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피아졸라가 1974년 발표한 ‘리베르탱고’가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의 폭압에 대한 저항의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강렬하고 농염한 춤 탱고에 관한 이모저모를 담은 책이다. 책은 탱고를 ‘땅고’라고 표현한다. ‘탱고’와 ‘땅고’는 구분돼야 한다는 게 저자의 말이다. ‘땅고’는 정통 아르헨티나 탱고이고, ‘탱고’는 유럽의 사교댄스와 만나 과장된 동작으로 변형된 ‘콘티넨털 탱고’라는 것이다. 보통 우리가 TV에서 볼 수 있는 건 스포츠로 변형된 콘티넨털 탱고다. 기사에서는 익숙한 표현인 ‘탱고’로 쓴다. 책에 따르면 탱고는 원래 아프리카 흑인들의 춤, 혹은 흑인들이 춤추기 위해 모이는 장소를 뜻했다. 1860년경 아르헨티나에서 흑인 춤곡인 칸돔베와 쿠바의 춤곡 아바네라가 결합되면서 생겨났다. 탱고는 혼자서는 출 수 없는 커플댄스이고, 상상력이 요구되는 즉흥의 춤이다. 음악과 춤뿐 아니라 가사 역시 탱고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탱고의 황금시대였던 1930∼1950년대 탱고 시를 쓰는 시인은 대부분 남자였고, 내용도 화자인 남자가 사랑의 상실을 노래하는 것이 주를 이뤘다. 이는 19세기 말 탱고 발생지인 부에노스아이레스 보카 항구의 극단적인 성비 불균형이 원인이라고 한다. 항구에는 선원, 부두 노동자, 피혁 공장 직원을 비롯해 남자가 대부분이었고, 이들이 실연의 고통을 시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탱고는 아르헨티나 정치와도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수많은 유럽인이 아르헨티나로 건너왔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탱고 바는 사람들로 흥청거렸다. 페론 대통령의 사회당 정권은 민족주의 성향을 갖고 있었기에 외국 음악을 제한하고 아르헨티나 음악을 장려했다. 저자는 “탱고를 춘다는 것은 나는 페론주의자라는 것을 육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1950년대 중반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는 탱고를 탄압하고 로큰롤 등을 장려했다. 탱고 아티스트들은 군사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페론주의자라는 혐의로 투옥됐다. 저자의 본명은 하재봉으로 과거 시와 소설, 영화평론을 썼다. 필명은 탱고 세계에서 쓰는 이름이라고 한다. 2004년 탱고에 입문한 뒤에는 탱고를 가르치는 한편 여러 페스티벌에서 탱고 부문 총감독을 했다. 저자는 “땅고를 추는 동안 우리는 마치 스승이 내려준 화두를 붙들고 동안거에 들어가 면벽참선하는 선승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아득함을 느낀다”, “땅고를 추기 위해 밀롱가(사람들이 모여 탱고를 추는 장소)로 들어가는 순간 나는 나를 둘러싼 세계와 거대한 아브라쏘(포옹)를 하고 있는 것이며 상대를 안는 순간 또 다른 나의 자아와 아브라쏘를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춤에 선(禪)이나 ‘세계와의 합일’까지 갖다 붙이는 건 다소 호들갑스럽다. 그만큼 몰입되는 춤이고, 저자가 탱고에 빠져있다는 얘기겠다. 대중적으로 탱고를 소개하기 위한 책일 텐데 일부 ‘전문용어’를 별다른 설명 없이 사용한 게 아쉽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여배우들이 세월이 무색한 동안미모를 자랑하지만 배우 김윤진 씨(44)의 눈가에는 나이에 걸맞은 잔주름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다음 달 5일 개봉하는 미스터리 스릴러 ‘시간 위의 집’에서 주인공 미희를 연기한 그를 29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영화는 자신의 집에서 남편과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미희가 교도소에서 25년간 복역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펼쳐진다. 그는 평범한 30대 주부 미희, 60대이지만 칠순이 한참 넘은 것처럼 보이는 노인 미희를 연기한다. 노인 분장과 연기가 퍽 자연스럽다. “제가 시술(?)을 지나치게 했으면 아무리 얼굴에 풀을 발라도 노인의 주름이나 표정이 표현이 안 되지 않았을까요. 그런 상태라면 배우로서 이런 배역을 제안받았을 때 방법이 없잖아요. 아직까지는 그냥 유지하고 버티고 싶어요.” 그러면서 그는 “물론 5년 뒤에는 생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며 웃었다. 김 씨는 크게 ‘튀지 않는’ 배우다. 더도 덜도 아니고, 영화의 흐름에서 꼭 필요한 만큼을 연기해 냈다. 영화에 미희가 아들을 잃고 큰 슬픔에 빠지는 장면이 있다. 배우로서 연기력을 보여줄 만한 기회지만 그는 오히려 미희의 뒷모습을 보여주며 건조하게 처리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이야기의 흐름이 중요하지 제가 어느 장면에서 얼마나 잘 울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배우는 감독과 시나리오가 전하려는 이야기를 잘 전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씨는 미희가 후두암 말기라는 설정, 신부(옥택연)와의 만남에서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의 디테일 등 자신의 의견이 영화에 받아들여진 곳들이 있다고 했다. “감독님에게 매일 (제안을) 던졌어요. 감독님은 ‘아, 예…’ 하실 뿐 대부분 무시하시지만요. (웃음) 그중에 괜찮은 게 받아들여졌다면 그건 감독님의 능력이지요.” 영화는 이야기가 촘촘하고 연출의 호흡도 나무랄 데 없는 스릴러다.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이웃 사람’(2012년), ‘세븐 데이즈’(2007년)를 비롯해 스릴러 장르가 적지 않다. “스릴러는 드라마틱하면서도 깔끔하게 스토리를 전달하기에 매력적”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인터넷 검색창에 영화 제목을 입력하면 연관 검색어에 김윤진이 아니라 극중 미희보다 비중이 덜한 신부 역의 옥택연이 뜬다고 하자 “택연 씨 팬 분들만 영화를 봐도 100만 명을 넘을 텐데 얼마나 좋아요”라고 말했다. “인생 길잖아요. 배우 김윤진이 드러나는 것보다는 캐릭터에 다가가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하모니’(2009년) 찍을 때 나문희 선생님이 가만히 앉아서 기도하는 연기를 봤는데, ‘아 이게(이 연기가) 영화네’ 싶더라고요. 저도 그런 존재감을 가진 배우가 되고 싶어요.”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국인이 사랑하는 시 중 하나인 윤동주의 ‘서시(序詩)’의 원래 제목이 시집의 전체 제목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주장이 나왔다. ‘서시’라는 제목은 윤동주가 붙인 것이 아니라, 출판 당시 출판사에서 붙인 것이라는 점은 이미 학계에 알려져 있다. 이근배 시조시인은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 ‘윤동주 100년 생애’ 전시회 개막식에서 “윤동주의 원래 원고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시)’라는 제목 뒤에 이 시가 이어진다”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시집 전체의 제목이면서 시의 제목”이라고 말했다. 이 시인은 “시의 내용에도 하늘, 바람, 별이 순서대로 등장한다”며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이라는 구절이 바로 제목의 ‘시’를 지칭한 것”이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임진왜란 때 왜군의 포로로 잡혀갔다가 우여곡절을 겪는 남자의 이야기는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이 유명하다. 