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인

황규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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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모든 질문이 스포츠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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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이터 비키니]나달 만세! 테니스 빅3 만세!

    역시 이변은 없었습니다. 라파엘 나달(31·스페인·세계랭킹 1위)은 11일 미국 뉴욕 빌리 진 킹 내셔널 테니스센터에서 열린 US 오픈 테니스 대회 남자 단식 결승전에서 케빈 앤더슨(31·남아프리카공화국·32위)에 3-0(6-3, 6-3, 6-4) 완승을 기록했죠.이 우승은 나달의 개인 통산 16번째 메이저 대회 타이틀이었습니다. 이로써 나달은 로저 페더러(36·스위스·2위)가 보유하고 있는 메이저 대회 남자 단식 최다 우승 기록에 3개 차로 다가간 동시에 현역 3위인 노바크 조코비치(30·세르비아·6위)는 4개 차이로 따돌렸습니다. 어쩌면 이 세 선수는 우리 시대 최고가 아니라 역사상 최고 테니스 선수일지 모릅니다.한국 테니스 팬들은 이 셋을 한 데 묶어 ‘빅3’라고 부르기 좋아합니다. 앞선 세 차례 메이저 대회에서도 페더러(호주 오픈, 윔블던)와 나달(프랑스 오픈)이 우승했기 때문에 올해는 2011년 이후 처음으로 4대 메이저 대회 타이틀을 모두 빅3가 차지한 해가 됐습니다. 페더러가 2003년 윔블던에서 개인 통산 첫 번째 메이저 대회 타이틀을 따낸 뒤 열린 메이저 대회는 모두 58번. 이 중 이 세 선수가 우승 트로피를 가져간 게 81.0%(47번)입니다. 같은 기간 메이저 대회 남자 단식은 총 7366경기가 열렸습니다. 이 세 선수는 이 중 10.1%에 해당하는 743승을 챙겼습니다. 참고로 메이저 대회에 한 번에 단식에 참여하는 선수는 128명입니다. 또 이 세 선수는 지난해 11월 앤디 머리(30·영국·3위)에게 1위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 13년 동안 번갈아 가면서 랭킹 1위 자리를 지키기도 했습니다. 나달이 현재 자리를 시즌 끝까지 유지하면 개인 통산 네 번째로 연말 랭킹 1위로 한 해를 마감하게 됩니다.이 기간 빅3 다음으로 메이저 타이틀을 가장 많이 가져간 건 머리와 스탄타니슬라스 바브링카(32·스위스·8위)였습니다. 두 선수 모두 세 번씩 메이저 대회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죠. 그래도 랭킹 1위를 경험한 데다 전체 남자프로테니스(ATP)투어 성적에서 머리가 앞서기 때문에 해외 언론에서는 빅3에 머리를 포함해 ‘빅4’ 또는 ‘빅3.5’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머리를 포함해 빅4로 따져 보면 이 네 선수가 모두 출전한 ATP투어 대회는 총 100개. 이 중 88개 대회가 이 네 명 중 한 명이 우승하는 거로 끝났습니다. 이들이 우승하지 못한 12개 대회 중 메이저 대회는 총 세 번. 먼저 후안 마르틴 델 포트로(29·아르헨티나·24위)가 2009년 US 오픈에서 우승했습니다. 이어 바브링카가 2014년 호주 오픈, 2015년 프랑스 오픈 챔피언 자리에 올랐죠.빅3 사이 맞대결 전적에서는 나달이 49승 36패(승률 57.6%)로 앞서 있습니다. 이유는 역시 클레이 코트. ‘클레이 코트의 황제’ 나달은 클레이 코트에서 두 선수를 상대로 승률 75.7%(28승 9패)를 기록했습니다. 나달은 머리를 상대로는 클레이 코트에서 7승 2패(승률 77.8%)를 기록 중이죠.재미있는 건 나달과 페더러가 US 오픈에서 아직 단 한번도 맞대결을 벌인 적이 없다는 것. 만약 올해 대회에서 두 선수 모두 4강에 진출했다면 US 오픈 첫 맞대결을 벌일 수 있었지만 페더러가 8강에서 탈락하며 다음 기회를 기약하게 됐습니다. 통계적으로 계산하면 두 선수가 여태 US 오픈 4강에서 만났어야 확률은 39%지만 벌어지지 않은 건 벌어지지 않은 일입니다. 역시 비키니가 그렇듯 통계 데이터는 참 많은 걸 보여줘도 모든 걸 보여주지는 못합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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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일담]이승엽은 드래프트 몇 순위 출신?

    정답은 없습니다. 그 어떤 프로야구팀도 신인 지명 회의(드래프트)에서 이승엽(41·삼성)을 지명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인 입단 방식’이 지금과 달랐던 겁니다.오늘(9월 11일)은 2018 프로야구 2차 신인 드래프트가 있는 날입니다. 한국 프로야구(KBO 리그)는 선수 보류(保留) 조항이 있는 폐쇄형 리그입니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 학교를 나온 선수가 프로야구 무대에서 뛰려면 드래프트를 거치거나 아니면 육성선수(옛 연습생)로 입단한 다음 정식선수로 신분을 바꿔야 합니다. 그런데 1995년까지는 ‘고졸 연고 자유계약’ 혹은 ‘연고지명’이라고 부르는 제도가 따로 있었습니다. 각 구단은 이 제도를 활용해 연고 지역 고교 3학년 선수하고는 지명 절차 없이 입단 계약을 맺는 게 가능했습니다. 그냥 계약만 하면 곧바로 입단입니다. 1995년 경북고를 졸업한 이승엽 역시 이 제도로 삼성에 입단한 케이스입니다. 프로야구 초창기에 이렇게 연고 지역 선수 영입 문호를 넓혀둔 건 물론 고교야구 인기를 프로야구로 연결하려는 의도였습니다. 1986년까지는 아예 대졸 선수도 연고 지역 고교를 졸업했다면 인원 제한 없이 1차 지명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연고 지역 선수를 무한정 영입할 수 있는 건 미국은 물론 고교 야구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일본에도 없는 제도였습니다.이 제도 원산지는 쿠바. 이용일 KBO 초대 사무총장은 대한야구협회(KBA) 부회장이던 1978년 쿠바야구협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우리나라(쿠바)에서는 모든 선수가 고향 팀에서만 뛴다. 그래서 야구가 국민 스포츠가 됐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전 총장은 이 논리로 1981년 정권 실세들을 설득했습니다. ‘반공’의 서슬이 시퍼렇던 그때 군사정권에서 공산주의자 피델 카스트로의 야구 제도를 받아들이게 만들었습니다. 1995년에도 대졸자는 드래프트를 거쳐야 했기에 이승엽이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2.5점만 더 받았어도 지명 절차가 필요했을지 모릅니다. 원래 이승엽은 고교를 졸업하면 한양대에 진학할 예정이었거든요. 무엇보다 아버지 이춘광 씨가 아들의 대학 진학을 바랐습니다. 이승엽은 심지어 고교 졸업 전에 한양대에서 미리 ‘예비 대학생’ 생활도 했습니다. 묘한 분위기가 퍼진 건 여름방학 이후 삼성이 적극적으로 러브콜을 보내면서부터.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낀 한양대는 수능 날 아침 야구부 관계자를 보내 이승엽이 고사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이승엽이 수능에서 37.5점을 받는 바람에 입학할 수 없게 됐습니다. 당시 체육 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하려면 최소 40점은 받아야 했거든요. 대학 진학보다 삼성 입단 쪽으로 마음이 기운 이승엽이 1교시 시험만 보고 고사장에서 당구장으로 도망쳐 생긴 일입니다. (이건 아버지 이춘광 씨 이야기. 이승엽 본인은 “1교시만 실력으로 보고 나머지 시간은 그냥 찍었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한양대에서 반발하자 이승엽은 일반 수험생 자격으로 입학시험을 치르겠다고 밝히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양대에서 희망하던 일이었을 뿐. 당시에는 이런 제도 때문에 이승엽 뿐만아니라 각 프로 구단에서 이런 식으로 대학에 가려던 선수를 빼 오는 일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야구위원회(KBO)는 1996년부터 고졸 선수도 드래프트를 거쳐야 하는 것으로 규정을 바꿉니다. 또 이렇게 지명 받은 선수가 대학 졸업 때까지 구단 보류권을 인정하게 제도를 손질하면서 지명을 받은 선수도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문제는 당시 2차 지명 인원 제한이 없었다는 것. 그 결과 이해 신인 드래프트 때 쌍방울은 28명을 지명했고, 삼성과 현대도 각 25명을 뽑았습니다. 한화와 해태(현 KIA)에서 지명한 숫자도 23명이나 됐습니다. 그렇게 8개 구단에서 180명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2차 지명이 끝났습니다. 최대 10명까지 지명할 수 있는 현재 제도를 적용하면 8개 구단인 당시는 80명이 한계였는데 100명(125%)을 더 뽑았던 겁니다. 결국 KBO는 이듬해 2차 지명 선수를 12명으로 줄였습니다.1995학년도 수능 때 이승엽만 일부러 시험을 망쳤던 건 아닙니다. 이승엽은 한양대에서 막내 생활을 함께하던 경남상고(현 부경고) 3학년 김건덕(1976~2016)에게도 “우리 수능 떨어지자(망치자)”고 제안을 합니다. 그래서 둘은 1번부터 5번까지는 1번, 6번부터 10번까지는 2번, 이런 식으로 답을 적었습니다. 김건덕도 시험을 망치고 아버지께 “지 시험 떨어졌으예”라고 이야기했지만 “니는 실업계(현 전문계)라 수능 커트라인은 의미가 없다”는 답을 듣고 말았습니다. 하릴없이 한양대로 돌아가 연습을 마치고 TV를 보는데 마침 친구가 삼성 입단식을 하는 장면을 보게 된 겁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이승엽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들려오는 한 마디. “친구야, 내는 인문계다.”김건덕은 청소년 대표팀 에이스를 지낸 유망주 중 유망주였지만 그런 투수들에게 으레 생기는 일처럼 어깨 부상이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는 대학 졸업반이던 1998년 신인 드래프트 대상자였지만 결국 이름을 불러주는 팀을 만나지 못해 유니폼을 벗어야 했습니다. 이후 아마추어 야구에서 지도자로 생활하다 지난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오늘도 누군가는 제일 먼저 이름이 불리고, 누군가는 100번째까지 기다려도 끝내 자기 이름을 듣지 못할 터. 그래도 열아홉, 스물셋은 아직 성패를 논하기에 너무 이른 나이입니다. 야구에서 실패했다고 인생에서 실패하는 것도 아닙니다. 국민 타자 이승엽도 시작은 실패한 투수였습니다. ‘진정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믿었기에 우리는 이승엽이 실패한 투수였다는 사실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마침표를 예쁘게 찍는 자만이 처음을 남깁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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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 투 더 동아/9월 10일] 문제적 인물, 마오쩌둥 사망

