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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를 작고 네모나게 썰어서 소금에 절인 후 고춧가루 따위의 양념과 함께 버무려 만든 김치(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는 어떻게 ‘깍두기’라는 이름을 얻게 됐을까.80년 전 오늘(1937년 11월 10일)자 동아일보는 김장철을 맞아 ‘지상 김장 강습’을 진행하면서 깍두기의 유래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3년 뒤 ‘조선 요리학’이라는 책을 펴내 홍선표 선생은 이 글에 “조선 정조(1752~1800)의 사위인 영명위(永明尉) 홍현주의 부인이 임금님에게 여러가지 음식을 새로이 만들어 드릴 때 처음으로 무를 썰어 깍두기를 만들어 드렸더니 대단히 칭찬하시고 잡수신 일로 여염가까지 전파하였다”며 “그때 이름을 각독기(刻毒氣)라 하였고 … 공주(충남 공주시)에 낙향해 깍두기를 만들어 먹은 까닭으로 공주에서부터 민간으로 시작된 관계로 오늘날까지 공주 깍두기가 유명한 것”이라고 썼다. 재미있는 건 깍두기를 처음 담근 사람이 “정조의 사위의 부인”이었다고 썼다는 것. 사위의 부인은 자기 딸이다. 홍현주가 다른 아내를 두었다는 기록도 없다. 따라서 이 글에 등장하는 ‘정조의 사위의 부인’은 홍현주와 혼인한 숙선옹주(1793~1836)였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면 숙선옹주가 정말 깍두기를 처음 만들었을까. 이에 대해 음식문화평론가 윤덕노 씨는 2011년 11월 25일자 동아일보에 쓴 ‘[윤덕노의 음식이야기]<106> 깍두기’에서 “(홍 선생이) 별다른 근거를 대지 않고 숙선옹주가 깍두기를 처음 만들었다고 써놓았다”며 “조선에서는 시집간 공주나 사대부 부인들이 궁중에 모여 음식을 만들어 왕실 어른들을 대접했다. 숙선옹주가 이때 음식솜씨를 자랑했을 수도 있다”고 했다.윤 평론가는 이렇게 ‘이때 음식솜씨를 자랑했을 수도 있다’고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여지를 남겨 놓았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먼저 숙선옹주가 홍선주와 가례를 치른 건 정조가 세상을 뜬 지 4년이 지난 1804년이다. 따라서 ‘시집 간 공주’가 다른 왕실 어른들을 대접할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정조 임금에게 깍두기를 대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미혼 때였다면 어땠을까. 시집가기 전 임금의 딸이 직접 요리를 할 수 있었는지 아닌지는 차치하더라도 정조가 세상을 떠날 때 숙선옹주는 한국 나이로 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말이 맞으면 숙선옹주가 여덟 살 전에 깍두기를 생각해 낸 ‘요리 신동’이었어야 하지만 역시나 관계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이 때문에 만약 숙선옹주가 정말 깍두기를 처음 만들었다 해도 이 무 김치 요리를 처음 먹은 임금은 아버지인 정조가 아니라 오빠인 순조(1790~1834)였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물론 윤 평론가가 쓴 것처럼 깍두기가 ‘서민들 허드레 김치’에서 발전했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그래서 여쭤본다. 여러분은 국밥을 드실 때 깍두기 국물을 넣으십니까. 아니 넣으십니까.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어느덧 올해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도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뜻인 천고마비는 가을을 대표하는 수식어. 하늘이 높은 건 누구나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직접 말을 키우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에 정말 말이 가을에 살이 찌는지는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말 그럴까요?일단 정답은 ‘네, 그렇습니다’입니다. 적어도 ‘렌츠런파크 서울’에서 경마에 참가하는 말(서울 경주마)은 확실히 가을에 몸무게가 늘어납니다. 경주마는 경주에 출전할 때마다 체중 검사를 받고, 한국마사회는 이 체중 검사 결과를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려두고 있습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 ‘파이선’을 가지고 마사회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서울 경주마 1757마리 가운데 미검마(未檢馬) 245마리를 제외한 1512마리의 몸무게 데이터를 수집했습니다. 경주마는 보통 한 달에 한 번 정도 경주에 출전하고, 이 1512마리는 총 1만9988번(평균 13.2번) 체중 검사를 받았습니다. 이 정도 데이터면 표본 숫자가 부족하다고는 할 수 없겠죠?실제 결과를 보면 8월에 472.5㎏이던 평균 몸무게는 가을이 시작되는 9월에는 473.7㎏로 1.2㎏ 늘어나고, 10월에는 다시 474.3㎏까지 올라갑니다. 11월이 되면 473.1㎏으로 내려오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름보다는 살이 찐 상태입니다.위에 있는 그래프를 보면 가늠할 수 있는 것처럼 계절별 몸무게 역시 가을이 제일 높습니다. 아예 3월부터 석 달씩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구분해 보면 가을 평균 몸무게가 473.7㎏으로 가장 많이 나갑니다.이전 계절보다 몸무게가 늘어난 비율을 살펴봐도 마찬가지. 전체 서울 경주마 가운데 63.1%가 여름 석 달보다 가을 석 달 평균 몸무게가 더 많이 나갔습니다. 요컨대 가을은 가장 많은 말이 가장 많이 살찌는 계절입니다. 사실 가을에는 말만 살이 찌는 건 아닙니다. 가을에는 식욕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식욕은 포만감을 느끼는 ‘포만중추’와 배고픔을 느끼는 ‘섭식중추’에서 조절합니다. 포만중추를 자극하는 요인 중 하나가 기온입니다. 체온이 일정 수준이 도달하면 포만중추가 우리 몸에 ‘그만 먹어도 된다’고 사인을 보내는 겁니다. 가을에는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기 때문에 더 많이 먹어야 포만중추가 자극을 받게 됩니다. 이건 다른 동물도 마찬가지인데 왜 하필 많고 많은 동물 중에 말이 살찐다고 하게 된 걸까요? 이 말을 처음 쓴 건 당나라 때 시인 두심언(?~708)이었습니다. 이 두심언의 손자가 바로 시성(詩聖) 두보(712~770)입니다. 유목민족이라 겨울이면 먹거리가 떨어지던 흉노는 가을걷이를 끝낸 중국 남쪽 지방을 침략해 물자를 빼앗아가기 일쑤였습니다. 두심언은 흉노의 침략을 막으러 북방으로 떠나던 친구 소미도에게 시를 지어 선물했습니다. 아래는 그 시 가운에 일부를 옮긴 것.여기서 두 번째 행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가 바뀐 말이 천고마비입니다. 구름이 걷히고 요사스런 별이 떨어졌다는 것 흉노를 물리쳤다는 뜻. 그렇게 흉노를 몰아내고 나면 전쟁에 지친 말도 다시 살이 오를 겁니다. 두시언은 이렇게 승리하고 돌아오라는 바람을 담아 친구에게 시를 선물했습니다. 이 시는 ‘수레를 타고 도읍으로 돌아오니, 같이 놀던 벗들 모두 나와 반기네(輿駕還京邑 朋遊滿帝畿·여가환경읍 붕유만제기), 개선하기로 한 약속 지키니, 봄 아침 햇살이 함께 노래하고 춤추네(方期來獻凱 歌舞共春輝(방기래헌개 가무공춘휘)’로 끝이 납니다.천고마비와 함께 가을을 상징하는 사자성어를 하나 더 꼽으라면 등화가친(燈火可親)일 터. 이 말을 21세기 식으로 번역하면 스마트폰 등불을 가까이하기 좋은 계절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껏 1900자 가까이 읽으셨으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 중 8% 정도는 PC 모니터로 읽고 계시겠지만) 스마트폰에서 눈 떼시고 가을 공기 한번 힘껏 들이켜 보세요. 그러면 가을 기운으로 우리 마음도 살이 찌지 않을까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25시간 동안 한국에 머물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에어 포스 원(AF)’을 타고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많이들 아시는 것처럼 미국 대통령 전용기 AF1은 그저 ‘(미국) 공군 1호기’라는 뜻입니다. 예비역 남성 분들은 군대에서 부대 최고 사령관이 타는 차를 ‘1호차’라고 불렀던 걸 기억하실 터. 그것과 100% 똑같은 명명법인데 그냥 영어로 AF1이 된 것뿐입니다. 그러면 AF1이 세상에 처음 등장한 건 언제였을까요?●관제사 착각 때문에 얻은 이름미 공군에서 대통령 전용기를 운영하기 시작한 건 1943년부터지만 처음부터 이 비행기를 AF1이라고 불렀던 건 아닙니다. 미 공군 수송기를 개조해 만든 첫 번째 미국 대통령 전용기에는 ‘게스 웨어 2(the Guess Where II)’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후 기체를 바꿀 때마다 대통령 전용기 이름도 △세이크리드 카우(Sacred Cow) △인디펜던스(independence) △컬럼바인(columbine)으로 바뀌었습니다. 사건이 생긴 건 1953년 어느 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컬럼바인을 타고 플로리다주로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비행기에는 미 공군(Air Force) 8610편이라는 편명이 붙어 있었는데 하필 근처에 미국 이스턴항공 8160편도 날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관제사가 두 비행기를 착각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당시 컬럼바인 조종사였던 윌리엄 드레이퍼 당시 미 공군 대령이 “앞으로 대통령 전용기를 다른 비행기와 착각하는 일이 없도록 ‘에어 포스 원’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하게 됩니다. 미 대통령 전용기를 공식적으로 AF1이라고 부르게 된 건 1959년부터입니다.AF1은 항공기 호출 부호(call sign)이기 때문에 미국 대통령이 어떤 미국 공군기를 타더라도 그 비행기가 곧 AF1이 됩니다. 사정상 공군기를 타지 못할 때는 육군 소속 비행기에 타면 ‘아미 원(Army One)’, 미 해군 비행기에 타면 ‘네이비 원(Navy 원)’입니다. 대통령이 육해공군을 막론하고 최고 통수권자이기에 이런 이름이 붙는 것.만약 군용기가 아니라 민항기에 탔을 때는 ‘이그제큐티브 원(Executive One)’이라고 부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 AF1 대신 흔히 ‘T버드’라고 부르는 원래 자기 전용기(위 사진)를 타고 다닐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습니다. 만약 정말 그랬다면 이 비행기는 AF1이 아니라 이그제큐티브 원이 됐을 겁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AF1이라고 부를 수 있는 비행기 숫자는 미군 공군에 있는 모든 비행기 숫자와 똑같습니다. 다만 맨 처음 사진으로 보신 것처럼 우리가 일반적으로 AF1이라고 부르는 비행기는 사실 따로 있습니다.●에어 포스 원은 쌍둥이다.미군에서는 ‘미국 항공 및 우주 장비 명명법’에 따라 비행기에 제식 명칭을 붙입니다. 비행기를 A-10, B-25, F-16처럼 부르는 거 보신 적 있죠? 