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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0월) 11일 오후 3시 5분 평양 능라도 5·1 경기장. 박종환 한국팀 감독(앞줄 왼쪽)과 명동찬 북한 감독을 선두로 남북 선수단이 마주 잡은 손을 높이 치켜들고 입장, 15만 관중의 함성과 어우러져 재회의 기쁨과 통일의 염원이 가득했다. 분단 이후 처음 열린 이날 남북통일축구 1차전은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남북통일축구 1차전 소식을 전한 1990년 10월 12일자 동아일보 1면 사진과 사진 설명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일부). 물론 여기서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는 건 비유적 표현일 뿐 사실과는 다르다. 실제로는 북한이 2-1로 이겼다. 문제는 이기는 과정이었다. 양 팀은 1-1로 전·후반 90분 경기를 마쳤다. 그러나 북한 측 주심이 추가 시간에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안타깝고 어처구니없는 10초였다”고 소제목을 달고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밝은 낯으로 서로의 등을 토닥거리며 함께 통일의 한 걸음을 내디뎠다고 말하려는 순간 주심의 페널티킥 호각소리가 분위기를 깨고 말았다. 스탠드의 많은 관중과 본부 측의 북측 인사 및 선수, 한국 관계자들까지도 1-1의 무승부를 기꺼워하며 그대로 경기가 끝나기를 바라는 순간이어서 (북한 측) 장석진 주심의 페널티킥 선언은 5·1 경기장의 화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1-2로 역전된 순간 본부석의 김유순 북한체육위원회 위원장, 김형진 부위원장의 낯빛도 침통해졌다. 관중들의 호응도 크지 않아 보였다. 김형진 부위원장은 ‘무승부가 훨씬 좋은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시했고 경기장을 빠져나가던 한 평양 시민은 볼멘소리로 ‘개운치가 않다’고 했다.” 경기 결과 자체가 중요하지 않았는데 주심이 ‘과잉 충성’ 했다는 얘기였다. 선수들 역시 승부에 집착하지 않았다. 이 경기에서 전반 25분 선제골을 넣은 ‘야생마’ 김주성은 경기 직후 “화해 분위기를 고려해 내가 골을 넣은 후에는 사실상 골문을 열어줬다”고 말했다. 두 팀은 12일 뒤인 그달 23일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다시 맞붙었다. 이번에도 남한 황선홍이 선제골을 넣었다. 그래도 목표는 여전히 ‘무승부’였다. 1990년 10월 24일자 동아일보는 “한국 선수들은 (황선홍의 득점) 이후 더 이상 골을 욕심내지 않는 모습을 보였고 북한은 후반 들어 관중들의 일방적인 성원 속에 윤정수 김광민 김윤철 등이 몇 차례 결정적인 슈팅을 했으니 골로 연결되지는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결국 2차전에서 남한이 1-0으로 승리하면서 남·북한은 1승 1패로 남북통일축구 대회를 마쳤다. 당시 남·북한 축구 관계자 사이에서 이 대회를 정례화하자는 이야기가 오갔지만 다시 이 대회가 열린 건 12년이 지난 2002년이었다. 당시 한국미래연합 대표를 맡고 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02년 5월 12일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북한 축구 대표팀을 초청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김 위원장이 이를 수락하면서 부산 아시아경기 개막을 앞두고 있던 그해 9월 7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남·북 대표팀이 맞대결을 치렀다. 이 경기는 0-0 무승부. 2005년에도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평양에서 김 위원장을 만나 ‘광복 60주년 기념 축구 대표팀 맞대결’을 제안해 광복절 하루 전인 8월 14일 역시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남북통일축구대회가 열렸다. 남한의 3-0 승리. 그 후로 다시 12년이 흘렀지만 네 번째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아쉽게도 요즘 신문을 보고 있노라면 ‘남·북한 모두가 승자’인 경기를 다시 보려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 모양이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1983년 10월 9일은 동남아·대양주 순방을 떠난 전두환 당시 대통령(86)이 첫 방문지였던 버마(현 미얀마)에 도착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전 대통령 일행은 이날 오전 버마 수도 랑군(현 양곤)에 있는 ‘버마의 국부(國父)’ 아웅산 장군(1915~47)의 묘지를 참배할 예정이었다. 위 사진은 정부 각료들이 아웅산 묘지에서 대통령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장면이다.안타깝게도 이 사진은 이들이 이승에 남긴 마지막 사진이 됐다. 이 사진을 찍고 나서 바로 몇 초 후 북한에서 설치한 폭탄이 터졌기 때문이다. 맨 앞줄에 자리 잡은 8명 중 맨 왼쪽에 있는 이기백 당시 합동참모의장, 그리고 사진 뒤쪽 맨 왼편에 보이는 최재욱 청와대 공보 비서관 등 두 명 만 목숨을 건졌고 나머지는 모두 세상을 떠났다.북한에서 원래 노렸던 ‘타깃’은 물론 전 대통령이었다. 원래 전 대통령은 이날 10시 30분에 이 묘지에 도착할 예정이었지만 차량 정체로 도착이 늦어지면서 대통령 부부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전 전 대통령이 도착하기 전 북한 테러범들이 폭탄을 터뜨린 이유는 뭐였을까. 이에 대해서는 아웅산 묘지에 제일 먼저 도착한 이계철 당시 주 미얀마 한국 대사가 전 대통령과 비슷한 헤어스타일(?)이었던 걸 이유로 꼽는 이들이 많다. 안경까지 써 전 전 대통령과 더욱 비슷해 보이는 이 대사가 태극기가 펄럭이는 고급 승용차에서 내리자 버마 나팔수가 진혼곡(‘애국가’였다는 의견도 있다) 연주를 시작했고, 북한에선 이 나팔 소리를 테러 기점으로 잡았기 때문에 폭탄을 먼저 터뜨렸다는 것이다.함병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도착한 걸 보고 북한 공작원들이 전 대통령이 도착한 것으로 착각했다는 의견도 있다. 보통 비서실장은 대통령과 함께 움직이는데다 함 실장 역시 전 대통령과 헤어스타일(?)이 유사했기 때문이다. 이 설(說) 역시 버마 나팔수가 먼저 착각했고 북한에서 나팔 소리를 기점으로 폭탄을 터뜨린 것으로 설명한다.이 자리에서는 동아일보 사진부 소속이던 이중현 기자도 순직했다. 이 기자는 당시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취재차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에 파견 갔다 돌아온 지 한 달 만에 ‘풀(pool) 기자’로 대통령을 따라 나섰다가 변을 당했다. 동아일보는 사건 발생 사흘 후인 그달 12일자 지면을 통해 이 기자가 생전에 찍었던 사진을 간추려 소개했다. 그러면서 “폭발 마지막 순간까지 사진을 찍다 산화한 고 이 기자의 마지막 작품은 카메라가 부서져 싣지 못해 안타깝다”고 밝혔다. 이 기자는 출국 전 카메라 렌즈를 새 걸로 바꾸면서 “가장 깊이 있는 사진을 찍어 오겠다”고 주변에 말했지만 끝내 사진을 세상에 선보이지 못했다.1983년에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현재 동아일보 기자들 역시 이 기자의 얼굴을 알고 있다. 지금도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 14층 동아일보 편집국에는 다른 순직 기자 두 명과 함께 이 기자의 사진이 걸려 있어서다. 맨 위 사진 촬영 당시 앞줄에 서 있던 사람 중에서 합참의장이던 이기백 대장만 살아남은 건 그가 장교 정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육군사관학교에 전시 중인 이 옷에 붙어 있는 각종 금속제 휘장, 약장이 방탄복 구실을 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 이 사건 때 중상을 입은 이 대장을 긴급 후송한 인물이 훗날 특전사령관을 지내는 전인범 당시 중위(예비역 육군 중장)였다. 전 전 특전사령관은 올해 2월 ‘문재인 캠프’ 합류하려다 “우리 집사람이 비리가 있었다면 권총으로 쏴 죽였을 겁니다”라는 발언에 끝내 발목이 잡혔던 인물이기도 하다.심상우 의원은 국회의원으로는 유일하게 이 테러 때 목숨을 잃었다. 심 의원은 당시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자격으로 전 대통령과 동행했다. 민정당 총재가 바로 전 대통령이었다. 심 의원은 방송인 심현섭 씨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호남(광주) 출신인 심 씨가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돕는 등 보수적인 정치색을 드러냈던 게 이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케이블카의 정지는 상징적이다. 차단된 의식의 흐름은 새로운 국면을 마련해 준다. 괄호로 묶여진 ‘어쩌면 의도’는 동일한 차원의 시간이 적용되어지지 않는 새로운 영역을 요구하는 챕터이다. 그리고 ‘오! 수정’의 전체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는 특권적인 챕터이다. 심리적 주관성이 닫히고 형이상학적인 시간의 차원이 열리게 되는 것은 정확히 케이블카가 멈추는 그 순간부터이다.”김영찬 씨는 200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가작 당선작 “수정의 이름으로 - ‘오! 수정’”에 이렇게 썼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영화적 상징일 뿐 현실에서 케이블카가 멈추는 건 참 곤혹스러운 경험이다. 1984년 10월 7일 서울 남산 케이블카를 탔던 승객 77명은 이 말을 절감할 것이다. 케이블카가 공중에서 5시간 동안 멈추는 바람에 “허기와 공포에 떨었기” 때문이다.당시 동아일보에 따르면 케이블카가 멈춘 건 이날 오후 2시 15분경이었다. 상하행선이 출발 1분 후 출발점에서 250m 지점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멈춰섰다. 처음에 케이블카 운행 업체는 정전 때문이라고 안내했지만 사실은 기계제품 고장이 문제였다.결국 회사 측은 케이블카가 멈춰서고 1시간 45분이 지난 오후 4시경부터 1인용 구명자루를 통해 탑승객을 한명씩 실어 내렸다. 이 과정에서 도르래가 기울어지면서 로프가 벗겨지는 바람에 38세 여성과 3세 남아의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다. 