀러 오던 그에게 ‘(힘드니까) 가수는 하지 마라’고 했는데…”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팬들은 영정 밑에 고인이 즐기던 양주 두 병과 담배 두 보루, 넥스트의 ‘라젠카’ CD 한 장을 두고 갔다. 생전에 고인이 “내 장례식장에서 울릴 노래”라고 했던 ‘민물장어의 꿈’은 영정 왼편에 설치된 미니스피커로 끝없이 반복 재생됐다. 유족들은 팬들의 조문까지 일일이 받았다. 전체 조문객의 80%가량이 일반 팬이었다. 유족들은 침착했지만 팬들은 오열하며 빈소를 빠져나왔다. 음악인들은 사회적 발언과 음악적 발언을 일치시킨 보기 드문 음악인으로 고인을 추억했다. 가수 박학기는 “오랜 생각을 두께 있는 음악으로 표현하는 가수, 음악으로 말을 할 줄 아는 빼어난 작사가였다”고 회고했다. ‘넥스트’ 전 기타리스트 김세황은 “이론에 기대기보다 뜨거운 가슴으로 느껴서 나온 것을 작품으로 승화한 천재”라고 했다. ‘넥스트’ ‘노땐스’(신해철 윤상)의 녹음 엔지니어였던 김은석 트리퍼사운드 대표는 “작업할 땐 주변 사람들이 이를 갈 정도로 완벽주의자 기질을 발휘했지만 돌아서면 상대에 대한 배려가 많은, 너무 여린 사람이었다”고 추모했다. 절친한 음악인들은 고인의 미발표곡 공개, 추모 앨범 발매와 공연 추진을 곧 논의할 계획이다. 고인의 음악이 끝까지 붙든 주제는 ‘삶, 사회, 죽음 속에서 난 누구냐’였다. 서정민갑 대중음악평론가는 “젊은 세대의 존재론적 고민을 준수한 노래에 담음으로써 ‘어린 왕자’ ‘데미안’에 비견될 음악적 성장소설을 집필했다. 우리 세대는 그의 노래를 들으며 소년에서 어른이 됐다”고 했다. 고인의 노래 속에서 삶은 죽음과, 개인은 사회와 끊임없이 투쟁했다. 생의 의미를 캐는 의문문이 그의 노랫말엔 유달리 많았다. 장례는 유족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발인은 31일 오전 9시.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된다. 유족들은 발인 전날까지 일반인 조문을 오후 1∼9시에만 받기로 했다. 마왕으로 불렸지만 한계와 싸운 철인(鐵人), 고독한 철인(哲人)이었던 한 사람이 돌아갔다. 철벽같은 안개의 성, 바로 자신에게로 영원히.임희윤 imi@donga.com·이새샘 기자}

가수 신해철이 별세한 다음 날인 28일 인터넷과 라디오에선 하루 종일 추모의 물결이 일었다. 고인이 “내 장례식장에서 울려 퍼질 노래”라 했던 ‘민물장어의 꿈’(1999년)은 주요 음원차트 10위권에 오르며 발표 15년 만에 재조명받았다. 이 노래는 1999년 앨범 ‘홈메이드 쿠키스 & 99 크롬 라이브’에 수록된 발라드곡이다. ‘저 강들이 모여 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한 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나 언젠가/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으며/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아무도 내게/말해 주지 않는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이 곡 말고도 고인의 히트곡들이 음원차트 상위권을 차지했고 멜론의 급상승 차트는 한때 ‘내 마음 깊은 곳의 너’를 비롯해 1위부터 21위까지 모두 고인의 노래로 채워졌다. 팬들은 그가 트위터에 남긴 글과 공연 영상을 공유하며 슬픔을 달랬다. 특히 2010년 6월 팬들을 향해 쓴 글은 2000회 이상 리트윗(해당 글을 자신의 트위터로 퍼오는 기능)됐다. “난 이제 그때만큼 순수해지고 미숙해질 순 없어요. 그런 음악을 만들 수 있다 해도 당신은 그 음악과 함께했던 당신의 그 시절 그 모습이 그리운 것뿐이에요. 내가 당신 인생의 일부, 특정한 시간을 함께했음을 기억해주어 고마워요.” 이날 방송 3사 라디오에도 신청곡이 쇄도했다. MBC ‘박경림의 두시의 데이트’ 3, 4부는 신해철 특집으로 꾸몄고, KBS ‘김C의 뮤직쇼’와 SBS ‘최화정의 파워타임’도 고인을 추모하는 사연과 노래를 내보냈다. 신해철은 라디오 스타였다. 1996∼1997년 MBC ‘FM 음악도시 신해철입니다’ DJ 시절엔 ‘시장’으로 불렸다. 2001년부터 SBS와 MBC를 오가며 ‘고스트 스테이션’을 진행할 때 돌발 발언을 많이 하는 그에게 청취자들이 지어준 별명이 ‘마왕’이었다.