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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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신광영 논설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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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5-11-14~2025-12-14
칼럼100%
  • [광화문에서/신광영]그 정도 ‘No’는 ‘No’가 아니다… 안희정 무죄에 담긴 통념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53)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 판결문 전문을 보면 피해자 김지은 씨(33) 주장에 대한 판사의 불신이 엿보인다. 재판부는 김 씨의 진술을 검증하는 데 전체 114쪽 중 80쪽을 할애했다. 판결문의 약 70% 분량이다. 김 씨의 진술 요지 뒤에는 ‘한편 같은 증거에 비추어 보면 아래와 같은 사정들도 인정된다’는 표현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 아래로 김 씨의 진술을 믿기 어려운 사유가 상세히 따라붙는다. 재판부는 안 전 지사가 성관계 당시 범죄임을 알았는지 등은 따로 살피지 않았다. 김 씨의 피해 주장 자체가 입증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피고인 안희정’의 재판에서 그의 ‘가해자다움’은 피해자가 피해자답지 않다는 판단에 가로막혀 심판대에 오르지 않았다. “내가 너무 외로우니 안아 달라” “나를 안게” “씻고 오라” “침대로 오라”…. 안 전 지사는 김 씨를 자신의 숙소로 불러 이런 말을 했다고 판결문에 나와 있다. 말만 봐서는 폭력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네 차례 성관계를 요구하면서 인사 혜택이나 불이익을 언급한 적도 없다. 그런데 안 전 지사는 성관계를 갖고 나면 김 씨에게 ‘미안하다’ ‘잊어라’는 등의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열풍이 한창이던 올 2월에는 김 씨를 불러 “너한테 했던 것들이 상처가 된 걸 알았다. 괜찮니”라고 물었다. 그는 이날도 김 씨와 성관계를 한 뒤 ‘내 자신이 참 무책임하고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이 밀려왔어’ ‘나 때문에 상처받고 실망하고 그러지 말길’이라고 문자를 보냈다. 안 전 지사는 김 씨의 폭로 직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비서실의 입장은 잘못”이라고 바로잡기도 했다. 김 씨가 성관계에 동의하지 않았음을 안 전 지사 스스로 인정하는 듯한 정황이다. 하지만 판결의 초점은 안 전 지사의 상황 인식이 아닌 ‘강압으로 느꼈다’는 김 씨의 주장을 믿을 수 있는지였다. 재판부는 성관계 요구를 받은 김 씨가 고개를 숙이고 “아니요. 모르겠어요. 아닌 것 같아요”라고 중얼거린 행위는 충분한 거절이 아니라고 봤다. 안 전 지사가 호텔 방으로 담배를 가져오라고 했을 때도 성관계 요구 가능성을 예상했다면 객실 앞에 담배를 갖다놓을 수도 있었는데 충분히 회피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판결문에는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을 폭넓게 인정할 경우 오히려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될 수 있다는 대목이 있다. 김 씨처럼 고학력에 정상적인 성인 여성이라면 실체가 불분명한 위력에 굴복할 정도로 종속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논리다. 미성년이거나 장애인이 아닌 여성이 폭행이나 협박이 없는 상황에 있다면 성적 자기결정권은 권리인 동시에 책임이라고 본 것이다. ‘No’라고 했다지만 충분한 ‘No’가 아니었다는 시각에는 여성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지키기 위해 다른 모든 가치를 제쳐둘 것이란 전제가 깔려 있다. 하지만 첫 여성 수행비서로서 보좌 업무를 잘해내고 싶은 자아실현 욕구, 직장을 유지하면서 이직에 대비해 좋은 평판을 유지하려는 신분 안정 욕구는 성적 자기결정권 못지않은 기본권이다. 유력한 대선주자이자 자신의 생살여탈권을 쥔 보스로부터 “나를 안으라”는 요구를 받은 여비서는 거절의 대가로 잃게 될 다른 기본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정중한 언어로 포장돼 있어도 은밀한 요구의 무게는 가벼워지지 않는다. 사람은 마음에서 가치관이 충돌할 때 나름의 방식으로 머뭇거린다. 재판부는 ‘여성에게 정조는 생명과 같다’는 통념이 전근대적이라고 지적했지만 위력 앞에 선 여성의 머뭇거림을 바라보는 인식은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

    • 2018-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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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신광영]1학년 학점이 인생 성적… ‘상대평가 지옥’ 로스쿨

    로스쿨 학생들은 중간·기말고사 때 시험지에 이름을 쓰지 않는다. 그 대신 무작위로 부여되는 수험번호를 문자로 전송받아 적는다. 교수의 ‘채점 특혜’ 시비를 막기 위해서다. 조교가 답안지를 앞자리부터 걷으면 “뒷자리 학생에게 몇 초를 더 줬다”는 항의가 빗발친다. 학점이 좋은 학생들은 서로 수강과목이 안 겹치도록 학기 초 평화협정을 맺기도 한다. 칼같이 적용되는 상대평가가 빚은 풍경이다. 수강 인원이 적어 절대평가가 이뤄지는 과목도 있지만 이때도 전쟁은 피할 수 없다. 추가 신청자가 생겨 상대평가로 바뀔 위기에 처하면 ‘마지막 신청자’ 색출·토벌 작전이 전개된다. 기존 신청자들이 해당자를 단톡방(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 초대해 수강을 철회할 때까지 회유하거나 협박한다. 8월은 이제 첫 학기를 마친 1학년생들이 휴학을 고민하는 시기다. 주요 로펌들이 1학년 성적 우수자를 ‘입도선매’하기 때문이다. 휴학 후 학원에서 다음 학기 예습을 하는 1학년생이 적지 않다. 휴학 요건이 출산이나 심각한 질병 등으로 제한돼 있지만 학생들은 우울증, 공황장애 소견서를 내민다. 자살 기도라도 할까 봐 학교는 거부하지 못한다. 서울대 로스쿨은 입학생 5명 중 1명꼴로 휴학한다. 첫 학기를 마친 뒤 휴학하는 학생이 가장 많다. 최근 서울대 등 주요 로스쿨이 1학년에 한해 절대평가를 도입하려는 것은 사태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미국 최상위급인 예일대 로스쿨은 3년 내내 학점을 매기지 않는다. 이미 검증된 학생들 간 우열을 가리는 게 무의미하다고 본다. 치열한 경쟁이 나쁜 것은 아니다. 로스쿨이 기존 사법시험 제도를 완전히 대체하게 된 만큼 내실을 갖춰야 한다. 우수 인재를 선별할 잣대도 필요하다. 하지만 사법연수원 성적으로 줄 세우던 폐해를 줄이려 도입한 로스쿨이 지금처럼 학점 노예를 양산한다면 바라던 변화는 아니다. 연세대 의대는 4년 전 본과생 대상 절대평가를 시작했다. 매 학기 과목별 기준치를 제시하고 도달 여부만 따졌다. “이를 악물고 하면 A학점 받을 학생들이 C학점 수준에 안주할 것”이란 우려가 많았다. 올해 초 졸업한 첫 ‘절대평가 세대’ 122명이 보여준 결과는 반대였다. 의사국가고시 합격률 98.6%. 이 대학 최근 5년간 합격률 중 최고치다. 합격자 120명의 평균 점수(301점)도 전체 합격자 평균(286점)보다 월등히 높다. 상대평가는 우열을 가리는 데 유용하지만 정작 학생이 요구되는 능력을 갖췄는지는 살피기 어렵다. 실력이 모두 미달이어도 1, 2등은 나오기 마련이다. 이에 비해 절대평가는 등수보다는 학생이 꼭 필요한 실력과 자질을 갖췄는지에 중점을 둔다. 경쟁적인 환경에서 더 뛰어낸 인재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미국 스포츠과학 저널(Journal of Sports Sciences) 연구를 보면 상대적으로 경쟁이 덜한 소도시(5만 명 이하)에서 자란 선수가 프로 리그에서 뛰는 비율이 인구 분포 대비 2배가량 높았다. 미국 인구의 25%가 소도시에 사는데 미국미식축구리그(NFL)와 미국프로골프(PGA) 선수 중 소도시 출신은 50%에 달했다. 덜 경쟁적인 여건에서 지속적인 격려를 받은 선수가 더 큰 잠재력을 갖는다는 게 연구팀의 결론이었다. 의사와 법률가는 사람의 신체적 생명과 사회적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다. 이미 바늘구멍을 통과해 고등 교육기관에 들어온 의대생과 로스쿨생을 또다시 상대평가의 틀에 욱여넣는 것은 무엇보다 의료와 법률 소비자에게 손해다. 누군가를 이기려고 불행하게 공부하며 서열의식을 내면화한 ‘반쪽 인재’에게 삶의 중요한 문제를 맡기기엔 망설여진다. 상대평가에 단련된 일부 변호사는 노트 필기와 시험 족보를 꽁꽁 숨기던 습관이 몸에 배어 같은 사건을 맡은 동료 변호사들과도 소송 기록을 잘 공유하지 않는다고 한다. 절대평가를 경험한 연세대 의대생들의 소감은 사뭇 다르다. “남을 제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내 실력으로 수술방에 설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됐다.” “홀로 투쟁한 4년이 아닌 동기들과 함께 성장한 4년.” 이들은 절대평가였기에 할 수 있었던 일로 ‘연구’와 ‘봉사활동’을 가장 많이 꼽았다. 우리는 큰 병에 걸리거나 인생의 고비를 맞았을 때 어떤 교육을 받은 의사와 법률가에게 의지해야 할까.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

    • 2018-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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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신광영]여자는 공중화장실에서 ‘이상 무’ 3번 속삭인다

