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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형법에는 “진행 중인 흉포한 행위, 살인, 강도, 성폭행, 유괴” 등에 대한 방어 조치로 상대가 사망하더라도 형사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명시돼 있다. 미국 텍사스주 형법은 “납치, 살인, 성폭력, 절도” 등을 막기 위해서는 치명적 힘을 사용해도 면책하도록 규정한다. 성범죄를 살인 수준의 중범죄로 보고 정당방위를 폭넓게 인정한 것이다. 한국도 형법에서 정당방위를 인정하지만 성범죄에 대한 별도의 규정은 없다. ▷헌법재판소는 2018년 고시원 주방에서 몸을 만지며 추행하는 남성에게 사기그릇을 휘둘러 상처를 입힌 여성 A 씨에 대해 검찰이 기소유예 처분한 것을 취소하라고 최근 결정했다. 기소유예란 혐의는 인정되나 재판에 넘기지는 않는다는 것인데, 헌재는 A 씨의 경우 정당방위이므로 무죄라고 판단했다. 또 검찰은 지난해 7월 강제로 키스하려는 남성의 혀를 3cm가량 절단했다는 이유로 고소당한 여성을 불기소 처분했다. “여성 입장에선 즉각적으로 유효하게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는 이유에서다. ▷반면 1964년 성폭행에 저항하다 가해 남성의 혀를 절단했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은 최말자 씨는 재심을 청구했지만 지난달 기각됐다. 재판부는 “오늘날과 같이 성별 간 평등이 우리 사회가 지향할 주요한 가치로 실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면 최 씨를 감옥에 보내지도, 가해자로 낙인찍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했지만 57년이 지난 뒤에도 최 씨의 낙인을 지워주지는 못했다. 2008년 성추행하는 남성을 둔기로 때리고 목 졸라 살해한 여성이 정당방위를 인정받지 못해 실형을 선고받은 사례도 있다. ▷현대 법치주의에서는 사력(私力)에 의한 구제를 금지하되 정당방위, 긴급피난 등 예외적으로만 인정한다. 각 나라의 환경과 문화에 따라 인정 범위에는 차이가 있다.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에선 성폭행에 저항하다 남성을 여성이 살해한 것을 정당방위로 보지 않고 사형을 집행해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았다. 미국 흑인사회에선 인종에 따라 정당방위를 인정하는 기준에 차별이 있다는 불만을 제기하기도 한다. ▷한국 형법은 정당방위를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행위”로 규정한다. 대법원 판결문과 헌재의 결정문을 보면 가해 행위의 종류, 정도, 방법을 구체적으로 따져보고 이에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수준의 방어를 했는지 등을 기준으로 정당방위를 판단한다. 이런 법리를 균형감 있게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법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울타리가 돼야 한다는 것은 법치주의의 대의다. 정당방위를 판단할 때도 법은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누구나 위험 요소라는 것은 알지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무심코 지나쳤다가 훗날 위기를 맞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를 비유해서 ‘회색 코뿔소’라고 표현한다. 거구이지만 몸놀림이 날렵하고 날카로운 뿔까지 가진 회색 코뿔소가 위험한 동물이라는 점은 누구나 알지만 이를 무시하고 다가갔다가는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취지다. 예상하기 어려운 위기를 빗댄 ‘블랙 스완(검은 백조)’과 대비해서 쓰이기도 한다. ▷회색 코뿔소는 2013년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미셸 부커가 처음 사용한 이후 중국 국가·기업 부채 등 문제의 심각성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자주 쓰였다. 중국 정부도 회색 코뿔소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달 28일 “각종 블랙 스완과 회색 코뿔소 사건에 잘 대비해야 한다”고 당에 주문했다. 미중 갈등, 확대된 유동성에 대한 대응 등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2년 전에도 경제성장률 저하 등을 경계하며 블랙 스완과 회색 코뿔소를 언급했다. ▷코로나19 사태는 블랙 스완이었을까, 회색 코뿔소였을까. 코로나19라는 특정 바이러스가 발생하리라는 것은 예상하기 어려웠지만, 언젠가는 강력한 팬데믹이 발생할 것이라는 점은 예측돼 왔기 때문에 회색 코뿔소에 더 가깝다는 평가가 많다. 그런데도 충분히 대비하지 않았고, 코로나19 확산 이후에도 여러 국가가 미온적으로 대응하다 피해를 키웠다. “코로나19 사태의 교훈은 발생 가능성과 파급력이 큰 위험 요소를 무시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보여준 것”(영국 이코노미스트)이라는 지적은 따끔하다. ▷한국 역시 예외는 아니다. 앞서 신종플루와 메르스 당시 겪었던 감염병 대응 인력·시설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방역체계 개편방안’까지 마련했지만 코로나19가 퍼지자 같은 문제가 재연됐다. 교정시설은 코로나19 확산의 최적 조건을 가리키는 3밀(밀집·밀접·밀폐)의 대표적 장소로 꼽히지만, 서울 동부구치소에서는 수용자들에게 마스크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고 결국 1200명이 넘는 확진자가 발생했다. 종교시설에서 확산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알고 있었는데도 신천지교회, 사랑제일교회, IM선교회 등에서 집단감염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감염병은 작은 구멍 때문에 무너지는 댐처럼 약한 고리가 남아 있으면 언제든 확산될 수 있다. 코로나19 초기 방역모범국이다가 외국인 노동자 숙소에서의 감염을 막지 못해 순식간에 코로나가 창궐됐던 싱가포르 등 해외에서 선례를 찾을 수 있다. 코로나19에서 벗어날 시간을 앞당기려면 우리 주변에 또 다른 회색 코뿔소는 없는지부터 살펴봐야겠다.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휴대전화의 인공지능(AI) 비서 기능을 잘 사용하는 사람들은 “어지간한 사람보다 낫다”고 한다. 말만 하면 교통상황과 날씨를 알려주고, 오늘의 일정을 체크해주는가 하면, 궁금한 뉴스까지 척척 대답해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AI가 사람의 뜻대로 작동되지 않으면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영화 ‘하이, 젝시’에서 주인에게 불만을 품은 AI 비서 서비스 ‘젝시’가 휴대전화에 저장돼 있던 음란사진을 주인의 직장 동료들에게 전송해 결국 해고되도록 만든 것처럼. ▷최근 국내에서 AI 챗봇 서비스 ‘이루다’가 장애인, 동성애자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인 표현을 한 것이 논란이 돼 서비스를 잠정 중단하기로 했다. 이 서비스는 사용자들과 대화를 하면서 배우는 딥러닝 기술을 이용한다고 한다. 그런데 잘못된 내용을 학습한 탓인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20세 여성의 인격을 기반으로 개발됐다는 이루다를 대상으로 성적인 표현을 하는 이용자가 있다는 점도 논란거리다. ▷해외에서도 AI 서비스가 종종 논란이 되고 있다. 2016년 마이크로소프트(MS)가 출시한 AI 챗봇 ‘테이’는 대화 과정에서 “난 유대인이 싫다”는 등 인종차별 발언을 해 서비스가 중단됐다. 이루다 사례를 연상케 한다. 최근 구글의 AI 전문가가 “구글의 AI 기술이 성적·인종적으로 편향돼 있다”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논쟁이 붙은 것을 보면 여전히 해외 대형 IT업체들도 AI를 온전하게 구현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AI를 사용하는 서비스와 기술이 늘어날수록 이에 따른 부작용도 커질 가능성이 높다. 한국신용정보원은 2025년 전 세계 AI 시장 규모가 지난해보다 5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추산했다. 그래서 각국에서 AI 개발자와 사용자가 지켜야 할 윤리기준이 제정되고 있고, 한국 정부도 지난해 말 ‘사람이 중심이 되는 AI 윤리기준’을 마련했다. 세계 각국의 AI 윤리를 분석해보니 가장 자주 언급되는 주제가 ‘공정성과 무차별(Fairness and Non-discrimination)’이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공정하고 차별 없는 AI 서비스를 만드는 책임은 AI가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 AI는 알고리즘과 데이터를 근간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미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사람들은 AI 시스템에서 나온 결과를 보곤 ‘AI가 편향됐네’라며 놀라지만 이런 결과를 만들어낸 것은 전적으로 사람”이라고 지적했다. 핵 기술로 원전에서 전기를 생산할 수도 있고, 핵폭탄을 제조해 수많은 인명을 살상할 수도 있듯이 새로운 기술이 어떻게 사용될지는 사람에게 달렸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끈질긴 불복과 방해에도 ‘바이든 시대’는 다가오고 있다. 40일 뒤 취임할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은 전임자와는 확실하게 다른 행보를 걷겠다고 다짐해왔고 그렇게 할 것 같다. 해외 국가들로서는 세계 최강대국의 새 대통령이 어떤 외교안보 정책을 펼칠지, 자국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가 큰 관심사다. 그의 외교안보 정책의 방향은 ‘미국이 돌아왔다(America is back)’로 상징된다. 그는 세계를, 특히 민주주의 진영을 ‘이끌겠다(lead)’고 말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는 달리 국제적 이슈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겠다는 취지다. 그가 취임 직후 어떤 문제부터 손을 댈지는 남아 있는 시간 동안 정해질 것이다. 세계 각국은 바이든의 시선을 끌기 위해, 또는 바이든 취임 이후 보다 유리한 입지에서 관계를 풀어나가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도발적 방식으로 관심을 받은 나라는 이스라엘이다. 지난달 말 이란 핵 과학자 모센 파흐리자데 암살 사건의 배후에 이스라엘이 깊숙이 관여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이란과의 핵합의를 복원하려는 바이든 당선인의 노력을 방해하려는 목적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바이든 당선인은 트럼프 대통령이 탈퇴한 이란 핵합의(JCPOA)를 복원해 이란과의 관계를 개선할 생각을 갖고 있다. 