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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의 어촌 주민들은 섣달 그믐날 밤이면 동네의 높은 산에 올라 새해를 맞으며 밀물이 들어온 갯벌 어디쯤에 도깨비불이 나타나는지 살폈습니다. 도깨비불이 반짝거리는 곳에 어망을 설치하면 물고기가 많이 잡힌다고 믿었거든요.” 책 ‘도깨비, 잃어버린 우리의 신’(인문서원)을 최근 낸 김종대 중앙대 국어국문학과 교수(59·사진)는 1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황해도부터 전남 신안군을 거쳐 경남 통영시 욕지도까지, 서해안과 남해안 어촌 전반에서 이 같은 ‘산망(山望)’ 풍속이 확인된다”며 “도깨비는 가난한 백성들에게 재물을 가져다주는 존재”라고 말했다. 최근 TV 드라마로 다시 입길에 오르내리는 도깨비지만 정작 전통문화 속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잘 아는 이는 드물다. 우리에게 익숙한,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이고 돌아온 혹부리 영감 얘기는 일제강점기 당시 국민학교 교과서에 실리며 전파된 일본의 민담이다. 뿔 달리고 철퇴를 든 외양도 일본의 전통 요괴인 ‘오니(鬼)’의 모습이다. 김 교수는 30여 년 전부터 도깨비와 관련된 다채로운 민담을 채록하고 연구해 학계에서 ‘도깨비 박사’로 불린다. 그에 따르면 도깨비는 산 고개, 덤불이 우거진 숲에 살며 해가 지고 어둑어둑하거나 비가 부슬부슬 내릴 때 나타나 사람을 홀리기도 하지만 사람과 관계를 맺는 대가로 부(富)를 주는 존재다. 바다에서는 풍어를 가져다주고 뱃길을 인도해준다. 도깨비가 나타난 터에 묘를 쓰면 후손이 부귀를 얻는 명당이 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소싯적 도깨비를 만났다거나 도깨비불을 봤다는 노인들이 동네마다 드물지 않게 있었다. 김 교수는 전통적 도깨비의 모습에 관해 “덩치가 좋고, 잘생겼다고 한다”며 “털이 많고 냄새가 나고, 더러 패랭이를 쓰기도 했다”라고 설명했다. 도깨비는 씨름, 술, 메밀묵을 좋아한다고 한다. 도깨비 이야기는 현대에도 계속된다. 김 교수가 1991년에 강원 화천군 하남면에서 한 청년의 아버지에게서 채록한 애기다. 청년이 읍내에서 술을 먹고 늦게까지 집에 오지 않아 찾아보니 큰 바윗덩어리를 붙잡고 씨름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떤 젊은 사람이 ‘씨름 한판하자’고 했다”는 것. 도깨비 신앙이 계속 이어지는 곳도 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전남 강진군 하저마을을 비롯해 바지락을 공동으로 캐는 어촌 등에서는 지금도 도깨비 고사를 지낸다. 1, 2월경 도깨비에 관한 본격 연구서를 다시 펴낼 예정이라는 김 교수는 “도깨비가 때로 역신(疫神)으로 전해지기도 하지만 그건 조선시대 귀신의 속성이 부가되면서 생긴 것으로 도깨비의 본래적 속성이 아니다”라며 “도깨비는 과거 당대 민중이 부귀와 장수를 빌었던 존재”라고 말했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

《 정유년(丁酉年) 새해가 밝아온다. 국민을 힘들게 하고 분노케 한 병신년. 새해가 이토록 기다려진 적도 별로 없었다. 물론 새해에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지만 새 마음, 새 기분으로 새 출발을 하고 싶은 때다. 정유년은 붉은 닭의 해다. 60갑자 중에서 34번째에 해당한다. 닭은 새 아침과 시대의 시작을 알린다. ‘나라 꼴이 말이 아닌’ 지금, 희망을 의미하는 닭의 해가 오는 것이 새삼 반갑다. 정(丁)은 적(赤), 즉 붉다는 의미와 통한다. ‘붉다’는 ‘밝다’ ‘총명하다’는 의미로도 사용한다. ‘총명한 선택으로 새 시대를 시작하는 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현실의 닭은 수난의 연속이다. 벌써 조류인플루엔자(AI)로 2000만 마리 가까운 닭이 비운을 맞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어질지 모른다. 여론조사 회사인 엠브레인과 함께 닭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조사해 봤다. 20∼50대 남녀 400명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닭(병아리 포함)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귀여움이 36.5%로 가장 많았고, 친밀함이 23.3%로 뒤를 이었다. 닭의 해를 맞아 인간과 가장 가까운 새인 닭의 인문학적 의미와 한국인의 닭 사랑에 대해 알아본다. 》 정유(丁酉)년이 온다. 닭이 온다. 내가 온다. 내가 울어야 새벽이 온다. 아침 해는 동해 속에 있다는 신목(神木) 부상(扶桑)의 나뭇가지를 흔들고서 올라와 뜨는데, 이 부상의 산 위에서 황금으로 된 내가 한 번 크게 울면 천하의 닭이 모두 따라 울면서 새벽이 밝아온다.(신이경·神異經, 동황경·東荒經) 이른 새벽, 난 눈과 피부로 빛을 흡수한다. 뇌하수체 전엽의 내분비기관인 송과체가 빛에 자극 받아 호르몬을 방출하면 피가 끓어올라 숨을 내쉬어 명관(鳴管)을 한껏 떨고자 하는 욕망을 참을 수 없다. “시간을 모를 때는 그 소리를 따를 수 있어서/하늘이 밝을 때까지 잠잘 수 있네(不知時能逐聲 想應睡到天明·부지시능축성 상응수도천명)….”(정인홍 ‘내암집’)울음의 효과 울음소리로 나는 인간의 시간과 귀신의 시간을 나눴다. 내가 울면 도깨비와 귀신들이 물러갔다. 귀신을 쫓을 때 사람들은 내 피를 뿌렸다. 물에 빠진 사람의 시신을 찾지 못했을 때는 나를 물에 던져 내가 우는 곳에 망자의 넋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태초다. 제주도 사람들은 “천황닭이 목을 들고, 지황닭이 날개를 치고, 인황닭이 꼬리를 쳐 크게 우니 갑을동방에서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천지황본풀이’)고 했다. 아프리카 요루바족은 신이 흙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땅에 쏟고 그 위에 닭을 한 마리 세웠는데 닭의 발톱이 깊숙이 파고 들어간 지역에 계곡이 생겼고, 그렇지 않은 곳에 언덕 고지대 산이 생겼다고 믿었다. 김알지는 내가 울던 나무 밑의 궤 안에서 일어났고 박혁거세의 왕비 알영의 입술이 원래 내 부리와 같았으며 신라의 다른 이름이 계림(鷄林)이니 신라는 나를 모시는 나라다. 고구려도 나를 숭배해 무용총 천장에 내 그림을 남겼다. 신라인들은 고구려군을 공격할 때 외쳤다. “수탉을 죽여라”(‘일본서기’). 오랫동안 나는 고기와 알을 제공하는 존재 이상이었다. 대보름날 꼭두새벽에 내가 열 번 이상 울면 그해는 풍년이 들었다. 결혼식 초례상의 청홍 보자기 안에서 나는 새로운 부부의 인연을 축복했다.다섯 가지 덕 나를 칭송하라. 나는 십이지(十二支) 중 유일한 조류다. 머리에 관(볏)을 썼고(문·文), 발톱으로 공격하며(무·武), 적을 보면 싸우고(용·勇), 먹을 것을 보면 서로 부르며(인·仁), 어김없이 때를 맞춰 우니(신·信) 다섯 가지 덕을 갖춘 자(하달홍 ‘축계설’)가 바로 나다. 조로아스터교의 전승은 “수탉은 악마와 마법사에게 저항하기 위해 창조됐다”고 했다. 페르시아인들은 닭이 나태의 악마인 부시아스타를 물리친다고 믿었다. 조선의 지방관들은 내가 드문 모습(기형)으로 태어나면 조정에 보고했고, 대신들은 왕의 덕을 의심했다. 성종 때 홍문관 부제학 성세명은 민가에 세 발 달린 암탉이 난 게 임금이 불교를 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성종실록 25년 10월 9일자). 성종은 “요괴한 일이 나 때문인지 대신 때문인지 소민(小民) 때문인지를 알 수 없다”고 항변했지만 이 닭을 궁에 들여 직접 본 뒤 끝내 대신들에게 항복했다.멀고 가까운 조상들 사실 나는 작은 공룡이다. 2007년 한 연구팀이 6800만 년 전 살았던 공룡에서 추출한 단백질과 나의 단백질이 같다는 점을 밝혀냈다. 현대 우리들의 직접적 조상은 적색야계(赤色野鷄·red jungle fowl)라는 고고하고 예민한 족속이다. 적색야계는 약 5000년 전 동남아시아의 밀림에서 인간의 곁으로 왔다. 오래전 동남아시아, 중국 남부, 인도, 인도네시아 등의 고대인들에 의해 각각 길들여졌다는 연구도 있다. 1911년 어느 새벽, 34세의 생물학자 윌리엄 비비는 미얀마 북부의 축축한 숲에서 적색야계를 목격하고 “햇빛이 깃털의 적색, 녹색, 자색을 비추자 새는 잠시 불타오르는 듯했다” “길들일 수 없는 표범 같았다”고 썼다. 적색야계는 800m 너비의 계곡을 날아서 건너갔다. 이들은 극도로 까다로워 닭장에 가두면 창살 사이로 목을 넣고 스스로 비틀어 죽어버리는 일도 있다고 한다. 기원전 1300년에서 110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집트의 도자기 조각에 내 그림이 있다. 초기에 인간들은 나를 먹기보다 창자나 뼈를 가지고 점을 쳤을 가능성이 있다. 미얀마 북부의 카렌족은 도축한 닭의 대퇴골에 대나무 조각을 집어넣고, 그게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가면 보이지 않는 영혼이 머무르는 영역에 닿을 수 있다고 믿었다. 