남산에 케이블카가 처음 다니기 시작한 건 1962년 5월 12일이었다. 개통식 소식을 전한 이튿날 동아일보에 따르면 당시 왕복 요금은 성인 기준으로 400환(40원)이었다. 당시 시내버스 요금이 5원이었으니 8배 비쌌던 것. 현재도 8500원으로 버스 요금 8배 수준이다.남산 케이블카는 개통 초기에 한번 타려면 2~3시간은 기다려야 할 만큼 인기였다. 그러다 1990년대 후반부터 내리막길을 걸었다. 다시 인기가 살아난 건 각종 연속극에 등장하면서 중국인 관광객들이 찾기 시작한 덕분. 현재까지 이 케이블카를 탄 사람은 연인원 1700만 명이 넘는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올 추석에는 ‘진짜 보름달’이 뜨지 않았다더니, 이번에는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게 아니라니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요? 사실 이 제목은 거짓말입니다. 달은 지구 주위를 도는 게 맞습니다. 아래 그림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제목을 왜 그렇게 지었냐고요? 그건 달이 지구를 도는 동안 지구도 태양 둘레를 돌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지구 관점에서 보면 달이 지구 둘레를 도는 게 맞지만, 태양 관점에서 보면 달은 지구 둘레를 돌지 않습니다.일단 ‘잡학사전의 본좌’라 할 수 있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이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볼까요?하늘색 선이 실제로 달이 지구 주위를 움직이는 경로입니다. 태양을 도는 지구에 ‘타고 있는’ 우리가 볼 때는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공전궤도 안팎으로 S라인을 그리면서 달이 따라오는 모양새입니다. 애니메이션으로 설명해 드리자면 지구가 까만 점선을 따라 움직일 때 달은 빨간 선 모양으로 움직입니다.여기서 퀴즈. 그러면 태양을 중심으로 달이 공전하는 궤도를 그리면 아래 그림 중에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까요?바로 위 애니메이션이 힌트였습니다.④가 정답입니다. 좁게 보면 S라인을 그리면서 안팎을 오가는 것 같지만 태양계로 범위를 넓혀 보면 원형에 가까운 모양새를 띄게 됩니다. 또 여러분이 이해하기 편하실 것 같아 S라인을 과장해 그리기도 했습니다. 보름 동안 실제 지구와 달이 태양 둘레를 보는 경로를 그려보면 이렇게 나타납니다.이제 또 여러분께 거짓말한 걸 사죄할 때가 됐습니다. 달이 지구하고 거의 비슷한 궤도로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게 거짓말은 아닙니다. 태양이 가만히 멈춰있는 것처럼 설명한 게 거짓말입니다.태양도 우리 은하계 중심을 기준으로 공전합니다. 자연스레 태양계에 속한 천체들도 태양을 따라 움직이겠죠? 우리는 보통 태양계를 볼 때 태양을 중심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보지만 실제 태양은 아래 그림 같은 각도로 움직입니다.그러면 태양계는 어떻게 따라 움직일까요? 아래 애니메이션이 정답입니다.태양이 돌면서 공전하는 게 아닙니다. 태양 공전 궤도(노란선)를 중심으로 카메라를 회전시키는 것처럼 만든 애니메이션입니다. 각 색깔 선은 행성별 이동경로. www.rhysy.net 캡처 멋있죠?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우리 은하는 또 대우주를 중심으로….요컨대 세상에 괜히 ‘우주적인 기적’이라는 표현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 우주적인 기적이 쌓이고 쌓여 이번 추석을 함께 보낸 그 분(들)과 만나게 된 겁니다. 그러니 혹시 추석에 보름달을 보고 소원을 빌지 못하셨다면 아래 보름달 사진을 보시면서 그 분(들) 안녕을 기원해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물론 여러분이 이 글을 읽게 되신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우주적인 인연’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소중한 인연 맺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들 평안하시고, 남은 연휴도 행복하게 보내세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혹시 이 우주적인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싶으시다면 페이스북 fb.com/bigkini에서 저를 찾아주시면 됩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그 남색 유니폼은 동네 꼬마들 모두의 심장을 쿵쾅 뛰게 만들었다. 학교에 누군가 (보이) 스카우트 유니폼을 입고 오면 너나 할 것 없이 항건(스카프) 끝을 잡고 빙빙 돌리기 바빴다. ‘잼버리’라는 낯선 낱말 역시 스카우트 출신 얼굴에는 옅은 미소로 퍼진다. 인정하자. 그 시절 우리는 누구나 스카우트를 꿈꿨다.이렇게 한국 소년들 가슴에 ‘로망’으로 남은 스카우트는 언제 한반도에 들어왔을까. 정답은 1922년 오늘(10월 5일)이다.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중앙고교) 체육 교사였던 조철호 선생(1890~1941)은 ‘조선소년척후단’을 조직하고 이날 발대식을 열었다. 동아일보에서는 그해 10월 7일자에 이 발대식 소식을 전했다.당시 동아일보는 조 선생이 “영국에서 처음 이(스카우트) 운동이 일어난 후 세계 각국에서 채용해 많은 효과를 얻었고 현재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회원이 800만 명이 이른다. 자유와 의를 존중하는 점에서는 오히려 압제적인 군대 교육보다 낫다는 평가가 있다”며 “더욱이 조선 소년 같이 나약한 소년은 크게 이런 운동을 장려해 용감하고 고상한 기풍을 기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보이스카우트를 처음 만든 건 로버트 베이든 포우엘 영국 육군 중장(1857~1941)이었다. 그는 1908년 ‘소년들을 위한 정찰법(Scouting for Boys)’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을 읽은 소년들이 자발적으로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스카우트 운동’이 벌어지게 된다.군인이 처음 이 운동을 시작한 만큼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스카우트 대원을 정말 소년 정찰병으로 활용하는 일도 있었다. 한반도에 처음 스카우트가 들어올 때 ‘척후단’이라는 썼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다 캠핑처럼 일상적인 야외 할동을 추구하는 바뀌면서 군대 색깔이 빠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아예 ‘요즘 군대는 (너무 편해서) 완전 보이스카우트야’ 같은 말을 들을 수 있는 정도가 됐다.기억력에 정말 자신 있는 스카우트 출신 독자라면 지금 한번 다음 구절을 얼마나 기억하고 계신지 확인해 보시라.나는 나의 명예를 걸고 다음의 조목을 굳게 지키겠습니다.첫째, 하느님과 나라를 위하여 나의 의무를 다하겠습니다.둘째, 항상 다른 사람을 도와주겠습니다.셋째, 스카우트의 규율을 잘 지키겠습니다.아, 물론 엄지로 새끼손가락을 잡고 나머지 세 손가락만 펴는 손 모양은 잊지 않으셨으리라 믿는다. 그럼 준비!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긴 글을 시작하기 전 먼저 세 줄 요약부터.1. 고조선은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기 전부터 고조선이었습니다.2. 음력을 양력으로 바꾸는 건 생각보다 어렵습니다.3. 우리가 단군 할아버지 얼굴을 알고 있는 데는 동아일보도 한 몫 거들었습니다.●고려 시대 책에 왜 고조선이 등장할까오늘은 개천절입니다. 개천절은 단군 할아버지가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터 잡으시고’ 고조선을 세우셨다는 날. 학창시절에 배운 것처럼 고조선은 원래 나라 이름이 조선이지만, 태조 이성계(1335~1408)가 세운 조선(1392~1910)과 구분하려고 앞에 옛 고(古)를 붙여서 고조선이라고 한다고 알고 계신다면 사실은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왜냐하면 조선 이전인 고려 시대 승려 일연(1206~1289)이 지은 ‘삼국유사’에 이미 고조선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정말입니다. 삼국유사 중 기이(紀異) 제1편 제목이 ‘고조선 왕검조선’입니다. 삼국유사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자료 중에서 단군(왕검)이 처음 등장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단군은 처음부터 조선이 아니라 고조선을 세운 셈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요? 일연이 정말 뛰어난 스님이라 자기가 세상을 떠나고 46년 뒤에 세상에 들어설 나라 이름이 조선이라는 걸 미리 예상한 걸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우리가 고조선이라고 부르는 시대는 크게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제는 많은 학자들이 ‘기자(箕子)조선은 실존하지 않았다’고 인정하지만, 기원전 194년 위만(衛滿)이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조선 정권을 장악했다는 건 정설입니다. 이렇게 나중에 위만조선이 들어섰기에 일연을 이를 단군(왕검)조선과 구분하려고 고조선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고조선은 이씨 조선보다 빨라서 고조선이 아니라 위씨 조선보다 빨라서 고조선입니다. ●개천절은 왜 ‘양력’ 10월 3일일까 아무 날짜나 골라서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정한 건 아닙니다. 함경도 지방 등에서는 음력 10월 3일에 단군 탄생일을 축하하는 ‘향산제(香山祭)’라는 제사를 올리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양력 10월 3일로 개천절 날짜를 못 박기 전에 대종교에서는 개천절을 음력으로 기념해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습니다(아래 사진). 그런데 왜 당시 정부에서는 음력을 양력으로 바꿔서 기념일로 정하지 않았을까요? 당시에는 음력을 양력으로 바꿔주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없어서 기원전 2333년 음력 10월 3일을 양력으로 바꾸기 어려웠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때도 사람들은 음력을 양력으로 바꿀 줄 알았습니다. 