보잉 747-200B를 개조해 만든 현재 AF1에는 VC-25라는 명칭이 붙어 있습니다. V는 VIP에서 따왔고, C는 수송기(Cargo)라는 뜻입니다.보잉에서 제작하고 미 공군에서 보유하고 있는 이 VC-25는 딱 두 대뿐입니다. 네, 한 대가 아니라 두 대입니다. 그러니까 미국 대통령 전용기는 한 대가 아니라 두 대인 겁니다. 2003년 하와이에 있는 미 공군 히캄 기지에서 찍은 아래 사진에서는 아직 착륙하지 않은 비행기가 AF1입니다. 그 비행기에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타고 있었거든요. 착륙해 있는 비행기에는 미국 대통령이 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때 호출 부호는 ‘SAM 28000’입니다. SAM은 ‘Special Air Mission(특별 항공 임무)’을 줄인 말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비행기에 미국 대통령이 타고 있지 않을 때는 ‘SAM 29000’이 됩니다.대통령 전용기가 두 대가 된 것도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부터입니다. 관제사가 착각했을 때 드레이퍼 대령이 몰고 있던 비행기는 ‘컬럼바인 2호(II)’였습니다. 쌍둥이 비행기는 ‘컬럼바인 3호(III)’였고요.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앤드루스 공군 기지에서 출발할 때는 전용기 두 대가 동시에 이륙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보안상 어떤 비행기에 대통령이 타고 있는지 외부에서 모르도록 하려는 목적입니다. 언제 어떤 비행기를 타는지도 랜덤이고, 때로는 목적지를 숨기려고 두 대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기도 합니다.●에어 포스 원은 ‘끝판왕’이다.AF1은 절대 그 누구도 격추할 수 없고, 격추해서도 안 되는 비행기입니다. 이 비행기가 전투기 호위를 받는 것도 모자라 미사일 방어 시스템 등 자체 방어 기능을 갖추고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미국 정부는 대통령이 AF1에 탑승할 때는 핵가방(Nuclear Football)을 비행기에 싣는 장면을 반드시 공개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처럼 말입니다.이 가방은 핵무기 컨트롤러를 담고 있어 이런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이 컨트롤러는 미국이 보유한 모든 핵미사일을 통제할 수 있는데요, 이 컨트롤러가 파괴 당하면 미국이 보유한 핵미사일은 미리 입력해둔 목표를 향해 자동으로 날아가게 됩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미군이 보유하고 있는 핵탄두는 4000개 수준입니다.그러니까 AF1을 격추시킨다는 건 전 세계를 멸망시키겠다는 것과 사실상 똑같은 뜻입니다. NYT는 “핵무기 4000두가 있으면 러시아, 리비아, 북한, 시리아, 이라크, 이란, 중국을 멸망으로 몰아넣고도 2897두가 남는다”고 설명했습니다. AF1은 그래서 ‘끝판왕’입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김장’은 월동 준비 필수 코스 가운데 하나였다. 2013년 유네스코(UNESCO)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김치를 담그고, 그렇게 담은 김치를 나눠 먹는 김장 문화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하기도 했다.하지만 김장 규모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김치 제조업체 J에서 주부 1175명을 설문 조사해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김장 계획이 있는 주부는 45%에 불과했다. 55%는 김장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는 것이다. 이 업체 관계자는 “최근 8년 동안 김장철마다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김포족(김장포기족) 비율이 50%를 넘어선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또 김장을 하기로 한 주부 중에서도 60%는 배추 20포기 이하로 김장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 나타났다.96년 전에는 ‘스케일’ 자체가 달랐다. 1921년 11월 8일자 동아일보는 당시 경성(서울) 지역 ‘김장 물가’를 전했는데 배추 가격은 “100통에 5원”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정현미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 학예연구관은 “배추 100통 정도를 김장량의 기본 단위로 봤던 것”이라고 설명했다.“경향(京鄕)을 막론하고 겨울 량식(양식)으로 중대한 진장(김장)도 립동(입동) 전후에는 하여야 되는 것이니 이제 경성 시내의 진장 시세를 대개 소개하면 백차(배추) 100통 보통 5원, 무 한 섬 보통 1원 50전이라 하여 고초(고추)는 한 말에 대개 70전 가량이오 기타 양염(양념)도 평년보다 별로히 고하(高下)가 업다(없다)하더라.”당시 5원은 금 3.65g을 살 수 있던 돈이었다. 이를 토대로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약 16만6900원 정도다. ‘서울시 물가정보’에 따르면 7일 현재 배추 한 포기는 2380원. 100포기면 23만8000원으로 올해가 14.3% 정도 더 비싸다. 단, 현재 우리가 먹는 배추는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가 1954년 개량에 성공한 품종이기에 당시 가격과 일대일로 비교하기는 무리다.김장 포기 숫자만 달라진 게 아니다. 1977년 11월 29일자 동아일보에는 ‘아파아트의 김장 ─ 뜰 있는 집은 얼마나 좋을까…’라는 독자 칼럼이 실렸다. 아파트 실내가 비좁아 김장하기가 어렵고 김칫독 묻을 곳을 찾기도 마땅찮다는 내용이었다.이 칼럼을 보내온 신현수 씨는 “남들은 다 아파트가 편리하다면서 옮겨가고 아파트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도 시종 뜰이 있는 집을 지켜 오신 부모님께 새삼 고마움을 느끼는 별난 마음이 되는 것도 아파트와 김장이 빚는 부조화 탓인가”라고 적었다. 이제는 전체 가구 중 48.1%(2015년 기준)가 아파트에 살지만 이런 부조화를 고민하는 이는 찾기 어렵다. 1993년 김치냉장고가 세상에 나온 효과가 컸다.1993년 1월 31일자 동아일보는 “김치냉장고는 김치를 오래 저장하고 싶다거나 김치는 즐겨 먹지만 김치 냄새가 냉장고에 배는 것을 싫어하는 소비자의 공통된 요구로 만들어진 것”이라며 “아파트, 연립주택 등으로 주거 형태가 바뀌면서 냉장고가 사계절 상품으로 자리를 굳혀감에 따라 냉장고 판촉전은 한겨울에도 뜨겁기만 하다”고 소개하고 있다. 물론 김치냉장고의 역기능(?)도 있다. 김치냉장고 보급이 ‘김포족’ 숫자도 늘린 것. 배추 재배 기술과 냉장 보관 기술이 더 발전하면 언젠가는 아예 김장하는 풍속 자체가 사라지지 않을지 걱정스러울 정도다.정 연구관은 “이 질문 대한 대답은 ‘아니다’라고 확신한다”면서 “갈수록 소외 계층을 위한 ‘사랑의 김장 나눔’ 행사가 많아지고 있다. 김장 풍속에 담긴 따스한 ‘정’을 나누는 문화가 가족에서 사회 전체로 퍼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은 그런 사람들”이라고 강조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어머니가 아들을 훌륭하게 키우면, 그 아들은 자기뿐 아니라 어머니의 존재도 역사에 남긴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그렇고, 어머니 홍주 백씨와 아들 석봉 한호가 그렇다. 백범 김구 선생에게도 어머니 곽낙원 여사(1859~1939·사진)가 있었다. 아니, 곽 역사는 백범 선생뿐 아니라 모든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의 어머니였다. 황해 장연군에서 태어난 곽 여사는 1922년부터 아들 내외와 함께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살았다. 그러다 1924년 며느리 최준례 여사가 숨을 거두자 우유를 먹이고 빈 젖을 물려가며 손자 둘을 키웠다.(이렇게 키운 둘째 손자 김신 선생은 1960년부터 3년간 공군참모총장을 지낸다.) 하지만 굶주리고 있는 건 비단 어머니를 여읜 세살 배기 하나가 아니었다. 백범 선생은 자서전 ‘백범일지’에 이렇게 썼다.“어머님께서는 청년, 노인들이 굶주리는 것을 애석히 여기셨지만 구제할 방법이 없었다. 두 손자마저도 상하이에서 키우기 힘들어 환국(還國)코자 하실 때, 어머님은 우리 집 뒤쪽 쓰레기통 안에 근처 채소상이 버린 배추 껍데기가 많을 것을 보고, 매일 저녁 밤 깊은 후 그런대로 먹을 만한 것을 골라 소금물에 담가두었다가 찬거리로 하기 위해 여러 항아리를 만들기도 하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하이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워지자 어머님께서는 네 살이 채 안된 신(信)이를 데리고 길을 떠나셨고, 나는 … 어머님께서 담아두신 우거지 김치를 오래 두고 먹었다.”당시 66세였던 곽 여사가 혼자 귀국길에 올랐지만, 이런 상황에서 노자(路資)를 넉넉히 드리기는 불가능했다. 백범일지는 이렇게 이어진다.“어머님께서 본국으로 돌아가실 때 여비를 넉넉히 드리지 못해, 겨우 인천에 상륙하시자 여비가 떨어졌다. 떠나실 때 내가 그런 말씀을 드린 바 없건만, 어머님은 인천 동아일보 지국에 가서 사정을 말씀하셨다. 지국에서는 신문에 난 상하이 소식을 보고 벌써 알았다면서 경성 갈 여비와 차표를 사서 드렸고, 경성에서 다시 동아일보사를 찾아가니 역시 사리원까지 보내드렸다고 했다.”당시 인천 동아일보 지국에서 봤다는 상하이 소식이 신문에 실린 게 바로 1924년 오늘(11월 6일)이다. “(곽 여사가) 근일에는 고국 생각이 간절하다고 그 아들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준비 중이라는데 상하이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 고국에는 가까운 친척도 한 사람 없는데 늙으신 이가 그대로 나아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만류하나 도무지 듣지 않고, 백골이나 고국강산에 묻히겠다고 하며 상하이를 떠나기로 작정하였다는데 아들의 만류함도 듣지 아니해 할 수가 없다 하며, 그 부인은 조선에 나간대도 갈 곳이 없으므로 그의 앞길이 매우 암담하다고 사람들은 매우 근심하는 중이라.”하지만 ‘고국강산에 묻히겠다’던 곽 여사는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일으킨 배후로 아들이 지목 당하자 다시 상하이로 건너와 ‘임정의 식모’를 자처했다. 곽 여사는 이후 임정이 여러 번 자리를 옮기던 중 병을 얻어 1939년 끝내 아들이 소원을 이루는 걸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아들의 소원은 물론 ‘대한 독립’이었다. 곽 여사는 처음에는 충칭(重慶)에 묻혔지만, 현재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잠들어 있다.곽 여사는 그렇게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동아일보와 백범 선생의 인연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졌다. 1940년 8월 10일 때 강제 폐간 당했던 동아일보가 1945년 12월 1일 중간(重刊)할 때도 백범 선생은 경세목탁(警世木鐸·‘세상을 깨우치는 목탁이 되어라’)이라는 붓글씨를 보내 이를 축하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이제는 이마저 길다. 