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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는 1980년대에 태어난 김지영 씨 다섯 명의 삶을 들여다 본 ‘SBS스페셜’을 26일 내보내면서 ‘세상 절반의 이야기’라고 부제를 달았습니다. ‘절반’? 아닙니다. 결혼생활에 있어 아내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을 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아내가 행복하면 남편도 행복하지만 그 반대는 아닙니다. 결혼생활 만족도를 결정하는 건 아내입니다.결혼생활을 하고 계신 분들은 따로 숫자가 필요 없이도 그 이유를 아실 터. 미국 보스턴대 데보라 카 교수(사회학) 연구진은 배우자의 결혼 생활 만족도가 본인 결혼 인생 만족도에 끼치는 영향력을 알아보려고 50세 이상 미국 부부 361쌍(722명)을 조사했습니다.이들은 논문 ‘행복한 결혼, 행복한 인생? 노후에 있어서 결혼 생활 만족도와 주관적인 웰빙(Happy Marriage, Happy Life? Marital Quality and Subjective Well-being in Later Life)’을 쓰면서 조사 참여자들에게 결혼생활 만족도를 1~4점으로 매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가장 만족스럽지 못할 때가 1점, 가장 만족스러울 때가 4점이었습니다.28일 ‘결혼과 가족 저널(Journal of Marriage and Family)’에 이들이 게재한 논문을 보면 부부 모두 결혼 생활 만족도가 1점이라고 답했을 때 남편의 인생 만족도는 평균 1.8점(6점 만점)이었습니다. 남편은 여전히 1점이지만 아내가 4점일 때 남편의 인생 만족도는 5.7점으로 3.9점 올라갑니다. 연구진은 이를 “남편이 결혼 생활에 만족하지 못해도 아내가 만족하면 높은 결혼 생활 만족도를 경험하게 되고 이 때문에 인생 만족도도 올라가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아내는 보통 남편보다 더 자기 인생에 만족하며 살지만 남편이 만족한다고 아내의 만족도가 이렇게 올라가지는 않습니다. 둘 모두 1점일 때 아내는 자기 인생이 2.5점이라고 답하는데 남편이 4점을 줘도 4.0점으로 1.5점 올라가는 데 그칩니다. 남편이 3.9점 올라갔으니까 상승률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겁니다.이에 대해 카 교수는 “주로 집안일을 하는 아내가 결혼생활에 만족하면 남편에게 많이 베푼다. 그러면 남편도 자기 인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자연스레 남편이 큰소리를 낼 일이 줄어들기 때문에 부부 사이도 좀더 원만해진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이 조사 결과에 따르면 남편은 참 이기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카 교수는 “남편이 아프면 아내는 스트레스를 받을 걸 알면서도 병간호를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내가 아플 때는 남편이 아니라 딸이 병간호를 맡는 일이 많다”고 전했습니다. 카 교수는 “결혼생활은 우리 인생에 있어 버퍼(buffer·물체에 가해지는 충격을 완화시키는 장치) 같은 존재”라고도 했습니다. “결혼생활이 원만하면 돈이나 건강 같은 문제를 풀어가는 데 있어 부부가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인생 만족도가 올라간다”며 “전체적으로 남편이 아내보다 결혼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 그럴수록 아내가 그만큼 헌신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죠. 이건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부부 사이에서도 역시 남편이 결혼생활에 더 만족합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과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성균관대 서베이리서치센터 공동 연구진이 지난해 6~11월 전국 18세 이상 105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남성은 72.2%가 결혼생활에 만족했지만 여성은 53.7%에 그쳤습니다.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이 좀처럼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건 김지영 씨들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로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회지표에 따르면 한국인의 삶에 대한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5.8점으로 OCED 35개 회원국 가운데 28위에 그쳤습니다. 그렇다고 김지영 씨를 행복하게 하는 길이 그저 남편들 인식 변화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인생은 어차피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 그 짐을 완전히 내려놓으라고 말하는 건 무책임한 일일 겁니다. 그래도 갈수록 김지영 씨들이 짐을 조금씩 덜 수 있는 세상은 만들어 가야 하지 않을까요?사실 김지영 씨들뿐 아니라 김지영 씨 남편들도 마찬가지였고, 마찬가지일 겁니다. 우리는 그저 결혼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늙어가고 싶었던 거고, 그냥 아이를 낳아서 키우고 싶은 게 아니라 그 아이랑 같이 잘 살고 싶은 거니까요.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요즘 방영 중인 tvN 주말 연속극 ‘명불허전’에는 조선 선조 시절 명의로 이름이 자자했던 허임(許任·1570~1647 추정)이 등장합니다. 허임은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명의 허준(許浚·1539~1615)도 인정한 침술의 대가였습니다. 선조 37년 임금이 침술에 대해 묻자 허준이 “신은 침을 잘 모릅니다만 허임이 평소 말하기를 경맥을 이끌어낸 다음에 아시혈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라고 답했을 정도였습니다.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명의 모두 허씨에 이름이 외자(한 글자)라니 신기하지 않나요? 한국 사람은 성(姓)을 제외하면 이름이 두 글자인 게 기본이지만 허씨 중에는 이렇게 유독 외자 이름인 인물이 많습니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許筠·1569~1618) 같은 옛날 사람은 물론 ‘농구 대통령’ 허재 국가대표팀 감독(52)도 이름이 외자입니다. 허 감독 큰아들인 농구 선수 허웅(24)도 그렇고, 역시 농구 선수인 허 감독 둘째 아들 역시 허훈(22)으로 이름이 외자입니다. 한글학회 이사장을 지낸 전 서울대 교수(언어학) 눈뫼 선생도 농구 선수하고 똑같이 허웅(1918~2004)입니다.방송인 중에서는 ‘의리’로 유명한 김보성 씨(51) 본명이 허석입니다. 김 씨는 데뷔 초에는 본명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거꾸로 본명이 이상룡인 방송인 허참 씨(69)도 예명을 외자로 지었습니다. 허씨 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외자 이름이 많은 걸까요?● 외자 이름은 특권이었다여기서 퀴즈 하나. 조선 정조의 이름은? MBC 연속극을 통해 친숙해진 것처럼 이산(李¤)이 정답입니다. 이때 산은 계산한다고 할 때 산(算)과 같은 글자입니다. 세종대왕 이름은 이도(李¤)인데 이 ‘¤’ 역시 세종대왕 이름을 적을 때 말고는 거의 쓸 일이 없는 글자입니다. 조선 철종처럼 태어났을 때는 임금이 될 가능성이 낮았던 왕족은 즉위하면서 이름을 고치는 일도 많았습니다.임금 이름을 이렇게 특이한 글자로 지은 이유는 뭘까요?한자문화권에는 기휘(忌諱) 또는 피휘(避諱)라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휘(諱)는 이름이라는 뜻이고 기와 피를 합치면 ‘기피’가 됩니다. 요컨대 이름을 밝히는 걸 꺼리는 전통이 바로 기휘 또는 피휘인 겁니다. 여전히 부모님 등 웃어른 성함을 이야기할 때 ‘김 ○자, ○자’처럼 말해야 예의바르다는 말을 듣는 건 바로 이 전통 때문입니다. 예전 사람들이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호를 지어 부른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이 전통에 따라 임금이나 성현(聖賢) 이름은 언급하는 것 자체가 불경죄에 속했습니다. 중국 당나라 태종 이름이 이세민(李世民)이라 불교에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세(世)를 빼고 관음보살이 됐고, 성현 중 성현이라 할 수 있는 공자 선생 이름이 공구(孔丘)라서 TK 지역에 있는 광역시 이름은 대구(大丘)에서 대구(大邱)로 바뀌었습니다.그런데 만약 일상적으로 쓰는 한자를 임금이 이름으로 쓰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의사소통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정조가 산(算)을 이름으로 썼다면 계산, 암산, 주산(珠算) 같은 말을 전부 쓸 수 없게 됩니다. 이름을 두 글자로 쓰면 이 부담이 더욱 커지겠죠? 그래서 사람들이 쓸 일이 별로 없는 한자를 골라 이름을 한 글자로 지었던 겁니다.여기서 시작해 왕조 시절에는 이름을 한 글자로 짓는다는 것 자체가 왕족만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허씨는 왕족도 아닌데 왜?허씨가 외자 이름을 쓰는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된 건 후삼국 시대 말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견훤과 한강 유역 패권을 두고 타투고 있던 왕건은 군량미가 떨어져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때 현재 서울 강서구·양천구 일대 호족이던 허선문(837~?)이 군량미는 물론 말과 군사까지 내주면서 왕건이 승리하도록 도왔습니다. 나중에 고려가 들어면서 왕건은 허선문의 공을 치하해 그에게 삼한공신(三韓功臣) 칭호와 함께 그가 본거지로 삼고 있던 공암(孔岩)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내렸습니다. 허선문은 공암 허씨(현재 양천 허씨) 시조가 됐습니다. 왕건은 그러면서 이 가문에 대를 걸러 외자 이름을 쓸 수 있는 특권을 줬습니다. 할아버지가 외자 이름을 쓰면 아버지는 건너 뛰고 손자가 다시 외자 이름을 쓸 수 있는 방식이었죠. 당시는 아직 호족 세력이 힘이 남아 있던 상태. 양천 허씨 가문은 “우리는 가야 김수로왕 때부터 왕족이었다”며 대대로 외자 이름을 쓰기로 결정합니다. 