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환

정양환 부장

동아일보 문화부

구독 4

추천

안녕하세요. 정양환 기자입니다.

ray@donga.com

취재분야

2026-04-10~2026-05-10
칼럼74%
인사일반17%
미국/북미3%
국제일반3%
국제경제3%
  • 27년 동안 숲에 들어가 숨어 지낸 ‘은둔자’, 그는 왜…

    “그는 모든 사람들이 정말로 자신을 ‘은둔자’라고 부르는지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말해줬다. 지역신문에서도 이따금 그를 ‘은둔자’라고 불렀다. ‘좋아하는 단어는 아니지만 이해는 합니다. 뭔가 정확해요. 은둔자는 정말이지 딱 들어맞으니까요.’ …‘나는 그 뒤로 숨을 수 있어요. 사람들의 고정관념과 가정에 부합한 척할 수 있죠. 은둔자라는 꼬리표가 좋은 점 중 하나는 이상한 행동을 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별의별 사람이 많다지만 ‘크리스토퍼 나이트’는 참 이해하기 힘든 존재다. 2013년 4월 4일, 미국 메인 주의 노스 숲 야영지에서 그는 1000여 건이 넘는 절도 혐의로 붙잡혔다. 횟수만 보면 세기의 도둑 같지만, 실은 자질구레한 먹을 거나 입을 거만 훔쳤다. 그보다 진짜 놀라운 건 나이트가 1986년 이 숲에 들어가 지금껏 혼자 살았단 점이다. 27년 동안. 세상은 낭만적으로 ‘은둔자’라 불렀지만, 그는 스스로를 “세상에 존재하기를 중단했다”고 설명했다. 딱히 이유도 없다. 풍족하진 않았어도 불우한 어린 시절도 아니었다. 가족도 직업도 있었고, 뭣보다 스무 살짜리 청년 앞엔 창창한 미래가 기다렸다. 그런데 그는 모든 걸 버리고 숲으로 떠났다. “내 행동을 설명할 수가 없어요. 떠날 때 아무런 계획이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어요. 그냥 떠났어요.” 아무 생각이 없던 것처럼, 그 세월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살았다. 물론 숲을 익히고, 훔친 책이나 잡지를 읽고, 라디오도 듣긴 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했던 일은, 홀로 삶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가장 충격적인 건 누구와도 대화하질 않았다는 대목이다. 27년 동안 우연히 지나가던 도보여행자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한번 나눈 게 전부였다. 정말 완벽한 혼자만의 삶이었다. 하지만 아름답게만 그리기엔 나이트는 꽤나 많은 ‘빚’을 타인에게 지고 있었다. 생산적인 활동이 없었던 그는, 입고 먹고 자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위에서 훔쳤다. 물론 값비싼 건 아니었다지만, 당한 사람은 괴롭기 짝이 없다. 자신의 완벽한 고독을 위해 타인은 불편한 괴로움을 감수해야 했다는 측면에서 그는 동정 받기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당연히 나이트는 감옥으로 향했다. ‘숲속의 은둔자’는 참 미묘한 책이다. 좋은 글과 근사한 취재가 읽는 맛을 드높이는데, 책장을 덮은 뒤엔 살짝 허망하다. 나이트는 ‘진정한 은둔자’이자 ‘좀도둑’이었다. 솔직히 이런 정의도 쓸모없는 게, 세간의 시선이나 잣대로 측정되는 인물이 아니다. 그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 건지 여전히 알쏭달쏭하다. 다만 한 가지. 인류는 앞으로도 끝없이 이 경계에서 번뇌하는 게 아닐까. 함께 살 것인가, 혼자 살 것인가. 그리고 그 인생의 가치는 몇 그램쯤 되는지. 어느새 훅하고 시린 가을이 밀려왔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8-10-12
    • 좋아요
    • 코멘트
  • [책의 향기]‘미투 운동’ 촉발시킨 그녀, 자유를 위해 침묵을 깨다

    “이 책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고 힘을 느끼길 원하는 모든 여성을 위한 집합 구호다. 우리가 더 이상 폄하당하고, 위협당하고, 저지당하지 않겠다는 경고다. 우리는 제도나 권력에 의해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진실을 말할 것이다. 우리는 사나워질 것이다.” ‘나는…’은 저자의 이 말에서 더 보탤 말이 딱히 없는 책이다. 저자는 아마도 2016년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 원래도 미국 폭스뉴스 간판 앵커로 유명했지만, 그가 속했던 방송국 회장인 로저 에일스를 성희롱 혐의로 고발하고 결국 사임시켰다. 이 사건은 이후 ‘미투 운동’이 폭발하는 도화선이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이 책은 제목처럼 침묵하지 않은 저자가 그와 관련해 하고 싶은 ‘모든 속내’를 타 털어놓은 선언서다. 자신의 경험은 물론이고 다양한 피해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아냈고,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처지가 어떤지 어떻게 바뀌어 나가야 하는지를 뚜렷하게 밝혔다. 저자는 문장이 그리 빼어난 편이 아닌데도, 글자 하나하나가 아주 명확하고 파장이 넓은 울림을 지녔다. 용기를 실천한 이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실은 ‘나는…’은 원론적으로 따지자면, 규정하기가 참 어렵다. 취재기 같기도 자서전 같기도 하며, 주장과 고백과 안내와 지시가 뭉뚱그려져 있다. 구성만 보면, 여성의 삶을 위한 자기계발서처럼 읽히기도 한다. 아마도 그만큼 저자가 하고픈 말이 많았기 때문일 텐데, 다른 주제나 저자였다면 다소 산만하다는 지적도 나왔을 게다. 꼭 하나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아마도 여성 독자들이 관심이 많을 책이지만, 정작 꼭 읽어야 할 이들은 남성이란 점이다. 불편할 수도, 뻔해 보일 수도,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책에도 나오듯, 상당수 남성은 저자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당신의 여성 가족과 친구를 위해서. 그들은 침묵하지 않기로 했고,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8-10-0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전시-퍼포먼스-파티… 미술이 즐거워