그저 ‘삼소’라는 두 글자면 충분할 만큼 한국인 입맛을 사로잡은 조합이다. 그런데 어르신 중에는 어릴 때 삼겹살을 먹은 기억을 떠올리는 분들이 별로 없다. 젊은 세대는 의아하겠지만 ‘삼겹살’은 1994년 전까지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찾을 수 없던 낱말이었다. 그렇다고 그 전까지 이런 낱말을 아예 쓰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한국 언론에 삼겹살 관련 표현이 처음 등장한 건 1934년 오늘(11월 3일)자 동아일보였다. 당시 ‘육류의 조코(좋고) 그른 것을 분간해 내는 법’이라는 기사에는 “도야지(돼지) 고기의 맛으로 말하면 소와 같이 부위가 많지 아니하나 뒤 넓적다리와 배 사이에 있는 세겹살이 제일 맛이 있고 그 다음으로는 목덜미 살이 맛이 있다”는 문장이 나온다. 여기 나오는 ‘세겹살’이 바로 요즘 말하는 삼겹살이다.잠깐만 생각해 보면 삼겹살보다는 세겹살이 어법에 맞는 표현처럼 보이기도 한다. 삼겹살은 살코기와 지방이 세 번 겹쳐 있다는 뜻. 겹겹이 쌓인 건 한 겹, 두 겹, 세 겹이라고 세니까 삼겹살보다는 세겹살이 더 정확한 표현처럼 보이는 것.하지만 이 낱말이 동아일보 지면에서 자취를 감춘 지도 벌써 40년이 넘었다. 동아일보 지면에 세겹살이 마지막으로 등장한 건 1974년 12월 5일자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5면에 나간 ‘값싸고 영양가 높은 돼지고기 조리법’ 기사를 통해 ‘돼지고기 세겹살 조림’을 소개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삼겹살을 지금처럼 구워 먹은 게 아니라 조려 먹었다는 것. 당시에는 ‘삽겹살은 당연히 구워 먹는 것’이라는 생각이 희박했다는 증거다. 이 기사에는 또 “특히 싫어하는 사람이 많은 돼지고기”라는 구절도 등장한다. 적어도 1974년까지는 삼겹살은 물론 돼지고기도 그렇게 인기 있는 먹거리는 아니었다고 추론할 수 있는 대목이다.그러면 한국 사람들은 언제부터 삼겹살을 ‘즐기게’ 됐을까? 정답은 ‘정확히는 모른다’에 가깝다.2009년 이화여대 식품영양학과 박사학위 논문 ‘근대 이후 100년간 한국 육류구이 문화의 변화’(이규진)에 따르면 한우·돼지갈비, 주물럭 같은 고기구이는 ‘원조’를 추적할 수 있다. 하지만 삼겹살은 “1970년대 후반쯤 ‘우후죽숙처럼’ 생겨났지만 처음부터 정착하지는 못했고 여름철에는 비수기가 되는 등 적응기를 거친 것으로 보인다”고 짐작할 뿐이다.일부 음식평론가는 1970년대 일본에서 돈가스를 만들 때 쓸 등심과 안심만 수입해 가는 바람에 한국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은 먹지 않는) 삼겹살을 먹게 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돈육(돼지고기) 수출 현황을 보면 이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다는 게 축산경영학 전문가들 의견이다. 대한양돈협회 관계자는 “1975년 돼지 수출 물량이 8500t 정도였다. 당시 돼지 한 마리에서 생산할 수 있는 등심과 안심은 5㎏ 안팎이었다. 170만 마리를 잡아야 8500t다. 당시 한 해에 보통 돼지를 200만 마리 정도 잡았다. 그러면 85%를 수출했다는 거다. 이건 말이 안 된다”고 설명했다.한국 사람이 어떻게 삽겹살과 사랑에 빠지게 됐는지는 알 수 없어도 언젠가 사랑에 빠진 것만큼은 틀림없다. 1983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독자란에는 “요즘 광주 시내 주점가에는 ‘소주코너’라는 술집이 부쩍 늘었고 안주감으로 돼지 삼겹살 등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적어도 1980년대 초반부터는 ‘삼소’ 조합이 인기였던 것이다.사실 음식 유래 같은 것 좀 모르면 또 어떤가. 안도현 시인이 ‘퇴근길’이라는 시에서 노래했듯 “삽겹살에 소주 한잔 없다면/아, 이것마저 없다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 퇴근길에 삽겹살에 소주 한 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남자들은 왜 자기보다 잘난 여자를 싫어하나요?”인터넷 커뮤니티 같은 곳에 이런 궁금증이 올라오는 건 별로 드물지 않은 일. 구글에서 ‘자기보다 잘난 여자’로 찾아보면 검색 결과가 약 36만5000개가 나옵니다. 정말 남자들은 자기보다 잘난 여자를 싫어할까요? 물론 꼭 그런 건 아닙니다. 한 결혼정보회사는 올해 5월 전국 미혼 남녀 594명(남녀 각 297명)에게 ‘결혼 후 아내의 수입이 남편보다 더 많으면 어떤 생각이 들까’를 설문조사해 발표했습니다. 그 결과 남성 응답자 45.8%가 ‘자랑스러울 것 같다’고 답했습니다. ‘자존심 상한다’는 답변은 21.5%에 그쳤죠. 미혼 여성 예상은 반대였습니다. ‘남자가 자존심 상할 것’이라고 예상한 비율이 63.3%가 나왔고, 이런 현상을 자연스럽다고 생각한 건 아예 제로(0)였습니다. 이 결과만 놓고 보면 남성들은 실제로 자기보다 잘난 여성을 싫어하지 않는데, 여성들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정말 그럴까요?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조사 결과가 틀렸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남성 두뇌는 저렇게 물어보면 저렇게 답하도록 프로그래밍이 돼 있거든요. 요컨대 남성은 ‘상상할 때는’ 자기보다 잘난 여자를 매력적이라고 느낍니다.미국 버팔로대, 캘리포니아루터대, 텍사스오스틴대 공동 연구진은 남성이 자기보다 지적으로 뛰어난 여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려고 여러 심리학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첫 번째 실험은 남성 대학생 105명(평균 19.3세)에게 자기보다 수학 영어 실력이 높거나 낮은 같은 학교 여학생과 데이트하는 상황을 미리 만든 시나리오에 따라 ‘상상’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나서 이 여학생과 실제로 데이트할 의사가 있는지 1(전혀 없다)~7(매우 많다)점 사이로 대답하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자기보다 점수가 높은 여학생과 실제로 데이트 하고 싶다는 의견이 5.21점으로 더 높았습니다.이게 실험 결과가 제가 위에 “남성은 ‘상상할 때는’ 자기보다 잘난 여자를 매력적이라고 느낀다”고 쓴 근거입니다.이제 남학생들이 실제로 여학생을 만날 차례. 이번 실험에는 평균 나이 18.8세인 남학생 90명이 참가했습니다. 이 남학생들은 ‘대인 관계 태도 연구(Study of Interpersonal Attitudes)’ 실험에 참가하면 심리학 수업 학점을 따게 된다고 소개 받은 상태입니다.실험 참가자 한 명이 연구실에 도착해 자리를 잡고 나면 곧 노크 소리가 들립니다. 이어서 여학생 등장. 연구진은 여학생에게 남학생 옆자리에 앉으라고 합니다. 여학생이 앉고 나면 연구진은 이 실험이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먼저 미국 대학원입학시험(GRE)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소개합니다.그런 뒤 연구원이 ‘시험지를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비우면 여학생이 자기는 이 동네에서 자란, 현재 남자친구가 없는 18세 1학년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합니다. 시험지가 도착하면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시험 문제를 풉니다. 그 동안 연구원은 의자 하나를 가져다 교탁 앞에 놓았습니다. 시험 시간이 끝나고 연구원이 ‘채점을 해오겠다’며 시험지를 들고 나갑니다. 그리고 나면 여학생은 ‘몇 학년이에요?’, ‘고향이 어디에요?’ 등을 친근하게 물어봅니다. 물론 이렇게 하도록 미리 지시를 받은 것.대화가 무르익을 즈음 연구원이 시험지 맨 위에 점수가 잘 보이도록 빨간 글씨로 서서 들고 옵니다. 남학생은 실제 결과에 관계없이 무조건 20점 만점에 12점을 받습니다. 여학생은 6점을 받을 때도 있고, 18점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자기보다 점수가 높은 여성과 낮은 여성을 ‘만들어내는’ 과정입니다. 연구원은 일부러 여학생 점수를 큰 소리를 발표합니다. 남학생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그리고 나서 연구원은 남학생에게 ‘다음 단계를 진행하려면 둘이 나란히 보고 앉아야 하니 의자를 앞으로 좀 가져와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게 진짜 실험입니다. 남학생이 의자를 어디에 놓았는지 몰래 측정했더니, 여학생이 점수가 낮을 때 남학생이 의자를 3.55인치(약 9㎝) 더 가까이 붙였습니다. 당연히 상대에게 매력을 느낄수록 의자를 더 가까이 붙였겠죠? 실제로 이 실험에서는 남학생들에게 역시 1~7점 사이로 여학생 매력을 평가해달라는 질문도 던졌는데요, 성적은 낮은 여학생이 평균 5.46점을 받을 때 성적이 높은 여학생은 이보다 0.34점 낮은 5.12점에 그쳤습니다. 확실히 남자는 자기보다 잘난 여자를 선호하지 않습니다.또 이 실험에서 제일 이상한 곳을 꼽으라는 질문에도 여학생이 점수가 낮을 때는 ‘(매력적인) 이 여성도 실험 멤버인 것 같다’는 답변을 골랐는데, 여학생 점수가 높을 때는 ‘내 점수가 잘못된 것 같다’는 답변을 제일 많이 골랐습니다.여기서 잠깐!남학생이 자기보다 성적이 뛰어난 여학생을 ‘덜 선호하는’ 건 사실이지만, 남학생은 데이트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모두 1~7점이 기준이었으니까 가운데는 4점. 점수가 낮은 여학생을 덜 선호했던 때는 4.69점이었고, 점수가 높은 여학생을 덜 선호했을 때도 5.12점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남학생이 속마음 깊숙한 곳까지 ‘쟤랑은 정말 데이트 한번도 하기 싫다’고 생각하는 여학생은 (없지 않다면) 진짜 드문 겁니다.그러니 ‘참 못 난 남자’를 짝사랑하고 계신 ‘알파걸’ 여러분 모두 조금 더 기운 내세요. 지금 ‘열폭’(열등감 폭발) 중인 그 ‘쪼다’가 정신 좀 차리면 여러분 마음 알아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남성 여러분, 저도 남자지만, 우리 참 속 좁다. 그렇죠?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경제상으로 우리 조선 사람이 아무리 군핍(窘乏·필요한 것이 없거나 모자라 군색하고 아쉽다)하다 하더라도 소비조합에 고본(股本·출자금) 10원 낼 금전은 있으니 우리도 곳곳에 이런 조합이 생겨야만 아주 절명(絶命·목숨이 끊어짐)을 면할 것이다.”동아일보는 1922년 11월 2일자 1면에 실린 ‘소비조합(消費組合)’이라는 기사를 통해 이렇게 강조했다. 이 기사는 “영국의 소비조합은 경탄할 만치 대규모로 경영한다”며 “그 시초로 말하면 1884년 록델(로치데일) 시에서 직조공 28인이 조직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요즘 협동조합 설립을 독려하는 단체에서 스페인 프로축구 팀 ‘FC바르셀로나’나 감귤(오렌지) 재배 협동조합 ‘선키스트’, 세계적인 비영리 통신사 ‘AP’ 등 협동조합 성공사례로 거론하는 것처럼, 창간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았던 동아일보 역시 ‘국제적인 시각’으로 협동조합을 소개한 것이다. 이 로치데일 협동조합은 많은 경제사학자들이 협동조합 시초로 꼽는 단체다.일제강점기 동아일보는 ‘경제적 독립운동’ 차원에서 협동조합 설립을 강조했다. 조선총독부에서 금용조합과 산업조합 등 식민 통치 목적으로 ‘관제조합’을 만들자 이에 대항하는 차원에서 자생적인 협동조합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것. 