양천 허씨 가문이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건 가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김수로왕과 그의 비(妃) 허황옥(許黃玉)을 뿌리로 두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가문이 외자 이름을 쓰는 건 가문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수단인 겁니다.●그 부끄러운 전설은 사실일까?넓은 의미로 보면 배우 김수로 씨도 본명(김상중)과 이름이 같은 선배 연기자가 있어 피휘를 선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 씨는 광산 김씨로 이 본관은 김수로왕을 뿌리로 둔 ‘가야 계열’이 아니라 김알지를 뿌리로 하는 ‘신라 계열’입니다. 이런 역사 때문에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 그리고 이로부터 분파한 허씨는 뿌리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 집안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김수로왕과 왕비가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가야에 큰 불이 났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불을 끄려고 제 아무리 애를 써도 꺼지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하고 김수로왕이 불가에 소변을 보니 불이 꺼졌습니다. 이에 임금은 여기저기 소변을 뿌리고 다녔습니다. 그때 불똥이 수로왕 국부에 불똥이 튀었고, 남은 흉터는 결국 점이 됐습니다. 그 뒤로 두 사람 자손들은 고추에 점을 달고 태어난다고 합니다.물론 과학적으로는 신빙성이 떨어지는 이야기입나다만, 들리는 풍문에 아내 외도를 의심하던 양천 허씨 남편이 있었는데 아들이 태어나자 고추를 확인했고 점이 있어 안심했다나 뭐라나. 2015년 기준으로 33만 명이 못 되는 허씨는 그렇다고 쳐도 김씨는 김해 김씨만 446만 명에 육박하는데… 설마… 아니겠죠?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갓뚜기’ 이전에는 ‘갓양식품’이 있었다. 갓뚜기는 식품회사 ‘오뚜기’가 착한 기업이라며 누리꾼들이 맨 앞 글자를 ‘갓(god)’으로 바꿔 부르는 신조어. 갓양식품은 삼양라면을 만드는 회사를 같은 방식으로 바꾼 사례다.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해 보면 삼양식품이 아무 욕심 없이 한국 사람들 배고픔을 해결하는 데 앞장섰다는 ‘삼양라면의 진실’이라는 글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삼양라면이 누리꾼들에게 이렇게 칭송받은 데에는 ‘쇠기름(우지·牛脂) 파동’의 억울한 피해자였다는 점도 한 몫 했다. 이 때문에 동정 여론이 일었던 것이다.삼양식품으로서는 진짜 억울할 만했다. 검찰은 1989년 11월 3일 삼양식품 등 대형 식품 업체 관계자들을 ‘보건범죄 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 ‘식품위생법’ 혐의로 구속 입건한다. 그러면서 이들이 “비누나 윤활유 원료로 사용하는 공업용 수입 쇠기름을 사용해 라면 등을 만들어 시판했다”고 발표했다. 이제는 많이들 아시는 것처럼 이 쇠기름을 공업용으로 분류한 건 미국 기준에 따른 것이었다. 미국 사람들은 내장과 사골을 먹지 않기 때문에 이를 식용으로 분류하지 않았던 것. 상황을 가정해 설명하자면 미국에서 김을 공업용으로 분류했다는 이유로 한국 국수에 들어간 김을 문제 삼는 것과 똑같은 케이스였다. 실제로 지금도 16등급 쇠기름 중 3등급 이상은 식용으로 쓰는 업체가 적지 않다.당시 검찰도 아주 자신이 있던 건 아니었다. 검찰은 사건 첫날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공업용 우지가 인체에 유해한지 여부는 규명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먹거리에 대한 우려는 늘 증폭되는 법. 당시 동아일보는 “수사 과정에서 너무 엄청난 사실이 밝혀지자 이로 인한 미증유(未曾有·지금까지 한 번도 없던 일)의 파문을 고려, 이를 제외한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삼양식품이 대법원 판결로 혐의를 완전히 벗는 데는 8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대법원은 1997년 8월 26일 삼양식품 등 관련회사와 회사 간부들에게 모두 무죄를 확정했다. 이 기간 삼양식품이 휘청거린 게 당연한 일. 이 회사 홍보관은 이 사태 이전 60%에 달했던 시장 점유율은 15%로 떨어졌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사건 이후 한동안 라면업계에서 동물성 기름이 자취를 감추고 식물성 팜유가 대세가 됐지만, 이제는 팜유로 면을 튀기면 발암물질이 더 많이 발생한다는 것이 밝혀졌다.이 파동은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 때문에 지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파동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삼양식품 경쟁사인 농심의 법률고문으로 활동 중인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이 쇠기름 파동으로 반사이익을 본 농심에서 김 전 실장에서 은혜를 갚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하지만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해당 업체뿐 아니라 관련 업계 전체 매출이 줄어드는 게 일반적이다. 따라서 농심에서 30년 가까이 지난 상태에서 김 전 실장에게 보은을 했다는 건 다른 증거가 없는 이상 개연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다.사실 삼양식품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좀더 밀접한 인연이 있다. 삼양식품 창업주 전중윤 회장은 1979년 총 11억 원을 들여 ‘명덕문화재단’을 만들었다. 당시 11억 원은 서울 대치동 은마아파트를 50채 넘게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이듬해 7월 전 회장을 비롯한 이 재단 설립자 전원이 사퇴하면서 이 재단을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양도하기로 결정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 재단이 해산한 2012년까지 이사장을 맡았다. 나중에 ‘한국문화재단’으로 이름을 바꾼 재단이 해산하면서 남은 자산 13억 원은 박 전 대통령의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설립한 육영재단으로 넘어갔다.이에 대해 한 주간지는 “삼양식품은 1961년 (박정희) 정부의 금전 도움을 받아 라면 제조 기계를 도입했고 이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며 “박(전희) 전 대통령에 대한 고마움이 절절했던 전 회장이 보은 차원에서 맏딸인 박 후보(박 전 대통령)에게 자신이 설립한 재단을 맡겼던 것으로 짐작된다. 사실상 기부행위라 봐도 무방하다”고 분석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코끼리하고 판다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실제 동물끼리 맞붙으면 무게가 5t 정도 나가는 아시아코끼리를 판다(최대 160㎏)가 상대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두 동물이 대표하는 인도(코끼리)하고 중국(판다)은 어떨까요? 당연히 맞붙지 않는 게 최선입니다.그런데 두 나라 군대는 요즘 두 달째 도클람이라는 곳에서 대치 중입니다. 중국에서 둥랑(洞朗)이라고 부르는 이 지역은 원래 중국과 부탄이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곳입니다. 중국이 6월부터 이 지역에 도로를 건설하기 시작하자 부탄에서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있는 인도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인도군이 출동해 도로 건설을 막자 이번에는 중국에서 인도가 자국 영토를 침범했다고 주장하고 나서기 시작했습니다.그 뒤로 두 나라 군대는 돌을 던지면서 몸싸움을 벌이는 등 갈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인도군이 무장 헬기를 국경 지대에 배치하자 중국에서는 인도와 맞닿은 시짱(西藏) 자치구에 ‘헬기 킬러’로 불리는 지대공 미사일 훙치(紅旗)-17을 가져다 놓기도 했습니다.지도에서 도클람 찾아보면 이 지역이 왜 문제가 되는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탄 인도 중국이 만나는 꼭짓점 부근에 이 지역이 자리 잡고 있거든요.지형을 3차원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구글 어스’ 도움을 받으면 이 지역이 왜 영토 분쟁 불씨를 안고 있는지 더욱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정말 딱 분쟁하기 좋은 지역에 도클람이 자리잡고 있죠.사실 지금까지 지도에 인도라고 나온 시킴 주(州)도 특이한 곳입니다. 네팔과 부탄 사이에 있는 이 주는 1975년까지는 인도 보호국이기는 했지만 엄연한 독립 왕국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도의 22번째 주가 된 지금도 이 지역에 가려면 별도로 출입 허가를 받아야 하죠. 중국은 2003년까지 인도에서 시킴을 병합한 걸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인도는 또 중국이 도클람을 차지하면 흔히 ‘닭의 목(Chicken’s Neck)‘이라고 부르는 ’실리구리 회랑‘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장 좁은 곳이 폭 17㎞밖에 되지 않는 이 회랑은 인도 본토와 북동부에 자리 잡은 7개 주(州)를 연결하는 구실을 합니다. 만약 중국이 이곳을 차지하게 되면 인도 땅은 두 동강 나게 됩니다.인도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영국령 인도 제국이던 시절에는 이런 회랑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아래 그림에서 회색 부분이 전부 인도였습니다.그러다 1947년 독립 과정에서 종교적인 이유 등으로 각기 다른 나라로 독립하면서 이 회랑이 생겼습니다. 이슬람교를 믿는 파키스탄은 원래 동·서 파키스탄으로 나뉘었는데 1791년 동파키스탄은 다시 방글라데시로 독립했습니다. 과연 두 나라는 언제까지 대립할까요? 외교 문제에 정통한 이들은 다음 달 3~5일까지 중국 푸젠(福建)성에서 열리는 브릭스(BRICs) 정상회의가 분수령이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 자리에는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도 참석할 예정입니다. 