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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는 직장인 프랑크 슈나이더 씨(45)는 180km 떨어진 북부 소도시 슈베린에서 주말을 보낸다. 주말 거주지인 그곳에서 작은 텃밭을 일구며 일상을 잊고 망중한을 즐긴다. 독일 연방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복수 거주지를 두고 있는 독일인은 180만 명(2.1%)으로 최근 2년 새 44만 명이나 늘었다. 이웃 나라 오스트리아는 140만 명(15%)이 두 집 살림을 하고 있다. 저출생의 여파로 한국은 급속한 인구 감소에 직면했다. 비수도권의 경우 소멸 위기에 처한 곳이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지방소멸을 막기 위한 특단의 대책으로 복수주소제를 도입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복수주소제는 현재 거주하는 주민등록 주소 외에 ‘부주소(제2의 주소)’를 둘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상시 거주는 아니더라도 일시 거주 인구라도 늘려서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하겠다는 취지다. 국내 인구감소지역 89곳의 인구는 총 490만 명에 불과하지만 이들 지역에서 하루 3시간 이상 머무는 횟수가 월 1회 이상인 체류인구는 2000만 명에 달한다. 경제적 효과는 얼마나 기대할 수 있을까. 강원연구원이 복수주소제를 도입했을 때 강원도에 끼칠 경제적 효과를 추산한 결과 10년 후 체류인구는 최대 226만 명, 소비지출액은 2300억 원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현 추세라면 강원도 인구는 2022년 153만 명에서 2052년 144만으로 9만 명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강릉, 홍천, 양양, 속초의 체류인구는 인구 대비 52∼82%에 달한다. 해외는 어떨까. 독일은 1970년대 대학 도시와 휴양지에 복수거주지제를 도입해 일부 지역의 경우 인구가 5년간 38% 늘었다. 프랑스에선 지난해 1월 기준으로 전체 거주지 3781만 곳 가운데 제2거주지와 비정기 숙소가 370만 곳(9.8%)에 달했다. 주로 60세 이상(66%) 부유층(34%)이 날씨가 좋은 지중해와 대서양 연안, 산악 지역 등에 별장을 뒀다. 일본 국회는 올해 5월 두 지역 거주를 촉진하는 내용의 관련 법을 개정해 공포했다.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먼저 위장전입 합법화 가능성이 제기된다. 지역인재특별전형으로 자녀들을 의대에 보내려는 학부모를 부추길 수 있다는 것이다. 지방재정이 늘 것이란 기대도 주민세, 재산세 등을 주거주지 자치단체와 나누지 않는다면 물거품이 될 수 있다. 오히려 외지인의 주택 구입으로 부동산 투기만 부추길 수 있다. 스위스의 경우 제2주택이 계속 늘어 2015년 3월 제2주택 비율이 20% 이상인 게마인데(기초자치단체)에 주택 신축 등을 규제하는 연방법을 제정했다. 이같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상당하긴 하지만 복수주소제는 인구소멸지역을 막기 위한 뚜렷한 해법이 없는 현 상황에서 버리기는 아쉬운 카드다. 지역인재특별전형, 선거권 등의 경우 범위를 주거주지로 한정해 풀 수도 있다. 체류인구는 그냥 늘지 않는다. 인구감소지역에서 제2주택을 구입하더라도 1주택자로 간주하는 등 유인책이 필요하다. 독일의 경우 제2거주지에 세금을 부과하자 등록자가 급감한 사례도 있다. 농어촌에는 여전히 빈집이 많다. 제2의 인생을 한적한 곳에서 보내려는 은퇴자들도 있고, 체류인구는 언제든 정주인구로 바뀔 수 있다. 복수주소제를 인구소멸지역에 활기를 불어넣을 마중물로 삼으면 어떨까.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국내 시내버스 회사 15곳을 소유한 차파트너스자산운용은 현재 선진운수를 제외한 나머지 14곳의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이르면 다음 달 말 예비입찰을 실시하는데 업계에선 매각 금액을 4000억∼5000억 원 선으로 보고 있다. 현재 싱가포르 국부펀드 계열 투자사와 미국 자산운용사 등 20여 개 업체가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시내버스가 펀드의 투자 대상이 된 건 2000년대 후반부터다. 호주 금융그룹 맥쿼리 등이 투자 상품으로 시내버스 펀드를 만들거나 기업공개(IPO)를 통해 수익을 내는 방식을 구상하며 인수를 타진했다. 실제 맥쿼리는 2006년 영국 런던의 5대 버스회사 중 하나인 스테이지코치를 6억5740만 호주달러(약 6003억 원)에 인수하고 2010년 되판 경험이 있다. 국내 자산운용사들은 201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내버스 펀드를 출시하기 시작했다. 올해 6월 기준으로 서울시 전체 시내버스 7384대 중 1027대(13.9%)를 차파트너스 등이 소유하고 있으며 인천의 경우 사모펀드 점유율이 34%에 달한다. 그렇다면 펀드들이 왜 첨단산업도 아닌 시내버스에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일단 이들이 투자하는 시내버스들은 준공영제로 운영돼 적자가 발생해도 지방자치단체가 손실금을 보전해 준다. 투자자 입장에서 손해를 볼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이다. 차고지 등 알짜 부동산을 보유한 회사도 많다. 시내버스가 전기차나 수소차로 모두 바뀔 경우 에너지 전환을 통한 기업가치 상승도 기대해 볼 수 있다. 사모펀드의 시장 진출이 긍정적 효과를 내기도 한다. 뉴욕, 싱가포르, 토론토, 마드리드 등 주요국 대도시의 시내버스들은 업체당 평균 2000대 안팎을 보유하고 있다. 반면 서울 버스업체 평균 보유 대수는 115대에 불과하다. 난립한 회사들을 통합하고 규모의 경제를 통해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 일부 회사들은 사모펀드 인수 후 인건비 15% 절감 등 경영 효율화를 달성하기도 했다.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 인프라 개선이나 새로운 시스템 도입 등을 위해 자본도 더 쉽게 동원할 수 있다. 반면 부정적 측면도 존재한다. 지자체들은 손실지원금으로 연간 2조 원이 넘는 돈을 지급하는데 이 지원금이 사모펀드의 배만 불리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인천의 경우 사모펀드가 인수한 회사들은 이후 주주 배당을 크게 늘렸는데, 약 2000억 원 넘는 손실지원금이 주로 사모펀드 투자자들에게 돌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경기 부천시의 한 회사는 적자에도 불구하고 사모펀드 인수 후 주주들에게 연평균 48억 원을 배당했다. 서울과 경기에선 사모펀드가 인수한 8개 업체의 64개 노선에서 하루 운행이 1268회 줄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단순히 손실을 보전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자체가 서비스 향상, 경영 효율화 등을 평가해 성과를 낸 회사에 지원을 더 해주는 방식이 가능할 것이다. 현재도 이 같은 성과이윤이 지급되고 있지만 규모는 전체의 2.6%에 불과하다. 또 사모펀드가 차고지 등을 팔아 배당하는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해 준공영제 가이드라인 보완이나 매각 금지 명령 등도 고려할 수 있다. 2004년 도입된 버스 준공영제는 올해 20주년을 맞았다. 공익을 해치는 회사들을 준공영제에서 퇴출시키는 등 재정비 노력이 필요한 때다.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국민연금공단이 지분 약 30%를 보유한 미국 샌프란시스코 시내 ‘원 부시 포디움’ 빌딩. 이달 초 이곳에 뉴욕과 런던, 싱가포르에 이어 네 번째 해외 투자사무소가 문을 열었다. 소장을 포함한 기금 운용인력은 모두 4명. 이들은 잠재력이 큰 실리콘밸리 기업들을 골라 직접 투자하는 업무를 시작했다. 김태현 공단 이사장은 개소식에서 “기금 수익률을 제고해 연금 개혁에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1988년 출범한 국민연금은 올해 6월 말 기준 운용 규모가 1147조 원에 달한다. 하지만 ‘내는 돈’보다 ‘받는 돈’이 많게 설계돼 어느 시점이 지나면 기금이 고갈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수익률을 끌어올리면 그만큼 국민들이 수혜를 보면서 고갈 시점을 늦출 수 있다. 수익률을 1%포인트 높이면 고갈 시점은 5년 늦춰진다. 현 제도가 그대로 유지된다고 가정할 때 기금은 2041년 1882조 원으로 정점에 달하고 이후 줄어들게 된다. 앞으로 17년간 기금 735조 원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이 기간이 기금 운용을 위한 ‘골든타임’이라고 볼 수 있다.그런데 돈이 쌓이는 반면에 돈을 굴릴 사람은 부족하다. 기금운용본부 운용직 정원은 지난해 말 기준 365명인데 2018년부터 한 번도 정원을 채운 적이 없다. 사실 인력을 채우고 싶지 않아 안 채우는 게 아니다. 사무실 소재지가 지방(전북 전주시)이라 몸값이 비싼 금융인들에겐 선호도가 크게 떨어진다. 매년 운용인력 20, 30명이 퇴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연봉도 업계 눈높이에 미치지 못한다. 