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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타기’. 휴가 때 제일 좋은 것도 이거고, 제일 나쁜 것도 이겁니다.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가는 건 설레는 일이지만 비좁은 비행기에 몇 시간씩 앉아 있어야 하는 건 생각만 해도 스트레스 받는 일이죠.여러분은 한번에 비행기를 어디까지 타보셨나요? 저는 직항으로는 미국 애틀랜타까지 가본 게 제일 멀리 날아간 경험입니다. 실제로 올해 1월 아에로멕시코에서 인천-멕시코시티 노선을 개설하기 전까지는 인천 공항에서 출발하는 직항 노선 중에 제일 노선 거리가 긴 게 애틀랜타 행이었습니다. 미국 뉴욕 JFK 공항까지 한번에 가는 비행기가 있는 데 무슨 소리냐고요? 아닙니다. 애틀랜타가 더 멉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지도는 보통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그립니다. 이 지도로 보면 뉴욕이 애틀랜타보다 더 멀어 보입니다(아래 사진 참조).그런데 지구는 2차원 평면이 아니라 3차원 구형입니다. 그래서 최단거리를 따져 보면 아래 그림처럼 뉴욕이 애틀랜타보다 가깝습니다.물론 비행기가 꼭 최단거리로 날아다니는 건 아닙니다. 위도마다 바람이 부는 방향이 다르죠(당연히 바람이 뒤에서 불어오는 편이 좋습니다.) 또 안전상의 이유로 일정 위도 이상으로는 비행기가 날지 못합니다. 그래서 실제 비행노선은 이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인천에서 애틀랜타까지는 보통 13시간 30분 거리. 그럼 전 세계에서 가장 긴 직항 노선 톱 10은 어디서부터 어디를 어떻게 날아다닐까요? 노파심에 말씀드리지만 아래 지도는 최단거리를 표시한 것으로 실제 비행노선은 다를 수 있습니다. 10위. 두바이(아랍에메리트) ↔ 휴스턴(미국)-항공사 및 편명: 에미레이트항공(EK211)-기종: 보잉 777-300ER-첫 운항: 2007년 12월 3일9위. 도하(카타르) ↔ 로스엔젤레스(LA·미국)-항공사 및 편명: 카타르항공(QR739)-기종: 보잉 777-200LR-첫 운항: 2016년 1월 1일8위. 지다(사우디아라비아) ↔ LA-항공사 및 편명: 사우디아항공(SV41)-기종: 보잉 777-300ER-첫 운항: 2014년 3월 31일7위. 두바이 ↔ LA-항공사 및 편명: 에미레이트항공(EK215, EK217)-기종: 에어버스 380-800(EK215), 보잉 777-200LR(EK217)-첫 운항: 2008년 10월 26일6위. 아부다비(아랍에미리트) ↔ LA-항공사 및 편명: 에티하드항공(EY171)-기종: 보잉 777-200LR-첫 운항: 2014년 6월 1일5위. 싱가포르 ↔ 샌프란시스코(미국)-항공사 및 편명: 싱가포르항공(SQ31), 유나이티드항공(UA1) -기종: 에어버스 350-900(SQ31), 보잉 787-9(UA1)-첫 운항: 2016년 10월 23일(SQ31), 2016년 6월 1일(UA1) 4위. 요하네스버그(남아프리카공화국) ↔ 애틀랜타-항공사: 델타항공(DL201)-기종: 보잉 777-200LR-첫 운항: 2009년 6월 1일3위. 시드니(호주) ↔ 댈러스(미국) -항공사: 콴타스항공(QF8)-기종: 에어버스 A380-800-첫 운항: 2014년 9월 29일2위. 오클랜드(뉴질랜드) ↔ 두바이-항공사: 에미레이트항공(EK449)-기종: 에어버스 A380-800-첫 운항: 2016년 3월 2일1위. 오클랜드 ↔ 도하-항공사: 카타르항공(QR921)-기종: 보잉 777-200LR-첫 운항: 2017년 2월 6일 꼼꼼하게 읽으신 분은 아시겠지만 현재 2위 오클랜드 ↔ 두바이 노선이 지난해 3월 2일 1위로 올라섰다가 올해 2월 1년도 1위를 지키지 못한 채 오클랜드 ↔ 도하 노선에 세계에서 제일 긴 직항노선 자리를 내줬습니다. 내년에는 다시 1위 자리가 바뀔 가능성이 높습니다. 싱가포르항공이 싱가포르에서 뉴욕 뉴어크 공항까지 날아가던 SQ21 노선을 부활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이죠. 혹시라도 그냥 비행기에 타고 있는 게 정말 너무 너무 좋으신 분이 계진지요. 그렇다면 여기 나온 ‘기나 긴’ 노선에 한번 도전해 보시면 어떨까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모든 기업사채 동결’. 동아일보 1972년 8월 3일자 1면은 이렇게 큼지막한 제목을 달았다. 전날 오후 11시 40분 박정희 정권은 ‘경제의 성장과 안정에 관한 긴급명령 15호’를 발표한다. 나중에 ‘8·3조치’라고 부르게 되는 ‘사채 동결’ 조치였다. 이에 따라 모든 기업은 1972년 8월 2일 현재 보유하고 있는 모든 사채를 정부에 신고하면 월 이자 1.35%, 3년 거치 5년 분할 상환 방식으로 갚을 수 있었다. 1.35%를 연리로 바꾸면 16.2%. 당시 시중 사채 금리는 연리 40~50% 수준이었으니 기업들로서는 이자가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고 갚는 날도 최장 8년 뒤로 밀리는 셈이었다. 당시 연평균 15% 안팎이던 물가 상승률까지 감안하면 기업들은 사실상 무이자 혜택을 누리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박정희 정권에서 이런 반(反)시장적이고 초법적인 특혜를 기업에 준 이유는 뭘까. 한국 기업들은 외국에서 빌린 돈으로 공장을 지어 1960년대 고도성장을 이뤄냈다. 그러다 1971년 미국 정부는 달러를 은행에 가져가면 금으로 바꿔주면 ‘금 태환 정책’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미국이 ‘재채기’를 하자 한국은 ‘신종플루’에 걸리고 말았다.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면서 외국에서 돈을 빌린 기업들에 위기가 닥쳤다. 여기에 시설·운영자금을 사채 시장에서 끌어다 쓰던 기업들은 문자 그대로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몰렸다. 박정희 정권도 처음에는 이런 기업은 정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지만 이들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컸다. 그달 9일까지 기업에서 신고한 총 사채 액수는 3456억 원. 당시 통화량의 80%에 육박하는 수준이었다. 올 5월 시중 통화량(M2)이 2454조 원이니 현재로 따지면 2000조 가까이 사채가 돌고 있던 셈이었다. 8·3 조치 효과도 확실했다. 기업 부채비율은 1970년 313%에서 1973년 288%로 떨어졌다. 1972년 5.7%까지 내려왔던 한국 경제 성장률은 1973~1979년 평균 10.3%로 올랐다. 같은 기간 세계 경제 성장률은 4.1%였다. 또 당시 정부에서 단기금융법 상호신용금고법 신용협동조합법을 제정하면서 제2 금융권이 탄생해 금융시장도 전환점을 맞았다. 그러나 사채로 돈을 불리던 서민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당시 기업에서 신고한 사채 중 당시 서울 고급 주택 가격에 해당하는 300만 원 이상은 전체의 10%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서민들이 내 집 마련을 꿈꾸며 소소하게 ‘돈 놀이’를 하던 돈이었다. 금융시장이 척박했던 상태라 서민들이 돈을 불릴 수 있던 수단은 돈 놀이가 거의 유일하던 시절이었다. 8·3조치 후 길게는 8년까지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할 처지가 되자 자살자가 속출했다. 정부는 결국 30만 원 이하인 사채는 예외로 인정해 신고하지 않아도 되도록 했지만 불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불만을 잠재우려면 ‘주먹’이 필요했다. 이 발표 후 석 달이 지나지 않은 그해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 효력을 정지시켰다. ‘10월 유신’이었다. 이 조치에 대한 평가도 그만큼 엇갈린다. 8·3조치 후반 작업에 참여했던 최각규 전 경제부총리는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문제가 있는 조치다. 국민의 사적 재산권을 침해한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 비춰볼 때 정말 부득이하고 불가피했다. 이런 측면을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이 조치가 없었다면 1973년 제1차 오일쇼크를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반면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저서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에 “8·3조치로 우리 기업은 무채를 겁낼 줄 모르고 몸집을 불리는 차입경영과 그룹경영으로 치달았고 자본을 충실히 하고 자기 사업에만 집중하던 우량 기업들이 오히려 시장경쟁에서 밀려나는 계기가 됐다. 