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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통쾌한 ‘무협지’를 만났다. 검객은 한자와 나오키. 은행원이다. 거품경제시대 끝자락에 대형 은행에 입사. 세상이 내 맘대로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조직 생활이 그런가. 이젠 고만고만한 중간간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한다. 그런데 사고가 터지자 상사들은 모든 책임을 그에게 돌린다. 그냥 고분고분히 따라야 하나. 인생이 걸린 문제. 그럴 순 없다. 한자와는 오랫동안 벼려왔던 칼을 뽑는다. 물론 소설에 진짜로 칼이나 초식이 등장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웬만한 무협 세계보다 더 박진감이 넘친다. 주제는 한자와의 한마디에 다 녹아 있다. “상대가 선의를 가지고 호의를 보인다면 성심성의껏 대응해. 하지만 당하면 갚아주는 게 내 방식이야. … 열 배로 갚아줄 거야. 그리고 짓눌러버릴 거야.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그게 상사건, 가진 자건, 악당이건. 칼은 춤추고, 꽃잎은 우수수. 그래서 더욱 이 소설은 무협지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일개 회사원이 그렇게 하고 싶은 말 다 할 수 있는 조직이 얼마나 되겠나. 아마 현지에서 원작소설은 물론 드라마까지 엄청난 대박을 터뜨렸던 이유도 그게 아닐까. 현실엔 존재하지 않는 슈퍼 히어로지만, 누구나 망토 두르고 하늘을 날고 싶은 맘. 21세기도 한참 지났지만 여전히 이 작품은 우리네 현실에 비추면 SF(공상과학)에 가깝다. 거창한 문학성은 없을지 몰라도, 흡입력 하나만큼은 만렙(최고 레벨)이다. 대형 은행에서 일했던 전문성을 살려, 일반인에겐 낯선 금융계의 속살을 흥미롭게 들춰낸 점도 매력적이다. 일본 문학은 노벨 문학상도 질투 나지만, 이런 다양성이야말로 진짜 힘이 아닐까. 조만간 나온다는 3, 4권이 기다려진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요즘 극적인 스포츠 경기나 희한한 사건을 마주하면 꽤나 쓰는 말이 있다. “영화나 드라마였으면 막장이라고 욕먹었겠다.” 너무 의외라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인식 범위를 벗어나면 현실감이 떨어진다. 아마 이 책을 읽는 이들도 비슷한 체험을 하게 되리라. 이게 진짜 실제로 벌어진 일일까. 일단 ‘전쟁 말고…’의 뼈대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개천에서 용 난 성공 신화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빈민가에서 태어난 사내. 가진 건 쥐뿔도 없지만 굳은 신념으로 역경을 뚫고 대박을 터뜨린다. 지금 당장 서점에 달려가도 닮은꼴 수백 권은 찾을 만큼 뻔한 스토리다. 하지만 발라냈던 살을 다시 붙여 가면 분위기는 180도 달라진다. 주인공 목타르 알칸샬리는 예멘계 미국인이다. 이슬람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 하류층에서 자랐다. 예멘에 가면 미국인이라서, 미국에선 아랍인이라고 눈총을 받는다. 어릴 때부터 공부는 뒷전인 문제아였지만 타고난 재능은 있어 어디에 내놔도 제 밥벌이를 하긴 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유레카’를 외칠 일이 생긴다. 커피에 인생을 걸기로 결심한다. 커피의 발상지가 예멘인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좋은 커피는 와인만큼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단 것도. 하지만 ‘모카’의 기원일 정도인 예멘은 오랜 전쟁을 치르며 세계 커피 시장에서 미미한 존재가 된 지 오래. 게다가 여전히 그곳의 치안은 불안하기 그지없다. 결론적으로 그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긴 했다. 목타르가 어렵사리 미국 수입에 성공한 ‘하이마 농장산 커피’는 “천사의 노래”란 극찬을 받으며 2017년 커피 평가지 역사상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 커피는 최근 한국에서도 화제인 블루보틀에서 한 잔에 16달러(약 1만9000원)에 내놓았다. 그런데도 없어서 못 판단다. 그런데 좀 기분이 께적지근하다. 이 ‘위대한’ 인물에 경의를 표할 맘은 좀처럼 들질 않는다. 목타르가 성공을 위해서만 한 몸을 바친 게 아니란 건 안다. 천대받는 예멘 커피를 세계에 알리려 했던 사명감도 이해한다. 근데 그게 수류탄을 들고 현지 고리대금업자와 담판을 지어야 할 정도로 꼭 필요한 일이었을까. 게다가 꽤 여러 번 요행이 작용하지 않았다면, 가족과 친구는 그가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를 뻔했다. 특히 애들에겐 전혀 들려주고 싶은 영웅담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기상천외한 모험이 드러낸 세상의 속살은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가 손쉽게 마시는 커피에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이 스며 있는지 괜스레 경건해질 정도다. 또 미국이건 중동이건, 종교 인종 빈부 갈등 아래 신음하는 많은 이들의 희생을 소스라치게 일깨운다. 아마도 소설가이자 사회운동가인 저자 역시 개인의 성공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을 게다. 다시 한번 되짚어 보자. 이건 훌륭한 농장에서 커피를 수입해 걸맞은 가격으로 팔아 성공한 이의 이야기다. 이토록 간명한 사업이 왜 자칫하면 목숨을 잃고 수많은 감시와 검사를 받아야 할 일이 돼 버린 것일까. 어쩌면 목타르는 커피가 아니라 ‘삶의 진실’을 미국으로 가져온 게 아닐는지. 불공평과 비도덕이 관행과 현실로 포장되는 세상을. 설탕과 우유로 아무리 가린들, 커피는 원래 쓰고 시큼하다. 우리가 오랫동안 길들여졌을 뿐.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요즘 극적인 스포츠경기나 희한한 사건을 마주하면 꽤나 쓰는 말이 있다. “영화나 드라마였으면 막장이라고 욕먹었겠다.” 너무 의외라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인식 범위를 벗어나면 현실감이 떨어진다. 아마 이 책을 읽는 이들도 비슷한 체험을 하게 되리라. 이게 진짜 실제로 벌어진 일일까. 일단 ‘전쟁 말고…’의 뼈대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개천에 용 난 성공신화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빈민가에서 태어난 사내. 가진 건 쥐뿔도 없지만 굳은 신념으로 역경을 뚫고 대박을 터트린다. 지금 당장 서점에 달려가도 닮은 꼴 수백 권은 찾을 만큼, 뻔한 스토리다. 하지만 발라냈던 살을 다시 붙여 가면 분위기는 180도 달라진다. 주인공 목타르 알칸샬리는 예멘 계 미국인이다. 이슬람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 하류층에서 자랐다. 예멘에 가면 미국인이라서, 미국에선 아랍인이라고 눈총을 받는다. 