사무실을 서울로 옮기고 급여를 민간 수준 이상으로 높이는 것이 해법이 될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다. 지역의 반발과 형평성 논란 등에 휩싸일 수 있기 때문이다.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해외사무소 운용인력을 더 늘리는 방법을 고려할 수 있다. 해외사무소의 경우 지리적 요인에서 비교우위가 있다. 정부 내부 분석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해외 전문인력을 201명까지 늘리면 인건비 1137억 원이 늘어난다. 반면 기금 수익률 상승 등으로 최대 1조7000억 원의 추가 수익이 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해외사무소 정원은 수년째 58명으로 동결된 상태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규모가 작은 편이다. 국민연금은 해외사무소에 10명가량 근무하는데 네덜란드, 캐나다, 노르웨이 등의 연기금은 많게는 50∼90명에 달한다.인력 1인당 기금 운용규모도 줄여야 한다. 주식 투자에서 높은 수익률을 안정적으로 내려면 성장 잠재력이 큰 기업을 최대한 꼼꼼하게 조사하고 발굴해야 한다. 국민연금 운용인력은 1인당 운용 규모가 3조 원을 넘지만 네덜란드 공적연금 운용공사(APG) 등 해외 연기금의 1인당 운영규모는 수천억 원 수준이다. 투자 대상을 신중하고 심도 있게 살펴볼 수 있는 만큼 성과 역시 더 좋을 수밖에 없다.공단 스스로도 노력해야 한다. 캐나다 연기금(CPPIB)의 경우 2006년경부터 다양한 대체자산에 투자해 수익률을 크게 끌어올렸다. 장기 수익률이 연 10%를 웃돈다. 국민연금은 장기 운용목표가 없고 정해진 자산군만 투자할 수 있어 시장 변화 대응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연금개혁에 시간이 필요한 만큼 이제라도 부족한 인력을 채우고 투자 체질을 개선해 다시 도약해야 할 때다.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2018년 5월 경남 진주시 S치과의원은 자본금 122억 동(약 6억5000만 원)으로 베트남 호찌민 2군 주상복합건물에 약 230m²(약 70평) 규모로 치과의원을 열었다. 스타벅스와 CGV영화관 등이 들어선 유동 인구가 많은 대로변 건물이다. S치과의원은 이후 호찌민 10군과 하노이에도 추가로 의원을 개설했다. 현지에 진출한 의료인들은 “베트남엔 치의대가 거의 없을 정도로 전문성이 많이 부족하다. 시장 잠재력은 충분하다”고 입을 모은다. 전북 전주 예수병원도 올해 2월 캄보디아 프놈펜에 진출해 종합병원(300병상) 건립과 의대, 치대, 간호대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병의원 설립, 운영 컨설팅, 수탁 운영 등 의료 관련 해외 누적 투자는 31개 국가, 205건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다소 주춤했던 기간이 있지만 최근 9년간 연평균 투자 증가율은 45.8%에 달한다. 중국과 미국, 중동 등에 많이 진출했지만 최근에는 중국 시장의 대안으로 떠오른 베트남, 필리핀, 캄보디아 등 동남아 국가들도 많아졌다. 그렇다면 왜 해외로 가는 것일까. 현행 의료법에 따르면 국내 병의원은 의사 등 의료인만이 설립하거나 투자할 수 있다. 규모를 더 키우고 싶어도 비의료인의 투자를 받을 수 없고 시장도 사실상 포화상태라 외연 확장에는 한계가 있다. 반면 베트남에선 외국인이 100% 투자할 수 있으며 의사가 아니라도 병원을 설립할 수 있다. 누구나 투자자를 모아 기업처럼 의료 사업을 할 수 있는 셈이다. 일부 의사들은 “베트남 증시에 한국 병원 최초로 상장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기도 했다. 게다가 의료 규제 철폐에 적극적인 현지 분위기도 매우 고무적이다. 지난해 인도네시아는 외국인 의사의 개업을 허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고 필리핀도 보건의료 분야에서 외국인 투자에 대한 제한을 완전히 풀었다. 낡은 현지 공공병원들은 외부 투자를 받아 최신 장비와 기술을 도입하고 싶어 한다. 신약 치료, 비대면 진료 등 국내에선 제한적인 영역도 시도해 볼 수 있다. 넘어야 할 장벽도 존재한다. 한국 의사가 베트남 현지 의사 면허증을 받더라도 일부 진료만 할 수 있다. 현지에 전임자를 두기엔 비용 문제 등이 커서 현지를 오가며 진료하지만 응급 상황에선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어려울 때도 많다. 현지 보건당국의 잦은 단속 등도 풀어야 할 과제다. 반면 현지에 진출한 병원들은 의료진 파견, 수익 등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으며 ‘개인 병원’이라고 불리는 영세성에서 벗어날 계기가 될 수 있다. 제약사, 의료기기 업체, 바이오 벤처기업 등과 함께 진출해 동반 성장이 가능하며 사회공헌이라는 무형의 가치를 쌓고 국가 이미지까지 제고할 수 있다. 싱가포르 래플스메디컬그룹은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등 13곳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기업형 병원으로 증시에도 상장돼 있다. 중국은 2000년대 의료개혁을 시행한 후 민간 의료를 집중적으로 육성했고 병원들이 해외에도 진출하며 경쟁하고 있다. 의료는 공익성이 강하지만 환자에게 치료비를 받고 수익을 내야 하는 경영의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바이오, 금융, 관광 등으로 파급 효과도 크다. 부디 국내 병원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도심에서 북동쪽으로 약 70km.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서울대병원이 10년째 위탁 운영하는 왕립 셰이크칼리파전문병원이 있다. 248병상 규모로 전체 의료진 800명 중 한국인만 100명이 넘는다. 서울대병원은 2014년 미국 스탠퍼드·존스홉킨스, 영국 킹스칼리지, 독일 샤리테 등 글로벌 병원들과 경쟁해 계약을 따냈다. 국내 병원이 해외 종합병원급 의료기관의 위탁운영권을 따낸 첫 사례다. 초창기 5년간 1조 원의 운영예산이 책정됐고 별도로 연간 70억∼80억 원의 위탁운영 수수료도 받았다. 운영 2년 만에 외래환자가 5만 명을 넘었다. 2019년 재계약에 성공했고 이달 중순 2번째 재계약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까. 일단 이번 재계약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이 병원은 왕실 산하인데 다른 왕실 산하 기관이 위탁운영을 맡겠다고 나서며 갑자기 경쟁 구도가 형성됐다. 또 왕실 측이 병원에 운영비 절감을 강하게 요구하면서 병원 수익성도 낮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심장, 뇌신경, 암에 집중하고 다른 진료 과목을 구조조정하란 요구도 있었다. 전문병원이라고 해도 일정 부분 종합병원 기능을 유지해야 하는데 수요가 많은 정형외과, 안과를 없애라고 하니 전체 환자가 줄고 수익에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운영 초기와 비교하면 한국인 의료진도 많이 줄었고 진료비 삭감, 의료 분쟁 등 크고 작은 불협화음도 있다. 이런 이유로 서울대병원 내부에선 그만두자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해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 걸프협력회의(GCC) 6개 회원국의 헬스케어 시장은 679억 달러(약 92조 원)에 달했다. 중동 부국들은 메이오클리닉, 존스홉킨스, 클리블랜드, 하버드 등 선진국 유수의 병원과 의대를 유치하며 현지 의료 수준을 높이고 의료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UAE만 해도 2022년 의료관광객 67만4000명을 유치해 10억 디르함(AED·약 3700억 원)을 벌어들였다. 현지에 진출한 글로벌 의대와 병원들은 임상연구, 교육, 진료 각 분야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시장이다. 병원 수출을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는 여전히 많다. 한국 의료에 대한 현지인들의 인식이 크게 바뀌고 있긴 하지만 같은 조건이면 여전히 미국과 유럽 병원을 선호하고 있다. 외국인 환자들과 쉽게 영어로 소통하며 진료할 수 있는 의사와 간호사도 부족한 실정이다. 해외 진출 사례가 많지 않다 보니 국가별 상황별 노하우 축적도 필요하다. 상호 의료진 면허 인정, 의료사고 문제 등 현실적인 과제도 많다. 올해 6월 카타르 도하에는 10층 규모의 ‘한국의료센터’가 문을 열었다. 서울아산병원, 라임나무치과, JK성형외과, 안강병원 등이 불임, 임플란트, 미용성형, 재활 등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서울아산병원은 2026년 개원을 목표로 두바이에 65병상 규모인 ‘UAE아산소화기병원’도 추진하고 있다. 분당서울대병원은 지난달 300병상 규모의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종합병원 프로젝트에서 사업 총괄을 맡았다. 의료 해외 진출은 경제적 측면에서도 이득이지만 국격을 높이고 양국 협력에 기여하는 외교적인 역할도 한다. 