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KBS 아나운서 출신 방송인 김경란(37)과 새누리당 김상민 의원(41)이 결혼을 발표하자 남성 정치인-여성 유명인 부부가 화제가 되고 있다. 정치인-아나운서 커플로는 KBS 앵커 출신인 박성범 전 국회의원과 신은경, 김민석 전 국회의원과 김자영 전 KBS 아나운서가 있다. 2005년에는 배우 심은하가 지상욱 전 자유선진당 대변인과 결혼해 주목받았다. 2011년엔 혼성그룹 투투 출신의 가수 황혜영이 김경록 전 민주통합당 부대변인, 2012년에는 방송인 박정숙이 네 살 연하의 이재영 새누리당 의원과 결혼했다. 이들은 각종 공식행사나 방송 출연장에서 인연을 맺는 경우가 많다. 결혼 후에는 남편의 선거 운동에 아내의 지명도가 큰 몫을 한다. 김한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과 1995년 결혼한 배우 최명길은 출산 후 부기도 빠지지 않은 몸으로 남편의 선거 유세를 도와 ‘내조의 여왕’으로 불렸다. 김경란과 김 의원의 결혼 소식에 누리꾼들은 “김상민 의원이 누구?” “tvN ‘더 지니어스’에 출연한 김경란은 정치력 장난 아니었는데 정치인 아내로도 활약할 듯” 등 두 사람의 ‘단일화’ 효과에 관심을 보였다.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서태지와 아이들’의 시대가 있었다. 1992년 ‘난 알아요’부터 1995년 ‘컴백홈’과 1996년 은퇴에 이르기까지 4년은 한국 대중음악 호황기였고 서태지와 아이들은 그 중심에 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시대는 ‘서태지의 아이들’의 시대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여기저기서 회오리 춤을 추거나 헤드뱅잉을 하고, 등교를 거른 채 음반가게 앞에 줄을 서거나 콘서트장으로 향했다. ‘됐어, 됐어/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같은 문구를 그렇게 많은 학생이 함께 외친 적은 그 전에도, 후에도 없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신드롬은 그들보다 김건모나 신승훈의 음반이 더 많이 팔렸던 것과 관계없이, 아이들뿐 아니라 TV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의 주목과, 아버지 어머니들의 눈총과 이목을 끌었다. 가수 서태지(정현철·42)가 데뷔한 지 22년 됐다. 20년 만에 세상은 뒤집혔다. 인기가요를 한나절 내내 울려대던 거리의 스피커는 잠잠해졌고, 방과 후 음반가게에 줄을 서던 풍경도 옛것이 됐다. TV 가요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한 자릿수로 내려앉은 지 오래고, 서태지가 ‘이제 이 작은 CD 한 장이면…’ 하고 광고했던 하이파이 오디오 대신 손에 잡히기는커녕 눈에 보이지도 않는 디지털 음원과 컴퓨터 스피커, 유튜브, 이어폰이 음악 세상의 실체가 됐다. 가요 판 자체가 바뀌었다. 몇 개의 디지털 음원 사이트에서 발표되는 실시간 스트리밍과 다운로드를 기반으로 한 차트가 가요의 인기 정도를 보여주는 지표다. 실질적인 주류 가요 판이 거기 있다. 그 판은 10, 20대가 쥐고 있고 그들은 아이돌과 힙합에 빠져있다. TV 오디션이나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가수의 노래, 아니면 이적 김동률의 듣기 편한 성인 취향 가요가 나올 때나 성인 청중의 위력이 가요 판에 발휘된다. 그 성인 중 다수는 한때 서태지 팬이었다. 2009년 ‘모아이’ 이후 5년 만에 가요계에 귀환한 서태지의 새 앨범 수록곡들은 발표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음원 차트 30∼40위권으로 내려앉았다. 발표 당일 언저리에는 아이돌 그룹 비스트나 악동뮤지션, 에픽하이에게도 순위가 차례로 밀렸다. 서태지의 시대는 끝난 걸까. ‘옛날 옛적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살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 “달라진 시대… 지금 데뷔했다면 서태지는 홍대앞 인디” ▼“서태지의 시대는 끝났다”… “갱스터랩이라고, 못들어봤지?”