    “미술과 함께하는 삶을 만끽하러 오세요.” 다소 선선하지만 청명한 날씨. 울긋불긋 솟아오른 풍선들.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야외광장은 오가던 시민들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한편에선 김명석 작가가 ‘하나 되는 우리’를 주제로 대형 서예 시연을 펼쳤고 씻김굿이 떠오르는 퍼포먼스 ‘현실 너머의 세계를 찾아서’(박일화 김석환 작가)도 이어졌다. 올해로 4회째를 맞는 ‘미술주간’ 개막식이 환호와 박수 속에서 성대한 출발을 알렸다.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도종환)가 주최하고 예술경영지원센터(대표 김도일)가 주관하는 ‘미술주간 2018’이 14일까지 열린다. ‘미술은 삶과 함께’를 주제로 열리는 이 행사에는 전국 181개 미술관 및 전시공간이 참여해 다양한 체험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관심을 모으는 프로그램은 해가 갈수록 인기가 높아지는 ‘뮤지엄나이트’다. 가을밤을 수놓는 다양한 행사는 전국 5개 국·공립미술관 행사를 화려하게 변신시킨다. 먼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은 5일 ‘MMCA 뮤지엄나잇 with 시네마’를 준비했다. 야외에서 빈센트 반 고흐를 다룬 영화 ‘러빙 빈센트’를 상영하고 전시도 관람할 수 있다. 서울 노원구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은 같은 날 관객 참여형 퍼포먼스 ‘일루젼 드로잉 쇼’를 개최한다. 지방에선 파티 클럽과 공연장으로 변신한 미술관을 만날 수 있다. 대전시립미술관은 5일 본관 분수대광장에서 ‘바이오파티’를 연다. 미디어아트도 관람하고 디제잉 파티도 즐길 수 있다. 광주시립미술관은 옥상정원에 음악회 ‘아트 나이트’를 준비한다. 미술작품 설명과 함께 아름다운 선율이 퍼져나가는 별밤이 기다린다. 마지막으로 6일 부산시립미술관은 ‘별이 총총 미술관’을 개최한다. 일렉트로닉 댄스뮤직(EDM) 공연은 물론이고 국악 현대무용 등을 즐길 수 있다. 전문가와 함께 다양한 전시공간을 찾아가는 미술여행 프로그램 ‘아트 투어’도 눈길을 끈다. 13일까지 워킹(도보)과 버스 투어 두 가지를 선보인다. 워킹 투어는 서울 북촌∼서촌 지역과 신사∼청담 지역을 둘러보는 코스로 나뉜다. 북촌∼서촌은 금호미술관과 아라리오갤러리, 학고재 등을 방문하며 신사∼청담은 코리아나미술관과 송은아트스페이스 등을 찾는다. 버스 투어는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쉽고 재미있는 현대미술관 투어’ ‘역사와 함께하는 미술관 투어’ ‘자연에서 힐링하는 미술관 투어’ ‘예술가의 미술관 투어’ 등 네 가지 코스로 구성돼 있다. 자세한 내용은 미술주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개막식에 참석한 김도일 예술경영지원센터 대표는 “국민 모두가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서 미술을 즐길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8-10-0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책의 향기]느긋하면서도 팽팽한 英 ‘코지 미스터리’의 매력

    스코틀랜드에서도 북부 외진 곳에 있는 로흐두 마을. 이 촌구석에서 유일한 경찰인 해미시 맥베스는 어느 날 극심한 치통과 함께 잠에서 깬다. 하지만 건넛마을에 있는 프레더릭 길크리스트는 ‘웬만하면’ 이를 뽑아버리는 걸로 악명 높은 치과의사. 다들 기차를 타고 큰 도시 인버네스에 가길 권하지만, 해미시는 괜한 귀찮음과 호기심이 발동해 그에게 진료받기로 맘먹는다. 예약 당일, 오전 일찍 방문한 병원은 묘한 기운이 물씬한데…. 아니나 다를까, 치과의사는 의자에 늘어진 상태로 숨을 거둔 채 맥베스 순경을 맞이한다. 이달 국내에 나온 ‘치과의사의 죽음’은 추리소설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13편에 해당하는 작품. 저자는 본명이 매리언 채스니라는 영국 인기 작가로, 주로 역사로맨스 계열을 많이 써왔다. 비턴은 그가 추리소설을 쓸 때 사용하는 필명. 현지에선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사 크리스티(1890∼1976)의 후계자로 호평받기도 한다. 맥베스 시리즈는 1985년 1편 ‘험담꾼의 죽음’부터 지금까지 33권이 세상에 나왔다. 1936년생인 저자는 팔순이 넘었지만, 조만간 시리즈 차기작을 내놓을 예정이란다. ‘촌구석 셜록 홈스’쯤 되는 주인공 해미시는 깡마르고 큰 키에 후줄근한 차림새를 지닌 시골 순경. 30대로 여겨지는데, 약혼 경력은 있지만 아직 총각이다. 농촌 경찰을 비하할 생각은 없지만, 얼핏 봐선 흔하디흔한 캐릭터다. 그다지 성실해 보이지도 않거니와, 승진 욕심도 없이 한적한 전원생활에 만족한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깊은 사려를 바탕으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스타일이랄까. 게다가 사건이 발생하면 날카로운 탐정 본능으로 척척 범인을 찾아낸다. 흥미진진하나 스케일이 크진 않은 이 연작이 영국은 물론 세계에서 30년 이상 사랑받은 비결은 뭘까. 여러 이유야 있겠지만, “스코틀랜드의 나른하고 아름다운 마을 로흐두로 여행을 떠날 시간”이란 뉴욕타임스 북 리뷰만큼 안성맞춤인 소개 문구도 없을 듯하다. 언제나 끔찍한 살인사건을 다루는데도, 왜 이렇게 가상의 마을인 로흐두가 끌리는 건지. 실제로 이 소설은 박진감이라곤 찾을 길 없는데도 몽롱하되 매혹적으로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느릿느릿 느긋한데도 스멀스멀 팽팽하고, 소탈한 인정과 속물의 악취가 희한하게 공존한다. 출판사에 따르면, 서구 문단에선 맥베스 시리즈를 ‘코지 미스터리(cozy mystery)’의 대표작으로 꼽는다고 한다. 이름처럼 평범한 듯 여유로운 추리소설들을 일컫는데, 참으로 잘 어울리는 용어다. 1권부터 읽으면 좋겠지만, 어느 편부터 봐도 어색하진 않다. 재밌는 건, 세월 따라 소설도 시대가 변하는데 등장인물들은 별로 나이 먹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1편은 대처 수상이 거론되는 1980년대가 배경. 하지만 ‘치과의사의 죽음’은 발행연도인 1997년 시절이 반영됐는데, 해미시는 여전히 30대. 하긴 뭐. 일본 추리만화 양대 산맥인 ‘소년탐정 김전일’과 ‘명탐정 코난’도 20여 년째 청소년이니까. 역시 사랑받으면 젊게 사나 보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8-09-2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책의 향기]성 평등 시대를 향해… 女 예술가들의 재기발랄 분투기

    페미니즘은 헤게모니일까 트렌드일까. ‘페미니스트 99’와 ‘치마가 짧기 때문이라고요?’를 보면, 이런 구분법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깃발을 든 지야 오래됐지만, 성 평등은 지금도 요원한 게 사실. 그러다 보니 극단적으로 흘러 현실과 괴리를 일으키는 현상까지 벌어진다. 또 한쪽에선 조롱과 위협이 여전히 존재하고. 이 두 책은 그런 현 상황을 ‘재기발랄하게’ 타개하려는 여성 예술가들의 분투가 담겨있다. 먼저 일종의 인물 열전 형식을 취한 ‘페미니스트 99’는 부제처럼 “세상을 바꾼 위대한 여성들의 인명사전”이다. 기원전 630년에 태어난 그리스 시인 사포부터 1997년 태어난 파키스탄 활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까지 다양한 시대와 지역을 망라했다. 단순히 인물의 생애를 정리한 게 아니라, 각 인물들을 다양한 분야의 페미니스트 성인이라 부르며 그 가치를 짚어내려 애썼다. 실제로 이 책의 원제는 ‘The little book of feminist saints’이기도 하다. 이 책은 참신하면서도 위트가 넘친다. 성인 종교화를 패러디한 그림들도, ‘학자의 수호성인’ ‘운동선수의 수호성인’ 식으로 정리한 글도 흥미롭다.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다. 정보적인 측면에서도 꽤나 유용한 편. 다만 ‘일기 작가의 수호성인’으로 꼽은 안네 프랑크처럼, 페미니즘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 건지 애매한 인물도 몇몇 있다. ‘치마가…’는 세계 카투니스트 162명으로 이뤄진 국제 네트워크 ‘카투닝 포 피스’의 작품 모음집. 카툰(만평)이란 도구를 통해 표현의 자유나 인권 민주주의를 천명하는 단체인데, 이 책은 그중에 성 평등과 관련된 작품만 선별했다. 일단 매력적인 그림과 명확한 주제 의식이 돋보인다. 게다가 평소 접하기 힘들었던 중동이나 아프리카 작가들의 작품을 만나는 기쁨도 크다. 그들에겐 이 정도의 예술 활동도 쉽지 않았을 걸 감안하면 더욱 눈길이 머문다. 하지만 기대가 높았던 탓일까. 기발한 촌철살인의 맛은 다소 떨어진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8-09-2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넓은 전시실 가득 채운 대작 4점의 아우라