한글날이 10월 9일인 건 훈민정음 해례본을 펴낸 1446년 음력 9월 10일을 양력으로 바꾼 결과물입니다.문제는 과거로 갈수록 해(양력)와 달(음력)의 정확한 움직임을 계산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그런 이유로 한국천문연구원에서 제공하는 음양력 변환 서비스는 1391년까지만 계산할 수 있도록 돼 있습니다. 기원전 2333년은 이 해로부터도 3724년 전입니다. 그러면 날짜를 바꾸는 것 자체가 별 의미가 없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흔히 음력이라고 부르는 ‘시헌력’도 1644년이 되어서야 처음 쓰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게다가 개천절이 음력 10월 3일이라는 것도 100% 신뢰할 만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닌 게 사실. 그래서 당시 문교부에서는 ‘10월 3일이라는 날짜가 중요하다’고 결론짓고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삼았습니다.● 4350년 전 단군 할아버지 얼굴은 어떻게 알까이렇게 우리는 기원전 2333년 음력 10월 3일이 양력으로 언제인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단군 할아버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마음먹으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으실 터.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가장 객관적인 이유는 물론 ‘정부표준영정’ 때문입니다. 정부는 1978년 홍숙호 화백이 그린 단군 초상화를 표준영정으로 지정했습니다(아래 사진). 이 영정은 현재 서울 종로구 단군성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홍 화백도 무엇인가 보고 그렸겠죠?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전 동아일보를 보면 사람들이 단군 할아버지 얼굴을 계속 궁금해 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습니다. 1920년 4월 1일 창간한 동아일보는 열흘 뒤인 그달 11일부터 창간 첫 사업으로 ‘단군 영정 현상 공모’를 실시합니다. 동아일보에서는 이 영정을 그해 10월 3일 공개할 예정이었지만 그해 9월 26일 일제로부터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기에 해당 날짜에 신문을 펴내지 못했습니다. 대신 1922년 11월 21일(음력 10월 3일)자 지면에 단군 영정이 등장합니다. 이 기사는 단군 영정을 어디서 가져왔는지 밝히고 있지 않아 공모전 당선작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가져온 사진인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단, 이 영정은 국내 최고(最古) 단군 영정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부여천진전단군화상(扶餘天眞殿檀君畵像)’과 닮아 있습니다. 단군은 동아일보 창간호에도 등장합니다. 동아일보 창간 멤버였던 김동성 기자(1890~1969) 창간호 3면에 삽화(아래 그림)를 그렸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 동아일보라고 쓴 띠를 두른 갓난아이가 단군유지(檀君遺趾)라는 액자를 잡으려 하고 있고 있습니다. 아, 한국 정부는 1948년 9월 25일 ‘연호에 관한 법률’을 제정함에 따라 단군기원, 즉 단기를 국가 공식 연호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1940~60년대 자료를 보다 보면 지금 우리가 쓰는 서기가 아니라 단기로 날짜를 표시한 건 그런 이유입니다. 단기를 사용하지 않게 된 건 1962년 이후입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국을 이뤄 승리한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는 패전국이던 독일 영토를 넷으로 나눠 점령했다. 기본적으로 아래 그림처럼 독일 영토를 나누되 소련 점령지 안에 있던 수도 베를린만 다시 4개국이 나눠 점령하는 방식이었다.그 후 미국 영국 프랑스는 자신들이 점령한 영토를 합쳐 새로운 독일 정부를 수립하자고 의견을 모았지만, 소련은 이를 거부했다. 그래서 세 나라가 점령한 지역은 서독이 됐고, 소련 점령지는 동독이 됐다. 이후 동독 정부는 자국 안에 있는 서독 영토인 서베를린으로 사람들이 건너가지 못하게 철조망을 쳤다. 이 철조망은 나중에 ‘베를린 장벽’이 됐다.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건 1989년 5월(이하 현지시간)이었다. 역시 사회주의 국가였던 헝가리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면서 오스트리아와 맞닿은 국경에 있던 철조망을 제거한 것. 이 소식을 들은 동독 주민 1000여 명이 서독으로 망명하려는 생각을 품고 헝가리로 여행을 떠났다. 이들이 국경을 넘을 때 헝가리 국경경비대가 묵인하면서 이들은 결국 서독으로 넘어갈 수 있었고, 그 후로 계속 동독 주민들은 국경을 넘어 서방 세계로 이동하게 된다. 이런 흐름이 이어지자 동독 정부는 민심을 수습하려 ‘여행 허가에 대한 출국 규제 완화’에 대해 발표했다. 당시 사회주의통일당 대변인 귄터 샤보프스키는 1989년 11월 9일 TV에 출연해 “외국 여행의 조건을 제시하지 않고 여행 허가를 신청할 수 있다. 경찰의 여권, 등록 부서는 모든 출국 비자를 지체 없이 발급하도록 지시한다. 동독 국민은 베를린 장벽을 포함하여 모든 국경 출입소에서 출국이 인정된다”고 발표했다. 사실 이건 착각이었다. 원래 그가 발표했어야 할 마지막 문장은 “국외 이주에 대해 동서독 국경 혹은 동서 베를린의 모든 검문소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잘못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 기자회견에서 ‘시행령이 언제부터 발표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지체없이’라고 답했다. 사실은 이튿날 아침부터 발효될 예정이었다.이 방송을 본 동베를린 시민들이 하나둘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왔다. 원래 이 법률은 여권과 비자를 발급하는 기준을 완화하겠다는 내용일 뿐 여권과 비자가 필요 없게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방송 내용만 보고 “국경이 지금 당장 개방됐다”고 받아들였다. 언론도 그렇게 보도했다. 이날 오후 10시경에는 1만 명이 넘는 이들이 국경 경비소로 몰려들었다. 이미 국경경비대에서 통행 허가증을 일일이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결국, 국경경비대는 조용히 현장에서 물러났다. 이튿날 새벽이 되자 동베를린 사람들은 아예 중장비를 가져와 베를린 장벽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국경 지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차를 몰고 온 사람들이 차례차례 국경을 넘었다. 그렇게 하룻밤 사이에 동서독 국경은 의미를 잃어버렸다.이날 이후 동독 군대와 경찰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동독 정부는 통제력을 상실했다. 결국 이듬해 3월 동독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자유선거를 실시했다. 이 선거에서 ‘가능한 한 가장 빨리 통일하자’고 주장한 ‘독일연합’이 승리하면서 통일에 가속도가 붙었다.결국 원래 동독 지역에 있던 5개 주(州)가 부활해 ‘독일연방공화국’에 가입하는 형식으로 통일 방안이 결정됐다. 이로써 법적으로 동독은 서독에 흡수된 게 아니라 공중분해 됐다. 독일 정부는 1990년 10월 3일 0시를 기해 공식적으로 ‘통일’을 선언했다. 독일이 공식적으로 다시 한 나라가 된 지 27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여전히 옛 서독 지역이 △소득 수준도 높고 △실업 수준은 낮고 △젊은 인구도 더 많다. 통일 당시 동독과 서독의 임금 격차는 약 1대3 수준이었다. 현재 남·북한은 최소로 잡아도 약 1대8 정도다. 많은 전문가가 한반도에 통일 국가가 들어선다면 독일보다 더한 후유증을 겪을 확률이 높다고 전망하는 이유다. 아직 남북통일의 길은 멀고 험해 보인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사실 일제강점기 때 신문 광고는 엄청 ‘야했다.’한번 일제강점기 때 여성 제품 광고는 어떻게 생겼을지 상상해 보시라. 그러면 아래 ‘박가분’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기 쉬운 게 사실이다.그래서 80년 전 오늘(9월 30일) 동아일보에 실린 ‘중장탕(中將湯)’ 광고는 눈을 의심스럽게 만든다. (아마도 정구복 차림을 한) 여성이 맨 다리를 그대로 내놓은 채 야릇한 미소를 띄고 있기 때문이다.이 중장탕은 일본 도쿄(東京)에 있던 츠무라준텐도(津村順天堂·현 츠무라제약)에서 수출하던 제품이었다. 지금도 같은 이름으로 팔리고 있는데 이 회사 홈페이지에 따르면 △산전·산후 장애 △생리 불순 △냉증 △불면증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이렇게 사진이 등장하기 전에는 그림이 있었다. 1925년 5월 28일자 동아일보에는 ‘하루나’라는 피부질환치료제 광고가 나갔다. 아래 그림에서 보시는 것처럼 ‘벌거벗은 여성 상반신’이 디자인 콘셉트였다.이렇게 나체를 콘셉트로 하던 시대에 ‘누드 사진집’ 광고도 빠질 수 없었다. 이듬해 6월 17일자 지면에는 ‘여자의 나체미의 신 연구’라는 제목으로 일본에서 만든 서양 여성 누드집 광고가 실렸다.이렇게 ‘야한 시대’에 성병 약 광고까지 등장했다. 매독 치료제 ‘푸로다’는 아예 전면광고를 내걸었다.꼭 성병약이 아니더라도 사실 일제강점기에는 의약품 광고가 제일 많았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개화기부터 1930년대까지 신문·잡지 광고를 분석한 ‘근대 광고에 나타난 상품의 유형’ 자료를 보면 1930년대에는 전체 광고 1339건 중 66.5%(890건)가 의약품 광고였다. 1920년대에도 51.6%(898건 중 463건)가 마찬가지였다.의약품 광고가 많았다는 건 당연히 그 시절 사람들도 지금 우리처럼 자신이나 가족 건강을 챙겼기 때문. 그건 교육열도 마찬가지였다. 1938년 7월 13일에 실린 이노우에(井上) 통신영어학교 광고는 “윗사람이 되고 싶은 분, 입신출세(立身出世)를 희망하는 제군은 영어만은 꼭 배워두십시다”라고 외치고 있다.이 학교 역시 소재지는 도쿄였다. 그러면 당시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통신 수단으로 영어를 공부했을까. 