이후 동아일보는 1932년 창간 12주년 기념사업으로 ‘전조선협동조합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지금이라면 국가가 했어야 할 일을 동아일보가 했던 셈이다.“조합 수 총 97개, 조합원 총수 4만 여 명, 조합 자금 42만 원(현재 약 74억 원)이어서 단기간에 발전한 운동으로서는 다대한 수확을 보았다 하겠다. 더욱 전 조선에 유명한 평안협동조합과 기타 유수한 조합이 조사에서 설루(洩漏)되었는바 이것은 사정에 의한 것이니 만일 충분한 조사를 완성하면 사실상의 숫자는 이의 배(倍)나 되지 않을까 한다.”이렇게 자생적인 협동조합 설립 운동이 독립운동으로 번질 것을 우려한 조선총독부가 대대적인 해산 작업에 나서면서 이 시기 많은 협동조합이 명맥이 끊기게 된다.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협동조합 가운데 제일 유명한 협동조합을 꼽으라면 역시 ‘서울우유협동조합’이다. 1938년 7월 13일자 동아일보는 서울우유가 ‘경성우유동업조합’이라는 이름으로 이틀 전(1938년 7월 11일) 설립 인가를 받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해방 후에도 협동조합은 인기였다. 각 리(里)나 동(洞)마다 ‘이동(里洞)조합’이라는 이름으로 협동조합을 만드는 일이 흔했다. 1957년에는 이를 지원하는 협동조합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협동조합 설립을 사실상 억압하면서, 2012년 협동조합기본법을 다시 만들기 전까지 한국에서 협동조합은 사실상 암흑기를 보내야 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이제 대세는 ‘월세’입니다. 지난해 말부터 부동산 중계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앱) ‘다방’에 올라온 다세대 다가구 및 오피스텔 매물 중 91.2%가 월세였습니다. 서정렬 영산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저금리 기조가 계속되면서 상대적으로 보증금이 낮은 원룸 시장에서 전세의 월세화가 훨씬 빠르게 나타나고 있는 데다 최근 1인 가구도 꾸준히 늘어난 복합적 결과”라고 분석했습니다.그러면 전 세계적으로 비교할 때 한국, 특히 월세는 얼마나 (비)쌀까요? 부동산 검색 업체 ‘렌트카페’에서 전 세계 30개 도시 월세 가격을 조사한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렌트카페는 이 30개 도시가 “‘모리기념재단 도시전략연구소’에서 선정한 ‘세계 도시 경쟁력 지수’에서 가장 흡인력이 높은(magnetic) 도시로 선정한 곳”이라고 소개했습니다.이에 따르면 서울에서는 한 달에 1500달러(약 168만 원)로 129㎡(39평)짜리 집을 빌릴 수 있습니다. 이는 이 30개 도시 중에서 다섯 번째로 넓은 면적입니다. 다른 도시도 살펴보면 터키 이스탄불이 같은 가격에 176㎡로 1위였고, 미국 뉴욕 맨해튼이 26㎡로 가장 적었습니다. 같은 월세로 빌릴 수 있는 면적을 실제 비율로 그려보면 아래 그림과 같습니다.그러니까 이스탄불에서 이 전체 면적에서 살 수 있을 때 맨해튼에서는 주황색 네모밖에 얻지 못하는 겁니다. 이건 ‘절대 숫자’로 계산했기 때문에 소득 수준을 고려하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구매력지수(PPP)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3만4985달러였습니다. 일본은 3만8239달러. 그러면 일본이 9.3% 더 높습니다.월세 1500달러 당 면적은 서울이 129㎡, 도쿄(東京)가 50㎡로 서울이 2.58배 크기 때문에 소득 수준을 감안해도 서울이 도쿄보다는 월세가 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은 지난해 전체 PPP 기준 1인당 GDP가 1만4440달러지만 지역별 편차가 큽니다. 예를 들어 베이징(北京)은 3만4039달러로 한국과 2.8% 차이밖에 나지 않습니다. 베이징에서 임대 가능 면적(133㎡)은 서울보다 3.1% 크니까 엇비슷한 가격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상하이(上海)는 1500달러에 158㎡로 서울보다 22.5% 더 큰 면적을 빌릴 수 있습니다. 지난해 상하이 PPP 기준 1인당 GDP는 3만3560달러로 한국이 4.2% 더 높았습니다. 따라서 상하이는 서울보다 월세가 저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이것도 어디까지나 면적만 따져서 그런 것.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는 1500달러로 서울하고 비교하면 45% 수준인 58㎡밖에 못 얻지만 그 집은 이렇게 생겼을지 모릅니다.제 아무리 숫자가 이렇게 나와도 마음에 드는 집은 모두 비싸기만 한 게 현실. 이 가을 이사를 꿈꾸는 모든 분들이, 가장 가고 싶은 집을, 가장 합리적인 가격에 얻을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부대찌개 종류 중 ‘존슨탕’이라는 게 있다. 음식 대부분이 그렇듯 100% 정확한 유래는 알기 힘들지만 1966년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재임 1963~69) 방한과 관계가 있다는 데 많은 학자가 동의하고 있다. 또 경기 화성 시 송산동의 ‘존슨 동산’ 역시 이 대통령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도널드 트럼트 대통령이 다음달 11일 방한하면 한국은 찾은 역대 11번째 미국 대통령이 된다. 이들 중 이런 식으로 자기 이름을 남기고 간 인물은 존슨 대통령이 유일하다. 51년 전 오늘(1966년 10월 31일) 방한한 그가 한국 땅을 밟고 있던 45시간 동안 그만큼 많은 일이 있었다는 방증이다.● 백악관의 쌀밥과 김치 그리고 베트남 파병존슨 대통령은 1961년부터 존 F 케네디(JFK) 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내다 1963년 JFK가 암살당하면서 대통령 자리를 이어받았다. (1964년 대선에선 공화당 후보 배리 골드워터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대통령이 됐다고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기 때문. 그 중 하나가 베트남 전쟁이었다.때마침 태평양 건너편에 이 전쟁을 경제 발전 토대를 마련하려는 나라가 있었다. 맞다. 바로 한국이었다. 두 나라 사이에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이런 관계는 마음이 변하기 전에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정을 나눠야 ‘비즈니스’가 성사되는 법.존슨 대통령은 1965년 5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을 미국으로 초청했다. 명분은 5·16군사정변 4주년. 존슨 대통령은 에어포스원을 한국으로 보내 박 대통령이 타고 오도록 했으며 워싱턴 중심가에서 카 퍼레이드까지 열어줬다. 나중에 공개된 백악관 문서에 따르면 존슨 대통령은 당시 정부 기관에 ‘빈틈없이’, ‘거창하게’ 박 대통령 환영 절차를 진행할 것을 명령했다. 또 각 신문에 박 대통령에 대한 기사를 크게 취급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백악관에는 쌀밥과 김치를 준비했고, 환영만찬장에서는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1965년 5월 20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당시 워싱턴을 떠나면서 “여기에 오기 전에 나는 자립경제 달성을 위한 한국 노력에, 또 공산 침략에 대항하여 자유를 수호키 위한 우리의 투쟁에 미국이 얼마나 관심과 이해를 가졌는지 의심했지만, 이제 나의 이 두 가지 의구(심)는 해소됐다”고 말했다.이후 한국에서 베트남 파병은 가속도를 냈다. 한국이 처음 베트남 전쟁에 파병한 건 1964년이지만 박 대통령 미국 방문 전까지는 의무(醫務)·건설지원단 등 비전투부대만 사이공(당시 남베트남 수도)을 찾았다. 국회가 전투부대(청룡부대) 파병 동의안을 가결시킨 건 1965년 8월 13일이었다. 이날 국회 본회의에는 여당(공화당)만이 단독으로 참석했다. ● “한국엔 반미주의자가 한 명도 없다.”이듬해 10월 존슨 대통령은 한국을 포함해 아시아 및 오세아니아 7개국 순방길에 올랐다. 인기 없는 전쟁을 수행 중인 미국 대통령이 다른 나라에서 환영받기는 쉽지 않은 일. 존슨 대통령은 가는 나라마다 ‘어제는 죄 없는 아이를 몇 명이나 죽였나?’, ‘존슨 고 홈(Go Home)’이라고 외치는 시위대와 마주해야 했다. 하지만 마지막 방문지였던 한국은 완전 딴판이었다. 1966년 10월 31일자 동아일보는 “존슨 대통령은 곧 박대통령과 검은 리무진차에 동승, 연도를 뒤덮은 180만을 훨씬 넘는 환영인파와 태극기 및 성조기 물결을 헤치며 서울로 들어왔다. 오후 4시 50분. 서울시청 앞 관장에 이른 존슨 대통령은 그곳에서 열린 ‘시민환영대회’에 참석. 수십 만 명이 참석한 대회… 존슨 대통령은 환영대회가 끝난 뒤 박 대통령과 함께 무개차(無蓋車·오픈카)를 타고 중앙청까지 퍼레이드”라고 전했다.다음날 동아일보는 존슨 대통령 일행이 이 환영행사에 무척 흐뭇해했다고 전했다. “빌 모어스 백악관 대변인은 ‘가장 크고 가장 성대하며 가장 열렬한 환영이었다’고 ‘가장’이란 최상급 수식어를 세 번씩이나 썼다”고 한다.열렬한 환영 분위기는 미국 기자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 홍종철 공보부 장관이 개최한 리셉션에서 미국 기자들은 “다른 나라처럼 데모도 없고 ‘존슨 고 홈’의 아우성이 없어 이상하다”고 노석찬 공보부 차관에게 물었다. 노 차관은 “한국엔 반미주의자가 단 한 사람도 없어서 그렇다”고 답했다. ● 낮의 외교, 밤의 외교존슨 대통령은 방문 이틀째였던 그해 11월 1일에는 경기 화성군 태안면 안녕리(현 화성시 안녕동)을 방문했다. 당시 동아일보 표현을 인용하면 이 마을은 “미국에서 원조를 받아 이룩한 ‘모범 부락’”이었다. 당시 태안면사무소는 존슨 대통령이 면 전체를 잘 굽어볼 수 있도록 전망대를 만들고 그 자리에 존슨동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이 자리에는 갓을 쓰고 도포를 쓴 ‘농군 대표’ 최시중 할아버지(당시 65)도 나와 있었다. 최 할아버지를 보자 존슨 대통령은 성큼 다가가 손을 내밀고 기념촬영을 했다.기념촬영을 마친 존슨 대통령을 최 할아버지에게 “미국에 가 보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최 할아버지는 긴 턱 수염을 쓸어내리며 “한번쯤 가보고 싶지만 오늘은 안 되겠다”며 웃었다. 그러자 존슨 대통령은 대신 최 할아버지에게 헬리콥터 10분 비행을 선물했다.이렇게 훈훈한 이야기에 ‘야화(夜話·밤 이야기)’가 빠지면 섭섭한 일. 이동원 당시 외무부 장관이 1992년 펴낸 책 ‘대통령을 그리며’에 따르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부대통령 자격으로 처음 만난 1961년부터 인연을 이어온 두 대통령은 ‘EDPS(음담패설)’를 주고받을 정도로 친했다고 한다. 방한 때 존슨 대통령이 이 장관을 칭찬하자 박 대통령은 “낮의 외교도 잘하지만 밤의 외교는 더욱 능숙하다”고 대답했다. 이에 붙임성 좋기로 유명한 이 장관이 존슨 대통령에게 ‘기생 파티(!)’를 제안했다. 존슨 대통령이 숙소로 쓰던 워커힐 호텔 별채에서 방한 마지막 날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제안한 것. 존슨 대통령도 이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영부인 버드 여사가 눈치를 채는 바람에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이 장관은 회고했다.● 기브 앤드 테이크(Give and take)이렇게 존슨 대통령을 맞이한 이들 중 다수가 ‘동원 인력’이었다는 걸 부인하기는 쉽지 않다. 