    참으로 오묘한 전시다. 알아먹기 쉬운 듯한데, 쉽사리 잡히지 않는.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 속 여우에게 홀린 기분이 이럴까. 분명히 손에 쥐었던 공이 ‘뿅’ 하고 사라졌다. 17일 개관한 인천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의 예술 전시 공간 ‘파라다이스 아트 스페이스’ 개막 특별전은 첫인상은 무척 화려한데도 담박했다. 패션디자이너 정구호가 디렉터를 맡아 맞춤한 듯 미니멀한 분위기가 물씬했다. 1346m²(408평) 규모의 개관기념전은 국내외 작가 4명의 작품 4점. ‘無節制&節制(무절제&절제)’란 전시 제목이 자아내는, 채우기보단 비워내는 데 방점이 찍혔으리라 짐작했다. 하나 막상 전시장에 들어서면, 월척은 낚은 숫자로 좌우되는 게 아님을 절감한다. 뭣보다 상설전시실이 그랬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가인 제프 쿤스(63·미국)와 데이미언 허스트(53·영국)의 작품 2점. 센 작품들이 떡하니 버티고 서주니 허전한 구석이 없다. 예술도 인생처럼 역시 한 방인가 보다. 쿤스의 ‘Gazing Ball―Farnese Hercules’는 여러모로 이날의 스타였다. 작품도 중앙 화점을 차지했는데, 작가까지 개막식에 왔으니 눈이 쏠릴 수밖에.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시종일관 미소를 머금은 ‘친절한 톰 (크루즈) 아저씨’였다. 클래식 조각이나 그림에 푸른 유리구슬을 더하는 이 연작 시리즈를 두고 “가장 순수한 형태인 구체(globe)는 사방을 비추며 관객이 우주 속 어디에 있는지를 짚어주는 일종의 GPS(위성위치확인시스템)”라며 “서양철학이나 동양사상에 깃든 관대함과 관용의 상징”이라고 설명했다. 작가의 유려한 설명이 아니더라도, ‘씨알 굵은’ 볼은 꽤나 상상력을 자극한다. 영화에서 보던 미지의 타임머신이 시공간을 거스르고 고대 그리스로 날아간다면 저런 생김새가 아닐는지. 다만 높이 3.26m짜리 작품이라 그런가. 인간과 피를 나눈 ‘살가운’ 헤라클레스보다 콧대 높은 ‘신들의 신’ 제우스를 닮아 보였다. 그 슈퍼 초인 오른쪽을 장식한 허스트의 ‘Aurous Cyanide’도 존재감이 대단했다. 전시 측은 “제목은 ‘시안화 제1금’이란 맹독성 화합물을 지칭한다”고 설명. 가로세로 9×3m에 이르는 화폭에 형형색색 동그라미를 경쾌하게 채운 작품이 죽음의 독극물이라. 생사의 경계를 건너가는 꽃상여 행렬이 어디선가 메아리로 피어오를 듯하다. 판테온 신전처럼 우뚝한 상설전시실 경치. 기에 눌릴 법도 하건만, 김호득(68) 이배 작가(62)가 채운 기획전시실도 만만찮았다. 우아하되 정갈한 향취가 조선의 여백 같은 매무새랄까. 광활한 공간을 맘껏 펼쳐놓아 작가들도 결과물에 상당히 만족했단 후문이다. 특히 김 작가의 ‘문득, 공간을 그리다’는 감히 올해 꼭 봐야 할 전시로 꼽고 싶다. 넓은 사각 수조에 먹물을 담고 위로 한지 수십 장을 늘어뜨렸는데, 창덕궁 달빛 기행을 거니는 기분이랄까. 숨을 고르는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착각마저 들었다. 작가만 허락한다면, 푹신한 의자 하나 구해다 한참 멍을 때리고픈 욕구가 일었다. 흰눈이 펑펑 내린 산골 탄광촌이 떠오르는 이 작가의 ‘불에서 부터’도 예사롭지 않다. 널찍한 바닥 전면에 한지를 깔고 거대한 숯 구조물을 띄엄띄엄 배치했다. 전시실 자체가 하나의 수묵화가 돼버린 풍경. 을씨년스러운데 깊은 열기를 머금었다. 이날 개관식에 참석한 전필립 파라다이스그룹 회장은 “파라다이스 아트 스페이스를 한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의 조화를 담은 새로운 아시아 모던&컨템포러리 아트의 허브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10월 17일까지.  인천=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8-09-20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책의 향기]불가능은 없다, 뇌가 정한 한계가 있을뿐