제2, 제3의 왕립 셰이크칼리파전문병원이 앞으로 더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 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최근 영국의 대학 평가 기관인 ‘THE(Times Higher Education)’가 발표한 올해 대학 순위에서 독일 대학들의 약진이 돋보였다. 뮌헨공대(30위)와 뮌헨대(38위), 하이델베르크대(47위) 등 8개 대학이 전 세계 100위 안에 들었다. 국내 대학은 서울대(62위) 등 3곳에 불과했다. 미국 시사잡지 US뉴스앤드월드리포트의 글로벌 대학 평가에서도 독일 대학 5곳이 100위 안에 포함됐다. 독일에선 이른바 명문대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고교 졸업생들은 ‘아비투어(대학입학자격시험)’만 통과하면 자유롭게 전공을 선택하고 진학할 수 있다. 학과별로 정원이 제한되기도 하지만 원칙적으로 결원이 발생하면 전국 어느 대학이나 자유롭게 전학할 수 있다. 베를린자유대에서 한 학기를 마친 뒤 결원이 생긴 뮌헨대로 옮길 수 있는 셈이다. 오랜 기간 평준화 정책을 고수해 온 독일 대학들은 글로벌 대학 순위에서 늘 뒤처져 있었다. 평가기관마다 편차가 있지만 많아야 한두 개 대학이 100위 안에 드는 정도였다. 독일 대학들은 고교 상위권 학생들을 엄선해 엘리트로 키우는 아이비리그, 옥스브리지와 달리 일반고 졸업생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교육하는 데 무게를 둔다. 교수 1인당 학생 수도 미국, 영국의 명문대와 비교하면 많은 편이다. 반면 대학 진학률은 2000년 33%에서 2021년 55%로 증가했다. 직장인 전형도 크게 늘렸다. 자동차 정비사로 일하다 뒤늦게 기계공학과에 진학하는 이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성적만으로 따지면 중위권 이하 진학이 크게 증가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결과는 상당히 고무적이다. 독일 대학들은 대부분 국공립이고 무상교육이라 교육의 질과 국제 경쟁력이 크게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았다. 수십 년째 이런 지적이 이어졌지만 평준화의 원칙을 깨지는 않았다. 대학 경쟁력은 결국 국가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급기야 독일 정부는 2005년부터 뛰어난 성과를 낼 5∼10개 대학을 선정해 지원하는 ‘우수 대학 육성 사업(Exzellenzinitiative)’을 추진했다. 1기(2006∼2012년)와 2기(2012∼2019년) 사업에 46억 유로(약 7조 원)의 예산이 투입됐고 현재 3기(2019년∼) 사업이 진행 중이다. 베를린공대, 뮌헨공대 등 명문 9개 공대는 연합체 ‘TU9’을 만들고 따로 관리했다. 학부 과정이 없어 입학하면 석사 이상의 학위를 취득해야 했던 교육 시스템도 개편해 미국과 영국 대학처럼 학사 학위 과정을 신설했다. 입학 정원제를 강화해 성적순으로 학생을 뽑는 대학도 크게 늘었다. 우수한 외국인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영어로 진행되는 전공도 늘렸다. 그 결과 슈피겔 등 독일 유수 언론들이 “유럽 대륙 대학들은 계속 대학 순위가 처지고 있으며 상황을 개선시킬 별다른 방법도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하던 목소리가 사라졌다. 대학 순위가 고등교육의 모든 성과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대학들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경쟁력을 강화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수백 년 전통을 깨고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는 독일 대학의 사례를 본보기로 삼아야 하는 이유다. 대학의 인재 양성은 산업의 근간이다. 국내에서도 명문대와 지방대를 가리지 않고 재도약의 사례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라오스 비엔티안 와타이 국제공항에서 국가주석궁까지 거리는 약 5km. 현지 승차공유 서비스 ‘로카’로 이동하면 내릴 때 요금이 10만 킵(약 6700원) 정도 나온다. 하지만 다른 승차공유 서비스인 ‘인드라이브’를 이용하면 7만 킵(약 4700원) 이하에도 갈 수 있다. 인드라이브는 승객이 직접 기사와 택시비를 흥정하는 구조다. 승객이 목적지를 설정하면 ‘인드라이브’가 적정 금액을 산출하는데 승객이 마음껏 올리고 내려 제시할 수 있다. 기사들이 제시 금액을 보고 역제안할 수도 있다 보니 밀당이 빈번하다. 심야 시간이나 외진 곳에선 요금이 올라가고 한산한 시간대엔 가격이 내려간다. 동남아 시장 진출이 겉보기에 쉬워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쉽지는 않다. 과거 ‘양말 한 켤레씩만 팔아도 10억 켤레가 넘는다’는 단순한 전략으로 중국에 진출했던 기업들은 대부분 실패했다.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뉴7’ 국가들에서도 현지 시장을 제대로 읽지 못해 철수한 유니콘 기업들이 많다. 글로벌 앱 ‘인드라이브’와 로컬 앱 ‘로카’가 현지 밀착 전략으로 라오스 시장에 안착했으나 우버, 그랩 등은 여전히 사용되지 않고 있다. 베트남에서도 스타벅스, 맥도널드, 버거킹은 맥을 못 추고 있고 배달의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은 사업을 접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동남아를 하나로 뭉뚱그려 판단하지 말고 개별 국가의 특성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도차이나 3형제’인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는 보통 한 묶음으로 묶이는데 사실 서로 많이 다르다. 예를 들어 과거 공산주의 국가에서 입헌군주국으로 변신한 캄보디아 경제는 상대적으로 개방적이다. 신탁회사를 통해 사실상 외국인이 토지를 매매할 수 있고 일상에서 달러가 통용돼 환율 방어에도 유리하다. 또 라오스는 경제적, 민족적 측면에서 태국에 훨씬 가깝다. 잘로(베트남), 라인(태국), 페이스북 메신저(필리핀, 캄보디아) 등 선호하는 메신저는 국가별로 제각각이지만 네이버 같은 포털사이트 역할은 페이스북이 대부분 맡고 있다. 변화가 더딜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동남아 국가들은 이미 ‘현금이 필요 없는 사회’로 상당 부분 진화했다. 신용카드 보급을 건너뛰고 누구나 보유한 스마트폰을 활용한 QR코드 결제가 자리 잡았다. 노점상에서도 QR코드 결제가 가능하고, 상점에선 QR코드 결제만 받는 곳이 많다.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000달러 안팎인 국가에서도 이런 상황은 마찬가지다. 수력발전으로 전기를 수출하는 라오스에선 BYD 등 중국산 저가 전기차들이 택시로 사용되고 캄보디아에선 ‘툭툭(Tuk-Tuk)’이라 불리는 삼륜차마저 전기차로 세대교체가 진행 중이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투자 성공 사례도 상당하다. 베트남 국방부 산하 이동통신사 비엣텔은 현직 장성이 최고경영자(CEO)로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동티모르 등 10개국에 진출했다. 덴마크 맥주 기업 칼스버그는 라오스 국영기업이었던 ‘비어라오’의 지분 50%를 인수해 시장을 장악했다. 승리하려면 결국 현지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을 바탕으로 맞춤형 전략을 세워 발 빠르게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국적을 가리지 않고 이미 숱한 경쟁자들이 뛰고 있으며 살림(인도네시아), CP(태국), SM(필리핀), 칩몽(캄보디아) 등 현지 재벌들도 강력한 경쟁자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지난해 서울의료원의 적자는 379억 원.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지원금 227억 원이 투입됐음에도 적자였다. 부산의료원도 적자 178억 원을 기록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당시 지급했던 손실보상금 지원이 끊긴 상황에서 진료 실적이 늘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 원인이다. 지난해 지방의료원 35곳 중 33곳이 적자로 적자액 합계는 3107억 원에 달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지방의료원 신축·증설에 의욕적으로 나서고 있다. 서울시와 인천시 등은 제2의료원을, 부산시는 서부산의료원을 추진하고 있다. 광주시와 울산시도 지방의료원 신설을 검토하고 있다. 의료 안전망을 더 꼼꼼하고 튼실하게 만들겠다는 기본 취지에는 공감한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상황이 이어진다면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지방의료원은 “코로나19 환자에게 집중하느라 다른 병원으로 보낸 환자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이유를 댄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환자들이 지방의료원을 선호하지 않는 것이다. 