여성 포로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세뇨리따 꼬레아’(나남)가 28일 나왔다. 저자인 소설가 유하령 씨(55)는 28일 기자간담회에서 “당시 약자 중의 약자였던 기생들이 포로로 끌려간 뒤 겪었을 수난을 그리려 했다”고 말했다. ‘기생 엄니’ 수향과 ‘기생 딸’ 정현은 임진년 동래성 전투에서 사로잡혀 일본 히젠나고야 성으로 끌려간다. 수향은 탈출하다가 잡혀 노예로 팔리고 마카오, 인도 고아를 거쳐 리스본으로 끌려가다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이른다. 정현은 포로 생활 중 아들을 낳지만 빼앗기고 수향을 찾아 나선다. 소설은 포르투갈인들과 네덜란드인들의 해상 전투, 선상 반란, 노예 매매 등을 묘사한다. 유 씨는 “임진왜란 당시 포로 10만 명이 일본으로 끌려갔고, 이후 나가사키의 노예시장에서 팔린 이들도 있지만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며 “다만 조선 포로들의 노예화로 마카오, 인도 고아 등의 포르투갈 상관(商館)에서 노예 값이 폭락했다며 선교사들이 보고한 기록이 있다”고 말했다. 유 씨는 2013년에도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간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화냥년’을 냈다. 이번 소설을 쓰기 위해 남편인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와 일본의 고서점을 뒤지며 자료를 찾았다고 한다. 유 씨는 “고서점에서 임진왜란 직후 일본을 여행하고 동방여행기를 남긴 이탈리아 무역상인 카를레티에 관한 일본인의 평론을 발견하고 소설에 참고했다”고 말했다. 이와 별개로 나가사키를 거쳐 마카오에 노예로 팔려가 6년 동안 고초를 겪은 뒤 일본으로 돌아온 조선인 여성 포로의 기록이 알려져 있다고 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소나무는/외솔길 숲속 소나무는/의젓하기만 하네/이유도 없이/뜻도 묻지 않고/그저 의젓하기만 하네.”(박이문·‘소나무 송(頌)’ 중에서) 동서양 철학을 아우른 인문학자이자 시인으로 ‘지성(知性)의 참모총장’으로 불려온 박이문(본명 박인희·미국 시먼스대 명예교수·사진) 포스텍 명예교수가 26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7세. 약 100권의 저작을 출간하며 왕성하게 활동한 고인은 철학은 인간이 답을 찾고 쉴 수 있는 둥지가 되어야 한다며 이른바 ‘둥지의 철학’을 추구했다. 고인의 시처럼 ‘의젓한 소나무’ 같은 삶이었다. 해외에서만 30여 년 동안 프랑스 철학과 영미 철학을 섭렵하며 인식론과 실존철학의 영역을 연구한 뒤 동양고전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았다. 예술철학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냈고, 철학과 문학의 경계에서 시작(詩作)에도 몰두한 시인이었다. 평소 고인은 “오랜 방랑 끝에 ‘철학적 글쓰기’와 ‘시적 글쓰기’의 결합은 불가능하지만 그 꿈마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이성의 그물망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을 시로 표현하고자 했고, 보편적인 것과 개체적인 것들을 모두 잡아 이 세계를 설명하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2014년경부터 기억력이 떨어지는 등 지병이 악화됐다. 지난해 2월 기자가 경기 고양시의 노인요양병원을 찾았을 때 기자 어깨를 두드리며 반가워했고, 그의 시를 읽자 환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충남 아산의 유학자 집안에서 막내로 태어나 6·25전쟁에 징집됐으나 폐질환과 영양실조로 쓰러져 의병제대했다. 피란 시절 부산에서 서울대 문리대 불문학과에 입학했고, 서울대 석사를 거쳐 1957년 이화여대에서 불문학과 전임교수로 발탁됐지만 1961년 프랑스로 떠나 소르본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 미국 시먼스대 교수, 1980년 이화여대·서울대 초청교수, 1983년 하버드대 교육대학원 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1985년 독일 마인츠대 객원교수, 1989년 일본국제기독교대 초빙교수, 1991년 포항공대 철학과 교수를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연구와 교육을 했다. 인촌상(2006년 인문사회문학 부문), 프랑스 정부 문화훈장(2010년 교육공로), 제1회 탄소문화상 대상(2012년) 등을 받았다. 훗날 도쿄대 총장을 지낸 하스미 시게히코는 소르본대 학위논문 ‘말라르메가 말하는 이데아의 개념’을 보고 “동양인도 이런 논문을 쓸 수 있구나”라며 감탄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고인의 전집(10권)을 지난해 발간한 류종렬 미다스북스 대표는 “박 교수는 대화로 깨달음을 주었던 ‘한국의 소크라테스’이자 척박한 한국 인문학의 영토에서 자라난 지성의 거목”이라고 말했다. 독일 마인츠대 시절부터 가깝게 지낸 강학순 안양대 교수는 “세상 물정에는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성을 보이면서도 학문 논쟁을 할 때는 물러섬이 없었다”며 “한국 인문학의 사표(師表)와 같은 인물”이라고 했다. 유족으로 부인 유영숙 씨와 아들 장욱 씨(미국 거주). 빈소는 서울 세브란스병원, 발인은 29일 오전 6시 20분. 02-2227-7500조종엽 기자 jjj@donga.com}

2015년 이른바 ‘흰골파검 논쟁’이 화제가 됐다. 한 영국인이 찍은 옷 사진이 어떤 이에게는 ‘흰색, 골드(금색)’, 다른 이에게는 ‘파랑, 검정’으로 보여 세계의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책은 이 논쟁으로 시작한다. 기자는 이번에도 하루는 ‘흰골’로 보였다가 다른 때는 ‘파검’으로 보이는 일을 겪고 새삼 당황스러웠다. 실제 그 옷은 파랑, 검정이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같은 파장의 빛이 우리 눈에 도달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색을 다르게 지각한다는 게 핵심이다. 우리의 뇌가 조명에 따라 달라지는 색 대신 ‘물체의 원래 색으로 추정되는 색’으로 경험을 통해 자동으로 보정해 인식하기 때문이다. 뇌는 소리도 걸러서 듣는다. 태평양의 어떤 외딴 섬에 사는 원주민들 언어의 특정 음성은 자기들끼리는 들리고, 음파측정기에도 감지되지만 외부에서 온 인류학자들은 그 소리를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그 연구자들의 뇌가 이 음들을 의식 속으로 들여보내는 훈련이 안돼 있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동일한 정보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당신이 보는 빨간색과 내가 보는 빨간색이 다르고, 느끼는 단맛과 장미 향기도 다르다. 책은 ‘협력은 어떻게 생겨나며 언제 이용당하는가’ ‘문화적 배경은 지각을 어떻게 조종하는가’를 비롯한 9개 질문과 답으로 구성돼 있다. 심리학, 인지과학 등의 실험 40여 건을 소개하면서 뇌과학을 설명한다.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사례도 있지만 흥미로운 실험들도 적지 않다. 뇌는 한 인간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몇 초에서 몇 분 사이에 결정한다. 그 판단은 얼마나 맞을까? 1990년대 미국 하버드대 심리학자들은 교사나 대학강사의 짧은 수업 영상을 무음으로 실험 참가자들에게 보여주고 역량, 우월성, 열의, 전문성 같은 범주로 이들을 평가하게 했다. 이 결과와 학생과 대학생들이 학기말에 한 강의 평가와 비교해보니 거의 비슷한 결론이 나왔다. 스위스의 심리학자는 알려지지 않은 정치가들의 얼굴 사진만 보여주고 정치 성향을 알아내라는 실험을 했는데, 역시 놀라울 정도로 적중률이 높았다. 직감의 힘이다. 물론 전체 통계이니 한 명 한 명의 직감은 틀릴 수 있다. 