또 나의 섬세한 뼈는 바느질이나 문신 도구, 작은 악기를 만드는 데 활용됐다.인류에의 기여 우리 족속의 고기와 알은 곡식을 먹는 인간에게 부족한 필수 아미노산이 풍부하다. 더구나 나는 돼지나 소와 달리 인간과 먹이를 두고 다투지 않았다. 나는 태국과 인도를 지나 메소포타미아와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인간은 새로운 땅을 개척할 때 나를 반드시 데려갔다.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 군도와 이스터 섬을 향하는 폴리네시아인들의 카누에도 있었다. 지금 우리 족속은 남극 대륙을 제외한 지구상의 모든 대륙에서 산다. 인구 성장이 식량 생산능력을 압도할 것이라는 맬서스의 경고가 실현되지 않은 데는 우리의 힘이 컸다. 우리가 알을 매일 낳는 건 자연선택이 아닌 인위선택의 결과다. 인간이 알을 많이 낳는 닭을 계속 선택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다른 새들은 거의 다 일부일처제인 것과 달리 우리 일족이 일부다처제가 된 건 우리가 하늘을 포기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3차원 공간에서는 수컷 한 마리가 여러 마리의 암컷을 통제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땅에서는 힘센 수컷이 다른 수컷들이 암컷들한테 접근하는 걸 막을 수 있다.저항정신 올해에는 나에게 권력자의 지능을 빗대지 말라. 조류는 두뇌가 작은 것일 뿐 포유류보다 머리가 나쁘다고 볼 근거는 없다. 어쨌든 우리는 시민들의 저항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2012년 멕시코시티의 달걀값이 큰 폭으로 오르자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같은 해 이집트 카이로의 시위대는 “저들은 비둘기 고기와 닭고기를 먹고, 우리는 매일 콩만 먹는다”고 외쳤다. 요즘 조류인플루엔자(AI)로 인한 도살처분으로 우리가 떼죽음을 당하고 있다. 만약 치명적 AI가 전 세계에 동시 창궐해 우리가 사라진다면 야생 닭을 가금화하는 작업을 수천 년에 걸쳐 다시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그동안 타조알이나 메추리알을 먹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나는 새로운 시대다. 안도현 시인은 읊었다. “…들꽃들아/그날이 오면 닭 울 때/흰 무명 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서울로 가는 전봉준’ 동아일보 1984년 신춘문예 당선작) 내가 온다. 정유년이 온다.◇도움말: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장, 최재천 국립생태원장, 이희훈 현대축산뉴스 발행인 ◇참고서적: 책 ‘치킨로드’(앤드루 롤러 지음·책과함께) ◇고전 원문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종합DB조종엽 기자 jjj@donga.com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술을 마시면서 취하지 않으려 드는 것은 성스러운 음악을 들으면서 숭고한 감정에 빠지지 않으려는 것만큼이나 불명예스러운 행동이다.” 뭐, 당연한 얘기를 이토록 진지하게 하시나. 그래도 이런 말투가 아멜리 노통브 소설의 매력인 걸. 주취에 대한 호들갑스러운 찬사를 몇 장 읽고 나면 소설은 저자와 동명의 소설가가 화자로 등장해 팬 사인회에서 페트로니유 팡토라는 술친구를 만난 이야기를 풀어 간다. 국내에 드문, 여성 예술가 두 명의 우정(?)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전작들처럼 이야기 자체가 기발하다는 느낌은 소설 초중반에는 많이 들지 않는다. 노통브는 소년 같은 이미지를 가진 팡토와 함께 샴페인을 카페에서 마시고, 시음회에서 마시고, 스키장에서 마신다. 음주로만 따진다면 웹툰 ‘술꾼 도시 처녀들’의 레퍼토리가 더 다채롭다. ‘부르주아’ 출신으로 이미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노통브와 ‘프롤레타리아’ 출신으로 이제 막 소설가로 데뷔한 팡토 사이에 질투와 애정이 교차하며 흐르는 묘한 긴장으로 소설은 힘을 얻는다. 소설은 노통브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한다. 팡토의 실제 모델은 동료 프랑스 소설가 스테파니 오셰로 알려져 있다. 책 속 팡토의 소설 제목도 실제 그의 소설 제목을 살짝 비튼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결말은 또 뭔가. ‘위험을 동경하다 살해당하는 셰익스피어’가 예술(가)의 운명이라는 얘기? 복잡하게 생각지 않아도 좋다. 그냥 죽죽 읽어도 발랄함 속에 하드코어한 면을 숨기고 있는 노통브니까. 단, 비극적 최후가 싫다면 빈속 음주는 하지는 말 것.조종엽기자 jjj@donga.com}

안중근 의사(1879∼1910)가 중국 뤼순 감옥에서 쓴 유묵(遺墨) 1점이 안 의사가 순국한 지 106년 만에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안중근의사숭모회는 안 의사가 1910년 3월 순국을 앞두고 쓴 글씨 ‘志士仁人 殺身成仁(지사인인 살신성인)’을 지난달 기증받았다고 28일 밝혔다. 숭모회는 “유묵의 글귀는 논어 ‘위령공 편’에 나오며 ‘높은 뜻을 가진 선비와 어진 사람은 옳은 일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숭모회는 이 유묵이 안 의사의 공판을 취재하러 간 일본 고치 현 도요(土陽) 신문사의 통신원 고마쓰 모토고(小松元吾)가 안 의사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밝혔다. 그 후손 고마쓰 료(小松亮) 씨가 가보로 보관하던 것을 이번에 무상으로 기증했다. 숭모회는 1910년 2월 10일 뤼순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제4회 공판을 방청하고 그린 그림이 담긴 삽화집과 공판 방청권도 함께 기증받았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도스(DOS) 컴퓨터로 2만여 쪽 사전 만들었습니다.” 선문대 중한번역문헌연구소는 한글 창제 이후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옛 우리말 사전인 ‘고어대사전’(전 21권)을 최근 간행했다. 연구 책임자인 박재연 선문대 중어중국학과 교수(58)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현대식 말뭉치 분석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않고, 옛 사전 편찬 방식처럼 초서를 포함한 한글 자료를 일일이 판독해 수작업으로 정리한 뒤 컴퓨터에는 입력만 했기 때문에 최신 컴퓨터가 필요없었다”고 말했다. 2005년 편찬을 시작해 11년 만에 완성한 이 사전은 옛 도서 4000여 책(500여 종)과 한글 편지, 고문서 2000여 점을 분석해 표제어를 추출하고 뜻을 풀이한 뒤 용례를 정리해 집대성했다. 2010년 박 교수가 편찬한 ‘필사본 고어대사전’을 수정, 증보한 것으로 표제항 수가 7만여 개에서 22만여 개로 3배 이상으로 늘었다. 용례 풀이만 69만여 개다. 이처럼 방대한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2002년 박 교수가 편찬한 중조대사전(9책) 덕이 컸다. 중조대사전은 현대가 아니라 조선시대 한자 어휘를 표제어로 해서 당시 한국어로 뜻을 풀이한 것으로, 조선의 중국어사전인 셈이다. 당시 조사한 용례 등이 이번 사전 편찬에도 활용됐다. 박 교수는 1980년대 중반 박사과정 당시 중국 고전소설 원전과 당대의 우리말 언해본을 연구하며 어휘와 용례를 추출하기 시작했다. 통틀어 30여 년간 진행된 연구가 이번 사전 간행으로 결실을 본 셈이다. “그동안 연구교수, 박사급 연구원, 석사과정 연구보조원까지 4, 5명이 꾸준히 작업했는데 연구소에서 오래 못 버티는 분들이 많았어요. 먹고 자는 시간 빼고는 종일 연구실에서 자료 보고 입력하는 일은 막노동에 가깝거든요.” 이번 고어대사전은 기존 고어사전이 자세하게 다루지 않았던 근대 국어 어휘를 대거 수록한 점이 특징이다. 한국어의 역사 연구는 대체로 15, 16세기의 중세 국어에 집중돼 대개 이 시기의 문헌을 조사해 편찬한 고어사전이 많다. 박 교수는 앞으로도 이번 사전의 수정·증보 작업을 계속할 계획이라고 했다. “10년 정도 뒤에는 30책 정도로 찍어서 연구소나 연구실에 사비로 보급하려고 합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2004년 한 희귀 종자 수집가가 미국 뉴욕 맨해튼 북쪽의 레스토랑 ‘블루 힐 앳 스톤 반스’에 보통 우리가 먹는 옥수수 품종과 달리 8줄로 알이 생기는 품종인 ‘뉴잉글랜드 에이트 로 플린트’ 종자를 보낸다. 다목적 농장을 겸하면서 ‘팜 투 테이블(farm to table·직접 기른 식재료로 요리하는 것)’ 방식으로 운영되는 이 식당에서 재배해 달라는 것이다. 이 식당의 요리사인 저자는 “이 옥수수로 만든 음식은 엄청나게 맛있었다”고 했다. 