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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슈퍼배드’에 나오는 악당 그루의 방귀총을 실험해보고, 바나나볼 수만 개로 가득 채운 초대형 풀장에서 헤엄칠 수 있다. 이 두 가지만으로 어린이 관객을 매료시키기엔 충분하다. 서울 종로구의 복합문화공간 ‘안녕 인사동’ 인사센트럴뮤지엄에서 열리는 ‘미니언즈 특별전’ 이야기다. 노란 미니언즈는 영화 ‘슈퍼배드’에 등장했던 악당 그루의 행동대원이다. 1, 2개의 눈을 갖고 국적 불명의 언어를 사용하는 미니언즈들은 사악하지만 귀여운 외모와 엉뚱함으로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2015년에 별도의 스핀오프 ‘미니언즈’가 개봉했고, 2020년 ‘미니언즈2’가 공개될 예정이다. ‘미니언즈 특별전’이 열리는 ‘안녕 인사동’은 지하 1층의 2810m² 규모로 지난달 9일 문을 열었다. 규모가 커서 일반 전시보다는 체험 공간이 다양하게 마련된 ‘미니 테마파크’에 가깝다. 첫 테마인 ‘극장과 갤러리’는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을 담은 프린트와 제작자 인터뷰 영상이 전시된다. 차분한 전시 공간을 지나면 거대한 ‘그루의 자동차’와 악당 그루가 맞이하는 ‘그루의 실험실’에서 본격적인 재미가 시작된다. 애니메이션 속 실험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공간에 디테일을 살린 소품들이 배치돼 영화 속에 들어간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슈퍼배드’ 시리즈의 4대 악당인 스칼렛 오버킬, 벡터 퍼킨스, 엘 마초, 발타자르 브랫의 실물 크기 조각도 곳곳에 세워져 있다. 이어지는 ‘걸즈룸’은 ‘인스타그래머’를 위해 마련된 공간이다. 우선 인스타그램의 상징과도 같은 ‘플러피 유니콘’이 초대형 사이즈로 한가운데 우뚝 서 있다. 주변 벽지는 온갖 화려한 패턴들로 장식돼 포토존을 만든다.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아보는 체험 게임, 브랫의 춤을 따라 하고 영상을 남기는 멀티미디어 게임이 이어지고, 마지막엔 초대형 볼풀이 관객을 맞이한다. 내년 3월 15일까지. 1만1000∼1만5000원.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73)의 아내 배우 윤정희 씨(75·사진)가 알츠하이머병으로 투병 중이다. 백 씨의 국내 공연기획사 빈체로는 “윤정희 씨가 10년 전부터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다”고 10일 밝혔다. 윤 씨의 투병 사실은 영화계와 클래식 음악계의 지인들만 알고 있었다. 윤 씨는 올해 5월부터 병세가 심각해져 딸인 바이올리니스트 백진희 씨가 프랑스 파리에서 돌보고 있다. 백 씨의 공식 행사에 늘 동행했던 윤 씨는 올해 3월 도이체그라모폰을 통해 발매한 백건우의 ‘쇼팽: 녹턴 전집’ 간담회에 참여하지 않아 당시 병세가 상당히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 알츠하이머병이 시작될 무렵 윤 씨는 이창동 감독의 ‘시’(2010년)에서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는 ‘미자’ 역을 맡았다. ‘미자’는 윤 씨의 본명이기도 하다. 15년 만에 영화계에 복귀한 그는 이 영화로 칸 영화제에 초청됐으며 로스앤젤레스 비평가협회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윤 씨는 1960년대 문희, 남정임과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를 이끌었다. 12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첫 영화 ‘청춘극장’(1967년)에서 주연을 맡으며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다. 지금까지 영화 330여 편에 출연했다. 백 씨와는 1976년 프랑스 파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전 세계를 누비는 백 씨의 연주 일정에 항상 동행하는 등 부부애가 깊은 것으로 유명하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예술 작품은 단순한 장식품을 넘어 시대를 증언하는 가치를 지닌다. 국내에서는 자주 느끼기 어려웠던 이 같은 예술의 가치를 제대로 보여주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경기 안산시 경기도미술관에서 지난달 29일 개막한 ‘시점(時點)·시점(視點)―1980년대 소집단 미술운동 아카이브’전이다. 개막 간담회에서 안미희 경기도미술관장은 “학예팀의 역량을 총동원한 프로젝트로 경기지역 근현대미술사의 새로운 시점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새롭게 여는 전시에 보내는 의례적 수사로 들릴 수도 있지만, 탄탄한 연구와 자료수집으로 뒷받침된 전시를 보고 나면 ‘근거 있는 자신감’의 원천을 느낄 수 있다. ‘시점·시점’전은 1980년대 한국 사회 변화의 한 축을 이끈 경기지역의 소집단 미술운동을 재조명하는 전시다. 1980년대 주요한 미술작품 330여 점과 자료 1000여 점을 30여 년 만에 공개한다. 전시장을 중심으로 활동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현실과 발언’ ‘임술년’ 등 미술그룹과 달리 현장 중심이어서 작품이 보존될 수 없었던 미술 그룹에 집중했다. 전시는 1980년대 뜨거웠던 경기도 미술의 현장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처럼 느껴진다. 백미는 1984년 4월 서울 경인미술관에서 열렸던 ‘두렁’ 창립전을 재현한 공간이다. 당시 미술동인 두렁은 고려 불화인 ‘감로탱’을 재해석한 걸개그림을 걸고 미술관 마당에서 열림굿을 펼쳤다. 김종길 학예실장은 “걸개그림은 1980년대 우리 미술이 탄생시킨 독자적인 형식”이라며 “갤러리가 아닌 현장 중심인 데다 그룹 활동에 의해 제작돼 제대로 보존될 수 없었던 작품을 30여 년 만에 복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걸개그림의 변천사도 확인할 수 있다. ‘두렁’처럼 초기의 걸개그림에서는 한국 전통 문화의 영향을 받은 독창적인 시각 언어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1988년 제작된 ‘가는 패’의 걸개그림 ‘노동자’는 러시아에서 시작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시각 언어를 차용했다. 당시 집회에 사용됐던 이 그림은, 민중미술이 현장 예술에서 시작해 프로파간다로 전락해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 밖에 여성주의 미술가 그룹인 ‘시월모임’, 아방가르드 미술 그룹 ‘안드로메다미술연구소’, ‘목판모임 나무’ 등 30여 개 소집단의 미술 활동 자료를 만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전시의 배경에 독일 카셀의 국제미술전 ‘도쿠멘타’가 있다는 것이다. 도쿠멘타는 이탈리아 베니스비엔날레와 함께 언급되는 세계적인 국제 미술전으로 5년에 한 번 열린다. 1955년 첫 전시에서 독일 나치 정권하에 퇴폐미술로 금지됐던 모더니즘 예술을 선보였다. 이후 현대미술의 거장 요제프 보이스가 ‘사회 조각’을 선보이는 등 삶과 맞닿은 예술을 보여주며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김 학예실장은 이러한 ‘시대 증언’의 속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재작년 카셀을 방문해 도쿠멘타 실무진과 함께 아카이빙 방법을 연구했다. 그는 경기 미술 아카이브 구축을 장기적 과제로 진행할 예정이다. “때로 긴 이야기보다 이미지 한 컷이 우리 삶을 더 정확히 보여줍니다. 역사의 상징적 기록으로 미술의 아카이브가 중요한 이유죠.”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미술은 너무 어렵고 아는 게 없어서….” 어쩌면 미술 기자가 미술계 외부 사람을 만날 때 가장 흔히 듣는 말인지도 모른다. 기자가 “그림은 오디오 가이드도, 설명서도 없이 가장 먼저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좋다”고 대답하면 대화는 끊기기 십상이다. 초심자들은 미술을 알기 위해 많은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렵다’는 편견 아래 미술은 고급스러운, 한가한, 사치스러운 미지의 영역으로 간주되곤 했다. 이런 오해에는 기존의 미술사 서술도 한몫했다. ‘명작’이나 ‘천재성’이라는 모호한 말 속에 작품의 시각언어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은 숨겼기 때문이다. 예술에서 과거 기록보다 더 중요한 건 ‘보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우리 모두가 어린 시절 언어를 배우기 전부터 연마했던 기술이다. 다만 어른이 되어 갖게 된 편견과 지식이 그림을 있는 그대로 보기 어렵게 만든다. 국제적 미술기관들이 미술사 다시 보기를 외치며 컬렉션을 재정비하고, 특정 개념이나 사조의 언급을 지양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올해 5월 영국에서 출간된 이 책은 ‘보는 방법’의 구체적 정리를 시도했다. “예술 작품은 선입견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봐야 한다”거나 “유명 작가에게 붙은 ‘천재’라는 딱지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말에서부터 신뢰가 생긴다. 