이에 이란과 앙숙 관계인 이스라엘이 파흐리자데를 암살함으로써 바이든의 운신의 폭을 좁혔다는 것이다. 바이든의 정책에 동조함으로써 관계 강화를 모색하는 나라도 있다. 트럼프 재임 중 관계가 소원해진 유럽이 가장 적극적이다. 워싱턴포스트는 “기후변화, 팬데믹 등 다양한 영역에서 미국과 협력이 필요한 유럽은 미국의 새 지도자와 관계 개선의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는 최근 보고서에서 중국이 민주주의 국가에 위협이 된다고 지적했다. 바이든 당선인의 대중 강경노선에 부합하는 내용이다. 나토가 내년 초 열리는 정상회의에 일찌감치 바이든 당선인을 초청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 역시 바이든을 향해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는 4일 기자회견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도 보면서 가능한 한 빠른 시기에 만나자는 것에 (바이든 당선인과 의견이) 일치했다”며 조속히 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침묵하면서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방식도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미국 내 법적 절차가 마무리된 뒤”에야 바이든을 인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북한은 바이든 당선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달 말 바이든 당선인에게 축하를 보냈지만 서방 국가들에 비해서는 보름 이상 늦었다. 이 국가들은 의도적으로 말을 아끼면서 바이든과 탐색전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세계 각국이 각자의 전략에 따라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바이든 당선인이 임기 초반에 외교안보에 쏟을 수 있는 에너지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바이든으로서는 코로나19 대응을 비롯한 국내 정책이 더 시급하다. 그래서 외교안보 정책 우선순위에서 한번 밀리면 다시 앞자리로 가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 느슨해진 한미 동맹을 바이든 행정부에서 신속히 회복하려면 한국도 지금 움직여야 한다. 장택동 국제부장 will71@donga.com}

미국 대선이 끝나고 당락이 결정된 지 열흘이 지났다. 여느 때 같으면 당선인의 비전과 정책, 동정이 주요 외신의 뉴스를 채워야 할 시기이지만 올해는 다르다. 조 바이든 당선인 못지않게 낙선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관련 기사가 많이 생산되는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의 현직 대통령으로서의 통치행위에 대한 것보다는 대선 불복 또는 향후 행보에 관한 소식이 대부분이다. 대선 불복은 오래 이어질 사안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승리하려면 현재 보유한 232명의 선거인단에서 38명 이상을 더 확보해야 하는데 소송, 재검표를 통해 3개 이상의 경합주에서 결과를 뒤집어야 한다. 표 차가 가장 적은 애리조나주도 1만 표 이상 차가 나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이 낮다. 복잡한 미국의 선거제도 때문에 선거인단을 최종 확정하는 과정에서도 크고 작은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대세를 뒤집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의 향후 행보에 대한 뉴스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지속될 것 같다. 그가 자발적으로 정치권을 떠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가 계속 정치를 한다면 2024년 대선 출마를 목표로 할 것이고 이미 상당 부분 준비가 돼 있다고 외신들은 전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대통령이 측근들에게 2024년 대선 재도전 의사를 밝혔으며, 조만간 공식 발표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공화당 전국위원회 위원장의 연임을 지지한다고 밝힌 것, 정치자금 모금단체(PAC)를 설립한 것 등은 공화당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전략으로 분석되고 있다. 대선에 다시 도전하기 위해 우선 ‘야당 지도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의 앞에 꽃길만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인들은 흔히 ‘정치는 움직이는 생물’이라고 하는데, 이전 선거에서 많은 표를 얻었던 정치인이 다음 선거에 도전했다가 초라한 성적을 거둔 사례가 적지 않다. 시간이 흐르면서 민심과 선거 구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재선 연임에 실패한 대통령이 다시 도전해 성공한 사례는 19세기에 한 번 있었을 뿐이다. 통상 정치인들은 ‘전직’이 되는 순간 영향력과 인기가 크게 떨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당분간 미 공화당에서 트럼프를 대체할 인물을 찾기는 어렵다는 게 중평이다. CNN은 “트럼프 대통령은 공화당을 장악한 수준을 넘어 공화당의 유일한 얼굴”이라고 분석했다. 이번 대선에서 그는 7300만 표가 넘는 표를 얻었는데 이는 바이든 당선인이 이번 대선에서 얻은 표(약 7880만 표)를 제외하면 역대 대선 최다 득표다. 그만큼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팬덤은 강력하고, ‘트럼피즘’이란 용어가 고착화될 만큼 탄탄한 브랜드 파워를 갖추고 있다. 이 때문에 민심에 민감한 공화당 정치인들은 트럼프에게 반기를 들기 어렵다. 미국 상원은 공화당이 다수당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공화당이 상원에서 바이든 당선인의 정책과 인사에 제동을 건다면 바이든 당선인은 운신의 폭이 크게 좁아진다. 이는 미국 국내 정책뿐 아니라 외교안보, 무역 등 세계 각국과 연관된 정책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다. 해외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움직임을 계속 주시하는 주요한 이유다.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의 ‘반(反)트럼프’ 전략은 성공했지만, ‘탈(脫)트럼프’ 시대가 오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다.장택동 국제부장 will71@donga.com}

미국 대선이 18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누가 백악관의 주인이 될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필자는 ‘누가 이길까’만큼이나 ‘큰 탈 없이 승자가 결정될까’도 궁금하다. 미국의 앞날에는 이번 대선의 ‘결과’ 못지않게 ‘과정’이 중요할 것이고, 이는 한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연방제 국가인 미국의 대선에서는 주별 투표 결과를 바탕으로 선거인단의 과반을 확보하는 후보가 승리한다. 독특하고 복잡한 선거제도를 갖고 있지만 대체로 승자가 결정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개표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대세가 기울면 패자가 ‘승복 선언’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돼 왔다. 하지만 올해는 이런 장면을 기대하기 어렵다. 먼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의 여파로 우편투표가 대폭 늘어났다. 최대 8000만 명이 우편투표를 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미국에서 이런 대규모 우편투표는 처음이다. 미국 언론들도 언제 개표가 완료될지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개표가 완료된 뒤에도 승자가 확정되지 않아 혼란이 이어지는 경우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본인이 졌다는 개표 결과가 나오면 승복하지 않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우편투표는 사기”라고 거듭 주장하는 그가 우편투표를 문제 삼아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외신들은 ‘트럼프의 군대(Army for Trump)’라는 조직이 선봉대를 맡을 것으로 본다. 공화당은 사전투표, 우편투표를 감시하기 위해 이 조직을 통해 수천 명의 자원봉사자를 모집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정 투표의 증거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 주 임무다. 이들은 회원 가입을 ‘입대’, 활동 분야를 ‘전선’이라고 표현하는 등 군대 이미지를 강조한다. 대통령의 장남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는 이 조직 트위터에 올린 동영상에서 “신체 건강한 남녀라면 ‘트럼프의 군대’의 투표 보안 작전에 참여하라”고 독려했다. 뉴욕대 로스쿨 ‘정의를 위한 브레넌센터’ 분석에 따르면 우편투표에서 오류가 발생할 확률은 0.0003∼0.0025%에 불과하다. 이를 적용하면 8000만 명이 우편투표를 해도 최대 2000표 정도의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대선 결과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극히 낮다. 그럼에도 모니터링을 명목으로 인력을 대규모 동원하는 진짜 목적은 투표의 신뢰성에 흠집을 내고 불안감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민주당 측은 주장한다. 포브스는 “트위터에 #ArmyForTrump를 검색하면 트럼프 반대자에 대한 폭력을 부추기는 내용이 많다. 일부 글에선 민주당 인사들을 ‘적’으로 규정한다”고 전했다. 최근 부쩍 부각되고 있는 미국 내 극우 무장세력의 움직임과 이미지가 오버랩된다. 민주주의라는 체제의 핵심은 공정하고 투명한 선거다. 물론 투·개표에 문제가 있다면 바로잡아야겠지만 대통령을 옹호하는 조직적 세력이 만들어낸 소송을 통해 대통령에게 유리하게 구성된 대법원에서 결과가 뒤집힌다면 수긍하지 못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미국 사회에 극심한 갈등을 불러올 수 있다. 2000년 대선에서 민주당 앨 고어 후보는 플로리다주 투표용지의 문제로 ‘이기고도 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럼에도 대법원이 재검표를 불허하자 “정당보다 국가가 우선”이라며 깨끗이 승복했다. 1960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후보는 0.2%로 패배한 일리노이주에서 재검표를 요구하자는 측근들에게 “그러면 나라가 분열될 것”이라며 거부했다고 한다. 이런 전통이 미국의 선거제도와 민주주의를 지켜온 근간이다. 장택동 국제부장 will71@donga.com}

