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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소년단(BTS)은 군 공백기를 끝내고 ‘완전체’로 다시 날아오를 태세지만, 이들이 속한 엔터테인먼트 기획사 하이브의 주가는 날개 없이 추락하고 있다. 이달 들어 코스피가 3,200 시대를 여는 와중에도 하이브 주가는 20%나 빠졌다. ‘BTS의 아버지’ 방시혁 하이브 의장의 오너 리스크 때문이다. 방 의장의 주식 부정거래 의혹을 두고 지난주 경찰이 하이브 본사를 압수수색하며 강제수사에 나선 데 이어 29일엔 국세청이 특별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주식으로 장난치면 패가망신”이라고 경고한 뒤 금융·사정 당국의 칼날이 매섭다.하이브 상장 때 2000억 부당이익 혐의 하이브가 주식시장에 입성한 건 BTS가 빌보드 차트를 휩쓸며 월드스타로 자리매김한 2020년 10월이다. 방 의장은 상장 하루 만에 국내 8위 주식 부자에 오르며 돈방석에 앉았다. 하지만 기업 대주주는 상장 이후 일정 기간 주식을 팔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보호예수’ 규제에 걸려 바로 돈을 만질 수는 없었다. 이를 피하려고 방 의장은 사모펀드들과 상장 후 지분 매각 차익의 30%를 넘겨받는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 이 중엔 방 의장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하이브 전 임원들이 설립한 사모펀드도 있었다. 방 의장 측은 상장 준비를 하고 있으면서도 하이브 주식을 가진 기존 투자자들에게 상장 계획이 없다고 알린 뒤 해당 사모펀드에 주식을 팔도록 유도했다. 보호예수 규제를 비켜간 사모펀드들은 상장 직후 5%에 가까운 지분을 내다 팔았고, 방 의장은 계약에 따라 2000억 원을 손에 쥐었다. 금융당국은 방 의장과 관계자들이 상장 과정에서 기획 사모펀드를 동원해 부당이득을 챙겼다고 보고 자본시장법상 사기적 부정거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이를 두고 방 의장 측은 사모펀드와 맺은 계약은 사적 계약인 만큼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사모펀드가 지분을 대량 매도하면서 상장 첫날 35만 원을 웃돌았던 하이브 주가는 열흘 만에 15만 원대로 수직 낙하했다. 당시 BTS의 군 입대 리스크 같은 애꿎은 이유만 찾으며 주가 폭락에 눈물 흘렸던 개미투자자들의 피해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투자자들은 5년이 지난 뒤에야 ‘진짜 이유’를 알고 분노하고 있다. 주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주주 간 계약이 상장 과정에서 철저히 은폐됐다는 사실에 기막힐 뿐이다. 이번 사태로 새삼 주목받는 게 하이브 상장 1년 전에 있었던 방 의장의 졸업식 축사다. 방 의장은 모교인 서울대 졸업식에서 스스로를 만든 건 “꿈이 아닌 분노”라고 했다. “최고 아닌 차선을 택하는 무사안일에 분노했고, 음악산업의 불공정거래 관행에 분노했다”는 것이다. “공공의 선에 해를 끼치고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욕망을 이루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주식시장 불공정거래 혐의로 전방위 수사를 받게 된 방 의장에게 투자자들이 되돌려주고 싶은 말일 것이다.“주가조작 패가망신” 엄포 아니어야 역대 정부마다 ‘일벌백계’를 다짐했지만 자본시장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불공정거래는 끊이지 않고 있다. 하이브와 SM엔터테인먼트 인수를 놓고 지분 경쟁을 벌였던 카카오 김범수 창업자 역시 시세조종 혐의로 재판 중이고, 윤석열 전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도 주가조작 혐의로 특검 수사를 받고 있다. 혐의 적발부터 법원 판결까지 몇 년씩 걸리는 데다 ‘감옥 가도 남는 장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처벌 수위가 낮은 탓이다. 이를 해결하겠다며 막강한 권한을 가진 범정부 차원의 ‘주가조작 근절 합동대응단’이 어제 출범했다. 불공정거래가 한 번이라도 적발되면 자본시장에서 퇴출시키는 ‘원스크라이트 아웃제’도 시행한다고 한다. “패가망신” 경고가 일회성 엄포가 아님을 이번에는 꼭 입증해야 할 것이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한때 한국 수험생들에게 ‘나폴레옹 수면법’이 유행한 적이 있다. 성인에게 권장되는 하루 수면시간은 7∼9시간이지만, 나폴레옹처럼 서너 시간만 자고도 멀쩡하게 일상생활을 하는 ‘쇼트 슬리퍼(short sleeper)’가 있다는 게 알려지면서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잠을 적게 자는 체질이 아니라면 수면 부족은 치명적이다. 생체리듬이 깨져 면역 기능이 떨어지는 건 물론이고 기억력과 집중력이 저하되고 비만이나 고혈압, 당뇨, 치매 같은 질병에 걸릴 위험도 높아진다. ▷세계수면학회가 매년 3월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 직전 금요일을 ‘세계 수면의 날’로 정해 수면 건강의 중요성을 알리는 이유다. 그런데 한국인은 지난해 하루 평균 8시간 4분을 잠자는 데 썼다고 한다. 통계청이 10세 이상 국민 2만5000명을 대상으로 24시간 활용 실태를 조사한 결과다. 1999년부터 5년 주기로 이뤄진 6번 조사 가운데 우리 국민의 수면시간이 줄어든 것은 처음이다. 2019년 수면시간은 8시간 12분이었다. ▷특히 국민 10명 중 1명은 자려고 누웠지만 제때 잠들지 못하고 평균 30분 넘게 뒤척이는 것으로 조사됐다. 60세 이상 고령층에서는 수면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20%에 육박했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를 세며 불면의 밤을 보내는 한국인이 이만큼 많다는 뜻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수면 장애나 불면증으로 진료를 받은 사람은 2022년 현재 110만 명에 달한다. 동네 곳곳에 수면 클리닉이 들어서고, 6년 전 올라온 ‘수면 유도 음악’ 동영상이 조회수 1억 회를 돌파한 배경이다. ▷통계청 조사는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앞서 글로벌 헬스케어 기업이 17개국 3만6000명을 조사한 결과에서는 수면의 양과 질에 대한 한국인의 만족도가 40%에도 못 미쳤다. 매일 숙면한다는 응답자도 7%로 세계 평균의 절반에 그쳤다. 한국인이 꿀잠을 자기 위해 지갑을 여는 규모는 이미 한 해 3조 원을 돌파했다. 오죽하면 ‘마약 베개’, ‘기절 베개’에 잠자기 전 스마트폰 사용을 강제로 막을 ‘휴대전화 감옥’까지 등장했겠나. ▷꿀잠을 방해하는 건 여럿이지만 과도한 스트레스와 극심한 경쟁, 불안 등이 1순위로 꼽힌다. 이번 통계청 조사에서도 직장인의 84%, 학생의 73%가 업무와 학업으로 인한 피로를 호소했다. 여기에다 한국인이 스마트폰, 태블릿 등으로 유튜브, 넷플릭스 같은 미디어를 시청하는 여가 시간은 5년 전 조사보다 2배 가까이 급증했다. 침대에 누워서까지 스마트폰을 쥐고 사는 생활 습관이 수면의 질을 떨어뜨리고 불면 사회를 고착화시키는 셈이다. 잠은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영역이지만, 수면 부족은 사회·경제적 손실로 이어진다. 도둑맞은 한국인의 잠을 되찾아야 할 때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이재명 대통령이 성남시장 시절 빚으로 고통 받는 서민을 돕겠다며 만든 게 ‘주빌리은행’이다. 50년마다 노예를 풀어주고 빚을 탕감해주던 성경 속 희년(禧年), 주빌리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 대통령은 4일 충청권 시민들과 만나 이를 소개하며 “문명사회에서 죽을 때까지 빚지는 것은 비극”이라고 했다. 그런데 한국에선 5년마다 ‘부채 희년’이 찾아온다. 노태우 정부부터 현 정부까지 정권이 바뀌면 어김없이 농가 부채 탕감, 신용 사면, 장기 연체 면제 같은 대규모 빚 감면 정책이 반복되고 있어서다.李정부, 123만 명 22兆 빚 없애기로 주빌리은행장 출신답게 이재명 정부는 역대급이다. 