저자는 독일에서 태어나 한국을 오가며 성장했고, 독일 막스플랑크 바이오사이버네틱스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장기에 한국과 독일 양쪽에서 겉돌면서 ‘사람은 서로를 어떻게 판단하고, 집단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을 가졌고, 뇌과학을 공부하게 됐다고 한다. 제목은 ‘우리의 뇌 속에는 수없이 많은 다른 사람들의 뇌가 존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뇌가 가장 많이 노력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일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우리의 뇌는 공감, 예측, 소통하는 ‘사회적 뇌’로 발달했다는 것이다. 과학 커뮤니케이션 경연인 ‘페임랩 인터내셔널’에 독일 대표로 출전해 최종 9인에 선발됐다는 저자의 이력답게 평범한 독자의 눈높이에서 쓰였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50년 동안 원형(原形) 논쟁이 지속되고 있는 석굴암의 제 모습을 밝혀 줄 논문이 나왔다. 19세기 말 석굴암 중수 공사를 기록한 상량문을 정밀하게 분석한 것으로 중수 공사 전에는 지금과 달리 목조전실(木造前室) 등 목구조물이 없었다는 내용이어서 학계에 큰 파장이 예상된다. 목조전실의 유무는 석굴암 원형 논쟁의 핵심이다.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30일 학술 등재지인 ‘보조사상’에 발표 예정인 논문 ‘석굴암 석굴 중수상동문(重修上棟文·1891) 연구’에서 1891년 진행된 석굴암 중수 공사의 성격을 새로 밝혀냈다. 상동문은 상량문과 같은 말이다.○ “원래는 없던 목구조물, 1891년 새로 세워” 최 교수는 논문에서 “당시 공사에서 목구조물이 없던 석굴암의 외양을 목조 전각으로 이뤄진 보통 절과 같은 모습으로 변형시켰다”라며 “공사 주체가 유가적(儒家的)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동양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인 상동하우(上棟下宇·위 마룻대와 아래 서까래)를 고집하며 돔 부분에 기와를 얹고 팔부중상이 있는 부분을 목조로 장식한 것”이라고 밝혔다. 최 교수가 새로 번역하며 주목한 상량문의 내용은 “새로운 모범(新規·신규)을 통해서 초창(草創·사업을 처음으로 일으킴)함이다”를 비롯해 여러 군데다. 그는 “신규, 초창과 같은 표현은 이 불사가 중수 이전의 형태와 다르다는 점을 명백히 한 것”이라고 말했다. 1891년 중수 공사의 목적은 “용궁(龍宮)의 제도가 거의 복구되었다. … 대장(大壯)의 송(頌)을…”이라는 상량문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최 교수는 “‘용궁의 제도’는 중국문화권의 전통적 사원 건축 양식인 ‘상동하우’를 가리킨다”며 “‘대장의 송’은 대들보를 놓고, 서까래를 드리운 모양인 주역의 대장괘(大壯卦)를 강조한 것”이라고 했다. 현재 석굴암은 1960년대 보수 공사에서 입구에 목조 전실을 새로 세우고, 팔부중상이 있는 전정(前庭)부 상단도 목구조로 덮은 상태다. 최 교수의 주장이 옳다면 19세기 말의 원형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난해한 문체로 주목 못 받아” 상량문은 1924년 일본인 학자에 의해 원문이 공개되고 1963년 목조전실이 세워지는 과정에서 다시 세상에 알려졌지만 그동안 그 가치에 주목한 이가 드물었다. 1969년 ‘신동아’ 기고로 원형 논쟁을 촉발한 남천우 서울대 교수도 상량문에 대해 “내용이 너무나도 추상적인 표현이고, 구체적으로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 건 거의 없다”고 했다. 1960년대 석굴암 공사를 총괄한 황수영 전 동국대 교수(작고·전 동국대 총장·문화재위원장)가 상량문 전문을 해석해 저서 ‘석굴암’(열화당)에 실었지만 주석을 달지 않았고, 별다른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최 교수는 “상량문이 주목받지 못한 건 변려문(騈儷文)이라는 고급 문체로 쓰여 번역이 어려운 특성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최치원 연구의 권위자로 2400쪽 분량의 ‘한국유학통사’(전 3권)를 내기도 했던 고문(古文) 전문가다. 상량문이 다시 주목받은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성낙주 석굴암미학연구소장은 책 ‘석굴암, 법정에 서다’(불광출판사) 등을 통해 “상량문은 귀중한 사료임에도 묻혔다”며 “‘도끼질이요 톱질이요(斧彼鉅彼)’ 등의 표현이 목공 작업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해 준다”고 말했다. 성 소장은 최 교수의 해석과는 반대로 “상량문은 이전의 목조 전각이 허물어진 것을 재건한 사실을 담고 있다”고 봤다. 그러나 최 교수는 기존 번역에 오류가 적지 않다고 했다. 황 교수의 기존 번역에는 “새로운 모범(新規·신규)을 통해서”가 “새로운 규모로”로 돼 있다. ‘규(規)’를 규모라고 본 것이다. 최 교수는 “조선시대 건축 관련 다른 문헌에도 ‘신규’는 새롭게 모범을 세운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이제야 겨우 옛 모습(구관·舊貫)에 비길 만하다”고 돼 있는 번역도 최 교수는 “구관(舊貫)은 ‘옛 모습’이 아니라 ‘옛 관례’를 따랐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최 교수는 1891년 중수 공사에서 본존불이 있는 주실의 돔 위쪽에 기와를 새로 덮었다는 것도 상량문을 통해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상량문의 ‘견보(牽補)’는 ‘견라보옥(牽蘿補屋)’의 준말로 담쟁이덩굴을 끌어다가 새는 지붕을 덮는다는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라며 “당시 공사에서 기와를 덮었다는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황 교수의 기존 번역에는 이 부분이 “앞으로 계속 보완해야 하리라”고 돼 있다.○ “1960년대 공사도 원형 벗어나” 석굴암은 20세기 초 주실 천장 앞쪽이 무너지는 등 폐허처럼 변해 가던 것을 1910년대 일제가 보수했는데 지금과 달리 목조전실을 만들지 않았고, 전정부도 개방했다. 하지만 1960년대 목조 전실을 세우자 원형에서 벗어났다는 지적과 그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목조 전실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목조 전각이 그려진 ‘골굴석굴도’ 등을 근거로 내세웠고, 반대 측에서는 이 그림이 인근의 천연 석굴 사원인 골굴사를 그린 것이라고 반박했다. 최 교수에 따르면 지금까지 발견된 상량문 이전의 고문헌 중 석굴암에 목구조물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불국사사적’(1708년)에서는 “석불사를 창건하였는데, 토목 공사와는 무관하게 순전히 다듬은 돌을 가지고 짜서 석조감실(石龕)을 만들었다”고 돼 있다. 동아일보를 통해 최 교수의 논문을 미리 본 과학사학자 문중양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단언키 어렵지만 논리 전개가 설득력이 있어 큰 신뢰가 간다”며 “19세기 말의 혼란 상황에서 원형을 훼손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는 해석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그동안 학계에서는 상투적이고 과장된 표현이 많다는 이유로 상량문을 소홀히 여겼지만 이는 변려문의 특성을 모르기 때문”이라며 “1891년 공사에서 본디 노천(露天) 상태이던 전정부를 목조건축으로 장식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 파란만장한 ‘1891년 상량문’ ▼ 1963년 보수공사 하다가 간이화장실 문짝서 발견617字 중 160字 잘려나가… 崔교수 “판독엔 문제 없어”석굴암의 원형에 대한 중요 정보를 담고 있는 ‘석굴 중수상동문’은 일제강점기 보수공사 도중에 발견됐지만 이후 종적을 감췄다가 1963년 보수공사 도중 석굴암 경내의 간이 화장실 문짝에 붙어 있는 상태로 발견됐다. 최영성 교수가 이번에 상량문 전문을 번역 주석하며 살펴본 결과 본문은 617자인데 처음과 마지막 부분이 잘려나가는 등 확인할 수 없는 글자가 160자다. 