    남자는 알 길이 없는 여성들의 공중화장실 이용법. 화장실에 들어섬과 동시에 문 잠긴 칸이 있는지부터 확인한다. ‘모두 비었음. 이상 무.’ 빈칸에 들어갈 땐 카메라에 얼굴이 찍힐까 봐 고개를 푹 숙인다. 그 다음엔 휴지통 발로 차기. ‘달려 있는 거 없음. 이상 무.’ 이어 동서남북 벽면을 살핀다. 구멍이 보이면 틀어막는데 쓸 호신용 스티커를 손에 쥐고. 다행히 ‘구멍 없음. 이상 무.’ 비로소 앉는다. 눈은 ‘몰카’ 렌즈를 찾아 계속 움직인다. 밤에 택시를 탄 여성은 홀로 스릴러 영화를 찍는다. 남자 운전사가 평소 가던 길로 안 가면 심장이 쿵쾅거린다. 도망쳐야 할 것 같아 신호 정지 때마다 택시 문고리를 잡았다 놓는다. 귀갓길 낯선 남자가 뒤따라오는 느낌이 들 때면 휴대전화를 보는 척 걸음을 멈춘다. 남자가 지나가야 다시 발걸음을 뗀다. 엘리베이터에 남자와 단둘이 탔을 땐 얼어붙는다. 남자가 내리기 전까지 집 층수를 누르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타지 말걸’ 후회가 밀려온다. 치킨 주문도 용기가 필요하다. 배달원 도착 전 집 현관에 남자 신발을 갖다놓는다. 여자 혼자 산다는 걸 들키면 안 된다. 아예 1층으로 내려가 받는 날도 있다. 따끈따끈한 치킨을 베어 물면서도 신경이 쓰인다. 주문할 때 남겨진 휴대전화 번호로 이상한 문자가 날아들진 않을까. 여성의 하루는 이런 ‘돌다리 두드리기’의 연속이다. 여자라면 거의 누구나 의식하지만, 남자라면 거의 누구도 의식하지 못하는 불안과 공포다. 위험은 남녀에게 불평등하다. 그걸 알면서도 약한 자의 숙명이라고 남자는 당연시하고, 여자는 체념해왔다. 이 오랜 관성을 더는 못 참는다는 울분이 최근 혜화역 시위에 여성 6만 명(주최 측 추산)을 불러 모았다. 안전에 관해서도 남녀가 ‘기울어진 운동장’에 있다는 자각은 1020 ‘영(Young)페미니즘’의 눈에 띄는 특징이다. 딱딱한 담론이 아닌 당장의 절실한 일상 문제다. 폭발력이 셀 수밖에 없다. ‘한남충(한국남자 벌레)’ 같은 남성 혐오 표현에는 적대감 못지않게 절박감이 엿보인다. 여성들의 날 선 언어에는 위협적인 존재를 향해 강하게 말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공포로부터 잠시나마 해방되고 싶은 간절함이 배어 있다. 혜화역 시위는 각자 짊어져 온 두려움을 결집해 자신감으로 바꾸는 장이었다. 천주교 성체 훼손, 남성 누드 사진 유출 등 워마드의 극단적 행태 이면에는 다른 가치관이 설 자리가 없을 만큼 강력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때문에 예수도, 어린이도, 난민도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경계한다. 피해의식으로 보일 수 있지만 여자로 살아보지 않은 남성들이 피해와 피해의식의 경계를 섣불리 재단할 수는 없다. 얼마 전 법정에서 난민을 돕는 20대 여성 통역사를 본 적이 있다. ‘난민 불인정 처분이 잘못됐다’며 무슬림 남성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판사에게 전하던 그의 표정은 간절해 보였다. 그런데 통역사는 재판 뒤에도 한참 동안 텅 빈 방청석에 혼자 있었다. 자신이 통역했던 난민들이 모두 법원 밖으로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남자인 난민들이 “물어볼 게 있다”며 다짜고짜 연락처를 달라고 조르거나 무작정 뒤따라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공포는 그 어떤 대의명분보다 절실하다. 다만 갈수록 격렬해지는 ‘남혐’ 움직임이 우려된다. 혐오는 껍데기만 거칠 뿐 상대가 귀를 닫으면 그만이다. 남성에게 위협이 되지 않으니 역설적으로 온건한 투쟁이다. 오히려 남성들을 분열시켜 포섭하는 게 위력적일 수 있다. 남성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여성인 경우가 많다. 공감 세포를 자극할 약한 고리가 적지 않다. ‘너희도 우리와 똑같이 당해보라’는 겁박보다 ‘이러면 아프지 않겠느냐’는 설득 앞에서 ‘한남충’은 더 초라해진다.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

    • 2018-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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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신광영]청탁자, 전달자, 실행자… 채용비리, 참 어려운 수사

    강원랜드 채용비리의 최고위급 청탁자라는 혐의를 받아온 3선 중진의원은 국민의 시선이 쏠린 포토라인에서 자기 지역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자유한국당 권성동 의원은 4일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으러 서울중앙지법에 나와 “우리 강릉시민들께 심려를 끼쳐 송구하다”고 했다. “검찰의 무리한 법리 구성에 대해 (판사에게) 잘 소명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의 지적대로 ‘법리 구성’은 채용비리 수사의 아킬레스건이다. 응당 입사해 월급 받아야 할 사람을 무직자로 만들고 그 자리에 무자격자를 꽂는 일. 이 누가 봐도 나쁜 짓을 응징하기 어려운 게 채용비리의 고약함이다. 채용비리는 외부의 ‘청탁자’, 내부의 고위 ‘전달자’, 인사부서 ‘실행자’ 등 3자 공동 범행이다. 이들의 언어는 선의로 위장한다. 특정인을 거명하며 “인재를 놓치지 않게 세심히 살펴 달라”거나 “열심히 했으니 필기는 보게 하자”며 인간애를 자극한다. 지령이 실행자에게 전달될 땐 ‘전략적 모호함’이 절정에 달한다. 포스트잇에 이름 세 글자만 적어 건네거나, 조선시대 임금이 관료를 뽑을 때 ‘낙점(落點)’하듯 지원자 명단 옆에 동그라미를 그려 넣는다. 합격자 발표를 한참 앞두고 “아무개 붙었느냐”고 묻는 수법도 있다. 나중에 문제가 되면 ‘사람 잘 챙기는’ 청탁자와 ‘융통성 있는’ 전달자는 빠지고, ‘말귀 잘못 알아들은’ 실행자가 독박을 쓴다. 3자 간 연결고리는 흐릿하고 꼬리가 밟혀도 자를 수 있게 설계된, 완성도 높은 범죄다. ‘전화 한 통’에 관대한 문화 탓에 그나마 범죄로 여긴 것도 2000년대 중반 이후다. 오래된 ‘신종 범죄’다. 검찰이 재판에 넘기는 사건은 1년에 3, 4건 정도로 드물다. 가해자를 겨우 찾아 법정에 세우면 이젠 피해자가 모호해진다. 현행법상 채용비리는 ‘회사의 채용 업무를 방해한 죄(업무 방해)’다. 법은 억울하게 떨어진 지원자 대신 사측을 피해자로 본다. 채용 책임자가 비리 직원한테 속았다는 게 입증돼야 비로소 업무를 방해받은 것으로 인정된다. 문제는 채용을 관장하는 회사 수뇌부가 대개 청탁의 전달자 또는 방조자라는 것이다. 한통속인 고위 간부가 실행자에게 속았다는 절묘한 사실관계가 구축돼야 처벌이 가능하다. 그래서 법정에선 꼬리를 자르는 임원과 ‘물귀신’ 인사팀장이 종종 격돌한다. “서류 위조까지 할 줄 몰랐다”는 임원 앞에서 팀장은 “혼자 못 죽는다”며 임원과의 통화 녹취를 내민다. 실행자까지 구제하려는 기업은 “업무를 방해받은 적이 없다”는 대담한 전략을 편다. 합의하에 더 필요한 인재를 뽑았을 뿐이라는 식이다. 전형 도중 채용기준을 바꾸고 서류를 꾸며 지원자 순위를 뒤바꾼 일을 경영적 결단으로 둔갑시킨다. 채용비리로 요즘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시중은행 관계자들은 “정관계 인사나 수백억 원을 맡긴 VIP 고객의 자녀를 뽑아야 은행에 이익인데 왜 채용의 자유를 막느냐”고 푸념한다. 업무 방해는커녕 ‘업무 촉진’이라는 것이다. 법률상 피해자가 “피해가 없다”고 항변하는 난센스가 벌어지는 사이 실질적 피해자들은 가슴이 미어진다. 합격증을 ‘절도’당하고 입사전형에 들인 시간과 노력을 ‘사기’당하면서도 자신이 피해자인지 알 수 없어 가슴 미어질 기회조차 박탈당한 이들이다. 그래서 엄연한 권력형 범죄의 피해자지만 ‘미투(#MeToo·나도 당했다)’에 나서지 못한다. ‘비리 기업’ 직원도 피해자다. ‘뒷구멍 신입’은 그 자체로 리스크일뿐더러 동료에게 무력감과 불신을 심는다. 비리 가담자들은 내밀한 이익을 위해 조직의 잠재력을 ‘횡령’한 것과 다름없다. 기회 균등이라는 시장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사회적 범죄이기도 하다. “무리한 법리 구성”이라던 권 의원의 소신이 통했는지 법원은 5일 ‘법리상 의문점이 있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권 의원은 “설령 추천을 했다고 해도 청탁자를 처벌한 사례가 없다”고 지적했다. 검사 출신답게 채용비리 기소에 애먹는 후배 검사들의 애환을 이해하고 있는 듯 했다.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

    • 2018-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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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신광영]그놈 구속영장 꺾인 날, 피해자는 집에 구속됐다

