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

김민 기자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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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국제부 기자입니다. 예술가의 이야기를 따로 모아 뉴스레터 '영감 한 스푼'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kimmin@donga.com

취재분야

2025-11-26~2025-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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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안-강인함 교차… 獨이주 한인 간호여성의 초상

    한국과 비슷하지만 어딘가 한국과는 다른 집 안 풍경. 그 한가운데 중년 여성이 무표정하게 앉아 있다. 이질적 풍경 속, 화면 아래에서 조금씩 떠있는 발이 왠지 모를 불안감마저 자아낸다. 마치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이 온전한 나의 땅이 아니라는 것처럼…. 사진작가 김옥선(52)의 신작 ‘베를린 초상’은 재독 한인 간호 여성을 조명한다. 제주에 거주하는 이방인이나 국제결혼 부부, 다문화가정, 난민 등을 담아 온 그간 작업의 연장선에 있다. 이번에 공개하는 25점 사진 연작도 눈앞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사진 기법에 바탕을 뒀다. 전시장에 줄지어 나란히 걸린 사진을 보면 이들이 이질적 환경에서도 저마다 고유의 뚜렷한 개성을 일구며 살아왔음이 드러난다. 불안한 토대일지언정 묵묵하게 자신의 환경을 지켜온 강인함이 표정에 묻어난다. 모두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을 떠나 타지에서 자신의 삶을 지켜온 주인공들이다. 한인 간호 여성의 독일 집단 이주는 독일에서 의사로 활동했던 이수길 박사의 중개로 1966년 1월 시작했다. 간호 인력이 부족한 독일, 해외 경험과 돈벌이를 희망한 한국 여성, 외화가 필요했던 정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1976년 독일 정부 정책이 변경될 때까지 1만여 명이 이주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주가 중단되고 현지 잔류, 제3국 이주, 귀국 중 선택을 해야 했다. 이 중 현지 잔류를 선택한 대부분의 간호 여성들은 독일 경제가 악화되면서 시행된 강제 귀국 조치 등의 대책에 강력하게 저항하고, 연대를 통해 자리를 지켜왔다. 그 역사의 숨소리가 작품을 통해 뚜렷하게 전해진다. 서울 강남구 아뜰리에 에르메스. 7월 28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19-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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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SNS 세상에서 당장 탈출하라” IT 전문가의 경고

    “(소셜미디어는) 사용자들의 관심과 시간을 최대한 많이 빼앗기 위해… 심리의 취약성을 이용한다. 이것이 아이들의 뇌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는 신이 아니고서는 모를 일이다.”(숀 파커 페이스북 초대 대표) “엄청난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나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 내 해법은 이 도구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벌써 수년 전부터 사용을 중단했다.”(차마스 팔리하피티야 페이스북 사용자 확산 담당 부사장) 이들의 우려는 이미 현실이 됐다. 감정을 증폭하도록 설계된 소셜미디어의 알고리즘은 분노와 편견을 확산시킨다. 인종차별 발언을 서슴지 않는 ‘트위터 중독자’가 미국 대통령이 됐고, 미얀마 로힝야족에 대한 거짓 선동이 핍박을 부추긴다. 정치적, 사회적 영역에서뿐인가. ‘세상을 연결시킨다’는 소셜미디어는 일상 속 박탈감과 외로움을 증폭시켰다. 가상현실(VR) 기술을 고안한 컴퓨터과학자인 저자는 소셜미디어가 왜 당신을 외롭게 만드는지 조목조목 분석하며, ‘해결책이 없다’는 페이스북 부사장의 말을 반박한다. 제목은 소셜미디어 계정을 삭제해야 할 10가지 이유이나, 저자가 분석한 문제의 핵심은 ‘버머’ 알고리즘이다. ‘사용자의 행동을 수정해 왕국(대기업)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라는 영어 설명의 앞 글자를 딴 단어다. 즉 소셜미디어가 이용하는 알고리즘은 사람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할 확률을 계산하고, 그렇게 행동하도록 유도한다. 이것이 자본을 만나 광고에 이용되면서 모든 문제가 시작됐다. 이 버머 알고리즘을 제거한 서비스의 탄생이 문제 해결의 관건이다. 버머 알고리즘은 ‘관심종자’ 우위 사회, 모두의 삶에 참견하는 오지랖, 최악의 꼴통이 분노를 조장해 돈을 버는 사회, 가짜 군중과 위조자의 사회를 만든다. 그 결과 “한쪽 끝에서 꼴통들이 똥폭풍처럼 쏟아져 나오고, 다른 쪽에선 극도로 조심하며 인위적으로 착해 보이는 행동을 한다”고 그는 진단한다. 또 다른 문제는 소셜미디어를 사용하는 우리의 데이터가 돈벌이에 활용되며 일자리마저 빼앗는다는 것이다. 온라인상 수많은 번역 문장을 공짜로 긁어모은 인공지능(AI)은 결과적으로 전문 번역가의 일을 빼앗는다. 예술가들의 데이터를 수집한 AI가 그린 작품이 비싼 값에 팔리는 일도 일어난다. 저자는 이것이 무료로 서비스를 사용하는 대신 데이터를 제공한 대가이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 대가는 커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차라리 유료 서비스가 더 안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간단해 보이는 제목과 달리 소셜미디어의 그늘을 재치 있는 문체로 풀어내 ‘지적 무기’를 제공한다. 우리가 당연히 받아들인 무료 독점 플랫폼 서비스들(페이스북, 구글 등)을 이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절실한 경고이기도 하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19-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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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류세’를 살고 있는 우리를 돌아보며… ‘디어 아마존: 인류세 2019’展

    ‘지구상 남은 마지막 한 그루의 나무가 베어지면…우리는 그때야 비로소 돈을 먹고 살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크리족 인디언) 30일 개막하는 일민미술관의 ‘디어 아마존: 인류세 2019’ 전시장 한쪽에 적힌 문구. ‘인류세’란 온실가스 배출, 핵실험 등 인간의 활동이 자연을 큰 폭으로 변화하게 만든 지질시대를 일컫는 말이다. 2000년 네덜란드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천이 이름 붙였고, 최근 기후변화나 플라스틱, 알루미늄 등 ‘인류세’의 퇴적물 단면이 드러나면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전시 주제가 ‘인류세’인 이유는 이렇다. 이 전시는 브라질 동시대 예술가와 한국 작가, 디자이너 등 총 19팀이 참가했다. 조주현 학예실장은 “비서구권 국가에서 ‘인류세’를 가장 활발하게 논의하고 있는 곳이 브라질”이라고 설명했다. 또 보통 ‘인류세’는 자연사박물관에서 흔히 다루는 주제지만 인류가 지구에 미칠 영향을 복합적 감각으로 상상하는 예술의 역할도 중요하기에 미술관 전시 주제로 꼽혔다. 1층 전시장에 들어서면 20, 30대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브라질 예술의 감각과 분위기를 가늠해볼 수 있다.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나’에 집중한 사적이고 즉물적인 경향이 두드러진다. 귀 퐁데(36)의 설치 작품은 자신의 신체를 ‘사회적 조각’으로 내놓아 눈길을 끈다. 검은 스크린에 구멍을 뚫어 일부 신체 부위만 내놓고, 손가락 끝에는 사슬을 묶은 사진에 헤드셋을 끼면 “나는 (스마트폰) 스크린을 만질 수 없다”는 문구가 흘러나온다. 컵케이크로 몸을 감싼 사진은 “나는 단것을 먹고 욕망을 채운다”는 말이 나오는 식이다. 몸을 활용해 일상 속 감각이나 타인의 시선을 표현한다. 2층에 전시된 중견 작가 작품은 근대화 과정을 직접적으로 다뤄 정치색이 짙게 드러난다. 조나타스 지 안드라지의 설치 작품은 ‘헤시피’ 지역의 도시화 과정을 주제로 한다. 원경에서 봤을 때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는 도시의 모습과 가까이서 봤을 때 괴리감이 느껴지는 일상을 나란히 배열했다. 도시의 겉모습만 서구 모더니즘을 따라 하면 과연 삶도 나아지는지 질문을 던진다. 3층 영상 전시장을 지나 프로젝트룸에 들어서면 숲 속에 온 것 같은 공간이 펼쳐진다. 푹신한 소파와 해먹, 포근한 카펫이 깔린 ‘미술관 속 소풍’을 위한 라운지다. 이곳에서 명상, 요가, 퍼포먼스, 발효주 워크숍 등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관객이 즐겁게 참여하며 환경 문제를 가깝게 느끼도록 유도한 공간. 공교롭게도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리투아니아관과 같은 주제를 유사한 방식으로 풀어냈다. 이 밖에 솔란지 파르카스 비데오브라질 디렉터가 기획한 스크리닝 프로그램 ‘비데오브라질 히스토리 컬렉션’도 5층 신문박물관 영상실에서 감상할 수 있다. 으나 바스의 ‘석기 시대’ 등 총 9편의 작품이 상영된다. 8월 25일까지. 5000∼7000원.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19-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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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비에서]이미 정해진 답?

