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모

유원모 기자

동아일보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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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법조팀 유원모 기자입니다. 잘 듣고 잘 쓰겠습니다.

onemore@donga.com

취재분야

2026-05-24~2026-06-23
검찰-법원판결64%
사회일반23%
사법10%
정치일반3%
  • 손님맞이-음식장만 없지만…“온라인 집들이 합니다”

    올해 2월 경기 광주시로 이사한 구현수 씨(32) 가족은 최근 조촐한 집들이를 열었다. 으레 있을 법한 상다리가 부러질 듯한 음식과 파티용 장식품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 대신 직접 설치한 포인트 조명과 아이를 위해 특별 제작한 아치형 출입문 등을 사진으로 찍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 구 씨는 “SNS상에서 인테리어 정보를 공유했던 다른 엄마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온라인 집들이’를 열었다”며 “셀프 인테리어를 진행하는 사람들에게 ‘온라인 집들이’는 필수”라고 말했다. 집들이가 변하고 있다. 과거처럼 친구나 가족을 초대하는 방식이 아니다. 개성 넘치게 집 안을 꾸미고, 이를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 SNS나 집들이 애플리케이션(앱)에 공개한다. ‘온라인 집들이’, ‘랜선 집들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다. 집이 잠만 자는 공간이 아닌 휴식과 취미생활을 누리는 문화공간으로 부각되면서 이런 현상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매김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개성과 가성비 동시에 잡는 셀프 인테리어 DIY(Do It Yourself) 등의 도입도 한몫했다. 셀프 인테리어가 최근 1인가구의 증가와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등 최신 소비 성향과 맞물리면서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됐다. 온라인 집들이에서 시작해 최근 인테리어 쇼핑몰까지 창업한 박수혜 씨(35)는 “직접 자재를 구입하고, 작업하는 이들에게 일일이 설명해야 하니 고려해야 할 것이 많다”며 “기성 제품을 쓰는 것에 비해 많게는 3분의 1로 가격을 줄일 수 있다. 우리 가족에 딱 맞는 환경을 만들 수 있어 만족도는 몇 배로 크다”고 말했다. 집 꾸미기라고 여성만의 전유물도 아니다. 요즘은 인테리어에 관심 많은 남성들이 늘며 남성을 뜻하는 ‘멘’과 ‘인테리어’를 합친 ‘멘즈테리어’라는 용어도 생겼다. 올해 1월 서울 광진구에서 자취를 시작한 대학생 정명호 씨(25)는 20m² 규모의 원룸을 모두 셀프 인테리어로 꾸몄다. 정 씨는 “토요일에만 문을 여는 한 포스터 가게에 가서 희귀한 영화 포스터를 구하는 등 내 집에서만 볼 수 있는 인테리어를 가미했다”며 “작지만 소확행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 바로 나의 집”이라고 말했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에 따르면 2000년 9조1000억 원 수준이던 국내 인테리어 리모델링 시장 규모는 지난해 30조 원을 넘어섰다. 내년에는 41조5000억 원 수준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 같은 흐름에 맞춰 최근 가상현실(VR)과 3D 화면을 제공하는 인테리어 관련 스타트업도 속속 등장한다. 전문가들은 셀프 인테리어에 무턱대고 도전하기보다는 작은 변화부터 시도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인테리어 전문 파워블로거인 하유라 씨(43)는 “전기, 보일러, 욕실 등은 최대한 자격증을 갖춘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좋다”며 “처음부터 규모나 부피가 큰 장판이나 도배를 하기보다는 작은 소품부터 변화를 주면서 인테리어의 감각을 높여 가는 방법을 추천한다”고 말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집들이라는 사회적 의례와 규범을 전통 방식이 아닌 SNS라는 젊은 세대에게 익숙한 수단으로 치르는 새로운 사회 의례인 셈”이라며 “큰 집을 구하기 어려운 젊은 세대들이 규모 대신 인테리어를 통해 자신의 주거 자존감을 높이는 색다른 방식이라고도 볼 수 있다”고 밝혔다. ○ TV 예능에선 ‘집방’ 각광 한편 집 구하기가 갈수록 큰 고민이 되어가는 가운데 방송이 직접 ‘부동산 중개사’로 나서 조건에 맞는 집을 찾아주는 프로그램을 선보여 젊은층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MBC ‘구해줘! 홈즈’는 ‘부동산 예능’을 표방하지만 화려한 연예인들의 집을 구석구석 비춰 준다거나 리모델링으로 낡은 집을 탈바꿈시켜 주는 기존 프로그램들과 달리 소박한 집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방법을 택했다. 예산을 맞추기 위해 채광이 좋지 않은 반지하 집을 보거나, 서울과 점점 먼 위치까지 고려해야 하는 서민들의 고충을 담았다. EBS의 ‘방을 구해드립니다’는 이사만 20번 넘게 해봤다는 방송인 나르샤와 반지하부터 전망 좋은 방까지 다양한 거주 경험이 있다는 방송인 조우종이 진행자로 나선다. 자산관리 전문가들이 집을 구할 때 고려해야 할 점도 조언한다. 공희정 TV평론가는 “예능 소재로서의 ‘집’은 과거 인테리어 정도로 다뤄졌으나 최근 청년들의 고민을 담는 새로운 소재로 확장되고 있다”며 “다만 예능 프로그램인 만큼 방송에서 제공하는 부동산 정보 등은 객관적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유원모 onemore@donga.com·이서현 기자}

    • 2019-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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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베트남 전쟁 vs 미국 전쟁… 어떤 기억이 공정한가

    1000여 년간 중국의 간섭을 받았다. 근대에 들어서는 프랑스 식민지가 됐고 일본의 침략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는 독립과 함께 이념으로 인해 남북이 쪼개져 10년에 걸친 내전을 겪었다. 한국과 비슷한 운명을 겪은 베트남의 역사다. 현대사의 전개는 우리와 달랐다. 1965년부터 10년 동안 치른 내전에서 사회주의 정권인 북베트남이 승리를 거뒀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우리나라와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이라 일컫는다. 그런데 베트남에서는 ‘미국 전쟁’이라고 부른다. 전쟁을 기억하는 서로 다른 시선을 보여주는 결과다. 1971년 전쟁 중인 베트남에서 태어나 1975년 해상 난민이 되어 미국으로 이주한 저자가 베트남 전쟁을 공정하게 기억하는 방식을 소개한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USC)의 교수인 저자는 2016년 베트남 전쟁을 다룬 소설 ‘동조자’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가이기도 하다. 베트남 전쟁을 결과로만 따지면 미국의 패배였다. 하지만 전쟁 이후의 기억은 오히려 미국의 문화적인 승리로 이어졌다.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던 영화 ‘지옥의 묵시록’(1979년)을 비롯해 도서, 미술 등 문화 권력을 통해 미군의 희생과 영웅적인 면모를 부각하는 모습이 세계인의 인식에 남게 됐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5만8000명의 미군은 기억하지만 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300만여 명의 베트남인이 외면받는 이유다. 한국 역시 베트남전에 대한 올바른 역사 인식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한국 사회가 베트남전 참전으로 얻은 경제적 이윤과 희생만을 부각하고, 한국군이 저지른 일탈 범죄에 대해서는 제대로 기억하지 않는 현실을 꼬집는다. 저자는 역사를 기록할 때 무엇보다 공정한 기억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자신뿐 아니라 타자를 기억하는 윤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은 두 번 치러진다. 한 번은 전쟁터에서, 두 번째는 전쟁을 기억하는 방법을 둘러싼 다툼에서 벌어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으로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는 한국 사회에도 어떻게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지 일러주는 유용한 참고서다.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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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년 만에… 도난당한 ‘보물’ 돌아와

