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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 모르는 소리 하네.” 한국에 살면서 이 소리 안 들어본 사람 있다면, 손들어 보자. 살짝만 순진하거나 한가한 소리를 하면 꼭 돌아오는 답. 때론 세상을 바꾸자는 정당한 권리 요구에도 저 딱지를 붙여 입을 틀어막기도 한다.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인 저자도 피해갈 수 없었다. 우리가 사회문제 해법을 사회학에서 구하지 않은 지는 오래 됐다. 오히려 저자의 귀에는 “왜 사회학자들이 해석하는 세계와 내가 경험한 세상은 어긋날까”, “사회학자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이론을 내가 안다고 나의 삶이 바뀌는가”란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그리고 “사회학자는 나보다 세상물정을 알지 못해”란 소리는 비수가 돼 꽂혔다. 저자는 지난해 10월 출간한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에서 마흔여덟 나이에 혼자 살고 있는 자신의 경험에 사회학 이론을 접목한 ‘자전적 사회학’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번 책에선 삶 전체로 자전적 사회학의 범위를 넓혔다. 그는 부지런히 세속 풍경을 채집하고 탐정처럼 고립된 생각, 상식, 사건 속에서 전체를 꿰뚫는 실마리를 찾아낸다. 글도 연구실이 아닌 삶의 현장 한가운데서 태블릿PC로 썼다. 도쿄 롯폰기힐스 앞 스타벅스에서 시작해 일산 웨스턴돔의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 서울 지하철 3호선 안, 일산과 강남을 오가는 M7412번 버스 안이 그 무대였다. 저자가 풀어낸 25가지 화두 중 ‘성숙’부터 살펴보자. 그는 오늘날 한국을 ‘배운 괴물들의 사회’라고 진단한다. 그가 본 모습은 이렇다. 우리는 사람이 배워야만 금수와 구별된다고 믿었고 미친 듯이 배웠다. 읽고 쓰는 능력이 없는 사람은 고작 1.7%밖에 없고 대학진학률은 81.9%, 인구 1만 명당 박사는 2.1명이다. 그렇지만 지하철에서는 ‘싸가지 없는 애들’과 ‘추잡스러운 중년’과 ‘나잇값 못하는 늙은이들’이 뒤섞여 있단다. 저자는 철학자 칸트의 ‘칸트의 교육학 강의’를 인용해 인간이 야만에서 벗어나 성숙한 인간이 돼야 한다고 역설한다. 배움에서 입신양명의 도구가 아니라 성숙한 인간으로의 완성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 지금처럼 팽창과 성장에 눈이 멀면 범죄를 저지르는 괴물 생산 공장을 멈춰 세울 수 없단다. 배웠지만 성숙하지 못한 인간이 못 배웠지만 성실한 사람들의 삶을 통째로 파괴하는 괴물 짓을 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자고 경고한다. 성숙하지 못한 인간들은 소비 앞에 서서 침을 질질 흘린다. 과시적인 소비가 만들어 낸 유행은 사유를 지배하더니 이제 세상을 바꿀 가능성마저 가로막고 있다는 분석은 설득력 있다. “유권자일 때 유효하던 1인 1표제라는 민주주의의 놀라운 평등은, 소비자로 변화하자마자 구석에 처박힌다. (중략) 부자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관심이 커질수록 부자들의 불법 상속에 무관심해지고, 쇼핑몰에 습관적으로 북적대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투표율은 낮아지고, 고객상담실에 전화를 걸어 소비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공적인 일에 분노하는 사람들은 줄어드는 법이다.” 저자는 타락한 처세술에 새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책을 썼다면서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처세란 리얼리티와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먹고 자라기 때문이란다. 사회적 문제를 외면한 채 자기계발서만 손에 쥐고 나 혼자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자기계발서) 책을 덮고 한번 물어보자. 이건희의 성공은 자기계발서 덕택인지, 아니면 이건희의 아버지가 이병철이었기 때문인지.” 새해 첫날 영혼 없는 신년 인사가 담긴 SNS에 시달렸거나 새해엔 삶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길 기도하며 떠오르는 태양을 스마트폰에 담았던 사람들에게 추천한다.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본 변호인은 ‘역사란 무엇인가’를 포함해서 피고인들이 읽었다는 불온서적 10여 권을 오늘 아침 서점에서 사가지고 왔습니다. 시중에서 아무나 살 수 있는 이 책들은 서울대에서 권장도서로 추천도 했습니다. 이 책들이 불온서적이면 대한민국 최고 대학이라 카는 데도 불온단체라 이 얘깁니까?” 영화 ‘변호인’(양우석 감독)에서 송우석 변호사(송강호)가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불온서적이 아님을 변론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대사다. 이 장면엔 고 리영희 한양대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도 잠깐 등장한다. ‘변호인’이 2일 현재 누적관객 635만 명을 넘어서며 흥행 돌풍을 이어가는 가운데 영화 속 책들도 덩달아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영화 덕을 가장 많이 보고 있는 책은 극중 주인공이 법정에서 들어 보이는 ‘역사란 무엇인가’. 이 책을 내는 까치출판사 관계자는 “이 책은 원래 대학 신학기인 3월과 9월에 많이 팔려 매년 6000부가량 나가는데, 지난해 말 영화가 개봉된 후 보름 만에 전체의 10%인 600부가 판매됐다”고 말했다. 인터넷서점 인터파크의 집계에 따르면 ‘역사란 무엇인가’의 판매량은 개봉 전보다 3배 이상으로 증가했고, 교보문고에서도 하루 평균 5권에서 20권으로 늘어났다. ‘전환시대의 논리’와 ‘난쏘공’의 판매량도 늘었는데,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책들을 구입한 독자의 절반 이상이 40대였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요즘 사극을 보면 조선시대 관복 색깔은 크게 둘 중 하나다. 빨강 아니만 파랑. 