    “너무 가감 없이 기사를 쓰셨어요.” 27일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미술관 측이 언급한 ‘가감 없는’ 기사는 현재 회고전이 열리는 예술가 박서보의 인터뷰였다. 해당 기사는 작가 작업실을 찾아 회고전을 열게 된 소감과, 그간 제기된 여러 이야기에 관한 작가의 생각을 듣고 정리했다. 그런데 미술관은 “다른 곳은 전시에 포커스를 맞춰 써주셨는데, 해당 기사는 작가 발언을 가감 없이 써서 난감하다”고 했다. 난감하다고 한 것은 이런 내용이다. ‘국내 최초 앵포르멜 작가’라는 표현의 문제점을 지적한 부분과 ‘팝 아트’, ‘옵 아트’를 수용했다는 미술관의 설명에 대해 작가가 부인한 대목이다. 마치 미술관과 작가가 대립하는 입장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형 앵포르멜’과 팝 아트, 옵 아트를 수용한 것은 이미 다 정립된 맞는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미 다 정립됐다’는 시각이다. 미술관은 현재 생존 작가의 전시를 열고 있다. 미술사적 평가가 이뤄지지 않은 시점에서 당연히 다른 의견이 제기될 수 있다. 더구나 ‘국립’현대미술관이 아닌가. 공공의 목적으로 전시를 열었다면 비판까지도 수렴해 건강한 담론을 형성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오스카 와일드는 “예술은 정답이 있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처럼 봐서는 안 되며, 미스터리에 휩싸인 여신처럼 바라봐야 한다”고 했다. 좋은 예술은 예술가 자신을 포함해 다양한 사람의 치열한 비평과 검증을 거쳐 탄생한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19-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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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강, 2114년 출간될 작품 노르웨이에 전달

    소설가 한강이 25일 노르웨이 공공예술단체 ‘미래도서관’에 2114년에 출간될 미공개 소설 원고 전달식을 가졌다. 미래도서관은 2014년 사업을 시작해 100년간 매년 작가 1명의 미공개 작품을 받아 2114년에 출판하는 프로젝트다. 책은 노르웨이 오슬로 외곽의 숲에 100년 동안 심은 나무 1000그루를 사용해 만든다. 한강은 다섯 번째 참여 작가로 그의 소설은 95년 뒤 출간된다. 한강이 공개한 소설 제목은 ‘사랑하는 아들에게(Dear Son, My Beloved)’로 분량이나 소재, 내용은 모두 비밀에 부친 채 봉인돼 오슬로 도서관에 보관된다. 한강은 ‘미래도서관의 숲’에서 열린 원고 전달식에서 프로젝트를 시작한 스코틀랜드 예술가 케이티 패터슨에게 흰 천으로 둘러싸인 원고를 넘겼다. 한강은 이날 전달식에서 “나의 원고가 이 숲과 결혼을 하는 것 같기도,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작은 장례식 같기도, 대지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긴 잠을 위한 자장가 같기도 하다”며 “한국에서 신생아를 위한 배냇저고리, 소복, 홑청으로 흰 천을 사용하기에 원고도 흰 천으로 감쌌다”고 설명했다. 그는 미래도서관 올해의 작가 선정 당시 소감문도 낭독했다. 소감문에서 그는 “첫 문장을 쓰는 순간 100년 뒤 세계를 믿어야 한다. 인간의 역사는 사라져 버린 환영이 되지 않았고 지구가 무덤이나 폐허가 되지 않았으리라는 근거가 불충분한 희망을 믿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프로젝트도 불확실성 속에서 무언가 애써 보려는 100년의 기도”라고 했다. 이날 행사에는 오슬로 시장과 재단 관계자, 내외신 언론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한강은 전달식이 끝난 뒤 오슬로 공공도서관에서 독립 언론인 로지 골드스미스와 대담을 진행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19-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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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서보 작가 “난 뿔난 도깨비… 피 토하듯 새로운 길 찾아왔다”

    《‘뿔난 도깨비.’ 원로작가 박서보(88)는 16일 자신의 회고전 간담회에서 세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리는 박서보의 회고전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는 그의 신작부터 1950년대 초기 작품까지 역순으로 소개한다. 약 70년의 여정을 작품 129점과 아카이브를 통해 선보이는 대규모 전시다.》  그는 단색화의 대표 작가이자 교육자, 행정가로 활발히 활동해 왔다. 1950년대 ‘반(反)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 선언’을 이끈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홍익대 사단을 거느린 패권주의자’라거나 ‘서양 미술을 모방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23일 서울 서대문구의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회고전 소감이 어떤가. “과거 작품이 전통의 양식적 해석이 많아 부끄러웠는데, 이번에 보니 시대의 산물이고 누구의 영향도 없어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화 No.1’도 오랜만에 전시됐다. ‘잭슨 폴록’의 모방이라는 지적도 있는데…. “미술사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폭격을 맞은 종로 거리 부서진 철근 아래를 걸어가며 나도 모르게 그런 작품이 나왔다. 그릴 때 잭슨 폴록은 몰랐다.” ―구체적 형상을 표현했나. “형상에서 추상이 된 거다. 안료 가루를 기름에 섞어 소주병으로 밀어 물감을 만들었다. 이게 현대 미술의 출발이었다. 그때 김창열 윤명로 등 함께한 작가들이 ‘안국동파’라고 놀림을 받았다.” ―현대 미술의 집단화가 왜 중요했나. “국제화가 중요했다. 일본이 현대 미술전으로 해외 진출을 했고 우리도 질 게 없다 생각했다. 남들은 내가 정치를 했다고 하지만, 나는 이런 일을 했다.” ―잭슨 폴록을 정말 몰랐나. “그림을 잘 보면 밑색이 보인다. 자주 다시 그려 ‘땜빵’한 흔적도 있다. (‘No. 1’ 제목은 어떻게 나왔나?) 시리즈의 첫 그림이기에 그렇게 붙였다. 유사성 지적은 자유지만 당시 정보가 없었다. 나는 보수 정권에서는 혁신가, 좌파 정권에선 우파 퇴물 취급을 받는다. 온갖 역경 아래 ‘현대 미술 가치관 집약 운동’을 했고 그것이 우리나라 미술을 만들었다.” ―‘묘법’은 사이 트웜블리와 비슷하다는 지적도 있다. “연필을 썼다고 비슷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트웜블리는 즉흥적 낙서를 표현했고 나는 행위의 반복, 자연과의 합일을 표현했다. 정신이 다르다. 트웜블리는 작품도 순식간에 완성한다. 물론 재주 있는 친구다. 죽기 전에 2인전으로 겨뤄 보고 싶다. 내 신작은 수신(修身)에 ‘치유’ 개념까지 넣어 트웜블리는 게임이 안 된다.” ―‘수신’이 그림만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왜 그런가. 이번 신작도 남들이 먼저 ‘완전히 수신과 치유를 동시에 잡는다’고 이야기한다. 화이트큐브 디렉터, 일본 평론가 모두 내 그림이 좋다고 했다. 우리나라 사람이나 개념적으로 접근해 ‘선만 긋고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단색화가 급조된 이론이라는 비판에 대한 생각은…. “절대 그렇지 않다. 미니멀리즘의 한국적 해석이 아니라 나를 전부 비워 내는 것이다. 서양은 개념적으로 접근하고 우리는 사상적으로 접근하는 것인데 구별을 못 한다.” ―예술 작품의 독창성은 어떻게 생긴다고 보나. “큰 흐름에서 자신만 가능한 길을 찾아야 한다. 평론가 이일이 나를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작가’라 했는데, 우리 사회가 발전해 이제 나 같은 사람은 필요 없다. 나폴레옹이 그 시대에 안 나왔다면 다른 누군가가 그 역할을 했을 것이다. 나 역시 (누군가 앞장서야 했던) 시대의 산물이고, 화살받이가 됐다.” ―시간이 지나면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을까. “그렇다. 나처럼 시대가 명확하게 바뀐 작가가 없다. 피를 토하듯 새로운 길을 찾아왔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19-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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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로작가 박서보 “나는 시대의 산물이자 화살받이”