우리 경제는 구조조정으로 대외 경쟁력을 강화한 것이 아니라 사채동결이라는 편법에 의존함으로써 위기관리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썼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91) 남편인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96)이 2일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필립 공은 이날 영국 런던 버킹엄 궁전에서 열린 영국 왕실 해병대 퍼레이드에 참석하는 걸 마지막으로 공식 활동을 중단하기로 한거죠. 이 퍼레이드를 마지막으로 정한 건 그가 왕실 해병대 총사령관이기 때문입니다.남자 왕의 아내를 뜻하는 왕비는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여왕의 남편을 뜻하는 낱말 ‘국서(國¤)’는 참 낯설기만 합니다. 여왕의 남편으로 사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필립 공은 곧잘 “영국에서 자식에게 가문을 물려주지 못하는 남자는 나뿐”이라고 자조하곤 했습니다. 여기서 가문은 성씨로 바꿔도 무방합니다. 도대체 영국 왕실은 어떤 성(姓)을 쓸까요? 1917년까지 영국 왕족은 따로 성이 없었습니다. 가문이나 왕조 이름이 있으니 성을 쓰지 않아도 그 사람이 누군지 다 아니까요. 현재 영국 왕족인 ‘윈저’ 가문은 원래 독일에 뿌리를 둔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영국은 20세기 초반에 독일하고 제1차 대전을 치렀습니다. 가문 이름이 독일색이라 부담이 됐던 게 당연한 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아버지 조지 5세는 버크셔 주 윈저에 있는 성채(城砦) 이름을 따 가문 이름을 윈저로 바꿨습니다. 그러면서 “빅토리아 여왕(1819~1901) 후손들 성을 윈저로 한다. 단, 기혼이거나 결혼한 적이 있던 여성은 예외”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하기 전까지 영국 왕족들 성은 윈저였습니다. 필립 공 역시 그리스 왕족 출신이라 성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가문 명 역시 독일 느낌이 나는 ‘바덴버그’였습니다. 조지 5세가 뜻을 살려 영어로 번역한 게 ‘마운트배튼’. 필립 공은 자연스레 ‘필립 마운트배튼’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문제가 생긴 건 1952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즉위 때였습니다. 필립 공의 외삼촌인 루이스 마운트배튼 백작(1900~1979)이 여성이 남편 성을 따르는 관례에 따라 영국 왕가 명칭을 윈저에서 마운트배튼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거죠.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어머니인 메리 대왕대비는 이 소식을 듣고 대노해 윈스턴 처칠 총리(1874~1965)에게 ‘영국 왕가 이름은 계속 윈저가 될 것’이라고 알렸습니다. 그러면 마운트배튼은 아예 사라졌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1960년 여왕 부부는 둘 사이에서 나온 자손들에게는 다른 성을 주겠다고 결정을 내립니다. (왕인데 이 정도도 마음대로 못 할까요?) 그 뒤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필립 공을 뿌리로 둔 자손들은 ‘마운트배튼윈저’를 성으로 쓰게 됐습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찰스 왕세자는 자연스레 ‘찰스 마운트배트윈저’가 이름인 겁니다. 단, 왕이 되면 성을 바꿀 수 있습니다. 찰스 왕세자가 즉위한 뒤 “내 후손들은 마운트배튼윈저 대신 윈저만 성으로 쓰겠다”고 하면 줄줄이 성이 바뀌는 거죠. 마운트배튼을 써도 되고 다른 성을 써도 됩니다. 왜냐? 왕이니까요. 요컨대 필립 공 아들인 찰스 왕세자도 자식에게 가문을 물려줄 수 있지만 필립 공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필립 공이 저처럼 속 좁은 인간이었다면 ‘외삼촌만 아니었다면…’이라고 종종 떠올리지 않았을까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한국 제조업에는 거의 항상 ‘위기’라는 낱말이 따라다닙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실제로 올 2분기 제조업 평균 가동률은 71.6%. 2분기만 따지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에 시달렸던 1998년(66.4%) 이후 최저치입니다. 공장이 문을 열지 않거나 문을 열어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뜻이죠.하지만 최근 매킨지 글로벌 연구소에서 내놓은 연도별 제조업 부가가치 국가 순위를 보면 한국 제조업은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이 연구소에서 전 세계 75개국을 대상으로 제조업 부가가치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1985년 15위로 시작한 한국 1995년 9위, 2005년 8위, 2015년 5위로 계속 순위를 끌어올렸습니다. 순위 상승폭(10계단 상승)만 놓고 보면 같은 기간 8위에서 1위로 오른 중국보다 한국이 더 많이 올랐습니다. 물론 한국이 이 이상 순위를 끌어올리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이는 게 사실. 2015년 기준으로 부가가치를 살펴보면 1위 중국이 3억1660만 달러, 2위 미국 2억2070억 달러, 3위 일본 7680억 달러, 4위 독일 6680억 달러 순이었습니다. 한국은 3490억 달러로 오히려 6위 인도(3090억 달러)에 쫓기는 신세입니다.그래도 한국 제조업이 정말 잘해왔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1985년 한국에 앞섰던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같은 나라 모두 30년이 지난 뒤에는 한국보다 순위가 낮았죠. 선진국과 신흥국 사이에 끼인 ‘샌드위치 신세’라는 평가를 한국 제조업이 잘 이겨왔다는 뜻일 겁니다.오늘도 제조 현장에서 피땀 흘리고 계신 직장인 여러분, 모두 한 번 더 파이팅 입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 대사처럼 “희망은 좋은 것이고, 좋은 건 결코 사라지지 않으니”까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정말 이상합니다. 한국에서는 대한항공이 1999년 3월 28일을 기점으로 모든 노선에서 ‘금연’ 정책을 실시하면서 비행기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됐습니다. 네, 그 전까지는 비행기에서 담배를 피웠죠. 전 세계적으로 기내 금연 정책을 실시한 건 20년도 안 된 일입니다. 사실상 ‘글로벌 스탠더드’ 역할을 하는 미국 연방항공국(FAA)은 2000년부터 기내 흡연을 전면 금지했습니다. 러시아도 2001년 7월 1일자로 같은 정책을 채택했죠. 그런데 요즘 비행기 화장실에는 여전히 재떨이가 달려 있습니다. 끽연가 중에는 ‘잘 참고 있었는데 재떨이를 보니 괜히 한 대 피우고 싶더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적지 않습니다. 도대체 왜 금연구역인 비행기에 아직도 재떨이가 달려 있는 걸까요? 정답은 ‘담배를 피울 때 재를 떨고 꽁초를 버리라고’입니다. 사람들이 보통 재떨이를 쓰는 이유하고 똑같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누군가는 피웁니다. 그래서 담배를 피웠을 때 바닥에 담뱃재 흘리지 말고 꽁초도 아무 데나 버리지 말라고 재떨이가 있는 겁니다. 꽁초를 아무렇게나 버렸다가는 불이 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1973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프랑스 파리로 날아오던 비행기 안에서 담배를 피운 승객이 불이 덜 꺼진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버렸다가 불이 나 123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 발생했죠. 