인터넷 시대엔 더이상 안 통해… 디지털 음원 위주 시장도 급변아이유 앞세우고 예능 출연에도… 신곡 차트 1주만에 30위 아래로서태지의 9집은 20일 발표 후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주요 음원 차트의 30위권 아래로 내려갔다. 그나마 아이유가 마이크를 잡았거나 먼저 공개해 화제가 된 ‘소격동’과 ‘크리스말로윈’이 반짝 인기를 얻어 체면치레를 했다. 새 앨범 전체는 이슈의 바람을 거의 타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태지 신드롬이 작동하지 않은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돌아온 서태지, 다시 대세가 될 수는 없는 솔로 가수로 처음 냈던 5집(1998년)은 미국에서 작업해 음반 발매와 뮤직비디오 공개 같은 기본적인 홍보만 했다. 6집(2000년)은 서태지의 컴백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모아진, 사실상 마지막 음반이다. 은퇴를 번복한 서태지가 4년 만에 빨갛게 물들인 레게머리로 실체를 드러냈을 때, 수많은 어린 팬들이 컴백 공연장에서 리듬에 맞춰 헤드뱅잉과 슬램을 하는 장면이 TV 뉴스 프로그램을 탔다. 7집(2004년)과 8집(2009년)은 컴백 쇼가 라디오나 TV의 한 채널에 독점 전파를 탔던 것 정도를 제외하면 큰 술렁임을 끌어내지 못했다. 서태지 역시 이번에 본인의 입으로 “서태지의 시대는 1990년대에 끝났다”고 정리해줬다. 이번 9집 활동의 일련을 ‘서태지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보는 시각은 그래서 유효하다. 최고 인기 여가수 아이유에게 첫 신곡을 부르게 하고, TV 예능 프로그램 ‘해피투게더’에 나가 유재석, 박명수와 토크를 주고받으며 뉴스 프로그램에서 손석희와 이야기를 나눈 그는 모 방송사 프로그램인 ‘비정상회담’ 출연진과 한 소셜 뮤직 사이트의 이벤트에 함께 나가기로 했다. 당분간 이런 홍보 활동이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의 CD가 나오는 날, 등교와 출근도 미뤄두고 새벽부터 음반 가게 앞에 줄을 섰던 학생과 직장인, 100만 장의 음반, 서태지가 은퇴할 때 가지 말라며 막아섰던, 그가 돌아올 때 노란 손수건을 흔들며 반겼던 김포공항의 인파는 다 어디로 간 걸까. 이 모든 게 현실이 아니라 서태지가 9집에서 말하는 동화 속의 이야기였던 걸까. 서태지는 왜 더이상 화제의 중심에 서지 못할까.기형화된 음반 시장, 서태지형 영웅의 시대는 갔다 서태지는 가요계에서 독보적인 경력을 만들었다. 서태지형 영웅은 아직 서태지뿐이다. 스무 살에 데뷔했다. 사랑 노래뿐 아니라 획일화된 교육, 통일에 대한 무관심 같은 사회적 메시지를 장착한 곡으로 폭발적 인기를 모았다. 이것은 시위 현장이 아닌 TV와 라디오에서의 인기를 말한다. 음악, 춤, 패션 같은 여러 분야에서 최소한 한국에는 거의 없던 전혀 새로운 유행을 주류 사회에 불어넣었다. 최전성기에 은퇴를 선언했다. 전문가들은 ‘서태지형 영웅’의 시대는 다시 올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는 “서태지 신드롬은 1990년대였기에 가능했다”고 못 박았다. 그는 “인터넷 시대 이후 서태지의 특성 자체가 하나의 딜레마가 돼서 서태지 앞에 나타났다”고 했다. 첫째는, 더이상 새로운 장르나 신선한 음악이 음악계에 파급력을 주지 못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초고속인터넷의 보급으로 최신 해외 장르가 음악 마니아들의 가정에 매일 배달되고 업데이트되는 환경에서 ‘갱스터랩이라고, 못 들어봤지?’ ‘감성코어를 소개해줄게’는 우스운 얘기가 됐다. 더 중요한 둘째는, 음반시장의 체질적 격변이다. 2000년대에 접어들며 디지털 음원의 공유와 스트리밍, 다운로드가 음악의 주 소비 행태가 되면서 50년 가까이 이어온 세계 음반 시장의 활황은 일순간 무너졌다. 수익이 줄어드니 모험은 멀어졌다. 김작가 평론가는 “대중음악은 작품인 동시에 제품이었다. 