    25년간 절도범의 손에 넘어가 행방이 묘연했던 ‘보물’이 돌아왔다.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은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와 공조 수사 끝에 보물 제1008호 ‘만국전도(萬國全圖)’를 비롯해 양녕대군의 친필 ‘숭례문’ 목판 등 도난문화재 123점을 회수했다고 29일 밝혔다. 이와 함께 경찰은 만국전도와 고서적 116책을 훔친 A 씨(50)와 숭례문 현판과 후적벽부 목판 등 6점을 구입해 숨긴 B 씨(70)를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만국전도는 1661년 여필(汝弼) 박정설(1612∼?)이 채색 필사한 세계지도다. 국내에 현존하는 서양식 세계지도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됐다고 알려져 있다. 가로세로 133×71.5cm 크기로, 이탈리아 출신 선교사 알레니(1582∼1649)가 1623년 편찬한 한문판 휴대용 세계지리서인 ‘직방외기(職方外紀)’에 실린 만국전도를 확대해 필사했다. 함양 박씨 정랑공파 문중에서 보관해오다 전적류 필사본 116책과 함께 1994년경 도난당했다. 경찰에 따르면 A 씨는 이 문화재들을 지난해 8월 입수한 뒤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 벽지 안쪽에 만국전도를, 고서적은 집 안에 숨겨 왔다. 첩보를 입수한 문화재청과 경찰은 A 씨의 식당과 주거지를 압수수색해 해당 문화재를 회수했다. B 씨는 2008년 10월 전남 담양 양녕대군 후손 문중에서 도난당한 ‘숭례문(崇禮門)’ 목판 2점과 ‘후적벽부(後赤壁賦)’ 목판 4점을 2013년경 구입한 뒤 자신의 비닐하우스에 보관한 혐의다. 국보 제1호인 숭례문에 걸린 목판은 양녕대군의 친필을 바탕으로 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번에 회수한 숭례문 목판은 양녕대군을 모신 사당인 서울 동작구 지덕사(至德祠)에 있던 목판을 모본으로 삼아 1827년에 다시 새겼다고 전한다. 지금은 지덕사에 숭례문 목판이 없고 탁본만 남아 있어 현존하는 유일의 숭례문 목판본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한상진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장은 “문화재 범죄의 공소시효는 10년이지만 2007년부터 ‘선의취득 배제 조항’이 신설돼 실질적으로 공소시효가 없다”며 “앞으로도 경찰과의 공조를 강화해 도난 문화재를 회수하기 위해 끝까지 추적할 것”이라고 밝혔다.유원모 onemore@donga.com·김소영 기자}

    • 2019-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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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 反나치 거리에 독립운동가 이미륵 추모동판

    독립운동가이자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쓴 작가 이미륵(본명 이의경·1899∼1950·사진)을 추모하는 기념동판이 독일 남부 뮌헨 근처 도시인 그라펠핑에 건립됐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과 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28일(현지 시간) 독일 그라펠핑 시청 인근 쿠르트 후버 거리 입구에 이미륵 동판을 부착했다고 29일 밝혔다. 신미경 작가(52)가 제작한 동판은 가로세로 60cm 크기에 이미륵의 얼굴과 한옥 지붕, 장미꽃을 형상화한 조각을 새겼다. 그가 생전에 즐겨 쓰던 “사랑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에게는 가시동산이 장미동산이 되리라”는 문구와 친필 서명을 새겨 넣어 머나먼 이국에서 향수를 달래며 창작 혼을 불사르던 모습을 형상화했다. 이미륵 동판 바로 옆에는 쿠르트 후버 전 뮌헨대 교수(1893∼1943)의 동판이 나란히 서있다. 쿠르트 후버는 생전에 이미륵과 교류했던 독일 지식인으로 히틀러의 만행에 항거하면서 반(反)나치 운동을 주동하다 체포당해 1943년 처형당한 인물이다. 189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이미륵은 경성의전 3학년 때 1919년 일어난 3·1운동에 가담했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만든 국내 비밀조직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서 활동했다. 이어 일제 경찰의 수배를 피해 중국 상하이에 위치한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갔다가 안중근 의사의 사촌인 안봉근의 권유로 1920년 독일로 망명했다. 독일에서도 김법린(1899∼1964) 이극로(1893∼1978) 등과 함께 항일 활동을 펼쳤고, 후버 교수 등 반나치 지식인들과도 폭넓게 교류했다. 광복 이후에는 뮌헨대 강사로 일하다 1950년 사망해 그라펠핑 묘역에 묻혔다. 이미륵이 1946년에 쓴 ‘압록강은 흐른다’는 유년 시절과 독일 망명 생활을 회고하며 집필한 자전적 소설이다. 독일 중고교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독일 문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한국 정신문화와 생활상을 서구에 알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앞서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올해 3월 22일 독일 그라펠핑시와 ‘압록강은 흐른다’ 집필 장소, 이미륵 묘역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업무협약을 맺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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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고궁박물관 기증·기탁 특별전… 수백년 가보, 시민과 함께

    수백 년간 문중에서 간직해 온 가보(家寶)를 시민들을 위해 기증, 기탁한 유물만을 모은 뜻깊은 전시회가 열린다. 국립고궁박물관은 개인 소장자나 문중이 박물관에 전달한 조선시대 초상화와 왕명 문서 7점을 한자리에서 공개하는 ‘기증·기탁 특별전―조선의 공신’을 28일부터 다음 달 30일까지 진행한다고 밝혔다. 기증은 박물관에 유물 소유권을 넘기는 행위이고, 기탁은 유물을 일정 기간 맡기는 것을 뜻한다. 이번에 선보이는 유물 가운데 보물 제1190호 ‘오자치 초상’은 나주 오씨 대종회가 고궁박물관에 2017년 기증했다. 크기는 가로세로 102×160cm로 비단 바탕에 그린 채색화다. 1476년 무관 오자치를 그린 것으로 추정되며, 가슴에 호랑이 무늬를 수놓은 흉배(胸背·가슴과 등에 장식한 표장)가 있어 오자치가 무관 1품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밖에 6점의 문화재는 모두 기탁 유물이다. 장흥 마씨 중앙종회가 소유한 보물 제1469호 ‘마천목 좌명공신 녹권’, 이건우 씨가 기탁한 보물 제1490호 ‘이성윤 초상’과 보물 제1508호 ‘이성윤 위성공신 교서’ ‘이성윤 위성공신 교지’, 진위 이씨 이기철 씨가 맡긴 보물 제1657호 ‘이형 좌명원종공신 녹권’을 공개한다. 녹권(錄券)은 왕명을 받아 공신에게 발급한 문서이고, 교서(敎書)는 국왕이 내린 명령서를 뜻한다. 교지(敎旨)는 왕이 신하에게 관직 등을 내릴 때 주는 문서다. 2000년경 도난당한 뒤 지난해 회수한 문화재로 전주 이씨 익안대군파 종회가 보유한 충남문화재자료 제329호 ‘익안대군 영정’도 전시에 나온다. 국립고궁박물관은 “공신에 책록된 조상의 명예로운 유품을 잘 간직해 박물관에 기증하고 기탁한 후손이야말로 또 다른 공신이라 할 수 있다”며 “전시를 계기로 유물 기증과 기탁이 더 활발해지길 바란다”고 밝혔다.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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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일배우 김염 “친일 영화를 찍느니 차라리 영화를 그만두겠소”