최 교수는 “이 부분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가 공개한 내용에 의지할 수밖에 없지만 문리상 판독에 문제가 없다”고 설명했다. 상량문의 작성자는 손영기(孫永耆)다. 최 교수는 “‘와룡암계첩(臥龍庵(결,계)帖·1859년)에 손영기로 추정되는 인물이 소개돼 있다”며 “‘조선국 영남좌도 경주부 동해가(東海上)에 살며 별호를 ‘구지산거사(九芝山居士)’라고 했다”고 밝혔다. 중수공사비를 댄 이는 조(趙) 순상(巡相)이라고 나온다. 최 교수는 “‘순상’은 ‘순상국(巡相國)’의 줄임말로 관찰사 겸 순찰사의 별칭”이라며 “1891년 이전 20년 동안 경상도 관찰사 겸 순찰사를 지낸 ‘조 씨’는 풍양 조씨 세도가 집안의 조강하(趙康夏·1841∼?)밖에 없다”고 말했다. 상량문이 기록한 공사는 석굴암이 아니라 인근 암자의 중수였다는 학설도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까지 ‘석굴’(현재 석굴암)과 ‘석굴암’(인근 암자)을 구분했고, 상량문은 명칭에서 석굴 중수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최 교수의 이번 논문은 일제강점기 석굴암 보수 공사의 결과처럼 목조전실 없이 전정부를 개방한 것이 옳다고 보지만 당시 공사에서 석굴암을 시멘트로 뒤집어씌우는 등의 잘못까지 옳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석굴암의 원형과 별개로 석굴암의 보존을 위해 최적이 무엇인지도 중요하다. 석굴암이 19세기 말까지 목조전실 없이 개방돼 있던 게 옳다 해도 보존에 악영향을 준다면 전실이 필요할 수도 있다. 목조전실 탓에 통풍이 안 돼 내부에 습기가 차는 현상이 악화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확실히 검증된 것은 아니다. 1971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실사를 통해 “(목구조 공사를 통해) 전실(전정부)의 석상이 비바람에 직접 닿지 않게 됐고, 결빙과 해동의 영향을 받지 않아 보호에 큰 도움을 줬다”고 평가했다. 성낙주 석굴암미학연구소장도 저서에서 “전실 없이 개방된 구조는 동물이 드나들고 새똥이 쌓이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말했다.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는 저서 ‘나라의 정화, 조선의 표상’에서 “일본은 석굴암 보수공사를 통해 조선의 과거와 현재를 대비시키면서 문명화된 일본이 조선의 옛 영화를 되찾아 줬음을 과시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 대 1은 선(線)이다. 하지만 셋이 만나면 면(面)이 되고, 넷이 만나면 입체가 된다. 1 대 다(多), 다 대 다 형식으로 화제의 인물과 이슈를 만나는 ‘집단토크쇼’를 시작한다. 내부자 또는 외부자의 ‘돌발 토크’도 있다. 동아닷컴(www.donga.com)과 동아일보 문화부 페이스북에서도 인터뷰 내용을 동영상으로 볼 수 있다.》 사회성 있는 영화들이 당대 한국인의 의식을 보여준다면 감동과 웃음을 무기로 관객의 마음을 파고드는 윤제균 감독(48)의 영화는 한국인의 무의식을 드러낸다. 국내 두 명 뿐인 ‘쌍천만’ 감독인 그는 최근 자신이 이끄는 JK필름 제작 영화 ‘공조’가 관객 781만 명을 기록하며 또 한 번 ‘장타’를 날렸다. ■ 탐색전“제목도 그냥 ‘김일’로 하면 되겠는데?” 본격 인터뷰 며칠 전 JK필름 멤버들과 저녁을 함께했다. 윤 감독은 프로레슬러 김일(1929∼2006)에 관한 얘기가 나오자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며 ‘흥분’해 헤드록을 걸고 머리를 쥐어박는 선수의 표정과 신음까지 흉내 냈다. 그건 영락없이 1970년대 작은 흑백TV 앞에서 넋이 나간 아이의 얼굴이었다. 이건 가면이 아닐까?■ 소문과 진실17일 서울 강남구 JK필름 사무실을 찾았다. ‘국제시장’이 2015년 베를린 영화제에 진출했다는 소문(?)부터 확인했다.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받았는데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정말인지. “제 억울한 부분 중 하납니다. 윤제균 하면 상업 영화, 흥행 영화만 만드는 감독이니까 영화제하고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 같아요.” ―윤 감독의 영화는 “싼마이(3류를 뜻하는 속어)” “재미있는데, 그게 끝이다”는 평도 있었습니다. “한 십년 넘었나요? 아내가 인터넷 댓글을 보고 ‘대성통곡’을 하더라고요. ‘한국 영화계를 위해 윤 감독 당신 같은 쓰레기는 떠나라’는…. 그런데, 결과에는 다 원인이 있잖아요. 제가 그런 의견이 안 나올 정도로 영화를 잘 만들었으면 악플이 안 달렸겠죠. 요즘은 좋은 ‘선플’들이 많아요. 하하.” ―이제 익숙해질 법한데요. “제가 소심하고 여린 편입니다. 욕먹고 기분 좋은 사람 없잖아요. 저는 상업영화지만 웰메이드를 만들려고 온 힘을 다 바치거든요. 장면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투자자들 설득해서 감독에게 돈을 더 쓰라고 하기도 하지요. 흥행이 될까, 안 될까를 기준으로 삼은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영화의 완성도지요.”■ 진짜냐?그는 평소 인터뷰에서 “항상 내려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연예인스러운’ 답변을 해 왔다. ―내려갈 준비를 어떻게 한다는 건가요. “‘해운대’ 제작할 때 빚이 10억 원이 넘었습니다. 집 잡혀 투자하는 상황이었죠. 아내에게 ‘여보, 우리 신혼 때 마포 아현동 10평짜리 반지하에서 3년 살았잖아. 이번 영화 망하면 다시 반지하로 가야 돼’ 했더니 그래도 괜찮다고 하더군요. 신혼 시절 집이 좁다뿐이지 행복했고, 별 불만이 없었어요. 지금도 잘 안되면 반지하로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연출할 때 스태프 이름을 다 외운다’는 것도 잘 믿기지 않습니다. 200명은 될 텐데…. “연상 기억법이 있어요. 촬영 현장은 서너 달 같이 지내는데 분위기가 안 좋으면 그게 지옥입니다. 이름 외우는 노력만으로 천국이 되는데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면 별로 힘든 일은 아닙니다.”■ 까칠한 질문‘두사부일체’ ‘색즉시공’을 비롯해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를 주로 만들던 그는 아이가 생긴 뒤에는 거의 12세, 15세 등급의 영화를 만든다. 첫째 아들이 중학교 1학년이다. ―첫째가 성(性)에 한창 관심 많을 나이인데, ‘색즉시공’ 보고 싶다는 얘기 안하는지요. “아마 아빠가 그런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를 잘 모를 겁니다.(웃음)” ―나중에는 알 텐데요. “결국 보겠죠. ‘색즉시공’에는 분명히 담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어요. ‘사랑은 장난이 아니고, 임신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아들이 보더라도 아빠로서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나중에 같이 볼 건가요?) 그럼요. 성에 대해 제가 가르치는 게 좋겠지요.”■ 인생사 새옹지마 광고회사에 다니던 그는 5년 내내 광고 제작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4년은 서류 작업을 하는 전략기획팀에서 일했다. “외환위기 뒤인 1998년 회사에서 돌아가며 한 달 무급 휴직을 시켰어요. 여행 갈 돈도 없으니 집에서 쓴 시나리오가 ‘신혼여행’이죠. 이듬해 우연히 공모전 광고를 보고 냈는데 당선됐어요. 강제 휴직과 수중에 돈이 없던 우연이 겹쳐 지금의 제가 있는 거지요.” ―운이 좋았던 건가요. “주어진 상황에서 진짜 최선을 다했어요. ‘두사부일체’ 시나리오는 회사 다닐 때 썼는데, 서너 달 동안 하루 4시간 이상 자 본 적이 없어요. 밤 12시부터 새벽 3시까지 쓰고, 다시 출근했죠.”■ 떼돈?윤 감독은 최근 CJ E&M에 JK필름 지분 51%를 넘겼다. 떼돈을 벌었다는 소문도 있다. ―얼마나 벌었나요. “말 안 하기로 했는데…. 많이 벌었죠. 임차료 걱정 없이 영화 만들려고 근처에 4층 규모의 사옥을 준비하고 있어요. 해외에 나가니 메이저 투자배급사들이 저를 만나주지도 않아요. 거의 ‘누구냐, 넌’ 이런 식이라…. 그래서 CJ와 손을 잡은 거지요. 영어 영화를 만들어 시장을 해외로 넓히고 싶습니다.”■ 인터뷰 후기윤 감독은 “수많은 인터뷰를 했지만 이번이 가장 긴장됐다”고 했다. 하지만 불편할 수 있는 질문에도 시종일관 여유가 넘쳤고, ‘쌍천만’ 감독답지 않게 소탈했다. 그게 노력으로 만들어낸 얼굴이라 해도 이 정도 일관되면 대단하다 싶다. 윤 감독은 “3대가 손잡고 보면서 행복해지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조종엽 jjj@donga.com·장선희 기자}