    “만약 1956년(대약진 운동 전)에 서거했다면 그는 틀림없이 중국 인민의 위대한 지도자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가 1966년(문화대혁명 전)에만 서거했어도 뛰어난 공이 조금 빛이 바랠지언정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1976년에 서거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 중국 최고지도자는 1981년 이렇게 말했다. 그가 이렇게 평가한 사람은 바로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 중국 초대 주석이었다. 41년 전 오늘자(9월 10일) 동아일보는 바로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난 소식을 전했다. 역사는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영웅인 동시에 1950년대 대약진 운동으로 수천만 명을 굶어죽게 만들고, 문화대혁명으로 중국 문화를 퇴보시킨 독재자였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덩샤오핑 시대에 등장했던 표현이 바로 ‘공7 과3(功七過三·공이 7할, 잘못이 3할)’이다.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가 내리막길을 걷게 된 배경 중 하나가 6·25전쟁이다. 전쟁 중반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북상하자 마오는 “순망치한(脣亡齒寒·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을 외치며 “중국 본토에서 미군과 싸우는 것보다 한반도에서 싸우는 게 낫다”면서 ‘인민지원군’ 60만 명을 파병했다. 마오쩌둥이 ‘인민해방군’이라는 공식 명칭 대신 파병 부대에 이런 이름을 붙인 건 중국 정부가 유엔과 직접 맞서는 모양새를 피하려는 의도였다. 물론 결과는 실패였다. 안세영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6·25전쟁) 참전 후유증을 가장 오래 겪은 나라는 아마 중국일 것”이라며 “국제사회에서 침략자라는 낙인을 피하지 못했고 중국은 죽(竹)의 장막에 갇히다 보니 극단적인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같은 과오를 범했다”고 평가했다. 이 때문에 중국은 제대로 국가를 발전시킬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한국으로서는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경제사학자 중에서는 중국이 문화대혁명(1966~76년)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면 당시 한국이 경제 발전을 이루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분석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마오쩌둥은 한국인들에게도 6·25전쟁 당시 북진 통일을 실패하게 만든 원흉인 동시에 경제 발전을 도운 ‘도우미’였던 셈이다. 6·25전쟁은 마오쩌둥 가족에게도 불행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 참전했던 큰아들 마오안잉(毛岸英·당시 28)이 1950년 11월 25일 평북 삭주군에서 미군기 폭격을 받아 숨졌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도 평북 회창군에 있는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부 열사릉원에 묻혀 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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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규인의 잡학사전]‘카탈루냐’는 왜 그렇게 독립을 원할까

    카탈루냐에 또 한번 독립운동이 불붙었습니다. 스페인 카탈루냐 자치 지방(comunidad aut¤noma) 의회는 6일(현지시간) 11시간에 걸친 논쟁 끝에 주민투표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카탈루냐 사람들은 10월 1일 분리독립에 대한 찬반을 묻는 주민 투표를 진행할 수 있게 됐죠. 스페인 헌법재판소는 2014년 분리독립 투표 때 이미 ‘카탈루냐 독립은 위헌’이라고 선언한 상태. 이번에 찬성표가 더 많이 나온다고 해도 실제로 독립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그래도 찬성표가 더 많이 나오면 정치적인 명분을 얻을 수 있고, 이를 토대로 카탈루냐 지방에서 중앙 정부에 자치권을 더 많이 요구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런데 도대체 카탈루냐주 지방은 왜 이렇게 스페인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할까요? 스페인 북동부에 있는 카탈루냐 지방은 아라곤 왕국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반면 수도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한 중남부는 카스티야 왕국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469년 아라곤 왕 페르난도와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이 결혼하면서 현재 스페인의 토대를 마련하게 됩니다.이 결혼동맹은 ‘왕가의 사정’이었을 뿐 민초들은 이후에도 자치권을 인정받은 상태로 서로 다른 정체성을 지닌 채 살았습니다. 문제는 줄을 잘못 섰다는 것. 스페인에서는 1701~14년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났는데 카탈루냐는 왕이 되지 못한 쪽 편을 들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해 왕이 된 펠리페 5세는 1716년 카탈루냐 지방을 주(州)로 강등시켰죠. 그렇게 스페인 일원으로 자리 잡나 싶던 카탈루냐 지방에서 다시 분리주의 움직임이 일게 된 건 민족주의 바람이 휘몰아친 20세기 초반이었습니다. 그러다 1938년부터 1975년까지 독재 권력을 휘두른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이 지역 문화를 탄압하면서 독립 열망이 더욱 커지게 됐죠. 당시 카탈루냐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자연스럽게 모국어(카탈루냐어)로 대화를 주고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헌병대에 끌려가기까지 했습니다. 프랑코가 세상을 떠난 뒤 카탈루냐는 다시 자치권을 얻었지만 한번 떠난 마음이 쉽게 돌아올 리가 있나요? 마음이 떠났으면 이제 돈 문제가 따라올 차례. 카탈루냐는 지난해 지역총생산(GRP) 2236억2900만 유로(약 301조6286억 원)를 기록했습니다. 이는 스페인 국내총생산(GDP) 1조1138억5100만 유로 중 5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 스페인을 구성하는 17개 자치 지방 중 1위에 해당합니다. 당연히 세금도 그만큼 많이 내겠죠. 카탈루냐 사람들은 자기들이 낸 세금을 중앙 정부에서 카스티야 지방이나 상대적으로 빈곤한 남부 지방에만 쓰고 있다며 불만이 많습니다.유럽에서는 카탈루냐 이외에도 분리 독립을 꿈꾸는 지역이 적지 않습니다. 스페인 안에서는 카탈루냐뿐 아니라 바스크도 독립을 원하고 있습니다. 바스크 사람들 역시 프랑크 독재 정권에 시달렸고, 무장 단체 ETA(바스크 조국과 자유)가 최근까지도 계속 독립 투쟁을 벌였습니다.스코틀랜드 역시 카탈루냐 못지 않게 독립 열망이 큰 곳으로 유명합니다. 소설 ‘플랜더스의 개’로 친숙한 플라망(네덜란드어로 플란데런) 지방도 벨기에로부터 독립을 원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남부 왈롱 지방과 서로 떨어지고 싶어하는 겁니다. 벨기에는 네덜란드어를 쓰는 플라망 지방과 프랑스어를 쓰는 왈롱 지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플라망 지방을 분리 독립을, 왈롱 지방은 프랑스에서 합병하기를 희망하고 있죠.독일 바이에른 주는 텔레비전에서 독일 국가보다 바이에른 주가(州歌)를 먼저 연주할 정도로 지역색이 강합니다. 여기도 문제는 역시 돈. 당장 독일 연방 탈퇴 선언을 할 확률은 희박하지만 매년 자기들이 낸 세금 중 40억 유로(약 5조3990억 원) 정도를 가난한 지역에 지원하는 데 불만은 많은 상태입니다. 바이에른 주 정부는 독일(.de)과 별도로 인터넷 도메인(.bayern)도 마련한 상태입니다.이탈리아 역시 상대적으로 더 잘사는 북부가 불만입니다. 롬바르디아 주는 자기들만 별도 독립하는 게 아니라 아예 이탈리아 북부 연맹을 따로 만들자고 제안할 정도입니다. 롬바르디아주 동쪽에 있는 있는 베네토 주에서도 비슷한 목소리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베테노 주는 베네치아가 있는 곳입니다. 볼차노현도 이탈리아 북부에 자리 잡고 있지만 사정은 조금 다릅니다. 독일어 구사자가 75% 이상인 이 지역은 원래 오스트리아 영토였고, 다시 오스트리아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지중해 있는 섬 코르시카는 지리적으로 프랑스보다 이탈리아에 더 가깝고, 1767년까지는 제노바 공화국 영토였습니다. 그때부터 이 지역 사람들이 하도 반란을 많이 일으켜 제노바에서 프랑스에 넘기는(팔아버린) 바람에 프랑스령이 됐습니다. 이후 나폴레옹을 배출하면서 정서적으로 프랑스의 일원이 됐지만, 다시금 독립을 주장하는 이들이 고개를 들고 있죠.2008년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코소보는 현재 100개가 넘는 나라에서 독립국으로 승인한 사실상 독립 국가입니다. 단, 세르비아는 물론이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인 러시아와 중국이 독립을 인정하지 않아 아직 유엔에는 가입하지 못한 상태입니다.몰도바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자리 잡은 트란스니스트리아는 1991년 옛 소련 붕괴 때 몰도바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그 후 대통령을 뽑는 등 정부를 꾸려 사실상 독립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 지역 사람들은 몰도바에서 독립하면 러시아에서 합병해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러시아에서도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몰도바는 공식적으로 이 나라를 자국 안에 있는 자치 국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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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규인의 잡학사전]마광수 없었으면 윤동주, 기형도 없었다