자료에 따라서는 275만 명을 동원했다는 기록도 찾을 수 있다. 참고로 당시 서울 인구는 350만 명이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원조해주지 않으면 먹고 살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던 당시 한국에서 미국 대통령의 위상은 지금하고는 또 달랐다. 당시라고 한국에 반미주의자가 단 한명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미국 대통령이 많은 한국인들에게 ‘슈퍼스타’였던 것도 사실이었을 터다.이 원조를 공짜로 얻어낸 건 물론 아니었다. 대통령 기록관에 따르면 박 대통령이 1965년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에 파병한 한국군 2000명이 미국 의회에서 원조안을 통과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한국에게는 미국이 필요했고, 미국 역시 한국이 필요했다. 아니, 존슨 대통령에게는 박 대통령이 필요했고, 박 대통령 역시 존슨 대통령이 필요했다. 하나를 받으려면 하나를 줘야 했다.2005년 공개된 ‘한국군 월남 증파에 따른 미국의 대한(對韓) 협조에 관한 주한 미대사 공한’(일명 브라운 각서)에 따르면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철수를 시작한 1973년까지 파병 장병이 국내로 송금한 돈은 총 1억9511만 달러에 달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 돈으로 경부고속도로를 깔았고, 한국 기업 역시 군수물자 납품 등으로 특수(特需)를 누렸다. KAIST가 문을 열게 된 것도 이 두 대통령의 우정(?) 덕분이었다.물론 베트남 전쟁 파병이 100%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파월 장병들이 이 전쟁에서 손에 피를 묻힌 덕에 한국 경제가 한 단계 도약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1964년 103달러였던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974년 541달러로 5배 이상 올랐다.과연 이번 트럼프 대통령 방한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무엇을 내주고 무엇을 얻게 될까.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아재’ 테스트 하나를 해보자. ‘휴거’는 무슨 뜻일까. ①휴먼시아에 사는 거지 ②세상에 종말이 찾아오는 것충격적이게도 요즘 일부 사람들은 휴거를 ①이라는 뜻으로 쓴다. (휴먼시아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서 지은 국민임대주택단지 브랜드 이름이다.) 하지만 1990년대를 몸소 경험한 이들에게 휴거는 역시 종말론이다.‘라이프성경사전’에 따르면 휴거(携擧)는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시 주를 믿고 죽은 성도들이 먼저 부활하고, 그때까지 살아 있는 성도들이 육체의 변화를 받아 공중으로 들어올려져서 주를 만나게 되는 종말적인 사건’을 뜻한다.이 풀이만 보면 신학과 시험에나 어울릴 법하지만 비기독교도 독자 중에서도 이 낱말을 알고 계신 분들이 적지 않을 거다. 19992년 다미선교회 ‘휴거 소동’을 지켜봤기 때문. 이 선교회는 1992년 오늘(10월 28일) 자정에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실제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 소동이 끝난 뒤 다미선교회는 11월 2일 각 신문에 사과 광고를 게재하는 한편 그달 10일까지 헌금 반환 신청을 받겠다고 밝혔다. 해산 당시 이 선교회 신도 숫자는 약 8000명 수준이었으며, 보관하고 있는 헌금은 25억 원 가량이었다.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는 표현에서 이름을 따온 이 선교회를 이끌던 건 이장림(당시 45·개명 후 이답게) 목사였다. 그는 1999년 세상이 멸망할 것인데 ‘요한계시록’에 7년 동안 짐승이 지배한다는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에, 1992년에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날짜를 10월 28일로 특정한 건 이 목사가 ‘어린 선지자’로 지목한 H군이었다. (H군은 나중에 정식 신학 교육을 받은 목사가 됐다.)그래도 이 목사가 ‘확신범’이었다면 휴거를 믿고 그에게 돈과 시간을 가져다 바친 이들이 덜 억울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 목사 본인은 휴거를 믿지 않았다. 휴거 예정일을 한달 가량 앞둔 그해 9월 24일 마약 복용 혐의로 검찰에 붙잡힌 그는 “사실은 나도 10월 28일 휴거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지는 않다”고 실토했다. 심지어 수색 결과 이 목사 집에서 1993년 5월 22일이 만기인 3억 짜리 환매조건부채권(RP)이 나오기도 했다. 1992년 10월 28일에 휴거가 발생할 것이라고 믿었다면 이런 투자를 할 리가 없었다. 이에 대해 이 목사는 “나는 이번 10월 28일의 휴거 대상자가 아니고 ‘환란시대’에도 지상에 남아 순교해야 할 운명”이라며 “이 돈은 그때 활동비로 쓰려고 준비해둔 것”이라고 해명했다. 결국 검찰은 이 목사를 사기 혐의로 구속했고, 법원은 그에게 징역 1년과 2만6000달러 몰수형을 내렸다. 이렇게 휴거 소동이 사기극으로 막을 내렸으니 당시 이 선교회 신도 모두 일상 생활로 돌아갔을까.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국제종교문제연구소’에서 펴내는 월간지 ‘현대종교’에 따르면 이 목사는 또 다른 선교회를 조직해 활동 중이며, 여전히 종말론을 믿는 이들은 그를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다고 한다.종교뿐 아니라 천제물리학 같은 과학 분야에서도 언젠가 우주가 생명을 다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매일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자세로 겸허하게 최선을 다해 사는 태도도 결코 나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종말론은 앞세워 돈이나 성(性) 등을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그 사람과 관계를 끊는 게 구원을 얻는 길이 아닐까.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1987년 오늘(10월 27일) 정부는 개헌 찬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이 투표에는 유권자 72.2%가 참가해 그 중 93.1%가 찬성표를 던졌다. 이날 국민투표를 통과한 헌법이 바로 지금까지 우리가 쓰는 ‘대한민국 제6공화국’ 헌법이다. 이 제9차 개헌 핵심 뼈대는 ‘대통령 직선제 도입’이었다. 동아일보는 ‘직선제 헌법(直選制 憲法) 확정’이라는 제목으로 투표 결과를 보도하면서 대통령 선거를 12월 15일 진행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함께 전했다. 그만큼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국민들 열망이 컸다. 대통령 직선제야 말로 민주화의 표상이었기 때문이다.●민주화로 가는 길1987년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시작한 해였다. 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이던 박종철 열사는 경찰에 끌려가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당해 1월 14일 숨졌다. 하지만 당시 치안본부(현 경찰청)는 이튿날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이 해명을 받아들일 수 없던 동아일보는 그달 16일 처음으로 고문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이튿날에는 ‘외상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고 복부 팽만이 심했으며 폐에서 수포음(거품 소리)이 전체적으로 들렸다’는 검안서 내용을 보도했다. 이 특종 보도로 치안본부는 ‘경관 두 명의 물고문으로 숨졌다’고 털어놓았다. 이후 동아일보는 그해 5월 22일 ‘치안본부 고위 간부들이 비밀회의를 열어 범인 축소, 사건 은폐 조작을 모의했다’, 다음날에는 ‘축소·은폐 조작을 법무부와 검찰 고위 관계자들이 이미 알고 있었다’고 잇달아 특종 보도를 내보냈다. 이 여파로 정부는 그달 26일 국무총리, 국가안전기획부장(현 국가정보원장), 내무부 장관(현 행정자치부 장관),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 등을 모두 바꾸는 개각을 단행했지만 사회적 분노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데모가 잇따르는 가운데 그해 6월 9일 이한열 열사(당시 연세대 경영학과 2년)가 경찰 최루탄에 맞아 결국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튿날 시청 앞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민들로 가득 찼다(6·10 민주항쟁).여기서 호헌(護憲)은 사전적으로 “헌법을 보호하여 지킨다”(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는 뜻. 하지만 여기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그해 4월 13일 ‘개헌 논의를 중단한다’고 발표한 담화 내용을 가리킨다. 민주화 열기에 위축된 여당(민주정의당)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위원(제13대 대통령)은 그해 6월 29일 서울 송파구 가락동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뼈대로 한 개헌 방향을 전 전 대통령에게 제안한다(6·29 선언). 이튿날 전 전 대통령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개헌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진행하게 됐다. 결국 새 헌법안이 통과되면서 대한민국 국민은 1972년 이후 15년 만에 다시 자기 손으로 대통령을 선출할 권리를 얻게 됐다. ● 대통령 간선제와 직선제이승만 박사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만든 건 국회였다. 제헌헌법은 대통령을 간선제로 뽑도록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발췌개헌’을 통해 대선 방식이 직선제로 바뀌면서, 1952년 8월 5일 대한민국 국민은 처음으로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을 뽑게 됐다.1960년 4·19 혁명으로 이 전 대통령이 물러난 뒤 정부 형태가 의원내각제로 바뀌면서 대선 방식도 국회 간선제로 바뀌었다. 이듬해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대통령중심제로 복귀하면서 다시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한다. 1971년 대선 승리로 3연임에 성공한 박 전 대통령은 1972년 ‘유신헌법(제4공화국 헌법)’을 통해 대선 방식을 간선제로 바꿨다. 유신헌법 제45조①은 ‘대통령의 임기가 만료되는 때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늦어도 임기만료 30일전에 후임자를 선거한다’고 돼 있었다. 