지방의료원을 하나 신축하려면 비용은 얼마나 들까. 병원 하나를 짓는 데 민간 병원의 경우 800∼1000개 병상 기준으로 5000억 원 정도가 필요하다. 인천시 제2의료원 사업비는 4272억 원으로 추산되고 있다. 세운 뒤 의료기기 성능 개선, 유지 보수 등을 위한 꾸준한 투자도 이어져야 한다. 정부와 지자체는 매년 수십억∼수백억 원의 예산을 지방의료원에 지원하고 있지만 의료진 채용마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강원 영월의료원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구하지 못해 지난해 11월 이후 10번이나 재공고를 냈다. 경기도의료원 안성병원은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1명을 채용하지 못해 3개월 이상 야간 진료를 중단했다. 해법은 없을까. 먼저 지방의료원에 제대로 투자해 경쟁력을 확보하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최신 의료기기 등을 대폭 늘리고 우수 의료진을 대거 확보한다면 환자들도 돌아올 수 있다. 다만 기존 대형 병원 브랜드를 단기간에 따라가는 건 쉽지 않으며 의료진 확보도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과제다. 일부 지방의료원의 경우 지금도 의사에게 연봉으로 5억∼6억 원을 주고 있다. 정부는 “지역의료를 강화하고 지방 공공병원을 수도권 대형 병원 수준으로 키우겠다”고 했지만 이 구상도 지방의료원 대신 지역 거점 국립대병원 위주다. 다들 대형 병원으로 가다 보니 지방의료원은 경제적으로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서민들이 주로 이용하고 이 때문에 적자가 악화된다. 큰돈을 들여 지역의료원을 만들었는데 악순환만 되풀이되는 셈이다. 차라리 서민들에게 의료 바우처를 지급하고 민간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대학병원장 출신의 한 기관장은 최근 고위공직자에게 “정부가 공공의료를 살리려면 정책 책임자인 장차관, 국회의원, 지자체장부터 지방의료원에서 진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기관장은 “자신들도 지방의료원을 이용하지 않으면서 왜 애꿎은 국민들에게만 대형 병원에 몰린다고 지적하느냐”고도 했다. 막대한 예산만 낭비하고 정작 지방의료는 살리지 못하는 상황이 지금이라도 바뀌길 기대한다. 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지난달 20∼24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제10차 세계물포럼. 148개국 1만3000여 명이 참석한 이 행사에 누수 방지와 관련된 각종 첨단 기술이 선보였다. 열화상 드론이 제방에서 물이 새는 틈을 찾아냈고 지하투과레이더는 시설물 균열을 탐색했다. 수중 드론은 관로에 투입돼 안전상태를 점검했다. 2022년 기준 전국 상수도 누수율은 9.9%로 서울시민들이 1년간 쓰는 물의 61%가 새고 있다. 생산원가로 따지면 약 7000억 원을 그냥 버리는 셈이다. 한국은 1인당 강수량이 전 세계 평균의 약 8분의 1 수준이고 하천 취수율이 36%에 불과해 물에 관한 스트레스가 높은 국가군에 속한다. 반면 생활 및 산업용수는 꾸준히 증가해 최근 10년간 1인당 사용량은 20L가 늘었다. 물 쓰듯 물을 쓸 수 없다. 누수 원인은 낡은 배관 때문이다. 내구 연한인 설치 21년을 넘긴 수도관이 37%에 달한다. 하지만 매년 교체하거나 개량하는 비율은 1% 안팎에 불과하다. 수도관 공사는 땅을 파서 관을 꺼내고 다시 매설해야 하기 때문에 큰 비용이 소요된다. 서울(1.6%) 부산(4.2%) 대구(2.4%) 등 대도시 누수율은 낮은 편이지만 재정 상황이 상대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강원 삼척(44%) 정선(41%), 전남 영암(45%), 경북 경주(41%) 등은 생산량 절반 가까이를 버리고 있다. 사실 161개 지방상수도 사업자 약 80%는 인구 30만 명 이하 지역을 담당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는 게 쉽지 않다. 대도시와 군 지역의 수돗물 생산원가는 3배 가까이 차이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환경부는 2017년부터 노후 상수도 관망을 개선하기 시작했고 지난해에만 16곳의 정비사업을 마쳤다. 누수율이 30%에 달했던 전북 순창군은 배관 교체로 누수율이 1%대로 낮아지는 성과도 냈다. 다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국 누수율은 2013년 10.7%에서 크게 떨어지지 않고 있다. 환경부가 내세운 선진국 누수율 5%에 도달하려면 좀 더 노력이 필요하다. 사실 지방상수도는 공기업으로 분류돼 수익을 낼 때 투자를 할 수 있다. 반면 대부분 사업성이 떨어지는 곳에 설치돼 시설 투자가 쉽지 않다. 국비 지원을 더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디지털과 인공지능(AI)을 결합한 관망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 배수관에 센서를 설치해 수질, 수압, 여과장치 등을 파악하고 대응하는 방법이다. 낡은 배관에서만 물이 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노후관 개량과 함께 스마트 관망 관리로 시스템을 효율화하는 게 필요하다. 상수도 지하배관망의 지리정보체계(GIS)는 광역시만 100% 완료했을 뿐 군 단위 지역에는 평균 35% 정도 설치에 그치고 있다. ‘세계는 물의 전쟁 중’이라고 불릴 만큼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막론하고 치수(治水)에 관심이 많다. 영국 런던시 템스워터는 지난해 마이크로소프트와 손잡고 데이터 딥러닝을 통한 누수 관리에 나섰다. 아랍에미리트(UAE)도 AI를 활용한 수돗물 공급망 개선에 나선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30년 기준 세계 물 수요는 공급을 40% 초과할 것으로 예상된다. K워터가 내수시장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통할 수 있도록 전략을 다시 짜야 할 때다. 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한국 병원에서 승모근 보톡스를 맞으면 1만2000엔(약 10만4000원)인데, 일본에선 6만 엔(약 52만 원)이나 내야 해요.” 지난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 환자가 사상 처음으로 60만 명을 넘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전 최대치보다 10만 명 이상 많다. 환자들은 일본(18만 명)과 중국(11만 명) 미국(7만 명) 순이지만 베트남 태국 등 ‘아시아 뉴(NEW) 7’ 국가 환자들도 9만 명을 넘는다. 경제적 파급 효과는 7조 원, 취업유발 인원은 6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왜 한국에서 치료받는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의료기술은 선진국인데, 비용은 개발도상국 수준이기 때문이다. 한국 의사들은 암과 간 이식, 뇌혈관 등 중증질환 치료뿐만 아니라 라식, 임플란트 등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여기에 K팝, K드라마 등을 좋아하는 외국인들은 한국 스타일 성형을 선호한다. 코로나19를 거치며 ‘드라이브스루’ 검사가 알려지는 등 한국 의료 시스템의 브랜드 파워도 높아졌다. 하지만 이런 추세가 계속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2019년 16만 명 넘게 한국을 찾았던 중국 환자들은 지난해 30%가량 줄었다. 러시아 환자도 많을 때에 비하면 절반 수준이다. 외국인 환자 수요는 언제라도 경제, 외교, 안보, 유행 등의 영향으로 급감할 수 있다. 싱가포르, 태국 등 쟁쟁한 경쟁자도 많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문을 더 열어야 한다. 현재 외국인 환자들은 의료관광 비자(90일), 치료요양 비자(1년) 등을 받고 입국한다. 하지만 현장에서 개발도상국 환자와 보호자들은 비자 발급이 까다로워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고 얘기한다. 의료관광 비자 발급이 암 등 일부 중증질환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의료관광 비자로 들어와 치료 기간이 늘어나면 치료요양 비자로 바꿔야 하는데, 임대차계약서 등 증빙 서류가 필요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무부와 보건복지부, 문화체육관광부 등이 나서고 있지만 부처별 이해관계가 달라 진척이 더딘 상황이다. 실제로 비자 발급이 거절되거나 지연된 몽골 환자들은 한국 대신 중국이나 튀르키예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반면 태국은 의료관광을 유치하기 위해 지난해 직계가족 3명까지 동반하고 1년까지 체류할 수 있는 비자를 도입했다. 피부과, 성형외과에 쏠린 수요를 중증질환으로 옮길 필요도 있다. 미용 수술은 유행에 민감해 수요 변화가 클 뿐 아니라 태국, 말레이시아, 브라질, 튀르키예에서도 가능하다. 그 대신 고난도 수술에서 꾸준한 실력을 보여야 중증 환자들이 선호하는 미국, 독일 같은 ‘업계 톱티어’에 오를 수 있다. 