    25일 중국 경제 중심인 상하이의 북적한 시내에서 서남쪽 항저우 방향으로 약 45km를 이동해 도착한 교외 공원묘지인 푸서우위안(福壽園). 이곳은 상하이에서 활동했던 유명 배우와 시인, 음악가 등이 잠들어 있는, 문화예술인을 위한 추모공원이다. 공원 내부로 들어가니 1930년대 중국 최고의 인기 여배우 롼링위(阮玲玉)의 생전 모습을 조각상으로 표현한 추모비와 색소폰을 형상화한 기념비, 루쉰(魯迅)의 아내인 쉬광핑(許廣平) 묘까지 불멸의 예술혼을 느낄 수 있는 이색적인 추모 공간이 나타났다. 입구에서 300m가량 떨어진 묘역으로 들어가 보면 아들 김첩(金捷)과 함께 묻혀 있는 인물이 나온다. “조선인 출신인 그는 영화 황제(映畵 皇帝)로 불렸다”는 비석 내용이 영화처럼 살다 간 그의 인생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고 있었다. 1930년대 중국 최고의 인기 배우이자 일제의 침략에 맞서 영화로 독립운동을 펼친 김염(金焰·1910∼1983)이 잠들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이자 한국 영화사 100년을 맞은 올해 한국과 중국 학계에서 항일 예술인에 대한 조명을 새롭게 진행하고 있다. 24일 중국 상하이 푸단(復旦)대에서 열린 한중 공동 학술대회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국 상하이’에서는 상하이를 중심으로 일제에 맞선 한중의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가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주목을 끈 것은 영화 황제 ‘김염’에 대한 연구다. 한재은 단국대 초빙교수는 “‘영화 황제’ 김염의 항일 영화인 형상”이라는 논문을 공개하며 “중국의 최고 인기 배우로 활동하면서도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예술로써 항일 독립투쟁에 나선 김염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번 학술회의는 단국대 동양학연구원과 푸단대 한국연구센터가 공동 주최했다.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염의 집안은 독립운동가로 가득하다. 아버지 김필순(1878∼1919)은 1908년 제중원의학교 1회 졸업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의사다. 구한말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의 주요 인물이었던 그는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 고향을 떠나 만주에서 독립군 주치의로 활동하며 의술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1919년 의문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를 여읜 김염은 중국 상하이로 이동해 고모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총장 등을 지낸 김규식(1881∼1950)에게 의탁한다. 김염은 1928년 우연히 단역에 발탁되면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처음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이듬해 쑨위(孫瑜) 감독의 눈에 띄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1929년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풍류검객’이 기록적인 흥행을 거두면서 일약 대스타로 거듭났다. 이때부터 10여 년간 중국 영화계를 호령한 그는 1933년 영화 전문 신문사인 ‘전성일보’에서 진행한 인기투표에서 남자 배우 1위를 차지하며 ‘영화 황제’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단순히 인기 배우로서의 삶이 아니었다. 1932년 상하이 사변을 일으키며 대륙 침략을 노골화한 일제는 당시 상하이의 대스타 김염에게 친일 영화에 출연할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그는 “영화를 찍지 않을지언정 아무 의미 없는 반진보적인 영화를 찍어 관중에게 해독이 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며 일제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한다. 이후 그는 일제에 맞서는 내용을 담은 영화 ‘들장미(野매괴)’, ‘대로(大路)’ 등에 출연하며 영화로 독립운동을 펼쳐갔다. 한 교수는 “1945년 광복 이후에도 중국에 남은 그는 중국 정부로부터 ‘국가 1급 배우’로 선정되는 등 한국 출신 항일 배우로서의 삶을 이어갔다”며 “함께 항일투쟁에 나섰던 경험이 있는 한국과 중국이 공동으로 역사 연구를 진행한다면 양국의 경색된 관계를 푸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상하이=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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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과 중국의 전통정원은 어떻게 다를까

    한국의 전통 정원과 중국 정원인 원림(園林)을 한곳에서 비교해 즐길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린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창립 50주년을 맞아 창덕궁 선정전(宣政殿·보물 제814호) 뒤뜰에서 한중 전통 정원 사진전 ‘옛 뜰(庭)을 거닐다’를 28일부터 다음 달 16일까지 진행한다고 27일 밝혔다. 중국의 베이징시 공원관리중심, 주중한국문화원과 공동으로 주최한다. 이번 전시는 중국 원림의 대표적인 특징인 가산(假山·모형 산)을 형상화한 천막 안에 설치한 5개의 모니터를 통해 사진을 선보인다. 천막 안에 들어가면 정원을 감상하기에 알맞은 고요한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한국과 중국의 정원 사진이 멋스러운 옛 시와 함께 전시된다. 전시는 총 5개의 주제로 꾸려졌다. 중국의 정원은 황가(皇家) 원림, 사가(私家) 원림, 사관(寺觀·불교 사원과 도교 도관) 원림, 풍경 명승, 도시공원에 해당하는 성시 원림으로 구성했다. 한국은 궁궐 정원·왕릉, 민가·별서(別墅·교외에 따로 지은 집), 사찰·서원, 명승, 전통마을 등으로 중국의 원림과 짝을 이룬다. 전시에서 공개하는 사진 200여 장은 한국과 중국 정원 특성이 어떻게 다른지 보여준다. 중국 정원은 극적인 대비, 한국 정원은 자연과의 조화가 돋보인다. 이원호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중국은 시나 그림에 나오는 이상적 경관을 정원에 구현하고자 해 자연과 인공 조형물이 보여주는 대비의 아름다움이 있다”며 “반면 한국의 정원은 유교적 전통에 따라 크게 장식하지 않은 듯하면서도 자연과 호흡하는 독특한 미학을 자랑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무료(창덕궁 입장료 별도)로 관람할 수 있다.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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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1000년의 세월 되살리는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통일신라시대 왕실의 연회 장소였던 경북 경주시의 동궁과 월지(안압지). 1970년대 첫 삽을 뜬 후 현재까지도 발굴 조사가 진행 중이다. 2014년 이곳에서 깊이가 7m에 이르는 통일신라 때의 우물이 발견됐다. 문제는 폭이 1.2∼1.4m에 불과했다. 체구가 작은 여성이어야 겨우 내부 조사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이때 발굴단원이던 장은혜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로프로 몸을 감고 깜깜한 우물에 홀로 들어갔다. 1000년의 세월을 견딘 문화유산이 빛을 보게 된 순간이다. 이 책은 집요하면서도 역동적인 문화재 발굴 현장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동아일보 기자인 저자는 문화재 담당으로 활동할 당시 취재한 경험을 살려 국내외 주요 유적지 20곳에서 활약한 고고학자 24명의 이야기를 되살려냈다. 박물관 속 빛나는 유물들은 원래부터 아름답다고 여겨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흙 속의 진주 찾기처럼 한 땀 한 땀 흘려내는 고고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세공돼야만 그 진가가 드러날 수 있다고 책은 강조한다. 2009년 전북 익산시 미륵사지 석탑의 보수정비 과정에서 1370년 만에 발견된 황금빛의 사리장엄구를 보자. 당시 연구진은 지름 1mm의 미세한 금 구슬을 핀셋 대신 양면 접착테이프를 붙인 막대기로 건져 올렸고, 섬유류는 대나무 칼로 조심스럽게 떼어내는 등 꼬박 이틀 밤낮을 지새운 끝에 유물을 수습할 수 있었다. 기존 역사 해석을 뒤집는 발굴 현장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절로 쾌감이 느껴진다. 1978년 경기 연천군 전곡리에서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발견되면서 유럽과 아프리카에서만 이 도끼가 존재한다는 기존의 ‘모비우스의 학설’을 무너뜨렸다. 1976년 경기 여주시 흔암리 발굴지에서 발견된 기원전 10세기 탄화미는 일본 열도에서 한반도로 벼농사가 전파됐다는 일본의 학설을 뒤집는 쾌거였다. 빛나는 업적뿐 아니라 속도와 성과를 중시하는 한국 사회 분위기에 휩쓸려 아쉬운 결과를 낳은 발굴 현장도 균형 있게 소개한다. 또 통설과 대립되는 학설도 함께 다뤄 읽는 깊이를 더한다. 영화 인디아나존스의 무대를 한반도로 옮겨 놓은 듯한 흥미로움을 선사하는 책이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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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총 길이 34m의 종이… 그 위에서 춤추는 3024자의 한자