최규하, 전두환 전 대통령 역시 이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 자리에 앉았다. 문제는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이 헌법 기구가 이름과 달리 통일을 목적으로 하지도 않았고, 주체적이지도 않았으며, 회의도 아니었다는 점. 이 기구는 그저 대통령이 ‘투표 형식’을 빌리기 위한 ‘거수기’에 지나지 않았다.통일주체국민회의는 제5공화국 헌법 도입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의원이 대통령을 뽑는 방식이 달라진 건 아니었다. 이날 국민투표에서 개헌안이 통과되면서 비로소 대통령 직선제가 뿌리내리게 됐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왜 운동회 때는 두 팀을 청군이랑 백군이라고 부르나요? 서로 반대되는 색을 쓰려면 청군 vs 홍군, 백군 vs 흑군 정도가 맞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 C로부터 ‘잡학사전’을 소개 받은 R 정말 감사합니다. ‘몰라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지만 알면 좋은 것을 찾아가는 재미’를 추구하는 잡학사전에 딱 어울리는 질문입니다. 사실 이상하기는 합니다. 미술시간에 배운 ‘보색(補色·반대색)’ 개념을 떠올려 보면 말씀하신 것처럼 ‘청군 vs 홍군’, ‘백군 vs 흑군’이 더 어울려 보입니다. 실제로는 초등학교 때부터 99.9% ‘청군 vs 백군’ 맞대결 구도지만요. 팀을 이렇게 나누는 이유는 ‘오방색(五方色)’ 때문입니다. 네, 박근혜 전 대통령 때문에 유명해진 낱말 그 오방색 맞습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오방색을 “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색”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다음 “동쪽은 청색, 서쪽은 흰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 가운데는 황색”이라고 설명이 이어집니다. 일단 이 그림을 보면 이해가 가시죠? 그런데 사실 이 그림은 원래 뒤집어 그려야 맞습니다. 동양에서는 보통 남쪽이 정방향을 뜻하니까요. 그러면 한번 그림을 뒤집어 보겠습니다. 이러면 왼쪽(좌측)에 동쪽(청색)이, 오른쪽(우측)에 서쪽(백색)이 오게 됩니다. 여기서 나온 그 유명한 표현이 바로 ‘좌청룡 우백호’입니다. 원래 이 표현은 남주작, 북현무로 이어지는데, 주는 ‘붉을 주(朱)’, 현은 ‘검을 현(玄)’을 쓰기 때문에 오방색과 뜻이 통합니다. 이런 구분이 있기에 예전에 차전놀이를 할 때도 팀을 동부, 서부로 나눴습니다. 색깔도 당연히 청색, 백색을 따랐습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아래 사진을 보시면 두 팀이 서로 머리끈 색깔이 청색과 백색인 걸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 전통이 이어져 운동회에서도 팀을 나눌 때 다른 색이 아니라 ‘청군 vs 백군’이 된 겁니다. 그러니 학교 선생님 여러분, 팀을 배치할 때 청군 백군을 엉뚱한 방향에 두시면 아니 됩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정부는 현재 24기인 원자력발전소를 2038년까지 14기로 줄이는 ‘탈 원전 로드맵’을 확정해 24일 발표했습니다. 원전 10기가 줄어들면 발전량도 줄어 들 테고, 그러면 이렇게 부족한 전기를 다른 원료로부터 만들어야 할 터. 이게 가능한지 알아보려면 먼저 현재 한국이 원자력으로 어느 정도 전기를 생산하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겁니다.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따르면 2016년 원자력발전소를 운영하고 있는 나라는 총 31개국입니다. 이들 나라는 (동)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북미에 주로 분포하고 있습니다. 아래 그림처럼 말입니다.이 31개국 가운데 전체 발전량 중 원자력 발전량이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높은 국가는 프랑스입니다. 프랑스는 전체 전기 생산량 중 4분의 3에 약간 못 미치는 비율(72.3%)을 원자력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밖에 슬로바키아(54.1%), 우크라이나(52.3%), 벨기에(51.7%)가 전체 전기 생산량 중 과반을 원자력 에너지로 만들고 있습니다. 한국은 30.3%로 12위입니다.2011년 후쿠시마(福島) 원전 사고를 겪은 일본은 전체 발전량 중 2.2%만 원자력에 의존하고 있죠.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를 경험한 우크라이나는 절반 이상을 원자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도 재미있는 부분입니다.그런데 나라마다 총 전기 생산량이 다르기 때문에 이 비율을 ‘절대 숫자’로 바꾸면 순위도 달라집니다. 이러면 한국은 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원자력 발전량이 많은 나라가 됩니다.제일 눈에 띄는 나라는 역시 미국. 31개 나라 중 유일하게 세 자리 수 원자로(100개)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답게 원자력 발전량도 압도적입니다. 그밖에 눈에 띄는 나라가 있다면 역시 독일이죠. 독일은 2011년 탈 원전을 선언한 뒤 원전 8곳이 가동을 멈추었지만 여전히 전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원자력 발전량이 많은 나라입니다.그렇다고 독일이 소위 신 재생에너지로 만드는 전기가 적은 것도 아닙니다. 세계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독일은 2015년 전체 전기 생산량 중 16.6%를 풍력(8.0%), 바이오연료(5.4%), 태양열(3.2%)로 만들었습니다. 지난해 원전 비율(13.1%)보다 더 많은 양입니다. 탈 원전이 아주 무모한 계획만은 아닌 겁니다.이번에도 비율을 절대 숫자로 바꾸면 2015년 독일이 신 재생에너지로 생산한 전기는 총 16만2487GWh(기가와트/시)입니다. 지난해 한국 원자력 발전량(15만42307 GWH)보다 더 많습니다. 그렇다고 한국이 무조건 독일을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다른 건 차치하고 풍력과 태양열은 국토 면적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독일(35만7114㎢)은 한국(10만339㎢)보다 3.6배 가까이 큰 나라입니다.여기에 탈(脫)석탄까지 변수로 넣으면 계산은 더욱 복잡해집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 과정을 통해 탈 원전, 탈 석탄, 신 재생에너지 확대의 에너지 전환 정책에 대한 국민의 공감대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게 의미 있는 성과”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2015년 IEA 자료를 보면 한국은 전체 발전량 중 42.8%를 석탄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원자력 비율(29.8%)까지 합치면 전체 전기 중 72.6%가 석탄과 원자력에서 나왔던 겁니다. 반면 소위 신재생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1.3%밖에 되지 않죠.물론 정부는 2038년까지 유예기간을 뒀습니다. 또 ‘장기적으로는’ 원전을 대체할 발전 방식을 찾는 게 맞다는 데도 동의하는 분들이 적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도, 그래도 말입니다. 정말 21년이라는 시간이 이 비율을 뒤집기에 충분한지 궁금한 것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아, 참고로 독일은 전체 전기 중 44.4%를 석탄으로 만들고 있습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10월 25일은 프로야구 해태(현 KIA)에 각별한 날이다. 그저 올해 이날 후신인 KIA가 한국시리즈 1차전을 치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팀이 해태라는 이름으로 마지막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른 날이 바로 1997년 10월 25일이다.이 해만 그랬던 건 아니다. 해태가 프로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2연패에 성공한 날도 1987년 10월 25일이었다.여기서 끝이 아니다. 1986년에도 해태가 두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날은 10월 25일이었다.이렇게 10월 25일의 주인공은 해태였다. 당시 해태 감독석에 앉아 있던 건 김응용 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회장이었다. KIA에서 올해 한국시리즈 1차전 시구자로 김 회장을 선택한 게 KIA 팬 관점에서는 ‘참 잘했어요’인 이유다. 그러면 사흘 뒤(28일) 잠실구장에서 열리는 3차전 때 두산은 누구를 시구자로 초대하면 좋을까. 건강만 허락한다면 김인식 현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특보가 제격이다. 두산은 2001년 10월 28일 삼성을 꺾고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당시 두산 감독이 바로 김 특보였고, 삼성 지휘봉을 잡고 있던 게 바로 김 회장이었다. 김 회장을 한국시리즈에서 무릎 꿇게 만든 건 이해 김 특보가 유일하다.그런 인연 속에 과연 올해 KIA와 두산의 한국시리즈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증이 커져만 간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에타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사고 25주년을 맞은 2011년 우크라이나를 찾았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입니다. 저 말 원래 뜻은 그냥 ‘여기는 우크라이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은 “우크라이나는 원래 문제가 많은 곳”이라는 의미로 저 말을 썼습니다. 처음 이 말을 들은 건 도착 이튿날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 숙소로 정한 호텔에서 저녁밥을 먹는데 전기가 나갔습니다. 그 뒤로 나흘 동안 이 식당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취재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면 초를 켜고 밥을 먹었죠. 그러자 한국인 식당 주인이 “체르노빌 원전에서 전기 생산이 중단된 뒤 잠깐씩 전기가 끊어질 때가 있는데 이번에는 오래 간다”며 저 표현을 알려줬습니다. ●우크라이나 전기 54%, 원자력 발전으로 충당 이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더 나빠졌을지 모릅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발전량이 더 줄어들거든요. 2011년에는 전체 발전량이 19만4337GWh(기가와트시)였는데 가장 최신 자료인 2015년에는 16만3682GWh로 19.1%가 줄었습니다. 현대 사회에 전기가 없으면 살기 힘든 건 어디나 마찬가지. 우크라이나 사람들도 해법을 찾으려 했겠죠? 네, 그래서 선택한 수단이 바로 ‘원자력’이었습니다. 네, 제대로 읽으신 거 맞습니다. 