    ‘뿔 난 도깨비’ 원로작가 박서보(88)는 16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대규모 회고전 간담회에서 세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단색화의 대표 작가이자 교육자, 행정가로 활발히 활동했다는 평가를 받는가 하면, ‘홍익대 사단을 거느린 패권주의자’라는 비판도 받는다. 그런 그의 작품 129점을 선보이는 대규모 회고전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23일 서울 서대문구의 작업실에서 그를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어봤다. 회고전을 열게 된 소감을 묻자 자신 있는 모습이었다. “과거 작품이 전통의 양식적 해석이 많아 부끄러웠는데, 이번에 적나라하게 내놓고 보니 그것 역시 시대의 산물로 누구의 영향도 없이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전시장에서 입체 작품인 ‘허상’을 볼 수 있다. 미국 조지 시갈의 인체 조각과 일본 다카마쓰 지로의 그림자 회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건축가 김수근이 재밌겠다고 해 오사카 만국박람회에도 출품했다.” ● “‘No.1’ 그릴 당시 폴록 몰라…서양 미술 수용한 바 없어” 박서보는 1956년 ‘반(反)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 선언으로 미술계에 이름을 알리고 1년 뒤 ‘회화 No.1’를 발표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 작품이 박서보를 ‘국내 최초 앵포르멜 작가로 알렸다’고 한다. ‘앵포르멜’은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생겨난 추상 미술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설명대로라면 박서보는 ‘최초로 앵포르멜을 모방한 작가’가 된다. 만약 ‘앵포르멜(프랑스어로 ’형태가 없는‘)’이 문자 그대로 추상의 의미라면, 이미 1930년대 유영국 등이 추상 미술을 선보인 바 있어서 최초로 보기는 어렵다. 이에 대해 그는 앵포르멜을 모방한 것이 아니며 고유의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회화 No.1’은 잭슨 폴록의 작품과 형태가 비슷하고 제목도 유사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당시 예술가들은 일본의 월간지 ‘미술수첩’을 통해 서양 미술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잭슨 폴록은 미군도 즐겨 보던 ‘라이프’지에 대대적으로 소개된 유명 작가였다. 그러나 박 화백은 당시 폴록을 몰랐다고 말했다.― ‘회화 No.1’이 오랜만에 전시됐다. “미술사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그런 실험을 누구도 하지 않았다. 당시 전쟁으로 폭격을 맞은 종로 거리 부서진 시멘트 조각이 붙은 철근 아래를 걸어가며 나도 모르게 그런 작품이 나왔다. 그림을 그릴 때 잭슨 폴록은 몰랐다.”― 그렇다면 구체적 형상을 표현한 작품인가? “형상에서 추상이 된 거다. 이 그림도 처음에는 페인트의 두께감이 생기지 않아 안료 가루를 기름에 섞어 소주병으로 밀어 물감을 만들었다. 이렇게 우리 현대미술이 출발했다. 그 때 함께한 김창열, 윤명로, 김종학 등이 ‘안국동파’라고 놀림을 받았다.”― 잭슨 폴록을 몰랐나? “그림을 잘 보면 밑색이 보인다. 자주 다시 그려 ‘땜빵’한 흔적도 있다. (제목은 왜 ‘No.1’이라고 붙인 것인가?) 시리즈의 첫 그림이기에 그렇게 붙였다. 지적은 자유지만 당시에는 정보가 아무것도 안 들어왔다. 무역도 없던 시절이다. 나는 보수 정권에서는 혁신주의자, 좌파 정권에선 우파 퇴물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나는 좌도 우도 아닌 개혁파다. 나는 역경을 겪으며 ‘현대 미술 가치관 집약 운동’을 했고 그것이 우리나라 미술을 만들었다. 평론가들이 서양 글만 짜깁기하고 자기 얘기가 없다. 그래서 내가 자연과 인간을 서양인처럼 이원화하지 않고 나도 자연의 한 부분으로 보는 동양적 가치관을 현대적으로 정립시켰다. 내 생각을 비워야 자연과 ‘합일’이 되고 ‘수신’을 한다는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이번 전시 설명에는 1960년대 ‘팝 아트’와 ‘옵 아트’를 수용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나는 그런 것을 수용한 일이 없다. 옵 아트는 착시 현상을 일으켜야 하는데 내 작품은 단순한 색띠 구성이다. 서양의 이론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것이 우리의 문제다. 그만큼 자기의 이론도 눈도 없다.” ● “내 ‘묘법’ 트웜블리(톰블리)보다 낫고 연대도 확실” 1970년대 그의 작품은 연필로 선긋기를 반복한 ‘묘법’으로 변화한다. 그는 둘째 아들이 공책에 글씨를 쓰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설명한다. 이 때부터 색채와 형태가 단순해진 작품들은 ‘단색화’로도 분류된다. 한편 이들 작품은 낙서를 모티브로 ‘유희성’ 등 인간의 속성을 보여준 미국 작가 사이 트웜블리(사이 톰블리·1928~2011)와 유사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박 화백은 자신의 작품이 ‘정신성’을 지녔기에 차별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1967년 ‘묘법’ 최초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는데, 류병학이라는 엉터리 평론가가 연도를 속였다고 주장한다”며 “초기 실험작을 누가 발표하나. 그런데 아직도 무식한 소리를 사람들이 퍼나른다”고 했다. ― ‘묘법’은 사이 트웜블리와 비슷하단 지적이 있다. “세잔과 르누아르의 정물을 두고 똑같은 유화인데 영향을 받았다고 하나? 연필을 썼다고 비슷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트웜블리는 즉흥적 낙서를 표현한 것이고 나는 행위의 반복, 자연과의 합일을 표현했다. 정신이 다르다.” ― 트웜블리의 작품을 정신성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 작품은 순식간에 완성이 된다. 물론 재주는 있는 친구다. 그 친구 작품이 한 점에 1000만 달러가 넘는데 나는 옥션에서 200만 달러가 겨우 넘었다. 2인전으로 겨뤄보고 싶다. 내 신작은 수신에 ‘치유’ 개념, 색채까지 넣어 최대의 경지로 트웜블리는 게임이 안 된다.”― ‘수신’이 그림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왜 그런가. 문맹 같은 사람이 고정관념을 가지면 뭘 쥐어줘도 모른다. 이번 작품만 해도 남들이 먼저 ‘완전히 수신과 치유를 동시에 잡는다’고 이야기 한다. 외국 갤러리와 평론가가 모두 내 그림이 좋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이나 개념적으로 접근해 ‘선만 긋고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국내에서 이해하지 못한다면 왜 한국적 미학인가? “보고도 모르는 사람은 문맹이다. 자기들이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하나. 또 내가 건강이 나빠지며 조수를 쓰기 시작했고 그 때부터 ‘수신’은 바닥에 깔고 ‘치유’의 개념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런데 왜 수신이라고 해놓고 조수를 쓰느냐고 공격한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한국 사람은 개인적으로 우수한데 한 사람이 올라가면 밑에서 끌어 내린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작가의 설명보다 작품이 직접 말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작품을 봤을 때 느껴야지. 내 신작은 모두가 전에 없던 밀도감이 있다며 높이 평가한다.” ● “나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산물이자 화살 받이” 단색화 논란에 대해서도 “외국 컬렉터와 평론가는 좋아하는데 국내에서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는 말했다. 또 단색화는 다색의 반대 개념으로 한 색을 사용한 ‘모노크롬(단색)’의 이미가 아니라 수행의 개념이며 서양의 잣대로 봐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민중미술에 대해 평가할 때는 ‘팝 아트’ 등 서양의 사조를 기준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 주변에서 존경과 호평을 많이 받는다. “단색화는 지금 없어서 못 파는 것이지 지속적으로 평가를 하고 있다. 또 단색화 다음에 민중미술이 뜰 거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민중미술의 출발은 훌륭했지만 양식은 19세기 고전주의 스타일이다. 가난한 사람이 쭈그리고 앉아있는 그림은 없는 사람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또 팝 아트는 앤디 워홀이나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이 다른데, 민중미술 작품은 전부 비슷하다.”― 한국적 상황을 담았다는 측면에서 민중미술도 가치를 지닐 수 있지 않나? “글쎄. 남한테 관심이 없어서. 다만 그동안 나온 걸 보면 양식이 다 사실주의다.”― 단색화가 급조된 이론이라는 비판에 대한 생각은? “절대 그렇지 않다. 미니멀리즘을 한국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나를 전부 비워내는 것이다. 서양은 개념으로 우리는 사상적으로 접근하는 것인데 구별을 못한다.”― 예술 작품의 독창성은 어떻게 생긴다고 보나? “큰 흐름에서 자신만 가능한 길을 찾아야 한다. 평론가 이일이 나를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작가’라 했는데, 우리 사회가 발전해 이제 나 같은 사람은 필요 없다. 나폴레옹이 그 시대에 안나왔다면 다른 누군가가 그 역할을 했을 것이다. 나 역시 (누군가 앞장서야했던) 시대의 산물이고, 화살받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제대로 평가를 받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렇다. 나처럼 시대가 명확하게 작품이 바뀐 작가가 없다. 피를 토하듯 새로운 길을 찾아왔다.” 김민기자 kimmin@donga.com}