사극 팬은 어느 정도 눈치를 챘겠지만 정3품 이상 당상관은 홍색 계열, 종3품 이하 당하관은 청색 계열의 관복을 입는다. 하지만 이런 관복의 색깔이 정반대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궁궐 밖 행차 때 활동성을 높이기 위해 입는 철릭 색깔도 뒤집힌 경우가 발견된다. 어떤 게 맞을까. 성종 7년(1476년)에 완성된 경국대전은 평상 집무복인 상복(常複)을 입을 때 1∼3품은 홍색, 4∼6품은 청색, 7∼9품은 녹색을 입도록 규정했다. 그 이전엔 복색 규정이 따로 없었고 이후에도 16세기가 되면 품계에 상관없이 잡색(雜色) 상복을 입었다. 즉 여러 색이 뒤섞인 현녹색 토홍색, 청홍색 옷을 입었다 그럼 품계는 어떻게 구별했을까. 단종 2년(1454년) 이후 흉배(가슴과 등에 다는 표장)로 구별했다. 시대별 차이가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문관의 경우 당상관은 쌍학, 당하관은 단학, 무관의 경우 당상관은 쌍호, 당하관은 단호 흉배를 달았다. 그러다 17세기가 되면 집무용으로 입던 상복이 의례용 복장이 되고 흉배가 없는 시복(時複)이 집무용 복장이 된다. 의례용 상복은 아청색, 집무용 시복은 주로 담홍색이나 심홍색 계열을 많이 입었다. 영조 22년(1746년) ‘속대전’이 공포되면서 상복과 시복을 모두 흑단령(흑색의 둥근 깃 옷)으로 통일하면서 흑색으로 통일됐다. 철릭의 경우 속대전에 당상관은 남색, 당하관은 청현색을 입도록 규정했지만 임금을 호종할 땐 품계에 상관없이 홍색을 입도록 했다. 풍속화에 등장하는 별감이나 악공이 홍색 계통 철릭을 입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임금의 행차 때 별감은 호위를 맡고, 악공은 풍악을 울려야 했기 때문이다. 도움말=이민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권오창 화백(조선시대 영정 전문)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착한식당’의 비법을 전수받을 1인은 누구? 채널A 간판 교양 프로그램 ‘이영돈 PD의 먹거리X파일’(매주 금요일 오후 11시)은 3일 100회 특집으로 ‘착한 식당을 나눠 드립니다’를 방송한다. 먹거리X파일이 선정한 착한식당 주인들이 나서서 형편이 어려운 예비 착한식당을 돕는 내용이다. 제작팀은 지난해 11월 27일 이 프로그램에 참가할 희망자 신청을 받아 14명의 후보자를 선정했다. 부부가 모두 신장 이식 수술을 받아 식당 운영이 어려워진 가정, 보이스피싱 사기를 당한 주인 등 딱한 사연을 가진 이들이다. 이날 방송에서는 음식 전문가, 착한식당 주인, 제작팀의 까다로운 검증을 거쳐 최종 1인이 선정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검증 과정에는 실험 카메라를 이용한 ‘진정성’ 테스트도 있다. 일부러 저가 식재료 구입을 권유하고 3000원밖에 없는 할머니가 식사를 주문하게 한 뒤 주인의 반응을 체크하는 시험이다. 이 최종 관문을 통과한 식당 주인은 착한식당 주인을 만나 재료 손질부터 맛의 비법까지 전수받는다. 아무런 특징이 없던 식당 안팎 표정이 지나가는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보기에도 맛있어 보이는 식당으로 변신하는 과정도 확인할 수 있다. 2012년 2월 10일 1회 방송을 시작한 먹거리X파일은 ‘제가 한번 먹어 보겠습니다’란 유행어와 함께 한국 사회의 음식 문화에 많은 변화를 이끌어 냈다. 까다로운 검증 절차를 통과하고 ‘착한식당’ 인증을 받은 식당 주인들은 전국에서 몰려든 손님들로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착한식당’을 찾았으나 재료가 떨어져 발길을 돌려야 했던 식도락가들이 근처의 다른 비슷한 식당을 찾는 덕에 주변 상권이 살아나기도 했다. 인공감미료(MSG)와 나트륨 줄이기, 빙초산 안 쓰기, 반찬 재탕 안 하기와 같은 국민적인 먹거리 운동이 일어난 것도 먹거리X파일이 이끈 변화다. 유명 식당이나 대형 백화점은 조리음식에 미리 MSG를 첨가하지 않고 손님이 선택하도록 방침을 바꾸었고, 공군은 모든 부대에서 MSG를 퇴출시키기도 했다. 착한 먹거리, 착한식당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제작진은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겪었다. 제작 기간만 반년이 걸린 ‘라면이 말하다’ 편의 구장현 PD는 라면을 주식 삼아 10일 내내 30봉지가 넘는 라면을 먹어야 했다. 정민지 기자는 착한 치킨을 찾기 위해 50곳이 넘는 치킨 집을 돌아다니며 먹다가 몸무게가 5kg 이상 늘었다. 김성옥 동원대 호텔조리과 교수는 “먹거리X파일은 단순 고발 프로그램이 아니다. 착한 재료, 조리법, 먹는 방법까지 건강과 먹거리와 관련된 지혜를 알려 주고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 낸 깊이 있는 교양 프로그램이었다. 앞으로 더욱 재밌고 충실한 정보가 담긴 방송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영돈 PD는 “착한 먹거리를 찾으려고 열심히 뛰다 보니 어느새 1년 10개월이 지났다. 시청자들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가기 위해 나눔 착한 식당과 같은 다양한 시도를 하고 더 많은 사람이 착한 먹거리를 누릴 수 있도록 종류도 늘려 가겠다”고 약속했다.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KBS 드라마에서 연애정보지 ‘열애’ 담당 기자로 나오는 소녀시대 윤아(23·사진 오른쪽)가 가수 겸 배우 이승기(26)와 연애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승기의 소속사 후크엔터테인먼트는 1일 “두 사람이 연예계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서로 호감을 갖게 됐다. 지금 막 시작하는 단계”라며 일부 인터넷 신문이 보도한 열애설을 인정했다. 윤아의 소속사인 SM엔터테인먼트도 “서로를 알아 가는 단계”라고 열애 사실을 확인했다. 윤아는 KBS 월화드라마 ‘총리와 나’에서 총리(이범수)와 사랑에 빠지는 연애정보지 여기자 남다정으로 나온다. 이승기는 tvN의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누나’에 ‘짐꾼’으로 출연 중이다. 이승기는 지난해 말 MBC 연기대상 최우수상, 윤아는 KBS 연기대상 우수상을 받았다.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마하티르와의 대화(톰 플레이트 지음·알에이치코리아)=미국 내 ‘아시아 정보통’으로 꼽히는 로스앤젤레스타임스 전 논설실장인 저자의 ‘아시아의 거인들’ 시리즈 중 하나. 