근데 작품과 제품 사이의 무게 균형이 깨지면서 대형 음반사는 반드시 수익을 낼 수 있는 콘텐츠에 천착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만약 서태지가 2014년에 스무 살이 됐다면 그의 활동 무대는 지금 서울 홍대 앞 인디 음악계일 것이라고 그는 상상했다. 잘생기고 예쁜 가수에게 흥행성이 보장된 작곡가가 그것도 다국적, 여러 명으로 붙어서 하나의 음반을 만들고, 그것을 다시 온·오프라인의 여러 채널을 통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 홍보해 어떻게든 띄우는 방식은 아이돌 중심의 국내 가요계뿐 아니라 영미권 팝 시장에서도 보편화된 풍경이다.서태지 공식 따라 움직이는 케이팝 서태지와 아이들은 가요계에 몇 가지 새로운 공식과 유산을 남겼고, 그들 중 일부는 여전히 게임의 룰로 작동하고 있다. 국내 컬러 TV 방송 개시(1980년 12월) 이후 이어지던 ‘듣는 음악’과 ‘보는 음악’의 줄다리기를, 서태지와 아이들은 12년 만에 ‘보는 음악’ 쪽으로 완전히 끌어왔다. 김작가 평론가는 “서태지는 한국 대중음악과 서구 음악 간 시차를 없앴고 라디오와 TV로 양분돼 있던 한국 음악 판도를 TV로 완전히 몰아왔다”고 말했다. ‘보는 음악’의 중심에는 안무와 뮤직비디오가 있다. 현재 통용되는 아이돌 그룹 안무의 기본 틀은 서태지와 아이들에서 나왔다. 여성그룹 씨스타의 춤을 만들고 있는 김규상 안무가는 “몸을 크게 써서 보여주는 ‘포인트 안무’를 대중가요계에 보급한 장본인이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고 했다. “이전이나 비슷한 시기에 박남정의 ‘ㄱㄴ춤’, 나미와 붐붐의 ‘토끼춤’, 현진영과 와와의 ‘고고춤’이 있었지만 보기에 경쾌하고 신난다는 느낌 정도였다. 거의 모든 10대가 그 동작을 따라하기 위해 열병처럼 들끓었던 춤은 ‘난 알아요’의 회오리춤이 처음이었다. 한때 라이벌 구도를 형성한 듀스의 춤도 의미 있었지만 단박에 눈에 박히고 누구나 한 번쯤 따라 춰보고 싶은 ‘포인트’의 매력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단연 앞섰다. 각각의 동작과 표정부터 그것들을 이으며 음악의 분위기에 몰입하도록 하는 구성력, 연출력은 지금도 최상위권으로 통용될 만한 수준이다.” 김규상 안무가는 신생 아이돌 그룹이나 연습생들에게 안무를 지도할 때 여전히 ‘난 알아요’와 ‘컴백홈’의 뮤직비디오를 보여준다. 싸이의 말춤을 만든 이주선 안무가는 “현재 활동하며 아이돌 춤을 만드는 국내 가요 안무가들 중 서태지와 아이들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이는 단 한 명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했다. 서태지 8, 9집과 여러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한 쟈니브로스의 김준홍 감독은 “‘난 알아요’는 국내 뮤직비디오의 사실상 효시”라면서 “가수를 돋보이게 하고 공간감을 확장하는 흰색 배경, 곡 분위기를 장면처럼 표현한 세트, 안무를 돋보이게 하는 빠른 카메라 워크, 가수의 얼굴을 예쁘게 표현하는 촬영 각도와 편집을 비롯한 아이돌 영상 공식의 다수가 이때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 “여전한 파워… 요즘 아이돌 ‘난 알아요’ 뮤비 보며 연습” ▼“서태지 공식은 유효하다”… 자극적인 랩에 낙차 큰 멜로디따라하게 만드는 포인트 안무… H.O.T.도 엑소도 성공코드 답습작곡능력 갖춘 아이돌도 늘어‘랩+노래’, 길게 풀면 ‘자극적인 랩+낙차 큰 멜로디로 중독성 있는 후렴구 노래’라는 히트 가요의 공식도 ‘난 알아요’ 이후 확산돼 지금에 이른다. 이런 방식을 국내에서 선보인 것은 서태지와 아이들에 앞서서도 홍서범, 신해철을 비롯해 몇몇 있지만 이후 댄스 그룹의 범람기를 통해 판의 룰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다. 아이돌 그룹 멤버 중에서도 빅뱅의 지드래곤, 블락비의 지코처럼 작곡이나 프로듀싱 능력이 있는 이들이 팬들을 더 끄는 현상 역시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자리 잡은 아이돌 신화다. 