    길이만 34m에 이르는 종이에 빼곡히 글씨가 적혀 있다. 기계적인 맞춤도, 어색한 비대칭도 아닌 춤추는 듯한 리듬감이 3024자의 글자에서 흘러나온다. 한 글자씩 자세히 보면 칼처럼 날카롭다가도, 멀리서 전체를 보면 궁극의 예술혼이 주는 압도감에 숙연해진다. 21일 찾은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박물관의 한쪽 벽면에 걸린 서예 작품은 단번에 시선을 붙들었다. 한국 근현대 서예가를 대표하는 검여(劍如) 유희강(1911∼1976·사진)이 쓴 ‘관서악부(關西樂府)’의 전체 작품이 처음으로 전시된 것이다. 성균관대박물관은 “추사 이후 한국 최고의 명필이라고 평가받는 검여의 작품 100여 점을 공개하는 특별전 ‘검무(劍舞)’를 31일부터 진행한다”고 밝혔다. 성대박물관은 관서악부를 상설 전시하는 ‘관서악부실’도 공개한다. 검여의 유족은 최근 성균관대박물관에 검여의 작품 400여 점과 습작 600여 점, 벼루, 붓, 종이 등 관련 유물 1000여 점을 기증했다. 장남 유환규 씨(82)는 “가내 소장보다는 학계에서 연구하고, 시민들이 즐기는 게 아버지의 뜻이라고 생각해 아무 조건 없이 기증했다”고 말했다.○ 글과 그림의 일체 이룬 예술 검여의 글씨에는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한 그의 여정이 담겨 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7년 명륜전문학교(성균관대 전신)를 졸업한 그는 중국 베이징으로 유학을 떠나 1946년까지 머물며 서화와 금석화, 서양화를 배웠다. 이때의 경험은 회화성을 가미한 검여 서예의 바탕이 됐다. 1945년 해방 정국에서는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 주호지대장의 비서로 근무하며 임정 요원들의 환국에 앞장서기도 했다. 광복 후 귀향한 그는 본격적인 서예가로서 활동한다. 당시 그의 대표작은 ‘완당정게(阮堂靜偈)’다. 추사 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 준 정게(부처의 가르침 찬미)를 새로운 형식으로 창조한 작품이다. 화선지의 한가운데에 ‘나무아미타불’이라는 큼지막한 여섯 글자를 써서 마치 불탑을 형상화한 모습을 표현했고, 주변에는 추사의 시를 자신만의 행서체로 꽉 채워놓았다. 김대식 성균관대박물관 학예실장은 “추사를 가장 흠모했던 검여는 열심히 따라가는 ‘법고(法古)’를 넘어 새로운 개성을 펼친 ‘창신(創新)’을 실현한 서예가”라고 설명했다. ○ 신체장애 극복한 예술 정신 1968년 9월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시련이 다가온다. 뇌졸중이 발병해 실어증과 함께 오른쪽 반신이 마비된 것. “종이와 먹과 붓의 단판 승부”라고 표현될 만큼 서예는 손끝의 예민한 감각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데, 오른손 마비는 서예가로서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불굴의 의지가 새롭게 붓을 쥐게 했다. 평생을 써 온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글씨를 써 내려갔다. 쓰러진 지 10개월 만에 왼손으로 다시 서예를 시작한 그의 글씨를 보고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1919∼2009)은 “검여의 좌수서(左手書)는 기교 없이 서예 본질의 추구만이 남아 더욱 격조가 높았다”고 평가했다. 검여는 1976년 4월부터 일생의 역작인 ‘관서악부’를 쓰기 시작한다. 관서악부는 1774년 신광수(1712∼1775)가 평양의 아름다운 풍경을 풀어낸 시다. 당시 서예계에서 중국의 명문을 쓰던 관행과 달리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백미로 여겨지는 관서악부를 택한 점 역시 흥미롭다. 6개월간 작품에 매달린 그였지만 결국 그해 10월 발문의 일부는 완성하지 못한 채 운명했다.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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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으로 만드는 예술 작품… 전국에 공예의 장 선다

    전통 공예와 이를 창의적으로 계승한 현대 공예 작품을 체험하고, 즐길 수 있는 국내 최대의 공예 축제 ‘공예주간’이 이번 주 전국 곳곳에서 열린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은 ‘2019 공예주간(Craft Week 2019)’을 26일까지 전국 360여 개 공방과 화랑, 문화예술기관에서 동시에 개최한다고 20일 밝혔다. 2회를 맞는 공예주간은 지난해 수도권에서만 진행된 것과 달리 올해는 부산, 광주, 창원, 청주, 강릉 등 전국으로 범위를 넓혀 전시, 체험, 판매, 강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서울에서는 공예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기획전시가 눈길을 끈다. 옛 서울역사인 문화역서울284에서 26일까지 열리는 ‘공예×컬렉션: 아름답거나+쓸모있거나’는 생산자 입장에서 벗어나 쓰임과 향유의 경험을 중시하는 사용자 입장에서 공예를 조명한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한복려 궁중음식문화재단 이사장(국가무형문화재 제38호),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등 공예품 애호가 26명의 특별 소장품을 감상하고, 영상 인터뷰를 볼 수 있다. 서울 종로구 통의동 보안여관에서는 젊은 공예작가와 평론가, 인문학자들이 모여 목공예, 차와 다기, 백자, 공예와 패션의 융합 등 전통 공예를 현대화하는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행사 기간 동안 오후 7시부터 자정까지 팝업 술집을 운영해 공예작가들이 만든 술잔을 들고, 작가들과 대화할 수 있는 자리도 마련했다. 실생활에 필요한 공예품을 구입할 수 있는 직거래장터 ‘마켓유랑’이 25, 26일 부산 수영구 복합문화공간 F1963에서 열린다. 전통천연염색법을 계승하고 있는 전남 나주시에서는 한국천연염색박물관 등지에서 염색 체험, 플리마켓 등을 진행한다. 젊은 도예인들이 합심해 만든 충남 공주시 계룡산도예촌에서는 세계 철화분청사기를 감상할 수 있는 전시와 저렴하게 도자기를 구매할 수 있는 장터를 즐길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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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수궁 안 돌담길, 오후 8시 30분까지 연장 개방