우크라이나는 2015년 전체 발전량 중 53.5%(8만7627GWh)를 원자력 발전으로 만들었습니다. IEA 홈페이지에 남아 있는 가장 옛날 자료(1990년 25.5%)와 비교하면 2배 넘게 올라간 비율이죠. 참고로 2011년 후쿠시마(福島) 원전 사고를 경험한 일본의 지난해 원자력 발전 비중은 2.2%입니다. 이렇게 변했다는 건 원자력 발전량 자체도 늘었다는 뜻이겠죠? 물론 발전량 전체가 줄어든 걸 감당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1990년과 2000년 사이에 원자력 발전량 자체도 15% 늘었습니다. 사실 체르노빌 원전 4호기는 1986년 폭발했지만 1~3호기에서 완전히 발전을 멈춘 건 2000년이었습니다. 네, 인류 최악의 원전 사고를 경험한 그 발전소에서 14년 동안 더 전기를 만들었던 겁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현재도 원전 4곳에서 원자로 15기를 통해 전기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체르노빌 사고가 있기 전에 지은 거라 어쩔 수 없이 쓰고 있는 걸까요? 아닙니다. 우크라이나는 2000년대 들어 원자로 2기를 추가했습니다. 흐멜니츠키 발전소는 현재 원자로 2기를 추가 건설 중에 있죠. 건설 기간을 계산에서 빼면 원자로 15기 중 60%(9)가 체르노빌 사고 이후에 발전을 시작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또 국토 중앙에 위치한 치히린에 새 원자력 발전소를 새로 짓는 카드도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체르노빌 사람들 “그래도 원전 필요하다.” 이런 정책이 체르노빌 피해자들에게 큰 상처가 되고 있을까요?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원자력이 없으면 전기가 없다는 뜻”이라는 걸 이들도 받아들이고 있으니까요.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이 발전소 직원용으로 지은 계획도시 프리퍄티에 살던 신카렌코 한나 씨. 그는 그때까지 줄곧 국립 원자력병원으로 치료를 받으러 다녔습니다. 한나 씨는 “사람들은 25년이 지난 아직도 아픈 곳이 있냐고 묻는데 거꾸로 아프지 않은 곳이 있냐고 물었으면 좋겠다”면서도 “전기가 없으면 지금 나도 치료를 받고 있지 못할 거다. 원전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사고 당시 현장을 수습하러 발전소에 들어갔던 재향 군인들(위 사진)도 한 목소리였습니다. 한 달 동안 헬기를 타고 냉각 작업을 벌였다는 나이도노프 볼리디미르 씨는 “한 과학자가 엉뚱한 실험을 하려다 너무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이 사고는 원전 자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실수였다”고 말하기도 했죠.젊은 친구들 생각도 비슷했습니다. 국립 체르노빌 박물관은 체르노빌 사태 수습에 썼던 탱크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 탱크 위에 올라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던 올가 군(위 사진 가운데) 역시 “이 박물관은 똑같은 실수를 하지 말라고 경고를 주는 곳이지 원전을 포기하라고 만든 건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에너지 믹스’가 중요하다 취재한 지 6년도 더 지난 수첩을 꺼내 이 글을 쓰면서 “아몰랑, 원전은 꼭 필요해”라고 말하려는 건 절대 아닙니다. 저 역시 ‘장기적으로는’ 원전이 필요 없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대신 탈원전에 앞서 발전 연료를 다양하게 갖추는 ‘에너지 믹스’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IEA 홈페이지에 올라온 가장 최신 시점인 2015년 기준으로 우크라이나가 실제 발전에 사용한 연료별 비율은 아래 그림과 같습니다. 원자력과 석탄이 전체 발전에서 87.8%를 차지하고 있죠. 풍력(0.7%)이나 태양열(0.3%), 바이오연료(0.1%) 같은 소위 신재생에너지는 보기 힘든 수준. 볼로디미리 흐로이스만 우크라이나 총리(39)도 최근 신 재생에너지 분야 투자를 약속했지만 당장 원자력 의존도를 크게 줄이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면 탈원전을 선언한 2011년 독일은 어떤 비율로 전기를 생산하고 있었을까요? 이번에도 IEA 홈페이지 자료를 토대로 그린 자료입니다. 풍력(8.0%), 바이오연료(5.4%), 태양열(3.2%)만 더해도 16.6%로 원자력(17.6%)과 큰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준비된’ 상태에서 탈원전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겁니다. 2015년이 되면 독일에서는 이 세 가지가 전체 전력 중 25.1%를 생산하게 됩니다. 독일은 이런 변화를 바탕으로 전기 ‘순수출국’이 되기도 했으니 탈핵이 자리잡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 이제 한국을 볼 차례. 역시 IEA 홈페이지 자료 기준입니다. 작아서 잘 보이지 않으실 테니 태양열(0.7%), 바이오연료(0.4%), 풍력(0.2%)입니다. 쓰레기를 태워서 얻는 전기와 민물과 썰물이 만드는 힘을 뜻하는 조력(潮力)으로 만드는 전기도 각 0.1%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탈원전을 선택하는 건 시기상조 아닐까요? 이런 사정을 잘 아셨을 테니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시민참여단도 “진행 중인 원전 건설을 중단하는 급격한 탈원전은 안 된다. 우선 원전 안전성을 높이고 신재생에너지 기술 개발에 힘쓰자. 그 뒤에 차분히 탈원전을 논의해도 늦지 않다”고 결론을 내리셨을 겁니다. 탈원전에도 확실히 준비가 필요합니다.● 석기시대는 왜 끝났을까 “석기시대는 돌멩이가 부족해서 끝난 게 아니다.” 셰이크 아흐메드 자키 야마니 전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은 “석유가 부족해서 석유시대가 끝나진 않을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학 기술 발전이 석기시대를 끝냈듯 석유도 마찬가지 운명을 맞이할 거라는 뜻이죠. 전기 자동차에 이어 전기 비행기 연구가 활발한 데서 알 수 있듯 이미 석유를 전기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전기를 만드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은 원자력입니다. 그게 어떤 기술이나 변화일지 모르지만 저는 “원자력이 위험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원자력 시대도 막을 내릴 것으로 기대합니다. 언젠가 원자력 발전을 비효율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과학 기술이 등장할지도 모르니까요. 아니, 꼭 그런 기술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동아시아는 정말 원자력발전소가 빽빽하게 들어선 지역이라 위험하다면 정말 위험하거든요. 한국에서만 원전이 사라진다고 안전을 보장받기 힘든 이유도 이 그림에 나타납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얼마 전 중국에서 만든 폐쇄회로(CC)TV 카메라를 하나 샀습니다. 놀랐습니다. 1만5000원도 안 되는 제품이었는데 (제가 필요한 기능은) 안 되는 게 없더군요. 그냥 ‘싼 맛에 산다’고 생각했던 게 부끄러울 정도였습니다.그래도 (아직) 저만 그런 건 아닐 겁니다. 인류가 역사상 가장 많이 사용한 영어 표현은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일 테지만, 중국제라고 하면 ‘가격은 싸지만 품질은 떨어진다’는 이미지가 남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면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는 어떨까요? 이제는 한국 제품을 무시하는 사람이 없을까요? 얼마 전 한 일본 사이트에는 ‘삼성과 화웨이(華爲)를 인정하지 않는 녀석이 있을 때 일본이 망해가고 있다고 느낀다’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삼성을 무시하는 건 물론 이 중국 회사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겁니다.어쩐지 분하지만 일본제, 아니 좀더 우리가 흔히 썼던 표현으로는 ‘일제(日製)’에서는 여전히 첨단적인 느낌이 나고, 그래서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것도 분명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범위를 전 세계적으로 살펴보면 어떤 나라 제품이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있을까요? 시장 조사 업체 ‘스태티스타(statista)’에서 이 질문 해답 찾기에 나섰습니다. 스태티스타는 전 세계 42개국 4만3034명을 대상으로 나라별 △제품 품질 △가격 대비 성능(흔히 말하는 가성비) △독창성 △디자인 △기술 첨단도 등을 설문조사해 ‘메이드 인 ○○○ 파워랭킹(Made-In-Country-Index)’을 내놓았습니다. 스태티스타는 “이 42개국 사람들이 전 세계 인구 중 90%를 차지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결과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나라는 독일이었습니다. 독일을 100점으로 둘 때 일본은 81점(8위)을 기록했습니다. 한국은 56점으로 18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중국은 28점으로 30위. 어떻습니까? 평소에 여러분이 각 나라 제품이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비슷하게 나왔나요? 재미있는 건 유럽 국가 중에서 독일과 스위스를 빼고는 모두 유럽연합(EU)보다 파워랭킹이 낮다는 것. (스위스는 EU 회원국은 아닙니다.) 스태티스타는 “‘메이드 인 EU’는 제품 안정성 측면에서 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며 “EU 소속 국가보다 남미 등 다른 나라에서 더 좋은 평가를 받는 것도 특징”이라고 분석했습니다.스태티스타는 각 나라 사람들이 어떤 나라 제품을 1위로 꼽았는지도 공개했습니다. 한국인이 1위로 꼽은 나라는 독일이었습니다. 일본인은 일본을 꼽았고, 중국인은 중국을 꼽았습니다. 일본을 1위로 꼽은 나라는 7개국으로 독일(13개국), 미국(8개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았습니다. 중국을 1위로 꼽은 나라는 물론(?) 중국뿐이었습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가장 존경하는 독립 운동가는?’ 이렇게 묻는 설문에서 1위를 하지 않으면 오히려 뉴스가 되는 인물이 바로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이다. 그랬으니 백범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 씨(1917~96·사진 왼쪽) 목숨을 노리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게 당연한 일. 1996년 오늘(10월 23일) 버스 기사 박기서 씨(당시 47·사진 오른쪽)가 마침내 그 뜻을 이루고야 말았다. ‘거사’를 계획하면서 박 씨가 선택한 무기는 나무 몽둥이(홍두깨)였다. 그는 시장에서 길이가 40㎝ 정도 되는 홍두깨를 사서 매직으로 ‘정의봉’이라고 쓴 다음 안 씨 집에 쳐들어가 그를 때려죽였다. 