만혼이 증가하는 국가가 많은 상황에서 난임 시술 같은 글로벌 경쟁력이 높은 분야에 집중하는 것도 경쟁력을 유지하는 방법 중 하나다. 이 밖에도 비대면 진료, 의료관광 생태계 복원, 전문 통역사 확보, 지역 특화 등 풀어야 할 과제는 넘친다. 외국인 환자들은 치료만 잘한다고 오지 않는다. 할랄을 엄격하게 따지는 무슬림에겐 음식도 매우 중요하다. 지난해 내과통합(9만 명), 건강검진(5만 명), 한방통합(1만8000명), 치과(1만5000명)를 방문한 외국인도 많았다. 고무적인 성과인 만큼 모처럼 되살아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더 준비해야 할 때다.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덕성여대가 내년도부터 독어독문학과와 불어불문학과에 신입생을 배정하지 않기로 하면서 두 학과는 폐지 수순을 밟게 됐다. 덕성여대 관계자는 “학교가 장기적으로 생존하고 발전하기 위해 추진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른바 ‘비인기’ 어문학과 폐지는 15년 전 시작됐다. 동국대가 2009년 독문과를 폐지했고 건국대(2005년)와 동덕여대(2022년)는 독문과와 불문과를 유럽학 전공에 통합했다. 학과 통폐합 이유는 단순하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1945년 광복 이후 국내 대학들은 급격한 성장기를 거치며 어문계열 학과를 대폭 늘렸다. 독일과 프랑스는 대학 학비가 사실상 무료라 유학을 위해 배우는 사람도 상당했다. 유럽에선 독일어가 모국어인 인구가 약 1억 명에 달하고 프랑스어는 아프리카 여러 국가에서 통용된다. 하지만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수요가 공급보다 많지는 않다. 졸업할 정도만 배우고 다른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더 많다. 그렇다면 어문계열 학과들은 이대로 퇴조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미국 유수의 대학들은 여전히 어문학과를 중시한다. 예일, 하버드, 프린스턴 등 연구 중심 명문대들이나 윌리엄스, 애머스트 등 리버럴 아츠 칼리지(Liberal arts college)는 어문학과를 소홀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물론 모든 대학이 수요가 많지 않은 어문학과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1960년대부터 주립대들을 연구중심대학(UC), 교육중심대학(CSU), 지역사회대학(CCC) 등으로 나눠 운영하고 있다. 대학들이 연구와 실무자 양성, 직업 및 평생교육 등으로 역할 분담을 하는 것이다. 실무인력 양성 차원에서도 어문학과를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미중 갈등 속에 침체된 중국 시장의 대안으로 인도 베트남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등 아시아 7개국(NEW 7)이 부상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지역에 진출하기 위한 준비는 여전히 부족하다. 베트남은 한국인이 약 20만 명이나 거주하는 3대 교역국이지만 베트남어과를 둔 국내 대학은 한국외대 등 3곳뿐이다. 또 기업들이 광활한 인도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지만 정작 힌디어를 가르치는 대학은 2곳에 불과하다. 국내 기업 진출 확대로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는 베트남어와 말레이·인도네시아어(마인어), 힌디어, 아랍어 등의 어문학과는 더 늘릴 필요가 있다. 또 어학이나 문학 중심의 교육보다는 정치, 경제, 역사 등을 아우르는 지역학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현지 사업 파트너, 직원 등과의 스킨십을 위해 현지어는 꼭 필요하지만 단순 통번역의 역할은 인공지능(AI) 번역기의 발달로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언어를 넘어 현지 역사 등을 깊이 이해하고 정치, 경제 상황을 해석할 수 있는 실무 인재 양성이 필요하다. 독일 베를린자유대나 영국 셰필드대 등 최근 한류 영향으로 전공자가 급증한 한국 관련 학과들은 대부분 한국학과로 개설돼 있다. 학과 정원도 수요에 따라 탄력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 베트남에선 1993년 하노이국립대를 시작으로 한국학과가 개설됐는데 올해 2월 기준으로 46개 대학에 재학생이 2만5000여 명에 달한다. 수요가 많아 졸업생들의 급여 수준도 높다. “다음엔 어떤 학과가 없어질지 모른다”는 한탄보다 위기를 기회의 발판으로 삼는 새로운 변신을 기대한다. 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강남으로 불리는 ‘수디르만 중심업무지구(SCBD)’. 면적 45만 m²(약 13만6000평)에 글로벌기업 사무실과 아파트, 쇼핑몰 등이 우뚝 솟은 마천루 지구다. 명품 옷을 걸치고 값비싼 액세서리를 장식한 젊은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현지에서는 ‘SCBD 스타일’로 불린다. SCBD를 개발한 주체는 정부가 아니다. 한 화교 출신 기업인이 부지를 사들여 1987년 마스터플랜을 만들고 통째로 개발했다. 미중 갈등과 중국의 경기 둔화가 장기화하면서 수출 한국의 대안시장으로 인도네시아, 베트남, 태국, 필리핀 등 동남아 국가들이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동남아 경제는 일찌감치 화교들이 장악했다. 인도네시아에선 인구 3%가 채 안 되는 화교들이 경제의 70, 80%를 지배하고 있다. CP, TTC, 센트럴 등 태국의 3대 재벌 기업은 모두 화교 가문 소유다. 화교들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화교 네트워크의 핵심은 혈연, 지연, 업연이다. 같은 화교라도 동향을 중심으로 폐쇄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푸젠(福建) 출신은 무역, 금융, 유통, 운수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광둥(廣東) 출신은 금은 세공, 유리 제조, 건설, 호텔에서 활약했다. 화교들은 서로 밀어주고 끌어준다. 대형 쇼핑몰을 개발할 때는 화교계 은행인 OCBC, 싱가포르 대화은행(UOB) 등을 활용해 투자금을 모으고 수익을 공유한다. 철저한 현지화도 추구했다. 태국에 정착한 화교들은 이름까지 태국식으로 바꿨다. 세대가 넘어가면서 현지 사회에 동화되고 흡수되는 사례도 많아졌다. 걸그룹 (여자)아이들의 민니와 보이그룹 GOT7의 뱀뱀, 2PM의 닉쿤은 모두 화교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 정계에도 진출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의 조부는 푸젠 출신이고 훈센 전 캄보디아 총리와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의 부계도 중국에서 이주했다. 동남아 시장에 안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화교들이 덜 진출한 시장을 공략할 수 있다. 도요타, 미쓰비시 등은 1960년대부터 태국에 공장을 세우고 동남아 자동차 시장을 장악했다. 화교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서 투자할 수도 있다. 화교 기업들은 금융, 유통, 부동산 중심이라 제조업이나 디지털 분야에선 상대적으로 약하다. 다만 이들도 확장 욕구가 강하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맞으면 전략적 제휴를 한다. 일본 유통기업 이온은 화교계 기업 시나르마스와 함께 자카르타에서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다. 화교의 영향력이 덜한 곳을 공략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한국 기업인의 성공 사례도 있다. 오세영 코라오(LVMC) 회장은 공산국가라 화교들이 거의 없었던 라오스에서 중고차 수입상으로 출발해 완성차 제조사, 은행 등을 아우르는 라오스 최대 민간기업을 일궜다. 동남아 진출 모범 사례는 하나 더 있다. 1960년대 말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코린도는 1998년 5월 인도네시아 인종 폭동 당시 화교들과 일본 기업들이 대부분 철수하는 상황에서도 현지에 그대로 남았다. 코린도는 원목 개발과 합판, 제지 등 수직 계열화를 구축하며 한때 인도네시아 재계 순위 20위권에도 오르기도 했다. 앞으로 동남아에서 화교를 뛰어넘는 더 많은 코린도와 코라오가 나오기를 기대한다.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올해도 어김없이 243명의 전국 광역 및 기초 지방자치단체장들은 신년사를 내놓았다. 내용은 대체로 비슷하다. 지역경제 활성화, 일자리 창출 등을 거론하며 지난해 성과 홍보, 올해 사업 소개 등을 담았다. 지자체장들은 어려운 사자성어까지 거론하며 미래 비전에 대한 의욕을 다졌다. 지자체장의 신년사를 읽으면 한 해 지방행정의 방향을 전망할 수 있다. 일부 지자체장은 현 경제 상황을 냉철하게 읽고 있었다. 오거돈 부산시장은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많다. 특히 경제가 그렇다”고 했고, 최문순 강원도지사는 “저출산 고령화와 국제 무역분쟁 등 모든 여건이 어렵다”고 털어놨다. 