정답은 ‘편지’였다. 영어 학습지를 풀어 도쿄로 보내면 첨삭지도해 보내주는 방식이었다. 당연히 시간이 적지 않게 걸렸을 테지만 이 회사는 신문에 꾸준히 1면 광고를 낼 만큼 성장을 계속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일단 해외 여행객이 가장 많이 찾은 도시는? ‘태국 방콕’입니다.세계적인 신용카드 회사 마스터카드는 2016 회계연도를 기준으로 해외 여행객이 가장 많이 찾은 도시를 선정해 26일(현지 시간) ‘마스터카드 글로벌 데스티네이션즈 시티스 인덱스 2017(Mastercard Global Destinations Cities Index 2017)’이란 이름으로 발표했습니다이에 따르면 지난해 방콕을 찾은 해외 여행객은 약 1941만 명으로 나타났습니다. 태국 통계청은 지난해 방콕에는 928만 명이 살았다고 밝히고 있으니 인구 두 배 가까운 여행객이 해외 여행객이 방콕을 찾아왔던 겁니다. 사실 이 숫자는 오히려 2015년(2147만 명)에 비하면 약 200만 명이 줄어든 숫자. 그래도 방콕은 2년 연속으로 해외 여행객이 가장 많이 찾은 도시였습니다.영국 런던이 1906만 명으로 뒤를 이었고 그 다음으로는 △프랑스 파리(1545만 명)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1487만 명) △싱가포르(1311만 명)까지가 전 세계 5위 안에 이름을 올렸죠. 1239만 명이 찾은 서울은 미국 뉴욕(1270만 명)에 이어 전 세계 7위를 차지했습니다. 서울은 2015년 10위(1020만 명)였는데 일본 도쿄(東京)와 터키 이스탄불,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를 제치면서 순위를 끌어올렸습니다. 마스터카드는 2017년에는 서울에 1244만 명이 찾아 뉴욕(1236만 명 예상)을 앞질러 6위에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카드 회사답게 마스터카드는 사람들이 각 도시에서 어떤 분야에 돈을 쓰는지도 조사했는데 서울은 사람들이 쇼핑에 돈을 쓰는 비율(56.5%)이 가장 높은 도시였습니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건 해외 여행객이 가장 많이 찾은 도시 10곳 중에서 6곳(관점에 따라 이스탄불을 포함하면 7곳)이 아시아 도시라는 점입니다. 마스터카드는 “2016 회계연도 기준으로 해외 여행객이 아시아에서 쓴 돈은 총 911억6000만 달러(약 104조7428억 원)로 유럽(747억4000만 달러)과 북미(550만2000 달러)보다 많았다”고 밝혔죠.만약 원하는 목적지로 어디든 여행을 보내준다고 하면 저는 유럽이나 북미에 있는 도시를 고를 겁니다. 많은 독자 분들 역시 저하고 같은 생각이실 터. 하지만 이미 전 세계적인 대세는 아시아입니다. 여러분이 꼭 가보고 싶은 도시는 어디인가요?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22년 전 오늘(9월 28일)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 제목을 나중에 유행어가 된 말로 바꾸면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당시 동아일보는 데뷔 5년차 배우였던 이병헌() 인터뷰 기사를 내보내면서 <액션-코믹연기 “척척‘ 「전천후 게릴라」 꿈꾼다>고 제목을 붙였다.이 제목은 정말 현실이 됐다. 이제 이병헌은 역할과 장르를 불문하고 대한민국 최정상 배우로 손꼽힌다. 가수 싸이가 부른 ’I Luv It‘에서 브레이크 댄스 실력을 선보였던 그는 개봉을 앞둔 영화 ’남한산성‘에서는 ’현실주의자‘ 최명길(1586~1647) 역을 맡아 열연했다. 이병헌은 1995년 당시 동아일보 기자와 인터뷰에서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스크‘의 짐 캐리처럼 표정만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연기를 시도해 보고 싶다“고 했다. 이 바람과 꼭 맞아떨어지진 않지만 그는 2009년 ’G.I. 조‘를 통해 할리우드에 데뷔하면서 ’할리우드 영화에서 무술하는 동양인 남성은 감정 표현과 대사가 거의 없다‘는 공식을 깨드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이미 한국과 일본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 배우였지만 할리우드에서는 조연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 영화 평론가는 ”많은 동양 배우들이 아시아 시장을 타깃으로 한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기 바쁘다. 그래서 정작 미국 주류인 백인 사회에서는 그 배우가 누군지 모르는 일도 허다하다. 이병헌은 조연이더라도 주류 시장을 공략한 영화 위주로 출연했다“며 ”이제 이병헌은 꼭 동양인이 아니어도 되는 배역에 캐스팅되는 배우로 성장했다“고 평했다. 이병헌은 2016년 아카데미 시상식 때 시상자로 무대를 밟기도 했다.당시 동아일보 기사가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이병헌은 데뷔 때만 해도 ”국어책을 읽는 듯한 대사, 딱딱한 표정연기가 동료 신인들 눈에도 우습게 보이던“ 배우였다. 그러나 이제는 영어 발음까지 좋은 배우로 성장했다. 역시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전략적으로 목표를 향해 노력하면 안 될 일도 되게 마련이다. 확실히 이제까지 이병헌의 배우 인생은 ’한국, 미국, 액션, 코믹, 성공적!‘이다.※기자에게는 자신이 기사로 쓴 인물과 함께 성장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보람이다. 기사 본문을 쓴 박원재 기자는 현재 동아닷컴 대표이사, 사진을 찍은 이훈구 기자는 동아일보 사진부장이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단언컨대 국회 회의록 어디에도 이보다 ‘섹시한’ 한 줄은 없다. 누구나 한번쯤 위정자들을 향해 내뱉고 싶었지만 차마 내뱉을 수 없던 그 말. 어쩌면 ‘장군의 아들’ 김두한 의원(1918~72·당시 한국독립당)이 아니었다면 국회 본회의에서 감히 외칠 수 없던 말. 그 말은 바로…. 그리고 김 의원은 정말 정일권 국무총리(1917~94),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1916~77·한국일보 사주) 등을 향해 똥물을 뿌렸다. 1966년 9월 22일, 나중에 역사가들이 ‘국회 오물투척사건’이라고 이름 붙인 순간이었다. 당시 동아일보에 따르면 김 의원은 똥을 양철통에 담은 뒤 마분지로 포장해 이를 들고 이날 오후 12시 45분경 질문자로 단상에 올랐다. 그 후 1시 5분경 “부정과 불의를 합리화시켜준 장관들을 심판하겠다”며 단상 앞에 나와 포장지를 풀었다. 그러면서 “이것은 밀수 사카린인데 국무위원들에게 맛을 보여줘야겠다”며 포장지 위에 있던 흰가루를 국무위원들에게 뿌리고 이어 똥을 뿌렸다. 이 마지막 발언에 김 의원이 똥을 준비한 이유가 드러난다. 바로 ‘밀수 사카린’이다. 당시 삼성 계열사였던 한국비료공업은 그해 5월 흔히 설탕 원료로 쓰는 사카린(새커린)을 일본에서 밀수하려다 덜미가 잡혔다. 새커린 2259포대(약 55t)를 건설 자재로 꾸미려다 들통이 난 것. 당시 박정희 정권은 밀수를 ‘5대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삼성과 유착 관계였던 군사정권은 밀수품을 압수하고 벌금을 부과하는 것으로 사태를 정리하려 했다. 그러자 국회에서 ‘특정재벌 밀수 사건에 관한 질문’ 안건을 통과시키며 조사에 나섰다. 김 의원이 똥을 뿌린 건 대정부 질문 이틀째였다. 김 의원은 사건 다음날 자택을 찾아간 동아일보 기자에게 “내가 던진 오물은 내각 국무위원 개인에게 던진 게 아니라 헌정을 중단했고 밀수 사건을 비호하고 있는 제3 공화국 정권에 던진 것”이라며 “문제의 오물은 순국선열의 얼이 서린 파고다 공원(현 탑골공원) 공중변소에서 퍼낸 것”이라고 했다. 충격이 컸던 만큼 효과도 확실했다. 정부에서는 정 총리를 비롯한 내각이 총사퇴했고, 이병철 당시 삼성 회장도 한국비료와 대구대를 국가에 헌납하면서 은퇴를 선언했다. (다만 이 회장은 2년 뒤 다시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동아일보 만평 ‘고바우 영감’은 이 만평 10주년 기념 지면(1969년 12월 30일자)에서 이 사건을 회상하면서 “적군 일개 대대를 섬명할 수 있는 것보다 더한 위력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김 의원도 책임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국회의원 자리를 잃고 서대문형무소에 구속·수감됐다. 형무소에서 할복 소동을 벌이기도 했던 그는 1년 뒤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이후 두 번 다시 ‘금배지’를 달지 못한 채 1972년 숨을 거뒀다. 공교롭게도 그가 세상을 떠난 1972년 11월 21일은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한 날이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한 메이저리그 스카우트가 KIA 투수 양현종(29)에 대해 작성한 스카우팅 리포트(사진)가 19일 프로야구 TV 중계화면에 잡혔습니다. 빠른 공(FB) 40, 커브(CB) 40, 슬라이더 50, 체인지업 40이라고 평가했네요. 이렇게 점수를 매기면 흔히 0~100점 사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는 20~80점 범위만 씁니다. 왜 그럴까요? 정답은 ‘정규분포’ 때문입니다. 네, 수학 시간에 배우는 그 정규분포 맞습니다. 평균을 50점, 표준편차를 10점으로 정규분포 그래프를 그리면 아래 그림처럼 나타납니다. 이때 비율은 해당 구역에 전체 표본 중 몇 %가 들어있는지를 나타냅니다. 20 아래와 80 너머에는 각 0.1%밖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20~80점만 써도 전체 표본 중 99.8%를 커버할 수 있는 거죠. 스카우트 사이에선 20~80점을 아래와 같은 뜻으로 씁니다. 80: 아주 뛰어남(Outstanding) 70: 뛰어남(Well-above-average) 60: 평균 이상(Above-average) 50: 메이저리그 평균(Major league average) 40: 평균 이하(Below-average) 30: 부족함(Well-below-average) 20: 매우 부족함(Poor) 팀에 따라서는 이 숫자를 10으로 나눠 2~8점을 기준으로 삼는 팀도 있습니다. 그래도 의미는 똑같습니다. 20~80점은 스카우트 사이에서 ‘링구아 프랑카(공용어)’입니다. 여기서 잠깐. 지금부터 길고 지루하게 역사적 배경과 20~80점이 야구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설명할 예정입니다. 