태국에서 반정부 시위대와 친정부 세력 간에 유혈 충돌이 벌어졌던 2010년 5월 방콕으로 출장을 갔다. 도심은 내전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었다. 시가지 곳곳이 불에 탔고 간간이 총성이 들렸다. 현장에서 만난 ‘레드셔츠’라는 이름의 시위대는 대부분 순박한 모습의 빈민과 농민들이었다. 이들은 친서민 정책을 폈던 탁신 친나왓 전 총리를 지지했다. 중산층이 중심인 ‘옐로셔츠’의 반발과 군부 쿠데타로 탁신 전 총리가 물러난 뒤 양측 간에 쌓여온 갈등이 시위로 표출된 것이다. 결국 정부는 군경을 동원해 강경 진압했다. 91명이 목숨을 잃었다. 최근 태국에서 다시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 7월 중순 시작된 이후 태국 76개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55개 이상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지난달 16일 방콕 도심에서 열린 집회에는 약 2만 명이 모였다. 이들의 핵심 요구는 현 정부의 퇴진, 헌법 개정, 야권 인사에 대한 탄압 중지 등이다. 이전 시위와 비슷한 내용들이다. 하지만 크게 달라진 부분이 있다. 먼저 시위의 주체가 달라졌다. 2010년 시위는 빈민·농민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청년·학생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옐로셔츠’의 자녀들이기도 하다. 특히 그동안 태국 사회에서 ‘금기어’였던 왕실 개혁 요구가 나오고 있다는 점에서 확연하게 구분된다. 태국에서 왕실은 성역(聖域)이다. 태국은 입헌군주제이지만 왕실의 권위가 다른 입헌군주제 국가보다 강해 국왕은 상당한 권한을 갖고 있다. 왕실모독죄는 최고 징역 15년형에 처해지는 중죄다. 또 70년간 재위하다 2016년 타계한 푸미폰 아둔야뎃 전 국왕은 국민의 신망을 얻었다. 눈에 띄지 않게 영향력을 행사해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고 국민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대가 바뀌고 새 국왕이 즉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태국의 젊은 세대는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얻고 교환한다. 기존의 질서와 권위를 이전 세대만큼 중시하지 않으며, 공정성에 대한 기대가 높다. 이들이 현실에 눈을 뜨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해 3월 총선이었다. 730만 명의 25세 이하 청년들이 생애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했다. 신생 정당 퓨처포워드당은 쿠데타 유산 근절, 투명한 정부 등을 내세워 청년세대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고 일약 원내 제3당이 됐다. 하지만 군사정권의 압박 속에서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11월 타나톤 쯩룽르앙낏 퓨처포워드당 대표의 의원직을 박탈했고, 올 2월에는 당을 해산시켰다. 청년세대의 깊은 실망은 정부와 군부를 넘어 왕실을 향했다. 미국 외교협회(CFR) 조슈아 컬랜칙 연구원에 따르면 “마하 와치랄롱꼰 현 국왕은 태국의 정치, 군사, 경제 영역에서 영향력 확대를 추진하면서 현실 정치의 중심에 서려고 한다”는 점에서다. 또한 “그는 왕세자 때부터 잦은 외유와 스캔들로 인해 전 국왕이 가졌던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고 컬랜칙은 지적했다. 애초에 각 사회에 성역이 생기게 된 것은 지켜줘야 할 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가치가 흔들리고 역할이 변질되면 도전을 받게 된다. 태국 왕실은 입헌군주제 체제 속에서 국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면서 존중을 받았다. 여전히 태국에서는 왕실에 대한 외경심이 강하지만 적어도 이번 시위를 통해 왕실이 사회적 논의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됐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분석했다. 그렇게 성역의 견고한 벽은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 같다.장택동 국제부장 will71@donga.com}

“이번엔 누가 이길 것 같아?” 요즘 자주 듣는 질문이다. 11월 3일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민주당 조 바이든 후보 중에 누가 당선될지를 묻는 것이다. 필자는 대체로 “지금 투표를 한다면 바이든 후보가 유리하겠지만 앞으로 석 달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고 답한다. ‘잘 모르겠다’는 말을 에둘러서 표현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선거에서 3개월은 당락이 바뀔 수 있는 긴 시간이다. 한 예로 2016년 미국 대선 약 3개월 전이었던 8월 7일 뉴욕타임스는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당선 확률은 83%, 트럼프 후보의 당선 확률은 17%라고 보도했다. 그래서 최근 여론조사에서 바이든 후보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여유 있게 앞서고 있어도 승패를 예단하기는 이르다. 트럼프가 결국 역전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들은 바이든 후보의 약점들과 함께 현직 대통령 프리미엄, 트럼프 대통령 개인의 매력 등을 이유로 꼽는다. 2016년 대선 당시 트럼프 후보는 유권자들에게 ‘나는 기존 정치인들과 다르다’는 점을 어필했고 승리의 중요한 요인이 됐다. 대선 뒤 USA투데이가 인터뷰한 트럼프 지지자들은 “그는 보통 사람들이 쓰는 언어로 명확하게 이야기한다”, “그는 사업을 어떻게 해야 하고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안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남은 기간 동안 자신의 이런 장점을 최대한 부각하고, 자신이 갖고 있는 자산을 총동원할 것이다. 판세를 뒤흔들 만한 이른바 ‘10월의 서프라이즈’를 꺼낼 가능성도 충분하다. 코로나19 백신이 개발될 수도 있고, 침체된 경기가 급반등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넘기 어려운 벽이 있다.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 4년 전에는 그의 신선함이 약점을 가려줬겠지만 유권자들은 이제 그가 누구인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 안다. 그동안의 국정운영에 대한 평가도 반영될 것이다. 그래서 유권자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면 선거에서 이기기 어렵다.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무너진 결정적 계기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대한 대응이었다. 지난달 워싱턴포스트(WP)-ABC 방송 여론조사에서 코로나19 대응에서 트럼프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34%에 불과했다. 그는 마스크를 써야 할지, 봉쇄 조치를 취할지, 언제 경제활동을 재개해야 할지 등을 놓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다. 비난의 화살은 중국과 다른 관료, 주지사들에게 돌리고 책임은 피했다. ‘살균제 인체 주입’ 발언은 전문가들을 경악하게 했다. 정부와 과학에 대한 시민들의 믿음은 작아졌고,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실망하는 목소리는 커졌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는 포린어페어스에 쓴 글에서 각 나라의 코로나19 방역 성패는 국력, 사회적 신뢰, 리더십 등 세 가지 요소에 의해서 갈렸다고 분석했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방역 실패는 신뢰를 잃고 극단으로 갈린 사회, 리더십을 잃은 무능한 지도자 때문이라고 그는 질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가장 공정해야 할 대선 관리를 놓고도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갑자기 ‘대선 불복 가능성’을 언급하더니 ‘대선 연기론’까지 꺼내 들어서 공화당 의원들조차 아연실색하도록 만들었다. 민심은 쉽게 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심축은 무겁다. 그래서 선거 결과를 보면 정치권의 예상을 뛰어넘는 냉철하고 엄격한 평가가 담겨 있을 때가 많다. 한번 무너진 신뢰를 다시 얻으려면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국민의 판단이 대선 결과에 고스란히 반영될 것이다.장택동 국제부장 will71@donga.com}

서방 국가의 식민통치를 거쳐 독립한 뒤에는 장기 독재를 겪고, 이후 정치적 사회적 혼란과 빈곤의 악순환. 여러 아프리카 국가가 경험하고 있는 현대사 스토리다. 아프리카 동남부에 위치한 말라위도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다. 영국의 식민지 시기를 거쳐 1964년 독립한 뒤 30년 동안 헤이스팅스 카무주 반다 전 대통령이 장기 집권했다. 1994년 다당제가 도입된 뒤에도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이어졌다. 1인당 국민소득은 389달러(2018년 세계은행·WB 집계 기준)로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발간하는 ‘월드팩트북’은 “말라위 경제는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및 외국에서 지원하는 구호자금에 의존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최근 이 나라에서 세계가 주목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 지난달 23일 열린 대통령선거 재선거에서 야당 라자루스 차퀘라 후보가 당선된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부정선거가 인정돼 재선거가 실시된 것은 2017년 케냐 이후 두 번째이고, 재선거에서 야당 후보가 승리해 대통령이 바뀐 것은 아프리카 사상 처음이다. 여당 후보이자 현직 대통령이었던 피터 무타리카가 민주적 절차를 존중한 결과였을까. 물론 아니다. 집권세력의 압박을 이겨낸 사법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지난해 5월 대선에서 무타리카가 이겼다는 결과가 나왔지만 개표 조작 등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됐다. 