어릴 때부터 공부는 뒷전인 문제아였지만, 타고난 재능은 있어 어디에 내놔도 제 밥벌이를 하긴 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유레카’를 외칠 일이 생긴다. 커피에 인생을 걸기로 결심한다. 커피의 발상지가 예멘인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좋은 커피는 와인만큼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단 것도. 하지만 ‘모카’의 기원일 정도인 예멘은 오랜 전쟁을 치르며 세계 커피 시장에서 미미한 존재가 된 지 오래. 게다가 여전히 그곳의 치안은 불안하기 그지없다. 결론적으로 그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긴 했다. 목타르가 어렵사리 미국 수입에 성공한 ‘하이마 농장산 커피’는 “천사의 노래”란 극찬을 받으며 2017년 커피 평가지 역사상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 커피는 최근 한국에서도 화제인 블루보틀에서 1잔에 16달러(약 1만9000원)에 내놓았다. 그런데도 없어서 못 판단다. 그런데 좀 기분이 께적지근하다. 이 ‘위대한’ 인물에 경의를 표할 맘은 좀처럼 들질 않는다. 목타르가 성공을 위해서만 한 몸을 바친 게 아니란 건 안다. 천대받는 예멘 커피를 세계에 알리려 했던 사명감도 이해한다. 근데 그게 수류탄을 들고 현지 고리대금업자와 단판을 지어야 할 정도로 꼭 필요한 일이었을까. 게다가 꽤 여러 번 요행이 작용하지 않았다면, 가족과 친구는 그가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를 뻔했다. 특히 애들에겐 전혀 들려주고 싶은 영웅담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기상천외한 모험이 드러낸 세상의 속살은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가 손쉽게 마시는 커피에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이 스며 있는지 괜스레 경건해질 정도다. 또한 미국이건 중동이건, 종교 인종 빈부 갈등 아래 신음하는 많은 이들의 희생을 소스라치게 일깨운다. 아마도 소설가이자 사회운동가인 저자 역시 개인의 성공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을 게다. 다시 한번 되짚어보자. 이건 훌륭한 농장에서 커피를 수입해 걸맞은 가격으로 팔아 성공한 이의 이야기다. 이토록 간명한 사업이 왜 자칫하면 목숨을 잃고 수많은 감시와 검사를 받아야 할 일이 돼버린 것일까. 어쩌면 목타르는 커피가 아니라 ‘삶의 진실’을 미국으로 가져온 게 아닐는지. 불공평과 비도덕이 관행과 현실로 포장되는 세상을. 설탕과 우유로 아무리 가린들, 커피는 원래 쓰고 시큼하다. 우리가 오랫동안 길들여졌을 뿐.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5년이 지난 뒤에는 첫발을 디뎠던 곳과 겉보기에 매우 다른 어딘가에 도착했다. 길을 잃었을 때의 묘미가 여기에 있다. 그 끝이 어디든, 당신이 가고자 했던 길을 갔을 때보다 더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미국인은 ‘돌+아이’다. 비하할 맘은 없지만 일반적이진 않다. 세계를 방랑하던 소설가로서 북한에 흥미를 느낄 수야 있다. 근데 시기가 2016년이었다. 그해 1월, 오토 웜비어(1994∼2017)가 억류된 그때 말이다. 그런데 평양으로 1개월 어학연수를 간다고? 친동생이면 머리끄덩이 잡고 다리몽둥이를…. 어쨌건 그는 갔다. “집착은 사람을 이상한 길로 돌아가게 만들고 그렇게 돌아간 길은 한 사람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결정짓기도 한다”는 저자 말마따나, 이 비정상적인 관심은 세상 누구도 하기 힘든 독특한 경험을 선사했다. 실은 2012년부터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해 꽤 친숙한 편이긴 했지만, 관광과 체류는 또 다르니까. 익숙하다고 어색하지 않은 건 아니다. 어쨌든 저자는 평양에서 ‘외계인’이다. 시내를 걸어가면 모두가 쳐다보지만 누구도 말을 걸지 않는다. 하지 말란 것도, 가면 안 되는 곳도 많다. 수업 때 한글 발음을 익히려고 동영상을 찍었는데, 뒤쪽에 걸린 김정일 초상화가 일부 잘렸다는 이유로 삭제 요구를 받는 나라. 저자가 자책하자 함께 수업 듣던 외국인 동료는 이렇게 대꾸한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항상 이걸 기억해요. 그들이 이상한 겁니다. 우린 아니에요.” 바로 이 지점이, 어쩌면 ‘시-유 어게인…’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이리라. 저자는 뭔가를 고발하거나 혹은 옹호하려고 이 책을 쓴 게 아니다. 정치나 도덕이란 잣대를 들이밀려고 평양에 가지 않았다. 누가 옳고 그르냐가 아니라, 거기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가가 보고 싶어서다. 서로 너무나 다른, 심지어 상대가 ‘적국(敵國)’이기까지 한 그는 어디까지 소통할 수 있을까. 판문점에서 만난 한 젊은 병사는 말한다. “미국인도 사람은 사람이네요.” 딱 그대로 저자는 그 말을 돌려주고 싶은 게다. 물론 이 책은 한계도 자명하다. 웬만한 자유국가도 겨우 한 달로 무슨 평가를 내리긴 어렵다. 그런데 어딜 가든 감시원(또는 안내원)이 달라붙는 체제 아래서 뭐 대단한 속내를 파헤칠 수 있겠나. 심지어 저자가 만난 대다수는 ‘평양 시민’이다. 북한에서도 선택받은 이들만 본 셈인데, 아무래도 편향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허점이 이 책의 매력을 깡그리 없애진 못한다. 형식적이고 가식적이었다 해도, 본질은 ‘사람과 사람’이 만났기 때문이다. 어디서 어떤 공감과 이해가 벌어질지 누구도 모르는 거 아닌가. 실제로도 이 책이 들려주는 체험은 의외로 놀라운 구석이 많다. 게다가 다녀온 뒤로 짐작되지만, 저자는 아주 열심히 한반도의 정세와 역사를 공부했다. 그 노력은 동의 여부를 떠나서 함부로 폄하할 수 없다. 저자에 따르면 평양은 “매일 아침 온통 안개로 뒤덮인다”. “마치 다시 꿈속으로 빠져들어 마법의 세상에 들어온” 것처럼…. 그 도시는 언제쯤이면 햇살이 비치며 환하게 실체를 드러내려나. 아니면 더 짙은 연무와 어둠 속으로 윤곽조차 감춰버릴까. 저자도 우리도 답은 모르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그곳엔 사람이 산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5년이 지난 뒤에는 첫발을 디뎠던 곳과 겉보기에 매우 다른 어딘가에 도착했다. 길을 잃었을 때의 묘미가 여기에 있다. 그 끝이 어디든, 당신이 가고자 했던 길을 갔을 때보다 더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미국인은 ‘돌+아이’다. 비하할 맘은 없지만 일반적이진 않다. 세계를 방랑하던 소설가로서 북한에 흥미를 느낄 수야 있다. 근데 시기가 2016년이었다. 그해 1월, 오토 웜비어(1994~2017)가 억류된 그 때 말이다. 그런데 평양으로 1개월 어학연수를 간다고? 친동생이면 머리끄덩이 잡고 다리몽둥이를…. 어쨌건 그는 갔다. “집착은 사람을 이상한 길로 돌아가게 만들고 그렇게 돌아간 길은 한 사람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결정짓기도 한다”는 저자 말마따나, 이 비정상적인 관심은 세상 누구도 하기 힘든 독특한 경험을 선사했다. 