송하진 전북도지사는 “글로벌 경제의 한파는 여전히 매섭고 성장동력의 새싹은 아직 여리고 약하다. 앞으로도 많은 난관과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기초단체장들은 더 절박했다. 김병수 경북 울릉군수는 “계속되는 오징어 조업의 불황은 어업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힘들게 하고 마음을 아프게 한다”고 했다. 이현종 강원 철원군수는 “가뭄 등으로 지역경제가 위축되고 생존권마저 위협받는 도전의 한 해였다”고 회상했고, 이항진 경기 여주시장도 “인구 소멸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주요 사업계획 등과 관련해선 의아하게 생각할 만한 점도 나왔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부동산공유기금’을 제시하며 “환수된 불로소득과 개발이익을 통해 공공의 부동산 소유를 늘리고, 토지나 건물이 필요한 기업과 개인에게 저렴하게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최근 몇 년 동안 집값이 가파르게 오르는 상황에서 박 시장의 의중이 무엇인지는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다만 기금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려면 결국 중앙정부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 재원으로 거론되는 종합부동산세와 개발부담금은 모두 중앙정부와 국회 등의 협조를 받아야 해결될 수 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꼬인 남북 관계의 실타래를 풀겠다고 나섰다. 이 지사는 “개성관광 재개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했지만 사실 개성관광 재개는 경기도가 단독으로 추진하거나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현재 남북 관계에선 개성관광 재개 추진이 공언(空言)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이시종 충북도지사는 “투자 유치의 실효가 확보되기 위해서는 경제의 심장인 산업단지 조성이 뒤따라야 한다”며 “매년 100만 평 이상의 산업단지가 공급되도록 하겠다”고 단언했다.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산업단지 조성이 필요하지만 매년 100만 평(약 330만 m²)씩 공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가 뒤따른다. 올해는 경제 상황 등이 쉽지 않은 한 해라는 전망이 많다. 적게는 수천억 원부터 많게는 40조 원의 예산을 다루는 지자체장들의 어깨가 더 무겁고 책임이 막중하다. 이들의 계획에 따라서 지방경제에 온기가 사라지거나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년 신년사에는 덕담을 주고받는 ‘말잔치’가 아니라 주민의 피부에 닿는 현실적인 정책들이 빼곡하게 담겼으면 한다. 절박한 만큼 중앙정부가 아니라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을 거론했으면 싶다. 자화자찬 식의 성과 자랑도 이젠 그만하는 게 좋겠다. 지자체장의 새해 일성은 각오와 철학 등이 담겨 파급 효과가 크다. 묵직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이유종 기자 pen@donga.com}
‘현재 대한민국의 자치분권 점수는 100점 만점에 51점 수준이다.’ 종합편성TV 채널A는 최근 서울 마포구 상암동 스튜디오에서 김두관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최대호 경기 안양시장, 윤종인 행정안전부 차관을 패널로 지방자치 현안을 다룬 토론회 ‘지방분권, 길을 묻다’를 진행했다. 이날 토론회에선 국세와 지방세의 적절한 비율, 조례 제정의 개선 방안, 특례시 도입 기준 등의 주제로 논의가 이어졌다. 김 의원은 “보통 선진국의 지방자치가 잘돼 있다고 한다. 하지만 선진국이기 때문에 지방자치가 잘되는 게 아니다. 사실은 자치분권, 재정분권, 자치법권 등 제대로 지방자치를 하면 나중에 다 선진국이 된다”고 말했다. 최 시장은 “(지방자치단체가 중앙정부로부터) 사무는 많이 위임받고 있다. 하지만 일을 많이 위임받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에 따른 예산과 인력이 지원돼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사례가 많다”며 “이것 때문에 지자체는 골병이 들고 있다”고 호소했다. 윤 차관은 “20년 정도 된 지방자치제의 운영체계를 바꿀 필요가 있다”며 “단순히 ‘세금이 걷혀서 어디로 가느냐’라는 문제만 볼 게 아니다. 중앙정부 기능의 지방 이양이라는 부분을 같이 검토해야 진정한 의미의 지방분권, 지방자치 강화가 이뤄진다”고 했다. 채널A 특별기획 ‘지방분권, 길을 묻다’는 21일 토요일 오전 9시에 방송된다.이유종 기자 pen@donga.com}

요즘 지방자치단체 공무원을 만나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우리 지자체장이 너무 자잘한 사안까지 챙기려고 든다.” 임금이 온갖 정사를 친히 살핀다는 만기친람(萬機親覽)형 지자체장이 많다는 이야기다. 공무원이나 기업인 출신 단체장 정도만 ‘관성의 법칙’ 때문에 이런 모습을 보일 것 같은데, 의원 보좌관이나 교수, 시민단체 활동가 등 출신을 가리지 않고 모두 자잘한 사안까지 챙기려고 한단다. 왜 그럴까. 지자체장들이 자잘한 사안까지 간섭하는 이유는 일단 마음이 조급하기 때문이다. 더 잘하는 모습을 보여야 연임할 수 있는데, 무엇을 해야 성과를 낼 수 있는지 실제로는 잘 모를 때가 많다. 그렇다 보니 ‘주민’과 관련된 자잘한 행사, 정책 등을 모두 직접 챙긴다. 주민이 표로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지자체장은 주민을 살뜰히 챙겨야 한다. 하지만 업무 규정을 넘어 과도하게 한다면 생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업무 결재는 대체로 지자체 규정에 따라 적정 직급이 전결로 처리한다. 도시계획, 교통 등 어지간히 큰 사안이 아니면 지자체장들이 결재할 사안은 많지 않다. 현실에선 지자체장이 과장, 국장, 부지자체장이 처리할 소규모 주차장이나 공원 개설에도 일일이 개입할 때가 많다. 재선 지자체장은 업무 자신감까지 붙어 더 자잘한 사안에 몰입한다. 직원들은 세세한 사업까지 챙기는 지자체장에게 핀잔을 듣지 않으려고 일을 주도적으로 처리하지 않게 된다. ‘오더’만 거슬리지 않게 잘 처리하려고 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열심히 일한 지자체장은 선거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까. 노력한 만큼 대가가 돌아와야 하는데, 실상은 꼭 그렇지 않다. 유권자들은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솔직히 알 길이 없다. 그저 자주 마주치는 친근한 지자체장으로 떠올리겠지만 변화와 혁신을 일궈낸 행정가로 기억할 것 같지는 않다. 한 지자체장은 한 차례 낙선한 덕에 4선까지 했는데도 정작 그가 무엇을 남겼는지 기억하는 주민은 드물었다. 동네 행사에만 얼굴을 내밀다 뚜렷한 성과 없이 16년이 지나갔다. 다음 선거에서 이기려면 임기 중 기억에 뚜렷하게 남는 대표 상품 한두 가지에 몰입하는 게 낫다. ‘걷는 도시’를 대표 브랜드로 정했다면 대중교통은 지하로 내리고 지상 차도는 절반으로 줄이며 인도를 대폭 늘리면 된다. ‘문화 공간’이 부족하다면 잉여 시설을 찾고 문화 소프트웨어가 이어질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면 된다. 물론 꾸준히 추진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시스템을 바꾸는 정책을 펴면 유권자들은 이를 주도한 지자체장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탁월한 행정가들도 대체로 이런 지자체장들이다. “메뉴 줄이세유.” 골목상권을 살리려는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요리연구가 백종원이 자주 하는 말이다. 그의 처방책은 매우 간단하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등을 파는 백반집에서 한두 가지 메뉴를 빼고는 모두 정리하라고 조언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효율성이다. 장사가 잘되지 않는 가게 주인들은 요리 솜씨가 빼어나지 않을 때가 많다. 메뉴가 많으면 재료 관리가 어렵고 조리 속도도 느리다. 결국 선택과 집중을 하라고 조언한다. 이유종 사회부 차장 pen@donga.com}