    A는 남자친구 배웅을 받으며 귀가하는 한 여성의 뒤를 밟고 있었다. 남자친구가 아파트 입구에 도착한 여성에게 손을 흔들며 돌아서던 순간을 A는 놓치지 않았다. 같은 동 주민인 듯 남자친구를 스쳐 지나 여성을 따라갔다. 집 안에 들어선 여성은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문틈으로 낯선 손 하나가 들어와 있었다. 불 꺼진 집에서 여성은 A와 맞닥뜨렸다. 처음 보는 남성이었다. 집에 아무도 없는 것을 아는 듯 A는 망설임 없이 여성을 추행했다. 집 밖까지 울려 퍼진 피해자의 비명소리에 남자친구가 발길을 멈췄다. 밖으로 나온 A는 남자친구의 얼굴을 힐끗 본 뒤 어둠 속으로 내달렸다. 폐쇄회로(CC)TV에 찍힌 A는 숙련된 도주자였다. 도망치면서 옷을 여러 번 갈아입었다. CCTV마다 모습이 제각각이었다. 집으로 곧장 가지도 않았다. 동네 주변을 3km 넘게 빙빙 돌았다. 자기 집을 코앞에 두고 여러 이웃집을 서성였다. 형사들은 동선을 추적하려 CCTV 100여 개를 몇 번씩 돌려봤다. 한 달 넘게 걸려 찾은 A의 집은 피해자 집에서 불과 몇십 미터 거리였다. 피해자는 형사들과 CCTV를 살펴보다 경악했다. 화면 속 A는 피해자와 같은 길로 출퇴근했다. A의 시야에 아침저녁으로 노출돼 있었다. 조사 결과 A는 성추행 전력으로 신상정보등록 대상자였다. ‘등록’된 성범죄자 신분으로 퇴근길 여성을 뒤따라가 몸을 만진 적도 있다. A는 동네 여성을 덮쳤고, 동네에 남아 또 다른 동네 여성을 노렸다. 범인의 정체를 알고 나자 공포는 더 커졌다. 남자친구의 ‘출퇴근 경호’가 시작됐다. 어느 날 피해자가 버스에 오르는 A를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는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피해자는 버스 앞에서 남자친구 팔을 잡고 몸을 덜덜 떨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피해자는 A가 체포됐다는 소식에 잠시 안심했다. 하지만 며칠 뒤 형사의 전화를 받자마자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찾았다. ‘무조건 빨리 처분’ 조건으로 살던 집을 내놨다. 그날 법원이 A에 대해 청구된 구속영장을 기각하고 석방시켰기 때문이다. ‘범행을 반성하고 있고, 증거가 수집돼 있어 인멸될 우려가 없으며, 직업과 주거가 일정해 도주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였다. 경찰에서 혐의를 모두 부인하던 A가 영장전담판사 앞에선 시인한 모양이었다. A는 이후 경찰 조사에서 갑자기 ‘음주 감경’ 카드를 꺼내들었다. “당시 술에 취해 기억은 없지만 피해자가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야간주거침입 강제추행은 5년 이상 징역에 처하는데 정상 참작이 되면 3년 이하 형이 선고돼 집행유예도 가능하다고 기대하는 듯했다. A는 한 회사에 장기 근속한 직장인이다. 현재 집에서도 가족들과 오래 살았다. 법원이 구속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한 주요 근거였다. 하지만 A의 ‘일정한 주거’와 범행 후에도 이어지는 출퇴근 ‘동행’ 탓에 정작 피해자는 집에 ‘구속’됐다. 그녀는 이제 ‘현관 앞에 왔다’는 남자친구의 문자를 봐야만 문을 열 수 있다. 밖에 나가 쓰레기 분리 배출을 하지 못해 베란다에 쌓아둔다. 구속을 피한 범죄자가 피해자를 찾아가 흉기를 휘둘렀다는 보도를 본 날에는 밤새 불을 켜둔다. 버튼만 누르면 112 신고가 되는 스마트 워치를 차고 있지만 A가 마음먹고 보복에 나서면 별 소용이 없다. 피해자는 집에서 ‘석방’되기 위해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 집은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니다. A가 언제든 다시 찾을 수 있는 범행 장소일 뿐이다. 피해자가 외딴 곳으로 숨어버리거나 보복이 두려워 진술을 포기한다면 이 사건의 ‘살아있는 증거’는 사라진다. 법원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보다 치명적인 증거 인멸이 또 있을까.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

    • 2018-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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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신광영]‘드루킹’이냐 ‘바둑이’냐, 다시 암호의 계절이 온다

    드루킹 사건을 취재하는 기자들의 대화에는 정체불명의 암호가 대거 등장한다. ‘서유기’ ‘둘리’ ‘초뽀’ ‘파로스’ ‘솔본아르타’…. ‘드루킹’ 김동원 씨 공범들의 온라인 닉네임이다. 이들이 불렀던 김경수 전 의원의 별명 ‘바둑이’, 댓글 조작 서버 이름 ‘킹크랩’ 같은 말도 자주 오르내린다. 곧 시작될 드루킹 특검 수사를 앞두고 기자들은 이 생경한 단어를 다시 꺼내고 있다. 여전히 베일에 가려진 사건 실체 앞에서 또 씨름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수사가 직업인 사람들은 “수사는 생물”이라고 한다. 범죄는 저마다의 ‘육체’와 ‘정신’으로 이뤄져 있고 수사는 둘 사이에서 살아 움직인다. 범행의 내용이 육체라면 정신은 범행의 동기다. 둘이 맞아떨어질 때 사건 실체가 온전히 드러난다. ‘지난 대선 때 기사 댓글이 불법적으로 조작됐느냐’는 드루킹 사건의 ‘육체’다. ‘정신’이 어떻게 규명되느냐에 따라 사건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진다. 드루킹의 단독 범행이라면 정치 브로커의 일탈이지만 김 전 의원이 묵인 또는 지시했다면 정권 실세의 민심 조작이다. 그동안 경찰 수사가 ‘봐주기’ 논란에 시달렸던 것은 사건의 ‘육체’에 갇혀 ‘정신’으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4월 중순 사건이 알려지며 김경수라는 이름이 등장했을 때 수사를 지켜보는 관객의 상당수는 김 전 의원을 사실상 피의자로 보기 시작했다. 김 전 의원과 드루킹이 비밀 메신저로 기사 인터넷접속주소(URL)를 주고받으며 ‘홍보해 달라’ ‘처리하겠다’며 나눈 대화는 의심을 부추겼다. 하지만 수사의 진도는 김 전 의원을 여전히 피해자로 묶어뒀다. 2월 수사 착수의 발단이 된 드루킹의 1월 17일 ‘평창올림픽 남북 단일팀 결성’ 기사 댓글 조작은 청와대에 부정적인 여론을 만들려고 한 범행이었다. 수사 의뢰도 김 전 의원이 속한 더불어민주당이 했다. 김 전 의원이 피의자가 되려면 대선 당시 민주당 후보에게 유리하도록 댓글이 불법 조작된 사실이 입증돼야 했다. 하지만 드루킹 일당의 봉인된 PC와 휴대전화, 수만 건의 기사 URL에서 조작의 물증을 찾는 건 만만치 않았다. 김 전 의원의 통화 기록과 계좌 압수수색 영장을 받는 데 필요한 범죄 사실의 윤곽이 그만큼 더디게 그려졌다. 경찰이 수사 초기 사이버 사건으로 접근한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온라인 수사는 오프라인 수사와 다르다. 사이버 수사관은 디지털 증거를 찾고 분석하는 데 능하다. 그 대신 범죄자와 신경전을 벌이며 입을 열어본 경험은 많지 않다. 컴퓨터 접속 기록 등 디지털 자료는 부인해도 소용없는 객관적 증거라 범죄자와 부대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드루킹 사건은 ‘온·오프’ 수사 기법이 총동원돼야 하는 ‘게이트급’ 사건이다. 집요하게 현장 증거를 찾아야 하고 관련자들과 여러 차례 결전이 불가피하다. 이런 전투에 강한 지능범죄수사대 같은 인력이 보강된 건 수사 착수 70일 만이었다. 넉 달간 이어진 경찰 수사는 이제 특검으로 넘어간다. 드루킹 일당이 대선 때 불법 프로그램을 이용해 댓글 조작을 했다는 범죄의 ‘육체’는 거의 확인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검이 김 전 의원을 정조준할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하지만 험난한 여정이다. 경찰 조사에서 드러난 것은 정황 증거일 뿐 김 전 의원의 연루 가능성을 뒷받침 할 ‘스모킹 건’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2012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디도스’ 해킹사건을 수사한 특검은 “배후를 밝히는 건 신의 영역”이라는 말과 함께 검찰에서 사건을 넘겨받은 뒤 거의 나아가지 못했다. 드루킹 특검은 신의 영역으로 남는 부분이 없기를 빈다.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

    • 2018-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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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신광영]‘낙태 진료실’ 앞 서성이는 수많은 사연을 떠올리며