몇몇 예술 교양서가 예술 작품에 얽힌 사변적 에피소드로 허황된 판타지를 부추기는 상황이기에 더 그렇다. 저자가 제시하는 것은 20세기 이전 고전미술 작품의 감상법이다. 총 10개로 이뤄진 각 단계의 앞 글자를 따 ‘TABULA RASA’라고 이름 붙였다. 앞의 여섯 단계는 시간(Time), 관계(Association), 배경(Background), 이해하기(Understand), 다시 보기(Look Again), 평가하기(Asses). 뒤의 4단계는 각각 리듬(Rhythm), 비유(Allegory), 구도(Structure), 분위기(Atmosphere)다. 이는 기교에 관한 것으로 고전미술에만 국한된다. 현대미술은 손으로 그리는 기교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기준을 도구로 활용해 20세기 이전의 유명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다만 각 작품에 관한 설명은 최소화했고 풍부한 도판을 함께 실었다. 저자의 해석을 따라가기보다 보는 사람에게 다양한 해석을 열어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접근 방식은 결국 ‘명작’은 박제된 보물이 아니라, 나와 다른 시대와 장소에 살았던 사람을 이해하는 창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세계 미술사가 인권의 확장을 기준으로 재편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제적 흐름에 맞춰 서양 미술을 알고 싶은 초심자라면 이 책을 가이드로 삼아도 좋을 듯하다. 원제는 ‘Look Again: How to Experience Old Masters’.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아르헨티나 출신 예술가 토마스 사라세노(46)의 작품 ‘하이브리드 건축물’은 거미가 주인공이다. 여러 종의 거미 2, 3마리가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8주에 걸쳐 만든 거미줄이 결합돼 하나의 건축물이 탄생됐다. 또 다른 설치 작품 ‘아라크노 콘서트’에서는 거미가 일으키는 진동이 스피커로 울려 퍼지면서 어두운 전시장 속 먼지와 공명한다. 관객은 숨죽인 채 이 광경을 지켜본다.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갤러리현대에서 사라세노의 개인전이 개막했다. 독일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사라세노는 10여 년간 거미와 협력자로 일했다. 그는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도 국가관 가운데 ‘거미/줄’관을 세워 거미줄 설치 작품을 선보였다. 어릴 적 오래된 집 다락방에 가득한 거미를 보고 ‘우리 집 주인은 거미일까 나일까’ 공상하던 소년은 거미의 시선에서 세계를 바라보려 시도한다. 사라세노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 대형 설치작품을 통해서다. 2008년 선보인 ‘Galaxies Forming Along Filaments’는 거미줄에서 영감을 얻어 인류의 새로운 주거 형태를 고민했다. 좁은 땅에 밀집한 도시의 주거를 벗어나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경계 없이 오갈 수 있는 시스템을 예술가의 상상력으로 제안했다. 이번 개인전의 전시장 지하에서 만나는 ‘서울/클라우드 시티즈’는 이렇게 작가가 꿈꾸었던 ‘구름 도시’ 모습을 서울에 결합했다. 베를린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에서 선보였던 대규모 ‘구름 도시’는 관객이 직접 거미가 된 듯 투명한 구 형태의 공간을 오갈 수 있어 인기였다. 서울은 이에 비하면 작은 규모지만 구름처럼 자유롭게 떠다니는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생명과학이나 열역학 등 최신 기술을 활용해 관객을 매혹하는 방식은 덴마크 출신 예술가 올라푸르 엘리아손이나 영국 기반 그룹 랜덤인터내셔널을 떠올리게 한다. 몰입에 가까운 경험과 사진을 찍고 싶은 비주얼도 이러한 경향과 맞물린다. 이 때문에 자연사박물관에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회의적 시선도 있다. ‘예술의 영역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라는 화두로 지켜보기에 흥미로운 작가다. 12월 8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하얀색 사각형 석조 건물 위에 유리 구름이 살포시 앉았다. 프랑스 파리 불로뉴 숲에 자리한 ‘돛단배’ 모양의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을 닮았다. 지난달 31일 서울 강남구에 문을 연 ‘루이비통 메종 서울’(청담 메종)은 세계적 건축가 프랭크 게리(90)가 한국에 선보이는 첫 작품. 게리는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1997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월트디즈니 콘서트홀(2003년) 등 무거운 재료를 종이처럼 가볍게 표현한 건축으로 유명하다. 지하 1층, 지상 4층인 ‘청담 메종’은 2000년 개관한 루이비통 글로벌 매장을 리모델링하고, 주얼리와 시계, 디자인 제품인 ‘오브제 노마드’를 포함시켜 새롭게 재편한 공간이다. 외관 설계를 맡은 게리는 높은 성벽에 기와를 올린 수원 화성과 도포를 휘날리는 ‘동래학춤’의 움직임에서 영감을 얻었다. 클래식 음악과 무용을 좋아하는 그는 동래학춤의 역동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됐다고 한다. 회색과 흰색의 무채색 건물에 1층 쇼윈도 공간은 원색을 뽐내는 나무 조형물을 설치해 대조를 이룬다. 청담 메종의 오픈을 기념해 게리가 직접 디자인한 작품으로, 종이를 손으로 구긴 듯한 형태가 돋보인다. 건물 외관의 유기적인 흐름과 색채의 대조는 내부로도 이어진다. 미국 출신의 건축가 피터 머리노가 디자인을 맡은 인테리어는 ‘볼륨과 대조’를 주제로 했다. 머리노는 20여 년간 로스앤젤레스, 뉴욕, 파리, 로마 등의 루이비통 메종을 설계했다. 외부의 하얀 석조가 내부로 연결되고 그 안에 다양한 디자인, 예술 작품이 자리해 색채를 더했다. 기존 매장은 층고가 일정했지만 ‘메종 청담’은 1층에 층고 12m로 시원하게 튼 라운지가 인상적이다. 이곳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코쿤 체어’는 루이비통의 커미션으로 만든 디자인 작품인 ‘오브제 노마드 컬렉션’의 일부다. 2012년 미국 디자인 마이애미를 통해 첫선을 보인 ‘오브제 노마드’는 아틀리에 오이, 마르셀 반더르스, 앙드레 푸 등 세계적 디자이너가 참여해 현재 55점의 아이템으로 구성됐다. 여행에 초점을 두고 ‘접는 의자’처럼 이동하기 좋은 소품에서 시작해 가구로 확장하고 있다. ‘청담 메종’ 곳곳에 배치된 소파와 조명 등은 머리노가 공간에 맞춰 고른 것으로 판매용은 아니다. 지하 1층은 남성 컬렉션으로, 지상 1, 2층은 여성 컬렉션과 액세서리, 향수, 파인 주얼리로 구성된다. 3층은 맞춤형 쇼핑을 할 수 있는 프라이빗 살롱이다. 4층에는 전시장으로 운영하는 ‘에스파스 루이비통’이 있다. 일본 도쿄, 독일 뮌헨, 이탈리아 베네치아, 중국 베이징에 이어 다섯 번째로 열린 ‘에스파스 루이비통 서울’은 개관을 기념해 알베르토 자코메티 특별전을 개최한다.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의 소장품 중 자코메티 작품 8점을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작품 다수는 지난해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알베르토 자코메티’전에도 소개됐다. 이 공간은 프렌치 레스토랑, 예술가와의 대화, DJ파티 등 다양한 용도로도 사용할 예정이다. 전시는 내년 1월 19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2020년, 동아일보의 100주년을 학생들이 디자인한다면 어떤 모습이 탄생할까? 연세대 디자인예술학부 4학년 이설희 씨는 동아의 자음 ‘ㄷㅇ’을 ‘도약’으로 바꾼 가상의 전시를 기획했다. ‘도약’전은 일제강점기부터 100년간 동아일보가 이어온 역사, 문화적 활동을 알리는 전시다. 전시 포스터 디자인에 화려한 색채의 산이 우뚝 솟아 있다. 새로운 100년으로 도약하는 동아일보의 모습이다. 4일부터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이 씨를 비롯한 청년 13명이 동아일보 브랜드를 재해석한 결과물을 만날 수 있다. 동아일보와 연세대 디자인예술학부의 산학협력전 ‘도약’을 통해서다. ‘도약’전 참가자들은 올 상반기부터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실무’ 강의(지도교수 채재용)에서 동아일보의 기존 브랜드를 분석하고, 장점을 극대화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학생들이 바라본 동아일보 브랜드의 강점은 언론 자유 수호와 활발한 문화예술 지원이었다. 동아마라톤, 신춘문예, 동아음악·무용콩쿠르 등 꾸준히 진행해 온 문화사업을 알리는 것이 브랜드의 긍정적 이미지를 극대화할 수 있다고 봤다. 