    정말입니다. 마광수 교수(1951~2017)가 없었다면 우리는 여태 윤동주 시인(1917~45)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할지 모릅니다. 기형도 시인이 세상 빛을 보게 된 것도 마 교수 덕분입니다. 이제 윤 시인은 ‘국민 시인’이라고 불러도 모자람이 없는 인물. 하지만 1980년대 초반까지도 윤 시인은 이 정도 평가를 받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정부에서 1990년 광복절이 되어서야 윤 시인에게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는 게 그 방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윤 시인이 명성을 얻게 된 건 마 교수가 1983년 쓴 박사 논문 ‘윤동주 연구: 그의 시에 나타난 상징적 표현을 중심으로’ 덕분이었죠. 마 교수는 이 논문에서 국문학 역사상 처음으로 윤 시인의 모든 시를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쓴 시에 ‘부끄러움’이라는 정서에 깔려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대비 문제집에서 윤 시인 시를 해설한 내용은 거의 이 논문에서 따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마 교수는 이 논문에 “그의 시에 나타나는 자학적이며 자기부정적인 이미지의 대표적 보기를 들면 이 점이 분명해진다. 앞서 말했듯 ‘부끄러움’이란 시어가 나오는 작품이 10편이나 되는데, 이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시인들이 표피적 정서나 표피적 이데올로기(또는 사상)만을 좇는 경향과 비교해 보면 가히 파격적이리만큼 독특한 문학세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썼습니다.마 교수는 또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이상하게도 ‘투사’보다는 ‘유약하지만 솔직한 사람’을 한 시대의 상징적 희생물로 만드는 일이 많다. 윤동주는 바로 그러한 역사의 희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일제 말 암흑기, 우리 문학의 공백을 밤하늘의 별빛처럼 찬연히 채워주었다.”마 교수는 소설이나 에세이를 쓰는 산문 작가로 유명하지만 원래는 청록파 시인 박두진(1916~98)의 추천으로 등단한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1983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된 뒤 이듬해 동아일보 신춘문예 예심 심사위원을 지냈습니다. 응모작 3000편 중 15편 정도를 골라 본심에 올리는 게 그의 임무. 그해(1985년) 최종 당선작으로 뽑힌 게 바로 기 시인이 쓴 ‘안개’였습니다.그러나 마 교수는 이 시를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예심을 보던 중 어떤 응모작이 전혀 마음에 안 들어서 낙선작으로 던져 버리고 난 직후에 무슨 텔레파시 같은 육감이 느껴져서 던져버린 작품을 다시 집어 들고 보니 작자가 (내가 지도 교수로 있던 연세문학회 회원) 기형도 군이었다. 그래서 완전히 인맥으로 그의 시를 특별히 뽑은 것이다. 사실 공정한 심사위원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행위였다”고 말했습니다.마 교수는 끝까지 기 시인을 크게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2009년 여성동아를 통해 가수 조영남 씨와 대담을 하면서 “기형도는 난해해. ‘물속의 사막’, 이게 무슨 소리야.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는 시구가 있는 시 제목이 ‘빈집’이야. 무슨 연관이 있어?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알고나 기형도를 좋아하는 걸까. 어려운 글은 무조건 못쓴 글”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시구로 유명한 안도현 시인(52·우석대 교수)이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라는 시로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될 때도 마 교수가 예심 심사위원이었죠. 마 교수와 동아일보의 인연은 한양대 강사 시절이던 1977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는 그해 4월 11일자 동아일보에 ’세상을 그르치는 신념의 공해‘라는 칼럼을 실었습니다. 마 교수는 이 글에서 ”단발령을 내렸을 때 땅을 치며 통곡하던 유생(儒生)들의 애절한 신념, 그 편협한 선비주의적 신념의 잔재가 아직도 우리들에게는 미덕으로 남아 있다“면서 ”이 세상의 악과 불행은 ’이상의 결핍‘ 때문에 비롯되지 않는다. 되레 모든 악과 불행은 오로지 ’잘못된 이상‘, ’잘못된 신념‘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유약하지만 솔직한 사람‘이었던 마 교수가 일생을 떠받친 신념은 아마도 ”위선적인 성(性)문화를 바로 잡자“는 것이었을 터. 하지만 여전히 ’선비주의적 신념‘이 지배하던 시대는 쉽게 마 교수의 신념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는 희생양이 되어야 했습니다. 소설 ’즐거운 사라‘를 쓴 죄로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 그는 최근까지도 ”사회적으로 학살당했다“며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마 교수는 우리에게 윤동주와 기형도를 남긴 채 자기 시집 제목 ’모든 것은 슬프게 간다‘처럼 떠났습니다.”현실적, 현실적으로 되어 나도 화장을 하고 싶다/분(粉)으로 덕지덕지 얼굴을 가리고 싶다/귀걸이, 목걸이, 팔찌라도 하여/내 몸을 주렁주렁 감싸 안고 싶다/현실적으로/진짜 현실적으로“ - 마 교수 시 ’나는 야한 여자다 좋다‘ 중에서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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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 투 더 동아/9월 6일]전두환 정권 ‘학과별 최소졸업정원제’ 도입

    오늘(6일)은 전국 예비 대입 수험생들이 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마지막 전국연합합력평가(모의고사)를 치르는 날. 이제는 대학 정원이 대입 희망자 숫자를 추월한 시대가 됐지만 그래도 저마다 희망 대학이 다르기 때문에 노력을 게을리 할 수는 없다. 이때 ‘대학 정원’은 입학 정원을 가리키는 말. 하지만 1980년대 초반에는 ‘대학 정원= 졸업 정원’인 시절도 있었다. 전두환 정권이 만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는 1980년 8월 30일 대학졸업제도를 마련했다. 문교부(현 교육부)는 그해 9월 5일 ‘학과별 최소졸업정원제’ 내용을 담은 교육개혁 시안을 발표했다. 졸업 정원보다 30% 가량 신입생을 더 뽑은 다음 학기가 끝날 때마다 일정 비율을 제적해 졸업 때 정원을 맞추는 방식이었다. 사실 ‘입학 문은 넓게, 졸업 문을 좁게’라는 방침은 선진국에서 대부분 채택하고 있는 대학 학사 방식이었다. 문제는 일률적으로 30%를 중도에 탈락시켜야 한다는 점. 학점도 무조건 상대평가 방식으로 매겨야 했다. 학생들은 서로 캠퍼스의 낭만을 나누는 친구가 아니라 네가 살아남으면 내가 죽어야 하는 경쟁자가 됐다. 나중에는 이 제도 때문에 중도 탈락할 것을 우려한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까지 있었다.결국 문교부는 1985년부터 초과 모집 비율을 대학이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도록 제도를 손질하면서 졸업정원제를 사실상 폐지했다. 1988년부터는 아예 입학정원제도 돌아갔다. 이와 함께 졸업정원제로 탈락한 학생이 다시 재입학할 수 있는 길도 열어주었다. 당초 정부 예상과 달리 이 제도가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대학에 면학 분위기를 조성해 시위를 막아보려는 의도 역시 군사정권에서 이 제도를 도입한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대학생이 늘어나면서 운동권 인재 풀(pool)이 넓어져 오히려 학생 운동이 사회 곳곳까지 침투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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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이터 비키니]북한 수출입 1위는 중국…2위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3일(현지 시간) 트위터에 “미국은 북한과 비즈니스를 하는 어떤 나라와도 무역을 끊을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트럼프 대통령은 이에 앞서 “중국이 북한에 더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이를 두고 미국이 중국 제재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사실 중국은 북한이 비즈니스를 하는 유일한 ‘주요 파트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5일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만든 웹사이트 ‘경제복합성 관측소(OEC·The Observatory of Economic Complexity)’에 따르면 2015년 기준으로 북한 전체 수입량 중 85.0%가 중국에서 오고, 전체 수출량 중 83.0%가 중국으로 나갑니다.중국 다음으로 북한과 교역을 많이 하는 나라는 인도(수입 비중 3.1%, 수출 비중 3.5%)였습니다. 특이한 건 서아프리카에 있는 나라 부르키나파소에서 북한 전체 수출액 중 1.2%(약 3280만 달러)를 수입한다는 사실인데요. 재미있는 건 부르키나파소는 ‘정직한 사람들의 나라’라는 뜻이라네요.품목별로 북한이 제일 많이 수입하는 건 석유(Refined Petroleum)로 2015년 한 해 동안 1억8600만 달러 어치를 사들였습니다. 제일 많이 수출하는 건 9억5100만 달러에 해당하는 석탄(Coal Briquettes)이었습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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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규인의 잡학사전] 北核, 히로시마 원폭 ○배 위력…어떻게 계산?

    ‘핵실험’을 하면 왜 ‘지진’이 날까요?정답은 ‘지하에서 폭탄을 터뜨려서’입니다. 1945년 처음 핵무기를 만든 뒤 70년 넘게 흐르는 동안 전 세계에서 이 무기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시험한 건 2000번 정도 됩니다. 이 중 4분의 3 정도가 지하 핵실험이었습니다.핵무기도 기본적으로 ‘폭탄’입니다. 폭탄은 폭발할 때 바깥으로 튀어나가려는 에너지로 적에게 피해를 입히는 무기. 땅속에서 이 에너지가 뻗어나가면서 땅이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핵실험을 하면 순간적으로 ‘인공 지진’이 일어나고 다른 지진과 마찬가지로 규모를 측정할 수 있게 되죠. 북한이 3일 강행한 6차 핵실험 규모는 기상청 발표 기준으로 5.7이었습니다.●리히터(릭터) 규모란 무엇인가 그러면 여기서 규모는 뭘까요? 학창시절 과학 시간에 공부를 열심히 하신 분이라면 이 순간 ‘리히터 규모’라는 낱말을 떠올리실 겁니다. 리히터 규모는 찰스 릭터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1900~85·아래 사진)가 1935년 처음 고안했습니다. 조상이 독일계라 예전에는 ‘Richter’라는 성(姓)을 ‘리히터’라고 적었죠. 그래서 많은 분에게 여전히 리히터 규모라는 표현이 익숙하지만 릭터 규모라는 말도 씁니다.리히터 규모는 진앙(震央)에서 100㎞ 떨어진 지점에서 측정합니다. 이때 지진계가 진폭 1mm인 파형을 그리면 리히터 규모 3입니다. 딱 100㎞ 떨어진 지점에 반드시 지진계가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기에 여러 곳에서 자료를 측정해 보정 과정을 거칩니다. 이런 이유로 발표 기관마다 규모가 다르거나 똑같은 지진에 대해 나중에 규모가 바뀌기도 합니다. 또 파형과 거리에 따라 다른 공식을 쓰는 것도 발표 기관마다 리히터 규모를 다르게 발표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그런데 왜 1mm일 때 규모가 1이 아니라 3일까요? 그건 지진계가 1000분의 1mm인 미크론을 단위로 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1mm는 1000미크론이 되겠죠? 눈치가 빠른 분은 이미 아시겠지만 리히터 규모는 상용로그값입니다. 수학 시간에 배운 것처럼 상용로그는 밑을 10으로 하는 로그값입니다. 10^3=1000이기 때문에 1mm일 때 규모가 3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리히터 규모가 1이 커지면 진폭은 얼마나 커질까요? 이걸 알아보려면 상용로그값이 1이 나오는 숫자를 찾아야겠죠? 그럼 10이 답이니까 10배가 정답입니다. 2 차이가 나면? 네, 이번에는 100배가 정답입니다. 수학 시간에 로그 같을 걸 배워서 뭐 하나 싶어도 다 쓸 데가 있던 겁니다.이렇게 지진계가 흔들리면 에너지가 나오겠죠? 이 에너지는 진폭 차이의 1.5제곱만큼 커집니다. 그래서 리히터 규모가 1 차이가 나면 언론에서는 보통 32배 차이가 난다고 표현합니다. 10의 1.5승이 31.6227766이거든요. 2 차이가 나면? 1000배 차이입니다. ((10^1.5)^2)=1000이니까요. 물론 수학 문제를 푸실 게 아니면 이걸 기억하고 계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그렇다고 이해하고 넘어가시면 그만입니다.●히로시마 몇 배는 어떻게 계산할까이렇게 공식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핵실험 파괴력을 다른 폭탄하고 비교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주로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첫 번째 원자폭탄 ‘리틀보이’와 비교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예를 들어 이번 북한 핵실험은 히로시마 원자폭탄 3~4배라는 평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건 어떻게 하는 걸까요?유용규 기상청 기상화산감시과장은 “‘규모 = 0.84 × TNT양(kt) 로그값 + 4.28’로 계산할 수 있다”며 “이를 역산하면 규모 5.7은 TNT 50kt에 해당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kt는 ‘킬로톤’이라고 읽죠. 1000t이 1kt입니다.히로시마에 떨어진 리틀보이는 보통 TNT 15kt로 환산합니다. 15×3=45, 15×4=60이니까 50kt인 이번 북한 핵실험 파괴력이 히로시마 원자폭탄 3~4배라는 평가가 자연스레 따라오는 겁니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은 이번 지진 규모를 6.3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기상청에서 얻은 공식에 넣어보면 TNT 290kt도 규모 6.3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번 북한 핵 실험은 리틀보이 보다 20배 가까이 파괴력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어느 쪽이 맞는지 알 수 없지만 북한이 너무 무모한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만큼은 틀림없습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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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규인의 잡학사전]핵무기, ICBM, 사드…어떤 사이?