미중 사이의 지역 내 긴장이 고조되고 있지만, 한국이 전쟁의 당사자가 될 소지가 없지 않다는 걸 실감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 신간 ‘전쟁의 문헌학’(열린책들·사진)을 낸 전쟁사학자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교수(42)를 최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만났다. 김 교수는 “우리는 여전히 청나라가 동중국해 일대에 가져다준 ‘200년 평화’의 기억에 머물러 있다”고 말했다. “북으로는 여진족, 남으로는 왜구를 막는 게 조선의 기본적인 군사전략입니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일본과의 관계도 정상화되면서 두 가지 외침을 방비하는 게 정책에서 빠져 버립니다. 그 시기 만들어진 기억이 지금까지도 한국의 전통인 것처럼 내려오는 것이지요.” 우리는 6·25전쟁을 겪지 않았던가. “그 경험은 국제 정세에 대한 관심보다 ‘북괴’에 대한 증오, 즉 한반도 안의 인식에 머물렀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이 북방정책을 펴고 중국과 수교할 때 국내에서 반대가 별로 없었던 것도 그 방증입니다.” ‘전쟁의 문헌학’의 부제는 ‘15∼20세기 동중국해 연안 지역의 국제 전쟁과 문헌의 형성·유통 과정 연구’다. 조선 후기에 유통된 일본의 군사, 병학(兵學) 정보를 총정리했다. 일본에서 쓰인 ‘격조선론’ ‘본조무림전’ 등이 실학자 이덕무를 비롯해 조선 후기 지식인들 사이에서 꽤 널리 읽혔다는 것도 밝혀냈다. 김 교수는 “전쟁은 텍스트의 생산과 유통을 추동했다”며 “여전히 한국과 중국 중심인 한국학의 영역을 확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드 논란을 묻자 김 교수는 “사드가 미사일을 다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이제 한국은 약소국도 아니고 동맹이 원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이 한국을 포기할 리 없다는 건 ‘한반도는 소중하다’는 유아적인 발상일 뿐입니다. 북한도 중국에 대해 그런 착각을 하고 있지요.” 사드 보복에 관해서는 “일본은 이미 겪은 일”이라고 했다. 수만 명의 중국인이 반일 시위를 벌이며 베이징의 일본 상점을 때려 부수는 등의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일본은 자원 수입처와 시장 다변화 등으로 대응했다는 것이다. 고려대 일문학과 출신인 김 교수는 임진왜란의 군담소설을 연구하다가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이 일본에서 널리 읽혔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전쟁사로 방향을 틀었다. 일본의 국립 문헌학 연구소인 국문학 연구자료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메이지유신 이전 일본에서 만들어진 모든 책을 수집한다’는 게 목표인 이 연구소에서 2006∼2010년 마이크로필름을 1만 점가량 읽고 검토했다고 한다. 그가 일본에서 낸 첫 책인 ‘이국 정벌 전기의 세계’(2010년)로 30년 전통의 ‘일본 고전 문학 학술상’을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받았다. “평화를 지향하지 않고, 분쟁을 통해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있는 게 엄연한 현실입니다. 전쟁은 인간 행동의 근본적인 측면이고 미연에 방지하려면 잘 알아야 하지요. 그러나 한국에서는 전쟁사가 특수한 분야처럼 인식돼 있습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국사학자 노태돈 서울대 명예교수, 철학자 강영안 서강대 명예교수를 비롯한 석학들의 대중 강연을 들을 수 있는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가 다음 달 1일부터 열린다. ‘석학과…’는 매년 30회 이상의 강연이 열리는 순수 인문학 강좌로 올해 10년째를 맞는다. 올해 강좌는 노 명예교수가 ‘삼국통일전쟁과 그 영향’이라는 주제로 문을 열고, 이어 강 명예교수가 ‘일상의 철학’을 주제로 강연한다. 이어 최유찬 전 연세대 교수, 김정희 원광대 교수, 성태용 전 건국대 교수 등이 강연자로 나선다. 올해부터는 인문학 온라인 강좌도 병행된다. 추후 유튜브 등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오프라인 강좌도 한국연구재단 기초학문자료센터 홈페이지 등에서 볼 수 있다. 행사를 주관하는 한국연구재단은 “삶의 새로운 가치를 찾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깊이 있는 인문학적 가치를 탐구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강연은 토요일 오후 2∼4시 서초문화예술회관(서울 서초구 강남대로) 아트홀에서 열린다. 단, 노태돈 명예교수의 1강은 서울교대 종합문화관에서 열린다. 수강료는 무료다. 수강신청은 전화(인문학대중화 사무국 02-739-1223)와 인터넷(인문공감 홈페이지 inmunlove.nrf.re.kr)으로 하면 된다. 접수일 당일 마감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서울에 벚꽃이 만발하는 다음 달 8일 서울 여의도 63빌딩 앞 한강변에서 가수 자이언티와 에픽하이 등이 공연하는 벚꽃축제가 열린다. ‘라이프플러스 벚꽃피크닉페스티벌 2017’이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이 행사는 한화그룹 6개 금융계열사 공동 주최로 로이킴, 에릭 남, 볼빨간사춘기, 어쿠스티, 소심한 오빠들, 이해리 등이 출연한다. 이날 낮 12시부터 8시간 동안 진행되며 인터넷()에서 2일까지 진행되는 이벤트에서 티켓을 경품으로 받아야 입장할 수 있다. 한강변 야외 피크닉 라운지와 벚꽃 테마의 마켓, 푸드트럭도 운영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하고 있는 병풍 속 그림에서 다산 정약용(1762∼1836)이 강진 유배 시절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새로운 시 3수가 발견됐다. 정민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는 계간지 ‘문헌과 해석’에 발표할 예정인 논문을 통해 “19세기 병풍 ‘표피장막책가도’에 그려진 시첩에서 다산의 것으로 보이는 시들이 발견했다”고 19일 밝혔다. 정 교수에 따르면 병풍에 그려진 책상 위의 서첩에 ‘산정에서 대작하며 진정국사의 시에 차운(次韻·남의 운자를 써서 시를 지음)하다’(山亭對酌次韻眞靜國師)라는 시가 적혀 있다. “… 흔들흔들 나무 집은 원래 속세 벗어났고/둥실둥실 뗏목 정자 내 몸을 붙일 만해/ 모두들 남방은 살기 좋다 말하더니/술 익고 생선 살져 또 서로를 부르누나.” 또 ‘산정에서 꽃을 보다가 또 진정국사의 시운에 차운하다(山亭對花又次眞靜韻)’라는 제목 아래에는 시 두 수가 적혀 있다. 첫 번째 시에는 ‘자하산인(紫霞山人)’, 두 번째 시에는 ‘다창(茶창)’이라는 지은이 이름이 쓰여 있다. 자하산은 강진의 다산초당이 있던 귤동 뒷산의 다른 이름이고, 진정국사는 강진 만덕산 백련사에 머물렀던 스님 천책(1206∼1294)을 가리킨다. 정 교수는 “차를 좋아하고 남방에 산 적이 있으며 자하산인이란 별호를 썼던 사람은 정약용뿐”이라고 말했다. 실제 시첩은 전하지 않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2067년 2월 21일 ‘역사 속의 오늘’(오메가 고 편집). “2017년 오늘 한국에서는 인간과 인공지능이 ‘번역 대결’을 펼치는 촌극이 벌어졌다. 