책이 말하는 ‘첫 번째 식탁’은 서양음식의 역사에서 커다란 고기 한 덩이와 몇 가지 채소를 곁들인 육류 위주의 식사를 뜻한다. ‘두 번째 식탁’은 1990년대부터 힘을 얻고 있는, 유기농 육류와 지역에서 재배된 채소로 차리는 로컬 푸드다. 저자는 두 번째 식탁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식재료의 생산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며 ‘세 번째 식탁’을 제안한다. 책이 주목하는 건 토양이다. 산업화된 농업과 무분별한 개발로 황폐화된 토양의 생산력을 되돌릴 수 있는 방식으로 경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건강한 토양에서 생산된 통밀가루와 당근을 찾아 나선다. 강제로 살을 찌우지 않은 거위에서 나온 푸아그라나 남획하지 않고 전통 방식으로 잡은 참치 등 윤리적인 먹거리 생산 방식도 고민한다. 저자는 2050년의 레스토랑 메뉴로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어린 귀리로 끓인 차, 야생 부들로 만든 스낵, 건강한 풀을 뜯고 자란 소의 젖으로 만든 버터, 돼지의 피와 뼈까지 활용한 돼지고기 구이와 소시지, 식물 플랑크톤을 곁들인 송어 등을 제안했다. 음식의 맛은 상상이 잘 안 가지만 지속 가능한 식탁을 고민하는 이라면 흥미롭게 읽을 만하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

“지진에 암각화 보존 대책 실패, 불법 공사로 인한 문화재 파괴까지…. 올해는 한마디로 문화재 수난의 해였다.” 21일 한 문화재계 인사가 2016년을 짧게 요약한 말이다. 문화재 보존과 계승에 바람 잘 날 없었지만, 올해는 유독 자연재해와 인재가 겹쳐 문화재 파괴가 심각했다. 학계는 고대사에 이어 대한민국 건국 시기 논란에 휩쓸렸다. 9월 12일 발생한 규모 5.8의 경북 경주 강진은 신라 고도(古都)의 빛나는 문화유산을 한순간에 위기로 내몰았다. 수많은 고택의 기와와 담장이 무너졌고, 다보탑은 일제강점기에 수리한 난간석이 내려앉는 피해를 입었다. 특히 첨성대의 중심축이 20년 치에 해당하는 20mm나 기울었다. 지진 전부터 첨성대는 북쪽 지반이 침하되면서 중심축이 매년 평균 1mm씩 북쪽으로 기울고 있다. 꼭대기에 놓인 정자석(井字石)도 9월 12일 50mm에 이어 19일 여진으로 다시 38mm 이동했다. 이로 인해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원들이 한밤에 첨성대로 급파되는 비상 상황이 연출됐다. 다행히 “첨성대는 당장 붕괴될 수준은 아니다”라는 진단 결과가 발표됐지만 첨성대의 구조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해체 수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돼 논란을 일으켰다. 결국 해체는 첨성대의 원형을 훼손시킬 것이라는 지적에 따라 해체 수리 방안은 유야무야됐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 보존 대책이 3년간 28억 원의 국가 예산만 낭비한 채 실패로 끝난 것도 큰 문제였다. 특히 가변형 임시 물막이(키네틱 댐) 모형 검증 실험에 청와대와 정치권이 개입해 “실현 불가능한 방안”이라는 전문가 의견이 묵살된 사실이 동아일보 단독 보도로 알려졌다. 불법 공사로 중요한 유적들이 파괴되는 사건도 잇달았다. 올 4월 국가 사적 제6호인 경주 황룡사지(皇龍寺址)에서 불법 공사로 인해 8세기 통일신라시대 건물과 도로, 수로 유적이 한꺼번에 파괴된 사실이 본보 보도로 드러났다. 이어 충남 부여군 세도면에서 발견된 기원전 2세기 토광묘(土壙墓·수직으로 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매장하는 무덤)가 불법 공사로 90%나 파괴된 사실도 7월 알려졌다. 광화문 현판의 원래 색깔이 지금과 달리 검은 바탕에 흰색이나 금색 글씨였음을 보여주는 사진이 새로 발견되기도 했다. 문화재청은 4월 현판 색상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기로 했지만, 예산 문제로 색상 검증 실험은 내년에 진행키로 했다. 학술 분야에서는 강단-재야, 주류-비주류 사학자 사이에 한군현 위치 등 고대사 논쟁이 뜨거웠다. 지난해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위의 동북아역사지도 비판을 계기로 불붙은 이 논쟁은 올해 양측이 전열을 정비하며 한층 달아올랐다. 재야 사학계는 6월 ‘미래로 가는 바른 역사 협의회’를 구성했고, 주류 사학계는 계간지 ‘역사비평’ 2016년 봄, 여름, 겨울호에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 비판’이라는 연속 기획을 게재해 반격에 나섰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지도학적 미비’를 이유로 8년간 제작된 동북아역사지도를 6월 ‘출판 불가’ 결정하고 다시 만들기로 했다. 대한민국 건국 시기 논란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1948. 8. 15)”고 표현한 국정 한국사 교과서 현장 검토본 공개로 가열됐다. 1919년 시작돼 1948년 완결된 일련의 건국 과정을 드러냈다는 의견과 임시정부 역사를 부정하는 서술이라는 견해가 팽팽히 맞서고 있다.김상운 sukim@donga.com·조종엽기자 }

“도성 밖의 시골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 보니 모두 9000명쯤 보이는 병사들과 일꾼들의 야영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틀간 초 값만도 6500달러가 들었다고 한다. 언덕배기는 불빛으로 타올랐다. 임시 주방 여러 곳에서 일꾼들과 문상객들에게 음식을 날랐다. 마치 중세의 대회의장이나 군대의 원정을 위한 계파들의 모임 같았다.” 고종의 최측근으로 헤이그 특사증을 우당 이회영 선생에게 전했던 호머 헐버트 박사(1863∼1949)가 1897년 11월 21, 22일 명성황후의 국장에 참석한 뒤 미국 신문에 기고한 글 중 일부다. 최근 발견된 이 기고문은 명성황후의 장례식이 얼마나 성대하게 열렸는지 보여줘 주목된다. 또 장례식에 참석한 가토 마스오(加藤增雄) 주한 일본공사가 1897년 11월 27일 본국에 보고한 기록을 통해 일본 왕실이 장례식에 향로를 보내왔다는 사실도 새로 확인됐다.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이 19일 헐버트 내한 13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하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헐버트의 활약’에 따르면 헐버트 박사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 1898년 1월 9일자에 명성황후의 장례식 참관기를 남겼다. “시해된 명성황후의 유해를 엄청난 비용을 들여 장대한 의식으로 매장하는 장례가 시작됐다. 무덤 조성과 장례 의식의 총비용은 100만 달러에 가깝게 추산된다.” 명성황후의 장례식은 고종이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황제의 위호를 대외적으로 사용한 사실상의 첫 행사인 만큼 성대하게 치러졌다. 명성황후의 죽음을 추적해 온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독도동해연구실장은 “가토 공사는 ‘장의전모(葬儀典模)는 모두 명제(明製)에 의거해 행렬 등은 극히 장려(壯麗)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고 말했다. 장례는 외교관과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특히 배려한 것으로 드러나 대한제국의 위상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헐버트 기고문에 따르면 참석한 외국인은 60여 명이었고, 일본공사관 기록에는 대한제국 정부가 장례식 사흘 전인 18일 각국 공사 영사에게 관원을 대동하고 참석해 달라고 통지하고 당일 새벽 가마(6인교)와 순검 등을 보내왔다고 나온다. 장지인 청량리에서도 외국인들은 후하게 대접받았다. “정부는 (능)언덕 기슭에 1만 달러 정도를 들여 임시 건물을 세웠다. 황실의 수행원들과 고위 관직들, 초청된 외국인들을 위한 숙소였다. … 늦은 밤에 12개 코스가 나오는 과분한 저녁식사가 서울에서는 내로라하는 일류 요리사들에 의해 제공되었다.”(헐버트 기고문) 김동진 회장은 “헐버트 박사는 명성황후 시해 직후 고종을 지키기 위해 침전에서 불침번을 섰고, 조선과 조약을 맺었던 나라들이 시해 사건에 침묵함을 비난했다”며 “신문 기고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왕실이 명성황후의 국장에 은제 향로를 보내온 점도 특이하다. “황제 폐하 및 황태자 전하는 상복을 입으신 채로 각국 사신 및 수행원 일동의 알현을 받으셨고, 본관을 비롯하여 공손히 조사(弔詞)를 아뢰었습니다.”(가토 공사 보고) 가토 공사는 “폐하께서는 만족한 모습이었고 ‘일본 제실(帝室)에서 미려한 향로를 증견(贈遣)하셨음은 짐이 특히 감사하는 바이다’라고 하셨다”고 보고했다. 