자영업자 등 취약계층 113만 명을 대상으로 7년 이상 연체된 5000만 원 이하의 빚을 일괄 탕감해주기로 했다. 또 코로나 위기로 피해를 입은 소상공인 10만 명은 연체 원금을 최대 90%까지 깎아준다. 123만여 명의 개인·자영업자가 안고 있는 22조6000억 원의 빚을 없애주겠다는 것이다. 생계를 위협받는 취약계층을 지원하고 재기를 돕는 건 정부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특히 팬데믹 대응 과정에서 빚의 수렁에 빠진 영세 자영업자들이 불황의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도록 하려면 어느 정도의 채무 조정은 불가피하다. 문제는 역대 정부마다 되풀이된 빚 탕감 정책이 취약계층의 여건을 장기적으로 개선시키기보다는 ‘빚으로 빚을 막는’ 구조적 위험을 더 키웠다는 점이다. 소득 하위 20%인 취약계층의 신용대출액 추이를 살펴보면, 탕감이 있을 때 반짝 줄었다가 다시 늘어나는 행태를 반복한다. 과거 구제 대상자의 20%가 다시 빚을 내 신용불량자(금융채무불이행자)로 전락했다는 통계도 있다. 지난 정부에서 연체 소상공인·자영업자의 빚을 감면해주는 새출발기금이 출범했지만 금융회사 3곳 이상에서 빚을 낸 저소득·저신용 자영업자는 3년 새 50% 급증했다. 무엇보다 일회성 빚 탕감으로는 고질적인 공급 과잉으로 ‘개미지옥’이 된 자영업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전체 취업자에서 자영업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20% 밑으로 떨어지긴 했지만, 주요 선진국에 비하면 여전히 2∼3배 높다. 괜찮은 일자리가 부족해 청년층부터 조기 퇴직한 베이비부머까지 대거 생계형 창업에 뛰어드는 탓이다. 준비도 없이 성급하게 창업한 뒤 빚으로 버티다가 폐업으로 내몰리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자영업자 3명 중 1명은 월평균 최저임금(월 210만 원)도 못 버는 신세다. 2차 베이비붐 세대(1964∼1974년생)가 본격적으로 은퇴하면 상황은 더 심해질 게 뻔하다.과포화 자영업 구조조정 병행해야 이 같은 구조적 위기를 방치한 채 부실이 쌓인 자영업자에게 채무 조정과 탕감을 반복하는 건 국민 혈세를 부어 ‘좀비 자영업자’만 늘리는 꼴이 될 수 있다. 회생 가능성이 있는 소상공인에게 흘러갈 자금 여력까지 막아 자영업 생태계의 지속 가능성을 해칠 우려도 있다. 더군다나 이 대통령은 4일 행사에서 “추가 탕감”까지 언급했는데, ‘안 갚고 버티면 된다’는 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소지가 크다. 현 정부가 내건 탕감 조건(7년 이상 연체, 5000만 원 이하)의 빚을 이미 성실하게 갚은 사람이 361만 명인데, 이들이 느끼는 박탈감은 상당하다. 정부는 빚 탕감 전력이 있는 사람을 걸러내는 등 엄격한 기준을 마련해 부작용을 최소화해야 한다. 아울러 고통스럽더라도 빚으로 연명하는 한계 자영업자를 솎아내는 구조조정을 서둘러야 한다. 폐업 기로에 놓인 자영업자를 돕는 근본 처방은 단기적 채무 구제가 아니라 질서 있는 출구를 마련하고 맞춤형 직업교육, 일자리 알선 등을 통해 취업 기회를 열어주는 것이다. 위기의 자영업을 언제까지 빚 탕감 ‘산소호흡기’로 연명시킬 수는 없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은행이나 관공서도 아닌데 버젓이 고객에게 신분증을 요구하는 곳이 글로벌 명품 브랜드 매장이다. 오픈런을 위해 입장 대기 번호표를 받을 때도 소비자는 이름과 연락처, 생년월일 등을 제공해야 한다. VIP 맞춤형 서비스를 명분으로 기본 인적사항은 물론이고 직업, 가족·친구 관계, 취미, 각종 기념일 같은 세세한 개인정보를 수집하는 일이 다반사다. 해커들의 놀이터인 ‘다크웹’에서 명품 브랜드의 고객 정보가 일반 소비자 정보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거래되는 이유다.▷그런데 이처럼 민감한 사적 정보가 가득 모인 명품 브랜드에서 국내 고객들의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디올, 티파니, 까르띠에에 이어 지난주 루이비통코리아에서 고객 정보가 외부로 유출된 것이 알려졌다. 루이비통과 디올, 티파니는 세계 최대 명품 그룹인 프랑스 루이뷔통모에에네시(LVMH) 소속이고, 까르띠에는 스위스 명품 그룹 리치몬트 산하의 보석·시계 브랜드다. 불과 두 달 새 국내에서 인지도와 인기가 높은 명품 브랜드 네 곳에서 정보 유출 사고가 확인된 것이다.▷이들 브랜드에서 새나간 정보에는 이름, 연락처, 주소, 이메일뿐만 아니라 소비자가 예민할 수밖에 없는 구매 이력과 ‘추가 제공 정보’가 포함돼 빈축을 사고 있다. 신용카드나 은행 계좌 같은 금융 정보는 유출되지 않았다지만, 온라인 곳곳에 흩어져 있는 개인정보들과 결합해 2차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소비자들 사이에선 콧대 높은 명품 브랜드의 보안이 이렇게 허술한지 몰랐다는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소비자들이 더 분통을 터뜨리는 건 명품 업체들의 부실하고 안일한 대응이다. 루이비통은 지난달 8일 고객 정보가 유출됐지만 이달 3일에야 관계당국에 신고했다. 디올은 올 1월에 발생한 유출 사고를 100일이 지난 뒤에야 파악했고, 이마저도 고객에게 곧장 알리지 않았다. 티파니 역시 한 달이 넘어서야 정보 유출을 인지하고 해당 고객에게만 이메일로 알렸고, 까르띠에는 유출 시점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오죽하면 이름만 명품일 뿐 대처는 구멍가게 수준이라는 얘기가 나오겠나.▷게다가 해외 명품 브랜드들은 한국 지사에 정보 보안 책임자나 담당 부서를 두지 않고 해킹 사고에 취약할 수 있는 외부 클라우드 서비스에 고객 정보 관리를 맡긴다고 한다. 명품 브랜드가 국내에서 막대한 수익을 올리면서도 고객 정보 보호에 소홀한 건 한국 소비자를 ‘호갱(호구+고객)’으로 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루이비통과 까르띠에 등이 올 상반기에만 두 차례 가격을 올리는 등 명품 브랜드의 ‘N차 가격 인상’은 관행이 됐다. 기꺼이 개인정보를 넘겨주고, 값을 아무리 올려도 사겠다는 호갱이 사라지지 않는 한 명품 브랜드의 배짱 영업은 계속될 것 같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페르시아만과 맞닿은 중동 산유국에서 원유나 천연가스를 싣고 큰 바다로 나가려면 이란과 오만 사이에 있는 호르무즈해협을 지나야 한다. 호리병같이 생긴 이 뱃길은 이란과 오만이 절반씩 관할하지만, 수심이 100m 안팎으로 얕은 데다 폭이 가장 좁은 곳은 39km에 불과해 대형 유조선은 그나마 수심이 깊은 북쪽 이란 해역을 통과해야 한다. 여기서도 들어가는 배와 나가는 배는 각각 3km 너비의 정해진 항로를 따라 이동해야 한다. 배 한 척만 틀어져도 수로가 엉키며 마비되는 구조인 셈이다. ▷그동안 미국의 압박이 거세질 때마다 이란이 ‘호르무즈 봉쇄’ 카드를 꺼내든 배경이다. 전 세계 원유 소비량의 20%, 중동 산유국이 수출하는 원유의 85%가 오가는 이 길목을 막아 국제 사회에 타격을 주겠다는 것이다. 2012년 미국이 이란의 핵 개발 의혹을 제기하며 이란산 원유 수입을 금지하자 이란은 해협을 봉쇄하겠다고 엄포를 놨고, 2018년 도널드 트럼프 1기 행정부가 이란 핵 합의를 파기하고 제재를 복원했을 때도 봉쇄 위협으로 맞섰다. ▷미국이 21일(현지 시간) 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에 개입해 이란 본토를 공습하면서 호르무즈의 봉쇄 가능성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 이란 의회가 곧바로 호르무즈 봉쇄를 의결해 최고국가안보회의의 최종 결정만을 남겨 놓고 있다. 국제 유가가 급등하고 주가와 환율이 출렁이는 등 글로벌 금융시장은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호르무즈 폐쇄가 현실화하면 국제 유가가 지금의 두 배로 치솟아 ‘워플레이션’(전쟁+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거라는 경고까지 나온다. ▷그런데 이란이 쥔 사실상 유일한 공세 카드임에도 20세기 이후 봉쇄가 현실화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이란 해군사령관이 한때 “호르무즈 봉쇄는 물 마시는 것만큼 쉽다”고 큰소리쳤지만, 실행에 옮기는 것이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서방의 제재로 극심한 경제난을 겪는 이란이 수출 대부분을 원유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수출길을 막는 건 자해나 다름없다. 