인간은 지문 몇 개를 번역하는 데 무려 50분이나 걸렸음에도 인공지능에 ‘승리’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통·번역 서비스가 인간의 기본권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통역사는 적지 않은 수익을 올렸고, 고가의 통역료를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이 서비스를 이용했다. 이 대결에서 공정한 룰은 인간과 인공지능이 ①같은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②시간당 얼마나 많은 양을 ③정확하게 번역하느냐가 되어야 했지만, 당시 기준은 ③밖에 없었다. ①은 로봇과 인간을 막론하고 에너지와 토지의 사용에만 세금을 물리는 오늘날은 당연한 발상이지만 당시는 사람이 일을 하면 오히려 ‘소득세’란 걸 냈던 시대다.(심지어 재화와 용역의 가치를 더하면 ‘부가가치세’를 냈고, 그냥 사람이면 세대주에 부과하는 ‘주민세’도 있었다.) 대결은 영역이 위축돼 가는 걸 견딜 수 없었던 인간들의 ‘자위’였다. ‘인지부조화’라는. 지극히 인간적이지만 지금은 사라진 단어의 용례로 전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205호에선 칠십 노모가 마흔이 넘은 아들의 발을 씻겨주고 있다. 교통사고로 척추를 상한 아들은 … 맞은편 206호에선 혼자 사는 주정뱅이 영감이 … 204호 양 씨 방 현관문이 빠끔 열려 있다. 정확히 3년 후 이 남자는 입안에 약을 한 줌 털어 넣고 … 202호 여자는 마침 혼자서 팔뚝에 인슐린 주사를 놓고 있는 참이다.”(‘세상의 모든 저녁’에서) 프랑스 파리 시몽크뤼벨리에 거리의 한 아파트에는 거주자들뿐 아니라 사물들까지 각자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인생 사용법’·조르주 페렉) 한국 쪽방촌 노인들은 어떨까. ‘살아온 얘기를 쓰면 대하소설이 나온다’지만 진짜 소설이 나왔다는 소식은 들어보지 못했다. 5·18민주화운동 소재의 명작 ‘봄날’(1997년)의 작자가 3년 만에 낸 이 소설집은 쪽방촌 노인들처럼 스스로는 말할 수 없는, 억눌린 이들의 이야기다. 이전 소설집 ‘황천기담’(2014년)에서 설화적 상상력을 선보였던 저자는 다시금 비극적 현대사에서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우리가 잊고 있는 이들에 주목한다. 아들이 외환위기 뒤 파산과 이혼 끝에 어이없는 죽음을 맞은 아버지는 아내마저 먼저 떠나보내고 마지막 여행을 떠난다.(‘흔적’) 6·25전쟁이 끝날 무렵 ‘산사람’들을 따라 올라간 형이 지리산 골짜기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자 아버지는 일손을 놓아버린다.(‘세상의 모든 저녁’) 1950년 초가을 새신랑이던 초임 순경은 인민군과 함께 이웃 섬에서 건너온 ‘몽둥이패’에게 맞아죽었다.(‘이야기집’) 아내의 아버지는 오래전 새벽에 논에 나가다 집 앞 도로에서 뺑소니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간이역’) 구순 잔치 대신 60년 전 바다에 빠져 죽은 두 아들의 넋을 건지는 굿을 한 소설 속 노파처럼, 작가도 소설로 억울한 망자들의 넋을 건진다. “저 평범한 골짜기, 숲, 해변, 모래밭, 웅덩이, 개울, 고목나무, 우물 하나에도 저마다의 이름과 이야기가 오롯이 새겨져 있다.”(‘이야기집’) 금간 술병 하나도 그저 허섭스레기가 아니다.(‘세상의 모든 저녁’) 고독사로 시신이 부패해 가는 왕년의 떠돌이 옹기쟁이가 과거 ‘지상에 남은 마지막 사람’을 생각하며 바닥에 작은 새를 그려 넣었던 술병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굴곡과 요철로만 이어진 비포장길, 그나마도 출구 없는 막다른 길”의 인생을 산 이들에 대한 애정이 소설 전반에 배어 있다. 표제작은 구원이 없는 이야기다. 한 노숙인의 투신자살 기사로 시작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몽둥이패’(서북청년단) 두목에게 겁탈당한 어머니로부터 태어났다. “몽둥이패에 끌려가 수중고혼이 된 그 젊은 사내가 … 어째선지 아이는 얼굴조차 본 적 없는 그 새신랑이 자신의 진짜 아비였더라면, 하고 내심 바란 적이 많았다.” 베트남전에서 정신적 외상과 함께 고엽제 피해를 입은 그는 세월호 참사 뉴스를 본 뒤 ‘괴물’을 목격한다. 소설 속 주인공은 철커덩 철커덩, 또는 쿵쾅쿵쾅 달리는 기차 안에서 이미 죽은 아내(흔적) 또는 곧 죽을 아내(‘간이역’)와 함께 있다. 현실에서는 열차가 목적지에 닿을 것이지만 소설은 그 순간에 멈춘다. “다음 세상에선 … 나무로, 풀 한 포기로, 꽃 하나로 그렇게 피어났다 사라지고 싶소.”(‘흔적’) 소설의 구원이란 그런 것이겠다. 작가의 완숙한 필력은 소설을 넘어 ‘잊지 않을게’라는 말의 윤리를 되새기게 만든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2004년) 등으로 일했던 ‘거물 운동권’인 저자(63)가 현대사를 보는 좌파적 민족주의 사관을 비판한 강연을 정리한 교양서다. 대한민국을 ‘태어나서는 안 됐을 나라’라고 보는 이들은 북한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농지개혁이 제대로 됐다고 보지만 저자는 박명림 연세대 교수의 연구 결과를 소개하며 이를 반박한다. “그런데 국가에서 40% 세금을 거두어갔답니다. 지주가 그냥 국가로 바뀐 것입니다. … 농민들이 사실은 소유권이 없는 거지요.” 반면 남한은 명분보다 실질을 중심으로 농지개혁을 했다. ‘유상몰수 유상분배’로 하되 소출의 30%를 5년 동안 내면 되는, 농민에게 지극히 유리한 조건이었다. 농지개혁은 친일파의 다수에게서 경제적인 토대를 완전히 몰수해버렸다. “제헌국회 의원들은 전국적 명망이 있고 당선될 만큼 덕망이 있는 분들이었고, ‘악질 친일 모리배’는 주로 경찰 간부들에게만 해당합니다.” 저자는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이었던 인촌 김성수 선생을 ‘당대의 조정자’로 평가했다. “인촌은 한민당의 실질적인 오너였지요. 그런데 대세로서 농지개혁을 받아들입니다. 최대 지주 김성수 선생이 하자고 하니까 중소 지주들이 꼼짝없이 따를 수밖에 없는 거지요.” “… 독립운동가들 전부 김성수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덕을 많이 베풀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그의 한계를 비판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의 족적을 지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선 자리가 그가 닦아놓은 기반 위에 있기 때문이지요.” 저자는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한 신익희, 조봉암 중심의 역사 서술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저자는 부마항쟁을 비롯한 여러 사건으로 투옥된 적이 있고, 1992년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장 등을 지냈다. 자신의 관점을 ‘뉴 레프트’라고 소개한다. ‘후진국형 진보’인 ‘올드 레프트’를 넘어서자는 얘기다. “민족주의 사관은 학문적으로는 도저히 지탱하기 힘든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현실에서 힘이 너무나 큽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흔치 않은 이력이다. 초등학교를 절반밖에 못 다녔지만 예술사회학 박사가 돼 만만찮은 저작을 펴냈다. 젊은 시절 혁명을 꿈꿨고, 중년에는 한 대통령의 당선에 일익을 맡았고 지금은 중견기업의 대주주다. 최근 ‘인간 본성의 역사’(에피파니·사진)를 낸 홍일립(본명 홍석기·61) 박사를 경기 성남시 분당구의 서재에서 만났다.책 ‘인간…’은 웬만한 사전 두께(7cm)다. 동서양의 고대부터 현대, 철학·사회과학과 생물학을 넘나들며 인간 본성에 대한 관념의 역사를 전개한다. 469명의 이론가가 등장하고 참고문헌만 총 1596종이다.》 “침팬지를 수십 년 동안 관찰하면 성악론자가 되고, 보노보의 공감 행동을 보면서 성선론에 기운다면 생물학적 증거란 과연 믿을 만한 것일까요?” 책에는 인간 본성을 과학으로 규정하려는 시도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계속 등장한다. 