일본인들이 시해한 황후의 장례식에서 일본 왕실의 조의품을 받는 고종의 속내가 어땠는지는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고종은 밤새 장례를 직접 지휘한 것으로 나타났다. “황제는 하관과 봉분 작업을 직접 지휘했다.”(헐버트 기고문) “폐하와 전하 모두 장의 당일 밤은 백관을 독려하여 모든 일을 친히 지휘하시어 거의 침실에 들어가실 틈이 없었던 모양이고….”(일본공사관 기록) 당일 한국 의장병은 모두 러시아식이었고, 러시아 하사관이 4명씩 어가의 4위(四圍)를 호위했다. 김영수 동북아재단 실장은 “당시 러시아 재정고문관 초빙을 둘러싼 마찰 등 한-러 관계가 어긋나고 있었다는 게 통설인데, 이 장면은 여전히 긴밀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말했다. 명성황후의 장례식은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연구를 통해 세부 과정이 드러났고, 호러스 앨런 미국공사 등이 남긴 글도 있다. 헐버트 박사 내한 기념 학술대회는 19일 오전 10시 반 서울 종로구 YMCA 대강당에서 열린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올해의 책’에 오른 책들과 아깝게 밀린 책들의 득표수는 과장하면 ‘깻잎 한 장’ 차이였다. 시국 탓일까. 유난히 기억하고, 성찰하고, 탐구하는 주제가 많은 ‘거의 올해의 책’을 소개한다. ‘다시 후쿠시마를 마주한다는 것’(서경식 등·반비)은 정주하 사진작가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피해 현장을 촬영한 작품을 일본에서 순회 전시하며 지식인, 시민들과 나눈 대화를 담은 책이다. 선정위원들은 “국가와 독점자본주의의 횡포가 초래한 재해에 관해 사진이라는 조용한 언어로 웅변한다”(강맑실 사계절 대표) “재발을 막기 위해 타자의 아픔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고 평했다. 마주해야 할 또 다른 일, 세월호 참사다. 세월호 참사에 관한 방대한 기록과 자료를 분석한 ‘세월호 그날의 기록’(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진실의힘)도 많은 추천을 받았다. 김수한 돌베개 편집주간은 “기억, 기록의 간절함으로 정리한 백서의 힘”이라고 했고, 염현숙 문학동네 대표는 “참담한 심정으로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고 또 묻게 된다”고 했다. 그렇다. 우리는 진실을 인양하기 위해 민주주의가 필요한 나라에서 산다. 민주주의라는 말은 언제부터 어떻게 쓰였을까. ‘한국의 근현대, 개념으로 읽다’(이경구 등·푸른역사)를 보자. 공화와 철학, 자강 등 전통과 근대가 마주하며 변화한 개념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수많은 요소와 변수가 얽힌 한국의 현재에 대한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이명학 한국고전번역원장)는 평이다. 차라리 ‘상상의 왕국을 찾아서’(레프 구밀료프·새물결) 나서고 싶기도 하다. ‘상상의…’는 “13세기 몽골을 중심으로 세계사를 치밀하게 분석한 책”(고운기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이다. 유정연 흐름출판 대표는 “유럽, 중국 중심 세계사의 공백인 중앙아시아의 역사를 원거리에서 조망하기도 하고, 쥐구멍으로 보기도 하는 거장의 필치가 담겼다”고 평했다. ‘김상욱의 과학공부’(김상욱·동아시아), ‘나쁜 페미니스트’(록산 게이·사이행성)도 각각 “물리학자의 날카로운 사회 통찰”(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여성혐오 시대를 돌파하는 강력한 페미니즘의 기록”(염종선 창비 이사)이라는 평과 함께 거의 올해의 책이 될 뻔했다. 기존 소설의 서사에 싸움을 건 정지돈 소설가의 ‘내가 싸우듯이’(문학과지성사)도 다수 추천을 받았다. “소설과 에세이, 비평의 경계를 넘나드는, 올해 한국 소설 중 단연 문제작”(강동호 문학평론가)이다. 김종호 소설가(검은책방흰책방 대표)는 “사람들이 어떻게 각자의 세기와 세계, 텍스트 속에서 약간은 우습고 슬픈 집념으로 살고 있는지를 예술가들의 시도를 통해 보여준다”고 했다. 싸움에는 씨앗처럼 딱딱한 껍질로 자기를 방어하면서도 과육으로 상대를 유혹하는 기술이 필요할 게다. 씨앗의 진화 이야기 ‘씨앗의 승리’(소어 핸슨·에이도스)는 “집요한 관찰이 돋보이는 식물 판 이기적 유전자”(서현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 “씨앗 한 톨로 그려낸 매혹적인 인류사”(한성봉 동아시아 대표)라는 평가를 받는다. 조종엽기자 jjj@donga.com ◆올해의 책 선정위원(가나다순·42명)강동호(문학평론가) 강맑실(사계절 대표) 강문종(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강성민(글항아리 대표) 고운기(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김기중(더숲 대표) 김무곤(동국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김선정(아트선재센터 관장) 김성곤(한국문학번역원장) 김수한(돌베개 편집주간) 김윤태(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김종호(소설가·검은책방흰책방 대표) 김태훈(팝칼럼니스트) 김형찬(고려대 철학과 교수) 김홍민(북스피어 대표) 곽효환(대산문화재단 상무) 박상준(민음사 대표) 백원근(책과사회연구소 대표) 백창화(숲속작은책방 대표) 서현(한양대 건축학부 교수) 안대회(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안성열(열린책들 인문주간) 여태훈(진주문고 대표) 염종선(창비 이사) 염현숙(문학동네 대표) 오영욱(건축가) 유정연(흐름출판 대표) 유희경(시인·위트앤시니컬 대표) 윤철호(사회평론 대표) 이명학(한국고전번역원 원장) 이한상(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장은수(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전상인(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정은숙(마음산책 대표) 정은영(남해의봄날 대표) 정재승(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주연선(은행나무 대표) 주일우(문학과지성사 대표) 표정훈(출판평론가) 한기호(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한성봉(동아시아 대표) 황덕호(재즈칼럼니스트)}

종의 기원 정유정·은행나무·1만3000원 인간에 대한 묵직한 탐구 담은 작품 ‘7년의 밤’, ‘28’에서 강력한 서사의 힘을 보여준 저자가 사이코패스의 내면을 일인칭 시점으로 파고들었다. 피 냄새에 잠에서 깬 유진은 피투성이가 된 자신과 숨져 있는 어머니를 발견한다. 어머니의 일기와 유진의 기억이 교차되며 악의 근원을 향해 달려간다. 숨 가쁘게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묵직한 탐구가 담겨 있다. 5월 출간된 후 17만 권 넘게 판매됐다. 한국 문학의 외연을 한 차원 넓힌 작품으로, 한국형 스릴러 소설의 현재를 보여주고 미래를 예감하게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악의 기원과 점화에 대한 어두운 탐구가 역설적으로 삶의 찬란함을 불러온다는 분석도 나온다. “생존이 목적이 된 세상에서 무자비함이 살아남기 위한 진화의 결과라면 단죄가 가능한가.”(김태훈 팝칼럼니스트) “악의 문제를 윤리·도덕적 차원으로부터 이토록 자유롭게 다룰 수가 있을까? 지독했던 올여름 무더위를 견디게 해 준 최고의 동반자다.”(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흐름출판/1만4000원 신경외과 레지던트 막바지에 폐암 판정을 받은 미국 의사가 생을 돌아본 에세이. 남은 날이 얼마인지 가늠할 수 없음에도 아이를 갖고, 환자를 돌보며 일상을 이어간다. 의연하고 품격 있는 삶을 만날 수 있다. 8월 출간돼 11만 권 넘게 팔렸다. “죽음에 대한 의학적 관찰과 삶의 가치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을 아름다운 문체로 쓴 역작.”(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온 더 무브 올리버 색스/알마/2만2000원 ‘의학계의 계관시인’으로 불리는 저자가 죽음을 앞두고 환희의 순간은 물론이고 고통까지, 매 순간을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게 써내려갔다. 동성애, 약물중독으로 힘겨웠던 시간까지 밝히며 주어진 것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감사하다고 말한다. 충만한 삶이 무엇인지 확인시켜준다. “환자를, 지구를, 그리고 자신을 죽는 순간까지 똑바로 바라보고 성찰한 이의 회고록.”(김무곤 동국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반비/1만7000원 1999년 미국 콜럼바인 고교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 사건 가해자의 어머니가 아들이 ‘괴물’이 된 이유를 찾기 위해 고통스러운 퍼즐을 맞춰간 과정을 담았다.