기내에 연기가 가득 찬 상태에서 기장이 비상착륙을 시도했지만 안타까운 결과를 막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FAA는 비행기 화장실에 의무적으로 재떨이를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2005년 첫 비행을 시작한 에어버스 A380 같은 최신 기종에도 재떨이가 달려 있는 이유입니다. 기내 흡연이 가능하던 때에 만든 오래 된 비행기라 재떨이가 달려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죠. FAA는 재떨이가 고장 난 경우에는 10일 이내에 수리를 마치도록 규정하고 있기도 합니다. 기내에 있는 재떨이가 절반 이상 고장 났다면 3일 안에 수리를 마쳐야 합니다. 2009년에는 영국 브리티시 에어웨이 항공사에서 기종에 맞는 재떨이를 구하지 못해 이륙이 지연된 일도 있었죠. 그러니까 비행기 안에서 담배가 너무 피우고 싶다면 꽁초는 꼭 재떨이에 버리고 벌금을 물면 됩니다. 한국에서는 ‘항공안전 및 보안에 관한 법률’에 따라 기내에서 담배를 피우면 5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연히 모두가 전 세계적인 기내 금연 정책에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 알렉산더르 쇼프만이라는 독일 사업가는 2004년 기내 흡연이 가능한 ‘스민트에어(Smoker’s International Airlines)‘ 설립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보잉 747 두 대를 사들여 독일 뒤셀도르프와 일본 도쿄(東京)를 오가는 노선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자금 조달 문제로 막판에 사업을 접고 말았습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본격 휴가철입니다. 인천공항 여객수가 지난달 30일 사상최대를 기록했고 문재인 대통령도 휴가를 떠났습니다. 하지만 휴가지에서는 “차라리 집에 있는 게 낫겠다”라는 불평이 쏟아진다고 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인파가 몰리며 바가지요금, 교통체증 등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극 성수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7말8초’에 휴가를 낼 수밖에 없는 사정, ‘d이슈’에서 알아보시죠. 김아연 기자 aykim@donga.com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여러분 모두 7월을 보내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특히, 서울에 사시는 분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이번 달(2017년 7월)은 1907년 기상청 관측을 시작한 뒤 ‘두 번째로 시원하지 않은 7월’이었습니다. 더우면 더운 거지 시원하지 않은 건 뭘까요? 기상청에서는 매일 기온을 재면서 평균값뿐 아니라 최고·최저값도 기록해 둡니다. 7월 월별 최저기온은 24.3도. 이달 1일부터 31일까지 최저온도를 모두 더한 다음 31로 나누면 24.3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아래 그래프에서는 주황색 네모 아래 부분을 모두 더하면 됩니다. 24.3도는 찌는 듯한 더위로 남아 있던 1994년 25.3도에 이어 기상 관측 109년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최저기온 기록입니다.(1908년부터 따지면 총 112년이 나오는데 3년이 빠진 건 1951~1953년에는 6·25전쟁으로 기상 관측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날 최저기온이 높다는 건 문자 그대로 그나마 조금이라도 시원한 걸 느낄 시간이 부족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계속 ‘덥다, 덥다’고 느낄 수밖에 없죠. 사실 올 7월 최고기온 평균은 30.4도로 공동 17위 수준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평균 기온(17시 현재) 27도로 역대 3위에 이름을 올릴 수 있던 건 이렇게 온도가 잘 내려가지 않은 탓이죠. 데이터로 볼 때도 적어도 7월 서울 날씨는 최고기온보다 최저기온에 더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지구 온난화 등으로 해마다 7월 온도가 올라가고 있다는 건 누구나 체감할 수 있는 사실. 1908년 7월 서울 평균 기온은 23.5도였으니까 112년 동안 3.5도가 올랐습니다. 아래 그래프도 이 사실을 증명합니다. 7월 월별 최저기온은 1908년 7월 20.4에서 올해 24.3도로 3.9도 올랐습니다. 아래 그래프를 보시면 그것도 꾸준히 올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월별 최고기온은 최저기온하고 1도 정도 차이가 나는 2.8도 오르는데 그쳤고 아래 그래프처럼 한 고비 꺾일 때도 있었습니다. (통계학에 익숙한 분들께 말씀드리면 상관계수도 최저기온 쪽이 높습니다.) 요컨대 이번 달은 더워서 더운 게 아니라 시원하지 않아서 더웠습니다. 8월에는 더울 때는 덥더라도 시원할 때는 좀 시원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1일그러진 ‘동대민국’-동대문 상인운영회 불법 갑질#.2서울 동대문 D의류상가 도매상인들은 자신들의 일터를 ‘동대민국(東大民國)’이라고 부릅니다. #.3상인운영회(운영회)라는 자치 조직이 특정 세력에 의해 사유화되면서 상인들을 상대로 ‘입점비’ ‘퇴점비’ 등을 뜯어내는 등 불법적인 관행이 10년 넘게 이어져 온 것이죠. #.4상인들은 평균 보증금 5000만 원, 월세 180만 원을 내며 4.23m²(약 1.25평) 크기 점포 한 칸을 얻어 장사하고 있습니다.임대 계약과 관리 권한을 위임받은 운영회가 중간 길목에서 상인들에게 전횡을 일삼는 구조이죠.#.5상인들은 운영회가 계약이나 규약 등 법적 근거도 없이 걷어가는 돈이 한 해 수천만 원에 달한다며 피해를 호소하고 있습니다.#.6운영회는 처음 입주하는 상인들에게 점포 보증금과는 별도로 500만~3000만 원의 ‘입점비’를 물려왔으며 매주 5만~15만 원의 홍보비와 명절 행사비용으로 한 해 50만~100만 원을 상인들로부터 받아왔습니다. #.7하지만 실제 집행 내용은 공개되지 않아 상인들은 “그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 알 길이 없다”고 했죠.한 상인은 “갈취 피해를 덜 당하려면 운영회 간부에게 고급 양주나 현금 등 수백만 원을 지속적으로 상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8경찰은 운영회의 이 같은 관행이 10년 넘게 이어져 온 것으로 파악하며 운영회가 상가 주인들로부터 일정 권한을 위임받았더라도 경비, 청소 등 일반적인 관리 수준을 넘어 별다른 법적 근거 없이 거액을 요구한 행위는 공갈죄에 해당할 소지가 크다고 말했습니다. 2017.07.31 (월)원본ㅣ구특교 · 김예윤 · 김배중 기자사진 출처ㅣ 동아일보 DB·뉴시스픽·뉴스1·픽사베이기획·제작 | 황규인 기자·신슬기 인턴}

아, 아쉽고 또 아쉽습니다. 한국 여자 배구 대표팀이 국제배구연맹(FIVB) 월드그랑프리 국제여자배구대회 2그룹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거든요. 한국은 31일 체코 오스트라바에서 열린 대회 2그룹 결승전에서 폴란드에 0-3으로 완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정말 선수들, 고생 많았습니다.원래 해마다 7월 31일은 한국 여자 배구 역사에 의미가 깊은 날입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때 동메달을 목에 건 날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올림픽 구기 종목에서 메달을 딴 건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몬트리올 올림픽 당시 한국 여자 배구 에이스는 이제 ‘여사님’이라는 호칭이 더 어울리는 조혜정(64)이었습니다. 그는 키 163.5㎝로 현대 배구에서는 세터라고 해도 ‘작다’는 평가를 받는 수준밖에 안 됐습니다. 그래도 조혜정은 180㎝가 넘는 상대 ‘블로킹 숲’을 뚫고 강스파이크를 날렸습니다. 그래서 외신 기자들이 붙여준 별명이 ‘날으는 작은 새(flying little bird)’. (맞춤법으로는 ‘나는 작은 새’가 맞지만 때론 일부러 맞춤법을 틀려야 할 때도 있는 법.) 그렇게 잘 나가던 한국 대표팀에 날벼락이 떨어집니다. 조혜정이 쿠바를 상대한 조별리그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다리를 다치고 만 것. 의사는 “뛰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얼음찜질을 하며 아쉬움을 삼키던 조혜정의 눈에 대표팀 막내 백명선(61)이 보였습니다. 