    • 2019-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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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준호, 세계 영화 지형도 바꿨다…거장들 총출동한 칸서 韓 최초 황금종려상

    “‘패러사이트’(기생충·Parasite) 봉준호!” 25일 저녁(현지시간) 칸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열린 제 72회 칸 국제영화제 폐막식에서 심사위원장인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호명에 숨죽임 끝에 환호와 박수가 터져나왔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수상의 영광을 향한 ‘예우의 함성’은 국적을 불문했다.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이름이 울려퍼지자 옆 자리에 앉은 배우 송강호를 뜨겁게 얼싸안았다. 그리고 대극장의 관중들을 뒤돌아보며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그가 처음 칸을 밟은 지 13년 만에 영화제의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품에 안는 순간이었다. 베네치아, 베를린 영화제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칸 영화제는 당대 영화의 어젠다를 주도하며 국제영화제 중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 1990년대 이후 헐리우드 영화에도 문호를 열었으며 아시아 영화에도 주목해 일본의 이마무라 쇼헤이,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중국의 첸 카이거 감독 등도 칸을 통해 세계적인 감독 반열에 올라섰다. 수상 직후 외신은 봉 감독의 영화세계와 한국 영화 최초 수상에 대해 상세하게 분석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AP통신은 봉 감독과 황금종려상(Palme d‘or)의 합성어인 ’봉도르(Bong d‘or)’라는 제목으로 “여러 장르가 결합한 이 영화는 올해 칸영화제에서 가장 호평받은 영화다”라고 설명했다. AFP통신은 “한국의 신랄한 풍자가 봉준호가 칸에서 역사를 썼다”며 봉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자세히 설명하는 한편 “송강호는 한국의 국보급 배우”라고 주목했다. ●거장들 총출동한 칸에서 거머쥔 황금종려상 ‘기생충’의 수상 여부는 칸 영화제 초청작이 발표되는 4월 중순만 해도 ‘시계 제로’의 상황이었다. 총 21편의 경쟁작 가운데 5편의 감독이 이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거장들로 초청작의 면면이 여느 때 보다 화려했다. ‘영 아메드’로 올해 감독상을 수상한 장 피에르·뤼크 다르덴 형제와 ‘쏘리 위 미스드 유’의 켄 로치 감독은 황금종려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감독이다. 지난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어느 가족’으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해 아시아 영화는 수상에서 멀어지는 것 아니냐는 예측도 나왔다. 그러나 ‘기생충’은 칸 현지 상영 직후 전 세계 언론과 평단, 영화제 관계자들에게 압도적인 호평을 받으며 영화제 전 설왕설래를 무색하게 했다. 특히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가 경제성장으로 맞닥뜨린 빈부 격차와 양극화의 문제를 블랙코미디로 풀어낸 것이 보편적인 공감대를 샀다는 평가를 받는다. 칸 영화제에 앞서 봉 감독은 “한국적인 디테일이 포진해 있지만 빈부차이는 전 세계의 보편적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가족이 거주하는 반지하, 치킨집을 하다 망한 이야기 등 기택네 가족에 대한 묘사는 지극히 한국적이지만 이는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문제기도 하다. 외신들은 “덩굴손처럼 뻗어와 당신 속으로 깊숙이 박힌다(가디언)”, “‘살인의 추억’ 이후 봉준호 감독의 가장 성숙한,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한 발언(헐리우드 리포터)” 등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영화평론가 강유정 강남대 교수는 “한국의 문제를 넘어 세계의 보편적 문제가 된 계층과 양극화 문제를 사회학에 영상미학을 더해 풀어낸 것이 칸의 인정을 받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100년 맞은 한국영화사 새로운 도약 계기 올해는 1919년 단성사에서 최초의 한국영화인 김도산 감독의 ‘의리적 구토’가 개봉한지 100주년을 맞는 해로 영화계는 이번 황금종려상 수상으로 한국 영화가 국제무대에서 가치를 더욱 인정받고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칸 영화제에서 장편 경쟁부문에 진출한 첫 한국영화는 임권택 감독의 2000년 영화 ‘춘향뎐’이다. 임 감독은 2002년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또 2004년에는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고, 같은 해 홍상수 ‘남자는 여자의 미래다’도 경쟁부문에 올랐다. 2007년에는 ‘밀양’(이창동)의 주연 전도연이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2009년에는 박찬욱 감독이 ‘박쥐’로 심사위원상을 수상해 2회 본상 수상 기록을 세웠다. 이듬해에는 ‘시’(이창동)가 각본상을 받았지만 이 때를 마지막으로 한국 영화는 한동안 연달아 수상에 실패했다. 한국영화의 칸 본상 수상은 이번이 9년 만이다. 2014년 ‘표적’(창감독)을 시작으로 한국 영화는 비경쟁 부문인 미드나이트 스크리닝에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다. 올해 ‘악인전’(이원태)까지 6년 연속 진출을 기록해왔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봉 감독의 황금종려상 수상은 세계 영화의 지형도가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며 “특히 아시아 영화가 2년 연속 칸에서 상을 받으며 앞으로 세계 영화 시장에서 아시아 영화가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이서현 기자 baltika7@donga.com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19-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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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마음 담아 고르고 해설한 ‘위로 같은 詩’

    매주 토요일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으로 독자를 만난 여러 편의 시 중 88편을 골랐다. ‘풀꽃’의 시인 나태주의 딸로 자란 저자는 시에 대한 원망과 궁금증을 품고 살았다고 한다. 시가 안 된다며 자주 우는 아버지를 보면서 자랐기 때문이다. 결국 시를 이해하기 위해 국문과에 진학하고, 현대시를 연구한 뒤 문학평론가가 됐다. 피에 흐르는 시적 유전자를 거부할 수 없었던 탓이다. 그런 그가 발굴한 시와 이에 관한 대중적 해설을 한 쪽씩 엮은 책이다. 익히 알려진 시인의 작품도 있지만 숨겨진 감동을 주는 시가 중심이 된다. 김영랑의 ‘내 마음을 아실 이’부터 김종삼 ‘묵화’, 송영택 ‘소녀상’, 박용래 ‘저녁눈’ 등이 각 부의 첫 장을 장식한다. 유명세보다는 마음이 좋아하는 시를 기준으로 선정했다고 한다. 저자는 시가 단아한 꽃처럼 독자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면 해설은 그 꽃을 피워낸 따뜻한 햇볕처럼 포근하게 시를 빛내 준다고 설명한다. 함축적인 언어로 표현된 시와, 그 시 속에 담긴 시대정신을 담아 오늘을 살아가며 좌표를 잃고 지친 현대인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시는 나를 울어주고 정성껏 슬퍼해’주기 때문에, ‘당신의 마지막 친구로 시를 선물하고 싶다’고 머리말에서 저자는 설명한다. 시와 해설을 한 폭의 이미지로 담은 김수진 작가의 삽화도 책 사이사이 삽입됐다. 저자는 시를 찾는 일이 마음을 보는 일이라고 한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서 그것이 어렵지만, 시에는 우리의 존재와 흔적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마음을 찾아 따뜻하게 안아 주고, 일상을 희망으로 담는 것이 저자가 설명하는 책을 펴낸 이유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19-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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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움만이 예술일까… 안창홍 개인전 ‘화가의 심장’