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으로 키운 아이도 우울증을 앓을 수 있다고 말한다. 몸뿐 아니라 정신건강까지 챙겨야 한다고 호소하며, 더 많은 고통을 막기 위해 깊은 상처를 내보였다. “처참한 내면을 응시한 용기 있는 기록.”(염종선 창비 이사)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현대문학/1만4000원 일본의 대표 작가인 저자가 글을 쓰게 된 계기, 글 쓰는 방식과 고뇌 등을 직설적으로 써내려간 에세이. 그만의 색깔과 문체를 만든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 35년간 글쓰기를 순수한 기쁨으로 채워 나간 저자를 보며 일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을 힌트를 찾을 수 있다. “하루키가 하루키일 수 있는 이유를 생생하게 느끼게 해 준다.”(김형찬 고려대 철학과 교수) 가치관의 탄생 이언 모리스/반니/2만2000원 에너지를 획득하는 방식이 사회 체계와 가치를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가치와 규범을 만들고 이를 유지하는 기반을 마련하면 환경 변화에 맞서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새로운 시각으로 사회 구조를 해석했다. “가치관의 형성 과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흥미로운 책.”(강문종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리처드 도킨스 자서전1, 2 리처드 도킨스/김영사/1만9500원,2만4500원 ‘이기적 유전자’, ‘만들어진 신’ 등으로 전 세계에 지적 충격을 준 저자가 삶의 궤적을 정리했다. 풍요로운 성장기와 역작이 탄생한 과정 등이 담겼다. 저자의 삶을 통해 한 시대의 주요 지적 담론을 아우르는 드문 경험을 할 수 있다. “위대한 과학자에게 신이 쥐여준 문학적인 펜. 예민한 감수성과 표현력 절정의 인생담.”(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풀꽃도 꽃이다1, 2 조정래/해냄/각 1만3800원 아들의 서울대 진학이 생의 목표인 엄마와 학업 스트레스로 자살을 꿈꾸는 아들을 통해 교육 현장을 고발한 소설. 풍부한 취재를 바탕으로 공부 기계로 살아가는 아이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잘못된 교육제도에 대책없이 비굴하게 휩쓸린 우리를 꾸짖는다.”(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 우리의 소원은 전쟁 장강명/예담/1만4800원 북한 김씨 왕조가 붕괴된 후 북한을 배경으로 3일간 펼쳐지는 사투를 박진감 있게 묘사한 액션 스릴러 소설. 통일에 대한 현실적인 시뮬레이션조차 없는 이 시대에 기존 분단문학의 틀을 뛰어넘었다는 평가다. “빠르고 재미있으며 의미심장하다. 무엇보다 단단하다.”(유희경 시인) 거짓말이다 김탁환/북스피어/1만3800원 세월호를 수색한 잠수사의 이야기를 통해 처참하고 믿기 어려운 현실을 생생히 고발했다. 소설이 당대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되묻는 작품.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는 의견이 많다. “논픽션 같은 픽션. 산자와 죽은 자의 포옹, 그리고 연대.”(정은영 남해의봄날 대표) 난생처음 한 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1, 2 양정무/사회평론/각 2만2000원 미술사를 우리의 시각에서 쉽고 깊이 있게 정리했다. 출간을 위해 저자가 편집자들에게 강의한 후 이를 엮어 낸 시리즈. 대중성과 전문성을 함께 갖춘 예술 인문서 기획 출판의 새 이정표를 제시했다. “미술로 향하는 지름길이 하나 더 출현했다.”(주일우 문학과지성사 대표)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이민경/봄알람/1만2000원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여성들의 불안감이 커지던 상황에서 여성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만든 독립출판물도 시대의 문제에 발 빠르게 대응하면 독자에게 폭넓게 다가갈 수 있음을 증명했다. “독립출판의 성공, 주목할 만한 저자의 발굴.”(박상준 민음사 대표) 채식주의자 한강/창비/1만2000원 어릴 적 자신을 문 개를 때려죽인 장면이 머릿속에서 맴돌던 여성이 육식을 거부하고 스스로 나무가 되어간다고 여기는 과정을 차분한 문체로 흡입력 있게 쓴 소설(2007년 출간). 맨부커상 수상으로 한국 문학의 위상을 높였고 숱한 독자를 빨아들이며 올해만 60만 권이 판매됐다. 침체된 한국 문학에 활력을 불어넣은 일등공신이기에 ‘명예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다. ◆올해의 책 선정위원(가나다순·42명)강동호(문학평론가) 강맑실(사계절 대표) 강문종(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강성민(글항아리 대표) 고운기(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김기중(더숲 대표) 김무곤(동국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김선정(아트선재센터 관장) 김성곤(한국문학번역원장) 김수한(돌베개 편집주간) 김윤태(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김종호(소설가·검은책방흰책방 대표) 김태훈(팝칼럼니스트) 김형찬(고려대 철학과 교수) 김홍민(북스피어 대표) 곽효환(대산문화재단 상무) 박상준(민음사 대표) 백원근(책과사회연구소 대표) 백창화(숲속작은책방 대표) 서현(한양대 건축학부 교수) 안대회(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안성열(열린책들 인문주간) 여태훈(진주문고 대표) 염종선(창비 이사) 염현숙(문학동네 대표) 오영욱(건축가) 유정연(흐름출판 대표) 유희경(시인·위트앤시니컬 대표) 윤철호(사회평론 대표) 이명학(한국고전번역원 원장) 이한상(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장은수(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전상인(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정은숙(마음산책 대표) 정은영(남해의봄날 대표) 정재승(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주연선(은행나무 대표) 주일우(문학과지성사 대표) 표정훈(출판평론가) 한기호(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한성봉(동아시아 대표) 황덕호(재즈칼럼니스트)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9일 윤봉길 의사 순국 84주기를 앞두고 한국 미국 중국 일본의 학자가 참여하는 국제학술대회가 열린다.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회장 김진우)는 국제학술회의 ‘매헌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와 국내외 영향’을 16일 오전 9시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연다. 학술대회는 윤 의사의 의거가 한국의 독립과 독립운동에 미친 효과에 초점을 맞춘다. 서상문 고려대 연구교수는 ‘윤봉길 의사의 상해의거와 중화민국의 한국독립운동 지원’에서 의거가 중국 국민당 정부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는 계기를 이끌어냈음을 밝힌다. 이 밖에 ‘카이로 회담의 진행과 합의, 그리고 거기에 끼친 윤봉길 의사 의거의 영향’(김학준 전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한국의 독립운동과 카이로 회담’(제임스 매트레이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 ‘윤봉길 의사 의거와 장제스 카이로 선언과의 관계’(이상철 일본 류코쿠대 교수) 등이 발표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시골 작은 집에 책 읽기를 좋아하는 할머니가 산다. 하지만 시골집에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과일을 따고, 가축을 돌보고, 장마에 대비하고…. 손님도 찾아오기 때문에 겨울이 깊어서야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림책 ‘책 읽기 좋아하는 할머니’의 줄거리다.》 “옛날 우리 어린 시절처럼 닭도 나오고, 도마뱀도 나오고, 쥐도 나오고 그러네요. 책? 옛날에는 좋아했지요. 이제는 눈이 어두워서 잘 못 보는데 이거는 그래도 글자도 안 작고, 그림도 많네.” 전순득 씨(75)가 12일 강원 원주시 신림면 황둔리 황둔송계경로당에서 ‘책 읽기 좋아하는 할머니’를 읽고 말했다. 