    문화재청은 21일부터 10월까지 덕수궁 내부 보행로(사진) 개방 시간을 오후 8시 30분까지 3시간 연장한다고 밝혔다. 덕수궁 내부 보행로는 지난해 10월부터 기존에 영국대사관이 점유하며 통행이 제한됐던 70m 구간을 연결하면서 시민들에게 돌아왔다. 문화재청은 덕수궁 돌담길 활성화를 위해 야간 조명 설치와 ‘돌담길 음악회’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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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들의 나라’ 그리스 소장 보물 첫 한국展

    ‘신(神)들의 나라’ 그리스의 국보급 유물 수백 점이 처음으로 한국을 찾는다. 그리스 문화체육부가 국가 간 문화 교류의 일환으로 소개하는 특별전 ‘그리스 보물전, 아가멤논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까지’가 다음 달 5일부터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층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그리스 전역의 24개 박물관에서 출품된 귀중한 유물 350여 점을 엄선했다. 그리스 박물관에서 소장한 유물이 한국에 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신석기 시대의 유물부터 그리스의 중흥기를 꽃피웠던 시기까지의 도자기, 금속조각, 장신구, 금과 은, 상아 등 다양한 소재로 구성됐다. 기원전 3000년경 그리스의 청동기 시대를 일컫는 ‘에게해 문명’ 관련 유물이 관람객을 가장 먼저 맞이한다. 에게해 문명은 크레타 섬, 키클라데스 제도, 그리스 본토 간의 문화 교류와 이 지역의 문명을 통칭한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황소머리 술잔’은 크레타섬에서 꽃피운 미노스 문화의 종교의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황소를 신성시한 미노스인들은 머리에 있는 두 개의 구멍을 통해 술을 흘려보내며 숭배의식을 펼쳤다고 한다. 당대 미노스인들의 의식주를 살펴볼 수 있는 ‘아크로티리의 소년 벽화’도 놓치면 아쉽다. 기원전 17세기∼기원전 12세기에 번성했던 미케네 문명. 미케네는 강력한 적수였던 도시국가 트로이를 두 번이나 물리쳤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군사 문화를 중시했던 역사답게 ‘아가멤논의 황금가면’, ‘사자와 싸우는 모습을 담은 금인장’ 등 강인한 모습을 형상화한 유물들이 주를 이룬다. 유랑시인 호메로스의 그리스 신화와 관련된 유물들도 흥미롭다. 호메로스의 두상과 함께 그가 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올림포스 신들의 조각상을 선보인다. 또 고대 그리스 올림픽에서 우승한 선수에게 올리브유를 담아 선물했다고 전해지는 암포라(흑화식 도자기)도 공개된다. 이 밖에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이자 그리스 중흥기를 이근 필리포스 2세 때 제작된 화려한 금화관과 금귀걸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형상화한 조각상 등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화려한 유물들이 가득하다. 전시는 9월 15일까지. 성인 1만5000원, 청소년 1만1000원.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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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읽기 능력 잃어가는 디지털 세대… 처방은 종이책

    책 제목처럼 독서를 권하는 책이다. 그러나 “책을 읽어야 좋은 것”이라는 뻔한 훈계조가 아니다. 뇌과학 분야의 최신 성과 중에서도 읽기와 관련된 연구 결과를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편지글의 형식으로 풀어낸다. 저자는 2009년 발간한 책 ‘책 읽는 뇌’를 통해 인류의 책 읽기 능력이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오랜 진화 끝에 힘겹게 획득한 성취라고 주장하며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준 미국의 인지신경학자다. 특히 깊이 읽기를 통해 비판적 사고와 반성, 공감과 이해, 개인적 성찰이 가능해지면서 지금의 고도화된 문명을 이룩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에 간과해선 안 되는 맹점이 있다. 바로 읽기란 타고난 것이 아닌 학습과 숙달에 의한 성취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다시 잃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며 상당한 지적 수준에 이른 독자라 해도 깊이 읽는 능력이 저절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어렸을 적 감명 깊게 읽은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를 어느 날 다시 꺼내 들었지만 더 이상 길고 난해한 문장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디지털 읽기 방식에 익숙해져 깊이 읽기의 방법을 놓쳐 버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었다. 최근 10여 년간 전 세계가 디지털 문화로 변모해 갔다. 덩달아 읽기의 주된 대상 역시 인쇄물에서 스마트폰 등 디지털 매체로 바뀌었다. 이 책은 디지털 매체에 익숙해지면서 깊이 읽기의 방법을 잃어 버렸을 때 나타나는 폐해를 조목조목 짚어낸다. 이와 함께 깊이 읽기 능력을 회복한 자신의 노력을 소개하며 특히 청소년들에게 권해야 할 올바른 읽기 교육 방법에 대해서도 일러준다. 디지털 읽기의 가장 큰 위험성은 주의집중과 깊이 있는 사고를 앗아간다는 점이다.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UCSD) 정보산업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한 사람이 하루 동안 다양한 기기를 통해 소비하는 정보의 양은 약 34GB(기가바이트)에 이른다고 한다. 약 10만 개의 영어 단어에 육박하는 숫자다. 그러나 저자는 밀도가 떨어지는 이 같은 방식은 연속적이거나 집중적인 읽기가 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더 큰 문제는 디지털 기기를 통한 읽기가 인쇄물을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미국 새너제이대의 한 연구에 따르면 디지털 읽기에서는 ‘훑어보기’가 표준 방식이 된다. F자형 혹은 지그재그로 중요한 글자만 재빨리 훑어 맥락을 파악한 후 결론으로 직행하는 방식이다. 이 같은 방법으로 신문이나 책을 읽으면 단어를 듬성듬성 건너뛰게 되고, 글에 담긴 논리적인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비판적 사고와 성찰의 능력을 전제로 하는 민주주의에 크나큰 위협이 되기도 한다. 최근 들어 가짜뉴스의 범람과 이를 구별해내지 못하는 흐름 역시 저자의 주장과 맥이 닿아 있다. 그렇다면 디지털 기기를 버리고, 무조건 책을 들어야 할까. 저자는 양자택일의 관점이 아닌 신중한 균형의 길을 제시한다. 바로 양손잡이 읽기 뇌의 길이다. 필요한 정보를 쉽고, 빠르게 검색하는 디지털 특화 읽기 방식과 창의적 사고와 깊이 있는 사유를 가능케 할 인쇄물 기반 읽기 교육을 병행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를 통해 매체마다 다른 읽는 속도와 리듬, 습관을 형성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기기 없이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현재 우리들에게 제대로 읽는 법을 일러주는 귀한 참고서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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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사이드&인사이트]“불완전이 더 낫다”… 복원된 미륵사지 석탑의 역설