이런 내용은 알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1)아래 추천을 눌러주시고 다른 기사를 읽으시거나 2)천천히 스크롤을 아래로 내리시다가 마음에 드는 그림이 나오는 부분부터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누가 먼저 썼을까 아, 계속 읽기로 하셨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은 행운이 가득한 하루가 될 겁니다. 물론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처음부터 이런 기준을 썼던 건 아닙니다. 처음에는 당연히 ‘말’로 리포트를 적었습니다. 선수 스카우트라는 건 원래 주관이 많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법. 그냥 말로 하면 상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차리기가 더욱 어려울 겁니다. 그다음에는 평균을 A로 두고 평균보다 좋으면 A+, A++, A+++…, 나쁘면 A0, A00, A000…처럼 등급을 매기는 방식을 썼지만 헷갈리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럴 때는 확실히 숫자가 편합니다. 야구 역사학자들이 스카우트에 처음 숫자를 도입한 인물로 제일 많이 거론하는 건 브랜치 리키 전 브루클린(현 LA) 다저스 단장(1881~1965)입니다. 리키 단장은 마이너리그에서 메이저리그로 이어지는 현재 팜(farm·선수 육성) 시스템을 고안한 인물입니다. 타고난 능력을 뜻하는 ‘툴(tool·도구)’ 역시 리키 단장이 처음 사용한 개념입니다. 단, 리키 단장은 0~60점 범위를 썼습니다. 리키 단장 제자로 역시 다저스 살림을 맡았던 알 캄파나이스 단장(1916~98)은 60~80점 범위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학교 선생님처럼 생각했던 거다. 70점을 통과 기준으로 삼고 80점 이상이면 우등생, 60점 아래면 낙제생이라는 생각으로 접근했던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다가 1974년 메이저리그 17개 구단이 각출해 스카우트 사무국(MLB Scouting Bureau)을 만들면서 20~80 시스템이 자리를 잡게 되죠. 이 사무국 초대 수장을 맡았던 짐 윌슨 전 밀워키 단장(1922~86) 아이디어였습니다. 당시 부국장을 맡았던 돈 프리스 전 볼티모어 스카우트(90)는 “윌슨 국장과 ‘어떻게 하면 표준화된 평가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까 브레인스토밍을 하다가 이 개념을 떠올렸다. 세월이 흘러서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윌슨 국장이 먼저 세상을 떠나 물어볼 사람도 없다. 하늘에 가서 꼭 물어보겠다”며 웃었습니다. ●도대체 정규분포로 어떻게 평가할까? 물론 그렇다고 스카우트가 ’저 선수 커브는 메이저리그 평균보다 1 표준편차만큼 뛰어나니 60점을 줘야겠다‘고 평가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평가가 쌓이면 쌓일수록 정규분포를 향해 가는 방식입니다. 사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은 시행 횟수를 늘리면 점점 정규분포에 가까운 모양이 됩니다. 예를 들어 이론적으로 동전을 100번 던지면 앞면은 50번이 나와야 합니다. 단, 실제로 동전을 100번을 던졌다고 해서 꼭 50번이 나오라는 법은 없습니다. 실제로 앞면이 나오는 확률은 아래 그림처럼 분포합니다. 어떻습니까? 정규분포를 닮았죠? 여기서 중요한 건 우리가 동전을 던지면 앞면이 나올 확률이 2분의 1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찬가지로 메이저리그 스카우트가 되려면 50점 그러니까 평균이 뭔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스카우트 사무국은 1989년부터 12일짜리 스카우트 양성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교육 과정 상당 부분을 이 50점을 보는 눈 기르기에 할당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 각 점수를 주는지 세세한 내용도 정해두고 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교육 방식은 이미 스타가 된 선수가 예전에 어떤 점수를 받았는지 되돌려보는 것. 또 스카우트 지망생은 유망주가 있다면 현재 스타인 어떤 선수와 비교해 보라는 지시도 받게 됩니다. 어떤 툴은 아예 객관적인 범위를 정해 놓고 모든 스카우트가 공통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아래 표는 스카우트닷컴에서 찾은 예시입니다. 이 표에는 20이 없습니다. 스카우트닷컴에서는 “어떤 항목이든 20을 받을 정도면 스카우트는 관심이 없다고 봐야 한다. 20을 쓰는 건 뚱뚱한 타자가 아주 발이 느릴 때 정도뿐”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스카우트가 야수를 평가하는 항목은 그 유명한 파이브(5)툴. 이 다섯 가지는 △타격 능력(Hitting Ability) △파워(Power) △스피드(Running Speed) △어깨(Arm Strength) △수비력(Fielding)입니다. 투수는 위에 나온 것처럼 빠른 공, 커브, 슬라이더 그리고 나머지 주요 구종에 대해 20~80점으로 점수를 매기게 됩니다. ●정규분포 또 언제 쓸까 정규분포는 야구 선수 스카우트 때처럼 평가 때 자주 씁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등에서 표준점수를 구할 때 쓰는 것 역시 정규분포입니다. ’등급제 수능‘에서는 성적이 상위 몇 %에 속하는지를 구하고(백분위) 이를 평균 50, 표준편차를 20으로 하는 정규분포에 대응해 표준점수를 구했습니다. 이 표준점수가 어떤 구간에 속하는지에 따라 등급을 결정했죠. 정규분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독일 출신 수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1777~1855)입니다. 가우스는 소행성을 찾다가 이 분포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정규분포를 ’가우스 분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혹시 포토샵 같은 프로그램으로 그래픽 작업을 하시다가 이미지를 흐리게 하는 ’가우시안(Gaussian) 필터‘ 같은 용어를 보신 적 있으신가요? 네, 이 필터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 역시 정규분포입니다.양현종 원본 사진(왼쪽)과 가우시안 필터를 적용한 사진. 동아일보DB 정규분포를 발견한 가우스에 대한 독일인들 자부심이 남다를 게 당연한 일. 독일에서 유로를 도입하기 전에 쓰던 10마르크 지폐에는 가우스와 함께 정규분포 그래프가 들어 있었습니다(아래 사진). ’학창시절에 정규분포를 야구 선수를 스카우트할 때 쓴다는 것만 알려줬어도 수학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했었을 텐데…‘하고 아쉬움이 드는 건 저 혼자만이 아니겠죠?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김지향 시인은 1977년 9월 20일자 동아일보에 ‘아파트 추첨과 불임수술“이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썼다. 여기서 아파트는 서울 반포 주공 2단지. 불임 수술이 등장하는 건 당시 주공(현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서 이 아파트 3800가구를 분양하면서 ①해외취업자로서 불임 시술자 ②불임 시술자 ③해외취업자 순서로 우선권을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김 시인은 이를 두고 ”해외토픽 감으로 전파를 타고 번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지적한 뒤 ”불임시술 조건은 주공이 그 본래의 사명에서 이탈한 일종의 월권행위며 젊은 이 나라 부부에게 내 집 마련의 기회를 박탈하는 처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역설적으로 풀이한다면 반포 아파트에는 앞으로 가정의 별이며 꽃이라 할 수 있는 어린이의 웃음소리를 듣기 힘들게 될 것이며 마치 양로원이나 인간 무덤을 방불케 할 것이니 이 얼마나 삭막한 풍경이겠는가. 안타깝기만 하다“고 썼다. 물론 김 시인 걱정은 기우였다. 이제 재건축을 통해 자취를 감춘 반포 주공 2단지는 마치 양로원이나 인간 무덤을 방불케 하는 삭막한 풍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어떻게든 아파트를 분양받겠다는 목표는 60대 남성들까지 기꺼이 수술대에 눕게 했다. 다음은 김 시인이 쓴 칼럼이 나간 다음 날 동아일보에 실린 독자 칼럼 ’불임만이 상책인가‘ 중 일부를 옮긴 것이다. ”불임시술을 하지 않아 이번 분양신청에서 4순위로 밀리고 나니 ’마이 호움(홈)‘의 꿈이 깨어지는 것 같아 속이 상한다. 10년 전에 남매를 낳은 후 나는 남편과 합심해 피임 등 여러 방법으로 가족계획을 하고 있다. 불임수술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솔선하여 가족계획을 하고 있는 선의의 무주택 서민을 감안하지 않은 이 원칙이 과연 공정한 것일까. 더구나 7자녀든 8자녀든 많은 아이를 갖고 있어도 불임시술만 하면 2순위로 올려주고 무자녀라도 하지 않으면 4순위로 떨어뜨리는 이 원칙 때문에 회갑을 넘긴 할아버지들이 수술을 받는 기현상까지 빚고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이러고도 불임시술이 인구 억제책의 보도(寶刀)가 될 수 있으며 주택분양의 대원칙이 될 수 있을까.“ 물론 중장년층 남성들이 꼭 자기가 살 집을 구하려고 불임수술을 받는 건 아니었다. ’분양권 전매‘는 그때도 유효한 돈벌이 수단이었던 것. 그해 9월 17일 동아일보 횡설수설은 ”세상이 각박하니 인심이 야박 서러운지, 인심이 야박하니 세상이 각박해지는지 알 수는 없으나 조금이라도 이득이 된다고 생각하면 남에게 뒤질세라 아귀다툼을 벌이는 풍토가 적지 않다“고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이어 ”아파트 입주 신청에 있어 불임 수술자에게 우선권을 주자 요즘 각 보건소에는 가족계획과는 별 상관이 없는 50, 60대의 노인들까지 몰려오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중략) 불임 수술자 중에는 자기가 입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례를 받고 대리 신청을 하기 위한 사람도 있는 모양이니 세상인심을 알 만하다“고 전했다. 이제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거꾸로 자녀가 많아야 아파트를 분양받기 유리한 세상. 그래도 결혼 전 정관수술을 받는 미혼 남성이 한둘이 아니다. 맞다. 옛날이라고 그저 아이를 많이 낳고 싶었던 건 아닌 것처럼, 지금 우리도 무조건 아이를 적게 낳고 싶은 게 아니다. 