게다가 저렴한 이란산 원유를 대거 수입하며 이란을 편드는 동맹국 중국에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점도 딜레마다. ▷호르무즈 봉쇄가 가시화하면 가장 큰 타격을 받을 나라는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이다.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하는 원유의 70% 이상이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등으로 수출되고, 특히 한국이 수입하는 중동산 원유의 99%가 이곳을 거친다. 한국은 이란의 도발에 맞서 달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5년 전 아덴만에 파견된 청해부대를 호르무즈해협으로 파병한 적도 있다. 이번에도 국내 선박과 유조선이 표적이 되면 청해부대가 출동할 가능성이 크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 호르무즈 봉쇄의 불똥이 어떻게 튈지 걱정스럽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K뷰티의 ‘제조 강자’로 꼽히는 한국콜마가 2세 경영 체제로 전환한 건 2019년이다. 일본과의 무역 갈등으로 반일 정서가 들끓던 당시, 창업주 윤동한 회장이 정부 대응을 비판하는 막말 영상 논란에 휩싸이며 경영에서 잠시 물러나면서다. 1남 1녀를 둔 윤 회장은 아들에겐 화장품과 의약품 사업을, 딸에겐 건강기능식품 사업을 맡기는 것으로 후계 구도를 그리고 지주사인 콜마홀딩스 지분을 물려줬다. 그해 말 아들 윤상현 사장은 부회장으로 승진하며 지주사 최대 주주가 됐고, 이듬해 초 딸 윤여원은 콜마비앤에이치의 사장이 됐다. ▷그런데 최근 아버지 윤 회장이 6년 전 아들 윤 부회장에게 물려준 지주사 주식 230만 주(지금은 무상증자를 거쳐 460만 주)를 돌려 달라는 소송을 냈다. 창업주가 2세 경영자를 상대로 증여 취소 소송을 제기하는 초유의 경영권 분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번 소송은 얼마 전부터 자회사 경영권을 둘러싸고 아들 윤상현 부회장과 딸 윤여원 사장이 벌인 ‘남매 다툼’이 ‘부자 싸움’으로 확전된 꼴이다. ▷남매간 갈등은 두 달 전 오빠 윤 부회장이 실적 부진과 주가 하락 등을 이유로 동생이 대표이사로 있는 콜마비앤에이치의 경영진 교체를 요구하면서 불거졌다. 동생이 이를 거부하자 오빠는 이사회 개편을 위한 임시주주총회를 열게 해달라는 소송까지 냈다. 이 같은 다툼이 알려지자 윤 회장은 창립 기념식에서 기존 후계 구도 방침을 거듭 밝히며 “창업주로서 직접 중재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아들이 “혈연 아닌 주주 가치 제고 원칙을 지킬 것”이라며 아버지의 뜻을 거부하자 부자간 소송전으로 번진 것이다. ▷부녀 측은 아버지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기 전 체결한 ‘3자 간 경영 합의’를 아들이 어긴 만큼 증여 취소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해당 합의에는 그룹 경영을 맡은 아들이 콜마비앤에이치의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경영권 행사를 지원·협조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으며, 이를 전제로 증여를 받았다는 것이다. 반면 아들 측은 당시 증여는 아버지의 사퇴로 인한 경영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이뤄진 것으로, 경영 합의를 전제로 한 ‘부담부증여’가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다. ▷향후 재판에선 경영 합의에 어떤 문구가 포함됐는지, 경영 합의를 증여의 조건으로 볼 수 있는지 등이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일반 가정에서도 부담부증여를 취소해 달라는 소송이 끊이지 않는데, 대체로 자식이 증여 조건으로 내건 효도나 부양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며 물려준 재산을 도로 내놓으라는 사례라고 한다. 일반 가정의 증여 반환도 까다로운데 콜마 분쟁은 경영권까지 걸려 있어 장기전으로 치달을 소지가 크다. 집안싸움으로 K뷰티 수출에 일등공신 역할을 해온 콜마의 날개가 꺾이지 않을까 걱정스럽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30여 년간 선거 때마다 경기 지역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단골 메뉴가 경기도를 남북으로 나누자는 분도와 수원·성남시의 군공항 이전이다. 김동연 경기도지사 역시 경기북부 특별자치도를 신설하고 남부권에 대규모 국제공항을 유치하겠다는 공약을 앞세워 2022년 지방선거에서 당선됐다. 군공항을 옮겨 민간도 함께 사용하는 통합 국제공항을 만들겠다는 것인데, 경기도는 그해 말 곧장 ‘경기국제공항추진단’을 꾸리고 이듬해 국제공항 건설 지원 조례까지 만들어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이어 지난해 11월엔 화성시 화옹지구 간척지, 평택시 서탄면, 이천시 모가면 등 세 곳을 국제공항 후보지로 선정했다. 인천·김포국제공항 이용객 10명 중 3명이 경기도민인데도 정작 도내에 공항이 없어 불편이 큰 데다, 15년 뒤 경기도 인구가 1479만 명으로 늘어나는 걸 감안하면 국제공항이 필요하다는 게 경기도의 주장이다. 여객 수요는 물론이고 반도체 클러스터 등 첨단산업단지를 기반으로 화물 수요 또한 경쟁력이 있다고 봤다. ▷그런데 최근 경기도의회 의원들이 국제공항 건설 지원 조례를 폐지하겠다는 조례안을 발의했다. 폐지 조례안에 참여한 도의원 10명 중 8명이 더불어민주당 출신으로, 같은 당 소속인 김 도시자의 역점 사업에 제동을 건 것이다. 도의원들은 수요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수도권에 국제공항을 또 짓는 건 명백한 예산 낭비라고 했다. 후보지 세 곳 모두 지하철 등 교통 인프라가 부족해 인천·김포공항을 가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리고, 늘어나는 화물 수요는 인접한 청주국제공항을 활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국제공항 후보지에서 주민들의 반발이 이어지는 것도 사업 백지화 추진에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화성시 화옹지구는 2017년부터 수원 군공항 이전 예비후보지로 거론됐던 곳인데, 주민들은 “군공항이든 국제공항이든 다 싫다”며 범시민대책위원회까지 만들어 집단행동에 나섰다. 공항이 들어서면 소음 피해가 가중되고 고도 제한에 묶여 갓 출범한 화성특례시 개발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평택과 이천시 후보지 주민들의 의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자체와 정치권이 한 몸이 돼 자기 지역에 공항을 유치하는 데만 열을 올리는 상황에서 경기도의회의 움직임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공항 건설부터 운영까지 전액 국비가 투입되다 보니 지자체와 정치권이 합작해 예산을 퍼준 뒤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세금 먹는 하마’가 된 공항이 널려 있다. 국내 15개 공항 중 11곳이 만성적자의 늪에서 허덕이고, 인구가 줄고 전국 곳곳에 고속도로와 KTX가 뚫리는데도 새로 건설되거나 계획 중인 공항이 10곳에 달한다. 경기국제공항은 물론이고 선거를 치를 때마다 늘어나는 ‘공항 포퓰리즘’에 제동을 걸어야 하는 이유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한국 직장인들 사이에서 생활비를 한 푼도 쓰지 않는 ‘무지출 챌린지’가 유행한 게 3년 남짓이지만, 일본에서는 2000년대부터 일찌감치 극단적인 절제 소비가 두드러졌다. 