    중견작가 안창홍(66)이 대형 부조 신작을 들고 개인전을 연다.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열리는 안창홍 개인전 ‘화가의 심장’에서는 ‘화가의 손’ 3점과 ‘화가의 심장’ 1점, 회화 소품 등 26점이 전시된다. 지하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대형 부조는 가로세로 2m가 넘는다. 작가가 물감 찌꺼기를 버리던 쓰레기통을 확대한 모습이다. 캐스팅으로 형태를 제작하고 작가가 직접 채색했다. 가운데 놓인 심장과 백골이 된 팔은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암시한다. 작가는 “유사 금박을 입힌 부조와 잿빛 부조의 대조는 성공한 예술가와 대중에게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의 삶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1층 입구에 전시된 푸른 배경 위 ‘화가의 손’은 심지어 24k 금박을 입혔다. 2층 전시장에는 회화 소품 ‘이름도 없는…’이 전시된다. 작가는 이들이 “이름만 없는 이들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묻혀버린 익명의 인물들”이라고 설명한다. 역사의 현장에서 희생당해 기억 속에 사라진 소시민들을 표현했다고 한다. 1970년대 말부터 선보인 그의 작품은 거침없고 도발적인 시각 언어로 주목을 받았다. 권위적인 사회에서 자아를 잃어버린 군중의 모습을 날카롭게 그려낸 ‘가족사진’ 연작, ‘49인의 명상’ 등이 대표적이다. 일상 속 평범한 소시민의 개성을 생생하고 강렬한 이미지로 드러낸 ‘베드 카우치’ 연작도 있다. 이런 과거 작품과 비교했을 때 신작은 다소 장식적 측면이 강하다. 삶의 현장으로 향했을 때 폭발적 에너지로 꿈틀댔던 시선이 작업실로 향하자 얌전해진 듯한 인상이다. 전시는 6월 30일까지.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19-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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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꽃의 화가’ 이경순 개인전

    화가 이경순(92)이 서울 강남구 갤러리오에서 30일부터 6월 12일까지 개인전 ‘데코룸, 밀고 당기는 꽃의 리듬’을 연다. 라일락, 나리꽃 등을 그린 미공개작 중심으로 구성했다. 꽃이 담긴 화병과 탁상, 창문 너머 펼쳐지는 풍경의 조화에서 느낀 감동을 표현했다. 국내 1세대 원로 작가인 이경순은 1953년 2회 국전부터 출품했고 이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추천작가로도 참가했다. ‘한 아름 장미’라는 제목으로 개최된 전시 이후 개인전은 근 10년 만이다. 이 화백은 “자연과 더불어 살며 이를 화폭에 담고 나누며 살아온 인생에 무한한 감사를 느낀다”고 말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19-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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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각형 평면 사진을 ‘구’형태 입체로 구현하다

    “사진의 프레임 밖 공간을 개념적으로 드러낼 순 없을까. 이런 고민 끝에 ‘구’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독일 출신으로 한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베른트 할프헤르(55)의 개인전 ‘Same same but different’가 서울 종로구 갤러리나우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는 구(球)의 형태에 사진을 담은 ‘Sphere(구)’와 동영상의 정지 화면을 평면에 나열한 ‘Stories(이야기들)’ 연작으로 구성된다. 15일 전시장에서 만난 할프헤르는 ‘구’ 시리즈가 1994년부터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당시만 해도 360도 카메라는 물론이고 파노라마 촬영 기법도 없었습니다. 완전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사진을 찍고 서로 연결시켜 작업했어요. 데이비드 호크니의 ‘포토 콜라주’와 비슷한 방식이었죠.” 독일 울름에서 태어난 그는 미술과 물리학을 함께 배워 공학에도 관심이 많다. 온전한 구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사진이 빈틈없이 이어지도록 붙인 다음 에폭시 코팅을 수차례 덧씌우는 ‘구’ 작품 제작에 통상 한 달이 소요된다. 손으로 만드는 것에 집중하는 공예적 측면이 강하다. 전시 제목은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이미지가 쏟아지는 시점을 염두에 뒀다. 그리고 거트루드 스타인의 시 ‘성스러운 에밀리’의 구절 ‘장미는 그냥 장미이다(Rose is a rose is a rose)’를 차용했다. 그는 “온라인에 수많은 이미지가 있지만 그 속에서도 다른 뉘앙스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이미지는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할프헤르는 2011년부터 중앙대 미술학부 조소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95년 처음 여행으로 한국을 찾은 뒤 2000년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등으로 독일과 한국을 오갔다. 한국에 정착하게 된 것은 2006년 경기 파주 하제마을의 예술가 레지던시에 머물면서부터다. “정치적, 사회적 작품을 선호하는 독일과 달리 한국에선 개념적인 측면에 대한 좋은 피드백을 많이 받았어요. 물론 정치적 이슈를 다루지만 간접적인 방식을 한국에선 더 좋게 보는 것 같습니다.” 또 영상 스틸컷을 나열한 ‘이야기들’ 시리즈는 동영상의 시간 개념을 드러내고 싶어서 만들었다. 할프헤르는 “카메라를 브러시처럼 사용해보고 싶었다. 다만 특정한 개념을 겨냥하기보다 우연히 나오는 훌륭한 이미지를 좋아해서 그런 방식으로 작업했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28일까지.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19-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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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거 상처, 올바른 사회를 위한 재료로 써야” 한반도평화나눔포럼 기자회견

    “프란치스코 교황은 북한의 비핵화 협상 과정을 아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20일 서울 중구 천주교 서울대교구청에서 열린 ‘2019 한반도평화나눔포럼’ 공식 기자회견에 참석한 구스만 카리키리 교황청 라틴아메리카위원회 부의장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남북 관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가까운 사이인 그는 “몇 달 전 교황의 방북 가능성이 거론됐지만, 공식 초청은 분명 없었으며 현재도 준비 모임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설명하며 이같이 밝혔다. 독일 출신인 요제프 클레멘스 주교(전 교황청 평신도 평의회 차관)는 “한 민족이었던 독일이 합쳐지길 열망하고, 통일이 되는 과정을 직접 겪었다”며 “아무리 상처가 깊거나 실망이 있어도 멀리 보고 하나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일치와 화해”라고 말했다. 헝가리 에스테르곰-부다페스트 대교구장인 에르되 페테르 추기경은 “깊이 상처받은 피해자는 가해자가 용서를 청하지 않아도 먼저 용서하라는 불림을 받는다”며 “사회의 불의를 참으라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상처와 교훈을 올바른 사회를 건설하는 재료로 써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19-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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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울한 선율-침울한 스토리… ‘우울함’에 빠져들다