실은 2012년부터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해 꽤 친숙한 편이긴 했지만, 관광과 체류는 또 다르니까. 나름 익숙하다고 어색하지 않은 건 아니다. 어쨌든 저자는 평양에서 ‘외계인’이다. 시내를 걸어가면 모두가 쳐다보지만 누구도 말을 걸지 않는다. 하지 말란 것도, 가면 안 되는 곳도 많다. 수업 때 한글 발음을 익히려 동영상을 찍었는데, 뒤쪽에 걸린 김정일 초상화가 일부 잘렸다는 이유로 삭제 요구를 받는 나라. 저자가 자책하자 함께 수업 듣던 외국인 동료는 이렇게 대꾸한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항상 이걸 기억해요. 그들이 이상한 겁니다. 우린 아니에요.” 바로 이 지점이, 어쩌면 ‘시-유 어게인…’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이리라. 저자는 뭔가를 고발하거나 혹은 옹호하려 이 책을 쓴 게 아니다. 정치나 도덕이란 잣대를 들이밀려고 평양에 가지 않았다. 누가 옳고 그르냐가 아니라, 거기에는 어떤 ‘사람들’이 사는가를 보고 싶어서다. 서로 너무나 다른, 심지어 상대가 “적국(敵國)”이기까지 한 그는 어디까지 소통할 수 있을까. 판문점에서 만난 한 젊은 병사는 말한다. “미국인도 사람은 사람이네요.” 딱 그대로 저자는 그 말을 돌려주고 싶은 게다. 물론 이 책은 한계도 자명하다. 웬만한 자유국가도 겨우 한달로 무슨 평가를 내리긴 어렵다. 그런데 어딜 가든 감시원(또는 안내원)이 달라붙는 체제 아래서 뭐 대단한 속내를 파헤칠 수 있겠나. 심지어 저자가 만난 대다수는 ‘평양 시민’이다. 북한에서도 선택받은 이들만 본 셈인데, 아무래도 편향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허점이 이 책의 매력을 깡그리 없애진 못한다. 형식적이고 가식적이었다 해도, 본질은 ‘사람과 사람’이 만났기 때문이다. 어디서 어떤 공감과 이해가 벌어질지 누구도 모르는 거 아닌가. 실제로도 이 책이 들려주는 체험은 의외로 놀라운 구석이 많다. 게다가 다녀온 뒤로 짐작되지만, 저자는 아주 열심히 한반도의 정세와 역사를 공부했다. 그 노력은 동의 여부를 떠나서 함부로 폄하할 수 없다. 저자에 따르면 평양은 “매일 아침 온통 안개로 뒤덮인다.” “마치 다시 꿈속으로 빠져들어 마법의 세상에 들어온” 것처럼. 그 도시는 언젠가 햇살이 비치며 환하게 실체를 드러내려나. 아니면 더 짙은 연무와 어둠 속으로 윤곽조차 감춰버릴까. 저자도 우리도 답은 모르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그곳엔 사람이 산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깃털 도둑이라…. 게다가 실화라니. 깃털같이 하찮은 것을 훔쳐서 대체 어디다 쓴다는 걸까?” 그간 ‘옮긴이의 말’을 옮긴 적은 없었다. 한데 이번만큼은 예외로 해야겠다. 이 책을 마주한 느낌을 너무 적확하게 표현했기에. 도대체 이게 뭔지. 왜 굳이 책으로 쓴 건지 가늠이 안 갔다. ‘깃털 도둑’이 다루는 전모도 별거 없다. 2009년 영국 자연사박물관에서 새 표본 299점이 사라졌다. 1년 넘게 지난 뒤 잡힌 범인은 런던왕립음악원 학생인 에드윈 리스트. 절도 행각을 벌인 이유는 어이가 없다. 플라이낚시 끝자락에 매다는 깃털을 갖고 싶어서였다. 여기까지 보면 술자리에서 안줏거리나 될 만한 ‘황당 에피소드’ 수준일 터. 실제로도 리스트는 당시 19세 청년의 치기와 정신미약을 근거로 집행유예 12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모든 게 일단락. 하지만 저자는 이 짤막한 사건에서 뭔가 불편한 냄새를 맡는다. 훔친 새 표본은 어떻게 됐나. 집행유예란 판결은 적절했나. 그리고 뭣보다, 왜 그는 박물관 유리창까지 깨고 들어가 새를 훔쳤을까. 무려 5년 동안 미국과 유럽을 돌며 취재한 내용은 더 충격적이다. 스포일러일 테니 자세히 말하긴 그렇다. 다만 순진무구한 어린애 장난으로 여길 건 아니다. 실은 플라이 타이어(fly tier·플라이낚시 제조자)의 세계는 생각보다 저변이 넓다. 이 때문에 희귀한 깃털은 예상보다 큰 ‘돈’과 ‘명성’을 안겨준다. 그리고 밀렵과 밀매라는 짙은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다. 그럼 깃털 탐욕은 일부 ‘덕후’만 해당될까. 실은 18∼19세기엔 훨씬 심했다. 중요한 패션 소재였으니. 화려한 모자 등을 꾸미려 수없이 많은 새들을 죽였다. 결국 여성들이 스스로 동물보호를 천명하며 잦아들긴 했지만, ‘취향’을 위해 동물을 마구잡이로 해친 건 틀림없다. “이 이야기 속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쪽은) 수세기에 걸쳐 새들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에게 새들은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인류의 미래에 도움이 될 거라는 신념과 과학은 계속 발전할 것이므로… 또 다른 쪽에는 에드윈 리스트가 속하는, 깃털을 둘러싼 지하세상이 있었다. 거기에서는 남들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지려는 탐욕과 욕망에 사로잡혀 더 많은 부와 더 높은 지위를 탐하며, 몇 세기 동안 하늘과 숲을 약탈해온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읽은 어느 범죄 논픽션보다 독특하다. 상대적으로 소소한 소재를 가지고 엄청난 통찰력을 발휘했다. 게다가 난민 시민운동가 출신인 저자가 전문도 아닌 분야를 파헤친 열정은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나 더. 이건 깃털과 서양만의 문제가 아니다.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코끼리 상아나 코뿔소 뿔, 호랑이 눈썹…. 우리도 그리 떳떳하진 않다. 인류가 지구상에서 이기적이고 잔인했던 게 어제오늘 일이겠느냐만. 이 죗값을 어떻게 치를지. 괜히 더 울적하고 미안하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모든 중생이 공경하고 정성으로 받드나니 깨달음을 이루는 일 부처님만 아시리라. 나도 이제 대승법을 이 세상에 널리 펼쳐 괴로운 중생을 구제하고 해탈시키리라.’ ―‘법화경’에서 》 12일은 불기 2563년 부처님오신날. 탄신일을 며칠 앞둔 8일 오전, 서울 은평구 진관사는 하늘에도 땅에도 꽃이 피었다. 부처님은 언제나 중생에게 길을 알려주려 하셨다. “절망하지 말고 우울해하지 말라. 모든 고통에는 빠져나갈 문이 있다. 네 마음속에 날아오를 수 있는 날개가 있다.” 멀리 스님 곁에서 아기 불상의 염화미소가 중생을 다독인다.글=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사진=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하루에 한 번씩만 해운정사(海雲精寺) 도량을 밟고 가도 발복(發福·운이 틔어 복을 받다)한다.”(고 손석우) 부산 해운대구에 있는 해운정사는 1971년 장수산에 터를 잡은 뒤 현재 6만6000여㎡(약 2만 평)에 이르는 대가람을 이뤘다. ‘육관도사’라 불렸던 풍수지리의 대가 손석우(1928∼1998)가 극찬한 이곳은 불교계 최고 어른이자 정신적 지도자인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이 ‘간화선 대중화’의 원력으로 중생을 제도하고 법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창건했다.