제아무리 중국이라도 손님을 모셔놓고 국경에서 치고받는 건 좀 모양새가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도로서도 손님으로서 예의를 갖출 필요가 있겠죠.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양쪽에서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낼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측합니다.두 나라는 1962년에도 영토 문제로 전쟁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이때는 중국이 이겼죠. 그 뒤 인도는 중국이 티베트를 침략하는 걸 묵인했고, 중국은 인도가 네팔과 부탄을 ’보호‘하는 걸 묵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됐습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거짓말이 탄로 나는 데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1971년 8월 24일자 1면에 “23일 낮 경인가도를 피로 얼룩지게 한 난동 무장괴한들은 북괴 무장공비가 아니라 인천 앞바다 공군관리하에 있는 실미도에 수용 중인 ‘군(軍) 특수범’들로 밝혀졌다”고 전했다. 군 특수범은 군 복무 중 중죄를 저질러 군 교도소에 수감 중인 이들을 뜻한다.박정희 정부는 이 사건이 일어난 전날에는 대간첩대책본부를 통해 “무장공비 21명이 서울 침투를 기도했다”며 “(인천에서 처음 발견된) 이들 무장공비들은 민간버스를 탈취 부평 소사를 거쳐 서울 노량진 유한양행 앞까지 진출했다 군경예비군에 의해 저지됐다”고 발표했다.대간첩대책본부장이던 김재명 중장은 이날 “최근 남북적십자 간에 가족 찾기 제의와 호응이 오가는 사이 지난 16일부터 21일까지 닷새 동안 전 휴전선에 걸쳐 북괴가 24명의 무장공비를 다섯 차례 침투시켜 그 중 10명을 사살하고 아군 4명이 전사했다”며 ‘무장공비 서울 침투설’에 무게를 더했다.이 발표가 어딘가 미심쩍었던지 당시 동아일보는 1면 머리기사 제목에 이들을 ‘무장괴한’이라고 표현했지만 제목부터 ‘공비’라는 낱말을 넣은 매체가 대부분이었다. 실제로 이들은 군특수범이 아니었다. 예비역 육군 준장이던 이세규 신민당 의원(1926~93)은 이들이 공군 산하 무장특공대였다고 폭로했다. 정부는 이 의원의 입을 막아보려 했지만 사실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이듬해 ‘10월 유신’ 이후 이 의원은 한 해 동안 일곱 차례 연행돼 고문에 시달렸다.)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는 1971년 9월 16일 국회에서 이들이 군 특수부대 요원이라고 신분을 공개했다. 김 총리는 “특수범이라고 주장했던 정부의 말을 바꾼 것은 자유로운 매스컴 활동 등으로 우리의 한마디 한마디가 북괴 측에 알려지고 있는 점을 감안, 어느 시기 동안 특수범이라고 은닉 발표하는 것이 불가피했으나 이제 그 시기가 지났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이어 “평상시나 전시(戰時)를 막론하고 어느 나라 어느 군대든 특수부대를 갖고 있다. 특수부대의 편성 목적, 시기, 훈련 과정 등은 공개회의에서 말할 수 없지만 국회 조사위원회에서 충분히 조사를 끝냈다”면서 “정치 목적으로 이 부대가 사용되지 않느냐는 의문에 대해 전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북한은 박정희 정권에 위협이 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도움을 주는 존재이기도 했다. 만약 북한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사건 첫날 박정희 정권은 이들이 누구였다고 발표했을까. 임지헌 서강대 교수(사학)는 이런 관계를 ‘적대적 공범자들’이라고 규정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북한 김일성이 서로 적대하면서도 도와주는 공범이었다는 것이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해마다 오늘(8월 23일)은 ‘야구의 날’입니다. 야구 팬 중에는 한국 국가대표팀이 베이징(北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게 2008년 8월 23일이라 이날을 야구의 날로 정했다고 알고 계신 분이 많습니다. 얼핏 속기 딱 좋은 얘기입니다.(참고로 원래는 12월 11일이 비공식 야구의 날이었습니다. 1981년 프로야구 창립총회를 열었던 게 이날이었거든요. 2012년까지 골든글러브 시상식을 이날 열던 건 그런 까닭입니다. 2013년 이후 골든글러브 시상식은 12월 둘째 화요일.)실제로 이날이 야구의 날이 된 건 1997년 ‘김영진 팬 서비스 사건’ 때문입니다. 사연인즉 이렇습니다. 이날 대구구장에서는 안방 팀 삼성이 쌍방울을 불러들여 더블헤더(연속경기)를 치렀습니다. 더블헤더 1차전에서 삼성이 9회초 수비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4-0으로 앞서고 있었습니다. 9회초에 쌍방울이 1점을 따라붙었지만 2사 1, 2루라 아웃 카운트 하나만 더 잡으면 경기가 끝나는 상황이었습니다.쌍방울 김성근 감독은 장재중(46)을 대타로 냈습니다. 볼카운트 1볼 2스트라이크에서 삼성 투수 김태한(48)이 던진 공이 낮게 떨어졌고 장재중은 헛스윙 삼진. 이 공을 받은 삼성 포수 김영진(45)은 팬 서비스 차원에서 공을 관중석으로 던졌습니다. 당시 이 경기를 생중계하던 SBS는 종료 자막을 내보냈고 한국야구위원회(KBO) 온라인 경기 상황에서는 투수 승패 기록까지 모두 나온 상태였습니다.이날 주인공 김영진. 그는 프로야구에서 통산 타율 0.155, 5홈런, 45타점을 남긴 채 2001년 한화를 마지막으로 유니폼을 벗었습니다. 그런데 쌍방울 더그아웃에서 장재중을 향해 ‘1루로 뛰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삼성 백인천 감독도 김영진에게 ‘공을 1루로 던지라’고 소리쳤지만, 공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다음이었습니다. 김동앙 주심은 그대로 경기종료를 선언하려고 했지만 이런 일을 그냥 넘어갈 김 감독이 아니었습니다. 김 감독은 본부석으로 들어가려던 심판진을 구장 안으로 밀치면서 격렬하게 항의했습니다.김 주심은 김 감독에게 퇴장 명령을 내린 뒤 4심 합의를 거쳐 오심을 시인했습니다. 뭐가 오심이었을까요? 김태한이 던진 공이 원바운드로 들어왔거든요. 야구 규칙에 익숙한 분들은 잘 아시는 것처럼 이때는 ‘스트라이크 아웃 낫아웃’ 상황이 됩니다. 이때 타자를 아웃시키려면 수비팀은 공을 잡고 타자를 태그하거나 1루로 공을 던져야 합니다. 하지만 삼성은 먹고 죽으려고 해도 공이 없는 상황. 김영진은 “심판이 삼진 콜 하는 걸 듣고 공을 던졌다”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심판진은 결국 타자 주자를 포함해 각 주자가 두 베이스씩 진루하도록 했습니다. 쌍방울이 2-4로 뒤진 상태에서 주자를 2, 3루에 두고 공격을 계속하게 된 겁니다. 쌍방울 다음 타자 최태원(47)이 2타점 적시타를 때려 4-4 동점이 됐고, 쌍방울은 이후 두 점을 더 뽑으면서 6-4로 경기를 가져가게 됩니다.삼성 쪽에서 생각하면 오심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패배를 당한 겁니다. 이렇게 황당한 패배를 당하면 다음 경기에도 영향을 주는 게 보통. 하지만 삼성은 이날 2차전에서는 10-5로 승리하면서 아쉬움을 털어버렸습니다. 물론 2차전에서 삼성은 김영진 대신 양용모(50)에게 포수 마스크를 씌웠습니다. 그러니까 이날 대구 더블헤더에는 △대낮부터 야구장을 찾은 팬에게 승리구를 선물하고 싶은 팬 서비스 정신 △야구 규칙의 복잡한 아름다움 △실수를 인정하는 겸손함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는 ‘좌절 금지’ 정신 △패배를 이기는 가장 빠른 길은 승리라는 투쟁심 등이 모두 녹아 있던 겁니다.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홍재형 당시 KBO 총재는 이날 상황을 보고 받은 뒤 이런 정신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에 시달리고 있던 국민에게 용기를 줄 것으로 판단해 이날을 야구의 날로 지정하라고 지시 했습니다 …. 라는 건 물론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이날 이런 일이 있던 건 사실이지만 8월 23일이 야구의 날이 된 건 베이징 올림픽 야구 금메달 때문이 맞습니다.2010년 낫아웃 규칙이 바뀌어 이제는 이런 장면을 볼 수가 없습니다. 당시 장재중은 타석 근처를 둘러싼 흙을 벗어나 더그아웃으로 걸어가던 중이었습니다. 현재 규칙에 따르면 장재중은 이 부분을 벗어난 순간 자동으로 아웃입니다. 당시에는 더그아웃에 들어가는 시점에 아웃 선언을 하게 돼 있었습니다.아, 8월 23일은 프로야구 팬 사이에서 아주 유명한 ‘캡처 사진’이 세상에 나온 날이기도 합니다. 류현진(30·LA 다저스)은 2012년 이날 문학 방문 경기 8회말 수비 때 병살타성 타구를 유도했지만 2루수 실책으로 1사 2, 3루가 되자 아래 사진 같은 표정을 지었습니다.사실 그렇습니다. 누구나 실수를 하고, 때로는 그 실수가 다른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엎질러진 물은 이미 엎질러진 물. 실수를 만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일일 겁니다. 류현진도 저 고통을 이겨냈기에 메이저리거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그럼 야구팬 여러분 모두, 지난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야구의 날 보내세요.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저는 원래 제 (남)동생하고 부모님 이웃집에 사는 걸 꿈꿨습니다. 하지만 결혼한 뒤 그게 얼마나 허황한 꿈인지 알게 됐습니다. 자매끼리 부모님 댁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건 어렵지 않아도 형제끼리는 매우 힘들죠. ‘화장실과 처가는 멀면 멀수록 좋다’던 속담은 정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실제 통계를 봐도 20~40대 기혼 부부는 10년 전보다 장모님 댁 = 처가하고 가까이에 살고 있습니다. 성균관대 서베이리서치센터에서는 2003년부터 해마다 ‘한국종합사회조사(KGSS)’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 조사 항목에는 어머니 그리고 배우자 어머니와 떨어져 사는 거리를 여덟 단계로 표시하는 설문항목이 들어 있죠. 0은 같은 집에 사는 경우고 7은 해외에 사는 사례입니다. 그래서 점수가 낮을수록 (배우자) 어머니하고 가까이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2006년 자료를 살펴보면 20~40대 부부는 처가(4.16점)보다 시댁(3.95점) 가까이에 살았습니다. 가장 최신 자료인 지난해에는 처가(3.94)가 시댁(3.99)보다 가까워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시댁은 10년 전보다 멀어진 반면 친정은 많이 가까워졌습니다. 