    “여기 혹시 빌리 아일리시 주황색 카세트테이프 있어요? 와, 여기 있다!” 17일 서울 마포구의 음반 매장 ‘도프 레코드’. 한 고교생이 들어오더니 아일리시의 카세트테이프를 발견하자마자 계산대에 들이밀었다. 18세의 아일리시는 올 들어 가장 뜨겁게 떠오른 신인 팝스타다. 빌보드 앨범차트 1위를 찍더니 노래 ‘bad guy’는 멜론 등 국내 음원차트 10위 안까지 치고 올라왔다. 팬 충성도의 척도인 실물 음반 판매량도 압도적이다. 김윤중 도프레코드 대표는 “‘보헤미안 랩소디’ 이후 퀸 열풍을 아일리시가 이어받았다. 카세트테이프만 200장 가까이 팔렸고 LP레코드와 CD 판매량도 올 상반기 압도적 1위”라고 했다. 그는 “구매자의 절대다수가 10대로, 그들이 이렇게 어두운 음악에 열광하는 것이 놀랍다”고 했다. 몽유병, 잔혹극, 공포물을 뒤섞은 음악과 영상이 아일리시의 전매특허다. 서브컬처(주변부 문화) 마니아의 전유물이던 음울한 콘텐츠, 이른바 ‘글루미(gloomy) 콘텐츠’가 주류 문화계를 점령하고 있다.○ 콘텐츠 시장은 제2의 세기말 최고 흥행을 기록한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 드라마 ‘왕좌의 게임’도 예외가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시리즈의 대단원을 마무리하는 이 작품들은 어두운 분위기의 화면, 영웅들의 잇따른 참패나 죽음으로 블록버스터로서는 이례적인 음울함으로 도배됐다. 일부 관객들은 “스트레스를 풀려고 봤다가 더 침울해졌다”고 호소한다. ‘킹덤’ ‘블랙미러’ ‘기묘한 이야기’ ‘버드박스’ 등 기괴하고 어두운 콘텐츠를 내세운 넷플릭스의 대중화도 이런 분위기에 한몫했다. 팝 음악계에서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커트 코베인(너바나)이 대표한 1990년대 얼터너티브 록 열풍 이후 자기 파괴적 음악이 이만큼 대중적 열광을 받은 것은 처음이라는 말이 나온다. 글루미 콘텐츠는 자기 과시와 힘자랑 이미지가 세던 힙합도 접수했다. 지난해 요절한 래퍼 엑스엑스엑스텐터시온이 대표적이다. 그의 곡 ‘SAD!’는 스포티파이 단일 곡 일간 스트리밍 역대 최고 기록(약 1040만 건)을 갈아 치웠다. 강일권 대중음악 평론가는 “요즘 대세인 내면의 어두움을 담은 이모 랩(emo rap)은 아예 자살충동, 약물중독, 패배감, 우울증이 주요 소재가 됐다”며 “2017년 래퍼 릴 핍, 2018년 엑스엑스엑스텐터시온이 실제로 비극적 죽음을 맞으며 10, 20대에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됐다”고 했다. 영국의 BBC와 텔레그래프, 미국의 바이스 등도 ‘다크 팝’ ‘테러 팝’ 같은 용어를 쓰며 ‘팝은 왜 점점 더 우울해지는가’ 같은 분석 기사를 앞다퉈 내고 있다. X세대와 Z세대의 연결고리를 찾기도 한다. 밝고 힘찬 댄스 팝이 점령한 듯 보이는 국내 음악계에서는 신세대 R&B 가수들이 이런 조짐을 보인다. 웹진 ‘아이돌로지’의 미묘 편집장은 “수민, 수란, 제이클레프 등 음악 팬들이 열광하는 신진들의 음악에 어둡고 축축하고 세기말적인 분위기가 관통한다”고 했다. 올해 한국대중음악상을 받은 제이클레프의 앨범 타이틀곡은 ‘지구 멸망 한 시간 전’이었다.○ 냉소, 절망… 디스토피아적 심리 발현 직장인 김아름 씨(32)는 얼마 전 서점에 갔다 제목과 표지만 보고 만화 ‘기분이 없는 기분’(창비)을 구매했다. 김 씨는 “주인공 부친의 고독사 이후 우울감을 다룬 내용에 뜻밖의 위로를 받았다. 때로는 ‘괜찮아질 거야’ ‘힘내’란 말조차 작은 폭력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만성피로처럼 우울감에 빠져 있었는데 고개를 푹 숙인 주인공의 모습부터 빨려들었다”고 했다. 성인은 물론이고 아동 출판 시장에서마저 죽음을 다룬 ‘3일 더 사는 선물’(씨드북), 가정폭력 문제를 짚은 ‘아빠의 술친구’(씨드북) 같은 작품이 속속 나와 주목받고 있다. 음울함에 대한 열광은 여러 분석을 낳는다. 밝고 예쁘장한 것들로만 가득한 인스타그램 세상에 대한 피로와 상대적 허탈감이 반영된 것이라는 추론도 나온다. 어두운 사회상을 그대로 비추는 것뿐이라는 일반론도 세다. 미묘 편집장은 “남들의 불행을 보며 이를 관망하는 자신의 처지를 즐기는 심리도 작용할 것”이라고 했다. 윤석진 충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현재까지 무한 생존경쟁 구도가 더 고착됐다. ‘더 이상 메시아는 없다’는 절망감이 영웅에 대한 냉소, 디스토피아적 사고로 나온 것 같다. 밝은 쪽에서는 소확행과 워라밸 추구로, 어두운 쪽으로는 글루미 콘텐츠 붐으로 발현한 셈”이라고 분석했다.임희윤 imi@donga.com·김민 기자}

    • 2019-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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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살 다룬 드라마 영향 자살률 증가?… 美선 경고 문구-영상

    우울하고 어두운 ‘글루미 콘텐츠’가 보는 사람들의 감정에 영향을 미칠까? 그렇다면 그 영향은 어떻게 조정해야 할까. 이미 미국에서는 이런 콘텐츠의 부작용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넷플릭스 드라마 ‘루머의 루머의 루머(13 Reasons Why)’를 둘러싼 ‘자살 조장’ 논란이 대표적이다. 지난달 29일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루머의…’가 공개된 뒤 청소년 자살률이 증가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해 파장이 일었다. 연구는 드라마가 공개된 2017년 4월 미국의 10∼17세 청소년 자살률이 28.9%나 증가했다고 지적했다. 드라마와 자살률 사이의 직접적 연관성을 밝힌 것은 아니며, 다른 요소를 배제할 수 없다는 단서가 달렸다. 그러나 드라마의 직접적 묘사를 지적해 온 이들은 넷플릭스가 ‘무책임했다’고 비판했다. 제이 애셔의 2007년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 ‘루머의…’는 주인공 해나 베이커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독특한 설정의 드라마다. 10대 소녀인 그는 자신이 목숨을 끊은 13가지 이유를 테이프에 녹음해 남긴다. 해나의 친구와 가족들은 그녀의 목소리를 하나씩 추적하며 타인의 고통에 무심했던 자신을 되돌아본다. 2008년 개봉한 영화 ‘다크 나이트’도 악역 ‘조커’가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부모들의 반발을 샀다. 특히 15세 관람가로 개봉한 영국에서는 영화등급위원회 사상 가장 많은 컴플레인을 받았다. 조커의 사이코패스 같은 성격과 폭력성이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였다. 거센 항의에 국회의원도 지지 성명으로 동참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처럼 민감한 반응을 의식해 넷플릭스 측은 ‘루머의…’의 두 번째 시즌을 공개한 뒤부터 첫 에피소드에 경고 문구와 영상을 삽입했다. 영상에는 출연진이 등장해 “나는 연기자이며 이 드라마는 사회적 이슈를 다루고 그에 관한 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픽션입니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심리적 이슈가 있다면 시청하지 않길 권하며 도움이 필요하면 지역 상담소나 홈페이지를 참고하라”고 직접적으로 안내한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출연진이 학교 폭력에 관한 내용을 상담하는 토크쇼도 열린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19-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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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골-오물 바라보며 힐링… 명상 화두 기획전 ‘멈춤과 통찰’

    몸은 예술에서 끊임없이 상기되는 주제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는 ‘역사를 몸으로 쓰다’를 주제로 한 기획전이 열렸고, 일민미술관도 작가의 몸이 겪은 역사를 강조한 ‘불멸사랑’전을 최근 열었다. 현실이 아닌 관념을 생각했던 흐름을 거부하고 일상의 몸과 감각에 집중하는 것이다. 서울 종로구 갤러리수에서는 명상을 화두로 한 기획전 ‘멈춤과 통찰’이 열리고 있다. 전시 기획자 변홍철은 “자신을 들여다보고 스스로를 이해하고 치유하는 명상 수행법을 예술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그 이야기는 김용호, 서고운, 이피, 최선의 작품으로 구성됐다. 전시장에서 눈길을 끄는 건 서고운의 작품이다. 동물의 사체나 해골 등 죽음의 이미지가 가득한 그의 회화는 공포와 불안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인체가 부패하는 과정을 네 단계로 담은 ‘사상도’는 일본의 불화 ‘구상도’에서 영감을 얻었다. ‘구상도’는 백골을 보며 몸과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깨달음에 다가가는 ‘백골관 수행’을 바탕으로 한다. 최선의 회화는 오물, 폐수 등을 재료로 활용했다. 잉크를 입으로 불어 패턴을 만든 ‘나비’는 호흡을 활용했다. 하수 위의 기름이나 폐수의 패턴을 그대로 형상화한 ‘오수회화’는 색을 달리해 한눈에 오수라는 걸 알아보지 못하게 했다. 기획자는 이것이 원효의 ‘일체유심조’를 떠올리게 한다고 설명했다. 제단화처럼 그려진 이피의 ‘난 자의 난자’는 작가가 자신의 몸에 온전히 포커스를 둔다. 가운데 서 있는 자신의 형상 좌우로 몸속에 고인 작가의 환상과 희망, 절망이 풍선처럼 줄줄이 달려 있다. 사진작가 김용호의 ‘피안’은 소금쟁이의 시선에서 바라본 연잎을 담았다. 변홍철은 “‘나는 영적이나 종교적이진 않다(I am spiritual but not religious)’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명상 자체가 이슈가 되고 있다”며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감기처럼 흔한 요즘, 멈춤과 호흡으로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데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하다”고 했다. 6월 16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19-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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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냉소, 절망’ 콘텐츠 시장은 제2의 세기말? 글루미 콘텐츠 붐