조혜정은 백명선에게 ‘메달 따서 연금 받게 되면 뭐 할 거냐’고 지나가듯 물었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이랬습니다. “언니, 저 동생 여섯 명이에요. 제가 학비를 대야 해요.” 백미선과 부둥켜 안고 한참 눈물을 흘린 조혜정은 ‘숙적’ 일본과 맞붙은 준결승전에 출전했지만 부상을 극복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점프조차 제대로 하기 힘들었던 조혜정은 1세트만 뛰고 경기에서 빠졌습니다. 결국 한국은 일본에 0-3으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렇게 동메달을 놓고 결전을 치르게 된 3, 4위전 상대는 헝가리. 한국은 이 경기에서 3-1 역전승을 거두고 동메달을 차지했습니다. 당시 이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기사에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온 선수도 동생들 학비를 책임져야 했던 백명선, 이름이 제일 많이(3번) 나온 선수도 백명선이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여자 배구 대표팀 절반에게만 비행기 비즈니스석을 타게 한다고 팬들이 들고 일어서는 나라가 됐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촌스러워 보이기까지하는 이런 스토리가 없었다면 한국이 그리고 한국 배구가 이만큼 성장하지 못했을 겁니다. 올드 배구 팬이라면 잘 아실 것처럼 그 후 조혜정은 1979년 이탈리아 리그에 진출하면서 한국 여자 배구 1호 해외 진출 선수가 됐습니다. 2010년에는 프로배구 여자부 GS칼텍스 감독을 맡아 한국 4대 프로 스포츠 첫 번째 여성 감독으로 이름을 남겼죠. 지금까지도 프로 골퍼 조윤희(35)와 조윤지(26)의 엄마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혹시 백명선 ‘여사님’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아시는 분 계시나요? 아니, 정확하게는 동생 분들 소식이 궁금하네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경고: 이 기사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 신작 영화 ‘덩케르크’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 공군은 어디 있는 거야(Where‘s the bloody air-force)?” 최근 개봉한 영화 ‘덩케르크’에서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Luftwaffe)가 한바탕 폭탄을 쏟아 붓고 떠나자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 해변에 있던 영국 병사가 이렇게 말하죠.(영화 이름을 이렇게 바꾼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물러나라! 물러나라! 물러나라! 물러나라! 물러나라!) 정답은 ‘안개 속’이었습니다. 영화가 막을 내릴 즈음 영국 국민들이 귀환병들을 환영하는 와중에도 “대체 공군은 한 게 뭐 있냐”며 핀잔을 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영국 공군은 정말 많은 일을 했습니다. 이 영화가 소재로 삼은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을 통해 덩케르크 해변에 고립돼 있던 영국 원정군(BEF)과 벨기에군, 프랑스군 등 총 33만8226명이 영국 땅을 밟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전장에서 구해낸 건 당시까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살아 돌아올 수 있던 건 영국 왕립공군(RAF)이 하늘에서 독일 공군을 물리치며 바다 위를 오간 배 900여 척을 보호했기 때문이죠. 영국에서 작전을 전개한 건 1940년 5월 27일부터 6월 4일까지 9일간. 이 기간 영국 공군은 총 4882회(sorties) 출격했습니다. 그 결과 독일 공군기 240기를 격추시키는 동안 177기를 잃기도 했습니다. 그저 공중전 대부분이 해안에서 떨어진 안개 낀 바다 위에서 벌어져 해변에 있는 육군 병사들 눈에 잘 보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육군 병사들이 볼멘소리를 하거나 시민들이 공군에 불만을 품었던 게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닙니다. 당시 영국 공군 전투기 사령관을 맡고 있던 휴 다우딩 대장(1882~1970)이 “영국 본토 내에 전투기 전력을 유지해야 한다”며 이 작전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건 사실이니까요. 다우딩 대장은 다이나모 작전 시작 11일 전인 1940년 5월 16일 윈스턴 처칠 총리(1874~1965)에게 편지를 보내 “(독일로부터 침략을 당한) 프랑스가 아무리 끈질기게 요구한대도 앞으로 영국 해협을 건너는 전투기가 단 한 대도 없도록 보증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다우딩 대장이 프랑스를 혐오해 저런 주장을 폈던 건 아닙니다. 이미 프랑스에 건너가 있던 전투기를 너무 많이 잃었기 때문이죠. 당시 영국 공군 조종사 대부분은 ‘초짜’였던 반면 독일 공군에는 스페인 내전에서 경험을 쌓은 베테랑이 즐비했습니다. 어차피 독일이 영국으로 쳐들어 올 테니 그때를 대비하려면 전투기를 최대한 아껴야 한다는 게 다우딩 대장 주장이었습니다. 그는 같은 편지에 “(영국군이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패배할 경우) 유럽 대륙 전체를 독일이 차지하더라도 영국이 계속 싸워야 한다는 걸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략) 전투기 전력이 충분하고 해군 함대가 건재하다면 우방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우리 영국 혼자서도 전쟁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다우딩 대장은 막 세상에 나온 레이더가 군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은 선구자이기도 했죠. 그는 반대를 무릅쓰고 유럽 대륙 쪽에 있는 영국 남동부에 레이더망을 깔았습니다. 이 레이더망은 뜻밖의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영국은 독일군 암호를 해독해 출격 정보를 입수했지만 독일에서는 이 레이더 때문에 정보가 샌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러니 독일군은 암호 체계를 바꿀 생각을 하지 못했고 영국은 더더욱 성공적으로 독일을 상대할 수 있었습니다. 다우딩 장군은 그냥 레이더만 설치한 게 아니라 각지에 흩어진 레이더에서 얻은 정보를 한 데 모으는 중앙 사령부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이게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만 해도 전투기 조종사 중에는 ‘하늘의 돈키호테’를 자처하던 낭만주의자(로맨티스트)가 적지 않아 통제가 쉽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대성공. 그가 이렇게 시스템을 만들어 놓은 덕에 그해 7월 10일부터 10월 31일까지 열린 ‘영국 본토 항공전(Battle Of Britain)’은 영국의 승리로 끝날 수 있었죠. 특히 다우딩 장군이 개발을 지시한 것이나 다름없는 ‘스핏파이어(Spitfire)’는 이 항공전을 통해 “영국을 구한 전투기”라는 명성을 얻었습니다. 처칠이 다이나모 작전 이전에 프랑스로 보내려고 했지만 다우딩 장군이 ‘절대 못 보낸다’고 반대하던 전투기가 바로 스핏파이어였습니다.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전투기 조종사들 활약이 계속되자 처칠은 “인류 전쟁사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적은 사람들에게 이토록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Never in the field of human conflict have so many owed so much to so few)”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 역시 결국 다우딩 장군이 옳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던 겁니다.