다만 이 자료는 ‘걸어서 15분 미만 거리(2점)’, ‘차나 전철 등으로 1~3시간 미만 거리(5점)’처럼 등급을 구분했기 때문에 실제 거리가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이에 대해선 성균관대 연구진이 지난달 ‘보건사회연구’에 게재한 논문 ‘친정과의 거리와 자녀출산’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연구진은 한국노동패널(KLIPS) 자료를 이용해 2000년 이후 혼인(초혼)한 가구를 대상으로 분석을 시행했습니다.그 결과 신혼부부 55.6%가 친정과 10㎞가 못 되는 지점에 신접살림을 꾸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0~20㎞ 지점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부부도 12.1%였으니까 3분의 2 이상(67.7%)이 친정과 20㎞ 미만 지점에 사는 셈이네요. 이렇게 친정 가까이 사는 이유는 뭘까.예상하시는 것처럼 ‘육아’ 때문입니다. 육아정책연구소에서 내놓은 ‘전국보육실태조사- 가구조사 보고’에 따르면 친정 부모(21.9%)가 시부모(15.3%)보다 양육에 도움을 주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그러니 친정집 근처를 선호하는 거죠.연구진은 신혼부부가 친정과 얼마나 떨어져 사는지 다섯 등급으로 나눠 첫째아이 출산 시기 차이를 조사했습니다. 친정하고 제일 가까이 사는 신혼부부가 첫 번째 아이를 제일 먼저 낳았습니다. 그렇다고 멀리 살수록 아이를 늦게 갖지는 않았습니다.이에 대해 연구진은 “손쉽게 친정 부모의 자녀 돌봄 지원 가능성을 기대해 볼 수 있는 거리 내에서는 친정 부모와 가까운 범주에 거주할수록 자녀출산이 촉진되지만 현실적으로 일상적 방문 또는 돌봄 지원이 용이하지 않은 거리(여기서는 50㎞ 이상)에서는 거리에 따른 이용교통수단의 차이(및 이에 따른 방문소요시간의 차이) 등으로 친정 부모와의 절대적인 거리에 비례하는 형태로 자녀출산 속도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풀이해볼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게 우리가 사는 현실이지만 놀랍게도(?) 시부모는 한 낱말이지만 친정 부모는 한 낱말이 아닙니다. 따라서 ‘친정_부모’라고 띄어 쓰는 게 올바른 표기법입니다. 이 정도면 유부녀 여러분들 항의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이들이 외할아버지·할머니는 그냥 할아버지·할머니라고 불러도 친할아버지·할머니는 ‘○○동 할아버지·할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한 게 언제부턴데요? 아, ‘그래서 너는 어디 사느냐’고요? 네, 저도 아파트 바로 옆 동이 처가입니다. 본가는? N포털에 물어보니 45.6㎞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저도 몰랐는데 저 트렌드에 민감한(?) 남자였나 봅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는 생각은 누구나 한번 쯤 해보셨을 터. 특히 자기는 몰라도 자녀는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신 부모님들이 적지 않으실 것이다. 특히 자기 생각을 그림으로 나타내는 ‘비주얼 싱킹(Visual Thinking)’이 사고력 발달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늘면서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 80년 전 조상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1937년 8월 22일자 동아일보는 ‘어린이 일요(日曜)’ 꼭지에서 ‘재미있고 쉽사리 되는 사생 잘하는 비결’을 소개했다. (사생·寫生은 ‘실물이나 경치를 있는 그대로 그리는 일’이라는 뜻.) 당시 동아일보는 “어디를 가든지 조그만 스켓치뿍(스케치북)과 연필은 잊지 말고 가지고 다니라”며 “시집간 누이가 오거든 경대 앞에 앉아 화장하는 것을 몰래 슬쩍 스케치 해보라. 나중에 누나가 보면 깔깔대고 웃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1934년 처음 지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어린이 일요’는 요즘 어린이에게 읽어줘도 부족하지 않은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해 10월 14일자는 “아침에는 다리가 네 개, 점심에 두 개, 저녁에 세 개인 것은?”이라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소개했다. 1937년 10일 10일에는 나뭇잎에 단풍이 드는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7월 28일자에는 나폴레옹이 못 건넌 도버 해협을 독일군이 건널 준비를 하고 있다는 무시무시한 소식(아래 사진)을 전하기도 했다. 자식들을 우리보다 하나라도 더 알고, 하나라도 더 나은 사람으로 키우고 싶은 마음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에 살던 부모님들 역시 같았던 셈이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야구보다 축구가 훨씬 위험합니다. 아, 이건 어디까지나 비밀번호(password) 이야기입니다. 21일 인터넷 사이트 계정(ID)과 비밀번호를 관리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드는 회사 ‘스플래시데이터(www.splashdata.com)’에 따르면 ‘축구(football)’는 전 세계 누리꾼들이 지난해 다섯 번째로 많이 쓴 비밀번호였습니다. 게다가 2014년 10위, 2015년 7위, 지난해 5위로 순위 상승도 가파릅니다. 반면 야구(baseball)는 2012년 10위, 2014년 8위, 2015년 10위를 거쳐 지난해에는 10위권 바깥으로 사라졌습니다.비밀번호를 정할 때 복잡한 조합을 요구하는 사이트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지만 지난해 사람들이 제일 많이 쓴 비밀번호는 여전히 ‘123456’이었습니다. 그다음은 ‘패스워드(password)’ 그 자체. 이어서 ‘12345’, ‘12345678’이 뒤를 이었습니다. 이렇게 숫자를 조합하는 패턴이 가장 흔한 비밀번호 10개 중 6개를 차지합니다.‘qwerty’가 꾸준히 인기인 것도 눈에 띕니다. qwerty는 컴퓨터 키보드에서 문자가 나오는 맨 첫 줄 맨 왼쪽 여섯 글자를 차례대로 친 겁니다. 이 때문에 이렇게 키를 배열한 키보드를 ‘쿼티(qwerty)식 키보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동물 중에서는 ‘원숭이(monkey)’하고 ‘용(dragon)’이 인기입니다. ‘letmein’은 ‘나를 들여보내 달라(Let Me In)’는 뜻. ‘trustno1’은 ‘신뢰도 제일(Trust No. 1)’이라는 뜻으로 썼겠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흔히 쓰기 때문에 뚫리기 딱 좋은 비밀번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iloveyou 역시 해커가 사랑하는 비밀번호로 손꼽을 만합니다. 영어 알파벳 대·소문자 각 26개, 숫자 10개, 특수문자 33개를 조합해 여덟 자리 비밀번호를 만든다고 하면 경우의 수는 700조 개 가까이 나옵니다. 그런데 실제로 비밀번호 유출 사례를 보면 사람들이 제일 많이 쓴 비밀번호 10개가 나머지 전체 조합보다 많은 일도 적지 않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렇게 흔한 비밀번호를 많이 쓰는 건 물론 외우기 쉽기 때문입니다. 비밀번호를 만들 때 대소문자와 특수문자, 숫자를 반드시 조합하라고 강제해도 사람들은 ‘P@$$w0rd’처럼 외우기 쉽게 만드는 게 대부분입니다. 이 역시 해커들이 사전(dictionary)에 넣고 공격 대상으로 삼는 낱말일 뿐입니다.이 때문에 보안 전문가들은 낱말이 아니라 문장으로 비밀번호를 설정하는 게 좋다고 조언합니다. 예를 들어 마음에 드는 여성을 찾은 남성이 있다면 ‘Ask@her4date(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하자)’ 같은 비밀번호를 쓰면 좋다는 이야기입니다. 너무 낯간지럽다고요? 아래 기사를 읽고 비밀번호로 인생을 바꾼 남성 스토리를 알게 되신다면 생각을 바꾸실지 모릅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요즘 일본은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 열기로 뜨겁습니다. 이 대회 개최 장소는 그 유명한 한신고시엔(阪神甲子園)구장. 이곳 이름을 따서 이 대회를 그냥 ‘고시엔’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구장 명칭에 들어 있는 것처럼 효고(兵庫) 현 니시노미야(西宮) 시에 있는 이 구장은 원래 일본 프로야구 한신이 안방으로 쓰는 곳입니다. 고시엔 기간에는 이 구장에서 경기를 치를 수 없기 때문에 예전에 한신은 이 대회가 열리는 약 20일 동안 모든 일정을 방문 경기로 소화해야 했습니다. 3주 동안 방문 경기만 치르면 성적에도 악영향을 주는 게 당연한 일. 열성적이기로 유명한 한신 팬들은 이 방문 연전을 ‘죽음의 원정(死のロード)’이라고 부르며 제도 개선을 요구하기도 했죠. 그래서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오사카에 돔구장이 문을 연 1997년 이후에 한신은 고시엔 기간 이 돔구장을 임시 안방으로 쓰게 됐습니다. 원래 오사카돔이라고 부르던 이 구장은 교세라(京セラ) 그룹과 명명권 계약을 맺으면서 2006년 7월 1일부터 ‘교세라돔 오사카’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야구팬들에게 교세라는 이 구장 이름으로 유명하지만, 주부들에게는 가볍고 강한 세라믹 칼(사진)로 유명한 회사입니다.교세라는 1959년 ‘교토 세라믹(京都セラミツク)’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자세히 보시면 현재 사명도 이 이름을 줄인 형태입니다. 이 회사를 세운 건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 명예회장(85). 그는 ‘회생 불능’ 판정을 받은 일본항공(JAL)을 살려낸 인물로도 유명합니다.이나모리 회장의 아내는 아사코(朝子) 여사. 아사코 여사 아버지는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1898~1959)입니다. 그러니까 우 박사가 이나모리 회장의 장인이 되는 셈입니다. 이나모리 회장은 한국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경기 수원 시에 있던 장인어른 실험장에 두 번 정도 방문한 적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그런데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우 박사는 씨 없는 수박을 처음 만든 사람이 아닙니다. 1950년 우 박사가 귀국했을 때까지도 한국에서는 육종학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습니다. 