저자는 말레이시아 전 총리인 마하티르 모하맛과 4차례 인터뷰하고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던 그의 리더십에 주목한다. 1만5000원.존재의 순간들(버지나아 울프 지음·부글)=1941년 저자가 59세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뒤 발굴된 원고를 모은 책. 저자가 말하는 존재의 순간은 충격이나 깨달음, 계시를 통해 개인이 존재의 실체를 온전히 느끼는 순간을 말한다. 1만5000원.넘치는 매력의 사나이 예수(박태식 지음·들녘)=대한성공회 사제인 저자가 현대인이 알아야 할 인간 예수를 쉽고 설득력 있게 풀어냈다. 책 속 예수는 넘볼 수 없는 지혜와 막강한 화술로 ‘인간 너머’의 삶을 살다간 역사적 인물로 그려진다. 1만7000원.고독의 즐거움(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에이지21)=생태문학의 고전 ‘월든’을 쓴 저자는 사상가, 작가, 환경운동가로 살며 깊은 사색과 성찰이 담긴 강연과 저술 활동을 했다. 그의 글 속에서 고독을 즐기는 법을 알려주는 155개 문장을 골라 담았다. 1만3000원.중국 일등기업의 4가지 비밀(김용준 외 지음·삼성경제연구소)=미국 경제지 포천이 선정한 2013년 ‘글로벌 500대 기업’에 중국 기업은 89개가 포함됐다. 한국이 5년째 14개로 제자리걸음인 데 비해 중국은 2배 이상 늘었다. 중국 각 산업을 대표하는 기업 13개를 선정해 그 비결을 분석했다. 2만 원.박경미의 수학콘서트 플러스(박경미 지음·동아시아)=‘수학을 더 좋아하게 만드는 책’으로 불리며 수학 교양서로는 최고 판매를 기록한 ‘박경미의 수학콘서트’의 개정증보판. 문학, 과학, 음악, 미술, 역사, 스포츠에 숨겨진 다채로운 수학 이야기가 펼쳐진다. 1만4500원.식당부자들(이상규 지음·이상)=14개 식당을 개업하고 8번의 폐업을 경험한 현직 식당 주인인 저자가 절대 망하지 않는 식당을 만드는 비결을 알려준다. 창업 전 최소 1년간 아르바이트로 일하고, 이익보다는 일단 매출부터 올릴 것을 권한다. 1만4000원.}

열쇠 구멍을 통해 보이는 거의 벌거벗은 여성의 뒷모습이 담긴 빨간색 표지가 눈길을 확 사로잡는다. 덴마크 화가 크리스토페르 에케르스베르의 ‘아침 단장’이다. 프랑스 파리8대학 미술사 교수인 저자는 책 첫 문장에서 “나는 관음증 환자다. 부끄러워도 어쩔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러더니 “당신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따지고 보면 그림을 보는 행위는 관음증 환자의 행동과 다를 바 없다”며 동참을 요구한다. 욕망의 대상을 그림 속에 가둬 간직하려는 욕망이 그림의 출발점이란다. 우리도 부끄러운 척, 점잖은 척을 버려야 그림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책에는 여인들이 옷을 벗고 목욕을 하고 몸을 말린 뒤 거울 앞에서 장신구를 착용하기까지의 몸단장 과정이 9개 장으로 구분해 담겨 있다. 기원전 1세기 폼페이 유적에 그려진 ‘몸단장하는 여인’ 벽화부터 1963년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목욕하는 여인’까지 79점을 담았다. 저자는 그림 속 여성들을 ‘언제나 지금 여기 있는 여자, 그리고 언제나 우리와 동시대를 사는 여자’로 상정하고 모두 ‘그녀’라고 부른다. 그는 직접 또는 그녀의 입을 빌려 그림에 담긴 몸단장의 의미와 역사를 풀어낸다. 여성의 몸단장은 우리와 예술가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최적의 수단이었다. 책은 유쾌하다. 저자는 독자가 무안할 정도로 여체를 찬양하고 때론 “‘목욕하는 여인들’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눈을 깨끗하게 닦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아닐까”라며 능청도 떤다. 그림 속 모델이 신은 스타킹 발가락 부분에 난 구멍에서 화가의 생각을 읽어낼 정도로 꼼꼼함도 자랑한다. 책을 읽으면 눈앞의 매력적인 여성을 그리면서 화가가 냈을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들려온다. 프랑스 화가 에드가 드가는 “열쇠 구멍으로 (여자를) 엿보고 싶다”고 동료 화가에게 털어놓고, 시인 보들레르는 여체를 바라보는 장 오귀스트 앵그르의 시선이 “사랑에 빠진 연인처럼 비굴할 정도로, 몸의 윤곽에 드러난 가장 가벼운 굴곡까지 쫓아간다”고 말했다.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몇 년 전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 기자인 저자와 프리랜서 사진가 미르코 탈리에르초는 뮌헨의 한 레스토랑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한때 자신이 얼마나 멋진 남자였는가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비범한 요리사로 주제가 바뀌었다. 탈리에르초는 선반공으로 일하려고 이탈리아에서 독일로 왔다가 독일인이 질 나쁜 이탈리아 생선도 잘 먹는 모습을 보고 요리사가 되기로 결심한 남자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는 영화 ‘대부’ 촬영 때 요리를 했다며 배우 알 파치노와 관련된 허풍을 늘어놓는 자신의 아버지도 덧붙인다. 그날 수다를 잊지 못한 저자는 “모든 요리사는 제정신이 아니다”란 확신을 갖는다. 곧 세계 각국의 ‘파격과 야성의 요리사’를 만나러 탈리에르초와 떠난다. 둘은 독일뿐 아니라 미국, 스페인, 보스니아, 케냐 등 11개국에서 요리사 17명을 만난다. 책은 최고의 이야기를 들려준 요리사에게 바치는 감사의 표시란다. 미국 텍사스에선 사형수 200명에게 사형 직전 마지막 식사를 만들어 준 요리사 브라이언 프라이스를 만난다. 현재 텍사스의 평범한 식당 주방장인 그는 처남 납치와 전처 강간 혐의로 텍사스 월유닛 교도소에서 1989∼2003년 복역했다. 그는 피자가게 아르바이트로 일한 게 전부였지만 교도소 주방 보조로 일하다 사형수의 마지막 식사를 전담하게 됐다. 프라이스는 1991년 2월 26일 살인을 저지른 사형수의 마지막 식사를 처음 만들어 준다. 사형수는 필레미뇽(뼈 없는 쇠고기 부위를 베이컨으로 감아 구워 만든 스테이크)과 파인애플, 케이크, 커피, 과일을 주문했다. 그는 필레미뇽 재료를 구하지 못해 평범한 스테이크를 만들어 줬다. 사형수는 교도소 신부를 통해 마지막 식사가 아주 좋았다고 전한다. 죽음을 앞둔 사형수가 가장 많이 찾은 요리는 스테이크였다. 하지만 1993년 교도소 규정이 바뀌면서 마지막 식사에 쓸 식재료는 교도소 주방에 보관된 것만 사용하도록 정해졌다. 