그 결과 △백지광고 포스터 △동아마라톤 스포츠웨어 △신춘문예 스페셜 에디션과 웹사이트 리디자인 △100주년 구독자 키트 △100주년 기념 엠블럼 △키워드 그래픽 캘린더 등의 디자인 작품이 탄생했다. 참가자 김은경 씨와 임하경 씨는 각각 신춘문예 웹사이트 리뉴얼과 특별판 굿즈를 제안했다. 김 씨는 “신춘문예는 신인 문학인 발굴과 문화 부흥 차원에서 지속되어야 할 역사적인 행동”이라며 “이를 위해 1920년 창간호부터 사용한 로고를 사용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소통을 담아 사이트를 디자인했다”고 설명했다. 임 씨는 동아일보의 3대 사시 중 문화주의에 초점을 맞춰 ‘세상을 보는 맑은 창’과 ‘연결’을 콘셉트로 한 포스터, 다이어리, 휴대전화 케이스, 엽서 등의 굿즈를 구성했다. ‘백지광고 포스터’를 제작한 김주희 씨는 “독자들이 동아일보의 투쟁을 지원하고 동참하는 뜻으로 실었던 응원 광고 속 재밌고 유쾌하게 풀어낸 문구, ‘파이팅’ 넘치는 문구를 활용해 디자인했다”고 말했다. 오주은 씨는 동아콩쿠르 수상자의 이미지를 활용한 구독자 키트를 디자인했다. 역사성, 역동성, 초심을 키워드로 한 달력을 제안했다. 채 교수(모노클앤컴퍼니 대표)는 “일반적인 브랜딩 수업은 새로운 브랜드를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100주년을 맞는 동아일보에는 구체적 아카이브가 있어 학생들에게도 실질적인 경험이 됐다”고 말했다. 전시는 28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김희근 벽산엔지니어링 회장의 소장품을 소개하는 ‘세종 컬렉터 스토리’가 열리고 있다. 지난해 9월 취임한 김성규 사장이 “미술관의 방향성을 구축하고 아트 컬렉터의 긍정적 역할을 조명하겠다”며 추진한 첫 기획전시라 기대를 모았다. 그런데 지난달 23일 개막한 전시엔 ‘컬렉터’만 있고 ‘긍정적 역할’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중요한 세 가지가 빠졌기 때문이다. 첫째는 교육적 측면이다. 공공 미술관의 1순위 고려 대상은 시민이다. 시민들은 공공 전시로 미술사를 경험하고 시대를 관찰한다. 유럽 모더니즘 컬렉션을 구축하고 미술관을 세운 페기 구겐하임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컬렉터’전에는 명확한 가치가 밝혀지지 않은 동시대 작품이 혼재돼 전시됐다. 요제프 보이스와 백남준 전시 공간 등 눈에 띄는 곳도 있었지만 미술사 흐름을 이해하기엔 턱없이 작은 규모였다. 다음은 후원자 역할이다. 컬렉터는 초기에 작품 가치를 알아보고 작가의 성장을 도울 때 후원자가 된다. 마르셀 뒤샹의 작품을 수집해 미국 필라델피아 박물관에 기증한 아렌스버그 부부가 대표적. 그런데 전시장에는 미술사의 주요 흐름이나 특정 사조에 관한 맥락이 보이지 않았다. 특히 전시장에 1, 2점씩 걸려 있는 앤디 워홀 등의 작품은 오래전 미술사적 가치가 확립된 투자적 성격이 짙은 작품이었다. 기획자는 “전체 소장품을 본 것이 아니라 김 회장 측이 제공한 작품으로 전시를 구성해 한계가 있었다”고 했다. 소장품이 공공 미술관에 전시되는 것은 좋은 이력이 된다. 미술관이 주도적으로 전체 소장품을 연구하고, 공익성에 맞는 작품을 충분히 선별했어야 하는데 이에 부합하지 못한 것은 안타깝다. 마지막은 공공성이다. 여러 사정으로 공익적 맥락을 전시에 넣기 어려웠다고 해도 입장료까지 받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김 회장은 대여료 없이 컬렉션을 내줬다. 미술관은 입장료(4000원)가 통상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개인이 모은 작품들을 시민이 유료로 봐야 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당초 기획 의도인 ‘컬렉터 역할 재정립’은 미술계에 정말 필요한 일이다. 김 회장 또한 오랫동안 예술 작품을 수집하고 활발히 문화 예술계를 지원했다. 그러나 컬렉터는 ‘후원자’와 ‘투자자’라는 양면성을 지닌 존재다. 이 중 긍정적 측면을 부각하려면 탄탄한 연구와 세심한 기획이 필요했다. 이 전시가 민간 미술관에서 열렸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시 산하단체가 운영하는 공공미술관에서 희귀하고 값비싼 작품을 나열해 보여준다는 정도의 안이한 기획이 이뤄진 것은 아쉽다. 앞으로 ‘컬렉터’전이 성공하려면 시민을 염두에 둔 치밀한 주제의식부터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

‘건물을 짓고 남은 자리에 정원을 꾸미는 게 아니라 원래 있었던 자연에 건물이 앉혀진다면 어떤 모습일까.’ 서울 성동구에 10일 문을 연 ‘아모레 성수’가 입소문을 타고 있다. 서울의 브루클린 ‘성수’에 있어서도, 오래된 자동차 정비소를 리모델링한 ‘인스타 성지’여서도 아니다. ‘힙스터’는 물론이고 건축가도 주목하는 공간은 중정에 자리 잡은 231m²(약 70평) 넓이의 ‘성수가든’이다. 쓰고 남은 여백을 채우거나 건축물을 보조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정원의 반전은 뭘까? “개구리가 밤새도록 울어대는 공원. 도시에서 쫓겨난 생명이 돌아오는 공간. 그런 곳이 저의 꿈입니다.” 성수가든을 만든 ‘더가든’의 김봉찬 대표(54·사진)가 말했다. 그의 말처럼 성수가든은 공간에 식물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식물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서식처’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쪽동백, 노각나무, 꼬랑사초, 나도히초미 등 자생식물이 공존하고, 바닥에는 푸른 이끼가 덮여 숲을 그대로 옮겨온 풍경이다. 녹색, 갈색, 회색의 그러데이션은 인위성 없는 자연 자체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아모레 성수’에는 뷰티 체험 공간과 카페가 들어섰다. 디귿(ㄷ)자 형태의 건축이 중정을 감싸안고, 통유리창을 통해 정원을 사방에서 감상할 수 있다. 따뜻한 날엔 창을 열어 두어서 스프링클러의 물이 뿜어질 때 풀내음이 솔솔 들어온다. 정원에는 사람이 들어갈 수 없으니, 이 공간의 주인공은 정원이다. 이처럼 인간 중심적 사고를 넘어 식물의 환경을 고려하는 것이 ‘생태정원’이다. 생태정원을 국내에 처음 도입한 김 대표는 대학에서 생태학을 공부하고, 제주 여미지식물원에 근무하며 식물의 생태를 익혔다. 제주 토박이로 다양한 식생을 접했고 40대 때까지 자연에 심취해 한국의 산, 도서 지방, 압록강 두만강 유역 등을 답사했다. 1990년대에는 해외 잡지를 보며 독학으로 조경 기술을 익혔고, 고산식물을 위한 암석원 조성 기법을 개발해 ‘평강식물원’에 적용했다. 김 대표는 그간 국내의 정원에서 다양한 식물의 어우러짐을 보기 힘들었던 것은 국내 조경의 기준이 ‘잘 견디는 식물’에 있어서라고 설명했다. 성수가든 속 식물 대다수는 기존 조경 시장에서 구하기 어려운, ‘더 가든’에서 직접 기른 것들이다. “국내에서는 안 좋은 조건에서 잘 견디는 식물, ‘하자’가 나지 않는 식물을 선호해 왔어요. 그런데 사실 모든 식물은 ‘하자’가 없습니다. 단지 잘못 다루거나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한 거죠. 낯선 서식처에서도 식물이 잘 살게 해주는 것이 정원의 기술입니다.” 미국 뉴욕의 명소 ‘하이라인파크’도 도시의 악조건에서 식물을 위한 환경을 조성해준 것이 핵심인데, 국내에서는 겉모습만 가져오려 해 어려움을 겪었다고 진단했다. 그 기저의 원인은 연구와 기술 개발 등 ‘기초 체력’ 부족이다. “식물원은 기본적으로 사진 찍는 곳이 아니라 식물 생태 연구의 베이스캠프가 되어야 해요. 뉴욕 식물원은 약초를 연구하려 아마존에도 베이스캠프를 두고 있죠.” 생태정원도 감각적 아름다움을 넘어 도시 속 생명 공존 방법으로 봐야 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자신의 서식지를 파괴하는 인간이 멸종위기종 1순위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생명과 공존하는 환경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 아닐까요?”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여리여리한 몸매에 싱그러운 미소, 부드러운 곱슬머리를 휘날리는 그를 향해 수많은 팬들이 절박하게 손을 뻗었다. 어떤 이들은 그를 가까이서 보려고 전날 밤부터 노숙하며 대기 줄을 형성했다. 이달 초 부산국제영화제, 미국 남자 배우 티모테 샬라메가 참여한 신작 ‘더 킹: 헨리 5세’의 야외 무대 인사 현장 풍경이다. 야성적으로 넘겨 붙인 옆머리,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지미 헨드릭스처럼 전기기타를 후려갈기는 그를 향해 수많은 팬들이 환호를 질렀다. 여자 보컬 겸 기타 황소윤이 이끄는 밴드 ‘새소년’의 지난달 야외 음악 페스티벌 출연 장면이다. 터질 듯한 상체 근육을 뽐내며 무대를 부술 듯 뛰어다니던 남자 가수, 공주 드레스를 입고 수줍게 웃는 여자 배우에게 이성 팬들의 헌신적 팬덤이 모이던 시대는 갔다. 예쁜 남자, 멋진 여자에 대한 열광. 아름다움과 매력의 관념에 관한 성별 차이의 붕괴…. 이른바 ‘노 젠더 팬덤’의 탄생이 이어지고 있다.○ 중성 바비인형의 탄생… 젠더에 유연한 Z세대 성별과 성적 매력에 관한 고정관념을 전복하는 물결은 지상파 방송에까지 다다랐다. 최근 방영 중인 KBS2 드라마 ‘조선로코―녹두전’. 여장남자 캐릭터로 화제다. 