    “6층까지만 복원된 지금의 모습을 보고 ‘이게 정말 다 수리가 된 게 맞느냐’고 묻는 분들이 많아요. 그럴 때마다 자신 있게 말씀드립니다. 복원 가능한 최대의 범위에서 ‘진정성’을 확보했다고 말이죠.”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10일 열린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 20년-문화재 수리의 현황과 과제’ 학술대회장에서 만난 김현용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43)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인생의 절반가량인 20년을 오롯이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 복원에 매달린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대학교 4학년 때 아르바이트생으로 미륵사지와 인연을 맺은 후 2001년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가 시작되자 건축조사보조원으로 일했고, 2007년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로 임용되면서 복원 과정을 총괄하는 책임자가 됐다. 미륵사지 석탑 복원의 국내 최고 전문가에게 이 같은 질문이 쏟아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지난달 30일 새로 준공된 미륵사지 석탑(서탑)은 9층으로 추정되는 완전한 모습이 아닌 한쪽이 붕괴된 모습을 그대로 놔둔 6층까지만 복원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이자 최대(最大) 석탑이면서 20년이라는 단일 문화재 역사상 가장 오랜 시간을 투입한 미륵사지 석탑은 왜 이런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시 섰을까.○ 달라진 문화재 복원, 동탑과 서탑의 비대칭 “성덕왕 18년(719년) 9월 미륵사에 진(震·벼락 또는 지진)이 있었다.”(삼국사기·三國史記) “미륵사가 동방 석탑 중 최고라는 이름은 헛소리가 아니다. 100년 전에 벼락이 떨어져 그 절반이 허물어졌다.”(와유록·臥遊錄·1756년) 각종 기록처럼 미륵사지 석탑은 백제 무왕 때인 639년 지어진 후 1300여 년의 세월을 견디면서 제 모습을 상당 부분 잃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가장 오래된 모습은 1910년 12월 일본인 조사단이 촬영한 사진이다. 당시에도 이미 동탑은 자취를 잃었고, 서탑은 6층까지만 남은 채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모습이었다. 일제는 1915년 콘크리트 185t을 투입해 붕괴된 석탑의 벽면을 응급 보수했다. 하지만 80여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콘크리트로 뒤엉킨 석탑은 흉물이 돼버렸다. 결국 1999년 문화재위원회는 전격적으로 석탑의 해체 후 보수정비를 결정했다. 문제는 석탑의 원형을 어떻게 설정할지였다. 창건 당시 미륵사지 석탑의 모습을 알려주는 문헌이나 그림 등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계 일부에서는 1993년 복원된 미륵사지 동탑처럼 9층으로 쌓아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그러나 동탑은 20세기 한국 문화재 복원 역사상 최악의 사례로 꼽힐 만큼 실패작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동탑의 원형을 추정할 기록이 없으니 서탑의 형상을 본떠 만들었고, 기계로 석재를 가공해 문화재가 주는 특유의 색감도 살리질 못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켜 버리면 좋겠다는 사람도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결국 2011년 문화재청은 국제학술대회와 문화재위원회 심의 등을 거쳐 ‘익산 미륵사지 보수정비 기본원칙’을 세운다. 총 4가지로 △추론에 의한 복원을 지양하고, 남아있던 6층까지만 보수해 진정성을 확보한다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훼손된 부재(部材·탑의 재료)는 과학적 방법으로 보강해 최대한 재사용한다 △전통기법만으로 원형 유지가 어려운 경우에는 최소한으로 현대적 기술을 적용한다 △조사, 연구, 시공 등 모든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미륵사지 석탑은 다소 불완전해 보이는 6층의 형태로 돌아왔다. 김 학예연구사는 “30년 가까운 시차를 두고, 나란히 서 있는 미륵사지 서탑과 동탑의 비대칭적인 모습은 한국 문화재 수리 역사와 가치관의 변화를 설명하는 가장 극명한 사례”라며 “미륵사지 석탑 복원은 추론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멈춰야 한다는 문화재 보존의 보편적 이념을 충실히 구현했다”고 말했다. ○ 원형을 둘러싼 감사원과 문화재청의 시각차 하지만 준공을 앞두고 새로운 논란이 불거졌다. 올해 3월 감사원이 “미륵사지 석탑의 재료와 공법이 원형과 다르게 복원됐다”는 감사 발표를 한 것. 감사원의 지적 사항은 크게 2가지다. 돌 사이의 틈을 메우는 충전재로 성능이 우수한 실리카퓸 배합제를 사용한다는 계획에서 충분한 검토 없이 황토 배합제로 바꾸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 석탑 내부의 중심 기둥인 적심(積心)을 모두 새로운 석재로 쌓겠다는 계획과 달리 1, 2층에만 이를 적용하고 3층 이상에서는 옛 부재를 활용해 안정성과 일관성을 잃었다고 발표했다. 김 학예연구사는 “충전재로 사용하려 했던 실리카퓸의 색깔이 시멘트와 매우 유사해 과거 흉물로 느끼게 한 것과 비슷한 모습이 나올 것으로 우려됐다”며 “천연 재료인 황토 배합제를 사용해도 충분히 안정성에 문제가 없다는 실험 결과를 확보했고, 2016년부터 진행한 모니터링에서도 안전하다는 평가 결과가 나왔다”고 말했다. 적심에 옛 부재를 활용한 점 역시 하중이 가장 몰리는 1, 2층에는 내구성이 강한 새로운 돌을 사용한 후 3층 이상부터는 역사적 가치를 고려해 기존 석재를 최대한 보강해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미륵사지 석탑은 옛 부재 재사용률을 81%까지 끌어올렸다. 불가피하게 새로운 돌을 쓸 때에도 옛 부재와 성분이 가장 유사한 전북 익산의 화강암인 황등석을 사용했다. 석탑 전체로 봤을 때 옛 부재와 새 부재의 비율은 각각 65%와 35%다. 문화재계에서는 감사원의 감사 발표가 문화재 복원을 가로막는 형식 우선, 행정편의주의의 대표적인 예라고 지적한다. 이왕기 이코모스(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한국위원회 위원장은 “애초 계획보다도 옛 부재를 더 많이 사용하고, 전통 재료를 구현하려 한 노력을 두고 계획서와 다르니 원형이 아니라고 지적하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라며 “문화재 가치와 중요성은 무시한 채 단순히 건물을 고치고 짓는 것처럼 일괄적인 표준시방서와 셈법을 강요해서는 곤란하다”고 말했다. ○ 무조건적인 원형 집착에서 벗어날 때 문화재 복원은 무조건 옛것을 좇을 수도, 그렇다고 현재의 기술만을 반영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일정 부분의 원칙은 있다. 바로 사회적 합의다. 대표적으로 경복궁을 보자. 1990년대부터 본격적인 경복궁 복원 계획이 발표되면서 원형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다.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한 경복궁이 원형이라는 주장과 1865년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중건된 경복궁이 기준이 돼야 한다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결국 문화재청은 19세기의 경복궁을 원형으로 택했다. 태조 때의 경복궁은 건물 높이가 낮아 현실적으로 기준으로 삼기에 어려웠고, 고종 때의 건축 기록이 더 풍부했기 때문이다. 전봉희 한국건축역사학회장(서울대 건축학과 교수)은 “문화재 중에서도 특히 건축문화재는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게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문화재 복원 역시 하나의 역사적 결과물이기 때문에 정답을 좇기보단 당대 사회가 도출할 수 있는 최대 범위에서 합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달 15일 화재로 지붕과 첨탑이 무너져 내린 노트르담 대성당의 복원에서 현대적 건축양식을 도입하는 데 반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이후 노트르담 대성당 복원 방식으로 지붕 전체를 스테인드글라스로 덮거나 탄소섬유 재질로 불꽃을 형상화하는 등 창의적인 설계안이 쏟아져 나왔다. 처음 지어진 12세기가 원형인지 첨탑이 세워진 18세기가 기준인지로 다투는 모습은 오히려 찾기 어렵다. 이른바 문화 선진국으로 불리는 프랑스의 현 모습이다. 수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에게는 지금도 보수정비를 기다리는 문화재가 가득하다. 이들 역시 원형을 찾기 위한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 다만 이제는 한 가지 단서를 더 붙여도 되지 않을까. 2019년 우리의 모습을 얼마나 반영할 수 있는지 말이다. 원형에 대한 애착도 좋지만 문화재 복원을 바라보는 자신감 있는 시선이 이제는 필요한 때이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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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노에 찬 수형자는 시한폭탄… 복귀 프로그램 실효성 키워야”