서태지 은퇴 약 7개월 후인 1996년 8월 데뷔한 H.O.T.는 사회를 비판하는 가사, 강렬한 랩, 파격적인 패션과 헤어스타일 등 서태지와 아이들의 여러 가지 성공 코드를 답습한 그룹이다. 이후 젝스키스, 신화 등 다른 아이돌 그룹도 비슷한 노선을 밟았다. 이들 아이돌 그룹은 초기 쇼 오락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하며 얼굴을 알리고 인기를 얻은 뒤에도 서태지의 경로를 그대로 따랐다. 데뷔 3, 4년 차가 되면 자작곡을 앨범에 수록하며 음악적 역량을 보여주는 시도를 한 것이다. H.O.T.의 멤버였던 강타는 한 토크쇼 프로그램에 출연해 “1, 2집을 내고 나니 듀스나 서태지 선배님 같은 음악적인 실력 없이 그런 큰 인기를 누리는 것이 옳지 않다는 말이 많았다. 당시 멤버들 대부분 경험이 없었지만 자작곡을 해야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에선 다른 평가도 있다. 서태지가 그저 해프닝처럼 나타나 자기 방식대로 음악을 한 뒤 과대한 후대 평가를 받고 있는 팝스타로 보는 이도 적지 않다. 이들은 서태지가 자신의 노하우를 공유하거나 동료 음악가나 음악계와 공동 발전을 모색하기보다는 짧은 시간에 만든 자신만의 음악을 구현하기 위해 매니지먼트 시스템과 국내외 최상급 스태프를 일시적으로 ‘헤쳐모여’ 했다고 주장한다. 현재의 케이팝 아이돌 시스템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영향보다는 앞서 발전한 일본의 아이돌 산업을 벤치마킹했고, 음악의 질적 향상은 서구권 음악의 직접 도입과 국내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튼튼한 기반을 바탕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한 음반업계 중견 관계자는 “서태지가 당시 국내의 다른 음악가들의 수준과 비교해 볼 때 입지전적 혁신을 이뤄냈다고는 볼 수 없다. 그가 업계의 표준을 월등하게 넘어서는 작업물을 내거나 그로 인해 큰 유산을 남겼다는 것은 그 시대와 여론이 만들어낸 신화”라고 평가했다.낯선 ‘케이팝 월드’에 재입장한 서태지 자, 서태지는 이제 자신이 뿌린 씨앗이 20년 동안 자라고 엉켜 넝쿨을 이룬 복잡한 미로의 세상, ‘이상한 케이팝 월드’에 떨어졌다. ‘잠적과 깜짝 귀환’이라는 새 앨범 발매의 순환 공식은 깨졌다. 요즘은 최정상권을 포함한 대부분의 아이돌 그룹이 TV 예능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자신들의 일상을 낱낱이 공개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뛰어들고, 1년에도 몇 번씩 디지털 싱글과 미니앨범을 발매해 가요계를 노크한다. 서태지와 아이들식 활동 경향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은 밀레니엄을 앞둔 1999년 god가 데뷔하면서부터다. 아이돌 그룹 최초로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찍으며 일상생활을 공개했다. 카리스마보다는 친근함과 허술함을 강조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출신의 양현석이 세운 기획사 YG엔터테인먼트는 2006년 빅뱅 데뷔를 앞두고 그룹 멤버가 훈련받고 선발되는 과정 전부를 공개하고 실제로 한 예비 멤버를 탈락시키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서태지 시절 유효했던 ‘실력 있는 뮤지션’이라는 마케팅 방법은 유지하면서도 아이돌 그룹이 기획사의 산물이며 멤버들의 자발성은 보장되기 힘들다는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아이돌 그룹이 생명력을 연장하기 위한 전략도 바뀌었다. 음원이나 음반 수입이 가수의 주 수입원이 될 수 없는 상황에서 아이돌 그룹 멤버들은 이전처럼 뮤지션으로 변신을 꾀하는 대신 연기, 예능 등으로 활동 영역을 확장했다. 