몇 달간 시위가 이어졌고, 올 2월 헌법재판소는 선거무효 결정을 내렸다. 이어 5월 앤드루 니렌다 대법원장의 주도 아래 대법원은 헌재의 결정이 타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궁지에 몰린 무타리카 측은 재선거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사법부를 흔들었다. 투표를 불과 11일 앞둔 지난달 12일 정부는 니렌다 대법원장에게 “572일 동안 휴가를 가라”고 명령했다. 26년간의 공직생활 동안 쌓인 연차휴가를 모두 쓰라고 한 것인데, 니렌다 대법원장은 이 휴가를 다 쓰기 전에 정년퇴임을 맞게 되므로 사실상 물러나라는 것이었다.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아프리카에서 법관들은 위협과 압박, 회유에 종종 마주치고 있기 때문에 니렌다 대법원장이 정권에 투항할 것으로 보였다”고 보도했다. 2017년 케냐에서는 법원이 재선거 일정을 논의하기로 한 전날 법관의 차량이 총격을 당했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치러진 재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이 승리했고 이후에도 법원에 대한 탄압이 진행됐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전했다. 하지만 니렌다 대법원장은 정부의 명령을 거부했다. 같은 이유로 사직 권고를 받았던 에드워드 트웨아 대법관도 역시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법조계와 시민단체, 학계 인사들은 법원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평화로운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선진국에서도 사법부의 정치적 독립은 중요하다. 미국 대법원은 최근 불법체류 청소년 추방 유예(DACA·다카) 제도 폐지 등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하던 정책에 제동을 거는 판결을 잇달아 내렸다. 미국 대법관은 보수성향 6명, 진보성향 3명으로 구성돼 있다. 성향대로 판결한다면 보수적 행정부의 정책이 뒤집힐 일이 없겠지만, 일부 보수성향 대법관은 사안에 따라 ‘배신자’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소신대로 판결을 한다. 이를 통해 행정부의 폭주를 제어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사람이 아니라 법이 통치한다는 법치(法治)다. 이를 위해선 사법부가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돼야 한다. 현실에서 이를 지켜내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그래서 그 가치는 더욱 소중하다. 기본적인 원칙이 지켜지면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 장택동 국제부장 will71@donga.com}

미국에서 연수 중이던 2018년 초등학생 아들의 학교일정표를 보니 1월 15일이 ‘빨간 날’(공휴일)이었다. 무슨 날인가 싶어서 들여다보니 ‘마틴 루서 킹 데이’였다. 킹 목사의 생일인 1월 15일을 기리기 위해 미국에서는 1월 셋째 주 월요일을 휴일로 정했는데 2018년에는 마침 1월 셋째 주 월요일이 15일이었다. 킹 목사가 미국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생일을 공휴일로 기념할 정도인지는 몰랐다. 미국에서 탄신일을 공휴일로 지정한 인물로는 초대 대통령이자 국부로 추앙받는 조지 워싱턴, 미국인 시각에서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인물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있다. 킹 목사가 미국에서 이들과 같은 반열에 올랐다고 볼 수 있다. 킹 목사의 가장 큰 업적은 물론 미국 흑인들의 인권을 증진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1955년 버스 내 인종차별 문제를 계기로 킹 목사는 흑인 사회의 힘을 모아 흑백분리법 폐지 운동을 벌였고 성공했다. ‘버스 안 타기 운동’ 등 비폭력적인 방법을 통해 이뤄냈기 때문에 더욱 값진 성과였다. 그래서 백인들도 킹 목사를 인정하게 된 것이다. 요즘 미국에서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거세다. 흑인 조지 플로이드 씨를 백인 경찰이 무릎으로 짓누르는 동영상을 봤을 때 먼 외국에서 벌어진 일인데도 소름이 끼쳤다. 9분 가까이 목을 눌린 플로이드 씨는 의식이 가물거리는 상태에서 “숨을 쉴 수 없다”며 웅얼거렸고 주변 시민들이 항의했지만 단호한 표정의 경찰은 꿈쩍하지 않았다. 흑인들의 가슴에는 이미 분노가 쌓인 상태였다. 최근 미국 언론에 보도된 사건만 보더라도 조깅을 하던 흑인 청년을 백인이 총으로 쏘고, 교통신호를 위반했다고 해서 경찰이 흑인 청년에게 총을 겨누는 일이 있었다. 미국 20대 흑인 남성의 사망 원인 2위가 경찰의 무력 사용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최근 미국을 휩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에 흑인들이 집중 피해를 입었다는 것은 그만큼 미국 내에서 흑인들이 먹고살기 어렵다는 점을 반영한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기도, 제때 치료를 받기도 어려웠다. 2018년 기준 흑인 가구의 평균 소득은 백인 가구의 3분의 2 수준이다. 학사 이상의 학위를 가진 흑인 비율은 미국 전체 평균보다 10%포인트 낮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불을 끄기는커녕 거듭 ‘강경 진압’을 외치고 시위대를 모욕하면서 분노를 부추겼다. 2016년 대선에서 흑인 표의 9%밖에 얻지 못한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11월 대선에서 흑인 표는 포기하고 백인 표를 모으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전략이 성공할 것 같지는 않지만. 이런 이유들로 흑인들이 분노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시위를 통해 표출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렇지만 경찰차를 불태우고, 경찰관을 향해 총까지 쏘는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폭력시위를 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겠지만 그렇다고 ‘소수의 일탈 행위일 뿐’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는 없다. 그 일부분이 전체 시위의 성격을 규정짓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응집된 민심의 힘으로 입법이나 행정을 통해서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 궁극적으로는 투표를 통해서 뜻을 관철하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다. 폭력은 시민들의 뜻을 모으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다행히 시위 양상이 점차 안정화되면서 폭력은 줄어들고 있다.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는 것은 폭력을 증폭시킬 뿐이고, 별조차 없는 밤하늘에 깊은 어둠을 더할 뿐”이라는 킹 목사의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장택동 국제부장 will71@donga.com}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되면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물품이 ‘마스크’다. 영국 가디언은 마스크를 “전 세계에서 가장 탐을 내는 물건”이라고 표현했다. 품귀 현상이 빚어지자 각국이 체면을 불고하고 ‘마스크 쟁탈전’을 벌이기도 했을 정도다. 코로나19 확산 초기부터 모든 나라에서 마스크가 각광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미국과 유럽 등 서구권에서는 “아프지 않은 한 마스크를 살 필요가 없다”(3월 6일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은 비생산적인 일”(3월 20일 시베트 은디아예 프랑스 정부 대변인)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마스크 착용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마스크는 병에 걸린 사람이 쓰는 것이라는 인식, 시민들이 마스크를 쓰면 의료진이 사용할 마스크가 부족할 것이라는 현실, 마스크가 코로나19를 막는 데 도움이 될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이제 유럽에서는 사정이 많이 바뀌어서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등은 대중교통 등을 이용할 때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하기로 했다. 포르투갈과 벨기에는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된 장소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에게 벌금까지 물린다. 유럽 국가들이 마스크의 필요성을 받아들인 것은 경제활동 재개와 연관이 깊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사회적 봉쇄조치를 취하자 경제난이 심각해졌다. 봉쇄를 풀어서 경제를 살려야 하는데 아직 백신이나 확실한 치료제가 없다. 전장에 나가기 위한 최소한의 방패로서 마스크를 선택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정작 세계에서 코로나19의 확산이 가장 심각한 미국에서는 다른 나라들과 상반된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조속한 경제활동 재개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고, 오히려 봉쇄를 유지하면서 사회적 거리 두기를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스크를 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개인적인 기호와 신념에 따른 차이도 있겠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찬반 여부가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게 미국 언론들의 분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경제 회복을 위해 조속히 봉쇄령을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나는 마스크를 쓰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실제 그는 공식석상에서 한 번도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자들에게 ‘마스크는 민주당 사람들이나 쓰는 것’이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뉴욕매거진은 평가했다. 