주말이면 집에서 간단한 음식을 해먹을 때가 많다. 어머니가 물려준 식칼은 잘 썰리지 않았다. 유명 브랜드의 칼을 구입할까 고심하다가 온라인에서 불광대장간을 발견했다. 서울에 아직도 대장간이 있다니. 지하철 불광역에서 내려 5분 걸으니 ‘주택가 대장간’이 나온다. 80대, 50대 주인 부자가 반갑게 맞는다. 전통시장에서 보던 나무 손잡이로 된 식칼이 즐비했다. 제법 잘 들었다. 다음엔 뭉툭한 디자인의 생선용 칼을 구입하련다. 1963년 설립된 이 대장간은 지난해 ‘오래 가게’로 지정됐다. 서울시가 30년 이상 이어온 튼실한 노포(老鋪)를 골라 ‘오래 가게’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2017년부터 모두 87개가 선정됐다. 서울스튜디오, 원삼탕, 경기떡집, 호미화방, 한신옹기…. 업종도 다양하고 상호명도 정겹다. 뉴트로 바람을 타고 을지다방, 효자베이커리에는 사람들이 다시 몰린다. ‘오래 가게’를 지정한 이유는 뭘까. 케이팝, 의료관광 정도만으로 외국인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거대 쇼핑몰은 도쿄, 홍콩, 싱가포르에도 많다. 금천구 시흥동 평택쌀상회는 자연 바람에 국수를 말린다. 이런 흥미로운 모습 때문에 변두리 쌀가게에도 외국인 관광객이 몰린다. 디지털 바람을 탔다. 1988년 처음 문을 열었다. 고작 30년밖에 안 됐는데도 ‘오래 가게’로 지정할 수 있을까. 식민지배, 6·25전쟁, 산업화를 거치며 살아남은 가게가 적다는 특수성이 있다. 더 오래 이어가라는 뜻으로도 불릴 수 있다. 사실 명맥을 잇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혜화동 문화이용원은 올해 초 문을 닫았다. 60년 이상 현업을 지켰던 이발사가 가위를 내려놓았다.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드나들던 명동의 한 다방은 ‘오래 가게’ 지정을 사양했다. 주인은 “자녀들이 승계할 것 같지 않다”고 전했다. 50년 장인의 홍은동 태광문짝은 임차료 인상을 견디지 못하고 다음 달 경기도로 옮긴단다. 홍은동에서만 30년간 자리를 지켜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뚝심을 가지고 후계자를 키워야 한다. 느티나무 가구점 거안은 해외 유학까지 다녀온 아들이 가게를 물려받았다. 물론 이런 사례가 흔한 것은 아니다. 자녀에게 직업을 강요할 수는 없다. 직원, 친척, 희망자 중에서도 후계자를 찾아야 한다. 서계동 개미슈퍼는 앞집에 살던 꼬마가 성장한 뒤 가게를 매입해 추억을 이어가고 있다. 상인과 건물주, 지방자치단체의 노력도 필요하다. 지하철 서울대입구역 일대 샤로수길은 원주민이 쫓겨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의 영향을 덜 받았다. 관악구의 한 공무원은 “가게 규모가 작고 프랜차이즈 가맹점들이 덜 들어와서 임대료 인상이 크지 않았다”고 말했다. 서울 성동구는 건물주와 임차인이 상생 협약을 맺도록 도왔다. 평범한 가게를 관광자산으로 발굴하는 노력도 더하면 어떨까. 주인들이 모를 수도 있는 가게에 얽힌 이야기를 발굴해 콘텐츠로 만들 수 있다. 한 홍콩 관광객은 한국인 특유의 정(情)을 느낄 수 있다며 서계동 개미슈퍼를 3번이나 찾았다. 겉보기에는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동네 가게인데도 말이다. 가만히 놔둔다고 가게가 잘 버티는 게 아니다. 백 년 전통이 쉽게 만들어지는 것도 분명 아니다. 이유종 사회부 차장 pen@donga.com}

태권브이, 황금바둑판, 이순신…. 최근 몇몇 시군이 추진하는 대표적인 전략 사업이다. 전북 무주군은 해발 420m의 향로산 정상에 아파트 12층 높이의 태권브이 로봇 조형물을 구상하고 있다. 예산만 72억 원을 잡았다. 전남 신안군은 189kg의 황금을 사들여 바둑판을 만들려고 한다. 예산만 110억 원이 들어가는데, 바둑기사 이세돌을 배출한 고장이라서 추진한다. 이순신 장군을 놓고는 삼파전이 벌어졌다. 경남 창원시와 통영시, 전남 광양시는 모두 동상이나 타워를 만들겠단다. 창원시는 200억 원을 들여 높이 100m의 ‘이순신 장군 타워’ 건립을 구상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들이 대형 상징물을 탐내는 이유는 뭘까. 대체로 비슷하다. 관광 등으로 지역 경제를 살리려는 취지다. 지난해 고령사회로 진입해 인구가 더 줄어들 수밖에 없는 시군은 그야말로 절박하다. 그렇더라도 혈세가 들어가니 사업성은 꼼꼼히 따져야 한다. 창원시의 한 의원은 상임위원회에서 “환경등급평가 1, 2급이 나오면 못 하나 못 꽂는다. 그런데 100m짜리를 이렇게 설치하겠다는 것이 맞는 건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지역 여론은 어떨까. 23일 창원시 진해종합복지관에서 열린 ‘이순신 타워 이대로 좋은가’ 토론회. “타워 예정지에서 바다를 보면 조선소만 눈에 들어온다.” “효과 검증 절차 없이 사업을 하려는 것 같다.” 비난 여론에 떠밀려 슬그머니 거둬들인 사례도 있다. 월미도 바다 앞에 대형 사이다병 조형물을 설치하려던 인천시는 이를 철회했다. 대형 상징물은 그만한 값어치를 해낼까. 충북 괴산군은 2005년 영국 기네스북에 올리겠다며 5억 원을 들여 지름 5.68m의 초대형 가마솥을 만들었다. 하지만 호주의 질그릇이 더 큰 것으로 확인되면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흑역사가 있다. 가마솥은 옥수수 삶기, 팥죽 끓이기 등 단발성 행사에 동원됐으나 2007년부터는 이마저도 중단돼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3대 악성 중 한 명인 박연의 고향인 충북 영동군은 2010년 7t짜리 대형 북을 만들었으나 임시보관소에서 수년 동안 방치했다. 왜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 것일까. 일단 구상 단계부터 사업성을 꼼꼼히 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술관을 짓는다면 어떤 작가들의 그림과 조각, 설치물을 전시할지 철저하게 따져야 한다. 일정 수준 이상의 방문객을 확보하려면 지역에서 평소 미술관을 찾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도 계산해야 한다. 텅 빈 지자체 미술관, 공연장도 흔하다. 이런 구체적인 조사를 하지 않고 짧은 기간에 눈에 보이는 성과물을 내려고 하니 손쉽게 거대 시설물만 떠올린다. 흉물로 방치되면 관리 예산만 더 들어갈 판이다. 유형보다는 무형 자산이 더 큰 파급력을 지닌 시대에 살고 있다. 굳이 상징물을 만들겠다면 역사, 문화, 이야깃거리 등이 충실해야 빛을 볼 수 있다. 의견수렴이라도 제대로 거쳐야 하는데 보통 내부자들이 졸속으로 결정할 때가 많다. 경기 구리 용인 성남시, 충남 아산시, 경남 양산시 등에선 하수처리장이나 쓰레기소각장의 굴뚝을 고쳐 식당, 화랑 등을 갖춘 훌륭한 전망대로 꾸몄다. 꼭 새로 지어야 사람들이 찾는 것은 아니다. 이유종 사회부 차장 pen@donga.com}

영국 맨체스터 중앙역인 피커딜리역. 맨체스터 인근에는 셰필드 버밍엄 리즈 등 산업 도시가 많아 피커딜리역을 거쳐 이동하는 사람들이 항상 많다. 피커딜리역에서 빠져나오면 소방서, 경찰서, 응급센터 등으로 사용됐던 옛 런던가소방서 건물이 보인다. 이 건물 옆에서 남쪽 방향으로 런던가를 따라 걸으면 맨체스터대 북부 캠퍼스가 나온다. 캠퍼스에는 도서관, 기숙사, 연구실, 강의실 등이 빼곡하다. 1902년 완공된 프랑스 르네상스 건축양식의 색빌스트리트빌딩도 보인다. 맨체스터대는 북부 캠퍼스 10만5218m²에 연구, 상업, 주거 등 복합시설을 짓는 대형 부동산 프로젝트 ‘ID 맨체스터’를 추진 중이다. 10년 뒤 완공을 목표로 15억 파운드(약 2조2073억 원)를 투입하는데 일자리 6000개가 생길 것으로 전망된다. 맨체스터대가 투자자를 유치해 공동 조인트벤처를 설립하고 해당 법인에 부지를 250년 동안 빌려주는 방식이다. 지방자치단체도 힘을 보탠다. 대학 관계자는 “올해 3월 프랑스 칸에서 열린 세계 최대 부동산 박람회 ‘미핌(MIPIM)’에 갔더니 거대 글로벌 국부펀드, 연기금에서 ‘ID 맨체스터’에 큰 관심을 보여 깜짝 놀랐다”고 언론에 전했다. 영국 대학들은 대부분 정부, 지자체 등의 재정적 지원을 받는 국공립학교다. 대학들은 아쉬울 게 별로 없는 지역사회에 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정부 지원금이 줄어들자 대안을 찾아야 했다. 맨체스터는 19세기 풍부한 수력 에너지 등에 힘입어 ‘코트노폴리스’라고 불릴 정도로 면방직 산업이 크게 번성했던 도시다. 면방직 산업이 쇠퇴기를 맞으며 1920년 이후 인구도 줄었고 이후에도 경기 침체 등으로 끊임없이 어려움을 겪었다. ‘맨체스터’라는 도시 이름은 현재 산업도시보다는 프로 축구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연고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맨체스터대는 교육도 일자리, 부를 창출하는 산업이라고 봤다. 대학이 투자자들을 모아 유휴 부지에 학생과 기업이 입주할 시설을 짓고 창업에 필요한 연구를 진행한다. 맨체스터대는 롤스로이스, BBC, 지멘스, 콜게이트, 유니레버, 글락소스미스클라인 등 유력 기업들과 함께 사업을 추진했던 경험이 있다. 미디어기업 ‘토크토크’는 본사를 런던에서 맨체스터로 옮기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이미 맨체스터에 사무실을 열었고 런던에는 20∼30개 사업 부문만 남기고 500개가 넘는 사업 부문을 맨체스터로 옮긴다. 토크토크는 비용 절감, 시너지 등을 기대했다. 사실 대학과 지자체, 기업 등이 힘을 합쳐 도시의 부활을 이끄는 모델은 이전에도 있었다. 헨리 에츠코위츠 스탠퍼드대 교수는 1990년대 미국 보스턴의 매사추세츠공대(MIT) 등 사례를 들어 ‘삼중 나선 혁신 모델(Triple helix model of innovation)’을 만들었다. 대학과 기업, 지자체 등이 상호 작용하면 경제 성장을 이끈다는 이론이다. MIT 경영대학원이 들어선 보스턴 켄들스퀘어 일대도 대학이 경제성장 엔진 역할을 했다. 과거 켄들스퀘어는 양조장, 발전소, 비누 공장 등이 있었던 산업시설이었으나 대학, 연구소, 상업시설, 주택 등이 들어서면서 활력을 잃었던 도심이 생기를 찾았다. 사람과 땅, 재물, 권력이 몰리면 경제는 성장할 수밖에 없다. 구도심에선 흔히 인구가 줄면서 성장 동력이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선 대학이 발화점 역할을 할 수 있다. 맨체스터대는 캠퍼스 부지를 활용해 역사적인 건물 일부를 빼고는 전면 개발하는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까지 추진하고 있다. 민간 투자자 유치에도 적극적이다. 이런 노력과 인근 도심 재개발 등으로 맨체스터 인구는 2000년대 중반부터 반등하기 시작했다. ‘ID 맨체스터’ 등의 도심 재개발이 진행되면 도심 인구는 3분의 1 정도가 더 늘 것으로 전망된다. 전통 산업이 쇠퇴하고 인구가 줄면 지역 경제가 어려워진다. 생존 위기에 내몰린 지방대가 늘어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지방 소멸의 시대’에 대학, 지자체, 지방 기업 등이 유휴 부지를 활용해 투자자를 유치하고 공동 프로젝트를 추진하면 어떨까. 셋이 뭉치면 3배로 커진다. 이유종 국제부 차장 pen@donga.com}