    ‘endure(인듀어) 1. 견디다, 참다, 인내하다 2. 그만두고 싶은 충동과 계속해서 싸우며 현재 상태를 유지하다.’ 책날개에 실린 저자 소개 위의 짤막한 설명. 좀 부풀리자면, 이게 제목과 함께 이 책의 ‘앙꼬’다. 기록 경신에 도전하는 운동선수가 신체적 능력을 한 톨까지 쥐어짜며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아니, 스포츠에서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과학 전문 칼럼니스트인 저자가 그 오래도록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쫓는 여정이 이 책에 담겼다. 뼈대만 놓고 보자면, ‘인듀어’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신체적 능력을 발현하는데 결국은 뇌가 중요하더란 얘기다. 앞서 언급한 인듀어의 두 번째 뜻을 잠시 되새김질하자. 이는 이탈리아 과학자 새뮤얼 마코라가 ‘지구력’에 대해 내린 정의이기도 하다. ‘노력(effort)’이란 말로도 대체 가능한 이 지구력은 육체적 측면과 정신적 측면을 둘 다 강조한다. 예컨대, 몸과 기술을 갈고 닦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마지막 차이는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어쩌면 ‘뻔하고 맥 빠지는’ 설명이다. 이 책도 내가 바라면 우주의 만물이 도와준다는 ‘시크릿’류의 판타지였단 말인가. 물론 그럴 리야 없다. ‘인듀어’는 스포츠라는 무대에서 인간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신체 시스템 자체에 주목한 책이다. 인간도 기계처럼 좋은 하드웨어를 갖추면 성적이 오르는 것일까. 당연히 그게 기본 전제겠지만, 여기엔 소프트웨어라 할 만한 뇌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인간이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든, 뇌가 지닌 보호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이든 말이다. “뇌 자극이 우리 몸의 숨겨진 지구력 저장고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기술인지 아닌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 알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험이 선수들에게 지구력 저장고의 존재를 믿게 해 주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안장 위에 앉은 두 명의 경쟁자에게 진정으로 의미 있는 무기는 자신이 더 나은 기술로 무장하고 있다는 믿음일지도 모른다.” 일단 이 책은 재밌다. 딱히 위트가 넘치는 건 아닌데, 과학책이 이렇게 흥미진진해도 될까 싶다. 이는 저자가 캐나다 육상 대표선수 출신이란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 자신의 경험을 잘 살려 운동선수와 과학자의 다양한 면모와 속내를 잘 짚어냈다. 마라톤 등산 경보 사이클 등 여러 분야를 취재해 재밌게 엮은 점도 높이 살 만하다. 특히 통증과 근육, 산소, 더위, 갈증, 연료 등 운동능력의 한계와 직결된 여섯 가지 분야를 정리한 2부는 탁월하다. 콘텐츠와 문장력이 이만큼이나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 저술은 쉽게 만나기 힘들다. 다만 책의 흐름과는 별개로, 묘한 ‘세상의 이치’도 묻어난다. 물리학 생리학 등의 총체라 할 수 있는 이런 인체 과학이 실은 다 목적이 있어서 발전했다는 걸 깨닫게 만든다. 산업혁명 전후엔 얼마나 더 효율적으로 노동자를 부려먹을 수 있을까,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시기엔 얼마나 더 강인한 군인을 키워낼 수 있을까가 이런 과학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지금은? 수많은 관련 연구를 지원하는 곳은 다름 아닌 글로벌 스포츠 의류나 음료 업체다. 운동선수와 과학자들의 순수성을 무시할 정도는 아니지만, 살짝 입안이 텁텁하긴 하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8-09-1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운동선수의 신체적 능력은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endure(인듀어) 1. 견디다, 참다, 인내하다 2. 그만두고 싶은 충동과 계속해서 싸우며 현재 상태를 유지하다.’ 책날개에 실린 저자 소개 위의 짤막한 설명. 좀 부풀리자면, 이게 제목과 함께 이 책의 ‘앙꼬’다. 기록 경신에 도전하는 운동선수가 신체적 능력을 한 톨까지 쥐어짜며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아니, 스포츠에서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과학 전문 칼럼리스트인 저자가 그 오래토록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쫓는 여정이 이 책에 담겼다. 뼈대만 놓고 보자면, ‘인듀어’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신체적 능력을 발현하는데 결국은 뇌가 중요하더란 얘기다. 앞서 언급한 인듀어의 두 번째 뜻을 잠시 되새김질하자. 이는 이탈리아 과학자 새뮤얼 마코라가 ‘지구력’에 대해 내린 정의이기도 하다. ‘노력(effort)’이란 말로도 대체 가능한 이 지구력은 육체적 측면과 정신적 측면을 둘 다 강조한다. 예컨대, 몸과 기술을 갈고 닦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마지막 차이는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어쩌면 ‘뻔하고 맥 빠지는’ 설명이다. 이 책도 내가 바라면 우주의 만물이 도와준다는 ‘시크릿’ 류의 판타지였단 말인가. 물론 그럴 리야 없다. ‘인듀어’는 스포츠라는 무대에서 인간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신체 시스템 자체에 주목한 책이다. 인간도 기계처럼 좋은 하드웨어를 갖추면 성적이 오르는 것일까. 당연히 그게 기본 전제겠지만, 여기엔 소프트웨어라 할만한 뇌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인간이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든, 뇌가 지닌 보호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이든 말이다. “뇌 자극이 우리 몸의 숨겨진 지구력 저장고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기술인지 아닌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 알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험이 선수들에게 지구력 저장고의 존재를 믿게 해 주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안장 위에 앉은 두 명의 경쟁자에게 진정으로 의미 있는 무기는 자신이 더 나은 기술로 무장하고 있다는 믿음일지도 모른다.” 일단 이 책은 재밌다. 딱히 위트가 넘치는 건 아닌데, 과학책이 이렇게 흥미진진해도 될까 싶다. 이는 저자가 캐나다 육상 대표선수 출신이란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 자신의 경험을 잘 살려 운동선수와 과학자의 다양한 면모와 속내를 잘 짚어냈다. 마라톤 등산 경보 사이클 등 여러 분야를 취재해 재밌게 엮은 점도 높이 살만 하다. 특히 통증과 근육, 산소, 더위, 갈증, 연료 등 운동능력의 한계와 직결된 여섯 가지 분야를 정리한 2부는 탁월하다. 콘텐츠와 문장력이 이만큼이나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 저술은 쉽게 만나기 힘들다. 다만 책의 흐름과는 별개로, 묘한 ‘세상의 이치’도 묻어난다. 물리학 생리학 등의 총체라 할 수 있는 이런 인체 과학이 실은 다 목적이 있어서 발전했다는 걸 깨닫게 만든다. 산업혁명 전후엔 얼마나 더 효율적으로 노동자를 부려먹을 수 있을까,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시기엔 얼마나 더 강인한 군인을 키워낼 수 있을까가 이런 과학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지금은? 수많은 관련 연구를 지원하는 곳은 다름 아닌 글로벌 스포츠 의류나 음료 업체다. 운동선수와 과학자들의 순수성을 무시할 정도는 아니지만, 살짝 입안이 텁텁하긴 하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8-09-14
    • 좋아요
    • 코멘트
  • [책의 향기]예고살인 vs 악연… 히가시노가 낸 두 개의 수수께끼

    히가시노 vs 히가시노. 마침 두 책이 하루 간격으로 출간돼 하는 얘기만은 아니다. 꽤 오랫동안 국내 일본문학의 인기는 이런 구도였다 봐도 무방할 정도다. 무라카미 하루키 등 쟁쟁한 작가들을 폄하할 의도는 없다. 하지만 히가시노가 쌓은 성벽은 그만큼 압도적이다. 출판사들에 따르면 2000년대 들어 ‘비밀’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작품은 60여 종. 특히 제134회 나오키상을 수상한 ‘용의자 X의 헌신’이 큰 반향을 일으킨 뒤 10년 넘게 기세가 꺾일 줄 모른다. 최근 100만 부를 넘어선 ‘나미야 잡화점의 비밀’이 아니어도 “제일 실적이 떨어지는 작품도 3만 부 이상은 나간다”고 한다. 자, 그럼 또다시 최소 3만 부는 팔릴 이 두 작품은 어떤 내용일까. 미리 얘기하면 둘 다 정통 ‘히가시노 스타일’은 아니다. 팬들은 알겠지만, 원래 저자는 자기만의 독특한 추리소설 작법을 지녔다. 사건도 범인도 첨부터 다 밝혀지는데 ‘어떻게’와 ‘왜’가 극의 긴장을 끌어올리는 방식. 하지만 요즘 들어, 이것도 히가시노의 ‘한 영역’일 뿐이란 생각도 든다. 대박을 친 ‘나미야…’도 힐링 판타지물이었으니까. 어쩌면 작가는 하나의 스타일로 규정받는 걸 제일 싫어할지도. ‘살인의 문’은 굳이 따지자면 심리소설이다. 주인공 다지마 가즈유키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일생 고달프다. 괴롭힘도 어찌나 많이 당하는지. 그러다 보니 ‘살의’를 느낀 적도 꽤 많다. 그리고 그 주위엔, 항상 ‘친구’ 구라모치 오사무가 있다. 실은 그를 친구라 부르긴 애매하다. 다지마가 처음 죽이고 싶단 맘을 먹은 상대도 구라모치였으니까. 그만큼 그는 주인공 인생에 자꾸만 끼어드는데…. 다지마와 구라모치의 질긴 악연은 어디쯤에서 멈춰 설까. 반면 ‘매스커레이드 나이트’는 산뜻한 수사물이다. 살인사건을 쫓는 얘기에 산뜻하다 해서 미안하지만, 그만큼 깔끔하고 야무지다. 이미 1편 ‘매스커레이드 호텔’과 2편 ‘매스커레이드 이브’가 국내에서 약 13만 부가 팔린 인기 시리즈인지라, 이번에도 반응이 뜨거울 터. 일본에선 3편이 지난해 나왔는데 도합 300만 부를 돌파했단다. 특급호텔을 배경으로 경시청 형사 닛타 고스케와 호텔리어 야마기시 나오미 콤비가 보여준 케미는 이번에도 명불허전. 예고 살인을 쫓는 재미가 맛깔스럽게 펼쳐진다. 같은 히가시노 작품이지만 색깔은 무척이나 다르다. 상수도와 하수도를 관통한 기분이랄까. ‘매스커레이드…’가 쫀득쫀득한 수사 드라마를 마주한 분위기라면, ‘살인의…’는 내면의 극단까지 몰아가는 끈적끈적한 하드코어 영화를 감상하는 듯하다. 취향에 따라 반응은 다소 갈리겠지만, 어디서든 필력과 매력은 넘쳐난다. 그걸 어찌 거부할 수 있을까.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8-09-0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南北 유명 작가 그림 한자리서 만난다