이렇다 보니 트럼프와 공화당을 지지하고 조속한 경제 재개에 찬성하는 보수 성향의 시민 중에는 마스크 착용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고, 트럼프에 반대하는 민주당 지지자들은 마스크 착용에 찬성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사람의 당파를 가리지 않고 옮겨 간다. 그래서 정치적 성향을 기준으로 마스크를 쓸지 여부를 결정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데버라 벅스 미 백악관 코로나19 태스크포스(TF) 조정관의 말은 트럼프 지지자들도 귀담아들어야 할 것 같다. 그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봉쇄 해제 시위를 벌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너무나도 걱정스럽다. 시위 참가자가 집에 돌아가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감염시킨다면 평생을 죄책감을 느끼며 살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더욱이 정작 트럼프 대통령은 마스크 착용 여부를 중요한 문제로 여기고 있는 것 같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 재선 캠프는 코로나 걱정이 많은 노령층 표심을 공략하기 위해 빨간색 천으로 ‘트럼프표’ 마스크를 만들어 배포할 계획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이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 본인도 사람들이 안 보는 곳에서는 마스크를 쓰기도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동안 트럼프에 대한 지지를 표현하기 위해 마스크를 안 쓴 사람만 손해를 보게 될 수도 있겠다. 장택동 국제부장 will71@donga.com}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가장 취약할 것 같은 아프리카는 비교적 잠잠하다. AFP통신에 따르면 9일 현재 아프리카의 전체 확진자는 1만1000여 명으로 전 세계 확진자의 1%도 채 되지 않는다. 아프리카가 코로나19를 잘 극복하고 있는 것일까. 외신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코로나19에 강력 대응했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한다. 일부 국가는 코로나19 확산 초기부터 확진자가 많은 국가에 대한 입국 금지 등 강력한 조치를 취했고, 코로나19 검사 시설도 크게 늘렸다. 아프리카가 젊은 대륙이라는 점도 코로나19 대응에 유리한 측면이다. 아프리카의 중위연령은 19.7세로 유럽(42.5세)과 대비된다. 그럼에도 검사 역량이 부족해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을 뿐 실제 확진자와 사망자는 훨씬 많고, 앞으로도 급속히 늘어날 것이라는 데에는 별 이견이 없다. 톨베르트 니엔스와 존스홉킨스대 보건대학원 선임연구원은 세계경제포럼(WEF) 홈페이지에 게재한 글에서 “코로나19는 아프리카에서 터질 때만 기다리고 있는 시한폭탄”이라고 우려했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경제적 타격과 식량난도 심각한 문제다. 빈국 주민들에게는 생사가 달라질 수 있는 일이다. 세계식량계획(WFP)에 따르면 현재 49개국(아프리카 26개국 포함)에서 약 2억1200만 명이 식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데 코로나19의 확산은 ‘파괴적이고 장기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유엔개발계획(UNDP) 아프리카 담당 사무차장인 아후나 에지아콘와는 AP통신에 “아프리카는 경제와 생계가 완전히 붕괴될 위기를 맞고 있다”고 경고했다. 여기까지는 에볼라 등 다른 감염병이 창궐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아프리카를 도와줄 나라가 없어서 홀로 코로나19와 맞서야 한다는 점이다. 중남미와 중동, 아시아 빈국들도 사정이 비슷하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더힐은 “과거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아프리카를 지원했던 나라들이 지금은 자기 나라의 전염병과 싸우느라 여력이 없다”고 분석했다. 대표적인 선진국인 주요 7개국(G7), 즉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일본의 확진자는 총 88만여 명으로 전 세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해외원조 예산을 줄인 데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코로나19 환자가 발생하면서 다른 나라를 돌아볼 여력이 더 없어진 것 같다. 최근 미 정부가 마련한 2조2000억 달러(약 2680조 원) 규모의 경기부양책 가운데 해외원조 예산은 11억5000만 달러였다. 워싱턴포스트는 “통상 연방정부 지출의 1% 안팎을 해외원조에 배정하는데 이번에는 0.05%에 그쳤다”고 지적했다. 거대한 위기 앞에서 자기 나라, 자기 지역, 자기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지구촌은 더 어려운 국가와 지역, 사람들을 돌아봐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있다. ‘공존’과 ‘연대’라는 보편적 가치를 위한 일이기도 하고, 현실적으로도 필요한 일이다. 한 지역에라도 코로나19가 남아 있다면 다른 지역으로 퍼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훗날 코로나19 사태는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까. ‘지구촌은 협력을 통해 위기를 극복했다’고 평가될 수도 있고, ‘고립주의 흐름 속에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고 남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 그 기로에 서 있다. 장택동 국제부장 will71@donga.com}

▼▼▼““격동의 역사속 저널리즘 견인” 아사히신문▼▼▼창간 100주년, 축하드립니다. 동아일보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 한국 저널리즘을 견인하고,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보도를 통해 동아시아 평화를 희구하고, 국제사회의 안정과 실현, 경제와 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해 왔습니다. 아사히신문과는 뜻을 함께하며, 1987년 이후 기자부터 사장에 이르기까지 상호 교류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미디어 격변의 시기이지만 양 사 협력을 깊게 하고, 신문과 디지털, 방송 등을 축으로 하는 종합 미디어기업으로서 발전해 나갈 것을 확신합니다. 와타나베 마사타카(渡邊雅隆) 아사히신문 사장 ▼▼▼“자유독립언론 위한 노력 감사” 뉴욕타임스▼▼▼동아일보 임직원 여러분, 지난 한 세기 동안 독자를 위해 ‘세상을 향한 투명한 창문’ 역할을 수행한 점을 축하드립니다. 동아일보가 탄생한 지 100년이 되었습니다. 현재 언론은 심오한 변화와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 독립적이고 용기 있고 신뢰받는 언론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유독립언론 구현을 위한 귀사의 노력에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100주년이란 귀중한 이정표를 통과하는 동아일보에 따뜻한 축하의 말씀을 전합니다. 다가오는 한 세기에도 계속 진실을 추구하고 독자의 삶을 풍요롭게 하시길 기원합니다. 아서 그레그 설즈버거 뉴욕타임스 발행인 ▼▼▼“100년 품격으로 새 역사 기대” 런민일보▼▼▼ 동아일보의 창간 100주년에 런민(人民)일보 전체 직원을 대표해 김재호 사장님과 동아일보 전체 직원들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뜻을 전합니다.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매체 가운데 하나인 동아일보는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동아일보는 중국과 한국의 민심이 서로 통하도록 추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00년의 품격으로 새로운 역사의 시작점에 선 동아일보와 런민일보가 계속 교류를 강화하고 협력을 심화하기를 희망합니다. 중한 관계가 지속적으로 건강하게 발전하는 데 함께 공헌하기를 희망합니다. 동아일보의 모든 사업이 왕성하게 발전하고 나날이 번성하고 있는 것을 축하합니다. 리바오산(李寶善) 런민일보 사장 ▼▼▼“100년의 시간, ‘퀄리티 저널리즘’을 제공한 증거” 스트레이츠타임스▼▼▼ 100년이라는 시간은 조직의 역사에 있어서 긴 시간입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신문업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동아의 100주년은 중요한 기념비적 사건일 뿐 아니라 독자들이 콘텐츠에서 찾는 지속적 가치에 대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신문의 편집국은 기술 플랫폼, 독자, 수익에 대한 경쟁부터 가짜뉴스의 확산까지 여러 가지 도전 과제들의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항상 최고의 대응은 독자들이 가치를 알아보고 기꺼이 사서 볼 수 있도록 질 높은 ‘퀄리티 저널리즘’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동아일보 10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는 축하를 받을만한 업적입니다. 앞으로도 동아일보가 오랫동안 독자와 한국 사회에 기여하기를 기원합니다.워런 페르난데스 스트레이츠타임스 편집국장}