이에 우 박사는 씨 없는 수박을 만드는 ‘기적’을 통해 농업 기술 중요성을 홍보하려 했던 겁니다. 우 박사는 1935년 ‘종(種)의 합성’ 이론을 다룬 논문으로 일본 도쿄(東京)대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 이론은 진화론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결국 찰스 다윈(1809~82)이 쓴 ‘종의 기원’ 내용 일부를 수정하게 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씨 없는 수박 역시 이 이론을 토대로 일본인 교수가 처음 만든 겁니다.세계적인 농학자 우장춘 박사. 그는 자식들에게 양부(養父)를 따라 ‘스나가(須永)’라는 성(姓)을 붙여줬지만, 본인은 계속 우(禹)씨 성을 고집했습니다. 영어 논문에 이름을 쓸 때도 이름 장춘(長春)은 일본식으로 나가하루(Nagaharu)라고 했지만, 성은 우(U)로 적었습니다.우 박사가 이론적으로만 뛰어났던 것도 아닙니다. 그가 없었으면 우리가 먹는 김치도 지금과 전혀 다른 모양이었을지 모릅니다. 현재 우리가 먹는 배추는 우 박사가 만든 원예 1, 2호를 기초로 개량한 품종이고, 깍두기를 담글 때 쓰는 무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제주도에 감귤과 유채꽃 재배를 권한 것 역시 우 박사였습니다. 강원도에 감자가 흔해 짓궂은 누리꾼들이 ‘감자국(國)’이라고 놀릴 정도가 된 것도, 가을이면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을 떠올리는 것도 모두 우 박사 업적이죠. 1959년 우 박사가 십이지장궤양으로 병상에 눕자 정부는 문화포장을 수여했습니다. 우 박사는 훈장을 어루만지면서 “고맙습니다. 아버지 나라가 나를 알아줘서…”라고 감격해 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조금만 더 일찍 알아주지…”라며 서글프게 눈물을 흘렸다고 하네요.우 박사의 아버지는 우범선 씨(1857~1903). 그는 명성황후시해사건(1895년)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우 박사는 일본으로 망명한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런 출생 배경은 지금도 누군가 문제 삼을 소지가 다분한 게 사실. 해방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당시에는 더했습니다. 우 박사는 훈장을 받고 나서 사흘 뒤에 숨졌고, 수원 농촌진흥청에 묻혔죠. 우 박사 가문과 수원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나모리 회장은 나중에 수원을 대표하는 인물과 인연을 한 번 더 맺기도 했습니다. 주인공은 축구 선수 박지성(36). 그가 일본 프로축구 J리그에서 뛸 때 소속팀이었던 교토 퍼플 상가(현 교토 상가 FC)의 후원 기업 중 하나가 교세라입니다. (참고로 상가·サンガ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온 말로 ‘동료’라는 뜻입니다. 가게를 뜻하는 상가·商家하고는 관련이 없습니다.)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박지성이 네덜란드 리그에 진출하려 하자 이나모리 회장은 직접 박지성을 만나 잔류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가 네덜란드 에인트호번 행을 결정하자 이나모리 회장은 박지성과 다시 만나 “박 군, 언제든 돌아온다면 환영하겠다”고 말하며 아쉬워했습니다.어떻습니까. 세상만사는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얼기설기 엮여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하리….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6·25전쟁 이후 북한과 미국이 실제로 전면전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때는 언제일까. 많은 역사학자들이 1976년 8월 18일이라고 의견을 모은다. 이날은 그 유명한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벌어진 날이다. 이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는 한미 경비병과 노무자 5명이 남측 관측소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 가지를 자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북한군이 가지를 잘 치는 법을 알려주는 등 작업이 순조로웠다. 그때 북한군 박철 중위가 부하들을 데리고 와 ‘가지치기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아서 보니파스 미군 대위는 이를 묵살하고 작업을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박철이 북한군 30여 명을 추가로 불렀다. 이들은 손에 쇠몽둥이와 도끼를 들고 있었다. 북한군이 남쪽 사람들을 포위한 상태로 박 중위가 재차 작업중단을 요구했다. 이번에도 보니파스 대위가 요구에 따르지 않자 박 중위는 손목시계를 풀어 손수건으로 감싼 뒤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죽여!”보니파스 대위는 도끼에 머리가 찍혀 현장에서 즉사했다. 마크 바렛 중위 역시 북한군으로부터 습격당한 사병을 도우려다 사망했다. 미군 기동타격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북한군이 군사 분계선을 넘어간 다음이었다.당시 유엔군 사령관 리처드 스틸웰 미 육군대장은 일본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 전투기 뒷자리에 탑승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은 이튿날(8월 19일) 군사정전위원회 개최를 요구했지만 북한은 불참했다. 그러면서 “미군이 나무를 자르는 것을 보고 경비병들이 제지하러 나섰다. 그 순간 갑자기 미군이 도끼를 던져 날아오는 도끼를 손으로 잡아 되던졌는데 보니파스 대위가 맞아 죽었다”고 주장하며 오히려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협상이 결렬되자 주한유엔군과 한국군은 6·25전쟁 이후 처음으로 준전시체제에 돌입했다. 북한군도 이에 맞서 북풍 1호를 발동해 전군 완전무장을 지시했다. 이렇게 양쪽이 맞서는 가운데 미군은 ‘폴 버니언 작전’을 세웠다. 표면적으론 ‘미루나무를 자른다’는 것이지만 북한이 도발해 온다면 휴전선을 넘어 개성을 탈환하고 연백평야 깊숙한 곳까지 진격한다는 내용이었다. 8월 21일 오전 7시. 한미 호송차량 23대가 북한 측에 사전 통보 없이 공동경비구역으로 진입했다. 미군 공병대원 16명은 전기톱과 도끼로 미루나무를 베어 내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미군 보병이 탄 다목적 헬기 20대와 공격용 헬기 7대가 떠 있었다. 그 위로는 B-52 폭격기 가 전투기 엄호를 받으며 선회 중이었다. 대구에는 핵미사일을 장착할 수 있는 F-111 편대가 미국 아이다호 주에서 날아와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에는 미드웨이급 항공모함과 순양함 5척이 대기 중이었다.북한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미루나무를 모두 자르는 순간 폴 버니언 작전은 끝이었다. 그러나 일꾼으로 위장해 현장을 엄호하고 있던 특전사 제1공수특전여단 대원 64명은 그대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M16 소총으로 무장한 이들은 손에 도끼와 몽둥이를 들고 북한군 초소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차례로 북한군 초소 4곳을 파괴했다. 미군 트럭 운전병이 이들을 막아서려 하자 권총으로 위협하는 일도 있었다.이들이 미군과 맞서면서까지 북한 초소로 쳐들어 간 건 박정희 대통령의 분노 때문이었다. 이 사건을 처음 접한 뒤 박 대통령은 “우리도 참는 데 한계가 있다. 내 군화와 철모를 가져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이 특공대를 만든 것부터 박 대통령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만약 북한에서 반격한다면 박 대통령은 전쟁도 불사할 것처럼 보였다.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 특전사 대원들이 침입해 난장판을 만들자 북한군은 초소를 비우고 도망가고 말았다. 이날 북한군 부대 통신을 감청한 미군은 “그들은 겁을 먹고 있었다”고 했다. 상황이 모두 끝난 뒤 북한 측 군사정전위 수석대표 한주경 소장이 미국 측 수석대표에게 비밀 면담을 요청했다. 한 소장은 그 자리에서 유감을 표명한 김일성의 친서를 전달했다. 미국은 논란 끝에 이 친서를 사과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이 사건 이후 북한이 직접 미국을 상대로 무력도발을 벌인 적은 없다. 방송에서는 미국을 맹비난해도 실제로 건드린 적은 없는 것. 미국 본토가 공격당한 9·11 테러 때는 오히려 테러리즘을 맹비난하면서 ‘우리가 한 일이 아니다’고 강조하기까지 했다. 북한은 이번에도 “괌을 공격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김정은 노동위원장이 “미국 놈들의 행태를 좀 더 지켜볼 것”이라고 말하면서 발을 빼는 분위기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정말입니다. 달걀 색깔로 ‘아재 테스트’가 됩니다.“나는 어릴 때 흰 달걀을 먹은 적이 있다. O 또는 X?”여기서 O를 선택하셨다면 ‘아재’입니다. 인정하셔야 합니다. 진짜 그렇습니다. 요즘 흰 달걀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요즘 ‘살충제 달걀’ 때문에 아주 난리가 났습니다. 그걸 핑계 삼아 제 주변에 (아주 드물게) 있는 1990년 이후 출생자에게 ‘흰 달걀’에 대해 물었더니 ‘그런 건 외국에나 있는 거 아닌가요?’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더군요. ‘부활절 때 흰 달걀에 그림 그려보지 않았냐’고 물어도 구석기 시대 사람처럼 쳐다보더군요. 요즘에는 파라핀에 담가서 색깔을 낸다고 합니다. (네, 저는 가톨릭 냉담자입니다.)그래서 자료를 뒤져 보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흰 달걀은 언제 우리 곁에서 사라졌을까?한국가금학회에서 펴낸 ‘1993 한국의 양계’에 해답이 들어 있었습니다. (가금·家禽은 집에서 기르는 거위, 닭, 오리 같은 날짐승을 뜻하는 낱말입니다.) 갈색산란계(褐色産卵鷄) 그러니까 갈색 달걀을 낳는 닭 사육 비율은 1991년 이미 98%에 달했습니다. 대한양계협회에 물어봤더니 현재 이 비율은 99%까지 올랐다고 합니다.1986년에 갈색 달걀을 낳는 닭을 키우는 비율이 이미 60%를 넘어섰으니 아직 나이가 30대 중반 이하이신 분들은 흰 달걀을 잘 보지 못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니 아재들만 ‘흰 달걀 전성시대’에 살았던 셈입니다.그러면 어떤 닭이 흰 달걀을 낳고, 어떤 닭이 갈색 달걀을 낳을까요? 