영국 맨체스터 중앙역인 피커딜리역. 맨체스터 인근에는 셰필드 버밍엄 리즈 등 산업 도시가 많아 피커딜리역을 거쳐 이동하는 사람들이 항상 많다. 피커딜리역에서 빠져나오면 소방서, 경찰서, 응급센터 등으로 사용됐던 옛 런던가소방서 건물이 보인다. 이 건물 옆에서 남쪽 방향으로 런던가를 따라 걸으면 맨체스터대 북부 캠퍼스가 나온다. 캠퍼스에는 도서관, 기숙사, 연구실, 강의실 등이 빼곡하다. 1902년 완공된 프랑스 르네상스 건축양식의 색빌스트리트빌딩도 보인다. 맨체스터대는 북부 캠퍼스 10만5218㎡에 연구, 상업, 주거 등 복합시설을 짓는 대형 부동산 프로젝트 ‘ID 맨체스터’를 추진 중이다. 10년 뒤 완공을 목표로 15억 파운드(약 2조 2073억 원)를 투입하는데 일자리 6000개가 생길 것으로 전망된다. 맨체스터대가 투자자를 유치해 공동 조인트벤처를 설립하고 해당 법인에 부지를 250년 동안 빌려주는 방식이다. 지방자치단체도 힘을 보탠다. 대학 관계자는 “올해 3월 프랑스 칸에서 열린 세계 최대 부동산 박람회 ‘미핌(MIPIM)’에 갔더니 거대 글로벌 국부펀드, 연기금에서 ‘ID 맨체스터’에 큰 관심을 보여 깜짝 놀랐다”고 언론에 전했다. 영국 대학들은 대부분 정부, 지자체 등의 재정적 지원을 받는 국공립학교다. 대학들은 아쉬울 게 별로 없는 지역사회에 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정부 지원금이 줄어들자 대안을 찾아야 했다. 맨체스터는 19세기 풍부한 수력 에너지 등에 힘입어 ‘코트노폴리스’라고 불릴 정도로 면방직 산업이 크게 번성했던 도시다. 면방직 산업이 쇠퇴기를 맞으며 1920년 이후 인구도 줄었고 이후에도 경기 침체 등으로 끊임없이 어려움을 겪었다. ‘맨체스터’라는 도시 이름은 현재 산업도시보다는 프로 축구단 맨체스터유나이티드의 연고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맨체스터대는 교육도 일자리, 부를 창출하는 산업이라고 봤다. 대학이 투자자들을 모아 유휴 부지에 학생과 기업이 입주할 시설을 짓고 창업에 필요한 연구를 진행한다. 맨체스터대는 롤스로이스, BBC, 지멘스, 콜게이트, 유니레버, 글락소스미스클라인 등 유력 기업들과 함께 사업을 추진했던 경험이 있다. 미디어기업 ‘톡톡’은 본사를 런던에서 맨체스터로 옮기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이미 맨체스터에 사무실을 열었고 런던에는 20~30개 사업 부문만 남기고 500개가 넘는 사업 부분을 맨체스터로 옮긴다. 톡톡은 비용절감, 시너지 등을 기대했다. 사실 대학과 지자체, 기업 등이 힘을 합쳐 도시의 부활을 이끄는 모델은 이전에도 있었다. 헨리 에츠코위츠 스탠퍼드대 교수는 1990년대 미국 보스턴의 매사추세츠공대(MIT) 등 사례를 들어 ‘삼중 나선 혁신 모델(Triple helix model of innovation)’을 만들었다. 대학과 기업, 지자체 등이 상호 작용하면 경제 성장을 이끈다는 이론이다. MIT 경영대학원이 들어선 보스턴 켄들스퀘어 일대도 대학이 경제성장 엔진 역할을 했다. 과거 켄들스퀘어는 양조장, 발전소, 비누 공장 등이 있었던 산업시설이었으나 대학, 연구소, 상업시설, 주택 등이 들어서면서 활력을 잃었던 도심이 생기를 찾았다. 사람과 땅, 재물, 권력이 몰리면 경제는 성장할 수밖에 없다. 구도심에선 흔히 인구가 줄면서 성장 동력이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선 대학이 발화점 역할을 할 수 있다. 맨체스터대는 캠퍼스 부지를 활용해 역사적인 건물 일부를 빼고는 전면 개발하는 부동산개발 프로젝트까지 추진하고 있다. 민간 투자자 유치에도 적극적이다. 이런 노력과 인근 도심 재개발 등으로 맨체스터 인구는 2000년대 중반부터 반등하기 시작했다. ‘ID 맨체스터’ 등의 도심 재개발이 진행되면 도심 인구는 3분의 1 정도가 더 늘 것으로 전망된다. 전통 산업이 쇠퇴하고 인구가 줄면 지역 경제가 어려워진다. 생존 위기에 내몰린 지방대가 늘어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지방 소멸의 시대’에 대학, 지자체, 지방 기업 등이 유휴 부지를 활용해 투자자를 유치하고 공동 프로젝트를 추진하면 어떨까. 셋이 뭉치면 3배로 커진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방탄소년단 정국의 솔로곡 ‘유포리아’가 이달 초 음원사이트 스포티파이에서 258일 만에 6000만 스트리밍을 돌파했다. 스웨덴이 설립한 스포티파이는 전 세계 음원사이트 시장 점유율 1위 기업. 지난달 말 프리미엄 서비스 유료회원을 1억 명이나 모았다. 지난해 매출액만 60억 달러(약 7조 원)에 달한다. 인구 1000만 명 정도의 스웨덴에는 이런 큰 기업이 많다. 어떻게 가능할까. 북유럽은 벤처캐피털 커뮤니티가 미국, 일본 등과 비교할 때 매우 작다. 서로 지인들이라 자금 조달이 쉽다. 기업에 호의적인 환경도 성장을 돕는다. 스웨덴은 전 세계 해적 음악의 메카이자 개인 간(P2P) 음원 공유, 정보통신 엔지니어링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스포티파이 창업자는 불법 파일 공유를 해결할 대안을 찾다 상대적으로 규제가 느슨한 광고 지원 스트리밍이라는 방식을 찾아냈다. 스웨덴은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가난한 국가 중 하나였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국민 20%가 미국으로 떠났다. 바이킹의 후예들은 200년 이상 전쟁과는 담을 쌓고 자유무역을 하면서 부를 쌓았다. 한데 부가 늘어나고 튼실한 복지 시스템을 갖추게 되자 걱정이 커졌다. 튼실한 복지제도는 천문학적인 재정이 필요했다. 또 경제는 고임금 구조로 바뀌었고 성장하는 게 쉽지 않게 됐다. 결국 1990년대 초 위기가 닥쳤다. 해결책이 필요했다. 정부는 경제성장 없이는 복지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했고 기업이 운신의 폭을 넓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기업들은 규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았다. 정부는 좋은 규제는 경제성장을 돕지만 그렇지 않은 규제는 경제를 해친다고 봤다. 규제를 최대한 단순하게 바꾸고 규제 품질 개선(Better Regulation)에도 나섰다. 2000년대 초 다시 경제위기가 찾아왔다. 정부는 체계적인 규제 개혁 시스템을 구축하기로 했다. 2006년 당시 집권한 보수 연립정부는 기업의 행정비용을 2010년까지 25% 줄이기로 했다. 기업 대상의 규제 상담 시스템도 만들었다. 청문위원회를 가동해 기업과 관련된 정책, 법률을 만들 때는 이해 당사자들이 적극 관여할 수 있게 했다. 규제가 생길 때마다 스웨덴 상공회의소는 정부에 피드백을 제공했다. 감사원은 규제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재량권을 가지고 조례 등을 통해서 공공 청소, 쓰레기 재생, 건강 보호 등의 규제를 풀었다. 규제가 발생하기 전 사전영향평가도 실시한다. 법안이 경제에 끼칠 영향을 예측해서 최대한 피해를 줄이는 것이다. 실제 제정 법안이 중소기업에 끼치는 비용, 결과 등을 구체적으로 조사한다. 또 이런 내용을 규제를 만들 때 의무적으로 밝히도록 규정했다. 보수 연립정부는 2006∼2014년 글로벌 경쟁력 확보, 일자리 창출 등을 목표로 의약품 처방 정부 독점 폐지, 유한회사 설립요건 완화, 경쟁법 개혁 등을 추진했다. 그 결과 1993년부터 2010년까지 스웨덴은 연평균 2.7%의 경제성장을 일궈냈으며 2015년에는 4.5%에 달했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국가 중 하나로 꼽힌다. 지난해 경제전문지 포브스의 비즈니스 환경평가에서 스웨덴은 영국에 이어 2위에 올랐다. 오픈월드 인디게임 마인크래프트, 퍼즐게임 캔디크러쉬사가, 모바일 결제 서비스 클라르나, 부동산 중개기업 콤파스 등 혁신 ‘유니콘 기업’도 대거 배출했다. 한국도 1998년 규제개혁위원회를 세우고 크고 작은 규제를 풀어왔다. 사실 시스템은 한국이나 스웨덴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스웨덴도 여전히 규제는 많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월 스웨덴 정부에 일부 규제를 완화하라고 권고했다. 다만 스웨덴은 보수와 진보 정권에 관계없이 장기간 규제 개혁을 추진한다. 정치권의 이해관계에도 덜 휘둘린다. 또 공무원이 아니라 이해관계자들이 만족하도록 제도 개선을 좀 더 현실적으로 한다. 처리 과정도 매우 투명하다. 진행 과정마다 모든 내용을 공개한다. 더 성장하려면 기득권 세력을 설득하는 일도 필요하다. 풀어야 풀린다. 이유종 국제부 차장 pe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