그렇다고 아이를 키우고 싶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아이들과 살고 싶다. 그것도 아주 잘 살고 싶다. 그때나 지금이나 위정자들은 이 지점을 늘 놓친다. 그래서 각종 정책에서 어린이는 늘 ’부모의 부속물‘이 되고 만다. 이 방향이 바뀌지 않는 한 젊은 세대는 ’아이를 낳지 않는 방식‘으로 윗세대에 대한 ’파업‘을 계속 이어갈지 모른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뉴욕) 양키스는 미키 맨틀 때문에 이기는 거야.”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 중에서 네, 그렇게 데릭 지터(43) 이전에 미키 맨틀(1931~95)이 있었습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 스위치 타자’(상대 투수에 따라 타석 방향을 바꾸는 타자)로 손꼽히는 맨틀은 1951년부터 1968년까지 양키스에서만 뛰었고, 그가 뛰는 동안 양키스는 월드시리즈에서 7번 우승했습니다. 맨틀은 여전히 통산 월드시리즈 최다 홈런(18개) 기록 보유자입니다. 올해 이승엽(41·삼성)이 그런 것처럼 맨틀도 1968년 먼저 은퇴를 예고한 뒤 경기를 치렀습니다. 그해 양키스가 속한 아메리칸리그 최강팀은 디트로이트였습니다. 이 팀 에이스 데니 맥클레인(73)은 현재까지 메이저리그 역사상 마지막 30승 투수로 남아 있습니다. 1968년 오늘(9월 19일) 두 선수는 디트로이트 안방 구장 ‘타이거 스타디움’에서 마지막 맞대결을 벌였습니다. 디트로이트가 6-1로 앞선 8회초 맨틀이 마지막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디트로이트 포수 짐 프라이스(76)가 마운드로 올라갔습니다. 경기장을 찾은 관중 9063명이 맨틀에게 기립박수를 보낼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준 것. 그때 맥클레인이 프라이스에게 말했습니다. “하나 선물하면 어떨까요?” 여기서 선물은 홈런이었습니다. 프라이스는 자기 자리로 돌아와 타석에 있던 맨틀에게 “선물 하나 드리겠다”고 말했습니다. 맨틀은 믿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그럴 만했습니다. 맥클레인은 투구 솜씨는 빼어났지만 사생활에는 문제가 있던 투수였으니까요. 맥클레인은 은퇴 후에 마약 소지, 횡령 등으로 교도소를 들락거렸는데 현역 시절에도 승부욕 때문에 괴팍한 행동을 벌이곤 했습니다. 하지만 프라이스가 빙긋이 웃으며 마운드를 바라보자 맨틀도 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몸쪽 높은 공으로 부탁해. 너무 빠르게는 말고.” 그해에 9이닝 당 볼넷을 1.7개밖에 내주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제구력을 자랑했던 맥클레인은 정말 그렇게 던졌습니다. 맨틀이 홈런성 파울을 두 번 날리자, 맥클레인은 더더욱 진심을 담아 느린공을 몸쪽 높게 던졌고, 맨틀은 결국 외야 관중석 2층에 떨어지는 대형 홈런을 날렸습니다. 프라이스는 2009년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맨틀이 베이스를 도는데 맥클레인이 박수를 치더라. 2루 베이스를 돌 때 (2루수) 댁 매컬리피(1939~2016)가 따라서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나중에는 모든 팀원들이 박수를 보냈다. 맨틀은 홈플레이를 밟고 나서 내게 고마워했다”며 “그런데 다음 타자 조 페피톤(77)이 ‘나도 하나 달라’고 얘기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당신은 미키 맨들이 아니잖아’하고 답했다. 그래도 맥클레인에게 얘기를 전했는데 머리 쪽으로 위협구가 날아오더라”며 웃었습니다. 이날 경기는 결국 디트로이트가 6-2로 이기면서 끝났고 맥클레인은 완투승으로 시즌 31번째 승리를 기록했습니다. 경기 후 인터뷰실로 들어오는 그에게 기자들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평소 언론과 사이가 나빴던 선수에게는 드문 일. “일부러 홈런을 맞아준 거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나는 전력을 다해 던졌지만 맨틀이 정말 잘 쳤다”“고 답했습니다. 맥클레인이 맨틀에게 홈런을 선물하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당시 그가 통산 534홈런으로 지미 폭스(1907~67)와 동률이었기 때문. 이 통산 535호 홈런으로 맥클레인은 메이저리그 통산 최다 홈런 역대 공동 3위(당시 기준)에서 단독 3위로 올라섰습니다. 맨틀은 이튿날 안방 경기에서 생애 마지막 홈런을 날리면서 통산 536홈런(현재 18위)으로 커리어를 마감했습니다. 맥클레인은 1975년 자서전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Nobody’s Perfect)‘를 펴내면서 이날 포수가 당시 디트로이트 주전 안방 마님이던 빌 프리한(76)이었다고 잘못 적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 에피소드가 세상에 나올 때마다 진짜 이날 포수였던 프라이스가 아니라 프리한이 등장하곤 하죠. 은퇴 후 18년 동안 TV 해설위원으로 활약한 프라이스는 ”그 전에도 그 이후로도 은퇴를 앞둔 위대한 타자에게 그런 선물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다른 선수들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미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한 상태였고 경기에서도 크게 이기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홈런을 치라고 공을 던진다고 다 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게 다 잘 맞아떨어진 날이었다“고 회상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런 우연이 바로 우리가 필연적으로 ’야구의 낭만‘을 사랑하는 이유일 겁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음식을) 먹고 난 뒤의 그릇을 씻어 정리하는 일”은 ‘설·거·지’라고 써야 맞습니다. 이번 기회에 꼭 기억에 두세요. 설거지는 ‘설거지’입니다. 절대 ‘설겆이’가 아닙니다!이렇게 강조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설거지를 설겆이라고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글 쓰는 게 직업인 기자 중에도 차고 넘칩니다.도대체 왜?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요? 그건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네, 제대로 읽으신 게 맞습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설거지를 설거지라고 마음 편히 못 쓰는 겁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받아쓰기를 잘해야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듣지만, 공부깨나 했다는 분 가운데서도 맞춤법이라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언어학적으로는 아예 학력이 높을수록 자주 틀리는 낱말이 따로 있습니다.설거지가 대표적으로 이런 낱말입니다. 설거지를 설거지라고 쓰면 ‘굳이’를 ‘구지’라고 쓰는 것처럼 낱말을 소리 나는 그대로 쓰는 듯한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받아쓰기 시험 때 이런 건 보통 오답이게 마련. 그래서 우리 머릿속에 들어 있는 언어 체계가 ‘세련되게’ 설겆이라고 쓰라고 잘못 지시하는 겁니다. 이런 현상은 넓은 의미에서 ‘과도(過度) 교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고치지 않아도 될 걸 과도하게 교정했다는 뜻입니다.이 과도교정 역시 비교적 흔한 언어 현상입니다. 과도 교정이 없었다면 ‘김치’도 세상에 없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요?원래 김치는 위에 나온 것처럼 썼습니다. 저 글자를 문자 그대로 읽으면 [딤채]가 됩니다. (김치냉장고 이름이 왜 그런지 아시겠죠?) 여기서 한국어에 구개음화 현상이 있다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굳이’를 [구지]로, ‘해돋이’를 [해도지]라고 발음하는 게 맞는 이유가 바로 구개음화 때문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딤채는 [짐채]가 됩니다. 그러다가 아래 아(ㆍ) 소리가 한국어에서 사라지면서 [짐치]가 됐습니다. 여기서부터 과도교정 현상이 일어납니다. [짐치]라는 소리만 듣고 이를 ‘김치’라고 적기 시작한 겁니다. 현대 한국어에는 ‘ㄷ구개음화’ 현상만 있지만 16세기에는 ‘ㄱ구개음화’ 현상도 있었거든요. 지금도 어떤 분들은 ‘길’을 [질], 엿기름을 [엿지름]이라고 발음하는 걸 들을 수 있는 건 이 때문입니다.이를 거꾸로 적용해서, 짐치를 짐치라고 쓰면 어쩐지 틀린 거 같으니까, 짐치를 김치라고 쓰게 된 겁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아예 소리도 [김치]로 바뀌었습니다. ‘질들이다’가 ‘길들이다’가 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사진설명)과도교정이 없었다면 어린 왕자와 여우는 서로를 ‘질들였을’ 겁니다. 파라마운트 홈페이지.아, 40대 이상 어르신 중에는 ‘학교에서 분명 설겆이라고 배웠는데 무슨 소리냐?’고 주장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맞습니다. 문교부(현 교육부)에서 1989년 맞춤법을 크게 흔들기 전까지는 설겆이가 표준어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습니다’로 써야 할 걸 ‘~읍니다’로 쓰는 분은 거의 안 계시잖아요? ‘~읍니다’가 ‘~습니다’로 바뀔 때 설겆이도 설거지가 됐습니다. 그러니 이제 설거지도 설거지라고 쓰십시다. 다시 한번 설거지는 설거지입니다!그런 의미에서 ‘설겆이’라고 쓰셨던 분이 오늘 설거지 당번을 맡아보시면 어떨까요? 설거지하러 가시기 전에 아래 추천 버튼 누르시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문. 다음 중 실제 존재하지 않는 학과는?①예수대 신학과②원광디지털대 얼굴경영학과③영남대 새마을국제개발학과④선문대 신학순결학과⑤전남과학대학 호텔조리김치발효과정답은 ①이다. 전북 전주시에 자리잡은 예수대는 건학이념으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를 내세우고 있지만 신학 전공은 따로 없다. 거꾸로 나머지 네 개 학과는 실제로 존재한다. 한 문제 더 풀어보자.문. 다음 중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대학 과제는?