당연히 마지막 식사의 풍족함이나 낭만도 사라졌다. 사과 한 알을 요구한 사형수는 잘게 썬 통조림 사과를 먹었고, 튀긴 대하 10마리를 부탁한 사형수는 냉동 생선 튀김을 먹어야 했다. 똥을 요구했던 사형수에겐 요구르트를 줬다. 프라이스는 당시를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로 기억한다. 원래 사형제를 찬성했던 그는 “(사형제 찬반에 대해) 대답하기 힘들다. 다만 그들 모두를 위해 기도했다”고 말한다. 세상을 바꾸려고 요리하는 사람도 있다. 저자는 독일인 밤 카트를 시위 현장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만난다. 밤 카트는 시위대가 구호와 돌로 경찰, 군인과 맞서 싸우는 동안 멀지 않은 야전 취사장에서 요리한다. 그린피스 환경감시선인 레인보 워리어호에서 요리하기도 했다. “밥이 없으면 투쟁도 없다”고 말하는 그의 인생 모토는 이렇다. “모두가 피델 카스트로가 될 수는 없어요. 감자 껍질을 벗기는 사람도 있어야죠.” 저자는 인터뷰 대상으로 ‘새로운 요리의 아버지’로 꼽히는 세계 최고 요리사 폴 보퀴즈와 케냐 나이로비 쓰레기집하장 요리사 페이스 무토니 중 한 명을 택해야 했을 때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한다. 무토니는 납과 수은으로 범벅된 쓰레기집하장에서 모닥불로 요리하는 판잣집 식당을 열었다. 쓰레기 더미에서 주워 온 플라스틱 접시에 음식을 담아낸다. 밥과 콩, 옥수수 가루 가격은 20실링(300원)이다. 저자는 “그녀와 아이들은 매일 먹어야 한다. 음식은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며 그녀의 삶을 결정하는 테마다. 더 이상은 말할 수 없다. 사실 그녀의 삶은 그리 할 말이 많은 것이 아니다”라고 썼다. 책 속에는 한 끼에 4만 달러를 받는 요리사, 독재자의 전속 요리사, 투우 꼬리 요리사도 나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요리사의 레시피도 수록돼 있다. 원제는 Teufelskoche(악마의 요리사들·2011년).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 사이픽스 서비스디자인팀장 팽한솔 씨(26)는 디자이너다. 하지만 올 초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에서 간호사 복장을 하고 일주일 동안 지냈다. 동료들과 3교대로 응급실을 지키며 개선점을 찾기 위해서다. 응급실은 촌각을 다투는 위급 환자와 경증 환자가 뒤섞여 혼란스러웠다.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은 환자 및 보호자와 그런 상황이 일상이 돼 버린 의료진 사이에 생긴 불신의 벽은 높았다. 보호자는 “가족이 죽어 가는데도 의료진이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 간단한 질문을 해도 사고뭉치 취급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의료진도 “식사도 못 하고 밤낮으로 환자를 돌보는데 정신없는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팽 씨는 일주일 동안의 관찰 결과와 2개월간의 의료진 면담을 바탕으로 응급실을 새롭게 디자인했다. 환자 응급 정도에 따라 7개 구역으로 나누고 도보 환자용과 앰뷸런스용 입구를 따로 만들어 응급실 내 동선이 최대한 겹치지 않도록 새로 짰다. 의료진과 환자 사이의 불신의 벽은 대형 전광판을 만들어 해결했다. 환자는 전광판을 보고 자신의 담당의와 간호사, 검사 진행 정도를 알 수 있게 됐다. 팽 씨는 “처음에는 ‘응급실에 웬 디자이너가 왔느냐’며 신뢰하지 않던 병원 관계자들도 개선 이후 혼잡과 혼란이 줄어들자 ‘전쟁터가 아니라 환자를 살리는 공간으로 출근하게 됐다’며 고마워했다”고 전했다. 팽 씨처럼 일상이나 공공 서비스 영역에서 원인도 모른 채 겪는 불편함을 바로잡아 주는 일을 서비스 디자인이라고 부른다. 2010년경부터 국내에 도입된 서비스 디자인이 다양한 분야에 접목되고 있다. 예쁘고 보기 좋은 물건 디자인에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디자인으로 옮겨 가고 있는 것이다. 디자인 경력 20년 차 노미경 위아카이 대표(43)는 노인들을 위한 약 처방 서비스를 개선하고 있다. 강북삼성병원이 고객의 목소리를 병원 서비스에 반영하려고 만든 해피 청진기 위원회에 ‘꽃보다 할배’ 나영석 PD가 낸 의견이 계기가 됐다. 유럽으로 떠난 할배 출연진이 검은 봉지에 약을 담아 와선 어떤 약을 먹어야 할지 몰라서 애를 먹는다는 내용이었다. 노 씨는 책상에 앉아 디자인을 고민하기보다 노인 100여 명을 만나 인터뷰하고 불편한 점을 들었다. 노 씨는 “서비스 디자인은 사용자의 목소리를 듣고 공감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복용 시간을 알기 쉬운 픽토그램으로 알려 주고 물병도 꽂을 수 있는 약주머니를 고안했다”고 설명했다. 이정규 디자인와우 부사장(45)은 요양원과 경로당에서 노인을 위한 서비스 디자인에 힘쓰고 있다. 이 씨는 “디자이너는 관리자 시각이 아니라 사람 중심으로 바라보기에 작은 불편까지 해결할 수 있다. 결국 서비스 디자인의 핵심은 관찰과 공감인 셈”이라고 말했다. 23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OTM청담아트홀에서 열린 ‘서비스 디자인 나이트’에선 이 같은 공공 영역에서 불편을 개선하는 서비스 디자이너들이 모여 서로의 사례를 공유했다. 이를 공동 개최한 한국디자인진흥원은 올해 서비스 디자인 전담팀을 만들어 확산에 힘쓰고 있다. 윤성원 서비스디지털융합팀장(43)은 “서비스 디자인이 의료 분야에서 활발한 이유는 그만큼 서비스 제공자와 이용자의 권력 격차가 커 디자이너가 혁신해야 할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앞으로 사회 전반에서 서비스 디자인의 활약이 크게 늘어날 것이다”고 밝혔다. 세계 최초의 서비스 디자인 전문 회사인 영국 엔진의 유일한 동양인 디자이너 김성환 씨(33)는 유럽 사례를 들려줬다. 그는 “유럽 대기업을 중심으로 서비스 디자인이 단순히 물건을 판매하는 차원을 넘어 고객의 정서와 경험까지 만족시키는 최적의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은 아직 초기 단계지만 인간의 나약함과 감수성까지 서비스 디자인으로 위로하려는 시도는 유럽에서도 배울 만하다”고 말했다.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떼인 임금 받아주는 웹툰?’ 웹툰의 주인공 구고신은 대낮 길거리 공원에서 잠자고 있던 스물네 살 청년을 만난다. 