    북핵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ICBM’이라는 낱말이 등장합니다. 다들 잘 아시는 것처럼 ICBM은 ‘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에서 머리글자를 딴 표현입니다. 한국 언론에서는 흔히 이를 ‘대륙간탄도미사일’이라고 번역하죠. 그러니까 ICBM 자체에는 어디에도 핵무기라는 뜻이 들어있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도 ‘ICBM = 핵무기’ 공식이 성립하는 이유는 뭘까요?일단 낱말부터 차근차근 풀어보겠습니다. ‘대륙간’이라는 말은 ‘대륙 사이’라는 뜻이겠죠. 대륙 사이는 먼 거리를 뜻할 겁니다. ICBM은 사거리 5500㎞을 넘겨야 합니다. 미사일은 뭔지 아실 테니 이제 ‘탄도’라는 낱말이 남았습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탄도(彈道)는 ‘발사된 탄알이나 미사일이 목표에 이르기까지 그리는 선’이라는 뜻이죠. 이것만으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개념이 헷갈릴 때는 반대말을 알아보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탄도 미사일 반대말로는 ‘순항 미사일’을 꼽을 수 있습니다. 순항 미사일은 영어를 그대로 읽어 ‘크루즈 미사일(Cruise Missile)’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비행기처럼 제트 엔진과 날개를 가지고 하늘로 뜨는 힘, 즉 양력(揚力)을 이용해 목표까지 날아갑니다. 비행 중에 고도나 속도를 바꾸지 않고 순항(順航)한다 해서 순항 미사일입니다. 순항 미사일이 수평에 가까운 개념이라면 탄토 미사일은 수직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ICBM은 수직으로 발사했다가 30도로 기운 채 목표를 향해 날아갑니다. 인공위성 등을 쏘아 올리는 우주 로켓이 계속 하늘 높이 올라가는 데 반해 ICBM은 일정 고도에 도달하면 기울기 때문에 비행 궤적을 보고 발사체가 우주 로켓인지 ICBM인지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위 그래픽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ICBM은 대기권 바깥으로 나갔다가 들어옵니다. 이 대기권 재돌입이 바로 ICBM 핵심 기술입니다. 북한은 이미 미사일을 멀리 보내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ICBM 개발에 성공했느냐 아니냐는 논란은 이 대기권 재돌입 기술을 확보했느냐 그렇지 않으냐를 따지는 거죠.이렇게 높이 올라갔다가 떨어질 때 목표 지점에 정확히 도달하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미사일 정확도를 측정할 때는 CEP(Circular Error Probable·원형공산오차)라는 개념을 씁니다. CEP는 미사일 50% 착탄 반경을 가지고 측정합니다. 예를 들어 CEP가 100m라면 발사한 미사일 50%는 반지름 100m 안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최신 ICBM이 보통 기준으로 삼는 게 CEP 100m입니다.이 정도 정확도를 선보이려면 발사지점과 목표지점을 m 단위까지 정확하게 입력해야 하는 건 물론, 목표 지점 상공의 공기 밀도(온도에 따라 달라집니다)를 예상해 초속 3㎝ 이상 차이가 나지 않게 ICBM 속도를 측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이건 ICBM이 아니더라도 어렵고 또 어려운 일입니다. 아예 ‘탄도학’이라는 학문이 따로 있을 정도. 표준국어대사전은 이 학문을 “발사한 탄환이 날아가는 방식을 연구하는 학문. 중력, 공기 저항, 탄환의 회전, 풍력, 지구의 자전 따위를 고려하여야 하기 때문에 방대한 수치 계산이 필요하며 초기 컴퓨터 개발의 요인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죠.이렇게 멀리 또 정확하게 날아가는 미사일을 만들려면 돈이 아주 많이 들겠죠? 그래서 핵탄두를 쓸 정도가 아니면 일반적으로 ICBM을 만들지 않습니다. 세계에서 국방비를 제일 많이 쓰는 미국조차 2006년에야 비핵탄두 ICBM 개발을 시작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ICBM = 핵무기’가 되는 겁니다.핵무기 자체는 세계 2차 대전 때처럼 전략폭격기에서 쏠 수도 있고, 순항미사일에 탑재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대포로 쏘는 것도 가능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만들면 상대방이 요격하기가 너무 쉽다는 겁니다. 이 역시 ‘핵무기 = ICBM’인 이유입니다.핵탄두가 대기권으로 재돌입할 때 속도는 마하 25~30 정도(시속 30만600~36만720㎞)입니다. 대기권 안으로 들어온 뒤에도 마하 20 정도로 낙하합니다. 이에 비하면 ‘거북이’라고 할 수 있는 미 공군 SR71 블랙버드(최고 속도 마하 3.3)도 실전에서 한 번도 격추당한 적이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입니다. 게다가 상대방 방어용 미사일 전파를 교란하는 채프까지 뿌리기 때문에 대기권에 재돌입한 ICBM을 요격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그래서 그 전까지는 ICBM이 대기권에 도달하기 전에 요격하는 게 일반적인 ICBM 대응책이었습니다. 이 개념을 바꾼 게 바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죠. THAAD에서 맨 처음 T는 ‘Terminal’ 즉 맨 끝이라는 뜻입니다. 탄두가 재진입해 낙하하고 있는 최후 상황에서 요격을 맡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대부분 알고 계시겠지만 혹시 모르셨다면, 핵과 ICBM, 그리고 사드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제 아시겠죠?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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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 투 더 동아/9월 4일]태권도,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 막전막후

    “대표팀은 육체를 가진 국가다. 대표팀이 취해야 할 스타일을 논의할 때 사람들은 종종 국가가 지향해야 할 자세를 논의하고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 기자 출신 칼럼리스트 사이먼 쿠퍼는 이렇게 썼다. 그는 축구 칼럼리스트지만 비단 축구만 그런 건 아니다. ‘극일(克日·일본을 이김) 정신’이 없었다면 한국 스포츠가 단기간에 이렇게 성장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일본이 하는 건 우리도 다해야 했다. 일본은 1964년 도쿄(東京) 올림픽 때 ‘맛배기’로 유도를 정식종목에 포함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유도는 1972년 뮌헨 대회 때부터 한번도 올림픽 공식종목에서 빠지지 않고 있다. 한국도 88서울올림픽 개최권을 따내자 똑같은 길을 걷기로 작정했다. 서울 대회 때 태권도를 시범종목으로 포함시키는 데 성공했고, 1994년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를 통해 올림픽 공식종목으로 만들었다. ‘만들었다’는 낱말을 쓴 건 IOC에서 태권도를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한 게 김운용 당시 IOC 부위원장 겸 세계태권도연맹(WT) 총재 개인 능력으로 이룬 성과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번 성과가 전체 태권도인들의 단결된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김 총재의 IOC 내 정치적 역량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에서 볼 때 국내외 태권도 관계자들의 결집이 어떤 것보다 우선해서 이루어져야 할 과제”라고 평가했다.당시 IOC에서 올림픽 정식종목을 채택할 때는 서로 엇비슷한 종목 중 하나만 고르는 게 원칙이었다. 태권도가 올림픽 종식 종목이 되면서 일본에서 정식종목으로 밀던 가라테(空手道)가 밀렸다. 태권도 정식종목 채택이 극일인 이유다. 가라테는 ‘어젠다 2020’에 따라 개최국에서 정식종목 추가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된 2020년 도쿄 대회 때가 되어서야 정식종목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대한태권도협회에서 처음 올림픽 정식 종목 진입을 추진할 때는 세부종목을 겨루기(대전)와 품새로 나눌 방침이었다. 그러나 품새는 판정 시비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한 데다 ‘재미없다’는 의견이 우세했기에 겨루기에 다걸기(올인)하기로 방침을 바꿨다. 겨루기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IOC는 경기 중 선수가 다쳐 병원으로 실려 가는 일이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머리 보호대와 가슴 보호구를 착용하고 경기를 하도록 규칙을 손질하고 나서야 태권도는 올림픽 정식종목이 될 수 있었다. 문제는 보호 장비 도입으로 인해 수비형 전술이 대세로 자리매김하면서 결국 겨루기 방식도 재미없다는 평가가 따라다니게 됐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태권도는 올림픽 퇴출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2013년 올림픽 핵심종목(Core Sports)에 이름을 올리면서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 한 계속 올림픽 종목으로 남게 됐다. WT는 이 과정에서 링(경기장)을 좁혀 공격적인 경기 진행을 유도하고, 컬러도복을 도입하는 등 태권도를 관중 친화적인 스포츠로 탈바꿈시키려 공을 들였다. 한국은 올림픽 태권도에서 금메달 12개, 은메달 2개, 동메달 5개로를 ‘종주국 어드밴티지’를 확실히 누렸다. 한국 태권도 팬들 관점에서 안타까운 건 갈수록 이점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지난해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때는 출전 남자 선수 3명이 모두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대신 오혜리(29) 김소희(23·49㎏급)등 여자 선수 두 명이 금메달을 따면서 종주국 자존심은 지켰다.오혜리는 지난해 올림픽을 따낸 뒤 “태권도가 재미없다는 말을 듣는 건 다 안다. 그런 말이 모두 옛말이 될 수 있도록 흥미진진한 경기를 펼치는 데 저부터 앞장서겠다”며 “여러분이 태권도를 많이 아껴주실수록 태권도가 여러분이 더 좋아하는 경기 내용으로 변할 수 있다. 많은 관심과 격려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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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규인의 잡학사전] 까만 닭이 오골계 아니라고?