세계 명상의 중심 허브로 발돋움 해운정사는 풍수에 조예가 없더라도 한눈에 알아볼 만큼 근사하다. 태백산맥에서 이어진 장수산은 거대한 코끼리 형상을 하고 있고, 해운대에서 바라보는 앞모습은 새끼를 품은 암사자 형상이다. 앞으로 망망대해까지 펼쳐져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해운대 10대 관광명소로 지정돼 1년 내내 유명인사를 포함해 내외국인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가히 부산경남 지역의 대표적 사찰이라 할 수 있는 해운정사는 3개의 선원을 갖춘 것으로 유명하다. 스님 20여 명이 끊임없이 정진하는 금모선언이 ‘상(上)선원’, 재가불자들이 여름과 겨울 안거기간에 3개월씩 정진하는 ‘하(下)선원’, 그리고 매주 토요일 일반인들이 철야 정진하는 ‘시민선원’이 있다. 많으면 1000명 이상의 대중이 함께 참선하는 국내 최고의 도량이다. 해운정사가 품고 있는 보물도 눈여겨봐야 한다. 부산광역시 시문화재자료 제78호로 지정된 ‘해운정사 선문 염송집’ 30권 10책과 제79호인 해운정사 현수제승법수 11권 1책이 있다.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149호인 해운정사 전법게(傳法偈) 3종 6점 등도 귀중한 문화재다. 아울러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을 모신 ‘원통보전’ 법당과 부처님 진신사리 33과를 모신 ‘관음보궁’, 1만 옥불 지장보살을 모신 ‘대불전’, 주요 조사 스님 10명을 석상으로 모신 ‘불조심인전’도 인상적이다. 매월 음력 초하루와 18일(지장재일)에 열리는 정기법회 때는 종정인 진제 스님이 직접 법문을 내려준다. 선지식의 고준한 법문은 일반 시민에게도 정신적으로 소중한 밑거름이 된다. 매월 음력 24일인 관음재일에는 남해 성담사로 가서 방생을 하고 법문을 듣는 방생법회를 봉행한다. 해운정사 측은 “최근 방탄소년단 열풍처럼 세계에서 한류에 대한 관심이 크다. 그와 더불어 서구에선 명상 붐도 일고 있다”며 “한국의 대표적인 참선도량인 해운정사는 장차 국제명상참선센터를 건립해 세계 명상의 중심 허브로 발돋움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간화선을 통해 극락정토와 세계평화에 이바지 한반도에서 불교는 1700년 동안 한국 정신문화의 근간을 이뤄왔다. 특히 간화선(看話禪·화두를 들고 수행하는 참선법)은 한국에서 오롯이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인류정신문화유산의 정수다. 진제 스님이 이끄는 ‘사단법인 대한불교조계종 진제선세계화회(진제선회)’는 부처님의 심인법(心印法)을 잇고 간화선 정신과 수행법을 한국은 물론 세계 곳곳에 널리 보급하고 있다.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각자의 심성을 계발하는 참선수행을 행함으로써 화목하고 평화로운 극락정토를 구현해 인류 행복과 세계 평화에 기여하려는 취지로 설립했다. 진제선회는 자비보살도를 실천하는 사업도 적극적이다. 빈곤과 질병, 자연재해로 고통받는 국내외 이웃을 위한 인도적 구호와 지원 활동을 벌인다. 2013년 필리핀 태풍피해 이주민, 2014년엔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을 위해 성금을 기탁했다. 초등학생 이하 3자녀 이상을 둔 가정 100가구를 선정해 해마다 100만 원씩 10년 동안 장학금 10억 원을 지급했다. 이 밖에도 남북평화통일 사업과 청소년 장학사업 등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진제선회에 가입을 원하는 이들은 해운정사 종무소로 문의할 수 있다. 가입 회원들에게 진제 스님이 친필로 쓴 선심(禪心) 액자를 선물로 증정한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역사가 시작되면서 ‘과거’는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중요한 자산이자 권력의 도구로 이용되어 왔다. … 역사가는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과거의 진실을 밝히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다.” 이 거창한 머리말에 떨지 말자. 이 책은 에드워드 카(1892∼1982)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아니다. 꽤나 긴 제목이 엔간히 말해준다. 그래, 방바닥에 드러누워 배 두드리며 봐도 아무 문제 없다. 그렇다고 한때 유행했던 ‘오락물’에 가까운 흥미 위주 역사서냐면 고건 또 아니다. 물론 저자는 지난해 전작 ‘역사는 재미난 이야기라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역사책’에 이어 “재미난 옛날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라 겸양한다. 하지만 군산대 사학과 교수인 그의 글엔 ‘뭔가’ 있다. 편안한 웃음 뒤춤에 잘 벼린 칼이 숨겨져 있다고나 할까. 자, 일단 이 근거 없는 음모론을 이어가련다. ‘역사를…’은 역사 속 유명인 7명을 다룬다. 골리앗과 싸운 다윗, 로마 황제 네로, 아메리카를 발견한 콜럼버스 등 대체로 그리 낯설지 않다. 그런데 ‘실제’ 그들은 세상에 흔히 알려진 것과 다르다고 쓰윽 포석을 깐다. 오호라. 감춰진 얘기를 까발리는 일만큼 신나는 게 어디 있겠나. 이를테면, 네로는 정말 폭군이었을까. 저자에 따르면 이런 오명은 억울한 면이 많다. 그가 핏줄도 정적이면 잔인하게 죽인 건 맞다. 한데 ‘왕좌의 게임’에서 그건 특별한 사례가 아니다. 오히려 네로는 평민이 사랑했던 황제였다. 사후에도 대중에 영합해 그의 후예를 자처한 정치인이 나올 정도였다. 문제는 네로가 ‘가진 자’에게 적이었단 점이다. 귀족은 세금 부담과 (자신들에게 유리한) 전통의 붕괴를 두려워했다. 당연히 그들이 주도한 역사서가 네로에게 우호적일 리 없었다. 게다가 영화로도 유명한 19세기 소설 ‘쿠오바디스’가 최악의 폭군으로 묘사한 게 결정적으로 머리에 박혀버렸다. 저자가 ‘선택한’ 여타 인물도 마찬가지다. 현재 찬사를 받든 비난을 받든 다 뒤집어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 그런데 공통점이 있다. 그게 남성이건 주류이건 강대국이건, ‘힘’을 지닌 세력에 따라 역사는 일그러진다. 하나 더. 이 굴곡은 남 일이기만 할까. 책 행간엔 너무나 많은 거울이 숨어 있다. 어떤 문장은 21세기 대한민국에 너무 맞춤이라 눈이 동그래진다. 다시 말하지만, ‘역사를…’은 재미가 우선이다. 크기도 앙증맞고 띠지 같은 꾸밈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겨울밤 구들방에서 들려주신 할머니의 옛얘기엔 곱씹을 통찰과 교훈이 배어있다. 그런 뜻에서 엉뚱하지만, 저자가 전작에서 쓴 한 글귀를 인용한다. “재미난 이야기의 기준은 무엇일까? … 삶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해볼 수 있는 ‘영양가’가 있어야 한다. … 우리의 인식 구조에 자리 잡고 있는 허위의식을 밝혀주는 이야기가 재밌을 때가 많다.” 국내 ‘역사’ 요리사가 차린 서양식 별미를 흐뭇하게 즐겨보시길.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아이라고 감정이 단순하진 않다. 어른만큼 말로 구분해서 표현하지 못할 뿐이다. 용기 슬픔 분노 행복 질투 외로움 부끄러움 흥분 두려움…. 알고 보면 다 자연스러운 감정인 것을. 하루에도 여러 번씩 바뀌는 감정. 그게 바로 나 자신이다. 