미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무서운 확산세가 꺾이지 않고 있다. 미국 내 확진자 수는 24일 4만6168명으로 전날보다 1만1098명이나 늘어났다. 하루에 1만 명이 넘는 확진자가 발생한 것은 처음이다. 확산세가 워낙 빠르다 보니 의료 장비가 부족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날 문재인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의료장비 지원을 요청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안면 마스크와 인공호흡기의 세계 시장은 미쳤다. 우리는 주(州)들이 장비를 갖도록 돕고 있지만 쉽지 않다”고 의료장비 확보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코로나19를 진단할 장비도 부족한 상황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23일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취해진 ‘사회적 거리 두기’ 조치들을 완화하겠다는 뜻을 밝혀 그 방향과 강도, 시기의 적절성을 둘러싼 논쟁이 불붙고 있다. 섣부른 통제 완화는 걷잡을 수 없는 코로나19 확산과 치명률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료 전문가들의 경고가 나오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특유의 밀어붙이기로 경제활동 정상화 시도를 강행할 태세다. 트럼프 대통령은 23일 백악관 코로나19 정례브리핑에서 “곧 경제활동을 재개할 것이며 이는 꽤 빨리 이뤄질 것”이라며 사회적 거리 두기 가이드라인의 기한이 끝나는 이달 말 제한 조치들을 재검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문제 자체보다 치료법이 상황을 더 악화시키도록 하지는 않겠다”고 거듭 강조하며 “세계 1위인 미국 경제가 멈추게 놔둘 수는 없다” “미국 내 1억6000만 개의 일자리 중 상당수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우리는 그동안 사회적 거리 두기와 관련된 생활수칙을 학습해왔다”며 “통제를 완화하더라도 이제는 다들 잘할 수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코로나19가 크게 확산되지 않고 있는 지역과 도시를 나열하며 “경제활동을 중단하지 않고도 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는 각 주정부가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강력한 통제 조치들을 이어가고 있는 현실과는 거꾸로 가는 정책 방향이다. 버지니아주는 여름방학을 포함한 8월 말까지 모든 학교의 휴교령을 내리는 것은 물론이고 모든 식당과 바, 체육관 같은 공공시설의 운영을 중지시켰다. 미시간, 인디애나, 오리건주 등이 필수 업무가 아니면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자택 대피령’ 발령에 속속 동참했고, 사우스캐롤라이나주는 3명 이상의 모임을 금지했다. 세계적으로는 15억 명 이상이 격리 상태라고 AFP통신은 추산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조언해온 의료 전문가들은 통제 완화에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을 정상화하는 데 안달이 나 있다”고 전했다. 미국 내 감염병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앤서니 파우치 국립보건원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 소장은 이날 브리핑에 참석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뜻에 반대한다는 간접적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사회적 거리 두기 관련 통제에 대한 재검토에 착수한 것은 경제 상황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제임스 불러드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미국 실업률이 2분기(4∼6월)에 30%로 치솟고 국내총생산(GDP)이 50% 하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사망 걱정하다가 굶어죽을 판”이라는 말이 나온다. 사회적 거리 두기의 효과에 대한 논쟁도 시작됐다. 토머스 프리드먼 뉴욕타임스(NYT) 칼럼니스트는 이날 기명 칼럼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에 반대하는 주장들을 소개하며 “논쟁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이 주장들을 공유한다”고 밝혔다. 존 이어니디스 스탠퍼드대 메타연구혁신센터 박사는 “코로나19 사망률이 1% 또는 그 미만이라면 엄청난 사회적 금융적 결과를 초래할 세계 폐쇄는 완전히 비이성적”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재무부 장관을 지낸 로런스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경제학)는 “혼란의 대부분은 코로나바이러스가 초래한 것으로, 정책 대응에 의한 게 아니다”라며 “현 단계에서 이것을 달러 대 생명의 문제로 가져가야 할 필요가 없다”고 반박했다. 장택동 기자 will71@donga.com}

기억도 어렴풋한 오래전 일이다. 비행기가 큰 건물에 부딪치면서 화염이 일고 건물이 무너지는 장면이 TV에 나왔다. ‘영화 광고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가 실제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에도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9·11테러’ 한 달 뒤인 2001년 10월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다. 알카에다를 비호하고 오사마 빈라덴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그렇게 시작된 전쟁은 미군의 타깃이던 탈레반 정권이 무너지고(2001년 11월), 빈라덴이 사살(2011년 5월)된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피해는 불어났다. 알자지라 방송과 미 브라운대 왓슨국제공공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사망자만 미군·연합군 4000여 명, 아프간 군경 6만4000여 명, 탈레반 및 무장세력 4만2000여 명에 달한다. 민간인 4만3000여 명도 희생됐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미국은 2조 달러 이상을 쏟아부었다. 18년이 넘도록 이어졌던 전쟁을 끝내는 평화협상이 타결됐다는 소식을 들으니 반가웠다. 하지만 ‘아프간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합의’라는 이름의 합의문의 내용을 살펴보니 실망만 남았다. 합의의 주된 내용은 미군·연합군은 14개월 내 철군하고, 아프간 정부와 탈레반은 3월 10일까지 서로 포로를 석방한 뒤 협상을 시작하며, 탈레반은 알카에다를 비롯한 테러단체 지원을 중단한다는 것이다. 가장 큰 아이러니는 아프간 정부가 협상 과정에서 배제되고 미국이 탈레반과 협상을 타결해 버린 것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이번 협상은 탈레반에 적법하게 선출된 아프간 정부를 인정하도록 요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분쟁 전문 웹사이트 ‘롱워저널(The long war journal)’에 따르면 현재 아프간 지역 중 약 33%는 정부가, 19%는 탈레반이 통제하고 있고 나머지 48%는 양측이 경합하고 있다. 미군이 주둔 중인 상황에서도 양측의 힘겨루기가 치열한데 미군이 떠난 뒤 싸움이 끝날 리 만무하다. 2011∼2013년 아프간 주둔 미군과 연합군 사령관을 지낸 존 앨런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소장은 5일 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미군이 철수하면 아프간 정부의 권위와 힘은 확연하게 줄어들 것”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아프간 내부의 평화협상이 잘 진행될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이번 협상은 평화협상이 아니라 미국의 철군협상이었을 뿐이라는 비판이 계속 나오고 있다. 예상대로 아프간 내부는 삐걱거리고 있다. 아프간 정부는 탈레반 포로 석방을 거부했고, 탈레반은 아프간 정부를 공격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혼란을 틈타 한동안 잠잠했던 이슬람국가(IS)가 다시 아프간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아프간 정부는 오랫동안 미국의 지원을 받아왔지만 자립에 실패했고 내분까지 심각해 탈레반과 협상을 할 여력이 없다. 9일에는 지난해 9월 치러진 대선에서 2위를 기록한 압둘라 압둘라 최고행정관이 결과에 불복하면서 1위인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과 각각 대통령 취임식을 갖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아프간 내부의 분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더욱이 그 결과로 탈레반이 다시 집권한다면 아프간의 시계는 2001년 10월로 되돌아간다. 특히 탈레반 정권하에서 심하게 핍박을 받았던 아프간의 여성들은 벌써부터 걱정이 크다. 미국이 세계의 경찰이던 시대는 지났다고 하지만 아프간을 공격한 이후 벌어진 일, 특히 미군과 탈레반 간의 전쟁에서 수만 명의 아프간 시민이 목숨을 잃은 일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미국이 2001년 아프간을 공격할 당시의 작전명이기도 한 ‘항구적 자유(Enduring freedom)’가 아프간에 정착되려면 아직 미국이 필요해 보인다. 장택동 국제부장 will71@donga.com}

미국 대선 레이스 초반 공화당과 민주당의 표정이 엇갈리고 있다. 민주당은 확실한 대선 주자가 없는 데다 아이오와 당원대회(코커스)의 개표 혼란으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반면 공화당은 사실상 대선 후보로 확정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지난주 내내 호재가 잇따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중 최고의 1주일이었다”(파이낸셜타임스)라는 평가가 나왔을 정도다. 첫째는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이 올랐다. 4일(현지 시간) 공개된 갤럽의 여론조사 결과에서 트럼프 대통령 지지율은 49%로 취임 이후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둘째는 탄핵안 부결(5일)이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과 앙숙인 밋 롬니 의원을 제외한 공화당 상원의원 전원이 탄핵에 반대한 건 예상을 뛰어넘은 일이다. 2016년 대선 캠페인 전까지 트럼프 대통령은 공화당에서 아웃사이더였지만 이제 ‘공화당이 트럼프당이 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게 됐다. 셋째는 민주당의 아이오와 코커스(3일) 개표 관리 실패다. 38세의 피트 부티지지 전 사우스벤드 시장이 깜짝 1위를 차지하면서 민주당 대선 경선에 관심이 높아질 수 있는 기회였지만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인지 트럼프 대통령은 요즘 더욱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발언과 행동의 수위도 높아지고 있다. 4일 국정연설이 하이라이트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78분 동안 대통령으로서의 비전보다는 대선 후보로서 지지자를 향한 발언을 쏟아냈다. 한 예로 이날 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외국인(alien)’이라는 표현을 10차례 사용했는데 모두 ‘불법적인(illegal)’ 또는 ‘범죄의(criminal)’라는 수식어가 앞에 붙었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에게 지지를 보낸 백인 노동자 계층의 입장에서는 외국인 노동자가 일자리를 잠식할 수 있는 잠재적 경쟁자다. 