①수강생끼리 1만 원으로 데이트하기②부모님께 밥상 차려 드리기③부자에게 시집가는 법 토론하기④뮤지컬 출연하기⑤에로틱 판타지 소설 쓰기이번에 정답은 없다. 이 다섯 가지 모두 대학 교양 수업 과제로 실재로 나온 것들이다. 부모님께 밥상을 차려드리는 수업은 과목 이름부터 ‘밥상머리 교육(건양대)’으로 범상치가 않다. ‘뮤지컬 출연하기’는 물론 전문 배우로 대극장 무대에 서라는 건 아니다. 국민대 ‘체험 뮤지컬’ 수험생들은 직접 뮤지컬을 만들어 교내 공연을 진행한다. ⑤는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마광수 교수가 연세대 학새들에게 내준 과제로 유명하다.이렇게 이색적인 대학 교과목은 언제든 눈에 띄게 마련. 1995년 9월 18일자 동아일보는 미국 명문대에서 개설한 이색 과목을 소개했다.당시 소개한 과목은 △예일대 ‘근친성교의 이야기들’ △조지타운대 ‘게이와 레즈비언의 말할 수 없는 생활들’ △컬럼비아대 ‘인종, 성(性) 그리고 로큰롤의 정치학’ △코넬대 ‘집 없는 사람을 먹고 재우는 법’ △하버드대 ‘마녀 늑대인간 강신술(降神術·기도나 주문으로 신을 내리게 하는 술법)’등이었다. 이런 교과목을 개설한 데 대해 영아메리칸재단(YAF)은 “학문의 자유도 좋지만 이런 과목들을 배우기 위해 1년에 우리 아이들이 많게는 2만5000여 달러의 학비를 내야 하는 것이냐”고 비판했다고 당시 동아일보는 전했다.물론 그때 한국 대학에 딱딱한 교양 수업만 있는 건 아니었다. 1995년 서강대에는 ‘죽음에 이르는 심리’라는 교양 과목이 있었고, 단국대에는 뮤지컬은 아니지만 2시간 동안 노래를 부르는 ‘교양 합창’ 과목도 있었다. 서울대 ‘여성의 건강’은 ‘애인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려는’ 남학생이 앞다퉈 수강했다고 한다.시험 유형도 특이한 대학이 많았다. 아주대 토질역학 수강생들은 무박 3일 동안 400문제가 넘는 문제를 풀어야 ‘전공 필수’ 과목을 이수할 수 있었다. 시(詩) 100개를 외워 쓰는 문제를 내는 학교도 있었다. 교가 가사를 쓰라거나 자기 이름을 한자로 적는 문제를 내는 교수는 부지기수.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서울대 상대(현 경영대)에는 항상 ‘마케팅은 무엇인가’라는 시험 문제를 칠판에 적어주는 교수가 있었다. 수험생들도 당연히 이 문제를 준비해 왔는데 어느 해인가 교수가 칠판에 ‘대’부터 적는 게 아닌가. 학생들이 술렁거리는 사이 교수가 완성한 문제는 이랬다. ‘대체 마케팅은 무엇인가’ 그런데 학생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끝나지 않았다. 대체를 다른 것으로 바꾼다는 뜻을 가진 ‘代替’로 받아들였던 것. 이 소동은 교수가 문제 맨 앞에 ‘도’를 적어 넣어 ‘도대체 마케팅은 무엇인가’로 바꾸면서 끝났다나 뭐라나.어떤 의미에서 대학은 이렇게 엉뚱한 생각을 수용할 수 있어야 성장하는 법. 그래서 부탁드린다. 독자 여러분이 보고 들으신 가장 특이한 대학 관련 에피소드를 댓글로 달아주시라!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안녕하세요, 서울 중구 중림동에서 일하고 있는 독자 박상익이라고 합니다. 궁금한 게 있어서 e메일을 보냅니다. 제가 출퇴근길에 FM 라디오를 듣는데 주파수가 100.0(㎒)처럼 정수로 딱 떨어지는 게 없더라고요.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아, 먼저 정말 ‘잡학사전’이라는 꼭지 이름이 딱 걸 맞는 질문 감사드립니다. 이 기사 제목에서 보신 것처럼 이렇게 되는 제일 큰 이유는 FM 라디오 주파수 소수점이 모두 홀수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아래는 수도권에서 잡을 수 있는 FM 라디오 주파수를 정리한 그림입니다. 전부 다 홀수로 끝나죠? 또 지역에 따라 같은 채널이 다른 주파수를 쓰거나, 같은 주파수를 다른 채널이 쓰는 일도 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이번에 제일 큰 이유는 ‘정책’입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대한민국 주파수 분배표’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주파수 88~108㎒ 범위를 FM 방송에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FM 방송국당 채널 간격은 200㎑(0.2㎒)입니다. 그러면 각 라디오 채널은 아래 같은 방식으로 주파수를 사용하게 됩니다.이렇게 0.2㎒ 간격으로 채널을 나누니까 소수점 첫 번째 자리가 계속 홀수입니다. 왜 한쪽 끝을 쓰면 안 되냐고요? 그건 방송국에서 라디오 전파를 쏠 때 전파 강도가 아래 그래프처럼 분포하기 때문입니다. 0.2㎒ 간격일 때는 가운데를 선택하는 게 가장 강하게 전파를 보낼 수 있는 방식입니다. 이런 이유로 한국 FM 라디오 방송 주파수는 소수점 뒤에 첫번째 자리가 계속 홀수로 나옵니다. 이렇게 정한 건 정책이라 정책이 바뀌면 끝자리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컨대 나라에 따라 87.5㎒부터 FM 라디오 방송에 주파수를 할당하는 나라도 많습니다. 이런 나라에서 0.2㎒ 간격을 기준으로 하면 전부 짝수만 나올 겁니다. 또 채널 사이 간격을 0.1㎒로 정한 나라도 많습니다. 이러면 짝수와 홀수가 번갈아서 나오게 됩니다. 채널 간격을 좁히면 라디오 방송 숫자를 더 많이 늘릴 수 있지만 (현재 한국 방식으로는 100개가 한계입니다) 음질에서는 손해를 봅니다. 한국에서 이런 정책을 채택한 건 미국 때문일 개연성이 큽니다.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 역시 한국과 같은 방식으로 FM 채널을 배정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주한미군 방송인 AFKN(현 AFN Korea)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FM 방송을 시작한 매체이기도 하고요. AFKN은 1964년 10월 1일부터 FM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인을 주요 청취자로 삼은 첫 번째 FM 라디오 방송국은 1965년 문을 연 ‘서울FM’이었습니다. 중앙일보에서 운영하던 동양방송(TBC)이 1966년 이 회사를 인수해 동양FM으로 바꿨습니다. 이 채널은 1980년 언론 통폐합에 따라 KBS로 넘어가 현재 KBS 2FM이 됐습니다. 아, 그렇다고 모든 국내 FM 방송 주파수 100% 홀수로 끝나는 건 아닙니다. 자유 FM은 강원 인제군 송신소에서 106.6㎒로 방송을 내보냅니다. 이 라디오 채널은 국가정보원에서 하는 대북방송입니다. 북한은 홀·짝수를 모두 쓰는 방식으로 FM 라디오를 운영하고 있기에 이 주파수를 사용하는 겁니다. 참고로 1978년 이후 한국에서 AM 방송은 525.5~1606.6㎑ 주파수 대역을 사용하고 채널 간격은 9㎑입니다. AM은 일반적으로 FM 보다 음질이 떨어지지만 전파를 더 멀리 보낼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FM은 전파가 멀리 나가지 않기 때문에 위에서 보신 것처럼 지역에 따라 같은 주파수를 다른 채널이 쓸 수 있는 겁니다. 아, 그런데, 요즘도 AM 듣는 분이 계시기는 한 거죠? (‘항덕’ 여러분 손!)※ ‘잡학사전’ 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궁금하기는 한데 직접 알아보기는 귀찮은 내용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kini@donga.com으로 e메일 보내주시면 됩니다. 성의껏 취재해서 궁금증을 해소하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제보해주신 독자 박상익 씨께 감사드립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공을 던지고 싶다.”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야구공을 꼭 쥔 채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나한테 야구가 뭐냐고요? ‘최·동·원’ 이름 석자지.”최동원. 이렇게 많은 부산 사람들 심장을 뛰게 만드는 세 글자가 또 있을까.한 프로야구 롯데 팬은 말했다. “박정태가 롯데의 정신이라면 최동원은 롯데의 혼(魂)이라고.”그가 공을 던지고 나서야 사람들은 철완(鐵腕)이라는 낱말이 진짜 무슨 뜻인지 알게 됐다. 최동원은 1984년 한국시리즈 때만 롯데에 우승 트로피를 안겼던 게 아니다. 그는 실업리그 시절이던 1981년 ‘코리언시리즈’에서도 6경기에 모두 등판해 42와 3분의 1이닝을 던져 2승 1패 1세이브를 기록하며 롯데에 실업리그 마지막 챔피언 자리를 선물했다. 재미있는 건 4차전. 최동원은 이 경기에 선발 투수로 나와 7회까지 던졌다. 8회초 수비를 시작할 때는 1루수로 포지션을 바꿨지만 2사 만루 위기가 찾아오자 다시 마운드에 올라 경기를 매조지었다. 그래서 이 경기 기록이 1승 1세이브다. (현재 야구 규칙은 승리 투수가 된 선수에게 세이브를 주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이 시즌 메이저리그 입단 취소 파동을 겪기도 했던 최동원은 아마추어 선수만 참가할 수 있던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참가 문제로 1982년은 한국전력에서 보냈다. 다시 롯데로 돌아온 1983년 최동원은 208과 3분의 2이닝을 평균자책점 2.89로 막아냈다. 하지만 당시 롯데 타선은 팀 타율 0.244로 6개 팀 중 꼴찌였다. 최동원은 결국 9승 16패 4세이브로 시즌을 마감했다.그리고 드디어 대망의 1984 시즌이 개막했다. 최동원은 이해 정규리그에서 284와 3분의 2이닝을 던져 27승 13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2.40을 기록한다. 당시는 전·후기 리그 1위 팀이 한국시리즈에서 맞붙는 방식이었다. 전기 리그 1위 팀 삼성 지휘봉을 잡고 있던 김영덕 감독은 ‘져주기 게임’ 끝에 OB(현 두산)보다 만만해 보이는 롯데를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선택했다. 그러나 결과는….롯데의, 아니 최동원의 우승이었다. 롯데는 김 감독 판단처럼 약한 팀이었을지 몰라도 최동원은 아니었다. 1차전에서 완봉승을 최동원은 3차전에 다시 마운드에 올라 완투승을 따냈다. 5차전은 완투패. 6차전은 구원승. 7차전은 다시 완투승이었다. 그는 은퇴한 뒤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리는 역시 대가가 뒤따르더라. 그러나 후회한 적은 없다. 다시 그날로 돌아가도 난 1차전부터 7차전까지 던질 거다. 왜냐? 그게 최동원이니까.” 다만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마지막이 배신당하는 것임을 알았더라면 아마 그 자리에서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을 거다.” 최동원은 1984년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강병철 당시 롯데 감독이 1, 3, 5, 7차전 등판 예정 소식을 전하면서 “동원아, 우짜노…. 