이 그림책은 형식 자체가 주는 메시지도 크다. 표지부터 마지막 직전까지 뻥 뚫려 있다. 그 속엔 작고 어린 ‘내’가 있다. 어떤 감정이 밀려와도 “내가 느끼는 감정이 곧 나 자신”이란 뜻.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이가 타인도 귀하게 여길 수 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이 유고집은 천국에서 온 편지일까. 저자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4년. 수많은 독자가 사랑했던 그의 글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건 분명 슬프다. 그런데 미공개 산문 7편을 포함한 에세이집이 다시 찾아오다니. 팬들에겐 축복이자 선물일 터. 의사이자 과학자였던 저자를 새로이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홀로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북미 대륙을 횡단한 20대부터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종이 책’에 대한 사랑을 접지 못한 말년까지. 그의 글은 여전히 종이 책이 전하는 질감만큼 온기가 넘친다. 하지만 100% 만족스럽느냐고 묻는다면 다소 망설여진다. 다 따로 썼던 걸 ‘짜깁기’했단 점을 감안해도, 너무 천차만별이다. 특히 발표하지 않았던 작품은, 이유나 사정이 있었을 텐데 싶기도 하다. 저자는 “뼛속까지 독자였다”고 자신할 만큼 책의 물성(物性)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이 종합선물세트는 누군가에겐 ‘소소(so so)한’ 러키 박스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어쩌랴. 물어도 준치요 썩어도 생치다. “82년 전 나를 이 세상에 데려다 주었듯이, 조만간 나를 이 세상에서 데려갈 테니” 같은 문장들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책을 집어들 이유는 차고도 넘친다. 올리버 색스는 올리버 색스니까. 모든 게 그 자리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구는 돌아가고 삶은 이어진다. RIP.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2017년 ‘5·18문학상’ 동화 부문 신인상을 수상한 저자의 첫 작품집. 표제작을 포함해 다섯 편의 동화를 실었다. 저자는 특수학급 교사로서 겪은 경험을 잘 녹여냈는데,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아이의 시선에서 산뜻하게 풀었다. 책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모두 장애를 지녔지만, 조금 불편할 뿐 결코 남과 다르지 않다. 밝고 적극적이며 매력적이다. 삐뚤어진 잣대를 갖다대는 건 어른과 그에 영향을 받은 다른 아이들이 아닐는지. 함께 실린 개구쟁이 같은 그림이 글맛을 더욱 살려준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제왕이 돌아왔다. ‘아키라’ ‘공각기동대’와 함께 1980, 90년대 일본 3대 SF만화로 꼽히던 ‘총몽’이 무삭제 버전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90년대 초반 팬들은 ‘사이버펑크(cyberpunk) 장르의 걸작’이라 불리던 이 만화를 불법 해적판으로 접하기도 했다. 요즘엔 올해 2월 국내 개봉한 미국 할리우드 영화 ‘알리타: 배틀 엔젤’ 원작으로 유명하다. 작품은 지금 봐도 신선하다. 선택받은 자들만 사는 공중도시와 무법천지인 지상사회. 인간의 뇌를 가졌으나 온몸이 기계인 사이보그. 기억을 상실했지만 극강의 무술을 지닌 여주인공. 쉼 없이 활극이 펼쳐지면서도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잃지 않는 서사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왜 미국 할리우드가 21세기에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었는지 수긍이 간다. 물론 90년대 작품인지라 ‘촌스러운’ 면도 있다. 그림체는 컴퓨터그래픽을 동반한 요즘 작품만큼 깔끔하지 않다. 흐름이 매끄럽지 않고 엉성한 대목도 눈에 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반갑다. 공장에서 찍어내지 않고, 장인이 공들인 ‘핸드메이드’의 매력이 물씬하다. 이번에 출간한 버전은 원래 9권이었던 작품을 지난해 일본에서 새롭게 5권으로 엮은 완전판. 1, 2권이 먼저 나왔고 여름까지 나머지를 순서대로 선보인다. 출판사는 “완전 판 다음엔 또 다른 시리즈인 ‘총몽 외전’과 ‘총몽 라스트 오더’ 그리고 지금도 현지에서 연재하는 ‘총몽 화성전기’도 출간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지금 한국사회는 세대와 계층, 이념 간의 갈등과 분열로 인해 나라를 견인하고 미래로 끌어가야 할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를 다시 회복시키고 일어나게 하는 원천인 부활 신앙이 어느 때보다 사회 전 영역에 필요합니다.” 오정현 사랑의교회 담임목사는 부활절을 앞두고 가진 17일 인터뷰에서 “적지 않는 사람들이 상처입고 고통 받는 현실”을 줄곧 걱정했다. 오 목사는 “갈등 에너지를 민족과 사회를 위한 건강한 에너지로 바꾸려면, 한국교회가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올해 부활절을 맞아 사회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신앙의 본질입니다. 모든 인생은 살다가 결국은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셔서, 희망과 소망과 회복의 보증이 되셨습니다. 부활 신앙 위에 있는 기독교 안에서는 우리가 호흡하고 있는 한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향한 부활절의 메시지가 아닐까요.” ― 한국사회에 만연한 갈등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우리는 현재 갈등해소 비용이 너무 많아요.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1인당 GDP의 27%를 사회적 갈등 관리 비용으로 쓴다고 합니다. 물론 갈등은 지금만의 문제가 아니지만, 교회가 지금 폭발하는 사회적 갈등 해결의 선두에 서야 하는 이유는 ‘통일 시대’를 앞뒀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갈등은 통일 이후의 갈등에 비하면 초보적인 수준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교회가 해결의 물꼬를 트지 못하면 통일시대의 갈등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요.” ― 통일 시대, 사랑의교회가 지닌 비전은… “피 흘림 없이 복음적 평화통일입니다. 통일은 더 이상 탁상공론이 아닙니다. 실체입니다. 2003년 서울 사랑의교회로 부임해 제가 맡은 역할 중 하나가 ‘복음적 평화통일’입니다. 한국교회는 애국·애족하는 교회였습니다. 정치나 경제가 아니라,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강력한 보호하심으로 지켜졌다고 믿습니다. 