데뷔 초부터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휴식기 없이 싱글 앨범을 내며, 음악에 집중하기보다는 다양한 활동을 하는 모습의 요즘 아이돌 그룹은 완전히 ‘탈서태지화’한 모습을 보여준다. JYP엔터테인먼트의 정욱 대표는 “서태지가 만들어 놓은 공식은 상당히 오랜 기간 남아 있다가 요 몇 년 새 급격히 변화했다”고 말했다. “디지털 음원 시장이 출현하고 소비 행태가 바뀌면서 가수가 수면에서 사라지는 순간 인기가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요즘 가수들은 ‘오늘도 활동 중’이라는 문패를 걸어놔야 한다.” ‘무한도전’이나 ‘런닝맨’에 나온 가수의 음원이 오랜 기간 공들여 준비한 싱어송라이터의 음반을 밀어내고 차트를 잠식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정 대표는 “서태지가 룰을 만든 아이돌 게임판에서 정작 (오랫동안 모습을 감춘) 서태지 자신은 많은 부분을 잃어버린 셈”이라고 했다. 서태지의 후손인 아이돌 월드의 시계는 뒷면이 다르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현행 케이팝 제작 시스템의 발전을 주목했다. 이 교수는 “지금은 대형 매니지먼트 시스템이 지배하기 때문에 가수 한 사람의 창작력으로 승부할 수 없는 시대”라면서 “자본과 힘을 갖고 스타를 양육하고 만들어내는 상황에서 더이상 서태지 같은 1인 창작자가 성공할 가능성은 없다”고 했다.폭발적인 천재는 늘 예고 없이 나온다 1인 영웅의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까. 먼저, ‘서태지형 영웅’으로 전문가들은 마이클 잭슨(1958∼2009), 커트 코베인(1967∼1994·‘너바나’ 리더), 짐 모리슨(1943∼1971·‘더 도어스’ 리더), 지미 헨드릭스(1942∼1970)를 주로 꼽았다. 스스로 만든 음악으로 대중음악계의 물줄기를 움직였고, 음악뿐 아니라 패션과 태도에서도 청년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기성세대의 견제 속에 시대적 아이콘의 위치에 오른 인물들. 이런 영웅은 사회적 격변기나 혼란의 시기에 곧잘 등장했다. 코베인은 로널드 레이건(1911∼2004)부터 조지 W 부시까지 12년간의 공화당 통치가 끝나고 클린턴 시대가 열리는 과도기에 등장했다. 헤비메탈과 성인 취향의 록, 댄스 음악이 혼재돼 있던 팝 시장에 극도로 염세적인 가사와 인디 음악 성향의 노이즈가 가득한 얼터너티브 록, 그런지 열풍을 불러왔다. 지미 헨드릭스와 짐 모리슨이 우상으로 떠오른 1960년대 후반은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 이슈와 반전 히피 운동이 사회를 휩쓸던 시기였다. 서태지와 아이들 신드롬은 군사 독재의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가 문민정부 출범(1993년 2월)으로 격변하던 과도기에 터져 나왔다. 분명한 것은 자국에서 서태지와 비슷한 충격을 던진 영웅 중에 은퇴하거나 사망했다가 서태지처럼 5∼10년 뒤에 다시 돌아온 이들은 없다는 것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그들의 혁명은 죽음으로 완성됨으로써 영원한 젊음을 얻었다. 전문가들은 “음반 시장 몰락과 디지털 사회로의 급격한 이행으로 영웅의 시대는 갔지만, 천재성과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팝스타가 사회 격변기와 맞물려 등장하면 또 한 번 서태지형 신드롬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내다봤다. 이동연 교수는 “서태지가 1980년대나 2000년대에 태어났다면 그런 반향을 낳기 힘들었을 것”이라면서 “1990년대는 이념의 시대가 끝나고 자본화가 진행되면서 소비문화의 주류에 영합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사운드가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그걸 뒷받침할 음악 테크놀로지도 있었다”고 했다. 배순탁 대중음악평론가는 “한 뮤지션이 한 세대를 대표하는 현상은 예전에 끝났다”고 했다. 그는 “미국에서도 코베인 이후로 그런 존재는 없다”면서 “10, 20대 문화는 더이상 음악에 몰입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즐길 거리로 분화됐다. ‘난 한물 간 가수’라 말하는 서태지를 보며 더이상 ‘환상 속의 그대’는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넥스트 서태지’는 우리 안에 있는지도 모른다. 내 증손이거나, 내 손이거나, 내 자녀이거나, 어쩌면 나일지도 모른다. 매트릭스는 혁명의 시기에 네오를 찾아 나선다. 네오는 선천적 구세주일 수도 있고, 1000만 명이 지닌 시대적 욕망을 대표하는 대리인에 불과할 수도 있다. 어쨌든 네오는 매트릭스의 일부다.임희윤 imi@donga.com·이새샘 기자}