여까지 왔는데…”라고 말하자 시원하게 “알겠심더. 마, 함 해 보입시더”라고 답했다. 하지만 4년 뒤 트레이드 될 줄 알았다면 그렇게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란 얘기였다. 최동원은 “그래도 나는 롯데를 위해 1984년을 통째로 바쳤어요. 하지만, 그 대가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대가가…”라며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롯데에서 최동원을 내보내기로 결정한 건 선수회 파동 때문이었다. 최동원은 당시 프로야구 팀들이 선수들에 대해 제도적으로 신분을 보장하지 않은 채 ‘상품’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불만이 많았다.그래서 선수회를 결성해 힘을 모으려고 했다. 그러자 한국야구위원회(KBO)와 각 구단이 저지에 나서면서 최동원에게 미운 털이 박혔다. (최동원은 선수회 결성을 시도하면서 ‘법무법인 부산’을 찾아 자문했다. 당시 최동원과 상담한 변호사가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었다.)삼성 유니폼을 입게 된 최동원은 우리가 알던 그 최동원이 아니었다. 롯데에서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한 최동원은 미국으로 떠났다가 1989년 후반기에 복귀했지만 30이닝을 8경기에 나와 1승 2패를 기록하는데 그쳤고, 이듬해 평균자책점 5.28을 기록한 뒤 결국 프로야구 무대를 떠났다.최동원은 은퇴 이듬해였던 1991년 정치계에 입문했지만 낙선한 뒤 방송인으로 변신한다. 야구 해설위원으로 야구계에 돌아온 그는 한화에서 투수 코치로 류현진(30·LA 다저스)을 발굴하는 한편 퓨처스리그(2군) 감독을 맡기도 했다. 그가 프로야구 현장으로 돌아온 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롯데 팬들은 그가 다시 롯데 유니폼을 입을 수 있기를 꿈꿨지만 2009년 7월 4일 시구 때를 제외하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2009년 문을 연 ‘롯데 자이언츠 기념관’에 있는 최동원 자리도 처음에는 텅 빈 상태였다.최동원은 끝내 롯데와 화해하지 못한 채 2011년 9월 14일 지병이던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최동원이 하늘나라로 갈 때 입은 옷은 롯데 시절 입었던 하얀 유니폼이었다. 반면 롯데 관계자들은 별세 이튿날이 되어서야 겨우 빈소를 찾아 팬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 롯데는 최동원의 등번호(11번)을 영구결번했고, 안방 사직구장 앞에 최동원 동상이 들어설 때도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화해를 모색했다. 이제는 아들 최기호 씨가 한때 롯데 구단 프런트로 일할 만큼 관계를 회복한 상태다.“짧고 굵게 야구한 게 내하고 잘 맞는다“던 그는 세상도 그렇게 살고 돌아갔다. 요즘 잘 나가는 후배들을 보면서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을까. “롯데, 야 임마야, 이만하믄 됐다 그라지 말고 가을 끝까지 단디해라!”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학창 시절 과학 시간에 배운 것처럼 아프리카(사진 오른쪽)와 남아메리카는 원래 한 대륙이었습니다. (물론 원래는 모든 대륙이 하나였습니다.) 이것만 똑같은 게 아닙니다. 실제보다 작아 보인다는 것도 공통점이죠. 인터넷을 열심히 하시는 분이라면 ‘아프리카 실제 크기.jpg’ 등으로 유행한 아래 지도를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지도를 그리는 원리(투영법)를 잘 모르시는 분들은 이 그림을 처음 보시면 ‘아프리카가 이렇게 컸나’하고 놀라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공 모양인 지구를 평면에 펼치다 보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겁니다.세계 지도를 그릴 때 흔히 쓰는 ‘메르카토르 도법’은 각도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게 목적입니다. 원래 항해용 지도였기 때문이죠. 대신 방향과 거리는 물론 넓이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합니다. 이 도법으로 그린 위 지도에서 그린란드(약 217만 ㎢)는 아프리카(약 3037㎢)만 하고 비슷한 크기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프리카가 14배 더 큽니다. 그러니 아프리카가 얼마나 넓은지 모르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그러니 아시아어(語)가 따로 없는 것처럼 아프리카어도 마찬가지인데도 ‘아프리카 말’이라는 표현을 쓰는 걸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남아메리카 대륙 역시 같은 이유로 작아 보입니다. 남아메리카 대륙에는 그리스 노르웨이 뉴질랜드 독일 멕시코 미국(본토) 북한 스웨덴 스페인 아일랜드 영국 이탈리아 일본 쿠바 터키 포르투갈 폴란드 프랑스(본토) 핀란드 하와이 한국 등 21개 나라(주)를 모두 넣을 수 있습니다. 아래 그림처럼 말이죠.자세히 보시면 곳곳에 빈 공간이 남아 있습니다. 남아메리카 대륙 면적은 약 1784만 ㎢인데 이 21개 나라 면적을 모두 더하면 1570만3179 ㎢ 정도 나옵니다. 그러니까 남아메리카 대륙이 251만4783 ㎢ 더 넓은 겁니다. 이러면 이 남은 공간에 그린란드를 한 번 더 넣을 수 있습니다. 화면을 위로 올려 세계지도를 한번 다시 보세요. 도저히 말이 되는 것 같죠? 여태 지도에 속아 오셔서 그렇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속지 마세요. 다시는 속지 않겠다는 뜻으로 ‘추천’을 눌러주시면 제게도 큰 힘이 됩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황제는 사실 자기와 별 상관없는 전쟁터에 근위대(황제를 가까이에서 호위하는 부대)를 보내며 말했다. “가서 침략군을 격파하고 한반도에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고 돌아오라. 그리고 이길 때까지 싸워라. 이기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이 에티오피아 황제는 자기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타고 다니던 말 이름을 따 이 부대에 ‘칵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칵뉴는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한다”는 뜻.그 후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 에티오피아군 6037명(연인원)이 한국 땅을 밟았다. 이들은 253차례 싸워 253번 모두 승리했다. 한국전쟁기념재단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에티오피아군 121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다쳤지만, 포로로 잡힌 건 단 한 명도 없었다. 황제가 말한 것처럼 정말 이기거나 죽을 때까지 싸운 것이다.하일레 셀라시에 황제(1892~1975)가 6·25전쟁에 군대를 파견한 건 이탈리아에 침략당한 경험 때문이었다. 1936년 이탈리아군이 쳐들어오자 셀라시에 황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했지만 결국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는 영국으로 망명했고, 1941년 영국군이 이탈리아군을 에티오피아에서 몰아낸 뒤에야 권좌를 되찾을 수 있었다. 6·25 전쟁에 참전한 에티오피아 군인들이 싸워 이기고 돌아간 것만은 아니다. 이들은 월급을 모아 1952년 경기 동두천 시에 ‘보화(Bowha) 고아원(보육원)’을 설립해 전쟁고아를 보살폈다. 전쟁이 멈추고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간 것도 아니다. 에티오피아군은 셀라시에 황제 명령에 따라 휴전 후에도 한반도에 남아 전후 복구를 도왔다. 보화 고아원이 문을 닫은 것도 휴전 후 3년이 지난 1956년이었다. 셀라시에 황제는 1968년 5월 18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 초청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박 대통령은 당시 만찬 인사말을 통해 “폐하는 한국이 공산 침략을 당했을 때 충용(忠勇)스러운 장병들을 보내준 자유의 수호자”라고 평가했다. 셀라시에 황제는 사흘 뒤 한국을 떠나며 “꼭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지만 끝내 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문제는 그가 에티오피아 황가에서 시조로 삼고 있던 솔로몬 왕처럼 슬기롭게 나라를 다스리지 못했다는 점. 에티오피아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는데도 황제는 별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민심이 황제를 떠나자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80)은 1974년 공산주의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해 9월 12일 황제를 폐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공산주의 침략에 맞서 한국에 군대를 파견했지만 자국 내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난 것이다.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뒤 에티오피아는 한동안 한국보다 자신들이 맞서 싸웠던 북한과 더 가까운 나라가 되기도 했다. 내전 끝에 1991년 쫓겨 난 멩기스투가 북한에 몸을 숨겼다는 추측이 나올 정도였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건 “꼭 에티오피아에 답방을 가겠다”던 박정희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약속을 지킨 건 딸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었다. 딸 박 전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에티오피아를 찾았다. 이에 앞서 이명박 전 대통령도 2011년 에티오피아를 찾았다. 에티오피아를 방문한 한국 정상은 이 전 대통령이 처음이었다.황규인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