청년은 공장 밀집 지역의 한 중국집에서 배달했지만 6개월째 밀린 임금을 받지 못했다. 중국집 주인은 청년이 배달 중에 오토바이를 망가뜨린 것을 구실 삼아 임금도 주지 않고 쫓아냈다. 부진노동상담소 소장인 구고신은 중국집을 찾아가 근로기준법 36조와 시행령을 근거로 밀린 임금을 요구한다. 중국집 주인이 줄 수 없다고 버티자 구고신은 중국집 단골인 주변 공장에 연락을 돌려 중국집 보이콧에 나서 달라고 설득한다. 날카로운 풍자를 담은 리얼리즘 만화를 그려온 만화가 최규석 씨(36·사진)가 17일부터 매주 화요일 네이버에서 웹툰 ‘송곳’ 연재를 시작했다. 아기공룡 둘리를 손가락 잘린 이주 노동자로 묘사한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반지하 방에 모여 사는 비정규직 청춘을 다룬 ‘습지 생태보고서’,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그린 ‘100°C’로 화제를 모았던 그가 그린 첫 웹툰이다. 제목 ‘송곳’은 송곳이 자연스레 주머니를 뚫고 나오듯 부당한 노동현실에 저항하는 ‘낭중지추(囊中之錐)’ 같은 등장인물들의 성격에서 따왔다. 주인공 구고신이 회사로부터 불이익을 당한 대형마트, 공장 노동자를 만나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프롤로그와 첫 회만 연재됐지만 젊은 직장인과 취업준비생에게 인기를 모은 웹툰 ‘미생’(윤태호 작가)의 블루칼라 버전이라 불리며 인기 몰이를 하고 있다. 프롤로그엔 댓글 8100여 개가 달렸고 전체 웹툰 순위 상위권에 오르며 30대 남성이 가장 많이 본 웹툰으로 뽑혔다. 최 씨는 직접 노동 현장을 취재하고 노동 관련 법전을 찾아가며 웹툰의 완성도를 높였다. 한 팬은 “아르바이트 학생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려면 웹툰을 꼭 보라”고 추천했다. 작가도 신성한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아야 함을 알리려는 ‘학습만화’를 그린다는 자세로 창작에 나섰다고 한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 한국만화박물관은 20일부터 내년 3월 2일까지 경기 부천시 원미구 상동 박물관에서 ‘만화, 문화재 되다!’ 기획전을 연다. 한국 만화 최초로 등록문화재가 된 김성환의 ‘고바우영감’, 김용환의 ‘토끼와 원숭이’, 김종래의 ‘엄마 찾아 삼만리’까지 만화 원화 61점과 당시 만화가 실린 잡지, 단행본, 만화가들의 작업도구들이 전시된다. 032-310-3090∼1■ 미국의 온라인 서점 아마존에서 발행하는 온라인 문예지 ‘데이 원(DAY ONE)’에 소설가 배수아의 단편소설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가 영어로 번역돼 실렸다. 정기구독자가 2만5000여 명에 이르는 데이원이 한국 문학작품을 소개한 것은 처음이다. 이 작품은 내년 초 아마존에서 전자책으로도 출간될 예정이다.}

‘신월동 주민’이라고만 밝힌 중년의 남성이 3년째 구세군 자선냄비에 1억 원을 기부했다(사진). 한국구세군 자선냄비본부는 22일 오후 50, 60대로 보이는 남성이 서울 중구 명동 입구에 설치된 자선냄비에 편지와 함께 수표 1억 원을 기부했다고 23일 밝혔다. 이 남성은 편지에서 “나라가 어려웠던 시절 나라의 부흥, 경제발전 고도성장의 주역이셨던 분들이 지금은 나이가 들어 병마에 시달리는 불우 이웃이라면 이분들이야말로 이웃의 도움이 필요하고 나라의 도움을 받아야 할 분들이 아닌가 싶다”고 썼다 당시 현장에 있던 최수진 구세군 사관학생은 “성금을 건넨 신사가 ‘좋은 일을 하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죠’라며 사랑의 성금을 기부했다”고 전했다. 이 남성은 신월동 주민이란 이름으로 2011년 12월 4일에 1억1000만 원, 2012년 12월 9일에 1억573만 원을 같은 장소에서 기부했다.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은 23일 2014년 새해를 앞두고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자는 취지의 신년 법어를 발표했다. 진제 스님은 “물과 같은 덕행으로 고통 받고 소외된 이웃, 서로 다투는 이웃이 없도록 서로를 내 몸같이 사랑하고 용서하며 통일과 세계평화를 앞당기자”며 “파도처럼 밀려오는 미래 앞에 누적된 과거의 폐습, 반목과 갈등은 지난해에 잊혀 보내고 국가와 지구촌의 행복한 내일을 우리 모두 염원하자”고 밝혔다. 천태종 종정 도용 스님도 신년법어를 통해 “꿈같은 세월에 속지 말고 명명백백 분명한 이 순간을 영원으로 살려라”며 “걱정 근심 번뇌덩이 본래 있었더냐. 언제나 밝고 깨끗한 본성의 빛을 바로 보아라”고 했다. 원불교 경산 종법사는 “넉넉한 마음을 기르고, 깊은 지혜를 닦고, 남모르게 베푸는 덕행을 쌓자”고 했고, 증산도 안경전 종도사는 “개벽은 험난한 시련이지만 동시에 위대한 희망이다”라고 밝혔다.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2000년 여름 미국의 한 대형 쇼핑몰. 한 젊은 여성이 배우 우마 서먼이 영화 ‘펄프 픽션’에서 썼던 검은 생머리 가발과 똑같은 가발을 쓴 채 들어왔다. 그는 20달러보다 싼 물건을 고르더니 조금 어수룩해 보이는 점원에게 100달러짜리 지폐를 건네고 거스름돈을 받았다. 2시간 동안 여러 쇼핑몰을 돌며 40∼50군데 가게에서 받은 거스름돈은 3000∼4000달러에 달했다. 여성이 산 물건과 받은 거스름돈은 쇼핑몰 밖에서 기다리던 남성이 받았다. 둘은 가까운 구세군 자선함에 가서 포장도 뜯지 않은 물건을 가득 넣었다. 근처에 구세군이 없으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달라’는 메모를 붙여 교회 앞에 놓아뒀다. 아기 옷, 이유식, 학용품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필수품이었다. 이 커플이 쓴 100달러짜리 지폐는 예술품의 경지에 이른 위조지폐였다. 제조자는 커플 중 남자인 아트 윌리엄스(41). 그가 위조한 달러화는 미국이 1996년 3월부터 야심 차게 발행한 ‘뉴 노트’였다. 미국 조폐청 측이 역사상 유례없는 위조방지 기술을 갖췄다고 자부하던 화폐였다. 수천만 달러 상당의 장비가 필요한 ‘슈퍼노트’(위조지폐)와 달리 그가 만든 것은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전화번호부 용지와 풀, 페인트를 활용한 수공예품이었는데 그 정교함에 수사원들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 책은 열일곱 살 때 위조지폐 기술을 배운 뒤 2001년 체포될 때까지 13년간 1000만 달러에 해당하는 위조지폐를 유통시킨 아트 윌리엄스의 삶을 추적한 흥미로운 논픽션이다. 