그전까지 무적을 자랑하던 독일 공군도 결국 이 항공전에서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일 군 수뇌부도 영국 본토를 침공하려던 ‘바다사자 작전’을 결국 포기하면서 독일이 손쉽게 승리할 것 같던 제2차 세계대전도 전환점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다우딩 장군이 다이나모 작전 때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영국 본토 항공전은 현재까지도 인터넷 문화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당시 영국 정부에서 “진정하고 하던 일 계속 하세요”라는 뜻으로 만든 ‘Keep Calm and Carry On’ 포스터(아래 사진)와 문구가 영어권에서 계속 큰 인기를 끌고 있으니까요.인터넷에서 ‘닥치고 ○○○’이라고 한국어로 쓴 거 보신 적 있으시죠? 그게 바로 이 표현을 과격하게(?) 번역한 겁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시느라 고생하셨다면 이제 닥치고 추천을 눌러주세요!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제일 쉬운 문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은? 잘 아시는 것처럼 이승만(1876~1965)이다. 조금 어려운 문제. 그럼 첫 국무총리는? 이번에는 광복군 참모장 출신인 이범석(1900~1972) 장군이 정답이다. 이제 제일 어려운 문제. 그럼 첫 번째 국무총리 후보자는 누구였을까. 이윤영 목사(1890~1975)가 주인공이다. 그러니까 대한민국 역사상 첫번째 국무총리 후보자는 인준 투표를 통과하지 못했다. 황해도에서 태어나 감리교 학교에서 공부한 이 대통령은 평안도 출신 감리교 목사인 이 목사를 1948년 7월 27일 총리 후보자로 지명하면서 ‘남북통일을 위한 인선’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 목사 카드를 꺼내든 게 불안했는지 국회에 나와 직접 대통령 교서(敎書)를 읽었다. 이 대통령은 이 교서에서 “모든 추천 명단이나 신문에 발표되는 것을 보면 가장 국무총리에 어울리는 분은 인촌 김성수(1891~1955) 신익희(1892~1956) 조소앙(1887~1958) 씨 등 세 분”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김성수는 “국무총리보다 덜 중요하지 않은 책임”을 맡겨야 하는 사람이라서 △신익희는 국회 부의장으로 이 대통령 본인이 대통령이 되면서 공석이 된 국회의장을 대신해 국회를 이끌어야 해서 △조소앙은 “불행히도 근자(近者)에 와서 총선거문제 이후로 노선이 갈려서” 총리로 지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 목사 인준인은 찬성 59표, 반대 132표로 부결됐다. 그러자 동아일보는 7월 30일 사설 ‘민중의 정치를 고조(高調)함’을 통해 “(이 대통령이 ‘이외의 인물’을 총리로 지명하겠다고 밝힌 데 대해) 총리의 인선은 반드시 국민적 기초 위에서 되어야 할 것이 상식이매, 이 상식을 이탈한 비밀과 의외가 있을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의 과도한 비밀은 드디어 이외의 파문을 초래하였으니 이윤영 씨의 인준 부결 소동은 이 땅, 이 겨레의 헌정사상 첫 페이지의 일대오점으로 국민의 통한이 이에 더 할 바 없다”고 비판했다. “대통령의 판단을 오도(誤導)하는 측근의 잡음을 의아(疑訝·의심)할 뿐”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 사설은 “이 대통령은 본인의 의사(意思)만이 민족의 원한 바라고 단정한다”며 “만약 일개인의 의사가 민의를 반영하는 것이라면 이 나라는 영웅이나 천재가 움직이는 나라요 민주의 힘으로 움직이는 나라가 아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이 대통령은 동아일보 예상대로 이 장군을 새 총리 후보자로 지명하면서 “여론상 이범석 씨의 명망이 가장 높으므로 민의에 따르겠다”고 했다. 이 장군에 대한 인준안은 그해 8월 2일 찬성 110표, 반대 84표로 통과됐다. 인준안 통과 후 이 대통령은 “장관 인선은 총리와 협의해 인격본위(人格本位)로 등용하겠다”고 밝혔다. 정말 이대로 됐을까. 이 장군은 국무총리 인준에 도움을 준 한국민주당 인사를 장관 자리에 추천할 때마다 이 대통령이 “그 자리는 내가 벌써 생각해 놓은 사람이 있다”, “왜 하필 그 사람이야?” “그 사람 언제부터 알고 지냈어?”라고 답했다고 훗날 회고했다. ‘코드 인사’라는 말은 노무현 정부 이후 등장한 신조어지만 대통령과 고향이 비슷한 사람 등 ‘자기 사람’을 총리나 장관에 앉히고 싶어 했던 건 정부 수립 때부터 계속된 일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1953년 오늘(7월 27일)은 유엔군과 북한군이 6·25전쟁 휴전협정서에 조인(調印)한 날입니다. 휴전을 하기로 했으면 이를 외부로 알릴 필요가 있을 터. 군대에서는 무전병이 이런 업무를 맡습니다. 당시 이 소식을 전한 무전병은 바로… (제목을 보고 다 아셨겠지만 모르시는 척!)송해 선생님(90)이었습니다. (사진 보고 다들 아셨겠지만) 네,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는 그 분이죠. 송 선생님은 그 동안 여러 방송에 출연해 “6·25 전쟁 당시 모스 부호로 전보를 치는 육군 통신대에서 근무했다. 그냥 모스 부호가 아니라 암호 된 모스 부호였다. 이 암호를 해독해 전보를 치면서 내용을 보니까 ‘22시(오후 10시)를 기해 모든 전투를 중단한다’는 휴전 전보였다. 내가 휴전 소식을 처음 전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모스 부호는 점(・)과 선(-)을 섞어서 글자를 조합하는 통신 수단입니다. 이 부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모스 부호를 접해도 무슨 뜻인지 알아채기가 쉽지 않지만 한번 배우면 계속 머릿속에 남아 있게 됩니다. 송 선생님은 “자동차 광고를 보는 데 모스 부호 소리가 들려 놀란 적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특정 업체 홍보처럼 비출까 봐 광고를 보여드릴 수는 없지만 간단한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찾으실 수 있습니다.)원래 북한에 있는 황해도 출신인 송 선생님은 6·25전쟁 당시 남쪽으로 건너와 한국군에서 근무했습니다. 월남 과정에서 바다를 건너 오면서 본명인 복희 대신 바다 해(海)를 예명으로 쓰기로 결정했다는 이야기도 널리 알려진 에피소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예명에 담은 겁니다.송 선생님은 금강선 관광을 처음 시작할 때는 ‘유람선 노래자랑’, 나중에는 전국노래자랑 평양편 진행을 맡아 북한을 찾았습니다. 그래도 누이 동생을 비롯한 가족은 만날 수는 없었다네요. 송 선생님은 “가족들이 제발 살아있기만을 기도한다”고 자주 말하곤 했죠. 하루 빨리 송 선생님을 비롯한 실향민들이 마음껏 고향을 찾을 수 있는 시대가 열리면 좋겠습니다.그럼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모스 부호로 쓴 ‘송해 선생님 건강하세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이 신발은 뭘로 만들었을까요? 제목을 읽고 들어오셨을 테니 이미 정답을 아실 터. ‘울트라 III 에코’라는 이름이 붙은 이 신발은 녹조(綠藻)로 만들었습니다. 네, ‘녹조라떼’라고 할 때 그 녹조 맞습니다. 정확하게는 중국 타이(太) 호에 잔뜩 끼었던 녹조가 원료입니다. 이 신발을 만든 건 ‘비보베어풋(Vivobarefoot)’이라는 영국 회사입니다. 이 회사는 원래 샌들이나 구두창에 쓰는 EVA(Ethylene-vinyl acetate·에틸렌초산비닐)로 ‘울트라 III’라는 워터슈즈를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석유 같은 화석 연료가 없으면 이 EVA를 만들 수가 없다는 것. 친환경 제품을 만들고 싶었던 비보베어풋은 녹조로 플라스틱 계통 소재를 만드는 미국 블룸(Bloom)사와 손잡았습니다. (녹조가 하천에 가득 낀 모습을 일컫는 영어 표현이 ‘bloom’입니다.) 이 미국 회사는 녹조 성분을 최고 60%까지 포함한 ‘블룸 폼(foam·아래 사진)’이라는 소재를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재는 요가 매트 등을 만드는 데 쓸 수 있다고 합니다. 녹조로 신발을 만드는 첫 단계는 이동 작업 차량을 녹조가 낀 하천으로 끌고 가는 것. 하천에서 녹조를 끌어올린 다음 화학 응고제를 뿌립니다. 그러면 녹조는 덩어리가 진 채로 이 차량에 달린 물탱크 아래 가라 앉죠. 공기를 주입해 덩어리를 물 위로 떠오르게 한 다음 햇볕에 잘 말리면 ‘녹조 수확’ 작업이 끝납니다. 수확이 끝나면 녹조에 있던 독성이 사라진 물을 원래 있던 하천으로 돌려보냅니다. 