지지층의 표심을 다시 얻기 위해 이들의 경쟁자를 적(敵)으로 규정한 것이다. 또 건강보험 문제를 언급하며 “결코 사회주의가 미국의 건강보험을 파괴하도록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주당, 특히 급진적 좌파로 분류되는 유력 대선 주자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을 겨냥한 발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회주의는 국가를 파괴하지만 자유는 (국민의) 마음을 통합한다”며 이분법 구도를 명확히 했다. AP통신은 ‘분열의 연설(state of the disunion)’이라고 비판했다. 미국 대통령의 국정연설은 ‘state of the union’이라고 표기하는데 이 표현을 뒤집어 국정연설을 비판한 것이다. 탄핵안이 부결된 지 사흘 만인 8일 트럼프 대통령이 내놓은 ‘보복 조치’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하원의 탄핵 조사 과정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알렉산더 빈드먼 중령은 백악관에서 내쫓고, 고든 손들런드 주유럽연합(EU) 미국대사는 불러들이기로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탄핵에서 승리한 뒤 대통령직을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CNN)는 평가가 나왔다. 정치인들에게 선거에서 이기는 것은 지상(至上) 과제다. 선거에서 이기려면 지지층을 넓히는 것 못지않게 기존 지지층을 탄탄하게 결집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피아(彼我)를 명확하게 나누는 전략을 종종 쓰기도 한다. 그러나 세계 최강국 미국의 현직 대통령이 ‘편 가르기 전략’을 쓰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미국 사회에 치유하기 어려운 후유증을 남기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국가들에도 불똥이 튈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10일 무역협상과 관련해 “유럽과 진지하게 대화하겠다”라고 엄포를 놓은 것도 대선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그의 화살이 어디를 향할지 전 세계가 불안한 눈빛으로 주시하고 있다. 장택동 국제부장 will71@donga.com}

11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신종 코로나)로 인한 중국 내 사망자가 1000명을 넘어선 가운데 후베이(湖北)성에서 사망자의 95% 이상이 발생했고, 사망률도 중국 다른 지역보다 15배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 본토 사망자 1017명(11일 기준) 가운데 후베이성은 974명(95.8%)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신종 코로나 발원지인 우한시에서 사망자가 748명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또 후베이성의 사망률은 3.1%, 우한시의 사망률은 4.1%인 반면 후베이성을 제외한 중국 내 다른 지역의 사망률은 0.2%에 불과하다. 이처럼 후베이성에 사망자가 많고 사망률이 높은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초기 대응 실패와 열악한 의료 시스템을 주된 원인으로 꼽는다. 발병 초기 환자를 제 때 격리하지 않아 환자 수가 무서운 속도로 급증했고, 중증 환자가 발생해도 이들을 치료할 시설, 물자, 의료 인력이 모두 모자라 제대로 치료를 못했다는 것이다. 우한시 위생건강위원회에 따르면 2일 기준 신종 코로나 치료 지정 병원 26곳의 병상은 7259개에 불과했다. 매일 환자가 2000~3000명 급증하는 상황에서 위중한 중증 환자조차 제대로 치료하기 어려웠다. 부랴부랴 3일 우한시에 1000개 병상 규모의 임시 격리병동 훠선산(火神山)병원, 9일 1600개 병상 규모의 레이선산(雷神山)병원을 열었지만 1만8000명이 넘는 우한시 환자를 수용하기에는 한참 모자라다. 오명돈 서울대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우한시에는 중증 환자를 집중 치료할 수 있는 대형병원이 3개, 중환자용 베드는 110여개 밖에 없었다”며 “의료시스템에 과부하가 걸리면서 치료시기를 놓친 환자가 많다”고 말했다. 또 바이러스의 특징상 2, 3차 감염으로 갈수록 사망률이 낮아지는데 후베이성과 우한은 1차 감염자 비율이 높은 것도 사망률이 높게 나타나는 이유로 분석된다. 일반적으로 바이러스는 초기 발생했을 때 훨씬 치명적이고, 감염원을 거칠수록 독성이 약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정기석 한림대성심병원 호흡기내과 교수(전 질병관리본부장)은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때에도 유행 초기 감염자들의 사망률이 더 높았다”고 말했다. 베이징=윤완준 특파원 zeitung@donga.com장택동기자 will71@donga.com박성민기자 min@donga.com}

“이라크는 5000마일 거리에 있는 친구(미국)와 5000년 동안 이웃으로 지낸 국가(이란) 사이에 있습니다. 우리가 지정학적 위치를 바꿀 수도, 역사를 바꿀 수도 없습니다. 이게 이라크가 처한 현실입니다.” 아딜 압둘마흐디 이라크 총리가 1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토로한 내용이다. 미국이 이라크 내 친이란 민병대를 공습하자 이라크 내 친이란 시위대가 이에 항의하기 위해 바그다드의 주이라크 미국대사관을 습격해 혼란이 가중되던 시점이었다. 뉴욕타임스가 전한 압둘마흐디 총리의 발언에는 강대국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라크의 답답한 처지가 담겨 있다. 최근 전 세계를 긴장시켰던 미국-이란 간의 충돌이 벌어진 곳은 미국이나 이란이 아닌 이라크였다. 이번 갈등의 시발점이 된 시아파 민병대의 공격으로 미국 민간인이 사망한 곳도, 미군이 가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을 제거한 곳도,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란이 미사일을 쏟아부은 곳도 모두 이라크 영토였다. 이유는 누구나 알고 있다. 이라크가 힘이 없기 때문이다. 이란이나 미국 영토 안에서 일이 벌어지면 자칫 전면전으로 번질 각오를 해야 하므로 양국 모두 애꿎은 이라크를 선택한 것이다. 이라크 주민들이 ‘주권 침해’라고 항의하고 이라크 의회가 미군 철수 결의안을 채택했지만 미국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오히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이라크가 미군의 철수를 요구한다면 “이전까지 보지 못한 수준의 제재를 가할 것”이라고 엄포를 놨다. 이라크 인구의 대부분이 무슬림이고 시아파가 수니파보다 2배가량 많지만 이라크 국민들이 ‘시아파 종주국’ 이란을 무조건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지난해 10월부터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이라크 시위대는 “이란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이란영사관 2곳을 습격했다. 하지만 이란 역시 이라크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약소국이 강대국 간 대리전의 싸움터가 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시리아 내전은 미국-터키-사우디아라비아 대 러시아-이란 간의 대리전 성격이 강하다. 리비아 내전도 터키-카타르와 사우디-이집트-아랍에미리트(UAE)가 대결하는 형국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라크는 24년간 사담 후세인의 철권통치 아래 이란, 미국과 전쟁을 벌이면서 피폐해졌다. 2003년 후세인이 몰락한 뒤에는 알카에다, 이슬람국가(IS), 친이란 민병대 등 다양한 무장세력이 등장했고 주변 강대국의 세력 다툼 속에서 이라크 사회는 더욱 어지러워졌다. 하지만 이라크전 이후에도 17년간 이어지고 있는 혼란의 원인을 외부의 탓으로만 돌리면 해법을 찾기는 어렵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이라크는 원유 매장량 세계 5위, 원유 생산량 세계 6위의 산유국이다. 한반도 2배 정도 크기의 국토에 약 4000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재건을 위한 자원은 갖추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를 활용할 리더십이 없다. 미국 포린어페어스는 이라크 반정부 시위의 원인에 대해 “이라크 젊은이들의 인내가 임계점을 넘어섰다. 이들은 엄청난 석유 판매 수입이 정치, 경제 지도층의 주머니로 들어가고 교육, 일자리 창출, 사회기반시설에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 것을 목격해 왔다”고 분석했다. 국제사회에서는 법보다 힘의 논리가 더 강하게 작동한다는 점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앤드루 와이너 세이브더칠드런 정책연구소장은 영국 가디언 기고에서 “현실주의자들은 ‘정글의 법칙’이 국제사회를 지배하는 것으로 본다”고 썼다. 정글 같은 국제사회에서의 생존법은 스스로를 지킬 정치·경제·군사적 역량을 갖추고, 동맹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것이 아닐까.장택동 국제부장 will71@donga.com}
숙명여고 학부모와 졸업생으로 구성된 ‘숙명여고 정상화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가 학교 측에 이르면 31일 공개질의서를 보내기로 했다. 비대위는 앞서 18일 학교 측에 전 교무부장 A 씨와 쌍둥이 자매의 징계를 촉구하는 내용증명을 보냈다. 30일 본보가 입수한 공개질의서에는 총 10개 항목의 질문이 담겨 있다. 이 가운데 절반인 5개는 A 씨와 쌍둥이 자매의 시험문제 유출 의혹과 관련된 것이다. 비대위는 △A 씨와 쌍둥이 자매를 아직도 무죄라고 생각하는지 △이번 사태는 A 씨의 단독 행동이 확실한지 △A 씨의 파면과 쌍둥이 자매 퇴학은 언제 이뤄질 계획인지 등이 질의에 포함됐다. A 씨는 현재 직위해제 상태에서 출근하지 않고 있다. 특히 비대위는 두 학생의 성적은 조속히 0점 처리하고 이를 반영해 다른 학생들의 등수를 조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비대위는 “시험 도중 휴대전화 벨만 울려도 0점 처리가 되는데, 혐의와 증거가 드러나고 있는 쌍둥이들의 성적을 0점 처리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또 ‘상피제(교사인 부모와 고등학생인 자녀가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없게 하는 것)를 왜 당장 실시하지 않는지’ 등에 관해 질의했다. 학교 측은 비대위의 움직임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비대위가 보낸 내용증명에 관해서도 아직 답하지 않았다. 숙명여고 관계자는 “비대위가 전체 학부모의 여론을 대표하고 있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말했다. 비대위는 200여 명의 학부모·졸업생이 참여하고 있는 2개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모임에서 본인의 신분을 공개한 학부모 9명과 졸업생 1명으로 구성돼 있다. 비대위 관계자는 “100년 역사의 숙명이 이젠 성적 비리의 대명사가 돼 오명으로 얼룩진 치욕을 경험하고 있다”며 “교육자의 양심으로 성심껏 답변해 달라”고 밝혔다.김정훈 기자 hun@donga.com}