    간호사의 호명에 진료실로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난다. 진료실 문 앞에서 소리가 멈추고 몇 초간 흐르는 정적. 산부인과 의사라면 거의 겪어봤다는 특유의 머뭇거림이다. 문이 열리면 의사의 예상은 대부분 적중한다. 사는 곳에서 1, 2시간씩 걸려 찾아온 여성들이다. 막상 의사 앞에선 별말이 없다. 낙태를 해달라는 부탁뿐. 의사가 난색을 표하면 저마다 사연을 꺼내놓는다. 하지만 소용없기 일쑤다. 돌아서는 그들의 뒷모습에서 단념의 기색을 찾아보긴 어렵다. ‘해주는 병원’을 찾아 또 전전하기 시작한다. 28년 차 산부인과 의사는 자신의 딸 또래의 20대 환자에게 “엄마가 된 여성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다독였다. 하지만 이내 답할 수 없는 질문에 직면했다. “선생님 따님이어도 낳으라고 하실 건가요?” 요행히 수술실로 보내진 여성들은 ‘굴욕의자’라고 불리는 수술대에 앉는다. 하반신 아래로 분홍 커튼이 드리워지고 그 너머로 철과 철이 맞부딪치는 소리를 듣는다. 차가운 금속이 몸속을 파고든다. 굴욕감에 두려움이 겹친다. 이어 다가오는 죄책감. 단지 점 하나로, 심장 소리로 살아있음을 증명해 왔던 태아의 몸부림이 떠오른다. 평생 가슴에 묻을 비밀의 죄를 안고 수술대를 내려온다. 환자든 의사든 낙태 수술방의 어느 누구도 이게 최선이라 여기는 사람은 없다. 5월 24일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심판 공개변론을 앞두고 법무부는 ‘낙태 찬성’ 여성들이 무책임하다고 했다. 얼마 전 본보 취재팀이 낙태를 경험한 여성과 의사, 낙태를 고심하다 결국 출산한 비혼모 등 15명을 인터뷰한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낙태로 잃게 될 생명에 가장 가슴 아파하는 사람은 낙태를 하려는 당사자였다. 이진성 헌법재판소장도 공개변론에서 “태아 생명에 가장 큰 관심을 갖는 사람은 바로 임신한 여성일 것”이라고 했다.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는 자기 인생을 책임지려는 결정은 무책임하지 않다. 낙태 여성과 이를 도운 의료진을 벌하는 낙태죄는 태아의 생명권이란 대의 아래 다른 생명권을 희생시킨다. 우선 산모 생명을 위협한다. 낙태하려면 ‘고비용 고위험’에 내몰린다. 낙태해 줄 의사를 찾아 헤매는 사이 임신 기간은 늘어난다. 1주일씩 늦어질 때마다 수술비는 10만 원씩 오른다. 배가 불러올수록 수술하려는 의사도 드물다. 위태로운 몸은 무자격자 손에 맡겨진다. 루마니아는 낙태금지법이 있었던 1966년부터 1989년까지 23년간 모성사망비(임신 관련 질환으로 숨진 산모 비율)가 이전보다 7배 늘었다. 낙태의 기로에서 생명을 택한 여성들은 ‘사회적 생명’의 박탈을 호소한다. 막상 낳았더니 ‘없었으면 하는 생명’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고귀한 존재인 태아와 산모가 출산과 동시에 ‘멀리해야 할 존재’로 거듭나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생명을 귀히 여긴다는 낙태죄의 이 같은 자기모순을 법관들도 이해하는 듯하다. 실형 선고 없이 대부분 벌금형이다. 하지만 법이 살아있는 이상 1953년 제정 이후 60년 넘게 여성의 기본권을 옥죄는 건 그대로다. 게다가 요즘 낙태죄는 남자친구나 남편이 상대의 낙태 사실을 약점 잡아 이별을 거부하거나 이혼 소송에서 압박할 카드로 주로 쓰인다. 본질에서 그만큼 멀어져 있다. 그간 낙태 논쟁은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간 대결로 보는 이분법에 가까웠다. 생명권이라는 공익 앞에 결정권이라는 사익을 위축시키는 접근이다. 이제 산모와 태아의 생물학적 생명과 사회적 생명의 균형을 맞추려는 논의가 필요하다. 국민 80%가 가톨릭 신자로 낙태를 엄격히 금지해온 아일랜드가 5월 25일 국민투표로 낙태죄를 없앤 것도 사회적 생명의 가치를 무겁게 받아들인 결과로 보인다. 사람답게 숨쉴 수 있어야 살아있는 의미가 있다. ▶ [내부자들, 낙태를 말하다] 연재기사 보기----신광영 사건팀장 neo@donga.com}

    • 2018-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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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신광영]“월급에서 깐다”던 조현민, 그가 진정 빼앗은 것은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가 물컵을 던졌던 3월 16일 회의에는 임직원 13명이 배석했다. 조 전 전무의 지적사항을 놓치지 않으려 여느 때처럼 녹음기가 작동 중이었다. 한 달 뒤 그 13명은 사건 목격자로 신분이 바뀌었다. 녹음파일은 범죄 증거로 압수됐다. 컵을 던지고 음료를 뿌리면서도 주변을 의식하지 않았던 조 전 전무의 자업자득이다. 조 전 전무의 언니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2014년 12월 기내에서 박창진 전 사무장을 무릎 꿇릴 때도 옆에 탑승객이 있었다. 조 전 부사장이 서류철로 박 전 사무장 손등을 내리치며 내지르는 고성을 그들은 생생히 들었다. 어머니인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은 공사장 직원들 앞에서 한 여직원을 몰아세웠다. 요즘 모녀의 폭언 녹취파일이 쏟아져 나오는 건 주변의 눈과 귀를 괘념치 않는 가족력 탓으로도 보인다. 무심함은 이 ‘비행 가족’이 휘두른 폭력의 본질을 보여준다. 동료와 고객 앞에서 인격이 짓밟힌 피해자의 굴욕감은 그들의 안중에 없었다. 수치심을 꼬집는 것은 가장 악랄한 언어폭력이다. 수치심을 느끼면 금방 티가 난다. 얼굴이 빨개지고 몸이 떨린다. 고개가 숙여지고 눈물이 나기도 한다. 가해자는 상대가 내 밑에 있음을 바로 실감한다. “월급에서 깐다” “당신 쉰(살)이야?” “이게 어디다 대고” “사무장 그 새끼 오라고 해”…. 조 씨 자매는 유독 상대의 수치심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수치심에 몸서리치는 사람은 빠르게 망가진다. “나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위는 오래가지 못한다. “나는 하찮은 사람”이라는 자기 비하를 피할 수 없다. 매사에 확신이 약해져 성과는 떨어진다. 폭언은 더 강해진다. 더 이상은 당하지 않으려 퇴근 후에도 뭘 잘못했는지 스스로 캐묻는다. 강박적인 반추 작업이다. 심리학자들은 “삶을 좀먹는 자기 파괴행위”라고 지적한다. 우울증과 자살로 이어질 수 있는 전조 증상이다. 박 전 사무장은 해고를 각오하고 ‘땅콩 회항 사건’을 폭로한 이유를 이렇게 표현했다. “죽을 것 같아서 그리고 죽지 못하여.” 혼자만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다. 상사의 갑질은 전염된다. 내가 제압당했듯 더 약한 부하를 재물 삼기 쉽다. 회사에서 받은 모멸감을 집에서 보상받으려 배우자와 자녀를 학대하기도 한다. 갑질은 ‘배둘레햄’(복부비만을 뜻하는 말) 유발 효과도 있다. 상사의 폭언에 시달린 기간이 길수록 체질량지수(BMI)가 비만에 가까워진다. 미국 인디애나대 연구진이 2016년 직장인 2363명을 연구한 결과다. 당장의 스트레스 해소가 절박해 달고 부드러운 음식을 부쩍 탐하게 된다. 이들에게 몸은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상이다. 폭식으로 자기실현 욕구를 채운다는 게 연구진의 분석이다. ‘직장 갑질’은 단순히 일부 상사의 괴팍한 성격 문제가 아니다. 지난해 영국 맨체스터대 연구에 따르면 ‘갑질 상사’에게선 나르시시즘(자기애)과 반사회적 인격장애 성향이 공통적으로 관찰된다. 자신의 불완전한 인격으로 타인의 몸과 영혼을 황폐화시키는 범죄행위인 것이다. 최태원 SK 회장의 사촌 최철원 사장처럼 “한 대에 100만 원”이라며 야구방망이를 휘둘러야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도 “월급에서 깐다”는 폭언을 들으면 월급으로 도저히 메울 수 없는 상처가 가슴 깊이 파인다. 경찰 수사를 거치며 조 전 전무의 죄목은 업무방해 하나로 줄었다. 물컵을 던졌지만 사람을 향하지는 않았고, 그가 뿌린 음료수에 젖은 직원들이 뒤늦게 처벌 의사를 포기한 탓이다. 결국 회의 진행을 방해한 죄만 남게 됐다. 하지만 직원들의 인간다운 삶을 방해한 진짜 죄를 그는 알고 있을까.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

    • 2018-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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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신광영]경찰관의 꽃이자 늪… 서울경찰청장이란 자리