두 회사는 이 신발 한 켤레를 만들면 물 57갤런(약 216¤)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제품을 만들 때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는 점도 두 회사가 홍보하는 포인트 중 하나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일본에는 녹조를 가지고 비료(퇴비)를 만드는 미라이에(ミライエ)라는 회사도 있습니다. 이 회사 역시 홈페이지(아래 사진)를 통해 녹조(アオコ)를 즉석에서 비료를 만들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습니다. 녹조는 또 석유를 대체할 바이오 에너지로도 인기가 높습니다. 미국 에너지국(DOE)은 2010년 녹조(algae)를 바이오 연료로 바꾸는 방법을 찾는 연구에 8000만 달러(약 897억 원)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전기라고 안 될 게 있나요? 지난해 류원형 연세대 기계공학과 교수팀은 녹조에서 전자(電子)를 뽑아내 전기를 만드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연구팀은 이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어드밴스드 펑서녈 머터리얼스(Advanced Functional Materials)’에 싣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환경오염 물질인 녹조 같은 게 얼마든 많이 생겨도 괜찮다고 말씀드리려는 건 물론 아닙니다. 다만 이렇게 녹조를 이용하는 법도 있다는 걸 소개하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아무리 싫어도 녹조와 함께 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면 쓸모를 찾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일 테니까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아, 정말 김세진 감독이 김요한을 원했구나.’ 프로배구 남자부 OK저축은행이 지난달 19일 KB손해보험과 날개 공격수 김요한(32·사진)을 포함한 2대2 트레이드를 단행하자 배구 취재 기자 사이에서 이런 말이 들렸습니다. 김세진 OK저축은행 감독이 그 전에도 김요한을 데려오려고 KB손해보험과 트레이드 협상을 벌였다는 소문이 돌았었죠. 이번에는 반대였습니다. 이번에는 확실히 KB손해보험이 급했습니다. KB손해보험에서 김요한 카드를 들고 트레이드 협상을 벌인 건 OK저축은행뿐만이 아니었거든요. 최근 사석에서 만난 한 배구단 관계자는 “KB손해보험에서 먼저 삼성화재에 4대4 트레이드를 제안했다고 들었다”고 전했습니다. KB손해보험에서 김요한, 그리고 이번에 김요한과 같이 팀을 옮긴 이효동(28·세터)을 포함해 선수 4명 이름을 대면서 ‘원하는 숫자만큼 데려가고 그 숫자만큼 선수를 달라’고 요청했다는 겁니다. 이 관계자는 “결국 2대2 트레이드로 합의를 봤다. 그런데 도장을 찍기 직전에 김요한 몸값 때문에 협상이 틀어진 걸로 안다”고 했습니다. 김요한은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은 지난해 KB손해보험과 연봉 4억 원에 재계약했습니다. 문제는 이 연봉이 각종 옵션 등을 제외한 순수 보장액이라는 점. 삼성화재 쪽에서 ‘연봉 이외 금액은 부담하기 어렵다’는 뜻을 밝히면서 트레이드는 물거품이 됐습니다. 이 관계자는 “OK저축은행에서 김요한 몸값을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아는 게 없다”며 말을 아꼈습니다. 우리카드도 KB손해보험에서 트레이드를 진행했던 팀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른 배구 관계자는 “우리카드에서는 김요한보다 (지난 시즌을 마치고 군입대한 우리카드 주전 세터) 김광국(30)을 대신할 세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세터를 포함해 카드를 맞춰보고 있었는데 삼성화재에서 유광우(32·세터)가 오게 되면서 없던 일이 됐다”고 했죠. 삼성화재 주전 세터였던 유광우는 지난 시즌까지 우리카드에서 뛴 박상하(31·센터)가 FA 자격을 얻어 삼성화재와 계약하면서 그 보상선수로 우리카드 유니폼을 입게 됐습니다. KB손해보험에서 팀 간판이나 다름없던 김요한을 트레이드하려고 이렇게 애쓴 건 그만큼 변화가 절실하다고 판단했다는 뜻이겠죠? KB손해보험은 김요한 트레이드에 이어 경북 구미시에서 경기 의정부시로 연고지를 옮기면서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국가대표 세터 출신 최영준 사무국장도 최근 배구단 밖으로 자리를 옮긴 상태. 과연 KB손해보험이 이번 변화를 통해 ‘만년 하위권’ 이미지를 벗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그 시절 우리에게는 누구나 컴퓨터 안에 처음 갖게 된 ‘스케치북’이었습니다. 1984년 ‘PC 페인트브러시’라는 세상에 나온 ‘그림판’ 이야기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이듬해 윈도 1.0부터 계속 마이크로소프트(MS) 윈도와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윈도에서 더 이상 이 그림판을 볼 수 없게 됐습니다. 영국 일간 가디언 등 해외 언론은 마이크로소프트(MS)가 올 가을 윈도 10을 업데이트할 때부터 그림판을 업데이트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24일(현지 시간) 보도했습니다. 단, 윈도에서 언제 아예 빠질지는 아직 확정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MS는 이미 4월 윈도 업데이트 때 ‘그림판 3D(Paint 3D)’를 내놓으면서 작별을 예고한 상태였죠. 어도비 포토샵 같은 프로그램에 밀려 그림판은 ‘3류 그래픽 소프트웨어’가 된 지 오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발로 그린 것처럼 낮은 퀄리티를 조심하라’는 뜻인 ‘발퀄주의’ 해시태그가 붙은 게시물은 거의 대부분 그림판으로 작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예 ‘그림판으로 작업했냐’는 말을 퀄리티가 낮은 그래픽 작업을 비판하는 표현처럼 쓸 정도였죠.하지만 못 난 선비만 붓을 탓하는 법. 누군가에게 그림판은 이렇게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주는 스케치북이자 화구(畫具)이자 크리스마스 선물이었습니다.그러니 올 가을 윈도 10이 업데이트 시작을 알리면 잠깐 그림판과 함께 했던 추억을 떠올려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그림판아, 잘 가!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아래 그림에서 색깔이 다른 네모를 찾아보세요. 제 눈에는 오른쪽 하나가 전혀 다른 색으로 보입니다. 왼쪽에도 다른 색이 들어 있을까요? 글을 읽으면서 정답을 알아봅시다. ●호메로스는 색맹? 빅토리아 왕조 시대 영국 총리를 네 번 지낸 윌리엄 글래드스톤(1809~98)은 평생 책을 2만 권 넘게 읽은 걸로 유명합니다. 특히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광팬이었죠. 글래드스톤은 반복해 호메로스 작품을 읽다가 재미난 사실을 발견합니다. 당연히 푸르러야 할 에게해(海)를 호메로스는 ‘진한 와인 빛(wine dark)’이라고 표현했던 것. 물론 문학적인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녹색 꿀, 겁에 질린 녹색 얼굴 같은 표현이 계속 등장하면서 글래드스톤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그래서 호메로스 작품에 등장한 색깔을 직접 세봤습니다. 그랬더니 검은색 170번, 흰색 110번, 빨간색 13번을 제외하면 다른 색깔은 10번도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파란색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죠. 깊은 고민에 빠진 글래드스톤은 호메로스가 색맹이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대문호만 색맹이어서는 안 되겠죠? 그는 고대 그리스인들은 모두 색맹이었다고 가설을 세우게 됩니다. ●언어학의 반격 당연히 그럴 리가 있나요? 20세기 들어 언어학이 발전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밝혀냅니다. 사람이 직접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언어 체계가 재해석한 세상을 본다는 거죠. 