    이 두 마리 닭 중에서 어느 쪽이 오골계일까요?정답은 ‘오른쪽’입니다. 많은 분들이 왼쪽을 고르셨을 거고, 오른쪽은 ‘과연 저게 닭은 맞나’ 궁금하셨겠지만 정말 오른쪽이 오골계입니다. 그럼 왼쪽은 뭐냐고요? ‘골’이 빠진 오계입니다. ‘까마귀 오(烏), 뼈 골(骨), 닭 계(鷄)’를 쓰는 오골계는 문자 그대로 뼈가 검은 닭이라는 뜻입니다. 뼈는 물론 피부와 내장도 검은색이지만 깃털까지 반드시 검은 건 아닙니다. 맨 처음 사진이나 아래 암탉처럼 깃털이 흰 오골계도 있습니다.이 오골계는 영어로 ‘silk fowl’이라고 부릅니다. silk는 잘 아시는 것처럼 ‘비단(실크)’이라는 뜻이고 fowl은 집에서 기르는 새를 뜻하는 ‘가금(家禽)’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깃털이 비단 같다는 뜻만 들어 있을 뿐 무슨 색인지는 들어있지 않은 겁니다. 굳이 따지자면 ‘실크색’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검은색보다는 베이지색처럼 밝은 색을 먼저 떠올리지 않으셨나요?‘오골계가 천연기념물인데 무슨 소리냐’고 묻고 싶은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오골계는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지만 1981년 전염병으로 몰사하면서 천연기념물에서 제외됐습니다. 이 닭은 흔히 ‘실크 오골계’라고 불렀습니다.‘내가 올 여름에도 오골계라고 까만 닭을 먹었는데 무슨 소리냐?’고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네, 잘못 들으신 겁니다. 그 닭이 오계입니다. 오계 중에서 충남 논산시 연산면 화악2길 38-5에서 키우는 닭은 천연기념물 제265호로 지정받은 상태입니다. 정식 명칭은 ‘연산오계’로 ‘골’은 어디에도 없습니다.이 두 닭은 깃털 색만 다른 게 아니라 품종 자체가 다릅니다. 대표적으로 오골계는 발가락이 다섯 개지만 오계는 네 개입니다. 사진을 보셨으니 볏 모양도 다르다는 걸 확인하셨을 겁니다. 오계는 적어도 조선 선조 때부터 한국에서 길렀고, 오골계는 일제강점기 때 한반도에 들어왔습니다.이런 이유로 대를 이어 연산오계를 키우고 있는 가문에서는 “‘동의보감’에도 오계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꼭 오골계가 아니라 오계라고 불러달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 까만 닭은 오골계가 아니라 오계입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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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 투 더 동아/9월 1일]소련군, 대한항공 여객기 미사일 격추

    1983년 9월 1일 미국 뉴욕을 출발해 앵커리지를 거쳐 서울을 향해 날아오던 대한항공 007편이 옛 소련 영토인 사할린 근처에서 사라졌다. 이미 당시 언론에서 조심스레 예측한 것처럼 이 B747 여객기는 소련 방공군 수호이(Su)15 요격기가 쏜 미사일을 맞고 추락했다. 그 결과 이 비행기에 타고 있던 269명(승객 246명, 승무원 23명)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은 항공 사고로 남아 있다.소련군이 미사일을 발사한 이유는 이 비행기가 자국 영토를 침범했기 때문이었다. 냉전이 한창이던 당시에는 미군 정찰기가 민항기로 위장해 소련 영공을 침범하는 일이 흔했다. 이 사할린 인근 상공을 아예 ‘공중 전쟁터’라 부를 정도였다. 이 때문에 당시 소련 정보부는 각 방공 부대에 미군 정찰기가 영공을 넘어 오면 격추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사실 이날도 이 지역을 정찰하던 미군 RC135 정찰기를 소련군 레이더가 포착한 상태였다. RC135도 B747처럼 보잉사에서 만든 B707을 개조한 비행기였다. RC135에 이어 곧바로 대한항공기가 레이더에 잡혔기 때문에 소련군에서 착각할 수 있던 상황이었다.소련에서 처음부터 곧바로 미사일을 쏜 건 아니었다. 소련군은 처음에 요격기 날개에 달린 경고등을 깜빡여 유도 착륙을 시도했지만 대한항공기에서 반응이 없었다. 이어 조명탄을 네 차례 발사했지만 마찬가지로 대한항공기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날 요격기를 조종한 켄나디 오시포비치 소령은 나중에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내가 조명탄이 아니라 철갑탄을 쐈다는 주장도 있는데 철갑탄을 쏠 때도 불꽃이 일기 때문에 밤에 식별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소련군에서 미사일을 발사하기 결정한 제일 큰 이유는 대한항공기가 고도를 높이면서 속력을 줄였기 때문이다. 소련군에서는 이를 공격 행위라고 판단했다. 전투기가 느린 속도로 여객기를 따라 가다가는 실속(失速)해 추락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었다. 전투기 비행 특성을 잘 아는 군 조종사가 대한항공 비행기를 몰고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 정말 민항기인 줄 몰랐을까 이날 이후 오시포비치 소령에게는 똑같은 질문이 따라다닌다. “격추한 비행기에 승객이 타고 있다는 걸 알았는가.” 대답도 똑같다. “몰랐다.” 오시포비치 소령은 “유도 착륙을 시도하려고 대한항공기 300m 옆까지 날아갔지만 창문 사이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겉모습은 여객기였지만 여객기를 개조한 정찰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문제는 당시가 어떻게든 상대를 ‘악마’로 만들어야 하는 냉전시대였다는 것. 1991년 3월 24일 동아일보 이낙연 도쿄(東京) 특파원(현 국무총리)은 오시포비치 소령이 일본 ‘TV 아사히’에 출연해 “당시 대한항공기는 항공등과 충돌방지등을 켜고 있었으며 이런 등을 켜는 것은 민항기”라며 “그 당시 자신은 대한항공기가 틀림없이 민간용 수송기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고 전했다.오시포비치 소령이 이 보도에 대해 해명한 건 6년 뒤였다. 1997년 9월 1일 동아일보 반병희 모스크바 특파원과 전화 인터뷰에서 “물론 충돌방지등이 켜져 있는 것을 봤다. 그러나 충돌방지등은 민항기뿐 아니라 수송기를 비롯해 다른 군용기도 밝힌다. 따라서 전투기가 아닌 것은 확실했지만 그렇다고 민항기였음을 알았다는 것은 아니다”며 “지상 귀환 후 결과를 조사하던 방공군 사령부에서 통보해줘 (민항기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당시 대한항공기가 꼬리날개에 있던 조명등을 켜지 않은 것도 오시포비치 소령을 착각하게 만들었다. 이 등을 켜 놓았다면 로고를 식별해 민항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겠지만 당시 대한항공기는 이 등을 끄고 운항 중이었다. 대한항공에서 ‘공중에서는 충돌 위험이 없다’는 이유로 이 등을 켜지 말라고 조종사들에게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두고 “전구 수명을 늘려 지출을 줄이려는 목적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오시포비치 소령은 “비행기에 표시된 어떤 표시나 글씨도 보지 못했다”고 주장하면서 “만약 사람이 탄 여객기라고 생각했다면 (미사일을) 쏘지 않았을 것이다. 여객기라는 사실을 확인했다면 상부에 보고하고 격추에 분명히 반대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왜 소련 하늘로 날아갔을까 오시포비치 소령은 사건 발생 후 30년이 지난 2013년까지도 “내가 격추한 비행기는 정찰기라고 아직도 확신한다. 대한항공기는 미군에서 격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그의 말을 모두 믿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확실한 건 이 대한항공기가 소련 영공에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이 비행기는 왜 적국 영공에 들어갔던 걸까. 당시 대한항공기는 천병인 기장(당시 45세)이 조종간을 잡고 있었다. 천 기장은 공군 시절 곡예비행단원으로 활동할 만큼 조종에 능했고, 대한항공 입사 후에도 대통령 전용기를 두 번 조종할 만큼 능력을 인정받았던 인물이었다. 엘리트 중 엘리트 조종사였던 것이다. 그랬던 천 기장이 수없이 다닌 항로를 이탈했던 이유는 뭘까.현재까지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는 가설은 좌표 입력 실수다. 당시 비행기는 관성항법장치(INS·Inertial Navigation System)에 의존해 항로를 결정했다. 이 장치를 쓰려면 출발지 좌표를 입력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처음에 이 좌표를 잘못 입력하면 갈수록 예정 항로를 크게 이탈하기 때문에 출발지로 돌아가 좌표를 수정해야 한다.출발지로 돌아가려면 기름을 버려야 한다. 비행기 연료탱크는 날개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예상 비행 거리를 다 채우지 못해 탱크에 연료가 필요 이상 많은 상태로 착륙하면 날개가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 당시 대한항공기가 앵커리지로 돌아간다면 연료 2만2500갤런(약 8만5172리터)을 버려야 했다. 이러면 회사 측에 1만9000 달러 정도 되는 손실을 안기게 된다.격추 당한 대한항공기 뒤에는 이 비행기보다 15분 늦게 앵커리기 공항을 이륙한 대한항공 015기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이 비행기를 조종했던 박용만 기장은 “천 기장이 앵커리지로 돌아갔을 경우 그의 신뢰성과 위신 문제, 회사 측으로부터의 처벌 등을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1988년 4월 18일자 동아일보는 전하고 있다.대한민국 최고 파일럿이 기초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은 심리가 있었던 데다, 대통령 전용기 기장 심사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걱정, 회사에서 징계도 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으로 천 기장이 수동으로 조종하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이다. 동아일보는 같은 기사에서 “대한항공이 연료를 절약하는 승무원들에게 보너스를 줘 왔다는 ‘입증되지 않은 시사(示唆·귀띔)’도 있다”고 보도했다.가장 유력한 가설이라고 해도 가설일 뿐이다. 유엔 산하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조사 결과 등을 종합하면 천 기장을 비롯한 조종사들이 INS가 아니라 나침반에 의존해 운행한 건 사실이지만 정확한 원인은 여전히 미스터리다.●이 사건, 그 후…이 사건으로 일어난 제일 큰 변화로 꼽을 만 한 건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개방이다. GPS는 미국 국방부에서 개발했으며 원래 군사용으로만 활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INS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고 판단한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은 GPS를 민간에게도 제공하겠다고 공표했다. 현재도 GPS 위성은 미국 공군에서 연간 7억5000만 달러 정도를 들여 관리하고 있지만 민간에서는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대한항공은 보잉사와 공동으로 새로운 기체 도색 디자인을 만들었다. 하늘색 디자인이 이때 등장했다. 그 뒤로 글꼴 모양을 바꾸는 등 사소한 부분은 손을 댔지만 큰 틀은 바뀌지 않았다. 대한항공은 1984년에 보잉 747-3B5 3대를 들어오면서 이 기체 디자인을 처음 적용했다. 안타깝게도 이 중 한 대가 1997년 8월 6일 괌에서 추락 사고를 일으키고 말았다.항공 업계에서는 큰 사고를 큰 겪은 편명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게 관례다. 이에 따라 대한항공은 김포공항과 뉴욕 존 F 케네디(JFK) 공항을 오가던 007편을 025·026편으로 바꿨다. 현재 인천공항과 JFK 공항을 연결하는 081·082편이 이 노선 후속 이름이다. ICAO는 사건 이듬해였던 1984년 국제민간항공협정을 개정하면서 민항기는 영공을 침범했다 하더라도 격추하지 못하도록 명시했다. 그러나 미 해군은 1988년 7월 3일 이란항공 여객기를 F14 전투기로 오인해 대공 미사일로 격추시켰다. 이로 인해 자신들이 맹비난하던 소련으로부터 역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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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이터 비키니]한국, 전세계 축구 대표팀 중 다섯 번째로 많이 이긴 나라