과부촌에 여장을 하고 잠입한 ‘전녹두’(장동윤)와 기생이 되기 싫은 ‘동동주’(김소현)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남자 배우 장동윤은 여자 배우 김소현과 미모 대결을 벌일 정도의 화사한 여장으로 화제를 모은다. 서두에 언급한 샬라메는 2017년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나이 많은 남성과 사랑에 빠지는 열연을 선보인 뒤 강력한 팬덤을 구축했다. 이런 현상은 전 세계 ‘Z세대’(1995년 이후 태어난 세대)에서 젠더 통념이 무너지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 유명 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가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지난해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Z세대 세 명 중 한 명은 중성적 인칭대명사에 친숙하다. 이들은 정치적 성향처럼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속성으로 젠더를 본다. 열 명 중 여섯은 각종 양식의 성별란에 ‘남성’과 ‘여성’ 이외의 선택지를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흐름을 포착한 미국의 바비인형 제작사 ‘마텔’은 지난달 ‘중성 바비인형’을 처음 출시했다. 여성 캐릭터 ‘바비’, 남성 캐릭터 ‘켄’의 이분법은 깨졌다. 중성 바비인형은 성별에 관계없이 다양한 헤어스타일과 패션을 아이들이 취향대로 고르도록 만들었다. 패션에서도 ‘논 바이너리’(이분법을 거부하는), ‘젠더-플루이드’(성별이 유연한)가 트렌드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남자 배우 빌리 포터가 드레스 형태의 가운을 입고 레드 카펫에 올랐다. 가수 셀린 디옹은 지난해 성별 구분이 없는 아동복 라인을 출시했다.○ “남녀는 아웃오브안중… 한 인간의 예쁨과 멋짐에 반할 뿐” 영화 ‘신비한 동물 사전’ ‘저스티스 리그’로 이름난 미국 남자 배우 에즈라 밀러는 여장의 선두 주자다. 레드카펫마다 화제를 뿌렸다. 그가 이끄는 밴드 ‘선스 오브 언 일러스트리어스 파더’는 음악 정체성을 ‘장르 퀴어’로 소개한다. 4월 1만 석 규모의 체조경기장 공연을 매진시킨 호주 팝스타 트로이 시반은 성소수자로서 뮤직비디오나 무대에서 셔츠 아래로 앙상한 쇄골을 드러내며 매력을 뽐낸다. 공연 예매 사이트 ‘예스24’에 따르면 시반의 4월 공연 예매자 중 여성이 89.3%였다. 밀러가 속한 ‘선스…’의 5월 내한공연은 예매자의 94.2%가 여성. 시반과 샬라메를 좋아한다는 30대 직장인 김지민 씨는 “성별을 떠나 그들이 인간 자체로서 가진 멋짐, 예쁨, 매력에 빠졌다”고 말했다. 지난달 엠넷 ‘퀸덤’에서 여성 그룹 AOA는 남성복과 단화 차림으로 등장한 뒤 후반부에 긴 머리와 하이힐이 돋보이는 남성 댄서들을 출연시키는 식으로 마마무의 ‘너나해’를 변주해 화제를 모았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동아방송대 교수)는 “크로스 섹슈얼리티는 몇 년 전만 해도 ‘아기 같은 인상의 근육질 남성’이나 ‘터프한 걸크러시 여성’처럼 남녀 매력 요소가 조금씩 섞인 절충적 형태로 나타났다. 하지만 미투운동 이후 여성주의가 강하게 대두하며 최근엔 급속히 극단화하는 추세다. 이런 경향은 당분간 지속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임희윤 imi@donga.com·김민 기자}

여리여리한 몸매에 싱그러운 미소, 부드러운 곱슬머리를 휘날리는 그를 향해 수많은 팬들이 절박하게 손을 뻗었다. 어떤 이들은 그를 가까이서 보려고 전날 밤부터 노숙하며 대기 줄을 형성했다. 이달 초 부산국제영화제, 미국 남자 배우 티모시 샬라메가 참여한 신작 ‘더 킹: 헨리 5세’의 야외 무대 인사 현장 풍경이다. 야성적으로 넘겨 붙인 옆머리,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지미 헨드릭스처럼 전기기타를 후려갈기는 그를 향해 수많은 팬들이 환호를 질렀다. 여자 보컬 겸 기타 황소윤이 이끄는 밴드 ‘새소년’의 지난달 야외 음악 페스티벌 출연 장면이다. 터질 듯한 상체 근육을 뽐내며 무대를 부술 듯 뛰어다니던 남자 가수, 공주 드레스를 입고 수줍게 웃는 여자 배우에게 이성 팬들의 헌신적 팬덤이 모이던 시대는 갔다. 예쁜 남자, 멋진 여자에 대한 열광. 아름다움과 매력의 관념에 관한 성별 차이의 붕괴…. 이른바 ‘노 젠더 팬덤’의 탄생이 이어지고 있다.●중성 바비인형의 탄생… 젠더에 유연한 Z세대 성별과 성적 매력에 관한 고정관념을 전복하는 물결은 지상파 방송에까지 다다랐다. 최근 방영 중인 KBS2 드라마 ‘조선로코-녹두전’. 여장남자 캐릭터로 화제다. 과부촌에 여장을 하고 잠입한 ‘전녹두’(장동윤)와 기생이 되기 싫은 ‘동동주’(김소현)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남자 배우 장동윤은 여자 배우 김소현과 미모 대결을 벌일 정도의 화사한 여장으로 화제를 모은다. 서두에 언급한 샬라메는 2017년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나이 많은 남성과 사랑에 빠지는 열연을 선보인 뒤 강력한 팬덤을 구축했다. 이런 현상은 전 세계 ‘Z세대’(1995년 이후 태어난 세대)에서 젠더 통념이 무너지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 유명 조사 기관 ‘퓨 리서치 센터’가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지난해 설문 조사에 따르면, Z세대 세 명 중 한 명은 중성적 인칭대명사에 친숙하다. 이들은 정치적 성향처럼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속성으로 젠더를 본다. 열 명 중 여섯은 각종 양식의 성별란에 ‘남성’과 ‘여성’ 이외의 선택지를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흐름을 포착한 미국의 바비 인형 제작사 ‘마텔’은 지난달 ‘중성 바비인형’을 처음 출시했다. 여성 캐릭터 ‘바비’, 남성 캐릭터 ‘켄’의 이분법은 깨졌다. 중성 바비인형은 성별에 관계없이 다양한 헤어 스타일과 패션을 아이들이 취향대로 고르도록 만들었다. 패션에서도 ‘논 바이너리’(이분법을 거부하는), ‘젠더-플루이드’(성별이 유연한)가 트렌드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남자 배우 빌리 포터가 드레스 형태의 가운을 입고 레드 카펫에 올랐다. 가수 셀린 디옹은 지난해 성별 구분이 없는 아동복 라인을 출시했다.●“남녀는 아웃오브안중… 한 인간의 예쁨과 멋짐에 반할 뿐” 영화 ‘신비한 동물 사전’ ‘저스티스 리그’로 이름난 미국 남자 배우 에즈라 밀러는 여장의 선두 주자다. 레드카펫마다 화제를 뿌렸다. 그가 이끄는 밴드 ‘선즈 오브 언 일러스트리어스 파더’는 음악 정체성을 ‘장르 퀴어’로 소개한다. 4월 1만석 규모의 체조경기장 공연을 매진시킨 호주 팝스타 트로이 시반은 성소수자로서 뮤직비디오나 무대에서 셔츠 아래로 앙상한 쇄골을 드러내며 매력을 뽐낸다. 공연 예매 사이트 ‘예스24’에 따르면, 시반의 4월 공연 예매자 중 여성이 89.3%였다. 밀러가 속한 ‘선즈…’의 5월 내한공연은 예매자의 94.2%가 여성. 시반과 샬라메를 좋아한다는 30대 직장인 김지민 씨는 “성별을 떠나 그들이 인간 자체로서 가진 멋짐, 예쁨, 매력에 빠졌다”고 말했다. 지난달 엠넷 ‘퀸덤’에서 여성 그룹 AOA는 남성복과 단화 차림으로 등장한 뒤 후반부에 긴 머리와 하이힐이 돋보이는 남성 댄서들을 출연시키는 식으로 마마무의 ‘너나해’를 변주해 화제를 모았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동아방송대 교수)는 “크로스 섹슈얼리티는 몇 년 전만 해도 ‘아기 같은 인상의 근육질 남성’이나 ‘터프한 걸크러시 여성’처럼 남녀 매력 요소가 조금씩 섞인 절충적 형태로 나타났다. 하지만 미투운동 이후 여성주의가 강하게 대두하며 최근엔 급속히 극단화하는 추세다. 이런 경향은 당분간 지속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영국의 유전역학 교수이자 전 세계 논문 인용 상위 1%의 과학자. 화려한 타이틀의 주인공인 저자는 이탈리아에 있는 해발 3100m 보르미오 산정에 오르려다 뇌졸중을 겪는다. 건강한 중년 남성에서 2주 만에 환자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재점검의 시간, 약을 줄이고 건강해질 확률을 높이는 음식을 탐구한 과학자는 수많은 엉터리 식이요법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전문가의 관점에서 식단을 분석하기로 했다. 음식에 관한 각종 영양소로 분류된 19개 챕터를 통해 식이요법의 기본인 영양학부터 다룬다. 식품산업계의 검증되지 않은 홍보와 유사과학의 이면도 지적한다. 체중 감량만을 위해 몸에 꼭 필요한 영양소를 배제하는 ‘환원주의적 사고’를 꼬집고, “모든 신선한 과일과 채소는 사실상 슈퍼 푸드”라며 마케팅의 허점을 짚어주기도 한다. 결론은 자연 식품의 구성 성분과 장내 미생물의 상호 작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 저자는 장내 미생물에 관한 저술, 블로그, 미디어 활동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과학 저술의 본보기’라는 찬사와 함께 2015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올해의 책으로 선정됐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김지아나 작가가 벨기에 보고시앙 재단의 후원을 받아 브뤼셀 아트로프트 갤러리에서 개인전 ‘흙의 연금술사’를 열고 있다. 