버블 붕괴와 함께 ‘잃어버린 10년’을 거치면서 소비를 가치 없는 행동으로 여기거나 심지어 죄악시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당시 “화장품에 1000엔 넘게 쓰거나 새 차를 사는 사람은 바보”라는 인터뷰 기사가 넘쳐났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가성비인 ‘코스파(cost performance의 일본식 발음)’라는 신조어가 등장한 것도 이때다. ▷소비 대신 절약이 일상이 된 일본의 30여 년간 변화를 한국은 압축적으로 겪고 있는 듯하다. 한국인 전 세대가 10년 전에 비해 소비를 자제하며 지갑을 닫았다고 한다. 세금, 이자, 연금보험료 등을 내고 남은 가처분소득에서 소비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인 ‘평균소비성향’이 모든 연령층에서 10년 전보다 하락한 것이다. 대한상공회의소가 2014년과 2024년의 세대별 소득과 소비 지출 변화를 분석한 결과다. ▷연령대별로 보면 60대의 평균소비성향이 62.4%로 내려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다. 지난해 100만 원을 벌면 62만 원 정도만 썼다는 얘기다. 또 소득이 늘어난 다른 세대와 달리 20, 30대는 소비금액뿐만 아니라 가처분소득까지 동시에 뒷걸음쳤다. 좋은 일자리가 부족한 젊은층은 쓸 돈이 없어 지갑을 못 열고, 준비 없이 은퇴를 맞은 고령층은 노후가 막막해 지갑을 안 여는 것이 통계로 확인된 셈이다. 전 연령층의 소비 감소는 단순히 경기 둔화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총체적으로 맞물린 결과다. ▷빛의 속도로 진행되는 저출산·고령화로 저성장이 만성화되는데, 성장 활력을 높이기 위한 구조개혁은 더디기만 해 일본식 극단적 절약 소비가 고착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 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은 한국인의 기대수명이 1년 늘어날 때마다 평균소비성향은 0.48%포인트씩 하락한다고 추산했다. 한국인 기대수명이 2004년 77.8세에서 지난해 84.3세로 뛰었는데, 그만큼 길어진 노후에 대비하기 위해 30, 40대마저 저축은 늘리고 씀씀이를 줄인다는 것이다. ▷이 같은 소비 부진은 저성장 늪에 빠진 한국 경제의 침몰을 더 부채질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0.8%로 대폭 낮추고 ‘0%대 성장’을 공식화하면서, 민간소비가 성장률을 0.15%포인트 끌어내릴 것으로 내다봤다. 국민이 지갑을 닫는다는 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아무리 해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크다는 뜻이다. ‘피크 저팬’에 이어 ‘피크 코리아’ 징후가 곳곳에서 감지되는 판에 무차별 돈 풀기식 정책만으로는 닫힌 국민들의 지갑을 열 수 없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중국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미국을 심하게 등쳐먹었다.” “관세 전쟁이든 무역 전쟁이든 다른 어떤 전쟁이든 중국은 끝까지 맞서 싸우겠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서로 죽일 듯 치고받던 미국과 중국이 ‘90일 관세 휴전’에 들어갔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고위급 협상에서 양국이 90일간 상호관세를 115%포인트씩 똑같이 인하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이 중국산 제품에 매기는 관세는 145%에서 30%로 낮아지고, 중국이 미국산에 물렸던 보복관세 125%는 10%로 인하됐다.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는 ‘깜짝 빅딜’이다. ▷양국이 첫 협상부터 극적인 화해 모드에 돌입한 건 이대로 가다가는 공멸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치킨게임 같은 관세 전쟁의 역풍으로 미국 금융시장은 달러·주식·채권 가격이 동반 하락하며 패닉에 빠졌고, 1분기 성장률은 ―0.3%로 주저앉았다. 관세 폭탄 우려에 기업들이 수입품을 미리 사재기하면서 미국의 무역 적자는 더 커졌고, 곧 마트 진열대가 텅 빌 것이라는 경고까지 나왔다. 내수·부동산 침체로 고전하는 중국 역시 대미 수출이 막히면서 공장 폐업이 잇따르고 있다. ▷속전속결 ‘휴전 담판’을 두고 양국 정부는 각각 자국의 승리라며 자축하는 분위기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이번 합의로 미중 관계가 완전히 리셋됐다”며 “가장 큰 성과는 중국의 시장 개방”이라고 평했다. 제네바 회담에 나섰던 중국 협상팀 3인방 중 한 명인 리청강 상무부 국제무역담판대표는 “중국 속담에 ‘맛있는 밥은 늦게 지어져도 좋다(好飯不怕晩)’는 말이 있다”며 협상 결과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중국 관영매체 등도 “중국의 위대한 승리”, “미국의 상호관세 남용에 처음으로 반격한 국가”라는 자평을 쏟아냈다. ▷하지만 미국 현지에서는 사실상 ‘트럼프의 판정패’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뉴욕타임스는 시진핑 국가주석의 버티기에 트럼프의 공격적 전략이 한계를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위기를 조장한 뒤 양보를 얻어내는 전략을 썼지만 중국이 고통을 감수할 의지를 보이자 관세 강경책을 철회했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트럼프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는 애덤 스미스와 무역 전쟁을 벌였고 패배했다”고 꼬집었다. ▷이번 관세 휴전이 영구적 평화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관세 인하에 90일이라는 꼬리표가 달린 데다 양국의 인식 차이가 커 후속 협상이 쉽지 않을 거라는 우려가 높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주말 시진핑과 통화할 수 있다”고 했는데, 양국 정상이 만나야 실질적인 관세 전쟁 종식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불안한 휴전이긴 해도 한국의 1, 2위 교역국인 중국과 미국의 해빙 무드에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질 일이 줄어든 건 다행이지만, 우리 발등에 떨어진 관세 폭탄은 아직 그대로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포천 500대 기업 가운데 최고령 최고경영자(CEO)는 94세의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이다. 버핏은 30대 중반이던 1965년 버크셔를 인수했는데, 이를 두고 훗날 “인생 최악의 투자 결정”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사양산업이던 섬유회사를 싸 보인다는 이유로 헐값에 사들인 게 실패였다는 것이다. 버핏은 섬유 사업에서 손을 떼고 버크셔를 세계 최대의 투자회사로 일으킨 뒤에도 “끔찍한 실수를 상기시키는 상징”이라며 회사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포천 500대 기업 CEO들의 평균 나이가 57세, 평균 재임 기간이 7년인 걸 감안하면 버핏의 뒤를 이어 시가총액 1조 달러에 달하는 ‘가치투자의 본산’을 누가 이끌지가 늘 관심사였다. 버핏의 후계자는 2021년 우연찮게 공개됐는데, 버핏이 한 인터뷰에서 “오늘 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내일 아침 경영권을 인수할 사람은 그레그가 될 것”이라며 그레그 에이블 비(非)보험 부문 부회장을 지목했다. 그러면서도 은퇴 계획은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그런데 버핏이 3일 그의 고향 오마하에서 열린 버크셔해서웨이 연례 주주총회에서 60년간 지켜온 CEO 자리에서 올해 말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후임자인 에이블을 포함해 회사 이사진도 몰랐던 깜짝 은퇴 발표였다. 