그는 “지금의 사회생물학이나 진화심리학은 가치가 개입된 추정, 기대, 비유로 가득 찬 ‘가설들의 꾸러미’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흡혈 박쥐가 자기가 먹은 피를 토해서 배고픈 동료를 먹이는 것에서 이타성이 동물적 기원을 갖는다고 보는 건 비약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지닌 의식적 감정이입의 증거나 순수한 이타적 동기의 증거는 다른 어떤 동물에게서도 발견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을 동물에게서 찾으려는 건 태산같이 쌓여 있는 주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보조 재료나 포장지로 완제품을 만들려는 일이지요.” 이력에 관해 거듭 묻자 홍 박사는 손사래를 치다가 자기 얘기를 띄엄띄엄 풀어놨다. 그의 삶에는 빈곤과 극단적 이데올로기 대립, 경제 성장, 민주화와 정권 교체 등을 수십 년 사이에 겪은 우리 현대사의 여러 얼굴이 각인됐다. 그는 초등학교 1학년을 다니다 학업을 중단한 뒤 4학년 2학기에 다시 들어갔다. 한글은 4학년 때 익혔다. 고교 1학년을 중퇴한 뒤 입주 가정교사로 일하다 연세대 사회학과에 76학번으로 입학했다. 대학에서는 칸트를 탐독하면서 외국서적을 번역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사실 그는 아주 가까운 가족이 월북해 신상에 이른바 ‘빨간 줄’이 가 있었다. “공부 말고 다른 길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마르크스주의를 접했다. 인터넷으로 ‘홍일립’을 검색하면 일본 학자가 쓴 자본론 해제인 ‘국제무역의 정치경제학’(1984년)이 등장한다. 일립(一笠·삿갓 하나)은 오래된 필명이다. 뜻을 묻자 “삿갓을 쓰면 부조리한 세상이 보이지 않아서”라고 했다. 1984년 대학원에 입학했다. 사복경찰 ‘백골단’이 도서관에 들어와 그의 옆자리에서 공부하던 학생의 긴 머리채를 잡고 머리를 책상에 내리꽂았다. “공부고 뭐고 다 필요 없다 싶었지요.” 결국 이듬해 경기도의 한 공장에 들어갔다. “공산주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죠. 용어는 그랬지만 인권이 존중받는 민주사회를 꿈꿨던 겁니다.” 조직에서 지도급 위치를 맡았다. 알 만한 386세대 운동권이 그의 후배들이다. 합법적 활동을 가장하기 위해 여론조사연구소 현대리서치를 세우기도 했다. 1991년 ‘지하 생활’을 정리했다. 옛 소련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노태우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결심의 계기가 됐다. “‘소비에트가 무너지는구나, 어렵겠구나’ 생각이 들었죠.” 아내와 단칸방 살림을 했던 그는 1993년 ‘먹고살려고’ 화장품 회사를 세웠다. 이 회사는 지난해 매출 2000여억 원의 중견 기업으로 성장했다. 1998년 새정치국민회의에서 정세분석국장으로 일했고, 여론조사회사 폴앤폴을 세웠다가 2000년 봄 총선 뒤 월간지에 ‘영남권 후보론’을 기고했다. 홍 박사는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캠프의 총괄기획실장을 맡아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을 이끌었다. 노 대통령 당선 전후 ‘반미하지 말라’ 등의 건의를 하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을 전후로 해서 한국 사회에서 권력이나 부, 명예가 있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어느 순간 그런 세계와 ‘안녕’하고 싶더군요.” 2010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속을 멀리하겠다고 마음먹고 집필을 결심한 게 이번 책이다. 가난과 풍요, 운동가와 기업가의 궤적이 뒤섞인 그의 삶은 일견 모순적이다. 그러나 그게 또 한국 현대사 아니겠는가. “나름 민주화에 기여했다고 생각하고, 운이 좋아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하고 싶었던 일은 대강 다 한 것 같아요. 이제 ‘잊혀진 인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낯설고 종잡기 어렵다. 소설가 윤해서 씨(36)가 등단 7년 만에 낸 첫 소설집 ‘코러스크로노스’(문학과지성사) 이야기다. ‘카오스의 소설’이라는 뒤표지 홍보 문구처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싶다가도, 거대한 막막함과 정면으로 마주하려 애쓴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윤 씨를 13일 만났다. ‘코러스크로노스’는 ‘시간합창’이라는 뜻으로 단편 ‘테 포케레케레’에 나오는 방의 이름이다. ‘테 포케레케레’는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말로 ‘미지의 어둠’이라고 했다. 익숙한 소설 서사를 기대했다가는 낭패다. ‘약 20억 년 전, 최초의 진핵세포가 등장했다’로 시작해 ‘문장에서 시간이 사라진다 … 나는 오직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를 건너뛴다’와 같은 문장을 거쳐 ‘… 왜상 속에서 왜상이. 끝없이 흔들린다. 탕,’으로 끝난다. 2011년 ‘문학과 사회’ 봄호에 게재했던 동명 소설의 문단 순서 등을 바꿔 소설집에 새로 실었다. 윤 씨는 “처음 발표할 때는 ‘테 포케레케레’의 뜻도 밝히지 않고 순서도 뒤섞어 소설 자체를 ‘미지의 어둠’으로 만들려 했는데, 너무 어둠 속에 남겨졌다”며 “‘편곡’을 달리해 봤다”고 말했다. 단편 ‘홀’에서는 어떤 남자의 눈을 갖게 된 여자가 등장하고, ‘오늘’에서는 한 남자가 점점 사라진다. 윤 씨는 “삶 자체가 시와 소설, 삶과 죽음, 음악과 문학의 경계에서 흔들리고 있는데, 글을 쓸 때는 그런 경계가 무화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이 도시에 남아 어느 날 몬트리올에서 온다. 어느 날은 모스크바에서, 쿠샤다스에서, 탄자니아에서 온다.…”(‘아’에서) 소설은 제주의 사려니숲, 알제리의 수도, 남태평양의 보라보라 섬 등을 오간다. 윤 씨도 네팔의 설산,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 볼리비아의 우유니 호수로 여행을 다녔다고 했다. 불모지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묻자 윤 씨는 “거대한 자연 앞에서는 일상에서 잃어버린, 우주 속의 존재라는 감각이 선연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등단작 ‘최초의 자살’은 변호사, 외판원 등이 인류가 생겨났을 무렵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인류는 동굴벽화를 그릴 때부터 존재했고, 그런 긴 시간이 앞으로도 있겠죠. 1981년 태어난 나도 그 모든 시간을 같이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런 시간의 결을 그려 보고 싶다고 할까요.”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이 네 자는 실을 필요가 없다. 가경(嘉慶) 병진년(1796년) 겨울에 내가 규장각 교서로 있었는데, 임금께서 몰래 명하시기를 ‘운서는 책을 펴서 문득 상서롭지 않으면 모름지기 밀어내야 한다’고 하셨다. … 신(臣) 용(鏞).” 1796년 정조가 다산 정약용(1762∼1836)에게 내린 운자(韻字) 사전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에 다산이 덧붙여 쓴 것이다. 다산은 이 책에 빼거나 더할 사항을 위의 여백에 붉은 먹으로 썼다. 다산의 친필을 비롯한 저술 가장본(家藏本·종가 소장본)과 서화 등이 대거 공개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경기 성남시 분당구)은 미공개 자료 다수를 포함한 다산 관련 학술자료(저술류 28점, 시문·서화·고문서류 12점)를 20일부터 한중연에서 전시한다. “은혜를 입고 갚지 않는 것은 고인이 비유컨대 우석(雨石)이라 한다. 빗물이 흙에 떨어지면 흙은 비를 품으니 이로 말미암아 오곡백과가 생겨나고 잎이 자라 그 꽃을 피움으로써 비의 본래의 뜻에 보답하는 것이다.” 이번에 전시되는 산재냉화(山齋冷話)의 한 구절이다. 다산이 자신의 수기치인(修己治人) 사상을 피력한 친필이다. 