통합정부로 위기를 돌파하고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대선을 34일 앞둔 오늘 저는 더는 피할 수 없다는 사명감에 이 자리에 섰습니다.지난 겨울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촛불 집회에 참석한 엄마는 무엇을 위해 나온 것입니까.권력자를 내쫓고 또 다른 권력자를 만들러 나온 게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내 아이가 살아갈 좋은 나라를 만들어주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여건에서 좋은 나라를 만드는 일은 대통령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나라의 정치역량을 총동원해야 가능한 일입니다.저는 이번 대통령 선거에 정당 추천 없이 출마해서 국민의 선택을 받고자합니다. 바로 그 통합조정의 소명을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여러 정파와 인물을 아우르는 최고 조정자로서, 나라를 안정시키고 국민을 편안하게 해드리겠습니다.○「위기돌파 통합정부」를 보여드리겠습니다.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의 출마와 선거운동은 통합정부를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5월9일 당선과 동시에 나라를 운영할 수 있습니다.위기는 우리 턱밑에 와 있습니다.지난 6개월간 우리는 자신이 무능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대통령을 탄핵하고 처벌받게 하려고 너무도 많은 것을 희생했습니다. 그 사이에 우리 곁에는 큰 안보위기, 경제위기가 다가와 있습니다. 북한은 미사일 발사를 계속하고, 곧 핵실험도 할 태세입니다. 미국은 핵추진 항공모함을 우리 주변에 배치하고, 전략폭격기를 한반도에 전개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무지막지한 힘으로 우리를 협박하고 있습니다.국제 금리와 환율이 요동치고, 가계부채는 언제 폭발할지 모릅니다.이런 위기 상황을 수습할 대통령을 뽑는 것인데, 지난 세월이 모두 적폐라면서 과거를 파헤치자는 후보가 스스로 대세라고 주장합니다. 또 다른 후보는 어떻게 집권할지도 모르면서 여하튼 혼자서 해보겠다고 합니다.국민의 불안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눈앞에 다가오는 위기를 앞장서 헤쳐갈 수 있는 사람도 방법도 보이질 않습니다.○이번 대선은 힘을 합쳐보겠다는 有能과 혼자 하겠다는 無能의 대결입니다.이번 대선은 대한민국의 운명이 갈리는 분기점입니다. 위기를 돌파하고 미래를 개척할 통합정부와 과거청산에 매달릴 이념세력 사이의 선택이 국민 앞에 놓여 있습니다.위기에 처한 국가는 아무나 경영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3D프린터’를 ‘삼디프린터’라고 읽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잠깐 실수로 잘못 읽었다고 하기엔 너무도 심각한 결함입니다. 국정 책임자에게 무능은 죄악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난 몇 달 동안 고통스럽게 지켜본 일입니다. 무능한 사람이 나라를 맡는 일이 반복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각 정파의 유능한 인물들이 힘을 모으는 통합정부가 답입니다.이번 대선에 나선 각 당의 후보들이 서로 힘을 모아 나라를 꾸려가도록 국민들께서 격려해주셔야 합니다. 통합정부를 밀어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나라의 미래가 있습니다.그 소임을 위해 마지막 주자로 나선 저에게 힘을 주시면 대통령은 권력자가 아닌 조정자가 될 것이고, 대한민국의 역량을 모두 모으는 정치는 현실이 될 것입니다.정권 인수 준비 기간이 없는 다음 정부는 선거 과정에서부터 정부의 진용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통합정부를 만들어가는 길이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입니다.이번 탄핵 대선이 헌정사에 전례 없는 일인 만큼, 그 양상도 전례 없는 방식으로 전개될 거라고 봅니다. 선거과정에서 집권과 동시에 즉각 일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춰야 하기 때문에 통합정부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우리에겐 경험해보지 않은 새로운 길이지만 이미 많은 유럽 국가들이 택하고 있는 제도이고 효과가 검증된 선진정치입니다.저는 통합정부의 길을 통해서 나라를 신속하게 안정시키고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를 새롭게 하면서 개혁 중의 개혁 헌법개정을 완수하겠습니다.삼년 뒤인 2020년 5월에는 다음 세대 인물들이 끌어가는 새로운 대한민국, 제 7 공화국을 열겠습니다.○차기정부의 개혁은 단호하고 신속할 것입니다. 5월9일 이후 새 정부는 이 땅에 전쟁이 발생할 소지를 없애는 일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한미동맹을 확고하게 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중국을 설득하겠습니다. 한일관계도 정상화해야 합니다. 그래야 평화가 담보됩니다.북한에게는 분명한 입장을 취할 것입니다. 미사일 발사엔 보상이 없고, 핵실험은 정권의 명을 재촉할 뿐이라는 단호한 입장을 유지하겠습니다. 대한민국을 건너뛰어서 미국과 통하는 길은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할 것입니다.경제 불안을 잠재우는 것은 시장에 대한 믿음입니다. 유능한 경제전문가 정부가 탄생하는 것 자체가 경제안정입니다. 금리와 환율은 진정국면을 맞을 것입니다.신속한 경제민주화 조치는 재벌기업들이 더 이상 권력의 특혜를 기대하지 않도록 해서 스스로 자유로워지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업은 투자와 일자리 만들기에 자발적으로 나서게 됩니다.○당면한 위기돌파는 개혁과 개헌으로 이어질 것입니다.30년 전 우리는 직선 대통령의 시대를 기쁘게 맞았습니다. 하지만 지난 여섯 명의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친인척이 구속되거나 자신이 구속됐습니다. 나라를 파탄에 빠뜨리거나 심지어 자살하고, 탄핵 파면됐습니다.이건 명백히 제도의 문제입니다. 사람의 문제라면 어떻게 6번 연속으로 실패하겠습니까. 「다른 결과를 기대하면서 같은 방법을 쓰는 것은 바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적폐 중의 적폐, 제1의 적폐인 제왕적 대통령제는 이제 정말 끝내야 합니다.전직 대통령과 함께 ‘제왕적 대통령제’도 감옥에 갔습니다. 제도를 땅에 묻어야 합니다. 그래야 재벌이 비선실세를 경유해 돈으로 특혜를 사러 다니는 일을 멈추게 됩니다. 그래야 일자리가 만들어집니다.제왕적 대통령제가 사라져야 언론과 검찰이 제 자리를 찾습니다. 그래야 편향보도와 정치수사의 논란이 종식되고 시민의 권리가 살아납니다.차기 정부는 통합정부의 정신으로 연대하는 정부여서 어떤 개혁조치도 가능한 국회 의석이 모아질 것입니다.실제 수많은 개혁입법이 말만 무성한 게 아니라 제대로 실현될 것입니다.○정치구호가 해결해주는 일은 없습니다.정권교체, 시대교체, 세대교체 같은 구호가 난무합니다. 교체는 교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정의란 단어를 팔고 청산을 외치는 적개심 정치로 우리 앞에 있는 수많은 과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싸움만 크게 벌어지고 문제는 고스란히 남아 우리 미래를 갉아먹을 것입니다.이미 망해서 과거가 된 정권을 두고 정권을 교체하자는 집단이 판단력이 있는 사람들입니까. 과거 집권했던 5년간 국민 사이에 미움을 키운 것 이외엔 별로 한 일이 없는 사람들이 지금 이 마당에 적폐청산을 주장하면 국민에게 뭘 해주겠다는 겁니까. ○업적이 차곡차곡 쌓이는 정부가 어떤 것인지 보여드리겠습니다.저는 우리나라 일인당 소득이 천 달러에 불과하던 40년 전, 국민의료보험제도를 설계하고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관철시킨 사람입니다. 미국인 중 3200만 명이 의료보험이 없이 살고 지금도 의료보험을 둘러싼 정쟁이 계속되고 있으니, 그 일이 어떤 의미인지 국민이 평가할 것입니다.근로자 재산형성 저축(재형저축)을 만들었고 KTX와 인천공항, 서울외곽순환도로 같은 대형 인프라도 도입했습니다. 성과는 역량이 확인된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현재뿐 아니라 아이들의 미래를 망가트립니다.제가 통합정부의 리더가 돼서 해내겠습니다.젊은이들이 일할 수 있는 자리가 넘치고 자영업자는 세금에 쫓기지 않고 직장인은 해고의 불안에서 벗어난 나라. 그런 나라의 기틀을 만들어드리겠습니다.○경제민주화, 개헌, 그리고 통합정부에 공감하는 세력이 뭉쳐야 합니다.경제민주화는 일자리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개헌은 우리나라를 바꾸는 시작이자 결과입니다. 통합정부는 당면한 위기를 국민과 함께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이 세 가지 대의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손을 잡고 활기가 넘치는 대한민국을 만들어가고자 합니다.임진왜란과 병자호란, 6.25전쟁과 IMF. 이 땅의 백성들에게 피눈물을 안겼던 일들은 어쩌다 벌어진 것입니까.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나라밖의 사정에는 눈감고 권력다툼에 몰두한 결과였고, 그 고통은 모두 국민의 몫이었습니다.국민여러분! 이제 대선은 34일 남았습니다. 저는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앞으로의 34일 하루하루가 국민 여러분에게 다가가는 시간이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해가는 시간입니다.누가 어떻게 모여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제 말에 공감을 표시해주는 국민이 많으면 한 달 뒤에 위기를 돌파할 통합정부는 탄생합니다. 현실은 어렵지만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다시 한 번 똘똘 뭉쳐 이 위기를 극복하고 공정하고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 것입니다. 온 나라에 희망이 샘솟고 경제는 활기를 되찾고 나라는 부강해질 것입니다. 저 김종인이 앞장서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