‘서태지 시대’의 또 다른 축은 서태지 팬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공식 팬클럽을 운영한 적이 없다. 1993년 공식 팬클럽 ‘아이비’가 창단됐지만 준비 부족, 콘텐츠 부족 등으로 1년여 만에 운영이 중단됐다. 대신 당시 만개하기 시작했던 PC통신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팬 모임이 생겼다. 서태지 팬덤을 이전 팬덤과 구분 짓는 차이점 중 하나는 팬덤의 충성도다. 서태지가 1년 이상 휴식기를 가지며 다음 앨범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 덕분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우상에 대해 시간을 들여 학습하기도 했다. 서태지 팬으로 활동했던 김영인(가명·31) 씨는 “서태지 팬들이 ‘팬질’을 하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공부’였다. 음반을 사면 반복해서 들으며 가사를 숙지하고 그 의미에 대해 토론하는 식이었다. 여러 장 사서 친구들에게 돌리면서 같이 연구하자고 했다”고 회고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출연하는 공개방송이나 행사에서 팬들의 질서 유지가 문제가 되자 ‘태지팬수호대’라는 자생적 조직이 생겨났다. 팬들을 줄 세우고 행사장 입장을 관리하는 일종의 행사 진행요원 역할을 하는 이들이었다. 이후 H.O.T. 등 아이돌 그룹의 팬클럽 임원들의 역할을 이들이 미리 보여준 셈이다. 서태지 은퇴 이후에도 팬클럽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1996년 서태지와 아이들 기념사업회가 발족했고 1997년 인터넷이 도입되면서 태지매니아, 서태지닷컴 등 팬들이 자체적으로 꾸려가는 팬사이트가 등장했다. 2012년에는 팬들이 모여 만든 20주년 기념 ‘서태지 아카이브’ 사이트가 오픈했다. 팬클럽이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낸 것도 이전과 달랐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1995년 발표한 4집 수록곡 ‘시대유감’이 공연윤리심의위원회의 방송 불가 판정을 받자 팬들은 사전심의제도 철폐 운동에 들어갔고, 결국 이 제도는 철폐됐다. 2000년 SBS ‘한밤의 TV 연예’가 편파 방송을 한다는 이유로 팬들은 광고 중단 운동을 벌였고, 일부 기업은 실제로 광고를 중단했다. 2004년에는 서태지 7집 수록곡 ‘빅팀’이 방송 불가 판정을 받자 ‘빅팀 살리기 운동’을 전개했다. 서태지 측 역시 팬들에게 음성사서함 공지로 항의 메일을 보낼 주소를 알려주는 등 팬덤의 활동을 직간접적으로 유도했다. H.O.T.의 기획사인 SM엔터테인먼트는 팬덤이 어느 정도 형성되자 공식 팬클럽을 창단해 서태지 팬덤과 군소 팬클럽이 하던 역할을 한 곳으로 통합했다. 다른 아이돌 그룹도 뒤따랐다. 2001년 H.O.T.가 해체하자 팬들이 시위하고, 기획사와 가수 간 수익 배분 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낸 것은 서태지 팬클럽과 닮은꼴이다. 서태지 팬이었던 이모 씨(31)는 “서태지 팬 중 상당수가 다른 아이돌 그룹 팬으로 옮겨갔는데 다른 가수의 팬들보다 나이와 경험이 많다 보니 팬덤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아이돌 팬덤 문화를 서태지 팬들이 만들어낸 셈”이라고 말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