다산이 드물게 사용한 호 ‘철마산초(鐵馬山樵)’의 인장이 찍혀 있다. 다산이 후학에게 ‘멘토링’한 친필 ‘현진자설(玄眞子說)’도 전시된다. 제자에게 두꺼비와 호랑이의 예를 들어, 자기 장점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라는 내용이다. “두꺼비는 … 땅이 얼더라도 깊이가 몇 자가 되어 몸이 얼지 않는다. 일을 도모함에 미리 마음 씀씀이를 부지런히 했기 때문이다.” 안승준 한중연 고문서연구실장은 “비단 바탕에 쓴 글씨가 단아하면서도 내면 세계가 잘 드러나, 보물로 지정된 ‘하피첩’에 견줄 만하다”고 말했다. 그림을 거의 남기지 않았던 다산이 그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산수도도 있다. 남종화(南宗(화,획)) 계열의 수묵산수도로, 위쪽에 정약용이 칠언절구 제시(題詩)를 썼다. 그림의 아래쪽 귀퉁이에 정조의 부마인 홍현주(1793∼1865)의 소장인이 찍혀 있다. 다산의 문인 제자 아들 손자들의 종합 시문집 ‘유수종사시권(游水鍾寺詩卷)’도 공개된다. 무엇보다 경세유표(經世遺表) 시경강의(詩經講義) 상서고훈(尙書古訓)을 비롯해 일제강점기 간행된 여유당전서의 저본이 된 가장본들이 다수 전시돼 눈길을 끈다. 경세유표 등은 1925년 홍수 당시 물에 젖은 흔적이 완연하고 다산이 친필로 교정한 흔적이 있다. 한중연은 기존 소장본 26점과 기탁분을 합쳐 다산 저술의 3분의 2 이상을 원본으로 보유하게 됐다. 이번에 공개되는 자료들은 김영호 전 유한대 총장(한중연 석좌교수)이 2015년 한중연에 기탁한 189점(저술 166책, 시문·서화·고문서 등 23점) 중 일부다. 김 전 총장은 연세대 실학연구교수로 일하던 1970년대부터 다산을 연구하며 사비로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그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70년대 어느 날 다산 자료가 보따리로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에서 대전까지 택시로 한달음에 내려갔던 기억이 난다. 땅 팔고 빚내서 사 모으다 보니 집에서 쫓겨날 지경이 되기도 했지만 한국학의 보고(寶庫)를 찾았으니 다행”이라며 웃었다. 한중연은 17, 18일에는 국제 학술회의 ‘세계사 속의 다산학’도 개최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프랑스 노동법에 기대어 한국 정부를 상대로 부당해고 소송을 내 이긴 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이야기다. 2005년 프랑스에서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을 준비하던 저자는 파리에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한국 대표부의 어시스턴트 채용 공고를 보고 지원해 일하게 된다. 이후 7년 동안 대표부에서 ‘행정원’으로 일했던 저자가 본 대한민국 외교부 해외 공관의 민낯이 책에 그대로 드러난다. 대표부 관료들은 개인적인 식사를 하고 마치 OECD 본부 국장이나 과장급 인사를 만난 것처럼 꾸며 영수증을 총무과로 넘겨버렸다. “직위가 높을수록 이런 사례가 많았는데, 제 가족이나 친구들과 외식을 하고 공적인 일로 점심을 먹은 것처럼 위장술을 썼다. … 보는 내가 다 민망했는데 정작 당사자들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자신들은 특수한 계층이기 때문에 그런 남용도 권리라고 떳떳하게 믿고 있었다.” 관료들은 의전에는 철두철미했다. ‘의전의 고수’였던 한 관료는 한국에서 높은 사람이 출장을 온다고 하면 미리 식당 4군데를 예약해 뒀다가 나머지 3군데는 펑크를 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한 식당 지배인으로부터 “더 이상 예약을 받지 않겠다”는 항의에 가까운 통보를 받기도 했다. 대표부 건물은 부자 동네인 파리 16구에서도 요지에 있다. 원래 대기업 에어버스 회장 소유의 대저택을 한국 정부가 산 것이다. 저자는 “OECD에서 위상이 우리보다 높은 북유럽 국가들은 오히려 건물 한 층을 세내어 사용할 뿐”이라며 “국민의 세금을 절약해주는 그들의 자세가 기특해 보인다”고 말한다. 그래도 외교관들이니 외국어에는 능통하지 않을까. “아주 가끔, 3년 가뭄에 콩 하나 나듯 프랑스어를 하는 외교관이 부임하기도 하는데, … 간단한 의사소통만 가능할 뿐 복잡한 법적·행정적 업무를 실행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재외공관의 행정업무는 현지 채용된 프랑스 직원이나 저자처럼 프랑스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한국계 직원들이 맡는다. 모두 비정규직인 이들은 ‘직원’이 아니라 ‘행정원’이라고 불린다. “행정원 주제에” “가서 행정원 하나 데려와!” “그까짓 행정원 따위가”라고…. 이런 분위기에서 저자는 2011년 한 상관으로부터 폭언과 밀침 등을 당한다. 대표부는 저자가 외교부 장관에게 편지를 써서 알린 뒤에야 이 직원에게 형식적인 징계를 내린다. 저자가 소송을 준비하자 대표부는 저자를 해고했다. 저자는 대표부를 상대로 부당해고 소송을 내 승리하지만 대표부는 외교관 면책특권을 무기로 배상금 지불을 하지 않고, 반만 내겠다고 하기도 한다. 저자는 청와대에 민원을 내고, 대표부는 대통령의 파리 방문을 앞두고서야 배상금 지불에 동의한다. 글에서 감정을 좀 덜어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화낼 만한 사람에게 화내지 말 것을 기대하는 것 또한 온당치는 않겠다. 한국 국적의 저자를 지켜준 건 프랑스 노동법이었다. 한국과 대비되는 프랑스의 노동 문화가 우리의 현실을 새삼 돌아보게 만든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공재 윤두서(1668∼1715)의 인장이 찍힌 해남 윤씨 집안의 초간보(初刊譜·처음 간행된 족보)가 확인됐다. 박성호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서연구실 선임연구원은 “보길도(전남 완도군 보길면)의 고산 윤선도(1587∼1671) 후손 집안에서 초간보를 포함한 고문헌 11점을 최근 수집했다”고 7일 밝혔다. 박 연구원에 따르면 이 족보는 1702년 간행됐으며 남녀 구분 없이 출생 순서대로 후손을 적고, 딸의 후손도 이름을 적는 초기 족보들의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다. 해남 윤씨 초간보는 몇 개가 더 있지만 윤두서의 소장인이 찍힌 건 이것이 유일하다. 원림(園林)으로 유명한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가 병자호란 당시 항복 소식을 접하고 제주도에 가던 도중 은거한 곳이다. 윤선도는 보길도에서 경주 설씨인 작은부인을 뒀고, 그 후손들이 대대손손 살아왔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지은 낙서재(樂書齋)의 고도서는 일제강점기 상당수가 흩어졌고, 남아 있는 것을 이번에 수집한 것이다. 박 연구원은 “종가인 녹우당(綠雨堂)이 아니라 보길도에서 발견된 점이 매우 흥미롭다”며 “보길도의 해남 윤씨 후손들은 서파(庶派)로서 설움도 있었겠지만 족보를 300년 이상 소중하게 간직해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족보는 윤두서가 보길도에 머무르며 보려고 가져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윤선도의 시문집인 고산유고(孤山遺稿)의 필사본과 윤선도가 봤을 것으로 보이는 정개청(1529∼1590)의 우득록(愚得綠)도 발견됐다. 발견된 고산유고는 별집으로 연작 시조인 산중신곡(山中新曲)이 담겨 있다. 정갈한 한글로 쓰였으며 1791년 이후 간행된 것을 후손이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우득록은 호남 사림의 맥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서인이 남인을 공격하는 데 근거로 사용됐던 저술이다. 박 연구원은 “남인이었던 윤선도는 서인에 맞서 왕권 강화를 주장하다가 20여 년의 유배 생활을 했다”며 “윤선도가 보길도에 두고 봤던 책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 밖에 묘지 관련 송사 자료 등 고문서도 여러 점 기탁됐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