해마다 5월 초 열리는 버크셔 주총에는 버핏의 투자 철학과 지혜를 듣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투자자들이 몰려드는데, 올해는 4만여 명이 운집해 전설적인 투자자의 갑작스러운 퇴장에 1분여간 기립 박수를 보내며 경의를 표했다. ▷올해가 그가 이끄는 마지막 주총임을 알고 있었던 버핏은 은퇴 발표에 앞서 5시간에 걸쳐 경제 현안에 대한 견해를 가감 없이 쏟아냈다. 특히 세계 경제를 뒤흔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을 “큰 실수”라며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는 트럼프 이름을 직접 거론하진 않았지만 “무역이 무기가 돼서는 안 된다”며 “무역이 전쟁 행위(act of war)가 될 수 있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꼬집었다. 또 “다른 나라가 번영할수록 우리도 그들과 함께 더 번영할 것”이라며 “균형 잡힌 무역이 전 세계를 위해 이롭다”고 강조했다. ▷트럼프발 관세 폭탄으로 금융시장이 대혼란에 빠진 와중에도 버핏은 올 들어 세계 억만장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자산을 늘렸다. 다들 ‘트럼프 랠리’에 취해 있을 때 애플 같은 대형 기술주 주식을 내다팔고 채권과 현금 자산 비중을 크게 늘린 덕분이다. 이번에도 그의 선택이 옳았던 셈이다. 버핏의 자산은 현재 230조 원을 넘어섰는데, 이 돈의 95%가 60세 이후에 형성됐다고 한다. “투자 원칙의 첫 번째는 돈을 잃지 말라, 둘째는 첫째 원칙을 절대로 잊지 말라”는 버핏의 투자 철학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하는 혼돈의 시대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고물가가 길어질수록 인기를 끄는 게 유통업계 자체 브랜드(PB) 상품이다. 유통업체가 직접 기획하고 주문 생산하는 덕에 저렴하고 품질까지 좋아 허리띠를 졸라맨 소비자들이 먼저 찾는다. 대형마트, 편의점 같은 오프라인 업체뿐 아니라 이커머스 회사들까지 PB 상품 개발에 힘을 쏟는 이유다. 국내 1위 이커머스 업체 쿠팡은 2017년 ‘탐사’ 브랜드로 PB 시장에 뛰어들어 식품 ‘곰곰’, 생활용품 ‘코멧’, 가전 ‘홈플래닛’ 등 30개에 가까운 자체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쿠팡이 이 같은 PB 상품들을 경쟁 상품보다 우선 노출되도록 검색 순위 알고리즘을 조작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쿠팡과 쿠팡의 PB 상품을 전담하는 자회사를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같은 혐의로 유통업체로는 사상 최대인 1628억 원의 과징금을 물리고 검찰에 고발한 지 11개월 만에 기소가 이뤄진 것이다. ▷검찰에 따르면 쿠팡은 2019년 3월부터 지난해 11월까지 PB 상품과 직매입하는 로켓배송 상품 5만1300개의 검색 순위를 16만 번이나 조작해 상단에 고정적으로 노출시켰다. 특히 판매가 부진해 재고가 쌓인 PB 상품과 제조업체로부터 수백억 원의 인센티브를 받기로 한 직매입 상품을 집중적으로 띄웠다. 실제 판매량과 사용자 별점, 가격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산출되는 검색 순위를 무시하고 무려 5년 9개월 동안 자사 상품을 밀어준 것이다. ▷이 같은 조작으로 100위 밖이던 PB 생수 ‘탐사수’는 단번에 1위로 뛰어 단일 제품으로는 쿠팡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상품이 됐다. 정상적으로는 100위권 진입조차 어려웠던 다른 PB 상품들도 줄줄이 1위로 올랐다. 이 덕에 쿠팡 PB 상품의 소비자 노출 횟수는 43%, 매출액은 76%나 늘었다고 한다. 바꿔 말하면 쿠팡에 수수료를 내고 상품을 파는 21만 개 입점업체들은 자기 제품을 검색 상위에 올리기 어려웠다는 뜻이다. 오프라인 유통업계에서 판치던 입점업체 차별이 혁신을 앞세우는 온라인 플랫폼에서 더 노골화된 셈이다. ▷쿠팡은 지난해 공정위 처분이 나왔을 때 “상품 진열 방식은 업체의 고유 권한”, “시대착오적 조치”라고 반발했다. 하지만 공룡 플랫폼의 지위를 악용해 소비자와 입점업체를 기만하고 혁신과는 거리가 먼 배짱 영업을 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공정한 경쟁이 사라진 시장에서 쿠팡은 재작년 처음 흑자를 낸 데 이어 지난해 매출 40조 원을 돌파하며 국내 전체 백화점 판매액을 뛰어넘었다. 온·오프라인를 통틀어 유통 1위에 오른 쿠팡이 소비자 신뢰와 유통 질서를 회복하지 못하면 한국 시장을 무섭게 잠식하는 알리, 테무 등 중국 이커머스에 역전당하는 건 시간문제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문재인 정부가 자랑했던 경제 성과 중 하나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달성이다. 2006년 2만 달러를 처음 넘어선 1인당 국민소득이 문 정부 첫해인 2017년 3만 달러를 돌파했다는 거였다. 당시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은 “문 정부에서 국민 1인당 국내총생산(GDP) 증가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5년마다 이뤄지는 GDP 통계 기준연도 개편에 따라 국민소득 3만 달러 돌파 시기는 2017년에서 2014년으로 앞당겨졌다. ▷3만 달러를 돌파했든 아니든 이명박·박근혜·문재인·윤석열 정부 빠짐없이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를 핵심 공약이나 정책 목표로 내세웠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가르는 기준으로 꼽히는데, 선진국 문턱을 넘어 한 단계 더 도약하겠다는 청사진을 담은 셈이다. 윤 정부는 취임 2년 차에 “민간 주도 성장을 유지한다면 5만 달러도 꿈이 아니다”라며 목표치를 더 높였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의 싱크탱크도 최근 5만 달러 달성을 담은 성장 전략을 내놓았다. ▷그런데 국제통화기금(IMF)이 한국의 1인당 GDP 4만 달러 달성이 4년 뒤인 2029년에야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해 10월만 해도 2027년 달성을 예상했는데 반년 만에 두 해나 늦춰 잡았다. 또 올해 한국의 1인당 GDP는 3만4642달러로 지난해보다 4% 줄어든다고 분석했다. 코로나 위기가 한창이던 2022년보다 낮은 수준으로 후퇴하는 것이다.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국가에서 1인당 소득이 이만큼 뒷걸음질 치는 건 이례적이다. ▷1인당 GDP는 한 나라의 경제 규모를 보여주는 경상 GDP를 미국 달러로 환산한 뒤 총인구로 나눠 계산하는데, IMF의 전망엔 저성장과 고환율 쇼크에 발목 잡힌 우리 경제의 현실이 고스란히 담겼다. 최근 IMF는 올해 한국의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2%에서 1%로 반 토막 냈다. 트럼프발 관세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더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봤다. 관세 폭탄에 국내 정치 불안, 내수 침체까지 맞물려 원화 가치는 주요국 통화보다 약세를 보이고 있다. ▷IMF 전망이 현실화된다면 한국은 15년이나 1인당 GDP 3만 달러의 덫에 갇히는 꼴이 된다. 우리보다 앞서 3만 달러를 통과한 선진국들이 평균 6년 만에 4만 달러 시대를 연 것과 비교하면 늦어도 한참 늦다. 게다가 내년부터 경쟁국인 대만에 1인당 소득이 추월당한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늙어 가는데도 경제 체질 개선과 사회 전반의 구조 개혁을 게을리한 대가다. 자칫 한눈팔다가는 4만 달러 벽을 깨기는커녕 2만 달러 추락을 걱정해야 할 수도 있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2005년 1월 정부과천청사가 대규모 시위대에 뚫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전년도 공인중개사 시험 불합격자 1500여 명이 경찰의 저지를 뚫고 청사에 난입해 한밤중까지 시위를 벌인 것이다. 이들은 건설교통부 건물을 에워싸고 “합격자를 추가 선발해 달라”고 요구했다. 