치악산 자락의 황둔리는 찐빵이 유명하고 인근에 휴양림과 계곡이 있는 시골 마을이다. 이곳에서 태어난 전 할머니는 책 속 할머니처럼 고추, 콩, 팥, 옥수수 농사를 짓느라 평생을 바쁘게 살았다. 요즘처럼 농사일이 좀 한가한 겨울철에 경로당에 오면 심심해서 ‘윷을 들었다 놨다’ 할 뿐이었다. 이날 경로당에는 사단법인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이 기증한 책 200여 권과 책장이 새로 들어오며 ‘할매·할배 책 읽는 방’이 생겼다. 이 단체는 그동안 시골 학교에 마을 도서관을 꾸미는 등 전국에 작은 도서관 350여 곳을 만들었지만 경로당을 책 읽는 공간으로 바꾼 건 이번이 처음이다. “마을 어르신들이 경로당에 와서 화투나 술 말고 문화적으로 즐길 거리가 있었으면 해서 독서 공간을 만들어 드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비용도 부담인 데다 서울 동대문에서 헌책을 사려고 했더니 어르신들이 좋아하실 만한 책을 고르기도 힘들고…. 그러다가 신문에서 ‘작은도서관…’ 기사를 보고 도움을 요청했는데 마음이 통했나 봐요.” 황둔1리 이장인 윤진철 씨(69)가 도서관을 개관하게 된 사연을 기쁘게 말했다. 다른 마을 어르신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작은도서관…’은 어르신들의 눈높이에 맞춰 큰 글자체로 출판된 한국문학전집, 그림책, 오디오 북, 건강 관련 책, 평범한 노인이 쓴 시집·수필집, 어르신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만화 등을 서가에 채웠다. “동화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를 읽었는데 옛날에 듣던 이야기하고 달라. 팥죽을 이고 가다가 어쨌다고 들었는데, 여기에는 밤도 나오고, 거북이도 나오고. 함께 사는 아홉 살, 열 살 손주들 읽어주면 좋겠네.”(김정순 씨·70) 주민 백낙진 씨(77)는 “젊은 시절엔 책을 많이 읽는 편이었는데, 요즘엔 집에 책이 별로 없어 잘 못 봤다”며 “경로당에서도 장기를 두거나 화투를 쳤는데 이제 책을 많이 읽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순자 씨(72)도 “소일거리가 없어 시간이 나면 스마트폰으로 게임이나 했는데, 책이 있으면 책을 봐야지”라고 말했다. 이날 경로당에서 가까운 황둔1리 마을회 체험관에서는 마을 주민 6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가수 서수남 씨(73)가 공연을 했고, 노인을 소재로 동화를 쓰는 김인자 작가가 책을 읽어줬다. 김 작가는 요양병원 등에서 어르신들에게 책을 읽어드리는 일을 수십 년째 해오고 있다. 그는 “어르신들이 독서에 대한 욕구가 분명히 있지만 일상에서 책을 읽을 환경이 잘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며 “젊은이들이 떠나고 시골에 남은 노인들이 창조적이고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원주=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김지하 시인과 도올 김용옥이 썼다고 주장하는 가짜 글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다.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김지하가 이렇게 말하면'으로 시작되는 글은 촛불집회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 아니라 종북 세력이 주도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촛불집회를 크게 보도하는 종합편성채널과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언론에 대해 "나라가 망하면 너희도 죽는다"며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김지하 시인의 부인인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은 14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김지하 시인이 작성한 것이 아닌데 이름이 언급된 글이 돌고 있어 당혹스럽다"고 밝혔다. 김 이사장은 또 "김 시인이 최근 시국 상황에 대해 답답한 마음에도 말을 아끼고 있는 상황인데 이런 일이 생겨 속상하고 화가 난다"면서 "조만간 사이버수사대에 수사를 의뢰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SNS에서는 "대통령 하야 주장 세력에 선동당하지 말고, 대한민국의 법치주의를 지킵시다"라는 제목의 글이 '도올 김용옥이 쓴 글'이라며 확산되고 있다. 이 글은 "박 대통령이 뭘 잘못했어요? 독재를 했어요? 부정 축재라도 했소?"라며 박 대통령을 옹호하는 내용이다. 도올의 책을 펴내 온 통나무 출판사 측은 "도올 선생님이 광화문 촛불집회 연단에서 시국 비판 연설도 했는데 그런 글을 썼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분명한 사기인데 글이 조직적으로 유포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김지영기자 kimjy@donga.com조종엽기자 jjj@donga.com}
양반이 자기 여종을 첩으로 삼아 자식이 태어나면 그 자식의 신분도 노비다. 주인은 그 아버지이고 나중에 형제 등이 다른 재산처럼 상속하게 된다. 이들은 배다른 형제의 종이 돼 부림을 받았을까? 박경 연세대 법학연구원 연구교수는 10일 한국고문서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조선 전기 자기비첩(自己婢妾) 소생 사환(使喚·노비로 부리는 일)에 대한 인식’에서 이 같은 상황을 막기 위한 조선의 법과 운용에 관해 연구 내용을 밝혔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양반의 자기비첩 소생은 종량(從良·여종이 낳은 양인의 아이는 양인이 되도록 함)하도록 했다. 태종 때에는 할아버지의 비첩 소생, 즉 4촌까지는 종으로 부리지 못하게 했고, 다시 모든 양인 남성과 천민 여성 사이의 소생을 양인으로 삼도록 했다. 박 연구교수는 “같은 부계 핏줄로 동기(同氣)를 이어받은 골육(骨肉)을 차마 일반 노비와 같이 부릴 수 없다는 논리였다”며 “위정자들이 부계 중심적 가족질서를 지향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종 때는 법 적용 대상이 관원과 일부 양인들의 천처첩(賤妻妾) 자녀로 좁아지기도 했다. 이와 별개로 타인이 소유한 여종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소유주가 타인이어서 종량하려면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문제는 절차였다. 종량을 하려면 신고를 해야 했는데 그 권한이 아버지, 적모(嫡母·아버지의 정실부인), 적(嫡) 동생 등으로만 규정돼 이들이 신고하지 않으면 그 집안의 노비로 남아야 했다. 노비를 관장하던 장례원(掌隸院)은 성종 대에 들어 이런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절차를 개선하면서 부, 조부의 비첩 자녀를 부리는 일을 골육을 해치는 일, 즉 ‘잔상골육(殘傷骨肉)’이라고 표현했다. 박 연구교수에 따르면 이 표현은 이후 항간에서 ‘골육상잔(骨肉相殘)’으로 변하고, 4촌까지의 근친을 부리는 일을 제한한 법과 달리 5, 6촌을 부리는 일까지 금기시된다. 이에 따라 명종 시기에는 5, 6촌은 노비로 부릴 수 있게 한다는 수교가 반포되기도 했다. 박 연구교수는 “당시 소송 기록을 분석해 보면 부자나 형제 등 같은 혈족이 서로 싸운다는 ‘골육상잔’은 골육을 부리는 일을 금지하는 법을 상징하는 용어로 정착했다”며 “유교적 질서의 구축 과정에서 가족 간의 윤리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 준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역사를 수사한다.’ 재야와 강단, 주류와 비주류 사이에 이견이 끊이지 않는 고대사의 쟁점을 범죄를 수사하는 검사의 눈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검사로 일하면서 40년 가까이 와당을 수집해 ‘기와 검사’라는 별명이 붙은 유창종 유금와당박물관장(71·법무법인 세종 변호사·전 서울지검장). 그가 최근 ‘와당으로 본 한국 고대사의 쟁점들’(경인문화사)을 내고 9일 동북아역사재단 주최 상고사 토론회에서 책의 주요 내용을 발표했다. “비주류 사학에서는 중국 요서 지역에 낙랑군이 설치돼 멸망 때까지 존속했다고 보지만 이는 평양에서 ‘낙랑예관(樂浪禮官)’, ‘낙랑부귀(樂浪富貴)’ 등이라고 쓰인 와당이 출토된 것과 모순됩니다.” 유 관장은 평양 출토 와당을 분석해 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비주류 학설을 비판했다. 