    평소 듬성듬성하던 서울지방경찰청 10층 기자실이 그날따라 빼곡했다. ‘드루킹’ 댓글 여론 조작 사건이 불거진 직후인 지난달 16일이었다. 이주민 서울경찰청장이 기자들과 마주 앉았다. 질문 공세가 시작됐다. 초점은 더불어민주당 김경수 의원의 연루 여부다. 이 청장의 입에 국민과 정치권의 시선이 쏠렸다. 서울경찰청장은 경찰 조직의 ‘넘버 2’다. 전국 경찰관 12만 명 중 약 4만 명을 지휘한다. 수도권 집중도가 높다 보니 굵직굵직한 정치 사회적 갈등이 사건화할 때마다 직접 지휘봉을 잡는다. 경찰청장(치안총감)보다 계급이 하나 아래인 치안정감이지만 일본은 도쿄 경시청장이 최고 계급인 경시총감이다. 영예로운 자리이지만 실상은 곳곳이 늪이나 다름없다. ‘뜨거운 감자’를 늘 떠안고 있어 총대 멜 일이 겹겹이 쌓이기 마련이다. 2000년 이후 임명된 서울경찰청장 21명 중 단 4명만 경찰청장이 됐다. 허준영 어청수 조현오 강신명 전 청장뿐이다. 나머지 17명 중 상당수가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물러났다. 김석기 전 서울청장은 경찰청장 내정 상태에서 용산 참사의 책임을 지고 낙마했다. 김용판 전 청장은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축소 은폐 의혹으로 기소됐다가 무죄 판결을 받았다. 구은수 전 청장은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 책임자로 지목돼 금고 3년을 구형받고 선고를 기다린다. 서울경찰청장은 안팎으로 포위돼 있다. 유일한 상관인 경찰청장과는 견제 관계에 있다. ‘넘버 1’이 비켜줘야 ‘넘버 2’가 올라갈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경찰청장으로선 힘 있는 2인자의 동태를 주시할 수밖에 없다. 경찰청이 직접 맡기 예민한 사건은 서울경찰청으로 내려 보내는 경우도 많다. 밖으로는 정치권과 여론의 입김에 취약하다. 수도 치안을 책임지는 막중한 역할에 비해 직급이 상대적으로 낮다. 장관, 차관보다 아래인 차관보급(1급)이다. 그만큼 흔들기가 수월하다. 동물적인 정무감각 없이는 사면초가에 놓이기 쉽다. 그날 이주민 청장의 간담회는 중대한 시험대였다. 대통령 측근의 악재를 봉합하고 싶은 청와대, 지방선거에 유리한 돌파구를 찾으려는 야당, 수사권 조정을 앞둔 검경의 첨예한 이해관계가 ‘삼각 교차’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대부분 드루킹이 문자를 보냈고, 김 의원은 거의 읽지 않았습니다. 의례적인 감사 표시만 몇 번 했습니다.” 그날 이 청장의 발언은 이틀 뒤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 결과 김 의원은 ‘드루킹’에게 기사 인터넷접속주소(URL)와 함께 ‘홍보해주세요’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수사 최고책임자가 김 의원을 두둔한다는 비난이 뒤따랐다. 이 청장은 간담회 나흘 뒤 수척해진 얼굴로 기자실을 찾아왔다. 그는 “조사 내용을 정확히 숙지하지 못했다”고 사과했다. 이 청장이 김 의원을 감싸주려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며칠 뒤 뻔히 들통 날 거짓말을 할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을 것이다. 경찰은 김 의원을 4일 소환조사하기로 하는 등 수사는 예정된 경로로 가고 있다. 그날의 실언으로 이 청장은 깊은 상처를 입었다. 간담회 전까지만 해도 그는 차기 경찰청장 ‘1순위’로 거론됐다. 현 경찰청장이 6월 퇴임이라 한두 달만 무사히 넘기면 ‘노마크 찬스’를 잡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힘겨루기의 한복판에 놓인 자신의 처지를 엄중히 자각하지 못한 대가를 그는 톡톡히 치르게 됐다. 그에겐 기회가 곧 위기였다. 개인으로서는 억울할 수 있어도 서울경찰청장으로선 감내해야 할 책임이다. 이 청장의 뼈아픈 실수는 잊기 쉬운 단순한 진실을 상기시킨다. 누구든 화려한 요직을 선망하지만, 감투는 높을수록 무거워진다.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

    • 2018-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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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신광영]그 병원 중환자실은 ‘세월호 조타실’ 이었다

    “신생아가 4명이나 숨졌는데 누구 책임입니까?” 3일 판사가 이대목동병원 의료진 3명에게 똑같이 물었다. 이들의 구속 여부를 결정하는 자리였다. 세 사람은 당시 병원 기획조정실장 박모 교수, 신생아중환자실장 조모 교수, 수간호사였다. 박 교수는 조 교수의 전임자로 이 병원 신생아 관리시스템을 만든 인물이다. 이날 세 사람 모두 다른 두 사람에게 책임을 돌렸다. 박 교수는 “현 운영진이 한 일”이라며 발을 뺐다. 조 교수는 “스승인 박 교수가 만든 관행대로 했다. 간호사 관리는 수간호사의 몫”이라고 했다. 수간호사는 “교수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고 억울해했다. 판사는 세 명 모두 구속했다. 업무상 과실이 소명됐고 서로를 책임자로 지목해 누구 하나 빼놓기 어려웠을 것이다. 4년 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후 법정에 출석한 선원들도 서로에게 책임을 돌렸다. “화물 선적과 고박, 평형수 관리는 항해사가 했다”(이준석 선장), “선장이 과적과 부실고박 관행을 알고도 묵인했다”(항해사), “선장과 항해사의 지시대로 했다”(조타수). 이들 주장에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누구라도 그런 처지에 놓이면 “해오던 대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이런 결과는 상상도 못 했다”고 항변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일상에서 작은 타협을 반복하며 악마의 관행을 쌓아올린 책임은 면하기 어렵다. 악습은 누적되면서 환자나 승객이 위태로워져도 어쩔 수 없다는 미필적 고의를 창출해낸다. 이대목동병원 신생아들은 감염된 주사제가 몸에 들어가 사망했다. 한 명에게만 써야 하는 주사제를 여러 환자에게 나눠 쓰는 습관이 주된 요인이었다. 문제가 된 영양주사제는 신생아에게 일종의 식사였다. 몇 년 전까지 1주일에 주사제 2병만 보험이 적용됐다. 이틀분이었다. 나머지 5일도 먹이려다 보니 1병을 처방한 뒤 3, 4명에게 주사했다. 박 교수와 조 교수는 2010년 이 관행을 멈추려 했다. 아기 1명당 매일 1병씩 주사하라고 처방을 바꿨다. 병원이 국제의료기관평가인증을 받으려면 처방과 투약을 일치시켜야 했다. 정부도 처방대로 모두 보험 처리를 해줬다. 하지만 ‘나눠 주사하기’ 관행은 이후 7년간 이어졌다. 간호사들이 실제 어떻게 투약하는지 전혀 살피지 않은 탓이다. 그 사이 주사제를 나누는 번거로운 작업은 경력 1년 미만의 막내 간호사에게 맡겨졌다. 세균이 우글거리는 싱크대 옆이 작업 장소였다. 개봉 즉시 투약해야 하는데 아기마다 투약 시간 맞추는 게 귀찮아 미리 나눠놓았다. 초기에 2, 3시간 전에 나누더니 사건 전에는 7시간 넘게 상온에 방치하다 투약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의사의 묵인 속에 나쁜 습관은 중환자실 전체로 전염됐다. 간호사들은 인큐베이터 옆에서 라면과 김밥을 먹었다. 맨손으로 기저귀를 갈고서 분유를 먹였다. 보호자들이 휴대전화를 들여오는 것도 용인됐다. 조 교수는 사건 당일 불안에 떠는 부모들에게 “미숙아들은 원래 놀랄 만한 이벤트가 있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는 사건 전 병원 감염관리위원회로부터 “주사제 감염에 유의하라”는 경고를 10번 넘게 받고도 의료진을 교육하지 않았다. 의사는 죽음에 익숙한 직업이다. 세월호 선원도 언제든 ‘사지’로 변하는 바다가 일터였다. 일상의 쳇바퀴 속에서 업(業)의 본질을 기억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생명의 무게가 익숙해질 때 비극은 예고된다. 0.0001%의 가능성을 머리에 이고 사는 직업인의 숙명이다. 비단 그들만의 숙명일까. 모든 직업은 누군가에겐 대체 불가능한 소중한 것을 다룬다.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

    • 2018-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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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신광영]‘허허’ 웃기만 한 이윤택…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성범죄 수사는 일반 수사와 많이 다르다. 수사의 성패는 증거에 달렸는데 피해자가 유일한 증거다. 이마저 물증이 아니다. 진술이 전부다. 둘 사이 일이라 목격자도 없다. 사건 현장은 생활 현장이다. 증거를 찾으려 들쑤시기 어렵다. 가해자도 이런 사정을 안다. “만취해 기억이 안 난다” “합의한 관계였다”는 말을 단골로 한다. 뻔뻔함에 화가 치밀다가도 구멍이 숭숭 뚫린 증거 앞에서 수사관은 난감하다. 그렇다고 피해자를 닦달하듯 조사하다간 ‘2차 가해자’가 된다. 성범죄 수사는 뇌를 다루는 신경외과 수술과 비슷하다. 섬세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환자가 뇌사에 빠지거나 반신불수가 될 수 있다. 마저 비교하자면, 정공법을 구사하는 강도·살인 수사는 일반외과 수술에 가깝다. 연쇄살인범 추적은 재범 우려 때문에 시간이 생명이다. 중증외상 응급수술과 닮았다. 사기, 횡령 등 재산범죄 수사는 성형외과 수술에 비견할 만하다. 가해자 처벌 못지않게 합의를 시켜서라도 피해자를 만족시키는 게 중요하다. 거악을 파헤치는 ‘특별수사’는 외압에 굴하지 않는 저돌성과 치밀함이 요구된다. 심장을 열어보는 흉부외과 의사에게 특히 필요한 덕목이다. 수술법이 제각각이듯 범죄마다 수사기법도 달라야 한다. 성범죄를 수사하면서 강력사건 처리하듯 서슴없이 대질조사를 하거나, 경제사건에서처럼 합의를 유도하면 거의 실패한다. 경찰이 최근 재수사에 나선 2004년 ‘단역배우 자매 자살 사건’은 실패한 수사의 참혹함을 보여준다. 당시 경찰은 단역배우였던 피해자를 가해자들과 나란히 앉혀놓고 여러 번 대질조사를 했다. 그 자리에서 한 가해자는 피해자와의 성행위 자세를 흉내 냈다. “경찰이 딸에게 가해자의 성기를 그려보라고 A4용지까지 건넸다”고 자매 어머니는 증언한다. 피해자가 2차 피해를 견디다 못해 자살하자 단역 일을 소개해준 여동생이 뒤따랐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가해자가 “잘못했다고 빌게요”라고 하면 경찰이 피해자 연락처를 건네며 합의를 거드는 일도 있었다. 야만의 시대였다. 요즘 성범죄 수사에 고유한 기법이 도입된 것은 당시 피해자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금은 경찰 수사 때부터 피해자에게 국선변호인을 붙여준다. 진술분석 전문가도 동원된다. 신변 불안을 호소하면 경찰이 피해자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파악한다. 예전에는 “피해자 진술밖에 없다”며 증거 불충분으로 끝내던 것을 이제는 피해자 진술의 증거능력을 높이려 노력한다. 단원 17명을 성추행한 혐의를 받는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감독이 구속되기까지 경찰은 이런 수사기법을 총동원했다. 그는 경찰이 피해자들의 일관된 진술을 들이밀자 반박을 못 하고 ‘허허’ 웃기만 했다고 한다. “(피해자가) 그렇게까지 말했다면 그게 사실일 것”이라는 말과 함께. 하지만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 이후 수사기관은 다시 시험대에 섰다. 폭로에 나섰던 피해자들 대부분이 수사의 문턱에서 주저한다. “다른 피해자가 나오면 그때 생각해 보겠다”는 반응이다. 영화감독 김기덕 씨와 배우 조재현 씨 수사가 답보 상태인 이유다. 9년 만에 검찰의 재조사 대상으로 떠오른 배우 장자연 씨 성접대 의혹 수사는 더욱 ‘난코스’다. 장 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피맺힌 한을 남겼지만 정작 ‘살아있는 증거’는 남아 있지 않다. ‘미투’는 수사기관에 새로운 ‘수술법’을 찾으라는 숙제를 던지고 있다.  신광영 사회부 기자 neo@donga.com}