책 제목은 ‘돈 만드는 예술’이란 뜻과 ‘돈 만드는 아트(위조지폐범 이름)’란 이중의 의미를 함축한다. 이야기는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위조지폐범으로 체포되고 3년 만에 출옥한 아트를 만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아트는 맥주 4잔을 연거푸 비우고 말문을 여는데, 독자는 그의 이야기에서 눈을 떼기 어렵다. 어린 시절 그는 여동생을 성적으로 학대했던 무책임한 아버지와 양극성 장애를 앓아 가족을 돌볼 형편이 안 됐던 어머니 사이에서 컸다. 어린 아트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해서 늘 친구 사이에선 스타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부모의 결별로 가정이 파탄나자 희망은 사라졌다. 그만큼 세상에 대한 복수심을 키웠다. 아트는 열일곱 살 때 위조지폐 기술자 다빈치를 만났다. 다빈치는 그에게 고급 인쇄 기술, 화폐 유통 개념, 수사망 피하는 법을 알려주고 홀연히 사라진다. 이후 아트의 행보는 완벽한 예술작품을 만들려는 장인과 닮아 있다. 저자는 ‘그는 위조지폐에 미쳐 있었다. 비용이 아무리 많이 들더라도 제대로 된 위조지폐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에게 지폐 위조는 예술이었고,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무대였다’고 썼다. 아트는 마음만 먹으면 수백만 달러의 돈을 찍어낼 수 있었다. 그는 돈의 노예가 된 다른 사람과 달리 돈 쓰는 여행을 하며 영원한 자유를 얻겠다는 오만에 사로잡혔다. 실상은 도피에 가까웠다. 위조지폐는 한 곳에 머물며 쓸 수 없었고 긴장과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오랜 기간 갈구했던 가족 간의 사랑과 추억은 애초에 돈으로 살 수 없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저 위조지폐 한 장을 얻으려고 발버둥칠 뿐이었다. 그리고 함께 파멸했다. 미국 연방정부는 그를 체포했지만 주로 그의 증언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에 유죄 인정을 대가로 그의 형량을 3년으로 줄여줬다. 하지만 출옥 후 2007년엔 그의 기사를 읽은 아들이 지폐 위조에 손을 대는 바람에 그 죄까지 뒤집어쓰고 2015년까지 다시 철창신세를 지고 있다. 책에 소개된 위조지폐의 역사도 흥미롭다. 저자는 지폐 위조의 원조로 기원전 3세기경 ‘주화에 불순물을 섞은 죄’로 추방된 이력이 있는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소개한다. 디오게네스는 “진정한 자유는 물질과 사회제도를 거부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고 했다.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연말을 맞아 ‘시집 연하장’은 어떨까. 최근 한 중견 출판사의 대표는 시집 20권을 구입했다. 지난해 지인들에게 보냈던 연하장을 대신해 올해는 시집 표지 뒷면에 연말 인사를 쓴 ‘시집 연하장’을 준비한 것이다. 그는 “연하장은 한 번 읽고 덮기 마련인데, 시집은 곁에 두고 내내 읽을 수 있다.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시가 담겨 있으니 인사말만 살짝 덧붙이면 된다”고 했다. 비교적 싼 가격도 시집을 선택한 이유다. 그가 구입한 시집 한 권 값은 8000원. 요즘 괜찮다 싶은 연하장은 한 장에 5000원이 넘고 비싼 것은 1만 원까지 나간다. 시집은 두껍지 않아 지인에게 우편으로 보내도 연하장과 가격 차가 적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김소연 시집 ‘수학자의 아침’, 이병률 시집 ‘눈사람 여관’, 이성복 시집 ‘래여애반다라’ 등 3종을 여러 권씩 구입했다. 올해 나온 시집 중 재밌게 읽은 시다. 그는 “시집 연하장을 보내는 것에서 끝내지 않고 어떤 시를 의미 있게 읽었는지 나중에 지인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올해 반응이 좋다면 내년엔 더 많은 시집을 구입할 생각이다”라고 했다. 시집 연하장이 언뜻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연하장 대신에 책을 보내는 풍속은 과거에도 있었다. 1983년 12월에는 다른 선물보다 싸고 인식이 좋은 책을 선물하는 유행이 퍼져 출판계가 대목을 맞았다. 당시 젊은층은 소유욕을 자극하는 예쁜 책을 선물하고, 선배는 후배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책을 선사했다. 1992년 12월엔 책에 간단한 인사말을 담아 전하는 ‘책 카드’가 인기라는 언론 보도도 나왔다. 2013년 연말을 맞아 잊고 있던 풍속을 되살린다는 기분으로 시집 연하장을 보내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 출판계는 불황에 빠져 있지만 연말에 책을 선물하는 풍속에 대한 과거 기사들을 찾아 읽어보니 관통하는 주제가 하나 있었다. 책 선물은 상대에게 부담을 주지도 않고 욕먹는 경우도 없다는 점이다.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우리 민옥이 만나러 성당 가자.” ‘민옥이’라니, 성당에 트로트 가수라도 온 걸까. 지난달 25일 저녁, 월요일인 데다 겨울비까지 내렸지만 대구 삼덕젊은이성당에는 민옥이를 만나러 온 신자 300여 명이 모였다. 황영삼 신부가 “아이고 비도 오는데 여까정 와줘서 고맙십니더”라고 인사하자 박수가 울려 퍼졌다. 민옥이의 정체는 천주교 대구대교구 신부 13명으로 구성된 사제 밴드. 신부들은 인사말이 끝나자 보컬 드럼 건반 베이스를 맡아 성가 ‘내 맘에 주님 오시길 원해’를 들려줬다. 이날 기도회 인도를 맡은 박준용 신부는 11월 위령성월을 맞아 죽음을 주제로 신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는 자신의 영정 사진과 유언장을 들고 나와 무거운 주제를 술술 풀어 나갔다. 신자들은 “역시 민옥이!”라며 호응을 아끼지 않았다. 민옥이 밴드로 활약 중인 천주교 대구대교구 2∼8년차 젊은 신부들을 17일 대구 계산문화관에서 만났다. 원래 이름은 ‘B.O.F’(Band of Father)이지만 이들이 진행하는 ‘미사와 함께하는 노래기도’의 줄임말인 ‘미노기’가 유명해지면서 친근감을 가미한 ‘민옥이’가 됐다. 이날 인터뷰에는 13명 중 황영삼(건반·35) 박준용(보컬·34) 장경식(일렉기타·32) 김병흥(베이스·30) 황은모(보컬·30) 김요한(신시사이저·29) 신부가 참가했다. 