평양에서 ‘대진원강(大晉元康)’이라고 쓰인 와당이 출토돼 서진의 혜제가 원강이라는 연호를 쓰던 기간(291∼299년)에도 평양에 중국 왕조의 관서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등 와당은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음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와당은 왕권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건축물에만 사용됐고, 다른 유물과 달리 이곳저곳으로 옮겨지는 일이 거의 없다는 특징이 있다. 유 관장은 “와당은 발견된 장소에 국가의 관서나 그에 준하는 기관 등의 건축물이 존재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고 말했다. 유 관장은 유금와당박물관(서울 종로구 창의문로11가길)에 평양에서 나온 와당 33점을 소장하고 있다. 유 관장은 또 평양에서 출토된 낙랑 와당이 위조된 것이라는 비주류설도 논박했다. 낙랑예관 등의 와당은 절당법(와당과 수키와를 접합한 부위의 절반을 실이나 대나무 칼로 절단해 만드는 기법)으로 제작됐는데, 낙랑군이 있던 시대에 이 기법이 사용됐다는 사실은 20세기 말에야 드러났다는 것이다. 유 관장은 “만약 20세기 초 와당들이 위조됐다면 당시 지식수준으로 보아 절당법으로 와당을 제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 관장은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封泥)가 요서에서 출토된 점 등을 고려하면 낙랑군은 요서나 요동에 있던 왕검성에 잠시 설치됐다가 나중에 마지막 왕검성(평양)으로 옮겨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밖에도 그는 대동강 유역 고구려 와당이 장기간 변화 발전했고, 문양과 예술성 등이 중국 남북조 와당보다도 앞선 점으로 보아 평양을 고구려의 주된 수도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또 6세기 말∼7세기 초 일본 와당도 한국계 와당을 모방하는 수준이었음을 고려하면 임나일본부설은 설득력이 없다고 말했다. 유 관장은 이날 토론회에서 동북아재단에 “고조선 연구소를 설립해 우리 민족과 역사 정체성의 핵심 과제인 고조선의 실체와 정통성 계승에 대해 적극적으로 연구해 달라”고 주문했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가난과 일제를 피해, 얼마 안 되는 세간을 이고 지고 만주로 떠난 농민들이 있었다. 그들의 후손인 조선족은 한중 수교 이후 다시 황해를 건너 한국의 식당, 공사 현장, 공장의 노동자와 가정의 아이 돌보미로 한국 사회의 노동의 한 축을 맡아 왔다. 황해뿐일까. 책은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영국의 한인 식당에서 일하고 한국인의 집에서 가사노동을 하는 조선족에 주목한다. 저자가 2010∼2014년에 걸쳐 영국, 중국 칭다오, 서울 구로동 등지에서 조선족을 인터뷰해 그린 ‘조선족 디아스포라(이산)’의 세밀화다. 2014년 기준 영국 런던 남서부의 뉴몰덴에는 한인들이 4000명 정도 사는데, 조선족도 그 정도 된다. 조선족이 없으면 뉴몰덴의 한인 식당들은 운영이 안 될 정도다. 브로커를 통해 비합법적으로 입국한 조선족이 상당수인데, 그 과정도 만만치 않다. 4개국 정도를 거치는 건 보통이고 20개국을 경유하는 이도 있다. 중간에 단속에 걸리는 통에 입국에 6개월∼1년 이상 걸리기도 한다. 조선족은 영국에 와서는 극도로 생활비를 아낀다. 2, 3년은 브로커에게 입국 비용으로 건넨 1만3000∼1만5000파운드(약 2000만 원 안팎)를 메워야 하고, 영국의 물가가 워낙 비싸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하루 식비 50펜스(약 730원)로 가장 싼 빵과 냉동 쇠고기 약간을 사 먹으며 지내기도 하고, 17명이 한집에 함께 살기도 한다. 영국의 조선족들은 한결같이 ‘성질 급하고 까다롭고 손이 빠른’ 한국인 고용주들에게 일을 배우며 힘들었던 경험을 털어놨다. 그래도 한국에서 일하는 것보다 나은 편이다. 영국의 한국인은 먼저 이주한 선배일 뿐 조선족과 마찬가지로 영국 사회의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서울의 조선족들은 어떨까. “우리는 중국 신분증에도 한글로 이름을 적는데 한국에서는 신분증에 영어로 쓰게 돼 있어요. 조선족은 ‘다문화’인가요, 한국 사람인가요?” 조선족은 중국에서도 받지 않던 차별을 같은 민족이 사는 한국에서 받는 설움을 토로했다. 중국 칭다오의 조선족은 사뭇 다르다. 조선족이 한국인보다 먼저 중국에 온 이민자이고, 중국 시민이기 때문이다. 한국인 고용주는 중간관리자로 일하는 조선족에게 많이 의지하게 된다. 칭다오의 한 조선족은 “한국인은 왜 내 나라인 중국에 와서도 조선족을 차별하려 드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중국 경제의 급성장은 돈 벌러 해외에 나온 조선족에 문제를 야기했다. 영국의 한 조선족은 “15년 전 1파운드는 중국 돈으로 15위안이 넘었는데, 요즘은 10위안도 안 된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중국에서 집 한 채를 살 만한 돈을 모았지만 이제는 별로 큰 금액이 아니게 됐다. 귀국의 종착점이 멀어진 것이다. 현지에서 자란 자녀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제 딸들은 헷갈려 해요. 영국 사람은 분명히 아닌데, 중국 사람이라고 하려니까 중국말도 못 하고, 한국 사람이라고 하자니 한국에 가본 적도 없고. 저는 ‘엄마는 차이니스 코리안인데, 넌 브리티시 차이니스 코리안이야’라고 했다가, 더 크면 ‘넌 코리안 맞아. 증조할아버지 때 함경북도에서 중국에 왔다가 이렇게 됐어’라고 하지요.”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인 저자는 “세계화로 지리적 뿌리내림이 흔들리면서 부유하는 개인은 공허함을 느낀다”며 “불안 속에서 더 나은 직장을 찾아 이동한다는 점에서는 우리 모두가 조선족”이라고 말했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

“일제강점기 지주 출신 부자들은 놀면서 부(富)를 탕진한 이들이 대부분이고, 일본 유학생들은 보통 고등문관 시험 치고 군수, 법관 되는 게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수당 김연수(1896∼1979)는 근대적 경제관념을 가지고 민족 기업을 일으켜 일본 자본과 경쟁했습니다. 선구적 기업가인 거지요.” 삼양그룹 창업주 수당 김연수에 관한 책 ‘親日(친일) 마녀사냥’을 최근 낸 엄상익 변호사(62)를 6일 서울 서초구 사무실에서 만났다. 엄 변호사의 사무실 서가에는 일제강점기 관련 연구서와 논문 등이 가득했다. 엄 변호사는 청송교도소 내 의문사 사건을 ‘신동아’에 밝히면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첫 의문사 규명을 이끈 인물이다. 대도 조세형, 탈옥수 신창원처럼 누구나 꺼리는 인물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2009년 수당의 후손들이 냈던 친일반민족행위결정 취소 청구소송도 대리했다. 책은 엄 변호사가 변론하는 과정과 과거 김연수가 성장한 과정 및 기업가로서의 면모 등 일대기를 소설처럼 재구성해 교차시켰다. 수당이 인수한 경성방직은 조선인이 만든 조선인의 회사였다. 직원들은 조선인만 고용했고, 1923년에는 처음으로 우리 기술로 광목을 생산했다. 태극기를 변형한 모양의 태극성(太極星) 상표를 달기 위해 조선총독부보다 덜 민감한 일본 상공성에 상표등록을 하기도 했다. 수당이 상하이 임시정부 등에 독립운동 자금을 댔다는 증언도 있다. 수당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당대의 상황을 묘사한 내용도 책에 적지 않다. “변론을 준비하며 일제강점기를 공부할수록 여태까지 역사의 해석을 독과점한 이들의 특정 시각만 일방적으로 수신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수당은 일제강점 말기 중추원 참의 등의 관직을 받는다. 이에 대해 엄 변호사는 “아예 ‘일본 사람이 되겠다’며 적극적으로 친일한 기업인이 분명히 있다”면서도 “수당은 일제가 주는 관직을 억지로 받았지만 기업을 운영하기 위한 것이었고, 민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았던 인물”이라고 말했다. 경성방직이 조선총독부에 낸 국방헌금에 대해서는 “전시에 조선총독부가 헌금을 하라고 공개적으로 내용증명을 보내오는데 사업가로서 안 낼 수 있었겠나”라고 말했다. 엄 변호사는 사건을 수임한 2008년부터 자료 수집을 시작해 이 책을 쓰는 데 8년이 걸렸다. 이유는 뭘까. “자비 출판입니다. 팔릴 책도 아니고, 이 나이에 공명심도 아닙니다. 다만 세상을 보는 시각이 자유로웠으면 합니다. 변호사 일을 하다 보니 한 색깔만 통하는 사회, 외눈으로만 보라고 강요하는 사회가 싫었어요. 학문이나 법정이 객관적 진실을 밝히는 것 같지만 자칫하면 ‘진실의 무덤’이 될 수도 있지요.”조종엽기자 jjj@donga.com}