    • 2018-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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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룸/신광영]‘뻗치기’는 취재원을 차별하지 않는다

    화제의 취재원은 그냥 만나주지 않는다. 본보 기자가 지난해 11월 이국종 교수가 있는 아주대병원 외상센터를 며칠째 맴돌던 때다. 당시 이 교수는 총상을 입은 북한 귀순 병사를 치료하고 있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이 교수와 마주친 곳은 그의 연구실 앞 화장실이었다. 이 교수는 화장실에 잠입해 기다린 기자에게 “국가정보원 직원들이 깔려 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들키지 않고 나갈 수 있는 ‘퇴로’를 귀띔해줬다. 며칠 뒤 본보에 는 기사가 실렸다. 결국 열흘간의 ‘뻗치기’(취재원 주변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취재방법)에도 이 교수 인터뷰는 성사되지 못했다. 그 대신 청소아줌마와 구내식당 영양사, 병원 세탁실 직원, 동료 의료진 눈에 비친 이 교수의 모습을 기사로 옮겼다. 여당의 대권주자에서 성범죄 피의자로 전락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공인이 공적인 상황에 놓였으니 그 역시 ‘뻗치기’ 대상이다. 10일 안 전 지사가 은신하는 수도권 한 야산의 컨테이너 숙소를 가까스로 찾아냈다. 몇 걸음 다가서자 숙소 근처에서 누군가가 기자를 향해 활을 겨누는 모습이 보였다. 안 전 지사에게 거처를 제공한 지인이었다. 할 수 없이 ‘비무장지대’를 정하고 멀찍이 떨어진 자리를 잡았다. 본보가 20일 보도한 기사에도 안 전 지사의 말을 많이 담지 못했다. 열흘간 그의 행보를 살피고 주변 인물을 만나 기록한 메모를 종합했다. 기사에 대한 독자의 반응은 매서웠다. “성폭력 가해자를 두둔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많았다. 한 여성단체 주관 토론회에서는 본보 기사를 두고 “가치판단을 제대로 하지 않은 보도”라고 비판했다. 새겨들을 지적이다. 발품 팔았다고 좋은 기사가 나오는 건 아니다. 다만 4개월 전 이 교수 관찰기를 보도했을 땐 “국민 영웅의 진면목을 보여줬다”는 호평이 지배적이었다. 같은 형식의 기사였지만 반응은 완전히 달랐다. 이 교수는 존경을, 안 전 지사는 비난을 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기자의 눈으로 보면 두 사람 모두 뉴스 가치가 높은 관찰 대상이다. 두 사람을 최대한 정확히 관찰할 수 있게 가까운 교두보를 확보하는 게 우선이다. 섣부른 가치판단보다 눈앞의 상황을 선입견 없이 지켜보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국민적 영웅에게서 진솔한 면모가, 여론의 몰매를 맞는 인물에게서 교묘한 꼼수가 포착되길 기다리곤 한다. 하지만 그런 기다림은 곧잘 배반당한다. 이것이 ‘뻗치기’의 묘미다. 미리 정답을 정해놓고 현장에 가면 어김없이 무너진다. ‘뻗치기’는 중립적이다. 그래서 “안 전 지사에 대해 왜 가치판단을 하지 않느냐”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뻗치기 현장에 가는 후배에게 잔소리를 던진다. “보고 들은 대로만 쓰자.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고.” 신광영 사회부 기자 neo@donga.com}

    • 2018-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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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대회 걸맞게 안전-질서 최고수준으로”

    “도심을 가로지르는 서울국제마라톤은 전 세계에 서울의 아름다움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이주민 서울지방경찰청장(사진)은 15일 “최고 권위의 세계적 마라톤 대회라는 위상에 걸맞게 안전과 질서도 최고 수준으로 만들겠다”며 이같이 말했다. 서울국제마라톤 중계 영상은 해외 112개국에 송출된다. 이 청장은 “선수들이 달리는 모습과 함께 한강과 청계천, 동대문 등 서울의 명소가 세계인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선수와 참가자 안전 확보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서울경찰청은 교통경찰 730여 명과 모범운전자 520여 명 등 3700여 명의 진행요원을 코스 곳곳에 배치해 대회 진행에 차질이 없도록 지원하고 시민 불편을 최소화할 계획이다. 이 청장은 “대회 성공을 위해 코스 주변 주민들의 성원과 협조가 필수적이다. 교통통제 플래카드와 입간판 등을 통해 일찍부터 홍보에 나섰다”고 말했다. 경찰은 대회 당일 오전 5시부터 8시 40분까지 출발지인 세종대로(광화문 삼거리∼세종대로 사거리) 양방향 전 차로의 교통을 통제한다. 오전 7시 50분부터 오후 1시 35분까지는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잠실주경기장에 이르는 구간에서 순차적으로 진행 방향 전 차로 교통이 통제된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2018-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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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룸/신광영]친고죄 폐지 3년 앞당길 수 있었다

    먼저 포문을 연 사람은 조순형 의원이었다. “이거 우리가 처리 못 하면 구설수에 오를 겁니다. 이거 폐지해야 됩니다.” 2010년 3월 22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실에 적막감이 돌았다. 조 의원이 말한 ‘이거’는 형법의 성폭력 친고죄 규정이다. ‘피해자가 고소해야 처벌한다’는 바로 그 조항이다. “제발 없애 달라”는 여성단체 요구가 당시 절정이었다. “학계 의견을 수렴해야 하지 않을까요.”(장윤석 법안소위 위원장) “피해자에게 주도권을 주는 의미에서 계속 있는 게 오히려….”(손범규 의원) “고소 취하해 달라고 가해자들이 하도 괴롭혀서 피해자들 두 번 울어요.”(조 의원) 팽팽하던 토론은 8일 후인 그해 3월 30일까지 이어졌다. 장 위원장이 “정리를 좀 하겠다”고 나서면서 ‘폐지’ 측이 밀리기 시작했다. “성폭력특별법을 보면 성범죄는 경미한 경우 빼고는 대부분 친고죄가 배제돼 있습니다.” 열흘 전 시행된 ‘성폭력범죄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성폭력특별법)’을 통해 친고죄가 거의 사라진 마당에 형법상 친고죄 규정까지 없앨 필요가 있는지 판단하자는 취지였다. 법무부 검찰국장 출신인 장 위원장의 지적에 여야 의원들은 반론하지 않았다. 당시 황희철 법무부 차관이 장 위원장을 거들었다. “친고죄를 연구해봤지만 성폭행범의 경우 몇 개 남아있지 않습니다.” 박영선 의원이 “외국은 친고죄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요”라고 맞섰다. 하지만 판세를 뒤집을 ‘팩트’가 없었다. “좀 더 검토해보자”는 기약 없는 다짐과 함께 회의는 끝났다. 당시 대부분의 성범죄에 친고죄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해석은 법조문을 읽어 보면 정확하지 않은 추론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장 위원장이 거론한 성폭력특별법 15조는 공중장소에서의 추행, 통신매체를 이용한 음란행위 등의 경우 고소가 있어야 처벌한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그 외 다른 성범죄’는 친고죄가 아니라고 추론할 수는 있다. 하지만 성폭력특별법에 명시된 ‘그 외 다른 성범죄’는 특수강간과 장애인 간음, 미성년자 강간 등 가중처벌이 필요한 소수의 특수범죄뿐이다. 형법에 나오는 강간과 강제추행 등 일반적인 성범죄는 그 안에 없다. 형법을 고치지 않는 한 대부분의 성범죄가 친고죄 적용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회의에 법조인 출신 의원들과 법무부 차관, 검찰국장, 법원행정처 차장이 있었다. 어느 누구도 장 위원장의 법 해석에 다른 의견을 내지 않았다. 이튿날 본회의에서 몇몇 의원이 “왜 친고죄를 그대로 두느냐”고 항의한 것을 끝으로 관련 논의는 국회에서 자취를 감췄다. 성폭력 친고죄 조항은 3년 뒤인 2013년 6월에야 폐지됐다. 늦어진 정의의 대가를 요즘 ‘미투(#MeToo·나도 당했다)’ 폭로자가 치르고 있다. 그 3년 동안 벌어진 성폭력에는 지금의 정의가 닿지 않는다. 그날 법사위 회의에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상습 성폭력 가중처벌 조항을 넣었다. 그 덕분에 2013년 6월 이전이라도 상습성이 입증되면 처벌할 길이 열렸다. 하지만 법사위원들은 이때도 오류를 범했다. ‘상습’ 문구를 형법에만 넣었다. 성폭력특별법을 생각하지 못했다. 특별법에 들어 있는 ‘업무상 위력 추행’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처럼 직장에서 하급자를 유린하는 상급자를 벌하는 조항이다. 이런 추행이야말로 가장 상습적으로 벌어지지만 8년 전 입법 과실 탓에 가중 처벌할 수 없다. 한 의원이 2015년 이를 바로잡는 법안을 냈지만 논의가 헛돌다 19대 국회 만료로 폐기됐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2차 피해를 감수하며 연일 힘겹게 아픔을 꺼내놓는다. 눈물로 만든 진전의 기회를 입법자들이 허무하게 날리지 않았으면 한다. 신광영 사회부 기자 neo@donga.com}