통일 시대를 여는 저와 사랑의교회의 꿈은 평양과 신의주, 개성에서 모두가 민족을 위한 푸른 꿈을 안고 세계를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 지금 한국사회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사회 문제는 뭐라고 보십니까. “저출산 문제라고 봅니다. 이는 한국교회가 앞장서야 할 긴급한 사명 가운데 하나입니다. 단순히 아이를 많이 낳는 게 아니라, 다음 세대를 향한 올바른 교육을 위해 물꼬를 열어줘야 합니다. 모세혈관처럼 뻗어 있는 한국교회가 아이들을 안심하고 키울 수 있는 장이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사랑의교회는 이를 위해 구체적 실천 방안을 세우고 있습니다. 미세먼지도 심각합니다. 이 문제에 교회가 앞장서야 하는 이유는 빈부의 문제를 심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가진 자는 여러 방식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폐해를 고스란히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 고통받는 사람을 도울 책무가 있는 교회는 마땅히 미세먼지를 해결하는 일의 중심에 서야 할 것입니다.” ― 목회 사역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십니까. “목회자의 힘의 원천은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이 은혜가 없으면 목회를 힘 있게 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으로 성도들의 사랑과 신뢰입니다. 교인들의 절대적인 신뢰 없이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습니다. 2003년 사랑의교회에 부임해 16년 사역한 뒤, 올해 3월 재신임 성격의 투표에서 성도들이 96.42%의 신뢰를 보여줬습니다. 제 사역의 힘은 오롯이 성도들의 사랑과 절대적인 신뢰에서 비롯합니다.” ― 사랑의교회는 한국교회와 함께 사회와 민족을 위해 어떤 일을 할지 기대됩니다. “사랑의교회의 시대적 소명은 우리 교회만 잘하는 게 아니라 한국교회와 함께 민족을 섬기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가 지난해 ‘생명비상 사명비상 은사비상’이란 목표를 가졌는데, 이제는 ‘생명나눔 사명나눔 은사나눔’으로 국가와 지역사회를 섬길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값으로 세워진 교회는 하나이며, 서로의 연약함을 채우고 도와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사랑의교회와 한국교회는 주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사랑의교회(서울 서초구)는 부활절을 맞아 생명의 공동체가 돼 ‘생명의 빛을 온 세상에 전달하는 도구로써 쓰임 받기’를 위해 기도한다. 특히 교회당은 성도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공유하고 열린 공간으로 조성했다. 아울러 사랑의교회는 민족과 나라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 역할을 감당하면서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고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는 ‘선한 공동체의 사명’을 견지하려 한다.부활의 실천, 세상을 섬기는 공간 영국의 세계적인 복음주의 설교가였던 존 스토트 목사(1921∼2011)는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세상에 대한 전도뿐만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주셨다”고 말했다. 사랑의교회 역시 부활절을 맞아 교회당을 누구나 찾아와서 인생의 짐을 내려놓는 쉼과 치유의 터로 만들고자 한다. 특히 문화 예술의 여유를 관조해 세상을 위한 나눔과 섬김을 공유한다. 이를 위해 3대 실천방안도 마련했다. 첫째, 누구나 거부감 없이 소통하는 개방형 문화공간이다. 종교적 색채를 자제하고 주민들이 편하게 드나드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실제로 지역사회 공공기관이나 단체가 임대해 아트갤러리나 북카페 등을 운영하기도 한다. 둘째, 공공재로서의 역할 수행이다. 사랑의교회 교회당은 장애인이 건물에서 이동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도록 만들었다. 이동장벽을 완전히 제거해 최우수(Barrier Free) 등급을 취득했다. 또한 대지면적 기준으로 54%를 완전 개방하고, 교회 경내를 24시간 이용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자연을 생각하는 친환경 건축을 꼽을 수 있다. 태양열과 자동절전 조명시설, 유휴 냉난방 에너지 활용 시스템을 갖췄다. 사랑의교회는 건축계획단계부터 예배에 국한하지 않고 대중문화공연을 열 수 있는 ‘공공성’에 중점을 뒀다. 본당은 기둥을 제거해 음향과 조명이 방해를 받지 않는다. 수용인원 6500여 석에 44개의 채광창을 갖춰 대규모 오페라 공연도 가능하다. 실제로 2013년부터 ‘서울시립교향악단 우리동네 음악회(2014년)’ ‘영화 더크리스마스 상영(2017년)’ ‘호두까기발레 공연(2018년)’ 등 다양한 이벤트를 선보였다.꾸준한 나눔과 섬김 사랑의교회는 나눔과 섬김의 책임을 잊지 않는다. 2014년 설립한 국제구호개발 NGO ‘사랑광주리’(이사장 오정현 목사)는 북한 어린이에게 영양식품을 꾸준히 지원해왔다. 지금까지 7개 시설에 모두 78t(116만 명 분량)을 지원했다. 또한 △북한 돼지농장과의 경제협력 △종묘장 등 환경개선사업 △평양 소재 대학 교육지원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사랑광주리는 또 2015년부터 일대일 상담과 봉사활동, 음식 나누기 등을 통해 대학생과 취업·창업을 준비하는 청년 지원에도 힘쓰고 있다. 사랑의교회 ‘사랑의복지재단’과 ‘이웃사랑선교부’도 눈길을 끈다. 1996년 설립한 재단은 지금까지 300억 원가량을 어린이와 장애인, 취약계층에 지원했다. 이웃사랑선교부는 해마다 ‘사랑의 김장 김치 나누기’를 비롯해 지역 홀몸노인과 입양가정 돌봄에 힘쓰고 있다. 최근 국가적 화두인 저출산 극복을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2014년 서초구에 기부채납 방식으로 교회 공간 325m²에 대형 어린이집을 건립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있는 그대로의 미국의 과거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 옹골찬 유혹이다. 솔직히 이 책은 제목이나 두께가 되게 부담스럽다. 500년 조선사도 헷갈리는데, 다른 나라 4세기가 가당키나 한가. 근데 교과서처럼 외웠던 ‘아메리칸드림’ 이면을 들춰 주겠단다. 어떤 이에겐 자유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성조기가 실은 카스트 버금가는 계급사회의 깃발이란 주장이다. 그리고 그 최하층에서 허덕이는 백인 빈민들이 있다. 바로 책의 원제인 ‘화이트 트래시(white trash·백인 쓰레기)’다. 이 정도면 저자가 미국 주적이 아닐까 싶지만, 아이젠버그는 루이지애나주립대 석좌교수다. 