평소 백범 선생 책을 열심히 읽었다는 박 씨는 경찰에 자수한 뒤 “이 하늘 아래에서 (안 씨와)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안 씨가 (백범 선생 암살 배후가 누구였는지) 진실을 밝히지 않아 분개를 느껴 범행했다”고 말했다. 현역 군인 신분이던 안 씨가 백범 선생을 저격한 건 1949년 6월 26일. 당시 이승만 정권에서는 안 씨 단독범행이라고 발표했지만 그때부터 배후가 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안 씨는 1992년 4월 13일자 동아일보를 통해 김창룡 당시 특무대장(1920~56)의 사주를 받아 백범 선생을 암살했다고 증언했지만 이후 몇 차례 말을 바꾸면서 신빙성에 물음표가 따라 붙었다.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말 바꾸기에 분개한 박 씨가 안 씨 목숨을 빼앗으면서 정말 백범 선생 암살에 배후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누구였는지는 영영 역사 속에 묻히게 됐다. 물론 이미 시한부 선고를 받았던 안 씨가 끝내 진실을 밝히고 세상을 떠났을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사건으로 박 씨는 대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 받았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 시절인 1998년 3·1절 특사로 수감 1년 5개월 만에 출소했다. 박 씨는 이후에도 친일 성향 평론가 김완섭 씨(54) 구타 사건 등으로 언론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지난달 제왕절개로 쌍둥이를 얻었습니다. (축하 댓글 미리 감사드립니다.) 제왕절개를 두 부분으로 나누면 ‘제왕(帝王)’과 ‘절개(切開)’가 됩니다. 절개라는 표현을 쓰는 건 산모 배를 가르는 수술을 하기 때문일 터. 그러면 여기 등장하는 제왕은 도대체 누구일까요?영어 표현에 힌트가 들어 있습니다. 제왕절개를 영어로는 ‘Caesarean(또는 Cesarean) Section’이라고 부릅니다. 이게 왜 힌트냐고요?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00~기원전 44) 그러니까 영어명 줄리어스 시저의 성(姓)을 알파벳으로 쓰면 ‘Caesar’거든요. 그저 우연이 아닙니다. ‘영어사전의 영어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옥스퍼드 사전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 방법으로 태어났다는 이야기에서 이 표현이 유래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그러면 제왕절개에서 제왕은 정말 카이사르인 걸까요? 아니니까 이 글을 쓰고 있겠죠?일단 카이사르가 제왕절개로 태어났다는 근거가 빈약합니다. 카이사르가 제왕절개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근거로 삼는 건 10세기에 세상에 나온 ‘수다(The Suda)’라는 백과사전입니다. 카이사르가 세상에 나온 지 1000년이 지난 다음 나온 이 책은 어머니가 임신 9개월째 숨졌지만 이 수술법 덕분에 카이사르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이 책은 라틴어로 ‘자르다’는 동사가 ‘caedere’였기 때문에 카이사르가 이런 이름을 얻게 됐다는 이야기도 소개하고 있습니다.심지어 많은 영웅이 알을 깨고 나오듯 카이사르가 죽어가는 어머니 배를 가르고 나왔다고 전하는 버전이 있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신화적 상상력이 너무 뛰어났다 스튜핏’입니다.일단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 코타(기원전 120~기원전 54)는 스무 살에 이 막내아들을 낳고도 46년을 더 살았습니다. 이게 중요한 사실인 이유는 예전에는 제왕절개를 하면 엄마는 죽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어차피 엄마는 죽을 테니 아이라도 살려보자’고 마지막 수단으로 선택하는 게 제왕절개였습니다.왜 엄마는 죽었을까요? 다른 모든 걸 떠나 당시 사람들은 지금처럼 마취하는 법을 몰랐습니다. 과학 시간에 배우는 대표적 마취제 ‘클로로포름’이 세상에 나온 게 1847년입니다. 흔히 돼지를 거세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던 스위스 사람 자코브 누페르가 1500년경 처음으로 아내와 아이를 모두 살리는 제왕절개에 성공했다고 하지만, 1881년만 해도 제왕절개를 시도한 산모 중 85%(영국 기준)가 숨졌습니다. 어떤 백과사전에는 카이사르가 제왕절개로 태어난 첫 번째 사람이라고 돼 있기도 합니다. 당연히 사실과 거리가 있습니다. 최소한 기원전 3세기에는 제왕절개로 사람이 태어난 기록이 있거든요. 카이사르 이전에도 사람들이 임신부 배를 가르면 아이는 살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게 확실합니다. 각종 신화에 제왕절개 형태로 태어난 신(神)이 등장한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게다가 카이사르는 이름이 아니라 성(정확히는 가문명·cognomen)입니다. 카이사르의 아버지 이름 역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3세)’였습니다. 할아버지 이름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2세)’입니다. 이렇게 가문명을 물려받았는데 갑자기 제왕절개 때문에 카이사르가 카이사르가 됐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카이사르 조상 중 누군가 이런 방식으로 태어났을 수는 있지만 그게 우리가 아는 그 카이사르는 아닌 겁니다.그러면 왜 제왕절개를 뜻하는 영어 낱말에 카이사르가 들어가게 된 걸까요? 위에서 보신 것처럼 라틴어로 ‘자르다’는 동사가 ‘caedere’였기 때문일 확률이 높습니다. 누마 폼필리우스 왕(기원전 753년~기원전 673년)이 통치하던 시절 로마는 이미 ‘렉스 카에사레아(Lex Caesarea)’라는 법령을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이 법령은 임신부가 숨지면 아이를 배속에서 꺼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법령을 만든 건 당시 사람들은 엄마와 아이가 땅에 같이 묻히는 걸 불경스럽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간혹 카이사르가 이 법을 처음 시행해 제왕절개를 제왕절개라고 부른다는 의견도 보이는데 이 역시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종합하자면 그냥 ‘(어머니 배를) 가른다’는 뜻으로 이 수술에 ‘Caesarea’를 썼는데 하필 카이사르가 제왕의 대명사다 보니까 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누군가 착각했을 개연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아마도 한국에 이 낱말을 전했을 일본에서도 ‘테이오우셋카이(帝王切開·제왕절개)’라고 쓰고, 독일어로도 ‘카이저’가 들어간 ‘카이저슈니트(Kaiserschnitt)“가 제왕절개를 뜻합니다. (카이저 자체가 카이사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참고로 ’서울 통계표‘에 따르면 지난해 신생아 중 41.5%가 제왕절개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는 서울시에서 자료를 공개하기 시작한 2007년(36.0%)과 비교하면 5.1%포인트 늘어난 숫자입니다.아, 마지막 보너스. 시저 샐러드(Caesar Salad)는 이탈리아계 미국인 시저 카르디니(1896~1956)가 요리법을 개발해 이런 이름이 붙었을 뿐 카이사르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마니또 놀이’는 이제 직접 해본 적이 없는 사람도 대부분 어떻게 하는지는 알고 있는 ‘국민 게임’이 됐다. 하지만 1985년만 해도 낯선 놀이였다. 김순덕 동아일보 기자(현 논설주간)는 그해 오늘(10월 18일)자 신문에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 늘 관심을 두고 편지나 선물을 보내면서 격려하는 ‘마니또’ 놀이가 최근 여학생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다”며 이 놀이를 소개했다. 1920년 창간한 동아일보에 ‘마니또’라는 세 글자가 등장한 건 이 기사가 처음이었다. 이 기사는 한국 언론 역사상 처음으로 마니또 놀이를 소개한 기사일 개연성이 높다. 한국언론진흥재단 기사통합검색(KINDS) 서비스에서 찾아보면 다른 신문에는 동아일보보다 2년 늦은 1987년이 되어서야 이 낱말이 등장한다. 단, KINDS에서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기사는 찾을 수 없다. 동아일보를 제외한 두 회사 인터넷 홈페이지 검색 결과 업체명을 제외하면 2000년 이후에야 마니또라는 낱말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럼 이 마니또는 무슨 뜻일까. 당시 동아일보는 “‘마니또’란 스페인어로 ‘애인’이라는 뜻으로 학생들 사이에는 ‘애인 같이 상대방을 생각하고 아껴주는 친구’를 의미한다”고 풀이했다. 그런데 스페인어로 애인을 뜻하는 낱말이라면 노비오(novio·남자친구), 노비아(novia·여자친구) 등을 먼저 떠올리는 게 보통이다. 한국말로 ‘자기야’처럼 부를 때는 ‘카리뇨(cari¤o)’가 일반적이다.그렇다고 저 문장이 사실과 다른 건 아니다. 은어, 속어, 인터넷 유행어 등을 풀이하는 서비스 ‘어반 딕셔너리(urbandictionary.com)’에 따르면 마니또(manito)에는 ‘나를 배신하지 않을 친구’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스피킹라티노닷컴(speakinglatino.com)이라는 사이트에서도 니카라과, 도미니카공화국, 멕시코에서 친구를 뜻하는 속어(slang)로 마니또를 쓴다고 소개하고 있다. 누가 어떻게 이렇게 널리 쓰이지 않는 낱말을 알게 돼 한국에 들여왔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세상 아주 없는 말을 지어내지는 않은 셈이다.또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이 기사가 1985년에 나온 덕에 마니또를 마니또로 쓸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듬해(1986년) 국립국어원에서 제정한 외래어 표기법은 “파열음 표기에는 된소리를 쓰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만약 이 말이 요즘 등장했다면 ‘마니토’라고 써야 했을 확률이 높다. 이탈리아에서 건너 온 아이스크림을 ‘젤라토’라고 써야 옳은 것처럼 말이다. 이 표기법에는 “이미 굳어진 외래어는 관용을 존중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기 때문에 일단 마니또를 마니또로 써도 무방하다. 그런데 왜 하필 스페인어였을까. 순전히 추측하건대 어쩌면 스페인어를 쓰는 볼리비아에서 건너 와 당시 인기를 끌던 가수 임병수 씨 영향도 있지 않았을까. 그저 ‘응답하라 1988’에서 ‘아이스크림 사랑’에 들어 있는 스페인어 가사를 유창하게 따라하던 성덕선(이혜리 분), 류동룡 때문에 생긴 착각일까. 물론 이 기사는 ‘아이스크림 사랑’이란 노래를 들으며 썼다. 이 노래에서도 마니또가 아니라 카리뇨를 부른다. “카리뇨 미오, 소모스 도스, 이 투, 이 요, 엘 파하로 이 라 플로르, 이 투, 이 요, 란사모스 엘 아모르, 이 투, 이 요, 디렉토 알 코라손, 알 코라손, 카리뇨 미오, 소모스 도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