    한국 월드컵 축구 대표팀이 오늘(31일) 오후 9시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명운(命運)을 걸고 이란과 한판 맞대결을 벌입니다. 한국은 이 경기 전까지 4승 1무 3패로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A조 조별리그 2위에 올라 있습니다. 만약 오늘 한국이 이란(1위)을 꺾고, 3위 우즈베키스탄이 중국에 패하면 한국은 9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하죠.이제 한국은 월드컵에 못 나가면 이상한 나라가 됐지만 1986 멕시코 월드컵 이전만 해도 본선 진출은 언감생심이었습니다. ‘그 덕에’ 한국은 전 세계 211개 축구 대표팀 가운데 다섯 번째로 많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네, 제대로 읽으신 게 맞습니다. 한국 대표팀은 지금까지 총 506승을 거뒀는데 이는 전 세계 대표팀 가운데 5위에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월드컵 본선에 못 나간 덕’이라고 말씀드린 건 그 때문에 메르데카컵, 박정희 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대통령배), 킹스컵 같은 아시아권 대회에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교적 쉬운 상대와 맞붙어 비교적 쉽게 승수를 쌓았다는 뜻입니다. 말레이시아에서 해마다 열리는 메르데카컵은 이제 열혈 축구팬이 아니면 이름도 알기 힘든 게 현실. 한국은 이 대회에 1960년부터 참가하기 시작해 1987년 마지막으로 국가대표팀을 보낼 때까지 총 97경기를 치러 62승(23무 12패)을 기록했습니다. 월드컵 지역 예선(81승)을 제외하면 한국 축구 대표팀이 승리를 많이 추가한 단일 대회가 바로 이 메르데카컵이죠. 이 대회에서 한국은 11번 우승했습니다.그 다음으로 승리를 많이 거둔 건 대통령배였습니다. 한때 ‘팍스컵’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이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은 52승을 추가했죠. 이 대회에는 각국 국가대표팀뿐 아니라 클럽팀이 참가하기도 했고, 한국은 청룡(대표팀) 백호(상비군) 등으로 나눠 여러 팀이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이 아시아경기에서 52승, 아시안컵 본선에서 32승을 거뒀다는 걸 참작하면 이 두 대회에서 얼마나 많이 이겼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태국에서 열리는 ‘킹스컵’에서도 25승을 추가했습니다.연도별로 보면 이들 대회에 집중했던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한국 대표팀이 승리를 많이 거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상대국별로 보면 한국이 제일 많이 이긴 나라는 일본(40승)입니다. 이어서 인도네시아와 태국을 상대로 각 31승을, 말레이시아에 25승을 거뒀죠. 그다음으로 많이 이긴 나라는 홍콩(22승), 싱가포르(20승) 등이었습니다. 오늘 맞붙는 이란과는 29번 맞붙어 9승 7무 13패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란을 상대로 최근 4연패에 빠져 있는 상황. 과연 한국은 이 사슬을 끊고 러시아행 티켓을 확보할 수 있을까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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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 투 더 동아/8월31일]발라드는 2040 세대의 뽕짝!

    윤종신(48)은 한 동안 가수보다 예능인 이미지가 더 강했다. 그러나 최근 ‘좋니’가 히트하면서 음악 팬들은 그가 얼마나 위대한 발라드 가수였는지 새삼 확인하게 됐다. 이 노래로 그는 21년 만에 차트 1위를 차지했다. 그 전까지는 1996년 내놓은 ‘환생’이 그의 마지막 차트 1위곡이었다.‘좋니’는 애절한 가사, 절규하는 창법 등 발라드가 전성기를 달리던 1990년대 중반 스타일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윤종신은 ‘힙합 전성시대’에 “뒤끝 있는 예전 남자친구”(‘좋니’ 중)를 소재로 한 노래를 내놓은 이유에 대해 “더 나이 들면 이렇게 절규하는 발라드를 못 부를 것 같았다”고 말했다. ‘좋니’는 그저 듣기만 좋은 노래도 아니다. 이 곡은 31일 현재 금영노래방과 TJ미디어에서도 모두 인기곡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너무 잘 사는 척 후련한 척” 살아가던 옛날 남자친구들이 모인 어느 밤, 술기운에 “니가 조금 더 힘들었으면 좋겠다”던 시절이 떠올라 한 곡조 뽑지 않고는 못 견뎠기 때문이리라. 이 정도면 인정해야 한다. 발라드는 ‘2040 세대의 트로트’라고 말이다. ‘댄스 전성시대’였던 1990년대 중반 ‘발라드 역풍’이 일었던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당시 동아일보에서 이 역풍의 첨병으로 꼽은 노래는 이승환(52)의 ‘천일동안’이었다. 1995년 8월 31일 동아일보는 “‘천일동안’은 밝고 감미로움을 특징으로 하는 발라드에도 ‘뽕짝’의 진한 사연을 담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천일동안’은 김수희의 ‘애모’와 바탕정서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평이다”라고 전했다.당시 한 30대 팬은 “들을수록 깊은 맛이 나는 발라드인데 가사 대부분이 ‘요’로 끝맺어 애절함을 더한다”며 “이 노래를 들으면 어딘가 ‘허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이로부터 22년이 지나 ‘좋니’를 듣고 부르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이제 한국 대중가요 팬들은 발라드(ballad)하면 템포가 느린 노래를 떠올리지만 어원인 라틴어 ‘ballare’는 ‘춤을 춘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1980년대 조덕배(58), 이영훈(1960~2008), 유재하(1962~1987) 등이 완성했다는 평가를 듣는 이 한국형 발라드가 어원과 완전히 멀어진 건 아니다. 발라드를 들을 때마다 우리 마음속에서 추억이 춤을 추니 말이다.“보고 싶겠죠. 천일이 훨씬 지난 후에라도 역시 그럴 테죠. 잊지마요, 우리 사랑, 아름다운 이름들을 … 난 자유롭죠. 그날 이후로. 다만 당신이 궁금할 뿐이죠. 다음 세상에서라도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마요.” ─ 이승환 ‘천일동안’ 중에서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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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규인의 잡학사전]생리를 왜 ‘마술’이라 부를까

    “제발 ‘마술’이라고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발암물질 생리대가 문제가 된 뒤 한 언론사에서 촬영한 동영상에 한 학생이 남긴 말입니다. 많고 많은 낱말 중에서 마술이 왜 생리를 뜻하는 표현이 된 걸까요?정답은 ‘풍채 좋은 산타클로스가 붉은 옷을 입고 수염을 기른 것’하고 같은 이유입니다. 다이아몬드 반지가 결혼반지 대명사가 된 것도 마찬가지고요. 아, 한국 국가대표팀 경기가 있을 때마다 ‘대~한민국’을 외치는 것도 같은 이유죠. 그러니까 기업체 마케팅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1990년대 중반 생리대 제조업체 D사는 “한달에 한번 여자는 마술에 걸린다”를 광고 카피로 앞세웠습니다. 제품 이름에 ‘매직(magic)’이 들어가는 데서 착안한 것. 이 광고가 인기를 끌면서 그 뒤로 생리를 마술 또는 마법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죠. 언제부터 대중이 ‘생리=매직’이라고 널리 받아들이기 시작했는지 확인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2002년 세상에 나온 영화 ‘공공의 적’에 “여자는 왜 한 달에 한 번씩 그 매직에 걸린다 안 하요. 여자친구가 그날이 그날이어서 내가 대신 약국에 매직 사러 갔당께”라는 대사가 등장하는 걸 토대로 2000년대 초반에는 확실히 이런 표현을 언중(言衆)이 널리 쓰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래 대사에 여자친구는 세 글자 비속어로 나옵니다.)이 대사에도 ‘그날’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처럼 직접 언급하기 어쩐지 부끄러운 낱말을 다른 낱말로 바꿔 완곡하게 표현하는 건 퍽 일반적인 언어 현상입니다. 특히 생리를 뜻하는 낱말은 전 세계적으로 50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독일에서는 생리를 ‘딸기 주간(週間·Erdbeerwoche)’이라고 부르고, 미국인들은 ‘플로 이모(Aunt Flow)’라는 말을 씁니다. 바다 건너 영국하고 묘한 관계인 프랑스에는 “영국 군대가 도착했다(Les Anglais ont debarqu¤)”는 표현도 있다고 하네요. 사실 ‘생리’라는 낱말도 완곡한 표현입니다. 생리(生理) 그 자체는 “생물체의 생물학적 기능과 작용 또는 그 원리”(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라는 뜻입니다. 노벨 생리학상은 여성들이 한달에 한번 걸리는 마술에 대한 연구 공로로 받는 상이 아니지요. 그런데도 많은 한국 사람들은 ‘생리 = 월경(月經)’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리라는 표현을 월경이라는 뜻으로 이렇게 널리 쓰기 시작한 것도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닙니다. 1962년 신문 기사만 해도 “생리대 = 월경대”라고 별도로 설명할 정도였습니다. SBS ‘미운 우리 새끼’에 출연 중인 70대 어머니들은 생리를 자연스럽게 “멘스(menstruation)”라고 표현했죠.일본에서도 ‘세이리(生理)’를 ‘겟게이(月經)’와 같은 뜻으로 씁니다. 한자문화권에서 생리를 월경이라고 쓰는 건 한국과 일본뿐입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 동아일보에 ‘생리기(간)’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걸 보면 우리가 월경을 생리라고 부르는 건 일본 영향일 개연성이 큽니다.일본어로 생리를 뜻하는 표현 중에는 ‘안네(アンネ)’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건 한국에서 생리를 마법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생리용품 브랜드 중에 안네가 있었던 거죠. 이 브랜드가 이름을 이렇게 지은 건 안네 프랑크가 쓴 ‘안네 프랑크-소녀의 일기’에 생리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안네 프랑크는 생리에 관해 쓴 세계 최초의 작가”라는 평가도 존재합니다.그러니까 월경을 월경이라고 부르기가 어려워 생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생리를 생리라고 부르기도 참 어렵게 됐습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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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 투 더 동아/8월29일]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을 때 어떤 말을 썼을까