보고시앙 재단은 레바논 출신의 아르메니아 보석상이었던 로베르 보고시앙과 그의 아들 장, 알베르가 설립해 지역정부와 협력하며 미술교육, 전시 및 작가 후원과 작업 공간 지원을 하고 있다. 도예를 기반으로 가전제품 디자인 협업 등의 작업을 해온 김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흙을 재료로 한 회화, 설치 작품 연작을 선보였다. 흙이 생명과 소멸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고, 이를 소재로 삶 속에서 사회적 관계에 관한 해석을 시도했다. 설치 작품 ‘기억을 담은 순간’은 구(球) 형태의 자기(포슬린 볼)를 벽면과 천장에 매달았다. 불안하고 가녀린 심성을 의미하는 얇은 도자기 조각과 그 조각에 담긴 빛이 서로 어우러져 커다란 형상을 만든다. 전시장에는 검은색과 흰색의 ‘포슬린 볼’이 대조를 이루며 설치됐다. 김 작가는 미국 파슨스 디자인스쿨을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흙이 지닌 조형적 가능성에 매료돼 흙과 빛으로부터 받은 영감을 작품에 표현하려는 시도를 꾸준히 해왔다. 아트로프트 갤러리는 한국인 이민영 큐레이터와 길 바우웬스가 2012년에 설립했다. 한국 작가를 유럽에 소개하는 전시를 여러 차례 개최했다. 전광영, 윤성필, 남궁환, 김준, 심문필, 정윤경, 김구림, 민성홍, 남춘모 작가도 이곳에서 전시를 했다. 16일부터 20일까지 열린 프랑스의 아트페어 ‘아시아나우 파리’에서 김지아나 작가의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김 작가의 전시는 다음 달 9일까지 열린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경기 안양시 평촌중앙공원에 거대한 ‘공기정화탑’이 생겼다. 네덜란드 출신 디자이너 단 로세하르더의 ‘스모그 프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설치된 7m 높이의 탑이다. 로세하르더의 ‘스모그 프리 프로젝트’는 정부, 학교, 청정 기술 산업과 협력해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도심의 스모그를 없앨 방법에 대해 고민해 보자는 취지로 출발했다. 그중 하나가 거대한 공기청정기를 공공장소에 설치하는 ‘스모그 프리 타워’다. 이 타워가 네덜란드와 중국을 거쳐 한국을 찾은 것은, 17일 개막한 제6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6) 때문이다. 공공예술을 주제로 하는 국제 트리엔날레인 APAP는 올해 ‘공생도시’를 주제로 7개국 47팀의 작가를 초청해 공공장소에서 100여 점의 작품과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전시는 크게 ‘안양’ ‘함께하는’ ‘미래도시’의 3개 주제로 나뉘어 열린다. ‘안양’은 ‘지상낙원’을 뜻하는 지명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품과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안양예술공원 내 상가와 지역 작가 프로젝트, 시민 참여 프로그램이 여기에 해당된다. 조르주 루스 작가의 ‘삶’ 글씨가 착시 효과를 일으키는 작품은 ‘함께하는’ 섹션에서 볼 수 있다. 소통과 교감을 전하는 싱가포르 리원 작가의 둥근 탁구대, ‘핑퐁 고 라운드 프로젝트’도 안양예술공원 벽천광장 에어돔 내부에 전시된다. 로세하르더의 ‘스모그 프리 타워’는 ‘미래도시’ 섹션에 포함됐다. 국내외 작가들이 참여해 ‘공생도시’ 주제를 해석한 전시 ‘내일보다 나은’이 안양 파빌리온 내부에서 열리며, 공공미술의 의미를 돌아보는 국제심포지엄이 26일 안양 블루몬테에서 열린다. 전시는 12월 15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가톨릭 사제이자 화가인 김태원 신부(67)가 다음 달 13∼19일 서울 강남구 갤러리원에서 ‘15번째 전시회’를 연다. 이번 전시는 1979년부터 시작된 40년의 화업을 정리하는 의미의 회고전이다. 파리 유학 시절 그렸던 드로잉과 동판화, 1995년부터의 유화, 2006년부터 그려 온 옻칠 그림 등 작품 100여 점을 선보인다. 전시 작품 중 ‘인간의 한계 1, 2’는 어떤 때는 꽃이 되고 어떤 때는 다투기도 하는 세상사를 담았다. “때로는 화를 분출하고, 또 다른 때는 선함을 분출하는 인간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붉은 흔적을 보고 피를 연상하더군요. 그렇게 보일 순 있겠지만 피를 형상화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인간이 생각하고 뿜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김 신부는 1979년 프랑스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그림을 접했다. 어릴 때도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자연스럽게 빠져들었다. “신부라고 그림을 그리지 말란 법이 있나요. 신학 공부를 하면서도 길거리의 그림이 자꾸 눈에 들어 왔어요. 그러다 파리국립미술학교에 다녔죠.” 옻칠 그림은 강원 원주에 정착하고 시작됐다. 1995년 원주 풍수원 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하며 방문한 장익 주교로부터 옻칠을 알게 됐다. 무형문화재 12호 김상수 장인과 부산 신라대 권상오 교수가 저술한 책 등을 보면서 기법을 알아 나갔다. 그는 건조한 은행나무 위에 삼베, 참숯가루, 황토를 일정한 비율에 맞춰 바탕을 만든다. 이 위에 안료 가루를 붙이는 ‘건칠분’ 그림을 그린다. 이런 방식의 작업을 하면 작품이 오래 유지될 수 있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선 ‘내 방 안에 있는 범고래’와 ‘내 방 안에 있는 상어’도 선보입니다. 양면으로 볼 수 있는 작품인데, 원래는 제 방 수족관에 넣어 전시했던 것이죠. 그만큼 옻칠 회화는 내구성이 뛰어납니다.” 신부이자 화가로 살아 온 그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했다. “생명 존중, 인류애가 저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주제입니다. 그런 사랑을 전하려고 그림도 이젠 애착을 갖지 않고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살리에리는 정말 모차르트를 죽였을까?’ 모차르트 독살설을 공식적으로 제기한 것은 러시아 문호 푸시킨의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다. 그런데 이에 관한 루머는 모차르트의 사망 직후 빈 음악계에 풍문으로 떠돌았다고 한다. 로시니도 살리에리를 만난 자리에서 반농담으로 ‘이 소문’을 언급했다. 루머에 스트레스와 시달림을 받은 살리에리는 죽기 2년 전 치매로 요양소에 실려가 ‘내가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혼잣말도 했다. 그런데 모차르트의 편지를 살펴보면 이야기는 다르다. 모차르트가 ‘황제의 눈에 든 인물은 살리에리뿐’이라고 불평을 늘어놓거나 질투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오히려 살리에리는 1788년 궁정 카펠마이스터로 임명된 뒤, 자신의 곡이 아닌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무대에 올렸다. 관계가 좋아진 두 사람은 공동으로 칸타타를 작곡하기도 했다. 어쩌면 ‘모차르트 독살설’은 너무 이른 나이에 떠난 천재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사람들이 만들어낸 상상일지 모른다. 책은 차이콥스키의 음악적 유서로서의 ‘비창’, 말러가 죽고 난 뒤 그의 삶을 왜곡했던 아내 알마의 모습 등 서양 음악사의 뒷이야기를 파헤친다. 클래식 음악 담당 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해 온 저자가 일반적 개설서에서는 만날 수 없는 20개의 화제를 엄선했다. 눈 밝은 클래식 팬이라면 알 법한 이야기라도 새롭게 들여다보려고 했다. ‘예술은 어렵다’는 막연한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극 권하고 싶은 책이다. ‘성전’처럼 지어진 콘서트홀에서 만나는 음악이 때로는 박제된 성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책은 그 음악 속에 담긴 시공간을 넓게 펼쳐 보여준다. 그 속의 소소하지만, 그래서 더 중요한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클래식 음악 또한 인간의 사소한 일상에서 출발했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곰국처럼 깊은 정보를 반듯하고 정갈하게 차려낸 문장도 매력이 넘친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2014년 ‘러버덕’으로 화제를 모은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에 이번엔 우주 몬스터들이 등장했다. 3일부터 시작한 ‘루나 프로젝트’는 디자이너 그룹인 ‘스티키몬스터랩(SML)’과 협업한 공공미술 프로젝트다. 