    남북한 유명 작가들의 그림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특별전시회 ‘아름다운 동행―평화, 꽃이 피다’가 14일부터 개최된다. 서울대총동창회(회장 신수정)가 주최하고 사단법인 K-메세나네트워크(이사장 손은신)가 주관하는 이번 전시회는 서울대총동창회가 통일을 준비하며 문화 예술의 저변 확대를 위해 꾸준히 준비해온 사업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김환기 박수근 등 남한 대표적 화가들의 작품 120여 점과 월북 작가부터 최근 현대 작가까지 북한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 80여 점을 선보인다. 특히 8·15광복 직후 북조선문화예술총동맹 산하 미술동맹 초대 서기장을 지냈던 102세 최고령 현역 작가인 김병기 화백의 최근작 ‘성자를 위하여’도 만날 수 있다. 2019년 1월 31일까지. 서울 마포구 SNU장학빌딩 2층 베리타스홀.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8-09-0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책의 향기]“아이들 상상 본능 깨우는 ‘모험 놀이터’를 許하라”

    잠깐, 눈을 감고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보자. 추억도 좋고 공상도 좋다. 일단 넓은 공터를 떠올리고. 거기에 뭔가를 채워 넣어보자.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다. 신나고 즐거운 기분만 꼭 붙들면 된다. 충분히 떠올렸다면, 잠시 숨을 고르고 되새김질해보길. 당신의 ‘놀이터(playground)’는 어떤 모습이었나. 삭막하거나 뻔한 풍경만 가득했더라도, 너무 괘념치 말자.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다. 실제로 동네 가까운 놀이터를 보라. 그네와 시소, 미끄럼틀…. 언제부터인가 대다수가 그냥저냥 ‘있으니까 있는’ 공간이 돼버렸다. 심지어 가끔은 ‘주폭(酒暴) 터’나 ‘우범 터’란 이름이 더 어울릴 정도로. ‘생활기술 연구가’ ‘놀이터 디자이너’란 직함을 가진 저자는 이런 인식의 탈바꿈을 강력히 요구한다. 놀이터는 단순한 장소가 아니다. 역사적으로도, 이곳은 아동 노동을 착취하던 산업자본주의 태동기를 지나며 생겨났다. 공장에선 벗어났지만, 돌보는 사람 없이 길가에 방치되던 아이들을 보호하고 치유하려는 목적이 컸다. 이 때문에 초창기 놀이터는 시설은 부실했을지언정, 아이들에게 훨씬 많은 자유를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산업이 더욱 성장하고 도시가 발달하면서, 놀이터도 안전을 이유로 규격화 표준화란 틀에 갇히게 된다. 지금의 천편일률적인 생김새가 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이런 놀이터는 어린이는 물론이고 사회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래서 제목에도 등장하는 ‘모험 놀이터’의 도입을 적극 권장한다. 모험 놀이터란 다양한 형태를 띠긴 하는데, 아이들의 본능을 일깨울 수 있는 곳을 일컫는다. 예컨대, 흙과 목재 철재더미만 있더라도 만들고 뒹굴고 부딪칠 수 있어야 한다. 당연히 안전이나 청결 문제로 께름칙할 터. 하지만 실제 해외에서 운영하는 모험 놀이터를 보면 규칙만 잘 지키면 사고 발생률도 기존 놀이터보다 훨씬 떨어진다고 한다. “놀이 기구의 수량이 놀이의 즐거움을 보장하지 못한다. 놀이 기구들이 상호 연결성을 갖고, 아이들 스스로 놀이 경험과 놀이의 경로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모험과 탐색의 요소가 있어야 하고 상상이 깃들 여지가 있어야 한다.” ‘마을이…’는 신선하다. 무덤덤하게 지나치던 놀이터란 장소를 다시 보게 한다. 일단 놀이터가 이런 역사와 함의를 지녔다는 게 놀랍다. 게다가 시민사회가 힘을 모아 진정한 놀이터를 아이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걸 깨닫게 만든다. 특히 자녀가 있는 부모라면 고개를 끄덕일 대목이 많다. 저자는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기성세대로서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에 이 이슈에 관심을 가졌다는데, 공감 가는 바가 적지 않다. 다만 책이 다소 결연한 분위기인 건 아쉽다. 양질의 정보와 내용을 담은 건 좋은데, 좀더 낙낙하게 정리했으면 어땠을지. 숨통을 틔워주는 놀이터를 제안하는 글이 어깨가 딱딱하게 굳게 만들면 안 되지 않을까. 이 운동이 더 많은 지지를 얻고 성공하길 바라는 뜻에서 사족을 붙인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8-09-0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예술이란, 인정받지 못해도 멈출 수 없는 것”