신부 수만 따지면 전국 최대 규모 밴드라고 한다. 2005년 신학교 동기 5명이 밴드 활동을 시작한 게 출발점이 됐다. 청년세대에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서였다. 황영삼 신부는 “개신교에선 찬양 문화가 발달돼 있는데 천주교는 적극 활용하지 못했다. 찬양도 좋은 기도 방법이라 노래기도를 고안했다”고 설명했다. 민옥이 콘서트는 지난달까지 모두 32차례 열렸다. 기도회 때마다 2, 3개월을 준비해 매번 새로운 무대를 선보인다. 토크쇼 콩트 뮤지컬이 가미될 때도 있다. 소외된 이웃을 위한 공연에선 트로트와 인기 가요를 신나게 연주하기도 한다. 고정 팬 수십 명은 매번 색다른 민옥이 무대를 만나려고 일정을 챙기기도 한다. 김요한 신부는 “요즘 청년들이 갑갑하고 목말라하는데 여기 오면 샘을 만난 것처럼 즐거워한다. 위로와 용기를 얻어가는 신자들의 모습을 보면 쉬는 날 연습하는 것도 전혀 힘들지 않다”고 말했다. 박준용 신부는 “성탄절이면 어딜 가나 캐럴이 울려 퍼진다. 그 속에는 예수 탄생을 기뻐하며 사랑을 전하고 나누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가까운 사람하고만 선물을 주고받지 말고 주변 이웃에게 시선을 돌리는 성탄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대구=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 그 순간 가진 짐을 다 내려놓은 듯 안도감과 휴식을 만끽할 수 있어요. 커피는 우리를 편안하게 포용해 줍니다.” 기선 작가(본명 권기선)의 커피 전문만화 ‘오늘의 커피’(애니북스·전 3권·사진)가 2009년 1, 2권이 나온 지 4년 만에 완간됐다. ‘오늘의 커피’는 재벌 2세 바리스타 나기태와 절대 미각을 지닌 오난지가 만나 최고의 커피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다뤘다. 당시만 해도 생소한 드립커피나 더치커피의 세계까지 다루며 커피 마니아들에겐 필독서로 꼽혔다. 최근 완간되면서 아시아 최대 커피 산지인 인도네시아와의 판권계약도 앞두고 있다. 13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기선 작가는 “전문적인 커피 지식과 만화적 재미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공을 들였더니 긴 슬럼프가 찾아와 완간이 늦었다. 기다려준 독자들에게 정말 죄송하다”고 말했다. ‘오늘의 커피’는 애니북스 이정헌 편집자가 국내 첫 커피 전문만화를 만들겠다는 포부로 기획한 만화. 2001년 데뷔해 ‘플리즈 플리즈 미!’로 2009년 대한민국 만화 우수상을 수상한 기선 작가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작가는 1년간 바리스타 교육을 받고 역사 깊은 카페나 프랜차이즈 커피숍을 돌며 커피를 배웠다. 이를 토대로 만화엔 다양한 원두와 커피 정보부터 카페 창업 노하우까지 백과사전에 가까운 정보가 충실히 담겨 있다. “스토리를 짤 때마다 전문적인 지식을 녹여내느라 힘이 많이 들었어요. 만화의 질에 매달리다 보니 슬럼프가 왔고 2년간은 아무 만화도 그리지 못했어요.” 작가의 슬럼프가 길어지자 편집자도 애가 탔다. 이 편집자는 2011년 한 잡지에 ‘집 나간 며느리 같은 만화가가 제3권을 그리러 돌아와 주길 바란다’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작가는 “어딜 가나 ‘오늘의 커피’ 소식을 묻는 팬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마음을 비우고 나니 스토리를 쓸 수 있었다”고 했다.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나이가 들수록 육신은 점점 추해지고, 정신도 부패할 뿐이라네.’ 책 목차 바로 앞에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 나온 글귀를 옮겨두었다. 죽음보다 무서운 것은 나이 듦인 것 같다. 갑작스레 찾아온 죽음은 손쓸 틈도 없지만, 노화는 ‘더디지만 가혹하게 쇠퇴하는 과정’을 그저 견뎌내야 한다. 미국 미시간대 로스쿨 교수인 저자는 65세 때부터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주변에선 노화에 관한 책을 쓰기에 아직 젊다,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만류했단다. 하지만 그는 늦어지면 노화에 관한 글뿐 아니라 어떤 글도 쓰지 못할까 걱정돼 서둘렀다. 그는 노화의 과정을 직시하려 노력한다. 나이 듦에 따라 잃는 것과 얻는 것을 화두로 자신의 경험, 문학, 성경, 영화를 넘나들며 때론 진지하게, 때론 유쾌하게 풀어나간다. 공포, 지혜, 불평, 은퇴, 복수, 재산, 감정, 구원을 각 장의 주제로 잡았다. 첫 장의 주제는 공포다. 그의 아버지는 88세가 될 때까지 선량하고 기품이 넘쳤지만 갑작스레 찾아온 치매 증상이 급속도로 악화되더니 한 달 만에 숨졌다. 병원에서는 그에게 덤덤하게 “뇌의 일반적인 수축 현상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나이가 들면 도파민 수용체 수가 감소함에 따라 두뇌의 크기가 상당 부분 줄어든다는 사실을 안 그는 겁을 집어 먹었다. 그도 책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다음 일시적인 기억상실증에 걸려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했다. 잔뜩 겁을 주더니 이렇게 말한다. “난 다행히도 이 사실을 모른 채로 30년의 두 배가 넘는 시간을 보내는 축복을 누렸다. 이제 젊은 동료들에게 꼭 알려 주어 그들이 나처럼 이 중요한 사실을 모르고 지나치지 않도록 해야겠다. 내가 또 이렇게 사려가 깊은 사람이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이 있다. 노년기의 특권은 모든 것을 겪어 냈다는 온순한 쾌락의 즐거움에 있다고 그는 역설한다. 나이가 들면 행복을 잘 느낀다, 지혜로워진다는 통념을 반박한다. 도리어 노화를 냉철하게 직시하고 그 속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찾는다. 죽음의 문턱에 다가갔던 기억상실증 경험도 책에 부록으로 담을 수 있어 좋다는 식이다. 반면 두 번 사는 것은 형벌에 가깝다며 보톡스나 비아그라 주름제거술에 기대려 하기보다 주어진 첫 번째 기회에 만족하고 살기를 권한다. 우리가 나이를 10대, 20대, 30대와 같이 10의 배수로 나눈 것도 절대 진리가 아니라 근래에 만든 것이라니 나이에 얽매일 필요도 없다. 저자는 충분히 잃어갈 만큼 오래 살게 됐으니 좋은 죽음을 맞기 위한 용기와 인내, 관대함, 강인함이 필요하다고 썼다. 그가 꼽은 최선의 죽음은 이렇다. 