    • 2018-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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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룸/신광영]‘생존 인증’ 동영상을 확보하라

    서울의 한 경찰서 여성청소년계 김모 형사는 5일 카카오톡 답변을 기다리며 마음을 졸였다. 출입국 기록상 일본에 있는 30대 여성에게 메시지를 보낸 지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한국 경찰입니다. 지연이(가명) 보호자 되시죠?’ 물음에 대한 답은 끝내 없었다. 김 형사는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지연이가 초등학교 예비소집에 안 나왔더군요. 아이가 잘 있는지 확인하려고 합니다.’ 몇 분 뒤 답장이 왔다. 하지만 딱 네 글자. ‘잘 있어요.’ 김 형사는 바로 답장했다. ‘말로는 안 되고 증명해 주셔야 합니다.’ 초등학교 취학통지를 받고도 1월 예비소집에 불참한 아이들의 행방을 찾는 게 요즘 김 형사의 주 업무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건 학대의 징조일 수 있다. 형사가 아이의 소재 파악에 나섰다면 사안이 심상치 않다는 얘기다. 학교 측과 동주민센터가 주소지 등을 찾아봐도 행방이 묘연할 때 경찰로 공이 넘어온다. 지난달 서울 경찰로 아동의 소재 파악 요청이 온 22건 중 지연이는 마지막 ‘미확인’ 건이었다. 부모는 일본으로 출국했지만 지연이는 출국 기록이 없었다. 가끔 여권 영문이름에 오류가 있거나 이중국적자일 경우 출입국 기록이 검색되지 않는 때가 있다. 하지만 김 형사는 지연이의 실물 확인 없이 안심할 수 없었다. 예비소집 불출석은 어쩌면 아이가 보내는 간절한 구조 신호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오래도록 외면했다. 불출석 아동 소재 파악은 지난해 비로소 시작됐다. 올해가 두 번째다.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집 가스배관을 타고 맨발로 탈출한 열한 살 A 양, 욕실에서 감금된 채 부모 학대로 숨진 일곱 살 원영이가 여론에 불을 지핀 결과였다. A 양은 학교에 2년째 장기결석했지만 아무도 살피는 이가 없었다. 김 형사가 일본으로 보내는 ‘카톡 노크’는 혹시 있을 수 있는 음지에 볕을 들이는 이를테면 ‘햇볕정책’이다. ‘잘 있다’는 말 외에 답이 없던 지연이 보호자에게 김 형사는 결국 마지막 경고를 보냈다. ‘아이의 현재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서 보내주십시오. 그게 없으면 조사에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지연이 보호자의 반응이 갑자기 빨라졌다. ‘그렇게까지 하는지 몰랐네요. 곧 보낼게요.’ 몇 시간 뒤 김 형사의 카톡으로 한 아이가 천진하게 웃는 사진과 집 거실을 뛰노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이 전달됐다. ‘아이와 함께 2월 말 귀국한다’는 메시지도 함께 왔다. 사진과 동영상 속 아이는 김 형사가 지연이 친인척을 통해 미리 확보한 얼굴 사진과 일치했다. 촬영 시각도 전송 직전이었다. 김 형사는 안도하며 답장했다. ‘2월 말 귀국하시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아이들은 투표권도, 사회적 영향력도 없다. 그들의 절규는 집 담장을 넘기 힘들다. 아동을 위한 정의는 감금되어 있기 일쑤다. 아동보호제도는 아이들의 눈물과 죽음 뒤에야 고작 한발씩 나아간 슬픈 진전의 역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어렵게 일궈낸 제도의 울림이 작지 않다. 2016년 경남 고성에서 일곱 살 친딸을 때리고 굶겨 숨지게 한 어머니와 부천에서 여중생 딸을 죽게 한 뒤 1년간 시신을 방치한 목사 아버지는 장기결석아동 전수조사 결과 세상에 드러났다. 지난해 고준희 양을 숨지게 한 부모 역시 비슷했다. 전국으로 확대되는 ‘위기아동 조기발견시스템’을 의식해 거짓 실종신고를 했다가 경찰에 덜미가 잡혔다. 아이들에게 ‘잘 있느냐’고 묻는 어른들의 노크가 더욱 집요해져야 할 것 같다.신광영 사회부 기자 neo@donga.com}

    • 2018-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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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룸/신광영]‘골든타임 지휘관’의 예고된 운명

    2014년 세월호 침몰 때 승객 구조에 실패한 해경 김경일 전 경위의 재판 날이면 방청석 맨 뒤에 그의 20대 남매가 앉았다. 유족이 빼곡히 앉은 방청석 왼편과 달리 오른편은 두 사람뿐이었다. 남매는 피고인석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재판이 끝나면 서둘러 빠져나갔다. 어느 날 두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둘 다 사범대를 나와 임용고시를 준비 중이었다. 김 전 경위의 딸은 “저의 제자가 될 수도 있는 아이들이 비극을 당했는데 선처를 바라는 저는 교사 자격이 없는 거겠죠”라고 말했다. 김 전 경위는 업무상 과실치사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지난해 12월 충북 제천시 스포츠센터 화재 때 현장 지휘관이었던 김종희 소방경은 신경정신과 치료를 위해 입원 중이다. 김 소방경은 건물 2층에 갇힌 인명 구조에 실패해 징계를 앞두고 있다. ‘2층 상황이 심각하다’는 연락을 받고도 신속히 대원을 투입하지 못했다. 사망자 29명 중 20명이 2층에서 발견됐다. 그는 25일 전화 통화에서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진압 당시 트라우마와 죄책감을 견디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 전 경위와 김 소방경은 수십, 수백 명의 목숨이 촌각에 달렸던 ‘골든타임’에 해경과 소방의 말단 지휘관이었다. 김 전 경위는 34년 경력에 24차례 표창을 받았다. 김 소방경 역시 27년 근무하며 6차례 표창을 받은 베테랑이다. 두 사람 모두 아들이 뒤를 따랐다. 김 전 경위의 아들은 해경 전투경찰로 복무했다. 김 소방경의 아들은 현직 소방관이다. 구조 실패에 대한 두 사람의 해명은 비슷했다. “평소대로 대응했고, 눈앞에 보이는 것부터 조치했으며, 그게 최선인 줄 알았다.” 김 전 경위는 세월호 안에 수백 명이 남아 있는 걸 알고도 우선 밖으로 탈출한 사람들을 해경 배에 옮겨 태웠다. 퇴선 방송이나 선내 진입 등 승객을 대피시키기 위한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는 소형 경비정(100t급) 지휘관이다. 주 업무가 불법어선 단속이었다. 인명 구조는 물에 빠진 사람을 몇 명 건져본 게 전부였다. 침몰하는 대형 여객선(6700t급)을 눈앞에 두고 그는 경험 부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김 소방경은 불길에 휩싸인 건물 옆 액화석유가스(LPG) 탱크에 불이 붙지 않도록 하는 데 주력했다. 1994년 12명이 사망한 서울 마포구 아현동 가스폭발 현장의 경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119상황실로부터 ‘2층 구조’ 연락을 받은 뒤에도 가스통 지키기에 몰두했다. 3층과 옥상의 눈에 보이는 사람만 구조했다. 화재 초기 2층으로 가는 비상계단은 불이 크게 번지지 않은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김 전 경위와 김 소방경 모두 경험의 덫에 빠져 최선의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이처럼 노련한 지휘관도 긴박한 현장에서는 경주마처럼 시야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이런 한계를 최소화할 시스템을 마련하는 게 상급자의 몫이다. 그러나 상급자들은 책임 소재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말단 지휘관이 모두 떠안는다면 참사의 재발을 막기 어렵다. 세월호 참사 때 청와대와 해경 지휘부는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김 전 경위가 유일한 정부 측 ‘책임자’였다. 당시 한 검찰 간부는 “300명 넘게 죽었는데 희생양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476명을 태운 6700t급 여객선의 침몰을 100t급 경비정 하나로 막아서야 했던 해경의 인명구조 체계는 세월호 침몰 후에도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이번 제천 화재 역시 현장 지휘관을 끌어내리는 ‘한풀이식 정의’로는 화마에 갇힌 사람들을 구할 수 없다. 2014년 김경일, 2017년 김종희에 이어 참사 때마다 실패한 지휘관이 양산될 뿐이다. 신광영 사회부 기자 neo@donga.com}

    • 2018-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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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0명 넘게 죽었는데 희생양 필요하지 않겠느냐” 정부 측 유일한 책임자는…