    “여기 혹시 빌리 아일리시 주황색 카세트테이프 있어요? 와, 여기 있다!” 17일 서울 마포구의 음반 매장 ‘도프 레코드’. 한 고교생이 들어오더니 아일리시의 카세트를 발견하자마자 계산대에 들이밀었다. 18세의 아일리시는 올 들어 가장 뜨겁게 떠오른 신인 팝스타다. 빌보드 앨범차트 1위를 찍더니 노래 ‘bad guy’는 멜론 등 국내 음원차트 10위 안까지 치고 올라왔다. 팬 충성도의 척도인 실물 음반 판매량도 압도적이다. 김윤중 도프레코드 대표는 “‘보헤미안 랩소디’ 이후 퀸 열풍을 아일리시가 이어받았다. 카세트테이프만 200장 가까이 팔렸고 LP레코드와 CD 판매량도 올 상반기 압도적 1위”라고 했다. 그는 “구매자의 절대다수가 10대로, 그들이 이렇게 어두운 음악에 열광하는 것이 놀랍다”고 했다. 몽유병, 잔혹극, 공포물을 뒤섞은 음악과 영상이 아일리시의 전매특허다. 서브컬처((Sub-Culture·주변부 문화) 마니아의 전유물이던 음울한 콘텐츠, 이른바 ‘글루미(gloomy) 콘텐츠’가 주류 문화계를 점령하고 있다.●콘텐츠 시장은 제2의 세기말 최고 흥행을 기록한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 드라마 ‘왕좌의 게임’도 예외가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시리즈의 대단원을 마무리하는 이들은 어두운 분위기의 화면, 영웅들의 잇따른 참패나 죽음으로 블록버스터로서는 이례적인 음울함으로 도배됐다. 일부 관객들은 “스트레스를 풀려고 봤다가 더 침울해졌다”고 호소한다. ‘킹덤’ ‘블랙미러’ ‘기묘한 이야기’ ‘버드박스’ 등 기괴하고 어두운 콘텐츠를 내세운 넷플릭스의 대중화도 이런 분위기에 한몫했다. 팝 음악계에서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커트 코베인(너바나)이 대표한 1990년대 얼터너티브 록 열풍 이후 자기 파괴적 음악이 이만큼 대중적 열광을 받은 것은 처음이라는 말이 나온다. 글루미 콘텐츠는 자기 과시와 힘자랑 이미지가 세던 힙합도 접수했다. 지난해 요절한 래퍼 엑스엑스엑스텐터시온이 대표적이다. 그의 곡 ‘SAD!’는 스포티파이 단일 곡 일간 스트리밍 역대 최고 기록(약 1040만 건)을 갈아 치웠다. 강일권 대중음악평론가는 “요즘 대세인 내면의 어두움을 담은 이모 랩(emo rap)은 아예 자살충동, 약물중독, 패배감, 우울증이 주요 소재가 됐다”며 “2017년 래퍼 릴 핍, 2018년 엑스엑스엑스텐터시온이 실제로 비극적 죽음을 맞으며 10, 20대에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됐다”고 했다. 영국의 BBC와 텔레그라프, 미국의 바이스 등도 ‘다크 팝’ ‘테러 팝’ 같은 용어를 쓰며 ‘팝은 왜 점점 더 우울해지는가’ 같은 분석 기사를 앞 다퉈 내고 있다. X세대와 Z세대의 연결고리를 찾기도 한다. 밝고 힘찬 댄스 팝이 점령한 듯 보이는 국내 음악계에서는 신세대 R&B 가수들이 이런 조짐을 보인다. 웹진 ‘아이돌로지’의 미묘 편집장은 “수민, 수란, 제이클레프 등 음악 팬들이 열광하는 신진들의 음악에 어둡고 축축하고 세기말적인 분위기가 관통한다”고 했다. 올해 한국대중음악상을 받은 제이클레프의 앨범 타이틀곡은 ‘지구 멸망 한 시간 전’이었다.●냉소, 절망…디스토피아적 심리 발현 직장인 김아름 씨(32)는 얼마 전 서점에 갔다 제목과 표지만 보고 만화 ‘기분이 없는 기분’(창비)을 구매했다. 김 씨는 “주인공 부친의 고독사 이후 우울감을 다룬 내용에 뜻밖의 위로를 받았다. 때로는 ‘괜찮아질 거야’ ‘힘내’란 말조차 작은 폭력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만성피로처럼 우울감에 빠져 있었는데 고개를 푹 숙인 주인공의 모습부터 빨려들었다”고 했다. 성인은 물론 아동 출판 시장에서마저 죽음을 다룬 ‘3일 더 사는 선물’(씨드북), 가정폭력 문제를 짚은 ‘아빠의 술친구’(씨드북) 같은 작품이 속속 나와 주목받고 있다. 음울함에 대한 열광은 여러 분석을 낳는다. 밝고 예쁘장한 것들로만 가득한 인스타그램 세상에 대한 피로와 상대적 허탈감이 반영된 것이라는 추론도 나온다. 어두운 사회상을 그대로 비추는 것뿐이라는 일반론도 세다. 미묘 편집장은 “남들의 불행을 보며 이를 관망하는 자신의 처지를 즐기는 심리도 작용할 것”이라고 했다. 윤석진 충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현재까지 무한 생존경쟁 구도가 더 고착화됐다. ‘더 이상 메시아는 없다’는 절망감이 영웅에 대한 냉소, 디스토피아적 사고로 나온 것 같다. 밝은 쪽에서는 소확행과 워라밸 추구로, 어두운 쪽으로는 글루미 콘텐츠 붐으로 발현한 셈”이라고 분석했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어두운 ‘글루미 콘텐츠’ 청소년에 악영향, “무책임하다” 논란 일자… ▼우울하고 어두운 ‘글루미 콘텐츠’가 보는 사람들의 감정에 영향을 미칠까? 그렇다면 그 영향은 어떻게 조정해야할까. 이미 미국에서는 이런 콘텐츠의 부작용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넷플릭스 드라마 ‘루머의 루머의 루머’(13 Reasons Why)를 둘러싼 ‘자살 조장’ 논란이 대표적이다. 지난달 29일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루머의…’가 공개된 뒤 청소년 자살률이 증가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해 파장을 일었다. 연구는 드라마가 공개된 2017년 4월 미국의 10~17세 청소년 자살률이 28.9%나 증가했다고 지적했다. 드라마와 자살률 사이의 직접적 연관성을 밝힌 것은 아니며, 다른 요소를 배제할 수 없다는 단서가 달렸다. 그러나 드라마의 직접적 묘사를 지적해 온 이들은 넷플릭스가 ‘무책임했다’고 비판했다. 제이 애셔의 2007년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 ‘루머의…’는 주인공 해나 베이커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독특한 설정의 드라마다. 10대 소녀인 그는 자신이 목숨을 끊은 13가지 이유를 테이프에 녹음해 남긴다. 해나의 친구와 가족들은 그녀의 목소리를 하나씩 추적하며 타인의 고통에 무심했던 자신을 되돌아본다. 2008년 개봉한 영화 ‘다크 나이트’도 악역 ‘조커’가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부모들의 반발을 샀다. 특히 15세 관람가로 개봉한 영국에서는 영화등급위원회 사상 가장 많은 컴플레인을 받았다. 조커의 사이코패스 같은 성격과 폭력성이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였다. 거센 항의에 국회의원도 지지 성명으로 동참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처럼 민감한 반응을 의식해 넷플릭스 측은 ‘루머의…’의 두 번째 시즌을 공개한 뒤부터 첫 에피소드에 경고 문구와 영상을 삽입했다. 영상에는 출연진이 등장해 “나는 연기자이며 이 드라마는 사회적 이슈를 다루고 그에 관한 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픽션입니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심리적 이슈가 있다면 시청하지 않길 권하며 도움이 필요하면 지역 상담소나 홈페이지를 참고하라”고 직접적으로 안내한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출연진이 학교 폭력에 관한 내용을 상담하는 토크쇼도 열린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19-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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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 인간과 다른 모습의 문어… 어떻게 높은 지능 갖게 됐을까