통상 20% 안팎이던 공인중개사 시험 합격률이 그해 1%로 뚝 떨어지며 발생한 일이었다. ‘중년 고시’, ‘인생 2막 자격증’으로 불리는 공인중개사 시험의 인기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부동산 광풍에 취업 한파까지 겹쳤던 2021년에는 공인중개사 시험에 역대 최다인 28만 명이 응시했다. 집값이 워낙 올라 매물 한두 건만 중개해도 웬만한 직장인 월급을 능가하는 수입을 올릴 수 있어 젊은층이 대거 몰렸다. 중년 고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응시자 열 중 넷이 20, 30대 청년이었다. ‘미친 집값’을 잡겠다는 정부의 현장 단속을 피해 불을 꺼놓고 몰래 영업하는 중개업소가 등장하던 시절이었다. ▷첫 시험이 치러진 1985년 이후 현재까지 배출된 공인중개사 자격증 소지자는 55만여 명이다. 경제활동인구 55명당 1명꼴로 공인중개사이니, ‘국민 자격증’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하지만 이 중 80% 정도는 ‘장롱 면허’이고, 실제 영업하는 공인중개사는 11만1600명에 그친다. 부동산 시장이 식으면서 개업 공인중개사는 2023년 2월 이후 줄곧 감소세를 이어가고 있다. 2년 넘게 새로 문을 연 중개업소보다 폐업하거나 휴업한 곳이 더 많다는 얘기다. ▷특히 올해 들어선 3개월 연속 새로 개업한 공인중개사가 1000명을 밑돌고 있다. 봄 이사철을 앞두고 신규 개업이 몰리는 시기에 개업자가 1000명 아래로 떨어진 건 통계 집계 이후 처음이다. 부동산 시장 침체가 길어지면서 서울과 지방을 가릴 것 없이 새로 문 여는 중개사가 급감했다. 거래가 끊긴 데다 고금리, 대출 규제, 내수 침체가 겹쳐 공인중개사들도 사무실 관리비와 임차료를 감당하기 힘든 처지다. 부동산 시장 호황기에 연간 100만 건을 웃돌았던 전국 주택 매매 거래는 지난해 64만 건에 그쳤다. ▷여기에다 부동산 직거래가 활발해진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최근 3년간 이뤄진 부동산 거래 319만 건을 살펴보면 중개와 직거래 비중이 거의 반반일 정도다. 한 중고거래 플랫폼에서 성사된 부동산 직거래는 3년 새 220배 폭증했다. 집값이 뛰면서 덩달아 치솟은 중개수수료가 부담인 데다 ‘건축왕’ ‘빌라왕’ 같은 전세사기에 공인중개사가 빠짐없이 등장한 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새 아파트 단지가 생기면 부동산중개업소부터 들어선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지만, 이젠 공인중개사도 살아남는 것 자체를 걱정하는 시대가 됐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철강업계 1, 2위인 포스코와 현대제철의 관계는 가전의 삼성·LG전자, 유통의 롯데·신세계와 비슷하다. 외환위기로 쓰러진 한보철강 인수를 놓고 포스코와 현대차그룹이 맞붙은 것을 시작으로, 최대 라이벌이자 앙숙으로 사사건건 부딪혔다. 한보철강을 품에 안은 정몽구 현대차 명예회장이 용광로를 갖춘 일관제철소 건설을 추진하자, 30여 년 독점 체제가 깨지게 된 포스코가 자동차용 강판 공급을 중단한 건 유명한 일화다. 대통령을 비롯해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총출동한 현대제철 일관제철소 기공식에도 포스코는 참석하지 않았다. ▷이런 두 회사가 미국 시장 공략을 위해 이례적으로 손을 맞잡았다. 현대제철이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에 짓는 제철소에 포스코가 함께 투자하기로 한 것이다. 앞서 현대차그룹은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감사 인사를 받으며 미국에 210억 달러를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여기엔 현대제철이 58억 달러를 들여 루이지애나에 연산 270만 t 규모의 자동차 강판 제철소를 건립하는 게 포함됐는데, 포스코가 최소 1조 원 이상을 투입하고 일부 생산 물량을 직접 판매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어제의 적을 동지로 돌려세운 건 트럼프발 관세다. 미국은 금액 기준으로 한국 철강 기업들의 최대 수출 시장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12일부터 수입 철강과 파생상품에 25%의 관세를 때리면서 ‘메이드 인 코리아’ 철강은 가격 경쟁력을 잃었다. 가뜩이나 중국산 덤핑 공세에 밀리던 국내 철강 기업들은 트럼프발 관세가 현실화되자 지난달에만 미국 수출액이 16% 넘게 줄었다. 트럼프의 ‘관세 철벽’을 넘으려면 현지 생산을 늘리는 것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포스코와 현대제철의 동맹은 윈윈 전략으로 꼽힌다. 현대제철로서는 포스코와 힘을 합치면 현지 투자 리스크를 크게 줄일 수 있다. 현대제철은 당초 투자금 58억 달러 중 일부를 외부에서 조달할 계획이었는데, 미국 진출을 오랫동안 준비하고 자금 사정까지 넉넉한 포스코가 제격이다. 10년 넘게 미국 제철소 설립을 놓고 고심하던 포스코 역시 나 홀로 투자의 부담을 덜면서 미국 진출이라는 해묵은 숙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됐다. ▷한국의 철강 ‘빅2’가 해외에서 공동 투자와 생산에 나선다는 건 과거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포스코와 현대차그룹은 철강 외에도 글로벌 전기차 시장에 대응해 이차전지 소재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했다. 중국의 저가 물량 공세와 트럼프 관세의 틈바구니에 껴 휘청대는 다른 산업에서도 상상을 뛰어넘는 우리 기업들의 협력을 기대한다. 경쟁 상대와도 손잡을 수 있는 기업들의 과감하고 유연한 전략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트럼프 스톰’을 헤쳐 나가는 힘이 될 것이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한국 소비자들이 해외 온라인 쇼핑몰에서 직접 사들인 물건이 지난해 8조 원어치에 육박하는데, 이 중 60%가 중국발(發) 직구다. 초저가를 앞세운 ‘알테쉬’(알리익스프레스·테무·쉬인)의 등장 이후 중국 직구액은 해마다 조 단위 숫자를 바꿔가며 최대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국내에선 150달러 이하 소액 수입품은 관세와 부가세가 면제되는데 중국에서 직구하는 제품 대부분이 여기에 포함된다. 과거엔 중국이 저가 제품을 쏟아내더라도 관세 장벽으로 1차 방어를 할 수 있었다면, 알테쉬 직구 시대엔 이마저 사라졌다는 뜻이다. ▷알테쉬의 초저가 공습에 골머리를 앓는 건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은 800달러 이하 소액 수입품에 면세를 해주는데, 이를 이용해 미국에 들어온 중국산 제품이 지난해 8억 개를 넘어섰다고 한다. 이를 발판으로 테무는 단숨에 미국 내 앱 다운로드 1위에 올랐고, 쉬인은 미국 패스트패션 시장의 절반을 장악했다. 미국 유통시장을 뒤흔들고 아마존, 월마트를 위협하는 중국 이머커스의 존재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그냥 두고 볼 리가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달 2일 전 세계를 향해 무차별 상호 관세를 발표하면서 중국산 제품에 대한 소액 면세 제도를 폐지했다. 소액 소포로 밀반입되는 마약류 펜타닐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했지만, 실상은 알테쉬를 정조준한 셈이다. 중국이 보복 관세로 맞대응하자 트럼프는 중국발 소액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30%에서 90%로 올린 데 이어 이틀 만에 120%까지 높였다. 그동안 무관세로 들어오던 알테쉬 제품에 다음 달 2일부터 120%의 관세 폭탄이 더해지는 것이다. ▷미국 진입이 사실상 막힌 중국 이커머스 업체들은 더 무섭게 한국 시장을 파고들 것으로 보인다. 벌써 올 1분기에 면세 혜택을 받고 국내에 들어온 중국발 직구 상품은 처음으로 6억 달러를 돌파했다. 알테쉬는 값싼 중국산 제품을 판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내 상품을 직접 유통하는 방식도 서두르고 있다. 