알 낳는 닭은 크케 레그혼 같은 흰색 품종과 로드 아일랜드 레드, 뉴 햄프셔 같은 갈색 계통 품종으로 나뉩니다. 깃털 색이 그렇다는 뜻이죠. 깃털 색을 결정하는 색소가 달걀 껍데기 색깔도 결정합니다. 그래서 흰 닭은 흰 달걀을 낳고, 갈색 닭은 갈색 달걀을 낳습니다.백인종이라고 황인종보다 더 뛰어난 인종이 아닌 것처럼 달걀 색깔도 맛이나 영양분 등에서 의미 있는 차이를 만들어내지는 않습니다. 예전에 흰색 달걀이 많았던 건 흰 닭이 사료를 적게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생산비도 낮출 수 있었습니다.그러다 기술 발달에 따라 갈색 닭도 달걀 생산력이 올라가면서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양계협회 관계자는 “흰 닭은 보통 달걀 생산만 가능하지만 갈색 닭 품종은 달걀과 고기를 모두 얻을 수 있는 난육(卵肉) 겸용 품종이어서 농가에서 갈색 닭을 더 선호하기 시작했다”면서 “1980~90년대 달걀 유통업체에서 ‘토종 달걀’, ‘황금달걀’ 마케팅을 벌여 소비자들도 갈색 달걀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실제로 2003년 국립수의과학검역원, 양계협회, 우송대, 충남대 공동 연구진이 내놓은 논문 ‘난각색에 대한 한국 소비자 기호도 조사’에 따르면 9점 만점을 기준으로 했을 때 한국인들은 갈색 달걀에 6.27점을 준 반면 가장 흰 달걀에는 4.51점밖에 주지 않았습니다.연령대별로 봐도 20~30세를 제외하면 모두 제일 갈색 달걀을 제일 좋아했습니다. 가장 젊은 이 세대는 제일 흰 달걀에 제일 낮은 점수를 준 유일한 집단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확실히 젊은 세대에게 흰 달걀은 낯설다고 봐도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물론 갈색 달걀을 선호하는 게 전 세계적인 현상은 아닙니다. 독일 소재 육종 회사 로만 티어주흐트에서 추정한 자료에 따르면 아프리카, 유럽, 동아시아에서는 갈색 달걀을 선호하지만 라틴아메리카, 북아메리카, 중동에서는 흰 것을 선호하죠.그래도 색깔보다 더더욱 중요한 건 역시 신선도일 터. 다시 흰 달걀을 먹어 보고 싶은 마음 정도는 얼마든 포기할 수 있습니다. 갈색 달걀이라도 아무 걱정 없이 먹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꾸신다면 아래 추천 버튼을 힘차게 눌러주세요!!!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해마다 광복절(8월 15일)이 되면 일본 정치인들이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참배할 것인지 아닌지 관심이 쏠립니다. 그때마다 따라오는 표현이 이 신사가 “A급 전범을 합사(合祀)했다”는 겁니다. 도대체 A급 전범은 뭐고, 합사는 무엇이기에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문제가 될까요?전범(戰犯)은 일단 ‘전쟁 범죄인’을 줄인 말입니다. A급 전범은 문자 그대로 그 중에서 A급(級)이라는 뜻입니다. A급이 있으면 있을 터. 실제로 B급 전범과 C급 전범도 있습니다. 그러면 A급 전범이 제일 나쁜 사람들이고 B, C로 내려갈수록 덜 나쁜 사람들일까요?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군은 이 전쟁과 관련된 동아시아 전범을 심판할 수 있도록 극동군사재판을 열었습니다. 이 재판에 필요한 조례를 만들면서 제5항 a, b, c조에 전범 분류 조항을 넣었습니다. 이 a~c조에 해당하는 전범이 바로 A~C급 전범입니다.이 조례에 따르면 △A급은 평화에 대한 죄(crimes against peace) △B급 통례의 전쟁 범죄(conventional war crimes) △C급은 비인도적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를 저지른 사람입니다.그러니까 혈액형 중에서 A형이 B형보다 더 품질(?)이 뛰어난 게 아니듯이 A급 전범이라고 꼭 BC급(보통 이렇게 붙여 씁니다) 전범보다 더 악랄한 건 아닙니다. 당연히 처벌도 ‘케바케(케이스 바이 케이스)’였습니다. A급 전범인데 징역형만 받은 사람도 있고, (보통 이렇게 붙여 씁니다) BC급 전범인데 사형을 선고받은 이들도 있습니다.그런데도 왜 A급 전범이 문제가 되는 걸까요? 이 조례가 스스로 증명하는 것처럼 어떤 급 전범이 되려면 일단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재판을 받으려면 기소를 해야 하죠. 극동군사재판에서는 A급 전범으로 분류 가능한 인물 중에서 고위 군사 지휘관과 정부 각료만 기소했습니다. 그 결과 실제로 전쟁을 기획하고, 주도한 인물이 A급 전범이 됐습니다.그러면 합사는 뭘까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합사는 ‘둘 이상의 혼령을 한 곳에 모아 제사를 지낸다’는 뜻입니다. 야스쿠니 신사 문제에서 합사는 ‘한 곳에 모아’에 방점이 찍힙니다. 현재 야스쿠니 신사 영새부(靈璽簿·죽은 이의 이름과 간단한 사항을 적은 책)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A급 전범 14명을 포함해 총246만6532 명. (야스쿠니 신사에는 전사자들 위패가 없습니다.) 야스쿠니 신사는 “한번 합사한 제신(祭神)을 빼는 것은 불가능하며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따라서 A급 전범을 합사했다는 건 이들을 원래 이 신사에서 메이지(明治) 시대 이후 제사를 올렸던 다른 전사자들과 똑같이 취급하겠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이들을 전범으로 규정한 극동군사재판 판결을 부인하는 행위고, 이건 침략 책임을 부인하는 행위가 됩니다. 사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 일본 정치인들이 여러 차례 이 신사를 참배했지만 1978년까지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해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자 동아일보는 ‘일본 우경화의 계절’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내며 비판했습니다. 1978년은 야스쿠니 신사에서 이 A급 전범을 합사한 해입니다. 야스쿠니 신사는 분명 일본 국왕(일왕)의 군대(황군)를 미화하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전쟁 당시 재임 중이던 히로히토(裕仁) 일왕조차 A급 전범을 합사한 1978년 이후로는 이 신사를 한번도 찾지 않았습니다. 그건 아키히토(明仁) 현재 일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왕가에서 보기에는 A급 전범 14명이 쓸데없이 전쟁을 벌여 자기들 목숨을 위태롭게 만든 존재일 테니까요.사정이 이런 데도 일본 보수 세력은 아소 다로(麻生太郞) 전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는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 같은 곳”이라고 발언하는 등 야스쿠니 신사를 옹호하기 바쁩니다. 그러니 이렇게 주장하고 싶습니다. “정말 그렇게 만들고 싶으면 말도 안 되는 논리 집어치우고 일단 A급 전범부터 분사(分祀)하라”고 말입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6248’. 최근 일주일 동안 제 하루 평균 걸음걸이 숫자입니다. 요즘에는 따로 만보계 같은 도구를 쓰지 않아도 하루에 몇 걸음을 걸었는지 스마트폰이 자동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숫자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숫자는 한국 사람 평균보다 많을까요? 적을까요?14일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팀에 따르면 한국 사람은 하루에 평균 5755걸음을 걷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한국 사람 평균보다 8.6% 정도 더 걸어 다닌 셈입니다. 스탠퍼드대 연구팀 역시 스마트폰 데이터를 가지고 조사했습니다. 걸음걸이를 알려주는 특정 어플리케이션(앱) 데이터를 가지고 이 앱 사용자가 최소 100명이 넘는 전 세계 111개국 71만7527개국 하루 평균 걸음 숫자를 알아봤습니다. 누적 날짜 숫자로는 6800만 일이 넘는 ‘빅데이터’를 모은 겁니다.연구팀은 이 중에서 사용자가 1000명이 넘는 46개국 데이터를 국제학술지 ‘네이처’를 통해 공개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한국 사람들은 전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많이 걷습니다.당연한 얘기지만 나라별 평균이 높다고 그 나라 사람 건강이 좋아지는 건 아닙니다. 아래 있는 추천 버튼까지 다 누르셨다며 이제 밖에 나가서 걸으실 차례입니다. 스마트폰 화면 보시면서 걸으면 위험하니까 조심하시고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얼마 전 사석에서 만난 한 서울 소재 모 여대 여성학 교수님 말씀.“저 어릴 때 밥 먹을 때마다 엄마가 오빠 앞으로 맛있는 반찬 밀어다 주는 게 너무 싫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여성학을 공부하게 됐는지 몰라요. 근데 웃기는 건요 어느새 보니까 저도 딸은 놔두고 아들 앞으로 맛있는 반찬 밀고 있더라니까요.”‘딸 바보’들 전성시대에 이 교수님이 특이하신 걸까요? 아니면 여전히 저렇게 생각하는 어머니가 적지 않을 걸까요? 한번 데이터로 알아보겠습니다.● 확실히 딸을 원한다!이제 ‘그래도 아들 하나는 꼭 있어야 한다’는 말은 사극 대사처럼 들리는 시대가 됐습니다. 실제로 성균관대 서베이리서치센터에서 실시하고 있는 한국종합사회조사에 따르면 2008년에서 2012년 사이에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2012년 이후 줄곧 아들보다 딸을 선호하는 의견이 많이 나오거든요. 선호 자녀 성별을 물어본 가장 최신 자료인 2014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딸을 선호한 응답자가 아들을 선호한 응답자보다 64.6% 많았습니다.태어난 순서에 따른 성비를 봐도 아들을 선호하던 분위기가 빛이 바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010년대 초반만 해도 셋째 이상에서는 아들이 태어나는 비율이 더 높았습니다. 아이가 배 속에 있을 때 성별을 알아보고 딸이면 낳지 않았던 것. 2015년에는 셋째 이상 성비도 105.6으로 ‘자연 성비’ 범위를 유지하고 있죠. 원래 진화적으로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보다 더 많이 태어나기 때문에 성비가 103~107 사이에 있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아예 직접 성별을 고를 수 있는 입양은 더 심합니다. 국내 가정에서 입양한 사례를 보면 20002년 이후 딸을 선택한 비율이 60%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죠. 한 입양기관 관계자는 “실제 입양 신청자 10명 중 9명은 딸을 원한다. 