    큼지막한 십자가가 걸린 커다란 강단 앞에 법복을 입은 스님이 섰다. 이곳은 국내 대표적인 기독교 대학인 숭실대의 한경직 목사 기념관. 2007년 숭실대 대학원 사회복지학과 배임호 교수의 ‘교정복지론’ 수업이 열렸던 곳으로, 매주 이색적인 강사들이 등장했다. 주인공은 사형수의 대부로 불리는 박삼중 스님과 가톨릭 신자이자 수많은 범죄자를 직접 감옥에 넣었던 송광수 전 검찰총장이다. 기독교 대학에서 맺어진 독특한 스승과 제자들은 10여 년간 스승의 날이면 사제 모임을 가졌다.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14일 만난 박삼중 스님, 송 전 총장, 배 교수는 “스승에는 종교도, 위치도, 나이도 정해져 있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의 인연 한가운데는 사형수였던 A 씨가 있다. 20대에 한순간의 오판으로 다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모범적인 복무 생활을 거치고 난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18년 6개월을 감옥에서 보낸 후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교정복지 사례 연구를 하던 배 교수는 “이론에 치우친 교정복지 수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연구를 통해 알게 된 사형수 출신 A 씨를 강사로 초빙했다. 이어 사형수의 교정에 가장 헌신하는 박삼중 스님과 법조인으로 교정 현장을 지켜본 송 전 총장까지 모셔오면서 전무후무한 교정복지 강의가 열리게 됐다”고 말했다. 박삼중 스님은 자신이 늘 몸에 지니고 있는 염주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교정과 스승의 의미를 알려줬다. 스님은 “염주 2개를 항상 차고 다니는데 이 중에 하나는 1989년 사형을 당한 고금석이 준 염주”라며 “조직폭력배의 일원으로 사람 4명을 죽인 그는 감옥에 들어오기 전 짐승과도 같은 삶을 살았지만 감옥에서 보낸 3년만큼은 부처나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영치금을 모두 불우한 재소자 가족에게 나눠주고, 모기로 들끓는 감옥 안에서 웃통을 일부러 벗고 피를 뜯어가라고 하기도 했다”며 “신분은 비록 사형수였지만 지금도 내게는 인생의 스승과도 같은 인물”이라고 말했다. 송 전 총장은 30년 넘게 수사 현장에서 범죄자들을 단죄하며 살아왔다. 그가 사형수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90년대 초 사형 집행을 담당하는 법무부 검찰2과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박삼중 스님을 만나면서부터다. 송 전 총장은 “당시만 하더라도 1년에 8, 9명씩 사형 집행이 이뤄지던 때였는데 스님이 찾아와 사형수들의 안타까운 가족사 등을 알려주면서 인연이 시작됐다”며 “사제 모임을 함께하는 제자들이 교정복지 전문가로 성장할 때마다 뿌듯함과 즐거움이 생긴다”고 말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강력히 처벌하라고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열악한 교도소의 처우를 개선하겠다는 소식에는 “범죄자에게 무슨 인권이 있냐”며 힐난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에 대해 송 전 총장은 “국민의 법감정을 존중할 필요가 있고, 단기적으로는 강력한 처벌이 실제로 범죄 예방에 도움을 준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재범률을 낮추기 위해서는 수형자들의 사회 복귀를 돕기 위한 세밀한 교정행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박삼중 스님은 “결국 사회로 돌아올 수형자들에게 분노만 키우게 한다면 우리 사회의 시한폭탄을 늘리는 꼴”이라며 “범죄자를 만드는 배경에는 사람의 본성보다 사회의 환경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수형자들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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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 황복사터서 쌍탑 추정 목탑터 발견

    경북 경주시 황복사(皇福寺)지에서 쌍탑으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목탑 터와 신라 시대 유물 700여 점이 한꺼번에 발견됐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12월부터 경주 낭산 일원(사적 제163호)에서 매장문화재 조사기관인 성림문화재연구원이 진행한 발굴조사 결과 황복사지에서 한 변이 6m인 정사각형 목탑 터 2개를 발견했다고 15일 밝혔다. 이번 조사 결과 사찰 중심 건물인 금당(金堂)과 탑 2개, 중문(中門)이 남북 방향으로 배치된 것으로 확인됐다. 사찰을 처음 조성한 시기는 단각고배(短脚高杯·짧은다리굽다리접시), 연꽃무늬 수막새 등 출토 유물로 봤을 때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사이로 보인다고 연구원은 설명했다. 황복사지에서 목탑 터가 실제로 쌍탑으로 판명난다면 신라가 지은 첫 쌍탑식 사찰이 된다. 이전까지 신라가 지은 최초의 쌍탑식 사찰은 679년에 창건한 경주 사천왕사(四天王寺)로 알려져 있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목탑 터 규모가 작고 주변에 비를 세운 건물인 비각이 있으며 중문 터와 가깝다는 점으로 미뤄 종묘와 관련된 제단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어 학계의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사찰 내 십이지신상 건물 터에서는 소·쥐·돼지·개 조각상이 확인됐다. 유물은 금동입불상, 금동판불, 비석 조각, 장식 기와인 치미, 녹색 유약을 바른 벽돌인 녹유전 등 700여 점이 나왔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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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 대학 강단에 선 스님과 가톨릭 신자 검찰총장의 ‘묘한 인연’