이게 색깔하고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언어학자들은 고대 문서를 가지고 어떤 색깔이 언제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는지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거의 모든 언어에서 똑같은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고대 문서에 처음 등장한 건 검은색과 흰색이었습니다. 그 다음 빨간색이 나옵니다. 이어서 녹색과 노란색. 맨 마지막이 파란색이었던 겁니다. 언어학자들은 녹색과 파란색을 구분하지 않는 언어가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우리말도 그렇습니다. 푸른 하늘은 파란색에 가깝겠지만, 푸른 숲은 녹색에 가까우니까요. 파란색 또는 파랑은 순우리말이지만 녹색(綠)은 한자어입니다. ●힘바족(族) 사례 그렇다면 푸른색을 아예 구분하지 않는 언어가 있다면 어떨까요? 이를 알아보려고 언어학자들은 아프리카 나미비아 북부에 사는 힘바족을 찾아갔습니다. 그 다음 맨 처음에 등장한 그림 두 개를 주고 똑같은 질문은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힘바 족 사람들은 왼쪽에서는 손쉽게 다른 색깔을 찾아냈지만 오른쪽에서는 못 찾았습니다. 네, 왼쪽에도 다른 색깔이 섞여 있던 겁니다.왜 그럴까요? 어떻게 오른쪽에서는 못 찾으면서 왼쪽에서만 다른 색을 찾아낼 수 있는 걸까요? 다시 그림을 보시죠. 정답은 이들이 쓰는 ‘언어’ 때문입니다. 영어를 비롯해 현대 언어에서는 기본 색깔을 11가지로 구분합니다. 힘바족이 쓰는 말에는 기본 색깔이 5개뿐입니다. 이들은 색깔을 아래 그림처럼 구분합니다. 그러니까 힘바 족 사람들에게 왼쪽 그림에는 부로우(burou)에 둠부(dumbu)가 섞여 있는 거지만, 오른쪽 그림은 전부 부로우 뿐이었던 겁니다. 색약 또는 색맹 증상이 있는 분들 중에서도 왼쪽에서만 다른 색깔을 찾아내는 분들이 계십니다. 사실 포토샵 같은 컴퓨터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확인해 보면 왼쪽 그림에도 분명히 다른 색깔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확실히 세상을 자기 두 눈으로 똑바로 보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뇌에 비친 그림자를 보는 겁니다. 여전히 믿기지 않으신다고요? 색깔을 나타내는 낱말이 없다고 저렇게 다른 색을 못 보는 게 말이 되냐고요? 아래 드레스는 무슨 색으로 보이십니까? 검정과 파랑? 아니면 흰색과 금색? 서로 다른 색깔로 보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아도 어쩔 수 없습니다. 못 보는 건 정말 못 보는 겁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국보급 투수’ 선동열(54·사진)에게 7월 24일은 초대 야구 국가대표 전임 감독이 된 날로 기억될 터. 그런데 27년 전 오늘(1990년 7월 24일)은 달랐습니다. 당시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기사 제목에 따르면 쌍둥이에게 정복당했거든요. 제목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선동열은 이날 경기 전까지 전신 MBC 시절을 포함해 LG를 상대로 12연승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날 비가 오락가락하던 잠실 경기에서 1-1로 맞선 5회말 선동열이 마운드에 오를 때만 해도 긴장한 쪽은 4연패를 당하고 있던 LG였습니다. 선동열이 3이닝을 1안타 무실점으로 막고 LG 선발 김용수(57)도 5회초 1실점 한 걸 제외하면 무실점으로 버티면서 경기는 8회초까지 1-1 동점을 유지했습니다. 그때 8회말 LG 선두 타자 나선 박흥식(55·현 KIA 코치)이 풀카운트 접전 끝에 3루타를 뽑아내면서 분위기가 LG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LG를 상대로 무사 3루 위기를 맞은 건 천하의 선동열에게도 낯설었는지 그는 여기서 폭투를 범하고 맙니다. 그 사이 박흥식이 홈플레이트를 밟으면서 LG가 2-1로 앞서기 시작했고 이 득점은 결국 결승점이 됐습니다. 하지만 선동열을 상대로 12연패 정도 당한 걸로는 명함을 내밀기가 힘듭니다. LG의 영원한 동반자 롯데는 더했거든요. 롯데는 1988년 8월 11일부터 1995년 9월 26일까지 선동열에게 20연패의 수모를 당했죠. 1995년 기록이 끊긴 건 선동열이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에 입단하면서 롯데와 맞붙을 일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롯데는 1988년 6월 12일 끝내기 안타로 승리를 거둔 뒤로 선동열이 은퇴할 때까지 단 한 번도 그를 패전투수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1999년 11월 21일 선동열이 일본 나고야에서 은퇴를 선언했던 그날 부산 시내 술집에 삼삼오오 모인 롯데 팬들은 ‘제발 우리한테 한번만 진 다음에 은퇴하라’며 분루를 삼켰다나 뭐라나.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신문에는 창간 후 발행한 호수(號數)를 이르는 지령(紙齡·신문의 연령)이 붙어 있다. 예를 들어 2017년 7월 22일자 동아일보는 ‘2만9842호’다.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이 지령을 벗어나 신문을 발행하는 일이 잦았는데 그게 바로 ‘호외(號外)’다. 1920년 4월 1일 창간한 동아일보는 97년 전 오늘(1920년 7월 22일) 100호를 맞았다. 100단위 숫자를 기념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이날 신문 1면 가운데에는 일본 도쿄(東京)에 주문했던 윤전기(신문을 인쇄하는 기계)가 도착한 걸 자축하고, 지면 일부를 독자 참여 꼭지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밝힌 상자 기사가 실렸다. 그런데 결국 이날 신문은 세상에 나가지 못했다. 조선총독부가 1면 머리기사로 나간 사설 ‘학우회 순연강연회 해산령과 언론 압박’에 문제가 있다며 발매반포금지 조치를 내렸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조선총독부에서 문제 삼은 부분을 삭제하고 호외로 발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학우회’는 도쿄에 유학 중이던 조선 청년 18명이 만든 단체다. 이들은 여름방학을 이용해 1920년 7월 9일 부산 동래를 시작으로 조선 각지를 돌며 순회강연을 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들이 도쿄에서 출발할 때부터 소식을 전하는 등 이 강연을 적극 후원했다. 학우회는 부산을 시작으로 울산 김해 대구 통영 공주 청주 천안 등을 거쳐 그달 18일 서울 단성사에 도착했다. 이 자리에는 3000여 명이 모였다. 나중에 초대 재무장관이 되는 게이오(慶應)대 유학생 김도연(1894~1968)이 ‘조선 산업의 장려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강연을 시작하자 강연장은 조선총독부 성토대회장으로 바뀌었다. 결국 종로경찰서장이 강연을 중단시키고 해산을 명했다. 조선총독부는 학우회가 서울 이북에서 열려던 강연회도 모두 취소시켰다. 그러자 동아일보는 100호 기념호 1면 사설에 “무차별이니 일시동인(一視同仁)이니 선정덕정(善政德政)이니 하는 사(蛇·뱀)의 설(舌·혀)을 농(弄)하야 조선인을 기만치 말라”고 조선총독부를 규탄했다. 이날 신문이 발매반포금지 조치를 당한 이유다. 새로운 지식에 굶주렸던 당시 동포들은 과학 교육 여성 위생 등 다양한 주제로 열리는 강연회에 참석해 지적 허기를 달랬다. 동아일보는 이 강연회를 지상 중계하면서 지식 보급에 앞장섰다. 1920년 4월부터 1925년 말까지 약 5년 동안 동아일보에서 소개한 강연회 기사는 총 2097건이나 된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생수머신.’ 황재균(29·현 샌프란시스코)은 프로야구 롯데 소속이던 2015년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에서 우승한 뒤 이런 별명을 얻었습니다. 결승에서 그와 맞붙은 NC 테임즈(31·현 밀워키)가 근육을 키운 황재균 몸매에 대해 평가해 달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는데요. (왜, 진짜 별명은 이게 아니라고 말을 못하니!) 이전까지 생애 최다 홈런이 18개(2009년)였던 황재균은 2015년 전반기에만 홈런 22개를 몰아치며 ‘벌크업’ 효과를 과시했습니다. 황재균은 그해 전반기에 348타석에서 15.8타석마다 하나씩 홈런을 날렸습니다. 타석 당 홈런 비율은 6.3%. 하지만 후반기가 막을 열자 황재균은 고개 숙인 남자가 됐습니다. 그가 후반기에 첫 홈런을 터뜨린 건 82타석이 지난 뒤였죠. 황재균은 이 홈런을 포함해 후반기 238타석에서 홈런 4개를 추가하는 데 그쳤습니다. 