그나마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어서 이 정도 비율에 그치는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아들, 딸 똑같다?그러면 키울 때도 아들과 딸이 똑같을까요?통계적으로 이를 알아본 논문 ‘Transition of Son Preference: Evidence from Korea’가 지난달 26일 세상에 나왔습니다. 논문 제목은 영어지만 한양대 최자원 교수(경제학)와 한국외대 황지수 교수(국제통상학)가 연구에 참여했습니다. 연구진은 사교육비조사, 생활시간조사, 한국노동패널조사 같은 조사 결과를 활용해 첫 아이가 아들과 딸일 때 양육 스타일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조사했습니다.그 결과 첫 아이가 아들일 때 어머니가 복직할 확률은 9% 포인트 내려갑니다. 연구진은 이를 “딸보다 아들을 어머니가 직접 키우는 확률이 높은 것”이라고 분석했죠. 그러면서 “첫 아이가 아들일 때 둘째를 낳을 확률이 내려간다는 점을 고려하다면 더욱 놀라운 일”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자연스레 자녀가 아들일 때 어머니가 일주일에 일하는 시간도 줄어듭니다. 기본적으로 어머니가 계속 일을 하지 않으면 주당 근무시간이 제로(0)이기 때문입니다. 출산 후 2년을 기준으로 하면 아들을 낳은 어머니는 주당 근무시간이 1.44시간 줄고, 5년 후에는 2.05시간이 줄어듭니다.한국에서는 또 아들에게 딸보다 집안일을 절반 정도밖에 시키지 않습니다. 10~18세 아들이 1주일에 집안일을 평균 0.99시간 도울 때 딸은 1.89시간을 돕습니다. ‘평소에 집안일을 돕는다’는 비율도 아들은 27.8%로 딸(44.4%)보다 16.6%포인트 낮았죠. 또 아들은 학원비도 더 많이 씁니다. 중학생 국어, 영어, 수학 학원을 기준으로 아들은 한 달에 평균 26만2250원을 학원비로 쓰지만 딸은 23만2530원으로 아들보다 2만9700원이 적습니다. 또 아들을 가진 부모님은 딸을 가진 부모님보다 성적이 떨어졌을 때 학원비 지출을 더 많이 늘립니다. 아들을 낳은 부모는 딸을 낳은 부모보다 자식 ‘가방끈’이 0.3년 정도 더 길기를 기대하기도 했죠. 연구진은 아들과 딸이 모유 수유 기간에서도 차이가 나는지 조사했는데 이 부분에서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를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하네요.물론 학원비를 논할 정도로 자란 세대는 아직 남아선호사상이 남아 있을 때 태어난 친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1999년에 아들을 낳은 어머니는 딸을 낳은 어머니보다 7시간 적게 일했습니다. 아들과 딸이 집안일을 돕는 시간 차이도 1시간에서 0.7시간으로 줄어들었죠. 앞으로는 이런 구분이 점점 더 사라질 겁니다. 지금은 문자 그대로 남아선호사상이 과도기(in transition)를 지나고 있는 거니까요. 그마저 끝물입니다.그러니 교수님, 제가 보니까 아드님 팔 길더라고요. 그냥 반찬 그 자리에 놔둬도 잘 먹을 겁니다. 굳이 따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아, 그나저나 옛날에 그렇게 아들만 좋아해서 어떻게 됐을까요? 지난달 말 주민등록인구를 기준으로 20~24세 인구 중에서는 남성이 여성보다 20만3344명 많습니다. 25~29세도 16만1013명 차이입니다. 그러니 20대 남성 여러분, 힘내세요. 여러분이 연애를 못하는 건 꼭 여러분 잘못만은 아닙니다. ㅠㅠ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1999년 8월 24일 ‘옷 로비’ 청문회장. 온통 흰색 차림에 짙은 화장을 한 한 남자가 들어섰다. 그는 증인 선서 때 자기 이름을 ‘앙드레 김’이라고 소개했다. 그러자 목요상 당시 국회 법사위원장(82)으로부터 “본명을 밝히라”는 지적이 나왔다. 그는 자기 이름을 ‘김봉남(金鳳男)’이라고 수정했다. 이 장면은 당시 TV 전파를 타면서 화제가 됐다. 온 국민이 가장 세련된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가장 토속적인(?) 이름을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특별검사(특검)제도를 도입한 이 로비 사건이 결국 흐지부지 끝나자 “검찰에서 밝혀낸 건 앙드레 김의 본명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당시 ‘김봉남’은 한국을 뒤흔든 세 글자가 됐다.이를 비아냥거리는 듯한 칼럼도 나왔다. 당시 한 매체는 “자기는 관계없이 얼떨결에 (청문회장에) 불려나온 듯 요상한 표정을 짓던 한국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 ‘봉남 킴’(앙드레 김)도 그중 한 사람이다. 엄밀히 말해 그들은 패션 디자이너가 아니다. 패션 디자이너란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입고 다니는 옷을 만드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며, 봉남이 형처럼 연예인과 일부 사모님들을 위해 파티옷, 결혼식옷과 같은 조명발 받는 공주옷을 만드는 사람은 ‘무대의상 디자이너’라 해야 옳다”고 주장했다.반면 동아일보는 1999년 8월 26일자 ‘기자의 눈’에 “선비는 호(號)로 작가는 필명(筆名)으로 부르는 것이 예의이듯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은 ‘앙드레 김’으로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썼다. 앙드레 김은 나중에 ‘신동아’와 인터뷰에서 “그것(기자의 눈)을 읽다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뭉클했다”고 회고했다. 앙드레 김은 그러면서 “그 기사를 써주신 기자님이 잘못 아신 부분이 있는데요. 저는 제 이름을 부끄러워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사람들이 제 이름을 가지고 말할 때 굉장히 실망스럽고 서글펐어요.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지상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해서 예명을 사용하는 게 이상할 것도 없고요. 연예인들 중에 예명으로 활동하는 사람들 많잖아요?”라고 덧붙였다.그는 또 ‘무대의상 디자이너’라는 평에 대해 “제가 화가 중에 김기창, 천경자 선생님 너무너무 존경하는데요. 돈이 없어서 아직 작품은 구입하지 못했지만요.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 돈을 벌어 꼭 그분들 작품 한점씩 사서 집에 걸어놓는 거예요. 저처럼 그분들 그림을 직접 갖지는 못해도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면서 기쁨을 느끼면 좋은 것 아닌가요? 의상도 마찬가지예요. 제 작품을 입지는 못하지만 쇼윈도에서, 패션쇼에서 그것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저런 옷을 입어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문화 아닌가요? 의상에는 꿈과 환상이 있어야 해요. 왜 꼭 입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반문하기도 했다.신동아와 앙드레 김의 인연은 이 인터뷰가 처음은 아니었다. 앙드레김은 당시로부터 33년 전인 1966년 2월호 신동아에 이런 에세이를 썼다. 당시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앙드레의 작품은 사치스럽다는 評(평)을 해주시는 분이 더러 있다. 그것이 어떤 性格(성격)의 評(평)이건 남의 見解(견해)엔 우선 謙虛(겸허)한 姿勢(자세)로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限定(한정)된 條件(조건)을 최대한 살려서 옷을 아름답게 만들어내려는 내 노력이 이런 식의 無責任(무책임)한 한마디로 處理(처리)된다는 것은 創作(창작)세계의 一角(일각)에 몸담고 있는 자로서의 自負心(자부심)으로 볼 때 여간 서운하고 억울한 노릇이 아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俗談(속담)이 있듯이 이 같은 천으로 보다 화사하게 또 때로는 ‘고저스’하게 옷을 지어낸다는 것이 어째서 ‘사치’인지 奢侈(사치)의 개념이 아리숭해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고저스: gorgeous)세상을 살다 보면 ‘최고’와 ‘가장 유명한’이 서로 아주 다른 의미가 될 때가 있다는 걸 깨닫곤 한다. 그런 점에서 앙드레 김은 이 두 수식어를 모두 써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대한민국 패션 디자인의 아이콘이었다. 옷만 보고도 또 말투만 듣고도 그게 누구인지 거의 전 국민이 알아차릴 수 있는 패션 디자이너를 과연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옷 로비 사건 때 ‘봉남이 형’이라고 부르며 그를 조롱하던 매체조차 그가 국내 최고의 디자이너라는 사실만큼은 부인하지 못했다.2010년 오늘(8월 12일)은 대한민국은 국내 최고이자 가장 유명했던 의상 디자이너 앙드레 김을 잃은 날이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평소에는 어디 뒀는지 까먹고 있다가 휴가철이 되면 급하게 찾게 되는 물건이 있으니….바로 여권입니다. 해외로 휴가를 떠나시는 분들에게는 공항으로 가기 전 꼭 챙기셔야 하는 물건이자, 해외로 못 나가시는 분들도 아쉬워 한번 찾아보게 되는 물건이죠.해외에서는 ‘여권=국적’으로 인식하는 일이 많습니다. 운동선수가 올림픽 등 세계 대회에 나가려고 국적을 바꾸는 걸 ‘Passport Swapping(여권 바꾸기)’이라고 부를 정도입니다.중국인에서는 자녀에게 홍콩 여권을 갖게 해주려는 중국인들이 홍콩으로 ‘원정 출산’을 떠나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중국 여권 소지자가 사전에 비자를 받지 않고 갈 수 있는 나라는 58개국(무비자 21개국, 도착비자 37개국)인데 홍콩 여권이 있으면 141개국(무비자 108개국, 도착비자 33개국)에 갈 수 있거든요. (도착비자는 해당 국가 입국심사대에서 발급 받는 비자를 뜻합니다.)그러면 한국 여권은 어떨까요? 패스포트인덱스(www.passportindex.org)에 따르면 올해 기준으로 한국 여권 소지자가 사전 비자 신청 없이 갈 수 있는 나라는 총 157개국입니다. 이는 독일 싱가프로(각 158개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숫자. 스웨덴 여권 소지자도 한국하고 똑같이 157개국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습니다.단, 한국은 비자가 아예 필요 없는 나라가 116개국으로 123개국 무비자인 스웨덴보다 적습니다. 따라서 스웨덴이 ‘여권 파워랭킹’ 3위라면 한국은 4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한국 여권은 전 세계에서 네 번째로 좋은 여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여기서 한 가지 더. 한국 여권 소지자는 지구 면적 11.5%를 차지하는 러시아(약 1709만8242㎢)에 갈 때 비자가 필요 없습니다. 