    “우리는 미술을, 아니 예술을 왜 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맨몸으로 부딪쳐 보고 싶었습니다. 인정이나 대접 받지 못해도, 왜 아티스트는 무모한 도전을 벌이는 걸까요. 해답을 찾았냐고요? 그건….” 22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김승민 큐레이터(38)는 한마디로 ‘스스로 가시밭길을 걷는 이’다. 영국 런던대에서 미술사 석사학위를 딴 뒤 한국현대도자전, 직지코리아국제페스티벌 등 중량감 있는 전시 80여 개를 기획했다. 주영 한국문화원 전시기획자로도 일하며 ‘우아하고 평탄한’ 삶을 보내기 충분한 경력을 쌓았다. 하지만 그는 남들이 정해놓은 루트를 따라가질 않았다. 23일 서울 마포구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공개한 ‘슬리퍼스 인 베니스’는 김 큐레이터가 어떤 나침반을 지녔는지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2015년 5월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에선 정규 행사만큼 화제가 됐던 이벤트가 있었다. 당시 그가 비엔날레에 초대받지 않은 작가 강임윤 구혜영 김덕영 등 8명과 함께 ‘게릴라성 전시’를 연 것. 사비를 쏟아부어 가며 “다윗이 골리앗에 맞서는 기분”으로 진행한 전시는 관람객 6000여 명이 몰리고 유럽 유명 매체가 소개할 정도로 이목을 끌었다. ‘슬리퍼스…’는 그 동명의 전시 전후에 있었던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베니스는 미술인에게 올림픽과 같은 무대입니다. 거기서 무명에 가까운 우리가 ‘판’을 바꿔 보려고 한 거죠. 큐레이터인 저는 그런 아티스트들에게 자리를 깔아준 사람이고요. 영화 역시 또 다른 ‘전시의 공간’이라 여겼습니다. 단발성으로 끝내지 않는, 하나의 ‘울림’을 간직하고 싶었어요.”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지만 그는 결국 다큐멘터리를 완성했다. ‘설국열차’를 편집했던 최민영 감독과 2007년 영국 터너상 수상자인 마크 월린저, 전 ‘삐삐밴드’ 멤버였던 이윤정 등이 힘을 보탰다. 최근 영화 ‘독전’에 출연해 주목받는 배우 이주영도 출연했다. 김 큐레이터는 “다들 고맙게도 예술을 향한 꿈의 도전이란 취지에 공감해 줬다”며 “세계적인 국제영화제에도 출품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영화에 그 무모한 도전의 답이 나오느냐고요? 하하.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하나는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예술가는 답을 주는 게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게 목적이 돼야 한다는 걸요. 우리의 질문은, 이제 시작입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을 거고, 만족하지도 않을 거예요.”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8-08-2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책의 향기]시한부 판정 후 9년… 그 ‘찬란한’ 삶의 투쟁

    “여동생 케이트가 결혼을 한다. 지금까지 본 결혼식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결혼식이다. 나는 발을 똑바로 지탱하기 위해 양말 안에 보조기를 찬다. 축하연 이틀째 되는 날, 문자메시지가 온다. ‘세상 소식들’이 벨파스트 영화제에서 최우수 단편영화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다. 나는 춤을 춘다. 내 인생의 마지막 춤이다.” 어쩌면 지루하거나 불편할 수 있다. 그만큼 삶의 끝자락에 선 이들이 남긴 책은 꽤나 많다. 때론 과한 감정이 버겁고, 혹은 덩달아 가슴을 짓눌리는 걸 피하고도 싶다. ‘어둠이…’ 역시 똑 닮은 체험이 될지도. 하지만 최소한, 이 책은 ‘찬란하다’. 아일랜드 영화감독인 저자는 1973년생. 히말라야 산행을 다녀올 정도로 정력적이던 그는 2008년 루게릭병(근위축성 측삭경화증) 진단을 받았다. 겨우 35세에 3, 4년 남았다는 시한부 선고까지. 당연한 절망과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그와 아내 루스는 망설이진 않았다. 더 삶을 아름답게 가꾸자고. 더 사랑하기로 결심한다. 여기까진 사실, 기시감이 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남은 생’을 잘 지내자는 게 아니었다. 남과 똑같이, 아니 더 근사하게 살리라 맘먹었다.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었다. 여행도 가고, 아이(심지어 쌍둥이)도 더 가졌다. 그리고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2010년경. 저자는 큰 위기를 겪는다. 폐렴으로 호흡 곤란에 빠졌다. 의료진조차 ‘마지막’을 언급하며 인공호흡기를 권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자는 단호했다. 어떤 장치를 달고서라도 버티려 한다. 그게 자신의 순수한 욕망이니까. 사랑하는 이들 곁에 1분 1초라도 더 머물 수만 있다면 뭐든 상관없었다. “나는 살고 싶다. 그게 잘못된 일인가? 무엇이 인생에 의미를 주는가? 의미 있는 삶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 나는 살아있다. 그것도 순간의 착오 때문에. 그들은 내게 삶을 주었고, 나는 그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이러한 선택권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이 책이 가진 또 다른 큰 매력은 문장이다. 간결하고, 담박하다. 부질없는 미사여구는 걷어내고, 적확한 단어만 골라낸다. 실은 상황이 그렇게 만든 거란 생각도 들긴 했다. 온몸이 마비된 뒤, 눈동자 움직임으로 글을 쓰는 ‘아이 게이즈(eye-gaze) 컴퓨터’로 작업했으니. 물론 그게 글이 지닌 품격을 흠집 내진 않지만. 저자는 지난해 10월 세상을 떠났다. 판정보다 5, 6년을 더 산 셈이다. 하지만 감히 추측건대, 그는 만족하지 않았으리라.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을 테다. 그런 자신과 아내, 가족을 자랑스러워했을 게다. “나는 온몸을 불사르며 이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죽음과 싸우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삶과 싸웠다. 원제 ‘It‘s Not Yet Dark(아직 어둡지 않다)’가 더 맞춤한 이유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8-08-2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순간 光’ 중첩시켜 2∼6주 공들여 키운 ‘생명의 나무’

    ‘생명의 나무’ 시리즈로 유명한 이정록 사진작가(47)의 개인전 ‘라이트 업 더 모먼트(Light Up The Moment)’가 28일부터 열린다. 이 작가가 2007년부터 10년 이상 천착해 온 ‘생명의 나무’ 시리즈는 “신과 인간이 교통(交通)하는 장소”라는 작가의 말처럼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가득하다. 직접 설치한 대상을 필름카메라로 ‘순간 광(光)’을 중첩시켜 2∼6주 가까이 공을 들여 찍는 작품이다. 모두 12점을 선보이는 이번 개인전 역시 초자연적인 에너지와 영혼의 만남을 만끽할 수 있다. 미국 로체스터공과대 영상예술대학원에서 순수 사진을 전공한 이 작가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나무가 지닌 신성한 존재성, 인류와 신화의 교감에 주목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의 작품은 지난해 영국 필립스옥션에서 2만2500파운드(약 3360만 원)에 팔릴 정도로 해외에서도 반응이 좋다. 이번 전시는 서울 강남구에 있는 정샘물 플래그십 스토어 플롭스(PLOPS)에서 1년에 걸쳐 진행하는 ‘플롭스 인 아트 프로젝트’의 첫 번째 주자다. 앞으로 최랄라 홍성준 지근욱 찰스장 등의 전시가 이어질 예정이다. 10월 28일까지.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8-08-2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책의 향기]“냉면은 배추김치 곁들여…” 다산도 사랑한 ‘여름의 맛’

    ‘봄을 보내는 여름 깃발. 냉면집 깃발이 철을 만난 듯.’(동아일보 1921년 4월 26일) 냉면 좀 안다고 자부했던 이라면 지나치기 어려운 책이다. 물론 그간 ‘정보’에 치중한 관련서는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은 평양냉면을 문학적 문화사적 측면에서 다뤘다. 소문만 들었던, 냉면 노포(老鋪)를 드디어 찾아간 기분이다. 명성만큼 맛도 만족스러울까. 일단 다양한 구색은 갖췄다. 조선 시대부터 최근까지 냉면을 언급한 글을 모아 호기심을 돋운다. ‘길게 뽑은 냉면 가락에 배추김치 곁들인다네’란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시를 마주하면 괜스레 흐뭇하다. 일제강점기 성업했다는 냉면 배달을 담은 신문 삽화는 정겹기도 하지. 역시 냉면의 내공은 진득하니 깊다. 하나 이렇게 ‘기획’으로 태어난 책이 지닌 한계도 또렷하다. 잡학사전 이상의 감흥을 전하진 않는다. 하긴 그래서 이런 무더위엔 더 안성맞춤일지도. 갈수록 솟구치는 냉면 값만 야속할 뿐.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8-08-1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책의 향기]“우울증, 지옥같은 고통 난 이렇게 떨쳐버렸다”