    구리가 들어있는 문어의 피는 청록색이다. 또 단단한 곳이 거의 없이 신경질로만 이뤄진 문어의 몸은 눈보다 조금 더 큰 구멍은 거의 모두 통과할 수 있다. 정해진 형체가 없어 흐물흐물한 이 독특한 생명체는 인간과는 정반대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놀랍게도 문어도 인간처럼 의식을 갖고 있다. 문어의 높은 지능은 여러 번의 실험을 통해 밝혀졌다. 문어는 실험실을 빠져나가기 위해 수조의 하수구를 막아 사방을 물바다로 만들기도 하고, 연구원을 향해 물을 뿌리기도 한다. 또 냉동식품을 먹이로 주자 어떤 문어는 연구원을 향해 보란 듯 먹이를 하수구에 던져버린다. 저자와 문어의 만남은 2009년 호주 동부의 푸른 바닷속에서 이뤄졌다. 조가비가 산더미처럼 쌓인 이곳에 문어들의 집단 서식지가 있었다. 여기서 만난 문어와 갑오징어들은 새로운 대상에게 왕성한 호기심을 보였다. 어떤 개체는 다리로 저자의 손을 잡고 이곳저곳을 헤엄쳐 다니기까지 했다. ‘옥토폴리스’라고 명명한 이곳에서 경험한 문어와의 만남과 직접 촬영한 사진을 저자는 사고 실험과 곁들여 제시한다. 이를 통해 인간과 정반대의 모습인 문어가 어떻게 지능을 갖게 됐는지 진화론과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 결과 깨닫게 되는 건 겸허함이다. 정신과 신체를 이원론적으로 떼어놓고, 정신은 인간만이 신에게 받은 특권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오만했는가. 언어가 없어도 동물들은 사람처럼 얼굴을 기억하고, 인과 관계를 유추하며, 사고에 따라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적 능력은 뉴런과 신체의 발달, 즉 몸의 진화를 바탕으로 생겨난 것이다. 바다는 많은 생명이 의식을 갖게 된 기원이다. 이런 바다를 무한정 주어진 선물로 여겼던 인간에 의해 바다가 망가지고 있다. 산소가 없어 생명이 살 수 없는 ‘데드존’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바다의 가장 깊은 곳을 갔더니 비닐봉지가 발견됐다는 우울한 뉴스에 더 많은 인간이 죄책감을 느끼길 바란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19-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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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계 캐나다 작가 제이디 자 “정체성의 혼란 겪으며 나만의 새전통 만들어”

    “마고할미 나가신다!” 10일 오후 베니스(베네치아) 비엔날레가 한창인 자르디니 공원. 둥둥대는 장구 소리와 우렁찬 한국어에 놀란 군중이 길을 비켜선다. 관객이 물러나 즉흥적으로 생긴 공간에 무용가 5명이 퍼포먼스를 벌이기 시작했다. 한국계 캐나다인 제이디 자(36·차유미·사진)의 ‘마고할미’ 작품이었다. 자는 랠프 루고프(베니스 비엔날레 총감독)와 에런 세자(델피나파운데이션 디렉터)가 기획한 ‘Meetings on Art’에 초청받았다. 8일부터 12일까지 매일 선보인 그의 작품은 마고할미, 탈춤 등 한국적 전통을 서양적 이미지와 결합했다. 그 결과 한국도 서양도 아닌 ‘차유미’만의 새로운 전통이 탄생했다. 현지에서 만난 그는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전환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캐나다에서 태어나 ‘충분히 캐나다인도, 한국인도 아닌’ 어색한 위치에 있다고 느꼈어요. 어린 시절의 저는 늘 불안했죠. 정해진 국가적 정체성을 따르기보다 나만의 정체성을 만들자고 생각했습니다.” 옷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그녀의 작업은 스케이트보더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천 조각을 기워 붙이는 패치워크로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식을 작업에 적용한 것이다. 그는 이것이 ‘보자기’와도 연결되며, 여러 문화를 혼합하는 이민자의 정체성과도 비슷하다고 봤다. 그는 “쓰고 남은 천으로 만드는 ‘보자기’의 형태와, 여러 사람의 협동으로 제작되는 방식이 감동적”이라고 했다. 그녀가 만든 새로운 전통에선 여성이 중심이다. 거인인 데다 힘이 장사인 여신 ‘마고할미’가 작품의 중심에 선 이유다. 그 자신도 한국인 어머니와 이모 4명의 강인한 모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한편 강인한 여성을 그린 ‘마고할미’ 이야기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해 안타깝다고도 했다. “한국계 미국인 황혜숙이 마고할미를 연구한 ‘마고웨이’를 읽고 많은 생각을 했어요. 마고할미를 세계 보편적 창조신으로 해석한 책을 보고, 서구 남성 중심에서 벗어난 새로운 이야기가 가능할 거라고 봤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단순한 어린이용 동화로만 소비된다니 아쉬워요.” 누군가가 정해준 정체성이 아닌, 주도적으로 자신의 뿌리를 만들어가는 그의 작업은 디아스포라뿐 아니라 불안한 시대를 사는 모든 현대인에게 용기를 준다. 이미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 PS1, 영국 서펜타인갤러리, 헤이워드갤러리 등에서 작품을 선보였고 베니스를 시작으로 더 많은 전시가 예정되어 있다.베네치아=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19-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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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면에 내세운 젠더 이슈… 대형 영상-음악 ‘관객 압도’

    《트랜스젠더, 레즈비언, 장애여성극단 연출가, 드래그 킹(남장 여성)…. 한국 사회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의 영상이 전시 공간을 채운다. 3개 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한 영상 속 등장인물, 빠른 템포의 음악과 커다란 소리가 관객을 압도한다. 마치 이곳에서만큼은 그들이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는 듯하다. ‘여성 국극’을 조명해 온 정은영 작가(45)의 작품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이다. 제58회 베니스(베네치아) 비엔날레 국제미술전이 11일 공식 개막했다. 김현진 예술감독이 전시를 총괄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 박종관)가 커미셔너를 맡은 한국관의 주제는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남화연(40), 정은영, 제인 진 카이젠 작가(39)가 참여해 영상 작품을 선보였다.》 ○ 되살아난 여성 서사 한국관의 주제는 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을 차용했다. ‘파친코’는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모호한 정체성으로 살아야 했던 ‘자이니치(재일동포)’의 비극을 그렸다. 반면 한국관은 ‘역사의 실패’를 젠더 이슈로 한정하고, 역사 속 잊혀진 여성과 소수자의 구체적 사례를 연구해 되살렸다. 정은영은 여성 국극의 현대적 형태를, 남화연은 최승희의 국제적 면모(반도의 무희)를, 제인 진 카이젠은 바리 설화의 재해석(이별의 공동체)을 소재로 했다. 김 감독은 “서구와 남성 중심의 시각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때 한층 더 풍요로운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관은 모든 작가의 작품이 영상이었다. 한국관은 1995년 마지막으로 자르디니 공원에 들어선 탓에 공간이 협소하다. 이에 작품들이 서로 겹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헤드셋과 가벽을 적절히 활용한 공간 배치가 눈길을 끌었다.○ 국제전, ‘분열의 긍정’ 총감독 랠프 루고프가 기획한 국제전은 사뭇 결이 달랐다. 한국관이 철저히 한쪽의 입장에서 역사의 복권을 주장했다면, 국제전은 한 사안을 두고도 주체에 따라 다양하게 파생되는 시각을 보여줬다. 기후 변화, 난민, 소셜미디어, 인종 문제 등 개인의 욕망이 폭발하고 정치적 요구가 늘어나는 시대에 ‘분열’ 자체가 축복이라는 듯한 뉘앙스였다. 우선 참여 작가 79명 모두가 전시장 두 곳(아르세날레, 자르디니)에 각기 다른 형태의 작품을 설치한 것이 눈에 띄었다. 그 결과 한 작가라도 공간과 분위기에 따라 전혀 다른 시각 언어를 선보일 수 있었다. 영국 작가 에드 앳킨스가 아르세날레에서는 가상 캐릭터를 활용한 영상과 설치 작품을, 자르디니에서는 자신을 타란툴라로 형상화한 회화를 전시하는 식이었다. 두 전시장의 입구를 양 갈래로 나눈 공간 구성도 ‘분열’을 형상화했다. 아르세날레는 두 인물이 서로를 노려보며 건배를 하는 조지 콘도의 ‘더블 엘비스’를 중심으로 입구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자르디니 전시관도 앙투안 카탈라의 설치 ‘It‘s Over’의 좌우로 난 복도 형태의 입구를 관람객이 선택해 입장한다. 한국 작가 이불과 강서경의 작품도 국제전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불은 남북의 이데올로기 갈등 극복을 기원하는 듯한 기념비 ‘오바드V’를, 강서경은 정간보(井間譜), 화문석 등 한국 전통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설치 연작을 선보였다.베네치아=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19-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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