반면 독일, 싱가포르, 스웨덴 여권 소지자 모두 비자를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한국 여권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땅을 비자 없이 갈 수 있는 여권입니다.그러면 북한은 어떨까요? 북한 여권 소지자는 38개 나라에 사전 비자 신청 없이 갈 수 있습니다. 세계에서 14번째로 나쁜 여권이 북한 여권입니다.여기까지 보시면서 재미있는 것 하나 찾으셨나요? 네, 여권 표지 색깔을 크게 구분하면 검은색, 녹색, 붉은색, 파란색 등 네 가지뿐입니다. 외교부 여권과 관계자는 “여권 표지에 사용하는 인쇄용지 표준 규격에 맞는 색상 스펙트럼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여권 표지 색깔도 제한적인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우리는 언제부터 지금 쓰는 시간을 쓰게 됐을까.1894년 갑오개혁을 떠올리셨다면 너무 멀리 가신 것. 일제강점기도 아까운 오답. 정답은‘ 1961년 8월 10일’이다. 박정희 정권은 5·16군사정변 성공 후 87일이 지난 이 날 표준시간을 30분 앞당겼다. 8월 10일 오전 0시를 오전 0시 30분으로 바꾸는 방식이었다.동아일보는 그해 8월 5일 표준시간 변경 소식을 전하면서 “현재의 표준자오선인 동경 127도 30분을 동경 135도로 변경하게 된 이유는 세계 각국에서 실시하는 표준시 제도가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통과하는 본초자오선을 표준으로 하는 국제 표준 시간을 기준으로 하여 정수(整數)의 시차로써 정하는 것을 관계로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반정수(半整數)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공항해 기상관측 등 시간 환산에 있어 일어나는 혼란을 시정키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삼는 그리니치 평균시(GMT·Greenwich Mean Time)는 1972년 1월 1일 협정세계시(UTC·Coordinated Universal Time)로 바뀌었다. UTC를 기준으로 현재 한국 표준시를 표시하면 UTC+9가 된다. 한국은 1961년 8월 9일까지는 UTC+8½을 썼다. 정수와 반정수가 등장하는 건 이 때문이다.이렇게 시간을 바꾸면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지 않았을까. 정답은 ‘아니다’였다. 그달 10일자 동아일보 석간은 “지금까지 서머타임으로 시곗바늘을 돌리느라 여러 차례 어리둥절했던 때문에 대부분이 무관심한 태도”라고 전했다. 한국은 1948~51년, 1955~60년 서머타임을 실시했다. 한국에서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표준시를 정한 건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같은 기사는 “어제까지 사용하던 127도 30분선은 구한말에 사용되었으나 (한일)합병 후 123도선으로 변경되었는데 해방 후 4287년 3월 21일 127도 30분선으로 복귀했다가 이번에 재개정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4287년은 단기(檀紀)로 서기 1954년을 뜻한다.이 기사처럼 1908년 대한제국에서 정한 첫 번째 한국 표준시는 동경 127도 30분 기준이었다. 그 후 1912년 동경 135도가 됐다가 1954년 춘분(春分)에 다시 127도 30분으로 돌아왔다. 그러다 1961년 다시 135도로 돌아간 뒤 56년 동안 이 기준을 유지하고 있다.그렇다고 표준자오선을 127도 30분으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동경 135도는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을 지난다는 게 제일 큰 이유다. 2013년만 해도 조명철 자유한국당 의원 등이 동경 127도 30분을 새 표준자오선으로 정하는 ‘표준시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북한도 2015년 8월 14일까지는 동경 135도를 표준자오선으로 삼았지만 다음 날부터 127도 30분을 기준으로 바꿨다. 그래서 현재 서울과 평양은 30분 시간 차이가 난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8월 9일은 한국 마라톤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날이다. 1936년 손기정 선생(1912~2002)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것도, 그로부터 56년 뒤 황영조 현 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47)이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것도 모두 8월 9일이었다. 손 선생이 마라톤 금메달을 땄다는 소식을 일본 라디오를 통해 들은 동아일보는 바로 호외를 발행해 뿌리는 한편 메가폰을 들고 가두선전으로 이 소식을 국민들에게 알렸다. ‘일장기 말소사건’ 주인공 이길용 기자(1899~?)는 1948년 ‘신문기자 수첩’(모던출판사)에 “회사 앞에 야심한 삼경(三更·오후 11시에서 오전 1시 사이)이건만 운집한 대군중 모두가 전파 일성에 환희 일색이요, 함성 환호뿐이다. … 목이 터지게 외치는 ‘손기정 만세!’ 소리는 기미년(1919년) 독립만세 소리에 방불한 바 있었다”고 썼다. 바르셀로나 대회 마라톤 우승도 극적이었다. 황 감독은 경기장 서쪽의 급경사 난코스였던 ‘몬주익 언덕’에서 골인 지점을 2.4㎞ 남기고 마지막 스퍼트로 2위 모리시타 고이치(森下廣一·49)를 따돌리고 우승했다. 그 뒤로 황 감독에게 붙은 별명이 ‘몬주익의 영웅’.이날 바르셀로나 올림픽 주경기장에는 손 선생이 직접 참석해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당시 손 선생은 남자 마라톤 경기일이 자신이 금메달을 땄던 그 날과 날짜가 같다는 사실을 알고 큰 기대를 품은 채 바르셀로나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손 선생은 1992년 올림픽 당시 동아일보에 보낸 특별 기고문에 “지난 56년간 나를 지탱해왔단 단 하나의 꿈이 바로 한국 마라톤의 올림픽 제패였다. 나이가 든 뒤엔 이 꿈이 더욱 절박해져 ‘꿈’ 정도가 아니라 ‘강박의식’처럼 늘 나를 짓누르곤 했다”고 회고했다. 이어 “황영조가 한국마라톤의 숙원인 10분벽을 깨고 2시간 8분대에 들어서는 순간 나의 뇌리에 죽기 전에 나의 꿈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전류처럼 흘렀다. 내가 굳이 이 나이에 이곳 바르셀로나까지 날아온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꿈을 이루어지는 순간을 보았다”고 썼다. 황영조에 이어 마라톤 은메달은 일본, 동메달은 독일 선수가 각각 차지했다. 손 선생은 “56년 전 이날 한국인인 내가 일본 국기를 달고 독일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그 세 나라 국기가 나란히 올라간다”며 감격해 했다. 황 감독은 시상식이 끝난 직후 손 선생을 찾아 목에 직접 금메달을 걸어줬다. 남자 마라톤은 보통 올림픽 마지막 경기로 열린다. 폐회식이 끝난 뒤 손 선생과 황 감독은 나란히 손을 잡고 주경기장을 한 바퀴 뛰었다. “한국이 금메달을 땄다. 한국이 또 올림픽 마라톤을 먹었다”고 외치며….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1936년 8월 9일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그가 남긴 첫 마디 “슬프다”그는 정말 슬펐다.42.195km를 쉼 없이 달려 제일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그가제일 먼저 한 일은 고개를 숙이는 것.시상대 위에서도 그는고개를 숙였다.독립 후, 그는 말했다.“독일 군악대가 연주하는 기미가요보다 운동장 한 구석에서 들려오는애국가 소리가 더 크게 들려 고개를 들 수 없었다.”※기미가요(君が代): 일본 국가(國歌)‘손긔졍.’2시간 29분 19초.당시 올림픽 최고기록으로 마라톤 정상을 차지한금메달리스트가 사인북에 쓴 세 글자일본 기자는 ‘왜 한자로 이름을 쓰지 않냐’고 물었다손기정이 답했다.“한글이 획수가 더 적다.”거짓말이었다.손기정의 거짓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우리나라 일장기가 나를 응원하였습니다.큰 기를 휘두르며 ‘6㎞ 남았다’고 외쳐….”“시상대에 우리가라 국가(기미가요)가 엄숙하게….”일본은 그를 데려다 선전 음반을 만들었다.이후 손기정은 점점 알아들 수 없는 목소리를 낸다.그때 들려오는 한마디 “크게 읽어.”손기정은 끝내 “내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우리나라 국민 전체의 승리”라고 말을 이었다.우리나라는 일본이었다.경성에 있던 한 신문사는 생각이 달랐다.동아일보는 그달 13일자 신문에서손기정 가슴에 있던 일장기를 지웠다.그로부터 12일 후에도 또 한번….이길용(당시 37세) 체육 주임기자.‘운수 좋은 날’을 쓴 소설가로 유명한 현진건 당시 사회부장 등.이 일로 동아일보 기자들이 차례로 서울 종로경찰서에 붙들려 갔다동아일보는 무기 정간(停刊) 처분을 받았다“여름이었으니까 유치창 안으로 속옷과 와이셔츠를 여러 차례 들여보냈지요.”“나오는 와이셔츠는 언제나….”“피투성이였습니다.”이 기자의 아내 정희선 여사그래도 이 기자는 굴하지 않았다.그는 이렇게 썼다.“이 나라의 아들은 손 선수를 왜놈에게 빼앗기는 것 같은 느낌에그 유니폼 일장 마크에서 엄숙하게도 충격을 받았다.”“면소니 군청이니 또는 조재소니 등등의 사진에는 반드시 일장기를 정면에 교체해 다는데이것을 지우고 싣기는 부지기수였다.”“이러한 우리로서 어찌 손기정 선수 유니폼에 선명했던 일장 마크를 그래도 실을 수 있을 것인가.”※신문기자 수첩(1948년)결국 동아일보는 279일 동안 정간 당했다가이듬해 6월 1일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다.하지만 이 기자는 해방이 될 때까지 다시 동아일보에서 일할 수 없었다.1945년 사업부 차장으로 복직한 이 기자는 1948년 야구대회를 만든다.단일 언론사 주최로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다.그가 없었다면 손기정뿐 아니라 메이저리그에서 한국을 빛낸 스타도 없었을지 모른다.단, 이 기자는 6·25전쟁 중 납북 돼 그 후 소식은 알 수가 없다.그렇다고 그가 완전히 잊혀진 건 아니다.한국체육기자연맹에서 그해 최고 체육기자에게 주는 상 이름은‘이길용 체육기자상’이다.그는 1948년 ‘신문기자 수첩’에 7쪽 분량으로 이렇게 후기를 남겼다.“세상이 알기로는 백림(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의 일장기 말살사건이이길용의 짓으로 꾸며진 것만 알고 있다.”“그러나 사내의 사시(社是)라고 할까. 전통이라고 할까.방침이 일장기를 되도록 아니 실었다. 우리는 도무지 싣지 않을 속셈이었던 것이다.”“동아일보에서 일장기를 지우는 건 차 마시고 밥 먹는 것처럼 흔한 항다반사(恒茶飯事)였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