    1910년 오늘(8월 29일)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날이다. 1920년 4월 1일 창간한 동아일보는 그해 오늘 3면에 ‘오늘!’이라는 사진 기사를 통해 나라를 빼앗긴 지 10년이 됐다는 사실을 상기키셨다. 당시 기사를 요즘 말에 가깝게 풀면 이렇다.“10년 전 오늘이 한국이 일본에 합병되던 날이올시다. 금년 8월 29일이 한일합병의 10주년 기념일이올시다. 사진은 한일합병조약에 양국 편에서 도장을 찍었던 곳이니 지금 총독관저 안에 있는 방이오, 그 방에 있는 사람은 한국 통감으로 합병조약을 체결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요, 왼편의 인물은 한국편으로 조약에 도장을 찍은 당시 한국 총리대신 이완용.”이 기사에 이완용 사진을 썼다는 것만 봐도 당시 그가 ‘매국노의 대명사’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모두 이름을 올린 그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니, 이완용을 제외하면 나머지 매국노가 누구였는지 이름을 대기도 힘든 게 현실이다. 그만큼 지금은 더욱 더 ‘매국노 = 이완용’이다. 1926년 이완용이 숨을 거두자 동아일보는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횡설수설’을 통해 “이완용이 염라국 사람이 되었으니 (염라국마저 팔아먹을까 봐) 염라국의 장래가 걱정이 돼 마음이 편치 못하다”고 썼다. 당연히 일제는 이 기사를 삭제하도록 명했다.보기에 따라 재미있는 건 이완용은 친일파였지만 일본어를 제대로 할 줄 몰랐다는 점. 대신 조선 최초 근대식 교육 기관인 ‘육영공원’ 출신인데다 미국 주재 외교관을 지냈기에 영어는 아주 유창했다. 그래서 나라를 팔아먹을 때도 영어를 썼다. 그는 죽기 전 아들에게 “이제 미국이 초강대국이 될 것 같으니 친미파가 되거라”하고 유언을 남겼다. 이렇게 좋은 ‘촉’을 엉뚱한 데 쓰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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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이터 비키니]아내 행복→남편 행복! 남편 행복≠아내 행복?

    SBS는 1980년대에 태어난 김지영 씨 다섯 명의 삶을 들여다 본 ‘SBS스페셜’을 26일 내보내면서 ‘세상 절반의 이야기’라고 부제를 달았습니다. ‘절반’? 아닙니다. 결혼생활에 있어 아내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을 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아내가 행복하면 남편도 행복하지만 그 반대는 아닙니다. 결혼생활 만족도를 결정하는 건 아내입니다.결혼생활을 하고 계신 분들은 따로 숫자가 필요 없이도 그 이유를 아실 터. 미국 보스턴대 데보라 카 교수(사회학) 연구진은 배우자의 결혼 생활 만족도가 본인 결혼 인생 만족도에 끼치는 영향력을 알아보려고 50세 이상 미국 부부 361쌍(722명)을 조사했습니다.이들은 논문 ‘행복한 결혼, 행복한 인생? 노후에 있어서 결혼 생활 만족도와 주관적인 웰빙(Happy Marriage, Happy Life? Marital Quality and Subjective Well-being in Later Life)’을 쓰면서 조사 참여자들에게 결혼생활 만족도를 1~4점으로 매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가장 만족스럽지 못할 때가 1점, 가장 만족스러울 때가 4점이었습니다.28일 ‘결혼과 가족 저널(Journal of Marriage and Family)’에 이들이 게재한 논문을 보면 부부 모두 결혼 생활 만족도가 1점이라고 답했을 때 남편의 인생 만족도는 평균 1.8점(6점 만점)이었습니다. 남편은 여전히 1점이지만 아내가 4점일 때 남편의 인생 만족도는 5.7점으로 3.9점 올라갑니다. 연구진은 이를 “남편이 결혼 생활에 만족하지 못해도 아내가 만족하면 높은 결혼 생활 만족도를 경험하게 되고 이 때문에 인생 만족도도 올라가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아내는 보통 남편보다 더 자기 인생에 만족하며 살지만 남편이 만족한다고 아내의 만족도가 이렇게 올라가지는 않습니다. 둘 모두 1점일 때 아내는 자기 인생이 2.5점이라고 답하는데 남편이 4점을 줘도 4.0점으로 1.5점 올라가는 데 그칩니다. 남편이 3.9점 올라갔으니까 상승률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겁니다.이에 대해 카 교수는 “주로 집안일을 하는 아내가 결혼생활에 만족하면 남편에게 많이 베푼다. 그러면 남편도 자기 인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자연스레 남편이 큰소리를 낼 일이 줄어들기 때문에 부부 사이도 좀더 원만해진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이 조사 결과에 따르면 남편은 참 이기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카 교수는 “남편이 아프면 아내는 스트레스를 받을 걸 알면서도 병간호를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내가 아플 때는 남편이 아니라 딸이 병간호를 맡는 일이 많다”고 전했습니다. 카 교수는 “결혼생활은 우리 인생에 있어 버퍼(buffer·물체에 가해지는 충격을 완화시키는 장치) 같은 존재”라고도 했습니다. “결혼생활이 원만하면 돈이나 건강 같은 문제를 풀어가는 데 있어 부부가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인생 만족도가 올라간다”며 “전체적으로 남편이 아내보다 결혼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 그럴수록 아내가 그만큼 헌신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죠. 이건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부부 사이에서도 역시 남편이 결혼생활에 더 만족합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과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성균관대 서베이리서치센터 공동 연구진이 지난해 6~11월 전국 18세 이상 105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남성은 72.2%가 결혼생활에 만족했지만 여성은 53.7%에 그쳤습니다.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이 좀처럼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건 김지영 씨들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로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회지표에 따르면 한국인의 삶에 대한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5.8점으로 OCED 35개 회원국 가운데 28위에 그쳤습니다. 그렇다고 김지영 씨를 행복하게 하는 길이 그저 남편들 인식 변화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인생은 어차피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 그 짐을 완전히 내려놓으라고 말하는 건 무책임한 일일 겁니다. 그래도 갈수록 김지영 씨들이 짐을 조금씩 덜 수 있는 세상은 만들어 가야 하지 않을까요?사실 김지영 씨들뿐 아니라 김지영 씨 남편들도 마찬가지였고, 마찬가지일 겁니다. 우리는 그저 결혼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늙어가고 싶었던 거고, 그냥 아이를 낳아서 키우고 싶은 게 아니라 그 아이랑 같이 잘 살고 싶은 거니까요.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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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규인의 잡학사전] 허준, 허재, 허임…허씨는 왜 외자 이름 많을까

    요즘 방영 중인 tvN 주말 연속극 ‘명불허전’에는 조선 선조 시절 명의로 이름이 자자했던 허임(許任·1570~1647 추정)이 등장합니다. 허임은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명의 허준(許浚·1539~1615)도 인정한 침술의 대가였습니다. 선조 37년 임금이 침술에 대해 묻자 허준이 “신은 침을 잘 모릅니다만 허임이 평소 말하기를 경맥을 이끌어낸 다음에 아시혈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라고 답했을 정도였습니다.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명의 모두 허씨에 이름이 외자(한 글자)라니 신기하지 않나요? 한국 사람은 성(姓)을 제외하면 이름이 두 글자인 게 기본이지만 허씨 중에는 이렇게 유독 외자 이름인 인물이 많습니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許筠·1569~1618) 같은 옛날 사람은 물론 ‘농구 대통령’ 허재 국가대표팀 감독(52)도 이름이 외자입니다. 허 감독 큰아들인 농구 선수 허웅(24)도 그렇고, 역시 농구 선수인 허 감독 둘째 아들 역시 허훈(22)으로 이름이 외자입니다. 한글학회 이사장을 지낸 전 서울대 교수(언어학) 눈뫼 선생도 농구 선수하고 똑같이 허웅(1918~2004)입니다.방송인 중에서는 ‘의리’로 유명한 김보성 씨(51) 본명이 허석입니다. 김 씨는 데뷔 초에는 본명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거꾸로 본명이 이상룡인 방송인 허참 씨(69)도 예명을 외자로 지었습니다. 허씨 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외자 이름이 많은 걸까요?● 외자 이름은 특권이었다여기서 퀴즈 하나. 조선 정조의 이름은? MBC 연속극을 통해 친숙해진 것처럼 이산(李¤)이 정답입니다. 이때 산은 계산한다고 할 때 산(算)과 같은 글자입니다. 세종대왕 이름은 이도(李¤)인데 이 ‘¤’ 역시 세종대왕 이름을 적을 때 말고는 거의 쓸 일이 없는 글자입니다. 조선 철종처럼 태어났을 때는 임금이 될 가능성이 낮았던 왕족은 즉위하면서 이름을 고치는 일도 많았습니다.임금 이름을 이렇게 특이한 글자로 지은 이유는 뭘까요?한자문화권에는 기휘(忌諱) 또는 피휘(避諱)라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휘(諱)는 이름이라는 뜻이고 기와 피를 합치면 ‘기피’가 됩니다. 요컨대 이름을 밝히는 걸 꺼리는 전통이 바로 기휘 또는 피휘인 겁니다. 여전히 부모님 등 웃어른 성함을 이야기할 때 ‘김 ○자, ○자’처럼 말해야 예의바르다는 말을 듣는 건 바로 이 전통 때문입니다. 예전 사람들이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호를 지어 부른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이 전통에 따라 임금이나 성현(聖賢) 이름은 언급하는 것 자체가 불경죄에 속했습니다. 중국 당나라 태종 이름이 이세민(李世民)이라 불교에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세(世)를 빼고 관음보살이 됐고, 성현 중 성현이라 할 수 있는 공자 선생 이름이 공구(孔丘)라서 TK 지역에 있는 광역시 이름은 대구(大丘)에서 대구(大邱)로 바뀌었습니다.그런데 만약 일상적으로 쓰는 한자를 임금이 이름으로 쓰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의사소통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정조가 산(算)을 이름으로 썼다면 계산, 암산, 주산(珠算) 같은 말을 전부 쓸 수 없게 됩니다. 이름을 두 글자로 쓰면 이 부담이 더욱 커지겠죠? 그래서 사람들이 쓸 일이 별로 없는 한자를 골라 이름을 한 글자로 지었던 겁니다.여기서 시작해 왕조 시절에는 이름을 한 글자로 짓는다는 것 자체가 왕족만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허씨는 왕족도 아닌데 왜?허씨가 외자 이름을 쓰는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된 건 후삼국 시대 말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견훤과 한강 유역 패권을 두고 타투고 있던 왕건은 군량미가 떨어져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때 현재 서울 강서구·양천구 일대 호족이던 허선문(837~?)이 군량미는 물론 말과 군사까지 내주면서 왕건이 승리하도록 도왔습니다. 나중에 고려가 들어면서 왕건은 허선문의 공을 치하해 그에게 삼한공신(三韓功臣) 칭호와 함께 그가 본거지로 삼고 있던 공암(孔岩)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내렸습니다. 허선문은 공암 허씨(현재 양천 허씨) 시조가 됐습니다. 왕건은 그러면서 이 가문에 대를 걸러 외자 이름을 쓸 수 있는 특권을 줬습니다. 할아버지가 외자 이름을 쓰면 아버지는 건너 뛰고 손자가 다시 외자 이름을 쓸 수 있는 방식이었죠. 당시는 아직 호족 세력이 힘이 남아 있던 상태. 양천 허씨 가문은 “우리는 가야 김수로왕 때부터 왕족이었다”며 대대로 외자 이름을 쓰기로 결정합니다. 양천 허씨 가문이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건 가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김수로왕과 그의 비(妃) 허황옥(許黃玉)을 뿌리로 두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가문이 외자 이름을 쓰는 건 가문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수단인 겁니다.●그 부끄러운 전설은 사실일까?넓은 의미로 보면 배우 김수로 씨도 본명(김상중)과 이름이 같은 선배 연기자가 있어 피휘를 선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 씨는 광산 김씨로 이 본관은 김수로왕을 뿌리로 둔 ‘가야 계열’이 아니라 김알지를 뿌리로 하는 ‘신라 계열’입니다. 이런 역사 때문에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 그리고 이로부터 분파한 허씨는 뿌리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 집안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김수로왕과 왕비가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가야에 큰 불이 났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불을 끄려고 제 아무리 애를 써도 꺼지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하고 김수로왕이 불가에 소변을 보니 불이 꺼졌습니다. 이에 임금은 여기저기 소변을 뿌리고 다녔습니다. 그때 불똥이 수로왕 국부에 불똥이 튀었고, 남은 흉터는 결국 점이 됐습니다. 그 뒤로 두 사람 자손들은 고추에 점을 달고 태어난다고 합니다.물론 과학적으로는 신빙성이 떨어지는 이야기입나다만, 들리는 풍문에 아내 외도를 의심하던 양천 허씨 남편이 있었는데 아들이 태어나자 고추를 확인했고 점이 있어 안심했다나 뭐라나. 2015년 기준으로 33만 명이 못 되는 허씨는 그렇다고 쳐도 김씨는 김해 김씨만 446만 명에 육박하는데… 설마… 아니겠죠?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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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 투 더 동아/8월27일]공업용 쇠기름 누명 쓴 라면업체 ‘무죄’