    침잠(沈潛)의 무게란 이런 것일까. ‘나의 우울증을…’은 묵직하다. 쉽사리 평을 내놓기 어렵다. 소설가이자 출판평론가인 저자는 1954년생. 환갑이 넘어 내놓은 자전적 에세이에 평생 사투를 벌인 삶의 여정을 담았다. 그 대상은 바로 ‘우울증’이다. 솔직히 정신질환을 두고 싸웠단 표현을 쓰는 게 과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터. 저자 역시 그런 시선을 잘 안다. 특히나 그처럼 집안이 유복하면 “배부른 푸념”으로 여겨지는 것도 익숙하다. 하지만 끊임없이 찾아오는 불안, 그리고 극단으로 치닫는 충동. 저자에게 삶이란 지옥 같은 고통이었음을 털어놓는다. “우울증은 전 세계 3억5000만 명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지구촌 전체의 문제이다. 2012년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서만 1600만 명이 한 번 이상 우울증을 겪었고 2014년에는 우울증으로 자살한 사망자 수가 4만 명을 넘었다. 그런데도 아무도 이 슬픔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길 원치 않는 듯하다.” ‘나의 우울증을…’은 모두보단 누군가를 위한 글이다. 어차피 겪어보지 못한 이에겐 신세 한탄으로 들릴 확률이 높다. 하지만 같은 아픔을 겪거나 마음의 상처가 짙은 이에겐 위안이 되리니. “내 우울증에 대해 승리를 선포하지는 못하지만 밀쳐내고 피하며 그런대로 잘 살아가고 있으며, 우울증의 반대는 상상도 못 할 행복이 아닌 대체적인 자족감”이라며 서로를 다독인다. 다소 현란하긴 하나, 새겨둘 만한 값진 문장이 빼곡하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8-08-1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책의 향기]치명적 기상이변 폭염… 언제까지 하늘 탓만

    꾀는 줄 알면서도 꾀였다. 왜 아니겠는가. 이 날씨에 ‘폭염 사회’라니. 못 본 척하는 게 더 이상하다. 요맘때 이 책을 낸 의도야 뻔하지만 한편으론 고맙기도 하다. 부제처럼 ‘폭염은 사회를 어떻게 바꿨나’는 이제 우리에게도 절체절명의 화두니까. 흔쾌히 유혹당하련다. 미리 말하면, 이 책은 초판이 2002년에 나왔다. 2015년 나온 재판을 번역했지만, 새로 실린 서문 말곤 ‘옛날 일’이란 소리다. 1995년 7월 미국 시카고에서 폭염으로 521명이 사망한 사건을 다뤘으니 자그마치 23년 전. 그런데 ‘지금, 여기’를 마주한 듯한 이 기시감은 뭘까. 뉴욕대 교수인 저자는 재난이 발생했던 시카고 출신. 자기 고향에서 벌어진 사태를 끈질기고 깊이 있게 파고들었다. 사실 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지만, 폭염을 사회학 측면에서 분석한다는 건 여간해선 엄두가 나지 않을 일. 자연재해인 데다 지진이나 태풍처럼 극적이질 않다 보니 더 관심이 쏠리지 않는다. 하지만 저자는 그 때문에라도 폭염에 대한 “사회적 부검(autopsy)”이 꼭 필요하다고 여겼다. “대부분의 세월 동안 가장 치명적인 형태의 기상이변은 폭염이었다. 폭염은 소리와 형체 없이 다가와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그리고 우리는 목숨을 걸고 폭염을 무시하고 있다. … 확신을 가지고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사회과학, 특히 사회학에서 기후변화는 연구와 대중의 참여가 집중되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리라는 점이다.” 얼핏 자연재해는 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도 숱하게 겪어 봤지 않나. 대부분 천재(天災)는 인재(人災) 탓에 호미면 됐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한다. 당시 시카고 역시 그랬다. 시민을 죽음으로 몰고 간 건 이상고온이지만, 그걸 최소화하기는커녕 기름을 끼얹은 건 인간의 우매함이었다. 저자는 ‘시스템’의 문제라고 점잖게 짚었지만. 물론 폭염이 참화로 이어진 데는 복잡한 요소들이 얽히고설켰다. 희생자들이 대다수 빈곤층 홀몸노인이었던 건 누구나 예상 가능하다. 하지만 시카고의 노스론데일과 사우스론데일은 둘 다 못사는 데다 바로 길 건너 동네인데도 사망률이 크게 차이 났다. 노스론데일은 경제가 낙후되며 많은 주민이 떠난 뒤 범죄자의 터전이 됐다. 이로 인해 노인들은 밖으로 나오질 않고 고립돼 버렸다. 반면 사우스론데일은 가난해도 인구가 밀집돼 여전히 거리에 은행이나 가게가 성행했다. 비상사태가 벌어져도 도움을 구할 지역 커뮤니티 덕분에 최악을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게 정 없는 이웃들 문제라고 봐선 곤란하다. 이 지경이 된 건 위기상황에 대한 시청(혹은 정부)의 대응전략이 부재했고, 응급구조 시스템의 원활한 운용이 미비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갈수록 지자체도 기업처럼 ‘효율성’만 추구하는 경향과 자극적인 사건만 쫓는 언론의 생리도 한몫했다. 나아가 당시 시카고 시장은 약점을 감추는 ‘홍보’에만 열을 올렸다. 시정이란 스포트라이트를 못 받더라도 묵묵히 도시 저변의 본질적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중요한데도 말이다. ‘폭염 사회’는 읽을수록 후덥지근해지는 책이다. 아, 저자의 분석은 선명하고 깔끔하다. 곳곳에서 겹쳐지는 우리네 모습이 떠올라서 그렇단 얘기다. 남의 나라도 엇비슷하게 후졌구나 하며 위안 삼기엔 입맛이 씁쓸하다. 해마다 여름은 더 뜨거워진다는데, ‘인재공화국’이라 불리는 대한민국은 어떻게 될는지. 불현듯 제목이 ‘폭염 지옥’으로 읽힌다. 원제 ‘HEAT WAVE: A Social Autopsy of Disaster in Chicago’.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8-08-1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23년 전, 시카고서 521명 사망”…고립된 빈곤층 울린 ‘살인 폭염’