2016년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가 선정한 ‘가장 중요한 사상가 50인’에도 뽑혔다. 그가 자국의 치부라고도 할 만한 속살을 이토록 가차 없이 헤집는 이유는 뭘까. “마뜩잖을지 모르지만, 백인 쓰레기는 우리나라 서사에서 중심이 되는 가닥이다. (때로는 보이고, 때로는 보이지 않는) 그런 사람들의 존재야말로 미국 사회가 우리가 의식하고 싶지 않은 이웃들에게 부여한, 자꾸 바뀌는 꼬리표에 집착한다는 증거다. ‘그들은 우리가 아니야’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싫든 좋든, 그들은 우리이며 항상 우리 역사의 본질적인 일부였다.” 그 신념을 바탕으로 수집한 근거는 놀랍도록 매섭다. 일단 건국신화부터 뒤집었다. 신대륙으로 건너온 조상들은 개척영웅이 아니었다. 영국의 가진 자들은 이익 창출과 거지 퇴출(이것도 상당히 순화한 표현이다)을 위해, 못 가진 이들은 강제노역이나 추방에 떠밀려 아메리카로 왔다. 대서양을 건너왔건만 ‘기회의 땅’은 귀족에게나 허락됐다. 빈자들은 ‘영주관할인(leet-men)’이라 불리며 대지주에게 예속된 처지였다. 저자는 이런 계급 구도가 남북전쟁을 거치고 20세기를 넘기면서도 여전하다고 본다. 아니 오히려 더 굳어졌다.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제퍼슨 등 건국의 아버지들이 친(親)계급주의 성향을 지녔던 건 넘어가자.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하지만 20세기 전후 여러 학자는 우생학을 끌어와 ‘가난은 타고난 기질’ 탓으로 몰고 갔다. 심지어 21세기에도 일부 정치인은 실직을 개인의 나태와 동일시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한다. 2009년 기준 미국 상위 1%는 소득의 5.2%만 국세와 지방세로 내는 반면에 하위 20%는 10.9%나 내는 기형적 구조는 다 뿌리가 있던 셈이다. ‘알려지지…’는 매우 논쟁적이다. 한쪽만 본다며 쉽게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많을 법하다. 게다가 강 건너 구경인지라 팍팍 와 닿지 않는 면도 있다. 생소한 지명과 인물이 숱해 가끔 ‘멍 때림’도 유발한다. 하지만 지난 미 대선에서 왜 그가 당선됐는지 어떤 정치서적보다 명쾌히 보여준다. 몇 세대 동안 하수구 취급을 받은 이들에게 ‘주류’는 어느 당, 어떤 공약이었건 위선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한반도에 이게 과연 남 일일까. 이미 세찬 바람이 낯짝을 때리건만.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어쩌면 이 책 구입비는 ‘1만6800원’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읽는데 분명 돈이 더 들어간다. 분명 빵빵하게 저녁도 먹었건만. 반갑잖은 군침이 밀려온다. 독서가 마음이 아니라 몸의 양식도 될 줄이야. 담뱃갑 따라 “체중이 불어날 수 있습니다”란 경고 문구라도 표지에 실어야 할 판이다. 하지만 다이어트와 잠시 이별하고 나면 신나는 모험이 황홀경으로 펼쳐진다. 근사한 사진 때문이라면 더 나은 요리책이 훨씬 많다. 우리의 입을 달래주는 갖은 디저트들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배우는 건 기대보다 더 즐겁다. 실은 디저트는 이름만 달랐을 뿐, 고대부터 존재했다. 옛사람이라고 ‘단짠단짠’을 싫어했겠나. 하지만 영국 옥스퍼드백과사전의 음식 분야 필자인 저자에 따르면 본격적으로 디저트가 각광받은 건 중세 무렵이다. 역시 주인공은 ‘설탕’. 인도에서 사탕수수로 정제하는 기술을 개발한 뒤 돌고 돌아 유럽으로 흘러왔다. 당시엔 설탕이 병도 치료하는 비싼 약재이자 최고급 향신료로 대접받았다. 당연히 상류층, 그들만의 잔치였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결과 아닌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주린 이들은 맛이나 모양을 따질 리 없다. 여유가 되니 폼도 잡는다. 디저트가 화려하게 꽃핀 17, 18세기가 왕정·귀족문화의 절정기였던 건 우연이 아니다. 실제로 당시 디저트는 눈으로 즐기는 ‘과시용’이 많았다. 성이나 영토를 미니어처처럼 만들어 내놓기도 했다. 설탕 등으로 만든 외벽을 부수면 안에서 새들이 날아오르는 디저트도 유행이었다고 한다. 재밌는 건, 과거엔 디저트가 꼭 식사 마지막에 먹는 요리는 아니었다. 유럽도 우리네 ‘한상차림’처럼 고기 생선과 함께 올라왔다. 지금과 같은 코스요리는 ‘러시아식’인데, 실용을 중시하던 이 풍조가 유럽으로 전해져 정착했다. 마찬가지로 대다수 디저트는 어느 한 나라가 ‘자기 것’이라고 부르기 애매하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이리저리 뒤섞이며 완성된 형태니까. 앞서 얘기했지만 ‘디저트의 모험’은 굉장히 즐거운 탐방이다. 세계 곳곳을 돌며 뿌리 내린 디저트를 따라, 미식여행을 다녀온 듯한 만족감이 크다. 특히 디저트의 양대 산맥이라 할 ‘크림’(아이스크림 포함)과 ‘케이크’는 따로 1장씩 할애해 설명했는데, 더욱 허기가 지니 주의하시길.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던 디저트가 19, 20세기 대중에게 퍼져 나가는 대목은 격변의 역사만큼 흥미진진하다. 다만 하나 아쉬운 건, 이 모험이 너무 한쪽 동네만 들여다본단 점이다. 디저트라 부르진 않았을지언정, 다채로운 후식을 보유한 아시아를 너무 홀대한다. 중국과 일본은 1페이지뿐이고, 한국은 아예 없다! 아메리카, 아프리카 대륙도. 겨우 80일 동안 몇 나라 들러놓고 ‘세계일주’라 불러서야 되겠나. ‘리얼 어드벤처’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 저자는 얼른 다시 짐을 싸시길. 아님 다른 누군가라도.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파란 하늘∼ 빨간 지구∼.’ 왠지 동요 한 구절을 연상시키는 제목에 현혹되지 마시라. ‘파란하늘…’은 버겁도록 묵직한 책이다. 왜 아니겠는가. 빙하가 녹아서 북극곰이 물에 빠지는 영상. 기상이변으로 몰아닥치는 자연재해. 아니, 뿌옇다 못해 마스크를 써도 목이 텁텁한 대기. 최소 한 번쯤 봤거나 경험한 지구의 경고는 어깨를 짓누른 지 오래다. 전 국립기상과학원장인 대기과학자가 썼으니 품질이야 믿고 봐도 될 터. 아니나 다를까. 한 페이지씩 넘길 때마다 입천장이 메마른다. 미리 말하지만, 저자는 결코 과장해서 겁을 주진 않는다. 오히려 이 심각한 내용을 담담한 필치로 정리한다. 하지만 다들 안다. 원래 차분한 팩트가 제일 무섭다. 요즘 한반도에서 가장 큰 관심사인 ‘미세먼지’를 살펴보자. 어느 순간 미세먼지는 호환마마, 심지어 핵미사일보다 겁나는 존재가 됐다. 그런데 실은 “서울의 오염먼지 농도는 2000년대 초반이 지금보다 50퍼센트 이상 높았다”. 저자도 지적하지만, 미세먼지란 용어 자체를 본격적으로 쓴 것도 2014년 이후다. 게다가 미세먼지는 생태계에서 긍정적 효과도 지녔기에, 예전부터 썼던 스모그나 연무로 부르는 게 옳다고 한다. 이 혼란은 무분별한 용어 사용에 멈추질 않는다. 우린 쉽게 중국을 탓하지만 아직 명확한 결론은 나오지 않은 상태다. 심지어 봄에 몰려올 ‘공포의 황사’는 실제로는 “코털이나 기관지 점막에서 걸러져 배출되므로 노약자가 아닌 건강한 사람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토양은 대부분 산성화돼 있어 알칼리 성분인 황사는 토양을 중화시키는 ‘고마운’ 역할도 한다. ‘파란하늘…’은 참 반가운 책이다. 