    큼지막한 십자가가 커다란 강단 앞에 법복을 입은 스님이 섰다. 이곳은 국내 대표적인 기독교 대학인 숭실대의 한경직 목사 기념관. 2007년 숭실대 대학원 사회복지학과 배임호 교수의 ‘교정복지론’ 수업이 열렸던 곳으로, 매주 이색적인 강사들이 등장했다. 주인공은 사형수의 대부로 불리는 박삼중 스님과 가톨릭 신자이자 수많은 범죄자를 직접 감옥에 넣었던 송광수 전 검찰총장이다. 기독교 대학에서 맺어진 독특한 스승과 제자들은 10여 년간 스승의 날이면 사제모임을 가졌다.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14일 만난 박삼중 스님, 송 전 총장, 배 교수는 “스승에는 종교도, 위치도, 나이도 정해져 있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의 인연 한가운데는 사형수였던 A 씨가 있다. 20대에 한순간의 오판으로 다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모범적인 복무 생활을 거치고 난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18년 6개월을 감옥에서 보낸 후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교정복지 사례 연구를 하던 배 교수는 “이론에 치우친 교정복지 수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연구를 통해 알게 된 사형수 출신 A 씨를 강사로 초빙했다. 이어 사형수의 교정에 가장 헌신하는 박삼중 스님과 법조인으로 교정 현장을 지켜본 송 전 총장까지 모셔오면서 전무후무한 교정복지 강의가 열리게 됐다”고 말했다. 박삼중 스님은 자신이 늘 몸에 지니고 있는 염주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교정과 스승의 의미를 알려줬다. 스님은 “염주 2개를 항상 차고 다니는데 이 중에 하나는 1989년 사형을 당한 고금석이 준 염주”라며 “조직폭력배의 일원으로 사람 4명을 죽인 그는 감옥에 들어오기 전 짐승과도 같은 삶을 살았지만 감옥에서 보낸 3년만큼은 부처나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영치금을 모두 불우한 재소자 가족에게 나눠주고, 모기로 들끓는 감옥 안에서 웃통을 일부러 벗고 피를 뜯어가라고 하기도 했다”며 “신분은 비록 사형수였지만 지금도 내게는 인생의 스승과도 같은 인물”이라고 말했다. 송 전 총장은 30년 넘게 수사 현장에서 범죄자들을 단죄하며 살아왔다. 그가 사형수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90년대 초 사형 집행을 담당하는 법무부 검찰2과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박삼중 스님을 만나면서부터다. 송 전 총장은 “당시만 하더라도 1년에 8, 9명씩 사형 집행이 이뤄지던 때였는데 스님이 찾아와 사형수들의 안타까운 가족사 등을 알려주면서 인연이 시작됐다”며 “사제모임을 함께 하는 제자들이 교정복지 전문가로 성장할 때마다 뿌듯함과 즐거움이 생긴다”고 말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강력히 처벌하라고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열악한 교도소의 처우를 개선하겠다는 소식에는 “범죄자에게 무슨 인권이 있냐”며 힐난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에 대해 송 전 총장은 “국민의 법감정을 존중할 필요가 있고, 단기적으로는 강력한 처벌이 실제로 범죄 예방에 도움을 준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재범율을 낮추기 위해서는 수형자들의 사회 복귀를 돕기 위한 세밀한 교정행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박삼중 스님은 “결국 사회로 돌아올 수형자들에게 분노만 키우게 한다면 우리 사회의 시한폭탄을 늘리는 꼴”이라며 “범죄자를 만드는 배경에는 사람의 본성보다 사회의 환경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수형자들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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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화의 수도’ 인천… 공단 노동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인천과 가장 잘 어울리는 수식어는 ‘최초’다. 개항 이후 신문물과 외국인이 들어온 첫 관문으로, 우리나라 근대화의 상징이었고 산업화 시기에는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한 기회의 땅이었다. 개항 이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천의 역사와 공단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이색적인 전시가 열린다. 국립민속박물관이 ‘2019 인천 민속문화의 해’를 맞아 15일부터 ‘메이드 인 인천’ 특별전(사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박물관 연구팀이 2017년 진행한 ‘인천 공단과 노동자의 생활문화’ 학술조사를 토대로 인천지역의 유물과 영상 6000여 점을 선보인다. 전시는 1부 ‘개항과 산업화’, 2부 ‘공단과 노동자’로 구성됐다. 1부에서는 19세기 말부터 제물포가 개항장으로 지정되면서 배로 수입된 물품을 의미하는 ‘박래품(舶來品)’ 등 신문물을 접한 인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917년 한국 최초의 성냥회사인 조선인촌회사에서 만든 성냥과 경인고속도로 개통 초청장, 중국음식점 배달가방, 축음기, 사진기 등 각종 근대 유물이 전시된다. 2부에서는 1960년대 이후 인천 공단 노동자들의 삶을 대변하는 ‘동일방직 작업복’, ‘용접바가지(마스크)’, ‘제미니자동차’ 등 유물과 관련 산업에 종사했던 22인의 인터뷰 영상을 만날 수 있다. 8월 18일까지. 무료.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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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서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된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전파와 교육을 담당했던 서원(書院)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것으로 확실시된다. 문화재청은 “세계유산 후보지를 사전 심사하는 유네스코 산하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가 ‘한국의 서원’을 세계유산으로 등재 권고했다”고 14일 밝혔다. 이코모스는 각국이 등재 신청한 유산을 조사한 후 등재 권고, 보류, 반려, 등재 불가 등 4가지 권고안 중 하나를 선택한다. 이 결과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와 당사국에 전달하며 등재 권고를 받은 유산은 이변이 없는 한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된다. 한국의 서원은 1543년 주세붕(1495∼1554)이 ‘백운동서원’이라는 명칭으로 건립한 조선의 첫 서원 영주 소수서원을 비롯해 경주 옥산서원, 안동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달성 도동서원, 함양 남계서원, 정읍 무성서원, 장성 필암서원, 논산 돈암서원 등 9곳이다. 모두 2009년 이전에 사적으로 지정됐고,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코모스는 서원이 유교가 발달한 조선의 건축물로, 성리학을 사회적으로 전파하고 정형성을 갖춘 건축문화를 이룩했다는 점이 세계유산 필수 조건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충족한 것으로 판단했다. 다만 추가 이행 과제로 9개 서원에 대한 통합 보존 관리방안 마련을 권고했다. 문화재청은 “관련 지자체와 협의해 이코모스의 지적 사항을 개선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한국의 서원은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6월 30일 개막해 7월 10일까지 이어지는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 여부가 최종 확정된다.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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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서원 9곳,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유력

    조선시대 성리학의 전파와 교육을 담당했던 서원(書院)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것으로 확실시된다. 문화재청은 “세계유산 후보지를 사전 심사하는 유네스코 산하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가 ‘한국의 서원’을 세계유산으로 등재 권고했다”고 14일 밝혔다. 이코모스는 각국이 등재 신청한 유산을 조사한 후 등재 권고, 보류, 반려, 등재 불가등 4가지 권고안 중 하나를 선택한다. 이 결과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와 당사국에 전달하며 등재 권고를 받은 유산은 이변이 없는 한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된다. 한국의 서원은 1543년 주세붕(1495~1554)이 ‘백운동서원’이라는 명칭으로 건립한 조선의 첫 서원 영주 소수서원을 비롯해 경주 옥산서원, 안동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달성 도동서원, 함양 남계서원, 정읍 무성서원, 장성 필암서원, 논산 돈암서원 등 9곳이다. 모두 2009년 이전에 사적으로 지정됐고,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코모스는 서원이 유교가 발달한 조선의 건축물로, 성리학을 사회적으로 전파시키고 정형성을 갖춘 건축문화를 이룩했다는 점이 세계유산 필수 조건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충족시킨 것으로 판단했다. 다만 추가 이행과제로 9개 서원에 대한 통합 보존 관리방안 마련을 권고했다. 문화재청은 “관련 지자체와 협의해 이코모스의 지적 사항을 개선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한국의 서원은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6월 30일 개막해 7월 10일까지 이어지는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 여부가 최종 확정된다. 유원모기자 onemore@donga.com}

    • 2019-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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