테무는 올해를 한국 공략의 원년으로 삼고 국내 판매자를 모집 중이고, 알리익스프레스는 국내 유통 대기업과 손잡고 합작법인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알테쉬의 공세가 거세질수록 국내 경쟁 이커머스 업체는 물론이고 중국산 헐값 제품에 맞서 물건을 생산해야 하는 중소기업까지 고사 위기에 내몰릴 거라는 우려가 높다. 가뜩이나 내수 침체로 허덕이는 중소 제조업체들은 중국발 직구 여파로 적잖은 타격을 입고 있다. 지난해 설문조사에선 중국 직구로 피해를 본 중소기업의 절반이 ‘과도한 면세 혜택’을 문제로 꼽았다. 알테쉬에 대한 견제는 세계적 추세여서, 호주 싱가포르 베트남 등도 소액 면세 제도를 없앴다. 미중 관세 전쟁이 이커머스 봉쇄로 확전된 상황에서 우리도 알테쉬만 배불리는 제도를 손볼 때가 됐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 세계를 향해 마구잡이로 퍼부은 상호관세를 둘러싸고 ‘트럼프 2기 경제팀’의 균열이 감지되고 있다. 먼저 격돌한 건 관세 전쟁의 설계자인 피터 나바로 백악관 고문과 ‘퍼스트 버디’ 일론 머스크다. 상호관세 조치가 발표되고 사흘 후 머스크는 “미국과 유럽은 무관세로 가야 한다”며 트럼프 기조와 상반되는 주장을 펼쳤다. 나바로를 겨냥해선 “뭐 하나 이룬 게 없다”고 비꼬았다. 나바로는 트럼프 1기 4년을 꽉 채우고 2기에 발탁된 유일한 경제 관료다. ▷“미국 산업이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장담과 달리, 해외에 공장을 둔 미국 기업들이 관세 직격탄을 맞을 거라는 우려가 커지자 머스크가 총대를 메고 나선 셈이다. 그러자 나바로는 “머스크는 차를 파는 게 중요하다. 상호관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며 공개 비판했다. 그러면서 “머스크는 자동차 제조업자가 아니라 조립업자다. 테슬라의 많은 부품이 중국, 일본, 대만에서 온다”고 깎아내렸다. ▷머스크는 “테슬라는 가장 미국산 차(the most American-made cars)”라며 “나바로는 벽돌보다 멍청하다”고 맹비난했다. 트럼프의 최측근들이 원색적인 표현을 써가며 설전 수위를 높인 것이다. 나바로는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의 부상을 막는 게 최우선 과제지만 테슬라는 전체 매출의 20%가 중국에서 나온다. 오히려 자동차 부품 관세 때문에 미국 공장에서 만드는 테슬라 차의 가격을 올려야 할 처지다.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골수 마가(MAGA)파’가 중국을 때릴 때마다 머스크가 제동을 걸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를 두고 ‘골수 마가’와 트럼프 2기의 신진 세력으로 분류되는 ‘다크 마가’의 충돌이라는 해석까지 등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주류 관료나 정치인을 배제하는 인사를 하면서 경제팀엔 빅테크 엘리트와 정통 금융인·기업가 출신을 포진시켰다. 머스크를 비롯해 헤지펀드 매니저 출신인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 자수성가 기업인 출신의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이 대표적이다. 두 그룹의 경제 철학은 닮은 듯 서로 달라 트럼프의 경제 정책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지가 관심사였는데, 틈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을 제외한 나라의 상호관세를 느닷없이 유예하는 과정에서도 경제팀의 내분이 엿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 유예를 검토하면서 베선트, 러트닉 장관과 논의했다고만 했을 뿐 나바로는 언급하지 않았다. 베선트는 한국, 일본 등과의 무역 협상도 맡았다.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월가와 공화당 지지자들마저 분노를 표출하자, 고율 관세에 반대해 온 온건파 장관들에게 힘이 실리는 모양새다. 이번 유예 조치로 각국은 시간을 벌었지만, 트럼프 경제팀의 분열과 갈등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갖고 있는 ‘문제적 기록’은 화려하다. 미국 역사상 두 번이나 탄핵 소추된 유일한 대통령이며, 중범죄자 꼬리표를 달고 취임한 첫 대통령이다. 그런데 재취임 두 달 만에 또 하나의 기록을 추가하게 됐다. “억만장자는 권력에서 손을 떼라”는 뜻의 대규모 ‘핸즈오프(Hands Off)’ 시위를 촉발한 대통령이 된 것이다. 요즘 미 전역은 반(反)트럼프 시위로 들끓고 있다. 5일(현지 시간)에만 50개 주, 1300여 개 지역에서 핸즈오프 시위가 벌어졌고 60만 명이 참석했다고 외신은 전했다. ▷시위대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라’ ‘사회보장에 손대지 마라’ ‘관세가 무섭다’ ‘교육에서 손 떼라’ 등 각양각색의 팻말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 무역 정책, 공무원 대량 해고, 복지 축소 등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전국적인 시위로 분출된 것이다. 시위 현장에는 트럼프 못지않게 연방정부 구조조정을 이끄는 ‘퍼스트 버디’ 일론 머스크를 규탄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트럼프 2기에서 해고된 공무원이 벌써 12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특히 전 세계를 향해 융단폭격 식으로 퍼부은 ‘트럼프 관세’가 미국 증시부터 박살내면서 성난 민심에 기름을 끼얹었다. 상호관세 발표 직후인 3, 4일 이틀간 미국 증시의 3대 지수는 일제히 10% 안팎 급락하며 팬데믹 위기 이후 최악의 폭락장을 연출했다. 미 증시는 관세 폭탄을 맞은 나라들보다 더 많이 떨어져 이틀 새 1경 원에 가까운 시가총액이 허공으로 사라졌다. 이 같은 폭락 장세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비관론이 지배적이어서 더 무섭다. ▷최근 여론조사에선 미국 유권자의 절반 이상(54%)이 트럼프 관세 정책을 반대한다고 답했다. 올 초만 해도 관세 정책을 지지한다는 응답이 반대보다 많았던 것과 딴판이다. 전 세계를 상대로 세운 높은 관세 장벽이 미국 내 물가를 높이고 해외에 공장을 둔 미국 기업의 이익을 감소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커진 탓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이 “그는 완전히 미쳐버렸다”는 직설적 표현으로 트럼프의 관세 정책을 비판했을 정도다. ▷이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 발표 바로 다음 날 플로리다의 마러라고 리조트로 날아가 골프를 즐기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지금이 부자 되기 좋을 때”라고 썼다. 시위 현장 곳곳에서 “주식시장은 폭락하고, 트럼프는 골프 친다”는 분노의 외침이 들린 배경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5일에도 “이것은 경제 혁명이며,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버텨내라”며 관세 전쟁을 강행할 뜻을 거듭 밝혔다. 미국 대통령이 막무가내로 힘을 휘두르는데 막을 사람이 없다. 분노한 시민들이 트럼프의 일방주의 폭주에 브레이크를 달아 줄 수 있을까.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국책은행인 IBK기업은행에서 전현직 임직원 수십 명이 가담한 880억 원대 부당 대출이 적발됐다. 퇴직한 직원이 은행에 다니는 배우자와 동기, 선후배 등과 결탁해 무려 7년 동안 부당 대출을 받거나 알선했다고 한다. 두 달 전에는 우리, KB국민, NH농협은행 등 3곳에서 고위 임원부터 일선 영업 현장까지 연루된 3800억 원대 부당 대출이 확인됐다. 소비자들에겐 가혹할 만큼 엄격한 대출 잣대를 들이대는 은행들이 국책은행, 시중은행 가릴 것 없이 짬짜미로 대규모 부정·편법 대출을 일삼아 온 것이다.▷금융감독원 검사 결과, 기업은행에서 14년간 근무하다 퇴직한 A 씨는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었다. 대출을 끼고 땅을 산 뒤 건물을 짓고 되파는 식으로 돈을 벌었다. 이 과정에서 기업은행 대출 심사역인 아내와 기업은행 사모임 5곳에서 만난 전현직 임직원이 대거 동원됐다. 