원래 오해나 무지만큼 무서운 게 없다. 특히 지구온난화나 오염먼지와 같은 이슈는 대단히 중요하나 대다수가 ‘잘 모른다’. 숱한 관련 서적이 있지만 다소 장황하거나 와 닿지 않을 때가 많다. 하지만 저자는 조곤조곤 맥을 짚어 준다. 깨진 빙하가 빨리 녹는 이유를 “덩어리 얼음을 따뜻한 곳에 둬도 천천히 녹지만, 얼음을 깨뜨려 물그릇에 넣으면 빠르게 녹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하는 친절함도 맘에 든다. 특히 이 책을 손에 쥐었다면 마지막 ‘나오는 말’은 곱씹어 읽길 권한다. 30년 넘게 현직에 종사했던 과학자로서 가슴에 맺혔던 응어리가 빼곡하다. 과학을 과학으로 대접하지 않고, 정책의 도구로 쓰는 한국의 현실은 울림이 크다. 과학자조차 공무원이나 영업사원으로 만드는 사회에서 어떤 개선이나 진보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다만 저자를 비롯한 과학자들에게도 어쭙잖은 부탁 말씀을 드린다. 계속해서 이렇게 현안을 다루는 과학서가 나와야 한다. 최근 청와대에서 발표한 인공강우 실험은 “요행을 기대하는 현대판 기우제”란 질타처럼. 대중이 그만큼 알아주지 않더라도, 한숨과 좌절이 반복되더라도 말이다. 모두가 하늘과 지구를 돌아볼 수 있도록.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에리코는 정말 구제불능이다. 주위에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도 있었을 게다. 20대 초반 여성이 기껏 한다는 일이 에로만화 편집자. 힘든 일만 있으면 엄마에게 쌍심지. 급기야 자살 미수까지. 겨우 살아났지만 재취업은 물 건너가고. 기초생활수급자로 연명하다가 또 목숨을 끊으려 하고…. 가족과 친구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아마 이렇게 ‘동전의 한쪽 면’만 보면 그리 정이 가질 않는다. 하지만 동전을 뒤집어보자. 술과 노름에 빠진 아버지. 학창시절 지속된 집단따돌림. 겨우 취직한 직장은 월급이 고작 12만 엔(약 122만 원). 숱한 야근과 가욋일에도 추가 수당도 없다. 지병이던 우울증은 점점 깊어지고…. 나락으로 떨어진 심정이 이해가 간다. 실은 이해한단 말도 에리코에겐 조심스럽다. 어떻게든 “평범하게” 살아보려던 그에게 세상은 냉혹했다. 병력과 자살 시도는 자립할 기회를 박탈한다. 치료와 위안을 위해 찾은 클리닉센터는 환자를 돈벌이 대상으로 여긴다. 기초생활수급자를 대하는 공무원들은 왜 그리 야멸치고 냉랭한지. 갈수록 심장이 쪼그라드는 에리코는 인생이란 무거운 굴레를 벗어던지고만 싶다. 짐작했겠지만, 다행히 그는 ‘회복’하고 있다. 다시 한 발짝씩 내딛고 있다. 봉사단체에서 일하며 세상이란 문을 노크했다. 작지만 소중한 월급봉투를 쥐고 친구에게 점심을 먹자고 전화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서글프다. 에리코는 10여 년에 걸친 여정 끝에 어렵사리 일어섰지만,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상당수는 무너져 내리니까. 아마 그가 이 책을 쓰기로 결심한 것도 그런 이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메시지가 아닐까. ‘이 지옥을…’은 참 먹먹한 책이다. 담담한 문장 속에 절망이 빼곡하다. 차이는 있겠지만, 갈수록 팍팍한 삶에 힘겨워하는 청춘들의 눈물이 배어 있다. 흥미로운 건, 후반부에 에리코의 말투가 달라진단 점이다. 마치 딴 사람처럼 주장과 의견을 쏟아낸다. 결이 좀 안 맞긴 한데, 얼마나 하고픈 말이 많았을까 싶다. 그래서 더욱, 더 많은 목소리가 울리는 세상이 돼야 한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삶은 그래도 계속된다. 하지만 행복도 이어질까. 제인스빌. 미국 위스콘신주에 있는 작은 도시. 인구는 겨우 6만 명이 조금 넘는다. 하지만 시민들은 자긍심이 넘쳐난다. 어디나 그렇듯 크고 작은 문제야 있다. 그래도 안정적이다. 부유하진 않아도 기름기가 흐른다. 대다수는 안락한 노후를, 혹은 근사한 미래를 꿈꿨다. 그런데 폭풍우가 몰아쳤다. 조짐은 진작부터 보였다. 2008년 금융위기를 앞두고 미 자동차산업은 헛발질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하필 제인스빌 경제의 근간은 1923년 첫 자동차를 생산한 GM 공장이었다. 전성기엔 7000명, 당시에도 3000명 이상이 종사하는. 그 공장이 문을 닫았다. 처음엔 절망보다 낙관이 우세했다. 일시적 중단이려니 싶었다. 그게 아니라도 산 입에 거미줄 치랴 싶었다. 하지만 부동산은 폭락했고, 제조업 노동자가 갈 곳은 마땅치 않았다. 정부와 지역 사회가 나름의 애를 쓰긴 했다. 하지만 보조금이나 후원금은 갑자기 텅 빈 월급봉투를 메울 수 없었다. 폭풍이 지나갔다고 끝이 아니었다. 햇볕이 없는 먹구름 아래에서 젖은 옷은 갈수록 무거워졌다. 몇몇에게만 실낱같은 햇빛을 허락한 채. ‘제인스빌…’은 참 조심스러운 책이다. ‘힐빌리의 노래’(흐름출판) 저자 밴스는 “가공되지 않은 아름다운 이야기”라 극찬했는데, 뭔 말인지 알겠지만 차마 그렇게 부르질 못하겠다. 담담하게 박힌 글자 속에 이토록 애잔함이 가득한데 어찌 아름답다고 부를까. 책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는 뻔한 표현 말고는 달리 떠오르질 않는다. 물론 미 워싱턴포스트 기자인 저자는 상찬 받아 마땅하다. 2008년 GM 공장이 폐쇄된 뒤 2013년까지 제인스빌이 변해가는 과정을 대단한 필력으로 켜켜이 쌓아올렸다. 뭣보다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집중했는데, 이게 상상 이상이다. 사실 기반산업이 무너진 도시의 곤궁함은 꽤나 익숙한 테마다. 제인스빌은 몰라도 거제와 군산은 아니까. 하지만 책은 우리가 가진 정보가 얼마나 파편적이고 피상적인지 잘금잘금 씹어준다. 가슴을 울린 공명을 감히 드러내기도 겸연쩍게. 뭣보다 재난이 휩쓸고 간 뒤 이에 대처하는 자세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절망을 부르짖는 저편에선 희망을 노래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초점을 맞춘 사람들은 모두 ‘다시 씨앗을 심는’ 이들이었다. 취업교육을 받고, 살림이나 잠을 줄이고, 싸우고 또 싸웠다. 가진 자들도 외면하지 않았다. 기부하고 지원하고 곁을 지켰다. 각자의 방법에 동의하건 하지 않건, 자신들의 도시를 지키려 애썼다. 하지만 본질은 바로 그 결과에 있었다. 모든 씨앗이 꽃을 피우는 게 아니었다. “주민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부는 형편이 피고, 일부는 비통해하고, 일부는 그럭저럭 살아간다. … 최근에 시행된 조사의 결과를 보면, 실업률은 4% 아래까지 떨어졌다. 21세기가 시작된 이래 가장 낮은 실업률이다. … 좋은 소식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재 직업을 가진 모든 주민들이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기에 충분한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 주민들의 실질 임금은 눈에 띄게 하락했다.” 비가 오지 않는 땅은 사막이 되기 쉽다. 하지만 폭우를 견딜 우산이 누구에게나 주어지진 않는다. 게다가 더 큰 아픔은, 비는 또다시 내린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