홈런 비율은 1.7%로 내려갔습니다. 황재균은 2015 시즌이 끝난 뒤 포스팅(비공개 경쟁 입찰)을 통해 메이저리그 문을 두드렸지만 단 한 팀도 반응이 없었습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후반기 성적 부진을 그 이유 중 하나로 꼽았습니다. 이런 일을 겪은 건 황재균이 처음은 아닙니다. ‘홈런 더비(derby)의 저주’라는 말이 널리 쓰일 정도. 메이저리그에서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를 부르는 공식 명칭이 ‘홈런 더비’라 이런 이름이 붙은 겁니다. 홈런 더비 때는 문자 그대로 홈런만 쳐야 하기 때문에 스윙 폼이 커지게 마련이고 결국 후반기 성적도 나빠진다는 게 이 저주를 믿는 이들 주장입니다. 올해 메이저리그(MLB)에서는 ‘베이브 루스의 재림’이라는 소리까지 듣던 뉴욕 양키스 신인 타자 애런 저지(25)가 이 저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저지는 전반기 때 12.2타석마다 홈런을 하나씩 날렸지만(총 30개) 올해 홈런 더비에서 우승한 뒤 20일까지 31타석에서 홈런을 하나도 때리지 못했습니다. 타율도 전반기 0.329에서 후반기 0.115로 주저앉았습니다. 황재균이나 저지만 그런 게 아닙니다.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MLB 홈런 더비에 참가한 선수 82명 성적을 전·후반기로 나눠 비교해 보면 타율, 출루율, 장타력, OPS(출루율+장타력), 타석 당 홈런 비율이 모두 내려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리그 평균은 모두 조금씩이라도 올랐는데 말이죠. 그렇다면 저주가 실제로 존재하는 걸까요? 정말 타자들이 무조건 홈런을 치려고 커진 스윙 폼을 끝내 바로잡지 못하는 걸까요? 시즌 홈런왕이 되려는 타자는 홈런 더비에 나서지 말아야 하는 걸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OPS 기준으로 MLB 홈런 더비 참가자 82명 중 59명(72.0%)가 성적이 내려간 건 사실. 그런데 이들이 전반기에 ‘너무 잘 쳤다’는 걸 감안해야 합니다. 황재균이 정말 후반기에도 홈런 22개를 때려 갑자기 40홈런을 넘게 치는 타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저지도 홈런을 60개 이상 쳐내면서 MLB 신인 선수 최다 홈런 기록(49개)을 갈아 치우는 게 아주 당연한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전반기에 남들보다 정말 (홈런을) 잘 쳤기에 홈런 더비에 초대 받을 수 있었습니다. MLB 홈런 더비에 참가할 수 있는 선수는 해마다 8명(2014년은 10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또 후반기에 성적이 떨어졌다고 해도 리그 평균보다는 훨씬 높습니다. 후반기에도 ‘올스타급’ 기량은 유지한 겁니다. 자기 전반기 성적보다 떨어지는 게 문제였을 뿐이죠. 통계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평균으로 회귀한다(regression to the mean)’고 합니다. 전반기에는 이 타자들이 ‘운이 좋아서’ 타격 성적이 평균보다 ¤았지만 후반기에는 반대로 평균을 향해 성적이 내려갔던 겁니다. 사실 야구 선수 타격 기록은 평균회귀를 설명할 때 자주 쓰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운이 꼭 반년 동안에만 바뀌는 건 아닙니다. 신인상을 타면 이듬해 부진하다는 ‘2년차 징크스’도 세상만사가 평균으로 회귀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죠. 실제로는 첫 해 너무 잘하면 이듬해 조금만 성적이 떨어져도 ‘건방져졌다’는 평가가 따라다니지만 말입니다.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은지 평균회귀로 설명할 수 있는 일에 이런저런 구실을 대는 ‘회귀의 오류’라는 표현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전반기에 너무 잘한 게 진짜 자기 실력은 아닌 것처럼 후반기에 좀 못한 것도 진짜 실력은 아니니까요. 장마에 축 늘어지고, 무더위에 지쳐 슬럼프에 빠지셨나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곧 다시 평균으로 돌아갈 테고, 그건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뜻이니까요. 거꾸로 지금 정말 잘 나간다고 자만할 필요도 없다는 걸 ‘홈런 더비의 저주’가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새로 고용한 미대생 알바(아르바이트)가 심상치 않다’는 글이 인터넷에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이 사진에는 슈퍼마켓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미대생이 과자를 색깔별로 정리한 진열대가 담겨 있습니다. ‘묘한 안정감을 준다’는 게 누리꾼들 평가. 그런데 모두가 이런 색깔을 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학창시절 과학 시간에 배웠고, 어른이 되어서도 건강검진을 받을 때마다 검사 받는 것처럼 색맹 또는 색약이라고 해서 색깔을 남들하고 다르게 받아들이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그러면 이런 분들 눈에는 맨 처음에 슈퍼마켓 진열대가 어떻게 보일까요? 이렇게 보입니다. 아래 그림 같은 색각 이상 테스트 많이들 받아보셨을 겁니다. 25, 29, 45, 56, 6, 8이라고 쓴 왼쪽 숫자를 읽으실 수 있는 분이 대부분이지만 200명 중 1명꼴로 이 그림이 오른쪽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색약 또는 색맹은 망막에 있는 원추세포라는 녀석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해 생기는 증상입니다. 원추세포는 다시 세 종류로 나뉘는데 각각 빨강(적색), 녹색, 파랑(청색)을 구분하는 구실을 합니다. 어떤 세포가 색깔에 반응하지 못하는지에 따라 같은 색깔이 다르게 보입니다. 방송인 중에서는 신동엽 씨가 여러 번 색약이라는 사실을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신 씨는 얼마 전 방송에서 “색깔에 대한 개념이 일반 사람들하고 조금 다르다.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이해가 안 가는 게 단풍 구경이다. 내 눈에는 단풍이 지저분해 보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래 사진을 보면 어쩐지 이해가 가기도 하는 발언입니다. 신문은 글씨 위주라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지만 사진에 들어간 색깔이 다르게 보이는 것까지 막지는 못합니다. 아래 사진은 오늘자 동아일보 1면을 색맹 종류에 따라 구분한 겁니다. 색깔이 다양한 실제 풍경뿐 아니라 비교적 단순한 색을 쓰는 애니메이션도 색맹 또는 색약이 있으면 아래 사진처럼 다르게 보입니다. 지금까지 나온 사진은 해당 색깔을 완전히 볼 수 없는 걸 가정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개인마다 색깔이 어떻게 보이는지 추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같은 색약도 개인차가 큽니다. 만화가 이현세 씨도 색약인데요, 색약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에 색감이 독특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흔히들 생각하시는 것과 반대로 남들하고 색깔을 다르게 본다고 자동차 운전면허를 딸 수 없는 건 아닙니다. 실제 신호등을 보고 색을 맞출 수만 있으면 면허증을 받는 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또 색깔을 다르게 보는 분들 중에는 색깔 구분을 더 잘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보는 것보다 색을 더 여러 단계로 구분할 수 있는 겁니다. 이를 근거로 “색각 이상은 진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죠. 진화의 산물이든 세포 이상이든 똑같은 색을 다르게 보는 이들도 200명 중 1명 정도는 있어야 사회가 좀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요? 남들하고 색깔을 다르게 보는 사람들보다 생각에 색안경을 끼고 남을 멋대로 재단하는 이들이 훨씬 더 문제 있는 분들일 테니 말입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