    2014년 세월호 침몰 때 승객 구조에 실패한 해경 김경일 전 경위의 재판 날이면 방청석 맨 뒤에 그의 20대 남매가 앉았다. 유족이 빼곡히 앉은 방청석 왼편과 달리 오른편은 두 사람 뿐이었다. 남매는 피고인석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재판이 끝나면 서둘러 빠져나갔다. 어느 날 두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둘 다 사범대를 나와 임용고시를 준비 중이었다. 김 전 경위의 딸은 “저의 제자가 될 수도 있는 아이들이 비극을 당했는데 선처를 바라는 저는 교사 자격이 없는 거겠죠”라고 말했다. 김 경위는 업무상 과실치사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지난달 충북 제천시 스포츠센터 화재 때 현장지휘관이었던 김종희 소방경은 신경정신과 치료를 위해 입원 중이다. 김 소방경은 건물 2층에 갇힌 인명 구조에 실패해 징계를 앞두고 있다. ‘2층 상황이 심각하다’는 연락을 받고도 신속히 대원을 투입하지 못했다. 사망자 29명 중 20명이 2층에서 발견됐다. 그는 25일 전화통화에서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진압 당시 트라우마와 죄책감을 견디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 전 경위와 김 소방경은 수십, 수백 명의 목숨이 촌각에 달렸던 ‘골든타임’에 해경과 소방의 말단 지휘관이었다. 김 전 경위는 34년 경력에 24차례 표창을 받았다. 김 소방경 역시 27년 근무하며 6차례 표창을 받은 베테랑이다. 두 사람 모두 아들이 뒤를 따랐다. 김 전 경위의 아들은 해경 전투경찰로 복무했다. 김 소방경의 아들은 현직 소방관이다. 구조 실패에 대한 두 사람의 해명은 비슷했다. “평소대로 대응했고, 눈앞에 보이는 것부터 조치했으며, 그게 최선인 줄 알았다.” 김 전 경위는 세월호 안에 수백 명이 남아있는 걸 알고도 우선 밖으로 탈출한 사람들을 해경 배에 옮겨 실었다. 퇴선방송이나 선내 진입 등 승객 대피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는 소형 경비정(100t급) 지휘관이다. 주 업무가 불법어선 단속이었다. 인명구조는 물에 빠진 사람을 몇 명 건져본 게 전부였다. 침몰하는 대형 여객선(6700t급)을 눈앞에 두고 그는 경험 부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김 소방경은 불길에 휩싸인 건물 옆 액화석유가스(LPG) 탱크에 불이 붙지 않도록 하는데 주력했다. 1994년 12명이 사망한 서울 마포구 아현동 가스폭발 현장의 경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119상황실로부터 ‘2층 구조’ 연락을 받은 뒤에도 가스통 지키기에 몰두했다. 3층과 옥상의 눈에 보이는 사람만 구조했다. 화재 초기 2층으로 가는 비상계단은 불이 크게 번지지 않은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김 전 경위와 김 소방경 모두 경험의 덫에 빠져 최선의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이처럼 노련한 지휘관도 긴박한 현장에서는 경주마처럼 시야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이런 한계를 최소화할 시스템을 마련하는 게 상급자의 몫이다. 그러나 상급자들은 책임소재에서 멀리 떨어져있고 말단 지휘관이 모두 떠안는다면 참사의 재발을 막기 어렵다. 세월호 참사 때 청와대와 해경 지휘부는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김 전 경위가 유일한 정부 측 ‘책임자’였다. 당시 한 검찰 간부는 “300명 넘게 죽었는데 희생양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476명을 태운 6700t급 여객선의 침몰을 100t급 경비정 하나로 막아서야 했던 해경의 인명구조 체계는 세월호 후에도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이번 제천 화재 역시 현장 지휘관을 끌어내리는 ‘한풀이식 정의’로는 화마에 갇힌 사람들을 구할 수 없다. 2014년 김경일, 2017년 김종희에 이어 참사 때마다 실패한 지휘관이 양산될 뿐이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2018-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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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집 개도 물 수 있잖아요” 중-소형견 위탁훈련 줄이어

    “뽀미, 옳지!” 9일 경기 김포시 반려견 행동교정 훈련소 ‘리더스독’ 운동장. 작은 몸집의 치와와가 산책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뽀미’로 불리는 이 반려견은 앙상한 다리를 앞뒤로 휘저으며 훈련사의 보폭에 맞춰 걸었다. 주인 통제에 잘 따르게 하려는 훈련이었다. 견주 A 씨는 “평소 뽀미가 가족들을 물곤 했는데 작고 아기 같아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게 사실”이라며 “‘최시원 프렌치불도그’ 사건 이후 사람을 무는 습관을 방치하면 안 될 것 같아 훈련소를 찾았다”고 말했다. 맹견 전문으로 알려진 이 훈련소에는 최근 중·소형견을 키우는 주인들의 훈련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이날 30분 간격으로 진행된 8번의 훈련에서 ‘교육생’은 거의 뽀미 같은 작은 개들이었다. 치와와 포메라니안 웰시코기를 비롯한 이들 17마리는 별도 공간에서 ‘훈련 대기’를 하고 있었다. 유명 한식당 ‘한일관’ 대표가 아이돌그룹 슈퍼주니어 멤버 최시원 씨의 반려견에게 물린 뒤 숨지는 사건이 벌어지자 새롭게 등장한 풍경이다. 윤재하 리더스독 훈련소장은 “사건 전 하루 서너 건 정도이던 중·소형견 훈련 문의가 최근 20여 건으로 늘었다. 기존에는 일반 개가 맹견 5마리당 1마리꼴이었는데 지금은 비슷하다”고 말했다. 견주들이 가장 많이 물어보고 관심을 갖는 교육은 입마개 착용 훈련이다. 경기도 등 일부 지방자치단체가 견종에 상관없이 무게 15kg 이상 반려견에 대해 외출할 때 입마개 착용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어서다. 현행 동물보호법은 아메리칸 핏불테리어, 도사견 등 6종에 대해서만 입마개 의무화를 규정하고 있다. 몸무게가 15kg에 육박하는 반려견을 키우는 주인들로선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견주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웰시코기는 평균 체중 13kg, 골든레트리버는 대체로 20kg이 넘는다. 이날 리더스독 훈련소에서는 맹견은 아니지만 몸무게가 50kg에 이르는 카네코르소 한 마리가 입마개 훈련을 받고 있었다. 훈련사가 “입!” 하고 외치면 훈련사 손에 들린 입마개 안으로 입을 밀어 넣는 동작을 반복했다. 윤 소장은 “견주들이 최근 입마개를 많이 사는데 막상 씌우려 하면 개들이 거부하는 경우가 많아 난감해한다. 입마개를 하고도 물과 먹이를 자유롭게 먹을 수 있도록 적응하게 해야 개들이 입마개를 피하지 않는다”고 조언했다. 반려견 훈련에 대한 지자체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한국애견협회에 따르면 ‘최시원 프렌치불도그’ 사건 이후 협회에 들어온 지자체 강의 요청이 30건에 달했다. 박애경 부회장은 “전국에 시설장을 갖춘 훈련소가 70여 곳에 불과해 밀려드는 반려견 훈련 문의를 소화하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김포=김단비 기자 kubee08@donga.com}

    • 2017-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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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찰 등 800여명, 안전 레이스 지킴이”

    “시민들이 청명한 가을 날씨를 만끽하며 도심을 달릴 수 있도록 안전 확보에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김정훈 서울지방경찰청장(사진)은 10일 “올해 15회째인 서울달리기대회는 약 1만 명의 참가자가 서울 도심을 달리는 대규모 축제인 점을 감안해 교통경찰과 모범운전사 등 800여 명을 배치해 교통을 철저하게 관리하겠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어 김 청장은 “올 도심에서 열린 다양한 문화체육 행사는 시민들의 협조로 무사히 마무리됐다”며 “이번 대회도 공감하면서 동참하는 대회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서울지방경찰청은 대회 당일인 15일 원활한 흐름을 위해 탄력적으로 교통을 통제한다. 출발지인 세종대로(서울시청 앞∼세종대로 사거리)와 도착지인 무교로(시청 삼거리∼모전교) 구간은 이날 오전 6시 반부터 10시 반까지 순차적으로 통제된다. 마라톤 코스인 종로(세종대로 사거리∼흥인지문)→동호로(흥인지문∼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지로(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지로1가)→청계천로(청계광장∼청계5가∼청계광장) 구간은 오전 7시 50분부터 9시 반까지 차례대로 통제된다. 청계천로(청계6가∼제2마장교) 구간은 오전 7시 50분부터 9시 10분까지 통제한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2017-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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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박근혜 5촌 살인사건’ 수사기록 곧 공개… 박지만 등 통화 정황땐 재수사 가능성

    6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65·구속 기소)의 5촌 조카들 사이에 벌어진 살인사건의 비공개 수사기록이 피해자 유가족에게 곧 공개된다. 서울북부지검은 서울행정법원이 최근 “수사기록을 유족에게 공개하라”고 판결한 데 대해 항소를 포기했다고 2일 밝혔다. 검찰은 그동안 수사 기밀 유출 가능성 등을 이유로 수사기록 공개를 거부해 왔다. 이 사건은 살해당한 박 전 대통령의 5촌 조카 박용철 씨(사망 당시 49세)가 박 전 대통령 남매의 육영재단 운영권 분쟁에 깊숙하게 개입했던 인물이어서, 사건에 숨겨진 배후가 있을 거라는 음모론이 끊이지 않았다. 박 씨가 숨진 시점은 박 전 대통령의 여동생 박근령 씨 남편인 신동욱 씨(49) 재판에 증인으로 나서기 직전이었다. 신 씨는 2007∼2009년 인터넷에 “박지만 씨가 육영재단을 강탈했고 박용철 씨에게 위협을 당했다”는 글을 올렸다가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던 중이었다. 박용철 씨는 당시 “박지만 EG 회장의 비서실장과 통화한 녹음 파일이 있다”며 육영재단 운영권을 둘러싼 폭력사태 배후가 박 회장이라고 암시하는 듯한 주장을 했다. 2011년 9월 박용철 씨는 서울 북한산 등산로에서 칼로 복부 여러 군데를 찔리고 머리도 망치에 맞아 함몰된 채 발견됐다. 그의 시신이 발견된 장소에서 3km 떨어진 숲속에서는 박 씨의 사촌형 박용수 씨(당시 51세)가 나무에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검찰과 경찰은 “박용수 씨가 금전 문제로 박용철 씨에게 앙심을 품었다”는 지인들의 진술을 근거로 박용수 씨가 박용철 씨를 살해하고 자살한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따라 검찰은 숨진 박용수 씨에 대해 ‘공소권 없음’ 처분을 하고 사건을 종결했다. 박용철 씨 유족은 수사 결과를 믿기 어렵다며 검찰에 박용철 박용수 씨의 사망 전 한 달간 통화기록과 휴대전화 발신 기지국 주소, 같은 기간 두 사람이 통화한 인물들의 신상정보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검찰은 기록 공개를 거부했고, 유족은 이에 불복해 소송을 냈다. 이번에 공개되는 기록에서 숨진 박용철 박용수 씨가 박 회장 등 박 전 대통령 측 관계자와 통화한 사실 등 새로운 정황이 드러나면 사건 재수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신광영 neo@donga.com·구특교 기자}

    • 2017-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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