러버덕 프로젝트 이후 석촌호수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국내 작가가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최고 높이 16m의 초대형 풍선 작품을 포함해 7개의 우주 몬스터가 호수에 띄워졌다. 달 착륙 50주년을 기념한 캐릭터들은 아폴로 10호와 우주 행성의 모습을 단순하고 귀엽게 구성했다. 양말 한쪽을 벗어 던지고 쪼그리고 앉아 있는 푸른색 캐릭터는 ‘지구몬’, 옆의 보라색 동그란 캐릭터는 달, ‘루나몬’이다. 아폴로 10호를 표현한 ‘솔라몬’ 위에는 만화 ‘피너츠’에 등장하는 유명 캐릭터 스누피와 찰리 브라운이 타고 있다. 스누피는 재활용 플라스틱 섬유를 이용해 제작했다. 루나 프로젝트는 27일까지 이어진다. 루나 프로젝트의 스누피는 17일 개막하는 서울 송파구 롯데뮤지엄의 ‘To the Moon with Snoopy’로 이어진다. 스누피를 매개로 우주를 돌아보는 전시다. 출발점은 미국 ‘찰스 엠 슐츠 뮤지엄’에서 열린 특별 전시 ‘To the Moon: Snoopy Soars with NASA’. 스누피 탄생 70주년과 달 착륙 50주년을 기념한 전시다. 특히 1968년 시작한 ‘우주비행사, 스누피’ 프로그램과 스누피가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안전 마스코트’가 된 과정이 눈길을 끈다. ‘우주비행사, 스누피’는 1967년 우주비행사 3명의 목숨을 앗아간 아폴로 1호의 비극적 화재로 시작됐다. 이 사건이 미국의 우주 계획과 직원들의 사기에 엄청난 타격을 주자, 공보실에서 대중에게 친숙한 스누피를 ‘안전 마스코트’로 채택해 위기를 타개하려 한 것. 이 과정에 관한 자료를 전시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찰스 엠 슐츠 뮤지엄의 특별전을 볼 수 있는 첫 전시 공간을 지나면 현대 미술가와 디자이너들이 참여해 스누피를 표현한 작품들을 전시했다. 세계적인 드로잉 아티스트 김정기가 스누피의 달 착륙 순간을 표현한 ‘무제’도 공개한다. 전시는 내년 3월 1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백남준은 미디어아트의 선구자로 알려졌지만, 국경을 넘나든 그의 행적은 충분히 조명되지 않았다. 전시는 이러한 백남준의 ‘탈국가’적인 면모를 부각한다.” 17일(현지 시간)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미술관에서 ‘백남준’전이 개막한다. 프랜시스 모리스 테이트모던 관장은 도록에서 전시를 이렇게 소개했다. 그는 또한 “백남준은 문화권을 초월하는 협력을 중요시 여긴 유목민적 연결자”라고 덧붙였다. 테이트모던은 영국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미술관으로 지난해에만 590만 명이 방문했다. 이곳에서 한국 출신 예술가가 대규모로 조명되는 것은 처음이다. ‘백남준’전은 그의 초기부터 말기까지 주요 작품과 기록 200여 점을 소개한다. 사전 입수한 도록과 이숙경 테이트 시니어 큐레이터(50)와의 인터뷰 등을 바탕으로 전시 내용을 살펴봤다. 》○ ‘국제인’ 백남준의 연대기 이번 전시는 테이트모던에서 주로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하는 ‘에얄 오퍼 갤러리’에서 열린다. 넓은 전시장은 총 12개의 섹션으로 나눠졌다. 섹션은 순서대로 ‘소개’, ‘TV정원’, ‘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백남준 첫 개인전), ‘실험’, ‘존 케이지와 머스 커닝햄’, ‘자아성찰’, ‘전파(Transmission)’, ‘플럭서스(fluxus·백남준이 참여한 전위예술운동)’, ‘샬럿 무어먼’, ‘요제프 보이스’, ‘촛불 하나’, ‘시스틴 채플’로 나뉘어졌다. 처음 세 방은 백남준의 대표작과 초기 활동을 짚었다면, 중간부터는 연대기와 상관없이 주요 키워드를 중심으로 구성했다. 특히 존 케이지, 샬럿 무어먼, 요제프 보이스 등 백남준이 협업한 작가들도 비중 있게 다뤘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숙경 큐레이터는 협업에 집중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백남준은 한국인으로 태어나 일본으로 망명하고, 그 뒤에는 독일로 유학을 갔으며 미국에서도 활동했다. 그는 항상 네 국가의 미술계와 밀접한 연계를 갖고 활동했다. 예술가로서 아시아와 유럽, 미주를 연결한 셈이다. 백남준은 국경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예술로 보여줬다.”○ 재현 과정만 1년이 걸리기도 백남준의 50여 년에 걸친 활동을 망라해 전시에선 그간 쉽게 볼 수 없었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세 번째 섹션 ‘Exposition…’은 1963년 백남준이 독일 부퍼탈(Wuppertal)에서 열었던 첫 개인전을 재현했다. 갤러리 3개 층을 가득 채웠던 이 전시는 초창기 백남준의 야심만만함을 보여준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이던 ‘관객 참여’ 작품도 만날 수 있다. 이 큐레이터는 “아주 어렵게 빌려온 작품”으로 ‘로봇-K456’(1964년)을 꼽았다. 백남준이 최초로 만든 로봇 형태의 작품이다. 후기에는 영상을 보여주는 로봇 형태의 작품이 많았는데, 이 작품은 백남준의 ‘대리인’처럼 조종하면 움직이며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1961년 독일 비스바덴에서 했던 유명한 퍼포먼스 ‘머리를 위한 명상(Zen for Head)’의 결과물도 전시한다. 플럭서스 페스티벌에 참가했던 백남준은 자신의 손과 머리카락에 물감을 묻히고, 몸으로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작품은 그 퍼포먼스의 흔적을 담고 있다. 하이라이트는 재현 과정에만 1년이 걸린 ‘시스틴 채플’(1993년)이다. 그해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 작가로 참가해 선보이고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25년 만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작품은 34대의 프로젝터로 벽면과 천장에 영상을 투사한다. 영상 속에는 존 케이지, 데이비드 보위, 재니스 조플린이 등장한다. 베니스에서 함께 전시했던 ‘몽골리안 텐트’도 눈여겨볼 만하다. 몽골족이 사용하는 텐트를 구매해 그 속에 TV부처와 자신의 얼굴을 본뜬 브론즈 가면을 놓아둔 설치 작품이다. 한민족은 물론 유럽과 아시아의 연결을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이 큐레이터는 “국가주의가 세계 곳곳에 등장하는 우려스러운 상황에서, 기술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자 했던 백남준의 철학이 중요한 접점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테이트모던과 미국 샌프란시스코현대미술관이 공동 기획한 ‘백남준’전은 내년 2월 9일까지 열린다. 그 다음엔 미국과 네덜란드, 싱가포르에서 순회전시를 개최할 예정이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7일부터 열리는 영국 테이트모던 미술관의 ‘백남준’ 전은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독일관 대표 작가로 참가한 백남준의 작품을 25년 만에 처음으로 재현해 선보인다. 당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고 귀국한 백남준의 기고가 같은 해 9월 26일자 동아일보 ‘나의 길’ 코너에 게재됐다. 이 글에서 백남준은 “비디오예술이란 예술이 고급화되던 당시 정서에 반해 만인이 즐겨보는 대중매체를 예술형식으로 선택한 예술깡패”라고 자신의 예술을 소개했다. 또 자신이 황금사자상을 받게 된 것에 대해서는 “유네스코에서 주는 피카소상도 타보았고 독일정부의 카이저상도 타보았는데 모두 특별상이었다. 특별상이란 조선 사람에게 대상을 주기 아까우니 이름으로 때우는 경우”라며 “독일정부에 의해 천거된 한국인이어서 대상을 받게 된 것이 진기하다”고도 말했다. 자신의 배경에 관한 솔직한 이야기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나의 조부가 섬유회사 경영자로 별로 돈 걱정을 안하던 사람이지만 예술가 노릇을 하며 넉넉했던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일제하 학창시절에 마르크스주의자로 분배의 정의 없이는 의를 실현할 수 없다는 생각을 치열하게 했고, 그것이 냄새나는 예술을 거부하게 만든 힘”이라고 털어 놓는다. 또 “존 케이지가 완전 성공하기 전에, 요셉 보이스가 거의 무명시절이 만나 놓은 것이 내 인생의 행운”이라고도 언급했다. 테이트모던 전시가 조명한 ‘국제인’으로서의 면모도 엿볼 수 있다. 백남준은 “외국에 살면서 조국에 애국하면 망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며 “외국에 살려면 그 나라에 적극 도전해 그들과 싸우고, 그래서 그들보다 우수하게 되었을 때 조국에 대한 애국이 저절로 성취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 예술계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일본인은 개미처럼 집단으로 열심히 일하지만 한국인은 모래처럼 흩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한국인이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은 국수주의적 발상이나 적어도 예술분야는 개미보다 독립적인 모래알이 낫다. 