“무엇보다도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사할린에 강제 동원됐던 조선인 노동자가 고향에 쓴 편지다. 허광무 ‘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은 3일 한일민족문제학회 학술대회의 ‘사할린 경찰기록과 일본지역 조선인 노무자’ 발표문에서 강제징용 피해자의 절절한 사연을 소개했다. 편지는 자신이 겪고 있는 참상을 전하려 했다. “노동자들이 공복을 견디지 못해 급기야 몸이 부어올라 힘도 쓰지 못하는 걸 보면 정말로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속아서 모집에 응한 것이 후회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모집에 응하는 사람이 있다면 절대로 말려 주세요.” 일제는 조선총독부 책임 아래 지방관청이 경비를 관리하고 지역·마을별로 인원을 할당해 기업에 인도하는 ‘관 알선’ 방식 이전부터 형식적으로는 ‘모집’이지만 거짓 선전과 경찰, 면직원의 위압적 ‘권유’를 통해 사실상 강제로 조선인을 동원했다. 조선인 노무자는 일제 경찰의 요주의 관찰 대상이었다. 이 편지도 경남 함양경찰서 우편검열에서 발견돼 사할린 경찰에 통보됐다. 하지만 편지를 쓴 이는 도주에 성공했다. 일경 자료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어떤 영화보다도 극적이다. “늑골이 아프다 하여 숙소에서 쉬게 하였는데 본인이 진료를 희망해 대기하던 중 감시원의 눈을 피해 도주했다.” “도주자는 5, 6일 전부터 오른쪽 발바닥에 종기가 생겨 미하시 병원에서 통원치료를 받던 중 4월 12일 오전 8시경 미하시 병원에서 화장실에 간다고 한 뒤 뒷문으로 도주했다.” “함바의 변소 창문을 뜯고 도주하여 즉시 4, 5명이 추적하였으나 함바 남쪽 수풀 속에서 종적을 감췄다.” 허 연구위원은 “일본 경찰의 입장에서 사할린은 ‘사상가’ ‘도주자’가 경찰의 눈을 피해 숨는 지역으로 경계의 대상이었다”며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 중 약 5분의 4가 아직 드러나지 않아 추가 조사가 절실하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키가 점차 작아졌다는 연구가 나왔다. 조영준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3일 한일민족문제학회가 연 학술대회 ‘사할린 한인기록물을 통해 본 일제하 재외한인사회’에서 일제강점기 사할린에 강제 징용된 노동자를 포함해 20∼40세 조선인 남성 2100여 명의 키를 출생 연도별로 분석했다. 조 교수는 ‘사할린 화태청(樺太廳·1907∼1945년 남사할린을 관할한 일제의 관청) 소장 경찰 기록과 일제하 조선인 신장(身長) 추세’라는 제목의 발표문에서 1896∼1900년생 남성은 평균 키가 162.8cm였지만 1921∼1924년생은 평균 159.5cm로 3cm 이상 작아졌다고 밝혔다. 이 연구에 따르면 1900년대, 1910년대생도 각각 그 이전 출생자보다 키가 작아 신장이 계속 작아진 걸로 나타났다. 신장은 성장기의 영양 상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들이 청소년기인 1910, 1920년대 영양 상태가 각각 전보다 나빴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사할린 거주 조선인은 노무자로 끌려간 이가 대부분으로, 키가 조선에서 다 자라고 성인이 된 뒤 사할린으로 갔기 때문에 이들의 신장은 사할린이 아니라 조선에서의 영양 상태를 보여준다. 이번 연구에서 분석한 조선인은 노무자(632명), 갱내 탄광노동자(459명), 기능공(107명), 상인(49명), 농민(40명) 등으로 당시 조선인의 다수를 구성했을 하층민을 포함하고 있다. 조 교수는 이번 대회에서 사할린 거주 일본인 남성 270명을 분석한 결과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일본인은 △원래 신장이 조선인보다 작았고 △조선인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키가 작아졌지만 △작아지는 정도는 조선인보다 완만해 점차 키가 조선인과 비슷해졌다. 이번 연구는 최신 자료인 2014년 대일항쟁기위원회가 러시아 국립사할린주역사기록보존소에서 열람한 문서철과 2006년 발간된 ‘전전(戰前) 조선인 관계 경찰자료집―화태청 경찰부문서’ 자료를 종합해 분석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평균키를 볼 수 있는 당시 국내 자료는 매우 드물다. 국내 관보(官報)의 행려사망자 기록을 분석한 연구가 있지만 원자료가 눈대중으로 기록됐을 가능성이 높아 신뢰도에 한계가 있다. 서울 양정고보 학생들의 기록을 조사해 “같은 연령대에서 신장이 점점 커졌다”는 연구가 있지만, 이들은 청소년인데다 조선인 가운데 상류층에 속해 대표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번 연구는 ‘조선인 관계 서류철’ ‘행정수사 서류철’ ‘조선인 관계 소재불명 요시찰인 수배에 관한 서류철’ 등 수배, 감시 목적의 일경(日警) 자료를 분석해 신뢰도가 높다. 키를 척(尺) 촌(寸)뿐 아니라 푼(分)까지 기재한 문서도 다수고, 일부는 미터법으로 mm 단위까지 기재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했지만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생산이 증가해 1910∼1940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연평균 증가율이 2.3%가량에 달했다는 게 수량경제학의 연구 결과다. 그러나 성장의 과실이 조선인에게도 분배돼 생활수준이 향상됐는지에 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엇갈린다. 조 교수는 “이번 연구는 일제강점기 경제성장으로 조선인의 생활수준이 향상했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잘 아는 생명의 죽음이 괴롭다면 잘 모르는 생물 종의 소멸에 느껴야 할 감정은 응당 부끄러움일 게다. “섬 북쪽에 세 바위가 벌여 섰고, 그 다음은 작은 섬, 다음은 암석이 벌여 섰으며… 또 바다의 섬 사이에는 인형 같은 것이 별도로 선 것이 30여 개나 되므로 의심이 나고 두려워서….”(성종실록) 1476년 영흥(永興) 사람인 김자주가 독도 부근까지 다녀온 뒤 임금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여기서 ‘인형 같은 것’은 바로 독도 강치(학명 ‘일본 강치’)로 보인다. 1906년 독도를 방문한 일본인도 “항상 바위 위에서 숙면을 취한다.… 많을 때는 만 마리나 된다”는 강치 목격담을 남겼다. 수십만 년 이상 강치 떼는 독도를 빼곡히 채우고 평화롭게 잠을 자거나 새끼에게 젖을 줬을 것이다. 독도 강치는 19세기 중엽에 4만∼5만 마리, 1900년대 초반까지도 2만∼3만 마리는 있었다고 추정된다. 한때는 독도뿐 아니라 동해안 전체가 서식처였다. 옛날에 울릉도를 가지도(可支島)라고 부른 것도 강치의 옛 이름인 ‘가지어’ 혹은 ‘가제’에서 연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인 어부들은 19세기 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강치 수만 마리를 잡아 씨를 말렸다. 일본의 어렵회사들은 1904∼1913년에만 강치 1만4000마리를 잡아 기름을 짜고 가죽을 벗겼다. 해양문명사학자인 저자(제주대 석좌교수)는 “대체로 한국 어민은 전통적으로 물개류나 바다사자 잡이를 하지 않았고 자연과 공생했다. 가죽을 팔기 위해 바다 포유류를 잡아 죽이는 일은 한국인의 의식 속에 없었다”고 말한다. 독도 강치는 결국 광복 뒤에는 개체 번식이 불가능할 정도의 소수만 남았고, 1975년 두 마리가 목격된 게 마지막이다. “마지막 강치는 가재바위 위나 후미진 바위 그늘에서 끼륵거리며 최후를 맞이했을지 모른다.”고 저자는 상상한다. 일본인 어부들의 강치잡이는 일제의 독도 영토 ‘편입’을 촉발하기도 했다. 1904년 강치잡이꾼 나카이 요자부로가 독도의 강치잡이를 독점하려고 ‘독도 영토 편입 및 차용 청원’을 일본 내무성에 제출한다. 일본 정부는 이 청원서를 계기로 논의를 서둘러 한국 정부는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1905년 2월 독도의 영토 편입을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환(環) 동해 곳곳을 찾아다닌 저자의 발품이 책에 담겼다. 저자는 독도 강치잡이의 본향인 오키 제도의 고카이 촌을 방문해 옛날 강치를 사냥했던 녹슨 총을 목격하기도 하고, 사료관에서 여전히 일본 정부가 이 마을 사람에게 독도 광물의 채굴권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도 알아낸다. 독도는 누구 땅일까? 생태적으로는 강치의 땅이었다. 저자는 “일본은 자신들의 강치잡이 역사를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는 증거라고 들이대지만 강치 학살은 반문명적 범죄 행위였다”며 “영유권 타령에만 머물지 말고 국민국가를 뛰어넘는 문명사적 차원에서 해양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익숙지 않은 일본의 옛 지명들이 책에 꽤 나오지만 흐름을 따라가는 데는 무리가 없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