    꾀는 줄 알면서도 꾀였다. 왜 아니겠는가. 이 날씨에 ‘폭염 사회’라니. 못 본 척 하는 게 더 이상하다. 요맘때 이 책을 낸 의도야 뻔하지만. 한편으론 고맙기도 하다. 부제처럼 ‘폭염은 사회를 어떻게 바꿨나’는 이제 우리에게도 절체절명의 화두니까. 흔쾌히 유혹 당하련다. 미리 말하면, 이 책은 초판이 2002년에 나왔다. 2015년 나온 재판을 번역했지만, 새로 실린 서문 말곤 ‘옛날 일’이란 소리다. 1995년 7월 미국 시카고에서 폭염으로 521명이 사망한 사건을 다뤘으니 자그마치 23년 전. 그런데 ‘지금, 여기’를 마주한 듯한 이 기시감은 뭘까. 뉴욕대 교수인 저자는 재난이 발생했던 시카고 출신. 자기 고향에서 벌어진 사태를 끈질기고 깊이 있게 파고들었다. 사실 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지만, 폭염을 사회학 측면에서 분석한다는 건 여간해선 엄두가 나지 않을 일. 자연재해인데다 지진이나 태풍처럼 극적이질 않다보니 더 관심이 쏠리지 않는다. 하지만 저자는 그 때문에라도 폭염에 대한 “사회적 부검(autopsy)”이 꼭 필요하다고 여겼다. “대부분의 세월 동안 가장 치명적인 형태의 기상이변은 폭염이었다. 폭염은 소리와 형체 없이 다가와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그리고 우리는 목숨을 걸고 폭염을 무시하고 있다. … 확신을 가지고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사회과학, 특히 사회학에서 기후변화는 연구와 대중의 참여가 집중되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리라는 점이다.” 얼핏 자연재해는 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도 숱하게 겪어봤지 않나. 대부분 천재(天災)는 인재(人災) 탓에 호미면 됐을 일을 서까래로도 막지 못한다. 당시 시카고 역시 그랬다. 시민을 죽음으로 몰고 간 건 이상고온이지만, 그걸 최소화는커녕 기름을 끼얹은 건 인간의 우매함이었다. 저자는 ‘시스템’의 문제라고 점잖게 짚었지만. 물론 폭염이 참화로 이어진 데는 복잡한 요소들이 얽히고설켰다. 희생자들이 대다수 빈곤층 독거노인이었던 건 누구나 예상가능하다. 하지만 시카고의 노스론데일과 사우스론데일은 둘 다 못 사는데다 바로 길 건너 동네인데도 사망률이 크게 차이 났다. 노스론데일은 경제가 낙후되며 많은 주민이 떠난 뒤 범죄자의 터전이 됐다. 이로 인해 노인들은 밖으로 나오질 않고 고립돼 버렸다. 반면 사우스론데일은 가난해도 인구가 밀집돼 여전히 거리에 은행이나 가게가 성행했다. 비상사태가 벌어져도 도움을 구할 지역 커뮤니티 덕분에 최악을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게 정 없는 이웃들 문제라고 봐선 곤란하다. 이 지경이 된 건 위기상황에 대한 시청(혹은 정부)의 대응전략이 부재했고, 응급구조시스템의 원활한 운용이 미비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갈수록 지방자치단체도 기업처럼 ‘효율성’만 추구하는 경향과 자극적인 사건만 쫓는 언론의 생리도 한몫했다. 나아가 당시 시카고 시장은 약점을 감추는 ‘홍보’에만 열을 올렸다. 시정이란 스포트라이트를 못 받더라도 묵묵히 도시 저변의 본질적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중요한데도 말이다. ‘폭염 사회’는 읽을수록 후덥지근해지는 책이다. 아, 저자의 분석은 선명하고 깔끔하다. 곳곳에서 겹쳐지는 우리네 모습이 떠올라서 그렇단 얘기다. 남의 나라도 엇비슷하게 후졌구나하며 위안삼기엔 입맛이 씁쓸하다. 해마다 여름은 더 뜨거워진다는데, ‘인재공화국’이라 불리는 대한민국은 어떻게 될는지. 불현듯 제목이 ‘폭염 지옥’으로 읽힌다. 원제 ‘HEAT WAVE: A Social Autopsy of disaster in Chicago.’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8-08-10
    • 좋아요
    • 코멘트
  • [책의 향기]폭염 식혀줄 영국표 정통 추리소설

    출판사 편집인 수전은 짜증이 났다. 인기 추리소설 작가 앨런 콘웨이의 원고 때문이다. ‘탐정 아티쿠스 퓐트’ 시리즈 최종판을 받았건만, 마지막 장이 없는 게 아닌가. 뭔가 착오가 생겼나 싶었는데, 이게 웬일. 뉴스에서 앨런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속보가 쏟아진다. 어찌 됐건 수전은 회사의 사활이 걸린 원고를 찾으려 동분서주. 그런데 앨런의 죽음에 께름칙한 구석이 있음을 눈치챈다. 심지어 소설이 현실과 무척 닮았다는 것도 깨닫는데…. 제목에서 짐작 가듯, 이 책은 추리소설이다. 그것도 살인 사건과 탐정이 등장하는 전형적인. 액자소설 형태를 취했는데, 퓐트 탐정이 등장하는 소설은 1950년대 영국이 무대. 수전이 원고의 누락분을 찾는 얘기는 2015년이 배경이다. 원래 소설가는 주위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얻는다지만, 작품 속 등장인물은 거의 앨런의 지인들을 빼닮았다. 그래서 가상과 현실이 얼기설기 얽히며 묘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그렇다고 ‘맥파이…’가 굉장히 복잡한 소설이란 뜻은 아니다. 오히려 단순한 쪽에 가깝다. 영국표 정통 추리물이라고나 할까. 액자소설의 안팎 분량이 거의 반반인데, 퓐트 탐정 얘기는 애거사 크리스티나 아서 코넌 도일의 작품을 읽는 기분도 든다. 끝내 찾아든 마지막 원고엔, 익숙하지만 기다려지는 ‘범인은 바로 당신!’ 장면도 나오고. 원래 추리나 스릴러, 호러물은 여름철 단골손님이다. 올해는 워낙 무더워서인지 특히 이런 장르의 소설이 확 늘었다. 그런데 ‘맥파이…’는 엄청 새롭거나 충격적인 스토리는 아니다. 어느 외신은 “예상치 못한 반전으로 전율을 일으킨다”고 썼던데, 솔직히 그 정도까진 아니다. 하지만 간만에 클래식이 지닌 풍미를 맛보려는 이에겐 딱 맞는 메뉴 선택이리니. 그래, 아무리 끈끈해도 가끔 정찬이 당길 때가 있지 않나. ‘추리’라 쓰고 ‘추억’이라 부르고 싶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8-08-0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책의 향기]선인들의 지혜 얻는 길, 나무와 자연 속에 있다

    실은 이 책은 그다지 설명할 게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뭐라 보탤 말이 굳이 필요 없다. 표지부터 포근한 기운이 물씬한 ‘나무가…’는 그 기대에서 반 뼘도 벗어나질 않는다. 아마 저자 설명만 봐도 다들 촉이 오리라. 오스트리아 알프스 산골에서 나고 자라 산림학 전공. 목수였던 아내의 할아버지에게 얻은 교훈과 자신이 평생 산림관리사로 일하며 얻은 경험을 담았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울창한 숲의 피톤치드가 뿜어져 나온다. 그렇다고 그저 잔잔하지만 않은 게 또 매력적이다. 원래 현지에선 20년 전 나왔다는데 아홉 번 수정을 거쳤고, 요즘 시대에 맞게 크게 개정한 최신판을 이번에 국내에 출간했단다. 그 속엔 나무와 목재에 대한 깊이 있는 정보도 쏠쏠하다. 꽤 전문적인 구석이 많은데도, 이렇듯 편안한 게 신기할 정도. 저자는 “세계적으로 선인들의 지혜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며 “그 지혜를 얻는 길이 바로 나무와 자연으로 가는 길에 있다”고 권한다. 이쪽 분야에 관심이 없어도 곁에 두고 봄 직하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8-08-0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