    ‘갓뚜기’ 이전에는 ‘갓양식품’이 있었다. 갓뚜기는 식품회사 ‘오뚜기’가 착한 기업이라며 누리꾼들이 맨 앞 글자를 ‘갓(god)’으로 바꿔 부르는 신조어. 갓양식품은 삼양라면을 만드는 회사를 같은 방식으로 바꾼 사례다.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해 보면 삼양식품이 아무 욕심 없이 한국 사람들 배고픔을 해결하는 데 앞장섰다는 ‘삼양라면의 진실’이라는 글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삼양라면이 누리꾼들에게 이렇게 칭송받은 데에는 ‘쇠기름(우지·牛脂) 파동’의 억울한 피해자였다는 점도 한 몫 했다. 이 때문에 동정 여론이 일었던 것이다.삼양식품으로서는 진짜 억울할 만했다. 검찰은 1989년 11월 3일 삼양식품 등 대형 식품 업체 관계자들을 ‘보건범죄 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 ‘식품위생법’ 혐의로 구속 입건한다. 그러면서 이들이 “비누나 윤활유 원료로 사용하는 공업용 수입 쇠기름을 사용해 라면 등을 만들어 시판했다”고 발표했다. 이제는 많이들 아시는 것처럼 이 쇠기름을 공업용으로 분류한 건 미국 기준에 따른 것이었다. 미국 사람들은 내장과 사골을 먹지 않기 때문에 이를 식용으로 분류하지 않았던 것. 상황을 가정해 설명하자면 미국에서 김을 공업용으로 분류했다는 이유로 한국 국수에 들어간 김을 문제 삼는 것과 똑같은 케이스였다. 실제로 지금도 16등급 쇠기름 중 3등급 이상은 식용으로 쓰는 업체가 적지 않다.당시 검찰도 아주 자신이 있던 건 아니었다. 검찰은 사건 첫날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공업용 우지가 인체에 유해한지 여부는 규명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먹거리에 대한 우려는 늘 증폭되는 법. 당시 동아일보는 “수사 과정에서 너무 엄청난 사실이 밝혀지자 이로 인한 미증유(未曾有·지금까지 한 번도 없던 일)의 파문을 고려, 이를 제외한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삼양식품이 대법원 판결로 혐의를 완전히 벗는 데는 8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대법원은 1997년 8월 26일 삼양식품 등 관련회사와 회사 간부들에게 모두 무죄를 확정했다. 이 기간 삼양식품이 휘청거린 게 당연한 일. 이 회사 홍보관은 이 사태 이전 60%에 달했던 시장 점유율은 15%로 떨어졌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사건 이후 한동안 라면업계에서 동물성 기름이 자취를 감추고 식물성 팜유가 대세가 됐지만, 이제는 팜유로 면을 튀기면 발암물질이 더 많이 발생한다는 것이 밝혀졌다.이 파동은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 때문에 지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파동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삼양식품 경쟁사인 농심의 법률고문으로 활동 중인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이 쇠기름 파동으로 반사이익을 본 농심에서 김 전 실장에서 은혜를 갚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하지만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해당 업체뿐 아니라 관련 업계 전체 매출이 줄어드는 게 일반적이다. 따라서 농심에서 30년 가까이 지난 상태에서 김 전 실장에게 보은을 했다는 건 다른 증거가 없는 이상 개연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다.사실 삼양식품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좀더 밀접한 인연이 있다. 삼양식품 창업주 전중윤 회장은 1979년 총 11억 원을 들여 ‘명덕문화재단’을 만들었다. 당시 11억 원은 서울 대치동 은마아파트를 50채 넘게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이듬해 7월 전 회장을 비롯한 이 재단 설립자 전원이 사퇴하면서 이 재단을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양도하기로 결정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 재단이 해산한 2012년까지 이사장을 맡았다. 나중에 ‘한국문화재단’으로 이름을 바꾼 재단이 해산하면서 남은 자산 13억 원은 박 전 대통령의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설립한 육영재단으로 넘어갔다.이에 대해 한 주간지는 “삼양식품은 1961년 (박정희) 정부의 금전 도움을 받아 라면 제조 기계를 도입했고 이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며 “박(전희) 전 대통령에 대한 고마움이 절절했던 전 회장이 보은 차원에서 맏딸인 박 후보(박 전 대통령)에게 자신이 설립한 재단을 맡겼던 것으로 짐작된다. 사실상 기부행위라 봐도 무방하다”고 분석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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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규인의 잡학사전] 인도 vs 중국 왜 두 달 동안 으르렁 댈까

    코끼리하고 판다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실제 동물끼리 맞붙으면 무게가 5t 정도 나가는 아시아코끼리를 판다(최대 160㎏)가 상대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두 동물이 대표하는 인도(코끼리)하고 중국(판다)은 어떨까요? 당연히 맞붙지 않는 게 최선입니다.그런데 두 나라 군대는 요즘 두 달째 도클람이라는 곳에서 대치 중입니다. 중국에서 둥랑(洞朗)이라고 부르는 이 지역은 원래 중국과 부탄이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곳입니다. 중국이 6월부터 이 지역에 도로를 건설하기 시작하자 부탄에서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있는 인도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인도군이 출동해 도로 건설을 막자 이번에는 중국에서 인도가 자국 영토를 침범했다고 주장하고 나서기 시작했습니다.그 뒤로 두 나라 군대는 돌을 던지면서 몸싸움을 벌이는 등 갈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인도군이 무장 헬기를 국경 지대에 배치하자 중국에서는 인도와 맞닿은 시짱(西藏) 자치구에 ‘헬기 킬러’로 불리는 지대공 미사일 훙치(紅旗)-17을 가져다 놓기도 했습니다.지도에서 도클람 찾아보면 이 지역이 왜 문제가 되는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탄 인도 중국이 만나는 꼭짓점 부근에 이 지역이 자리 잡고 있거든요.지형을 3차원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구글 어스’ 도움을 받으면 이 지역이 왜 영토 분쟁 불씨를 안고 있는지 더욱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정말 딱 분쟁하기 좋은 지역에 도클람이 자리잡고 있죠.사실 지금까지 지도에 인도라고 나온 시킴 주(州)도 특이한 곳입니다. 네팔과 부탄 사이에 있는 이 주는 1975년까지는 인도 보호국이기는 했지만 엄연한 독립 왕국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도의 22번째 주가 된 지금도 이 지역에 가려면 별도로 출입 허가를 받아야 하죠. 중국은 2003년까지 인도에서 시킴을 병합한 걸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인도는 또 중국이 도클람을 차지하면 흔히 ‘닭의 목(Chicken’s Neck)‘이라고 부르는 ’실리구리 회랑‘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장 좁은 곳이 폭 17㎞밖에 되지 않는 이 회랑은 인도 본토와 북동부에 자리 잡은 7개 주(州)를 연결하는 구실을 합니다. 만약 중국이 이곳을 차지하게 되면 인도 땅은 두 동강 나게 됩니다.인도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영국령 인도 제국이던 시절에는 이런 회랑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아래 그림에서 회색 부분이 전부 인도였습니다.그러다 1947년 독립 과정에서 종교적인 이유 등으로 각기 다른 나라로 독립하면서 이 회랑이 생겼습니다. 이슬람교를 믿는 파키스탄은 원래 동·서 파키스탄으로 나뉘었는데 1791년 동파키스탄은 다시 방글라데시로 독립했습니다. 과연 두 나라는 언제까지 대립할까요? 외교 문제에 정통한 이들은 다음 달 3~5일까지 중국 푸젠(福建)성에서 열리는 브릭스(BRICs) 정상회의가 분수령이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 자리에는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도 참석할 예정입니다. 제아무리 중국이라도 손님을 모셔놓고 국경에서 치고받는 건 좀 모양새가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도로서도 손님으로서 예의를 갖출 필요가 있겠죠.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양쪽에서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낼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측합니다.두 나라는 1962년에도 영토 문제로 전쟁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이때는 중국이 이겼죠. 그 뒤 인도는 중국이 티베트를 침략하는 걸 묵인했고, 중국은 인도가 네팔과 부탄을 ’보호‘하는 걸 묵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됐습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2017-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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