나는 그래서 한국예술계의 앞날을 낙관한다.”아래는 백남준이 기고한 “재미없으면 예술이 아니다”의 전문이다. “재미없으면 예술이 아니다” (백남준. 1993년 9월 26일 동아일보 기고) 84년 정월, 그 해가 되면 세상이 망하게 될 거라는 예언을 남긴 조지 오웰에게 한바탕 야유를 보내고 오랜만에 고국에 들렀다. 1950년 7월에 한국을 떠나 34년만에 처음 공식적으로 한국에오는 길이었으니 감회도 깊었으려니와 ‘굿모닝 미스터오웰’로 내 이름이 한껏 알려진 터라 무슨 금의환향이나 하듯 공항에서부터 법석을 떨었다. 공항에서 어느 기자가 내게 “예술이 뭐냐”고 물었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술이나 한잔 마시고 푸념조로 넋두리하듯 예술가들끼리 하는 질문이지만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예술은 사기야” 다음날 한국의 굵직한 신문들이 모두 큰제목으로 白南準(백남준) 왈 “예술은 사기다”라고 대서특필했다. 예술을 사기로 몰아붙인 것 같아 내심 가슴도 아팠으나 예술이 사기란 말은 내가 개발한 꽤 괜찮은 반어법 중 하나라서 웃고 지나갔다. 그로부터 또 10년이 지났는데 아직 내게 이 말에 대하여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래도 예술은 정말 사기이거나 아니면 정반대인 모양이다. 예삿일이 아니다. 나는 자서전을 쓸만한 위인도 아니고 또 그럴 나이도 아니며 앞으로 배울 것이 무궁무진하니 너절한 얘기는 안 하는게 상책인 것 같다. 다만 몇 가지 생각나는 일만 그림 그리듯 써놓고 독자들은 그것을 비디오 보듯 봐주면 그만이다. 내가 획책하는 예술이란 늘 관람객이 즐기고 잘 봐주면 족한 것이니…. 내 일생은 태어나서 열여덟까지 한국에서 산 것을 제외하고는 늘 외지 생활이다. 그것이 팔자소관 아니고는 나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일본에서 7년, 독일에서 7년, 미국에서 29년, 모두 43년간 외국생활이다. 그러나 나는 한번도 외지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으나 다만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생각은 떠나지 않는다. 나는 간혹 한국에 갈 때면 옛 동창생들을 만난다. 白寅洙(백인수) 廉普鉉(렴보현) 崔景漢(최경한) 朴漢洙(박한수), 徐載雄(서재웅)등 코흘리개 친구들이다. 이 친구들은 대개 경기보통중학 동창생들인데 옛날에는 서로 시간이 없어 못 만났지만 이제는 목소리만 들어도 반갑다. 6·25 직전에 이들과 보낸 시간이지금도 머리에 선하지만 요즘 만나면 모두 환갑이 넘어 세월이 무상함을 느낀다. 모두가 묘자리를 봐둬야 할 나이다.나는 86년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나도 이제 쉰에서 다섯이 넘었으니 차차 죽는 연습을 해야겠다. 예전 어른이면 地官(지관)을 데리고 이상적인 묘자리를 찾아다닐 나이가 됐으나 나는 돈도 없고 요새는 땅값도 비싸졌으니 그런 국토 낭비 계획은 없애고 오붓하게 죽는 재미를 만드는 것이 상책이다. 내 인생의 행운은 존 케이지가 완전 성공하기 전에, 조셉 보이스가 거의 무명시절에 만나 놓은 것이다” 나의 조부께선 國喪(국상)이 났을 때 만조백관의 상복을 마련하던 섬유회사 경영자였으며 선친은 태창방직 설립자였으니 나는 꽤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별로 돈 걱정을 안 하던 사람이다. 그러나 정작 예술가 노릇을 하면서부터는 넉넉했던 적이 없다. 일제하 학창시절에는 마르크스주의자이기도 했었고 분배의 정의 없이는 義(의)를 실현할 수 없다는 생각이 매우 치열하게 다가왔었다. 이 생각은 내 예술가로서의 전체 노정에 크게 작용했으며 냄새나는 예술을 거부하게 만든 힘이기도 했다. 그래서 예술은 이 냄새의 종류를 어떻게 조정하느냐가 관건이며 그에 따라 사기도 되고 혹여 진실도 되는게 아닐까. 1963년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화랑에서 비디오예술의 첫 탄생을 알리는 전시회를 가질 때 나는 가진 돈 모두를 TV 13대를 사는데 탕진했다. 집에서 마지막 송금해온 돈을 다 써버린 셈이었다. 존 케이지는 50년대 말 독일 다름슈타트의 국제하계음악페스티벌에서 처음 만났지만 독일의 영웅 조셉 보이스는 비디오 예술 첫 탄생일에 직접 내방하여예기치 않았던 퍼포먼스까지 해주었다. 그 친구는 내가 애지중지하던 이바흐(IBACH)피아노를 때려 부숴버리는 퍼포먼스를 해줌으로 해서 내 인생에 끼어들었다. 비디오예술이란 예술이 고급화되던 당시의 정서에 반하여 만인이 즐겨보는 TV라는 대중매체를 예술형식으로 선택한 일종의 예술깡패였다. 그 안에는 동양사상이나 한국의 고유한 이야기 등도 내포되어 있었지만 서양인에게는 독특한 것으로만 보일뿐 눈치 채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기존미술에 대한 항거, 예술의 대중성회복이란 때 이른 목표를 내걸었던 내게는 당시「동양에서 온 문화테러리스트」라는 딱지만 붙었었다. 내가 미국에 정착하게 된 것은 실은 의외적인 것이다.1964년 일본에서 로봇과 비디오연구에 근1년을 보내고 다시 독일로 돌아가는 길에 미국을 구경삼아 들렀다. 뉴욕에 처음 도착했을때 거리는 몸서리쳐지게 지저분했고 이런 곳에서 어떻게 팝아트가 나왔으며 부자나라 소리를 듣는가 의아했다. 당시 뉴욕에서는 뉴욕아방가르드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었으며 나는 샬럿 무어맨이란 여자에게 걸려들어 이 페스티벌에 참가하게 되었다. 내가 참가했던 퍼포먼스는 이미 독일에서 했던 것이었고 뉴욕 리바이벌은 독일에서 했던「동양인 출신의괴짜역」이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샬럿 무어맨과는 그가 저세상으로 가기 전까지 예술적 동지애를 유지하게 되었다. 미국정착은 이러저러한 일이 생기고 슬슬 재미가 붙어 눌러앉은 것이 30년이 다 되었다. 인생이란 앞일을 모르기 때문에 재미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퍼포먼스를 통해 수대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때려 부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은 서양은 물론 동양에서조차 음악의 상징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며 음악의 한계를 그것으로 고정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또 TV를 통해 재미만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부처의 모습과달, 물고기, 컴퓨터그래픽 등을 넣어 재미를 방해했다. 나는 매스미디어가 독재자의 수중에 장악되어 민중의 눈을 가려 세상이 망하게될 것이라는 조지 오웰의 생각에 도전장을 냈다. 미디어는 정보를 전달해 주는 커뮤니케이션의 상징이며 그것은 정보단절의 시대에 대중의 눈을 일깨우는 이른바「전자초고속도로」라며「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만들었다. 따라서 84년 정월에 방영된 이 프로는 망하지 않고 건강하게 생존해있던 우리들이 조지 오웰에게 보내는 새해인사였다. 내가 올해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상을 받게 되었을때 한국에서 온 어느 여기자가 큰 상을 몇 번째 받느냐고 물었다. 사실 나는 유네스코에서 주는 피카소상도 타보았고 독일정부의 카이저상도 타 보았다. 그러나 이런 것은 모두 특별상이었다. 특별상이란 경우에 따라 조선 사람에게 대상을 주기 아까우니까 특별상이란 이름으로 때우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베니스 비엔날레는 독일정부에 의해 천거된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대상을 받는데 일조를 했다는 사실이 진기하다. 나는 외국에 살면서 조국에 애국하면 망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외국에 살려면 그 나라에 적극 도전하여 그들과 싸워야 한다. 그래서 그들보다 우수하게 되었을때 조국에 대한 애국은 저절로 성취된다. 참다운 민족주의는 드러내지 않는데 있으며 참다운 민족주의가 생명을 갖기 위해서는 더욱 더 활발한 해외교류가 이루어져야한다. 국수주의가 횡행하는 곳에는 문화와 삶의 다양성이 없고 진취적 지식인들을 살인하게 된다. 사대주의는 망국병이지만 국수주의도 이에 못지않다. 일본인들은 개미처럼 집단으로 열심히 일하고 여행도 개미처럼 집단으로 한다. 한국인은 모래처럼 흩어져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일본인은 실수를 저질러도 집단으로 저지르며 한국인은 모래알 하나가 저지른다. 17년 전 결혼한 나의 아내는 일본인이니 우리 집안의 실수는 절충식인 셈이다. 그렇다고 한국인이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은 국수주의적 발상이나 적어도 예술분야는 개미보다 독립적인 모래알이 낫다. 나는 그래서 한국예술계의 앞날을 낙관하는 사람이다. 예술 한답시고 건강은 돌보지 못한 덕에 오래전부터 당뇨에 시달리고 산다. 나는 내가 쓰러져 못 쓰게 되면 네덜란드로 보내달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네덜란드는 안락사를 허락하는 곳이니까. 이제 광케이블 시대가 오면 예술도 한층 다양해지리라. 