대출 증빙 서류를 허위로 꾸며 제출했지만 아내와 동료들은 이를 묵인하고 돈을 내줬다. A 씨의 입행 동기인 대출심사센터장과 지점장들은 미분양 상가의 부당 대출을 줄줄이 승인해 줬고, 고위 임원은 미분양 난 건물에 아예 은행 점포를 입점시켰다.▷이런 식으로 A 씨가 2017년 6월부터 지난해 7월까지 직접 빌리거나 건설사에 알선해준 부당 대출은 51건, 785억 원에 달한다. 이쯤 되면 국책은행이 아니라 ‘사금고’라 불러야 할 판이다. A 씨의 부정을 공모하거나 눈감아준 임직원들은 두둑한 대가를 챙겼다. A 씨에게 해외 골프 접대를 받은 임직원이 스무 명이 넘고, 일부 임직원은 배우자들이 A 씨 회사에 취업하는 방식 등으로 16억 원 상당의 금품을 챙겼다. 은행원들의 기강 해이가 ‘도덕 불감증’ 수준이다.▷더군다나 기업은행은 지난해 9월 자체 조사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을 파악하고도 금감원에 보고하지 않았다. 오히려 금감원 검사가 시작되자 일부 직원들은 수백 개 문서와 사내 메신저 기록을 삭제하며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고 했다. 또 은행 조사 결과 부당 대출 규모가 240억 원이라고 공시했지만 금감원 검사에서 3배 넘게 늘었다. 은행권에 만연한 제 식구 감싸기가 도를 넘은 셈이다.▷지난해 손태승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이 얽힌 불법 대출이 드러난 데 이어 대규모 부당 대출이 끊이지 않으면서 은행권의 내부통제 강화와 윤리 경영이 말뿐이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국민은행과 농협은행에서는 직원들이 대출 브로커와 짜고 억대 금품을 받은 뒤 수백억 원을 대출해 주는 등 위법 행태도 갈수록 대담해지고 조직화되고 있다. 고객들이 이런 은행을 믿고 돈을 맡겨도 되나 싶다. 신뢰와 리스크 관리가 생명인 은행권의 탈선이 위험 수위를 넘고 있어 걱정스럽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진두지휘하는 ‘관세 전쟁’의 다음 무기는 4월 2일로 예고된 상호 관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개념의 관세인데, 각국이 미국산 제품에 적용하는 관세만큼 미국도 똑같이 상대국에 관세를 물리겠다는 것이다. 국가마다, 품목마다 관세율이 제각각이어서 상호 관세 부과는 AI 프로젝트급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어떤 나라가 대상인지, 어떻게 관세율을 매기겠다는 건지가 초미의 관심사인데 트럼프 행정부 고위 당국자가 ‘더러운 15(Dirty·더티 15)’ 국가들을 지목했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이 18일 현지 인터뷰에서 나라별로 상호 관세율이 다를 거라고 설명하면서 “대미 무역량이 많은 15%의 국가들, ‘더티 15’라고 부르는 국가들에 집중하고 있다”고 한 것이다. 과거 미 행정부가 중국을 겨냥해 ‘더러운 철강(dirty steel)’이라고 언급한 적은 있지만 무역 상대국을 싸잡아 지저분하다고 지칭한 건 이례적이다. 남의 나라 총리를 ‘주지사’라고 조롱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무례함이 행정부 전반으로 옮겨간 듯하다. ▷베선트 장관은 ‘더티 15’에 어느 나라가 포함됐는지 밝히진 않았지만 미국에 상당한 관세를 부과하고, 관세 못지않게 중요한 ‘비관세 장벽’을 치는 국가라고 지적했다. 미국에 불리한 세금이나 규제, 정부 보조금 같은 비관세 장벽까지 고려한 상호 관세를 거듭 확인한 것이다. 미국에 여덟 번째로 많은 무역 적자를 안긴 한국도 ‘더티 15’에 올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진위를 떠나 “한국의 평균 관세가 미국의 4배”라는 게 트럼프 대통령의 인식이다. ▷더군다나 한국의 까다로운 농산물 검역 규제와 30개월 이상 미국산 소고기 수입 금지, 구글의 정밀지도 반출 제한 등은 미국 측이 꾸준히 문제 삼아 온 한국의 비관세 장벽 이슈들이다. 최근 국무장관, 상무장관, 백악관 핵심 참모 등이 돌아가면서 한국을 콕 집어 압박 수위를 높이는 배경이다. 일본 대만 등이 미국에 더 큰 무역 적자를 떠안겼는데도 한국을 향한 칼날이 유독 매섭다. 국정 리더십에 구멍이 난 한국이 동네북이 된 신세다. ▷베선트 장관은 “사전에 협상하면 상호 관세를 피해갈 수 있다”며 “일부 국가는 이미 트럼프 대통령에게 대미 관세를 대폭 낮추겠다고 제안했다”고 강조했다. 교역국들을 상대로 4월 2일 전까지 선물 보따리를 가져오라고 압박한 셈이다. 일본, 인도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을 직접 만나 관세 면제를 요청하면서 각각 1조 달러 투자와 미국산 에너지·무기 수입을 약속했다. 대만은 정부 대신 반도체 기업 TSMC가 나서 1000억 달러를 추가 투자하기로 했다. 한국이 ‘더티 파트너’가 아니라 ‘대체 불가 파트너’임을 설득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한국에서 텔레그램 탈퇴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진 건 5년 전이다. 텔레그램 본사가 ‘n번방’ 수사에 협조하지 않자 국내 가입자들이 정해진 시각에 한꺼번에 탈퇴하며 압박에 나선 것이다. 누리꾼들은 텔레그램을 주무대로 벌어진 성착취물 유포 사건을 각종 외국어로 번역해 알렸고 해외 언론사에 제보하기도 했다. 하지만 탈퇴 러시도 잠시뿐, 한국 가입자는 갈수록 늘어 텔레그램은 국내 2위 모바일 메신저로 급성장했다. ▷범죄의 온상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보다 보안성과 익명성이 부각된 덕이다. 한국 경찰의 수차례 수사 협조 요청에도 텔레그램은 일절 응하지 않은 채 범죄자들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줬다. 불법 음란물 유통을 막기 위한 ‘n번방 방지법’이 시행되자 오히려 텔레그램 가입자가 수십만 명씩 늘어난 건 아이러니다. 해외에 서버를 둔 외국 기업은 규제에서 쏙 빠진 탓이다. 지난해 불법 계엄 사태 때도 카카오톡이 검열될 수 있다는 괴담이 퍼지자 시민들은 텔레그램부터 깔았다. ▷그런데 5년 만에 다시 텔레그램 탈출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이번에는 일반 가입자가 아니라 텔레그램을 방패 삼아 활개 치던 범죄자들이 중심이다. 한국 경찰과 텔레그램이 핫라인까지 구축해 수사 공조에 나서자 범죄자들이 텔레그램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한결같이 수사에 비협조적이던 텔레그램은 지난해 8월 파벨 두로프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가 프랑스 검찰에 체포되자 태도를 바꿨다. 이용자 간 대화가 서버에 전혀 남지 않는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었다. ▷텔레그램은 234명의 피해자를 성착취한 이른바 ‘자경단’ 사건을 시작으로 수사 협력에 물꼬를 튼 뒤 한국 경찰의 자료 요청에 90% 넘게 협조하면서 하루 3번꼴로 소통하고 있다. 텔레그램에서 벌어지던 성범죄, 마약 등 강력 범죄뿐만 아니라 투자 리딩방 같은 신종 사기 수사에도 속도가 붙었다고 한다. 문제는 범죄자들이 추적을 피해 해외의 다른 보안 메신저로 갈아타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국가안보국(NSA) 감청 프로그램을 세상에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이 쓴다고 해서 유명해진 ‘시그널’이 대표적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다 같이 시그널로 갈아타면 끝 아님?”, “보안 쪽에선 시그널이 좋음” 등의 글들이 퍼지고 있다. 과거 ‘드루킹 댓글 조작’ 사건에 이 메신저가 쓰였고 윤석열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도 계엄 관련자들과 시그널로 소통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용자 아이디가 없는 메신저 ‘심플엑스 챗’, 동유럽에서 많이 쓰는 ‘바이버’ 등도 범죄자들이 숨어드는 곳이라고 한다. 이들 메신저가 초창기 텔레그램과 닮아 있어 새로운 범죄 소굴이 될까 걱정스럽다. 하지만 텔레그램이 결국 꼬리를 내린 것처럼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