죽는다는 걸 충분히 자각할 정도의 정신을 유지한 채 가족들이 있는 곳에서 몇 마디 반어적 농담을 던진 후에 마지막 숨을 내쉬는 것.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1996년 학원 액션만화 ‘짱’(임재원 작가)이 연재를 시작했을 때 주인공 현상태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당시 10대 팬들은 불의를 참지 못하고 정의와 의리로 똘똘 뭉쳐 싸우는 주인공 현상태에게 열광했다. 17년이 지난 지금, 당시 팬들은 30대 아저씨가 됐지만 현상태는 아직 고3이다. 만화에는 초창기 등장했던 삐삐 대신에 슬그머니 휴대전화가 등장한다. 제목에 ‘∼짱’을 단 숱한 아류작이 나왔다가 사라지는 동안 ‘짱’은 17년간 만화잡지에 연재됐다. 지난해 8월 나온 71권까지 단행본은 모두 350만 부가 팔렸다. 만화의 폭발적 인기 속에 당시 생소했던 짱이란 표현도 얼짱, 몸짱처럼 우리 사회에 자리 잡았다. 만화 팬들은 ‘짱’ 신간이 나올 때마다 “난 어느새 고등학생 조카를 둔 30대가 됐는데, 주인공은 여전히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며 즐거워한다. 과연 만화가 끝나긴 할까. 임재원 작가는 “지금 보스인 김철수와의 싸움이 시작됐다. 내년 4월에는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장기 연재의 비결은 작가의 능력보다는 독자들이 만화에 애정을 갖고 계속 기다려준 덕분이다”라고 밝혔다. 코믹무협만화 ‘열혈강호’(전극진 글·양재현 그림)는 1994년 연재를 시작해 내년 4월이면 만 20년이 된다. 최근 단행본 62권이 발간됐고 총 500만 부가 팔렸다. 작가들도 남녀 주인공인 한비광과 담화린이 무림을 평정하고 행복하게 잘 살아가는 해피 엔딩만 생각할 뿐 정작 언제 끝날지 모른다. 1999년 “반환점을 돌았다”고 하더니, 몇 년 전부터는 “2년 안에 끝내겠다”는 각오만 밝혀왔다. 양재현 작가는 “최종 무대 격인 신지(神地)에 도달했으니 이제 후반부에 진입했다. 만화 속 캐릭터가 작가의 의지와 상관없이 생명력을 갖고 움직이다 보니 에피소드가 늘어나고 자연히 이야기가 길어졌다”고 했다. 2003년 연재를 시작한 서문다미 작가의 순정 판타지 만화 ‘RURE’도 2000년대 이후 장기연재 작품. 귀신을 보는 능력을 가진 소녀가 차원 이동을 하며 벌이는 모험담과 로맨스를 그린 작품으로 작가도, 편집자도 그 끝을 알 수 없단다. 단행본 20권이 출간돼 25만 부가 팔렸다. 일본에서는 1960, 70년대에 시작해 아직 연재 중인 작품들이 있다. ‘고르고 13’ ‘유리가면’ 등이 대표적이다.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만화창작과 교수는 “1990년대 만화 활황기에 나온 작품들이 오랜 기간 독자의 사랑 속에 연재를 이어가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손에 꼽을 대표작이 없는 점은 한국 만화계의 숙제로 남았다”고 말했다.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저 날아가는 새가 허공에 안겨 허공을 드러내듯이, 아, 그대 참사랑이여, 내 이 초라한 삶과 죽음이 그대 품에 안겨 그대를 드러내는 것이기를!’ ‘동양학 하는 목사님’으로 유명한 이현주 목사가 우리 나이로 칠순을 맞아 불가의 스님에게 어울릴 법한 제목의 책을 냈다. 신간 ‘공’(샨티·사진)이다. 부제는 ‘저는 어디에도 없으면서 모든 것을 있게 하는…’이다. 책에는 2008년부터 2011년까지 그가 먹을 묻힌 붓으로 선물 포장지나 판지 같은 쓸모없는 종이에 그린 다양한 형태의 ‘空(공)’ 글씨 70점과 공을 화두로 붙잡고 쓴 글 149편이 담겨 있다. 글씨를 보고 있자면 불가의 달마도가 생각날 정도다. 2004년부터 충주에서 살고 있는 그에게 10일 전화를 걸었다. “마침 오늘이 생일이에요. 칠순이 되니 손님들이 종종 찾아와서 자비로 책 200부만 찍어 선물로 나눠 주려고 했다가 정식 출간하게 됐어요.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쓴 글이 아니라 정직하게 썼고, 그저 자유롭게 읽어주시면 그만입니다.” 이 목사는 몇 년 전부터 방안에 쭈그리고 앉아 입으로 ‘공공공공…’ 하고 읊조리며 다양한 모양의 ‘공’자를 썼다. 그러곤 마치 표구하듯이 둘레를 다른 종이로 풀칠해 붙였다. 재작년 사별한 아내는 생전에 그 모습을 보고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지 왜 그러고 있느냐”며 한마디씩 했단다. 완성된 작품은 주변 사람들에게 “공을 공짜로 드립니다”라며 나눠 줬다. 이 목사는 평생 수십 권의 철학서, 동화, 번역서를 내며 왕성한 저작 활동을 벌여 왔다. 특히 ‘대학중용읽기’ ‘기독교인이 읽는 금강경’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 ‘장자산책’처럼 유불선 사상을 넘나드는 책이 많다. “갓난쟁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나갔습니다. 남이 알려주는 예수에 대한 이해나 설명보다 직접 배우고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노자 공자 부처도 만나게 됐습니다.” 개신교 목사인 그에게 불가의 화두처럼 들리는 공이란 무엇일까? “허공이 없으면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손을 머리 위로 드는 것도 허공이 있어서 가능한 것처럼 아무 데도 없지만 다른 것을 존재하게 하는 게 허공입니다. 저도 허공처럼 존재하면 좋겠는데 육신이 있어 불가능하죠. 그래서 마음만이라도 허공처럼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허공이 닮았다고 했다. 그는 “‘허공=예수’라고 할 수는 없지만 형상이 없는 하나님을 몸으로 경험한다면 가장 근접한 것이 허공 같다”며 “유불선과 기독교의 경계도 그 앞에서 다 허물어진다”고 했다. 그런 그가 ‘고마운, 정말 좋은 친구’였던 아내가 별세한 다음엔 글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됐다고 한다. “아내가 임종할 무렵에 이 책에 담길 글을 마쳤어요. 책을 낼 땐 마지막이란 생각도 했는데, 아직 모르겠어요. 제가 할 말은 거의 다 했단 생각은 드네요.” 마지막으로 종교인으로서 한마디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가끔 집으로 찾아오는 분들이 고민을 털어놓지만 그저 들어드리기만 한다. 다들 열심히 사니까 그저 하시는 일 거리낌 없이 하시면 좋겠다”며 더는 말을 아꼈다. 통화 내내 그의 목소리는 가벼웠다.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