나의 미래작업은 광케이블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의 확장, 삶과 예술과 과학이 더 이상 은유가 아닌 실재의 정보로 다가오는 삶의 예술로 가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광케이블에 의한 정보시대를 역설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은 나의아이디어를 훔쳤다. 아마도 나는 다시 태어나면 예술보다 물리학에 더 관심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게는 감상적인 추억보다 오늘하루의 일이 더 바쁘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혁신적’, ‘선구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국제적 예술가 백남준(1932~2006)의 회고전이 17일(현지시간) 영국 테이트모던 미술관에서 열린다. 테이트모던과 미국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이 공동기획한 전시는 백남준의 작품 200여 점을 소개하는 대규모 전시다. 영국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장소로 꼽히는 테이트모던(지난해 관객 590만 명)에서 한국 출신의 예술가가 집중 조명되는 것은 처음이다. 전시를 담당한 이숙경 박사·테이트 시니어 큐레이터(50)에게 직접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200여 점이 넘는 방대한 규모다. 어떤 구성으로 백남준을 조명했는가? “전시의 기본적인 목적은 백남준의 탈국가, 초국가적이면서 미래지향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초기 작업부터 연대기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주제별로 12개의 방으로 구성했다. 백남준의 아이디어나 그가 협업을 많이 했던 예술가들의 관계 등으로 분류됐다. 관객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방에는 TV부처(1974)와 TV정원(1974/2002)이 전시된다. 푸른 이파리 사이에 텔레비전이 놓인 대형 설치작품인 ‘TV정원’은 자연과 기술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현상을 예견한 작품이다. 그 다음에는 백남준의 첫 개인전인 ‘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의 일부를 복원한 공간이 뒤를 잇는다. 당시 선보였던 작품 상당수가 모여 한 방을 차지하고 있다. 위성 중계 프로젝트를 다룬 방도 있다. 백남준이 협업한 예술가인 샬롯 무어만,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를 다룬 방도 마련됐다.” ―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에서 선보이고 대상을 받은 ‘시스틴 채플’도 26년 만에 처음으로 재현했다. “재현하는 과정에 1년이 걸렸다. 베니스에서 백남준의 작업 보조를 했고, 지금은 백남준의 유작을 관리하는 큐레이터인 존 허프만의 조언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백남준이 당시 작업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아 사진과 증언에 의존해야 했다고 한다.) 시스틴 채플을 전시한 공간에는 빔 프로젝터 36개가 설치됐다. 프로젝터들이 벽면뿐 아니라 천정에도 영상을 투사하기 때문에, 구조물의 설계나 프로젝터의 위치 등 고려할 사항이 많았다. 1993년 당시에는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의 양쪽 날개 건물 중 하나를 완전히 채웠는데, 그곳은 층고가 굉장히 높다. 그래서 프로젝터 40개를 사용했는데, 갤러리 공간은 그보다 층고가 낮아 36개를 사용했다. 프로젝터 기술이 진화를 거듭해, 당시에는 크고 무거운 것을 설치하느라 고생했는데 이번엔 작고 가벼운 프로젝터를 사용했다. 시각적 이미지를 표출하는 데 집중해 현대적 기계를 사용했다.― 프로젝터 얘기가 흥미로운데, 백남준이 늘 기계를 사용했기 때문에 기술적 문제가 항상 발생한다. CRT 모니터를 구하는 데에도 애를 먹진 않았는지? ”작품마다 그에 맞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만약 작품의 외형적인, 조각적인 측면이 중요하다면 화면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로 그대로 전시했다. 반면 영상의 내용이 중요한 작품이라면, 작가가 남긴 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큐레이터의 선택이 필요했다. 다만 백남준도 작업마다 매번 다른 방식으로 기술적 접근을 했기에, 큐레이터로서 기술적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접근하려 했다.“― 눈여겨봐야 할 작품을 꼽는다면?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전시됐던 작품인 ‘몽골텐트’가 정말 보기 힘든 작품이다. 독일 뮌스터뮤지엄에서 대여해 온 작품으로, 몽골과 유라시아, 시베리아에 관심이 많았던 백남준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한민족은 물론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접점을 알고 싶어 했다. 작품은 1980년대 말 몽고족이 쓰는 텐트를 직접 구매해 집처럼 꾸민 형태다. 내부에 TV부처와 자신의 얼굴을 브론즈 가면으로 만든 것을 안에 놓았다. 아주 어렵게 빌려온 작품으로는 ‘로봇-K456’(1964)을 꼽을 수 있다. 백남준이 1980년대 로봇 형태의 작품을 자주 제작했는데, 이 작품은 최초의 로봇이다. 후기에는 영상을 보여주는 형태의 로봇이 많았는데, 이 때는 백남준의 ‘대리인’처럼, 그가 조종하면 움직이면서 퍼포먼스를 하는 로봇이었다. 또 하나는 1961년 백남준이 독일 비스바덴에서 했던 퍼포먼스 ‘머리를 위한 명상(Zen for Head)’의 결과물이다. 백남준이 당시 플럭서스 페스티벌에 참가해서 자신의 손과 머리카락에 물감을 묻히고 몸으로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를 했다. 그 흔적을 그대로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데, 이것 역시 최초로 공개되는 작품이다.“―2010년 테이트리버풀에서도 ‘백남준’ 전시를 연 것으로 알고 있다.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흔적을 훑어보며 백남준에 대해 느낀 바가 있다면? ”수년간 연구를 해왔지만 더욱 절실히 느낀 건 지금 시대에 백남준의 작품이 시사하는 바가 많다는 점이다. 디지털환경이 변화해 대중문화도 국가의 경계가 없어지고, 이 문화를 통해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러 국가에서 국가주의적인 경향이 등장하는 우려스러운 상황이 연출되고 있고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기술과 통신을 통해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많은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본 백남준의 철학을 이 시점에서 다시 돌아보게 됐다. 정말 서로 ‘접속’돼 있는 세계가 도래했다. 백남준은 당시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미래를 당시 미리 봤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협업’을 조명한 것이 의미심장하다.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와의 협력에 상당한 공간을 할애했다. ”백남준은 한국인으로 태어나 일본으로 망명하고, 그 뒤 독일로 유학을 가고 나서 나중엔 미국에서도 활동했다. 그러면서 네 국가들의 미술 커뮤니티와 항상 밀접한 연계를 갖고 활동했다. 예술가로서 아시아와 유럽, 미주의 커뮤니티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 셈이다. 이는 결국 백남준이 국가간의 경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예술을 통해 보여줬음을 시사한다. 테이트모던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이 찾는 미술관이다. 지난해부터는 영국의 모든 장소 중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은 곳이기도 하다. 또 미술관 관객의 절반은 국제적 방문객으로, 이곳은 영국인만의 것이 아닌 세계적인 장소다. 여기서 백남준을 이 시점에 조명하는 이유도 결국은 그가 ‘탈국가’와 ‘연결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세계가 격변하고 있는 지금 같은 시기에 백남준이 중요한 회고의 접점이 되길 바란다.“영국 테이트모던의 ‘백남준’전은 내년 2월 9일까지 열린다. 전시는 이숙경 박사·테이트 시니어 큐레이터와 루돌프 프릴링 샌프란시스코현대미술관(SFMOMA) 미디어 큐레이터, 발렌티나 라바글리아(테이트), 안드레아 니체-크루프(SFMOMA)가 큐레이트 했다. 테이트모던과 SFMOMA가 공동 기획해 미국, 네덜란드, 싱가포르에서 순회전이 열릴 예정이다. 김민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